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통신 보도 노근리 학살]"피란민 敵간주 사살결정"

  • 입력 1999년 9월 30일 19시 59분


6·25전쟁이 한창이던 50년 7월 미군이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서 한국양민을 살해한 ‘노근리 학살사건’이 미 정부 공식문서와 미군의 증언을 통해 30일 확인됐다고 AP통신이 보도했다.

다음은 AP통신의 관련기사 요약.

▼美軍문건-증언 공개▼

미 제1기갑사단과 육군 25사단사령부 명령서 등 미군공식 문건과 참전 미군들의 증언에 따르면 미군은 7월26일 노근리부근에서 발견되는 민간인을 적으로 간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참전 미군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북한군이 농민 차림으로 위장, 피란민대열을 통해 침투하려 한다는 소문이 나돌았으며 이에 따라 미군이 어린이 여성 등을 포함한 피란민 수백명을 살해했다는 것. 미군들은 노근리 학살 사건보다 희생자는 적었지만7월과 8월 두차례 유사한 피란민 학살사건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美25사단장 발포 명령▼

미 25사단장인 윌리엄 B 킨 소장은 7월26일 야전 지휘관들에게 보낸 명령서에서 한국 경찰이 노근리 지역의 민간인을 전원 철수시키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밝히고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모든 민간인을 적으로 간주, 조치를 취하라고 지시했다. 제1기갑사단 사령부도 명령서에서 “피란민이 전선을 넘어오지 못하도록 하고 전선을 넘어오면 발포하라”고 지시했다.

제1기갑사단에 근무했던 6명의 참전 미군들은 민간인을 향해 발포했다고 증언했으며 또다른 6명은 대량학살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기관총 사수였던 노먼 팅클러는 “우리는 그들을 전멸시켰다”고 증언했다.

▼공군機 기총소사도▼

일부 참전 용사들은 노근리 부근 굴다리에 있던 피란민들로부터 총격을 받았으며 시체들 사이에서 위장한 북한군 병사를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적대적인 총격은 없었다는 참전미군도 있어 증언이 엇갈렸다.

참전 미군들은 피살자수가 100∼200명 또는 수백명에 이른다고 말했다. 굴다리 부근에 있었던 참전 미군들은 사망자를 200여명으로 추산했으며 그밖에 상당수가 공군기의 기총소사로 숨졌다고 말했다.

당시 미군들 사이에는 북한군이 농민 복장을 하고 피란민 대열을 통해 미군 방어선에 침투할지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7연대 소총수였던 허먼 패터슨은 “그들 중에 적군이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고 말했다.

▼“민간인 고의로 공격”▼

참전 미군들은 한국 생존자들의 증언의 핵심적인 내용을 확인했다. 즉 미군들이 피란민을 노근리 철로 밑 굴다리에 몰아넣고 이들중 거의 대부분을 살해했다는 것. 한국 생존자와 몇몇 참전 병사들은 미군기들이 피란민들이 있던 지역으로 갑자기 저공비행을 한 뒤 기총소사를 하면서 학살이 시작됐다고 증언했다. 일부 참전 병사들은 미군기들이 수마일 떨어진 북한군 포대를 공습할 계획이었으나 실수로 기총소사를 가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미 조종사들은 위장한 북한군이 피란민 대열에 섞여 있는 것으로 의심해 가끔 민간인들을 고의로 공격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참전 미군인 텔로 프린트는 당시 자신과 다른 병사들이 미군의 공습을 받게 돼 피란민들과 함께 배수로로 몸을 숨겼다며 “누군가, 아마도 미군이 우리를 향해 총을 쏘았다”고 말했다.

당시 중위로 참전했던 로버트 캐롤 예비역 대령도 상부로부터 민간인이나 군인 그 누구도 전선을 넘어오지 못하도록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면서 7연대 소총수들이 인근 진지에서 피란민을 향해 발포했다고 말했다. 인근에 있던 25사단도 “이 지역의 민간인들은 적으로 취급될 것”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굴다리밑 무차별 총격▼

캐롤은 소총 중대들에 총격을 멈추라고 명령했다며 “그들이 적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첫날엔 피란민 사이에 북한군이 없었으며 대부분이 여성과 어린이 노인들이었다”고 회고했다.

참전 미군들은 중화기중대장이었던 멜번 챈들러 대위가 상급자와 연락을 취한 뒤 굴다리 입구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발포할 것을 지시했다고 말했다. 참전미군이었던 유진 헤슬먼은 “챈들러 대위가 ‘모두 없애버리자’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챈들러 대위와 다른 핵심 장교들은 모두 사망했으며 당시 대령으로 대대를 지휘했던 허버트 헤이어(88)는 “총격사건에 관해 알지 못하며 발포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참전 미군들은 헤이어 대령이 당시 작전을 하급자에게 위임했다고 말했다.

〈워싱턴AP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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