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호 시집「禪에 관한 노트」,詩통한 禪 전달

  • 입력 1997년 8월 19일 07시 52분


언제부터인가 시인은 언어의 길을 끊고(言語道斷) 온갖 마음의 갈피조차 접었다(心行處滅). 선(禪)과 시(詩), 성(聖)과 속(俗) 사이, 그 어디쯤엔가 조심스레 「번뇌의 쥐를 잡는 덫」(參禪)을 놓는다. 번뇌의 쥐를 꾀는 미끼는 절간에서 빌린 「구멍 없는 자물쇠」의 화두(話頭). 그러나 화두는 해탈의 유혹(돛)이자 해탈의 집착(덫)이 아니던가. 하릴없이 구멍 없는 자물쇠를 만지작거리는 시인. 아무리 둘러보아도 산중(山中)에는 열쇠가 없구나…. 그런 그가 마침내 시의 쇠꼬챙이를 꺼내 들었다. 구멍 없는 자물쇠를 여는 세간(世間)의 열쇠. 선과 시, 성과 속, 산중과 세간의 경계를 한묶음에 뀀으로써 「한 손바닥에서 나는 손뼉소리」에 이르려는 가열 찬 시도다. 탄광촌 사북의 「대설주의보」로부터 꼭 10년 뒤에 나온 다섯번째 시집 「회저의 밤」(93년). 그 이후 줄곧 「나를 녹이는 시」, 자기무화(自己無化)의 시작(詩作)을 통해 「빈」 자신을 공(空)에 섞는 불교의 선에 빠져온 시인 최승호씨(43). 그가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세계를 문학의 구슬에 꿰고자 「길 없는 풀숲」을 헤치며 새로운 장르의 씨앗을 싹틔우고 있다. 이른바 선의 맛을 문학에 담그는 「선미문학(禪味文學)」. 그는 올들어 여덟번째 시집 「여백」과 실험적인 우화시집 「황금털 사자」를 냈다. 이번에는 「禪에 관한 노트」의 구상과 집필에 매달리느라 여름을 앓고 있다. 내달 출간 계획이 늦어지는 눈치다. 『오래전에 구상이 끝났지요. 하지만 막상 손을 대고 보니 「아직은 좀 비릿하다, 설익었다, 좀 더 발효시켜야겠다」는 느낌입니다』 흔히 선사들과 시인의 세계는 맞닿는 구석이 많다고 한다. 『선사들의 미적 감각은 언어를 압박하지요. 「대나무 그림자가 빗질을 한다. 먼지 한점 일지 않는다」 「호랑이 입 안에서 그네를 탄다」 「초명벌레(아주 작은 벌레) 눈속에 야시장이 열린다」는 표현…. 시가 숨쉬고 있지 않습니까』 때로는 반어적인 우의(寓意), 잔잔한 미소 속에 선승의 매질같은 인식의 섬광이 번쩍이기도 한다. 한번은 스님이 추위를 참다못해 목불(木佛)을 불쏘시개 삼아 불을 쬐고 있었다. 다른 스님이 무슨 짓이냐고 따지자 『사리를 찾고 있다』는 답변. 목불에 웬 사리냐는 다그침에 이렇게 답했다. 『사리가 없는 목불은 몽땅 불쏘시개를 해야겠구만』 선의 세계, 그 깨달음의 경지는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 설명 대신 들려주는 선문답. 역시 알듯 모를듯하다. 『빈 손으로 왔습니다』 『그러면 들고 있게』 『뭘 들고 있으란 말입니까』 『그러면 내려놓게』 끝내 비우지 못하고 있음을 나무라는 걸까. 90년대 들어 부쩍, 시의 프리즘을 통과한 분광(分光)이 현실과 역사에서 비켜서는 듯한 시인. 흔히 「갇힘」과 「벗어남」의 시학으로 해석되는 그의 시는 처음엔 사회와 제도에 갇혀 있었고 이제 「죽음이 나를 가둔다」는 강박에 쫓긴다는 말을 듣는다. 「황금털 사자」에서 잠시, 「방부제마저 썩어 문드러진」 지독한 현실에 반응했지만 예전보다는 한결 곰삭고 그만큼 부드러워졌다는 평이다.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독재가 청산된 지금 「자본」의 타락은 말할 수 없을 정도예요. 이를 견제할 수 있는 건 종교적 영성(靈性)뿐이라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적 관심은 현실도피가 아닌, 현실에 대한 강력한 대응이지요』 왜 하필 불교일까. 『선의 우상파괴적 요소가 마음에 들어요. 흔히 종교는 믿음이거나 헌신이거나, 또는 수행이라고 하는데 나는 믿음을 갖기에는 너무 「삐딱하고」 헌신하기에는 에고가 너무 강하다고 할까…』 〈이기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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