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주성하 기자

동아일보 콘텐츠기획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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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관련 사이트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http://nambukstory.com)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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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13~2025-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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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에서 부활한 고대 형벌들-기록말살형의 실체[주성하의 ‘北토크’]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5월 21일 청진조선소에서 5000톤급 구축함이 진수 도중 쓰러지고, 김정은이 격노한 뒤 두 사람의 얼굴이 공식 매체에서 사라졌습니다.한 명은 김명식 해군사령관이고, 다른 한 명은 홍길호 청진조선소 지배인입니다. 물론 이들 외에도 숙청된 인물들이 훨씬 많겠지만, 외부 세계에서 숙청 사실을 즉각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두 명 정도입니다. 두 사람은 북한 조선중앙TV에 등장할 정도의 지위에 있어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홍길호는 6월 14일 방영된 강건호 진수 기념식 영상에서 김정은의 현지시찰에 동행한 과거 사진이 편집됐습니다. 김명식도 마찬가지였습니다.그런데 김명식의 얼굴은 15일 뒤 부활했습니다. 물론 몸은 어디에 갔는지 알 수 없으나, 화면에선 다시 나타났습니다. 조선중앙TV가 지난달 29일 방영한 기록영화 ‘위민헌신의 여정, 새로운 변혁의 2024년’에 김정은을 따라다니는 김명식의 얼굴이 여러 차례 등장했습니다.이것이 북한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겐 또 화젯거리가 됐습니다. 김명식이 기록까지 말살될 정도의 처벌을 받은 줄 알았는데, 그 정도까진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김정은의 격노 누그러졌냐’는 분석의 기사들도 나왔습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얼굴이라도 다시 살아난 것만으로도 김정은이 크게 선심을 쓴 것처럼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겐 이해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북한에서 기록이 사라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고, 기록이 사라지면 북한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우리는 특정인의 기록이 사라진 것을 북한이 방영하는 영상을 통해 확인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북한 내부에선 주민은 다 알 수밖에 없는 엄청난 북새통이 한바탕 벌어집니다.● 기록말살형의 역사기록을 말살하는 ‘형벌’은 21세기에 북한에만 존재합니다. 온 가족을 숙청하는 연좌제와 더불어 지구상에 유물처럼 존재하는 악명 높은 처벌입니다.기록말살형은 역사가 참 오래된 형벌입니다. 기록말살형을 받은 최초의 기록된 인물은 성경에 나오는 모세라고 합니다. 약 3500년 전 이집트 왕자였던 모세는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그들을 인도해 가나안으로 탈출했습니다. 그러자 모세의 아버지일 것으로 추정되는 파라오가 그의 모든 이름을 삭제하는 형을 내렸다고 합니다. 파라오가 누군지는 의견이 갈리지만, 람세스 3세라는 견해가 우세합니다. 3000년 전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름이 없어지면 존재도 사라진다고 믿었다고 합니다.영화 ‘300’에선 기원전 480년경 스파르타를 침공한 페르시아의 황제 크세르크세스 1세가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네놈들의 희생에는 영광 따위는 없을 것이다. 내가 스파르타를 역사에서 한 치도 남김없이 지워버릴 것이니! 그리스의 모든 문서를 불태워 버리고, 그리스의 모든 역사가의 눈알을 뽑아버리고 입에서 혀를 잘라버릴 것이다. 누구든지, 스파르타나 레오니다스의 이름을 아주 조금이라도 언급하기만 해도 사형으로 다스릴 것이다. 세상은 너희가 존재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물론 작가가 만든 대사겠지만, 시대를 고려했을 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천 년의 로마제국(기원전 753년~기원후 476년) 시대에도 최고의 형벌은 기록말살형이었다고 합니다. 이 형벌에 처하면 로마인에게는 족보라고 할 수 있는 조각상이 모두 강제 회수돼 파괴됩니다. 공문서나 각종 기록에 남겨진 이름은 지우고, 건물에 새겨진 초상이나 기록은 파괴하거나 긁어내 없애버립니다. 파괴된 조각상이나 비문은 가축이 밟고 다니는 도로에 깔아 모욕당하게 만들고 살던 집도 철거합니다. 사라진 이름을 공개적으로 언급해도 안 됩니다. 그러나 로마에서도 대역죄가 아닌 이상, 가족까지 처벌하는 연좌제는 없었습니다.우리 역사에서도 비슷한 형벌이 존재합니다. 조선시대에 ‘삭명(削名)’이란 형벌이 있었습니다. 먹으로 이름을 지우는 묵삭(墨削), 북을 치고 성토하면서 유적에서 영구히 이름을 지우는 명고영삭(鳴鼓永削), 누런 종이를 붙여서 영구히 이름을 지우는 부황영삭(付黃永削)의 세 종류가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니고, 과거에 응시할 수 없는 등의 불이익을 당하였을 뿐입니다. 그나마 이 형벌은 영조 시대 편찬된 통일 법전인 속대전(1746년)을 통해 금지됐습니다.점차 사라져가던 기록말살형을 현대 사회에서 부활시킨 이는 공산주의자들이었습니다. 1930년대 소련의 스탈린 치하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록말살을 당했습니다.대표적 인물이 ‘스탈린의 개’로 불리면서 대숙청을 주도했던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예조프 소련 내무인민위원회의 위원장입니다. 1930년대 후반의 대숙청 기간 스탈린은 70만 명을 처형하고, 수백만 명을 반혁명분자라며 쿨라크(수용소)에 감금했으며 1000만 명을 강제 이주 및 강제노동을 시켰습니다. 하지만 불만이 커지자, 예조프를 처형하고 그의 모든 기록을 말살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예조프의 고향이 어디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중국도 예외는 아닙니다. 문화대혁명 기간에 덩샤오펑, 류사오치 등 수많은 고위직이 기록말살형에 처했습니다. 물론 나중에 대다수가 복권하긴 했습니다. 지금도 중국은 1989년의 천안문 사태에 대해 기록을 삭제하고 언급을 못 하게 하고 있습니다. 공산당을 비판한 전직 유명 축구선수 하오하이둥(郝海東)의 모든 기록이 모두 삭제된 것도 최근의 일입니다. 물론 당사자는 스페인에 거주해 신변에는 이상이 없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일은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축구협회는 러시아 축구클럽에서 뛰는 아나톨리 티모슈크를 반역자로 간주해 우크라이나인으로 달성한 그의 기록을 말소했습니다. 그래서 우크라이나 축구 국가대표팀의 공식 최다 출전자가 티모슈크에서 안드리 셰우첸코(셰브첸코)로 교체됐습니다.● 모든 형벌의 부활최근엔 기록말살형을 이야기할 때, 북한을 제외하면 할 말이 없을 정도입니다. 인민들에게 공산주의 사회를 만든다고 사기를 치고 3대 세습 왕조를 부활시킨 북한은, 과거 인류 역사에 존재했던 수많은 형태의 기록말살형도 그대로 부활시켰습니다. 영상에서 얼굴이 사라지는 것은 우리가 알 수 있는 아주 일부의 사실에 불과합니다.북한은 해당 인물에 대한 모든 기록을 지우고 철거하는 고대 로마의 형벌 방식은 물론, 조선시대의 부관참시, 묵삭, 부황영삭까지 다 되살려냈습니다. 부관참시를 당한 대표적 인물로는 1984년에 사망한 김만금 전 노동당 농업담당 비서를 꼽을 수 있습니다. 고난의 행군 시기 굶어 죽는 사람들의 원성이 자자해지자 김정일은 김만금을 간첩으로 몰아 유해를 꺼내 부셨습니다.2013년 12월 13일 사형 선고를 받은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은 모든 종류의 기록말살형에 다 해당하는 인물입니다. 모든 기록이 삭제됐을 뿐만 아니라 그가 책임지고 건설했던 멀쩡한 건축물까지 허물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수억 달러를 들여 2012년 완공했던 평양민속공원인데, 장성택 숙청 3년 뒤 몽땅 허물어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장군님의 은덕으로 인민을 위한 공원이 만들어졌다고 입이 마르도록 자랑하다가 불과 몇 년 뒤 새로 만든 공원을 흔적도 없이 부순 것입니다.어떤 인물이 기록말살형에 처해지면 대다수 북한 주민들은 TV를 통해선 그 사실을 알지 못 합니다. 지방은 늘 정전이라 TV를 볼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 인물에 대한 묵삭, 부황영삭이 이뤄지기 때문에 모두가 알 수밖에 없습니다.특정인에 대해 기록 말살이 결정되면 이는 각 지역의 노동당 조직에 통보가 됩니다. “그 인물의 이름이나 사진이 어느 저서에 실렸으니 지우라”는 지시가 하달됩니다. 그러면 당 간부들이 모든 집을 방문해 해당 저서가 있는지 샅샅이 뒤져 지시를 수행합니다.북한 가정집들에 있는 책 대다수는 구매한 것이 아니라 당국이 주민을 세뇌하기 위해 나눠준 것들입니다. 이런 책들은 크게 두 가지 종류입니다.첫 번째 종류는 김씨 일가의 사상이나 노작(勞作)이 담긴 수백 권이 훌쩍 넘는 책들입니다. 34권짜리 ‘김일성전집’, 65권짜리 ‘김정일전집’이 대표적입니다.두 번째 종류는 김씨 일가를 찬양하는 저서입니다. 자기 입으로 자기가 위대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 김씨 일가와 함께 일을 했다는 사람들이 쓴 회고담을 책으로 묶어낸 것입니다. 김일성 회상실기집 ‘인민들속에서’는 무려 112권이나 발간됐습니다. 각각의 책엔 김일성을 찬양하는 수십 명의 회고록이 담겨있습니다. “무엇을 할 때 우리가 이렇게 하려 했는데, 영명하신 수령님이 그건 아니라며 우리의 잘못된 눈을 띄워주었다”는 내용들이 꽉 차 있습니다. 김정일 회상실기집 ‘주체시대를 빛내이시며’는 82권이 출판됐습니다. 이런 책들을 보면 김씨 일가는 현장에 가서 늘 “그게 아니라, 이거다”고 얘기하는 부정형 인물인 듯싶습니다. 김정은 회상실기집은 ‘선군혁명령도를 이어가시며’라는 제목으로 출판됐습니다.문제는 이러한 김씨 일가 찬양 회고담을 쓴 사람이 수천 명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중 누가 숙청될 때마다 당 간부들이 1년에 몇 번이고 전국의 가정집을 뒤져야 합니다. 흔적을 없애는 대상도 책이나 화보, 신문 등 모든 것에 해당합니다.이런 일이 반복되니 북한의 오래된 책은 성한 것이 없습니다. 가장 누더기가 된 대표적인 책은 1959년부터 1970년까지 총 12권이 출판된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입니다. 이름 그대로 김일성의 빨치산 시절을 회상한 동료들의 구술을 정리한 것인데, 3대 세습까지 내려오며 반세기 동안 가장 많이 숙청된 사람들이 빨치산 출신이기도 합니다.숙청 대상이 나오면 그가 쓴 내용 수십 페이지를 통째로 잘라갑니다. 아무리 김일성을 칭찬한 내용이라도 그의 이름과 기억을 매체에 남겨둘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회상자의 글에 숙청자의 이름이나 행적이 언급되면, 이건 자를 수 없으니 꺼먼 먹으로 그 대목을 쭉 지워버립니다. 또는 부황영삭처럼 종이띠를 붙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책은 3분에 1도 남아있지 않고, 남아있는 부분도 먹칠 부분이 가득 차 읽을 수조차 없게 됩니다.물론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처럼 오래된 책들은 고난의 행군을 거치며 휴지로 애용돼 가정마다 남아있는 것이 거의 있을까 싶긴 합니다. 하도 참기 어려웠는지 북한은 2003년에 살아있는 사람들의 회상기만 묶어 다시 똑같은 제목의 책을 내기도 했습니다.● 누가 기록말살에 처해질까이런 소동이 벌어지니 북한 사람들은 고위급이 숙청되면 모를 수가 없습니다. 특히 김명식 해군사령관 같은 경우는 김정은의 각별한 신임을 받는 듯한 모습을 여러 번 연출했기 때문에 주민들이 많이 기억할 겁니다. 그는 김정은과 모자를 바꾸어 쓴 사진이 두 번이나 북한 매체에 실렸습니다. 김정은이 모자를 바꿔 쓴 사람이 거의 없으니 이런 사진은 꽤 인상적입니다. 동시에 “이렇게 좋아하던 인물도 하루아침에 사라지는구나”는 확실히 각인시켜 줄 순 있겠죠. 영상이나 출판물에 얼굴이나 글을 남길 정도면 그나마 고위층일 것입니다. 이름도,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람이 훨씬 많을 겁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기록말살형에 처해질까요.김정은이 누굴 숙청할 때마다 “이 자는 처형만 하고, 이 자는 가족까지 죽이고, 이 자는 기록말살까지 하라”고 지시하진 않을 겁니다. 그렇다고 아래 간부들이 눈치껏 기록말살까지 했다가 김정은이 “내가 거기까지 하라고 했냐”며 화를 내면 처벌을 피할 수 없으니 마음대로 결정할 순 없을 겁니다.분명 내부에 어떤 기준은 있을 것이지만 외부에 알려지진 않았습니다. 다만 여러 증언을 종합하면 김정은이 사람을 어떻게 죽이라고 할 때 암시를 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숨 쉴 자격도 없는 놈”이라고 하면 처형을 하고, “묻힐 자격도 없는 놈”이라고 욕하면 차마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참혹하게 처형한 뒤 시신을 화염방사기로 태워 흔적도 없앤다고 합니다. 4신 고사총 처형도 여기에 해당하죠. 수천 명을 모아놓고 처형할 땐 아마 “지시를 거역한 것에 대한 교훈을 보여주라”고 하지 않을까요.물론 김정은의 지시로 처형되면 가족까지 연좌제로 모두 처벌되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기록말살형은 어떤 인물들에 해당하는지, 이를 최종 비준하는 사람이 누군지는 우리가 알 순 없지만 통일이 되면 많은 것들이 밝혀질 겁니다.그리고 북한이 지우려고 해도 다 지울 순 없는 것들도 꽤 많습니다. 한국에도 북한이 출판한 저서들이 꽤 들어와 있는데, 당 간부들이 한국까지 찾아와 지워버릴 순 없는 일이죠. 통일이 되면 숙청의 기록만 정리해도 수십 년을 바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북한 같은 참혹한 인권 유린의 시대를 후손들이 다시 겪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이 방대한 작업은 반드시 해야 할 것입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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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원산 관광지구는 왜 만들었을까?

    ‘반동사상배격법’과 ‘청년교양보장법’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북한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규모 관광단지가 생겨났다. 북한은 1일부터 2만 명 숙박 규모의 원산갈마해안관광지구를 개장한다고 밝혔다. 지난달 24일 관광지구를 아내, 딸과 함께 방문한 김정은은 활짝 웃고 있었다. 관광의 ‘관’자만 알아도 저렇게 웃고 있을까 싶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관광을 ‘다른 지방이나 다른 나라의 풍습 풍광 문물 등을 유람하는 산업’으로 규정했다. 그런데 원산 관광지구는 해안에 숙박 시설과 부대시설만 잔뜩 들어서 있을 뿐, 방문객이 지역 주민과는 접촉할 수 없는 가두리 양식장처럼 조성됐다. 북한이 이곳을 찾은 외국인들에게 자유로운 원산 시내 관광을 허락할 수 있을까. 어림도 없는 일이다. 이곳에선 물놀이밖에 할 것이 없지만 감수해야 할 위험 부담은 매우 크다. 옷을 입어도 사회주의 양식에 맞는지 따져봐야 하고 애정 행위도 못 하며 사진을 찍을 때엔 이색적 장면인지 깊이 고민해 봐야 한다. 관광지의 필수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음악도 체제 찬양 가요만 듣게 될 것이다. 반동사상배격법에 따르면 ‘사회주의 사상 문화와 우리 식의 생활양식에 배치되는 다른 나라 영화나 녹화물, 편집물, 도서, 노래, 그림, 사진 같은 것을 보았거나 들었거나 보관한 자 또는 유포한 자는 노동교화형, 정상(情狀)이 무거우면 5년 이하의 노동교화형에 처한다’고 돼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나 미국, 일본 같은 적대국 노래를 들으면 처벌 강도가 두 배 더 심해서 최소 5년, 정상이 무거우면 10년 형이다. 청년교양보장법에 적시돼 있는 처벌 조항은 너무 많아 꼽기도 버겁다. ‘성 불량 행위, 음탕한 행위, 도박 행위, 종교와 미신 행위, 이색적인 옷차림과 몸단장, 저속하고 몰상식한 행위, 이혼과 조혼, 이색적인 장면을 연출·촬영·편집하는 행위’ 등이 모두 처벌 대상이다. 외국인들에게는 그나마 좀 예외를 두겠지만 북한 사람들과 함께 이용하기 때문에 관광지 전체적인 분위기는 북한 규정에 따라야 할 것이다. 관광지를 운영하는 목적은 돈을 벌기 위해서다. 하지만 원산 관광지구에서 어떻게 돈을 벌지 기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러시아나 중국에서 비행기와 열차, 배로 기껏 싣고 와야 하루 수천 명 규모에 지나지 않는다. 가겠다는 사람이 줄을 섰다는 가정하에 그렇다. 한국 대표 관광지 제주도는 지난해 1378만 명의 관광객이 찾았다. 하루 평균 3만7750명이 찾은 셈이다. 외국인은 290만 명으로 하루 평균 8000명이 되지 않는다. 성수기라고 특별히 많이 오는 것도 아니다. 지난해 8월 제주 관광객은 936만 명으로 하루 평균 3만 명 정도인데 내국인이 83.7%, 외국인이 16.3%를 차지했다. 서울 면적 3배인 제주도 하루 외국인 관광객이 8000명도 되지 않는다는 점을 떠올리면 원산의 손바닥만 한 지역에 가두리처럼 만든 2만 명 수용 관광지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지 가늠이 될 것이다. 러시아 전상자(戰傷者) 요양 시설로 전용한다고 해도 가겠다는 러시아인 자원자가 없을 것이다. 이미 북한은 러시아군 부상병 수백 명을 원산에 받았는데, 이 부상병들의 경험담이 공유되고 있다. “의료 서비스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식사는 맛이 없고 고기가 부족했으며 저녁에 밖을 돌아다니거나 지역 주민과 접촉하는 것이 금지였다.” 결정적인 것은 술을 구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러시아 사람들에게 술을 구할 수 없는 곳은 지옥이나 마찬가지다. 또 전상자들이 가득한 곳에 굳이 돈을 써서 관광을 갈 사람이 누가 있을까 싶다. 아무리 생각해도 왜 지었는지 답이 나오지 않는다. 김정은은 앞으로 여러 지역에 서로 다른 유형의 유망한 대규모 관광문화지구를 건설하겠다고 공언했다. 지어 놓은 마식령스키장, 양덕온천문화휴양지, 삼지연 포태리관광지구가 파리만 날리고 있는데 또 만들겠다고 한다. 관광 상식으론 이해가 되지 않으니, 김정은과 그 가족을 위한 피난 시설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든다. 원산이나 삼지연 관광지들은 김정은이 특별히 좋아하는 별장 근처에 있다. 유사시 외국인 관광객들 속에 재빨리 숨어 폭격을 피할 수 있다. 그런 목적이라면 이런 관광지들은 김정은에게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소중한 것일 수도 있다. 호텔 아래 깊이 숨겨진 벙커는 북한이 오래전부터 사랑해 온 조합이기도 하다.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5-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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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서 실종된 대좌 아버지를 찾습니다”…전 대외연락부 요원 차영철이 탈북한 이유[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김정일의 지시를 받고 중국에서 활동하던 부모가 갑자기 증발했다. 중앙당 대외연락부 소속이던 차영철은 부모를 찾겠다는 일념 하나로 탈북을 선택했다. 20년째 찾고 찾았지만 부모 소식은 알 길이 없다.“인터뷰하면 아버지 어머니가 (기사를)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중국 국가안전국이 부모님을 납치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죄가 없으니 죽이진 않았을 겁니다. 숨어서 살려 했지만, 부모님 살아 계실 때 꼭 만나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저를 공개하려 합니다.”부친 본명은 차세휘. 1946년생으로 2002년 3월 실종 당시 북한 보위사령부 7처 대좌(대령)였다. 해외에 파견된 가장 높은 계급 인물이었다.1992년 8월 한중 수교를 전후해 중국에선 한국 안전기획부와 북한 보위부가 치열한 첩보전을 벌였다. 부친은 1992년 12월 중국 심양에 ‘고구려구이집’라는 식당을 열었다. 해외에 문을 연 최초의 북한 식당이다. 모친이 식당 지배인이었다. 부친은 ‘차철’ 또는 ‘홍철’이란 위장명을 사용하며 밖으로 돌아다녔다. 그의 공작은 10년 뒤인 2002년 실종으로 막을 내렸다.● 김정일이 파견한 부친차영철은 1980년 1월 1일 평양시 평천구역 봉남동에서 태어났다. 6세 때 만수대동상이 걸어서 5분 거리인 모란봉구역 북새동으로 이사했다. 이곳엔 서울로 치면 압구정동 로데오거리와 맞먹는 명품 거리가 있다.차 씨가 태어났을 때 부친은 국가보위부 312호실에서 근무했다. 312호실은 김정일의 ‘3월 12일 방침’에 의해 만들어진 조직으로, 보위부 자금을 만드는 곳이었다. 차 씨가 어렸을 때 부친은 유럽과 남미로 계속 출장을 다녀 집에 거의 붙어 있지 않았다. 차 씨 부친이 보위부에서 일할 수 있었던 이유는 출신성분이 매우 좋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6·25전쟁 때 전사한 까닭에 ‘전사자 자녀’ 혜택을 받았다.1952년생인 모친은 평양영화연극대학을 졸업하고 김일성대 출판사를 다녔다. 외가도 출신성분이 매우 좋았다. 해외를 다니며 달러를 주무르는 부친을 만난 덕에 차 씨의 어린 시절은 매우 유복했다. 인민학교를 다닐 때엔 평양에 몇 없는 ‘콘트라 게임기’를 가지고 놀았고, 모두가 부럽게 바라보는 비싼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인민학교를 졸업한 뒤엔 명문 모란봉제1고등중학교에 입학했다. 3학년이던 13세 때인 1993년 부모와 함께 중국에 나왔다.부친이 중국에 집중적으로 출장을 다니기 시작한 것은 1991년부터였다. 중국이 한국과 수교할 움직임을 보이자 북한이 선제적으로 대응을 시작한 것이다. 부친은 심양시 민정국과 합작해 조선대양무역회사를 만들었고, 심양 북역 바로 뒤에 ‘고구려구이집’을 내고 활동 거점으로 삼았다.1993년 보위부 상좌(중령)였던 부친은 김정일이 사인한 파견장을 받고 ‘차철’이란 가명으로 중국에 눌러앉았다. 평양에 있던 가족도 심양으로 불러왔다. 중국에 나올 때 모친은 출판사를 그만두고 보위부에 입대했다.해외에 생긴 최초의 북한 식당이란 명성이 알려지면서 고구려구이집은 한국인들도 많이 찾았다. 영화배우 못지않은 미모의 지배인이 보위부 요원인 줄 그들은 알 길이 없었다. 종업원도 보위부 5과 출신 미녀였고, 요리사도 평양에서 으뜸가는 실력자를 데려왔다. 심양에서 살게 된 차 씨는 서탑조선족학교를 다녔다. 1년쯤 다녀 중국어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때 한족 학교인 132중학교로 옮겼다.● 자강도를 살린 식량 10만 톤차 씨는 설날 때 평양에 사는 할머니와 다른 친척을 만나기 위해 북한에 들어가는 것을 빼고는 늘 중국에서 살았다.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으로 많은 북한 사람들이 굶어 죽었지만 차 씨는 전혀 몰랐다. 평양에 들어갔을 때 함께 놀던 친구들 집은 다 부유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부친은 이때 죽을 고비를 넘겼다. 식당 경영을 모친에게 맡긴 부친은 태권도 5, 6단 사범 3명을 경호원으로 데리고 밖으로 나돌았다. 어느 날 부친이 북한에 들어갔을 때 당시 자강도 책임비서였던 연형묵이 찾아왔다. 부친의 진짜 신분은 북한에서도 비밀이었지만, 1989년부터 1992년까지 총리를 지낸 연형묵은 알고 있었다.연형묵은 부친을 차에 태우고 자강도로 향했다. 하루 종일 거리 곳곳에 쓰러진 죽음들, 누더기를 입고 몰려다니는 꽃제비들을 아무 말 없이 보여 주었다. 차에서 내릴 때 부친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우리나라가 이렇게 어려웠군요. 제가 돕겠습니다.”중국에 돌아온 부친은 자신이 가진 능력을 모두 동원해 식량을 마련해 북한으로 보냈다. 이렇게 보낸 식량이 3년 동안 10만t을 넘었다. 당시 중국 기업인들이 부친에게 상하이 같은 주요 도시에 몰래 땅을 사놓으면 부자가 될 수 있으니 투자하라고 많이 권했다. 하지만 부친은 가진 돈으로 식량을 모두 구입해 북한에 보냈다.어느새 자강도에서 차철이란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됐다. 자강도 사람들을 살리겠다고 식량을 보내 준 사람 이름이 차철인지 홍철인지, 북한 국적인지 해외 재력가인지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이 소문이 김정일 귀에도 들어갔다. 김정일은 화가 났다. 북한의 모든 혜택은 김정일 이름으로 시행돼야 했다. 돈을 벌어 자신에게 바치라고 중국에 보냈더니 제 멋대로 자강도 사람들을 살리는 데 써버렸다.부모에게 소환 명령이 떨어졌다. 돌아가면 당 규율을 위반한 죄로 처벌이 불가피했다. 이때 연형묵이 나섰다. 그는 김정일을 만나 부친을 살려 달라고 호소했다. 그러자 김정일이 웃으며 “이번은 애국한 것으로 쳐주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최홍희가 키운 남파간첩 사범들차 씨는 중국 학교에 다니면서도 중국어(국어) 수학 물리 등에서 늘 우등 성적을 받았다. 중국 선생들은 다른 학생들에게 “조선 학생이 너희들보다 낫다”고 말하곤 했다.1996~1997년에는 심양에 새로 생긴 ‘You too can speak English’라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영어학원도 다녔다. 학원 선생님은 미국인과 캐나다인들이었다. 차 씨는 그때 같은 반 한국 여학생을 울렸던 일이 아직도 마음에 걸린다.“여자애가 ‘너희 북한은 못살아. 생긴 것도 이상해’라고 하는 바람에 화가 나서 ‘이 남조선 괴뢰야. 너넨 국민들 죽이잖아. 그리고 내가 더 잘 사니, 네가 더 잘 사니. 거지는 바로 너야’라고 쏘아붙였어요. 여자애는 결국 울었습니다. 그걸 보니 ‘남자가 여자를 울리는 것은 아닌데’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손수건을 건네주고 화해를 하긴 했는데,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미안합니다. 그 애도 이젠 40대 중반일 텐데 뭐 하고 사는지 궁금하네요.”심양엔 가끔 외삼촌 홍원희도 놀러 왔다. 홍원희는 북한의 유일한 태권도 7단 사범이었고 인민체육인이었다. 1980년대 조선태권도연맹 남자 태권도 사범팀 감독을 지냈고, 1980년대 말 평양에 광복거리가 건설된 뒤 아파트와 승용차까지 선물로 받을 정도로 김정일의 신임을 받았다. 외삼촌은 1994년부터 1998년까지 아내와 함께 파견 나간 페루에서 특공경찰 훈련 교관을 지냈다. 그는 중국을 거쳐 해외로 갈 때마다 심양의 누나를 찾아왔다.“외삼촌은 대남 공작원을 양성하는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을 졸업하고 남파 임무도 몇 번 수행한 사람이었습니다. 1981년 최홍희(전 국제태권도연맹 총재)가 북한에 들어와 44명으로 제1기 사범 요원 교육을 시작했을 때 김정일 지시로 대남 공작원 출신들이 교육생으로 파견돼 배웠습니다. 최홍희는 10년 이상 배워야 할 동작을 북한 교육생들이 7개월 만에 습득했다고 좋아했지만, 실은 이들 모두 최정예 요원들이었던 겁니다.”차 씨는 19세 때인 1999년 132중학교를 졸업했다. 부친은 그를 칭화대(清華大)에 보내려 했다. 하지만 6년 동안의 중국 생활이 지겨웠던 차 씨는 평양에 돌아가 친구들과 어울리며 살고 싶었다. 할 수 없이 부친은 그를 평양외국어대 중국어과로 보냈다. 나이가 많아 또래들이 다니는 2학년에 학생이 아닌 보위부 위탁생 신분으로 들어갔다. 위탁생은 졸업 후에 파견 기관으로 돌아가는 학생을 의미한다.● 평양을 주름잡은 ‘날라리’중국에서 한족 학교를 6년 다닌 그에게 평양외대 중국어과는 의미가 없었다. 부모의 통제도 없는 데다, 집에 달러도 가득하니 이때부터 본격적인 탈선이 시작됐다.아버지가 관리하는 차 중에 평양에 몇 대밖에 없는 닛산 세드릭을 몰고 고려호텔, 양각도호텔 같은 비싼 호텔에 가서 놀았다. 이 호텔들 노래방에서 중간 크기의 방을 다음 날 새벽 1시까지 70달러 정도에 빌렸다. 두 호텔을 비롯해 모란봉숙소, 정보센터, 보통강호텔, 평양호텔, 해방산호텔, 서산호텔, 창광호텔, 청년호텔 등 달러만 있으면 쓸 곳은 많았다. 매일 수백 달러씩 쓰면서 흥청망청 살았다.20세에 비싼 차를 몰고 다니는 차 씨를 모르는 평양 교통안전원은 한 사람도 없었다. 안전원이 차를 세우고 징글징글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오는 건 10달러 정도 뇌물을 달라는 의미였다. 2학년 때 6개월씩 군에 가야 하는 교도생활을 돈으로 빠진 뒤 친구들과 묘향산에 자주 놀러 다녔다. 그에게 잘 보여 돈을 받으려는 영화배우들이 줄을 섰다.하마터면 김정은 집안사람이 될 뻔도 했다. 스위스에서 유학하고 들어온 김일성 가문의 여자친구가 생긴 것이다. 같은 외대 학생인 이 여성은 평양에서 유일하게 노랑머리를 하고 다녔다. 차 씨와 여자친구가 수업을 빼먹고 놀러 다녀도 이들을 통제할 사람이 없었다. 가끔 뭐라고 하는 교수가 있긴 했지만 달러를 찔러주면 입을 다물었다.놀이공원에 가면 차림새 때문에 누구도 이 두 사람을 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줄도 서지 않고 놀이기구 앞에서 “조총련 관광단인데 빨리 좀 탑시다”라고 하면 무사통과였다. 가끔 시비를 거는 단속원들에게 외삼촌이 만들어 준 영어가 잔뜩 쓰인 국제태권도연맹 2단 사범증을 내밀면 기가 죽었다. 영어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보니 해외에서 온 사범이라 생각한 것이다.그의 단골상점은 일본 상품만 전문으로 파는 보통강상점이었다. 그 상점에서는 피랍된 일본인 여성이 금목걸이와 금반지 매장에서 일했다. 승합차가 그녀를 상점에 태워다 주고 또 퇴근 때는 데려 갔다.그 일본인 여성은 단골인 차 씨를 볼 때마다 늘 뭔가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2002년 9월 김정일은 일본인 13명을 납치한 것을 인정하고, 그중 5명을 일본으로 돌려보냈다. 보통강상점 그 여성은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 그는 2005년 12월 차 씨가 중국으로 나올 때까지도 그 상점에서 일했다.● 갑자기 전해진 부모 실종 소식2002년 북한에서 최초로 10만 명이 참가하는 대집단체조 ‘아리랑’ 공연이 열렸다. 외대 학생들도 집단체조에 동원돼 아침부터 저녁까지 혹독하게 훈련했다. 차 씨는 늘 그랬듯 훈련에 참가하지 않고 놀러 다니느라 바빴다. 후방 물자를 조달하는 ‘후방조’라는 명목으로 달러를 내면 그를 찾는 사람은 없었다.그해 4월 달러를 전달하기 위해 모처럼 훈련장에 나타났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반 친구들이 그에게 오더니 “별일 없냐”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네 아버지, 어머니가 남조선에 가서 기자회견 했다는 소문이 돌던데 아니겠지”라는 것이었다. 차 씨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평양외대는 고위 간부 자식들이 많이 다니고 있어 소문이 빨랐다. 차 씨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러고 보니 부모가 북한에 오지 않은 지 꽤 됐다. 부모는 평양에 오면 집에 오지 않고 ‘장군님(김정일)의 배려’라며 묘향산, 정방산 특각, 문수초대소 등에서 1주일을 지내고 해외로 나갔다. 초대소에 갈 때는 신형 벤츠를 탔는데 그 뒤로 의료진과 경호원들이 탄 렉서스 승용차가 따라다녔다. 그만큼 부친은 김정일이 특별히 우대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평양에 올 때마다 아버지는 늘 겸손하게 살라고 훈계했지만 20세를 넘은 아들에겐 먹히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들을 자신처럼 해외에서 일하면서 가끔 북한에 출장 오는 사람으로 만들어주려 했다. 물론 전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2000년 부친은 보위부에서 군부 보위사령부 7처 소속 대좌로 부서를 옮겼다. 7처는 해외파견처로 보위사령부 안에서도 노른자위였다. 기존 국가보위부 312호실은 ‘심화조 사건’에 휘말려 실장과 정치부장 모두 처형됐다. 처형된 이들은 중국에 나올 때마다 아버지가 5성급 호텔을 잡아 주고 2만 달러씩 용돈을 주던 사람들이었다.심화조 사건은 1990년대 후반 김정일이 조작한 대규모 숙청 사건이다. 숙청된 전체 간부는 2만5000여 명으로 알려졌다. 국가보위부 숙청을 보위사령부가 담당했는데, 312호실 소속으로 살아남은 사람은 부친을 포함해 몇 명 되지 않았다. 숙청 광풍에서도 살아남을 정도로 김정일의 확실한 신임을 받던 부친이 모친과 함께 남조선으로 갔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차 씨는 여기저기 알아봤다. “네 아버지는 그럴 사람이 아니니 신경 쓰지 말고 공부나 잘하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버지 상관이자 중장인 7처장도 그에게 전화해 “아무 신경도 쓰지 말고 무슨 일 있으면 즉시 (나에게) 전화하라”고 했다.그래도 불안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부모가 사라진 것은 분명해 보였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집에 있는 돈은 실컷 쓰고 죽자”는 오기가 생겼다. 그때부터 학교도 잘 나가지 않고 더욱 방탕하게 살았다.호텔에서 매일 수백, 수천 달러씩 뿌려 대자, 누군가 대학에 신고했다. 대학에선 그를 퇴학시키려 했다. 이때 7처장이 대학에 직접 찾아와 학장과 당 비서를 면담했다. 7처장은 차 씨를 불러 “아버지 어머니 소문은 허튼 소문이니 방랑하지 말라. 당만 믿고 학교 생활 잘하라”고 당부했다. 부모가 실종된 지 1년이 돼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 차 씨 마음도 조금 진정됐다.● 신병훈련소에서 탈영하다2003년 10월 차 씨는 대학을 졸업했다. 공교롭게도 그해에 모든 대학 졸업생은 3년 동안 군 의무 복무하라는 김정일 지시가 하달됐다. 보위사령부에서 연락이 왔다. 일단 군에 입대해 신병훈련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평양 소재 대학 졸업생들은 차에 실려 평남 개천비행장에 있는 신병훈련소로 이동했다.차 씨도 이번만큼은 빠질 수가 없었다. 북한 최고 숙박시설에서 살던 차 씨에게는 충격의 연속이었다. 병실은 냄새가 너무 나서 들어갈 수 없었다. 난생처음 보는 잡곡밥에 시꺼먼 염장무국과 반찬이 나왔다.“이건 짐승이 먹는 것이지 사람이 먹는 것이 아니다.”이때부터 그는 단식에 들어갔다. 며칠 먹지 않으니 정치지도원이 찾아와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정치지도원이 차려준 두부와 된장찌개로 며칠 만에 숟가락을 뜰 수 있었다. 차 씨가 “죽어도 신병 생활을 못 하겠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묻자 정치지도원은 여단에 가서 자필 제대 탄원서를 써보라고 했다.다음날 차 씨는 훈련장을 이탈해 여단 사령부로 찾아가 제대 탄원서를 써서 냈다. 담당 군관이 그를 한심스럽게 쳐다보더니 조금 기다리라고 했다. 기다리다간 신병훈련소로 끌려갈 것 같다는 느낌에 무작정 큰길로 뛰쳐나와 아무 차나 잡으려 했다. 한참을 기다리니 평양 번호판을 단 승용차가 나타났다.차를 막아선 그는 달러를 줄 테니 평양까지 태워달라고 했다. 운전기사는 10달러를 불렀다. 돈이 없던 차 씨는 평양에 도착하면 30달러를 주겠다고 했다. 2시간 만에 평양으로 돌아왔다. 며칠 새 삐쩍 마른 모습을 보고 동네 사람들이 놀랐다. 집에서 저녁을 배 터지게 먹고 나니 잠이 왔다.새벽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나가보니 보위사령부 7처 소속 대좌가 서 있었다. 탈영은 군법 적용 사건이다. 욕을 잔뜩 먹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대좌는 뜻밖에도 “영철아, 건강이 어때?”라고 살뜰하게 물어보더니 종이를 꺼냈다.깜짝 놀랐다. 어제 여단에 써 놓고 온 제대 탄원서였다. 보위사령부에 그가 탈영했다는 직보가 들어가자 7처장은 탄원서부터 회수해 증거를 없앤 것이다. 대좌는 “3개월 동안은 신병훈련 기간이니 집에 조용히 박혀 있으라”고 신신당부하고 떠났다.물론 차 씨는 이 당부를 지키지 않았다. 그 3개월 동안 태권도 사범 형들과 실컷 놀러 다녔다. 가끔 7처에서 전화가 와 “조용히 있으라고 했는데 어제 거길 왜 갔냐”는 추궁을 받긴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며칠 지나면 또 놀러 나갔다.3개월이 지나자 전화가 왔다. 신병 때 입은 군복차림으로 보위사령부 정문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전날까지 호텔에서 먹은 술이 깨지도 않은 채 사령부로 가니 견장에 두 줄이 박힌 새 군복을 주었다. 신병훈련을 마친 것으로 서류가 정리된 것이다. 7처장이 말했다. “3년 복무는 장군님 방침이니 빠질 수는 없다. 그러니 이제 보내 주는 곳에서 성실하게 근무하라.”그를 태운 차가 도착한 곳은 평양시 역포구역 보위사령부 당 강습소 경비부대였다. 부대원들 부모는 내로라하는 간부들이었다. 한마디로 ‘금수저’들이 편하게 근무하며 경력을 만드는 부대였다. 밥도 이밥이 나왔고 돼지고기와 오리고기도 정기적으로 나왔다. 차 씨는 그때 비로소 잘 먹는 부대가 있고, 못 먹는 부대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중앙당 대외연락부에 선발되다 경비부대에서 10개월도 채 보내지 않았을 때 김정일의 새 지시가 하달됐다. 군에 보낸 대학 졸업생 중 외대와 김일성대 외국어문학부, 음악무용대학 기악부 졸업생은 제대시키라는 것이었다. 군 3년 동안 외국어나 악기 다루는 법을 잊어 버리니 예외를 적용하라는 뜻이었다. 차 씨의 군 생활은 신병까지 포함해 1년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군 복무 경력까지 얻게 됐으니 운이 매우 좋았다.2004년 10월 외대 운동장에 차 씨처럼 군에서 돌아온 졸업생들이 모였다. 몇몇 간부들이 단상에 올라 “장군님의 배려”를 운운하더니 한 명씩 불러 간부 선발 면접을 보게 했다. 며칠이 지나자 전화가 왔다.“차영철 동무는 조선노동당 대외연락부에 선발됐습니다.”대외연락부는 남한 지하당 구축을 전담하고 조총련 사업도 지도하는 부서다. 어디 가서 증명서를 꺼내 보이면 아무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끗발이 세다. 누구나 가고 싶어 하지만 아무나 갈 수 없는 곳이다. 간부 면접을 본 외대 졸업생 1000명 중에 대외연락부에 선발된 사람은 차 씨 포함 단 2명이었다.차 씨를 데리려 차가 왔다. 그가 소속된 부서는 대외연락부 116연락소였다. 116연락소는 김정일의 ‘1월 16일 방침’으로 만든 부서로 항일 빨치산 출신 이을설 원수의 사위가 소장으로 있었다.차 씨의 첫 임무는 광복거리에 있는 청년호텔에 가서 중국에서 온 기술자들을 관리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북한과 중국이 각각 2500만 달러를 투자해 평양사탕가루공장을 짓고 있었는데, 설비와 기술자들은 모두 중국에서 왔다.차 씨는 이 기술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주로 통역을 했다. 발령 받은 첫 직업이 호텔에서 생활하며 외국인들과 고급 식사를 하는 일인 셈이었다. 생활총화도 없었다. 차 씨와 함께 대외연락부에 온 친구는 “너는 생활총화를 하지 않아 너무 좋겠다”며 부러워했다.차 씨는 사회에 나오자마자 부모 행방을 수소문했다. 부모가 실종됐음에도 자신이 잡혀 가지 않고 오히려 중앙당에 발령받은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아버지와 연관된 사람에게서 큰 비밀을 알게 됐다.“너희 아버지는 몇몇 군부 간부들이 외국에 몰래 무기를 팔아먹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 그래서 김정일에게 이를 고발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보위사령부가 가로챘지. 보위사령관도 이에 연루가 됐는데, 아버지를 어찌 할 수가 없어 전전긍긍하던 참에 실종이 벌어진 거야.”이 말을 듣고 차 씨는 보위사령부가 왜 자신을 지금까지 보호했는지, 대학 졸업 후 당연히 갈 것이라고 생각하던 보위사령부가 아니라 중앙당으로 옮겨 오게 됐는지 어렴풋이 짐작하게 됐다. 뒷배라고 생각했던 보위사령부는 더 이상 믿을 곳이 아니었다. 결심이 굳어졌다.“이 나라를 빨리 떠야겠다. 심양에 가서 부모를 찾고 진실도 알아야겠다.”● 중국에서 탈북을 선택하다차 씨는 해외로 파견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자신이 중국 유력 재벌들을 많이 알고 있다는 소문도 열심히 돌렸다. 실제로 심양에서 6년 동안 살면서 아버지와 거래하는 많은 기업인을 알게 됐다. 그중엔 북한과 거래하는 중국 기업인 중 최고 부자로 알려진 조교(북한 국적 재중 조선족)도 있었다.소문이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어느 날 나이 많은 남성이 그를 찾아왔다. 국가과학원 소속 모 사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중국에 식당을 차리려 하는데, 여기에 투자해 줄 수 있는 인맥을 어느 정도 알고 있냐고 물었다. 차 씨가 인맥 정보를 말하자 그는 “소속을 국가과학원으로 옮겨 줄 테니 나와 함께 중국에 한 달 동안 출장을 다녀오자”고 제안했다. 차 씨는 쾌재를 불렀다.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소속이 가 본 적도 없는 국가과학원으로 변경됐고 중국 출장단에 이름이 올랐다. 보위부에서 차 씨 아파트를 찾아 ‘요해사업’을 벌였다. 해외 파견되는 사람들의 주변을 조사하는 필수 과정이었다. 다행히 차 씨 아파트 사람들은 그에 대해 모두 좋게 이야기해 주었다.2005년 12월 5일 차 씨는 한 달짜리 중국 출장을 허락받고 그 사장과 함께 신의주에 갔다. 여권에 적혀 있는 차 씨 생일도 1977년생으로 고쳐져 있었다. 신의주에서 중국으로 넘어가기 전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두 사람에게 임무를 주었다.첫 번째 임무는 투자자를 물색해 심양에 식당을 차리는 것이었고, 두 번째 임무는 탈북자들이 거쳐 간다는 연길의 모 한국인 교회 목사 연락처와 탈북 루트를 파악하라는 것이었다. 또 매주 한 번씩 신의주로 나와 경과를 보고해야 한다는 단서도 달았다. 이미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던 차 씨에겐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둘은 차를 타고 단동으로 넘어가 다른 차로 갈아타고 심양에 도착했다. 첫날은 호텔에서 묵고, 이튿날 부모가 운영했던 식당을 찾아갔다. ‘고구려구이집’ 간판은 사라지고 한족 식당으로 바뀌어 있었다.“저에겐 참 추억이 많은 식당이고 부모님의 흔적이기도 해요. 1990년대 심양에 갔던 한국 사람들이 많을 텐데, 그때 찍은 식당 사진이 있다면 꼭 찾고 싶어요.”그 다음날 차 씨는 홀로 택시를 타고 심양 기차역으로 갔다. 청도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오래 계획했던 일이 마침내 마무리된 것이다.“함께 중국으로 나왔던 사장에겐 미안하죠. 그런데 그 사장의 정체를 모르겠어요. 사장은 국가보위부 업무를 협조해 주는 대가로 보위부 요원에게만 주는 국경통행증을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만 석연치 않은 게 많았죠. 국가과학원이 감히 중앙당 대외연락부 사람을 빼내 자기들 소속으로 바꿀 수 없거든요. 또 탈북 루트를 파악하는 임무도 그렇고. 어쩌면 보위부나 보위사령부에서 저를 미끼로 내걸고 사라진 부모님 행방을 찾으려 했던 것일 수도 있고요.”● 중국인으로 살다차 씨는 어렵지 않게 청도의 중국인 지인을 찾아 숨어들었다. 중국인 친구들에게 차 씨는 ‘북한 재벌의 아들’쯤으로 인식돼 있었다. 그는 지인들을 총동원해 부모 행방을 수소문했다. 그 결과 아버지와 함께 일했고 실종 직전까지 함께 있었던 사람들을 찾아냈다. 그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사장님 부부를 체포한 것은 중국 국가안전부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후 행방을 알 수가 없습니다.”차 씨는 이 외에도 여러 정보를 얻었다. 중국이 “차철은 마약사범이니 우리가 처리하겠다”고 북한에 통보한 것도 알아냈다.“맹세컨대 부모님은 마약에 절대 손대지 않았어요. 중국에서 마약사범은 공안이 다루지 안전부가 다루지 않습니다. 마약이라면 부모님과 함께 일한 사람들도 잡혀 가야 하는데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북한에 부모님을 송환하지 않을 유일한 구실이 마약사범이니 그렇게 밝힌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하지만 부친 소식은 더 이상 알 수가 없었다. 탈북한 신분으로 추적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차 씨는 중국에서 탈북자로 살 수밖에 없었다. 3년 뒤인 2008년 중국에서 진짜 신분증을 만들었다. 이때부터 북송 위험은 사라졌다. 중국어도 유창하기 때문에 주변에서는 그를 한족으로 알았다.중국에서 체류하려면 돈도 벌어야 하니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일을 했다. 그러는 과정에 7세 아래 한족 아내도 만났다.“2010년에 어느 카페에서 맥주를 마시다가 눈이 마주쳤어요. 거의 동시에 끌렸다고 할까. 밥을 같이 먹으면서 사귀자고 했지요.”당시 중국엔 한류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아내는 그를 한국말을 잘 하는 한족 남성으로 알았다. 사귀고 열흘쯤 지나 차 씨는 그에게 고백하며 자신의 정체도 이야기했다. 그녀는 “과거는 상관없고 이제부터 우리 둘만 좋으면 된다”고 대답했다.둘은 세계 최대 규모 도매시장이 있어 ‘세계의 슈퍼마켓’이라 불리는 저장성 이우(义乌)시로 옮겨 가 가방가게를 차렸다. 장사는 잘됐다. 집도 사고 차도 사고 부부가 각각의 가게도 운영했다. 잘 나갈 때는 직원 8, 9명을 두기도 했다.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터져 중국이 봉쇄되면서 위기가 찾아왔다. 장사를 접고 집에 있는 날이 길어졌다. 집에 있다 보니 갑자기 드는 생각이 있었다.“너는 왜 탈북했지? 초심을 잃었다. 부모를 찾겠다고 와서는 중국에서 돈이나 버는 것이 맞는 일인가.”며칠 동안 고민하다가 차 씨는 아내에게 말했다.“너를 만나 너무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 그렇지만 이렇게 혼자만 잘 살 순 없어. 부모님을 찾아야 하지만 중국인 신분으로는 어려워. 한국에 가서 한국 국적을 따면 당당히 목소리를 내면서 부모님도 찾을 수 있을 거 같아.” 아내는 그의 결심을 적극 응원해 주었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2023년 4월 5일 차 씨는 제주도행 비행기에 올랐다. 중국 여권이 있기에 마음만 먹으면 관광객으로 얼마든지 올 수 있었다. 밤늦게 제주공항에 내렸다. 예약해 둔 호텔에 짐만 내려놓고 인근에 있는 동부경찰서를 찾아갔다.“저 평양에서 온 사람인데 자수하러 왔습니다.”“왜 공항에서 자수하지 않고 하필 여기에 왔나요?”“공항에서 자수한다고 하면 소란이 벌어질 수도 있고 같이 왔던 중국인들이 사진을 찍으면 일이 커질까 봐 그랬습니다.”“달아날 분 같진 않으니 일단 호텔로 가서 자고 있어요. 내일 아침에 갈게요.”아침 일찍 경찰관이 찾아왔다. 공항에 가니 그를 조사하려고 기다리는 사람이 10명도 넘게 모여 있었다. 기본적인 것들을 이야기하고 서울로 올라왔다.차 씨는 한국 정보기관이 자신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는 노동당 대외연락부 소속으로 중국에 파견돼 활동하는 요원으로 파악돼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부모님 신원과 하는 일, 사라진 경위까지도 다 꿰고 있었다. 새삼 한국 정보기관의 정보력에 놀랐다.초봄에 한국에 왔는데 조사를 마치고 하나원을 거쳐 사회에 나오니 어느새 가을이었다. 차 씨는 서울 마포구 임대주택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까지 살던 곳 중 가장 낡고 작은 방이지만 그럼에도 서울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중국에서 아내를 데려오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6개월 동안 온갖 마음고생 끝에 마침내 아내를 국제결혼 형식으로 한국에 데려올 수 있었다.인터넷으로 열심히 일자리를 찾아 지난해 2월 인천의 작은 무역회사에 취직했다. 중국에서 살 때는 한국 업체들과 상대했는데, 이번엔 한국에서 중국 업체들과 거래하는 일이었다. 나름 열심히 일했지만 올 5월 회사를 그만두었다. 사장이 처음에 했던 약속을 지키지 않아 신뢰가 깨진 것이다. 이제 다시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북한에서 운이 좋게 금수저로 태어나 초년엔 잘 살았는데, 중년엔 작은 중소기업에 취직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지금 저의 가장 큰 목표는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을 찾은 겁니다. 이제 아버님은 79세가 됐고 어머니도 73세입니다. 중국 어딘가에 있을 부모님을 찾을 수만 있다면 참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그가 부모님이 살아있다고 확신하는 이유는 중국 당국이 북한 고위급 인물은 신분 세탁을 해 숨겨 주고 있다는 말을 들어서다. 탈북한 사람 중에서도 대좌 이상급 인물은 북송하지 않고 북한 유사시를 대비해 관리한다는 것.“제 부친은 비록 김정일 지시로 중국에서 활동했지만, 그럼에도 굶어 죽어가는 인민을 외면할 수 없어 식량 10만 t을 사 보내 처벌까지 받을 뻔했습니다. 상해에 땅을 몰래 사 놓으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유혹에도 자기 몫은 챙기지 않았습니다. 해외에 파견된 최고위급이었으니 한국에 온다면 나라에 기여할 정보도 많을 텐데, 찾을 길이 없습니다.”이제 차 씨가 할 수 있는 일은 부모님이 우연히 이 기사를 보고 연락해 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자신을 공개하는 일밖에 없다. ‘부모 찾아 3만 리’, 20년 넘게 헤매 온 그의 소원은 이뤄질 수 있을까.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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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벙커버스터는 김정은을 떨게 할까? 북한의 지하세계[주성하의 ‘北토크’]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미국이 21일 이란의 포르도 지하 핵시설에 12발의 GBU‑57 벙커버스터 폭탄을 투하하자, 많은 언론이 북한을 떠올렸습니다. 김정은도 공포에 떨 수밖에 없다는 것이 대다수 언론의 분석입니다. 물론 북한은 핵무기를 이미 갖고 있기 때문에 미국이 이란처럼 사용할 수 없다는 이유도 빠질 수 없이 곁들였습니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북한은 2022년 9월 ‘핵무력정책법’을 발표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북한이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조건은 다섯 가지입니다. 첫째, 북한에 대한 핵무기 또는 대량살육무기 공격이 감행되었거나 임박했다고 판단되는 경우. 둘째, 국가지도부 등에 대한 적대세력의 핵 및 비핵공격이 감행되었거나 임박했다고 판단되는 경우. 셋째, 국가의 중요 전략적 대상들에 대한 치명적인 군사 공격이 감행되었거나 임박했다고 판단되는 경우. 넷째, 유사시 전쟁의 확대와 장기화를 막고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작전상 필요가 불가피하게 제기되는 경우. 다섯째, 기타 국가의 존립과 인민의 생명 안전에 파국적인 위기를 초래하는 사태가 발생해 핵무기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상황이 조성되는 경우입니다.북한의 핵사용 교리는 ‘가장 공세적이고 급진적인 핵 독트린’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임박했다고 판단되거나, 전략 대상에 대한 공격이 진행되거나, 기타 불가피한 상황 등이 언급돼 있지만, 한마디로 자의적으로 판단해 쓸 수 있다는 뜻입니다. 김정은 참수 작전은 당연하게 핵 보복 대상이 됩니다. 다른 핵보유국들도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비슷한 핵 교리를 갖고 있습니다. 미국, 러시아, 중국 등 모든 나라들이 지도부가 무력화되면 핵을 사용한다는 ‘핵 독트린’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벙커버스터로 김정은을 제거하거나, 북한의 핵시설을 공격한다는 것은 핵 보복을 감내해야 하는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물론 북한도 핵무기를 사용하면 체제 궤멸까지 각오할 정도의 보복을 받아 무사하진 못하기 때문에 함부로 핵을 사용할 순 없을 겁니다. 그런데 핵 교리와는 별개로 “미국의 스텔스 폭격기가 벙커버스터를 싣고 북한을 공격하는 동시에, GBU-57보다 관통 능력이 더 뛰어나다는 한국의 현무-5 미사일 수백 기가 동시에 타격하면 북한의 핵 보복 능력을 선제적으로 무력화시킬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이는 북한의 핵무기 저장 시설의 위치를 모두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는 가정 하에 할 수 있는 상상입니다.그렇지만, 그런 가정에도 결론은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북한의 지하 시설이 그리 호락호락하진 않기 때문입니다. 이 기사에선 벙커버스터라는 무시무시한 괴물이 북한에는 효율적으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살펴보기 위해 북한의 지하 시설에 대해 설명해보려 합니다.● 북한의 지하 세계이란은 벙커버스터로 타격할 수 있는 대상이 매우 명확했습니다. 포르도와 나탄즈, 이스파한 3곳만 타격해 붕괴시키면 이란의 핵능력을 불능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다릅니다. 북한의 지하 세계는 외부에서 알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합니다.전 세계를 돌아보십시오. 면적에 비해 또는 인구에 비해 가장 많은 지하 시설을 갖고 있는 나라가 어디일까요. 아마 1등은 한국이고, 2등은 북한일 겁니다. 지하 세계의 끝판왕이 한반도라는 뜻입니다.한국은 좁은 영토와 산악지형이라는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땅을 팠습니다. 전국 지하철 총길이만 따져도 서울과 부산을 왕복으로 두 번 오갈 수 있는 길이에 해당하는 1450㎞인데, 상당히 많은 구간이 지하에 묻혀 있습니다. 전국의 건물에는 깊은 지하 주차장이 있습니다. 제가 사는 아파트도 주차장이 지하 7층까지 있습니다. 지하 주차장의 면적을 모두 합치면 어마어마할 것입니다. 산지가 발달한 지형 때문에 전국의 터널은 모두 3000개가 넘습니다. 이 정도면 지구 공군이 모두 날아와 폭격하고, 지구상의 모든 미사일이 한국을 타격한다고 해도, 대다수 한국인은 터널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거기에 한국은 터널 파는 기술도 세계 정상급이라 자고 나면 계속 어디선가 땅을 파고 있습니다.북한은 우리와 좀 다릅니다. 북한의 건물들엔 지하 주차장이 없고, 지하철도 평양에 총연장 길이 34㎞에, 역은 17개에 불과합니다. 도로와 철도를 잇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터널을 만들었지만, 뚫는 기술은 인력에 주로 의존하다보니 그리 높은 편은 아닙니다.그러나 북한의 특징은 폭격에서 살아남기 위해 터널들을 팠다는 것입니다. 즉 지하 시설 대부분이 군사용으로 건설했다는 것이죠. 이는 북한이 겪었던 전쟁의 경험 때문이기도 합니다. 6·25전쟁이 끝난 뒤 평양의 2층 이상 건물 중 무너지지 않은 것은 단 하나뿐이었습니다. 40만 명이 살던 평양에 43만 발의 폭탄이 투하됐습니다.평양뿐만 아니라 북한의 모든 도시는 초토화가 됐습니다. 한국전쟁 시기 미군은 북한 지역에 무려 63만5000톤의 폭탄을 투하했습니다. 이는 태평양 전쟁 시기 연합군이 태평양 전역에 투하했던 폭탄 60만 톤보다 많았고, 일본 제국 본토에 투하된 16만 톤의 무려 4배에 이르며,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유럽 전역 전체에 투하되었던 폭탄 160만 톤의 40%에 해당하는 수치입니다.폭격에 가족을 잃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는 북한엔 ‘폭격 노이로제’가 휩쓸었습니다. 그래서 전쟁 시기는 물론, 전쟁이 끝나도 파고 또 팠습니다. 깊이 더 깊이 팠습니다. 평양 지하철은 지하 100~150m 깊이에 건설됐습니다. 그러고도 한국보다 먼저 지하철을 개통했습니다. 물론 훗날에 GBU-57이나 현무-5 미사일이 나올 줄 알았으면 안심하지 못하고 더 깊이 내려갔을 겁니다.평양뿐만 아니라 각 도시와 군들마다 지하철은 없어도 방공호들은 든든하게 지어졌습니다. 벙커버스터에 당한 이란이나, 팔레스타인과는 달리 북한은 원래 산악 지형이다 보니 높은 산을 파고들어 가면 됐습니다. 결과 1970년대 후반쯤 북한은 전쟁이 나면 모든 도시가 굴속에 들어갈 수 있게 완성됐습니다. 그냥 대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벌어지면 터널 안에 들어가 일상생활도 가능하게 지었습니다. 터널 안에 들어가면 무수한 줄기가 있고, 각 기관과 직장, 학교, 유치원 공간들이 있습니다.군수공장은 애초에 폭격을 당할 것을 감안해 지하에 지었는데, 주로 산지가 가장 험준한 자강도와 평안북도에 몰려있습니다. 이 많은 터널을 무슨 수로 붕괴시킬 수 있을까요. 미군이 보유한 벙커버스터 수량은 이란 폭격 전에 약 20개로 추산됐습니다. 이중 이란에 14발을 썼으니 몇 개 남지 않았을 겁니다. 물론 필요하면 얼마든지 또 만들겠지만, GBU-57의 가격은 400만 달러(약 55억 원)로 추정되니 무한정 만들기엔 너무 비쌉니다. 한국의 현무-5 미사일도 1기당 100억 원 이상으로 추정되며, 연간 70여 발까지 만들 순 있지만, 가격이 비싸 한국군은 200기 정도를 보유할 계획이라고 합니다.그렇다고 해도 정말 중요한 곳들만 타격하면 효과가 있을 순 있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중요한 곳은 북한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김 씨 일가 전용 터널들북한의 지하 세계 중에 가장 견고한 곳은 김씨 일가의 안전을 위한 곳입니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는 “평양에는 유사시 수뇌부가 대피할 수 있는 300m 깊이의 땅굴이 부지기수로 존재한다”며 “1953~72년 사이에 착공된 지하철과는 다른 제2의 지하 세계”라고 말했습니다.땅에 숨은 북한 지도부를 제거하려면 평양 시민들이 대피한 150m 깊이의 지하철을 붕괴시키고도, 다시 150m를 더 관통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는 북한 수뇌부가 땅에 들어가 한 곳에 있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김씨 일가를 위한 터널의 총연장 길이는 지하철보다 훨씬 더 깁니다.평양에서 26년 동안 터널만 건설했던 공병국 소좌(소령) 출신 탈북민은 이렇게 증언했습니다.“평양엔 김일성광장이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평양 중심부의 광장이고, 다른 하나는 지하 약 200m에 있는 ‘비밀의 광장’입니다. 평양 주석궁(현 금수산태양궁전)에서 왼쪽 룡남산으로 터널로 이동하면 넓은 지하 공간이 나옵니다. 이곳의 정식 명칭은 ‘김일성광장’인데, 룡남산과 김일성대 옛 운동장 아래에 위치해 폭격에 안전합니다. 이곳을 폭격하면 교정을 폭격해 대학생들을 죽였다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하 김일성광장은 가로, 세로가 100m 이상이고 높이는 12m인데 전쟁 중이라도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소집할 수 있도록 건설됐습니다. 제가 입대한 1969년엔 이미 거의 완공돼 마무리 공사를 벌일 때였는데, 이곳에 가본 사람은 한국에선 저밖에 없을 겁니다.”그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평양 지하철의 유일한 환승역인 전우역에 가면 에스컬레이터로 150m 정도 지하로 내려갑니다. 수직으로 보면 지하 100m 깊이에 지하철이 있는 셈이죠. 내려가서 다시 숨겨진 비밀 입구로 가면 거기서 다시 에스컬레이터로 150m 더 내려가 김일성 전용 땅굴이 나옵니다. 땅굴 너비는 당시 김일성이 타던 포드 승용차 한 대가 지나갈 정도의 폭이었습니다.”김정일 측근에서 2년 동안 있었던 또 다른 탈북민은 이런 증언을 했습니다.“천천히 달리긴 했지만 차를 타고 지하로만 40분 정도 가는 별장도 있습니다. 지하차도는 1차선이고 너무 좁지도 않고 넓지도 않고 적당해요. 거긴 지하에 각종 오락실, 수영장, 침실, 식당 등이 정말 화려하게 꾸며져 있습니다. 인민대학습당이나 광복백화점 이런 민간 빌딩 아래 김정일의 아지트들이 있습니다. 방음 장치도 철저해서 민간인은 그 아래 그런 곳이 있을 줄 절대 상상도 못 하죠. 그렇지만 아지트에는 그 빌딩과 연결된 탈출구가 있어요. 민간 빌딩을 위에 이고 지하에 숨어버리면 폭격하기도 쉽지 않거니와 도처에 그런 비밀장소가 있고 지하로 연결돼 있어서 어디에 있는지 찾기도 힘들 겁니다. 지하차도를 전담해 지키는 부대가 있는데, 그곳 군인들은 특혜를 받습니다. 제대해도 외부에 내보내지 않아 비밀을 지킵니다.”이러한 증언을 종합하면 김씨 일가가 외부와의 통신을 차단하고 지하에 들어가면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일단 김씨 일가의 터널을 공격하려면 비난을 감수하고 대학이나 병원을 무너뜨리고 다시 지하 수백m를 더 관통해야 합니다. 인민대학습당이나 유경호텔 아래 같은 곳은 매우 안전한 거처일 겁니다. 팔레스타인 하마스 지도부가 병원이나 학교 등의 지하에 지하 벙커를 만든 것을 보면 북한에서 배운 것 같기도 합니다. 북한은 지도자를 위해서라면 인민은 언제든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 가르치는 곳이니 당연한 일입니다.그리고 무수한 지하터널이 또다시 얼기설기 연결돼 있기 때문에 한 곳을 폭격해도 즉각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두더지조차 살기 위해 굴을 얼기설기 복잡하게 만드는데, 가장 머리 좋은 수재들을 김씨 일가 경호에 우선적으로 발탁하는 북한은 얼마나 더 모든 경우의 수를 예상해 만들었겠습니까.지하 시설을 건설한 경험은 비단 김씨 일가를 위해서만 쓰이진 않았을 겁니다. 북한의 핵 시설이나 군수공장도 북한이 축적한 모든 경험과 노하우를 모아 만들었을 겁니다. 물론 이런 것을 만들 때는 벙커버스터나 현무-5까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먹고 때리면 몇 개는 파괴할 수 있을 겁니다.이렇게 북한의 지하 시설 건설 능력에 대해 증언에 기초해 서술하긴 했지만, 분명히 과장도 섞여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북한 처지에선 “우리의 지하 세계는 너무 깊어 타격해도 효과가 없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 더 낫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북한은 원래 있어도 없는 듯이 하는 것보단, 없는 것도 있다고 허풍을 떠는데 선수들입니다.북한이 오랫동안 경제난에 시달리다 보니 과거 만든 지하 세계 중에 온전히 유지하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될지도 의문입니다. 지하 터널을 유지하려면 지하수를 계속 퍼내야 하고, 이는 곧 전기가 많아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전기가 없어 북한의 주요 탄광, 광산들도 침수를 막지 못하고 있는데, 사람이 살지 않는 터널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물론 김씨 일가를 위한 지하 시설은 전기가 우선적으로 공급되니 예외이겠지만 말입니다.평양 지하철도 1987년에 마지막 역을 만든 뒤 38년 동안 노선이 더 연장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경제난 때문에 땅 밑을 팔 능력이 없어진 것입니다. 요즘 건설되는 터널들을 보면 사람들이 들어가 해머와 정으로 암반을 뚫어 발파를 진행합니다. 100년 전에나 쓰던 원시적 방법이죠. 그러니 북한이 붕괴한 뒤 지하 세계가 공개되면 한심해서 눈이 감길 것으로 생각합니다.일각에선 북한이 터널을 뚫는데 선수들이라 남침용 땅굴을 서울과 평택, 심지어 부산까지 연결했다는 주장도 폅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터널을 뚫는데 유능하다고 해도, 소리 없이 삽질만으로 서울까지 파들어 오고, 파낸 흙을 흔적 없이 처리하고, 대규모 양수기를 돌려 물을 계속 빼내며 관리하는 것은 북한도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북한이 1970년대 초반까지 파 내려오던 땅굴들은 사람이 살지 않는 비무장지대도 넘기 전에 다 발각됐습니다. 제일 긴 땅굴이 북한 쪽 길이까지 포함해 3.5㎞밖에 되지 않습니다. 한국 쪽으로 가장 많이 내려온 것이 1.2㎞였습니다. 물론 1990년에 4땅굴이 발견됐지만, 이것 역시 조사 결과 1970년대 뚫다가 중단한 것이었습니다.지금까지 쓴 긴 글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한반도는 터널의 왕국이다. 북한엔 전쟁에 대비한 무수한 터널들이 있다. 벙커버스터가 아무리 많아도 무력화시키긴 어렵다. 김씨 일가가 유사시 땅굴에 들어가면 제거하기 어렵다. 다만 경제난 때문에 북한의 땅굴 능력은 1980년대 수준에 머물러 있고, 이미 건설된 것도 유지가 어렵다.” 그렇다면, 벙커버스터에 얻어맞은 이란을 보며 김정은은 공포를 느낄까요, 아니면 코웃음을 칠까요. 여러분들이 판단해 보십시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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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은을 지켜보는 ‘보이지 않는 눈’[주성하의 ‘北토크’]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지난달 21일 함북 청진조선소에서 5000톤급 구축함이 사고로 넘어지자, 북한은 이를 하루 만에 공개했습니다. 이례적이고 신속하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실은 이를 통해 김정은의 깊은 고민을 엿볼 수 있습니다.김정은이 이런 대형 사고를 외부에 공개하고 싶었겠습니까. 과거 같으면 ‘은둔의 왕국’답게 철저히 은폐하는 데 급급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기 어렵습니다.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우선 청진조선소를 내려다보는 위성의 눈 때문입니다. 북한이 청진에서 신형 구축함을 곧 진수할 것이라는 사실은 사고 이전에 공개됐습니다.옆으로 드러누운 구축함 사진도 사고 직후 전 세계에 공개됐을 겁니다. 즉 김정은이 이를 숨기려 했다면 더 큰 망신을 샀겠죠. 사고 발생 직후 북한이 쓰러진 구축함에 파란 방수포부터 덮은 것 역시 위성을 의식한 행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김정은은 사고가 발생하자 “우리 국가의 존위와 자존심을 한순간에 추락시킨 것”이라며 펄펄 뛰었습니다. 존위는 북한에서 존엄과 위상을 의미하는 뜻으로 쓰입니다. 쓰러진 구축함을 보면서 김정은의 머릿속엔 “내일 이것이 전 세계의 웃음거리가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떠올랐을 겁니다. “이왕 알려질 바엔 미리 선제적으로 공개하고, 이를 계기로 내부 기강을 잡아야겠다”라고 판단했을 겁니다.두 번째 이유는 진수식에 참가했을 수천 명의 눈 때문입니다. 북한은 제대로 된 언론이 없다 보니 과거부터 소문이 언론의 자리를 대체했습니다. 북한 내부의 소문 전파 속도는 매우 빠릅니다. 휴대전화까지 광범위하게 도입된 오늘날엔 구축함 사고 소식은 막기 어렵습니다. 소문이란 것은 퍼지다 보면 대개 더 나쁘게 변질됩니다. 구축함이 침몰했다고 와전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한 달 안에 수리가 가능한 사고라고 전달하는 것이 더 나았을 겁니다.북한에선 망신스러운 소식을 노동신문에 실으라고 지시할 사람은 김정은밖에 없습니다. 어린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구축함이 넘어지는 것을 본 김정은은 처음엔 노발대발 욕설을 퍼부었을 겁니다. 그러다가 좀 진정되면서 “이걸 어떻게 수습하지”라는 생각에 이르렀을 것이고, 또 “내일 사고 소식과 내가 분노했다는 사실을 전국에 공개하라”라는 지시를 내렸을 겁니다. 그런 지시가 없었는데 어떤 간부가 노동신문에 자의적으로 이를 공개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죠.구축함 사고를 통해 우리는 김정은이 위성을 매우 의식한다는 점, 그리고 위성에 대한 공포가 앞으로도 김정은의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칠 것임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위성이 없던 김정일 시대엔 모든 사고는 무조건 은폐가 원칙이었지만, 김정은 시대엔 숨길 수 없는 사고는 선제적으로 공개하는 것으로 원칙이 새로 정해진 듯합니다.공개의 원칙은 위성에 잡히느냐 안 잡히느냐로 판단하겠죠. 북한을 지켜보는 위성은 일정한 주기로 사진을 찍습니다. 한국의 정찰위성은 2시간마다 북한을 촬영하지만, 이 사진은 민간에 공개되지 않습니다.공개가 되는 상업 위성사진은 촬영 시간 간격이 더 큽니다만, 이번처럼 하루 만에 수습할 수없는 구축함 사진이나 아파트 붕괴 등 대형 사고 현장은 얼마든지 찍을 수 있습니다. 다만 북한은 위성이 찍을 수 없는 광산 침수나 미사일 발사 실패 등은 계속 은폐의 영역에 들어갈 겁니다.그러니 앞으로 북한이 공개하는 불미스러운 사고를 접할 때 위성에 들킬 수밖에 없는 것인가, 혹은 아닌가를 우선적인 판단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 같습니다. 북한 역시 진화하는 위성의 촬영 능력을 자세히 지켜보고 있을 겁니다. 현재 전 세계에 있는 상업 위성사진 판매 회사는 10개가 넘습니다. 그렇지만 북한을 찍은 위성사진이 가장 많이 나오는 곳은 미국 콜로라도주 웨스트민스터에 본사를 둔 미국의 우주 기술기업 맥사(Maxar)입니다. 구글어스가 맥사의 대표적 고객이죠. 맥사가 운용하는 위성은 90개 이상으로 알려져 있고, 촬영한 사진을 민간에 판매합니다. 한국이 최근 쏘아 올린 정찰위성의 해상도는 지상의 30cm 물체까지 식별할 수 있는 0.3m급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맥사가 운영하는 위성은 0.3m급은 물론 0.15m급의 사진도 찍습니다. 즉 한국의 최신 정찰위성에 비해 성능이 비슷하거나 더 나은 수준이라는 뜻입니다.우리는 비밀이라며 정찰위성에서 찍은 사진을 공개하지 않는데, 맥사의 위성사진을 보면 굳이 비밀주의를 엄격하게 지켜야 하냐는 생각도 들긴 합니다. 정찰위성 발사에 막대한 예산을 썼는데, 민감하지 않은 사진은 판매해서 일부 예산은 회수하는 것이죠. 어차피 맥사가 찍은 사진이나 한국 정찰위성이 찍은 사진이나 가끔은 포커스가 다르다는 정도의 차이가 아닐까요.맥사의 위성사진은 0.3m급 해상도의 사진일 경우 1㎢당 200~500달러라고 합니다. 고해상도는 더 비싸지만, 저해상도 사진은 무료일 때도 있습니다. 서울 면적(605㎢)의 0.3m급 사진을 매일 얻어서 비교하려면 저렴하게 산다고 해도 매일 12만 달러(약 1억6500만 원)가 듭니다. 서울보다 면적이 큰 평양(829.1㎢)의 사진을 매일 얻으려면 최소 16만6000달러(약 2억2800만 원)가 들고, 1년을 보려면 8320만 달러(약 1140억 원)가 듭니다. 개인이나 기관이 부담할 수 있는 액수가 아닙니다.그래서 북한을 위성으로 감시하는 사람들은 공짜 저해상도 사진으로 감시하다가 의심이 갈만한 곳만 좁혀서 사진을 확인하는 방법을 씁니다. 이런 식으로 구축함이 쓰러진 사진과 다시 일어난 구축함이 수리를 위해 나진항 드라이 독에 옮겨간 위성사진이 공개됐습니다. 이 사진들은 김정은도 이미 보았을 겁니다. 앞서 맥사가 찍은 대표적 위성사진 중 화제가 된 것은 2023년 2월 8일 심야에 진행된 북한의 열병식 장면인데, 열병식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화성-17형 대륙간탄도미사일이 광장을 통과하는 장면을 북한 조선중앙TV가 공개하기 전에 먼저 공개했습니다.아마 김정은이 위성이 이렇게 자세하게 내려다본다는 것에 섬뜩함을 느꼈을 겁니다. 위성을 의식하다 보면 “내가 현지 시찰을 할 때 위성이 내려다보는 것 아닌가”는 공포도 느끼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위성은 카메라처럼 따라다니며 찍는 것이 아니라 수 시간 간격으로 찍기 때문에 지방에 간 김정은은 포착하기 어렵습니다. 워낙 사진 가격이 비싸다 보니 북한의 지방까지 샅샅이 살펴보긴 어렵습니다.하지만 특정 지역을 계속 주시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가령 원산에 있는 김정은의 별장 같은 곳은 이미 위성사진으로 북한을 감시하는 사람들에겐 주요 목표이죠. 김정은이 원산에서 물놀이하거나 승마하는 모습은 분명 어느 위성이든 찍을 겁니다. 암살의 불안에 떠는 김정은에겐 분명 달갑지 않은 일이고, 놀 때마다 께름칙한 생각이 들 겁니다.물론 상업위성으로선 김정은을 구분하긴 쉽지 않습니다. 145㎏의 체형이 북한에 또 있을까 싶긴 하지만, 뚱뚱한 체형의 인물이 찍혔다고 해서 그것이 김정은이라고 확실하게 단정할 순 없습니다.그러나 미국의 정찰위성이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대당 가격이 10억 달러가 넘는 미국의 정찰위성 ‘키홀(Key Hole·KH)’은 해상도가 0.15m급이라고 알려졌지만, 최신 위성의 경우 1㎝를 구별할 수 있는 초정밀 카메라를 탑재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정찰위성은 일반적으로 600㎞의 고도에서 하루에 약 14~15바퀴 정도 지구를 돌다가 필요시엔 200~300㎞까지 고도를 낮춰 정밀한 사진을 찍습니다. 미국 국방부는 내년까지 무려 1000개의 정찰위성을 운용할 계획입니다. 이 정도면 김정은을 전담 감시하는 위성도 꽤 있을 것입니다.시간이 갈수록, 기술이 진보할수록 김정은의 불안감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김정은이 그렇게도 군사정찰위성을 갖고 싶어 집착하는 이유도, 어쩌면 그의 마음속 깊이 정찰위성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김정은이 위성사진을 두려워할 이유는 또 있습니다. 저는 국제부 기자였던 2009년 이런 기사를 쓴 적이 있습니다.“강화도 면적의 2.5배 정도에 불과한 중동의 소왕국 바레인이 위성사진을 제공하는 인터넷 사이트 구글어스 때문에 비상이 걸렸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가 26일 보도했다. 요즘 바레인 국민의 ‘소일거리’는 구글어스를 통해 자기 나라를 구경하는 것. 왕족이 국토의 80%를 소유한 부익부 빈익빈의 모순을 이들은 구글어스를 보며 깨닫고 있다. ‘왕족 아무개의 정원과 요트 계류장, 수영장은 정말 호화롭기 그지없다’ ‘어떤 왕궁은 인근 마을 3∼4개를 합친 것보다 더 크다. 왕궁 때문에 바다에 나가는 길이 막혔다’ 등등 불만은 끝이 없다.물론 바레인 국민이 이전에도 현실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높은 담장에 막혀 직접 눈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구글어스는 왕족들의 땅이 얼마나 되고 어떻게 사는지, 그들 때문에 자신의 삶은 어떻게 영향을 받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게 한다. 국민 여론이 악화되기 시작한 것은 당연지사. 바레인은 1인당 국민소득이 한국과 비슷한 1만5000달러 정도지만, 왕족의 재산을 제외하면 집 없는 가난한 사람이 많다. 국민의 60% 이상은 시아파이지만 하마드 알할리파 국왕은 수니파다.각료직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왕족은 언론과 정보기관, 학계를 모두 통제하며 지금까지 평온하게 국정을 운영해 왔다. 하지만 인터넷과 위성TV가 등장하면서 평온에 금이 가고, 국부의 공평한 분배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여론이 악화되자 바레인 정부는 사생활 침해를 구실로 올해 초 구글어스를 차단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역효과를 낳았다. 많은 사람이 파일로 된 지도를 e메일로 주고받기 시작했고, 어떤 사이트는 접근 차단을 해제하는 프로그램을 제공하기도 했다.”바레인이 이럴진대 북한은 어떻겠습니까. 김정은은 인민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나는 고난의 행군 시기 풋강냉이 한 이삭으로 끼니를 에울 때도 있었으며 거의 매일 줴기밥(주먹밥)과 죽으로 끼니를 에웠다. 나는 고난의 행군 전 기간 장군님(김정일)을 모시고 인민과 함께 있었고 인민들이 겪는 고생을 함께 겪었다. 훗날 역사가들이 고난의 행군 시기 김정은은 어떻게 지냈는가 하고 물으면 나는 그들에게 떳떳이 말해줄 수 있다. 고난의 행군 시기 나는 호의호식하지 않았다. 나는 인민들과 같이 어렵게 살았다.”그런데 위성사진이 공개되면 죽을 먹고 산다는 김정은의 호화별장 수십 개가 드러납니다. 김정은의 별장은 경계가 삼엄하고, 높은 나무들로 막혀 있어 인민은 전혀 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위성은 김정은이 얼마나 호화롭게 사는지, 얼마나 인민들에게 거짓말을 해왔는지를 사진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이것들은 북한이 인터넷에서 제일 먼저 지우고 싶은 사진들일 겁니다.시간이 갈수록 위성 기술은 점점 진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위성의 능력이 향상될수록 ‘은둔의 왕국’ 북한의 베일은 점점 벗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어쩔 수 없이 구축함 사고를 공개했지만, 앞으로 김정은에게 가해지는 압박은 더욱 커질 것입니다. 김정은과 북한을 지켜보는 ‘보이지 않는 눈’-위성의 맹활약을 기대합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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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범죄로 바뀐 청진조선소의 ‘기적’

    김정은이 했다는 수많은 말 중에 개인적으로 제일 황당하고 웃긴 말은 이것이다. “나는 ‘고난의 행군’ 시기 풋강냉이 한 이삭으로 끼니를 에울 때도 있었으며 거의 매일 줴기밥(주먹밥)과 죽으로 끼니를 에웠다. 나는 고난의 행군 전 기간 장군님(김정일)을 모시고 인민과 함께 있었고 인민들이 겪는 고생을 함께 겪었다. 훗날 역사가들이 고난의 행군 시기 김정은은 어떻게 지냈는가 하고 물으면 나는 그들에게 떳떳이 말해줄 수 있다. 고난의 행군 시기 나는 호의호식하지 않았다. 나는 인민들과 같이 어렵게 살았다.” 고난의 행군 시기는 북한에서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은 1990년대 중반을 말한다. 만약 이때 김정은이 정말로 스위스가 아닌 북한에 있었다면 지난달 21일 발생한 구축함 진수 사고의 책임을 물어 홍길호 청진조선소 지배인을 체포하기 전에 상부터 주었을 것이다. 고난의 행군 때 함경북도 청진시 청진조선소에선 많은 기술자가 굶어 죽어서 선박 생산이 중단됐다. 나중에 군수공업부 산하 일개 직장으로 겨우 배속돼 어뢰정이나 소형 잠수함을 종종 만들긴 했지만, 대형 군함 건조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김정은 지시에 청진조선소에선 5000t급 구축함을 만들어 냈다. 진수할 때 모로 넘어지긴 했지만, 껍데기라도 그럴싸하게 만들어 진수대에 올려놓은 것은 청진조선소의 실제 건조 능력으로 볼 때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돈을 들여 대형 드라이독을 만들어 준 남포조선소는 이번에 5000t급 구축함 진수에 성공했지만 청진조선소에는 드라이독이 없었다. 이 차이 때문에 남포조선소 지배인은 영웅이 됐겠지만, 청진조선소 지배인은 용납할 수 없는 범죄자가 됐다. 같은 규격 군함을 두 조선소에서 동시에 만들게 한 것은 삼척동자도 이해하기 어려운 무지의 결정이다. 초도함을 먼저 만들어 띄워 문제점을 찾고 이를 반영해 두 번째 군함을 만드는 것이 상식이다. 또, 이미 군함을 만든 곳에서 다시 만든다면 훨씬 쉽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김정은은 조급증에 사로잡혔는지 이런 상식을 뒤집고 대형 군함 건조 경험이 전혀 없는 남포와 청진 두 곳에서 동시에 구축함을 만들게 했다. 그러니 청진조선소 사고의 우선적 책임은 김정은이 져야 한다. 지배인과 공장 간부들을 닥치는 대로 체포하기 전에 조선소에 기술자나 숙련공은 제대로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함경북도는 이미 고난의 행군 전인 1980년대 말부터 식량을 비롯한 각종 배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생산물도 나오지 않고 자재를 빼돌려 팔 수도 없는 조선소는 청진에서도 기피 직장이었다. 1970, 80년대 대형 선박을 건조했던 기술자와 숙련공들은 조선소를 계속 다니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 직장을 버리고 뿔뿔이 자기 살길을 찾았다. 김정은이 고난의 행군 시기 청진에 와 봤다면, 그 참혹한 과거를 딛고 구축함까지 만들어 냈다는 사실 자체에 눈물부터 흘려야 마땅하다. 솔직히 청진조선소에 구축함을 만들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놀랍다. 이번 구축함 전도(轉倒) 사고는 배급도, 월급도, 인센티브도 없는 북한 현실이 만든 대표적인 사고라 할 수 있다. 설령 구축함이 제대로 진수됐다고 해도 이후 조선소 노동자들에게 배급이라도 제대로 해 줬을지 의문이다. 조선소와 함께 국가과학원 역학연구소, 김책공업종합대학, 중앙선박설계연구소 등의 과학자 집단도 용납할 수 없는 범죄 집단이 됐다. 이들은 군함의 안전성이나 진수 계산을 담당했을 것이다. 졸지에 처벌받게 될 과학자 중에 고위 간부 자식은 당연히 없다. 사무실에 앉아 계산하고 설계도를 그리는 일은 북한에서 매우 인기 없는 직종이다. 이런 일을 해 본들 먹고살기 어렵다. 직업 특성상 연구원들은 대학을 졸업했겠지만, 정말 힘없는 집안 자식일 확률이 높다. 조선시대 양반이라 할 만한 고위 간부는 자식을 이런 곳에 보내지도 않는다. 이런 직업은 중인 신분에 불과하다. 똑똑한 사람들은 대학 졸업 후 연구소에 발령 받더라도 어떡하든 빠져나와 간부가 되거나 외화벌이 기관에 들어간다. 연구소에 남으면 ‘실패한 인생’일 뿐이다. 그러니 열심히 일할 동기도 없다. 김정은은 명품으로 온몸을 휘감은 딸을 데리고 다니며 화를 버럭버럭 내기 전에 북한 현실부터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매일 줴기밥과 죽으로 끼니를 에워보길 바란다. 그러면 세상이 달리 보일 것이다.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5-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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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李 대통령은 옥류관 냉면을 먹을 수 있을까[주성하의 ‘北토크’]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2005년은 분단 이후 남북 관계가 최고로 좋았던 해였습니다. 그런 시절도 있었나 싶을 정도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때의 이야기지만, 아무튼 그해엔 마음만 먹으면 민간인도 큰 제한 없이 평양 관광을 갈 수 있었습니다.그해 가을 통일교 산하 평화항공여행사는 서울에서 평양 관광상품 판매를 시작했습니다. 1박2일 일정에 110만 원이나 했지만 예약이 몰렸습니다.평양 관광 일정은 단순했습니다. 전세기를 타고 서해를 돌아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하면 김일성 동상이 있는 만수대를 우선 방문하고, 주체사상탑, 개선문, 역사박물관, 만경대 순으로 일정이 이어졌습니다. 투숙은 4성급으로 자처하는 보통강호텔에서 했고, 300달러를 내면 능라도 5.1경기장에서 아리랑 대집단체조를 일등석에서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2005년에 평양을 방문한 인원은 모두 39만7192명이었는데, 이중 금강산 관광객 29만8247명을 빼면 9만8945명이 평양 등 금강산 이외의 지역을 방문했습니다.이 9만8945명 중에 4일 취임한 이재명 대통령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당시 이재명 대통령은 성남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을 때였습니다.2005년의 이 변호사는 인생에서 나름 ‘한가한’ 시간을 보낼 때였습니다. 그 이전에 인권·노동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거의 매년 ‘별’을 하나씩 달고 있었습니다.2002년 ‘분당 파크뷰 특혜 분양 사건’을 고발하면서 검사 사칭을 했다는 이유로 150만 원의 벌금을 확정받았습니다. 물론 그가 고발했던 김병량 당시 성남시장은 실제로 억대 뇌물을 받은 것이 확인돼 2007년 징역 1년의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2004년 이 변호사는 별을 두 개나 받았습니다. 하나는 그해 3월 공공병원 성남시립의료원 건립과 관련해 의회 본회의장에 난입했다는 이유로 특수공무집행방해죄로 기소돼 벌금 500만 원을 선고받았습니다. 또 두 달 뒤엔 혈중알코올농도 0.158%로 음주 운전에 적발돼 벌금 150만 원을 선고받았습니다.이 대통령은 성남시립의료원 사건으로 수배 중에 정치 입문을 결심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2006년 8월 성남시장에 출마했다가 낙선했습니다. 2005년은 그의 사회활동과 정치활동의 중간에 있던 시기입니다. 그리고 돈을 벌려고 애쓰던 시기였기도 했습니다. 2005년부터 그의 변호사 사무실은 폭력, 살인, 강간 사건도 변호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되는 일도 없고, 해놓은 일도 없던 시기 그의 눈에 평양 관광 상품이 들어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당시 한시적으로 누구에게나 평양 관광이 허락됐다고는 하나 북한에 관한 관심이 없었다면 선뜻 결심하기 어려운 일이긴 합니다. 2005년 한국 인구가 4818만 명이었으니 그해 방북한 9만8945명은 인구의 0.2%, 즉 500명 중 한 명에 불과합니다. 그만큼 당시의 이재명 대통령은 북한에 대한 각별한 관심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그로부터 13년이 지난 2018년 11월 15일, 경기도에 리종혁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을 단장으로 하는 북한 대표단 5명이 나타났습니다. 경기도가 판을 깐 ‘아시아태평양의 평화 번영을 위한 국제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였습니다.이때 이재명 당시 경기도지사는 “옥류관 냉면을 아직 먹어보지 못했다”라며 경기도에 옥류관 1호점 유치를 제안했습니다. 이에 이 부위원장은 “옥류관 분점이 경기도에 개관하기 전에 한번 (북측에) 왔다 갔으면 좋겠다”라며 초청 의사를 전달했습니다.2018년 9월 평양 남북정상회담 수행단에서 밀려난 ‘모욕’을 딛고 절치부심해 독자적인 방북 방법을 모색했던 이재명 당시 경기도지사가 드디어 끈을 잡은 순간이었습니다. 경기도에 평화부지사라는 자리를 신설해 이화영 전 의원을 영입했던 것에 대한 보답을 받는 듯했습니다. 방북을 활용해 몸값을 올리려는 시도는 절절했지만, 끝내 성공하진 못했습니다. 이듬해 2월 하노이 회담의 실패와 1년 뒤 찾아온 코로나 사태 등이 원인입니다. 그리고 이화영 부지사와의 인연은 그를 나락으로 끌고 들어갈 뻔했습니다.하지만 그는 윤석열 전 대통령이 넘겨준 ‘행운의 열쇠’를 뜻밖의 선물로 받고, 북한을 활용하지 않고도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옥류관 냉면을 먹고 싶어하는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라고 지금쯤 김정은에게도 관련 분석 파일이 올라갔을 겁니다. 아마 김정은은 좀 의아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북한에 온 남쪽 사람에게 옥류관 냉면을 먹여 보내지 않은 적도 있었던 말인가”라며 2005년의 상황을 학습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옥류관은 한국 방문객들의 필수 방문코스처럼 활용되지만, 2005년 가을엔 하도 많은 남쪽 사람이 단기간에 몰려와서인지 옥류관 냉면도 모자랐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일부는 먹었겠지만, 당시의 이재명 변호사는 북한이 옥류관 냉면을 일부러 접대할 레벨은 아니었던 것입니다.이재명 대통령은 임기 중에 옥류관 냉면을 먹을 수 있을까요. 2018년 4월 옥류관 수석 요리사를 판문점에 데리고 나타났던 김정은이 이재명 대통령에게도 옥류관 냉면으로 생색을 낼 마음이 생길까요.이 대통령은 20년 전 북한을 방문한 0.2%에 속했던 사람입니다. 북한에 대한 관심사가 예사롭진 않을 것이란 의미입니다. 이미 이 대통령의 그림은 윤곽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대북 전문가인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이 국정원장 후보자로 발탁된 것은 북한에 던지는 의미심장한 메시지입니다.남북 정상회담의 역사적 순간마다 다리를 놓은 것은 통일부보단 국정원이었습니다. 특히 한국 대통령의 방북 때엔 예외가 없었습니다.2000년 김대중-김정일의 1차 남북정상회담 때 임동원 당시 국정원장이 두 차례나 평양을 사전에 방문해 회담을 조율했습니다. 2007년 노무현-김정일의 2차 남북정상회담 직전에도 김만복 당시 국정원장이 2차례나 사전 방북해 의제를 조율했습니다. 2018년 9월 문재인 대통령의 방북 때도 ‘국정원-통일전선부 라인’이 접촉 창구였습니다. 멀리 보면 1972년의 7·4 남북공동성명도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평양을 방문해 실무를 담당했습니다.그러니 이종석 국정원장 임명이 무슨 뜻인지는 북한도 너무 잘 알 것입니다. 물론 당분간은 남북관계 전진이 이뤄질 가능성은 높아 보이진 않습니다. 북한은 2023년 적대적 두 국가론을 내놓고 남북 관계를 단절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한국과의 관계를 빠르게 복원할 만한 절실함은 없습니다.북한은 이미 러시아에 바짝 붙어 숨구멍을 열어놓았습니다. 또 한국에서 얻을 수 있는 당근도 마땅치 않습니다. 유엔의 강력한 대북 제재가 여전히 유효하므로 한국이 북한에 줄 수 있는 것도 많지 않습니다. 이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보다 무작정 앞서 나가기도 애매합니다.그럼에도 5년은 정말 긴 시간입니다. 앞으로 대북 접촉의 일선에서 뛸 ‘선수’들에게 옥류관은 참으로 많이 오르내리는 이름이 될 것 같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옥류관 냉면을 먹는 장면을 볼 수 있을까요?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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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숨 걸린 북한의 ‘시범껨’, 걸린 놈만 불쌍한 공포의 생존게임[주성하의 ‘北토크’]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시범껨’이란 말은 북한 사람들이 정말 많이 쓰는 말입니다. 북한 국어사전엔 없는데, 구글에 ‘시범껨’이라고 쳐보니 이런 답변이 나옵니다.“‘시범껨’은 ‘시범경기’ 또는 ‘시범게임’을 줄여서 부르는 표현입니다. 주로 야구에서 사용되지만, 다른 스포츠나 게임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즉, 공식적인 경기 시작 전에 선수들의 컨디션을 점검하거나, 새로운 규칙이나 전략을 시험해보기 위해 치르는 연습경기를 뜻합니다.”한마디로 남쪽에서 시범껨은 연습경기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하지만 북한에선 ‘본보기 처벌’이라는 전혀 다른 공포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시범껨에 걸리지마” “시범껨에 걸려 총살됐대” 하는 식으로 쓰지, 이걸 시범경기로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언제부터, 또 왜 본보기 처벌이 ‘시범껨’이라는 단어로 통용되기 시작했는지 알 순 없습니다만, 시범껨에 걸리면 저지른 죄의 형량보다 훨씬 더 높은 수위의 처벌을 받게 됩니다. 본보기로 보여주어 경종을 울리려는 목적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며칠 전 북한에서 또다시 ‘시범껨’에 걸릴 사안이 발생했습니다. 22일에 새로 건조한 5000톤급 구축함을 진수하다가 배도 띄우지 못하고, 함선이 파손된 것입니다.현장에서 지켜본 김정은은 대노했습니다. 청진까지 가려면 평양에서 차나 열차를 타고 최소 이틀은 걸리는데, 그 먼 길을 갔다가 눈앞에서 배가 뒤집히는 것을 보니, 눈도 뒤집힌 것 같습니다. 김정은은 “있을 수 없고 용납할 수 없는 심각한 중대 사고이며 범죄적 행위”라며 “우리 국가의 존위와 자존심을 한순간에 추락시킨 이번 사고 책임자들을 엄중하게 문책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문책 대상까지 콕 찍었는데, 당 중앙위원회 군수공업부, 국가과학원 역학연구소, 김책공업종합대학, 중앙선박설계연구소, 청진조선소의 간부들을 상대로 조사를 진행해 책임 소재를 가리라고 지시했습니다. 김정은이 용납할 수 없는 범죄라 했으니 또 피바람이 불게 생겼습니다. 북한에선 친한 사람들끼리 “군함 만들던 사람들 시범껨에 걸렸네. 어쩌냐. 불쌍하다”고 술렁거릴 겁니다. 군함 건조자들도 자기들 딴엔 최선을 다했을 것입니다. 성공했으면 영웅이 됐을 것을 졸지에 범죄자로 몰리게 생겼으니 한 순간의 실패로 본인과 가족의 인생이 끝날 판입니다.● 시범껨에 걸린 지방 간부들북한에선 이번처럼 시범껨에 걸려든 사람들이 수시로 나옵니다. 올해의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1월에 벌어졌습니다. 2025년 1월 27일에 소집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30차 비서국 확대회의에서는 자강도 우시군과 남포시 온천군의 지방간부들의 세도와 부정부패를 특대범죄로 규정하고 공개 숙청했습니다.회의는 극히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습니다. 주석단 가운데 앉은 김정은은 담배를 피우며 계속 간부들을 노려봤고, 회의 도중 박정천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과 조용원 당 조직비서를 불러내어 회의장의 누군가를 삿대질하면서 소리치기도 했습니다. 공식 발표 내용도 무시무시합니다. 일단 우시군에 대해선 이렇게 규정했습니다.“지방의 세도꾼, 관료배들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당과 인민 사이의 성스러운 단결의 성새를 허물려 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 당에 있어서, 우리 인민에게 있어서, 우리 제도와 우리 법권에 있어서 추호도 용서할 수 없는 특대형 범죄사건이다.”북한 전문매체 데일리NK의 자강도 소식통에 따르면 회의 나흘 뒤인 31일 우시군 주민들 앞에서 군 농업감찰기관 감찰원과 안전부장 등 관련자 10여 명이 공개 처형됐다고 합니다.온천군에 대한 단죄 내용도 끔찍합니다. 북한 발표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얼마 전 온천군에서는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 결정관철을 위한 군당 전원회의 준비를 너절하게 하고 회의를 심히 형식적으로 진행하고 나서는 돌아앉아 당일군들을 포함한 40여명의 일군들이 집단적으로 부정행위를 감행하는 특대사건을 발생시키였다.이것은 당의 각급 지도간부들이 봉사기관들에서 음주접대를 받는 것과 같은 안일해이된 생활을 하지 말데 대한 당내 규률을 란폭하게 위반한 행위로서 우리 당 력사에 이번처럼 군당책임일군이 직접 조직하고 군당일군들을 비롯한 군안의 수십 명에 달하는 당, 행정 책임일군들이 무리를 지어 몰려가 그러한 부정행위를 감행한 망동은 일찌기 없었다.온천군에서 공공연히 자행된 집단적인 음주불량행위는 규률 건설에 관한 당의 로선에 전면배치되는 행위이며 사건의 주모자, 가담자들은 지도간부로서의 초보적인 자격도 없는 썩어빠진 무리, 방자한 오합지졸의 무리들이라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이 정도면 온천군에서도 끔찍한 공개 처형이 이뤄지고, 아주 운이 좋은 일부는 감옥에 갔을 것 같습니다. 이 사건의 여파로 김정은의 신임을 듬뿍 받던 조용원 조직비서도 두 달 넘게 혁명화를 갔다가 얼마 전에 복귀한 것으로 파악됩니다.● “걸린 놈만 억울하지….”이런 사건을 접하는 북한 주민들의 생각은 다릅니다. “당 간부들이 어찌 저런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냐”고 분노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늘 그랬듯이 주민들은 “우시군과 온천군 간부들이 시범껨에 걸렸네” “걸린 놈만 억울한거지”라며 쯧쯧 혀를 차고 말 겁니다.그들이 그러는 것은 당연한 반응입니다. 우시군 간부들이 저질렀다는 범죄는 군량미 부족분을 메우기 위해 가택수색을 했고, 그래도 식량이 나오지 못한 가정에선 짐승이나 가전제품을 가져간 것이라고 합니다. 당초에 각 지방별로 군량미를 무조건 보장하라는 지시는 김정은이 하달한 것입니다. 그 지시를 집행하지 못하면 처벌을 받기에 지방 간부들이 강제적인 방법으로 집행했을 뿐입니다. 할당된 수량은 무조건 바치되, 쥐어짜지는 말라고 하면 간부들보고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김정은도 해답은 내놓지 못합니다.온천군 간부들은 회의 후에 여성들과 온천에 가서 문란하게 놀았던 것이 발각됐다고 합니다. 물론 지방 간부들이 잘못한 것은 맞지만, 솔직히 북한에서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정직한 간부도 거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왜냐면 노동당이 하라는 대로 해서는 절대 간부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뇌물도 주고, 아부도 하고, 접대도 해야 간부가 될 수 있습니다.높이 올라갈수록 뇌물 액수도 커지고, 접대의 규모도 달라집니다. 들키지 않아서 그렇지 지방의 가난한 온천군보단, 뇌물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는 평양을 조사하면 몇 배 더 심한 일도 많을 겁니다.하지만 어느 순간 당 간부들의 부정부패에 경종을 울려야 되겠다 싶어진 김정은이 지방 ‘새우급’ 간부들이 벌인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시범껨 대상으로 삼은 것입니다. 이렇게 ‘시범껨’이 이뤄지면 간부들은 한두 해는 조심히 지내게 됩니다.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 또 언제 그랬듯이 다시 원래 살던 대로 돌아갑니다. 간부들에게 뇌물과 접대를 받지 말라는 말은 호랑이에게 고기를 먹지 말라는 말과 같습니다.● 수시로 바뀌는 분노의 타깃과거 수십 년의 역사를 돌아볼 때 북한 시범껨의 진짜 문제는 연속성도, 일관된 처리 기준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김 씨 일가의 기분에 따라 시범껨의 대상이 수시로 바뀝니다. 올해 들어선 간부들의 부패와 진수식 실패 때문에 분노가 터져 나왔는데, 다음에도 똑같은 사안으로 분노할 가능성은 낮습니다. 분노할 일은 널리고 널렸습니다.실례로 도둑과 강도 사건이 많아진다는 보고가 들어가 김정은이 “사회에 경종을 울리라”고 하면 그때부터 전국 곳곳에서 공개총살이 벌어집니다. 이럴 땐 총살을 당할 죄가 아님에도, 해당 시기 그 지역에서 가장 중한 죄를 저질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공개총살 대상이 되는 겁니다. 이런 사람을 시범껨에 불행하게 걸려들었다고 합니다.김정은 지시를 수행하지 못한 죄부터 시작해 한국 드라마를 본 행위, 장사를 한 행위, 부를 축적한 행위, 탈북과 밀수를 한 행위, 군 기강을 무너지게 한 행위, 뇌물 받는 행위, 물자를 빼돌린 행위, 공장 가동을 제대로 하지 않은 행위, 부화행위(불륜) 등등 시범껨에 걸릴 사안들은 너무나 많습니다.바꿔놓고 말하면, 우시군 간부들이 만약 주민들을 수탈하지 않아 군량미를 전량 바치지 못하는 경우에도 “장군님의 지시를 받들지 않은 특대형 범죄사건”에 해당돼 시범적으로 처형될 가능성이 있다는 뜻입니다.북한 사람들은 “숨만 쉬는 것 빼고는 다 불법”이란 자조 섞인 불만을 늘 토로합니다. 모든 것이 ‘비사회주의적 행위’에 해당되는 북한인지라, 김정은이 어느 대목에서, 어떤 때 화를 낼지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무리로 당하는 시범껨김정은 시대엔 시범껨에 당하는 대상이 개인에서 집단으로 이동하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습니다. 김정은 집권 초기엔, 그의 분노를 자극한 개인이 희생양이 됐습니다.자신이 그려준 그림대로 미림승마구락부를 짓지 않았다고 2013년 5월에 처형한 북한군 설계연구소장이나, 전기와 사료가 없어 자라를 제대로 키울 수 없다고 변명했다고 2015년 5월 처형한 평양자라공장 지배인이 대표적입니다.하지만 최근엔 우시군이나 온천군처럼 지역이나 특정 기관 간부들 전체가 대상이 되는 사례가 급격히 늘고 있습니다. 이런 경향은 코로나가 발생한 2020년부터 급격히 두드러지고 있습니다.그해 2월 뇌물사건으로 김일성고급당학교 당위원회를 해산하고 수십 명을 처벌했고, 8월엔 방역 위반을 이유로 함경북도 온성군 당위원회, 보위부, 안전부, 국경경비대를 해산시켰습니다. 이중 10여명이 처형되고, 나머지 간부들은 농민으로 신분을 강등시켜 내쫓았습니다. 같은 달엔 평원군 안전부도 해산시켜 전원 처벌이 이뤄졌습니다. 11월엔 입시비리를 이유로 평양의학대학 당위원회를 해산하고 간부들을 모두 처벌했습니다.2022년 8월엔 홍수 피해로 인한 사망자 숫자를 속였다는 이유로 평안남도 도당을 해산하고 간부 300명을 현장 체포하기도 했습니다.과거 북한 간부들이나 주민들의 목표는 “최소한 나만은 시범껨에 걸리지 말자”는 것입니다.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릅니다. 처벌까지 집단주의가 적용되니 내가 잘한다고 해서 안전하다는 보장이 없습니다.점점 북한은 더욱 무서운 사회로 진화돼 가고 있습니다. 간부들과 주민들은 점점 숨을 쉬기 어려운 상황이 되고 있습니다. 이럴 때는 최대한 숨소리도 내지 않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김정은 차를 추월했다간…올해 초 북한은 개인들에게 자가용 승용차 소유를 허용했다고 합니다. 이러면 주민들이 감격해 눈물을 흘릴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차를 사고 다니다가 시범껨에 걸리지 않게 조심하자”는 것이 모두의 공통적인 생각일 겁니다. 이미 차를 타고 가다가 김정은의 분노를 샀던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평양에 소문이 난 대표적 사례를 든다면 2010년 초 북한군 총정치국 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가던 황해도 4군단 모 사단장이 새로 선물 받은 신형 일제 팔라딘 승용차를 타고 신이 나서 달리다가 평양시 입구에서 김정은이 탄 벤츠 S600을 추월한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후계자 신분으로 얼굴이 공개되지 않았던 김정은은 혼자 운전을 하고 있었는데, 사단장의 차를 재추월해 멈춰 세운 뒤 째려보고 갔다고 합니다.다음날 열린 총정치국 회의에선 그 사단장과 운전병은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회의장에 온 사단장이 온밤 고민하며 “차종을 보니 장군님 아들 같은데, 내가 잘못 걸린 것 같다”고 하소연하는 바람에 회의 참석자들이 다 알게 돼 소문이 났다고 하네요.그해 5월 5일엔 군에 ‘청년대장 동지 방침’이란 것이 하달됐는데 “요새 군 운전사들이 무법천지이니 강하게 단속해 엄중히 책임을 물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즈음 평양에서 원산으로 가던 김정은의 차가 마식령에 있는 길이 4㎞의 ‘무지개 동굴’에 들어섰는데, 매연을 새까맣게 내뿜으며 앞서 가던 북한군 화물차가 김정은의 경적을 무시하고 비켜주지 않았던 것이 발단이었습니다. 아마 운전병은 매연으로 가득 차 잘 보이지 않는 터널에서 민간 승용차가 뒤에서 경적을 울려대니 “감히 군대 차량에게”라는 심정으로 더 천천히 갔을지도 모릅니다. 5월 5일 방침 뒤 인민무력부장도 단속돼 청사에서 내려다보이는 구내 운동장에서 운전병과 함께 2시간 넘게 제식훈련을 해야 했다고 합니다.지금은 김정은이 경호를 받으며 다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혹시 김정은이 밤에 암행어사처럼 평양거리를 몰래 다니다가 “자가용차를 허용했더니 평양 교통이 엉망진창이 됐다”고 화라도 내면 큰일입니다. 당사자 운명이야 더 말할 필요가 없겠죠. 또 최악의 경우 자가용차들이 몰수될 수도 있고, 교통법규를 익히게 한다고 몇 달 고생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니 자가용 허용에도 북한 사람들의 마음속엔 ‘절대 시범껨에 걸리지 말자’는 걱정이 더 커질 수 있는 것입니다.김정은의 분노는 늘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다음번 시범껨에 걸릴 불운한 자들이 누가 될지 그건 누구도 모릅니다. 다만 김정은과 가까워질수록 죽을 확률도 높아지는 것은 분명합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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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가용 보유가 가져올 북한의 변화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

    북한이 올 초부터 자가용 승용차 소유를 전격 허용했다는 대북 소식통들의 증언이 잇따르고 있다. 실제로 자가용을 사는 사람들이 아직까지 거의 없어 정책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더 지켜봐야 한다. 그럼에도 이것이 사실이라면 개인 휴대전화 허용보다 더 북한 사회에 충격을 줄 수 있는 변화라고 할 수 있다. 2017년에도 북한이 자가용 승용차 보유를 허용했다는 뉴스가 나왔지만, 당시엔 개인 명의 차량 등록은 불가했고 사업소나 기관 명의로 해야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이번엔 개인 명의 등록까지 허용했다고 소식통들은 전했다. 물론 지금까지도 자가용 소유는 북한 법률상 불법은 아니었다. 북한 민법 59조는 ‘공민은 살림집과 가정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가정용품, 문화용품, 그 밖의 생활용품과 승용차 같은 기재를 소유할 수 있다’고 개인 소유권 대상을 규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자가용을 소유한 사람은 총련 귀국자에 한정돼 있었다. ‘개인 소유의 성격과 원천’을 규정한 민법 58조에 ‘개인 소유는 노동에 의한 사회주의 분배, 국가 및 사회의 추가적 혜택, 터밭(텃밭)경리를 비롯한 개인 부업경리에서 나오는 생산물, 공민이 샀거나 상속, 증여받은 재산, 그 밖의 법적 근거에 의하여 생겨난 재산으로 이루어진다’고 규정됐기 때문이다. 차량을 살 수 있는 큰돈은 ‘그 밖의 법적 근거에 의하여 생겨난 재산’밖에는 만질 수 없는데, 지금까지 이 ‘재산’은 일본에서 송금이 오는 총련 귀국자들이나 인정받을 수 있었다. 북한에서 자가용 승용차 보유를 허용하려면 바뀌어야 하는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이 58조 적용의 유연성이다. 차량 구매 비용은 분배나 개인 부업으로 충당할 수 없다. 북한 같은 체제에선 많은 돈을 합법적으로 벌었다고 증명하는 일은 매우 위험하다. 증명하려다가 오히려 재산이 공개돼 ‘비사회주의적 행위자’로 처벌받을 위험이 높다. 자가용 소유는 외국과의 무역을 통해 얻은 개인 수입이나, 외국에서 벌어온 재산, 장사를 통해 번 재산을 모두 ‘법적 근거에 의하여 생겨난 재산’에 포함시켜 인정해야 가능하다. 또 운전면허 제도도 개편해야 한다. 북한에서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으려면 ‘자동차운전사양성소’에서 1년을 공부해야 하는데, 입학 자격과 연령이 매우 제한적이다. 여러 장애물이 있겠지만 자가용 승용차 보유가 허용되면 북한 주민들의 욕망을 크게 자극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북한에 자가용 승용차 10만 대 정도 팔릴 수 있는 구매력은 충분히 존재한다. 당장 평양에만 집값이 수만 달러인 주택이 수십만 채 있다. 대다수 거주권은 달러로 거래된다. 평양 주택 구매 자금도 이 58조에 따르면 태반이 불법이다. 하지만 주택만큼은 이 조항이 유명무실해졌다. 처벌의 칼날을 쥐고 있는 자들부터 좋은 집에서 살고 있으니 다른 누굴 처벌할 명분이 없는 것이다. 자가용 승용차도 권력층부터 보유하게 되면 주택과 마찬가지로 민법 조항은 사문화될 것이다. 자가용 승용차 보유를 허용해도 아무나 무작정 좋은 차를 살 순 없다고 한다. 메르세데스벤츠나 렉서스 같은 고급 승용차는 여전히 고위 간부만 탈 수 있고 개인은 중국산 차량만 보유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중국에서 팔리는 판매가격 5000달러 안팎의 4인용 전기차 등은 북한에서도 잘 팔릴 것이다. 폐기 직전의 값싼 중고차도 북한에 대량으로 들어갈 것이다. 휴대전화는 보유 허용 초기에 장사꾼이 많이 샀다. 실시간 정보 교환은 이들에게 더 큰 부를 안겨 주었다. 자가용 승용차도 마찬가지로 있는 자와 없는 자 사이 삶의 질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가 될 것이다. 팔 물건을 넣은 배낭을 메고 다니는 장사꾼은 도태될 것이며 물류 이동은 훨씬 활발해질 수밖에 없다. 자가용 보유의 의미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더 비싼 집과 차는 인간의 탐욕을 자극하는 가장 대표적인 상품이다. “우리 집은 왜 차가 없느냐”는 자녀의 투정에 초연할 수 있는 부모는 많지 않다. 자가용 보유가 허용됐다고 해도 아직은 정말로 믿고 사도 될지 몰라 서로 눈치 보는 시기일 것이다. 하지만 권력이나 인맥을 믿고 용감하게 사는 자들이 점점 나오게 될 것이고, 그들이 무사하다는 것을 보면 너도나도 사게 될 것이다. 나중에 자금 출처를 들먹이며 자가용을 뺏기도 쉽지 않다. 차를 몰수한다는 것은 곧 부유층에게서 ‘당과 수령에 대한 충성’도 빼앗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5-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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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간계 1위’도 피하지 못한 북한의 ‘혁명화’[주성하의 ‘北토크’]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북한 김정은이 9일 평양의 러시아대사관을 방문했을 때 언론의 조명을 받은 인물이 있었습니다. 조용원 노동당 조직비서입니다.조용원은 김정은 집권 이후 해임과 강등, 복권을 번갈아 당하며 롤러코스터를 탄 다른 고위 간부들과는 다르게 한 번도 출세 가도에서 밀려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각종 행사 때마다 김정은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습니다.김정은의 신임은 그의 직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북한에서 노동당 조직비서는 비유하면 ‘인간계 서열’ 1위인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북한의 신계와 인간계북한에서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신계(神界)’의 위치엔 1남 4녀가 있습니다. ‘김정은과 포우먼(이설주, 김여정, 김주애, 현송월)’은 인간계가 감히 건드릴 수도, 넘볼 수도 없는 위치입니다.인간계는 신계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존재들일 뿐이지만, 그래도 나름 서열이 있습니다. 인간계의 실제 권력 서열은 노동신문 등을 통해 공식 발표되는 서열과 차이가 있습니다.북한에선 ‘인사권, 돈줄, 칼자루’로 비유할 수 있는 3대 권력 중 하나는 쥐고 있어야 진짜 힘 있는 실세로 인정받습니다. 칼자루는 국가보위성처럼 남을 숙청할 수 있는 힘을 의미합니다.최룡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같은 경우는 공식 서열상으론 2위로 발표되지만, 인사권이나 돈줄, 칼자루 중 하나도 제대로 틀어쥔 것이 없기 때문에 사실상 허수아비라고 볼 수 있습니다. 3대 권력 중 으뜸은 인사권입니다. 노동당 조직비서는 북한의 대다수 간부에 대한 승진, 해임 등의 인사 권한을 갖고 있는데, 국가보위상도 조직비서의 눈치를 봐야 합니다. 물론 노동당 비서나 군 대장 이상, 내각 상급 인사는 김정은이 하겠지만, 그 나머지에 대해선 조직비서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하지만 ‘인간계 서열’ 1위라고 해도 신계의 눈에 나면 별 수 없습니다. 조용원의 신상에 빨간 불이 켜진 것은 올해 1월부터인데, 처음엔 김정은이 가는 행사에 빠지는 것부터 조짐이 보였습니다. 그러다 2월엔 상무위원임에도 현지시찰 보도에서 이름이 빠지거나 주석단에서 밀려났고, 급기야 2월 28일 이후엔 종적이 묘연해졌습니다.한국 언론에선 조용원이 숙청된 것이 아니냐는 추정이 나왔는데, 9일 김정은의 러시아대사관 시찰 때 모습을 드러냈고 비서라는 직책까지 노동신문에 실렸습니다. 이에 정부는 조용원이 정황상 ‘혁명화’를 마치고 복귀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계 1위도 피할 수 없는 ‘혁명화’란 무엇일까요.# 인간계의 처벌 종류이를 알려면 먼저 북한에서 ‘인간계’가 받는 형벌의 종류부터 알 필요가 있습니다. 북한의 공식적인 형벌은 모두 8가지입니다. 구체적으로 사형, 무기노동교화형, 유기노동교화형, 노동단련형, 선거권박탈형, 재산몰수형, 자격박탈형, 자격정지형입니다. 사형이나 무기징역을 의미하는 무기노동교화형은 최고 수위의 처벌입니다. 나머지 형벌은 교화소, 감옥, 노동단련대 등에서 집행됩니다.하지만 북한이 어디 법대로 사는 사회입니까. 법 이외의 끔찍한 처벌도 존재하지만, 외부에 알려질까 봐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형법 이외의 대표적 처벌로는 21세기 지구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연좌제를 들 수 있습니다. 관리소(정치범수용소)는 연좌제의 대표적인 부속물입니다. 멸족을 시켜야 하는 사람의 가족을 수용해 영원히 사회와 격리시키는데, 정치범수용소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일은 외부에 공개되지도 않았습니다.정치범수용소도 멸족 해당자들이 들어가는 ‘완전통제구역’과 복권 가능성을 열어둔 ‘혁명화구역’으로 나뉩니다. 혁명화구역에서 수감됐다가 탈북한 사람들은 여럿 있지만, 완전통제구역 출신은 단 한 명도 탈북하지 못했습니다. 정치범수용소에는 전성기였던 1970년대 중반엔 100만 명 가까이 수감돼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지금은 수감자가 약 20만 명 정도로 추산합니다.또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추방기지’라는 것도 있습니다. ‘반동분자’의 일가족들을 깊은 산골에 종신 유배시키는 곳으로 정치범수용소의 혁명화구역과 비슷합니다. 정치범수용소나 추방기지가 무서운 이유는 대다수 수감자들이 재판도 없이 하루아침에 끌려와 평생을 짐승처럼 살아야 한다는데 있습니다.실례로 장성택 사건에 연루돼 처형된 간부들의 가족은 하루아침에 차에 실려 정치범수용소에 갑니다. 이들 가족은 북한 형법을 대입했을 때 처벌할 조항도 없기 때문에 재판도 없이 끌고 가는 것입니다.# 간부가 대상인 혁명화‘혁명화’ 역시 형법에 없는 대표적 처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주로 간부들이 대상입니다. ‘혁명화 교육’ 또는 ‘혁명화 조치’라고도 합니다. 주로 대상자들을 지방 공장, 농장, 탄광 등에서 낮에는 노역을, 밤에는 김 씨 일가 관련 학습을 시킵니다.쉽게 비유하면 인간계 상위에서 살던 인물들을 인간계 바닥에 내려 보내 쓴 맛을 보게 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 주민들은 혁명화 갈 일이 없습니다. 그들의 일상이 곧 혁명화 과정이라 할 수 있으니깐 말입니다. 혁명화는 북한에서 고위 간부로 살려면 한 번쯤은 겪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객관적으로 간부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혁명화를 갈 때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북한 체육인들을 꼽을 수 있는데, 과거엔 한국 선수와의 대결에서 패배하면 당연한 절차처럼 혁명화를 갔습니다. 이것은 몇 달 동안의 육체적 및 정신적 처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간부들도 배운 것이 있으니 이렇게 아래 사람들에게 써먹을 때도 있는 것입니다.하지만 혁명화도 나름 무서운 점이 있습니다. 밑바닥에 내려가면 언제 올라올 수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혁명화 대상이 됐다가 죽을 때까지 복권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습니다.혁명화가 노리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육체적 고통보단, 정신적 고통이 크죠. 혁명화를 거친 사람들은 복권하면 김 씨 일가의 발바닥을 핥게 됩니다. 특히 김 씨 일가의 신임을 받아 큰 혜택을 누리던 고위 간부일수록 혁명화 요법은 훨씬 강하게 먹힙니다.# 혁명화의 본질혁명화를 통해 추구하는 것이 뭔지를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노동당 대남비서였던 김용순(1934~2003)을 꼽을 수 있습니다. 김용순은 분단 이후 최초로 열린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서 활약해 한국에도 잘 알려졌습니다. 김용순이 혁명화를 간 때는 1984년 10월입니다.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에 따르면 김용순은 “당 국제부도 외교부서인 만큼 폴카 등 사교춤을 배워두라”는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국제부 간부들과 부인들을 모아 춤판을 벌였다가 혁명화 대상이 됐습니다. 그는 “지도자 동지께서 시키는 대로 일처리를 했을 뿐인데 왜 이러냐”고 항의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그가 혁명화를 간 진짜 이유는 김정일의 눈 밖에 났기 때문입니다. 김용순은 노래를 잘 부르고, 춤을 잘 추고, 술을 잘 마시기로 유명했는데, 김정일의 저녁 기쁨조 파티의 고정 참석자였으며 그중 음주가무의 최강자였습니다. 그뿐이 아니라 당시 국제부 과장으로 있던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와 ‘바람이 났다’는 소문도 파다하게 퍼졌습니다.김정은은 적당한 구실을 붙여 김용순을 탄광 노동자로 내쫓았고 후임 국제비서로 황장엽을 임명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수호천사’였던 김경희가 아버지 김일성에게 끈질기게 복권시켜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김일성도 김용순이 아첨기가 심하다고 마뜩찮게 여겼지만, 성격이 유별난 딸을 이기진 못했습니다. 1년 반 정도 탄광 노동자로 일하던 김용순은 김일성고급당학교에서 재교육을 받는다는 명목으로 평양에 올라왔다가 1987년에 당 국제부 부부장으로 복귀했습니다.여기까지는 김 씨 일가의 눈 밖에 난 간부의 일반적인 혁명화 수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굳이 김용순을 사례로 든 것은 이후의 일 때문입니다. 북한 당 고위간부 출신의 탈북자에 따르면 김용순은 탄광에서 매일매일 충성의 일기를 적었다고 합니다.거기엔 ‘당의 신임을 져버렸을 때 나의 인생은 개나 버러지와 같은 인생이로구나’라는 대목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김정일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습니다. 똑똑한 김용순이 왜 혁명화를 보냈는지를 너무 잘 파악했으니 말입니다.김정일은 “참으로 실감나는, 우리 간부들에게 교양적 가치가 있는 일기”라고 평가하고 “이것을 출판해 당 간부들과 모든 국가 간부들에게 의무적으로 보게 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래서 당시 중앙기관 국장 이상급 간부들이 그걸 다 봤다고 합니다.“내 눈밖에 나면 너희들은 다 개나 버러지”라는 생각을 심어주는 것. “네가 가진 돈과 명예, 권력은 모두 나의 하사품이고, 충성을 다 하는 대가로 받는 것”임을 깨닫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혁명화의 본질입니다.# “몰랐어요. 벌레인줄을…”간부들은 혁명화를 가게 되면 자신을 지켜보는 수많은 감시의 눈들에게 각종 방법으로 “충복이 될 준비가 됐습니다”를 보여주기 위해 애씁니다. 남 먼저 일터에 나오거나 일기를 쓰거나, 충성의 편지를 바치는 등 수법은 다양합니다. 자신의 처지에 절망해 한숨만 쉬면 복권될 방법이 요원하다는 것을 누구나 압니다. 반세기 가까이 북한에서 유지돼 온 혁명화는 북한 인민의 생각도 바꾸었습니다.올해 우크라이나에서 전사한 북한군 일기에선 “제가 저지른 죄는 용서받을 수 없지만 어머니 조국은 나에게 인생의 새 출발을 할 수 있고, 재생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이번 작전에서 대오의 맨 앞에 달려갈 것이며, 목숨을 바쳐서라도 최고사령관 동지의 명령을 무조건 철저히 따를 것입니다. 김정은 붉은 특공대의 무패의 용감성과 희생성을 온 세계에 보여줄 것입니다”라는 구절이 발견됐습니다.그는 우크라이나 파병을 일종의 혁명화로 생각하고 일기를 통해 충성을 증명하려 했던 것입니다. 노동당에 입당하는 것이 그의 희망이었습니다.이번에 조용원은 두 달 만에 복귀했습니다. 그가 혁명화를 갔다 왔다면 모든 간부가 꿈꾸는 가장 최단기 혁명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그 기간 그는 “언제 다시 복귀할 수 있을까”라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겁니다. 복귀 후에도 “다신 가지 않겠다”는 각오를 매일 다지며 살고 있겠죠. 예전엔 김정은이 부르면 무릎을 꿇었지만, 앞으론 기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만약 조용원이 요즘의 한국 노래방에 왔다면, 정말 눈물 흘리며 부를 수 있는 ‘인생의 노래’를 쉽게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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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사증’이 뭐길래… 북한군은 왜 목숨을 내거는가[주성하의 ‘北토크’]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러시아 모스크바에서 9일 열린 전승절 80주년 기념식에 김정은은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28명의 국가수반이 선 붉은 광장 주석단에서 ‘원 오브 뎀’으로 비춰지는 것이 싫었던 것일까요. 아니면 경험해보지 못한 다자 정상 외교가 부담이었을까요.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치르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김정은이 일등공신이라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자국의 군수물자를 탈탈 털어 보내주고, 심지어 참전 병력까지 보내준 국가 지도자는 김정은 밖에 없습니다.국가정보원은 지난달 30일 러시아에 파병된 북한군 1만5000명 가운데서 47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중 전사자는 600여명이라고 밝혔습니다.김정은도 지난달 28일 노동신문에 발표한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군사위) 서면 입장문을 통해 러시아 파병 사실과 전사자 발생을 공식화했습니다.김정은은 “자랑스러운 아들들의 영용성을 칭송하여 우리 수도에는 곧 전투위훈비가 건립될 것”이라며 “희생된 군인들의 묘비 앞에는 조국과 인민이 안겨주는 영생 기원의 꽃송이들이 놓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몇 명이 희생됐다는 언급은 없었습니다.불과 몇 달 전만 하더라도 북한 당국은 러시아 파병 소식이 주민들 속에서 퍼지자 이를 유언비어로 규정하고 유포자 색출에 혈안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파병과 전사자 발생을 인정한 뒤엔 태도가 확 바뀐 것입니다. 앞으로는 이를 주민 교육 선전용 소재로 사용할 것입니다. 북한의 선전 방식은 상투적이죠. 주민들을 모아놓고 중앙에서 파견된 강사들이 이런 식으로 떠들 겁니다.“미제와 서방 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 우크라이나 괴뢰도당이 러시아 영토를 침범했다. 러시아가 곤경에 빠져 속수무책으로 밀리고 있을 때 일당백의 우리 특수병력이 전투에 참가해 단숨에 전세를 역전시켰다. 우리 군 한 개 소대만 나가도 우크라이나 괴뢰 한 개 대대가 겁에 질려 도망가기 급급했다.”“세계 2위의 군사력을 가진 러시아도 미제 장비로 무장한 우크라이나에 고전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지원한 포와 포탄, 미사일이 도착하자 상황이 급반전했다. 눈을 단 것처럼 정확한 포탄과 미사일이 목표를 정확히 타격하자 미제는 조선의 군사기술과 장비가 러시아보다 더 뛰어날 줄은 몰랐다고 아우성쳤다. 러시아도 지금 세계에서 제일 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국가는 조선이라고 감탄하며 각종 장비를 다 보내달라고 손을 내밀고 사정하고 있다.”실제 강연 내용은 더욱 황당할 겁니다. 북한의 내부 선전 강연 내용은 늘 저의 상상력보다 몇 발자국은 더 나갔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강군을 키워낸 김정은이 위대하다고 결론을 내고 침이 마르게 칭송할 겁니다.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우크라이나에서 최후의 순간까지 장군님을 그리며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졌다는 ‘영웅전사’들의 스토리가 쏟아져 나올 것이며, “이들의 뒤를 따라 제2의 OOO(영웅이라는 병사의 이름)이 되자”는 구호가 전국 각지의 생산현장과 학교들에 걸리겠죠.그렇다면 북한 주민들은 저런 선전을 믿을까요. 안타깝지만, 아마 80%는 믿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세뇌가 먹히게끔 만들려고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폐쇄정책을 펴고 있는 것입니다.주민들은 누군가의 아들딸들이 타향의 전쟁터에서 무주고혼이 된 것에 분노하지 않을까요. 당사자가 아닌 한 크게 분노할 사람도 많지 않을 듯합니다.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탈북민들의 많은 증언을 통해 유추해보면 북한은 전쟁을 치르지 않는 나라 중 남성 사망률이 아마 최상위권일 겁니다. 매년 다른 나라라면 죽지 않아도 될 수 만 명의 남성이 국책 사업과 생계 현장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안전장비가 뒷전인 곳이라 큰 공사판이 벌어지면 기한을 맞추느라 어둠 속 야간작업에 내몰리다가 수십, 수백 명씩 죽어나갑니다. 각종 거리 건설이 벌어지는 평양에선 “올라간 아파트 층수만큼 사람이 죽는다”는 말이 정설이 된지 오랩니다. 이처럼 죽음이 예사로운 일이 된 북한에서 600명 정도의 사망은 ‘새 발의 피’ 정도라 할 수 있습니다.거기에 전사한 군인에 대한 대우도 비난을 잠재우는데 적잖은 영향을 끼칩니다.북한은 전투에서 전사한 군인의 가족에게 ‘전사증’이란 것을 발급합니다. 전사증은 김 씨 일가 초상화 다음으로 집에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는데, 이것은 “우리 가족은 이제 핵심계층으로 인정받았다”는 징표이기도 합니다.북한에서 6.25전쟁 전사자 가족은 출신성분을 빨치산 가족 다음쯤으로 인정받습니다. 전사자의 부모나 형제, 자녀는 웬만하면 간부로 등용됩니다. 평양에는 핵심계층들이 모여 사는데, 잘 나가는 집안을 조사해보면 전사증이 한두 개씩은 나올 겁니다.그런데 현재 빨치산 가족은 벌써 3대, 4대까지 내려오며 혈통의 ‘약발’이 떨어졌고, 6.25전쟁 전사자 가족도 2대, 3대쯤으로 내려와 힘이 빠졌습니다. 70년 넘게 하도 많은 숙청이 있다보니 가계 출신성분의 순수성도 많이 오염됐을 겁니다.그런데 우크라이나 전사자 가족은 정말 오랜만에 배출된 ‘따근따끈한’ 신흥 핵심계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부모형제는 간부 등용에서 최우선 순위로 선발될 것이고, 자식이 있다면 만경대혁명학원에 보내 김정은을 옹위하는 핵심 요직에 발탁할 것입니다. 전사자 가족은 출신성분의 우대에 더해 공급의 우대도 받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배급을 주지 못해도 전사자 가족에겐 무조건 배급을 해줄 것입니다.우크라이나 전사자 가족들에게 평양 거주 우선권을 부여한다는 말도 나오는데, 충분히 가능성이 높은 이야기입니다. 핵심계층이 됐는데, 당연히 평양에서 살아야죠.평양 거주권은 ‘100만 달러짜리’라고 할 정도로 받기 어렵습니다. 평양 청년과 지방 청년이 결혼을 하면 남녀 상관없이 무조건 지방으로 내려 보낼 정도로 평양은 거주의 순수성을 고수합니다. 거주 이전의 자유가 당국의 허락 없이 이뤄질 수 없는 북한이니 원한다고 평양에서 살 수도 없는 것이죠.그렇지만, 전사자가 600명이라면 이들 가족 정도는 얼마든지 평양에서 살 수 있게 할 수 있습니다. 김정은이 최근 건설한 5만 세대 살림집 중 일부만 내주어도 주택 문제는 해결됩니다. 어쩌면 부상자 가족도 ‘공로’에 따라 평양이나 대도시로 이주를 허용할지 모릅니다.김정은은 평양에 전사자들을 기리는 전투위훈비가 건립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위훈비는 평양시 서성구역 연못동에 있는 ‘조국해방전쟁 참전열사묘’에 건립될 가능성이 높습니다.2013년 김정은의 지시에 의해 만들어진 열사묘는 ‘인민군열사추모탑’을 중심으로 600개 이상의 묘가 자리 잡고 있는데, 꼭 6.25전쟁에서 죽지 않아도 안장이 됩니다. 베트남 전쟁에 파병됐다 전사한 공군 조종사 27명,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당시 전사한 공비 25명 중 24명도 여기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열사묘 주변의 공터도 많아 얼마든지 확장할 수 있습니다.‘인민군열사묘’는 지난달 김정은의 참석 하에 성대하게 열린 화성지구 3단계 거리와 도보로 30분 이내에 위치해 있습니다. 3단계 아파트 1만 세대 중 우크라이나 전사자 가족에게 600세대 정도는 얼마든지 공급할 수 있을 겁니다. 유족들이 기념일마다 혈육의 묘를 찾아 참배하고 이들처럼 목숨 바쳐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하는 모습은 북한 당국에게도 나쁘지 않는 ‘그림’일 겁니다.평양에 아파트도 주고, 가족에게 출세를 보장해주며 특별 공급까지 해주니 북한 사람들의 시각에서 볼 때는 전사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이뤄지는 것이죠. 건설현장 등에 내몰렸다가 사고로 사망한 사람들의 가족은 “차라리 우크라이나에 가서 죽지”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겁니다. 또 세뇌와 별도로 전장에 나간 북한 청년들에게도 목숨을 내걸 동기부여도 어느 정도 생기는 것입니다.북한은 비판받아 마땅한 정책들이 넘쳐납니다. 하지만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체제를 위한 희생에 들이는 보상은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래야 충성을 짜낼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북한보다 훨씬 잘 사는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2010년 천안함 폭침 사건 전사자 유족들은 2억~3억600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고, 2002년 제2연평해전 전사자 6명은 3000만~6000만원 수준의 보상금을 받았다가 나중에 1억4400만 원~1억8400만 원의 보상금을 추가로 받았습니다. 이 보상금으론 서울에 방 한 칸 구입하기도 어렵습니다. 사고로 사망하나 영웅적으로 전사하나 별 차이가 없고, 취직이나 공급의 특혜도 없습니다.사용도 하지 않는 지방 공항이나 도로 등에 수천 억, 수조 원씩 낭비하는 우리가 나라를 위한 희생에는 너무나 짠 것이 아닐까 돌아봐야 합니다. 대한민국이 공동체에 대한 희생과 헌신에 최고의 예우와 보상이 이뤄지는 나라로 세계적인 인정을 받는 날이 올 수 있을까요.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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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은과 김옥주, 아직도 따뜻하네 [주성하의 ‘北토크’]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시선1# 김옥주의 ‘천하’는 언제까지?요즘 김정은의 관심은 새로 건조한 5000톤급 구축함 ‘최현호’에 꽂혔습니다. 재작년엔 정찰위성에 집착해 한 기를 쏘고 그해 연말 노동당 중앙위 8기9차 전원회의에서 “2024년에 3개의 정찰위성을 추가로 쏴올릴 데 대한 과업을 천명”했다고 하지만, 이 약속은 현재까진 전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작년의 관심사는 건설이었습니다. 평양 화성지구 건설을 비롯해, 압록강 수해 현장 건설 등에 분주히 찾아가 시찰을 했습니다.김정은은 늘 새로운 것을 가지는데 집착하는 성격으로 보입니다. 김정은의 뇌를 좌우하는 4가지 호르몬(도파민, 엔도르핀, 아드레날린, 세로토닌)은 주로 “드디어 나도 가졌다”는 성취감에 가장 자극적으로 반응하는 것 같습니다. 지속 또는 유지와 같은 이후에 일어날 일들은 그를 흥분시키지 못하는 듯 합니다.올해는 지금까지 볼 때 최현호가 그의 성취감을 가장 자극한 것 같습니다. 그는 4월 25일 남포항에서 열린 진수식에 참가해 낮부터 밤까지 이어진 행사 내내 앉아있었습니다. 그의 얼굴은 정말로 행복해 보였습니다.28일과 29일 이틀 동안 진행된 최현호 무기 발사 실험에도 꼬박 참가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2023년 11월 21일 첫 정찰위성을 발사한 뒤 하루가 멀다하게 국가항공우주기술총국 평양종합관제소를 찾아가 “오늘은 어디를 찍었다”며 자랑하던 때와 흡사합니다.최현호 진수를 경축하는 행사의 마감은 해군이 주최한 연회와 중앙예술단체들의 축하공연으로 마무리됐는데, 늘 그랬듯이 어둠 속에서 화려한 축포와 함께 진행됐습니다.북한은 2018년 탁현민 당시 청와대 의전비서관이 현송월에게 “열병식을 밤에 하는 것이 좋다”고 한 뒤로부턴 계속 야간에 행사를 진행합니다. 탁 비서관은 “(행사를) 밤에 해야 조명을 쓸 수 있고, 그래야 극적 효과가 연출된다. 보여주고 싶은 것만 밝게 보여주고, 보여주고 싶지 않은 부분은 어둡게 만들어버리면 된다. 그래서 밤 행사가 낮 행사보다 감동이 배가된다”고 말했다고 2022년에 회상했습니다.그 말을 따라 밤에 해보니 김정은의 감동이 배가됐는지, 이젠 야간 행사가 북한의 표준으로 굳어졌습니다.최현호 진수식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북한은 이날 행사를 1시간 넘게 방영했습니다. 그런데, 이날 공연에서 기자의 눈길을 끈 것은 화려한 축포도, 공연 내내 줄을 맞춰 차렷 자세로 서있던 해군 장병들도 아니었습니다.가수 김옥주가 공연 내내 거의 혼자 노래를 부르는 것이 가장 눈길이 갔습니다. 새 것을 좋아하는 김정은과 어울리지 않게, 김옥주는 지금까지도 계속 김정은의 신임을 듬뿍 받고 있는 것입니다. 1985년생으로 김정은보다 한 살 어린 것으로 알려진 김옥주는 이설주의 금성학원 선배라고 합니다. 김옥주는 2021년 6월 20일 김정은이 참석한 노동당 제8기 3차전원회의 축하 국무위원회연주단 공연에서 전체 26곡 중 22곡을 홀로 불러 주목을 받았던 가수입니다. 앞서 2월 열린 ‘설명절 경축 공연’에선 김정은의 앵콜을 두 번 받아 한 무대에서 같은 노래를 세 번이나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 김옥주가 이후 4년 가까이 별로 주목을 받지 않았지만, 이번 행사를 통해 김정은의 신임을 여전히 넘치도록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김옥주는 은하수관현악단 시절이던 2012년 설 명절 공연에서 이설주와 함께 공연했던 가수입니다. 물론 그땐 쟁쟁한 여가수들이 많아 김옥주는 특별해 보이지 않았습니다.2018년 4월 3일 ‘남북 평화협력 기원 남측 예술단’ 공연 때 김옥주는 이선희와 함께 ‘J에게’를 불렀습니다. 한국에서 그의 이름을 알게 된 계기였습니다. 당시 김옥주는 소좌(소령) 계급의 모란봉악단 성악과장이었습니다.2018년 2월 북한 예술단의 방한 공연 때만 해도 송영, 류진아, 라유미, 김주향 등 유명 여가수들이 많이 활동했는데, 지금 이들은 모두 어디론가 사라지고 오직 김옥주만 홀로 살아남았습니다.김정은 시대 수많은 숙청의 바람이 불었지만, 김옥주는 은하수·청봉·모란봉·삼지연 악단에 이어 현재의 국무위원회연주단까지 무려 5개의 예술단을 거치며 살아남았습니다.2021년엔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는데, 계급도 대좌(대령) 이상급으로 승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정은의 신임만 받으면 사실 계급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대좌도 대장 이상의 발언권이 있는 것입니다. 김옥주에 대한 김정은의 따뜻한 순정은 언제까지 이어질까요.이달 5월 9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진행되는 제2차 세계대전 승리 80주년 기념일 행사에 북한의 열병식 부대와 공연단이 참가한다는 말들이 흘러 나오고 있습니다.쿠르스크 전투에 참가한 북한 특수부대들이 열병식에 나올 법도 하지만, 북한은 그러지 않을 겁니다. 북한은 열병식 참가 군인을 키 172㎝ 이상만 뽑는데, 그래야 누가 봐도 북한군이 멋있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특수부대는 키가 작은 군인들도 많기 때문에, 일부러 열병식에 부대를 보낸다면 북한에서 따로 보내게 될 것입니다.공연단이 가게 되면 김옥주가 가게 될까요. 그가 또 모스크바에서 독무대를 펼치는 모습을 보게 될지 모릅니다.그럼 김옥주는 노래를 얼마나 잘 부를까요? 궁금하다면 아래 링크에서 확인해보십시오. 2018년에 당시 54세였던 이선희와 33세였던 김옥주가 함께 ‘J에게’를 부르는 영상입니다.시선2# ‘인민복’ 버리는 김정은‘최현호’ 진수식 관련 일련의 행사에서 여러 가지 눈길을 끄는 것들이 많았습니다.12살에 2차 성징까지 끝난 것으로 보이는 김주애가 아버지와 그 어느 때보다도 화기애한 분위기를 연출했던 것도 그렇고, 최현호에 설치된 5인치(127㎜) 함포에도 관심이 갔습니다.함포의 경우 러시아와 중국 등 북한의 동맹국들은 대구경 함포로 130㎜를 사용합니다. 127㎜ 함포는 미국과 한국 등 서방 선진국들이 쓰는 대구경 함포의 표준입니다. 북한이 왜 굳이 동맹국의 무기 체계를 사용하지 않고, 서방 국가들의 무기 체계를 차용했는지는 앞으로 계속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그런데 이날 행사에서 시각적으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북한 해군 정복의 변화입니다. 병사들의 군복은 아직 바뀌지 않았지만, 군관(장교)들의 군복은 남녀 모두 달라졌습니다. 최근 북한 육군의 복장이 ‘중국화’가 되고 있는데, 해군 역시 그러했습니다.군관들의 제복에서 견장(계급장)이 사라졌습니다. 대신 오른쪽 가슴에 계급과 이름이 새겨진 것으로 보이는 명찰이 붙었습니다. 명찰 위에 붙은 마름모 모양의 배지는 ‘해군군관학교’를 이수한 자들에게 주는 졸업 배지로 보입니다. 여군의 모자도 달라졌습니다.이것이 왜 중국을 따라했다고 할 수 있는지 아래 사진들을 보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아래는 중국군 제복인데, 해군만 견장이 없습니다. 북한도 지금 그렇게 바뀌었습니다.중국군 해군 정복만 따로 살펴봐도 북한과 같습니다.물론 북한 해군의 복장은 한국 해군과 닮았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우리도 해군 장교복에 견장이 없고, 여군 모자도 비슷합니다.중국이나 한국의 해군 정복이 크게 차이가 없었다고 볼 수 있었는데, 북한이 뒤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동안 북한은 인민복 스타일의 군복을 착용했는데, 이제 인민복을 버리기 시작하고 있습니다.이것이 해군에게서만 일어나는 변화는 아닙니다.북한 중학생 교복도 과거엔 목까지 단추를 닫는 인민복 스타일이었지만, 지금은 옷깃이 있는 양복으로 바뀌었습니다. 앞으로 육군이나 공군도 인민복을 버릴지 주목해야 할 것 같습니다.북한에서 교복이나 정복의 변화를 지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김정은입니다. 김정은의 지시 없이 함부로 옷을 변화시켰다가 목숨을 내걸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유추해볼 때 인민복은 김정은의 취향이 아니라는 의미기도 합니다.그의 부친 김정일은 인민복 스타일과 잠바를 고집했지만, 김정은은 취향이 달랐던 것 같습니다. 물론 2018년 4월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이나 그해 6월 싱가포르 북미 회담 때처럼 가끔 인민복을 입을 때가 있긴 하지만, 북한 내부에선 그런 옷을 거의 입고 다니지 않습니다.목을 조이는 인민복이 싫었을까요. 그런데 북한에서 인민의 목을 조이는 것은 옷이 아닌데 말입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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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은 미국 핵심산업에 반드시 필요한 파트너”

    산업통상자원부(장관 안덕근)와 KOTRA(사장 강경성)는 29일 서울 코엑스에서 ‘협상의 시간, 협력의 해법’이라는 주제로 ‘2025 글로벌 신통상 포럼’을 개최했다. 이번 포럼은 2월 18일 발표된 ‘범부처 비상수출 대책’의 일환으로 마련됐다. 첫 번째 세션에서는 케이트 칼루트케비치 맥라티 전무이사가 기조연설자로 나섰다. 칼루트케비치 전무이사는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무역실장과 백악관 대통령 특별보좌관을 지낸 경력을 바탕으로 2기 행정부의 가능성과 그에 따른 전략을 제시했다. 칼루트케비치 전무이사는 “한국은 방산, 조선, 반도체, 의약품, 에너지 등 미국이 육성하고자 하는 핵심 산업에 있어서 불완전한 공급망을 보완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파트너”라고 강조했다. 또한 “한국은 미국 내 강력한 투자 기반을 활용하고, 현지 협력사들을 소통 채널로 활용해 미국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어진 토론에서는 양주영 산업연구원 경제안보·통상전략연구실장, 김영만 산업통상자원부 통상정책총괄과장, 유종철 대한상공회의소 APEC협력센터장이 한미 간 공급망 협력 구조, 아웃리치 현장 분위기, 통상환경 변화에 대한 정부와 기업 차원의 대응 방향 등을 설명했다. 두 번째 세션에서는 우리 기업 대응책으로 조명된 ‘글로벌 사우스’에 주목했다. 곽성일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세계지역연구2센터장은 글로벌 사우스의 시장 기회와 경제 협력 방향을 소개했다. 전임 KOTRA 서남아지역본부장였던 빈준화 KOTRA 글로벌공급망실장은 인도, 강준모 LG 경영연구원 연구위원은 동남아시아에 대하여 진출 사례를 중심으로 실질적인 시장 정보를 공유했다. 또한 글로벌 사우스 지역에 신규 진출하기 위해 우리 기업이 활용할 수 있는 정부 개발협력사업인 경제발전경험공유사업(KSP)과 경제혁신파트너십프로그램(EIPP)의 성공 사례들도 소개됐다. 한편 KOTRA는 미국의 통상 조치와 그에 따른 대응 방안 공유를 위해 10일부터 매주 ‘통상환경 비상대응 정기 설명회’를 열고 있다. 설명회는 포럼과 연계해 진행됐으며, 미국의 주요 관세 조치 및 미국·멕시코·캐나다무역협정(USMCA) 동향, 중국의 대응, 원산지 관리 및 품목 분류 전략, 무역 리스크 대응 방안 등 실무 중심 프로그램으로 구성됐다. ‘통상환경 비상대응 정기 설명회’는 지금까지 약 1000명의 수출 및 해외 진출 기업 관계자가 온·오프라인으로 참석해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포럼 현장에서는 참가 기업을 위한 일대일 상담 부스도 마련됐다. 강경성 KOTRA 사장은 “빠르게 변화하는 글로벌 통상 환경에서 우리 기업이 경쟁력을 더욱 강화하는 전략을 수립할 수 있도록 포럼을 마련했다”면서 “KOTRA는 85개국 131개 무역관을 통해 현장 비즈니스 기회를 빠르게 포착하여 우리 기업에 전파하고, 정부와 함께 우리 기업이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총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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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북한 해외 여성 노동자들의 비극

    “시집 잘 가려다 홀아비한테 가게 생겼다.” 중국에서 일하고 있는 북한 여성 노동자 수만 명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요즘 세계의 관심사가 러시아 파병 북한 군인들에게 집중돼 있다 보니 중국에서 감금 노예처럼 일하는 수만 명의 북한 여성 문제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해외에서 일하는 북한 여성 노동자들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이전에 파견돼 최소 6년 넘게 갇혀서 일만 하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귀국 지시는 없다. 현지 관리자들은 지난해 1월 중국 옌볜에서 일어났던 것 같은 북한 노동자 폭동이 또다시 일어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실제로 북한 노동자들이 고용된 대다수 공장들에서 분노가 임계점에 이르고 있다. 북한은 최근 각 공장마다 매달 문제를 일으킬 만한 몇 명을 추려서 귀국시키라는 지시를 내렸을 뿐이다. 노동자 중엔 중국에서 3년 정도 열심히 일해서 돈을 좀 모아 시집갈 밑천을 마련할 생각으로 온 처녀가 많다. 하지만 코로나19 국경 봉쇄가 끝났어도 귀국 지시가 떨어지지 않아 20대에 나온 여성들 나이가 어느새 30세가 넘어가게 됐다. 북한에선 30세 넘은 여성은 노처녀 중의 노처녀로 간주돼 결혼이 어렵다. 돈이 좀 있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돈도 많이 벌지 못했다. 6년 정도 일하면 평균 5000달러 정도 모으게 된다. 야근과 특근을 도맡아 죽어라 일만 하면 8000달러까지 벌 순 있지만 이는 극소수에 해당한다. 이 돈으로 북한 대도시에서 집 한 채 사기도 어렵다. 아이를 북한에 두고 온 유부녀 노동자들도 6년 넘게 집 소식을 알 수 없어 화가 나긴 마찬가지다. 북한은 중국에 나와 있는 노동자들이 가족과 연락하는 것을 철저히 차단하고 있다. 집 소식을 들으면 동요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편지도 전화도 할 수 없으니 집에서 누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수 없고, 그동안 번 돈을 고향에 보낼 수도 없다. 언젠가 귀국하더라도 이들의 분노가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 않다. 일부 먼저 귀국한 노동자 중엔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3년이나 모르고 있었다”거나 “가족이 먹고살기 힘들어 집까지 팔고 거지가 된 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절규가 터져 나오고 있다. 이 상처는 평생 아물 수 없을 것이다. 북한이 파견 노동자들을 귀국시키지 않는 이유는 대체할 신규 노동자 파견이 어렵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간 북-중 관계가 악화돼 온 결과 중국은 유엔 대북제재 결의를 이유로 북한 노동자를 받지 않고 있다. 북한은 중국에 파견된 노동자 월급의 80% 이상을 빼앗아 간다. 노동자들은 노동당의 중요한 돈줄인 것이다. 중국에 파견된 여성들은 피복, 수산물, 식당 등 다양한 업종에서 일하고 있다. 중국 공장들은 남성보다 관리가 쉬운 여성들을 선호한다. 숙소만 마련해 주면 북한 관리자들이 알아서 노동자들을 감금하고 통제한다. 여성 노동자들이 파견된 공장마다 ‘삼촌’이라 불리는 북한 남성 부사장이 한 명씩 같이 나가 있다. 이 삼촌들이 공장 소속 여성들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실질적 관리자다. 삼촌은 나이 많은 여성을 반장이나 조장으로 임명해 통제하게 한다. 여성들을 관리해야 하니 북한 측 사장으로 여성을 내세우긴 하지만 사실상 ‘바지 사장’일 뿐이다. 요즘 바지 사장들은 “이젠 총각에게 시집가기 틀렸다”고 한탄하는 노동자들을 “간부 나부랭이들이 참 너무하다. 자기 자식이면 그러겠느냐”며 열심히 다독여 준다고 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니 겁이 나는 것이다. 수많은 여성의 고혈을 짜내서 먹는 데 맛을 들인 북한은 앞으로도 그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달 중순 한 러시아 매체에는 모스크바에서 일하고 있는 북한 여성 근로자 수백 명이 일하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이 공개됐다. 이들은 ‘러시아판 쿠팡’이라고 불리는 러시아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 ‘와일드베리스’ 물류창고에서 일하고 있었다. 중국에 노동자들을 파견하기 어려워지자 슬그머니 러시아에 보낸 것이다. 러시아에 파견된 노동자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점점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진 않을 것이다. 김정은은 이들이 번 돈을 빼앗아 평양에 고층 아파트들을 짓고 인민 낙원을 만든다며 생색을 내고 있다. 남의 나라 전쟁에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 죽는 청년들의 목숨과 노예가 된 여성들의 눈물로 쌓은 ‘낙원’ 위에서 김정은의 웃음소리만 높아진다. 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5-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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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OTRA, 美 상호관세 전면전 맞서 수출기업 보호 총력 대응

    산업통상자원부와 KOTRA가 미국 정부의 상호관세 부과 등 통상 환경 변화에 맞서 총력 대응을 펼치고 있다. KOTRA는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한 1월부터 ‘수출투자비상대책반’을 가동하며 급변하는 통상환경 속 수출기업을 위한 대응 방안을 발 빠르게 준비해 왔다. 2월부터는 ‘관세대응 119’ 통합상담창구를 개설해 운영하고 있는데, 이달 1일까지 1324건의 상담 문의가 접수됐다. 이 중 관세 관련 문의가 절반 가까이를 차지했다. 미국, 멕시코, 캐나다 등 20개 해외무역관에는 헬프데스크도 설치해 현지 진출 기업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2월부터 대구경북, 충북, 강원, 인천, 울산 등에서 ‘찾아가는 관세 대응 릴레이 설명회’를 개최해 지역·업종별로 세분화된 관세 대응 전략을 전파해 왔다. 지난달 26일에는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통상환경 전환기, 수출기업 지원 종합설명회’를 열었는데, 이날에만 수출기업과 정부, 유관기관 관계자 등 1000여 명이 몰렸다. 하루 동안 일대일 컨설팅 387건, 지원사업 안내에 727명이 문의하는 등 글로벌 통상 전쟁을 앞두고 대비책 마련에 고심하는 기업인들의 상담이 잇따랐다. 실제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달 2일 전 세계를 대상으로 상호관세 부과를 발표함에 따라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산업부와 KOTRA는 본격적인 발효를 앞둔 9일 이후 수출 현장의 혼란을 최소화하고자 실질적인 지원책 마련과 실행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우선 관세 대응 119는 통합 상담 창구로서의 기능을 더욱 보강하고, 유관기관과의 협업을 확대해 ‘관세 대응 119 종합지원센터’로 확대 운영한다. 또한 KOTRA의 전문 상담 인력을 확대하고, 미국 현지 관세사를 활용한 해외 상담 채널을 연계할 예정이다. 관세 대응 바우처 사업은 산업부와 연계해 1일부터 참여 기업 모집을 시작했는데, 관세 영향 분석, 피해 대응, 대체 시장 발굴 등 ‘관세 대응 패키지 서비스’를 제공한다. 기존 바우처 서비스와 달리 KOTRA 해외무역관이 발굴한 해외 현지 관세·법률 전문가의 컨설팅을 받을 수 있어 기업별 맞춤형 수출 해법을 찾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아울러 KOTRA는 대체 시장과 사업 파트너 발굴 등 수출 활로 모색에도 힘쓰고 있다. 이달 10일부터 매주 목요일 KOTRA 본사 국제회의장에서 ‘통상환경 비상대응 정기설명회’를 개최한다. 29일에는 코엑스에서 ‘글로벌 신통상 포럼’도 개최해 지역별 시장 환경, 대체 시장 기회 요인을 소개할 예정이다. 트럼프 1기 행정부 무역실장을 지낸 케이트 칼루트케비치가 기조연설과 패널토론에 참여해 미국 통상 정책 전망과 기회요인에 대해 설명한다. 강경성 KOTRA 사장은 “미국 상호관세 발효가 우리 기업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과 수출 현장의 혼란을 최소화해야 한다”며 “KOTRA는 관세 대응 119의 기능을 강화하고 유관기관과의 협업 등 확대 개편을 통해 범정부 총력지원 체계로서 역할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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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일본 스케이트와 핵추진잠수함

    2월 초 2025 하얼빈 겨울아시안게임에 참가한 북한 피겨스케이팅 선수들의 스케이트를 보고 마음이 짠했다.피겨스케이팅 선수들은 부츠처럼 발목을 높이 잡아주는 스케이트를 신어야 부상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다. 그런데 북한 선수들은 마치 초보자용처럼 발목이 낮은, 한눈에도 저렴해 보이는 스케이트를 신고 경기를 치르고 있었다. 그걸 신고 렴대옥-한금철 조는 은메달까지 받았으니, 각각 26세와 25세가 되도록 저들이 흘렸을 피눈물은 가늠하기 어렵다.이번 겨울아시안게임에 북한은 단 3명의 선수만을 보냈다. 하얼빈은 북한에서 열차로 이동할 수 있는 곳이다. 어쩌면 가장 가까운 지역에서 치러지는 국제대회라고 할 수 있음에도 3명밖에 보내지 못했다는 것은 북한의 겨울 스포츠는 피겨스케이팅을 빼곤 사실상 전멸 상태라고 볼 수 있다는 얘기다.북한은 한때 스피드스케이팅이 매우 강했다. 아시아인 최초로 겨울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종목에서 메달을 차지한 선수가 바로 북한 한필화 선수다. 그는 1964 인스브루크 겨울올림픽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3000m 종목에서 은메달을 받았다. 이는 아시아 여성 선수 최초의 겨울올림픽 메달이기도 했다.그런 전통을 갖고 있음에도 지금 북한 스피드스케이팅은 국제무대에서 사라졌다. 한국은 쇼트트랙에서 세계를 제패하고 있고, 스피드스케이팅에서도 세계 기록을 세운 이상화나 올림픽 금메달을 받은 모태범 같은 우수한 선수들을 계속 배출한다. 같은 민족인 데다 지옥 훈련이라면 세계 최고 수준일 북한이니 우수한 선수들을 배출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그런데도 우수한 선수들이 나오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시설과 장비 문제다. 북한에도 당연히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들이 있지만 훈련장이 없어 늦가을에 돼서야 함경남도 부전에 가서 야외 훈련을 시작한다. 장진호 바로 옆인 부전은 춥기로 악명 높다. 영하 수십 도의 날씨에 밖에서 훈련을 하다 보니 동상을 입거나 방광염에 걸리고, 발톱이 빠지는 일이 잦다.선수들은 실력에 따라 스케이트를 차등 지급받는데, 4등급은 북한제 스케이트를 지급한다. 이게 스케이트냐 할 정도로 한심한 것이다. 3등급으로 인정되면 러시아제 스케이트를, 2등급으로 인정되면 독일제 스케이트를 준다. 국가대표급인 1등급으로 인정받은 선수 한두 명에게는 일본제 스케이트를 지급한다. 그런데 이 외제 스케이트도 새것이 아니다. 선배들이 타고 또 타던 것이라 스케이트 날이 쉽게 무뎌져서 전문적으로 날을 갈아주는 사람을 매 조에 한 명씩 두고 있다. 선수보다 스케이트가 더 귀한 상황이니 스키니 하키니 하는 종목은 어림도 없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 이런 북한에서 종목을 막론하고 우수한 선수들이 나오면 그게 이상한 것이다.하지만 이런 가난하고 슬픈 이야기들은 두꺼운 얼음장 아래에 깊숙이 숨겨져 있다. 밖으로 드러나는 북한의 모습엔 허세만 가득하다.지난달 김정은은 전략핵잠수함(SSBN)인 ‘핵동력전략유도탄잠수함’ 건조 현장을 공개했다. SSBN은 세계 6개국밖에 보유하지 못한 수십억 달러짜리 무기이다. 유지비도 너무 비싸서 공짜로 줘도 운용하지 못할 나라들이 태반이다. 지난달 말에는 조기경보통제기도 공개했다. 북한과 동일하게 Il-76 수송기 기반인 러시아 A-50 조기경보통제기는 업그레이드 성능에 따라 가격이 4억∼6억 달러에 이른다.핵무기에, 미국까지 도달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에, 정찰위성 등등 북한이 최근 공개하는 무기들은 하나같이 천문학적인 가격을 자랑하는 것이다.무기뿐만이 아니다. 평양에는 화려한 거리들이 매년 건설되고, 원산엔 제주도 전체 객실 수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객실 2만 개짜리 거대한 해안관광단지가 완공을 앞두고 있다. 이것도 분명히 북한의 현실이다. 김정은은 그걸 봐달라고 딸과 함께 열심히 돌아친다. 그의 눈과 귀는 늘 무기나 건물에 머물러 있을 뿐, 사람에게 머물러 있지 않는다.그러니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장에서 죽어가는 수천 북한군 병사의 울부짖음이나 최전방에서 지뢰를 매몰하다 수시로 사고로 죽어가는 군인들의 비명이 들릴 리가 만무한 것이다.목숨이 하찮은 곳에선 꿈도 하찮다. 너덜너덜해진 일본제 스케이트를 받는 것이 북한 빙상 선수들의 꿈이다. 그 꿈을 이뤄도 렴대옥처럼 외국에서 다른 나라 선수들의 스케이트를 부럽게 바라볼 기회는 극소수에게만 돌아갈 뿐이다.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5-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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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한국 국방 이대로 괜찮습니까

    세계 2위 군사대국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3년째 고전하는 것을 보며, 비록 군사전문가는 아니지만 많은 걱정을 떨쳐낼 수가 없다. 전쟁 양상이 확 바뀌는데 우린 괜찮을까. 병종별로 보자. 한국 육군의 자랑은 최강 화력의 7기동군단이다. 세계 정상급 K2 흑표 전차 수백 대로 북진 선봉에 선다. 두꺼운 전면 장갑으로 포탄을 튕겨내며 전진하는 전차는 ‘지상전의 왕자’였다. 그런데 이 왕자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힘을 못 쓴다. 그 넓은 평야에서도 중대급 전차전조차 벌어지지 않고, 포탄을 정면으로 튕겨내며 버티는 일도 거의 없다. 파괴된 전차 대다수는 휴대용 미사일이나 드론, 지뢰에 상부 또는 하부가 뚫렸다. 만약 7군단이 북진할 때 1인칭 드론 수백 대가 공격하면 막을 수 있을까. 북한이 특정 신호에 일제히 수십 m 상공에 날아올라 내리꽂히는 능동형 지뢰라도 개발하면 어떻게 될까. 전차 설계는 이대로 괜찮은가. 강력한 전면 방탄 성능에 집중해온 세기의 개념을 바꿔야 할 때가 오진 않았을까. 장비만 문제가 아니다. 가령 한국군이 강철 체력의 특등사수 육성에 열심인 동안, 북에선 지금 여군들이 드론 조종을 맹훈련하고 있진 않을까. 공군은 괜찮은가. 지금까지는 군용기의 공중전 능력이 매우 중요했다. 최고 성능을 위해 비행기는 점점 비싸진다. 그런데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공중전은 전쟁 초기에 좀 벌어졌지, 이후엔 사라졌다. 우크라이나가 서방에서 도입한 F―16 전투기는 순항미사일 격추 임무에 사용되고 있고, 러시아 군용기는 멀리서 공대지 미사일이나 폭탄을 투하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강력한 대공 미사일들이 버티니 군용기들의 역할은 매우 제한된다. 이럴 바엔 수천억 원짜리 다목적 비행기 한 기보단 값싼 순항미사일 격추용 무인기나 폭격 전용기 수십 기를 만드는 게 더 효율적이진 않을까. 엄청난 돈을 쓰는 해군엔 물음표가 가장 많이 붙는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해군력은 비교 자체가 무의미하지만, 러시아 해군은 꼼짝 못 한다. 전쟁 초기 1조 원 가치의 러시아 흑해함대 기함 모스크바함이 미사일 단 두 발에 격침됐다. 강력하다고 알려졌던 흑해함대가 우크라이나 곡물수송로조차 통제하지 못한다. 뒤로 밀려나 구석에 숨었는데도 전력의 30% 이상인 수십 척의 함정을 앉은 자리에서 잃었다. 1조 원이 넘는 이지스함을 찍어내는 한국 해군이 유사시 돈값을 할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북한 해군을 상대로 이지스함까지 쓸 일은 없을 것 같고, 중국을 상대한다면 수십, 수백 기씩 떼로 날아들 최신 극초음속 미사일을 막을 방법이 없어 보인다. 이지스함은 사례일 뿐이다. 바야흐로 바다를 휘젓는 수중 자폭 드론, 레이더를 피해 수면을 스치듯 날아와 공격하는 드론, 레이더에도 걸리지 않는 골판지 드론 시대가 오고 있다. 북한이 과거의 포사격과 같은 전통적인 공격 대신에 광섬유로 연결해 전파 방해도 받지 않고 정확도도 뛰어난 골판지 드론들을 대거 날려 보내면 어떻게 막아야 할까.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해병대 격인 해군육전대가 매우 강했다. 그런데 전쟁 3년 동안 상륙작전은 해보지도 못한 채 전선에서 보병대처럼 소모된다. 미군도 해병대를 없애고 있는 흐름에 우리도 굳이 해병대여야만 하냐는 질문도 해야 한다.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 확전 우려 때문에 쏘지도 못할 비싼 미사일을 잔뜩 실은 함정보단 우리에게도 수십 km 밖에서도 드론 1대와 군함 1척을 확실하게 바꿀 수 있는 드론정들이 시급할 수 있다. 서해 5도를 드론의 섬으로 바꾸면 값비싼 육해공 장비의 사용을 최소한으로 하면서도 북한의 도발을 더 확실히 견제할 수 있다. 재래식 전력에서 북한은 비교 대상이 안 될 정도지만 그게 장점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비싼 무기만 찾고 또 그것이 아까워 놓지 못하는 사이, 북한은 값싼 드론에 올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수십만 명의 희생과 바꾼 러시아의 전쟁 경험을 고스란히 가져가는 사이, 우린 우크라이나에 참관단조차 보내지 못하고 있다. 줄어드는 병력 자원에 대한 걱정만큼 싸고 효율적인 군에 대해 얼마나 고민하고 있는가. 인공지능(AI)까지 더해질 미래 전쟁의 설계는 누가 해야 하는가. 승진훈련장의 판박이 훈련을 수십 년 동안 보면서 결정권자의 위치에 오른 사람들이 하긴 어려운 일이다. 경험을 무시할 순 없지만 상상과 혁신은 50, 60대의 몫이 아니다.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5-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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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돈주머니 불룩해진 김정은의 채찍질

    이달 10일 신의주 인근 위화도 벌판엔 1만 명은 족히 넘을 북한 군인이 집결했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이후 637년 동안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이곳에 모인 적은 없었을 것이다. 이날 김정은은 위화도에 450정보(약 4.5㎢) 규모의 온실농장을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지금 북한 인민에겐 온실에서 생산된 토마토, 오이보다는 식량이 더 시급하다. 쌀 1kg은 1년 전에 비해 60% 오른 북한 돈 8000원에 거래되고, 석탄을 비롯한 땔감 가격도 최근 두 달 동안에만 50% 이상 뛰었다. 달러 환율은 1년 전보다 무려 2.5배나 올랐다. 인민은 식량과 땔감 가격을 감당하지 못해 주린 배를 안고 추위에 떨고 있는데 김정은에겐 대규모 온실 건설이 우선이었다. 북한은 생산비를 시장에서 환수하는 시장경제 체제가 아니어서 초대형 온실 운영에 드는 연료, 전력, 비료 등을 장기적으로 감당하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최근 5년 내 건설한 다른 3개의 초대형 온실은 가동되고 있다. 인민의 땔감은 없어도 온실 난방용 석탄은 보장된다는 의미다. 김정은의 ‘삽질’ 구상은 온실에만 머물지 않는다. 특히 올해 통이 커졌다. 지난해엔 매년 지방공업공장 20개를 짓겠다고 하더니 여기에 더해 올해는 군 병원 및 종합봉사소 3개를 시범적으로 건설하고 내년부터는 20개씩 짓겠다고 공언했다. 비싼 의료 장비를 수입해야 하는 병원 건설은 지방공장 건설보다 돈이 더 많이 든다. 김정은은 또 평양 1만 가구 주택 공사를 앞으로도 이어가고, 원산갈마관광지구를 6월까지 개장하겠다고 밝혔다. 확실히 김정은의 자신감과 씀씀이가 달라졌다. 그의 돈주머니는 어디에서 채워졌을까. 전통적으로 북한은 북-중 교역을 통해 외화를 벌었다. 사상 최강의 유엔 대북제재가 시작되기 직전인 2016년에 북한의 대중 무역 의존도는 88.2%였고, 무역 규모는 58억 달러였다. 하지만 지난해 북-중 무역 규모는 21억8000만 달러로 8년 전의 37.6%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특히 2016년에 26억 달러였던 대중 수출액이 지난해엔 3억2000만 달러로 급감했다. 요즘 최악으로 악화된 북-중 관계까지 감안하면 김정은이 중국에서 외화를 조달하긴 어렵다. 여기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기간인 2020년 1월부터 2023년 7월까지 3년 7개월 동안 북한 국경은 꽁꽁 닫혔고 대외 교역도 중단됐다. 김정은 돈주머니가 텅텅 비어야 정상이지만 최근 건설 행보는 그와는 반대다. 최근 1년 남짓 김정은이 어디선가 많은 돈을 얻게 됐다는 의미다. 추정 가능한 자금 출처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 우선 러시아에 탄약과 무기, 심지어 파병까지 한 대가를 받고 있다는 의미다. 얼마나 받았는지는 양국이 침묵하는 한 외부에서 알 수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면 이후 뒤따를 대규모 건설 수요에 북한 노동자들이 대거 파견될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 원산갈마관광지구를 러시아 전상자(戰傷者)들을 위한 휴양시설로 전용한다면 김정은의 돈주머니는 더욱 불룩해질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북한 해커들의 활약이다. 21일 가상자산 거래소 바이비트에선 사상 최대 해킹 피해가 발생했다. 북한 해킹조직 ‘라자루스’로 추정되는 해커들이 무려 15억 달러 상당의 암호화폐를 빼갔다. 또 미국 암호화폐 분석회사 체이널리시스에 따르면 지난해 북한 해커들이 탈취한 암호화폐 액수는 13억4000만 달러로 전 세계 가상자산 해킹 피해액의 61%에 이른다. 김정은은 이렇게 훔친 돈만으로도 충분히 대규모 토목공사를 감당할 수 있다. 현재 북한 해커 대다수는 중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들을 막지 못한다면 ‘도둑놈의 자신감’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김정은이 대규모 토목공사에만 돈주머니를 여는 이유는 뭘까. 건설 자재를 외국에서 사올 돈으로 러시아에서 밀만 수입해도 장마당 물가 상승으로 인한 인민의 아우성은 막을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역사 속에 사라진 수많은 독재자가 이미 해 주었다. 독재자에겐 국민을 채찍질할 구실이 필요하다. 채찍을 휘두르기엔 대규모 토목공사만 한 것이 없다. 인민이 마감이 정해진 삽질 과제에 정신을 쏟다 보면 불평할 여유도 없게 된다. 김정은은 그저 채찍만 열심히 휘두르면 된다. 생활고로 인한 인민의 비명이 높아질수록 김정은이 휘두르는 채찍 소리는 더욱 높아지게 될 것이다. 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5-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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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타트업의 지속가능한 성장, 해외시장 진출에 달려”

    “스타트업 세계화의 교두보를 마련하겠다.” 고려대 크림슨창업지원단을 이끄는 이병천 단장(생명공학부 교수·사진)은 18일 “기존 스타트업 발굴 및 육성 정책을 고도화해 스타트업 세계화와 해외 시장 진출에 주력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다음은 일문일답. ―스타트업 세계화를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나. “2022년부터 세계 최대 정보기술(IT)·가전 전시회인 CES에 참가해 시장 흐름과 부문별 성장 가능성을 가늠해 왔다. 이 밖에 세계 최대 이동통신 박람회 ‘모바일 월드 콩그레스(MWC)’, 아시아 최대 규모 개방형 혁신 비즈니스 매칭 행사 ILS, 유럽 창업 전시회 SLUSH, 세계 최대 생명공학기술 콘퍼런스인 BIO USA 등에 꾸준히 참여했다. 해외 창업 생태계의 장점을 조사하고 네트워크를 확장하기 위해서다. 지난해에는 해외 투자자와 대학, 기관을 초청해 지식을 공유하고 네트워크를 넓히는 고려대 글로벌 스타트업 콘퍼런스를 열었다. 지난달 ‘CES 2025’에서는 단독관을 운영해 교내 스타트업이 주목받도록 도왔다.” ―어떤 주요한 성과를 낳았는지 설명해 달라. “고려대가 육성한 스타트업이 세계 무대에서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스타트업들이 매년 CES 혁신상을 받았다. 특히 교원 창업기업 큐심플러스(대표 노광석)는 2023년부터 3년 연속 CES 혁신상을 받았다. 그 밖에도 여러 교내 스타트업이 세계 곳곳에 이름을 알렸다. 크림슨창업지원단의 성과이면서 한국 스타트업이 세계 시장에서 꾸준히 성장할 역량을 가졌다는 강력한 증거다.” ―스타트업의 글로벌 진출은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 “대학 창업을 더욱 활성화해 교내 스타트업의 해외 시장 진출을 촉진할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 계획이다. 투자자, 연구기관, 대학, 기업, 시장을 아우르는 해외 창업 생태계와 교내 스타트업을 직접 연결하는 글로벌 콘퍼런스를 개최해 창업기업 네트워킹을 더욱 강화할 생각이다. CES를 포함해 해외에서 열리는 딥테크 및 주요 기술 관련 행사에 고려대 단독으로 스타트업 전시관을 마련하는 등 홍보 전략을 고도화할 방안을 짜고 있다. 이를 통해 한국 스타트업이 세계적인 투자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아 막대한 투자금을 유치하는 동시에 해외 딥테크 기업과 힘을 합쳐 성과를 낼 수 있는 전략과 정책을 펼 계획이다. 해외 시장을 그저 경험하는 수준에 머무르는 데서 나아가 세계 수준의 경쟁력을 가진 중견 업체로 도약할 수 있도록 판로 개척도 지원하겠다.” ―크림슨창업지원단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고려대와 크림슨창업지원단의 가장 큰 목표는 ‘대학이 발굴하고 육성한 스타트업이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게 성장, 발전하도록 돕는 것’이다. 연구기술 기반 창업 지원을 받은 스타트업이 해외에 진출해 시장에서 성과를 만들며 결국에는 나라 경제 성장에 기여하도록 도울 생각이다. 글로벌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해외 투자 유치에 힘을 쏟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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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16명 살해범의 ‘억울한’ 북송

    2022년 대선을 몇 달 앞두고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전화를 받았다. “북한 전문가로서 문재인 정부 시기에 벌어진 북한 어민 북송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내게 물었다. 당시 그는 윤석열 대선 캠프의 영입 1호였고, 안보 분야 이슈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북송 사건을 더불어민주당을 공격할 적합한 소재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북송된 북한 어민 두 명이 무고하다고 믿는 듯했다. 그래서 이런 취지로 대답을 했다. “그들이 정말 동료 16명을 살해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가. 모든 증거는 현 정부에 있는데 무고한 어민을 북송했다고 공세를 폈다가 감당할 수 있는가. 청와대의 전화 한 통에 나포에 참가했던 군인들과 조사에 참가했던 국가정보원, 국방부, 경찰 조사관 등 수백 명이 일제히 무고한 이를 북송하는 반인륜적 범죄에 동참해 입을 닫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대선에서 내걸 공약이 얼마나 많은데, 굳이 16명을 죽인 흉악범 인권 문제를 전면에 거는 게 바람직한 것인가. 집권해서 재조사했을 때 이들이 무고한 어민이었다면, 그것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이니 그때 가서 단죄해도 늦지 않다.” 윤석열 캠프는 대선 기간엔 이 사건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집권하자마자 이 사건부터 꺼내 들었다. 대통령실은 북송 사진들을 공개하면서 “용납할 수 없는 반인륜적, 반인도적 범죄”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국민의힘이 만든 ‘국가안보문란 실태조사TF’의 한기호 위원장은 “16명을 살해했다는 것은 북한이 탈북 브로커를 송환하기 위해 거짓말한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부와 집권당의 누구도 이들이 흉기로 하룻밤 새 동료 16명을 잔인하게 살해한 흉악범이라고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지금도 문재인 정부가 무고한 탈북 어민들을 강제 북송한 것으로 믿고 있다. 이들의 송환 결정에 참가한 문재인 정권 안보라인 핵심 인사들에 대한 결심 공판이 마침내 지난달 13일 열렸다. 대통령 구속 사태 속에서 사람들의 이목도 끌지 못했다. 검찰은 정의용 전 국가안보실장과 서훈 전 국정원장에겐 징역 5년을, 노영민 전 대통령비서실장에겐 4년을, 김연철 전 통일부 장관에겐 3년을 구형했다. 대통령실까지 나서 반인륜적, 반인도적 범죄라고 규탄했던 것에 비하면 시시한 구형이다. 이달 19일에 열릴 1심 선고에서 북송을 범죄로 볼 것인지, 통치 행위로 볼 것인지가 판가름 날 것이다. 결심 공판 이전의 재판들은 모두 비공개로 진행됐다. 국가 안보와 관련한 기밀 사항 보안이 이유였다. 검찰은 북한 어민의 나포 과정과 진술 조서, 북한 통신 감청 기록 등을 무려 2년이나 샅샅이 살펴보고, 수많은 참고인 조사도 했다. 그럼에도 이들이 16명을 살해한 자들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검찰 공소장엔 “탈북민들은 탈북 과정에서 범죄를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우리 헌법과 법률에 따라 공정한 재판을 받고 죄책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적시돼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을 왜곡한 것이다. 북송된 흉악범들은 탈북 과정에 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다. 조업 중에 동료들을 죽였고, 일당 중 한 명이 체포되자 도주한 것이다. 이들이 한국으로 오려고 했던 것도 아니다. 한국 해군과 조우하자 이틀이나 도주했고, 결국 경고사격과 특수부대의 선상 진입으로 제압돼 체포됐다. 그러자 할 수 없이 귀순 의사를 밝혔을 뿐이다. 특대형 흉악 범죄를 저지르고 도주한 자들이라 해도 충분히 조사하지 않고, 국민 모르게 서둘러 북송하려 했던 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 맞다. 흉악범도 재판 받을 권리가 있다는 주장도 타당하다. 다만 모든 물증을 인멸한 흉악범들이 남한에서 유죄 판결을 받을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이들 이전에 북한에서 흉악 범죄를 저지르고 한국에 입국한 탈북자가 23명이나 되지만 이 중 우리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문제는 북송 어부들이 무고한 듯 몰아갔던 정부와 집권당의 그 누구도 “그들이 살인자는 맞지만, 그럼에도…”라고 솔직히 말하는 이가 없다는 것이다. 이들이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돼 우리 동네에 살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도 국민들이 “집권하자마자 16명을 살해한 희대의 살인자들의 인권 문제부터 챙긴 윤석열 정부가 훌륭하다”고 했을까.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5-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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