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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호성 서울시청 사이클팀 감독(51)은 한국 자전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조호성은 올림픽 메달에 가장 근접했던 ‘사이클 황제’였다. 한국 선수 중 올림픽 시상대에 선 선수가 한 명도 나오지 않은 가운데 그는 한국 올림픽 역대 최고 성적인 4위를 기록했다. 다만 아쉬운 4위였다. 조호성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포인트레이스(250m 트랙을 160바퀴를 돌고, 10km마다 순위를 매겨 총점으로 승자를 가리는 경주)에서 158바퀴를 돌 때까지 3위였다. 두 바퀴만 더 순위를 유지했으면 메달을 딸 수 있었으나 두 바퀴를 남기고 1점 차로 역전당했다. 조호성은 “올림픽에 오기 3주 전에 이탈리아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경쟁자들을 모두 제치고 월등하게 1등을 했다. 마음은 이미 포디움 위에 있었다”라며 “너무 설레어서 경기 전날 잠을 못 잤다. 돌이켜보면 자만심이 화를 부른 게 아닐까 싶다”라고 말했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매디슨에서 금메달을 딴 뒤 그는 경륜으로 전향했다. 아마추어 시절 중장거리 선수였던 그는 단거리를 달리는 경륜에서도 곧바로 ‘경륜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를 오랫동안 지도한 정태윤 전 대표팀 감독의 말에 따르면 “조호성은 특별하다 못해 특이한 선수”였다. 사이클과 경륜은 쓰는 근육이 다르다. 단시간에 폭발적인 힘을 내야하는 경륜 선수로서 급선무는 몸을 키우는 것이었다. 66kg이었던 몸무게를 86kg으로 만들기 위해 그는 죽을 힘을 다했다. 조호성은 “체중을 불리는 게 가장 힘들었다. 경륜 입문 후 매일 밤 고열량의 스테이크를 먹고 보충제를 먹었다. 그래도 살이 쉽게 찌지 않았다”마려 “단백질을 보충하기 위해 새벽엔 알람을 맞춰 놓고 일어났다. 그렇게 6개월을 지내고서야 서서히 체중이 늘었다. 그때부터 경기력이 좋아지면서 자신감도 생겼다”라고 했다. 경륜 선수 생활은 화려했다. 2005년부터 2007년까지 3년 연속 그랑프리 우승을 차지했다. 2004년부터 2007년까지는 4년 연속 상금왕에도 올랐다. 당시 최다이던 47연승 기록도 세웠다. 약 4년 6개월 동안의 경륜 선수 생활 동안 그는 겉에서 보기엔 한 마리 우아한 백조 같았다. 하지만 내면적으로 그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돈이 걸린 경륜이라는 종목 특성상 스트레스를 피할 수 없었다. 조호성은 “성적도 좋았고, 돈도 많이 벌었지만 정신적으로 피폐해졌다. 일요일 마지막 경주 같은 때에는 30억 원이 넘은 돈이 걸리기도 했다”며 “그런데 베팅액의 대부분이 내게 걸려 있었다. 무조건 1등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고 타는 게 쉽지 않았다”라고 했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원형탈모가 왔다. 한두 군데가 아니라 7, 8 군데 머리가 빠졌다. 그는 “베팅에 실패한 분이 집으로 찾아오는 날도 있었다. ‘세상이 이런 욕이 다 있구나’ 싶을 정도로 다양하고 많은 욕을 먹기도 했다”라며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살아야 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다시 아마추어로 돌아간 뒤 원형탈모도 씻을 듯이 나았다”고 했다. 그가 다시 아마추어로 돌아온 가장 큰 이유는 못다 이룬 올림픽 메달의 꿈에 도전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어느덧 그도 30대 중반을 향해 가고 있었다. 조호성은 “나이는 30대 중반이었지만 20대와 같은 열정이 있었다. 만약 국내 팀에서 자리가 없다면 해외로 나가서 도전할 생각이었다”라고 했다. 다행히 서울시청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장거리를 달리기 위해선 다시 살을 빼야 했다. 눈물겨운 살 빼기가 시작됐다. 식단조절과 유산소, 필라테스를 병행하며 몇 개월 만에 약 20kg를 감량했다. 하지만 20대 초반 몸무게이던 65kg까지는 3kg이 모자랐다. 그는 “아마추어로 돌아온 후 최소한의 열량으로 버티며 살을 뺐다. 칼로리를 가능한 한 적게 섭취하면서 운동량은 최대한 많이 가져갔다. 살 빼기도 쉽지 않지만 찌우는 것에 비하면 훨씬 할 만했다”라며 웃었다. 그는 사이클의 본고장인 프랑스에 가서 1년간 개인 훈련을 하면서 점점 기량을 회복했다. 그가 결정적으로 재기에 성공한 대회는 2009년 사상 처음으로 서울 도심에서 열린 2009 투르 드 서울 국제사이클대회였다. 서울 광화문광장을 출발해 다시 광화문 동아일보사로 골인하는 100.5km 레이스에서 조호성은 2시간17분5초로 2위 디르크 뮐러(36·독일)를 2초 차로 따돌리고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다. 비바람이 부는 악천후 속에서 조호성은 결승선 1km 남겨두고 막판 스퍼트를 해 짜릿한 역전 우승을 일궈냈다. 조호성은 “아마추어로 복귀한 뒤 가진 첫 국제대회에서 우승하면서 다시 자신감을 찾을 수 있었다. 그 대회가 있었기에 향후 5년간 더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끝내 올림픽 메달의 꿈은 이루지 못했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후배들과 함께 팀 추월 금메달을 합작했지만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는 메달과는 더욱 멀어졌다. 그는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쳤다. 조호성은 “열정은 여전했지만 세월의 무게를 거스를 순 없었다. 여전히 하루에 300km를 타는 건 괜찮았다. 하지만 20대 때는 하루 자고 일어나면 회복이 됐지만 40세가 되니 더이상 되지 않더라”라고 말했다. 은퇴 후 지도자로 변신한 그는 현재 서울시청 감독을 맡고 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과 2021년 도쿄 올림픽 때는 지도자로 올림픽 무대를 밟았다. 올해부터는 대한사이클연맹 전무로 선임돼 행정가의 일도 겸하고 있다. 요즘도 그의 머리 속은 자전거 생각 뿐이다. 언젠가는 올림픽 시상대 위에 선 한국 선수를 배출하는 게 목표이자 꿈이다. 조호성은 “한강 자전거 도로 등을 보면 사이클을 즐기는 인구가 정말 많다. 하지만 자전거 인기에 비해 올림픽 메달이 없다는 게 아쉽다. 올림픽 메달이 없다 보니 그때마다 1점 차로 메달을 놓친 내 이름이 소환된다. 언젠가 좋은 후배가 나와 나를 그 굴레에서 꺼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도자 겸 행정가로 바쁜 시간을 보내면서도 그는 현역 때 못지않은 탄탄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다. 선수들에게 배 나온 지도자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게 이유다. 봄에서 가을까지는 러닝이나 자전거를 탄다. 주말에는 8시간 안팎의 등산을 간다. 그는 “걷거나 뛸 때 생각이 많이 정리된다. 행정가 일을 맡은 요즘에는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더 운동을 하려 한다”고 했다. 한국 최고의 사이클 선수로 활동하면서 그는 많은 나라를 다녔다. 훈련과 대회 참가를 위해 가 본 나라만 50여 개국이나 된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나라는 세계 최고의 도로 사이클 대회인 ‘투르 드 프랑스’를 개최하는 프랑스다. 그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오랫동안 프랑스에 머물려 훈련을 했고, 다시 아마추어에 복귀한 2000년대 말에도 프랑스에서 1년 동안 훈련을 했다. 조호성은 “사이클의 천국인 프랑스에서는 곳곳에서 하루에 50개의 레이스가 열린다. 대회 수준이나 상금에 따라 내가 원하는 대회를 나가면 된다”고 했다. 향후 그의 꿈은 그가 다녔던 나라들 중 정말 좋았던 10여 개 나라에서 ‘한 달 살기’를 해보는 것이다. 조호성은 “선수나 지도자를 할 때는 호텔과 경기장 주변만 다녔다. 선수가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 여유있게 살아보는 게 버킷리스트”라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세계 최고 권위의 도로 사이클 대회 ‘투르 드 프랑스’가 5일(현지 시간) 개막했다. 올해로 112회째를 맞은 투르 드 프랑스에 출전한 한국 선수는 아직 없다. 가장 근접했던 사람을 꼽으라면 ‘사이클 황제’ 조호성 서울시청 감독(51)을 들 수 있다. 올림픽도 마찬가지다. 한국 사이클 선수 가운데 올림픽 시상대 위에 선 사람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역대 최고 성적은 조호성이 2000년 시드니 올림픽 포인트레이스에서 기록한 4위다. 포인트레이스는 250m 트랙을 160바퀴 돌며, 10km마다 순위를 매겨 총점으로 승자를 가리는 경주다. 158바퀴를 돌 때까지 3위였던 그는 두 바퀴를 남기고 1점 차로 역전당해 올림픽 메달을 놓쳤다. 메달은 못 땄지만 그를 지도한 정태윤 감독의 말에 따르면 조호성은 “특별하다 못해 특이한 선수”였다. 그는 이후 단거리를 달리는 경륜으로 전향해 곧바로 ‘경륜 황제’가 됐다. 상금왕을 4차례 차지했고, 그랑프리 우승도 3번이나 했다. 당시 최다이던 47연승 기록도 세웠다. 육상으로 치면 마라톤 선수가 100m로 전향해 최고가 된 것에 견줄 수 있다. 조호성은 “체중을 불리는 게 정말 힘들었다. 큰 근육을 키우기 위해 매일 밤 고열량의 스테이크를 먹었다. 새벽엔 알람을 맞춰 놓고 일어나 단백질을 보충했다”고 했다.‘경륜 황제’의 삶은 화려했다. 달릴 때마다 우승했고, 우승할 때마다 큰 상금을 벌었다. 하지만 정신은 점점 피폐해졌다. 조호성은 “돈이 걸려 있다 보니 스트레스가 심했다. 베팅에 실패한 분이 집으로 찾아오는 날도 있었다. ‘세상이 이런 욕이 다 있구나’ 싶을 정도로 다양한 욕을 먹었다”고 했다. 2009년 그는 스스로 황제 자리에서 내려와 아마추어 사이클로 돌아왔다. 못다 이룬 올림픽 메달의 꿈에 도전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살을 빼야 했다. 식단 조절과 유산소, 필라테스를 병행하며 몇 개월 만에 약 20kg을 감량했다. 조호성은 “칼로리를 최소한 섭취하고 많은 훈련량을 가져갔다. 살 빼기도 쉽지 않지만 찌우는 것에 비하면 훨씬 할 만했다”며 웃었다. 2012 런던 올림픽과 2014 인천 아시안게임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친 그는 현재 서울시청 감독을 맡고 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과 2021년 도쿄 올림픽 때는 지도자로 올림픽 무대를 밟았다. 올해부터는 대한사이클연맹 전무로 선임돼 행정가의 일도 겸하고 있다. 바쁜 와중에도 운동은 하루도 거르지 않는다. 선수들에게 배 나온 지도자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다. 봄에서 가을까지는 러닝을 하거나 자전거를 탄다. 주말에는 8시간 안팎의 등산을 간다. 그는 “걷거나 뛸 때 생각이 많이 정리된다. 행정가 일을 맡은 요즘에는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더 운동을 하려 한다”고 했다. 자나 깨나 그의 머릿속은 자전거 생각뿐이다. 언젠가는 올림픽 시상대 위에 선 한국 선수를 배출하는 게 목표이자 꿈이다. 조호성은 “한국은 자전거가 인기 있는 나라다. 하지만 올림픽 메달이 없다 보니 그때마다 1점 차로 메달을 놓친 내 이름이 소환되곤 한다. 좋은 후배가 나와 나를 그 굴레에서 꺼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스마일 퀸’ 김하늘(37)은 현역 시절 ‘삼촌 팬’들을 몰고 다닌 인기 골퍼였다. 별명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는 필드 안팎에서 항상 환한 미소를 짓고 다녔다. 김하늘은 “어릴 때부터 ‘한국의 로리 케인이 돼라’는 말을 아빠한테 듣고 자랐다. 케인은 성적과 관계없이 항상 웃으며 주변에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하던 선수였다”라며 “골프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화를 내봐야 달라지는 것도 없더라”라며 웃었다.주니어 시절부터 그는 성적이 좋든, 그렇지 않든 많이 웃고 다녔다. 대회를 망친 날도 웃으면서 그린을 벗어났다. 그 모습을 보고 다른 학부모 중 한 명이 “하늘이는 오늘 잘 쳤나 보다”라고 말을 건넸다. 그는 “아뇨, 저 오늘 오버파 쳤어요”라고 쿨~하게 답했다. 김하늘은 “어릴 때부터 밝은 성격이었다. 좋지 않은 상황일수록 내가 웃으면 상대방은 더 힘들지 않았을까 싶다”며 “사실 그때는 자신감이 넘치던 시절이기도 했다. 중요한 퍼트를 못 넣어도, 한 대회를 망쳐도 다음 홀이나 다음번 대회에서 얼마든지 만회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했다. 밝은 성격과 뛰어난 실력 덕분에 그는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에서 단숨에 톱스타가 됐다. 2011년 KLPGA투어 대상을 수상했고, 2011년과 2012년에는 2년 연속 상금왕도 차지했다. KLPGA투어에서 통산 8승을 거둔 뒤 2015년에는 일본 무대에 진출해 성공시대를 이어갔다. 2016년 메이저대회 리코컵에서 우승했고, 2017년 또 다른 메이저대회 살롱파스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2017년에만 3승을 거두는 등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투어에서 통산 6승을 올렸다. 2021년을 끝으로 은퇴한 김하늘은 요즘도 ‘스마일’ 가득한 인생을 살고 있다. 김하늘은 “틈틈이 일하면서 하고 싶었던 취미활동을 한다. 시간을 여유롭게 쓸 수 있다는 게 너무 감사하고 행복하다”라고 말했다. 김하늘은 유튜버로 활동하며 각종 골프 행사나 강연 등을 다닌다. 가끔씩 방송에도 출연하고, 기업 초청 이벤트에 참가해 주말 골퍼들을 대상으로 일일 레슨을 하기도 한다. 강연이나 행사 때마다 그는 ‘멘털’에 대한 질문을 종종 받는다. 숨 막히는 우승 경쟁의 순간을 어떻게 이겨냈느냐 하는 것이다. 김하늘은 “따라가고 있는 상황에서는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린다. 언젠가 한 번은 기회가 온다는 마음으로 서두르지 않고 플레이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또 “앞서고 있는 상황에서는 ‘내가 지금 도망가는 게 아니라 추격하고 있다’고 마음먹는다. 지켜야 하는 사람이 오히려 불안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결정적인 순간 1m 퍼팅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나 힘든 상황이다. 골프에서 1m 안팎의 짧은 퍼트를 놓쳐 경기를 놓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며 “내 경우에는 속으로 ‘이 퍼팅은 이미 내가 수천, 수만 번 성공했던 퍼팅이다’라는 말을 되뇌며 자신 있게 친다”고 했다. 김하늘이 은퇴한 지 4년이 지났지만 미소처럼 변하지 않은 게 있다. 선수 시절 못지않게 건강하고 탄탄한 몸이다. 김하늘의 일상은 운동으로 가득 차 있다. 직장인에 빗대 표현하면 주5일 운동하고, 주말 이틀을 쉰다. 김하늘은 “선수 생활을 할 때보다 요즘 운동을 더 많이 하는 것 같다. 선수 때는 운동이 싫었는데 요즘은 내가 찾아서 하는 하고 있다”며 웃었다. 선수 시절부터 해오던 필라테스와 퍼스널 트레이닝(PT)은 지금도 꾸준히 한다. 최근에는 척추 건강 및 코어 강화에 도움이 되는 자이로토닉(Gyrotonic)을 시작했다. 김하늘은 “PT는 통해서 큰 근육을 키운다면 필라테스는 속 근육과 신체 밸런스를 잡는 데 도움이 된다. 두 가지를 병행하면서 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 큰 부상이 없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김하늘은 여기서 머물지 않고 최근에 자이로토닉을 추가했다. 그는 “자이로토닉은 기구를 이용해 척추 쪽 근육을 하나하나 세웠다가 눕히는 운동이다. 평소 잘 쓰지 않는 근육을 새롭게 움직이고 있다”고 말했다.그렇지만 뭐니 뭐니해도 요즘 그가 가장 빠져 있는 건 바로 러닝이다. 김하늘은 “원래 달리기를 싫어했다. 그런데 지난해 우연히 한 마라톤 대회에 나가게 됐다. 같은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과 함께 달리면서 러닝의 재미에 눈을 뜨게 됐다”고 말했다. ‘러닝 마니아’가 된 그는 일주일에 3, 4회는 뜀박질을 한다. 월요일에는 러닝 크루와 함께 달리고, 함께 선수 생활을 했던 윤채영 등과도 달린다. 한 번 뛰면 10~15km 가량을 뛴다. 김하늘은 “원래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편이었다. 그런데 러닝을 시작한 뒤엔 오후 10시에 자서 오전 6시에 일어나는 사람이 됐다. 활력이 넘치고 건강해지는 걸 몸으로 느낀다”고 했다. 그는 “아침 일찍 뛰면서 보는 강물, 밝게 내리쬐는 햇살 등이 너무 좋다. 뛰는 시간만큼은 오로지 나일 수 있다는 게 달리기의 매력”이라고 했다. 윤채영, 이보미 등과 청계산이나 인왕산 등 서울 인근 산에도 오른다. 그는 “매일 뛰다가 지루해질 때쯤 등산을 해보니 색다른 세상이 펼쳐지더라”고 했다. 김하늘은 “은퇴 후 1년간 근육이 많이 빠졌다. 스스로 ‘일반인 다 됐네’라고 자조하곤 했다”며 “그런데 다시 꾸준히 운동하면서 지금은 현역 시절과 몸무게와 근육량이 똑같아졌다”며 웃었다.본업이었던 골프는 한 달에 한두 번 친다. 스코어에 크게 개의치 않는 ‘명랑 골프’다. 김하늘은 “골프 연습은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 라운드에서 4언더파를 쳤다”고 했다. “그 실력이면 다시 현역으로 복귀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잘 쳐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놓고 치니 공이 더 잘 맞는다. ‘제발 살아만 있어라’라는 기분으로 친다”며 웃었다. 선수 시절 그는 웃는 낯과는 달리 필드 위에선 ‘완벽주의자’에 가까웠다. 공이 제대로 뻗어 나가도 자신이 원했던 스위트 스폿에 맞지 않으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김하늘은 “프로 선수들도 한 라운드에서 14번 드라이버를 잡으면 마음에 드는 샷이 4, 5개 밖에 나오지 않는다. 지금은 잘 쳐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내려놓으니 골프가 더 재미 있어졌다”며 “현역 때는 페어웨이에 공을 집어넣어야 한다는 생각에 몸통 회전도 마음껏 하지 못했다. 요즘은 마음껏 허리를 돌리니까 스윙이 더 좋아진 것 같다”고 말했다.아픔이나 구김살이 없을 것 같지만 김하늘도 선수 생활 말엽에는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다. 2017년 일본에서 3승을 거두며 승승장구했지만 2018년 거짓말처럼 샷이 무너졌다. 김하늘은 “전혀 나답지 않게 불안장애가 왔다. 디펜딩 챔피언으로 출전하는 시합을 앞두고는 소화도 안 되고,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며 “2021년 은퇴할 때까지 힘들게 골프를 쳤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코로나19 유행하던 시기라 많은 대회가 열리지 않았다. 은퇴를 하고 났더니 그런 증상이 씻은 듯 사라졌다”고 했다. 그런 과정을 겪은 그이기에 여유가 넘치는 요즘이 더욱 즐겁고 행복하다. 김하늘은 “최선을 다했고, 후회 없는 선수 시절을 보냈다. 국내외에서 14번이나 우승한 것도 내겐 과분하다. 지금 치는 편한 골프처럼 앞으로의 인생도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살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스마일 퀸’이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 김하늘(37)은 웃음이 많은 골프 선수였다. 잘할 때는 물론이고 잘 못 쳤을 때도 미소를 지었다.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에서 8승, 일본여자골프(JLPGA)투어에서 6승을 거둔 뛰어난 실력에 밝고 유쾌한 성격을 갖춘 그는 많은 갤러리들을 몰고 다녔다. 김하늘은 “어릴 때부터 ‘한국의 로리 케인이 돼라’는 말을 아빠한테 듣고 자랐다. 케인은 성적과 관계없이 항상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하던 골퍼였다”며 “골프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화를 내봐야 달라지는 것도 없다. 내가 웃어서 상대방은 더 힘들지 않았을까 싶다”며 웃었다. 2021년을 끝으로 은퇴한 김하늘은 요즘도 ‘스마일’ 가득한 인생을 살고 있다. 김하늘은 “틈틈이 일하면서 하고 싶었던 취미 활동을 한다. 시간을 여유롭게 쓸 수 있다는 게 너무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라고 말했다. 김하늘은 유튜버로 활동하며 각종 골프 행사나 강연 등을 다닌다. 방송에 얼굴을 비치기도 한다. 미소와 함께 달라지지 않은 게 또 하나 있다. 여전히 건강한 몸이다. 그의 일상은 운동으로 가득 차 있다. 김하늘은 “선수 생활을 할 때보다 지금 운동을 더 많이 하는 것 같다. 선수 때는 운동이 싫었는데 요즘은 내가 찾아서 하는 편”이라고 했다. 예전부터 해오던 필라테스와 퍼스널트레이닝(PT)은 지금도 꾸준히 한다. 최근에는 척추 건강 및 코어 강화에 도움이 되는 자이로토닉(Gyrotonic)을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가 가장 빠져 있는 건 바로 러닝이다. 김하늘은 “원래 달리기를 싫어했다. 그런데 지난해 우연히 한 마라톤 대회에 나가서 같이 달리면서 러닝 재미에 푹 빠지게 됐다”며 “원래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편이었는데 러닝을 시작한 뒤엔 오후 10시에 자서 오전 6시에 일어나는 사람이 됐다. 활력이 넘치고 건강해지는 걸 몸으로 느낀다”고 했다. 주 3, 4회는 러닝을 한다는 그는 러닝 크루 활동과 별개로 함께 선수 생활을 했던 윤채영과 한강을 뛰곤 한다. 김하늘은 “아침 일찍 뛰면서 보는 강물, 밝게 내리쬐는 햇살 등이 너무 좋다. 뛰는 시간만큼은 오로지 나일 수 있다는 게 달리기의 매력”이라고 했다. 윤채영, 이보미 등과 종종 서울 인근 산에도 오른다는 그는 “은퇴 후 1년간 근육이 많이 빠졌다. 스스로 ‘일반인 다 됐네’라고 자조하곤 했다”며 “그런데 다시 꾸준히 운동하면서 지금은 현역 시절과 몸무게와 근육량이 똑같아졌다”며 웃었다. 본업이었던 골프는 한 달에 한두 번 친다. 스코어에 크게 개의치 않는 ‘명랑 골프’다. 김하늘은 “골프 연습은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 라운드에서 4언더파를 쳤다”고 했다. “그 실력이면 다시 현역으로 복귀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잘 쳐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놓고 치니 공이 더 잘 맞는다. ‘제발 살아만 있어라’라는 기분으로 친다. 주말 골퍼분들께도 추천하고 싶은 마음가짐”이라고 했다. 향후 계획에 대해 그는 “최선을 다했고, 후회 없는 선수 시절을 보냈다. 국내외에서 14번이나 우승한 것도 내겐 과분하다. 지금 치는 편한 골프처럼 앞으로의 인생도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고 싶다”고 말했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텍사스를 대표하는 강타자였던 아드리안 벨트레(46)는 14일 열린 전 텍사스 동료 추신수 SSG 랜더스 구단주 보좌역의 은퇴식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벨트레는 11일 SSG퓨처스필드를 찾아 2군 선수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했는데 이때 뜻밖의 이름이 나왔다. ‘한국형 핵잠수함’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김병현(46)이었다. 벨트레는 “가장 까다로웠던 투수”를 묻는 질문에 주저 없이 김병현이라고 답했다. 그는 “김병현을 상대한 날에는 꿈에 나올 정도였다. 김병현의 구속이 떨어졌을 때 겨우 안타를 치고 세리머니를 했다”고 말했다. 벨트레는 리그 최고 타자에게 주는 실버슬러거를 4번이나 수상한 손꼽히는 강타자였다. 올스타에 4번 뽑혔고, 골드글러브도 5번 받았다. 1998년 LA 다저스에서 데뷔해 2018년 은퇴할 때까지 타율 0.286, 3166안타, 477홈런, 1707타점을 올렸다.통산 3166개의 안타 중 김병현을 상대로 친 안타는 단 1개다. 16타수 1안타로 타율은 0.063밖에 되지 않는다. 벨트레 뿐 아니었다. 전성기 시절 김병현이 언더핸드로 던지는 힘 있는 패스트볼과 춤추는 변화구에 MLB 타자들은 연신 헛방망이질을 하기 일쑤였다. 김병현이 2002년 5월 11일 필라델피아전에서 기록한 ‘9구 3탈삼진’은 요즘도 회자되는 명장면이다. 하지만 정작 이에 대한 김병현의 반응은 쿨~하다. 김병현은 “사실 그날 공이 별로 좋지 않아 변칙적으로 던진 거였다. 구위로 이겼다기보다는 전략적으로 던졌는데 운 좋게 9구 3삼진이 나왔을 뿐”이라고 말했다. 20년이 훌쩍 넘었지만 당시 김병현이 MLB에 남긴 임팩트는 여전하다. 성적 뿐 아니라 돈에서도 마찬가지다. 김병현은 성균관대 재학 중이던 1999년 애리조나와 계약금 225만 달러(약 30억 원)에 계약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 중 하나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한 채가 10억도 안 하던 때였다. 26년이 흘렀지만 한국 아마추어 선수 중 그보다 많은 돈을 받고 미국에 간 선수는 아직도 나오지 않았다. 애리조나 시절 최고의 마무리로 각광 받았던 김병현은 2003년 보스턴으로 이적하면서는 2년 1000만 달러(약 136억 원)를 받았다.김병현은 또 한국 선수 중에서 유일하게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를 낀 선수이기도 하다. 그것도 한 개가 아닌 두 개다. 2001년 애리조나에서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김병현은 2004년 보스턴에서 두 번째 반지의 주인이 됐다.야구로 부와 명예를 모두 얻는 김병현은 은퇴 후 누구도 예상치 않았던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가장 먼저 시작한 건 방송 일이었다. 선수 시절 내성적인 성격에 독특한 카리스마를 갖고 있던 그를 생각하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김병현은 “선수 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사회에 나왔을 때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그동안 내가 가장 어려워하고 힘들어했던 일을 해 보자고 마음먹었다. 바로 사람들 앞에 서는 거였다”고 했다. ‘방송인’ 김병현이 탄생한 배경이다. 김병현은 “어릴 때부터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었다. 결혼식도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했을 정도”라며 “그런데 많은 분들이 있는 그대로의 ‘인간 김병현’을 좋아해 주셨다. 정말 감사드린다”라고 말했다. 두 번째는 요식업이다. 그가 음식 장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결정적 계기는 은퇴 후 시구를 위해 친정팀 애리조나를 찾았을 때다. 당시 외야석 한편에는 ‘곤조 그릴’이라는 식당이 성업 중이었는데 그곳을 애리조나 시절 동료였던 루이스 곤살레스가 운영하고 있었다. 김병현은 “딱 느낌이 왔다. 내가 좋아하는 야구장에서 먹거리를 해 보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며 “이후 내 모교인 광주제일고의 이름을 딴 햄버거집을 열었다”라고 말했다. 사실 이전부터 그는 먹는 거에 관심이 많았다. 미국에 있을 때부터 미국 샌디에이고에 스시집을 열었고, 태국 음식점과 일본식 라멘집 등을 운영한 적도 있다. 김병현은 “먹는 건 본능적인 욕구이자 즐거움이다. 지인들이 미국에 찾아왔을 때 맛집을 데려가면 너무들 좋아하셨다. 특히 싸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행복해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자연스럽게 요식업의 길로 접어들게 됐다”고 했다. 그가 설립한 수제 햄버거집은 창원NC파크와 고척스카이돔에 입점도 했다. 최근에는 야구와 잘 어울리는 핫도그를 본격적으로 팔기 시작했다. 얼마 전 서울 양재동에 ‘BK’s 버거 앤 핫도그‘라는 이름의 수제 핫도그 집을 오픈했다. 핫도그와 햄버거는 패스트푸드다. 심지어는 ’정크 푸드(쓰레기 음식)‘로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김병현의 생각은 다르다. “건강한 재료로 만들면 맛있고, 건강하게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핫도그의 재료인 햄과 소시지에 푹 빠진 그는 국내 육가공기술학교 ‘훔메마이스터슐레’에서 관련 과정을 수료했다. 지난달엔 독일에서 열린 국제식육전문박람회(이하 IFFA)에 출전해 금메달 6개와 은메달 1개를 획득했다. IFFA는 1949년부터 3년마다 개최되는 육류 관련 국제 무역 박람회다. 김병현은 “가장 호평받은 건 부대찌개였다. 햄이나 소시지를 국물에 넣어 먹지 않는 독일 심사위원들에게 독특하고 맛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김병현은 소시지에 첨가물을 거의 넣지 않은 100%의 고기로 만든다고 했다. 여기에 고급 향신료를 써 풍미를 더한다. 한국에서 자영업은 쉽지 않다. ‘아프니까 사장이다’라는 말도 있다. 본격적으로 자영업을 한 디 5년이 된 김병현은 “가끔 같은 자영업자 사장님들끼리 만나면 ‘죽겠으니까 사장이다’라는 말을 나누곤 한다”고 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 유행했던 몇 년간은 정말 힘들었다”며 “하지만 자영업이라는 게 원래 힘든 거다. 직원들과의 관계, 건물주와의 관계 등 신경 써야 할 일이 너무 많다. 야구를 할 때는 나 혼자 잘하고 열심히 하면 결과를 얻을 수 있었지만 자영업은 전혀 다른 세계”라고 말했다. 야구 선수 시절 그는 누구나 인정하는 톱스타였다. 가장 비싼 차를 몰았고, 원하면 비싼 음식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당시와 비교하면 힘든 지금이 오히려 더 행복하다고 했다. 김병현은 “돈은 그때 훨씬 많이 벌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당시엔 혼자 나만의 세계에 갇혀 살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며 “지금은 7000~8000원 짜리 핫도그를 만들어 팔고 있지만 많이 여유로워졌다. 여러 사람들과 소소히 어울리면서 살아가는 게 나름 재미있고 행복하다”라고 말했다. 야구 선수 시절 그는 치열하게 야구를 하는 선수였다. 그는 “드러난 모습만 보고 ‘천재’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어릴 때 연습이 끝나고 집에 와서도 야구 생각을 했다. 뭔가 떠오르면 ‘내일은 이렇게 해봐야지’라고 생각하며 잠이 들곤 했다. 열심히 하다 보니 야구를 잘하게 됐고, 미국에도 가게 됐다”고 했다. 요즘 핫도그를 대하는 모습이 당시와 비슷하다. 자나 깨나 오직 핫도그 생각이다. 김병현은 “자영업이라는 게 정말 신경 쓸 게 많고 힘들 때도 많다”면서도 “하지만 나는 뭔가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할 때 행복감을 느낀다. 제대로 만든 핫도그, 햄버거는 건강하면서도 맛있는 음식이라는 걸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 이 분야에서 확실히 자리 잡은 뒤 ‘마음의 고향’인 야구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무대를 밟은 한국 선수는 28명밖에 되지 않는다. 월드시리즈에 진출한 선수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를 낀 선수는 단 한 명, ‘한국형 핵잠수함’ 김병현(46)이다. 2001년 애리조나에서 첫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김병현은 2004년 보스턴에서 두 번째 우승 반지의 주인이 됐다. 김병현은 명예뿐 아니라 부도 얻었다. 성균관대 재학 중이던 1999년 계약금 225만 달러(약 30억 원)를 받고 애리조나에 입단했다. 이후 26년이 흘렀지만 한국 아마추어 선수 중 그보다 많은 돈을 받고 미국에 간 선수는 아직 없다. 김병현은 2003년 보스턴으로 이적하면서는 2년간 1000만 달러(약 136억 원)의 계약을 맺었다. 야구 선수로 크게 성공한 그는 요즘 자영업자다. 방송일을 하면서 요식업을 한 지 몇 년 됐다. 미국에 있을 때부터 미국 샌디에이고에 스시집을 열었고, 한국프로야구에서 은퇴한 뒤엔 태국 음식점과 일본 라멘집 등을 운영했다. 김병현은 “먹는 건 본능적인 욕구이자 즐거움이다. 지인들이 미국에 찾아왔을 때 맛집을 데려가면 너무 좋아하셨다. 특히 싸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행복해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자연스럽게 요식업의 길을 걷게 됐다”고 했다. 그가 설립한 수제 햄버거집은 창원NC파크와 서울 고척스카이돔에 입점도 했다. 최근엔 야구와 잘 어울리는 핫도그를 본격적으로 팔기 시작했다. 얼마 전 서울 양재동에 ‘BK’s 버거 앤 핫도그’라는 이름의 수제 핫도그 집을 오픈했다. 핫도그와 햄버거는 패스트푸드다. 심지어 ‘정크푸드’로도 불린다. 하지만 김병현의 생각은 다르다. “건강한 재료로 만들면 맛있고, 건강하게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핫도그의 재료인 햄과 소시지에 푹 빠진 그는 국내 육가공기술학교 ‘훔메마이스터슐레’에서 관련 과정을 수료했다. 지난달엔 독일에서 열린 국제식육전문박람회(IFFA)에 출전해 금메달 6개와 은메달 1개를 획득했다. IFFA는 1949년부터 3년마다 개최되는 육류 관련 국제 무역 박람회다. 김병현은 “가장 호평받은 건 부대찌개였다. 가장 한국적인 요리 방법이 독일 심사위원들에게 어필했던 것 같다”며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을 때 느낀 쾌감을 모처럼 다시 맛봤다”고 했다. 김병현은 첨가물을 거의 넣지 않은 100%의 고기로 햄이나 소시지를 만든다고 했다. 여기에 고급 향신료를 써 풍미를 더한다고 한다. 선수 시절 그는 치열하게 야구를 했다. 그는 “드러난 모습만 보고 ‘천재’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어릴 때 연습이 끝나고 집에 와서도 야구 생각을 했다. 뭔가 떠오르면 ‘내일은 이렇게 해봐야지’라고 생각하며 잠이 들곤 했다. 열심히 하다 보니 야구를 잘하게 됐고, 미국에도 가게 됐다”고 했다. 요즘 핫도그를 대하는 모습이 당시와 비슷하다. 자나 깨나 오직 핫도그 생각이다. 김병현은 “자영업이라는 게 정말 신경 쓸 게 많고 힘들 때도 많다”면서도 “하지만 나는 뭔가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할 때 행복감을 느낀다. 제대로 만든 핫도그, 햄버거는 건강하면서도 맛있는 음식이라는 걸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 이 분야에서 확실히 자리를 잡은 뒤 ‘마음의 고향’인 야구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한국 여자 양궁에는 ‘신궁(神弓)’ 계보가 있다. 1979년 베를린 세계선수권 5관왕에 오른 김진호를 시작으로 김수녕, 윤미진, 박성현, 안산, 그리고 지난해 파리올림픽 3관왕 임시현까지 신궁들은 한국 양궁을 세계 최강으로 만드는 데 일조해 왔다. 이들이 국제무대에 딴 금메달은 수십, 수백 개에 이르지만 그중 박성현 전북도청 감독(42)이 가장 먼저 달성한 기록이 있다. 박성현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여자 개인전과 단체전을 석권했고,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도 단체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 밖에 세계선수권과 아시안게임과 아시아선수권 개인전 금메달까지 획득하며 한국 양궁 선수로는 처음으로 그랜드슬램(올림픽, 아시안게임, 세계선수권, 아시아선수권)을 달성했다.하지만 박성현이 세계적인 선수를 넘어 ‘신궁’이 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람이 있다. 서오석 현 코오롱 양궁팀 감독(68)이다. 고교 시절까지 박성현은 ‘진흙 속의 진주’ 같은 선수였다. 잠재력은 있었지만 제대로 실력을 보여주질 못했다. 전북체고를 졸업할 때까지 박성현이 딴 국내대회 메달은 고교 마지막 전국체전에서 기록한 동메달 1개가 전부였다. 어찌보면 그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게 당연했다. 엘리트 운동선수들은 대학이나 실업팀에 입단할 때 ‘경기실적증명서’라는 서류를 제출한다. 박성현의 경기실적증명서에는 달랑 동메달 1개만 기입되어 있었다. 평범하다 못해 양궁을 잘하지 못했던 박성현이 전북도청에 입단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역 안배’ 차원이었다. 전북도청 양궁팀이니만큼 전북 지역선수를 한 명 넣다 보니 그게 박성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만난 서오석 감독이 박성현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당시 전북도청을 지휘하고 있던 서 감독은 신체조건이 좋은 박성현의 가능성을 한눈에 알아봤다. 서 감독은 박성현에게 1년 내내 활을 쏘게 하는 대신 기본기 훈련만 시켰다. 초등학생 시절에나 할 법한 팔굽혀 펴기와 시위 당기기만 줄기차게 했다. 박성현은 “다른 선수들은 모두 70m 과녁을 향해 활을 쏘는데 나만 혼자 떨어져 팔굽혀 펴기를 하고 있었다. 너무 서러워서 어느 날은 엄마한테 ‘나는 이렇게 1년만 하다가 끝나는 거 같다’라고 하소연을 한 적도 있다”고 했다. 1년간 꼬박 팔굽혀펴기 등 기본기 훈련만 하다가 나간 첫 대회는 2000년 종별선수권대회였다. 서 감독은 박성현에게 “첫 대회니까 10점을 쏘려 하지 말고 제 타임에만 늦지 않게 쏘고 나오라”고 말했다. 박성현은 서 감독의 말을 따랐다. 경기가 끝난 후 전광판을 보니 개인전 가장 높은 곳에 박성현의 이름이 있었다. 주변에서는 “도대체 박성현이 누구야?”라는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박성현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한 말이었다. 이날 이후 박성현의 앞에는 거칠 게 없었다. ‘낙타가 바늘구멍 뚫기보다 어렵다’는 국가대표 선발전을 통과했고,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땄다. 이후 2010년 은퇴할 때까지 항상 정상을 유지했다. 박성현은 “저는 정말 인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첫 실업팀에서 서오석 감독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양궁선수 박성현’도 없었을 것”이라며 “이후에도 서 감독님은 오늘날까지 내 인생의 멘토다. 지도자로 첫발을 내딛는 데도 도움을 주셨다. 요즘도 아빠보다 더 자주 통화한다”라며 웃었다.서오석 감독이 박성현에게 ‘신궁’의 길을 열어줬다면 그가 ‘신궁’으로 자리 잡는 데 함께 했던 사람은 남편 박경모 공주시청 감독(50)이다. 박경모 역시 올림픽 금메달 2개를 딴 남자 신궁이다. 박경모는 2004년 아테네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남자 단체전 금메달을 땄다. 두 사람의 집에는 올림픽 금메달 5개를 비롯해 각종 국제대회에서 수집한 금빛 메달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두 신궁의 만남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한국 양궁 대표팀은 세계 최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다양한 극기 훈련을 한다. 박성현이 처음 태극마크를 단 2001년 대표팀은 경남 진해의 해군 특수전전단(UDT)에 입소해 특수 훈련을 받았다. 그런데 이때 남자 대표팀 선수들이 훈련을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대한양궁협회는 남자 선수들의 대표팀 자격을 박탈하고 2진 선수들을 대표팀에 합류시켰다. 박경모는 그때 태극마크를 단 4명 중 한 명이었다. 선수촌에서 동고동락하면서 둘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박성현은 2003년부터 여자팀 주장을 맡았고, 박경모는 남자팀 주장이었다. 힘들 때 서로에게 힘이 되면서 연인으로 발전했다. 다만 둘의 만남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둘의 교제 소식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양궁 경기가 끝난 뒤에야 알려졌다. 공교롭게도 두 선수 모두 개인전에서 중국 선수에게 1점 차로 뒤져 은메달에 그쳤다. 박성현은 “연애하느라 개인전 금메달을 못 땄다는 불편한 시선도 있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서로가 있었기에 힘든 과정을 이겨내고 단체전에서는 금메달을 딸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둘은 그해 말 곧바로 결혼했다. 그리고 아이를 가지면서 박성현은 예상보다 빠른 은퇴를 했다. 그는 2010년 플레잉코치를 거쳐 2011년부터 전북도청 감독으로 일하고 있다. 박경모도 2011년부터 공주시청 팀을 맡았다. 박성현은 “선수 때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집에서 양궁 얘기를 많이 한다. 나는 여자팀, 남편은 남자팀을 맡고 있는데 서로의 조언이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부부는 금메달 해설위원으로도 유명하다. 두 사람은 한 지상파 방송사 해설위원으로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부터 2021년 도쿄 올림픽, 2024년 파리 올림픽까지 함께 했다. 한국 대표팀은 2016년 리우 대회에서 전 종목(당시 금메달 4개)을 석권했고, 2021년에도 금메달 4개를 땄다. 지난해 파리에서는 금메달 5개로 또 한 번 전 종목을 제패했다. 박성현은 “항상 같이 공부하고 같이 준비한다. 언제든 믿을 수 있는 내 편이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 건지 모르겠다. 방송사 입장에서도 방을 하나만 줘도 되니 좋을 것 같다”라며 웃었다.신궁 부부의 미래는 세 딸이다. 박성현-박경모 부부는 슬하에 예진(14), 수진(12), 나윤(9) 등 세 딸을 뒀다. 세 딸은 아직 전문적으로 양궁 선수의 길을 걷고 있지는 않다. 두 사람의 집에는 작은 마당이 있는데 취미 삼아 이곳에서 활을 쏘곤 한다. 가끔은 박경모 감독의 공주시청 훈련장에서 쏠 때도 있다. 박성현은 “아직은 재미이자 취미로 가르치고 있다”라고 했다. 소속팀을 15년째 맡고있는 감독이자 세 아이의 엄마로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 박성현에게 세 딸은 존재만으로도 삶의 동력이 된다. 박성현은 “아이들이 커 가면서 대화가 되니 너무 재미있다. 함께 모여서 이야기만 하고 있어도 시간이 정말 빨리 간다”며 “든든한 남편과 세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내게는 축복인 것 같다. 감독이자 아내, 엄마로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한국 양궁의 ‘신궁(新弓)’ 계보를 얘기할 때 박성현 전북도청 감독(42)은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박성현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여자 개인전과 단체전을 석권했고,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도 단체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양궁 선수 최초로 개인전 그랜드슬램(올림픽, 아시안게임, 세계선수권, 아시아선수권)도 달성했다. 남편 박경모 공주시청 감독(50) 역시 신궁이다. 박경모도 2004년 아테네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남자 단체전 금메달을 땄다. 두 사람의 집에는 올림픽 금메달 5개를 비롯해 각종 국내외 대회에서 수집한 금빛 메달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두 신궁의 만남 뒤엔 뜻밖의 사연이 있다. 박성현이 처음 태극마크를 단 2001년 한국 양궁 대표팀은 경남 진해의 해군 특수전전단(UDT)에 입소해 특수 훈련을 받았다. 그런데 이때 남자 대표팀 선수들이 훈련을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대한양궁협회는 즉시 남자 선수들의 대표팀 자격을 박탈하고 2진 선수들을 대표팀에 합류시켰다. 박경모는 그때 태극마크를 단 4명 중 한 명이었다. 선수촌에서 동고동락하던 둘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박성현은 2003년부터 여자팀 주장을 맡았고, 당시 박경모는 남자팀 주장이었다. 둘은 힘들 때 서로의 힘이 되면서 연인으로 발전했다. 다만 둘의 만남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동료 선수들은 물론 코칭스태프도 몰랐던 둘의 교제 소식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양궁 경기가 끝난 뒤에야 알려졌다. 공교롭게 두 선수 모두 개인전에서 1점 차로 은메달에 그쳤다. 박성현은 “일부이긴 하지만 연애하느라 금메달을 못 땄다는 시선도 있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서로가 있었기에 힘든 과정을 이겨내고 단체전 금메달을 딸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둘은 그해 말 결혼했다. 그리고 아이를 가지면서 박성현은 예상보다 빠른 은퇴를 했다. 그는 2010년 플레잉코치를 거쳐 2011년부터 전북도청 감독으로 일하고 있다. 박경모도 2011년부터 공주시청 팀을 맡고 있다. 박성현은 “선수 때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집에서 양궁 얘기를 많이 한다. 나는 여자팀, 남편은 남자팀을 맡고 있는데 서로의 조언이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부부는 금메달 해설위원으로도 유명하다. 두 사람은 한 지상파 방송사 해설위원으로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부터 2021년 도쿄 올림픽, 2024년 파리 올림픽까지 함께했다. 한국 양궁은 2016년 리우 대회에서 전 종목(당시 금메달 4개)을 석권했고, 2021년에도 금메달 4개를 땄다. 지난해 파리에서는 금메달 5개로 또 한 번 전 종목을 제패했다. 박성현은 “같이 공부하고 같이 준비한다. 언제든 믿을 수 있는 내 편이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 건지 모르겠다. 방송사 입장에서도 방을 하나만 줘도 되니 좋을 것 같다”라며 웃었다. 부부는 슬하에 예진(14), 수진(12), 나윤(9) 등 세 딸을 뒀다. 박성현은 “애들이 많이 커서 대화가 되니 너무 재미있고 시간이 빨리 간다”라며 “믿음직한 남편과 세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축복인 것 같다. 감독, 아내, 엄마 등 1인 3역으로 사는 게 바쁘지만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싶다”고 말했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역도여제’로 한 시대를 호령했던 장미란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은 “역도는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종목”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자신이 흘린 땀과 노력에 비례해 기록이 나온다는 의미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역도는 보디빌딩과 더불어 ‘약(藥)한 선수’들이 많이 나오는 종목 중 하나다. 순간적인 힘을 내야 하는 종목 특성상 약물의 유혹에 넘어가는 선수들이 적지 않다.바로 그 약물 때문에 울다가 웃은 대표적인 사람이 김민재 제주 남녕고 역도부 코치(42)다. 그는 한국 올림픽 역사를 넘어 세계 올림픽 역사를 통틀어서도 최고의 반전 드라마를 쓴 사람이다. 2012년 런던 올림픽 역도 남자 94kg급에 출전한 김민재는 인상에서 한국 신기록인 185kg을 들었다. 기대했던 용상에서는 210kg을 기록했다. 본인이 기대했던 만큼은 아니었지만 합계 395kg는 나쁘지 않은 기록이었다. 당시 경쟁자들이 다른 대회 성적과 비교하면 충분히 시상대에 설 만했다. 하지만 결과는 전혀 달랐다. 꽤 좋은 기록에도 불구하고 김민재는 8위에 그쳤다. 경쟁자들은 합계 400kg 이상을 번쩍번쩍 들어 올렸다. 김민재는 “죽을 만큼 열심히 했는데 안 되는 게 있더라”라며 굵은 눈물을 쏟았다. 그는 “다들 약 먹은 거 아냐”라고 허탈하게 말하기도 했다. 무의식중에 내뱉은 말이었지만 사실이었다. 금, 은, 동메달리스트는 물론이고 4위, 6위, 7위 선수도 약물의 힘을 빌렸다는 게 몇 년 뒤에 밝혀진 것이다. 8위였던 김민재의 순위는 수직 상승 해 2위까지 올랐다. 뒤늦게 올림픽 은메달리스트가 된 김민재는 “많은 축하를 받았다. 그렇지만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어떤 종목보다 정직해야 할 역도가 더럽혀 졌기 때문”이라며 “그래도 내가 쏟은 땀과 노력이 보상받았다고 좋게 생각하려 한다”고 말했다.2012년 런던 올림픽을 마친 후 한국 역도 대표팀은 초상집 같은 분위기였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장미란은 4위에 머물렀다. 메달을 기대했던 남자 최중량급의 전상균도 아깝게 4위를 했다. 하지만 몇 년 후 사정은 180도 달라졌다. 런던 대회에서 도핑이 차례차례 적발되면서 장미란은 동메달을 따게 됐다. 전상균 역시 동메달로 승격했다. ‘노메달’인 줄 알았던 한국 역도는 결과적으로 은 1개, 동메달 2개를 땄다. 김민재는 “처음 도핑 얘기가 나온 게 2015년 말 정도였던 것 같다. 한 명씩, 한 명씩 적발되더니 어느새 내가 은메달리스트가 되어 있더라”고 말했다. 김민재는 2019년 열린 제100회 전국체육대회 기간 중 올림픽 은메달을 받았다. 돌이켜 보면 그의 역도 인생도 롤러코스터 같았다. 고교 시절 경량급 유망주였던 그는 대학 1학년 때 돌연 역도를 그만뒀다. 체중 조절이 힘들었고, 부상까지 겹쳐서였다. 중국집 배달과 주유소 아르바이트 등을 전전하다가 현역으로 군대에 갔다. 그가 다시 바벨을 잡은 건 동갑내기 여자친구였던 이연화 씨 덕분이었다. 지금은 그의 아내가 된 이연화 씨 역시 국가대표 역도 선수를 할 정도의 실력자였다. 이전과 달리 체중 조절을 하지 않고 먹고 싶은 거 다 먹어가면서 운동을 했다. 한때 69kg급 경량급 선수였던 그는 85kg 선수가 됐다. 1년 뒤에는 다시 94kg급으로 체급을 올렸다. 체중이 느는 것 이상으로 기록은 더 급격히 늘었다. 당시 그는 코치도 없이 혼자 운동을 했는데 용상으로 거뜬히 200kg을 들어 올렸다.주변에선 난리가 났다.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기록이었기 때문이다. “김민재가 약을 먹었다”라는 소문이 돌았다. 김민재는 “사실 나도 내 기록을 믿기 어려웠다. 역도 선수들은 대개 일주일에 두세 차례 기록을 점검한다. 그런데 나는 한 달 동안 매일 기록이 올라가는 걸 눈으로 확인했다”라고 했다. 태극마크를 단 후 대표팀에서 체계적인 훈련을 받자 기록은 더욱 일취월장했다. 런던 올림픽에 갈 때도 몸 상태가 최상이었다. 역도 대표팀 내에서 그는 ‘비밀병기’로 불렸다. 연습 때 용상으로 220kg를 번쩍번쩍 들었으니 잘하면 금메달도 가능하다는 평가도 나왔다. 하지만 이미 앞에 서술한 대로 그는 평소보다 못한 기록을 들었다. 하지만 김민재는 “내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하지만 만약 평소 연습 기록을 그대로 들었다고 해도 메달권에는 턱도 없었다. 약을 먹지 않는 나로서는 약 먹고 경기에 나온 선수들을 이길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부상 등이 겹치면서 김민재는 2017년 은퇴와 함께 역도계를 떠났다. 은퇴 후 잠시 개인 사업을 했던 김민재는 2020년부터 제주 남녕고에서 어린 선수들을 가르치고 있다. 제주도 체육회 역도 전임지도자로 먼저 제주에 자리 잡은 아내의 권유를 이번에도 따랐다. 이 씨가 지역 내 유망주를 발굴하면 김민재가 남녕고에서 키우는 식이다. 처음 왔을 때 단 두 명밖에 없던 선수가 지금은 중학생을 합치면 20명 가량 된다. 지난해 소년체전에서는 여러 선수가 메달도 땄다. 역사(力士) 유전자를 물려받은 세 자녀도 모두 역도를 한다. 장녀 태희 양(16)은 남녕고, 차녀 다현 양(14)은 중학교에서 역도 선수로 뛰고 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막내 명준 군(11)도 역도 선수를 꿈꾼다. 김민재는 “태희는 엄마처럼 용상을 잘하고, 다현이는 나를 닮아서 인상에 강하다”라며 “내가 가르치는 모든 아이들이 다 좋은 선수가 됐으면 한다. 제주를 한국 역도의 중심으로 만들고 싶은 바람”이라고 말했다.김민재는 2023년 자녀들 앞에서 제 실력을 보여준 적이 있다. 은퇴식을 하지 않고 선수 생활을 그만둔 그가 은퇴 경기로 출전한 2023 전북 아시아태평양 마스터즈 대회가 그 무대였다. 남자 102kg급에 출전한 그는 인상 150kg(1위), 용상 180kg(1위), 합계 330kg(1위)로 3관왕에 오르며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했다. 김민재는 “솔직히 같이 대회에 출전한 선수들의 메달을 빼앗은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크다”라며 “그래도 가족들 앞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고 축하를 받으며 은퇴하고 싶었다. 팬 여러분께도 절을 올리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고 말했다. 어느덧 제주에 자리를 잡은 그는 주중의 피로와 스트레스를 주말 낚시로 푼다. 어릴 적부터 오징어를 좋아해 왔던 그는 선상 오징어 낚시를 즐긴다. 제주 일대는 1년 사시사철 오징어를 잡기에 좋은 환경이다. 김민재는 “가끔 생선을 낚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오징어 낚시 위주로 한다”라며 “요즘은 럭비공 만한 갑오징어 철이다. 조금 있으면 살오징어와 한치 철이고, 9월부터는 무의오징어를 잡는다”라고 말했다. 잡은 오징어는 회로도 먹고 숙회로 먹기도 하고, 전으로 만들기도 한다. 김민재는 “오징어 낚시가 내겐 유일한 취미이다. 언젠가는 작은 배를 하나 사서 ‘선장’이 되고 싶다. 내 배를 타고 내가 좋아하는 오징어를 마음껏 잡고 싶다”라고 말했다. 주중에는 누구보다 열정적인 역도 코치로 어린 선수들을 육성하는 그는 4월 11일 세계 도핑방지의 날을 맞아 가족들과 함께 모처럼 서울 나들이를 했다. 한국도핑방지위원회(KADA)가 마련한 행사에 참가하고, 프로야구 LG 경기의 시구자로도 나섰다. 김민재는 “정직한 땀과 깨끗한 스포츠의 가치를 믿는다”고 시구 소감을 밝혔다. ‘약한 사람’의 입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말이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김민재 남녕고 역도부 코치(42)는 선수 시절 한국 올림픽 역사상 최고의 반전 드라마를 쓴 사람이다. 2012년 런던 올림픽 남자 94kg급에 출전한 김민재는 인상에서 한국기록인 185kg을 들었고, 용상은 210kg을 기록했다. 나쁘지 않은 기록이었지만 결과는 8위였다. 경쟁자들은 합계 400kg 이상을 번쩍번쩍 들어 올렸다. 당시 김민재는 “죽을 만큼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게 있더라”라며 굵은 눈물을 쏟았다. 그는 “다들 약 먹은 거 아니냐”라고 허탈하게 말하기도 했다. 무의식중에 내뱉은 말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사실이었다. 금, 은, 동메달리스트는 물론이고 4위, 6위, 7위 선수도 약물의 힘을 빌렸다는 게 몇 년 뒤에 밝혀진 것이다. 8위였던 김민재의 순위는 수직 상승했다. 갑작스레 올림픽 은메달리스트가 된 김민재는 “많은 축하를 받았다. 그렇지만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어떤 종목보다 정직해야 할 역도가 더럽혀졌기 때문”이라며 “그래도 내가 쏟은 땀과 노력이 보상받았다고 좋게 생각하려 한다”고 말했다. 처음이자 마지막 올림픽이었던 런던 대회는 그렇게 비극으로 시작해 희극으로 끝났다. 돌이켜보면 그의 역도 인생도 한 편의 드라마였다. 고교 시절 경량급 유망주였던 그는 대학 1학년 때 돌연 역도를 그만뒀다. 체중 조절이 힘들었고, 부상이 겹쳐서였다. 중국집 배달과 주유소 아르바이트 등을 전전하다가 현역으로 군대에 갔다. 그를 일으켜 세운 건 지금은 아내가 된 동갑내기 친구 이연화 씨였다. 역도 국가대표였던 이 씨의 응원 속에 다시 바벨을 잡은 김민재는 잠재력을 터뜨렸다. 코치도 없이 혼자 훈련했는데 한국기록급 성적을 냈다. 주변에선 “약을 먹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역도계에서 그는 ‘약쟁이’로 불렸다. 태극마크를 단 후 체계적인 훈련을 받자 기록은 일취월장했다. 은퇴 후 잠시 개인 사업을 했던 김민재는 2020년부터 제주 남녕고에서 어린 선수들을 가르치고 있다. 제주도 체육회 역도 전임지도자로 먼저 제주에 자리 잡은 아내의 권유를 이번에도 따랐다. 이 씨가 지역 내 유망주를 발굴하면 김민재가 남녕고에서 키우는 식이다. 처음 왔을 때 단 두 명밖에 없던 선수가 지금은 중학생을 합치면 20명가량 된다. 지난해 소년체전에서는 여러 선수가 메달도 땄다. 역사(力士) 유전자를 물려받은 세 자녀도 모두 역도를 한다. 장녀 태희 양(16)은 남녕고, 차녀 다현 양(14)은 중학교에서 역도 선수로 뛰고 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막내 명준 군(11)도 역도 선수를 꿈꾼다. 김민재는 “태희는 엄마처럼 용상을 잘하고, 다현이는 나를 닮아서 인상에 강하다”라며 “내가 가르치는 모든 아이들이 다 좋은 선수가 됐으면 한다. 제주를 한국 역도의 중심으로 만들고 싶은 바람”이라고 말했다. 4월 11일 세계 도핑방지의 날 즈음 김민재는 가족들과 함께 모처럼 서울 나들이를 했다. 한국도핑방지위원회(KADA)가 마련한 행사에 참가하고, 프로야구 LG 경기의 시구자로도 나섰다. 김민재는 “정직한 땀과 깨끗한 스포츠의 가치를 믿는다”고 시구 소감을 밝혔다. ‘약한 사람’의 입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말이었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풍운아’라는 별명이 최향남(54)만큼 잘 어울리는 야구 선수가 있을까. 1990년 해태 타이거즈(현 KIA)에 입단해 LG, 롯데 등을 거친 뒤 2013년까지 KIA 유니폼을 입었던 그는 통산 54승 79패 24세이브 14홀드 평균자책점 4.05를 기록했다. 승리보다 패배가 많은 선수였고, 평균자책점도 4점대로 평범한 편이다. 하지만 그는 한국 야구 선수 중 누구보다 많은 나라와 다양한 리그에서 뛰며 파란만장한 야구 인생을 살았다. 최향남은 하고 싶은 게 많은 선수였다. 보통 선수들과 달랐던 점은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 거침없이 도전했다는 것이다. 1998년 LG 소속으로 12승을 거두며 일약 에이스로 떠오르기도 한 그는 이후 어깨 수술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2003년은 한 경기도 등판하지 못했지만 2004년 친정인 KIA로 돌아와 쏠쏠한 활약을 펼쳤다. 그러던 그는 2005년 시즌을 마친 후 갑자기 세계 최고의 무대라는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에 도전장을 던졌다. 당시 35세이던 그는 테스트를 통해 클리블랜드 산하 트리플A 버팔로에 입단했다. 혈혈단신 혼자 미국 땅을 밟았지만 활약은 모든 이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34경기에 출전해 8승 5패 평균자책점 2.36이라는 빼어난 성적을 올렸다. 제대로 된 계약이었다면 MLB 승격을 노려볼 만도 했다. 하지만 마이너리그 계약이었던 터라 결국 기회는 팀 내 다른 유망주에게 돌아갔다. 2007년 KBO리그 롯데로 돌아온 그는 또 한 번의 전성기를 맞는다. 2008년 주전 마무리 임경완이 난조에 빠지자 덜컥 마무리 투수를 맡았는데 이게 대성공을 거둔 것이다. 구위는 20대 후반~30대 초반에 비해 다소 떨어졌지만 자신감 있는 투구와 경기 운영 능력을 앞세워 롯데의 뒷문을 든든히 지켰다. 얼마나 공을 빠른 템포로 던졌는지 적장의 목을 술이 식기 전에 베어 온 관우에 빗대어 ‘향운장’이라는 멋진 별명도 얻었다. 그해 그는 2승 4패 9세이브 3홀드 평균자책점 3.58을 기록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이미 37세였다. 보통 선수였다면 계속 KBO리그에서 뛰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최향남이었다. 포스팅시스템(비공개 경쟁입찰)을 통해 다시 한번 MLB 문을 두드렸다. 최향남은 “2006년 미국 선수들을 상대해 보면서 충분히 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더 늦기 전에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반전이 일어났다. 세인트루이스가 덜컥 포스팅에 응한 것이다. 포스팅 비용은 단돈 101달러. 한국 돈으로 약 14만 원밖에 되지 않는 상징적인 액수였지만 한국 선수 최초의 포스팅 성공 사례였다. 이후 류현진, 강정호, 이정후, 김혜성 등이 줄줄이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 메이저리그 마운드는 끝내 밟지 못했다. 세인트루이스에서 방출된 후 다시 테스트를 거쳐 입단한 LA 다저스 산하 트리플A 앨버커키에서 9승 2패 평균자책점 2.34로 맹활약했으나 적지 않은 나이가 걸림돌이 됐다.최향남이 MLB에 도전하면서 입은 유니폼은 이뿐이 아니다. 2008~2009시즌에는 도미니칸리그 아길라스에도 소속됐고, 2009~2010시즌에는 멕시칸리그 알고도네로스에서도 뛰었다. 선수 생활 마지막 유니폼은 2015년 유럽에 있는 오스트리아에서 했다. 비너노이슈타트 유니폼을 입었던 최향남은 “야구 선수로 미국, 일본, 도미니카공화국, 멕시코에서 뛰었다. 그런데 유럽은 한 번도 안 가봤더라. 여행 겸 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고 했다. 세미 프로리그인 오스트리아에서 그는 MLB의 투타겸업 슈퍼스타 오타니 쇼헤이 같은 선수였다. 투수인 그는 예전엔 타석에 들어설 일이 없었지만 오스트리아에서는 투타를 겸했다. 그는 투수로는 에이스였고, 타자로는 안타기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안타를 치고 베이스를 밟다가 후방 십자인대를 다쳤다. 하지만 그는 한 달 간 재활을 하고 남은 리그를 뛰었다. 시즌이 끝난 후 그는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최우수선수(MVP)에도 뽑혔다. 최향남은 “아름다운 기억이었다. 원정 경기를 갈 때는 승용차에 4명씩 앉아 알프스를 넘어 다녔다”며 “함께했던 동료들은 실력을 떠나 야구를 잘하고 싶다는 몸짓과 눈빛이 너무 좋았다. 나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오스트리아 선수들은 대개 따로 직업이 선수들이었다. 현지 선수들과 친해진 그는 쉬는 날에는 이 집, 저 집으로 초대를 받곤 했다. 평소 술을 마시지 않는 최향남이지만 그곳에서는 종종 포도주를 즐겼다. 그는 “내 평생 언제 그런 경험을 다시 해볼까 싶다. 순수했던 동료 선수들과 포도주와 빵, 수세 소시지를 먹으며 좋은 추억을 쌓았다. 내 인생 최고의 여행이 아니었을까 싶다”고 말했다. 그가 44살까지 마운드에 설 수 있었던 건 철저한 자기관리 덕분이었다. 원래부터 그는 술, 담배를 하지 않았다. 먹는 것에도 조심스러웠다. 가공육이 몸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김밥을 먹을 때도 햄은 빼고 먹을 정도였다. 최대한 가공식품과 인스턴트 식품을 멀리하고 가능한 대로 집밥을 먹었다. 운동도 열심히 했다. 야구 외의 취미 활동이 없었기에 운동 후엔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 겨울에는 한 달씩 화악산에 들어가 산을 달리며 몸을 만들기도 했다. 오스트리아에서의 마지막 선수 생활 후 그는 지도자가 돼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다. 글로벌선진학교 감독을 맡았고, 중국 상하이 골든이글스 투수코치로 2년을 지냈다. 2023년에는 상무 야구단 투수코치를 맡았다. 현재는 휴식을 취하며 지도자 생활을 모색하고 있다. 선수로서 누구도 하지 못했던 다양한 경험을 한 그는 선수들을 이해하려 애쓰는 지도자가 되려 애쓴다. 그리 길지 않은 지도자 경력에도 불구하고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선수들도 몇 명 있다. 최향남은 “많은 지도자들이 잘하는 선수를 더 잘 가르치려 한다. 하지만 내 경우엔 잠재력이 있지만 제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선수들에게 더 마음이 많이 간다”라며 “내가 겪은 시행착오를 통해 그런 선수들은 훌륭한 선수로 양성하는 게 목표다. 그런 선수들이 ‘아버지’라고 불러줄 때 보람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어느덧 50대 중반이 된 그에겐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예전 MLB에 도전하는 마음으로 다시 한번 실전 마운드에 서 보는 것이다. 최향남은 “후회 없는 선수 생활을 했다고 자부한다. 10년 전만 해도 ‘이제는 징하다’는 생각이었다”며 “하지만 50대가 되고 보니 마운드에 서는 게 내 삶에 적지 않은 의미가 있을 것 같다”며 웃었다. 몇 해 전 사구체신염을 앓은 그는 요즘 서서히 몸을 만들어가고 있다. 가장 기본적인 러닝과 맨몸운동이 시작이다. 그는 “중년 나이대에 가장 좋은 게 맨몸운동이다. 부상 위험 없이 몸의 기초를 다질 수 있다. 기본적인 몸을 만든 근육 운동을 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라고 했다. 그는 “사실 마운드에 설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혼신을 다한 마지막 공을 던진다는 게 내겐 엄청난 축복 같은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풍운아’ 최향남(54)은 파란만장한 야구 인생을 살았다. 1990년 해태(현 KIA)에 입단한 뒤 LG, KIA 등에서 뛰던 그는 2006년 세계 최고의 무대인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에 도전했다. 35세의 나이에 테스트를 통해 클리블랜드 산하 트리플A 버펄로에 입단했다. 2007년부터 2년간 롯데에서 뛴 뒤엔 2009년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다시 MLB의 문을 두드렸다. 당시 그는 포스팅 비용 101달러(약 14만5000원)에 세인트루이스와 계약했다. 38세에 이뤄낸 한국 선수 최초의 포스팅 성공 사례였다. 꿈에 그리던 메이저리그 무대는 끝내 밟지 못했다. LA 다저스 산하 트리플A 앨버커키에서 9승 2패 평균자책점 2.34로 호투했으나 적지 않은 나이가 걸림돌이 됐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롯데와 KIA, 독립 구단 고양 원더스에서 뛰었다. 마지막 선수 생활은 오스트리아에서 했다. 2015년 비너노이슈타트 유니폼을 입은 최향남은 “야구 선수로 유럽을 한 번도 안 가봤더라. 여행 겸 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며 웃었다. 아마추어 수준인 오스트리아에서 그는 ‘오타니’ 같은 선수였다. 투수로는 에이스였고, 타자로는 ‘안타 기계’였다. 어느 날인가엔 안타를 치고 베이스를 밟다가 후방 십자인대를 다쳤다. 하지만 그는 한 달간 재활을 하고 남은 리그를 뛰었다. 최향남은 “아름다운 기억이었다. 방문경기를 갈 때는 승용차에 4명씩 앉아 알프스를 넘어 다녔다”며 “야구 실력을 떠나 동료들의 야구를 대하는 몸짓과 눈빛이 너무 좋았다. 나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덕분에 그는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최우수선수(MVP)에 뽑혔다. 그가 그 나이까지 마운드에 설 수 있었던 건 철저한 자기관리 덕분이었다. 원래부터 그는 술, 담배를 하지 않았다. 먹는 것에도 조심스러웠다. 인스턴트 등 가공식품을 멀리하고 가능한 한 집밥을 먹었다. 운동도 열심히 했고, 휴식도 충분히 취했다. 겨울에는 한 달씩 산에 들어가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만들기도 했다. 은퇴 후 그는 지도자가 돼 후배들을 가르쳤다. 글로벌선진학교 감독을 맡았고, 중국 상하이 골든이글스 투수코치로 2년을 지냈다. 2023년에는 상무 야구단 투수코치로 일했다. 현재는 휴식을 취하며 지도자 생활을 모색하고 있다. 최근 그에겐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예전 MLB에 도전하는 마음으로 다시 한번 실전 마운드에 서 보는 것이다. 최향남은 “후회 없는 선수 생활을 했다고 자부한다. 10년 전만 해도 ‘이제는 징하다(징그럽다의 전라도 방언)’고 생각했다”며 “그런데 50대가 되고 보니 마운드에 서는 자체가 큰 의미가 있는 것 같다”며 웃었다. 몇 해 전 사구체신염을 앓은 그는 요즘 서서히 몸을 만들어 가고 있다. 러닝과 맨몸운동이 시작이다. 그는 “중년들에게 가장 좋은 게 맨몸운동이다. 부상 위험 없이 몸의 기초를 다질 수 있다. 기본적인 몸을 만드는 근육 운동을 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고 했다. 그는 “마운드에 설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혼신을 다해 마지막 공을 던진다는 게 내겐 축복 같은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엄홍길 대장(65·엄홍길휴먼재단 상임이사)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산악인이다. 그는 사상 최초로 히말라야 8000 고봉 16좌를 모두 완등한 역사적인 산악인이다. 1988년 해발 8850m의 에베레스트를 시작으로 초오유(8201m), 마칼루(8463m), 브로드피크(8047m), 로체(8516m), 다울라기니(8167m), 마나슬루(8163m), 가셔브룸 1봉(8068m), 가셔브룸 2봉(8035m), 안나푸르나(8091m), 낭가파르밧(8126m), 칸첸중가(8568m), K2(8611m), 시샤팡마(8027m), 얄룽캉(8505m), 로체샤르(8400m)를 모두 올랐다. 이 같은 업적에 힘입어 엄 대장은 2019년에는 ‘대한민국 스포츠영웅’에 선정됐다. 대한체육회는 당시 “그의 도전 정신이 우리 국민 모두에게 희망을 준 점을 높이 평가했다”고 설명했다.태어날 때부터 산과 친숙했던 그는 의외로 ‘물 사람’이기도 하다. 새로운 경험을 해보기 위해 군 생활을 해군에서 한 게 계기가 됐다. 인천 바다에서 군 생활을 한 그는 정원이 13명 안팎인 작은 배를 탔다. 서해에서 조업하는 어선들을 검문, 검색하는 게 주 업무였다. 배 타는 것 자체는 그리 힘들지 않았다. 가장 힘들었던 건 막내였던 그가 배 안에서 생기는 모든 잡일을 처리해야 하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게 바로 요리였다. 따로 주방장이 없던 작은 배였던지라 요리는 계급이 가장 낮은 사람이 하는 게 관례였다. 삼시세끼 10여 명분의 식사를 준비하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엄 대장은 “배를 타지 않을 땐 군 생활이 너무 편했다. 하지만 배만 타면 요리를 해야 했다. ‘맛이 있네 없네’, ‘간이 짜네 마네’하는 타박을 매일 들어야 했다”고 말했다. 뱃사람 생활이 그리 길진 않았다. 그가 타던 배가 엔진이 불타는 사고가 나면서 폐선이 된 것이다. 할 일 없이 내무반에 주로 머물던 어느 날 벽에 붙어 있던 포스터 한 장이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해군 특수전전단(UDT) 모집 포스터였다. 체력에 자신 있던 그는 단번에 지원서를 냈다. 엄격한 신체검사를 통과한 뒤 생도 번호 89번을 배정받았다. 그때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극한의 훈련이 이어졌다. 엄 대장은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내가 왜 지원했을까’라는 후회가 몰아쳤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저녁에는 ‘딱 오늘 하루만 더 버티자’는 마음을 먹었다”고 했다. 그렇게 그는 6개월간의 고된 훈련이 이겨냈다. 처음 150여 명이 시작했으나 마지막까지 훈련을 수료한 사람은 채 3분의1도 되지 않았다. 해군과 UTD에서의 경험이 나중에 그에겐 소중한 자산이 됐다. 엄 대장은 “극한의 훈련을 견디면서 체력과 정신력이 몰라보게 좋아졌다”며 “당시의 경험이 나중에 히말라야 16좌를 오를 수 있는 힘이 됐다. 배에서 요리했던 경험조차도 큰 도움이 됐다”며 웃었다. 엄 대장은 2007년 로체샤르(8400m)로 16번째 봉우리를 오른 것을 끝으로 더 이상 높은 산에 도전하지 않는다. 이듬해인 2008년부터는 ‘인생의 17좌’를 오르고 있다. 17번째 봉우리는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한 네팔 곳곳에 학교를 짓는 일이다. 그가 히말라야 16좌를 모두 오르기까지는 꼬박 22년이 걸렸다. 38차례 도전해 16번 성공했고, 그보다 많은 22번 실패했다. 그 과정에서 동료와 셰르파 등 10명을 잃었다. 그 역시 생사의 고비를 여러 번 넘나들었다. 마지막 16번째 고봉이었던 로체샤르는 그중에서도 가장 힘든 고비였다. 3번 실패했고, 4번째 도전에서야 겨우 성공했다. 등정 직전까지 천하의 엄 대장도 죽음과 실패에 대한 극한의 공포에 시달렸다. 추위에 떨면서 그는 히말라야에 기도를 올렸다. “꼭 성공하게 해주세요, 살아서 돌아가게 해주세요.” 하늘 저 높은 곳에서 “왜 너만 살아서 나가야 하느냐”소리가 들렸다. 그는 “살려주신다면 동료들을 챙기고, 남을 위해서 사는 삶을 살겠습니다”라고 약속했다.천신만고 끝에 그는 정상 등정에 성공했다. 히말라야는 그가 원하는 걸 들어준 것이다. 이제는 그가 갚을 차례였다. 엄대장은 2008년 자신의 이름을 딴 엄홍길휴먼재단을 설립했다. 그리고 2010년 팡보체에 제1차 휴먼스쿨을 세웠다. 에베레스트로 가는 길목에 있는 팡보체 휴먼스쿨(해발 4060m)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학교다. 처음 학교를 지으려 할 때는 현지인들조차도 “자동차도 들어갈 수 없는 고지대에 어떻게 학교를 짓느냐”고 손사래를 치기로 했다. 이전에도 세계 여러 구호 단체에서 학교를 지으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엄홍길 휴먼재단은 공사 시작 1년만에 4개의 교실과 1개의 강당, 도서관으로 구성된 학교를 완공했다. 엄 대장은 “1986년 처음 에베레스트에 도전했을 때 함께 했던 셰르파가 절벽에서 추락해 사망하는 사고를 당했다. 팡보체는 그의 고향이었다”며 “언젠간 꼭 빚을 갚겠다는 마음을 먹었던 터라 1호 학교를 그곳에 지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네팔 오지 곳곳에 엄 대장의 마음이 실린 학교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원래는 엄 대장이 오른 16개 봉우리에 맞춰 16개 학교를 지으려 했다. 그런데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속속 나타났다. 엄 대장은 “한 학교가 완공될 즈음이면 또 어딘가에서 도움을 주겠다는 분이 나타났다. 그렇게 끊이지 않고 학교를 짓는 공사가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2020년 16번째 휴먼스쿨이 딸께셜에 들어서면서 그가 약속했던 16개의 학교가 모두 만들어졌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공사는 계속 이어져 지난해 19번째 학교가 완성됐고, 올해는 20번째 학교 터파기가 시작된다. 엄 대장은 “한창 산을 오를 땐 정상만 바라봤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아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며 “그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건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네팔에 학교를 보급하는 게 내 운명처럼 돼 버렸다”고 말했다. 산은 오른 뒤 내려가면 되지만 학교는 짓는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끊임없는 유지, 보수, 운영이 오히려 더 중요하다. 엄홍길휴먼재단은 네팔 현지에 지부를 두고 원활한 교육이 이뤄질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더 이상 높은 산은 오르지 않지만 그는 여전히 산과 함께 산다. 서울 강북구 우이동 삼각산 밑에 집이 있는 그는 집 인근의 북한산, 도봉산을 자주 오른다. 왕복 두 시간이 걸리는 그만의 코스를 돌면 온몸이 땀으로 젖는다. 대신 몸은 건강해지고, 머리는 맑아진다. 한 달에 한 번은 재단에서 운영하는 정기산행을 한다. 그는 “산에만 가면 좋은 기운과 에너지가 느껴진다. 함께 산에 오르는 사람들도 다들 같은 생각이다. 마음이 넓고, 자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니 더할 나위가 없다”라고 말했다. 어느덧 60대 중반이지만 그는 나이에 비해 훨씬 젊어 보인다. 가까이에서 보면 피부가 유난히 맑은 편이다. 이에 대해 그는 “하루에 물을 4~5L 정도 마신다. 땀이 많은 편이라 산행과 각종 운동을 하면서 몸의 노폐물을 많이 빼는 편”이라고 말했다. 그는 여전히 수영하는 걸 좋아하고, 물에서 노는 것도 좋아한다. 수영장을 갈 수 없는 때는 사우나를 자주 찾는다. 아침 기상과 함께 푸쉬업을 100개 정도 한 그는 사우나에 가서는 스쾃을 1000개 하면서 온몸의 땀을 뺀다. 음식을 가려먹진 않지만 인스턴트 음식은 거의 입에 대지 않는다. 엄 대장은 “히말라야를 20여년간 오르면서 가장 많이 먹은 게 라면죽이나 라면밥 등 인스턴트 음식이었다. 피자나 햄버거 등도 거의 먹지 않는다”며 “정성껏 재료를 준비해 만들어 먹는 음식이 가장 좋다. 좋은 사람들과 따뜻한 음식을 먹는 즐거움이 크다”라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000m 고봉 16좌를 등정한 엄홍길 대장(65·엄홍길휴먼재단 상임이사)은 2007년 로체샤르(8400m)를 끝으로 높은 산에 도전하지 않는다. 이듬해인 2008년부터는 ‘인생의 17좌’를 오르고 있다. 17번째 봉우리는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한 네팔 곳곳에 학교를 짓는 일이다. 그가 히말라야 16좌를 모두 오르기까지는 꼬박 22년이 걸렸다. 38차례 도전해 16번 성공했고, 그보다 많은 22번 실패했다. 그 과정에서 동료와 셰르파 등 10명을 잃었다. 그 역시 생사의 고비를 여러 번 넘나들었다. 16번째 고봉인 로체샤르는 그중에서도 가장 힘든 고비였다. 3번 실패했고, 4번째 도전에서야 성공했다. 등정 직전까지 그도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렸다. 추위에 떨면서 그는 히말라야에 기도를 올렸다. “꼭 성공하게 해주세요, 살아서 돌아가게 해주세요.” 허공에서는 “왜 너만 살아서 나가야 하느냐”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살려주신다면 동료들을 챙기고, 남을 위해서 사는 삶을 살겠습니다”라고 약속했다. 히말라야는 그가 원하는 걸 들어줬다. 이제는 그가 갚을 차례였다. 그는 2008년 엄홍길휴먼재단을 설립했고, 2010년 팡보체에 제1호 학교를 세웠다. 에베레스트로 가는 길목에 있는 팡보체 휴먼스쿨(해발 4060m)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학교다. 엄 대장은 “1986년 처음 에베레스트에 도전했을 때 함께했던 셰르파가 절벽에서 추락해 사망하는 사고를 당했다. 팡보체는 그의 고향이었다”며 “언젠간 꼭 빚을 갚겠다는 마음을 먹었던 터라 1호 학교를 그곳에 지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네팔 곳곳에 엄 대장의 마음이 실린 학교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원래는 16개 봉우리에 맞춰 16개 학교를 지으려 했다. 그런데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속속 나타났다. 한 학교가 완공될 즈음이면 또 새로운 학교 짓기가 시작됐다. 2020년 딸께셜 휴먼스쿨이 16번째 학교였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지난해 19번째 학교가 완성됐고, 올해는 20번째 학교 터파기가 시작된다. 엄 대장은 “한창 산을 오를 땐 정상만 바라봤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아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며 “그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건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네팔에 학교를 보급하는 게 내 운명처럼 돼 버렸다”고 말했다. 산은 오른 뒤 내려가면 되지만 학교는 짓는다고 끝이 아니다. 끊임없는 유지, 보수, 운영이 필요하다. 엄홍길휴먼재단은 네팔 현지에 지부를 두고 원활한 교육이 이뤄질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고산은 오르지 않지만 그는 여전히 산과 함께 산다. 서울 강북구 우이동 삼각산 밑에 집이 있는 그는 집 인근의 북한산, 도봉산을 자주 오른다. 왕복 두 시간이 걸리는 그만의 코스를 돌면 온몸이 땀으로 젖는다. 그 대신 몸은 건강해지고, 머리는 맑아진다. 한 달에 한 번은 재단에서 운영하는 정기산행을 한다. 평생을 산에서 살았지만 해군 특수전전단(UDT) 출신인 그는 물도 친숙하다. 사우나를 즐기는 그는 그곳에서도 스쾃 1000번을 하면서 땀을 흘린다. 하루에 물도 4∼5L를 마신다. 지난주 다시 네팔로 떠난 엄 대장은 “산에만 가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산의 기운과 에너지를 받는 게 너무 좋다”며 “히말라야의 성스러운 기운을 담아 와 앞으로도 좋은 소식을 많이 전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지난달 새 진천선수촌장에 임명된 ‘탁구 레전드’ 김택수(55)는 선수 시절 ‘악바리’로 유명했다. 국가대표 선수라면 누구든 열심히 하지 않는 선수가 없겠지만 그중에서도 그는 유독 의지가 강했다.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나 자신을 봐도 의지와 집념이 강한 편이었다”고 말할 정도다. 그가 처음 탁구 라켓을 잡은 건 남들보다 다소 늦은 초등학교 5학년 특별활동 시간이었다. 처음엔 취미로 시작했지만 소년체전에 출전하면서 탁구 선수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먹었다.동료들에 비해 2, 3년이 늦게 탁구를 시작한 그는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광주 무진중에 진학하면서 국가대표라는 더 큰 목표가 생겼다. 중학교 선배이자 당대 최고의 탁구 스타였던 김완 감독이 가끔 학교를 찾아 탁구를 쳐 주곤 했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다.그때부터 그는 목표를 향해 모든 걸 쏟아부었다. 남들보다 30분 먼저 훈련을 시작했고, 30분 늦게 연습장을 나왔다. 김택수는 “너무 힘들었지만 참고 견뎠다. 잘 때는 머리맡에 안약을 두고 잤다”며 “밤늦게까지 연습을 하고 잠들면 아침에 눈이 잘 떠지지 않는다. 어렵게나마 눈을 뜨기 위해 안약을 눈에 넣는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진정한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탁구를 시작한 지 5년 만인 중학교 3학년 때 그는 전국대회에서 1등을 했다. 고교 1학년 때 청소년 대표가 됐고, 고2 때 마침내 꿈에 그리던 태극마크를 달았다. 하지만 그가 진정 대단한 것은 태극마크를 단 이후의 일이다. 그는 처음 국가대표가 된 후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을 앞두고 은퇴할 때까지 17년간 한 번도 태극마크를 놓친 적이 없다. 국가대표 선수들의 요람이 서울 태릉선수촌에서 충북 진천선수촌으로 바뀌는 동안에도 그는 여전히 선수촌의 터줏대감이었다. 그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전에 은퇴하면서 지도자로 변신했다. 하지만 실력으로만 보면 그는 3, 4년은 충분히 더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었다는 게 탁구계의 평가다. 당시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 유승민과 오상은 등 두 명이 이미 결정된 가운데 김택수는 마지막 한 장의 티켓을 따냈다. 그런데 그는 마지막 순간 덜컥 자신의 출전권을 후배에게 양보했다. 김택수는 “생애 마지막 올림픽 출전권을 양보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그렇지만 객관적으로 나보다는 후배들의 메달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했다”며 “돌이켜보면 무모했던 건지, 순수했던 건지 모르겠다. 선수가 아닌 지도자로 탁구계에 헌신하는 것도 괜찮겠다고 느꼈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남자 단식과 복식에서 2개의 동메달을 땄다. 비록 올림픽 금메달과는 인연이 없었지만 그는 중국의 만리장성을 넘어 본 몇 안 되는 선수다. 그의 탁구 인생 하이라이트는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중국 탁구는 감히 넘보기 힘든 철옹성과 같았다. 그런데 김택수는 남자 단식 4강에서 세계랭킹 3위인 중국의 쿵링후이를 이겼다. 그리고 결승에서 또 다른 중국 선수 류궈량까지 꺾었다. 그 경기에서 나온 32구 랠리는 지금 봐도 가슴 떨리는 명장면이다. 그러나 정작 그가 만리장성을 넘는 모습을 현지에선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김택수는 “중국은 그 대회에서 앞서 열린 6개 종목을 모두 휩쓸었다. 더구나 중국 선수가 두 명이나 4강에 올라와 있었다”라며 “당시 아시안게임에서 가장 큰 화제를 모았던 건 야구 대표팀이었다. 박찬호와 김병현 등 일명 드림팀이 처음 구성됐기 때문이다. 현지에 온 기자들 대부분이 야구 경기를 보러 갔다. 내가 금메달을 딴 것을 뒤늦게 알고 달려왔던 기억이 난다”라며 웃었다. 올림픽 금메달을 꿈을 이뤄준 것은 제자인 유승민(43·현 대한체육회장)이었다. 선수 은퇴 후 곧바로 유승민을 지도한 김택수는 중국 선수들을 대비해 맹훈련을 시켰다. 유승민은 혹독한 훈련을 이겨낸 유일한 선수였다. 김택수는 “나도 집념과 의지가 강한 편이다. 그런데 유승민 회장은 모든 면에서 나를 넘어선 선수였다”며 “왕하오의 이면타법을 대비하기 위해 하루 1만 개의 공을 받도록 했다. 모든 선수들이 나가떨어질 때 유 회장만 버텨냈다. 남다른 집념과 체력이 있었다”고 말했다. 유승민은 결국 남자 단신 결승에서 만난 왕하오를 꺾고 한국 남자 선수로는 올림픽 단신 결승에서 유일하게 중국 선수를 이긴 선수가 됐다. 그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유승민이 마지막 점수를 뽑고 우승을 확정한 순간 예기치 않는 논란이 벌어졌다. 원래대로라면 유승민이 코치의 품에 안기는 것이 일반적인데 코치석에 앉아 있던 김택수가 오히려 선수인 유승민에게 먼저 안겨버린 것이다. TV를 통해 지켜보고 있는 많은 이들로부터 ‘주객전도’가 아니냐는 비판이 있었다. 김택수는 “절대 의도한 게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나도 당연히 유 회장이 먼저 내게 안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경기장에 펜스가 있지 않나. 유승민을 안아주러 가기 위해 펜스를 펄쩍 뛰어넘었는데 유 회장이 번개처럼 이미 눈앞에 와 있더라.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유 회장에게 안겨 있더라. 깜짝 놀라 다시 자세를 바꿔 내가 유 회장을 안아줬다”라고 말했다. 이후 그는 7년간 국가대표 지도자를 지냈다. 선수, 지도자로 24년간 선수촌에서 살았던 그는 유승민이 대한체육회장으로 당선되면서 선수촌장에 임명돼 다시 선수촌으로 돌아오게 됐다. 그가 선수, 지도자로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은 철저한 자기관리다. 술은 마시지만 12시를 넘기지 않는다. 가능한 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며, 잠을 충분히 잔다. 선수 때와 비교해 몸무게도 거의 변하지 않았다. 많이 먹은 날은 그만큼 걷거나 뛰며 어떻게든 칼로리를 소모한다. 튀긴 음식이나 패스트푸드를 피하고 신선한 야채류와 해산물을 즐겨 먹는다. 허리 디스크로 수술을 세 차례나 한 그는 무거운 무게를 들지 않고 가벼운 근력 운동을 주도 한다. 또 하루에 1만 보 또는 1만 5000보를 걸으려 노력한다. 마음의 고향과 같은 선수촌의 수장으로 돌아온 그는 선수들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면서도 훈련에 있어서만큼은 양보가 없다고 밝혔다. 그는 “선수 때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면 세계 정상으로 가기 위해선 한계를 넘는 훈련밖에 없다. 그렇게 노력해도 운이 따라야 올림픽 메달을 딸 수 있다”라며 “가장 중요한 건 선수 스스로 깨닫고 하는 훈련이다. 선수들에게 확실한 동기부여를 주는 게 내 역할”이라고 말했다.이헌재 기자 uni@donga.com}
지난달 새 진천선수촌장에 임명된 ‘탁구 레전드’ 김택수(55)에게 선수촌은 집보다 편한 곳이다. 고교 2학년 때 처음 태극마크를 단 김택수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을 앞두고 은퇴할 때까지 17년간 국가대표 선수로 뛰었다. 지도자가 된 후에도 7년 동안 선수촌 밥을 먹었다. 선수, 지도자로 24년간 선수촌에서 살았던 그가 선수촌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멀고 험한 길이었다. 그가 처음 탁구 라켓을 잡은 건 남들보다 다소 늦은 초등학교 5학년 특별활동 시간이었다. 우연히 출전한 소년체전을 통해 그는 탁구 선수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먹었다. 광주 무진중에 진학하면서 국가대표라는 더 큰 목표가 생겼다. 중학교 선배이자 당대 최고의 탁구 스타였던 김완 감독이 가끔 학교를 찾아 탁구를 쳐 주곤 했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다. ‘악바리’ 김택수는 목표를 향해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남들보다 30분 먼저 훈련을 시작했고, 30분 늦게 연습장을 나왔다. 김택수는 “너무 힘들었지만 참고 견뎠다. 잘 때는 머리맡에 안약을 두고 잤다. 아침에 눈이 떠지지 않으면 안약을 눈에 넣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중3 때 전국대회에서 1등을 했고, 고1 때 청소년 대표가 됐다. 그리고 고교 2학년 때 꿈에 그리던 태극마크를 달았다. 그의 탁구 인생 하이라이트는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이었다. 당시에도 중국 탁구의 만리장성을 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런데 김택수는 남자 단식 4강에서 세계랭킹 3위인 중국의 쿵링후이를 이겼다. 그리고 결승에서 또 다른 중국 선수 류궈량까지 꺾었다. 그 경기에서 나온 32구 랠리는 지금 봐도 가슴 떨리는 명장면이다. 하늘은 그에게 올림픽 금메달은 허락하지 않았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단식과 남자 복식에서 딴 2개의 동메달이 전부였다. 올림픽 금메달의 꿈을 이뤄준 건 제자 유승민(43·현 대한체육회장)이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때 지도자로 변신한 그는 유승민이 남자 단식 결승에서 중국의 왕하오를 꺾는 데 큰 도움을 줬다. 김택수는 “나도 집념과 의지가 강한 편이다. 그런데 유승민 회장은 모든 면에서 나를 넘어섰다”며 “왕하오의 이면타법에 대비하기 위해 하루 1만 개의 공을 받도록 했다. 그걸 유일하게 버틴 게 유 회장이다. 남다른 집념과 체력이 있었다”고 했다. 그가 선수, 지도자로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은 철저한 자기관리다. 술은 마시지만 12시를 넘기지 않는다. 가능한 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며, 잠을 충분히 잔다. 선수 때와 비교해 몸무게도 거의 변하지 않았다. 많이 먹은 날은 그만큼 걷거나 뛰며 어떻게든 칼로리를 소모한다. 튀긴 음식이나 패스트푸드를 피하고 신선한 야채류와 해산물을 즐겨 먹는다. 마음의 고향과 같은 선수촌의 수장으로 돌아온 그는 “선수 때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면 세계 정상으로 가기 위해선 한계를 넘는 훈련밖에 없다. 그렇게 노력해도 운이 따라야 올림픽 메달을 딸 수 있다”며 “가장 중요한 건 선수 스스로 깨닫고 하는 훈련이다. 선수들에게 확실한 동기부여를 주는 게 내 역할”이라고 말했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요즘은 야구에 미쳐 있어요.”한국 여자 아이스하키의 전설적인 골키퍼(골리)였던 신소정(35)은 요즘 1인 2역으로 살고 있다. 주간에는 고려대 아이스하키 팀의 골리 코치로 일하고, 오전 일찍 시간과 저녁에는 사회인 야구 선수 생활을 한다. 사회인 야구라고 우습게 보면 안 된다. 그가 소속된 야구팀 ‘리얼 디아몬즈’는 여자 사회인 야구팀에서는 독보적인 강팀이다. 지난해 열린 5개의 전국대회에서 3번이나 정상에 올랐다. 신소정은 바로 그 팀에서 주전 포수이자 4번 타자를 맡고 있다. 신소정이 야구를 시작한 것은 팀 스포츠 특유의 아드레날린을 잊지 못해서다.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을 마지막으로 은퇴할 때까지 16년간 태극마크를 달았던 그는 운동을 그만둔 뒤의 헛헛한 마음을 다른 운동으로 달래려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하는 골프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리 오래 가진 않았다. 신소정은 “스피디하면서도 팀원들과 함께 하는 아이스하키를 하다가 개인 운동인 골프를 하니 크게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다 아는 지인의 소개로 4년 전 야구와 인연을 맺게 됐다. 처음부터 포수를 했던 건 아니다. 원래 있던 포수가 아파서 나오지 못한 날이 있었는데 그날 대신해 처음으로 포수 마스크를 썼다. 아이스하키 골리와 야구의 포수는 닮은 점이 많다. 마스크를 쓰고, 온몸을 장비로 감싼다는 점이 그렇다. 전체 경기를 넓은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공통점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비슷한 건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퍽이나 공을 글러브를 받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스하키 선수 시절 신소정은 눈앞에서 시속 100km 이상의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퍽을 잡아내거나 온몸으로 막아내야 했다. 그는 남자 선수들과도 종종 함께 훈련했는데 그때는 180km가 넘는 슬랩샷을 경험해야 했다. 그런 그에게 투수가 던지는 시속 100km 안팎의 공은 그리 부담스럽지 않았다. 신소정은 “아무래도 빠른 속도의 퍽을 받다가 상대적으로 느린 공을 받는 거였으니 그리 힘들지 않았다. 이후 포수라는 자리에 흥미를 느껴 더 재미있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하루는 남들보다 훨씬 바쁘게 돌아간다. 그는 아침 일찍 집 근처 야구 레슨장으로 출근해 타격부터 수비, 캐치볼 등 개인 훈련을 한다. 이후 점심 때쯤 고려대 아이스하키장으로 출근해 선수들을 지도한다. 퇴근 후엔 다시 야구장에 들러 그룹 레슨을 받으며 동료들과 손발을 맞춘다. 워낙 열정적으로 야구를 하다 보니 주변에서는 여자 야구 국가대표에 한 번 도전해 보라고 권유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신소정은 “스스로 느끼기에는 여전히 부족함이 많다. 태극마크를 달 실력은 전혀 아닌 것 같다”며 “지금처럼 꾸준히 실력을 쌓아가 언젠가 도전해도 되겠다고 느껴지면 혹시라도 시도해 볼 수 있을 것 같다”며 웃었다.사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사람은 적지 않다. 여자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재임했던 양상문 한화 수석코치가 지난해 그가 야구하는 모습을 본 뒤 “야구를 얼마나 오래 했나. 혹시 엘리트 선수였느냐”며 물어본 적도 있다. 처음 야구를 시작할 때 그는 “건강도 관리하고 스트레스도 풀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들었다. 그런데 이제는 야구가 없는 삶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지경이 됐다. 그는 아이스하키 선수 시절 했던 식단 관리를 지금 그대로 하고 있다. 신소정은 “운동선수 출신이라서 그런지 운동을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 야구를 하면서 예전 아이스하키 선수 때의 행복을 다시 느끼고 있다”며 “이왕 야구를 시작한 만큼 더 잘하는 선수가 되고 싶다”며 웃었다. 신소정은 지난해 11월 부산 사직구장에서 열린 2024 자이언츠배 여자야구대회에서도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수훈상까지 받았다. 야구에서는 이제 갓 잠재력을 터뜨리려는 ‘유망주’이지만 그는 여자 아이스하키에서는 역사의 한 획을 그은 ‘레전드’다. 일곱 살 때 아이스하키를 시작한 그는 중학생이던 2004년 대표팀에 발탁된 후 2018년 평창올림픽을 마지막으로 은퇴할 때까지 16년간 태극마크를 달았다. 대표팀 주전 ‘골리’였던 그는 북한과 단일팀을 이룬 평창올림픽 때도 골문을 든든히 지켰다. 단일팀은 당시 5전 전패를 당했지만 그는 236개의 유효슈팅 가운데 210개를 온몸으로 막아냈다. 그는 한국 선수로는 최초로 2013년 아이스하키 종주국 캐나다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그는 캐나다 1부 리그의 34개 모든 팀에 자신의 경기 영상을 보냈고, 그를 선택한 프랜시스 제이비어대에 입학했다. 그는 2016년에는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북미여자아이스하키리그 뉴욕에 입단했다. 고려대 아이스하키 팀 골리 코치로 일하기 전에는 지금은 해체한 실업팀 대명 킬러웨일즈에서 골리 코치로 일하기도 했다. 현재로 유일한 남자팀 여성 코치인 그는 당시에도 실업팀 최초이자 유일한 여성 코치였다. 신소정은 “골리 출신인 케빈 콘스탄틴 당시 대명 감독님이 편견 없이 저를 불러주셨다”면서 “고려대도 오직 실력만 보고 저를 받아주셨다. 여자 선수들에게 꿈과 희망이 전해질 수 있게 더 열심히 하겠다”고 말했다. 여자 선수들에게는 불모지랑 다름없던 한국 아이스하키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는 어릴 때부터 남자 선수들과 함께 운동을 해야 했다. 그가 운동을 하던 초중고 시절 한국에는 여자 아이스하키팀이 하나도 없었다. 강북중과 혜화여고를 나온 그는 남자 클럽팀에 소속돼 훈련을 했다. 그는 “혼자 여자이다 보니 운동이 끝나면 다른 선수들이 라커룸을 쓰기 전에 먼저 빠르게 샤워를 해야 했다. 서로 많이 불편했지만 큰 배려를 받았다”고 했다. 돌이켜보면 그런 과정이 있었기에 해외 진출도 할 수 있었고, 현재 남자팀 지도자로 일할 수 있었다. 그는 “남자 선수들과 함께 운동했던 건 내겐 큰 행운이었다”라며 “남자 선수들 틈에서 강하게 단련했던 게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2018 평창올림픽을 끝으로 선수로 빙판을 떠난 뒤 그는 잠시 다른 길을 걷기도 했다. 연기자가 되기 위해 연기학원을 다니며 오디션을 보기도 했고, 멕시코 음식을 만드는 푸드트럭을 운영하며 자영업자로 변신하기도 했다. 신소정은 “은퇴 후 그동안 해보고 싶다고 마음먹었던 걸 두루 해봤다. 그런 경험을 통해 내가 진정으로 좋아했던 건 역시 운동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됐다”며 “현재 맡고 있는 아이스하키 코치와 야구 선수 생활을 더 잘 해내고 싶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여자 아이스하키 팀의 지도자로도 일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신소정(35)은 한국 여자 아이스하키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일곱 살때 아이스하키를 시작한 그는 중학생이던 2004년 대표팀에 발탁된 후 2018년 평창 올림픽을 마지막으로 은퇴할 때까지 15년간 태극마크를 달았다. 대표팀 주전 ‘골리’였던 그는 북한과 단일팀을 이룬 평창 올림픽 때도 골문을 든든히 지켰다. 단일팀은 당시 5전 전패를 당했지만 그는 236개의 유효슈팅 가운데 210개를 온몸으로 막아냈다. 아이스하키는 몸과 몸이 부딪치는 격렬한 종목이다. 퍽은 어디로 튈지 모르고, 슛은 시속 180km까지 나온다. 남자들에게도 쉽지 않은 종목이지만 그는 평생을 아이스하키와 함께 살고 있다. 현재 신소정은 고려대 남자 아이스하키팀의 골리 코치로 일하고 있다. 2021년 말 팀에 합류했으니 벌써 5년 차. 팀 내에서 그는 유일한 여성이다. 그에게는 익숙한 상황이다. 그가 운동을 하던 초중고교 시절 한국에는 여자 아이스하키팀이 하나도 없었다. 아이스하키를 계속하기 위해 그는 남자 선수들과 함께 훈련을 해야 했다. 2013년 아이스하키 종주국 캐나다로 유학을 떠난 것도 뛸 팀을 찾기 위해서였다. 당시 그는 캐나다 1부 리그의 34개 모든 팀에 자신의 경기 영상을 보냈고, 그를 선택한 프랜시스 제이비어대에 입학했다. 그는 2016년에는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북미여자아이스하키리그 뉴욕에 입단했다. 신소정은 “돌이켜 보면 남자 선수들과 함께 운동했던 건 큰 행운이었다”라며 “남자 선수들 틈에서 강하게 단련했기에 해외에서도 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신소정은 2020년부터 2년간은 남자 실업팀 대명 킬러웨일즈(해체)의 골리 코치로 일하기도 했다. 당시에도 그는 실업팀 최초이자 유일한 여성 코치였다. 신소정은 “골리 출신인 케빈 콘스탄틴 당시 대명 감독님이 편견 없이 저를 불러주셨다”라면서 “고려대도 오직 실력만 보고 저를 받아주셨다. 여자 선수들에게 꿈과 희망이 전해질 수 있도록 더 열심히 하겠다”고 말했다. 아이스하키와 함께 그를 지탱하는 또 한 축은 야구다. 신소정은 “운동선수 출신이라서 그런지 운동을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며 “예전엔 골프를 했는데 개인 종목이다 보니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야구를 하면서 아이스하키 선수 때의 행복을 다시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아침 일찍 집 근처 야구 레슨장에서 타격, 수비, 캐치볼 등 개인 훈련을 한 뒤 고려대 하키장으로 출근한다. 퇴근 후엔 다시 야구장에 들러 그룹 레슨을 받는다. 야구를 시작한 지 4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주전 포수이자 4번 타자로 활약하고 있다. 주중에는 연습을 하고, 주말에 주로 경기를 뛴다. 그가 소속된 여자 사회인 야구팀 리얼 디아몬즈는 지난해 전국대회에서 3차례나 정상에 올랐다. 지난해 11월 부산 사직구장에서 열린 2024 자이언츠배 여자야구대회에서도 우승했고, 신소정은 수훈상을 받았다. 신소정은 “골리로 빠른 퍽을 받다가 포수로 야구공을 받으니 적응이 딱히 어렵지 않았다”며 “건강 관리 겸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시작한 야구에 푹 빠졌다. 취미이지만 이왕이면 더욱더 잘하는 선수가 되고 싶다”며 웃었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영화 ‘넘버3’에 나오는 명장면 하나. 송강호가 부하 조폭들에게 ‘헝그리 정신’에 대해 가르치다 이렇게 얘기한다. “거 누구야, 현정화! 걔도 라면만 먹고 육상해서 금메달 3개씩이나 따버렸어.” 눈치 없는 부하는 ‘진실’을 말한다. “임춘애입니다. 형님.” 일순간 흐르는 정적. 무식이 탄로 난 송강호은 말한다. “나가 있어.” 그리고 ‘퍽, 퍽’ 소리와 함께 무자비한 폭행이 시작된다. 임춘애가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누구도 예상치 못한 금메달 3개를 딴 지 벌써 40년 가까이 지났다. 무명 선수에서 육상 3관왕(800m, 1500m, 3000m)에 오른 임춘애는 일약 ‘신데렐라’가 됐다. 하지만 송강호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그는 여전히 ‘라면 소녀’다. 당시 그를 가르친 코치가 열악한 운동부 환경을 얘기하며 “간식으로 라면을 먹는다”고 얘기한 게 그가 라면만 먹고 금메달을 3개나 딴 것으로 곡해됐다. 이후 그는 인터뷰 때마다 사실이 아니라고 얘기했고, 코치 역시 과장됐다고 설명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임춘애는 “50대 중반인데도 사람들에게 나는 여전히 ‘라면 소녀’”라며 웃었다. 임춘애는 “저는 밀가루가 입에 맞지 않아 라면을 먹지 않았다. 동료 선수들도 가끔 간식으로 라면을 먹었을 뿐”이라며 “라면 국물에 밥을 말아서 먹은 적은 있다”고 했다. “우유를 마시며 운동하던 친구들이 부러웠다”는 발언 역시 오해다. 사실 그는 한 번도 우유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다. 그런데 이야깃거리에 목말랐던 사람들이 우유 이야기도 진짜인 양 포장하면서 그는 ‘라면만 먹었고, 우유는 마시지 못하면서 운동했지만 성공했던’ 스토리의 주인공이 됐다. 임춘애는 “‘헝그리 정신’을 강조하기 위해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냈을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우유만 마시면 바로 화장실에 가야 하는 체질이라 우유도 마시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 한 우유업체는 선수단 앞으로 5년간 무료로 우유를 보내기도 했다. 정작 선수들이 가장 많이 먹었던 건 삼계탕 같은 보양식이었다. 다만 당시 선수들의 운동 환경이 지극히 열악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한국에서 처음 열린 서울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선수들은 스파르타식 훈련을 견뎌야 했다.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는 명목하에 욕설과 체벌이 용인되던 시대였다. 처음 운동을 시작할 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중학교 3학년 때 반에서 키가 가장 작았을 정도로 왜소했던 임춘애는 경기 성남 지역에서 좀 뛴다 하는 정도의 선수였다. 좋아서 운동을 했다기 보다는 친구들과 함께 하는 맛에 육상을 계속했다. 중간에 고무줄놀이도 하면서 즐기듯 운동을 했다. 그런데 1986년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모든 게 달라졌다. 한국에서 열리는 첫 대형 국제대회를 앞두고 “몸이 망가져도 좋으니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는 지침이 내려왔다. 선수들은 말 그대로 뼈를 갈아야 했다. 그는 사실 국가대표 선발전에 출전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후 열린 전국체전에서 3관왕을 하면서 뒤늦게 태극마크를 달았다. 이후 17세 소녀는 새벽, 오전, 오후, 야간까지 쉴 새 없이 달려야 했다. 기록이 좋아지는 만큼 몸은 망가졌다. 임춘애는 “얼마나 훈련을 많이 했던지 훈련을 끝내면 유니폼이 소금에 절인 것처럼 됐다”며 “훈련이 너무 힘들다 보니 대회에 나가는 게 너무 좋았다. 대회 때는 예선과 결선 등 딱 두 번 만 뛰면 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모진 훈련을 견딘 끝에 그는 아시안게임 3관왕에 올랐다. 하지만 그때 이미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2년 뒤인 1988년 서울올림픽 개회식 때 성화 봉송 마지막 주자로 나선 게 인생의 하이라이트였다. 아픈 몸을 이끌고 출전한 서울올림픽에서도 그는 아시안게임 때와 비슷한 기록을 냈다. 하지만 세계의 벽은 아시아 무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높았다. 예선 탈락을 하자 이번엔 “배에 기름이 껴서 제대로 못 뛴다”는 비난이 쏟아졌다.이화여대에 재학 중이던 그는 은퇴를 하려 했다. 운동은 너무 힘들었고, 운동을 계속할 수 있는 몸 상태도 아니었다. 하지만 육상계는 그에게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까지 뛸 것을 제안했다. 그는 골반뼈가 제대로 자라지 못해 운동을 계속하는 게 무리라는 진단서를 제출하고서야 겨우 은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뒤에서는 “정신상태가 틀려 먹었다”는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임춘애는 “제대로 된 재활도, 심리상담 같은 것도 없었을 때”라며 “진단서를 제출해 은퇴하게 된 것은 내가 포기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할 수 없는 상태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은퇴 후 그는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렸다. 그렇다고 운동장 밖의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한 것도 아니었다. 세 아이의 엄마가 된 그는 남편과 함께 생계를 꾸려야 했다. 보험회사 직원으로도 일했고, 수입차 영업사원으로도 뛰었다. 차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그가 유명세 덕에 차를 몇 대 팔자 “고객을 빼앗아간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동료들 사이에서 나왔다. 이후 칼국수 가게를 차리기도 했고, 도시락 사업도 해 봤다. 하지만 사회생활 역시 쉬운 게 아니었다. 그는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의 오해를 사거나 방해를 받곤 했다. 많은 걸 배운 시간이었다”고 했다. 그 와중에 그는 고향과도 같은 육상과 다시 연결되기 시작했다. 지인의 추천으로 한 주류 도매업 사장들이 만든 마라톤 팀을 지도했다. 임춘애는 “예전 선수 생활을 할 때는 누군가를 이기기 위한 달리기를 했다”며 “동호인 팀을 가르치면서 ‘아, 재미있게 뛰는 달리기라는 것도 있구나’라는 걸 새삼 느꼈다”고 했다. 이후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육상 지도자로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다. 과도한 운동 후유증으로 그는 지금도 몸이 좋은 편이 아니다. 조기 치료로 완치되긴 했지만 몇해 전 유방암 수술 후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서 고생도 많이 했다. 그는 “방사선 치료 막판에 세 번 정도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며 “하지만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정신을 차렸다. 잘 자라준 세 아이에게 부끄러우면 안 되겠다는 마음으로 일어섰다”고 했다. 작년에는 오른쪽 무릎 수술도 받았고, 앞서는 양쪽 눈 백내장 수술도 했다. 하지만 그는 “유튜브나 책을 통해 좋은 말씀들을 많이 들으면서 마음공부를 많이 했다. 돈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 작은 일에 행복할 수 있다는 점을 배웠다”고 했다. 마음을 편하게 먹자 거짓말처럼 그에게 다시 길이 열렸다. 몇 해 전 안산청소년재단 정책기획실장으로 임명돼 달리기 교실 등을 열었고, 작년부터는 경기도 경기도청 직장운동경기부 지원협력관을 맡고 있다. 도청 산하 10개 실업팀의 지원 및 현안 조정, 선수들과의 소통 등이 주 업무다. 그는 지난달 강원 평창에서 열린 겨울체전 현장도 찾아 선수들을 응원하고 격려했다. 최근 들어서는 다시 운동도 시작했다. 무릎에 무리를 주지 않기 위해 천천히 뛰거나 빨리 걷는다. 계단을 천천히 오르기도 한다. 무릎 수술 후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서 생애 최고 몸무게는 경신한 그는 요즘은 “천천히라도 달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이었는지를 깨닫고 있다”고 했다. “한 때 추리닝은 꼴도 보기 싫었다”는 그는 “최근 들어 운동은 정말 해야 하는 거였구나 라는 걸 새삼 느낀다. 운동을 하니 몸이 좋아지고 시간이 훌쩍 간다”고 말했다. 어릴 때부터 최근까지 그는 이기기 위해, 또는 살아남기 위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왔다. 최근 들어서는 그동안 해보지 못했던 요리를 배우고, 입지 않는 옷을 고쳐 입는 등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다. 그는 “결혼 후 경력이 단절돼 여기까지 오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며 “선배 체육인으로서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잘 살아가고 싶다”라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임춘애(56)는 한국 육상의 ‘신데렐라’였다. 고교생이던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누구도 예상치 못한 육상 3관왕(800m, 1500m, 3000m)에 올랐다. 그로부터 벌써 40년 가까이 지났지만 그에겐 지워지지 않는 오해가 있다. 바로 ‘라면 소녀’다. 당시 그의 코치가 열악한 운동부 환경을 얘기하며 “간식으로 라면을 먹는다”고 얘기한 게 라면만 먹고 금메달을 딴 것으로 곡해됐다. 이후 그는 인터뷰 때마다 사실이 아니라고 얘기했고, 코치 역시 과장됐다고 설명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임춘애는 “50대 중반인데도 사람들에게 나는 여전히 ‘라면 소녀’”라며 “저는 밀가루가 입에 맞지 않아 라면을 먹지 않았다. 그 대신 삼계탕 같은 걸 엄청 먹었다”며 웃었다. 다만 운동 환경이 지극히 열악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한국에서 처음 열린 서울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선수들은 스파르타식 훈련을 견뎌야 했다.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는 명목하에 욕설과 체벌이 용인되던 시대였다. 17세 소녀는 새벽, 오전, 오후, 야간까지 쉴 새 없이 달려야 했다. 기록이 좋아지는 만큼 몸은 망가졌다. 임춘애는 “얼마나 훈련을 많이 했던지 훈련을 끝내면 유니폼이 소금에 저린 것처럼 됐다”고 했다. 아픈 몸을 이끌고 그는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도 아시안게임 때와 비슷한 기록을 냈다. 하지만 세계의 벽은 너무나 높았다. 예선 탈락을 하자 “배에 기름이 껴서 제대로 못 뛴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운동을 계속할 수 있는 몸이 아니었지만 육상계는 그에게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까지 뛸 것을 제안했다. 그는 골반뼈가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는 진단서를 제출하고서야 겨우 은퇴할 수 있었다. 운동화를 벗었지만 이후 삶도 순탄하진 않았다. 결혼 후 세 아이의 엄마로 생계를 꾸려야 했다. 보험회사 직원, 수입차 영업사원으로 일했다. 칼국수 가게를 차리기도 했고, 도시락 사업도 해 봤다. 하지만 사회생활 역시 쉬운 게 아니었다. 그는 “열심히 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오해를 사거나 방해를 받곤 했다. 많은 걸 배운 시간이었다”고 했다. 과도한 운동 후유증은 이후에 나타났다. 완치되긴 했지만 몇 해 전 유방암 수술 후 항암치료를 받았고, 작년에 오른쪽 무릎 수술도 받았다. 그가 다시 돌아온 곳은 체육계였다.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육상 지도자로 일하던 그는 작년부터는 경기도청 직장운동경기부 지원협력관을 맡고 있다. 도청 산하 10개 실업팀의 지원 및 현안 조정, 선수들과의 소통 등이 주 업무다. 그는 지난달 강원 평창에서 열린 겨울체전 현장도 찾아 선수들을 응원하고 격려했다. 최근 그는 쳐다보기도 싫던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무릎에 무리를 주지 않기 위해 천천히 뛰거나 빨리 걷는다. 계단을 천천히 오르기도 한다. “한때 추리닝은 꼴도 보기 싫었다”는 그는 “요즘 들어 ‘운동은 정말 해야 하는 거였구나’라는 걸 새삼 느낀다. 운동을 하니 몸이 좋아지고 시간이 훌쩍 간다”고 말했다. 어릴 때부터 최근까지 그는 앞만 보며 달려왔다. 최근 들어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는 그는 요리를 배우고, 옷을 고쳐 입는 등 평소 해보고 싶었던 일을 시작했다. 그는 “결혼 후 경력이 단절돼 여기까지 오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며 “선배 체육인으로서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잘 살아갈 것”이라고 말했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