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악기 달인 이블린 글레니『안들려도 영감으로 연주』

  • 입력 1999년 3월 10일 19시 24분


장구를 든 서양 처녀가 두루마기 차림의 가야금 연주자와 마주 앉아 있었다. 94년 경주 안압지 임해전.

‘둥∼’장구의 나지막한 소리가 선선한 바람을 갈랐다. 황병기(이화여대 교수)가 ‘침향무’를 타자 이블린 글레니가 장구로 반주했다. 영국 비비씨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현장이었다.

“선생님, 지금의 음량으로 연주하면 적절한 밸런스가 이루어질까요?” 글레니의 조심스런 질문에 황병기의 눈이 커졌다. 두 악기 사이의 조화에 대해서 질문하고 있는 이 처녀는 귀가 거의 들리지 않는 청각장애인. 한국으로 오기 전 영국에서 잠깐 장구의 기초를 배우고 연주전 황병기에게 2시간여 사사하며 호흡을 맞췄을 뿐이다.

“놀라웠습니다. 극도로 정밀한 소리의 감각을 갖고 있었어요. 두어시간 같이 연주했는데 믿기 힘들 정도로 호흡이 잘 맞았죠.” 황병기 교수의 회상. “보통사람과 마찬가지로 말을 주고 받았어요. 도저히 장애인이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예요. 눈이 깊어보여서 특히 기억에 남았죠. 영혼의 깊이가 느껴지는 눈이었어요.” 그는 상대의 입술을 보고 뜻을 간파, 답한다.

이블린 글레니. 그가 첫 내한연주를 갖는다. 16일 오후7시반 서울 서초구 서초동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1965년 스코틀랜드 애버딘 생인 그는 12세때 청력을 거의 완전히 잃었다. 15세때 명 타악교수 블레이크를 만나 인생의 진로를 결정하게 된다. 19세때 영국 왕립음악원으로부터 입학을 거부당했지만 끝내 입학. 88년 대지휘자 게오르그 솔티, 피아니스트 페라이어와 함께 협연한 바르토크 음반은 그에게 그래미상 수상의 영광을 안겼다. BMG사에서 독집앨범 ‘리듬송’ ‘어둠속의 빛’ 등을 연속 히트시켰다. 글레니는 무대에 맨발로 오른다. 발바닥 배 뺨 등 온몸으로 음악을 느끼기 때문. 피부의 작은 떨림과 눈으로 보이는 진동, 희미하게 남아있는 청력을 종합해 보통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느끼고 듣는다. 그의 모습을 담은 영상 다큐멘터리에는 무릎사이 소형 스피커를 끼우고 악보를 넘기며 음악을 ‘감상’하는 글레니의 모습이 소개되곤 한다.

“글레니는 터치가 대단히 힘있고 강렬합니다. 반면 불가사의할 정도로 섬세한 음색도 표현해내 뚜렷한 인상을 남기지요. 자신이 작곡도 하는 만큼 작곡가의 의도를 표현해내는 센스도 뛰어납니다.” 박동욱 한국 타악인회 고문의 평.

타악기는 19세기 낭만주의 시대까지 관현악에서 생기있는 리듬을 표현하기 위한 보조악기였다. 20세기 이후 흑인음악, 인도네시아―말레이 음악(가믈란) 등 ‘종족음악’이 주목을 받게 되면서 작곡가와 연주가들이 타악기의 중요성에 다시 눈뜨게 됐다. 02―580―1300(예술의 전당)

〈유윤종기자〉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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