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궁녀 바로알기' 학술대회

  • 입력 2000년 5월 2일 20시 44분


서기 660년 백제가 멸망하자 수도 사비(충남 부여)의 낙화암에서 백마강으로 몸을 던진 백제의 여인들, ‘삼천궁녀’.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고 정말로 백마강에 뛰어든 것인가. 그 수가 과연 3000명에 달했을까.

삼천궁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학술대회가 최근 부여에서 열렸다. 한국전통민속문화보존회와 한국샤머니즘학회 주최. 이번 학술대회는 삼천궁녀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는데 초점이 맞춰졌다.

‘삼국유사’ 등에 나타난 기록으로 볼 때, 당시 백제 여인들이 몸을 던진 것은 일단 역사적 사실. 그러나 삼천궁녀하면 그 엄청난 수의 궁녀를 거느렸던 의자왕의 방탕과 타락을 먼저 떠올린다. 이것이 편견이다.

삼국유사에도 여인의 수가 3000명이란 기록은 없다. 조흥윤 한양대교수(문화인류학)는 “수많은 궁녀를 통해 의자왕의 방탕함을 부각하고 그래서 백제가 멸망하지 않을 수 없었음을 강조하려는 시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승자의 시각이 반영되어 역사가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조교수는 “궁녀란 제도가 도입된 것은 삼국시대인데 여러 기록이나 정황으로 보아 당시 궁녀가 3000명씩이나 존재했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구중회 공주대교수(민속학)에 따르면 3000명이란 숫자가 들어간 첫 기록은 16세기 조선 명종 때 민재인이 쓴 ‘백마강부(賦)’. 구교수는 그러나“민재인 역시 의자왕의 타락을 강조하기 위해 3000명이라고 한 것 같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왜 3000명인가. 3000은 불교에서 삼라만상을 망라하거나 우주를 상징하는 뜻으로 쓰인다. 즉 궁녀가 ‘많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3000’이란 수가 사용됐다는 것이다.

구교수는 또 궁녀를 후궁으로 바라보는 태도도 버려야한다고 말한다. 삼국유사에도 ‘궁인’이 죽었다고 돼 있다. 즉 그들은 궁에서 일하는 여성들이었지 의자왕의 성적 유희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구교수는 또 의자왕의 방탕에 대해서도 의문을 나타낸다. 용감하고 결단성이 있고 행실이 후덕해‘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렸던 의자왕이 왜 갑자기 타락으로 접어들었는지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자왕이 탐락(耽樂)과 황음(荒淫)을 일삼던 시기는 656년3월로 돼 있다. 그런데 바로 전 해에 신라의 30여개 성(城)을 격파했을 정도였는데 어떻게 갑자기 타락할 수 있었는지…. 객관적인 해명이 필요하다.”

삼천궁녀를 의자왕의 탐욕 대상으로 연결시켜 생각하지 말 것, 패자의 역사를 너무 희화화하지 말 것. 이것이 연구자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이광표기자>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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