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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LG 염경엽 감독과 ‘배구여제’ 김연경(은퇴)이 2025년 한국체육기자연맹 올해의 지도자상과 선수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두 사람은 연맹 소속 체육기자 투표에서 가장 많은 표를 받았다. 염 감독은 2023년에 이어 올해 LG의 정규시즌, 한국시리즈 통합 우승을 이끈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김연경은 소속팀 흥국생명을 2024~2025 V리그 챔피언에 올려놓은 뒤 은퇴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추신수 SSG 구단주 보좌역(43)이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명예의 전당 후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미국야구기자협회(BBWAA)는 18일 2026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수 있는 새 후보 12명과 기존 후보 15명을 발표했다. 추신수는 콜 해멀스, 라이언 브라운, 맷 켐프, 하위 켄드릭, 대니얼 머피, 헌터 펜스 등과 함께 신규 후보 명단에 포함됐다.2005년 시애틀에서 빅리그에 데뷔한 추신수는 2020년까지 16시즌 동안 1652경기에 출전해 타율 0.275(6087타수 1671안타), 218홈런, 782타점, 157도루, OPS(출루율+장타율) 0.824를 기록했다.호타준족 외야수였던 추신수는 세 시즌 20홈런-20도루를 달성했고, 2018년엔 텍사스 구단 최다인 52경기 연속 출루에도 성공했다. 2021년 한국프로야구 SSG에 입단한 그는 4시즌을 더 뛴 뒤 은퇴했다.추신수는 아시아 선수로는 네 번째 명예의 전당 후보다. 앞서 노모 히데오, 마쓰이 히데키, 스즈키 이치로 등 3명의 일본 선수가 후보로 선정됐다. 이중 이치로는 올해 1월 발표된 투표에서 득표율 99.75%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명예의 전당에 가입하려면 BBWAA 소속 10년 이상 경력을 지닌 기자들의 투표에서 75% 이상 지지를 얻어야 한다. 투표 결과는 내년 1월 21일 발표될 예정이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몇 해 전 일본에서는 ‘골프 한류’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이보미, 김하늘, 윤채영, 신지애 등 미모와 실력을 겸비한 골퍼들이 맹활약했기 때문이다.안신애(35) 역시 한류 열풍의 주역 중 하나였다. 2017년부터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투어에 진출한 안신애는 데뷔전부터 큰 화제를 모았다. 실력과 별개로 그의 존재 자체가 스타성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일본 골프계에는 치마를 입고 경기를 하는 선수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뛸 때도 ‘패션의 아이콘’이었던 안신애는 일본에서는 화려한 패션 센스와 인터뷰 스킬을 앞세워 ‘안신애 신드롬’을 일으켰다. 그는 일본에서는 이전에 좀처럼 볼 수 없던 선수였다. 다른 선수들이 스포츠 뉴스나 스포츠 관련 프로그램에 출연했다면 안신애는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버라이어티 쇼의 단골손님이었다. 2018년에는 톱스타들만이 할 수 있다는 화보집까지 발간했다. 안신애는 “빡빡한 대회 일정 속에 이동일에는 행사에 참여하거나 광고 촬영을 했다. 편의점에 가면 내 사진이 들어있는 스포츠신문과 잡지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한국 선수로 자부심을 느낄 만큼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일본 투어에서 뛴 3년은 그에겐 인생의 황금기인 동시에 아쉬움이 많이 남는 시기이기도 했다.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에서 메이저대회 우승 포함 3승을 거둔 그였지만 일본에서는 이렇다 할 성적을 전혀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 시즌을 뛰면서 그는 우승 경쟁을 제대로 해보지 못했다. 톱10에 이름을 올린 적도 없다. 더욱 아쉬웠던 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파행적으로 운영된 2020시즌이었다. 이전까지 부분 시드로 출전했던 안신애는 절치부심하면서 2020시즌을 준비했다. 2019년 말 열린 퀄리파잉스쿨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해 처음으로 풀 시드를 손에 넣었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그는 시합을 나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자연스럽게 골프계에서도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 약 4년간 그의 거의 골프채를 놓다시피 했다. 그가 다시 필드로 돌아온 것은 투병 중인 아버지를 위해서였다. 안신애는“병상의 아버지가 내가 투어에서 뛰는 모습을 너무 자랑스러워하셨다. 마지막으로 딸이 필드에서 뛰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다”고 했다. 여기서 그의 천재성이 다시 한번 발휘됐다. 거의 4년을 쉬고 몇 달 연습한 뒤 ‘지옥의 레이스’라 불리는 JLPGA투어 시드전을 통과한 것이다. 안신애는 “지난해 일본 투어를 뛰면서 일본 팬들에게도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었다”며 “틈 나는 대로 국내 대회도 몇 개 뛰었다. 아버지도 아픈 몸을 이끌고 내가 골프를 치는 모습을 봐 주셨다”고 했다. 올해 아버지가 별세한 뒤 안신애는 마침내 은퇴했다. 그리고 골퍼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선수 때 남달랐던 안신애의 행보는 은퇴 후에도 여전하다. 그는 얼마 전 화장품 브랜드 ‘메르베이(MERBEI)’를 론칭하며 뷰티 사업가로 변신했다. 그가 건넨 명함에는 ‘CEO’라는 세 글자가 박혀 있었다. 안신애는 “어릴 때부터 뷰티나 패션 쪽에 관심이 많았다. 은퇴 후 뭘 하면서 살아야 할까 생각하다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이왕 사는 인생 멋있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었다”고 했다.어릴 때부터 그에게 화장품은 생활필수품이었다. 안신애는 “골프는 모든 종목을 통틀어 선크림을 가장 많이 바르는 종목이다. 선수 생활을 하면서 일반 제품부터 고가 제품까지 다양하게 써 볼 기회가 있었다”며 “처음엔 막연하게 내가 선크림을 만들면 잘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새각했다. 이전에 써 본 제품들에서 각각 부족한 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화장품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사업은 골프와는 달랐다. 골프는 나만 필드에서 잘 치면 되지만 사업을 신경 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다행인 것은 그에겐 인복이 있다는 것이다. 안신애는 “처음 시작은 맨 땅에 헤딩하듯이 했다. 그런데 새로운 일을 맞닥뜨릴 때마다 도움을 줄 수 있는 분들을 알게 됐다”라며 “덕분에 시행착오를 최대한 줄이면서 일을 해나가고 있다. 항상 겸손하게 살려고 노력해왔다. 그래서인지 주변에서 도와주시는 분들이 적지 않다”라고 말했다. 그의 회사는 현재까지 에센스, 세럼, 크림, 선크림, 폼클렌저 등 5종의 스킨케어 제품을 내놨다. 그는 하루에 10번 넘게 자신의 얼굴로 직접 테스트하면서 만족스러운 제품을 만드는 제 참여했다. 안신애는 “20년 넘게 햇볕 아래에서 골프를 쳐 오면서 몸으로 느낀 건 분명하다. 관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30, 40대 이후가 확실히 다르다는 것”이라며 “많은 분들이 꾸준한 관리로 더 젊고 건강한 삶을 사셨으면 좋겠다”라고 했다. 안신애는 일본 등 해외 진출도 준비하고 있다.사실 그에게는 노력보다는 천재의 이미지가 더 크다. 하지만 평생 우승 한번 없이 사라지는 선수가 수도 없지만 그는 KLPGA투어에서 세 차례나 우승했다. 2009년엔 신인왕도 차지했고, 2015년엔 메이저대회까지 제패했다. 안신애는 “선수 시절에는 억울하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뉴질랜드 유학 시절 정말 누구보다 열심히 골프를 쳤다. 그 덕분에 골프 선수 안신애도 존재할 수 있었다”고 했다. 뉴질랜드에서 그는 학업과 골프를 병행했다. 그가 사는 곳은 문만 열면 골프장이 있었는데 그는 학교에 다녀오면 줄곧 채를 놓지 않았다. 안신애는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는 여름에는 오후 9시 넘어서도 해가 지지 않는다. 방과 후 숙제를 끝낸 후 잠을 자기 전까지 정말 열심히 훈련했다”고 했다. 사업가로 변신한 후 그는 운동을 못하는 만큼 먹는 양을 줄이면서 관리를 한다. 안신애는 “따로 다이어트를 하는 건 아니지만 가능한 한 적게 먹으려 한다”라며 “또 이왕이면 건강한 음식을 섭취하려고 노력한다. 피자를 먹는 대신 타코를 먹는 식”이라고 말했다. 사업과 함께 그는 여자로서의 인생도 살고 싶다고 했다. 그는 “최근 들어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종종 한다. 나 자신보다 아낄 수 있는 존재가 있었으면 좋겠다”라며 “아버지가 떠난 후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더 커지는 것 같다. 가족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게 결국 우리가 숨 쉬며 살아가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골퍼’ 안신애(35)는 시작부터 남달랐다. 2009년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에 데뷔한 그는 빼어난 외모와 세련된 패션 감각을 앞세워 필드를 화려하게 물들였다. 실력도 뒷받침됐다. 그해 신인왕을 차지했고, 이듬해인 2010년에는 2승과 함께 상금랭킹 3위에 올랐다. 2015년에는 메이저대회 KLPGA챔피언십도 제패했다. 2017년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투어에 진출해서는 ‘안신애 신드롬’을 일으켰다. 눈에 띄는 성적은 아니었지만 스타성만큼은 최고였다. 대회 때마다 일본 매체들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다녔다. 안신애는 각종 TV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화보를 찍는 등 최고 스타 대접을 받았다. 이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은퇴 후 그가 방송계에 진출하거나 인기를 이용해 골프 해설과 레슨을 할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안신애의 행보는 여전히 남다르다. 그는 얼마 전 화장품 브랜드 ‘메르베이(MERBEI)’를 론칭하며 사업가로 변신했다. 그가 건넨 명함에는 ‘CEO’라는 세 글자가 박혀 있었다. 안신애는 “어릴 때부터 뷰티나 패션 쪽에 관심이 많았다. 은퇴 후 뭘 하면서 살아야 할까 생각하다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이왕 사는 인생 멋있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었다”고 말했다. 어릴 때부터 그에게 화장품은 생활필수품이었다. 안신애는 “골프는 모든 종목을 통틀어 선크림을 가장 많이 바르는 종목이다. 선수 생활을 하면서 일반 제품부터 고가 제품까지 다양하게 써 볼 기회가 있었다”며 “하루에 10번 넘게 내 얼굴로 테스트하면서 만족스러운 제품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현재까지 에센스, 세럼, 크림, 선크림, 폼클렌저 등 5종의 스킨케어 제품을 내놨다. 그는 “20년 넘게 햇볕 아래에서 일하며 몸으로 느낀 건 분명하다. 관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30, 40대 이후가 확실히 다르다는 것”이라며 “많은 분들이 꾸준한 관리로 더 젊고 건강한 삶을 사셨으면 좋겠다”라고 했다. 안신애는 일본 등 해외 진출도 준비하고 있다. 나름의 성공적인 골프 선수 생활을 했지만 일본 진출 후 번듯한 성적을 내지 못한 아쉬움도 있다. 야심 차게 시즌을 준비했던 2020년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입국 자체를 하지 못했다. 이후 약 4년을 흘려보냈다. 하지만 2023년 말 JLPGA투어 퀄리파잉스쿨(Q)을 통과해 지난해 마지막으로 필드에 섰다. 안신애는 “투병 중이던 아버지가 내가 투어에서 뛰는 모습을 너무 자랑스러워하셨다. 작년 국내 대회에 출전할 때는 아픈 몸을 이끌고 골프장에도 와 주셨다”라며 “이제 아버지는 안 계시지만 주변에 도와주시는 분들이 있다. 내가 인생을 잘못 살진 않았구나 라고 느낀다”라고 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인복이 있는 것 같다. 선수 생활을 할 때도, 사업을 시작한 이후에도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라며 “나도 사업으로 성공하면 주변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 특히 골프를 하는 여자 후배들을 돕고 싶다”라고 말했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1987년 9월 13일은 ‘왕년의 야구 스타’ 김건우(62)에게 많은 것을 앗아간 날이었다. 1년 전인 1986년 MBC 청룡에 입단한 김건우는 18승 6패 평균자책점 1.80을 기록하며 신인왕에 올랐다. 2년차이던 1987년에도 승승장구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12승 7패 평균자책점 2.64를 기록하며 에이스로 활약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저녁 김건우는 여자친구를 데려다주다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했다. 얼마나 세게 차에 치였던지 그는 충돌과 함께 15m 넘게 날아갔다. 양쪽 팔과 한쪽 다리가 부러졌다. 여자친구도 가벼운 부상을 입었다. 김건우는 피를 흘리면서도 여자친구에게 기어가 안부를 확인했다. 그리고는 정신을 잃었다. 김건우는 “횡단보도에서 택시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갑자기 쾅 소리가 나면서 하늘이 노래졌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여자친구가 쓰러져 있는 걸 보고 다가가 ‘괜찮냐’고 물어봤다. 이후로는 전혀 기억이 없다”고 했다.불의의 교통사고 이후 ‘투수’ 김건우의 재능은 사라졌다. 수술과 재활을 거듭한 끝에 1989년 마운드로 돌아왔지만 예전처럼 묵직한 공을 던지던 김건우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었다. 김건우는 “시속 140km를 넘던 공이 120km대로 떨어졌다. 던질 수는 있었지만 팔꿈치가 통증이 이겨내지 못했다. 공을 던질 때마다 팔꿈치가 산산조각 나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에겐 여전히 ‘타자’로서의 재능이 남아 있었다. 선린상고 시절 그는 동기 박노준과 함께 고교무대를 휩쓴 스타였다. 투수로서도 잘했지만 타석에선 대포알같은 타구를 쏘아 올리곤 했다. 1992년 그는 타자로 변신했다. 모처럼 방망이를 잡았지만 강한 타구를 날렸다. 당당히 4번 타자로 나서며 한동안 최다안타 부문 1위를 달릴 정도로 선전했다. 그렇지만 하늘은 다시 한 번 그의 재능을 시샘했다. 빙그레와의 경기 중 땅볼을 치고 1루로 달려다가 장종훈과 충돌하면서 왼쪽 손목이 부러졌다. 그대로 시즌을 접어야 했다. 어느덧 나이는 30대를 넘어가고 있었다. 구단은 은퇴는 권유했고, 그는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투수와 타자로 모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김건우의 선수 생활이 아쉽게 저물었다. 그래도 그에게는 가장 소중한 게 남아 있었다. 교통사고 당시 그와 함께 있었던 여자친구 정재연 씨다. 김건우는 한양대 1년 후배인 정 씨를 선배이던 정상흠 전 LG 코치 소개로 만났다. 두 사람은 첫 만남부터 사랑에 빠졌다. 교통사고로 김건우의 미래가 불안해졌지만 그들의 사랑을 갈라놓진 못했다. 두 사람은 이듬해인 1988년 결혼했다. 김건우는 “처음 봤을 때부터 너무 예쁜 사람이었다. 큰 사고를 당한 후에도 나 같은 사람하고 결혼해 줄 정도로 착한 사람”이라며 “아내도 어느덧 할머니가 됐지만 내 눈에는 여전히 예쁘다”라며 웃었다. 한동안 그는 야구 재능을 꽃피우지 못한 걸 아쉬워했다. 은퇴 후 지도자로서도 크게 성공했다고 보기 어렵다. LG 트레이닝 코치와 투수 코치를 맡았지만 특별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프로 무대를 떠난 뒤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리틀 야구단을 운영하기도 했고, 2017년부터는 청담고 감독을 맡기도 했다. 중간중간 TV와 라디오 야구 해설자로서도 활동했다. 야구로서 큰 행복을 느끼지 못했던 그는 요즘 햄버거 패티를 구우며 어느 때보다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그는 지난해 충남 태안 연포해수욕장 인근에 자신의 이름을 딴 ‘건우수제버거’를 오픈했다. 서울살이에 지쳐 5년 전 귀촌한 그는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농로를 까는 일이나 도랑을 만드는 막노동을 하기도 했고, 식당에서 고기를 써는 아르바이트도 했다. 김건우는 “처음 귀촌을 해서는 용돈벌이 삼아 이런저런 일을 했다. 그런데 첫 손주가 태어나고 둘째 손주도 딸 뱃속에 생기면서 ‘장남감이라도 사 주려면 돈을 좀 더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수제버거 집을 열게 됐다”고 했다.평생 야구만 해온 김건우는 장사를 해본 적이 없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그가 원래부터 요리에도 재능이 있었다는 것이다. 김건우는 “원래부터 요리를 잘했고, 요리하는 것도 좋아했다. 요즘도 김치도 담그고 각종 반찬도 만든다”고 했다. 김건우 표 수제 햄버거는 그의 요리 재능에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쳐 탄생했다. 처음에는 패티 하나 굽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다음 손님이 오래 기다리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뚝딱 햄버거를 만들어낸다. 더블버거, 새우버거, 에그버거 등 종류도 다양하다. 맛이 좋은 데다가 가게 위치까지 좋아 대번 입소문이 났다. 여름 휴가철과 주말에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김건우는 “좋은 재료를 쓰니까 맛을 알아주시는 분들이 자주 찾아주신다. 또 저를 응원했던 팬들 중 멀리서 찾아주시는 분들도 적지 않다”며 웃었다. 그는 주방에서 햄버거를 만들고, 아내 정 씨가 서빙과 포장을 한다. 김건우는 “처음에는 용돈이나 벌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주말에는 주방에서 나오지 못할 정도로 장사가 잘 된다”며 “내 가게에서 아내와 둘이 일을 하니 따로 월세가 인건비도 들지 않는다. 아내와는 눈빛만 봐도 손발이 척척 맞는다”고 말했다. 주중에는 150~160개의 햄버거를 판매한다. 연휴나 공휴일에는 매출이 더 많이 나올 때도 종종 있다. 김건우는 “큰돈을 버는 건 아니지만 어지간한 회사원보다는 많이 버는 것 같다”며 “경제적으로 안정됐다는 점이 느낌”이라며 웃었다.김건우는 햄버거집 사장으로 사는 요즘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김건우는 “야구를 하느라 딸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햄버거 판 돈으로 아이들에게 용돈도 주고, 손주에게 장난감도 사 줄 수 있다. 아마도 지금이 내 인생의 황금기인 것 같다”며 웃었다. 그의 목표는 80세까지 패티를 굽는 것이다. 김건우는 “나와 아내 중 한 명만 아파도 장사를 할 수 없다. 지금처럼 80세까지 건강하게 햄버거를 만드는 게 꿈”이라며 “젊은 때부터 꿈꿨던 텃밭은 가꾸는 생활을 하고 있다. 손님이 뜸할 때는 자유 시간도 많다. 중고 피아노를 사서 연습도 한다. 언젠가는 내가 작사, 작곡한 곡을 써 보고 싶다”고 말했다. 건우수제버거는 일주일 중 수요일에 하루를 쉰다. 이날은 김건우 부부가 경기 수원에 사는 딸 집을 방문하는 날이다. 김건우는 “평소에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지만 손주를 보러 가는 이날이 가장 행복하다”라며 “수원에 들를 때마다 대형마트에 들러 신선하고 질 좋은 식재료를 구매한다.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인 것 같다”리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야구의 신’인 줄 알았던 오타니 쇼헤이(31)도 사람이었다. 오타니가 연장 18회 접전 끝에 승리한 이튿날 선발 등판한 월드시리즈에서 패전 투수가 됐다. 전날 월드시리즈 3차전에서 한 경기 9출루 경기를 했던 오타니는 2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다저스타디움에서 열린 토론토와의 4차전 선발 등판해 6이닝 6피안타(1홈런) 1볼넷 6탈삼진 4실점으로 흔들렸다.오타니는 전날 3차전에 1번 지명타자로 나서 홈런 두 방을 몰아치는 등 4타수 4안타 3타점 3득점 5볼넷으로 활약한 뒤 몇 시간만 쉬고 곧바로 마운드에 올랐다.오타니는 6이닝 동안 93개의 공을 뿌리는 괴력을 선보였지만 구속은 평소보다 다소 떨어진 모습이었다. 이날 패스트볼 평균 구속은 시속 97.5마일(약 156.9km)로 올해 평균 구속인 98.4마일(약 158.4km)을 밑돌았다. 최고 구속은 시속 99마일(약 159.3km)이었다. 전날 프레디 프리먼의 연장 18회 끝내기 홈런으로 짜릿한 승리를 거둔 다저스는 이날 2회 선취점을 뽑았다. 2회말 1사 1, 3루에서 엔리케 에르난데스가 희생플라이를 뽑아냈다.하지만 오타니는 이어진 3회초 1사 1루에서 토론토 중심 타자 블라디미르 게레로에게 4구째 가운데 높은 스위퍼를 공략당해 좌중간 역전 투런 홈런을 허용했다. 오타니는 4회부터 6회까지는 안타 1개만 내주고 호투했지만 7회 달턴 바쇼에게 우전 안타, 어니 클레멘트에게 중월 2루타를 허용한 후 마운드를 내려왔다. 이후 구원 투후 앤서니 반다가 오타니의 승계 주자에게 모두 득점을 허용하면서 승부의 추는 토론토 쪽으로 기울었다. 전날까지 1승 2패로 수세에 몰렸던 토론토는 이날 결국 6-2로 승리하면서 2승 2패로 시리즈 균형을 맞췄다. 게레로 주니어는 결승 홈런 포함 4타수 2안타 2타점 2득점으로 활약했다.토론토와 다저스는 30일 같은 장소에서 WS 5차전을 펼친다.이헌재 기자 uni@donga.com}

‘슈퍼스타’ 오타니 쇼헤이(31)는 투타 겸업의 대명사다. 오타니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한국에서도 투수, 타자로 모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선수가 몇몇 있었다. ‘비운의 야구 스타’ 김건우(62)도 그중 한 명이다. 선린상고 시절 그는 박노준과 함께 고교야구를 대표하는 스타였다. 마운드에선 돌처럼 묵직한 공을 던졌고, 타석에선 대포알 같은 타구를 쏘아 올렸다. 1986년 MBC 청룡에 입단해서도 승승장구했다. 데뷔전부터 1피안타 완봉승을 거두며, 18승 6패 평균자책점 1.80을 기록했다. 신인왕은 당연히 그의 차지였다. 하지만 이듬해 9월 불의의 교통사고 이후 ‘투수’ 김건우의 인생은 사라졌다. 여자 친구를 데려다주다 뺑소니차에 치여 양쪽 팔과 한쪽 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은 것이다. 김건우는 “10m 넘게 날아간 것 같다. 피를 흘리면서도 여자 친구 안부를 확인한 후 정신을 잃었다”고 했다. 강속구를 잃어버린 그는 1992년 타자로 전향했다. 당당히 4번 타자로 최다안타 부문 1위를 질주했다. 하지만 빙그레와의 경기 중 땅볼을 치고 1루로 달려다가 장종훈과 충돌하면서 왼쪽 손목이 부러졌다. 몇 해 지나지 않아 ‘타자’ 김건우는 은퇴했다. 김건우는 이후 LG 투수코치와 리틀야구단 감독, 청담고 감독 등을 지낸 뒤 야구계를 떠났다. 한동안 그는 야구 재능을 꽃피우지 못한 걸 아쉬워했다. 하지만 요즘은 햄버거 패티를 구우며 어느 때보다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그는 지난해 충남 태안 연포해수욕장 인근에 자신의 이름을 딴 수제버거집을 열었다. 김건우는 “서울살이에 지쳐 5년 전에 귀촌했다. 처음엔 고깃집에서 고기를 썰고 설거지도 했다. 농로를 까는 막노동도 했다”며 “그러다 손주도 태어나고 해서 고심 끝에 수제버거집을 열었다”고 했다. 난생처음 해보는 장사였지만 기대 이상이었다. 목이 좋은 데다가 입소문이 나면서 주문이 밀려들었다. 주말과 여름 휴가철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보냈다. 김건우는 “좋은 재료를 쓰니까 맛을 알아주시는 분들이 자주 찾아주신다. 또 저를 응원했던 팬들 중 멀리서 찾아주시는 분들도 적지 않다”며 웃었다. 그는 주방에서 햄버거를 만들고, 아내 정재연 씨가 서빙을 한다. 교통사고 당시 여자 친구였던 정 씨는 이듬해 아내가 됐다. 김건우는 “처음에는 용돈이나 벌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주말에는 주방에서 나오지 못할 정도로 장사가 잘된다”며 “아내는 눈빛만 봐도 호흡이 척척 맞는다. 어느덧 할머니가 됐지만 내게는 여전히 예쁜 사람”이라고 했다. 야구 선수로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는 햄버거집 사장으로 사는 요즘 더욱 만족감을 느낀다. 김건우는 “야구를 하느라 딸들과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햄버거 판 돈으로 아이들에게 용돈도 주고, 손주에게 장난감도 사준다. 지금이 내 인생의 황금기인 것 같다”며 웃었다. 그의 목표는 80세까지 패티를 굽는 것이다. 김건우는 “나와 아내 중 한 명만 아파도 장사를 할 수 없다. 지금처럼 80세까지 건강하게 햄버거를 만드는 게 꿈”이라며 “손님이 뜸할 때는 시간도 자유롭다. 중고 피아노를 사서 연습도 한다. 언젠가는 작사, 작곡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이승엽 전 프로야구 두산 감독이 일본프로야구 요미우리의 임시 코치직을 맡는다.요미우리 구단은 29일부터 다음 달 13일까지 열리는 팀 가을 캠프에 이 전 감독을 초빙힌다고 22일 발표했다. 2004년 일본 무대에 진출한 이 전 감독은 2006년부터 5년간 요미우리에서 활약했다. 요미우리 이적 첫 해인 2006년에는 4번 타자를 맡아 타율 0.323, 41홈런, 108타점으로 맹활약했다. 이후 요미우리와 4년 30억엔(약 282억 원)짜리 대형 계약을 한 그는 2011년 오릭스를 거쳐 2012년 KBO리그로 복귀했다. 이 전 감독은 한국에서 467홈런, 일본에서 159홈런 등 모두 626개의 홈런을 터뜨렸다. 이번 요미우리행에는 요미우리 시절 한솥밥을 먹었던 아베 신노스케 감독과의 친분이 크게 작용했다. 이 전 감독은 요미우리 역대 70대 4번 타자, 아베 감독은 역대 72대 4번 타자다. 일본 언론들은 요미우리가 이 전 감독을 통해 타선 강화를 노리고 있다고 전했다. 이 전 감독은 2023년부터 두산의 지휘봉을 잡았으나 감독 3년 차인 올해 6월 성적 부진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자진사퇴했다.이헌재 기자 uni@donga.com}

한국 양궁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못 따면 ‘죄인’이 되는 유일한 종목이다. 30년 넘게 세계 최강의 자리를 지키는 덕분에 한국 양궁은 자의든 타의든 금메달이 당연시된다. 무리한 기대 속에서도 양국 양궁은 매 대회 최고의 성적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 양궁은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사상 첫 전 종목(금메달 4개)을 석권했다. 혼성전이 포함돼 금메달 5개가 된 지난해 파리 올림픽에서 다시 한 번 5개 전 종목을 휩쓸었다. 하지만 금메달이 아니면 실패를 의미하는 한국 양궁을 이끄는 지도자들의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한다. 2012년 런던 올림픽 남자 대표팀 감독을 맡았던 오선택 현 프랑스 대표팀 감독(64)이 대표적이다. 당시 임동현, 김법민, 오진혁으로 구성된 남자 대표팀은 역대 최강 전력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만약 한국이 한 개의 메달을 딴다면 남자 대표팀이 될 거라고들 했다. 예선에서도 세계신기록을 3개나 따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남자 단체전에서 미국에 일격을 당하며 동메달에 ‘그쳤다.’ 일주일 후 열리는 남자 개인전까지 오 감독은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다. 오 감독은 “대표팀을 지도하면서 당뇨와 고혈압, 고지혈증이 모두 찾아왔다. 탈모도 생겨 머리를 박박 밀고 모자를 쓴 채 대회를 치렀다”고 했다. 그를 구했던 건 남자 대표팀의 맏형 오진혁이었다. 이전 대회까지 유독 개인전 금메달이 없던 한국 양궁은 오진혁의 사상 첫 개인전 금메달로 체면치레를 했다. 오 감독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을 때가 아닐까 싶다. 대회 후 인터뷰를 하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고 했다. 이에 비해 여자 대표팀 코치로 함께했던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은 천국이었다. 김수녕, 윤미진, 김남순으로 이뤄진 여자 대표팀은 거칠 게 없었다. 당연한 듯 여자 단체전 금메달을 목에 걸었을 뿐 아니라 개인전에서는 세 명의 선수가 금, 은, 동메달을 모두 차지하며 나란히 시상대 위에 섰다. 김수녕이 금, 윤미진이 은, 김남순이 동메달이었고, 4위는 북한의 최옥실이었다. 소속팀 LH 양궁단에서 정년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2019년 그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도전을 했다. 2020 도쿄올림픽 총감독직에 지원해 합격한 것이다. 그는 “얼마나 힘들고 부담이 될 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여자팀, 남자팀 지도자로 올림픽 금메달을 이뤘으니 총감독에 마지막 양궁 인생을 걸어보고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소망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물거품이 됐다. 전세계를 덮친 코로나19 유행 속에 2020년 도쿄올림픽이 1년 미뤄진 것이다. 여느 종목이라면 대표 선수와 대표팀 코칭스태프를 모두 유임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공정과 원칙을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대한양궁협회는 지도자와 선수를 모두 새로 뽑기로 했다. 그렇게 그의 양궁 지도자 인생도 끝나는 것 같았다. 의외의 기회는 프랑스에서 찾아왔다. 2024년 파리 올림픽을 앞두고 있던 프랑스가 좋은 성적을 내줄 경험 많은 지도자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오 감독은 정년 후에도 자신의 지도력을 펼칠 무대가 필요했다. 양측의 입장이 맞아떨어지면서 오 감독은 2022년 초 프랑스로 향했다.프랑스 양궁은 작년 파리 올림픽에서 두 가지 역사적인 기록을 남겼다. 남자 대표팀은 단체전 은메달을 따며 사상 처음 올림픽 시상대에 올랐고, 리자 바르블랭은 여자 선수 최초로 개인전 메달(동메달)을 수확했다. 한국 양궁이 전 종목(금메달 5개)을 석권한 가운데 프랑스는 종합순위 2위에 오르며 개최국의 체면을 지켰다.오 감독은 근력이 모자란 남자 선수들의 활을 한국 여자 선수들이 쓰는 활로 바꿨다. 바람 방향에 따라 조준을 달리하는 오조준도 가르쳤다. 동시에 한국 양궁의 DNA를 불어넣었다. 오 감독은 올림픽을 앞두고 퐁텐블로에서 양궁장이 설치된 파리 앵발리드까지 74km 거리의 행군을 기획했다. 오전 7시에 출발해 꼬박 24시간이 걸리는 강행군이었다. 오 감독은 “뚜렷한 목표의식을 갖기 위해선 기억에 남는 훈련이 필요하다. 선수들이 앵발리드로 골인하면서 개선하는 느낌을 주도록 했다”고 했다.한국에서 온 양궁 마스터 ‘미스터 오’는 파리 올림픽 후 르 몽드 등 유력지의 스포츠면 기사를 여러 차례 장식했다. 집 인근 레스토랑에 가면 알아보는 사람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좋아진 건 일과 삶의 균형이다. 여유 넘치는 프랑스 사람들과 함께하며 할 땐 하고, 쉴 때는 확실히 쉬는 삶을 산다. 흔히 말하는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 완벽한 인생이다. 좋은 날씨 속에 야채, 단백질 위주의 건강한 식단을 하면서 몸도 완전히 달라졌다. 한국에서 먹던 성인병 약은 프랑스에서는 모두 끊었다.근력 운동과 유산소 운동도 꾸준히 한다. 밴드 스트레칭으로 유연성을 유지하고, 가벼운 무게의 기구를 사용해 근력을 키운다. 주말에는 집 인근 골프장에서 카트를 끌고 18홀을 돈다. 오 감독은 “처음 프랑스에 왔을 때만 해도 18홀을 돈 뒤 너무 피곤해서 쓰러졌다. 지금은 가끔 36홀도 소화할 만큼 몸이 좋아졌다”며 웃었다. 프랑스에서 생활 체육에 가까운 승마도 가끔 한다.한국에서 성공적인 지도자 인생을 보낸 그가 프랑스에서도 많은 사람이 부러워할 만한 제2의 인생을 사는 건 양궁에 관한 열정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양궁을 시작한 그는 10점 과녁에 화살이 꽂힐 때의 쾌감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미친 듯이 운동을 했다. 일반 학생들이 등교하기 전인 오전 6시에 먼저 나가 운동을 시작했고, 밤이 깜깜해져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고교 때 전국대회 우승도 여러 번 했지만 선수로서의 한계도 일찍 깨달았다. 올림픽에 나갈 선수가 될 수 없으니 대학생 때 일찌감치 지도자로 변신했다. 처음엔 중고교 팀을 맡다가 1993년부터 한국토지공사(현 LH) 감독이 됐다. 그의 밑에서 성장한 대표적인 선수는 2016년 리우 올림픽 2관왕 ‘짱콩’ 장혜진이다. 실력에 비해 멘털이 약했던 장혜진은 번번이 대표 선발전 마지막의 벽을 넘지 못했다. 이를 이겨내는 방법은 관중들이 많은 국제대회에 많이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오 감독은 “국가대표야 알아서 국제대회 경험을 쌓을 수 있지만 장혜진 같은 선수는 그렇지 못했다. 개인 적금을 깨서 국제대회에 내보낸 적도 있다. 어느 순간 장혜진이가 알을 깨고 세계적인 선수가 됐다”고 했다. 한국에 있었더라면 벌써 은퇴했을 나이. 하지만 프랑스에서 오 감독은 여전히 현역이다. 최근에는 프랑스양궁협회와 2028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까지 재계약을 했다. 오 감독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양궁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라며 “유럽 양궁이 좀 더 성장해야 세계 양궁이 더 재미있어진다. 당장은 프랑스 대표팀에 집중하고자 한다. 장기적으로는 유럽 곳곳에 양궁 캠프를 세울 꿈을 꾸고 있다”고 말했다.이헌재 기자 uni@donga.com}

베테랑 양궁 지도자 오선택 감독(64)은 2021년 LH양궁단에서 정년을 맞은 후 일생의 선택을 했다. 2022년 프랑스 대표팀 감독직을 맡은 것이다. 2024년 파리 올림픽을 앞두고 있던 프랑스는 좋은 성적을 내줄 지도자를 원했다. 오 감독은 정년 후에도 자신의 지도력을 펼칠 무대가 필요했다. 양측의 입장이 맞아떨어지면서 오 감독은 2022년 초 프랑스로 향했다. 프랑스 양궁은 작년 파리 올림픽에서 두 가지 역사적인 기록을 남겼다. 남자 대표팀은 단체전 은메달을 따며 사상 처음 올림픽 시상대에 올랐고, 리자 바르블랭은 여자 선수 최초로 개인전 메달(동메달)을 수확했다. 한국 양궁이 전 종목(금메달 5개)을 석권한 가운데 프랑스는 종합순위 2위에 오르며 개최국의 체면을 지켰다. 오 감독은 근력이 모자란 남자 선수들의 활을 한국 여자 선수들이 쓰는 활로 바꿨다. 바람 방향에 따라 조준을 달리하는 오조준도 가르쳤다. 동시에 한국 양궁의 DNA를 불어넣었다. 오 감독은 올림픽을 앞두고 퐁텐블로에서 양궁장이 설치된 파리 앵발리드까지 74km 거리의 행군을 기획했다. 오전 7시에 출발해 꼬박 24시간이 걸리는 강행군이었다. 오 감독은 “뚜렷한 목표의식을 갖기 위해선 기억에 남는 훈련이 필요하다. 선수들이 앵발리드로 골인하면서 개선하는 느낌을 주도록 했다”고 했다. 오 감독은 한국에서부터 검증된 지도자였다. 소속팀에서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이은경(53), 2016년 리우 올림픽 2관왕에 오른 장혜진(38) 등을 키웠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땐 여자 대표팀 코치로 한국 선수단의 개인전 1∼3위를 이끌었고, 2012년 런던 대회에선 남자 대표팀 감독으로 사상 첫 남자 선수 개인전 금메달(오진혁)에 기여했다. 역설적이게도 세계 최강 한국 양궁을 지키면서 그는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 2012년 런던 올림픽 즈음에는 당뇨와 고혈압, 고지혈증에 시달렸다. 대회 기간 중에는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제2의 지도자 인생을 사는 프랑스에서는 다르다. 여유 넘치는 프랑스 사람들과 함께하며 할 땐 하고, 쉴 때는 확실히 쉬는 삶을 산다. 흔히 말하는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 완벽한 인생이다. 좋은 날씨 속에 야채, 단백질 위주의 건강한 식단을 하면서 몸도 완전히 달라졌다. 한국에서 먹던 약은 프랑스에서는 모두 끊었다. 근력 운동과 유산소 운동도 꾸준히 한다. 밴드 스트레칭으로 유연성을 유지하고, 가벼운 무게의 기구를 사용해 근력을 키운다. 주말에는 집 인근 골프장에서 카트를 끌고 18홀을 돈다. 오 감독은 “처음 프랑스에 왔을 때만 해도 18홀을 돈 뒤 쓰러졌다. 지금은 가끔 36홀도 소화할 만큼 몸이 좋아졌다”며 웃었다. 프랑스에서 생활 체육에 가까운 승마도 가끔 한다. 오 감독은 최근 프랑스양궁협회와 2028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까지 재계약을 했다. 오 감독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양궁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라며 “유럽 양궁이 좀 더 성장해야 세계 양궁이 더 재미있어진다. 당장은 프랑스 대표팀에 집중하고자 한다. 장기적으로는 유럽 곳곳에 양궁 캠프를 세울 꿈을 꾸고 있다”고 말했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프로야구엔 ‘악바리’나 ‘독종’이란 별명을 가진 선수들이 종종 나온다. 그중 원조 악바리를 꼽으라고 하면 누구나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 한국프로야구 제1호 몸에 맞는 공의 주인공인 김인식 연천 미라클 감독(72)이다. ‘국민 감독’으로 불리는 김인식 전 한국 야구 대표팀 감독(78)과는 동명이인이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작은 체구로 ‘베트콩’으로도 김인식은 승부욕이 남다른 선수였다. 키가 168cm 밖에 되지 않았던 그는 홈런 타자가 아니었다. 대신 공을 몸에 맞고서라도 출루하고자 하는 ‘악’과 ‘깡’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나야 뭐 치사하게 ‘데드볼’이나 맞고 출루하려고 했던 선수였을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상대 배터리의 입장에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는 날아오는 공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항상 타석에 바짝 붙어섰다. 조금이라도 공이 몸쪽으로 들어올라치면 팔이나 몸을 내밀어 일부러 맞았다. 일단 출루한 뒤에는 빠른 발을 앞세워 수비진을 흔들었다. 1루 나간 뒤 2루를 향해 뛸 듯 말 듯 하는 모습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그는 18차례의 사구(死球)를 기록했다. 이듬해인 1983년에는 13번 몸에 맞는 공으로 출루했다. 그리고 1984년 어느 날 한국 야구사에 지금도 깨지지 않는 기록이 하나 나온다. 바로 3연타석 몸에 맞는 공이다. 주연은 김인식, 조연은 재일교포 투수 고 장명부(삼미)였다. 제구력이 좋았던 장명부는 잠실 경기에서 두 번 연속 김인식을 맞혔다. 그리고 다음 인천 경기 첫 타석부터 다시 몸에 맞는 공을 던졌다. 김인식도 참지 않았다. 씩씩거리며 마운드를 향해 달려갔다. 여느 때 같으면 벤치클리어링이 벌어질 만도 했지만 양 팀 벤치의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김인식은 장명부의 허리띠를 잡고 당겼다. 하지만 덩치가 산만 했던 장명부는 꿈쩍도 하지 않고 가만히 내려다볼 뿐이었다. 김인식이 1루로 돌아갔을 때 장명부는 김인식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며 윙크를 했다. “일부러 빈볼을 던졌다”는 표현이었다. 김 감독은 “홈런도 못 치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 있겠나. 팀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루하자는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아무 공에나 맞으면 안 된다. 빠른 공을 피하고 이왕이면 변화구에 맞고 나가려 했다”며 웃었다. MBC 청룡에 입단하기 전 그는 실업야구 롯데제과에 몸담았다. 당시 일본에서 수비코치가 왔는데 그는 하루에 펑고를 500개씩 받았다. 김인식은 “도이 상으로 기억한다. 도이 코치로부터 수비 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은 후부터 힘과 기술이 몰라보게 좋아졌다. 거칠었던 플레이가 부드러워지면서 1976년에 국가대표로도 뽑혔다. 그리고 그해 콜롬비아 세계선수권대회에 나갈 수 있었다”고 했다.악착같은 노력도 한몫했다. 평소 그는 발과 하체 힘을 키우기 위해 운동화 대신 군화를 신고 다녔다. 그 모습을 본 일본인 코치는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독종”이라고 평했다. 프로 입단 후에도 그는 최선을 다했다. 몸을 아끼지 않는 허슬플레이를 펼치면서도 원년 개막전을 시작으로 6년간 606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세웠다. 이후 최태원 등에 의해 이 기록은 깨졌지만 프로야구의 원조 철인(鐵人)을 논할 때 그의 이름이 빠지지 않는 이유다. 고비도 적지 않았다. 내야수였던 그는 해태와의 경기 도중 김성한이 친 땅볼을 잡다가 오른쪽 엄지손가락이 완전히 꺾인 적이 있다. 그는 그 경기를 마지막까지 소화한 뒤 병원으로 갔다. 김인식은 “어떤 날은 피가 흐르는데도 경기를 계속한 적도 있다. 1루로 송구할 때 피가 1루까지 날아가곤 했다”고 회상했다. 무슨 일에든 최선을 다하는 자세와 야구에 대한 열정은 지도자가 된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1988년 선수 은퇴 후 그는 LG 2군 코치와 감독, 1군 수석코치 등을 두루 거쳤다. 2006년 LG 2군 감독을 끝으로 프로를 떠난 뒤에는 2007년부터 2013년까지는 충훈고 감독을 맡았다. 당시 신생팀이던 충훈고는 재정적으로 풍족하지 못했다. 선수단 버스를 운전할 기사 월급을 주는 게 여의치 않자 그는 1종 대형면허를 취득한 후 직접 선수단 버스를 몰았다. 그가 지도자로서 제2의 인생을 바치고 있는 곳은 2015년 창단한 독립구단 연천 미라클이다. 독립구단은 프로 지명을 받지 못했거나, 마지막으로 프로 도전을 목표로 하는 선수들이 모이는 곳이다. 11년째 지휘봉을 잡고 있는 그는 여전히 선수들과 함께 호흡한다. 경기 때는 더그아웃에 앉아 있지 않고 헬멧을 쓰고 3루 주루코치로 나간다. 김인식은 “야구를 하다가 아픔을 겪은 선수들에게는 재기할 기회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팀을 맡았는데 여기까지 오게 됐다”고 말했다. 한때 열악하기 그리 없던 독립리그지만 지금은 KBO리그로부터 점점 관심을 받고 있다. 팀 이름 미라클(기적)처럼 독립리그를 거쳐 프로야구에 진출하는 선수들이 한두 명씩 나오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연천에서 함께 땀을 흘렸던 손호영(롯데), 황영묵(한화), 박영빈(NC) 등은 어엿한 주전 선수로 1군 무대를 소화했다. 올해 롯데의 새 별로 떠오른 박찬형도 연천 미라클에서 2년간 함께 했다. 김인식 감독은 “손호영처럼 독립리그를 통해 뒤늦게 꽃을 피우는 선수들이 나오면서 이제는 프로 10개 구단 스카우트들이 종종 선수들을 보러 온다”라며 “프로의 관심 속에 선수들도 꿈과 희망을 갖고 더 열심히 하고 있다. 우리 독립리그가 프로야구의 3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2019년 발병한 위암도 야구로 극복했다. 암세포를 조기 발견해 수술을 받은 후 다시 야구장에서 젊은 선수들과 땀을 흘렸다.그는 요즘도 오전 5시 반이면 일어나 타격 연습이 필요한 선수들과 함께 운동장으로 향한다. 70살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배팅볼도 250~300개씩 던져 준다. 수시로 펑고도 친다. 김인식은 “젊은 선수들과 함께 호흡하는 게 나한테도 큰 도움이 된다. 3루 주루코치로 나가고, 배팅볼도 던지면 선수들이 더 집중한다“고 말했다. 연천 미라클의 연고지인 경기 연천군은 크게 유명할 게 없는 지자체였다. 하지만 연천 미라클의 선전 속에 야구 도시로서의 명성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다. 연천군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 연천 미라클은 2025 독립야구단 경기도리그에서 우승하며 4년 연속 챔피언에 올랐다. 김 감독은 “연천군의 적극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이 자리까지 올라오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열심히 하는 만큼 모든 분들이 정말 열심히 도와주신다”라며 “야구를 시작한 날부터 지금까지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았다. 지금까지 그라운드에 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다. 몸이 버티는 데까지 후배들과 야구 발전에 도움이 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이헌재 기자 uni@donga.com}

‘악바리’란 불린 사나이가 있었다. 프로야구 제1호 몸에 맞는 공의 주인공 김인식 독립리그 연천 미라클 감독(72)이다. ‘국민 감독’으로 불리는 김인식 전 한국 야구 대표팀 감독(78)과 동명이인이다. 원년 MBC 청룡 유니폼을 입었던 김 감독은 ‘악’과 ‘깡’으로 작은 체구를 이겨냈다. 신장 168cm의 작은 키에 힘도 그리 세지 않았지만 상대 배터리는 그를 무척 까다로워했다. 우선 그는 몸에 맞는 공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날아오는 공에 일부러 몸을 갖다 댄 후 출루하기도 했다. 일단 누상에 나갔다 하면 빠른 발로 수비진을 휘저었다. 그가 갖고 있는 또 하나의 기록은 3연속 타석 몸에 맞는 공이다. 평소 그를 눈엣가시처럼 보던 재일교포 투수 고 장명부(삼미)가 1984년에 세 번 연속 그를 맞혔다. 세 번째 공을 맞은 후 김 감독은 분을 참지 못하고 마운드로 달려갔다. 하지만 거구이던 장명부는 가만히 내려다볼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씩씩거리며 1루로 돌아간 김 감독에게 장명부는 찡긋 윙크를 했다. ‘빈볼이었다’는 표현이었다. 김 감독은 “홈런도 못 치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 있겠나. 팀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루하자는 생각이었다”며 “그렇다고 아무 공에나 맞은 건 아니다. 이왕이면 변화구에 맞고 나가려 했다”며 웃었다. 몸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그는 원년 개막전부터 606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세웠다. 내야수였던 김 감독은 “어느 경기에서인가 김성한(해태)이 친 땅볼에 엄지손가락이 꺾인 적이 있다. 그래도 끝까지 경기를 뛰었다”며 “피가 흐르는데도 그냥 뛰었다. 1루로 공을 던질 때 피가 1루까지 날아갔다”고 했다. 무슨 일에든 최선을 다하는 자세와 야구에 대한 열정은 지도자가 된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2006년 LG 2군 감독을 끝으로 프로를 떠난 김 감독은 2007년부터 2013년까지는 충훈고 감독을 맡았다. 당시 신생팀으로 재정적으로 열악했던 팀 사정상 그는 대형 면허를 취득해 손수 선수단 버스를 몰았다. 2015년부터는 독립구단 연천을 이끌고 있다. 독립구단은 프로 지명을 받지 못했거나, 마지막으로 프로 도전을 목표로 하는 선수들이 모이는 곳이다. 11년째 지휘봉을 잡고 있는 그는 여전히 선수들과 함께 호흡한다. 경기 때는 더그아웃에 앉는 대신 헬멧을 쓰고 3루 주루코치로 나간다. 오전 5시 반이면 일어나 타격 연습이 필요한 선수들에게 배팅볼도 300개씩 던져 준다. 수시로 펑고도 친다. 2019년 발병한 위암도 야구로 극복했다. 암세포를 조기 발견해 수술을 받은 후 다시 야구장에서 젊은 선수들과 땀을 흘렸다. 연천은 팀 이름 미라클처럼 기적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의 밑에서 마지막 도전을 한 황영묵(한화), 손호영(롯데), 박영빈(NC) 등이 KBO리그에 진출해 당당히 1군 무대에서 뛰고 있다. 박찬형(롯데)도 연천을 거쳤다. 연천군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 연천 미라클은 올 시즌에도 2025 독립야구단 경기도리그에서 우승하며 4년 연속 챔피언에 올랐다. 김 감독은 “야구를 시작한 날부터 지금까지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았다. 지금까지 그라운드에 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감사한 일”이라며 “몸이 버티는 데까지 후배들과 야구 발전에 도움이 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고독한 황태자’로 불렸던 윤학길 전 롯데 2군 감독(64)은 딸에게 운동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 한국 프로야구 역대 최다인 통산 100경기 완투 기록을 갖고 있는 윤 감독은 운동이 얼마나 힘들고 고독한 길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황태자의 DNA를 받고 태어난 딸 윤지수(32)는 어릴 때부터 에너지가 넘쳤다. 축구를 하겠다고 했다가, 태권도 선수가 되겠다고 했다. 윤 감독은 “딸을 예쁘게 키우고 싶었다. 지수는 어릴 때부터 공부도 꽤 잘했다. 그런데 결국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더라”고 했다. 윤지수가 다녔던 부산 양운중에는 남자 펜싱부가 있었다. 원래 여자 펜싱부도 있다가 윤지수가 입학했을 당시에는 남자부만 운영하고 있었다. 그의 운동신경을 알아본 박현석 선생님이 그에게 펜싱을 권했다. “너만 하겠다고 한다면 여자 펜싱부를 재창단해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처음 칼을 잡은 윤지수는 부내 유일한 여자 선수였다. 당연히 남자 선수들과 연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펜싱 스타일이 남자와 비슷해진 이유다. 윤지수는 “남자 선수들과 같이 체력 훈련을 했다. 체육관이 6층에 있었는데 남자 선수들과 함께 매일 뛰어올랐다”고 했다.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그와 연습 경기를 하다가 진 뒤 우는 남자 선수들도 생겼다. 윤 감독은 “잘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열심히는 하더라”고 했다. 아버지 윤 감독은 딸이 운동하는 데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그저 멀리서 응원만 했다. 다른 부모들처럼 경기가 열린 펜싱 경기장을 찾은 적도 한 번 없다. 하지만 윤지수는 선수 생활 내내 ‘윤학길의 딸’로 통했다. 그만큼 아버지의 그림자는 크고 깊었다.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그가 땀 흘리고 노력해 시상대 제일 높은 곳에 섰을 때도 사람들은 “윤학길 선수가 어떤 조언을 해줬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아빠의 존재가 그에겐 큰 동기부여가 됐다. 윤지수는 “어릴 적 종종 아빠를 따라 야구장을 갔다. 아빠는 항상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에 있었다. 아빠처럼 나도 큰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고 했다.어릴 때부터 유망주 소리를 들었던 윤지수였지만 세계적인 선수가 되는 과정이 호락호락 하지 만은 않았다. 세상은 넓었고 강자들은 많았다. 부산디자인고 3학년 때 처음 국가대표가 돼 태릉선수촌에 들어 갔지만 선배들의 기량은 그보다는 한참 위였다. 윤지수는 “나는 안되는 선수라고 생각했다. 당시 사촌 언니한테 전화해서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봐달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며 웃었다. 모든 아마추어 선수들의 꿈인 올림픽도 번번이 그를 외면했다. 2012년 런던 올림픽 땐 여자 사브르 개인전 금메달을 딴 김지연의 파트너 선수에 머물렀다. 런던 땅은 밟지도 못한 채 국내에서만 훈련했다. 처음 올림픽 출전이었던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때는 후보 선수로 엔트리에 들어 개인전에 출전하지 못했다. 단체전에선 5위를 했다. 2021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는 무릎 수술을 받아 출전을 못 할 뻔했다. 자신감도 바닥까지 떨어졌다. 죽도록 노력했지만 잘되지 않을 것 같았다. 우여곡절 끝에 나선 도쿄 올림픽에서 그는 김지연, 최수연, 서지연과 함께 여자 사브르 단체전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탈리아와의 동메달 결정전 한때 10점 차로 뒤졌지만 이를 45-42로 뒤집었다. 윤지수는 6바우트에서 11점을 추가하며 역전의 발판을 놨다. 그는 “내 생에 가장 기억이 남는 게 도쿄 올림픽 동메달이다. 꿈에 그리던 첫 올림픽 메달이었다”고 했다. 아버진 윤 감독은 딸의 경기를 TV로 보지 않았다. 아니, 볼 수가 없었다. 그는 혼자 산에 올라 등산을 하면서 마음으로 딸을 응원하고 있었다. 마침내 동메달을 확정한 윤지수의 연락이 왔을 때 그의 반응은 참으로 경상도 남자다웠다. “메달 땄다고 까불지 말고 몸가짐 잘하라”는 것이었다. 귀국 후 윤지수가 아빠의 목에 올림픽 동메달을 걸어줬을 때도 윤 감독은 “축하한다”는 말 대신 “잘나갈수록 겸손해라”고 말했다. 윤지수는 “정말 아빠다운 축하 말이었다. 나도 사람인지라 처음엔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맞는 말이라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윤학길-윤지수 부녀는 ‘올림픽 가족’이기도 하다. 1984년 상무 소속이던 윤 감독도 그해 열린 로스앤젤레스(LA) 올림픽에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했다. 다만 당시 야구 종목은 올림픽 정식 종목이 아닌 시범 종목이었다. 윤 감독은 “경기장이 LA 다저스의 홈구장인 다저스타디움이었다. 그곳에서 한국 팀의 첫 승을 내가 거뒀다. 아마 박찬호보다 훨씬 빨리 승리를 거둔 한국 선수일 것”이라며 “그런데 아픈 기억도 있다. 3, 4위 결정전에서 내가 홈런을 맞는 바람에 우리 팀이 졌다. 다저스타디움 첫 피홈런 기록도 내가 갖고 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윤지수는 맏언니로 출전한 지난해 파리 올림픽에서는 후배들과 함께 여자 사브르 단체전 은메달을 수확했다. 올림픽 은 1개, 동메달 1개를 갖고 있는 윤지수가 올림픽에 관한 한은 아버지를 뛰어넘은 셈이다. 부녀는 특징도 다르다. 윤 감독은 투수 시절 리그를 대표하는 선발 투수였다. 12시즌 동안 거의 대부분 선발 투수로만 뛰며 117승을 거뒀다. 그중 완투가 100회, 완봉승이 무려 20회였다.반면 딸 윤지수는 단체전에서 후반을 지키는 ‘마무리’ 역할에 더 강했다. 개인전보다는 단체전때 훨씬 성적이 좋았다. 윤지수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단체전을 할 때면 지고 있어도지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라며 “파리 올림픽 때 맏언니로서의 무게를 이기고 값진 은메달을 땄다. 서울시청 입단 후 파리 올림픽까지 이끌어주신 조종형 협회 부회장님께 감사드린다”고 했다. 올해 1월 한국 여자 펜싱 사브르의 간판으로 활약하던 윤지수가 정들었던 칼을 내려놨다. 더 뛸 수도 있지만 미련 없이 새로운 길을 걷기로 했다. 전북 익산체육관에서 열린 은퇴식 때 윤 감독은 꽃다발을 들고 딸을 찾았다. 윤지수는 “아빠는 한 번도 직접 경기장을 찾은 적이 없었다. 항상 멀리서 응원하던 아빠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펜싱장에 오셨다. 부녀간의 의리를 지켜주셨다”며 웃었다.그가 ‘의리’라는 표현을 쓴 건 1997년 8월 부산 사직구장에서 열린 윤 감독의 은퇴식 때 네 살이던 그가 꽃다발을 들고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얀색 치마를 입은 그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아빠에게 꽃다발을 건넸다.부녀는 은퇴 후 살아가는 모습도 닮았다. 2019년 한화 코치를 마지막으로 현장을 떠난 윤 감독은 한국야구위원회(KBO) 재능기부위원으로 야구와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틈날 때마다 유망주들을 성심성의껏 지도한다. 윤지수는 올해 1월 위례신도시에 자신의 이름을 딴 펜싱클럽을 열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그는 선수 때 알지 못했던 행복을 느끼고 있다. 윤지수는 “아이들이 웃으면서 펜싱을 하는 모습이 그렇게 귀여울 수 없다. 아이들의 눈을 보면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라고 말했다. 윤지수는 “돈을 많이 벌기보다는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펜싱의 재미와 매력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 나도 아빠처럼 받은 만큼 돌려주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이헌재 기자 uni@donga.com}

1997년 8월 부산 사직구장에서는 ‘고독한 황태자’ 윤학길 전 롯데 2군 감독(64)의 은퇴식이 열렸다. 1986년 롯데에 입단한 윤 감독은 1997년 은퇴할 때까지 롯데에서만 뛴 레전드 투수다. 그가 기록한 통산 100경기 완투는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다. 당시 네 살이던 딸 윤지수(32)도 그 자리에 있었다. 하얀색 치마를 입은 그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아빠에게 꽃다발을 건넸다. 올해 1월. 여자 펜싱 사브르의 간판으로 활약하던 윤지수가 칼을 내려놨다. 전북 익산체육관에서 열린 은퇴식 때 윤 감독이 꽃다발을 들고 딸을 찾았다. 윤지수는 “아빠는 한 번도 직접 경기장을 찾은 적이 없었다. 항상 멀리서 응원하던 아빠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펜싱장에 오셨다. 부녀간의 의리를 지켜주셨다”며 웃었다. 선수 생활 내내 윤지수는 ‘윤학길의 딸’로 통했다. 그만큼 아버지의 그림자는 크고 깊었다. 마냥 좋지만은 않았지만 아빠의 존재가 큰 동기부여가 된 것도 사실이다. 윤지수는 “어릴 적 종종 아빠를 따라 야구장을 갔는데 아빠는 항상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에 있었다. 아빠처럼 나도 큰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유망주 소리를 들었지만 목표로 했던 올림픽 메달은 번번이 그를 외면했다. 2012년 런던 올림픽 땐 파트너 선수에 머물렀고,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선 단체전 5위를 했다. 2021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는 무릎 수술을 받아 출전을 못 할 뻔했다. 우여곡절 끝에 나선 도쿄 올림픽에서 그는 김지연, 최수연, 서지연과 함께 여자 사브르 단체전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탈리아와의 동메달 결정전 한때 10점 차로 뒤졌지만 이를 45-42로 뒤집었다. 윤지수는 6바우트에서 11점을 추가하며 역전의 발판을 놨다. 윤지수는 맏언니로 출전한 지난해 파리 올림픽에서는 후배들과 함께 여자 사브르 단체전 은메달을 수확했다. 윤 감독은 투수 시절 리그를 대표하는 선발 투수였다. 반면 딸 윤지수는 단체전에서 후반을 지키는 ‘마무리’ 역할에 더 강했다. 파리 올림픽 이후엔 윤 감독을 ‘윤지수 아빠’라고 부르는 사람도 많아졌다. 윤 감독과 윤지수는 전형적인 ‘경상도 부녀’다. 많은 대화는 없지만 마음으로 서로를 챙긴다. 윤지수가 올림픽 메달을 아빠의 목에 걸어줬을 때도 윤 감독은 “축하한다”는 말 대신 “잘나갈수록 겸손해라”라고 말했다. 윤지수는 “아빠다운 축하말이었다. 섭섭할 수도 있지만 맞는 말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올림픽을 끝으로 미련 없이 은퇴를 택한 윤지수는 올해 1월 위례신도시에 자신의 이름을 딴 펜싱클럽을 열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그는 선수 때 알지 못했던 행복을 느끼고 있다. 윤지수는 “아이들이 웃으면서 펜싱을 하는 모습이 그렇게 귀여울 수 없다. 아이들의 눈을 보면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라고 말했다. 현장을 떠난 윤 감독은 요즘도 KBO 재능기부위원 자격으로 틈날 때마다 유망주들을 가르친다. 윤지수도 아버지의 길을 따르려 한다. 그는 “돈을 많이 벌기보다는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펜싱의 재미와 매력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 나도 아빠처럼 받은 만큼 돌려주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 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누구나 성공할 수 있고, 누구나 실패할 수 있다. 하지만 실패했다고 멈춰있으면 안 된다. 멈춰있는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은 없다. 뭔가 해보려고 하는 사람은 하늘이 돕는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다시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다.”이런 교수님 같은 말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이태현 용인대 무도스포츠학과 교수(49)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뻔하고 상식적인 말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이태현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이태현은 천당과 지옥, 천국과 밑바닥을 모두 경험한 몇 안 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모래판의 황태자’라는 별명으로 군림했던 이태현이지만 지금 이 자리까지 오기까지는 그는 산전수전을 다 겪어야 했다. 이태현은 일명 ‘이만기 키즈’다. 이만기가 화려한 기술을 앞세워 모래판을 휩쓰는 걸 보면서 씨름을 시작했다. 이태현 뿐 아니라 신봉민, 김경수, 김영현, 황규연 등 걸출한 장사들이 한국 민속씨름의 마지막 전성기를 함께 했다. 그중에서도 이태현은 단연 특별한 선수였다. 의성고 3학년이던 1993년 때 7관왕을 달성하며 ‘모래판의 지존’으로 불렸다. 민속씨름에 데뷔한 1994년에도 선전을 거듭하더니 그해 9월 곧바로 천하장사에도 등극했다. 하지만 꿈에 그리던 천하장사가 영광스러운 것만은 아니었다. 5판 3선승제로 치러진 백승일과의 결승전이 팬들의 기대와는 동떨어진 내용을 보였기 때문이다. 서로를 너무 잘 알던 두 선수는 공격보다는 방어에 치중했다. 무승부에 무승부가 이어졌다. 무려 12판까지 승부를 가리지 못하자 주최 측은 체중이 더 적게 나가는 선수가 이기는 걸로 규칙을 정했다. 승리는 체중이 적게 나간 이태현에게 돌아갔다. 이 때문에 한동안 그의 이름 앞에는 ‘저울장사’란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이태현은 “처음 천하장사가 됐을 때 마치 구름 위를 걷은 기분이었다. 경기를 마치고 휴게소에 갔는데 팬들이 박수를 치면서 환호해 줄 때 ‘이게 바로 천하장사구나’라고 느꼈다”고 했다. 하지만 하루 자고 일어나자 상황이 바뀐 걸 알았다. 그는 “다음 날 거의 모든 신문이 ‘저울장사’라는 표현을 썼더라. 환영받지 못하는 천하장사라는 걸 깨닫고 다음부터는 정말 공격적인 씨름을 하려고 애썼다. 실제로 이듬해 경기부터는 이기던 지던 공격적으로 임했다”라고 말했다. 타고난 힘에 기술까지 겸비하고 있던 이태현은 승승장구했다. 2006년 처음 은퇴할 때까지 그는 천하장사 3차례와 백두장사 18번을 차지했다. 모래판을 떠나면서 그는 인생 일대의 도전에 나섰다. 종합격투기인 일본 프라이드 진출을 선언한 것이다. 한국에서 씨름은 점점 인기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씨름협회는 내부 알력으로 시끄러웠다.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일본 종합격투기계는 이미 이전부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어느 날 그는 일본에서 초청을 받았다. 일본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뛰고 있는 이승엽의 경기도 볼 겸 구경이라도 해보라는 것이었다. 이태현은 “경기장에 들어섰을 때는 느낌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10만 관중의 환호가 내 도전 의식을 자극했다. 이렇게 큰 무대에 한 번 서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당시 그의 나이는 벌써 30대 초반이었다. 나름 팀을 꾸려 열과 성을 다해 훈련을 했다. 그는 “얼마나 열심히 했던지 이런 정성이었으면 천하장사 다섯 번은 더 했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수십 년 씨름에 익숙해진 몸이 종합격투기형 몸으로 단시간에 바뀔 리 없었다. 머리로는 알아도 몸이 따라가질 않았다. 그해 9월 히카르도 모리아스와의 데뷔전에서 그는 1라운드 8분 8초만에 TKO로 패했다. 훤칠하게 잘 생겼던 그의 얼굴은 피와 멍으로 가득 찼다. 몸보다 더 아픈 건 마음이었다. 당시 그는 무지막지한 악플에 시달렸다. 절치부심한 그는 당대 최고의 종합격투기 선수였던 표도르가 운영하던 러시아로 전지훈련을 떠났다. 그곳에서 그는 또 다른 지옥을 경험했다. 천하장사건 뭐건 그곳에선 모든 게 실전이었다. 코뼈가 내려앉고, 눈가가 찢어졌다. 이태현은 “한 손에는 가족사진, 또 한 손에는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들고 6개월을 버텼다. 죽고 싶은 마음을 아이들 사진을 보면서 다잡았다”고 말했다. 훈련의 성과는 놀라웠다. 비밀리에 한국 챔피언과 스파링을 했는데 주먹이 날아오는 게 다 보였다. 일본 도장에 가서 스파링을 했는데 두 명을 꼬꾸라뜨렸다. 그리고 복귀전으로 치른 야마모토 요시히사오의 경기에서 1라운드 TKO승을 거뒀다. 그의 앞에는 거칠 게 없어 보였다. 몸도 좋았고, 자신감도 넘쳤다. 하지만 자만심이 화를 불렀다. 다름 상대를 세계 최고 수준의 선수였던 알리스타 오브레임(네덜란드)으로 고른 것이다. 이태현은 “이왕 할 거면 제대로 된 선수랑 붙고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1라운드 36초 만에 처참하게 무너졌다. 니킥을 맞고 기절한 것이다. 이태현은 “씨름으로 쌓아 올렸던 부와 명예가 바닥까지 추락했다. 사람들이 무서워 3개월 동안 아예 집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라고 했다.수렁에 빠진 그를 다시 꺼내 준 것은 씨름이었다. 친구들은 그를 데리고 오토바이 여행을 다녔다. 헬멧을 쓰고 있으면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초등학교 은사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가 다시 모래판으로 돌아오라는 제의를 받았다. 아내 이윤정 씨도 “오빠가 가장 잘하고, 즐거웠던 것을 하라”며 힘을 보탰다. 이태현은 “복귀를 결심했을 때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막상 내가 모래판에 올라오자 그런 분들도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셨다”라며 “돌아온 씨름판에서는 모든 분들이 내게 좋은 말씀을 해주셨다. 나를 다시 일으켜준 씨름을 위해 남은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했다. 복귀 첫해 그는 정상에 오르진 못했다. 10월 백두장사와 12월 천하장사에서 각각 준우승을 했다. 우승을 하지 못하고 2등을 해도 팬들을 그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한창때 140kg를 넘겼던 몸무게는 종합격투기를 하면서 120kg까지 빠져 있었다. 아내는 요리 학원을 다니면서 맛있는 걸 해 먹였다. 다시 몸무게가 140kg대로 올라온 그는 제 기량을 찾았다. 이듬해인 2010년 그는 1월 설날장사에 등극했고, 이후 백두장사에서 두 번 더 우승했다. 그는 천하장사 3회, 백두장사 20회, 통산 497승이라는 빛나는 기록을 뒤로 하고 2011년 3월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은퇴 후 그는 결심대로 씨름을 위한 인생을 살고 있다. 2011년 용인대 교수로 임용돼 지금까지 교수로 일하고 있다. 용인대 씨름부를 이끌면서 대한체육회 이사와 대한씨름협회 이사직도 맡고 있다. 문화재청 산하 인류문형문화유산씨름진흥원 이사장직도 수행하고 있다. 그의 모든 활동은 오직 씨름을 향해 있다. 처음 씨름을 시작할 때부터 부모님은 그에게 공부를 함께 시켰다. 경북 의성으로 씨름 유학을 간 그는 주말에 집에 오면 과외수업을 받았다. 용인대에 입학해서는 친구들이 “자더라도 강의실에서 자라”며 그를 수업에 데리고 들어갔다. 그렇게 책을 가까이한 덕분에 바쁜 와중에도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이태현은 “씨름을 국내외 여러 곳에 많이 알리기 위해 애쓰고 있다. 재작년에 미군들을 상대로 씨름을 가르쳤고, 몽골에도 씨름을 전파했다. 최근에는 태권도의 품새라 할 수 있는 씨름의 겨룸새를 개발하고 있다”라며 “전 세계적으로 씨름과 유사한 종목들이 많다. 씨름을 아시안게임을 넘어 세계선수권대회 종목으로 만드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하루가 어떻게 가는 줄 모르고 바쁘게 살고 있는 그에겐 버킷리스트가 하나 있다. 실의에 빠져 집에만 머물던 그를 다시 세상 밖으로 꺼내진 바이크를 타고 유럽을 누벼보는 것이다. 이태현은 “바이크를 타면 앞만 봐야 한다. 잡생각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조용한 산길,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며 자연과 하나가 될 수 있어 너무 좋았다”라며 “언젠가 조금 한가해지는 시간이 온다면 혼자서, 또는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와 함께 한달 간 바이크 여행을 해보고 싶다”라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모래판의 황태자’ 이태현(49)은 민속씨름 데뷔 첫해이던 1994년 천하장사에 올랐다. 영광스러운 꽃가마였지만 비난도 적지 않았다. 백승일과 치른 결승전(5판 3승제)은 지루한 무승부 끝에 12판이 지나서야 끝났다. 승리는 체중이 더 적게 나간 이태현에게 돌아갔다. 그에겐 한동안 ‘저울 장사’란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하지만 인생 최대의 시련은 전성기를 지낸 뒤 도전한 종합격투기에서 찾아왔다. 씨름 인기 하락과 내부 알력 등으로 시끄러웠던 2006년 이태현은 전격적으로 일본 프라이드에 진출했다. 천하장사 3회, 백두장사 20회, 통산 497승에 빛나는 그였지만 제대로 된 준비 없이 도전한 종합격투기가 순조로울 리 없었다. 2006년 첫 경기에서 브라질 선수에게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TKO패를 당했다. 러시아 표도르 훈련장에서 6개월간의 맹훈련 후 가진 첫 경기에서 일본 선수를 상대로 첫 승을 거뒀지만 2008년 알리스타이르 오버레임(네덜란드)에게 1라운드 36초 만에 처참히 무너졌다. 이태현은 “씨름으로 쌓아 올렸던 부와 명예가 바닥까지 추락했다. 3개월 동안 아예 집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라고 했다. 그를 수렁에서 꺼내준 건 아내 이윤정 씨와 친구들이었다. 친구들은 그를 데리고 오토바이 여행을 다녔다. 헬멧을 쓰고 있으면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초등학교 은사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가 다시 모래판으로 돌아오라는 제의를 받았다. 아내 이 씨도 “오빠가 가장 잘하고, 즐거웠던 것을 하라”며 힘을 보탰다. 한창 때 140kg을 넘겼던 몸무게는 종합격투기를 하면서 120kg까지 빠져 있었다. 아내는 요리 학원에 다니면서 맛있는 걸 해 먹였다. 다시 몸무게가 140kg대로 올라온 그는 승승장구하며 두 차례 더 백두장사를 차지했다. 이태현은 “종합격투기를 하면서 지독한 악성 댓글에 시달렸다. 그런데 돌아온 씨름판에서는 팬들이 격려를 해 주시더라. 나를 다시 일으켜준 씨름을 위해 남은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했다. 2011년 은퇴한 그는 그해 용인대 교수로 임용돼 지금까지 무도스포츠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용인대 씨름부를 이끌면서 대한체육회 이사와 대한씨름협회 이사직도 맡고 있다. 인류무형문화유산씨름진흥원 이사장직도 수행하고 있다. 그의 모든 활동은 오직 씨름을 향해 있다. 처음 씨름을 시작할 때부터 부모님은 그에게 공부를 함께 시켰다. 경북 의성으로 씨름 유학을 간 그는 주말에 집에 오면 과외 수업을 받았다. 용인대에 입학해서는 친구들이 “자더라도 강의실에서 자라”며 그를 수업에 데리고 들어갔다. 그렇게 책을 가까이한 덕분에 바쁜 와중에도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이태현은 “씨름을 국내외 여러 곳에 많이 알리기 위해 애쓰고 있다. 재작년에 미군들을 상대로 씨름을 가르쳤고, 몽골에도 씨름을 전파했다. 최근에는 태권도의 품새라 할 수 있는 씨름의 ‘겨룸새’를 개발하고 있다”라며 “전 세계적으로 씨름과 유사한 종목들이 많다. 씨름을 아시안게임을 넘어 세계선수권대회 종목으로 만드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대한프로레슬링연맹(WWA)은 30일 오후 3시 경기 부천체육관에서 고 이왕표 7주기 추모대회 ‘WWA THE WRESTLERS: 1 (더 레슬러즈: 1)’을 개최한다. 메인 이벤트는 WWA 월드 헤비급 챔피언 홍상진과 그와 23년 지기인 후배 김민호의 대결이다. 두 사람은 고 이왕표의 제자들이다. 이외에도 극동헤비급챔피언 조경호가 일본 유학 시절 동기이자 라이벌인 WWE 크루저웨이트 클래식 출신인 제이슨 리를 상대로 방어전을 치른다. 레전드 격투가 한태윤, 최두억과 WWA에서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피지컬 몬스터 하카(대만), 마이클 수(홍콩)의 태그팀 매치를 벌인다. 이를 포함해 다양한 스토리를 가진 6 시합이 열린다. 시합 당일 현장에는 이번 대회 메인스폰서인 성훈종합건설(주) 권태훈 대표를 비롯하여 고 이왕표와 ‘바늘과 실’ 같은 존재였던 프로레슬러 노지심, 홍보대사 개그맨 박준형, 배우 문주원, 금광산, 개그맨 김시덕 등이 참석한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스키 타는 게 세상에서 제일 좋았던 소녀가 있었다. 틈만 나면 스키를 타던 그는 어느 날 올록볼록한 언덕을 타는 스키를 알게 됐다. 당시로선 생소했던 모굴스키였다. 국내에 정식 코스도 제대로 없을 때였지만 경사면 스키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모굴스키는 눈이 쌓인 언덕을 내려오면서 회전기술, 공중연기, 속도를 겨루는 프리스타일 스키 종목이다. 그가 중학교 2학년 때 국내에서 모굴스키 대회가 열렸다. 당시 그는 정식 선수는 아니었지만 전(前) 주자로 먼저 코스를 탔다. 일본 주니어 대표팀을 이끌고 방한했던 일본 감독이 그 모습을 지켜본 뒤 “같이 일본으로 가서 훈련해 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렇게 그는 ‘정식’ 모굴스키 선수가 됐다. 일본에서 제대로 훈련받은 그는 고1 때 한국 모굴스키 국가대표가 됐다. 하지만 생애 처음 태극마크를 단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중간고사를 보러 가기 위해 하루 훈련에서 제외해 줄 것을 대표팀에 요청하자 코칭스태프는 국가대표 포기 각서를 쓰라고 했다. 그는 과감히 태극마크를 포기하고 시험을 보러 갔다. 모굴스키를 선택한 것도, 시험을 보기 위해 국가대표를 포기한 것도 남달랐던 그는 전 한국 여자 모굴스키 국가대표 서정화(35)다. 그때부터 10여 년이 지난 현재 그는 법무법인 YK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을 졸업한 뒤 지난해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강원 춘천에서 만난 서정화는 “어린 마음에 ‘국가대표가 안 되면 체육 선생님을 하면 되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당시에도 꿈은 올림픽에 나가 메달을 따는 것이었다. 하지만 부모님도, 나도 운동과 공부를 병행하면서도 충분히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1년 뒤 그는 다시 국가대표 선발전을 통과해 태극마크를 달았다. 이번엔 대표팀에서 운동과 학업을 병행하는 걸 허락해줬다. 고교 졸업 후 대학은 운동과 학업을 같이 하는 게 당연한 미국으로 갔다. 서던캘리포니아대에 입학한 그는 동아시아 국제 관계를 전공하면서 스키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그는 두 차례 겨울올림픽에 출전했다. 2010년 밴쿠버 올림픽에선 21위를 했고, 2014년 소치 대회 땐 부상 여파로 24위를 했다. 서정화는 “미국에서는 운동 선수를 대하는 문화가 한국과는 천양지차였다. 올림픽에 출전한다고 얘기하면 ‘너는 공부도 열심히 하면서 운동도 잘하는구나. 인생을 열정적으로 살고 있구나’라며 인정해주는 문화가 있었다”고 말했다. 말처럼 운동과 공부를 병행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스키 종목 특성상 주요 국제대회는 유럽 등에서 많이 열렸고, 올림픽 등을 앞두고는 훈련도 유럽에서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서정화는 “전지훈련을 가거나 대회를 갈 때에는 에세이 등을 과제로 대신 제출해야 했다. 계절학기도 들어야 했다”면서 “하지만 한편으로는 운동에만 매몰되지 않아 좋았다. 사람은 누구나 온-오프(on-off)가 있어야 하는데 내 경우엔 ‘온’이 운동이었다면 공부가 ‘오프’ 역할을 했다”고 했다. 그래도 일반 학생들보다 졸업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2009년 입학한 그는 2015년에 졸업장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한국에서 열린 2018 평창 올림픽에서 대한민국 여자 모굴 사상 처음으로 결선 진출의 쾌거를 이뤄냈다. 평창올림픽 최종 성적은 14위였다. 그는 공중에서 두 바퀴를 돌아 720도 회전을 하는 ‘콕 7(CORK 7)’ 등 남자 선수들이 주로 했던 도전적인 기술들을 많이 선보였다. 여기서 의문 하나. 딱딱한 얼음 같은 슬로프에 잘못 착지하면 큰 부상을 입을 수 있지 않을까. 평소 모굴스키 선수들은 어떻게 훈련을 하는 걸까. 서정화는 “처음에는 공중 동작을 지상에서 익힌다. 트램폴린 등을 이용해 체조처럼 동작을 한다”라며 “이게 익숙해지면 ‘워터 점프’라고 해서 물에 착지하는 동작을 익힌다. 물에 착지하는 것까지 몸에 완전히 익히면 눈으로 이동한다”라고 설명했다. 그가 선수로 뛸 당시 국내에는 ‘워터 점프’ 시설이 없었다. 이 시설을 이용하기 위해서라도 해외에 전지훈련을 가야 했다. 최근 국내에도 강원 춘천 남산면에 ‘발리376’이라는 워터 점프장이 생겼다. 서정화와 함께 모굴스키 선수생활을 했던 남동생 서명준이 운영하는 곳이다. 서정화는 “동생이 최근 은퇴하면서 이 시설을 짓고 운영하게 됐다. 스키 선수들만 상대해서는 수익이 나지 않아 오전엔 선수들이 사용하고, 오후엔 일반인에게도 개방한다”고 했다. 평창 올림픽을 전후해 그는 ‘제2의 인생’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다행히 학창 시절 내내 공부와의 끈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변호사 시험에도 도전할 수 있었다. 운동과 학업의 병행에 대한 그의 생각은 확고했다. 그는 “현재 우리나라 어린 선수들의 운동 시간이 너무 길다. 다른 나라 선수들은 두세 시간 하는데 우리는 7, 8시간을 한다”라며 “긴 운동 시간에는 부상 위험도 따른다. 그런 부분을 고려하면 우리 선수들도 훈련을 집중적으로 하면 공부할 시간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운동선수들의 인생에도 운동 이외의 삶이 있어야 한다. 공부를 잘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꾸준히 학교를 다니고, 일상적인 학교생활을 해나가는 것만으로도 향후 인생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경우엔 어릴 때부터 고민했던 스포츠 인권과 관련된 문제가 로스쿨을 선택한 계기가 됐다. 서정화 변호사는 “변호사로 일한 지 1년 밖에 되지 않아서 현재 일하고 있는 로펌에서 민사와 형사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사건을 접하며 배우고 있다”며 “앞으로 어떤 분야를 전문으로 하든 스포츠 인권과 관련된 문제는 꾸준히 관심을 갖고 지켜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변호사 업무와 별개로 그는 현재 한국도핑방지위원회(KADA) 선수위원을 맡으며 시민단체인 스포츠인권연구소에서 활동하고 있다. 서정화는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협회나 지도자와의 갈등이 있을 때 선수들의 목소리가 반영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라며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스포츠 인권 침해의 원인이나 구조적인 문제를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되고 싶다”라고 말했다. 변호사로 일하면서 그는 운동을 시작한 후 거의 떨어져 지냈던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선수 생활을 할 때보다는 훨씬 시간과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운동도 꾸준히 한다. 일주일에 두세 번 피트니스센터에 가서 러닝과 근육 운동을 한다. 최근에는 클라이밍에도 재미를 붙였다. 서정화는 “스키 선수 생활을 할 때는 하체를 많이 썼다. 그래서 당시 ‘크로스 트레이닝’을 위해 비시즌에는 상체 위주의 클라이밍을 했었다”라며 “당시엔 운동을 위해서였다면 지금은 재미로 한다. 어려운 문제를 푸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그것도 나름대로 재미있다”고 말했다.하지만 여전히 그에게 마음의 고향은 스키 슬로프다. 은퇴 후에도 가끔 스키장에서 눈 위를 달렸던 그는 지난해부터 전국체전 시범종목으로 채택된 모굴 종목에 출전하고 있다. 제주특별자치도 소속으로 출전한 작년과 올해 모두 그는 일반부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서정화는 “대회 때가 아니면 완벽한 모굴스키 코스를 타 보기가 어렵지 않나. 오랜만에 대회 코스 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다”라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LA 다저스의 ‘슈퍼스타’ 오타니 쇼헤이(31)가 ‘투수들의 무덤’ 쿠어스 필드에서 투수 복귀 후 최악의 투구를 했다. 오타니는 21일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의 쿠어스 필드에서 열린 2025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콜로라도와의 방문 경기에 1번 타자 겸 선발투수로 출전해 4이닝 동안 9피안타 무사사구 3탈삼진 5실점을 기록했다. 팀이 3-8로 패하면서 오타니는 올 시즌 10번째 등판만에 첫 패(무승)까지 떠안았다. 평균자책점은 3.47에서 4.61로 올라갔다. 오타니가 한 경기에서 9개 이상의 안타를 허용한 건 LA 에인절스 시절이던 2021년 9월 11일 휴스턴전(3과 3분의1이닝 9피안타 6실점) 이후 약 3년 11개월 만이다. 1회를 삼자 범퇴로 막은 오타니는 0-0이던 2회말 안타 3개와 희생타 1개를 허용하며 2실점 했다. 3회엔 다시 삼자 범퇴를 기록했으나 4회에 집중타를 얻어맞았다. 조던 벡을 시작으로 워밍 베르나벨, 미키 모니아크, 브렌턴 도일, 올랜도 아르시아 등 다섯 타자에게 연속 안타를 허용하며 3점을 내줬다.특히 아르시아의 타구는 오타니의 오른쪽 바깥쪽 허벅지를 직접 때렸고, 오타니는 한참 동안 그라운드 위에서 통증을 호소했다. 오타니는 잠시 휴식 후 이닝을 마무리했지만 0-5로 뒤진 5회말 수비에서 교체됐다. 타자 오타니는 이날 2타수 1안타 1볼넷을 기록한 뒤 8회초 공격 때 앨릭스 콜과 교체됐다.오타니는 경기 후 “올 시즌 초 (타석에 들어섰다가) 투수의 공에 맞았던 부분에 똑같이 타구를 맞았다. 하지만 향후 정상 출전에 지장이 없도록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타니는 하루 휴식 후 23일 시작되는 샌디에이고와의 경기부터 정상 출전할 예정이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국가대표냐, 중간고사냐. 전 한국 여자 모굴스키 국가대표 서정화(35)는 고교 1학년 때 인생의 기로에 섰다. 생애 처음 태극마크를 단 기쁨도 잠시. 중간고사를 보러 가기 위해 하루 훈련에서 제외해줄 것을 요청하자 대표팀은 국가대표 포기 각서를 쓰라고 했다. 그는 과감히 태극마크를 포기하고 시험을 보러 갔다. 10여 년이 지난 현재 그는 법무법인 YK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을 졸업한 뒤 지난해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서정화는 “어린 마음에 ‘국가대표가 안 되면 체육 선생님을 하면 되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당시에도 꿈은 올림픽에 나가 메달을 따는 것이었다. 하지만 부모님도, 나도 운동과 공부를 병행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1년 뒤 그는 다시 국가대표 선발전을 통과해 태극마크를 달았다. 이번엔 다행히 대표팀에서 운동과 학업을 병행하는 걸 허락해줬다. 고교 졸업 후 대학은 운동과 학업을 같이 하는 게 당연한 미국으로 갔다. 서던캘리포니아대에서 동아시아 국제 관계를 전공한 그는 “대회에 나갈 때는 에세이 등을 과제로 대신 제출해야 했다”면서 “하지만 한편으로는 운동에만 매몰되지 않아 좋았다. 사람은 누구나 온-오프(on-off)가 있어야 하는데 내 경우엔 ‘온’이 운동이었다면 ‘오프’는 공부였다”고 했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그는 두 차례 겨울올림픽에 출전했다. 2010년 밴쿠버 올림픽에선 21위를 했고, 2014년 소치 대회 땐 부상을 당한 여파로 24위를 했다. 그리고 그는 한국에서 열린 2018 평창 올림픽에서 대한민국 여자 모굴 사상 처음으로 결선 진출을 이뤄낸 뒤 14위로 대회를 마쳤다. 공중에서 두 바퀴를 돌아 720도 회전을 하는 ‘콕 7(CORK 7)’이 그의 주 기술이었다. 공부와의 끈을 놓지 않았기에 그는 은퇴 후 변호사가 될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고민했던 스포츠 인권과 관련된 문제가 로스쿨을 선택한 계기가 됐다. 서정화 변호사는 “현재 일하고 있는 로펌에서 민사와 형사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사건을 접하며 배우고 있다”며 “앞으로 어떤 분야를 전문으로 하든 스포츠 인권과 관련된 문제는 꾸준히 관심을 갖고 지켜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변호사 업무와 별개로 그는 현재 한국도핑방지위원회(KADA) 선수위원을 맡으며 시민단체인 스포츠인권연구소에서 활동하고 있다. 변호사로 일하면서 그는 운동을 시작한 후 거의 떨어져 지냈던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선수 생활을 할 때보다는 훨씬 시간과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운동도 꾸준히 한다. 일주일에 두세 번 피트니스센터에 가서 러닝과 근육 운동을 한다. 최근에는 동료 변호사와 함께 클라이밍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그에게 마음의 고향은 스키 슬로프다. 은퇴 후에도 가끔 스키장에서 눈 위를 달렸던 그는 지난해부터 전국체전 시범종목으로 채택된 모굴 종목에 출전하고 있다. 결과는 작년과 올해 모두 일반부 금메달이었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