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구 공항동의 '서울농군'…5대째 서울서 농사

  • 입력 2000년 9월 26일 20시 12분


울특별시에도 엄연히 농사를 짓는 농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러나 아쉽긴 하지만 30여년간의 ‘농군’ 생활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서울 강서구 공항동에 사는 이원길(李源吉·62)씨. ‘서울토박이’로 이 곳에서 5대째 벼농사를 짓고 있는 그는 매년 이맘때쯤 누렇게 익어가는 벼이삭을 볼 때마다 오랜 친구를 대하는 것처럼 가슴이 푸근해진다.

25일 새벽 5시. 여느 때처럼 그는 삽을 메고 집에서 2㎞ 남짓 떨어진 논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전 태풍피해로 쓰러진 벼를 다시 세우고 농로를 손질하느라 어느새 이마에 구슬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러나 수확을 눈앞에 두고 한 톨의 쌀알이라도 더 건지기 위한 손놀림은 좀처럼 쉴 줄 몰랐다. “올해도 수해 때문에 평년작의 절반 수준인 200가마도 채 못 거둘 것 같아요. 이같은 일이 3년째 계속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재해가 없어야 할 텐데….”

그가 지금은 7000여평의 논을 소유한 ‘중농’이지만 처음부터 농업을 천직으로 정한 것은 아니었다. 20여년 전 작고한 그의 부친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30여마지기의 논을 자신의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며 7남매의 생계를 꾸린 전형적인 농부였다.

“비료나 농기계가 없던 시절, 맨손이나 기껏해야 소로 농사를 짓느라 고생하시던 부친을 어릴 적부터 지켜보며 도저히 가업으로 이어받을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20대 후반 그는 인천의 한 목공회사에서 1년간 근무했다. 그러나 불편한 몸으로 농사를 짓는 부친을 돕기 위해 결국 직장생활을 청산하고 귀향했다. 그 뒤부터 장남인 큰형과 함께 농사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60년대 후반인 당시 그는 이 지역에서 최초로 기계를 도입한 ‘현대식 농군’으로 통했다.

“직접 구입한 경운기와 트랙터로 인근 논의 일까지 도맡아 하다보니 대기업 과장 정도의 수입은 올릴 수 있었죠.”

그러나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농업은 급격히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친자식처럼 정성을 쏟은 쌀의 가격이 제자리를 거듭하자 고향을 등지는 이웃이 하나둘씩 늘어갔던 것.

“매년 수해와 가뭄으로 농사를 망치거나 정부에서 권장한 벼 신품종을 심었다가 폭삭 망했을 때는 모두 포기하고 장사나 할까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80년대말 불어닥친 부동산 투기 붐으로 ‘농촌이탈’은 더욱 가속화됐다. 논을 팔아 하루아침에 수억∼수십억원대의 거금을 챙긴 이웃들이 생겨났다. 이 중 일부는 섣불리 사업에 투자했다가 사기당해 재산을 날리거나, 상속을 둘러싸고 가족간에 불화가 생기는 경우도 잇따랐다.

그러나 그는 85년 인근 공항 활주로로 편입되면서 보상금을 받고 넘긴 일부 땅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한눈을 팔지 않았다. “빠듯했지만 3남매를 대학공부시켜 시집장가까지 보낼 수 있었던 ‘생활의 터전’을 돈과 바꿀 순 없었죠.”

서울시에 사는 농민이라고 해서 ‘특혜’를 받은 적은 거의 없다. 오히려 다른 농촌지역에서 받는 농약 무상지원이나 각종 행정 지원 등 기본혜택조차 제대로 못 받아 속상한 적이 많았다.

‘서울농부’와 결혼해 고생만 해온 부인 이영주씨(59)에게 항상 미안하다는 그는 솔직히 자식들에게까지 ‘땅과의 씨름’을 권유하고 싶지는 않았다고 털어놓는다. 수입농산물의 급증, 제반 농사비용 상승 등으로 갈수록 ‘수지타산’조차 맞추기 힘든 농부생활을 자신의 대(代)에서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늙은 탓인지 예전처럼 중노동을 할 수가 없더군요. 하지만 거동할 수 있을 때까지 농사를 지을 생각입니다. 농부가 땅을 떠날 수는 없잖아요.”

<윤상호기자>ysh100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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