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종

김윤종 부장

동아일보 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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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먼 나라’ 같지만 한국의 미래상이 담겨있는 ‘이웃나라’입니다. 저와 함께 뉴스의 ‘배낭여행’을 함께 떠나실까요?

zozo@donga.com

취재분야

2025-06-23~2025-07-23
칼럼94%
행정3%
인사일반3%
  • [오늘과 내일/김윤종]지구에겐 우리가 ‘러브버그’다

    2016년 개봉한 영화 ‘테라포마스’는 독특한 설정으로 화제를 모았다. 2099년 환경오염으로 지구가 한계에 달하자 인류는 화성 탐사에 나선다. 선발대는 지구와 유사한 환경을 조성하는 ‘테라포밍’을 화성에 시행한 후 검증을 위해 바퀴벌레를 풀어놓고 지구로 돌아간다. 500년 뒤,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으로 변했는지 확인차 다시 화성에 가보니 지능이 있고 직립 보행하는 바퀴벌레들이 나타나 인간을 공격했다. 인류는 변이된 바퀴벌레들과 처절한 전투를 펼친다. 소름 돋았던 부분은 진화한 바퀴벌레들이 인간만 보면 무조건 죽이려 한다는 설정이었다. 마치 벌레만 보면 놀라서 없애려 하는 우리처럼 말이다. 미국 생태학자 제프리 록우드 교수는 “인간에겐 벌레에 대한 혐오가 학습된다”고 했다. 인류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낯선 생물체를 보면 두려움을 느끼도록 진화했다. 배설물, 썩은 음식 등 병원균이 많은 환경에서 주로 나타나는 벌레에 혐오를 느끼고 회피함으로써 생존율을 높였다는 설명이다.한반도 아열대화와 벌레들의 공습 요즘 이런 혐오 1순위는 ‘러브버그’다. 대규모 출몰로 지자체마다 퇴치전에 나섰다. 국회에선 러브버그 퇴치법이 발의됐다. ‘독성이 없고 생태계에 유리한 익충이니 그냥 둬도 된다’는 주장과 ‘혐오감을 준다면 사회적 해충이므로 박멸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립하는 등 사회적 논쟁까지 거세졌다. ‘익충이냐, 해충이냐’ ‘방제하냐, 마냐’보단 러브버그가 왜 많아졌나부터 짚어봐야 한다. 중국 동남부 등 아열대 지역에서 서식하던 이 벌레는 점차 북상해 2015년부터 국내에서 발견됐다. 갈수록 더워지는 한반도 환경이 러브버그 폭증의 핵심 원인이라는 게 생태학자들의 설명이다. 벌레는 습하고 무더운 날씨 속에선 짧은 기간 내 몇 세대씩 발생하는데, 8일 서울 낮 최고기온은 37.8도로 117년 만에 가장 높았다. 2050년대까지 한반도 기온이 3도가량 상승하고, 폭염 일수는 7일 이상 늘어날 것으로 기상 당국은 전망한다. 러브버그는 그나마 낫다. 생태계 교란종 꽃매미 수백 마리가 최근 수도권에 등장했다. 나무 수액을 빨아먹으며 농가에 피해를 주는 곤충이다. 10일엔 유충이 잎을 갉아 먹는 미국흰불나방 발생 예보가 ‘주의’ 단계로 상향됐다. 중증열성혈소판감소증후군(SFTS)을 옮기는 작은소참진드기 등 사람을 죽이는 전염병 매개 벌레까지 증가 추세다. 익충-해충 논쟁보다 일상 속 환경 실천부터 세계보건기구(WHO) 분석 결과 평균 기온이 1도 오르면 말라리아 등 전염병은 5% 가까이 늘어난다. 얼룩날개모기가 퍼트리는 국내 말라리아 환자는 2021년 294명에서 지난해 713명으로 증가했다. 전염병 매개 벌레가 많아지면 고령층, 어린이 등 감염 취약계층이 가장 피해를 본다. 한반도 아열대화에 대비한 정교한 방제 대책이 절실하다. 질병을 옮기지 않더라도 대응 체계는 갖춰야 한다. 현재는 감염병, 병충해 등을 옮기는 벌레를 관리하는 법과 제도만 구비됐다. 러브버그처럼 직접 피해를 주지 않는 벌레의 경우 방제할 법적 근거가 없다. 어떤 벌레가 어느 지역에서 급증해 피해를 줄지를 예측하는 시스템 또한 갖춰야 한다. 무엇보다 과도한 일회용품 소비와 에너지 사용 등 ‘편리하다’는 이유로 당연시하는 삶의 방식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국내 1인당 탄소 배출량은 연간 약 14t, 플라스틱 폐기물 배출량은 연간 약 90㎏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상위권이다. 100만 종 이상이 현재 멸종위기에 처했는데, 대부분 인간의 활동에서 비롯됐다. 우리가 벌레를 혐오하며 제거하듯 지구도 인간을 없애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진 않을까. 이미 그 징후인 폭염 폭우 등 기후 재앙이 세계 곳곳에서 늘고 있다. 러브버그 폭증, 일종의 경고로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김윤종 사회부장 zozo@donga.com}

    • 2025-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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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김윤종]수도권이 하나만 더 생긴다면

    “이재명 정부는 지역 갈등을 유발하지 않도록 현명하게 대응해 달라.” 김태흠 충남지사와 김영환 충북지사, 이장우 대전시장, 최민호 세종시장이 19일 세종시에 모여 이렇게 외쳤다. ‘정부 비효율성만 커진다’며 해양수산부 부산 이전 추진에 반발하는 자리였다. 하루 전 부산에선 정반대 목소리가 나왔다. 박형준 부산시장은 “해수부 이전을 환영한다”며 지역균형발전을 위한 조치라고 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5일 첫 국무회의에서 해수부 부산 이전 준비를 지시한 후 지역 갈등으로 확산되는 모양새다. 정부마다 반복되는 균형발전 되돌이표 해수부 하나 이전한다고 ‘얼마나 큰 균형발전 효과가 있을까’란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성장동력이 꺼져가는 지역의 절박함도 이해된다. 일자리 부족 등으로 수도권으로 떠나는 부산 청년 인구는 10년간 10만 명이 넘고 합계출산율은 0.66명으로 최저 수준이다. 부산뿐 아니라 수도권을 제외한 많은 지역이 겪는 현상이다. 해수부 이전은 단순히 1개 부처 이동에 대한 결정이 아니다. 장기간 지속된 수도권 일극체제와 이로 인한 인구유출, 지역소멸, 저출산 고령화 등 우리 사회 난제가 내재된 문제다. 해수부 이전 반대 논리인 행정수도 완성 역시 수도권에 쏠린 기능을 세종으로 이관해 균형발전을 이루는 게 목표다. 이 대통령이 세종 내 국회의사당, 대통령 집무실 건립을 공약으로 내건 것도 같은 이유다. 새 정부는 수도권 중부권 동남권 대경권 호남권 등 5대 초광역권과 제주 강원 전북 등 3대 특별자치도, 일명 ‘5극 3특’ 구축을 통한 균형발전도 목표로 내세웠다. 새 정부마다 ‘지방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며 대책을 쏟아냈다. 김영삼 정부는 과밀부담금제 등으로 수도권 쏠림을 억제하려 했다. 노무현 정부는 공공기관 지방 이전 등을 시행했다. 이명박 정부는 5+2 광역경제권 구축으로, 박근혜 정부는 각 시도 창조경제센터 건립으로 지역을 살리겠다고 했다. 문재인 정부는 지역균형 뉴딜을 추진했고, 윤석열 정부에선 지방시대 종합계획이 발표됐다. 그러나 수도권은 더 거대해졌고 지방은 더욱더 쪼그라들었다. 지난해 수도권 인구는 2604만 명으로 전년보다 3만 명 이상 증가한 반면, 비수도권 인구는 2516만 명에서 87만 명 이상 감소했다. 전체 228개 시군구 중 57%(130곳)가 소멸위험지역이 됐다.지방분권은 선택이 아닌 생존 문제 우리 사회의 이런 모습은 돌덩이처럼 굳어진 지 오래다. 서울과 유사한 수준의 도시가 전국에 1곳만 더 생기면 어떻게 될까. 일자리와 주택 부족, 저출산 등이 상당 부분 완화될 수 있을 것이다. 수도권이 3곳이 된다면, 우리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살 수도 있다. 균형발전을 고민할 때마다 유럽 특파원 시절 릴, 낭트 등 프랑스 곳곳에서 본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의 기념비들이 생각난다. 왕정을 거친 프랑스는 모든 권한이 파리에 집중되면서 지역 격차가 커졌다. 이에 미테랑은 기득권 반대에도 지방분권을 추진했고 1982년 관련 법안을 마련했다. 미테랑의 뜻을 이은 자크 시라크 전 대통령은 2003년 개헌을 통해 프랑스를 분권화 공화국으로 명문화했다. 각 지역은 특성에 맞게 발전할 수 있었다. 지방분권을 이루려면 지자체의 재정자립도부터 높여야 한다. 현재 총조세 중 지방세 비중은 25%에 불과하다. 일명 ‘3할 자치’ 탓에 지자체는 중앙정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은 지방분권국가를 지향한다’는 조항을 헌법에 넣는 개헌도 고려해 볼 만하다. 수도권 일극 체제로 한계에 달한 우리에게 지방분권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김윤종 사회부장 zozo@donga.com}

    • 2025-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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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김윤종]‘K차별이 더 무섭다’는 외국인들

    “그 식당, 외국인들이 많이 가잖아요. 최대한 피하는 게 좋습니다.” 경기 시흥시 정왕동에 사는 한 주민의 이야기다. 경기 안산시 원곡동, 수원시 고등동에서도 비슷한 목소리가 나온다. 최근 일어난 끔찍한 살인사건 때문이다. 중국 국적의 차철남은 17일 정왕동에서 2명을 망치로 때려 숨지게 했다. 자신의 돈을 갚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이틀 뒤엔 ‘나를 무시한다’며 자택 인근 편의점주 등 2명을 흉기로 찔렀다. 19일 경기 화성시 동탄호수공원에선 40대 외국인이 흉기 3개를 들고 주변에 있던 한국인을 공격했다. 외국인 거주 비율이 높은 지역에선 “밤에 외국인 만나면 무섭다”는 이들이 적지 않다. 차철남 범죄로 외국인 혐오 확산 소셜미디어에는 ‘중국XX는 다 범죄자다. 잡아들여라’ ‘까무잡잡한 X들은 피해야 한다’ 등의 글이 게재되고 수많은 ‘좋아요’ 댓글이 달린다. 물론 차철남 등의 범죄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피해자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가해자가 외국인인 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전체 외국인을 향한 혐오와 배척이 반복적으로 확산되는 것은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외국인 범죄 건수 자체가 증가한 것은 사실이다. 경찰청 통계를 보면 국내 외국인 범죄자 수는 2021년 2만9450명에서 지난해 3만5283명으로 4년 새 19% 증가했다. 다만 이 기간에 국내 체류 외국인 수도 195만 명에서 265만 명으로 36% 늘었다. 범죄율로 보면 외국인 범죄자는 10만 명당 1384명, 내국인 범죄자는 10만 명당 1986명이다. 밤늦게 골목에서 외국인 혹은 한국인을 마주쳤을 때 외국인이라고 더 위험한 건 아닐 수 있다. 낙인찍고 회피하기엔 우리 주변에 외국인이 너무 많다. 국내 체류 외국인 265만 명은 국내 전체 인구의 5.17%다. 100명 중 5명 이상이 외국인인 셈이다. 도심에선 식당과 상점에서 근무하는 외국인을 자주 볼 수 있다. 건설 현장이나 공장, 요양시설은 외국인 근로자 없이는 운영이 안 된다. 국내 초중고교 다문화 학생 또한 전체 학생의 5%에 달한다. 충북 청주시 봉명초교는 학부모 안내장을 베트남어 등 5개 언어로 배포한다. “친한파로 한국 왔다가 혐한파 된다” ‘그들’이 아니라 이미 함께 살고 있는 ‘우리’인 셈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국내 체류 외국인들이 혐한(嫌韓)이 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산업 현장에서 임금 체불과 부당한 대우를 겪은 외국인 근로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대학도 ‘혐한’ 제조소가 됐다고 한다. 한 외국인 유학생은 “K팝과 K드라마를 좋아해 유학까지 왔지만 기대했던 한국이 아니었다”며 “유학생을 ‘등록금 인출기’로만 본다. 형식적인 수업, 부실한 학사 관리에 인종 차별까지 겪으니 무서웠다”고 했다. 국내 외국인 유학생 수는 26만 명으로 전체 대학생의 10%나 된다. 저출산으로 학령 인구가 줄자 대학들이 외국인 유학생 유치에서 돌파구를 찾아왔기 때문이다. 한국어는 물론이고 영어가 능숙하지 않아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도 일단 입학부터 시키는 학교들이 있을 정도다. 한 대학 총장은 “입학 후엔 관리가 엉망인 학교가 많다”며 “좋은 경험을 가지고 귀국해 친한파가 돼야 할 유학생들이 오히려 혐한파가 된다”고 경고했다. 이들은 자신이 겪은, 이른바 ‘K차별’을 소재로 유튜브에서 혐한 콘텐츠를 만들기도 한다. 백인이 아닌 베트남, 필리핀 등 아시아계가 지하철을 타면 옆 빈자리에 한국인들이 앉지 않으려 한다는 내용들이다. 조만간 국내 체류 외국인은 300만 명을 넘어서게 된다. 외국인 관련 범죄도 증가할 수 있는 만큼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하지만 외국인 전체를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하며 혐오와 차별을 강화하는 우리의 모습은 범죄 못지않게 위험해 보인다. 불안을 이유로 벽을 세우기보단 상식으로 서로의 다름을 포용하는 것이 절실하다. 김윤종 사회부장 zozo@donga.com}

    • 2025-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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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김윤종]법사와 샤넬백, 다른 듯 닮은 권력의 장식

    디올 백에 이어 샤넬 백과 그라프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논란이다. 검찰은 지난달 30일 이 명품들을 찾기 위해 윤석열 전 대통령 부부의 사저인 서울 서초구 아크로비스타를 압수수색했다. 통일교 전직 고위 간부가 윤 전 대통령 취임 전후 건진법사 전성배 씨에게 ‘김건희 여사 선물’ 명목으로 해당 명품들을 전달했다고 한다. 각종 이권을 청탁했다는 의혹이다. 영국 명품 그라프 목걸이는 6000만 원이 넘는다. 전 씨는 검찰에서 “샤넬 백과 목걸이는 잃어버렸다”고 진술했다.‘무속과 명품은 닮았다’는 무속인들샤넬 백의 행방 못지않게 대통령 부부가 왜 건진 같은 인물과 친분을 쌓았는지 의아해하는 이들이 많다. 전 씨는 일광조계종 소속 승려였다. 정식 불교 종파는 아니다. 가죽을 벗긴 소 사체를 제물로 바치는 행사를 열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전 씨는 일광조계종에서 특별한 활동을 하진 않았다고 한다. 그는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법당을 차려 ‘무속인’으로 고위급 인사들과 만나면서 존재를 알리기 시작했다. 김 여사가 운영한 코바나컨텐츠 고문을 맡았고, 2021년 윤석열 대선 후보 캠프 산하 네트워크본부에서도 활동했다.전 씨는 2018년 지방선거 당시 경북 영천시장 출마 후보자에게서 금품을 받은 혐의로 지난해 말 체포되기도 했다. 검찰 조사 과정에서 그는 공천 청탁과 함께 받은 돈을 ‘기도비’라고 했다. ‘기도비면 청탁 실패 후 왜 돌려주나’라고 묻자 전 씨는 “검사님은 이런 세계를 이해 못 한다. 계속 빌던 집안에 있으면 그 사람들은 기도 안 하면 못 산다”고 밝혔다고 한다. 부자와 고위층들이 신명기도를 바라며 자신을 찾는다는 맥락의 설명이다.김 여사의 점을 봐줬다는 무당 역시 “(옷차림부터 다른) 사람들이 온다”고 했다. 특이한 점은 무속인들이 물질주의의 정점인 명품과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무속은 연관이 없어 보이지만, 욕망을 토대로 ‘상징’을 소비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말하는 부분이다. 샤넬 백을 든 사람은 고급이란 상징을 과시함으로써 만족감을 느끼고, 무당을 찾는 이는 운세라는 상징 속에서 안도를 얻는다는 것이다. 한 무속인은 “무속과 명품 모두 ‘나에게 특별한 것’이라는 의례 행위”라고 했다. 문제가 생기면 조상 운세 등 외부에서 요인을 찾는 무속과 야당의 횡포 탓만 하는 정부 모습도 묘하게 겹친다.비선 차단하고 인사 투명성 강화돼야무속에 심취하든 명품을 구매하든 개인의 선택이다. 하지만 이들이 공적 영역에 개입되면서 국가 운영의 투명성이 훼손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윤 전 대통령은 2022년 취임사에서 공정과 상식, 법치를 강조했지만, 무속과 명품 의혹 속에서 정부는 반대로 움직였다. 같은 해 해외 순방 당시 김 여사는 재산 신고 내역에 없던 수천만 원대 반클리프아펠 목걸이를 착용해 논란이 됐다. 김 여사의 디올 백 수수 의혹과 검찰의 미온적 수사로 공정성 이슈도 불거졌다.비선 의혹 무속인들의 연이은 등장은 정부 신뢰를 무너뜨렸다. 건진법사, 천공스승, 지리산 도사(명태균), 무정도사, 수암선생…. 이름만 나열해도 ‘이게 뭔가’ 싶다. 천공은 대통령 관저 이전 과정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무정이 대통령에게 비공식 자문역을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전 씨의 처남은 대통령실 인사 개입 의혹으로 수사를 받고 있다. 명 씨로 인해 윤 전 대통령 부부의 공천 개입 의혹도 불거졌다. 12·3 비상계엄 배후로 꼽히는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은 점집을 운영하며 수암선생으로 불렸다. 이들 대부분 수사를 받거나 구속 상태로 재판 중이다.물론 대통령과의 친분을 악용한 비선들은 어느 정부에서나 있었다. 6월 3일 조기 대선을 앞둔 지금도 대선 후보 캠프 안에 함량 미달 비선들이 모여 있을지 모른다. 대선 주자들은 비선을 원천 차단하고 투명한 인사 시스템을 약속해야 할 것이다. 그러지 못하면 요상한 도사와 법사들이 계속 등장할 수 있다. 김윤종 사회부장 zozo@donga.com}

    • 2025-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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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김윤종]땅이 꺼졌는데, 부동산 전화가 불이 난 이유

    “가슴이 철렁했어요. 우리 동네에서도 발생하다니, 전화도 막 오더라고요.” 서울 마포구 대장주로 통하는 한 아파트 인근 부동산 중개업소 대표의 말이다. 13일 이 아파트 앞 지하철 5호선 애오개역 일대 차로에 땅꺼짐(싱크홀)이 발생했다. 그는 “다행히 크기가 작아서 안심하는 분위기”라며 “구멍이 큰 지역은 공포심에 매수세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인명 사고 우려가 아니라 집값 하락을 걱정했다는 것이다. 지난달 24일 대형 싱크홀이 발생해 오토바이 운전자가 사망한 강동구 명일동, 13일과 14일 연이어 싱크홀이 생긴 부산 사상구 학장동과 감전동 등의 중개업소들에도 “싱크홀 때문에 집값 떨어지냐”는 전화가 잇따랐다고 한다. 싱크홀 원인이 되는 동공(洞空)의 30% 정도가 강남권에 집중됐다는 서울시 조사도 화제다.안전보다 부동산 악영향부터 걱정 앞서 서울시가 싱크홀 정보를 공개하지 않아 논란이 됐다. 지난해 8월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 생긴 대형 싱크홀에 승용차가 빠져 2명이 다쳤다. 서울시는 지반 침하 가능성이 있는 지역을 분석한 지도를 연내 만들겠다고 발표했고, 일명 ‘싱크홀 지도’가 제작됐다. 이후 7개월 만에 명일동에서 싱크홀이 다시 발생하자 이 지도를 공개하란 여론이 커졌다. 하지만 서울시는 비공개를 고집하며 “부동산 가격 등에 혼란을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해당 지도는 현장 조사 없이지하 시설을 서면 조사한 자료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시뿐만이 아니다. 사상구에선 지난해 9월 깊이 8m의 싱크홀에 트럭이 추락하는 등 2023년부터 최근까지 싱크홀이 14개나 발생했다. 부산시 역시 사고 때마다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했지만 사고는 반복됐다. 11일 땅꺼짐이 발생한 경기 광명시 신안산선 공사현장에 대해서도 수년 전부터 지하수로 지반 침하가 우려된다는 경고가 제기돼 왔다. 최근 싱크홀 사고들이 인재(人災)란 비판이 커지자 지자체들은 대책을 쏟아냈다. 서울시는 싱크홀 지도를 제대로 만들고, 대규모 공사장에 지표투과레이더(GPR) 탐사를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부산시는 GPR 탐사와 모니터링 강화안을, 경기도는 전문가 집단을 활용한 공사현장 안전 점검 계획을 발표했다. 인공지능(AI) 싱크홀 예측을 내세운 지자체도 있다.상식부터 채워야 땅이 꺼지지 않아 그러나 보여주기식 대책을 발표하는 데 그쳤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GPR 조사는 지표면으로부터 2m 깊이의 지반 정도만 탐색할 수 있다. 명일동 같은 깊이 10m의 대형 싱크홀은 찾아내기 어렵다. 그간 싱크홀에 대비할 시간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국토교통부 조사 결과 2014년부터 10년간 전국에서 싱크홀 2085개가 발생했다. 지자체와 정부가 싱크홀을 생명과 직결된 심각한 안전문제로 여기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전문가들은 지금이라도 지질조사와 지하공사 안전검사를 제대로 하고 노후 상하수도관을 교체하는 등 체계적인 싱크홀 예방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싱크홀은 주로 지하 공간 개발과 시공 불량, 상하수도 노후화, 지하수 유출 등으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싱크홀 조사 과정과 위험도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도 중요하다. 미국은 포털 등을 통해 싱크홀 발생 이력과 위험 정도를 실시간으로 공개한다. 일본과 영국 또한 지반안정성 지도를 시민에게 제공한다. 물론 싱크홀 위험 지역 정보가 공개되면 일부 집값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불만이 나올 수도 있다. 그렇다고 정보를 감추면 오히려 싱크홀 포비아(공포증) 확산으로 사회 혼란이 더 커질 수 있다. 일부 지역에선 ‘위험한 동네로 인식되면 집값이 하락한다’며 싱크홀을 봐도 쉬쉬하려는 분위기가 여전히 있다고 한다. 생명보다 중요한 건 없다. ‘안전이 최우선’이란 상식이 채워지지 않는다면 땅은 계속 꺼질 수밖에 없다.김윤종 사회부장 zozo@donga.com}

    • 2025-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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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김윤종]대통령 탄핵 선고날, 尹 체포했던 공수처의 자조

    헌법재판소가 4일 윤석열 대통령을 파면하면서 탄핵심판이 마무리됐다. 다 끝난 것은 아니다. 14일 서울중앙지법에선 윤 전 대통령의 내란 우두머리 혐의에 대한 공판기일이 진행된다. 본격적인 형사재판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때문인지 윤 전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을 집행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의 현재를 궁금해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내란 수사 혼선으로 사회 갈등 커져 탄핵심판과 형사재판은 다르지만 헌재가 12·3 비상계엄 선포, 국회 군경 투입 등 5대 사유를 모두 중대한 위헌·위법으로 판단한 만큼 공수처 내부엔 “대통령을 체포한 우리도 공이 있다”는 분위기가 형성됐을 것으로 봤다. 하지만 이날 공수처엔 연가 권고 공고가 내려진 상태였다. 공수처 관계자는 “내란죄 수사하면서 비판도 많이 받고 한계도 느꼈다”고 자조했다. 윤 전 대통령 수사 과정에서 수사기관들이 혼선을 빚으며 사회 혼란을 증폭시켰다는 비판이 컸다. 국회에선 공수처폐지법안까지 발의됐다. 지금까지도 공수처 분위기가 침체된 이유다. 계엄 사태 초기 검경과 공수처는 수사 주도권 경쟁을 벌였고 ‘내란죄 수사 권한은 어느 기관에 있냐’는 논란이 커졌다. 법적으로 명시적인 내란죄 수사권은 경찰에 있지만 공수처는 고위공직자 직권남용의 관련 범죄로 내란죄를 수사하겠다며 검경에 이첩을 요청했다. 검경이 사건을 공수처에 넘겼지만 윤 전 대통령 측은 ‘공수처 수사권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탄핵 관련 시위가 거세지기 시작했다. ‘법원 쇼핑’ 논란은 기름을 부었다. 공수처법 31조상 공수처 공소 제기 1심 재판은 중앙지법 관할로 한다. 공수처는 예외조항 중 증거 소재지(한남동 대통령 관저) 등을 이유로 서부지법에 체포영장을 청구했다. 중앙지법이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구속영장 발부 당시 검찰의 내란죄 수사권을 인정하지 않자 의도적으로 법원을 골랐다는 분석이 나왔다. 윤 전 대통령 측은 절차적 하자를 주장했고 탄핵 반대 지지자 수백 명이 서부지법에 난입하는 초유의 사태로 이어졌다. 공수처는 1월 3일 윤 전 대통령 체포에 실패하자 이틀 뒤 사전협의 없이 ‘체포영장 집행을 일임한다’는 공문을 경찰에 보냈다. ‘영장은 검사 지휘로 사법경찰관리가 집행한다’는 형사소송법 81조를 준용했다는 게 공수처의 설명이었다. 경찰은 “공수처는 경찰을 지휘할 수 없다”고 거부했다. 공수처로부터 사건이 송부된 후 검찰은 1월 24일 중앙지법에 윤 전 대통령 구속기한 연장을 신청했다. 법원은 “공수처 수사에 대한 검찰의 보완수사권이 공수처법에 명시되지 않았다”며 불허했다.혼란 키운 형사사법 체계 개선해야 윤 전 대통령은 파면 10일 만인 14일 피고인 신분으로 법정에 서게 된다. 내란죄 수사권, 각종 증거들의 증거능력 등이 주요 쟁점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형사재판과 함께 탄핵 찬반이 극렬한 상황에서 수사기관이 오히려 갈등을 키운 원인도 되짚어 봐야 한다. 1차적으로 수사기관들의 책임이 크다. 불필요한 경쟁으로 논란을 자초했다. 수사 역량에도 문제가 있었다. 다만 수사기관 탓으로만 책임을 돌리기보단 구조적 문제를 개선해 유사한 혼란의 재발을 막는 것이 중요하다. 문재인 정부 당시 시행된 검경 수사권 조정, 검찰의 직접 수사권 축소, 공수처 출범, 그리고 윤석열 정부의 검찰 수사 범위 원상 복구까지 형사사법 체계가 졸속 개편된 것이 근원적 문제라는 게 법조계의 시각이다. 공수처법 2조를 보면 수사 가능한 고위공직자 1순위로 대통령이 적시돼 있다. 그런데 불소추특권이 있는 대통령을 수사할 수 있는 내란죄는 공수처 수사 범죄에 빠져 있다. 공수처 수사 사건에 대한 검찰의 보완 수사 여부도 명확하지 않은 등 입법 미비가 적지 않다. 헌재 선고로 계엄·탄핵 정국의 큰 혼란은 일단락됐다. 그러나 내란죄 형사재판과 형사사법 체계 개선이란 숙제는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다. 김윤종 사회부장 zozo@donga.com}

    • 2025-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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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김윤종]아픈 가족에게 ‘이젠 보내줘’라고 듣는다면

    “어머니를 끝까지 모실 겁니다.” 지난달 20일 경기 고양시에 사는 김중석(가명) 씨가 말했다. 80대 부모와 함께 사는 그는 10년간 아픈 어머니 간병 때문에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더 작은 아파트로 이사를 준비했다. 이 소식을 들은 아파트 경비원이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시면 어떠냐”고 제안하자 김 씨가 단호하게 거부한 것이다. 불과 12일 뒤 김 씨는 80대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를 살해했다. 이들은 경찰에 “어머니(아내)가 먼저 죽여 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끝까지 모시겠다’는 김 씨의 발언에 대해 주변 지인들은 “너무 힘들어서 스스로에게 한 다짐일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매달 1.6건씩 발생하는 간병 범죄‘노노(老老) 부양’이 늘면서 이 같은 슬픈 사연이 일상처럼 다가온다. 경찰에 따르면 국내에서 한 달에 평균 1.6건씩 간병 살인이 발생한다. 안타깝게도 가해자 중 상당수는 평소 가족 사랑이 컸다고 한다. 그렇기에 아픈 부모와 남편 혹은 아내를 장기간 보살폈고, 오랜 간병으로 인한 어려움도 그만큼 더 많이 누적되면서 극단 범죄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간병 범죄를 저지른 이들의 경찰 진술 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발언이 자주 나온다.“평생을 함께한 아내(남편)인데 지금 늙고 병든 모습을 보면 너무 안쓰러워 힘들어도 참았다. 하지만 수년이 지나니 한계다. 좋은 데로 보내고 나도 따라가겠다”며 동반 자살을 암시한다. “너무 아파하니 나도 아프다. 함께 가기로 했다”는 유서를 남기는 경우도 적지 않다. 피해자들 역시 “여보(혹은 얘야) 나 이젠 그냥 보내줘”, “이렇게 살면 뭐해. 이젠 하늘로 갈게”라며 세상을 떠나고 싶다는 표현을 수시로 한다. 치매 노모를 10년 가까이 돌본 한 자녀는 이렇게 고백했다. “하루에 수십 번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모습을 보면서, 처음엔 ‘우리 엄마가 어쩌다 이렇게 됐나’란 안타까움이 컸어요. 초기엔 요양보호사를 썼지만 비용 부담으로 점차 혼자 돌보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보살펴온 엄마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너 누구야’라며 공격합니다. 자꾸 나쁜 생각을 하게 돼요.” 건강보험연구원 조사 결과 가족 간병인의 33%는 우울증 증세를 보였으며, 42%는 자살까지 생각했다.범행 이르는 평균 기간 6년 전에 지원해야 간병 범죄가 짧은 기간 내에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법원 판결문과 심리 부검 등을 보면 간병가족이 범행에 이르기까지 걸린 간병 기간은 평균 6년이다. 적지 않은 기간 동안 어려운 돌봄생활을 버틴다는 것이다. 범죄에 빠지지 않도록 이 기간 내에 각종 지원을 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이 강조하는 이유다. 고령화를 미리 겪은 선진국에선 가족 간병인의 휴식권을 보장하는 여러 정책을 시행 중이다. 영국과 미국 등은 임시돌봄(Respite care)을 운영 중이다. 가족 간병인이 휴식을 원하면, 환자를 자택이 아닌 다른 장소로 옮겨 대신 돌봐주는 제도다. 일본 역시 단기입소간병(Short stay) 제도가 있다. 환자가 시설 등에 일정 기간 숙박하면서 간병을 받고 가족들은 휴식을 취한다. 독일은 간병 중인 가족이 휴식을 원하면 대체돌봄비용을 지급한다. 스웨덴 등에는 환자들이 자신의 집에서 돌봄과 의료, 식사 등을 통합 지원받을 수 있는 커뮤니티케어도 구축돼 있다. 가족 간병인 부담은 더는 한편, 환자 역시 안정적으로 자택에서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지역사회가 함께 돌보는 시스템이다. 한국은 지난해 65세 이상 비율이 20%를 넘어서는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 가족 간병인 규모도 100만 명에 육박한다. 병든 가족이 오랜 간병으로 지친 나에게 “이젠 그만 보내줘”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에 대한 답은 개인의 숙제가 아니다. 그 누구든 간병 범죄에 빠질 수 있다는 위급함으로 우리 사회가 하루빨리 간병 대책을 강화해야 한다. 김윤종 사회부장 zozo@donga.com}

    • 2025-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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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김윤종]아이가 숨진 후에야 법을 만드는 나라

    “제2의 하늘이가 안 나오게 도와주세요.” 10일 대전의 한 초등학교에서 교사의 흉기에 숨진 김하늘 양(8)의 아버지 김민규 씨는 절규하며 일명 ‘하늘이법’ 제정을 호소했다. 가해 교사 명모 씨는 지난해 12월 우울증으로 6개월간 휴직 신청을 한 후 3주 만에 복직했다. 짧은 시간 내 복직하는데도 진단서에는 ‘정상 근무 가능’으로 적혀 있었다. 범행 4일 전 동료 교사 목을 졸랐다. 사건 당일 장학사가 학교를 찾아 분리 조치를 권고했고, 명 씨는 무단 외출해 흉기를 사 왔다. 매 순간 어른들이 조금만 신경을 써서 조치를 취했다면 8세 아이가 사망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정부와 정치권은 즉각 하늘이법 제정에 나섰다. 교원 정신질환 검사 의무화, 정신건강 문제 교사 직권 휴직 등이 담길 것으로 보인다. 어린이 이름을 딴 법안들 계속 늘어나 재발 방지를 위해 검토해 볼 만한 조치들이다. 그럼에도 ‘언제까지 사고가 난 후에야 피해 어린이의 이름을 딴 법안을 만들어야 하나’라는 자괴감, 나아가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을 지울 수 없었다. 민식이, 한음이, 정인이 등 여러 이름이 떠올랐다. 2019년 당시 9세 민식이는 어린이보호구역에서 교통사고로 숨졌다. 이후 스쿨존 교통안전을 강화하는 일명 ‘민식이법’이 제정됐다. 다섯 살이던 해인이는 2016년 어린이집 앞에서 사고를 당했지만, 응급조치를 제대로 받지 못해 사망했다. 어린이 시설 안전사고 시 응급조치를 의무화하는 ‘해인이법’이 2020년 시행됐다. 동승 보호자 의무 탑승 등을 담은 ‘세림이법’은 아이가 후진하는 어린이집 차량에 치여 숨진 뒤 생겼다. 통학버스 내 아동 하차 여부를 확인하는 ‘한음이법’은 2016년 당시 세 살 이한음 군이 통학차량 안에 방치돼 사망한 사건이 계기가 됐다. 학대로 아동이 세상을 떠난 뒤에야 개정된 법안도 적지 않다. 2020년 정인이는 양부의 상습 학대로 숨졌다. 아동학대 의심신고 시 즉각 분리 등을 담은 ‘정인이법’이 생긴 배경이다. 어린이에 대한 잘못된 투약에서 비롯된 종현이법까지, 아이들 이름을 담은 법은 늘어나고 있다. 이 같은 법들은 아이들 안전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됐다. 하지만 일각에선 겉으로 드러난 문제를 중심으로 법안이 서둘러 만들어지다 보니, 근원적인 해결책이 되기엔 부족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민식이법이 생겼지만 스쿨존 내 어린이 교통사고는 2022년 529명, 2023년 523명 등 큰 변화가 없다. 정인이법에도 불구하고 아동학대 건수는 2023년 4만8522건으로, 전년 대비 5.2% 증가했다. 서둘러 법 만들기보단 예방시스템 구축해야 하늘이법의 경우 정신질환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명 씨가 단순히 우울증만으로 아이를 무참히 살해했다고 보기 어렵다. 자칫 우울증 등을 앓는 교사를 낙인찍어 이를 더 숨기게 하는 역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 우울증 진료 초교 교직원이 2018년 4033명에서 2023년 9468명으로 급증한 만큼, 교실 현장부터 세밀히 점검할 필요가 있다. ‘대면 인계’ 의무화도 대안으로 제시됐다. 돌봄교실에 있던 하늘이가 학교 앞에 도착한 학원 차를 타려고 혼자 이동하다 변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는 적절한 인력 충원을 전제로 한다. 한 교사는 “돌봄교실 교사 1명이 학생 31명을 맡고 있다”라며 “아이들 학원 시간이 각각 다르다. 보호자가 올 때마다 대면 인계를 하긴 어려운 게 현실”이라고 했다. 학부모들은 “유연근무 등 자녀 등하교를 챙길 수 있는 환경부터 만들어야 한다”고 하소연한다. 아이가 숨질 때마다 빠르게 희생자 이름으로 법안을 만들고 ‘대책을 마련했다’고 안도하는 과정에서 본질적인 문제를 놓친 것은 아닐까. 충분한 숙의 속에 참사를 예방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안착돼야만 어린이 이름의 법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이다. 김윤종 사회부장 zozo@donga.com}

    • 2025-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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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김윤종]아스팔트 극우 청년은 어떻게 탄생했나

    세뇌. 진실. 페미. 이재명.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 일대를 비롯해 서울서부지법 등 윤석열 대통령 탄핵 반대 시위 현장에 나선 20, 30대 남성들에게서 자주 언급되는 단어다. 날것 그대로 전달해 본다. “그간 (좌파에) 세뇌당했는데, 이제 진실을 알게 됐습니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킵시다.”, “좌파였는데 우파로 돌아섰습니다. 페미(니즘) 정당인 민주당은 이재명(더불어민주당 대표)만 지키려 합니다.” 일부는 극단적 행태까지 보였다. 19일 윤 대통령 구속영장이 발부되자 서부지법에 난입했다. 현행범으로 체포된 90명 중 20, 30대가 51%(46명)에 달했다. 청년세대 중 극히 일부의 모습일 것이다. 다만 보수 우파 집회에 젊은 남성이 늘고 있으며, 이들이 가세한 후 시위가 과격해졌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젠더 갈등 봉합보다 활용한 정치권 여러 이유가 있지만, 전문가들은 특히 누적된 젠더(gender·사회문화적 성) 갈등을 봉합하기보단 진영의 이익을 위해 활용한 결과라고 분석한다. 갈등의 시작은 2010년대 초반에 생긴 2030 남성들의 피해의식이다. 이들은 여성보다 ‘손해 보며 산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학교에선 여성들이 더 공부를 잘하고 입사 성적도 여성이 상위권인데, 군대까지 다녀오니 더 뒤처진다는 것. 남녀가 동등하게 경쟁하는데도 궂은일은 남자부터 시키며 데이트 비용과 혼수 등은 남성이 더 많이 하게끔 강요당한다고 주장한다. 페미니즘이 확산되면서 여성에 대한 반감은 더 커졌고, 온라인 커뮤니티 일간베스트, 에펨코리아 등을 통해 확산됐다. 반대로 2030 여성은 여전히 남녀 불평등이 크다고 생각한다. 강남역 살인 사건 등 여성 대상 강력범죄에 대한 반감으로 남성을 향한 불신도 커졌다. 이를 봉합해야 할 사회 리더들은 갈등을 오히려 활용했다. 지난 대선만 봐도 2030을 두고 여야가 갈렸다. 민주당과 이재명 후보는 페미니즘을 옹호하며 여성 표심을 얻으려 했다. 국민의힘과 윤석열 후보는 여성가족부 폐지로 이른바 ‘이대남’들을 끌어모았다. 시위 현장에서 만난 20대 남성은 “민주당은 페미 관련 정책을 펴 왔다. 국힘을 지지한다”고 했고, 또래 여성은 “국힘은 반페미니즘 세력”이라고 비아냥댔다. 고착된 갈등은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더욱 두드러졌다. 여의도 탄핵 찬성 집회 참석자 중 20, 30대 여성 비율은 10∼18%인 반면 같은 연령대 남성은 5% 이하였다. 그러자 2030 남성들은 “나서야 한다”며 한남동 일대에 모였다. 정치권은 이번에도 이를 활용했다. 윤 대통령은 “2030세대가 (탄핵 반대) 집회를 하고 있는데 유튜브로 지켜보고 있다”라며 시위대를 선동하는 듯한 메시지를 냈다.선동은 달콤하지만 민주주의는 망가진다 시위 현장의 2030 남성들이 “진실을 알려줬다”며 칭송하는 유튜버들은 선동으로 돈을 벌었다. 시위 현장 생중계에 부정선거 의혹 등 각종 음모론까지 곁들여 젊은층 관심을 유도한다. 이달 6∼12일 유튜브 후원금인 슈퍼챗 수익 상위 10개 채널 중 9개가 극우 보수 성향 유튜버다. 극우 성향 청년들의 법원 난입 등 극단적 행동은 범죄 행위임이 분명하지만, 개인의 일탈로만 치부해선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갈등을 ‘대화와 합의’란 민주적 방식으로 봉합하려 노력하기보단, 선동을 통해 지지층을 강화시키는 방식으로 해결하려 했던 우리 사회의 모습이 투영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수사학 전문가 패트리샤 로버츠 밀러 미국 텍사스대 교수는 선동을 ‘우리 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대편을 희생양으로 삼는 것’으로 규정했다. 선동은 문제의 원인을 외부로 돌리기 때문에 심리적 편안함을 주지만, 복잡한 현실과 서로 간 차이 때문에 거쳐야 할 숙의를 무너트린다. 그가 정의한 선동의 모습은 우리 사회와 겹쳐 보인다.김윤종 사회부장 zozo@donga.com}

    • 2025-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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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김윤종]참사 전 신호는 항상 먼저 나타났다

    지난달 19일 전남 무안국제공항에서 열린 ‘공항 조류충돌예방위원회’. 한 참석자는 “비행기가 고어라운드(go-around·복행)하다가 새 떼와 자주 마주친다.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불과 10일 뒤인 29일 발생한 무안 제주항공 참사를 예언한 듯한 경고였다. 사고가 난 제주항공 7C2216편은 조류 충돌(버드 스트라이크)로 복행한 후 동체 착륙을 시도했고, 방향 안내 시설인 ‘로컬라이저’가 설치된 둔덕에 충돌하면서 폭발했다. 이 과정에서 승객 179명이 사망했다. 장례식장과 공항 참사 현장 등에선 유족들의 눈물과 절규가 넘쳐났다. 이를 보도하는 내내 가슴이 먹먹했다. 사고로 자녀 부모를 잃은 고통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 같다.‘예견된 인재’ 지적, 무안 참사 때도 나와 슬픔을 넘어 분노를 느끼는 유족들도 많았다. 여러 징후가 사전에 나타났지만 참사를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류충돌예방위에선 관리 인력 부족, 경보기 문제를 비롯해 조류 포획 등이 1년 전보다 1344마리나 줄었다는 구체적 수치까지 거론됐다. 사고 비행기는 참사 직전 이틀 동안 5개국을 오가며 13차례 운항을 했다. 무리한 운영이란 지적이 나왔다. 높이 2m의 무안공항 둔덕은 콘크리트로 설치됐다. 활주로 주변 설치물은 비행기 이탈을 대비해 ‘부러지기 쉬운 재질’로 제작하란 정부 고시 등이 지켜지지 않았다. 조류 충돌 경고에 대응하고, 로컬라이저를 규정대로 만들었다면 막을 수 있었던 참사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대형사고 직전엔 위험신호가 나온다. 지난해 6월 23명이 사망한 경기 화성 리튬전지 공장 화재의 경우 참사가 나기 불과 이틀 전 배터리 온도 급상승으로 인한 화재가 공장에서 발생했다. 불이 번지지 않자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7명이 사망한 경기 부천 모텔 화재(8월)도 막을 수 있었다. 화재는 노후 전선에서 비롯됐는데, 에어컨 교체 공사를 하던 기사는 ‘전선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수차례 경고했다. 68세 남성의 차량 역주행으로 9명이 사망한 서울 시청역 참사 역시 고령운전 사고가 급증하면서 대책 논의가 시급하다는 경고가 나오던 중 발생했다.대형 사고 전조 현상, 제대로 직시해야 참사는 불운 속에서 갑작스레 발생하는 듯 보이지만, 작은 문제들이 쌓인 후 임계점에 다다르면 터진다. 미국의 한 보험회사에 근무하던 허버트 윌리엄 하인리히는 재해 사례를 토대로 중상자가 1명 나오기 전에 같은 이유로 경상자가 29명, 부상을 당할 뻔한 사람이 300명이 생긴다는 통계를 제시했다. 널리 알려진 하인리히 법칙(Heinrich’s Law)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알면서도 사고 전 나타나는 신호를 무심하게 넘기고, 참사로 이어진 뒤에야 후회한다. 미국 국토안보부(DHS) 역시 같은 문제 인식하에 20년간 발생한 테러, 대형 사고 등을 연구해 ‘왜 참사와 재난이 반복되는지’를 분석했다. 그 결과 대형 사고는 발생 확률이나 빈도가 낮다 보니, 사고 발생 후 일정 시간이 지나면 정부나 조직의 대응이 소홀해졌다. 시민들 역시 사회 안전망이 잘 작동될 것이란 믿음은 지나치게 큰 반면, 참사가 닥칠 가능성은 과소평가한 것으로 분석됐다. 무안 제주항공 참사 역시 시간이 지나면 기억에서 옅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언제든지 유사한 참사가 일어날 수 있다는 점만큼은 잊지 말아야 한다. 5년간 전국 공항에서 버드 스트라이크가 559건이나 발생했다. 국내 공항 여러 곳에 무안공항과 유사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설치돼 있다. 대형 사고를 완전히 막을 순 없다. 하지만 전조 현상에 적극 대응하면 빈도나 피해 규모를 줄일 수 있다. 최근 통계청 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인 4명 중 1명(25.6%)은 ‘우리 사회가 안전하지 않다’고 답했다. 2년 전 21.7%보다 높아졌다. 올해는 이 수치가 줄어들 수 있을까.김윤종 사회부장 zozo@donga.com}

    • 2025-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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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김윤종]김건희 여사-채상병 의혹 수사의 나비효과

    “큰일 났어. 이러다 회사 문 닫겠어.” 3일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후 검찰 관계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한 말이다. 검찰이 살기 위해 빠른 대처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후 특별수사본부가 6일 구성됐고 “윤 대통령을 내란 혐의 피의자로 입건했다”고 발표했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도 구속했다. 검찰 일부 부서에는 새로운 사건 배당을 중지한다는 공지까지 내려왔다고 한다. 수사력을 집중해 대통령 수사를 빠르게 진행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특별수사단을 꾸린 경찰도 대통령실, 수도방위사령부 등을 압수수색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는 “윤 대통령 긴급 체포를 시도하겠다”고 선언했다.‘봐주기 수사’ 비판받아 온 검경의 변신 ‘전광석화’와 같은 수사다. 각 기관의 경쟁으로 수사 혼선 우려가 나오고 있지만, 계엄 정국의 혼란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라도 신속한 수사가 절실한 시점이다. 그럼에도 한편으론 검경의 지난 1년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씁쓸함을 지울 수 없었다. 이들이 제대로 수사했다면 지금의 혼란은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은 “거대 야당이 탄핵소추로 사법 행정 기능을 마비시키고 주요 예산을 삭감해 국가 기능을 훼손했다”며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그런데 ‘여소야대’라는 4월 총선 결과는 김건희 여사 의혹, 해병대 채모 상병 순직 사건 외압 의혹과 이에 대한 수사기관의 미덥지 않은 수사가 큰 영향을 미쳤다. 김 여사가 최재영 씨에게 디올백을 받은 사건은 지난해 12월 고발된 후 올해 5월에야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됐다. 하지만 서울중앙지검 지휘부가 곧 교체됐고, 김 여사의 첫 대면조사는 대통령경호처 부속청사에서 비공개로 진행됐다. 검찰은 10월 ‘청탁 대가용 선물이 아니다’라며 김 여사를 무혐의 처분했다. 김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연루 의혹 사건도 2020년 4월 고발된 후 4년 6개월 만에 증거 부족 등을 이유로 불기소 처분됐다. 항소심에서 전주 손모 씨의 방조 혐의가 인정됐지만, 비슷한 역할로 의심받는 김 여사 추가 조사는 없었다. 수사심의위원회도 열리지 않았다. 김 여사 의혹 수사에 대한 비판은 연초부터 계속됐고 여당 지지율 하락과 총선 패배로 이어졌다. 국민의힘은 10월 발표한 ‘22대 총선백서’에서 ‘김건희 여사 등의 이슈가 정권심판론에 불을 붙였지만 대응하지 못해 참패했다’고 자체 분석했다. 성역 없는 권력 수사가 사회 혼란 줄여 공수처와 경찰도 마찬가지다. 채 상병 사건과 관련해 직권남용 등 혐의를 받는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을 윤 대통령이 3월 주호주 대사로 임명하자, 공수처는 출국 3일 전 불러 4시간 약식 조사했다. 경찰 역시 수사 11개월 만인 7월 채 상병 관련 수색을 묵인했다는 의혹을 받아온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에게 ‘직권이 없었다’며 무혐의 처분했다. 이 같은 과정에서 야당은 김건희 채상병 특검법의 국회 통과를 강행했고, 윤 대통령은 거부권 행사로 맞섰다. 야권이 서울중앙지검장 등 탄핵과 내년도 예산안 삭감까지 추진하면서 여야 대립이 극에 달했다. 비상계엄 선포까지의 과정이다. 검경이 김 여사 등의 의혹을 스스로 강조해온 ‘법과 원칙에 따라’ 수사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의혹이 신속히 밝혀지고 대통령의 빠른 사과로 이어졌다면 총선 결과가 달라졌을 수 있다. 공정한 수사가 인정되면 야당이 특검법, 탄핵소추안 발의를 고집할 명분도 없었다. 현재 수사기관들은 윤 대통령 수사에 조직의 명운을 걸었다고 한다. 쓰러진 권력을 엄중히 수사하는 건 조직이 사는 길과 거리가 있다. 차기 대통령 등 새로 등장할 권력의 비리가 나타났을 때 공정한 잣대로 수사해야 신뢰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권력만 쳐다보는 수사의 나비효과가 얼마나 큰 사회적 혼란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경험은 이번으로 충분하다. 김윤종 사회부장 zozo@donga.com}

    • 2024-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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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김윤종]영화 속 ‘무도실무관’은 현실에 없다

    경기 안산시의 한 동네는 요즘 풍경이 바뀌었다. 초저녁만 돼도 죽은 듯이 조용하다. 아이를 직접 등하교시키는 학부모들이 부쩍 늘었다. 가방에 호신용품을 잘 넣었는지 점검하는 여성도 보인다. 8세 아동을 성폭행한 조두순이 지난달 25일 이곳으로 이사 오면서 벌어진 일이다. 주민 신모 씨는 하소연한다. “불안해 죽겠는데, 이사도 못 갑니다. 집을 팔아야 하는데 아무도 여기로 안 오려고 하니까….” 조두순 집에서 불과 200∼400m 내 어린이집과 초등학교가 여럿 있다. 주민 불안이 커지자 경찰은 조두순 집 앞에 경찰관을 배치했다. 안산시는 창문만 열면 조두순 집이 보이는 곳에 월세방까지 얻었다.고위험 성범죄자 이사 때마다 혼란 안산뿐만이 아니다. 여성 10명을 성폭행한 박병화가 5월 경기 수원시 팔달구로 이사하면서 일대가 혼란에 빠졌다. 미성년자 12명을 성폭행한 김근식의 경우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됐다. 안산 주민들을 인터뷰하며 9월 개봉한 영화 ‘무도실무관’이 생각났다. 전자발찌 착용자를 감시하는 역할을 하는 법무부 무도실무관인 주인공(배우 김우빈)이 성범죄자들로부터 지역민을 보호하는 내용이다. 한 안산 주민은 이 영화를 언급하며 “제시카법은 진척이 없냐. 정치권은 뭐 하냐”고 성토했다. 아동 성폭행범을 뛰어난 무술 실력으로 응징하는 영화 주인공처럼 시민들의 불안감을 없애줄 특단책으로 ‘제시카법’을 거론한 것이다. 제시카법은 성범죄자가 학교나 공원 주변 300∼600m 내에 거주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다.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성폭행 전과자가 거주지 인근 9세 소녀 제시카를 납치 살해한 사건을 계기로 2005년 도입됐다. 국내에서는 지난해 10월 법무부가 관련 법안을 입법 예고했다. 고위험 성범죄자가 출소하면 국가 지정 시설에 살게 하는 게 주요 골자다. 그러나 법안은 제대로 논의되지 못했고 21대 국회 임기가 끝나며 폐기됐다. 22대 국회에서 최근 법안이 다시 발의되면서 ‘빨리 도입해야 한다’는 요구가 생긴 것. 주민들의 바람과 달리 법안이 통과되긴 쉽지 않아 보인다. 형벌을 받고 출소한 사람의 시설 거주는 이중 처벌이자, 헌법상 거주 이전의 자유 침해라는 반대가 만만치 않다. 시설이 들어설 지역의 거센 반발도 예상된다. 현행 제도부터 점검·보완이 급선무 하지만 조두순 인근 주민 입장에서는 다수의 안전이 범죄자 인권이나 자유보다 더 절박할 수밖에 없다. 전자발찌 착용자는 매년 4000명이 넘는다. 이들 중 다시 성범죄를 일으킨 경우는 최근 5년간 157건이나 발생했다. 온라인 채팅을 통해 거주지로 미성년자를 유인한 후 전자발찌를 찬 채 성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대책이 시급하다. 다만 제시카법이 영화 주인공처럼 단박에 문제를 해결해 주는 건 아니다. 미국 교정당국 조사 결과 제시카법 시행 후 노숙 성범죄자 수가 3년간 24배 증가했다. 거주 제한으로 가족과 떨어지고 직장도 갖지 못하면 ‘사회에서 배제됐다’는 분노가 커지고 재범으로 이어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새 제도부터 도입해 한 번에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 현행 제도부터 점검하는 게 급선무다. 2019년 도입된 1 대 1 전담 보호관찰제를 보다 활성화하면 고위험 성범죄자 점검을 강화할 수 있다. 현재는 보호관찰관 1명이 수십 명의 성범죄자를 맡는다. 성도착 환자 등에게 약물로 충동을 줄이는 치료도 제대로 시행해야 한다. 관련 제도가 2011년 시작됐지만, 치료명령이 내려진 경우는 연평균 10건 미만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영화 ‘무도실무관’을 본 후 “전자발찌 범죄자를 감시하며 시민 보호를 위해 어떻게 희생하는지 보여준다. 이 영화를 많이 봤으면 좋겠다”며 추천했다고 한다. 현실 속엔 영화처럼 ‘무쌍영웅’은 없다. 정부가 하루빨리 기존 정책이나 제도가 제대로 시행되는지부터 확인하고 보완하는 것이 성범죄자 옆집에 살며 마음 졸이는 시민을 위하는 현실적인 해결책이다. 김윤종 사회부장 zozo@donga.com}

    • 2024-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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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김윤종]국문과를 외국인이 채우는 나라

    10일 소설가 한강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발표되는 순간, 국내 문인들과의 인연이 떠올랐다. 20년 전인 2005년 5월 100여 명의 작가들과 함께 독도로 향했다. 당시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거세지자 작가들은 독도사랑을 담은 시를 낭송하는 예술제를 열었다. 취재차 배를 타고 독도로 향하면서 작가들과 문학을 토론했다. 고은 시인에게는 노벨상에 대해 물었다. “염원의 나무 자라는 미쁜 보석” “내 기특한 혈육”이라고 독도를 표현하는 작가들의 감성이 부러웠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쓰냐’고 묻는 과정에서 작가들 상당수가 국어국문학과 출신이라는 점도 알게 됐다.‘제2의 한강 배출 어렵다’는 대학들 이런 인연 때문일까. 10월 10일이면 국내 작가의 자택으로 향하곤 했다. 노벨 문학상 수상 시 인터뷰를 먼저 하기 위해서다. 매년 수상 실패로 아쉬움이 쌓였지만 이번 수상으로 사라졌다. 한국 사회도 축제 분위기다. 한강 소설은 엿새 만에 100만 권 이상 판매됐고, 소셜미디어에는 ‘문송(문과라 죄송) 사용 금지’ ‘국문과 쾌거’란 글이 확산됐다. 한강의 모교인 연세대 국문과에는 축하 현수막까지 걸렸다. 그런데 정작 한강의 꿈이 자라났던 대학 국문과에서는 “앞으론 ‘제2의 한강’을 배출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하소연이 나온다. 경제 분야의 ‘피크 코리아(peak-Korea)’ 논쟁처럼 한국 문학이 이번 수상으로 정점에 섰지만, 향후 쇠퇴할 수 있다는 우려다. 한 국문과 교수는 “요즘 국문과 신입생들은 ‘서정주’ 시인도 모른다”고 했다. 독서량이 적다 보니 교과서 속 작가조차 생소한 경우가 태반이라는 것이다. 그는 “좋은 문학을 읽지 않으니 좋은 글을 쓰는 젊은층이 줄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학생들이 소설을 쓸 때조차 챗GPT로 초고를 쓴 후 그 내용을 다듬는다고 한다. 그나마 학부는 나은 셈이다. 또 다른 국문과 교수는 “석사 과정 학생 모두 외국인 유학생”이라고 밝혔다. 한국에 호감을 가지고 국문학을 전공하는 외국인은 소중한 존재다. 하지만 깊이 있는 전공 수업은 사실상 어렵다는 게 대학의 얘기다. 그럼에도 재정난 때문에 외국인 유학생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국문과 중 콘텐츠창작학과 등으로 이름을 바꾸거나 아예 폐쇄된 곳이 수두룩하다. 국문과 등 어문 인문계열 학과는 최근 8년 새 800곳 이상 사라졌다. 독서 붕괴로 인한 작가 고사 막아야 전공자뿐만이 아니다. 지난해 국내 성인 10명 중 약 6명은 1년간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 연간 독서량은 1.7권.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조사에서는 “문해력이 과거보다 저하됐다”는 교사의 답변이 91.8%에 달했다. 인공지능(AI) 시대이자 이공계 인재가 국가경쟁력인 이 시기에 ‘국문과나 독서가 대수냐’고 반문할 수 있다. 이미 BTS, 기생충 등 한류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문화강국도 맞다. 하지만 독서 습관 붕괴는 좋은 작품, 나아가 뛰어난 작가를 사라지게 한다. 읽는 습관이 줄어들면 좋은 작품이 발표돼도 소비할 독서 인구가 감소한다. 인세가 적어지면 작가는 본업을 포기한다. 이미 만연한 현상이다. 정부 지원마저 미흡하다. 문학 등 인문학 관련 내년 예산(281억 원)은 올해보다 24%가량 준다. 열악한 상황 탓에 요즘 국문과 학생들은 스스로를 ‘채식주의자’라고 부른다고 한다. ‘한국에서 문학을 하겠다’는 것은 모두가 육식인 사회에서 홀로 채식을 선언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의미다. 노벨 문학상 수상의 벅참으로 보낸 일주일이었다. 이젠 마음을 조금 가라앉히고 ‘차세대 한강’이 될 작가들을 키울 수 있는 토양을 고민해보면 어떨까? 한강의 아버지 한승원 작가는 노벨상 수상을 계기로 자신이나 딸의 이름을 딴 문학관 설립을 극구 사양했다. 그는 단지 말했다. “책을 많이 읽고, 많이 살 수 있게 해달라.” 김윤종 사회부장 zozo@donga.com}

    • 2024-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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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김윤종]취임사마다 ‘검찰 중립’ 외쳤던 총장들

    “사건이 공정하게 처리되는지, 죄를 지은 사람이 합당한 벌을 받고 있는지, 걱정하시는 국민도 계신다.” 19일 열린 46대 검찰총장 취임식에서 심우정 신임 총장은 이같이 말했다. 이어 “외부 영향이나 치우침 없이 오로지 증거와 법리에 따른 공정한 수사를 통해 국민들이 믿을 수 있게 하자”고 했다. ‘증거와 법리’를 강조한 심 총장 표정에선 정권 중반에 임명된 검찰총장으로서의 부담감이 느껴졌다. 신임 총장의 목표와 약속을 취임사에 담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은 탓이다. 전임 이원석 총장 역시 2년 전 취임사에서 한비자의 ‘법불아귀(法不阿貴·법은 신분이 귀한 자에게 아부하지 않는다)’를 언급하며 “성역은 없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를 둘러싼 디올백 수수 의혹 수사 등을 질질 끌어 임기 내 마무리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36년간 총장 3명 중 1명만 임기 채워 검찰총장 2년 임기제가 시행된 1988년 이후 임명된 총장 25명의 취임사를 쭉 훑어 봤다. 시대에 따라 주요 수사 대상과 척결 방안이 각각 다르게 담겼지만, 검찰의 중립성·공정성·신뢰 회복을 언급한 부분은 취임사마다 유사했다. 일부는 ‘Ctrl+V’(붙여넣기)로 내용을 옮긴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김영삼 정부 첫 검찰총장인 박종철 전 총장은 1993년 3월 취임사에서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며 “국민을 두려워하며 소신껏 검찰권을 행사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통령 의중을 읽지 못한다는 평가와 수사 부진이 겹치면서, 박 전 총장은 취임 6개월 만에 사퇴했다. 2005년 4월 취임사에서 “정치적 중립과 수사 독립을 뿌리내리겠다”고 했던 김종빈 전 총장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는 동국대 교수 구속에 대해 헌정사상 첫 법무부 장관의 수사지휘권이 발동되자 같은 해 10월 물러났다. 이명박 정부 때인 2011년 8월 취임한 한상대 전 총장은 “검찰의 깨끗함과 투명함을 강화시키겠다”고 외쳤다. 하지만 그는 일명 ‘봐주기 구형’으로 구설에 올랐고 대검 중수부 폐지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후배 검사들의 검란(檢亂)으로 1년 3개월 만에 퇴진했다. 채동욱 전 총장은 2013년 4월 취임식에서 “정치적 중립성에 대해서 결연한 의지를 가지겠다”고 했지만, 박근혜 정부 초기 국가정보원 댓글사건 수사를 지휘하다 혼외자 논란에 휘말려 취임 6개월 만에 사퇴했다. 윤 대통령 또한 검찰총장 시절 문재인 정부와 갈등을 겪었고 2021년 3월 사퇴 후 곧장 대통령 후보가 됐다. 36년간 25명의 총장 중 2년 임기를 마친 이는 9명(36%)에 불과했다.‘검찰 중립 방벽 되겠다’는 약속 지켜야 심 총장도 선배 총장들처럼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레임덕과 함께 각종 의혹이 터지면서 정권을 직격하는 수사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김수남 전 총장의 경우 자신을 임명한 박 전 대통령을 구속했다. 이달 24일 디올백을 건넨 최재영 씨에 대한 수사심의위원회 결과가 나오면 김 여사 처분을 결정해야 한다. 12일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 2심에서 전주(錢主)로 기소된 손모 씨가 방조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으면서 유사한 역할을 한 김 여사 처분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 수사 등 검찰 중립성을 평가할 사건이 수두룩하다. 이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심 총장은 정권에 맞설 수도, 비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판단이 필요한 순간에 취임사를 떠올리길 바란다. 심 총장 취임사는 이렇게 끝맺는다. “검찰의 중립성 독립성이 지켜질 수 있도록 든든한 방벽이 될 것을 약속드린다.” 물론 총장 의지만으론 한계가 있다. 정치권 외압, 대통령 인사권 등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다. 그럼에도 이 약속이 지켜진다면 ‘검찰 중립성·독립성’이란 단어는 향후 신임 총장들의 취임사에선 점차 줄어들지 않을까.김윤종 사회부장 zozo@donga.com}

    • 2024-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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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대 동갑내기 임산부의 서로 다른 선택[오늘과 내일/김윤종]

    “너무 안타까운 마음에 꽃을 가져왔습니다.” 20일 세종시 조치원읍에 있는 신안저수지. 저수지 주변에는 꽃다발과 화분 등이 놓여 있다. 한 동네 주민은 “그 아기를 추모하고 싶었다”며 “자주 다니던 곳에서 비극이 발생해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닷새 전인 15일 이곳을 산책하던 주민들은 저수지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영아(嬰兒) 시신이 물 위에 떠 있었기 때문이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건진 아기 시신에는 탯줄이 붙어 있었다. 경찰이 일대 폐쇄회로(CC)TV 영상을 조사하자 하루 뒤 21세 김지수(가명) 씨가 자수했다. 홀로 사는 김 씨는 양수가 출산 예정일보다 일찍 터져 집에서 혼자 출산했다. 출산 후 아기가 숨을 쉬지 않아 겁이 나 저수지에 아기를 버렸다고 진술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한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아기 유기한 엄마, 아기 지킨 엄마 비슷한 상황의 21세 박수진(가명) 씨가 있다. 부모와 연락이 거의 끊어진 그는 서울에서 배달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했다. 남자친구를 만났지만 임신을 하자 떠났다고 한다. 홀로 낙태와 출산을 고민하다가 임신 막달이 됐고, 병원에서 지난달 말 출산했다. 박 씨는 병원을 나선 후 아기를 유기하려 했다. 그러나 온라인 검색 중 미혼모 지원센터를 알게 돼 전화를 걸였다. 상담원은 즉시 박 씨가 사는 곳으로 출동해 아기를 보호하는 한편으로 박 씨를 설득하고 상담했다. 박 씨는 마음을 바꿔 최근 아기의 출생신고를 마쳤다. 동갑내기인 이들은 경제적, 심리적 어려움 등으로 출산과 양육에 갈등을 겪고 있는 ‘위기 임산부’다. 하지만 두 여성은 180도 다른 행보를 보였다. 이들의 엇갈린 결과에서 시행 한 달 된 보호출산제 등의 사각지대와 보완점이 드러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지난달 19일부터 출생통보제와 보호출산제기 시행됐다. 전자는 의료기관이 아기의 출생 사실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제출하고 지방자치단체가 이를 통보받는 제도다. 후자는 임신, 출산을 원치 않는 여성이 익명으로 진료를 받고 출산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친모가 갓 태어난 자녀 2명을 살해한 ‘수원 냉장고 영아 시신 사건’ 등 태어난 후 출생신고가 되지 않아 아동이 방치되는 사태를 막기 위한 조치다. 제도 시행 후 두 여성의 차이는 1차적으론 ‘공간’에서 비롯됐다. 김 씨는 병원이나 시설이 아닌 집에서 홀로 출산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유기했다. 반면 아기를 버리려던 박 씨는 지원센터를 찾았고, 주변의 도움을 받았다.보호출산 자체보다 상담이 중요 근원적으로는 ‘상담’이 이들의 차이를 만들었다. 미혼모 지원시설 관계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아이를 버리거나 입양 보내고 싶어 하다가도 막상 상담을 하면 직접 양육을 선택하는 미혼모들이 적지 않다”고 밝혔다. 보호출산제를 먼저 도입한 선진국들이 임산부가 익명 출산을 신청해도 관련 절차 진행보다 상담부터 신경을 쓰는 이유다. 2013년부터 보호출산제를 시행 중인 독일은 출산 전후로 체계적 상담과 지원에 초점을 맞춘다. 위기 임산부 발굴을 위해 비대면 인터넷 상담, 24시간 긴급상담 등을 시행 중이다. 그 결과 2014∼2018년 독일 내 위기 임산부의 40%는 상담 과정에서 익명 출산을 포기하고 직접 양육 등을 택했고, 22%만 익명 출산을 진행했다. 국내도 보호출산제 시행 후 한 달간 419건의 상담이 이뤄졌다. 안심하긴 이르다. 상담조차 하지 못한 채 김 씨와 유사한 상황에 내몰리는 산모들이 우리 주변에 많다. 국내 미혼모는 연간 2만 명이 넘고, 출산 기록은 있지만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아동 2123명(2015∼2022년) 중 최소 249명이 사망했다. 아이를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 키울 수 있는 사회, 첫걸음은 위기 임산부 발굴과 상담에 있지 않을까. 김윤종 사회부장 zozo@donga.com}

    • 2024-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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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김윤종]봉화 농약 사건 ‘범인 찾기’보다 중요한 것

    “경로당 가기 무섭습니다.” 지역에 사는 어르신들의 하소연이다. 경로당 노인들이 농약에 중독돼 쓰러진 사건이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15일 경북 봉화군 봉화읍에서 65∼78세 할머니 4명은 오리고기를 먹은 후 경로당으로 이동했다. 이들은 미리 큰 통에 타둔 믹스커피를 냉장고에서 꺼내 마신 후 심정지, 마비 등으로 병원에 실려 갔다. 농약 중독이었다. 3일 후 또 다른 H 할머니(85)가 유사한 증세로 중태에 빠졌다. 그는 앞서 입원한 할머니 4명과 오리고기를 함께 먹었지만 커피는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농약 복용 시 증상이 바로 나타나는데, 이 할머니만 3일 후 중독 증상을 보인 것. 먼저 쓰러진 할머니 4명은 위세척 결과 에토펜프록스, 터부포스 등의 농약 성분이 나온 반면 H 할머니에게서는 이와 다른 농약 성분이 검출됐다. H 할머니는 지난달 30일 숨을 거뒀다.경찰, 사망 할머니 경로당 갈등 수사 경찰은 피해자로 보이는 H 할머니를 용의선상에 두고 수사하고 있다. 그의 자택을 최근 수색했고, 쓰러지기 전 자신의 통장에 있던 돈을 찾아 가족에게 보낸 사실도 확인했다. H 할머니 외의 할머니 4명은 경로당 간부였으며, 이들이 공용 식품을 관리하는 과정에서 경로당 내 다른 어르신들과 갈등이 있었다는 진술도 확인 중이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증거물 감정 결과가 나오면 사건의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봉화 농약 사건을 취재하면서 접한 지방자치단체 관계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사건 이면에 고령화에 따른 노인 문제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 관계자는 “노인 시설에서 함께 생활하는 고령자가 늘면서 각종 갈등이 터져 나오고 있다”고 했다. 국내 65세 이상은 960만9000명. 전체 인구의 18.6%다. 2015년 6만6292곳이던 경로당, 복지관 등 노인여가복지시설은 지난해 9만3056곳으로 8년 새 40.4%나 증가했다. 이들 시설의 정원은 40만 명에 달한다. 특히 도시보다 시설이 부족하고 인구 감소가 심한 농촌의 경우 노인들이 경로당 등에서 모여 공동 생활을 하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길다. 하루 8시간, 매달 20일을 복지관에서 지낸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오래 함께 있다 보면 사소한 시비도 최악의 사태로 이어질 수 있다. 2018년 경북 포항에선 마을 주민들과 갈등을 겪던 68세 여성이 생선탕에 농약을 넣었다.공동 생활 속 노인 갈등, 관심 가져야 노인 집단 내 세대 갈등도 자주 발생한다. 전북대 연구를 보면 한 경로당에서 입구 의자를 두고 싸움이 벌어졌다. 신발을 신기 편하도록 80세 이상 노인들이 긴 의자를 설치했는데, 60대 노인들이 “입구가 예쁘지 않다”며 내다 버리려 해 큰 갈등이 생겼다. 노인복지관에 다니는 70대 남성은 “가족, 친구처럼 익숙한 사이가 아니다 보니 사소한 일도 싸움이 된다”고 했다. 또 다른 노인은 “65세 노인과 85세 노인은 완전히 다른데, ‘노인’이란 범주에 한꺼번에 넣고 공동 생활을 하니 다툼이 잦아질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국내 노인시설은 식사 지원 등 개개인 돌봄에 초점을 맞춘다. 시설 노인 전반의 관계를 관리 및 교육해 주는 프로그램은 없다. 고령화를 먼저 겪은 스위덴 등 유럽은 노인시설 속 고령자 커뮤니티가 제대로 구축돼 갈등을 줄일 수 있게 신경 쓴다. 연령에 따라 각각 다른 프로그램도 지원한다. 유엔은 1991년 총회에서 ‘노인을 위한 원칙’을 채택했고, 오늘날 여러 선진국 고령 정책의 근간이 됐기 때문이다. 의식주를 넘어 원만한 관계 등 행복추구권과 존엄성이 침해되지 않아야 한다는 게 골자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도 노인시설 내 커뮤니티가 원활하게 운영되도록 갈등 관리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10년 뒤엔 한국인 3명 중 1명이 노인이 된다. 김윤종 사회부장 zozo@donga.com}

    • 2024-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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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동연 “이재명과 차별화? 내 갈길 뚜벅뚜벅 갈것”[월요 초대석]

    “정치 불통, 경제 무능, 뺄셈 외교를 하고 있다.” 김동연 경기도지사는 5일 경기 수원시 영통구 도청 집무실에서 가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윤석열 정부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김 지사는 “총선 전에는 정치판과 경제 운영의 틀, 교육 시스템, 갈등 구조인 사회를 지적하며 리더십 위기라고 했다”며 “(총선 뒤에는) 대통령과 여당이 국민의 생각과 심판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변화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이제는 신뢰 붕괴 수준까지 가는 것 같다. 대단히 안타깝고 개탄스럽다”고 말했다. ‘채 상병 특검법’이 국회를 통과한 것에 대해 김 지사는 “대통령이 이번에도 거부권 행사를 한다면 정말 큰 문제고, 지금 거의 국정 포기 수준으로 가는 것 같다”며 “특검법 수용해서 왜 이런 일이 발생했고, 그 과정에서 이것을 무마하려고 하는 잘못된 시도가 있었다면 명명백백하게 다 밝혀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지사는 차기 대선 출마 여부에 대해서는 “경기도가 바뀌면 대한민국이 바뀐다는 생각으로 일하고 있다”며 “‘지사를 더 할 거냐, 대권 나갈 거냐’ 하는 것은 국민의 부름에 대한 제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잘 판단해 보겠다”고 밝혔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와의 차별화 전략에 대해 “굳이 이 전 대표를 의식해서 차별화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제 갈 길을 뚜벅뚜벅 갈 것”이라고 했다. “지금 한국에 비전 제시 정치인 없어… 난 신상품, 구태정치 안할 것”총선 결과를 승리로 오판해선 안 돼… 당 지지율 뒷걸음질, 경제 정당 돼야70조 투자 유치, 임기 내 100조 달성… ‘진보는 경제 무능’ 잘못된 신화 깰 것당 안팎 견제는 내 경쟁력 보여주는 것… 국민의 부름 따라 대선 출마 잘 판단《문재인 정부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강민석 씨가 2일 경기도 신임 대변인으로 선임됐다. 앞서 5월 17일 안정곤 전 청와대 선임행정관과 신봉훈 전 청와대 행정관이 각각 경기도 비서실장과 정책수석으로 임명됐다. 친문(친문재인) 핵심으로 꼽히는 전해철 전 국회의원이 경기도정자문위원장으로 조만간 위촉될 예정이다. 김동연 경기도지사가 이처럼 친문계 인사를 대거 영입하면서 일각에선 차기 대선을 염두에 두고 진용을 갖추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김 지사는 5일 경기 수원시 영통구 도청 집무실에서 가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특정 정치 세력을 염두에 두고 인사를 하지 않는다”며 “강호의 인재를 영입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다만 차기 대선 출마 여부에 대해서는 “국민의 부름에 대한 제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잘 판단해 보겠다”며 즉답을 피했다. 다음은 일문일답.》―민선 8기가 출범한 지 2년이 지났다. 가장 의미 있는 성과를 꼽는다면…. “경기도는 잠재력과 다양성 등 모든 면에서 대한민국의 축소판이다. 국정 운영을 해봤을 때의 경험과는 달리 직접 주민들을 상대하고 도정을 이끌며 많은 가능성을 봤고 ‘경기도를 바꿔서 대한민국을 바꾸자’ 하는 마음으로 2년을 달려왔다. 도지사로서 70조 투자 유치 등 여러 가시적인 성과가 있었지만, 도민들께서 저에 대한 신뢰와 도정에 대한 믿음의 정도가 올라간 것이 제일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 ―‘돈 버는 도지사’로 100조 원 이상의 투자 유치를 자신했다. “(취임 후) ‘돈 버는 도지사’가 되겠다고 했다. 가장 큰 취지는 진보는 경제에 무능하고 시장을 잘 모르고 있다는 잘못된 신화를 반드시 깨기 위해서였다. (4년 동안) 국내 투자를 100조 원 이상 하겠다고 했는데, 이미 70조 원을 달성했다. 임기 내 100조 원 이상은 충분히 달성할 것으로 본다. 최대한 많이 하겠다.” ―화성 공장 화재 사고로 23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번 사고를 보면서 이태원 참사가 떠올랐다”고 했다. 일부에서는 재난을 정쟁화했다는 지적도 있는데…. “이태원 참사는 현재진행이다. 해결된 것도 없고 책임지는 사람도 없다. 경기도에서 (화성 공장 화재) 대응하는 확실한 차별성을 보여 주고 싶었다. 유가족 대책이나 장례 문제 등 빠른 사고 수습과 문제 발생부터 대책까지 전 과정을 담은 백서를 만들고 있다. 비슷한 참사의 반복을 막겠다는 취지다. (이런 과정들이) 만약에 정쟁화로 보인다면 정쟁 얼마든지 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경기북부특별자치도를 추진하고 있지만 찬반 논란이 거세다. “경기 북부 인구가 360만 명이 넘었다. 이는 전국 광역자치단체 중 경기도(남부)와 서울 다음으로 많은 수치다. 또 비무장지대(DMZ) 등 잘 보존된 자연환경이 있다. 경기 북부의 무한한 잠재력을 보여 주고 있고 가장 큰 경쟁력이다. 오랫동안 국가 경제를 운영해 온 사람으로서 경기 북부를 발전시키면 대한민국 성장의 중요한 전기를 만들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우리의 계획(중첩 규제 완화 등)대로 경기 북부 비전이 실현되면 대한민국 국내총생산(GDP)을 연평균 0.31%포인트 이상 올릴 수 있다.” ―올해 4월 총선을 앞두고 김포를 서울로 편입해 ‘메가시티’로 만드는 방안을 여당이 추진하면서 논란이 커졌다. “부울경(부산울산경남)이라든지, 광주 호남이라든지 메가시티는 추진해야 한다고 본다. 메가시티는 수도권 일극화에서 전국을 다극화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도권은 얘기가 다르다. 왜냐면 경기도는 수도권이라고 하지만 경기 북부가 낙후된 곳이 많다. 4·10총선을 앞두고 지난해 여당 대표가 김포와 서울 편입 문제를 들고 나오면서 이 판을 완전히 흙탕물로 만들었다. 개탄스러운 일이다. 선거의 표를 위해서 서울 인근 시를 서울로 편입하겠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30년 동안을 끌고 온 국토 균형 발전에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이고 또 지방자치와 지방분권에 전면으로 어긋나는 것이다. 이미 지난번 총선에서 결과로 저는 분명히 국민께서 심판했다.” ―주요 현안마다 윤석열 정부를 강하게 비판해 왔다. 윤석열 정부와 여당을 어떻게 평가하나. “총선 전에는 정치판과 경제 운영의 틀, 교육 시스템, 갈등 구조인 사회를 지적하며 리더십 위기라고 했다. 총선 이후 위기 문제가 더 커졌다. 국민이 정권에 대해 분명하게 메시지를 줬지만, 바뀔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과 여당이 국민의 생각과 심판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변화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이제는 신뢰 붕괴 수준까지 가는 것 같다. 대단히 안타깝고 개탄스럽다.” ―22대 국회에서 ‘채 상병 특검법’이 다시 통과됐다. 대통령이 이번에도 거부권을 행사할 것으로 보나. “대통령이 이번에도 거부권 행사를 한다면 정말 큰 문제다. 대통령은 지금 거의 국정 포기 수준으로 가는 것 같다. 대통령이 국정을 포기한다면 국민은 대통령을 포기할 것이다. 억울하게 희생된 젊은 해병 장병 문제에 대해 이런 식으로 나간다면 윤 대통령이 지금 불행한 길로 가게 될 것이다. 결자해지 차원에서 대통령이 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 특검법 수용해서 왜 이런 일이 발생했고, 그 과정에서 이것을 무마하려고 하는 잘못된 시도가 있다면 아주 명명백백하게 다 밝혀내야 한다.” ―최근 친문 전해철 전 의원 영입이나 대북 송금 자료 공개 논란, 개딸의 공격 등과 관련해 당 안팎에서 견제가 시작된 것 같다. “견제가 있다고 하는 건 그만큼 기대와 경쟁력이 있기 때문이다. 당의 앞을 내다볼 자산이 많을수록 좋은 거다. 견제 또는 경쟁하는 것이 없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당의 역동성과 에너지를 살리는 것이라 해석한다. 이게 제 공식적인 답이다.” ―민주당이 이재명 전 대표의 일극 체제로 간다는 비판이 있다. 민주당은 어떻게 나아가야 하나. “이재명 전 대표는 당원과 국민의 지지를 받는 당의 가장 큰 자산이다. 그런데 민주당이 총선 결과를 승리로 오판해서는 안 된다. 총선은 첫째 윤 정부에 대한 심판이었고, 동시에 민주당에도 분명한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실제 지금 당 지지율이 뒷걸음질 치고 있다. 지금 민주당이 더 작은 민주당으로 가서는 안 된다. 더 큰 민주당, 수권정당으로서 유능한 정당, 경제에 유능하고 시장을 가장 잘 이해하는 진보의 민주당이 되도록 제 역할과 책임을 다하겠다.” ―차기 대선에 출마하는지 궁금하다. 경기도지사 재선 도전 여부도 관심이다. “우리 도민들께서 제게 과분한 성원을 통해서 정치 초짜인 제게 경기지사를 맡겼다. 경기도가 바뀌면 대한민국이 바뀐다는 생각으로 일한다. 대한민국 바꿔 보고 싶다. 그런데 어떤 자리에서 ‘지사를 더 할 거냐, 대권 나갈 거냐’ 하는 것은 국민의 부름에 대한 제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잘 판단해 보겠다.” ―차기 대권주자로서 본인의 장점은 무엇인가. “제가 갖고 있는 경쟁력이자 제 특징은 첫째 ‘제대로 된 사람’이다. 정직하고 진정성을 갖고 있고, 거짓말하는 사람 싫다. 두 번째는 확장력이다. 경기도의회에서 여야 동수로 출범했지만 협치했다. 예산과 조직 다 합의 처리했고 만장일치 통과했다. 도민들로부터 제가 ‘정파적으로 어디 편중됐다’는 얘기 듣지 않는다. 세 번째로 경제전문가다. 대한민국 경제에 대해서 그냥 한 단면을 가지고 얘기하는 사람이 많지만 전 세계 경제 흐름과 자본주의 역사, 대한민국이 해방 이후에 개발연대로부터 쭉 지나 왔던 흐름 등을 잘 파악해 문제를 풀어야 한다. 대단한 역량이 필요하다.” ―약점은? ‘정치인으로서 주변에 사람이 없다’라는 평가도 있다. “지금 사람이 없어서 약점이라는 평가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사람은 구름같이 올 것이다. 지도자는 가장 밑바닥에 진정성이 있다. 권력을 사유화하거나 내 사적 이익을 위해서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과 국가를 위해 봉사하고 필요하면 희생할 수 있다는 진정성이다. 여기(진정성)에서 소통과 통합이 나온다. 그 다음 국가의 비전을 제시하고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역량과 일머리가 있으면 된다. 지금 대한민국 비전을 제시하는 대통령이 있나? 정치인은? 어느 누구도 대한민국을 어디로 끌고 가겠다 얘기한 사람이 있나? 조급할 것 없다. 오히려 (그런 우려가) 경쟁력이라고 본다. 구태의연한 정치 하고 싶지 않다. 국민 입장에서 보면 난 신상품이다.” ―이재명 전 대표와의 차별화 전략은 있는가. “굳이 이재명 전 대표를 의식해서 차별화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저는 제 갈 길 뚜벅뚜벅 갈 것이다. 구정치 안 하고 갈 거다. (앞서 말한 차기 대권주자로서의 장점) 세 가지는 누구랑 차별화가 아니라 제가 갖고 있는 경쟁력이자 특징이다.” 김동연 경기도지사 프로필△충북 음성 출생(67)△덕수상고, 국제대 졸업, 미국 미시간대 박사△행정고시 26회, 입법고시 6회△아주대 총장(2015∼2017년)△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인터뷰=김윤종 사회부장 zozo@donga.com정리=이경진 기자 lkj@donga.com·조영달 기자 dalsarang@donga.com}

    • 2024-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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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균형발전 외면한 야당… 수도권 일극주의 깨야 지속성장 가능”

    “수도권 정당으로 변한 더불어민주당이 초심을 잃고 분권과 지역균형발전에 대한 의지가 약해진 게 핵심 이유라고 봅니다.” 박형준 부산시장은 지난달 10일 부산 연제구 시청 집무실에서 가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KDB산업은행(산은)의 부산 이전이 성사되지 못하는 상황을 놓고 이렇게 말했다. 산은 이전은 부산을 중심으로 남부권 발전을 촉진하기 위한 국정 과제로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공약한 사안이다. 산은을 부산으로 이전하려면 ‘본점을 서울에 둔다’는 산은법 4조 1항을 개정해야 하지만 국회 상임위원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박 시장은 “지역균형발전은 고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서 이어져 내려오는 민주당의 중요한 가치라 생각한다”며 “수도권 일극주의를 깨려면 남부권에 새로운 성장 바람이 일어야 하고 이를 위해 정책금융기관의 이전은 필수”라고 말했다. 이날 인터뷰에서 박 시장은 비대해진 수도권에 대응하는 남부권의 발전과 이를 위한 부산의 역할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세계 2위 환적항(소형 항만으로부터 화물을 받아 모선으로 옮겨 싣는 데 이용되는 항만)을 가진 부산을 싱가포르, 홍콩처럼 국제 자유 비즈니스 도시로 만들기 위해 진작 노력했다면 수도권 집중이 일으킨 오늘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산은 이전이 왜 시급하다고 보는가. “단순하게 하나의 금융기관을 옮기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가 지속 성장하려면 수도권 일극주의를 반드시 타파해야 하고, 이를 위해 수도권에 대응하는 남부권이라는 하나의 발전 단위를 만들어야 한다. 이를 촉진할 정책금융기관이 있어야 하며 국제금융도시라는 강점을 지닌 부산에 와야 효율성이 극대화된다.” ―각종 규제를 완화해 싱가포르나 중국 상하이처럼 육성하는 내용을 담은 ‘부산글로벌허브도시특별법’도 21대 국회에서 처리가 무산됐다. 산은 이전처럼 야당의 반대가 이유인가. “(특별법은 산은법과 비교해) 분위기는 다르다. 최근 야당 원내대표를 만나 특별법의 연내 처리를 호소했을 때 공감하는 분위기였다. 이미 부산 여야 의원 18명 전원이 21대 국회에 이어 법안을 재발의했고 야당도 별 이견이 없어 (22대 국회 통과는) 희망적이다.” ―글로벌허브도시특별법이 왜 필요하다고 보나. “부산 전역에 획기적인 규제혁신, 특례지원과 함께 사람과 자본, 기업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내용을 담고 있다. 물류, 금융 등 부산이 강점을 보이는 산업에 대해선 다양한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항만과 공항을 중심으로 물류거점을 조성해 그와 결합한 국제금융도시를 만들어 첨단산업이 성장할 수 있는 도시를 추구한다.” ―2030 엑스포 유치가 불발된 상황에서 2029년 말 가덕도신공항 개항을 계속 추진할 필요가 있는가. 안전성 확보, 주민 이주 문제 등에서 무리하는 게 아니냐는 시선이 있다. “엑스포 유치 때문에 공사 기간이 6년 정도 당겨진 건 맞지만 단순히 엑스포를 위한 공항이 아니다. 30여 년 전부터 동남권 관문 공항으로 준비를 해왔다. 남부권 전체를 또 하나의 국가 발전 축으로 만들기 위한 혁신 인프라인 만큼 철저히 준비해 연말 착공할 계획이다.” ―조국혁신당에서 엑스포 유치 과정 전반에 대한 국정조사를 주장한다. “최선을 다했지만 유치 실패가 여전히 너무도 아쉽다. 다만 그 과정에서 부산의 브랜드가 크게 올라가는 등 수확도 적지 않았다. 경쟁국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유치 과정에서 너무도 많은 자본을 투입해 경쟁이 어려웠다. 상임위 등 국회의 정상적인 기능을 통해 유치 과정의 여러 의문점을 충분히 해소할 수 있는데도, 국정조사를 주장하는 건 오로지 창피를 주겠다는 것으로만 이해된다. 이는 유치를 간절히 염원했던 부산시민들에 대한 모독 행위다.” ―한국 제2의 도시라는 명성이 무색할 만큼 부산의 인구는 계속 줄어들고 있다. 어떤 해법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4차 산업혁명, 신산업 분야에 새로운 기업들을 유치하는 데 최대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 결과 부산시장으로 처음 취임했던 3년 전보다 부산에 대한 기업의 각종 투자 유치가 10배 정도 늘었다. 현실적으로 대기업의 본사를 부산으로 이전하는 건 어려운 상황이라고 보고 전력반도체나 2차전지 등에서 잠재력을 가진 신흥 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데 더 집중할 것이다.” ―4월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참패했다. 보수 패배 원인은 무엇이라 보는가. “국민의힘이 서민층에게 희망을 주는 메시지나 정책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게 결정적인 이유라 생각한다. 국민은 보수가 나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힘이 별로 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점을 공감하려는 노력, 효능 있는 정책을 찾으려는 고민이 많이 필요하다.” ―앞으로의 정치적 행보를 정한 게 있다면…. “현재는 오직 부산시민들의 삶의 질, 행복을 높이기 위한 정책에 집중하고 있다. 서민들에게 다가가는 시정을 만드는 게 목표이며 그 이후의 개인적 행보에 대해선 내년에 생각하려고 한다.”박형준 부산시장 프로필 △부산(64) △대일고, 고려대 사회학과 졸업 △동아대 사회학과 교수 △17대 국회의원(2004∼2008년) △이명박 정부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2009년 8월∼2010년 7월) △국회 사무총장(2014년 7월~2016년 6월) △제38·39대 부산시장 (2021년 4월∼현재) △17대 대한민국시도지사협의회장(2024년 1월∼현재) 인터뷰=김윤종 사회부장 zozo@donga.com정리=강성명 기자 smkang@donga.com}

    • 2024-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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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김윤종]‘우리 아닌 외국인’ 생각이 참사 키운다

    “그 많은 생명이 사라지다니, 너무 안타까워요. 그런데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한국인이 이렇게 많이 죽었으면 정말 난리가 났을 거 같아요. 외국인이라 그나마….” 서울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옆 테이블에 있던 직장인들의 대화를 우연히 들었다. 24일 외국인 18명을 포함해 23명이 숨진 경기 화성시 리튬전지 공장 화재 이야기였다. 내국인과 외국인 간 차별을 두는 인식이 은연중에 배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 역시 매일 크고 작은 사건·사고를 접하며 보도 여부를 두고 경중을 따질 때, 외국인 근로자 사고는 내국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중을 낮춰 생각하곤 했다. 외국인 근로자의 죽음이 일상이 됐을 만큼 수시로 발생함에도 말이다. 두 달 전 끔찍하게 세상을 떠난 태국 출신 근로자가 다시 생각났다. 산재 사망자 10명 중 1명은 외국인 4월 20일 오전. 경기도의 한 폐기물 공장. 쑤친(가명) 씨는 “플라스틱 분쇄기계를 청소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기계 작동이 멈추는 점심시간을 이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직원들이 식사하러 나가자 기계 안에 들어가 청소를 시작했다. 그런데 한 한국인 작업자가 생각보다 일찍 식사를 마치고 복귀했다. 안에 누군가 있다고 생각하지 못한 채 분쇄기계를 작동시켰다. 쑤친 씨는 응급실로 옮겨졌으나 끝내 숨졌다. 지난해 국내 전체 산업재해 사고 사망자(812명) 중 외국인 근로자는 85명(10.4%)에 달했다. 올해는 213명 중 24명(11.2%·3월 기준)이다. 사고 사망 근로자 10명 중 1명 이상이 외국인인 셈이다. 외국인이 산업 현장에서 사망하면, ‘언어나 소통 문제로 내국인에 비해 각종 사고 등 위기 대응에 미흡했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런데 쑤친 씨는 한국말을 곧잘 했다. 화성 화재로 사망한 라오스 국적 숙사완 말라팁 씨도 한국어에 능통했다. 외국인 근로자들은 단순히 언어나 소통의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자신들이 산업 현장의 안전 정보에서 소외되는 것이 문제라고 하소연한다. 한 외국인 근로자는 “말이 통해도 안전 관련 정보를 접할 기회가 한국인 근로자에 비해 많이 부족하다. 차별을 느낀다”며 ‘내부 청소 시 알림 장치’, ‘청소 시 외부에서 기계를 작동시킬 위험’ 등 충분한 정보가 있었다면 (쑤친 씨는)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화성 공장 참사도 마찬가지다. 배터리에서 첫 폭발이 일어나자 근로자들은 주변 물건부터 옮기려 했다. 소화기로 진화를 시도했지만 불길은 더 커졌다. 출입문 반대쪽으로 대피했다가 연기를 흡입해 전원 질식사했다. 리튬은 연소할 때 물과 닿으면 불화수소 가스가 발생하며 폭발한다. 리튬의 성질과 대응 방법을 숙지했다면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외국인 근로자=일회용’ 인식 바꿔야 파견, 일용직 등의 외국인 근로자는 단기간에 여러 작업장을 이동하며 근무한다. 업체들은 짧은 시간을 일하고 떠나는 이들에게 굳이 안전교육을 시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다. 이런 행태 속에서 최근 3년간 외국인 노동자 2만2300명 이상이 산재를 당했다. 외국인 근로자 안전 매뉴얼, 안전교육 이수 강화 등 제도적 보완이 필요한 이유다. 한 노동 전문 변호사는 “특히 작업장에서 다루는 물질의 특성, 위험 요인과 대응법을 제대로 교육해야 한다”고 말했다. 외국인 근로자들은 사회 인식부터 변해야 한다고 호소한다. 안전교육 등이 강화될지라도, 외국인 근로자를 함께 공존해야 할 ‘이웃’으로 보지 않고 차별한다면 언제든 화성 화재와 같은 참사가 되풀이될 수 있다는 것이다. 26일 화성 화재 공장 앞에 모인 외국인 근로자들의 외침은 새겨들을 만하다. “안전한 일터를 만들려면 ‘외국인 근로자는 쓰다 버리는 일회용품’이란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김윤종 사회부장 zozo@donga.com}

    • 2024-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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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김윤종]‘연금 특검’ 필요하다는 미래세대

    “우리 미래를 걱정하는 어른들이 정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치적 이익을 위해 제대로 된 결정을 안 하는 정치인들, 심판해야 할 거 같아요.” 21대 국회에서 끝내 국민연금 개혁안 처리가 무산되자, 한 18세 고교생은 이처럼 말했다. 동아일보는 지난달 청소년들에게 국민연금 개편에 대한 생각을 심층 인터뷰해 보도했다. 이들에게 21대 국회가 지난달 29일 종료된 후 다시 연락하자 ‘연금개혁을 왜 정치로 몰고 가나’라는 목소리가 나왔다. 한 청소년은 “(미래세대가) 성인이 되면 연금 개혁 과정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특검을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정치권이 툭하면 특검을 거론하니, 청소년들까지 특검 이야기를 한다. ‘특검이 무엇인지 제대로 아나’란 생각이 들면서도, 미래세대의 분노가 생각보다 크다는 걱정이 앞섰다. “대통령실이 ‘맹탕안’ 만들라 압박” 대통령실에서 ‘맹탕 연금개혁안’을 만들도록 사실상 지시했다는 부처 공무원들의 하소연도 떠올랐다. 한 정부 관계자는 “정부안에 ‘얼마 내고’(보험료율) ‘얼마 받을지’(소득대체율) 등 구체적 수치가 빠지게 된 건 지난해 7월부터 일찌감치 대통령실이 지침을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2022년 12월 “연금 교육 노동 개혁이 인기가 없더라도 미래세대를 위해 반드시 해내야 한다”고 밝혔다. 개혁을 강조한 대통령 지지율은 당시 40%가 넘었다. 앞선 정부에선 대통령의 가이드라인이 개혁 실패로 이어졌다. 2018년 8월 문재인 전 대통령은 보건복지부의 연금개편 초안에 대해 “개혁에 중요한 건 사회적 합의”라며 제동을 걸었다. 이후 4개 정부안이 국회에 제출됐고, 진전 없이 종료됐다. 윤 대통령의 개혁 발언으로 정부안은 구체적인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이 담긴 ‘단일안’이 될 것이란 기대가 컸다. 그러나 지난해 10월 발표된 정부안은 단일안 대신 여러 변수를 조합한 24개 시나리오가 담겼다. 정부 관계자 등에 따르면 복지부는 보험료율을 현행 9%에서 최소 12%로 올려야 한다고 대통령에게 수차례 보고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대통령실은 ‘총선 때문에 안 된다’는 입장을 보였으며, 국민연금 재정계산위원회가 단일안을 내지 않도록 다각도로 압력을 넣었다고 한다. 22대 국회, 연금개혁 속도 내야 실무자들 사이에서는 ‘억지로 여러 시나리오를 만드느라 힘들다’는 하소연까지 나왔다. 정부안이 발표된 후 대통령실은 언론 보도에 ‘맹탕’ ‘알맹이 없는’ 등의 단어가 들어가지 않도록 하라”는 지시까지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과정 속에서 동력을 잃은 연금개혁은 4월 총선 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야당은 ‘여당안(보험료율 13%·소득대체율 43%)을 수용하겠다’고 제안했지만, 대통령실과 여당은 “국민연금과 기초연금, 공무원연금 등을 함께 바꾸는 구조개혁을 해야 한다”며 거부했다. 물론 연금개혁 무산이 대통령실만의 책임은 아니다. 여야 국회 연금특위 또한 공론화 조사, 2개안 압축 등을 거쳤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개혁을 미루는 정치권 심리도 이해는 된다. 부담은 높이고 혜택은 줄이는 방향으로 개혁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 보니 국민적 반감이 크고,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럼에도 연금개혁을 미루는 기성세대에 대한 미래세대의 분노가 생각보다 크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현행 제도가 유지되면 연기금은 2041년 적자로 돌아서고 2055년 고갈된다. 미래세대는 급여의 3분의 1 이상을 보험료로 내야 한다. 오죽하면 10대 청소년이 ‘연금 특검’을 운운할까. 겉으론 연금개혁을 외치면서 속으론 정치적 이익을 위해 개혁을 늦춘 과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경우 세대 갈등이 폭발할 수도 있다. 22대 새 국회와 정부는 이를 무겁게 받아들이길 바란다. 바로 ‘나의 자녀’가 겪을 문제로 여기고 신속히 연금개혁안부터 만들어야 한다.김윤종 사회부장 zozo@donga.com}

    • 2024-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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