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헌재

이헌재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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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중요하지 않은, 하지만 누군가에겐 재미있을지도 모를 스포츠의 뒷담화를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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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9~2026-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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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헌재의 인생홈런]탁구 치던 ‘우리 영식이’ “요즘은 샌드백도 칩니다”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단은 금 9, 은 3, 동메달 9개 등 총 21개의 메달을 합작했다. “할 수 있다” 신화를 만든 펜싱 박상영, 여자 양궁 2관왕에 오른 장혜진 등 여러 스타가 탄생했다. 그런데 메달리스트가 아닌데도 ‘국민적인 스타’가 된 선수가 있었다. 탁구의 정영식(34)이었다. 정영식은 탁구 남자 단식 16강전에서 당대의 일인자 마룽(중국)을 상대로 눈물겨운 투혼을 보였다. 첫 두 세트를 따내며 난공불락이던 만리장성을 넘을 뻔했다. 정영식의 기대 이상의 선전에 마룽은 진땀을 흘렸고, 중국 대표팀 감독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버렸다. 하지만 이후 듀스를 거듭하는 접전 끝에 결국 무릎을 꿇었다. 정영식은 패배 직후 펑펑 눈물을 쏟았다. 정영식은 남자 단체전에서도 선전했으나 독일과의 동메달 결정전에서 패해 결국 올림픽 메달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하지만 포기를 모르고 독사처럼 달려드는 정영식의 모습은 진한 감동을 안겼고, 팬들은 그에게 ‘우리 영식이’란 별명을 붙여줬다. 정영식은 부지런한 선수였다. 성실함을 넘어 ‘탁구밖에 모르는 선수’라는 평가를 들었다. 어릴 때부터 유망주였던 그는 성인 무대에서도 착실히 성장했다. 중국과 일본, 폴란드 등 해외 리그에서도 뛰었다. 하지만 정작 정영식 본인은 행복하지 않았다고 했다. 선수 생활 내내 심각한 불안 장애에 시달렸던 그는 탁구채를 내려놓을 생각도 여러 번 했다. 하지만 주변에서 함께 땀 흘리는 동료들을 보며 참고 또 참았다. 2021년 도쿄 올림픽에도 출전한 그는 2023년 31세의 이른 나이에 은퇴했다. 정영식은 “탁구를 칠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스스로 알고 있었기에 더 열심히 했던 것 같다”고 했다. 은퇴 후 미래에셋증권 탁구단 코치로 일하던 정영식은 2024년 9월 창단한 세아탁구단의 초대 감독으로 부임했다. 32세의 나이에 실업팀 감독이 될 수 있었던 건 많은 이들이 그의 탁구에 대한 열정과 사람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감독’ 정영식은 요즘 행복하게 지낸다. 불안 증세도 사라졌다. 그는 “가르친 선수들의 실력이 느는 걸 볼 때마다 너무 재미있다”며 “휴가를 받아도 어서 빨리 체육관 가서 선수들을 보고 싶은 마음뿐”이라고 했다. 달라진 환경 덕분이겠지만 또 하나의 계기가 있다. 바로 복싱이다. 정영식은 약 2년 전부터 복싱을 시작했다. 퇴근 후 저녁 늦게 체육관에 가 한 시간 반가량 땀을 흘린다. 정영식은 “기존의 내 성격이나 성향과는 전혀 다른 운동을 해보고 싶었다”며 “샌드백을 치고, 스파링을 하면서 마음속 두려움을 많이 극복했다”고 했다. 정영식은 내친김에 생활체육대회에도 두 번이나 출전했다. 현재 전적은 2전 2패다. 그는 경기 때 가르치는 제자들도 모두 불러 경기를 보게 했다. 정영식은 “탁구가 기술과 체력의 종목이라면 복싱은 기세와 깡다구의 스포츠다. 기세에 밀리면 주먹도 제대로 내지 못한다”며 “복싱을 통해 그동안 몰랐던 인생의 새로운 면을 알게 됐다. (생활체육대회) 챔피언에 오르는 날까지 더 노력하겠다.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제자들도 배우는 게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 2026-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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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슈퍼 루키’ 김민솔, 한국여자오픈 정상…가장 먼저 시즌 2승

    ‘슈퍼 루키’ 김민솔(20)이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시즌 첫 메이저 대회이자 내셔널타이틀 대회 한국여자오픈 정상에 올랐다. 김민솔은 14일 경기 양주 레이크우드 컨트리클럽 산길·숲길 코스(파71)에서 열린 메르세데스-벤츠 제40회 한국여자오픈 골프선수권대회 최종 4라운드에서 버디 2개와 보기 1개로 한 타를 줄였다. 최종 합계 4언더파 280타를 적어낸 김민솔은 국가대표 후배이자 9월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대표로 선발된 아마추어 양윤서(18·합계 3언더파 281타)를 1타차로 제치고 우승했다. 올해 4월 iM금융오픈에서 와이어 투 와이어 우승을 달성한 김민솔은 이번 시즌 가장 먼저 2승을 올렸다. 김민솔은 우승 상금 4억 원과 함께 1억3000만 원 상당의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을 부상으로 받았다.시즌 상금 7억7000만 원을 쌓은 김민솔은 상금 랭킹 1위와 대상 포인트 1위가 됐고, 신인왕 레이스 1위 자리도 굳게 지켰다. 김민솔은 지난해 2승을 거뒀지만 1부 투어 출전이 15개 밖에 되지 않아 올해 신인 자격을 유지하고 있다. 김민솔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메이저대회 AIG 여자오픈과 일본의 내셔널타이틀 대회 일본여자오픈 챔피언십 출전권까지 확보했다.챔피언조에서 전·현 국가대표 선수들 간의 치열한 대결이 펼쳐졌다. 김민솔은 10번홀(파4)에서 양윤서가 보기를 범한 사이 단독 선두로 올라섰다. 양윤서는 14번홀(파5)에서도 보기를 범했고 침착하게 파를 지킨 김민솔이 두 타 차로 앞섰다. 김민솔은 15번홀(파4)에서 6m 거리의 버디를 잡아내며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지난주 US여자오픈에서 공동 54위를 한 김민솔은 “미국 대회에서 경기를 운영하는 능력 등 많은 것을 배우고 돌아왔다. 시즌 첫 우승 때도 밝혔지만 세계 정상을 꼭 찍어 보고 싶은 목표는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18년 만에 한국여자오픈에 출전한 신지애는 3오버파 287타를 적어내며 공동 7위로 대회를 마쳤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 2026-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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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헌재]이상민으로 본 ‘명장’과 ‘졸장’ 사이

    1990년대는 폭언과 체벌이 공공연하게 벌어지던 ‘야만의 시대’였다. 연세대 농구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이상민, 서장훈, 문경은, 우지원 등 스타들이 즐비했던 연세대는 농구대잔치를 휩쓸며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자칫 어린 선수들이 엇나갈까 봐 최희암 연세대 감독은 선수들을 더 엄격하게 대했다. 다만 이상민은 예외였다. 이상민은 최 감독의 속을 한 번도 썩이지 않았다. 그만큼 농구를 잘했고, 자기 관리에 철저했다. 그런데 4학년 때 딱 한 번 최 감독은 이상민에게 손을 댔다. 뭘 잘못해서가 아니었다. 당시 주장이던 이상민을 본보기 삼아 후배 선수들의 기강을 잡으려다 벌어진 일이었다.지시하기보다 듣는 리더 최고의 선수였던 이상민은 3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올해 감독으로 가장 높은 자리에 섰다. 그가 이끈 KCC는 지난달 2025∼2026 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에서 소노를 꺾고 정상에 올랐다. 정규리그 6위 팀 사상 첫 챔프전 우승이었다. 이 감독 역시 프로농구 최초로 한 팀에서 선수, 코치, 감독으로 모두 우승하는 새 역사를 썼다. 화려한 기록 잔치와 별개로 화제가 됐던 건 이 감독의 리더십이었다. KCC의 작전 타임은 다른 팀과는 완전히 달랐다. 예를 들자면 가드 허훈이 “우리 그거 하던 거 있잖아” 하고 외치면 이 감독이 “백도어(수비가 앞쪽으로 쏠린 틈을 타서 골밑으로 파고드는 공격) 하자고?”라고 되묻는 식이었다. 이 감독이 “이렇게 할까”라고 제안하면 선수들이 “아니야, 다른 작전이 나을 것 같아”라고 반대 의견을 내기도 했다. 이 감독은 자신의 선수 시절을 떠올리며 “인과응보”라면서 웃었다. 이 감독도 삼성 선수 시절 당시 안준호 감독의 작전 지시에 반대 의견을 내곤 했다. 감독 이상민은 최희암보다는 안준호의 길을 택했다. 지시하기보다는 듣고자 했다. 선수를 혼낼 일이 있어도 꾹 참았다가 따로 불러서 설득했다. 이런 이 감독을 두고 팬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소통하는 감독’이라고 옹호하는 쪽이 있는가 하면, 선수 장악력이 떨어지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이 감독 역시 “결과적으로 우승했기에 망정이지 우승을 놓쳤다면 선수들에게 휘둘리는 감독 소리를 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소통 리더십을 통해 그는 최 감독도 해보지 못한 프로농구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명장은 좋은 선수들이 만든다 이 감독은 KCC 지휘봉을 잡기 전에 8시즌 동안 삼성 감독직을 수행했다. 선수들을 대하는 방식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삼성 감독 시절 이상민은 우승은커녕 플레이오프 진출도 두 번밖에 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을 “실패한 감독이었다”고 했다. 그때와 지금의 차이는 선수 구성이다. 이 감독은 “국가대표급 선수들로 구성된 KCC에서는 선수들이 제 기량을 맘껏 펼칠 수 있게 하는 데 주력했고, 좋은 결과가 나왔을 뿐”이라고 했다. 타 종목도 마찬가지다. 프로야구 염경엽 감독은 넥센과 SK(현 SSG) 시절 ‘염갈량’이란 별명으로 불렸지만 선수층이 두껍지 않았던 두 구단에서 우승하진 못했다. 하지만 2023년 LG 사령탑에 취임한 뒤 그해 29년 만에 팀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안겼고, 지난해 또 한 번 정상에 섰다. 올 시즌에도 LG는 선두 싸움을 하고 있다. 차이는 역시 선수들이다. LG에선 플랜A가 생각처럼 되지 않아도 플랜B, 플랜C로 바꾸면 된다. 좋은 선수가 많다고 반드시 우승하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좋은 선수 없이 우승할 확률은 지극히 낮다. ‘명장’과 ‘졸장’을 가르는 건 결국 선수들이다. 그리고 선수단을 구성하고 키우는 건 구단이다. 하위권 팀들 팬들의 분노는 감독을 향하곤 한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원인은 다른 곳에 있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 2026-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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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코파이도 찔끔 먹던 신수지 “이젠 맘껏 먹고 행복하게 운동해요”[이헌재의 인생홈런]

    소녀는 우연히 TV에서 본 ‘빨간 리본’에 단번에 매료됐다. 부모님에게 리듬체조를 시켜달라고 졸랐다. 기계체조 선수 출신인 아버지는 반대했다. 운동으로 성공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불모지나 다름없는 리듬체조라니. 하지만 딸은 3년을 끈질기게 고집을 피웠다. 결국 부모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원조 ‘리듬체조 요정’ 신수지는 그렇게 초등학교 4학년 때 본격적으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목표는 태극마크를 달고 올림픽에 나가는 거였다. 너무나 간절했던 터라 하루 10시간의 훈련도 기꺼이 이겨냈다. 함께 시작했던 동료들이 힘든 훈련에 하나둘씩 포기했지만 그만은 끝까지 남았다. 세계적인 기술을 익히기 위해 고등학교 1학년 때 러시아로 훈련을 갔다. 유일한 동양인 소녀였던 그는 모든 걸 스스로 알아서 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항상 긍정적이었다. 표정이 일그러질 수밖에 없는 힘든 동작을 할 때도 웃으면서 했다. 러시아 리듬체조 대모로 불리던 이리나 비네르 당시 러시아체조협회장이 그런 신수지를 예쁘게 봤다. 비네르 회장은 훈련부터 일상생활까지 신수지를 각별하게 챙겼다. 리듬체조 선수에게 훈련만큼 힘든 게 식단 조절이다.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최소한의 음식을 섭취한다. 아침은 요거트 위주로 간단하게 먹고 난 뒤 곧바로 운동을 시작한다. 쌩쌩이 1000개과 복근 운동 등 체력 훈련 위주다. 점심은 탄수화물을 살짝 넘고 저녁도 단백질 위주로 가볍게 먹는다. 오후 이후엔 기술 훈련을 한다. 혼자 전지훈련을 온 신수지는 더더욱 엄격하게 관리해야 했다. 처음에는 그를 경계하던 러시아 선수들의 눈에도 그가 안쓰럽게 보였나 보다. 몰래 숨겨놓은 초코파이를 하나씩 건네곤 했다. 한입에 먹기엔 너무 아까웠다. 신수지는 “초코파이를 주무르고 또 주물러서 끈적한 떡처럼 만들었다. 너무 배가 고프고 싶을 때마다 손톱만큼 떼어먹곤 했다”고 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그는 2007년 그리스에서 열린 세계선수권에서 17위를 기록하며 상위 20위까지 주어지는 올림픽 출전권을 획득했다. 2008 베이징 올림픽 개최국 자격으로 출전권을 얻은 중국 선수들을 제외하고는 아시아 선수로는 유일한 자력 출전권이었다. 한국 리듬체조 선수가 올림픽 무대에 선 것도 1992 바르셀로나 대회 이후 16년 만이었다. 올림픽 예선에서 12위를 기록하며 최종 라운드에는 진출하지 못했지만 당시 한국 선수 최고 성적이었다. 신수지는 “10년 넘는 노력에 대한 보상을 받는 기분이었다. 당시 워낙 비인기 종목이라 부모님도 어렵게 티켓을 구해 관중석 제일 위쪽에서 경기를 지켜보셨다”라며 “나름대로 최선의 경기를 마친 뒤 부모님께 손을 흔들려 퇴장했다. 내 평생 최고의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라고 말했다. 신수지 이후 리듬체조를 하는 선수들이 점점 늘어났다. 신수지는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는 발목 인대 부상을 안고 후배들과 함께 단체전에 출전해 4위를 했다. 동메달에는 단 0.1점이 모자랐다. 주요 국제대회 메달은 없었지만 한국 리듬체조는 신수지 이전과 이후로 나뉠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신수지가 정작 국민적인 화제를 모은 건 2011년 은퇴 이후다. 2013년 신수지는 프로야구 두산 안방 경기의 시구자로 마운드에 섰는데 이때 그가 선보인 360도 회전 시구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신수지는 “체조 선수 출신다운 시구를 고민하다가 선수 때 장기였던 백 일루전(Back Illusion·한 다리를 축으로 다른 다리를 360도 수직 회전해 원을 만드는 기술)을 응용해 앞으로 도는 일루전을 한 뒤 공을 던졌다”고 했다. 이 시구는 역대 한국프로야구 시구사에서 역대 최고의 시구 중 하나로 꼽힌다. 얼마나 큰 화제가 됐는지 신수지의 시구는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에도 대대적으로 소개됐다. 신수지는 “체조 선수 시절에도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 주시긴 했는데 아무래도 시구 이후에 알아봐 주시는 분들이 크게 늘었다”라며 “일루전 시구 후 여기저기서 많이 불러주셔서 머리카락으로 바닥 청소를 많이 쓸고 다녔던 것 같다”라며 웃었다. 밝고 건강한 이미지의 신수지는 이후 각종 스포츠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방송인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스포테이너(스포츠+엔터테이너) 신수지의 시작이었다. 이 모든 게 우연만은 아니다. 리듬체조 선수를 할 때부터 그는 한 곳에 꽂히면 무서울 정도로 열심히 했다. 시구 역시 마찬가지다. 시구자로 결정됐다는 소식을 들은 후부터 그는 혼자서 피칭 연습을 시작했다. 하루 150개씩 이틀간 300개를 던졌다. 그가 던진 공이 스트라이크 존 비슷한 곳에 꽂힌 것도 그런 이유다. 신수지는 이후 볼링, 양궁, 씨름, 아이스하키에 이어 야구까지 수많은 종목을 섭렵했다. 어떤 종목을 하더라도 하는 순간만큼은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했다. 볼링을 칠 때는 삼시세끼를 볼링장에서 먹으며 훈련해 프로 자격증까지 땄다. 최근 몇 년간 집중하고 있는 건 골프다. 은퇴 후 신수지도 보통 사람들처럼 적지 않은 굴곡을 겪었다. “탁 트인 공간에 가서 활동하는 게 도움이 된다”는 말을 듣고 골프채를 잡았다.리듬체조를 할 때처럼, 볼링을 칠 때처럼 골프도 열심히 했다. 하루에 드라이버만 1000개를 친 날도 있다. 1년도 안 돼 싱글을 쳤고, 2년 차에 이븐타를 기록했다. 그리고 3년 차에 2언더파까지 쳤다. 신수지는 “3년간 하루도 연습장을 거르지 않았다. 지방에 행사를 갈 때도 일정을 마친 후 혼자 골프백을 들고 인근 연습장을 찾아 공을 쳤다”라며 “공을 쪼갤 때의 손맛과 희열이 좋았다. 평소 꾹꾹 눌러살다가 드라이버로 공을 빵빵 때리자 마음이 시원해졌다”고 했다. 그는 스포츠와는 떨어질 수 없는 운명인 것 같다. 신수지는 요즘도 주 5, 6회씩 피스니스센터를 찾는다. 신수지는 “생각이 많아지면 잠이 잘 오질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게 운동이다. 몸을 ‘괴롭히면’ 깊은 잠을 잘 수 있다”고 했다. 최근에는 피클볼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바쁜 일상 속에서 그는 ‘여행’으로 힐링을 한다.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틈이 생기면 평소 가고 싶었던 여행지로 가서 모든 걸 내려놓고 재충전을 한다. 신수지는 “예전에는 너무 나를 가둬놓고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요즘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먹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 그것 자체가 내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스포테이너로 왕성하게 활동하면서도 대한체육회 홍보미디어위원과 대전시체조협회 부회장을 맡으며 체육계와의 인연도 이어가고 있다. 리듬체조 유망주들을 위한 캠프에도 참가한다. 최근에는 선수로 활동할 때의 경험을 살려 압박스타킹 제조, 판매 사업도 시작했다. 신수지는 “제가 선수 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고충을 담아서 스타킹을 만들었다. 12시간을 서 있어도 다리가 붓지 않는다”라며 “방송과 사업 등 건강하게 지내며 하고 싶은 일들이 많다. 가장 어려울 것 같지만 더 늦기 전에 단란한 가정도 꾸리고 싶다”며 웃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 2026-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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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헌재의 인생홈런]‘리듬체조 요정’ 신수지 “일루전 시구 후 스포테이너 됐죠”

    ‘리듬체조 요정’ 신수지(35)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 아시아 선수로는 최초로 자력 본선 진출권을 따냈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는 발목 인대 부상을 안고 후배들과 함께 단체전에 출전해 4위를 했다. 동메달에는 단 0.1점이 모자랐다. 주요 국제대회 메달은 없었지만 한국 리듬체조는 신수지의 등장 이후 사람들에게 익숙한 종목이 됐다. 신수지가 국민적인 화제를 모은 건 2011년 은퇴 이후다. 2013년 신수지는 프로야구 두산 안방경기의 시구자로 마운드에 섰는데 이때 그가 선보인 360도 회전 시구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신수지는 “체조 선수 출신다운 시구를 고민하다가 장기였던 백 일루전(Back Illusion·한 다리를 축으로 다른 다리를 360도 수직 회전해 원을 만드는 기술)을 응용해 앞으로 도는 일루전을 한 뒤 공을 던졌다”고 했다. 역대 최고의 시구로 꼽히는 신수지의 시구는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에도 소개됐다. 그날 이후 방송국에서 그를 찾기 시작했다. 밝고 건강한 이미지의 신수지는 각종 스포츠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방송인으로 자리를 잡았다. 스포테이너(스포츠+엔터테이너) 신수지의 시작이었다. 이 모든 게 우연만은 아니다. 선수 시절부터 그는 한 곳에 꽂히면 무서울 정도로 열심히 했다. 시구 역시 마찬가지다. 시구자로 결정됐다는 소식을 들은 후부터 그는 혼자서 피칭 연습을 시작했다. 하루 150개씩 이틀간 300개를 던졌다. 그가 던진 공이 스트라이크 존 비슷한 곳에 꽂힌 것도 그런 이유다. 신수지는 이후 볼링, 양궁, 씨름, 아이스하키에 이어 야구까지 수많은 종목을 섭렵했다. 볼링을 칠 때는 삼시 세끼를 볼링장에서 먹으며 훈련해 프로 자격증까지 땄다. 최근 몇 년간 집중하고 있는 건 골프다. 은퇴 후 신수지도 보통 사람들처럼 적지 않은 굴곡을 겪었다. “탁 트인 공간에 가서 활동하는 게 도움이 된다”는 말을 듣고 골프채를 잡았다. 리듬체조를 할 때처럼, 볼링을 칠 때처럼 골프도 열심히 했다. 하루에 드라이버만 1000개를 친 날도 있다. 1년도 안 돼 싱글을 쳤고, 2년 차에 이븐타를 기록했다. 그리고 3년 차에 2언더파까지 쳤다. 신수지는 “3년간 하루도 연습장을 거르지 않았다. 공을 쪼갤 때의 손맛과 희열이 좋았다”며 “평소 꾹꾹 누르며 살다가 드라이버로 공을 빵빵 때리자 마음이 시원해졌다”고 했다. 그는 요즘도 주 5, 6회는 피트니스센터를 찾는다. 신수지는 “생각이 많아지면 잠이 잘 오질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게 운동이다. 몸을 ‘괴롭히면’ 깊은 잠을 잘 수 있다”고 했다. 최근에는 피클볼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바쁜 일상에도 그는 대한체육회 홍보미디어위원과 대전시체조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유망주들을 위한 캠프에도 참가한다. 최근에는 선수로 활동할 때의 경험을 살려 압박스타킹 제조, 판매 사업도 시작했다. 신수지는 “건강하게 지내며 하고 싶은 일들이 많다”면서 “가장 어려울 것 같지만 더 늦기 전에 가정도 꾸리고 싶다”며 웃었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 2026-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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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듬체조 요정’ 신수지 “일루전 시구 후 스포테이너 됐죠”[이헌재의 인생홈런]

    ‘리듬체조 요정’ 신수지(35)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 아시아 선수로는 처음으로 자력 본선 진출권을 따냈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는 발목 인대 부상을 안고 후배들과 함께 단체전에 출전해 4위를 했다. 동메달에는 단 0.1점이 모자랐다. 주요 국제대회 메달은 없었지만 한국 리듬체조는 신수지의 등장 이후 사람들에게 익숙한 종목이 됐다. 신수지가 국민적인 화제는 모은 건 2011년 은퇴 이후다. 2013년 신수지는 프로야구 두산 안방 경기의 시구자로 마운드에 섰는데 이때 그가 선보인 360도 회전 시구가 큰 화제가 됐다. 신수지는 “체조 선수 출신다운 시구를 고민하다가 장기였던 백 일루전(Back Illusion·한 다리를 축으로 다른 다리를 360도 수직 회전해 원을 만드는 기술)을 응용해 앞으로 도는 일루전을 한 뒤 공을 던졌다”고 했다. 역대 최고의 시구로 꼽히는 신수지의 시구는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에도 소개됐다. 그날 이후 방송국에서 그를 찾기 시작했다. 밝고 건강한 이미지의 신수지는 이후 각종 스포츠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방송인으로 자리를 잡았다. 스포테이너(스포츠+엔터테이너) 신수지의 시작이었다. 이 모든 게 우연만은 아니다. 선수 시절부터 그는 한 곳에 꽂히면 무서울 정도로 열심히 했다. 시구 역시 마찬가지다. 시구자로 결정됐다는 소식을 들은 후부터 그는 혼자서 피칭 연습을 시작했다. 하루 150개씩 이틀간 300개를 던졌다. 그가 던진 공이 스트라이크 존 비슷한 곳에 꽂힌 것도 그런 이유다. 신수지는 이후 볼링, 양궁, 씨름, 아이스하키에 이어 야구까지 수많은 종목을 섭렵했다. 볼링을 칠 때는 삼시세끼를 볼링장에서 먹으며 훈련해 프로 자격증까지 땄다. 최근 몇 년간 집중하고 있는 건 골프다. 은퇴 후 신수지도 보통 사람들처럼 적지 않은 굴곡을 겪었다. “탁 트인 공간에 가서 활동하는 게 도움이 된다”는 말을 듣고 골프채를 잡았다.리듬체조를 할 때처럼, 볼링을 칠 때처럼 골프도 열심히 했다. 하루에 드라이버만 1000개를 친 날도 있다. 1년도 안 돼 싱글을 쳤고, 2년 차에 이븐타를 기록했다. 그리고 3년 차에 2언더파까지 쳤다. 신수지는 “3년간 하루도 연습장을 거르지 않았다. 공을 쪼갤 때의 손맛과 희열이 좋았다”라며 “평소 꾹꾹 눌러살다가 드라이버로 공을 빵빵 때리자 마음이 시원해졌다”고 했다. 그는 요즘도 주 5, 6회는 피스니스센터를 찾는다. 신수지는 “생각이 많아지면 잠이 잘 오질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게 운동이다. 몸을 ‘괴롭히면’ 깊은 잠을 잘 수 있다”고 했다. 최근에는 피클볼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바쁜 일상에도 그는 대한체육회 홍보미디어위원과 대전시체조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유망주들을 위한 캠프에도 참가한다. 최근에는 선수로 활동할 때의 경험을 살려 압박스타킹 제조, 판매 사업도 시작했다. 신수지는 “건강하게 지니며 하고 싶은 일들이 많다”면서 “가장 어려울 것 같지만 더 늦기 전에 가정도 꾸리고 싶다”며 웃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 2026-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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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0㎏ 골리앗을 넘긴 60㎏ 다윗…정지현 “레슬링은 강한 자들의 운동”[이헌재의 인생홈런]

    3년 전 채널A에서 인기리에 방영됐던 ‘천하제일장사2’에서는 놀라운 장면이 펼쳐졌다. 작은 몸집의 레슬러 정지현(43)이 몸무게가 족히 두 배는 나갈 거 같은 야구 선수 출신 양준혁(57)을 모래판에 눕혀버린 것이다. 경기 시작 전만 해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같았다. 씨름은 체급 경기이지만 이날은 레슬링 팀의 정지현과 야구팀의 양준혁이 일대일 대결을 벌였다. ‘골리앗’ 양준혁은 경기 시작과 함께 힘으로 내리눌렀다. 정지현의 한쪽 다리가 들리면서 승부는 그대로 끝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지현은 왼쪽 다리로 한동안 버텼다. 그리고는 되치기를 시도해 거구 양준혁을 모래판에 누여 버렸다. 정지현은 “레슬링은 밸런스와 기술의 스포츠다. 레슬러들은 자기보다 힘센 사람들을 얼마든지 제압할 수 있다”고 했다.‘만두귀’를 가진 사람들과는 시비 붙지 말라는 말이 있다. 만두귀를 가진 대표종목이 바로 레슬링이다. 모래판이 아닌 아스팔트 바닥에서는 정말 큰일이 날 수도 있다. 그래서 레슬러들은 시비를 먼저 알아서 피하는 편이다. 정지현도 “내가 키도 작고 만만해 보이긴 한다. 그래서 어릴 때는 시비를 거는 사람도 아주 가끔 있었다”면서 “하지만 언젠가부터는 시비를 걸려 본 적이 없다”며 웃었다. 정지현은 초등학생 때 기계체조 선수였다. 이후 유도를 거쳐 중학교 3학년 때 뒤늦게 레슬링에 입문했다. 유도 선수 시절 정지현은 패배가 익숙한 선수였다. 당시 유도 종목에서 가장 가벼운 체급이 48kg급이었는데 정지현은 몸무게가 채 40kg도 나가지 않았다.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았고. 힘에서 달리니 기술도 소용도 없었다. 보다 못한 지도자가 레슬링 전향을 권유했고, 그렇게 레슬러가 됐다.‘레슬러’ 정지현은 승승장구했다. 체조를 하면서 익힌 유연성에 유도 선수로 기른 체력이 합쳐지자 무서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었다. 무명으로 출전한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은 그에겐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 레슬링 남자 그레코로만형 60kg급에 출전한 정지현은 결승에서 연장 접전 끝에 로베르토 몬존(쿠바)을 3-0으로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불과 21살의 나이에 세계 정상에 우뚝 선 것이다. 하지만 다음 목표였던 올림픽 두 번째 금메달은 끝내 손에 잡히지 않았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8강에서 누르바키트 텐기즈바예프(카자흐스탄)에게 1-2로 패했다. 순간의 방심이 화를 불렀다. 정지현은 “약 5초 정도를 남기고 상대 선수를 던졌다. 속으로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5초를 버티지 못하고 역전당했다”라며 “경기든 인생이든 정말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라는 걸 절감했다”고 했다. 이후 2012년 런던 올림픽을 누구보다 간절하게 준비했다. 하지만 런던에서도 8강에서 아제르바이잔 선수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하고 말았다. 정지현은 “정말 열심히 준비했고 컨디션도 좋았다. 하지만 올림픽이라는 무대의 압박을 이겨내지 못했다”고 했다. 비록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는 세 차례나 올림픽 무대를 밟은 몇 안 되는 레슬러다. 2014년 인천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서는 71kg급으로 체중을 높여 금메달을 땄다. 예전 태릉선수촌이나 현재 진천선수촌에서 레슬링은 훈련 강도가 가장 센 종목이다. 땀을 비 오듯이 흘리는 건 기본이고 신물이 나올 정도로 뛰고 구른다. 10년 넘게 선수촌 밥을 먹은 정지현에겐 운동이 지겹지 않았을까. 그는 “땀을 흘리고 숨이 가빠 져오는 게 여전히 즐겁다. 레슬링은 알아갈수록 더 재미있다”고 했다. 선수에서 은퇴하고 지도자 생활을 하던 그가 2023년 말 서울 서초구 강남역 근처에 ‘짐오브레슬러’라는 레슬링 전문 체육관을 세운 이유다. 관장이자 서무, 행정, 심지어 청소까지 1인 다역을 하는 그는 매일 저녁 회원들과 함께 매트를 뒹군다. 정지현은 “레슬링은 대중적인 운동도, 쉽게 배울 수 있는 운동은 아니다. 기본자세를 제대로 익히는 데만 2, 3개월이 걸린다”라며 “하지만 하나씩 기술을 익혀가며 테이크다운(상대를 바닥에 쓰러뜨리는 기술)을 성공시킬 때의 쾌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체력과 자신감이 커지는 효과도 있다”라고 했다. 최근 젊은 층을 중심으로 UFC 등이 큰 인기를 끌면서 그라운드 기술이 필요한 레슬링을 배우려는 사람이 많이 늘고 있다. 정지현은 “누구나 강해지고 싶은 욕구가 있지 않나. 젊은 친구들도 있지만 50대의 중년층에서도 체력 단련을 위해 레슬링을 배우는 분들도 있다”라며 “개인적으로는 여성분들에게 추천한다. 보통 레슬링을 상남자의 운동이라고 하지만 적은 힘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 있기 때문에 여성들에게는 호신용으로 제격”이라고 했다. 실제로 미국과 일본 등에서는 여성들 사이에 레슬링이 꽤 인기가 높다. 일본 여성 레슬링은 올림픽에서 금메달도 자주 딴다. 선수에서 은퇴한 뒤에도 그는 꾸준한 단련으로 선수 시절 못지않은 몸을 유지하고 있다. 정지현은 2023년 그리스에서 열린 베테랑 세계선수권대회 남자 70kg급에 출전해 금메달을 땄다. 앞서 그는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그리고 아시아선수권 대회 금메달을 딴 상태였다. 여기에 현역 시절 성공하지 못했던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명예’ 그랜드슬램을 이루게 됐다. 정지현은 “현역 시절 세계선수권대회에 자주 출전하지 못했다. 동메달만 두 번 땄는데 뒤늦게나마 기회가 생겨 베테랑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을 하게 됐다”며 웃었다. 레슬링 체육관은 퇴근 시간 이후에 일반인을 대상으로 운영하기에 그는 오전, 오후에는 시간이 있는 편이다. 정지현은 이때를 빌려 UFC 선수 출신 김동현, 세계소방관대회 챔피언 홍범석, 피지컬100 시즌2 우승자 아모띠 등과 함께 체육관을 돌며 운동을 한다. 가수 션이 만든 ‘언노운 크루’에서는 달리기도 한다. 정지현은 달리기와 기능성 운동을 결합해 젊은 층을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하이록스(HYROX)’ 대회에도 출전할 생각이다. 하이록스는 1km 러닝과 8개 기능성 운동을 반복해 승부를 가리는 실내 스포츠다. 정지현은 “선수 시절 매일 위액이 나올 정도로 훈련을 했다. 옛날 생각하면 정말 질리게 운동을 했던 것 같다”라면서도 “그래도 운동을 할 때가 즐겁고 재미있었다. 지금도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운동하면 더 힘이 나고 재미있다. 나는 영원히 몸을 써야 하는 운명인 것 같다”라고 했다. 정지현은 일주일에 4, 5회는 운동을 한다. 한 번에 1시간을 해도 집중력 있게 한다. 정지현은 “건강한 몸을 만들려면 힘든 과정이 있어야 한다. 근력을 키우려면 주 3회는 운동을 해야 한다. 여기에 살을 빼려면 뛰어야 한다. 편하게 운동하면서 몸이 좋아지길 기대해선 안 된다”라고 했다. 그의 다음 목표는 레슬링의 매력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이를 위해 체육관을 잘 운영하면서 레슬링 유튜브도 다시 시작하려 한다. 정지현은 “언젠가는 다시 레슬링계로 돌아가 후배들이 내가 따지 못한 두 번째 올림픽 금메달을 따는 데 힘을 보태고 싶다”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 2026-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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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헌재]오타니가 바꾼 韓 야구장 풍경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의 슈퍼스타 오타니 쇼헤이(32·LA 다저스)는 야구 역사를 바꾼 선수다. 오타니 이전에 투수와 타자로 모두 성공한 선수는 약 100년 전 활약한 ‘영원한 홈런왕’ 베이브 루스(1895∼1948) 정도다. 미국에서는 오타니를 ‘투 웨이(Two-way) 스타’, 일본에서는 ‘이도류(二刀流)’로 표현한다. 단순히 투타를 함께 하는 수준이 아니다. 투수로는 최고 영예인 사이영상 후보로 거론될 만큼 좋은 구위를 갖고 있다. 타자 오타니는 MLB 역사상 최초로 50홈런-50도루 클럽에 가입했을 정도로 독보적이다. 그런 오타니를 두고 최근 MLB에서는 작은 논란이 벌어졌다. 크레이그 카운셀 시카고 컵스 감독이 오타니와 소속팀 다저스를 겨냥해 “한 선수만 특별 대우를 받고, 한 팀만을 위한 룰이 시행되고 있다”고 문제 제기를 한 것이다. ‘오타니 룰’이란 선발투수가 지명타자로 동시 출장할 경우 투수 등판을 마친 뒤에도 지명타자로 계속 경기를 뛸 수 있게 한 규정이다. 오타니가 MLB에 입성한 몇 해 뒤인 2022년부터 도입됐다. ‘오타니 룰’ 덕분에 다저스는 최대 13명까지인 투수 로스터를 14명까지 운영할 수 있다. 시샘 어린 문제 제기에 데이브 로버츠 다저스 감독은 한마디로 정리했다. “다른 팀들도 오타니 같은 선수를 찾으면 된다.”오타니 같은 선수를 찾아라 오타니가 바꾼 건 규정뿐이 아니다. 불가능으로 여겨졌던 ‘투타겸업’을 성공적으로 해내면서 한국 야구장 안팎의 풍경도 크게 바뀌었다. 한창 열기를 더해가고 있는 제80회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겸 주말리그 왕중왕전에서도 오타니 효과를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타니처럼 투수와 타자를 겸업하는 선수가 부쩍 많아진 것이다. 올해 고교야구 최대어로 꼽히는 부산고 하현승이 대표적이다. 키 194cm의 건장한 체격인 하현승은 왼손 투수로 시속 150km가 넘는 빠른 공을 가뿐히 던진다. 올해 주말리그와 황금사자기까지 7경기에 나와 평균자책점 ‘0’을 기록 중이다. 타자로는 타율 0.488, 3홈런, 15타점을 올렸다. 하현승과 함께 올해 고교야구 ‘빅3’로 꼽히는 덕수고 엄준상, 서울고 김지우 등도 모두 투수와 타자를 겸한다. 지난해 황금사자기 무대를 누볐던 광주제일고 출신 김성준은 ‘제2의 오타니’를 꿈꾸며 작년 이맘때 텍사스 레인저스에 입단했다. 여러 팀이 그에게 러브콜을 보냈지만 투타겸업 프로그램을 제시한 텍사스행을 택했다. 그를 지도한 조윤채 광주제일고 감독은 “오타니가 ‘야구 소년’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줬다”고 말했다. 쓰레기는 남이 버린 행운 또 다른 오타니 효과는 ‘쓰레기 줍기’다. 오타니가 고교 시절 ‘목표 달성표’를 작성하면서 ‘운(運)’ 항목에 쓰레기 줍기를 써넣었다는 게 알려진 뒤 쓰레기를 줍는 선수들이 크게 늘었다. 고교생 오타니는 “다른 사람이 무심코 버린 행운을 줍는 것”이라고 했다. 대구상원고 2학년 엄유상은 7일 황금사자기 안산공고전에서 4타수 4안타를 친 뒤 “난생처음 4안타 경기를 했다. 아무래도 쓰레기를 열심히 주운 덕분인 것 같다”며 웃었다. 윤혁 두산 베어스 스카우트는 “실력과 인성을 모두 갖춘 오타니의 성공 후 많은 아마 선수가 쓰레기를 줍는다”며 “야구 실력과 별개로 인성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프로 스카우트들도 그런 모습을 유심히 관찰한다”고 말했다. 이런 모습이 아마추어 야구에 국한된 건 아니다. 프로야구 LG 트윈스 차명석 단장은 서울 한강 산책을 자주 하는데 쓰레기가 눈에 띄면 곧바로 줍는다고 한다. 한동안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이 없던 LG는 차 단장이 재임하던 2023년과 지난해 두 차례나 우승했다. 단 0.0001%라도 좋은 기운이 더해졌던 건 아닐까. 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 2026-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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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헌재의 인생홈런]‘작은 거인’ 정지현 “테이크다운의 매력 알리고파”

    60kg대의 몸으로 100kg 이상 거구를 쓰러뜨릴 수 있는 종목이 몇이나 될까. 다른 종목은 몰라도 레슬링은 가능하다. 몇 해 전 채널A에서 인기리에 방영됐던 ‘천하제일장사2’를 보면 알 수 있다. ‘작은 거인’ 정지현(43)은 몸무게가 족히 두 배는 될 것 같은 야구 선수 출신 양준혁(57)을 꺾었다. 거구인 양준혁이 위에서 힘으로 눌렀지만 정지현은 왼쪽 다리로 한동안 버틴 뒤 되치기로 양준혁을 모래판에 누여 버렸다. 정지현은 “레슬링은 밸런스와 기술의 스포츠다. 나보다 힘센 사람들을 얼마든지 제압할 수 있다”고 했다. 정지현은 초등학생 때 기계체조를 했다. 이후 유도를 거쳐 중학교 3학년 때 뒤늦게 레슬링을 시작했다. 유도 선수 시절 가장 가벼운 체급이 48kg급이었는데 정지현은 채 40kg도 나가지 않았다. 보다 못한 지도자가 레슬링 전향을 권유했고, 그렇게 레슬러가 됐다. 유연성과 체력, 유도 기술까지 갖춘 정지현은 승승장구했다. 21세 때 출전한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남자 그레코로만형 60kg급에서 깜짝 금메달을 땄다. 두 번째 올림픽 금메달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2008년 베이징 대회와 2012년 런던 대회까지 세 차례 올림픽 무대를 밟았다. 예전 태릉선수촌이나 현재 진천선수촌에서 레슬링은 가장 혹독한 훈련을 하는 종목이다. 땀을 비 오듯이 흘리는 건 기본이고 신물이 나올 정도로 뛰고 구른다. 10년 넘게 선수촌 밥을 먹은 정지현은 운동이 지겹지 않았을까. 그는 “땀을 흘리고 숨이 가빠져 오는 게 좋았다. 레슬링은 알아갈수록 더 재미있었다”고 했다. 선수에서 은퇴하고 지도자 생활을 하던 그가 2023년 말 서울 서초구 강남역 근처에 ‘짐오브레슬러’라는 레슬링 전문 체육관을 세운 이유다. 관장이자 서무, 행정, 심지어 청소까지 1인 다역을 하는 그는 매일 저녁 일반인 회원들과 함께 매트를 뒹군다. 정지현은 “레슬링은 쉬운 운동은 아니다. 기본자세를 제대로 익히는 데만 2, 3개월이 걸린다”며 “하지만 하나씩 기술을 익혀가며 테이크다운(상대를 바닥에 쓰러뜨리는 기술)을 성공시킬 때의 쾌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체력과 자신감이 커지는 효과도 있다”고 했다. 그는 또 “레슬링은 상남자의 운동이지만 여성들에게도 좋다. 적은 힘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 있기 때문에 호신용으로 제격”이라고 했다. 그는 꾸준한 단련으로 선수 시절 못지않은 몸을 유지하고 있다. 오전, 오후 시간이 빌 때면 UFC 선수 출신 김동현, 세계소방관대회 챔피언 홍범석, 피지컬100 시즌2 우승자 아모띠 등과 함께 체력 훈련을 한다. 가수 션이 만든 ‘언노운 크루’에서 달리기도 한다. 2023년 은퇴선수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정지현은 앞으로 ‘하이록스(HYROX)’ 대회에도 출전할 생각이다. 하이록스는 1km 러닝과 8개 기능성 운동을 반복해 승부를 가리는 실내 스포츠로 최근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정지현은 “나는 평생 몸을 써야 하는 운명인 것 같다. 체육관과 유튜브를 잘 운영해 레슬링의 매력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며 “언젠간 다시 레슬링계로 돌아가 후배들이 내가 따지 못한 두 번째 올림픽 금메달을 따는 데 힘을 보태고 싶다”고 말했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 2026-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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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소함의 미학…2249승 ‘경마 대통령’ 박태종 “‘타는 즐거움’은 계속”[이헌재의 인생홈런]

    ‘경마 대통령’이라 불렸던 박태종 한국마사회 심판 자문위원(61)은 어릴 때부터 ‘타는 것’이라면 뭐든지 좋아했다. 그 시작은 콤바인이었다. 그는 1965년 충북 진천의 작은 시골에서 태어났다. 농사철이 되면 그도 논으로 나와 일을 돕곤 했는데 어른들의 허락을 받아 간간이 콤바인을 몰곤 했다. 박태종은 “작은아버지가 한번 운전을 해보라고 해서 콤바인을 처음 몰았는데 너무 재미있었던 기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고교 졸업 후 상경한 뒤 그는 서울 마포구 이모부의 야채가게에서 배달 일을 도왔다. 그의 꿈은 택시기사나 포클레인 기사가 되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내비게이션이 보급되지 않았을 때다. 배달 일을 마치면 이모부의 배달용 차량을 몰고 서울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택시를 몰 때를 대비해 지리를 익힌 것이다. 틈틈이 포크레인 학원도 다녔다. 서울 곳곳에선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 역시 서울 4호선 사당역 인근에서 포크레인 조수로 일하기도 했다. 뭔가를 타면서 돈을 벌고 먹고 사는 그의 꿈이 서서히 현실이 되는 듯했다. 하지만 여기서 인생을 바꾼 일이 벌어졌다. 포크레인 기사 시험을 보러 혼자 강원도 춘천까지 갔다. 그런데 감독관이 수험표를 살펴보더니 뜻밖의 말을 했다. “나이가 모자라 시험을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접수비까지 다 냈는데 무슨 소리냐”고 묻자 “시험을 볼 순 없지만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실습이나 한번 하고 가라”고 했다. 박태종은 “너무 황당해서 할 말이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낙심하진 않았다. 그는 “성격이 원래 단순한 편이라 있는 상황을 그대로 잘 받아들이는 편”이라고 했다. 운명은 그렇게 그를 ‘말의 세계’로 이끌었다. 때마침 이모부가 배달 차 한국마사회 마포 지점에 갔다가 경마 기수 후보생 모집 공고를 보고 왔다. 모집 공고에 써있는 조건은 키 163㎝ 이하였다. 박태종은 어릴 때 키가 작고 왜소했다. 특수 부대에 가고 싶었지만 체중 미달로 병역도 면제 판정을 받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키 147cm, 몸무게 46kg다. 박태종은 키가 작아야 우대받는 직업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기쁨이 교차했다. 준비 없이 치른 첫해 시험에서 낙방했다. 오기가 생겼다. 1년 더 준비해 기수 후보생 13기로 정식 기수가 됐다. ‘경마 대통령’의 시작이었다. 처음부터 그가 승승장구했던 건 아니다. 30명의 동기 훈련생 중 27명이 기수로 데뷔했는데 동기들이 모두 1승, 2승씩을 거둘 때 그만 우승하지 못했다. 어떤 선배가 “말도 많이 타면서 어떻게 1등을 하지 못하냐”고 놀리기도 했다.박태종이 할 수 있는 건 노력밖에 없었다. 말 모양 동상에 고무줄을 달고 연습했다. 그러다 1992년 가장 큰 대회 중 하나인 무궁화배에서 우승했다. 생애 첫 대상경주 우승이었다. 꾸준한 노력에 자신감이 붙었다. 그때부터 박태종 천하가 시작됐다. 작년을 끝으로 말에서 내려올 때까지 1만6016번의 경주에 출전해 2249번 우승했다. 한국 근대 경마 104년 역사에서 누구도 넘보지 못할 기록이다. 2016년 2000승을 달성했을 땐 한국조폐공사에서 순금 기념 메달을 제작했다. 조폐공사가 금메달을 제작한 역대 스포츠 스타는 박찬호, 김연아, 손흥민, 페이커(이상혁) 정도다.왜소한 체격은 축복이었다. 그는 많이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이었다. 모든 기수들은 경기일엔 극도의 감량 스트레스를 받는다. 체중이 가벼워야 말에게 전해지는 하중이 줄어들고, 좀 더 빠른 레이스를 펼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삼시세끼를 꼬박 챙겨 먹었다. 중간중간 간식까지 먹고 말을 탔다. 박태종은 “말을 잘 다루려면 기수가 힘이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내가 훨씬 유리했던 셈”이라며 웃었다. 그는 평생 술 담배를 하지 않았다. 술을 전혀 못 마시는 어머니를 닮아 선천적으로 술이 안 받는 체질이다. 기수들에게 술은 무척 위험하다. 건강은 차치하고 술자리에서 무심코 뱉은 말이 승부 조작 등으로 연결될 수 있다. 적지 않는 기수들이 불상사에 휘말려 옷을 벗었다. 그이 동기 중에도 여러 명이 술과 연관된 불상사로 경마판을 떠나야 했다. 그는 “아마 술을 마셨다면 정년까지 말을 타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가 수십 년간 ‘대통령’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건 가장 큰 이유는 철저한 자기관리였다. 새벽형 동물인 말은 오전 일찍 훈련 시켜야 한다. 박태종은 선수로 뛴 39년간 한 번도 새벽 조교에 늦은 적이 없다. 박태종은 “항상 9시 이전에 잠들었다. 그래서 9시 뉴스를 본 적이 없다. 세상 돌아가는 건 8시 뉴스를 통해 접했다”고 했다. 절제된 생활 속에 후배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운동도 꾸준히 했다. 몸에 나쁘다는 음식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반대로 몸에 좋은 음식은 꼬박 챙겨 먹었다. 39년간 탄 말에서 내려왔지만 아쉬움은 전혀 없다고 했다. 천하의 박태종도 부상은 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러 번 낙마했고, 20여 차례 수술과 입원을 반복했다. 1999년에는 말발굽에 짓밟혀 척추를 크게 다치기도 했다. 박태종은 “은퇴 후 가장 좋은 건 부상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역시 마음이 편한 게 최고”라고 했다.한국마사회는 올해 초 누구보다 많은 경험을 가진 그를 심판 자문위원으로 위촉했다. 그는 요즘 기수복 대신 양복을 입고 출근한다. 처음엔 어색했던 양복도 이제는 꽤 익숙해졌다. 박태종은 “처음엔 걱정이 많았지만 주변 분들의 도움으로 잘 적응하고 있다”라며 “막상 선수를 할 때는 심판분들이 이렇게 많은 일을 하는지 몰랐다. 조교사, 마주들과 꾸준히 소통해 더욱 공정한 레이스가 되도록 힘이 되고 싶다”라고 말했다. 심판이 된 요즘도 그는 하루 한 시간 반~두 시간 운동은 여전히 거르지 않는다. 건강 관리 측면도 있지만 살기 위해 한다. 39년간 말을 탄 후 그의 양쪽 무릎은 정상이 아니다. 하중이 무릎에 쏠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왼쪽 무릎은 골절을 당했고, 오른쪽 무릎엔 인공 인대를 삽입한 상태다. 근력이 떨어지면 어김없이 통증이 찾아온다. 꾸준히 운동하는 그의 상체에는 여전히 식스팩이 뚜렷하다. 출근일에는 한두 시간 체력단련장에서 근력 운동을 한다. 출근하지 않는 날에는 동네 피트니스센터를 찾는다. 평생을 바른 생활 사나이로 살아온 그에게 ‘타는 것’은 여전히 즐거움이다. 더이상 말을 타진 않지만 그는 시간만 나면 자전거 안장에 오른다. 집이 있는 경기 의왕에서 서울 잠실 종합운동장까지 라이딩을 한다. 어떤 날은 하루 9시간 동안 자전거를 탄 적도 있다. 몇 해 전까지는 오토바이도 탔지만 “너무 위험하다”는 주변의 만류에 이제 오토바이는 떠나보냈다. 자동차 운전도 좋아한다. 혼자서 트레일러 면허도 땄다. 언젠가 캠핑카를 몰고 세계 어딘가를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박태종은 “지금도 스타리아를 개조한 캠핑카를 갖고 있다. 함께 고생한 아내와 함께 언젠가는 캠핑카로 유럽 횡단 여행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 2026-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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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헌재의 인생홈런]2249승 ‘경마 대통령’ 박태종 “왜소한 체격이 축복”

    박태종 한국마사회 심판 자문위원(61)은 선수 시절 ‘경마 대통령’으로 불렸다. 작년을 끝으로 말에서 내려올 때까지 1만6016번 경주에 출전해 2249번 우승했다. 한국 근대 경마 104년 역사에서 누구도 넘보지 못할 기록이다. 2016년 2000승을 달성했을 땐 한국조폐공사에서 순금 기념 메달까지 제작했다. 충북 진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박태종은 어릴 때 키가 작고 왜소했다. 운동 신경은 좋은 편이었지만 할 만한 운동이 없었다. 특수 부대에 가고 싶었지만 체중 미달로 병역도 면제 판정을 받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키 147cm, 몸무게 46kg이다. 고교 졸업 후 서울 마포구 이모부의 야채 가게에서 배달일을 돕던 그는 포클레인 기사가 되려 했다. 틈틈이 학원을 다녔고, 현장 조수로 일하기도 했다. 그리고 강원 춘천으로 기사 시험을 보러 갔다. 여기서 그의 인생을 바꾼 일이 벌어졌다. “나이가 안 돼서 시험을 볼 수 없다”는 얘기를 들은 것이다. 허탈하게 포클레인 기사의 꿈을 접어야 했던 그에게 이모부가 이렇게 말했다. “경마 기수 후보생을 뽑는데 키가 163cm 이하여야 된단다.” 키가 큰 게 아니라 작아야 된다고? 그는 재수 끝에 기수가 됐다. 왜소한 체격은 축복이었다. 그는 많이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이었다. 다른 기수들은 경기일엔 몸을 가볍게 하려고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삼시 세끼에 간식까지 챙겨 먹고 말을 탔다. 박태종은 “말을 잘 다루려면 기수가 힘이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훨씬 유리했던 셈”이라며 웃었다. 그는 선천적으로 술도 못 마신다. 선수들에게 술은 무척 위험하다. 건강은 차치하고 술자리에서 무심코 뱉은 말이 승부 조작 등으로 연결될 수 있다. 적지 않은 기수들이 불상사에 휘말려 옷을 벗었다. 그는 “술을 마셨다면 정년까지 말을 타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가 수십 년간 ‘대통령’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철저한 자기관리였다. 새벽형 동물인 말은 오전 일찍 훈련시켜야 한다. 박태종은 39년간 한 번도 새벽 조교에 늦은 적이 없다. 박태종은 “항상 오후 9시 이전에 잠들었다. 그래서 9시 뉴스를 본 적이 없다. 세상 돌아가는 건 8시 뉴스를 통해 접했다”고 했다. 절제된 생활 속에 후배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운동도 꾸준히 했다. 몸에 나쁘다는 음식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천하의 박태종도 부상은 피하지 못했다. 여러 번 낙마했고, 20여 차례 수술과 입원을 반복했다. 1999년에는 말발굽에 짓밟혀 척추를 크게 다치기도 했다. 박태종은 “은퇴 후 가장 좋은 건 부상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역시 마음이 편한 게 최고”라고 했다. 한국마사회는 올해 초 누구보다 많은 경험을 가진 그를 심판 자문위원으로 위촉했다. 그는 요즘 기수복 대신 양복을 입고 출근한다. 박태종은 “처음엔 걱정이 많았지만 주변 분들의 도움으로 잘 적응하고 있다”라며 “막상 선수를 할 때는 심판분들이 이렇게 많은 일을 하는지 몰랐다. 조교사, 마주들과 꾸준히 소통해 더욱 공정한 레이스가 되도록 힘이 되고 싶다”라고 말했다. 심판이 된 요즘도 그는 하루 한 시간 반∼두 시간 운동은 여전히 거르지 않는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 2026-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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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립니다] 제80회 황금사자기 고교야구 5월 2일 개막

    올해로 80회를 맞이한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겸 주말리그 왕중왕전이 2일부터 16일까지 열립니다. 서울 목동야구장과 신월야구장에서 열리는 이번 대회에는 지난해 우승팀 성남고를 비롯해 13개 권역별 전반기 주말리그를 거친 57개 학교 및 클럽이 참가합니다. 8강부터는 SPOTV 중계를 통해 대회를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이번 대회에 야구팬과 참가 고교 동문 여러분의 많은 관람 및 성원을 바랍니다.기간 : 5월 2일(토) ~ 5월 16일(토)장소 : 서울 목동야구장, 신월야구장(예선 일부)티켓판매 : 현장 판매 및 놀인터파크 예매성인 1만 원학생, 65세 이상 노인, 장애인 4000원이헌재 기자 uni@donga.com}

    • 2026-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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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연승 불멸의 신화 ‘불사조’ 박철순… “불가능? 누구나 일어설 수 있어” [이헌재의 인생홈런]

    1982년 프로야구가 창립된 후 지금까지 내려오는 불멸의 기록들이 있다. 일본 퍼시픽리그 타격왕 출신 백인천이 그해 기록한 4할 타율(0.412), 1983년 ‘너구리’ 삼미 장명부의 한 시즌 30승과 36완투 400이닝 투구, 1984년 롯데의 영원한 에이스 최동원의 한국시리즈 4승 등이다. 그리고 1982년 OB 베어스의 박철순(72)이 기록한 22연승이 있었다. 박철순은 4월 10일 전주 해태전 구원승을 시작으로 9월 18일 대전 롯데전까지 한 번의 패전도 없이 역사적인 22연승을 달성했다. 9월 22일 롯데와의 더블헤더 1차전에서 3-4로 패하면서 연승 기록은 깨졌다. 하지만 박철순은 그 경기에서도 정규이닝인 9회를 넘어 10회까지 던지다가 김용철에게 결승타를 맞았다. 원년 박철순의 피칭은 여느 투수들과는 수준이 달랐다. 왼쪽 다리를 높이 들어 올리는 역동적인 투구폼으로 강속구를 던졌고 변화구로는 체인지업, 너클볼, 팜볼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상대 타자들은 한 번도 본 적 없던 휘황찬란한 박철순의 투구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그럴 만도 한 게 박철순은 1969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 입단한 이원국에 이어 한국 투수로는 역대 두 번째로 미국프로야구를 이미 경험한 선수였다. 박철순은 1980년 밀워키 브루어스에 입단해 두 시즌 동안 산하 마이너리그에서 뛰었다. 박철순은 “당시 한미대학야구선수권이라는 대회가 있었다. 볼티모어 구장에서 당시 마이너리그 연합팀과 경기를 했는데 그날따라 공이 제대로 긁혔다. 시속 150km를 던졌는데 동양인이 빠른 공을 던진 게 인상적으로 보였던 것 같다”고 했다. 당시 계약금 2만 달러를 받았다. 요즘 기준으로는 헐값이지만 당시로선 큰돈이었다. 첫해 싱글A에서 머물던 박철순은 이듬해 더블A로 승격했다. 때마침 1982년 한국프로야구가 창설되면서 박철순은 메이저리그 도전을 눈앞에 두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초창기 한국프로야구에는 기본 변화구인 슬라이더도 도입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미국에서 다양한 구질을 배웠던 박철순이 던지는 체인지업과 팜볼 등은 한국 타자들이 보기에는 마구와 다름없었다. 박철순은 결국 그해 24승 4패 7세이브 평균자책점 1.84라는 빼어난 성적을 기록하며 정규시즌 최우수선수(MVP)에도 뽑혔다. 소속팀 OB는 그해 한국시리즈 정상에도 올랐다. 하지만 박철순의 전성기는 4월의 벚꽃만큼 짧았다. 이듬해부터 끊임없는 부상에 시달렸다. 특히 허리 부상이 발목을 잡았다. 이미 전조가 있었다. 1982년 24승을 올리는 동안부터 이미 허리에 통증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참고 던졌다. 한국시리즈가 열리는 동안에도 그는 허리가 아파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하지만 3차전 때 마운드에 올랐다. 코칭스태프가 만류했지만 “괜찮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는 진통제를 맞고 마운드에 올랐다. 박철순은 “돌이켜보면 참 무모했다. 프로 선수가 몸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 아니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라면서도 “혹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의 나는 그런 것조차 즐겼던 것 같다. 프로 선수라면 고통 속에 훈련하고, 아픔을 참고 경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젊었고, 이기는 게 좋았다. 만류하는 코칭스태프에게 ‘나갈 수 있습니다. 던질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고 말했다. 박철순은 이듬해부터 한 번도 예전의 기량을 회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후 그가 보여준 열정과 투혼은 오히려 그에게 ‘불사조’라는 별명을 안겼다. 여러 차례 허리 수술을 받고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1998년에는 속옷 광고를 찍다가 왼쪽 발목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부상을 당했지만 초인적인 의지로 재활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가 다시 마운드에 설 때마다 팬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박철순은 “어찌 보면 한물간 투수가 아닌가. 끝까지 기다려준 구단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가족과 팬들의 넘치는 응원도 받았다”라며 “어떻게 해서든 일어나서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더 간절히 매달렸다”고 했다.41세이던 1995년. 그는 정규시즌에서 9승(2패)을 올렸다. 원년인 1982년 이후 개인 한 시즌 최다승이었다. 그리고 그해 OB는 다시 한번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랐다. 우승 확정 후 그는 그라운드 위에서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그리고 1996년을 끝으로 정들었던 마운드를 떠났다. 잠시 코치로 일하던 그는 한동안 야구를 떠나 사업가의 삶을 살았다. 디스플레이 패널 제조업체 대표를 했고, 골프용품을 제작해 판매하기도 했다. 한때 직원이 200명 가까이 될 정도로 사업은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값싼 중국산 제품과의 경쟁에서 밀렸고, 물건을 팔아도 수금을 잘 되지 않았다. 어려움 끝에 몇 해 전 결국 사업에서 손을 뗐다. 그는 야구를 하면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됐다. 10년 넘게 사업을 하면서는 마음에도 병이 왔다. 박철순은 “사업을 접은 후 자격지심이 생겼다. 사람 만나는 걸 피했고, 오는 전화도 잘 받지 않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위험하다고 느꼈다”고 했다. 그런 그를 다시 양지로 꺼내 준 것은 역시 야구였다. 박철순은 몇해 전부터 원로 야구인들의 모임인 일구회의 대외협력부회장을 맡고 있다. 외부 활동을 하면서 다시 운동도 시작했다. 동네 산책길 걷기를 시작으로 작년 가을부터는 피트니스센터에도 다닌다. 박철순은 “일주일에 최소 4번은 운동한다. 피트니스센터에 가 보면 나보다 나이 많은 분들도 정말 열심히 몸 관리를 하더라”며 “짧은 시간이라도 꾸준히 운동하면서 ‘예전의 나’로 돌아오게 됐다”고 했다.지난해 12월 ‘2025 뉴트리디데이 일구상 시상식’에서는 뜻깊은 이벤트가 열렸다. 이날은 2025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끝판대장’ 오승환(전 삼성)이 일구대상을 수상한 날이었다. 그 자리에는 두 명의 ‘전설’ 박철순과 ‘회장님’ 송진우(전 한화)가 나란히 한 자리에 섰다. 이들 세 명은 등번호 21번이 새겨진 유니폼을 나란히 펴들었다. 21번의 시작은 다름 아닌 박철순이었다. 박철순은 미국에서 돌아온 1982년 21번으로 한국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이에 대해 박철순은 “많은 사람들이 22연승을 두고 등 번호를 넘어서려 했던 것 아니냐고 물어보시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원래 내가 원했던 번호는 에이스의 상징인 11번이었다. 그런데 팀 선배가 먼저 11번을 다는 바람에 21번을 달았을 뿐”이라며 웃었다. 통산 210승 투수 송진우는 “박철순 선배님을 바라보며 21번을 택했고, 야구에 대한 의미는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오승환 역시 “야구를 너무 잘하셨던 선배님들과 같은 번호를 썼고, 영구결번까지 오게 됐다. 선배님들께 감사한다”고 했다. 이들 세 명이 달았던 21번은 각각 두산, 한화, 삼성의 영구결번이다. 일구회는 올 시즌을 끝으로 철거 예정인 서울 잠실구장을 기념하기 위해 10월이나 11월경 ‘잠실 고별 레전드 게임’을 추진하고 있다. 일구회는 레전드 선수들이 한자리에 모여 팬들과 함께 잠실구장의 마지막 순간을 나누고, 선수와 팬이 함께 만들어온 시간의 의미를 되새기는 역사적이고 상징적인 무대를 만들어 보려 한다. 1995년 우승 당시 잠실에서 뜨거운 눈물을 쏟았던 박철순도 역사적인 잠실 고별전에 힘을 보태고자 한다. 박철순은 “지금도 마운드에 서면 마음이 떨린다. 고별전에 서는 선수들과 이를 지켜보시는 팬들 모두에게 엄청나게 감동적인 무대가 될 것”이라며 “잠실구장을 떠나보낼 때 정말 마음이 뭉클할 것 같다. 야구를 통해 정말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은 만큼 레전드 게임을 포함해 앞으로도 한국 야구 발전을 위해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자 한다”고 말했다. 박철순의 선수 시절 주제곡은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 웨이(My Way)’였다. 마이 웨이가 더 잘 어울리는 선수는 지금까지 없었다. ‘불사조’ 박철순은 여전히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 2026-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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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헌재]휴대전화 없는 그곳, 마스터스에 가고 싶다

    2019년 9월 열린 한국프로골프(KPGA)투어 대회에선 희대의 사건이 벌어졌다. 마지막 날 16번홀에서 티샷 실수를 한 김비오가 갤러리를 향해 ‘손가락 욕’을 한 것이다. 스윙 도중 갤러리의 휴대전화 촬영음 때문에 실수했다고 생각한 김비오는 순간적으로 화를 참지 못했다. 김비오는 그 대회에서 우승했지만 후폭풍은 거셌다. 곧바로 상벌위원회가 소집됐고, 3년 자격정지(추후 1년으로 감경)에 벌금 1000만 원의 중징계가 내려졌다. 상금 랭킹과 제네시스 포인트 랭킹 등 모든 순위에서도 제외됐다. 김비오는 “선수 이전에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다”며 무릎을 꿇고 눈물을 쏟았다. 갤러리에게 욕을 한 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다. 하지만 김비오의 성정을 잘 아는 사람들은 사석에서 안타까움을 표현하곤 했다. 김비오가 잘못한 건 분명하지만 갤러리들의 비(非)매너가 원인이 아니냐는 것이다. 몇몇 갤러리들이 경기 내내 김비오의 스윙 때마다 고의로 휴대전화 촬영음을 냈다는 주장도 나왔다. 갤러리 문화는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요즘도 사진을 찍으려는 갤러리들과 이를 막으려는 경기 진행 요원들 간의 실랑이가 심심찮게 벌어진다. 스윙 도중 ‘찰칵’ 소리에 골프채를 내려놓는 선수들의 모습도 익숙하다. ‘김비오 학습 효과’로 인해 선수들은 “갤러리 소음은 각자 이겨내야 할 몫”이라며 참는다.예외 없는 ‘노 휴대전화’ 정책 하지만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휴대전화 이슈가 없는 골프대회가 있다.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마스터스 토너먼트다. 13일 미국 조지아주 오거스타의 내셔널 골프클럽에서 끝난 제90회 마스터스는 로리 매킬로이(북아일랜드)의 역사적인 2연패로 화려하게 마무리됐다. 그런데 올해 마스터스는 개막 전부터 뜻밖의 사건으로 화제를 모았다. 1989년 디 오픈 챔피언 자격으로 대회에 초청받은 마크 캘커베키아(미국)가 휴대전화를 사용하다 보안요원에게 적발돼 쫓겨난 것이다. 캘커베키아가 휴대전화를 사용한 날은 대회도 아닌 연습 라운드였고, 장소도 코스가 아닌 클럽하우스 근처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손녀이자 인플루언서인 카이 트럼프도 구설에 올랐다. 카이는 마스터스 현장에서 찍은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공유했는데 몇몇 누리꾼들이 “휴대전화로 찍은 것 아니냐”며 의혹을 제기했다. 카이는 “휴대전화가 아닌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이라고 해명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됐다. 마스터스는 연습 라운드 때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하는 건 허용한다.디지털 시대 속 아날로그의 힘 마스터스의 ‘노(No) 휴대전화’ 정책은 대회 조직위의 최상위 원칙이다. 조직위는 홈페이지를 통해 ‘반입 금지 물품’을 공지하는데 휴대전화는 모든 물품 최상단에 적혀 있다. 칼을 포함한 무기류보다 순위가 높다. 미디어도 예외가 아니다. 휴대전화를 갖고 들어갈 순 있지만 미디어센터 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 코스에서 사용하다 적발되면 출입증을 빼앗기고 즉시 퇴장이다. 마스터스는 그 대신 대회장 곳곳에 무료 공중전화를 설치해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 휴대전화는 현대인들에게 필수품 이상이다. ‘디지털 디톡스’를 강제당하는 마스터스에서 사람들은 어떤 감정을 느낄까. 일단 선수들은 대환영이다. 휴대전화를 의식하지 않아도 되고 셀카 요청도 받지 않는다. 무엇보다 “페이트런(후원자·마스터스 갤러리를 의미)들이 내 골프에 집중해 주는 게 좋다”고 말한다. 페이트런들의 감정도 어색함에서 편안함으로 서서히 바뀌어 간다고 한다. 휴대전화에 신경을 빼앗기지 않으니 경기에 더 몰두할 수 있다. 옆 사람과의 대화도 늘어난다. 사진 대신 눈으로 코스와 멋진 샷을 머리에 담는다. 사람들은 이런 불편함을 경험하기 위해 수천 달러의 웃돈을 주고 마스터스 티켓을 구매한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원칙을 고수해 더 매력적인 곳, 골프를 골프 그 자체로 볼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골프의 천국’ 마스터스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 2026-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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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헌재의 인생홈런]‘불사조’ 박철순 “야구로 받은 사랑, 돌려드리고파”

    지난해 12월 ‘2025 뉴트리디데이 일구상 시상식’에서는 뜻깊은 이벤트가 열렸다. 등번호 21번의 ‘투수 레전드’ 3인방이 나란히 한 무대에 선 것이다. ‘불사조’ 박철순(72)과 ‘회장님’ 송진우(60), 그리고 ‘끝판대장’ 오승환(44)이 주인공이었다. 21번은 이 3명의 영구결번이다. 그 시작은 박철순이었다.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OB 베어스 유니폼을 입은 박철순은 22연승과 함께 24승 4패, 7세이브, 평균자책점 1.84라는 눈부신 성적을 거뒀다. KBO리그 최초의 정규시즌 최우수선수(MVP) 역시 그의 몫이었다. 박철순은 “많은 사람들이 22연승을 두고 등번호를 넘어서려 했던 것 아니냐고 물어보시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원래 내가 원했던 번호는 에이스의 상징인 11번이었다. 그런데 팀 선배(계형철)가 11번을 다는 바람에 21번을 달았을 뿐”이라며 웃었다. 박철순의 전성기는 4월의 벚꽃만큼 짧았다. 이듬해부터 끊임없는 부상에 시달렸다. 고질이던 허리 수술을 여러 번 했고, 왼쪽 발목 아킬레스힘줄이 끊어졌다. 보통 선수면 포기할 만도 했지만 그는 불굴의 의지로 다시 일어섰다. 1996년을 마지막으로 은퇴할 때까지 기적처럼 마운드로 돌아와 공을 던졌다. 박철순은 “한물간 투수를 구단이 끝까지 기다려줬다. 가족과 팬들의 넘치는 응원도 받았다”며 “어떻게 해서든 일어나서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더 간절히 매달렸다”고 했다. 은퇴 한 해 전 그는 9승(2패)을 거두며 팀의 두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우승 확정 후 그는 그라운드 위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잠시 코치로 일하던 그는 한동안 야구를 떠나 사업가의 삶을 살았다. 디스플레이 패널 제조업체 대표를 했고, 골프용품을 제작해 판매하기도 했다. 한때 직원이 200명 가까이 될 정도로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값싼 중국산 제품과의 경쟁에서 밀렸고, 물건을 팔아도 수금을 잘 하지 못하는 어려움 끝에 몇 해 전 결국 사업에서 손을 뗐다. 그는 야구를 하면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됐다. 10년 넘게 사업을 하면서는 마음에도 병이 왔다. 박철순은 “사업을 접은 후 자격지심이 생겼다. 사람 만나는 걸 피했고, 오는 전화도 잘 받지 않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위험하다고 느꼈다”고 했다. 그런 그를 다시 양지로 꺼내 준 것은 역시 야구였다. 박철순은 얼마 전부터 원로 야구인들의 모임인 일구회의 대외협력부회장을 맡고 있다. 외부 활동을 하면서 다시 운동도 시작했다. 동네 산책길 걷기를 시작으로 작년 가을부터는 피트니스센터에도 다닌다. 박철순은 “일주일에 최소 4번은 운동한다. 피트니스센터에 가 보면 나보다 나이 많은 분들도 정말 열심히 몸 관리를 하더라”며 “짧은 시간이라도 꾸준히 운동하면서 ‘예전의 나’로 돌아오게 됐다”고 했다. 일구회는 올 시즌을 끝으로 철거 예정인 서울 잠실구장을 기념하기 위해 10월이나 11월경 ‘잠실 고별 레전드 게임’을 추진하고 있다. 1995년 우승 당시 잠실에서 뜨거운 눈물을 쏟았던 박철순은 “야구를 통해 정말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 레전드 게임을 포함해 앞으로도 한국 야구 발전을 위해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자 한다”고 말했다. 그의 주제곡이었던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 웨이(My Way)’처럼 그는 여전히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가고 있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 2026-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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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기 칼 잡은 ‘前수영천재’ 한규철…“‘3대500’에 마라톤 완주 도전”[이헌재의 인생홈런]

    보통 선수는 한 번 달아보기도 힘든 태극마크를 15살 때 달았다. 17살 때는 호주 퍼스에서 열린 세계수영선수권대회 남자 접영 200m에 나가 역대 한국 선수로는 최초로 결선 진출의 쾌거를 이뤘다. 자유형과 접형, 개인 혼영 등 각 종목 한국신기록도 세웠다. 메이저 국제종합대회인 아시안게임에도 3번이나 출전했다.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동메달 3개를 목에 걸었다. 2002년 부산 대회와 2006년 도하 대회 때는 각각 4개씩의 동메달을 획득했다. 총 11개의 동메달로 그보다 국제대회에서 많은 동메달을 딴 한국 선수는 없다. 하지만 ‘수영 천재’ 한규철(45)에게는 최악의 성적이자 시나리오였다. 평생 목표로 했던 금메달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타이밍이 잘 맞지 않았다. 2002년 부산 대회 때 그는 접영 100m와 200m, 그리고 자유형 800m 계주에서 동메달을 땄다. 만약 그가 접영 대신 자유형을 나갔다면 무난히 금메달을 땄을 것이다. 2002년 부산 대회를 앞두고는 몸을 좀 더 가볍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5kg를 무리하게 감량한 게 오히려 독이 됐다. 한규철은 “방콕 대회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자유형에 집중했는데 너무 살을 많이 빼는 바람에 정작 경기 때 힘이 제대로 들어가질 않았다”고 했다.2006년 도하 대회 때는 한국 수영의 최고 스타인 박태환에 밀려 자유형에 출전하지 못했다. 한규철은 “세 대회 연속 실패하고 나니 금메달을 딸 운명이 아닌가 보다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후에 의미 없는 실업 선수 생활을 몇 년 더 했지만 열정이 살아나질 않았다”고 했다. 목표를 잃은 그는 급격히 무너졌다. 선수 생활을 마친 후 우울감이 찾아왔다. 그동안 살아온 모든 인생이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 90kg대였던 몸무게가 120kg을 넘었다. 설상가상으로 투자를 잘못하는 바람에 그나마 벌어놓은 돈도 많이 날렸다. 10대부터 20대까지 최고의 수영 선수로 불렸던 그는 한순간에 생활고를 겪는 처지가 됐다. 한규철은 “창창한 30대 초반에 모든 것을 잃는 기분이었다. 살아야겠다는 의욕도 없었다. 그저 죽지 못해 살았던 것 같다”라고 했다.보다 못한 선배가 그를 다시 수영장으로 이끌었다. 어린 선수들이라도 지도해 보라는 것이었다. 역설적으로 큰 상처를 줬던 수영장이 다시 그를 일으켜 세웠다. 아이들을 가르치려면 자신부터 건강해야 했다.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약을 먹지 않으면 잠들지 못했던 그가 불굴의 의지로 약도 끊었다. 꾸준히 운동을 하면서 불과 4개월 만에 30kg 이상을 감량했다. 그렇게 그는 몇 년 만에 그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정상인’이 됐다. 한규철은 “당시 가르쳤던 제자들이 너무 좋았다. 하나를 가르치면 실력이 쑥쑥 늘었다. 다른 사람이 잘했는데 내가 기분이 좋아지는 색다른 경험을 했다. 30대 중후반에 내 열정을 다시 불사르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오전에 아이들을 가르치고 다시 오후에 가르칠 때까지 시간이 비면 그는 마치 ‘운동선수’처럼 웨이트트레이닝에 매달렸다. ‘헬창’(헬스를 통해 몸 불리기에 열중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유행하는 ‘3대 500’(스쾃, 데드리프트, 벤치프레스 중량을 합쳐 500kg의 무게를 드는 것)도 거뜬히 돌파했다. 스쾃은 190kg, 데드리프트는 200kg, 벤치프레스는 135kg을 들었다. 40대 중반이 된 그는 현재 수영장을 떠나 자영업자의 삶을 살고 있다. 서울 강남구 도곡동의 한 숙성 고기 전문점 신도세기 대표가 그의 직함이다. 한규철은 “더 늦기 전에 평생 몸담았던 물을 떠나 새로운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라고 했다. 수영 코치 생활은 그리 나빴던 건 아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불안정한 생활을 할 순 없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이왕이면 좀 더 어리고 열정이 살아있을 때 ‘사회생활’에 뛰어들어보고 싶었다.그렇게 처음 서울 강남구 신논현동 근처에 냉동 삼겹살집을 오픈했다. 약 2년을 버텼지만 성공했다고 하긴 어려웠다. 그는 “약 2년 정도 하나가 폐업을 했다. 너무 주먹구구식으로 준비했었다”라며 “요식업도 잘 짜인 시스템 안에서 제대로 해야 한다는 걸 절감했다”고 했다. 그리고 철저한 준비를 거쳐 2023년 가을 서울 강남구 도곡동에 신도세기를 오픈했다. 이번 가게는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점심 메뉴인 갈비탕과 달지 않는 불고기는 동네 주민뿐 아니라 인근 직장인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다. 32개의 테이블이 있는 약 330㎡ 크기의 매장은 15~18명의 직원들로 바쁘게 돌아간다. 손님이 밀려들 때면 그도 대표 명함을 떼고 고객 응대와 서빙을 한다. 고기를 직접 굽기도 한다. 손에 빌 때는 고기 손질도 직접 한다. 처음엔 칼질에 익숙하지 않아 손을 베는 바람에 응급실에도 몇 번 갔다. 한규철은 “수십 년간 대우받는 선수, 지도자로 살다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넓은 세상을 만나고 있다. 처음엔 손님한테 인사하는 게 쑥스러웠지만 지금은 내 주변의 모든 분들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여전히 그를 지탱하는 건 운동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매장에 나가기 전까지 그는 러닝과 웨이트트레이닝을 꾸준히 한다. 지금도 여전히 주 1, 2회는 ‘3대 500’을 든다. 작년 하반기부터는 러닝의 매력에 푹 빠졌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하루에 기본 10km 정도를 뛴다. 주말에는 20km 정도의 장거리 러닝도 한다. 그는 “가게에서 머리가 복잡한 일이 있어도 땀 날 때까지 뛰고 나면 머리가 맑아진다”라며 “한동안 괴롭히던 불면증도 사라졌다. 역시 운동은 평생 하는 게 맞다는 걸 새삼 실감하고 있다”라고 했다.수영과 육상은 완전히 다른 종목이다. 하지만 ‘엔진’은 똑같기에 그는 초보 러너임에도 기록이 쑥쑥 좋아지고 있다. 그는 벌써 하프 마라톤에 출전해 1시간 30분대에 안에 골인했다. 그는 조만간 풀 코스도 달릴 생각이다. 지금 추세라면 서브 3(풀코스 마라톤을 3시간 안에 주파하는 것)도 충분히 노려볼 만 하다. 내친김에 그는 철인3종(수영, 사이클, 마라톤)까지 고려하고 있다. 보통 사람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수영은 그에겐 편안한 종목이다. 한규철은 “지금처럼 하루하루 열심히 살다 보면 또 다른 길이 열릴 수 있다. 그런 상황을 대비해서라도 건강한 신체와 정신을 유지하려 한다”며 “현재는 요식업에 집중하고 있지만 새로운 기회가 생기면 언제든 몸과 마음을 바쳐 뛰어들어볼 생각”이라고 했다.이헌재 기자 uni@donga.com}

    • 2026-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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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폐인’에서 ‘철인’으로… 한규철 “땀 흘리자 삶이 돌아와”[이헌재의 인생홈런]

    한규철(45)은 박태환이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 남자 수영의 1인자였다. 경기고에 다니던 1998년 호주 퍼스에서 열린 세계선수권 남자 접영 200m에서 결선에 진출했는데 이는 한국 수영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시안게임도 세 차례(1998년 방콕, 2002년 부산, 2006년 도하) 출전해 동메달을 11개나 목에 걸었다. 하지만 주변에선 그를 ‘아쉬운 선수’라고 평가했다. 실력으로는 금메달인데 동메달만 11개 수집했으니 나온 소리다. 평생 꿈이던 금메달에 도달하진 못한 그는 급격히 무너졌다. 선수 생활을 마친 후 우울감이 찾아왔다. 90kg대였던 몸무게가 120kg을 넘었다. 벌어 놓은 돈도 날려 생활고를 겪었다. 한규철은 “30대 초반에 모든 것을 잃었다. 삶의 의욕도 없었다. 죽지 못해 살았던 것 같다”라고 했다. 보다 못한 선배가 그를 다시 수영장으로 이끌었다. 어린 선수들이라도 지도해 보라는 것이었다. 역설적으로 그렇게 싫었던 운동이 다시 그를 일으켜 세웠다. 아이들을 가르치려면 자신부터 건강해야 했다.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쑥쑥 자라는 제자들을 보는 즐거움도 컸다. 몇 년 만에 그는 ‘정상인’이 됐다. 40대 중반이 된 그는 현재 자영업자의 삶을 살고 있다. 서울 강남구 도곡동의 한 숙성 고기 전문점 대표가 그의 직함이다. 한규철은 “더 늦기 전에 수영장을 떠나 새로운 삶을 살아 보고 싶었다”며 “무작정 시작한 첫 가게는 폐업했지만 2023년 가을 오픈한 지금 가게는 동네 맛집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했다. 32개의 테이블이 있는 약 330㎡ 크기의 매장은 15∼18명의 직원들로 바쁘게 돌아간다. 손님이 밀려들면 그도 대표 명함을 떼고 고객 응대와 서빙을 한다. 고기 손질도 직접 한다. 한규철은 “대우받는 선수, 지도자로 살다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넓은 세상을 만나고 있다. 내 주변의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여전히 그를 지탱하는 건 운동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매장에 나가기 전까지 그는 러닝과 웨이트트레이닝을 꾸준히 한다. 특히 작년 하반기부터 시작한 러닝의 매력에 푹 빠졌다. 그는 “가게에서 머리가 복잡한 일이 있어도 땀 날 때까지 뛰고 나면 머리가 맑아진다”라며 “불면증도 사라졌다. 역시 운동은 평생 하는 게 맞다는 걸 새삼 실감하고 있다”라고 했다. 어느덧 하프 마라톤까지 완주한 그는 조만간 풀코스도 달릴 생각이다. 내친김에 철인3종(수영, 사이클, 마라톤) 도전도 고려하고 있다. 보통 사람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수영은 그에겐 집처럼 편안한 종목이다. 한규철은 “지금처럼 하루하루 열심히 살다 보면 또 다른 길이 열릴 수 있다. 그런 상황에 대비해서라도 건강한 신체와 정신을 유지하려 한다”고 말했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 2026-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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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헌재]39세 류현진, 42세 노경은

    2023년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한일전. 한국 선발 투수로 김광현(38·SSG)이 등판하자 일본 측에서는 놀랍다는 반응이 나왔다. 언제 적 김광현이 35세가 돼서도 여전히 한국의 에이스를 맡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김광현은 초반 2이닝을 완벽하게 틀어막았다. 하지만 3회부터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더니 결국 조기 강판됐다. 한국은 그 경기서 4-13으로 완패했고, 조별리그에서도 탈락했다. 2026년 WBC 한국 야구 대표팀 명단에는 당시 김광현보다 나이가 많은 두 베테랑 투수가 합류했다. 39세 류현진(한화)과 42세 노경은(SSG)이다. 이 둘이 없었으면 한국 야구의 17년 만의 8강 진출도 무산될 뻔했다. 류현진은 조별리그 대만전에 선발 투수로 등판했다. 실투 하나가 홈런으로 연결돼 3이닝 1실점을 기록했지만 선발 투수 역할은 해냈다. 승부치기 끝에 4-5로 패하긴 했지만 류현진이 초반을 제대로 막아주지 않았다면 한국은 더 일찍 무너졌을 것이다. 류현진은 대회 기간 내내 한국 투수진의 구심점이 됐다.나이 무색한 베테랑의 힘 노경은의 깜짝 활약은 모든 이의 기대를 뛰어넘었다. 한국은 호주와의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2실점 이하에 5점 차 이상 승리라는 극악의 ‘경우의 수’를 채워야 8강에 갈 수 있었다. 선발 투수 손주영(28·LG)이 1회를 던진 후 팔꿈치 이상으로 물러났지만 갑자기 호출된 노경은이 2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한국은 결국 7-2로 승리하며 8강이 열리는 미국 마이애미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류현진과 노경은은 ‘핵 타선’ 도미니카공화국과의 경기에서도 선발 투수와 2번째 투수로 등판했다. 비록 콜드게임으로 졌지만 코칭스태프의 신뢰가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다. 두 선수의 구위는 누가 봐도 전성기 시절에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시속 150km는 기본이고 160km를 던지는 투수가 넘쳐나는 ‘구속 혁명’의 시대에 두 투수는 140km 초중반의 속구로도 경쟁력을 입증했다. 많은 이들이 한국 선수들의 느린 구속을 지적했지만 류현진은 귀국 인터뷰에서 “당연히 구속이 빠르고 제구도 잘되면 좋지만, 본인이 어떤 걸 잘하는지 아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실제로 류현진 본인이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에서 그렇게 살아남았다. 류현진은 KBO리그에선 왼손 강속구 투수로 꼽혔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평균 구속이 느린 축에 속했다. 류현진은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정교한 투구에 집중했다. 그는 모든 변화구를 마음먹은 곳에 던질 수 있는 몇 안 되는 투수였다. 2019년 내셔널리그 평균자책점 1위(2.32)에 오른 것도 적응의 산물이었다.뭘 생각해? 그냥 하는 거지 한국 야구에서 여러 차례 방출당한 경험이 있는 노경은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몸으로 보여줬다. 2003년 프로에 입단한 노경은은 39세이던 2023년 처음 올스타전에 나갔다. 데뷔 22년 차이던 2024년에는 생애 첫 홀드왕을 차지했고, 지난해 홀드왕을 2연패했다. 류지현 대표팀 감독은 “이번 대회 한국의 최우수선수(MVP)는 노경은”이라고 했다. 이재명 대통령도 “42세 베테랑 투수 노경은 선수가 보여준 끊임없는 도전과 큰 용기는 많은 국민들에게 희망과 투지를 불어넣을 것”이라고 했다. 자기관리에 철저한 노경은의 모든 건 야구에 맞춰져 있다.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고 자신만의 루틴을 지킨다. 16일 새벽 비행기로 귀국한 노경은은 그날 곧바로 야구장으로 출근했다. “루틴상 웨이트트레이닝을 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였다. 경기에 나서는 마음가짐도 단순 명료하다. “내 임무는 시키면 그냥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번 WBC를 끝으로 두 선수는 국제대회에서 은퇴한다. 20년 넘게 본보기이자 좋은 길잡이가 되어 온 두 선수의 길을 따르는 건 남은 선수들의 몫이다.이헌재 기자 uni@donga.com}

    • 2026-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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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네수엘라, ‘마두로 더비’서 美 3-2 격파…WBC 첫 우승

    베네수엘라가 ‘마두로 더비’에서 미국을 꺾고 사상 첫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우승 트로피에 입을 맞췄다. 베네수엘라는 18일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론디포파크에서 열린 2026 WBC 결승에서 미국을 3-2로 꺾고 정상에 올랐다.8강에서 ‘디펜딩 챔피언’ 일본을 8-5로 이긴 베네수엘라는 준결승에서 이탈리아를 4-2로 물리친 데 이어 ‘드림팀’을 구성한 미국마저 넘어섰다. 이날 두 나라의 대결은 ‘마두로 더비’로 불리며 큰 관심을 모았다. 미국은 1월 군사 작전으로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축출해 미국으로 압송했다. 이후 양국의 정치적 갈등이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야구로 ‘총성 없는 전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팽팽한 투수전으로 진행되던 경기는 3회초 1사 2, 3루에서 베네수엘라가 마이켈 가르시아(캔자스시티)가 중견수 희생플라이를 치면서 균형이 깨졌다. 베네수엘라는 1-0으로 앞선 5회초 선두 타자 윌리에르 아브레우(보스턴)가 미국 선발 투수 놀란 매클린의 2구째 한가운데 직구를 공략해 가운데 담장을 넘기는 솔로 홈런을 쏘아 올리며 2-0으로 앞섰다.패색이 짙던 미국은 8회말 2사 1루에서 브라이스 하퍼(필라델피아)에게 중월 투런포를 때려 2-2 동점을 만들었다. 하지만 25명의 빅리거로 팀을 구성한 베네수엘라는 9회초 결정적인 도루로 다시 찬스를 잡았다. 볼넷을 얻어 출루한 선두 타자 루이스 아라에스(샌프란시스코)의 대주자로 대주자 하비에르 사노하(마이애미 말린스)가 2루 도루에 성공해 무사 2루 기회를 만든 것. 이후 에우헤니오 수아레스(신시내티)가 개럿 휘틀록(보스턴)을 상대로 좌중간 적시 2루타를 터뜨려 다시 3-2로 앞섰다. 9회말 베네수엘라 마무리 투수로 등판한 다니엘 팔렌시아(시카고 컵스)는 카일 슈워버(필라델피아 필리스)를 헛스윙 삼진, 거너 헨더슨(볼티모어 오리올스)을 내야 뜬공, 로먼 앤서니(보스턴 레드삭스)를 헛스윙 삼진으로 잡아내며 경기를 끝냈다. 이날 베네수엘라 투수진은 ‘올스타 라인업’을 보유한 미국 타선을 단 3안타 2실점으로 막아냈다. 2023년 대회 결승에서도 일본에 2-3으로 패했던 미국은 두 대회 연속 우승 문턱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 2026-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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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메달 캐다 ‘딸기 농부’된 김형일 “金도 딸기도 땀·눈물을 먹고 자랍니다”[이헌재의 인생홈런]

    처음에 원했던 건 작은 텃밭이었다. 막연하게 농사를 지어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평생 땀과 함께 살아왔는데 이왕이면 자연으로 돌아가 땀을 흘리면서 살면 좋지 않을까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리고 결심했다. 딸기 농사를 짓기로. “많은 과일들이 호불호가 있지만 딸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 않느냐”는 게 결론이었다. 김형일 전 국가대표 사이클 감독(48)은 그렇게 2024년 소속팀인 대구시청 감독을 그만두자마자 곧바로 ‘딸기 농부’가 됐다. 김형일은 평생 자전거 안장에서 살아온 자전거인이다. 자전거가 좋아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서울체중·고와 한국체육대를 나와 2002년에는 부산 아시안게임에도 출전했다. 단거리인 스프린트 선수였던 그는 막판 삐끗하며 4위로 아쉽게 시상대에 서진 못했지만 수준급 선수였다. 그는 이후 경륜 선수로 전향해 5년간 선수로 뛰었다. 압도적인 성적을 거둔 건 아니지만 상금 랭킹 10위 안팎에 오르는 꽤 괜찮은 선수였다. 적지 않은 돈을 벌었고 삶도 윤택했다. 하지만 가슴속에는 뭔가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었다. 많은 사람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는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자전거를 본격적으로 공부해 세계 최고의 자전거 기구인 국제사이클연맹(UCI)에서 일하는 꿈을 꿨다. 결국 목표를 이루진 못했지만 스위스 프로팀에서 어시스턴트 매니저로 일하며 해외 활동 경험을 했다. 그의 자전거 인생은 2013년 대구시청 감독을 맡은 후 만개했다. 2024년 은퇴할 때까지 11년간 여러 차례 국내외 대회 우승을 이끌었고, 수많은 제자를 길렀다. 대한실업자전거연맹이 주는 최우수감독상을 9번이나 받았다. 2018년부터 2022년까지는 여자 사이클 국가대표 감독으로도 활동했다.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그가 이끈 여자 대표팀은 역대 한국 사이클 최고 성적인 금메달 5개와 동메달 1개를 수확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2019년 소강체육대상 지도자상을 받았고, 2020년에는 체육훈장 맹호장까지 수상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에는 언젠가부터 자연과 흙에 대한 갈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지도자 생활 말년에 그는 틈틈이 딸기를 공부했다. 스마트팜 시설과 원예 등에 대해 인터넷 강의를 들었고, 후계농 제도 등도 익혔다. 그는 2024년 12월 31일자로 사이클 감독직에서 퇴직했다. 그리고 이듬해 1월 17일 경기 여주에 농업회사법인 흰돌팜을 설립했다. 그리고 외부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딸기 스마트팜을 세웠다. 딸기는 겨울 작물이다. 대개 9월에 심기 시작해 12월부터 수확한다. 하지만 의욕이 넘쳤던 그는 욕심을 냈다. 더 일찍 심어서 더 늦게까지 수확해보려 한 것이다. 일명 ‘사계절 딸기’가 그의 새로운 목표였다. 하지만 처음 해 보는 농사가 그리 만만한 게 아니었다. 그는 두 차례나 애지중지 키우던 딸기밭을 갈아엎어야 했다. 김형일은 “우리 스마트팜에 딸기 묘목 3만 주를 심었다. 육묘 하나에 800~900원인데 한 번 엎어질 때마다 금전적인 피해가 엄청났다”라며 “딸기는 워낙 예민한 작물이다. 낮에는 영상 25도, 밤에도 영상 7도를 맞춰야 한다. 그러다 보니 전기세와 난방비 등을 포함해 큰돈이 날아갔다”고 했다. 그는 작년 12월 1일을 잊지 못한다. 이날은 그의 농장이 첫 딸기를 딴 날이다. 9월에 다시 정식으로 심은 딸기 묘목에서 빨간 딸기가 열렸다. 거구인 그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굵은 눈물을 펑펑 쏟았다. 사실 딸기밭에서 눈물을 흘린 게 이날이 처음은 아니다. 성공이 절박했던 그는 매일 밤 농장에 혼자 와서 “제발 잘 자라 달라”며 울고 또 울었다. 그는 “마치 3만 명의 신생아를 키우는 심정이었다. 할 수 있는 건 ‘제발 잘 자라 달라’고 비는 것밖에 없었다”라며 “감독을 할 때는 더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선수를 몰아세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딸기를 키울 때는 기다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고 했다. 그의 땀과 눈물을 먹고 자란 딸기들은 이제 잘 자란다. 우여곡절 끝에 첫 딸기를 수확한 후 정상 가도에 들어섰다. 첫 달에 700kg를 땄고, 1월에는 1000kg을 넘겼다. 모양이 예쁘고, 맛도 좋은 그의 딸기는 인천의 한 5성급 호텔에 납품도 한다. 대부분의 판매는 온라인으로 이뤄진다. 김형일은 “아직까진 온라인 판매를 주력으로 하고 있다. 네이버 스마트스토어에도 입점했다”라며 “기념일이 되면 많은 사람에게 온라인으로 커피나 케이크를 선물하지 않나. 예쁜 딸기를 선물하는 날이 오도록 노력하고 있다”라고 했다. 딸기 농부로 이제 첫발을 뗀 그이지만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제2호 농장, 제3호 농장을 지어 규모를 키우고 딸기 전문 카페까지 차리는 것이다. 딸기 전문 브랜드를 만드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실제로 글로벌 딸기 브랜드도 크게 성공한 기업도 있다. 일본에서 처음 생긴 오이시란 딸기 회사는 태양열을 이용한 전기로 미국 등에서 엄청난 규모의 스마트팜을 운영하고 있다. 그 회사를 벤치마킹에 제대로 된 브랜드 딸기를 만들어 보는 게 그의 새로운 꿈이다. 그에게는 딸기 말고 또 하나의 희망이 자라고 있다. 사이클 선수로 활동하고 있는 아들 김도윤 군(17)이다. 아버지의 DNA를 물려받은 김도윤은 지난해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아시아 주니어 트랙 선수권에서 3관왕(단체추발, 옴니엄, 매디슨)에 올랐다. 김형일은 “승부의 세계에서 오래 살아본 입장에서는 아이가 그런 고통을 안고 살길 바라지 않았다”면서도 “하지만 본인이 스스로 노력하는 걸 보고는 응원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고 했다. 김도윤은 현재 장선재 감독이 지도하는 자전거 명문팀 LX에 입단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김도윤은 쉬는 날에는 틈틈이 딸기 농사도 돕는다. 전업 딸기 농부가 됐지만 김형일의 마음의 고향은 여전히 자전거다. 그는 “딸기로 성공한 뒤 언젠가는 다시 사이클로 돌아갈 것이다. 감독을 하는 동안 재정 부족으로 힘든 적이 많았다”라며 “돈을 많이 벌어서 자전거 선수나 팀을 후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그는 또 “아들에게 아시안게임에서 4위에 그친 내 한을 풀어달라고 말한 적은 없다”면서 “그래도 아빠가 못 나가 본 올림픽 무대에 서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 2026-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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