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5억 北에 갔다]盧당선자측과 현대상선측의 속사정

  • 입력 2003년 1월 31일 11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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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사실상 현대상선의 대북 송금사실을 시인하면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당선자측이 이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는지, 이 문제에 대한 입장이 무엇인지도 앞으로 사태전개에 주요관건이 될 전망이다.

인수위 김병준(金秉準) 정무분과 간사는 ‘미리 알고 있었느냐’는 질문에 “글쎄”라고 여운을 남겼고, 민주당 정세균(丁世均) 정책위의장은 문희상(文喜相) 대통령비서실장 내정자를 만나러 인수위에 왔다가 기자들로부터 같은 질문을 받고 “답변을 유보하겠다”고 말해 사전 인지 가능성을 진하게 풍겼다. 노 당선자와 인수위측이 국가정보원 등으로부터 보고받는 과정에서 알게 됐을 수도 있다.

유인태(柳寅泰) 정무수석 내정자는 30일 오전 기자들과 만나 “박지원(朴智元) 대통령비서실장이 어제 기자들에게 알려준 것으로 알고 있다”며 “밝혀야죠. 안 밝힐 수 있겠어요”라고 말했다. 비록 나중에 “박 실장이 발설자가 아니다”고 정정하기는 했지만 이같이 민감한 문제에 대해 노 당선자의 핵심 참모가 선뜻 박 실장을 발설자로 지목한 것은 의외다. 되짚어보면, 노 당선자측도 이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현 정권과 교감을 갖고 있었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문희상 내정자의 통치행위 관련 발언은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대목. 국정원의 개입이 사실로 드러남에 따라 현 정권의 개입이 부인할 수 없는 정황이 된 이상 “평화를 위한 통치권 차원의 일이었다”고 넘어가는 것이 현 정권과 차기 정권으로선 최선의 방안일 수 있기 때문이다.

차기 정권이 햇볕정책 등 현 정권의 대북 정책을 계승하겠다고 밝혔고, 북한 핵문제가 최대 현안으로 걸려있는 현 시점에서는 더더욱 양측의 이해관계가 일치할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차기 정권은 이 문제에 관한 한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다는 점에서 어떤 식으로든 새 정부 출범 전에 불거져서 매듭지어지는 것을 강력히 선호하고 있다. 노 당선자가 검찰 수사를 촉구하고, 감사원이 즉각 감사결과를 발표하고, 검찰이 신속한 수사 입장을 밝히고 나선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차기 정권으로선 대북송금의 후폭풍으로 타격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점이 우선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현 정권이나 현대가 상처를 입는 문제는 부차적일 수 있고, 바로 이 때문에 향후 처리과정에서 현 정권과 갈등의 소지도 남아 있다.

현대상선측은 당초 고 정주영(鄭周永) 현대 명예회장이 대북송금을 주도했고, 정몽헌(鄭夢憲) 현대아산이사회 회장이 직접 나섰다는 점에는 여러 분석들이 일치한다. 개성공단 개발과 금강산 관광특구 지정 등 대북사업 독점권을 확실히 보장받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수천억원의 거액을 북한에 송금하는 일을 정부 몰래 할 수는 없는 일. 이 과정에서 현대측이 현 정권에 도움을 요청했고, 마침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던 현 정권이 불감청고소언 격으로 개입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과정을 어느 쪽이 주도했는지는 앞으로 밝혀져야 할 부분이다.

어쨌거나 현대로선 최소한 정부와 함께 한 일이었다고 주장할 것으로 보인다. 현대가 이제까지 한나라당으로부터 엄청난 공격을 당하면서도 굳게 입을 다물었던 것도 국정원이 깊숙이 개입된 이상 최악의 경우에도 정권이 보호해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차기 정부 출범을 앞두고 조속한 진상규명 움직임이 일고 ‘동업자’인 현 정권이 현대 쪽에 모든 책임을 떠넘기자 현대측은 생존 위협을 느꼈을 법하다.

28일 현대상선이 2235억원과 관련한 자료를 감사원에 전격 제출하고, 사실이 드러나자 “확인해줄 수 없다”는 아리송한 태도를 취한 것도 현 정권과 차기 정권을 향한 무언의 시위일 수 있다.

윤종구기자 jkm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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