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철시인,「자본에 살어리랏다」서 돈-섹스의 세상 그려

  • 입력 1997년 10월 2일 07시 28분


평론가 정효구씨가 계간 「작가세계」 가을호에 평론이 아닌 편지를 써 화제가 됐었다. 수신인은 90년대 들어 작품 발표가 뜸해진 「80년대의 빛났던」 시인들. 황지우 최승자 장정일 김영승 등에게 띄운 이 편지에서 첫번째로 불린 이름은 박남철시인(44)이었다. 『선생님께서 하고 싶은 대로 선생님만의 시형식을 조용하게 우리 시단에 다시 선보여주십시오. 선생님이 없는 시단은 참으로 밋밋합니다』 정씨의 간곡한 청이다. 예상보다는 이른 답장일까. 91년 네번째 시집 「러시아집 패설」이래 침묵했던 박시인이 새 시집 「자본에 살어리랏다」(창작과비평사)를 펴냈다. 세상을 삼킬듯 내려앉는 노을을 홀로 지켜보는 이처럼 시인은 「모오든, 20세기말의 핏빛 일몰이 보인다」는 문장으로 시집의 마침표를 찍었다. 『시인은 자기 몸을 태워서라도 동시대인들에게 경종을 울려야 할 의무를 짊어진 사람입니다. 돈과 섹스에 혈안이 된 90년대의 자본주의가 스스로의 작동논리 때문에 패망할지도 모른다고 적신호를 보내고 싶었습니다』 그가 바라보는 90년대는 요지경 같은 것이다. 술집에서 만난 미모의 사십대후반 여자는 낯 모르는 남자인 시인과 여관방까지 기어들어 술주정을 하고 그 여자를 피해 도망쳐 간 이발소에서는 다리가 미끈한 아가씨가 향기를 뿜으며 다가와 「아저씨 선불하시고 주무시지요? 카드로 끊으면 7만원인데요」라고 귓가에 더운 입김을 뿜어댄다.(「아름다운 것들」 중) 급기야 「…못 살겠다 꾀꼬리/구십년대 후반엔/이젠 아주 신세 조진 술래가 되어버렸네/다들 어디에 숨어있니 사랑들아/빌딩나무 뒤에 숨어서들 웃고 있니/자본과 이자꽃 뒤에 숨어있니…」(「못찾겠다 꾀꼬리」 중)라고 목메어 부르던 시인은 「나는 자본주의의 정화조에 빠진 한 마리의 개이다」(「목련에 대하여 Ⅲ」 중)라고 자조한다. 예전에도 그랬듯이 그는 시에 자신을 맨몸으로 드러낸다. 불륜이 넘쳐나는 세상을 묘사하기 위해서라면 남의 타락을 그리지 않고 자신의 외도와 이혼 재결합의 과정을 고백한다. 가끔씩 보습학원의 강사로 일할 뿐 「오늘은 실업자이지만 어제는 더 실업자였던」 자신의 혹독했던 겨울나기를 시로 써서 「조퇴」 「명퇴」로 내몰린 실업자들의 고단한 마음을 드러낸다. 그의 시가 그저 현실부적응자의 넋두리일까. 평론가 박덕규씨는 강하게 도리질한다.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 사회문화사적인 삶을 그리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등단 이후 박남철이라는 이름에는 언제나 「파괴」 「해체」 「실험」이라는 단어들이 따라다녔다. 80년대 갖은 실험들 속에서 그가 해체했던 것은 「시란 이런 것」이라는 기고만장한 고정관념과 서슬퍼렇던 독재였다. 삼청교육대의 교관 목소리를 흉내내 「내 시에 대하여 의아해하는 구시대의 독자놈들에게→차려, 열중쉬어, 차려, …」(「독자놈들 길들이기」 중)라는 시를 썼던 그였다. 독재도 끝난 90년대, 그는 여전히 「세상과 몸을 섞지 못한다」. 시대와의 불화는 시인의 운명이라는 듯 그는 세상의 양지보다 음지로 시선을 돌린다. 그러나 그의 불화는 사랑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현실이여, 현실이여, 나는 너를 언제나 경멸한다. 그러면서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언제나 네 위에서 날고 있는 나를 조금은 용서해다오. 용서하지 말아다오」(「작가후기」 중). 〈정은령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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