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책]번역이 근대일본 만들었다

  • 입력 2000년 9월 1일 19시 58분


도쿠가와 막부시절 에도의 의사 스기타 겐파쿠는 죄수의 해부된 인체를 보고 나가사키의 통역관을 통해 입수한 네덜란드어 해부서의 정밀성을 확인한다. 해부현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스기타와 그의 동료들은 그 해부서를 일본어로 번역할 것을 결심한다. 그리고 그들은 변변한 사전도 없이 3년만에 그 책을 ‘해체신서(解體新書)’라는 이름으로 번역해낸다. 1774년의 일이다. 일본의 ‘번역시대’가 열린 것이다.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본격적인 근대화과정에서 번역은 단지 외국 문물의 수용행위가 아닌, 하나의 국가생존 전략이요 프로젝트였다. 메이지시대의 번역에서 역사물이 많은 까닭은 문명 특히 서구문명을 그 바닥으로부터 탐구해 자국발전의 역사적 맥락을 다시 잡자는 의도 때문이었다. 또 군사, 병법 관련은 물론 화학과 관련된 번역물이 많았던 것도 우연이 아니다. 당시의 대표적인 경공업인 섬유산업에서 ‘화학염료’는 필수적이고, 최대 현안인 군사분야에서 ‘화약’은 불가결한 것이며 농업국이라서 ‘화학비료’는 나라의 운명과 직결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도시대 이래 축적되어온 일본의 번역전통은 메이지 초기까지만 해도 한자 어휘에 결정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일본의 대표적 민권주의자 나카에 초민이 1882년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민약역해(民約譯解)’라는 제목으로 번역할 때까지도 그랬다. 그러나 1894∼5년 청일전쟁을 경계로 중국과 일본 사이에 번역어휘 차용의 역전현상이 나타났다. 옌푸(嚴復)가 ‘원부(原富)’(스미스의 ‘국부론’), ‘군학(群學)’(스펜서의 ‘사회학’), ‘군기권계론(群己權界論)’(밀의 ‘자유론’), ‘법의(法意)’(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천연론(天演論)’(헉슬리의 ‘진화와 윤리’) 등으로 표현했던 중국식 번역어가 급속히 일본식 번역어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군기권계론’이 ‘자유론(自由論)’으로 ‘군학’이 ‘사회학(社會學)’으로 바뀌었다.

사실 ‘society’를 ‘사회(社會)’라는 번역어로 정착시키기까지 그들이 거쳤던 고민의 궤적은 곧 근대일본의 정신적 두께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그들이 겪었던 그 무수한 고민과 허다한 오역의 과정을 건너뛴 채 사전적 의미로 박제화된 용어들을 그대로 옮겨쓰고 있다. 바로 이것이 일본과 한국의 넘어설 수 없는 격차인지 모른다.

번역은 타자와의 교섭이요 그 자체가 커뮤니케이션이다. 진정한 번역은 단지 다른나라 말을 자국어로 옮겨놓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번역은 말의 타자성을 의식하는 순간 시작된다. 에도시대의 유학자 오규 소라이가 늘상 읽어왔던 ‘논어’, ‘맹자’가 외국어임을 인식한 순간처럼 말이다. 번역은 타자의 말과 동거하는 행위다. 그 동거행위를 통해 컨텍스트를 따져보고 서로의 의미구성을 탐색하는 지난한 과정이 이어진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적절한 의미(어)를 포착할 때 비로소 동거는 끝난다. 그러나 새로운 언어, 곧 자국어로 갈아입은 말의 나열이 번역의 끝은 아니다. 번역은 독자의 읽는 행위를 통해 타자(성)와의 관계론적 소통을 이루면서 완성되는 것이다. 결국 번역의 시작은 역자이지만 번역의 끝은 독자가 맺는다.

따라서 “번역이 일본의 근대를 구성했다”는 말의 이면에는 “그 번역된 책을 읽는 독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녹아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 책이 번역사의 수레를 밀어간 독자들의 궤적을 좀더 깊이있게 짚어내지 못한 점은 아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번역 자체는 40여쪽에 달하는 질좋은 역주와 원서에 없는 휘턴 원저 ‘만국공법(萬國公法)’의 영어, 중국어, 일본어판 비교 등 역자의 섬세한 노력이 돋보인 수작(秀作)이다.

정진홍(한국예술종합학교교수·커뮤니케이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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