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80돌]이준식/진보주의 시각서 본 광주운동

  • 입력 1999년 3월 4일 20시 09분


‘광주학생운동’은 그 이전 학생운동의 사상적 조직적 변화과정에서 배태(胚胎)된 것이었다.

이 운동의 발원지인 광주에서 학생운동이 본격화한 것은 1926년 11월 성진회가 결성된 이후였다. 이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은 광주의 핵심적 사회주의 활동가로 각각 ‘조선공산당’과 ‘조선공산청년회’에 관여했던 강석봉(姜錫奉) 장석천(張錫天) 등이었다. 이들의 지도아래 장재성(張載性) 등 학생운동의 핵심세력은 활발한 동맹휴학을 벌였다.

광주의 학생운동은 사회운동 지도부의 ‘지도’와 일련의 맹휴를 통해 축적된 학생들의 역량이 결합된 것이었다.

이같은 학생운동의 외부연계 양상은 서울 대구 등 다른 지역에서도 나타나고 있었다. 이후 광주의 학생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데 결정적 계기가 된 12월의 서울 시위에서도 ‘조선학생전위동맹’ 등 비합법단체 및 이들과 연계된 각 학교 독서회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운동이 확산될수록 비합법단체의 영향력은 줄어들었다. 오히려 학생운동을 계급투쟁으로 규정하는 식의 좌익 편향적 요소도 등장했다. 어쨌든 사회주의운동은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난데 큰 영향을 미친 동시에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던 학생운동이 침체의 길로 빠지는데도 절반의 책임을 지고 있는 셈이다.

광주학생운동은 이후 몇년 동안 일제에 대한 민중투쟁이 활성화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아울러 이 운동이 일어난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에 학교에 다녔고, 그래서 학생운동의 고양에 영향을 받은 학생들이 1930년대 이후 민족운동의 핵심세력이 된 것도 이 운동이 거둔 중요한 역사적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준식(연세대강사·사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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