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최초의 오로빌리언 이현숙씨 “이상적 마을 꿈꾸며…”

  • 입력 2002년 7월 7일 18시 15분


이현숙씨와 남편 이봉이 각각 스쿠터에 두 아들인 싯달타와 크리쉬나를 태우고 학교로 바래다 주는 길. 이곳의 주요 교통수단은 스쿠터다.
이현숙씨와 남편 이봉이 각각 스쿠터에 두 아들인 싯달타와 크리쉬나를 태우고 학교로 바래다 주는 길. 이곳의 주요 교통수단은 스쿠터다.
오로빌에는 아이를 포함, 10명의 한국인이 산다. 이현숙씨(39)는 최초의 오로빌리언. 한국에서 여고를 졸업하고 프랑스를 거쳐 오로빌로 왔다. 처음엔 몇 개월만 살아보려고 했는데 18년을 내리 살았다. 두 딸과 두 아들 등 모두 네 자녀를 두고 프랑스인 남편 이봉(37)과 살고 있다. 다음은 그의 오로빌 정착기.

“네살 때 부모가 이혼하고 증조할머니 밑에서 홀로 자라났다. 이혼 후 프랑스로 떠났던 어머니가 초청해 프랑스에서 1년간 살았다.

곧 보이지 않는 벽이 느껴졌다. 반드시 언어의 장벽만은 아니었다. 이미 스리 오로빈도와 마더의 사상에 심취했던 어머니가 인도에 가자고 해서 따라나서 오로빌까지 왔다.

그때가 84년 21세였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내 두 다리로 굳건히 설 수 있는 곳을 찾아가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로빌에 혼자 남았다. 집에는 문도 없어 뱀이 무시로 드나들었고 물리기도 했다. 야자수 잎으로 가린 지붕에서는 비가 샜다.

수중에 300루피(약 8000원)밖에 없어 밥을 굶었다. 학교에서는 점심을 공짜로 주기 때문에 교사가 되겠다고 했다. 가르칠 게 없었다. 그러나 학교에서 받아줬다. 나는 아이들과 뛰어 놀면서 한국동요를 가르쳤다. 그랬더니 학교에서 고맙다고 했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한 것이다. 이미 아이 엄마가 된 제자들이 지금도 나를 보면 산토끼를 부른다.

만약 내가 한국에서 살았으면 뭐가 됐을까. 미스코리아의 용모도 아니고 부자도 아니며 공부도 못했다. 집안배경까지 어지럽다. 나는 한국에선 없었던 희망을 이곳에서 찾았다. 자신을 표현하면서 살 수 있는 길을 찾았다. 어디든 내가 일하고 싶은 곳에서는 나를 받아줬다.

지금은 행정을 맡고 있다. 프랑스어, 영어, 현지어인 타밀어도 하게 됐다. 말을 배우면서 사람들의 사연을 알게 됐다. 나보다 지독히 어려운 삶도 있다는 걸 깨닫자 부모 없이 자라난 상실감이 사라졌다. 내 힘으로 생활할 수 있게 되면서 부모를 이해했다. 부모가 나를 버린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었다. 아버지 어머니의 문제였다.

내 안의 질곡에서 벗어나면서 이상적인 마을을 건설하겠다는 오로빌리언들의 이상에 흠뻑 취해 청년기를 불태웠다. 지금은 인구도 많이 늘고 마을도 커져 과거의 이상이 희석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과거의 오로빌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떨린다.”

오로빌〓홍은택기자 eunta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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