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시래기국… 그 고향의 맛

  • 입력 1996년 12월 8일 19시 56분


모처럼 고향에 간 길에 시래기를 잔뜩 쌓아 놓고 보니 가져갈게 걱정이었다. 덩치 큰 시래기 보따리를 서울까지 가져가겠다고 우기는 나를 보고 아내가 눈을 흘긴다. 나이가 마흔이 되도록 아직 자가용도 없는 남편을 탓하는 눈길이다. 모처럼 가족들과 야외라도 나가려면 나는 아내와 아이들의 눈치부터 보게 된다. 어쩌다 시골이라도 한번 다녀오려면 버스와 지하철 그리고 기차를 번갈아 타야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아내의 눈치는 물론 아이들 코치까지 볼 수밖에 없다. 그래도 나는 시래기를 포기할 수 없었다. 추운 겨울에 얼큰하게 끓여먹는 무청이나 배춧잎을 엮어 말린 시래깃국 맛을 포기할 순 없기 때문이다. 시래기를 엮을 쯤이면 농촌의 가을걷이는 대충 끝나갈 무렵이다. 추수같은 큰 일을 끝낸 초로의 부부가 양지바른 곳에 마주앉아 짚타래에 하나하나 시래기를 엮어 가는 모습은 여유롭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짐이 너무 많아 시래기를 몇타래 포기하긴 했지만 이런저런 보따리로 중무장한 채 대중교통과의 릴레이 경주를 거쳐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 나는 무엇보다 먼저 시래기 보따리를 풀어 베란다에 매달았다. 마침 집앞을 지나치던 옆집 할머니가 내모습을 바라보며 부럽다는 듯 한참이나 서 계셨다. 『할머니 시래기좀 드릴까요』하고 묻자 할머니는 내심 바랐다는 듯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시래기 두 타래를 받아쥐면서 할머니는 『내가 저녁에 시래깃국 끓여 놓을테니 와서들 드시구랴』했다. 그날 저녁에 옆집 할머니가 끓여주신 시래깃국을 우리 식구는 모두 무척 맛있게 먹었다. 할머니는 아내에게 시래깃국 끓이는 비법까지 가르쳐 주었다. 『시래기는 미리 물에 담가 충분히 불려야 해. 국거리물은 쌀뜨물이 좋고 돼지 뼈다귀를 적당히 넣으면 더 좋지. 고춧가루와 된장을 적당히 풀고 콩나물을…』 그때까지 시큰둥한 표정으로 있던 아내가 드디어 밝은 표정으로 한마디 했다. 『여보, 다음주에 가서 시래기 마저 가져 올까요』 김 상 묵(경기 고양시 행신동 7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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