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프슨 가곡집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

  • 입력 1997년 10월 10일 08시 03분


성악계의 「바리톤 3걸」을 연인으로 표현하면 어떨까. 러시아의 드미트리 흐보로스토프스키는 뜨거운 열정의 연인. 불 같은 사랑을 폭발시키지만 때로는 무섭게도 느껴진다. 음성에는 야수의 포효와 같은 열기가 있다. 영국의 브라인 터펠은 믿음직한 연인이다. 때로는 무뚝뚝하지만 가슴에 가만히 고개를 기대볼 만하다. 음성은 카랑카랑하고 때로 고지식한 표현을 드러내지만 바위와 같이 강건한 기질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미국의 토머스 햄프슨은, 그는 멋쟁이 연인이다. 온화하고 지적이며 때로는 정열적이지만 언젠가는 무관심한 표정으로 멀리 사라져버릴지 모른다. 음성에는 기품이 깃든 깊은 공명이 있는 반면 정착을 모르는 「방랑자 기질」도 도사리고 있다. 슈베르트 탄생 2백주년인 올해, 햄프슨이 노래한 가곡집 「겨울나그네」가 음반으로 나왔다(EMI). 지휘자 볼프강 자발리시가 피아노반주를 했다. 슈베르트의 「3대 가곡집」 중 최대걸작으로 꼽히는 「겨울 나그네」. 연인에게 버림받은 젊은이의 방랑을 그리고 있다. 작품은 「잘 자라」는 밤인사로 시작돼 「가지에 희망의 말을 새겨놓았던」 보리수 밑에서 옛 사랑을 회상하기도 하고 「연인이 살던 곳」에서 온 우편마차 소리에 가슴이 설레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결국 헤매는 곳은 「눈으로 뒤덮인 계곡, 험한 사잇길」. 자학적인 젊은이의 방랑은 겨울이 지나가면 끝날 수 있을까. 멋쟁이 햄프슨은 젊음의 고뇌속에 머리를 처박지 않는다. 온몸으로 전율하는 비장함 대신 한숨 한번 내쉬는 듯한 허탈함이 음반을 둘러싼다. 「흐르는 내 눈물은 개울을 따라 도시를 지나 옛 연인의 집 앞으로 흐르리라」는 「홍수」에서 그는 깊은 저음의 첫음을 무겁게 내리꽂지 않는다. 가볍게 띄워내는 듯한 그의 발성은 깊은 절망보다도 한번 삭여낸 허무감을 마음속에 열어보인다. 이처럼 세련된 표현은 햄프슨의 교묘하고도 독특한 창법 덕분이다. 특히 그는 전타음(前打音)처럼 한 음표를 앞에 오는 음표의 음높이와 연결시키는 묘한 버릇이 있다. 이런 특징은 때로 「비정통적」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그의 노래에 독특한 세련미와 매력을 가져다준다. 두터운 목소리와 가벼운 목소리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것도 매력. 첫곡 「잘 자라」에서 「네 평안을 흐트리지 않으리…」라며 소리에 실린 무게를 살짝 덜어내는 모습도 햄프슨만이 이루어낼 수 있는 독특한 표현 중 하나다. 〈유윤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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