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김소진씨,「고아떤 민중」두고 세상 밖으로…

  • 입력 1997년 4월 25일 08시 22분


봄꽃이 만발한 4월 요절한 작가의 시든 몸을 실은 영구차를 보는 것은 비극이다. 24일 서른다섯을 일기로 경기도 용인의 흙속에 묻힌 작가 김소진은 살아 생전 소설집 「고아떤 뺑덕어멈」에서 가난하고 가여운 삶을 살다간 아버지에게 보내는 서문을 쓴 적이 있다. 「첫 아이가 열달 동안 유일한 생명줄로 삼아온 엄마 젖을 떼느라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유일한 자산인 가난과 상처가 지난 사년간 제 알량한 문학의 밑천이자 젖줄이었습니다. 당신을 숱하게 팔아먹어온 그 문학적 젖줄을 이제는 떼어버릴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그의 소년기와 청춘은 전쟁통에 월남한 부모와 서울 미아리 산동네 지붕들이 맞붙은 「기찻집」, 험하지만 푸근한 시장의 민초들, 세상을 바꾸자는 결의를 나누던 대학 동료들과의 만남으로 이어졌다. 「장석조네 사람들」 등에서 다룬 그의 두드러진 소설적 주제는 민중들의 해학과 인간미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여기에 보태진 능란한 이야기 솜씨는 그를 우리 리얼리즘 문학의 본령을 이어가는 드문 작가로 떠올리게 했다. 그는 신문기자였던 시절과 전업작가로 나선 후를 일관해서 최다산 작가의 하나였다. 그의 빈소에서 있은 작가 김성동의 금강경 독경과 오랜 벗 정홍수의 「그 동안 애많이 썼다. 이제 가서 편히 쉬어라」는 고별사는 창작혼과 함께 고된 생계를 펜 끝에 맡겨야 하는 작가들의 운명을 위로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젖줄을 떼내고 넉넉한 민중문학의 벌판으로 나가려던 길목에서 숨졌다. 그가 그토록 가엽게 젖떼는 모습을 지켜봤던 네살배기 아들을 상주로 남긴 채. 그가 작가로서 같은 길을 걸어왔던 부인 함정임의 눈시울 아래서 가냘프게 읊조렸던 유언은 못다 이룬 그의 꿈을 말하는 것이었다. 「미안하다… 구상… 니가 해에…」. 〈권기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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