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주성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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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관련 사이트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http://nambukstory.com)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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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분야

2026-04-10~2026-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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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北여자축구, 한국팀 만나면 펄펄 날아…우승땐 ‘공화국 영웅’[주성하의 ‘北토크’]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 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북한 내고향여자축구단이 아시아축구연맹(AFC) 여자 챔피언스리그 시합을 위해 17일 한국에 온다. 종목을 막론하고 북한 선수단의 방한은 2018년 이후 8년 만이다.내고향여자축구단은 20일 수원종합운동장에서 열리는 AFC 여자 챔피언스리그 4강전에서 수원FC 위민과 맞붙는다. 이기면 23일 오후 2시, 호주 멜버른시티FC와 일본 도쿄 베르디 벨라자 전 승자와 같은 경기장에서 맞붙는다.연령별 월드컵에서 우승한 경험이 있는 국가대표급 선수가 대거 포진한 내고향여자축구단은 지난해 11월 이번 대회 조별리그에서 수원FC 위민과 대결해 3대0 완승을 거둔 바 있다.내고향여자축구단은 결승에 진출해 우승팀과 준우승팀에 각각 내건 상금 100만 달러(14억6860만 원) 또는 50만 달러(7억3430만 원)를 받고 평양으로 돌아갈 확률이 높다. 북한 여자축구는 그동안 대한민국과의 대결에서 20전 16승 3무 1패로 절대 우세이다.북한은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여자 축구만은 전혀 다른 세상에 존재하듯 예외다. 북한은 AFC 여자 아시안컵과 아시안게임에서 우승을 3번이나 한 강팀이다. 올해엔 순위가 11위로 처지긴 했지만 지난해엔 국제축구연맹(FIFA) 여자 랭킹 9위에 오른 여자 축구 강국이다. 한국은 19위다.그렇다면 북한 여자 축구는 왜 강할까. 그렇게 강한데도 월드컵에만 나가면 힘을 쓰지 못한다. 딱 한 번 8강에 진출(2007년)한 것이 전부다. 이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북한 선수가 세계 무대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이유내고향여자축구단 방한이 확정된 직후인 5일, 북한 입장을 대변하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는 ‘세계 패권을 향한 조선 여자축구의 힘, 강팀의 밑천은 정연한 후비(후진) 육성 체계’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이에 따르면 북한 여자 축구가 ‘강호’ 지위를 유지하는 비결은 체계적인 선수 육성 체계에 있다.기사에 따르면 2013년 개교한 평양국제축구학교가 북한 선수 육성 시스템의 핵심이다. 북한 각지에 있는 ‘축구학교’ ‘과외체육학교’ 등에서 두각을 드러낸 유망주를 평양국제축구학교로 보내 전문적인 교육을 받게 하는 방식이라고 한다. 조선신보는 “전국적 규모의 피라미드식 육성 체계가 세워져 있는 것”이라고 표현했다.조선신보 분석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핵심은 아니다. 다른 스포츠 종목은 피라미드식 육성 체계가 없어서 죽을 쑤는 것인가. 북한의 다른 종목도 피라미드식 육성 체계로 운영된다.그럼에도 여자 축구만 선전하는 이유를 알려면 북한 선수 육성 시스템의 문제점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가령 남자 축구는 왜 성적이 나오지 않는 것일까.한 전직 북한 축구 대표팀 감독은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았다. 선수들 기초 체력이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대부분 스포츠 종목은 키와 몸무게 같은 체격이 중요하다. 북한은 사춘기쯤에 체격과 힘을 주로 보고 후보군을 뽑아 그때부터 육류와 기름 등을 먹이며 훈련시킨다.하지만 사람의 어린 시절 영양 상태는 매우 중요하고 이후 오랫동안 영향을 미친다. 탁아소, 유치원, 소학교(초등학교) 때엔 우리 아이가 선수로 클 자질이 있는지, 키가 어느 정도 클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 일반 가정에서 섭취하는 영양 이상을 보장받기 어렵다. 한마디로 말하면 옥수수죽만 먹고 큰 아이를 10대 후반부터 잘 먹여 뛰게 해 봤자 한계가 있다는 의미이다.국민의 전반적인 체격이 국제 수준을 따라가야 그중에서 스포츠 인재가 나올 수 있는데, 북한은 체격이 왜소해 선수 재목을 찾기도 어렵다. 물론 영양이 전부는 아니다. 성적이 떨어지는 이유로는 선진국과 거리가 있는 폐쇄적인 훈련 방법이나 지도자 능력, 운동 환경, 장비를 비롯한 다양한 요소가 작용한다.● 북한에서 여자축구만 발전한 이유여자 축구는 왜 예외일까. 여자 축구 선수 선발 메커니즘이 다른 종목과 다르기 때문이다.북한 부모 중 딸이 태어나면 “축구나 시켜 볼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축구는 북한이란 환경 속에서 여자가 성공할 수 있는 극소수 가능성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국가대표로 선발되면 엄청난 포상이 차례진다.국제 대회에서 우승하면 선수 개인은 공훈체육인, 인민체육인 같은 개인적인 영광과 ‘화선 입당’이라는 정치적 영예도 얻을 수 있다. 화선 입당은 엄청난 공을 세운 사람을 현장에서 바로 노동당원으로 만드는 ‘특별 입당 과정’을 의미한다. 또 지방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던 평양 시민으로 바로 도약할 수 있다. 눈에 띄게 맹활약하면 가족까지 평양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 평생 가 보기 어려운 외국 구경은 덤이다.국제 대회에 나가 우승하는 딸. 이것은 북한 가정의 꿈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 여자아이들은 5세쯤 되면 모두가 운동선수, 더 구체적으로 여자 축구선수 상비군이라고 할 수 있다. 딸에게서 운동 재능이 엿보이면 공부도 제대로 시키지 않는다.영양 공급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된다. 굳이 국가가 공급하지 않아도 가능성이 보인다면 각 가정에서 알아서 딸에게 영양 공급을 집중하기 때문이다.이렇게 전국 여자아이들이 축구에 매달리니 당연히 인재를 선발할 확률이 훨씬 높다. 만약 세계 다른 나라가 이런 환경이라면 그 국가는 여자 축구 최강국이 됐을 것이다. 다만 한국도 마찬가지일 테지만, 선진국 여성은 사회에서 성공할 다른 기회가 많기 때문에 굳이 축구에 올인하는 가정은 거의 없다. 축구를 하는 여성 인재 풀(pool)이 협소하니 세계적인 선수가 나올 확률도 떨어진다.반면 북한은 공부 잘하는 여자가 성공할 확률보다 축구 잘하는 여자가 성공할 확률이 더 높다. 평양이 아닌 지방의 가난한 가정 여자아이는 대학에 갈 확률도 희박하고, 대학을 졸업해도 국가가 직업을 정해 주기 때문에 좋은 직장을 잡기 어렵다. 한국이라면 의대에 가서 의사를 할 정도의 머리를 가진 여성이라도 북한에서는 출신성분이 나쁘고 가난하다면 대학에도 가지 못하고 농민이나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다.여자 축구는 북한 여성에게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이렇게 목적의식이 철저한 여자아이들이 혀를 깨물며 훈련하니 여자 축구가 발전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 여자 축구가 월드컵에선 죽을 쑤는 이유북한 남자아이들도 같은 목표를 가지지 못할 이유는 없지만, 불행하게도 남자 축구는 국제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지 못한다. 한국이나 일본을 비롯한 다른 나라 남자아이들에게도 축구는 매력적인 보상과 뚜렷한 동기 부여가 있는 종목이기 때문이다.반면 북한에서는 국제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둬 성공할 확률이 거의 없으니 남자 축구는 기회비용 차원에서 여자 축구에 비해 인생을 다 걸 이유가 떨어진다.그렇다면 17세 이하(U-17)나 U-20은 세계 최강국 반열에 드는 북한 여자 축구는 왜 성인 무대인 월드컵에서는 힘을 쓰지 못할까. 월드컵에 4번 나가 8강에 한 번 든 것이 최고 성적이다.가장 중요한 이유는 상대가 강하기 때문이다. 17세나 20세 때 만나는 상대와 월드컵에서 만나는 상대는 전혀 다르다. 10대 중반에 축구에 인생을 걸겠다고 마음먹는 축구 강국(대부분 선진국이다) 여성은 많지 않다. 축구를 몇 년 해 보다가 적성에 맞고 역량이 되니 프로 선수가 되는 것이다.20세 이하 북한 여자 축구선수들이 세계 무대에서 만나는 상대는 축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훈련이 많이 필요한 선수가 대부분이다. 5~6세부터 전문적으로 육성된 데다 오랫동안 다져진 조직력까지 더해진 북한 선수들이라면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반면 선진국 월드컵 국가대표 여성은 축구에 인생을 건 선수다. 동시에 축구 경력도 꽤 많다. 체격과 힘이 좋은 선진국 여성이 축구에 올인해 6~7년 정도만 훈련하면 북한 수준을 뛰어넘는 것이다.선진국 여자 프로축구 선수들은 상대적으로 좋은 훈련 환경에서 선진적인 기술과 전술을 연마한다. 성적이 좋으면 보상도 따른다. 똑같이 ‘밥줄’이 걸린 조건이라면 북한 선수의 힘과 체력, 정신력은 한계가 분명해진다. 현저한 신체 조건 차이를 극복하기 어렵듯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 장벽이 명백해지는 것이다.● 여자 선수 최고의 성공 신화수원FC 위민과 맞붙을 내고향여자축구단 선수들은 그 어느 경기보다 치열하게 싸울 것이다. 우승 상금 100만 달러도 큰돈이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한국과의 경기에서 넣는 골은 ‘값’이 달라진다. 가령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여자 축구 첫 남북 대결에서 첫 골을 넣은 이홍실 선수는 곧바로 화선 입당했고 이후 국제 심판 등으로 승승장구하며 함경북도 농촌에서 올라와 평양의 좋은 아파트에서 산다.다른 나라와의 경기에서 골을 넣으면 이런 표창은 없다. 한국 팀과의 경기는 김정은이 지켜볼 가능성도 높아 그가 기분이 좋아지면 어떤 상을 하사할지 모른다. 반면 이길 것이라 믿었는데 지면, 선수들은 평양에 돌아가 강제노동을 비롯한 엄청난 고초를 당하게 된다. 처벌 강도도 다른 것이다.북한 체육 선수들은 성적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지도자가 어떤 상을 하사하는가이다. 대회 우승 상금을 얼마 받든 선수들 것이 아니기에 상관없다. 김정은 기분에 따라 하사하라고 지시하는 것이 진짜 선수 몫이다.지도자 기분을 만족시켜 최고의 상을 하사받은 선수는 단연 1999년 스페인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여자 마라톤에서 우승한 정성옥이다. 그는 우승 소감을 묻자 “결승 지점에서 장군님이 ‘어서 오라’ 불러 주는 모습이 떠올라 끝까지 힘을 냈다”고 대답했다.이 말에 감동한 김정일은 정성옥에게 공화국영웅 칭호와 고급 승용차 벤츠 500, 평양 고급 주택을 하사했고 우승 상금 6만 달러도 모두 갖게 했다고 한다. 북한에선 국제 대회 우승 선수에겐 공화국영웅보다 한 등급 낮은 노력영웅 칭호와 우승 상금 일부만 준다. 올림픽을 비롯해 국제 대회에서 금메달을 5개나 딴 유도 스타 계순희도 노력영웅에 불과하다.단연 선군 시대 영웅이자 정신적 풍모의 귀감으로 떠오른 정성옥이었지만, 몇 년 뒤 조선신보와의 인터뷰에서 “애인이 직접 채워 준 손목시계를 보며 힘을 내 우승했다”는 ‘말실수’를 했다. 이 말은 사실이기도 했다.1990년대 중반은 ‘고난의 행군’ 시절이라 체력 소모가 심한 마라톤 선수들도 ‘국수죽’을 먹으며 훈련했다. 옥수수 국수를 물에 몇 시간 담그면 면발이 퉁퉁 불어나고 뚝뚝 끊어지는데, 여기에 배추 시래기를 넣고 휘휘 저으면 국수죽이 된다.정성옥은 1996년에 국가대표팀에서 만난 남자 마라톤 간판 김중원과 연애 중이었다. 김중원은 중국의 성(省)급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해 상금 8000달러를 받았는데, 자기 몫으로 주어진 상금 중 300달러를 떼서 애인에게 개엿(푹 고아 뼈를 제거한 개고기에 옥수수엿을 넣고 졸인 것)과 개소주를 만들어 먹였다. 그렇다고 체력이 하루아침에 생겼을 리 만무한 일이다.정성옥이 우승해야 하는 다른 이유는 아버지를 살려야 했기 때문이다. 황해도 해주 지방공장에서 18년간 화물차 운전사로 일하던 그의 아버지는 대회 직전 차로 사람을 치어 숨지게 해 재판을 받게 됐다. 감옥에 가게 된 아버지를 살리려면 대회에서 무조건 1등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정성옥은 임신중절수술까지 받고 대회에 나섰다.딸이 우승과 함께 아부성 발언으로 공화국영웅과 인민체육인 칭호를 받게 되자 정성옥의 부친은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는 영웅의 아버지가 돼 각종 매체에 출연했다.“(정성옥이) 유명해졌으니 나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라며 한숨을 쉬던 김중원도 버리지 않고 1년 반 뒤 결혼했다. 이런 정성옥의 성공 스토리는 북한 스포츠의 신화가 됐다. 수원FC 위민이 만나게 될 내고향여자축구단 선수들은 제2의 정성옥을 꿈꾸며 이를 악문 북한 여인들인 것이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1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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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스크바 공항에 나타난 북한 청년들[주성하의 ‘北토크’]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이달 17일 러시아 모스크바 외곽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에서 한 무리의 북한 청년들이 목격됐습니다.우크라이나 인터넷 매체 ‘유로마이단 익스프레스’가 공개한 짧은 영상에는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을 빠져나온 북한 청년들이 기다리던 대형 버스에 올라타는 모습이 담겨 있었습니다.●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의 용도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은 모스크바 최대 규모 공항입니다. 지난해 7월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을 출발한 노드윈드 항공사의 첫 직항 여객기가 8시간 비행 끝에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여객기 기종은 보잉 777-200 ER로 최다 440명이 탑승합니다.북한은 사람들을 공항에 보내 열렬한 환영 행사까지 열었습니다. 하지만 운항 초기의 기대와 달리 직항 여객기는 극도로 낮은 탑승률 때문에 예정된 운항 횟수를 채우지 못하고 있습니다.러시아 정부는 북한 관광 활성화를 위해 이 항공사에 1회 비행에 약 1억5000만 원이라는 보조금까지 지급했습니다. 하지만 원래대로라면 월 2회씩 운항해야 할 직항 여객기는 지난 9개월 동안 월평균 1회만 운영됐습니다. 그마저도 비행기 좌석이 대부분 빈 상태로 운항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모스크바에서 북한으로 관광을 가겠다는 사람들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여객기가 평양에서 모스크바로 돌아올 때는 상황이 다른 것 같습니다. 17일처럼 북한 노동력을 싣고 오면 10회에 최다 4400명을 모스크바까지 이송할 수 있습니다. 물론 북한이 러시아 항공사에 제값을 지급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이날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에 도착한 북한 청년들이 평양에서 출발했다고 단정하긴 어렵습니다. 북한에서 선박을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한 뒤, 여기서 러시아 국내선을 타고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에 도착하면 비용을 훨씬 절감할 수 있습니다.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에 도착한 북한 청년들은 똑같은 카키색 동복을 입고, 배낭과 가방까지 단체로 들고 나타났습니다.“3조 조장 오라우. 야야야”라는 북한 억양 말소리도 들렸습니다.짧은 머리와 군기가 바짝 든 행동, 상대적으로 건장한 체구 등을 통해 볼 때 북한군 출신들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이들이 현역인지, 막 제대한 군인들인지는 불분명합니다. 이들은 누구이며, 왜 러시아로 왔을까요.● 군인들 제대시켜 러시아 파견저는 올해 1월 27일 ‘러시아로 끌려가는 북한 제대군인들’이라는 칼럼을 동아일보에 실었습니다. 당시 북한 소식통은 “올해 제대 대상인 군인 전체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점령지에 파견된다”고 제보했습니다.그 칼럼을 통해 저는 북한이 올해 제대군인 중 남성만 골라 보낸다고 해도 4만 명은 될 것이지만, 그 인원이 다 선발될 가능성은 낮다고 썼습니다. 간부나 잘 사는 집 자식들은 돈을 뿌려가며 이래저래 빠질 테니, 선발되는 사람은 일반 백성의 자녀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정은이 러시아 파병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행사를 대대적으로 열고, 이들을 위한 기념관까지 평양에 성대하게 준공하는 바람에 주민들은 러시아로 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알게 됐습니다.실제로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최근 북한에선 올해 제대한 청년뿐만 아니라 제대를 2~3년 앞둔 군인들까지 조기 제대시켜 러시아로 파견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러시아와 근로자 몇 명을 파견하기로 계약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인원수를 채우기 힘드니 조기 제대란 카드까지 꺼낸 것이 아니겠습니까.이 정도의 파견 붐이라면 올해 러시아로 가는 청년은 몇만 명은 될 것입니다. 이미 해외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러시아에 많은 북한 여성이 파견돼 일하고 있는 모습이 공개됐습니다. 지금까지는 남성 파견은 많지 않았는데, 올해 부쩍 늘어날 것으로 보입니다.러시아에 간 북한 근로자들 처지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여러 인터뷰를 통해 앞서 파견된 북한 근로자들은 하루 16시간 이상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 공개됐습니다.그럼에도 러시아로 간 청년들은 행운아일지도 모릅니다. 요즘 북한 내부에서는 식량 가격이 석 달 만에 두 배 이상으로 상승하는 등 민생이 급격히 악화하고 있습니다. 북한에서 가만히 앉아 굶어 죽기를 기다릴 바에야 러시아에 가서 일하면 적어도 굶어 죽지는 않겠으니 말입니다.● 헤르손의 미래가 북한 손에?젊고 건장한 북한 청년들은 러시아 어디로 갈까요. 북한 여성 근로자들처럼 물류센터에서 상품 분류하는 일이나 하진 않을 겁니다.북한 청년들의 예상 파견지와 관련해 요즘 주목되는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습니다. 러시아가 점령 중인 우크라이나 헤르손 지역이 최근 언론에 자주 오르내립니다.대표적으로 14일 블라디미르 살도 헤르손주 러시아 점령지역 지사가 모스크바 주재 북한 대사관에 찾아와 신홍철 북한 대사와 회동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살도 주지사는 “북한 측은 식량이 필요하며 우리는 식물성 기름, 밀가루, 가공식품 등에서의 협력을 기대한다. 이 분야들에서 양국의 이해관계가 일치한다”고 설명했습니다.살도 주지사는 앞으로 북한과의 농산물 공급 관련 접촉을 확대하고 시범 사업을 통해 상호 이해를 구축하며 문화, 스포츠, 교육 분야에서도 인도주의적 교류를 시작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이어 헤르손 지역 농장 등을 둘러볼 수 있도록 신 북한 대사를 초청했습니다.크림반도와 연결된 헤르손주는 우크라이나 영토로, 전체 면적은 2만8461㎢에 이릅니다. 이는 전라남북도 전체 면적(2만935㎢)에 전북 면적(8,075㎢)을 추가한 정도의 크기입니다.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전까지는 ‘우크라이나의 바구니’라고 불릴 정도의 대표적인 곡창지대였습니다.하지만 현재 러시아가 주 면적의 72%를 점령했고, 현지에 살던 우크라이나인들을 대거 다른 곳으로 이주시켰습니다. 전쟁 전 100만 명이던 헤르손주 인구는 절반도 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우크라이나가 장악하고 있는 주도(州都) 헤르손시도 전쟁 전 인구 28만 명에서 현재 6~7만 명으로 줄었습니다.헤르손주는 농경지 70%에 물을 공급하던 카호우카 댐이 붕괴해 관개용수가 부족하고, 농경지 30% 이상이 지뢰와 폭발물이 묻혀 있어 접근하기 힘든 땅이 됐습니다. 매년 밀 수백만t을 생산하던 이 지역은 현재 정상적인 영농이 어려운 곳으로 바뀌었습니다.이렇게 황폐하고 위험한 지역에 가서 일하겠다는 러시아인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러시아가 헤르손주를 살리려면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사람들, 즉 부서진 건물도 짓고 지뢰도 제거하며 농사도 잘 지을 수 있는 노동력이 필수적입니다.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에 나타난 북한 청년들이 바로 러시아가 찾아낸 해결책 아닐까요.헤르손에 북한 노동력을 보내면 이탈을 방지하기도 매우 쉽습니다. 사방이 러시아 영토 및 점령지와 바다로 둘러싸여서 북한 청년들이 자유세계로 가려면, 치열하게 교전 중인 전선을 통과해 우크라이나로 오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헤르손 지역 전투는 더욱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당국이 20일 밝힌 바에 따르면 지난주 러시아가 헤르손에서 띄운 공격 드론은 약 5500대로 그 전주보다 900대 많아졌다고 합니다.한 치 한 치 우크라이나 영토로 파고드는 러시아군, 그 뒤를 따르며 지뢰를 제거하고 건물을 세우며 농사를 짓는 북한 청년들. 올해 헤르손에서 보게 될 장면일 듯합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6-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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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월 당신은 헝가리 문화에 빠진다

    주한 리스트 헝가리 문화원이 5월 한 달간 헝가리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연과 문화 행사를 선보인다. 공연, 클래식, 재즈, 어린이 놀이 같은 장르로 구성돼 헝가리 문화의 예술적 깊이와 대중적 매력을 전달한다. 주목되는 프로그램은 공연 ‘메리 고 라운드(회전목마)’. 5월 16, 17일 부산에서 열리는 부산국제연극제(BIPAF) 공식 폐막작으로 헝가리를 대표하는 동명 영화를 무대 공연으로 각색했다. 부다페스트 국립극장과 헝가리 국립무용단 소속 배우와 무용수 수십 명이 연극과 헝가리 전통 음악 및 춤의 향연을 펼친다. 놀이동산을 재현한 무대 디자인이 환상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같은 달 23, 24일 충북 청주시 청남대 일원에서 열리는 재즈토닉 페스티벌에는 세계적인 색소폰 연주자 토니 러커토시가 출연해 헝가리 재즈의 정수를 선보인다. 그달 28일 서울 동대문구 아르코 카멜리아홀에서는 리스트 음악대학 교수이자 저명한 피아니스트 보르베이 라슬로 연주회가 열린다. 가족 프로그램도 준비된다. 4일부터 어린이날인 5일까지 서울 종로구 국립민속박물관에서는 어린이 헝가리 문화 체험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9, 10일 강원 춘천시 남이섬 국제 어린이도서 페스티벌에서도 헝가리 작품들이 소개된다. 공연 및 프로그램 관련 문의는 주한 리스트 헝가리 문화원 전화와 이메일로 할 수 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6-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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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 인민이 굶어죽고 있다[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

    전 세계에서 북한만큼 이란 전쟁의 직격탄을 가혹하게 맞은 국가는 없을 것이다. 식품과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면 가장 가난한 사람들부터 생계 위기를 겪듯이, 나라도 마찬가지다. 충격에 견딜 내구력이 없는 가난한 나라들부터 국가 파산 위기에 몰린다. 이란 전쟁으로 인해 전 세계가 고물가로 아우성친다. 하지만 북한에선 아우성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김정은은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외부로 흘러 나갈까 봐 내부를 꽁꽁 틀어막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북한 상황은 매우 심각하다. 4월 중순 쌀과 휘발유 1kg 가격은 각각 북한 돈 3만 원과 7만6000원이 넘었다. 이는 석 달 전에 비해 두 배 넘게 오른 가격이다. 2년 전 4월에는 쌀 1kg이 5500원, 휘발유는 1만3000원에 불과했다. 가뜩이나 2년 동안 물가가 정신없이 올랐는데, 이란 전쟁 때문에 물가의 고삐가 완전히 풀린 양상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오를지조차 알 수 없다. 한국에서 2년 전에 L당 1500원이던 휘발유 값이 9000원으로 올랐다고 상상하면 북한의 미친 물가 상승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1990년대 중반의 고난의 행군 시절에도 이 정도로 무섭게 물가가 오르진 않았다. 이미 북한에선 작년 겨울부터 굶어 죽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작년 말에 연초 대비 쌀값이 두 배나 올랐는데, 가계 수입은 그에 맞춰 따라가지 못하니 벌어진 일이다. 그런데 굶어 죽는 와중에 다시 식량 값이 석 달 만에 거의 두 배로 뛰었다. 곳곳에서 아사자들이 나올 것이 뻔한데, 탈북이 불가능할 정도로 국경을 철저히 봉쇄해 내부 소식이 외부에 새어 나오지도 못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는지는 북한 당국도 모를 것이다. 처벌이 두려워 간부들이 굶어 죽은 사람들을 병에 걸려 죽었다고 거짓 보고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김정은도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고 보긴 어렵다. 과거의 사례로 봤을 때 평북과 자강도 군수공업 지역에서 제일 먼저 아사자들이 나올 것이고, 영양실조 군인들도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북한에 이번 위기가 진짜 위험한 이유는 내구력이 전혀 없는 상태인 데다, 대책도 없기 때문이다. 북한의 내구력은 4년 가까이 이어진 코로나 봉쇄로 이미 소진됐다. 3년 치를 쌓아두던 군량미를 다 털어먹은 것이 대표적이다. 미래 역시 암담하다. 연료 가격 상승으로 농기계를 제대로 가동할 수 없으니 올해 농사는 망한 것이나 다름없다. 농기계보다 더 문제인 것은 비료를 확보하지 못한 것이다. 전 세계 비료 교역량의 3분의 1이 지나가던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자 중국이 비료 수출을 금지했다. 중국에서 비료를 수입하지 못하면 북한은 대책이 없다. 북한의 1년 비료 소요량은 150만 t인데, 자체적으로 생산되는 양은 3분의 1에 불과하다. 농번기가 닥쳐왔는데 비료가 없으면 1년 내내 식량난을 극복할 수 없다. 연료 값이 비싸 차가 다니지 못하면 물류 이동이 위축돼 지역별 가격 편차도 상당할 수밖에 없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도 김정은은 너무나 태평하다. 아니, 오히려 김정은의 정책은 인민을 굶겨 죽이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시장 폐쇄 움직임이다. 장마당을 풀어줘도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인데, 연말까지 개인 영업을 막고, 카드 결제를 의무화해 개인 재산을 국가가 파악하겠다고 한다. 해방 후 지주, 자본가들의 재산을 뺏어 먹더니, 이젠 뺏을 대상이 없어서 자기들끼리 뺏어 먹고 사는 것이다. 잔디를 심어라, 묘지를 파서 화장하라는 식의 황당한 지시도 계속 하달된다. 1990년대 중반엔 굶어 죽을 바엔 중국이라도 갔지만, 지금은 국경에 지뢰까지 매설해 앉은 자리에서 죽을 수밖에 없다. 북한은 강제로 내리먹이는 김정은주의를 학습하다가 사람들이 쓰러져가는 거대한 ‘나치 수용소’가 됐다. 이런 위기 속에서도 김정은은 13세의 어린 딸을 데리고 다니며 미사일이나 대포 등 뭘 쏘는 것에만 집착하는 ‘발사 광인’으로 살고 있다. 남쪽에 손을 내밀어도 모자랄 판에 여동생과 함께 한국 대통령을 조롱하면서 낄낄대고 있다. 언젠가는 김정은 정권이 망하겠지만, 2026년의 김정은의 행태는 더욱 눈을 부릅뜨고 주시해야 한다. 인민이 굶어 죽어가는 와중에 지도자란 인간이 어떤 짓을 하며 살았는지 역사에 똑똑히 기록해야 한다.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6-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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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은 ‘사회주의 승리’ 포기?…北헌법에서 뺐다[주성하의 ‘北토크’]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 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북한은 사회주의 체제일까요, 아닐까요? 정답은 ‘아니다’입니다. 과거에도 실질적으론 사회주의 체제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확실하게 아닙니다.북한의 사회주의 체제는 누가 빼앗은 것도, 3자가 부인한 것도 아닙니다. 저들 스스로가 이제부터 북한은 더 이상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고 선언했습니다.북한은 지난달 23일 최고인민회의 제15기 제1차 회의를 마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으로’ 개칭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북한은 헌법에서 왜 사회주의란 단어를 빼버렸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회주의란 말로는 더 이상 현재의 북한을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죠. 새로 제정된 개정 헌법 조항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2019년 8월 수정 보충된 헌법 기준으로 봐도 최근 몇 년 동안 결정된 북한의 정책들은 사회주의헌법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북한이 법 따로 현실 따로라고는 하지만, 지금처럼 가다 보면 헌법은 있으나 마나 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주의헌법에서 사회주의적 요소들을 빠르게 제거해버리고 있는 사람은 바로 김정은입니다. 2019년 개정된 북한 사회주의헌법 조항은 모두 172조로 구성됐는데, 이중 국가기구의 임무, 권한, 수도, 국장, 국기 등을 규정한 조항을 빼면, 주민에게 영향을 미치는 조항은 86개뿐입니다.김정은은 헌법에서 사회주의를 어떻게 도려냈을까요. 사례는 많지만, 86개 조항 중 중요한 것만 살펴보겠습니다.● 헌법에 위배되는 김정은의 정책북한 헌법의 1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체 조선 인민의 이익을 대표하는 자주적인 사회주의 국가이다’라고 규정돼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북한은 헌법 1조에 명시된 사회주의란 단어를 헌법 명칭에서 빼버렸습니다.9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북반부에서 인민정권을 강화하고 사상, 기술, 문화의 3대 혁명을 힘 있게 벌려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이룩하며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원칙에서 조국 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투쟁한다’라고 명시돼 있습니다.김정은은 2023년 12월 30일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남북 관계를 ‘동족 관계’가 아닌 ‘적대적 두 국가관계’이자 ‘전쟁 중인 두 교전국’으로 규정하며 민족 및 통일 개념을 폐기했습니다. 한국 언론들은 지난달 최고인민회의 직후 북한이 헌법에 두 개 국가 조항을 신설해 넣었는지, 아닌지에 촉각을 곤두세웠습니다. 해당 조항이 헌법에 들어갔는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는 없지만, 사실 그에 못지않게 주목해야 할 것은 북한이 사회주의를 헌법에서 빼버렸다는 점입니다.조국 통일 조항 못지않게, 앞에 명시된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도 유명무실한 조항이 됐습니다.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작금의 김정은 정책은 사회주의와 반대로 가기 때문입니다.23조는 농촌에 대한 규정인데, ‘협동단체에 들어있는 전체 성원들의 자원적 의사에 따라 협동단체 소유를 점차 전인민적소유로 전환시킨다’고돼 있습니다. 이는 김정은이 2022년 제시한 ‘새 시대 농촌혁명강령’과 배치되는 내용입니다. 새 시대 농촌혁명강령은 약 20명으로 구성됐던 협동농장의 경작 단위를 3~5명 수준으로 세분화하고, 생산 자율성 및 인센티브 확대해 중국식 포전 담당제와 유사한 방향으로 운영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25조는 ‘세금이 없어진 우리나라에서 늘어나는 사회의 물질적 부는 전적으로 근로자들의 복리 증진에 돌려진다. 국가는 모든 근로자들에게 먹고 입고 쓰고 살 수 있는 온갖 조건을 마련하여 준다’고돼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이미 사용료라는 이름으로 전기세와 물세, 자릿세 등 온갖 세금을 징수하고 있고 배급과 월급도 유명무실해진 지 오랩니다.28조는 ‘국가는 협동농장의 생산시설과 농촌문화주택을 국가 부담으로 건설하여 준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현실은 북한 농촌들에서 최근 건설되는 주택들은 모두 현지 주민의 부담으로 건설됩니다. 30조 ‘근로자들의 하루 노동시간은 8시간이다’라는 조항도 의미 없어진 지 오래된 사문화된 조항입니다.● 사회주의의 핵심 논거 상실위의 조항들보다 더 충격적인 일은 최근 김정은이 헌법에 명시된 사회주의의 핵심 조항들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정책들을 고의로 내놓고 있다는 것입니다.북한 주민에게 “자본주의 제도와 비교해 볼 때 사회주의 제도의 우월성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거의 100% 확률로 “우리 사회주의 제도에서는 무상치료, 무료교육을 받습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실제로 북한은 반세기 넘게 무상치료, 무료교육을 사회주의의 핵심 장점처럼 선전해 왔습니다. 이미 30년 전부터 무상치료는 유명무실한 제도였지만, 적어도 최근까지 선전은 그렇게 해왔습니다. 또 이는 북한 헌법에도 명시돼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헌법 47조는 ‘국가는 모든 학생들을 무료로 공부시키며 대학과 전문학교 학생들에게는 장학금을 준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56조는 ‘국가는 전반적 무상치료제를 공고 발전시키며 의사담당구역제와 예방의학 제도를 강화하여 사람들의 생명을 보호하며 근로자들의 건강을 증진시킨다’고돼 있습니다. 72조에도 ‘공민은 무상으로 치료받을 권리를 가지며 나이 많거나 병 또는 불구로 노동 능력을 잃은 사람, 돌볼 사람이 없는 늙은이와 어린이는 물질적 방조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이 권리는 무상치료제, 계속 늘어나는 병원, 요양소를 비롯한 의료시설, 국가사회보험과 사회보장제에 의하여 보장된다’고 적시됐습니다.앞서 헌법에 적시된 무상치료나 무료교육, 사회보장제 등은 모두 국가가 부담해야 할 의무입니다. 하지만 김정은은 최근 그 의무를 내팽개쳤습니다.김정은이 최근 밀고 나가고 있는 ‘보건 혁명’은 치료비 도입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실제로 모든 병원에서 현재 접수비, 진단비, 치료비, 약값, 처방비, 입원비 등의 명목으로 돈을 받고 있습니다. 병원 비용은 일반 주민은 치료받을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고액입니다.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북한이 2023년 12월 21일 제정한 ‘교육후원법’은 기관·기업소·단체와 공민이 교육 발전을 위해 ‘교육후원기금’을 내는 체계를 의무화하고 처벌 규정까지 마련했습니다. 완전 무료교육이라는 국가의 의무를 벗어던진 것입니다.북한 주민들은 이제 사회주의 제도의 장점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무상치료, 무료교육이란 단순한 구호를, 세계를 모르는 무지한 상태에서도 앵무새처럼 말할 수 있게 세뇌가 됐었는데, 지금은 그 핵심 논거를 상실한 것이죠.김정은이 지난달 ‘경찰제도’를 도입하겠다고 밝힌 것도 사회주의 색채를 빼버리는 작업의 일환으로 해석됩니다.● 딸을 앞세운 김정은 어디로 가나이렇게 헌법에서 사회주의적 조항을 유명무실화시키면서 김정은이 가고자 하는 방향은 어디일까요. 아직은 그 방향이 보이지 않습니다.한 가지 확실한 것은 김정은이 선대와는 다르게 사회주의 체제의 실패를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헌법에 명시된 기존의 사회주의 시책들이 더 이상 실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반세기 넘게 공염불로만 존재하던 국가의 약속들을 지워버리는 것입니다.일반적으로 사회주의는 생산 수단의 사회적 소유에 기초하는 경제 및 정치 철학으로, 사유 재산 소유와는 대조적인 개념입니다. 김정은이 사회주의적 약속들을 지웠다면, 그 자리엔 사유 재산을 인정하는 새 약속들이 헌법이란 이름으로 들어설까요. 사유 재산이 인정되면 시장 경제로의 전환은 불가피합니다.그렇지만 현재의 북한은 시장 경제로 전환하기엔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습니다. 김정은은 사회주의는 버렸지만, 세습과 우상 숭배, 강력한 독재는 더욱 단단히 틀어쥐고 있습니다. 강력한 전제군주제라는 정치 형태는 절대 버릴 생각이 없는 것이고, 새로운 4세대 군주로 김주애를 내세우려는 움직임도 최근 더욱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지금의 변화는 단지 사회주의 시책이라는 악성 채무에 대해 지급 불능을 선언했을 뿐입니다. 반면 시장 경제는 체제 불안 때문에 도입을 못 하겠기에, 당분간은 사회주의적 경제 형태와 시장 경제 사이의 갈팡질팡 줄다리기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지구상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았던 기이한 경제 체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죠.그렇지만, 이런 형태가 장기적으로 유지될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 배급도, 월급도, 무상치료와 무료교육도 사라진 북한에서,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서 오직 절대적 복종만 요구하는 김정은에게 진심으로 충성을 바친 인민은 곧 사라질 것입니다. 오는 것이 없으면 가는 것도 없기 마련입니다. 북한 인민도 조만간 김정은에게 충성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아버릴 것입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6-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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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격총을 쏘는 13세 김주애의 용도는[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

    김정은은 딸이 어떤 모습으로 보이길 원할까. 최근 한 달 사이 주애의 이미지 메이킹 전략이 크게 바뀌었다. 조선중앙TV는 지난달 27일 주애가 저격소총을 쏘는 영상을 공개했다. 이달 11일에는 주애가 권총을 쏘는 장면이, 20일엔 심지어 전차를 운전하는 모습까지 공개됐다. 아버지 손을 잡고 다니던 어린 소녀는 어느새 만능 여전사 이미지로 바뀌고 있다. 앞으로 주애가 기관총을 난사하고 수류탄을 던지는 모습이 공개돼도 놀랍진 않다. 하지만 그의 나이 불과 13세. 중량이 수십 t인 전차를 운전하고 저격소총을 쏘는 모습은 경악스럽기까지 하다. 전쟁사를 살펴봐도 13세 소녀 저격병은 본 기억이 없다. 강제로 10대들을 반군에 끌고 가는 아프리카 내전 국가들에서도 저격소총을 든 13세 소녀는 보지 못했다. 김주애의 단독 사진이 북한 매체에 실린 것도 지난달 27일 저격소총을 쏘는 사진이 최초였다. 저격소총이 발사되는 순간 13세 소녀의 어깨는 반동을 감당하지 못해 뒤로 확 밀려났다. 이렇게까지 무리하면서 김정은은 왜 총을 쏘는 딸의 모습을 북한 인민에게 각인시키고 싶었던 것일까. 무슨 메시지를 던지고 싶은 것일까. 일반적으로 총은 권력을 의미하지만 북한은 여기에 좀 더 특별한 의미를 붙인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말은 마오쩌둥(毛澤東) 전 중국 주석이 1927년에 했다고 알려졌지만, 북한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총대정신’ ‘총대철학’이란 논리를 개발했다. 총대철학은 “혁명은 총대에 의해 개척되고 전진하며 완성된다”는 게 핵심이다. 북한에서 지도자의 총은 권력을 의미한다. 이를 자식에게 넘겨주는 의식은 권력까지 넘긴다는, 이른바 ‘총대 서사’가 완성되는 과정이다. 김정은은 총을 쥔 딸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후계자가 주애임을 보여주려는 의도였을까. 국가정보원은 지난달 12일 주애가 “후계 내정 단계에 들어간 걸로 판단한다”고 국회에 보고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김정은에게 13세밖에 되지 않는 어린 딸을 후계자로 내세워야 할 절박한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건강에 자신이 있다면 자식이 좀 더 큰 다음에 가업을 잇게 하는 것이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상식이다. 주애가 후계자라면 김정은에게 아들은 없단 말인가. 국정원은 2017년 2월에 이설주가 출산했다고 밝혔다. 그 아이가 아들인지 딸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주목할 점은 있다. 2018년 2월부터 이설주의 호칭이 갑자기 바뀌었다. 그 이전까지는 북한 매체에 ‘이설주 동지’라고 나왔지만, 이때부터는 ‘이설주 여사’가 등장한다. 북한 역사를 1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여사는 단 네 명만 존재한다. 첫 번째 여사는 김일성을 낳은 강반석이다. 강반석은 항일투쟁에 뛰어드는 아들에게 권총 두 자루를 넘겨 주었다고 북한은 선전한다. 낳은 아들에게 총까지 물려준, 총대 서사의 시작이다. 두 번째 여사는 김정일을 낳은 김정숙이다. 김정숙이 사망할 때 김정일의 나이는 7세. 그래서인지 김정일이 어머니에게서 총을 물려받았다는 선전은 없었는데 갑자기 5년 전, 김정숙이 군복 차림의 어린 김정은에게 권총을 물려주는 그림이 등장했다. 총대 서사의 계승을 위한 조작이 진행된 것이다. 세 번째 여사는 김일성의 후처 김성애다. 그는 평일과 영일이란 두 아들을 낳았다. 김성애가 여사로 호칭된 시기는, 그가 권력을 휘두르던 1970년대에 한정된다. 김정일이 권력을 잡은 뒤 그의 존재는 지워졌다. 앞선 세 여사는 김 씨 가문 대를 잇고 ‘혁명 위업을 계승’하게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다면 이설주는? 주애를 낳고서도 5년 동안 동지라고 불렸는데, 2017년 아이를 낳고 1년 뒤에 여사로 호칭이 바뀌었음은 아들을 낳았다는 의미일까. 2018년의 이설주는 김정은을 남편이라 스스럼없이 부르며 그가 담배를 끊지 않는다고 푸념했다. 대를 이은 여성의 당당함처럼 느껴졌다. 이설주가 아들을 낳았다면 그 아이는 올해 9세. 김주애가 처음 등장했을 때 나이다. 김정은에게 아들이 있다면, 총대 서사를 입혀 가는 김주애는 무슨 용도일까. 여전히 정답은 모른다. 다만 총대 서사로 세뇌된 북한 주민들은 가죽코트 입고 총을 쏘는 소녀의 모습에서 차기 ‘여왕’을 떠올릴 것이다. 김주애는 여왕이 될 수 있을까. 물론 누구도 그것까지 목도하고 싶진 않을 것이다.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6-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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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악명 높던 北 ‘게슈타포’ 보위부, 어쩌다 김정은의 애물단지 됐나 [주성하의 ‘北토크’]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 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안전원이 온다!” “보위원이 온다!”북한에서는 눈을 부지런히 굴려야 무탈하게 살 수 있습니다. 왼쪽만 보고 있으면 어느새 보위원이 오른쪽에서 나타나고, 오른쪽을 보고 있으면 안전원이 왼쪽에서 나타납니다. 북한의 모든 동과 리, 직장과 학교 등에는 안전원과 보위원이 함께 상주하는데, 하나가 아닌 둘이 떽떽거리며 돌아치니 정신이 어지러울 지경입니다.하지만 앞으로 북한 사람들은 한 방향만 보며 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저기 경찰이 온다!” 이런 말만 하면서요.뒤통수를 감시하는 서늘한 시선은 여전히 존재하겠지만, 적어도 나를 잡으러 나타나는 자는 한쪽에서만 나타날 가능성이 높습니다.김정은이 23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조만간 경찰 제도를 도입하겠다고 밝히면서 북한 공안 시스템이 81년 만에 완전히 탈바꿈하게 됩니다. 사회안전성은 경찰성(省)이나 경찰청이 되고, 국가보위성은 국가정보국으로 바뀌게 됩니다.북한 공안 역사는 1945년 11월 19일 북조선5도행정국 보안국 창설로 시작됐습니다. 보안국은 지금까지 사회안전성, 내무성, 인민보안성 등으로 명칭이 바뀌며 존재했고, 소속 구성원들도 각각 안전원, 내무원, 보안원 등으로 불렸습니다. 즉 북한엔 경찰이 존재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북한 사람들이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떠는 국가보위성은 1973년 5월 사회안전부 소속 정치보위국이 분리돼 국가정치보위부로 독립하면서 만들어졌습니다. 지난 반세기 넘는 동안 보위성에 끌려가 죽은 사람은 1백만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국가보위성은 향후 한국 국가정보원과 비슷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입니다. 사회안전성은 한국 경찰청 같은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북한의 공안 제도 개편에 대해 국내 언론들은 정상국가를 표방하는 움직임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틀린 분석은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설명해 주는 분석도 아닙니다.북한이 공안 시스템을 완전히 바꾼 기저에는 체제 유지에 대한 자신감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냥개 두 마리는 필요 없다1973년 북한이 보위부를 만든 시기는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후계 세습이 이뤄지던 때였습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건설한다며 밤잠도 제대로 재우지 않고 인민들을 내몰더니, 갑자기 부자 세습으로 왕조가 되겠다니요. 인민에겐 공산주의자가 되라고 하더니, 자기는 왕이 되겠다니요.인민은 정신이 번쩍 들기 시작했습니다. 곳곳에서 공공연한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김 씨 부자는 보위부를 만들어 ‘공포 통치’로 대응했습니다.1970년대 중반은 참 어수선한 시절이었고 끔찍한 공포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자고 나면 누가 불만을 이야기하다가 가족과 함께 차에 실려 사라졌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 차가 정치범수용소에 갔는지, 깊은 산골에 갔는지는 누구도 몰랐습니다. 사이좋게 지내던 이웃들이 자고 나면 사라지니 사람들은 무서워 입을 다물게 됐습니다.이때는 북한에 정치범수용소가 엄청나게 생겨나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수용소를 만드는 족족 수감자가 넘쳐났습니다. 이렇게 피해를 본 사람이 100만 명은 훌쩍 넘었다고 합니다. 적수공권으로 맞서 싸울 수 있는 공포가 아니었습니다.정의롭고 용감하며 비판적 사고를 하던 사람들이 먼저 끌려가 사라졌습니다. 남은 사람들은 무서워서 입을 닫았습니다.이렇게 반세기 넘게 공포 통치를 편 결과 북한 인민은 이제 저항할 생각조차 못 하는 ‘바보’가 돼 버렸습니다. 태어나서 보고 배운 것은 순응이었고, 세뇌 기술은 점점 더 정교해졌습니다.3대 세습도 그러려니 받아들이게 됐고, 심지어 13세 주애를 후계자로 내세웠다 해도 감히 불만을 말하지도 못하게 됐습니다. 불만과 의문 제기엔 목숨을 걸 용기가 필요합니다.정치범으로 잡아갈 사람은 점점 주는데 보위성 조직은 여전히 비대했습니다. 조직은 존재 이유를 증명해야 합니다. 정치범이 줄어드니 보위성은 2000년대 들어 탈북자들을 잡는 데 열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이후 국경도 완전히 봉쇄돼 탈북자도 없어졌습니다.보위성은 북한 외부 TV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을 잡기 시작했는데, 이는 안전성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거리에서 보위원이나 안전원이나 경쟁적으로 사람들 가방을 뒤집니다.보위성의 방대한 조직은 점점 먹잇감이 없어져 빈둥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반면 이들이 쥔 권력은 여전히 막강했습니다. 보위원과 안전원 중 위세를 따지자면 보위원이 훨씬 높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보위원 위상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북한에서 권력기관 종사자는 뇌물을 받아야 살 수 있습니다. 배급도 제대로 나오지 않고 월급은 있으나 마나이니, 자기에게 주어진 권력을 이용해 어떻게든 주민들을 뜯어먹어야 살 수 있는 것입니다.여기서 보위원과 안전원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경제사범, 경범죄, 절도 등을 담당하는 안전원은 소위 ‘불법적인’ 행위를 적발하면 적발된 사람에게서 뇌물을 받아 잘 살 수 있습니다. 눈감아 주는 일은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고, 설령 걸린다 해도 처벌이 약합니다.하지만 보위원은 뇌물이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보위성에 체포된다는 것은 정치범이란 의미인데, 정치범은 아무리 뇌물을 써도 풀려날 수 없습니다. 보위원이 정치범을 눈감아 주려면 자기 목숨도 걸어야 합니다.이런 상황이 이어지면서 가족 배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보위원은 점점 거지 신세가 됐고, 충성심도 약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도 먹고 살아야 하니 안전원과 마찬가지로 별반 중요하지도 않은 일로 트집을 잡고 사람들을 협박하기 시작했습니다.외부 드라마 보는 사람을 적발하면 소위 ‘대박’입니다. 눈감아 주는 대가는 꽤 큽니다. 어느새 보위원은 드라마 단속반인지, 술자리 단속반인지 구분이 되지 않게 됐습니다. 보위원들까지 뇌물 뜯어내는 데 혈안이 되다 보니, 어느새 보위성이라는 존재는 체제에 대한 불만만 초래하는 대상이 됐습니다.보위성과 안전성은 이 밖에 많은 영역에서 서로 겹칩니다. 두 조직 모두 감시, 수사, 예심 기능은 물론 감옥과 정치범수용소까지 갖고 있습니다. 두 기관 사이 알력은 점점 커졌고, 충성 경쟁 속에 억울하게 정치범으로 몰려 잡혀가는 사람도 많아졌습니다.김정은은 보위성을 없애는 것이 체제 안정을 유지하는 데 더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듯합니다. 한마디로 인민이 순한 양 떼로 바뀐 지금, 굳이 포악한 사냥개를 두 마리나 유지할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군림하던 마인드까지 바뀔까앞으로 국가정보국은 체포해야 할 목표를 경찰에 찍어 주는 역할을 할 것으로 보입니다. 감시와 방첩, 정보 수집은 계속하겠지만, 그들의 특권이던 초법적인 가택수색이나 영장 없는 체포, 고문, 감옥과 수용소 운영, 사형 집행 같은 기능을 유지할지는 미지수입니다.한국도 국정원 전신인 중앙정보국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때가 있었기 때문에, 북한 국가정보국이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적극적인 행위를 시사하는 보위국과 음지에서 활동하는 분위기를 띠는 정보원은 이름부터 느낌이 다르므로 과거보다 역할이 더 커지긴 어렵다고 봅니다.경찰로 명칭이 바뀌는 안전원도 역할이 달라질 것으로 보입니다. 사회안전성은 ‘수령 옹호 보위, 당과 정권의 옹호 보위, 인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 사회질서 유지’ 순으로 임무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임무는 보위성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하지만 경찰 조직으로 바뀌게 되면 치안 유지에 더 방점이 찍힐 것으로 예상됩니다. 과거처럼 수령 옹호 보위와 당과 정권 옹호 보위가 여전히 최고 임무라고 한다면, 굳이 경찰로 이름을 바꿀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정보국과 경찰의 제복도 이름에 어울리게 바뀔 것 같습니다. 현재 보위원은 군관과 같은 복장을, 안전원은 크고 누런 견장을 어깨에 단 군복을 입습니다. 정보국 요원 복장이 어떻게 바뀔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경찰은 중국 공안이나 러시아 경찰처럼 군복이 바뀔 가능성이 높습니다.조직 임무가 바뀌면 국가정보국이 과거처럼 위세 있는 기관으로 존재할지도 의문입니다. 과거엔 보위원이 되겠냐, 안전원이 되겠냐 묻는다면 누구나 보위원이 되겠다고 했겠지만, 앞으론 경찰을 더 선호할 수도 있습니다. 정보만 캐서는 뇌물을 받기 어렵기 때문이죠.공안 시스템 개편에 대한 북한 주민들 반응은 대체로 긍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름부터 치를 떨게 만들던 보위성이 사라지는 것만으로도 공포감은 줄게 됩니다. 또 경찰이란 새로운 조직을 보면서 “우리도 뭔가 선진적으로 바뀌려나”하는 기대도 품게 됩니다. 안전원을 보는 시선과 경찰을 보는 시선은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물론 지금까지 인민의 머리 꼭대기에 군림하며 거들먹거리던 기존 정보국과 경찰 구성원 마인드가 하루아침에 바뀔 리는 없습니다. 여전히 그들은 온갖 트집을 잡아 인민에게서 뭐든 뜯어낼 생각만 하게 될 것입니다. 김정은이 세계 보편적인 공안 시스템을 만들려 한다면 이름만 바꾸어선 안 됩니다. 이 조직들의 체질 개선까지 바란다면 엄청난 노력과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물론 그게 김정은이 원하는 일인지도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6-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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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평북 도당 청사 방화사건의 의미

    지난해 12월 7일 북한 신의주 평북 도당 건물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압록강 건너편 중국 단둥(丹東)에서도 치솟은 검은 연기가 보였다. 북한은 건물 잔해를 급히 철거했다. 내부 소식통에 따르면 도당 청사 중심부 회의실이 불타 5명이 죽고 대형 초상화와 조각상들도 타 버렸다. 당국은 화재를 합선으로 위장한 방화로 결론 내고 은밀히 수사하고 있다. 아직 범인을 잡지는 못했다. 신의주는 온실 건설을 계기로 최근 김정은이 가장 많이 찾은 도시이다. 화재 열흘 전에도 김정은이 다녀갔다. 그런 신의주에서 가장 상징적인 도당 건물을 태워 버렸다는 것은 북한 역사를 돌아봐도 유례없는 일이다. 김정은은 “감히 어떤 놈이 이런 짓을 했냐”며 펄쩍 뛰었을 것이다. 김정은은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 북한 민심은 그가 집권한 이래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가장 큰 원인은 민생 파탄이다. 이번 겨울에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이후 30년 만에 다시금 수많은 아사자와 동사자가 발생했다고 소식통은 전했다. 북한은 지금 완벽히 봉쇄돼 여러 지역에서 아사자가 많이 생겨도 외부에 소식이 전해지기 어렵다. 주민들은 굶어 죽는 이유가 김정은 때문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다. 아무리 노동당 대회에서 자화자찬해 봐야, 주택단지와 온실이나 지방공업공장을 완공했다고 만세를 불러 봐야 대다수 주민에겐 딴 나라 이야기에 불과하다. 김정은은 주민들이 수십 년 동안 의존해 먹고살던 장마당 경제의 핵심 근간을 단 2년 만에 무너뜨렸다. 몇 가지 사례만 들어 보자. 김정은은 2년 동안 초라한 지방산업공장 40개를 겨우 건설해 놓고 무슨 자신감인지 외국에서 수입하던 제품 180종에 대해 수입 금지 조치를 내렸다. 주로 중국에서 들여오던 것으로 민생에 절실한 식품을 비롯한 생필품이다. 김정은의 의도는 지방산업공장 생산품으로 국영 유통망을 강화해 내수 시장을 살리겠다는 것이었을 터다. 그래서 완제품을 사 오지 말고 원료를 사 오라는 지시도 내렸다. 문제는 지방산업공장이 내수 시장을 충족하기엔 턱없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제대로 돌아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김정은도 지난달 당 대회에서 새로 건설된 공장이 1년도 되지 않아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다고 고백하면서, 이를 간부들 태만과 무책임성 때문이라고 했다. 전기도 원료도 외화도 주지 않으면서 공장을 정상화하라는 지시가 얼마나 황당한지도 모르는 것 같다. 이러는 사이에 수입 금지 조치로 장마당 시스템이 붕괴했다. 장마당에서 물건을 팔던 상인들은 하루아침에 굶어 죽게 생겼다. 어제까지 밥 먹고살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소득을 잃었는데, 내부 식량 가격은 무섭게 오르고 있다. 북한에서 지난달 중순 기준 북한돈 환율은 달러당 4만 원을 넘겼고, 쌀 1kg 가격도 2만 원을 넘었다. 2년 전엔 각각 8000원, 5000원 안팎이었는데 미친 듯이 오른 것이다. 그렇다고 주민 소득이 따라 오른 것도 아니다. 월급도 2년째 제자리다. 그러니 비싼 식량과 땔감을 살 수 없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다. 여기에 식량 생산도 크게 줄었다. 이것도 김정은 때문이다. 그의 농촌개혁안에 따라 농장 작업반장은 국가 공급 비료를 외상으로 받아 가을에 식량으로 갚아야 한다. 가을 수확량을 알 수 없는 데다 흉작이면 빚더미에 올라앉는 구조라 많은 반장이 지난해 비료 구입을 포기했다. 인민은 아우성치는데 김정은의 건설판은 점점 커진다. 지방산업공장만 지으라더니 이젠 봉사기지도 건설하고 병원도 건설하고 목장도 지어야 한다. 건설 비용은 주민 주머니에서 나온다. 건설 노동자들에게 장갑과 양말을 줘야 한다, 배부르게 먹여야 한다 등등의 구실로 계속 인민반들을 쥐어짠다. 돈독이 오른 김정은은 병원에 가서도 돈을 내야 치료를 받게 했다. 치료비와 약값은 북한 주민 소득에 비해 어마어마하게 비싸다. 이제 가난한 사람은 아프면 죽어야 한다. 이러니 어차피 죽을 바에야 불이라도 확 지르겠다는 사람이 나오는 것이다. 이란처럼 대규모 민중 봉기가 일어난 뒤 미국이 김정은을 제거해 준다는 믿음만 있다면 북한 주민들은 다 거리로 몰려나올지도 모른다. 정작 김정은은 이런 민심을 알고는 있을까. 어린 딸을 데리고 총이나 쏘러 다니는 것을 보면, 전혀 모르는 것 같다.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6-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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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년말 ‘신의주 도당청사 화재’는 성난 주민이 저지른 방화였다[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

    지난해 12월 7일 북한 신의주 평북 도당 건물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압록강 건너편 중국 단둥(丹東)에서도 치솟은 검은 연기가 보였다. 북한은 건물 잔해를 급히 철거했다. 내부 소식통에 따르면 도당 청사 중심부 회의실이 불타 5명이 죽고 대형 초상화와 조각상들도 타 버렸다. 당국은 화재를 합선으로 위장한 방화로 결론 내고 은밀히 수사하고 있다. 아직 범인을 잡지는 못했다.신의주는 온실 건설을 계기로 최근 김정은이 가장 많이 찾은 도시이다. 화재 열흘 전에도 김정은이 다녀갔다. 그런 신의주에서 가장 상징적인 도당 건물을 태워 버렸다는 것은 북한 역사를 돌아봐도 유례없는 일이다. 김정은은 “감히 어떤 놈이 이런 짓을 했냐”며 펄쩍 뛰었을 것이다.김정은은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 북한 민심은 그가 집권한 이래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가장 큰 원인은 민생 파탄이다. 이번 겨울에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이후 30년 만에 다시금 수많은 아사자와 동사자가 발생했다고 소식통은 전했다. 북한은 지금 완벽히 봉쇄돼 여러 지역에서 아사자가 많이 생겨도 외부에 소식이 전해지기 어렵다.주민들은 굶어 죽는 이유가 김정은 때문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다. 아무리 노동당 대회에서 자화자찬해 봐야, 주택단지와 온실이나 지방공업공장을 완공했다고 만세를 불러 봐야 대다수 주민에겐 딴 나라 이야기에 불과하다.김정은은 주민들이 수십 년 동안 의존해 먹고살던 장마당 경제의 핵심 근간을 단 2년 만에 무너뜨렸다. 몇 가지 사례만 들어 보자.김정은은 2년 동안 초라한 지방산업공장 40개를 겨우 건설해 놓고 무슨 자신감인지 외국에서 수입하던 제품 180종에 대해 수입금지 조치를 내렸다. 주로 중국에서 들여오던 것으로 민생에 절실한 식품을 비롯한 생필품이다. 김정은의 의도는 지방산업공장 생산품으로 국영 유통망을 강화해 내수 시장을 살리겠다는 것이었을 터다. 그래서 완제품을 사 오지 말고 원료를 사 오라는 지시도 내렸다.문제는 지방산업공장이 내수 시장을 충족하기엔 턱없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제대로 돌아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김정은도 지난달 당 대회에서 새로 건설된 공장이 1년도 되지 않아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다고 고백하면서, 이를 간부들 태만과 무책임성 때문이라고 했다. 전기도 원료도 외화도 주지 않으면서 공장을 정상화하라는 지시가 얼마나 황당한지도 모르는 것 같다. 이러는 사이에 수입금지 조치로 장마당 시스템이 붕괴했다.장마당에서 물건을 팔던 상인들은 하루아침에 굶어 죽게 생겼다. 어제까지 밥 먹고살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소득을 잃었는데, 내부 식량 가격은 무섭게 오르고 있다. 북한에서 지난달 중순 기준 북한돈 환율은 1달러당 4만 원을 넘겼고, 쌀 1kg 가격도 2만 원을 넘었다. 2년 전엔 각각 8000원, 5000원 안팎이었는데 미친 듯이 오른 것이다. 그렇다고 주민 소득이 따라 오른 것도 아니다. 월급도 2년째 제자리다. 그러니 비싼 식량과 땔감을 살 수 없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다.여기에 식량 생산도 크게 줄었다. 이것도 김정은 때문이다. 그의 농촌개혁안에 따라 농장 작업반장은 국가 공급 비료를 외상으로 받아 가을에 식량으로 갚아야 한다. 가을 수확량을 알 수 없는 데다 흉작이면 빚더미에 올라앉는 구조라 많은 반장이 지난해 비료 구입을 포기했다.인민은 아우성치는데 김정은의 건설판은 점점 커진다. 지방산업공장만 지으라더니 이젠 봉사기지도 건설하고 병원도 건설하고 목장도 지어야 한다. 건설 비용은 주민 주머니에서 나온다. 건설 노동자들에게 장갑과 양말을 줘야 한다, 배부르게 먹여야 한다 등등의 구실로 계속 인민반들을 쥐어짠다.돈독이 오른 김정은은 병원에 가서도 돈을 내야 치료를 받게 했다. 치료비와 약값은 북한 주민 소득에 비해 어마어마하게 비싸다. 이제 가난한 사람은 아프면 죽어야 한다.이러니 어차피 죽을 바에야 불이라도 확 지르겠다는 사람이 나오는 것이다. 이란처럼 대규모 민중 봉기가 일어난 뒤 미국이 김정은을 제거해준다는 믿음만 있다면 북한 주민들은 다 거리로 몰려나올지도 모른다. 정작 김정은은 이런 민심을 알고는 있을까. 어린 딸을 데리고 총이나 쏘러 다니는 것을 보면, 전혀 모르는 것 같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6-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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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화방탕 대명사’ 북한 2인자 최룡해의 퇴장 [주성하의 ‘北토크’]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25일 끝난 북한 제9차 노동당 대회를 통해 김정은 정권의 ‘공식 의전 서열 2위’이자 빨치산 2세를 상징하는 인물, 최룡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퇴진이 확정됐습니다.최룡해는 ‘백두혈통’을 강조하는 북한에서 김정은의 위상을 돋보이게 하는 보조적인 상징자산이었습니다. 올해 그의 나이 76세. 북한에서 상징자산은 나이와 상관없습니다. 그의 전임자였던 김영남 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91세까지 현역을 지켰습니다.최룡해의 이른 퇴진은 오랜 지병인 당뇨병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는 10여 년 전인 60대 초반부터 한쪽 다리를 절면서 김정은을 수행하는 모습이 종종 포착됐습니다. 당뇨병과 척추질환이 겹쳤다고 합니다. 이를 고려하면 당뇨 합병증이 시작되고도 10년 넘게 자리를 지킨 자체만으로 대단한 일일 수 있습니다. ● ‘체제의 행운아’ 최룡해최룡해의 인생은 전반적으로 운이 매우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룡해는 김일성의 빨치산 동료 최현의 서자(庶子)입니다. 최현은 빨치산 동료 김철호와 결혼해 1942년 최룡택이라는 적자(嫡子)를 낳았습니다. 최현은 38경비여단 여단장 시절에 일본군 간호사 출신인 황해북도 거주 여성과 불륜 관계였는데, 1950년 1월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최룡해입니다.혈통을 중시하는 북한에서 빨치산 출신이 낳은 적자가 많음에도 최룡해가 빨치산 2세를 대표하는 상징자산이 된 것은 매우 이례적입니다.김일성과 같은 항일연군 2군 출신이던 최현은 북-중 국경 근처에서 전투를 자주 벌여 국내에 많이 알려졌던 인물로 김일성 유일 독재체제를 가장 앞장서 옹호했습니다. 즉 부친의 후광이 빨치산 출신 중 가장 강력했다는 점이 최룡해에겐 첫 번째 행운이었습니다.두 번째 행운은 최현의 적자 최룡택이 높은 벼슬보다는 방탕한 삶을 선택했다는 점입니다. 최룡택은 오랫동안 노동당 3대혁명소조지도부 과장 자리에 있었는데, 김정일이 더 높은 자리를 주겠다고 해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3대혁명소조지도부 과장은 전국의 20대 초반 여대 졸업생들을 쥐락펴락하는 위치였습니다. 노동당에 입당시켜 준다며 마음에 드는 젊은 엘리트 여성들을 침실로 끌어들일 수 있는 권력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난봉꾼으로 살던 최룡택은 60세도 채 되지 않은 2000년대 초반 뇌출혈로 쓰러졌습니다. 최룡해의 세 번째 행운은 어렸을 때부터 김정일을 따라다녔다는 점입니다. 김정일과 최룡택은 나이가 같아 어려서부터 같이 자란 사이였는데, 그러다 보니 최룡해도 코흘리개 시절부터 김정일을 알게 됐습니다.이런 인연으로 최룡해는 김정일 시대에 빠르게 출세했습니다. 36세에 벌써 노동당 중앙위 위원에 선출됐고 2년 뒤엔 북한 청년 조직 수장인 조선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 비서로 발탁됐습니다. 어린 나이에 큰 권력을 움켜쥔 최룡해는 빠르게 부패했습니다. 청년동맹 협주단을 만들고 전국 미녀들을 뽑아 부화방탕(浮華放蕩)한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가 변태적 성욕 충족을 위해 ‘수청 드는’ 여성들 치아를 하나당 100달러씩 주고 뽑았던 일을 북한 사람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최룡해에 대한 이 같은 정보는 김정일에게 흘러들어갔습니다. 백두혈통만이 차지할 수 있는 최고 미녀들을 감히 빨치산혈통이 빼돌려 ‘기쁨조 파티’까지 흉내를 냈으니 김정일이 격노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최룡해는 이후 6년 동안 ‘혁명화’를 하게 됩니다.청년동맹 부하 간부들은 대거 처형당했고 이가 뽑힌 여성들도 25호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 죽음을 맞았지만, 최룡해는 몇 년간의 노동 단련으로 위기를 넘겼습니다.같은 서자 출신인지라 동병상련이었을까요. 최룡해는 김정은 시대에 더 승승장구했습니다. 2010년 난데없이 인민군 대장이 된 데 이어 2012년 정치국 상무위원 겸 군 총정치국장으로, 그리고 차수로 승진했습니다. 이후 두루두루 요직을 옮겨 다니다가 몸이 더 버틸 수 없을 때쯤 안전하게 은퇴한 것입니다.● 대를 이은 목숨 빚최룡해의 퇴진으로 이제 빨치산 2세는 북한 정치 무대에서 거의 다 사라졌습니다. 최 씨 가문의 빨치산 혈통은 3대까지 계속 이어질 수 있을까요.최룡해에겐 김정은과 동갑인 아들 최현철이 있습니다. 최현철은 29세이던 2013년 큰 교통사고를 당해 다 죽었다가 살아났습니다. 당시 평양시당 조직부 책임부원이던 최현철은 친구와 한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공교롭게도 부친이 수장인 북한군 총정치국 소속 군용 승합차에 치어 소생 불가 판정을 받고 사체실까지 들어갔습니다. 그날 오전 4시 김정은이 봉화진료소에 나타나 “최 씨 가문의 대가 끊기면 안 된다. 무조건 살려 내라”고 지시했습니다.북한 최고 의료진이 총동원됐습니다. 최현철은 42일 만에 눈을 떴습니다. 이후 그는 2년 넘게 재활치료를 했습니다. 김정은은 거액을 들여 그를 싱가포르까지 보내 고막 수술을 받게 했습니다.함께 사고를 당한 친구는 초기 상태가 최현철보다 좋았지만, 별다른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었다고 합니다. 김정은의 소생 지시는 최현철만 해당했기 때문입니다.뇌를 다쳐 발음도 어눌하고 거동도 불편하던 최현철이 고위 간부로 출세할 정도로 건강을 회복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노동당 9차 대회에서 발표된 250명의 노동당 중앙위 위원 및 후보 위원 명단에 최현철의 이름은 없었습니다. 부친인 최룡해는 36세에 위원이 됐지만, 42세 최현철은 아직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빨치산 3대 혈통의 본격적인 등장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어쩌면 김정은에겐 빨치산 혈통이라는 상징성이 3대까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여담이지만 최현철과 비슷한 사례가 또 있습니다.간부 인사권을 모두 틀어쥐고 있어 ‘인간계 권력’ 최고 수장이라고 불리는 조용원 노동당 조직지도부장 아들도 김정은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2019년 초 호위국 군관 신분으로 30대 중반이던 조용원의 아들은 평양역 인근의 한 고급 술집에서 친구와 술을 마셨습니다. 최고 핵심 실세의 아들인지라 나름 북한에선 비싼 브랜드인 ‘송악소주’를 마셨는데, 이것이 메탄올로 만든 가짜 술이었습니다. 북한에선 가짜 술이 시중에 공공연하게 도는데, 하필 조용원의 아들이 피해자가 돼 시력을 잃게 됐습니다.이때도 김정은이 나섰습니다. 무조건 시력을 회복시키라는 지시에 조용원의 아들은 치료 시설이 훨씬 좋은 중국으로 이송됐습니다. 중국 의료진은 처음엔 치료할 수 없다고 난색을 보였지만, 결국 오랜 치료 끝에 시력이 돌아왔습니다. 함께 마셨던 친구는 별다른 치료를 받지 못해 시력을 잃었습니다. 이 때문에 북한 내부에서는 “같은 술을 마셨는데 조용원 아들만 해외에서 치료받고, 친구는 힘이 없어 소경이 됐다”는 소문이 쉬쉬하면서도 돌았습니다.김정은의 분노로 메탄올 술을 판매한 식당 지배인은 처형됐고, 그 식당 주변 10여 개의 다른 식당도 몽땅 철거됐다고 합니다.김정은 시대 실세였던 최룡해와 조용원은 공교롭게도 김정은에게 아들 목숨이라는 ‘큰 빚’을 지게 됐습니다. 그러니 ‘주군’에 대한 충성심이 더 높아질 것은 뻔한 일 아닐까요. 실제로 조용원은 김정은에게 “아들에게 광명을 찾아주어 감사하다”며 “대를 이어 충성하겠다”는 편지를 바쳤다고 합니다.숱한 처형을 목도했지만, 정작 자신은 늘 안전지대에 머물던 최룡해는 이제 권력을 내려놓았습니다. 그의 몸 상태를 봤을 때 몇 년 안에 김정은이 최룡해의 운구를 직접 나르며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볼 가능성도 있습니다. 북한 언론은 최룡해를 대를 이은 충신의 귀감이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할 것입니다.하지만 북한 인민들은 최룡해를 만민 평등을 지향한다는 북한 사회주의의 기만적 사기극을 낱낱이 드러낸 상징이자 부화방탕의 대명사로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6-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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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빵 먹는 조선민족 만들자!” 김정은이 빠다와 치즈에 꽂힌 이유[주성하의 ‘北토크’]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2026년 김정은의 새로운 관심사가 등장했다. 인민들에게 빠다(버터)와 치즈를 먹이겠다는 것이다.김정은은 2일 평북 삼광축산농장 조업식에 참가해 “각 도들에 실리 있는 축산 기지들을 연쇄적으로 일떠세우면서 축산 현대화의 흐름을 고조시키면 나라의 축산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할 것”이라며 “전체 주민들에게 우유와 빠다, 치즈를 비롯한 각종 젖 가공품과 고기 가공품들이 항상 차례지게 하는 목표를 내세워야 한다”고 말했다.집권 이래 김정은의 관심사는 수시로 변해왔는데, 최근 몇 년 사이엔 지방산업공장, 대규모 온실, 관광단지 등이 대표적인 관심사였다. 하지만 올해 버터와 치즈 생산을 위해 각 도마다 축산 기지를 만들겠다는 새 목표가 제시됐다.2012년 집권 이래 김정은의 행동 패턴을 분석해보면, 어떤 것에 꽂히면 그 목표에는 집요할 만큼 집착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제시한 목표를 완수했다고 공언할 정도의 성과물을 만들어 낼 때까지 집요하게 찾아가고, 닦달질했다.문제는 그 이후였다. 드디어 목표를 달성했다고 만세를 부른 뒤 그의 관심사는 새것으로 옮겨간다. 뒤에 남겨진 과거의 관심사가 숨이 넘어가도 별로 관심이 없었다.북한은 생산에 필요한 원자재나 에너지 등 모든 것이 항상 부족하다. 한정된 자원은 김정은의 최근 관심사가 다 차지한다.인민에게 육류와 버터를 먹이겠다는 꿈은, 지금까지 김정은이 제시했던 목표 중에 그나마 가장 칭찬할 만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북한 인민에겐 먹는 문제가 제일 중요한데, 스키장 만들고, 관광단지 만들고 하는 것보단 먹는 것을 풀겠다고 하니 박수받아 마땅하다.● 빵 먹는 조선 민족의 꿈그렇다면 김정은의 이번 ‘버터와 치즈의 꿈’은 과연 실현 가능한 것일까.우선 김정은이 왜 갑자기 버터와 치즈라는 목표를 들고나왔는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물론 김정은의 머릿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는 없지만, 과거를 통해 합리적인 추론은 도출해 낼 수 있다.버터와 치즈는 밥과 어울리는 식품이 아니다. 대신 빵 문화권에서 버터, 치즈는 수천 년 넘게 식탁의 중심을 차지해 온 식품이다. 특히 유럽 농부들에게 빵과 치즈는 수천 년 동안 가장 기본적인 식사였으며, 역사적, 영양학적, 문화적 의미가 있다.빵은 밀 재배와 연결된다. 김정은은 2021년 말 개최된 노동당 제8기 4차 전원회의에서 “인민의 식생활 문화를 흰쌀밥과 밀가루 음식 위주로 바꾸겠다”며 ‘알곡생산구조’ 전환을 선언했다.이후 북한의 밀 경작지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김정은은 선대가 식량 문제 해결의 중점 과제로 내걸었던 옥수수, 감자 농사에서 탈피하려 한다. 최근 밀 생산 강국인 러시아와의 관계가 밀접해지면서, 군수품과 인력 지원에 대한 보상을 밀로 받을 가능성도 높아졌다.대대로 밥을 먹는데 익숙했던 인민의 입맛을 바꾸려면, 빵에 버터와 치즈까지 발라 맛있게 먹게 해야 한다. 그래야 불만을 줄일 수 있다.스위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빵과 버터, 에멘탈 치즈를 즐겨 먹었던 김정은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빵과 치즈가 옥수수밥보단 훨씬 맛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김정은이 2일 언급한 각 도의 축산 기지 건설은 낙농업을 키우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낙농업은 젖소 등을 사육하여 원유를 생산하고 이를 활용해 유제품을 생산하는 축산업이다.문제는 낙농업 육성이 북한 실정에서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군인 등 인력을 대량으로 동원해 눈에 보이는 건물을 건설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다. 물론 김정은도 그리 생각할 것이다. ● 연설과 현실의 간극삼광축산농장 조업식에서 한 김정은의 연설은 보기 드물게 현실을 정확히 직시하고 있다. 그는 축산업 발전의 5대 고리로 △우량품종의 종자 확보 △충분한 사료 보장 △과학적인 사양관리 △철저한 수의방역 △생산과 경영 관리의 정보화·지능화를 내걸었다. 또 “‘풀 먹는 집짐승’을 기르기 위해 방목지와 도로가 필요하다는 개념에서 대담하게 탈피해야 하며 과학기술을 이용해 축사에서 가축을 키우는 방향으로 축산업의 개념을 바꿔야 한다”고 지시했다. 100% 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말과 현실은 전혀 다르다.예를 들어보자. 3년 전 한국 정부와 민간단체들이 젖소 101마리를 네팔에 지원한 일이 있다. 네팔은 낙농업이 매우 중요한 국가다. 국내총생산(GDP)의 9%를 낙농업이 차지한다.그럼에도 네팔 토착종 젖소의 연간 마리당 산유량은 880㎏에 불과하다. 한국 젖소의 연간 산유량은 1만㎏이 넘는다. 한국 젖소 한 마리가 네팔보다 생산량이 10배 이상 많다. 북한의 젖소 품종은 낙농업으로 먹고 사는 네팔보다 결코 낫다고 할 순 없을 것이다.우량 젖소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국도 1970년대부터 반세기 넘게 꾸준한 노력을 기울여 우량 젖소를 키워왔다. 1970년대 한국 젖소의 하루 우유생산량은 9리터였지만, 지금은 34리터로 올라섰다.사료는 어떤가. 2024년 한국은 배합사료 생산량이 2000만 톤을 넘겼는데, 원료의 95% 이상을 수입한다. 젖소 사육에서 알팔파, 티모시 등 양질의 조사료(건초)는 필수적인데, 이것들도 해외에서 들여온다.하지만 김정은은 “풀판들을 쓸모 있게 개량하고 영양가 높은 먹이풀들을 재배하라”고 했다. 한국이나 중국이 풀판이 없어 건초를 수입하는 것이 아니다. 북한에 건초까지 수입할 외화가 있을 리는 만무하지만, 북한 풀판에서 사료를 해결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거기에 더해 젖소도 사람과 똑같이 알곡을 먹여야 한다.철저한 수의방역도 말뿐일 가능성이 높다. 수의방역은 한국도 버거운 일이다. 김정은이 수천 명의 인력을 파견해 2013년부터 5년 동안 건설한, 세계 최대 규모의 목장이라고 자랑하던 약 1억5000만 평 규모의 세포등판 축산단지도 수의방역 때문에 망했다. 물론 세포등판도 사료부터 시작해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지만, 제일 큰 문제는 병에 걸려 죽는 가축이 많았던 것이다.이 외에도 전기도 부족하고, 컴퓨터 등 첨단 반도체 설비도 귀한 북한에서 과학적인 사양관리와 정보화·지능화를 어떻게 이룩한다는 것인지도 상상이 되지 않는다.● 백날 본보기를 창조해 봐야…김정은은 이날 연설에서 광천닭공장을 가금업의 본보기로 만들었다고 자랑했다. 광천닭공장은 2년 전 김정은이 방문한 공장이다. 하지만 추위와 더위를 막아줄 냉난방시설, 사료 문제 등을 풀지 못해, 이후 제대로 생산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지금까지 김정은이 이룩했다는 성과 중에 인정할 만한 것이 거의 없는데, 빵과 치즈의 꿈이라고 제대로 이뤄질 수 있을까. 그걸 기대하는 북한 주민은 없을 것이다.공장이든, 목장이든, 김정은이 손대는 것마다 실패하는 진짜 이유는 경제 시스템이 잘못됐기 때문이다.젖소 목장만 봐도 우량종자나 사료, 방역 약품 등은 수입에 의존해야 한다. 하지만 생산품이 나오면 김정은은 평양이나 군, 유치원 등에 생색을 내며 공짜로 풀 것이다. 그렇다고 생산에 필요한 외화를 지속적으로 대주는 것도 아니다. 삼광축산농장 간부들은 이제부터 목숨을 하늘에 맡기고 살아야 한다. 김정은의 관심이 내년에 딴 곳에 쏠리면 젖소 목장은 찬밥 신세가 된다.몇 년 뒤 김정은이 불쑥 찾아와 “당의 영도업적을 망쳤다”며 화를 내며 간부들을 반당반혁명분자라고 단죄할지 누가 아는가. 전기나 원료를 대주지 않으면, 모든 것에 천재라는 김정은을 총경리로 임명해봐야 뾰족한 묘수가 있을 리가 없다.북한 인민이 빠다와 치즈를 먹고 살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시장경제를 인정하고 도입하면 된다. 그러면 김정은이 편히 쉬고 있어도 인민 생활은 빠르게 좋아진다.…하지만 그걸 외면하고 있는 한, 김정은이 죽을 때까지 전국을 홍길동처럼 돌아다니며 격려하고 처벌하고 해봐야 성과가 나올 수가 없다. 어쩌면 인민이 잘살기 전에 간부들이 처벌받아 다 죽는 것이 현실적 가능성이 더 높을 듯싶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6-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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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러시아로 끌려가는 북한 제대군인들

    김정은이 올해 또 러시아에 수만 명을 파병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 소식통은 “올해 제대 대상 군인 전체가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점령지에 파견된다”고 전했다. 북한은 17세에 군에 입대해 남성은 평균 10년, 여성은 5년 동안 복무한다. 현재 실질적인 북한군 병력은 80만 명 정도로 예상된다. 여기서 군관과 장기 복무 하사관을 빼면 병사는 많아야 6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 중 남성은 매년 10분의 1씩, 여성은 5분의 1씩 제대한다. 러시아에 남성 제대군인만 보내는지 여성도 보내는지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남성만 보낸다고 해도 4만 명은 될 것이다. 뇌물이 보편화한 북한에선 간부나 부자는 돈을 뿌려 가며 자녀들을 이래저래 빼낼 테니 선발되는 사람들은 일반 서민 자녀일 것이다. 러시아에 파병 가는 제대군인들은 파괴된 인프라 복구에 투입된다. 이미 북한은 지난해 6월 러시아에 공병 1000명과 군 건설 노동자 5000명을 파견하기로 했는데, 올해 제대군인까지 합세하면 노동자 파견 규모는 훨씬 더 커질 듯하다. 북한 근로자 해외 파견은 2017년 유엔 대북 제재 결의안 위반이지만, 이 결의안은 무용지물이 된 지 오래다. 북한 제대군인 중엔 복무 기간 집에 한 번도 못 간 사람이 많다. 우크라이나에 포로로 잡힌 고참 군인 이모 씨는 부대에서 100km 정도 떨어진 집에 10년 동안 한 번도 가지 못했다고 했고, 입대 4년 차인 백모 씨도 집에 가지 못했다. 재작년 8월 군사분계선을 통해 귀순한 9년 차 북한 군인도 복무 기간 집에 간 적이 없다. 군인들이 휴가 한번 쓰지 못하고 10년씩 복무하는 이유는 부대에서 보내주지 않아서가 아니다. 집에 갔다 오려면 부대로 복귀할 때 쌀 한 배낭이라도 메고 돌아와 군관들에게 뇌물을 줘야 한다. 가난한 집 자식은 집에 부담을 주기 싫어서 기회가 있어도 가지 않는다. 반면 돈 많은 집 자식은 군관들에게 뇌물을 주고 집에서 몇 달씩 놀기도 한다. 제대 후 집에 돌아가서 결혼하고 싶은 희망으로 10년씩 버텼는데, 그 희망이 물거품이 될 판이다. 연애를 못 해 본 27세 청년 수만 명이 우크라이나에 풀리면 강력 범죄가 빈발할 법도 하지만 현실은 다를 것이다. 현재 러시아가 점령 중인 우크라이나 남동부 지역 면적은 북한 전체 영토와 맞먹는 약 12만 km². 북한 제대군인들이 투입될 지역은 이 중에서도 심하게 파괴된 일부 지역이 될 것이다. 민간인도 이미 다 피란을 떠나 약탈할 것도 변변치 않은, 그야말로 폐허에 불과한 땅이다. 북한이 제대군인들을 러시아로 보내는 까닭은 이들이 통제하기 가장 쉬운 집단이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엔 군에서 10년씩 복무하면 대개 노동당에 입당시켰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10년 복무해도 입당하는 군인은 10% 미만이라고 한다. 당국은 제대군인을 인력이 모자라는 공장이나 농촌, 탄광 등에 일방적으로 보내는 경우가 많은데, 입당한 사람은 현지에서 집으로 도망칠 궁리만 한다. 그래서 파견지에서 2, 3년 정도 지켜보고 입당시키는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북한에서 당원 위상이 과거보다 떨어진 것은 사실이다. 돈이 많으면 당원보다 낫지만, 문제는 돈도 없는데 당원도 아니면 인기가 없다는 데 있다. 당원밖에 기댈 것이 없는 가난한 청년들은 10년 허비한 청춘이 아까워서라도 파견지에서 몇 년 더 버틸 수밖에 없다. 러시아에 가는 제대군인들도 현지에서 열심히 일을 잘해야 입당시키겠다는 말을 들을 것이다. 이렇게 20대 청년들을 코를 꿴 부림소처럼 부려먹으면서도 김정은은 정작 “출산율 감소를 막아야 한다”고 엉뚱한 소리를 한다. 지난해 러시아로 파견됐던 북한 근로자들 인터뷰를 보면 이들은 하루 16시간 이상 중노동에 시달렸다. 열심히 일한 만큼 김정은 주머니가 불룩해지니, 올해 파견될 제대군인들 처지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새해 초부터 김정은은 평양에 만드는 ‘해외군사작전 전투위훈기념관’ 건설 현장에 가족을 데리고 나가 지게차를 직접 몰며 나무를 심느라 분주했다. 사진 속 김정은은 신이 난 듯 보였다. 기념관 옆에는 전사자 400여 명의 묘가 들어선다. 현재까지 북한이 공개한 전사자 수는 약 250명. 아직 150명 정도 묫자리가 비었다.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6-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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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년전 한밤 중 목욕탕에 나타난 김정은, 분노한 이유는 [주성하의 ‘北토크’]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 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 봅니다.북한 매체들은 21일 김정은이 함경북도 경성군 온포근로자휴양소 준공식에 참석했다고 크게 보도했다.준공식에서 김정은은 “몇 해 전 이곳에 왔을 때 당의 영도 업적이 깃든 사적 건물이라는 간판은 걸어 놓고도 휴양소의 모든 구획과 요소들이 비문화적이고 운영 또한 비위생적으로 하고 있는 실태를 심각히 비판하던 때가 기억난다”면서 “오늘 이렇게 인민의 훌륭한 휴양 봉사 기지로 다시 개건된 휴양소를 보니 참으로 보람 있는 일을 또 하나 했다는 긍지가 생긴다”고 말했다.얼핏 들으면 인민을 위해 엄청난 선심을 쓴 것처럼 들리지만, 김정은이 온포근로자휴양소에 집착한 데엔 나름 다른 이유도 있다.이날 준공사를 한 리일환 노동당 비서는 “소문난 명승지인 온포지구의 새로운 전변은 원수님께서 이곳을 찾아오시었던 2018년 7월의 그날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말했다.그랬다. 바로 2018년 7월 초 그날 밤에 일이 터졌다.● 한밤에 쳐들어온 김정은당시 노동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께서는 깊은 밤 온포휴양소를 찾으시어 관리 운영 실태와 형편을 요해하시였다.… 휴양소의 목욕탕을 돌아보시면서 관리를 잘 하지 않아 온천 치료 욕조가 어지럽고 침침하고 비위생적이라고, 최근에 잘 꾸려진 양어장들의 물고기 수조보다도 못하다고, 탈의실도 온전히 꾸려져 있지 않고 환기가 잘되지 않아 습하고 불쾌한 냄새가 난다고, 인민들이 휴양와서 치료하는 곳인데 소독은 제대로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이런 환경에서 치료가 되겠는가고, 정말 너절하다고 지적하시었다.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령도 업적이 깃들어 있는 사적 건물이라는 간판을 걸어 놓고 이렇게 한심하게 관리 운영하여 인민들의 호평이 아니라 비평을 받게 되면 사철 온천물이 마를 줄 모르고 솟아나는 경치 좋은 곳에 인민을 위한 휴양소부터 일떠 세워주신 수령님과 장군님의 업적을 말아먹고 죄를 짓게 된다고 준절히 이르시었다.”노동신문에 이 정도로 보도가 나가면 김정은이 당시 얼마나 신경질적 반응을 보였을지 대략 상상이 된다. 아마 여러 간부들이 처벌받았을 것이다.그런데 진짜 이상한 일은 김정은이 왜 하필 깊은 밤 온포휴양소를 찾았을까 하는 것이다.온포휴양소는 북한 최북단 함경북도 경성역에서 직선거리로 12km 떨어진 곳에 있다. 관모봉에서 시작돼 바다를 향해 흐르는 개천을 따라 꾸불꾸불 산길을 20km는 달려야 한다. 김정은이 인민이 걱정돼 함경북도까지 와서 한밤중에 차를 몰아 올라갈 사람은 아닌 듯싶은데…, 이상한 일이다.그렇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온포휴양소에서 다시 직선거리로 14km 정도 상류로 올라가면 김정은의 호화 별장 ‘온포특각’이 있다. 김 씨 일가를 위한 호화 별장을 북한에선 특각, 또는 초대소라고 부른다.예로부터 주을온천 또는 경성온천으로도 불린 온포온천은 신경통과 관절염, 피부병 치료에 효과가 있는 라돈 온천이다. 경성의 옛 지명 주을은 여진어로 ‘뜨거운 물’이란 뜻이다.일제시대에 일본군도 요양소를 세워 이용했을 정도로 유명한 주을온천은 광복 후 김일성이 특히 좋아했다. 김일성은 함경북도를 시찰할 때마다 도 소재지 청진에 있는 특각에선 딱 두 번만 자고 늘 온포특각에 머물렀다.김정일도 권력을 장악했을 때, 이 온천이 마음에 들어서인지 김일성 특각 옆에 자기 특각을 따로 지어 사용했다. 이 특각들은 당연히 김정은이 물려받았다.그런데 김정은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냄새’가 나는 특각이 싫었는지 두 다 허물어 버리고 자기 특각을 새로 지었다. 이 특각은 2016년경 완공됐다.특각까지는 지방에선 보기 드물게 길이 수십km 아스팔트도로가 쭉 연결돼 있다. 특각 지구엔 낚시터도 있는데, 물고기는 전부 특별 임무를 받은 양어 작업반이 청진시 한 호수에서 애지중지 키워 옮겨 온다. 어쩌다 나타나는 김정은을 위해 길이 20cm 이상의 잉어와 붕어를 비롯해 각종 물고기 수만 마리를 항상 낚시터에 가득 채워 넣어야 한다. 이 수만 마리 물고기가 오염시킨 물이 강을 따라 인민의 휴양소로 흘러내려 간다.온포특각을 지키기 위해 974부대 정예 병력 1개 여단 2500명이 상시 주둔한다.물론 주민들은 온포휴양소 상류에 뭐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 누구도 접근할 수도 없고, 또 구글어스로 내려다볼 수도 없다. 그냥 “저기 상류에 장군님 특각이 있는데, 거기 경치는 훨씬 좋다” 정도의 소문만 돈다.2018년 7월 초 새로 지은 온포특각을 찾은 김정은은 갑자기 잠이 오지 않았는지, 아니면 화풀이 대상을 찾고 싶었는지, 혹은 만취했는지는 몰라도 깊은 밤에 갑자기 차를 타고 하류에 있는 온포휴양지에 나타났다.원래 김정은이 시찰할 곳은 몇 달 전부터 준비를 하는데,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면 방법이 없다. 온포휴양소 간부들은 준비 없이 경을 치게 됐다.사실을 따져 보면 휴양소가 양어장 욕조보다 못한 것이 간부들 책임은 아니다. 휴양소를 제대로 관리하려면 수익을 창출해 그 일부로 다시 휴양소를 관리해야 한다. 북한은 이런 시스템이 아니라서 당국에서 자재나 자금을 대주지 않으면 관리가 될 수가 없다.먹고살기도 어려운 사람들이 온천욕이나 하려고 멀리서 며칠씩 기차를 타고 오지도 않는다. 아니, 온천욕하러 가겠다고 여행증을 발급해 달라고 하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다.한국도 온천 문화가 쇠퇴하면서 과거 인기를 누리던 온천 시설들이 문을 닫은 사례가 많은데, 북한은 그것보다 상황이 심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상류의 멀쩡한 김일성 특각과 김정일 특각을 다 밀어 버리고는 자기 특각을 새로 지은 김정은이 “수령님과 장군님 업적을 말아 먹었다”고 화를 내는 것이 황당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김정은이 격노했는데 새로 건설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다.이날 저녁 김정은은 “인민군대가 다음 해에 멋들어지게 건설하여 우리 인민들에게 선물하게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실제로 건물 몇 채를 완공하는 데까진 무려 8년이 걸렸다. 아마 다시 특각에 올라가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났을 땐 필름이 끊겼는지 인민군대를 보내주겠다고 했던 약속을 잊어 버린 것 같다. 국가에서 자재와 인력을 대주지 않으니 함경북도 간부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인민들 주머니를 쥐어짜서 휴양소를 지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그러다가 지난해 3월 다시 온포휴양소에 나타난 김정은이 자기가 한 말을 기억해 냈는지, 이번엔 인력과 자재를 대주어 올해 완공된 것이다. 이제 김정은은 자신의 온포특각에 올라갈 때마다 도로 중간쯤에 있는 새 휴양소를 보면서 기분이 좋을 것이다.● 김 씨 일가 ‘현지 지도’의 비밀이런 식의 김 씨 일가 현지 지도에는 숨겨진 공식이 있다. 그들이 자주 현지 지도했다는 지역을 보면 꼭 근처에 김 씨 일가가 사랑하는 특각이 있다. 특각에 와서 놀다가 심심하면 주변을 둘러보고 뭐라고 지적하는 것이 곧 현지 지도가 된다. 이는 김일성 시대부터 내려온 전통이다. 김일성이 가장 많이 찾은 지역이 평북 창성인데, 100번 넘게 현지 시찰을 하고 북한 전국 지방 발전의 본보기로 삼았다. 그 외진 창성을 수없이 찾은 이유는 창성에 김일성이 제일 좋아한 특각이 있기 때문이다. 김정일도 창성을 매우 사랑했다. 그는 가끔 동해안에 있는 원산특각과 함흥 서호특각을 찾았다. 스키를 좋아하는 김정은은 집권 초 겨울에 스키를 타려 삼지연을 자주 방문했는데, 그때 낡은 삼지연 시가지가 눈에 거슬렸던 것 같다. 김정은 지시로 지금 삼지연은 거의 새로 건설됐다고 할 만큼 천지개벽했다.특각이 근처에 있으면 주변 지역 간부들은 늘 긴장하고 살 수밖에 없다. 언제 김 씨 일가가 들이닥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대신 김 씨 일가는 특각이 없는 지역은 거의 찾아가지 않았다.김정은도 집권한 지 15년이 돼 가지만, 함경북도만 봐도 그가 시찰한 곳은 동해안을 따라 몇 군데밖에 되지 않는다. 특각이 주변에 없는 데다 도로 사정이 안 좋은 내륙 주민들은 평생 김정은을 직접 볼 기회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새로 지은 온포휴양소가 개장하면 북한 인민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줄지어 찾아올까. 2019년 김정은 지시로 축구장 200면 이상을 합친 면적의 터에 대규모로 건설된 양덕온천문화휴양지나, 지난해 건설된 원산갈마관광지구를 보면 답이 나온다. 모두 파리만 날린다.돈을 벌지 못하는 휴양지나 관광지구는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선조들이 남긴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은 북한에 딱 들어맞는 말이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6-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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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企 AI 전환 지원할 공동훈련센터… 한국산업인력공단, 20곳 새로 모집

    한국산업인력공단이 중소기업의 인공지능(AI) 전환을 지원할 ‘2026년도 AI 특화 공동훈련센터’ 20곳을 신규 모집한다. 이 센터는 국가인적자원개발컨소시엄 모델을 활용해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AI 활용 역량 격차를 완화하고 재직자가 실제 현장에서 활용 가능한 AI 직무역량을 갖추도록 지원한다. 자체 훈련시설과 전문 인력을 활용해 협약기업 노동자에게 맞춤형 훈련과 현장 적용을 연계한 종합 지원 프로그램을 제공할 계획이다. 훈련은 3단계로 진행된다. 먼저 전문가가 기업 현장을 방문해 AI 도입 준비 수준을 진단하고 ‘AI 훈련 로드맵’을 수립한다. 이후 경영자 대상 인사이트 교육과 실무자 중심의 문제해결형 실무 훈련이 진행되며 훈련 종료 후에도 전문가의 밀착형 코칭을 지원하고 우수사례 공유회를 개최해 성과를 확산한다. 공단은 전국 8개 권역을 대상으로 지역·산업별 분포를 고려해 총 20곳을 선정한다. 선정 기관에는 연간 5억 원 내외의 사업 운영비와 인프라 구축비, 일반 훈련비의 300%에 달하는 고단가 AI 특화 훈련비가 지원된다. 사업 참여를 희망하는 기관은 2월 23일까지 사업계획서를 제출해야 한다. 3월 중 선정 결과가 발표될 예정이다. 모집 공고는 공단 누리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6-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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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년 北 자가용 판매량 9000여대…‘마이카’ 욕망이 깨어난다[주성하의 ‘北토크’]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 2025년은 북한 ‘마이카(My Car) 시대’ 원년이다. 북한은 지난해 초 개인의 자가용 소유를 전격 허용했다. 또 ‘자가용승용차 이용법’이라는 것도 만들었다.지난해 10월 이후 평양 시내에서 자가용 승용차가 달리는 사진도 많이 공개됐다. 북한은 노동당 창건 80주년인 지난해 10월 10일을 맞아 ‘평양 가을철 국제상품전람회’를 열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이후 처음으로 외국인 관광객 입국을 공식 허용했다. 이 관광객들이 찍은 평양 시내 차량 사진들이 외부 사이트에 공개된 것이다.북한의 자가용 승용차 번호판은 노란색이서 국가 소유 승용차와 뚜렷하게 구별된다.● 당국도 예상 못한 판매량이달 초 북한 내부 소식통에 따르면 지난 1년 동안 자가용이 평양에서만 8000여 대 팔렸다고 한다. 평양을 제외한 지역은 다 합쳐도 1000대 정도 팔렸다. 당국이 전격적으로 자가용 보유를 허용했지만, 과연 그런 건지 반신반의하는 사람도 많고 구매력에도 한계가 있다는 의미다. 평양 자가용은 ‘평양·1234’ 같은 식으로 네 자리 숫자 번호판이 사용된다. 이미 8000대 넘게 팔렸다면, 조만간 다른 방식의 번호판이 나오게 될 것으로 보인다. 숫자를 네 자리만 활용했다는 것은 북한 당국도 1년 만에 자가용이 1만 대 가까이 팔릴 것을 예측하지 못했다는 것을 뜻한다.과거에 비해 많은 차량이 중국에서 북한으로 밀수되는 정황도 다수 확인된다. 지난달 압록강을 끼고 있는 양강도에서만 차량이 건너갈 수 있는 임시 도강로(渡江路·강바닥에 흙더미를 쌓아 만든 비공식 통로) 32개가 위성을 통해 확인됐다. 중국에서 건너다보이는 혜산 시내에도 택시 간판을 단 차량이 급격하게 늘었다.새로 개장한 ‘아미산 자동차 기술 봉사소’에선 새 차량 판매와 함께 임대 서비스도 하고 있다.이런 변화는 올해에 더 가속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평양을 따라 지방에서 승용차 구매 수요가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승용차 판매가 활성화하면서 여러 명이 돈을 모아 할부로 차량을 구매하는 방법이 일반화하고 있으며 외상으로 사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과거에도 북한에서 개인의 자가용 보유가 불법은 아니었다. 하지만 ‘개인 소유의 성격과 원천’을 규정한 북한 민법 58조는 ‘개인 소유는 노동에 의한 사회주의 분배, 국가 및 사회의 추가적 혜택, 터밭(텃밭) 경리를 비롯한 개인 부업 경리에서 나오는 생산물, 공민이 샀거나 상속 또는 증여받은 재산, 그 밖의 법적 근거에 의하여 생겨난 재산으로 이루어진다’라고 규정하고 있다.즉, 차량을 살 수 있는 큰돈은 ‘그 밖의 법적 근거에 의하여 생겨난 재산’ 말고는 만질 수가 없는데, 지금까지 이 ‘재산’은 일본에서 송금이 오는 총련 귀국자들이나 인정받을 수 있었다. 외국과의 무역을 통해 번 돈이나 장마당에서 번 돈은 모두 비사회주의적 재산 축적으로 간주해 언제든 몰수될 수 있다.하지만 북한은 올해 민법 적용을 느슨하게 해 자산 축적 과정을 증명하지 않고도 차량을 살 수 있게 허용했다. 또 자가용 상속도 인정해 주고 있다.● 자가용 시대의 풍경북한의 이 같은 정책 변화는 단순히 경제난 때문에 내부에 숨어 있는 외화를 빨아들이려는 의도로만 해석할 순 없다. 차량 소유뿐만 아니라 주택과 기업 소유, 의료 분야 등에서 사회주의적 시책을 폐기하고 중국식 시장경제 비슷한 모델로 바뀌는 징후가 최근 몇 년 새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심지어 가장 대표적인 사회주의 정책인 배급제도 점점 대상이 축소되고 있다.김정은은 외부에 떠들지 않고 획기적인 내부 개혁을 진행하는 중이다. 자가용 허용은 그런 정책 변화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물론 김정은의 지시 한마디로 언제든 정책이 바뀔 수 있기 때문에 주민들이 당국을 신뢰하진 않는다. 그래서 막대한 돈이 드는 자가용을 서슴없이 사지는 않는다.현재 자가용은 사적 소유보다는 영업 서비스 분야에서 급격히 확산하는 추세다. 개인 또는 여러 명이 차량을 사서 운송업을 하거나 택시 영업을 하는 것이다.이런 경우엔 차량이 소유가 아닌 투자 개념이 되기 때문에 당국도 생계수단을 함부로 뺏기 어려워진다. 재산을 강탈하면, 빼앗긴 사람은 당국에 반감을 품은 ‘반동’이 될 수밖에 없다. 빼앗긴 사람이 많을수록 반동이 증가하면 북한 체제가 위태로워진다. 차량 임대 서비스도 퍼지고 있다. 당국에서 인정받은 공인 ‘륜전기재(바퀴 달린 운송 및 중장비) 봉사소’에서 시간제로 차량을 임대해 준다. 평양의 경우 승용차를 24시간 빌리는 비용은 100달러 정도이며, 장기 임대는 기간에 따라 10% 이상 할인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당국에서 차량을 구매해 봉사소에 제공하진 않는다. 봉사소 차량은 외화 벌이 기관이나 돈 많은 개인이 사서 봉사소에 운영하게 한다. 실질적으로는 개인 소유 차량이다.북한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자가용은 중국제 중고 전기자동차다. BYD가 가장 많다고 한다. 전기자동차 시장이 포화 상태인 중국은 값싼 중고 승용차를 얼마든지 북한에 넘길 수 있다. 중국 업자들이 할부금을 못 내 압류된 승용차들을 북한에 대거 넘기고 있다는 뉴스도 나온다. 차량이 증가하면서 주유 서비스 및 중고차 수리 업체도 많아지고 있다. 만성적인 전력난과 연료난을 겪고 있지만, 차량용 연료는 중국에서 많이 밀수되고 있다. 또 태양광 충전을 위한 패널과 충전기도 함께 북한으로 들어간다.마이카 시대를 맞아 해결해야 하는 또 다른 문제는 면허증 발급이다. 과거 북한은 운전사 양성소에서 1년 이상 운전을 배운 사람에게만 면허를 발급해 주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3개월 속성 교육을 통해 면허를 받을 수 있는 제도도 등장했다. 교육비는 300~500위안(한화 약 6만~10만 원)이다. 북한 당국은 차량 등록 비용은 물론 면허 장사로도 외화를 거둬들인다. 1200위안(약 25만 원) 정도 뇌물을 주면 3개월을 배우지 않고도 더 빨리 면허증을 발급받을 수 있다.● ‘마이카’가 바꿀 북한 미래북한 당국이 자가용 소유를 허용했을 때 주민들은 아무래도 ‘갑자기 법이 바뀌어 차를 빼앗아 가면 어떡하지’에 가장 많은 신경을 쓴다.자가용승용차 이용법에는 몰수 규정이 명시돼 있다. 제41조는 ‘자가용 승용차 이용 질서를 어긴 자에게는 도로교통법의 해당 조항에 따라 벌금, 운전 자격 박탈 처벌을 준다. 자가용 승용차를 범죄 행위에 이용하였을 경우에는 몰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합법과 불법의 경계가 모호한 북한에서, 특히 장사조차 불법인 북한에서 당국이 ‘차를 이용해 범죄 행위를 했다’고 걸면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앞으로 자가용을 많이 판매하려면 당국이 웬만하면 몰수하지 않아야 한다. 당국에 대한 신뢰는 하루아침에 생겨나지 않는다.여러 가지 시행착오에도 북한에서 마이카 시대가 시작된 것은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도 1970년대 이후 마이카 바람이 시작된 이후 1인당 국내총생산(GDP) 상승과 1980년대 ‘3저 호황’ 덕분에 1980년대 본격적인 마이카 시대를 맞았다. 마이카는 중산층의 상징이자 성공의 보편적인 목표였다.현시점에서 북한 마이카는 중상층이 아닌 상류층의 상징이다. 마이카 시대는 교통 환경, 외식과 쇼핑 문화 확대 같은 사회 변화를 수반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욕망의 분출’이다.마이카는 사적 소유를 인정받지 못하던 북한 사람들 마음속에 탐욕을 심어 놓고, 경쟁 심리를 자극하게 된다. “우리 집은 왜 차가 없느냐”는 자녀 투정에 초연할 수 있는 부모는 많지 않다.북한 마이카 시대는 당국에 충성해야 인정받던 시대에서 돈을 벌어야 인정받는 시대로 바뀐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이카는 거리 풍경을 바꾸는 것에서 더 나아가 북한 주민의 ‘혁명적’ 두뇌도 ‘자본주의’로 물들이게 될 것이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6-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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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국가와 체제 위에 민족이 있다

    새해 벽두부터 교황 레오 14세가 ‘성심당’ 창립 70주년 축하 메시지를 보내 화제가 됐다. 성심당은 1950년 12월 흥남에서 미군 수송선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타고 거제로 피란을 온 임길순 씨가 창립했다. 그는 1956년 먹고살기 위해 서울로 올라오다가 열차가 고장 나자, 대전에 내려 성당에서 내준 밀가루 두 포대를 밑천 삼아 찐빵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성심당은 대전에서만 만날 수 있다”는 신조로 영업해 왔다. 그런 성심당이 예외로 생각하는 곳이 있다. 2019년 임영진 성심당 대표는 흥남에 뿌리를 둔 문재인 대통령과 만나 “통일이 된다면 평양 혹은 함흥에 분점을 낼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 76년 전 흥남의 기적은 2세들의 가슴속에 깊이 뿌리를 내려 미래의 역사를 꿈꾸게 한다. 10만 명의 피란민을 구출한 흥남 철수 작전은 기적만 만든 것이 아니다. 기자의 외할아버지도 1950년 흥남에서 배를 타고 남쪽으로 왔다. 남쪽에 와서 새 가족을 이뤄 2녀 1남을 낳았지만 누구보다 먼저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강릉에서 살다 작고했다. 외할아버지의 월남은 남은 가족들에겐 재앙이었다. 탄압과 박해를 피해 계속 도망다니다가 북새통 기차역에서 5세밖에 안 된 어머니는 가족과 헤어졌고, 평생 혈육을 그리며 고아로 살아야 했다. 출신 성분의 굴레는 외손자인 기자에게까지 씌워졌다. 탈북해 서울에 온 기자의 뿌리도 1950년의 흥남과 이어져 있다. 영화 ‘국제시장’을 보고 기자처럼 눈물을 줄줄 흘린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는 민족 분단의 아픔이 죽을 때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갈라진 민족은 피 흘리는 깊은 아픔이다. 합쳐져야만 아무는 상처다. 촌수도 없다는 부부는 갈라지면 남이지만, 피를 나눈 부모·자식의 인연은 버린다고 버려지지 않는다. 민족이란 그런 혈연이다. 둘로 갈라진 민족은 언젠가는 합쳐진다. 근래 독일이 그랬고, 예멘이 그랬다. 오늘날 한 민족이 두 국가로 나뉜 사례는 남북한과 중국-대만 정도이다. 대만은 청나라의 지배를 받은 기간이 200여 년에 불과하고, 1895년 이래 본토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 그런 대만을, 중국은 민족이란 명분으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통일하겠다고 칼을 간다. 하지만 누구보다 다시 합쳐져야 하는 한반도에선 우주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 벌어진다. 김정은은 오로지 패밀리의 세습 통치를 위해서 2년 전부터 ‘적대적 두 국가론’을 내걸고 수천 년 동안 이 땅에서 살아온 민족의 허리를 영영 끊으려 획책하고 있다. 시작은 두 국가론이지만, 김씨 일가의 영속을 위해 앞으론 민족 부정의 논리도 개발할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민족을 통일하려 한 지도자는 수없이 많이 봤어도, 멀쩡한 민족을 단절하겠다고 한 지도자는 거의 찾기 힘들다. 그런 김정은의 논리에 인구도 2배이고 국력도 훨씬 더 큰, 그래서 주도적이어야 할 한국은 속수무책이다. 통일부 수장인 정동영 장관은 새로운 논리인 양 ‘평화적 두 국가론’을 내걸고 한국 사회의 통일 담론부터 분열시킨다. 이는 김정은의 프레임에 넘어가는 어리석은 일이다. 적대적 두 국가로 살겠다는 김정은에게 “통일을 지향하는 평화적 두 국가로 살자”고 해봐야, 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강조해 봐야 결국 남는 것은 ‘두 국가’일 뿐이다. 혈연을 끊겠다는 김정은에게 우리는 혈연의 힘으로 맞서야 한다. 두 집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한 핏줄을 강조하는 것이다. 김정은이 두 국가를 강조하면 할수록 우리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이것은 김정은의 가장 취약한 약점이다. 왜냐하면 분단 이래 북한이 가장 강조해 내걸었던 구호가 다름 아닌 ‘우리는 하나다’와 ‘우리민족끼리’였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두 국가나 체제의 통합까지 아우르는 의미인 ‘통일’을 넘어, 가장 원론적인 민족과 혈연의 담론으로 맞서야 한다. 김정은이 멀어지려 하면 할수록 우리는 핏줄의 힘으로 끌어당겨야 한다. “수천 년을 같은 땅에서 살아온 우리 민족은 합쳐져야 한다.” 국제사회도, 북한도 이 말 앞에선 반박할 논리가 빈약하다. 그게 바로 민족의 힘이다. 국가와 체제 위에 민족이 있다. 막을 수 없는 그 힘이 있기에 언젠가는 기자가 배를 타고 흥남항에 내려 ‘성심당 흥남점’에서 빵을 사 먹는 날은 반드시 오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주의 순리이자, 인류의 순리이다.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6-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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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꿈을 잃었던 청소년에게 다시 희망을”

    국제구호개발기구 월드비전이 진행하는 ‘하트힐링’ 사업이 삶의 기반이 흔들려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 가던 여러 청소년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있다. 하트힐링 사업은 범죄로 인해 보호자를 잃거나 일상이 무너진 아동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심리 회복과 학업 및 진로 재설계를 함께 지원하는 통합 회복 프로그램이다. 월드비전은 지난해부터 3년간 총 20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심리검사와 상담, 치료비 지원을 비롯해 학업, 자기 계발을 위한 맞춤형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또 법무부 교정본부와 범죄 피해자 지원 기관 등과 협력해 사각지대에 놓인 청소년을 발굴하고 연결해 왔다. 올해 이 사업과 연결된 진희(가명·18)는 어머니를 일찍 여읜 뒤 아버지의 수감으로 한동안 ‘다음’을 상상하기 어려운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멈춰 서 있던 진희의 시간은 하트힐링 사업을 만나면서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진희에게 가장 큰 변화는 ‘진로를 다시 말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그는 1 대 1 진로지도와 적성검사를 받으며 막연했던 고민을 차분히 정리해 나갔다. 바리스타와 제과제빵, 간호 등으로 오가던 관심사는 코칭을 거치며 ‘국제무역’이라는 목표로 좁혀졌다. 3년 안에 대학 진학이라는 목표를 세운 그는 다시 공부를 시작하며 일상의 리듬을 되찾았다. 진희가 하트힐링 프로그램을 통해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지원 내용’보다 ‘사람’이었다. 프로그램을 시작하며 만난 월드비전 담당자는 처음 만난 자리에서도 진희의 이름을 불러 주며 이야기를 들어줬다. 진희는 “고민을 털어놓으면 ‘그럼 우리 같이 해볼까’라고 말해줬는데, 그 한마디가 계속 마음에 남았다”고 했다. 오랫동안 혼자 버텨야 한다고 믿어 왔던 진희에게 하트힐링은 ‘지원 프로그램’ 이전에 ‘사람을 만난 경험’이었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소정(가명·17)은 아버지의 수감 이후 불안과 정서적 혼란을 겪었지만, 아버지가 가족 회복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가족에게 사과한 것을 계기로 변화가 시작됐다. 부모 관계가 회복되면서 가정의 정서적 안정도 되찾았고, 소정은 면회 시간을 가족이 함께 소통하는 시간으로 받아들이며 일상과 학교생활에서도 안정을 회복하고 있다. 진수(가명·19) 역시 가족의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학업과 진로에 대한 자신감을 잃었지만, 하트힐링 사업의 지원을 통해 다시 계획을 세웠고, 자격증 취득과 진학·취업 준비를 병행하며 “앞으로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정리가 됐다”고 말했다. 세 사람의 상황은 달랐지만, 공통점은 분명했다. 누군가가 곁에 머물며 함께 생각해 주는 경험이 회복의 출발점이 됐다는 점이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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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동신문 개방? 노동신문 서버는 개방을 견뎌낼까?[주성하의 ‘北토크’]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연말에 노동신문 개방을 둘러싸고 여야의 설전이 오갔습니다. 노동신문 개방은 윤석열 정부 시절인 2023년에 국정 과제로 추진하던 사안이었습니다.약 3년 전엔 침묵하던 국민의힘은 이번엔 “무장해제하고 북한에 백기 투항하는 것”, “안보 인식이 우려를 넘어 경악스러운 수준에 이르렀다”는 등의 발언을 동원해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반면, 민주당에선 체제 경쟁력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반박하고 있고, 심지어 “노동신문을 자유롭게 구독한다면 가장 효과적인 대국민 반공 교육이 되리라 확신한다”(박지원 의원)라는 주장도 나왔습니다.어느 말이 맞을까요. 저는 반세기를 남과 북에서 살면서, 노동신문을 가장 많이 본 사람 중 한 명일 겁니다. 그런 저는 여야의 논란을 보면서 안보니, 반공이니 하는 범주의 생각은 들지 않고, 몇 가지 서로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걸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첫째, “개방하면 누가 읽을까?”라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20년 넘게 북한 기사를 써온 저는 어쩔 수 없이 노동신문이나 북한 중앙TV를 시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저에게 노동신문을 읽는다는 것은 ‘고행’의 연속입니다. 인내가 필요하고, 비위도 좋아야 합니다.요즘 휴대전화 속에 얼마나 재미있는 것이 많은데, 아까운 시간을 누가 노동신문의 깨알 같은 문자를 해독하느라 낭비하겠냐 싶습니다.저를 포함해 정말 노동신문을 구독이 필요한 사람들은 정부에서 열어주든 말든, 오래전부터 노동신문을 자유롭게 볼 수 있었습니다. VPN 앱 하나만 깔면, 휴대전화에서도 노동신문이나 북한 방송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봅니다.한 젊은 국민의힘 의원이 “노동신문의 텍스트는 간첩들의 난수표로 활용될 가능성도 높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고 많이 웃었습니다. 만에 하나 노동신문의 텍스트를 난수표로 활용하는 간첩이 있다고 해도, 그 간첩은 오래전부터 노동신문을 자유롭게 봤을 겁니다.저는 노동신문을 개방해도 그걸 볼 사람이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솔직히 반공교육의 측면이 훨씬 크기 때문에 보다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지만, 앞서 말했듯이 인내와 비위가 좋은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둘째, 국민의 힘이 주장하는 무장해제는 우리가 아닌, 노동신문이 먼저 당할 것 같습니다.노동신문 등 북한 사이트들은 서버가 매우 불안합니다. 기사 하나 클릭하면 열리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려 인내가 많이 필요합니다. 한국의 빠른 인터넷 속도에 익숙한 많은 젊은이들은 이 단계에서, 북한 기사 열리는 것을 기다리다가 포기할 듯싶습니다.초기에 노동신문 사이트를 오픈하면 궁금한 사람들이 들어가 볼 것인데, 제가 볼 땐 한 100명만 동시 접속해도 북한 서버가 버티지 못할 겁니다. 노동신문을 열어놨는데, 그 때문에 서버가 마비돼 저처럼 일 때문에 접속해야 할 사람도 읽지 못하면 큰일입니다. 그리고 북한은 김 씨 일가가 조롱받는 것을 정말 참지 못합니다. 점잖은 북한 연구자들이야 노동신문을 보고 필요한 것만 읽고 말지만, 한국의 젊은 세대가 북한 사이트에 접속해 김 씨 일가의 사진들을 따서 밈이나 개그의 소재로 활용한다면 어떨까요. 북한 매체들은 밈이나 개그로 활용하기엔 정말 풍부한 소재가 있습니다.그러면 이번엔 북한이 기겁해서 노동신문 사이트를 닫아버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건 정말 저처럼 북한을 들여다보는 사람에겐 큰일인데, 진지하게 말하지만 정말 문을 닫아버릴 것 같습니다.셋째, 노동신문을 읽으면 거기에 세뇌될 사람이 있을까요? 90% 이상에겐 반공 교재가 될 것임이 분명하지만, 세뇌당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기도 어렵습니다.저는 북한 관련 블로그나 유튜브를 18년째 운영해 왔고, 합쳐서 2억 뷰가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북한 관련 뉴스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꽤 많이 봤습니다. 그중엔 누가 봐도 황당한, 유치원생 이상의 지능만 갖춰도 판단이 될 가짜 뉴스를 진지하게 믿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이재명 대통령이 최근 북한 매체 개방 문제를 언급하면서 “북한 노동신문을 못 보게 막는 이유는 국민이 선전에 넘어가서 빨갱이가 될까 봐 그러는 것 아니냐”고 했는데, 빨갱이가 되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물론 노동신문을 보고 빨갱이가 되는 지능이라면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말입니다.넷째, 그 재미없는 노동신문에서도, 그나마 우리에겐 좀 관심거리가 될만한 제일 재미있는 면이 사라졌습니다. 이건 정말 유감입니다. 노동신문은 모두 6개면으로 구성되는데, 반세기 넘게 맨 뒷면인 6면은 ‘남조선면’으로 불리며 한국 관련 기사가 작성됐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남조선면이 사라졌습니다. 특히 김정은이 지난해부터 한국과 상종하지 않겠다고 한 뒤로 한국 관련 소식은 노동신문에서 거의 사라졌습니다. 노동신문에 있던 담당 부서인 ‘조국통일부’도 없애버렸습니다. 사실 ‘남조선 기사’는 참 재미있었는데 말입니다. 한국 사람들에겐 “북한이 우리 관련 소식을 어떻게 쓰냐”가 제일 궁금할 건데, 우리의 일상을 북한이 재해석해 가공한 것을 보면 웃음을 참기 힘들죠. 남조선 소식이 없는 노동신문은 북한 인민들에게도 매우 인기가 없어졌습니다.그런데, 우리에게 이렇게 재미없는 노동신문도 북한 주민에겐 정말 중요한 정보 전달자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북한 주민들은 노동신문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요.이에 대해 제가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몇 년 전에 썼던 글이 있습니다. 여기까지만 읽으셔도 되는데, 시간적 여유가 좀 더 있는 분만 재미 삼아 아래 내용을 읽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길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저는 분명 여기까지만 읽을 것을 권고했습니다.노동신문을 ‘거꾸로’ 읽었던 추억. 나는 북한에 살 때 노동신문을 정말 열심히 읽었다. 하루라도 읽지 않으면 뭔가를 놓친 기분이었다.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 판단해 볼 때 북한 신문은 철저히 노동당 선전선동 기관지로 김일성 부자 우상화 관련 기사가 꽉 차 있는 재미없는 신문이다. 어떠한 비판성 기사도 허용되지 않을뿐더러, 사건, 사고, 범죄, 재해, 여론조사 등을 담은 기사 역시 철저히 배제된다.실제로 한국에 와서 국제부 기자로 10년 넘게 있으면서 한국 신문은 물론이고, 세계의 무수한 신문을 봤지만, 노동신문 편집만큼 획일적이고 구태의연한 신문도 찾아보기 힘들다. 노동신문 대다수의 기사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슷비슷해서 지루하기 그지없다.그런 실정이니 신문 역시 북한 주민들에게서 철저히 외면당할 것이라는 추론이 어렵지 않게 나올 수 있다.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북한 주민들은 정말 신문을 열심히 챙겨 읽는다. 그 중엔 과거의 나도 포함돼 있었다.물론 읽고 싶다고 해서 누구나 신문을 원할 때마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신문 역시 국가에서 배정해 주기 때문에 일정한 사회적 직책이 없으면 신문을 볼 수가 없다.북한에서 신문이 인기가 있는 이유는 세상이 돌아가는 형편을 알 수 있는 통로가 신문 밖에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중앙 방송도 있지만, 지방에선 겨우 하루 몇 시간 동안만 전기가 오고 늘 정전돼 살기 때문에 TV 보기가 쉽지 않다. 또 TV에서 전해주는 뉴스는 겨우 30분 정도인데 이것도 김정일 동정 보도 등에 할애하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사실상 신문밖에 없다.북한에선 신문 외에 읽을거리도 많지 않다. 잡지도 거의 없을뿐더러, 몇 개 안 되는 잡지도 발행 부수가 매우 적어 일반 주민들은 구경하기 힘들다. 김 부자 관련 서적을 제외하면 북한 내에서 발행되는 문예 작품 역시 거의 없다.이런 북에서 살면 활자를 본다는 그 자체가 반가울 뿐이다. TV도 없고, 인터넷도 없고, 책도 없고, 거기에 한국처럼 술 마시고 놀 장소도 거의 없고, 노래방도 없고, 여가생활도 발달해 있지 않다 보니 독서는 북에서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즐거움이기도 하다.김일성, 김정일 등 북한 지배층의 동정을 보도하는 노동신문의 1~3면은 재미가 없지만 국내 소식을 전하는 4면과 국제면인 5면, 남조선 면인 6면은 그래도 매일 다른 소식이 전해진다. 그러므로 신문을 보면 내가 살아있다는 즐거움이 느껴진다.북한 주민들은 5면과 6면만큼은 정말 자세히 뜯어본다. 물론 남조선 관련 보도는 철저히 ‘통일방안 선전, 남조선 당국 및 자본가, 미 제국주의자들에 대한 비난, 남조선 사회의 어두운 점 부각을 통한 사회주의 우월성 선전’에 초점을 맞추어 보도한다. 국제면도 ‘썩어빠진 자본주의 사회의 불합리를 폭로, 반미 연대성의 공고화, 북한의 국제적 위상 제고’ 등을 집중 부각한다. 하지만 북한 주민들도 이 정도는 안다. 그래서 그들 나름의 상상력을 발휘해서 외부 세계를 상상해 본다.나의 실례를 든다면 가장 기억나는 것이 1991년 2월과 3월이 아니었을까 싶다. 노동신문이 제일 재미있었던 때도 그때였다. 1년 전 뉴스도 오늘 거 같고, 10년 전 뉴스도 오늘 거 같은 노동신문이 그렇게 기다려지기는 그때가 처음이다.바로 그해 1월 17일에 걸프전이 벌어져서 다음 달 28일까지 벌어졌다. 놀랍게도 노동신문은 걸프전이 벌어지자 이를 비교적 소상하게 중계했다. 북한에선 걸프전을 ‘만전쟁’이라고 했다. 전쟁의 참혹함도 알고 피해자들에겐 안 된 말이지만, 그래도 싸움 구경해 보긴 처음이었다. 물론 눈으로 화면을 본 것은 아니고, 그냥 읽기만 했지만 내가 살던 곳이 북한임을 감안하면 그 정도만 해도 과분한 것이다.더 놀라운 것은 그 전쟁을 내가 보기엔 북한이 처음으로 중립적 시각에서 전하고자 노력했다는 것이다. 공습의 시작과 전쟁 양상을 중계 보도하듯이 전했다. 기억해 보면 이런 식이다.“이라크 **방송에 따르면 18일 F-111 전략폭격기 등을 앞세운 다국적군 비행기 16대가 바스라를 공습했다. 이라크 반항공군은 미사일을 발사해 이 중 1대를 격추했다고 발표했다.이라크 혁명수비대는 쿠웨이트에 5기의 스커드 미사일을 발사했다. 걸프 뉴스는 다국적군이 패트리어트 요격미사일을 발사해 이 중 3기를 격추했다고 전했다. 두 발은 쿠웨이트 도시 외곽에 떨어졌다. 다국적군의 상륙에 맞서 이라크군은 **섬에 방어부대를 배치하고, 대기했다. 섬에 접근하던 다국적군 소해정 1대가 기뢰에 부딪혀 격파됐다.”노동신문의 보도 분량은 다국적군의 공격 내용과 이라크군의 방어 내용이 거의 반반씩 됐다.물론 철저히 이라크 중심적 보도이긴 했다. 전과라고 나오는 것은 이라크군이 뭘 쐈다. 미군 비행기 몇 대가 떨어졌다는 것만 나온다.다국적군의 전과라고 해봐야 기껏 패트리엇으로 스커드 요격했다는 것하고, 어딜 폭격했다는 정도이지, 이라크군이 얼마나 피해 봤는지는 찾아볼 길이 없었다. 그냥 다국적군이 오늘은 어떤 도시들을 폭격했다는 것만 나왔다.하지만 북한임을 고려하면 놀랄만한 일이다. 특히 미제라고 쓰지 않고 다국적군이라니, 그건 당시에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나는 노동신문이 “영웅적 이라크 혁명수비대가 미제 침략자들을 통쾌하게 짓부쉈습니다. 오늘만 해도 미국놈 45놈이나 황천길에 갔습니다”는 식의 보도를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내 생각과는 달랐다.덕분에 당시 토마호크니, 패트리어트니 하는 미사일 이름도 얻어들었다. 토마호크가 무슨 뜻인지 사전도 찾아서 기억했다.그런데 이렇게, 하루, 하루 지나고, 열흘이 지나도 보도가 달라지는 것이 없다. 처음 나온 것과 똑같이 오늘은 어디 어디 공습했고, 이라크가 미사일 몇 발 쐈고, 이런 내용만 반복됐다. 전쟁이라면 막 돌격하고, 방어선을 뚫고, 막고 그러는 것만 상상했는데, 그냥 폭격했고 대응했다 이런 것만 나오는 것이다.아마 속으로 “요즘은 왜 전쟁 이렇게 시시하게 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해도 될 것 같았다. 노동신문이 걸프전에 전개된 다국적군 병력과 이라크군 병력까지 비교해 주어 살펴보니 병력이 비슷했다.“이렇게 엇비슷하니 누구도 선뜻 못 들어가는구나!” 정도로 짐작했다. 한 달 넘게 공습 보도해 지루해지던 어느 날(한국에 와서 찾아보니 바로 2월 24일이었다) 지상전이 시작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교전이 벌어졌다는 소식에 다시 생기를 찾았다. 어디서 전투가 벌어졌다니. “오, 이제야 막바지로 치닫는구나.” 다음날 신문을 펼쳤는데, 이게 웬일. 어제 보도한 분량의 절반으로 전쟁 중계가 나왔다. 싸움이 벌어졌으면 더 크게 써야지 이게 뭐지 싶어 의아했다. 내용도 어디 어디서 격전이 벌어졌다는 것인데, 그것만 봐서는 알 수가 없었다.또 다음날 보니 이번에는 더 작게 보도됐다. 혁명수비대가 여전히 완강하게 저항하고 있단다. 이상했다. 나흘째였던가, 놀랍게도 노동신문에서 걸프전 뉴스가 사라졌다. 어디에도 없었다. 지상전이 시작됐다는데, 나흘 만에 보도가 없어지다니 웬 일인가 싶어 매우 놀았다.아무리 생각해도 이라크군 50만 대군이 나흘 만에 없어진 것 같지는 않고, 다시 소강상태에 들어갔나 생각했다. 걸프전 뉴스는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에야 비로써 “정말 졌나?”는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도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이라크에 50만 대군에 탱크도 수천 대나 있다고 했는데 그 무력이 불과 나흘 만에 전멸했다고 어찌 믿을 수 있을까.한참 뒤 “이라크 애국자들이 바그다드에서 미군 기지를 폭탄테러 한다”는 내용이 실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에야 “이라크가 이젠 미군의 통치를 받는구나”하고 생각했다. 나중에 서울에 와서 찾아보니 걸프전은 지상전이 벌어지고 4일 4시간, 불과 100시간 안에 끝났다고 했다.위에서 서술된 노동신문 내용은 절대적으로 내 기억에 의존해 되살린 것이다. 수십 년 전 일이라 정확하지 않은 기억도 있었을 것이다. 북한자료센터에 가서 그때 신문을 본다면 당시 내가 그걸 보면서 들었던 느낌까지 되살릴 수 있을 텐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몇 달 뒤 북한군 각 부대가 연거푸 하달되는 총참모부 지시를 집행하느라 바빠지기 시작했다. 기억되는 지시는 갱도를 많이 만들고 입구 문에 원뿔을 만들어 붙이라는 것이다. 적의 레이더 탐지를 교란하기 위해서란다. 사방에서 쾅쾅~발파 소리가 울려 퍼졌다. 텅 빈 굴들이 곳곳에 만들어졌다.그리고 또 하나의 지시는 가짜 무기를 많이 만들어내란 것이었다. 군인들이 용접기를 구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공장에도 가짜 포를 만들어 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가짜를 많이 만들어야 적들이 진짜를 구분 못 하고 허튼 곳에 폭격한단다.걸프전에서 미군의 무시무시한 화력을 보고 기겁해서 총참모부가 머리를 짜내 만든 대책이란 것이 고작 갱도 많이 만들고, 뿔 만들어 붙이고, 가짜 비행기 등을 모방한 ‘더미’를 만들라는 것들이다.북한군도 나중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는지 한 10년쯤 지나선 관리도 안 한다. 고철이나 땔감이라도 썼으면 좋으련만 그 주제에 그래도 군 등록 장비라 다치지도 못한다.북한에 가면 그래서 저렇게 방치된 가짜 모형들이 많다. 눈물나게 구슬펐던 북한군 과거의 산증인으로…. 그래도 그때는 1991년이라 저런 것이라도 만들었지, 지금은 저런 더미라도 만들 능력이 있을까 싶다.당시 이라크 전쟁을 다룬 노동신문을 보면서 나는 깨달음을 얻었다. “북한은 최강이 아니구나. 이라크도 저렇게 나흘 만에 완전히 먹히는 데 우리가 세계 최강이라니 말도 되지 않는 억지구나.”그때 나는 10대 소년이었다. 내가 그 정도 느꼈으니 북한의 수많은 지식인 역시 비슷한 생각을 품었을 것 같다.남조선 보도 역시 나의 관심 주제였다. 가령 실례로 노동신문에선 “남조선 괴뢰 집단이 장군님을 찬양하는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을 들씌워 애국청년에게 1년 형을 선고했다”는 식의 비난 기사가 많이 실린다.그러면 주민들은 “아, 우리는 남조선 대통령을 찬양하면 바로 총살일 텐데 저긴 고작 1년이라니, 참 좋은 사회구나”하고 생각한다. 실제로 1989년 대학생 임수경이 평양에 왔다가 돌아갔을 때 북한 신문들은 ‘애국청년에게 징역 5년을 선포한 남조선 파쇼 도당의 만행’을 연일 규탄했다. 그러나 북한 주민들은 오히려 “우리 중 누가 서울에 가서 저러고 돌아오면 본인은 물론 8촌까지 멸족될 텐데. 진짜 파쇼는 우리구나”하고 생각했다.이런 식으로 나는 당국의 선전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나름의 상상력을 발휘해 외부세계를 그려 보았다. 그리고 나중에 돌아보면 당시의 나의 상상은 노동신문에 쓰인 내용보다 훨씬 더 진실에 근접해 있었다. 이렇게 노동신문도 퍼즐을 맞추어 수수께끼를 푸는 것처럼 읽어보면 나름 정말 재미있다.그것이 내가 노동신문을 열심히 읽는 이유이기도 했다. 늘 이런 식으로 신문을 읽기 때문에 나는 행간에서 숨은 뜻을 찾아내는 능력은 정말 잘 발달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당국이 말해주지 않아도 신문을 거꾸로 읽어가면서 웬만큼 다 알 수 있는 것이다.물론 지금은 북한 선전 당국도 이런 것을 이제는 많이 의식하고 있다. 임수경 방북 때만 해도 ‘너무 과하게’ 남조선 독재정권을 비난했다가 역효과를 냈는데 이제는 나름대로 경험이 쌓이다 보니 이런 실수를 거의 저지르지 않는다.서울에서 벌어지는 촛불 시위 보도를 보면 북한의 고민을 알 수가 있다. 사진을 하나 실어도 서울의 발전상이 북한 주민에게 전해질까 봐 배경을 모두 지우면서 고심한 흔적들이 역력하다. 노동신문은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때는 단 세 문장으로,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은 단 네 문장으로 관련 내용을 보도했다. 여느 때 같으면 “인민들이 들고일어나 반북 대결에 광신하던 정권을 몰아내고 내고 자주독립을 쟁취하고 있다”고 호도해 선전했을 것인데 너무 조용한 것이다.결국, 북한도 사람들이 신문을 거꾸로 읽어버리는 것을 알아버린 것 같다. 그나마 서너 문장으로 탄핵 사실을 알린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사실 아무 내용도 쓰지 않으면 북한 주민이 외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기 어렵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든 나름 입맛대로 포장해 보도하는 순간 그때는 북한 주민이 뛰어난 상상력을 발휘해 상황을 알아 버리게 된다.한국의 탄핵 보도를 보면서 많은 북한 주민도 “인민들이 힘을 모으면 독재자를 몰아낼 수 있다”는 상상을 할 것 같다. 북한은 그것이 끔찍할 것 같다.북한 신문을 말할 때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사례가 또 하나 있다. 노동신문의 열렬한 애독자였던 내가 북한에서 마지막으로 읽었던 신문은 9·11테러 소식이 실린 손바닥만 한 신문 쪼가리였다.사연은 이렇다. 2001년 나는 탈북했다가 불행하게도 중국 공안에 체포돼 북송됐다. 6개 감옥을 옮겨 다니며 수감생활을 하다가 제일 마지막에 간 곳이 강제노동수용소였다. 수용소에선 종종 외부 작업을 나가기도 하는데, 이때 모든 남성 수감자의 주된 관심이 담배꽁초와 휴지를 주어오는 것이었다. 그렇게 주어 온 담배꽁초를 털어 수용소 안에서 몰래 피우는 담배는 꿀맛이다.어느 하루 작업 동원에 나갔던 나는 운이 좋게도 손바닥만 한 신문을 발견했는데, 그걸 보다가 흠칫 놀랐다. 미국의 세계무역센터가 알 수 없는 테러 집단의 공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기사 절반 이상이 사라져 다른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쌍둥이 빌딩이 여객기와 충돌해 검은 화염이 하늘로 치솟는 사진은 다행히 그대로 남아있었다.이후 나는 그 신문 조각을 쓰지 않고 석방될 때까지 갖고, 과거 했듯이 온갖 상상을 다 해보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 유일 초강대국을 공격할 나라는 어디일까.”북한에서 살았던 내가 알카에다와 같은 중동 테러 단체의 존재를 알 리가 만무했다. 결국, 끝내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다.몇 달 뒤 석방됐고, 곧바로 탈북했기 때문에 당시 읽은 9·11테러 신문 기사는 내가 북한에서 보았던 마지막 노동신문 기사가 되고 말았다. 한국에 와서 당시 북한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찾아보다가 놀랐다. 테러 발생 직후 북한 외무성 대변인이 당시 “지극히 유감스럽고 비극적인 사건이며 온갖 형태의 테러와 그에 대한 어떠한 지원도 반대하는 우리의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고 재빨리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아마 그것을 본 북한 지식인들은 속으로 비웃었을 것이다. 평소에는 맨 날 미국을 불바다로 만들어버리겠다고 호통을 쳐왔는데, 정작 보복이 닥칠 순간이 되니 미국이 테러의 배후로 북한을 찍을까 봐 꼬리를 내리는 것이다.선전선동과 거짓으로 도배가 된 노동신문일지라도 그걸 꼼꼼히 읽으며 거꾸로 상상해 본 덕분에 나는 탈북을 결행하는 순간까지 이르게 됐다. 북한이 아무리 언론 매체를 통해 거짓을 주입하려고 해도 사람들은 직감적으로 진실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다.아무리 겉으로 충성하는 척 거짓 연기를 한다고 해도 뇌와 심장까지 노동당에 맡겨놓고 사는 것은 아니다.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에이브러햄 링컨 전 대통령은 이런 말을 남겼다.“모든 사람을 잠시 속일 수는 있다. 일부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마치 북한을 지켜보고 남긴 명언 같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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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에서 온 세탁소 ‘작은 거인’… “세금 내는 재미에 삽니다” [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올해 10월 서울에서 남북하나재단 주최 ‘2025년 남북한 주민 사회통합 사례 발표 대회’가 열렸다. 대상은 서울 양천구 목동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56세 용성옥 씨에게 돌아갔다.쟁쟁한 발표자가 많았지만 어렸을 때 소아마비를 앓았고 키는 145cm에 불과한 용 씨가 심사 위원들과 청중에게서 높은 점수를 받아 대상을 탄 이유는 무엇일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마다 생각은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성옥 씨가 걸어온 삶과 주어진 조건이 나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쓰러지지 않고 살아남아 서울에 집과 가게를 장만하고 “국가에 세금을 내는 것이 얼마나 뿌듯한 일인지 여러분도 그 기쁨을 누려 보십시오”라고 외치는 여인. 그 앞에선 모두가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말했다.“북한과 중국에서 제가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입니다. 지금 돌아봐도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지금은 저 스스로 너무나 기특하고 대견합니다. 남은 인생은 열심히 살아온 저에게 상을 줄 겁니다. 지금까지 보지 못하고 살았던 하늘도 쳐다보고 산도 바라보면서 여유롭게 살아가려 합니다.”하늘과 산을 보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말하는 여인. 지금까지 어떤 인생을 살아 것일까.● “태어나 보니 장애인이었다.”용 씨 고향은 함경남도 함흥이다. 1969년 그가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흥남비료공장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부모는 모두 남쪽 출신이었다. 그래서 북에는 친척이 한 명도 없었다. 경기도 가평에서 살다가 6·25전쟁 때 의용군에 징집됐던 부친은, 강원도 남쪽 어느 산골에서 북으로 피난을 온 여인을 만나 결혼했다.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그가 7세 때 시름시름 앓다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가 살던 마을엔 비료공장 암모니아 냄새가 늘 지독하게 풍겼고 아버지가 없는 집이 많았다.부친이 사망하자 어머니가 비료공장에 다녔다. 그래야 배급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남편 없이 자식 5명을 키워야 했던 어머니는 늘 어두운 표정이었다. 용 씨는 어머니가 웃는 것을 본 일이 없다. 그가 20세 때 모친도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병원 사정이 열악해 결핵이었는지, 늑막염이었는지 병명도 몰랐다.용 씨는 태어나자마자 소아마비에 걸려 오른쪽 다리를 잘 쓰지 못하는 장애인이 됐다. 지독하게 가난한 가정에서 막내였던 용 씨는 늘 오빠들과 언니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다. 배고파도 배고프다고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1985년 용 씨는 16세에 고등중학교를 졸업했다. 비료공장 노동자 자녀들은 학교를 졸업하면 부모 뒤를 이어 비료공장에서 일하게 하는데, 하필 그해에 졸업한 학생들은 용성기계공장에 무리배치(집단 배정)가 됐다.집에서 가까운 비료공장에 갔으면 출퇴근이라도 쉬웠겠지만, 용성기계공장은 집에서 한 시간 반이나 걸어야 했다. 사지 멀쩡한 애들은 한 시간이면 갔지만, 다리가 불편한 용 씨는 남들보다 더 일찍 나가 쩔뚝거리며 다녔다.기계공장에선 그가 장애인이라고 압축기 운전공 업무를 맡겼다. 스위치를 조작하는 일이라 몸을 써야 하는 힘든 일보단 나았다.그곳에서 용 씨는 1994년까지 9년을 일했다. 공장을 그만둔 것은 자의가 아니었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전기가 없어 공장이 가동되지도 않았고 배급도 나오지 않아 노동자들이 출근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어떻게 살아남았을까”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은 고난의 행군 시절. 함흥은 북한에서 가장 참혹한 비극을 겪은 지역에 속했다. 못 먹어서 퉁퉁 부은 사람들이 길가에 쓰러졌다.규찰대가 돌아다니며 쓰러진 사람들을 살펴봤다. 눈을 뒤집어보고 “하루 남았다” “사나흘 남았다”고 판단했다. 3~4일 이하로 남았다고 판단된 사람은 산에 버렸다. 어차피 살지 못할 사람들이니 길거리에서 시체를 미리 치우는 것뿐이었다.어머니가 1989년에 세상을 떠난 뒤 용 씨는 집에서 오빠와 같이 살았다. 하지만 성성한 사람도 겨우 연명하는 상황에서 올케에게 장애인 시누이는 구박의 대상일 뿐이었다. 용 씨는 비료공장에서 비료를 훔쳐 인근 지역에 가서 팔기도 했지만, 이것만으로는 혼자서 먹을 것도 벌지 못했다.오빠네 집을 전전하다가 언니네 집에도 갔다가 했지만 어디서든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남매가 굶어 죽을 사람을 지목하라고 하면 아마 서슴없이 그를 맨 먼저 꼽았을 것이다. 도무지 갈 곳이 없으면 거리에 나가 잤다. 근 1년을 처녀 꽃제비로 살았다.그 스스로도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그때 어떻게 살아남았을까”이다. 1998년 봄. 더는 버틸 수 없는 순간이 왔다.‘이젠 죽겠구나. 그래. 제발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 유랑 중에 귀동냥으로 들었던 소문 하나가 떠올랐다. 북쪽 지역에 올라가면 피를 팔 수 있다는 말이었다.“그래, 아직 몸뚱이와 피는 있으니 한번 가 보자.”기차를 타고 함흥에서 회령까지 20일이 걸렸다. 기차에 붙어 기생하는 꽃제비들처럼, 그도 걸식하며 가까스로 회령에 도착했다. 이때 죽지 않은 것 역시 그의 생각에 또 하나의 기적이었다.회령역에 내려 힘없이 주저앉아 있는데, “중국에 가겠다면 자기가 데려다주겠다”며 한 노파가 다가왔다. 용 씨는 중국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거기 가면 살길이 있다는 말에 따라나섰다.그해 4월 15일 김일성 생일에 그는 노파와 다른 여인과 함께 두만강을 몰래 건넜다. 함께 간 여인은 세 번째 탈북 시도 만에 중국에 무사히 왔다며 무척 좋아했지만, 용 씨는 자신이 어디 있는지조차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로 쇠약했다. 노파는 “4명은 데리고 와야 하는데 2명밖에 데리고 오지 못했다”며 툴툴거렸다.그가 들어간 중국집은 전문적으로 북한 사람들을 팔아먹는 집인 듯했다. 한 남성이 그들을 집에 들여놓기 전에 몸에 이가 많다면서 밖에서 옷부터 갈아입혔다. 방에 들어가서는 해 놓은 찰떡을 먹게 했다. 여자들이 왔다는 것은 그에게 돈이 왔다는 의미일 것이다.어떤 것도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극심한 고통 때문에 물도 삼킬 수 없었다. 그 집에서 20일을 보냈다. 겨우 몸을 추스른 그를 데리고 길을 떠났다.● 시골에서 보낸 9년그가 팔려 간 곳은 흑룡강성 목단강 지역 농촌이었다. 가까운 도시로 가려면 100km나 가야 하는 심심산골이었다. 전체 350세대 중 두 세대만 빼고 모두 조선족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서로가 먼 친척 관계인 듯 보였다.그의 남편으로 정해진 남자는 7세 연상의 총각이었는데,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용 씨를 살갑게 대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때리지도 않았다. 배운 것도 전혀 없어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아이를 갖자는 말도 없었다. 용 씨 역시 책임도 지지 못할 아이를 낳을 생각은 없었다.이 마을에서 그는 9년을 살았다. 돈이 없어 벼농사도 짓지 못해 용 씨가 마을에서 각종 삯일을 받아다 해서 돈을 벌었다. 먹고사는 일만 반복됐다. 몇 년쯤 살다 보니 살고 싶은 의욕이 사라졌다. 인간의 삶이 아니라 희망이 없는 돼지의 삶인 것 같았다. 쥐약이나 농약만 보면 먹어서 죽고 싶은 날이 많았다. 그렇게 하지 못한 이유는 마을에 농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한 여인 때문이었다. 병원에서 위 세척을 해서 살아났지만 돈은 돈대로 나가고 몸은 몸대로 망가져 있었다. 그런 꼴은 되고 싶지 않았다.용 씨가 그 마을에서 지내는 동안 탈북 여성 32명이 시집을 왔다. 다들 견디지 못하고 도망가거나 체포돼 북송됐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런 삶을 버티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하지만 용 씨는 달랐다. 그는 태어나서부터 수모를 견디며 죽은 듯 사는 것이 몸에 배었다. 참는 것은 누구보다 도가 트였다. 말도 모르는데 마을을 떠났다간 화를 당할까 두려웠다. 유랑하던 지난날을 생각하면, 그래도 그 마을엔 누울 곳은 있었다.마을 사람들은 모여 앉으면 누가 싸웠고, 누가 뭘 훔쳐 도망갔다 같은 탈북자들 욕을 했다. 용 씨는 더욱 숨도 쉬지 못하고 살았다.신기한 것은 그 9년 동안 그가 북송 한 번 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안이 오면 오히려 “우리 집에 와 있으라”며 옆집 사람들이 집을 비워 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탈북자를 “먹지 못해 온 거지들”로 봤다. 그들이 어떤 일을 견디지 못해 하면 “그런 거지들이 똑똑한 척, 잘난 척한다”고들 했다. 하지만 용 씨는 달랐다. 누구와도 말썽을 만들지 않았고 늘 겸손했다. 혈연으로 엮인 마을에서 골치 아픈 친척 총각 거둬 주고 먹여 주고 말썽 없이 조용하게 사는 그에게는 나름 존재 이유가 분명했던 것 같다.● “우리를 받는 곳이 있다고?”2006년 5월 돈을 벌겠다고 한국에 갔던 마을 사람이 용 씨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왔다.“내가 한국에 와 보니 북에서 온 사람을 탈북자라며 국적도 주고 돈도 주고 임대아파트도 주더라. 네 각시도 숨어 살게 하지 말고 여기 보내서 사람답게 살게 해.”용 씨는 그때 처음으로 한국에 간 탈북민들 얘기를 들었다.‘아, 이 세상에 우리 같은 사람들을 받아 주고 사람 대접을 해 주는 곳이 있구나.” 희망이 생기고 가슴이 뛰었다. 남편에게 한국에 가겠다고 하니, 늘 그랬듯이 반대도 찬성도 하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 온 마을 주민을 통해 브로커와 연결돼 일행 5명과 함께 한국으로 떠났다. 중국과 태국 국경에서 험한 산을 넘을 땐 다리가 끊어질 것 같았지만 미래를 생각하며 기어코 산을 넘었다.태국에 도착하니 다른 브로커가 마중 나왔다. 그는 “미국에 가려면 도와줄 텐데, 한국에 가려면 알아서 가라”고 했다. 당시엔 미국에서 탈북민을 난민으로 간주해 입국을 허용하는 북한인권법이 통과된 지 1년이 지난 뒤였다. 브로커가 무슨 이해관계 때문에 그렇게 말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용 씨는 미국에 가겠다며 남았다. 미국과 한국의 차이는 몰랐지만 혼자 알아서 가라는 말이 무서웠다.미국에 가기를 희망하는 탈북민은 방콕에서 유엔 관할의 어느 호텔에 묵게 했다. 하지만 미국 입국 심사는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미국에 간 탈북민은 2025년까지 200명이 간신히 넘는데, 모두 1년 넘게 제3국에서 대기해야 했다.그는 그 호텔 생활을 8개월 동안 했다. 그때가 가장 행복한 때인 듯했다. 가만히 있어도 호텔에서 먹여 주고 입혀 주니 그런 천국이 따로 없었다. 그러던 중 다른 탈북자를 따라 한인 교회에 가게 됐다. 교회 사람들은 “미국행은 기약이 없으니 한국으로 가는 것이 낫다”고 말해 주었다. 실은 용 씨에게 미국이든 한국이든 큰 의미는 없었기 때문에 그는 8개월 만에 한국행 대열에 합류했다. 방콕 이민국 감옥에 들어가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낸 뒤 마침내 한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태국에서만 그렇게 1년을 허비했다. 하나원 생활을 하면서 그는 비로소 삶의 의욕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하나원에서 가르쳐 주는 영어 단어를 익히면서 ‘중국에서 돌처럼 살았던 9년이 너무나 아깝다’고 생각하게 됐다.● 한계를 깨달은 초기 정착 과정2007년 11월 2일 그는 하나원을 졸업해 서울 양천구 신정동 임대아파트에 자리를 잡았다. 더 이상 과거의 용성옥이 아니었다. 껍질을 벗고 땅 위로 올라온 애벌레마냥 새로운 인생을 예고한 존재였다. 나이 38세. 의욕이 넘쳤다.하지만 한국 사회에선 필수라는 컴퓨터도 전혀 할 줄 몰랐고 휴대전화 사용도 서툴렀다. 집에서 혼자 밥에 고추장을 며칠 비벼 먹으니 갑자기 또 외로움이 찾아왔다.“여기서는 더 이상 외롭지 말자. 먹고 잘 수 있는 곳으로 가서 일하자.”벼룩시장을 뒤져 찾은 첫 직업은 경기 용인시의 어느 정신병원 간병인 자리였다. 그곳의 다른 간병인들은 대개 70대 조선족이었다. 몇 달 일하니 그에게 말을 거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이 일은 젊은 사람이 할 일이 못 되니 다른 직장을 찾으라”고 했다. 그때쯤 그는 간병인이 자신에게 어울리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작은 체구로 우람한 환자들을 옮길 수도 없었고, 장애인 몸으로 무거운 것을 들고 다니기도 힘들었다. 설거지를 하려고 해도 키가 작아 불편했다.하지만 다른 직장 생활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그는 직장이라고 하면 정장 차림에 구두를 신고 다니는 곳인 줄만 알았다. 컴퓨터도 할 줄 모르는 자신이 직장인이 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그때 귀인이 나타났다. 그가 사는 동네 교회의 한 장로가 야간에 작업할 사람이 필요하니 해 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이 장로 부부는 종이 쇼핑백 끈을 자르는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데, 밤에도 일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그곳에서 용 씨는 오후 8시부터 이튿날 오전 9시까지 작업했다. 기계로 하는 작업이었지만, 16세부터 기계공장에서 기계공을 한 그로서는 두렵지 않았다.하루 일당은 10만 원이었다. 돈을 쓸 곳이 별로 없어 들어오는 족족 모두 통장에 저축했다. 살면서 처음으로 통장에 돈이 들어오는 생활을 하니 참 좋았다.장로인 사장은 “북한 사람이 참 일을 잘한다”며 좋아했다. 이후 사장은 다른 탈북민들도 받아 일을 시켰는데 조용하게 일하는 성격인 용 씨는 오히려 그들과 어울리는 것이 스트레스였다. 2년 넘게 일한 그가 먼저 일을 그만두었다.● 운전면허로 얻은 자신감한국에 와서 처음 느낀 큰 성취는 운전면허 취득이었다. 일자리를 찾아도 거리가 멀고 교통수단이 좋지 않아 가기 힘든 경우가 종종 생겨났다.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니 많이 걷는 것도 힘들었다. 그에게 운전면허 취득은 절박한 일이었다.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쪽 다리에 힘이 없어 양발 운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강사들은 “그렇게 하면 너무 위험하니 운전을 포기하라”고 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사정을 들은 운전면허학원 원장은 그에게 따로 강사를 붙여 줬다. 마침내 운전면허를 딴 그는 지금까지 14년째 무사고 운전을 하고 있다. 위험하다고, 안 된다고 주변에서 말리는 일을 해내니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그런데 어떤 일을 하던 시간이 흐를수록 커지는 고민이 있었다.“이런 일은 영원히 할 일이 아니다. 나처럼 장애가 있는 사람이 평생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나이가 들수록 다리에 힘이 없어질 텐데 늦지 않게 나만의 일을 찾아 보자.” 한국 사회에 어느 정도 적응하면서 여기저기 다양한 가게를 찾아가 살펴보며 연구하기 시작했다. 학교 다닐 때 반 친구들 머리카락을 잘라 주던 일이 생각나 미용실도 가 봤지만, 한국 미용실은 가위질만 하는 곳이 아니었다. 엄두가 나지 않았다.우연히 알게 된 일이 세탁이었다. 하루는 동네 전단을 보다 ‘머리밴드 고무줄 끼우는 아르바이트’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게 됐다. 고무줄을 끼우면 1개에 10원씩 주는 일이었다. 거기서 그는 재봉기란 것을 처음 봤다. 60세가 훌쩍 넘은 여인이 재봉질하는 것을 보고는 적성에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앉아서 하는 일인 데다 연령 제한도 없어 보였다.하지만 재봉일도 기술이 필요한 법. 그는 미싱학원을 검색하고 등록했다. 4대 보험이 되는 회사에 다니면서 6개월 동안 학원 주말 반에 부지런히 다녔다. 왼발로 발판을 누르고 오른손으로 박음질을 하려니 손과 발이 따로 놀았다. 나이 들어 배우니 더 힘들었다. 하지만 다녀 볼수록 내 일이란 확신이 생겼다.옷 수선도 이 학원에서 처음 알게 됐다. 여기저기 옷 수선집을 찾아 살펴보니 대개 60~70대 사장이 운영하고 있었다. “정년이 없이 내가 하고 싶을 때까지 할 수 있는 일이구나.”직장을 그만두고 아예 전문직 주간 반에 등록했다. 그때부터 2년 동안 학원에서 열심히 기술을 배웠다. 오전엔 학원에 가고 오후엔 옷 수선집에서 아르바이트한 뒤 저녁엔 다른 부업을 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집에 미싱을 사놓고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나의 세탁소를 열다그렇게 2년이 흘렀다. 2014년 3월 그는 살던 동네에서 옷 수선집을 열었다. 옷 수선만 해서는 수입에 한계가 있을 듯해 세탁 체인점과 겸했다.그렇지만 세탁과 옷 수선은 기술만으로 하는 일이 아니었다. 고객 대응법과 인사법, 돈 계산법, 컴퓨터 타자술, 세탁 품목 익히는 법, 가게 운영법 등 넘어야 할 산이 한둘이 아니었다. 명품이 뭔지 밍크가 뭔지도 몰랐다.처음에는 수선을 위해 손님들 옷을 가위로 자르는 것이 두려워서 가위를 들었다 놨다를 한 시간 동안 했다. 실전은 학원과 달랐다.지금까지 조용히 살던 성격도 문제였다. 분명히 손님이 들어올 때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라고 인사를 했는데, 말이 입에서 맴돌아 손님은 알아듣지 못할 때가 많았다. 힘을 주어 말하면, 조선족이냐고 했다. 이때마다 그는 북에서 왔다고 당당히 대답했다.동네에 세탁소가 한둘이 아닌 상황에서 그의 유일한 경쟁력은 가격을 낮추는 것이었다. 남들이 3000원 받을 때 2000원을 받았다. 가격 경쟁력을 내세우니 고객이 하나둘 늘어났다. 하지만 3년쯤 세탁소를 운영해 보니 한계가 보였다.그의 세탁소는 그냥 동네 고객들에겐 싸고 착한 가게였다. 남들처럼 똑같이 수선도 하고 세탁도 할 자신이 생겼지만 가격을 높이려고 하자 고객들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굳어진 이미지가 문제였다.3년 만에 가게를 옮겼다. 스스로 봐도 당당하게 할 수 있는데, 그 동네에선 굳어진 이미지를 벗기 힘들었다. 2017년 서울 양천구 지하철 5호선 목동역 인근에 새로 세탁소를 시작했다. 스스로를 새롭게 업그레이드하는 의식이기도 했다.업그레이드를 하려면 쉬지 않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세상은 세탁이나 수선 기술만 있다고 해서 편히 살게 두지 않았다. 점점 성능이 뛰어난 세탁기와 건조기가 나오고 주변에 코인 세탁소도 늘었다. 유튜브 등으로 세탁 기술도 많이 공유되면서 세탁업 입지는 매년 줄어들었다. 게다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세탁 체인점 본사가 폐업하자 손님도 줄었다.어떻게 하면 경쟁력을 키울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신발 세탁을 떠올렸다. 신발 세탁은 까다로워서 가정에서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클레임이 제일 많은 것도 신발 세탁이어서 세탁소에서 선뜻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그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주말마다 경기 의정부나 안양 그리고 한양대 등에서 ‘수업료’를 내면서 신발 세탁 기술을 배웠다. 온라인 세탁 카페나 세탁 밴드 등에 가입해 비결을 배우기도 했다.이런 과정을 거치고 직접 신발 세탁을 시작하니 잘하는 집이라고 소문이 났다. 차에 신발을 가득 싣고 찾아오는 고객이 많아졌다. 그렇게 번 돈을 모아서 2020년엔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 자그마한 집도 샀다. 한국에 온 지 13년 만에 내 집이 생긴 것이다.● 시련은 파도와 같은 것인생이 늘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서민들을 보호한다며 2020년 정부 여당이 국회에서 강행 처리한 ‘임대차 3법’이 진짜 서민인 그의 목을 겨누는 비수가 됐다.2023년, 세탁소가 세든 건물 주인이 갑자기 가게를 비우라고 통보했다. 자신이 들어와 장사하겠다는 것이었다. 주인 속셈은 당시 월세 60만 원에서 어차피 5%밖에 올릴 수 없으니 그를 내보내고 다른 사람을 더 높은 월세로 받겠다는 얘기였다. 한편으론 세탁소는 기계가 많아 쉽게 옮기지 못할 것이란 타산도 있었던 듯하다.세탁소는 단골 관리가 핵심이다. 다른 데에서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세탁소를 처음 차리는 것과 비슷한 모험이다. 주인은 아예 전화를 받지도 않았다. 이견이 있으면 변호사와 상의하라는 문자 메시지만 왔다. 사정사정해서 20만 원을 더 주고 2년 계약을 새로 맺었다.올해 5월 다시 2년 만기가 다가오자 용 씨는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는 문자 메시지를 주인에게 보냈다. 2년 전의 불친절한 태도로 보건대 재계약에 목을 매면 또 어떤 조건을 내걸지 알 수 없어 용단을 내린 것이다. 그는 집 인근에 새 가게를 구했다. 기존 세탁소에선 수백 m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이사비만 1000만 원이 들었지만 마음은 시원했다. 그가 떠난 세탁소는 7개월이 지난 지금도 비어 있다. 이사를 하면서 고객을 잃을까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의외로 많은 단골이 더 멀어진 그의 세탁소로 찾아왔다. 새로운 가게는 ‘세탁스토리’라는 브랜드를 내걸고 운동화 위주 세탁과 옷 수선을 함께 한다. 그에겐 어디 가도 뿌리를 내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파도 같은 시련을 넘고 또 넘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찾아 자리 잡았다는 것처럼 뿌듯한 일도 없다. 손이 떨려 더 이상 가위질을 할 수 없을 때까지 평생 일할 수 있다는 것도 참으로 다행스럽다. ● “저를 보고 힘내세요.”사회통합 사례 발표 대회에서 그는 말했다.“대한민국 3만 탈북민은 저를 보고 힘내시기 바랍니다. 포기만 하지 않고 주저앉지만 않는다면 꼭 기회가 있고 끝이 있습니다. 이 말처럼 한다는 것도 얼마나 어려운 일인 줄 알지만 그 끝이 가져다 주는 희열도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지도 압니다.”그는 한국 생활 초기에 장애인 수당을 받으며 살까 하는 생각도 했다. 일부 탈북민은 장애인 등급을 받으려 애를 쓰기도 한다. 그런데 생계비를 지원받으며 할 수 있는 일은 그가 보기에 거의 없었다. 생계비와 장애인수당을 받으려면 평생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살아야 하고 자기 이름으로 차도 살 수 없었다.“지금 와서 봐도 정부 지원 생계비에 의존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더군요. 그걸 버려야 잘 살 수 있습니다. 작은 것을 내려놓아야 큰 것을 얻을 수 있는 법이죠.”실제로 그렇게 살아온 삶이 그는 매우 자랑스럽다. 재산세와 소득세 같은 세금을 낼 때마다 ‘받지 않고 오히려 내는 사람이 됐다’는 사실에 대단히 뿌듯하다.그의 꿈은 부담을 내려놓고 여유를 가지는 것이다. 자그마한 실수에도 북에서 와서 그렇다고, 장애인이어서 그렇다고 손가락질 받는 것이 두려워 압박감 속에 살았다. 그렇게 18년을 살면서 자신도 모르게 강박관념이 생겼다. 그걸 내려놓자는 것이다.이미 여유롭게 살기를 실천에 옮기고 있다. 한국에 와서 늘 바쁘게 살다 보니 여행을 가 본 적이 없었다. 지난해 그는 교회 봉사단체 일원으로 3박 4일간 몽골을 다녀왔다. 그의 첫 해외여행이었다. 올해 6월에는 베트남도 가 봤다.예전엔 하늘을 여유롭게 바라볼 틈도 없었다. 이제는 하늘을 보고 바람을 느낀다. 어쩌면 그에겐 새로운 업그레이드일지도 모른다. 인터뷰를 마치려는 순간 그가 다른 탈북민들에게 꼭 할 말이 있다고 했다.“세탁업이 정말 매력 있는 일이라고 꼭 알려 주고 싶어요. 정년도 없고 AI 시대에도 사라지는 직업이 아닙니다. 한국 사람들도 미국 이민 초기에 세탁업부터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한민족이 손재주가 있다는 증거인데 제가 보니 북에서 온 사람들은 더 손재주가 있어요. 저와 인연을 맺어 세탁업을 하게 된 사람이 몇 명 있는데 지금 다 잘 살고 있습니다. 저처럼 키도 작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사람도 나이 마흔에 시작해 서울에 집도 사고 자기 가게도 얻었습니다. 의지만 굳세면 왜 못 하겠습니까.”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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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5배년 계획이 된 5개년 계획

    김정은이 9일부터 11일까지 열린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13차 전원회의 확대회의에서 국가경제발전 5개년 계획 완수를 선언했다. 예상했던 바이지만 헛웃음이 나는 것은 숨길 수가 없다. 회의장에 있던 간부들도, 회의 내용을 들을 인민도, 심지어 김정은도 5개년 계획이 완수됐다고 스스로 믿지 않을 것이다. 2021년 1월 8차 당대회에서 발표된 5개년 계획의 주요 목표는 △금속 부문의 주체 철 생산 체계 완성 및 철강재 증산 △화학공업 자체 기술역량 강화를 통한 화학제품 증산 △조·수력발전소 건설 및 핵동력 공업(원자력발전) 창설 준비를 통한 전력 생산 강화 등이다. 이 중 하나라도 진전된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간부나 인민은 김정은의 완수 선언이 내심 반가울 것이다. 당시 8차 당대회 주석단에 선 김정은은 잔뜩 굳은 표정으로 “국가경제발전 5개년 전략 수행 기간이 끝났지만 내세웠던 목표는 거의 모든 부문에서 엄청나게 미달됐다”며 “쓰라린 교훈”이라고 말했다. 2016년 노동당 7차 대회에서 ‘휘황한 설계도’라고 제시한 5개년 계획이 모두 실패했음을 자기 입으로 실토한 것이다. 북한 지도자가 실패를 자인하는 것은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라 뜻밖이었다. 하지만 그는 실패의 원인을 간부들에게 돌렸다. 당시 김정은은 “비상설 중앙검열위원회를 조직해 실태를 파악하고 잘못한 것은 무엇인가, 그 원인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비롯해 그 진상을 파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완수했다고 했으니 간부들은 검열은 피할 수 있게 돼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쉴 것이다. 김정은이 5개년 계획 완수를 선언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이해가 된다. 10년째 실패를 인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북한은 1954년부터 ‘3개년 계획’ ‘5개년 계획’ ‘6개년 계획’ ‘7개년 계획’ 등 10회가 넘는 계획을 발표했다. 계획대로라면 북한은 세상에서 제일 잘사는 나라가 돼 있어야 하지만 현실은 아프리카 빈국 수준보다 못한, 우리가 다 아는 그대로다. 그럼에도 북한은 계획 중독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70년 넘게 ‘80일 전투’니 ‘100일 전투’니 달달 볶여 온 북한 인민만 불쌍할 따름이다. 지난 약 5년 동안에도 인민은 평양 5만 가구 주택 건설이나 원산갈마관광지구 건설, 지방산업공장 40개 건설 등에 동원돼 정신없이 삽질만 했다. 그런데도 김정은이 시찰하는 지방산업공장 사진들을 보면 한국의 변변찮은 중소기업 규모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들이다. 원산갈마관광지구 건설은 또 무슨 의미가 있는가. 관광업 활성화라는 목표와 동떨어져 파리만 날리면 돈 낭비에 불과한 것이다. 김정은이 실패를 인정하든 완수를 선언하든 사실 큰 의미는 없다. 인민은 이미 북한이 5년 동안 어떻게 변했는지 피부로 체감하고 있다. 계획이란 것도 다 잘 먹고 잘살려고 내거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 5년간 인민 생활은 ‘고난의 행군’ 이후 최악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북한 민생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때 제일 중요하게 활용되는 지표는 쌀값이다. 2020년 10월 1kg에 북한 돈 4500원 수준이던 쌀값은 올해 10월 3만 원을 넘었다. 최근 좀 하락하긴 했지만, 아무튼 5배 안팎의 상승률이다. 북한 역사에서 5년 동안 쌀값이 다섯 배 오른 적은 없다. 7차 당대회와 8차 당대회 사이 5년 동안에도 쌀값은 거의 비슷했다. 환율도 2020년 10월, 1달러에 북한 돈 8000원 수준이던 것이 올해 10월엔 3만8000원이 됐다. 이것도 거의 다섯 배로 상승한 것이다. 장마당 통제는 더 강화돼, 시장에 가서 돈을 주고도 구하지 못할 생필품이나 식료품이 훨씬 많아졌다. 무슨 계획을 내놓고 다그칠수록 점점 못살게 되는 것은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지난 5년은 특히 심했다. 결론적으로 8차 당대회의 5개년 계획은 물가를 다섯 배 이상 상승시킨 5배(倍)년 계획에 불과할 뿐이다. 이러고도 김정은은 위대한 성과 운운하고 있다. 만약 그가 내년 1월 9차 당대회에서 과거를 ‘승리의 5년’이라고 자평한다면, 이는 5년 동안 그의 얼굴 피부도 다섯 배쯤 두꺼워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다시 ‘휘황한 5개년 계획’이라고 제시한다면, 아마 고막까지도 다섯 배쯤 두꺼워져서 인민의 아우성이 더는 들리지 않는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5-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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