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주성하 기자

동아일보 콘텐츠기획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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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관련 사이트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http://nambukstory.com)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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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분야

2025-11-22~2025-12-22
남북한 관계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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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일반7%
경제일반3%
  • 북에서 온 세탁소 ‘작은 거인’… “세금 내는 재미에 삽니다” [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올해 10월 서울에서 남북하나재단 주최 ‘2025년 남북한 주민 사회통합 사례 발표 대회’가 열렸다. 대상은 서울 양천구 목동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56세 용성옥 씨에게 돌아갔다.쟁쟁한 발표자가 많았지만 어렸을 때 소아마비를 앓았고 키는 145cm에 불과한 용 씨가 심사 위원들과 청중에게서 높은 점수를 받아 대상을 탄 이유는 무엇일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마다 생각은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성옥 씨가 걸어온 삶과 주어진 조건이 나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쓰러지지 않고 살아남아 서울에 집과 가게를 장만하고 “국가에 세금을 내는 것이 얼마나 뿌듯한 일인지 여러분도 그 기쁨을 누려 보십시오”라고 외치는 여인. 그 앞에선 모두가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말했다.“북한과 중국에서 제가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입니다. 지금 돌아봐도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지금은 저 스스로 너무나 기특하고 대견합니다. 남은 인생은 열심히 살아온 저에게 상을 줄 겁니다. 지금까지 보지 못하고 살았던 하늘도 쳐다보고 산도 바라보면서 여유롭게 살아가려 합니다.”하늘과 산을 보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말하는 여인. 지금까지 어떤 인생을 살아 것일까.● “태어나 보니 장애인이었다.”용 씨 고향은 함경남도 함흥이다. 1969년 그가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흥남비료공장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부모는 모두 남쪽 출신이었다. 그래서 북에는 친척이 한 명도 없었다. 경기도 가평에서 살다가 6·25전쟁 때 의용군에 징집됐던 부친은, 강원도 남쪽 어느 산골에서 북으로 피난을 온 여인을 만나 결혼했다.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그가 7세 때 시름시름 앓다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가 살던 마을엔 비료공장 암모니아 냄새가 늘 지독하게 풍겼고 아버지가 없는 집이 많았다.부친이 사망하자 어머니가 비료공장에 다녔다. 그래야 배급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남편 없이 자식 5명을 키워야 했던 어머니는 늘 어두운 표정이었다. 용 씨는 어머니가 웃는 것을 본 일이 없다. 그가 20세 때 모친도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병원 사정이 열악해 결핵이었는지, 늑막염이었는지 병명도 몰랐다.용 씨는 태어나자마자 소아마비에 걸려 오른쪽 다리를 잘 쓰지 못하는 장애인이 됐다. 지독하게 가난한 가정에서 막내였던 용 씨는 늘 오빠들과 언니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다. 배고파도 배고프다고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1985년 용 씨는 16세에 고등중학교를 졸업했다. 비료공장 노동자 자녀들은 학교를 졸업하면 부모 뒤를 이어 비료공장에서 일하게 하는데, 하필 그해에 졸업한 학생들은 용성기계공장에 무리배치(집단 배정)가 됐다.집에서 가까운 비료공장에 갔으면 출퇴근이라도 쉬웠겠지만, 용성기계공장은 집에서 한 시간 반이나 걸어야 했다. 사지 멀쩡한 애들은 한 시간이면 갔지만, 다리가 불편한 용 씨는 남들보다 더 일찍 나가 쩔뚝거리며 다녔다.기계공장에선 그가 장애인이라고 압축기 운전공 업무를 맡겼다. 스위치를 조작하는 일이라 몸을 써야 하는 힘든 일보단 나았다.그곳에서 용 씨는 1994년까지 9년을 일했다. 공장을 그만둔 것은 자의가 아니었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전기가 없어 공장이 가동되지도 않았고 배급도 나오지 않아 노동자들이 출근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어떻게 살아남았을까”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은 고난의 행군 시절. 함흥은 북한에서 가장 참혹한 비극을 겪은 지역에 속했다. 못 먹어서 퉁퉁 부은 사람들이 길가에 쓰러졌다.규찰대가 돌아다니며 쓰러진 사람들을 살펴봤다. 눈을 뒤집어보고 “하루 남았다” “사나흘 남았다”고 판단했다. 3~4일 이하로 남았다고 판단된 사람은 산에 버렸다. 어차피 살지 못할 사람들이니 길거리에서 시체를 미리 치우는 것뿐이었다.어머니가 1989년에 세상을 떠난 뒤 용 씨는 집에서 오빠와 같이 살았다. 하지만 성성한 사람도 겨우 연명하는 상황에서 올케에게 장애인 시누이는 구박의 대상일 뿐이었다. 용 씨는 비료공장에서 비료를 훔쳐 인근 지역에 가서 팔기도 했지만, 이것만으로는 혼자서 먹을 것도 벌지 못했다.오빠네 집을 전전하다가 언니네 집에도 갔다가 했지만 어디서든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남매가 굶어 죽을 사람을 지목하라고 하면 아마 서슴없이 그를 맨 먼저 꼽았을 것이다. 도무지 갈 곳이 없으면 거리에 나가 잤다. 근 1년을 처녀 꽃제비로 살았다.그 스스로도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그때 어떻게 살아남았을까”이다. 1998년 봄. 더는 버틸 수 없는 순간이 왔다.‘이젠 죽겠구나. 그래. 제발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 유랑 중에 귀동냥으로 들었던 소문 하나가 떠올랐다. 북쪽 지역에 올라가면 피를 팔 수 있다는 말이었다.“그래, 아직 몸뚱이와 피는 있으니 한번 가 보자.”기차를 타고 함흥에서 회령까지 20일이 걸렸다. 기차에 붙어 기생하는 꽃제비들처럼, 그도 걸식하며 가까스로 회령에 도착했다. 이때 죽지 않은 것 역시 그의 생각에 또 하나의 기적이었다.회령역에 내려 힘없이 주저앉아 있는데, “중국에 가겠다면 자기가 데려다주겠다”며 한 노파가 다가왔다. 용 씨는 중국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거기 가면 살길이 있다는 말에 따라나섰다.그해 4월 15일 김일성 생일에 그는 노파와 다른 여인과 함께 두만강을 몰래 건넜다. 함께 간 여인은 세 번째 탈북 시도 만에 중국에 무사히 왔다며 무척 좋아했지만, 용 씨는 자신이 어디 있는지조차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로 쇠약했다. 노파는 “4명은 데리고 와야 하는데 2명밖에 데리고 오지 못했다”며 툴툴거렸다.그가 들어간 중국집은 전문적으로 북한 사람들을 팔아먹는 집인 듯했다. 한 남성이 그들을 집에 들여놓기 전에 몸에 이가 많다면서 밖에서 옷부터 갈아입혔다. 방에 들어가서는 해 놓은 찰떡을 먹게 했다. 여자들이 왔다는 것은 그에게 돈이 왔다는 의미일 것이다.어떤 것도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극심한 고통 때문에 물도 삼킬 수 없었다. 그 집에서 20일을 보냈다. 겨우 몸을 추스른 그를 데리고 길을 떠났다.● 시골에서 보낸 9년그가 팔려 간 곳은 흑룡강성 목단강 지역 농촌이었다. 가까운 도시로 가려면 100km나 가야 하는 심심산골이었다. 전체 350세대 중 두 세대만 빼고 모두 조선족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서로가 먼 친척 관계인 듯 보였다.그의 남편으로 정해진 남자는 7세 연상의 총각이었는데,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용 씨를 살갑게 대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때리지도 않았다. 배운 것도 전혀 없어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아이를 갖자는 말도 없었다. 용 씨 역시 책임도 지지 못할 아이를 낳을 생각은 없었다.이 마을에서 그는 9년을 살았다. 돈이 없어 벼농사도 짓지 못해 용 씨가 마을에서 각종 삯일을 받아다 해서 돈을 벌었다. 먹고사는 일만 반복됐다. 몇 년쯤 살다 보니 살고 싶은 의욕이 사라졌다. 인간의 삶이 아니라 희망이 없는 돼지의 삶인 것 같았다. 쥐약이나 농약만 보면 먹어서 죽고 싶은 날이 많았다. 그렇게 하지 못한 이유는 마을에 농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한 여인 때문이었다. 병원에서 위 세척을 해서 살아났지만 돈은 돈대로 나가고 몸은 몸대로 망가져 있었다. 그런 꼴은 되고 싶지 않았다.용 씨가 그 마을에서 지내는 동안 탈북 여성 32명이 시집을 왔다. 다들 견디지 못하고 도망가거나 체포돼 북송됐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런 삶을 버티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하지만 용 씨는 달랐다. 그는 태어나서부터 수모를 견디며 죽은 듯 사는 것이 몸에 배었다. 참는 것은 누구보다 도가 트였다. 말도 모르는데 마을을 떠났다간 화를 당할까 두려웠다. 유랑하던 지난날을 생각하면, 그래도 그 마을엔 누울 곳은 있었다.마을 사람들은 모여 앉으면 누가 싸웠고, 누가 뭘 훔쳐 도망갔다 같은 탈북자들 욕을 했다. 용 씨는 더욱 숨도 쉬지 못하고 살았다.신기한 것은 그 9년 동안 그가 북송 한 번 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안이 오면 오히려 “우리 집에 와 있으라”며 옆집 사람들이 집을 비워 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탈북자를 “먹지 못해 온 거지들”로 봤다. 그들이 어떤 일을 견디지 못해 하면 “그런 거지들이 똑똑한 척, 잘난 척한다”고들 했다. 하지만 용 씨는 달랐다. 누구와도 말썽을 만들지 않았고 늘 겸손했다. 혈연으로 엮인 마을에서 골치 아픈 친척 총각 거둬 주고 먹여 주고 말썽 없이 조용하게 사는 그에게는 나름 존재 이유가 분명했던 것 같다.● “우리를 받는 곳이 있다고?”2006년 5월 돈을 벌겠다고 한국에 갔던 마을 사람이 용 씨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왔다.“내가 한국에 와 보니 북에서 온 사람을 탈북자라며 국적도 주고 돈도 주고 임대아파트도 주더라. 네 각시도 숨어 살게 하지 말고 여기 보내서 사람답게 살게 해.”용 씨는 그때 처음으로 한국에 간 탈북민들 얘기를 들었다.‘아, 이 세상에 우리 같은 사람들을 받아 주고 사람 대접을 해 주는 곳이 있구나.” 희망이 생기고 가슴이 뛰었다. 남편에게 한국에 가겠다고 하니, 늘 그랬듯이 반대도 찬성도 하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 온 마을 주민을 통해 브로커와 연결돼 일행 5명과 함께 한국으로 떠났다. 중국과 태국 국경에서 험한 산을 넘을 땐 다리가 끊어질 것 같았지만 미래를 생각하며 기어코 산을 넘었다.태국에 도착하니 다른 브로커가 마중 나왔다. 그는 “미국에 가려면 도와줄 텐데, 한국에 가려면 알아서 가라”고 했다. 당시엔 미국에서 탈북민을 난민으로 간주해 입국을 허용하는 북한인권법이 통과된 지 1년이 지난 뒤였다. 브로커가 무슨 이해관계 때문에 그렇게 말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용 씨는 미국에 가겠다며 남았다. 미국과 한국의 차이는 몰랐지만 혼자 알아서 가라는 말이 무서웠다.미국에 가기를 희망하는 탈북민은 방콕에서 유엔 관할의 어느 호텔에 묵게 했다. 하지만 미국 입국 심사는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미국에 간 탈북민은 2025년까지 200명이 간신히 넘는데, 모두 1년 넘게 제3국에서 대기해야 했다.그는 그 호텔 생활을 8개월 동안 했다. 그때가 가장 행복한 때인 듯했다. 가만히 있어도 호텔에서 먹여 주고 입혀 주니 그런 천국이 따로 없었다. 그러던 중 다른 탈북자를 따라 한인 교회에 가게 됐다. 교회 사람들은 “미국행은 기약이 없으니 한국으로 가는 것이 낫다”고 말해 주었다. 실은 용 씨에게 미국이든 한국이든 큰 의미는 없었기 때문에 그는 8개월 만에 한국행 대열에 합류했다. 방콕 이민국 감옥에 들어가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낸 뒤 마침내 한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태국에서만 그렇게 1년을 허비했다. 하나원 생활을 하면서 그는 비로소 삶의 의욕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하나원에서 가르쳐 주는 영어 단어를 익히면서 ‘중국에서 돌처럼 살았던 9년이 너무나 아깝다’고 생각하게 됐다.● 한계를 깨달은 초기 정착 과정2007년 11월 2일 그는 하나원을 졸업해 서울 양천구 신정동 임대아파트에 자리를 잡았다. 더 이상 과거의 용성옥이 아니었다. 껍질을 벗고 땅 위로 올라온 애벌레마냥 새로운 인생을 예고한 존재였다. 나이 38세. 의욕이 넘쳤다.하지만 한국 사회에선 필수라는 컴퓨터도 전혀 할 줄 몰랐고 휴대전화 사용도 서툴렀다. 집에서 혼자 밥에 고추장을 며칠 비벼 먹으니 갑자기 또 외로움이 찾아왔다.“여기서는 더 이상 외롭지 말자. 먹고 잘 수 있는 곳으로 가서 일하자.”벼룩시장을 뒤져 찾은 첫 직업은 경기 용인시의 어느 정신병원 간병인 자리였다. 그곳의 다른 간병인들은 대개 70대 조선족이었다. 몇 달 일하니 그에게 말을 거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이 일은 젊은 사람이 할 일이 못 되니 다른 직장을 찾으라”고 했다. 그때쯤 그는 간병인이 자신에게 어울리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작은 체구로 우람한 환자들을 옮길 수도 없었고, 장애인 몸으로 무거운 것을 들고 다니기도 힘들었다. 설거지를 하려고 해도 키가 작아 불편했다.하지만 다른 직장 생활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그는 직장이라고 하면 정장 차림에 구두를 신고 다니는 곳인 줄만 알았다. 컴퓨터도 할 줄 모르는 자신이 직장인이 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그때 귀인이 나타났다. 그가 사는 동네 교회의 한 장로가 야간에 작업할 사람이 필요하니 해 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이 장로 부부는 종이 쇼핑백 끈을 자르는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데, 밤에도 일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그곳에서 용 씨는 오후 8시부터 이튿날 오전 9시까지 작업했다. 기계로 하는 작업이었지만, 16세부터 기계공장에서 기계공을 한 그로서는 두렵지 않았다.하루 일당은 10만 원이었다. 돈을 쓸 곳이 별로 없어 들어오는 족족 모두 통장에 저축했다. 살면서 처음으로 통장에 돈이 들어오는 생활을 하니 참 좋았다.장로인 사장은 “북한 사람이 참 일을 잘한다”며 좋아했다. 이후 사장은 다른 탈북민들도 받아 일을 시켰는데 조용하게 일하는 성격인 용 씨는 오히려 그들과 어울리는 것이 스트레스였다. 2년 넘게 일한 그가 먼저 일을 그만두었다.● 운전면허로 얻은 자신감한국에 와서 처음 느낀 큰 성취는 운전면허 취득이었다. 일자리를 찾아도 거리가 멀고 교통수단이 좋지 않아 가기 힘든 경우가 종종 생겨났다.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니 많이 걷는 것도 힘들었다. 그에게 운전면허 취득은 절박한 일이었다.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쪽 다리에 힘이 없어 양발 운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강사들은 “그렇게 하면 너무 위험하니 운전을 포기하라”고 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사정을 들은 운전면허학원 원장은 그에게 따로 강사를 붙여 줬다. 마침내 운전면허를 딴 그는 지금까지 14년째 무사고 운전을 하고 있다. 위험하다고, 안 된다고 주변에서 말리는 일을 해내니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그런데 어떤 일을 하던 시간이 흐를수록 커지는 고민이 있었다.“이런 일은 영원히 할 일이 아니다. 나처럼 장애가 있는 사람이 평생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나이가 들수록 다리에 힘이 없어질 텐데 늦지 않게 나만의 일을 찾아 보자.” 한국 사회에 어느 정도 적응하면서 여기저기 다양한 가게를 찾아가 살펴보며 연구하기 시작했다. 학교 다닐 때 반 친구들 머리카락을 잘라 주던 일이 생각나 미용실도 가 봤지만, 한국 미용실은 가위질만 하는 곳이 아니었다. 엄두가 나지 않았다.우연히 알게 된 일이 세탁이었다. 하루는 동네 전단을 보다 ‘머리밴드 고무줄 끼우는 아르바이트’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게 됐다. 고무줄을 끼우면 1개에 10원씩 주는 일이었다. 거기서 그는 재봉기란 것을 처음 봤다. 60세가 훌쩍 넘은 여인이 재봉질하는 것을 보고는 적성에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앉아서 하는 일인 데다 연령 제한도 없어 보였다.하지만 재봉일도 기술이 필요한 법. 그는 미싱학원을 검색하고 등록했다. 4대 보험이 되는 회사에 다니면서 6개월 동안 학원 주말 반에 부지런히 다녔다. 왼발로 발판을 누르고 오른손으로 박음질을 하려니 손과 발이 따로 놀았다. 나이 들어 배우니 더 힘들었다. 하지만 다녀 볼수록 내 일이란 확신이 생겼다.옷 수선도 이 학원에서 처음 알게 됐다. 여기저기 옷 수선집을 찾아 살펴보니 대개 60~70대 사장이 운영하고 있었다. “정년이 없이 내가 하고 싶을 때까지 할 수 있는 일이구나.”직장을 그만두고 아예 전문직 주간 반에 등록했다. 그때부터 2년 동안 학원에서 열심히 기술을 배웠다. 오전엔 학원에 가고 오후엔 옷 수선집에서 아르바이트한 뒤 저녁엔 다른 부업을 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집에 미싱을 사놓고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나의 세탁소를 열다그렇게 2년이 흘렀다. 2014년 3월 그는 살던 동네에서 옷 수선집을 열었다. 옷 수선만 해서는 수입에 한계가 있을 듯해 세탁 체인점과 겸했다.그렇지만 세탁과 옷 수선은 기술만으로 하는 일이 아니었다. 고객 대응법과 인사법, 돈 계산법, 컴퓨터 타자술, 세탁 품목 익히는 법, 가게 운영법 등 넘어야 할 산이 한둘이 아니었다. 명품이 뭔지 밍크가 뭔지도 몰랐다.처음에는 수선을 위해 손님들 옷을 가위로 자르는 것이 두려워서 가위를 들었다 놨다를 한 시간 동안 했다. 실전은 학원과 달랐다.지금까지 조용히 살던 성격도 문제였다. 분명히 손님이 들어올 때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라고 인사를 했는데, 말이 입에서 맴돌아 손님은 알아듣지 못할 때가 많았다. 힘을 주어 말하면, 조선족이냐고 했다. 이때마다 그는 북에서 왔다고 당당히 대답했다.동네에 세탁소가 한둘이 아닌 상황에서 그의 유일한 경쟁력은 가격을 낮추는 것이었다. 남들이 3000원 받을 때 2000원을 받았다. 가격 경쟁력을 내세우니 고객이 하나둘 늘어났다. 하지만 3년쯤 세탁소를 운영해 보니 한계가 보였다.그의 세탁소는 그냥 동네 고객들에겐 싸고 착한 가게였다. 남들처럼 똑같이 수선도 하고 세탁도 할 자신이 생겼지만 가격을 높이려고 하자 고객들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굳어진 이미지가 문제였다.3년 만에 가게를 옮겼다. 스스로 봐도 당당하게 할 수 있는데, 그 동네에선 굳어진 이미지를 벗기 힘들었다. 2017년 서울 양천구 지하철 5호선 목동역 인근에 새로 세탁소를 시작했다. 스스로를 새롭게 업그레이드하는 의식이기도 했다.업그레이드를 하려면 쉬지 않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세상은 세탁이나 수선 기술만 있다고 해서 편히 살게 두지 않았다. 점점 성능이 뛰어난 세탁기와 건조기가 나오고 주변에 코인 세탁소도 늘었다. 유튜브 등으로 세탁 기술도 많이 공유되면서 세탁업 입지는 매년 줄어들었다. 게다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세탁 체인점 본사가 폐업하자 손님도 줄었다.어떻게 하면 경쟁력을 키울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신발 세탁을 떠올렸다. 신발 세탁은 까다로워서 가정에서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클레임이 제일 많은 것도 신발 세탁이어서 세탁소에서 선뜻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그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주말마다 경기 의정부나 안양 그리고 한양대 등에서 ‘수업료’를 내면서 신발 세탁 기술을 배웠다. 온라인 세탁 카페나 세탁 밴드 등에 가입해 비결을 배우기도 했다.이런 과정을 거치고 직접 신발 세탁을 시작하니 잘하는 집이라고 소문이 났다. 차에 신발을 가득 싣고 찾아오는 고객이 많아졌다. 그렇게 번 돈을 모아서 2020년엔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 자그마한 집도 샀다. 한국에 온 지 13년 만에 내 집이 생긴 것이다.● 시련은 파도와 같은 것인생이 늘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서민들을 보호한다며 2020년 정부 여당이 국회에서 강행 처리한 ‘임대차 3법’이 진짜 서민인 그의 목을 겨누는 비수가 됐다.2023년, 세탁소가 세든 건물 주인이 갑자기 가게를 비우라고 통보했다. 자신이 들어와 장사하겠다는 것이었다. 주인 속셈은 당시 월세 60만 원에서 어차피 5%밖에 올릴 수 없으니 그를 내보내고 다른 사람을 더 높은 월세로 받겠다는 얘기였다. 한편으론 세탁소는 기계가 많아 쉽게 옮기지 못할 것이란 타산도 있었던 듯하다.세탁소는 단골 관리가 핵심이다. 다른 데에서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세탁소를 처음 차리는 것과 비슷한 모험이다. 주인은 아예 전화를 받지도 않았다. 이견이 있으면 변호사와 상의하라는 문자 메시지만 왔다. 사정사정해서 20만 원을 더 주고 2년 계약을 새로 맺었다.올해 5월 다시 2년 만기가 다가오자 용 씨는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는 문자 메시지를 주인에게 보냈다. 2년 전의 불친절한 태도로 보건대 재계약에 목을 매면 또 어떤 조건을 내걸지 알 수 없어 용단을 내린 것이다. 그는 집 인근에 새 가게를 구했다. 기존 세탁소에선 수백 m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이사비만 1000만 원이 들었지만 마음은 시원했다. 그가 떠난 세탁소는 7개월이 지난 지금도 비어 있다. 이사를 하면서 고객을 잃을까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의외로 많은 단골이 더 멀어진 그의 세탁소로 찾아왔다. 새로운 가게는 ‘세탁스토리’라는 브랜드를 내걸고 운동화 위주 세탁과 옷 수선을 함께 한다. 그에겐 어디 가도 뿌리를 내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파도 같은 시련을 넘고 또 넘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찾아 자리 잡았다는 것처럼 뿌듯한 일도 없다. 손이 떨려 더 이상 가위질을 할 수 없을 때까지 평생 일할 수 있다는 것도 참으로 다행스럽다. ● “저를 보고 힘내세요.”사회통합 사례 발표 대회에서 그는 말했다.“대한민국 3만 탈북민은 저를 보고 힘내시기 바랍니다. 포기만 하지 않고 주저앉지만 않는다면 꼭 기회가 있고 끝이 있습니다. 이 말처럼 한다는 것도 얼마나 어려운 일인 줄 알지만 그 끝이 가져다 주는 희열도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지도 압니다.”그는 한국 생활 초기에 장애인 수당을 받으며 살까 하는 생각도 했다. 일부 탈북민은 장애인 등급을 받으려 애를 쓰기도 한다. 그런데 생계비를 지원받으며 할 수 있는 일은 그가 보기에 거의 없었다. 생계비와 장애인수당을 받으려면 평생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살아야 하고 자기 이름으로 차도 살 수 없었다.“지금 와서 봐도 정부 지원 생계비에 의존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더군요. 그걸 버려야 잘 살 수 있습니다. 작은 것을 내려놓아야 큰 것을 얻을 수 있는 법이죠.”실제로 그렇게 살아온 삶이 그는 매우 자랑스럽다. 재산세와 소득세 같은 세금을 낼 때마다 ‘받지 않고 오히려 내는 사람이 됐다’는 사실에 대단히 뿌듯하다.그의 꿈은 부담을 내려놓고 여유를 가지는 것이다. 자그마한 실수에도 북에서 와서 그렇다고, 장애인이어서 그렇다고 손가락질 받는 것이 두려워 압박감 속에 살았다. 그렇게 18년을 살면서 자신도 모르게 강박관념이 생겼다. 그걸 내려놓자는 것이다.이미 여유롭게 살기를 실천에 옮기고 있다. 한국에 와서 늘 바쁘게 살다 보니 여행을 가 본 적이 없었다. 지난해 그는 교회 봉사단체 일원으로 3박 4일간 몽골을 다녀왔다. 그의 첫 해외여행이었다. 올해 6월에는 베트남도 가 봤다.예전엔 하늘을 여유롭게 바라볼 틈도 없었다. 이제는 하늘을 보고 바람을 느낀다. 어쩌면 그에겐 새로운 업그레이드일지도 모른다. 인터뷰를 마치려는 순간 그가 다른 탈북민들에게 꼭 할 말이 있다고 했다.“세탁업이 정말 매력 있는 일이라고 꼭 알려 주고 싶어요. 정년도 없고 AI 시대에도 사라지는 직업이 아닙니다. 한국 사람들도 미국 이민 초기에 세탁업부터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한민족이 손재주가 있다는 증거인데 제가 보니 북에서 온 사람들은 더 손재주가 있어요. 저와 인연을 맺어 세탁업을 하게 된 사람이 몇 명 있는데 지금 다 잘 살고 있습니다. 저처럼 키도 작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사람도 나이 마흔에 시작해 서울에 집도 사고 자기 가게도 얻었습니다. 의지만 굳세면 왜 못 하겠습니까.”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1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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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5배년 계획이 된 5개년 계획

    김정은이 9일부터 11일까지 열린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13차 전원회의 확대회의에서 국가경제발전 5개년 계획 완수를 선언했다. 예상했던 바이지만 헛웃음이 나는 것은 숨길 수가 없다. 회의장에 있던 간부들도, 회의 내용을 들을 인민도, 심지어 김정은도 5개년 계획이 완수됐다고 스스로 믿지 않을 것이다. 2021년 1월 8차 당대회에서 발표된 5개년 계획의 주요 목표는 △금속 부문의 주체 철 생산 체계 완성 및 철강재 증산 △화학공업 자체 기술역량 강화를 통한 화학제품 증산 △조·수력발전소 건설 및 핵동력 공업(원자력발전) 창설 준비를 통한 전력 생산 강화 등이다. 이 중 하나라도 진전된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간부나 인민은 김정은의 완수 선언이 내심 반가울 것이다. 당시 8차 당대회 주석단에 선 김정은은 잔뜩 굳은 표정으로 “국가경제발전 5개년 전략 수행 기간이 끝났지만 내세웠던 목표는 거의 모든 부문에서 엄청나게 미달됐다”며 “쓰라린 교훈”이라고 말했다. 2016년 노동당 7차 대회에서 ‘휘황한 설계도’라고 제시한 5개년 계획이 모두 실패했음을 자기 입으로 실토한 것이다. 북한 지도자가 실패를 자인하는 것은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라 뜻밖이었다. 하지만 그는 실패의 원인을 간부들에게 돌렸다. 당시 김정은은 “비상설 중앙검열위원회를 조직해 실태를 파악하고 잘못한 것은 무엇인가, 그 원인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비롯해 그 진상을 파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완수했다고 했으니 간부들은 검열은 피할 수 있게 돼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쉴 것이다. 김정은이 5개년 계획 완수를 선언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이해가 된다. 10년째 실패를 인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북한은 1954년부터 ‘3개년 계획’ ‘5개년 계획’ ‘6개년 계획’ ‘7개년 계획’ 등 10회가 넘는 계획을 발표했다. 계획대로라면 북한은 세상에서 제일 잘사는 나라가 돼 있어야 하지만 현실은 아프리카 빈국 수준보다 못한, 우리가 다 아는 그대로다. 그럼에도 북한은 계획 중독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70년 넘게 ‘80일 전투’니 ‘100일 전투’니 달달 볶여 온 북한 인민만 불쌍할 따름이다. 지난 약 5년 동안에도 인민은 평양 5만 가구 주택 건설이나 원산갈마관광지구 건설, 지방산업공장 40개 건설 등에 동원돼 정신없이 삽질만 했다. 그런데도 김정은이 시찰하는 지방산업공장 사진들을 보면 한국의 변변찮은 중소기업 규모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들이다. 원산갈마관광지구 건설은 또 무슨 의미가 있는가. 관광업 활성화라는 목표와 동떨어져 파리만 날리면 돈 낭비에 불과한 것이다. 김정은이 실패를 인정하든 완수를 선언하든 사실 큰 의미는 없다. 인민은 이미 북한이 5년 동안 어떻게 변했는지 피부로 체감하고 있다. 계획이란 것도 다 잘 먹고 잘살려고 내거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 5년간 인민 생활은 ‘고난의 행군’ 이후 최악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북한 민생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때 제일 중요하게 활용되는 지표는 쌀값이다. 2020년 10월 1kg에 북한 돈 4500원 수준이던 쌀값은 올해 10월 3만 원을 넘었다. 최근 좀 하락하긴 했지만, 아무튼 5배 안팎의 상승률이다. 북한 역사에서 5년 동안 쌀값이 다섯 배 오른 적은 없다. 7차 당대회와 8차 당대회 사이 5년 동안에도 쌀값은 거의 비슷했다. 환율도 2020년 10월, 1달러에 북한 돈 8000원 수준이던 것이 올해 10월엔 3만8000원이 됐다. 이것도 거의 다섯 배로 상승한 것이다. 장마당 통제는 더 강화돼, 시장에 가서 돈을 주고도 구하지 못할 생필품이나 식료품이 훨씬 많아졌다. 무슨 계획을 내놓고 다그칠수록 점점 못살게 되는 것은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지난 5년은 특히 심했다. 결론적으로 8차 당대회의 5개년 계획은 물가를 다섯 배 이상 상승시킨 5배(倍)년 계획에 불과할 뿐이다. 이러고도 김정은은 위대한 성과 운운하고 있다. 만약 그가 내년 1월 9차 당대회에서 과거를 ‘승리의 5년’이라고 자평한다면, 이는 5년 동안 그의 얼굴 피부도 다섯 배쯤 두꺼워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다시 ‘휘황한 5개년 계획’이라고 제시한다면, 아마 고막까지도 다섯 배쯤 두꺼워져서 인민의 아우성이 더는 들리지 않는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5-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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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번 북송된 그녀, 73만 유튜버 되다…탈북 유튜브 ‘유미카’ 뒷이야기[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탈북민 사회에선 6~7년 전부터 유튜브 바람이 불었다. 수백 개의 탈북민 유튜브 채널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그러나 이후 많은 이가 중도 포기했고 살아남더라도 조회수 하락에 고전 중이다.허나 화마가 막 지나간 폐허에도 꽃 한 송이쯤 피어나는 법이다. 탈북민 유튜브 중에서도 독야청청(獨也靑靑), 홀로 우뚝 선 유튜버가 있으니 그 채널 이름은 ‘유미카’다.유미카는 12월 초 현재 구독자 72만7000명을 보유하며 누적 조회수는 6억4700만 회에 이른다. 잘 되는 집엔 뭔가 이유가 있는 법이다.유미카를 운영하는 이유미 씨에겐 사람들의 말을 편안하게 이끌어 내는 힘이 있다. 함께 공감해 주고, 울어 주고, 웃어 주며 시청자들도 함께 빠져들게 된다.그러나 영상에서 환하게 웃는 그가 누구보다 많은 눈물을 흘렸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부드럽게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그가 하반신 마비를 이겨 내고 열 번의 북송과 열한 번의 탈북을 체험한, 누구보다 독한 여성이라는 것을 잘 모른다.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 말을 잘 들어 주는 그는 보위부 고문에 아버지를 잃고 한국에 와서도 홍일점 중고차 딜러로 살아오며 누구보다 할 말이 많은 사람이다.양강도 혜산에서 태어난 아기가 40대에 생각지도 못한 유튜브 스타가 되기까지 반세기 가까운 세월, 운명은 그를 모질게도 괴롭혔다. 유미카는 주저앉지 않고 고난을 넘고 또 넘은 그에게 주는 운명의 보상은 아닐까.● 양강도 혁명사적관 강사이 씨는 1977년 태어났다. 당시 부친은 제대군인으로 양강도 혜산농림대학 임업과 학생이었고 모친은 소아병원 약사였다. 이 씨 집안은 토호(土豪)라고 불려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혜산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중학교 교장을 지낸 할아버지의 7남 2녀 중 둘째인 부친은 대학 졸업 후 고위 간부가 됐다. 부친의 다른 형제들도 다 ‘장(長)’ 자 직함을 가진 간부가 됐다. 혜산에 모여 사는 모친의 혈육들도 혜산에서 알아주는 간부들이었다. 이 씨의 어린 시절은 비교적 순탄했다. 반짝이던 순간도 있었다. 7세에 전국어린이노래축전에 나가 1등을 했다. 부모는 딸이 성악에 소질이 있는 줄 알고 기대했지만, 이 씨가 진학한 중학교에 성악을 가르칠 선생이 없다는 것을 알고 포기했다. 성악 대신 바이올린으로 갈아타 5년을 연주했지만 독주회 한 번 못 해 보고 그만두었다. 음악 영재인 줄 알고 시간을 보내다 보니 공부는 늘 반에서 꼴찌를 다투었다.이 씨 집은 압록강 바로 앞에 있었다. 여름과 겨울이면 압록강에서 중국 아이들과 많이 놀았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탈북하는 사람이 없어, 순찰대가 오전 오후에 한 번씩만 돌아볼 정도로 국경 경비는 허술했다.이 씨는 18세인 1994년 고등중학교를 졸업했다. 성적은 좋지 못했지만 아버지 덕분에 1년제 혁명사적지 강사 양성학교에 진학했다.이때 그의 부친은 양강도 혁명전적지관리총국 처장으로 있었다. 혁명전적지관리총국은 김 씨 일가 우상화 작업을 위한 핵심 시설물인 동상을 비롯해 혁명전적지와 혁명사적지 등을 관리하고 보존하는 일을 한다. 이른바 성지 보존과 관리를 책임진 노동당의 매우 중요한 부서다.북한의 대표적인 혁명 사적은 양강도에 압도적으로 많이 몰려 있다. 혁명의 성지라는 백두산, 조작해 만든 김정일의 ‘고향집’, 보천보 같은 빨치산 전적지 등이 대표적이다. 이 씨 부친은 양강도의 각종 사적관, 답사숙영소를 비롯해 많은 산하 조직을 책임졌다.북한은 김 씨 일가 우상화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혁명전적지관리총국엔 식량도 넉넉히 주고 각종 물자도 수시로 공급했다. 이 씨 집도 먹는 걱정은 없었다.북한에서 우상화 시설 강사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여성 중에서 인물과 체격, 목소리, 출신성분을 보고 골라 뽑는다. 그런데 양강도에선 여성 강사가 늘 모자랐다.백두산 답사 행군이 필수 교육 코스인지라 평양을 포함해 북한 전역에서 양강도로 몰려왔다. 군복 비슷한 멋진 옷을 빼입은 미모의 젊은 여성 강사에게 반하는 평양 총각이 많았다. 강사들도 평양으로 시집가는 것이 목표였다. 강사들이 수시로 결혼해 빠져나가니 강사 충원은 늘 골칫거리였는데, 고난의 행군이 막 시작된 1994년경엔 특히 심각했다. 양강도는 그해에 급히 1년제 혁명사적지 강사 양성학교를 만들었다. 이 씨는 키가 기준 미달이었지만 부친 덕분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학교를 졸업한 그는 혜산의 도 혁명사적관 강사로 일을 시작했다. 부친이 갑자기 체포돼 끌려가지만 않았다면 평양 남자와 눈이 맞아 평양 시민이 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구호나무 28대 불타버려1997년 가을 백두산 혁명전적지에서 초대형 사고가 발생했다. 건조실에서 작업하던 구호나무 28대가 불타버린 것이다.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었다. 누군가 밤에 건조실에 침입해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낸 뒤 달아났다. 당시엔 중국에서 만들어진 탈북자 반체제 조직들이 북한에 침투해 동상 폭파, 혁명사적지 방화 등을 시도하던 때였다. 범인은 체포되지 않았다.구호나무는 김일성 휘하의 항일빨치산이 김 씨 일가를 칭송하는 글을 적었다는 나무를 의미한다. 상식적으로 봐도 늘 추격을 피해 도망 다녀야 하는 빨치산이 붓과 먹을 준비해 굳이 압록강을 건너와 나무껍질을 벗기고 글을 적고 갈 리는 없지만, 아무튼 이런 구호나무가 북한 곳곳에 수천 그루다. 매년 새로 발견된다는 구호나무는 사실 이 씨 부친 산하 비밀 조직이 시약을 뿌려 가며 만들어 내는 것이다. 구호나무는 손상을 막으려고 8~11m 높이의 두꺼운 특수 유리통으로 씌웠고, 밤에는 두꺼운 휘장으로 전체를 감싼다. 유리통은 2만 달러를 주고 외국에서 수입했다고 한다. 유리 내부엔 순도 99% 아르곤을 채우고, 내부 온도 섭씨 20도를 유지하기 위해 컴퓨터 시설을 갖춘 중앙통제소에서 관리한다.나무 주변엔 피뢰침과 수십 개의 스프링클러를 설치했다. 구호나무 지역 반경 4km에 폭 약 100m로 나무를 완전히 벌채한 방화선도 쳐 놓았다. 북한이 구호나무를 유지하느라 들이는 돈은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아무리 돈을 쏟아도 습기에서 완벽하게 보호할 수 없기 때문에 매년 비밀리에 나무를 뽑아와 건조실에서 시약 처리를 다시 하면서 글씨를 보존한다. 이렇게 건조하던 중 방화가 발생한 것이다.구호나무 관리를 책임진 이 씨 부친은 연대책임이 지워져 보위부에 구속됐다. 하지만 북한 당국은 딜레마에 빠졌다. 여러 사람을 처벌하면서 대대적으로 범인을 색출하면 구호나무가 불탔다는 소문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정치적 범죄는 최대한 은폐하는 것이 김 씨 일가 권위 보존에 더 유리했다.당국은 부친을 40일 만에 석방했다. 대신 산하 직장 노동자로 강등시켰다. 방화 사실을 아는 사람들 입도 철저하게 막았다. 불탔다는 구호나무 28그루는 새로 만들어 조용히 다시 심었다. 부친이 노동자로 강등되면서, 이 씨도 도 혁명사적관 강사 자리에서 쫓겨났다.● 김정일 말 한마디 때문에이렇게 구호나무 방화 사건은 조용히 무마되는 듯싶었지만, 김정일이 새로운 재앙을 일으켰다. 이듬해 함경남도 무재봉이란 곳에서 산불이 발생했는데, 인근에 주둔하던 해군 소속 군인들이 무재봉 구호나무를 지키겠다고 올라가 17명이 타 죽었다. 이 군인들 시신은 구호나무를 몸으로 둘러싼 채 발견됐다. 북한은 이들 모두에게 공화국 영웅 칭호를 수여하고 선군 시대 모범으로 크게 홍보했다.그런데 김정일이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군인들은 타 죽으면서도 구호나무를 지키는데, 작년 양강도에선 구호나무들이 탔는데 죽은 놈은커녕 머리카락 하나 탄 놈도 없다”고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김정일이 화를 냈으니 누군가는 희생양이 돼야 하는 법. 양강도 보위부에선 이 씨 부친과 건조실 시공 책임자 그리고 경비원을 다시 체포했다.퇴근해 집으로 오던 이 씨는 끌려가는 부친을 길에서 만났다. 어디 가냐고 묻자 부친은 어두운 표정으로 “보위부에서 알아볼 것이 있어 간다”고만 대답했다. 그렇게 끌려간 부친은 한 달이 돼도 돌아오지 않았다. 김정일 ‘말씀’ 때문에 보위부에 끌려간 사람은 가족이 아무리 팔방으로 뛰어다녀도 석방될 수는 없었다.어느 날 이 씨 집에 보위부 구류장 계호원이 찾아왔다. 집엔 어머니와 이 씨만 있었다. 두 살 위 오빠와 남동생은 군에 입대해 있었다.계호원은 술과 담배를 뇌물로 요구하면서 감방에 있는 부친이 딸을 좀 데리고 와 달라고 부탁했다고 말했다. 이 씨는 계호원을 따라 보위부 감옥에 갔다. 새벽 시간, 정전으로 새까만 어둠 속에서 계호원이 그를 데리고 감옥으로 내려갔다. 다른 죄수들이 알아챌까 봐 계호원은 그에게 맨발로 조용히 따라오라고 요구했다.문을 세 개나 통과해 감방 통로에 들어서니 부친은 끝 방에 수감돼 있었다. 준비해 간 달걀과 찰떡을 아버지 손에 쥐여 준 이 씨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온몸으로 울어야 했다.아버지가 딸을 부른 이유는 단 하나였다. “집 장롱 아래 내가 쓴 글들이 있으니 그걸 갖고 평양에 가서 구명운동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헤어질 때 아버지는 딸의 손을 꼭 잡고 “너만 믿겠다”고 속삭였다.집에 와서 찾아보니 문장이 빼곡한 A4 용지 몇 장이 나왔다. 작년에 체포됐을 때 부친은 이럴 경우를 대비한 듯 건조실 도면과 각종 설명을 써 놓았다. 시설 관리를 잘하지 못해 화재가 났다고 몰아가는 보위부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외부인의 방화임을 입증하는 내용이었다.● 낮에는 강사, 밤에는 밀수꾼부친이 남긴 글과 집 재산을 처분해 만든 돈을 들고 그는 평양으로 향했다. 당시 이 씨 집은 남들보다 잘 살았는데, 부친이 재산을 많이 남겨서가 아니라 이 씨가 밀수해서 많은 돈을 번 덕분이었다.부친의 직책 덕분에 고난의 행군 기간에 먹고살 걱정은 없었다. 하지만 부친은 돈을 모으진 않았다. 부친은 1년의 절반은 산하 기관에 출장을 나가 있었는데, 이 씨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부친 몰래 밀수 일에 뛰어들었다. 혁명사적관 강사로 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자 공장 기계, 전기구리선을 비롯한 전국의 물자들이 중국에 밀수출되기 위해 혜산으로 밀려왔다. 혜산 사람들은 “저렇게 아까운 것들이 중국에 넘어가는 것을 보니 우리나라는 3년 안에 망하겠다”고 노골적으로 말했다.압록강 바로 앞에 있는 이 씨 집은 밀수 통로로는 최적이었다. 게다가 이 씨는 어렸을 때부터 건너편 중국 아이들과 놀았기 때문에 장백에 아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국경경비대 숫자가 크게 늘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군인 두 명씩이 압록강변 국경 200m 구간을 지켰는데, 전혀 통제되지 않았다. 압록강 너비는 불과 수십 m. 이쪽에서 밀수꾼이 넘어가는 것을 보고 경비대원들이 뛰어가면, 다른 밀수꾼들이 저쪽에서 강을 넘어 냅다 달아났다. 당시 혜산은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군인들은 밀수꾼을 잡으려 하루 종일 헐레벌떡 뛰어다녔다. 그들을 체포하기 위해서라기보단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운 나쁘게 잡힌 사람들은 군인들에게 돈을 찔러 주었다. 나중에는 야간 근무를 서야 할 시간에 강을 건너 장백에 가서 맥주를 마시고 돌아오는 군인들도 생겨났다. 건너편에서 밀수하는 중국인들에게 매수된 것이다.이 씨 집엔 밀수꾼들이 알아서 찾아왔다. 주변 집들도 마찬가지라 압록강 앞 그의 동네는 ‘밀수 마을’이나 다름없었다. 이 씨는 밀수를 도와주면서 번 돈으로 재산을 불렸다. 전기도 없지만 일제 컬러TV도 사고 선풍기도 사 놓았다.이렇게 번 돈을 부친 구명을 위해 써야 할 때였다. 이 씨 삼촌이 과거 같은 부대에서 복무한 자신의 동기가 상좌인데 평양에서 군부대 보위부장을 한다며 소개해 주었다. ● “남조선으로 가고 싶다.”그 보위부장의 커다란 집에 머물던 이 씨는 큰 충격을 받았다. 보위부장은 아내가 일을 나간 시간이면 부하 보위원들을 불러 방에 들어가 몰래 비디오를 봤다. 어느 날 이 씨는 보위원들이 여자가 스트립쇼를 하는 미국 비디오를 보면서 야한 장면은 몇 번이고 다시 돌려서 보는 것을 우연히 발견했다.또 다른 날에는 한 방에 들어갔다가 이 씨 또래의 젊은 여성이 벌거벗고 누워 있는 것을 보기도 했다. 이 여성은 다음 날 아침에 군복을 입고 나갔다. 보위부장은 산하 부대 여성 군인을 노리개로 삼고 있었다. 이런 인간들이 밖에 나가선 “장군님을 결사옹위하고, 썩어빠진 반동사상을 뿌리 뽑자”고 외치면서 사람들을 잡아 고문할 것을 상상하니 끔찍했다.평양에 머무르며 부친 구명을 위해 중앙당이나 보위부를 비롯해 안 가 본 곳이 없을 정도로 뛰어다녔지만 그 누구도 21세 처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마지막으로 찾아간 군 보위사령부에서는 효과가 있었다. 이때쯤 이 씨는 방법을 바꾸어 “아버지를 살려 달라”가 아니라 “간첩을 잡아 달라”고 호소했다. 당시 보위사령부는 보위부를 제치고 막강한 힘을 휘두르고 있었다. 보위부가 방화를 저지른 간첩을 잡지 않고 무고한 사람을 방화범으로 조작해 몰아간다는 것은 보위사령부가 보위부를 공격할 수 있는 구실이 될 수 있었다.이 씨가 평양에서 돌아오고 얼마 뒤 보위사령부가 혜산 보위부 검열을 나왔다. 1999년 7월 부친은 드디어 감옥에서 나왔다. 무죄가 아닌 병보석이었다.상태를 보니 간이 좋지 않아 복수가 차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즉시 병원에 데리고 갔지만 부친은 3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향년 54세였다.혁명전적지관리총국 고위 간부였던 부친은 감옥에서 반동 중의 반동으로 변해 있었다. 부친은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은 듯 딸에게 김 씨 일가의 조작에 대해 거리낌 없이 말했다.부친을 통해 이 씨는 6·25전쟁은 북한이 일으켰다는 것, 구호나무는 만들어 낸 것이라는 사실 등을 알았다. 부친은 김 씨 일가를 “저 새끼들”이라고 불렀다.“저 새끼들이 한 번도 가지 않은 별장이 전국에 많은데, 그곳에도 처녀들을 관리원으로 박아 두고 있다” “왜 아름다운 백두산을 파괴하고 거기에 자기 이름을 박아 넣느냐” 등등 아버지의 입은 점점 거칠어져 갔다.이 씨는 아버지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하루 종일 아버지 병간호만 할 수는 없었다. 장사를 나가야 했다.“이 땅엔 미래가 없다. 내가 걸을 수만 있다면 가족을 데리고 남조선으로 가고 싶다.” 이 씨가 들은 아버지의 유언이었다. ● 차 사고로 하반신 마비화불단행(禍不單行). 재앙은 홀로 오지 않고 겹쳐서 온다. 1999년은 이 씨에게 그런 해였다.부친이 풀려나기 전인 1999년 2월 이 씨 가족은 시내에서 추방됐다. 새벽, 문을 마구 두드리는 소리에 일어났더니 남자들이 들어와 세간살이를 차에 무작정 실었다. 도착한 곳은 삼수의 깊은 산골. 삼수갑산의 그 삼수다. 마을 간부가 나오더니 “집도 없는 데 왜 자꾸 사람들을 보내냐”고 남자들에게 짜증을 냈다. 그때는 혜산에서 자고 나면 수십 명씩 잡혀 추방될 때였다. 그들을 싣고 온 차는 창고라고도 말할 수 없는 곳에 짐을 내리고 사라졌다. 삼수의 2월 추위 속에 그곳에서 생존할 방법은 전혀 없었다.이 씨는 그날 중으로 혜산에 돌아왔다. 빼앗긴 집은 고위급 장교가 차지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그는 일제 컬러TV를 주고 혜산 변두리의 무너져 가는 집을 구했다. 지붕 곳곳에 구멍이 뚫려 하늘이 보이긴 했지만 삼수의 ‘창고’보단 나았다. 혜산엔 친척이 많아 의지하며 살 수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부친의 형제자매는 8명이나 됐지만, 부친이 보위부에 끌려갔다는 얘기를 듣고 모두 사색이 됐다. 그들은 북한 간부다웠다. 보위부 조사 내용을 들었는지 “구호나무가 불에 탈 동안 형님은 뭘 했냐”며 “집에 반역자가 나타났다”고 떠들었다. “아버지가 정치범이 되면 삼촌들도 무사하진 못한다”고 말해 봐야 소용이 없었다. 이 씨는 그들과 연을 끊었다. 썩 나중의 일이지만 삼촌들은 다 비참한 노년을 맞았다.그나마 외가는 이 씨를 도와주었지만 계속 얻어먹고 살 순 없었다. 이 씨는 장사를 시작했다. 부친이 세상을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그는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담배를 싣고 함흥으로 가던 화물차가 한 고개에서 전복됐다. 이 씨는 화물차 적재함에 깔려 정신을 잃었다.몇 시간 만에 구조돼 인근 병원으로 실려 갔지만 약이 없었다. 혜산에서 외삼촌이 달려와 큰 병원으로 옮겼지만 침대만 빌려줄 뿐이었다. 그나마 며칠 뒤엔 약이 없으니 집으로 데려가라고 했다.사고 후유증으로 하반신 마비가 왔다. 집에 하루 종일 누워 있는 동안 유일한 위안은 한국 라디오를 듣는 것이었다. 다행히 그가 있는 변두리엔 전기 공급이 잘 돼 라디오를 들을 수 있었다. 인근에 중국에서 투자한 탄광이 전기를 중국에서 직접 끌어왔던 것이다.처음엔 라디오 내용을 반신반의했지만 믿지 않을 방법도 없었다. 출연자들이 말하는 북한 실상은 그가 아는 현실 그대로였다. 날씨 예보도 잘 맞았다. 특히 탈북민 출연자들이 하는 말은 억양도 비슷해 귀에 쏙쏙 들어왔다.라디오를 들으며 한국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졌다. ‘꼭 한국으로 가서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리라.’ 그러려면 일어서야 했다. 별짓을 다 해 봤다. 옆집 할머니가 개똥을 먹으면 좋아진다고 해서 개똥마저 구워 먹어 봤다.23세라는 젊음의 힘이었는지 조금씩 하반신이 움직였다. 누워 있다가 처음 앉았을 때는 3초도 채 버티지 못했지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이를 악물었다. 마침내 6개월 만에 이불장을 잡고 두 발로 설 수 있었다. 그때부터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움직였다. 겨우 걸을 수 있을 때까지 1년이 걸렸다.● 산삼을 메고 압록강을 넘다2001년 2월 하반신 마비를 극복한 이 씨는 압록강을 넘었다. 그때도 걷기는 힘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성치 않은 상태에서도 밀수를 다시 시작했다. 아이템은 산삼이었다.당시 중국에서는 함북 경성에서 왔다는 ‘경성삼’이 제일 비쌌다. 첫 거래가 성공해 큰돈을 만졌다. 그런데 두 번째 거래를 하려고 하니 중국 연변 화룡에 있다는 대방(밀수업자)과 연결이 되지 않았다. 산삼을 집에 두고 있다간 다 썩을 판이었다.그는 직접 강을 건너기로 했다. 예전에 밀수를 많이 했기 때문에 압록강 넘는 방법도 잘 알았고 장백에는 아는 사람도 있었다. 새벽에 얼음 위로 건너간 그를 맞은 대방이 산삼을 보더니 “이런 삼은 장백에서 소화할 수 없고 연길에 가야 한다”고 했다.산삼을 들고 택시를 탔다. 택시기사가 의심스러웠는지 말을 걸었다. 대답할 수가 없었다. 택시 옆자리에서 자는 척했다. 20분도 지나지 않아 느낌이 이상해 눈을 뜨니 변방대(국경경비대) 건물 앞이었다. 강을 건넌 지 2시간 만에 산삼을 다 빼앗기고 수감됐다. 중국은 수감자들에게도 빵과 고기를 주었다. 충격이었다.그날 중으로 혜산으로 북송됐다. 보위부에서 조사를 기다리다 함께 북송된 다른 탈북 여성들과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몇 년씩 중국에서 살다 왔다는 그들은 “중국에선 돼지도 고기를 먹는다” 같은 믿기 어려운 얘기를 했다.이 씨는 북송된 당일 석방됐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연길 병원에 치료받으려 건너갔다”고 둘러댔는데, 성치 않은 그를 본 보위부가 믿어 주었다. 또 보위부에 있는 친척 오빠가 힘을 써 주었다.이 씨는 다른 탈북자에 비해 석방되기 유리한 점이 많았다. 혜산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집 딸이고, 친척들도 다 고위 간부였다. 보위부도 부친을 고문해 죽게 했다는 부채의식이 있었다. 강을 건넌 지 2시간 만에 잡힌 데다 몸이 성치 않은 처녀를 감옥에 넣었다가 죽으면 큰일이라는 생각도 있었을 터다. 물론 뇌물도 적잖게 썼다.이 씨가 곧바로 풀려나는 것을 본 다른 북송 처녀가 급히 속삭였다.“언니, 나는 중국에서 5년 살아서 중국어가 유창해요. 언니가 나를 빼 주면 베이징에 데려가서 식당에 취직시켜 줄게요.”중국어를 몰라 잡혔다는 사실이 원통했던 그에겐 엄청난 유혹이었다. 풀려난 그는 친척들 힘을 동원해 함흥에서 왔다는 그녀를 보위부에서 뽑아 냈다. 그녀는 중국 길림성 통화현에서 한족 남편과 살았다는 여성을 데리고 왔다.5월 어느 날 이 씨는 이들을 데리고 자신이 잘 아는 지점에서 압록강을 넘었다. 장백의 아는 집까지 데려갔다. 이 여인은 한족 남편에게 전화했다. 유창한 중국어로 통화하는 그가 그렇게 멋있을 수 없었다. 여인은 남편이 마중 오기로 했다고 말했다. “아, 이젠 성공인가.” 마음이 놓였다.새벽에 여인은 변소에 다녀오겠다고 나갔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강을 넘을 때만 이용하고는 귀찮은 이 씨와 처녀를 떼어 버리고 도망친 것이다.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장백 안쪽으로 가 보기로 했다. 중국에서 5년 살았다는 처녀가 중국어를 하니 택시기사의 의심을 덜 받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엔 첫 번째 변방 초소에서 체포됐다. 또 북송됐다.또 잡혀온 그를 보고 어이없어 하는 보위부 사람들에게 이번에도 담배 몇 보루를 뇌물로 주고 어렵지 않게 나왔다.보위부가 그를 몰랐다면 아마 감옥에 보냈겠지만, 당시엔 북송된 사람들로 보위부 감방이 넘칠 때였다. 혜산 사람이 다 아는 고위 간부의 딸로 살다가 졸지에 아버지를 잃고 불구까지 된 24세 처녀에 대한 연민도 있었을 것이다.● 열 번의 북송, 열한 번의 탈북북한은 청년들에게 ‘백절불굴(百折不屈·백 번 꺾여도 굴하지 않음)의 혁명정신을 가져라’라고 세뇌하고 있다. 중국에 가자마자 두 차례나 북송된 이 씨 마음속엔 ‘백절불굴의 탈북 정신’이 자라고 있었다.그렇다고 중국어를 모르고 무작정 갈 수는 없는 법. 두 번째 석방될 땐 한족과 결혼해 중국어가 유창한 양강도 후창 사는 여인과 친해져 함께 탈북하기로 약속했다.세 번째 탈북에서도 택시를 타고 가다가 몇 시간 만에 잡혔다. 장백을 벗어나지 못하고 또 잡혔다. 그리고 또 탈북…. 네 번째도 비슷했다.혜산 보위부에 네 차례나 잡혀 오니 나중엔 “멍청하게 또 잡혔느냐. 치료 좀 받으려는데 중국놈들 참 지독하다”고 동정하는 보위원마저 생길 정도였다. 물론 그가 잡힐 때마다 외가 친척들이 적극 나서서 뇌물을 써서 처벌받지 않고 석방됐다.다섯 번째 탈북에서 드디어 장백을 벗어나 연길까지 도착했다. 연길에서 개장을 파는 식당에서 일했다. 개고기를 매일 먹으니 하루가 다르게 몸이 좋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얼마 뒤 체포됐다. 문제는 연길에서 체포되면 혜산 보위부가 아닌 함북 온성 보위부로 북송된다는 점이다. 이곳 보위부엔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엄마가 뇌물을 들고 달려왔다.감옥에서 몸을 추스르고 나와 다시 탈북했다. 이후에는 장백을 벗어나 어디에 자리를 잡을까 싶으면 체포됐다. 북송되는 지역도 온성, 회령, 무산 등 다양했다. 수차례 탈북했다 북송이 되면 가중처벌이 따를 수밖에 없다.하지만 그의 전산기록이 남아있지 않았다는 운이 따랐다. 혜산에서 추방돼 간 삼수에서 그는 주민등록을 하지 않았다. 그의 기록은 혜산에도 삼수에도 없었다. 삼수 안전부에 전화해 호송하러 오라고 하면 삼수에선 우리 사람이 아니라고 거절했다. 그 시절 북한은 온라인 전산망이 없었다. 처벌을 담당할 거주지역이 없으니 공중에 뜬 신분이 된다. 북송된 탈북민을 받은 국경 보위부 난처해진다. 언제까지 국경 감옥에 두고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다. 이럴 때마다 모친이 달려와 뇌물을 주니 마지못해 석방해 주었다. 추방된 덕을 그나마 본 셈이다.자꾸 북송되면서 이 씨는 보위부 취조를 받을 때 어떻게 대답할지 ‘프로’의 경지에 올랐다. 누구는 북송 한 번에 죽기도 하지만 이 씨는 열 번이나 살아남았다. 북송될 때마다 나름의 사연이 있었다. 구구절절 쓰기엔 너무 길어 생략할 수밖에 없다. 일곱 번째 탈북 때는 천진에 자리를 잡았는데 체포되기까지 좀 오래 걸렸다. 이때 중국어를 어느 정도 배웠다. 2004년부터는 한국으로 가려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북한 노동단련대에서 만난 친구와 함께 탈북하기도 했는데, 그 친구는 혼자 한국행 길에 올랐다가 붙잡혀 북한에 끌려가서 죽었다. 열 번째 북송 때엔 연길에 있다는 탈북 브로커를 만나려고 천진에서 일부러 북중 국경 부근에 왔다가 체포됐다. 이때는 석방될 때까지 반년 넘게 걸렸다. 2004년 10월 온성으로 넘어와 함북도 집결소에서 고생했고, 혜산으로 넘어와서 6개월 노동단련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혜산 도시건설사업소 지배인이던 외삼촌이 분주소(파출소) 건물을 지어 주기로 하고 그를 풀려나게 했다. 각종 건설을 담당하는 도시건설사업소는 힘이 있는 부처였다. 이렇게 이 씨는 2001년 2월부터 2005년 5월의 마지막 탈북까지 열 번의 북송을 겪었다.● “유미야, 내가 도와줄게.”열 번이나 북송된 이 씨 사연은 마을에 소문이 다 났다. 하도 자꾸 잡혀 오니 마을의 한 여인이 도와주겠다고 했다.이 씨도 아는, 이 여인의 남편은 먼저 탈북해 한국에 정착해 있었다. 여인을 통해 한국 남편에게 전화하니, 반가워하며 심양까지 오면 도와주겠다고 했다.열한 번째 탈북 길은 발걸음이 가벼웠다. 심양까지 가면 성공이라고 믿었다. 심양에 가서 한국으로 가려는 일행과 합세했다. 그런데 이 일행은 동남아나 몽골을 경유해 한국으로 가지 않고 중국에 있는 외국인학교나 재외 공관에 진입하는 방식을 택했다.2005년 10월 이 씨 일행 5명은 천진국제학교에 진입해 한국행을 요구했다. 이 같은 집단 진입이 많을 때였다. 천진국제학교는 이들을 베이징 주재 한국영사관에 넘겼다. 드디어 성공한 것이다.하지만 고생은 끝나지 않았다. 중국 당국이 이들의 한국행에 대해 사사건건 딴지를 놓는 바람에 영사관 지하실에서 13개월이나 머물렀다. 감옥 같은 지하실 생활을 1년 넘게 하니 미칠 것 같았지만 그는 이겨 냈다. 그나마 영사관에선 한국 TV 프로그램을 마음껏 보고 불고기와 빵, 라면 같은 먹을 것도 잘 먹었다. 열 번이나 수감 생활을 극복한 이 씨에게 이 정도는 고생 축에도 들지 않았다.새해를 코앞에 둔 2006년 12월 30일 이 씨는 마침내 한국에 올 수 있었다. 합동 심문 중에 네 차례 북송까지 말했더니 담당 조사관이 ‘또? 이 얘기는 언제 끝나려나’ 싶은 눈빛이었다. 열 번째 북송까지 다 말하면 심문 시간이 한없이 길어질 것 같아서 이 씨는 입을 닫았다. 다행스러운 것은 하도 많이 북송돼 감옥이나 집결소 생활을 하면서 만난 ‘감옥 동기들’을 심문 과정에서 많이 만났다는 것이다. 그들이 보증해 주어 더 오래 있지 않고 하나원에 갈 수 있었다.● 1년 만에 탈북시킨 가족2007년 4월 드디어 한국 사회에 나왔다. 30세 때였다. 서울 노원구 한 임대주택에 짐을 풀었다. 이제부터 혼자 살면서 돈을 벌어야 했다. 돈을 벌어야 북에 있는 가족도 데리고 올 수 있으니 마음이 조급했다.아르바이트와 자격증 학원에 다니는 시간이 이어졌다. 미용, 바리스타, 빵, 메이크업, 컴퓨터 등 그는 많은 자격증에 도전했다. 하지만 컴퓨터 자격증 하나만 땄다. 실기는 자신 있었지만 이론과 영어가 그를 괴롭혔다. 한국은 요리 용어도 영어를 써서 교재를 봐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식당과 치킨집 등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제일 오래 한 일이 찜질방 야간 아르바이트였다. 밤엔 손님도 별로 없는 데다 사우나에서 먹고 자니 5만 원씩 받는 일당도 쓸 일이 별로 없어 통장에 쌓였다.이렇게 번 돈으로 2008년 어머니와 남동생을 한국에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자강도 국경경비대에서 10년을 복무하고 집에 돌아온 남동생은 탈북했다는 사실을 알고 “집안에 배신자가 나왔다”고 길길이 뛰었다고 한다.함경도나 양강도에서 국경경비대 복무를 했다면 탈북민이나 밀수꾼들을 많이 만나 생각이 좀 바뀌었겠지만, 자강도는 탈북도 밀수도 없는 곳이라 군에서 세뇌된 상태 그대로였던 것이다.그런 동생이 탈북하게 된 계기는 이 씨와 모친의 통화가 적발돼 보위부에 끌려간 일이었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분명히 내통했을 것”이라며 몽둥이를 드니 동생도 “누나가 남조선에 있는 한 여기서 살면 미래가 없다”며 북한에서 계속 사는 것을 포기했다. 보위부에 잡혀가 매를 맞고서야 정신이 든 경우였다.두 살 위 오빠는 끝내 한국으로 오지 않았다. 그의 세뇌는 더 단단했다. 설득하려 했지만 오빠는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유미카에 남기는 기록2012년 봄, 이 씨는 인천 최대 규모 엠파크 중고차 단지에서 일을 시작했다. 지인이 공감 능력과 설득력이 뛰어난 그를 눈여겨보고 중고차를 팔면 잘하겠다고 권했다. 당시만 해도 여성 중고차 딜러는 거의 없을 때였다. 엠파크에서 그는 홍일점이었다.중고차를 팔면서 별의별 일을 많이 겪었다. 중고차를 잘 팔려면 신차 영업소를 장악해야 했다. 새 차를 사는 사람들에게 “중고차로 팔 때 연락해 주세요”라고 말하면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영업소에는 남성 딜러만 있어서 그가 들어가면 쳐다보지도 않았다.그는 낙담했지만 주저앉지는 않았다. 오히려 문을 열고 들어가 “안녕하세요. 저는 북한에서 왔습니다”라고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그제서야 사람들이 그를 보며 “어디서 왔느냐, 언제 왔느냐”며 말을 걸었다.하루는 차를 사던 여성 고객이 그를 측은하다는 듯 보며 “왜 여성이 이런 벼랑끝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벼랑 끝에 가 보셨어요? 저는 수없이 가 봤거든요.”식당 아르바이트보다는 중고차 파는 일이 적성에 맞았다. 올해까지 13년 동안 판매왕도 해 보고 여러 상도 받았다.2019년 유튜브 채널 유미카를 시작한 계기도 중고차를 더 팔기 위해서였다. 2~3년 뒤 구독자가 엄청나게 늘면서 주업이 바뀌었다. 72만 구독자, 조회수 6억 회 이상의 유튜버라면 당연한 일이었다. 중고차도 계속 팔긴 하지만 아무래도 파워 유튜버 비중이 더 커졌다.그동안 유미카에 나온 탈북자는 200명이 넘는다. 그들 이야기를 계속 듣다 보니 사명감도 점점 생겨났다.“저도 당사자이긴 하지만 다른 탈북민들이 겪었던 참혹한 인권 유린 사례를 계속 듣다 보니 이걸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통일이 언제 올지 모르는데 이렇게 남겨 놓는 영상을 먼 훗날 통일이 되서 북한에 있는 가족이 볼 수 있을 겁니다.살아서 통일을 보지 못한다 해도 우리가 무슨 생각으로 이 땅에 왔으며,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 북에 남겨둔 가족을 어떻게 그리며 살았는지 그 기록은 남을 겁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계속 영상을 만들 겁니다.”그의 말에 같은 탈북민인 기자도 설득됐다. “그러네요. 그럼 저도 유미카에 기록을 남깁시다.” 역시 설득의 여왕이었다.마이크를 달고 나자 이 씨 입에서 다시금 특유의 밝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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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마당서 옷 팔던 北처녀, 인사동 개인전 열기까지[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어선을 타고 중국으로 탈북한 사례는 거의 없다. 탈북 화가 이지혜 씨는 그런 희박한 방법으로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넘어갔다.배를 타고 떠났으면 바로 한국으로 오지, 왜 중국으로 갔느냐는 질문이 따르기 마련. 이 씨가 탄 배는 북한 어선이 아니라 중국 어선이었다. 북한의 연료난으로 해군 함정이 거의 가동하지 못하는 틈을 타서 중국 어선들은 대놓고 북한 영해에 들어가 조업을 했다. 일부 선장은 대담하게도 야밤에 북한 땅에 배를 대고 사람을 싣고 오는 브로커 일을 하기도 했다.2017년 여름, 22세 이 씨는 먼저 탈북한 아버지의 연락을 받았다. 가족을 데리고 어느 날 몇 시까지 평북 어느 섬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탈북하는 줄도 몰랐다. 그 섬까지 배를 타고 가면 아버지가 거액을 갖고 나타난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집을 떠났다. 북한 배를 타고 그 섬에 가서 기다리니 밤에 중국 배가 나타났다. 그 배를 타고 몇 시간 만에 중국 항구에 도착했다. 아버지가 마중 나와 있었다. 3년 전, 깊은 산골에 가서 금을 캐 돈을 보내겠다던 아버지였다. 중국에 왔다는 사실을 알고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떠는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말했다.“여보, 사실은 내가 중국에서 큰 수산 기지를 운영하면서 돈도 많이 벌었어. 일단 수산 기지에 가서 이야기합시다.”아버지가 한국에서 왔다는 것은 이 씨만 알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이 씨와 여동생은 차를 타고 심양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하루빨리 돈을 받아 북으로 돌아가려는 마음뿐이었다. 왜 이 씨 아버지는 어머니에게도 한국으로 가자는 말을 못했을까. 왜 어렵게 가족을 배로 탈북시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일까.● 전혀 다른 출신 성분의 만남이 씨는 1995년 평안남도 개천에서 맏딸로 태어났다. 고난의 행군이 막 시작되던 때였다. 고난의 행군에 대한 기억은 없다. “배급을 받지 못해 몰래 숨어서 장사하느라 너에게 젖을 제대로 먹이지 못했다”는 어머니 말은 많이 들었다.아버지는 배를 탔다. 원래 공장 노동자였지만, 일찍이 공장에 매달 일정한 액수의 돈을 내기로 하고 배를 탔다. 바다에서의 일은 고되고 위험했지만 돈은 많이 벌 수 있었다. 한번은 사고가 나서 병원에 입원했는데, 그때 의사 실습생이던 모친을 만나 내처 결혼까지 했다.알고 보니 두 집안은 서로 상극이었다. 아버지의 할아버지는 해방 전에 개천과 안주 일대에서 알아주는 지주였다. 정미소도 있었고, 집도 세 채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해방이 되면서 모두 빼앗겼다. 할아버지는 가끔 아버지에게 “저기 보이는 땅이 다 우리 땅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어머니의 집은 대대로 머슴을 살다가 해방이 돼서 팔자가 바뀌었다. 지주를 타도하고 빼앗은 집의 일부와 땅을 받았다. 이 씨의 외할아버지는 지주 타도에 얼마나 열심히 앞장섰던지 리당위원장까지 올랐다.이렇게 출신 성분이 너무나 다른 집안인 데다 의사와 어부라는 신분의 벽도 있었음에도 결혼까지 한 것은 아마도 아버지가 배를 갖고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싶다. 아버지는 돈을 벌어 배를 샀는데, 당시 북한에서 배가 있는 어부는 당 일꾼 부럽지 않을 정도로 많이 벌었다. 가난하던 그 시절엔 의사가 어부에게 시집가는 것이 전혀 부끄럽지 않은 일이었다.그리고 그런 선택은 옳았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 어부들은 굶어 죽지 않았지만 의사는 장마당에 나가 장사를 해야 했다. 어머니도 병원을 나와 장마당에 앉은 장사꾼으로 변신했다. 물론 아버지가 벌어오긴 했지만, 가족을 풍족하게 먹여 살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안기부 간첩으로 몰린 아버지2009년은 이 씨 기억 속에서 가장 좋았던 해이자 가장 불행한 해이기도 했다. 그해 이 씨는 처음으로 쌀밥을 먹고살았다. 늘 배가 고파 “세 숟가락만 더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해엔 아버지 사업이 번창해 돈이 막 들어왔다.아버지는 점차 영역을 확대해 중국에 수산물을 파는 일에도 손을 댔다. 이 일도 잘 돼 군부대 수산기지 기지장으로 스카우트되기도 했다.당시 아버지는 각각 4000달러, 6000달러에 산 배를 두 척 소유하고 있었고, 1700달러와 2200달러씩 주고 산 외국 엔진도 두 개 있었다. 이 정도면 당당히 부자라 할 만했다.하지만 북한은 눈에 띄게 잘 사는 것도 죄가 되는 세상이다. 아버지도 만일을 대비해 여기저기 뇌물을 많이 뿌려 놨다. 하지만 군부대 보위부장은 액수가 못마땅했는지, 아니면 날로 뺏어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2009년 10월에 아버지를 갑자기 연행해 갔다. 이를 모르고 있던 가족은 그 이틀 뒤 갑자기 들이닥친 보위부원들 앞에서 혼비백산했다.보위부원들은 TV, 냉장고, 세탁기를 비롯해 돈 될 만한 것을 모두 빼앗아 차에 싣고 떠났다. 그의 가족은 졸지에 알거지가 됐다. 갑작스런 불행에 할머니는 결핵에 걸려 얼마 뒤 세상을 떠났다. 이 씨 동생도 결핵에 걸렸다.어머니와 이 씨는 아버지를 찾아 군부대에 갔지만 누구도 그드을 들여놓지 않았고, 아버지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지도 않았다. 추운 겨울이 올 때까지 두 사람은 한 달 넘게 군부대 정문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이 불쌍해 보였는지 누가 “네 아버지는 안기부에서 돈을 받았기 때문에 평양에 잡혀갔으니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여기서 기다려 봐야 소용없다”고 귀띔해 주었다.아버지 소식은 이듬해 5월이 돼서야 알게 됐다. 교화소에서 갓 출소한 사람이 집에 와서는 아버지가 2년 형을 받고 끌려와 함께 있었다고 전해 주었다.아버지는 2011년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지주라는 출신성분에 중국과 무역했고 돈도 많이 축적한 아버지는 보위부 먹잇감으로 딱 좋은 대상이었다. 갑자기 한국 안기부 돈을 받았다는 무서운 혐의를 받고 평양에 끌려간 아버지는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 너무 괴로워 벽에 머리를 부딪쳐 자살도 시도했지만 무위로 돌아갔다. 무릎을 꿇고 “제발 불러 주는 대로 다 적을 테니 살려 주십시오” 애원해도 “불러 주긴 뭘 불러 줘? 네가 지금 나를 잡으려고 하느냐”는 대답이 날아왔다. 죄를 알아서 만들어 내라는 뜻이었다. 그들이 만족할 답을 알아서 적을 때까지 고문은 이어졌다. 아버지 재산을 다 뺏어 나눠 가진 이상 보위부는 무조건 그를 간첩으로 만들어 죽여야 안전했다.보위부 취조 과정에서 간첩으로 둔갑해 종신형을 구형 받았다. 하지만 최고재판소도 이건 너무 무리했다 싶었는지 사건을 다시 돌려보냈다. 덕분에 아버지는 2년 형으로 감형될 수 있었다.배운 것이 배 타는 것뿐이라 아버지는 다시 배를 탔다. 돈을 어느 정도 버는 눈치가 보이니 보위부에서 또 잡아갔다. 재산도 다시 몰수당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은 아버지가 오래 구금되진 않았다는 것이다. 억울하게 두 번이나 죽다가 살아난 아버지는 집에 돌아와 이를 갈았다.“이 땅에선 도저히 살지 못하겠다. 남조선으로 가야겠다.”2014년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깊은 산골에 금을 캐러 간다고 말하고는 떠났다. 북한 체제에 대한 어머니의 충성심이 너무 강해 탈북한다고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대신 19세 맏딸에겐 북한을 뜬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남조선으로 가 3~4년 안에 꼭 연락할 테니 네가 엄마랑 동생이랑 잘 설득해 데리고 와라.” 그러면서 성공해서 사람을 보낼 때 사용할 암호까지 미리 말해 주었다. 아버지가 이런 이야기를 믿고 할 사람은 맏딸밖에 없었다.● 국수 파는 11세 소녀이 씨는 어느 아버지가 봐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믿음직한 맏딸이었다. 그는 6세 때부터 어머니를 도와 장마당에서 장사를 시작했다.9세부터 11세까지는 오전 5시에 일어나 근처 공장에서 버린 불량 제품을 주어 하루종일 깨끗이 씻고 다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재가공해 팔았다. 혼자서 몰래 시작한 일이었는데, 나중에 이것도 소문 나 경쟁자들이 생기는 바람에 어린 이 씨는 밀려났다.이후 옥수수 국수를 사서 시골에 가 마늘로 바꾸는 일을 시작했다. 농촌은 늘 정전이라 옥수수를 가공해 먹기 어려웠는데, 도시는 잠깐 전기가 들어올 때가 있어 국수를 뽑을 수 있었다. 11세 소녀는 자전거 안장에 앉으면 페달에 발도 닿지 않았다. 처음엔 서서 자전거를 탔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서너 시간 농촌 마을을 돌면서 마늘을 바꾸고 다시 돌아오면 오후가 됐다. 집집마다 대문을 두드리며 “국수 바꾸세요”라고 목청껏 소리쳤다.처음엔 옥수수 10kg을 싣고 다녔는데, 앉아서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됐을 땐 30kg씩 싣고 다닐 수 있었다. 바꿔온 마늘은 새벽에 평양에 올라가는 차에 팔았다.경험이 쌓이면서 돈이 되는 것은 뭐든 싣고 다녔다. 복숭아씨도 받아 왔고 그릇이나 꿀도 다뤘다. 아버지는 먼바다에 나가느라 이따금 돌아왔다. 셋이 그렇게 노력해도 부유하게 살진 못했다. 이 씨는 늘 ‘세 숟가락만 더 먹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 자랐다.이렇게 장사하면서 학교는 띄엄띄엄 다녔는데도 이 씨는 인민학교와 중학교 내내 최우등이었다. 학교에 간 날도 두 시간만 수업을 듣고 다시 장사하러 나왔다. 시험 칠 때는 벼락치기로 공부했다. 최우등을 한 비결은 담임선생에게 아버지가 늘 생선을 가져다 주고, 이 씨는 마늘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배급이 나오지 않으니 교사도 점수를 팔아서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늘 장사하는 처지였지만 꿈은 있었다. 이 씨는 화가가 되고 싶었다. 집에서 간간이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날 아버지가 버럭 소리쳤다.“그림이 밥 먹여 주나. 장사 열심히 해서 돈 버는 것이 최고야.”어머니처럼 의사가 되고 싶을 때도 있었다. 이번엔 어머니가 소리쳤다.“엄마를 봐라. 의사보단 장마당에 앉아 돈 버는 일이 훨씬 어렵다. 장사나 해라.”● 한국 라디오 듣는 아버지와 딸이 씨와 아버지 사이엔 어머니 모르는 비밀이 있었다. 뱃사공에겐 날씨 예보가 생명이다. 아버지는 라디오를 사서 몰래 남조선 방송을 들었다. 일기예보를 들으려 시작한 일이지만, 남조선 방송을 듣는다는 것은 금단의 열매를 따 먹는 것과 비슷한 일이었다.나중에 아버지는 집에 와서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라디오를 들었다. 어머니에겐 절대 비밀이었다. 아버지는 라디오를 들을 때면 이 씨 보러 어머니가 장마당에서 돌아오는지 망을 보게 했다.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 확실한 시간엔 그도 아버지와 함께 남조선 라디오를 들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채널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탈북민이 출연하는 자유아시아방송, 열린북한방송, 극동방송을 아버지는 즐겨 들었다. 한국사람이 하는 말은 억양도 이상하고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탈북민이 하는 말은 귀에 쏙쏙 들어왔다.아버지는 늘 라디오 옆에 수첩을 펴놓고 뭔가 받아 적었다. 어느 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한 최성국이라는 탈북 작가가 불쑥 “어려운 일이 있으면 전화하라”며 자기 전화번호를 말해 버렸다. 아버지는 놓치지 않고 그 번호를 받아 적었다.나중에 탈북한 중국에서 아버지는 최 작가에게 전화를 걸어 통화를 했다고 한다. 한국에 와서 직접 만나 보니 “한국에 있는 탈북민을 대상으로 말하다가 실수한 셈인데, 북에서 그 번호를 받아 적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 놀랍다”며 신기해했다.청취가 끝나면 라디오를 지붕 아래 볏짚 속에 철저히 숨겨 놓았다. 그 바람에 보위부가 두 차례 집에 와서 재산을 몰수해 갈 때도 들키지 않았다. 아버지가 집을 떠나며 맏딸에게 남긴 말도 이랬다.“남조선이 정말 이렇게 잘 사는 나라인지 내 눈으로 보고 싶구나. 정말 잘 살면 온 가족을 꼭 데리러 오겠다.” 집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은 이 씨뿐이었다.● 장마당에 나타난 20세 옷 장사꾼16세이던 이 씨가 중학교를 졸업하기 직전인 2011년 12월 김정일이 사망했다. 그때 아버지는 감옥에 끌려가 온 가족이 거지처럼 살 때라 대학에 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김정일 사망 관련 행사에서 충성심을 보이면 혹시 아버지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 여동생과 함께 한겨울 새벽부터 저녁까지 김일성 동상과 영생탑 앞을 매일 청소하며 지켰다. ‘보위부 간부님들. 저희가 이렇게 충성 분자이니 아버지를 좀 봐 주세요’라는 마음이었다. 그때 손에 입은 동상 탓에 지금도 겨울이면 찌릿찌릿 아픔이 올라온다.2012년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피복 공장에 동창들과 함께 단체로 발령 났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장사하며 살던 그가 얌전히 앉아 재봉기나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는 공장에 매달 쌀 10kg 이상 살 수 있는 북한돈 6만 원을 내기로 하고 장사를 시작했다. 대다수 북한 공장은 일정 액수의 돈을 내면 장사하는 것을 눈감아 준다. 그렇게라도 돈을 벌어 가져오는 사람이 있어야 공장 간부들도 먹고살기 때문이다.이 씨는 그릇을 들고 전국을 다니며 장사했다. 17세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미 장사로 잔뼈가 굵은 몸이었다.돈을 좀 버는가 싶었는데 어느 날 ‘102그루빠(비사회주의 단속반)’에 걸렸다. 아버지도 실종된 터라 빠져나가지 못하고 화학공장 보위대에 들어가게 됐다. 총을 메고 공장을 지키는 보초 일이었다. 그보다는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을 한다며 밤 11시 반까지 뭔가를 외우게 하는 일이 더 힘들었다.1년쯤 눈치껏 보위대 생활을 하다가 단속이 다시 잦아들었을 때 또 나와 장사를 했다. 이번엔 장마당에 앉아 옷을 팔았다.아버지가 보위부에 세간을 다 빼앗기긴 했지만, 숨겨 놓고 끝까지 불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1000달러짜리 배 엔진이었다. 이 씨는 그걸 아끼고 아끼다가 팔아 옷 장사 밑천으로 삼았다.20세 처녀가 장마당에 앉아 옷을 사라고 외치는 건 얼핏 부끄러운 일 같지만, 북한에선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장마당에 앉는다는 자체가 이미 돈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장마당 매장을 가지려면 자릿세만 200달러 정도 내야 한다. 거기에 초기 투자가 필요한 옷 장사를 하려면 300~400달러는 있어야 했다. 돈이 많아야 할 수 있는 장마당 옷 장사는 선망받는 직업이었다. 하지만 옷 장사는 생각보다 잘 되지 않았다. 그가 사는 동네는 옷 사는 데 돈을 쓸 만한 사람이 부족했다.● 아버지의 연락과 탈북이 씨는 다시 옷을 잔뜩 넣은 짐을 메고 시골을 돌기 시작했다. 가을철 농촌은 제일 풍족한 계절이지만 너무 바빠져서 장마당 갈 시간이 없기도 했다.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옷을 팔았다. 옷 파는 일은 국수를 바꾸는 것과는 다른 노하우가 필요했다. 장사 잘하는 사람을 집중적으로 관찰한 결과 비법은 말을 잘 들어 주는 데 있었다. 상대이야기를 잘 들으며 같이 웃고 울어 주니 고객들이 주머니를 아낌없이 열었다. 높게 가격을 불렀다가 깎아 주고, 한 개보다 세 개를 사면 더 할인해 주고 양말 같은 서비스를 하나 더 챙겨 주는 것도 이때 배운 노하우다.그렇게 따라하니 장사가 잘 됐다. 어느 날 남편에게 맞고 사는 주부 이야기를 한 시간 동안 앉아서 들어 줬다. 이 주부가 고맙다며 동네 친구들까지 다 불러 그날 옷을 다 사준 일도 있었다. 북한도 사람 사는 동네였다.장사에 어느덧 적응됐을 때 불쑥 집에 사람이 찾아와 아버지가 알려준 암호를 댔다. 그 사람을 따라 신의주로 갔더니 아버지와 전화할 수 있었다.“지혜야. 아버지는 중국에 와서 돈 많이 벌었어. 가족을 데리고 오라. 엄마한테는 국경에 와서 가족사진 찍어 보내 주어야 아버지가 확인하고 돈 많이 보낸다고 해라.”아버지 말투가 바뀐 것을 알았다. 라디오에서 듣던 남조선 억양이 스며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남조선에 왔다는 말을 맏딸에게도 하지 않았다. 혹시나 말실수할까 봐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맏딸은 눈치로 알아챘다. 기뻤다. 아버지가 드디어 뜻을 이루었구나.그는 어머니와 여동생을 설득해 중국으로 데리고 왔다. 아버지가 사는 부자 동네라고 속여 심양까지 겨우 왔는데 그만 사고가 터졌다. 그들을 데리고 온 중국 브로커들이 갑자기 수고비를 두 배로 내라는 것이었다. 한국에 정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버지에게 그 돈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그러던 어느 날 중국 브로커들은 이 씨와 여동생을 불러내 갑자기 차에 태우곤 어디론가 가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들은 “요즘 중국에서 이 나이 또래 처녀가 진짜 비싸니 돈을 더 주지 않으면 팔아 먹겠다”고 아버지를 협박했다. 갑자기 딸 둘을 잃게 된 아버지는 전력을 다했다. 한국 친구에게 급히 돈을 꾸었지만 브로커들이 부르는 값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아버지는 여권까지 내주며 믿어 달라고 사정했고 마침내 브로커들은 차를 돌렸다.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여기로 오지 말고 다른 주소를 알려줄 테니 거기로 가라.”딸들이 돌아와서 다시 브로커들 협박을 받게 될 것이 두려워 다른 한국행 브로커에게 딸들을 넘겼던 것이다. 이 씨는 두 살 어린 여동생과 함께 동남아로 향했다. ● 중국에서 날아온 부모님 체포 소식둘은 무사히 동남아의 어느 국가에 도착했다. 이곳에서는 성경 공부를 3개월 시킨 뒤 한국에 보내는 기독교 단체가 활동하고 있었다. 거기에 있다가 2018년 1월 한국에 올 수 있었다. 그때까지 심양에 남은 아버지와 어머니 소식은 알 수가 없었다.2018년 6월 모든 조사와 하나원 생활을 마친 뒤 그는 부모 소식부터 알아봤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청천벽력이었다.아버지는 한국에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어머니를 설득하느라 수없이 싸웠다고 한다. 어머니는 끝내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대도시에서 탈북한 부부가 그렇게 싸우며 오래 있을 수 없는 법. 어떻게 신고가 들어갔는지 부부는 중국 공안에 체포됐다.아버지는 인신매매범이란 누명을 썼고 어머니는 북송됐다. 자신의 의지대로 북에 돌아갔지만, 북한 당국이 칭찬해 줄 것 같진 않다. 오히려 남편과 자식들이 한국에 갔으니, 한국행 시도로 몰려 잘못되지나 않았을지 걱정이다. 지금도 이 씨는 어머니 소식을 모른다.일단 아버지부터 살려야 했다. 하나원을 나와 서울 양천구에 자리 잡은 이 씨는 취직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어느 정도 체류하다 온 탈북민은 그래도 시장경제를 어느 정도 체험했지만, 이 씨처럼 북한에서 곧바로 한국에 온 탈북민에겐 모든 것이 낯설었다.라디오를 통해 들었던 남조선과 그가 직접 눈으로 본 한국은 너무나 달랐다. 마치 가상 도시인 듯 눈으로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았다. 원시생활을 하다가 문명 도시로 나온 느낌이었다.취직은 늦지 않게 이뤄졌다. 첫 일자리는 강남의 어느 횟집이었다. 하루 12시간 일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을 선뜻 받아주고 돈을 주는 사장이 고마웠다. 이 씨는 쉬는 시간에도 식당을 청소하고 화분에 물을 주었다. 어느 정도 횟집에서 일하다가 월급 180만 원을 받는 회계 사무실에 취직했다. 여기서도 자신을 받아준 것이 고마워 쉬는 시간에도 화장실까지 청소하고 쓰레기도 버렸다. 주변 사람들이 “여기는 청소하는 사람이 따로 있으니 하지 말라”고 만류했지만, 이 씨는 뭔가 고마움을 표현해야 할 것 같아 계속 할 일을 찾아 나섰다. ● 1학기 4.5점 만점에 4.41이 씨는 하나원에서 생활할 때 청소년반에 편입돼 공부했다. 처음 듣는 내용이 많았지만 이상하게 시험만 치면 늘 100점을 받았다. 그때 “아, 나는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구나” 깨달았다. 북한에서 장사하느라 느끼지 못했던 공부 본능이 깨어나는 순간이었다.하지만 사회에 나와서 공부할 순 없었다. 그를 기특하게 본 주변 사람들이 “24세면 공부를 해야 한다”고 권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중국에서 7년 형을 선고받은 상황이라 변호사 비용이며 영치금 등은 모두 이 씨가 조달해야 했다. 대학에 갈 여유가 없었다.그렇지만 언제까지 아무런 기술이나 자격증 없이 일하며 살 순 없었다. 일을 하면서 평생교육원에 등록했다. 퇴근한 뒤 무조건 3시간씩 수업을 들었다. 그렇게 1년 반 만에 사회복지사와 요양복지사 자격증을 땄다.자격증을 활용해 재가복지센터에 취직했다. 요양복지사, 주야간 보호사, 사무국장 등 자신 앞에 주어진 일은 다 했다.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대학에 가고 싶은 꿈이 살아났다. 복지센터에서 대학 입시를 준비했다. 오후 6시에 퇴근해 6시 반부터 10시 반까지 학원에서 공부했다. 주말엔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투잡, 쓰리잡, 정신없는 시간이 이어졌다.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무리하다가 영양실조로 퇴근길에 졸도까지 했다.그의 목표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이었다. 실기가 매우 중요했는데 이 씨는 한 번에 붙을 수 있었다. 타고난 재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2021년 3월, 26세의 이 씨는 대학 신입생이 돼 교정을 밟게 됐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뿐이었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모든 과목이 버거웠다. 특히 영어는 넘기 어려운 고개였다. 너무 힘들었지만, 1학기엔 휴학도 되지 않았다.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머리를 싸매고 자신과의 싸움에 들어갔다. 다른 신입생들이 입학의 기쁨을 누리며 즐기고 있을 때, 그는 하루에 네댓 시간만 자며 모르는 것은 네 번이고, 다섯 번이고 이해될 때까지 들었다. 공부에 너무 집중하다 보니 위장병도 생겼고 코피를 쏟는 일도 다반사였다.하지만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1학기에 그는 4.5점 만점에 4.41이라는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공부에 모든 에너지를 쏟으니 돈을 벌 수 없게 된것은 또 문제였다. 혼자서 최대한 아끼며 살 순 있지만, 감옥 생활을 하는 아버지 수발은 포기할 수 없었다.휴학하고 2년간 직장 생활을 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중국에서 2심 재판을 이어가는데 변호사비가 모자랐기 때문이다. 여동생도 취직해 열심히 함께 벌었다.● 탈북 작가로 성장하는 삶정신없이 세월이 흘렀다. 지난해 마침내 아버지가 중국에서 석방돼 한국에 돌아왔다. 북한에서의 감옥 생활 2차례에 더해 7년을 중국 감옥에 있다 보니 폐인이 됐다. 아직까지 요양 중이다. 그래도 그에겐 아버지가 살아 돌아왔다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이 씨는 복학해 지금은 3학년 2학기를 마쳤다. 1년 더 대학에 다녀야 한다. 아버지가 왔으니 한숨 돌릴 법도 하지만, 태어나서 지금까지 쉬지 않고 달려온 그는 쉬는 법을 모른다. 남는 에너지를 이번에는 그림을 그리는 데 쏟고 있다.올해 10월 ‘인민의 소원’이라는 주제로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벌써 12번째 개인전이다.그의 그림은 탈북민 화가 작품 중에서도 특이하다. 화폭 하나에 남과 북이 함께 담겨 있는데, 남북의 명암을 뚜렷하게 대비하지도 않고, 전반적으로 어둡지도 않다.‘자력갱생’ 간판이 붙은 북한 농촌 마을에 옥수수 비가 내린다거나, ‘사회주의 무상치료 만세’가 적혀 있는 간판 위로 알약들이 떨어지는 식이다. 보는 사람에게 ‘이렇게 밝고 해학적으로 남북을 보여줄 수도 있구나’ 생각하게 만든다. 풍요와 결핍을 한 작품 속에 녹여 내면서 아픔도 위트 있게 풀어 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데, 이 씨 작품은 타고난 듯 어렵지 않게 표현하고 있다. 이런 독특한 작품들은 이 씨의 오랜 고민 끝에 나왔다.“한국에서의 평범한 일상과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담고 싶고, 북한에서의 불편하고 어두운 진실도 담고 싶은데 너무 무겁지 않게 함께 풀어가려고 나름 찾은 해답입니다.”힘든 길을 어렵게, 너무나 아프게 걸어온 그였지만 앞으로 가야 할 길은 더 멀다.당면하게 목표는 세계적인 작가가 되는 것이다. 30세까지 그는 본의 아니게 남들이 마음 먹는다고 해서 겪을 수 없는 엄청난 백그라운드를 쌓았다. 분단국가에서 태어나 인권의 불모지에서 아픔을 겪었고, 이를 탈출해 대한민국이라는 선진국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가 살아온 삶과 경험만 잘 녹여도 충분히 전 세계에서 인정받는 작가가 될 수 있다.남은 것은 그의 몫이다. 20세에 장마당에서 옷을 팔던 북한 처녀가 10년 뒤 인사동에서 전시회를 연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듯이, 그가 만들 미래의 더 큰 기적 역시 지금 우리가 과연 상상할 수 있을까.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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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은 금고지기’ 사위 류현우 대사는 왜 탈북을 선택했나[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류현우 전 쿠웨이트 주재 북한 대리대사는 2019년 탈북하기 전까지 16년 동안 장인인 전일춘 노동당 39호실 실장 집에서 살았다. 사실상 왕조 국가인 북한에서 누구도 처벌할 수 없는 김정은 패밀리를 ‘신계(神界)’에 비유한다면, 그 아래 ‘인간계’ 최고위급들이 사는 곳이 그가 살던 은덕촌이다.그의 아랫집에는 김양건 노동당 대남담당 비서 겸 통일전선부장(2015년 12월 사망)이, 윗집에는 오극렬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겸 조선로동당 작전부장(2023년 2월 사망)이 살았다. 윗윗집에는 박남기 노동당 계획재정부장(2010년 3월 총살)이 살았다.1998년 김정일의 지시로 평양 대동강구역 대동강 근처에 누구도 들여다볼 수 없는 으쓱한 곳에 건설된 은덕촌은 10세대짜리 아파트 6개 동으로 구성돼 있다. 아파트 한 동마다 입구가 서로 반대 방향인 현관 두 개가 있다. 한 현관으로 5세대가 드나든다고 할 수 있다. 3m 높이 담장으로 둘러싸인 은덕촌 입주 세대주는 60명. 김정일이 직접 골랐다. 군부에서 40명, 노동당에서 10명, 기타 행정기관에서 10명이 뽑혔다.군부가 가장 많은 이유는 아무래도 총을 쥐고 있기 때문에 쿠데타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총정치국장, 인민무력상, 총참모장뿐만 아니라 정찰국장, 조직부 국장 같은 부처 책임자급 장성들이 여기에서 산다. 김정일 사망 이후 김정은 시대에도 이 입주 비율은 달라지지 않았다.● ‘인간계’ 최고위직들의 청빈 경쟁이곳에 살면 북한에서 인간계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혜택이 보장된다. 북한군 1개 중대가 경비를 서는 방 다섯 개 197㎡(60평)짜리 집에서 산다. 아파트 현관마다 경비병들이 출입을 통제하기 때문에 은덕촌에 살면서도 다른 동과의 교류는 불가능하다. 같은 동에서도 현관이 다른 다섯 세대와는 소통이 거의 없다. 그나마 같은 현관을 이용하고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는 다섯 세대끼리는 서로 인사하고 지낸다.드나드는 사람과 물자가 다 통제되다 보니, 은덕촌 사람들은 사치스럽게 살 엄두를 내지 못한다. 집에 비싼 물품을 들여놓거나 색다르게 꾸미거나 하면 다 보고가 되기 때문이다.외국에서 살던 류 전 대사 기억으로는 아래층 살던 대남 정책 총책 김양건의 집은 서 발 막대기를 휘둘러도 걸릴 것이 없었고, 대외 정책 총책 김계관은 그보다 더 심해 꽃제비가 따로 없을 정도로 ‘청렴하게’ 살았다. 은덕촌 사람들은 청빈을 증명하는 경쟁이라도 하듯이 살아야 오래 살 수 있었다.물론 이 ‘청빈한’ 관료들을 위해 김 씨 가문은 ‘굶어 죽을 걱정’은 없게 만들어 주는 크나큰 은덕을 베푼다.은덕촌 가정은 부부만 사는 경우가 거의 없고 자식과 손자들까지 산다. 한 세대에 보통 5명 이상이 사는데 이들은 100% 입쌀로 배급을 받다. 반찬 몇 가지 정도는 할 수 있는 채소도 공급해 준다. 각 가정에 매달 달걀 30알, 돼지고기 2kg, 생선 2kg이 공급된다. 이 정도면 북한에선 인간계가 받을 수 있는 최고 대접이 분명하다.조용한 환경에서 도청도 잘 되다 보니 목소리를 낮추어 조심스럽게 말하는 습관도 은덕촌이 빚어낸 풍경이다. 도청에 걸려 처형된 이영호 북한군 총참모장(2012년 7월 처형)이나 화폐개혁 실패의 희생양이 돼 공개 처형된 박남기 계획재정부장처럼 이곳에서 살다가 죽임을 당하는 생생한 표본들이 수시로 나오기 때문에, 늘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살게 되는 것도 은덕촌이 만든 또 하나의 ‘혜택’이다.은덕촌도 가끔 정전되긴 한다. 그래도 인간계 최고위직 노인들이 목욕은 하라고 세대마다 2kW짜리 가열기 하나씩은 넣어 주었다. 류 전 대사 부인은 한국에 온 뒤 수도에서 더운물, 찬물이 나오는 게 제일 좋다고 했다. 류 씨는 남쪽에 와서 국민임대아파트에 산다. 국민임대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북한에서 제일 좋은 주거 단지 은덕촌을 보며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듯싶다.● 은덕촌에서 도태촌으로은덕촌 사람들에게 베푸는 장군님의 하해와 같은 은덕은 죽을 때까지 이어진다. 여기에서 살다가 은퇴하면 은덕촌 담장 바로 바깥에 있는, 또 다른 담장으로 둘러싸인 아파트 단지로 옮겨 간다. 은덕촌 사람들은 이 아파트 단지를 ‘도태촌’이라고 부른다.은덕촌에 사는 사람들은 주로 비밀이 절대 새 나가면 안 되는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은퇴해서도 사회에 내보내지 않는 것이다.2019년 류 전 대사가 탈북하던 시점에 도태촌에 살던 사람들은 현직에 있을 때 한국에 특사로 왔던 김기남 노동당 선전비서, 현철해 차수, 최영림 총리, 김원홍 보위상, 황병서 북한군 총정치국장 등이다. 전일춘 실장도 류 전 대사가 탈북하기 전에 39호실 실장에서 물러나 도태촌으로 옮겼다. 집에 이불장과 옷장은 없어도 최신형 도청기만은 집안 곳곳에 숨겨져 있다. 도태촌도 직계 가족만 출입이 허용될 뿐 친척은 밖에 나와서 만나야 한다. 은퇴한 당사자가 죽으면 그제야 남은 가족은 평양 시내 다른 곳으로 이사할 수 있다.도태가 되면 은덕촌에서 받던 배급이나 달걀 공급은 끊어진다. 전 실장도 도태촌에 옮겨 가선 부부의 6개월 치 배급으로 감자 4kg만 받았다. 2019년은 고난의 행군 시절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봉쇄 기간도 아니었음에도 사정이 그랬다.탈북 직전 류 전 대사 아내는 도태촌으로 옮겨간 아버지 집에 갔다가 충격을 받았다. 27년 동안 39호실 수장으로 있으며 수천만~수억 달러를 주무르던 부친이 반년 치 배급으로 감자 2kg을 받으며 허름한 집에서 살고 있었다. 아내는 어머니에게 말했다.“남들이 보는 눈도 있는데 이불장이랑 옷장을 사자.”“돈이 어디 있냐?”“엄마. 아버지가 39호실 실장이었는데 우리 집에 돈이 없다면 그걸 누가 믿겠어. 딸인 나도 못 믿겠는데.”“내가 딸에게 거짓말을 해서 뭘 하겠니. 아버지가 비리를 저지르며 사리사욕을 채웠다면 오늘까지 그 자리에 붙어 있었겠니?”해외에서 그나마 달러를 만져 본 아내는 부모에게 옷장과 이불장을 사라며 수중의 돈을 탈탈 털어 건넸다. 오던 길에 아내는 길가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다.김 씨 일가는 북한 곳곳에 수십 개의 호화 별장을 짓고 온갖 사치를 다 누리고 있는 동안, 그들을 위해 평생을 바친 최고 머슴들 삶의 마지막은 이처럼 비참했다.● 김정은의 숨겨진 비밀 금고류 전 대사는 한국에 온 탈북민 중 유일하게 인간계 최고위급과 함께 은덕촌에서 살았던 사람이다.김정일 금고지기의 사위였기에 김정은이 후계자로 등극하기 전에 벌써 장인과 함께 김정은을 만나 이야기도 해 봤고, 김여정과 그의 남편도 만날 수 있었다. 북한 최고위층 패밀리로 이러저러한 일을 수많이 보고 들었지만 그는 오랫동안 입을 닫고 살았다.북에 두고 온 가족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 달 전 그는 큰 결심을 했다. 자신이 보고 들었던 내용을 소상히 기록한 첫 저서 ‘김정은의 숨겨진 비밀 금고’를 세상에 내놓았다.김정일 패밀리 일원이던 이한영(1997년 피살)이 1996년에 쓴 저서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 잠행 14년’과 이 씨 모친인 성혜랑이 2000년 펴낸 자서전 ‘등나무집’ 이후, 김 씨 패밀리에 대해 이렇게 자세한 증언이 담긴 책은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한영의 저서와 류 전 대사의 저서는 모두 동아일보에서 출판했다.북한 고위급 외교관의 시선과 김정일의 남산고급중학교 동창으로 나중에 금고지기가 된 전일춘 실장의 시각, 아내의 증언까지 합쳐진 이 책은 외부에서 절대 알 수 없는, 김정은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정보로 가득 차 있다. 북한에 관심이 있거나 북한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지 않고선 오늘의 북한을 안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가령 책 내용 중 김정은의 고모부인 장성택 전 노동당 행정부장이 화형됐다는 충격적인 사실은 류 전 대사가 탈북하지 않았으면 누구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김정은은 장성택을 불 태워 죽였다고 측근들에게 과시하듯 이야기했다. 장성택 숙청 이유나 숙청 과정도 책에 자세히 소개돼 있다. ‘김정은의 숨겨진 비밀 금고’는 남쪽 사람들에겐 ‘문이 열린 진실의 금고’ 역할을 오랫동안 할 것이다.● 유일한 선택지가 된 탈북류 전 대사 부부 탈북은 김정은에겐 어떻게든 되돌리고 싶은 뼈아픈 사건이겠지만, 그들을 한국으로 오게 만든 것은 김 씨 일가라고 할 수 있다.류 전 대사의 탈북은 2017년 주 쿠웨이트 북한대사관에 걸어 놓은 김정일 얼굴이 그려진 선전화 한 점이 사라지면서 시작됐다. 그해 유엔에서 강력한 대북 제재가 의결되자 쿠웨이트 정부도 이에 맞춰 쿠웨이트 주재 북한 대사를 포함해 대사관 정원 10명 중 6명을 추방했다. 그 결과 대사관 참사였던 최고참 류 씨가 대리대사 및 초급당비서가 됐다.인원이 줄어들자 북한 당국은 작은 건물로 이사해 대사관 임대료를 아끼라고 지시했다. 이사가 끝난 뒤 최종 점검을 하다 대사관에 있던 김 씨 가문 얼굴이 들어간 선전화 3점 중 한 점이 사라진 사실을 알게 됐다. 작품 중심에 선 김정일이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키고 있고 그 아래에서 김정일을 에워싼 노동자, 농민, 군인들이 손가락 방향을 바라보는 유화였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폐쇄회로(CC)TV도 돌려보고 인부들에게 물어도 보고 왔던 길과 쓰레기통도 뒤졌지만 사라진 그림은 나타나지 않았다.1등서기관인 동료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상의하면서 류 전 대사는 “해당 선전화는 전직 초급당비서가 갖고 온 것이라 노동당 선전선동부 등록대장에 기재돼 있지 않은 것이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입을 닫고 있자”고 했다. 2년 뒤인 2019년 7월 1등서기관은 귀국했다. 북한 외교관들은 귀국 후 3개월 동안 노동당 조직지도부의 엄격한 조사를 받는다. 그해 8월 북한에서 전보가 날아왔다. 대사관 ‘1호 작품’, 즉 김 씨 일가가 들어 있는 유화를 가지고 귀국하라는 것. 다른 나라에 파견된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려 봤지만 해당 지시가 떨어진 사람은 류 전 대사 한 명뿐이었다. 귀국한 1등서기관이 2년 전 선전화 분실 사실을 고백하고 책임을 그에게 돌린 것이다.그까짓 선전화 한 점이 대수냐고 할 수 있지만 북한에선 목숨이 걸린 문제였다. ‘당의 유일적 영도 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에는 ‘초상화, 동상, 영상 작품… 등을 목숨으로 보위해야 한다’고 돼 있다. 목숨으로 보위해야 할 작품을 잃어버린 것도 모자라서, 그 사실을 이실직고하지 않고 2년이나 숨긴 죄는 당을 기만한 용서하지 못할 대역죄다. 귀국하라는 날은 닥쳐오고 있었지만, 류 전 대사와 아내는 살아날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아내는 “우리가 그래도 충신 집안인데, 아버지가 김정은에게 편지를 쓰면 살 수 있지 않을까”라며 희망을 피력했지만 확률은 희박했다. 그들이 살면서 본 노동당은 부친은 용서해도 자식까진 용서하지 않았다. 10대 원칙 사수에는 하나의 예외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 북한이다.북한에 귀국해서 정치범수용소에 갈 바엔 여기서 죽자고 결심도 했지만 10대 딸이 눈에 밟혀 할 수 없었다. 정치범의 딸이 돼 평생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류 전 대사는 잘 알았다. 박남기 계획재정부장이 총살되고 그 남은 가족은 발길질을 당하며 통곡 속에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던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귀국할 수도, 자결할 수도 없는 상황에 내몰린 이들 가족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망명이었다. 북한 영화 ‘은비녀’의 주제곡이 귀에 맴돌았다. ‘새 삶의 1절’이 시작됐다.외로이 떠가는 운명의 쪽배키 없이 노 없이 가는 곳 어데냐풍랑에 시달려 고달픈 마음나라 잃어 서러워라아 내 인생아● 대사에서 기초생활수급자로북에 남은 가족들 때문에 처음엔 미국으로 조용히 망명하는 것을 고려했다. 그런데 하필 그때는 2019년 9월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이 싱가포르와 베트남, 판문점에서 김정은과 얼싸안고 그를 훌륭한 지도자라고 치켜세우던 때였다. 미국으로 갔다가 김정은에게 주는 트럼프 대통령의 선물이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남은 선택지는 한국이었다. 외국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1990년대 한국으로 망명한 북한 외교관이 출연한 유튜브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었다. 그 외교관은 “한국에 오면 집도 주고 직업도 주고 이밥에 돼지고기를 실컷 먹을 수 있다. 북한 외교관이 망명하면 한국 정부에서 먹고 살게 다 해 준다”고 말했다. 류 전 대사 생각에도 그럴 것 같긴 했다. 한국으로 가자고 결심했다. 남편과 딸이냐, 북한의 부모냐 선택해야 하는 운명에 처한 아내도 어디든 절대 못 간다고 고집을 부리다 마지막 순간 결국 자식을 선택했다.2019년 9월 18일 오전 6시반. 뜬눈으로 새운 부부는 학교에 가야 할 시간이라며 딸을 깨워 차에 태우고 15분 거리의 한국대사관으로 들어갔다. 혹시 말실수할까 봐 딸에겐 그때까지 탈북한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그렇게 한국에 도착했고 그해 12월 사회에 나왔다. 한국에 오면 먹고 살 걱정이 없다던 선배 외교관의 말은 사실과 달랐다. 적어도 류 전 대사에게 특혜 같은 것은 없었다. 다른 탈북민처럼 56㎡(17평) 임대주택에 짐을 풀고 똑같은 액수의 정착금을 받았다. 한숨을 돌릴까 했는데 그만 한 달 만에 코로나19 사태가 터졌다.직업도 없는데 집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3인 가족이 월 110만 원을 받는 기초생활수급자로 살게 됐다. 관리비와 통신비 등을 내고 나면 40만 원으로 한 달을 살아야 했다. 택배기사로 나섰지만 50세 된 탈북민을 받아주는 회사도 없었다. 북한에서는 누구나 부러워하는 외교관이었지만 한국에 와서 백수가 된 것이다.몇몇 유명 탈북 외교관은 국책연구기관 연구원이 되기도 했지만 북한 외교관 출신 연구원 정원도 한정돼 있다 보니 6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에겐 자리가 돌아오지 않고 있다.시간이 흐르면서 방송도 출연하게 됐고 이러저런 일들도 하면서 차츰 상황은 좋아지고 있긴 하지만, 앞날을 생각하면 막막하기만 하다. 이들 부부에게 유일한 기쁨은 딸이 한국 생활에 잘 적응하는 것이다. 딸은 눈치 볼 것 없이 자유로운 한국 생활에 만족해 하며 좋은 대학에 합격해 내년에 입학하게 됐다. 행복한 딸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그의 가슴 한구석은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낀다. 딸의 행복을 위해 치러야 할 대가가 떠올라서다. 북에 남은 부모님은 어떻게 됐을까.● 북한에서 아랍어를 배운다는 것류 전 대사의 부친은 북한에서 핵심 중의 핵심 계층이었다. 1952년 최고사령부 친위중대에 입대한 부친은 43년 동안 김일성 경호부대에서 근무했다. 호위사령부 제1호위국 부부장(대좌)까지 하다가 1995년 3월 정년퇴직했다.부친이 친위중대에 들어간 것은 함흥에서 리당위원장을 지내던 할아버지가 1951년에 현물세를 내기 위해 가다가 미군 폭격에 죽어 애국열사가 됐기 때문이다.김일성 호위부대도 외부와 격리된 평양 대성구역 아파트 단지에서 살았다. 그가 어렸을 때 김일성 호위부대 군관들에 대한 공급은 꽤 좋았다. 입쌀을 풍족하게 배급받았고 매달 돼지고기 5kg, 기름 2L 등 기타 공급도 좋았다. 맡겨진 일만 잘하면 먹고살 걱정이 없었다.1972년에 태어난 류 전 대사는 호위국 자녀들이 주로 다니는 인민학교를 마치고 1983년 평양외국어학원 입학시험을 쳤다. 평양외국어학원 입학시험 자격을 받는 것 자체도 아무나 받지 못하는 특권이었다. 문제는 여기에 지원하는 학생들 출신이 보통 집안이 아니었다.그는 당시에 가장 인기 좋았던 프랑스어학과를 1지망으로, 영어를 2지망, 아랍어를 3지망으로 써 냈다. 하지만 더 권세 있는 집 자식들에게 밀려 아랍어학과에 들어가게 됐다. 당시엔 북한과 아랍어 하는 나라들과의 교류가 별로 없었다. 북한에서 아랍어를 가르치는 곳은 평양외국어학원 아랍어학과 밖에 없었는데, 그가 들어갔을 때 아랍어학과 한 학년 인원은 5명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운 좋게 시리아 이집트 같은 중동 국가들과의 관계가 좋아지면서 아랍어 인기도 높아졌다.1989년 학원을 졸업한 그는 당연하게 평양외국어대 아랍어학과에 진학했다. 물론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아랍어는 이슬람교와 떼어놓을 수 없는 언어다. 가령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도 아랍어에선 ‘알라의 은총으로’라고 말한다. 아랍어를 잘하려면 이슬람교를 반드시 이해해야 하는데, 문제는 북한에선 어떤 종교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대학에 입학해 1년쯤 지난 1990년에 그는 공부를 위해 이슬람교 종교적 문구를 따로 정리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누군가 이를 대학 보위부에 밀고했다. 대학 보위원은 그를 불러 “이슬람 경전을 공부하는 놈은 용서할 수 없다”며 사정없이 구타한 뒤 부모를 불렀다. 그때 그는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매를 맞았다.1호위국 부부장이 일개 대학 보위원에게 찾아가 싹싹 빌며 용서를 구하고, 보위부 지인들을 다 동원해서야 이 일은 겨우 무마될 수 있었다.● 맹장과 담낭을 잃은 고난의 행군1994년 그는 대학을 졸업했다. 운이 없게도 그해부터 대학 졸업생은 3년 동안 노동 현장 체험을 시키라는 김정일 지시가 하달됐다. 그 이전까지 대학 졸업생은 3대 혁명 소조원으로 3년 동안 파견돼 나름 큰소리 치며 살 수 있었는데, 1994년 이후부터는 노동자가 돼 현장에서 일해야 했다.그래도 3년 동안 일을 잘하면 노동당에 입당시켜 준다기에 그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강계로 자원했다.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맹추위의 강계 같은 어렵고 힘든 곳에 가서 노동계급화 해야 입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하지만 큰 실수였다. 1995년부터 북한엔 배급이 끊긴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고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지역의 하나가 강계였다.강계시 양정사업소로 간 그는 고난의 행군의 비참함을 3년 동안 온몸으로 느꼈다. 관을 짤 판자도 없어 그냥 땅에 묻은 시신을 개들이 파내어 살점을 물고 다니는 광경은 지금도 가끔 떠오른다. 대두박과 벼 뿌리, 흙까지 파먹었지만 20대의 허기를 극복할 수 없어 남들처럼 농장 밭에 들어가 도둑질도 서슴없이 했다. 3년 동안 못 먹을 것들을 먹으며 고생하다 보니 맹장과 담낭을 다 떼어내야 했다.나무를 패다가 도끼로 발등을 찍은 일도 있었다. 병원에 가서 마취제도 없이 꿰매다가 정신을 잃기도 했다. 지금도 그의 발엔 생살을 꿰맨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귀한 아들이 강계에서 이렇게 살 동안 부모들은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 1995년 3월에 제대한 부친은 곧바로 생계 전선에 내몰렸다. 김일성 호위부대 부부장이었다고 해서 당국이 베푸는 특혜는 하나도 없었다. 배급이 끊겨 부부가 먹고 살길이 막막하던 차에 지인이 준 100달러를 밑천 삼아 만두 장사를 시작했다. 이른 아침부터 부친은 밀가루를 반죽해 어머니와 함께 하루 종일 만두를 빚었다. 국가계획위원회 간부로 은퇴한 모친은 하루도 빼지 않고 저녁마다 김일성대 후문에 만두를 이고 가서 팔았다. 그렇게 그의 부모도 고난의 행군 때 굶어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외교관으로 탄탄대로1997년 끝날 것 같지 않던 현장실습생 생활도 끝났다. 그런데 김정일의 말이 또 바뀌었다. 현장 체험생은 노동당에 입당시키지 말라고 한 것이다. 3년 노력이 허사가 됐다.노동당에 입당하지 않고선 외교관으로 성장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는 군에 자원 입대했다. 공군 1사단에 입대해 개천 원리비행장에서 3년 동안 군복무를 했다. 3년 뒤 마침내 노동당원이 됐고 원하던 외무성에도 들어갈 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김정은 금고지기인 장인 도움으로 승승장구했다고 말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아랍어과 출신이 손에 꼽힐 정도로 적었고, 대학을 졸업하고 노동당에 입당한 아랍어과 졸업생은 더 적었다.그는 노동 체험 현장에서나, 군복무 기간에도 아랍어 공부를 열심히 한 덕분에 실력을 인정받았다. 나중에 그는 김정일 아랍어 통역사를 양성하는 ‘1호 통역 후보생’이 됐지만 김정일이 아랍 국가 수반들을 거의 만나지 않아 직접 통역할 기회는 없었다. 대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외무상의 아랍어 통역은 매번 담당했다. 실력이 뒷받침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39호실 실장 사위가 된 것도 우연한 인연 때문이었다. 그의 부친과 아내의 큰아버지가 과거 최고사령부 친위중대 같은 분대에서 복무했던 전우 사이였던 것이다. “내게 시집가야 할 조카딸이 있는데.” “내게도 장가를 보낼 아들놈이 있소.” 이렇게 류 전 대사와 부인은 선을 보게 됐다. 아내는 김일성대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박사원(대학원)에서 공부하던 학생이었다. 서로가 어디에 내놔도 꿀리지 않는 청춘남녀인지라 결혼은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2002년 결혼식을 올렸고 딸도 태어났다.북한에선 결혼하면 남편 집에서 사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내도 처음엔 류 전 대사 집에서 시집살이를 했다. 방 두 칸짜리 아파트에서 류 전 대사 부모와 류 전 대사 누나 부부까지 세 가족이 살아야 했다. 딸이 자식까지 낳고 방 한 칸 없이 고생하는 것을 본 장인이 “우리 집이 다섯 칸이니 들어와 살라”고 해서 류 전 대사의 처가살이가 시작됐다.아랍어 같은 희귀어를 전공한 외교관은 외국 파견 주기가 빠르다. 영어나 프랑스어 전공 외교관은 외국 대사관에 한 번 나가려면 오래 기다려야 했지만 희귀어는 전공자가 몇 명 없는 가운데서 돌려 쓰다 보니 자주 나가게 될 수밖에 없었다.그는 38세였던 2010년 시리아 대사관에서 3년을 지내고 귀국한 뒤 2016년 10월 쿠웨이트 주재 북한대사관 참사로 나갔다. 외무성에 있을 때는 1부상 서기, 부국장급인 외무성 2급 연구원 등을 지냈다.● 목숨보다 귀중한 그림한국에는 3만5000명에 가까운 탈북민이 있다. 온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류 전 대사의 탈북 이유는 가장 어이없는 경우에 속한다. 그는 배고픈 사람도 아니었고 죄를 지은 사람도 아니었다. 운명이 바뀐 이유는 그림 한 점 때문이다.가족과 함께라면 굶어 죽어도, 맞아 죽어도 된다고 생각했던 그였지만, 김정일 얼굴이 들어간 유화는 가족을 지킬 명분과 용기조차 앗아갔다. 북에 소환돼 가족과 함께 죽는다고 해도 나머지 가족을 살린다는 보장은 없었다. 본인 집안이나 처가 모두 정치범 가족이란 누명을 쓰고 대대로 비참하게 살아야 한다. 특히 10대 딸이 정치범수용소에서 살 것을 생각하니 부모는 정치범이 될 비장한 각오마저 할 수 없었던 것이다.그는 자신을 아들처럼 아끼던 장인을 생각하면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장인은 김 씨 일가 금고지기로 27년을 살았지만 단 1달러도 따로 챙기지 않았다. 김정은의 주머니는 두 개다. 류 전 대사 장인이 관리한 39호실 자금을 ‘당 자금’이라고 했고, 당 본부 서기실 36국이 관리하는 자금을 ‘혁명 자금’이라고 했다. 거창하게 혁명 자금이라고 붙였지만 실은 김 씨 일가 사생활에 드는 돈, 즉 각종 사치품 사는 데 쓰는 돈이다. 36국이 달러를 어디에 얼마나 쓰는지는 김정은만 알 뿐, 북한 최고 비밀에 속한다. 39호실 자금도 김정은 지시에 따라 지출되긴 하지만 김 씨 일가 사생활을 위해 쓰진 않는다. 대신 굵직굵직한 공사가 벌어질 때마다 거액이 지출되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몰래 빼돌릴 수 있었지만 전일춘 실장은 한 푼도 챙기지 않았다. 그런 점 때문에 김정일과 김정은에게 대를 이어 신임을 받았다. 하지만 그렇게 평생을 정직하게 살았어도 딸과 사위의 탈북 때문에 말년에 피해를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북한 체제에선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일이 수없이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그림 하나 때문에 대사를 탈북하게 만드는 어리석은 체제라는 꼬리표도 붙게 됐다. 류 전 대사는 이런 시스템을 북한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비록 가슴 아픈 대가를 각오하고 온 길이고 한국에 와서 기대했던 대우는 받지 못하지만, 딸을 보면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딸은 무척 행복해 보인다. 내년에 대학에서 생화학을 전공할 생각이다. 수령의 노예가 될 뻔했던 삶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자유의 땅에서 성장하는 딸을 보면 앞으로 어떤 어려운 일이 닥쳐도 다 버틸 수 있을 것 같다.죄책감 때문에 오랫동안 괴로워하던 아내도 다시 일어났다. 서울 모 대학 대학원에 진학해 내년 1월 박사학위 논문을 완성하게 된다. 류 전 대사도 스스로 삶을 개척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다. “운명의 배를 타고 왔지만 아직 종착점이 어딘지는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가족은 전혀 다른 땅에 뿌리를 내리고 다시 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새 삶의 ‘2절’을 시작했다. 영화 은비녀 주제가 2절 가사는 북한이 그를 위해 만든 노래인 것 같기도 하다.눈물을 흘리며 떠나온 고향내 다시 돌아갈 그날은 언제냐하늘가 저 멀리 철새가 날을 때면눈물 없는 내 나라가아 그리워라.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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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온실 채소 죽으면 간부들은 목 내놔야…‘김정은 농장’의 실상 [주성하의 ‘北토크’]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올해 북한 김정은의 가장 큰 관심사는 평안북도 신의주온실종합농장이 아닐까 싶습니다. 김정은은 26일 완공을 앞둔 신의주온실종합농장을 현지 지도했는데, 올해만 다섯 번째 방문입니다. 이곳은 그가 1년 사이 가장 많이 찾은 곳입니다.북한은 “신의주온실종합농장 건설은 총건축 공사량의 97% 선에서 진척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를 미뤄보아 한 달 안에 완공식이 열릴 것이고, 김정은은 또 이곳을 방문해 붉은 테이프를 자를 것 같습니다.그런데 북한의 준공식은 완공됐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이번에 노동신문은 “온실 호동과 남새과학연구중심(센터), 여관, 편의봉사시설, 탁아소, 유치원 등 공건물, 수백 세대 살림집의 전력 및 급배수 계통에 대한 시운전이 진행 중에 있다”고 자랑했습니다. 수백 세대의 살림집은 신의주온실종합농장을 둘러싸고 있는 아파트 단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이건 자랑거리가 아닌데, 노동신문이 실수한 것 같습니다.북한은 분명히 지난해 12월 21일에 김정은이 참가한 가운데 이 살림집들에 대한 준공식을 성대하게 가졌습니다. 그때로부터 1년이 지났는데 이제 와서 전력 및 급배수 계통에 대한 시운전을 한다니요. 전기와 물은 사람이 사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들입니다.이걸 아직도 끝내지 못했다면, 지난 1년 동안 겉모양만 그럴듯한 아파트에서 사람들이 도대체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해집니다. 김정은은 준공식을 포함해 다섯 차례나 이곳을 더 방문하는 동안 농장에서 일할 사람들의 집은 돌아보지 않았던 것일까요.● 세 번째 ‘세계 최대 온실농장’어쨌든, 그럼에도 신의주온실종합농장 준공식은 곧 열릴 것입니다. 김정은이 가장 원하는 그림이기 때문입니다.그리고 이곳에서 채소가 쏟아져 나오는 장면도 북한 매체들을 통해 수없이 등장하겠죠. 중국에서 빤히 건너다보이는 곳인데, 생산을 하지 못 하고 있다면 얼마나 많은 간부들이 처벌을 받겠습니까.이제 김정은은 온실만큼은 어디 가서도 전문가처럼 할 말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의 지시로 북한에는 이미 초대형 온실 농장들이 여러 개 건설됐습니다.2015년 평양 사동구역 장천남새전문농장(45ha)을 시작으로 2019년 함북 중평온실농장(200㏊), 2022년 함남 연포온실농장(277㏊), 2024년 강동온실농장(280ha)이 건설됐습니다. 준공을 앞둔 신의주온실종합농장은 면적이 446㏊나 됩니다.북한은 연포온실농장을 완공한 뒤 이를 세계 최대 규모의 온실농장이라고 자랑했습니다. 그렇다면 3년 사이 세계 최대 규모 온실농장이 세 개나 생긴 셈입니다. 이것이 끝이 아닐 수도 있죠. 내년에 김정은이 또 어디에 가서 온실농장을 지으라고 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김성태 전 쌍방울그룹 회장이 지난해 7월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던 이유는 경기도의 북한 스마트팜 지원사업 명목으로 북한에 500만 달러를 전달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에서 건설되는 방대한 온실 농장들을 보면, 우리가 북한의 스마트팜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원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앞서 지은 북한의 대규모 온실농장들은 잘 가동되고 있을까요. 북한 언론 보도에 따르면 국가 계획량 이상으로 각종 채소를 생산한다고 합니다.이 주장만큼은 어느 정도 사실일 것 같습니다. 지금 김정은의 관심사가 온통 온실에 집중돼 있는데, 자신의 선행 치적인 온실에서 생산에 차질이 빚어진다면 또 누가 죽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농장이 지어진 지역에서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온실이 잘 가동되고 있음을 김정은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인민보다 더 귀중한 채소그런데 북한에선 바로 이런 게 문제입니다. 온실 농장들이 잘 가동되려면 대규모 난방과 전기가 필수적입니다. 종자와 비료도 많이 듭니다. 온실 농장들이 제대로 가동하려면 농장에서 생산된 채소를 시장에서 제값을 받고 팔고, 판매 대금으로 온실 운영에 필요한 석탄이나 비료 등을 사 와야 합니다. 그래야 반짝 운영이 아닌 지속적인 운영이 보장됩니다.그런데 북한의 선전을 보면 앞서 건설된 온실 농장에서 생산된 채소들은 ‘인민들에게 베푸는 장군님의 크나큰 사랑을 전하는’ 수단이 되고 있습니다. 제값을 받지 못함에도 채소가 계속 생산되려면 ‘장군님의 관심과 사랑’이 몇 년 뒤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져야 가능할 겁니다.문제는 김정은의 관심과 사랑은 전기나 비료를 무한히 만들어내진 못한다는 것입니다. 북한의 만성적인 전력난이나 연료난은 수많은 탈북민을 통해 계속 전해집니다.가뜩이나 없는 전기와 석탄을 온실에 아낌없이 투입하면, 인근 사람들은 다시금 암흑 속에 살면서 추운 겨울에 난방도 제대로 못 하고 살 수도 있습니다.주민들이 추워서 벌벌 떠는 것과, 채소가 잘 자라는 것. 둘 중 북한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요. 당연히 채소입니다. 신의주 온실에서 채소가 제대로 생산되지 못하면 목을 내놔야 하는 간부들이 한둘이 아닐 겁니다. 그러나 주민이 추워서 떤다고 목을 내놓을 일은 없습니다. 장군님의 사랑을 인민에게 전하기 위해 인민들이 얼어 죽는 것쯤은 감수해야 합니다. 비료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료가 부족해 김정은이 평생 찾아가지 않을 외진 시골 농장들의 논과 밭작물이 시들어 죽어도 상관없습니다. 온실만 잘 가동되면 됩니다.앞서 건설된 대규모 온실들의 사정도 위와 비슷할 겁니다. 올해 1월 북한엔 매서운 한파가 들이닥쳐 학생들이 겨울 방학이 끝난 뒤에도 학교에 가지 못했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못해도 온실 채소는 잘 자라야 합니다.● 평양타조농장과 대동강자라공장의 사례북한 사람들에겐 이런 일은 수십 년 넘게 반복돼 온 익숙한 광경입니다. 대표적으로 110여 개 우리에서 타조 1만 마리를 사육하고 있다는 평양타조목장을 실례로 들 수 있습니다. 이 타조농장은 김정일의 지시로 1998년에 착공해 이듬해 완공했습니다. 그때 김정일은 갑자기 “타조고기가 맛있다”며 전국에서 대대적으로 기르라고 했습니다. 1998년은 고난의 행군 말기로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을 때였습니다.김정일의 지시를 어길 수는 없으니 외국에서 타조를 사 와서 최고 등급의 배추를 먹여가며 키웠습니다. 평양 사람들은 추위에 덜덜 떨고 있는데도 타조들은 따뜻한 전기 난방 속에 살았습니다. 북에서 지금까지 타조 고기를 먹어본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타조농장과 같은 사례는 많습니다. 철갑상어나 자라도 있죠.2015년 4월 “전력 공급 부족으로 펌프를 돌리지 못해 자라들이 죽였다”고 이실직고한 대동강자라공장 지배인과 당 비서는 김정은에게 따귀를 맞은 뒤 그 자리에서 끌려나가 총살됐습니다. 그걸 북한 모든 간부가 지켜봤습니다. 이제 전기나 비료가 없어 온실을 가동하지 못했다고 하면, 결과는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특히 신의주온실종합농장은 누구보다 긴장해야 합니다. 김정은이 1년 사이에 다섯 번이나 찾았는데 생산이 제대로 되지 못한다면 ‘장군님의 영도 업적이 깃든 온실을 파괴한 반당반혁명종파분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다행스러운 일은 김정은의 관심이 영원하진 않다는 데 있습니다. 이는 ‘세포등판’ 축산지구를 사례로 들 수 있습니다. 2012년 12월 김정은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축산업 발전에서 새로운 전환을 일으키겠다며 수만 명의 평양 시민을 선발해 강원도 세포에 보냈습니다. 그의 집권 이래 민생을 위한 최초의 대규모 동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사를 이듬해 봄에 시작하면 왜 안 됐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그해 겨울 숱한 사람들이 숙소도 변변치 않은 산꼭대기에 올라가, 언 땅을 곡괭이로 파내느라 엄청난 고생을 했습니다.그때로부터 13년이 흘렀습니다. 이제 세포는 김정은의 관심사에서 완전히 잊힌 듯 합니다. 가지도 않고 언급도 없습니다. 당연히 세포에서 생존해 있는 소는 얼마 되지 않고, 또 소고기를 먹겠다는 북한 사람도 없습니다.신의주온실종합농장 간부들도 한 해 한 해 잘 버티다 보면 좋은 날이 올 겁니다. 몇 년 뒤엔 김정은이 “인민들에게 과일을 배터지게 먹게 하겠다”며 뛰어다닐지 누가 알겠습니까.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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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굿네이버스, 기업 맞춤형 사회 공헌 확대

    기업이 보유한 물류·운송 역량을 사회 문제 해결에 적용하는 사회 공헌 활동이 확대되고 있다. 글로벌 아동 권리 전문 비영리단체 굿네이버스는 그동안 국제개발협력 사업과 긴급구호 활동을 통해 축적한 전문성을 바탕으로, 기업의 후원 물품을 해외 사업 현장에 알맞게 지원하고 있다. 단순한 구호물품 지원을 넘어 기업의 요구에 맞춘 수혜 지역 선정을 비롯해 운송 방식, 배분 프로세스, 캠페인 연계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협업이 이뤄지고 있다. 굿네이버스는 2022년 글로벌 해운기업 HMM과 후원 물품 운송 협약을 체결했다. 이 협약에 따라 HMM은 최근 베트남 북부 하장 지역 취약계층 아동 8만3000여 명에게 굿네이버스가 지원한 총 9만7000여 벌의 의류를 운송해 전달했다. 굿네이버스는 절감한 운송 비용만큼 취약 지역 지원에 재투입해 지역사회 자립을 돕는다. 지난달에도 글로벌 패션기업 폰드그룹이 기증한 19억 원 규모의 의류 구호물품이 HMM의 지원을 통해 라오스로 출발했다. 올 4월 경남·경북 지역에 대규모 산불 피해가 발생했을 때도 굿네이버스의 구호물품 전달 시스템이 빛을 발했다. 굿네이버스는 지방자치단체와 협력해 이재민에게 꼭 필요한 물품에 대한 수요 조사를 진행하고 긴급구호물품 조달 및 배분 계획을 수립했다. 국내 패션 플랫폼 ‘무신사’는 입점 브랜드 40여 곳과 함께 굿네이버스에 2억5000만 원 상당의 의류를 후원했다. 그 결과 옷가지조차 챙기지 못하고 급히 몸을 피한 이재민들의 일상 회복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9월 잠실 한강공원에서 열린 기부 러닝 대회 ‘굿네이버스 레이스 with 띵크어스’에는 참가비가 기후위기 대응 사업에 후원되는 캠페인 취지에 맞춰 메인 스폰서 롯데카드를 비롯해 총 18개 기업이 후원사로 참여했다. 레이스를 마친 참가자들이 받은 완주 기념품에는 후원 물품이 가득했다. 대회 현장에는 기업별 브랜드 부스가 마련되어 참가자들이 브랜드를 경험하는 시간도 마련됐다. 굿네이버스는 스포츠, 식음료, 생활 건강 등 다양한 브랜드와 함께 기후위기 대응이라는 공익 메시지를 전하며, 캠페인을 확대해 나갈 수 있었다. 현대중 굿네이버스 대외협력실장은 “굿네이버스는 기업의 전문성이 국내외 사업 현장에서 실질적인 지원 성과로 이어지도록 협력 모델을 고도화해 왔다”며 “앞으로도 물류, 플랫폼, 소비재 등 다양한 산업군과의 파트너십을 확대해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가치 실현에 기여하겠다”고 말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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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무상 치료제 폐지된 북한의 현실

    2025년은 김정은이 병원에 꽂힌 한 해였다. 그는 19일 평양 인근 강동군병원 준공식에 참석했다. 올 2월 6일 착공식부터 시작해 이날까지 9개월여 동안 그는 이 병원을 4차례 방문했다. 지난달 준공한 평양종합병원도 올해만 3차례 찾았다. 그뿐만 아니다. 지난해엔 ‘20X10 정책’을 발표해 10년 동안 매년 20개 군에 지방공업공장을 건설하라고 하더니, 올해엔 여기에 더해 병원도 매년 20개씩 건설하라고 지시했다. 김정은이 인민 건강에 갑자기 지대한 관심이 생긴 것 같지는 않다. 의료가 아주 괜찮은 돈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뿐이다. 자기가 아무리 호통을 쳐도 인민이 주머니를 열지 않지만,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생기면 집을 팔아서라도 치료비를 낸다는 것을 안 것이다. 한국에는 북한의 무상 치료제가 폐지됐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남조선은 돈이 없으면 치료를 못 받고 죽지만, 우리 공화국은 무상으로 인민을 치료한다”고 반세기 넘게 자랑해서 그런지 북한이 아직도 무상 치료제를 시행하는 줄 알고 있다. 북한 무상 치료제는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절부터 사실상 사라졌다. 의사가 진단하고 처방하면 환자는 장마당에서 약을 사 오고, 그 약으로 의사가 치료하는 시스템이 됐다. 치료는 공짜가 아니었다. 환자는 배급이나 월급을 받지 못하는 의사에게 돈을 건네야 했다. 이런 유명무실하고 허울뿐인 무상 치료제는 2022년 8월 급격한 전환점을 맞았다. 이때부터 북한은 모든 병원 간판에서 ‘인민’을 떼 버리게 했다. 올해 준공된 병원들도 원래라면 평양종합인민병원, 강동인민병원이라 불려야 한다. 인민이 간판에서만 버려진 것은 아니다. 인민은 병원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접수비, 진단비, 치료비, 약값, 처방비, 입원비 등 모두 물어야 한다. ‘합법적인’ 치료비가 도입된 것이다. 한국과 북한의 병원은 이제 시스템에서는 별 차이가 없게 됐다. 하지만 1인당 소득으로 비교하면 한국이야말로 진정한 무상 치료 수준이다. 게다가 북한은 리(里) 단위 작은 병원과 시군급 병원, 도 병원, 평양종합병원 간의 치료비 격차가 엄청 심하다. 가령 올해 초 기준 군 병원에서 엑스레이를 한 번 찍으면 북한 돈 2만 원을 받았는데, 도 병원에서는 설비가 최신식이라는 이유로 6만 원을 받았다. 2만 원은 쌀 2kg 이상을 살 수 있는 돈이다. 중앙병원에 가면 비용은 천문학적이다. 가령 북한에 몇 대 없는 컴퓨터단층촬영(CT) 장비 사용료는 지난해 기준 70만 원 정도였다. 북한 고액 연봉 수령자도 1년에 70만 원을 벌지 못한다. 지난해 종양으로 평양에 올라가 후두절제술을 받은 한 지방 고위 간부는 입원 치료비까지 5000달러(당시 기준 북한 돈 약 4400만 원)를 썼다. 처방과 동시에 병원에서 판매되는 약 가격은 장마당과 거의 같다. 장마당에서 비싸지면 병원에서도 비싸진다. 장마당 약품은 간혹 불량품이 있지만, 병원 약은 신뢰도가 있어 환자들은 이왕이면 병원에서 산다. 김정은은 19일 강동군병원 준공식에서 이런 의미심장한 연설을 했다. “이 병원은 건설 과정도 교본적이었지만 운영 과정도 지방 보건 발전의 우수한 본보기로 될 것”이라며 ‘혁명적 결행’ ‘우리식 보건 현대화’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 북한 사람들은 본보기라는 강동군병원 치료비가 얼마로 책정될지 긴장하며 주시할 것이다. 사실 북한이 유상 치료제를 도입하든 말든, 어차피 인민은 수십 년 동안 돈 없으면 치료도 못 받고 죽는 세상에서 살았다. 그렇지만 우리식 보건 현대화란 것이 도입되면서 환자와 가족, 의사, 장마당 약장수 할 것 없이 모두 피해자가 되고 김정은만 수혜자가 됐다. 무늬만 무상 치료제하에서 의사에게 뇌물로 전달되던 돈은 이제 당국으로 들어간다. 정성제약종합공장, 순천제약공장 등에서 생산된 약품이 장마당 약장수를 대신한다. 또 국가가 정한 치료비가 뇌물 시대에 비해 훨씬 비싸지면서 환자와 그 가족의 부담도 엄청나게 커졌다. 이제 북한은 진짜로 돈이 없으면 치료도 못 받고 죽는 세상이 됐다. 김정은이 갑자기 병원을 많이 만들라고 채찍질하는 것을 보면 돈 냄새를 강하게 맡은 것 같다. ‘의료가 주머니 속 달러를 터는 데 제격이구나’라고 깨달은 것이다. 김정은이 인민들 좋으라고 저리 열심히 뛰어다니겠는가. 그런 것은 본 적이 없다.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5-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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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짐승 발자국 따라 네발로 뛰었다” 9년차 북한군의 탈북기〈2〉 [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22일 공개된 1부에 이어.)강민국은 지뢰밭 앞에서 잠시 고민했다. 지뢰밭을 통과하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에 운명을 맡겨야 하는 일이었다.다행스러운 것은 달이 밝았다는 점이었다. 떠날 때는 분계선을 넘을 때 비가 오거나 날이 흐려 어둡기를 원했는데, 막상 장벽과 철조망을 통과해 보니 달이 밝아 너무나 다행스러웠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움직였다면 분명히 여러 번 실수를 했을 것이지만, 달이 밝아 철조망을 관찰하며 통과할 수 있었다.지뢰밭을 달빛 아래 조용히 관찰하니 짐승들이 다닌 발자국들이 보였다. 며칠 전 내린 폭우와 이후 이어진 고온의 날씨로 땅이 빨리 말라 단단해지다 보니 발자국이 또릿하게 보였다. 이것도 비가 오거나 흐린 날씨였다면 발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그는 짐승 발자국을 따라 이동했다. 적어도 짐승이 지나갔다면 선으로 연결된 대인지뢰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렇지만 목함지뢰는 어쩔 수 없으니 운에 맡겨야 했다. 강 씨는 이동 방향을 산 아래 도로로 정했다. 아무래도 도로엔 지뢰가 그리 많이 묻혀 있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이동할 때 그는 네발걸음으로 움직였다. 네 발로 가면 무게가 분산돼, 두 발로 가다가 지뢰를 밟는 것보단 안전할 확률이 높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한참을 철조망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니 도로가 나타났다. 금강산 관광이 중단된 지 16년도 넘었던 때라 도로에도 풀이 울창하게 자라 있었다. 그런데 도로라고 지뢰가 매설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도로 가운데 흙이 깔린 곳을 만났는데, 위에 대전차 지뢰가 잔뜩 설치돼 있었다. 대전차 지뢰는 사람의 몸무게엔 터지지 않는다는 상식을 알고 있던 터라, 조심스럽게 밀어내고 통과했다.얼마쯤 더 가니 도로가 굽은 구간이 나타났다. 거기서부턴 북한 초소에서 발견할 수 없는 사각지대였다. 이제부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철조망을 통과해 네 발로 정신없이 2㎞쯤 왔는데, 불쑥 차단봉이 나타났다. 북한에서 만든 엉성한 차단봉도 아니고, 또 글씨체도 북한식이 아니었다. ‘드디어 남조선에 왔구나.’ 그때의 감격을 어찌 다 설명할 수 있을까.달빛 아래 차단봉 옆에 있는 CCTV가 보였다. 중국 영화에서 CCTV를 봤기에 그게 무엇인지 알았다. ‘나를 보고 있구나’ 싶어 벌떡 일어났다. 이제부턴 네 발걸음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군복도 털면서 CCTV 앞을 괜히 서성거렸다. 빨리 나를 발견하라는 나름의 신호였다.그는 북한에서 9년 동안 보초를 서본 군인이었다. 차단봉 건너편에서 근무에 나온 군인이 졸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가 보초선을 통과하면 누군지 모를 한국 군인이 처벌을 받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막 도착한 한국에서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고 싶진 않았다.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군인이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멀리서 웅얼거리는 확성기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들어보니 “정지. 정지”라고 했다. 하지만 강 씨는 정지가 무슨 말인지 몰랐다. 북한에선 ‘섯’이라고 하지 정지라고 하진 않는다.● 처음 본 한국군한참을 기다리다가 더는 기다릴 수 없어 할 수 없이 차단봉을 넘어 걸어갔다. 좀 가다 보니 철조망과 통문이 나타났다. 그 앞에 서니, 스피커 소리가 더 긴박해졌고, 잘 들렸다.“지금 대상은 불응하고 있다. 접근하면 사격하겠다. 귀순 의향 있으면 손을 들라.”대상이 뭐고, 불응이 뭐고, 귀순이 뭔 말인지는 몰랐지만, 사격과 손들라는 말은 알아들었다.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자 스피커가 “대한민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고 했다.통문이 열리더니 10여 명의 군인이 쏟아져 나왔다. 그를 땅에 눕히더니 뒤로 손을 묶었다. ‘이게 환영이냐’는 생각이 스쳤다. “동행자는 없습니까. 추격조는 없습니까.” “없습니다.”“필요한 것 없습니까.” “물을 좀 주세요.” 누군가 물병을 가져다 입에 대주었다. 벌컥벌컥 마시고 또 마셨다.나중에 들은 바지만, 한국군은 그가 북한 지역에서 움직일 때부터 적외선 카메라로 지켜봤다고 한다. 하지만 네 발로 움직이니 짐승인지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한국 지역에 도착해 벌떡 일어서서야 사람인 줄 알았다고 한다.두 손을 묶인 와중에도 강 씨는 한국군을 관찰했다. 첫 번째로 눈에 들어온 것이 너무나 멋진 군복이었다. 신발도 멋진 소가죽 군화였다. 김일성광장에서 열병식을 하는 군인들도 이들처럼 잘 입진 못했다. 거기에 방탄복과 방탄모, 야시경까지 착용하고 있었다. 강 씨는 북한군 생활 9년 동안 방탄복이나 야시경을 본 적이 없다. 소총도 번쩍번쩍한 것이 녹을 열심히 닦아내기에 급급한 북한군의 낡은 자동보총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거기에 마중 나온 군인들의 키는 대체로 강 씨보다 한 뼘씩 컸다. 강 씨도 부대에서 키가 큰 30% 축에 들어갔는데, 한국 군인들은 훨씬 키도 크고, 체격도 좋았고, 피부에서 기름기가 돌았다.‘아, 나를 마중하느라 키가 큰 군인들을 골라내서, 차려 입히고 나온 거겠지.’강 씨는 자기 몰골을 살펴봤다. 가뜩이나 낡은 군복이 다 찢겨 있었다. 갑자기 기가 죽었다.군인들이 그에게 안대를 씌우더니 차에 타게 했다. 차에서 에어컨이 나오고 있었다. 태어나 처음 맞아본 에어컨 바람이었다.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 하나 풀렸다. ‘이렇게 시원한 바람을 맞으니 이 더위에 저런 군복과 방탄복을 입고도 견딜 수 있었구나.’그가 한국에 도착한 시간은 2024년 8월 20일 새벽 2시경이었다.● 죽을 받아 들고 눈물 흘려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22사단 본부. 도착해 안대를 풀어주었다. 본부의 군인들도 똑같은 군복차림이었고 다들 키가 컸다. 그제야 자신을 맞은 군인들이 일부러 골라 뽑아온 사람들이 나온 것이 아닌 줄 알았다.들어가자마자 코로나 검사부터 했다. 여성 군의관들이 새벽에 나오게 만들어 짜증 났는지는 몰라도 딱딱한 인상으로 그를 검사했다.‘나는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인가 보다.’ 그런 생각은 곧 풀렸다. 한 장교가 필요한 것이 없냐고 물어서 “배가 고프다”고 대답했다. 이틀 동안 꼬박 굶었다. 실은 병원에서 탈출하고부터 거의 먹지 못했다.장교는 “준비하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이어 “몸을 씻고 싶다”고 하자 그를 목욕탕에 데리고 갔다. 씻고 나오니 한국군 운동복을 주었다.목욕하는 사이 식사가 준비됐다. 그가 한국에 오면서 가장 기대한 것이 첫 식사였다. ‘그래도 고기는 주겠지’라고 엄청나게 기대했는데, 죽 한 그릇이 달랑 나왔다. 처음엔 크게 실망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장교의 말이 눈물이 쏟아졌다.“오래 굶었다가 갑자기 먹으면 탈이 나니, 일단 죽부터 먹으면서 점차 식사량을 늘여야 합니다.”‘나는 남조선을 해방하겠다고, 남조선 괴뢰군을 때려잡겠다고 10년을 군사복무 했는데, 이들은 나를 동포로, 형제로 맞아주는구나.’멀건 죽 속에서도 뭔가 씹혔다. 썩 나중에 알았지만, 그건 전복이었다. 죽을 먹고 아침에 다시 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차가 늘어선 도로. 포장 상태가 너무 좋아 흔들리지 않는 도로가 눈에 보였다.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북한군에서 운전병이었기 때문이었다.● 운전병으로 입대하다강 씨는 18세였던 2015년 북한군에 입대했다. 학교 다닐 때 학급반장도 하는 등 공부를 잘했지만, 어머니는 군에 가라고 했다. “너는 출신성분이 걸려 간부가 될 순 없으니, 군에 가서 평생 써먹을 기술이나 배워라.” 할아버지 때문이었다. 평양에서 중앙당 간부를 하던 할아버지는 술자리에서 친구들에게 당의 의료 정책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산골로 추방됐다. 아버지가 열심히 노력해 동해안의 한 도시로 이사를 왔지만, 거기까지였다.부모들이 열심히 로비한 덕분에 강 씨는 입대하면서 200달러는 뇌물로 써야 갈 수 있다는 군 운전수 양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양성소 과정은 1년이었다. 1년 동안 10분 정도씩 화물차를 세 번 몰아보고 졸업했다. 전체 양성소 인원은 800명 정도. 1개 대대가 120명 정도인데, 대대마다 1958년부터 생산된 ‘승리58’ 목탄 화물차가 실습용으로 1대씩 있었다. 이 차는 손으로 스타찡(리코일 스타터)을 1~2시간 교대로 돌려야 발동이 걸렸다. 그렇게 겨우 엔진을 돌려도 엔진에 목탄 재가 계속 차서 수시로 차가 멈춰 섰다.그래도 그가 간 운전사 양성소는 총참모부 직속이라, 군단별로 한 개씩 있는 운전사 양성소보다는 훨씬 사정이 좋았다. 겨울엔 목탄 만들 참나무를 찍어오기 위해 깊은 산에 3시간 넘게 걸어갔다가, 나무를 등짐으로 메고 다시 돌아왔다.늘 배가 고팠다. 알루미늄 공기에 훌쩍 들어간 옥수수밥, 멀건 소금국, 염장무 3형제 반찬이 1년 내내 제공됐다. 염장무를 아무 양념도 없이 채를 치고, 동그랗게 썰고, 깍두기처럼 썬 것이 염장무 3형제다.그냥 썰어주면 되지만, 과거 김정일이 군인들에게 3가지 반찬을 무조건 제공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람에 모양만 달리해 그릇에 담는다. 이렇게라도 사진을 찍어 위에 보고하지 않으면 반찬 3가지를 보장하라는 지시를 어긴 것이 된다. 능력은 없는데, 하라고는 하니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이다.● 목탄차, 쌀겨차, 가랑잎차…1년 동안 양성소 생활을 마치고 부대에 배속됐다. 그의 대대엔 전투차량으로 등록된 화물차가 8대가 있었다. 하지만 가동할 수 있었던 차량은 그가 복무하던 내내 2대뿐이었다.나머지는 각목을 이용해 땅에서 띄워 보관만 했다. 이 차들은 전쟁이 나도 가동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가동되는 2대를 위해 부품들을 오랫동안 뜯어내 사용했기 때문이다. 바퀴도 철심이 다 드러난 쓰다 버린 폐타이어가 붙어있었다. 지휘관은 “네 차를 몰고 싶으면 부품을 사 와서 끼우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이것도 빈말임을 누구나 안다. 설령 부잣집 자식이어서 부품을 사서 갖고 와도 고참들이 또 뜯어갈 것이 뻔했다.그나마 강 씨의 부대는 총참모부 직속이라 괜찮은 부대라서 대대에 가동되는 차 2대를 유지할 수 있었다. 2대로 각종 건설장에 노력 동원도 나가고, 후방 물자도 실어 오고, 김장철에 배추나 무도 실어 왔다.그가 입대할 땐 북한군 부대에 참나무 숯으로 가동되는 목탄차만 있었는데, 유엔의 대북제재가 심화하면서 화물차들의 연료가 다양하게 바뀌었다. 어떤 연료로 움직이는가에 따라 차에 이름이 붙었는데, 목탄차, 쌀겨차, 카바이드차, 알탄차, 메탄가스차, 가랑잎차 등으로 나뉘었다.목탄차는 힘이 좋지만, 참나무 숯을 구하기 힘들었다. 쌀겨차는 탈곡한 벼 껍질로 가는 차였다. 장점은 연기가 적게 났고, 힘도 좋았고, 벼 껍질을 구하기 쉬웠다. 가다가 정미소가 있으면 쌀 4㎏ 정도 살 수 있는 돈인 2만 원에 화물차 적재함 가득 채울 수 있는 벼 껍질을 구입할 수 있었다. 대신 조수가 적재함에 타서 쉴 새 없이 난로에 껍질을 넣어야 했다.비슷한 차가 가랑잎차인데, 아무 가랑잎이나 쓰진 못하고 참나무 가랑잎을 써야 했다. 이 차는 조금만 먼 곳에 가려면 적재함에 가랑잎을 가득 실어야 했고, 조수는 벼 껍질보다 더 열심히 난로에 가랑잎을 넣어야 했다.알탄차는 알처럼 빚은 무연탄을 적재함의 난로에 넣어 가는 차였다. 카바이드와 메탄 차는 연료 구입비가 비쌌다. 휘발유나 디젤유가 없으니, 위의 대용 연료를 사용했는데, 대신 자동차 부품이 너무 자주 고장 나 한번 갔다 오면 분해해서 그을음을 긁어내야 했다. 이것이 2024년 현재의 북한군 실태다. ● 북한군 지휘관 운전사북한군 부대들에서 부품과 연료난으로 처절하게 싸우고 있을 때, 그나마 상황이 좋은 차들은 고위 군관들이 타는 승용차였다.북한군은 일정한 계급 이상인 군관에게 공무용 차를 주는데 이를 직무차라고 부른다. 그렇다고 당국이 승용차 부품이나 연료를 직무차에게 특별히 공급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엔 비밀이 있다.북한에서 어느 정도 돈이 있는 부유층들은 자식을 군에 보낼 때 승용차를 중고로 사서 보낸다. 북한군 군관들이 타는 차는 중국제 우와즈, 북경, 신비라는 브랜드인데, 북한에서 북경 중고차는 2000달러 정도 하고, 우와즈나 신비는 1500달러 정도 거래가 된다.이렇게 차를 서서 입대하면, 운전수 양성소를 마치지 않아도 곧바로 여단장이나 사단장 등 고위 군관의 직무차 운전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군 복무 내내 승용차를 운용하는 연료나 부품 등은 본인이 집에서 돈을 가져와 대야 한다.대신 좋은 점은 규율 생활도 하지 않고, 동원에도 빠지며, 자기 방에서 편안하게 군 복무를 할 수 있다. 그리고 제대할 때 지휘관이 대학 추천권을 준다.차를 살 수 있다는 것은 잘 사는 집 자식이란 의미다. 운전사는 지휘관의 집안 경조사나 먹거리 등도 챙겨야 한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반대급부로 지휘관은 운전사를 얼마든지 휴가 보낼 수 있다. 운전사 두 명 정도만 채용해 교대로 굴리면, 1년에 절반은 집에 가서 놀면서 군 복무를 마칠 수 있다.이렇게 차를 갖고 입대한 운전사를 채용한 지휘관이 북한군 전체에서 10% 이상은 된다.그렇다고 국가에서 준 차를 타고 다니는 다른 지휘관은 규정대로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도 다 부유한 집안 자식을 자기 운전사로 채용해서 연료나 부품을 대게 한다. 즉 북한군 고위 간부들의 운전사는 부잣집 자식인 것이다.지휘관 운전사도 어느 지역인지, 어느 직책인지에 따라 가격이 달라진다. 평양 인근에서 지휘관 운전사를 하려면 집을 팔아야 한다고 소문이 났다. 자기 돈으로 군용차를 유지하는 것은 당연하고, 지휘관 가족까지 운전사가 다 먹여 살려야 한다.북한에서 권력이 막강하고, 돈이 아주 많은 진짜 부자들은 자식들을 운전사로 보내지 않는다. 어쨌든 직무차 운전사는 10년을 복무해야 하기 때문이다. 진짜 권력층 또는 부자는 자식을 집 근처 부대에서 편안하게 5년 정도 복무하게 한 뒤 입당시켜 대학을 졸업하게 한다. 부모의 권력이 너무 세면 지휘관들이 뇌물을 달라는 얘기도 못 하고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다.권력이 없는데, 돈이 많으면 아예 소속 중대 정도는 먹여 살린다. 대신 자식은 후방 물자 구입이란 명목으로 집에 와서 편안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제대한다.● 로또 맞은 운명2023년 말 강 씨는 김정은이 지시한 공사에 차출됐다. 김정은이 지시한 날짜까지 공사를 마치지 못하면 누가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지휘관들은 군인들을 인정사정없이 일을 시켰다.강 씨는 수 톤짜리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드는 일을 했는데, 그 넓은 작업장에 중장비가 3대뿐이고, 그마저도 수시로 고장 나거나 부품이 없어 사실상 인력으로 모든 작업을 해결해야 했다.아침 기상 시간은 새벽 4시. 청소하고 밥을 먹고 5시에 공사장에 나간다. 세수는 어림도 없고, 이를 닦을 시간이 있는 날은 행복한 날이었다.12시까지 오전 작업을 마치고 점심을 먹는다. 저녁은 6시가 아니라, 그날 과제를 마친 새벽 1시쯤에 제공됐다. 그걸 먹고 이가 바글거리는 모포(담요)를 덮고 3시간을 잤다. 1953년 전쟁이 끝난 뒤 북한군 모포는 딱 3번 바뀌었다. 수십 년을 사용한 모포는 사실상 누더기나 다름이 없지만, 수면시간이 3시간인 환경에선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그렇다고 배불리 먹는 것도 아니었다. 옥수수밥에 멀건 소금국을 먹고 일어서면 그때에야 배고픈 게 느껴졌다. 허약 환자들, 결핵환자들이 속출했지만, 날짜를 맞추지 못하면 떨어질 처벌이 무서워, 군인들에겐 단 하루의 휴식일도 허용되지 않았다.강 씨는 이런 환경에서 7개월을 버티다가 결국 쓰러졌다. 병원에 가니 내시경도 하지 않고 위경련이라고 했다. 여단 병원 수준에선 수면 내시경을 할 수 없다. 그래서 강제로 내시경을 삼키라고 했는데, 너무 아파 넘어가지 않았다. 수면 내시경을 하려고 하면 사회 병원에 가서 돈을 내야 했는데, 너무나 비싸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북한의 민간병원은 ‘도 인민병원’ ‘군 인민병원’ 이런 식으로 불렀는데, 3년 전부터 간판에서 인민이란 말을 뺐다. 돈받고 치료하면서 인민병원이라고 부르기에 멋쩍어서인지도 모른다.진단도 받지 못한 채 그는 뭔지 모를 찌꺼기가 떠다니는 수액을 맞다가 결국 탈북을 선택했다. 집에서 약 살 돈을 보내줄 수 있었으면 탈북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탈북하는 내내 아픈 배를 쥐어 잡고 이동했다. 그런데 그렇게 아팠던 위가 한국에 와서 약 몇 알을 먹으니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북한에 있었으면 진단도 못 내리고 생사람만 잡을 뻔했다. 여러 조사를 마치고 강 씨는 올해 1월 서울 근교 지역에 임대주택을 받고 한국 사회에 나왔다. 불과 10개월 정도 남짓한 한국 생활이지만, 너무나 행복하다. 어디든 다닐 수 있고, 인권을 존중받아 좋고, 배고픔을 몰라 좋다.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대학에 가라고 권했다. 그래서 한국 정착 2개월 만에 ‘다음학교’에 입학해 입시 준비를 시작했다. 다음학교는 남북 청소년이 함께 공부하는 서울시 등록 대안교육기관이다. 이런 준비를 마친 끝에 얼마 전 가천대 물리치료학과에 입학했고, 내년 3월부터 다닐 예정이다. 더 좋은 대학에 가지 왜 물리치료학과를 선택했냐고 묻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가 물리치료학과를 선택한 이유는 죽을 뻔한 운명이 한국에 와서 새롭게 태어나게 됐으니, 자신도 누군가를 치료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였다. 물론 지금의 결심이 옳은 것인지 확신은 없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많은 것들이 아직 뭐가 뭔지 모른다. 하지만, 어찌 되든 뭐가 문제란 말인가. 그는 세계에서 가장 극악한 감옥에서 탈출한 엄청난 행운아다. 인민의 탈출을 막기 위해 북한은 약 240㎞의 남쪽 국경에 5m 높이의 장벽을 세우고, 8중 철조망을 만들고, 없는 전기를 아낌없이 공급하고 있다. 철조망 밖의 지뢰밭과 장벽 밖의 무수한 감시초소와 잠복초소까지 생각한다면, 감옥도 이런 감옥이 또 어디에 있을까.탈북하다가 전기에 붙어 죽고, 총에 맞아 죽고, 지뢰를 밟아 죽은 이는 또 얼마나 많았을 것인가. 북한이란 감옥에 갇혀 생지옥을 경험하는 2000만 동포들을 생각하면, 강 씨는 로또보다 더한 행운을 얻은 사람이다. 그리고 뭐든 새로운 도화지에 그릴 수 있는 28세일뿐이다. 서울의 하늘 아래에서 오늘도 그의 꿈은 새싹처럼 자라고 있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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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 있다간 생체실험으로 죽겠구나” 사선 넘어온 북한군[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그는 여단 병원에서 도망쳤다. 더 있으면 시체로 나와야 할 것 같았다. 누가 봐도 뼈밖에 안 남은 몰골의 강민국은 9년 넘게 군에서 복무해 이제 제대까지 1년도 채 남지 않은 고참 병사였다. 하지만 남은 1년을 버틸 수 없었다.하루에 3시간밖에 자지 못하고 쉬는 날도 없이 공사판에서 버티던 강 씨는, 열흘 전 배가 너무 아파 병원에 실려 왔다. 하지만 병원에서 딱히 해주는 것은 없었다.엊그제 군의관이 들어왔다. 링거라도 맞아야 한다고 했다. 술병, 맥주병 상관없이 끓는 물에 넣었다가 꺼내면 링거 병이 된다. 강 씨에게 온 병은 마침 투명한 병이었는데, 주사액을 본 강 씨는 경악했다. 병 안에 숱한 부유물들이 둥둥 떠다녔다. 저 이물질들이 혈관에 들어갈 것을 생각하니 끔찍했다.“싫습니다. 놓지 마세요.” 저항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는 강제로 링거를 맞았다. 그날 저녁부터 고열이 심하게 나기 시작했다.다음날 군의관이 다시 들어왔다. 또 링거를 들고 왔다. 그리곤 “오늘은 좀 더 정제를 잘해서 이물질이 거의 없어. 이거라도 맞지 않으면 넌 죽어”라고 말해주었다. 전날 링거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지만, 또 맞았다.“내가 여기에 있다간 생체실험 대상이 돼서 죽겠구나.”강 씨는 2년 전에도 다리에 종기가 생겨 군단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그때 한 달 동안 병원에서 33명의 군인이 죽어 나갔다. 모기에게 물렸다가 부어서 죽은 병사, 자창을 치료 못 해 팅팅 부어 죽은 병사 등등 병명은 각자 달랐지만, 원인은 하나뿐이었다. 항생제가 없기 때문이다. 집에 전화해서 항생제를 살 돈을 전달받은 병사는 장마당에서 항생제를 구입해 맞을 수 있었다. 그때 강 씨도 집에서 보내준 돈으로 항생제를 사서 나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집이 갑자기 가난해져서 돈을 보낼 수 없기 때문이다. 2년 전 숱한 군인들이 병원에서 죽는 것을 본 트라우마가 머릿속에 그대로 있는 상황에서, 이번엔 자신이 죽을 차례가 온 것이다. 병원에서 놔주는 링거가 뭔 진 몰라도, 별 효과가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살려면 도망쳐야 했다. 집에 가봐야 치료할 능력도 되지 않고, 또 탈영병이라고 처벌받을 것이 뻔했다.“그래. 이판사판. 남조선밖엔 갈 곳이 없구나. 가다 죽으나, 있다가 죽으나 뭔 차이가 있겠는가.”그때는 몰랐다. 삼엄한 감시의 눈을 피해 5m 높이의 장벽, 고압선 3개가 포함된 7개의 철조망, 교묘하게 숨겨진 감지선 하나를 넘고, 그리고 또 지뢰밭을 통과해야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2024년 8월, 그는 자유를 향해 떠났다.● 고성으로 가는 길군사분계선으로 가려니 일단 강원도 고성까지 가야 했다. 병원에서 제일 가까운 친척 집에 찾아가 북한 돈 3만 원을 빌렸다. 쌀 3~4㎏을 살 수 있는 액수였다.길에서 남쪽으로 가는 화물자동차를 탔다. 북한엔 돈을 받고 사람을 태워주는 버스 역할을 하는 ‘써비차’들이 있다. 고성까지 2만 원을 내라고 했다. 군인이라고 예외는 없었다. 차를 타도 끝이 아니었다. 고성은 최전방 지역이라 특별 통행증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었다. 화물차에 오른 강 씨는 주변을 관찰했다. 허름한 군복을 입은 대위가 보였다.군복 꼴을 보니 가난한 병종의 군관임이 틀림없었다. 이런 사람은 적은 뇌물에도 넘어간다. 강 씨는 대위에게 다가가 차고 있던 전자시계를 내밀며 “고성에 일 보러 가는데 여행증이 없으니 도와 달라”고 했다. 그 시계 구입가는 북한 돈 2만 원. 쌀 3~4㎏ 정도 살 수 있는 액수다. 군관이 시계를 훑어보더니 머리를 끄덕였다.단속초소가 나타났다. 여행증 검열을 하려 적재함에 오른 군인에게 군관은 자신의 공무 여권을 보여주며 강 씨는 자기가 데리고 가는 부대원이라고 소개했다. 북한에서 군관들이 스폰서 역할을 할 대원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은 너무 일상적인 일이다. 초소 군인은 별 시비를 걸지 않고 지나갔다. 이들도 뇌물 받는 데선 프로들이라, 사람을 보자마자 견적을 낸다. 돈이 나올만한 사람에게 시비를 걸어야지, 가난한 군관을 건드려봐야 뇌물도 없고, 입만 아프다는 것을 안다.무사히 고성에 도착한 강 씨는 장마당부터 찾아갔다. 이제부터 한국까지 가려면 먹을 것이 있어야 했다. 수중에 남은 1만 원으로 북한에서 만든 과자 1㎏과 담배 두 갑을 살 수 있었다. 인근 뒷산에 올라갔다. 밤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움직일 생각이었다.그에겐 고성에서 근무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저기 보이는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남조선이란 정보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도로로는 갈 수가 없으니, 도로가 보이는 산비탈을 타고 내려갈 생각이었다.날이 너무 더워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고, 금방 갈증이 찾아왔다. 하지만 생사가 결정되는 출발선에 서고 보니 육체적 고통 정도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탈영병 잡으러 갑니다.”2024년 8월 17일 밤. 어두워지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로가 보이는 산비탈을 따라 걸으면 될 줄 알았는데, 막상 걸어보니 너무 힘들었다. 금강산은 사실상 돌산이다. 어둠 속에서 바위를 넘고 또 넘으며 가다 보니 도무지 속도가 나지 않았다. 이렇게 가다간 끝이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도로 옆으로 뻗은 철길로 내려왔다. 아직 분계선까진 많이 남아있으니, 여기엔 경비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얼마쯤 걸어갔을 때 갑자기 앞에 무장을 한 군인이 전짓불을 켜며 불쑥 나타났다. 그는 부소대장급인 상사 견장을 단 강 씨를 보더니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었다. 위기의 순간이 되니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어, 나 저기 저 동네에 있는 모 부대 부소대장인데, 저기 앞에 민경 초소에 탈영병 잡으러 가. 우리 소대원의 친구가 민경 초소에 있는데, 거기 놀러 간다고 하고 나타나지 않았어. 낼 판정 받아야 하는데, 너무 급해서 새벽에 지휘관들이 찾으려 나설 수밖에 없어.”새벽에 탈영병을 잡으러 간다는 말은 설득력이 전혀 없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이번엔 군인이 “배낭 좀 봅시다”라고 했다. 배낭 안의 손전등을 봤다면, 새벽에 손전등도 켜지 않고 가는 그를 의심이라도 할 법하지만 이 군인은 처음부터 과자 봉투와 담배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담배 한 갑을 꺼내 주자 입꼬리가 올라갔다.전짓불 때문인지 저기서 한 명이 또 다가왔다. 남은 담배 한 갑을 보더니 또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이때 또 한 명이 나타났다. 이번엔 순찰을 도는 중대장이었다. 강 씨는 배낭을 발로 차 옆으로 밀어놓았다. 손전지가 발견되면 재미없을 것 같았다.중대장이 또 누구냐 물어서 강 씨는 아까 했던 거짓말을 다시 되풀이했다. 갑자기 담배를 받은 군인이 나서서 열심히 강 씨 편을 들어주기 시작했다. 담배를 받았다는 것을 말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중대장이 “어떻게 생긴 병사냐”고 물어서 학교 다닐 때 친구의 얼굴을 떠올리며 열심히 설명했다.중대장이 그의 설명을 들으며 자주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의 의미를 강 씨는 안다. 북한군 부대들엔 워낙 탈영병들이 많아서, 지휘관들에겐 탈영병을 잡으러 다니는 일이 중요한 임무였다. 낮이든 밤이든 상관없이 찾아다녀야 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던지 중대장은 갑자기 강 씨를 동정하기 시작했다. 중대 본부로 끌려갈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중대장은 “아무리 급해도 여긴 밤에 돌아다니면 안 되는 곳”이라며 돌아가라고 했다. 그러면서 “인상착의를 잘 들었으니 혹시 그 탈영병이 여기로 지나가면 잡아서 보내주겠다”라고도 했다. 천운이었다. 강 씨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돌아서서 왔던 길로 다시 걸었다.그들이 안 보이게 되자 그는 이번엔 도로를 건너 반대쪽으로 갔다. 밤에 보니 도로 좌측은 논이어서 거기로 에돌아가면 될 듯했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거기는 논이 아니라 갈대숲이었고, 깊은 수렁이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쯤 갔을까. 갑자기 몸이 쑥 빠지더니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허우적거릴수록 그의 몸은 점점 더 수렁에 들어가 어느새 목까지 잠겼다.“이대로 죽는구나” 싶은 절망 속에서도 마지막 발악이라도 해보려고 열심히 손을 휘저었다. 연꽃인지, 갈대인지 모를 뿌리가 손에 잡혔다. 하나를 잡고 끌어당기니 뽑혔다. 이번엔 여러 대를 손으로 모아 조심조심 끌어당겼다. 더 이상 몸이 빠지지 않았다. 뿌리가 뽑히면 그도 죽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씩, 조금씩 끌어당기기를 한 시간 넘게 반복한 끝에 겨우 몸을 뽑아낼 수 있었다. 수렁에서 나온 그는 다시 도로를 건너 산으로 올라갔다.온몸이 젖어 기진맥진한 그는 산에 올라가 돌 틈에 몸을 숨기고 쓰러졌다. 어차피 곧 날이 밝을 것이니 여기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 밤에 또 움직일 계획이었다. 배낭을 꺼내보니 과자가 죽이 돼 먹을 수 없게 됐다. 이제 식량마저 떨어진 것이다.● 또다시 마주친 잠복초소2024년 8월 18일. 동해에서 해가 떠올랐다. 이제 따뜻한 햇살에 옷과 몸을 말리고 잠을 자면 됐다. 해가 떠오른 지 30분쯤 지나 잠이 들까 했는데 갑자기 말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럽게 살펴보니, 그가 숨은 바위틈 바로 30m 위에 북한군 잠복초소가 있었다. 두 명의 군인이 잠복 초소에서 나오더니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들은 잠복초소에 있는 이불을 꺼내고, 겉옷을 벗어 햇볕에 말리기 시작했다.머리카락이 삐쭉 섰다. 밤에 그가 조금만 더 올라갔다면, 올라오다가 소리만 냈다면, 여기가 아닌 저기에 자리를 잡았다면…. 그가 그 돌 틈에서 주저앉은 것은 천운이었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문제였다. 1분 1초가 긴장의 연속이었다. 잠을 자다가 소리를 낼까 봐 그날 낮엔 하루 종일 쥐 죽은 듯이 돌 틈에 박혀 있었다.그렇게 낮 동안 잠을 자지 못하고 지내다가 다시 밤이 되자 산에서 조심스럽게 내려왔다. 낮에 산 아래를 보니 남쪽으로 연결된 도로가 보였다. 도로는 관리가 되지 않은지 꽤 오래돼, 양옆으로 풀이 키 높이로 무성했다. 도로에 바짝 붙어 풀을 헤치며 가기 시작했다. 밤이지만, 둥근달이 떠서 사방이 잘 보였다.500m쯤 갔을 때, 갑자기 앞에 시꺼먼 물체가 나타나 깜짝 놀랐다. 야간 잠복을 나와 잠을 자는 군인이었다. 9시도 채 되지 않았지만, 낮에 농사니 뭐니 고역을 치르며 기진맥진해 야간 근무에 나오자마자 곯아떨어진 것이 뻔했다. 잠을 자던 군인도 인기척을 듣고 벌떡 일어났다. 여기서 주저하면 끝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견장을 보니 입대한 지 3년쯤 돼 보이는 군인이었다. 20m쯤 떨어져 자는 병사가 한 명 더 보였다. 9년의 ‘짬밥’이 본능적으로 나왔다.“야, 어느 부대야.” 초저녁에 갑자기 웬 상사가 나타나 호통 치니 상대가 움츠러들었다.“누구십니까.” “나 저 앞에 민경 초소 부소대장이야.” 호통을 치면서 상대의 복장을 보니 상의는 얼룩무늬 군복을 입었지만, 모자와 하의는 낡은 누런 군복을 입었다. 이건 복장 위반 사항이다. 게다가 무기도 없다. 근무에 나와 잘 때 누가 훔쳐 갈까 봐 총을 근처에 숨겨두는 병사들이 많다. 상대가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강 씨는 몰아붙였다.“너 근무에 나와 이리 자는 거 분대장이 알아? 그리고 복장이 이게 뭐야? 총은 또 어디 가고. 너희 부대 이거 안 되겠네. 조국은 널 믿고 있는데, 넌 여기서 잠이 와?”풀이 죽은 병사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잘못했습니다. 그런데 부소대장 동지, 여긴 밤에 못 갑니다. 돌아가십시오.”강 씨는 병사를 한 번 더 째려보고 뒤로 돌아 걸었다. 떨어져 자고 있던 한 명은 그때까지 일어나지 않고 계속 잠을 자고 있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얼마쯤 돌아오다가 다시 산에 올랐다.병원에서 떠날 때부터 강 씨는 하늘을 향해 수없이 기도했다. 종교가 뭔지 전혀 모르지만, 절망적인 상황이 되니 하늘을 보며 “살려 달라. 무사히 남조선에 가게 해 달라”는 기도가 계속 나왔다. 어쩌면 그 기도가 통했을까. 밤에 두 번 단속됐는데 모두 빠져나오는 기적이 일어났다. 산에 올라가니 드디어 멀리 분계선의 철책 불빛이 보였다. 여기서 하루 더 머물며 정찰해야 하겠다고 판단했다. ● 장벽과 고압 철조망2024년 8월 19일. 몸을 숨기고 산 아래 도로를 감시했다. 하루 종일 도로로 차 한 대가 지나갔을 뿐 조용했다. 멀리 해변에서 시작돼 산을 타고 구불구불 올라간 콘크리트 장벽이 보였다. 장벽을 어떻게 넘을지 생각해 봤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장벽이 있다고 돌아갈 순 없었다. 어차피 앞을 막아서는 것은 다 넘어가리라 결심하고 떠난 몸이 아닌가.어둠이 깔리자, 그는 낮에 봐뒀던 코스를 타고 다시 움직였다. 한참을 가니 드디어 장벽이 나타났다. 막상 앞에 가보니 높이가 5m는 돼 보였다. 쌓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공사 잔해들이 주변에 널려있었다. 도무지 넘을 방법이 없어 장벽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한참 내려갔는데, 장벽 아래에 물이 빠지도록 만든 배수구가 보였다. 배수구에 들어가 보니 쇠살창이 설치돼 있었다. 혹시나 해서 시도했는데, 머리가 살창 사이로 들어갔다. 머리가 들어가면 몸도 빠질 수 있을 것이다.한참을 낑낑거리며 드디어 쇠살창을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그가 당시 몸에 뼈만 남아 45㎏도 채 되지 않는 상태가 가능한 일이었다. 조금만 살이 쪄도 불가능했을 일이다. 다시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배수구를 지나 장벽의 반대쪽에 도착하니 두 사람 정도 나란히 걸을 정도 너비의 순찰로가 나오고, 순찰로 옆에 고압 철조망이 두 개 있었다. 1만 볼트의 전기가 흐른다고 해서 악명이 자자한 ‘만선’ 철조망이었다. 북에서 분계선에 전기철조망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군인은 없는지라, 강 씨도 떠날 때 이미 각오했던 일이다.주변에서 나뭇가지를 찾아 철조망에 대봤더니, 전압이 어찌나 센지 마른 나뭇가지를 통해서도 손바닥에 찌릿하고 전기가 흘렀다. 땅에서 맨 아래 전기선까지 높이는 10㎝ 정도였다. 군에서 배운 대로 강 씨는 나뭇가지 두 개를 이용해 전기선을 20㎝ 정도 들어 올린 뒤, 그 아래 땅을 파고 조심스럽게 통과했다. 1.5m 앞에 있는 두 번째 철조망도 같은 방법으로 통과했다. 철조망 사이엔 모래를 깔아놓은 ‘흔적선’이 있었다. 발각되면 안 되기 때문에 첫 번째 철조망을 통과한 뒤 구멍을 메우고, 지나온 흔적도 손으로 잘 다듬어 놓고, 두 번째 철조망 구멍도 또 메웠다.전기철조망 두 개를 통과한 뒤 마지막 철책 지역까지 향해 냅다 달렸다. 전기철조망과 민경이 관리하는 최후의 철책까지 거리는 4㎞ 정도 떨어져 있다. 마지막 철책은 전등들이 켜져 있어 불빛을 보며 가면 됐다. 하지만 중간 지역은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곳이라 그의 키를 넘는 나무와 풀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동남아 열대 우림과 마찬가지인 곳이었다.전등이 보이지 않아서 한참 가다가 나무가 나타나면 타고 올라가 방향을 재확인했다. 나무에 올라가 확인하는 것을 열 번쯤 반복하니 드디어 철책에 도착할 수 있었다.수풀을 헤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은 목이 마른 것이었다. 8월의 고온 속에서 하루 넘게 물을 먹지 못했다. 가끔 물웅덩이도 나타났다. 하지만 물이 휘발유가 덮인 것처럼 번들번들했다. 침을 뱉어봤더니 퍼지지 않았다. 그런 물은 썩은 물이라 마실 수 없었다.● 5중 철조망과 지뢰밭그가 도착한 마지막 철책 지역은 약 1m 간격으로 철조망이 다섯 겹 설치돼 있었다. 전등도 많이 달아서 주변이 환했다. 일정한 간격으로 약 5m 높이의 감시탑이 있었는데, 거기에 군인이 올라가 아래를 감시했다.강 씨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감시탑으로 기어갔다. 감시탑 바로 아래엔 그늘이 져 있었다. 밝은 불빛을 보는 군인은 발아래 어두운 지역을 잘 보지 못할 것이라 타산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격언에 목숨을 맡겨 보기로 한 것이다.감시탑 위의 군인은 한국 노래를 흥얼흥얼 부르고 있었다. 강 씨도 그 노래를 안다.“친구여. 꿈속에서 만날까~” 노랫소리가 높아지면 강 씨도 슬금슬금 움직였다.드디어 첫 번째 철조망에 도착했다. 여기 철조망은 전기철조망보다 더 빡빡했다. 땅과 마지막 선의 높이는 불과 5㎝ 정도였다. 나무꼬챙이를 받쳐 놓고 손에 피가 나도록 땅을 팠다. 통과했다. 지나온 땅은 손으로 흔적이 남지 않게 다시 고르게 했다. 두 번째 철조망도 같은 방법으로 통과했다.“괜스레 힘든 날, 겁 없이 전화해.” 두서없이 흘러나오던 노랫소리가 뚝 끊긴다. 강 씨도 숨을 죽이고 엎드려 있었다. 이번엔 중얼중얼~. 그러다가 콧노래. 다시 한국 노래….세 번째 철조망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번 철조망은 땅을 팔 수가 없었다. 땅이 있어야 할 곳에 유리와 못을 잔뜩 박은 콘크리트 블록들이 깔려있었다.지금까지 수많은 위기를 헤치고 왔지만, 이번은 도무지 통과할 길이 보이지 않았다. 돌아갈 수도 없었다. 철조망 중간에 갇힌 강 씨는 “여기서 죽는구나” 생각했다.지금 생각해 봐도, 또 앞으로 기다릴 삶을 떠올려도, 그때보다 더 절망스러운 일은 없을 듯하다. 그는 미친 듯이 땅을 팠다. 블록이 얼마나 깊은지는 몰라도 그래도 마지막 몸부림이라도 쳐야 했다.기적은 포기하지 않는 자에게 일어나는 법이다. 블록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블록은 통으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가로·세로·높이가 각각 15㎝·40㎝·50㎝ 되는 블록을 땅에 박은 것이었다.조심스럽게 블록을 겨우 빼냈는데, 교묘한 복병이 숨겨져 있었다. 블록 바로 앞에 땅 위 5㎝ 높이에 눈에 잘 띄지 않는 실선이 설치돼 있었다. 자칫 발견하지 못했을 수 있었지만 천만다행으로 그의 눈에 보였다.블록을 뽑은 구멍으로 빠져나가면 실선을 건드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선이 전기선인지도 알 수 없어 뚫어지게 관찰하니 알루미늄선이 아니라 철선이었다. 그러면 전기선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걸 건드리면 감시탑에 신호가 전달될 것이 뻔했다.강 씨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방법을 찾아냈다. 주변에 있는 나뭇가지들을 모아 철선을 두껍게 칭칭 감았다. 건드려도 흔들리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성공했다.철선을 넘어 네 번째 철조망에 도착했다. 이 철조망엔 전기가 흐르고 있었다. 앞서 고압 철조망을 두 개나 넘은 경험이 있기에, 이것도 나뭇가지로 들어 올리고 땅을 파서 넘었다.다섯 번째 철조망은 2.5m의 가시철조망이었는데, 위에 원형 철조망이 타래로 감겨 있었다. 빠져나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위로 기어 통과하려고 철조망을 쥐고 힘을 주는 순간 삑~하는 소리가 났다. 철조망을 고정한 기둥과 쇠줄이 마찰하면서 나는 소리였다.다행히 힘을 많이 주지 않았던 데다, 한국 노래에 심취한 병사의 취향 덕분에 발각되지 않았다. 그나마 제일 구멍이 큰 틈을 찾아 몸을 밀어 넣었다. 장벽의 쇠살창도 여윈 몸 덕분에 넘었는데, 이것도 머리만 들어가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성공했다. 대신 철조망의 가시에 군복과 살이 수없이 뜯겼다.마침내 그는 보초병의 발밑에서 다섯 개의 철조망을 모두 벗어났다. 아직도 한국 노래를 흥얼거리는 보초병을 향해 속으로 외쳤다.“그래, 너는 여기서 한국 노래나 불러라. 난 한국에 간다.”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9번의 ‘데스게임’을 넘어온 그에게 남은 마지막 미션은 지뢰밭 통과였다.(23일 공개될 2부에서 이어집니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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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찢어진 청바지 입고 싶어 탈북한 개마고원 소녀, 패션업체 대표가 되다[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개마고원에서 중학생 소녀는 매직 머리에 후드티,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다녔다. 모두 북한 당국이 단속하는 차림새였다.마을 사람들은 “쟤는 ‘황색 바람’에 젖어 버린 이상한 애야. 저런 날라리와 같이 놀지 마”라며 자식들을 단속했다. 학교에서 아무리 비판해도 소용이 없었다. 당 간부였던 부친은 딸 교육을 잘 못했다는 이유로 반성문을 수시로 써야 했다.3년에 한 벌씩 주는 교복은 받을 때는 훌렁했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작아졌다. 소녀는 집에서 혼자 교복을 줄였다 늘였다 했다. 친구들과 몰래 한국이나 외국 드라마를 볼 때면 늘 패션에 눈이 갔다. “우리도 저렇게 입고 살게 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그로부터 20년 뒤, 그 소녀는 자신이 직접 디자인해 만든 옷을 전 세계에 수출하고 있다. 어쩌면 패션을 위해 태어났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이 꿈을 완성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북에서 태어난 운명을 거스르고 탈북해 서울에 정착해서 빈주먹으로 일어서야 했다.아직 가야 할 길은 멀다. 그래도 과거와는 달리 인생의 깨달음을 얻었다. 열심히 가다 보면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린다는 것을….● 개마고원의 청바지녀강지현은 1990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평양에 대한 기억은 없다. 그가 4세 때 평양에서 상하수도 관련 기관 간부였던 할아버지가 뭔 잘못을 했는지 하루아침에 가족과 함께 함북 청진으로 쫓겨났다. 그래도 시골이 아닌 큰 도시로 간 것으로 보아 정치 범죄는 아닌 듯싶다.아버지는 할아버지 잘못을 속죄한다는 의미로 백두산 건설 돌격대에 자원해 3년 동안 일했다. 당국의 인정을 받은 것인지, 이후엔 양강도 백암군 임업사업소 당 간부로 임명됐다. 개마고원의 울창한 산림과 깨끗한 강이 소녀의 놀이터였다.그가 패션에 눈을 뜬 것은 11세 때 할아버지와 고모들이 사는 청진으로 가면서부터였다. 딸이 산골에서 자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부친은 그를 청진으로 유학 보냈다.큰 무역회사 부기원(경리)으로 일하는 고모들은 부유하게 살고 있었다. 고모들은 당시 청진에 대량으로 들어오는 일본 중고 옷을 넘겨받아 장마당에 팔았다. 강 씨의 고종사촌 언니들은 중고 옷 중에 마음에 드는 옷들을 골라 입었다. 물론 북한 당국이 통제하는 패션들이었다.사촌 언니들이 크면 그 옷들은 자연스럽게 강 씨에게 전달됐다. 어느 순간 강 씨도 언니들처럼 옷을 골라 입기 시작했다. 몰래 보는 한국 드라마에서 나오는 옷들을 눈여겨봤다가 비슷한 것이 나오면 골라냈다.북한 당국의 옷차림 통제는 시기별로 들쑥날쑥했다. 죽일 것처럼 통제하다가, 아예 손을 놓고 있기도 했다. 강 씨가 청진에 살던 때는 통제가 약해진 때였다. 학교에 입고 가서는 안 됐지만, 10대 초반 소녀가 방과후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거리를 다녀도 제지하지 않았다.그렇게 3년 후 부친이 와서 딸을 데리고 개마고원으로 돌아갔다. 촌 동네에선 아무리 조신하게 입는다고 입어도 사람들이 손가락질했다. 마을 사람들은 단체복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그렇지만 강 씨의 끼는 죽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멋있게 보일까’ 고민하면서 머리를 고데기로 펴거나 염색하기도 했다. 외부 세계를 모르는 개마고원 주민들과, 많은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외부 문물을 접한 강 씨는, 아무래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스스로 멋 내기 좋아하고 잘 노는 학생이라고 생각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가 무슨 짓을 하건 이상하다고 했다. 모두가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자유분방하게 사는 그를 부러워하는 학생도 주변에 적지 않았다.● “석 달만 중국에 살고 싶어”2007년 중학교를 졸업했을 때 부친은 딸을 청진에 있는 3년제 경제전문대학 부기학과에 다니게 했다. 경리 일을 하며 잘사는 고모들처럼 살길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주산으로 계산하는 일은 도무지 적성에 맞지 않았다. 한 학기만 다니고 개마고원으로 돌아왔다.그때쯤 북한 정책에 변화가 있었다. 우물 안 개구리 신세인 북한 과학기술 수준을 높일 생각이었는지, 아니면 후계자 김정은에게 젊은 인재를 많이 남겨 주고 싶어서였는지, 북한에서 학비를 부담할 수 있는 고위 계층 자녀의 해외 유학을 허용한 것이다. 부친은 이 기회를 활용해 강 씨를 중국에 유학 보내기로 작정했다. 부친은 평양을 오가며 열심히 선을 찾아 로비했고 뇌물도 적잖게 썼다. 강 씨는 해외 유학생 선발 시험을 6번이나 봤지만, 어찌 된 일인지 모두 떨어졌다. 뇌물 먹은 간부는 강 씨가 불합격하면 뇌물을 다시 돌려줬다.유학 준비를 하면서 지역 출판물 보급소에 취직했다. 중앙에서 내려온 신문이나 책을 작은 도서관들에 나눠주는 일이었다. 중앙에선 북한 영화나 드라마, 음악을 넣은 CD도 내려왔는데,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CD 배포를 담당한 그에게 잘 보이려는 사람도 늘어났다.하지만 북한에서 보급하는 CD는 한국이나 중국 영화를 많이 봐서 눈이 높아진 강 씨 성에 차지 않았다. 몸은 북한에 있었지만 어느새 머리는 바깥세상에 살고 있었다. 바야흐로 18세. 한창 꿈도 많고 보고 싶은 것도 많은 나이였다.어느 날 강 씨는 잘 알고 지내는 3세 위 동네 오빠에게 속을 터놓았다. 그 오빠는 중국에 잘사는 친척들이 있었고, 합법적인 여행증을 받아 중국을 여러 번 다녀왔다.“오빠, 우리 부모님 모르게 날 좀 중국에 데려다 주면 안 돼? 딱 석 달만 구경하고 싶어.”“정말 가 보고 싶어? 정 원하면 내가 구경시켜 줄게.”그렇게 둘은 중국에 같이 가기로 약속했다. 여기에 오빠 친구까지 합세했다.압록강이 강이 꽁꽁 얼어붙은 2008년 12월, 21세 두 청년과 강 씨는 길을 나섰다. 집에는 청진 고모네 집에서 석 달 정도 놀고 오겠다고 말해 승낙을 받았다.그 오빠는 중국을 드나드는 통로가 있었다. 셋은 차를 얻어 타고 삼지연으로 갔다. 경비대에게 돈을 주고 강을 넘었다. 오빠가 전화를 하니 연변에 사는 오빠 이모가 차를 끌고 마중 나왔다. 남들에 비하면 너무나 쉬운 탈북이었다. ● 중국 대학에 입학하다오빠 이모라는 사람은 중국에서 교사였는데, 집에 가 보니 매우 잘 살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미국과 한국 교회에서 돈을 지원받아 북한 선교 활동을 하고 있었다.중국에서 지낸 한 달은 꿈만 같았다. 여기저기 구경 다니다가 집에 들어가선 한국 드라마를 원 없이 봤다.백화점에는 드라마에서 본 옷들이 다 있었다. 중국 아가씨들은 한겨울에도 코트 안에 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녔다. 어떤 옷을 입든 통제하는 사람은 없었다. 백화점에 가 보고 강 씨는 시쳇말로 눈이 돌아갔다. 처음엔 한두 달 놀다가 개마고원 집에 가려고 했는데, 여기서 살고 싶은 생각이 점점 커졌다. 그런 강 씨의 심경 변화를 눈여겨보던 오빠 이모가 한 달쯤 뒤 제안했다.“북에 다시 돌아갈래, 아니면 중국에서 대학 다닐래?”가뜩이나 집에 돌아가기 싫었는데, 북한에서 여섯 번이나 떨어졌던 대학 생활을 중국에서 하게 해 준다니 꿈만 같았다.2009년 1월 강 씨는 기차를 타고 하얼빈으로 갔다. ‘국적이 없는’ 그가 중국 대학에 정식 입학할 순 없었다. 대신 50대 초반 한국인 부부가 운영하는 3년제 대학 ‘할빈아청대’에 들어갔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선교 목적으로 설립한 어학원 성격의 학교 아닌가 싶다. 한국 기독교계에 발이 넓은 그 이모 덕분에 탈북민 신분으로 학교 입학이 가능했던 것이다. 학교는 하얼빈 도심에서 버스를 타고 두 시간 정도 떨어진 변두리 도시에 있었다. 강 씨는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그가 입학한 중국어학과 같은 반에는 한국에서 온 청년도 넷이나 있었다. 3명은 강 씨보다 나이가 많았고 부산에서 왔다는 한 명은 어렸다. 강 씨는 한국에 온 뒤 “나, 부산 사나이야”를 입에 달고 살던 2세 어린 그 청년을 찾아봤지만 허사였다.‘한국 오빠들’은 강 씨에게 바람을 불어넣었다.“제대로 된 신분도 없는데, 대학에 다닐 거면 한국에서 다녀야지.”4개월 동안 중국어를 공부하고 방학을 맞았다. 3개월만 하겠다던 중국 살이가 신선놀음에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른다고 어느새 반년이 넘었다. 집에선 딸이 실종됐다고 난리가 났을 것이고, 돌아가면 감옥행이었다. 이렇게 된 것, 한국에 가고 싶었다.그 이모에게 전화해 “한국으로 보내 주시면 안 돼요”라고 말했다. 이모는 이번에도 대책이 있었다. 하얼빈 어느 교회에서 경기 부천에서 온 한국인 선교사를 만나 보라며 전화번호를 주었다. 이 선교사는 사람을 더 모아서 8월에 한국으로 한 팀을 보낼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7명이 모였다.● “나를 왜 미워하지?”한국에 도착하는 과정도 순탄했다. 그해 8월 말 출발해 중국 남부 지방을 거쳐 라오스로 갔고, 거기서 태국으로 이동했다. 기차와 버스, 승용차, 배를 번갈아 타며 방콕에 도착한 뒤 이민국 감옥에 들어갔다.당시는 한 해에 탈북민이 3000명 가까웠다. 감옥에 들어간 강 씨는 탈북민이 그렇게 많은 걸 보고 깜짝 놀랐다. 한 감방에 여성 120명이 수감돼 있었다.19세의 여리여리한 그를 보고 먼저 온 ‘기가 세 보이는’ 언니들이 “넌 어떻게 왔냐”고 물었다. 대학에 다니다가 왔다고 하니 모두 표정이 바뀌었다.“우리가 어떤 개고생을 당하며 여기에 왔는데, 이렇게 편하게 오는 애도 있네.”텃세인지 질투인지 모를 구박과 따돌림이 시작됐다. 그의 자리는 화장실 옆이었는데, 많은 사람이 시도 때도 없이 화장실에 드나들어 잠을 잘 수도 없었다. 기름진 음식은 입에 맞지 않았다. 점점 야위어 갔고 기도 팍 죽었다. 살면서 처음 해 보는 고생이었다.그렇게 한 달을 버티니 드디어 출발 순번이 돌아왔다. 공항에 갔는데 이번엔 어려 보이는 한국인 인솔자가 탈북민들에게 반말로 고래고래 폭언을 퍼부었다. “야, 너네 한국에 가지 않을 거야? 조용히 해.”그 사람을 떠올리면 강 씨는 지금도 치가 떨린다.“왜 그 자식은 우릴 사람 취급하지 않았던 걸까요. 우리가 죄인도 아닌데 말이죠.”‘내가 지금 제대로 된 나라에 가는 건지’ 싶어 가슴이 벌렁벌렁해서 어떻게 비행기에 탔고, 어떻게 공항에 내렸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2009년 11월 2일 새벽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추운 날이었다. 그와 탈북민들은 버스에 타고 어디론가 가서 건강검진부터 받았다. 그리고 다시 버스를 타고 조사기관에 들어갔다.안 좋았던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조사받으며 점차 바뀌었다. 시설도 좋고 방도 따뜻했고 밥도 맛있었다.하나원에서 태국에서 같이 있던 여성들과 생활하며 다시 고생이 시작됐다. 중국에서 대학 다니다가 온 것이 왜 그리 싫어할 일인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도 감방은 아니었기에 잠을 못 자는 일은 없었다.하나원을 졸업하기 전 임대주택 배정이 시작됐다. 그의 기수는 200명이 넘었는데 서울 임대주택은 16개만 나왔다. 절반 이상이 서울에 가고 싶어 하니 추첨은 피할 수 없었다.강 씨는 새벽기도 때마다 서울에 가게 해 달라고 빌었다. 기도가 하늘에 닿았는지 그 16명 중에 뽑혔다. ‘서울’을 뽑은 순간 ‘얘들이 나를 더 미워하겠네’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서울을 뽑은 16명이 어느 구에 갈지를 놓고 추첨했다. 성동구 금호동 임대주택이 하나 있었는데, 다들 성동구란 이름이 생소해서였는지 선택하지 않았다. 강 씨는 자연스럽게 그 임대주택으로 가게 됐다. 막상 가 보니 노원구나 강서구보다 입지가 좋은 곳이었다. 엎어져도 떡 함지에 엎어진 격이었다.● 날개를 만드는 시간2010년 4월 8일, 12평 임대주택에서 강 씨의 한국 생활이 시작됐다. 첫 목표는 다른 젊은 탈북민들과 다름없었다. 지금이 대학에 갈 적기라고 다들 생각했다.학원에 다니며 대학 입시를 준비했다. 그의 목표는 분명했다. 한국까지 왔는데 패션을 전공하고 싶었다. 하지만 탈북민이라고 좋은 대학에 그냥 입학시켜 줄 리 없었다. 특히 영어가 문제였다. 여기저기 알아보다 2년제 한국폴리텍대학 패션디자인학과로 목표를 정했다. 실기 위주로 학생을 받아서 손재주 좋은 강 씨에겐 유리했다.그렇게 들어간 폴리텍대 공부는 쉽지 않았다. 1시간 넘게 걸려 대학에 도착하면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수업이 이어졌다. 대학 4년 과정을 2년에 몰아 들어야 했기에 코피 나도록 공부해야 했다. 규율이 엄격한 고등학교에 다니는 듯했다.“지금 돌아보면 그때를 잘 이겨냈기에 오늘의 제가 있는 겁니다. 독하게 공부해서 학점도 좋게 받았어요. 그렇게 단련하고 나니 다른 것들은 쉬워 보이더군요.”폴리텍대를 졸업하고 이론에 대한 욕구가 더 커졌다. 4년제 대학에 편입학하려고 하니 이번에도 영어가 문제였다. 영어 공부를 시작했고 3개월 동안 필리핀 어학 연수도 다녀왔다. 이런 준비 끝에 2014년 한양대 의류학과에 편입했다.한양대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말투도 서울말씨여서 과 동기들은 그가 북에서 온 줄 몰랐다. 누가 물어보면 강원도에서 왔다고 했다. 한양대에서의 2년은 폴리텍대보다 수월했다.2016년 8월 한양대를 졸업했다. 패션에 빠져 있던 개마고원 소녀는 이제 서울에서 새롭게 비상할 준비를 마쳤다. 물론 아직은 홀로 날 순 없었다.그의 첫 직장은 모델 양성학원 겸 패션쇼 기획사인 ‘더모델즈’였다. 대표 정소미 감독은 서울 컬렉션을 비롯해 패션쇼를 수백 회 연출한 국내 대표적인 패션쇼 전문 기획 및 연출자 출신이었다. 정 감독 밑에서 강 씨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들이 참가하는 서울패션위크 ‘서울컬렉션’ 실무를 두 번 맡았다.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2020년 서울패션위크는 20주년이어서 120개 브랜드가 참여해 55차례 패션쇼를 선보였다. 국내 정상급 디자이너가 펼치는 ‘서울컬렉션’, 신진 디자이너를 소개하는 ‘제너레이션 넥스트’, 런던 패션위크와 협력해 열리는 ‘해외 교류 패션쇼’, 14개 대학이 참여하는 ‘대학생 우수 작품 패션쇼’ 등 다양한 쇼가 열렸다. 국내외 바이어가 500명 이상 참여해 일대일 비즈니스 미팅도 진행했다. 일이 힘든 만큼 많이 배웠다. 그만큼 성장한 시간이었다.● 스타트업 대표가 되다일을 배우면서도 자신만의 브랜드를 갖고 싶은 욕구는 커져만 갔다. 시간 나는 대로 틈새시장을 연구했다. 2017년 온라인 쇼핑몰을 창업했지만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자신만의 스토리가 있어야 했다.오랜 준비를 거쳐 2020년 5월 더모델즈를 퇴사하고 곧바로 스타트업 ‘새샘’을 만들고 패션 브랜드 ‘아이스토리’를 내놨다. 자신이 직접 인터뷰한 탈북민들 스토리를 바탕으로 티셔츠를 제작하는 것이었다. 아산나눔재단 글로벌 스타트업 프로그램에 당선돼 받은 300만 원이 종잣돈이 됐다. 첫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국내보다 미국 독일 영국 네덜란드 같은 해외에서 구매 주문이 몰렸다. 많이 팔렸지만 시간이 갈수록 수익률은 떨어졌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국제 택배비가 계속 오른 탓이었다.아이스토리 하나에만 의지해선 안 되겠다 싶어 새로운 사업 모델을 구상했다. 원단 중개 플랫폼 ‘아이페브릭’을 개발했다. 회사를 운영해 보니 패션만 배웠지 사업에 대해선 잘 모르는다는 한계를 느끼게 됐다. 지난해 고려대 첨단기술비지니스학과 대학원 과정에 등록해 창업학 석사에 도전하고 있다.이 같은 노력 끝에 정부 예비창업 패키지에 뽑혔고, 올 5월에는 50 대 1 경쟁률을 뚫고 ‘도약 패키지’에 당선돼 지원금을 받았다. 스타트업 ‘정석 코스’를 밟으며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스타트업 분야에서 투자를 받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사업계획서를 잘 써서 타당성을 설득하고, 발표도 잘해야 한다. 신용도 인정을 받아야 한다.강 씨는 이 분야 전문가로 성장했다. 최근 5년 동안 서울시 창업경진대회, 서울시 테스트베드 데모데이, 아산나눔재단 등 여러 사업 발표 대회에서 다섯 차례 상을 받았다. 예비 창업자 멘토로도 활약하고 있다. 2022년부터 컨설팅해 준 스타트업이 6개가 넘는다. 지난해 한국벤처기업회 멘토로 임명됐고 범부처 IRIS 평가위원, 통일부 심사역 직함도 얻었다. “한국 청년들에게 브랜딩은 어떻게 하고 자금은 어떻게 조달할지, 특허는 어떻게 등록하며 사업계획서와 발표 자료는 어떻게 만드는지 컨설팅해 주고 심사도 합니다. 문뜩문뜩 개마고원 탈북민 강지현이 정말 잘 살아왔고, 지금도 잘 살고 있구나 싶어 뿌듯합니다.”● 후드티에 찢어진 청바지지난달 말부터 이달 초까지 강 씨는 서울 강남구 ARTE22 갤러리에서 자신이 그린 그림들로 ‘다결 랩소디’라는 전시회를 열었다. 2021년부터 전시회만 여러 차례 열었다.“패션과 그림은 동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똑같이 영감에서 출발하거든요. 탈북민 스토리를 패션 브랜드화하는 작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리게 됐습니다. 2021년에 정식 데뷔해 활동하고 있습니다.”그의 그림들은 색채에 대한 예민한 통찰이 돋보인다. 밝고 강렬하며, 때로는 눈부시게 충돌한다. 강 씨는 ‘색의 언어’를 통해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흘러간 기억을 붙잡기보다, 그 기억이 남긴 감정을 천천히 겹쳐 쌓는다. 그에게 색은 마음의 깊이를 말하는 도구이며, 주름은 말하지 못한 시간을 드러낸다.스타트업 대표에 화가 생활까지 하지만, 여전히 배운다. 여전히 젊고 에너지가 넘친다.“얼마 전 SK텔레콤 오픈이노베이션 프로그램에 선정됐어요. 선정된 15개 기업 대표들이 엠티를 하는데 저만 여자인 거예요. 다들 저보고 ‘대표님이세요’라고 묻더군요. 지금까지 고생을 많이 했는데 그렇게 젊게 봐 주시는 걸 보면 저에게는 미래가 많이 남은 거겠죠?”삶의 무게는 여전히 버겁다. 힘들 때마다 그는 내면의 강지현을 격려한다.“지금까지 잘 헤쳐 왔고, 지금도 잘하고 있어. 힘내. 이렇게 스스로 속삭이죠. 지난 1년 동안 배운 것이 한국 와서 10년 배운 것보다 더 많은 것 같아요. 그런데 과거의 10년이 없었다면, 오늘의 1년도 없었을 겁니다. 사람은 축적하며 크는 것이고, 저는 지금도 축적하는 중입니다.”그의 꿈은 스타트업을 성공시킨 뒤 자신의 경험과 지혜를 나눠 주는 창업학 교수가 되는 것이다. 통일 되면 북한 개발을 위한 스타트업 센터도 세우고 싶다.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싶어 고향을 떠났던 강지현에겐 평양에서 후드티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창업을 가르치는 날이 올 것 같다. 그는 아직 젊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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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北폭풍군단의 눈물…굶주린 특수부대의 실상[주성하의 ‘北토크’]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김정은이 이달 1일 인민군 제11군단 지휘부를 시찰했습니다. 언제 가나 궁금했는데, 드디어 갔습니다. 북한이 8월 러시아 파병 사실을 공개하고, 전사자들을 내세운 선전전을 시작했을 때부터 김정은의 11군단 방문은 예고돼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러시아 파병에서 워낙 많이 죽어 사기가 크게 떨어져 있으니 직접 방문해 격려해야 했을 겁니다.이번에 러시아에 파병된 부대는 11군단 산하의 4개 저격병여단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저격병여단 4개를 통째로 보낸 것은 아닙니다. 11군단에서 군수공장 지역, 농촌, 탄광 등 전장에서 죽어도 크게 반발하지 않을 지역 출신의 군인들을 선발했고, 일반 부대에서도 비슷한 조건으로 모집했습니다. 이렇게 여기저기에서 모은 병사들을 저격병여단 편제에 포함한 뒤 특수작전훈련기지라는 곳에서 손발을 맞추는 훈련을 시켜 파병했습니다. 물론 파병 부대의 주축은 11군단 저격병여단 병사들과 군관들이었습니다.● 일당백에 세뇌된 북한군북한의 러시아 파병 규모는 4개 여단 편제의 총 1만2000명 정도입니다. 국정원은 올해 9월 “우방(우크라이나)과 종합 검토한 결과, 현재 사망자는 2000여명으로 추산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군의 전사자·부상자 비율은 1:3입니다. 즉 1명이 사망할 때 3명의 부상자가 발생한다는 것인데, 이를 북한군에 대입하면 2000명이 전사했을 때 600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북한 특수작전군은 12월 14일부터 1월 14일까지 딱 한 달 동안 전투에 투입됐는데, 1만2000명 중 8000여명의 사상자가 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상자가 3분의 2가 발생하면 이는 전멸된 부대로 간주합니다.파병된 북한 군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겁니다. 우물 안 개구리로 살면서 현대전의 ‘현’ 자도 들어보지 못했고, 그래서 자신들이 세계 최강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전멸 수준의 피해를 보았으니 말입니다. 외부에선 북한군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해 최신 전쟁 기술을 배워갔다고 분석하는데, 그것보다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할 것은 북한군이 받았을 정신적 충격입니다. 그 충격들은 살아서 돌아간 군인들을 통해 북한군에 전염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물론 특수부대 군인들이 10년 동안 열심히 훈련했으니, 어느 정도의 전투력은 발휘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들이 상대한 우크라이나군은 평균 나이가 45세 정도이고, 민간에서 수시로 모집해 온 사람들이라 전투 기술도 별로 높지 않았을 것이고, 죽음에 대한 공포도 컸을 겁니다. 그에 비하면 17세~27세 사이의 북한군 병사들은 훨씬 잘 뛰어다녔을 것이고, 훨씬 용감했을 것이며, 총도 잘 쐈을 겁니다. 두 병력이 백병전을 벌이면 북한군이 유리했을지 모르겠지만, 문제는 드론이었습니다. 북한에선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드론이란 것에 발각돼, 적이 어디 있는지도 모른 채 뛰어 다니다가 무리로 죽어 나갔으니 얼마나 허망했겠습니까.반세기 넘도록 북한군 정신교육의 핵심은 ‘일당백’입니다. 한 명이 백 명을 당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김정은을 비롯한 북한 지도부도 “우리 군은 천하무적의 일당백 강군”이라고 세뇌시켰습니다. 외부 세계를 전혀 알 수 없는 군인들은 그 말에 세뇌될 수밖에 없습니다.“조선인민군은 천하무적의 강군이다. 어떤 놈들이 감히 우리에게 덤벼!” 이렇게 말입니다.● 제일 큰 충격을 받은 폭풍군단그중에서도 자신들이 북한군에서도 가장 최정예임을 아는 특수부대 군인들은 더욱 자신감이 충만했을 겁니다. 우크라이나전 파병 이전까지만 해도 11군단 군인들은 자신들이 전장에 투입되면 겁쟁이 미군이나 남조선 괴뢰군 최소 10명은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겁니다.그런데 막상 전장에 나가니 적은 보이지 않고, 있다는 말도 들어본 적이 없는 자폭 드론들이 날아다니며 공격해 왔습니다. 밤에 몰래 습격한다고 뛰어다녔는데, 하늘에서 적외선 열감지기로 손바닥처럼 다 보고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벌판에서 노출되면 10년 동안 익힌 전투 기술이 전혀 필요 없었습니다. 그렇게 허둥지둥 도망치다가 드론에 당하는 북한 군인들의 모습을 담은 영상은 많이 공개됐습니다. 살아서 돌아간 병사들은 이렇게 말하겠죠.“우리가 10년 벽돌까기를 연습했는데, 실제 전투에선 그런 게 전혀 쓸모가 없더라. 드론에 발각되지 않고 이동하는 연습이 제일 필요하더라. 무기와 탄약에 방탄복과 철모까지 메고 뛰어다니는데, 우리 체격으론 감당이 안 되더라. 역시 비계 먹고 사는 러시아 놈들이 우리보다 훨씬 힘이 좋은 걸 보니 잘 먹고 체격 좋은 게 제일 중요하더라.”현대전이 무엇인지, 얼마나 무서운지에 대한 공포가 제일 먼저 전염될 부대는 당연히 11군단일 수밖에 없습니다.1년 전까지 한솥밥을 먹던 전우들이 시체로 돌아오고, 불구가 돼 전역하게 됐으니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11군단은 저격병여단 3개와 경보병여단 4개, 항공육전병여단 3개, 도합 10개의 여단으로 구성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중 핵심부대는 저격병여단입니다. 경보병부대보단 저격부대가 훨씬 훈련 강도가 높고, 공중 침투에 특화됐다는 항공육전여단은 연료가 없어 낙하 훈련을 해보지 못한 병사들이 태반입니다. 한 개 여단 편제가 3000명 정도이니, 10개 여단이 소속된 11군단 전체 병력은 지휘부나 후방 보장 병력까지 다 해봐야 기껏 4만 명입니다. 그런데 이 중 가장 믿을 수 있는 부대들에서 8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니 당연히 충격이 크겠죠.그러니 김정은은 러시아에 파병됐다가 전사했던 군인들에게 최고의 보상을 선언해야 하고, 또 직접 부대를 찾아가 살아남은 병력을 격려해야 합니다. 이번 한 번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도 자주 방문해 계속 사기를 높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폭풍강도’로 불리는 폭풍군단이번 방문에서도 김정은은 11군단을 높이 치켜세웠습니다. ‘인민군대의 영웅성의 상징’ ‘우리 군대의 고귀한 명성과 불멸할 명함을 주추로 받쳐 주고 있는 믿음직한 전위전투대오’ ‘전군을 이 부대처럼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강군으로, 영웅군대로 만들자는 것이 우리 당의 의지이고 염원’ 등의 수사학이 동원됐습니다.그런데 이 말은 어느 정도 맞는 말입니다. 김정은의 다시 해외에 파병한다면, 북한군에서 그나마 전투에 동원할 만한 병력은 11군단밖에 없습니다. 북한군에서 실질적으로 전투 병력이라고 믿고 쓸 만한 지상군 병력은 5만 명도 되지 않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머지는 머리 숫자나 채우는 역할을 수행할 뿐입니다. 물론 적을 너무 경시하면 안 되겠죠. 누구나 군복을 입혀놓으면 뛰어다니며 총은 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귀순해 온 많은 탈북 군인들을 만나 이야기해 보면, “그게 군대가 맞냐”는 어이없는 웃음이 계속 나옵니다.1년에 총을 3발밖에 쏴보지 않는 군인, 훈련 대신 농사와 건설로 시간을 보내는 군인, 먹지 못해 영양실조 환자가 속출하는 부대…. 최전방 병력은 그나마 전투력을 유지하기 위해 북한이 나름 최선의 공급을 보장하는 부대들입니다.그런 최전방 군인들의 상황도 들으면 들을수록 기가 막힙니다. 개인적으로도 한국군 행군 완전군장 무게 약 38~42kg을 메고 1㎞를 갈 수 있는 군인이 20%는 될지 정말 궁금합니다. 40kg 배낭을 메고 서 있거나, 겨우 백 걸음도 못 갈 군인이 절반이 넘는다는 것은 확실히 장담할 수 있습니다.저는 수십 명의 사람과 함께 북한군 최신 정보를 듣는 강연을 종종 주최합니다. 두 달 전에도 1년 전까지 북한군이 있었던 군인을 초빙해 들었는데, 참석했던 사람들 모두가 경악한 표정이었습니다. 그래도 북한에 대한 지식이 꽤 있는 참가자들임에도 “설마 그 정도일까” 생각했었는데 다 듣고는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구나”고 말합니다.이 글을 읽는 구독자들도 “에이, 설마 군대인데, 그 정도일까”라는 생각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귀순 병사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을수록 “저게 군대라고”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속옷도 없이 누더기 군복을 입고 살며, 늘 배고픔에 허덕이는 북한군 실상을 들을 때마다 “드라마 야인시대에 나오는 수표교 거지들이 북한군보단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계속 듭니다.북한군 최정예라는 11군단, 즉 폭풍군단을 북한 사람들은 ‘폭풍강도’라고 부릅니다. 이 부대군인들이 배가 고파 민가를 ‘습격’하는 일이 많은데, 그나마 날쌔서 잡기 어렵습니다. 민간인도 영양 상태가 좋은 것은 아니니 비교 우위인 것입니다. 즉 북한군에서 훔치는 것을 제일 잘하는 부대가 11군단인 것입니다.● 키 143㎝면 군에 가는 청년들한국의 영화나 드라마에선 11군단, 또는 그의 전신인 특수 8군단이 거의 무적의 전사로 종종 등장합니다. 분명 북한의 특수부대가 뛰어났던 시기는 있었습니다. 1990년대 중반까지는 북한의 특수부대는 그나마 특수부대다웠습니다. 특수부대에 입대하면 지옥의 훈련을 끊임없이 이겨내야 했고, 정신·육체적으로 뛰어났습니다.물론 그래봐야 인간들이긴 합니다. 1968년의 김신조 부대, 울진-삼척 침투 무장 공비 부대는 북한에서 가장 뛰어난 특수부대 요원들이었지만, 이들도 경무장으로 후방에서 포위에 들면 일당백은커녕 한국군과의 사상(死傷) 비율에서 1대1도 버거워했습니다.북한 특수부대가 급속히 전투력을 잃어간 것은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였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먹지 못하는데 어떻게 훈련합니까. 11군단에서도 영양실조 환자가 속출했습니다. 영양실조 걸리지 않고 버티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습니다.북한 전체적으로 기아에 허덕이다 보니 병력 자원의 질이 급속히 떨어졌습니다. 지금 북한은 17세 이상 학교 졸업생 중 키 143㎝ 이상, 몸무게 45㎏ 이상이면 군에 입대시킵니다. 북한군이 전반적으로 ‘난쟁이’ 군대가 된 것입니다. 일반 부대에선 165㎝ 정도만 돼도 키가 큰 병사 축에 들어갑니다.이 중에서 아무리 골라서 특수부대에 보내도 전체적인 왜소함은 피할 수 없습니다. 키만 작아진 것이 아니라 영양상태도 여전히 떨어져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감당이 되지 않는 병사들에게 특수훈련을 시킬 순 없는 일입니다.코로나 시기 북한은 국경 경비를 강화하기 위해 11군단 병력을 압록강 경비에 파견했습니다. 이 때문에 11군단 군인들도 많이 찍혀 지금도 인터넷에서 영상들이 돌고 있습니다. 11군단 별거 없었습니다. 삐쩍 마른 청년들이 돌아다녔고, 격술훈련을 하는 모습이 찍힌 영상들도 있는데, 힘이 없어 발을 제대로 들어 올리지도 못했습니다. 50㎏도 안 되는 삐쩍 마른 청년들이 주먹을 내질러봐야 얼마나 힘이 실리겠습니까.물론 김정은이 방문하면 앞에서 벽돌 여러 장을 격파하고, 배에 돌을 올려놓고 부수는 군인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키와 체격을 보고 1호 행사용으로 선발된 뒤, 특별히 잘 먹여서 운영되는 중대급 정도의 일부 군인들입니다. 김정은이 왔는데 내세울 군인은 있어야죠.러시아에 파병된 북한 특수작전군의 초기 영상을 보면 특수부대라고 뽑았는데도 키도 작고, 삐쩍 말랐습니다.그런데 올해 8월부터 10월 사이 북한에 돌아온 파병 군인들을 내세운 행사를 보면 모두 살들이 많이 찐 모습입니다. 러시아에 간 북한 군인들은 돼지비계가 잘 공급돼 이를 정신없이 먹었습니다. 현지에서 북한군을 상대로 취재해 왔던 한 언론인은 “북한군들이 3개월쯤 지나니 피둥피둥 살이 찌더라”고 말했습니다. 살아서 돌아온 파병 군인들은 지금 매우 영양상태가 좋아진 채로 귀국한 것입니다.● 괴이한 특수 훈련북한 특수부대의 한계에 대해 신체 능력만 놓고 이야기했는데, 이들의 전쟁 수행 능력도 실은 매우 뒤떨어져 있습니다.김정은은 외부에 과시하기 위해 특수부대 훈련을 자주 벌여놓고 사진을 공개하는데, 이런 훈련 장면을 분석해 보면, 이들 부대는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있습니다.명색이 특수부대인데, 떼를 지어 돌격하고, 이해되지 않는 앞뒤 공중제비를 하고 있습니다. 엄폐물이 있는데, 굳이 높이 날아올라 공중에서 총을 쏘고, 총을 쏘는 군인 앞으로 점프해 총을 쏘기도 합니다. 김정은이 보기엔 멋있겠지만, 외부의 시선에서 보면 왜 이런 동작을 훈련하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우리도 이런 멋있는 특수 장비를 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누가 봐도 과시용으로 공개하는 특수부대 훈련도 적지 않습니다. 이것도 자세히 보면 기가 막힙니다. 가령 방탄복 같은 것을 입었지만, 방탄판이 없는 것이 보이고, 야시경 같은 것이 붙은 방탄모를 쓰고 나왔지만, 한 번도 써본 일이 없는지 턱끈 조절을 할 줄 몰라 머리에서 막 흘러내립니다. 총구로 향하게 이상하게 붙인 조준경으로 총을 쏘는 연출을 하는 사진도 있습니다.11군단의 편제도 현대전과는 동떨어져 있습니다. 병력의 70%가 경보병여단과 항공육전병여단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경보병은 무장을 가볍게 하여 공격력과 방어력을 다소 희생한 대신 기동성을 높인 보병을 말하는데, 한마디로 총 한 정과 배낭 하나를 메고 수백㎞를 걸어 이동하는 부대입니다. 이런 부대는 반세기 전까진 효용이 있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허나, 차량이나 헬기로 병력을 침투시키는 현대전의 시대에 정찰 자산이 내려다보는 지상에서 수천 명이 총만 메고 뛰어 다니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습니다. 항공육전병여단도 왜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대규모 병력의 공중 침투는 제공권을 장악해야만 가능합니다. 하지만 고물 전투기만 갖고 있는 북한은 제공권을 장악할 힘을 오래 전에 잃었습니다. 침투 수송기도 1940년대 생산된, 시속 200㎞도 안 되는 고물 AN-2기들뿐입니다. 이 복엽 수송기가 뜰 수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떴다고 한들 작은 무인기 격추를 논하는 현대전에선 날아다니는 ‘관’에 불과합니다. AN-2기 침투가 이젠 막혔다는 것을 알아서인지, 작년에 북한은 두 대밖에 없는 고려항공 수송기에 군용 도색을 급히 입혀 낙하 훈련하는 모습도 연출했습니다. 하지만 처음 해보는 훈련인지라 비행 속도가 너무 빨라 낙하산이 비행기에 걸리고, 낙하산끼리 엉키는 사진도 그대로 나옵니다.11군단의 ‘특수성’에 대해선 말하려면 끝이 없지만, 김정은이 특수부대를 과시하기 위해 연출한 훈련들은 북한에선 먹힐지 몰라도 외부 전문가들에겐 웃음만 줄 뿐입니다.● 11군단엔 왜 돼지비계를 안주나.북한의 11군단이 이렇게 낙후한 부대가 된 이유는 한마디로 정리하면, 가난해서입니다.나라가 부유해야 군인들을 잘 먹이고, 좋은 장비를 쓰게 하고, 마음껏 훈련하게 할 수 있습니다.세계 최고의 특수부대를 운용하는 미국은, 특수부대원 한 명 육성에 수십억 원이 듭니다. 2025년 기준으로 네이비실 전투원 1명을 양성하는데 평균 27억 원 이상이 소요된다고 합니다. 거기에 더해 개인 장비와 지원 장비까지 계산하면 훨씬 더 많은 돈이 소요됩니다. 27억 원은 200만 달러입니다. 200만 달러면 옥수수 5000톤 정도 살 수 있습니다. 미국 네이비실 전투원 두 명 육성 비용이면 4만 명의 북한 11군단 전체가 1년 동안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식량을 살 수 있습니다. 배부르면 다시 고강도 육체 훈련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것도 못하고 있죠.네이비실 2명 육성 비용=>11군단 유지비용.이것만큼 적나라하게 북한 푹풍군단을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비교가 어디 있겠습니까. 김정은이 11군단의 사기를 북돋으려면 우선 이들에게 밥과 돼지비계 정도는 보장해 주는 것이 우선입니다.김정은은 10월 새로 건조한 최현함을 방문했을 때는 승조원이 100여 명뿐이라 그랬는지 평양에서 남포까지 돼지고기볶음, 양념닭튀김 등이 포함된 뷔페식 음식을 차에 싣고 가 한 끼 잘 먹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11군단 지휘부 방문 때엔 인원이 많아서인지 음식을 가져가지 못했습니다. 해군엔 ‘한턱내면서’, 해외에 파병돼 숱한 희생자를 낸 11군단엔 쏘지 않으니, 은근히 고기를 기대했을 현지 군인들은 실망이 클 겁니다. 아무리 말로 ‘인민군의 상징 부대’라고 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병사들에겐 제일 배부르게 공급되는 부대가 제일 상징적인 부대입니다. 허기져 걸어 다닐 힘이 없는 부대는 그냥 ‘폭풍거지’일 뿐입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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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금강산 현대주유소 철거 작전

    지난해 봄, 금강산 온정리에 투입된 북한군은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고난도 미션에 직면했다. 미션명은 ‘현대오일뱅크 금강산 주유소 철거’. 북한은 주유소를 철거해 본 경험이 없다. 김정은 집권 이후 북한에도 지하에 연료 탱크를 묻는 형태의 주유소가 전국에 200개 정도 생겨났다. 가뜩이나 모자란 주유소인데 짓자마자 철거할 일은 없었다. 게다가 금강산 주유소는 부실한 자재와 저급한 기술로 지은 것이 아니라, 현대가 1998년 11월부터 3개월 동안 세운 것이다. 북한에 건설되는 첫 한국 주유소라는 상징성 때문에 허술하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북한이 아는 유일한 철거 방법은 폭파시킨 뒤 건물 잔해를 내다 버리는 것이다. 북한은 쌓아 올리는 건 많이 해도 파내는 건 거의 하지 않았다. 뭐든 부족하니 기존 건물은 그대로 놔 두고 빈 땅에 새로 건설하는 데만 익숙하다. 그나마 평양처럼 부지가 부족한 곳에선 기존 건물을 허물고 새로 짓기도 한다. 다만 그들이 철거해 온 건물은 대개 1950년대에 ‘평양 속도’라고 포장하며 날림으로 지은 것이 대부분이라 기둥 서너 군데를 폭파하면 풀썩풀썩 무너진다. 그런 북한이 금강산에서 맞닥뜨린 것은 차원이 다른 철근 콘크리트 구조다. 그것도 그냥 무너뜨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콘크리트와 내부 탱크를 뜯어내는 작업이었다. 어쨌든 김정은의 명령이 하달됐으니 군인들은 유일하게 아는 발파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콘크리트가 어찌나 단단한지 폭약 넣을 구멍 뚫기도 쉽지 않았고, 폭파해도 뜯겨 나오는 양이 보잘것없었다. 껍질을 벗기듯 뜯어내고 또 뜯어내는 작업은 반년 넘게 진행됐다. 온정리 사람들은 지난해 여름 발파 소리를 수없이 들어야 했다. 한국은 웬만한 철거업체에 몇천만 원만 주면 일주일 안에 주유소 하나를 금방 뜯어내겠지만 북한은 경험도, 장비도 없다. 더욱이 그들이 금강산에서 뜯어내야 할 것은 주유소뿐만이 아니었다. 2019년 10월 23일 금강산을 방문한 김정은은 “보기만 해도 기분 나빠지는 너절한 남측 시설들을 싹 들어내고 현대적인 봉사 시설들을 우리 식으로 새로 건설하라”고 지시했다. 김정은은 한국이 지은 관광시설들을 ‘건설장 가설 건물을 방불케 하는 집들’ ‘피해 지역 가설막이나 격리병동’ 등에 비유하며 폄훼했다. 김정은 특유의 허세도 빠지지 않았다. 그는 “우리 설계 역량도 튼튼하고, 강력한 건설 역량이 있으며 당의 구상과 결심이라면 그 어떤 난관과 시련도 뚫고 무조건 실현하는 우리 군대와 노동계급이 있기에 금강산에 세계적인 문화관광지를 꾸리는 사업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큰소리쳤다. 그런데 세계적인 문화관광지는커녕 가설막이나격리 병동 같다던 건물 몇 동조차 아직까지도 완전히 들어내지 못했다. 한국이라면 영세 업체라도 쉽게 끝낼 일을 ‘최고존엄’ 김정은의 지시에도 6년째 끝내지 못하고 쩔쩔맨다. 그동안 건물 하나하나 해체될 때마다 동원된 많은 군인과 금강산 주민들 입을 통해 북한에는 차원이 다른 한국 건설에 대한 신화들이 생겨났다. 건물을 보기만 했던 것과 해체하면서 느끼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경험이다. 한국 건설에 대한 신화는 비단 금강산에서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2020년 6월 13일, 김여정은 한국을 향해 “머지않아 쓸모없는 (개성공단) 북남공동연락사무소가 형체도 없이 무너지는 비참한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협박했다. 나흘 뒤 북한은 진짜로 이 연락사무소 건물을 폭파했다. 폭약을 얼마나 썼던지 70m 떨어진 15층짜리 개성공단 종합지원센터 건물 유리창이 다 박살 났다. 하지만 정작 형체도 없이 무너뜨리겠다던 건물은 높이 솟구쳤던 폭파 먼지가 가라앉은 뒤에도 꿋꿋이 서 있었다. 전 세계가 보라고 진행된 ‘폭파 쇼’에 동원됐던 북한 최고 공병들은 경악했을 것이다. ‘도대체 이 건물은 어떻게 지었기에 이 정도 위력의 폭발을 견딘단 말인가. 형체도 없이 무너뜨리라는 지시를 집행하지 못한 우리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연락사무소 건물이 수작업을 통해 완전히 사라진 것은 4년 뒤인 지난해 3월이다. 종합지원센터는 지금도 철거 공사가 진행 중이다. 금강산 주유소와 개성공단 연락사무소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죽었으되 죽지 않았으니, 북한이 즐겨 쓰는 표현을 빌린다면 ‘죽어서 더 빛나는 전설의 이름’이 됐다.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5-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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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에서 온 평범한 이웃’ 송지아 씨가 얻은 삶의 교훈[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10년 가까이 가족을 벌어 먹였지만 결말은 허망했다. 2007년 12월 어느 날 송지아 씨는 함북 무산읍에 있는 자신의 집에 조용히 들어섰다. 장사 밑천을 모두 잃은 직후였다. 북한에서 장사가 망하는 이유는 많지만 그중 첫째 이유를 꼽는다면 밑천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날 그는 청진으로 가지고 가던 휘발유 100리터를 당국 단속에 걸려 빼앗겼다. 옥수수 300kg을 바꿀 수 있는 양이었다. 풀죽을 해 먹으면 가족이 반년 이상 먹고살 식량이었다.장사가 불법인 북한에선 안전부나 보위부 단속반이 눈을 부릅뜨고 사냥거리를 찾는다. 그들은 빼앗아야 먹고살 수 있는 하이에나 떼다. 송 씨도 먹잇감이 됐다. 당국이 공급해 주지도 않는 휘발유이지만 개인이 유통하는 순간 밀거래범이 된다.집에 들어간 송 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옷을 벗어 벽에 걸고 집에 있는 제일 낡은 옷을 꺼내 입었다. 죽을지도 모르는 먼 길 떠날 결심을 하고 나니 괜찮은 옷이라도 두 여동생에게 남겨 두고 싶었다. 유서 쓰는 마음으로 짧은 이별 편지를 적어 걸어 둔 옷 주머니에 넣고 집을 나섰다.‘죽지는 않겠지만, 이제 나가면 돌아오진 않을 겁니다.’그 말은 현실이 됐다. 그는 죽지도 않았지만 돌아가지도 않았다. 아니, 돌아갈 수 없는 몸이 됐다. 고향을 떠나던 그날, 두 볼을 찌르던 북방 찬바람을 여전히 기억한다. 살아 보겠다고 발버둥치는 이를 더 깊은 수렁에 밀어 넣는 땅을 27세 처녀는 그렇게 떠났다.“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었죠. 중국에 오래 있지도 않았고 북송된 적도 없으니까요. 한국에 와서도 거저 주어진 행운은 없었지만 노력한 만큼 대가를 얻고 있으니까요.”그의 인생엔 많은 탈북민이 겪은 드라마틱한 역경과 고난은 없었다. 대신 ‘북에서 온 이웃’으로 조용히 이 사회에 스며들어 ‘평범한 이웃’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모니카집’ 맏딸어떤 나라에서 태어났는지가 운명의 5할을 결정하고, 어떤 가정에서 태어났는지가 운명의 3할을 좌우한다는 연구도 있다. 그게 맞는다면 송 씨는 태어날 때부터 인생의 8할이 이미 꼬여 버렸다. 지구상에서 손꼽히게 가난한 땅에서 태어났고, 그 땅에서도 더 가난한 지역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딸로 태어나 최악의 기아 참사를 겪어야 했다.1981년 송 씨가 태어났을 때 부친은 함북 무산광산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주변에 친척도 없었다. 자강도 강계에서 맏아들로 태어난 부친은 군복무 10년을 마치자 ‘무리 제대’로 아무 연고도 없는 무산광산에 강제로 발령을 받았다. 무리 제대는 제대한 군인 수백~수천 명을 인력이 부족한 곳에 강제로 보내는 것을 말한다.무산과 강계는 남극과 북극만큼 떨어져 있었다. 기차로 가면 잘 다닐 때도 사나흘씩 가야 했다.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엔 최소 열흘이 걸렸다. 송 씨 모친도 강원도의 한 군수공장에서 일하다가 부친을 만나 결혼한 뒤 무산으로 왔다.송 씨가 태어난 집은 무산에서 ‘천 세대’라고 불리는 ‘하모니카집’ 집단촌이었다. 북한은 1980년대 초반 노천 광산인 무산광산을 확장하면서 수많은 제대 군인을 이곳에 보냈다. 이들이 살 집을 짓기 위해 공동묘지를 밀고 건물 1000세대를 급히 지었다. 한 식구씩 사는 단칸방 4칸이 한 지붕 아래 다닥다닥 붙어 있는 형태가 악기 하모니카를 닮았다고 해서 하모니카집이라고 불렸다. 인천 부평구에 한국에서 유일하게 남은 일제 징용 흔적인 ‘미쓰비시 줄사택’과 비슷하지만, 이조차도 무산 하모니카집보다는 크다.옆집 코 고는 소리, 방귀 소리까지 다 들리는 환경에서도 혈기 왕성한 제대 군인 가족 1000세대가 살다 보니 아이들이 쑥쑥 태어났다. 송 씨가 인민학교에 다닐 때 한 학년에 45명 규모 11개 반이 있었다. 송 씨 부모도 자식을 네 명 낳았다.넓지 않은 하모니카 주택 단지에 수천 명이 살다 보니 흡사 수용소를 방불케 했다. 어느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 대부분 다 알았다. 좁은 공터는 연령대 비슷한 아이들로 꽉 찼다. 아침저녁이면 1000개 굴뚝이 내뿜는 연기 때문에 코앞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그가 겪은 고난의 행군1994년부터 하모니카 단지에 고난의 행군 바람이 휘몰아쳤다. 배급이 나오지 않으니 광산 노동자들이 무리로 죽어 나갔다.차라리 서로를 몰랐다면 나았을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정을 나누던 사람들이 관도 없이 땅에 묻혔다. 송 씨도 옆집을 포함해 함께 놀던 친구들의 죽음을 수시로 목격하며 ‘나도 언젠가 저렇게 집에서 뼈만 남은 시체로 나오겠구나’ 하는 공포를 느꼈다.온 가족이 굶어 죽은 집에 가면 벽에 김 씨 일가 초상화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아궁이 가마솥까지 뽑아 팔면서 마지막까지 버틴 것이다. 집에서 팔 수 없는 것은 초상화밖에 없었다.다행히 송 씨 부모는 굶어 죽은 사람들보단 생활력이 조금 나았다. 부친은 광산에 나가지 않고 산에 올라가 화전을 일구었다. 모친은 중국 상품을 들고 강원도 친정을 오가며 장사를 했다. 맏딸 송 씨는 10대 초반부터 부친을 따라 화전에서 농사를 지었고 가을엔 산에 움막을 치고 농작물을 지켰다.송 씨는 지금도 캠핑이란 말만 들어도 소름이 돋는다. 움막에서 겁에 질려 밤을 새우던 어릴 때 공포가 떠오른다. 또 비빔밥을 거의 먹지 않는다. 비빔밥만 보면 어려서 먹던 풀죽이 떠오른다. 길을 가다가 “저건 먹는 풀, 저건 못 먹는 풀”하며 저도 모르게 구분하는 자신이 싫다.학교에 나오는 아이들은 전교생의 절반도 되지 않았지만, 송 씨는 그래도 학교에 나가는 학생이었다. 방과 후엔 동생들을 데리고 풀을 뜯으러 다녔다. 먹을 수 있는 풀도 먼 데 있는 산에 가야 뜯을 수 있었다. 고난의 행군 기간은 그의 사춘기와 겹친다. 한창 키가 크고 발육이 될 나이에 먹지 못하니 학생들 평균 키가 10cm 이상 작아졌다.17세에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송 씨는 3년제 대학인 청진2사범대학에 추천받았다. 이곳을 졸업하면 인민학교나 유치원 교사로 임명된다. 북한에서는 중학교 졸업생 15% 정도만 대학에 간다. 웬만해선 대학 추천을 받기도 쉽지 않다. 송 씨가 뛰어나게 공부를 잘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학교에 나오지 않는 학생이 태반인 데다 나온 학생들도 공부를 잘하지 않았다. 또 대학 추천을 받은 학생들도 집안 형편 때문에 포기하다 보니 그에게 추천권이 온 것이다.그의 집이라고 딸을 대학에 보낼 형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부모는 맏딸만큼은 꼭 대학에 보내고 싶어 했다. 도청 소재지인 청진에 나가 입학시험을 치니 얼마 뒤 입학 통지서가 날아왔다.● 한 학기를 버틴 대학 생활어떻게든 3년은 버텨 교사가 되리라던 의지는 입학 한 학기 만에 깨졌다. 대학 기숙사에서 밥을 주지 않아 먹을 것은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최소 비용으로 한 달을 먹으려면 ‘속도전가루’ 15kg을 사야 했다. 속도전가루는 옥수수에 높은 압력과 열을 가해 가루로 만든 것으로 물을 부어 비비면 바로 먹을 수 있다. 속도전가루조차 충분히 살 돈이 없던 송 씨는 점심시간에 수돗물로 배를 채울 때가 많았다. 이겨 내야 할 것이 허기뿐이라면 견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학에서 내라는 각종 비용이 너무 많았다. 심지어 교수 식량조차 학생들이 돈을 걷어 보조해 줘야 했다.송 씨는 장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연료와 속도전가루 장사였다. 무산광산에서도 조금 힘 있는 사람들은 생산용으로 조금씩 나오는 연료를 빼돌려 청진에 와서 팔면 돈이 남았다.그 돈으로 속도전가루를 구입해 장마당에서 팔면 어느 정도 이문이 남았다. 17세 여대생이 장마당에 앉아 속도전가루를 파는 게 너무 부끄러웠지만, 굶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하며 버텼다.하지만 이 삶도 오래가진 않았다. 청진에서 두만강 옆 무산까지 열차가 정상적으로 다니면 2시간 정도 걸렸다. 하지만 전기가 제대로 오지 않으면 기차에서 며칠을 보내야 할지 기약조차 없었다.장사하러 오가는 사람과 짐으로 열차는 미어터졌다. 객실을 콩나물시루처럼 꽉 채우고도 자리가 없어 열차 지붕에 앉아 가는 사람도 많았다. 먹지 못한 채 지붕에 며칠씩 있다 보면 착시현상도 일어난다. 기차가 달릴 때 부주의하게 허리를 세웠다가 고압선에 닿아 감전돼 죽는 사람도, 터널에 들어갈 때 미처 엎드리지 못해 터널 입구 벽에 부딪쳐 죽는 사람도 많았다.송 씨도 달리는 열차 지붕에서 떨어졌다. 열차가 흔들렸는지, 급제동했는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열차 높이와 선로를 받치는 자갈 더미 높이까지 감안하면 4~5m 높이에서, 그것도 달리는데 떨어졌으니 못해도 최소 불구가 돼야 맞겠지만, 정신을 차리니 천만다행으로 물이 고여 있는 진흙탕에 떨어져 큰 부상을 면했다.하지만 이 일로 혼이 빠져나갔다. 더 이상 장사하며 버틸 자신이 없었다. 한 학기 만에 학업을 그만두었다.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한 학기 지나고 나니 지방 출신 학생 태반이 그만두었다. 자퇴 절차 같은 것은 없었다. 대학에 나오지 않으면 그걸로 대학과의 인연은 끝이었다.● 객화차원으로 새출발대학은 접었지만 열차를 타고 다니면서 배운 것도 있었다. 철도 신분증이 있으면 안전원들에게 단속되지도 않았고 물건을 빼앗길 우려도 없었다. 철도기관 입사가 목표가 됐다. 열차를 자주 이용하며 알게 된 몇몇 철도원들 도움으로 이듬해 18세에 무산 객화차대에 입사했다.객화차대는 종점인 무산에 들어온 열차를 청소하고 점검하는 일을 했다. 어린 나이에 낡고 더러운 열차를 청소하는 일이 마음에 들진 않았다 하지만 대신 보상이 있었다.북한 열차엔 객화차원 전용 칸이 있다. 언제 고장 날지 모르니 늘 타고 있는 정비원이 머무는 칸이다. 이곳은 열차 안전원들이 거의 단속하지 않았다. 객화차대도 배급을 주지 않는 처지라 직원들이 이 칸을 활용해 장사하는 것을 눈감아 주었다.객화차원 칸엔 40kg짜리 짐을 10개 정도 실을 수 있었다. 송 씨는 무산과 다른 지역을 다니며 물건을 날랐다. 식량을 싼 곳에서 사서 무산에 가져다 팔고, 무산에서는 중국 물품을 사서 남쪽 지역에 싣고 가 팔았다.어느새 그가 식구를 먹여 살리는 가장 노릇을 하게 됐다. 가장이 되니 나이가 차도 결혼할 생각을 못했다. 그가 시집을 가면 가족을 먹여 살릴 사람이 없었다. 객화차대에서 2007년까지 일하는 동안 탈북을 원하는 사람 10여 명을 몰래 데리고 무산에 온 적도 있었다.남쪽 지역 사람들은 탈북하고 싶어도 두만강 지역에 연고가 없어 엄두를 못 내는 경우가 많다. 국경 지역으로 가려면 빨간 줄이 그어진 특별여행증을 발급받아야 하는데, 그 지역 연고가 없으면 받기 어려웠다. 무산에 도착한다고 해도 국경을 넘는 선을 찾아야 하는데, 거의 매일 진행되는 민가 숙박 검열을 피하기가 어렵다. 운 좋게 피한다고 해도 경비대가 촘촘하게 잠복한 두만강을 넘는 것도 쉽지 않았다.그렇지만 송 씨의 객화차원 칸에 타면 국경에 도착할 때까지 비교적 수월하게 검열을 피할 수가 있었다. 무산에 도착해서도 월경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선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송 씨는 데려온 사람들을 객화차대 숙소에 머물게 해 숙박 검열을 피했다. 송 씨가 도와서 중국으로 간 사람들 중에 북송된 이도 있었을 테지만 다행히 누구도 송 씨 이름은 불지 않았는지, 그는 조사를 받은 적이 없었다.2007년 12월 휘발유를 단속에 빼앗기지만 않았더라면 송 씨는 지금도 북에서 열차를 타고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단속반 중엔 돈이 필요해 눈이 돌아간 사람이 꼭 있다. 객화차원 칸은 눈감아 주면서 일정한 뇌물을 받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었지만 가끔 장사 물품을 통째로 빼앗는 악질적인 단속반원이 나타난다. 객화차원은 을이라 항의할 수가 없다. 단속반원에겐 열차를 더 타지 못하게 하거나 심지어 감옥에 보낼 힘이 있기 때문이다. 장사 밑천을 빼앗긴 송 씨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다시 그 돈을 만들 능력도 없었다. 절망 속에서 그가 택한 길은 탈북이었다.● 국경경비대원의 조언낡은 옷으로 갈아입은 그는 동창생 집으로 향했다. 그 동창은 중국에 건너가 결혼까지 해서 살다가 북송돼 국경경비대와 중국에 아는 선이 있었다. 다시 탈북할 기회만 보고 있던 그 동창은 송 씨에게 흔쾌히 같이 가자고 했다. 탈북할 돈이 없었는데 송 씨를 팔면 자신은 공짜로 묻어 갈 수 있다고 타산한 것이다.둘은 무산을 벗어나 두만강 상류 쪽으로 수십 리 올라갔다. 곳곳에 단속 초소가 있었지만 현지인이라 어렵지 않게 통과할 수 있었다. 동창이 아는 국경경비대원이 야간 경비를 설 때 두만강에 나갔다. 상류인 데다 국경경비대만 아는 지점에서 건너니 물이 무릎까지 밖에 오지 않았다.경비대원은 떠나는 송 씨에게 “중국 가면 나이를 25세 미만이라고 하세요. 아무래도 젊은 사람이 유리하죠”라고 조언해 주었다. 강을 건너니 경비대원과 미리 약속한 중국인들이 나와 있었다. 중국인들이 송 씨와 동창생이 쥐고 온 줄에 비닐로 꽁꽁 싸맨 돈을 묶자 강 건너편 경비대원이 줄을 당겨 가져갔다.둘은 차를 타고 연길로 들어와 깜깜한 집에 갇혔다. 동창은 중국 남편과 연락이 닿아 이틀 정도 있다 떠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20대 조선족 남성이 찾아와 송 씨를 차에 태웠다. 그가 송 씨를 산 것이었다. 도착한 곳은 이 남자가 아내와 함께 사는 아파트였다.경비대원 조언대로 25세라고 했다. 도착해 보니 20세~25세 미만 탈북 여성 넷이 있었다. 큰 방에 조선족 부부가 살고, 송 씨는 창문을 가린 다른 방에서 이 여성들과 함께 지냈다. 조선족은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 한바탕 떠들었다.“나는 너희를 한족에게 시집보내지도 않을 거고 먹을 것도 충분히 주고 일하면 일한 만큼 대가도 줄 것이다. 여기보다 더 좋은 곳을 찾을 순 없을 것이다.”남성은 밤에 이들을 차에 태우고 식당 서빙을 시켰다. 중국어를 모르니 방에 음식을 가져다주는 일을 했다. 부부는 낮에 외출할 때면 아파트 현관문에 자물쇠를 채웠다.송 씨는 이 조선족이 왜 젊은 탈북여성을 사 모았는지 모른다. 단순히 식당 종업원 일만 시키려 했을 것 같진 않다. 송 씨는 온 지 한 달도 안 돼 탈출했다.● 몽골 사막을 넘어 한국으로다른 여성들과 얼굴을 익혀 친하게 됐을 때 20세인 막내가 말했다.“서빙하다가 한국 사람을 만났어요. 쪽지에 ‘저는 탈북한 사람인데 도와주세요’라고 적어 몰래 주었는데 그가 교회 사람들과 연결시켜 주었어요. 식당에 온 교회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아파트 문을 따준다고 했어요. 그리고 한국에 보내 준다고 했는데, 언니들 생각은 어때요?”서빙할 때는 보통 조선족이 지키고 서서 손님들과 이야기를 못하도록 감시하는데 막내가 틈을 노려 구조 요청을 한 것이다.5명 중 3명이 찬성했다. 송 씨를 포함한 두 명은 망설였다. 비록 미래를 알 수 없어 집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쪽지를 써 놓고 오긴 했지만, 가능하면 돈을 벌어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그러자 다른 셋이 그들을 설득했다. 북송된 경험이 있던 한 여성은 북에 돌아가면 어떤 비인간적인 처우가 기다리는지 말해 주었다. 그 말을 들으니 송 씨도 마음이 흔들렸다.며칠 뒤 조선족 부부가 외출했을 때 교회 사람 몇 명이 정말로 문을 열어 주었다. 다섯 명은 이들이 갖고 온 차를 타고 떠났다.송 씨는 어디로 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을 달려 어느 아파트에 들어가니 다른 탈북자 몇 명이 더 있었다. 내몽골을 거쳐 한국으로 가기 위해 대기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몇 명씩 팀을 이루어 내몽골에 건너가면 다음 팀이 떠나는 식이었다. 한국행을 원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순서가 빨리 오지 않았다. 2009년은 한국에 온 탈북민 수가 정점을 찍은 해였다. 그해에만 2913명이 입국했다. 한 팀이 떠나면 송 씨 일행은 다시 은신처를 옮기며 조금씩 내몽골과 가까운 곳으로 이동했다.거의 여름이 다 돼서야 송 씨 순서가 왔다. 탈북 여성 5명에 더해 여인과 아이, 노인 부부까지 9명이 안내를 받으며 내몽골 국경을 넘어 몽골 땅에 발을 디뎠다. 철조망을 몇 개 지나니 광활한 사막이 펼쳐졌다. 몽골 국경경비대에 체포되면 된다고 했는데 어디로 가야 경비대가 나타날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일행은 무더운 사막을 이틀 반이나 헤맸다. 한참을 걷다 떠난 곳으로 되돌아오기 일쑤였다. 다들 지쳐 더 이상 힘이 없게 되자 어디로 갈지를 두고 내분이 생겼다. 결국 서로 갈라졌다. 송 씨와 함께 도망친 여성 4명은 이쪽으로, 여인과 아이 그리고 노인 부부는 저쪽으로 갔다.여기서 이렇게 죽는구나 싶은 고비를 몇 번 넘긴 뒤 국경경비대와 조우했다. 경비대 숙소에서 며칠 있다가 다시 울란바토르로 이송됐다. 다른 방향으로 떠난 4명의 운명을 걱정했는데, 그들도 이미 울란바토르에 와 있었다.열악한 울란바토르 수용소 생활은 6개월 가까이 이어졌다. 탈북민 수감자들은 냄새 나는 쌀로 밥을 스스로 지어 먹어야 했다. 싹이 다 난 감자와 양배추가 부식으로 들어왔는데 된장도 없어 맹물에 소금만 쳐서 국을 끓여 먹었다. 물이 귀해 세수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칫솔도 주지 않아 양치질도 못 했다. 주몽골 한국대사관은 이들 처우에 대해 신경도 쓰지 않는 듯싶었다.한국에 가는 순서가 어떻게 짜였는지 알 순 없지만, 송 씨는 함께 온 4명보다 두 달 늦게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생전 처음 타 보는 비행기여서 심한 멀미에 시달려 토하느라 언제 인천공항에 착륙했는지도 몰랐다.● 고난의 정착남들 다 받는 조사를 마치고 하나원에 가니 앞서 온 동료들은 이미 사회로 나간 뒤였다. 두 달 먼저 온 차이는 컸다. 송 씨는 하나원을 나가면 서울에서 살고 싶었지만 그의 기수 128명에겐 서울 임대주택이 4채만 나왔다. 그 두 달 전엔 이거소다 많이 나왔다고 들었다. 서울을 포기하고 울산에 가겠다고 신청서를 냈다. 울산이 어디 붙었는지도 몰랐다. 일자리가 많은 곳이 어딘지 물으니 울산에 공단이 있어 취업 확률이 높다고 했다. 하지만 울산을 노린 탈북민도 많았는지 추첨에서 떨어졌다. 어디를 다시 신청해야 할지 모르던 차에 담당 선생이 자신이 알아서 넣겠다고 했다.그에게 광명시가 배당이 됐다. 바로 임대주택이 나오는 것은 아니고 6개월 동안 한 교회에서 마련한 숙소에서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2009년 2월 하나원을 졸업한 송 씨는 서울 신림동 교회에서 마련한 숙소로 옮겼다. 집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다른 탈북민 5명과 함께 원룸에서 반년을 살았다.하나원을 나와서 한 첫 번째 일은 세무학원 등록이었다. 자격증이 있어야 취업에 유리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세무회계 자격증을 따고 취업도 했다. 서울 성동구 성수동에 있는 한 퀵서비스 회사에서 세무 직원을 뽑는다는 공고를 보고 찾아가 뽑혔다. 다른 한국 여성도 지원했지만 왜 그가 뽑혔는지 1년쯤 지나 알았다. 당시엔 탈북민을 고용하면 월급의 절반까지 50만 원 한도 내에서 3년 동안 지원하는 고용보험제도가 있었다. 그의 첫 1년간 월급은 100만 원이 되지 않았다. 고용주는 50만 원만 주고 그를 쓸 수 있었다.회사는 직원이 100명 넘었고 사무실 직원도 20명쯤 됐다. 그곳에서 3년을 일했다. 아니, 버텼다. 회사 특성상 전화받을 일이 많았는데 말투가 이상하다며 온갖 불만이 쏟아졌고, 장난전화도 수시로 걸려 왔다. 먼저 전화하면 보이스피싱이냐며 끊는 사람도 많았다. 말투를 고쳐야겠다고 언어 교정 학원까지 다녔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집으로 받은 광명시 하안동 영구임대주택에서 회사까지 출근 시간도 거의 2시간이었다. 스트레스가 심해 입국할 때 54kg이던 몸무게가 1년 뒤 44kg로 줄어 영양실조 직전이 됐다. 진짜 고난의 행군인 듯했다.그럼에도 버틴 이유는 정착지원금 때문이었다. 당시 탈북민은 한 직장에서 3년을 일해야 정착지원금 1800만 원가량을 전액 받을 수 있었다. 도중에 좋은 직장을 알게 돼 이직하면 정착금은 사라졌다. 한국을 전혀 모르는 탈북민이 당장 굶지 않으려고 닥치는 대로 취업한 곳에서 3년 동안 강제로 일하게 만드는 법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나원을 나오자마자 정착금을 많이 주면 브로커들이 뜯어 간다는 이유였는데 탈북민 원성이 커지자 이후엔 3번 정도 회사를 옮겨도 받을 수 있게 바뀌었다.● 처음 만든 봉사단체3년 동안 열심히 일해 정착지원금을 다 받자마자 그는 광명시청 임기제 공무원으로 이직했다. 한국 사회를 점점 알게 되면서 더 좋은 직업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정착지원금이란 족쇄 때문에 옮겨갈 수 없었다.2012년 10월 그가 시청에 입사할 수 있었던 것은 회사에 다니면서 꾸준히 공부해 사회복지사를 비롯한 자격증을 7개나 따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시청에서 사회복지 업무를 맡았다.시청에 입사한 지 한 달 만에 동네 탈북민 다섯 명과 함께 탈북민 집을 청소해 주는 봉사단체를 전국 최초로 만들었다. 자신의 경험이 계기였다. 지금은 탈북민 정착 지원을 돕는 하나센터가 전국에 있어 해당 지역에 오는 탈북민 집을 미리 청소하는 서비스도 제공하지만 당시엔 그런 것이 없었다.하나원을 나온 지 6개월 만에 21㎡(약 7평) 임대아파트에 입주했을 때 새 삶에 대한 기쁨보다 절망감을 더 크게 느꼈다. 벽지는 곳곳이 찢어져 있었고 온 집안에 담배 냄새가 심하게 배어 있었다. 화장실도 들어가기 끔찍할 정도로 더러웠다. 관리사무소에 벽지라도 새로 해줄 수 없냐고 물었더니 규정상 5년이 돼야 해 줄 수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청소를 도와줄 수 있냐고 했더니 입주인이 알아서 해야 한다고 했다.전입신고를 해야 한다고 알려준 사람도 없었다. 나중에야 알고서 전입신고를 하려고 나섰는데 동네 지리를 모르니 코앞에 있는 동사무소(주민센터)를 찾지 못해 몇 시간을 헤매다 다른 동사무소로 찾아가기도 했다.송 씨는 자신이 겪은 일을 다른 탈북민이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한국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후배들은 최소한 집에 신발은 벗고 들어가서 짐을 풀고 첫 밤을 보내게 하고 싶었다. 동네에 사는 탈북민들에게 그런 뜻을 전하니 흔쾌히 그러자고 나섰다. 이후 광명에 오는 탈북민들은 깨끗이 청소된 집에 들어가 첫날을 보낼 수 있었다.● 평범한 이웃의 조언광명시청에 입사한 직후 결혼을 해 가정도 꾸렸다. 한 살 위인 남편은 한국에 와서 처음 만난 남자였다. 성수동 회사에 다닐 때 탈북민 조사 용역 업무를 하러 온 남편을 처음 만났다. 한국 사회를 거의 모르는 송 씨가 조언이 필요할 때마다 도움을 요청하다 정이 들었다. 연애를 해 본 적이 없기에 연애만 하면 결혼하는 줄 알았다. 지금 돌아보면 결혼하자는 자신의 말에 남편이 머리를 끄덕여 줘서 망정이지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을 뻔했다. 2017년엔 딸도 태어났다. 욕심 같아선 아이를 더 많이 키우고 싶었지만 하늘이 한 명만 허락했다.딸이 태어난 이듬해 경기도 시흥에 있는 10년 공공임대주택 청약에 당첨돼 새집에 이사할 수 있었다. 비록 크지 않고 외진 곳이지만 내 집이 생겨 만족감이 크다. 하지만 이사를 가야 했기에 광명시청에선 더 이상 일하기 어려웠다. 관내 거주자를 우선 고용한다는 암묵적인 규정 때문에 2022년 10월, 근무 10년을 채우고 퇴사해야 했다.1년도 안 돼 한국교통안전공단 상담원으로 입사할 수 있었다. 임기제 공무원과 달리 정년이 보장되는 일자리다. 공공기관이기 때문에 면접도 4차례나 보는 등 입사 기준이 까다로웠지만 갖고 있던 자격증 7개가 높은 점수를 받는 데 도움이 됐다. 지금도 그는 여러 봉사단체에 가입해 휴일에도 봉사활동에 나선다. 커피 봉사를 하기 위해 바리스타 자격증을 딴 뒤 목감복지관 등에서 노인을 위한 커피 부스도 운영한다. 한국 사회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맞벌이 가족으로 정착했지만 그는 여전히 배워가는 중이다.“아이를 키우면서 정말 많이 배웁니다. 북에서는 가정교육이란 말도, 부모 교육이란 말도 모르고 자랐습니다. 아이가 유치원과 학교에 다니면서 인성 교육을 비롯해 이런저런 교육을 받는 것을 보며 많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나도 저런 교육을 일찍 받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기도 하고, 아이들이 이렇게 자라나니 한국은 잘 될 수밖에 없구나 싶은 생각도 듭니다.”앞으로 무엇을 공부할지도 정했다. “사회복지 담당 업무를 10년 동안 하면서 탈북민 가정을 많이 알게 됐습니다. 탈북 여성 혼자 애를 키우며 일을 다니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방치돼 분리불안장애를 앓는 자녀가 많습니다. 북에서 선생님이 될 뻔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몰라도, 이런 아이들을 치료할 수 있는 자격증을 따서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한국에서 16년을 산 그에게 한국에 첫발을 내딛는 탈북민에게 조언을 해 달라고 하자 손사래를 쳤다.“크게 성공한 사람도 아니고 대단한 것을 이룬 사람도 아닙니다. 그래도 꼭 한마디 해 줘야 한다면, 좌절하지 말고 노력하면 보상이 있을 것이라고 말해 주고 싶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절망의 바닥까지 갔을지라도 포기하지 말라고요.그 순간이 지나 나중에 돌아보면 다 나의 뼈와 살이 되는 과정, 면역을 키우는 과정이었다고 말해 주고 싶습니다. 제가 얻은 삶의 교훈입니다. 앞으로 어떤 시련이 와도 이 고난 뒤엔 어떤 보상이 기다릴까 기대하면서 살아갈 겁니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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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은도 핵잠수함을 건조한다는데… 이번엔 어떤 괴물이?[주성하의 ‘北토크’]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갑자기 남북 사이에 핵추진 잠수함 건조 경쟁이 벌어지게 됐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나는 한국이 현재 보유한 구식이고 기동성이 떨어지는 디젤 잠수함 대신 핵추진 잠수함을 건조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고 밝혔습니다.전날 경주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핵추진 잠수함 건조를 위한 핵연료 공급 결단을 요청한 데 대한 대답이었습니다. 핵추진 잠수함 건조지도 미국 필라델피아 조선소로 확정됐습니다.한국이 빠른 시일 내에 핵추진 잠수함을 건조해 운영한다면, 핵추진 잠수함을 가진 7번째 국가가 될 수 있습니다. 현재 핵추진 잠수함을 가진 나라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에 더해 인도가 보유하고 있습니다. 핵보유국인 6개 국가는 핵추진 잠수함이 핵무기 발사 플랫폼 역할도 수행합니다. 한국만 원자로에서 잠수함 추진력만 얻는 유일한 국가가 될 예정입니다.하지만 한국이 세계에서 7번째 핵추진 잠수함 보유국이 될지는 아직 미지수입니다. 호주가 2030년대 초반까지 미국에서 버지니아급 핵잠수함 최소 3척을 도입하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죠. 한국의 핵추진 잠수함 도입이 2030년대 중반이 된다면 호주가 7번째 국가가 됩니다.여기에 다른 변수가 또 있습니다. 북한이 올해 핵추진 잠수함을 만들고 있다고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올해 3월 6일 북한은 김정은이 5000t급 이상으로 추정되는 잠수함 건조 현장을 방문하는 사진을 공개했습니다. 만약 북한이 5~6년 내로 핵추진 잠수함을 만든다면, 호주보다 앞선 세계 7번째 핵추진 잠수함 보유국이 되는 셈이다.여기에 더해 북한은 이미 전술핵공격잠수함을 만들었다고 선언했습니다. 추진력은 디젤 엔진에서 얻지만, 잠수함에 핵미사일을 탑재해 발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023년 9월 북한이 진수식을 가진 전술핵공격잠수함 ‘김군옥영웅함’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김정은이 2021년 1월 8차 노동당 당대회에서 “새로운 핵잠수함 설계 연구가 끝나 최종 심사 단계에 있다”고 밝힌 지 불과 2년 반 만에 만든 것입니다.북한이 핵추진 잠수함까지 완성한다면, 이는 당연히 핵무기까지 탑재한 핵추진 잠수함이 될 것입니다. 이는 한국은 물론 미국과 일본에도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밖에 없겠지요.북한이 핵추진 잠수함 운용에 성공하면, 한국은 현재 보유한 디젤 잠수함으로 이를 막기 어려워집니다. 핵추진잠수함은 디젤 연료로 움직이는 재래식 잠수함보다 속도가 2배 이상 빠르기 때문에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이런 점 때문에 김정은도 핵추진 잠수함 건조에 사활을 걸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김정은의 계획대로 핵추진 잠수함이 실제로 건조되면, 이는 핵무기에 못지않은 또 다른 엄청난 위협입니다.하지만 조선업 최강국인 한국도 핵추진 잠수함을 건조하는데 10년이 걸릴 것이란 예상이 나오는 상황에서, 과연 북한이 몇 년 안에 핵추진 잠수함 건조에 성공할 수 있을지엔 많은 의문 부호가 붙을 수밖에 없습니다.● 북한의 핵 잠수함2022년 국방백서에 따르면, 북한은 로미오급을 포함한 70여 척의 잠수함을 보유하고 있다고 적시돼 있습니다. 미국과 중국이 각각 70여 척의 잠수함을 갖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북한은 잠수함 숫자에 있어서 세계 최강국 반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8척의 잠수함을 보유한 한국 해군에 비하면 숫자로선 비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하지만 질을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집니다.북한이 보유한 최대 크기의 로미오급 잠수함은 1700톤급인데 1950년대 구소련이 연안 방어를 위해 도입한 것입니다.북한은 1971년에 중국이 운영하던 로미오급 잠수함을 중고로 처음 들여왔고, 이후 돈이 될 때마다 몇 척씩 추가로 수입했습니다. 나중에는 중국에서 부품을 수입해 조립도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보면 약 20척을 도입한 것으로 알려진 북한 잠수함의 핵심 전력 로미오급은 잠수가 가능할지조차 모를 ‘환갑이 넘은’ 고물들입니다.2년 전에 진수식을 가진 김군옥영웅함도 낡은 로미오급 잠수함을 두 동강 내서 가운데에 무려 10개의 미사일 수직 발사관을 끼워 넣은 것입니다. 가뜩이나 고물 잠수함에 엄청 무거운 미사일 수직 발사대를 끼워 넣는 식으로 만들다 보니 무게 중심이 맞을지도 알 수 없습니다. 실제로 김군옥영웅함은 진수한지 2년이 넘었는데 아직 아무 소식도 없습니다.여기에 북한은 잠수함에서 잠수함발사탄도유도탄(SLBM)을 발사하는 사진도 공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이미 ‘북극성’이란 이름이 붙은 SLBM을 개발했다고 선언했고, 열병식에도 빠지지 않고 들고 나와 자랑하고는 있습니다. 또 바다에서 발사하는 사진까지도 공개했지만, 실은 이것이 물속에 설치한 바지선에서 발사한 것일 뿐입니다.김정은은 외국 무기의 외형만을 복제하는데 성공해도 신형 무기를 만들었다고 자랑에 여념이 없습니다. 이런 성격을 감안할 때 김군옥영웅함에서 SLBM 발사가 성공했다면 몇 달을 “위대한 업적을 세웠다”고 동네방네 선전했을 것이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김군옥영웅함이 공개된 뒤, 이 잠수함이 잠항 후 계속 기포가 발생하거나 밑으로 가라앉고, 수면에서 함체가 옆으로 기울어지는 중대한 결함이 있어 수리 중이라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북한을 위성을 통해 감시하는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도 올해 7월 위성사진을 통해 김군옥영웅함이 진수 이후에도 거의 가동되지 않고 부두에 머물렀다고 분석했습니다.김군옥영웅함에 앞서 북한은 2015년 1월에도 SLBM 수중 발사 실험에 성공했다고 사진까지 공개하면서, 이 잠수함을 ‘8·24 영웅함’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이 잠수함도 지금 어디서 무얼 하는지 이후 행적이 묘연합니다.● 감당하기 힘든 핵추진 잠수함잠수함을 두 동강 내 가운데 미사일 수직 발사관을 이어 붙이는 작업은, 핵추진 잠수함 건조에 비하면 매우 간단한 작업입니다. 이 작업도 제대로 못한 북한이 핵추진 잠수함을 만들고 있다니 과연 믿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핵추진 잠수함은 어마어마한 몸값과 유지비 때문에 웬만한 국가는 공짜로 줘도 운용하기 쉽지 않습니다. 핵 추진 잠수함의 건조비는 10억 달러를 훌쩍 넘습니다.세계에서 제일 비싼 핵추진 잠수함은 미국이 갖고 있습니다. 미국의 수중배수량 9000톤급 씨울프급 잠수함은 1척당 건조비가 30억 달러 넘습니다. 수중 배수량이 7900톤급인 버지니아급 핵잠수함은 초기엔 1척당 건조비가 24억 달러 정도였지만, 이후 스텔스 기능 등 각종 첨단 기술이 적용되면서 지금은 40억 달러가 넘습니다. 이런 핵추진 잠수함을 미국은 약 70척 정도 운용합니다. 미국은 제일 좋은 것은 다 갖다 쓰며 최고 성능을 지향하기 때문에 비쌀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다른 나라들도 싼 것은 아닙니다.러시아 주력 야센급 핵잠수함은 수중 배수량 1만3800톤급인데, 1척당 건조비가 12억5000만 달러입니다. 미국의 반값에 못 미치긴 하지만, 그래도 10억 달러가 넘습니다. 인도가 6000톤급 핵잠수함 3척을 건조하는데 든 돈이 29억 달러로, 1척당 10억 달러가 들었습니다.한국도 노무현 정부 시절 4000t급 핵추진 잠수함 3척을 확보하려는 시도를 비밀리에 진행했는데, 1척당 건조비를 1조2000억 원으로 추산했습니다. 당시 환율로 계산해도 10억 달러쯤 되는데, 20년 전 물가임을 감안했을 때 지금은 훨씬 더 든다는 의미입니다.결론적으로 말하면, 핵추진 잠수함 하나 가지려면 최소 10억 달러씩 써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핵추진 잠수함은 한 척으로는 제 기능을 못 합니다. 실제 용도에 맞게 쓰려면 기본 3척을 만들어 운용해야 합니다. 한 척이 바다에 들어가 임무를 수행하면, 한 척은 대기해야 하고, 나머지 한 척은 정비를 받고 있어야 합니다. 이런 무기 운용의 원리는 세계 모든 군대에 적용이 됩니다.전자시계도 만들지 못하는 북한이 잠수함 건조에 필요한 숱한 부품과 자재를 자체로 조달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싸게 잡아 1척당 5억 달러의 자재가 들어간다고 해도, 이는 북한이 감당할 수준이 아닙니다.북한은 대외 무역의 90% 이상을 중국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대중국 무역적자 규모는 2022년 12억7000만 달러, 2023년 21억4000만 달러입니다. 무역을 해도 돈을 벌기는커녕 빚만 쌓이는 상황인 것입니다. 북한 해커들이 아무리 가상화폐를 많이 훔쳐 상납한다 한들, 무역에서 진 빚도 갚기 어려운 형편입니다.여기에 더해 잠수함은 돈만 있다고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함선 건조에서 최고 난도의 기술이 필요한 것이 잠수함입니다. 수상함과는 달리 협소하고 한정된 공간에 수많은 관과 전선, 무장 체계 등이 복잡하게 설치되기 때문입니다. 작은 장비 하나만 바뀌어도 관련 체계 설계를 연쇄적으로 변경해야 합니다.또한 수중 작전 환경에서 승조원 안전 등을 고려한 압력선체 건조 기술도 뛰어나야 합니다. 핵추진 잠수함은 여기에 더해 작은 공간에서 원자로까지 운영해야 하니 건조하기가 훨씬 까다롭습니다. 북한이 1700톤급 잠수함을 조립한 경험도 있고, 이에 기초해 1996년 강릉 무장 공비 침투 사건 때 타고 왔던 300톤급 상어급 잠수정은 만들어본 일이 있지만, 수천 톤급 잠수함은 또 다른 영역의 도전입니다.북한이 잠수함에 설치해 운용할 수 있는 소형 원자로를 만들 능력이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소형 원자로를 만들 능력이 있다면, 깜깜한 암흑 속에 사는 북한 도시들에 전기를 공급하는 원자력 발전소 정도는 이미 만들어야 했지 않을까요.핵추진 잠수함은 또 건조로 끝나지 않습니다. 어마어마한 유지비 때문에 웬만한 국가는 ‘줘도 못 먹는’ 처지에 빠집니다. 미국은 항공모함 유지비가 1년에 1억5000만~2억 달러 정도 드는데, 핵잠수함은 2억7000만 달러에서 3억 달러 사이 유지비가 듭니다. 즉 핵추진 잠수함은 항공모함보다 돈을 두 배 더 잡아먹는 하마라는 뜻입니다. 이걸 북한이 감당할 수 있을까요. 이건 확실히 말할 수 있지만, 북한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그러니 김정은이 만든다는 핵추진 잠수함이 너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어떤 것을 들고 나올까요. 김군옥영웅함처럼 거하게 자랑 한 번 하고 사라질 고물을 만드느라 엄청난 돈을 탕진하는 것은 아닐까요.● 잠수함 부대의 악몽잠수함 이야기가 나온 김에 북한 잠수함 관련 잘 알려지지 않은 에피소드 몇 개를 추가로 소개해 볼까 합니다. 북한 해군은 동해와 서해가 연결되지 않는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습니다. 서해를 지원하기 위해 동해 함대들이 한반도 남쪽을 에돌아 갈 수도 없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잠수함 전대도 서해와 동해에서 각각 운영하고 있습니다. 동해의 잠수함 전대는 신포시 앞바다에 있는 마양도(4전대)와 함남 리원군 차호노동자구(5전대)에 몰려 있습니다. 서해는 황해남도 과일군 월사리에 잠수함이 주력인 10전대와 11전대가 있습니다. 물론 부대 명칭들은 최근에 바뀌었을 수가 있지만, 주력 기지들은 여전히 같습니다.서해 잠수함 기지들이 외부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좋은 곳에 위치해 있다면, 동해 기지들은 잠항하자마자 깊은 수심에 바로 들어갈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대신 상대도 미리 깊은 입구에 비밀리에 잠항해 있다가 공격하기도 유리합니다.북한군에서 최고 대우를 받는 군인들은 두 부류인데, 비행기 조종사와 잠수함 승조원들입니다. 식량, 육류, 기름, 당과류 등 공급 기준이 북한군에서 제일 높습니다. 그래 봐야 한국 사람들이 볼 때는 기초생활수급자의 밥상보다 못합니다.북한 해군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대형 참사 3개 중 2개가 잠수함 부대에서 발생했습니다. 2013년 10월 중순 동해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375t급 구잠함과 200t급으로 추정되는 경비정이 며칠 시차를 두고 침몰해 70여 명의 해병들이 사망했습니다. 당시 김정은은 이들의 묘소를 직접 찾아 자기의 이름을 상주로 비석에 새길 것을 지시했습니다. 이는 수상함에서 벌어진 대형 사고입니다.잠수함 관련 대표적인 사고는 1985년 2월 20일 함남 신포 앞바다에서 기지로 귀환하던 1700톤급 로미오급 잠수함이 부상하던 도중 수천 톤급 대형 상선과 부딪쳐 침몰한 일입니다. 50여 명의 승조원이 함께 수장됐습니다. 북한은 소련 태평양 함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들도 인양에 실패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 잠수함은 여전히 바닷속에 있습니다.또 다른 사고는 1983년 10월 황해도 과일군 월사리 잠수함 11전대에서 일어났던 ‘김선동 사건’입니다. 제대를 앞둔 평양 출신의 중사 김선동은 군의소 간호원과 연애하다가 들켜, 부대원들이 다 모인 장소에서 공개적으로 비판받고 처벌까지 받게 됐습니다. 10년을 복무하고 불명예 제대하게 되자 화가 난 김선동은 자신이 분대장으로 있었던 잠수함 전대 병기창에 들어가 자폭을 선택했습니다.목격자들에 따르면 핵폭발이 일어났다고 착각할 정도로 버섯구름이 200m 이상 솟구쳐 올랐다고 합니다. 당시 병기창 갱도엔 한 발당 가격이 100만 달러가 넘고, 장약량도 수백㎏이 넘는 어뢰만 100발 이상 있었고, 거기에 기뢰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이것들이 한꺼번에 터지다 보니 병기창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병기창 경비병과 근무조 40여 명이 죽었습니다. 북한 해군으로선 지우고 싶은 악몽일 수밖에 없습니다.물에 들어가기 무서울 정도의 고물 잠수함들에, 연료 공급도 제대로 되지 않아 훈련도 못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김정은은 전술핵공격잠수함이나 핵추진 잠수함으로 잠수함 전력을 업그레이드시키겠다고 힘을 쏟고 있습니다.여기에 한국도 핵추진 잠수함을 만들고 있다면, 그의 경쟁 심리는 더 불타오를 것입니다. 하지만 최신 잠수함 건조는 투쟁심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잠항 상태에서 SLBM을 발사하는 김군옥영웅함의 사진부터 먼저 공개하면 북한의 잠수함 건조 능력을 조금은 인정해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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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 집단 최면의 비밀[주성하의 ‘北토크’]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파블로프의 개’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개에게 먹이를 줄 때마다 종소리를 내자, 나중엔 개가 종소리만 듣고도 침을 흘린다는 것이다.1904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러시아 생리학자 이반 페트로비치 파블로프는 이 실험을 통해 원래 관련 없던 두 자극이 연합될 때 같은 반응이 일어나는 ‘조건 형성’을 증명했고, 현대 행동주의 심리학의 기초를 만들었다. 파블로프의 개는 인간 심리나 학습 과정에 대한 이해에 큰 영향을 끼쳤다.불행하게도 이 연구의 의미는 독재자들이 먼저 깨달았다.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블라디미르 레닌은 파블로프를 불러 연구를 정리해 달라고 했다. 3개월 뒤 파블로프가 가져온 400페이지짜리 보고서를 레닌은 하루 만에 다 읽었다.이튿날 파블로프를 부른 레닌은 매우 감격한 표정으로 “이로써 혁명의 미래가 보장됐다”고 말했다고 한다. 레닌은 이를 대중 심리 조작 기술로 간주했다. 심리 조작은 자기도 모르는 새에 특정 동작을 하도록 세뇌하는 걸 의미한다. 종만 울려도 침을 흘리는 개처럼, 인간도 그렇게 만들 수 있다.레닌이 파블로프 연구의 가치를 알아본 지 100년이 넘었다. 만약 파블로프가 다시 살아 온다면 자신을 뛰어넘는 심리 조작 기술을 발휘하는 곳을 발견할 것이다.바로 북한이다. 북한은 침을 흘리는 단계를 넘어 인간 전체를 집단 최면에 걸리게 하는 심리조작 기술을 활용하고 있다.● 왜 집단체조를 계속 할까10일 노동당 창건 80주년 기념일에도 북한은 집단체조와 열병식을 진행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때문에 하지 못하다 5년 만에 부활한 것이다.한국 언론은 북한이 수십만 명을 동원해 집단체조나 광장 열병식을 계속하는 이유를 잘못 분석한다. 국력 과시용이라고도 하고, 외화벌이를 위해서라고도 하는데 정확한 분석이 아니다.집단체조에 평양 인구 약 200만 명 중 대략 10만 명이 동원된다. 인구 1000만의 서울로 치면 어린이와 젊은이 50만 명이 최소 6개월 동안 다른 일을 하지 않고 한자리에 모여 간단한 동작을 무한 반복 연습한다.국력을 키우려면 이들을 일하게 만들어야 한다. 외화벌이용도 틀린 말이다. 외국인이 오지 않아도 집단체조와 열병식은 늘 한다.북한이 대규모 군중 행사를 지속하는 진짜 이유는 파블로프의 개에서 찾아야 한다.기자는 김일성대학교에 다니던 1990년대에 김일성광장에서 배경대(카드섹션하는 사람들)도 해 봤고 행진대도 해 봤다. 잠깐이지만 열병식 훈련에도 참가해 봤다. 배경대 훈련 실례를 하나 들어 보자. 9월 9일 공화국 창건 기념일을 위한 배경대 훈련은 6월 중순 시작됐다. 오전 5시부터 일어나 식사하고 광장까지 두 시간 가까이 걸어갔다.광장 바닥에는 수만 개의 점이 찍혀 있다. 가로세로 약 70㎝ 사각형 모서리마다 60-132, 156-30 하는 식의 숫자가 붙어 있다. 각자에게 점 하나씩이 배당됐다. 석 달 동안 서 있어야 하는 자리다.훈련은 매우 간단했다. 광장 주석단 지붕 가운데와 양 끝에 세 명의 신호수가 올라가 있다. 이들이 동시에 1부터 8까지 적힌 커다란 숫자판을 들면 우리는 3가지 종류의 꽃다발을 신호가 바뀔 때까지 쳐들고 있어야 했다. 가령 1번이 올라가면 빨간색 꽃다발을 들고, 2번은 노란색 꽃다발, 3번은 둘 다 같이, 5번은 빨간색 꽃다발을 열심히 흔드는 식이다. 자신이 서 있는 점에 따라 번호별로 다른 색 꽃다발을 들어야 했다. 그러면 김일성광장에 ‘김정은 장군 만세’ ‘경축’ ‘일심단결’ 따위의 글씨가 일사불란하게 나타났다가 사라진다.머리가 좋고 나쁨과 상관없이 이 8가지 동작을 익히는 데 드는 시간은 한나절도 안 된다. 그럼에도 이 같은 단순 동작을 3개월 동안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하루 종일 되풀이했다.김일성광장 대리석 바닥은 한낮이면 뜨겁게 달아올라 숨이 막힌다. 그늘도 없고 물도 없는 그곳에서 사람들은 불판에 올린 생고기 신세였다.사방에서 사람들이 일사병으로 쓰러졌지만, 주변 백화점 건물이나 지하차도로 데리고 가 그늘에 눕혀 놓는 것이 유일한 치료였다. 그래도 치유되지 않으면 그 점은 다른 사람이 채웠다. 살이 익어 밤에는 잠도 자지 못할 정도로 쓰라렸다. 그러나 도망갈 수는 없었다. 그렇게 수십만 명이 집단체조나 열병식, 군중 시위에 동원돼 광장에서 독재자를 위한 하나의 점으로 3~10개월을 존재해야 했다. 단순한 훈련도 3개월 하면 사람이 바뀐다. 아무 생각도 없이 앉으라면 앉고, 서라면 선다. 동작을 따라가지 못하면 엄격한 자아비판과 호상비판, 연대책임과 추가 훈련이라는 처벌을 받는다. 이런 과정을 통해 집단에서 벗어나거나 이질감을 만드는 것에 대해 공포에 가까운 두려움을 반복적으로 학습하게 된다.집단체조는 유치원생까지 참가한다. 평양에서는 집단체조에 참가해 보지 않은 학생을 찾기 어렵다. 왜 아이들을 6개월 넘게 간단한 훈련만 시키는가. 이 아이들을 어렸을 때부터 파블로프의 개처럼 세뇌하기 위해서다.김 씨 일가에겐 평양이 제일 중요하다. 지방 도시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나더라도 평양에서만 일어나지 않으면 된다. 1970년대부터 출신성분이 나쁜 시민은 지방으로 추방하고, 출신성분이 좋은 사람들을 뽑아 평양 시민으로 만들었다. 북한에서 출신성분이 좋다는 것은 김일성의 말을 꼭두각시처럼 추종하는, 무식하고 말 잘 듣는 DNA를 갖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체제 비판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머리 좋은 DNA는 외진 유배지로 끌려갔다.세뇌에 취약한 계층으로 평양을 채워 넣고도 부족해 김 씨 일가는 집단체조를 통해 끊임없는 세뇌를 이어간다. 지방 반란은 군대가 진압하면 된다. 어쩌면 도시를 몽땅 쓸어버리고, 주동자의 8촌까지 멸족해 반역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평양이 반역하면 큰일이다. 평양은 김 씨 일가 안전에 직결되는 도시다. 평양까지 봉기할 정도면 군도 제대로 통솔되지 못한다고 봐야 한다. 군 열병식도 핵심 병력을 끊임없이 파블로프의 개로 세뇌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이런 본질을 알게 되면 왜 북한이 엄청난 인력을 낭비하며 집단체조를 계속하는지, 열병식을 계속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김 씨 일가가 평양 시민과 군을 파블로프의 개로 세뇌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한 평양 집단체조와 열병식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북한과 사이비 종교의 본질은 같다파블로프의 개는 종과 먹이만 있으면 침을 흘린다. 하지만 인간의 세뇌는 개보다는 훨씬 어렵고 정교해야 한다. 특히 대중 전체를 세뇌하기 위해선 파블로프 실험을 훨씬 넘어서는 정교한 대중 심리 조작 기술이 동원돼야 한다.북한 노동당 최고 인재들이 동원된 대중 세뇌 기술 전부를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기자는 북에서 살았던 경험을 토대로 큰 기술 몇 개는 체험에 기초해 이해할 수 있다.대중을 세뇌시키려면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외부와의 접촉을 철저히 차단하는 것이다. 즉 정보가 들어가지도 나가지도 못하게 해야 한다. 외부 정보가 들어가면 사람들이 당에서 주입하는 거짓말을 믿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북한이 왜 개혁·개방이란 말에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는지, 끊임없이 폐쇄 정책을 추구하는지에 대한 해답이 여기에 있다. 김정은이 최근 몇 년 동안 ‘반동사상문화배격법’ ‘청년교육보장법’ ‘평양문화어보호법’ 등을 만들어 외부 정보를 접한 사람들에게 중형을 선고하는 이유도 설명이 된다.외부 세상을 알게 되면 하나의 사상이 주입되지 않는다. 파블로프의 개도 가만히 누워 있는 옆집 개가 더 맛있는 먹이를 먹는다는 것을 안다면 누워 있으려 하지 종소리에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두 번째로는 신비성을 조작해야 한다. 당이나 지도자는 신 같은 특별한 존재로서 신비성을 가져야 한다. 이런 방법은 사이비 종교 교주들도 쓴다. 자기는 대중을 구하는 신이라는 인상을 심어 주는 것이다.세 번째는 대중에게 끊임없는 자기반성을 하게 만든다. 자기비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남도 비판하고 폭로하는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서로 연대감을 높인다. 북한에서 생활총화와 호상비판을 계속 시키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네 번째로 이념 주입 단계에서 이념을 성스러운 과학으로 만든다. 이념을 의심하는 것은 신을 의심하는 것과 같은 죄로 인식시킨다.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은 김 씨 일가가 왜 자기 이름으로 어려운 철학사상 논문을 계속 발표할까. 바로 이념을 성스러운 과학으로 만들어야 대중을 조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념은 개인보다 높은 위치에 놓이도록 교육한다. 사회주의를 위해선 자기 한목숨 서슴없이 바치라고 교육하는 것이다. 교육만 해선 대중이 따르지 않는다. 상벌이 있어야 한다. 생존은 누구에게나 보장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 준다. 동시에 죽음을 불사하며 지시를 따른 자에겐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 사상 개조를 거부하고 지도자나 당 지시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나 가족은 살아 남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동시에 전장에서 포로가 되기 보다 자폭 같은 행위를 하면 가족까지 책임져 준다는 당근을 주는 것이다.이런 원리는 북한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세계 많은 사이비 종교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신자들을 세뇌한다. 중동 자폭 테러범도 똑같은 과정과 방식으로 세뇌된다. 북한 같은 전체주의 국가와 파시즘, 사이비 종교는 세뇌 방식이 모두 똑같다.● 정교한 사상 주입 과정사상을 주입하는 방식도 정교해야 한다.우선 사람을 주변과 단절된 상태에 놓이게 한 뒤 정보 입력을 극단적으로 제한하거나 과잉 주입시켜야 한다. 정보가 극단적으로 부족해 감각 차단 상태에 놓인 사람에게 입력하고자 하는 정보를 과잉 주입하면 뇌가 잘 받아들인다. 북한 매체에서 하루 종일 ‘김정은 원수님’ 타령을 하는 것이 이 같은 원리다.옛 소련에서는 오랜 기간 격리되고 정보 유입이 제한된 정치범이 취조관 기분에 맞춰 자신의 죄를 꾸며낼 뿐 아니라 그것을 진실이라 믿는 일도 일어났다. 감각 차단 상태에서 생기는 심리 조작의 힘은 상상 이상이다.둘째, 뇌와 육체를 지치게 만들어 딴생각할 여유를 빼앗아야 한다. 북한 당국이 왜 쥐꼬리만 한 배급 때문에 굶주린 인민을 ‘100일 전투’니 ‘200일 전투’니 하며 쉬지 않고 내몰고, 생활총화와 각종 강연회로 정신없이 들볶는 이유다.심리 조작에서 제일 필요한 부분이다. 딴생각할 겨를없이 들볶으면 사상이 쉽게 주입된다. 대중을 피곤하고 지친 상태, 즉 결핍과 불안에 빠지게 해서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힘을 빼앗고 나면 이제 핵심 세뇌 과정으로 연결된다.지도자나 이념을 따르면 영생이 기다린다고 주입하는 것이다. 이 단계를 거치면 사람들은 지도자를 위해 육체와 재산을 서슴없이 바치려는 심리 조작이 완전히 성공하게 되는 것이다.이런 원리를 알면 북한이 제대로 배급할 형편도 못 되면서 왜 장마당을 폐쇄해 인민을 배급에 의존하게 만들려는지 이해할 수 있다. 배급제가 존재한 지난 반세기 넘는 기간 북한 인민은 한 번도 배 부르게 배급을 받아 본 일이 없다. 북한이 제일 잘 살았다는 1970년대 초반에도 한 달 배급을 받으면 늘 2~3일 분량이 모자라 동네를 돌며 식량을 꿔 먹게 만들었다.이는 비단 북한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한국 사이비 종교나 일부 다단계 사업체도 모집한 사람들을 먼저 폐쇄된 방에 가둬 잠을 재우지 않아 피곤하고 지치게 만든 뒤 세뇌한다. 북한과 사이비 종교 원리는 같다. 기업이나 단체 연수원들이 왜 외진 곳에 있는지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이다.북한 김 씨 일가는 소련과 중국에서 배운 정교한 대중 심리 조작 기술을 80년 가까이 활용해 인민을 세뇌해 왔다. 김정은 얼굴만 봐도 저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흐르도록 만드는 것이 그들의 목표다.북한에서 사는 사람은 자기가 세뇌됐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한국처럼 모든 정보가 열려있는 사회에서도 사이비 종교에 빠지면 벗어나기 힘든데 하물며 폐쇄된 북한이야 더 말할 것이 없다.북한 인민이 당한 세뇌는 깰 수 있을까. 당연히 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신이 죽어야 한다는 점이다. 신이 죽지 않는다고 해서 손을 놓고 있어야 할까. 그렇진 않다.세뇌의 첫 단계, 외부와의 접촉 차단부터 풀어야 한다. 북한이 어쩔 수 없이 문을 열게 만드는 것이 북한 인민을 세뇌에서 구원하는 첫걸음이기도 하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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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팬티’ 북한군[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

    10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북한군이 씩씩하게 행진했다. 주석단에서 중국과 러시아 2인자를 옆에 두고 선 김정은은 뿌듯한 얼굴이었다. 북한군이 입은 최신 전투복이나 각종 장비를 보고 “언제 저런 것을 도입했나. 대단하다”라고 분석할 남쪽 전문가도 있을 것이다. 쓸데없는 짓이다. 그 옷과 장비는 행사용일 뿐이다. 행사가 끝나면 다음 열병식을 위해 벗긴다. 실제 북한군 복장 상태는 전혀 다르다. 북한군 병영을 무작위로 가 본다면 상거지가 따로 없다. 태반이 삐쩍 마른 몰골에 군복은 누더기에다 발가락이 드러난 신발을 신고 있을 것이다. 병력 자원이 없어 키 143cm, 몸무게 45kg 이상이면 무조건 입대시키는 현실이나, 얼마나 많은 군인이 영양실조와 싸우고 있는지는 더 말하지 않겠다. 북한군 피복에만 집중하려 한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난해부터 군사분계선 북쪽에 차단물 공사를 하는 북한군들이 출몰한다. 남쪽에서 촬영한다는 것을 알아서인지 새 군복을 입고 나왔다. 그래 봐야 한 달만 햇볕을 받으면 색이 누렇게 변한다. 천 재질이나 염색 수준은 눈 뜨고 못 볼 지경이다. 새 군복은 입었지만 바지를 벗기면 장담컨대 70% 이상이 ‘노팬티’일 것이다. 북한군 피복 규정에 따르면 군인은 1년에 광목천으로 만든 것과 흡사한 흰 ‘면 빤쯔(면 팬티)’ 두 벌을 공급받는다. 땡볕에서 며칠만 일하면 면으로 된 천은 땀에 젖어 쉽게 찢어진다. 더 큰 고통은 땀에 젖은 팬티가 정신없이 말려 올라간다는 것이다. 북한군엔 서혜부 탈장(헤르니아) 환자들이 많다. 못 먹어서 복근은 약해졌는데 고된 육체노동을 시켜 생기는 현상이다. 하지만 많은 군인은 사타구니까지 말려 올라간 팬티 탓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팬티 입기를 더 싫어한다. 세탁 시간은 일주일에 한 번이다. 일주일 입은 새까만 팬티라 할지라도 마를 때까지 잘 지켜야 한다. 안 그러면 눈 깜짝할 사이에 훔쳐 간다. 팬티 같은 복장 검열은 엄격해 장마당에서 일반 팬티를 구입해 입으면 심각한 규정 위반이다. 없는 게 차라리 낫다. 팬티가 누더기가 돼도 버리질 못한다. 1년에 딱 두 벌뿐이니 귀하게 재사용해야 한다. 북한군은 양말을 공급하지 않는다. 그 대신 발싸개라 불리는 광목천으로 발을 둘둘 감싼다. 발싸개도 1년에 두 번 주는데 팬티 같은 흰 면 재질이다. 발싸개를 하고 천과 고무로 만든 군화인 ‘지하족’을 신는다. 신발 내부 저질 고무에 쓸려 며칠 만에 발싸개가 까맣게 변한다. 그래도 버릴 순 없다. 겨울에는 발싸개를 해도 발이 시려우니 팬티를 발에 감는다. 그것도 모자라면 발에 비닐을 더 감는다. 팬티를 보면 다른 피복도 알 수 있다. 여름 군복은 1년에 한 번, 겨울 군복은 2년에 한 번 준다. 규정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나마 제때 공급받지 못할 때도 많다. 여름 군복 한 벌을 7개월 넘게 입어야 한다. 한 번만 빨면 색깔이 누렇게 변하고, 몇 달 지나면 걷잡을 수 없이 해어진다. 취사 당번을 서면 나무를 해 와야 하는데, 누더기처럼 된 면은 나무 가시에 약간만 스쳐도 쭉쭉 찢어진다. 농사와 공사가 일상인 북한군은 바늘과 실을 항상 군복 주머니에 보관하고 있다가 찢어지면 바로 기워야 한다. 군인 규정에 그렇게 적혀 있다. 힘든 공사판에 동원된 군인들을 보면 수용소 수감자로 착각할 것이다. 신발은 1년에 여름 신발 두 켤레, 겨울 신발 한 켤레를 준다. 규정이 그렇다는 것이지 제대로 주질 못한다. 군모는 5년에 한 개 준다. 최근까지 북한군에서 10년 가까이 복무한 탈북민은 “동내의는 입대할 때 한 번밖에 입지 못했다”고 했다. 남은 것은 군 간부들이 빼돌려 장마당에 팔았을 것이다. 여성 군인들 사정도 상상해 보시라. “뭔 소리. 김정은이 시찰할 때 보니 다들 멋있는 군복을 입었던데”라는 반박도 있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 모든 부대에는 행사용 군복 보관 창고가 따로 있다. 김정은이 오면 꺼내 입고, 가면 다시 벗어 보관한다. 우크라이나 파병 북한 군인들은 각설이 행색에서 해방돼 좋은 팬티와 옷을 입게 됐다고 죽기 전까지 좋아했을 것이다.“전쟁에 만반으로 준비된 백전백승, 미제와 대적할 무적의 군대”라고 자랑스럽게 연설하는 김정은은 이런 실상을 제대로 알고 있을까.“저기요. 애들 팬티부터 좀 입혀요.”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5-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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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만 쌍십절은 어떻게 북한 노동당 창건일로 둔갑했을까[주성하의 ‘北토크’]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본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10일은 북한이 기념하는 조선노동당 창건 80주년 되는 날이다. 정주년(5, 10년 단위로 꺾어지는 해)을 중시하는 북한 특성상 당 창건 80주년 기념일은 올해 최대 명절로 간주한다. 이날 북한에선 열병식을 비롯한 성대한 행사가 열린다. 관련 보도도 그동안 많이 나와 남쪽에서도 10월 10일이 북한 노동당 창건일인 줄 아는 사람이 적지 않다.하지만 1945년 10월 10일에 북한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10월 10일은 중화민국(대만) 국경절이다. 대만은 1911년 우창 봉기를 기점으로 한 신해혁명이 시작된 10월 10일을 건국 기념일로 여기고 매년 10월 10일(쌍십절)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대만 쌍십절이 어떻게 조선노동당 창립일로 둔갑했을까.● 조작된 ‘인민의 생일’북한이 1945년 10월 10일을 조선노동당 창건일이라고 주장한 것은 1958년부터다. 그해 3월 노동당 제1차 대표자 회의에서 김일성은 조선노동당에서 종파가 완전히 청산됐다고 공식 발표했다.남로당, 연안파, 소련파를 완전히 숙청한 김일성은 이때부터 노동당의 역사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13년 전 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수없이 많았겠지만, 누구도 김일성의 말에 토를 달지 못하게 된 것이다.북한은 1945년 10월 10일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 설립 대회가 열렸으며 이 대회에서 김일성이 ‘우리나라에서의 맑스-레닌주의당 건설과 당의 당면 과업에 대하여’라는 연설을 했다고 선전하고 있다.올해 3월 7일 북한 노동신문은 ‘위대한 조선로동당의 성스러운 80년 혁명영도사를 긍지 높이 펼친다’는 장문의 기사를 통해 10월 10일이 조선 인민의 참다운 생일이라고 주장했다.“우리는 오늘 조선 인민의 참다운 생일은 조선로동당이 자기의 탄생을 선포한 1945년 10월 10일이라고 당당히 말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날과 더불어 우리 인민의 존엄과 영예, 행복과 미래, 한없이 고귀하고 소중한 모든 것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의 진실이다.”하지만 북한이 말하는 ‘부인할 수 없는 역사의 진실’은 곧 ‘부인해야 할 역사의 사기’일 뿐이다.조선노동당이 창당된 날은 1945년이 아닌 1949년 7월 1일이다. 그해 6월 30일부터 7월 1일까기 평양 모란봉 회의장에서 열린 비공개 회의에서 남로당과 북로당이 통합돼 조선노동당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통합 사실을 숨기다가 이듬해 6·25전쟁을 일으킨 뒤에야 공개했다.그렇다면 조선노동당 전신 북조선노동당은 언제 창건됐을까. 1946년 8월 28일부터 북한에 노동당이란 이름이 등장한다. 이날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은 합당을 선언하고 당명을 북조선노동당이라고 지었다.그럼 북조선공산당은 언제 만들어졌을까. 1946년 6월 22일이다. 이날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은 명칭을 ‘북조선공산당’으로 바꾸고 서울을 연고로 한 조선공산당으로부터 독립한다. 서술조차 복잡할 만큼 조선노동당의 탄생 배경은 어지럽다.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은 언제 만들어졌을까. 1945년 10월 13일이다. 하지만 이때 북조선 분국은 김일성이 만든 것이 아니다.이날 조선공산당 서북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가 열리고 북조선 분국이 결성됐지만, 책임비서엔 김용범, 2비서엔 오기섭과 무정이 임명됐다. 북조선 분국은 그해 9월 11일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이 서울에 조선공산당을 재건한 뒤, 소련군이 주둔한 북한에 분국 형태로 나온 조직이었다. 김일성은 소련군의 지원에 힘입어 1945년 12월 18일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책임비서로 임명됐다.10월 10일은 위에서 언급한 날짜 중 어느 것과도 겹치지 않는다. 그런데도 왜 10월 10일로 노동당 창건일을 조작했을까.중국에서 살았던 김일성이 쌍십절을 좋아해 그날을 노동당 생일로 지정한 것은 아닐까 싶지만, 확인할 바는 없다. 김일성이 북한에 단독 정부를 세운 날짜가 1948년 9월 9일, 일명 ‘구구절’이다. 아마도 10월 10일 노동당 창건일은 ‘9·9’, ‘10·10’이라는 상징 조작에 당첨된 날짜일 가능성이 높다.● 토를 달 수 없는 역사노동당 생일까지 조작하는 북한이니 다른 것은 얼마나 쉽게 조작할지 짐작이 어렵지 않다.북한은 오랫동안 북한군 창건일을 4월 25일로 기념해 왔는데, 1932년 4월 25일에 김일성이 중국 안도현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을 창건했다는 것이다. 사실 조선인민혁명군은 해방 전까지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 유령 군사 조직이다. 중국공산당 지휘를 받는 동북항일연군에서 ‘조선 인민’을 내건 군사 조직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1932년 4월에 20세 김일성이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도 아는 사람이 없다.더 나아가 북한은 김일성이 14세 때인 1926년 10월 17일에 만주에서 ‘타도제국주의동맹’이란 비밀조직을 만들어 10세 이상 청년들을 부하로 지도했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렇게 역사 조작을 밥 먹듯이 하는 북한도 정확히 인정하는 날짜가 있다.1945년 9월 19일에 김일성이 소련 군함 푸가초프호를 타고 원산에 도착했고, 9월 22일 평양에 입성했다는 것이다. 조선인민혁명군을 인솔해 평양까지 전투를 벌이며 당도했다고 조작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지만, 김일성이 소련 군함으로 왔다는 사실은 김일성 회고록에도 실려 있어 이제 와선 부인할 수 없게 됐다. 북한은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김일성 장군 환영 대회’가 열렸다며 양복을 입고 연설하는 김일성 사진을 공개했다. 그리고 이날 비로소 대중에게 김일성이란 이름을 공개했다고 가르친다. 물론 이것도 실제 역사와 다르다. 이날 열린 대회 명칭은 ‘소련군 환영 평양시 민중 대회’였다. 이날 소련 훈장을 가슴에 달고 나온 김일성은 소련군 장교들에게 둘러싸여 소련군을 입이 마르게 찬양하는 연설을 했다. 물론 나중에 북한은 사진에서 소련 훈장과 소련군들을 삭제하고 김일성 혼자서 주석단에서 환호를 받으며 연설하는 듯 조작했다. 그럼에도 북한에서 상식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당국이 공개한 사실만으로도 이런 의문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평양에 들어온 지 20일도 안 된 김일성이 개선 연설도 하기 전에 익명으로 노동당을 창건한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하지만 북한에서 ‘수령님의 혁명 역사’에 감히 의문을 제기하거나 토를 다는 일은 정치범이 되는 일이기에 누구도 말할 수는 없다.그렇게 해가 가면서 역사는 왜곡되고 굳어졌다. 북한 주민들은 출처도 없는 ‘참다운 생일 10월 10일’을 위해 올해 내내 성과를 내라는 압박을 받으며 힘들게 살아왔다는 것을 알기나 할까.● 피로 쓰는 ‘조선노동당사(堂史)’ 노동당의 역사는 피의 역사이기도 하다. 반세기 넘게 왜곡된 역사 교육을 받은 북한 사람들은 노동당을 김일성이 창건해 빨치산 부하들과 함께 이끌어 온 역사라고 인식한다.북한 주장대로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이 노동당의 뿌리라 인정한다고 쳐도, 그 분국의 초대 책임비서가 김용범이란 사람이었다는 것을 아는 북한 주민은 거의 없다.김용범은 김일성보다 10세 많은 1902년생으로 소련 모스크바 유학생 출신이다. 일제강점기 평안도에 잠복해 공산주의 활동을 벌이다 몇 차례 구속되는 등 북한에선 손 꼽히는 거물급 공산주의자였다. 하지만 북한에 진주한 북한군이 대놓고 김일성을 밀어 주면서 그는 두 달 뒤 제2비서로 밀려났고, 1947년 9월에 위암으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조선공산당 당수였던 박헌영도 조용히 처형됐다.1945년 10월 13일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이 결성된 뒤 회의 참가자들은 박헌영에게 이런 축전을 보낸다.“소련 붉은 군대의 영웅적 투쟁에 의해 유리한 조건이 실현된 조선에서 박헌영 동지의 정당한 노선에 따라 북조선5도 연합회의를 개최하게 된데 대해 전 세계 무산계급의 조국인 소련방 스탈린 대원수에게 감사하며 동시에 조선무산계급의 영도자 박헌영 동지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의 수령 스탈린 대원수 만세, 조선의 무산계급의 수령이신 박헌영 동지 만세. 1945년 10월 13일.”공산주의자들에게 1945년 10월 당시의 수령은 박헌영뿐이었던 것이다.6·25전쟁 이전에 열린 북한노동당 회의 참석자 명단을 보면, 오늘날 북한 주민들이 이름을 알만한 빨치산 출신은 10명 중 1명도 되지 않는다. 반대로 말하면 이후 10명 중 9명이 처형돼 이름도 없이 사라졌다는 뜻이다.어디 그뿐인가. 북한 노동당 간부들에 대한 숙청은 현재진행형이다. 김정은이 격노할 때마다 많은 간부가 죽어 간다.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채 사라진 간부가 얼마나 많은지 누구도 알 수 없다.이런 노동당 역사를 북한은 ‘승리와 영광으로 아로새겨진 자랑스러운 역사’라고 자랑하고 있다. 북한이 말하는 승리의 역사는 곧 처형의 역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패자는 죽어 이름도 남기지 못하는 역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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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 노동당 영화과가 선택한 인재, 따뜻한 남쪽 나라 감독이 되다[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올해 7월 서울 강서구 남북통합문화센터 대강당에선 연극 ‘백학’이 초연됐다. 연극은 6·25전쟁이 끝날 무렵 북한 인민군 포로가 돼 아오지 탄광에 끌려간 국군 소위와 하사의 삶을 그렸다. 70대 고령이 된 두 전우는 조국으로 귀환하기 위해 탈북을 시도하다 적발돼 목숨을 잃는다.“내 고향 남쪽으로 가고 싶다. 내 꿈은 언제 이루어지나.”백학은 시베리아 동토에 머물다가 우리나라에서 월동하는 겨울 철새 두루미를 말한다. 북한 최북단에서 따뜻한 남쪽 고향으로 오고 싶어 하는 국군 포로들의 희망과 좌절이 공연 내내 관객 가슴을 흔들었다.백학 극본과 연출은 탈북민 출신 오진하 감독이 맡았다. 연극엔 그가 살아온 인생이 녹아 있었다. 아니, 오 씨가 살아온 길은 연극보다 더 극적이었다.● 인민군에 끌려간 세브란스 학생오 씨는 1964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남쪽에서 북으로 끌려온 의용군 출신이었다.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부친은 서울에서 세브란스의과대학에 막 입학한 상태였다. 부친의 형 역시 세브란스의대 3학년이었다.형제의 아버지, 즉 오 씨의 할아버지는 경북 영양군 부자였다. 부친 말에 따르면 영양군 감천리 높은 산에서 내려다보이는 땅 대부분이 할아버지 것이었다. 그래서 두 아들을 서울에 유학 보낼 수 있었다.하지만 전쟁이 모든 것을 바꾸었다. 인민군이 전쟁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하자 형제는 피난 갈 새도 없었다. 당시 학교 교수들은 군 트럭에 실려 북한으로, 학생들은 강원도 철원으로 끌려갔다. 철원에서 3일 동안 총 쏘는 법만 가르친 뒤 의용군이라며 전선으로 내몰았다.부친은 견장도 없는 군복을 입고 소속 대대를 열심히 따라갔는데, 대전에 도착도 하기 전에 대대가 전멸했다. 그날 부친이 식당 근무에 뽑혀 나무하러 가느라 숙영지를 떠났을 때 국군이 습격했다. 살아남은 사람은 2명뿐이었다.부대가 없어지자 부친은 고향으로 도망갔다. 하지만 가는 도중 산에서 또 인민군에 잡혀 1사단으로 끌려갔다. 북한군 1사단은 다부동 전투에서 백선엽 장군이 이끈 국군 1사단과 싸워 거의 궤멸당한 부대다. 부친은 전투도 해 보기 전에 미군 전투기 기총소사에 맞아 다리를 크게 다쳤다.부친은 차에 실려 중국 단동에 있는 북한군 중앙병원으로까이송됐다. 오랜 입원 생활 끝에 얻은 것도 있었다. 병원 간호사였던 모친과 사랑을 키운 것이다.전쟁이 거의 끝날 무렵에야 퇴원했다. 세브란스의대의 권위는 북한에서도 인정받아 부친은 김일성대에 입학하게 됐다. 낮에는 건설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대학에서 공부하다 소련 유학생으로 뽑혔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소련군 태평양함대에 파견돼 군함 기관실 일을 배웠다. 북한으로 돌아온 부친은 원산 제1함대가 조성될 때 기관 담당 기술자로 발탁됐다.1959년 일본 니가타항에서 재일 한인들이 처음으로 귀국할 때 동원된 선박은 소련 군함을 개조한 화물선이었는데, 부친은 그 배에서 소련 군인들과 일했다. 하지만 소련의 신원 검증은 엄격했다. 부친은 고향이 남쪽이란 이유로 곧 평양으로 되돌려 보내졌다. 부친의 다음 일은 새로 건설된 평양종합방직공장 기술자였다. 오 씨가 태어났을 때 부친은 공장 노동지도원이었고, 모친은 공장 탁아소 보육원이었다.함께 인민군에 끌려간 부친의 형도 전쟁에서 살아남아 유학생으로 선발돼 독일에서 의학을 배웠다. 그는 은퇴할 때까지 조선노동당 군사위원회 직속 818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했다.818연구소는 화학과 생물 특히 세균을 전문 연구했는데, 외형상으론 주사 약품을 개발한다고 했다. 군사위원회에 소속된 진짜 이유는 관련 분야 무기화 연구로 추정된다. 오 씨는 큰아버지가 생체 실험 관련 독일어 서적을 늘 들여다봤고, 가끔 부친과 만났을 때도 생체 실험 관련된 끔찍한 이야기들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연구소 연구원 대부분은 과거 일본이나 한국, 외국에서 공부했거나 고향이 남쪽이어서 출신 성분이 나쁜 수재들이었다. 군 계급은 소좌부터 대좌까지였는데, 평양 시내에서 경무부대원들이 깍듯이 인사했던 것으로 봐서 특별한 신분증이 있었던 것 같았다.● 수상했던 아버지의 삶오 씨가 태어난 평양 선교구역은 거대한 방직공장 마을이었다. 공장은 직원만 1만2000명이었고 면적은 67만㎡, 건물 넓이는 15만㎡에 이르렀다. 산학협동 시범 기업체로서 자체 기술기능공학교와 공장대학도 운영했다. 공장 직원 자식들은 커서 대개 부모를 이어 방직공장 노동자로 일하라고 권유받았다.부친은 공장 법규 지도원 겸 공장 소속 공산대학 철학 강좌장을 겸하고 있었다. 오 씨 눈에 비친 부친은 이상한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김일성 사상으로 무장했어야 마땅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공책에 뭔가 계속 적었다. 그러다간 어느 날 내용이 적힌 종이를 쭉쭉 찢어 아궁이에 불태웠다.부친이 뭘 적는지 궁금했던 오 씨는 가끔 공책을 훔쳐봤는데, 어린 그가 봐도 체제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반동 사상’임이 분명했다. 어느 날 부친은 수기를 쓰기 시작했다. 내용을 훔쳐보니 전쟁 때 누가 죽었다는 기록밖에 없었다. 이런 수기나 일기는 가택수색을 당했을 때 죽음을 부르는 증거이기 때문에 부친은 숨겨 놓지 않고 불태워 버렸다.아버지와 어울리는 사람도 전부 6과 대상이었다. 6과는 남쪽 출신과 일본 귀국자를 맡아 관리하는 부서를 말한다. 이들은 모여 술을 마시다가 북한 체제를 비판했고 “왜정 때도 이보다 나았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체제 비판적인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서로 신고하는 사람도 없었다. 남쪽 출신은 남쪽 출신끼리 사돈을 맺었다. 출신 성분이 나쁜 ‘까치’끼리 어울린 것이다.평생 고향을 그리던 부친은 1997년 62세로 세상을 떠났다. 부친의 형도 2년 앞선 1995년에 63세로 사망했다. 오 씨는 부친과 큰아버지가 ‘고난의 행군’ 때 영양 공급을 제대로 받지 못한 탓에 오래 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수륙양용 장갑차를 몰다1980년에 만 16세가 된 오 씨는 평양산업기술고등중학교 졸업반이 됐다. 8월 졸업을 앞두고 3월 어느 날 수업 중에 불러내더니 입대하라고 했다.그가 배속된 부대는 113중도하여단이었다. 여단 산하 선견도하(상륙작전 또는 침투작전 시 먼저 투입되는 수륙양용차)와 개척 공병, 진지 공병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부대 중 오 씨는 ‘까연대’ 소속이었다. ‘까’는 러시아말로 K를 의미한다. 까연대는 소련제 K-61 수륙양용장갑차를 운용했다. 1개 소대원이 서서 모두 탈 수 있는 이 장갑차의 자체 방어 능력은 형편없어 5.56mm탄도 관통할 정도였다.그래도 북한에선 귀하고 비싼 장비를 다루다 보니 이 부대에서는 신병 훈련도 1년이나 했다. 다행인 점은 주둔지가 대동강 옆 평양시 대성구역 안악동에 있다는 것이었다. 집이 가까우니 심리적으로 안정이 됐다. 오 씨는 신병 훈련 6개월째에 우수한 능력을 인정받아 수륙양용장갑차 운전병 양성소에 파견됐다. 양성소 학제는 1년이었다.오 씨가 양성소에서 부대를 관찰하니 ‘기본 중대’인 까연대 7대대 1중대에 가야 입당도, 승진도 빨랐다. 기본 중대는 김일성이 현지 시찰했다는 중대여서 대원 선발도 까다로워 양성소 최고 성적을 받아야 했다. 최고만 엄선한 중대라 상부에서 훈련 판정을 나오면 기본 중대가 출동했다.기본 중대에 뽑히는 것을 목표로 한 오 씨는 잠을 자지 않고 공부하며 훈련했다. 양성소를 졸업할 때 동기 217명 중 2명만 선발하는 기본 중대 대원이 됐다.그가 부운전수로 발령받은 115호 장갑차는 1968년 평양 대규모 수해 때 김일성이 타고 시내를 순찰한 차량이었다. 일명 현지 지도 차였다. ‘김일성 사적물’이기 때문에 늘 세워 두고 정비만 했다. 도하 훈련 때는 다른 차량을 운전했다.115호 장갑차 운전병은 엄청난 영예였다. 다른 부대에서 참관을 오면 오 씨가 차량의 ‘혁명역사’를 해설해 주었다. 보상도 확실했다. 제대할 때 중앙대학 추천을 받았다. 오 씨 앞길은 탄탄대로인 듯했다. 하지만 운명은 생각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예성강 도하훈련 우승자1985년 8월 15일, 부대 에이스로 인정받고 분대장으로 승진한 그는 장갑차를 몰고 광복절 기념 대규모 열병식에 참가했다. 김일성광장을 통과하며 주석단을 쳐다보니 김정일이 총참모장인 오극렬 귀에 뭐라고 열심히 말하고 있었다.주석단과 시내를 통과해 부대로 복귀하려는데 갑자기 지시가 떨어졌다. 장갑차를 몰고 황해도 배천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짐도 챙기지 못한 채 배천에 가 보니, 그의 부대는 4군단 직속으로 소속이 바뀌어 있었다.김정일이 수륙양용장갑차 부대를 보고, 저 부대는 전쟁이 나면 제일 먼저 남진해야 하는 부대이니 평양에 두지 말고 최전방에 보내라고 지시했던 것이다.새로운 주둔지는 허허벌판이었다. 강 건너에 한국 해병대 2사단이 있었다. 북한은 6·25전쟁 때 이곳을 통해 북한군 최정예 부대 방호산의 6사를 도하시켰다.새 병영을 짓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4군단 소속이 되면서 새로 파견 나온 중대장과 정치지도원이 수륙양용장갑차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것이었다. 당시 중대 초급단체위원장을 겸했던 그는 어느 날 군단에 올라갔을 때 군단장을 직접 찾아갔다.“새로 부임한 군관들이 부교 도하부대 출신이라서 수륙양용차 같은 중장비에 대한 전문성이 없어 전투력을 발휘할 수 없다. 수륙차 전문 지휘관을 보내주면 좋겠다”고 하자 중장인 군단장이 호탕하게 웃으며 “부대 전투력을 생각하는 기특한 분대장이구먼” 하더니 문제의 지휘관 몇 명을 변경 배치하는 조처를 해 주었다. 옆에 있던 군단 정치위원도 “앞으로 문제가 있으면 전화를 직접 하라”며 격려했다.이듬해인 1986년 가을 예성강에서 도하작전 훈련이 있었다. 각종 악조건을 가정하고 누가 가장 빨리 돌파하는지 시간을 쟀는데 오 씨가 운전한 장갑차가 1등을 했다.군단 정치위원이 그를 알아보더니 옆에 있던 참모장에게 “이 동무에게 일주일 휴가를 주라”고 지시했다. 당시 북한군은 전군에서 휴가 제도를 없애고 사망 또는 결혼식만 3일씩 휴가를 줄 때였다. 엄청난 특혜를 받은 오 씨는 모처럼 평양 집에 와서 휴식을 취했다.● 눈앞에서 본 수백 명의 죽음군단 정치위원 눈에 든 뒤로 군 생활은 다시 잘 풀렸다. 7년 만에 노동당에 입당하게 됐는데 입당 보증인이 군단 정치위원이었다. 입대 8년 차엔 사관장이 됐다. 사관장은 중대에 한 명만 있는 계급으로 하사관 중 제일 높았다.사관장 시절이던 1988년 2월 평생 잊지 못할 일을 경험했다. 어느 날 그에게 평양-개성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 후방 지원 물자(주민들이 군대에 지원하는 식품, 의류품, 노동보호물자)를 갖다 주라는 지시가 떨어졌다.평양-개성 고속도로는 1987년 건설을 시작했는데 군인들이 대거 동원됐다. 그는 차에 물자를 싣고 공사 최대 난관이던 금천군 다리 건설 현장에 갔다. 무지개처럼 생긴 긴 아치형 교량이었다.다리 아래 늘어선 군인 천막에 도착하니 물자를 받을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맨 끝의 식당으로 쓰는 천막에 가 보니 막 차려 놓은 수백 명분 밥그릇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취사병들이 밥을 지어 놓고, 200m 정도 떨어진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부대원들을 데리러 간 듯싶었다.기다리려고 담배를 꺼내 피우는데 갑자기 엄청난 아우성이 들렸다. 놀라서 고개를 쳐드니 짓고 있던 교량이 통째로 무너져 내렸다. 공사 기간을 맞춘다며 겨울에 시멘트가 굳기도 전에 또 몰탈을 붓다 벌어진 사고였다. 다리 위에 바글바글하던 군인들도 추락했다. 몰탈도 함께 흘러내려 시신 찾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주변에 있던 군인 100여 명이 맨손으로 몰탈을 헤치며 시신을 찾기 시작했다. 들것들이 오는 것을 보니 형체 없는 살점들만 실려 있었다. 한참 지나 구급차들이 왔다. 오 씨는 다리가 후들거려 주저앉아 버렸다. 비통한 울부짖음으로 가득한 현장에 차마 갈 생각을 못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다른 막사로 가서 부대에 전화했다. 당장 돌아오라고 했다.얼마나 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개 대대쯤 몰살당한 것으로 추정됐다. 그는 지금도 김이 올라오던 그 알루미늄 밥그릇들을 잊을 수가 없다.● 부유했던 운전기사의 삶 어느덧 10년이 흘렀다. 1990년 10월, 제대를 앞두고 김일성대 생물학부에 추천을 받았다. 여단 전체에 1장만 할당되는 김일성대 추천권을 그가 받은 것이다. 추천을 받는다고 입학하는 것은 아니었다. 김일성대 시험을 봤지만 떨어졌다. 김일성대 시험 합격은 부대에서 가장 우수한 군인이거나 공부를 잘하는 것과는 크게 관련이 없다. 고위 간부 자식이거나 김 씨 일가 호위병 출신은 빈 시험지를 내도 붙지만, 일반 군단 출신에 남조선 혈통인 그는 김일성대에 입학할 만한 좋은 조건이 아니었다.제대하고 집에 오니 대외경제사업부 해외물자공급소장 운전사로 발령이 났다. 집에서 없는 인맥을 다 동원해 힘써 준 덕분이었다.공급소는 노동당 직속 의사당재정경리부 지시를 받아 해외에서 물자를 사 오거나, 해외 공관에 각종 물자를 보내 주는 일을 담당했다. 가령 김정일의 특각(별장)을 지을 때 중동 최고 카펫, 유럽 호화 샹들리에 등을 구입하는 것이다.사치품이라 해서 마음대로 수입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중앙에서 사람이 내려와 사진을 내밀며 “이것이 장군님이 추천한 것”이라고 하면, 전 세계를 돌며 꼭 그 물건을 찾아내야 했다. 이렇게 달러를 주무르는 부서 책임자의 운전사는 누구나 부러워할 자리였다.하지만 소장 운전사 자리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군에서 중대를 인솔하고 지시하다가, 갑자기 간부 발바닥을 핥아야 하는 일이 내킬 리가 만무했다. 공급소 직원들은 대개 평양외대나 국제관계대 등을 졸업한, 고위 간부 집 자식들이었다. 이들은 걸핏하면 외국 출장을 다니고 평양에서 제일 비싼 외화식당만 찾아다녔다. 공급소에 점심을 싸 오는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점심시간이 되면 직원들이 뿔뿔이 차를 타고 외화식당에 가서 먹고 오고, 퇴근 후에도 돈 있는 사람끼리 또 외화식당에 가는 것을 보니 자신의 처지가 초라해 보였다.반년쯤 소장 운전사를 하다가 이직을 선택했다. 이번에 얻은 직업은 지방공업부 일용공업총국 운전기사였다. 알고 보니 최고의 직장이었다.총국은 전국의 화장품이나 신발 공장 같은 생필품 공장에 자재를 공급했다. 지방 공장들에는 갑 중의 갑으로 행세했다. 전국의 공장 지배인들이 자재를 받겠다고 총국 앞에 길게 줄을 섰다. 빈손으로 오지 않고 돼지를 몇 마리씩 싣고 오거나 담배, 술 같은 뇌물을 잔뜩 준비해 왔다.총국 운전기사로 있는 동안 육류나 술 같은 것은 늘 넘쳐났다. 2년 정도 어느 간부 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 하지만 1993년 말 충격적인 사건을 목격하고 이 직장도 그만두었다.● 공포의 숙청 광풍1993년 12월, 그는 평양 간리역에 가서 화물열차에 실린 자재를 싣고 오라는 지시를 받았다.화물차 여러 대가 역 앞에 늘어서 화물열차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견장도 달지 않은 군복을 입은 건장한 남성 30~40명이 오더니 “당장 대가리 박아”라고 고함을 질렀다. 동시에 앞에서 강력한 서치라이트가 켜져 눈이 부셔 앞을 볼 수가 없었다.‘이게 뭐지’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머리를 땅에 박고 있는데 화물열차가 들어왔다. 차들을 비추던 불빛이 잠시 화차로 옮겨간 틈을 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엿보았다. 화차에서 머리에 마대 같은 것을 쓴 20명 가까운 남성들이 꽁꽁 묶여 짐짝처럼 던져지고 있었다. 옷을 보니 풍채 좋은 고위 군관들이 분명해 보였지만 신발도 신지 않았다. 오 씨를 감시하던 남성들이 우르르 몰려가 그들을 차에 싣고 사라졌다. 훗날 들으니 그들은 소련 유학파 고위 군관을 대규모로 숙청한 ‘프룬제 군사대학 사건’에 휘말려 평양에 송환된 군관들이었다. 하지만 당시 아무것도 모르던 그는 공포에 질렸다. 물자를 받으려 수없이 와야 했던 간리역이 갑자기 지옥처럼 느껴졌다. 무자비하게 겁을 주며 뒤를 보지 말라고 명령하던 인간들 모습이 자꾸 어른거리고 그들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이곳 아니면 벌어먹을 데 없겠나’하는 생각에 다시 직업을 옮겼다. 이번에는 중앙당 38호실 소속 고려봉사지도국 택시 운전기사였다. 고려호텔과 양각도호텔 앞에 택시를 세워 두고 손님을 태우는 일이었다. 하지만 북한에서 택시를 이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 사실상 차를 세워 놓고 빈둥거리는 일이 잦았다.일을 하면서도 대학에 가고 싶다는 소원을 버리진 않았다. 다른 대학을 갈 수도 있었지만 그가 가고 싶은 대학은 평양영화연극대학 연출과 하나뿐이었다.오 씨는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고 공연하는 것을 즐겨 했다. 군에서도 방송 원고를 많이 썼고, 충성의 노래 모임을 할 때면 늘 중대를 우승시켰다. 장래 희망도 연출가였다. 꿈을 놓지 않으니 기회가 찾아왔다. 북한은 군 사관장 출신은 특별히 당에서 관리한다. 인원 100명이 넘는 중대에서 최고로 인정받은 인재였기 때문이다.1994년 봄, 당 비서가 그를 불렀다. “중앙당 선전선동부 영화지도과에서 동무를 평양영화연극대학에 입학을 추천했으니 다음 주에 대학에 가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이런 행운이 찾아왔는지 어리둥절했다.군에 있을 때 인민군 신문사 기자와 인터뷰한 덕분이었음을 나중에 알았다. 그는 당시 “꼭 영화연극대학에 가서 연출을 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는데, 노동당 선전선동부 영화지도과에서 그 인터뷰를 봤는지 “이 사람이 쓸 만해 보이는데 공부를 한번 시켜 보자”고 결정 난 것이다. 대학 입학이 결정된 뒤 위에서 시킨 대로 “당의 배려로 남조선 출신 자녀도 차별 없이 최고의 기회를 받는다”는 감사의 말을 수없이 하고 다녔다.● 탈북을 꿈꾸다1994년 4월 영화연극대학 첫 개교일이 왔다. 학교가 전투 동원령을 하달 받은 듯 어수선했다. 교실에도 들여보내지 않고 입학생들을 모아 놓더니 소대(반)별로 벼 뿌리를 캐 오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식량이 부족해 벼 뿌리를 대용 식량으로 사용한다고 했다. 기가 막혔다.소대에선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며 무엇을 가져올 수 있을지 개인별로 물었다. 누구는 석탄을 갖고 오기로 했고, 누구는 여자 기숙사 천장 수리용 목재를 갖고 오기로 했고, 누구는 휘발유를 가져오기로 했다. 오 씨는 목재에 칠할 래커와 시너를 가져오겠다고 했다.가만히 보니 아무것도 가져올 능력이 없는 사람은 대학 청소를 하거나 농촌 동원에 나가야 했고, 갖고 온다고 하는 사람은 2개월 동안 놀게 했다. 그는 농촌 동원 기간이 끝날 때까지 놀다가 래커와 시너 한 통씩을 갖고 올 생각이었다. 선배들에게 물어보니 물자는 구하는 놈만 구해 올 뿐, 갖고 가지 않아도 처벌은 없다고 했다.그렇게 대학에 이름만 걸어 놓고 집에서 놀았다. 5월이 지나고 6월에 들어서니 다들 당장 남북통일이 될 듯한 분위기에 취해 있었다. 어디 가나 흥분제 먹은 사람들처럼 ‘곧 수령님께서 김영삼과 회담하고 통일을 선언한다’고 수군거렸다. 동시에 불안한 소문도 같이 돌았다. 여기저기서 체포되어 사라진 사람이 많아졌다.동네 술친구들도 갑자기 하나둘 없어지기 시작했다. 오 씨는 제대 후 동네 30대 초반 친구들과 자주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다 보면 체제에 대한 불만이 오갔다. 그런데 보위부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이들을 비밀리에 체포하기 시작했다.가까운 사이인 제대 군관 형이 먼저 사라졌다. 보위부 소좌인 친구에게 달려가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봐 달라고 하니 그도 침울한 표정으로 “나도 오늘내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며칠 뒤 소좌도 사라졌다. 그의 부인에 따르면 출근길에 군관 3명에게 계단에서 연행됐다는 것이다. 나중에 들었지만, 두 사람은 혹독한 고문을 받고 특별재판소에 끌려가 처형됐다고 한다.가까운 주변 사람이 하나둘 잡혀 가니 ‘나는 언제 끌려갈까’ 불안해졌다. 연출 공부고 뭐고 두려워서 견딜 수 없었다.‘안 되겠다. 하루빨리 북한을 떠나야겠다.’그는 지도를 구입했다. 두만강으로 갈까, 압록강으로 갈까. 중국에 넘어가면 어딜 갈까. 당시는 본격적인 탈북도 이뤄지지 않던 때라 한국에 갈 생각까진 못했다.대학에선 왜 나타나지 않느냐고 찾기 시작했다. 그는 시간을 벌기 위해 평양고려병원에 입원했다. 대학에 가지 않을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병상에 누워서도 도망갈 생각뿐이었다.평양고려병원은 백이 좋아야 입원하는 곳이었다. 같은 병실에 입원한 노동당 재정경제부 부부장 아들과 친해져서 군인들이 경비를 서는 그의 집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 집이 궁궐이나 다름이 없었다. 김정일이 하사한 선물이 가득했다. 사우나가 있는 집은 처음 봤다. 거실 간식 바구니엔 외화 다발이 가득했는데 필요한 만큼 지갑에 넣고 나가면 다시 돈이 바구니에 채워지는 식이었다.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부부장 아들도 갖고 싶은 것이 있었다. 일본 미야타 자전거였다. 당시 평양에선 구할 수 없었다. 탈북 경비가 필요하던 오 씨는 만경봉호가 입항하는 원산항에 있던 친구에게 부탁했다. 겨우 미야타 중고 자전거를 200달러에 구입했다. 부부장 아들은 수고했다며 1000달러를 주었다. 탈북 자금이 마련됐다. 언제 도망갈지만 결정하면 됐다.● 마침내 한국에 도착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7월 9일 정오에 김일성 사망이 발표된 것. 온 나라가 눈물바다가 됐다. 병원 원장이 오더니 “수령님이 돌아가셨는데 편하게 병실에 누워 있을 수는 없다”며 당장 퇴원해 소속 기관으로 돌아가라고 했다.오 씨는 10일에 퇴원했다. 15일쯤 평양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동안 인연을 쌓았던 사람들에게 인사나 하자는 생각으로 찾아다니다가, 보위부가 사람들을 체포할 형편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김일성 죽음 직전에 보위부 내부에선 숙청 광풍이 불고 있었다.김일성이 죽기 몇 년 전부터 호위사령부와 보위부, 중앙당 사람들은 김일성을 ‘아바이’라고 불렀다. 이는 김정일에게만 충성한다는 것을 공공연히 과시하는 것이었다.1994년 7월 25일 평양에서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이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하기로 확정되자, 김정일은 더욱 불안해졌다. 비밀경찰조직 보위부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충성할지 떠봐야겠다고 생각한 김정일은 보위부 간부들에게 통일관을 적어내게 했다.눈치 없이 배운 대로 “수령님 대에 꼭 조국을 통일하겠습니다”라고 적어낸 간부들은 얼마 뒤 모두 군복을 벗어야 했다. 김정일이 “이런 놈은 내 사람이 아니다”라고 했던 것이다.숙청 바람은 김일성이 죽은 날부터 더 심해졌다. 김일성 동상 앞에서 “수령님이 서거하시니 우린 어떻게 합니까”라고 울부짖은 간부는 바로 옷을 벗었다. “비록 수령님은 서거하셨지만, 우리에겐 김정일 장군님이 있습니다”라고 해야 살 수 있었다. 중앙당 조직부가 책임지고, 보위사령부를 칼잡이 삼아 보위부를 감시하고 잡아갔다. 보위부가 제 코도 닦지 못할 상황이 되니 탈북하려던 마음을 고쳐먹게 됐다.애도 기간 평양 시민은 출근하면 직장별로 조문하고 퇴근해선 가족 단위로 조문하고 주말에는 당세포 단위로 조문했다. 눈을 뜨면 조문했다.탈북을 꿈꾸느라 몇 달 동안 대학에 가지 않으니 퇴학 처리가 돼 있었다. 2000년 말 탈북을 다시 결심하고 중국으로 갈 때까지 오 씨는 평북에서 군(郡)당학교를 다녔고, 졸업 뒤엔 지방공장 체험 등을 하며 지냈다. 중국에선 3년 가까이 숨어 살며 한국행을 모색했다. 2003년 9월 제3국을 거쳐 한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그는 ‘평양에선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한국에서 연출 공부를 다시 해서 꼭 영화, 연극 연출자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 대학로 무명 배우로 시작조사를 마치고 2003년 12월 서울 강서구의 한 임대아파트에 짐을 풀었다. 이제부터 어떤 삶을 살아갈지는 오로지 그의 결심에 달렸다. 연출을 하고 싶고 연출가로 이름을 남기고 죽고 싶었지만 나이 40세에 아무런 경력도 없이 관련 분야에 뛰어들기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먹고 살려면 돈도 벌어야 했다.그는 한 시사주간지 기자로 정착의 첫발을 뗐고, 모 대북 방송 리포터 활동도 했다. 그런데 아무리 가명을 써도 어떻게 그의 신분을 알았는지 북한에서 협박 문자가 여러 번 날아왔다. 북에 남은 가족이 걱정돼 기자 일은 2006년까지 하다 그만두었다. 그의 목표는 연출이지 기자는 아니었다.직장을 다니며 짬짬이 영화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공부를 하고 나니 ‘자본주의 제작 현장’을 경험해 보고 싶었다. 참관이 아닌 제작자로 일하고 싶었는데, 2004년 10월 지인의 도움으로 기회가 찾아왔다.그는 북한 인권을 다룬 단편 독립영화 ‘너는 내 것이라’를 만들었다. 원작을 쓰고 제작까지 책임졌다. 낯선 전문 용어가 어려워 선배 감독들을 따라다니며 조언을 구하면서 제작팀을 꾸렸다.꼬박 2개월 동안 첫 영화를 만들었다. 이때 얻은 경험이 이후 그가 제작자, 연출자, 극작가의 길을 걷는 데 용기를 북돋아 주는 밑천이 됐다. 영화를 만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돈을 벌 수는 없었다.‘영화나 연극을 하려면 범의 굴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2007년부터 대학로에 진출했다. 무명배우로 시작해 10년 넘게 작은 연극의 단역, 주연, 미니 드라마 단역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주말이나 연휴엔 대형 트럭 운전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이어 갔다.열심히 살다 보니 기회가 찾아왔다. 2012년 9월 김나윤 희원 극단 대표가 그를 찾아왔다. 그와 많은 얘기를 하며 재 보는 듯하더니 창작 뮤지컬 ‘언틸 더 데이’ 각색과 연출을 맡아 달라고 했다. 대본을 보니 수억 원이 투자되는 대형 상업 뮤지컬이었다.오 씨는 뮤지컬 성공에 모든 에너지를 쏟았다. 뮤지컬은 그해 10월부터 12월까지 공연됐는데 매회 350석 객석이 가득 찼다. 뮤지컬 성공과 더불어 오 씨 이름이 언론과 방송에 조명되기 시작했다. 연출가로서 공식 데뷔를 한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선뜻 뮤지컬을 맡겨 준 김 대표에게 언제나 감사하며 살고 있다. 뮤지컬을 하면서 얻은 것도 많았지만 부족한 점도 많이 깨달았다.‘한국에서 뮤지컬을 하려면 한국만의 정서를 익히고 전문 지식도 많이 필요하구나.’전문적인 공부를 시작하려 했지만 어느덧 50세였다. 2014년, 고민 끝에 대학에 입학했다. 공연예술 학사 과정과 영상미디어학 석사 과정을 연이어 마쳤다.한편으로 북한에서 왔다는 독특한 경력도 적극 활용했다. 2010년부터 그를 찾아와 북한말의 극적 화법을 배운 배우만 90명이 넘는다. 이들은 영화 드라마 뮤지컬 연극 등에서 활약하고 있는데, 스타도 여럿 있다. 2019년부터는 전국 말모이 연극제 이북 작품 예술감독으로 일하고 있다.● 마지막까지 불태울 열정오 씨는 한국에 도착해 20년 넘게 한 길만 달려왔다. 탈북할 때 품었던 연출의 꿈은 입국 10년 안에 이뤘고, 15년쯤 지났을 땐 기획과 제작 경영 그리고 극작도 겸할 수 있게 됐다. 이젠 영화, 연극, 뮤지컬은 물론 연주회나 방송 컨텐츠까지 기획하고 각본을 쓰며 연출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2020년 56세 늦은 나이에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그동안의 활동을 인정받아 새로 건립된 통일부 남북통합문화센터에서 문화콘텐츠 개발 확산 업무를 맡게 된 것이다. 처음엔 매년 연극, 뮤지컬, 단편 드라마를 한 편씩 만들 생각이었지만 지난해부터 욕심이 생겼다. ‘하나를 만들어도 국내 최고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자. 마지막을 불태우자’지난해 60세가 되어 한국에 입국하던 39세 때의 열정으로 되돌아간 그가 만든 작품은 탈북민들의 한국 정착 과정을 담은 ‘열 번째 봄’이었다. 지가을엔 남북연합 음악회인 가을음악회 기획, 제작, 연출을 맡아 부산에서 공연했다.올해도 연극 ‘백학’을 7월에 초연했다. 그가 대본을 쓰고 연출을 맡은 백학엔 그의 삶도 녹아 있다. 이달엔 경기 김포에서 가을음악회를 연다. 열정은 식지 않았지만 지나가는 세월은 야속하다. 올해 그는 61세가 됐다. 은퇴할 나이지만 여전히 문화콘텐츠를 개발하는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언제까지 일할지는 알 수 없다. 누군가 능력 있는 후배가 와서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이어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통일부 남북통합문화센터에서 일한 기간이 길진 않지만 아쉬움도 많다.“제가 여기서 일하는 5년 동안 대통령이 세 번 바뀌었습니다. 남북통일 공감문화 관련 정책을 수행하는 사람으로서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많이 혼란스럽습니다.”공무원 조직에서 일하는 예술가는 많은 제약을 받는다. 현실과 법의 충돌을 가장 피부로 느끼는 사람도 다름 아닌 그다. 한국 국민은 마음만 먹으면 유튜브나 인터넷으로 북한 대중음악을 얼마든지 접할 수 있다. 하지만 북한 콘텐츠를 상영하면 국가보안법에 위반된다. 북한 영화를 보여 주면서 북한 실상을 설명하고 싶지만, 이를 승인할 권한을 가진 공무원은 없다. 그렇다고 막는 사람도 없다. “네가 알아서 하고 책임도 져라”는 것이 공무원 사회 풍토다. 법을 위반하면 잡혀 가는 현실을 감내하고 영화를 상영할 순 없다. 연출가는 예술적으로 접근하고 싶은데, 이것이 행정규제와 부딪치면 이길 수 없다. 배가 산으로 가다 보니 현실과 동떨어진 결과물이 나올 때도 있다.그가 남북통합문화센터에서 일한 5년은 극과 극을 오가는 대북정책 속에서 누구도 말해 주지 않는 해결책을 찾느라 진이 빠진 기간이기도 했다. 퇴직할 시간은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은퇴할 생각이 없다. 은퇴는 곧 죽음이다. 자판을 두드릴 힘이 남아 있는 한 계속 작품을 만들 생각이다. 전문 예술인이 되고 싶어 하는 탈북민을 키워 주고도 싶다.“한국에 와서 20년 넘게 공연예술 계통에 몸을 담지 않았습니까. 배웠던 것들, 체험했던 경험 들을 다른 탈북민들에게 나눠 주고 싶습니다.”그가 만든 연극에는 탈북민 연기자들이 늘 출연한다. 가수도 될 수 있으면 탈북 가수를 쓰려고 한다. 재능 있는 탈북민이 있다면 하나라도 더 기회를 주고 싶은 마음이다. 배우, 가수, 성악 등 2명씩 탈북민 예술가를 데뷔시키고 싶은 것이 지금 그의 목표다. 그는 역사 앞에 평가받는 심정으로 임한다.“언제가 될 진 모르겠지만 통일이 된 뒤, 꿈을 찾아 따뜻한 남쪽 나라로 온 오진하가 이렇게 꿈의 흔적을 남기고 갔다고 기억됐으면 좋겠습니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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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 구축함에 붙은 방탕하고 잔인한 이름들[주성하의 ‘北토크’]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 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북한은 올해 두 척의 5000톤급 구축함을 진수했습니다. 4월 25일 남포조선소에서 ‘최현호’가 진수식을 가졌고, 6월 12일엔 나진조선소에서 두 번째 구축함 ‘강건호’가 진수했습니다. 강건호는 앞선 5월 21일 함북 조선조선소에서 김정은이 참가한 진수식 도중 넘어져 화제가 됐던 군함입니다.이들 구축함들이 어느 정도의 무장을 하고, 어떤 성능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직 자력 항해를 했다는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습니다.그럼에도 북한은 5000톤급이나 되는 군함을 자체로 만들었다는 것을 대내외에 널리 자랑하고 싶은가 봅니다. 실패한 강건호 진수식을 포함해 모두 세 차례의 진수식에 김정은이 참가해 밤늦게까지 대대적인 경축 공연을 펼쳤습니다. 한국은 구축함이나 잠수함에 역사적 인물이나 국가에 공헌한 인물의 이름을 붙입니다. 하지만 북한은 김일성과 항일투쟁을 함께 했다는 사람들의 이름을 붙이기로 한 것 같습니다. 김정은은 올해를 시작으로 매년 같은 배수량의 구축함을 두 척씩 만들겠다고 선언했는데, 내년엔 또 다른 이름들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북한이 평양에 조성한 대성산혁명열사릉엔 모두 140여 명의 항일 투사들이 묻혀 있는데, 이 중 15명의 반신상은 김일성의 부인이자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을 중심으로 열사릉의 제일 꼭대기에 특별하게 위치하고 있습니다.15명을 왼쪽에서부터 순서대로 꼽으면 림춘추, 최현, 최용건, 김경석, 류경수, 안길, 김책, 김정숙, 강건, 최춘국, 오중흡, 최희숙, 김일, 오백룡, 오진우입니다. 그러니 내년부터 만들어질 군함의 명칭은 예상이 되는데, 가령 안길이나 오중흡의 이름이 선정되겠죠.열사릉이 만들어진 때는 1975년으로 김일성이 살아있을 때입니다. 즉 김일성이 직접 뽑은 특별한 15인입니다. 그런데 이 15명 중에서도 김정은은 최현을 1번으로 뽑았고, 강건을 2번으로 선택했습니다. 이들은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일까요.● 방탕아의 대명사 최현과 아들들최현은 1907년에 길림성 훈춘 현에서 홍범도 부대의 일원이었던 최득권의 아들로 태어나 1984년 75세에 사망했습니다. 최현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5년 중국 군벌에게 체포돼 1932년까지 감옥 생활을 했습니다. 출소 후 최현은 연길 유격대에 입대했고, 연대장까지 했습니다. 당시 빨치산 연대는 많을 땐 200명까지, 적을 땐 100명 미만으로 구성됐습니다. 최현 부대는 용감했고 싸움을 잘하기로 소문이 났습니다. 하지만 용감성과는 별개로 최현은 죽을 때까지 문맹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어에 능통했던 김일성을 넘진 못했습니다.동북항일연군이 1940년대 초반 소련으로 들어가 88독립여단으로 개편됐을 때, 김일성은 대위로 1대대장을 맡았고, 최현은 상위로 중대장을 맡았습니다. 88독립여단 시절 김일성과 같은 대위급이었던 조선인은 1대대 정치위원 안길, 2대대 정치위원 강건(본명 강신태), 3대대 정치위원 김책이었습니다. 참고로 여단장과 정치부여단장엔 중국인인 주보중과 이조린이 임명됐습니다.해방 후 북한으로 돌아온 최현은 1948년 내무성 산하 38선 경비여단 여단장을 맡아 한국군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6·25전쟁 직전 처벌을 받아 강등됐다가, 전쟁이 시작된 뒤 2사단장, 2군단장을 지냈고, 전쟁이 끝난 뒤인 1955년 민족보위성 부상, 1958년 체신상, 1969년 민족보위상, 1976년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아 사망할 때까지 유지했습니다.김일성보다 나이가 5살이 많았던 최현은 사석에서 김일성에게 말을 놓는 인물이었습니다. 김일성을 “일성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김일성은 최현에 대해 “그가 나에 대해 경어를 사용한 것은 다만 공식 석상에서뿐이었다. 이것은 우리의 우정에서 거추장스러운 예의와 격식을 제쳐놓고 오히려 그 우정에 진실성과 참신성을 부각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적고 있습니다.불같은 성격을 지닌 그는 무식하지만, 우직한 충성심으로 김일성의 독재와 아들로의 권력 세습을 적극 도운 인물입니다.1956년 8월 노동당 내의 연안파와 소련파 계열 세력들이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장에서 김일성의 유일 독재에 반발하자, 최현은 권총을 뽑아 들고 회의장에 들어가 “당장 쏴 죽인다”고 호통을 쳐 반대파들을 진압했다고 합니다.또 1972년 김일성이 자신의 환갑잔치에서 “누가 내 뒤를 이으면 좋겠냐”고 말하자, 최현이 앞장서서 “당연히 장남이 해야 한다”고 김정일을 밀었습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세습은 큰 반발을 부르는 민감한 일이고, 최용건 등 김일성의 빨치산 전우들도 반대했지만, 최현이 앞장서서 아들 세습으로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이렇게 김정일로의 세습에 큰 공로를 세운 최현은 자신도 세습의 열매를 배 터지게 따먹었습니다. 최현의 두 아들은 북에서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성골’이 됐습니다.최현은 최룡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부친입니다. 최현은 빨치산 시절에 김철호와 결혼해 최룡택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38여단장 시절 일본군 간호사 출신인 여성과 바람을 피워 1950년 1월 최룡해가 태어났습니다. 바람을 피운 것에 대한 처벌로 전쟁 전 최현은 처벌을 받았는데, 전쟁 뒤 김철호가 최룡해를 거두어 함께 키웠습니다.최현의 적자인 최룡택은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입니다. 1942년생으로 알려진 최룡택은 김정일과 함께 자라 막역한 사이였습니다. 사생아인 최룡해는 형 앞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습니다.최룡택은 노동당 3대혁명소조지도부 과장을 오랫동안 지내다가 2000년대 초반 뇌출혈로 쓰러져 물러났습니다. 그가 과장일 때, 부장은 장성택이었습니다. 장성택도 빨치산 적자 최룡택 앞에선 기를 펴지 못했습니다.김정일은 최룡택에게 원하는 요직은 다 주겠다고 했지만, 최룡택은 거절하고 3대혁명소조지도부 과장으로 쭉 있었습니다. 여기엔 이유가 있습니다.김정일은 1973년 3대혁명소조운동이란 것을 시작해 대학 졸업생들을 3년 동안 현장에 파견했고, 뛰어나게 활약하는 사람은 노동당에 입당시켰습니다.최룡택의 자리는 20대 초반인 전국의 여대 졸업생들을 쥐락펴락하는 위치였던 것입니다. 서류를 통해 예쁜 여대생을 골라내 자기와 잠자리를 함께 하면 입당을 포상으로 주었습니다.최룡택의 기행은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최룡택은 북한에 단 한 대뿐인 빨간색 벤츠를 타고 다녔는데, 늘 어린 여성들을 태우고 전국으로 놀러 다녔습니다. 최룡택이 입에 올랐던 유명한 사건 중 하나가 1990년대 중반 강원도당 사건이었습니다. 최룡택은 강원도 원산의 총련휴양소 3각을 자기들의 아지트로 삼고 장성택 등을 불러 엽기 행각을 벌였는데, 이것이 김정일의 귀에 들어갔습니다.김정일은 경고의 의미로 최룡택의 시중을 들었던 강원도당 조직비서 등 고위 간부 11명을 총살했고, 노리개가 됐던 여성들은 관리소(정치범수용소)에 끌어갔지만, 주범인 최룡택과 장성택은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습니다.최룡해도 형 못지않은 엽기 행각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최룡해는 1990년대 초반 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사로청) 위원장을 맡았는데, 이 자리 역시 젊은 여성들을 쥐락펴락하는 자리였습니다.그는 전국의 미녀들을 뽑아 청년협주단이란 명목으로 기쁨조를 만든 뒤 방탕한 술자리로 밤을 새웠습니다. 변태적 성욕을 위해 여성들의 이를 다 뽑게 했는데, 이 한 개를 뽑는 대가로 200달러씩 주었습니다. 이것 역시 김정일에게 보고 됐지만, 최룡해는 잠깐 혁명화를 갖다 오는 데 그쳤습니다. 농락당했던 협주단 여성들만 청진 수성에 있는 25호 관리소에 끌려가 죽음을 맞았습니다.부전자전입니다. 여러 증언에 따르면 최현은 해방 후 많은 여성을 마구 건드리면서 “우리가 산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는데, 이 정도도 못 하냐”고 오히려 호통을 쳤다고 합니다. 후계자 자리를 지키기 위해 김정일은 간호비서란 명목으로 젊은 여성들을 빨치산 출신들에게 공급했는데, 최현도 죽기 전까지 전국의 경치 좋은 별장을 다니며 젊은 여성들에게 둘러싸여 실컷 놀다가 죽었습니다.최현이 빨치산에서 싸운 공은 인정한다고 쳐도, 해방 된지 80년째 되는 올해까지 본인과 아들들은 북한을 마적처럼 타고 앉아 세습해 가며 방탕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최현은 북한 정권의 실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친동생 부부를 죽인 강건최현이 원 없이 방탕하다가 죽었다면, 강건은 일찍 죽어 그와 비교가 되는 인물입니다. 강건은 경북 상주에서 1918년에 태어나 1928년 부모를 따라 만주로 이주했습니다. 본명은 강신태였는데, 이후 강건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새로 고친 이름은 가나다순으로 정하는 명단에 늘 먼저 올라갑니다.강건은 16세 때인 1933년 한 살 아래인 동생 강신일과 함께 유격부대를 만들었습니다. 소년 형제들은 부대를 이끌고, 만주군에게 체포된 영안유격총대 대장 이형박을 구출해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습니다.강건은 군사적 재능도 뛰어났고, 승진도 빨라 88독립여단에서 대위 계급을 받았습니다. 해방 후 북한군 초대 총참모장을 맡았는데, 1950년 9월 8일 32세에 사망했습니다. 전쟁 발발 한 달 뒤인 7월 27일 한국군 참모총장인 채병덕 소장이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다가 경남 하동에서 북한군의 총에 맞아 전사했는데, 북한군 총참모장도 낙동강을 넘으려다가 죽은 것입니다. 강건은 고향 바로 옆인 경북 안동에서 차가 대전차 지뢰를 밟는 바람에 죽었다고 알려졌지만, 그의 죽음과 관련해선 여러 설이 있습니다.강건은 매우 잔인한 인물이었습니다. 친동생과 그의 임신한 아내를 자기 손으로 교수형에 처한 사람입니다.이는 1980년대 중국에 생존한 항일 빨치산 출신자들을 인터뷰했던 유순호 작가의 저서 ‘김일성’에 나오는 내용입니다.1938년 강건은 주보중 휘하에서 5군 3사 9연대 정치위원으로 있었고, 한 살 아래의 동생 강신일은 8연대 정치위원을 맡고 있었습니다. 1938년 여름 5군은 서쪽으로 이동하다가 많은 전사자를 냈습니다.그런데 8연대엔 5군에서 예쁘기로 소문이 났고, 춤과 노래를 잘 부르는 이생금이란 여대원이 있었습니다. 1938년에 이생금은 16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미 결혼을 했었는데, 남편이 그만 원정 도중 전사했습니다.강신일은 여대원을 위로하다가 그만 사랑에 빠졌습니다. 같은 전우인 남편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정치위원과 미망인이 동거하기 시작하니 이는 말밥에 충분히 오를 수 있는 사안이었습니다.이 일로 처벌을 받을 위험에 처하자, 강신일은 자신을 따르는 조선인 부대원들과 함께 도주했습니다. 그렇다고 일제에 투항한 것은 아니고, 흑룡강성 동북부에 있는 쌍압산시 집현현에 가서 무장투쟁을 계속했고, 북만 지구 재만한인조국광복회도 만들었습니다.그런데 1939년 가을 형 강신태의 부대가 집현현 일대에서 식량을 구하다가, 강신일이 3군 9연대의 이름을 여전히 걸고 활동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강신태는 9연대 주력부대를 데리고 강신일의 부대를 습격했습니다. 무장을 해제하고 강신일과 이생금을 잡은 뒤 처형하겠다고 펄펄 뛰었습니다. 증언자들은 이때 이생금이 임신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했습니다.강신태는 “부대에서 도주한 자가 바로 내 친동생이기 때문에 더욱 용서할 수 없다”며 동생을 반드시 죽인다며 고집을 피웠습니다. 그와 함께 있던 8연대 1중대장 왕경운, 4군 유수처 지도원 조서염 등이 나서서 “일본군에 투항한 것도 아니고, 항일투쟁을 계속하고 있으니 일단 상부에 데리고 가서 의견을 들어보자”고 말렸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습니다.결국 그는 강신일과 부인 이생금을 총살도 아닌, 나무에 목을 매달아 죽였습니다. 해당 내용에 대해선 해방 후 중국에 살았던 왕경운, 3사 정치부 주임 왕효명, 당시 17세였던 3사 8연대 1중대 소속 여대원 오옥청 등 여러 증언자가 있습니다.강신일은 오늘날 중국 쌍압산시 인민정부에서 ‘쌍압산의 항일영웅 강신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그의 아내 이생금도 역시 항일열사로 기록돼 있습니다. 중국 정부의 자료에는 강신일과 이생금의 죽음에 대해 “특정한 환경하에서 어쩔 수 없이 빚어졌던 착오적인 결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강신태-강건은 고작 32세에 남침 전쟁에서 죽었습니다. 그는 강창주라는 아들을 남겼는데, 강창주는 군단장까지 지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북한은 1956년에 그의 이름을 딴 강건군관학교를 만들었습니다. 이 학교는 이후 많은 북한군 장교들을 양성했는데, 오늘날엔 그 이름이 강건명칭 종합군관학교로 바뀌었습니다. 올해 2월 강건명칭 종합군관학교를 시찰한 김정은은 교내에 있는 강건 동상 앞에 헌화하고 머리를 숙였습니다. 잔혹한 강건의 업보인지, 오늘날 강건군관학교 사격장은 잔인한 처형장으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강건군관학교는 평양시 외곽인 순안공항 인근에 있는데, 학교 주변에 넓은 전술훈련장이 있고, 훈련장 안에 길이 100m, 너비 60m 정도인 사격장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진행된 공개 처형에 대한 증언은 참으로 많습니다. 1980년 2월 북한의 최고 미인이라고 알려졌던 영화배우 우인희를 비롯해, 수많은 고위 간부들이 처형됐습니다. 대표적 인물로 실패한 화폐개혁의 희생양이 돼 2010년 처형당한 박남기 전 노동당 계획재정부장, 김정은이 참가한 회의에서 졸았다가 2015년 처형된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장성택의 심복들이던 리룡하 노동당 행정부 제1부부장과 장수길 노동당 행정부 부부장, 이설주의 과거사를 언급했다가 처형된 은하수관현악단 단원 12명 등을 들 수 있습니다.이런 공개 처형은 목격자가 많습니다. 한국에도 강건군관학교 사격장에서 직접 공개 처형을 목격했던 탈북민들이 적지 않습니다. 김정은 시대 들어 이곳에서 4신 고사총 처형도 이뤄진다는 증언도 나옵니다. 그래서인지 북한 사람들은 이곳을 ‘고위층의 무덤’이라고 한다고 합니다.친동생 부부를 목을 매달았던 강건의 업보 때문일까요. 강건은 오늘날에도 잔인한 처형과 더불어 지워지지 않는 이름이 됐습니다. 심지어 올해엔 그의 이름을 딴 구축함조차 바다도 나가기도 전에 넘어져 여러 사람을 죽게 했으니, 강건은 정말 죽음을 부르는 이름인 듯합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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