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주성하 기자

동아일보 콘텐츠기획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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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관련 사이트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http://nambukstory.com)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zsh75@donga.com

취재분야

2026-01-06~2026-02-05
남북한 관계64%
칼럼23%
경제일반10%
사회일반3%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러시아로 끌려가는 북한 제대군인들

    김정은이 올해 또 러시아에 수만 명을 파병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 소식통은 “올해 제대 대상 군인 전체가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점령지에 파견된다”고 전했다. 북한은 17세에 군에 입대해 남성은 평균 10년, 여성은 5년 동안 복무한다. 현재 실질적인 북한군 병력은 80만 명 정도로 예상된다. 여기서 군관과 장기 복무 하사관을 빼면 병사는 많아야 6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 중 남성은 매년 10분의 1씩, 여성은 5분의 1씩 제대한다. 러시아에 남성 제대군인만 보내는지 여성도 보내는지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남성만 보낸다고 해도 4만 명은 될 것이다. 뇌물이 보편화한 북한에선 간부나 부자는 돈을 뿌려 가며 자녀들을 이래저래 빼낼 테니 선발되는 사람들은 일반 서민 자녀일 것이다. 러시아에 파병 가는 제대군인들은 파괴된 인프라 복구에 투입된다. 이미 북한은 지난해 6월 러시아에 공병 1000명과 군 건설 노동자 5000명을 파견하기로 했는데, 올해 제대군인까지 합세하면 노동자 파견 규모는 훨씬 더 커질 듯하다. 북한 근로자 해외 파견은 2017년 유엔 대북 제재 결의안 위반이지만, 이 결의안은 무용지물이 된 지 오래다. 북한 제대군인 중엔 복무 기간 집에 한 번도 못 간 사람이 많다. 우크라이나에 포로로 잡힌 고참 군인 이모 씨는 부대에서 100km 정도 떨어진 집에 10년 동안 한 번도 가지 못했다고 했고, 입대 4년 차인 백모 씨도 집에 가지 못했다. 재작년 8월 군사분계선을 통해 귀순한 9년 차 북한 군인도 복무 기간 집에 간 적이 없다. 군인들이 휴가 한번 쓰지 못하고 10년씩 복무하는 이유는 부대에서 보내주지 않아서가 아니다. 집에 갔다 오려면 부대로 복귀할 때 쌀 한 배낭이라도 메고 돌아와 군관들에게 뇌물을 줘야 한다. 가난한 집 자식은 집에 부담을 주기 싫어서 기회가 있어도 가지 않는다. 반면 돈 많은 집 자식은 군관들에게 뇌물을 주고 집에서 몇 달씩 놀기도 한다. 제대 후 집에 돌아가서 결혼하고 싶은 희망으로 10년씩 버텼는데, 그 희망이 물거품이 될 판이다. 연애를 못 해 본 27세 청년 수만 명이 우크라이나에 풀리면 강력 범죄가 빈발할 법도 하지만 현실은 다를 것이다. 현재 러시아가 점령 중인 우크라이나 남동부 지역 면적은 북한 전체 영토와 맞먹는 약 12만 km². 북한 제대군인들이 투입될 지역은 이 중에서도 심하게 파괴된 일부 지역이 될 것이다. 민간인도 이미 다 피란을 떠나 약탈할 것도 변변치 않은, 그야말로 폐허에 불과한 땅이다. 북한이 제대군인들을 러시아로 보내는 까닭은 이들이 통제하기 가장 쉬운 집단이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엔 군에서 10년씩 복무하면 대개 노동당에 입당시켰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10년 복무해도 입당하는 군인은 10% 미만이라고 한다. 당국은 제대군인을 인력이 모자라는 공장이나 농촌, 탄광 등에 일방적으로 보내는 경우가 많은데, 입당한 사람은 현지에서 집으로 도망칠 궁리만 한다. 그래서 파견지에서 2, 3년 정도 지켜보고 입당시키는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북한에서 당원 위상이 과거보다 떨어진 것은 사실이다. 돈이 많으면 당원보다 낫지만, 문제는 돈도 없는데 당원도 아니면 인기가 없다는 데 있다. 당원밖에 기댈 것이 없는 가난한 청년들은 10년 허비한 청춘이 아까워서라도 파견지에서 몇 년 더 버틸 수밖에 없다. 러시아에 가는 제대군인들도 현지에서 열심히 일을 잘해야 입당시키겠다는 말을 들을 것이다. 이렇게 20대 청년들을 코를 꿴 부림소처럼 부려먹으면서도 김정은은 정작 “출산율 감소를 막아야 한다”고 엉뚱한 소리를 한다. 지난해 러시아로 파견됐던 북한 근로자들 인터뷰를 보면 이들은 하루 16시간 이상 중노동에 시달렸다. 열심히 일한 만큼 김정은 주머니가 불룩해지니, 올해 파견될 제대군인들 처지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새해 초부터 김정은은 평양에 만드는 ‘해외군사작전 전투위훈기념관’ 건설 현장에 가족을 데리고 나가 지게차를 직접 몰며 나무를 심느라 분주했다. 사진 속 김정은은 신이 난 듯 보였다. 기념관 옆에는 전사자 400여 명의 묘가 들어선다. 현재까지 북한이 공개한 전사자 수는 약 250명. 아직 150명 정도 묫자리가 비었다.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6-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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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년전 한밤 중 목욕탕에 나타난 김정은, 분노한 이유는 [주성하의 ‘北토크’]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 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 봅니다.북한 매체들은 21일 김정은이 함경북도 경성군 온포근로자휴양소 준공식에 참석했다고 크게 보도했다.준공식에서 김정은은 “몇 해 전 이곳에 왔을 때 당의 영도 업적이 깃든 사적 건물이라는 간판은 걸어 놓고도 휴양소의 모든 구획과 요소들이 비문화적이고 운영 또한 비위생적으로 하고 있는 실태를 심각히 비판하던 때가 기억난다”면서 “오늘 이렇게 인민의 훌륭한 휴양 봉사 기지로 다시 개건된 휴양소를 보니 참으로 보람 있는 일을 또 하나 했다는 긍지가 생긴다”고 말했다.얼핏 들으면 인민을 위해 엄청난 선심을 쓴 것처럼 들리지만, 김정은이 온포근로자휴양소에 집착한 데엔 나름 다른 이유도 있다.이날 준공사를 한 리일환 노동당 비서는 “소문난 명승지인 온포지구의 새로운 전변은 원수님께서 이곳을 찾아오시었던 2018년 7월의 그날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말했다.그랬다. 바로 2018년 7월 초 그날 밤에 일이 터졌다.● 한밤에 쳐들어온 김정은당시 노동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께서는 깊은 밤 온포휴양소를 찾으시어 관리 운영 실태와 형편을 요해하시였다.… 휴양소의 목욕탕을 돌아보시면서 관리를 잘 하지 않아 온천 치료 욕조가 어지럽고 침침하고 비위생적이라고, 최근에 잘 꾸려진 양어장들의 물고기 수조보다도 못하다고, 탈의실도 온전히 꾸려져 있지 않고 환기가 잘되지 않아 습하고 불쾌한 냄새가 난다고, 인민들이 휴양와서 치료하는 곳인데 소독은 제대로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이런 환경에서 치료가 되겠는가고, 정말 너절하다고 지적하시었다.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령도 업적이 깃들어 있는 사적 건물이라는 간판을 걸어 놓고 이렇게 한심하게 관리 운영하여 인민들의 호평이 아니라 비평을 받게 되면 사철 온천물이 마를 줄 모르고 솟아나는 경치 좋은 곳에 인민을 위한 휴양소부터 일떠 세워주신 수령님과 장군님의 업적을 말아먹고 죄를 짓게 된다고 준절히 이르시었다.”노동신문에 이 정도로 보도가 나가면 김정은이 당시 얼마나 신경질적 반응을 보였을지 대략 상상이 된다. 아마 여러 간부들이 처벌받았을 것이다.그런데 진짜 이상한 일은 김정은이 왜 하필 깊은 밤 온포휴양소를 찾았을까 하는 것이다.온포휴양소는 북한 최북단 함경북도 경성역에서 직선거리로 12km 떨어진 곳에 있다. 관모봉에서 시작돼 바다를 향해 흐르는 개천을 따라 꾸불꾸불 산길을 20km는 달려야 한다. 김정은이 인민이 걱정돼 함경북도까지 와서 한밤중에 차를 몰아 올라갈 사람은 아닌 듯싶은데…, 이상한 일이다.그렇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온포휴양소에서 다시 직선거리로 14km 정도 상류로 올라가면 김정은의 호화 별장 ‘온포특각’이 있다. 김 씨 일가를 위한 호화 별장을 북한에선 특각, 또는 초대소라고 부른다.예로부터 주을온천 또는 경성온천으로도 불린 온포온천은 신경통과 관절염, 피부병 치료에 효과가 있는 라돈 온천이다. 경성의 옛 지명 주을은 여진어로 ‘뜨거운 물’이란 뜻이다.일제시대에 일본군도 요양소를 세워 이용했을 정도로 유명한 주을온천은 광복 후 김일성이 특히 좋아했다. 김일성은 함경북도를 시찰할 때마다 도 소재지 청진에 있는 특각에선 딱 두 번만 자고 늘 온포특각에 머물렀다.김정일도 권력을 장악했을 때, 이 온천이 마음에 들어서인지 김일성 특각 옆에 자기 특각을 따로 지어 사용했다. 이 특각들은 당연히 김정은이 물려받았다.그런데 김정은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냄새’가 나는 특각이 싫었는지 두 다 허물어 버리고 자기 특각을 새로 지었다. 이 특각은 2016년경 완공됐다.특각까지는 지방에선 보기 드물게 길이 수십km 아스팔트도로가 쭉 연결돼 있다. 특각 지구엔 낚시터도 있는데, 물고기는 전부 특별 임무를 받은 양어 작업반이 청진시 한 호수에서 애지중지 키워 옮겨 온다. 어쩌다 나타나는 김정은을 위해 길이 20cm 이상의 잉어와 붕어를 비롯해 각종 물고기 수만 마리를 항상 낚시터에 가득 채워 넣어야 한다. 이 수만 마리 물고기가 오염시킨 물이 강을 따라 인민의 휴양소로 흘러내려 간다.온포특각을 지키기 위해 974부대 정예 병력 1개 여단 2500명이 상시 주둔한다.물론 주민들은 온포휴양소 상류에 뭐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 누구도 접근할 수도 없고, 또 구글어스로 내려다볼 수도 없다. 그냥 “저기 상류에 장군님 특각이 있는데, 거기 경치는 훨씬 좋다” 정도의 소문만 돈다.2018년 7월 초 새로 지은 온포특각을 찾은 김정은은 갑자기 잠이 오지 않았는지, 아니면 화풀이 대상을 찾고 싶었는지, 혹은 만취했는지는 몰라도 깊은 밤에 갑자기 차를 타고 하류에 있는 온포휴양지에 나타났다.원래 김정은이 시찰할 곳은 몇 달 전부터 준비를 하는데,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면 방법이 없다. 온포휴양소 간부들은 준비 없이 경을 치게 됐다.사실을 따져 보면 휴양소가 양어장 욕조보다 못한 것이 간부들 책임은 아니다. 휴양소를 제대로 관리하려면 수익을 창출해 그 일부로 다시 휴양소를 관리해야 한다. 북한은 이런 시스템이 아니라서 당국에서 자재나 자금을 대주지 않으면 관리가 될 수가 없다.먹고살기도 어려운 사람들이 온천욕이나 하려고 멀리서 며칠씩 기차를 타고 오지도 않는다. 아니, 온천욕하러 가겠다고 여행증을 발급해 달라고 하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다.한국도 온천 문화가 쇠퇴하면서 과거 인기를 누리던 온천 시설들이 문을 닫은 사례가 많은데, 북한은 그것보다 상황이 심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상류의 멀쩡한 김일성 특각과 김정일 특각을 다 밀어 버리고는 자기 특각을 새로 지은 김정은이 “수령님과 장군님 업적을 말아 먹었다”고 화를 내는 것이 황당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김정은이 격노했는데 새로 건설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다.이날 저녁 김정은은 “인민군대가 다음 해에 멋들어지게 건설하여 우리 인민들에게 선물하게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실제로 건물 몇 채를 완공하는 데까진 무려 8년이 걸렸다. 아마 다시 특각에 올라가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났을 땐 필름이 끊겼는지 인민군대를 보내주겠다고 했던 약속을 잊어 버린 것 같다. 국가에서 자재와 인력을 대주지 않으니 함경북도 간부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인민들 주머니를 쥐어짜서 휴양소를 지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그러다가 지난해 3월 다시 온포휴양소에 나타난 김정은이 자기가 한 말을 기억해 냈는지, 이번엔 인력과 자재를 대주어 올해 완공된 것이다. 이제 김정은은 자신의 온포특각에 올라갈 때마다 도로 중간쯤에 있는 새 휴양소를 보면서 기분이 좋을 것이다.● 김 씨 일가 ‘현지 지도’의 비밀이런 식의 김 씨 일가 현지 지도에는 숨겨진 공식이 있다. 그들이 자주 현지 지도했다는 지역을 보면 꼭 근처에 김 씨 일가가 사랑하는 특각이 있다. 특각에 와서 놀다가 심심하면 주변을 둘러보고 뭐라고 지적하는 것이 곧 현지 지도가 된다. 이는 김일성 시대부터 내려온 전통이다. 김일성이 가장 많이 찾은 지역이 평북 창성인데, 100번 넘게 현지 시찰을 하고 북한 전국 지방 발전의 본보기로 삼았다. 그 외진 창성을 수없이 찾은 이유는 창성에 김일성이 제일 좋아한 특각이 있기 때문이다. 김정일도 창성을 매우 사랑했다. 그는 가끔 동해안에 있는 원산특각과 함흥 서호특각을 찾았다. 스키를 좋아하는 김정은은 집권 초 겨울에 스키를 타려 삼지연을 자주 방문했는데, 그때 낡은 삼지연 시가지가 눈에 거슬렸던 것 같다. 김정은 지시로 지금 삼지연은 거의 새로 건설됐다고 할 만큼 천지개벽했다.특각이 근처에 있으면 주변 지역 간부들은 늘 긴장하고 살 수밖에 없다. 언제 김 씨 일가가 들이닥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대신 김 씨 일가는 특각이 없는 지역은 거의 찾아가지 않았다.김정은도 집권한 지 15년이 돼 가지만, 함경북도만 봐도 그가 시찰한 곳은 동해안을 따라 몇 군데밖에 되지 않는다. 특각이 주변에 없는 데다 도로 사정이 안 좋은 내륙 주민들은 평생 김정은을 직접 볼 기회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새로 지은 온포휴양소가 개장하면 북한 인민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줄지어 찾아올까. 2019년 김정은 지시로 축구장 200면 이상을 합친 면적의 터에 대규모로 건설된 양덕온천문화휴양지나, 지난해 건설된 원산갈마관광지구를 보면 답이 나온다. 모두 파리만 날린다.돈을 벌지 못하는 휴양지나 관광지구는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선조들이 남긴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은 북한에 딱 들어맞는 말이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6-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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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企 AI 전환 지원할 공동훈련센터… 한국산업인력공단, 20곳 새로 모집

    한국산업인력공단이 중소기업의 인공지능(AI) 전환을 지원할 ‘2026년도 AI 특화 공동훈련센터’ 20곳을 신규 모집한다. 이 센터는 국가인적자원개발컨소시엄 모델을 활용해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AI 활용 역량 격차를 완화하고 재직자가 실제 현장에서 활용 가능한 AI 직무역량을 갖추도록 지원한다. 자체 훈련시설과 전문 인력을 활용해 협약기업 노동자에게 맞춤형 훈련과 현장 적용을 연계한 종합 지원 프로그램을 제공할 계획이다. 훈련은 3단계로 진행된다. 먼저 전문가가 기업 현장을 방문해 AI 도입 준비 수준을 진단하고 ‘AI 훈련 로드맵’을 수립한다. 이후 경영자 대상 인사이트 교육과 실무자 중심의 문제해결형 실무 훈련이 진행되며 훈련 종료 후에도 전문가의 밀착형 코칭을 지원하고 우수사례 공유회를 개최해 성과를 확산한다. 공단은 전국 8개 권역을 대상으로 지역·산업별 분포를 고려해 총 20곳을 선정한다. 선정 기관에는 연간 5억 원 내외의 사업 운영비와 인프라 구축비, 일반 훈련비의 300%에 달하는 고단가 AI 특화 훈련비가 지원된다. 사업 참여를 희망하는 기관은 2월 23일까지 사업계획서를 제출해야 한다. 3월 중 선정 결과가 발표될 예정이다. 모집 공고는 공단 누리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6-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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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년 北 자가용 판매량 9000여대…‘마이카’ 욕망이 깨어난다[주성하의 ‘北토크’]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 2025년은 북한 ‘마이카(My Car) 시대’ 원년이다. 북한은 지난해 초 개인의 자가용 소유를 전격 허용했다. 또 ‘자가용승용차 이용법’이라는 것도 만들었다.지난해 10월 이후 평양 시내에서 자가용 승용차가 달리는 사진도 많이 공개됐다. 북한은 노동당 창건 80주년인 지난해 10월 10일을 맞아 ‘평양 가을철 국제상품전람회’를 열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이후 처음으로 외국인 관광객 입국을 공식 허용했다. 이 관광객들이 찍은 평양 시내 차량 사진들이 외부 사이트에 공개된 것이다.북한의 자가용 승용차 번호판은 노란색이서 국가 소유 승용차와 뚜렷하게 구별된다.● 당국도 예상 못한 판매량이달 초 북한 내부 소식통에 따르면 지난 1년 동안 자가용이 평양에서만 8000여 대 팔렸다고 한다. 평양을 제외한 지역은 다 합쳐도 1000대 정도 팔렸다. 당국이 전격적으로 자가용 보유를 허용했지만, 과연 그런 건지 반신반의하는 사람도 많고 구매력에도 한계가 있다는 의미다. 평양 자가용은 ‘평양·1234’ 같은 식으로 네 자리 숫자 번호판이 사용된다. 이미 8000대 넘게 팔렸다면, 조만간 다른 방식의 번호판이 나오게 될 것으로 보인다. 숫자를 네 자리만 활용했다는 것은 북한 당국도 1년 만에 자가용이 1만 대 가까이 팔릴 것을 예측하지 못했다는 것을 뜻한다.과거에 비해 많은 차량이 중국에서 북한으로 밀수되는 정황도 다수 확인된다. 지난달 압록강을 끼고 있는 양강도에서만 차량이 건너갈 수 있는 임시 도강로(渡江路·강바닥에 흙더미를 쌓아 만든 비공식 통로) 32개가 위성을 통해 확인됐다. 중국에서 건너다보이는 혜산 시내에도 택시 간판을 단 차량이 급격하게 늘었다.새로 개장한 ‘아미산 자동차 기술 봉사소’에선 새 차량 판매와 함께 임대 서비스도 하고 있다.이런 변화는 올해에 더 가속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평양을 따라 지방에서 승용차 구매 수요가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승용차 판매가 활성화하면서 여러 명이 돈을 모아 할부로 차량을 구매하는 방법이 일반화하고 있으며 외상으로 사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과거에도 북한에서 개인의 자가용 보유가 불법은 아니었다. 하지만 ‘개인 소유의 성격과 원천’을 규정한 북한 민법 58조는 ‘개인 소유는 노동에 의한 사회주의 분배, 국가 및 사회의 추가적 혜택, 터밭(텃밭) 경리를 비롯한 개인 부업 경리에서 나오는 생산물, 공민이 샀거나 상속 또는 증여받은 재산, 그 밖의 법적 근거에 의하여 생겨난 재산으로 이루어진다’라고 규정하고 있다.즉, 차량을 살 수 있는 큰돈은 ‘그 밖의 법적 근거에 의하여 생겨난 재산’ 말고는 만질 수가 없는데, 지금까지 이 ‘재산’은 일본에서 송금이 오는 총련 귀국자들이나 인정받을 수 있었다. 외국과의 무역을 통해 번 돈이나 장마당에서 번 돈은 모두 비사회주의적 재산 축적으로 간주해 언제든 몰수될 수 있다.하지만 북한은 올해 민법 적용을 느슨하게 해 자산 축적 과정을 증명하지 않고도 차량을 살 수 있게 허용했다. 또 자가용 상속도 인정해 주고 있다.● 자가용 시대의 풍경북한의 이 같은 정책 변화는 단순히 경제난 때문에 내부에 숨어 있는 외화를 빨아들이려는 의도로만 해석할 순 없다. 차량 소유뿐만 아니라 주택과 기업 소유, 의료 분야 등에서 사회주의적 시책을 폐기하고 중국식 시장경제 비슷한 모델로 바뀌는 징후가 최근 몇 년 새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심지어 가장 대표적인 사회주의 정책인 배급제도 점점 대상이 축소되고 있다.김정은은 외부에 떠들지 않고 획기적인 내부 개혁을 진행하는 중이다. 자가용 허용은 그런 정책 변화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물론 김정은의 지시 한마디로 언제든 정책이 바뀔 수 있기 때문에 주민들이 당국을 신뢰하진 않는다. 그래서 막대한 돈이 드는 자가용을 서슴없이 사지는 않는다.현재 자가용은 사적 소유보다는 영업 서비스 분야에서 급격히 확산하는 추세다. 개인 또는 여러 명이 차량을 사서 운송업을 하거나 택시 영업을 하는 것이다.이런 경우엔 차량이 소유가 아닌 투자 개념이 되기 때문에 당국도 생계수단을 함부로 뺏기 어려워진다. 재산을 강탈하면, 빼앗긴 사람은 당국에 반감을 품은 ‘반동’이 될 수밖에 없다. 빼앗긴 사람이 많을수록 반동이 증가하면 북한 체제가 위태로워진다. 차량 임대 서비스도 퍼지고 있다. 당국에서 인정받은 공인 ‘륜전기재(바퀴 달린 운송 및 중장비) 봉사소’에서 시간제로 차량을 임대해 준다. 평양의 경우 승용차를 24시간 빌리는 비용은 100달러 정도이며, 장기 임대는 기간에 따라 10% 이상 할인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당국에서 차량을 구매해 봉사소에 제공하진 않는다. 봉사소 차량은 외화 벌이 기관이나 돈 많은 개인이 사서 봉사소에 운영하게 한다. 실질적으로는 개인 소유 차량이다.북한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자가용은 중국제 중고 전기자동차다. BYD가 가장 많다고 한다. 전기자동차 시장이 포화 상태인 중국은 값싼 중고 승용차를 얼마든지 북한에 넘길 수 있다. 중국 업자들이 할부금을 못 내 압류된 승용차들을 북한에 대거 넘기고 있다는 뉴스도 나온다. 차량이 증가하면서 주유 서비스 및 중고차 수리 업체도 많아지고 있다. 만성적인 전력난과 연료난을 겪고 있지만, 차량용 연료는 중국에서 많이 밀수되고 있다. 또 태양광 충전을 위한 패널과 충전기도 함께 북한으로 들어간다.마이카 시대를 맞아 해결해야 하는 또 다른 문제는 면허증 발급이다. 과거 북한은 운전사 양성소에서 1년 이상 운전을 배운 사람에게만 면허를 발급해 주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3개월 속성 교육을 통해 면허를 받을 수 있는 제도도 등장했다. 교육비는 300~500위안(한화 약 6만~10만 원)이다. 북한 당국은 차량 등록 비용은 물론 면허 장사로도 외화를 거둬들인다. 1200위안(약 25만 원) 정도 뇌물을 주면 3개월을 배우지 않고도 더 빨리 면허증을 발급받을 수 있다.● ‘마이카’가 바꿀 북한 미래북한 당국이 자가용 소유를 허용했을 때 주민들은 아무래도 ‘갑자기 법이 바뀌어 차를 빼앗아 가면 어떡하지’에 가장 많은 신경을 쓴다.자가용승용차 이용법에는 몰수 규정이 명시돼 있다. 제41조는 ‘자가용 승용차 이용 질서를 어긴 자에게는 도로교통법의 해당 조항에 따라 벌금, 운전 자격 박탈 처벌을 준다. 자가용 승용차를 범죄 행위에 이용하였을 경우에는 몰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합법과 불법의 경계가 모호한 북한에서, 특히 장사조차 불법인 북한에서 당국이 ‘차를 이용해 범죄 행위를 했다’고 걸면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앞으로 자가용을 많이 판매하려면 당국이 웬만하면 몰수하지 않아야 한다. 당국에 대한 신뢰는 하루아침에 생겨나지 않는다.여러 가지 시행착오에도 북한에서 마이카 시대가 시작된 것은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도 1970년대 이후 마이카 바람이 시작된 이후 1인당 국내총생산(GDP) 상승과 1980년대 ‘3저 호황’ 덕분에 1980년대 본격적인 마이카 시대를 맞았다. 마이카는 중산층의 상징이자 성공의 보편적인 목표였다.현시점에서 북한 마이카는 중상층이 아닌 상류층의 상징이다. 마이카 시대는 교통 환경, 외식과 쇼핑 문화 확대 같은 사회 변화를 수반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욕망의 분출’이다.마이카는 사적 소유를 인정받지 못하던 북한 사람들 마음속에 탐욕을 심어 놓고, 경쟁 심리를 자극하게 된다. “우리 집은 왜 차가 없느냐”는 자녀 투정에 초연할 수 있는 부모는 많지 않다.북한 마이카 시대는 당국에 충성해야 인정받던 시대에서 돈을 벌어야 인정받는 시대로 바뀐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이카는 거리 풍경을 바꾸는 것에서 더 나아가 북한 주민의 ‘혁명적’ 두뇌도 ‘자본주의’로 물들이게 될 것이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6-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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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국가와 체제 위에 민족이 있다

    새해 벽두부터 교황 레오 14세가 ‘성심당’ 창립 70주년 축하 메시지를 보내 화제가 됐다. 성심당은 1950년 12월 흥남에서 미군 수송선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타고 거제로 피란을 온 임길순 씨가 창립했다. 그는 1956년 먹고살기 위해 서울로 올라오다가 열차가 고장 나자, 대전에 내려 성당에서 내준 밀가루 두 포대를 밑천 삼아 찐빵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성심당은 대전에서만 만날 수 있다”는 신조로 영업해 왔다. 그런 성심당이 예외로 생각하는 곳이 있다. 2019년 임영진 성심당 대표는 흥남에 뿌리를 둔 문재인 대통령과 만나 “통일이 된다면 평양 혹은 함흥에 분점을 낼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 76년 전 흥남의 기적은 2세들의 가슴속에 깊이 뿌리를 내려 미래의 역사를 꿈꾸게 한다. 10만 명의 피란민을 구출한 흥남 철수 작전은 기적만 만든 것이 아니다. 기자의 외할아버지도 1950년 흥남에서 배를 타고 남쪽으로 왔다. 남쪽에 와서 새 가족을 이뤄 2녀 1남을 낳았지만 누구보다 먼저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강릉에서 살다 작고했다. 외할아버지의 월남은 남은 가족들에겐 재앙이었다. 탄압과 박해를 피해 계속 도망다니다가 북새통 기차역에서 5세밖에 안 된 어머니는 가족과 헤어졌고, 평생 혈육을 그리며 고아로 살아야 했다. 출신 성분의 굴레는 외손자인 기자에게까지 씌워졌다. 탈북해 서울에 온 기자의 뿌리도 1950년의 흥남과 이어져 있다. 영화 ‘국제시장’을 보고 기자처럼 눈물을 줄줄 흘린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는 민족 분단의 아픔이 죽을 때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갈라진 민족은 피 흘리는 깊은 아픔이다. 합쳐져야만 아무는 상처다. 촌수도 없다는 부부는 갈라지면 남이지만, 피를 나눈 부모·자식의 인연은 버린다고 버려지지 않는다. 민족이란 그런 혈연이다. 둘로 갈라진 민족은 언젠가는 합쳐진다. 근래 독일이 그랬고, 예멘이 그랬다. 오늘날 한 민족이 두 국가로 나뉜 사례는 남북한과 중국-대만 정도이다. 대만은 청나라의 지배를 받은 기간이 200여 년에 불과하고, 1895년 이래 본토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 그런 대만을, 중국은 민족이란 명분으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통일하겠다고 칼을 간다. 하지만 누구보다 다시 합쳐져야 하는 한반도에선 우주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 벌어진다. 김정은은 오로지 패밀리의 세습 통치를 위해서 2년 전부터 ‘적대적 두 국가론’을 내걸고 수천 년 동안 이 땅에서 살아온 민족의 허리를 영영 끊으려 획책하고 있다. 시작은 두 국가론이지만, 김씨 일가의 영속을 위해 앞으론 민족 부정의 논리도 개발할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민족을 통일하려 한 지도자는 수없이 많이 봤어도, 멀쩡한 민족을 단절하겠다고 한 지도자는 거의 찾기 힘들다. 그런 김정은의 논리에 인구도 2배이고 국력도 훨씬 더 큰, 그래서 주도적이어야 할 한국은 속수무책이다. 통일부 수장인 정동영 장관은 새로운 논리인 양 ‘평화적 두 국가론’을 내걸고 한국 사회의 통일 담론부터 분열시킨다. 이는 김정은의 프레임에 넘어가는 어리석은 일이다. 적대적 두 국가로 살겠다는 김정은에게 “통일을 지향하는 평화적 두 국가로 살자”고 해봐야, 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강조해 봐야 결국 남는 것은 ‘두 국가’일 뿐이다. 혈연을 끊겠다는 김정은에게 우리는 혈연의 힘으로 맞서야 한다. 두 집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한 핏줄을 강조하는 것이다. 김정은이 두 국가를 강조하면 할수록 우리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이것은 김정은의 가장 취약한 약점이다. 왜냐하면 분단 이래 북한이 가장 강조해 내걸었던 구호가 다름 아닌 ‘우리는 하나다’와 ‘우리민족끼리’였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두 국가나 체제의 통합까지 아우르는 의미인 ‘통일’을 넘어, 가장 원론적인 민족과 혈연의 담론으로 맞서야 한다. 김정은이 멀어지려 하면 할수록 우리는 핏줄의 힘으로 끌어당겨야 한다. “수천 년을 같은 땅에서 살아온 우리 민족은 합쳐져야 한다.” 국제사회도, 북한도 이 말 앞에선 반박할 논리가 빈약하다. 그게 바로 민족의 힘이다. 국가와 체제 위에 민족이 있다. 막을 수 없는 그 힘이 있기에 언젠가는 기자가 배를 타고 흥남항에 내려 ‘성심당 흥남점’에서 빵을 사 먹는 날은 반드시 오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주의 순리이자, 인류의 순리이다.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6-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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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꿈을 잃었던 청소년에게 다시 희망을”

    국제구호개발기구 월드비전이 진행하는 ‘하트힐링’ 사업이 삶의 기반이 흔들려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 가던 여러 청소년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있다. 하트힐링 사업은 범죄로 인해 보호자를 잃거나 일상이 무너진 아동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심리 회복과 학업 및 진로 재설계를 함께 지원하는 통합 회복 프로그램이다. 월드비전은 지난해부터 3년간 총 20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심리검사와 상담, 치료비 지원을 비롯해 학업, 자기 계발을 위한 맞춤형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또 법무부 교정본부와 범죄 피해자 지원 기관 등과 협력해 사각지대에 놓인 청소년을 발굴하고 연결해 왔다. 올해 이 사업과 연결된 진희(가명·18)는 어머니를 일찍 여읜 뒤 아버지의 수감으로 한동안 ‘다음’을 상상하기 어려운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멈춰 서 있던 진희의 시간은 하트힐링 사업을 만나면서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진희에게 가장 큰 변화는 ‘진로를 다시 말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그는 1 대 1 진로지도와 적성검사를 받으며 막연했던 고민을 차분히 정리해 나갔다. 바리스타와 제과제빵, 간호 등으로 오가던 관심사는 코칭을 거치며 ‘국제무역’이라는 목표로 좁혀졌다. 3년 안에 대학 진학이라는 목표를 세운 그는 다시 공부를 시작하며 일상의 리듬을 되찾았다. 진희가 하트힐링 프로그램을 통해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지원 내용’보다 ‘사람’이었다. 프로그램을 시작하며 만난 월드비전 담당자는 처음 만난 자리에서도 진희의 이름을 불러 주며 이야기를 들어줬다. 진희는 “고민을 털어놓으면 ‘그럼 우리 같이 해볼까’라고 말해줬는데, 그 한마디가 계속 마음에 남았다”고 했다. 오랫동안 혼자 버텨야 한다고 믿어 왔던 진희에게 하트힐링은 ‘지원 프로그램’ 이전에 ‘사람을 만난 경험’이었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소정(가명·17)은 아버지의 수감 이후 불안과 정서적 혼란을 겪었지만, 아버지가 가족 회복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가족에게 사과한 것을 계기로 변화가 시작됐다. 부모 관계가 회복되면서 가정의 정서적 안정도 되찾았고, 소정은 면회 시간을 가족이 함께 소통하는 시간으로 받아들이며 일상과 학교생활에서도 안정을 회복하고 있다. 진수(가명·19) 역시 가족의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학업과 진로에 대한 자신감을 잃었지만, 하트힐링 사업의 지원을 통해 다시 계획을 세웠고, 자격증 취득과 진학·취업 준비를 병행하며 “앞으로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정리가 됐다”고 말했다. 세 사람의 상황은 달랐지만, 공통점은 분명했다. 누군가가 곁에 머물며 함께 생각해 주는 경험이 회복의 출발점이 됐다는 점이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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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동신문 개방? 노동신문 서버는 개방을 견뎌낼까?[주성하의 ‘北토크’]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연말에 노동신문 개방을 둘러싸고 여야의 설전이 오갔습니다. 노동신문 개방은 윤석열 정부 시절인 2023년에 국정 과제로 추진하던 사안이었습니다.약 3년 전엔 침묵하던 국민의힘은 이번엔 “무장해제하고 북한에 백기 투항하는 것”, “안보 인식이 우려를 넘어 경악스러운 수준에 이르렀다”는 등의 발언을 동원해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반면, 민주당에선 체제 경쟁력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반박하고 있고, 심지어 “노동신문을 자유롭게 구독한다면 가장 효과적인 대국민 반공 교육이 되리라 확신한다”(박지원 의원)라는 주장도 나왔습니다.어느 말이 맞을까요. 저는 반세기를 남과 북에서 살면서, 노동신문을 가장 많이 본 사람 중 한 명일 겁니다. 그런 저는 여야의 논란을 보면서 안보니, 반공이니 하는 범주의 생각은 들지 않고, 몇 가지 서로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걸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첫째, “개방하면 누가 읽을까?”라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20년 넘게 북한 기사를 써온 저는 어쩔 수 없이 노동신문이나 북한 중앙TV를 시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저에게 노동신문을 읽는다는 것은 ‘고행’의 연속입니다. 인내가 필요하고, 비위도 좋아야 합니다.요즘 휴대전화 속에 얼마나 재미있는 것이 많은데, 아까운 시간을 누가 노동신문의 깨알 같은 문자를 해독하느라 낭비하겠냐 싶습니다.저를 포함해 정말 노동신문을 구독이 필요한 사람들은 정부에서 열어주든 말든, 오래전부터 노동신문을 자유롭게 볼 수 있었습니다. VPN 앱 하나만 깔면, 휴대전화에서도 노동신문이나 북한 방송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봅니다.한 젊은 국민의힘 의원이 “노동신문의 텍스트는 간첩들의 난수표로 활용될 가능성도 높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고 많이 웃었습니다. 만에 하나 노동신문의 텍스트를 난수표로 활용하는 간첩이 있다고 해도, 그 간첩은 오래전부터 노동신문을 자유롭게 봤을 겁니다.저는 노동신문을 개방해도 그걸 볼 사람이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솔직히 반공교육의 측면이 훨씬 크기 때문에 보다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지만, 앞서 말했듯이 인내와 비위가 좋은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둘째, 국민의 힘이 주장하는 무장해제는 우리가 아닌, 노동신문이 먼저 당할 것 같습니다.노동신문 등 북한 사이트들은 서버가 매우 불안합니다. 기사 하나 클릭하면 열리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려 인내가 많이 필요합니다. 한국의 빠른 인터넷 속도에 익숙한 많은 젊은이들은 이 단계에서, 북한 기사 열리는 것을 기다리다가 포기할 듯싶습니다.초기에 노동신문 사이트를 오픈하면 궁금한 사람들이 들어가 볼 것인데, 제가 볼 땐 한 100명만 동시 접속해도 북한 서버가 버티지 못할 겁니다. 노동신문을 열어놨는데, 그 때문에 서버가 마비돼 저처럼 일 때문에 접속해야 할 사람도 읽지 못하면 큰일입니다. 그리고 북한은 김 씨 일가가 조롱받는 것을 정말 참지 못합니다. 점잖은 북한 연구자들이야 노동신문을 보고 필요한 것만 읽고 말지만, 한국의 젊은 세대가 북한 사이트에 접속해 김 씨 일가의 사진들을 따서 밈이나 개그의 소재로 활용한다면 어떨까요. 북한 매체들은 밈이나 개그로 활용하기엔 정말 풍부한 소재가 있습니다.그러면 이번엔 북한이 기겁해서 노동신문 사이트를 닫아버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건 정말 저처럼 북한을 들여다보는 사람에겐 큰일인데, 진지하게 말하지만 정말 문을 닫아버릴 것 같습니다.셋째, 노동신문을 읽으면 거기에 세뇌될 사람이 있을까요? 90% 이상에겐 반공 교재가 될 것임이 분명하지만, 세뇌당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기도 어렵습니다.저는 북한 관련 블로그나 유튜브를 18년째 운영해 왔고, 합쳐서 2억 뷰가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북한 관련 뉴스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꽤 많이 봤습니다. 그중엔 누가 봐도 황당한, 유치원생 이상의 지능만 갖춰도 판단이 될 가짜 뉴스를 진지하게 믿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이재명 대통령이 최근 북한 매체 개방 문제를 언급하면서 “북한 노동신문을 못 보게 막는 이유는 국민이 선전에 넘어가서 빨갱이가 될까 봐 그러는 것 아니냐”고 했는데, 빨갱이가 되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물론 노동신문을 보고 빨갱이가 되는 지능이라면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말입니다.넷째, 그 재미없는 노동신문에서도, 그나마 우리에겐 좀 관심거리가 될만한 제일 재미있는 면이 사라졌습니다. 이건 정말 유감입니다. 노동신문은 모두 6개면으로 구성되는데, 반세기 넘게 맨 뒷면인 6면은 ‘남조선면’으로 불리며 한국 관련 기사가 작성됐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남조선면이 사라졌습니다. 특히 김정은이 지난해부터 한국과 상종하지 않겠다고 한 뒤로 한국 관련 소식은 노동신문에서 거의 사라졌습니다. 노동신문에 있던 담당 부서인 ‘조국통일부’도 없애버렸습니다. 사실 ‘남조선 기사’는 참 재미있었는데 말입니다. 한국 사람들에겐 “북한이 우리 관련 소식을 어떻게 쓰냐”가 제일 궁금할 건데, 우리의 일상을 북한이 재해석해 가공한 것을 보면 웃음을 참기 힘들죠. 남조선 소식이 없는 노동신문은 북한 인민들에게도 매우 인기가 없어졌습니다.그런데, 우리에게 이렇게 재미없는 노동신문도 북한 주민에겐 정말 중요한 정보 전달자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북한 주민들은 노동신문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요.이에 대해 제가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몇 년 전에 썼던 글이 있습니다. 여기까지만 읽으셔도 되는데, 시간적 여유가 좀 더 있는 분만 재미 삼아 아래 내용을 읽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길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저는 분명 여기까지만 읽을 것을 권고했습니다.노동신문을 ‘거꾸로’ 읽었던 추억. 나는 북한에 살 때 노동신문을 정말 열심히 읽었다. 하루라도 읽지 않으면 뭔가를 놓친 기분이었다.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 판단해 볼 때 북한 신문은 철저히 노동당 선전선동 기관지로 김일성 부자 우상화 관련 기사가 꽉 차 있는 재미없는 신문이다. 어떠한 비판성 기사도 허용되지 않을뿐더러, 사건, 사고, 범죄, 재해, 여론조사 등을 담은 기사 역시 철저히 배제된다.실제로 한국에 와서 국제부 기자로 10년 넘게 있으면서 한국 신문은 물론이고, 세계의 무수한 신문을 봤지만, 노동신문 편집만큼 획일적이고 구태의연한 신문도 찾아보기 힘들다. 노동신문 대다수의 기사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슷비슷해서 지루하기 그지없다.그런 실정이니 신문 역시 북한 주민들에게서 철저히 외면당할 것이라는 추론이 어렵지 않게 나올 수 있다.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북한 주민들은 정말 신문을 열심히 챙겨 읽는다. 그 중엔 과거의 나도 포함돼 있었다.물론 읽고 싶다고 해서 누구나 신문을 원할 때마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신문 역시 국가에서 배정해 주기 때문에 일정한 사회적 직책이 없으면 신문을 볼 수가 없다.북한에서 신문이 인기가 있는 이유는 세상이 돌아가는 형편을 알 수 있는 통로가 신문 밖에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중앙 방송도 있지만, 지방에선 겨우 하루 몇 시간 동안만 전기가 오고 늘 정전돼 살기 때문에 TV 보기가 쉽지 않다. 또 TV에서 전해주는 뉴스는 겨우 30분 정도인데 이것도 김정일 동정 보도 등에 할애하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사실상 신문밖에 없다.북한에선 신문 외에 읽을거리도 많지 않다. 잡지도 거의 없을뿐더러, 몇 개 안 되는 잡지도 발행 부수가 매우 적어 일반 주민들은 구경하기 힘들다. 김 부자 관련 서적을 제외하면 북한 내에서 발행되는 문예 작품 역시 거의 없다.이런 북에서 살면 활자를 본다는 그 자체가 반가울 뿐이다. TV도 없고, 인터넷도 없고, 책도 없고, 거기에 한국처럼 술 마시고 놀 장소도 거의 없고, 노래방도 없고, 여가생활도 발달해 있지 않다 보니 독서는 북에서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즐거움이기도 하다.김일성, 김정일 등 북한 지배층의 동정을 보도하는 노동신문의 1~3면은 재미가 없지만 국내 소식을 전하는 4면과 국제면인 5면, 남조선 면인 6면은 그래도 매일 다른 소식이 전해진다. 그러므로 신문을 보면 내가 살아있다는 즐거움이 느껴진다.북한 주민들은 5면과 6면만큼은 정말 자세히 뜯어본다. 물론 남조선 관련 보도는 철저히 ‘통일방안 선전, 남조선 당국 및 자본가, 미 제국주의자들에 대한 비난, 남조선 사회의 어두운 점 부각을 통한 사회주의 우월성 선전’에 초점을 맞추어 보도한다. 국제면도 ‘썩어빠진 자본주의 사회의 불합리를 폭로, 반미 연대성의 공고화, 북한의 국제적 위상 제고’ 등을 집중 부각한다. 하지만 북한 주민들도 이 정도는 안다. 그래서 그들 나름의 상상력을 발휘해서 외부 세계를 상상해 본다.나의 실례를 든다면 가장 기억나는 것이 1991년 2월과 3월이 아니었을까 싶다. 노동신문이 제일 재미있었던 때도 그때였다. 1년 전 뉴스도 오늘 거 같고, 10년 전 뉴스도 오늘 거 같은 노동신문이 그렇게 기다려지기는 그때가 처음이다.바로 그해 1월 17일에 걸프전이 벌어져서 다음 달 28일까지 벌어졌다. 놀랍게도 노동신문은 걸프전이 벌어지자 이를 비교적 소상하게 중계했다. 북한에선 걸프전을 ‘만전쟁’이라고 했다. 전쟁의 참혹함도 알고 피해자들에겐 안 된 말이지만, 그래도 싸움 구경해 보긴 처음이었다. 물론 눈으로 화면을 본 것은 아니고, 그냥 읽기만 했지만 내가 살던 곳이 북한임을 감안하면 그 정도만 해도 과분한 것이다.더 놀라운 것은 그 전쟁을 내가 보기엔 북한이 처음으로 중립적 시각에서 전하고자 노력했다는 것이다. 공습의 시작과 전쟁 양상을 중계 보도하듯이 전했다. 기억해 보면 이런 식이다.“이라크 **방송에 따르면 18일 F-111 전략폭격기 등을 앞세운 다국적군 비행기 16대가 바스라를 공습했다. 이라크 반항공군은 미사일을 발사해 이 중 1대를 격추했다고 발표했다.이라크 혁명수비대는 쿠웨이트에 5기의 스커드 미사일을 발사했다. 걸프 뉴스는 다국적군이 패트리어트 요격미사일을 발사해 이 중 3기를 격추했다고 전했다. 두 발은 쿠웨이트 도시 외곽에 떨어졌다. 다국적군의 상륙에 맞서 이라크군은 **섬에 방어부대를 배치하고, 대기했다. 섬에 접근하던 다국적군 소해정 1대가 기뢰에 부딪혀 격파됐다.”노동신문의 보도 분량은 다국적군의 공격 내용과 이라크군의 방어 내용이 거의 반반씩 됐다.물론 철저히 이라크 중심적 보도이긴 했다. 전과라고 나오는 것은 이라크군이 뭘 쐈다. 미군 비행기 몇 대가 떨어졌다는 것만 나온다.다국적군의 전과라고 해봐야 기껏 패트리엇으로 스커드 요격했다는 것하고, 어딜 폭격했다는 정도이지, 이라크군이 얼마나 피해 봤는지는 찾아볼 길이 없었다. 그냥 다국적군이 오늘은 어떤 도시들을 폭격했다는 것만 나왔다.하지만 북한임을 고려하면 놀랄만한 일이다. 특히 미제라고 쓰지 않고 다국적군이라니, 그건 당시에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나는 노동신문이 “영웅적 이라크 혁명수비대가 미제 침략자들을 통쾌하게 짓부쉈습니다. 오늘만 해도 미국놈 45놈이나 황천길에 갔습니다”는 식의 보도를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내 생각과는 달랐다.덕분에 당시 토마호크니, 패트리어트니 하는 미사일 이름도 얻어들었다. 토마호크가 무슨 뜻인지 사전도 찾아서 기억했다.그런데 이렇게, 하루, 하루 지나고, 열흘이 지나도 보도가 달라지는 것이 없다. 처음 나온 것과 똑같이 오늘은 어디 어디 공습했고, 이라크가 미사일 몇 발 쐈고, 이런 내용만 반복됐다. 전쟁이라면 막 돌격하고, 방어선을 뚫고, 막고 그러는 것만 상상했는데, 그냥 폭격했고 대응했다 이런 것만 나오는 것이다.아마 속으로 “요즘은 왜 전쟁 이렇게 시시하게 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해도 될 것 같았다. 노동신문이 걸프전에 전개된 다국적군 병력과 이라크군 병력까지 비교해 주어 살펴보니 병력이 비슷했다.“이렇게 엇비슷하니 누구도 선뜻 못 들어가는구나!” 정도로 짐작했다. 한 달 넘게 공습 보도해 지루해지던 어느 날(한국에 와서 찾아보니 바로 2월 24일이었다) 지상전이 시작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교전이 벌어졌다는 소식에 다시 생기를 찾았다. 어디서 전투가 벌어졌다니. “오, 이제야 막바지로 치닫는구나.” 다음날 신문을 펼쳤는데, 이게 웬일. 어제 보도한 분량의 절반으로 전쟁 중계가 나왔다. 싸움이 벌어졌으면 더 크게 써야지 이게 뭐지 싶어 의아했다. 내용도 어디 어디서 격전이 벌어졌다는 것인데, 그것만 봐서는 알 수가 없었다.또 다음날 보니 이번에는 더 작게 보도됐다. 혁명수비대가 여전히 완강하게 저항하고 있단다. 이상했다. 나흘째였던가, 놀랍게도 노동신문에서 걸프전 뉴스가 사라졌다. 어디에도 없었다. 지상전이 시작됐다는데, 나흘 만에 보도가 없어지다니 웬 일인가 싶어 매우 놀았다.아무리 생각해도 이라크군 50만 대군이 나흘 만에 없어진 것 같지는 않고, 다시 소강상태에 들어갔나 생각했다. 걸프전 뉴스는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에야 비로써 “정말 졌나?”는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도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이라크에 50만 대군에 탱크도 수천 대나 있다고 했는데 그 무력이 불과 나흘 만에 전멸했다고 어찌 믿을 수 있을까.한참 뒤 “이라크 애국자들이 바그다드에서 미군 기지를 폭탄테러 한다”는 내용이 실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에야 “이라크가 이젠 미군의 통치를 받는구나”하고 생각했다. 나중에 서울에 와서 찾아보니 걸프전은 지상전이 벌어지고 4일 4시간, 불과 100시간 안에 끝났다고 했다.위에서 서술된 노동신문 내용은 절대적으로 내 기억에 의존해 되살린 것이다. 수십 년 전 일이라 정확하지 않은 기억도 있었을 것이다. 북한자료센터에 가서 그때 신문을 본다면 당시 내가 그걸 보면서 들었던 느낌까지 되살릴 수 있을 텐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몇 달 뒤 북한군 각 부대가 연거푸 하달되는 총참모부 지시를 집행하느라 바빠지기 시작했다. 기억되는 지시는 갱도를 많이 만들고 입구 문에 원뿔을 만들어 붙이라는 것이다. 적의 레이더 탐지를 교란하기 위해서란다. 사방에서 쾅쾅~발파 소리가 울려 퍼졌다. 텅 빈 굴들이 곳곳에 만들어졌다.그리고 또 하나의 지시는 가짜 무기를 많이 만들어내란 것이었다. 군인들이 용접기를 구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공장에도 가짜 포를 만들어 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가짜를 많이 만들어야 적들이 진짜를 구분 못 하고 허튼 곳에 폭격한단다.걸프전에서 미군의 무시무시한 화력을 보고 기겁해서 총참모부가 머리를 짜내 만든 대책이란 것이 고작 갱도 많이 만들고, 뿔 만들어 붙이고, 가짜 비행기 등을 모방한 ‘더미’를 만들라는 것들이다.북한군도 나중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는지 한 10년쯤 지나선 관리도 안 한다. 고철이나 땔감이라도 썼으면 좋으련만 그 주제에 그래도 군 등록 장비라 다치지도 못한다.북한에 가면 그래서 저렇게 방치된 가짜 모형들이 많다. 눈물나게 구슬펐던 북한군 과거의 산증인으로…. 그래도 그때는 1991년이라 저런 것이라도 만들었지, 지금은 저런 더미라도 만들 능력이 있을까 싶다.당시 이라크 전쟁을 다룬 노동신문을 보면서 나는 깨달음을 얻었다. “북한은 최강이 아니구나. 이라크도 저렇게 나흘 만에 완전히 먹히는 데 우리가 세계 최강이라니 말도 되지 않는 억지구나.”그때 나는 10대 소년이었다. 내가 그 정도 느꼈으니 북한의 수많은 지식인 역시 비슷한 생각을 품었을 것 같다.남조선 보도 역시 나의 관심 주제였다. 가령 실례로 노동신문에선 “남조선 괴뢰 집단이 장군님을 찬양하는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을 들씌워 애국청년에게 1년 형을 선고했다”는 식의 비난 기사가 많이 실린다.그러면 주민들은 “아, 우리는 남조선 대통령을 찬양하면 바로 총살일 텐데 저긴 고작 1년이라니, 참 좋은 사회구나”하고 생각한다. 실제로 1989년 대학생 임수경이 평양에 왔다가 돌아갔을 때 북한 신문들은 ‘애국청년에게 징역 5년을 선포한 남조선 파쇼 도당의 만행’을 연일 규탄했다. 그러나 북한 주민들은 오히려 “우리 중 누가 서울에 가서 저러고 돌아오면 본인은 물론 8촌까지 멸족될 텐데. 진짜 파쇼는 우리구나”하고 생각했다.이런 식으로 나는 당국의 선전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나름의 상상력을 발휘해 외부세계를 그려 보았다. 그리고 나중에 돌아보면 당시의 나의 상상은 노동신문에 쓰인 내용보다 훨씬 더 진실에 근접해 있었다. 이렇게 노동신문도 퍼즐을 맞추어 수수께끼를 푸는 것처럼 읽어보면 나름 정말 재미있다.그것이 내가 노동신문을 열심히 읽는 이유이기도 했다. 늘 이런 식으로 신문을 읽기 때문에 나는 행간에서 숨은 뜻을 찾아내는 능력은 정말 잘 발달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당국이 말해주지 않아도 신문을 거꾸로 읽어가면서 웬만큼 다 알 수 있는 것이다.물론 지금은 북한 선전 당국도 이런 것을 이제는 많이 의식하고 있다. 임수경 방북 때만 해도 ‘너무 과하게’ 남조선 독재정권을 비난했다가 역효과를 냈는데 이제는 나름대로 경험이 쌓이다 보니 이런 실수를 거의 저지르지 않는다.서울에서 벌어지는 촛불 시위 보도를 보면 북한의 고민을 알 수가 있다. 사진을 하나 실어도 서울의 발전상이 북한 주민에게 전해질까 봐 배경을 모두 지우면서 고심한 흔적들이 역력하다. 노동신문은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때는 단 세 문장으로,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은 단 네 문장으로 관련 내용을 보도했다. 여느 때 같으면 “인민들이 들고일어나 반북 대결에 광신하던 정권을 몰아내고 내고 자주독립을 쟁취하고 있다”고 호도해 선전했을 것인데 너무 조용한 것이다.결국, 북한도 사람들이 신문을 거꾸로 읽어버리는 것을 알아버린 것 같다. 그나마 서너 문장으로 탄핵 사실을 알린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사실 아무 내용도 쓰지 않으면 북한 주민이 외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기 어렵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든 나름 입맛대로 포장해 보도하는 순간 그때는 북한 주민이 뛰어난 상상력을 발휘해 상황을 알아 버리게 된다.한국의 탄핵 보도를 보면서 많은 북한 주민도 “인민들이 힘을 모으면 독재자를 몰아낼 수 있다”는 상상을 할 것 같다. 북한은 그것이 끔찍할 것 같다.북한 신문을 말할 때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사례가 또 하나 있다. 노동신문의 열렬한 애독자였던 내가 북한에서 마지막으로 읽었던 신문은 9·11테러 소식이 실린 손바닥만 한 신문 쪼가리였다.사연은 이렇다. 2001년 나는 탈북했다가 불행하게도 중국 공안에 체포돼 북송됐다. 6개 감옥을 옮겨 다니며 수감생활을 하다가 제일 마지막에 간 곳이 강제노동수용소였다. 수용소에선 종종 외부 작업을 나가기도 하는데, 이때 모든 남성 수감자의 주된 관심이 담배꽁초와 휴지를 주어오는 것이었다. 그렇게 주어 온 담배꽁초를 털어 수용소 안에서 몰래 피우는 담배는 꿀맛이다.어느 하루 작업 동원에 나갔던 나는 운이 좋게도 손바닥만 한 신문을 발견했는데, 그걸 보다가 흠칫 놀랐다. 미국의 세계무역센터가 알 수 없는 테러 집단의 공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기사 절반 이상이 사라져 다른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쌍둥이 빌딩이 여객기와 충돌해 검은 화염이 하늘로 치솟는 사진은 다행히 그대로 남아있었다.이후 나는 그 신문 조각을 쓰지 않고 석방될 때까지 갖고, 과거 했듯이 온갖 상상을 다 해보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 유일 초강대국을 공격할 나라는 어디일까.”북한에서 살았던 내가 알카에다와 같은 중동 테러 단체의 존재를 알 리가 만무했다. 결국, 끝내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다.몇 달 뒤 석방됐고, 곧바로 탈북했기 때문에 당시 읽은 9·11테러 신문 기사는 내가 북한에서 보았던 마지막 노동신문 기사가 되고 말았다. 한국에 와서 당시 북한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찾아보다가 놀랐다. 테러 발생 직후 북한 외무성 대변인이 당시 “지극히 유감스럽고 비극적인 사건이며 온갖 형태의 테러와 그에 대한 어떠한 지원도 반대하는 우리의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고 재빨리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아마 그것을 본 북한 지식인들은 속으로 비웃었을 것이다. 평소에는 맨 날 미국을 불바다로 만들어버리겠다고 호통을 쳐왔는데, 정작 보복이 닥칠 순간이 되니 미국이 테러의 배후로 북한을 찍을까 봐 꼬리를 내리는 것이다.선전선동과 거짓으로 도배가 된 노동신문일지라도 그걸 꼼꼼히 읽으며 거꾸로 상상해 본 덕분에 나는 탈북을 결행하는 순간까지 이르게 됐다. 북한이 아무리 언론 매체를 통해 거짓을 주입하려고 해도 사람들은 직감적으로 진실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다.아무리 겉으로 충성하는 척 거짓 연기를 한다고 해도 뇌와 심장까지 노동당에 맡겨놓고 사는 것은 아니다.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에이브러햄 링컨 전 대통령은 이런 말을 남겼다.“모든 사람을 잠시 속일 수는 있다. 일부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마치 북한을 지켜보고 남긴 명언 같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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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에서 온 세탁소 ‘작은 거인’… “세금 내는 재미에 삽니다” [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올해 10월 서울에서 남북하나재단 주최 ‘2025년 남북한 주민 사회통합 사례 발표 대회’가 열렸다. 대상은 서울 양천구 목동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56세 용성옥 씨에게 돌아갔다.쟁쟁한 발표자가 많았지만 어렸을 때 소아마비를 앓았고 키는 145cm에 불과한 용 씨가 심사 위원들과 청중에게서 높은 점수를 받아 대상을 탄 이유는 무엇일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마다 생각은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성옥 씨가 걸어온 삶과 주어진 조건이 나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쓰러지지 않고 살아남아 서울에 집과 가게를 장만하고 “국가에 세금을 내는 것이 얼마나 뿌듯한 일인지 여러분도 그 기쁨을 누려 보십시오”라고 외치는 여인. 그 앞에선 모두가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말했다.“북한과 중국에서 제가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입니다. 지금 돌아봐도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지금은 저 스스로 너무나 기특하고 대견합니다. 남은 인생은 열심히 살아온 저에게 상을 줄 겁니다. 지금까지 보지 못하고 살았던 하늘도 쳐다보고 산도 바라보면서 여유롭게 살아가려 합니다.”하늘과 산을 보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말하는 여인. 지금까지 어떤 인생을 살아 것일까.● “태어나 보니 장애인이었다.”용 씨 고향은 함경남도 함흥이다. 1969년 그가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흥남비료공장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부모는 모두 남쪽 출신이었다. 그래서 북에는 친척이 한 명도 없었다. 경기도 가평에서 살다가 6·25전쟁 때 의용군에 징집됐던 부친은, 강원도 남쪽 어느 산골에서 북으로 피난을 온 여인을 만나 결혼했다.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그가 7세 때 시름시름 앓다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가 살던 마을엔 비료공장 암모니아 냄새가 늘 지독하게 풍겼고 아버지가 없는 집이 많았다.부친이 사망하자 어머니가 비료공장에 다녔다. 그래야 배급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남편 없이 자식 5명을 키워야 했던 어머니는 늘 어두운 표정이었다. 용 씨는 어머니가 웃는 것을 본 일이 없다. 그가 20세 때 모친도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병원 사정이 열악해 결핵이었는지, 늑막염이었는지 병명도 몰랐다.용 씨는 태어나자마자 소아마비에 걸려 오른쪽 다리를 잘 쓰지 못하는 장애인이 됐다. 지독하게 가난한 가정에서 막내였던 용 씨는 늘 오빠들과 언니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다. 배고파도 배고프다고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1985년 용 씨는 16세에 고등중학교를 졸업했다. 비료공장 노동자 자녀들은 학교를 졸업하면 부모 뒤를 이어 비료공장에서 일하게 하는데, 하필 그해에 졸업한 학생들은 용성기계공장에 무리배치(집단 배정)가 됐다.집에서 가까운 비료공장에 갔으면 출퇴근이라도 쉬웠겠지만, 용성기계공장은 집에서 한 시간 반이나 걸어야 했다. 사지 멀쩡한 애들은 한 시간이면 갔지만, 다리가 불편한 용 씨는 남들보다 더 일찍 나가 쩔뚝거리며 다녔다.기계공장에선 그가 장애인이라고 압축기 운전공 업무를 맡겼다. 스위치를 조작하는 일이라 몸을 써야 하는 힘든 일보단 나았다.그곳에서 용 씨는 1994년까지 9년을 일했다. 공장을 그만둔 것은 자의가 아니었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전기가 없어 공장이 가동되지도 않았고 배급도 나오지 않아 노동자들이 출근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어떻게 살아남았을까”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은 고난의 행군 시절. 함흥은 북한에서 가장 참혹한 비극을 겪은 지역에 속했다. 못 먹어서 퉁퉁 부은 사람들이 길가에 쓰러졌다.규찰대가 돌아다니며 쓰러진 사람들을 살펴봤다. 눈을 뒤집어보고 “하루 남았다” “사나흘 남았다”고 판단했다. 3~4일 이하로 남았다고 판단된 사람은 산에 버렸다. 어차피 살지 못할 사람들이니 길거리에서 시체를 미리 치우는 것뿐이었다.어머니가 1989년에 세상을 떠난 뒤 용 씨는 집에서 오빠와 같이 살았다. 하지만 성성한 사람도 겨우 연명하는 상황에서 올케에게 장애인 시누이는 구박의 대상일 뿐이었다. 용 씨는 비료공장에서 비료를 훔쳐 인근 지역에 가서 팔기도 했지만, 이것만으로는 혼자서 먹을 것도 벌지 못했다.오빠네 집을 전전하다가 언니네 집에도 갔다가 했지만 어디서든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남매가 굶어 죽을 사람을 지목하라고 하면 아마 서슴없이 그를 맨 먼저 꼽았을 것이다. 도무지 갈 곳이 없으면 거리에 나가 잤다. 근 1년을 처녀 꽃제비로 살았다.그 스스로도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그때 어떻게 살아남았을까”이다. 1998년 봄. 더는 버틸 수 없는 순간이 왔다.‘이젠 죽겠구나. 그래. 제발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 유랑 중에 귀동냥으로 들었던 소문 하나가 떠올랐다. 북쪽 지역에 올라가면 피를 팔 수 있다는 말이었다.“그래, 아직 몸뚱이와 피는 있으니 한번 가 보자.”기차를 타고 함흥에서 회령까지 20일이 걸렸다. 기차에 붙어 기생하는 꽃제비들처럼, 그도 걸식하며 가까스로 회령에 도착했다. 이때 죽지 않은 것 역시 그의 생각에 또 하나의 기적이었다.회령역에 내려 힘없이 주저앉아 있는데, “중국에 가겠다면 자기가 데려다주겠다”며 한 노파가 다가왔다. 용 씨는 중국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거기 가면 살길이 있다는 말에 따라나섰다.그해 4월 15일 김일성 생일에 그는 노파와 다른 여인과 함께 두만강을 몰래 건넜다. 함께 간 여인은 세 번째 탈북 시도 만에 중국에 무사히 왔다며 무척 좋아했지만, 용 씨는 자신이 어디 있는지조차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로 쇠약했다. 노파는 “4명은 데리고 와야 하는데 2명밖에 데리고 오지 못했다”며 툴툴거렸다.그가 들어간 중국집은 전문적으로 북한 사람들을 팔아먹는 집인 듯했다. 한 남성이 그들을 집에 들여놓기 전에 몸에 이가 많다면서 밖에서 옷부터 갈아입혔다. 방에 들어가서는 해 놓은 찰떡을 먹게 했다. 여자들이 왔다는 것은 그에게 돈이 왔다는 의미일 것이다.어떤 것도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극심한 고통 때문에 물도 삼킬 수 없었다. 그 집에서 20일을 보냈다. 겨우 몸을 추스른 그를 데리고 길을 떠났다.● 시골에서 보낸 9년그가 팔려 간 곳은 흑룡강성 목단강 지역 농촌이었다. 가까운 도시로 가려면 100km나 가야 하는 심심산골이었다. 전체 350세대 중 두 세대만 빼고 모두 조선족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서로가 먼 친척 관계인 듯 보였다.그의 남편으로 정해진 남자는 7세 연상의 총각이었는데,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용 씨를 살갑게 대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때리지도 않았다. 배운 것도 전혀 없어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아이를 갖자는 말도 없었다. 용 씨 역시 책임도 지지 못할 아이를 낳을 생각은 없었다.이 마을에서 그는 9년을 살았다. 돈이 없어 벼농사도 짓지 못해 용 씨가 마을에서 각종 삯일을 받아다 해서 돈을 벌었다. 먹고사는 일만 반복됐다. 몇 년쯤 살다 보니 살고 싶은 의욕이 사라졌다. 인간의 삶이 아니라 희망이 없는 돼지의 삶인 것 같았다. 쥐약이나 농약만 보면 먹어서 죽고 싶은 날이 많았다. 그렇게 하지 못한 이유는 마을에 농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한 여인 때문이었다. 병원에서 위 세척을 해서 살아났지만 돈은 돈대로 나가고 몸은 몸대로 망가져 있었다. 그런 꼴은 되고 싶지 않았다.용 씨가 그 마을에서 지내는 동안 탈북 여성 32명이 시집을 왔다. 다들 견디지 못하고 도망가거나 체포돼 북송됐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런 삶을 버티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하지만 용 씨는 달랐다. 그는 태어나서부터 수모를 견디며 죽은 듯 사는 것이 몸에 배었다. 참는 것은 누구보다 도가 트였다. 말도 모르는데 마을을 떠났다간 화를 당할까 두려웠다. 유랑하던 지난날을 생각하면, 그래도 그 마을엔 누울 곳은 있었다.마을 사람들은 모여 앉으면 누가 싸웠고, 누가 뭘 훔쳐 도망갔다 같은 탈북자들 욕을 했다. 용 씨는 더욱 숨도 쉬지 못하고 살았다.신기한 것은 그 9년 동안 그가 북송 한 번 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안이 오면 오히려 “우리 집에 와 있으라”며 옆집 사람들이 집을 비워 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탈북자를 “먹지 못해 온 거지들”로 봤다. 그들이 어떤 일을 견디지 못해 하면 “그런 거지들이 똑똑한 척, 잘난 척한다”고들 했다. 하지만 용 씨는 달랐다. 누구와도 말썽을 만들지 않았고 늘 겸손했다. 혈연으로 엮인 마을에서 골치 아픈 친척 총각 거둬 주고 먹여 주고 말썽 없이 조용하게 사는 그에게는 나름 존재 이유가 분명했던 것 같다.● “우리를 받는 곳이 있다고?”2006년 5월 돈을 벌겠다고 한국에 갔던 마을 사람이 용 씨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왔다.“내가 한국에 와 보니 북에서 온 사람을 탈북자라며 국적도 주고 돈도 주고 임대아파트도 주더라. 네 각시도 숨어 살게 하지 말고 여기 보내서 사람답게 살게 해.”용 씨는 그때 처음으로 한국에 간 탈북민들 얘기를 들었다.‘아, 이 세상에 우리 같은 사람들을 받아 주고 사람 대접을 해 주는 곳이 있구나.” 희망이 생기고 가슴이 뛰었다. 남편에게 한국에 가겠다고 하니, 늘 그랬듯이 반대도 찬성도 하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 온 마을 주민을 통해 브로커와 연결돼 일행 5명과 함께 한국으로 떠났다. 중국과 태국 국경에서 험한 산을 넘을 땐 다리가 끊어질 것 같았지만 미래를 생각하며 기어코 산을 넘었다.태국에 도착하니 다른 브로커가 마중 나왔다. 그는 “미국에 가려면 도와줄 텐데, 한국에 가려면 알아서 가라”고 했다. 당시엔 미국에서 탈북민을 난민으로 간주해 입국을 허용하는 북한인권법이 통과된 지 1년이 지난 뒤였다. 브로커가 무슨 이해관계 때문에 그렇게 말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용 씨는 미국에 가겠다며 남았다. 미국과 한국의 차이는 몰랐지만 혼자 알아서 가라는 말이 무서웠다.미국에 가기를 희망하는 탈북민은 방콕에서 유엔 관할의 어느 호텔에 묵게 했다. 하지만 미국 입국 심사는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미국에 간 탈북민은 2025년까지 200명이 간신히 넘는데, 모두 1년 넘게 제3국에서 대기해야 했다.그는 그 호텔 생활을 8개월 동안 했다. 그때가 가장 행복한 때인 듯했다. 가만히 있어도 호텔에서 먹여 주고 입혀 주니 그런 천국이 따로 없었다. 그러던 중 다른 탈북자를 따라 한인 교회에 가게 됐다. 교회 사람들은 “미국행은 기약이 없으니 한국으로 가는 것이 낫다”고 말해 주었다. 실은 용 씨에게 미국이든 한국이든 큰 의미는 없었기 때문에 그는 8개월 만에 한국행 대열에 합류했다. 방콕 이민국 감옥에 들어가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낸 뒤 마침내 한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태국에서만 그렇게 1년을 허비했다. 하나원 생활을 하면서 그는 비로소 삶의 의욕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하나원에서 가르쳐 주는 영어 단어를 익히면서 ‘중국에서 돌처럼 살았던 9년이 너무나 아깝다’고 생각하게 됐다.● 한계를 깨달은 초기 정착 과정2007년 11월 2일 그는 하나원을 졸업해 서울 양천구 신정동 임대아파트에 자리를 잡았다. 더 이상 과거의 용성옥이 아니었다. 껍질을 벗고 땅 위로 올라온 애벌레마냥 새로운 인생을 예고한 존재였다. 나이 38세. 의욕이 넘쳤다.하지만 한국 사회에선 필수라는 컴퓨터도 전혀 할 줄 몰랐고 휴대전화 사용도 서툴렀다. 집에서 혼자 밥에 고추장을 며칠 비벼 먹으니 갑자기 또 외로움이 찾아왔다.“여기서는 더 이상 외롭지 말자. 먹고 잘 수 있는 곳으로 가서 일하자.”벼룩시장을 뒤져 찾은 첫 직업은 경기 용인시의 어느 정신병원 간병인 자리였다. 그곳의 다른 간병인들은 대개 70대 조선족이었다. 몇 달 일하니 그에게 말을 거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이 일은 젊은 사람이 할 일이 못 되니 다른 직장을 찾으라”고 했다. 그때쯤 그는 간병인이 자신에게 어울리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작은 체구로 우람한 환자들을 옮길 수도 없었고, 장애인 몸으로 무거운 것을 들고 다니기도 힘들었다. 설거지를 하려고 해도 키가 작아 불편했다.하지만 다른 직장 생활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그는 직장이라고 하면 정장 차림에 구두를 신고 다니는 곳인 줄만 알았다. 컴퓨터도 할 줄 모르는 자신이 직장인이 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그때 귀인이 나타났다. 그가 사는 동네 교회의 한 장로가 야간에 작업할 사람이 필요하니 해 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이 장로 부부는 종이 쇼핑백 끈을 자르는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데, 밤에도 일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그곳에서 용 씨는 오후 8시부터 이튿날 오전 9시까지 작업했다. 기계로 하는 작업이었지만, 16세부터 기계공장에서 기계공을 한 그로서는 두렵지 않았다.하루 일당은 10만 원이었다. 돈을 쓸 곳이 별로 없어 들어오는 족족 모두 통장에 저축했다. 살면서 처음으로 통장에 돈이 들어오는 생활을 하니 참 좋았다.장로인 사장은 “북한 사람이 참 일을 잘한다”며 좋아했다. 이후 사장은 다른 탈북민들도 받아 일을 시켰는데 조용하게 일하는 성격인 용 씨는 오히려 그들과 어울리는 것이 스트레스였다. 2년 넘게 일한 그가 먼저 일을 그만두었다.● 운전면허로 얻은 자신감한국에 와서 처음 느낀 큰 성취는 운전면허 취득이었다. 일자리를 찾아도 거리가 멀고 교통수단이 좋지 않아 가기 힘든 경우가 종종 생겨났다.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니 많이 걷는 것도 힘들었다. 그에게 운전면허 취득은 절박한 일이었다.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쪽 다리에 힘이 없어 양발 운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강사들은 “그렇게 하면 너무 위험하니 운전을 포기하라”고 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사정을 들은 운전면허학원 원장은 그에게 따로 강사를 붙여 줬다. 마침내 운전면허를 딴 그는 지금까지 14년째 무사고 운전을 하고 있다. 위험하다고, 안 된다고 주변에서 말리는 일을 해내니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그런데 어떤 일을 하던 시간이 흐를수록 커지는 고민이 있었다.“이런 일은 영원히 할 일이 아니다. 나처럼 장애가 있는 사람이 평생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나이가 들수록 다리에 힘이 없어질 텐데 늦지 않게 나만의 일을 찾아 보자.” 한국 사회에 어느 정도 적응하면서 여기저기 다양한 가게를 찾아가 살펴보며 연구하기 시작했다. 학교 다닐 때 반 친구들 머리카락을 잘라 주던 일이 생각나 미용실도 가 봤지만, 한국 미용실은 가위질만 하는 곳이 아니었다. 엄두가 나지 않았다.우연히 알게 된 일이 세탁이었다. 하루는 동네 전단을 보다 ‘머리밴드 고무줄 끼우는 아르바이트’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게 됐다. 고무줄을 끼우면 1개에 10원씩 주는 일이었다. 거기서 그는 재봉기란 것을 처음 봤다. 60세가 훌쩍 넘은 여인이 재봉질하는 것을 보고는 적성에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앉아서 하는 일인 데다 연령 제한도 없어 보였다.하지만 재봉일도 기술이 필요한 법. 그는 미싱학원을 검색하고 등록했다. 4대 보험이 되는 회사에 다니면서 6개월 동안 학원 주말 반에 부지런히 다녔다. 왼발로 발판을 누르고 오른손으로 박음질을 하려니 손과 발이 따로 놀았다. 나이 들어 배우니 더 힘들었다. 하지만 다녀 볼수록 내 일이란 확신이 생겼다.옷 수선도 이 학원에서 처음 알게 됐다. 여기저기 옷 수선집을 찾아 살펴보니 대개 60~70대 사장이 운영하고 있었다. “정년이 없이 내가 하고 싶을 때까지 할 수 있는 일이구나.”직장을 그만두고 아예 전문직 주간 반에 등록했다. 그때부터 2년 동안 학원에서 열심히 기술을 배웠다. 오전엔 학원에 가고 오후엔 옷 수선집에서 아르바이트한 뒤 저녁엔 다른 부업을 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집에 미싱을 사놓고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나의 세탁소를 열다그렇게 2년이 흘렀다. 2014년 3월 그는 살던 동네에서 옷 수선집을 열었다. 옷 수선만 해서는 수입에 한계가 있을 듯해 세탁 체인점과 겸했다.그렇지만 세탁과 옷 수선은 기술만으로 하는 일이 아니었다. 고객 대응법과 인사법, 돈 계산법, 컴퓨터 타자술, 세탁 품목 익히는 법, 가게 운영법 등 넘어야 할 산이 한둘이 아니었다. 명품이 뭔지 밍크가 뭔지도 몰랐다.처음에는 수선을 위해 손님들 옷을 가위로 자르는 것이 두려워서 가위를 들었다 놨다를 한 시간 동안 했다. 실전은 학원과 달랐다.지금까지 조용히 살던 성격도 문제였다. 분명히 손님이 들어올 때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라고 인사를 했는데, 말이 입에서 맴돌아 손님은 알아듣지 못할 때가 많았다. 힘을 주어 말하면, 조선족이냐고 했다. 이때마다 그는 북에서 왔다고 당당히 대답했다.동네에 세탁소가 한둘이 아닌 상황에서 그의 유일한 경쟁력은 가격을 낮추는 것이었다. 남들이 3000원 받을 때 2000원을 받았다. 가격 경쟁력을 내세우니 고객이 하나둘 늘어났다. 하지만 3년쯤 세탁소를 운영해 보니 한계가 보였다.그의 세탁소는 그냥 동네 고객들에겐 싸고 착한 가게였다. 남들처럼 똑같이 수선도 하고 세탁도 할 자신이 생겼지만 가격을 높이려고 하자 고객들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굳어진 이미지가 문제였다.3년 만에 가게를 옮겼다. 스스로 봐도 당당하게 할 수 있는데, 그 동네에선 굳어진 이미지를 벗기 힘들었다. 2017년 서울 양천구 지하철 5호선 목동역 인근에 새로 세탁소를 시작했다. 스스로를 새롭게 업그레이드하는 의식이기도 했다.업그레이드를 하려면 쉬지 않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세상은 세탁이나 수선 기술만 있다고 해서 편히 살게 두지 않았다. 점점 성능이 뛰어난 세탁기와 건조기가 나오고 주변에 코인 세탁소도 늘었다. 유튜브 등으로 세탁 기술도 많이 공유되면서 세탁업 입지는 매년 줄어들었다. 게다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세탁 체인점 본사가 폐업하자 손님도 줄었다.어떻게 하면 경쟁력을 키울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신발 세탁을 떠올렸다. 신발 세탁은 까다로워서 가정에서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클레임이 제일 많은 것도 신발 세탁이어서 세탁소에서 선뜻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그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주말마다 경기 의정부나 안양 그리고 한양대 등에서 ‘수업료’를 내면서 신발 세탁 기술을 배웠다. 온라인 세탁 카페나 세탁 밴드 등에 가입해 비결을 배우기도 했다.이런 과정을 거치고 직접 신발 세탁을 시작하니 잘하는 집이라고 소문이 났다. 차에 신발을 가득 싣고 찾아오는 고객이 많아졌다. 그렇게 번 돈을 모아서 2020년엔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 자그마한 집도 샀다. 한국에 온 지 13년 만에 내 집이 생긴 것이다.● 시련은 파도와 같은 것인생이 늘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서민들을 보호한다며 2020년 정부 여당이 국회에서 강행 처리한 ‘임대차 3법’이 진짜 서민인 그의 목을 겨누는 비수가 됐다.2023년, 세탁소가 세든 건물 주인이 갑자기 가게를 비우라고 통보했다. 자신이 들어와 장사하겠다는 것이었다. 주인 속셈은 당시 월세 60만 원에서 어차피 5%밖에 올릴 수 없으니 그를 내보내고 다른 사람을 더 높은 월세로 받겠다는 얘기였다. 한편으론 세탁소는 기계가 많아 쉽게 옮기지 못할 것이란 타산도 있었던 듯하다.세탁소는 단골 관리가 핵심이다. 다른 데에서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세탁소를 처음 차리는 것과 비슷한 모험이다. 주인은 아예 전화를 받지도 않았다. 이견이 있으면 변호사와 상의하라는 문자 메시지만 왔다. 사정사정해서 20만 원을 더 주고 2년 계약을 새로 맺었다.올해 5월 다시 2년 만기가 다가오자 용 씨는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는 문자 메시지를 주인에게 보냈다. 2년 전의 불친절한 태도로 보건대 재계약에 목을 매면 또 어떤 조건을 내걸지 알 수 없어 용단을 내린 것이다. 그는 집 인근에 새 가게를 구했다. 기존 세탁소에선 수백 m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이사비만 1000만 원이 들었지만 마음은 시원했다. 그가 떠난 세탁소는 7개월이 지난 지금도 비어 있다. 이사를 하면서 고객을 잃을까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의외로 많은 단골이 더 멀어진 그의 세탁소로 찾아왔다. 새로운 가게는 ‘세탁스토리’라는 브랜드를 내걸고 운동화 위주 세탁과 옷 수선을 함께 한다. 그에겐 어디 가도 뿌리를 내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파도 같은 시련을 넘고 또 넘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찾아 자리 잡았다는 것처럼 뿌듯한 일도 없다. 손이 떨려 더 이상 가위질을 할 수 없을 때까지 평생 일할 수 있다는 것도 참으로 다행스럽다. ● “저를 보고 힘내세요.”사회통합 사례 발표 대회에서 그는 말했다.“대한민국 3만 탈북민은 저를 보고 힘내시기 바랍니다. 포기만 하지 않고 주저앉지만 않는다면 꼭 기회가 있고 끝이 있습니다. 이 말처럼 한다는 것도 얼마나 어려운 일인 줄 알지만 그 끝이 가져다 주는 희열도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지도 압니다.”그는 한국 생활 초기에 장애인 수당을 받으며 살까 하는 생각도 했다. 일부 탈북민은 장애인 등급을 받으려 애를 쓰기도 한다. 그런데 생계비를 지원받으며 할 수 있는 일은 그가 보기에 거의 없었다. 생계비와 장애인수당을 받으려면 평생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살아야 하고 자기 이름으로 차도 살 수 없었다.“지금 와서 봐도 정부 지원 생계비에 의존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더군요. 그걸 버려야 잘 살 수 있습니다. 작은 것을 내려놓아야 큰 것을 얻을 수 있는 법이죠.”실제로 그렇게 살아온 삶이 그는 매우 자랑스럽다. 재산세와 소득세 같은 세금을 낼 때마다 ‘받지 않고 오히려 내는 사람이 됐다’는 사실에 대단히 뿌듯하다.그의 꿈은 부담을 내려놓고 여유를 가지는 것이다. 자그마한 실수에도 북에서 와서 그렇다고, 장애인이어서 그렇다고 손가락질 받는 것이 두려워 압박감 속에 살았다. 그렇게 18년을 살면서 자신도 모르게 강박관념이 생겼다. 그걸 내려놓자는 것이다.이미 여유롭게 살기를 실천에 옮기고 있다. 한국에 와서 늘 바쁘게 살다 보니 여행을 가 본 적이 없었다. 지난해 그는 교회 봉사단체 일원으로 3박 4일간 몽골을 다녀왔다. 그의 첫 해외여행이었다. 올해 6월에는 베트남도 가 봤다.예전엔 하늘을 여유롭게 바라볼 틈도 없었다. 이제는 하늘을 보고 바람을 느낀다. 어쩌면 그에겐 새로운 업그레이드일지도 모른다. 인터뷰를 마치려는 순간 그가 다른 탈북민들에게 꼭 할 말이 있다고 했다.“세탁업이 정말 매력 있는 일이라고 꼭 알려 주고 싶어요. 정년도 없고 AI 시대에도 사라지는 직업이 아닙니다. 한국 사람들도 미국 이민 초기에 세탁업부터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한민족이 손재주가 있다는 증거인데 제가 보니 북에서 온 사람들은 더 손재주가 있어요. 저와 인연을 맺어 세탁업을 하게 된 사람이 몇 명 있는데 지금 다 잘 살고 있습니다. 저처럼 키도 작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사람도 나이 마흔에 시작해 서울에 집도 사고 자기 가게도 얻었습니다. 의지만 굳세면 왜 못 하겠습니까.”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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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5배년 계획이 된 5개년 계획

    김정은이 9일부터 11일까지 열린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13차 전원회의 확대회의에서 국가경제발전 5개년 계획 완수를 선언했다. 예상했던 바이지만 헛웃음이 나는 것은 숨길 수가 없다. 회의장에 있던 간부들도, 회의 내용을 들을 인민도, 심지어 김정은도 5개년 계획이 완수됐다고 스스로 믿지 않을 것이다. 2021년 1월 8차 당대회에서 발표된 5개년 계획의 주요 목표는 △금속 부문의 주체 철 생산 체계 완성 및 철강재 증산 △화학공업 자체 기술역량 강화를 통한 화학제품 증산 △조·수력발전소 건설 및 핵동력 공업(원자력발전) 창설 준비를 통한 전력 생산 강화 등이다. 이 중 하나라도 진전된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간부나 인민은 김정은의 완수 선언이 내심 반가울 것이다. 당시 8차 당대회 주석단에 선 김정은은 잔뜩 굳은 표정으로 “국가경제발전 5개년 전략 수행 기간이 끝났지만 내세웠던 목표는 거의 모든 부문에서 엄청나게 미달됐다”며 “쓰라린 교훈”이라고 말했다. 2016년 노동당 7차 대회에서 ‘휘황한 설계도’라고 제시한 5개년 계획이 모두 실패했음을 자기 입으로 실토한 것이다. 북한 지도자가 실패를 자인하는 것은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라 뜻밖이었다. 하지만 그는 실패의 원인을 간부들에게 돌렸다. 당시 김정은은 “비상설 중앙검열위원회를 조직해 실태를 파악하고 잘못한 것은 무엇인가, 그 원인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비롯해 그 진상을 파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완수했다고 했으니 간부들은 검열은 피할 수 있게 돼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쉴 것이다. 김정은이 5개년 계획 완수를 선언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이해가 된다. 10년째 실패를 인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북한은 1954년부터 ‘3개년 계획’ ‘5개년 계획’ ‘6개년 계획’ ‘7개년 계획’ 등 10회가 넘는 계획을 발표했다. 계획대로라면 북한은 세상에서 제일 잘사는 나라가 돼 있어야 하지만 현실은 아프리카 빈국 수준보다 못한, 우리가 다 아는 그대로다. 그럼에도 북한은 계획 중독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70년 넘게 ‘80일 전투’니 ‘100일 전투’니 달달 볶여 온 북한 인민만 불쌍할 따름이다. 지난 약 5년 동안에도 인민은 평양 5만 가구 주택 건설이나 원산갈마관광지구 건설, 지방산업공장 40개 건설 등에 동원돼 정신없이 삽질만 했다. 그런데도 김정은이 시찰하는 지방산업공장 사진들을 보면 한국의 변변찮은 중소기업 규모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들이다. 원산갈마관광지구 건설은 또 무슨 의미가 있는가. 관광업 활성화라는 목표와 동떨어져 파리만 날리면 돈 낭비에 불과한 것이다. 김정은이 실패를 인정하든 완수를 선언하든 사실 큰 의미는 없다. 인민은 이미 북한이 5년 동안 어떻게 변했는지 피부로 체감하고 있다. 계획이란 것도 다 잘 먹고 잘살려고 내거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 5년간 인민 생활은 ‘고난의 행군’ 이후 최악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북한 민생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때 제일 중요하게 활용되는 지표는 쌀값이다. 2020년 10월 1kg에 북한 돈 4500원 수준이던 쌀값은 올해 10월 3만 원을 넘었다. 최근 좀 하락하긴 했지만, 아무튼 5배 안팎의 상승률이다. 북한 역사에서 5년 동안 쌀값이 다섯 배 오른 적은 없다. 7차 당대회와 8차 당대회 사이 5년 동안에도 쌀값은 거의 비슷했다. 환율도 2020년 10월, 1달러에 북한 돈 8000원 수준이던 것이 올해 10월엔 3만8000원이 됐다. 이것도 거의 다섯 배로 상승한 것이다. 장마당 통제는 더 강화돼, 시장에 가서 돈을 주고도 구하지 못할 생필품이나 식료품이 훨씬 많아졌다. 무슨 계획을 내놓고 다그칠수록 점점 못살게 되는 것은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지난 5년은 특히 심했다. 결론적으로 8차 당대회의 5개년 계획은 물가를 다섯 배 이상 상승시킨 5배(倍)년 계획에 불과할 뿐이다. 이러고도 김정은은 위대한 성과 운운하고 있다. 만약 그가 내년 1월 9차 당대회에서 과거를 ‘승리의 5년’이라고 자평한다면, 이는 5년 동안 그의 얼굴 피부도 다섯 배쯤 두꺼워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다시 ‘휘황한 5개년 계획’이라고 제시한다면, 아마 고막까지도 다섯 배쯤 두꺼워져서 인민의 아우성이 더는 들리지 않는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5-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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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번 북송된 그녀, 73만 유튜버 되다…탈북 유튜브 ‘유미카’ 뒷이야기[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탈북민 사회에선 6~7년 전부터 유튜브 바람이 불었다. 수백 개의 탈북민 유튜브 채널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그러나 이후 많은 이가 중도 포기했고 살아남더라도 조회수 하락에 고전 중이다.허나 화마가 막 지나간 폐허에도 꽃 한 송이쯤 피어나는 법이다. 탈북민 유튜브 중에서도 독야청청(獨也靑靑), 홀로 우뚝 선 유튜버가 있으니 그 채널 이름은 ‘유미카’다.유미카는 12월 초 현재 구독자 72만7000명을 보유하며 누적 조회수는 6억4700만 회에 이른다. 잘 되는 집엔 뭔가 이유가 있는 법이다.유미카를 운영하는 이유미 씨에겐 사람들의 말을 편안하게 이끌어 내는 힘이 있다. 함께 공감해 주고, 울어 주고, 웃어 주며 시청자들도 함께 빠져들게 된다.그러나 영상에서 환하게 웃는 그가 누구보다 많은 눈물을 흘렸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부드럽게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그가 하반신 마비를 이겨 내고 열 번의 북송과 열한 번의 탈북을 체험한, 누구보다 독한 여성이라는 것을 잘 모른다.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 말을 잘 들어 주는 그는 보위부 고문에 아버지를 잃고 한국에 와서도 홍일점 중고차 딜러로 살아오며 누구보다 할 말이 많은 사람이다.양강도 혜산에서 태어난 아기가 40대에 생각지도 못한 유튜브 스타가 되기까지 반세기 가까운 세월, 운명은 그를 모질게도 괴롭혔다. 유미카는 주저앉지 않고 고난을 넘고 또 넘은 그에게 주는 운명의 보상은 아닐까.● 양강도 혁명사적관 강사이 씨는 1977년 태어났다. 당시 부친은 제대군인으로 양강도 혜산농림대학 임업과 학생이었고 모친은 소아병원 약사였다. 이 씨 집안은 토호(土豪)라고 불려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혜산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중학교 교장을 지낸 할아버지의 7남 2녀 중 둘째인 부친은 대학 졸업 후 고위 간부가 됐다. 부친의 다른 형제들도 다 ‘장(長)’ 자 직함을 가진 간부가 됐다. 혜산에 모여 사는 모친의 혈육들도 혜산에서 알아주는 간부들이었다. 이 씨의 어린 시절은 비교적 순탄했다. 반짝이던 순간도 있었다. 7세에 전국어린이노래축전에 나가 1등을 했다. 부모는 딸이 성악에 소질이 있는 줄 알고 기대했지만, 이 씨가 진학한 중학교에 성악을 가르칠 선생이 없다는 것을 알고 포기했다. 성악 대신 바이올린으로 갈아타 5년을 연주했지만 독주회 한 번 못 해 보고 그만두었다. 음악 영재인 줄 알고 시간을 보내다 보니 공부는 늘 반에서 꼴찌를 다투었다.이 씨 집은 압록강 바로 앞에 있었다. 여름과 겨울이면 압록강에서 중국 아이들과 많이 놀았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탈북하는 사람이 없어, 순찰대가 오전 오후에 한 번씩만 돌아볼 정도로 국경 경비는 허술했다.이 씨는 18세인 1994년 고등중학교를 졸업했다. 성적은 좋지 못했지만 아버지 덕분에 1년제 혁명사적지 강사 양성학교에 진학했다.이때 그의 부친은 양강도 혁명전적지관리총국 처장으로 있었다. 혁명전적지관리총국은 김 씨 일가 우상화 작업을 위한 핵심 시설물인 동상을 비롯해 혁명전적지와 혁명사적지 등을 관리하고 보존하는 일을 한다. 이른바 성지 보존과 관리를 책임진 노동당의 매우 중요한 부서다.북한의 대표적인 혁명 사적은 양강도에 압도적으로 많이 몰려 있다. 혁명의 성지라는 백두산, 조작해 만든 김정일의 ‘고향집’, 보천보 같은 빨치산 전적지 등이 대표적이다. 이 씨 부친은 양강도의 각종 사적관, 답사숙영소를 비롯해 많은 산하 조직을 책임졌다.북한은 김 씨 일가 우상화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혁명전적지관리총국엔 식량도 넉넉히 주고 각종 물자도 수시로 공급했다. 이 씨 집도 먹는 걱정은 없었다.북한에서 우상화 시설 강사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여성 중에서 인물과 체격, 목소리, 출신성분을 보고 골라 뽑는다. 그런데 양강도에선 여성 강사가 늘 모자랐다.백두산 답사 행군이 필수 교육 코스인지라 평양을 포함해 북한 전역에서 양강도로 몰려왔다. 군복 비슷한 멋진 옷을 빼입은 미모의 젊은 여성 강사에게 반하는 평양 총각이 많았다. 강사들도 평양으로 시집가는 것이 목표였다. 강사들이 수시로 결혼해 빠져나가니 강사 충원은 늘 골칫거리였는데, 고난의 행군이 막 시작된 1994년경엔 특히 심각했다. 양강도는 그해에 급히 1년제 혁명사적지 강사 양성학교를 만들었다. 이 씨는 키가 기준 미달이었지만 부친 덕분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학교를 졸업한 그는 혜산의 도 혁명사적관 강사로 일을 시작했다. 부친이 갑자기 체포돼 끌려가지만 않았다면 평양 남자와 눈이 맞아 평양 시민이 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구호나무 28대 불타버려1997년 가을 백두산 혁명전적지에서 초대형 사고가 발생했다. 건조실에서 작업하던 구호나무 28대가 불타버린 것이다.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었다. 누군가 밤에 건조실에 침입해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낸 뒤 달아났다. 당시엔 중국에서 만들어진 탈북자 반체제 조직들이 북한에 침투해 동상 폭파, 혁명사적지 방화 등을 시도하던 때였다. 범인은 체포되지 않았다.구호나무는 김일성 휘하의 항일빨치산이 김 씨 일가를 칭송하는 글을 적었다는 나무를 의미한다. 상식적으로 봐도 늘 추격을 피해 도망 다녀야 하는 빨치산이 붓과 먹을 준비해 굳이 압록강을 건너와 나무껍질을 벗기고 글을 적고 갈 리는 없지만, 아무튼 이런 구호나무가 북한 곳곳에 수천 그루다. 매년 새로 발견된다는 구호나무는 사실 이 씨 부친 산하 비밀 조직이 시약을 뿌려 가며 만들어 내는 것이다. 구호나무는 손상을 막으려고 8~11m 높이의 두꺼운 특수 유리통으로 씌웠고, 밤에는 두꺼운 휘장으로 전체를 감싼다. 유리통은 2만 달러를 주고 외국에서 수입했다고 한다. 유리 내부엔 순도 99% 아르곤을 채우고, 내부 온도 섭씨 20도를 유지하기 위해 컴퓨터 시설을 갖춘 중앙통제소에서 관리한다.나무 주변엔 피뢰침과 수십 개의 스프링클러를 설치했다. 구호나무 지역 반경 4km에 폭 약 100m로 나무를 완전히 벌채한 방화선도 쳐 놓았다. 북한이 구호나무를 유지하느라 들이는 돈은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아무리 돈을 쏟아도 습기에서 완벽하게 보호할 수 없기 때문에 매년 비밀리에 나무를 뽑아와 건조실에서 시약 처리를 다시 하면서 글씨를 보존한다. 이렇게 건조하던 중 방화가 발생한 것이다.구호나무 관리를 책임진 이 씨 부친은 연대책임이 지워져 보위부에 구속됐다. 하지만 북한 당국은 딜레마에 빠졌다. 여러 사람을 처벌하면서 대대적으로 범인을 색출하면 구호나무가 불탔다는 소문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정치적 범죄는 최대한 은폐하는 것이 김 씨 일가 권위 보존에 더 유리했다.당국은 부친을 40일 만에 석방했다. 대신 산하 직장 노동자로 강등시켰다. 방화 사실을 아는 사람들 입도 철저하게 막았다. 불탔다는 구호나무 28그루는 새로 만들어 조용히 다시 심었다. 부친이 노동자로 강등되면서, 이 씨도 도 혁명사적관 강사 자리에서 쫓겨났다.● 김정일 말 한마디 때문에이렇게 구호나무 방화 사건은 조용히 무마되는 듯싶었지만, 김정일이 새로운 재앙을 일으켰다. 이듬해 함경남도 무재봉이란 곳에서 산불이 발생했는데, 인근에 주둔하던 해군 소속 군인들이 무재봉 구호나무를 지키겠다고 올라가 17명이 타 죽었다. 이 군인들 시신은 구호나무를 몸으로 둘러싼 채 발견됐다. 북한은 이들 모두에게 공화국 영웅 칭호를 수여하고 선군 시대 모범으로 크게 홍보했다.그런데 김정일이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군인들은 타 죽으면서도 구호나무를 지키는데, 작년 양강도에선 구호나무들이 탔는데 죽은 놈은커녕 머리카락 하나 탄 놈도 없다”고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김정일이 화를 냈으니 누군가는 희생양이 돼야 하는 법. 양강도 보위부에선 이 씨 부친과 건조실 시공 책임자 그리고 경비원을 다시 체포했다.퇴근해 집으로 오던 이 씨는 끌려가는 부친을 길에서 만났다. 어디 가냐고 묻자 부친은 어두운 표정으로 “보위부에서 알아볼 것이 있어 간다”고만 대답했다. 그렇게 끌려간 부친은 한 달이 돼도 돌아오지 않았다. 김정일 ‘말씀’ 때문에 보위부에 끌려간 사람은 가족이 아무리 팔방으로 뛰어다녀도 석방될 수는 없었다.어느 날 이 씨 집에 보위부 구류장 계호원이 찾아왔다. 집엔 어머니와 이 씨만 있었다. 두 살 위 오빠와 남동생은 군에 입대해 있었다.계호원은 술과 담배를 뇌물로 요구하면서 감방에 있는 부친이 딸을 좀 데리고 와 달라고 부탁했다고 말했다. 이 씨는 계호원을 따라 보위부 감옥에 갔다. 새벽 시간, 정전으로 새까만 어둠 속에서 계호원이 그를 데리고 감옥으로 내려갔다. 다른 죄수들이 알아챌까 봐 계호원은 그에게 맨발로 조용히 따라오라고 요구했다.문을 세 개나 통과해 감방 통로에 들어서니 부친은 끝 방에 수감돼 있었다. 준비해 간 달걀과 찰떡을 아버지 손에 쥐여 준 이 씨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온몸으로 울어야 했다.아버지가 딸을 부른 이유는 단 하나였다. “집 장롱 아래 내가 쓴 글들이 있으니 그걸 갖고 평양에 가서 구명운동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헤어질 때 아버지는 딸의 손을 꼭 잡고 “너만 믿겠다”고 속삭였다.집에 와서 찾아보니 문장이 빼곡한 A4 용지 몇 장이 나왔다. 작년에 체포됐을 때 부친은 이럴 경우를 대비한 듯 건조실 도면과 각종 설명을 써 놓았다. 시설 관리를 잘하지 못해 화재가 났다고 몰아가는 보위부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외부인의 방화임을 입증하는 내용이었다.● 낮에는 강사, 밤에는 밀수꾼부친이 남긴 글과 집 재산을 처분해 만든 돈을 들고 그는 평양으로 향했다. 당시 이 씨 집은 남들보다 잘 살았는데, 부친이 재산을 많이 남겨서가 아니라 이 씨가 밀수해서 많은 돈을 번 덕분이었다.부친의 직책 덕분에 고난의 행군 기간에 먹고살 걱정은 없었다. 하지만 부친은 돈을 모으진 않았다. 부친은 1년의 절반은 산하 기관에 출장을 나가 있었는데, 이 씨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부친 몰래 밀수 일에 뛰어들었다. 혁명사적관 강사로 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자 공장 기계, 전기구리선을 비롯한 전국의 물자들이 중국에 밀수출되기 위해 혜산으로 밀려왔다. 혜산 사람들은 “저렇게 아까운 것들이 중국에 넘어가는 것을 보니 우리나라는 3년 안에 망하겠다”고 노골적으로 말했다.압록강 바로 앞에 있는 이 씨 집은 밀수 통로로는 최적이었다. 게다가 이 씨는 어렸을 때부터 건너편 중국 아이들과 놀았기 때문에 장백에 아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국경경비대 숫자가 크게 늘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군인 두 명씩이 압록강변 국경 200m 구간을 지켰는데, 전혀 통제되지 않았다. 압록강 너비는 불과 수십 m. 이쪽에서 밀수꾼이 넘어가는 것을 보고 경비대원들이 뛰어가면, 다른 밀수꾼들이 저쪽에서 강을 넘어 냅다 달아났다. 당시 혜산은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군인들은 밀수꾼을 잡으려 하루 종일 헐레벌떡 뛰어다녔다. 그들을 체포하기 위해서라기보단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운 나쁘게 잡힌 사람들은 군인들에게 돈을 찔러 주었다. 나중에는 야간 근무를 서야 할 시간에 강을 건너 장백에 가서 맥주를 마시고 돌아오는 군인들도 생겨났다. 건너편에서 밀수하는 중국인들에게 매수된 것이다.이 씨 집엔 밀수꾼들이 알아서 찾아왔다. 주변 집들도 마찬가지라 압록강 앞 그의 동네는 ‘밀수 마을’이나 다름없었다. 이 씨는 밀수를 도와주면서 번 돈으로 재산을 불렸다. 전기도 없지만 일제 컬러TV도 사고 선풍기도 사 놓았다.이렇게 번 돈을 부친 구명을 위해 써야 할 때였다. 이 씨 삼촌이 과거 같은 부대에서 복무한 자신의 동기가 상좌인데 평양에서 군부대 보위부장을 한다며 소개해 주었다. ● “남조선으로 가고 싶다.”그 보위부장의 커다란 집에 머물던 이 씨는 큰 충격을 받았다. 보위부장은 아내가 일을 나간 시간이면 부하 보위원들을 불러 방에 들어가 몰래 비디오를 봤다. 어느 날 이 씨는 보위원들이 여자가 스트립쇼를 하는 미국 비디오를 보면서 야한 장면은 몇 번이고 다시 돌려서 보는 것을 우연히 발견했다.또 다른 날에는 한 방에 들어갔다가 이 씨 또래의 젊은 여성이 벌거벗고 누워 있는 것을 보기도 했다. 이 여성은 다음 날 아침에 군복을 입고 나갔다. 보위부장은 산하 부대 여성 군인을 노리개로 삼고 있었다. 이런 인간들이 밖에 나가선 “장군님을 결사옹위하고, 썩어빠진 반동사상을 뿌리 뽑자”고 외치면서 사람들을 잡아 고문할 것을 상상하니 끔찍했다.평양에 머무르며 부친 구명을 위해 중앙당이나 보위부를 비롯해 안 가 본 곳이 없을 정도로 뛰어다녔지만 그 누구도 21세 처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마지막으로 찾아간 군 보위사령부에서는 효과가 있었다. 이때쯤 이 씨는 방법을 바꾸어 “아버지를 살려 달라”가 아니라 “간첩을 잡아 달라”고 호소했다. 당시 보위사령부는 보위부를 제치고 막강한 힘을 휘두르고 있었다. 보위부가 방화를 저지른 간첩을 잡지 않고 무고한 사람을 방화범으로 조작해 몰아간다는 것은 보위사령부가 보위부를 공격할 수 있는 구실이 될 수 있었다.이 씨가 평양에서 돌아오고 얼마 뒤 보위사령부가 혜산 보위부 검열을 나왔다. 1999년 7월 부친은 드디어 감옥에서 나왔다. 무죄가 아닌 병보석이었다.상태를 보니 간이 좋지 않아 복수가 차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즉시 병원에 데리고 갔지만 부친은 3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향년 54세였다.혁명전적지관리총국 고위 간부였던 부친은 감옥에서 반동 중의 반동으로 변해 있었다. 부친은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은 듯 딸에게 김 씨 일가의 조작에 대해 거리낌 없이 말했다.부친을 통해 이 씨는 6·25전쟁은 북한이 일으켰다는 것, 구호나무는 만들어 낸 것이라는 사실 등을 알았다. 부친은 김 씨 일가를 “저 새끼들”이라고 불렀다.“저 새끼들이 한 번도 가지 않은 별장이 전국에 많은데, 그곳에도 처녀들을 관리원으로 박아 두고 있다” “왜 아름다운 백두산을 파괴하고 거기에 자기 이름을 박아 넣느냐” 등등 아버지의 입은 점점 거칠어져 갔다.이 씨는 아버지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하루 종일 아버지 병간호만 할 수는 없었다. 장사를 나가야 했다.“이 땅엔 미래가 없다. 내가 걸을 수만 있다면 가족을 데리고 남조선으로 가고 싶다.” 이 씨가 들은 아버지의 유언이었다. ● 차 사고로 하반신 마비화불단행(禍不單行). 재앙은 홀로 오지 않고 겹쳐서 온다. 1999년은 이 씨에게 그런 해였다.부친이 풀려나기 전인 1999년 2월 이 씨 가족은 시내에서 추방됐다. 새벽, 문을 마구 두드리는 소리에 일어났더니 남자들이 들어와 세간살이를 차에 무작정 실었다. 도착한 곳은 삼수의 깊은 산골. 삼수갑산의 그 삼수다. 마을 간부가 나오더니 “집도 없는 데 왜 자꾸 사람들을 보내냐”고 남자들에게 짜증을 냈다. 그때는 혜산에서 자고 나면 수십 명씩 잡혀 추방될 때였다. 그들을 싣고 온 차는 창고라고도 말할 수 없는 곳에 짐을 내리고 사라졌다. 삼수의 2월 추위 속에 그곳에서 생존할 방법은 전혀 없었다.이 씨는 그날 중으로 혜산에 돌아왔다. 빼앗긴 집은 고위급 장교가 차지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그는 일제 컬러TV를 주고 혜산 변두리의 무너져 가는 집을 구했다. 지붕 곳곳에 구멍이 뚫려 하늘이 보이긴 했지만 삼수의 ‘창고’보단 나았다. 혜산엔 친척이 많아 의지하며 살 수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부친의 형제자매는 8명이나 됐지만, 부친이 보위부에 끌려갔다는 얘기를 듣고 모두 사색이 됐다. 그들은 북한 간부다웠다. 보위부 조사 내용을 들었는지 “구호나무가 불에 탈 동안 형님은 뭘 했냐”며 “집에 반역자가 나타났다”고 떠들었다. “아버지가 정치범이 되면 삼촌들도 무사하진 못한다”고 말해 봐야 소용이 없었다. 이 씨는 그들과 연을 끊었다. 썩 나중의 일이지만 삼촌들은 다 비참한 노년을 맞았다.그나마 외가는 이 씨를 도와주었지만 계속 얻어먹고 살 순 없었다. 이 씨는 장사를 시작했다. 부친이 세상을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그는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담배를 싣고 함흥으로 가던 화물차가 한 고개에서 전복됐다. 이 씨는 화물차 적재함에 깔려 정신을 잃었다.몇 시간 만에 구조돼 인근 병원으로 실려 갔지만 약이 없었다. 혜산에서 외삼촌이 달려와 큰 병원으로 옮겼지만 침대만 빌려줄 뿐이었다. 그나마 며칠 뒤엔 약이 없으니 집으로 데려가라고 했다.사고 후유증으로 하반신 마비가 왔다. 집에 하루 종일 누워 있는 동안 유일한 위안은 한국 라디오를 듣는 것이었다. 다행히 그가 있는 변두리엔 전기 공급이 잘 돼 라디오를 들을 수 있었다. 인근에 중국에서 투자한 탄광이 전기를 중국에서 직접 끌어왔던 것이다.처음엔 라디오 내용을 반신반의했지만 믿지 않을 방법도 없었다. 출연자들이 말하는 북한 실상은 그가 아는 현실 그대로였다. 날씨 예보도 잘 맞았다. 특히 탈북민 출연자들이 하는 말은 억양도 비슷해 귀에 쏙쏙 들어왔다.라디오를 들으며 한국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졌다. ‘꼭 한국으로 가서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리라.’ 그러려면 일어서야 했다. 별짓을 다 해 봤다. 옆집 할머니가 개똥을 먹으면 좋아진다고 해서 개똥마저 구워 먹어 봤다.23세라는 젊음의 힘이었는지 조금씩 하반신이 움직였다. 누워 있다가 처음 앉았을 때는 3초도 채 버티지 못했지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이를 악물었다. 마침내 6개월 만에 이불장을 잡고 두 발로 설 수 있었다. 그때부터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움직였다. 겨우 걸을 수 있을 때까지 1년이 걸렸다.● 산삼을 메고 압록강을 넘다2001년 2월 하반신 마비를 극복한 이 씨는 압록강을 넘었다. 그때도 걷기는 힘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성치 않은 상태에서도 밀수를 다시 시작했다. 아이템은 산삼이었다.당시 중국에서는 함북 경성에서 왔다는 ‘경성삼’이 제일 비쌌다. 첫 거래가 성공해 큰돈을 만졌다. 그런데 두 번째 거래를 하려고 하니 중국 연변 화룡에 있다는 대방(밀수업자)과 연결이 되지 않았다. 산삼을 집에 두고 있다간 다 썩을 판이었다.그는 직접 강을 건너기로 했다. 예전에 밀수를 많이 했기 때문에 압록강 넘는 방법도 잘 알았고 장백에는 아는 사람도 있었다. 새벽에 얼음 위로 건너간 그를 맞은 대방이 산삼을 보더니 “이런 삼은 장백에서 소화할 수 없고 연길에 가야 한다”고 했다.산삼을 들고 택시를 탔다. 택시기사가 의심스러웠는지 말을 걸었다. 대답할 수가 없었다. 택시 옆자리에서 자는 척했다. 20분도 지나지 않아 느낌이 이상해 눈을 뜨니 변방대(국경경비대) 건물 앞이었다. 강을 건넌 지 2시간 만에 산삼을 다 빼앗기고 수감됐다. 중국은 수감자들에게도 빵과 고기를 주었다. 충격이었다.그날 중으로 혜산으로 북송됐다. 보위부에서 조사를 기다리다 함께 북송된 다른 탈북 여성들과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몇 년씩 중국에서 살다 왔다는 그들은 “중국에선 돼지도 고기를 먹는다” 같은 믿기 어려운 얘기를 했다.이 씨는 북송된 당일 석방됐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연길 병원에 치료받으려 건너갔다”고 둘러댔는데, 성치 않은 그를 본 보위부가 믿어 주었다. 또 보위부에 있는 친척 오빠가 힘을 써 주었다.이 씨는 다른 탈북자에 비해 석방되기 유리한 점이 많았다. 혜산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집 딸이고, 친척들도 다 고위 간부였다. 보위부도 부친을 고문해 죽게 했다는 부채의식이 있었다. 강을 건넌 지 2시간 만에 잡힌 데다 몸이 성치 않은 처녀를 감옥에 넣었다가 죽으면 큰일이라는 생각도 있었을 터다. 물론 뇌물도 적잖게 썼다.이 씨가 곧바로 풀려나는 것을 본 다른 북송 처녀가 급히 속삭였다.“언니, 나는 중국에서 5년 살아서 중국어가 유창해요. 언니가 나를 빼 주면 베이징에 데려가서 식당에 취직시켜 줄게요.”중국어를 몰라 잡혔다는 사실이 원통했던 그에겐 엄청난 유혹이었다. 풀려난 그는 친척들 힘을 동원해 함흥에서 왔다는 그녀를 보위부에서 뽑아 냈다. 그녀는 중국 길림성 통화현에서 한족 남편과 살았다는 여성을 데리고 왔다.5월 어느 날 이 씨는 이들을 데리고 자신이 잘 아는 지점에서 압록강을 넘었다. 장백의 아는 집까지 데려갔다. 이 여인은 한족 남편에게 전화했다. 유창한 중국어로 통화하는 그가 그렇게 멋있을 수 없었다. 여인은 남편이 마중 오기로 했다고 말했다. “아, 이젠 성공인가.” 마음이 놓였다.새벽에 여인은 변소에 다녀오겠다고 나갔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강을 넘을 때만 이용하고는 귀찮은 이 씨와 처녀를 떼어 버리고 도망친 것이다.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장백 안쪽으로 가 보기로 했다. 중국에서 5년 살았다는 처녀가 중국어를 하니 택시기사의 의심을 덜 받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엔 첫 번째 변방 초소에서 체포됐다. 또 북송됐다.또 잡혀온 그를 보고 어이없어 하는 보위부 사람들에게 이번에도 담배 몇 보루를 뇌물로 주고 어렵지 않게 나왔다.보위부가 그를 몰랐다면 아마 감옥에 보냈겠지만, 당시엔 북송된 사람들로 보위부 감방이 넘칠 때였다. 혜산 사람이 다 아는 고위 간부의 딸로 살다가 졸지에 아버지를 잃고 불구까지 된 24세 처녀에 대한 연민도 있었을 것이다.● 열 번의 북송, 열한 번의 탈북북한은 청년들에게 ‘백절불굴(百折不屈·백 번 꺾여도 굴하지 않음)의 혁명정신을 가져라’라고 세뇌하고 있다. 중국에 가자마자 두 차례나 북송된 이 씨 마음속엔 ‘백절불굴의 탈북 정신’이 자라고 있었다.그렇다고 중국어를 모르고 무작정 갈 수는 없는 법. 두 번째 석방될 땐 한족과 결혼해 중국어가 유창한 양강도 후창 사는 여인과 친해져 함께 탈북하기로 약속했다.세 번째 탈북에서도 택시를 타고 가다가 몇 시간 만에 잡혔다. 장백을 벗어나지 못하고 또 잡혔다. 그리고 또 탈북…. 네 번째도 비슷했다.혜산 보위부에 네 차례나 잡혀 오니 나중엔 “멍청하게 또 잡혔느냐. 치료 좀 받으려는데 중국놈들 참 지독하다”고 동정하는 보위원마저 생길 정도였다. 물론 그가 잡힐 때마다 외가 친척들이 적극 나서서 뇌물을 써서 처벌받지 않고 석방됐다.다섯 번째 탈북에서 드디어 장백을 벗어나 연길까지 도착했다. 연길에서 개장을 파는 식당에서 일했다. 개고기를 매일 먹으니 하루가 다르게 몸이 좋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얼마 뒤 체포됐다. 문제는 연길에서 체포되면 혜산 보위부가 아닌 함북 온성 보위부로 북송된다는 점이다. 이곳 보위부엔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엄마가 뇌물을 들고 달려왔다.감옥에서 몸을 추스르고 나와 다시 탈북했다. 이후에는 장백을 벗어나 어디에 자리를 잡을까 싶으면 체포됐다. 북송되는 지역도 온성, 회령, 무산 등 다양했다. 수차례 탈북했다 북송이 되면 가중처벌이 따를 수밖에 없다.하지만 그의 전산기록이 남아있지 않았다는 운이 따랐다. 혜산에서 추방돼 간 삼수에서 그는 주민등록을 하지 않았다. 그의 기록은 혜산에도 삼수에도 없었다. 삼수 안전부에 전화해 호송하러 오라고 하면 삼수에선 우리 사람이 아니라고 거절했다. 그 시절 북한은 온라인 전산망이 없었다. 처벌을 담당할 거주지역이 없으니 공중에 뜬 신분이 된다. 북송된 탈북민을 받은 국경 보위부 난처해진다. 언제까지 국경 감옥에 두고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다. 이럴 때마다 모친이 달려와 뇌물을 주니 마지못해 석방해 주었다. 추방된 덕을 그나마 본 셈이다.자꾸 북송되면서 이 씨는 보위부 취조를 받을 때 어떻게 대답할지 ‘프로’의 경지에 올랐다. 누구는 북송 한 번에 죽기도 하지만 이 씨는 열 번이나 살아남았다. 북송될 때마다 나름의 사연이 있었다. 구구절절 쓰기엔 너무 길어 생략할 수밖에 없다. 일곱 번째 탈북 때는 천진에 자리를 잡았는데 체포되기까지 좀 오래 걸렸다. 이때 중국어를 어느 정도 배웠다. 2004년부터는 한국으로 가려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북한 노동단련대에서 만난 친구와 함께 탈북하기도 했는데, 그 친구는 혼자 한국행 길에 올랐다가 붙잡혀 북한에 끌려가서 죽었다. 열 번째 북송 때엔 연길에 있다는 탈북 브로커를 만나려고 천진에서 일부러 북중 국경 부근에 왔다가 체포됐다. 이때는 석방될 때까지 반년 넘게 걸렸다. 2004년 10월 온성으로 넘어와 함북도 집결소에서 고생했고, 혜산으로 넘어와서 6개월 노동단련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혜산 도시건설사업소 지배인이던 외삼촌이 분주소(파출소) 건물을 지어 주기로 하고 그를 풀려나게 했다. 각종 건설을 담당하는 도시건설사업소는 힘이 있는 부처였다. 이렇게 이 씨는 2001년 2월부터 2005년 5월의 마지막 탈북까지 열 번의 북송을 겪었다.● “유미야, 내가 도와줄게.”열 번이나 북송된 이 씨 사연은 마을에 소문이 다 났다. 하도 자꾸 잡혀 오니 마을의 한 여인이 도와주겠다고 했다.이 씨도 아는, 이 여인의 남편은 먼저 탈북해 한국에 정착해 있었다. 여인을 통해 한국 남편에게 전화하니, 반가워하며 심양까지 오면 도와주겠다고 했다.열한 번째 탈북 길은 발걸음이 가벼웠다. 심양까지 가면 성공이라고 믿었다. 심양에 가서 한국으로 가려는 일행과 합세했다. 그런데 이 일행은 동남아나 몽골을 경유해 한국으로 가지 않고 중국에 있는 외국인학교나 재외 공관에 진입하는 방식을 택했다.2005년 10월 이 씨 일행 5명은 천진국제학교에 진입해 한국행을 요구했다. 이 같은 집단 진입이 많을 때였다. 천진국제학교는 이들을 베이징 주재 한국영사관에 넘겼다. 드디어 성공한 것이다.하지만 고생은 끝나지 않았다. 중국 당국이 이들의 한국행에 대해 사사건건 딴지를 놓는 바람에 영사관 지하실에서 13개월이나 머물렀다. 감옥 같은 지하실 생활을 1년 넘게 하니 미칠 것 같았지만 그는 이겨 냈다. 그나마 영사관에선 한국 TV 프로그램을 마음껏 보고 불고기와 빵, 라면 같은 먹을 것도 잘 먹었다. 열 번이나 수감 생활을 극복한 이 씨에게 이 정도는 고생 축에도 들지 않았다.새해를 코앞에 둔 2006년 12월 30일 이 씨는 마침내 한국에 올 수 있었다. 합동 심문 중에 네 차례 북송까지 말했더니 담당 조사관이 ‘또? 이 얘기는 언제 끝나려나’ 싶은 눈빛이었다. 열 번째 북송까지 다 말하면 심문 시간이 한없이 길어질 것 같아서 이 씨는 입을 닫았다. 다행스러운 것은 하도 많이 북송돼 감옥이나 집결소 생활을 하면서 만난 ‘감옥 동기들’을 심문 과정에서 많이 만났다는 것이다. 그들이 보증해 주어 더 오래 있지 않고 하나원에 갈 수 있었다.● 1년 만에 탈북시킨 가족2007년 4월 드디어 한국 사회에 나왔다. 30세 때였다. 서울 노원구 한 임대주택에 짐을 풀었다. 이제부터 혼자 살면서 돈을 벌어야 했다. 돈을 벌어야 북에 있는 가족도 데리고 올 수 있으니 마음이 조급했다.아르바이트와 자격증 학원에 다니는 시간이 이어졌다. 미용, 바리스타, 빵, 메이크업, 컴퓨터 등 그는 많은 자격증에 도전했다. 하지만 컴퓨터 자격증 하나만 땄다. 실기는 자신 있었지만 이론과 영어가 그를 괴롭혔다. 한국은 요리 용어도 영어를 써서 교재를 봐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식당과 치킨집 등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제일 오래 한 일이 찜질방 야간 아르바이트였다. 밤엔 손님도 별로 없는 데다 사우나에서 먹고 자니 5만 원씩 받는 일당도 쓸 일이 별로 없어 통장에 쌓였다.이렇게 번 돈으로 2008년 어머니와 남동생을 한국에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자강도 국경경비대에서 10년을 복무하고 집에 돌아온 남동생은 탈북했다는 사실을 알고 “집안에 배신자가 나왔다”고 길길이 뛰었다고 한다.함경도나 양강도에서 국경경비대 복무를 했다면 탈북민이나 밀수꾼들을 많이 만나 생각이 좀 바뀌었겠지만, 자강도는 탈북도 밀수도 없는 곳이라 군에서 세뇌된 상태 그대로였던 것이다.그런 동생이 탈북하게 된 계기는 이 씨와 모친의 통화가 적발돼 보위부에 끌려간 일이었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분명히 내통했을 것”이라며 몽둥이를 드니 동생도 “누나가 남조선에 있는 한 여기서 살면 미래가 없다”며 북한에서 계속 사는 것을 포기했다. 보위부에 잡혀가 매를 맞고서야 정신이 든 경우였다.두 살 위 오빠는 끝내 한국으로 오지 않았다. 그의 세뇌는 더 단단했다. 설득하려 했지만 오빠는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유미카에 남기는 기록2012년 봄, 이 씨는 인천 최대 규모 엠파크 중고차 단지에서 일을 시작했다. 지인이 공감 능력과 설득력이 뛰어난 그를 눈여겨보고 중고차를 팔면 잘하겠다고 권했다. 당시만 해도 여성 중고차 딜러는 거의 없을 때였다. 엠파크에서 그는 홍일점이었다.중고차를 팔면서 별의별 일을 많이 겪었다. 중고차를 잘 팔려면 신차 영업소를 장악해야 했다. 새 차를 사는 사람들에게 “중고차로 팔 때 연락해 주세요”라고 말하면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영업소에는 남성 딜러만 있어서 그가 들어가면 쳐다보지도 않았다.그는 낙담했지만 주저앉지는 않았다. 오히려 문을 열고 들어가 “안녕하세요. 저는 북한에서 왔습니다”라고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그제서야 사람들이 그를 보며 “어디서 왔느냐, 언제 왔느냐”며 말을 걸었다.하루는 차를 사던 여성 고객이 그를 측은하다는 듯 보며 “왜 여성이 이런 벼랑끝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벼랑 끝에 가 보셨어요? 저는 수없이 가 봤거든요.”식당 아르바이트보다는 중고차 파는 일이 적성에 맞았다. 올해까지 13년 동안 판매왕도 해 보고 여러 상도 받았다.2019년 유튜브 채널 유미카를 시작한 계기도 중고차를 더 팔기 위해서였다. 2~3년 뒤 구독자가 엄청나게 늘면서 주업이 바뀌었다. 72만 구독자, 조회수 6억 회 이상의 유튜버라면 당연한 일이었다. 중고차도 계속 팔긴 하지만 아무래도 파워 유튜버 비중이 더 커졌다.그동안 유미카에 나온 탈북자는 200명이 넘는다. 그들 이야기를 계속 듣다 보니 사명감도 점점 생겨났다.“저도 당사자이긴 하지만 다른 탈북민들이 겪었던 참혹한 인권 유린 사례를 계속 듣다 보니 이걸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통일이 언제 올지 모르는데 이렇게 남겨 놓는 영상을 먼 훗날 통일이 되서 북한에 있는 가족이 볼 수 있을 겁니다.살아서 통일을 보지 못한다 해도 우리가 무슨 생각으로 이 땅에 왔으며,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 북에 남겨둔 가족을 어떻게 그리며 살았는지 그 기록은 남을 겁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계속 영상을 만들 겁니다.”그의 말에 같은 탈북민인 기자도 설득됐다. “그러네요. 그럼 저도 유미카에 기록을 남깁시다.” 역시 설득의 여왕이었다.마이크를 달고 나자 이 씨 입에서 다시금 특유의 밝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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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마당서 옷 팔던 北처녀, 인사동 개인전 열기까지[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어선을 타고 중국으로 탈북한 사례는 거의 없다. 탈북 화가 이지혜 씨는 그런 희박한 방법으로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넘어갔다.배를 타고 떠났으면 바로 한국으로 오지, 왜 중국으로 갔느냐는 질문이 따르기 마련. 이 씨가 탄 배는 북한 어선이 아니라 중국 어선이었다. 북한의 연료난으로 해군 함정이 거의 가동하지 못하는 틈을 타서 중국 어선들은 대놓고 북한 영해에 들어가 조업을 했다. 일부 선장은 대담하게도 야밤에 북한 땅에 배를 대고 사람을 싣고 오는 브로커 일을 하기도 했다.2017년 여름, 22세 이 씨는 먼저 탈북한 아버지의 연락을 받았다. 가족을 데리고 어느 날 몇 시까지 평북 어느 섬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탈북하는 줄도 몰랐다. 그 섬까지 배를 타고 가면 아버지가 거액을 갖고 나타난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집을 떠났다. 북한 배를 타고 그 섬에 가서 기다리니 밤에 중국 배가 나타났다. 그 배를 타고 몇 시간 만에 중국 항구에 도착했다. 아버지가 마중 나와 있었다. 3년 전, 깊은 산골에 가서 금을 캐 돈을 보내겠다던 아버지였다. 중국에 왔다는 사실을 알고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떠는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말했다.“여보, 사실은 내가 중국에서 큰 수산 기지를 운영하면서 돈도 많이 벌었어. 일단 수산 기지에 가서 이야기합시다.”아버지가 한국에서 왔다는 것은 이 씨만 알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이 씨와 여동생은 차를 타고 심양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하루빨리 돈을 받아 북으로 돌아가려는 마음뿐이었다. 왜 이 씨 아버지는 어머니에게도 한국으로 가자는 말을 못했을까. 왜 어렵게 가족을 배로 탈북시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일까.● 전혀 다른 출신 성분의 만남이 씨는 1995년 평안남도 개천에서 맏딸로 태어났다. 고난의 행군이 막 시작되던 때였다. 고난의 행군에 대한 기억은 없다. “배급을 받지 못해 몰래 숨어서 장사하느라 너에게 젖을 제대로 먹이지 못했다”는 어머니 말은 많이 들었다.아버지는 배를 탔다. 원래 공장 노동자였지만, 일찍이 공장에 매달 일정한 액수의 돈을 내기로 하고 배를 탔다. 바다에서의 일은 고되고 위험했지만 돈은 많이 벌 수 있었다. 한번은 사고가 나서 병원에 입원했는데, 그때 의사 실습생이던 모친을 만나 내처 결혼까지 했다.알고 보니 두 집안은 서로 상극이었다. 아버지의 할아버지는 해방 전에 개천과 안주 일대에서 알아주는 지주였다. 정미소도 있었고, 집도 세 채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해방이 되면서 모두 빼앗겼다. 할아버지는 가끔 아버지에게 “저기 보이는 땅이 다 우리 땅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어머니의 집은 대대로 머슴을 살다가 해방이 돼서 팔자가 바뀌었다. 지주를 타도하고 빼앗은 집의 일부와 땅을 받았다. 이 씨의 외할아버지는 지주 타도에 얼마나 열심히 앞장섰던지 리당위원장까지 올랐다.이렇게 출신 성분이 너무나 다른 집안인 데다 의사와 어부라는 신분의 벽도 있었음에도 결혼까지 한 것은 아마도 아버지가 배를 갖고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싶다. 아버지는 돈을 벌어 배를 샀는데, 당시 북한에서 배가 있는 어부는 당 일꾼 부럽지 않을 정도로 많이 벌었다. 가난하던 그 시절엔 의사가 어부에게 시집가는 것이 전혀 부끄럽지 않은 일이었다.그리고 그런 선택은 옳았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 어부들은 굶어 죽지 않았지만 의사는 장마당에 나가 장사를 해야 했다. 어머니도 병원을 나와 장마당에 앉은 장사꾼으로 변신했다. 물론 아버지가 벌어오긴 했지만, 가족을 풍족하게 먹여 살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안기부 간첩으로 몰린 아버지2009년은 이 씨 기억 속에서 가장 좋았던 해이자 가장 불행한 해이기도 했다. 그해 이 씨는 처음으로 쌀밥을 먹고살았다. 늘 배가 고파 “세 숟가락만 더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해엔 아버지 사업이 번창해 돈이 막 들어왔다.아버지는 점차 영역을 확대해 중국에 수산물을 파는 일에도 손을 댔다. 이 일도 잘 돼 군부대 수산기지 기지장으로 스카우트되기도 했다.당시 아버지는 각각 4000달러, 6000달러에 산 배를 두 척 소유하고 있었고, 1700달러와 2200달러씩 주고 산 외국 엔진도 두 개 있었다. 이 정도면 당당히 부자라 할 만했다.하지만 북한은 눈에 띄게 잘 사는 것도 죄가 되는 세상이다. 아버지도 만일을 대비해 여기저기 뇌물을 많이 뿌려 놨다. 하지만 군부대 보위부장은 액수가 못마땅했는지, 아니면 날로 뺏어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2009년 10월에 아버지를 갑자기 연행해 갔다. 이를 모르고 있던 가족은 그 이틀 뒤 갑자기 들이닥친 보위부원들 앞에서 혼비백산했다.보위부원들은 TV, 냉장고, 세탁기를 비롯해 돈 될 만한 것을 모두 빼앗아 차에 싣고 떠났다. 그의 가족은 졸지에 알거지가 됐다. 갑작스런 불행에 할머니는 결핵에 걸려 얼마 뒤 세상을 떠났다. 이 씨 동생도 결핵에 걸렸다.어머니와 이 씨는 아버지를 찾아 군부대에 갔지만 누구도 그드을 들여놓지 않았고, 아버지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지도 않았다. 추운 겨울이 올 때까지 두 사람은 한 달 넘게 군부대 정문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이 불쌍해 보였는지 누가 “네 아버지는 안기부에서 돈을 받았기 때문에 평양에 잡혀갔으니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여기서 기다려 봐야 소용없다”고 귀띔해 주었다.아버지 소식은 이듬해 5월이 돼서야 알게 됐다. 교화소에서 갓 출소한 사람이 집에 와서는 아버지가 2년 형을 받고 끌려와 함께 있었다고 전해 주었다.아버지는 2011년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지주라는 출신성분에 중국과 무역했고 돈도 많이 축적한 아버지는 보위부 먹잇감으로 딱 좋은 대상이었다. 갑자기 한국 안기부 돈을 받았다는 무서운 혐의를 받고 평양에 끌려간 아버지는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 너무 괴로워 벽에 머리를 부딪쳐 자살도 시도했지만 무위로 돌아갔다. 무릎을 꿇고 “제발 불러 주는 대로 다 적을 테니 살려 주십시오” 애원해도 “불러 주긴 뭘 불러 줘? 네가 지금 나를 잡으려고 하느냐”는 대답이 날아왔다. 죄를 알아서 만들어 내라는 뜻이었다. 그들이 만족할 답을 알아서 적을 때까지 고문은 이어졌다. 아버지 재산을 다 뺏어 나눠 가진 이상 보위부는 무조건 그를 간첩으로 만들어 죽여야 안전했다.보위부 취조 과정에서 간첩으로 둔갑해 종신형을 구형 받았다. 하지만 최고재판소도 이건 너무 무리했다 싶었는지 사건을 다시 돌려보냈다. 덕분에 아버지는 2년 형으로 감형될 수 있었다.배운 것이 배 타는 것뿐이라 아버지는 다시 배를 탔다. 돈을 어느 정도 버는 눈치가 보이니 보위부에서 또 잡아갔다. 재산도 다시 몰수당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은 아버지가 오래 구금되진 않았다는 것이다. 억울하게 두 번이나 죽다가 살아난 아버지는 집에 돌아와 이를 갈았다.“이 땅에선 도저히 살지 못하겠다. 남조선으로 가야겠다.”2014년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깊은 산골에 금을 캐러 간다고 말하고는 떠났다. 북한 체제에 대한 어머니의 충성심이 너무 강해 탈북한다고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대신 19세 맏딸에겐 북한을 뜬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남조선으로 가 3~4년 안에 꼭 연락할 테니 네가 엄마랑 동생이랑 잘 설득해 데리고 와라.” 그러면서 성공해서 사람을 보낼 때 사용할 암호까지 미리 말해 주었다. 아버지가 이런 이야기를 믿고 할 사람은 맏딸밖에 없었다.● 국수 파는 11세 소녀이 씨는 어느 아버지가 봐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믿음직한 맏딸이었다. 그는 6세 때부터 어머니를 도와 장마당에서 장사를 시작했다.9세부터 11세까지는 오전 5시에 일어나 근처 공장에서 버린 불량 제품을 주어 하루종일 깨끗이 씻고 다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재가공해 팔았다. 혼자서 몰래 시작한 일이었는데, 나중에 이것도 소문 나 경쟁자들이 생기는 바람에 어린 이 씨는 밀려났다.이후 옥수수 국수를 사서 시골에 가 마늘로 바꾸는 일을 시작했다. 농촌은 늘 정전이라 옥수수를 가공해 먹기 어려웠는데, 도시는 잠깐 전기가 들어올 때가 있어 국수를 뽑을 수 있었다. 11세 소녀는 자전거 안장에 앉으면 페달에 발도 닿지 않았다. 처음엔 서서 자전거를 탔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서너 시간 농촌 마을을 돌면서 마늘을 바꾸고 다시 돌아오면 오후가 됐다. 집집마다 대문을 두드리며 “국수 바꾸세요”라고 목청껏 소리쳤다.처음엔 옥수수 10kg을 싣고 다녔는데, 앉아서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됐을 땐 30kg씩 싣고 다닐 수 있었다. 바꿔온 마늘은 새벽에 평양에 올라가는 차에 팔았다.경험이 쌓이면서 돈이 되는 것은 뭐든 싣고 다녔다. 복숭아씨도 받아 왔고 그릇이나 꿀도 다뤘다. 아버지는 먼바다에 나가느라 이따금 돌아왔다. 셋이 그렇게 노력해도 부유하게 살진 못했다. 이 씨는 늘 ‘세 숟가락만 더 먹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 자랐다.이렇게 장사하면서 학교는 띄엄띄엄 다녔는데도 이 씨는 인민학교와 중학교 내내 최우등이었다. 학교에 간 날도 두 시간만 수업을 듣고 다시 장사하러 나왔다. 시험 칠 때는 벼락치기로 공부했다. 최우등을 한 비결은 담임선생에게 아버지가 늘 생선을 가져다 주고, 이 씨는 마늘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배급이 나오지 않으니 교사도 점수를 팔아서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늘 장사하는 처지였지만 꿈은 있었다. 이 씨는 화가가 되고 싶었다. 집에서 간간이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날 아버지가 버럭 소리쳤다.“그림이 밥 먹여 주나. 장사 열심히 해서 돈 버는 것이 최고야.”어머니처럼 의사가 되고 싶을 때도 있었다. 이번엔 어머니가 소리쳤다.“엄마를 봐라. 의사보단 장마당에 앉아 돈 버는 일이 훨씬 어렵다. 장사나 해라.”● 한국 라디오 듣는 아버지와 딸이 씨와 아버지 사이엔 어머니 모르는 비밀이 있었다. 뱃사공에겐 날씨 예보가 생명이다. 아버지는 라디오를 사서 몰래 남조선 방송을 들었다. 일기예보를 들으려 시작한 일이지만, 남조선 방송을 듣는다는 것은 금단의 열매를 따 먹는 것과 비슷한 일이었다.나중에 아버지는 집에 와서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라디오를 들었다. 어머니에겐 절대 비밀이었다. 아버지는 라디오를 들을 때면 이 씨 보러 어머니가 장마당에서 돌아오는지 망을 보게 했다.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 확실한 시간엔 그도 아버지와 함께 남조선 라디오를 들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채널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탈북민이 출연하는 자유아시아방송, 열린북한방송, 극동방송을 아버지는 즐겨 들었다. 한국사람이 하는 말은 억양도 이상하고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탈북민이 하는 말은 귀에 쏙쏙 들어왔다.아버지는 늘 라디오 옆에 수첩을 펴놓고 뭔가 받아 적었다. 어느 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한 최성국이라는 탈북 작가가 불쑥 “어려운 일이 있으면 전화하라”며 자기 전화번호를 말해 버렸다. 아버지는 놓치지 않고 그 번호를 받아 적었다.나중에 탈북한 중국에서 아버지는 최 작가에게 전화를 걸어 통화를 했다고 한다. 한국에 와서 직접 만나 보니 “한국에 있는 탈북민을 대상으로 말하다가 실수한 셈인데, 북에서 그 번호를 받아 적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 놀랍다”며 신기해했다.청취가 끝나면 라디오를 지붕 아래 볏짚 속에 철저히 숨겨 놓았다. 그 바람에 보위부가 두 차례 집에 와서 재산을 몰수해 갈 때도 들키지 않았다. 아버지가 집을 떠나며 맏딸에게 남긴 말도 이랬다.“남조선이 정말 이렇게 잘 사는 나라인지 내 눈으로 보고 싶구나. 정말 잘 살면 온 가족을 꼭 데리러 오겠다.” 집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은 이 씨뿐이었다.● 장마당에 나타난 20세 옷 장사꾼16세이던 이 씨가 중학교를 졸업하기 직전인 2011년 12월 김정일이 사망했다. 그때 아버지는 감옥에 끌려가 온 가족이 거지처럼 살 때라 대학에 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김정일 사망 관련 행사에서 충성심을 보이면 혹시 아버지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 여동생과 함께 한겨울 새벽부터 저녁까지 김일성 동상과 영생탑 앞을 매일 청소하며 지켰다. ‘보위부 간부님들. 저희가 이렇게 충성 분자이니 아버지를 좀 봐 주세요’라는 마음이었다. 그때 손에 입은 동상 탓에 지금도 겨울이면 찌릿찌릿 아픔이 올라온다.2012년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피복 공장에 동창들과 함께 단체로 발령 났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장사하며 살던 그가 얌전히 앉아 재봉기나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는 공장에 매달 쌀 10kg 이상 살 수 있는 북한돈 6만 원을 내기로 하고 장사를 시작했다. 대다수 북한 공장은 일정 액수의 돈을 내면 장사하는 것을 눈감아 준다. 그렇게라도 돈을 벌어 가져오는 사람이 있어야 공장 간부들도 먹고살기 때문이다.이 씨는 그릇을 들고 전국을 다니며 장사했다. 17세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미 장사로 잔뼈가 굵은 몸이었다.돈을 좀 버는가 싶었는데 어느 날 ‘102그루빠(비사회주의 단속반)’에 걸렸다. 아버지도 실종된 터라 빠져나가지 못하고 화학공장 보위대에 들어가게 됐다. 총을 메고 공장을 지키는 보초 일이었다. 그보다는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을 한다며 밤 11시 반까지 뭔가를 외우게 하는 일이 더 힘들었다.1년쯤 눈치껏 보위대 생활을 하다가 단속이 다시 잦아들었을 때 또 나와 장사를 했다. 이번엔 장마당에 앉아 옷을 팔았다.아버지가 보위부에 세간을 다 빼앗기긴 했지만, 숨겨 놓고 끝까지 불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1000달러짜리 배 엔진이었다. 이 씨는 그걸 아끼고 아끼다가 팔아 옷 장사 밑천으로 삼았다.20세 처녀가 장마당에 앉아 옷을 사라고 외치는 건 얼핏 부끄러운 일 같지만, 북한에선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장마당에 앉는다는 자체가 이미 돈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장마당 매장을 가지려면 자릿세만 200달러 정도 내야 한다. 거기에 초기 투자가 필요한 옷 장사를 하려면 300~400달러는 있어야 했다. 돈이 많아야 할 수 있는 장마당 옷 장사는 선망받는 직업이었다. 하지만 옷 장사는 생각보다 잘 되지 않았다. 그가 사는 동네는 옷 사는 데 돈을 쓸 만한 사람이 부족했다.● 아버지의 연락과 탈북이 씨는 다시 옷을 잔뜩 넣은 짐을 메고 시골을 돌기 시작했다. 가을철 농촌은 제일 풍족한 계절이지만 너무 바빠져서 장마당 갈 시간이 없기도 했다.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옷을 팔았다. 옷 파는 일은 국수를 바꾸는 것과는 다른 노하우가 필요했다. 장사 잘하는 사람을 집중적으로 관찰한 결과 비법은 말을 잘 들어 주는 데 있었다. 상대이야기를 잘 들으며 같이 웃고 울어 주니 고객들이 주머니를 아낌없이 열었다. 높게 가격을 불렀다가 깎아 주고, 한 개보다 세 개를 사면 더 할인해 주고 양말 같은 서비스를 하나 더 챙겨 주는 것도 이때 배운 노하우다.그렇게 따라하니 장사가 잘 됐다. 어느 날 남편에게 맞고 사는 주부 이야기를 한 시간 동안 앉아서 들어 줬다. 이 주부가 고맙다며 동네 친구들까지 다 불러 그날 옷을 다 사준 일도 있었다. 북한도 사람 사는 동네였다.장사에 어느덧 적응됐을 때 불쑥 집에 사람이 찾아와 아버지가 알려준 암호를 댔다. 그 사람을 따라 신의주로 갔더니 아버지와 전화할 수 있었다.“지혜야. 아버지는 중국에 와서 돈 많이 벌었어. 가족을 데리고 오라. 엄마한테는 국경에 와서 가족사진 찍어 보내 주어야 아버지가 확인하고 돈 많이 보낸다고 해라.”아버지 말투가 바뀐 것을 알았다. 라디오에서 듣던 남조선 억양이 스며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남조선에 왔다는 말을 맏딸에게도 하지 않았다. 혹시나 말실수할까 봐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맏딸은 눈치로 알아챘다. 기뻤다. 아버지가 드디어 뜻을 이루었구나.그는 어머니와 여동생을 설득해 중국으로 데리고 왔다. 아버지가 사는 부자 동네라고 속여 심양까지 겨우 왔는데 그만 사고가 터졌다. 그들을 데리고 온 중국 브로커들이 갑자기 수고비를 두 배로 내라는 것이었다. 한국에 정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버지에게 그 돈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그러던 어느 날 중국 브로커들은 이 씨와 여동생을 불러내 갑자기 차에 태우곤 어디론가 가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들은 “요즘 중국에서 이 나이 또래 처녀가 진짜 비싸니 돈을 더 주지 않으면 팔아 먹겠다”고 아버지를 협박했다. 갑자기 딸 둘을 잃게 된 아버지는 전력을 다했다. 한국 친구에게 급히 돈을 꾸었지만 브로커들이 부르는 값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아버지는 여권까지 내주며 믿어 달라고 사정했고 마침내 브로커들은 차를 돌렸다.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여기로 오지 말고 다른 주소를 알려줄 테니 거기로 가라.”딸들이 돌아와서 다시 브로커들 협박을 받게 될 것이 두려워 다른 한국행 브로커에게 딸들을 넘겼던 것이다. 이 씨는 두 살 어린 여동생과 함께 동남아로 향했다. ● 중국에서 날아온 부모님 체포 소식둘은 무사히 동남아의 어느 국가에 도착했다. 이곳에서는 성경 공부를 3개월 시킨 뒤 한국에 보내는 기독교 단체가 활동하고 있었다. 거기에 있다가 2018년 1월 한국에 올 수 있었다. 그때까지 심양에 남은 아버지와 어머니 소식은 알 수가 없었다.2018년 6월 모든 조사와 하나원 생활을 마친 뒤 그는 부모 소식부터 알아봤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청천벽력이었다.아버지는 한국에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어머니를 설득하느라 수없이 싸웠다고 한다. 어머니는 끝내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대도시에서 탈북한 부부가 그렇게 싸우며 오래 있을 수 없는 법. 어떻게 신고가 들어갔는지 부부는 중국 공안에 체포됐다.아버지는 인신매매범이란 누명을 썼고 어머니는 북송됐다. 자신의 의지대로 북에 돌아갔지만, 북한 당국이 칭찬해 줄 것 같진 않다. 오히려 남편과 자식들이 한국에 갔으니, 한국행 시도로 몰려 잘못되지나 않았을지 걱정이다. 지금도 이 씨는 어머니 소식을 모른다.일단 아버지부터 살려야 했다. 하나원을 나와 서울 양천구에 자리 잡은 이 씨는 취직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어느 정도 체류하다 온 탈북민은 그래도 시장경제를 어느 정도 체험했지만, 이 씨처럼 북한에서 곧바로 한국에 온 탈북민에겐 모든 것이 낯설었다.라디오를 통해 들었던 남조선과 그가 직접 눈으로 본 한국은 너무나 달랐다. 마치 가상 도시인 듯 눈으로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았다. 원시생활을 하다가 문명 도시로 나온 느낌이었다.취직은 늦지 않게 이뤄졌다. 첫 일자리는 강남의 어느 횟집이었다. 하루 12시간 일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을 선뜻 받아주고 돈을 주는 사장이 고마웠다. 이 씨는 쉬는 시간에도 식당을 청소하고 화분에 물을 주었다. 어느 정도 횟집에서 일하다가 월급 180만 원을 받는 회계 사무실에 취직했다. 여기서도 자신을 받아준 것이 고마워 쉬는 시간에도 화장실까지 청소하고 쓰레기도 버렸다. 주변 사람들이 “여기는 청소하는 사람이 따로 있으니 하지 말라”고 만류했지만, 이 씨는 뭔가 고마움을 표현해야 할 것 같아 계속 할 일을 찾아 나섰다. ● 1학기 4.5점 만점에 4.41이 씨는 하나원에서 생활할 때 청소년반에 편입돼 공부했다. 처음 듣는 내용이 많았지만 이상하게 시험만 치면 늘 100점을 받았다. 그때 “아, 나는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구나” 깨달았다. 북한에서 장사하느라 느끼지 못했던 공부 본능이 깨어나는 순간이었다.하지만 사회에 나와서 공부할 순 없었다. 그를 기특하게 본 주변 사람들이 “24세면 공부를 해야 한다”고 권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중국에서 7년 형을 선고받은 상황이라 변호사 비용이며 영치금 등은 모두 이 씨가 조달해야 했다. 대학에 갈 여유가 없었다.그렇지만 언제까지 아무런 기술이나 자격증 없이 일하며 살 순 없었다. 일을 하면서 평생교육원에 등록했다. 퇴근한 뒤 무조건 3시간씩 수업을 들었다. 그렇게 1년 반 만에 사회복지사와 요양복지사 자격증을 땄다.자격증을 활용해 재가복지센터에 취직했다. 요양복지사, 주야간 보호사, 사무국장 등 자신 앞에 주어진 일은 다 했다.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대학에 가고 싶은 꿈이 살아났다. 복지센터에서 대학 입시를 준비했다. 오후 6시에 퇴근해 6시 반부터 10시 반까지 학원에서 공부했다. 주말엔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투잡, 쓰리잡, 정신없는 시간이 이어졌다.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무리하다가 영양실조로 퇴근길에 졸도까지 했다.그의 목표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이었다. 실기가 매우 중요했는데 이 씨는 한 번에 붙을 수 있었다. 타고난 재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2021년 3월, 26세의 이 씨는 대학 신입생이 돼 교정을 밟게 됐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뿐이었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모든 과목이 버거웠다. 특히 영어는 넘기 어려운 고개였다. 너무 힘들었지만, 1학기엔 휴학도 되지 않았다.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머리를 싸매고 자신과의 싸움에 들어갔다. 다른 신입생들이 입학의 기쁨을 누리며 즐기고 있을 때, 그는 하루에 네댓 시간만 자며 모르는 것은 네 번이고, 다섯 번이고 이해될 때까지 들었다. 공부에 너무 집중하다 보니 위장병도 생겼고 코피를 쏟는 일도 다반사였다.하지만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1학기에 그는 4.5점 만점에 4.41이라는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공부에 모든 에너지를 쏟으니 돈을 벌 수 없게 된것은 또 문제였다. 혼자서 최대한 아끼며 살 순 있지만, 감옥 생활을 하는 아버지 수발은 포기할 수 없었다.휴학하고 2년간 직장 생활을 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중국에서 2심 재판을 이어가는데 변호사비가 모자랐기 때문이다. 여동생도 취직해 열심히 함께 벌었다.● 탈북 작가로 성장하는 삶정신없이 세월이 흘렀다. 지난해 마침내 아버지가 중국에서 석방돼 한국에 돌아왔다. 북한에서의 감옥 생활 2차례에 더해 7년을 중국 감옥에 있다 보니 폐인이 됐다. 아직까지 요양 중이다. 그래도 그에겐 아버지가 살아 돌아왔다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이 씨는 복학해 지금은 3학년 2학기를 마쳤다. 1년 더 대학에 다녀야 한다. 아버지가 왔으니 한숨 돌릴 법도 하지만, 태어나서 지금까지 쉬지 않고 달려온 그는 쉬는 법을 모른다. 남는 에너지를 이번에는 그림을 그리는 데 쏟고 있다.올해 10월 ‘인민의 소원’이라는 주제로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벌써 12번째 개인전이다.그의 그림은 탈북민 화가 작품 중에서도 특이하다. 화폭 하나에 남과 북이 함께 담겨 있는데, 남북의 명암을 뚜렷하게 대비하지도 않고, 전반적으로 어둡지도 않다.‘자력갱생’ 간판이 붙은 북한 농촌 마을에 옥수수 비가 내린다거나, ‘사회주의 무상치료 만세’가 적혀 있는 간판 위로 알약들이 떨어지는 식이다. 보는 사람에게 ‘이렇게 밝고 해학적으로 남북을 보여줄 수도 있구나’ 생각하게 만든다. 풍요와 결핍을 한 작품 속에 녹여 내면서 아픔도 위트 있게 풀어 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데, 이 씨 작품은 타고난 듯 어렵지 않게 표현하고 있다. 이런 독특한 작품들은 이 씨의 오랜 고민 끝에 나왔다.“한국에서의 평범한 일상과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담고 싶고, 북한에서의 불편하고 어두운 진실도 담고 싶은데 너무 무겁지 않게 함께 풀어가려고 나름 찾은 해답입니다.”힘든 길을 어렵게, 너무나 아프게 걸어온 그였지만 앞으로 가야 할 길은 더 멀다.당면하게 목표는 세계적인 작가가 되는 것이다. 30세까지 그는 본의 아니게 남들이 마음 먹는다고 해서 겪을 수 없는 엄청난 백그라운드를 쌓았다. 분단국가에서 태어나 인권의 불모지에서 아픔을 겪었고, 이를 탈출해 대한민국이라는 선진국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가 살아온 삶과 경험만 잘 녹여도 충분히 전 세계에서 인정받는 작가가 될 수 있다.남은 것은 그의 몫이다. 20세에 장마당에서 옷을 팔던 북한 처녀가 10년 뒤 인사동에서 전시회를 연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듯이, 그가 만들 미래의 더 큰 기적 역시 지금 우리가 과연 상상할 수 있을까.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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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은 금고지기’ 사위 류현우 대사는 왜 탈북을 선택했나[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류현우 전 쿠웨이트 주재 북한 대리대사는 2019년 탈북하기 전까지 16년 동안 장인인 전일춘 노동당 39호실 실장 집에서 살았다. 사실상 왕조 국가인 북한에서 누구도 처벌할 수 없는 김정은 패밀리를 ‘신계(神界)’에 비유한다면, 그 아래 ‘인간계’ 최고위급들이 사는 곳이 그가 살던 은덕촌이다.그의 아랫집에는 김양건 노동당 대남담당 비서 겸 통일전선부장(2015년 12월 사망)이, 윗집에는 오극렬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겸 조선로동당 작전부장(2023년 2월 사망)이 살았다. 윗윗집에는 박남기 노동당 계획재정부장(2010년 3월 총살)이 살았다.1998년 김정일의 지시로 평양 대동강구역 대동강 근처에 누구도 들여다볼 수 없는 으쓱한 곳에 건설된 은덕촌은 10세대짜리 아파트 6개 동으로 구성돼 있다. 아파트 한 동마다 입구가 서로 반대 방향인 현관 두 개가 있다. 한 현관으로 5세대가 드나든다고 할 수 있다. 3m 높이 담장으로 둘러싸인 은덕촌 입주 세대주는 60명. 김정일이 직접 골랐다. 군부에서 40명, 노동당에서 10명, 기타 행정기관에서 10명이 뽑혔다.군부가 가장 많은 이유는 아무래도 총을 쥐고 있기 때문에 쿠데타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총정치국장, 인민무력상, 총참모장뿐만 아니라 정찰국장, 조직부 국장 같은 부처 책임자급 장성들이 여기에서 산다. 김정일 사망 이후 김정은 시대에도 이 입주 비율은 달라지지 않았다.● ‘인간계’ 최고위직들의 청빈 경쟁이곳에 살면 북한에서 인간계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혜택이 보장된다. 북한군 1개 중대가 경비를 서는 방 다섯 개 197㎡(60평)짜리 집에서 산다. 아파트 현관마다 경비병들이 출입을 통제하기 때문에 은덕촌에 살면서도 다른 동과의 교류는 불가능하다. 같은 동에서도 현관이 다른 다섯 세대와는 소통이 거의 없다. 그나마 같은 현관을 이용하고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는 다섯 세대끼리는 서로 인사하고 지낸다.드나드는 사람과 물자가 다 통제되다 보니, 은덕촌 사람들은 사치스럽게 살 엄두를 내지 못한다. 집에 비싼 물품을 들여놓거나 색다르게 꾸미거나 하면 다 보고가 되기 때문이다.외국에서 살던 류 전 대사 기억으로는 아래층 살던 대남 정책 총책 김양건의 집은 서 발 막대기를 휘둘러도 걸릴 것이 없었고, 대외 정책 총책 김계관은 그보다 더 심해 꽃제비가 따로 없을 정도로 ‘청렴하게’ 살았다. 은덕촌 사람들은 청빈을 증명하는 경쟁이라도 하듯이 살아야 오래 살 수 있었다.물론 이 ‘청빈한’ 관료들을 위해 김 씨 가문은 ‘굶어 죽을 걱정’은 없게 만들어 주는 크나큰 은덕을 베푼다.은덕촌 가정은 부부만 사는 경우가 거의 없고 자식과 손자들까지 산다. 한 세대에 보통 5명 이상이 사는데 이들은 100% 입쌀로 배급을 받다. 반찬 몇 가지 정도는 할 수 있는 채소도 공급해 준다. 각 가정에 매달 달걀 30알, 돼지고기 2kg, 생선 2kg이 공급된다. 이 정도면 북한에선 인간계가 받을 수 있는 최고 대접이 분명하다.조용한 환경에서 도청도 잘 되다 보니 목소리를 낮추어 조심스럽게 말하는 습관도 은덕촌이 빚어낸 풍경이다. 도청에 걸려 처형된 이영호 북한군 총참모장(2012년 7월 처형)이나 화폐개혁 실패의 희생양이 돼 공개 처형된 박남기 계획재정부장처럼 이곳에서 살다가 죽임을 당하는 생생한 표본들이 수시로 나오기 때문에, 늘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살게 되는 것도 은덕촌이 만든 또 하나의 ‘혜택’이다.은덕촌도 가끔 정전되긴 한다. 그래도 인간계 최고위직 노인들이 목욕은 하라고 세대마다 2kW짜리 가열기 하나씩은 넣어 주었다. 류 전 대사 부인은 한국에 온 뒤 수도에서 더운물, 찬물이 나오는 게 제일 좋다고 했다. 류 씨는 남쪽에 와서 국민임대아파트에 산다. 국민임대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북한에서 제일 좋은 주거 단지 은덕촌을 보며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듯싶다.● 은덕촌에서 도태촌으로은덕촌 사람들에게 베푸는 장군님의 하해와 같은 은덕은 죽을 때까지 이어진다. 여기에서 살다가 은퇴하면 은덕촌 담장 바로 바깥에 있는, 또 다른 담장으로 둘러싸인 아파트 단지로 옮겨 간다. 은덕촌 사람들은 이 아파트 단지를 ‘도태촌’이라고 부른다.은덕촌에 사는 사람들은 주로 비밀이 절대 새 나가면 안 되는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은퇴해서도 사회에 내보내지 않는 것이다.2019년 류 전 대사가 탈북하던 시점에 도태촌에 살던 사람들은 현직에 있을 때 한국에 특사로 왔던 김기남 노동당 선전비서, 현철해 차수, 최영림 총리, 김원홍 보위상, 황병서 북한군 총정치국장 등이다. 전일춘 실장도 류 전 대사가 탈북하기 전에 39호실 실장에서 물러나 도태촌으로 옮겼다. 집에 이불장과 옷장은 없어도 최신형 도청기만은 집안 곳곳에 숨겨져 있다. 도태촌도 직계 가족만 출입이 허용될 뿐 친척은 밖에 나와서 만나야 한다. 은퇴한 당사자가 죽으면 그제야 남은 가족은 평양 시내 다른 곳으로 이사할 수 있다.도태가 되면 은덕촌에서 받던 배급이나 달걀 공급은 끊어진다. 전 실장도 도태촌에 옮겨 가선 부부의 6개월 치 배급으로 감자 4kg만 받았다. 2019년은 고난의 행군 시절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봉쇄 기간도 아니었음에도 사정이 그랬다.탈북 직전 류 전 대사 아내는 도태촌으로 옮겨간 아버지 집에 갔다가 충격을 받았다. 27년 동안 39호실 수장으로 있으며 수천만~수억 달러를 주무르던 부친이 반년 치 배급으로 감자 2kg을 받으며 허름한 집에서 살고 있었다. 아내는 어머니에게 말했다.“남들이 보는 눈도 있는데 이불장이랑 옷장을 사자.”“돈이 어디 있냐?”“엄마. 아버지가 39호실 실장이었는데 우리 집에 돈이 없다면 그걸 누가 믿겠어. 딸인 나도 못 믿겠는데.”“내가 딸에게 거짓말을 해서 뭘 하겠니. 아버지가 비리를 저지르며 사리사욕을 채웠다면 오늘까지 그 자리에 붙어 있었겠니?”해외에서 그나마 달러를 만져 본 아내는 부모에게 옷장과 이불장을 사라며 수중의 돈을 탈탈 털어 건넸다. 오던 길에 아내는 길가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다.김 씨 일가는 북한 곳곳에 수십 개의 호화 별장을 짓고 온갖 사치를 다 누리고 있는 동안, 그들을 위해 평생을 바친 최고 머슴들 삶의 마지막은 이처럼 비참했다.● 김정은의 숨겨진 비밀 금고류 전 대사는 한국에 온 탈북민 중 유일하게 인간계 최고위급과 함께 은덕촌에서 살았던 사람이다.김정일 금고지기의 사위였기에 김정은이 후계자로 등극하기 전에 벌써 장인과 함께 김정은을 만나 이야기도 해 봤고, 김여정과 그의 남편도 만날 수 있었다. 북한 최고위층 패밀리로 이러저러한 일을 수많이 보고 들었지만 그는 오랫동안 입을 닫고 살았다.북에 두고 온 가족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 달 전 그는 큰 결심을 했다. 자신이 보고 들었던 내용을 소상히 기록한 첫 저서 ‘김정은의 숨겨진 비밀 금고’를 세상에 내놓았다.김정일 패밀리 일원이던 이한영(1997년 피살)이 1996년에 쓴 저서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 잠행 14년’과 이 씨 모친인 성혜랑이 2000년 펴낸 자서전 ‘등나무집’ 이후, 김 씨 패밀리에 대해 이렇게 자세한 증언이 담긴 책은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한영의 저서와 류 전 대사의 저서는 모두 동아일보에서 출판했다.북한 고위급 외교관의 시선과 김정일의 남산고급중학교 동창으로 나중에 금고지기가 된 전일춘 실장의 시각, 아내의 증언까지 합쳐진 이 책은 외부에서 절대 알 수 없는, 김정은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정보로 가득 차 있다. 북한에 관심이 있거나 북한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지 않고선 오늘의 북한을 안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가령 책 내용 중 김정은의 고모부인 장성택 전 노동당 행정부장이 화형됐다는 충격적인 사실은 류 전 대사가 탈북하지 않았으면 누구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김정은은 장성택을 불 태워 죽였다고 측근들에게 과시하듯 이야기했다. 장성택 숙청 이유나 숙청 과정도 책에 자세히 소개돼 있다. ‘김정은의 숨겨진 비밀 금고’는 남쪽 사람들에겐 ‘문이 열린 진실의 금고’ 역할을 오랫동안 할 것이다.● 유일한 선택지가 된 탈북류 전 대사 부부 탈북은 김정은에겐 어떻게든 되돌리고 싶은 뼈아픈 사건이겠지만, 그들을 한국으로 오게 만든 것은 김 씨 일가라고 할 수 있다.류 전 대사의 탈북은 2017년 주 쿠웨이트 북한대사관에 걸어 놓은 김정일 얼굴이 그려진 선전화 한 점이 사라지면서 시작됐다. 그해 유엔에서 강력한 대북 제재가 의결되자 쿠웨이트 정부도 이에 맞춰 쿠웨이트 주재 북한 대사를 포함해 대사관 정원 10명 중 6명을 추방했다. 그 결과 대사관 참사였던 최고참 류 씨가 대리대사 및 초급당비서가 됐다.인원이 줄어들자 북한 당국은 작은 건물로 이사해 대사관 임대료를 아끼라고 지시했다. 이사가 끝난 뒤 최종 점검을 하다 대사관에 있던 김 씨 가문 얼굴이 들어간 선전화 3점 중 한 점이 사라진 사실을 알게 됐다. 작품 중심에 선 김정일이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키고 있고 그 아래에서 김정일을 에워싼 노동자, 농민, 군인들이 손가락 방향을 바라보는 유화였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폐쇄회로(CC)TV도 돌려보고 인부들에게 물어도 보고 왔던 길과 쓰레기통도 뒤졌지만 사라진 그림은 나타나지 않았다.1등서기관인 동료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상의하면서 류 전 대사는 “해당 선전화는 전직 초급당비서가 갖고 온 것이라 노동당 선전선동부 등록대장에 기재돼 있지 않은 것이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입을 닫고 있자”고 했다. 2년 뒤인 2019년 7월 1등서기관은 귀국했다. 북한 외교관들은 귀국 후 3개월 동안 노동당 조직지도부의 엄격한 조사를 받는다. 그해 8월 북한에서 전보가 날아왔다. 대사관 ‘1호 작품’, 즉 김 씨 일가가 들어 있는 유화를 가지고 귀국하라는 것. 다른 나라에 파견된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려 봤지만 해당 지시가 떨어진 사람은 류 전 대사 한 명뿐이었다. 귀국한 1등서기관이 2년 전 선전화 분실 사실을 고백하고 책임을 그에게 돌린 것이다.그까짓 선전화 한 점이 대수냐고 할 수 있지만 북한에선 목숨이 걸린 문제였다. ‘당의 유일적 영도 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에는 ‘초상화, 동상, 영상 작품… 등을 목숨으로 보위해야 한다’고 돼 있다. 목숨으로 보위해야 할 작품을 잃어버린 것도 모자라서, 그 사실을 이실직고하지 않고 2년이나 숨긴 죄는 당을 기만한 용서하지 못할 대역죄다. 귀국하라는 날은 닥쳐오고 있었지만, 류 전 대사와 아내는 살아날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아내는 “우리가 그래도 충신 집안인데, 아버지가 김정은에게 편지를 쓰면 살 수 있지 않을까”라며 희망을 피력했지만 확률은 희박했다. 그들이 살면서 본 노동당은 부친은 용서해도 자식까진 용서하지 않았다. 10대 원칙 사수에는 하나의 예외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 북한이다.북한에 귀국해서 정치범수용소에 갈 바엔 여기서 죽자고 결심도 했지만 10대 딸이 눈에 밟혀 할 수 없었다. 정치범의 딸이 돼 평생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류 전 대사는 잘 알았다. 박남기 계획재정부장이 총살되고 그 남은 가족은 발길질을 당하며 통곡 속에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던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귀국할 수도, 자결할 수도 없는 상황에 내몰린 이들 가족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망명이었다. 북한 영화 ‘은비녀’의 주제곡이 귀에 맴돌았다. ‘새 삶의 1절’이 시작됐다.외로이 떠가는 운명의 쪽배키 없이 노 없이 가는 곳 어데냐풍랑에 시달려 고달픈 마음나라 잃어 서러워라아 내 인생아● 대사에서 기초생활수급자로북에 남은 가족들 때문에 처음엔 미국으로 조용히 망명하는 것을 고려했다. 그런데 하필 그때는 2019년 9월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이 싱가포르와 베트남, 판문점에서 김정은과 얼싸안고 그를 훌륭한 지도자라고 치켜세우던 때였다. 미국으로 갔다가 김정은에게 주는 트럼프 대통령의 선물이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남은 선택지는 한국이었다. 외국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1990년대 한국으로 망명한 북한 외교관이 출연한 유튜브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었다. 그 외교관은 “한국에 오면 집도 주고 직업도 주고 이밥에 돼지고기를 실컷 먹을 수 있다. 북한 외교관이 망명하면 한국 정부에서 먹고 살게 다 해 준다”고 말했다. 류 전 대사 생각에도 그럴 것 같긴 했다. 한국으로 가자고 결심했다. 남편과 딸이냐, 북한의 부모냐 선택해야 하는 운명에 처한 아내도 어디든 절대 못 간다고 고집을 부리다 마지막 순간 결국 자식을 선택했다.2019년 9월 18일 오전 6시반. 뜬눈으로 새운 부부는 학교에 가야 할 시간이라며 딸을 깨워 차에 태우고 15분 거리의 한국대사관으로 들어갔다. 혹시 말실수할까 봐 딸에겐 그때까지 탈북한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그렇게 한국에 도착했고 그해 12월 사회에 나왔다. 한국에 오면 먹고 살 걱정이 없다던 선배 외교관의 말은 사실과 달랐다. 적어도 류 전 대사에게 특혜 같은 것은 없었다. 다른 탈북민처럼 56㎡(17평) 임대주택에 짐을 풀고 똑같은 액수의 정착금을 받았다. 한숨을 돌릴까 했는데 그만 한 달 만에 코로나19 사태가 터졌다.직업도 없는데 집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3인 가족이 월 110만 원을 받는 기초생활수급자로 살게 됐다. 관리비와 통신비 등을 내고 나면 40만 원으로 한 달을 살아야 했다. 택배기사로 나섰지만 50세 된 탈북민을 받아주는 회사도 없었다. 북한에서는 누구나 부러워하는 외교관이었지만 한국에 와서 백수가 된 것이다.몇몇 유명 탈북 외교관은 국책연구기관 연구원이 되기도 했지만 북한 외교관 출신 연구원 정원도 한정돼 있다 보니 6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에겐 자리가 돌아오지 않고 있다.시간이 흐르면서 방송도 출연하게 됐고 이러저런 일들도 하면서 차츰 상황은 좋아지고 있긴 하지만, 앞날을 생각하면 막막하기만 하다. 이들 부부에게 유일한 기쁨은 딸이 한국 생활에 잘 적응하는 것이다. 딸은 눈치 볼 것 없이 자유로운 한국 생활에 만족해 하며 좋은 대학에 합격해 내년에 입학하게 됐다. 행복한 딸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그의 가슴 한구석은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낀다. 딸의 행복을 위해 치러야 할 대가가 떠올라서다. 북에 남은 부모님은 어떻게 됐을까.● 북한에서 아랍어를 배운다는 것류 전 대사의 부친은 북한에서 핵심 중의 핵심 계층이었다. 1952년 최고사령부 친위중대에 입대한 부친은 43년 동안 김일성 경호부대에서 근무했다. 호위사령부 제1호위국 부부장(대좌)까지 하다가 1995년 3월 정년퇴직했다.부친이 친위중대에 들어간 것은 함흥에서 리당위원장을 지내던 할아버지가 1951년에 현물세를 내기 위해 가다가 미군 폭격에 죽어 애국열사가 됐기 때문이다.김일성 호위부대도 외부와 격리된 평양 대성구역 아파트 단지에서 살았다. 그가 어렸을 때 김일성 호위부대 군관들에 대한 공급은 꽤 좋았다. 입쌀을 풍족하게 배급받았고 매달 돼지고기 5kg, 기름 2L 등 기타 공급도 좋았다. 맡겨진 일만 잘하면 먹고살 걱정이 없었다.1972년에 태어난 류 전 대사는 호위국 자녀들이 주로 다니는 인민학교를 마치고 1983년 평양외국어학원 입학시험을 쳤다. 평양외국어학원 입학시험 자격을 받는 것 자체도 아무나 받지 못하는 특권이었다. 문제는 여기에 지원하는 학생들 출신이 보통 집안이 아니었다.그는 당시에 가장 인기 좋았던 프랑스어학과를 1지망으로, 영어를 2지망, 아랍어를 3지망으로 써 냈다. 하지만 더 권세 있는 집 자식들에게 밀려 아랍어학과에 들어가게 됐다. 당시엔 북한과 아랍어 하는 나라들과의 교류가 별로 없었다. 북한에서 아랍어를 가르치는 곳은 평양외국어학원 아랍어학과 밖에 없었는데, 그가 들어갔을 때 아랍어학과 한 학년 인원은 5명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운 좋게 시리아 이집트 같은 중동 국가들과의 관계가 좋아지면서 아랍어 인기도 높아졌다.1989년 학원을 졸업한 그는 당연하게 평양외국어대 아랍어학과에 진학했다. 물론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아랍어는 이슬람교와 떼어놓을 수 없는 언어다. 가령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도 아랍어에선 ‘알라의 은총으로’라고 말한다. 아랍어를 잘하려면 이슬람교를 반드시 이해해야 하는데, 문제는 북한에선 어떤 종교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대학에 입학해 1년쯤 지난 1990년에 그는 공부를 위해 이슬람교 종교적 문구를 따로 정리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누군가 이를 대학 보위부에 밀고했다. 대학 보위원은 그를 불러 “이슬람 경전을 공부하는 놈은 용서할 수 없다”며 사정없이 구타한 뒤 부모를 불렀다. 그때 그는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매를 맞았다.1호위국 부부장이 일개 대학 보위원에게 찾아가 싹싹 빌며 용서를 구하고, 보위부 지인들을 다 동원해서야 이 일은 겨우 무마될 수 있었다.● 맹장과 담낭을 잃은 고난의 행군1994년 그는 대학을 졸업했다. 운이 없게도 그해부터 대학 졸업생은 3년 동안 노동 현장 체험을 시키라는 김정일 지시가 하달됐다. 그 이전까지 대학 졸업생은 3대 혁명 소조원으로 3년 동안 파견돼 나름 큰소리 치며 살 수 있었는데, 1994년 이후부터는 노동자가 돼 현장에서 일해야 했다.그래도 3년 동안 일을 잘하면 노동당에 입당시켜 준다기에 그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강계로 자원했다.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맹추위의 강계 같은 어렵고 힘든 곳에 가서 노동계급화 해야 입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하지만 큰 실수였다. 1995년부터 북한엔 배급이 끊긴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고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지역의 하나가 강계였다.강계시 양정사업소로 간 그는 고난의 행군의 비참함을 3년 동안 온몸으로 느꼈다. 관을 짤 판자도 없어 그냥 땅에 묻은 시신을 개들이 파내어 살점을 물고 다니는 광경은 지금도 가끔 떠오른다. 대두박과 벼 뿌리, 흙까지 파먹었지만 20대의 허기를 극복할 수 없어 남들처럼 농장 밭에 들어가 도둑질도 서슴없이 했다. 3년 동안 못 먹을 것들을 먹으며 고생하다 보니 맹장과 담낭을 다 떼어내야 했다.나무를 패다가 도끼로 발등을 찍은 일도 있었다. 병원에 가서 마취제도 없이 꿰매다가 정신을 잃기도 했다. 지금도 그의 발엔 생살을 꿰맨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귀한 아들이 강계에서 이렇게 살 동안 부모들은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 1995년 3월에 제대한 부친은 곧바로 생계 전선에 내몰렸다. 김일성 호위부대 부부장이었다고 해서 당국이 베푸는 특혜는 하나도 없었다. 배급이 끊겨 부부가 먹고 살길이 막막하던 차에 지인이 준 100달러를 밑천 삼아 만두 장사를 시작했다. 이른 아침부터 부친은 밀가루를 반죽해 어머니와 함께 하루 종일 만두를 빚었다. 국가계획위원회 간부로 은퇴한 모친은 하루도 빼지 않고 저녁마다 김일성대 후문에 만두를 이고 가서 팔았다. 그렇게 그의 부모도 고난의 행군 때 굶어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외교관으로 탄탄대로1997년 끝날 것 같지 않던 현장실습생 생활도 끝났다. 그런데 김정일의 말이 또 바뀌었다. 현장 체험생은 노동당에 입당시키지 말라고 한 것이다. 3년 노력이 허사가 됐다.노동당에 입당하지 않고선 외교관으로 성장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는 군에 자원 입대했다. 공군 1사단에 입대해 개천 원리비행장에서 3년 동안 군복무를 했다. 3년 뒤 마침내 노동당원이 됐고 원하던 외무성에도 들어갈 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김정은 금고지기인 장인 도움으로 승승장구했다고 말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아랍어과 출신이 손에 꼽힐 정도로 적었고, 대학을 졸업하고 노동당에 입당한 아랍어과 졸업생은 더 적었다.그는 노동 체험 현장에서나, 군복무 기간에도 아랍어 공부를 열심히 한 덕분에 실력을 인정받았다. 나중에 그는 김정일 아랍어 통역사를 양성하는 ‘1호 통역 후보생’이 됐지만 김정일이 아랍 국가 수반들을 거의 만나지 않아 직접 통역할 기회는 없었다. 대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외무상의 아랍어 통역은 매번 담당했다. 실력이 뒷받침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39호실 실장 사위가 된 것도 우연한 인연 때문이었다. 그의 부친과 아내의 큰아버지가 과거 최고사령부 친위중대 같은 분대에서 복무했던 전우 사이였던 것이다. “내게 시집가야 할 조카딸이 있는데.” “내게도 장가를 보낼 아들놈이 있소.” 이렇게 류 전 대사와 부인은 선을 보게 됐다. 아내는 김일성대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박사원(대학원)에서 공부하던 학생이었다. 서로가 어디에 내놔도 꿀리지 않는 청춘남녀인지라 결혼은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2002년 결혼식을 올렸고 딸도 태어났다.북한에선 결혼하면 남편 집에서 사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내도 처음엔 류 전 대사 집에서 시집살이를 했다. 방 두 칸짜리 아파트에서 류 전 대사 부모와 류 전 대사 누나 부부까지 세 가족이 살아야 했다. 딸이 자식까지 낳고 방 한 칸 없이 고생하는 것을 본 장인이 “우리 집이 다섯 칸이니 들어와 살라”고 해서 류 전 대사의 처가살이가 시작됐다.아랍어 같은 희귀어를 전공한 외교관은 외국 파견 주기가 빠르다. 영어나 프랑스어 전공 외교관은 외국 대사관에 한 번 나가려면 오래 기다려야 했지만 희귀어는 전공자가 몇 명 없는 가운데서 돌려 쓰다 보니 자주 나가게 될 수밖에 없었다.그는 38세였던 2010년 시리아 대사관에서 3년을 지내고 귀국한 뒤 2016년 10월 쿠웨이트 주재 북한대사관 참사로 나갔다. 외무성에 있을 때는 1부상 서기, 부국장급인 외무성 2급 연구원 등을 지냈다.● 목숨보다 귀중한 그림한국에는 3만5000명에 가까운 탈북민이 있다. 온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류 전 대사의 탈북 이유는 가장 어이없는 경우에 속한다. 그는 배고픈 사람도 아니었고 죄를 지은 사람도 아니었다. 운명이 바뀐 이유는 그림 한 점 때문이다.가족과 함께라면 굶어 죽어도, 맞아 죽어도 된다고 생각했던 그였지만, 김정일 얼굴이 들어간 유화는 가족을 지킬 명분과 용기조차 앗아갔다. 북에 소환돼 가족과 함께 죽는다고 해도 나머지 가족을 살린다는 보장은 없었다. 본인 집안이나 처가 모두 정치범 가족이란 누명을 쓰고 대대로 비참하게 살아야 한다. 특히 10대 딸이 정치범수용소에서 살 것을 생각하니 부모는 정치범이 될 비장한 각오마저 할 수 없었던 것이다.그는 자신을 아들처럼 아끼던 장인을 생각하면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장인은 김 씨 일가 금고지기로 27년을 살았지만 단 1달러도 따로 챙기지 않았다. 김정은의 주머니는 두 개다. 류 전 대사 장인이 관리한 39호실 자금을 ‘당 자금’이라고 했고, 당 본부 서기실 36국이 관리하는 자금을 ‘혁명 자금’이라고 했다. 거창하게 혁명 자금이라고 붙였지만 실은 김 씨 일가 사생활에 드는 돈, 즉 각종 사치품 사는 데 쓰는 돈이다. 36국이 달러를 어디에 얼마나 쓰는지는 김정은만 알 뿐, 북한 최고 비밀에 속한다. 39호실 자금도 김정은 지시에 따라 지출되긴 하지만 김 씨 일가 사생활을 위해 쓰진 않는다. 대신 굵직굵직한 공사가 벌어질 때마다 거액이 지출되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몰래 빼돌릴 수 있었지만 전일춘 실장은 한 푼도 챙기지 않았다. 그런 점 때문에 김정일과 김정은에게 대를 이어 신임을 받았다. 하지만 그렇게 평생을 정직하게 살았어도 딸과 사위의 탈북 때문에 말년에 피해를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북한 체제에선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일이 수없이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그림 하나 때문에 대사를 탈북하게 만드는 어리석은 체제라는 꼬리표도 붙게 됐다. 류 전 대사는 이런 시스템을 북한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비록 가슴 아픈 대가를 각오하고 온 길이고 한국에 와서 기대했던 대우는 받지 못하지만, 딸을 보면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딸은 무척 행복해 보인다. 내년에 대학에서 생화학을 전공할 생각이다. 수령의 노예가 될 뻔했던 삶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자유의 땅에서 성장하는 딸을 보면 앞으로 어떤 어려운 일이 닥쳐도 다 버틸 수 있을 것 같다.죄책감 때문에 오랫동안 괴로워하던 아내도 다시 일어났다. 서울 모 대학 대학원에 진학해 내년 1월 박사학위 논문을 완성하게 된다. 류 전 대사도 스스로 삶을 개척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다. “운명의 배를 타고 왔지만 아직 종착점이 어딘지는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가족은 전혀 다른 땅에 뿌리를 내리고 다시 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새 삶의 ‘2절’을 시작했다. 영화 은비녀 주제가 2절 가사는 북한이 그를 위해 만든 노래인 것 같기도 하다.눈물을 흘리며 떠나온 고향내 다시 돌아갈 그날은 언제냐하늘가 저 멀리 철새가 날을 때면눈물 없는 내 나라가아 그리워라.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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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온실 채소 죽으면 간부들은 목 내놔야…‘김정은 농장’의 실상 [주성하의 ‘北토크’]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올해 북한 김정은의 가장 큰 관심사는 평안북도 신의주온실종합농장이 아닐까 싶습니다. 김정은은 26일 완공을 앞둔 신의주온실종합농장을 현지 지도했는데, 올해만 다섯 번째 방문입니다. 이곳은 그가 1년 사이 가장 많이 찾은 곳입니다.북한은 “신의주온실종합농장 건설은 총건축 공사량의 97% 선에서 진척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를 미뤄보아 한 달 안에 완공식이 열릴 것이고, 김정은은 또 이곳을 방문해 붉은 테이프를 자를 것 같습니다.그런데 북한의 준공식은 완공됐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이번에 노동신문은 “온실 호동과 남새과학연구중심(센터), 여관, 편의봉사시설, 탁아소, 유치원 등 공건물, 수백 세대 살림집의 전력 및 급배수 계통에 대한 시운전이 진행 중에 있다”고 자랑했습니다. 수백 세대의 살림집은 신의주온실종합농장을 둘러싸고 있는 아파트 단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이건 자랑거리가 아닌데, 노동신문이 실수한 것 같습니다.북한은 분명히 지난해 12월 21일에 김정은이 참가한 가운데 이 살림집들에 대한 준공식을 성대하게 가졌습니다. 그때로부터 1년이 지났는데 이제 와서 전력 및 급배수 계통에 대한 시운전을 한다니요. 전기와 물은 사람이 사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들입니다.이걸 아직도 끝내지 못했다면, 지난 1년 동안 겉모양만 그럴듯한 아파트에서 사람들이 도대체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해집니다. 김정은은 준공식을 포함해 다섯 차례나 이곳을 더 방문하는 동안 농장에서 일할 사람들의 집은 돌아보지 않았던 것일까요.● 세 번째 ‘세계 최대 온실농장’어쨌든, 그럼에도 신의주온실종합농장 준공식은 곧 열릴 것입니다. 김정은이 가장 원하는 그림이기 때문입니다.그리고 이곳에서 채소가 쏟아져 나오는 장면도 북한 매체들을 통해 수없이 등장하겠죠. 중국에서 빤히 건너다보이는 곳인데, 생산을 하지 못 하고 있다면 얼마나 많은 간부들이 처벌을 받겠습니까.이제 김정은은 온실만큼은 어디 가서도 전문가처럼 할 말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의 지시로 북한에는 이미 초대형 온실 농장들이 여러 개 건설됐습니다.2015년 평양 사동구역 장천남새전문농장(45ha)을 시작으로 2019년 함북 중평온실농장(200㏊), 2022년 함남 연포온실농장(277㏊), 2024년 강동온실농장(280ha)이 건설됐습니다. 준공을 앞둔 신의주온실종합농장은 면적이 446㏊나 됩니다.북한은 연포온실농장을 완공한 뒤 이를 세계 최대 규모의 온실농장이라고 자랑했습니다. 그렇다면 3년 사이 세계 최대 규모 온실농장이 세 개나 생긴 셈입니다. 이것이 끝이 아닐 수도 있죠. 내년에 김정은이 또 어디에 가서 온실농장을 지으라고 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김성태 전 쌍방울그룹 회장이 지난해 7월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던 이유는 경기도의 북한 스마트팜 지원사업 명목으로 북한에 500만 달러를 전달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에서 건설되는 방대한 온실 농장들을 보면, 우리가 북한의 스마트팜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원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앞서 지은 북한의 대규모 온실농장들은 잘 가동되고 있을까요. 북한 언론 보도에 따르면 국가 계획량 이상으로 각종 채소를 생산한다고 합니다.이 주장만큼은 어느 정도 사실일 것 같습니다. 지금 김정은의 관심사가 온통 온실에 집중돼 있는데, 자신의 선행 치적인 온실에서 생산에 차질이 빚어진다면 또 누가 죽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농장이 지어진 지역에서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온실이 잘 가동되고 있음을 김정은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인민보다 더 귀중한 채소그런데 북한에선 바로 이런 게 문제입니다. 온실 농장들이 잘 가동되려면 대규모 난방과 전기가 필수적입니다. 종자와 비료도 많이 듭니다. 온실 농장들이 제대로 가동하려면 농장에서 생산된 채소를 시장에서 제값을 받고 팔고, 판매 대금으로 온실 운영에 필요한 석탄이나 비료 등을 사 와야 합니다. 그래야 반짝 운영이 아닌 지속적인 운영이 보장됩니다.그런데 북한의 선전을 보면 앞서 건설된 온실 농장에서 생산된 채소들은 ‘인민들에게 베푸는 장군님의 크나큰 사랑을 전하는’ 수단이 되고 있습니다. 제값을 받지 못함에도 채소가 계속 생산되려면 ‘장군님의 관심과 사랑’이 몇 년 뒤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져야 가능할 겁니다.문제는 김정은의 관심과 사랑은 전기나 비료를 무한히 만들어내진 못한다는 것입니다. 북한의 만성적인 전력난이나 연료난은 수많은 탈북민을 통해 계속 전해집니다.가뜩이나 없는 전기와 석탄을 온실에 아낌없이 투입하면, 인근 사람들은 다시금 암흑 속에 살면서 추운 겨울에 난방도 제대로 못 하고 살 수도 있습니다.주민들이 추워서 벌벌 떠는 것과, 채소가 잘 자라는 것. 둘 중 북한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요. 당연히 채소입니다. 신의주 온실에서 채소가 제대로 생산되지 못하면 목을 내놔야 하는 간부들이 한둘이 아닐 겁니다. 그러나 주민이 추워서 떤다고 목을 내놓을 일은 없습니다. 장군님의 사랑을 인민에게 전하기 위해 인민들이 얼어 죽는 것쯤은 감수해야 합니다. 비료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료가 부족해 김정은이 평생 찾아가지 않을 외진 시골 농장들의 논과 밭작물이 시들어 죽어도 상관없습니다. 온실만 잘 가동되면 됩니다.앞서 건설된 대규모 온실들의 사정도 위와 비슷할 겁니다. 올해 1월 북한엔 매서운 한파가 들이닥쳐 학생들이 겨울 방학이 끝난 뒤에도 학교에 가지 못했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못해도 온실 채소는 잘 자라야 합니다.● 평양타조농장과 대동강자라공장의 사례북한 사람들에겐 이런 일은 수십 년 넘게 반복돼 온 익숙한 광경입니다. 대표적으로 110여 개 우리에서 타조 1만 마리를 사육하고 있다는 평양타조목장을 실례로 들 수 있습니다. 이 타조농장은 김정일의 지시로 1998년에 착공해 이듬해 완공했습니다. 그때 김정일은 갑자기 “타조고기가 맛있다”며 전국에서 대대적으로 기르라고 했습니다. 1998년은 고난의 행군 말기로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을 때였습니다.김정일의 지시를 어길 수는 없으니 외국에서 타조를 사 와서 최고 등급의 배추를 먹여가며 키웠습니다. 평양 사람들은 추위에 덜덜 떨고 있는데도 타조들은 따뜻한 전기 난방 속에 살았습니다. 북에서 지금까지 타조 고기를 먹어본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타조농장과 같은 사례는 많습니다. 철갑상어나 자라도 있죠.2015년 4월 “전력 공급 부족으로 펌프를 돌리지 못해 자라들이 죽였다”고 이실직고한 대동강자라공장 지배인과 당 비서는 김정은에게 따귀를 맞은 뒤 그 자리에서 끌려나가 총살됐습니다. 그걸 북한 모든 간부가 지켜봤습니다. 이제 전기나 비료가 없어 온실을 가동하지 못했다고 하면, 결과는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특히 신의주온실종합농장은 누구보다 긴장해야 합니다. 김정은이 1년 사이에 다섯 번이나 찾았는데 생산이 제대로 되지 못한다면 ‘장군님의 영도 업적이 깃든 온실을 파괴한 반당반혁명종파분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다행스러운 일은 김정은의 관심이 영원하진 않다는 데 있습니다. 이는 ‘세포등판’ 축산지구를 사례로 들 수 있습니다. 2012년 12월 김정은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축산업 발전에서 새로운 전환을 일으키겠다며 수만 명의 평양 시민을 선발해 강원도 세포에 보냈습니다. 그의 집권 이래 민생을 위한 최초의 대규모 동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사를 이듬해 봄에 시작하면 왜 안 됐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그해 겨울 숱한 사람들이 숙소도 변변치 않은 산꼭대기에 올라가, 언 땅을 곡괭이로 파내느라 엄청난 고생을 했습니다.그때로부터 13년이 흘렀습니다. 이제 세포는 김정은의 관심사에서 완전히 잊힌 듯 합니다. 가지도 않고 언급도 없습니다. 당연히 세포에서 생존해 있는 소는 얼마 되지 않고, 또 소고기를 먹겠다는 북한 사람도 없습니다.신의주온실종합농장 간부들도 한 해 한 해 잘 버티다 보면 좋은 날이 올 겁니다. 몇 년 뒤엔 김정은이 “인민들에게 과일을 배터지게 먹게 하겠다”며 뛰어다닐지 누가 알겠습니까.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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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굿네이버스, 기업 맞춤형 사회 공헌 확대

    기업이 보유한 물류·운송 역량을 사회 문제 해결에 적용하는 사회 공헌 활동이 확대되고 있다. 글로벌 아동 권리 전문 비영리단체 굿네이버스는 그동안 국제개발협력 사업과 긴급구호 활동을 통해 축적한 전문성을 바탕으로, 기업의 후원 물품을 해외 사업 현장에 알맞게 지원하고 있다. 단순한 구호물품 지원을 넘어 기업의 요구에 맞춘 수혜 지역 선정을 비롯해 운송 방식, 배분 프로세스, 캠페인 연계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협업이 이뤄지고 있다. 굿네이버스는 2022년 글로벌 해운기업 HMM과 후원 물품 운송 협약을 체결했다. 이 협약에 따라 HMM은 최근 베트남 북부 하장 지역 취약계층 아동 8만3000여 명에게 굿네이버스가 지원한 총 9만7000여 벌의 의류를 운송해 전달했다. 굿네이버스는 절감한 운송 비용만큼 취약 지역 지원에 재투입해 지역사회 자립을 돕는다. 지난달에도 글로벌 패션기업 폰드그룹이 기증한 19억 원 규모의 의류 구호물품이 HMM의 지원을 통해 라오스로 출발했다. 올 4월 경남·경북 지역에 대규모 산불 피해가 발생했을 때도 굿네이버스의 구호물품 전달 시스템이 빛을 발했다. 굿네이버스는 지방자치단체와 협력해 이재민에게 꼭 필요한 물품에 대한 수요 조사를 진행하고 긴급구호물품 조달 및 배분 계획을 수립했다. 국내 패션 플랫폼 ‘무신사’는 입점 브랜드 40여 곳과 함께 굿네이버스에 2억5000만 원 상당의 의류를 후원했다. 그 결과 옷가지조차 챙기지 못하고 급히 몸을 피한 이재민들의 일상 회복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9월 잠실 한강공원에서 열린 기부 러닝 대회 ‘굿네이버스 레이스 with 띵크어스’에는 참가비가 기후위기 대응 사업에 후원되는 캠페인 취지에 맞춰 메인 스폰서 롯데카드를 비롯해 총 18개 기업이 후원사로 참여했다. 레이스를 마친 참가자들이 받은 완주 기념품에는 후원 물품이 가득했다. 대회 현장에는 기업별 브랜드 부스가 마련되어 참가자들이 브랜드를 경험하는 시간도 마련됐다. 굿네이버스는 스포츠, 식음료, 생활 건강 등 다양한 브랜드와 함께 기후위기 대응이라는 공익 메시지를 전하며, 캠페인을 확대해 나갈 수 있었다. 현대중 굿네이버스 대외협력실장은 “굿네이버스는 기업의 전문성이 국내외 사업 현장에서 실질적인 지원 성과로 이어지도록 협력 모델을 고도화해 왔다”며 “앞으로도 물류, 플랫폼, 소비재 등 다양한 산업군과의 파트너십을 확대해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가치 실현에 기여하겠다”고 말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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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무상 치료제 폐지된 북한의 현실

    2025년은 김정은이 병원에 꽂힌 한 해였다. 그는 19일 평양 인근 강동군병원 준공식에 참석했다. 올 2월 6일 착공식부터 시작해 이날까지 9개월여 동안 그는 이 병원을 4차례 방문했다. 지난달 준공한 평양종합병원도 올해만 3차례 찾았다. 그뿐만 아니다. 지난해엔 ‘20X10 정책’을 발표해 10년 동안 매년 20개 군에 지방공업공장을 건설하라고 하더니, 올해엔 여기에 더해 병원도 매년 20개씩 건설하라고 지시했다. 김정은이 인민 건강에 갑자기 지대한 관심이 생긴 것 같지는 않다. 의료가 아주 괜찮은 돈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뿐이다. 자기가 아무리 호통을 쳐도 인민이 주머니를 열지 않지만,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생기면 집을 팔아서라도 치료비를 낸다는 것을 안 것이다. 한국에는 북한의 무상 치료제가 폐지됐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남조선은 돈이 없으면 치료를 못 받고 죽지만, 우리 공화국은 무상으로 인민을 치료한다”고 반세기 넘게 자랑해서 그런지 북한이 아직도 무상 치료제를 시행하는 줄 알고 있다. 북한 무상 치료제는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절부터 사실상 사라졌다. 의사가 진단하고 처방하면 환자는 장마당에서 약을 사 오고, 그 약으로 의사가 치료하는 시스템이 됐다. 치료는 공짜가 아니었다. 환자는 배급이나 월급을 받지 못하는 의사에게 돈을 건네야 했다. 이런 유명무실하고 허울뿐인 무상 치료제는 2022년 8월 급격한 전환점을 맞았다. 이때부터 북한은 모든 병원 간판에서 ‘인민’을 떼 버리게 했다. 올해 준공된 병원들도 원래라면 평양종합인민병원, 강동인민병원이라 불려야 한다. 인민이 간판에서만 버려진 것은 아니다. 인민은 병원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접수비, 진단비, 치료비, 약값, 처방비, 입원비 등 모두 물어야 한다. ‘합법적인’ 치료비가 도입된 것이다. 한국과 북한의 병원은 이제 시스템에서는 별 차이가 없게 됐다. 하지만 1인당 소득으로 비교하면 한국이야말로 진정한 무상 치료 수준이다. 게다가 북한은 리(里) 단위 작은 병원과 시군급 병원, 도 병원, 평양종합병원 간의 치료비 격차가 엄청 심하다. 가령 올해 초 기준 군 병원에서 엑스레이를 한 번 찍으면 북한 돈 2만 원을 받았는데, 도 병원에서는 설비가 최신식이라는 이유로 6만 원을 받았다. 2만 원은 쌀 2kg 이상을 살 수 있는 돈이다. 중앙병원에 가면 비용은 천문학적이다. 가령 북한에 몇 대 없는 컴퓨터단층촬영(CT) 장비 사용료는 지난해 기준 70만 원 정도였다. 북한 고액 연봉 수령자도 1년에 70만 원을 벌지 못한다. 지난해 종양으로 평양에 올라가 후두절제술을 받은 한 지방 고위 간부는 입원 치료비까지 5000달러(당시 기준 북한 돈 약 4400만 원)를 썼다. 처방과 동시에 병원에서 판매되는 약 가격은 장마당과 거의 같다. 장마당에서 비싸지면 병원에서도 비싸진다. 장마당 약품은 간혹 불량품이 있지만, 병원 약은 신뢰도가 있어 환자들은 이왕이면 병원에서 산다. 김정은은 19일 강동군병원 준공식에서 이런 의미심장한 연설을 했다. “이 병원은 건설 과정도 교본적이었지만 운영 과정도 지방 보건 발전의 우수한 본보기로 될 것”이라며 ‘혁명적 결행’ ‘우리식 보건 현대화’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 북한 사람들은 본보기라는 강동군병원 치료비가 얼마로 책정될지 긴장하며 주시할 것이다. 사실 북한이 유상 치료제를 도입하든 말든, 어차피 인민은 수십 년 동안 돈 없으면 치료도 못 받고 죽는 세상에서 살았다. 그렇지만 우리식 보건 현대화란 것이 도입되면서 환자와 가족, 의사, 장마당 약장수 할 것 없이 모두 피해자가 되고 김정은만 수혜자가 됐다. 무늬만 무상 치료제하에서 의사에게 뇌물로 전달되던 돈은 이제 당국으로 들어간다. 정성제약종합공장, 순천제약공장 등에서 생산된 약품이 장마당 약장수를 대신한다. 또 국가가 정한 치료비가 뇌물 시대에 비해 훨씬 비싸지면서 환자와 그 가족의 부담도 엄청나게 커졌다. 이제 북한은 진짜로 돈이 없으면 치료도 못 받고 죽는 세상이 됐다. 김정은이 갑자기 병원을 많이 만들라고 채찍질하는 것을 보면 돈 냄새를 강하게 맡은 것 같다. ‘의료가 주머니 속 달러를 터는 데 제격이구나’라고 깨달은 것이다. 김정은이 인민들 좋으라고 저리 열심히 뛰어다니겠는가. 그런 것은 본 적이 없다.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5-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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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짐승 발자국 따라 네발로 뛰었다” 9년차 북한군의 탈북기〈2〉 [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22일 공개된 1부에 이어.)강민국은 지뢰밭 앞에서 잠시 고민했다. 지뢰밭을 통과하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에 운명을 맡겨야 하는 일이었다.다행스러운 것은 달이 밝았다는 점이었다. 떠날 때는 분계선을 넘을 때 비가 오거나 날이 흐려 어둡기를 원했는데, 막상 장벽과 철조망을 통과해 보니 달이 밝아 너무나 다행스러웠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움직였다면 분명히 여러 번 실수를 했을 것이지만, 달이 밝아 철조망을 관찰하며 통과할 수 있었다.지뢰밭을 달빛 아래 조용히 관찰하니 짐승들이 다닌 발자국들이 보였다. 며칠 전 내린 폭우와 이후 이어진 고온의 날씨로 땅이 빨리 말라 단단해지다 보니 발자국이 또릿하게 보였다. 이것도 비가 오거나 흐린 날씨였다면 발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그는 짐승 발자국을 따라 이동했다. 적어도 짐승이 지나갔다면 선으로 연결된 대인지뢰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렇지만 목함지뢰는 어쩔 수 없으니 운에 맡겨야 했다. 강 씨는 이동 방향을 산 아래 도로로 정했다. 아무래도 도로엔 지뢰가 그리 많이 묻혀 있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이동할 때 그는 네발걸음으로 움직였다. 네 발로 가면 무게가 분산돼, 두 발로 가다가 지뢰를 밟는 것보단 안전할 확률이 높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한참을 철조망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니 도로가 나타났다. 금강산 관광이 중단된 지 16년도 넘었던 때라 도로에도 풀이 울창하게 자라 있었다. 그런데 도로라고 지뢰가 매설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도로 가운데 흙이 깔린 곳을 만났는데, 위에 대전차 지뢰가 잔뜩 설치돼 있었다. 대전차 지뢰는 사람의 몸무게엔 터지지 않는다는 상식을 알고 있던 터라, 조심스럽게 밀어내고 통과했다.얼마쯤 더 가니 도로가 굽은 구간이 나타났다. 거기서부턴 북한 초소에서 발견할 수 없는 사각지대였다. 이제부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철조망을 통과해 네 발로 정신없이 2㎞쯤 왔는데, 불쑥 차단봉이 나타났다. 북한에서 만든 엉성한 차단봉도 아니고, 또 글씨체도 북한식이 아니었다. ‘드디어 남조선에 왔구나.’ 그때의 감격을 어찌 다 설명할 수 있을까.달빛 아래 차단봉 옆에 있는 CCTV가 보였다. 중국 영화에서 CCTV를 봤기에 그게 무엇인지 알았다. ‘나를 보고 있구나’ 싶어 벌떡 일어났다. 이제부턴 네 발걸음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군복도 털면서 CCTV 앞을 괜히 서성거렸다. 빨리 나를 발견하라는 나름의 신호였다.그는 북한에서 9년 동안 보초를 서본 군인이었다. 차단봉 건너편에서 근무에 나온 군인이 졸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가 보초선을 통과하면 누군지 모를 한국 군인이 처벌을 받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막 도착한 한국에서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고 싶진 않았다.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군인이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멀리서 웅얼거리는 확성기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들어보니 “정지. 정지”라고 했다. 하지만 강 씨는 정지가 무슨 말인지 몰랐다. 북한에선 ‘섯’이라고 하지 정지라고 하진 않는다.● 처음 본 한국군한참을 기다리다가 더는 기다릴 수 없어 할 수 없이 차단봉을 넘어 걸어갔다. 좀 가다 보니 철조망과 통문이 나타났다. 그 앞에 서니, 스피커 소리가 더 긴박해졌고, 잘 들렸다.“지금 대상은 불응하고 있다. 접근하면 사격하겠다. 귀순 의향 있으면 손을 들라.”대상이 뭐고, 불응이 뭐고, 귀순이 뭔 말인지는 몰랐지만, 사격과 손들라는 말은 알아들었다.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자 스피커가 “대한민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고 했다.통문이 열리더니 10여 명의 군인이 쏟아져 나왔다. 그를 땅에 눕히더니 뒤로 손을 묶었다. ‘이게 환영이냐’는 생각이 스쳤다. “동행자는 없습니까. 추격조는 없습니까.” “없습니다.”“필요한 것 없습니까.” “물을 좀 주세요.” 누군가 물병을 가져다 입에 대주었다. 벌컥벌컥 마시고 또 마셨다.나중에 들은 바지만, 한국군은 그가 북한 지역에서 움직일 때부터 적외선 카메라로 지켜봤다고 한다. 하지만 네 발로 움직이니 짐승인지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한국 지역에 도착해 벌떡 일어서서야 사람인 줄 알았다고 한다.두 손을 묶인 와중에도 강 씨는 한국군을 관찰했다. 첫 번째로 눈에 들어온 것이 너무나 멋진 군복이었다. 신발도 멋진 소가죽 군화였다. 김일성광장에서 열병식을 하는 군인들도 이들처럼 잘 입진 못했다. 거기에 방탄복과 방탄모, 야시경까지 착용하고 있었다. 강 씨는 북한군 생활 9년 동안 방탄복이나 야시경을 본 적이 없다. 소총도 번쩍번쩍한 것이 녹을 열심히 닦아내기에 급급한 북한군의 낡은 자동보총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거기에 마중 나온 군인들의 키는 대체로 강 씨보다 한 뼘씩 컸다. 강 씨도 부대에서 키가 큰 30% 축에 들어갔는데, 한국 군인들은 훨씬 키도 크고, 체격도 좋았고, 피부에서 기름기가 돌았다.‘아, 나를 마중하느라 키가 큰 군인들을 골라내서, 차려 입히고 나온 거겠지.’강 씨는 자기 몰골을 살펴봤다. 가뜩이나 낡은 군복이 다 찢겨 있었다. 갑자기 기가 죽었다.군인들이 그에게 안대를 씌우더니 차에 타게 했다. 차에서 에어컨이 나오고 있었다. 태어나 처음 맞아본 에어컨 바람이었다.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 하나 풀렸다. ‘이렇게 시원한 바람을 맞으니 이 더위에 저런 군복과 방탄복을 입고도 견딜 수 있었구나.’그가 한국에 도착한 시간은 2024년 8월 20일 새벽 2시경이었다.● 죽을 받아 들고 눈물 흘려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22사단 본부. 도착해 안대를 풀어주었다. 본부의 군인들도 똑같은 군복차림이었고 다들 키가 컸다. 그제야 자신을 맞은 군인들이 일부러 골라 뽑아온 사람들이 나온 것이 아닌 줄 알았다.들어가자마자 코로나 검사부터 했다. 여성 군의관들이 새벽에 나오게 만들어 짜증 났는지는 몰라도 딱딱한 인상으로 그를 검사했다.‘나는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인가 보다.’ 그런 생각은 곧 풀렸다. 한 장교가 필요한 것이 없냐고 물어서 “배가 고프다”고 대답했다. 이틀 동안 꼬박 굶었다. 실은 병원에서 탈출하고부터 거의 먹지 못했다.장교는 “준비하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이어 “몸을 씻고 싶다”고 하자 그를 목욕탕에 데리고 갔다. 씻고 나오니 한국군 운동복을 주었다.목욕하는 사이 식사가 준비됐다. 그가 한국에 오면서 가장 기대한 것이 첫 식사였다. ‘그래도 고기는 주겠지’라고 엄청나게 기대했는데, 죽 한 그릇이 달랑 나왔다. 처음엔 크게 실망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장교의 말이 눈물이 쏟아졌다.“오래 굶었다가 갑자기 먹으면 탈이 나니, 일단 죽부터 먹으면서 점차 식사량을 늘여야 합니다.”‘나는 남조선을 해방하겠다고, 남조선 괴뢰군을 때려잡겠다고 10년을 군사복무 했는데, 이들은 나를 동포로, 형제로 맞아주는구나.’멀건 죽 속에서도 뭔가 씹혔다. 썩 나중에 알았지만, 그건 전복이었다. 죽을 먹고 아침에 다시 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차가 늘어선 도로. 포장 상태가 너무 좋아 흔들리지 않는 도로가 눈에 보였다.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북한군에서 운전병이었기 때문이었다.● 운전병으로 입대하다강 씨는 18세였던 2015년 북한군에 입대했다. 학교 다닐 때 학급반장도 하는 등 공부를 잘했지만, 어머니는 군에 가라고 했다. “너는 출신성분이 걸려 간부가 될 순 없으니, 군에 가서 평생 써먹을 기술이나 배워라.” 할아버지 때문이었다. 평양에서 중앙당 간부를 하던 할아버지는 술자리에서 친구들에게 당의 의료 정책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산골로 추방됐다. 아버지가 열심히 노력해 동해안의 한 도시로 이사를 왔지만, 거기까지였다.부모들이 열심히 로비한 덕분에 강 씨는 입대하면서 200달러는 뇌물로 써야 갈 수 있다는 군 운전수 양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양성소 과정은 1년이었다. 1년 동안 10분 정도씩 화물차를 세 번 몰아보고 졸업했다. 전체 양성소 인원은 800명 정도. 1개 대대가 120명 정도인데, 대대마다 1958년부터 생산된 ‘승리58’ 목탄 화물차가 실습용으로 1대씩 있었다. 이 차는 손으로 스타찡(리코일 스타터)을 1~2시간 교대로 돌려야 발동이 걸렸다. 그렇게 겨우 엔진을 돌려도 엔진에 목탄 재가 계속 차서 수시로 차가 멈춰 섰다.그래도 그가 간 운전사 양성소는 총참모부 직속이라, 군단별로 한 개씩 있는 운전사 양성소보다는 훨씬 사정이 좋았다. 겨울엔 목탄 만들 참나무를 찍어오기 위해 깊은 산에 3시간 넘게 걸어갔다가, 나무를 등짐으로 메고 다시 돌아왔다.늘 배가 고팠다. 알루미늄 공기에 훌쩍 들어간 옥수수밥, 멀건 소금국, 염장무 3형제 반찬이 1년 내내 제공됐다. 염장무를 아무 양념도 없이 채를 치고, 동그랗게 썰고, 깍두기처럼 썬 것이 염장무 3형제다.그냥 썰어주면 되지만, 과거 김정일이 군인들에게 3가지 반찬을 무조건 제공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람에 모양만 달리해 그릇에 담는다. 이렇게라도 사진을 찍어 위에 보고하지 않으면 반찬 3가지를 보장하라는 지시를 어긴 것이 된다. 능력은 없는데, 하라고는 하니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이다.● 목탄차, 쌀겨차, 가랑잎차…1년 동안 양성소 생활을 마치고 부대에 배속됐다. 그의 대대엔 전투차량으로 등록된 화물차가 8대가 있었다. 하지만 가동할 수 있었던 차량은 그가 복무하던 내내 2대뿐이었다.나머지는 각목을 이용해 땅에서 띄워 보관만 했다. 이 차들은 전쟁이 나도 가동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가동되는 2대를 위해 부품들을 오랫동안 뜯어내 사용했기 때문이다. 바퀴도 철심이 다 드러난 쓰다 버린 폐타이어가 붙어있었다. 지휘관은 “네 차를 몰고 싶으면 부품을 사 와서 끼우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이것도 빈말임을 누구나 안다. 설령 부잣집 자식이어서 부품을 사서 갖고 와도 고참들이 또 뜯어갈 것이 뻔했다.그나마 강 씨의 부대는 총참모부 직속이라 괜찮은 부대라서 대대에 가동되는 차 2대를 유지할 수 있었다. 2대로 각종 건설장에 노력 동원도 나가고, 후방 물자도 실어 오고, 김장철에 배추나 무도 실어 왔다.그가 입대할 땐 북한군 부대에 참나무 숯으로 가동되는 목탄차만 있었는데, 유엔의 대북제재가 심화하면서 화물차들의 연료가 다양하게 바뀌었다. 어떤 연료로 움직이는가에 따라 차에 이름이 붙었는데, 목탄차, 쌀겨차, 카바이드차, 알탄차, 메탄가스차, 가랑잎차 등으로 나뉘었다.목탄차는 힘이 좋지만, 참나무 숯을 구하기 힘들었다. 쌀겨차는 탈곡한 벼 껍질로 가는 차였다. 장점은 연기가 적게 났고, 힘도 좋았고, 벼 껍질을 구하기 쉬웠다. 가다가 정미소가 있으면 쌀 4㎏ 정도 살 수 있는 돈인 2만 원에 화물차 적재함 가득 채울 수 있는 벼 껍질을 구입할 수 있었다. 대신 조수가 적재함에 타서 쉴 새 없이 난로에 껍질을 넣어야 했다.비슷한 차가 가랑잎차인데, 아무 가랑잎이나 쓰진 못하고 참나무 가랑잎을 써야 했다. 이 차는 조금만 먼 곳에 가려면 적재함에 가랑잎을 가득 실어야 했고, 조수는 벼 껍질보다 더 열심히 난로에 가랑잎을 넣어야 했다.알탄차는 알처럼 빚은 무연탄을 적재함의 난로에 넣어 가는 차였다. 카바이드와 메탄 차는 연료 구입비가 비쌌다. 휘발유나 디젤유가 없으니, 위의 대용 연료를 사용했는데, 대신 자동차 부품이 너무 자주 고장 나 한번 갔다 오면 분해해서 그을음을 긁어내야 했다. 이것이 2024년 현재의 북한군 실태다. ● 북한군 지휘관 운전사북한군 부대들에서 부품과 연료난으로 처절하게 싸우고 있을 때, 그나마 상황이 좋은 차들은 고위 군관들이 타는 승용차였다.북한군은 일정한 계급 이상인 군관에게 공무용 차를 주는데 이를 직무차라고 부른다. 그렇다고 당국이 승용차 부품이나 연료를 직무차에게 특별히 공급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엔 비밀이 있다.북한에서 어느 정도 돈이 있는 부유층들은 자식을 군에 보낼 때 승용차를 중고로 사서 보낸다. 북한군 군관들이 타는 차는 중국제 우와즈, 북경, 신비라는 브랜드인데, 북한에서 북경 중고차는 2000달러 정도 하고, 우와즈나 신비는 1500달러 정도 거래가 된다.이렇게 차를 서서 입대하면, 운전수 양성소를 마치지 않아도 곧바로 여단장이나 사단장 등 고위 군관의 직무차 운전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군 복무 내내 승용차를 운용하는 연료나 부품 등은 본인이 집에서 돈을 가져와 대야 한다.대신 좋은 점은 규율 생활도 하지 않고, 동원에도 빠지며, 자기 방에서 편안하게 군 복무를 할 수 있다. 그리고 제대할 때 지휘관이 대학 추천권을 준다.차를 살 수 있다는 것은 잘 사는 집 자식이란 의미다. 운전사는 지휘관의 집안 경조사나 먹거리 등도 챙겨야 한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반대급부로 지휘관은 운전사를 얼마든지 휴가 보낼 수 있다. 운전사 두 명 정도만 채용해 교대로 굴리면, 1년에 절반은 집에 가서 놀면서 군 복무를 마칠 수 있다.이렇게 차를 갖고 입대한 운전사를 채용한 지휘관이 북한군 전체에서 10% 이상은 된다.그렇다고 국가에서 준 차를 타고 다니는 다른 지휘관은 규정대로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도 다 부유한 집안 자식을 자기 운전사로 채용해서 연료나 부품을 대게 한다. 즉 북한군 고위 간부들의 운전사는 부잣집 자식인 것이다.지휘관 운전사도 어느 지역인지, 어느 직책인지에 따라 가격이 달라진다. 평양 인근에서 지휘관 운전사를 하려면 집을 팔아야 한다고 소문이 났다. 자기 돈으로 군용차를 유지하는 것은 당연하고, 지휘관 가족까지 운전사가 다 먹여 살려야 한다.북한에서 권력이 막강하고, 돈이 아주 많은 진짜 부자들은 자식들을 운전사로 보내지 않는다. 어쨌든 직무차 운전사는 10년을 복무해야 하기 때문이다. 진짜 권력층 또는 부자는 자식을 집 근처 부대에서 편안하게 5년 정도 복무하게 한 뒤 입당시켜 대학을 졸업하게 한다. 부모의 권력이 너무 세면 지휘관들이 뇌물을 달라는 얘기도 못 하고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다.권력이 없는데, 돈이 많으면 아예 소속 중대 정도는 먹여 살린다. 대신 자식은 후방 물자 구입이란 명목으로 집에 와서 편안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제대한다.● 로또 맞은 운명2023년 말 강 씨는 김정은이 지시한 공사에 차출됐다. 김정은이 지시한 날짜까지 공사를 마치지 못하면 누가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지휘관들은 군인들을 인정사정없이 일을 시켰다.강 씨는 수 톤짜리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드는 일을 했는데, 그 넓은 작업장에 중장비가 3대뿐이고, 그마저도 수시로 고장 나거나 부품이 없어 사실상 인력으로 모든 작업을 해결해야 했다.아침 기상 시간은 새벽 4시. 청소하고 밥을 먹고 5시에 공사장에 나간다. 세수는 어림도 없고, 이를 닦을 시간이 있는 날은 행복한 날이었다.12시까지 오전 작업을 마치고 점심을 먹는다. 저녁은 6시가 아니라, 그날 과제를 마친 새벽 1시쯤에 제공됐다. 그걸 먹고 이가 바글거리는 모포(담요)를 덮고 3시간을 잤다. 1953년 전쟁이 끝난 뒤 북한군 모포는 딱 3번 바뀌었다. 수십 년을 사용한 모포는 사실상 누더기나 다름이 없지만, 수면시간이 3시간인 환경에선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그렇다고 배불리 먹는 것도 아니었다. 옥수수밥에 멀건 소금국을 먹고 일어서면 그때에야 배고픈 게 느껴졌다. 허약 환자들, 결핵환자들이 속출했지만, 날짜를 맞추지 못하면 떨어질 처벌이 무서워, 군인들에겐 단 하루의 휴식일도 허용되지 않았다.강 씨는 이런 환경에서 7개월을 버티다가 결국 쓰러졌다. 병원에 가니 내시경도 하지 않고 위경련이라고 했다. 여단 병원 수준에선 수면 내시경을 할 수 없다. 그래서 강제로 내시경을 삼키라고 했는데, 너무 아파 넘어가지 않았다. 수면 내시경을 하려고 하면 사회 병원에 가서 돈을 내야 했는데, 너무나 비싸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북한의 민간병원은 ‘도 인민병원’ ‘군 인민병원’ 이런 식으로 불렀는데, 3년 전부터 간판에서 인민이란 말을 뺐다. 돈받고 치료하면서 인민병원이라고 부르기에 멋쩍어서인지도 모른다.진단도 받지 못한 채 그는 뭔지 모를 찌꺼기가 떠다니는 수액을 맞다가 결국 탈북을 선택했다. 집에서 약 살 돈을 보내줄 수 있었으면 탈북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탈북하는 내내 아픈 배를 쥐어 잡고 이동했다. 그런데 그렇게 아팠던 위가 한국에 와서 약 몇 알을 먹으니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북한에 있었으면 진단도 못 내리고 생사람만 잡을 뻔했다. 여러 조사를 마치고 강 씨는 올해 1월 서울 근교 지역에 임대주택을 받고 한국 사회에 나왔다. 불과 10개월 정도 남짓한 한국 생활이지만, 너무나 행복하다. 어디든 다닐 수 있고, 인권을 존중받아 좋고, 배고픔을 몰라 좋다.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대학에 가라고 권했다. 그래서 한국 정착 2개월 만에 ‘다음학교’에 입학해 입시 준비를 시작했다. 다음학교는 남북 청소년이 함께 공부하는 서울시 등록 대안교육기관이다. 이런 준비를 마친 끝에 얼마 전 가천대 물리치료학과에 입학했고, 내년 3월부터 다닐 예정이다. 더 좋은 대학에 가지 왜 물리치료학과를 선택했냐고 묻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가 물리치료학과를 선택한 이유는 죽을 뻔한 운명이 한국에 와서 새롭게 태어나게 됐으니, 자신도 누군가를 치료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였다. 물론 지금의 결심이 옳은 것인지 확신은 없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많은 것들이 아직 뭐가 뭔지 모른다. 하지만, 어찌 되든 뭐가 문제란 말인가. 그는 세계에서 가장 극악한 감옥에서 탈출한 엄청난 행운아다. 인민의 탈출을 막기 위해 북한은 약 240㎞의 남쪽 국경에 5m 높이의 장벽을 세우고, 8중 철조망을 만들고, 없는 전기를 아낌없이 공급하고 있다. 철조망 밖의 지뢰밭과 장벽 밖의 무수한 감시초소와 잠복초소까지 생각한다면, 감옥도 이런 감옥이 또 어디에 있을까.탈북하다가 전기에 붙어 죽고, 총에 맞아 죽고, 지뢰를 밟아 죽은 이는 또 얼마나 많았을 것인가. 북한이란 감옥에 갇혀 생지옥을 경험하는 2000만 동포들을 생각하면, 강 씨는 로또보다 더한 행운을 얻은 사람이다. 그리고 뭐든 새로운 도화지에 그릴 수 있는 28세일뿐이다. 서울의 하늘 아래에서 오늘도 그의 꿈은 새싹처럼 자라고 있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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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 있다간 생체실험으로 죽겠구나” 사선 넘어온 북한군[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그는 여단 병원에서 도망쳤다. 더 있으면 시체로 나와야 할 것 같았다. 누가 봐도 뼈밖에 안 남은 몰골의 강민국은 9년 넘게 군에서 복무해 이제 제대까지 1년도 채 남지 않은 고참 병사였다. 하지만 남은 1년을 버틸 수 없었다.하루에 3시간밖에 자지 못하고 쉬는 날도 없이 공사판에서 버티던 강 씨는, 열흘 전 배가 너무 아파 병원에 실려 왔다. 하지만 병원에서 딱히 해주는 것은 없었다.엊그제 군의관이 들어왔다. 링거라도 맞아야 한다고 했다. 술병, 맥주병 상관없이 끓는 물에 넣었다가 꺼내면 링거 병이 된다. 강 씨에게 온 병은 마침 투명한 병이었는데, 주사액을 본 강 씨는 경악했다. 병 안에 숱한 부유물들이 둥둥 떠다녔다. 저 이물질들이 혈관에 들어갈 것을 생각하니 끔찍했다.“싫습니다. 놓지 마세요.” 저항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는 강제로 링거를 맞았다. 그날 저녁부터 고열이 심하게 나기 시작했다.다음날 군의관이 다시 들어왔다. 또 링거를 들고 왔다. 그리곤 “오늘은 좀 더 정제를 잘해서 이물질이 거의 없어. 이거라도 맞지 않으면 넌 죽어”라고 말해주었다. 전날 링거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지만, 또 맞았다.“내가 여기에 있다간 생체실험 대상이 돼서 죽겠구나.”강 씨는 2년 전에도 다리에 종기가 생겨 군단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그때 한 달 동안 병원에서 33명의 군인이 죽어 나갔다. 모기에게 물렸다가 부어서 죽은 병사, 자창을 치료 못 해 팅팅 부어 죽은 병사 등등 병명은 각자 달랐지만, 원인은 하나뿐이었다. 항생제가 없기 때문이다. 집에 전화해서 항생제를 살 돈을 전달받은 병사는 장마당에서 항생제를 구입해 맞을 수 있었다. 그때 강 씨도 집에서 보내준 돈으로 항생제를 사서 나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집이 갑자기 가난해져서 돈을 보낼 수 없기 때문이다. 2년 전 숱한 군인들이 병원에서 죽는 것을 본 트라우마가 머릿속에 그대로 있는 상황에서, 이번엔 자신이 죽을 차례가 온 것이다. 병원에서 놔주는 링거가 뭔 진 몰라도, 별 효과가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살려면 도망쳐야 했다. 집에 가봐야 치료할 능력도 되지 않고, 또 탈영병이라고 처벌받을 것이 뻔했다.“그래. 이판사판. 남조선밖엔 갈 곳이 없구나. 가다 죽으나, 있다가 죽으나 뭔 차이가 있겠는가.”그때는 몰랐다. 삼엄한 감시의 눈을 피해 5m 높이의 장벽, 고압선 3개가 포함된 7개의 철조망, 교묘하게 숨겨진 감지선 하나를 넘고, 그리고 또 지뢰밭을 통과해야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2024년 8월, 그는 자유를 향해 떠났다.● 고성으로 가는 길군사분계선으로 가려니 일단 강원도 고성까지 가야 했다. 병원에서 제일 가까운 친척 집에 찾아가 북한 돈 3만 원을 빌렸다. 쌀 3~4㎏을 살 수 있는 액수였다.길에서 남쪽으로 가는 화물자동차를 탔다. 북한엔 돈을 받고 사람을 태워주는 버스 역할을 하는 ‘써비차’들이 있다. 고성까지 2만 원을 내라고 했다. 군인이라고 예외는 없었다. 차를 타도 끝이 아니었다. 고성은 최전방 지역이라 특별 통행증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었다. 화물차에 오른 강 씨는 주변을 관찰했다. 허름한 군복을 입은 대위가 보였다.군복 꼴을 보니 가난한 병종의 군관임이 틀림없었다. 이런 사람은 적은 뇌물에도 넘어간다. 강 씨는 대위에게 다가가 차고 있던 전자시계를 내밀며 “고성에 일 보러 가는데 여행증이 없으니 도와 달라”고 했다. 그 시계 구입가는 북한 돈 2만 원. 쌀 3~4㎏ 정도 살 수 있는 액수다. 군관이 시계를 훑어보더니 머리를 끄덕였다.단속초소가 나타났다. 여행증 검열을 하려 적재함에 오른 군인에게 군관은 자신의 공무 여권을 보여주며 강 씨는 자기가 데리고 가는 부대원이라고 소개했다. 북한에서 군관들이 스폰서 역할을 할 대원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은 너무 일상적인 일이다. 초소 군인은 별 시비를 걸지 않고 지나갔다. 이들도 뇌물 받는 데선 프로들이라, 사람을 보자마자 견적을 낸다. 돈이 나올만한 사람에게 시비를 걸어야지, 가난한 군관을 건드려봐야 뇌물도 없고, 입만 아프다는 것을 안다.무사히 고성에 도착한 강 씨는 장마당부터 찾아갔다. 이제부터 한국까지 가려면 먹을 것이 있어야 했다. 수중에 남은 1만 원으로 북한에서 만든 과자 1㎏과 담배 두 갑을 살 수 있었다. 인근 뒷산에 올라갔다. 밤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움직일 생각이었다.그에겐 고성에서 근무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저기 보이는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남조선이란 정보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도로로는 갈 수가 없으니, 도로가 보이는 산비탈을 타고 내려갈 생각이었다.날이 너무 더워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고, 금방 갈증이 찾아왔다. 하지만 생사가 결정되는 출발선에 서고 보니 육체적 고통 정도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탈영병 잡으러 갑니다.”2024년 8월 17일 밤. 어두워지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로가 보이는 산비탈을 따라 걸으면 될 줄 알았는데, 막상 걸어보니 너무 힘들었다. 금강산은 사실상 돌산이다. 어둠 속에서 바위를 넘고 또 넘으며 가다 보니 도무지 속도가 나지 않았다. 이렇게 가다간 끝이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도로 옆으로 뻗은 철길로 내려왔다. 아직 분계선까진 많이 남아있으니, 여기엔 경비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얼마쯤 걸어갔을 때 갑자기 앞에 무장을 한 군인이 전짓불을 켜며 불쑥 나타났다. 그는 부소대장급인 상사 견장을 단 강 씨를 보더니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었다. 위기의 순간이 되니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어, 나 저기 저 동네에 있는 모 부대 부소대장인데, 저기 앞에 민경 초소에 탈영병 잡으러 가. 우리 소대원의 친구가 민경 초소에 있는데, 거기 놀러 간다고 하고 나타나지 않았어. 낼 판정 받아야 하는데, 너무 급해서 새벽에 지휘관들이 찾으려 나설 수밖에 없어.”새벽에 탈영병을 잡으러 간다는 말은 설득력이 전혀 없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이번엔 군인이 “배낭 좀 봅시다”라고 했다. 배낭 안의 손전등을 봤다면, 새벽에 손전등도 켜지 않고 가는 그를 의심이라도 할 법하지만 이 군인은 처음부터 과자 봉투와 담배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담배 한 갑을 꺼내 주자 입꼬리가 올라갔다.전짓불 때문인지 저기서 한 명이 또 다가왔다. 남은 담배 한 갑을 보더니 또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이때 또 한 명이 나타났다. 이번엔 순찰을 도는 중대장이었다. 강 씨는 배낭을 발로 차 옆으로 밀어놓았다. 손전지가 발견되면 재미없을 것 같았다.중대장이 또 누구냐 물어서 강 씨는 아까 했던 거짓말을 다시 되풀이했다. 갑자기 담배를 받은 군인이 나서서 열심히 강 씨 편을 들어주기 시작했다. 담배를 받았다는 것을 말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중대장이 “어떻게 생긴 병사냐”고 물어서 학교 다닐 때 친구의 얼굴을 떠올리며 열심히 설명했다.중대장이 그의 설명을 들으며 자주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의 의미를 강 씨는 안다. 북한군 부대들엔 워낙 탈영병들이 많아서, 지휘관들에겐 탈영병을 잡으러 다니는 일이 중요한 임무였다. 낮이든 밤이든 상관없이 찾아다녀야 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던지 중대장은 갑자기 강 씨를 동정하기 시작했다. 중대 본부로 끌려갈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중대장은 “아무리 급해도 여긴 밤에 돌아다니면 안 되는 곳”이라며 돌아가라고 했다. 그러면서 “인상착의를 잘 들었으니 혹시 그 탈영병이 여기로 지나가면 잡아서 보내주겠다”라고도 했다. 천운이었다. 강 씨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돌아서서 왔던 길로 다시 걸었다.그들이 안 보이게 되자 그는 이번엔 도로를 건너 반대쪽으로 갔다. 밤에 보니 도로 좌측은 논이어서 거기로 에돌아가면 될 듯했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거기는 논이 아니라 갈대숲이었고, 깊은 수렁이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쯤 갔을까. 갑자기 몸이 쑥 빠지더니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허우적거릴수록 그의 몸은 점점 더 수렁에 들어가 어느새 목까지 잠겼다.“이대로 죽는구나” 싶은 절망 속에서도 마지막 발악이라도 해보려고 열심히 손을 휘저었다. 연꽃인지, 갈대인지 모를 뿌리가 손에 잡혔다. 하나를 잡고 끌어당기니 뽑혔다. 이번엔 여러 대를 손으로 모아 조심조심 끌어당겼다. 더 이상 몸이 빠지지 않았다. 뿌리가 뽑히면 그도 죽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씩, 조금씩 끌어당기기를 한 시간 넘게 반복한 끝에 겨우 몸을 뽑아낼 수 있었다. 수렁에서 나온 그는 다시 도로를 건너 산으로 올라갔다.온몸이 젖어 기진맥진한 그는 산에 올라가 돌 틈에 몸을 숨기고 쓰러졌다. 어차피 곧 날이 밝을 것이니 여기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 밤에 또 움직일 계획이었다. 배낭을 꺼내보니 과자가 죽이 돼 먹을 수 없게 됐다. 이제 식량마저 떨어진 것이다.● 또다시 마주친 잠복초소2024년 8월 18일. 동해에서 해가 떠올랐다. 이제 따뜻한 햇살에 옷과 몸을 말리고 잠을 자면 됐다. 해가 떠오른 지 30분쯤 지나 잠이 들까 했는데 갑자기 말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럽게 살펴보니, 그가 숨은 바위틈 바로 30m 위에 북한군 잠복초소가 있었다. 두 명의 군인이 잠복 초소에서 나오더니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들은 잠복초소에 있는 이불을 꺼내고, 겉옷을 벗어 햇볕에 말리기 시작했다.머리카락이 삐쭉 섰다. 밤에 그가 조금만 더 올라갔다면, 올라오다가 소리만 냈다면, 여기가 아닌 저기에 자리를 잡았다면…. 그가 그 돌 틈에서 주저앉은 것은 천운이었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문제였다. 1분 1초가 긴장의 연속이었다. 잠을 자다가 소리를 낼까 봐 그날 낮엔 하루 종일 쥐 죽은 듯이 돌 틈에 박혀 있었다.그렇게 낮 동안 잠을 자지 못하고 지내다가 다시 밤이 되자 산에서 조심스럽게 내려왔다. 낮에 산 아래를 보니 남쪽으로 연결된 도로가 보였다. 도로는 관리가 되지 않은지 꽤 오래돼, 양옆으로 풀이 키 높이로 무성했다. 도로에 바짝 붙어 풀을 헤치며 가기 시작했다. 밤이지만, 둥근달이 떠서 사방이 잘 보였다.500m쯤 갔을 때, 갑자기 앞에 시꺼먼 물체가 나타나 깜짝 놀랐다. 야간 잠복을 나와 잠을 자는 군인이었다. 9시도 채 되지 않았지만, 낮에 농사니 뭐니 고역을 치르며 기진맥진해 야간 근무에 나오자마자 곯아떨어진 것이 뻔했다. 잠을 자던 군인도 인기척을 듣고 벌떡 일어났다. 여기서 주저하면 끝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견장을 보니 입대한 지 3년쯤 돼 보이는 군인이었다. 20m쯤 떨어져 자는 병사가 한 명 더 보였다. 9년의 ‘짬밥’이 본능적으로 나왔다.“야, 어느 부대야.” 초저녁에 갑자기 웬 상사가 나타나 호통 치니 상대가 움츠러들었다.“누구십니까.” “나 저 앞에 민경 초소 부소대장이야.” 호통을 치면서 상대의 복장을 보니 상의는 얼룩무늬 군복을 입었지만, 모자와 하의는 낡은 누런 군복을 입었다. 이건 복장 위반 사항이다. 게다가 무기도 없다. 근무에 나와 잘 때 누가 훔쳐 갈까 봐 총을 근처에 숨겨두는 병사들이 많다. 상대가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강 씨는 몰아붙였다.“너 근무에 나와 이리 자는 거 분대장이 알아? 그리고 복장이 이게 뭐야? 총은 또 어디 가고. 너희 부대 이거 안 되겠네. 조국은 널 믿고 있는데, 넌 여기서 잠이 와?”풀이 죽은 병사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잘못했습니다. 그런데 부소대장 동지, 여긴 밤에 못 갑니다. 돌아가십시오.”강 씨는 병사를 한 번 더 째려보고 뒤로 돌아 걸었다. 떨어져 자고 있던 한 명은 그때까지 일어나지 않고 계속 잠을 자고 있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얼마쯤 돌아오다가 다시 산에 올랐다.병원에서 떠날 때부터 강 씨는 하늘을 향해 수없이 기도했다. 종교가 뭔지 전혀 모르지만, 절망적인 상황이 되니 하늘을 보며 “살려 달라. 무사히 남조선에 가게 해 달라”는 기도가 계속 나왔다. 어쩌면 그 기도가 통했을까. 밤에 두 번 단속됐는데 모두 빠져나오는 기적이 일어났다. 산에 올라가니 드디어 멀리 분계선의 철책 불빛이 보였다. 여기서 하루 더 머물며 정찰해야 하겠다고 판단했다. ● 장벽과 고압 철조망2024년 8월 19일. 몸을 숨기고 산 아래 도로를 감시했다. 하루 종일 도로로 차 한 대가 지나갔을 뿐 조용했다. 멀리 해변에서 시작돼 산을 타고 구불구불 올라간 콘크리트 장벽이 보였다. 장벽을 어떻게 넘을지 생각해 봤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장벽이 있다고 돌아갈 순 없었다. 어차피 앞을 막아서는 것은 다 넘어가리라 결심하고 떠난 몸이 아닌가.어둠이 깔리자, 그는 낮에 봐뒀던 코스를 타고 다시 움직였다. 한참을 가니 드디어 장벽이 나타났다. 막상 앞에 가보니 높이가 5m는 돼 보였다. 쌓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공사 잔해들이 주변에 널려있었다. 도무지 넘을 방법이 없어 장벽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한참 내려갔는데, 장벽 아래에 물이 빠지도록 만든 배수구가 보였다. 배수구에 들어가 보니 쇠살창이 설치돼 있었다. 혹시나 해서 시도했는데, 머리가 살창 사이로 들어갔다. 머리가 들어가면 몸도 빠질 수 있을 것이다.한참을 낑낑거리며 드디어 쇠살창을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그가 당시 몸에 뼈만 남아 45㎏도 채 되지 않는 상태가 가능한 일이었다. 조금만 살이 쪄도 불가능했을 일이다. 다시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배수구를 지나 장벽의 반대쪽에 도착하니 두 사람 정도 나란히 걸을 정도 너비의 순찰로가 나오고, 순찰로 옆에 고압 철조망이 두 개 있었다. 1만 볼트의 전기가 흐른다고 해서 악명이 자자한 ‘만선’ 철조망이었다. 북에서 분계선에 전기철조망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군인은 없는지라, 강 씨도 떠날 때 이미 각오했던 일이다.주변에서 나뭇가지를 찾아 철조망에 대봤더니, 전압이 어찌나 센지 마른 나뭇가지를 통해서도 손바닥에 찌릿하고 전기가 흘렀다. 땅에서 맨 아래 전기선까지 높이는 10㎝ 정도였다. 군에서 배운 대로 강 씨는 나뭇가지 두 개를 이용해 전기선을 20㎝ 정도 들어 올린 뒤, 그 아래 땅을 파고 조심스럽게 통과했다. 1.5m 앞에 있는 두 번째 철조망도 같은 방법으로 통과했다. 철조망 사이엔 모래를 깔아놓은 ‘흔적선’이 있었다. 발각되면 안 되기 때문에 첫 번째 철조망을 통과한 뒤 구멍을 메우고, 지나온 흔적도 손으로 잘 다듬어 놓고, 두 번째 철조망 구멍도 또 메웠다.전기철조망 두 개를 통과한 뒤 마지막 철책 지역까지 향해 냅다 달렸다. 전기철조망과 민경이 관리하는 최후의 철책까지 거리는 4㎞ 정도 떨어져 있다. 마지막 철책은 전등들이 켜져 있어 불빛을 보며 가면 됐다. 하지만 중간 지역은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곳이라 그의 키를 넘는 나무와 풀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동남아 열대 우림과 마찬가지인 곳이었다.전등이 보이지 않아서 한참 가다가 나무가 나타나면 타고 올라가 방향을 재확인했다. 나무에 올라가 확인하는 것을 열 번쯤 반복하니 드디어 철책에 도착할 수 있었다.수풀을 헤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은 목이 마른 것이었다. 8월의 고온 속에서 하루 넘게 물을 먹지 못했다. 가끔 물웅덩이도 나타났다. 하지만 물이 휘발유가 덮인 것처럼 번들번들했다. 침을 뱉어봤더니 퍼지지 않았다. 그런 물은 썩은 물이라 마실 수 없었다.● 5중 철조망과 지뢰밭그가 도착한 마지막 철책 지역은 약 1m 간격으로 철조망이 다섯 겹 설치돼 있었다. 전등도 많이 달아서 주변이 환했다. 일정한 간격으로 약 5m 높이의 감시탑이 있었는데, 거기에 군인이 올라가 아래를 감시했다.강 씨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감시탑으로 기어갔다. 감시탑 바로 아래엔 그늘이 져 있었다. 밝은 불빛을 보는 군인은 발아래 어두운 지역을 잘 보지 못할 것이라 타산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격언에 목숨을 맡겨 보기로 한 것이다.감시탑 위의 군인은 한국 노래를 흥얼흥얼 부르고 있었다. 강 씨도 그 노래를 안다.“친구여. 꿈속에서 만날까~” 노랫소리가 높아지면 강 씨도 슬금슬금 움직였다.드디어 첫 번째 철조망에 도착했다. 여기 철조망은 전기철조망보다 더 빡빡했다. 땅과 마지막 선의 높이는 불과 5㎝ 정도였다. 나무꼬챙이를 받쳐 놓고 손에 피가 나도록 땅을 팠다. 통과했다. 지나온 땅은 손으로 흔적이 남지 않게 다시 고르게 했다. 두 번째 철조망도 같은 방법으로 통과했다.“괜스레 힘든 날, 겁 없이 전화해.” 두서없이 흘러나오던 노랫소리가 뚝 끊긴다. 강 씨도 숨을 죽이고 엎드려 있었다. 이번엔 중얼중얼~. 그러다가 콧노래. 다시 한국 노래….세 번째 철조망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번 철조망은 땅을 팔 수가 없었다. 땅이 있어야 할 곳에 유리와 못을 잔뜩 박은 콘크리트 블록들이 깔려있었다.지금까지 수많은 위기를 헤치고 왔지만, 이번은 도무지 통과할 길이 보이지 않았다. 돌아갈 수도 없었다. 철조망 중간에 갇힌 강 씨는 “여기서 죽는구나” 생각했다.지금 생각해 봐도, 또 앞으로 기다릴 삶을 떠올려도, 그때보다 더 절망스러운 일은 없을 듯하다. 그는 미친 듯이 땅을 팠다. 블록이 얼마나 깊은지는 몰라도 그래도 마지막 몸부림이라도 쳐야 했다.기적은 포기하지 않는 자에게 일어나는 법이다. 블록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블록은 통으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가로·세로·높이가 각각 15㎝·40㎝·50㎝ 되는 블록을 땅에 박은 것이었다.조심스럽게 블록을 겨우 빼냈는데, 교묘한 복병이 숨겨져 있었다. 블록 바로 앞에 땅 위 5㎝ 높이에 눈에 잘 띄지 않는 실선이 설치돼 있었다. 자칫 발견하지 못했을 수 있었지만 천만다행으로 그의 눈에 보였다.블록을 뽑은 구멍으로 빠져나가면 실선을 건드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선이 전기선인지도 알 수 없어 뚫어지게 관찰하니 알루미늄선이 아니라 철선이었다. 그러면 전기선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걸 건드리면 감시탑에 신호가 전달될 것이 뻔했다.강 씨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방법을 찾아냈다. 주변에 있는 나뭇가지들을 모아 철선을 두껍게 칭칭 감았다. 건드려도 흔들리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성공했다.철선을 넘어 네 번째 철조망에 도착했다. 이 철조망엔 전기가 흐르고 있었다. 앞서 고압 철조망을 두 개나 넘은 경험이 있기에, 이것도 나뭇가지로 들어 올리고 땅을 파서 넘었다.다섯 번째 철조망은 2.5m의 가시철조망이었는데, 위에 원형 철조망이 타래로 감겨 있었다. 빠져나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위로 기어 통과하려고 철조망을 쥐고 힘을 주는 순간 삑~하는 소리가 났다. 철조망을 고정한 기둥과 쇠줄이 마찰하면서 나는 소리였다.다행히 힘을 많이 주지 않았던 데다, 한국 노래에 심취한 병사의 취향 덕분에 발각되지 않았다. 그나마 제일 구멍이 큰 틈을 찾아 몸을 밀어 넣었다. 장벽의 쇠살창도 여윈 몸 덕분에 넘었는데, 이것도 머리만 들어가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성공했다. 대신 철조망의 가시에 군복과 살이 수없이 뜯겼다.마침내 그는 보초병의 발밑에서 다섯 개의 철조망을 모두 벗어났다. 아직도 한국 노래를 흥얼거리는 보초병을 향해 속으로 외쳤다.“그래, 너는 여기서 한국 노래나 불러라. 난 한국에 간다.”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9번의 ‘데스게임’을 넘어온 그에게 남은 마지막 미션은 지뢰밭 통과였다.(23일 공개될 2부에서 이어집니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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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찢어진 청바지 입고 싶어 탈북한 개마고원 소녀, 패션업체 대표가 되다[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개마고원에서 중학생 소녀는 매직 머리에 후드티,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다녔다. 모두 북한 당국이 단속하는 차림새였다.마을 사람들은 “쟤는 ‘황색 바람’에 젖어 버린 이상한 애야. 저런 날라리와 같이 놀지 마”라며 자식들을 단속했다. 학교에서 아무리 비판해도 소용이 없었다. 당 간부였던 부친은 딸 교육을 잘 못했다는 이유로 반성문을 수시로 써야 했다.3년에 한 벌씩 주는 교복은 받을 때는 훌렁했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작아졌다. 소녀는 집에서 혼자 교복을 줄였다 늘였다 했다. 친구들과 몰래 한국이나 외국 드라마를 볼 때면 늘 패션에 눈이 갔다. “우리도 저렇게 입고 살게 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그로부터 20년 뒤, 그 소녀는 자신이 직접 디자인해 만든 옷을 전 세계에 수출하고 있다. 어쩌면 패션을 위해 태어났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이 꿈을 완성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북에서 태어난 운명을 거스르고 탈북해 서울에 정착해서 빈주먹으로 일어서야 했다.아직 가야 할 길은 멀다. 그래도 과거와는 달리 인생의 깨달음을 얻었다. 열심히 가다 보면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린다는 것을….● 개마고원의 청바지녀강지현은 1990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평양에 대한 기억은 없다. 그가 4세 때 평양에서 상하수도 관련 기관 간부였던 할아버지가 뭔 잘못을 했는지 하루아침에 가족과 함께 함북 청진으로 쫓겨났다. 그래도 시골이 아닌 큰 도시로 간 것으로 보아 정치 범죄는 아닌 듯싶다.아버지는 할아버지 잘못을 속죄한다는 의미로 백두산 건설 돌격대에 자원해 3년 동안 일했다. 당국의 인정을 받은 것인지, 이후엔 양강도 백암군 임업사업소 당 간부로 임명됐다. 개마고원의 울창한 산림과 깨끗한 강이 소녀의 놀이터였다.그가 패션에 눈을 뜬 것은 11세 때 할아버지와 고모들이 사는 청진으로 가면서부터였다. 딸이 산골에서 자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부친은 그를 청진으로 유학 보냈다.큰 무역회사 부기원(경리)으로 일하는 고모들은 부유하게 살고 있었다. 고모들은 당시 청진에 대량으로 들어오는 일본 중고 옷을 넘겨받아 장마당에 팔았다. 강 씨의 고종사촌 언니들은 중고 옷 중에 마음에 드는 옷들을 골라 입었다. 물론 북한 당국이 통제하는 패션들이었다.사촌 언니들이 크면 그 옷들은 자연스럽게 강 씨에게 전달됐다. 어느 순간 강 씨도 언니들처럼 옷을 골라 입기 시작했다. 몰래 보는 한국 드라마에서 나오는 옷들을 눈여겨봤다가 비슷한 것이 나오면 골라냈다.북한 당국의 옷차림 통제는 시기별로 들쑥날쑥했다. 죽일 것처럼 통제하다가, 아예 손을 놓고 있기도 했다. 강 씨가 청진에 살던 때는 통제가 약해진 때였다. 학교에 입고 가서는 안 됐지만, 10대 초반 소녀가 방과후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거리를 다녀도 제지하지 않았다.그렇게 3년 후 부친이 와서 딸을 데리고 개마고원으로 돌아갔다. 촌 동네에선 아무리 조신하게 입는다고 입어도 사람들이 손가락질했다. 마을 사람들은 단체복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그렇지만 강 씨의 끼는 죽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멋있게 보일까’ 고민하면서 머리를 고데기로 펴거나 염색하기도 했다. 외부 세계를 모르는 개마고원 주민들과, 많은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외부 문물을 접한 강 씨는, 아무래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스스로 멋 내기 좋아하고 잘 노는 학생이라고 생각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가 무슨 짓을 하건 이상하다고 했다. 모두가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자유분방하게 사는 그를 부러워하는 학생도 주변에 적지 않았다.● “석 달만 중국에 살고 싶어”2007년 중학교를 졸업했을 때 부친은 딸을 청진에 있는 3년제 경제전문대학 부기학과에 다니게 했다. 경리 일을 하며 잘사는 고모들처럼 살길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주산으로 계산하는 일은 도무지 적성에 맞지 않았다. 한 학기만 다니고 개마고원으로 돌아왔다.그때쯤 북한 정책에 변화가 있었다. 우물 안 개구리 신세인 북한 과학기술 수준을 높일 생각이었는지, 아니면 후계자 김정은에게 젊은 인재를 많이 남겨 주고 싶어서였는지, 북한에서 학비를 부담할 수 있는 고위 계층 자녀의 해외 유학을 허용한 것이다. 부친은 이 기회를 활용해 강 씨를 중국에 유학 보내기로 작정했다. 부친은 평양을 오가며 열심히 선을 찾아 로비했고 뇌물도 적잖게 썼다. 강 씨는 해외 유학생 선발 시험을 6번이나 봤지만, 어찌 된 일인지 모두 떨어졌다. 뇌물 먹은 간부는 강 씨가 불합격하면 뇌물을 다시 돌려줬다.유학 준비를 하면서 지역 출판물 보급소에 취직했다. 중앙에서 내려온 신문이나 책을 작은 도서관들에 나눠주는 일이었다. 중앙에선 북한 영화나 드라마, 음악을 넣은 CD도 내려왔는데,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CD 배포를 담당한 그에게 잘 보이려는 사람도 늘어났다.하지만 북한에서 보급하는 CD는 한국이나 중국 영화를 많이 봐서 눈이 높아진 강 씨 성에 차지 않았다. 몸은 북한에 있었지만 어느새 머리는 바깥세상에 살고 있었다. 바야흐로 18세. 한창 꿈도 많고 보고 싶은 것도 많은 나이였다.어느 날 강 씨는 잘 알고 지내는 3세 위 동네 오빠에게 속을 터놓았다. 그 오빠는 중국에 잘사는 친척들이 있었고, 합법적인 여행증을 받아 중국을 여러 번 다녀왔다.“오빠, 우리 부모님 모르게 날 좀 중국에 데려다 주면 안 돼? 딱 석 달만 구경하고 싶어.”“정말 가 보고 싶어? 정 원하면 내가 구경시켜 줄게.”그렇게 둘은 중국에 같이 가기로 약속했다. 여기에 오빠 친구까지 합세했다.압록강이 강이 꽁꽁 얼어붙은 2008년 12월, 21세 두 청년과 강 씨는 길을 나섰다. 집에는 청진 고모네 집에서 석 달 정도 놀고 오겠다고 말해 승낙을 받았다.그 오빠는 중국을 드나드는 통로가 있었다. 셋은 차를 얻어 타고 삼지연으로 갔다. 경비대에게 돈을 주고 강을 넘었다. 오빠가 전화를 하니 연변에 사는 오빠 이모가 차를 끌고 마중 나왔다. 남들에 비하면 너무나 쉬운 탈북이었다. ● 중국 대학에 입학하다오빠 이모라는 사람은 중국에서 교사였는데, 집에 가 보니 매우 잘 살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미국과 한국 교회에서 돈을 지원받아 북한 선교 활동을 하고 있었다.중국에서 지낸 한 달은 꿈만 같았다. 여기저기 구경 다니다가 집에 들어가선 한국 드라마를 원 없이 봤다.백화점에는 드라마에서 본 옷들이 다 있었다. 중국 아가씨들은 한겨울에도 코트 안에 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녔다. 어떤 옷을 입든 통제하는 사람은 없었다. 백화점에 가 보고 강 씨는 시쳇말로 눈이 돌아갔다. 처음엔 한두 달 놀다가 개마고원 집에 가려고 했는데, 여기서 살고 싶은 생각이 점점 커졌다. 그런 강 씨의 심경 변화를 눈여겨보던 오빠 이모가 한 달쯤 뒤 제안했다.“북에 다시 돌아갈래, 아니면 중국에서 대학 다닐래?”가뜩이나 집에 돌아가기 싫었는데, 북한에서 여섯 번이나 떨어졌던 대학 생활을 중국에서 하게 해 준다니 꿈만 같았다.2009년 1월 강 씨는 기차를 타고 하얼빈으로 갔다. ‘국적이 없는’ 그가 중국 대학에 정식 입학할 순 없었다. 대신 50대 초반 한국인 부부가 운영하는 3년제 대학 ‘할빈아청대’에 들어갔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선교 목적으로 설립한 어학원 성격의 학교 아닌가 싶다. 한국 기독교계에 발이 넓은 그 이모 덕분에 탈북민 신분으로 학교 입학이 가능했던 것이다. 학교는 하얼빈 도심에서 버스를 타고 두 시간 정도 떨어진 변두리 도시에 있었다. 강 씨는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그가 입학한 중국어학과 같은 반에는 한국에서 온 청년도 넷이나 있었다. 3명은 강 씨보다 나이가 많았고 부산에서 왔다는 한 명은 어렸다. 강 씨는 한국에 온 뒤 “나, 부산 사나이야”를 입에 달고 살던 2세 어린 그 청년을 찾아봤지만 허사였다.‘한국 오빠들’은 강 씨에게 바람을 불어넣었다.“제대로 된 신분도 없는데, 대학에 다닐 거면 한국에서 다녀야지.”4개월 동안 중국어를 공부하고 방학을 맞았다. 3개월만 하겠다던 중국 살이가 신선놀음에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른다고 어느새 반년이 넘었다. 집에선 딸이 실종됐다고 난리가 났을 것이고, 돌아가면 감옥행이었다. 이렇게 된 것, 한국에 가고 싶었다.그 이모에게 전화해 “한국으로 보내 주시면 안 돼요”라고 말했다. 이모는 이번에도 대책이 있었다. 하얼빈 어느 교회에서 경기 부천에서 온 한국인 선교사를 만나 보라며 전화번호를 주었다. 이 선교사는 사람을 더 모아서 8월에 한국으로 한 팀을 보낼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7명이 모였다.● “나를 왜 미워하지?”한국에 도착하는 과정도 순탄했다. 그해 8월 말 출발해 중국 남부 지방을 거쳐 라오스로 갔고, 거기서 태국으로 이동했다. 기차와 버스, 승용차, 배를 번갈아 타며 방콕에 도착한 뒤 이민국 감옥에 들어갔다.당시는 한 해에 탈북민이 3000명 가까웠다. 감옥에 들어간 강 씨는 탈북민이 그렇게 많은 걸 보고 깜짝 놀랐다. 한 감방에 여성 120명이 수감돼 있었다.19세의 여리여리한 그를 보고 먼저 온 ‘기가 세 보이는’ 언니들이 “넌 어떻게 왔냐”고 물었다. 대학에 다니다가 왔다고 하니 모두 표정이 바뀌었다.“우리가 어떤 개고생을 당하며 여기에 왔는데, 이렇게 편하게 오는 애도 있네.”텃세인지 질투인지 모를 구박과 따돌림이 시작됐다. 그의 자리는 화장실 옆이었는데, 많은 사람이 시도 때도 없이 화장실에 드나들어 잠을 잘 수도 없었다. 기름진 음식은 입에 맞지 않았다. 점점 야위어 갔고 기도 팍 죽었다. 살면서 처음 해 보는 고생이었다.그렇게 한 달을 버티니 드디어 출발 순번이 돌아왔다. 공항에 갔는데 이번엔 어려 보이는 한국인 인솔자가 탈북민들에게 반말로 고래고래 폭언을 퍼부었다. “야, 너네 한국에 가지 않을 거야? 조용히 해.”그 사람을 떠올리면 강 씨는 지금도 치가 떨린다.“왜 그 자식은 우릴 사람 취급하지 않았던 걸까요. 우리가 죄인도 아닌데 말이죠.”‘내가 지금 제대로 된 나라에 가는 건지’ 싶어 가슴이 벌렁벌렁해서 어떻게 비행기에 탔고, 어떻게 공항에 내렸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2009년 11월 2일 새벽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추운 날이었다. 그와 탈북민들은 버스에 타고 어디론가 가서 건강검진부터 받았다. 그리고 다시 버스를 타고 조사기관에 들어갔다.안 좋았던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조사받으며 점차 바뀌었다. 시설도 좋고 방도 따뜻했고 밥도 맛있었다.하나원에서 태국에서 같이 있던 여성들과 생활하며 다시 고생이 시작됐다. 중국에서 대학 다니다가 온 것이 왜 그리 싫어할 일인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도 감방은 아니었기에 잠을 못 자는 일은 없었다.하나원을 졸업하기 전 임대주택 배정이 시작됐다. 그의 기수는 200명이 넘었는데 서울 임대주택은 16개만 나왔다. 절반 이상이 서울에 가고 싶어 하니 추첨은 피할 수 없었다.강 씨는 새벽기도 때마다 서울에 가게 해 달라고 빌었다. 기도가 하늘에 닿았는지 그 16명 중에 뽑혔다. ‘서울’을 뽑은 순간 ‘얘들이 나를 더 미워하겠네’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서울을 뽑은 16명이 어느 구에 갈지를 놓고 추첨했다. 성동구 금호동 임대주택이 하나 있었는데, 다들 성동구란 이름이 생소해서였는지 선택하지 않았다. 강 씨는 자연스럽게 그 임대주택으로 가게 됐다. 막상 가 보니 노원구나 강서구보다 입지가 좋은 곳이었다. 엎어져도 떡 함지에 엎어진 격이었다.● 날개를 만드는 시간2010년 4월 8일, 12평 임대주택에서 강 씨의 한국 생활이 시작됐다. 첫 목표는 다른 젊은 탈북민들과 다름없었다. 지금이 대학에 갈 적기라고 다들 생각했다.학원에 다니며 대학 입시를 준비했다. 그의 목표는 분명했다. 한국까지 왔는데 패션을 전공하고 싶었다. 하지만 탈북민이라고 좋은 대학에 그냥 입학시켜 줄 리 없었다. 특히 영어가 문제였다. 여기저기 알아보다 2년제 한국폴리텍대학 패션디자인학과로 목표를 정했다. 실기 위주로 학생을 받아서 손재주 좋은 강 씨에겐 유리했다.그렇게 들어간 폴리텍대 공부는 쉽지 않았다. 1시간 넘게 걸려 대학에 도착하면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수업이 이어졌다. 대학 4년 과정을 2년에 몰아 들어야 했기에 코피 나도록 공부해야 했다. 규율이 엄격한 고등학교에 다니는 듯했다.“지금 돌아보면 그때를 잘 이겨냈기에 오늘의 제가 있는 겁니다. 독하게 공부해서 학점도 좋게 받았어요. 그렇게 단련하고 나니 다른 것들은 쉬워 보이더군요.”폴리텍대를 졸업하고 이론에 대한 욕구가 더 커졌다. 4년제 대학에 편입학하려고 하니 이번에도 영어가 문제였다. 영어 공부를 시작했고 3개월 동안 필리핀 어학 연수도 다녀왔다. 이런 준비 끝에 2014년 한양대 의류학과에 편입했다.한양대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말투도 서울말씨여서 과 동기들은 그가 북에서 온 줄 몰랐다. 누가 물어보면 강원도에서 왔다고 했다. 한양대에서의 2년은 폴리텍대보다 수월했다.2016년 8월 한양대를 졸업했다. 패션에 빠져 있던 개마고원 소녀는 이제 서울에서 새롭게 비상할 준비를 마쳤다. 물론 아직은 홀로 날 순 없었다.그의 첫 직장은 모델 양성학원 겸 패션쇼 기획사인 ‘더모델즈’였다. 대표 정소미 감독은 서울 컬렉션을 비롯해 패션쇼를 수백 회 연출한 국내 대표적인 패션쇼 전문 기획 및 연출자 출신이었다. 정 감독 밑에서 강 씨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들이 참가하는 서울패션위크 ‘서울컬렉션’ 실무를 두 번 맡았다.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2020년 서울패션위크는 20주년이어서 120개 브랜드가 참여해 55차례 패션쇼를 선보였다. 국내 정상급 디자이너가 펼치는 ‘서울컬렉션’, 신진 디자이너를 소개하는 ‘제너레이션 넥스트’, 런던 패션위크와 협력해 열리는 ‘해외 교류 패션쇼’, 14개 대학이 참여하는 ‘대학생 우수 작품 패션쇼’ 등 다양한 쇼가 열렸다. 국내외 바이어가 500명 이상 참여해 일대일 비즈니스 미팅도 진행했다. 일이 힘든 만큼 많이 배웠다. 그만큼 성장한 시간이었다.● 스타트업 대표가 되다일을 배우면서도 자신만의 브랜드를 갖고 싶은 욕구는 커져만 갔다. 시간 나는 대로 틈새시장을 연구했다. 2017년 온라인 쇼핑몰을 창업했지만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자신만의 스토리가 있어야 했다.오랜 준비를 거쳐 2020년 5월 더모델즈를 퇴사하고 곧바로 스타트업 ‘새샘’을 만들고 패션 브랜드 ‘아이스토리’를 내놨다. 자신이 직접 인터뷰한 탈북민들 스토리를 바탕으로 티셔츠를 제작하는 것이었다. 아산나눔재단 글로벌 스타트업 프로그램에 당선돼 받은 300만 원이 종잣돈이 됐다. 첫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국내보다 미국 독일 영국 네덜란드 같은 해외에서 구매 주문이 몰렸다. 많이 팔렸지만 시간이 갈수록 수익률은 떨어졌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국제 택배비가 계속 오른 탓이었다.아이스토리 하나에만 의지해선 안 되겠다 싶어 새로운 사업 모델을 구상했다. 원단 중개 플랫폼 ‘아이페브릭’을 개발했다. 회사를 운영해 보니 패션만 배웠지 사업에 대해선 잘 모르는다는 한계를 느끼게 됐다. 지난해 고려대 첨단기술비지니스학과 대학원 과정에 등록해 창업학 석사에 도전하고 있다.이 같은 노력 끝에 정부 예비창업 패키지에 뽑혔고, 올 5월에는 50 대 1 경쟁률을 뚫고 ‘도약 패키지’에 당선돼 지원금을 받았다. 스타트업 ‘정석 코스’를 밟으며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스타트업 분야에서 투자를 받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사업계획서를 잘 써서 타당성을 설득하고, 발표도 잘해야 한다. 신용도 인정을 받아야 한다.강 씨는 이 분야 전문가로 성장했다. 최근 5년 동안 서울시 창업경진대회, 서울시 테스트베드 데모데이, 아산나눔재단 등 여러 사업 발표 대회에서 다섯 차례 상을 받았다. 예비 창업자 멘토로도 활약하고 있다. 2022년부터 컨설팅해 준 스타트업이 6개가 넘는다. 지난해 한국벤처기업회 멘토로 임명됐고 범부처 IRIS 평가위원, 통일부 심사역 직함도 얻었다. “한국 청년들에게 브랜딩은 어떻게 하고 자금은 어떻게 조달할지, 특허는 어떻게 등록하며 사업계획서와 발표 자료는 어떻게 만드는지 컨설팅해 주고 심사도 합니다. 문뜩문뜩 개마고원 탈북민 강지현이 정말 잘 살아왔고, 지금도 잘 살고 있구나 싶어 뿌듯합니다.”● 후드티에 찢어진 청바지지난달 말부터 이달 초까지 강 씨는 서울 강남구 ARTE22 갤러리에서 자신이 그린 그림들로 ‘다결 랩소디’라는 전시회를 열었다. 2021년부터 전시회만 여러 차례 열었다.“패션과 그림은 동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똑같이 영감에서 출발하거든요. 탈북민 스토리를 패션 브랜드화하는 작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리게 됐습니다. 2021년에 정식 데뷔해 활동하고 있습니다.”그의 그림들은 색채에 대한 예민한 통찰이 돋보인다. 밝고 강렬하며, 때로는 눈부시게 충돌한다. 강 씨는 ‘색의 언어’를 통해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흘러간 기억을 붙잡기보다, 그 기억이 남긴 감정을 천천히 겹쳐 쌓는다. 그에게 색은 마음의 깊이를 말하는 도구이며, 주름은 말하지 못한 시간을 드러낸다.스타트업 대표에 화가 생활까지 하지만, 여전히 배운다. 여전히 젊고 에너지가 넘친다.“얼마 전 SK텔레콤 오픈이노베이션 프로그램에 선정됐어요. 선정된 15개 기업 대표들이 엠티를 하는데 저만 여자인 거예요. 다들 저보고 ‘대표님이세요’라고 묻더군요. 지금까지 고생을 많이 했는데 그렇게 젊게 봐 주시는 걸 보면 저에게는 미래가 많이 남은 거겠죠?”삶의 무게는 여전히 버겁다. 힘들 때마다 그는 내면의 강지현을 격려한다.“지금까지 잘 헤쳐 왔고, 지금도 잘하고 있어. 힘내. 이렇게 스스로 속삭이죠. 지난 1년 동안 배운 것이 한국 와서 10년 배운 것보다 더 많은 것 같아요. 그런데 과거의 10년이 없었다면, 오늘의 1년도 없었을 겁니다. 사람은 축적하며 크는 것이고, 저는 지금도 축적하는 중입니다.”그의 꿈은 스타트업을 성공시킨 뒤 자신의 경험과 지혜를 나눠 주는 창업학 교수가 되는 것이다. 통일 되면 북한 개발을 위한 스타트업 센터도 세우고 싶다.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싶어 고향을 떠났던 강지현에겐 평양에서 후드티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창업을 가르치는 날이 올 것 같다. 그는 아직 젊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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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北폭풍군단의 눈물…굶주린 특수부대의 실상[주성하의 ‘北토크’]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김정은이 이달 1일 인민군 제11군단 지휘부를 시찰했습니다. 언제 가나 궁금했는데, 드디어 갔습니다. 북한이 8월 러시아 파병 사실을 공개하고, 전사자들을 내세운 선전전을 시작했을 때부터 김정은의 11군단 방문은 예고돼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러시아 파병에서 워낙 많이 죽어 사기가 크게 떨어져 있으니 직접 방문해 격려해야 했을 겁니다.이번에 러시아에 파병된 부대는 11군단 산하의 4개 저격병여단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저격병여단 4개를 통째로 보낸 것은 아닙니다. 11군단에서 군수공장 지역, 농촌, 탄광 등 전장에서 죽어도 크게 반발하지 않을 지역 출신의 군인들을 선발했고, 일반 부대에서도 비슷한 조건으로 모집했습니다. 이렇게 여기저기에서 모은 병사들을 저격병여단 편제에 포함한 뒤 특수작전훈련기지라는 곳에서 손발을 맞추는 훈련을 시켜 파병했습니다. 물론 파병 부대의 주축은 11군단 저격병여단 병사들과 군관들이었습니다.● 일당백에 세뇌된 북한군북한의 러시아 파병 규모는 4개 여단 편제의 총 1만2000명 정도입니다. 국정원은 올해 9월 “우방(우크라이나)과 종합 검토한 결과, 현재 사망자는 2000여명으로 추산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군의 전사자·부상자 비율은 1:3입니다. 즉 1명이 사망할 때 3명의 부상자가 발생한다는 것인데, 이를 북한군에 대입하면 2000명이 전사했을 때 600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북한 특수작전군은 12월 14일부터 1월 14일까지 딱 한 달 동안 전투에 투입됐는데, 1만2000명 중 8000여명의 사상자가 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상자가 3분의 2가 발생하면 이는 전멸된 부대로 간주합니다.파병된 북한 군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겁니다. 우물 안 개구리로 살면서 현대전의 ‘현’ 자도 들어보지 못했고, 그래서 자신들이 세계 최강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전멸 수준의 피해를 보았으니 말입니다. 외부에선 북한군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해 최신 전쟁 기술을 배워갔다고 분석하는데, 그것보다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할 것은 북한군이 받았을 정신적 충격입니다. 그 충격들은 살아서 돌아간 군인들을 통해 북한군에 전염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물론 특수부대 군인들이 10년 동안 열심히 훈련했으니, 어느 정도의 전투력은 발휘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들이 상대한 우크라이나군은 평균 나이가 45세 정도이고, 민간에서 수시로 모집해 온 사람들이라 전투 기술도 별로 높지 않았을 것이고, 죽음에 대한 공포도 컸을 겁니다. 그에 비하면 17세~27세 사이의 북한군 병사들은 훨씬 잘 뛰어다녔을 것이고, 훨씬 용감했을 것이며, 총도 잘 쐈을 겁니다. 두 병력이 백병전을 벌이면 북한군이 유리했을지 모르겠지만, 문제는 드론이었습니다. 북한에선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드론이란 것에 발각돼, 적이 어디 있는지도 모른 채 뛰어 다니다가 무리로 죽어 나갔으니 얼마나 허망했겠습니까.반세기 넘도록 북한군 정신교육의 핵심은 ‘일당백’입니다. 한 명이 백 명을 당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김정은을 비롯한 북한 지도부도 “우리 군은 천하무적의 일당백 강군”이라고 세뇌시켰습니다. 외부 세계를 전혀 알 수 없는 군인들은 그 말에 세뇌될 수밖에 없습니다.“조선인민군은 천하무적의 강군이다. 어떤 놈들이 감히 우리에게 덤벼!” 이렇게 말입니다.● 제일 큰 충격을 받은 폭풍군단그중에서도 자신들이 북한군에서도 가장 최정예임을 아는 특수부대 군인들은 더욱 자신감이 충만했을 겁니다. 우크라이나전 파병 이전까지만 해도 11군단 군인들은 자신들이 전장에 투입되면 겁쟁이 미군이나 남조선 괴뢰군 최소 10명은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겁니다.그런데 막상 전장에 나가니 적은 보이지 않고, 있다는 말도 들어본 적이 없는 자폭 드론들이 날아다니며 공격해 왔습니다. 밤에 몰래 습격한다고 뛰어다녔는데, 하늘에서 적외선 열감지기로 손바닥처럼 다 보고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벌판에서 노출되면 10년 동안 익힌 전투 기술이 전혀 필요 없었습니다. 그렇게 허둥지둥 도망치다가 드론에 당하는 북한 군인들의 모습을 담은 영상은 많이 공개됐습니다. 살아서 돌아간 병사들은 이렇게 말하겠죠.“우리가 10년 벽돌까기를 연습했는데, 실제 전투에선 그런 게 전혀 쓸모가 없더라. 드론에 발각되지 않고 이동하는 연습이 제일 필요하더라. 무기와 탄약에 방탄복과 철모까지 메고 뛰어다니는데, 우리 체격으론 감당이 안 되더라. 역시 비계 먹고 사는 러시아 놈들이 우리보다 훨씬 힘이 좋은 걸 보니 잘 먹고 체격 좋은 게 제일 중요하더라.”현대전이 무엇인지, 얼마나 무서운지에 대한 공포가 제일 먼저 전염될 부대는 당연히 11군단일 수밖에 없습니다.1년 전까지 한솥밥을 먹던 전우들이 시체로 돌아오고, 불구가 돼 전역하게 됐으니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11군단은 저격병여단 3개와 경보병여단 4개, 항공육전병여단 3개, 도합 10개의 여단으로 구성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중 핵심부대는 저격병여단입니다. 경보병부대보단 저격부대가 훨씬 훈련 강도가 높고, 공중 침투에 특화됐다는 항공육전여단은 연료가 없어 낙하 훈련을 해보지 못한 병사들이 태반입니다. 한 개 여단 편제가 3000명 정도이니, 10개 여단이 소속된 11군단 전체 병력은 지휘부나 후방 보장 병력까지 다 해봐야 기껏 4만 명입니다. 그런데 이 중 가장 믿을 수 있는 부대들에서 8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니 당연히 충격이 크겠죠.그러니 김정은은 러시아에 파병됐다가 전사했던 군인들에게 최고의 보상을 선언해야 하고, 또 직접 부대를 찾아가 살아남은 병력을 격려해야 합니다. 이번 한 번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도 자주 방문해 계속 사기를 높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폭풍강도’로 불리는 폭풍군단이번 방문에서도 김정은은 11군단을 높이 치켜세웠습니다. ‘인민군대의 영웅성의 상징’ ‘우리 군대의 고귀한 명성과 불멸할 명함을 주추로 받쳐 주고 있는 믿음직한 전위전투대오’ ‘전군을 이 부대처럼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강군으로, 영웅군대로 만들자는 것이 우리 당의 의지이고 염원’ 등의 수사학이 동원됐습니다.그런데 이 말은 어느 정도 맞는 말입니다. 김정은의 다시 해외에 파병한다면, 북한군에서 그나마 전투에 동원할 만한 병력은 11군단밖에 없습니다. 북한군에서 실질적으로 전투 병력이라고 믿고 쓸 만한 지상군 병력은 5만 명도 되지 않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머지는 머리 숫자나 채우는 역할을 수행할 뿐입니다. 물론 적을 너무 경시하면 안 되겠죠. 누구나 군복을 입혀놓으면 뛰어다니며 총은 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귀순해 온 많은 탈북 군인들을 만나 이야기해 보면, “그게 군대가 맞냐”는 어이없는 웃음이 계속 나옵니다.1년에 총을 3발밖에 쏴보지 않는 군인, 훈련 대신 농사와 건설로 시간을 보내는 군인, 먹지 못해 영양실조 환자가 속출하는 부대…. 최전방 병력은 그나마 전투력을 유지하기 위해 북한이 나름 최선의 공급을 보장하는 부대들입니다.그런 최전방 군인들의 상황도 들으면 들을수록 기가 막힙니다. 개인적으로도 한국군 행군 완전군장 무게 약 38~42kg을 메고 1㎞를 갈 수 있는 군인이 20%는 될지 정말 궁금합니다. 40kg 배낭을 메고 서 있거나, 겨우 백 걸음도 못 갈 군인이 절반이 넘는다는 것은 확실히 장담할 수 있습니다.저는 수십 명의 사람과 함께 북한군 최신 정보를 듣는 강연을 종종 주최합니다. 두 달 전에도 1년 전까지 북한군이 있었던 군인을 초빙해 들었는데, 참석했던 사람들 모두가 경악한 표정이었습니다. 그래도 북한에 대한 지식이 꽤 있는 참가자들임에도 “설마 그 정도일까” 생각했었는데 다 듣고는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구나”고 말합니다.이 글을 읽는 구독자들도 “에이, 설마 군대인데, 그 정도일까”라는 생각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귀순 병사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을수록 “저게 군대라고”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속옷도 없이 누더기 군복을 입고 살며, 늘 배고픔에 허덕이는 북한군 실상을 들을 때마다 “드라마 야인시대에 나오는 수표교 거지들이 북한군보단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계속 듭니다.북한군 최정예라는 11군단, 즉 폭풍군단을 북한 사람들은 ‘폭풍강도’라고 부릅니다. 이 부대군인들이 배가 고파 민가를 ‘습격’하는 일이 많은데, 그나마 날쌔서 잡기 어렵습니다. 민간인도 영양 상태가 좋은 것은 아니니 비교 우위인 것입니다. 즉 북한군에서 훔치는 것을 제일 잘하는 부대가 11군단인 것입니다.● 키 143㎝면 군에 가는 청년들한국의 영화나 드라마에선 11군단, 또는 그의 전신인 특수 8군단이 거의 무적의 전사로 종종 등장합니다. 분명 북한의 특수부대가 뛰어났던 시기는 있었습니다. 1990년대 중반까지는 북한의 특수부대는 그나마 특수부대다웠습니다. 특수부대에 입대하면 지옥의 훈련을 끊임없이 이겨내야 했고, 정신·육체적으로 뛰어났습니다.물론 그래봐야 인간들이긴 합니다. 1968년의 김신조 부대, 울진-삼척 침투 무장 공비 부대는 북한에서 가장 뛰어난 특수부대 요원들이었지만, 이들도 경무장으로 후방에서 포위에 들면 일당백은커녕 한국군과의 사상(死傷) 비율에서 1대1도 버거워했습니다.북한 특수부대가 급속히 전투력을 잃어간 것은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였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먹지 못하는데 어떻게 훈련합니까. 11군단에서도 영양실조 환자가 속출했습니다. 영양실조 걸리지 않고 버티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습니다.북한 전체적으로 기아에 허덕이다 보니 병력 자원의 질이 급속히 떨어졌습니다. 지금 북한은 17세 이상 학교 졸업생 중 키 143㎝ 이상, 몸무게 45㎏ 이상이면 군에 입대시킵니다. 북한군이 전반적으로 ‘난쟁이’ 군대가 된 것입니다. 일반 부대에선 165㎝ 정도만 돼도 키가 큰 병사 축에 들어갑니다.이 중에서 아무리 골라서 특수부대에 보내도 전체적인 왜소함은 피할 수 없습니다. 키만 작아진 것이 아니라 영양상태도 여전히 떨어져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감당이 되지 않는 병사들에게 특수훈련을 시킬 순 없는 일입니다.코로나 시기 북한은 국경 경비를 강화하기 위해 11군단 병력을 압록강 경비에 파견했습니다. 이 때문에 11군단 군인들도 많이 찍혀 지금도 인터넷에서 영상들이 돌고 있습니다. 11군단 별거 없었습니다. 삐쩍 마른 청년들이 돌아다녔고, 격술훈련을 하는 모습이 찍힌 영상들도 있는데, 힘이 없어 발을 제대로 들어 올리지도 못했습니다. 50㎏도 안 되는 삐쩍 마른 청년들이 주먹을 내질러봐야 얼마나 힘이 실리겠습니까.물론 김정은이 방문하면 앞에서 벽돌 여러 장을 격파하고, 배에 돌을 올려놓고 부수는 군인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키와 체격을 보고 1호 행사용으로 선발된 뒤, 특별히 잘 먹여서 운영되는 중대급 정도의 일부 군인들입니다. 김정은이 왔는데 내세울 군인은 있어야죠.러시아에 파병된 북한 특수작전군의 초기 영상을 보면 특수부대라고 뽑았는데도 키도 작고, 삐쩍 말랐습니다.그런데 올해 8월부터 10월 사이 북한에 돌아온 파병 군인들을 내세운 행사를 보면 모두 살들이 많이 찐 모습입니다. 러시아에 간 북한 군인들은 돼지비계가 잘 공급돼 이를 정신없이 먹었습니다. 현지에서 북한군을 상대로 취재해 왔던 한 언론인은 “북한군들이 3개월쯤 지나니 피둥피둥 살이 찌더라”고 말했습니다. 살아서 돌아온 파병 군인들은 지금 매우 영양상태가 좋아진 채로 귀국한 것입니다.● 괴이한 특수 훈련북한 특수부대의 한계에 대해 신체 능력만 놓고 이야기했는데, 이들의 전쟁 수행 능력도 실은 매우 뒤떨어져 있습니다.김정은은 외부에 과시하기 위해 특수부대 훈련을 자주 벌여놓고 사진을 공개하는데, 이런 훈련 장면을 분석해 보면, 이들 부대는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있습니다.명색이 특수부대인데, 떼를 지어 돌격하고, 이해되지 않는 앞뒤 공중제비를 하고 있습니다. 엄폐물이 있는데, 굳이 높이 날아올라 공중에서 총을 쏘고, 총을 쏘는 군인 앞으로 점프해 총을 쏘기도 합니다. 김정은이 보기엔 멋있겠지만, 외부의 시선에서 보면 왜 이런 동작을 훈련하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우리도 이런 멋있는 특수 장비를 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누가 봐도 과시용으로 공개하는 특수부대 훈련도 적지 않습니다. 이것도 자세히 보면 기가 막힙니다. 가령 방탄복 같은 것을 입었지만, 방탄판이 없는 것이 보이고, 야시경 같은 것이 붙은 방탄모를 쓰고 나왔지만, 한 번도 써본 일이 없는지 턱끈 조절을 할 줄 몰라 머리에서 막 흘러내립니다. 총구로 향하게 이상하게 붙인 조준경으로 총을 쏘는 연출을 하는 사진도 있습니다.11군단의 편제도 현대전과는 동떨어져 있습니다. 병력의 70%가 경보병여단과 항공육전병여단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경보병은 무장을 가볍게 하여 공격력과 방어력을 다소 희생한 대신 기동성을 높인 보병을 말하는데, 한마디로 총 한 정과 배낭 하나를 메고 수백㎞를 걸어 이동하는 부대입니다. 이런 부대는 반세기 전까진 효용이 있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허나, 차량이나 헬기로 병력을 침투시키는 현대전의 시대에 정찰 자산이 내려다보는 지상에서 수천 명이 총만 메고 뛰어 다니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습니다. 항공육전병여단도 왜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대규모 병력의 공중 침투는 제공권을 장악해야만 가능합니다. 하지만 고물 전투기만 갖고 있는 북한은 제공권을 장악할 힘을 오래 전에 잃었습니다. 침투 수송기도 1940년대 생산된, 시속 200㎞도 안 되는 고물 AN-2기들뿐입니다. 이 복엽 수송기가 뜰 수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떴다고 한들 작은 무인기 격추를 논하는 현대전에선 날아다니는 ‘관’에 불과합니다. AN-2기 침투가 이젠 막혔다는 것을 알아서인지, 작년에 북한은 두 대밖에 없는 고려항공 수송기에 군용 도색을 급히 입혀 낙하 훈련하는 모습도 연출했습니다. 하지만 처음 해보는 훈련인지라 비행 속도가 너무 빨라 낙하산이 비행기에 걸리고, 낙하산끼리 엉키는 사진도 그대로 나옵니다.11군단의 ‘특수성’에 대해선 말하려면 끝이 없지만, 김정은이 특수부대를 과시하기 위해 연출한 훈련들은 북한에선 먹힐지 몰라도 외부 전문가들에겐 웃음만 줄 뿐입니다.● 11군단엔 왜 돼지비계를 안주나.북한의 11군단이 이렇게 낙후한 부대가 된 이유는 한마디로 정리하면, 가난해서입니다.나라가 부유해야 군인들을 잘 먹이고, 좋은 장비를 쓰게 하고, 마음껏 훈련하게 할 수 있습니다.세계 최고의 특수부대를 운용하는 미국은, 특수부대원 한 명 육성에 수십억 원이 듭니다. 2025년 기준으로 네이비실 전투원 1명을 양성하는데 평균 27억 원 이상이 소요된다고 합니다. 거기에 더해 개인 장비와 지원 장비까지 계산하면 훨씬 더 많은 돈이 소요됩니다. 27억 원은 200만 달러입니다. 200만 달러면 옥수수 5000톤 정도 살 수 있습니다. 미국 네이비실 전투원 두 명 육성 비용이면 4만 명의 북한 11군단 전체가 1년 동안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식량을 살 수 있습니다. 배부르면 다시 고강도 육체 훈련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것도 못하고 있죠.네이비실 2명 육성 비용=>11군단 유지비용.이것만큼 적나라하게 북한 푹풍군단을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비교가 어디 있겠습니까. 김정은이 11군단의 사기를 북돋으려면 우선 이들에게 밥과 돼지비계 정도는 보장해 주는 것이 우선입니다.김정은은 10월 새로 건조한 최현함을 방문했을 때는 승조원이 100여 명뿐이라 그랬는지 평양에서 남포까지 돼지고기볶음, 양념닭튀김 등이 포함된 뷔페식 음식을 차에 싣고 가 한 끼 잘 먹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11군단 지휘부 방문 때엔 인원이 많아서인지 음식을 가져가지 못했습니다. 해군엔 ‘한턱내면서’, 해외에 파병돼 숱한 희생자를 낸 11군단엔 쏘지 않으니, 은근히 고기를 기대했을 현지 군인들은 실망이 클 겁니다. 아무리 말로 ‘인민군의 상징 부대’라고 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병사들에겐 제일 배부르게 공급되는 부대가 제일 상징적인 부대입니다. 허기져 걸어 다닐 힘이 없는 부대는 그냥 ‘폭풍거지’일 뿐입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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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금강산 현대주유소 철거 작전

    지난해 봄, 금강산 온정리에 투입된 북한군은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고난도 미션에 직면했다. 미션명은 ‘현대오일뱅크 금강산 주유소 철거’. 북한은 주유소를 철거해 본 경험이 없다. 김정은 집권 이후 북한에도 지하에 연료 탱크를 묻는 형태의 주유소가 전국에 200개 정도 생겨났다. 가뜩이나 모자란 주유소인데 짓자마자 철거할 일은 없었다. 게다가 금강산 주유소는 부실한 자재와 저급한 기술로 지은 것이 아니라, 현대가 1998년 11월부터 3개월 동안 세운 것이다. 북한에 건설되는 첫 한국 주유소라는 상징성 때문에 허술하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북한이 아는 유일한 철거 방법은 폭파시킨 뒤 건물 잔해를 내다 버리는 것이다. 북한은 쌓아 올리는 건 많이 해도 파내는 건 거의 하지 않았다. 뭐든 부족하니 기존 건물은 그대로 놔 두고 빈 땅에 새로 건설하는 데만 익숙하다. 그나마 평양처럼 부지가 부족한 곳에선 기존 건물을 허물고 새로 짓기도 한다. 다만 그들이 철거해 온 건물은 대개 1950년대에 ‘평양 속도’라고 포장하며 날림으로 지은 것이 대부분이라 기둥 서너 군데를 폭파하면 풀썩풀썩 무너진다. 그런 북한이 금강산에서 맞닥뜨린 것은 차원이 다른 철근 콘크리트 구조다. 그것도 그냥 무너뜨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콘크리트와 내부 탱크를 뜯어내는 작업이었다. 어쨌든 김정은의 명령이 하달됐으니 군인들은 유일하게 아는 발파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콘크리트가 어찌나 단단한지 폭약 넣을 구멍 뚫기도 쉽지 않았고, 폭파해도 뜯겨 나오는 양이 보잘것없었다. 껍질을 벗기듯 뜯어내고 또 뜯어내는 작업은 반년 넘게 진행됐다. 온정리 사람들은 지난해 여름 발파 소리를 수없이 들어야 했다. 한국은 웬만한 철거업체에 몇천만 원만 주면 일주일 안에 주유소 하나를 금방 뜯어내겠지만 북한은 경험도, 장비도 없다. 더욱이 그들이 금강산에서 뜯어내야 할 것은 주유소뿐만이 아니었다. 2019년 10월 23일 금강산을 방문한 김정은은 “보기만 해도 기분 나빠지는 너절한 남측 시설들을 싹 들어내고 현대적인 봉사 시설들을 우리 식으로 새로 건설하라”고 지시했다. 김정은은 한국이 지은 관광시설들을 ‘건설장 가설 건물을 방불케 하는 집들’ ‘피해 지역 가설막이나 격리병동’ 등에 비유하며 폄훼했다. 김정은 특유의 허세도 빠지지 않았다. 그는 “우리 설계 역량도 튼튼하고, 강력한 건설 역량이 있으며 당의 구상과 결심이라면 그 어떤 난관과 시련도 뚫고 무조건 실현하는 우리 군대와 노동계급이 있기에 금강산에 세계적인 문화관광지를 꾸리는 사업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큰소리쳤다. 그런데 세계적인 문화관광지는커녕 가설막이나격리 병동 같다던 건물 몇 동조차 아직까지도 완전히 들어내지 못했다. 한국이라면 영세 업체라도 쉽게 끝낼 일을 ‘최고존엄’ 김정은의 지시에도 6년째 끝내지 못하고 쩔쩔맨다. 그동안 건물 하나하나 해체될 때마다 동원된 많은 군인과 금강산 주민들 입을 통해 북한에는 차원이 다른 한국 건설에 대한 신화들이 생겨났다. 건물을 보기만 했던 것과 해체하면서 느끼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경험이다. 한국 건설에 대한 신화는 비단 금강산에서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2020년 6월 13일, 김여정은 한국을 향해 “머지않아 쓸모없는 (개성공단) 북남공동연락사무소가 형체도 없이 무너지는 비참한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협박했다. 나흘 뒤 북한은 진짜로 이 연락사무소 건물을 폭파했다. 폭약을 얼마나 썼던지 70m 떨어진 15층짜리 개성공단 종합지원센터 건물 유리창이 다 박살 났다. 하지만 정작 형체도 없이 무너뜨리겠다던 건물은 높이 솟구쳤던 폭파 먼지가 가라앉은 뒤에도 꿋꿋이 서 있었다. 전 세계가 보라고 진행된 ‘폭파 쇼’에 동원됐던 북한 최고 공병들은 경악했을 것이다. ‘도대체 이 건물은 어떻게 지었기에 이 정도 위력의 폭발을 견딘단 말인가. 형체도 없이 무너뜨리라는 지시를 집행하지 못한 우리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연락사무소 건물이 수작업을 통해 완전히 사라진 것은 4년 뒤인 지난해 3월이다. 종합지원센터는 지금도 철거 공사가 진행 중이다. 금강산 주유소와 개성공단 연락사무소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죽었으되 죽지 않았으니, 북한이 즐겨 쓰는 표현을 빌린다면 ‘죽어서 더 빛나는 전설의 이름’이 됐다.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5-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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