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시대 가로지르기]<3>“親美-反美는 우리속의 환상”

  • 입력 2004년 3월 7일 18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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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미국의 정치문명’이란 책을 펴낸 권용립 교수는 반미의 감상주의와 친미의 피상주의를 모두 비판하면서 친미와 반미를 말하기 전에 먼저 미국의 사상과 역사, 더 나아가 미국인의 집단무의식까지 철저히 분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김미옥기자
지난해 ‘미국의 정치문명’이란 책을 펴낸 권용립 교수는 반미의 감상주의와 친미의 피상주의를 모두 비판하면서 친미와 반미를 말하기 전에 먼저 미국의 사상과 역사, 더 나아가 미국인의 집단무의식까지 철저히 분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김미옥기자
《우리에게 미국은 무엇인가. 친미(親美)와 반미(反美)의 이분법은 이런 질문에서 출발한다. 친미론자는 미국을 대한민국의 건국과 번영의 초석을 닦아준 혈맹, 자유와 민주의 상징으로 인식한다. 반미론자는 미국이 자신의 패권 확립을 위해 철저히 한국을 이용해 온 제국주의 국가일 뿐이며 남북통일을 가로막는 걸림돌이라고 본다. 둘 다 ‘우리’라는 렌즈에 비친 미국이다. 그 렌즈를 제거한 미국의 실상은 과연 무엇일까. 친미와 반미를 넘어 먼저 ‘미국을 바로보자(觀美)’고 제안하는 경성대 권용립 교수(50·정치외교학)의 질문은 여기서 출발한다. 》

● ‘오래된 전통을 좇는 신생국가’, 미국

“우리가 미국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정치제도나 정책 같은 피상적 수준입니다. 미국적 사고의 원류가 되는 역사와 사상, 집단 무의식 등을 모르면서 미국을 안다고 할 수는 없지요.”

권 교수는 미국 엘리트층이 지닌 사상적 원류로 자유주의와 공화주의, 칼뱅주의 3가지를 든다. 자유주의는 미국이 건국될 당시 18세기 유럽에서 분출된 개인중심의 근대적 사상이다. 공화주의는 고대 로마의 공화정을 모델로 공익을 위해 사익을 희생시키는 ‘덕성의 정치’ 사상. 마지막으로 인간구원의 신앙심과 직업노동, 금욕정신을 떠받쳐 준 칼뱅주의는 미국의 초기 정착자인 청교도들의 정신과 맥을 같이한다.

우리는 흔히 미국을 200년밖에 안된 신생국가, 근대 정치의 산물로 인식한다. 그러나 권 교수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의 이상적 모델은 오히려 고대 로마의 공화정이었다고 지적한다.

“미국의 헌법과 정치제도를 지배하는 사상은 지극히 이기적인 근대적 인간을 데리고 어떻게 하면 고대 ‘덕성의 정치’를 구현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으로 귀결됩니다.”

공화주의는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희생시키고 공익을 위해 헌신하는 ‘자연귀족’에 의한 통치를 이상으로 삼는다. 칼뱅주의 또한 신의 의지를 지상에 구현해야 한다는 사명감, 또는 소명에 뿌리를 둔 선민의식을 부채질한다.

이런 엘리트주의와 특권의식은 국내적으로는 ‘보수화’, 국외적으로는 ‘미국 예외론’을 낳았다는 것이 권 교수의 분석이다.

“미국은 고대와 근대가 융합한 국가라는 점에서 유럽보다 더 과거지향적인 국가입니다. 동시에 타락한 구세계에 오염되지 말거나 이를 구원해야 한다는 외교적 고립주의 또는 사명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 잘못 그려진 초상화에서 빚어진 친미와 반미

한국에서의 친미와 반미는 이런 미국의 실체가 아니라 각자의 마음속에 그려진 잘못된 미국의 초상에 대한 작용 또는 반작용에 불과하다는 것이 권 교수의 지적이다.

“친미가 우리의 정치적 현실에 압도적 영향을 끼친 미국에 대한 일방적 동경의 발로라면, 반미 역시 일방적으로 품어왔던 환상이 무너진 것에 대한 환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는 특히 반미가 과거의 맹미(盲美·미국의 실체에 눈먼 상황)에 대한 조건반사적 ‘반대’라는 점에서 현실감각을 결여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냉정히 말해 우리 역사에서 외교적 ‘친’과 ‘반’은 친명-반청, 친청-반일, 친일-반청, 친미-반공 등 항상 복수의 외세를 두고 어떻게 힘의 균형을 유지할 것인가라는 방식으로 존재했지 하나의 외세만을 두고 논의된 적이 없습니다. 지금 반미를 말한다면 그것은 결국 친중(親中)과 떼어놓을 수 없을 겁니다. 현재의 반미감정에는 미국과 거리를 유지할 때 그로 인해 생기는 외교관계의 변화를 어떻게 풀어나갈지에 대한 냉정한 판단이 결여돼 있어요.”

권 교수는 특히 반미감정에 섞인 ‘외세 콤플렉스’를 경계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등을 거치며 상처받은 자존심을 보상해 줄 역사적 피고로서 우리 바깥을 지목하는 집단적 습성이 키워졌다”고 반미정서의 뿌리를 분석한다.

친미론에 대한 그의 비판도 매섭기는 마찬가지다. 그는 미국에 가서 살고, 공부하고, 미국 내에 절친한 인맥을 갖고 있다고 해서 미국을 안다고 예단하는 안일함을 질타한다.

“미국은 시스템과 원칙의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가 한국이 이라크에 파병해 줬으니 북핵문제에 대해 양보할 것이라고 간주하는 것 자체가 미국을 모른다는 증거입니다. 이제는 미국에 타성적으로 의존하는 것을 멈추고 미국의 생각부터 정확히 읽어 미리 그 길목을 지키는 지혜를 갖췄으면 좋겠어요.”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부시 대외정책 뿌리는 민주당 ‘개입주의’ 노선

현재의 미국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성격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친미와 반미를 가르는 바로미터다.

한국의 친미론자들은 미국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의 대표적 인사인 존 볼턴 미 국무부 차관이 지난해 방한해 남긴 “세상이 바뀌었다”는 말을 자주 인용한다. 9·11테러 이후 미국의 대외정책은 공화당과 민주당, 여야를 떠나 확고하게 바뀌었으며 이는 돌이킬 수 없는 변화라는 것이다.

이에 비해 반미론자들은 전반적으로 미국의 행태를 비판하지만 특히 부시 행정부의 ‘예외성’을 강조한다. 부시 대통령의 기독교 근본주의적 신앙심 때문에 대외정책과 전쟁을 종교적 선악의 대결로 인식하고 있으며, 공화당의 ‘물주’인 군산복합체의 이익을 노골적으로 챙기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권용립 교수는 이런 관점에 대해 먼저 부시 행정부의 행태가 “미국적 전통에 비추어 결코 예외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미국의 대외정책에는 항상 미국은 타락한 구세상과는 다른 예외적 존재이며 미국은 이를 구할 사명을 지니고 있다는 엘리트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부시 행정부의 예외성은 전통적으로 외교적 고립주의를 추구한 공화당 노선에서 벗어나 민주당 노선인 개입주의 정책을 수용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한다고 권 교수는 지적한다. 현 부시 대통령의 아버지 조지 부시 대통령이 벌인 걸프전을 제외하곤 1차 세계대전(윌슨), 2차 세계대전(루스벨트), 6·25전쟁(트루먼), 베트남전(케네디) 등 주요 전쟁에 뛰어든 것은 모두 민주당 정권이었다.

전통적으로 대외정책에서 공화당은 경제적 이익에 투철했고, 민주당은 미국적 가치의 구현에 충실했다는 것. 그러나 요즘 이것이 뒤바뀐 것은 네오콘의 핵심인사들이 60년대까지만 해도 민주당 지지자였기 때문이란 게 권 교수의 분석이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다음주의 ‘흑백시대 가로지르기’ △신 좌우합작이 필요하다=박순성 동국대 교수(경제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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