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은행-개인 「묘한 짝사랑」…불경기가 빚은 삼각관계

  • 입력 1997년 5월 14일 20시 34분


『경기가 바닥을 기니 장사가 될 턱이 있나요. 점포를 정리한 돈으로 은행빚이나 갚을 참입니다』

H은행 본점 영업부에서 만난 한 중년 고객은 대출받을 때 설정한 근저당을 풀기 위해 융자계 창구로 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다른 은행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시중은행들은 한보와 삼미그룹의 부도 이후 기업에 대한 여신을 대폭 줄이는 대신 「안전한」 개인 대출에 힘쓰고 있지만 일반 거래자들은 오히려 기존 대출금을 상환하는 사례가 급증, 「돈장사」가 안돼 울상이다.

B은행 관계자는 『올들어 신규대출 실적이 작년에 비해 30%이상 줄어드는 추세를 보여 자금운용에 비상이 걸린 판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기존 대출금을 갚는 고객이 늘어 고민』이라고 털어놨다.

그는 「대출세일」 안내전단을 돌리면서 신규고객 확보에 안간힘을 쓰지만 개인대출 문의전화도 뜸한 상태라고 덧붙였다.

D은행 압구정동지점장은 『지점장 전결로 대출금리를 낮추고 수수료 감면 등 각종 혜택을 제시해도 효험이 없다』면서 『근저당을 설정하고 5천만∼1억원을 빌려 쓰던 고객들이 줄줄이 상환을 하고 있어 영업수지에 타격이 크다』고 말했다.

또 K은행 영업부 관계자는 『지난해엔 건당 평균 1천만원이던 대출신청금액이 요즘은 3백만∼5백만원으로 소액화했다』면서 『융자신청을 하더라도 내핍형으로 바뀌고 있다』고 귀띔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시중은행들은 작년에 이어 또 한차례 적극적 대출세일에 나설 태세다.

은행돈을 쓰던 일반 고객들이 올들어 대출금 상환러시를 이루는데 대해 관계자들은 △대체투자수단이던 부동산과 증시가 장기침체, 투자 메리트가 떨어진데다 △대기업의 잇따른 도산으로 평생직장 신화가 무너지고 △해마다 10% 이상 오르던 임금이 묶이면서 이자부담을 감당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부실채권에 시달리는 은행들은 자금에 목마른 중소기업 등에 대한 대출을 기피, 돈이 금고에 쌓여있지만 개인고객들은 빌린 돈도 서둘러 갚는 묘한 삼각관계다.

〈이강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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