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 「올빼미族」 크게 늘어…문화형-강박형-생계형

  • 입력 1998년 6월 2일 18시 56분


『자장면 왔습니다.』 새벽2시경. 서울 신촌 그레이스백화점 뒤편 실내포장마차안. 한 손님이 『매콤한 국물이 먹고 싶다』고 하니 주인이 『걱정말라』며 전화기를 든다. 정확히 5분후 오토바이 엔진소리와 함께 도착한 24시간 중화요리점의 「철가방」. 손님들은 심야에 배달된 짬뽕과 자장면을 꿀처럼 아예 마셔버리지만 밤을 빼앗긴 배달원은 입이 찢어져라 하품.

대도시의 밤은 잠을 잊었다. 밤새 퍼마시는 술꾼이나 향락 유흥업소 종사자, 폭주족 얘기가 아니다.

급속히 늘고 있는 「젊은 심야 문화족」. 그들에게 밤은 휴식을 위한 정지된 시간이 아니라 「개척해야 할 흥미진진한 신세계」 「신비한 문화공간」이다. 그들을 겨냥해 온갖 종류의 문화산업과 업소들이 달맞이꽃처럼 피어나고….

IMF시대 「논스톱 시티(Non―Stop City)」의 심야속으로 들어가 보자.

▼밤을 즐기는 사람들

영화수입사 보은영상은 최근 파리만 날리다 1주일만에 간판을 내린 미국 독립영화 「워킹&토킹」 등 3편을 밤11시반부터 새벽5시까지의 심야상영으로 돌렸다. 그랬더니 온라인으로 돈을 미리 송금받는 예매방식을 취했는데도 모두 매진. 이에 앞서 덴마크 영화 「킹덤」도 밤12시에 시작, 새벽5시10분에 끝나는 심야 상영 예매표가 가장 먼저 매진되는 진기록을 세웠다.

나이든 사람은 혹 야간통행금지가 37년만에 해제된 82년1월6일 이후 잠깐 유행했던 야한 영화 위주의 퀴퀴한 극장을 떠올릴지 모른다. 그러나 올해 우리사회에 본격 등장한 심야영화붐은 그때완 전혀 다르다. 완성도 높은 화면, 좌석을 가득메운 젊은이들의 초롱한 눈빛, 진지한 감상태도….

음악회 연극 등도 밤을 파고든다. 가수 박상민은 이달말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자정부터 새벽4시까지 심야콘서트를 갖는다. 「죽은 시간」이었던 심야가 마니아 중심의 「문화 시간」으로 재창조되고 있는 것.

「금요일 밤12시에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최근 일본의 한 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일본 남성 중 15%, 여성 중 2.9%가 자정 현재 외출 중.

모처럼 일찍 귀가한 젊은이들은 「사이버 야행(夜行)」을 나간다. PC통신 아이네트 조사에 따르면 전체 인터넷 이용 건수의 47%가 새벽1∼4시에 이뤄진다.

30대이상 중장년층에서도 심야족은 늘고 있다. 새벽2시경 서울 서초동의 한 심야바둑방. 10여명의 손님중엔 술기운이 가신뒤 차를 몰고 가려는 사람도 있지만 심야의 호젓함속에서 흑백대결을 즐기려는 바둑광이 상당수.

심야개장하는 뉴코아스포츠클럽. 자정무렵까지 수영과 헬스를 즐기는 수백여명의 고객. 한겨울에도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을 털며 냉기속으로 걸어나가는 표정엔 「하루를 더 길게 살았다」는 자부심이 가득.

▼밤을 빼앗긴 사람들

밤에 문화생활을 즐기는 젊은층의 호강(?) 저편에는 「먹고 살기 위해」 밤을 반납한 사람들의 눈꺼풀이 무겁다 .포항철강산업공단내 강원산업은 낮에는 생산라인을 끄고 밤11시부터 오전8시까지만 풀가동한다. 심야시간대의 산업용전기료가 낮의 절반도 안되는 점을 이용한 것.

유흥가 주변의 분식집, 중화요리점 중엔 ‘올빼미 업소’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 지난해 8월부터 24시간 배달서비스를 하고 있는 신촌반점의 장두원지배인(33). 『야간매상이 전체의 30%를 차지한다.종업원을 2교대로 운영, 밤근무자는 밤10시에 교대해 새벽4시까지 일한다.』

24시간 팩스 컴퓨터이용 서비스 등을 제공하는 「킨코스」에는 낮에는 쉬고 밤에 일하거나 공부하는 프리랜서 학생 등이 매일 밤 20∼30명씩 찾아온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성형외과 비뇨기과 등의 진찰실 중에도 불이 꺼지지 않는 곳이 꽤 있다. 연예인 정치인 등 얼굴이 알려진 사람들이 주 고객인 이른바 ‘몰래 클리닉.’성병 성기능장애 등 쑥스러운 고민을 남들이 자는 시간에 해결하고 감쪽같은 얼굴로 맞이하는 새아침.

▼왜 밤을 좋아할까

신한종합연구소 박영배책임연구원은 엄격한 가정윤리와 가정내 「통금」 등 억제요소의 이완을 밤문화 개화(開花)의 주된 요인으로 꼽는다.

대략 세부류로 나뉘는 「올빼미족」에 대한 심리분석.첫째 심야의 「끼리 느낌」을 즐기는 젊은 문화마니아. 「낮」으로 상징되는 주류(主流)문화에의 편입을 거부하는 이들에게 밤은 「문화의 해방구」. 도시라는 편의공간을 십분 활용, 깊은 밤 한곳에 모였다는 연대감을 느끼며 정체감을 확인하는 것.

둘째 부류는 생체모터의 「온―오프(On―Off)」 시간을 주체적으로 바꿔가려는 직장인들. 이들은 회사나 조직이 일방적으로 정해준 획일적인 활동시간을 최대한 확장시키려 애쓴다. 변형근로제 플렉시블타임제 등 변화한 근로형태, 비어있는 시간을 못견뎌하는 현대인의 강박관념도 여기에 한몫.

세번째는 밤이라는 새롭고 거대한 시장을 개척하는 상인들. 주로 젊은층인 이들 밤상인과 고객간에는 낮에는 볼 수 없는 「독특하고 젊은 커뮤니케이션 문화」가 형성되고 있다.

〈이기홍기자〉lk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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