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경매, 브로커들 脫法 판친다…낙찰받고도 한숨

  • 입력 2000년 6월 9일 19시 02분


《법원경매를 통해 내 집을 마련하려던 주부 C씨(38·서울 서대문구 연희동)는 얼마 전 큰 낭패를 당했다. 서울지방법원에서 감정가 1억5000만원짜리 아파트를 1억3000만원에 낙찰받았는데 추가로 8000만원을 더 부담해야 할 처지에 놓였기 때문. 그는 “세입자가 낙찰금에서 전세금을 배당받지 않고 직접 나에게 받겠다고 해 할 수 없이 낙찰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그는 “나중에 알았지만 경매브로커가 세입자와 짜고 배당요구를 철회할 경우 일반인은 낙찰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점을 악용한 것 같다”고 말했다. C씨는 결국 경매에 든 비용 100만원만 고스란히 날리고 말았다.》

서민들의 재테크 수단으로 관심을 모아온 법원 경매제도가 허술한 법체계와 경매브로커들의 전횡으로 탈법천국으로 변해가고 있다.

경매브로커들은 경매제도의 허점을 이용해 가짜 세입자들을 만들고 선순위 채권을 조작해 낙찰자로부터 거액을 뜯어내거나 유찰시켜 헐값 낙찰을 받고 있다.

특히 경매브로커들이 폭력조직을 동원해 낙찰자 등 일반인을 협박하는 일까지 자주 발생하고 있다.

K씨(58·서울 도봉구 도봉동)는 얼마 전 경매물건을 낙찰받았다가 폭력배의 협박에 시달려 수백만원을 뜯겼다. 가짜 세입자로 둔갑한 폭력배들이 막무가내로 이사비를 요구하거나 낙찰받은 건물에 손상을 입혀도 법적으로 해결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

투자가치가 높은 물건의 경우 수십명의 경매브로커들이 몰려들어 일반인은 입찰 자체가 불가능하며 예상치 못했던 추가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상가나 오피스빌딩의 경우 경매브로커가 만들어낸 가짜 세입자에게 수억원대의 허위 공사대금을 요구받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다.

K경매컨설팅 사장 P씨(36)는 “법원 경매물건의 90% 이상이 경매브로커에 의해 낙찰 여부가 결정되고 있기 때문에 일반인이 법원에서 제공하는 정보를 통해 입찰에 참여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밝혔다.

이처럼 법원 경매가 경매브로커들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바람에 경매물건에 투자했던 일반인들은 금전적 손실은 물론 정신적 피해까지 보고 있다.

지난해 상가건물을 5억2000만원에 낙찰받았다가 세입자의 ‘실력행사’로 3억5000만원에 되팔아버린 L씨(51)는 “이제 경매라면 넌덜머리가 난다”며 고개를 저었다.

투자가치가 높다고 생각했던 경매물건에 생각지도 못했던 채권이 숨어 있는 경우도 많다.

1996년부터 입찰에 참가해 온 부동산중개업자 박모씨(47)는 “이론적으로는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게 법원경매지만 권리분석에 어두운 일반인은 5%의 수익률을 내기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일반서민과 채권자에게 돌아갈 몫을 경매브로커가 챙기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은행 등 경매를 신청한 채권자들도 자신들의 몫이 엉뚱한 경매브로커와 폭력배에 넘어가는 게 억울하기는 마찬가지다. 국민은행 자산관리부 이현기과장은 “모든 은행이 경매브로커에 속아넘어가지 않기 위해 전담팀을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런데도 법원측은 경매제도에 관한 근본적 대책마련에 미온적이다.

오히려 법원 경매계 직원들과 집행관들은 경매물건 정보나 관련 자료를 제공하는 방법으로 경매브로커들의 편의를 봐주고 있다.

법원의 한 경매담당 판사는 “법원도 경매브로커로 인한 폐해를 알고 있지만 이들을 경매시장에서 몰아내기는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전문가들은 관련법의 허점을 하루속히 보완해 경매브로커의 개입 소지를 없애고 경매관련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해 일반인도 쉽게 경매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매컨설팅업체 디지털태인 김종호사장은 “일반인들이 법원을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전담 창구를 만들어야 경매브로커의 개입 소지를 근본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정훈기자>sunshad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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