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니어]길거리농구 열풍 『밤하늘은 우리의 바스켓』

  • 입력 1997년 9월 2일 07시 39분


지난달 28일 밤 12시 서울 강남구 개포동 개포5단지 시민공원. 4개의 조명탑이 에워싸고 있는 1백평 남짓한 아스팔트공간은 밤을 잊은 젊음들이 발산하는 열기로 가득했다. 『정수야, 스크린. 네가 돌아나와야지』 『림을 건드렸잖아. 인터피어야』 봄부터 가을까지 매일밤 1318들의 「농구 해방구」가 결성되는 곳. 단순한 마니아를 넘어 농구에 미쳤다고 자평하는 프로들이 모여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또래의 웬만한 선수 못지않은 기량으로 무장한 이들의 경기는 실전을 방불케 하는 수준. 골밑에서의 이중점프나 노룩패스(상대를 쳐다보지 않고 건네주는 패스) 덩크슛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방학이 끼여있는 여름을 전후한 때가 최대의 성수기. 요즘은 한낮의 따가움이 가시는 저녁무렵부터 농구공을 옆에 낀 10대들이 삼삼오오 코트로 몰려든다. 농구인파로 절정을 이루는 밤 10시. 3면의 코트는 5명 또는 3명씩 팀을 이룬 「선수」들로 발디딜 틈이 없다. 늦게 오는 팀이 앞 팀의 경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이곳의 불문율. 일주일 중 가장 많은 인파가 몰리는 토요일밤은 코트를 차지하기가 하늘에 별따기다. 자정이 될 때까지 대기인원은 평균 50여명. 모처럼 코트를 찾은 대학생 형들도 줄을 서야 하기는 마찬가지다. 5단지코트의 터줏대감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정수(17·중동고2년). 중동고 농구동아리 「카이저스」의 멤버로 일주일에 여섯번은 여기에 들른다는 자칭 「중증환자」다. 이 코트가 처음 문을 연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거의 매일 단골로 출입해왔다. 밤늦게 학원수업을 마치고 자정이 넘은 시간에 이곳으로 발길을 돌린 적도 부지기수. 물론 비슷한 친구들과 함께였다.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어도 일단 농구공을 손에 잡으면 아무 걱정이 없어요. 처음 본 아이들도 한 게임만 해보면 금방 친해지고요. 모여서 술집이나 당구장 가는 것보다 훨씬 낫잖아요』 농구에 관한 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날쌘돌이 현우(17·중산고2년)의 농구예찬론. 그 역시 코트에서 아침이슬을 맞아 본 경험이 적지 않은 광이다. 하루가 다르게 확산일로를 걷고 있는 길거리농구 열풍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은 비단 여기만은 아니다. 한강시민공원이나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 마련된 간이코트 역시 소문난 명소. 특히 대학로는 농구광이라면 한번쯤 서보고 싶은 선망의 코트. 젊은층이많이몰리는 거리의 속성상 보는 눈도 많아 웬만한 실력이 아니고서는 명함을 내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남학생뿐 아니라 여학생들도 가세하는 추세. 아직은 남학생들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지만 아파트단지 곳곳의 농구대에서 땀흘리는 여학생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헌 기자> ▼ 나이키배 여자부 우승팀 ▼ 길거리농구에도 여성들의 입김이 거세지고 있다. 직접 농구화끈을 조여매고 코트에 나선 당찬 10대 여학생들. 더이상 관람석의 오빠부대에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남자들만의 영역으로 치부돼왔던 세계에 과감히 도전장을 냈다. 신현정 김지영 박미정 이양순. 풍문여고 3학년 열여덟 동갑내기. 주장인 현정이만 빼고는 모두 1m60이 채 안되는, 그래서 농구와는 거리가 있을 것 같은 이들은 실상 누구 못지않은 농구광이다. 이들은 지난 13일 한강시민공원에서 열린 제5회 나이키배 길거리농구대회 여자부에서 당당히 우승을 거머쥐었다. 여자부는 올해 신설됐지만 참가한 4개팀 모두 전력이 녹록치 않은 수준. 지난해부터 일주일에 한번씩 모여 기량을 갈고 닦아온 현정이네를 비롯, 매주 세차례 이상은 농구대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신여중과 송파중 연합팀 등 쟁쟁한 팀들이 출사표를 냈다. 『처음에는 호기심어린 남자애들의 눈길이 부담스러웠어요. 「어, 골도 넣네」 「드리블도 곧잘 하는걸」 하는 얘기가 들릴 때마다 기분이 좋지는 않았죠』 그러나 「과연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남자애들의 의심 섞인 눈길은 이내 적극적인 호응으로 변해갔다. 골이 들어갈 때마다 열렬한 박수가 터져나오고 응원소리도 높아졌다. 『코트에서 공을 쫓아다니다 보면 경기장에서 응원하는 것과는 다른 희열을 느낄 수 있어요. 국가대표팀도 국제무대에선 여자가 남자보다 성적이 더 나은데 우리라고 못할 이유가 없잖아요』 대학진학후에도 농구공을 놓지 않겠다는 현정이네의 다부진 각오에서 날로 힘을 얻어가고 있는 코트의 우먼파워를 실감할 수 있다. 〈이 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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