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독서]'빨리 빨리!'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나?

입력 2000-09-29 18:57수정 2009-09-22 0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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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올림픽에서도 ‘속도’로 승부하는 종목에서 각종 세계 신기록이 쏟아졌다.

바야흐로 속도 전성 시대. 지금처럼 인간이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을 해치워야한 적이 있었을까. 테크놀러지의 발전은 빠름을 미덕으로, 느림을 악덕으로 만들어 버렸다. ‘느림’의 작가 밀란 쿤데라의 말을 빌면, “시간의 속도는 기술 혁명이 인간에게 부여한 황홀경의 양태”다.

이 책은 이같은 황홀경에 도취된 현대인 병리현상을 묘파한 문명 비판서다. 과학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불필요한 시간을 줄여야 된다는 생각은 전영역에서 일종의 강박관념이 되고 있으며, 즉각성이 네트워크와 인간 정서생활을 지배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는 브레이크 없이 달려가는 현대 문명의 ‘시간 강박’과 ‘속도 집착’의 실례를 보여주는데 전편을 할애하고 있다.

정밀한 시간에 대한 현대인의 강박관념은 스포츠에서 쉽게 볼 수 있다. 1000분의 1초를 아끼기 위해 수영 선수는 기꺼이 가슴털을 밀고 육상선수는 머리카락을 자른다. 100m 달리기 출발선에서는 화약총 대신 전자음을, 결승선에서는 테이프 대신 초고속 디지털 카메라를 쓰는 것도 마찬가지. 루지(눈썰매)는 동계 올림픽에서 1000분의 1초 차이로 승자를 결정 짓는다. 정확한 시간에 대한 집착이 나노초(10억분의 1초)란 찰나의 정밀함을 넘어선지 오래다.

시간에 대한 조급증은 비단 운동 선수만의 것은 아니다. ‘급속 냉각’을 자랑하는 냉장고, 몇 분만에 완성되는 인스턴트 음식, 선거 마감시간과 동시에 발표되는 출구조사 등 우리 일상 곳곳에 스며있다.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2, 3초를 참지 못해 ‘닫힘’ 버튼을 누르고, 웹페이지가 로딩되는 1, 2초를 견디지 못해 ‘뒤로’ 버튼을 클릭하는 당신도 속도 중독자다.

저자는 현대인은 시간을 아끼려고 조바심치지만 실제로는 시간을 낭비하는 자가당착에 빠진다고 꼬집는다. 운전을 하면서 전화를 걸고, TV를 보면서 음식을 준비하는 등 ‘멀티―태스크’를 일상화지만 대부분 한가지에 집중하는 것보다 효율성이 떨어진다. ‘시테크’ 관련서가 봇물을 이루고, 시간을 절약하는 각종 전자제품이 쏟아져 나오지만 점점 바빠질 뿐이다.

이같은 ‘초스피드 시대의 패러독스’는 어디서 오는가? “시간은 인간에 의해 정의된 것이며, 그냥 이용하며 살아가는 것”이란 사실이 실마리다. 시간과의 싸움이란 결국 죽음으로 결판나는, 패배가 예정된 게임인 것이다.

미친듯이 앞으로만 치닫는 세상의 속도감에 어질머리를 느끼는 독자라면 이런 대목에 밑줄을 쳐둘만하다. “절약한 시간을 탕진할 적극적인 방법을 찾아라. 과학기술이나 효율성 따위가 더 많은 시간을 갖게 해주지 않는다. 시간은 잃어버렸다 되찾는 어떤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인간은 시간의 흐름에 속절없이 떠내려갈 수도, 거슬러 헤엄칠 수도 있다. 만사(萬事)가 유심(唯心)이다.

▼'빨리 빨리!'/ 제임스 글릭 지음/ 석기용 옮김/이끌리오/ 315쪽 1만원▼

◇'속도전쟁' 어디까지 왔나?

△1994년 미국인의 하루 평균 섹스시간은 4분으로 급감했다. 이는 하루중 공식문서를 처리하는 시간과 비슷하다.

△최초의 엘리베이터는 초당 20cm 움직였으나 최근 초고속 엘리베이터는 비행기 이륙속도에 맞먹는 초당 9m에 달한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참고 기다리는 시간은 약 15초에 불과하다. 40초가 넘어가면 사람들은 화를 내기 시작한다.

△최근 전화 자동응답기는 말의 속도가 25% 정도 빠르며, 전자레인지는 매일 4분의 시간을 절약시켜 준다.

△윈도우98는 이전 버전보다 컴퓨터 부팅과 종료 시간을 매번 90여초 단축시킨다. 50년이면 23.5일을 버는 셈이다.

△1990년대 야구는 투구 간격을 20초에서 12초로 줄이는 등 규정을 바꿔 평균 경기시간을 6분가량 줄였다.

△맥도널드는 55초 이내에 제공되는 서비스를, 도미노 피자는 30분 이내 초인종을 울리는 배달 마케팅을 내세웠다.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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