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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마 대통령’이라 불렸던 박태종 한국마사회 심판 자문위원(61)은 어릴 때부터 ‘타는 것’이라면 뭐든지 좋아했다. 그 시작은 콤바인이었다. 그는 1965년 충북 진천의 작은 시골에서 태어났다. 농사철이 되면 그도 논으로 나와 일을 돕곤 했는데 어른들의 허락을 받아 간간이 콤바인을 몰곤 했다. 박태종은 “작은아버지가 한번 운전을 해보라고 해서 콤바인을 처음 몰았는데 너무 재미있었던 기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고교 졸업 후 상경한 뒤 그는 서울 마포구 이모부의 야채가게에서 배달 일을 도왔다. 그의 꿈은 택시기사나 포클레인 기사가 되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내비게이션이 보급되지 않았을 때다. 배달 일을 마치면 이모부의 배달용 차량을 몰고 서울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택시를 몰 때를 대비해 지리를 익힌 것이다. 틈틈이 포크레인 학원도 다녔다. 서울 곳곳에선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 역시 서울 4호선 사당역 인근에서 포크레인 조수로 일하기도 했다. 뭔가를 타면서 돈을 벌고 먹고 사는 그의 꿈이 서서히 현실이 되는 듯했다. 하지만 여기서 인생을 바꾼 일이 벌어졌다. 포크레인 기사 시험을 보러 혼자 강원도 춘천까지 갔다. 그런데 감독관이 수험표를 살펴보더니 뜻밖의 말을 했다. “나이가 모자라 시험을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접수비까지 다 냈는데 무슨 소리냐”고 묻자 “시험을 볼 순 없지만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실습이나 한번 하고 가라”고 했다. 박태종은 “너무 황당해서 할 말이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낙심하진 않았다. 그는 “성격이 원래 단순한 편이라 있는 상황을 그대로 잘 받아들이는 편”이라고 했다. 운명은 그렇게 그를 ‘말의 세계’로 이끌었다. 때마침 이모부가 배달 차 한국마사회 마포 지점에 갔다가 경마 기수 후보생 모집 공고를 보고 왔다. 모집 공고에 써있는 조건은 키 163㎝ 이하였다. 박태종은 어릴 때 키가 작고 왜소했다. 특수 부대에 가고 싶었지만 체중 미달로 병역도 면제 판정을 받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키 147cm, 몸무게 46kg다. 박태종은 키가 작아야 우대받는 직업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기쁨이 교차했다. 준비 없이 치른 첫해 시험에서 낙방했다. 오기가 생겼다. 1년 더 준비해 기수 후보생 13기로 정식 기수가 됐다. ‘경마 대통령’의 시작이었다. 처음부터 그가 승승장구했던 건 아니다. 30명의 동기 훈련생 중 27명이 기수로 데뷔했는데 동기들이 모두 1승, 2승씩을 거둘 때 그만 우승하지 못했다. 어떤 선배가 “말도 많이 타면서 어떻게 1등을 하지 못하냐”고 놀리기도 했다.박태종이 할 수 있는 건 노력밖에 없었다. 말 모양 동상에 고무줄을 달고 연습했다. 그러다 1992년 가장 큰 대회 중 하나인 무궁화배에서 우승했다. 생애 첫 대상경주 우승이었다. 꾸준한 노력에 자신감이 붙었다. 그때부터 박태종 천하가 시작됐다. 작년을 끝으로 말에서 내려올 때까지 1만6016번의 경주에 출전해 2249번 우승했다. 한국 근대 경마 104년 역사에서 누구도 넘보지 못할 기록이다. 2016년 2000승을 달성했을 땐 한국조폐공사에서 순금 기념 메달을 제작했다. 조폐공사가 금메달을 제작한 역대 스포츠 스타는 박찬호, 김연아, 손흥민, 페이커(이상혁) 정도다.왜소한 체격은 축복이었다. 그는 많이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이었다. 모든 기수들은 경기일엔 극도의 감량 스트레스를 받는다. 체중이 가벼워야 말에게 전해지는 하중이 줄어들고, 좀 더 빠른 레이스를 펼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삼시세끼를 꼬박 챙겨 먹었다. 중간중간 간식까지 먹고 말을 탔다. 박태종은 “말을 잘 다루려면 기수가 힘이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내가 훨씬 유리했던 셈”이라며 웃었다. 그는 평생 술 담배를 하지 않았다. 술을 전혀 못 마시는 어머니를 닮아 선천적으로 술이 안 받는 체질이다. 기수들에게 술은 무척 위험하다. 건강은 차치하고 술자리에서 무심코 뱉은 말이 승부 조작 등으로 연결될 수 있다. 적지 않는 기수들이 불상사에 휘말려 옷을 벗었다. 그이 동기 중에도 여러 명이 술과 연관된 불상사로 경마판을 떠나야 했다. 그는 “아마 술을 마셨다면 정년까지 말을 타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가 수십 년간 ‘대통령’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건 가장 큰 이유는 철저한 자기관리였다. 새벽형 동물인 말은 오전 일찍 훈련 시켜야 한다. 박태종은 선수로 뛴 39년간 한 번도 새벽 조교에 늦은 적이 없다. 박태종은 “항상 9시 이전에 잠들었다. 그래서 9시 뉴스를 본 적이 없다. 세상 돌아가는 건 8시 뉴스를 통해 접했다”고 했다. 절제된 생활 속에 후배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운동도 꾸준히 했다. 몸에 나쁘다는 음식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반대로 몸에 좋은 음식은 꼬박 챙겨 먹었다. 39년간 탄 말에서 내려왔지만 아쉬움은 전혀 없다고 했다. 천하의 박태종도 부상은 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러 번 낙마했고, 20여 차례 수술과 입원을 반복했다. 1999년에는 말발굽에 짓밟혀 척추를 크게 다치기도 했다. 박태종은 “은퇴 후 가장 좋은 건 부상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역시 마음이 편한 게 최고”라고 했다.한국마사회는 올해 초 누구보다 많은 경험을 가진 그를 심판 자문위원으로 위촉했다. 그는 요즘 기수복 대신 양복을 입고 출근한다. 처음엔 어색했던 양복도 이제는 꽤 익숙해졌다. 박태종은 “처음엔 걱정이 많았지만 주변 분들의 도움으로 잘 적응하고 있다”라며 “막상 선수를 할 때는 심판분들이 이렇게 많은 일을 하는지 몰랐다. 조교사, 마주들과 꾸준히 소통해 더욱 공정한 레이스가 되도록 힘이 되고 싶다”라고 말했다. 심판이 된 요즘도 그는 하루 한 시간 반~두 시간 운동은 여전히 거르지 않는다. 건강 관리 측면도 있지만 살기 위해 한다. 39년간 말을 탄 후 그의 양쪽 무릎은 정상이 아니다. 하중이 무릎에 쏠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왼쪽 무릎은 골절을 당했고, 오른쪽 무릎엔 인공 인대를 삽입한 상태다. 근력이 떨어지면 어김없이 통증이 찾아온다. 꾸준히 운동하는 그의 상체에는 여전히 식스팩이 뚜렷하다. 출근일에는 한두 시간 체력단련장에서 근력 운동을 한다. 출근하지 않는 날에는 동네 피트니스센터를 찾는다. 평생을 바른 생활 사나이로 살아온 그에게 ‘타는 것’은 여전히 즐거움이다. 더이상 말을 타진 않지만 그는 시간만 나면 자전거 안장에 오른다. 집이 있는 경기 의왕에서 서울 잠실 종합운동장까지 라이딩을 한다. 어떤 날은 하루 9시간 동안 자전거를 탄 적도 있다. 몇 해 전까지는 오토바이도 탔지만 “너무 위험하다”는 주변의 만류에 이제 오토바이는 떠나보냈다. 자동차 운전도 좋아한다. 혼자서 트레일러 면허도 땄다. 언젠가 캠핑카를 몰고 세계 어딘가를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박태종은 “지금도 스타리아를 개조한 캠핑카를 갖고 있다. 함께 고생한 아내와 함께 언젠가는 캠핑카로 유럽 횡단 여행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박태종 한국마사회 심판 자문위원(61)은 선수 시절 ‘경마 대통령’으로 불렸다. 작년을 끝으로 말에서 내려올 때까지 1만6016번 경주에 출전해 2249번 우승했다. 한국 근대 경마 104년 역사에서 누구도 넘보지 못할 기록이다. 2016년 2000승을 달성했을 땐 한국조폐공사에서 순금 기념 메달까지 제작했다. 충북 진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박태종은 어릴 때 키가 작고 왜소했다. 운동 신경은 좋은 편이었지만 할 만한 운동이 없었다. 특수 부대에 가고 싶었지만 체중 미달로 병역도 면제 판정을 받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키 147cm, 몸무게 46kg이다. 고교 졸업 후 서울 마포구 이모부의 야채 가게에서 배달일을 돕던 그는 포클레인 기사가 되려 했다. 틈틈이 학원을 다녔고, 현장 조수로 일하기도 했다. 그리고 강원 춘천으로 기사 시험을 보러 갔다. 여기서 그의 인생을 바꾼 일이 벌어졌다. “나이가 안 돼서 시험을 볼 수 없다”는 얘기를 들은 것이다. 허탈하게 포클레인 기사의 꿈을 접어야 했던 그에게 이모부가 이렇게 말했다. “경마 기수 후보생을 뽑는데 키가 163cm 이하여야 된단다.” 키가 큰 게 아니라 작아야 된다고? 그는 재수 끝에 기수가 됐다. 왜소한 체격은 축복이었다. 그는 많이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이었다. 다른 기수들은 경기일엔 몸을 가볍게 하려고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삼시 세끼에 간식까지 챙겨 먹고 말을 탔다. 박태종은 “말을 잘 다루려면 기수가 힘이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훨씬 유리했던 셈”이라며 웃었다. 그는 선천적으로 술도 못 마신다. 선수들에게 술은 무척 위험하다. 건강은 차치하고 술자리에서 무심코 뱉은 말이 승부 조작 등으로 연결될 수 있다. 적지 않은 기수들이 불상사에 휘말려 옷을 벗었다. 그는 “술을 마셨다면 정년까지 말을 타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가 수십 년간 ‘대통령’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철저한 자기관리였다. 새벽형 동물인 말은 오전 일찍 훈련시켜야 한다. 박태종은 39년간 한 번도 새벽 조교에 늦은 적이 없다. 박태종은 “항상 오후 9시 이전에 잠들었다. 그래서 9시 뉴스를 본 적이 없다. 세상 돌아가는 건 8시 뉴스를 통해 접했다”고 했다. 절제된 생활 속에 후배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운동도 꾸준히 했다. 몸에 나쁘다는 음식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천하의 박태종도 부상은 피하지 못했다. 여러 번 낙마했고, 20여 차례 수술과 입원을 반복했다. 1999년에는 말발굽에 짓밟혀 척추를 크게 다치기도 했다. 박태종은 “은퇴 후 가장 좋은 건 부상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역시 마음이 편한 게 최고”라고 했다. 한국마사회는 올해 초 누구보다 많은 경험을 가진 그를 심판 자문위원으로 위촉했다. 그는 요즘 기수복 대신 양복을 입고 출근한다. 박태종은 “처음엔 걱정이 많았지만 주변 분들의 도움으로 잘 적응하고 있다”라며 “막상 선수를 할 때는 심판분들이 이렇게 많은 일을 하는지 몰랐다. 조교사, 마주들과 꾸준히 소통해 더욱 공정한 레이스가 되도록 힘이 되고 싶다”라고 말했다. 심판이 된 요즘도 그는 하루 한 시간 반∼두 시간 운동은 여전히 거르지 않는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올해로 80회를 맞이한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겸 주말리그 왕중왕전이 2일부터 16일까지 열립니다. 서울 목동야구장과 신월야구장에서 열리는 이번 대회에는 지난해 우승팀 성남고를 비롯해 13개 권역별 전반기 주말리그를 거친 57개 학교 및 클럽이 참가합니다. 8강부터는 SPOTV 중계를 통해 대회를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이번 대회에 야구팬과 참가 고교 동문 여러분의 많은 관람 및 성원을 바랍니다.기간 : 5월 2일(토) ~ 5월 16일(토)장소 : 서울 목동야구장, 신월야구장(예선 일부)티켓판매 : 현장 판매 및 놀인터파크 예매성인 1만 원학생, 65세 이상 노인, 장애인 4000원이헌재 기자 uni@donga.com}

1982년 프로야구가 창립된 후 지금까지 내려오는 불멸의 기록들이 있다. 일본 퍼시픽리그 타격왕 출신 백인천이 그해 기록한 4할 타율(0.412), 1983년 ‘너구리’ 삼미 장명부의 한 시즌 30승과 36완투 400이닝 투구, 1984년 롯데의 영원한 에이스 최동원의 한국시리즈 4승 등이다. 그리고 1982년 OB 베어스의 박철순(72)이 기록한 22연승이 있었다. 박철순은 4월 10일 전주 해태전 구원승을 시작으로 9월 18일 대전 롯데전까지 한 번의 패전도 없이 역사적인 22연승을 달성했다. 9월 22일 롯데와의 더블헤더 1차전에서 3-4로 패하면서 연승 기록은 깨졌다. 하지만 박철순은 그 경기에서도 정규이닝인 9회를 넘어 10회까지 던지다가 김용철에게 결승타를 맞았다. 원년 박철순의 피칭은 여느 투수들과는 수준이 달랐다. 왼쪽 다리를 높이 들어 올리는 역동적인 투구폼으로 강속구를 던졌고 변화구로는 체인지업, 너클볼, 팜볼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상대 타자들은 한 번도 본 적 없던 휘황찬란한 박철순의 투구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그럴 만도 한 게 박철순은 1969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 입단한 이원국에 이어 한국 투수로는 역대 두 번째로 미국프로야구를 이미 경험한 선수였다. 박철순은 1980년 밀워키 브루어스에 입단해 두 시즌 동안 산하 마이너리그에서 뛰었다. 박철순은 “당시 한미대학야구선수권이라는 대회가 있었다. 볼티모어 구장에서 당시 마이너리그 연합팀과 경기를 했는데 그날따라 공이 제대로 긁혔다. 시속 150km를 던졌는데 동양인이 빠른 공을 던진 게 인상적으로 보였던 것 같다”고 했다. 당시 계약금 2만 달러를 받았다. 요즘 기준으로는 헐값이지만 당시로선 큰돈이었다. 첫해 싱글A에서 머물던 박철순은 이듬해 더블A로 승격했다. 때마침 1982년 한국프로야구가 창설되면서 박철순은 메이저리그 도전을 눈앞에 두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초창기 한국프로야구에는 기본 변화구인 슬라이더도 도입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미국에서 다양한 구질을 배웠던 박철순이 던지는 체인지업과 팜볼 등은 한국 타자들이 보기에는 마구와 다름없었다. 박철순은 결국 그해 24승 4패 7세이브 평균자책점 1.84라는 빼어난 성적을 기록하며 정규시즌 최우수선수(MVP)에도 뽑혔다. 소속팀 OB는 그해 한국시리즈 정상에도 올랐다. 하지만 박철순의 전성기는 4월의 벚꽃만큼 짧았다. 이듬해부터 끊임없는 부상에 시달렸다. 특히 허리 부상이 발목을 잡았다. 이미 전조가 있었다. 1982년 24승을 올리는 동안부터 이미 허리에 통증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참고 던졌다. 한국시리즈가 열리는 동안에도 그는 허리가 아파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하지만 3차전 때 마운드에 올랐다. 코칭스태프가 만류했지만 “괜찮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는 진통제를 맞고 마운드에 올랐다. 박철순은 “돌이켜보면 참 무모했다. 프로 선수가 몸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 아니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라면서도 “혹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의 나는 그런 것조차 즐겼던 것 같다. 프로 선수라면 고통 속에 훈련하고, 아픔을 참고 경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젊었고, 이기는 게 좋았다. 만류하는 코칭스태프에게 ‘나갈 수 있습니다. 던질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고 말했다. 박철순은 이듬해부터 한 번도 예전의 기량을 회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후 그가 보여준 열정과 투혼은 오히려 그에게 ‘불사조’라는 별명을 안겼다. 여러 차례 허리 수술을 받고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1998년에는 속옷 광고를 찍다가 왼쪽 발목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부상을 당했지만 초인적인 의지로 재활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가 다시 마운드에 설 때마다 팬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박철순은 “어찌 보면 한물간 투수가 아닌가. 끝까지 기다려준 구단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가족과 팬들의 넘치는 응원도 받았다”라며 “어떻게 해서든 일어나서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더 간절히 매달렸다”고 했다.41세이던 1995년. 그는 정규시즌에서 9승(2패)을 올렸다. 원년인 1982년 이후 개인 한 시즌 최다승이었다. 그리고 그해 OB는 다시 한번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랐다. 우승 확정 후 그는 그라운드 위에서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그리고 1996년을 끝으로 정들었던 마운드를 떠났다. 잠시 코치로 일하던 그는 한동안 야구를 떠나 사업가의 삶을 살았다. 디스플레이 패널 제조업체 대표를 했고, 골프용품을 제작해 판매하기도 했다. 한때 직원이 200명 가까이 될 정도로 사업은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값싼 중국산 제품과의 경쟁에서 밀렸고, 물건을 팔아도 수금을 잘 되지 않았다. 어려움 끝에 몇 해 전 결국 사업에서 손을 뗐다. 그는 야구를 하면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됐다. 10년 넘게 사업을 하면서는 마음에도 병이 왔다. 박철순은 “사업을 접은 후 자격지심이 생겼다. 사람 만나는 걸 피했고, 오는 전화도 잘 받지 않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위험하다고 느꼈다”고 했다. 그런 그를 다시 양지로 꺼내 준 것은 역시 야구였다. 박철순은 몇해 전부터 원로 야구인들의 모임인 일구회의 대외협력부회장을 맡고 있다. 외부 활동을 하면서 다시 운동도 시작했다. 동네 산책길 걷기를 시작으로 작년 가을부터는 피트니스센터에도 다닌다. 박철순은 “일주일에 최소 4번은 운동한다. 피트니스센터에 가 보면 나보다 나이 많은 분들도 정말 열심히 몸 관리를 하더라”며 “짧은 시간이라도 꾸준히 운동하면서 ‘예전의 나’로 돌아오게 됐다”고 했다.지난해 12월 ‘2025 뉴트리디데이 일구상 시상식’에서는 뜻깊은 이벤트가 열렸다. 이날은 2025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끝판대장’ 오승환(전 삼성)이 일구대상을 수상한 날이었다. 그 자리에는 두 명의 ‘전설’ 박철순과 ‘회장님’ 송진우(전 한화)가 나란히 한 자리에 섰다. 이들 세 명은 등번호 21번이 새겨진 유니폼을 나란히 펴들었다. 21번의 시작은 다름 아닌 박철순이었다. 박철순은 미국에서 돌아온 1982년 21번으로 한국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이에 대해 박철순은 “많은 사람들이 22연승을 두고 등 번호를 넘어서려 했던 것 아니냐고 물어보시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원래 내가 원했던 번호는 에이스의 상징인 11번이었다. 그런데 팀 선배가 먼저 11번을 다는 바람에 21번을 달았을 뿐”이라며 웃었다. 통산 210승 투수 송진우는 “박철순 선배님을 바라보며 21번을 택했고, 야구에 대한 의미는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오승환 역시 “야구를 너무 잘하셨던 선배님들과 같은 번호를 썼고, 영구결번까지 오게 됐다. 선배님들께 감사한다”고 했다. 이들 세 명이 달았던 21번은 각각 두산, 한화, 삼성의 영구결번이다. 일구회는 올 시즌을 끝으로 철거 예정인 서울 잠실구장을 기념하기 위해 10월이나 11월경 ‘잠실 고별 레전드 게임’을 추진하고 있다. 일구회는 레전드 선수들이 한자리에 모여 팬들과 함께 잠실구장의 마지막 순간을 나누고, 선수와 팬이 함께 만들어온 시간의 의미를 되새기는 역사적이고 상징적인 무대를 만들어 보려 한다. 1995년 우승 당시 잠실에서 뜨거운 눈물을 쏟았던 박철순도 역사적인 잠실 고별전에 힘을 보태고자 한다. 박철순은 “지금도 마운드에 서면 마음이 떨린다. 고별전에 서는 선수들과 이를 지켜보시는 팬들 모두에게 엄청나게 감동적인 무대가 될 것”이라며 “잠실구장을 떠나보낼 때 정말 마음이 뭉클할 것 같다. 야구를 통해 정말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은 만큼 레전드 게임을 포함해 앞으로도 한국 야구 발전을 위해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자 한다”고 말했다. 박철순의 선수 시절 주제곡은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 웨이(My Way)’였다. 마이 웨이가 더 잘 어울리는 선수는 지금까지 없었다. ‘불사조’ 박철순은 여전히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2019년 9월 열린 한국프로골프(KPGA)투어 대회에선 희대의 사건이 벌어졌다. 마지막 날 16번홀에서 티샷 실수를 한 김비오가 갤러리를 향해 ‘손가락 욕’을 한 것이다. 스윙 도중 갤러리의 휴대전화 촬영음 때문에 실수했다고 생각한 김비오는 순간적으로 화를 참지 못했다. 김비오는 그 대회에서 우승했지만 후폭풍은 거셌다. 곧바로 상벌위원회가 소집됐고, 3년 자격정지(추후 1년으로 감경)에 벌금 1000만 원의 중징계가 내려졌다. 상금 랭킹과 제네시스 포인트 랭킹 등 모든 순위에서도 제외됐다. 김비오는 “선수 이전에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다”며 무릎을 꿇고 눈물을 쏟았다. 갤러리에게 욕을 한 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다. 하지만 김비오의 성정을 잘 아는 사람들은 사석에서 안타까움을 표현하곤 했다. 김비오가 잘못한 건 분명하지만 갤러리들의 비(非)매너가 원인이 아니냐는 것이다. 몇몇 갤러리들이 경기 내내 김비오의 스윙 때마다 고의로 휴대전화 촬영음을 냈다는 주장도 나왔다. 갤러리 문화는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요즘도 사진을 찍으려는 갤러리들과 이를 막으려는 경기 진행 요원들 간의 실랑이가 심심찮게 벌어진다. 스윙 도중 ‘찰칵’ 소리에 골프채를 내려놓는 선수들의 모습도 익숙하다. ‘김비오 학습 효과’로 인해 선수들은 “갤러리 소음은 각자 이겨내야 할 몫”이라며 참는다.예외 없는 ‘노 휴대전화’ 정책 하지만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휴대전화 이슈가 없는 골프대회가 있다.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마스터스 토너먼트다. 13일 미국 조지아주 오거스타의 내셔널 골프클럽에서 끝난 제90회 마스터스는 로리 매킬로이(북아일랜드)의 역사적인 2연패로 화려하게 마무리됐다. 그런데 올해 마스터스는 개막 전부터 뜻밖의 사건으로 화제를 모았다. 1989년 디 오픈 챔피언 자격으로 대회에 초청받은 마크 캘커베키아(미국)가 휴대전화를 사용하다 보안요원에게 적발돼 쫓겨난 것이다. 캘커베키아가 휴대전화를 사용한 날은 대회도 아닌 연습 라운드였고, 장소도 코스가 아닌 클럽하우스 근처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손녀이자 인플루언서인 카이 트럼프도 구설에 올랐다. 카이는 마스터스 현장에서 찍은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공유했는데 몇몇 누리꾼들이 “휴대전화로 찍은 것 아니냐”며 의혹을 제기했다. 카이는 “휴대전화가 아닌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이라고 해명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됐다. 마스터스는 연습 라운드 때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하는 건 허용한다.디지털 시대 속 아날로그의 힘 마스터스의 ‘노(No) 휴대전화’ 정책은 대회 조직위의 최상위 원칙이다. 조직위는 홈페이지를 통해 ‘반입 금지 물품’을 공지하는데 휴대전화는 모든 물품 최상단에 적혀 있다. 칼을 포함한 무기류보다 순위가 높다. 미디어도 예외가 아니다. 휴대전화를 갖고 들어갈 순 있지만 미디어센터 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 코스에서 사용하다 적발되면 출입증을 빼앗기고 즉시 퇴장이다. 마스터스는 그 대신 대회장 곳곳에 무료 공중전화를 설치해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 휴대전화는 현대인들에게 필수품 이상이다. ‘디지털 디톡스’를 강제당하는 마스터스에서 사람들은 어떤 감정을 느낄까. 일단 선수들은 대환영이다. 휴대전화를 의식하지 않아도 되고 셀카 요청도 받지 않는다. 무엇보다 “페이트런(후원자·마스터스 갤러리를 의미)들이 내 골프에 집중해 주는 게 좋다”고 말한다. 페이트런들의 감정도 어색함에서 편안함으로 서서히 바뀌어 간다고 한다. 휴대전화에 신경을 빼앗기지 않으니 경기에 더 몰두할 수 있다. 옆 사람과의 대화도 늘어난다. 사진 대신 눈으로 코스와 멋진 샷을 머리에 담는다. 사람들은 이런 불편함을 경험하기 위해 수천 달러의 웃돈을 주고 마스터스 티켓을 구매한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원칙을 고수해 더 매력적인 곳, 골프를 골프 그 자체로 볼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골프의 천국’ 마스터스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지난해 12월 ‘2025 뉴트리디데이 일구상 시상식’에서는 뜻깊은 이벤트가 열렸다. 등번호 21번의 ‘투수 레전드’ 3인방이 나란히 한 무대에 선 것이다. ‘불사조’ 박철순(72)과 ‘회장님’ 송진우(60), 그리고 ‘끝판대장’ 오승환(44)이 주인공이었다. 21번은 이 3명의 영구결번이다. 그 시작은 박철순이었다.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OB 베어스 유니폼을 입은 박철순은 22연승과 함께 24승 4패, 7세이브, 평균자책점 1.84라는 눈부신 성적을 거뒀다. KBO리그 최초의 정규시즌 최우수선수(MVP) 역시 그의 몫이었다. 박철순은 “많은 사람들이 22연승을 두고 등번호를 넘어서려 했던 것 아니냐고 물어보시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원래 내가 원했던 번호는 에이스의 상징인 11번이었다. 그런데 팀 선배(계형철)가 11번을 다는 바람에 21번을 달았을 뿐”이라며 웃었다. 박철순의 전성기는 4월의 벚꽃만큼 짧았다. 이듬해부터 끊임없는 부상에 시달렸다. 고질이던 허리 수술을 여러 번 했고, 왼쪽 발목 아킬레스힘줄이 끊어졌다. 보통 선수면 포기할 만도 했지만 그는 불굴의 의지로 다시 일어섰다. 1996년을 마지막으로 은퇴할 때까지 기적처럼 마운드로 돌아와 공을 던졌다. 박철순은 “한물간 투수를 구단이 끝까지 기다려줬다. 가족과 팬들의 넘치는 응원도 받았다”며 “어떻게 해서든 일어나서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더 간절히 매달렸다”고 했다. 은퇴 한 해 전 그는 9승(2패)을 거두며 팀의 두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우승 확정 후 그는 그라운드 위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잠시 코치로 일하던 그는 한동안 야구를 떠나 사업가의 삶을 살았다. 디스플레이 패널 제조업체 대표를 했고, 골프용품을 제작해 판매하기도 했다. 한때 직원이 200명 가까이 될 정도로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값싼 중국산 제품과의 경쟁에서 밀렸고, 물건을 팔아도 수금을 잘 하지 못하는 어려움 끝에 몇 해 전 결국 사업에서 손을 뗐다. 그는 야구를 하면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됐다. 10년 넘게 사업을 하면서는 마음에도 병이 왔다. 박철순은 “사업을 접은 후 자격지심이 생겼다. 사람 만나는 걸 피했고, 오는 전화도 잘 받지 않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위험하다고 느꼈다”고 했다. 그런 그를 다시 양지로 꺼내 준 것은 역시 야구였다. 박철순은 얼마 전부터 원로 야구인들의 모임인 일구회의 대외협력부회장을 맡고 있다. 외부 활동을 하면서 다시 운동도 시작했다. 동네 산책길 걷기를 시작으로 작년 가을부터는 피트니스센터에도 다닌다. 박철순은 “일주일에 최소 4번은 운동한다. 피트니스센터에 가 보면 나보다 나이 많은 분들도 정말 열심히 몸 관리를 하더라”며 “짧은 시간이라도 꾸준히 운동하면서 ‘예전의 나’로 돌아오게 됐다”고 했다. 일구회는 올 시즌을 끝으로 철거 예정인 서울 잠실구장을 기념하기 위해 10월이나 11월경 ‘잠실 고별 레전드 게임’을 추진하고 있다. 1995년 우승 당시 잠실에서 뜨거운 눈물을 쏟았던 박철순은 “야구를 통해 정말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 레전드 게임을 포함해 앞으로도 한국 야구 발전을 위해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자 한다”고 말했다. 그의 주제곡이었던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 웨이(My Way)’처럼 그는 여전히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가고 있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보통 선수는 한 번 달아보기도 힘든 태극마크를 15살 때 달았다. 17살 때는 호주 퍼스에서 열린 세계수영선수권대회 남자 접영 200m에 나가 역대 한국 선수로는 최초로 결선 진출의 쾌거를 이뤘다. 자유형과 접형, 개인 혼영 등 각 종목 한국신기록도 세웠다. 메이저 국제종합대회인 아시안게임에도 3번이나 출전했다.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동메달 3개를 목에 걸었다. 2002년 부산 대회와 2006년 도하 대회 때는 각각 4개씩의 동메달을 획득했다. 총 11개의 동메달로 그보다 국제대회에서 많은 동메달을 딴 한국 선수는 없다. 하지만 ‘수영 천재’ 한규철(45)에게는 최악의 성적이자 시나리오였다. 평생 목표로 했던 금메달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타이밍이 잘 맞지 않았다. 2002년 부산 대회 때 그는 접영 100m와 200m, 그리고 자유형 800m 계주에서 동메달을 땄다. 만약 그가 접영 대신 자유형을 나갔다면 무난히 금메달을 땄을 것이다. 2002년 부산 대회를 앞두고는 몸을 좀 더 가볍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5kg를 무리하게 감량한 게 오히려 독이 됐다. 한규철은 “방콕 대회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자유형에 집중했는데 너무 살을 많이 빼는 바람에 정작 경기 때 힘이 제대로 들어가질 않았다”고 했다.2006년 도하 대회 때는 한국 수영의 최고 스타인 박태환에 밀려 자유형에 출전하지 못했다. 한규철은 “세 대회 연속 실패하고 나니 금메달을 딸 운명이 아닌가 보다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후에 의미 없는 실업 선수 생활을 몇 년 더 했지만 열정이 살아나질 않았다”고 했다. 목표를 잃은 그는 급격히 무너졌다. 선수 생활을 마친 후 우울감이 찾아왔다. 그동안 살아온 모든 인생이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 90kg대였던 몸무게가 120kg을 넘었다. 설상가상으로 투자를 잘못하는 바람에 그나마 벌어놓은 돈도 많이 날렸다. 10대부터 20대까지 최고의 수영 선수로 불렸던 그는 한순간에 생활고를 겪는 처지가 됐다. 한규철은 “창창한 30대 초반에 모든 것을 잃는 기분이었다. 살아야겠다는 의욕도 없었다. 그저 죽지 못해 살았던 것 같다”라고 했다.보다 못한 선배가 그를 다시 수영장으로 이끌었다. 어린 선수들이라도 지도해 보라는 것이었다. 역설적으로 큰 상처를 줬던 수영장이 다시 그를 일으켜 세웠다. 아이들을 가르치려면 자신부터 건강해야 했다.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약을 먹지 않으면 잠들지 못했던 그가 불굴의 의지로 약도 끊었다. 꾸준히 운동을 하면서 불과 4개월 만에 30kg 이상을 감량했다. 그렇게 그는 몇 년 만에 그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정상인’이 됐다. 한규철은 “당시 가르쳤던 제자들이 너무 좋았다. 하나를 가르치면 실력이 쑥쑥 늘었다. 다른 사람이 잘했는데 내가 기분이 좋아지는 색다른 경험을 했다. 30대 중후반에 내 열정을 다시 불사르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오전에 아이들을 가르치고 다시 오후에 가르칠 때까지 시간이 비면 그는 마치 ‘운동선수’처럼 웨이트트레이닝에 매달렸다. ‘헬창’(헬스를 통해 몸 불리기에 열중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유행하는 ‘3대 500’(스쾃, 데드리프트, 벤치프레스 중량을 합쳐 500kg의 무게를 드는 것)도 거뜬히 돌파했다. 스쾃은 190kg, 데드리프트는 200kg, 벤치프레스는 135kg을 들었다. 40대 중반이 된 그는 현재 수영장을 떠나 자영업자의 삶을 살고 있다. 서울 강남구 도곡동의 한 숙성 고기 전문점 신도세기 대표가 그의 직함이다. 한규철은 “더 늦기 전에 평생 몸담았던 물을 떠나 새로운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라고 했다. 수영 코치 생활은 그리 나빴던 건 아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불안정한 생활을 할 순 없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이왕이면 좀 더 어리고 열정이 살아있을 때 ‘사회생활’에 뛰어들어보고 싶었다.그렇게 처음 서울 강남구 신논현동 근처에 냉동 삼겹살집을 오픈했다. 약 2년을 버텼지만 성공했다고 하긴 어려웠다. 그는 “약 2년 정도 하나가 폐업을 했다. 너무 주먹구구식으로 준비했었다”라며 “요식업도 잘 짜인 시스템 안에서 제대로 해야 한다는 걸 절감했다”고 했다. 그리고 철저한 준비를 거쳐 2023년 가을 서울 강남구 도곡동에 신도세기를 오픈했다. 이번 가게는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점심 메뉴인 갈비탕과 달지 않는 불고기는 동네 주민뿐 아니라 인근 직장인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다. 32개의 테이블이 있는 약 330㎡ 크기의 매장은 15~18명의 직원들로 바쁘게 돌아간다. 손님이 밀려들 때면 그도 대표 명함을 떼고 고객 응대와 서빙을 한다. 고기를 직접 굽기도 한다. 손에 빌 때는 고기 손질도 직접 한다. 처음엔 칼질에 익숙하지 않아 손을 베는 바람에 응급실에도 몇 번 갔다. 한규철은 “수십 년간 대우받는 선수, 지도자로 살다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넓은 세상을 만나고 있다. 처음엔 손님한테 인사하는 게 쑥스러웠지만 지금은 내 주변의 모든 분들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여전히 그를 지탱하는 건 운동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매장에 나가기 전까지 그는 러닝과 웨이트트레이닝을 꾸준히 한다. 지금도 여전히 주 1, 2회는 ‘3대 500’을 든다. 작년 하반기부터는 러닝의 매력에 푹 빠졌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하루에 기본 10km 정도를 뛴다. 주말에는 20km 정도의 장거리 러닝도 한다. 그는 “가게에서 머리가 복잡한 일이 있어도 땀 날 때까지 뛰고 나면 머리가 맑아진다”라며 “한동안 괴롭히던 불면증도 사라졌다. 역시 운동은 평생 하는 게 맞다는 걸 새삼 실감하고 있다”라고 했다.수영과 육상은 완전히 다른 종목이다. 하지만 ‘엔진’은 똑같기에 그는 초보 러너임에도 기록이 쑥쑥 좋아지고 있다. 그는 벌써 하프 마라톤에 출전해 1시간 30분대에 안에 골인했다. 그는 조만간 풀 코스도 달릴 생각이다. 지금 추세라면 서브 3(풀코스 마라톤을 3시간 안에 주파하는 것)도 충분히 노려볼 만 하다. 내친김에 그는 철인3종(수영, 사이클, 마라톤)까지 고려하고 있다. 보통 사람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수영은 그에겐 편안한 종목이다. 한규철은 “지금처럼 하루하루 열심히 살다 보면 또 다른 길이 열릴 수 있다. 그런 상황을 대비해서라도 건강한 신체와 정신을 유지하려 한다”며 “현재는 요식업에 집중하고 있지만 새로운 기회가 생기면 언제든 몸과 마음을 바쳐 뛰어들어볼 생각”이라고 했다.이헌재 기자 uni@donga.com}

한규철(45)은 박태환이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 남자 수영의 1인자였다. 경기고에 다니던 1998년 호주 퍼스에서 열린 세계선수권 남자 접영 200m에서 결선에 진출했는데 이는 한국 수영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시안게임도 세 차례(1998년 방콕, 2002년 부산, 2006년 도하) 출전해 동메달을 11개나 목에 걸었다. 하지만 주변에선 그를 ‘아쉬운 선수’라고 평가했다. 실력으로는 금메달인데 동메달만 11개 수집했으니 나온 소리다. 평생 꿈이던 금메달에 도달하진 못한 그는 급격히 무너졌다. 선수 생활을 마친 후 우울감이 찾아왔다. 90kg대였던 몸무게가 120kg을 넘었다. 벌어 놓은 돈도 날려 생활고를 겪었다. 한규철은 “30대 초반에 모든 것을 잃었다. 삶의 의욕도 없었다. 죽지 못해 살았던 것 같다”라고 했다. 보다 못한 선배가 그를 다시 수영장으로 이끌었다. 어린 선수들이라도 지도해 보라는 것이었다. 역설적으로 그렇게 싫었던 운동이 다시 그를 일으켜 세웠다. 아이들을 가르치려면 자신부터 건강해야 했다.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쑥쑥 자라는 제자들을 보는 즐거움도 컸다. 몇 년 만에 그는 ‘정상인’이 됐다. 40대 중반이 된 그는 현재 자영업자의 삶을 살고 있다. 서울 강남구 도곡동의 한 숙성 고기 전문점 대표가 그의 직함이다. 한규철은 “더 늦기 전에 수영장을 떠나 새로운 삶을 살아 보고 싶었다”며 “무작정 시작한 첫 가게는 폐업했지만 2023년 가을 오픈한 지금 가게는 동네 맛집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했다. 32개의 테이블이 있는 약 330㎡ 크기의 매장은 15∼18명의 직원들로 바쁘게 돌아간다. 손님이 밀려들면 그도 대표 명함을 떼고 고객 응대와 서빙을 한다. 고기 손질도 직접 한다. 한규철은 “대우받는 선수, 지도자로 살다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넓은 세상을 만나고 있다. 내 주변의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여전히 그를 지탱하는 건 운동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매장에 나가기 전까지 그는 러닝과 웨이트트레이닝을 꾸준히 한다. 특히 작년 하반기부터 시작한 러닝의 매력에 푹 빠졌다. 그는 “가게에서 머리가 복잡한 일이 있어도 땀 날 때까지 뛰고 나면 머리가 맑아진다”라며 “불면증도 사라졌다. 역시 운동은 평생 하는 게 맞다는 걸 새삼 실감하고 있다”라고 했다. 어느덧 하프 마라톤까지 완주한 그는 조만간 풀코스도 달릴 생각이다. 내친김에 철인3종(수영, 사이클, 마라톤) 도전도 고려하고 있다. 보통 사람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수영은 그에겐 집처럼 편안한 종목이다. 한규철은 “지금처럼 하루하루 열심히 살다 보면 또 다른 길이 열릴 수 있다. 그런 상황에 대비해서라도 건강한 신체와 정신을 유지하려 한다”고 말했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2023년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한일전. 한국 선발 투수로 김광현(38·SSG)이 등판하자 일본 측에서는 놀랍다는 반응이 나왔다. 언제 적 김광현이 35세가 돼서도 여전히 한국의 에이스를 맡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김광현은 초반 2이닝을 완벽하게 틀어막았다. 하지만 3회부터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더니 결국 조기 강판됐다. 한국은 그 경기서 4-13으로 완패했고, 조별리그에서도 탈락했다. 2026년 WBC 한국 야구 대표팀 명단에는 당시 김광현보다 나이가 많은 두 베테랑 투수가 합류했다. 39세 류현진(한화)과 42세 노경은(SSG)이다. 이 둘이 없었으면 한국 야구의 17년 만의 8강 진출도 무산될 뻔했다. 류현진은 조별리그 대만전에 선발 투수로 등판했다. 실투 하나가 홈런으로 연결돼 3이닝 1실점을 기록했지만 선발 투수 역할은 해냈다. 승부치기 끝에 4-5로 패하긴 했지만 류현진이 초반을 제대로 막아주지 않았다면 한국은 더 일찍 무너졌을 것이다. 류현진은 대회 기간 내내 한국 투수진의 구심점이 됐다.나이 무색한 베테랑의 힘 노경은의 깜짝 활약은 모든 이의 기대를 뛰어넘었다. 한국은 호주와의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2실점 이하에 5점 차 이상 승리라는 극악의 ‘경우의 수’를 채워야 8강에 갈 수 있었다. 선발 투수 손주영(28·LG)이 1회를 던진 후 팔꿈치 이상으로 물러났지만 갑자기 호출된 노경은이 2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한국은 결국 7-2로 승리하며 8강이 열리는 미국 마이애미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류현진과 노경은은 ‘핵 타선’ 도미니카공화국과의 경기에서도 선발 투수와 2번째 투수로 등판했다. 비록 콜드게임으로 졌지만 코칭스태프의 신뢰가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다. 두 선수의 구위는 누가 봐도 전성기 시절에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시속 150km는 기본이고 160km를 던지는 투수가 넘쳐나는 ‘구속 혁명’의 시대에 두 투수는 140km 초중반의 속구로도 경쟁력을 입증했다. 많은 이들이 한국 선수들의 느린 구속을 지적했지만 류현진은 귀국 인터뷰에서 “당연히 구속이 빠르고 제구도 잘되면 좋지만, 본인이 어떤 걸 잘하는지 아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실제로 류현진 본인이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에서 그렇게 살아남았다. 류현진은 KBO리그에선 왼손 강속구 투수로 꼽혔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평균 구속이 느린 축에 속했다. 류현진은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정교한 투구에 집중했다. 그는 모든 변화구를 마음먹은 곳에 던질 수 있는 몇 안 되는 투수였다. 2019년 내셔널리그 평균자책점 1위(2.32)에 오른 것도 적응의 산물이었다.뭘 생각해? 그냥 하는 거지 한국 야구에서 여러 차례 방출당한 경험이 있는 노경은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몸으로 보여줬다. 2003년 프로에 입단한 노경은은 39세이던 2023년 처음 올스타전에 나갔다. 데뷔 22년 차이던 2024년에는 생애 첫 홀드왕을 차지했고, 지난해 홀드왕을 2연패했다. 류지현 대표팀 감독은 “이번 대회 한국의 최우수선수(MVP)는 노경은”이라고 했다. 이재명 대통령도 “42세 베테랑 투수 노경은 선수가 보여준 끊임없는 도전과 큰 용기는 많은 국민들에게 희망과 투지를 불어넣을 것”이라고 했다. 자기관리에 철저한 노경은의 모든 건 야구에 맞춰져 있다.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고 자신만의 루틴을 지킨다. 16일 새벽 비행기로 귀국한 노경은은 그날 곧바로 야구장으로 출근했다. “루틴상 웨이트트레이닝을 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였다. 경기에 나서는 마음가짐도 단순 명료하다. “내 임무는 시키면 그냥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번 WBC를 끝으로 두 선수는 국제대회에서 은퇴한다. 20년 넘게 본보기이자 좋은 길잡이가 되어 온 두 선수의 길을 따르는 건 남은 선수들의 몫이다.이헌재 기자 uni@donga.com}

베네수엘라가 ‘마두로 더비’에서 미국을 꺾고 사상 첫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우승 트로피에 입을 맞췄다. 베네수엘라는 18일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론디포파크에서 열린 2026 WBC 결승에서 미국을 3-2로 꺾고 정상에 올랐다.8강에서 ‘디펜딩 챔피언’ 일본을 8-5로 이긴 베네수엘라는 준결승에서 이탈리아를 4-2로 물리친 데 이어 ‘드림팀’을 구성한 미국마저 넘어섰다. 이날 두 나라의 대결은 ‘마두로 더비’로 불리며 큰 관심을 모았다. 미국은 1월 군사 작전으로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축출해 미국으로 압송했다. 이후 양국의 정치적 갈등이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야구로 ‘총성 없는 전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팽팽한 투수전으로 진행되던 경기는 3회초 1사 2, 3루에서 베네수엘라가 마이켈 가르시아(캔자스시티)가 중견수 희생플라이를 치면서 균형이 깨졌다. 베네수엘라는 1-0으로 앞선 5회초 선두 타자 윌리에르 아브레우(보스턴)가 미국 선발 투수 놀란 매클린의 2구째 한가운데 직구를 공략해 가운데 담장을 넘기는 솔로 홈런을 쏘아 올리며 2-0으로 앞섰다.패색이 짙던 미국은 8회말 2사 1루에서 브라이스 하퍼(필라델피아)에게 중월 투런포를 때려 2-2 동점을 만들었다. 하지만 25명의 빅리거로 팀을 구성한 베네수엘라는 9회초 결정적인 도루로 다시 찬스를 잡았다. 볼넷을 얻어 출루한 선두 타자 루이스 아라에스(샌프란시스코)의 대주자로 대주자 하비에르 사노하(마이애미 말린스)가 2루 도루에 성공해 무사 2루 기회를 만든 것. 이후 에우헤니오 수아레스(신시내티)가 개럿 휘틀록(보스턴)을 상대로 좌중간 적시 2루타를 터뜨려 다시 3-2로 앞섰다. 9회말 베네수엘라 마무리 투수로 등판한 다니엘 팔렌시아(시카고 컵스)는 카일 슈워버(필라델피아 필리스)를 헛스윙 삼진, 거너 헨더슨(볼티모어 오리올스)을 내야 뜬공, 로먼 앤서니(보스턴 레드삭스)를 헛스윙 삼진으로 잡아내며 경기를 끝냈다. 이날 베네수엘라 투수진은 ‘올스타 라인업’을 보유한 미국 타선을 단 3안타 2실점으로 막아냈다. 2023년 대회 결승에서도 일본에 2-3으로 패했던 미국은 두 대회 연속 우승 문턱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처음에 원했던 건 작은 텃밭이었다. 막연하게 농사를 지어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평생 땀과 함께 살아왔는데 이왕이면 자연으로 돌아가 땀을 흘리면서 살면 좋지 않을까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리고 결심했다. 딸기 농사를 짓기로. “많은 과일들이 호불호가 있지만 딸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 않느냐”는 게 결론이었다. 김형일 전 국가대표 사이클 감독(48)은 그렇게 2024년 소속팀인 대구시청 감독을 그만두자마자 곧바로 ‘딸기 농부’가 됐다. 김형일은 평생 자전거 안장에서 살아온 자전거인이다. 자전거가 좋아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서울체중·고와 한국체육대를 나와 2002년에는 부산 아시안게임에도 출전했다. 단거리인 스프린트 선수였던 그는 막판 삐끗하며 4위로 아쉽게 시상대에 서진 못했지만 수준급 선수였다. 그는 이후 경륜 선수로 전향해 5년간 선수로 뛰었다. 압도적인 성적을 거둔 건 아니지만 상금 랭킹 10위 안팎에 오르는 꽤 괜찮은 선수였다. 적지 않은 돈을 벌었고 삶도 윤택했다. 하지만 가슴속에는 뭔가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었다. 많은 사람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는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자전거를 본격적으로 공부해 세계 최고의 자전거 기구인 국제사이클연맹(UCI)에서 일하는 꿈을 꿨다. 결국 목표를 이루진 못했지만 스위스 프로팀에서 어시스턴트 매니저로 일하며 해외 활동 경험을 했다. 그의 자전거 인생은 2013년 대구시청 감독을 맡은 후 만개했다. 2024년 은퇴할 때까지 11년간 여러 차례 국내외 대회 우승을 이끌었고, 수많은 제자를 길렀다. 대한실업자전거연맹이 주는 최우수감독상을 9번이나 받았다. 2018년부터 2022년까지는 여자 사이클 국가대표 감독으로도 활동했다.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그가 이끈 여자 대표팀은 역대 한국 사이클 최고 성적인 금메달 5개와 동메달 1개를 수확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2019년 소강체육대상 지도자상을 받았고, 2020년에는 체육훈장 맹호장까지 수상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에는 언젠가부터 자연과 흙에 대한 갈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지도자 생활 말년에 그는 틈틈이 딸기를 공부했다. 스마트팜 시설과 원예 등에 대해 인터넷 강의를 들었고, 후계농 제도 등도 익혔다. 그는 2024년 12월 31일자로 사이클 감독직에서 퇴직했다. 그리고 이듬해 1월 17일 경기 여주에 농업회사법인 흰돌팜을 설립했다. 그리고 외부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딸기 스마트팜을 세웠다. 딸기는 겨울 작물이다. 대개 9월에 심기 시작해 12월부터 수확한다. 하지만 의욕이 넘쳤던 그는 욕심을 냈다. 더 일찍 심어서 더 늦게까지 수확해보려 한 것이다. 일명 ‘사계절 딸기’가 그의 새로운 목표였다. 하지만 처음 해 보는 농사가 그리 만만한 게 아니었다. 그는 두 차례나 애지중지 키우던 딸기밭을 갈아엎어야 했다. 김형일은 “우리 스마트팜에 딸기 묘목 3만 주를 심었다. 육묘 하나에 800~900원인데 한 번 엎어질 때마다 금전적인 피해가 엄청났다”라며 “딸기는 워낙 예민한 작물이다. 낮에는 영상 25도, 밤에도 영상 7도를 맞춰야 한다. 그러다 보니 전기세와 난방비 등을 포함해 큰돈이 날아갔다”고 했다. 그는 작년 12월 1일을 잊지 못한다. 이날은 그의 농장이 첫 딸기를 딴 날이다. 9월에 다시 정식으로 심은 딸기 묘목에서 빨간 딸기가 열렸다. 거구인 그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굵은 눈물을 펑펑 쏟았다. 사실 딸기밭에서 눈물을 흘린 게 이날이 처음은 아니다. 성공이 절박했던 그는 매일 밤 농장에 혼자 와서 “제발 잘 자라 달라”며 울고 또 울었다. 그는 “마치 3만 명의 신생아를 키우는 심정이었다. 할 수 있는 건 ‘제발 잘 자라 달라’고 비는 것밖에 없었다”라며 “감독을 할 때는 더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선수를 몰아세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딸기를 키울 때는 기다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고 했다. 그의 땀과 눈물을 먹고 자란 딸기들은 이제 잘 자란다. 우여곡절 끝에 첫 딸기를 수확한 후 정상 가도에 들어섰다. 첫 달에 700kg를 땄고, 1월에는 1000kg을 넘겼다. 모양이 예쁘고, 맛도 좋은 그의 딸기는 인천의 한 5성급 호텔에 납품도 한다. 대부분의 판매는 온라인으로 이뤄진다. 김형일은 “아직까진 온라인 판매를 주력으로 하고 있다. 네이버 스마트스토어에도 입점했다”라며 “기념일이 되면 많은 사람에게 온라인으로 커피나 케이크를 선물하지 않나. 예쁜 딸기를 선물하는 날이 오도록 노력하고 있다”라고 했다. 딸기 농부로 이제 첫발을 뗀 그이지만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제2호 농장, 제3호 농장을 지어 규모를 키우고 딸기 전문 카페까지 차리는 것이다. 딸기 전문 브랜드를 만드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실제로 글로벌 딸기 브랜드도 크게 성공한 기업도 있다. 일본에서 처음 생긴 오이시란 딸기 회사는 태양열을 이용한 전기로 미국 등에서 엄청난 규모의 스마트팜을 운영하고 있다. 그 회사를 벤치마킹에 제대로 된 브랜드 딸기를 만들어 보는 게 그의 새로운 꿈이다. 그에게는 딸기 말고 또 하나의 희망이 자라고 있다. 사이클 선수로 활동하고 있는 아들 김도윤 군(17)이다. 아버지의 DNA를 물려받은 김도윤은 지난해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아시아 주니어 트랙 선수권에서 3관왕(단체추발, 옴니엄, 매디슨)에 올랐다. 김형일은 “승부의 세계에서 오래 살아본 입장에서는 아이가 그런 고통을 안고 살길 바라지 않았다”면서도 “하지만 본인이 스스로 노력하는 걸 보고는 응원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고 했다. 김도윤은 현재 장선재 감독이 지도하는 자전거 명문팀 LX에 입단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김도윤은 쉬는 날에는 틈틈이 딸기 농사도 돕는다. 전업 딸기 농부가 됐지만 김형일의 마음의 고향은 여전히 자전거다. 그는 “딸기로 성공한 뒤 언젠가는 다시 사이클로 돌아갈 것이다. 감독을 하는 동안 재정 부족으로 힘든 적이 많았다”라며 “돈을 많이 벌어서 자전거 선수나 팀을 후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그는 또 “아들에게 아시안게임에서 4위에 그친 내 한을 풀어달라고 말한 적은 없다”면서 “그래도 아빠가 못 나가 본 올림픽 무대에 서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지난해 12월 1일. 거구의 중년 남성은 양손에 빨간 딸기를 들고 펑펑 눈물을 쏟았다. 그는 1년여의 노력 끝에 처음으로 딸기를 수확했다.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양쪽 뺨으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김형일 전 대구시청 사이클 감독(48)은 평생 자전거와 함께 산 ‘자전거인’이다. 자전거가 좋아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안장에 올랐다. 서울체중·고와 한국체육대를 나와 2002년에는 부산 아시안게임에도 출전했다. 아쉽게 4위로 메달을 따진 못했지만 어엿한 국가대표 선수였다. 이후 경륜으로 전향한 뒤에도 꽤 이름을 날렸다. 지도자가 되어선 더 성공했다. 2013년 대구시청 감독을 맡아 수많은 제자를 길렀다. 2018년부터 2022년까지는 여자 사이클 국가대표 감독으로도 활동했다.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그가 이끈 여자 대표팀은 역대 한국 사이클 최고 성적인 금메달 5개와 동메달 1개를 수확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2019년 소강체육대상 지도자상을 받았고, 2020년에는 체육훈장 맹호장까지 수상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의 마음에는 자연과 흙에 대한 갈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꽂힌 게 바로 딸기였다. 김형일은 “농사를 지으려고 마음먹은 뒤 딸기를 생각하게 됐다. 딸기는 싫어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과일이지 않나”라며 “공부를 하다 보니 스마트팜을 통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딸기 업체도 알게 됐다. 나도 그렇게 해보자고 결심했다”고 했다. 그는 2024년 12월 31일자로 대구시청 감독직을 내려놨다. 그리고 이듬해 1월 17일 농업회사법인 흰돌팜을 설립했다. 몇해 전부터 틈틈이 익혀 온 지식을 이용하고, 외부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경기 여주에 딸기 스마트팜을 세웠다. 딸기는 겨울 작물이다. 대개 9월에 심기 시작해 12월부터 수확한다. 그는 ‘사계절 딸기’에 도전했다. 더 일찍 심어서 더 늦게까지 수확하는 게 목표였다. 하지만 농사라는 게 그리 만만한 게 아니었다. 그는 두 차례나 애지중지 키우던 딸기밭을 갈아엎어야 했다. 멋모르고 시도한 게 패인이었다. 9월에 다시 정식으로 3만 주를 심었다. 그는 “마치 아기 3만 명을 키우는 심정이었다. 매일 밤 농장에 와 ‘제발 잘 자라 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라며 “감독을 할 때는 더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선수를 몰아세울 수 있다. 하지만 딸기를 키울 때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첫 딸기를 수확한 이후부터는 정상 가도에 들어섰다. 첫 달에 700kg을 땄고, 1월에는 1000kg을 넘겼다. 모양이 예쁘고, 맛도 좋은 흰돌팜 딸기는 인천의 한 5성급 호텔에 납품도 한다. 대부분의 판매는 온라인으로 이뤄진다. 김형일은 “생일을 맞은 사람에게 온라인으로 커피나 케이크를 선물하는 것처럼 프리미엄 딸기를 선물하는 날이 올 때까지 열심히 할 것”이라고 했다. 딸기 농부로 이제 첫발을 뗀 그이지만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제2호 농장, 제3호 농장으로 규모를 키우고 딸기 전문 카페까지 차리는 것이다. 하지만 마음의 고향은 여전히 자전거다. 그는 “딸기로 성공한 뒤 언젠가는 다시 사이클로 돌아갈 것이다. 감독을 하는 동안 재정 부족으로 힘들 때가 적지 않았다”라며 “돈을 많이 벌어서 자전거 선수나 팀을 후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사람에게 있어 인생의 황금기는 언제일까. 많은 사람들이 젊은 시절을 가장 좋았던 때로 생각한다. 1990년대 LG 트윈스의 신바람 야구의 주역이었던 서용빈(55)도 그랬다. 단국대를 졸업하고 LG에 입단한 1994년 그는 신인으로 인생의 정점에 섰다. 당시 MBC 청룡을 이어받아 신생구단에 가깝던 LG는 그해 서용빈과 김재현, 유지현까지 ‘신인 3인방’을 앞세워 프로야구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신인 3명이 동시에 최고의 활약을 펼친 LG는 정규시즌에 이어 한국시리즈까지 제패했다. ‘신바람 야구’라는 조어를 탄생시킨 LG는 한국 최고의 인기 프로야구 팀이 됐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화려하게 핀 꽃이 그렇게 빨리 저물 줄은. 그리고 인내의 시간이 그렇게 오래동안 계속될 줄은. 스타플레이어가 즐비했던 LG는 여전한 인기를 자랑했지만 성적은 그렇지 못했다. 1997년과 1998년에는 한국시리즈까지 올랐지만 현대에 막혀 준우승에 그쳤다. 2002년 다시 한국시리즈에 올랐지만 삼성에 패하며 또 다시 정상 문턱에서 미끄러졌다. 야구도, 인생도 기회가 끝나면 위기가 온다. LG도 마찬가지였다. LG는 2003년부터 길고 긴 암흑기에 빠져들었다. 구단의 대대적인 투자와 선수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LG는 2003년 6위를 시작으로 2012년까지 10년 연속 포스트시즌 무대를 밟지 못했다. 신인 3인방도 뿔뿔이 흩어졌다. 신인이던 1994년과 이듬해 1995년까지 2년 연속 전경기 출장에 3할 타율을 기록했던 서용빈도 부상과 군복무 등을 거치며 평범한 선수로 전락했다. 2005년과 2006년 2년 연속 1할 대 타율을 기록한 뒤 선수에서 은퇴했다. 이후 코치가 돼 계속 LG 유니폼을 입었지만 사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코치 시절의 대부분의 LG 암흑기의 한 가운데서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20대 초반 짧은 영광을 맛본 후 30, 40대는 방황과 절망의 연속이었다. 운이 다시 트기 시작한 건 50대가 돼서였다. 야구 해설위원을 거쳐 2021년 KT 위즈 2군 감독으로 취임했는데 그해 KT는 창단 후 처음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랐다. 직접 그라운드에서 우승의 감격을 함께한 것은 아니었지만 1994년 이후 무려 27년 만에 ‘우승의 맛’을 봤다. 그리고 다시 친정팀 LG로 돌아온 지난해 전력강화 코디네이터 겸 총괄을 맡고 있는 상황에서 다시 한번 우승을 경험했다. 그가 LG 소속으로 정상에 오른 건 무려 31년 만이었다. 서용빈은 “대전 원정 경기에서 우승이 결정됐다. 우승을 확정 짓는 순간 너무 가슴이 벅차올라 혼자 우와~하고 함성을 질렀다”며 “그날 밤 편의점에서 안주와 맥주를 사와 혼자만의 ‘우승 파티’를 했다. 예전 힘들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고 했다.그 오랜 기다림 사이에 인생의 버팀목이 되었던 건 중 하나는 바로 공부다. 평생을 야구장에서 살던 그는 2018년 한국체육대 대학원에 입학하면서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 한때 프로야구에서 잘 나가던 스타플레이어 출신이 40대 후반의 나이에 조카뻘 학생들과 수업을 들은 것이다. 서용빈은 “2017시즌이 끝나고 잠시 유니폼을 벗게 됐다. 한편으로는 잘 됐다 싶었다. 이전부터 이론과 공부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스포츠코칭을 전공으로 선택했다”고 했다. 물론 그도 단국대에서 학부를 마쳤다. 하지만 야구부 시절 대학 생활에 대한 기억은 야구장과 숙소를 오간 게 대부분이다. 밥도 학생식당이 아닌 숙소에서 먹었다. 서용빈은 “당시만 해도 운동선수들은 수업도 제대로 듣지 않을 때다. 캠퍼스의 낭만이란 건 전혀 없었다”고 했다. 중년의 학교생활은 즐거움 그 자체였다. 대학원 수업은 일주일에 두 번 있었는데 그는 4, 5번학교에 갔다. 시간이 있으면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들고, 동료들을 만나고, 논문을 찾아보곤 했다. 서용빈은 “학교에 가는 것 자체가 너무 재미있었다. 수업이 없어도 학교 특유의 분위기가 너무 좋아 학교를 찾곤 했다”고 했다. 석사 과정을 마친 후엔 2023년부터는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현재 55세인 서용빈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라고 꼽는 게 바로 다시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50대의 서용빈은 뒤늦은 학교생활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서용빈은 “석사, 박사 공부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겸손’이란 단어를 가장 많이 배운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지난 선수 생활과 코치 생활을 돌이켜 보니 스스로에겐 자만했고, 상대방에게는 배려가 부족했더라. 한 명의 인간으로서 항상 더욱 겸손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에는 정말 열심히, 그리고 착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라며 “(비싸지 않은) 학생식당에서 내가 밥을 한 번 사면 그 사람들은 껌이나 캔 커피라도 하나 사서 보답했다.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새삼 깨달은 게 큰 수확”이라고 했다. 오랜 현장 생활을 거쳐 그는 현재 프런트로 제2의 야구 인생을 살고 있다. 그라운드가 아닌 낯선 사무실로 무대가 바뀌었지만 그는 ‘회사 생활’도 즐기고 있다. 서용빈은 “사무실 직원들과 함께 밥 먹고 생활하고 대화하는 것 자체가 재미있고 신기하다”라며 “예전의 나라면 전혀 알지 못했던 것들을 새롭게 경험하고 있다. 빨리 적응하려 노력 중”이라며 웃었다.낮에는 회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이중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탄탄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다. 그가 선수 생활에서 은퇴한 후 코치가 되면서 결심한 것 중 하나가 ‘배 나온 지도자는 되지 않겠다’는 거였다. 서용빈은 “선수 생활을 할 때 배 나온 지도자, 아침에 술 냄새를 풍기는 지도자는 선수들의 존경을 얻지 못했다”라며 “처음 결심한 대로 요즘도 지키려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요즘도 하루 한 시간 가량은 운동을 한다. 아침에 기상하면 20~30분 가벼운 유산소 운동을 하고, 피트니스센터나 집에서 30분 정도 근력 운동을 한다. 선수 시절에 비해 먹는 양도 줄였다. 그는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숟가락을 잘 놓는 편이다. 조금 과하게 먹었다 싶으면 알아서 숟가락을 내려놓는다”고 했다. 프로야구 선수 출신으로 그는 야구장 안팎에서 다양한 경험을 해 오고 있다. 그는 자신이 겪으며 느꼈던 일들을 후배 선수들도 경험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서용빈은 “학교와 회사를 다니면서 배우고 경험한 것들을 운동 후배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책임을 느낀다”라며 “유니폼을 입고 있든, 아니면 정장을 입고 있든 상관없이 어느 자리에서건 야구계를 위한 역할을 잘 해내고 싶다”고 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무서움(Fear).’ 레너드 코페트(1923∼2003)가 쓴 ‘야구란 무엇인가’의 첫 문장은 위의 낱말 하나로 시작한다. 야구 명저로 꼽히는 이 책에서 저자는 “무서움이야말로 야구라는 경기를 설명하는 첫 번째 화두가 돼야 한다. 타자는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최선으로 공을 때리려는 욕망과 피하려는 본능의 억제 사이에서 싸운다”고 썼다. 하지만 야구의 두려움은 겨울올림픽 종목 선수들이 감내해야 하는 원초적인 무서움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일반인이 가장 큰 공포를 느낀다는 아파트 10층 높이로 떠올라 다양한 기술을 선보이는 하프파이프, 50m 높이에서 공중회전을 하는 빅에어 등이 대표적이다. 시속 140km 이상 속도로 깎아지른 듯한 슬로프를 타고 내려오는 알파인 스키는 또 어떤가. 말 그대로 ‘삐끗’하는 순간 온몸이 부서질 수 있는 종목들이다.두려움 이겨낸 K여고생들 여고생 스노보더 최가온과 유승은이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겨울올림픽에서 딴 메달은 바로 그 공포를 이겨낸 산물이다. 18세 동갑내기인 둘은 일반인은 엄두도 내기 힘든 퍼포먼스를 처음 출전한 올림픽에서 보란 듯이 해냈다. 최가온이 금메달을 딴 13일 스노보드 여자 하프파이프 결선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최가온은 1차 시기 두 번째 점프에서 스위치 백사이드 1080을 시도하다가 파이프에 얼굴부터 떨어지며 크게 넘어졌다. 최가온조차도 “어디 한 군데 부러진 줄 알았다”고 말할 정도로 충격이 컸다. 공포를 딛고 2차 시기에 나선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3차 시기에서 최가온은 다섯 개의 점프를 모두 성공시키며 역전 우승했다. 최가온의 ‘인간 승리’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24년 1월 그는 스위스 락스에서 열린 국제스키·스노보드연맹(FIS) 월드컵 대회에서 고난도 공중 기술을 연습하다가 척추가 골절됐다. 다음 한 시즌을 통으로 날릴 정도로 큰 부상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두 번 다시 그곳을 쳐다보기도 싫었겠지만 최가온은 다시 부딪치는 쪽을 택했다. 몸이 낫자마자 락스에서 집중 훈련을 이어갔다. 그리고 이번 올림픽을 앞두고 1월 같은 곳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정상에 올랐다.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최가온의 서사는 어쩌면 그때부터 이미 예고돼 있었는지도 모른다. 유승은 역시 2024년 11월 월드컵 대회에서 복사뼈가 골절되는 부상을 입었다. 1년간의 재활 끝에 복귀한 훈련에서 이틀 만에 손목이 부러졌다. 이어지는 불운을 딛고 유승은은 10일 스노보드 빅에어에서 동메달을 따냈다. 특히 2차 시기에는 연습 때도 한 번 성공한 적 없던 프런트사이드 1440을 깔끔히 성공시켰다.메달이 아니어도 실패는 아니다 둘의 성공은 결과론적인 얘기다. 올림픽 메달을 따지 못했다고 해서 실패인 것은 아니다. 올림픽 알파인 스키 최고령 메달에 도전했던 ‘스키 여제’ 린지 본(42·미국)은 8일 여자 활강 레이스 도중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닥터 헬기에 실려 병원으로 이동되면서 본이 울부짖는 소리에 많은 이들이 머리를 감싸안았다. 실패로 보일 수 있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본은 이후 자신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기문과 충돌하면서 균형을 잃었는데 겨우 5인치(약 13cm)가 메달과 부상을 가른 차이라고 했다. 간발의 차로 기문을 피했다면 메달을 딸 수 있었다는 뜻이다. 본은 “인생처럼 스키도 위험을 감수한다. 때로 꿈을 이루지 못할 수 있지만 도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인생의 아름다움”이라며 “도전하지 않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 우리 인생에서 유일한 실패는 도전조차 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설 연휴가 끝나고 새해가 시작됐다. 과거를 딛고 새 마음으로 무언가에 도전하기에 딱 좋은 시기다. 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배드민턴 여제’ 안세영이 선봉에 선 한국 여자 대표팀이 사상 처음으로 아시아남녀단체배드민턴선수권대회 정상에 섰다. 여자 배드민턴 대표팀은 8일 중국 칭다오 콘손체육관에서 열린 대회 여자부 결승에서 중국을 3-0으로 완파했다.2진급 선수들을 파견하기도 했던 한국은 이번 대회에 안세영을 비롯해 최강 전력을 구성하며 우승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다. 결과는 2016년 대회 창설 이후 10년 만에 첫 우승이었다. 안세영은 이날 첫 경기에 나서 중국의 한첸시를 39분 만에 2-0(21-7, 21-14)으로 완파하며 기선을 제압했다. 이어 여자복식 백하나-김혜정 조가 지아이판-장슈셴 조를 2-0(24-22, 21-8)으로 이겼고, 김가은이 쉬원징(127위)을 2-1(19-21, 21-10, 21-17)로 꺽으면서 우승을 확정했다. 반면 남자 에이스 서승재가 어깨 부상으로 대회에 출전하지 못한 남자 대표팀은 전날 준결승에서 중국에 2-3으로 패하며 공동 3위로 대회를 마감했다.이헌재 기자 uni@donga.com}

소년등과(少年登科). 어린 나이에 큰 성취를 한다는 뜻이다. 좋은 말이지만 너무 이른 성취는 불행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경계의 의미도 담고 있다. 오죽하면 송나라 학자 정이가 소년등과를 인생의 세 가지 불행 중 하나로 꼽았을까. 프로야구 LG 트윈스에서 주전으로 활약했던 서용빈(55)도 그랬다. 그는 대학을 갓 졸업한 신인이던 1994년 인생의 정점에 섰다. 그를 포함해 김재현, 유지현까지 ‘신인 3인방’이 맹활약한 LG는 그해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랐다. LG의 ‘신바람 야구’는 그 무렵 생긴 말이다. 처음 정상에 오를 때만 해도 금방 또 우승할 줄 알았다. 하지만 우승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선수 생활을 마감할 때까지 그는 두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를 끼지 못했다. 지도자가 돼서는 더 심했다. 2000년대 들어 LG는 긴 암흑기를 겪었다. 우승은커녕 포스트시즌에도 진출하지 못하는 해가 이어졌다. 20대에 딱 한 번 짧은 영광을 맛본 후 30, 40대는 방황과 절망 속에서 보냈다. 운이 다시 트이기 시작한 건 50대가 돼서였다. 2021년 KT 위즈 2군 감독이던 그는 그해 팀의 창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함께했다. 그리고 친정팀 LG의 전력 강화 코디네이터 겸 총괄을 맡고 있던 지난해 다시 한번 우승했다. LG 소속으로 정상에 오른 건 31년 만이었다. 서용빈은 “우승을 확정 짓는 순간 너무 가슴이 벅차올라 혼자 ‘우와’ 하고 함성을 질렀다”며 “그날 밤 편의점에서 안주와 맥주를 사와 혼자만의 ‘우승 파티’를 했다. 예전의 힘들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고 했다. 50세를 전후해 그의 인생은 훨씬 다채로워졌다. 뒤늦게 다시 배우기 시작하면서다. 평생을 야구장에서 살던 그는 2018년 한국체육대 대학원에 입학해 석사 학위를 땄다. 2022년부터는 같은 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낮에는 야구단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이중생활이다. 서용빈은 “다시 배우기 시작한 건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생각의 폭이 넓어졌다.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새삼 깨달은 것도 큰 수확”이라고 했다. 단국대 야구부 시절 그의 활동 공간은 대부분 야구장이었다. 밥도 학생식당이 아닌 숙소에서 먹었다. 서용빈은 “당시만 해도 수업도 제대로 듣지 않을 때다. 캠퍼스의 낭만이란 건 전혀 없었다”며 “오히려 요즘 학생식당을 이용하고, 동료들과 차를 마시며 대화를 한다. 그때 못 즐겼던 생활을 이제야 만끽하고 있다”고 했다. 오랜 현장 생활을 거쳐 그는 현재 프런트로 제2의 야구 인생을 살고 있다. 그라운드가 아닌 사무실로 무대를 바꾼 그는 ‘회사 생활’도 즐기고 있다. 서용빈은 “직원들과 함께 밥 먹고 생활하고 대화하는 것 자체가 재미있고 신기하다”면서 “예전의 나라면 전혀 알지 못했던 것들을 새롭게 경험하고 있다. 빨리 적응하려 노력 중”이라며 웃었다. 그는 “학교와 회사를 다니면서 배우고 경험한 것들을 운동을 하는 후배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책임을 느낀다”며 “어느 자리에 있든 나만의 역할을 잘 해내고 싶다”고 했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인생의 하이라이트가 10초도 안 되는 시간에 결정되는 건 대단한 일이다.” 달리기 마니아로 유명한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이다. 육상 종목은 ‘올림픽의 꽃’이라 불린다. ‘육상의 꽃’은 단연 남자 100m다. 지구에서 가장 빠른 인간을 가리는 남자 육상 100m는 짧지만 화려하다. 출발 총성과 함께 단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는 강렬한 종목이다. 누군가에겐 그렇게 화려할지 몰라도 한국을 대표하는 스프린터였던 김국영(35)에게는 허탈한 꿈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김국영은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육상 남자 100m에 출전해 10초37을 기록했다. 한국 선수로는 20년 만에 올림픽 무대에 섰지만 단 한 번의 레이스로 예선 탈락하고 말았다. 김국영은 “분명히 총소리는 들었는데 이후 어떻게 뛰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눈을 뜨니까 이미 레이스가 끝나 있었다”며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 선수였나 하는 허탈감과 함께 내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밀려들었다”고 했다. 지구 정반대 편에서 열린 리우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 한국 선수단은 30시간 가까이 비행기를 타야 했다. 김국영을 비롯한 육상 대표팀은 경기가 열리기 나흘 전에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했다. 시차 적응 등 현지 적응 훈련을 이틀 정도 한 뒤 레이스를 했으니 정상 컨디션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달렸으나 레이스는 10초 만에 끝났다. 김국영은 “올림픽의 중압감은 이전에 뛰어본 대회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냥 다른 선수들을 따라가다가 끝난 것 같다”고 했다. 올림픽 등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들은 일반적으로 경기 이튿날 곧바로 귀국한다. 김국영 역시 바로 다음 날 귀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갈 때와 똑같이 올 때도 30시간이 넘게 걸렸다. 불과 10초 경기를 위해 비행기만 60시간 넘게 탄 것이다. 하지만 리우에서의 허탈한 기억은 그에겐 엄청난 자극과 동기부여가 됐다. 김국영은 “여기서 포기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부터라도 정신 똑바로 차리자고 다짐했다”고 했다. 리우 올림픽 이듬해인 2017년은 김국영 육상 인생의 하이라이트였다. 그해 6월 25일 열린 전국육상경기대회 남자 100m 준결선에서 그는 10초13을 뛰며 한국신기록을 세웠다. 2전 전 자신이 세웠던 한국기록을 0.03초 단축했다. 그리고 이틀 뒤 열린 코리아오픈 국제 육상대회 결선에서 10초07로 골인하며 재차 한국신기록을 경신했다. 한국인 사상 첫 9초대 진입도 기대되는 페이스였다. 0.08초. 김국영은 바로 그 찰나의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달리고 또 달렸다. 하지만 끝내 10초의 벽은 넘지 못했다. 김국영은 지난해 말 은퇴하면서 100m 9초대 진입은 한국 육상의 미완의 숙제로 남고 말았다.10초 벽을 넘기 위해 그는 갖은 노력을 다했다. 트랙 위에서뿐 아니라 일상생활도 9초대 진입에 맞췄다. 사우나 등에 갈 때면 그는 숫자 9가 들어간 9번이나 99번 로커를 사용했다. 자동차 번호판을 고를 때로 숫자 9가 많이 들어가는 걸 골랐다. 현재 그의 자동차 번호판에는 숫자 9가 3개나 포함돼 있다. 김국영은 “심지어 아파트로 이사할 때도 9층 집을 먼저 알아봤다. 그런데 9층 집 물건이 없어 뜻을 이루진 못했다”며 웃었다. 그만큼 간절하고 절박했지만 하늘은 끝내 그에게 9초대를 허락하지 않았다. 김국영은 “돌이켜 보면 평생 목표가 9초대 진입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나마 10초07을 뛸 수 있었던 것 같다”라며 “만약 내가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금메달이라는 더 큰 꿈을 꿨다면 9초대에 들어갈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아쉬움이 있기에 후배들에게도 ‘항상 꿈을 더 크게 가지라’고 조언한다”라고 했다.김국영은 은퇴에 대해 “미련도 없고, 아쉬움도 없다”고 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쏟아부었기에 할 수 있는 얘기다. 그는 “9초대 선수가 나오기 위해선 무엇보다 재능을 타고나야 한다. 여기에 선수의 노력, 지도자의 열정, 당일 날씨와 컨디션 등이 더해져야 나올 수 있다”라고 했다.2019년 전국육상선수권은 어쩌면 그에게 다시 못 올 기회였다. 준결선에서 맞바람을 뚫고 10초12를 끊을 정도로 컨디션이 좋았다. 하지만 하루 뒤 열린 결선에서 10초18에 그쳤다. 그는 “뒷바람이 조금만 불어줬으면 9초대가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했다. 짹짹거리는 새 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였다”고 했다.작년 10월 초 은퇴한 김국영은 짧은 휴식 후 국가대표 지도자가 돼 다시 진천선수촌으로 돌아왔다. 여자 단거리 국가대표팀 코치가 그의 새 직함이다. 김국영은 “약 두 달여 동안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자고 싶은 만큼 자면서 행복하게 지냈다”며 “이렇게 1, 2년 쉬어보면 어떨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내 몸에 여전히 스프린터의 기운과 경험이 남아 있을 때 후배들을 지도하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했다”고 복귀 배경을 설명했다. 그런데 왜 남자 대표팀이 아니라 여자 대표팀일까. 김국영은 “최근 남자 선수들은 많이 성장했지만 여자 선수들은 그렇지 않다. 격차가 더 벌어지기 전에 도와야겠다고 생각해 여자 대표팀에 지원했다”고 말했다. 이영숙(61)이 1994년 세운 여자 100m 한국기록 11초49는 올해로 32년째 깨지지 않고 있다. 김국영은 19살이던 2010년 전국육상선수권 남자 육상 100m 예선에서 10초31을 뛰며 고(故) 서말구가 1979년 세웠던 종전 한국기록 10초34를 31년 만에 경신했는데 이보다 더 오랜 기간 깨지지 않고 있다. 김국영은 “가을에 열리는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육상 여자 400m 릴레이에서 선수들이 시상대에 설 수 있도록 돕고 싶다”라고 했다.장기적으로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9초대의 벽을 후배 선수들이 깨는 데 힘을 보태려 한다. 한국 육상은 주변국들에 비해 한참 뒤처져 있다. 중국과 일본에선 이미 10년쯤 전에 10초대 벽을 허문 선수가 나왔다. 중국의 쑤빙톈(37)은 2015년, 일본의 기류 요시히데(31)는 2017년에 각각 처음 10초 벽을 깨뜨렸다. 육상 불모지로 통하는 동남아에서도 100m를 9초대에 달리는 선수가 나왔다. 태국의 푸리폴 분손(20)은 작년 12월 동남아시안(SEA) 게임에서 9초94를 기록했다. 이 종목 세계 기록은 ‘번개 우사인 볼트(자메이카)가 2009년 세운 9초58이다.올해부터 지도자로 새출발하는 김국영은 올해 아빠로도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 2023년 국가대표 멀리뛰기 선수 출신 김규나(36·은퇴)와 결혼한 그는 조만간 쌍둥이 아들의 아빠가 된다. 엄마, 아빠의 육상 DNA를 물려받은 아이들에 대한 기대가 주변에서 더 크다. 김국영은 “사람들의 기대치가 높아서 만약 운동을 못 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되기도 한다”라며 “무조건 운동을 시킬 생각은 없다. 아이들이 운동을 좋아하고, 또 잘한다면 전폭적으로 지원할 생각이다. 이왕이면 한 명은 나처럼 단거리 선수, 또 한 명은 아내처럼 멀리뛰기 선수로 키워보고 싶다”며 웃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한국프로야구 통산 418홈런의 주인공 박병호(40)가 키움 히어로즈 코치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 잔류군 선임 코치가 그의 새 직함이다.박병호만큼 화려한 선수 시절을 보낸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2012년부터 2015년까지 사상 최초로 4연속 홈런왕에 올랐다. 2014년, 2015년에는 두 시즌 연속 50홈런 이상을 기록했고, 이를 발판 삼아 2016년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미네소타 트윈스에 입단했다. 2022년에는 KT 위즈 소속으로 35홈런을 날리며 KBO리그 역대 최고령 홈런왕(36세)에도 올랐다.‘선수’ 박병호는 늦게 핀 꽃이었다. 성남고 시절 역사상 최초의 4연타석 홈런을 때린 그는 2005년 1차 지명으로 LG 트윈스에 입단했지만 좀처럼 유망주의 껍질을 깨지 못했다. LG 유니폼을 입고 6년 반 동안 그가 기록한 홈런은 고작 24개였다.2011년 넥센(현 키움)으로의 트레이드가 반전의 계기가 됐다. LG에서 25번을 달았던 박병호는 넥센에서 52번으로 바꿔 달았다. 앞뒤가 바뀐 등번호처럼 야구 인생도 180도 달라졌다. 넥센에서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홈런 타자로 다시 태어났다.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칭찬의 힘박병호는 최근 취재진과의 인터뷰에서 “예전의 나는 ‘어떻게 하면 삼진을 안 당할까’ 생각했던 선수였다. 하지만 김시진 감독님한테 삼진당해도 칭찬받고 나서 자신감이 생겼다. 박흥식 코치님, 허문회 코치님을 만나면서 좋은 성적을 이룰 수 있었다”고 했다.LG도 박병호에게 기회를 주지 않은 건 아니었다. 신인 때부터 꾸준히 경기에 출전시켰다. 하지만 처음 한두 타석 삼진을 먹고 들어오면 곧바로 교체되기 일쑤였다. 1군에서 몇 경기 부진하면 2군행 통보가 날아들었다.넥센은 달랐다. 당시 넥센 사령탑이던 김시진 감독은 박병호에게 “홈런을 치든, 삼진을 먹든 너는 변함없이 우리 팀 4번 타자”라고 격려했다. “타율이 너무 낮은 것 아니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박흥식 당시 타격 코치는 “4번 타자는 평소에 못 쳐도 된다. 결정적일 때 쳐주면 된다. 박병호는 그런 타자다”라고 답했다. 실패 속에서도 칭찬을 먹고 자란 박병호는 거짓말처럼 쑥쑥 성장했다. 박병호는 “어렸을 때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게 와닿지 않았다. 김시진 감독님의 한마디가 저의 많은 것을 바꿔 놨다”고 했다.은퇴와 함께 곧바로 코치 생활을 시작하는 것도 역시 박병호답다. 요즘 스타플레이어 출신들은 종목을 불문하고 그라운드보다 화려한 방송계를 선호한다. 승부 세계의 피 말림도 없고, 시간도 상대적으로 여유롭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도 훨씬 풍족하다.실력만큼 좋았던 인성하지만 박병호는 1군 코치도, 2군 코치도 아닌 3군으로 불리는 잔류군 코치다. 최고였던 선수가 가장 밑바닥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다. 연봉은 2년 전 받던 7억 원의 채 10분의 1도 안 되는 수준이다. 박병호는 “저도 힘든 시간이 길었기 때문에 선수들과 공감하는 코치가 되고 싶다”며 “힘든 생활이 길어지는 선수에게는 칭찬이 필요하다. 칭찬 많이 해주고, 긍정적으로 해주고 싶다. 선수들 이야기 많이 들으면서 운동의 끈을 놓지 않게 해보고 싶다”고 했다.키움 구단은 박병호의 잔류군 코치 선임을 알리면서 “박병호가 현역 시절 보여준 기량과 자기 관리, 모범적인 태도는 후배 선수들에게 큰 귀감이 됐다”고 밝혔다. 한창 잘나가던 시절에도 박병호는 겸손한 선수였다. 특급 스타이면서도 항상 주변을 챙겼다. 김재웅 키움 홍보팀장은 “무슨 기록을 세웠을 때 박병호는 선수단뿐 아니라 프런트 직원, 구장 경호팀과 미화원 여사님들도 빼놓지 않고 선물하며 고마움을 표현하곤 했다”고 전했다. ‘코치’ 박병호가 가져올 선한 영향력이 벌써 기대된다. 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프로야구 한화 거포 노시환이 연봉 10억 원에 계약하며 팀 내 가장 비싼 선수가 됐다. 한화는 재계약 대상자 62명의 연봉 계약을 마쳤다고 21일 발표했다. 내야수 노시환은 지난해 3억3000만 원에서 무려 6억7000만 원이 오른 10억 원에 계약했다. 이는 팀 내 최고인상률(약 203%)이자 최대 인상액이다.노시환은 지난해 정규시즌 144경기 전경기에 출장해 타율 0.260, 32홈런, 101타점을 기록했다. 2023년 31홈런을 넘어 개인 한 시즌 최다 홈런을 기록했다. 마무리 투수 김서현은 지난해 5500만 원에서 200% 인상된 1억6800만 원에 재계약했다. 김서현은 69경기에 등판해 2승 4패 33세이브 2홀드, 평균자책점 3.14의 성적을 냈다.이밖에 외야수 문현빈은 작년 8800만 원에서 161.4% 오른 2억3000만 원에 계약했고, 투수 문동주도 2억2000만 원에 도장을 찍었다. 지난해 신인으로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던 투수 정우주는 3000만 원에서 약 133% 오른 7000만원을 받는다. 연봉 협상을 마무리한 한화는 23일 호주 멜버른으로 1차 스프링캠프를 떠난다.이헌재 기자 uni@donga.com}

0.08초. 눈을 깜빡이는 것보다 짧은 시간이다. 한국 대표 스프린터 김국영(35)은 바로 그 찰나의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달리고 또 달렸다. 하지만 끝내 목표를 이루지 못한 채 지난해 말 은퇴하면서 100m 9초대 진입은 한국 육상의 미완의 숙제로 남고 말았다. 김국영은 19세이던 2010년 전국육상선수권 남자 육상 100m 예선에서 10초31을 뛰어 고 서말구가 1979년 세웠던 종전 한국기록(10초34)을 31년 만에 경신했다. 김국영은 이후 네 차례나 더 한국기록을 깨뜨렸다. 최고 기록은 2017년 세운 10초07이었다. 10초 벽을 넘기 위해 그는 갖은 노력을 다했다. 트랙 위에서뿐 아니라 일상생활도 9초대 진입에 맞췄다. 목욕탕에서 그는 숫자 9가 들어간 9번이나 99번 로커를 사용했다. 그의 자동차 번호 뒷자리에도 숫자 9가 3개나 포함돼 있다. 그만큼 간절하고 절박했지만 하늘은 끝내 그에게 9초대를 허락하지 않았다. 김국영은 “돌이켜 보면 평생 목표가 9초대 진입이었기에 그나마 10초07을 뛸 수 있었던 것 같다”라며 “만약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꿈꿨다면 9초대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후배들에게도 ‘꿈을 크게 가지라’고 조언한다”라고 했다. 김국영은 은퇴에 대해 “미련도 없고, 아쉬움도 없다”고 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쏟아부었기에 할 수 있는 얘기다. 그는 “9초대 선수가 나오기 위해선 무엇보다 재능을 타고나야 한다. 여기에 선수의 노력, 지도자의 열정, 당일 날씨와 컨디션 등이 더해져야 나올 수 있다”라고 했다. 2019년 전국육상선수권은 어쩌면 그에게 다시 못 올 기회였다. 준결선에서 맞바람을 뚫고 10초12를 끊을 정도로 컨디션이 좋았다. 하지만 하루 뒤 열린 결선에서 10초18에 그쳤다. 그는 “뒷바람이 조금만 불어줬으면 9초대가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바람 한 점 없이 정말 고요한 날이었다”고 했다. 작년 10월 초 은퇴한 김국영은 두 달 휴식 후 12월 국가대표 지도자가 돼 다시 진천선수촌으로 돌아왔다. 여자 단거리 국가대표팀 코치가 그의 새 직함이다. 김국영은 “내 몸에 스프린터의 기운과 경험이 남아 있을 때 후배들을 지도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라며 “최근 남자 선수들은 많이 성장했지만 여자 선수들은 그렇지 않다. 격차가 더 벌어지기 전에 도와야겠다고 생각해 여자 대표팀에 지원했다”고 말했다. 이영숙(61)이 1994년 세운 여자 100m 한국기록 11초49는 올해로 32년째 깨지지 않고 있다. 올해 김국영은 지도자 및 아빠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 둘 다 가본 적 없는 길이다. 김국영은 “가을에 열리는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육상 여자 400m 릴레이에서 선수들이 시상대에 설 수 있도록 돕고 싶다”라고 했다. 장기적으로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9초대의 벽을 후배 선수들이 깨는 데 힘을 보태려 한다. 중국과 일본은 이미 9초대 선수가 나왔고, 작년 말에는 태국의 푸리폴 분손이 9초94를 뛰며 동남아 선수 최초로 10초 벽을 깼다. 국가대표 멀리뛰기 선수 출신 김규나(36·은퇴)와 결혼한 그는 조만간 쌍둥이 아들의 아빠가 된다. 김국영은 “우리 부부보다 주변에서 더 기대하시는 것 같다”라면서 “아이들이 운동을 좋아하고 잘한다면 한 명은 단거리 선수, 또 한 명은 멀리뛰기 선수로 키워볼 것”이라며 웃었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