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문열이 評하는 소설 '황금색 발톱'

  • 입력 2000년 6월 18일 19시 36분


참으로 오랜만에 지적 긴장과 미학적 감동을 아울러 느끼며 한 권의 소설집을 내쳐 읽었다. 소설집 ‘슬픈 열대’와 장편소설 ‘태를 기른 형제들’로 90년대 초반 기대를 모았던 엄창석이 8년만에 묶어낸 단편소설집 ‘황금색 발톱’이 바로 그 책이다.

평단의 총애는 종종 한 시대 문학의 모습을 결정한다. 저널리즘 비평과 아카데미 비평이 뒤섞여 있는 우리 문단에서는 특히 그러하다. 우리가 90년대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 시대 우리 평단의 선택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엄창석은 90년대 평단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여러 해 전 그가 이 연작 단편의 첫 작품인 ‘남쪽 원숭이’를 발표했을 때 누구도 모조(模造) 혹은 농담의 사회적 기능과 현상을 소설적으로 분석한 이 작품에 주목하지 않았다. 어쩌면 ‘후기 자본주의 서설’이란 거창한 부제가 그런 화를 자초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뒤 다소 굼뜨기는 했지만 ‘색칠하는 여자’가 우리 시대의 성(性)과 권력의 의미를 강렬한 언어로 드러냈고, 이어서 ‘소설기계’가 섬뜩한 상상력으로 현대 정치의 이미지적 특성을 형상화했다. 그리고 다시 소설집의 제목으로 쓴 ‘황금색 발톱’이 발표되었으나 여전히 그의 작업에 주목하는 이는 없었다.

후기 자본주의의 거대한 몸집은 자신을 막아서는 어떤 장애물도 용납하지 않는다. 스스로 완벽한 자기구조를 갖추었다는 미신 아래 거침없이 나아가는 이 ‘리바이어던’을 한 이슬람 신비주의 시인의 환상을 빌어 우리에게 보여주는 작품이 ‘황금색 발톱’이다. 작품 속에서 황금색 발톱은 그 거대한 괴물의 발톱이지만, 동시에 마비와 둔감에 빠져 있는 우리의 의식을 통렬하게 할퀴는 작가의 발톱이기도 하다.

‘육체의 기원’은 이 연작단편의 종지부가 되는 작품으로 바로 황금색 발톱을 가진 거대한 구조에 끼인 현대인의 한 초상이다. ‘황금색 발톱’이 신화와 신비주의적 상징을 쓰고 있다면, 이 ‘육체의 기원’은 역사적 생물학적 탐색으로 현대성에 접근하고 있다. 크고 무거운 주제를 얘기하면서도 읽는 이가 지루하거나 주눅들지 않게 하는 문체와 작법에서 한 작가로서의 원숙을 느끼 게 한다. 이따금 쌀에 섞인 뉘처 럼 거슬리는 문장이 눈에 뜨이 지만, 이는 작가 보다 소설집 의 교정 교열을 맡은 이 들에게 책임을 묻고 싶다.

작가 엄창석은 동아일보 신춘문예중단편 부문의 11년 후배이고, 이천의 내 서재에서 합쳐 3년을 묵고 갔다. 이 어줍잖은 서평이 그런 사적인 정실에 끌린 것으로 읽힐까 실로 두렵다. 하지만 단언하거니와, 나는 지금 작가 엄창석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작품을 보고 그 감동을 말하는 중이다.

거기다가 더욱 나를 감동시킨 것은 함께 부쳐온 장편소설 ‘어린 연금술사’이다. 만약 문학성이란 겉멋과 허세를 벗어 던지고 가슴에 닿아오는 책읽기를 원하는 독자가 있다면, 그리고 그가 엄창석이 다년간 문학적 공백을 변명하듯 한꺼번에 내민 두 권의 책중에서 한 권만을 골라야 한다면, 나는 서슴없이 이 ‘어린 연금술사’를 권하겠다.

이 장편은 그 출발부터 우리가 오래 등한히 여겨온 미문(美文)의 전통을 아련한 그리움으로 떠올리게 하는 데가 있다. ‘신비한 참여’로 이야기를 끌어내고 있는 프롤로그로부터 ‘유년이 가르쳐준 삶의 환유(換喩)’로 맺는 에필로그에 이르기까지 관념과 서정을 이렇게 잘 조화시켜 나간 문장을 읽어본지 하마 오래인 듯하다. 온전한 형태는 못되지만, 우리에게 빈약한 교양소설 혹은 성장소설의 전통을 축적해 가는 과정으로도 눈여겨 볼 만한 작품이다.

세상은 변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느낌도 변한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엄창석의 글들은 바로 그런 것들을 상기시킨다.

이문열(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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