[화제의 책]'유물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 입력 2000년 10월 13일 19시 02분


1990년7월 경기 하남시 이성산성 발굴현장. 발굴을 시작한 지 3개월째. 무더위와 피로감이 한양대 발굴단을 짓눌렀다. 그런 어느날, 한 발굴단원의 삽 끝에 무언가가 걸리는 듯한 촉감이 전해왔다.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삽을 집어 던지고 꽃삽으로 조심스레 흙을 걷어냈다. 나무조각이었다. 이번엔 솔을 이용해 흙을 털어 나갔다. 그러기를 한참, 그의 몸은 떨리기 시작했다. 목간(木簡·글씨가 쓰여진 나무조각)이었다. 신라 목간. 이성산성의 실체를 확인케 해주는 유물이 나온 것이다. 3개월동안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풀리는 순간이었다.

이 책에 나오는 한 대목(심광주 토지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의 글)이다. 발굴은 힘겨운 노동이긴 하지만 그 희열은 만만찮다.

한국 고고학자 25인이 쓴 이 책은 보통 사람이 접하기 어려웠던 발굴 현장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책 곳곳에서 만나는 발굴의 낭만과 애환.

경기 하남시 미사리 선사유적 발굴 이야기. 발굴단은 인골(人骨)을 발견했다. 제물을 준비할 수 없어 그림으로 대신해 제사를 지냈다. 이후 발굴장엔 갑자기 사고가 생기더니 그칠 줄을 몰랐다. 발굴단은 불안했다. 그래서 제대로 제사를 지냈다. 그러자 사고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발굴 이야기다. 서울 암사동 선사유적 발굴 당시엔 인골을 화장하는 순간, 마른 하늘에 천둥 번개가 치기도 했다.

발굴 이야기는 낭만적이다. 그러나 행간을 잘 들여다보면 고된 노동이자 인내를 요구하는 작업임을 알 수 있다. 하루 종일 삽질을 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고, 유물 하나를 찾아내기 위해 오랜 시간을 참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유물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임효택 이인숙 외 지음/ 푸른역사/ 355쪽/ 1만원▼

<이광표기자>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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