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주성하 기자

동아일보 콘텐츠기획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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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관련 사이트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http://nambukstory.com)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zsh75@donga.com

취재분야

2025-04-02~2025-05-02
칼럼47%
남북한 관계27%
경제일반17%
산업3%
여행3%
문화 일반3%
  • “한국은 미국 핵심산업에 반드시 필요한 파트너”

    산업통상자원부(장관 안덕근)와 KOTRA(사장 강경성)는 29일 서울 코엑스에서 ‘협상의 시간, 협력의 해법’이라는 주제로 ‘2025 글로벌 신통상 포럼’을 개최했다. 이번 포럼은 2월 18일 발표된 ‘범부처 비상수출 대책’의 일환으로 마련됐다. 첫 번째 세션에서는 케이트 칼루트케비치 맥라티 전무이사가 기조연설자로 나섰다. 칼루트케비치 전무이사는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무역실장과 백악관 대통령 특별보좌관을 지낸 경력을 바탕으로 2기 행정부의 가능성과 그에 따른 전략을 제시했다. 칼루트케비치 전무이사는 “한국은 방산, 조선, 반도체, 의약품, 에너지 등 미국이 육성하고자 하는 핵심 산업에 있어서 불완전한 공급망을 보완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파트너”라고 강조했다. 또한 “한국은 미국 내 강력한 투자 기반을 활용하고, 현지 협력사들을 소통 채널로 활용해 미국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어진 토론에서는 양주영 산업연구원 경제안보·통상전략연구실장, 김영만 산업통상자원부 통상정책총괄과장, 유종철 대한상공회의소 APEC협력센터장이 한미 간 공급망 협력 구조, 아웃리치 현장 분위기, 통상환경 변화에 대한 정부와 기업 차원의 대응 방향 등을 설명했다. 두 번째 세션에서는 우리 기업 대응책으로 조명된 ‘글로벌 사우스’에 주목했다. 곽성일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세계지역연구2센터장은 글로벌 사우스의 시장 기회와 경제 협력 방향을 소개했다. 전임 KOTRA 서남아지역본부장였던 빈준화 KOTRA 글로벌공급망실장은 인도, 강준모 LG 경영연구원 연구위원은 동남아시아에 대하여 진출 사례를 중심으로 실질적인 시장 정보를 공유했다. 또한 글로벌 사우스 지역에 신규 진출하기 위해 우리 기업이 활용할 수 있는 정부 개발협력사업인 경제발전경험공유사업(KSP)과 경제혁신파트너십프로그램(EIPP)의 성공 사례들도 소개됐다. 한편 KOTRA는 미국의 통상 조치와 그에 따른 대응 방안 공유를 위해 10일부터 매주 ‘통상환경 비상대응 정기 설명회’를 열고 있다. 설명회는 포럼과 연계해 진행됐으며, 미국의 주요 관세 조치 및 미국·멕시코·캐나다무역협정(USMCA) 동향, 중국의 대응, 원산지 관리 및 품목 분류 전략, 무역 리스크 대응 방안 등 실무 중심 프로그램으로 구성됐다. ‘통상환경 비상대응 정기 설명회’는 지금까지 약 1000명의 수출 및 해외 진출 기업 관계자가 온·오프라인으로 참석해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포럼 현장에서는 참가 기업을 위한 일대일 상담 부스도 마련됐다. 강경성 KOTRA 사장은 “빠르게 변화하는 글로벌 통상 환경에서 우리 기업이 경쟁력을 더욱 강화하는 전략을 수립할 수 있도록 포럼을 마련했다”면서 “KOTRA는 85개국 131개 무역관을 통해 현장 비즈니스 기회를 빠르게 포착하여 우리 기업에 전파하고, 정부와 함께 우리 기업이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총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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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북한 해외 여성 노동자들의 비극

    “시집 잘 가려다 홀아비한테 가게 생겼다.” 중국에서 일하고 있는 북한 여성 노동자 수만 명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요즘 세계의 관심사가 러시아 파병 북한 군인들에게 집중돼 있다 보니 중국에서 감금 노예처럼 일하는 수만 명의 북한 여성 문제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해외에서 일하는 북한 여성 노동자들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이전에 파견돼 최소 6년 넘게 갇혀서 일만 하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귀국 지시는 없다. 현지 관리자들은 지난해 1월 중국 옌볜에서 일어났던 것 같은 북한 노동자 폭동이 또다시 일어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실제로 북한 노동자들이 고용된 대다수 공장들에서 분노가 임계점에 이르고 있다. 북한은 최근 각 공장마다 매달 문제를 일으킬 만한 몇 명을 추려서 귀국시키라는 지시를 내렸을 뿐이다. 노동자 중엔 중국에서 3년 정도 열심히 일해서 돈을 좀 모아 시집갈 밑천을 마련할 생각으로 온 처녀가 많다. 하지만 코로나19 국경 봉쇄가 끝났어도 귀국 지시가 떨어지지 않아 20대에 나온 여성들 나이가 어느새 30세가 넘어가게 됐다. 북한에선 30세 넘은 여성은 노처녀 중의 노처녀로 간주돼 결혼이 어렵다. 돈이 좀 있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돈도 많이 벌지 못했다. 6년 정도 일하면 평균 5000달러 정도 모으게 된다. 야근과 특근을 도맡아 죽어라 일만 하면 8000달러까지 벌 순 있지만 이는 극소수에 해당한다. 이 돈으로 북한 대도시에서 집 한 채 사기도 어렵다. 아이를 북한에 두고 온 유부녀 노동자들도 6년 넘게 집 소식을 알 수 없어 화가 나긴 마찬가지다. 북한은 중국에 나와 있는 노동자들이 가족과 연락하는 것을 철저히 차단하고 있다. 집 소식을 들으면 동요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편지도 전화도 할 수 없으니 집에서 누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수 없고, 그동안 번 돈을 고향에 보낼 수도 없다. 언젠가 귀국하더라도 이들의 분노가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 않다. 일부 먼저 귀국한 노동자 중엔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3년이나 모르고 있었다”거나 “가족이 먹고살기 힘들어 집까지 팔고 거지가 된 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절규가 터져 나오고 있다. 이 상처는 평생 아물 수 없을 것이다. 북한이 파견 노동자들을 귀국시키지 않는 이유는 대체할 신규 노동자 파견이 어렵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간 북-중 관계가 악화돼 온 결과 중국은 유엔 대북제재 결의를 이유로 북한 노동자를 받지 않고 있다. 북한은 중국에 파견된 노동자 월급의 80% 이상을 빼앗아 간다. 노동자들은 노동당의 중요한 돈줄인 것이다. 중국에 파견된 여성들은 피복, 수산물, 식당 등 다양한 업종에서 일하고 있다. 중국 공장들은 남성보다 관리가 쉬운 여성들을 선호한다. 숙소만 마련해 주면 북한 관리자들이 알아서 노동자들을 감금하고 통제한다. 여성 노동자들이 파견된 공장마다 ‘삼촌’이라 불리는 북한 남성 부사장이 한 명씩 같이 나가 있다. 이 삼촌들이 공장 소속 여성들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실질적 관리자다. 삼촌은 나이 많은 여성을 반장이나 조장으로 임명해 통제하게 한다. 여성들을 관리해야 하니 북한 측 사장으로 여성을 내세우긴 하지만 사실상 ‘바지 사장’일 뿐이다. 요즘 바지 사장들은 “이젠 총각에게 시집가기 틀렸다”고 한탄하는 노동자들을 “간부 나부랭이들이 참 너무하다. 자기 자식이면 그러겠느냐”며 열심히 다독여 준다고 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니 겁이 나는 것이다. 수많은 여성의 고혈을 짜내서 먹는 데 맛을 들인 북한은 앞으로도 그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달 중순 한 러시아 매체에는 모스크바에서 일하고 있는 북한 여성 근로자 수백 명이 일하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이 공개됐다. 이들은 ‘러시아판 쿠팡’이라고 불리는 러시아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 ‘와일드베리스’ 물류창고에서 일하고 있었다. 중국에 노동자들을 파견하기 어려워지자 슬그머니 러시아에 보낸 것이다. 러시아에 파견된 노동자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점점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진 않을 것이다. 김정은은 이들이 번 돈을 빼앗아 평양에 고층 아파트들을 짓고 인민 낙원을 만든다며 생색을 내고 있다. 남의 나라 전쟁에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 죽는 청년들의 목숨과 노예가 된 여성들의 눈물로 쌓은 ‘낙원’ 위에서 김정은의 웃음소리만 높아진다. 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5-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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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OTRA, 美 상호관세 전면전 맞서 수출기업 보호 총력 대응

    산업통상자원부와 KOTRA가 미국 정부의 상호관세 부과 등 통상 환경 변화에 맞서 총력 대응을 펼치고 있다. KOTRA는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한 1월부터 ‘수출투자비상대책반’을 가동하며 급변하는 통상환경 속 수출기업을 위한 대응 방안을 발 빠르게 준비해 왔다. 2월부터는 ‘관세대응 119’ 통합상담창구를 개설해 운영하고 있는데, 이달 1일까지 1324건의 상담 문의가 접수됐다. 이 중 관세 관련 문의가 절반 가까이를 차지했다. 미국, 멕시코, 캐나다 등 20개 해외무역관에는 헬프데스크도 설치해 현지 진출 기업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2월부터 대구경북, 충북, 강원, 인천, 울산 등에서 ‘찾아가는 관세 대응 릴레이 설명회’를 개최해 지역·업종별로 세분화된 관세 대응 전략을 전파해 왔다. 지난달 26일에는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통상환경 전환기, 수출기업 지원 종합설명회’를 열었는데, 이날에만 수출기업과 정부, 유관기관 관계자 등 1000여 명이 몰렸다. 하루 동안 일대일 컨설팅 387건, 지원사업 안내에 727명이 문의하는 등 글로벌 통상 전쟁을 앞두고 대비책 마련에 고심하는 기업인들의 상담이 잇따랐다. 실제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달 2일 전 세계를 대상으로 상호관세 부과를 발표함에 따라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산업부와 KOTRA는 본격적인 발효를 앞둔 9일 이후 수출 현장의 혼란을 최소화하고자 실질적인 지원책 마련과 실행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우선 관세 대응 119는 통합 상담 창구로서의 기능을 더욱 보강하고, 유관기관과의 협업을 확대해 ‘관세 대응 119 종합지원센터’로 확대 운영한다. 또한 KOTRA의 전문 상담 인력을 확대하고, 미국 현지 관세사를 활용한 해외 상담 채널을 연계할 예정이다. 관세 대응 바우처 사업은 산업부와 연계해 1일부터 참여 기업 모집을 시작했는데, 관세 영향 분석, 피해 대응, 대체 시장 발굴 등 ‘관세 대응 패키지 서비스’를 제공한다. 기존 바우처 서비스와 달리 KOTRA 해외무역관이 발굴한 해외 현지 관세·법률 전문가의 컨설팅을 받을 수 있어 기업별 맞춤형 수출 해법을 찾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아울러 KOTRA는 대체 시장과 사업 파트너 발굴 등 수출 활로 모색에도 힘쓰고 있다. 이달 10일부터 매주 목요일 KOTRA 본사 국제회의장에서 ‘통상환경 비상대응 정기설명회’를 개최한다. 29일에는 코엑스에서 ‘글로벌 신통상 포럼’도 개최해 지역별 시장 환경, 대체 시장 기회 요인을 소개할 예정이다. 트럼프 1기 행정부 무역실장을 지낸 케이트 칼루트케비치가 기조연설과 패널토론에 참여해 미국 통상 정책 전망과 기회요인에 대해 설명한다. 강경성 KOTRA 사장은 “미국 상호관세 발효가 우리 기업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과 수출 현장의 혼란을 최소화해야 한다”며 “KOTRA는 관세 대응 119의 기능을 강화하고 유관기관과의 협업 등 확대 개편을 통해 범정부 총력지원 체계로서 역할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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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일본 스케이트와 핵추진잠수함

    2월 초 2025 하얼빈 겨울아시안게임에 참가한 북한 피겨스케이팅 선수들의 스케이트를 보고 마음이 짠했다.피겨스케이팅 선수들은 부츠처럼 발목을 높이 잡아주는 스케이트를 신어야 부상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다. 그런데 북한 선수들은 마치 초보자용처럼 발목이 낮은, 한눈에도 저렴해 보이는 스케이트를 신고 경기를 치르고 있었다. 그걸 신고 렴대옥-한금철 조는 은메달까지 받았으니, 각각 26세와 25세가 되도록 저들이 흘렸을 피눈물은 가늠하기 어렵다.이번 겨울아시안게임에 북한은 단 3명의 선수만을 보냈다. 하얼빈은 북한에서 열차로 이동할 수 있는 곳이다. 어쩌면 가장 가까운 지역에서 치러지는 국제대회라고 할 수 있음에도 3명밖에 보내지 못했다는 것은 북한의 겨울 스포츠는 피겨스케이팅을 빼곤 사실상 전멸 상태라고 볼 수 있다는 얘기다.북한은 한때 스피드스케이팅이 매우 강했다. 아시아인 최초로 겨울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종목에서 메달을 차지한 선수가 바로 북한 한필화 선수다. 그는 1964 인스브루크 겨울올림픽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3000m 종목에서 은메달을 받았다. 이는 아시아 여성 선수 최초의 겨울올림픽 메달이기도 했다.그런 전통을 갖고 있음에도 지금 북한 스피드스케이팅은 국제무대에서 사라졌다. 한국은 쇼트트랙에서 세계를 제패하고 있고, 스피드스케이팅에서도 세계 기록을 세운 이상화나 올림픽 금메달을 받은 모태범 같은 우수한 선수들을 계속 배출한다. 같은 민족인 데다 지옥 훈련이라면 세계 최고 수준일 북한이니 우수한 선수들을 배출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그런데도 우수한 선수들이 나오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시설과 장비 문제다. 북한에도 당연히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들이 있지만 훈련장이 없어 늦가을에 돼서야 함경남도 부전에 가서 야외 훈련을 시작한다. 장진호 바로 옆인 부전은 춥기로 악명 높다. 영하 수십 도의 날씨에 밖에서 훈련을 하다 보니 동상을 입거나 방광염에 걸리고, 발톱이 빠지는 일이 잦다.선수들은 실력에 따라 스케이트를 차등 지급받는데, 4등급은 북한제 스케이트를 지급한다. 이게 스케이트냐 할 정도로 한심한 것이다. 3등급으로 인정되면 러시아제 스케이트를, 2등급으로 인정되면 독일제 스케이트를 준다. 국가대표급인 1등급으로 인정받은 선수 한두 명에게는 일본제 스케이트를 지급한다. 그런데 이 외제 스케이트도 새것이 아니다. 선배들이 타고 또 타던 것이라 스케이트 날이 쉽게 무뎌져서 전문적으로 날을 갈아주는 사람을 매 조에 한 명씩 두고 있다. 선수보다 스케이트가 더 귀한 상황이니 스키니 하키니 하는 종목은 어림도 없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 이런 북한에서 종목을 막론하고 우수한 선수들이 나오면 그게 이상한 것이다.하지만 이런 가난하고 슬픈 이야기들은 두꺼운 얼음장 아래에 깊숙이 숨겨져 있다. 밖으로 드러나는 북한의 모습엔 허세만 가득하다.지난달 김정은은 전략핵잠수함(SSBN)인 ‘핵동력전략유도탄잠수함’ 건조 현장을 공개했다. SSBN은 세계 6개국밖에 보유하지 못한 수십억 달러짜리 무기이다. 유지비도 너무 비싸서 공짜로 줘도 운용하지 못할 나라들이 태반이다. 지난달 말에는 조기경보통제기도 공개했다. 북한과 동일하게 Il-76 수송기 기반인 러시아 A-50 조기경보통제기는 업그레이드 성능에 따라 가격이 4억∼6억 달러에 이른다.핵무기에, 미국까지 도달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에, 정찰위성 등등 북한이 최근 공개하는 무기들은 하나같이 천문학적인 가격을 자랑하는 것이다.무기뿐만이 아니다. 평양에는 화려한 거리들이 매년 건설되고, 원산엔 제주도 전체 객실 수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객실 2만 개짜리 거대한 해안관광단지가 완공을 앞두고 있다. 이것도 분명히 북한의 현실이다. 김정은은 그걸 봐달라고 딸과 함께 열심히 돌아친다. 그의 눈과 귀는 늘 무기나 건물에 머물러 있을 뿐, 사람에게 머물러 있지 않는다.그러니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장에서 죽어가는 수천 북한군 병사의 울부짖음이나 최전방에서 지뢰를 매몰하다 수시로 사고로 죽어가는 군인들의 비명이 들릴 리가 만무한 것이다.목숨이 하찮은 곳에선 꿈도 하찮다. 너덜너덜해진 일본제 스케이트를 받는 것이 북한 빙상 선수들의 꿈이다. 그 꿈을 이뤄도 렴대옥처럼 외국에서 다른 나라 선수들의 스케이트를 부럽게 바라볼 기회는 극소수에게만 돌아갈 뿐이다.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5-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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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한국 국방 이대로 괜찮습니까

    세계 2위 군사대국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3년째 고전하는 것을 보며, 비록 군사전문가는 아니지만 많은 걱정을 떨쳐낼 수가 없다. 전쟁 양상이 확 바뀌는데 우린 괜찮을까. 병종별로 보자. 한국 육군의 자랑은 최강 화력의 7기동군단이다. 세계 정상급 K2 흑표 전차 수백 대로 북진 선봉에 선다. 두꺼운 전면 장갑으로 포탄을 튕겨내며 전진하는 전차는 ‘지상전의 왕자’였다. 그런데 이 왕자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힘을 못 쓴다. 그 넓은 평야에서도 중대급 전차전조차 벌어지지 않고, 포탄을 정면으로 튕겨내며 버티는 일도 거의 없다. 파괴된 전차 대다수는 휴대용 미사일이나 드론, 지뢰에 상부 또는 하부가 뚫렸다. 만약 7군단이 북진할 때 1인칭 드론 수백 대가 공격하면 막을 수 있을까. 북한이 특정 신호에 일제히 수십 m 상공에 날아올라 내리꽂히는 능동형 지뢰라도 개발하면 어떻게 될까. 전차 설계는 이대로 괜찮은가. 강력한 전면 방탄 성능에 집중해온 세기의 개념을 바꿔야 할 때가 오진 않았을까. 장비만 문제가 아니다. 가령 한국군이 강철 체력의 특등사수 육성에 열심인 동안, 북에선 지금 여군들이 드론 조종을 맹훈련하고 있진 않을까. 공군은 괜찮은가. 지금까지는 군용기의 공중전 능력이 매우 중요했다. 최고 성능을 위해 비행기는 점점 비싸진다. 그런데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공중전은 전쟁 초기에 좀 벌어졌지, 이후엔 사라졌다. 우크라이나가 서방에서 도입한 F―16 전투기는 순항미사일 격추 임무에 사용되고 있고, 러시아 군용기는 멀리서 공대지 미사일이나 폭탄을 투하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강력한 대공 미사일들이 버티니 군용기들의 역할은 매우 제한된다. 이럴 바엔 수천억 원짜리 다목적 비행기 한 기보단 값싼 순항미사일 격추용 무인기나 폭격 전용기 수십 기를 만드는 게 더 효율적이진 않을까. 엄청난 돈을 쓰는 해군엔 물음표가 가장 많이 붙는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해군력은 비교 자체가 무의미하지만, 러시아 해군은 꼼짝 못 한다. 전쟁 초기 1조 원 가치의 러시아 흑해함대 기함 모스크바함이 미사일 단 두 발에 격침됐다. 강력하다고 알려졌던 흑해함대가 우크라이나 곡물수송로조차 통제하지 못한다. 뒤로 밀려나 구석에 숨었는데도 전력의 30% 이상인 수십 척의 함정을 앉은 자리에서 잃었다. 1조 원이 넘는 이지스함을 찍어내는 한국 해군이 유사시 돈값을 할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북한 해군을 상대로 이지스함까지 쓸 일은 없을 것 같고, 중국을 상대한다면 수십, 수백 기씩 떼로 날아들 최신 극초음속 미사일을 막을 방법이 없어 보인다. 이지스함은 사례일 뿐이다. 바야흐로 바다를 휘젓는 수중 자폭 드론, 레이더를 피해 수면을 스치듯 날아와 공격하는 드론, 레이더에도 걸리지 않는 골판지 드론 시대가 오고 있다. 북한이 과거의 포사격과 같은 전통적인 공격 대신에 광섬유로 연결해 전파 방해도 받지 않고 정확도도 뛰어난 골판지 드론들을 대거 날려 보내면 어떻게 막아야 할까.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해병대 격인 해군육전대가 매우 강했다. 그런데 전쟁 3년 동안 상륙작전은 해보지도 못한 채 전선에서 보병대처럼 소모된다. 미군도 해병대를 없애고 있는 흐름에 우리도 굳이 해병대여야만 하냐는 질문도 해야 한다.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 확전 우려 때문에 쏘지도 못할 비싼 미사일을 잔뜩 실은 함정보단 우리에게도 수십 km 밖에서도 드론 1대와 군함 1척을 확실하게 바꿀 수 있는 드론정들이 시급할 수 있다. 서해 5도를 드론의 섬으로 바꾸면 값비싼 육해공 장비의 사용을 최소한으로 하면서도 북한의 도발을 더 확실히 견제할 수 있다. 재래식 전력에서 북한은 비교 대상이 안 될 정도지만 그게 장점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비싼 무기만 찾고 또 그것이 아까워 놓지 못하는 사이, 북한은 값싼 드론에 올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수십만 명의 희생과 바꾼 러시아의 전쟁 경험을 고스란히 가져가는 사이, 우린 우크라이나에 참관단조차 보내지 못하고 있다. 줄어드는 병력 자원에 대한 걱정만큼 싸고 효율적인 군에 대해 얼마나 고민하고 있는가. 인공지능(AI)까지 더해질 미래 전쟁의 설계는 누가 해야 하는가. 승진훈련장의 판박이 훈련을 수십 년 동안 보면서 결정권자의 위치에 오른 사람들이 하긴 어려운 일이다. 경험을 무시할 순 없지만 상상과 혁신은 50, 60대의 몫이 아니다.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5-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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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돈주머니 불룩해진 김정은의 채찍질

    이달 10일 신의주 인근 위화도 벌판엔 1만 명은 족히 넘을 북한 군인이 집결했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이후 637년 동안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이곳에 모인 적은 없었을 것이다. 이날 김정은은 위화도에 450정보(약 4.5㎢) 규모의 온실농장을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지금 북한 인민에겐 온실에서 생산된 토마토, 오이보다는 식량이 더 시급하다. 쌀 1kg은 1년 전에 비해 60% 오른 북한 돈 8000원에 거래되고, 석탄을 비롯한 땔감 가격도 최근 두 달 동안에만 50% 이상 뛰었다. 달러 환율은 1년 전보다 무려 2.5배나 올랐다. 인민은 식량과 땔감 가격을 감당하지 못해 주린 배를 안고 추위에 떨고 있는데 김정은에겐 대규모 온실 건설이 우선이었다. 북한은 생산비를 시장에서 환수하는 시장경제 체제가 아니어서 초대형 온실 운영에 드는 연료, 전력, 비료 등을 장기적으로 감당하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최근 5년 내 건설한 다른 3개의 초대형 온실은 가동되고 있다. 인민의 땔감은 없어도 온실 난방용 석탄은 보장된다는 의미다. 김정은의 ‘삽질’ 구상은 온실에만 머물지 않는다. 특히 올해 통이 커졌다. 지난해엔 매년 지방공업공장 20개를 짓겠다고 하더니 여기에 더해 올해는 군 병원 및 종합봉사소 3개를 시범적으로 건설하고 내년부터는 20개씩 짓겠다고 공언했다. 비싼 의료 장비를 수입해야 하는 병원 건설은 지방공장 건설보다 돈이 더 많이 든다. 김정은은 또 평양 1만 가구 주택 공사를 앞으로도 이어가고, 원산갈마관광지구를 6월까지 개장하겠다고 밝혔다. 확실히 김정은의 자신감과 씀씀이가 달라졌다. 그의 돈주머니는 어디에서 채워졌을까. 전통적으로 북한은 북-중 교역을 통해 외화를 벌었다. 사상 최강의 유엔 대북제재가 시작되기 직전인 2016년에 북한의 대중 무역 의존도는 88.2%였고, 무역 규모는 58억 달러였다. 하지만 지난해 북-중 무역 규모는 21억8000만 달러로 8년 전의 37.6%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특히 2016년에 26억 달러였던 대중 수출액이 지난해엔 3억2000만 달러로 급감했다. 요즘 최악으로 악화된 북-중 관계까지 감안하면 김정은이 중국에서 외화를 조달하긴 어렵다. 여기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기간인 2020년 1월부터 2023년 7월까지 3년 7개월 동안 북한 국경은 꽁꽁 닫혔고 대외 교역도 중단됐다. 김정은 돈주머니가 텅텅 비어야 정상이지만 최근 건설 행보는 그와는 반대다. 최근 1년 남짓 김정은이 어디선가 많은 돈을 얻게 됐다는 의미다. 추정 가능한 자금 출처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 우선 러시아에 탄약과 무기, 심지어 파병까지 한 대가를 받고 있다는 의미다. 얼마나 받았는지는 양국이 침묵하는 한 외부에서 알 수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면 이후 뒤따를 대규모 건설 수요에 북한 노동자들이 대거 파견될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 원산갈마관광지구를 러시아 전상자(戰傷者)들을 위한 휴양시설로 전용한다면 김정은의 돈주머니는 더욱 불룩해질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북한 해커들의 활약이다. 21일 가상자산 거래소 바이비트에선 사상 최대 해킹 피해가 발생했다. 북한 해킹조직 ‘라자루스’로 추정되는 해커들이 무려 15억 달러 상당의 암호화폐를 빼갔다. 또 미국 암호화폐 분석회사 체이널리시스에 따르면 지난해 북한 해커들이 탈취한 암호화폐 액수는 13억4000만 달러로 전 세계 가상자산 해킹 피해액의 61%에 이른다. 김정은은 이렇게 훔친 돈만으로도 충분히 대규모 토목공사를 감당할 수 있다. 현재 북한 해커 대다수는 중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들을 막지 못한다면 ‘도둑놈의 자신감’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김정은이 대규모 토목공사에만 돈주머니를 여는 이유는 뭘까. 건설 자재를 외국에서 사올 돈으로 러시아에서 밀만 수입해도 장마당 물가 상승으로 인한 인민의 아우성은 막을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역사 속에 사라진 수많은 독재자가 이미 해 주었다. 독재자에겐 국민을 채찍질할 구실이 필요하다. 채찍을 휘두르기엔 대규모 토목공사만 한 것이 없다. 인민이 마감이 정해진 삽질 과제에 정신을 쏟다 보면 불평할 여유도 없게 된다. 김정은은 그저 채찍만 열심히 휘두르면 된다. 생활고로 인한 인민의 비명이 높아질수록 김정은이 휘두르는 채찍 소리는 더욱 높아지게 될 것이다. 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5-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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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타트업의 지속가능한 성장, 해외시장 진출에 달려”

    “스타트업 세계화의 교두보를 마련하겠다.” 고려대 크림슨창업지원단을 이끄는 이병천 단장(생명공학부 교수·사진)은 18일 “기존 스타트업 발굴 및 육성 정책을 고도화해 스타트업 세계화와 해외 시장 진출에 주력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다음은 일문일답. ―스타트업 세계화를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나. “2022년부터 세계 최대 정보기술(IT)·가전 전시회인 CES에 참가해 시장 흐름과 부문별 성장 가능성을 가늠해 왔다. 이 밖에 세계 최대 이동통신 박람회 ‘모바일 월드 콩그레스(MWC)’, 아시아 최대 규모 개방형 혁신 비즈니스 매칭 행사 ILS, 유럽 창업 전시회 SLUSH, 세계 최대 생명공학기술 콘퍼런스인 BIO USA 등에 꾸준히 참여했다. 해외 창업 생태계의 장점을 조사하고 네트워크를 확장하기 위해서다. 지난해에는 해외 투자자와 대학, 기관을 초청해 지식을 공유하고 네트워크를 넓히는 고려대 글로벌 스타트업 콘퍼런스를 열었다. 지난달 ‘CES 2025’에서는 단독관을 운영해 교내 스타트업이 주목받도록 도왔다.” ―어떤 주요한 성과를 낳았는지 설명해 달라. “고려대가 육성한 스타트업이 세계 무대에서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스타트업들이 매년 CES 혁신상을 받았다. 특히 교원 창업기업 큐심플러스(대표 노광석)는 2023년부터 3년 연속 CES 혁신상을 받았다. 그 밖에도 여러 교내 스타트업이 세계 곳곳에 이름을 알렸다. 크림슨창업지원단의 성과이면서 한국 스타트업이 세계 시장에서 꾸준히 성장할 역량을 가졌다는 강력한 증거다.” ―스타트업의 글로벌 진출은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 “대학 창업을 더욱 활성화해 교내 스타트업의 해외 시장 진출을 촉진할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 계획이다. 투자자, 연구기관, 대학, 기업, 시장을 아우르는 해외 창업 생태계와 교내 스타트업을 직접 연결하는 글로벌 콘퍼런스를 개최해 창업기업 네트워킹을 더욱 강화할 생각이다. CES를 포함해 해외에서 열리는 딥테크 및 주요 기술 관련 행사에 고려대 단독으로 스타트업 전시관을 마련하는 등 홍보 전략을 고도화할 방안을 짜고 있다. 이를 통해 한국 스타트업이 세계적인 투자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아 막대한 투자금을 유치하는 동시에 해외 딥테크 기업과 힘을 합쳐 성과를 낼 수 있는 전략과 정책을 펼 계획이다. 해외 시장을 그저 경험하는 수준에 머무르는 데서 나아가 세계 수준의 경쟁력을 가진 중견 업체로 도약할 수 있도록 판로 개척도 지원하겠다.” ―크림슨창업지원단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고려대와 크림슨창업지원단의 가장 큰 목표는 ‘대학이 발굴하고 육성한 스타트업이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게 성장, 발전하도록 돕는 것’이다. 연구기술 기반 창업 지원을 받은 스타트업이 해외에 진출해 시장에서 성과를 만들며 결국에는 나라 경제 성장에 기여하도록 도울 생각이다. 글로벌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해외 투자 유치에 힘을 쏟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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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16명 살해범의 ‘억울한’ 북송

    2022년 대선을 몇 달 앞두고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전화를 받았다. “북한 전문가로서 문재인 정부 시기에 벌어진 북한 어민 북송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내게 물었다. 당시 그는 윤석열 대선 캠프의 영입 1호였고, 안보 분야 이슈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북송 사건을 더불어민주당을 공격할 적합한 소재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북송된 북한 어민 두 명이 무고하다고 믿는 듯했다. 그래서 이런 취지로 대답을 했다. “그들이 정말 동료 16명을 살해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가. 모든 증거는 현 정부에 있는데 무고한 어민을 북송했다고 공세를 폈다가 감당할 수 있는가. 청와대의 전화 한 통에 나포에 참가했던 군인들과 조사에 참가했던 국가정보원, 국방부, 경찰 조사관 등 수백 명이 일제히 무고한 이를 북송하는 반인륜적 범죄에 동참해 입을 닫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대선에서 내걸 공약이 얼마나 많은데, 굳이 16명을 죽인 흉악범 인권 문제를 전면에 거는 게 바람직한 것인가. 집권해서 재조사했을 때 이들이 무고한 어민이었다면, 그것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이니 그때 가서 단죄해도 늦지 않다.” 윤석열 캠프는 대선 기간엔 이 사건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집권하자마자 이 사건부터 꺼내 들었다. 대통령실은 북송 사진들을 공개하면서 “용납할 수 없는 반인륜적, 반인도적 범죄”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국민의힘이 만든 ‘국가안보문란 실태조사TF’의 한기호 위원장은 “16명을 살해했다는 것은 북한이 탈북 브로커를 송환하기 위해 거짓말한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부와 집권당의 누구도 이들이 흉기로 하룻밤 새 동료 16명을 잔인하게 살해한 흉악범이라고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지금도 문재인 정부가 무고한 탈북 어민들을 강제 북송한 것으로 믿고 있다. 이들의 송환 결정에 참가한 문재인 정권 안보라인 핵심 인사들에 대한 결심 공판이 마침내 지난달 13일 열렸다. 대통령 구속 사태 속에서 사람들의 이목도 끌지 못했다. 검찰은 정의용 전 국가안보실장과 서훈 전 국정원장에겐 징역 5년을, 노영민 전 대통령비서실장에겐 4년을, 김연철 전 통일부 장관에겐 3년을 구형했다. 대통령실까지 나서 반인륜적, 반인도적 범죄라고 규탄했던 것에 비하면 시시한 구형이다. 이달 19일에 열릴 1심 선고에서 북송을 범죄로 볼 것인지, 통치 행위로 볼 것인지가 판가름 날 것이다. 결심 공판 이전의 재판들은 모두 비공개로 진행됐다. 국가 안보와 관련한 기밀 사항 보안이 이유였다. 검찰은 북한 어민의 나포 과정과 진술 조서, 북한 통신 감청 기록 등을 무려 2년이나 샅샅이 살펴보고, 수많은 참고인 조사도 했다. 그럼에도 이들이 16명을 살해한 자들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검찰 공소장엔 “탈북민들은 탈북 과정에서 범죄를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우리 헌법과 법률에 따라 공정한 재판을 받고 죄책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적시돼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을 왜곡한 것이다. 북송된 흉악범들은 탈북 과정에 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다. 조업 중에 동료들을 죽였고, 일당 중 한 명이 체포되자 도주한 것이다. 이들이 한국으로 오려고 했던 것도 아니다. 한국 해군과 조우하자 이틀이나 도주했고, 결국 경고사격과 특수부대의 선상 진입으로 제압돼 체포됐다. 그러자 할 수 없이 귀순 의사를 밝혔을 뿐이다. 특대형 흉악 범죄를 저지르고 도주한 자들이라 해도 충분히 조사하지 않고, 국민 모르게 서둘러 북송하려 했던 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 맞다. 흉악범도 재판 받을 권리가 있다는 주장도 타당하다. 다만 모든 물증을 인멸한 흉악범들이 남한에서 유죄 판결을 받을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이들 이전에 북한에서 흉악 범죄를 저지르고 한국에 입국한 탈북자가 23명이나 되지만 이 중 우리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문제는 북송 어부들이 무고한 듯 몰아갔던 정부와 집권당의 그 누구도 “그들이 살인자는 맞지만, 그럼에도…”라고 솔직히 말하는 이가 없다는 것이다. 이들이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돼 우리 동네에 살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도 국민들이 “집권하자마자 16명을 살해한 희대의 살인자들의 인권 문제부터 챙긴 윤석열 정부가 훌륭하다”고 했을까.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5-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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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차 밀던 북한군, 외제차 복원 달인으로 거듭나다 [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1993년 북한군에 입대한 임충익 씨는 제대할 때까지 10년 내내 ‘삽질’만 했다. 10년 동안 휴가로 집에 간 적은 단 한 번. 그것도 사흘뿐이었다. 10년 동안 군복을 입고 있었지만 사격을 한 것은 훈련에서 실탄 20여 발을 쏴 본 것이 전부다.임 씨 사례는 예외적이진 않다. 북한군에는 임 씨처럼 군인 임무보다는 제대할 때까지 삽질만 죽도록 하는 청년이 많다. 임 씨는 그 중 한 명이었을 뿐이었다.그가 처음 입대한 부대는 815훈련소(평양방어사령부)였다. 신병 훈련을 마치고 대대에 배속되자마자 평양-향산 고속도로 공사 현장에 나갔다. 공사판에선 돌을 나르고 교각을 세웠다.일이 힘든 것보다는 배고픈 것이 더 견디기 어려웠다. 옥수수밥에 염장(鹽藏) 무 반찬, 소금으로 간을 맞춰 멀겋게 끓인 시래기국만 먹어야 했다. 돌도 삭인다는 18세 나이인지라 눈을 뜨고 있는 시간이면 먹을 것만 머릿속에 떠올랐다. 1년 넘게 공사를 마치고 돌아오니 대대가 해산됐다.두 번째로 배속 받은 부대에서는 금강산발전소 건설 현장을 나갔다. 부대는 금강산댐에서 원산까지 연결하는 길이 45㎞의 도수(導水)터널을 뚫는 일을 맡았다. 물길이라 하지만 바닥 폭 15m, 천정 폭 10m, 높이 11m의 어마어마한 굴이었다. 유사시 북한군 기계화 군단이 폭격을 피해 원산까지 이동할 수 있을 정도였다.임 씨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발파(發破) 뒤 돌을 광차(鑛車)에 실어 굴 밖으로 나르는 일을 했다. 공사 현장이 깊은 산골에 있는 데다 외출도 하지 못하고 갱 안에서만 살다 보니 사회에서 ‘고난의 행군’이 시작돼 숱한 사람이 굶어 죽은 것도 알지 못했다.당시 금강산발전소 건설 군인들에게는 매일 안남미 1kg이 식량으로 공급됐다. 안남미(米)는 영양가가 낮아 빨리 허기가 지긴 했지만, 그래도 정량대로 병사들에게 공급됐다면 배고픈 고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부대로 공급된 식량을 간부들이 다 빼돌려 일반 병사들은 늘 허기져 있었다. 반면 대대장이나 정치지도원 같은 간부들은 피둥피둥 살찐 얼굴이 늘 시뻘겋게 돼 돌아다녔다. 부하들 식량을 빼돌려 고기와 술로 바꿔 먹었던 것이다.안전장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채 갱내에서 일하다 보니 사고도 잦았지만 다행히 임 씨는 부상을 당하진 않았다. 한번은 돌을 실은 광차를 몰고 나오는데 뒤에서 천장이 무너지는 아찔한 사고도 있었다.터널 건설 현장에서 사고로 제일 많이 죽는 부대는 발파 작업을 담당한 공병국(工兵局)이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니 공병국 소속 군인들은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살았다. 저녁이면 민가를 습격해 무자비하게 물건을 훔쳐 오다 보니 군인들 사이에서 공병국은 ‘화적떼’라고 불렸다. 금강산발전소에서 2년 동안의 일을 끝내니 또 부대가 해산됐다.세 번째로 배속 받은 부대가 간 곳은 황해남도 과일군이었다. 과일군은 군 전체가 하나의 과수농장으로 전체 경지 면적 70%가 과수단지다. 주로 평양에 사과, 배, 복숭아, 감을 공급한다. 과수원 둘레가 40km에 이르는 곳도 있다.이곳에서 임 씨는 병실을 짓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때까지의 삶에 비하면 훨씬 편했다. 과일군에 간 이유는 어쩌면 공사를 하느라 수고했으니 잠시 쉬라는 의미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배고픔은 여전했다.영양실조에 걸린 군인들은 농약을 잔뜩 친 과일을 익기도 전에 따먹다 죽기도 했다. 그렇더라도 가을에 과일을 실컷 먹을 순 있었다. 애로는 땔감이 없는 것이었다. 나무뿌리를 힘들게 캐서 병실 난방을 해야 했다. 이곳에서 2~3년 있다가 네 번째로 배속된 곳이 4군단 125사였는데, 새로 만들어진 방사포부대였다. 황해도 구월산 주변 골짜기마다 병실만 짓다가 2003년에 제대했다.부대를 옮길 때마다 새로운 병사들과 만났기에 한 부대에만 있다가 제대한 군인보다 훨씬 힘들게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다행히 노동당에 입당했으니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당시엔 10년 동안 군복무를 하고도 입당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두 번째로 다행인 점은 그나마 군 복무가 10년으로 마무리 된 것이다. 고난의 행군 시기, 많은 청소년이 굶어죽어 신병 보충이 여의치 않자 김정일은 1997년에 군복무 기간을 13년으로 늘렸다.하지만 이는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17세에 집을 떠나 30세까지 군에 있게 된 고참 병사들이 인근 부락에서 결혼할 여자를 찾아 동거하기 시작했다. 군율(軍律)이 바닥에 떨어지는 등 부작용이 커지자 김정일은 2002년, 군복무 기간을 다시 10년으로 줄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임 씨도 2006년까지 13년간 군복무할 뻔했다.● “아들아, 남조선에 가자.”고향인 청진에 돌아가니 부모님이 무척 노쇠해진 것이 눈에 띄었다. 그는 과일군에 근무할 때 딱 한 번 집에 갔다. 그것도 휴가가 아니라 탈영한 병사를 잡으려 간 사흘간의 공무 집행이었다. 군인이 휴가를 받아 집에 갔다 오면 부대에 뭐든 배낭 한가득 들고 귀대해야 했기에 임 씨는 집에 부담을 주기 싫어 가지 않았다.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임 씨 아버지가 그에게 말했다.“우리는 무조건 남조선에 가야 해. 너는 결혼하지 마. 애가 생기면 못 가.”처음엔 무슨 소리인가 했다. 알고 보니 아버지는 그가 군에 간 사이에 중국에 가서 3년이나 살다가 왔다. 임 씨 부친은 중국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고 1950년대 말 대기근을 피해 북한으로 건너왔다. 그러다 보니 중국에 친척이 많았다.중국에서 건너온 사람은 출신성분이 좋지 않기 때문에 좋은 일자리를 잡기 어려웠다. 임 씨 부친도 청진조선소 산하 군함부품공장 노동자로 일했다. 집은 도시 변두리에서 대다수 노동자가 살던 ‘하모니카주택’이었다. 하모니카주택은 주택 하나를 단칸방 대여섯개로 쪼갠 형태를 말하는데 사생활 보호는 거의 되지 않았다.이곳에서 1976년 임 씨가 태어났고 4년 뒤 남동생도 생겼다. 임 씨가 군복무를 할 때 하나 있던 누나는 병으로 숨졌다. 임 씨 학교생활은 평범했다. 수학처럼 원리가 있는 과목은 잘했지만 혁명역사처럼 무작정 날짜를 외우는 과목은 정말 싫었다.김일성 생일 때 당과류 1kg을 선물로 받으면서 몇 번이고 고맙다며 김일성 초상화를 향해 인사하는 일도 싫었다. “사탕과자는 식료품공장 사람들이 만드는데 내가 왜 원수님께 인사를 해야 하냐”고 했다가 아버지에게 끌려가 혼난 적도 있었다.가정환경 자체가 북한에 충성하며 사는 집안도 아니었고, 군에서 세뇌를 당하며 충성심을 키우는 부대가 아닌 건설부대에 있었던 터여서 임 씨는 한국에 가자는 아버지 말에 분노하진 않았다. 다만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탈북을 왜 해야 하는지 의문은 있었다.중국에 있는 아버지 친척들이 도와줘서 임 씨 집안은 먹고살만 했다. 그가 군에 간 사이 동생은 목선을 사서 어업을 해서 돈을 잘 벌었다.제대 후 임 씨의 첫 직장은 철도국 소속 짐함공장이었다. 당시 북한에는 컨테이너를 뜻하는 짐함이 많지 않았다. 직장생활은 무난했다. 2년쯤 지난 2006년 임 씨는 철도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졸업하면 철도 간부가 될 수 있었다. 이렇게 3년쯤 사회생활을 하면서 임 씨는 점점 북한의 현실을 깨닫기 시작했다.이때 감정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더러워서 못 살겠다’였다. 동생이 뱃일로 돈을 많이 벌다 보니 그의 집엔 보위부나 안전부 같은 곳의 정복 입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노동당 행정기관 간부들까지 수시로 들락거리며 돈을 뜯어갔다. 많이 벌면 많이 번 만큼 뜯겼다. 뇌물을 주지 않으면 각종 보복이 뒤따랐다.임 씨가 이 같은 현실에 분노할 때마다 아버지는 “너희처럼 부지런한 애들은 남조선에 가면 무조건 잘산다”고 했다. 중국에서 3년 동안 살면서 아버지는 한국의 현실을 어느 정도 알게 됐던 것이다.어느 날 억울한 일을 당해 화가 폭발한 임 씨가 아버지에게 말했다.“좋아요. 남조선에 갑시다. 그런데 어떻게 가면 되나요?”맏아들의 동의가 없어 결행하지 못하던 아버지는 화색이 돌아 대답했다.“네 동생 배로 가면 제일 쉽다. 배를 타고 곧장 나가면 일본인데 거기까지 가면 성공인 거야.”어쩌면 남동생이 배를 타게 된 것도 이날을 예견한 아버지의 기획이었을지 모른다.● 동해바다를 가른 기적의 6일동생이 소유한 목선은 당시 북한 일반 목선에 비해 훨씬 컸다. 10명도 탈 수 있었다. 탈북 준비를 하면서 동생은 배에 엔진도 2개 장착했고 연료도 몰래 수백 kg을 실어 놓았다. 집에 있던 돈을 다 달러로 바꾸니 2000달러 정도 됐다. 당시 북한에선 엄청난 액수였다. 아버지는 “이 정도 돈이면 중국으로 탈북하기에도 충분하지만 배가 있으니 바다를 통해 바로 가는 것이 제일 쉽다”고 했다.2007년 5월 27일 임 씨 형제와 부모는 탈북 길에 올랐다. 임 씨 형제가 배를 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평소에 동생 일을 도와주면서 자주 배를 타려고 드나들었기에 항구 초소를 통과하기 쉬웠다. 연로한 부모님은 다른 곳에서 기다리게 했다.바다로 나갔다가 유턴해서는 밤에 부모님을 싣고 다시 떠났다. 31세 임 씨와 27세 동생은 무서운 것 없는 나이였다. “어떤 놈들이 추격하면 다 죽여 버리고, 안 되면 우리가 죽으면 되지.” 각자 품속에는 최후에 쓸 쥐약도 한 봉지씩 있었다.청진항에서 떠나자마자 나침반을 110도에 맞추고 최고 속력으로 항해했다. 목적지는 일본 니가타(新潟)항이었다. 레이더에 걸리지 않는 목선이라 추적은 없었지만, 항해가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몇 시간 항해하니 목선이 버티기 어려울 정도로 파도가 높아졌다. 3일쯤 지났을 때 태풍도 만났다. 집채만한 파도 앞 목선은 가랑잎이나 다름없었다. 이들은 구명조끼도 입지 않고 있었다. 동해 한가운데서 배가 뒤집히면 구명조끼는 별 의미가 없기도 했다. 다행히 몇 년 동안 배를 탔던 동생은 침착했다.“형, 물풍(풍닻·깔대기 모양 어선용 닻)만 든든하면 배가 뒤집히지 않으니 괜찮아.”목숨을 걸어야 하는 노정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버틴 것일 수도 있다.출발 닷새째인 6월 2일 새벽 멀리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보자마자 일본이란 것을 알았다. 북한 해안은 그렇게 밝지 않았다. 배를 몰아 해안으로 접근했다. 방파제가 보여 배를 댔다. 뭍에 발을 들이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였다.“여보시오. 우린 북한에서 왔는데 경찰을 불러 주세요.”말은 통하지 않아도 자신들 행색을 보고 놀랄 줄 알았는데, 행인들은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일본 사람들이 북한 목선을 본 적도 없고, 이런 상황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안 되겠어. 좀 더 큰 항구를 찾아갑시다.”다시 배를 띄워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다. 한참을 가는데 갑자기 위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다. 쳐다보니 헬기 두 대가 따라오고 있었다. 좀 있으니 해양순시선도 나타났다.순시선 유도를 따라 아오모리(青森)현 후카우라(深浦)항에 들어갔다. 경찰차를 타고 아오모리경찰서로 이송돼 이틀쯤 조사를 받고는 헬기로 도쿄로 옮겨졌다. 도쿄로 이송될 때 언론사 헬기들이 따라붙어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을 보고 임 씨는 “우리가 참 대단한 일을 했나 보다” 생각했다.도쿄에서 불법체류자 수용시설에 수감됐다. 그래도 침대도 있고 방도 깨끗했다. 한국에서 나온 사람이 임 씨 일행을 맞이했다. 10여 일을 더 조사받았다. 품속에 넣고 온 2000달러는 압수된 뒤 신권으로 바꿔 받았다. 배는 포기각서를 써 줬는데 그 후 어떻게 됐는지 알지 못한다.조사 시작부터 이들은 최종 목적지는 한국이라고 한결같이 말했다. 어떤 절차를 거쳤는지는 모르지만 임 씨 가족은 6월 16일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북한을 떠난 지 20일 만에 서울에 도착했다.● “자동차 장인이 되겠다.”2007년 9월 16일 조사와 하나원 생활을 마친 임 씨 가족은 한국 사회에 정착하게 됐다. 부모님과 동생은 부산에 집을 받았지만, 임 씨는 가족과 떨어져 마산에 정착하는 길을 택했다. 한국에 왔으니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나 보겠다는 생각이 컸다.마산을 택한 이유는 공업단지가 많아 일자리가 많다고 들어서였다. 정부에서 내준 임대주택에 도착해 가구 몇 개를 사니 수중에 있던 정착금 300만 원이 하루만에 없어졌다.마산에 도착한 날부터 생활정보지에서 일자리를 알아봤다. 그리고 이튿날 주유소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었다. 신분증도 나오기 전이어서 주유소 사장은 경찰서에 전화해 그의 신원을 알아본 뒤 일해도 좋다고 했다.주유소에서 3개월쯤 일했을 때 탈북민 정착지원기관 남북하나재단 홈페이지에 GM대우 수원서비스센터에서 탈북민 직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봤다. 이곳에서 일하려면 운전면허증이 필수라고 해서 곧바로 운전면허학원에 등록해 면허증을 땄다. 다음날 수원으로 올라갓다. 올라오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내 팔자는 왜 이렇게 바퀴와 인연이 있을까. 북한에서는 광차를 끌다가, 포병부대에서는 방사포차를 다루다가, 제대해서는 철도에서 일했는데 이제 자동차 바퀴를 다루게 됐네….”서비스센터에서 1년 2개월을 일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업무 만족도는 점점 떨어졌다. 가장 큰 불만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서비스센터에서 오래 일한 사람들을 보니 월급도 그리 많이 오르는 것 같지 않았다. 자동차 부품처럼 매일 똑같은 일하면서 늙어가고 싶진 않았다.“나만의 평생 직업을 찾아야겠다. 북한군에서 10년 동안 별 일을 다 해봤는데 몸으로 버티는 거야 못할까” 하는 자신감도 있었다.이리저리 고민한 끝에 그가 정한 아이템은 출장 자동차 광택 사업이었다. 서비스센터에서 일하면서 대형 센터가 처리하지 못하는 자동차 외장 관리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이 분야 장인으로 인정받아 봐야겠어.”2009년 4월 단돈 600만 원으로 출장 광택 일을 시작했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 출장 광택사업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홍보가 매우 중요했다. 당시 이 업종의 주요 홍보 수단은 전단지였다. 임 씨도 처음에 전단지를 열심히 돌렸지만 “요즘 같은 인터넷 시대에 왜 전단지를 뿌리고 있지”라는 생각이 차츰 들었다.그는 걸음마를 떼던 인터넷 검색광고 시장에 눈을 돌렸다. 홈페이지를 만들고 열심히 홍보한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일감이 끊임없이 몰려왔다.새벽 4시부터 오후 9시까지 그야말로 몸을 갈아 넣으며 일했다. 퇴근할 때는 온몸에 힘이 남아 있지 않았지만 주머니에 든 두툼한 현금 뭉치를 만지며 이를 악물었다. 2년 동안 열심히 일하니 돈도 모아지고 기술도 늘었다. 모은 돈으로 2011년 용인지식산업센터에 오프라인 매장을 열었다. 홍보 방법도 잘 터득해 사무실에 앉아 전국에 오더를 뿌리는 일도 했다.사업이 잘되니 무서움이 사라졌다. 광택만 내는 것이 아니라 광택 및 세차 용품도 팔아 보자고 생각했다. 미국의 한 자동차용품 회사와 총판 계약을 맺어 온라인 매장을 열고 직원도 뽑았다. 대실패였다. 총판사업에 손을 댄 순간 들어오는 돈보다 나가는 돈이 더 많았다. 번 돈을 다 쏟아붓다 마침내 손을 들었다. 첫 시련이었다.● 강남에서 새로 시작하다직원도 하나둘 떠나고 통장 잔고도 텅텅 비어 갔다. 임 씨 가슴에는 피눈물이 고였다. 그는 홀몸도 아니었다. 사업이 잘 나가던 2012년 결혼을 한 아내는 임신을 했다. 어떻게 하면 재기할 수 있을까만 고민할 때 한 직원이 “용인은 시장이 한정돼 있으니 서울 강남에서 새로 시작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솔직히 임 씨는 강남을 거의 몰랐다. 그러나 그곳에선 새로운 기회가 생길 것이라는 희망이 솟아났다. 2013년 그는 대출금 2000만 원으로 강남에 구멍가게를 차렸다. 가게 문을 여는 날 결심했다.“3년 안에 이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게 만들 거야.”그때부터 가게에만 붙어살았다. 집에는 1주일에 한 번 옷을 갈아입기 위해 들렸다. 경쟁력은 저렴한 가격이었다. 강남에서 생존할 수 있는 길은 박리다매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 뼈를 갈아 넣어야 했다. 고객과의 약속시간을 지키기 위해 하루에 몇 시간만 눈을 붙이고 작업했다. 직원도 없이 홀로 버티다 관절도 망가졌다.하지만 그런 시절을 이겨내니 점점 고객이 늘었다. 2년 뒤 가게 앞에 줄을 선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눈물이 났다. 눈물을 몰래 훔치고 공구를 잡았다.3년쯤 지났을 때 강남구 대치동에 마음에 드는 가게가 매물로 나왔다. 그러나 보증금 1억 원이 없었다. 속을 썩이고 있을 때 거래처 사장이 선뜻 1억 원을 빌려줬다. 그동안 봐온 그의 성실함과 약속은 무조건 지키는 신용을 믿었던 것이다. 대치동에 옮겨온 뒤 매출이 급격히 늘었다.번 돈 대부분을 재투자했다. 기술자들을 영입했고 다양한 장비와 설비를 마련했다. 그의 업체는 외장 수리, 도색, 광택 코팅, 휠 복원, 덴트(찌그러짐) 복원 분야에서 솜씨 좋은 가게로 소문이 났다. 대표 서비스는 오래된 자동차를 새 차처럼 복원하는 ‘자동차, 새 차 만들기’ 프로그램이다.처음부터 잘 풀린 것은 아니었다. 가장 큰 위기는 고객 응대였다. 북에서 온 그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이른바 ‘진상 손님’을 상대하는 법이었다. 이 때문에 혼자서 많이 울기도 했다. 거액을 합의금으로 지불하고 화가 나 문을 닫을까도 고민했다. 그러나 이제는 고객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속상한 일을 여러 번 겪으면서 마인드를 바꿨습니다. 서비스 일은 맞고 틀리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사업 초기에 제가 많이 모자랐던 겁니다. 찾아와 줘서 고맙고, ‘저 사람은 저런 것’임을 내가 인정해 주면 된다고 생각하니 다툴 일이 없어졌습니다.”두 번째 위기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때였다. 코로나19로 외출이 줄어드니 자동차 수리 일감도 줄었다. 주변에서 문을 닫는 동종 업체가 늘어났다. “코로나19 시기에 매출이 30% 떨어진 업소는 3개월 만에 문을 닫고, 10% 떨어지면 1년 안에 문을 닫더군요. 저도 초기엔 잠시 위축이 됐지만 이게 기회일 수가 있다고 봤습니다. 이 업종은 단골이 중요한데 폐업한 업체 단골을 우리 손님으로 만들어야겠다고 판단했습니다.”코로나19 기간에 공격적으로 마케팅을 펼쳤다. 전문 모델까지 써서 홍보 영상을 제작했고 온라인 광고도 더 늘렸다. 자본금이 적은 그에게 공격적인 마케팅 결심은 쉽지 않았지만 과거 온라인 홍보를 해본 그의 경험상 확신이 들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점점 고객이 늘었고 매출도 늘었다.대출 2000만 원으로 시작한 강남 생활 13년 만에 기술자 3명을 두고 연매출 10억 원을 찍는 사장님이 됐다.● “만족은 제 안에 있습니다.”임 씨 가게 앞에는 최고급 외제차가 즐비하다. 그는 자동차 외형 복원 업계 ‘달인’으로 소문이 났다. 하지만 그가 탈북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자동차 전문가로 많은 매체와 인터뷰를 했지만 신분을 밝힌 적도 없다.“탈북민인 게 장사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한국에서 탈북민이 성공하면 국가 지원을 받아 됐다고 보는 시선도 어느 정도 있기 때문에 일부러 북한에서 왔다는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사업이 잘 되면서 프랜차이즈로 확장하라는 제안도 받았지만 거절했다. 돈을 많이 번 사장 보다는 인정받는 장인이 되고 싶은 꿈이 더 크다. “가장 신경을 쓰는 분야가 마무리입니다. 작업 후 남는 미세한 결함을 수정하는 작업은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제가 직접 합니다. 이 단계가 품질 차이를 만듭니다. 규격화가 불가능한 이 업종에서 매장만 확대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습니다.”같은 부모님 밑에서 같은 세계관을 갖고 자라서인지, 동해안 한 도시에서 바다 일에 종사하는 임 씨 동생도 성공했다. 직원 수십 명에 연매출 수십억 원인 사장님이 됐다. 집도 두 채를 사서 부모님을 모시고 있다. 그렇게 되기까지 동생이 흘린 눈물도 임 씨 못지않았다.쥐약을 품고 태풍을 헤치며 닷새 동안 동해를 가로질러 새 삶을 찾은 임 씨 형제는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땅에 든든히 닻을 내렸다.“운도 노력하는 사람에게만 찾아온다고 생각합니다. 늘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고민하고 또 고민하면 길이 생깁니다.”임 씨는 아들만 넷을 둔 아버지다. 맏이가 12살, 막내가 5살이다. 가족은 그를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가장 큰 힘이다.“자식들이 잘 성장할 때까지 열심히 돈을 벌고 이후엔 조용한 시골에서 살고 싶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제 그릇이 보이더군요. 그릇만큼 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강남에서 비싼 외제차를 다루다 보니 많이 가진 사람을 많이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지금껏 상대하면서 깨달은 것은, 내가 만족하면 그게 성공이라는 것입니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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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북한 대사령의 비밀

    시국이 이 모양인지라 올해는 신년 특별사면이 사라졌다. 내심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큰 불운이 아닐 수 없다. 북한에도 특별사면 제도가 있다. 이를 대사령(大赦令)이라고 부른다. 다만 북한 대사령은 새해를 맞아 하지는 않고, 최대 명절로 꼽는 김일성 김정일 생일이나 광복절, 정권 수립일 등에 발표한다. 그런데 북한 대사령의 비밀을 알고 나면 경악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북한에서 특별사면 기준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교화소에서 사면받고 나온 사람도 자신이 왜 풀려났는지 잘 모른다. 전거리교화소에 6년 동안 수감된 탈북민 권효진 씨는 교화소에서 두 번째로 높은 ‘죄수 간부’인 ‘총지령공’을 지내면서 대사령의 두 가지 비밀을 알게 됐다. 첫 번째 비밀은 대사령이 죄인들에게 주는 혜택이라기보다는 교화소 간부들에게 주는 특혜 성격이 더 크다는 것이다. 북한 대사령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政令)으로 발표되지만 이는 형식에 불과하다. 대사령은 사회안전성이 김정은에게 “장군님의 위대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올해 태양절에 30만 일(日)을 빼서 혜택을 주려고 합니다”는 식의 제안서를 올리고 이를 비준받으면 집행한다. 5나 10으로 끝나는 정주년(整週年·꺾어지는 해)에는 대사령 사면일이 평년의 두 배쯤으로 늘어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제안서가 몇 명을 사면시킨다는 것이 아니라 몇만 일을 빼겠다고 돼 있다는 것이다. 승인이 떨어지면 전국 교화소들에 수감자 수에 비례하는 일수(日數)가 할당된다. 가령 전거리교화소가 1만 일 사면 권한을 받았다고 하자. 이를 기초로 간부들이 일수를 배분한다. 보통 7명의 주요 간부가 직급에 따라 사면일을 나눠 가진다. 교화소장, 부소장, 당 비서가 1000일씩 가지는 경우 보위지도원, 보안과장, 간부지도원, 후방과장은 500일씩 가진다. 이렇게 나눠 받은 사면권은 각자 알아서 사용한다. 교화소장은 특정인에게 몰아줘서 3년 형기를 단축시켜 줄 수도 있고, 다섯 명에게 감형 200일씩을 나눠줄 수도 있다. 간부들은 뇌물과 특정인과의 관계 등에 의해 사면을 해줄 사람을 선택한다. 간부들이 나눠 갖고도 남는 일수는 다시 도강죄(渡江罪) 몇 %, 인신매매죄 몇 %, 사회불량자 몇 % 하는 식으로 할당한다. 죄수들은 교화 생활을 잘하면 사면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지만, 실은 바깥에 있는 가족의 뇌물 액수에 사면이 달려 있는 경우가 많다. 북한 대사령의 두 번째 비밀은 더 끔찍하다. 교화소 죄수들은 사회안전성에 소속된 ‘노예’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죽어 가며 생산한 식량이나 석탄 등으로 사회안전성과 평양의 지배계층이 먹고산다. 갑자기 대사령이 떨어져 많은 죄수가 석방된다는 것은 노예 수가 줄어든다는 의미이고, 이들이 만들어 내던 생산물도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사령으로 죄인 수천 명이 줄어들면 사회안전성은 즉각 이만큼을 충원하려 한다. 그래서 대사령과 비슷한 시기에 각 안전부에 죄수 수를 할당하는 비밀 지시를 내려보낸다. 그러다 보니 대사령이 예고된 해엔 단순 범죄를 저질러도 중형을 받아 교화소를 가게 된다. 북한의 대다수 죄인은 자기 형량이 어떻게 결정되는지 모른다. 일반인은 법조문을 볼 수 없고 변호사도 없으며 법정 다툼도 불가능하다. 판사가 판결하는 대로 형기가 결정된다. 그런데 같은 액수를 훔친 도둑이라고 해도 어떤 해엔 3개월 노동단련형으로 끝날 수도 있지만, 대사령이 있는 해에 걸리면 3년 형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북한에선 내부적으로 이 시스템을 교화 정책이라고 부른다. 교화 정책의 중요한 목표는 죄인, 즉 노예 숫자를 일정하게 맞추는 것이다. 그래야 교화소 생산량이 들쑥날쑥하지 않게 맞춰지고, 평양 지배계층이 뜨뜻한 집에서 배급을 받으며 살 수 있는 것이다. 이 시스템은 김일성 때부터 3대째 이어지고 있고 김정은도 당연한 듯 활용한다. 자신을 지키는 사냥개라고 할 수 있는 보위성과 안전성에 충분한 인센티브를 줄 돈이 없으니 대사령이라는 제도로 수감자들의 운명과 복역 날짜를 활용해 먹고살 수 있게 허락한 것이다. 올해는 광복 및 노동당 창건 80주년이다. 이를 계기로 대규모 대사령이 떨어질 가능성도 높다. 북한 사람들에겐 2025년이 그 어느 해보다 조심스럽게 살아야 하는 위험한 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5-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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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연 속 여유… 이바라키에서 즐기는 특별한 ‘라운딩’

    ‘골프 천국’ 일본 이바라키(茨城)현이 한국인 곁에 성큼 다가왔다. 지난해 12월 청주공항과 이바라키공항을 잇는 에어로케이(Aero K) 전세기가 취항하면서 올 3월 4일까지 주 3회(화, 목, 토요일) 운항하게 된 것이다. 동남아 골프 여행을 계획 중이라면 저렴한 가격과 온화한 날씨가 장점인 이바라키현도 고려해 볼 만하다. 청주에서 비행기로 2시간이면 도착한다.● 알고 보면 ‘골프 천국’한국인에게 이바라키현은 생소할지도 모른다. 일본 간토(關東) 북부에 있는 이바라키현은 도쿄 도심에서 북동쪽으로 가깝게는 30km, 멀게는 150km 떨어져있다. 태평양에 접한 데다 강, 호수, 산 같은 자연 자원이 풍부하다.그러나 무엇보다도 골프를 즐기는 한국인에게는 훌륭한 경관과 시설을 자랑하는 골프장과 사시사철 춥지않은 날씨, 그리고 상대적으로 싼 비용이야말로 이바라키현의 장점으로 다가올 것이다.한국 기온이 영하권을 기록하며 눈이 내리는 12월에도 이바라키현의 평균기온은 2∼10도를 유지한다. 가장 추운 1, 2월에도 평균기온은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다. 눈도 거의 내리지 않음은 물론이다.서울 면적(약 605㎢)의 10배 정도에 인구 280만여명이 거주하고 있는 이바라키현에는 골프장이 114개나 있다. 이 중 국제적인 골프 대회를 유치할 수 있는 수준급 골프장도 10개가 넘는다. 이바라키현 남쪽은 일본 최대 간토평야이고, 북쪽은 산악지대, 동쪽은 태평양이다. 그만큼 지형적으로 다양하면서도 절경을 만끽할 수 있는 코스가 산재해 있다.넓고 평탄한 페어웨이에서 태평양을 바라보며 시원하게 스윙해 보고 싶다면 미국까지 갈 필요가 없다. 또 골프장마다 다양한 해저드가 절묘하게 배치돼 있어 전략적인 어프로치를 할 수도 있다. 초보자가 즐길 수 있는 코스도 풍부하다.최고 장점은 가격이다. 지난해 12월 방문한 58년 전통의 미토(水戸) 골프클럽은 평일에 점심과 카트 비용을 포함한 라운딩비가 5900엔(약 5만4000원)밖에 하지않았다. 주말에는 1만7000엔∼2만 엔(약 15만6000∼18만 원) 정도다. 놀랍게도 이 골프장은 이바라키현에서 비싼 축에 들어간다고 하니 다른 골프장은 얼마나 쌀지 가늠할 수 있다.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이 있지만 이 골프장은 해당하지 않는다. 페어웨이와 그린의 잔디 상태는 한국 고급 회원제 골프장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캐디가 없기 때문에 일행들이 서로에게 집중하며 대화도 할 수 있어 좋다. 조급하게 뒤따라오는 팀도 없어 느긋하게 라운딩을 즐길 수 있다. 미토역을 비롯한 주요 교통 거점에서 픽업 서비스를 제공하는 골프장도 적지 않다.● 쇼핑과 정원의 조화낮에 골프를 즐겼다면 밤엔 쇼핑을 즐기면 된다. 이바라키현청 소재지 미토시에는 북(北)간토지방 최대 쇼핑몰 ‘이온 몰 미토 우치하라’를 비롯해 쇼핑 인프라가 잘 마련돼 있다. 면세 슈퍼마켓과 의약품 매장을 둘러보다 보면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다.미토시는 낫토로 유명하다. 일본 낫토의 70%가 이바라키현에서 생산된다. 순창 하면 고추장을 떠올리듯 일본에서는 미토 하면 낫토다. 낫토에 거부감이 없는 사람이라면 낫토 문화의 정수를 만끽할 수 있다.세계적으로 인기 높은 일본 술인 사케를 좋아한다면 역시 이바라키현이 좋은 선택지가 될 수 있다. 유명한 쌀 생산지이며 좋은 물이 풍부한 이바라키현에서는 예부터 품질 좋은 사케가 만들어졌다. 현재 주조장(酒造場)은 35곳 있다. 일반인이 견학할 수 있는 주조장도 여러 곳이다. 대부분 전철이나 버스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쉽게 도착할 수 있다. 렌터카를 운전할 필요가 없으니 마음껏 마실 수 있다는 의미다.이바라키현 남부 아미(阿見)정에는 미국 서해안 콘셉트를 기반으로 만든 프리미엄 아웃렛이 있다. 일본 국내외 유명 브랜드 약 150개 점포가 모여 있어 특별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다.이 아웃렛은 또 다른 명물로 유명하다. 높이 120m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불상인 우시쿠대불(牛久大佛)이 바로 인근에 있어서다. 우시쿠대불은 1995년 세계 최고 최대 청동 불상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우시쿠대불은 그 자체로 ‘절’이기도 하다. 불상 내부에는 5층 건물이 들어서 있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85m 높이에 전망대가 있다.골프와 쇼핑이 만족스러웠다면 이바라키현이 자랑하는 일본 3대 정원에 드는 가이라쿠엔(偕樂園)을 찾아가 볼 시간이다. 1842년 에도(江戶)막부 시대 말기에 만들어진 가이라쿠엔은 한마디로 ‘꽃의 바다’라 할 수 있다. 겨울에는 꽃을 보기 어렵지만 2월부터 가을까지 매화축제, 벚꽃축제, 진달래축제 같은 각종 꽃 축제가 이어진다.일본 3대 폭포에 속하는 다이고(大子)정의 후쿠로다(袋田) 폭포는 ‘4번의 폭포’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폭포수가 네 번에 걸쳐 직하하는 장관에 더해 사계절 보지 않으면 진정한 멋을 느낄 수 없다 하여 붙은 별칭이다.이바라키현의 단점이라고 굳이 꼽자면 온천이 많지 않다는 점일 텐데 아예 없지는 않다. 북부 국영 히타치해변공원에 가면 지하 1504m 고대 지층에서 퍼올린 온천수로 이뤄진 아지가우라(阿字ヶ浦) 온천 노조미가 있다. 온천 인근에는 이탈리아 나폴리와 경관이 비슷하다고 해서 ‘동양의 나폴리’로 불리는 아지가우라 해수욕장이 있다. 태평양을 끼고 이어진 길이 1.2km 백사장이 눈부시다.● 이곳저곳 편리하게 옮겨 다니고…2010년 개항한 이바라키공항은 나리타나 하네다 공항만 알고 있는 한국인에게 일본 간토지역으로 가는 새로운 기착점이 될 수 있다. 충청도에서 도쿄로 가기 위해 굳이 서울까지 올라올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 크지 않은 지방 공항이지만 국제선과 국내선 모두 있어 간토 북부나 도호쿠(東北) 남부로 향하는 거점이 될 수 있다.도쿄와도 가깝다. 이바라키공항 앞에서 도쿄역까지 운행하는 직행버스를 탈 수 있다. 이 버스를 타면 도쿄 시내 어디든 100∼140분이면 갈 수 있다. 서울에서 하네다공항에 도착해 고속열차로 도쿄 시내까지 가는 시간과 큰 차이가 없다. 버스 요금은 어른 1650엔(약 1만5190원), 어린이 830엔(약 7650원)이다. 이바라키현 곳곳에는 도쿄를 잇는 수도권 철도인 쓰쿠바 익스프레스와 조반센(常磐線) 역이 있어 골프를 즐기고 도쿄로 이동하는 데 큰 지장이 없다.지난해 12월 3일 이바라키현 오미타마(小美玉)시 이바라키공항에서 열린 취항 기념식에서 강병호 에어로케이 대표이사는 “현재는 청주에서 떠나는 노선만 있지만 수요가 있다면 인천공항에서 이바라키공항까지 직항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오이가와 가즈히코 이바라키현 지사도 이날 “현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 중 한국인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고 방문객 수도 많아지고 있다”며 “직항 노선 취항을 계기로 한국인 관광객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말했다.이바라키현은 한국어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다. 기차 승용차 자전거 도보로 당일치기부터 3박 4일 일정까지 주요 관광지를 둘러볼 수 있는 최적의 코스를 제안해 준다.이바라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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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한열문학상’을 수상한 탈북청년, 영화감독으로 데뷔하다[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2024년 12월 14일은 탈북청년 석범진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 됐다.이날 이화여대의 아트하우스모모에선 그가 제작한 첫 독립 장편영화 ‘림시교원’의 시사회가 열렸다. 하지만 세상의 주목이 모두 대통령 탄핵이 선고될 국회에 쏠려 있던 터라 시사회는 썰렁했다. 취재 방문을 기대했던 기자들이 모두 불참하면서 기사도 한줄 나가지 않았다.영화 림시교원은 가까운 미래에 북한으로 교생실습을 간 남한의 대학생 소희가 최고지도자 초상화 분실사건에 연루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담았다. 석 씨는 시나리오부터 연출, 편집에 이르기까지 모두 담당하면서 2024년 한 해를 통째로 이 작품에 쏟아부었다.소란스러운 시국에 데뷔 무대를 망친 셈이라 억울한만도 했지만 석 씨는 의외로 담담했다.“그런 일이 있을 줄 모르고 시사회 날짜를 잡았지만, 하마터면 그것도 못할 뻔했습니다. 시사회가 열린 것이 어딥니까. 객석도 가득 찼고요. 영화를 보신 분들이 카메라 무빙이나 연출이 좋았다고 격려해 줘 힘이 납니다.”석 씨는 북한에서 오로지 김정일 시대만 겪었다. 김일성이 사망한 1994년에 태어나, 김정일이 사망한 2011년에 탈북했다. 한국에서 4명의 대통령을 겪었고, 조만간 다섯 번째 대통령을 보게 됐다. 북한에서부터 문학 소년을 꿈꿨던 그는 한국에 와서 여러 편의 소설과 수많은 시를 발표했다. 작품성도 인정받아 24세에 이한열문학상을 수상했다. 이후 연세문학회장, 연세예술원 영화학 1기 졸업, 영국 유학, 첫 장편영화 제작 등 적잖은 성과도 이뤄냈다. 이제 겨우 30세에 불과한 청년에게 앞으로 어떤 인생이 기다릴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30년 동안 쌓은 시련과 경험은 그를 버티게 해줄 든든한 뿌리가 될 것이다.● 김일성 사망 다음달에 태어나다석 씨는 1994년 8월 두만강 옆인 함경북도 무산에서 태어났다. 김일성이 사망한 지 한 달 뒤였다. 어머니는 김일성 장례식을 치르느라 더운 날씨에 여기 저기 다니며 울어야 했다. 그래서 늘 뱃속 아이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끼봐 걱정스러웠다.1995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고난의 행군’에 대한 기억은 없다. 가족들은 풀죽으로 끼니를 떼우면서도 외동아들인 그에겐 쌀밥을 해먹였다. 당시 4살 때였지만 흐릿한 기억으로 머릿속에 남아있다.비록 풀죽을 먹었지만 그의 집안은 북한에서 상당한 엘리트 집안이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독립운동 유공자 집안이었다. 할아버지는 중소기업 지배인을 지냈고, 할머니도 무산세관 직원이었다. 외가도 뒤지지 않았다. 외할아버지는 서울대를 다니다가 6.25전쟁 때 북한군에 입대한 뒤 낙동강전선에서 팔을 잃고 영예군인(상이군인)이 됐다. 북에서도 두뇌는 인정받았지만, 남쪽 출신이라 평양에서 살지 못하고 무산으로 내려와 무산공대 교수로 재직했다. 다만 외활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났기에 기억은 거의 없다.아버지는 출신성분이 우수한 자들만 선발되는 김일성 경호부대에 입대했다. 하지만 훈련 중 머리를 심하게 다쳐 낙향해야만 했다. 그리고 무산공대를 졸업한 뒤 전기공으로 일했다.그런데 석 씨가 커가면서 갖게 된 궁금증은 따로 있었다. “어머니는 무산공대를 나와 군 인민위원회 재정부에서 일했고, 큰 이모는 교사, 작은 이모는 의사인데도 왜 장마당에서 장사를 하고 있을까?”조부와 외조부 모두 마음만 먹으면 잘 살 수 있는 위치였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 고지식했다. 자식들은 부모덕을 보지 못한 채 각자 호구책을 찾아야만 했다.석씨는 소학교에 입학할 나이인 7세에 깊은 산골로 들어가 움막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산 속에 소토지(뙈기밭)를 일궜는데, 남들이 훔쳐가지 않게 가족들이 돌아가며 경비를 서야만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움막에서 아들에게 휴지로 쓰던 요리책으로 한글을 가르쳤다. 그래서 1년 늦게 학교에 들어갔는데도 공부는 남들보다 더 잘할 수 있었다.● 소학교 2학년때부터 쓴 시그의 소학교 때 기억은 온통 나쁜 일들로 채워져 있다.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갔다. 군에서 머리를 다친 후유증으로 뇌종양이 발병했고, 병이 심해지면서 반신마비와 전신마비를 겪다가 몇 달 뒤 사망했다.아버지의 병간호를 하면서 재산을 다 팔고 나중에는 집까지 팔게 됐다. 어머니는 허름한 집으로 이사해 돼지를 키우고 술을 빚었다. 석 씨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술통을 메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술을 팔아야 했다. 그래도 먹고 살기 너무 힘들었다.2006년엔 어머니가 그를 이웃집에 맡기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홀몸으로 어린 아들을 도저히 키울 자신이 없자, 돈을 벌겠다는 생각으로 떠난 것이다. 이후 석 씨는 할아버지 집에서 살게 됐다. 장손을 남의 집에 둘 수 없다며 그를 거둔 것이다. 지금까지 생생한 기억 하나가 있다. 소학교 정문에서 폭발물이 터진 일이다. 당시 그 일로 그가 다니던 무산소학교의 교장 딸을 비롯해 수십 명이 죽거나 다쳤다. 북한 당국은 이를 안기부의 소행이라고 했다. 그때 이후 석 씨는 남조선에 대한 두려움과 증오심을 갖게 됐다. 남조선이란 단어를 들을 때마다 폭발 현장에서 보았던 살점과 피비린내가 떠올랐던 것이다.순탄하지 않은 환경이었지만 석 씨는 꿈을 키워나갔다. 그의 첫 꿈은 화가였다. 그렇지만 그림을 가르치는 학생소년궁전 미술소조에 입학하려면 매달 쌀 10㎏과 당시 뇌물로 인기 많던 ‘고양이담배’ 2보루씩을 내야만 했다.결국 화가의 꿈을 접은 어린 소년은 소학교 2학년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동무’라는 제목의 시가 그의 첫 작품이었다. 그의 작품은 좋은 평가를 받았고, 선생들은 다른 학생들에게 읽어주기 바빴다. 칭찬을 받으며 자신감을 얻은 소년은 신이 났다. 시 쓰기를 계속했고 나중에는 수필도 썼다.그는 물리나 화학, 생물 등 이공계 분야에서도 성적이 좋았다. 덕분에 일반중학교에 다니던 그는 군에 하나 밖에 없는 수재학교인 무산 제1중학교로 편입했다.돈도 없고 부모도 없는 석 씨가 학교에서 살아남을 방법은 오직 하나, 공부 밖에 없었다. 그는 촛불을 켜고 코피가 터질 때까지 공부했다. 그 결과 학교를 대표해 나선 군 학과경연에서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5학년 때엔 무산군 대표로 ‘도 알아맞히기 경연’에 나가 순위권에 오르기도 했다. 알아맞히기 경연은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퀴즈 프로그램 같은 것이다.전국 경연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면 중앙급 대학에 갈 수 있다. 석 씨의 목표는 김책공대에 입학하는 것이었다. 온 가족이 공대를 졸업한 ‘공대 집안’이었기에, 석 씨도 많은 고민 없이 선택할 수 있었다.그런데 또 돈이 발목을 잡았다. 전국 경연에 참가하기 위해선 도 소재지인 청진에 머물며 이듬해 경연 준비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석 씨에겐 숙식을 해결할 돈이 없었다. 한 달 정도 청진에 머물다 집에 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보낸 사람이 그를 찾아왔다. “어머니가 아들을 데려오라고 했다”는 말을 전했다. 하지만 그는 따라나서지 않고, 7개월을 혼자 고민했다. 잘하면 북한에서도 좋은 대학을 갈 수 있는 희망이 있는데, 굳이 모험을 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두만강을 기어 넘다그렇게 그가 고민을 거듭하던 시기에 몇 가지 일들이 연이어 터졌다. 우선 2009년 11월 30일에 전격 단행된 화폐개혁이었다. 당시 15세였던 어린 그의 눈에도 지금까지 사람들이 모은 돈을 모두 무효화하고, 한 세대에 10만 원만 나눠주는 정책은 너무나도 무리한 정책이었다. 무엇보다 북한돈만 갖고 있던 사람들은 졸지에 거지가 되고, 달러나 위안화를 갖고 있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부자가 되는 상황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물가도 미친 듯이 뛰었고, 온 나라에 생활고로 고통받는 인민들의 아우성이 넘쳐났다.석 씨는 어느날 할머니에게 “이런 정책을 실시한 사람은 인민들 앞에 나와 머리 숙이고 사과해야 한다”고 분노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할머니는 “어디에서든 그런 얘기는 절대로 하지 말라”며 어린 손자에게 신신당부했다.하지만 석 씨의 뜨거워진 감정은 좀처럼 식지 않았다. 이후 “이런 말이 되지 않는 나라에서 살아야 한다니”라는 말이 머릿속을 맴돌기 시작했다.당시 그가 정서적으로 크게 의지했던 두 사람이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일도 큰 충격이 됐다. 한 명은 그가 짝사랑하던 여학생이었고, 다른 한 명은 사촌이었다. 특히 공부에 열심인 석 씨에게 “너 그러다가 정신병원에 간다”라며 농담하던 사촌이 먼저 광인이 돼 병원으로 입원하던 장면은 그에게 죽음 이상의 충격으로 다가왔다.라이벌 관계였던 학교 친구가 월반을 해서 국방대학에 합격한 일도 그를 충격에 빠지게 했다. 부자집 자식은 학년을 조작하고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일이 가능한데, 공부로는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그에겐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를 힘들게 한 것이다.결국 그는 어머니를 찾아가기로 했다. 그런 결심을 담아 그는 ‘눈길 우에서’라는 소설을 썼다. 모교 선생들에게 전한 무언의 작별 인사였다.2011년 2월 그는 마침내 안내자와 함께 탈북의 길에 올랐다. 두만강까진 집에서 20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 항상 다니던 길이었다. 강에 도착하니 안내인에게서 미리 돈을 받은 군관이 기다리고 있었다.“이제부터 발소리를 내면 안 돼. 신발을 벗어.”군관은 먼저 신발을 벗더니 꽁꽁 언 두만강에 뛰어들더니 기어가기 시작했다. 석 씨도 신발을 벗고 그의 뒤를 따랐다. 일행은 기어가다 멈추고 동태를 살피고, 다시 기어가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 두만강 일대를 헤맨 끝에 반대편 중국에 도착했다. 이후 군관은 중국 쪽 도로에 가면 택시가 기다린다는 말만 남기고 부리나케 돌아섰다. 하지만 그의 말과 달리 도로에는 택시가 없었다. 엄동설한에 얼음 위를 한 시간 동안 기어오느라 발은 동상에 걸렸고, 얼어붙은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도 석 씨는 희망을 잃지 않고 중국 마을 쪽으로 도로를 따라 걸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걸었지만 택시는 보이지 않았다. 이번엔 반대방향으로 한참을 돌아와 강을 건넜던 처음 위치에 도달했다. 이미 시간이 많이 흘렀고, 동이 트기 시작했다. 그 때 멀리서 차량 한대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놀란 석 씨는 잽싸게 길 옆 수풀 속에 몸을 숨겼다. 그런데 수풀에 천천히 다가서다 멈춰선 차량에서 “네가 어제 넘어오기로 한 얘냐”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찾던 택시였다. 택시 기사는 “(자기도) 온 밤을 헤맸다면서 이렇게 만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석 씨가 택시에 타자마자 기사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건네주었다. 전화 속 목소리는 분명 어머니 목소리였다. 하지만 말투가 너무 달랐다. 어머니가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는데 20% 정도만 이해됐다.“나는 지금 나사렛대학교를 다니는데 하나님이 너를 무사히 인도하실 것”이라는 어머니의 말에 머리 속으로 “대학이 아니고 대학교? 하나님은 누구? 어머니는 중국에 있는 것이 맞나?”라는 의구심만 잇따랐다. 그때까지도 그는 어머니가 중국에 있는 줄로 알았다.나중에 안 사실은 어머니가 탈북 후 중국 남부 선전에서 한국 기업 에서식모로 일하다가 2년 뒤인 2008년에 한국으로 왔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한국에 와서 외할아버지 형제들을 모두 만났다. 외할아버지는 집안의 장손이었고, 전쟁 때 동생들을 남겨둔 채 군에 들어갔다는 사실도 그 때 알았다.● 태국에서 겪은 첫 수감생활한국으로 오는 과정은 어머니가 잘 연결을 해준 덕에 다른 탈북민에 비해선 훨씬 순탄했다. 심양이란 곳까지는 혼자 왔다. 하지만 이후부턴 도착하는 곳마다 다른 탈북민들이 합세했다. 중국 남부 쿤밍에 이르렀을 때는 일행이 30여 명이나 됐다. 이 가운데엔 여성과 아이가 20여 명이나 됐다. 남성은 대여섯 명에 불과했다. 석 씨처럼 탈북 후 곧바로 한국행 길에 오른 사람도 없었다.남쪽으로 이동할 때마다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북에서 나올 땐 외투를 껴입었는데, 보름 뒤엔 얇은 티셔츠만 입었다. 브로커들은 옷을 한 배낭씩 메고 와 일행들을 갈아입혔다. 살펴보니 먼저 떠난 사람들이 입었던 옷들 같았다.밤새 이름을 알 수 없는 산을 넘었더니 라오스란 곳에 도착했다. 또 몇 시간 뒤엔 태국이라고 했다. 그는 일행을 따라 무작정 걸었다. 태국에 도착하면 경찰에게 한시라도 빨리 체포되는 것이 유리하다고 해서 큰 도로 가운데로 무작정 걸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헤매던 도중 누군가의 신고를 받은 태국 경찰이 나타났다.태국 감방 생활은 힘들었다. 고생했던 다른 탈북민들에겐 견딜만한 수준이었지만, 첫 수감생활을 경험하는 석 씨에겐 고통스러웠다.감옥 안에서도 그는 자서전을 썼다. 북한에서의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지를 고민하는 과정의 기록이었다. 마침내 탈북 2개월 뒤인 2011년 4월 한국에 도착했다.태국 감방에선 밥을 하루에 두 끼만 주었는데, 항상 똑같은 메뉴인 밥과 닭죽만 나왔다. 반면 한국의 조사기관에서 주는 밥은 무척 맛있었다. 빵과 우유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그 덕에 삐쩍 말랐던 몸에 살이 붙기 시작했다.하나원에 갔을 때 어머니가 면회를 왔다. 북에 있을 때 그는 어머니가 중국에서 사는 줄 알았다. 친척들이 알려주지 않았던 것이다.2011년 9월 마침내 그는 하나원을 나왔다. 그리고 어머니가 사는 천안으로 갔다. 당시 17세인 그는 고등학교 2학년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학교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는 주변지인들의 권고를 받고 일반 중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듬해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검정고시 만점으로 연세대 입학한국에서의 학교생활은 혼란스러웠다. 두 살이 많아도 밝힐 수가 없었다.북한에서 군 대표로 선출됐던 실력이라 여기서도 과학은 어렵지 않았다. 학교 과학중점반에 들어가 물리, 화학, 생물 등 평소 그가 좋아하던 과목들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교내외 경시대회에도 자주 출전해 꽤 많은 상을 타기도 했다. 하지만 영어가 너무 어려웠다. 맞춤법을 새로 공부해야 하는 국어는 더 어려웠다. 어머니가 힘들게 공장에 가서 돈을 벌다보니 학원이나 과외를 받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그는 국어를 익히기 위해 무작정 많은 책을 읽고 시와 시나리오를 썼다. 그랬더니 언젠가부터 국어가 교정이 되기 시작했다.그는 여전히 과학도가 되겠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지만, 어느새 시와 수필, 소설을 쓰는 시간이 많아졌다. 고등학교 때 쓴 단편소설 ‘늑대일기’는 탈북민의 이야기를 반려견의 시각으로 서술한 독특한 소설이었는데 선생들이 보고 매우 좋았다고 칭찬을 해주었다. 다시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그런데 고3 때 위기가 찾아왔다. 어머니가 공장에서 일하다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쓰러졌던 것이다. 집에서 돈을 벌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 그는 학교를 중퇴하기로 결심했다.젊은 담임선생은 자신의 월급에서 용돈을 떼어 너에게 줄 테니 계속 학교를 다니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석 씨는 이런 도움의 손길을 받을 마음의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사지가 멀쩡한데 왜 도움을 받아야 되냐”는 반발심만 생겼다.믿는 구석도 있었다. 고등학교 때 그는 영상을 제작하는 방법을 처음 접했는데, 촬영을 독학으로 파고들어 영상 제작 분야에서 일할 수 있는 기술을 익히면 대학을 가지 않고도 평생 먹고 살 수 있다는 판단이 섰다.햄버거 체인점에서 일하며 반 년 동안 열심히 돈을 벌었고, 점차 생활이 안정됐다. 미성년자라 나오지 않았던 정착지원금도 이때쯤에 나왔다. 다시 공부를 하고 싶은 욕망이 생겨났다. 하지만 나이가 많아 다시 고등학교를 가진 못하고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그를 담당했던 천안 서북경찰서 형사는 그가 검정고시학원에 다닐 수 있게 금전적으로 지원했다.석 달 동안 학원에 다닌 뒤 치른 검정고시에서 그는 7개 과목에서 모두 만점을 받았다. 검정고시라고 해도 만점 득점자는 내신 1등급으로 인정해주었다. 그는 어느 대학을 갈까 고민하다가 연세대를 지목했다. 그가 좋아하는 시인 윤동주가 다닌 학교라는 사실에 매력을 느꼈다.2016년 그는 소원대로 연세대 전기전자공학부에 입학했다. 문학을 좋아하긴 했지만, 가족 내력 때문에 공학도가 되겠다는 꿈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게다가 연세대엔 문예창작과가 없었다.● 이한열문학상을 수상하다대학 생활 초기는 즐거웠다. 그는 동기들에게 굳이 탈북민임을 드러내지 않았다. 커뮤니티마다 리더를 자처하고 사람들과 잘 지내니 동기들은 그를 과대표로 추천했다.과대표를 하면서 대동제, 주점행사, 합동응원전 등을 주도했다. 연세문학회에 가입해 동아리 활동도 열심히 했다.입학 다음해엔 연세문학회 회장으로도 선출됐다. 이후 연세대 총동아리연합회 창작예술분과장, 영화동아리 부회장 등을 맡으며 한국 학생들과 잘 어울리게 됐다.하지만 대학 과정에 느낀 교훈도 있었다. 전공과목은 대체로 재미있고 따라갈 수 있었지만, 수학이 너무 어려웠다. 전공에서 난관에 부딪치자 그는 미래를 다시 그려보았다.대학 졸업 후 회사원이 된 모습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옷 같이 보였다. 반면 문학 분야에선 주변의 칭찬을 많이 받았다. 특히 2017년에 쓴 시 ‘타투’는 이한열 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타투의 내용은 길지 않다.“타투.날이 찬 오늘은 시린 당신의 발을 찾고 있습니다. 버선발에 덧신을 동여매도 얼어 죽을 것 같았던 그 겨울은 처마 아래 고드름이 참 예뻤습니다. 허기진 날에는 당신이 저녁마다 붙여 두었던 가마 솥 누룽지를 생각합니다. 토끼가 먹는 풀을 뜯어다 사람도 함께 나눠 먹을 때 이태백이 놀던 달에 나도 올라 앉아 쿵쿵 절구를 찧고 있던 것이었습니다.유족보다 더 슬퍼하는 문상객에게는 허리를 더 굽혀 인사하고 있었습니다. 당신보다 덜 아픈 사람들이 먼저 세상을 떠날 때 당신의 아픔이 덜 무거워 보이는 착시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몹시 아프게 지워버린 이름에게 부름을 돌려주려고 나왔습니다. 피부마다 바늘을 찔러 넣어 떨어진 낙엽들을 피워내겠습니다.”심사를 맡았던 시인 김응교 숙명여대 교수는 “(석 씨가) 투고한 작품들 수준이 고른 편이어서 시를 보는 수준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삶을 대하는 진지함과 언어를 부리는 상상력도 믿음직하다”는 심사평을 남겼다.석 씨는 ‘꽃제비와 까치’라는 수필로 광화문 글판 에세이쓰기 대회 특별상을 수상했고, 대학생 때 여성부 장관상도 받았다. 이때 받은 상금으로 그는 카메라를 샀다. 늘 꿈을 꾸던 촬영에 도전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첫 단편영화 ‘연음’은 이렇게 나왔다. 부족한 점이 많았지만, 글로만 머물던 자신의 이야기를 영상화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었다. 한 해 뒤엔 서울시의 한 프로젝트에 참여해 ‘데자뷔’라는 단편영화를 만들었다. 그가 영화를 열심히 만든 이유는 ‘영화를 가장 사랑하는 방법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한 어느 평론가의 말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영화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고, 점차 노하우를 익혔다. 이 과정에 미래에 대한 꿈도 달라졌다.특히 2019년 영국대사관이 주관한 프로그램에 당선돼 6개월 동안 런던 유학생활을 경험하면서 세상에 대한 자신의 시각이 좁았다는 것을 느꼈다.그 6개월 동안 그는 학업 외에 ‘런던으로 간 평양사람’이란 시나리오와 함께 ‘뉴몰든FC’라는 장편소설까지 썼다. 이 장편소설은 25세 대학생의 작품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의 탄탄한 서사와 절도된 문체로 여러 작가들을 놀라게 했다. 초고를 오디오북으로 발간한 그는 아직도 이 소설을 끌어안고 수정하고 있다. 그만큼 이 소설에 대한 애정이 깊다. 그는 자신의 소설을 펴내줄 출판사를 찾고 있다.● “석범진으로 살고 싶습니다.”영국에서 돌아온 그는 학과장을 찾아가 국어국문학과로 전과 신청을 했다.학과장은 석 씨가 코딩을 짜는 것보단 글쓰기에 더 소질이 있고, 회로설계보단 영화를 만드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것엔 동감했지만, “누구나 박찬욱이나 봉준호가 될 수 없는데, 그래도 그 길을 가야 하겠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저는 박찬욱, 봉준호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석범진이라는 사람이고 싶고 저만의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그는 깊은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라 마음을 바꾸진 않았다.이듬해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자마자 코로나가 터졌다. 모든 수업이 비대면으로 진행됐지만, 그래도 국문과가 과학보단 훨씬 재미있었다. 성적도 덤으로 높아졌다.코로나 기간에도 그는 짬짬이 ‘길섶’이라는 단편영화를 찍었다. 돈이 없어 자원해주는 형과 동생들을 배우로 써야 했고, 남들이 다니지 않는 외진 곳에서 한밤중에 찍어야 했지만 그래도 영화를 만드는 순간만큼은 행복했다.2022년 연세대를 졸업할 때 마침 연세예술원이 생겨나 첫 학생들을 모집했다. 연세예술원엔 영화학과도 있었는데, 학생들이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도록 영화 제작에 필요한 장비나 제작비를 지원해주었다. 이미 대학 시절 4편의 단편영화를 찍었던 석 씨는 연세예술원에 지원해 합격했다. 20여 명의 영화학과 학생들 중엔 현직 촬영 및 조명 감독도 있었고, 작가도 있었다. 동기들이 서로 자신의 경험을 전수하며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예술원을 다니며 석 씨는 한 걸음 더 성장했다. 2024년 예술원 주최 제1회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그가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다. 또 영화학과 1기생 졸업 기념으로 장편영화를 만들게 됐을 때 예술원 교수들은 연출까지도 석 씨에게 맡겼다. 로케이션 섭외부터 배우 섭외까지 어느 하나 쉬운 일은 없었다. 예산은 1억 원으로 책정됐지만, 이중 7000만 원은 재능기부 등의 형태로 협찬을 받았고, 실제 들어간 돈은 3000만 원 정도였다. 이것으로 장편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만, 석 씨는 해냈다. 돈이 없어 영화를 흑백으로 만들어야 했고, 스토리를 여러 번 바꾸어야 했지만 결국 70분짜리 영화를 7,8월의 땡볕 속에 촬영해 마무리할 수 있었다. 12월에 진행된 영화 림시교원 시사회는 석 씨에겐 영화계로 발을 내딛는 첫 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겐 꿈이 있고, 꿈을 향해 가기 위한 단계별 목표도 있다.“제가 개인적으로 ‘두만강 감독’이라고 부르는 세 사람이 있습니다. ‘두만강’과 ‘경계’를 만든 장률 감독, ‘무산일기’를 만든 박정범 감독, ‘아리랑’을 만든 나운규입니다. 장 감독은 두만강을 넘어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박 감독은 제 고향인 무산에서 한국으로 넘어온 탈북민의 삶을 다루었습니다. 나운규는 어릴 때 고향 회령에서 보고 들은 노래와 이미지를 영화에 접목한 감독입니다. 저는 이 감독들에게서 동질감을 느꼈고, 저도 앞으로 두만강 감독이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그의 머리 속엔 벌써 여러 시나리오로 꽉 차있다. ‘꽃제비’ ‘붉은 소년단원’ ‘다섯 소년에 대한 이야기’는 언젠가 영화가 돼 나올 것이다. 모두 소토지 세대와 장마당 세대의 삶을 그려내는 작품들이다.“영화를 찍으면 상업영화를 찍어야 유명 감독이라고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저도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주류가 되지 못해도 독보적인 영화는 만들 자신이 있습니다. 재미가 없어도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영화를 만들 순 있습니다. 저는 그 누군가가 되고 싶지 않고 저 자신이고 싶습니다. 영화의 힘을 믿는 한 이 길을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4-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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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북한군이 떼죽음으로 남긴 교훈

    북한군 최정예 ‘폭풍군단’ 병사들이 우크라이나에서 속절없이 죽고 있다. 12월 치러진 전투에서 북한군 사상자는 1100여 명이라고 국가정보원이 19일 밝혔다. ‘고기 분쇄기’로 불리는 우크라이나 최전선에서 열흘 남짓 기간에 1만1000명으로 추산되는 파병 병력의 10분의 1이 갈려 나간 것이다. 실전 속 북한군은 전혀 최정예가 아닌, 가장 한심한 전투원들이었다. 북한군과 교전했던 우크라이나 드론 부대 지휘관은 워싱턴포스트(WP)에 “놀라운 일이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40∼50명이 한꺼번에 들판을 달린다. 포격과 드론의 최상의 표적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군은 드론을 피해 도망칠 줄 알며 숨어서 드론에 총을 쏘지만 북한군은 선 채로 마구잡이로 쏴댔다. 이들을 죽이는 것은 낮은 레벨의 컴퓨터 게임을 하는 느낌이었다”고 증언했다. 북한군이 힘을 쓰지 못하는 이유를 드론과 평야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오지만, 일부만 맞다. 진짜 이유는 이들이 현대전과는 전혀 상관없는 ‘고려 무사’로 키워졌기 때문이다. 특수부대에 입대해 10년 동안 가장 많이 하는 훈련은 맨손으로 벽돌을 격파하거나 뒷발차기로 기와를 박살 내는 따위들이다. 열병식에 나가 발을 배꼽까지 올리며 씩씩하게 행진하는 것도 중요하다. 김정은이 특수부대를 현지 시찰할 때마다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장면이 바로 격술이다. 군인들은 배에 화강석을 올려놓고 망치로 부수고 깨진 유리 위를 맨발로 걸어간다. 이런 것을 볼 때마다 김정은은 활짝 웃으며 너무 좋아한다. 그의 머릿속 특수부대는 우수한 격술가나 차력쇼 전문가들인 것 같다. 특수부대원들이 정작 공격 훈련을 하는 모습을 보면 실소가 나온다. 우크라이나에서처럼 무리를 지어 돌격하거나 갖은 현란한 몸짓으로 이리저리 땅에 뒹굴며 총을 쏜다. 총알을 피한다는 몸짓인 것 같은데, 정작 방탄복을 입고 군장을 착용하면 그걸 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듯하다. 지금까지 북한 매체를 통해 본 특수부대 훈련 사진이나 영상에서 현대전의 전투 대형을 본 적이 없다. 한때 우리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폭풍군단의 실체가 우크라이나전을 통해 낱낱이 까발려지면서 다행이라는 반응도 있다. 북한군 최정예 병력의 실전 능력이 그 정도면 늘 농사와 건설에 끌려다니는 일반 병사들의 수준은 안 봐도 뻔하다. 이런 상황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도 크다. 한국도 팔굽혀펴기나 윗몸일으키기, 달리기 등의 높은 체력 기준을 통과하고, 사격을 잘해야만 특급전사로 인정해 준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에서 펼쳐지는 전쟁을 통해 뛰기도 힘들어하는 병사도 1인칭 시점(FPV) 드론만 잘 조종하면 특급전사 10명 정도를 손쉽게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지난달 월스트리트저널(WSJ)에 소개된 29세 우크라이나 드론 조종사 올렉산드로 다흐노도 학창 시절 공부는 하지 않고 비디오 게임만 했지만 참전 후 1년 반 동안 300여 명의 러시아군을 죽였다. 이는 미군 역사상 최고의 저격수인 네이비실 소속 크리스 카일이 이라크전에서 사살한 적(공식 160명, 비공식 225명)보다 훨씬 많은 숫자다. WSJ는 “영화에서 엘리트 군인을 묘사할 땐 강인해 보이는 마초적 이미지를 사용하지만, 오늘날 실제로 전장에서 성과를 내는 건 전투에서 도저히 살아남지 못할 것 같은 ‘스크린 중독’의 연약한 젊은이들”이라며 “드론 조종에 필요한 것은 우락부락한 근육이 아닌 빠른 사고력과 예리한 눈, 민첩한 엄지손가락”이라고 분석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우리에게 병사의 능력뿐만 아니라 육해공 장비의 보유 효율이나 운용 전략에 대해 반드시 통렬한 재점검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경고한다. 물론 우리 군이 이미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을 것이라 믿고 싶다. 총 한번 쏘지 못하고 죽는 북한 군인들을 보며 군 개혁만 떠올리면 일부만 보는 것이다. 그들이 죽음으로 세상에 던지는 가장 큰 메시지는 “변화하지 못하면 죽는다”는 것이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여전히 반세기 이전에 만들어진 엘리트 충원 시스템 속에서 살고 있다. 20대 전후 찍기를 잘하는 능력만 갖췄던 사람들에게 수십 년 뒤 국가 운영까지 맡기고 있다. 하지만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보고, 살기 위해 바닥을 기어본 사람들이 국민에겐 더 나은 정치인일지도 모른다. 파괴적인 전쟁을 보며 우리의 고정관념도 파괴할 필요가 있다.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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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전거리교화소의 ‘불망산’

    지금까지 수많은 탈북민을 만났지만 경기 광주에서 캠핑카 제작업을 하고 있는 권효진 씨(63)의 증언은 충격적이었다. 그는 함경북도 전거리교화소에서 2001년부터 2007년까지 6년간 수감 생활을 했다. 정확하게는 견뎌냈다. 교화소에서 6년을 버텨 살아남을 확률은 극히 희박하다. 그가 석방될 때 안전원(경찰)들조차 그를 영웅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가 살 수 있었던 비결은 가족들의 뇌물이었다. 이를 통해 교화소 내 죄수들 중 넘버2의 위치인 ‘총지령공’ 자리를 따낸 것. 일종의 ‘죄수 간부’로서 “생산 지령과 결과를 관장하고 입소와 퇴소, 병보석, 사망자 등을 종합해 교화국에 보고하는” 업무를 맡는다. 그래서 교화소 실태를 누구보다 잘 알 수 있고, 그만큼 그의 증언은 특별하다. 전거리교화소에서 죽으면 ‘불망산’에 간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탈북민 가운데 불망산을 실제 가본 사람은 권 씨가 거의 유일하다. 그는 교화소 수감자의 생활을 노예의 삶이라고 했다. “제가 총지령공으로 있을 당시 전거리교화소는 수용 능력이 800명이었지만 보통 1100명이 수감돼 있었고, 이를 관리하는 보안원과 경비병이 240명이었습니다. 당시 33개 교화반이 있는데 동 정광을 채취하고, 임업과 감자 농사 등을 했습니다. 이렇게 전국 교화소에서 죄수들이 생산한 것으로 사회안전성이 먹고삽니다. 즉, 죄인은 안전성의 노예들인 셈입니다.” 교화소에서는 죽음이 다반사였다. “전거리엔 매일 10여 명이 새로 입소하는데, 사람이 죽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제일 적게 죽는 날이 2명이었고, 평균 5∼7명씩 죽었습니다. 추운 겨울엔 10명 이상씩 죽습니다.” 그의 증언에서도 가장 끔찍한 부분은 시신 처리 과정이다. “죄수가 죽으면 ‘사체보관실’에 쌓아두었다가 저녁에 불망산으로 부르는 외딴 화장터에서 태웁니다. 시체를 처리할 때는 총지령공과 수레꾼 4명 등 모두 8명이 갑니다. 화장터엔 굵은 철근으로 만든 직사각형의 틀이 있는데, 아래에 나무를 쌓고 시체를 올려놓습니다. 죄수들이 삐쩍 말라 시신은 통나무 두께도 안 됩니다. 한 구는 머리를 오른쪽에, 다음은 머리를 왼쪽에 놓는 식으로 차곡차곡 놓으면 틀에 모두 12구의 시신이 올라갑니다. 저녁에 불을 지피고 내려갔다가 아침에 올라가면 재들이 선반 아래에 수북이 떨어져 있습니다. 그걸 삽으로 퍼서 화장터 주변에 막 뿌리고, 빗자루로 씁니다. 무덤 같은 것은 없습니다. 저녁에 또 반복됩니다. 화장에 쓰는 통나무는 죄수들이 산에서 끌고 내려온 것입니다.” 총지령공 기간에 전 씨가 처리한 시신만 수천 구였다. 이런 지경이니 교화소에서 3년을 버티면 영웅이라 불리는 것이다. 전거리교화소는 북한에서 규모가 작은 축에 속한다. 그가 있을 당시 북한에는 교화소가 모두 12곳이 있었다. 제1호 교화소인 평양 화천교화소는 신분이 드러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주로 수감돼 있어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강동에 2교화소, 사리원에 3교화소, 개천에 4교화소 등 전국 각지에 교화소는 분산돼 있다. 가장 규모가 큰 함흥교화소엔 무려 1만 명이 수감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모든 교화소에서 전거리에서 벌어지는 것과 같은 끔찍한 일들이 매일매일 일어나고 있다. 교화소엔 단련형과 교화형을 받은 사람들이 간다. 북한 형법상 형벌에는 노동단련대(1∼6개월), 노동단련형(1∼3년), 노동교화형(1∼15년 및 무기), 사형 등이 있다. 단련형은 공민권이 유지되지만 교화형은 공민권이 박탈돼 큰 차이가 있다. 북한엔 교화소만 있는 게 아니다. 교화소 수감자들이 안전성에 소속된 노예들이라면, 정치범수용소의 정치범은 보위부의 노예들이다. 그 외에도 군인을 수감하는 군 교도소, 보위원만 따로 수감하는 보위부 대열, 깊은 산골에 격리되는 추방기지 등도 존재한다. 권 씨의 증언은 담담했다. 그러나 그의 증언엔 북한 체제가 유지될 수 있는 ‘거대한 비밀’이 담겨 있었다. 체제를 지키는 사냥개인 보위부와 안전성에 충분한 물자를 제공할 수 없는 독재자들은 대신 노예들을 하사했다. 노예는 죽어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새로운 노예는 얼마든지 충원된다. 노예들이 생산하는 식량과 땔감 등으로 사냥개들과 이들의 주인인 평양의 지배계층이 먹고산다. 이게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표방하는 노예 국가 북한의 실상이다.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4-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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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北서 사형판결 뒤 작심발언으로 구사일생… 캠핑카 만드는 前 북한군 전차장의 삶[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매일 평균 10여 명이 들어오고, 매일 평균 5,6명은 죽어나가는 지옥이 있다. 이 지옥에서 3년을 버틸 확률은 50% 미만이고, 10년을 버틸 확률은 0.01%쯤 된다. 그곳은 북한 교화소이다. 권효진 씨는 이곳에서 6년을 버티고 살아남았다. 예심기간까지 합치면 7년 이상 수감 생활을 견뎌냈다. 그가 출소할 때 증명서를 확인하던 철도안전원은 “영웅이 나왔다”라며 경의를 표하고, 도착지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편의까지 봐줄 정도였다.권 씨는 군에서 기계화부대 전차 전차장을 지냈고, 사회에 나와서는 대학 졸업 뒤 대기업의 노동당 선전부 소속 신문주필까지 역임했다. 하지만 영문도 모르고 도와준다고 했던 심부름 하나 때문에 사형 판결까지 받았고, 나중에 감형됐지만 16년형을 선고받았다.교화소에서 나온 뒤 탈북한 그는 현재 한국에서 탈북문인단체 ‘국제펜클럽 망명북한작가센터’ 이사장을 맡으며 캠핑카 제작도 하고 있다. 탈북민 중에 권 씨만큼 오랜 기간 북한 인권의 참혹한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한 사람은 많지 않다.●졸업증도 못 받고 간 군대권 씨는 1961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났다. 그가 8살 때 집안에 큰 풍파가 닥쳤다. 북한군 6군단 정찰상급참모(중좌)였던 아버지가 당시 북한군 총참모장을 지내다 반당반혁명 종파분자라고 숙청된 최광의 일당으로 몰린 것이다. 이로 인해 노동당에서 출당되고 군복도 벗어야 했다. 이후 아버지는 청진제강소 회전로 직장에 노동자로 가게 됐다. 회전로공은 1시간만 일해도 얼굴이 새까맣게 돼 누구나 기피하는 직업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군소리 한 마디 내지 않고 버텨냈고, 1973년에 다시 노동당에 복당하고, 제강소 자재과장으로 일할 수 있게 됐다.권 씨가 1978년 군에 입대하기 전까지 청진은 ‘패싸움의 도시’로 악명이 높았다. 권 씨가 살았던 동네는 특히 패싸움이 일상처럼 벌어지던 곳이었다. 그도 어렸을 때부터 동네 형들을 따라다니며 싸우는 법을 익혔다. 그림을 잘 그렸던 권 씨는 1975년 청진에 생긴 예술학교 1기생으로 입학했지만, 7개월 만에 싸움에 연루돼 퇴학당했다.청진의 패싸움은 1977년 9월 25일을 기점으로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날 청진역 앞에서 패싸움이 벌어져 두 명이 삽에 맞아 죽는 일이 발생했다. 이 사건이 김일성에게 보고되자 중앙에서 검열단이 들이닥쳐 패싸움 가담자를 잡아서 깊은 산골로 추방했기 때문이다. 권 씨도 이때 체포됐지만 제강소 자재과장인 아버지가 시멘트 두 트럭 물량을 뇌물로 바치고 풀려나 추방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몇 달 뒤 이듬해 3월 학교 사로청지도원이 수업 중인 교실에 들어와선 “권효진, 김광원은 가방을 싸고 나오라”고 외쳤다. 권 씨는 패싸움 문제로 다시 잡혀가는 것으로 생각하며 고개를 떨궜다. 그런데 지도원 방에 들어가니 “군사동원부를 찾아가라”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지시를 받는다.이튿날 군사동원부를 찾았을 때 그는 또 한 번 놀란다. 졸업을 몇 달 앞둔 그에게 군 입대가 결정됐다는 날벼락이 떨어진 것이다. 아들 때문에 속을 썩이던 아버지가 학교에 부탁해 입대를 시켜달라고 부탁한 데서 비롯된 일이었다.● 전차를 7년 몰다그로부터 한 달 뒤 권 씨는 820훈련소 776사단에 입대했다. 820훈련소는 위장 이름인데, 북한에선 ‘탱크지도국’이라고도 불렀던 유일한 기계화군단이다.그가 입대했을 때 820훈련소는 105사단과 776사단으로 구성됐다. 105사단은 평남 숙천에, 창설된 지 1년도 안 된 비밀부대인 776사단은 강원도 판교군 지하리에 각각 자리하고 있었다. 전쟁이 터지면 제일 먼저 남침의 앞장에 설 부대들이었다.함께 입대한 같은 반 친구 김광원은 105사단 이계섭중대에 배속했다. 북한군에서 제일 먼저 ‘3대 혁명 붉은기 중대’ 봉화를 든 곳이다. 이런 이유로 북한이 고위간부 자제들에게 군 복무 및 노동당 입당이라는 스펙을 쌓기 위해 거쳐 가게 하는 곳이었다. 당시 중대엔 민족보위상을 지낸 최용건의 아들, 북한 외부상을 지낸 백남순의 아들 등이 복무 중이었다. 김광원은 김정일의 공식 부인인 김영숙의 남동생이었다. 4년 전 누나가 김정일과 공식 결혼하면서 특별관리대상이 돼 이곳에 배치된 것이었다. 중학교 졸업증도 받지 못하고 남들보다 일찍 군에 온 두 명의 절친은 이후부터 걸어가는 길이 달라졌다. 한 명은 로얄 패밀리의 일원으로 체계적인 관리를 받는 승진 코스를 탄 것이고, 다른 한 명은 사고 방지용으로 조기 군입대를 한 것이었다.김광원은 군 생활을 짧게 마치고 보위대학에 갔고, 나중에 9군단 검찰소 검사를 하며 기세등등하게 살았다. 하지만 끝은 좋지 못했다. 마약을 하는 사실이 적발돼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디론가 사라졌다. 당시는 김정일이 고용희에게 빠져 김영숙을 멀리하던 때였다. 끈 떨어진 남동생은 더 이상 로얄 패밀리로서 대우받지 못한 채 숙청된 것이다.776사단은 당시 소련제 T-55전차와 이를 복제한 중국제 T-59 전차로 무장하고 있었다. 사단은 공격 훈련과 함께 방어 훈련도 했다. 주요 임무 중의 하나는 원산 인근에서 상륙작전이 벌어지면 이를 방어하는 것과 판교 주변의 미루벌에 육전대가 투하되면 이를 소멸하는 것이었다. 6.25전쟁 때 원산상륙작전과 평북 숙천에 공수 낙하한 미군 부대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경험에서 마련된 훈련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권 씨는 간부들에게서 사단의 원산 이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1978년에 건설된 평양-원산 고속도로의 노선이 변경됐다는 말을 들었다. 실제로 평양-원산 고속도로는 판교에 가깝게 남쪽으로 노선이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간다.그는 입대 초기엔 장탄수로 1년, 조준수로 2년을 복무한 뒤 4년차에 전차장이 됐다. 매우 빠른 진급이었다.1980년대 좌우만 해도 북한의 경제사정이 괜찮아서 전차 기동훈련을 위한 연료는 충분히 공급됐다. 매년 평남 양덕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기동 훈련을 한 번씩 했다. 짧으면 일주일, 길면 보름 동안 훈련은 진행됐다. 보름 훈련 때는 강원도 철령을 넘기도 했는데, 도로가 너무 나빠 전차병들 사이에서 “전쟁 때 어떻게 이런 도로로 다니냐”는 푸념이 나왔다.전차병 생활 중 가장 고된 기억은 1982년 한미의 팀스피리트 합동훈련에 대응한 훈련 때였다. 사단 전차들을 3일 동안 밤낮없이 기동과 은폐를 반복하면서 각종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았다. 졸음운전으로 민간 차들을 들이박고, 심지어 기관차를 박은 전차도 있었다.● 굶어죽은 천재들7년 동안 전차병으로 근무한 권 씨는 마지막 근무 3년 동안 여단 사진사로 일했다. 미술에 소질이 있었던 권 씨는 전차장 시절 대대의 벽보와 선전화를 도맡아 그리는 직관원도 겸했다. 이런 사실이 여단 지휘부에 알려지면서 보직이 바뀐 것이다. 당시 여단에는 역사 기록용 사진기 1대와 당원증용 증명사진, 우수 군인 및 가족 촬영용 사진기 1대가 있었다. 기록용 사진기는 군관이, 촬영용 사진기는 여단 사진사가 갖고 있었다.사진사 일은 나름 편안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1987년 제대를 1년 앞두고 대학에 추천받게 됐다. 사회 물정을 잘 몰랐던 그는 대학 리스트만 보고, 이수복대학이란 이름을 발견하고는 그곳을 선택했다. 6.25전쟁 때 기관총을 몸으로 막아 영웅이 된 이수복은 북한 사람들에겐 공화국 영웅의 상징과 같은 인물이었다.평남 순천에 있는 대학은 순천비날론기업소에 소속된 화학단과대학이었다. 권 씨가 그림을 그려보이자 바로 입학 허가가 났다. 하지만 그는 입학을 거부했다. 대신 그는 무조건 평양미술대학에 가고 싶다고 떼를 썼다. 그 과정에서 평양미술대학 학장과 만수대창작사의 최고 화가 등에게 편지도 썼다.이런 행동들이 화근이 됐다. 대학은 당에서 보내주는 것인데 일개 개인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는 사상투쟁회의에 회부돼 또 이런 일을 벌이면 출당을 시키겠다는 협박을 받기도 했다.하지만 권 씨는 버티기로 하고, 일주일 동안 단식투쟁을 벌였다. 북한에서 단식투쟁은 감옥에 끌려갈 위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여단 선전부에서 일하면서 인정받은 공이 컸기에 간부들이 그를 회유하기 시작했다. 여단 선전부장 등은 “지금은 평양미술대학 폰트(추천권)가 전혀 나오지 않으니 대신 청진 2사범대학 미술학부로 보내주겠다”고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1988년 제대증을 받고, 청진에 갔다. 하지만 시험은 보지 않았다. 청진에서 시당 간부를 하고 있던 사촌형이 “김책제철소에 가서 1년만 일하면 그동안 평양미술대학 추천권을 받아 오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무조건 평양미술대학에 가고 싶었던 그는 사촌형의 제안을 받아들여 김책제철소 직관원으로 1년 동안 일했다. 그러나 미술대학 폰트는 끝내 받지 못했다. 연령제한도 걸림돌이 됐다. 평양미술대학은 만 26세 이하만 입학을 시켰는데, 이미 그는 제한선을 넘은 것이다.결국 그는 대안을 찾기로 했다. 그 결과 북한에서 ‘동방의 유일한 도자기 대학’이라고 선전하며 “외국 유학생까지 받겠다”고 선전하던 경성도자기단과대학을 선택했다. 당시 경성(주을)도자기가 외국에서 인정받으면서 경성도자기공장은 도자기연합기업소로 승격했다. 만수대창작사에서 공장에 내려와 그림을 그려 외화를 벌고 있었다. 권 씨는 1989년 4년제 도자기공예미술과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졸업하면 함경북도 미술창작사 공예단에 가겠다는 목표도 세웠다. 공예단 단장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졸업 시점이 다가오면서 그는 다시 꿈을 포기해야만 했다. 미술창작사에서 인재들이 속절없이 굶어죽고 있다는 사실을 경험한 것이다.사람들은 북한의 고난의 행군이 1995년부터 시작된 줄 알고 있다. 하지만 함경북도와 양강도 등 평양에서 먼 지역은 1980년대 말부터 이미 배급이 끊겼다. 1990년대 초반 러시아 유학까지 다녀온 장하남, 박천민 등 함북의 유명 예술가들이 배급을 받지 못한 채 집에서 숨을 거뒀을 정도다. 이들은 오직 그림만 그릴 줄 알았지 장사를 할 줄 몰랐다.● 노동당 소속 신문주필이 되다졸업 후 그는 도 동약(한약)관리국에 들어가 약 상표를 그리는 일을 맡았다. 동약관리국엔 원자재로 쓰는 곡물이나 물약 등이 공급됐다. 이후 중학교 미술교원으로 발령받기도 했지만 가지 않았다. 중학교 교원도 당시엔 굶어죽기 쉬운 직업이었다.그렇게 이곳저곳을 기웃대다 마침내 정착한 곳은 2금속연합기업소 초급당 선전부 지도원 겸 신문주필이었다. 당시 북한에서 발행되는 신문은 무려 460여 종에 달했다. 이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급 기업소 이상 기관들은 모두 자체 신문을 보유했다. 한국으로 치면 사보와 비슷한 것이다. 2금속은 북한에서 제일 큰 건설연합기업소였다. 주로 금속공장을 건설하거나 보수하는 일을 했다. 산하에 작은 기업소를 43개나 거느린 대기업이다.김일성은 2금속을 “나의 전방척후대”라고 불렀다. 이런 이유로 2금속에서 발행하는 신문의 제호는 ‘전방척후대’였다. 참고로 김책제철소 사내 신문은 ‘강철전선’이다.권 씨의 업무는 매주 신문을 발행하는 일이었다. 발행부수는 43부에 불과했다. 종이가 부족한 탓에 각 기업소에 한 부씩 보내줄 물량만 찍은 것이다. 그마나 늘 종이가 모자랐다. 그래서 권 씨의 주요 업무 가운데 하나는 길주펄프공장에 가서 용접봉 1㎏과 종이 1㎏을 바꾸어오는 것이었다.신문주필로 그는 1997년까지 3년을 일했다. 그 기간은 북한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었던 ‘고난의 행군’ 시기와 겹친다.권 씨는 북한의 최대 제철소인 김책제철소가 배급 중단 1주일 만에 용광로 가동이 중단되고, 평생을 노동당에 충성을 다할 것 같았던 간부들이 아프다고 핑계를 내고 퇴직한 뒤 장사에 나서는 일들을 수없이 목격했다.노동당 말단 지도원인 권 씨도 배급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가 먹고 살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덕분이었다. 어머니는 1970년대 청진시에서 최초로 ‘꽃사탕’이란 것을 만들어 팔고 ‘꽃떡집’이란 것도 운영했었다. 김일성이 ‘8월 3일 지시’라는 것을 내리고, 지방경공업을 발전시키라는 지시를 내렸을 때 서둘러 소규모 경영형태의 부업을 시작한 것이었다. 개인 소유는 아니었지만, 운영을 맡고 돈도 많이 모을 수 있었다.6.25전쟁 참전군인 출신인 어머니는 ‘도 노병써클위원장’이란 감투도 쓰고 있었다. 참전군인들로 구성된 공연단인데, 어디에서도 무시하기 힘든 파워를 지닌 조직이었다. 어머니는 위원장으로 재직하면서 함경북도에서는 누구도 쉽게 시비를 걸기 어려운 광범위한 인맥을 갖고 있었다.1997년 함경북도 예술단에서 무대미술가로 일해달라는 제안이 왔다. 당시 도 예술단에선 ‘딸에게서 온 편지’라는 야심작을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중앙에서 미술가로 파견돼 온 권 씨의 군시절 지인이 “함경북도에 권효진이란 인재가 있는데 왜 데려다 쓰지 않냐”고 한 것이발단이 됐다.권 씨는 곰곰히 생각한 끝에 신문주필 자리를 떠나기로 했다. 도 예술단은 집 바로 앞이라 통근거리도 가깝고, 좋아하는 그림도 실컷 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중국으로 공연을 나갈 기회도 있었다.● 국군포로를 찾아준 죄절차를 거쳐 도 예술단으로 옮겨 권 씨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어 전국인민축전에 나갈 작품 심의위원으로 선정되며 술술 일이 풀리나 싶었다. 하지만 운명은 또다시 그에게 장난을 쳤다. 2금속 당위원회에서 권 씨가 무단결근을 하고 있다며 출당시키겠다는 연락을 해온 것이다. 자초지종을 살펴보니 당적이 넘어오지 않은 게 문제였다.북한에선 직장을 옮기면 식량정지, 군사이동증, 조직이동증, 거주지 이동증 등 11개의 서류를 수정해야 한다. 이 가운데서 하나라도 누락되면 처벌이 내려진다. 특히 당적 이동은 11개 서류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분류된다. 만약 직장에서 이직 희망자의 요청 승인을 거부하면 이직은 불가능하다. 권 씨도 그런 경우였다. 2금속 당위원회가 어깃장을 놓는 바람에 처벌이 불가피해진 상태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2금속에 가서 머리를 숙이기엔 권 씨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그는 “사람이 굶어죽는 마당에 노동당원이 다 뭐냐. 나는 가지 않을테니 니들 마음대로 해라.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 왔는데, 이제부턴 나도 돈이나 벌 거야”라고 소리쳤다. 그 길로 그는 나진으로 옮겨갔다. 2년쯤 지나서 그는 당 생활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출당 조치도 받았다.나진에서 그는 장사 수완을 발휘해 큰 돈을 벌기 시작했다. 동해함대 군상관리소 지도원이란 명함을 파고 중국에 잣과 해산물 등을 팔았다. 돈이 쌓이자 200마력 어선 두 척을 빌렸다. 대학 등에서 갖고 있는 부업선으로, 연료가 없어 가동하지 않던 것들이었다.권 씨는 배 소속 기관에 매달 연료 1톤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배를 빌린 뒤 해산물을 잡아 중국에 팔았고, 수만 달러라는 거금도 벌었다. 이 과정에 나진을 드나드는 조선족 상인들과도 인맥을 쌓았다.그러던 어느 날 친분이 있던 조선족 상인에게서 “청진체신소에 가면 김송춘이란 사람이 있는데 나진까지 좀 데려와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수고료 2000달러에 선불도 500달러를 준다는 조건이었다. 위험 부담이 있었지만 무시하기엔 큰 돈이었다. 당시엔 청진과 나진 사이엔 전기철조망이 쳐 있고, 단속초소도 있어 사람들이 함부로 왕래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돈이 많은 권 씨는 단속초소를 매수한 상태인지라 사람 하나 데려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청진에서 수소문한 끝에 찾은 김송춘 씨는 굶어죽기 직전인 삐쩍 마른 노인이었다. 그는 인근 장마당에서 노인을 배불리 먹이고 좋은 옷도 사 입혔다. 이어 약속장소인 남산여관으로 데려다 주는 데 성공했고, 약속한 돈을 챙겼다. 그 때까지만 해도 어렵지 않은 일을 하며 큰 돈을 만질 수 있었다는 생각에 즐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 일은 그에게 큰 위기가 됐다. 얼마 뒤 친분이 있는 보안서 간부가 그에게 보위부에서 찾는다고 귀띔을 해주었다. 나중에 안 사실은 김송춘이 국군포로였다는 것. 그리고 조선족 상인은 무역도 하면서 동시에 국군포로도 찾아 한국과 연결시켜주며 돈을 벌고 있었다는 것이다.당시 권 씨는 국군포로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도 까맣게 몰랐다. 그런데 조선족 상인을 감시하던 보위부는 그가 여관에 노인을 데리고 들어가는 모습까지 사진을 찍어 갖고 있었다.그는 큰일에 연루됐음을 직감했고, 순순히 보위부에 잡혀갈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수습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야 했다. 벌었던 돈을 숨겨두고, 그 가운데 1만 달러만 배에 찬 뒤 평양으로 향했다. 그리고 평양에서 친구들을 만나 수습할 방법을 찾으며 몇 달을 보냈다. 그 기간 나진에는 “권효진이 30만 달러를 횡령하고 도주했으니 보는 즉시 신고하라”는 내용이 담긴 수배 전단이 사진과 함께 거리 곳곳에 붙었다.도주생활은 사리원에서 막이 내렸다. 친구를 만나려 내려갔다가 그를 추적하던 보위부원들에게 잡힌 것이다. 1999년 말 그는 함경북도 보위부로 끌려갔다.청진에 사는 모든 인맥을 동원해 구명운동을 벌였고, 3년형 정도를 선고받고 모든 일이 끝날 줄로 알았다. 하지만 일이 꼬였고,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장사하면서 함께 연루됐던 고위급 간부 자식들이 모든 죄를 그에게 뒤집어씌운 것이다. ● 사형판결을 받고 한 최후진술1년여의 긴 수사 끝에 마침내 2001년 1월 17일 최종 재판이 열렸다. 중앙재판소에서 직접 판사가 내려왔다. 그는 형이 언도되던 때가 지금도 생생하다. 주요 죄명은 “국군포로를 빼내려고 내통한 죄, 노동당의 재산인 송이버섯을 몰래 판 죄, 당 자금을 횡령한 죄, 대외사업권한이 없이 외국인을 면담한 죄” 등이었다. 어느 것 하나 간단한 죄목이 아니었다. 외국인 면담죄만 봐도 ‘형법부칙 50조에 따라 장군님의 대외적 권위를 훼손한 죄’와 연결됐다.판사는 죄명들을 줄줄이 나열한 뒤 “권효진에게 사형을 언도한다”고 선언한 뒤 의사봉을 세 번 내리쳤다. 당시 법정에 있던 어머니는 판사의 선고 소리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사형 판결 뒤 판사가 물었다. “피고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없는 가?”한참을 머뭇대던 권 씨는 입을 열었다. 사형까지 받았는데, 무슨 말이던 속에 있는 생각을 털어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말들이 쏟아졌다. “사실 지금까지 1년 넘게 구류돼 조사를 받으면서 각종 혐의에 대해 인정하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지만, 저는 다 부인했습니다. 사실은 다 아는 내용이었습니다.”“제가 나진으로 가서 중국 사람들을 만난 것은 돈을 벌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신문주필로 긍정기사를 많이 썼습니다. 다 옳다고 써왔지만 결과적으로 많은 주변 사람들이 굶어죽었습니다. 저는 중국 사람들을 만나 꼭 알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너희도 사회주의를 하는데, 왜 우리만 굶어죽고 있냐. 너희는 어떻게 살고 있냐’ 이런 것을 묻고 싶었습니다….”그의 진솔하지만 따끔한 현실 비판이 담긴 최후 진술을 들은 판사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휴정을 선언한 뒤 다른 재판관들을 데리고 나갔다. 그 때 정신을 차리고 앉아 있던 어머니는 급하게 그들을 뒤따라갔다. 이후 15분쯤 지났을 때 누군가 재판실 창문을 두드렸다. 어머니였다. 조금 전까지 혼절까지 하며 사색이 됐던 어머니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어머니는 창문 밖에서 두 손바닥을 활짝 폈다가 다시 한 손바닥을 활짝 폈다. 15년형이란 뜻이었다. 어머니는 두 손을 번쩍 들고 만세도 불렀다.권 씨는 그때를 회상할 때마다 마음이 찢어진다. “세상 어느 어머니가 아들이 15년형을 선고받았는데 세상 다 가진 것처럼 웃으면서 만세를 부릅니까. 재판이 끝난 뒤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어요. ‘내 너를 두 번 낳았다. 오늘 다시 태어났으니, 네가 돌아오는 날까지 내 절대 죽지 않고 기다리마.” 재판정으로 돌아온 판사가 다시 입을 열었는데, 그가 했던 말을 권 씨는 영원히 잊지 못한다. “형법 부칙 49조를 양정하여 국가 재산류 관련 형법 61조에 근거하여 15년 징역형에 처한다.” 형법 49조는 사형이고, 양정은 바꾼다는 뜻이다.선고를 마친 뒤 판사는 그를 바라보며 “피소자, 마지막 말을 참 잘했어”라고 하더니 판결문을 닫고 재판정을 떠났다.권 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50세 중반쯤 돼 보이는 판사였는데, 지금도 궁금합니다.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나를 살려주려 마음먹었는지”라고 말했다.● 전거리교화소의 ‘불망산’2001년 2월 5일 그는 전거리교화소에 입소했다. 북한의 공식명칭은 12호 교화소이다. 당시 전거리교화소는 800명 수용능력에 보통 1100명이 수감돼 있었다. 이를 경비하고 지키는 보안원이 모두 240명이나 됐다.권 씨는 교화소에 들어가자마자 특혜를 받아 ‘목공지령공’이란 직책을 얻었다. 교화반 중 임업반들에 생산 지령을 주고, 저녁에는 과제 수행을 판단하는 자리였다. 입소와 퇴소, 병보석, 사망자 등을 종합해 교화국에 보고하는 것도 그의 일이었다.특혜가 가능했던 배경에는 가족 전부가 매달려 동원한 각종 인맥과 뇌물이 있었다. 전거리는 함경북도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청진의 가족들이 그를 쉽게 돌볼 수 있었다.그는 특별대우를 받았고, 4년 뒤엔 교화소 총지령공이 됐다. 수감자 중 2인자에 해당하는 자리인데, 빨간 완장을 차고 다녔다. 당시 1인자인 전거리교화소 총반장은 나진시당 조직비서를 했던 사람이었다.교화소 생활을 끔찍했고 매일 사람이 죽어나갔다. “총지령공이란 자리에 있으니 매일 몇 명이 들어오고, 몇 명이 나가는지 다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집계해 보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평균 1100명이 수감돼 있었던 교화소에선 사람이 안 죽은 날이 없었습니다. 제일 적게 죽은 날이 2명이었고, 하루 평균 5~7명이 죽었습니다. 겨울에는 10명 이상씩 죽습니다.” 그는 만약 일반 재소자로 있었다면 자신도 2년 이상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고백했다.사망자 처리 과정은 말로 다 옮기기 어려울 정도로 처참했다. “사람이 죽으면 쌓아두었다가 불망산이란 곳에 가서 화장을 합니다. 전거리를 경험한 탈북민이 많지만 불망산은 말만 들었지 가본 사람은 없을 겁니다. 시체는 총지령공인 저와 수레꾼 4명, 식당 직원 2명, 위생원 2명만이 운반합니다. ”“불망산의 화장은 철근 선반 위에 나무를 쌓아놓고 그 위에 시체를 올려놓고 태웁니다. 선반 크기때문에 가로로 6구를 눕히고, 세로로 6구를 눕혀 모두 12명을 화장할 수 있습니다. 저녁에 나무에 불을 붙이고 내려왔다가 다음날 아침에 가면 시체들이 모두 재가 됩니다. 그럼 빗자루로 그 재를 쓸어 주변에 버립니다. 무덤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화장하는 그 나무는 바로 죽은 사람들이 어제까지 산에서 끌어내려온 나무였습니다.”이런 과정을 통해 전거리에서 총지령원을 할 때 그가 화장 처리한 시신만 수천 명에 달한다. ● 한국에서 받은 깨달음죄수 중에서도 그나마 간부를 한 덕에 권 씨는 오랜 기간 버틸 수 있었다. 또 대사령 때마다 감형을 받아 15년 형이 6년으로 줄었다. 2007년 2월 형기를 마치고 석방된 권 씨는 특별한 직업이 없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치료를 받았다.교화소 출소자인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북한을 뜨기로 결심한다. 오랜 준비 끝에 2008년 12월 탈북의 길에 올랐다. 북한에서 움직일 루트를 정밀하게 설계한 덕분에 오래 걸리지 않고 태국을 거쳐 2009년 2월 한국에 입국했다.“인천공항에서 들어오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북한에서 주필을 할 때 늘 썼던 말이 애국을 하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버스를 타고 오면서 창 밖의 모든 것을 살펴보다가 저도 모르게 ‘애국은 한국이 하는구나’라는 말이 나오더군요.”특히 충격 받은 것은 도로 방음막이었다. “이게 진짜 국민을 위한 정책이지요. 도로 화단을 보나 산을 보나, 도로를 보나 모든 것들이 완벽했습니다. 대한민국은 한 치의 땅도 애국의 선상에서 애정 관리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그해 8월 하나원을 나와 그는 동대문구에 임대주택을 받았다. 만 나이로 48세였다.“한국에 올 때 두 가지는 가서 하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서예나 그림을 그려 붓으로 먹고 살겠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영어를 배우고 싶었습니다.”그는 집을 받고 다음날 인사동으로 향했다. 한국의 미술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날로 마음속에서 붓을 내려놓았다.“한국 미술과 북한 미술의 차이가 너무 컸습니다. 이건 내가 전혀 모르는 분야구나. 선전화 위주의 북한 미술로는 여기서 먹고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그 다음날엔 경동시장에 가서 수산물 파는 알바 자리를 얻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어떻게 유통되는지를 직접 보고 싶었다. 이후에도 이사짐 업체 등 여러 곳을 전전했다.그러던 중 지인의 추천으로 북한 관련 전문 인터넷 신문 기자로 채용돼 2년을 일했다. 또 북한인권단체 실장으로 1년을 일하는 등 강연과 인권 활동으로 시간을 보냈다. 전거리교화소의 실상을 고발하는 그림을 그려 유엔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그러던 중 문득 한국에서 보낸 시간을 되돌아보다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끼게 됐다. “여기 와서 계속 소위 ‘운동권’ 탈북민들과 어울려 다녔더군요. 단체 일을 해봐야 월급이 적기 때문에 그냥 근근이 먹고 살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런 나라에 와서 계속 요구만 하면서 살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자유로운 환경에서 기술을 익혀 자립해서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탈북민은 북한에서 출신성분 등으로 인해 도무지 잘 살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럼 출신성분을 보지 않는 한국에선 왜 잘 살지 못합니까. 정부에 탈북민 정착지원이 부족하다고 계속 요구하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받아주는 측의 입장도 생각해봐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가 오라고 해서 온 것도 아닌데, 계속 요구만 할 권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기술을 익혀 능력으로 인정받고, 그걸로 탈북민의 편견을 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그 때 이전에 했던 모든 일들과 관계를 끊고, 그는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55세 때였다. ● 캠핑카로 다시 그린 인생무엇을 제일 잘할지 생각해봤다. 북에서 공예미술과를 다니면서 목공일도 해본 경험을 활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손재주로 하는 일은 자신이 있었다. 여러 곳을 알아보다 취직한 곳이 경남의 한 작은 목공장(가구공장)이었다.열심히 일했다. 가구들을 살펴보며 창의성을 불어넣으려고 노력했다. 2년 동안 열심히 노력해 마침내 그가 만든 가구들을 경남의 제일 큰 가구점에 납품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열심히 하면 보상이 따를 것이란 것은 그의 착각이었다. 그의 노력으로 목공장의 매출이 크게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익 배분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2년 만에 첫 일을 그만두었다.두 번째 도전으로 그는 캠핑카를 제작하는 회사에 취직했다. 앞으로 국민소득이 높아질수록 캠핑카 수요가 많아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벤츠를 개조해 캠핑카로 만드는 회사에 찾아가 무작정 취직시켜달라고 요청했다.사장은 그를 아래위로 살펴보더니 “최저시급을 줄 테니 해 보겠냐”고 했다. 일주일 동안 그가 일하는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던 사장이 다시 그를 불렀다.“일을 참 잘하시네요. 월급을 올려드릴게요.”“아닙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일이라서 열심히 합니다.”그곳에서 많은 기술을 익혔다. 그런데 1년 뒤 공장이 멀리 이전하게 됐다. 이사까지 하면서 따라갈 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해 결국 그 공장을 그만두었다.다시 찾은 직장은 경기 광주에 있는 캠핑카 제작업체 ‘캠핑대장 팔라스’였다. 유경험자인 그는 이미 경력 기술자가 돼 있었다.4년이 지난 현재 그는 회사의 제작반장이다. 회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인정받고 있다. 관련 특허도 여러 건을 갖고 있다.“제가 일할 때 캠핑카의 영역은 스타렉스 이상급이라고만 여겼습니다. 저는 승용차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요란하게 장비를 많이 갖출 수도 있지만, 피곤하면 인근 숲 속에 들어가 잠을 잘 수 있는 것도 캠핑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모닝까지 차박 침상을 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개조한 캠핑카는 450대 정도 됩니다.”이제 그는 기술로 이 사회에 완벽하게 자리 잡았다. “‘형님, 이것 와서 좀 해주세요’하는 친구들이 다 한국 친구들입니다. 기술로 인정받으니 누가 찾을 때마다 뿌듯한 생각이 듭니다.”그는 일을 하는 틈틈이 글도 쓴다. 탈북문인들과 교류하면서 지내다보니 올해 10월 국제펜클럽 망명북한작가센터 이사장으로 추대 받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신망을 쌓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통일이 되면 그는 캠핑카를 몰고 북에 가고 싶다. “통일이 되면 북한 사람들이 호화로운 집, 비싼 차 이런 경쟁을 하게 될 것이 뻔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너희들은 아름다운 자연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비싼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자연을 심어주고 싶습니다.”북의 친구들에게 대한민국 홍보대사가 되고도 싶다. “여력이 된다면 진짜 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습니다. 고향 친구들에게 내가 보고 느낀 대한민국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통일이 되면 북한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껍데기만 볼 겁니다. 저는 이 사회에서 15년을 살면서 속살까지 봤습니다. 그 속살을 가르치며 빨리 여기로 들어오라 말할 겁니다. 하하….”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4-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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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타원정대-소원선물… ‘그린리더클럽’ 참여하세요”

    아동복지전문기관 초록우산(회장 황영기)이 운영하는 ‘그린리더클럽’이 우리 사회의 나눔문화 확산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그린리더클럽은 한 달에 10만 원 이상 기부하는 중고액 후원자들의 모임이다. 2022년 발족한 이 모임에는 현재 전국 약 9400명의 후원자가 이름을 올리고 있으며 그 규모는 올해 말까지 9600명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후원금 규모 역시 2년 전 약 190억 원에서 올해 말 380억 원으로 2배가량 증가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후원자 네트워크 기반 활동 후원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는 ‘후원자 네트워크’에 기반한 공감대에 긍정적 영향을 받은 결과다. 그린리더클럽은 보호대상아동 및 자립준비청년 지원 등 재단의 주요 사업 캠페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주변 지인들에게 나누는 기쁨을 알려 새롭게 후원 참여를 독려하는 등 다양한 후원 활동을 적극적으로 이어나가고 있다. 실제로 부산의 임태현 후원자(43)는 의류, 온라인 쇼핑몰, 유통 등에 관심 있는 지역 내 자립준비청년들에게 진로 조언을 하는 등 멘토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북 전주에 사는 박솔 후원자(37)는 아동을 위한 나눔가게 캠페인을 알리며 100명을 목표로 후원 참여를 이끌어 내고 있다.후원자들은 매월 일정 금액을 정기적으로 기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역사회 아동에게 실질적인 지원을 제공하기 위해 봉사활동을 직접 주도하고 있다. 초록우산 ‘대구 청년CEO 그린리더클럽’ 역시 그중 하나다. 이 클럽은 2023년 9월 발족 이후 지난해 말 아이들의 따뜻한 겨울나기를 위한 ‘초록우산 산타원정대’ 참여를 시작으로 올해 5월에는 가정의 달을 맞아 아동양육시설을 찾아 봉사 활동을 했다. 이어 대구지역 모자복지시설 아동들을 대상으로 소원선물 지원 활동을 하는 등 적극적인 나눔 활동을 펼치고 있다. 대구 청년CEO 그린리더클럽은 개인들의 정기후원으로 모은 1억 원 외에 지금까지 추가로 1억 원 규모의 후원금과 물품을 아동들에게 지원한 바 있다.● 보호대상아동 지원 초점 그린리더클럽의 후원은 실제 아동들의 삶의 변화로 이어지고 있다. 올해 스무 살이 된 오영지(가명) 씨는 지난 10여 년간 시설에서 생활하며 자립을 준비해 왔다. 홀로서기가 쉽지 않았지만, 자신을 지원해 주는 후원자들의 응원에 힘입어 지금은 헤어디자이너를 목표로 차근차근 미래를 준비해 가고 있다. 오 씨처럼 초록우산은 그린리더클럽과 함께 재단 중점 사업의 일환으로 시설이나 위탁가정에서 생활하는 보호대상아동과 자립준비청년들이 겪는 성장 환경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지원을 이어가고 있다. 초록우산 황영기 회장은 “기부는 누군가를 위한 나눔 활동인 동시에 우리가 살아갈 미래를 위한 일종의 가치 투자와 같다. 특히 그린리더클럽은 지역 후원자 간 네트워크를 통해 나눔문화 확산을 이끌고 있다”며 “아동이 처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할 그린리더클럽에 보다 많은 이들이 참여해 주시길 바란다”고 밝혔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4-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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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해 목선 탈북 1호, 강원 JC 회장이 되다…김성주 EJ레포츠 회장의 이야기[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으악, 인민군이다.”다가오던 어선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황급히 뱃머리가 회전하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추위를 막기 위해 소금포대를 덮고 있다 엔진소리에 벌떡 얼어난 김성주 씨는 어안이 벙벙했다. 말을 건네볼 틈조차 없었다.얼마가 지나자 작은 순찰선 두 척이 나타났다. 경찰들이 그들을 향해 권총을 겨누었다. 책임자인 듯 한 경찰이 총을 겨눈 채 연신 “진정하세요”라고 고함쳤다.당황한 김 씨 일행도 다급하게 소리쳤다. “거기서 진정하세요. 우린 귀순하려 왔습니다. 진정하세요.”“그럼 이 배로 한 명씩 넘어오세요.”순찰선을 타고 주문진항으로 들어갔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었다. 파출소에 들어가니 소장이 “오느라 고생 많았다”며 믹스커피를 타주었다. 김 씨는 그때까지 커피를 마셔본 일이 없었다. 처음 마셔본 믹스커피는 무척 달고 맛있었다.얼마쯤 지났을 때 소장이 다시 말을 건넸다.“사실 여기에 먼저 들어와 있으면 안 되는데, 안전을 위해 다시 바다로 나가야 합니다.”한국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사실에 안도한 김 씨 일행은 선선히 그말을 따랐다. 다시 타고 온 목선에 올라 바다로 나갔다. 한참 후 도착한 곳엔 해경 소속 경비정 3척이 기다리고 있었다. 경찰특공대가 총을 겨누고 이들을 체포하는 사진과 영상이 만들어졌다.나중에 알고 보니 김 씨는 동해에서 목선을 타고 한국으로 탈북한 최초의 사례였다. 이들이 도착한 날은 2003년 4월 6일이었다.경찰은 발표를 통해 “3명의 탈북민이 탄 목선은 어민들이 고기잡이를 위해 쳐 놓은 유자망 그물에 스크류가 걸려 표류하다 어민들에게 발견됐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달랐다. 이들은 목선을 타고 새벽 일찍 주문진항에 들어왔다. 그런데 너무 조용해 다시 바다로 나와 정치망 부표에 배를 묶은 뒤 누군가가 발견해주길 기다리던 참이었다. 이들을 발견해 신고한 선장은 3500만 원의 포상금을 받았다. 이런 사실과 함께 언론들엔 동해 경계가 뚫렸다는 기사가 도배됐다. 놀랍게도 이후에도 동해 경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북한 목선은 우리 군의 경계에 걸리지 않고 한국 해역까지 들어온다.● 82시간의 사투당시 20세였던 김 씨가 46세의 아버지와 40세 삼촌과 함께 함남 이원군을 출발한 시간은 2003년 4월 2일 오후 6시였다. 이후 주문진항에 도착해 발견되기까지 길이 5m, 폭 1.7m, 높이 0.5m에 6.5마력 경운기 엔진이 부착된 0.5t짜리 목선 위에서 82시간 동안 사투를 치러야 했다.이원군 라흥구의 선박초소에 뇌물을 주고 떠난 시간은 좀 더 이른 시각인 2일 오후. 항에서 떠나 얼마쯤 항해하다가 다른 해안에 배를 세우고 돼지고기, 닭고기, 식수, 20L 기름통, 추위를 피할 나무 등을 실었다.항에서 떠날 때 준비물이 많으면 의심받기 때문에 미리 특정 해안가에 긴 항해에 필요한 것들을 숨겨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떠난 때가 오후 6시였다.이들이 의지할 것은 몰래 구입했던 군용 나침판 하나뿐이었다. 항에서 떠난 뒤 남동 방향 45도로 나침판을 맞추고 계속 배를 몰았다. 먼 바다로 나갈수록 파도가 거세졌지만, 돌아갈 순 없었다.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떠난 길이었다.하루가 지난 다음날 저녁, 북한의 대표적 여객선인 ‘만경봉호’로 보이는 큰 배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김 씨는 “아버지, 저렇게 큰 배가 가는 것을 보니 우리가 공해에 온 것 같아요. 이제 남쪽으로 뱃머리를 돌려야겠어요”라고 소리쳤다. 그의 외침에 뱃머리가 남쪽으로 돌려졌다. 그런데 4일 새벽 예상치 못한 태풍을 만났다. 비가 세차게 내렸고, 엔진도 꺼졌다. 이전에도 이런 고장은 종종 있었다. 그때마다 엔진 전원 플러그를 뽑은 뒤 닦아서 다시 맞추면 시동이 걸렸다. 하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밤새 플러그를 닦았지만 시동은 걸리지 않았다.작은 목선으로 공해에서 표류하는 일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들은 소금포대를 뒤집어쓴 채 밤새 파도와 추위와 싸워야만 했다. 배에 차는 물을 퍼내며 사투를 벌였지만 점점 힘이 빠졌다. 피곤에 지쳐 잠에 떨어졌던 김 씨가 눈을 뜨고, 포대를 벗어던졌을 땐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다행히 비는 멎었다. 아버지가 배 머리에 웅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식량으로 준비했던 죽은 닭의 목을 칼로 쳐서 바다에 던지며 용왕님을 찾고 있었다. 살려달라는 뜻을 담은 일종의 굿이었다.그걸 본 김 씨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간절한 마음을 담아 하늘에 기도한 뒤 다시 플러그를 닦았다. 정성이 하늘에 닿았을까. 밤새 꺼졌던 엔진에 다시 시동이 걸렸다.일행은 다시 항해를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이들은 엔진이 꺼진 목선이 해류를 타고 남쪽까지 빠르게 흘러 내려왔다는 사실을 몰랐다.5일 오후 2시, 북한에선 본 적이 없는 큰 군함이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나중에 천안함 폭침사건이 벌어졌을 때 김 씨는 탈북할 때 봤던 군함이 천안함과 같은 1200t급 초계함일 거라고 생각했다. 군함은 목선에서 2, 3㎞ 지점까지 와서 멈춰 섰다. 아버지는 다급한 목소리로 “저게 조선 군함인지 남조선 군함인지 모르니 일단 엔진을 끄자. 엔진 소리도 음향탐지기에 적발될 수가 있다”고 소리쳤다.시동을 끈 이들은 군함을 향해 열심히 노를 저어갔다. 그런데 군함은 잠시 정박했다가 이들을 보지 못하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갔다.다시 아버지가 “남쪽으로 가는 것을 보니 저건 남조선 군함이 틀림없다. 저 배를 따라 가자”고 외쳤다.이들이 다시 시동을 걸고 군함이 이동한 방향으로 따라갔을 때 군함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고개를 들어 오른쪽을 보니 멀리 육지 비슷한 것이 보였지만, 구름인지 산인지 판단이 되지 않았다. 일행은 그쪽으로 갈지 여부를 놓고 옥신각신해야만 했다. 그러나 선뜻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 결국 남쪽으로 더 내려가기로 의견을 모았다. 잘못해 원산항에 들어갔다가 체포된다면 총살을 피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다시 한참을 남쪽으로 내려가던 중 바다에 떠있는 부표와 마주쳤다. 살펴보던 아버지는 “이것 봐, 부표 글씨체가 각진 것이 북조선 부표는 아니야. 여긴 이제 남조선이야”라고 소리질렀다. 그제서야 이들은 뱃머리를 육지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잠시 후 구름인지 산인지 헷갈렸던 게 육지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낮부터 쉬지 않고 달렸다. 하지만 배의 속도가 느려 새벽녘이 돼서야 해안가 인근에 도착할 수 있었다. 더 다가가지 않고 조용히 주시하니 해변에서 폭죽을 터뜨리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북한에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남조선임이 더욱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열심히 배를 몰아 당도한 항구는 주문진. 하지만 그때까지도 이들은 그곳의 지명을 알지 못했다.● 주문진항에 도착방파제에 도착한 뒤 일동은 배에서 내릴 생각이었다. 그 때 아버지가 일행을 막아섰다.“여기도 해안경비대가 있을 건데, 밤에 움직이다가 잘못하면 총에 맞을 수 있어. 여기 경찰이 우릴 발견하게 해야지, 우리가 먼저 육지에 올라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일단 배를 바다에 세우고 신호를 보내자.”다시 뱃머리를 돌려 바다로 향한 뒤 정치망 부표에 배를 묶었다. 그리고 화로에 불을 피운 뒤 해안을 향해 열심히 흔들며 소리쳤다. 하지만 반응이 전혀 없었다. 이들을 신경쓰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반응이 없자 지쳤지만 남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일행들은 “에라 모르겠다. 아침까지 좀 자자”며 하나둘 잠에 빠져들었다.얼마를 지났을까 고기배의 엔진소리가 귀를 때렸다. 그 소리에 놀란 김 씨는 벌떡 일어났다. 어선 선장은 국방색 북한 옷차림의 김 씨가 눈에 띄자 놀라서 “인민군이 나타났다”고 소리친 뒤 황급하게 사라졌다.해군 경비정에 끌려 다시 주문진항에 들어온 시각은 오전 9시. 항구엔 벌써 사람들이 새까맣게 모여 있었다. 세 명은 주문진항에 대기하고 있던 검정색 아우디 승용차에 한 명씩 실려 알 수 없는 어딘가로 이동했다. 도착한 곳은 군 사령부 같은 곳이었다. 그들을 맞이한 중장은 어떤 경로로 한국까지 오게 됐는지 설명할 것을 요구했다.거기에서 82시간 동안 벌어졌던 일을 설명했다. 이후 다시 승용차를 이용해 그들은 서울로 향했다. 이동 과정에서 차창 밖으로 자동차 행렬에 막힌 고속도로가 보였다. 북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이었기에 무척 신기했다.서울 모처에서 각방에 수용된 이들은 본격적인 심문을 받았다. 아버지와 삼촌은 2주 만에 심문이 끝났다. 그런데 김 씨는 한 달이나 계속했다. 나중에 되돌이켜보니 나이를 한 살 줄인 것이 화근인 듯 했다.김 씨는 한국에 오면 군에 입대할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나이를 줄이는 게 유리할 것 같아 태어난 해를 83년이 아닌 84년이라고 바꿔 대답했다. 아버지와 삼촌의 심문과정에서 자신의 정보가 모두 알려졌을 것이라는 생각을 못한 것이다. 그래도 한 달 동안 심문을 받으며 끝까지 84년생이라 우겼다. 결국 조사관들도 그의 고집에 꺾여 84년생으로 된 주민등록증을 발급해주었다. 개별적으로 묶는 방에서 조사받을 때는 방으로 배달해주는 밥만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심문이 끝나고 단체 수용시설로 옮기니 뷔페식으로 차려진 식당에 맘껏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하나원에서 김 씨는 20세 미만이라 청소년반에 배정됐다. 북한에선 17세에 군대를 가지만, 남한에서는 20세 미만이면 청소년으로 분류된다는 사실에 그는 놀랐다.한편으로는 앞으로 군대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겨 좋았다. 김씨가 군 입대를 원했던 데에는 북에서 당한 세뇌 탓이 컸다. 어렸을 때부터 군대에 가야 출신성분도 고치고, 아버지 죄도 씻을 수 있다고 교육받았던 것이다.● 오솔길을 따라 6시간 통학김 씨가 1983년 함남 이원군에서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기관차 부품을 만드는 공장 노동자였다. 군에서 특수부대 교관까지 했던 부친이 노동당에 입당하지 못하고 이원군 노동자로 내려온 이유는 출신성분 때문이었다. 김 씨의 증조할아버지는 해방 전 강원도 고성군의 지주였다. 해방 후 박해를 피해 간 곳이 하필 남쪽이 아닌 북쪽의 평북 지방이었다.할아버지는 기술자로 인정받아 한때 평양에 살기도 했지만, 나중에 이원으로 추방됐다. 이곳에서 태어난 김 씨는 어렸을 때부터 체육을 좋아했다. 인민학교 때에도 체육 특기생들만 모인 반에 들어가 스케이트, 축구, 마라톤 등 해보지 않은 스포츠가 없었다.그런데 그가 11살 때인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고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 노동자로는 먹고 살 수 없었던 부친은 자강도로 떠났다. 그때 공장마다 김정일에게 ‘충성의 선물’을 바친다는 조직을 만들었는데, 부친의 공장은 산삼과 꿀을 바치기로 했다.부친은 자강도 화평군에 꿀 생산 기지를 만들겠다며 떠났다. 앉아서 굶어죽느니 차라리 심심산골에 들어가 농사를 해야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어머니와 김 씨, 두 동생 등 5명을 이끌고 도착한 곳은 화평역에서 차로 한 시간을 간 뒤 다시 걸어서 2시간이 걸리는 첩첩산중이었다. 그곳에서 외딴 동기와 나무집에 살아야만 했다. 가까운 동네에 가려고 해도 2시간을 걸어야 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등잔불을 붙이고 살아야만 했다. 이곳에서 김 씨 가족은 나무를 베고 뿌리를 뽑아 밭을 만들었다.김 씨가 다녀야 할 학교는 왕복 25㎞ 거리라 통학에만 6시간씩 걸렸다. 그것도 길이 없어 숲 속 오솔길을 따라 다녀야 했다. 학교에서 조금이라도 놀다간 한밤중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날 11세 소년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걸어야 했다. 혹시라도 만나게 될 산짐승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그래도 김 씨는 하루도 학교를 빼먹지 않았다. 학교에 가지 않으면 집에 남아 돌밭을 개간하거나 옥수수 농사를 해야 했다. 당시 그는 그런 일들이 정말 싫었다.처음 도착했을 때만 해도 김 씨 가족은 질경이 풀을 베어 독을 빼기 위해 하루 종일 끓인 뒤 옥수수 한 국자를 풀어 죽을 해먹었다. 나중에 점차 자리를 잡으면서 옥수수밥도 먹었다.부친은 토종꿀을 생산한 뒤 열심히 공장에 바쳤다. 점점 생산량이 늘어나자 공장에서 차를 내줬고, 꿀을 실어 나를 수 있었다. 김 씨는 중학교 6년 과정 중 처음 2년은 화평, 이후 2년은 이원에서 다녔다. 졸업 전에 다시 화평으로 돌아왔고, 나머지 과정을 마치고 2001년에 졸업했다.● 15년형을 선고받은 아버지중학교 졸업 직전에 부친이 감옥에 끌려갔다. 2000년 김정일의 생일선물로 할당받은 꿀을 생산하지 못했다. 그걸 빌미로 검찰이 달라붙었다. 이 과정에 장군님의 선물 마련을 위해 공장에서 내준 차를 제멋대로 유용해 재산을 벌었다는 죄까지 뒤집어썼다. 부친은 꿀을 싣고 간 차에 돌아올 땐 생선을 싣고 와 자강도에서 팔았던 게 화근이었다.꿀을 생산할 때 당국으로부터 지원받은 건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먹고 살기 위해 벌인 일에는 칼 같이 죄를 묻는 세상이었다. 부친은 이원의 영화관에서 공개재판을 받고 15년형을 선고받았다.자강도에 살고 있던 가족은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전화도 없고, 편지를 써봐야 배달도 되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1년 동안 부친에게 연락이 없어도 찾아갈 엄두조차 내기 어려운 곳이었다. 당시는 기차를 타고 화평에서 이원까지 가려면 보름씩 걸렸다.김 씨는 중학교 졸업 후 군 입대를 위해 이원에 갔다가 아버지가 수감됐다는 사실을 전해들었다. 다행히 김 씨가 갔을 땐 아버지는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구타를 심하게 당해 건강이 크게 악화된 상태였는데, 삼촌이 뇌물을 써서 그나마 집에 머물며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장남인 김 씨를 보자 부친은 “네가 이제 군대에 가면 100% 영양실조에 걸릴 것 같으니 전문대학에 2년 정도 다니면서 살을 찌운 뒤 가라”고 당부했다.병중인 부친의 말에 김 씨는 선선히 따르기로 했다. 그는 2년제 철도공장 기능공 전문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북한 전문학교는 거의 운영되지 못했다. 학생들이 이름만 학교에 걸어놓고 돈을 벌었다. 선생들에게 뇌물을 주면 출석을 인정해주던 때였다.부친은 집안 재산을 팔아 목선을 하나 장만해주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탈북을 결심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바다 경험을 쌓게 할 목적이 숨겨져 있었다. 이런 사실을 몰랐던 김 씨는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닥치는 대로 일했다. 가족들의 생계가 달린 일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돈을 벌었다. 여름엔 오징어를 잡았고, 고무호스를 달고 잠수부 일도 했다. 제대로 된 장비는 꿈꾸기도 어려웠다. 북한의 어부는 칠성판에 목숨을 맡겨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19세 때 15m 깊이에 들어가 돌미역을 베다가 산소를 공급하던 엔진이 멈춰서는 바람에 죽을 뻔하기도 했다. 파도가 센 날에 갯바위 옆에서 작업하다가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어 닥쳐 배가 박살이 나는 일도 있었다.그래도 목선을 타고 일하는 것은 그 마을 사람들에겐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위험하긴 해도 굶어죽진 않을 수단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김 씨의 고향인 라흥노동자구에선 고난의 행군 때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김 씨네 마을 앞 배 밭은 3년 만에 거대한 공동묘지로 변했다.● 탈북을 계획하다김 씨가 바다에서 일을 하는 동안 아버지는 수시로 감옥을 들락거렸다.2002년 7월 아버지가 뇌물을 주고 다시 7개월 병보석으로 나왔다. 아버지는 종종 아들과 함께 해변에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친이 숨죽이며 조용히 그에게 말을 건넸다. “여긴 아닌 것 같다. 내가 이제 감옥에 가서 형기를 채우면 60세가 되는데 그럼 인생이 끝나. 남조선에 가면 인권이란 것이 있다는데 최소한 굶어죽진 않을게 아니냐.”아버지의 말을 경청하던 김 씨는 펄쩍 뛰었다.“무슨 소리해요. 제가 군에 가서 입당도 하고, 열심히 살아서 아버지의 죄도 씻을게요.”“출신성분이 나쁜데 군대에 가도 네가 바라는 부대에 갈 것 같냐. 여기 주둔하고 있는 호위국 군인들을 봐봐. 너도 총도 못 쏘고 10년 내내 탄광에서 일하든가, 나무를 베든가 그러다가 입당도 못하고 올 거야. 아니, 영양실조 환자가 돼서 1년 안에 오지 않으면 다행이지.”김 씨는 직전에 군에 나간 친구가 영양실조에 걸려 돌아온 것을 보았다. 체격 조건이 김 씨보다 더 좋았던 친구였는데 1년 만에 기차에서 스스로 내리지도 못해 김 씨가 역에서 집까지 업고 왔다.이버지의 설득은 계속 됐고, 김 씨는 점차 수긍이 됐다. 무엇보다 북한에서 열심히 살아봐야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아버지 말에 공감이 갔다. 다만 뭍에서 조금만 나가도 파도가 엄청 높은데 높이가 50㎝ 밖에 되지 않는 목선을 타고 남조선에 간다는 것은 무모한 계획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바로 옆 차호해군기지에서 레이더기지를 운영하고 있어서 탈북 시도를 제대로 하기도 전에 잡힐 수 있다는 우려도 영향을 미쳤다.그런 이유들로 결심을 하지 못한 채 차일피일 미루는 동안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그렇게 아버지의 병보석 기간이 끝나는 이듬해 4월이 다가왔다.아버지는 다시 그를 불러 정색하고 말을 꺼냈다.“이제는 더 지체할 수 없다. 내가 찾아보니 옛날 발해랑 신라가 해상 교역하던 시기가 청명 때였다고 하더라. 이때는 파도도 없고, 해류도 남쪽으로 흐른다고 했어. 이젠 떠나야 해.”마침내 김 씨는 아버지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거기에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고민도 한몫했다. 북에서는 그의 앞날도 별 볼일이 없을 게 분명하다는 판단이 섰던 것. 아버지는 삼촌도 설득해 함께 탈북하기로 했다. ● 어머니와의 이별세 사람은 떠나는 날짜를 일단 2003년 4월 2일로 정했다. 그런데 생각하지 못한 변수가 생겼다. 떠나기 일주일 전 자강도에 살던 어머니가 무슨 예감이 들어서인지 불쑥 나타난 것이다. 김 씨가 이원에 나온 2년 동안 어머니는 자강도에서 동생들과 함께 지냈다. 그동안 김 씨 부자는 가족들에게 별도로 연락하지 않았다. 편지를 써봐야 어차피 배달도 안 되는 곳이라는 부질없는 일이라 여겼던 것이다. 남편과 아들의 근황이 궁금했던 어머니는 왕복에 거의 한달이 걸리는 먼길을 마다 않고 이원까지 달려온 것이었다. 부자는 아내이자 어머니에게 남조선으로 가기로 했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목선에 3명 이상 탈수도 없거니와 가다가 죽을지도 모르는 판에 모두 떠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또 자강도엔 어머니가 돌봐야 하는 동생들도 있었다.남편과 아들이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어머니는 3일 뒤 다시 돌아갔다. 기차역에서 김 씨는 어머니 앞에서 참을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 군대에 가서 잘 해서 호강시켜 드릴게요”라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기차역에서 그는 옷 속에 숨겨놓고 바느질로 꿰맨 500원짜리 지폐를 계속 만지작거렸다. 쌀 몇 ㎏을 살 수 있는 그 돈은 탈출을 위한 최후의 비상금이었다. 혹시 일이 틀어져도 500원이면 몇 끼는 사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숨겨놓은 것이다. 그때까지도 김 씨는 남조선에서도 북한돈이 통용될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만큼 세상에 대해 무지했다. 그래서 끝내 어머니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 한국에 도착해 그 500원은 압류됐고, 무용지물이 됐다.김 씨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목이 메고, 가슴 한켠이 먹먹하다. 나중에 자신이 창업한 기업에 ‘오백환경산업’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그 때문이다.김 씨는 한국에 도착한 이후 북에 있는 가족을 찾으려 무진장 애를 썼다. 하지만 성과는 없었다. 주소도 없는 심심산골이라 아무리 돈을 많이 주겠다고 해도 가겠다는 사람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택견 사범이 되다김 씨가 하나원을 나온 때는 2003년 9월이었다. 서울에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에 따라 부자는 노원구 중계동에 위치한 임대주택을 받았다.노원에 도착한 당일 김 씨는 집에서 나와 동네를 돌아다녔다. 사회에 나온다면 하고 싶었던 게 한 가지가 있었다. 그건 태권도 배우기였다. 북에선 집안 형편이 어느 정도 돼야 태권도를 배울 수 있었다. 새로운 세상에 왔으니 그것부터 경험하고 싶었다.이곳저곳 태권도 간판이 붙은 곳들을 찾았다. 하지만 모두 아이들만 가르친다며 어른은 받지 않는다는 말만 들었다.저녁이 돼서 택견이라는 간판이 붙은 곳을 발견했다. 그곳에 들어가 보니 성인들도 훈련을 하고 있었다. 관장은 중년의 여성이었다. 그는 한국택견협회에서 여성 최초의 택견 공인지도자 자격을 받은 이현기 관장이었다. 탈북민인데 태권도를 배우고 싶다는 김 씨에게 이 관장은 더 이상 묻지 않고 회비도 받지 않을 테니 대신 청소를 하면서 틈나는 대로 배워보라고 했다. 이때 맺어진 인연으로 이 관장은 김 씨의 양어머니가 됐고, 그의 결혼식에서는 모친석에 앉았다.그는 이때부터 4년 동안 열심히 택견을 익혔다. 아침 9시에 출근해 청소를 하고, 오후에 버스를 몰아 초등 중등 과정에 다니는 애들을 태워오고, 저녁엔 성인부와 함께 택견을 익혔다. 모든 일과가 끝나고 마무리 청소를 한 뒤 집에 가면 새벽 1시반이었다.하루도 빠짐없이 2년 동안 그런 생활을 해낸 결과 지도사범 자격증도 따냈다. 지도사범이 되니 월급도 나오고 시범단 운영도 가능해졌다. 어느 정도 한국 생활에 적응했다싶으니까 안정적인 생활에 대한 갈증이 생겼다. 그래서 정수기능대학에 입학해 용접기능사 자격증을 땄다. 용접을 하면 조선소에서 큰 돈을 벌 수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첫 직장은 엘리베이터 회사였다. 용접 자격은 쓸모가 없었다. 월급 160만 원을 받으며 2년쯤 다녔다. 하는 일은 엘리베이터 점검표를 작성이었다. 미래가 보이질 않았다. 그와 함께 다니는 직장생활 13년 차 대리도 200만 원을 받았다. 이렇게 계속 살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회사에 다니면서 밤이면 택견 체육관을 찾아 운동을 계속했던 이유다.● 탈락한 특전사 시험무술사범이 되겠다는 꿈을 이룬 김 씨는 다음 행보를 고민했다. 그가 한국에 올 때 결심했던 일은 군 입대였다. 이왕이면 특전사에 가고 싶었다. 특전사 부사관으로 근무하다 제대하면 수천 만 원의 목돈이 생기고, 이를 씨앗자금으로 삼아 제대 후 택견 도장도 차릴 수 있을 거란 생각이었다.병무청에 문의했더니 북에서 온 탈북민은 군 입대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답이 돌아왔다. 포기할 수 없었다. 다시 국방부 홈페이지에 “군에 가고 싶은데, 탈북민이라고 뽑아주지 않는 것은 차별이 아닌가”라는 글을 남겼다. 며칠 뒤 “지원하세요”라는 전화가 걸려왔다.마침내 원하던 특전사 시험에 응할 수 있게 됐다. 과정은 까다로웠다. 실기 시험만 무려 일주일 동안 치러졌다. 그런데도 즐거웠다. 무엇보다 식사가 좋았다. 첫날 특전사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데 밥이 너무 맛있고 잘 나와서 눈이 뒤집혀졌다. 북한에서 군에 입대했다가 영양실조로 돌아온 친구들이 떠올랐다.“여기 군대는 이렇게 맛있는 밥을 먹고 살다니. 내 꼭 입대해 조국을 위해 한 몸을 바치는 인간병기가 되리라.”택견 지도사범인 그에게 실기 시험 통과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15㎏ 군장을 메고 2㎞ 뛰는 시험엔 지원자 57명 중 2등으로 들어왔다. 윗몸 일으키기, 턱걸이 등도 최고 성적으로 통과했다. 필기시험도 잘 보았다. 마지막 관문은 신체검사였다. 신청자 57명 가운데 그 때까지 살아남은 인원은 40명.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신체검사장에 들어섰다. 그런데 그에게만 옷을 벗고 신체검사를 받으란 이야기가 없었다. 어쩔 줄 몰라하던 그에게 담당관이 다가와선 “김성주 씨는 이번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라며 불합격 통보를 전했다.어처구니가 없고 화도 났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허탈한 마음을 달래며 특전사 정문을 나서던 그 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김성주 씨, 합격하셨어요.”전화기 건너편에서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공은 한국 체대 관계자였다. 특전사 시험이 우선이었지만, 혹시 몰라 지원서를 넣은 체대에 합격한 것이었다. 그렇게 돼 그는 한국체육대학 태권도과 07학번으로 입학했다. 그는 특전사에 입대하지 못한 일이 지금도 아쉽다. 탈북민 출신의 첫 특전사 부사관은 그로부터 10년 뒤인 2017년에 나왔다.● 뜻밖의 놀이공원 사장체육대학 생활은 힘들었지만 보람도 컸다. 그는 노원구의 집에서 송파구에 있는 대학까지 오토바이로 등하교를 했다. 그러다 2학년 때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현장에서 기절했다 깨어나 보니 병원이었다. 왼쪽 다리가 탈고되고 신경도 손상됐다. 이로 인해 그는 선수부는 포기하고 지도자 과정을 이수하고, 졸업해야만 했다.재활치료에만 6개월이 걸리고, 완치된다 해도 태권도를 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문제는 재활치료비였다. 돈을 구할 길이 막막했다. 그 때 강원도 원주에 있는 오크밸리 리조트 놀이동산에서 아르바이트를 찾는다는 고마운 소식이 전해졌다. 이후 그는 주말과 방학 때마다 원주에 내려가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가 맡은 놀이기구는 ‘유로번지’였다. 트램펄린과 번지점프를 접목해 두 가지 기구의 매력을 동시에 즐기고 느낄 수 있도록 만든 놀이기구였다.그는 이 놀이기구에 푹 빠졌다. 트램펄린 위에서 택견 시범 하듯이 텀블링을 하니 아이들이 신기하다고 모여들었다. 그런 동작은 그의 재활운동에도 도움이 돼 일석이조였다.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눈여겨봤던 놀이동산 사장이 그에게 7500만 원에 유로번지를 인수할 것을 제안했다. 대금은 운영 수익과 월급에서 정산하기로 했다.주말과 방학 성수기면 어김없이 원주를 찾아가 눈에 불을 켜고 열심히 일했다. 그 결과 돈이 모였고, 대학 졸업 전에 그는 바이킹과 에어바운스라는 놀이기구까지 인수했다.그런 식으로 지내다보니 놀이동산 전체를 다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장은 권리금 5000만 원만 주면 운영권을 넘기겠다고 했다. 돈을 구할 데가 마땅치 않았던 그는 미래의 장모를 찾아가 넉살 좋게 돈을 빌렸다. 한 달 안에 갚겠다는 약속도 했다.그 소식을 접한 장인은 “결혼도 안한 예비사위에게 돈을 빌려주는 법도 있냐”며 혀를 찼지만 결국 돈을 만들어주었다. 그는 약속대로 한 달 안에 빌린 돈을 모두 갚았다.아내는 대학 1학년 때 소개팅에서 만났다. 학교 형을 따라간 2대2 미팅자리였다. 그 자리에서 은행에 다닌다는 여성이 마음에 들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4살이었고, 아내는 26살이었다.연상연하라는 사실이 부담스러웠던 아내는 처음에 그의 구애를 거절했다. 하지만 그의 계속된 구애에 결국은 그를 받아들였다. 이후 아내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그의 곁을 지켜줬다. 연애를 시작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그가 교통사고로 입원했을 때 아내는 매일 퇴근할 때마다 병실을 찾아왔다. 그렇게 사랑을 키운 두 사람은 그가 대학을 졸업하던 2011년 결혼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크밸리 놀이공원 사장 자리에도 올랐다. 사업장 이름은 그와 아내의 이름에서 한자 씩 따서 ‘EJ레포츠’라고 정했다.●강원지구 JC 회장이 되다운동만 알았던 그였지만 놀이공원을 운영하면서 자신이 회사 경영에 뛰어난 소질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가 인수할 때까지만 해도 놀이공원의 연매출액은 7000만~8000만 원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가 인수한 이듬해 매출액은 3억 원으로 껑충 뛰었다. 오크밸리에 납입하는 수수료 23%와 직원 인건비 등을 다 제외하고도 1억 5000만 정도 손에 쥘 수 있었다.그는 그렇게 모인 돈을 놀이기구와 부동산 등에 투자했다. 그 결과 현재 놀이기구 기종은 11종에 달한다.집도 원주의 전원주택을 사서 이사했다. 서울서만 살아온 아내도 전원생활이 좋다고 찬성했다.노력을 아까지 않으며 놀이공원 사업에 공을 들였지만 올해로 마지막으로 막을 내리게 됐다. 올해 사업자 선정입찰에서 그가 제시한 금액보다 훨씬 많은 돈을 제시한 대기업에 밀린 것. 아쉬웠지만 주저앉지는 않았다. 대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놀이동산보다 더 큰 다른 사업을 시작했다.2014년 발생한 세월호 사고 이후 전국 각급 학교에는 생존수영을 가르치는 수업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하지만 수영장을 갖춘 학교는 전체의 2%에 불과했다. 김 씨는 이를 기회로 여겼다.“이동식 수영장을 만들어 교육을 해보면 어떨까.”그는 조립이 가능한 이동식 수영장 장비를 마련해 공개입찰에 뛰어들었다. 반응이 좋았다. 고무된 그는 겨울에도 수업이 가능한 에어돔 형태의 이동식 수영장 시설까지 마련했다. 위기도 있었다. 코로나19가 발생하면서 비대면 수업이 대세가 됐고, 수영 수업도 열리지 않았다. 그렇게 힘든 겨울을 버텨내자 다시 봄이 왔다. 2022년부터 생존수영 수업이 재개된 것이다. 그는 현재 경기도와 강원도 일대 초등학교를 대상으로 실존수영 수업을 늘려가고 있다.사업이 안정되면서 사회활동도 늘어났다. 그는 2022년에 한국청년회의소(JC) 원주지역 회장으로 선출됐다. 2017년 원주JC에 입회해 사무국장, 외무부회장, 상임부회장을 차례로 역임하면서 회원들의 신뢰를 받은 덕분이다.지난해엔 강원지구 JC 회장으로 당선됐다. 19명이 후보로 등록해 치열한 경합이 펼쳐졌지만, 특유의 친화력과 활동성을 널리 인정받은 결과였다.회장 선거를 치르는 과정에서 만난 우연한 인연도 있다. 그의 경력이 알려지자 속초 JC회장이 다가와 “2003년 그 목선을 나포할 때 나도 해경으로 현장에 있었다”고 밝힌 것. 20년 전 해경과 소금물을 뒤집어쓰고 꾀죄죄한 몰골이었던 탈북민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또다시 한 자리에서 만난 일이어서 주변 지인들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됐다. 남쪽에서 성공적이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김 씨와는 달리 함께 온 아버지와 삼촌은 안타깝게도 그다지 행복한 일상을 경험하지 못했다. 삼촌은 8년 뒤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도 남양주에서 소 5마리로 목축업을 시작했다가 삼촌이 운명하자 크게 실망한 뒤 네덜란드로 이민을 떠났다. 현재 그곳에서 시민권을 획득해 살고 있다.김 씨의 롤모델은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다.“정주영 회장님이 소 한 마리를 갖고 왔다가 나중에 고향으로 1000마리를 끌고 가지 않았습니까. 저는 배 한 척을 몰고 왔으니 배 1000척은 끌고 올라가고 싶습니다. 김정은과 만나 남과 북이 물물교환으로 공동의 부를 창출하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통일되면 통일부 장관도 해보고 싶습니다. 저처럼 시장경제체제에서 사업을 해 본 사람이 누구보다 북한 인민들을 시장경제로 잘 인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그는 늘 큰 꿈을 꾸고 살았다. 남과 북에서 반반의 삶을 살아온 41세 김성주 대표. 그가 걸어가야 할 미래는 아직도 멀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4-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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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번의 북송 견디고…北~南으로 이어온 요리인생 40년[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북 강원도를 떠나, 남 강원도에 뿌리내리기까지 10년이 걸렸다.강원도 원주 시내에서 금강산막국수 식당을 운영하는 이순복 대표는 1966년 북한의 최남단인 강원도 고성에서 태어났다. 한반도를 대표하는 명승지 금강산 자락에 마을이 자리한 경치 좋은 곳이지만, 이곳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마음대로 놀려 다니지 못했다. 한국 간첩들이 들어와 아이들을 잡아간다고 어려서부터 귀가 빠지도록 들은 선전 탓이다. 부모들도 어둠이 내리면 아이들을 내보내지 않았다.출입문 위에는 커다란 나무 몽둥이에 뾰족한 대못을 잔뜩 박은 ‘고슴도치 방망이’가 늘 걸려있었다. 수상한 사람이 오면 내려치라고 당국이 의무적으로 걸게 한 것이다.이 씨가 8살 되던 때 부모들은 끝내 고성을 떠났다. 6남매를 늘 불안에 떨면서 살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계공장 노동자였던 이 씨의 부친은 같은 강원도 고산군 설봉리로 이주했다. 고성에서 나서 자린 이 씨는 고산에 가서 어마어마하게 큰 차가 있고, 기차로 불린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이곳에서 그는 인민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다. 1983년 17세의 나이로 중학교를 졸업하자 국가가 임명한 직장은 보건부 산하 요양소였다.● 특권계층을 위한 요양소설봉리는 고려 말기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인연을 맺은 석왕사가 위치한 경치 좋은 마을이었다. 그래서인지 이곳 골짜기를 따라 사회 및 군부 요양소만 11개나 있었다.학교를 졸업하고 요양소에 배치되는 일은 큰 특혜였다. 이 씨의 동창 중에선 인물, 체격을 보고 3명만 선발됐다. 요양소는 여성에게 접대원과 요리사라는 두 개의 선택지를 주고 고르게 했다. 그는 요리사를 선택했고, 함북 김책에 있는 6개월 과정의 요리학원에 보내졌다.그가 근무한 요양소는 중앙당 고위 간부들이 가족과 함께 놀려오는 특별과와 회사에서 일을 잘한 일반 근로자들이 포상 형식으로 선발돼 오는 일반과로 나뉘어 있었다. 입소자들은 한 달 동안 요양소에서 쉴 수 있는데, 특별과와 일반과의 인원 비중은 8 대 2 정도였다.특별과와 일반과는 숙소와 식당부터 달랐다. 특별과는 매일 고기와 생선 등 12가지 반찬이 제공됐다. 반면 일반과는 반찬이 염장무, 염장양배추, 염장오이 등 ‘염장 삼형제’ 뿐이었다. 항상 말로는 평등한 사회주의를 외쳤지만 어디서든 평등은 없었다.특별과와 일반과 사람들이 평등하게 먹는 것은 위장병 치료에 특효가 있다는 약수뿐이었다. 요양을 하는 시늉을 내느라고 그랬는지는 몰라도 입소자들에게 아침, 점심, 저녁으로 체크까지 하면서 약수를 마시게 했다.이 씨는 이곳에서 7년을 일하다가 23살 때인 1989년에 군인 병원 화식장(주방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요양소의 생활은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어머니가 입당을 하려면 군 계통에서 일해야 한다며 등을 떠밀어 선택한 것이었다.● 이루지 못한 사랑새로 일하게 된 곳은 군단급인 806훈련소 64호 병원이었다. 병원엔 영양실조 환자가 많이 왔다. 이 씨는 그곳에서 1998년까지 9년 동안 근무했다.1990년대 중반의 고난의 행군 시기엔 영양실조에 걸린 군인들이 끊임없이 이송돼 왔다.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식사는 단백질 보충을 위해 콩기름을 한 숟가락씩 부은 밥에다 조리한 두부 정도였다.영양실조뿐만 아니라 사고를 당한 군인도 많이 왔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반엔 인근에서 금강산발전소 갱도 작업이 진행됐다. 열악한 환경이라 사고가 한번 터지면 많이 다쳤다. 한꺼번에 사고를 당한 40~50명이 실려 왔던 날도 있었다.화식장은 밑에 6명의 조리사를 통솔하는 위치였다. 군 병원에서 일하면 노동당에 입당시켜 준다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가 직장을 바꿀 때 뒤를 봐주겠다던 정치부장은 물러나면서 뒷배도 사라졌다. 그 때 이 씨는 병원 노무자로 일하면서 입당하는 일이 하늘의 별따기란 사실을 깨달았다. 실제로 수십 년을 일했어도 노동당원이 되지 못한 사람들이 허다했다.견딜 수 없는 일은 또 있었다. 당시 그는 17세 때 요리학원에서 만났던 남자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각자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마음을 확인해왔다. 그런데 노동당원인 어머니는 죽어도 결혼을 허락할 수 없다고 완강하게 반대했다. 상대 남성이 귀국자 출신이어서 결혼하는 순간 출신성분이 하락한다는 게 이유였다.결혼을 둘러싼 갈등은 계속됐고, 그러는 사이 이 씨는 나이만 계속 먹었다. 어느덧 북한에선 결혼을 하기 힘들다는 나이인 33세가 되자 그는 폭발했다. 어느 날 병원에 나가지 않고 집을 뛰쳐나가 함북 청진에 있는 언니에 집으로 도망을 갔다. 그때가 1998년이었다.하지만 언니 집이라도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외지에서 젊은 여성이 왔다는 소문이 동네에 퍼지자 집에 이 핑계, 저 핑계로 드나드는 사람들이 슬슬 생겨났다.“요즘 젊은 여자들은 다 중국에 시집가. 거기 가면 풍족하게 살 수 있어”라고 바람을 넣는 할머니도 있었고, “결심만 내리면 바로 중국에 데려다 주겠다”고 제안하는 젊은 여성도 있었다. 젊은 여성을 중국에 팔면 돈이 생기는 시절이라 집을 나온 이 씨를 보고 군침을 흘리는 사람들이었다.이 씨가 도망쳐 온 이유를 묻기 위해 언니가 강원도로 부모를 찾아갔다. 속이 상한 부모들은 “그 애는 내놓은 자식이니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로 언니를 되돌려보냈다.이 씨는 반발심이 생겼다.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언니네 집에 계속 있을 수도 없었다. 더 이상 발을 붙일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중국행을 결심했다. 중국에 사촌오빠가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으니 가면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짜 공안에 속아 끌려가1998년 10월 이 씨는 두 여성과 함께 두만강을 넘었다. 그들을 인솔해 간 브로커가 경비대를 매수했기에 대낮에 강을 어렵지 않게 건넜다.강을 건너자마자 중국 사람이 마중 나와 그들을 싣고 화룡으로 들어갔다. 중국에서 잡히지 않고 살려면 중국 남성을 만나 같이 사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도 이런 일을 이미 각오하고 온 터였다. 이 씨의 짝은 연길 인근 조양촌이란 곳에 사는 남자로 정해졌다. 이 씨보다 한 살 어린 농부였다. 가난한 형편에도 결혼하겠다고 3000위안이라는 큰 돈을 내고 그를 데려갔다.그럭저럭 중국에 잘 정착하나 싶었지만 반년쯤 지나 위기가 찾아왔다. 어느날 저녁 갑자기 집 앞에 차 두 대가 나타나더니 사내 여섯이 내렸다. 이중 세 명은 공안 복장을 하고 있었다.이들은 집에 들이닥쳐 이 씨의 남편에게 족쇄를 채우고, 이 씨는 차에 태웠다. 남편에겐 벌금 수천 위안을 들고 오면 이 씨를 석방하겠다고 했다.이들이 떠난 뒤 이상한 낌새를 느낀 남편은 마을에 있던 중국 공안에 신고했다. 마침 주변에 있던 공안차가 즉각 두 대를 추격해 이 씨가 탔던 차를 막아섰다. 사내들은 이 씨를 팔았던 브로커 일당이었다. 북한 여성을 팔아 돈을 챙기고 몇 달 뒤 공안원을 가장해 여자를 데리고 가서 다시 팔아치우려 했던 것이다. 중국 공안에 체포된 사내 일당은 6년 형을 받고 감옥으로 보내졌다.중국 공안들은 이 씨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것으로 모든 게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3일 뒤 중국 공안들은 차를 끌고 다시 나타나 그를 체포한 뒤 북송 조치를 내렸다. ● 반 년 만에 끌려간 북한1999년 6월 그는 다시 북한으로 끌려갔다. 북송된 탈북민이 거치는 보위부 조사, 단련대, 청진 농포집결소 생활이 이어졌다. 집결소에 들어가니 처음 청진에 왔을 때 봤던 일이 떠올랐다. 시장에서 허름한 옷을 입은 40~50명의 사람들이 어디론가 끌려가는 모습이었다. 언니는 이들이 중국에 갔다 잡혀 북송된 사람들이라고 했다. 당시 이 씨는 그들에게 배신자라며 욕을 했다. 1년 뒤 자신이 똑같은 신세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농포집결소에서 약 보름 정도 있었을 때 강원도 고산안전부에서 이들을 이송하기 위해 안전원이 나타났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를 보고 운이 좋다고 했다.어떤 사람은 고향에서 인계인수를 받으려 안전원이 오지 않아 집결소에서 몇 달씩 있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냥 수감돼 대기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혹독한 강제노동을 시키기 때문에 몇 달만 지나면 영양실조 환자가 된다.고산까지 끌려간 이 씨는 안전부 유치장에 구금됐다. 북송된 사람들은 거주지까지 호송돼 거기서 재판을 받은 뒤 교화소에 갈지 단련대로 갈지가 결정된다.행운이 찾아왔다. 마침 고산안전부가 건물 공사를 하고 있어 임시 유치장을 사용했는데, 살창 간격이 넓었다. 몇 달 동안 조사를 받으며 뼈밖에 남지 않은 이 씨가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는 너비였다. 함께 수감됐던 여성 두 명과 함께 그는 도망쳤다.유치장을 탈출한 이 씨는 집에 들리지도 않고 다시 함경도로 향했다. 이번엔 행운이 따르지 않았다. 한밤 중에 무작정 두만강에 들어섰는데 생각보다 물이 깊어 키를 넘었다. 놀라서 다시 기슭으로 돌아오다 국경경비대에 걸린 것이다.보위부 조사-단련대-농포집결소-고산안전부으로 이어지는 이송 과정이 다시 반복됐다. 고산까지 갔는데 배가 많이 불러왔다. 처음 체포돼 북송될 때만 해도 그는 자신이 임신했다는 것을 몰랐다. 가혹한 환경이지만 배 속의 생명력은 끈질겼다. 고산안전부에선 만삭에 가까운 그를 차마 잡아둘 수 없었던지 집에 가서 아이를 낳고 오라고 내보냈다.가석방되자마자 그는 다시 중국으로 향했다. 이번엔 브로커를 끼고 무사히 강을 넘었다. 그때가 1999년 11월 말이었다.● 네 번째 북송을 피해 한국행이때부터 이 씨는 밤에 잘 때마다 문을 걸어 잠갔다. 밤에 공안이 쳐들어올 것을 대비한 조치였다. 오전에 두부를 만들어 시장에 넘기는 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것만이 당시로서는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경제활동이었다.2000년에 아들이 태어났다. 그런데 아들이 돌도 되기 전인 이듬해 봄 그는 또다시 체포됐다. 비가 억수로 내리는 날이라 공안이 오지 않을 것으로 방심하고 문을 잠그지 않았는데, 그날 공안이 들이닥쳤다. 세 번째 북송이었다. 이번엔 북송될 때 돈을 몸 속 여기저기 감추고 끌려갔다. 보위부 조사-단련대-농포집결소까지 다시 같은 코스를 밟아 이송이 진행됐다. 하지만 돈을 가져간 덕분에 고산안전부까진 끌려가지 않았다. 숨겨둔 돈을 호송 안전원에게 건네자 그는 도망을 가라고 눈치까지 주었다. 기차를 타고 가던 도중에 이름 모를 역에 내려 그는 다시 중국으로 향했다.중국에 돌아오니 촌 정부에서 아이까지 낳고 정착해 사는 여성을 세 번이나 북송한 것은 지나친 처사라며 앞으론 공안이 잡아가지 못하게 막아주겠다고 했다. 그는 이후 중국돈 500위안을 촌 정부에 바치고 보호를 받았다.하지만 그런 생활이 영원할 수는 없었다. 2007년 다시 연길에 탈북자에 대한 검거선풍이 불었다. 그 와중에 체포된 탈북민 중에 이 씨를 잘 아는 여인이 포함돼 있었다. 그는 이 씨가 한국으로 가는 탈북민 10여 명을 지원해준 사실을 털어놨다. 그 소식을 전해준 사람은 이 씨에게 귀빨리 도망가라고 했다.중국에 사는 동안 이 씨는 한국으로 가는 방법을 익혔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갈 수도 있었다. 다만 아이가 아파 움직일 수가 없어 참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 사이에 정성스런 간호를 받은 아이는 건강이 좋아졌다.네 번째 북송을 당할 수는 없었다. 남편에게 한국으로 가겠다고 했다. 남편도 사정을 이해한다며 머리를 끄덕였다. 아이에겐 병원에 간다고 말하고 집을 나섰다. 나중에 들으니 그가 떠난 지 일주일 뒤에 공안이 집에 들이닥쳤다고 했다.그가 향한 곳은 몽골이었다. 일행은 모두 9명이었다. 엄청 높은 국경 철조망을 피가 나는 줄도 모르고 넘어서 한참을 갔다. 그러다 다시 철조망이 만나게 돼 살펴보니 그들이 넘었던 동일한 철조망이었다. 사막에선 자칫하면 길을 잃기 십상이었다. 그렇게 11시간을 사막에서 헤매던 끝에 일행은 마침내 몽골 군인들에게 발견됐다.군인들을 이들을 땅굴에 가뒀다. 이곳에서 노린내 나는 양고기만 먹으며 보름을 버틴 끝에 마침내 울란바토르로 옮겨졌다.● 5년 만에 달성한 개업의 꿈이 씨는 2007년 8월에 한국에 도착했다. 당시는 조사 기간도 길지 않아 2007년 11월 하나원을 퇴소해 사회에 나올 수 있었다. 사회에 나올 때 그는 정착지를 강원도로 정했다. 북에서 살던 곳이니 왠지 정감이 갔다. 강원도 원주에 임대주택을 받았다. 고성에 가서 살고 싶었지만, 막상 가보니 원주가 살기 더 나은 것 같았다. 그는 한국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딜 때 5년 안에 자신의 식당을 차리겠다고 결심했다. 북한에서 요리사로 16년을 살다보니 식당을 열면 승산이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식당을 열 돈이 없으니 우선은 일하며 돈도 벌고 한국의 요식업계도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했다. 정착 열흘 뒤부터 그는 식당에 취직해 열심히 일했다. 어떤 음식점을 할까 고민하다가 결정한 것이 강원도를 대표하는 음식인 막국수였다. 그때부터 그는 막국수 식당들만 찾아다니며 취직해 열심히 일했다. 일하다보니 “탈북민에겐 월급을 적게 줘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장도 만나게 됐고, 퇴직금을 줄 수 없다고 버티는 사장도 있었지만, 목표가 있으니 주저앉을 수가 없었다.5년 동안 하루도 쉰 적이 없었다. 마침내 8000만 원이 모였다. 그 돈을 밑천으로 삼아 2013년 1월 원주 시내에 ‘금강산막국수’라는 상호를 내건 식당을 열 수 있었다. 5년 안에 내 식당을 열겠다는 목표를 이룬 것이다. 돈이 없다보니 주차장도 없는 가게를 얻게 됐고, 인맥도 없어 한계가 명백했지만 열심히 하는 것으로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렇게 시작한 식당은 어느새 11년째를 맞았다. 두 달 뒤면 개업 12년째를 맞게 됐다.그 오랜 기간 금강산막국수는 하루도 문을 닫은 날이 없었다. 하루 휴식도 아끼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중국에서 축구선수로 성장했던 아들도 가끔 한국에 와 어머니의 식당일을 거들어준다.강원도의 많은 막국수집들은 겨울에 손님이 없어 문을 닫는 곳도 많다. 이 씨는 백숙과 닭볶음탕, 북한식 어복쟁반, 두부전골 등으로 메뉴를 다양하게 만들어 막국수 비수기에 대비했다. 이제는 막국수보단 다른 메뉴가 훨씬 더 많이 팔린다. 치열한 노력으로 그는 신규 식당들이 수없이 생겨났다 사라지는 치열한 요식업의 세계에서 든든히 뿌리를 내리고 살아남았다. 물론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때 그는 강원도 대표 식당으로 선수촌에 자원해 들어갔다가 한달 보름 만에 엄청난 적자를 보게 됐다. 그 적자를 다 갚게 돼 숨을 좀 돌리러나 했는데 이번엔 코로나가 터졌다. 그렇지만 코로나 기간에 적자를 보진 않았고, 자영업자들에게 지급되는 지원금도 받지 않았다. 7년 동안 식당을 운영하면서 단골손님을 많이 만들어놓은 덕분이었다.● “금강산에 식당을 열겁니다.”식당이 자리 잡고 나자 이 씨는 지역사회 봉사에도 눈을 돌렸다. 지금까지 7년 동안 사회복지관이나 경로당에 매년 TV와 냉장고와 같은 전자제품을 기증하고, 해마다 한 번씩 노인들을 대상으로 잔치도 연다.“북한에 살 때 요양원에서 일한 추억 때문인지 저도 모르게 복지관을 찾아가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봉사하면서 알게 된 인연들이 한국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저에겐 큰 힘이 됩니다.”이 씨의 봉사의 범위는 점차 넓어져 복지관과 경로당뿐만 아니라 고아원과 국가유공자들에게도 무료 음식을 수시로 제공하고 있다. 돈을 많이 벌게 되면 하고 싶은 일도 봉사다.“능력이 되면 인근 시골에 별장을 하나 사고 싶습니다. 이곳을 탈북민들이 힘들면 와서 쉴 수 있는 쉼터처럼 꾸려놓을 겁니다. 북에선 온 사람들은 명절에 얼마나 외롭습니까. 이럴 때 함께 모여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정말 좋지요.”이 씨는 북한에서 32년을 살았고, 중국에서 10년을 살았으며, 한국에서 17년째 살고 있다. 그렇지만 그의 여정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인생의 최종 목표는 다시 고향에 식당을 여는 것이다.“열여덟에 요리사가 돼 벌써 40년째 요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북한 음식도 만들어보고, 중국 음식도 해보고, 한국 음식도 다 해봤습니다. 언제까지 제가 요리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제가 힘이 남아있을 때 통일이 됐으면 좋겠습니다.통일이 되면 금강산막국수 식당을 진짜로 제 고향 금강산 자락으로 옮겨가고 싶습니다. 금강산막국수는 금강산에 있어야죠. 그곳은 한국의 요리를 북한 사람들에게 알리는 식당이 될 것이고, 남북의 요리를 하나로 통합하는 식당이 될 것입니다.”꿈을 말할 때 이 씨의 얼굴은 활짝 피었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4-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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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맥도날드 매장 매니저, 대만에서 ‘워킹홀리데이’

    지난달 한국맥도날드에서 선발한 직원 네 명이 대만 공항에 도착했다. 이들은 김정은 부천역곡DT점 매니저, 김하영 수원인계DT점 매니저, 김용희 고양덕이DT점 매니저, 유우철 충남당진DT점 점장으로 모두 각 매장의 운영과 관리를 맡고 있다. 이들이 대만에 간 이유는 한국맥도날드의 직원 프로그램 ‘워킹홀리데이’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맥도널드의 워킹홀리데이는 전국 각지에서 근무하는 매장 직원들에게 새로운 환경에서 근무할 기회를 제공하고 일과 여가를 한번에 누릴 수 있도록 하는 내부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에 참가한 매니저들은 약 8주간 타이베이 도심에 위치한 맥도널드 매장에서 근무한다. 이 과정을 통해 외식업계 내 전문성과 리더십 역량을 강화하고, 대만 맥도널드만의 특장점을 직접 눈으로 보고 배우게 된다. 이런 프로그램이 가능한 이유는 맥도널드가 전 세계 어느 시장에서나 동일한 글로벌 시스템을 기반으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전 세계 맥도널드 구성원들은 언어와 문화를 넘어 브랜드 내에서 함께 공유하는 시스템과 핵심 가치를 기반으로 근무하고 있다. 이는 ‘빅맥’ ‘맥너겟’ 등이 전 세계 어디에서나 동일한 맛을 내는 것과도 맥이 닿아 있다. 맥도널드는 ‘버거를 만드는 회사’가 아닌 ‘버거를 만드는 사람들의 회사’라는 경영 철학 아래 직원들을 최우선시하는 기업 문화를 추구한다. 워킹홀리데이는 이런 철학을 보여주는 프로그램 중 하나다. 워킹홀리데이는 지난해 제주 지역에서 시작돼 올해 초에는 강원 강릉시에서 성공적으로 개최됐다. 참가자들의 만족도도 높다. 제주 프로그램에 참가했던 참가자 11명 중 다수가 각자의 매장으로 돌아간 후 ‘팀 리더’나 매니저로 성장했다. 지난 프로그램들과 마찬가지로, 12월 대만 워킹홀리데이 종료 이후 관련 영상은 한국맥도날드 공식 소셜미디어 채널들을 통해 공개된다. 현재 프로그램에 참가 중인 매니저들의 생생한 근무 일지와 여가 생활 등이 브이로그 형식으로 담길 예정이다. 한국맥도날드 관계자는 “대만 지역에서 진행되는 이번 워킹홀리데이는 전 세계 모든 구성원이 공유하는 글로벌 시스템과 기업 핵심 가치가 존재하기에 가능한 가장 ‘맥도널드다운’ 직원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한다”며 “앞으로도 직원의 발전이 맥도널드의 발전이라는 믿음 아래 국내 구성원들이 외식 업계 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을 마련하고 지원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4-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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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한반도 최악의 시나리오

    또다시 트럼프 시대에 4년을 살게 됐다. 예측하기 어려운 바람이 어디로, 어떤 강도로 불지 알 수 없게 됐다. 배는 예상치 않은 높은 파도가 옆구리를 칠 때 뒤집힌다. 당장 동북아에 불어닥칠 예상 가능한 폭풍은 관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중국 제품에 대한 관세를 60%, 자동차 등 일부 제품은 200%까지 인상하겠다고 공약했다. 이 경우 중국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2.5%포인트 하락할 수 있다고 스위스계 투자은행 UBS는 전망했다. 미국의 대중 무역 고율 관세가 본격화된 2018년 중국의 경제성장률은 1990년 이후 가장 낮은 6.6%를 기록했다. 이후 계속 내리막길을 걸어 현재 5%대까지 떨어졌다. 그런데 중국이 또다시 트럼프의 강펀치를 맞게 된 것이다. 경제 성장이 멈추면 중국 내부의 불만은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 불만의 강도에 따라 시진핑(習近平)의 장기집권 계획은 물론이고 공산당 일당독재까지 위태로울 수 있다. 집권 위기에 빠진 독재자는 늘 전쟁의 유혹을 받는다. 중국이 대만과 전쟁을 벌인다면 미국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미국이 직접 참전하면 막대한 인명 피해와 비용을 치러야 한다. 지난해 미국의 싱크탱크인 전략국제문제연구소는 “미국이 승리해도 중국보다 더 긴 고통을 겪으며 승리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미국 우선주의를 표방한 트럼프가 파병까지 할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대만 전쟁에 어떤 식으로든 개입하지 않을 수는 없다. 다만 중국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을 때 미국이 쓸 비장의 카드가 하나 있다. 우크라이나 지원도 포기하겠다는 트럼프가 미국의 손해를 막기 위해 충분히 생각해볼 수 있는 카드다. 바로 북한 체제의 붕괴다. 북한은 중국의 옆구리에 붙어있는 폭탄이라 할 수 있다. 이 폭탄의 뇌관은 김정은이다. 미국은 마음만 먹으면 뇌관을 터뜨릴 충분한 능력을 갖췄다. 문제는 이 폭탄이 터지면 중국과 한국은 그 파편을 고스란히 뒤집어써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에 있어 대만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동북지역의 안정이다. 대다수 중국 왕조의 멸망은 동북지역의 혼란에서부터 시작됐다. 혼란 이후 힘을 키운 세력이 산하이관(山海關)을 지나 중원의 한족 왕조를 정복하고, 이후 시간을 두고 한족에게 동화되는 역사가 반복됐다. 북한이 붕괴되면 수백만 명의 난민이 중국으로 넘어갈 수 있다. 이들은 세계에서 전투력이 가장 강한 난민일 가능성이 높다. 남성은 10년 동안, 여성의 절반도 6년 이상 군사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무장 난민 무리가 동북지역으로 끊임없이 몰려온다면 중국으로서는 비수가 옆구리에 꽂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대만과 전쟁을 치를 수는 없다. 어쩌면 경제위기 속 중국은 공산당 체제의 붕괴를 막기 위해 사투를 벌여야 할지도 모른다. 중국에는 대재앙이다. 트럼프로서는 ‘닌자 미사일’ 한 발로 미국의 패권을 넘보는 중국을 주저앉히고, 대만과의 전쟁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다. 여기에 미국을 협박하는 핵미사일을 만드는 데 골몰하는 위험한 독재자 제거라는 덤도 생긴다. 한국도 파편을 피할 수 없다. 한반도 정세가 불안해지면 해외 자본이 일거에 빠져나갈 수 있다. 1990년대 말 외환위기 때엔 경제 체질 개선을 통해 단기간에 해외 자본이 돌아왔다. 하지만 북한 붕괴로 인한 혼란은 언제 수습될지 알기 어렵다. 선진국에서 중진국으로 뒷걸음질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러한 후폭풍 때문에 김정은 제거는 미국이 그동안 감히 생각하지 않았던 시나리오다. 하지만 앞으로 의회 권력까지 틀어쥐게 된 트럼프라면? 그의 머릿속에 한국은 잘살면서도 방위비 분담금도 제대로 내지 않는 ‘기생충 동맹국’으로 인식돼 있다면? 트럼프가 우리를 자국을 지키고 중국을 수렁에 빠뜨리며 세계 전쟁을 막을 수 있는 ‘대의의 희생양’으로 삼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물론 이런 시나리오는 최악의 최악을 가정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나서지 않더라도, 건강에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김정은이 급사해도 최악의 조건은 형성된다. 특정 조건이 만났을 때 생기는 ‘공진(共振)’은 위력이 상상을 초월한다. 제방이나 교량 하나 지을 때도 최악의 천재지변을 가정해 설계한다. 하물며 국가 존립을 위한 대비는 아무리 준비해도 모자람이 없다.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4-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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