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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명하복’은 군대에서나 통하는 말로 들릴 수 있지만 실제로는 한국의 모든 공무원에게 적용되는 법적 의무다. 국가공무원법과 지방공무원법에 “공무원은 소속 상관의 직무상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어서다. 표현이 조금 바뀌었을 뿐 1949년 국가공무원법이 제정될 때부터 쭉 유지돼 온 조항으로, 시대의 변화에 뒤처진 법이라는 비판이 적지 않았다. 정부가 76년 만에 이 조항을 없애기로 했다. ▷정부가 25일 입법예고한 국가공무원법과 지방공무원법 개정안의 핵심은 공무원의 ‘복종 의무’를 ‘지휘·감독에 따를 의무’로 바꾼다는 것이다. 하급자는 상급자의 지휘·감독을 따르되 “서로 협력”하고, 의견을 제시할 수 있게 했다. 위법한 지휘·감독은 따르지 않을 수 있고, 이로 인해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상명하복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검찰은 이미 2004년 검찰청법을 개정해 ‘명령 복종’을 ‘지휘·감독에 따른다’로 바꾸고 이의제기권을 인정했는데, 이제야 일반 공무원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법을 바꾼다니 늦은 감이 있다. ▷물론 지금도 공무원이 상관의 명령을 무조건 수용해야 하는 건 아니다. “명백히 위법·불법한 명령은 직무상의 지시 명령이라 할 수 없으므로 따라야 할 의무가 없다”는 게 대법원 판례다. 정부의 공무원 징계업무편람에도 “위법한 직무상 명령에는 복종을 거부해야 한다”고 돼 있다. 하지만 법에 명확한 규정이 없고 수직적 공직 문화에 익숙하다 보니 뭔가 아니다 싶어도 지시를 거부하는 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이런 부담감을 덜어내 주겠다는 게 법을 고치는 이유일 것이다. ▷군인에 대해서도 위헌·위법적 명령은 거부할 수 있도록 하는 군인복무기본법 개정안이 국회에 발의돼 있다. 현행 군형법에도 “정당한 명령”을 어겼을 때 처벌하도록 돼 있긴 하지만, 불법 명령에 대한 항명권을 법에 못 박자는 것이다. 12·3 계엄 당시 국회에 병력을 투입하라는 명령을 어기고 부하들에게 ‘서강대교를 넘어가지 말라’고 한 조성현 수방사 경비단장, 채 상병 순직 사건 조사 결과를 경찰에 넘기지 말라는 지시를 따르지 않은 박정훈 해병대 수사단장 같은 사례가 늘어나게 될 것이다. ▷반면 복종 의무가 사라지면 공직 기강이 흔들리고 업무 능률이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지금도 일부 젊은 공무원들은 상사가 지시하면 ‘이걸요? 제가요? 왜요?’라고 되묻곤 한다는데 앞으로 더 심해질 수 있단 얘기다. 순간의 판단이 생사를 좌우할 수도 있는 군에서 불법 명령인지 일일이 따질 겨를이 있겠느냐는 목소리도 마냥 무시할 순 없다. 정부가 시행령에 판단 기준을 얼마나 상세하게 제시하느냐가 관건이다. 그래야 공직사회가 민주적인 의사 결정과 효율적인 업무 수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존엄성을 상실하느냐, 아니면 동맹(미국)을 잃느냐 기로에 섰다.”(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이번 안이 최종 평화적 해결의 기초가 될 수 있다.”(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최근 제시한 종전안에 대한 양국 정상의 반응은 이렇게 달랐다. 이번 안이 얼마나 러시아에 유리한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우크라이나 내에선 ‘사실상 항복 문서’라는 불만이 들끓고 있다. ▷28개 항으로 돼 있는 종전안의 핵심은 루한스크와 도네츠크를 합친 돈바스 지역을 “사실상 러시아 영토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전쟁 초반부터 돈바스는 최대 격전지였다. 우크라이나 국토의 8%를 차지하는 돈바스는 석탄, 철강 등 원자재가 풍부한 산업의 중심지이자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전략적 요충지다. 러시아는 주민의 약 40%가 러시아계라는 점을 앞세워 돈바스를 점령하는 데 주력했고, 우크라이나는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런 지역을 고스란히 넘겨주라는 건 우크라이나인들에겐 참기 어려운 굴욕이다. ▷종전안에는 “우크라이나가 나토(NATO)에 가입하지 않는다는 점을 헌법에 명시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나토의 동진(東進)에 결사반대하는 러시아에 맞서 젤렌스키 정부가 나토 가입을 추진한 게 전쟁을 촉발한 직접적인 계기였는데, 미국이 러시아 손을 들어준 것이다. 종전안에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재침공하면 군사적 대응과 국제적 제재를 복원한다’ 등의 내용이 있긴 하지만 손에 잡히는 안전 보장 방안은 없다. 뉴욕타임스의 지적대로 “전쟁 중단 외에는 우크라이나에 별 이득이 없는” 협상이다. ▷트럼프가 이렇게 일방적인 종전안을 들이밀 수 있었던 건 전시에 벌어진 역대급 부패 스캔들로 인해 젤렌스키 정부가 흔들리고 있어서다. 국영 원자력기업에서 발생한 1억 달러(약 1470억 원) 규모의 횡령 사건을 주도한 젤렌스키의 한 측근은 집에 황금 변기를 둘 정도였다고 한다. 전직 부총리도 이 과정에서 약 20억 원을 챙긴 혐의로 구속됐다. 4년째 이어지고 있는 전쟁으로 전방 지역 주민 3분의 1은 먹을 것도 부족한 판에 고위층은 뒷돈 잔치를 벌였으니 국민이 분노하고 국론은 갈라질 수밖에 없다. 이런 약점을 트럼프가 파고든 것이다. ▷이번 종전안의 초안은 트럼프의 사위 재러드 쿠슈너와 푸틴의 최측근이 만들었다고 로이터통신 등이 전했다. 미국도 자국의 이득을 챙기는 걸 잊지 않았다. 해외에서 동결된 러시아 자산 1000억 달러를 우크라이나 재건에 투입하되 그 수익의 절반은 미국이 가져가기로 했다. 반면 민간인만 약 5만 명이 죽거나 다친 피해국 우크라이나는 종전 협상에서는 소외되는 형국이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냉혹한 국제사회에서 집안 단속조차 제대로 못 한 약소국이 설 자리는 좁아 보인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집단 항명한 검사들은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 11일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가 페이스북에 이 글을 올린 이후 민주당에서는 ‘대장동 일당’에 대한 검찰의 항소 포기를 둘러싼 검사장들의 반발을 ‘집단 항명’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강등, 징계, 처벌하라고 요구하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정치적 레토릭을 넘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범여권 의원들이 19일 실제로 검사장들을 고발하기에 이르렀다. 사법적인 문제가 된 만큼 법리적으로 타당한 주장인지 따져보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여권에선 검사장 18명이 내부망에 ‘검찰총장 권한대행에게 추가 설명을 요청드린다’는 글을 올린 게 공무원의 집단 행위를 금지한 국가공무원법 위반이라고 주장한다. 여권 법사위원들은 “공무원이 다수로 결집해 직무 기강을 해치거나 정치적 중립성을 침해할 위험을 야기할 경우 명백한 위법이라는 게 대법원의 확립된 판례”라고도 했다. 이런 취지의 법리가 포함된 대표적 판결이 2009년 6월 시국선언을 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간부들에 대한 대법 전원합의체 판결이다.여권 “檢 불법 집단 행위”… 법리에 맞나 그런데 대법은 어떤 집단 행위가 정치적 중립성을 침해하는 것인지는 “동기 또는 목적, 시기와 경위, 정치세력과의 연계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해야 한다”고 했다. 전교조 시국선언의 경우 2009년 10월 보궐선거를 앞두고 각계에서 정부를 비판하는 시국선언이 잇따르던 시점에 나왔고, “이명박 정권의 독단과 독선적 정국 운영” “국정 전면 쇄신” 등 내용이 적혀 있다. 대법은 “선거에 대한 영향 내지는 반(反)정권 전선의 구축이라는 뚜렷한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다고 보고 유죄 판결의 주요 사유로 제시했다. 반면 검사장들이 올린 글에는 정치적 표현이 전혀 없다. 당시 노만석 검찰총장 직무대행에게 항소를 포기한 구체적 경위와 이유를 설명해 달라고 했을 뿐이다. 이번 판결은 대장동 개발업자들에 대한 것이고, 이재명 대통령과 직접적인 관련도 없다. 그래서 정성호 법무부 장관이 “이 사건이 이 대통령과 무슨 관계가 있나”라고 한 것 아닌가. 여권 법사위원들이 어떤 측면에서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을 무너뜨린 일탈 행위”라고 한 건지 납득하기 어렵다. 또 “공익에 반하는 목적을 위한 행위”인지가 집단 행위의 불법성을 판단하는 한 요소라는 대법 판례도 있다. 항소 포기로 대장동 일당이 얻은 천문학적 불법 이익을 국가가 추징할 길이 막혔는데, 항소를 안 한 이유를 물어보는 게 공익에 어긋나는가.‘의견 내지 말라’ 지시한 사람도 없어 검사장들의 행동이 항명이라는 주장도 사리에 맞지 않는다. 국가공무원법과 검찰청법의 ‘상관의 명령 또는 지휘·감독에 따라야 한다’는 조항을 어겼다는 취지라면, 먼저 상급자의 명령을 하급자가 거부하는 일이 벌어졌어야 했다. 그런데 정 장관은 일절 지시한 게 없다고 하고, 노 전 대행은 서울중앙지검장에게 항소 방침을 재검토하라고 했을 뿐이다. 누구도 다른 검사들에게 ‘항소 포기에 대해 의견을 내지 말라’ 같은 명령이나 지휘를 한 게 없다. 그런데 검사장들이 어떤 명령을 거부했다는 건지 모를 일이다. 막상 고발이 이뤄지고 나자 민주당 김병기 원내대표는 “뒷감당은 거기(법사위)서 해야 할 것”이라며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시기가 적절하지 않았다는 뜻인지, 아니면 고발까지 한 건 과하다는 의미인지 불분명하다. 어느 쪽이든 이렇게 민감한 사안을 놓고 불협화음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여권의 대응에 무리가 있었다는 방증으로 보인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가장 조용한 부처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법제처가 요즘 바람 잘 날이 없다. 업무와 관련해서가 아니라 조원철 법제처장의 잇따른 돌출 발언 때문이다. 조 처장은 국정감사에서 이재명 대통령에게 적용된 12개 혐의에 대해 “다 무죄”라고 주장해 풍파를 일으키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장동 사건과 관련해 이 대통령을 감싸는 발언으로 거듭 논란의 중심에 섰다. ▷조 처장은 3일 친여 성향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이 대통령은) 대장동 일당을 만난 적도 없는데 수백억 원의 뇌물이나 지분을 받기로 했다는 주장 자체가 너무 황당할 뿐”이라고 했다. 조 처장은 이 대통령과 사법연수원 동기이자 대장동 사건에서 이 대통령의 변호인이었지만, 지금은 엄연히 차관급 공무원 신분이다. 김만배 씨 등 대장동 일당에 대한 1심 판결 이후 대장동 사업에서 이 대통령의 역할을 놓고 여야 간에 설전이 한창인 터에 공직자가 이런 정치적 발언을 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조 처장이 지켜야 할 선을 넘어선 언행으로 비판받은 게 처음도 아니다. 지난달 24일 법제처 국감에서도 “(이 대통령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고 주장해 파문이 일었다. 법제처장이 국정감사에 기관증인으로 출석해 특정 사건의 유·무죄를 언급하는 건 본분에서 한참 벗어난 일이었다. ‘4년 연임제로 개헌해도 이 대통령은 연임할 수 없는 것 아니냐’는 질의에 조 처장이 “국민이 결단해야 할 문제”라며 여지를 둔 것도 부적절했다. 여권에서조차 “쓸데없이 공격의 빌미를 줬다”는 지적이 나올 지경이 됐다. ▷3일 출연한 유튜브에서 조 처장은 국감 발언에 대해 “법제처장으로서의 발언이 아니라는 지적에는 동의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법제처장으로서 할 얘기냐 비판이 나올지는 모르겠는데…”라며 대장동 관련 언급을 이어갔다. 다른 공직자들이 언행에 신중한 건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정치적 중립 의무 등을 감안해서다. 조 처장의 태도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자신의 의견을 거침없이 밝히겠다는 취지로 비친다. “법제처장 직위를 내려놓고 사선 변호인으로서 활동하라”는 야당의 비판이 지나치지 않아 보인다. ▷지금의 상황은 윤석열 정부에서 이완규 전 법제처장을 놓고 벌어졌던 논란의 데자뷔를 보는 듯하다. 이 전 처장은 윤 전 대통령과 대학 및 사법연수원 동기로, 윤 전 대통령이 검찰총장 시절에 낸 징계 취소 소송의 변호인을 맡았다. 그는 윤 전 대통령이 ‘김건희 특검법’ 등에 거부권을 행사한 것은 “정당한 사유”에 해당하며, 공수처가 윤 전 대통령을 내란 혐의로 수사한 것은 “법적 논란이 있다”는 등 발언으로 현 여권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 자꾸 대통령과 가깝고 편한 사람만 법제처장에 앉히다 보니 이런 일이 반복된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지난달 19일 시행된 개정 형사소송법과 형사소송규칙에는 범죄 피해자가 소송기록의 열람·등사를 신청하면 재판장이 원칙적으로 허가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국가 안전보장 등 예외적 이유로 불허할 때는 피해자에게 문서로 이를 설명하도록 했다. 이전까지 법원장의 재량에 맡겼던 것에 비하면 피해자의 권리가 진일보한 것이다. “몇 번이나 재판기록 열람을 신청했지만 허가해 주지 않았다”는 이른바 ‘부산 돌려차기 사건’ 피해자 등의 호소가 반영된 결과다. 피해자가 본인과 관련된 사건의 기록을 보는 것조차 까다롭게 돼 있는 이유는 법적으로 형사절차의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재판의 당사자는 국가를 대신하는 검사와 피고인이다. 피해자는 수사 단계에선 주로 참고인, 재판 단계에선 증인으로서 증언할 뿐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없다. 피고인이나 다른 증인이 거짓말하는 게 뻔히 보이더라도 피해자는 따질 수 없고 증거를 신청하지도 못한다. “피해자는 형사절차에서 잊혀진 존재”(조미선 사법정책연구원 연구위원)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형사사법의 당사자는 국가와 피고인” 형사사법의 주체를 국가와 피의자·피고인으로 보는 것은 한국뿐 아니라 대다수 대륙법계 국가에 적용되는 원리다. 그런데 이런 시스템을 유지하면서도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재판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고 있는 대륙법계 국가도 일부 있다. 한 예로 일본에 2008년 도입된 ‘피해자참가제도’는 살인, 유괴, 성폭행 등 강력범죄의 피해자나 유족에게 ‘참가자’라는 별도의 지위를 주고 증인과 피고인을 신문할 수 있는 권리 등을 부여한다. 피해자가 형사사법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피해자에게 일본의 참가자와 비슷한 권한을 주는 형사소송법 개정안이 2011년과 2014년 발의된 적이 있지만 입법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법조계에선 이에 대한 찬반 의견이 맞서고 있다. 반대하는 측에선 재판에서 피해자의 목소리가 커지면 피고인이 유죄라는 심증이 굳어지게 되고, 형사절차가 사적 보복의 장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피고인의 방어권은 마땅히 존중돼야 하지만 그렇다고 피해자는 할 말도 못 하고 냉가슴만 앓는 것 역시 사법정의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본다. 신중하되 전향적인 접근이 필요하다.피해자 국선변호인 확대 논의 시급 우선은 피해자에 대한 국선변호인 선임을 확대하는 방안부터 논의를 서둘러야 한다. 피고인에 대해선 미성년자 또는 70세 이상이거나 3년 이상의 징역형에 해당되는 사건으로 기소된 경우 등 폭넓게 국선변호인 선임을 의무화하고 있다. 반면 피해자는 아동청소년성보호법, 아동학대처벌법, 장애인복지법, 인신매매방지법, 스토킹처벌법 등 6개 법률에 해당하는 범죄에 대해서만 국선변호인이 선임된다. 변호사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피해자는 자신이 법적으로 어떤 권리를 가졌는지부터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모든 피의자·피고인은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다고 형사소송법에 명시된 것과 달리 피해자에 대해서는 이 6개 법률에서만 개별적으로 변호사 선임권을 규정하고 있다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에 ‘피해자 변호사’의 대상 범죄를 살인, 강도를 비롯한 특정강력범죄로 확대하고 미성년자 피해자 등에 대해선 반드시 국선변호인을 선임하도록 하는 내용의 법안이 국회에 여러 건 발의돼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형사소송법에 피해자 변호사의 권한과 지위를 포괄적으로 규정하는 방안을 마련할 것을 8월 정부에 권고했다. 정부와 국회의 관심이 절실하다. 범죄 피해자들에겐 검찰개혁, 사법개혁 같은 거창한 담론보다 피부에 직접 와 닿는 문제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난해 12월 3일 밤 국회의사당 내 수소충전소 인근에 백팩을 멘 방첩사 부대원 49명이 출동했다. 가방 안에는 방검복, 수갑, 포승줄, 장갑, 삼단봉 같은 장비들이 들어 있었다. 이들 ‘체포조’의 임무는 국회의장과 여야 대표 등 10여 명을 검거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거물급 정치인들을 대거 체포하는 임무를 수행해야 할 방첩사 부대원들 사이에서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고 한다. ▷체포 작전은 긴박하게 돌아갔다. 계엄 선포 직후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에게 체포 대상자 명단을 통보했고, 여 전 사령관은 경찰과 국방부 조사본부에 인력 지원을 요청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홍장원 전 국가정보원 1차장에게 “이번 기회에 싹 잡아들여”라며 방첩사를 도우라고 지시했다. 여 전 사령관은 홍 전 차장에게 ‘체포 대상자들의 소재 파악이 안 된다’며 위치 추적을 요청했다. 이들을 검거하면 포승줄로 묶거나 수갑을 채워 수방사 B1 벙커로 이송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그런데 정작 체포조의 핵심인 방첩사 부대원 일부는 만취 상태였다. 25일 윤 전 대통령 내란 우두머리 혐의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방첩사 최모 소령은 계엄 당일 저녁 부대원들과 회식하면서 “(소주를) 각 한 병 이상 마셨다”고 진술했다. 오후 9시경 회식이 끝나고 관사에 있을 때 비상계엄이 선포됐고 최 소령은 급히 사령부로 갔다. 최 소령은 “(정식 작전을) 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다들 술 냄새가 났다”고 기억했다. 공판에 출석한 다른 방첩사 간부도 ‘당시 방첩사 수사관 다수가 음주로 상황 판단이 안 되는 상태였다는 게 맞느냐’는 변호인의 질문에 “동의한다”고 답했다. ▷이런 상황인데도 최 소령에게는 한동훈 당시 국민의힘 대표를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우원식 국회의장과 당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최우선 체포 대상이었다. 느닷없이 체포조가 된 방첩사 부대원들은 “이게 맞냐” “(체포영장 등) 근거 없이 나가면 안 된다”며 망설였다고 한다. 이들이 출동 과정에서 시간을 끈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필요한 물품을 최대한 천천히 챙겼고, 국회를 700m 정도 앞둔 지점에서 일부러 차량에서 내린 뒤 편의점에서 생수를 사기도 했다. ▷계엄이 선포된 지 약 2시간 반 만에 국회에서 계엄 해제요구안이 가결되면서 체포가 실행으로 옮겨지지는 않았다. 최 소령은 체포 작전 당시 “혼란스럽고, 무질서했고, 무기력했고, 무서웠다”고 전했다. 이런 상태에서 술까지 마신 방첩사 부대원들이 체포에 실제 투입됐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모른다. 체포 대상자들이 거세게 저항하면서 물리적 충돌이 불가피했을 수 있고, 국회 주변에 다수의 시민들이 모여 있었던 만큼 폭력 사태로 번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대한민국에서 제일 힘센 사람이 됐다”(12일)고 스스로 밝혔듯이 이재명 대통령은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권력자다. 국회 과반 의석으로 정부를 뒷받침하는 여당, 존재감이 미미한 제1야당 등 정치 지형을 보면 민주화 이후 대통령 중에서도 이렇게 강력한 대통령이 있었나 싶다. 이런 이 대통령이 11일 기자회견에서 검찰개혁과 관련해 “내가 가장 큰 피해자”라고 했으니 눈길을 끌지 않을 수 없다. 이 대통령은 “나한테 불리한 건 사실이 아닌 것도 엄청나게 언론이 쓰더니 요새는 ‘그게 아니다’라는 명백한 팩트가 나와도 언론에 안 나오더라”고도 했다.이 대통령이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이는 쌍방울 대북 송금 의혹 사건과 관련해 새로운 정황들이 드러나고 있는 점을 가리킨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는 김성태 전 쌍방울그룹 회장과 공모해 경기도지사였던 이 대통령의 방북 비용을 대납하게 한 혐의 등으로 유죄가 확정됐다. 이 대통령도 공범으로 기소됐고 재판은 취임 이후 중단된 상태다.與 “대북송금 사건 조작… 공소 취소해야”이 대통령이 본인 얘기를 먼저 꺼낸 것은 뒤에 이어진 “(검찰개혁은) 감정을 완전히 배제하고 치밀하게 검토하자”는 말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한 화법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최근 대북송금 사건과 관련된 일련의 흐름을 보면 ‘피해자’ 발언을 흘려듣기는 어렵다. 이 사건의 공범인 KH그룹 회장 배상윤 씨는 6월 말 언론 인터뷰에서 “이 대통령 및 경기도와 전혀 무관한 일”이라고 했고, 이달 5일엔 KH그룹 전 부회장 조경식 씨가 국회 청문회에서 검찰로부터 “‘두 사람(이 대통령과 이 전 부지사)을 끼워 맞춰야 너희들이 살 수 있다’는 압박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국가정보원도 이달 2일 ‘과거 국정원이 이 대통령 측에 유리한 자료는 검찰에 제출하지 않았다’는 취지로 국회에 보고했다.배 씨 인터뷰 직후 더불어민주당은 태스크포스(이후 특별위원회로 개편)를 만들어 본격 대응에 나섰고, 조 씨 증언 사흘 뒤엔 “조작 기소 실상이 드러났다”며 재수사를 촉구했다. 여권에서는 검찰이 이 대통령에 대한 공소 취소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 대통령은 야당 대표 시절에도 이 사건을 “희대의 조작 사건”이라며 거세게 비판했지만, 대통령의 발언은 무게가 확연히 다르다. 이 대통령의 의도와 무관하게 검찰에 적잖은 부담이 될 것이다.판결로 李 결백 입증돼야 뒷말 없을 것윤석열 정부에서 검찰이 이 대통령을 12개 혐의로 기소했을 만큼 집요하게 수사한 건 사실이다. 이 대통령으로서는 억울한 점이 있을 수 있고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시정돼야 마땅한데, 관건은 어떤 방식으로 바로잡을 것이냐다. 여권의 요구대로 공소 취소로 마무리된다면 검찰이 인사권자인 대통령의 눈치를 본 것 아니냐는 뒷말이 나올 가능성이 매우 높다. 반면 이 대통령 퇴임 이후에라도 모든 증거와 주장을 법정에 꺼내 놓고 판결을 통해 억울함을 증명한다면 누구도 정당성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게 된다.또 이 전 부지사가 주장했던 검찰의 이른바 ‘술자리 회유 의혹’에 대해 법무부가 신빙성이 있다고 보고 본격적인 감찰에 나선 마당이다. 의혹이 사실로 확정된다면 재심 사유로 인정될 가능성이 있어 여권 일각과 이 전 부지사 측에서 벌써부터 재심 청구 얘기가 나오고 있다. 이 전 부지사 판결이 무죄로 뒤집힌다면 이 대통령도 함께 결백이 입증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법원의 판단을 거쳐야 불필요한 논란의 싹이 남지 않을 것이다. “누구도 자기 사건의 재판관이 될 수 없다”는 말도 있지 않나.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5월 3일부터 1주일간 국민의힘에선 ‘대선 후보 강제 교체’라는 한국 정당사상 전무후무한 일이 벌어졌다. 극심한 혼란과 갈등이 빚어졌고, 윤석열 전 대통령의 불법 비상계엄으로 이미 치명상을 입은 국민의힘으로선 엎친 데 덮친 격이 됐다. 이 사태를 조사한 당 감사위원회는 권영세 전 비상대책위원장과 이양수 전 사무총장에 대해 당원권 3년 정지의 중징계를 청구했다. 그런데 당 중앙윤리위원회는 11일 두 사람을 징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윤리위는 “두 사람이 자의적·독단적으로 (후보 교체 시도를) 했다고 볼 수 없다”고 했다. 비대위 회의 등을 거쳤으니 두 사람에게만 책임을 물을 순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그 자리에 있었으니 한 것”이라고 옹호했다. 이런 논리라면 당 지도부는 권한만 있고 책임은 없는 자리가 된다. 여 위원장은 권 전 위원장이 임명했고, 권 전 위원장과 서울대 법대 동기라는 점을 감안해도 팔이 안으로 너무 굽었다.▷후보 교체 시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비정상의 연속이었다. 김문수 후보가 선출된 직후부터 당 지도부는 한덕수 전 총리와 빨리 단일화하라고 압박했다. 두 사람의 회동이 성과 없이 끝나자 당 지도부는 누구를 선호하는지를 묻는 여론조사를 강행한 뒤 김 전 후보의 자격을 박탈했다. 물론 후보 경선 당시 단일화를 약속했던 김 전 후보가 시간을 끌면서 분란의 단초를 제공한 측면은 있다. 그렇다고 민주적 절차를 거쳐 뽑은 대선 후보를 이런 식으로 끌어내리는 정당이 세상에 어딨나.▷막장극의 끝판은 5월 10일 오전 2시 반에 ‘오전 3시부터 4시까지 후보 신청을 받는다’고 공고한 것이다. 미리 준비하지 않는 한 꼭두새벽에 1시간 만에 32종류나 되는 서류를 챙겨 후보 신청을 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누가 봐도 한 전 총리 한 사람을 위한 것이었는데, 윤리위는 11일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다”는 억지 해석을 내놓았다. 다음 날 후보 교체 찬반을 물은 당원 투표에서 부결되면서 이 사태는 막을 내렸다. ‘한덕수 후보로의 변경에 찬성하느냐’며 가결을 유도하는 듯한 질문까지 했는데도 평당원들은 반대표를 더 던졌다.▷6·3대선이 채 한 달도 남지 않은 시점에 벌어진 후보 교체 파동으로 국민의힘은 대선 레이스를 펼치기도 전에 진이 빠져 버렸다. 당 안팎에서 “심야 쿠데타” “제2의 비상계엄”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최소한의 상식이 통하는 정당이라면 그 중심에 섰던 이들에게 응분의 책임을 묻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도 7월 안철수 의원이 혁신위원장을 맡으면서 권 전 위원장 등의 출당을 요구했을 땐 당 지도부가 거부했고, 이번엔 당 윤리위가 막아 섰다. 민심과 거꾸로 가기로 일부러 작정을 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의문이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3대 특검’ 이전까지 도입됐던 특별검사 가운데 대표적 성공 사례로 2001년 ‘이용호 게이트’ 특검을 꼽는 이들이 적잖다. 이전에 진행된 ‘파업 유도 특검’과 ‘옷 로비 특검’이 흐지부지 끝난 뒤 특검제에 대한 기대가 낮아진 상황에서 출범한 역대 3번째 특검이었다. 차정일 특검과 특검보 2명, 파견검사 등 수사 인력 34명으로 규모도 단출했다. 그런데 105일의 수사 기간에 현직 대통령의 처조카와 측근, 검찰총장의 동생 등을 줄줄이 구속하고 전 국회부의장 등 거물급 정치인들을 재판에 넘기자 특검을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이 달라졌다. 특검의 자료를 넘겨받은 검찰도 대통령의 차남을 구속하는 등 매섭게 수사했다. 당시 특검에 참여했던 법조인은 “특검이 튼튼하게 뼈대를 세웠고 검찰이 충실하게 매듭지었다”고 회고했다. 이에 비해 지금 진행 중인 내란 특검, 김건희 특검, 채 상병 특검은 수사 여건이 한결 낫다. 파견 검사와 공무원, 특별수사관을 합쳐 내란 특검 260명, 김건희 특검 200명, 채 상병 특검 100명에 달한다. 수사 기간도 특검에 따라 120∼150일이 보장돼 있다. 핵심 수사 대상인 윤석열 전 대통령 부부는 진작에 힘을 잃은 상태여서 관련자들로부터 진술을 받아내는 것도 상대적으로 용이하다.“플리바기닝·경찰 수사지휘권까지 허용” 여당이 26일 발의한 특검법 개정안은 특검에 한층 더 힘을 실어준다. 수사 기간을 30일씩 늘리고, 특검별로 수사 인력을 30∼90명 추가로 파견한다. 범행을 자수·신고하면 형을 깎아주거나 면제하는 일종의 플리바기닝도 허용했다. 현재 마약, 테러 등 극소수 범죄에만 허용되는 제도다. 이미 막강한 특검들을 ‘슈퍼 특검’으로 만드는 법안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법안이 통과되면 특검 수사 도중 특검법을 개정하는 첫 사례가 되기도 한다.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은 특검 수사 기간 내에 완료하지 못한 부분은 경찰에 넘겨 특별검사의 지휘 아래 수사하도록 한 부분이다. 검찰개혁을 앞둔 시점이라는 점 등을 감안해 남은 수사를 검찰 대신 경찰에 인계하는 것은 납득이 간다. 하지만 특검팀의 수사가 끝난 뒤에도 특별검사가 경찰의 수사를 지휘한다는 건 신중하게 따져봐야 할 문제다. 검사의 수사지휘권을 폐지한 현행 법체계의 예외에 해당하는 것인 데다, 특검이 보고받고 지시하는 일종의 ‘경찰 특검팀’이 기간 제한 없이 운용될 소지가 있다. 특검 정국 장기화 우려… ‘과유불급’ 새겨야 전직 대통령 부부와 그 주변의 비리를 철저하게 규명해야 한다는 점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특별한 상황인 만큼 폭넓게 예외를 둬야 한다는 의견도 나올 수 있다. 그런데 원래 특검은 ‘산 권력’의 눈치를 보느라 검찰의 공정한 수사를 기대하기 어려운 사건에 한해 예외적으로 도입하는 제도다. 몰락한 권력에 대한 수사를 특검이 맡은 사례는 드물다. 비상계엄 이후 이어진 극심한 혼란을 신속하고 집중적으로 정리하기 위한 특검 도입의 필요성을 인정하더라도, 이제는 오히려 특검을 임명한 현 정권의 입맛에 맞게 수사가 진행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법조계에서 적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여당이 예외에 예외를 더해 특검을 강화하고 기간을 늘리면 특검 정국을 장기화하려는 의도라는 의심이 커질 것이다. 특검법을 고치지 않아도 특검별로 수사 기간이 2∼3개월 남아 있다. 그동안 특검은 핵심적인 영역에 수사력을 집중하고, 끝내지 못한 부분은 통상적 수사를 통해 마무리하는 게 불필요한 오해를 피할 수 있는 길일 것이다. 지나치면 모자란 것만 못하다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은 특검에도 적용된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독일의 헌법인 기본법엔 ‘누구든지 법률이 정한 판사에 의해 재판받을 권리를 박탈당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다. 우리나라 헌법상 ‘헌법과 법률이 정한 판사에게 재판받을 권리’와 유사하다. 독일 헌법재판소는 이 조항을 놓고 “개별 사건에 관해 재판할 판사를 선임함으로써 재판의 결과에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것은 어느 쪽으로부터 행해지는가에 관계없이 회피돼야 한다”고 판시했다. 그래야 “사법의 독립”이 지켜지고 “공공의 신뢰가 달성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어떤 판사가 재판을 담당하게 하느냐, 즉 ‘배당’은 사법부 독립의 가장 기본적 요소다. 그래서 외부의 입김이 작용하지 않도록 시스템을 통한 무작위 배당 원칙에 따라 운용되고 있다. 그런데 근래 더불어민주당에서 거론되는 특별재판부(특판) 제도는 특검의 영장 청구와 기소를 특판에서 전담하는 것으로, 사건 배당에 예외를 인정하는 것이다. 지난달 말 특검이 청구한 드론작전사령관과 전 해병대 사령관에 대한 구속영장이 잇따라 기각된 게 특판 도입론에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됐다. 특검 영장 기각에 與 “특판 도입해야” 민주당 의원 115명이 참여해 발의한 특판 도입 법안의 뼈대는 9명으로 구성되는 특별재판부후보추천위원회에서 영장전담판사 및 1, 2심을 담당할 판사 후보를 2배수로 추천하면 대법원장이 임명하는 것이다. 국회 몫 추천위원 3명은 ‘대통령이 소속되거나 소속됐던 정당’을 제외한 교섭단체와 의석수가 가장 많은 비교섭단체가 협의해서 정한다. 민주당과 국민의힘 모두 배제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추후 국민의힘만 빠지도록 수정할 것이라는 게 민주당 측의 설명이다. 결국 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이 특판 인선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구조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판사들이 내란 척결의 걸림돌이 되면 특검처럼 특판을 구성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하지만 특판과 특검 도입을 같은 선상에 놓고 볼 수는 없다. 공격수 격인 검찰에 비해 심판 역할을 하는 법원에는 더욱 엄격한 중립성이 요구된다. 헌법에도 수사권의 주체에 대해선 별도의 언급이 없는 반면 사법권은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에 속한다”고 돼 있고, 판사의 독립성을 명시한 조항도 있다. 그런 만큼 예외를 두는 데에도 훨씬 신중해야 한다. 민주당에선 특판 도입론의 한 근거로 ‘과거 특판이 운용된 전례가 있다’는 점을 제시한다. 1948년 반민족행위 특별재판부, 1960년 3·15 부정선거 특별재판소가 구성된 적이 있지만 이는 당시 헌법에 적시된 부칙을 근거로 한 것이다. 법조계에선 특판 설치가 현행 헌법에는 위배된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특판이 재판을 진행했다가 혹여라도 훗날 위헌 결정이 나온다면 대혼란이 불가피하다. 정석대로 해야 논란의 빌미 없을 것 특검 수사의 궁극적 목적은 비상계엄 사태를 비롯해 윤석열 정부에서 해소되지 않은 굵직한 의혹들을 규명하고 책임을 물음으로써 잔재를 청산하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사법 절차를 둘러싼 불필요한 논란의 빌미를 남기지 말아야 한다. 정치권이 개입해 특검이 청구하는 그대로 영장을 내줄 만한 재판부를 만든다는 건 이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본다. 되짚어 보면 법원은 김건희 특검이 청구한 ‘집사 게이트’ 관련 압수수색영장은 기각했지만 이후 이 사건의 핵심 인물에 대한 체포영장은 발부했다. 윤 전 대통령에 대한 내란 특검의 체포영장도 한 차례 기각했지만 보름 뒤 구속영장은 발부했다. 이처럼 정상적으로 법원의 사법적 통제를 거치면서 혐의를 다지고 수사의 완결성을 높여나가면 된다. 정석대로 하는 게 최선이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이 사람이 칼로 찌르면 어떻게 방어해서 도망가야겠다는 상상을 항상 하면서 다녔어요.” 동호회에서 만난 남성에게서 3년 넘게 스토킹을 당한 피해자 A 씨가 시민단체와 상담을 하면서 털어놓은 증언이다. 다른 피해자들은 “스토커가 불을 낼 수도 있고 어떤 일도 생길 수 있어서 무서웠다” “언제까지 두려움에 떨어야 하나 기약이 없는 게 힘들었다”고 했다. 이런 불안 속에 산다는 것만으로도 끔찍한데, 더 심각한 문제는 공포가 현실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7월 29일 울산의 한 주차장에서 전 애인이 휘두른 흉기에 찔려 중태에 빠진 20대 여성 B 씨는 7월 초 ‘헤어지자’고 한 뒤 스토킹에 시달렸다. 같은 달 26일에는 경기 의정부시에서 50대 여성이 스토커의 흉기에 찔려 목숨을 잃었다. 이들은 스토킹 신고를 했고 긴급 신고를 할 수 있는 스마트워치도 갖고 있었지만 비극을 피하지 못했다. 전자발찌 부착, 구금시설 유치 등 가해자의 접근을 보다 확실하게 막을 수 있는 ‘잠정조치’는 경찰이 신청하지 않거나 검찰이 기각해 이뤄지지 않았다. ▷스토킹은 이성 간의 내밀한 관계에서 파생되는 경우가 많아 어디서부터 범죄인지 모호한 측면이 있는 건 사실이다. 경찰은 “스토킹 범죄는 구속이나 구금 같은 강력한 제재가 가능한 만큼 행위를 엄격하게 해석해야 하는데 기준도, 판례도 많지 않아 헷갈린다”고 토로한다. 그렇다고 피해자의 생사를 가를 수 있는 중범죄에 수사기관이 손을 놓고 있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먼저 범죄의 전조(前兆)부터 놓치지 말아야 하는데, 휴대전화에서 스토킹의 징후가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울산 사건의 가해자는 불과 엿새 동안 피해자에게 전화 168차례, 문자메시지 400여 차례를 보냈다. 의정부 사건의 범인도 스토킹 신고 이후 피해자에게 문자를 보냈다가 경찰로부터 경고를 받았다. 피해자가 전화번호를 교체하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을 다시 만들어도 기어이 찾아내 연락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고 한다. 이런 집착이 폭력이나 살인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만큼, 스토킹 용의자의 통신 기록을 조회할 수 있도록 하면 범죄 예방에 도움이 될 수 있다. ▷학계에선 스토킹 처벌법에 규정된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여 정당한 이유 없이 지속적·반복적으로’라는 범죄 성립 조건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정당한 이유 없이’ 등 표현은 자의적 해석의 여지가 있고, ‘지속성·반복성’ 못지않게 ‘심각성’도 중요한 요소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토킹 위험성을 평가할 기준을 정립하고 피해자 보호조치 절차를 간소화하는 것도 시급하다. 희생자가 나왔을 때만 반짝 관심을 보이다 어물쩍 넘어가는 일은 없어야 한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검찰 수사권-기소권 분리에 대해 이재명 대통령이 이달 초 ‘추석 전까지 얼개는 가능할 것 같다’고 했을 때 석 달 만에 검찰 개혁의 틀을 짠다는 건 촉박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민주당은 한술 더 뜬다. 김병기 원내대표는 언론 인터뷰에서 “이르면 7월 말, 늦어도 8월 초” 얼개가 나올 것이라고 했고, 당 대표 후보들은 추석 전 입법을 끝내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너무 서두르면 숙의가 필요한 부분을 간과할 가능성이 커진다. 특히 우려되는 건 수사기관을 적법하게 통제하고 수사와 기소에 빈틈이 없도록 할 방안에 대한 고민이 부족해 보인다는 점이다. 이는 검찰제도의 존립 이유, 나아가 형사사법 체계의 완결성과 직결되는 문제다. 검찰 개혁의 본질에 해당하므로 얼개 단계에서부터 정교하게 설계해야 한다. 여당 내 논의의 출발점이 될 이른바 ‘검찰 개혁 4법’에서는 검찰의 직접수사권은 중대범죄수사청(중수청)에 넘기고, 경찰과 중수청의 수사를 검증·보완하도록 하는 기능은 신설되는 국가수사위원회(국수위)에 맡기는 것으로 돼 있다.검찰의 폐해는 직접수사권에서 비롯 구체적으론 불송치 사건에 대해선 고소·고발인이나 피해자가 국수위에 이의 신청을, 그 외의 사건은 사건 관계인들이 국수위에 수사 심의를 신청할 수 있다. 그러면 국수위는 수사했던 기관에서 다시 수사하거나 다른 수사기관에 이첩하게 할 수 있고, 불송치 사건은 공소청 검사에게 송치하도록 명령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국수위가 직접 보완하지는 못한다. 검사 역시 수사기관에 보완수사 요구권만 있을 뿐 직접 보완수사를 할 권한은 없다. 경찰이나 중수청이 보완 요구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면 시정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지금까지는 송치된 사건을 검사가 살펴본 뒤 미흡하면 보완수사를 요구하고, 시정되지 않으면 직접 보완수사를 해왔다. 부당하게 불송치 결정된 사건도 경찰에 재수사를 요청하고 미이행 시 송치받아 검사가 마무리할 수 있다. 국수위를 통한 보완은 현행 방식에 비해 과정이 복잡하고 효율이 떨어질 것이라는 지적이 법조계에서 적지 않다. 범죄의 피해자에게는 오히려 개악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여권이 검사의 보완수사권까지 폐지하려고 하는 건 ‘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검찰 해체’라는 정치적 구호에 집착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검찰의 직접수사권과 보완수사권은 성격이 전혀 달라서 ‘수사권’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로 묶을 수 없다. 민주당에서 검찰 개혁의 명분으로 삼는 검찰권의 비대화, 기소 목적의 짜맞추기 수사 등은 검찰의 직접수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폐해가 심각하다는 점에 국민이 공감하면 검찰의 직접수사권을 전면 폐지하는 게 합리적이다. 이와는 무관한 보완수사권까지 도매금으로 넘겨 한꺼번에 없앨 이유는 없다.보완 요구만으론 수사기관 통제 한계 민주당은 3년 전 ‘검수완박’을 추진할 때도 검사의 보완수사 기능을 없애려고 했다가 여야 협의, 국회의장 중재를 거쳐 막판에 입장을 바꿨다. 이를 놓고 당시 문재인 대통령도 “검찰이 소추기관 및 적법성 통제기관으로서의 역할을 계속 수행하도록 보장했다”고 평가했다. 그 필요성은 지금도 유효하고 국수위가 대신하기 어렵다. 여권 안팎에선 보완수사권을 남겨 두면 검찰이 이를 발판 삼아 야금야금 수사권을 확대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그게 문제라면 보완수사의 범위를 엄격하게 제한하면 된다. 보완수사권 존치는 검찰이 내세우는 논리라는 이유로 반대하는 이들도 있다. 누구의 주장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국민의 편익 증진을 확고한 기준으로 삼아 이에 부합하는지만 판단하면 될 일이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윤석열 전 대통령은 15일에도 서울구치소의 독방에서 버텼다. 10일 다시 구속된 뒤 특검의 출석 요구에 2차례 불응했고, 특검의 지휘로 구치소 측이 14일부터 이틀 연속 강제구인에 나섰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수사에는 응하지 않는 반면에 윤 전 대통령 측은 수감 환경에 대해선 불만을 쏟아내고 있다. 한술 더 떠 지지자들은 “독방에 에어컨을 설치해달라”며 구치소에 민원 폭탄을 넣고 있다. ▷윤 전 대통령 변호인은 “구치소가 덥고 당뇨로 인해 식사를 적게 하는 탓에 진술할 의욕이 꺾였다”고 주장한다. 피의자를 구속하는 건 출석을 담보해 수사의 실효성을 높이는 것이 큰 이유인데, 이 정도 사유로 조사 불응이 용인되면 구속은 별 의미가 없어진다. 윤 전 대통령 측은 ‘운동시간을 보장받지 못하고 당뇨 약도 못 구했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법무부는 다른 수용자들과 마주치지 않게 배려를 받으면서 운동하도록 하고 있고 약품 반입도 허용했다고 반박했다. 구치소 측이 굳이 윤 전 대통령을 차별 대우해 문제를 만들 이유도 없어 보인다. ▷특검은 구인 실패 이후 “구치소 측에 책임을 묻겠다”고 했지만 교도관들이 물리력을 동원해 윤 전 대통령을 끌어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이에 특검이 ‘옥중 조사’를 시도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특검이 구치소를 찾아간다고 해도 조사가 성사될지는 미지수다. 윤 전 대통령은 1월 처음 구속 수감됐을 때에도 강제 구인과 옥중 조사를 모두 거부했었다. 비상계엄 이후 윤 전 대통령이 수사기관의 조사에 응한 것은 구속 전 특검에 두 차례 출석한 것뿐이다. 법조계에선 체포나 구속을 피하기 위한 행보였다고 본다. ▷하지만 그때도 윤 전 대통령 측은 ‘출석 날짜와 시간을 늦춰달라’ ‘비공개로 출석하게 해달라’는 등 절차와 방식을 놓고 특검과 충돌했다. “사생활과 명예 보호”를 명분으로 삼았는데, 정작 이명박 전 대통령이 공개 소환됐을 때 수사를 책임졌던 서울중앙지검장이 윤 전 대통령이다. 또 윤 전 대통령은 체포영장 집행 저지 등 진술과 물증이 나온 혐의들까지 ‘모르쇠’로 일관했다. 이런 태도가 구속의 필요성을 높여준다는 점을 모를 리 없는 26년 검사 경력의 윤 전 대통령이 왜 그랬는지 의아하다. ▷3대 특검에는 윤 전 대통령을 수사해야 할 사안들이 산적해 있다. ‘내란 특검’은 제2의 계엄 선포 시도 여부, ‘북풍 공작’ 의혹 등의 진상을 밝혀야 한다. ‘채 상병 특검’이 수사 중인 ‘VIP 격노설’의 종착점도 윤 전 대통령이다. 공천 개입 의혹 등을 맡고 있는 ‘김건희 특검’도 윤 전 대통령 조사를 통해 밝혀야 할 게 많다. 이런 마당에 조사는 완강히 거부한 채 지엽적 절차와 피의자의 권리에만 매달리는 전직 대통령의 모습이 씁쓸할 따름이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올 상반기 대통령실의 특수활동비 예산은 ‘0’원이었다. 지난해 말 국회의 예산안 심사 당시 더불어민주당에서 대통령실 특활비 예산 82억 원을 전액 삭감해서다. 여당이던 국민의힘은 “국정 핵심 기능을 마비시키려는 시도”라며 결사반대했지만, 다수당인 민주당은 “특활비 삭감했다고 국정이 마비되지 않는다”며 밀어붙였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자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국민의힘 반대 속에 민주당 주도로 국회를 통과한 추가경정예산안에는 대통령실 특활비 41억여 원이 포함됐다.▷추경안에 반영된 특활비는 하반기에 사용할 금액으로, 연간 기준으로는 삭감했을 때와 같은 82억여 원이다. 지난해 예산안대로 원상복구된 셈이다. 특활비는 기밀 유지가 필요한 정보, 사건 수사, 외교·안보, 경호 등에 쓰이는 경비로 대부분 현금으로 지급되고 영수증 처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 증빙자료가 없다 보니 어디에 썼는지, 본래 목적과 다르게 사용한 건 아닌지 확인하기 어렵다. 자칫 고위공직자들이 ‘쌈짓돈’처럼 써도 확인할 길이 없다.▷이렇다 보니 특활비를 놓고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노무현 정부에서 대통령실 예산을 총괄한 정상문 총무비서관이 특활비 12억여 원을 빼돌려 차명계좌에 보관한 사실이 드러나 징역 6년 판결을 받은 게 대표적 사례다.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은 국가정보원의 특활비를 상납받아 사용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기도 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 부인인 김정숙 여사의 옷값을 특활비로 결제했다는 의혹에 대해선 경찰의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 불투명한 특활비 사용이 논란을 낳고 있는 것이다.▷물론 국가안보실이 은밀한 정보 활동에 쓰는 비용이나 대통령이 주는 각종 격려금 등이 특활비에서 나오는 만큼 대통령실 특활비를 없애기는 어렵다. 민주당도 이번에 “국익 및 안보 등과 연계돼 고도의 보안이 요구되는 활동에 직접 소요되는 경비”라는 점을 대통령실 특활비 복원의 명분으로 삼았다. 그렇다면 민주당이 지난해에는 왜 특활비 예산을 한 푼도 남기지 않고 깎았는지 설명을 했어야 하는데, 별 언급이 없다. 이러니 국민의힘에서 ‘후안무치’ ‘이중잣대’라고 비난하며 정쟁이 반복되는 것이다.▷삭감-복원을 둘러싼 여야 간의 다툼보다 중요한 건 특활비로 인해 세금이 낭비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특활비 사용의 투명성을 높이는 것은 물론이고 국회가 예산을 심의할 때 특활비 규모를 필요 최소한으로 제한해야 한다. 기획재정부의 관련 지침에도 ‘같은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면 특활비를 증빙이 필요한 특정업무경비로 전환하라’고 돼 있다. 국민의 세금이 허투루 쓰이지 않도록 감시하는 게 국회가 존재하는 이유 중 하나라는 점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살아 있는 권력에 수사의 칼끝을 겨눈다는 건 때론 목을 걸어야 하는 험난한 일이다. 그래서 ‘법조 3성(聖)’ 중 한 명이자 ‘대쪽 검사’로 평가받는 최대교 전 서울고검장도 1949년 임영신 상공부 장관을 수사할 당시 “앞으로 불어닥칠 회오리바람에 맞서야 한다는 생각에 착잡했다”고 회고했다. 임영신은 이승만 대통령에게서 청혼받았던 것으로 알려질 만큼 가까운 사이였고 당시 정부의 실세였다. 외압이 거셌지만 최대교는 임영신을 수뢰 등 혐의로 기소했고, 이 일로 옷을 벗었다가 4·19혁명 뒤 복직했다. 권력형 비리에 대한 수사는 검찰의 전체 업무 가운데 극히 일부이지만, 검찰의 존재 이유와 직결된다. 최대교 같은 검사들이 ‘성역 없는 수사’에 주춧돌을 놨고, 민주화 이후 검찰은 현직 대통령의 가족과 측근 등 권부 핵심에 대한 수사를 주도했다. 수사 배경을 놓고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검찰이 권력에 맞서는 모습을 보일 때 국민은 지지를 보냈다. 지금 검찰은 존폐의 기로에 서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기소권-수사권 분리’를 공약했고 국정기획위원회는 이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여당 의원들은 검찰청 폐지를 포함한 ‘검찰개혁 4법’을 내놨다. 그런데 검찰의 수사권 자체를 옹호하는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에서 검경 수사권 조정과 ‘검수완박’을 진행할 때 찬반 여론이 팽팽했던 것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여권 “기소권-수사권 분리”… 관건은 여론 그동안의 검찰개혁으로 검찰의 직접 수사 대상은 ‘부패·경제범죄 등’으로 대폭 줄었다. 다음 단계는 기소권-수사권 분리가 되리라는 건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헌법재판소가 “헌법은 검사의 수사권에 대해 침묵한다”며 수사권을 검찰의 헌법상 권한으로 인정하지 않은 만큼 검찰이 수사기관으로 남기 위해선 여론의 지지가 반드시 필요했다. 이런 측면에서 윤석열 전 대통령의 당선은 검찰에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에게도 예외는 없다’는 결기를 보여줬다면 검찰의 수사권을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한풀 꺾였을 것이다. 하지만 검찰은 반대로 갔다. 대표적으로 김건희 여사를 소환해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및 디올백 수수 의혹을 조사하자고 했던 서울중앙지검장이 전격 경질됐을 때, 새 수사팀이 김 여사를 ‘출장 조사’하고 불기소 처분했을 때 검찰 수뇌부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윤 전 대통령이 검찰총장일 때 도이치 사건에 대한 총장의 수사지휘권을 배제한 법무부 장관의 지시가 계속 유효한지는 논란이 있다. 후임 총장이 김 여사를 기소하도록 지휘한 뒤, 이 지휘가 적법한지는 나중에 법원의 판단을 받아 볼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그랬다면 검찰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검찰엔 두고두고 뼈아픈 장면으로 남을 것이다.尹 힘 빠진 뒤 돌변한 檢… 민심은 냉담 그랬던 검찰이 비상계엄 사태 이후 돌변했다. 서울고검은 도이치 사건 재수사에 나선 지 한 달여 만에 김 여사의 연루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녹음파일을 대거 찾아냈다. 김 여사가 ‘건진법사’를 통해 샤넬 가방 등을 받았는지도 윤 전 대통령 퇴임 이후 수사가 이뤄지고 있다. 명태균 씨 수사 역시 윤 전 대통령 직무 정지 뒤 서울중앙지검으로 이송돼 속도가 빨라졌다. 이는 검찰이 ‘성역 있는 수사’를 했었다고 자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힘 빠진 권력을 향해 추상같은 수사에 나선들 냉담한 민심을 돌릴 수 있겠나. 검찰 해체로까지 이어질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대수술을 피하긴 어려울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망각한 검찰의 자업자득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아 보인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누가 최고 사법기관인지를 놓고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간에 벌어지는 힘겨루기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KSS해운 법인세 부과 공방이다. 대법원은 2011년 세금 부과가 정당하다고 판결했지만, 헌재는 실효된 부칙을 근거로 판결한 것은 헌법 위반이라며 ‘한정위헌’ 결정을 내렸다. 이를 근거로 KSS해운이 낸 재심 청구를 대법원이 기각하자 헌재는 기각 판결을 취소하라고 결정했다. 대법원은 이 결정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에 KSS해운은 국세청이 세금 부과를 취소하지 않는 건 위헌이라는 소송을 헌재에 냈다. 국세청이 헌재 결정보다 대법 판결을 우선시하는 건 부당하다는 점을 확인해 달라는 취지가 담겨 있다. 헌재는 지난달 13일 이 사건을 전원재판부에 회부하고, 이례적으로 언론에 공지했다. 주목되는 건 더불어민주당이 지난달 7일 ‘재판소원’을 도입하는 헌재법 개정안을 발의한 것과 시점이 맞물린다는 점이다.헌재 권한 확대와 직결된 숙원 사업 이 제도가 도입되면 법원 판결이 헌법소원 대상에 포함돼 판결에 문제가 있는지 헌재가 결정할 합법적 권한을 갖게 된다. KSS해운과 관련한 헌재의 움직임은 민주당의 법안을 지지한다는 점을 보여주려 한 것으로 읽힌다. 헌재는 헌재법 개정에 공감한다는 의견서도 국회에 냈다. 나아가 법원이 헌재의 결정을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점을 법에 명시하고, 헌재 결정이 나올 때까지 판결의 효력을 정지할 수 있게 하자고 제안했다. 재판소원 도입은 헌재의 숙원 사업이다. 재판소원이 전면 허용되면 헌재의 권한이 대폭 확대되고 위상이 한층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법조계에서도 국민의 기본권 보장 확대 차원에서 재판소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목소리가 있다. 하지만 헌법에 부합하는지, 부작용은 없는지 등 따져봐야 할 문제가 여럿이다. 이론적으론 사실 판단 및 법률 해석으로 이뤄지는 법원의 재판과 재판에 의한 기본권 침해 여부를 다루는 재판소원이 구분되지만, 둘 사이의 경계는 희미하다. 헌재가 제시한 ‘헌법적으로 중요한 원칙이나 청구인의 기본권 보호에 필요한 경우’에만 재판소원의 대상으로 하자는 기준도 모호하다. 재판소원이 시행된다면 헌재가 헌법상 법원의 권한인 사법권을 침해한다는 논란이 불가피할 것이다. 3심제가 실질적인 4심제로 바뀌면서 판결 확정까지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도 늘어난다. 또 재판소원이 법제화되면 헌재의 업무가 폭증할 것이다. 독일의 경우 헌법소원 가운데 약 90%를 재판소원이 차지하고 있을 정도다. 헌법소원은 전원재판부에서 판단하므로 재판관만 늘린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따라서 재판소원 도입 여부에 대해 먼저 충분히 숙의한 뒤 공감대가 형성된다면 필요 최소한의 사건만 대상이 되도록 정교하게 제도를 설계해야 한다. 속전속결로 밀어붙일 사안이 아니다.사법부 압박에 장단 맞추는 듯 비쳐 법리적 쟁점과 함께 반드시 짚어봐야 할 게 민주당에서 재판소원을 추진하는 배경이다. 대법원이 이재명 대통령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을 유죄 취지로 파기 환송하자 민주당은 사법부를 압박하는 여러 방안을 들고나왔다. 재판소원도 그중 하나로 평가된다. 그런데 헌재가 이에 장단을 맞추는 것으로 비칠 만한 행보를 보이는 건 신중하지 못하다. 헌재의 무게를 감안한다면 조직의 이익이 걸린 문제라도 때를 가려야 하지 않겠나. 향후 헌재가 민감한 사건을 여권에 유리한 방향으로 결정하면 재판소원 도입을 염두에 둔 것으로 의심받을 가능성도 있다. 가벼운 처신으로 그동안 쌓아온 신뢰가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을 헌재가 무겁게 받아들이길 바란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공직후보자 인사 검증을 담당하는 법무부 인사정보관리단은 요즘 파장 분위기가 역력하다.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국회가 관리단의 예산을 전액 삭감하면서 내부 화장실이 폐쇄돼 직원들은 인근 관공서나 공원으로 가야 하고, 전기요금도 체납돼 언제 전기가 끊길지 모른다고 한다. 여기에 관리단 소속 검사 3명 모두 대선 전날 검찰로 복귀하게 됐고, 후속 인사는 없다. 3년 전 논란 속에 출범했던 관리단이 별 성과 없이 해체 수순을 밟고 있는 모양새다. ▷인사정보관리단은 윤석열 전 대통령이 주도하고 한동훈 전 법무부 장관이 뒷받침하면서 탄생했다. 윤 전 대통령은 당선 직후 “세평 검증을 위장해 국민 신상 털기와 뒷조사를 벌여 왔다”는 등의 이유로 민정수석실 폐지를 선언했다. 이어 취임 뒤 당시 최측근이던 한 전 장관이 맡은 법무부에 인사 검증 업무를 넘겼다. 야당에선 “소통령의 탄생”이라며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정부는 시행령을 개정해 밀어붙였다. 한 전 장관도 “정치권력의 비밀 업무가 감시받는 통상 업무로 전환되는 것”이라며 적극 옹호했다. ▷1차 검증은 법무부, 2차 검증 및 판단은 대통령실 공직기강비서관실로 나눠 정보가 집중되는 것을 막고 검증을 강화하는 게 당초의 취지였다지만 법무부와 공직기강비서관실 모두 수장은 검찰 출신이다. ‘검찰 공화국’에서 검사 선후배들끼리 얼마나 철저하게 역할을 분리했을까 싶다. 또 검증 과정에서 범죄의 단서를 발견했을 때 어떻게 처리할지도 논란의 대상이었다. 법무부 소속인 데다 검사들이 중심 역할을 한 관리단에서 이를 못 본 척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검경에 넘겨 수사하도록 하면 검증에 응할 후보자들이 확 줄어들 수밖에 없어서다.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 소재가 불투명해진 것도 관리단 설치의 부작용이었다. 윤석열 정부에서는 대법원장, 여성가족부 장관, 국가수사본부장 후보자 등이 잇따라 낙마하는 ‘인사 참사’가 이어졌다. 재산 신고 누락, 자녀 학교폭력 같은 기본적 사항조차 걸러내지 못해 일어난 일이다. ‘인사 검증에 구멍이 더 커졌다’는 지적이 쏟아졌는데도 법무부는 ‘기계적으로 자료만 수집한다’는 식의 변명으로 빠져나갔고, 대통령실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럴 거였으면 굳이 왜 관리단을 만든 것인지 의문이 가시질 않는다. ▷지난해 5월 윤 전 대통령이 민정수석을 부활하면서 관리단의 입지는 더 애매해졌다. 관리단을 설립했던 명분은 사라진 셈이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다시 규정을 바꾸고 파견 인력을 돌려보내는 것도 무리라는 의견이 나왔다. 그렇게 관리단은 명맥을 유지하다가 대선을 앞두고 조용히 문을 닫고 있다. 인사 검증 시스템을 놓고 벌어진 이런 혼란이 윤석열 정부의 난맥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현재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수사 1, 2부는 조직도에 이름만 있는 ‘유령 부서’나 다름없다. 검사가 부족해 이들 부서는 부장, 평검사 모두 공석이다. 공수처 검사 정원은 25명이지만 실제로 근무 중인 검사는 처·차장을 포함해 14명으로, 검찰로 치면 중간 규모 지청 수준에 불과하다. 퇴직하는 검사들만큼 충원이 이뤄져야 하는데 정부가 8개월 동안 신규 임용을 해주지 않고 뭉개면서 벌어진 일이다. ▷검찰총장 출신인 윤석열 전 대통령은 애당초 공수처를 마뜩잖게 여겼다. 대선 후보 시절 “공수처에 엘리트는 안 가고 3류, 4류가 간다”는 비하성 발언을 내놓는가 하면 “공수처가 정치화된 데서 벗어나지 못하면 폐지를 추진할 것”이라고도 했다. 윤 전 대통령의 대선 공약에는 다른 기관이 수사하는 사건에 대한 공수처의 이첩요청권 폐지가 포함됐다. 검경도 독자적으로 고위공직자의 부패 범죄를 수사할 수 있게 함으로써 사실상 공수처를 무력화하겠다는 뜻으로 읽혔다. ▷공수처법에서 이첩요청권을 삭제하는 방안은 여소야대의 국회에서 무산됐지만, 윤 전 대통령에게는 인사권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남아 있었다. 공수처 검사는 3년마다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야 연임할 수 있기 때문에 대통령 눈 밖에 나면 임기 만료 뒤 짐을 싸야 한다. 민감한 사건을 수사하는 공수처 검사들로서는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실제로 윤 전 대통령은 자신이 연관된 ‘채 상병 수사 외압 의혹’ 사건을 담당하는 공수처 검사들의 연임안 결재를 미루고 미루다가 검사 임기가 끝나기 53시간 전에야 재가하는 ‘몽니’를 부렸다. 당사자들은 물론 다른 공수처 검사들도 이 과정을 지켜보며 마음을 졸였을 것이다. ▷공수처 검사의 임용 역시 대통령의 재가가 필요한데, 있는 사람도 내쫓길 판에 인력 충원은 언감생심이었을지 모른다. 공수처는 지난해 9월 검사 3명 신규 임명을 추천했지만 윤 전 대통령은 끝내 재가하지 않았다. 윤 전 대통령이 탄핵 소추돼 직무가 정지된 뒤인 올해 1월 공수처는 추가로 검사 4명 임명안을 올렸지만 권한대행을 맡은 한덕수 전 국무총리, 최상목 전 부총리 역시 결재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윤 전 대통령의 눈치를 살피느라 뒷사람에게 미룬 듯한 느낌을 준다. ▷결국 ‘대대대행’인 이주호 권한대행이 이들 공수처 검사 7명을 25일자로 임명하는 안을 재가하면서 공수처는 숨통이 트이게 됐다. 그렇다고 윤 전 대통령 등의 내란 혐의 수사, 채 상병 외압 수사 등 윤석열 정부의 주요 인사들이 연루된 주요 사건들을 수사하는 공수처의 인력난을 일부러 방치한 정부의 책임이 가벼워지는 건 아니다. 치졸한 방식으로 공수처의 수사를 방해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와도 할 말이 없게 됐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허위사실공표죄의 구성요건에서 ‘행위’를 삭제하는 공직선거법 개정이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전광석화처럼 진행되고 있다. 이재명 후보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 다음 날인 2일 민주당 소속 국회 행정안전위원장이 발의하더니, 7일 행안위에 이어 14일 법제사법위원회에서도 일사천리로 통과됐다. 이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한다면 곧바로 민주당이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한 뒤 시행할 기세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민주당이 서두르는 건 이 조항으로 기소돼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된 이 후보의 선거법 위반 재판을 면소 판결로 끝냄으로써 눈앞에 닥친 ‘사법 리스크’를 해소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다만 대외적 명분은 이 조항이 “표현의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한다”는 점을 들었다. 민주당은 “‘행위’와 같은 추상적 용어는 법 적용 범위를 예측하기 어렵게 한다”고도 주장했다.“‘행위’에 대한 허위사실 유포 금지는 합헌” 이에 대한 해답은 이미 헌법재판소가 내놨다. 헌재는 2021년 2월 이 조항에 대한 헌법소원에서 합헌으로 결정하면서 “후보자의 ‘행위’란 자질, 성품, 능력 등과 관련된 것으로서 선거인의 판단에 영향을 줄 만한 사항으로 한정”되고 “건전한 상식과 통상적인 법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떠한 행위가 금지되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고 판단했다. 또 발언이 다소 과장됐거나 미세한 부분에서 오류가 있다고 해서 처벌하는 건 아니므로 “표현에 대한 지나친 제약이 된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돈은 묶고 입은 풀라’는 말처럼 선거법은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개정돼 왔다. 그 궁극적인 목적은 자유로운 선거운동 보장 자체보다는 국민의 의사가 정확하게 선거에 반영되도록 하는 데 있을 것이다. “후보자가 자신의 행위에 관해 허위의 사실을 공표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결과적으로 선거의 공정성을 보장할 수 없게 된다”고 헌재가 판시했듯이 거짓말을 하는 입까지 풀어준다면 표현의 자유는 커질지언정 국민이 왜곡된 정보를 근거로 투표할 위험 역시 높아진다. 본말이 전도되는 셈이다. 법조계 일각에선 행위에 대한 후보자의 발언이 허위인지 여부는 사법기관이 아니라 공론의 장에서 가려져야 하고, 형사처벌보다는 정치적인 책임을 물어야 하는 영역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이상적인 방향일지는 몰라도 처벌과 피선거권 박탈이라는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거짓말을 늘어놓는 후보들이 넘쳐나는 현실과는 괴리가 있다고 본다.“공론의 장에서 검증” 실현 가능성 있나 사실 후보자나 가족의 ‘출생지, 가족관계, 신분, 직업, 경력, 재산’ 등 허위사실공표죄의 다른 요건들에 비해 어떤 행위를 했는지 안 했는지, 이에 대한 발언이 인식의 표현인지 사실의 진술인지를 가리는 건 전문가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시민들이 이를 판단해 투표에 반영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건 실현 가능성이 떨어진다. 더욱이 선거운동 막바지에 나온 발언은 검증할 시간적 여유도 없는데, 선거에서 이기고 나면 허위 발언이라는 게 밝혀진들 정치적·도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날 당선자가 얼마나 되겠나. 이 법이 시행되면 대다수 정치인과 정치지망생들은 속으로 쾌재를 부를 것이다. 반면 허위 정보를 근거로 공직자를 잘못 선출한 피해는 국민이 감당해야 한다. 헌재가 합헌이라고 했고, 삭제할 경우 부작용 우려가 큰 법 조항을 없애려면 숙의를 거치는 시늉이라도 하는 게 정상이다. 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과반 의석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건 정치적 폭력이나 다름없다. 대선을 앞두고 역풍을 우려할 만도 한데 그조차 개의치 않는 건 민주당의 자신감인지 무모함인지 의아할 따름이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이건 진짜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2일 윤석열 전 대통령 내란 우두머리 혐의 3차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오상배 전 수방사령관 부관(대위)은 이 발언을 두 차례 했다. 처음은 비상계엄 당시 윤 전 대통령이 이진우 전 수방사령관에게 전화로 “총을 쏴서라도 문을 부수고 들어가라”고 지시하는 걸 들었을 때, 두 번째는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안 의결 뒤에도 윤 전 대통령이 “두 번, 세 번 계엄 하면 된다”고 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윤 전 대통령은 피고인석에 앉아 젊은 군 간부의 증언을 들었다. ▷오 대위는 윤 전 대통령의 변호인이 기자회견에서 “체포의 ‘체’ 자를 얘기한 적도 없다”고 말한 것을 듣고는 “배신감 같은 걸 느꼈고” “진실을 밝히는 데 도움이 돼야겠다”는 마음에 검찰에서 진술하게 됐다고 했다. 앞서 조성현 수방사 제1경비단장, 김형기 특전대대장 등 현장 군 간부들도 헌법재판소나 법원, 검찰에서 ‘국회의원을 끌어내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진술했다. 이런 증언들이 쌓여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고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이를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다. ▷윤 전 대통령은 전날 SNS를 통해 ‘국민께 드리는 호소’를 발표했다. 국민의힘 지도부의 기습적인 대선 후보 교체 시도가 당원들에 의해 제지된 직후다. ‘정당 민주주의의 파괴’란 비난을 받는 국민의힘의 단일화 논란에 대해 윤 전 대통령은 “여전히 건강함을 보여준 경선”이라는 상식 밖의 평가를 내놨다. 그러면서 “제 마음은 여전히 국가와 당과 국민에게 있다” “끝까지 이 나라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길에 여러분과 함께할 것”이라고 했다. 자신을 당의 후견인으로 여기는 듯 보인다. ▷하지만 국민의힘 당원들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의문이다. 조기 대선이 치러지게 된 것도, 국민의힘이 탄핵 찬성파와 반대파로 갈라진 것도 윤 전 대통령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그런데도 윤 전 대통령은 이번 호소문에서 당원과 국민에게 제대로 사과하지 않았다. 오히려 윤 전 대통령의 행태가 대선을 목전에 둔 국민의힘에 점점 부담이 되고 있는 형국인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당의 단결을 촉구하고 대선 승리를 외치고 있다. ▷윤 전 대통령이 재판에 출석하는 모습은 이번에 처음 공개됐다. 일반 피고인과 마찬가지로 지상을 통해 법정에 들어오도록 법원이 결정했기 때문이다. 윤 전 대통령은 ‘대선과 관련해 국민에게 할 말이 있느냐’는 등 취재진의 질문에 일절 대답하지 않았다. 전날 ‘호기로운’ 호소문을 발표한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윤 전 대통령이 진정 어린 사과를 할 게 아니라면 차라리 침묵하는 편이 현명한 처신일 것이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