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동아신춘문예/단편소설부문]당선소감 및 심사평

  • 입력 1996년 12월 31일 18시 15분


▼ 당선소감/유경희 ▼ 유년시절을 생각하면 뒷마당이 떠오른다. 우물가에서 엄마가 빨래하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장독대에 앉아 책을 읽거나 숙제를 하곤 했다. 햇볕이 뒷마당 가득 넘실거렸고 나를 둘러싼 세계는 초식동물처럼 유순했다. 유년이 지나 시골집을 떠나온 후부터 내 주변의 세계는 조금씩 억세고 황폐해졌다. 밤중이면 거리에서 소리지르며 싸우는 소리가 들렸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불쑥불쑥 삶에 끼어들기도 했다. 죽음이나 헤어짐은 언제나 생소했다. 글을 쓰는 것 외에 다른 무엇으로도 나는 그 생소함과 상처를 견디는 법을 알지 못했다. 힘든 일을 지나올 때마다 나는 방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앉은뱅이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쓰고 있다는 일이 내게는 고통을 견딜 수 있는 힘이 되어 주었다. 당선소식을 듣고 늦은 밤 식탁에 앉아 아버지를 생각했다. 한때는 애증의 대상이었으나 이제는 그리움으로 남아있는 아버지. 수의를 입고 누워계시는 아버지 앞에 앉아 이 소식을 들려드리고 싶다. 내 사랑의 원천인 엄마에게도 큰딸이 남긴 흔적 하나를 보여드릴 수 있게 되어 기쁘다. 글을 목숨처럼 생각하고 써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신 숭의여전의 김양호 선생님과 김용국 선생님께 깊은 감사드린다. 그리고 더 열심히 써야 한다는 다짐을 갖게 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감사드린다.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겠다. △71년 전북 고창 출생 △92년 숭의여전 문예창작과 졸업 ▼심사평/한수산 조남현 ▼ 본선에 오른 작품들을 보면서 「혼」이라든지 「땀」이라든지 하는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혼을 불어넣은 소설이나 문장 한줄 한줄에 땀이 배어 있는 소설을 보기가 어려웠다. 좋은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부단한 습작이 선행되어야 하겠지만 인간이나 세상에 대한 남달리 깊은 통찰력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런가 하면 글쓰기의 동력은 글읽기에 내재되어 있다는 인식도 다져야 한다. 복권판매소 여직원의 의식과 생활을 밀도있게 그려낸 심용운의 「섬」은 평범한 소재를 의미있는 스토리로 만들었고 또 의미있는 스토리를 신선한 담론으로 전환시킨 힘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결국 담론이 스토리를 압도해 버림으로써 사건진행이 부자연스럽게 처리되고 만 한계를 드러내었다. 정의연의 「집」은 처음에는 참신하게 느껴졌던 소박성이 나중에 가서는 오히려 작품의 무게를 떨어뜨리는 결과가 되었다. 극적인 요소가 좀더 분명하게 개입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타인으로부터 버림받는다는 모티프로 작중의 과거와 현재를 잇고 있는 유경희의 「전갈은 어디로 사라졌을까」는 전갈 뱀 독의 상징성을 작품의 바탕색으로 칠하면서 어둠의 생활과 밝은 세계에의 지향, 사실과 상징, 과거와 현재 등을 힘있게 교직하고 있다. 또 이러한 교직과정은 자연스럽기도 하거니와 능숙하다.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다. 다만 대화와 지문의 구분을 없애버린 것은 지엽적인 것이지만 재고해 볼 문제이다. 혼란은 꼭 매력으로만 남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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