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C의 대학」특별대담]『대학 본질은 자유-비판』

  • 입력 1997년 10월 30일 07시 25분


《유럽의 명문 독일 자유베를린대 요한 빌헬름 겔라흐 총장(59)이 고려대 노동대학원(원장 김호진·金浩鎭) 초청으로 방한했다. 겔라흐총장은 민법 상법 환경법 등의 분야에서 탁월한 연구업적을 남긴 저명 법학자로 91년부터 총장을 맡고 있다. 방한 목적은 고려대와 자매결연 협정 체결. 그는 28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세계화와 대학 개혁」을 주제로 특별강연을 하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29일 오전 서울 조선호텔에서 겔라흐총장과 김호진원장의 특별 대담을 마련했다. 두 사람은 21세기를 앞둔 전환기에 대학의 역할과 나아갈 방향에 대해 진지한 논의를 벌였다.》 김호진교수〓중세 유럽 대학은 지식욕구를 억압해오던 종교적 굴레가 깨지면서 시작된, 이른바 「성스러운 무지로부터의 해방」과 함께 태어났습니다. 당시 대학은 만인에게 배움의 열린 공동체, 교사와 학생의 자치공동체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대학의 본질은 자유와 비판, 진리추구였고 이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왔다고 생각합니다. 1900년 전후 한국의 근대적 대학은 태생적으로 유럽과는 좀 다르죠. 교육을 통한 계몽이랄까, 민족주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절박함에서 출발했습니다. 해방 후에도 대학은 근대국가형성과 시민사회 형성을 주도해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고도산업화 정보화라는 시대적 변화는 대학의 이같은 고전적 위상을 흔들고 새로운 과제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첨단 지식을 공급해야 한다는 사회적 요청에 따라 아쉽게도 「지식탐구」의 영역으로 그 역할이 축소되는 추세입니다. 겔라흐〓대학의 성장에서 유럽과 동양이 과정상의 차이는 있다고 하지만 자유의 정신을 추구해왔다는 점에서는 근본적인 동질감을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 게다가 앞으로는 세계화로 인해 동서양 대학이 유사한 문제점을 공유하게 돼 상호 협력의 필요성이 늘어날 것으로 생각합니다. 대학은 본질적으로 이론과 현실을 모두 추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철학이나 자연과학 연구에 그치지 말고 문학 인류학 등과 같이 인류문화를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문화의 장(場)이 돼야 할 의무도 있는 것이죠. 김〓산업사회 고도지식사회 세계화시대에 들어서면서 대학이 학문연구 기능을 상실하고 전문기능인 양성을 위한 직업교육기관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대학은 본래 목적인 학문성과 실용성의 조화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 하는 과제에 직면하게 된 것이죠. 겔라흐〓동감입니다. 대학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순수학문의 연구입니다. 이게 없으면 대학의 존재 의미는 사라집니다. 응용학문이란 현실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것이죠. 순수학문은 현실과 무관해 보이기 때문에 더 중요한 겁니다. 당장 필요하지 않지만 그 순수학문이 앞으로 언제 어떻게 쓰일지 지금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순수학문이 응용학문보다 더 중요한 것이죠. 어리석은 사회일수록 응용분야에만 집착합니다. 김〓대학이 사회봉사에 기여해야한다는 바로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국가 사회 대학간에 협력이 필요합니다. 우선 대학의 자율과 자치에 대한 배려가 시급합니다. 그래서 기업과 정부는 대학의 공공적 기능을 인정하고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사회를 대표하는 기업의 경우 자신들의 이익에 집착하기 때문에 대학과의 협동연구가 안되고 있습니다. 겔라흐〓대학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잘 설명하셨습니다. 기업이 대학을 지원하는 것은 이제 세계적인 추세입니다. 독일 유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업의 이윤을 위해서입니다. 대학이 너무 기업에 의존하다보면 대학의 고유 기능이나 사명을 잃어버릴 수 있죠. 순수와 자유를 상실하면 대학은 위험합니다. 현명한 사회일수록 현재의 사회필요성과 무관한 대학의 기능을 인정합니다. 기업이 만든 사립대학은 극단적으로 말해 그 기업의 한 조직에 불과한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물론 한국의 포항공대처럼 매우 긍정적인 사례도 있지만…. 김〓국제화시대를 맞아 교육시장이 개방되고 외국대학이 한국교육시장을 침투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습니다. 교육제국주의라고 할까요. 이 경우 한국대학의 상대적 경쟁력이 약해 개성을 상실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질적인 개선, 경쟁력강화를 위한 전반적인 개혁을 가져오고 이를 통해 한국대학이 국제사회로 지평을 넓히는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토착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겔라흐〓교육제국주의 침투는 유럽에서도 문제입니다. 영어가 세계 공통어로 자리잡고 미국이 세계를 주도하면서 미국화에 대한 우려가 커진 것이죠. 각국이 나름의 고유 문화전통을 상실할 수도 있습니다. 정신적 식민지가 되지 않기 위해선 한국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합니다. 자연과학기술의 학문은 국제적 보편성을 지향하지만 인문사회 분야야말로 전통문화를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전세계적으로 양적팽창 질적저하가 대학의 현실입니다. 김〓그렇습니다. 하지만 질적 향상을 위해서는 시설 교수진 등이 확보돼야 합니다. 이 점에서 한국의 사립대는 더 힘든 현실에 처해있습니다. 한국의 경우 대학들이 일제치하에서 독립운동에 선구적 역할을 수행했고 군부통치라는 민주주의의 좌절 속에서도 이를 극복하는 견인차 역할을 해왔습니다. 이제 대학이 해야할 남은 과제가 있다면 분단현실을 어떻게 극복해 통일국가를 이룰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한국의 대학인들은 이에 대해 상당히 고민하고 있습니다. 겔라흐〓솔직히 말해 독일통일에 있어 대학이 특별히 기여한 점은 없습니다. 통일 이후 동서독 통합교육에는 어느 정도 기여했다고 봅니다. 한국의 경우 50년이 넘는 단절로 인해 상황이 심각해 보이는군요. 물리적 통일이 되더라도 완전한 정신적 통일에 이르기까지는 또다른 50년 이상이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대학이 할 일은 남북한간의 학술교류를 활발히 전개하는 것이죠. 김〓한국의 대학 발전을 가로막는 저해요인의 하나는 중앙집권적 경영시스템입니다. 유럽은 대체로 단과대를 중심으로 인사재정 등에 관한 자치권이 부여돼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겔라흐〓유럽에선 총장에게 권력이 집중돼 있지 않습니다. 한국의 권력집중적인 통치구조가 대학에도 그대로 이어진 것은 아닌지요. 김〓21세기는 고도지식사회입니다. 그래서 대학의 역할이 더 중시되는 것이죠. 겔라흐총장과의 대담이 21세기를 앞두고 한국 대학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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