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여성사/49명의 여성통해 '역사의 속살'엿보기

  • 입력 2000년 4월 28일 19시 34분


“궁중은 말투가 달라. 입을 크게 벌리지도 않고 작은 소리로 말하는데 뒤로 갈수록 더 작아져. 양념도 슬그머니 ‘양염’, 배는 ‘생이’라고 해. …그냥 서서 한 10년 구경했어. 몇 년이 지나니까 음식맛도 보게 해주고….”

요리연구가 황혜성이 그냥 서서 한 10년 구경한 세월이 없었다면 조선조 마지막 궁중요리를 정리, 보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첫째는 어떤 기록도 없이 오로지 상궁들의 기억을 통해서만 요리법이 전수되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정치 사회 중심의 역사관으로는 이런 세밀한 생활사의 보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49명 여성들의 생애사를 모은 것이다. 치마 속에 독립운동자금을 숨겨 압록강을 넘나들었던 상해 임시정부의 자금조달책 정정화부터 제주도 최고의 여성 잠수부로 꼽히는 고인춘까지…. 고 이태영변호사처럼 사회적 성취가 뛰어난 엘리트여성이 주요 인터뷰 대상자지만 일본군 위안부 출신의 배봉기할머니처럼 그저 한 시대를 가파르게 살아낸 증언자들도 있다. 그 조각보들이 하나하나 이어지면 한국 현대사가 다른 모습으로 그려진다. 정치경제사만으로는 접근되지 않는 역사의 속살이 만져진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로 알려져있는 이소선여사. 독립운동가 아버지의 죽음, 어머니의 개가, 남편의 사업실패, 상경으로 이어지는 그의 인생은 한번도 가난으로부터 놓여나질 못했다.

“추운 겨울, 더부살이하는 집 마룻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태일이와 잠을 청할 때면 옷을 벗어서 태일이에게 덮어주며 그랬어. ‘사람이란 잘살 때도 있고 못살 때도 있는 법이다. 어쩌다 가난하다고 해서 나쁜 마음을 먹으면 절대로 안된다. 아무렇게나 살려고 했다면 우리가 이 고생을 뭐하러 하겠니?’”

그가 아들에게 심어준 ‘아무렇게나 살아선 안된다’는 자존감이야말로 노동운동가 전태일의 출발점이었다.

‘여성신문’이 10년 넘게 장기연재해온 시리즈. ‘공식성’을 부여받지 못하는 여성의 삶을 서술하는 형식으로 ‘이야기’라는 사적인 담론구조를 택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그 특징 때문에 인터뷰 대상자 자신의 주관, 자기변호를 넘어서지 못하는 한계도 분명하다.

1권 347쪽, 2권 349쪽 각권 1만원.

<정은령기자> 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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