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목요탕속의 두 시인 고형렬-이명찬씨

  • 입력 1998년 1월 19일 08시 14분


이런 얘기를 해도 될까. 남자목욕탕의 풍경…. 목욕탕은 목욕탕이되 넥타이 맨 사내들이 간밤의 숙취를 씻기 위해 서둘러 땀만 빼고 가는 도심의 사우나가 아니다. ‘금일목욕’이라는 간판을 내붙인 동네목욕탕이라야 한다. 드문드문 낯익은 이웃도 있어 반갑게 아는 체하며 서로 등 밀어주는 곳. 그러다 스르르 졸기도 하는…. 몸과 마음이 더불어 무장해제되는 바로 그 순간, 시인 고형렬(44)은 세상이 다 말개지는 기쁨을 느낀다. 새 시집 ‘성에꽃 눈부처(창작과 비평사)’속에서 그는 이렇게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따끔따끔한 탕속에 들어가서 다리를 쭉 뻗고 누웠다/앞에 나를 만만하게 보고 있는 사람은 지난 12월 전방에서 제대를 했다/대학에 떨어진 아이는 거울 앞에 앉아 다리때를 밀고 있다/옆에서 아이 시원타 아이 시원타는 늙은이는 뼈가 녹는 모양이다/좋은 아침, 해가 나서 새벽에 내린 눈이 얼어붙은 거리를 걸어갈 생각 하니 즐겁다/욕탕 밖이 환하다(집은 봄처럼 창문을 활짝 열었겠지?)/천장 창 눈얼음이 햇살 이에 물린다 부스러진다’(고형렬 ‘목욕탕에서’) 목욕의 즐거움을 아는 이가 어디 고시인 한사람일까. 첫시집 ‘아주 오래된 동네’(문학동네)를 펴낸 시인 이명찬(37)은 탕속에 들어앉아 얼굴 벌개진 사내들을 보며 ‘귀가 축 늘어진 미륵보살님 여기들 모였구나’하고 무릎을 친다. 80년대 펄펄 끓는 열탕 같은 20대를 보낸 그는 이제 ‘내게 주의가 있다면 다만 온탕주의일 뿐’이라고 목욕탕 철학을 편다. ‘…물론 냉탕도 열탕도 목욕탕의 필요조건이긴 하지만/열탕과 냉탕만 있는 목욕탕/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열탕과 냉탕이 뒤섞여 온탕이 되는/그 소박하고 대중적인 이치를 눈감고 생각합니다/혹시나 그 모르는 남들은 이런 내 관조를 경계해/중도를 가장한 극우 보수주의적 대중추수주의적/기회주의적 절충주의라고 타박하지 않을까/염려되기도 하지만…’(이명찬 ‘목욕탕에서’중) 알몸에는 계급장을 달 수 없다. 두둑한 지갑을 넣을 주머니도 없다. 겉치레는 다 벗어야 ‘입욕가(入浴可)’다. 그러나 거울 앞에 서면 퇴적층처럼 쌓인 군살과 탄력잃은 피부가 지나온 시간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스스로에게 ‘683세대’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시인 이명찬. 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 대학을 다녔고 이제 30대가 된 그는 ‘피둥피둥한 몸피에 아랫배가 불거진’ 거울 앞의 사내를 보며 ‘앞줄에 내몰릴까 두려워/대열의 뒤에서 몇개의 짱돌을 던졌던’ 그 어정쩡한 20대에 이미 오늘의 나는 잉태된 것이었다고 자책한다. ‘…때문에 나는 깨어지지 않았다/쌍팔년도 다지나 대망의구십년대이르기까지/그리고 서른을 넘길때까지/그것은 언제나 생피나는 현실이 아니라/언제나 적당한 모험,/차라리 은밀한 내통일 뿐이었으므로…’(‘나의 모험’중) 마음먹은 대로 살아지지는 않은 채 부질없이 세월만 덮쳐오는 육신. 마흔나이도 중턱을 넘긴 고형렬시인은 함께 목욕온 어린 아들의 옷을 입혀주다가 ‘너도 이런 인생을 살까’하는 생각에 불현듯 목이 멘다. ‘…다섯살이 되는 아이몸 물기를 닦고 선풍기 앞에 가서 머리를 말리고 앉아서 옷을 입히느라 단추를 끼운다/앞에 가만히 서 있는 아들의 얼굴을 보다가 내 아들을 괜한 세상에 태어나게 한 것 아닌가 아들이 슬펐다…’(‘아들이 슬프다’중) 닦아도 또 더러워질 것을 알면서도 닳아지는 살 닦기를 포기하지 않는 두 시인. 어쩌면 ‘목욕재계’는 그들에겐 일상의 먼지에 덮여 이제는 기억마저 희미해져가는 꿈을 잊지 않으려는 소박한 반성의 제의인지도 모른다. ‘온탕주의자’ 이명찬시인이 ‘그럼에도 나 한군데 일상으로 붙박여/서럽게 흔들려본 적 없는 것들에겐/아니다 아니다 끝끝내 도리질하겠다’(‘흔들리지 않게’중)고 아우성치는 힘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이겠는가. 목욕 끝내고 아들 손잡고 돌아가는 길, 고형렬시인은 칙칙한 골목을 다 밝힐 만큼 환하게 핀 ‘목련’을 본다. ‘세상 가장 커다란 믿음을 본다/가지마다 피는 망울을 느낀다/어느 시절에도 찾아오는 그들이/그리고 그 나무들이 가장/오래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하늘이 가물고 재난이 터져도/그들은 이 세상으로 찾아온다/그 누군가와 한 약속을 지키는/그것이 그들의 구원인양…’(‘목련’중) 〈정은령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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