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정환「상상하는 한국사」,곡해-조작없는『역사추궁』

  • 입력 1997년 7월 1일 08시 08분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 그는 살수대첩이 끝나자마자 역사의 기록에서 사라진다. 그 어떤 역사학자도 설명해주지 않던 이 미스터리에 주목하는 이가 있다. 시인 김정환씨(43). 그는 청사에 빛나는 전략가 을지문덕은 어디로 사라졌느냐는 의문에 매달린다. 그는 을지문덕이 선비족 출신이라는 추론에 주목한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이러한 「설」의 신빙성을 캐는 데 있지 않다. 뜻밖에도 그는 고구려는 언어구조부터 신라 백제와 달랐고, 그래서 한반도의 「삼국시대」로 묶기에는 동질성의 갭이 있다는 또 다른 역사적 추론으로 옮아간다. 그리고 을지문덕과 고구려의 정체성에 대한 서로 다른, 동떨어진 추론 사이에서 궁극적인 의문을 건져 올린다. 고구려는 기실 전투적인 인근 부족들의 전시연합체는 아니었을까? 여기에서 역사의 공백을 뛰어넘으려는 문학적 상상력은 엄청난 에너지로 폭발한다. 「그렇다. 고구려는 공(空)이다. 그것은 일순 찬란한 섬광을 발하다가 사라져 버린, 그러나 그 빛이 너무 눈부셔 역사 속에 영원히 각인된…」. 그래서 저자는 말한다. 『고구려의 명장사에는 찬란한 승리의 장면이 있을 뿐 지지부진한 「그후」의 이야기가 없어요. 그러나 나라는 그 지지부진함이 이어 가는 거지요. 을지문덕의 전략과 전술은 고구려가 바로 그렇듯, 나라로 이어지지 않고 우리들의 가슴에 박혀있지요』 김정환시인. 그가 궁금증을 파헤쳐온 취재자료와 천착을 바탕으로 역사를, 썼다. 그 음울했던 80년대를 「가차없이」 헤쳐온 배불뚝이 사나이가 쓴 한국통사. 「상상하는 한국사」(푸른숲). 작년에 고대 삼국시대 통일신라편이 나온데 이어 이번에 「반란의 시대」(고려), 「백성을 위한 나라」(조선전기), 「근대로 가는 길」(조선후기) 등 3권이 출간됐다. 의문이 고개를 든다. 시인이 쓰는 역사는, 극빈한 사료(史料)의 모래성 같은 우리 역사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상상력으로 얼버무리려는 시도는 아닐까. 『상상력의 힘은 사실의 곡해와 지어냄에 있지 않아요.사실과 사실 사이, 사실과 사실의 틈새를 비집는 궁금증에 있지요. 그 궁금증에 대한 집요한 추궁이랄까. 우리 역사책은 이런 점에서 「직무유기」를 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그의 책은 실증과 사실(史實)의 배열, 그리고 박제화된 역사적 논문만이 텅빈 객석을 지키고 있는 「교실의 사학」과는 많이 다르다. 아찔할 만큼 역사의 숨결에 맞닿아 있다. 그리고 시인의 직관은 시대의 정신을 한줌에 움켜쥐듯 아우른다. 그는 고려시대의 음란한 기운에 대해 「갖은 금은보화를 삼키며 색(色)과 공(空)이 어긋난 불교가 육체의 반란을 초래한」 것이라고 갈파한다. 무신정권의 실체와 그 종말에 대해서도 최의가 너무 살이 찌고 무거워서 무참히 살해당한 것을 빗대 이렇게 규정한다. 『최씨 정권은 몽골이 아니라 「육체의 과잉」에 의해 죽었어요. 무신정권이 자주적이었다는 말은 근거가 없지요. 육체의 방종을 「자주」라고 부르면 모를까…』 정통사학의 교과서로는, 그리고 고증을 무시한 역사소설이나 사극 따위로는 메울 수 없는 역사. 김정환의 「한국사 읽기」는 그래서 역사학의 폭과 상상력을 넓혀주는 또 하나의 결실로 꼽히고 있다. 〈이기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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