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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한일전. 한국 선발 투수로 김광현(38·SSG)이 등판하자 일본 측에서는 놀랍다는 반응이 나왔다. 언제 적 김광현이 35세가 돼서도 여전히 한국의 에이스를 맡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김광현은 초반 2이닝을 완벽하게 틀어막았다. 하지만 3회부터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더니 결국 조기 강판됐다. 한국은 그 경기서 4-13으로 완패했고, 조별리그에서도 탈락했다. 2026년 WBC 한국 야구 대표팀 명단에는 당시 김광현보다 나이가 많은 두 베테랑 투수가 합류했다. 39세 류현진(한화)과 42세 노경은(SSG)이다. 이 둘이 없었으면 한국 야구의 17년 만의 8강 진출도 무산될 뻔했다. 류현진은 조별리그 대만전에 선발 투수로 등판했다. 실투 하나가 홈런으로 연결돼 3이닝 1실점을 기록했지만 선발 투수 역할은 해냈다. 승부치기 끝에 4-5로 패하긴 했지만 류현진이 초반을 제대로 막아주지 않았다면 한국은 더 일찍 무너졌을 것이다. 류현진은 대회 기간 내내 한국 투수진의 구심점이 됐다.나이 무색한 베테랑의 힘 노경은의 깜짝 활약은 모든 이의 기대를 뛰어넘었다. 한국은 호주와의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2실점 이하에 5점 차 이상 승리라는 극악의 ‘경우의 수’를 채워야 8강에 갈 수 있었다. 선발 투수 손주영(28·LG)이 1회를 던진 후 팔꿈치 이상으로 물러났지만 갑자기 호출된 노경은이 2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한국은 결국 7-2로 승리하며 8강이 열리는 미국 마이애미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류현진과 노경은은 ‘핵 타선’ 도미니카공화국과의 경기에서도 선발 투수와 2번째 투수로 등판했다. 비록 콜드게임으로 졌지만 코칭스태프의 신뢰가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다. 두 선수의 구위는 누가 봐도 전성기 시절에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시속 150km는 기본이고 160km를 던지는 투수가 넘쳐나는 ‘구속 혁명’의 시대에 두 투수는 140km 초중반의 속구로도 경쟁력을 입증했다. 많은 이들이 한국 선수들의 느린 구속을 지적했지만 류현진은 귀국 인터뷰에서 “당연히 구속이 빠르고 제구도 잘되면 좋지만, 본인이 어떤 걸 잘하는지 아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실제로 류현진 본인이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에서 그렇게 살아남았다. 류현진은 KBO리그에선 왼손 강속구 투수로 꼽혔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평균 구속이 느린 축에 속했다. 류현진은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정교한 투구에 집중했다. 그는 모든 변화구를 마음먹은 곳에 던질 수 있는 몇 안 되는 투수였다. 2019년 내셔널리그 평균자책점 1위(2.32)에 오른 것도 적응의 산물이었다.뭘 생각해? 그냥 하는 거지 한국 야구에서 여러 차례 방출당한 경험이 있는 노경은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몸으로 보여줬다. 2003년 프로에 입단한 노경은은 39세이던 2023년 처음 올스타전에 나갔다. 데뷔 22년 차이던 2024년에는 생애 첫 홀드왕을 차지했고, 지난해 홀드왕을 2연패했다. 류지현 대표팀 감독은 “이번 대회 한국의 최우수선수(MVP)는 노경은”이라고 했다. 이재명 대통령도 “42세 베테랑 투수 노경은 선수가 보여준 끊임없는 도전과 큰 용기는 많은 국민들에게 희망과 투지를 불어넣을 것”이라고 했다. 자기관리에 철저한 노경은의 모든 건 야구에 맞춰져 있다.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고 자신만의 루틴을 지킨다. 16일 새벽 비행기로 귀국한 노경은은 그날 곧바로 야구장으로 출근했다. “루틴상 웨이트트레이닝을 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였다. 경기에 나서는 마음가짐도 단순 명료하다. “내 임무는 시키면 그냥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번 WBC를 끝으로 두 선수는 국제대회에서 은퇴한다. 20년 넘게 본보기이자 좋은 길잡이가 되어 온 두 선수의 길을 따르는 건 남은 선수들의 몫이다.이헌재 기자 uni@donga.com}

베네수엘라가 ‘마두로 더비’에서 미국을 꺾고 사상 첫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우승 트로피에 입을 맞췄다. 베네수엘라는 18일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론디포파크에서 열린 2026 WBC 결승에서 미국을 3-2로 꺾고 정상에 올랐다.8강에서 ‘디펜딩 챔피언’ 일본을 8-5로 이긴 베네수엘라는 준결승에서 이탈리아를 4-2로 물리친 데 이어 ‘드림팀’을 구성한 미국마저 넘어섰다. 이날 두 나라의 대결은 ‘마두로 더비’로 불리며 큰 관심을 모았다. 미국은 1월 군사 작전으로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축출해 미국으로 압송했다. 이후 양국의 정치적 갈등이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야구로 ‘총성 없는 전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팽팽한 투수전으로 진행되던 경기는 3회초 1사 2, 3루에서 베네수엘라가 마이켈 가르시아(캔자스시티)가 중견수 희생플라이를 치면서 균형이 깨졌다. 베네수엘라는 1-0으로 앞선 5회초 선두 타자 윌리에르 아브레우(보스턴)가 미국 선발 투수 놀란 매클린의 2구째 한가운데 직구를 공략해 가운데 담장을 넘기는 솔로 홈런을 쏘아 올리며 2-0으로 앞섰다.패색이 짙던 미국은 8회말 2사 1루에서 브라이스 하퍼(필라델피아)에게 중월 투런포를 때려 2-2 동점을 만들었다. 하지만 25명의 빅리거로 팀을 구성한 베네수엘라는 9회초 결정적인 도루로 다시 찬스를 잡았다. 볼넷을 얻어 출루한 선두 타자 루이스 아라에스(샌프란시스코)의 대주자로 대주자 하비에르 사노하(마이애미 말린스)가 2루 도루에 성공해 무사 2루 기회를 만든 것. 이후 에우헤니오 수아레스(신시내티)가 개럿 휘틀록(보스턴)을 상대로 좌중간 적시 2루타를 터뜨려 다시 3-2로 앞섰다. 9회말 베네수엘라 마무리 투수로 등판한 다니엘 팔렌시아(시카고 컵스)는 카일 슈워버(필라델피아 필리스)를 헛스윙 삼진, 거너 헨더슨(볼티모어 오리올스)을 내야 뜬공, 로먼 앤서니(보스턴 레드삭스)를 헛스윙 삼진으로 잡아내며 경기를 끝냈다. 이날 베네수엘라 투수진은 ‘올스타 라인업’을 보유한 미국 타선을 단 3안타 2실점으로 막아냈다. 2023년 대회 결승에서도 일본에 2-3으로 패했던 미국은 두 대회 연속 우승 문턱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처음에 원했던 건 작은 텃밭이었다. 막연하게 농사를 지어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평생 땀과 함께 살아왔는데 이왕이면 자연으로 돌아가 땀을 흘리면서 살면 좋지 않을까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리고 결심했다. 딸기 농사를 짓기로. “많은 과일들이 호불호가 있지만 딸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 않느냐”는 게 결론이었다. 김형일 전 국가대표 사이클 감독(48)은 그렇게 2024년 소속팀인 대구시청 감독을 그만두자마자 곧바로 ‘딸기 농부’가 됐다. 김형일은 평생 자전거 안장에서 살아온 자전거인이다. 자전거가 좋아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서울체중·고와 한국체육대를 나와 2002년에는 부산 아시안게임에도 출전했다. 단거리인 스프린트 선수였던 그는 막판 삐끗하며 4위로 아쉽게 시상대에 서진 못했지만 수준급 선수였다. 그는 이후 경륜 선수로 전향해 5년간 선수로 뛰었다. 압도적인 성적을 거둔 건 아니지만 상금 랭킹 10위 안팎에 오르는 꽤 괜찮은 선수였다. 적지 않은 돈을 벌었고 삶도 윤택했다. 하지만 가슴속에는 뭔가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었다. 많은 사람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는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자전거를 본격적으로 공부해 세계 최고의 자전거 기구인 국제사이클연맹(UCI)에서 일하는 꿈을 꿨다. 결국 목표를 이루진 못했지만 스위스 프로팀에서 어시스턴트 매니저로 일하며 해외 활동 경험을 했다. 그의 자전거 인생은 2013년 대구시청 감독을 맡은 후 만개했다. 2024년 은퇴할 때까지 11년간 여러 차례 국내외 대회 우승을 이끌었고, 수많은 제자를 길렀다. 대한실업자전거연맹이 주는 최우수감독상을 9번이나 받았다. 2018년부터 2022년까지는 여자 사이클 국가대표 감독으로도 활동했다.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그가 이끈 여자 대표팀은 역대 한국 사이클 최고 성적인 금메달 5개와 동메달 1개를 수확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2019년 소강체육대상 지도자상을 받았고, 2020년에는 체육훈장 맹호장까지 수상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에는 언젠가부터 자연과 흙에 대한 갈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지도자 생활 말년에 그는 틈틈이 딸기를 공부했다. 스마트팜 시설과 원예 등에 대해 인터넷 강의를 들었고, 후계농 제도 등도 익혔다. 그는 2024년 12월 31일자로 사이클 감독직에서 퇴직했다. 그리고 이듬해 1월 17일 경기 여주에 농업회사법인 흰돌팜을 설립했다. 그리고 외부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딸기 스마트팜을 세웠다. 딸기는 겨울 작물이다. 대개 9월에 심기 시작해 12월부터 수확한다. 하지만 의욕이 넘쳤던 그는 욕심을 냈다. 더 일찍 심어서 더 늦게까지 수확해보려 한 것이다. 일명 ‘사계절 딸기’가 그의 새로운 목표였다. 하지만 처음 해 보는 농사가 그리 만만한 게 아니었다. 그는 두 차례나 애지중지 키우던 딸기밭을 갈아엎어야 했다. 김형일은 “우리 스마트팜에 딸기 묘목 3만 주를 심었다. 육묘 하나에 800~900원인데 한 번 엎어질 때마다 금전적인 피해가 엄청났다”라며 “딸기는 워낙 예민한 작물이다. 낮에는 영상 25도, 밤에도 영상 7도를 맞춰야 한다. 그러다 보니 전기세와 난방비 등을 포함해 큰돈이 날아갔다”고 했다. 그는 작년 12월 1일을 잊지 못한다. 이날은 그의 농장이 첫 딸기를 딴 날이다. 9월에 다시 정식으로 심은 딸기 묘목에서 빨간 딸기가 열렸다. 거구인 그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굵은 눈물을 펑펑 쏟았다. 사실 딸기밭에서 눈물을 흘린 게 이날이 처음은 아니다. 성공이 절박했던 그는 매일 밤 농장에 혼자 와서 “제발 잘 자라 달라”며 울고 또 울었다. 그는 “마치 3만 명의 신생아를 키우는 심정이었다. 할 수 있는 건 ‘제발 잘 자라 달라’고 비는 것밖에 없었다”라며 “감독을 할 때는 더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선수를 몰아세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딸기를 키울 때는 기다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고 했다. 그의 땀과 눈물을 먹고 자란 딸기들은 이제 잘 자란다. 우여곡절 끝에 첫 딸기를 수확한 후 정상 가도에 들어섰다. 첫 달에 700kg를 땄고, 1월에는 1000kg을 넘겼다. 모양이 예쁘고, 맛도 좋은 그의 딸기는 인천의 한 5성급 호텔에 납품도 한다. 대부분의 판매는 온라인으로 이뤄진다. 김형일은 “아직까진 온라인 판매를 주력으로 하고 있다. 네이버 스마트스토어에도 입점했다”라며 “기념일이 되면 많은 사람에게 온라인으로 커피나 케이크를 선물하지 않나. 예쁜 딸기를 선물하는 날이 오도록 노력하고 있다”라고 했다. 딸기 농부로 이제 첫발을 뗀 그이지만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제2호 농장, 제3호 농장을 지어 규모를 키우고 딸기 전문 카페까지 차리는 것이다. 딸기 전문 브랜드를 만드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실제로 글로벌 딸기 브랜드도 크게 성공한 기업도 있다. 일본에서 처음 생긴 오이시란 딸기 회사는 태양열을 이용한 전기로 미국 등에서 엄청난 규모의 스마트팜을 운영하고 있다. 그 회사를 벤치마킹에 제대로 된 브랜드 딸기를 만들어 보는 게 그의 새로운 꿈이다. 그에게는 딸기 말고 또 하나의 희망이 자라고 있다. 사이클 선수로 활동하고 있는 아들 김도윤 군(17)이다. 아버지의 DNA를 물려받은 김도윤은 지난해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아시아 주니어 트랙 선수권에서 3관왕(단체추발, 옴니엄, 매디슨)에 올랐다. 김형일은 “승부의 세계에서 오래 살아본 입장에서는 아이가 그런 고통을 안고 살길 바라지 않았다”면서도 “하지만 본인이 스스로 노력하는 걸 보고는 응원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고 했다. 김도윤은 현재 장선재 감독이 지도하는 자전거 명문팀 LX에 입단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김도윤은 쉬는 날에는 틈틈이 딸기 농사도 돕는다. 전업 딸기 농부가 됐지만 김형일의 마음의 고향은 여전히 자전거다. 그는 “딸기로 성공한 뒤 언젠가는 다시 사이클로 돌아갈 것이다. 감독을 하는 동안 재정 부족으로 힘든 적이 많았다”라며 “돈을 많이 벌어서 자전거 선수나 팀을 후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그는 또 “아들에게 아시안게임에서 4위에 그친 내 한을 풀어달라고 말한 적은 없다”면서 “그래도 아빠가 못 나가 본 올림픽 무대에 서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지난해 12월 1일. 거구의 중년 남성은 양손에 빨간 딸기를 들고 펑펑 눈물을 쏟았다. 그는 1년여의 노력 끝에 처음으로 딸기를 수확했다.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양쪽 뺨으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김형일 전 대구시청 사이클 감독(48)은 평생 자전거와 함께 산 ‘자전거인’이다. 자전거가 좋아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안장에 올랐다. 서울체중·고와 한국체육대를 나와 2002년에는 부산 아시안게임에도 출전했다. 아쉽게 4위로 메달을 따진 못했지만 어엿한 국가대표 선수였다. 이후 경륜으로 전향한 뒤에도 꽤 이름을 날렸다. 지도자가 되어선 더 성공했다. 2013년 대구시청 감독을 맡아 수많은 제자를 길렀다. 2018년부터 2022년까지는 여자 사이클 국가대표 감독으로도 활동했다.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그가 이끈 여자 대표팀은 역대 한국 사이클 최고 성적인 금메달 5개와 동메달 1개를 수확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2019년 소강체육대상 지도자상을 받았고, 2020년에는 체육훈장 맹호장까지 수상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의 마음에는 자연과 흙에 대한 갈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꽂힌 게 바로 딸기였다. 김형일은 “농사를 지으려고 마음먹은 뒤 딸기를 생각하게 됐다. 딸기는 싫어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과일이지 않나”라며 “공부를 하다 보니 스마트팜을 통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딸기 업체도 알게 됐다. 나도 그렇게 해보자고 결심했다”고 했다. 그는 2024년 12월 31일자로 대구시청 감독직을 내려놨다. 그리고 이듬해 1월 17일 농업회사법인 흰돌팜을 설립했다. 몇해 전부터 틈틈이 익혀 온 지식을 이용하고, 외부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경기 여주에 딸기 스마트팜을 세웠다. 딸기는 겨울 작물이다. 대개 9월에 심기 시작해 12월부터 수확한다. 그는 ‘사계절 딸기’에 도전했다. 더 일찍 심어서 더 늦게까지 수확하는 게 목표였다. 하지만 농사라는 게 그리 만만한 게 아니었다. 그는 두 차례나 애지중지 키우던 딸기밭을 갈아엎어야 했다. 멋모르고 시도한 게 패인이었다. 9월에 다시 정식으로 3만 주를 심었다. 그는 “마치 아기 3만 명을 키우는 심정이었다. 매일 밤 농장에 와 ‘제발 잘 자라 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라며 “감독을 할 때는 더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선수를 몰아세울 수 있다. 하지만 딸기를 키울 때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첫 딸기를 수확한 이후부터는 정상 가도에 들어섰다. 첫 달에 700kg을 땄고, 1월에는 1000kg을 넘겼다. 모양이 예쁘고, 맛도 좋은 흰돌팜 딸기는 인천의 한 5성급 호텔에 납품도 한다. 대부분의 판매는 온라인으로 이뤄진다. 김형일은 “생일을 맞은 사람에게 온라인으로 커피나 케이크를 선물하는 것처럼 프리미엄 딸기를 선물하는 날이 올 때까지 열심히 할 것”이라고 했다. 딸기 농부로 이제 첫발을 뗀 그이지만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제2호 농장, 제3호 농장으로 규모를 키우고 딸기 전문 카페까지 차리는 것이다. 하지만 마음의 고향은 여전히 자전거다. 그는 “딸기로 성공한 뒤 언젠가는 다시 사이클로 돌아갈 것이다. 감독을 하는 동안 재정 부족으로 힘들 때가 적지 않았다”라며 “돈을 많이 벌어서 자전거 선수나 팀을 후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사람에게 있어 인생의 황금기는 언제일까. 많은 사람들이 젊은 시절을 가장 좋았던 때로 생각한다. 1990년대 LG 트윈스의 신바람 야구의 주역이었던 서용빈(55)도 그랬다. 단국대를 졸업하고 LG에 입단한 1994년 그는 신인으로 인생의 정점에 섰다. 당시 MBC 청룡을 이어받아 신생구단에 가깝던 LG는 그해 서용빈과 김재현, 유지현까지 ‘신인 3인방’을 앞세워 프로야구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신인 3명이 동시에 최고의 활약을 펼친 LG는 정규시즌에 이어 한국시리즈까지 제패했다. ‘신바람 야구’라는 조어를 탄생시킨 LG는 한국 최고의 인기 프로야구 팀이 됐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화려하게 핀 꽃이 그렇게 빨리 저물 줄은. 그리고 인내의 시간이 그렇게 오래동안 계속될 줄은. 스타플레이어가 즐비했던 LG는 여전한 인기를 자랑했지만 성적은 그렇지 못했다. 1997년과 1998년에는 한국시리즈까지 올랐지만 현대에 막혀 준우승에 그쳤다. 2002년 다시 한국시리즈에 올랐지만 삼성에 패하며 또 다시 정상 문턱에서 미끄러졌다. 야구도, 인생도 기회가 끝나면 위기가 온다. LG도 마찬가지였다. LG는 2003년부터 길고 긴 암흑기에 빠져들었다. 구단의 대대적인 투자와 선수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LG는 2003년 6위를 시작으로 2012년까지 10년 연속 포스트시즌 무대를 밟지 못했다. 신인 3인방도 뿔뿔이 흩어졌다. 신인이던 1994년과 이듬해 1995년까지 2년 연속 전경기 출장에 3할 타율을 기록했던 서용빈도 부상과 군복무 등을 거치며 평범한 선수로 전락했다. 2005년과 2006년 2년 연속 1할 대 타율을 기록한 뒤 선수에서 은퇴했다. 이후 코치가 돼 계속 LG 유니폼을 입었지만 사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코치 시절의 대부분의 LG 암흑기의 한 가운데서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20대 초반 짧은 영광을 맛본 후 30, 40대는 방황과 절망의 연속이었다. 운이 다시 트기 시작한 건 50대가 돼서였다. 야구 해설위원을 거쳐 2021년 KT 위즈 2군 감독으로 취임했는데 그해 KT는 창단 후 처음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랐다. 직접 그라운드에서 우승의 감격을 함께한 것은 아니었지만 1994년 이후 무려 27년 만에 ‘우승의 맛’을 봤다. 그리고 다시 친정팀 LG로 돌아온 지난해 전력강화 코디네이터 겸 총괄을 맡고 있는 상황에서 다시 한번 우승을 경험했다. 그가 LG 소속으로 정상에 오른 건 무려 31년 만이었다. 서용빈은 “대전 원정 경기에서 우승이 결정됐다. 우승을 확정 짓는 순간 너무 가슴이 벅차올라 혼자 우와~하고 함성을 질렀다”며 “그날 밤 편의점에서 안주와 맥주를 사와 혼자만의 ‘우승 파티’를 했다. 예전 힘들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고 했다.그 오랜 기다림 사이에 인생의 버팀목이 되었던 건 중 하나는 바로 공부다. 평생을 야구장에서 살던 그는 2018년 한국체육대 대학원에 입학하면서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 한때 프로야구에서 잘 나가던 스타플레이어 출신이 40대 후반의 나이에 조카뻘 학생들과 수업을 들은 것이다. 서용빈은 “2017시즌이 끝나고 잠시 유니폼을 벗게 됐다. 한편으로는 잘 됐다 싶었다. 이전부터 이론과 공부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스포츠코칭을 전공으로 선택했다”고 했다. 물론 그도 단국대에서 학부를 마쳤다. 하지만 야구부 시절 대학 생활에 대한 기억은 야구장과 숙소를 오간 게 대부분이다. 밥도 학생식당이 아닌 숙소에서 먹었다. 서용빈은 “당시만 해도 운동선수들은 수업도 제대로 듣지 않을 때다. 캠퍼스의 낭만이란 건 전혀 없었다”고 했다. 중년의 학교생활은 즐거움 그 자체였다. 대학원 수업은 일주일에 두 번 있었는데 그는 4, 5번학교에 갔다. 시간이 있으면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들고, 동료들을 만나고, 논문을 찾아보곤 했다. 서용빈은 “학교에 가는 것 자체가 너무 재미있었다. 수업이 없어도 학교 특유의 분위기가 너무 좋아 학교를 찾곤 했다”고 했다. 석사 과정을 마친 후엔 2023년부터는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현재 55세인 서용빈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라고 꼽는 게 바로 다시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50대의 서용빈은 뒤늦은 학교생활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서용빈은 “석사, 박사 공부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겸손’이란 단어를 가장 많이 배운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지난 선수 생활과 코치 생활을 돌이켜 보니 스스로에겐 자만했고, 상대방에게는 배려가 부족했더라. 한 명의 인간으로서 항상 더욱 겸손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에는 정말 열심히, 그리고 착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라며 “(비싸지 않은) 학생식당에서 내가 밥을 한 번 사면 그 사람들은 껌이나 캔 커피라도 하나 사서 보답했다.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새삼 깨달은 게 큰 수확”이라고 했다. 오랜 현장 생활을 거쳐 그는 현재 프런트로 제2의 야구 인생을 살고 있다. 그라운드가 아닌 낯선 사무실로 무대가 바뀌었지만 그는 ‘회사 생활’도 즐기고 있다. 서용빈은 “사무실 직원들과 함께 밥 먹고 생활하고 대화하는 것 자체가 재미있고 신기하다”라며 “예전의 나라면 전혀 알지 못했던 것들을 새롭게 경험하고 있다. 빨리 적응하려 노력 중”이라며 웃었다.낮에는 회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이중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탄탄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다. 그가 선수 생활에서 은퇴한 후 코치가 되면서 결심한 것 중 하나가 ‘배 나온 지도자는 되지 않겠다’는 거였다. 서용빈은 “선수 생활을 할 때 배 나온 지도자, 아침에 술 냄새를 풍기는 지도자는 선수들의 존경을 얻지 못했다”라며 “처음 결심한 대로 요즘도 지키려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요즘도 하루 한 시간 가량은 운동을 한다. 아침에 기상하면 20~30분 가벼운 유산소 운동을 하고, 피트니스센터나 집에서 30분 정도 근력 운동을 한다. 선수 시절에 비해 먹는 양도 줄였다. 그는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숟가락을 잘 놓는 편이다. 조금 과하게 먹었다 싶으면 알아서 숟가락을 내려놓는다”고 했다. 프로야구 선수 출신으로 그는 야구장 안팎에서 다양한 경험을 해 오고 있다. 그는 자신이 겪으며 느꼈던 일들을 후배 선수들도 경험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서용빈은 “학교와 회사를 다니면서 배우고 경험한 것들을 운동 후배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책임을 느낀다”라며 “유니폼을 입고 있든, 아니면 정장을 입고 있든 상관없이 어느 자리에서건 야구계를 위한 역할을 잘 해내고 싶다”고 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무서움(Fear).’ 레너드 코페트(1923∼2003)가 쓴 ‘야구란 무엇인가’의 첫 문장은 위의 낱말 하나로 시작한다. 야구 명저로 꼽히는 이 책에서 저자는 “무서움이야말로 야구라는 경기를 설명하는 첫 번째 화두가 돼야 한다. 타자는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최선으로 공을 때리려는 욕망과 피하려는 본능의 억제 사이에서 싸운다”고 썼다. 하지만 야구의 두려움은 겨울올림픽 종목 선수들이 감내해야 하는 원초적인 무서움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일반인이 가장 큰 공포를 느낀다는 아파트 10층 높이로 떠올라 다양한 기술을 선보이는 하프파이프, 50m 높이에서 공중회전을 하는 빅에어 등이 대표적이다. 시속 140km 이상 속도로 깎아지른 듯한 슬로프를 타고 내려오는 알파인 스키는 또 어떤가. 말 그대로 ‘삐끗’하는 순간 온몸이 부서질 수 있는 종목들이다.두려움 이겨낸 K여고생들 여고생 스노보더 최가온과 유승은이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겨울올림픽에서 딴 메달은 바로 그 공포를 이겨낸 산물이다. 18세 동갑내기인 둘은 일반인은 엄두도 내기 힘든 퍼포먼스를 처음 출전한 올림픽에서 보란 듯이 해냈다. 최가온이 금메달을 딴 13일 스노보드 여자 하프파이프 결선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최가온은 1차 시기 두 번째 점프에서 스위치 백사이드 1080을 시도하다가 파이프에 얼굴부터 떨어지며 크게 넘어졌다. 최가온조차도 “어디 한 군데 부러진 줄 알았다”고 말할 정도로 충격이 컸다. 공포를 딛고 2차 시기에 나선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3차 시기에서 최가온은 다섯 개의 점프를 모두 성공시키며 역전 우승했다. 최가온의 ‘인간 승리’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24년 1월 그는 스위스 락스에서 열린 국제스키·스노보드연맹(FIS) 월드컵 대회에서 고난도 공중 기술을 연습하다가 척추가 골절됐다. 다음 한 시즌을 통으로 날릴 정도로 큰 부상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두 번 다시 그곳을 쳐다보기도 싫었겠지만 최가온은 다시 부딪치는 쪽을 택했다. 몸이 낫자마자 락스에서 집중 훈련을 이어갔다. 그리고 이번 올림픽을 앞두고 1월 같은 곳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정상에 올랐다.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최가온의 서사는 어쩌면 그때부터 이미 예고돼 있었는지도 모른다. 유승은 역시 2024년 11월 월드컵 대회에서 복사뼈가 골절되는 부상을 입었다. 1년간의 재활 끝에 복귀한 훈련에서 이틀 만에 손목이 부러졌다. 이어지는 불운을 딛고 유승은은 10일 스노보드 빅에어에서 동메달을 따냈다. 특히 2차 시기에는 연습 때도 한 번 성공한 적 없던 프런트사이드 1440을 깔끔히 성공시켰다.메달이 아니어도 실패는 아니다 둘의 성공은 결과론적인 얘기다. 올림픽 메달을 따지 못했다고 해서 실패인 것은 아니다. 올림픽 알파인 스키 최고령 메달에 도전했던 ‘스키 여제’ 린지 본(42·미국)은 8일 여자 활강 레이스 도중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닥터 헬기에 실려 병원으로 이동되면서 본이 울부짖는 소리에 많은 이들이 머리를 감싸안았다. 실패로 보일 수 있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본은 이후 자신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기문과 충돌하면서 균형을 잃었는데 겨우 5인치(약 13cm)가 메달과 부상을 가른 차이라고 했다. 간발의 차로 기문을 피했다면 메달을 딸 수 있었다는 뜻이다. 본은 “인생처럼 스키도 위험을 감수한다. 때로 꿈을 이루지 못할 수 있지만 도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인생의 아름다움”이라며 “도전하지 않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 우리 인생에서 유일한 실패는 도전조차 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설 연휴가 끝나고 새해가 시작됐다. 과거를 딛고 새 마음으로 무언가에 도전하기에 딱 좋은 시기다. 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배드민턴 여제’ 안세영이 선봉에 선 한국 여자 대표팀이 사상 처음으로 아시아남녀단체배드민턴선수권대회 정상에 섰다. 여자 배드민턴 대표팀은 8일 중국 칭다오 콘손체육관에서 열린 대회 여자부 결승에서 중국을 3-0으로 완파했다.2진급 선수들을 파견하기도 했던 한국은 이번 대회에 안세영을 비롯해 최강 전력을 구성하며 우승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다. 결과는 2016년 대회 창설 이후 10년 만에 첫 우승이었다. 안세영은 이날 첫 경기에 나서 중국의 한첸시를 39분 만에 2-0(21-7, 21-14)으로 완파하며 기선을 제압했다. 이어 여자복식 백하나-김혜정 조가 지아이판-장슈셴 조를 2-0(24-22, 21-8)으로 이겼고, 김가은이 쉬원징(127위)을 2-1(19-21, 21-10, 21-17)로 꺽으면서 우승을 확정했다. 반면 남자 에이스 서승재가 어깨 부상으로 대회에 출전하지 못한 남자 대표팀은 전날 준결승에서 중국에 2-3으로 패하며 공동 3위로 대회를 마감했다.이헌재 기자 uni@donga.com}

소년등과(少年登科). 어린 나이에 큰 성취를 한다는 뜻이다. 좋은 말이지만 너무 이른 성취는 불행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경계의 의미도 담고 있다. 오죽하면 송나라 학자 정이가 소년등과를 인생의 세 가지 불행 중 하나로 꼽았을까. 프로야구 LG 트윈스에서 주전으로 활약했던 서용빈(55)도 그랬다. 그는 대학을 갓 졸업한 신인이던 1994년 인생의 정점에 섰다. 그를 포함해 김재현, 유지현까지 ‘신인 3인방’이 맹활약한 LG는 그해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랐다. LG의 ‘신바람 야구’는 그 무렵 생긴 말이다. 처음 정상에 오를 때만 해도 금방 또 우승할 줄 알았다. 하지만 우승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선수 생활을 마감할 때까지 그는 두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를 끼지 못했다. 지도자가 돼서는 더 심했다. 2000년대 들어 LG는 긴 암흑기를 겪었다. 우승은커녕 포스트시즌에도 진출하지 못하는 해가 이어졌다. 20대에 딱 한 번 짧은 영광을 맛본 후 30, 40대는 방황과 절망 속에서 보냈다. 운이 다시 트이기 시작한 건 50대가 돼서였다. 2021년 KT 위즈 2군 감독이던 그는 그해 팀의 창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함께했다. 그리고 친정팀 LG의 전력 강화 코디네이터 겸 총괄을 맡고 있던 지난해 다시 한번 우승했다. LG 소속으로 정상에 오른 건 31년 만이었다. 서용빈은 “우승을 확정 짓는 순간 너무 가슴이 벅차올라 혼자 ‘우와’ 하고 함성을 질렀다”며 “그날 밤 편의점에서 안주와 맥주를 사와 혼자만의 ‘우승 파티’를 했다. 예전의 힘들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고 했다. 50세를 전후해 그의 인생은 훨씬 다채로워졌다. 뒤늦게 다시 배우기 시작하면서다. 평생을 야구장에서 살던 그는 2018년 한국체육대 대학원에 입학해 석사 학위를 땄다. 2022년부터는 같은 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낮에는 야구단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이중생활이다. 서용빈은 “다시 배우기 시작한 건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생각의 폭이 넓어졌다.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새삼 깨달은 것도 큰 수확”이라고 했다. 단국대 야구부 시절 그의 활동 공간은 대부분 야구장이었다. 밥도 학생식당이 아닌 숙소에서 먹었다. 서용빈은 “당시만 해도 수업도 제대로 듣지 않을 때다. 캠퍼스의 낭만이란 건 전혀 없었다”며 “오히려 요즘 학생식당을 이용하고, 동료들과 차를 마시며 대화를 한다. 그때 못 즐겼던 생활을 이제야 만끽하고 있다”고 했다. 오랜 현장 생활을 거쳐 그는 현재 프런트로 제2의 야구 인생을 살고 있다. 그라운드가 아닌 사무실로 무대를 바꾼 그는 ‘회사 생활’도 즐기고 있다. 서용빈은 “직원들과 함께 밥 먹고 생활하고 대화하는 것 자체가 재미있고 신기하다”면서 “예전의 나라면 전혀 알지 못했던 것들을 새롭게 경험하고 있다. 빨리 적응하려 노력 중”이라며 웃었다. 그는 “학교와 회사를 다니면서 배우고 경험한 것들을 운동을 하는 후배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책임을 느낀다”며 “어느 자리에 있든 나만의 역할을 잘 해내고 싶다”고 했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인생의 하이라이트가 10초도 안 되는 시간에 결정되는 건 대단한 일이다.” 달리기 마니아로 유명한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이다. 육상 종목은 ‘올림픽의 꽃’이라 불린다. ‘육상의 꽃’은 단연 남자 100m다. 지구에서 가장 빠른 인간을 가리는 남자 육상 100m는 짧지만 화려하다. 출발 총성과 함께 단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는 강렬한 종목이다. 누군가에겐 그렇게 화려할지 몰라도 한국을 대표하는 스프린터였던 김국영(35)에게는 허탈한 꿈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김국영은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육상 남자 100m에 출전해 10초37을 기록했다. 한국 선수로는 20년 만에 올림픽 무대에 섰지만 단 한 번의 레이스로 예선 탈락하고 말았다. 김국영은 “분명히 총소리는 들었는데 이후 어떻게 뛰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눈을 뜨니까 이미 레이스가 끝나 있었다”며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 선수였나 하는 허탈감과 함께 내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밀려들었다”고 했다. 지구 정반대 편에서 열린 리우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 한국 선수단은 30시간 가까이 비행기를 타야 했다. 김국영을 비롯한 육상 대표팀은 경기가 열리기 나흘 전에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했다. 시차 적응 등 현지 적응 훈련을 이틀 정도 한 뒤 레이스를 했으니 정상 컨디션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달렸으나 레이스는 10초 만에 끝났다. 김국영은 “올림픽의 중압감은 이전에 뛰어본 대회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냥 다른 선수들을 따라가다가 끝난 것 같다”고 했다. 올림픽 등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들은 일반적으로 경기 이튿날 곧바로 귀국한다. 김국영 역시 바로 다음 날 귀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갈 때와 똑같이 올 때도 30시간이 넘게 걸렸다. 불과 10초 경기를 위해 비행기만 60시간 넘게 탄 것이다. 하지만 리우에서의 허탈한 기억은 그에겐 엄청난 자극과 동기부여가 됐다. 김국영은 “여기서 포기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부터라도 정신 똑바로 차리자고 다짐했다”고 했다. 리우 올림픽 이듬해인 2017년은 김국영 육상 인생의 하이라이트였다. 그해 6월 25일 열린 전국육상경기대회 남자 100m 준결선에서 그는 10초13을 뛰며 한국신기록을 세웠다. 2전 전 자신이 세웠던 한국기록을 0.03초 단축했다. 그리고 이틀 뒤 열린 코리아오픈 국제 육상대회 결선에서 10초07로 골인하며 재차 한국신기록을 경신했다. 한국인 사상 첫 9초대 진입도 기대되는 페이스였다. 0.08초. 김국영은 바로 그 찰나의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달리고 또 달렸다. 하지만 끝내 10초의 벽은 넘지 못했다. 김국영은 지난해 말 은퇴하면서 100m 9초대 진입은 한국 육상의 미완의 숙제로 남고 말았다.10초 벽을 넘기 위해 그는 갖은 노력을 다했다. 트랙 위에서뿐 아니라 일상생활도 9초대 진입에 맞췄다. 사우나 등에 갈 때면 그는 숫자 9가 들어간 9번이나 99번 로커를 사용했다. 자동차 번호판을 고를 때로 숫자 9가 많이 들어가는 걸 골랐다. 현재 그의 자동차 번호판에는 숫자 9가 3개나 포함돼 있다. 김국영은 “심지어 아파트로 이사할 때도 9층 집을 먼저 알아봤다. 그런데 9층 집 물건이 없어 뜻을 이루진 못했다”며 웃었다. 그만큼 간절하고 절박했지만 하늘은 끝내 그에게 9초대를 허락하지 않았다. 김국영은 “돌이켜 보면 평생 목표가 9초대 진입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나마 10초07을 뛸 수 있었던 것 같다”라며 “만약 내가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금메달이라는 더 큰 꿈을 꿨다면 9초대에 들어갈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아쉬움이 있기에 후배들에게도 ‘항상 꿈을 더 크게 가지라’고 조언한다”라고 했다.김국영은 은퇴에 대해 “미련도 없고, 아쉬움도 없다”고 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쏟아부었기에 할 수 있는 얘기다. 그는 “9초대 선수가 나오기 위해선 무엇보다 재능을 타고나야 한다. 여기에 선수의 노력, 지도자의 열정, 당일 날씨와 컨디션 등이 더해져야 나올 수 있다”라고 했다.2019년 전국육상선수권은 어쩌면 그에게 다시 못 올 기회였다. 준결선에서 맞바람을 뚫고 10초12를 끊을 정도로 컨디션이 좋았다. 하지만 하루 뒤 열린 결선에서 10초18에 그쳤다. 그는 “뒷바람이 조금만 불어줬으면 9초대가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했다. 짹짹거리는 새 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였다”고 했다.작년 10월 초 은퇴한 김국영은 짧은 휴식 후 국가대표 지도자가 돼 다시 진천선수촌으로 돌아왔다. 여자 단거리 국가대표팀 코치가 그의 새 직함이다. 김국영은 “약 두 달여 동안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자고 싶은 만큼 자면서 행복하게 지냈다”며 “이렇게 1, 2년 쉬어보면 어떨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내 몸에 여전히 스프린터의 기운과 경험이 남아 있을 때 후배들을 지도하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했다”고 복귀 배경을 설명했다. 그런데 왜 남자 대표팀이 아니라 여자 대표팀일까. 김국영은 “최근 남자 선수들은 많이 성장했지만 여자 선수들은 그렇지 않다. 격차가 더 벌어지기 전에 도와야겠다고 생각해 여자 대표팀에 지원했다”고 말했다. 이영숙(61)이 1994년 세운 여자 100m 한국기록 11초49는 올해로 32년째 깨지지 않고 있다. 김국영은 19살이던 2010년 전국육상선수권 남자 육상 100m 예선에서 10초31을 뛰며 고(故) 서말구가 1979년 세웠던 종전 한국기록 10초34를 31년 만에 경신했는데 이보다 더 오랜 기간 깨지지 않고 있다. 김국영은 “가을에 열리는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육상 여자 400m 릴레이에서 선수들이 시상대에 설 수 있도록 돕고 싶다”라고 했다.장기적으로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9초대의 벽을 후배 선수들이 깨는 데 힘을 보태려 한다. 한국 육상은 주변국들에 비해 한참 뒤처져 있다. 중국과 일본에선 이미 10년쯤 전에 10초대 벽을 허문 선수가 나왔다. 중국의 쑤빙톈(37)은 2015년, 일본의 기류 요시히데(31)는 2017년에 각각 처음 10초 벽을 깨뜨렸다. 육상 불모지로 통하는 동남아에서도 100m를 9초대에 달리는 선수가 나왔다. 태국의 푸리폴 분손(20)은 작년 12월 동남아시안(SEA) 게임에서 9초94를 기록했다. 이 종목 세계 기록은 ‘번개 우사인 볼트(자메이카)가 2009년 세운 9초58이다.올해부터 지도자로 새출발하는 김국영은 올해 아빠로도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 2023년 국가대표 멀리뛰기 선수 출신 김규나(36·은퇴)와 결혼한 그는 조만간 쌍둥이 아들의 아빠가 된다. 엄마, 아빠의 육상 DNA를 물려받은 아이들에 대한 기대가 주변에서 더 크다. 김국영은 “사람들의 기대치가 높아서 만약 운동을 못 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되기도 한다”라며 “무조건 운동을 시킬 생각은 없다. 아이들이 운동을 좋아하고, 또 잘한다면 전폭적으로 지원할 생각이다. 이왕이면 한 명은 나처럼 단거리 선수, 또 한 명은 아내처럼 멀리뛰기 선수로 키워보고 싶다”며 웃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한국프로야구 통산 418홈런의 주인공 박병호(40)가 키움 히어로즈 코치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 잔류군 선임 코치가 그의 새 직함이다.박병호만큼 화려한 선수 시절을 보낸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2012년부터 2015년까지 사상 최초로 4연속 홈런왕에 올랐다. 2014년, 2015년에는 두 시즌 연속 50홈런 이상을 기록했고, 이를 발판 삼아 2016년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미네소타 트윈스에 입단했다. 2022년에는 KT 위즈 소속으로 35홈런을 날리며 KBO리그 역대 최고령 홈런왕(36세)에도 올랐다.‘선수’ 박병호는 늦게 핀 꽃이었다. 성남고 시절 역사상 최초의 4연타석 홈런을 때린 그는 2005년 1차 지명으로 LG 트윈스에 입단했지만 좀처럼 유망주의 껍질을 깨지 못했다. LG 유니폼을 입고 6년 반 동안 그가 기록한 홈런은 고작 24개였다.2011년 넥센(현 키움)으로의 트레이드가 반전의 계기가 됐다. LG에서 25번을 달았던 박병호는 넥센에서 52번으로 바꿔 달았다. 앞뒤가 바뀐 등번호처럼 야구 인생도 180도 달라졌다. 넥센에서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홈런 타자로 다시 태어났다.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칭찬의 힘박병호는 최근 취재진과의 인터뷰에서 “예전의 나는 ‘어떻게 하면 삼진을 안 당할까’ 생각했던 선수였다. 하지만 김시진 감독님한테 삼진당해도 칭찬받고 나서 자신감이 생겼다. 박흥식 코치님, 허문회 코치님을 만나면서 좋은 성적을 이룰 수 있었다”고 했다.LG도 박병호에게 기회를 주지 않은 건 아니었다. 신인 때부터 꾸준히 경기에 출전시켰다. 하지만 처음 한두 타석 삼진을 먹고 들어오면 곧바로 교체되기 일쑤였다. 1군에서 몇 경기 부진하면 2군행 통보가 날아들었다.넥센은 달랐다. 당시 넥센 사령탑이던 김시진 감독은 박병호에게 “홈런을 치든, 삼진을 먹든 너는 변함없이 우리 팀 4번 타자”라고 격려했다. “타율이 너무 낮은 것 아니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박흥식 당시 타격 코치는 “4번 타자는 평소에 못 쳐도 된다. 결정적일 때 쳐주면 된다. 박병호는 그런 타자다”라고 답했다. 실패 속에서도 칭찬을 먹고 자란 박병호는 거짓말처럼 쑥쑥 성장했다. 박병호는 “어렸을 때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게 와닿지 않았다. 김시진 감독님의 한마디가 저의 많은 것을 바꿔 놨다”고 했다.은퇴와 함께 곧바로 코치 생활을 시작하는 것도 역시 박병호답다. 요즘 스타플레이어 출신들은 종목을 불문하고 그라운드보다 화려한 방송계를 선호한다. 승부 세계의 피 말림도 없고, 시간도 상대적으로 여유롭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도 훨씬 풍족하다.실력만큼 좋았던 인성하지만 박병호는 1군 코치도, 2군 코치도 아닌 3군으로 불리는 잔류군 코치다. 최고였던 선수가 가장 밑바닥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다. 연봉은 2년 전 받던 7억 원의 채 10분의 1도 안 되는 수준이다. 박병호는 “저도 힘든 시간이 길었기 때문에 선수들과 공감하는 코치가 되고 싶다”며 “힘든 생활이 길어지는 선수에게는 칭찬이 필요하다. 칭찬 많이 해주고, 긍정적으로 해주고 싶다. 선수들 이야기 많이 들으면서 운동의 끈을 놓지 않게 해보고 싶다”고 했다.키움 구단은 박병호의 잔류군 코치 선임을 알리면서 “박병호가 현역 시절 보여준 기량과 자기 관리, 모범적인 태도는 후배 선수들에게 큰 귀감이 됐다”고 밝혔다. 한창 잘나가던 시절에도 박병호는 겸손한 선수였다. 특급 스타이면서도 항상 주변을 챙겼다. 김재웅 키움 홍보팀장은 “무슨 기록을 세웠을 때 박병호는 선수단뿐 아니라 프런트 직원, 구장 경호팀과 미화원 여사님들도 빼놓지 않고 선물하며 고마움을 표현하곤 했다”고 전했다. ‘코치’ 박병호가 가져올 선한 영향력이 벌써 기대된다. 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프로야구 한화 거포 노시환이 연봉 10억 원에 계약하며 팀 내 가장 비싼 선수가 됐다. 한화는 재계약 대상자 62명의 연봉 계약을 마쳤다고 21일 발표했다. 내야수 노시환은 지난해 3억3000만 원에서 무려 6억7000만 원이 오른 10억 원에 계약했다. 이는 팀 내 최고인상률(약 203%)이자 최대 인상액이다.노시환은 지난해 정규시즌 144경기 전경기에 출장해 타율 0.260, 32홈런, 101타점을 기록했다. 2023년 31홈런을 넘어 개인 한 시즌 최다 홈런을 기록했다. 마무리 투수 김서현은 지난해 5500만 원에서 200% 인상된 1억6800만 원에 재계약했다. 김서현은 69경기에 등판해 2승 4패 33세이브 2홀드, 평균자책점 3.14의 성적을 냈다.이밖에 외야수 문현빈은 작년 8800만 원에서 161.4% 오른 2억3000만 원에 계약했고, 투수 문동주도 2억2000만 원에 도장을 찍었다. 지난해 신인으로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던 투수 정우주는 3000만 원에서 약 133% 오른 7000만원을 받는다. 연봉 협상을 마무리한 한화는 23일 호주 멜버른으로 1차 스프링캠프를 떠난다.이헌재 기자 uni@donga.com}

0.08초. 눈을 깜빡이는 것보다 짧은 시간이다. 한국 대표 스프린터 김국영(35)은 바로 그 찰나의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달리고 또 달렸다. 하지만 끝내 목표를 이루지 못한 채 지난해 말 은퇴하면서 100m 9초대 진입은 한국 육상의 미완의 숙제로 남고 말았다. 김국영은 19세이던 2010년 전국육상선수권 남자 육상 100m 예선에서 10초31을 뛰어 고 서말구가 1979년 세웠던 종전 한국기록(10초34)을 31년 만에 경신했다. 김국영은 이후 네 차례나 더 한국기록을 깨뜨렸다. 최고 기록은 2017년 세운 10초07이었다. 10초 벽을 넘기 위해 그는 갖은 노력을 다했다. 트랙 위에서뿐 아니라 일상생활도 9초대 진입에 맞췄다. 목욕탕에서 그는 숫자 9가 들어간 9번이나 99번 로커를 사용했다. 그의 자동차 번호 뒷자리에도 숫자 9가 3개나 포함돼 있다. 그만큼 간절하고 절박했지만 하늘은 끝내 그에게 9초대를 허락하지 않았다. 김국영은 “돌이켜 보면 평생 목표가 9초대 진입이었기에 그나마 10초07을 뛸 수 있었던 것 같다”라며 “만약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꿈꿨다면 9초대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후배들에게도 ‘꿈을 크게 가지라’고 조언한다”라고 했다. 김국영은 은퇴에 대해 “미련도 없고, 아쉬움도 없다”고 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쏟아부었기에 할 수 있는 얘기다. 그는 “9초대 선수가 나오기 위해선 무엇보다 재능을 타고나야 한다. 여기에 선수의 노력, 지도자의 열정, 당일 날씨와 컨디션 등이 더해져야 나올 수 있다”라고 했다. 2019년 전국육상선수권은 어쩌면 그에게 다시 못 올 기회였다. 준결선에서 맞바람을 뚫고 10초12를 끊을 정도로 컨디션이 좋았다. 하지만 하루 뒤 열린 결선에서 10초18에 그쳤다. 그는 “뒷바람이 조금만 불어줬으면 9초대가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바람 한 점 없이 정말 고요한 날이었다”고 했다. 작년 10월 초 은퇴한 김국영은 두 달 휴식 후 12월 국가대표 지도자가 돼 다시 진천선수촌으로 돌아왔다. 여자 단거리 국가대표팀 코치가 그의 새 직함이다. 김국영은 “내 몸에 스프린터의 기운과 경험이 남아 있을 때 후배들을 지도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라며 “최근 남자 선수들은 많이 성장했지만 여자 선수들은 그렇지 않다. 격차가 더 벌어지기 전에 도와야겠다고 생각해 여자 대표팀에 지원했다”고 말했다. 이영숙(61)이 1994년 세운 여자 100m 한국기록 11초49는 올해로 32년째 깨지지 않고 있다. 올해 김국영은 지도자 및 아빠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 둘 다 가본 적 없는 길이다. 김국영은 “가을에 열리는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육상 여자 400m 릴레이에서 선수들이 시상대에 설 수 있도록 돕고 싶다”라고 했다. 장기적으로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9초대의 벽을 후배 선수들이 깨는 데 힘을 보태려 한다. 중국과 일본은 이미 9초대 선수가 나왔고, 작년 말에는 태국의 푸리폴 분손이 9초94를 뛰며 동남아 선수 최초로 10초 벽을 깼다. 국가대표 멀리뛰기 선수 출신 김규나(36·은퇴)와 결혼한 그는 조만간 쌍둥이 아들의 아빠가 된다. 김국영은 “우리 부부보다 주변에서 더 기대하시는 것 같다”라면서 “아이들이 운동을 좋아하고 잘한다면 한 명은 단거리 선수, 또 한 명은 멀리뛰기 선수로 키워볼 것”이라며 웃었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HL 안양 공격수 김상욱(38)이 아시아리그 아이스하키 최다 공격 포인트 기록을 세웠다. 김상욱은 11일 안양 HL 아이스링크에서 열린 레드이글스(일본)와의 2025~26 아시아리그 아이스하키 정규리그 28차전 안방 경기에서 1-0으로 앞선 2피리어드 15분 9초에 추가골을 넣었다. 통산 573번째 포인트(154골, 419어시스트)를 작성하며 오바라 다이스케(은퇴)의 종전 기록(572포인트·227골, 345어시스트)을 넘어섰다. 2010년 12월 11일 도호쿠전에서 데뷔한 김상욱은 15년 1개월 대기록을 수립했다.김상욱은 한자와 치카라의 선제골로 1-0으로 앞선 2피리어드 15분 9초에 김건우가 내준 리턴 패스를 원타이머 스냅샷으로 마무리했다. HL 안양이 2-1로 승리하면서 김상욱의 추가골은 결승골이 됐다. 김상욱은 철저한 자기 관리로 30대 후반의 나이에도 전성기 못지 않은 경기력을 과시하고 있다. 지난 시즌 14골 27어시스트를 기록하며 2016~17 시즌에 이어 생애 두 번째 최우수선수(MVP)를 수상했고, 올 시즌에도 28경기에서 16골 23어시스트로 포인트 랭킹 선두를 달리고 있다. 김상욱은 “입단 후 지도해주신 감독, 코치님들께 감사드린다. 동료들이 많이 도와줬기 때문에 기록을 수립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배구 전설’ 신치용(71)은 배구로 일가를 이룬 사람이다. 흰색 배구공을 통해 그는 대학을 갔고, 실업팀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며, 지도자가 돼서는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현장을 떠난 뒤에는 삼성화재 배구단 단장과 제일기획 스포츠구단 총괄 운영담당 부사장직을 맡았다. 이후 2019년부터 21년까지는 대한민국 아마추어 선수들의 요람인 진천선수촌장직을 수행했다. 그리고 2023년부터는 한국체육산업개발 대표이사로 일하고 있다. 어느덧 고희(古稀)를 넘었지만 그는 여전히 ‘현역’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선수 시절 신치용은 좋은 세터였다. 하지만 누가 봐도 특급이라고 할 만한 선수는 되지 못했다. 배구 명문인 성균관대에 진학했고, 1980년에는 잠시 태극마크를 달기도 했지만 주요 국제대회에 출전한 정도는 아니었다. 신치용 본인도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군대를 제대한 후 그가 여러 실업팀 중 한국전력공사(한전)에 입단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신치용은 “내가 나고 자란 곳이 경남 거제다. 한전에서 잠시 선수 생활을 하다가 곧 은퇴하고 평사원으로 전직하려 했다”라며 “당시 내 꿈은 시험을 봐서 과장 직함을 다는 것이었다. 한전 거제 지점장이 돼 안정적으로 살고 싶었다”라며 웃었다. 그런데 은퇴 얘기를 꺼내려던 1983년에 백구의 대제전(슈퍼리그)으로 불린 대통령배 대회가 덜컥 창립됐다. 실업 배구 대회가 정기적으로 열리게 되면서 그는 어쩔 수 없이 한두 해만 더 선수 생활을 하려 했다. 플레잉코치라는 직함을 달고 있던 그에게 양인택 당시 감독이 “코치를 하면 잘할 것 같다”라며 지도자 전직을 권유했다. ‘배구 명장(名將)’ 신치용의 시작이었다. 그는 성실한 코치였다. 1995년까지 무려 12년간 묵묵히 코치직을 수행했다. 그해 삼성화재가 배구단을 창단하면서 그에게 지휘봉을 맡겼다. 누구나 원하던 감독 자리를 제안받고도 그는 그리 내켜 하지 않았다. 신치용은 “당시만 해도 (공기업인) 한전은 평생 정년이 보장된 회사였다. 삼성은 우리나라 최고의 기업이었지만 성적이 안 좋으면 한두 해 하고 잘릴 것이었기에 선뜻 결정을 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의 결심을 굳혀준 사람은 농구 선수 출신인 아내 전미애 씨였다. 전 씨는 “매일 배구로 시작해 배구로 끝내는 하루하루를 살지 않나. 제대로 지원해주는 팀에서 꿈을 한 번 현실로 만들어보라”고 조언했다. ‘배구 명가(名家)’ 삼성화재의 시작이었다. 삼성화재의 지원은 화끈했다. 삼성은 어느 분야에서건 무조건 1등을 해야 한다는 문화가 있던 시절이었고, 배구단 창단을 주도한 이학수 전 삼성그룹 부회장은 승부욕에 관한 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사람이었다. 세터 신영철을 시작으로 김세진, 신진식 등 당대의 최고 스타들은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 데려왔다. 1997년 처음 참가한 슈퍼리그 우승을 시작으로 신치용의 삼성화재는 대한민국 프로 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강팀으로 거듭났다. 신치용이 지휘봉을 잡은 동안 삼성화재는 모두 19차례 결승전 무대에 올라 16번이나 정상에 우뚝 섰다. 슈퍼리그에서 8회 우승했고, 2005년 프로 출범 후 챔피언결정전에서도 8회 우승했다. 대표팀을 지휘한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도 금메달을 차지했다. 감독 시절 그의 좌우명은 신한불란(信汗不亂)이었다. 땀을 믿으면 흔들림이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선수들에게 무조건 많은 훈련을 시킨 건 아니다. 신 대표는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선수들에게 가르치려고 한 적이 없다. 다만 선수들이 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려 했다”고 했다. 20년 가까이 최정상을 지킨 그가 말하는 명장(名將)의 비결은 “잔머리를 굴리지 않는 것”이다. 신치용은 “선수, 지도자를 해 온 50년 넘게 잔머리 쓰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되면 무조건 그길로 갔다”라며 “그렇게 해야 절대 후회가 남지 않는다. 옳은 길을 가면 잠시 불편할 수는 있지만 결과는 배신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지킨 또 하나의 원칙은 “감독이 돋보이려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감독이 주인공이 되려 하는 순간 선수들의 마음이 돌아선다. 선수와 경쟁하는 감독이 되어서 안 된다”라며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선수들에게 맡겨야 한다. 선수가 마음이 우러나서 해야 훈련이건 경기건 100%가 나온다”고 했다. 선수들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그는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곤 했다. ‘팀워크’를 만들어 내려고 일부러 선수들을 더 혼내고, 엄하게 대하기도 했다는 것. 선수들끼리 모여서 감독 뒷담화를 하다 보면 자신들도 의식하지 못한채 하나로 뭉치곤 했다. 신치용은 “배구는 감독이 아닌 선수들이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선수들끼리 하나가 되면 된다. 감독은 외로운 사람이고, 감독 자리는 고독을 이겨내야 하는 자리”라고 했다.감독은 선수들이 최선의 플레이를 할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인 동시에 최선을 플레이를 고안해내는 사람이기도 해야 한다. 신치용은 “조훈현 같은 바둑 전설들은 모든 수를 복기한다고 하지 않나. 내 경우에는 한 세트 25점이 어떻게 났는지 모두 복기했다. 심지어는 다른 팀 경기를 복기한 적도 있다”라며 “그렇게 모든 경기가 머리 속에 들어가 있으면 결정적인 순간 어떤 작전을 써야 할 지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반복 훈련을 통해 선수들의 움직임이 좋은 상태라면 작전 성공률이 높아진다”고 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신치용의 머리는 여전히 검은색이다. 흰머리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모발 역시 풍성하다. 이 때문에 그는 “머리 염색하셨어요”, “혹시 가발인가요”라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그는 “태어나서 한 번도 염색을 해 본 적이 없다. 아마 평생 잔머리를 쓰지 않고 살아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며 웃었다.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온 그는 대표이사로 사는 요즘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매일 오전 5시가 되기 전 집이 있는 경기 용인 수지에서 출발해 출근하기 전 사우나를 한 시간 씩 한다. 걷는 걸 좋아하는 그에게는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워 내에 있는 사무실은 ‘꿈의 직장’이다. 평일 오전과 오후 점검 삼아 넓은 공원을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1만 보 걷기가 된다. 주말에는 인근 광교산을 오른다. 왕복 3, 4시간짜리 산행을 통해 땀을 흘리고 나면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다. 신 대표는 “주말에 산을 타면서 기른 하체 힘으로 일주일을 버틴다. 가끔 지인들과 골프도 즐기는데 골프 역시 걷는 운동이라 건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한국체육산업개발은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과 미사 경정장, 광명 경륜장 등 1988년 서울 올림픽 시설을 관리하는 게 주 업무다. 직원은 1400여 명이나 된다. 코트 위 ‘치열한 승부사’였던 그는 이곳에서는 안전과 사람 존중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 배구 코트는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다. 신 대표는 언젠가 자신의 배구 인생을 총망라한 책을 써 볼 생각이다. 자신의 성공과 실패를 가감 없이 독자 및 후배들과 나누겠다는 생각이다. 또 국내 무대가 아닌 해외에서의 코트 복귀도 고려하고 있다. 그는 “국내 무대에서는 이미 제자들이 너무 잘해 주고 있다. 퇴직 후 기회가 된다면 몽골이나 캄보디아 같은 개발도상국에서 배구 지도 봉사를 해보려 한다”고 말했다.이헌재 기자 uni@donga.com}

어느덧 고희(古稀)를 넘은 신치용 한국체육산업개발 대표이사(71)가 요즘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머리 염색하셨어요”다. 두 번째는 “혹시 가발인가요”다.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는 흰머리가 별로 없다. 모발 역시 풍성하다. 신 대표는 “태어나서 한 번도 염색을 해 본 적이 없다. 아마 평생 잔머리를 쓰지 않고 살아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며 웃었다. 35년간의 배구 지도자 생활을 거쳐 진천선수촌장을 지낸 그는 2023년 9월 한국체육산업개발 대표로 취임했다. 이 회사는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과 미사 경정장, 광명 경륜장 등 1988년 서울 올림픽 시설을 관리하는 게 주 업무다. 직원은 1400여 명이나 된다. 걷는 걸 좋아하는 그에게는 ‘꿈의 직장’이다. 평일 오전과 오후 점검 삼아 넓은 공원을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1만 보 걷기가 된다. 경기 용인 수지가 집인 그는 주말에는 인근 광교산을 오른다. 왕복 3, 4시간짜리 산행을 통해 땀을 흘리고 나면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다. 신 대표는 “주말에 산을 타면서 기른 하체 힘으로 일주일을 버틴다. 가끔 지인들과 골프도 즐기는데 골프 역시 걷는 운동이라 건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지금은 배구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지만 신 대표는 한국 배구 감독 중 성인 무대에서 가장 많은 우승을 차지한 전설적인 존재다. 삼성화재 지휘봉을 잡고 19차례나 챔피언결정전 등 결승전 무대에 올랐다. 그중 슈퍼리그에서 8회 우승했고, 2005년 프로 출범 후에도 8회 챔피언결정전 정상을 차지했다. 감독 시절 그의 좌우명은 신한불란(信汗不亂)이었다. 땀을 믿으면 흔들림이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선수들에게 무조건 많은 훈련을 시킨 건 아니다. 신 대표는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선수들에게 가르치려고 한 적이 없다. 다만 선수들이 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려 했다”며 “선수가 하고 싶어서 해야 100%가 나온다. 후배들에게도 ‘잔머리 굴리지 말고, 가르치려 하지 말라’고 조언한다”고 했다. ‘팀워크’를 만들어 내려고 일부러 선수들을 더 혼내고, 엄하게 대하기도 했다. 선수들끼리 모여 감독 욕을 하다가 하나가 되곤 했다는 것. 신 대표는 “배구는 감독이 아닌 선수들이 하는 것이다. 선수들끼리 하나가 되면 된다. 감독은 외로운 사람이고, 감독 자리는 고독을 이겨내야 하는 자리”라고 했다. 코트 위 ‘치열한 승부사’였던 그도 요즘은 배구 코트가 무서워 보일 때가 있다. 농구 선수 출신 딸 신해인과 사위인 박철우 프로배구 우리카드 감독대행 사이에 낳은 두 손녀의 경기를 볼 때다. 신 대표는 “배구 선수인 손녀 경기는 차마 잘 못 보겠더라. 수십 년간 내가 어떻게 저렇게 치열한 곳에서 살았나 싶다”고 했다. 하지만 그에게 배구 코트는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다. 신 대표는 언젠가 자신의 배구 인생을 총망라한 책을 써 볼 생각이다. 자신의 성공과 실패를 가감 없이 독자 및 후배들과 나누겠다는 생각이다. 또 국내 무대가 아닌 해외에서의 코트 복귀도 고려하고 있다. 그는 “국내 무대에서는 이미 제자들이 너무 잘해 주고 있다. 퇴직 후 기회가 된다면 몽골이나 캄보디아 같은 개발도상국에서 배구 지도 봉사를 할 마음이 있다”고 했다. 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화순초-화순중-화순실업고를 나온 ‘윙크 보이’ 이용대(37)는 전남 화순군이 배출한 최고의 스포츠 스타다. 이용대 외에 프로야구 KIA 타이거즈의 김선빈, 2024년 파리 올림픽 복싱 동메달리스트 임애지 등도 몇 화순군 출신 스타들이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딴 체육관이 있는 선수는 이용대가 유일하다. 화순군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배드민턴 혼합복식에서 금메달을 딴 이용대의 활약을 기려 국제규격 9면, 국내규격 12면을 갖춘 ‘이용대 체육관’을 건립했다. 이용대는 “부모님이 살고 계신 고향에 내려갈 때마다 내 이름이 걸린 체육관을 보면 너무 기분이 좋다. 자부심과 함께 더 열심히, 잘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든다”고 했다. 하지만 ‘배드민턴 레전드’ 이용대는 탄생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요즘이야 배드민턴이 생활체육 뿐 아니라 엘리트 종목으로도 큰 인기를 얻고 있지만 이용대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비인기 종목 중에 비인기 종목이었다. 이용대가 배드민턴 라켓을 잡은 건 화순초에 배드민턴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야구는 당시에도 꽤 인기가 있었다. 아들이 뛰어난 운동신경을 갖고 있는 걸 안 이용대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야구를 시키려 했다. 화순과 멀리 않은 광주에는 야구 명문 팀이 여럿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실제로 광주로 전학을 갈 뻔 하기도 했다. 이용대는 “배드민턴에 소질이 있다면서 감독님이 부모님을 설득하셨다. 잘 모르겠지만 아마 내가 야구 선수를 했다면 배드민턴만큼은 못하지 않았을까?”라며 웃었다. 공교롭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화순초에도 야구부가 생겼다. 국가대표 2루수로 성장한 1년 후배 김선빈이 그때 야구부에 들어갔다. 그렇게 이용대는 배드민턴, 김선빈은 야구 선수로 성장했다. 이용대의 앞길엔 거칠 게 없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최연소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배드민턴 혼합 복식에서 이효정과 함께 금메달을 따냈다. 당시 스무살이던 이용대는 세리머니 도중 중계 카메라를 향해 ‘찡긋’ 윙크를 했다. 훈훈한 외모에 빼어난 실력까지 갖춘 그는 단숨에 국민 남동생이 됐다. 2012년 런던 올림픽 남자복식에서는 동메달을 추가했다. 이용대는 복식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선수였다. 이용대는 “배드민턴을 시작할 때 박주봉, 김문수, 김동문, 하태권 같은 선배님들이 우상이었다. 그분들이 모두 복식 전문 선수들이라 나도 그렇게 되고 싶었다”고 했다. 그의 남자 복식 파트너는 정재성에서 고성현으로, 또 유연성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누구와 짝이 되던 이용대 조는 항상 세계랭킹 1위를 했다. 그렇게 130주 넘게 정상을 지켰다. 이용대는 지난해 세계배드민턴연맹(BWF)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됐다. 이용대는 공격이 화려한 선수가 아니었다. 네트 플레이와 수비에 강했다. 특히 어떤 공격을 해도 번번이 막아내는 수비에 상대 선수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수밖에 없었다. 많은 선수들이 가장 만나기 싫어하는 상대가 바로 이용대였다. 이용대가 수비에 특화된 플레이를 한 것은 살아남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상대적으로 파워가 부족했던 이용대는 “내가 잘할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하고자 했다. 상대의 강한 스매싱을 받아내는 수비와 이어지는 빠른 공격 전환을 죽어라 연습했다”고 했다.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일본 야구의 전설적인 스타 스즈키 이치로 역시 자신의 강점을 최대한 살려 최고의 스타가 됐다. 이치로의 현역 시절 트레이드 마크는 바로 내야 안타였다. 다른 타자라면 평범한 땅볼이 될 타구를 이치로는 내야 안타로 만들었다. 타격과 동시에 곧바로 1루로 달려나가는 그만의 타격법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 유력 언론 뉴욕타임스는 이치로와의 인터뷰에서 “여자들은 홈럼처럼 큰 타구를 좋아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다소 무례한(?) 질문을 했다. 이에 이치로는 “내야 안타에는 섹시함이 있다. 내야 안타를 치기 위해서는 테크닉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이용대 역시 “스매싱은 화려해 보이지만 더 섹시한 건 수비다. 네트를 살짝 넘기는 헤어핀이나 크로스 헤어핀, 드롭샷 같은 기술이 통할 때의 쾌감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고 했다. 현재 요넥스 배드민턴팀의 플레잉코치로 활동하고 있는 이용대는 요즘도 선수들과 함께 실전을 방불케하는 훈련을 한다. 그의 오른 손바닥은 여전히 물집으로 가득하다. 대신 쉬는 날에는 가끔 스포츠 예능 프로그램에 얼굴을 내밀곤 한다. 운동신경이 좋은 그는 축구와 골프 예능에 참여했고. 최근에는 배구 예능에도 얼굴을 내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가장 재미있다고 느끼는 종목은 배드민턴이다. 이용대는 “랠리가 길게 이어지면 점점 숨이 가빠진다. 그럴 때 도파민이 터지면서 큰 행복감이 밀려든다. 배드민턴은 할수록 어렵고 재미있는 운동”이라고 말했다. 최고의 선수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용대의 꿈은 배드민턴 지도자로도 성공하는 것이다. 이용대는 “배드민턴은 알수록 재미있다. 제가 배워왔던 걸 후배들에게도 잘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라며 “기회가 된다면 국가대표 지도자로도 활동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 배드민턴의 전성기를 열어가고 있는 안세영, 서승재, 김원호 같은 선수들이 그에게 큰 동기부여가 된다. 3월 전영오픈 때 임시로 대표팀 지도자를 맡았던 이용대는 “안세영은 실력과 체력, 기술 등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없다. 이런 선수가 다시 나올까 싶을 정도”라며 “남자복식 최강자로 떠오른 서승재-김원호 조도 점점 완벽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용대는 또 유소년 선수들에게도 도움이 되고자 ‘이용대 재단’도 설립했다. 이용대배 꿈나무 최강전을 지난 2년간 전남 강진에서 열었고, 내년 2월 제3회 대회는 경남 합천에서 개최한다. 몇 해 전까지는 이용대배 학교대항 배드민턴선수권대회도 열었다. 이용대는 “내가 어릴 적 배드민턴을 할 때도 삼성배 최강전이라는 대회가 있었다. 우승 상금이 50만 원이었던 걸로 기억되는데 어린 마음에도 정말 큰 동기부여가 됐다”라며 “덕분에 나도 지금과 같은 선수가 될 수 있었다. 많이 받은 만큼 재단 활동을 통해 돌려드리려 한다”고 말했다. 배드민턴은 생활 체육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종목이다. 이용대는 “실외도 좋지만 가능하면 실내에서 치는 경험을 해보셨으면 좋겠다”라며 “바람이 없으면 다양한 기술을 쓸 수 있고, 경쾌한 타구음도 더 잘 들린다. 레슨까지 받으면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올해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 생애 첫 승을 거둔 임진희가 제주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1000만 원을 기부했다. 임진희의 기부금은 고향인 서귀포시 지역 내 취약계층을 위해 사용될 예정이다. 임진희는 6월 LPGA투어 2인 1조 대회인 다우 챔피언십에서 이소미와 짝을 이뤄 생애 첫 LPGA투어 우승을 차지했다. 임진희는 “작은 정성이지만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이 따뜻한 겨울을 보내는 데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 앞으로도 받은 사랑을 나눔으로 돌려드리는 선수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실력이 얼굴에 묻히는 선수들이 가끔 있다. ‘윙크보이’ 이용대(37)가 대표적이다. 이용대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배드민턴 혼합 복식에서 이효정과 함께 금메달을 따냈다. 당시 스무 살이던 이용대는 세리머니 도중 중계 카메라를 향해 ‘찡긋’ 윙크를 했다. 훈훈한 외모에 빼어난 실력까지 갖춘 그는 단숨에 국민 남동생이 됐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윙크보이’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는 세계 배드민턴 역사에서 ‘레전드’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선수다. 특히 복식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이용대는 “배드민턴을 시작할 때 박주봉, 김문수, 김동문, 하태권 같은 선배님들이 우상이었다. 그분들이 모두 복식 전문 선수들이라 나도 그렇게 되고 싶었다”고 했다. 그의 남자 복식 파트너는 정재성에서 고성현으로, 또 유연성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누구와 짝이 되든 이용대 조는 항상 세계 랭킹 1위를 했다. 그렇게 130주 넘게 정상을 지킨 이용대는 지난해 세계배드민턴연맹(BWF)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현재 요넥스 배드민턴팀의 플레잉코치로 활동하고 있는 이용대는 쉬는 날에는 가끔 스포츠 예능 프로그램에 얼굴을 내밀곤 한다. 운동신경이 좋은 그는 축구와 골프, 최근에는 배구 예능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여전히 가장 재미있다고 느끼는 종목은 배드민턴이다. 이용대는 “랠리가 길게 이어지면 점점 숨이 가빠진다. 그럴 때 도파민이 터지면서 큰 행복감이 밀려든다”고 말했다. 그는 또 “배드민턴은 할수록 어렵고 재미있는 운동이다. 많은 분들이 스매싱을 좋아한다. 하지만 네트를 살짝 넘기는 헤어핀이나 크로스 헤어핀, 드롭샷 같은 기술이 통할 때의 쾌감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용대는 공격이 화려한 선수가 아니었다. 그 대신 네트플레이와 수비에 강했다. 상대적으로 파워가 부족했던 이용대의 생존을 위한 노력이 강점이 됐다. 그는 “내가 잘할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하고자 했다. 상대의 강한 스매싱을 받아내는 수비와 이어지는 빠른 공격 전환을 죽어라 연습했다”고 했다. 그는 지금도 선수들과 함께 훈련한다. 여전히 곱상한 얼굴이지만 손바닥엔 굳은살이 가득하다. 미래의 꿈도 배드민턴 지도자로 성공하는 것이다. 이용대는 “배드민턴은 알수록 재미있다. 제가 배워 왔던 걸 후배들에게도 잘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며 “기회가 된다면 국가대표 지도자로도 활동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 배드민턴의 새로운 전성기를 열어가고 있는 안세영, 서승재, 김원호 같은 선수들이 그에게 큰 동기 부여가 된다. 3월 전영오픈 때 임시로 대표팀 지도자를 맡았던 이용대는 “안세영은 실력과 체력, 기술 등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없다. 이런 선수가 다시 나올까 싶을 정도”라며 “남자복식 최강자로 떠오른 서승재-김원호 조도 점점 완벽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배드민턴은 생활 체육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종목이다. 이용대는 “실외도 좋지만 가능하면 실내에서 치는 경험을 해보셨으면 좋겠다”며 “바람이 없으면 다양한 기술을 쓸 수 있고, 경쾌한 타구음도 더 잘 들린다. 레슨까지 받으면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서 2008승을 거둔 리오 듀로셔 감독(1991년 사망)은 “사람 좋으면 꼴찌(Nice guys finish last)”라는 명언을 넘겼다. 인성보다는 승부욕 강하고 독한 선수가 더 성공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야구계의 신사’로 불리는 김용희 프로야구 롯데 2군 감독은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다. 별명에서 알 수 있듯 김 감독은 사람 좋기로 유명하다. 선수나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그의 태도에는 상대에 대한 배려가 가득하다.김 감독은 선수 시절 최고 스타 중 한 명이었다. 포항제철 야구단 시절 실업야구를 대표하는 거포였다. 큰 키(신장 190cm)에서 뿜어져 나오는 호쾌한 스윙이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프로야구가 출범 후에도 롯데를 대표하는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1982년 롯데 유니폼을 입은 그는 초대 올스타전 최우수선수(MVP)를 차지했다, 2년 후인 1984년 다시 한번 올스타전 MVP에 뽑혔다. 당시 올스타전 MVP에게는 승용차를 부상으로 줬는데 그는 그 당시엔 무척 귀했던 승용차를 2년 사이에 두 대나 받았다. 실력만큼 유명한 게 후덕한 인품이었다. 말 많고, 탈 많은 야구계에서 그는 물의 한번 일으키지 않고 모범적인 선수 생활을 했다. 아쉬운 건 고질적인 허리 부상으로 일찍 유니폼을 벗어야 했다는 것이다. 김 감독은 “재활이라는 개념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오른팔을 다쳐 깁스를 한 적이 있는데 선수가 없다고 감독님이 경기를 뛰라고 한 적도 있었다”며 “무릎뼈가 튀어 나와도 파스 한 장 붙이고 시합을 하곤 했다”고 말했다.사람 좋고 소통 잘하는 그였기에 여러 팀에서 지휘봉을 맡겼다. 1995년부터 1998년까지 롯데 감독을 지냈고, 2000년에는 삼성 감독으로 취임했다. 또 2015~2016년에는 SK 감독을 맡기도 했다. 이후 야구 해설위원과 KBO 경기운영위원 등을 거쳐 2024년부터 롯데 2군 감독을 맡고 있다. 70세가 된 그를 찾는 팀이 여전히 있다는 건 그가 어떻게 인생을 살아왔는지를 보여준다.다만 아쉬운 건 우승 트로피다. 그가 프로 유니폼을 입고 우승한 건 1984년이 유일하다. 당시 롯데는 삼성과의 한국시리즈에서 7차전까지 가는 혈전 끝에 4승 3패로 우승했다. 고 최동원이 혼자서 한국시리즈 4승을 모두 거둔 바로 그 해다. 하지만 김 감독은 이후 선수는 물론이고 지도자로도 우승한 적이 없다. 그가 가장 아쉬워하는 건 롯데 사령탑 첫해였던 1995년이다. 그해 두산과 치른 한국시리즈에서 5차전까지 3승 2패로 앞서다 내리 두 번을 져 준우승에 그쳤다. 골프 선수인 아들 김재호(43)도 비슷했다. 누가 봐도 우승을 할 만한 실력인데 좀처럼 우승 트로피를 들지 못했다. 1, 2라운드 때 선두권을 달리는 경우는 적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최종일만 되면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그렇게 20대가 지나갔고, 30대도 흘러갔다. 나이는 언제 골프채를 놔도 이상하지 않을 40대 중반을 향해 가고 있었다.그러던 지난달 한국프로골프(KPGA)투어 렉서스 마스터즈에서 마침내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김재호가 210년째 대회 만에 생애 첫 우승컵을 들어 올린 것이다. 3라운드까지 공동 선두였던 김재호는 이날도 여지없이 샷이 흔들렸다. 버디 2개를 잡는 동안 보기 5개를 범하며 3오버파를 쳤다. 예전의 김재호라면 그대로 무너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한 타 차 2위로 들어간 마지막 18번홀에서 버디를 잡아내며 다시 공동 선두로 올라서 연장전에 돌입했다. 그리고 연장 첫 번째 홀에서 버디를 잡아내며 꿈에 그리던 정상에 올랐다. 우승을 확정한 김재호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이 장면을 보고 더 기뻤던 건 김용희 감독이었다.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TV로 경기를 지켜보던 김 감독은 “초반에 타수를 잃길래 오늘도 또 어렵겠다는 생각을 했다. 본인이 스스로 포기하지 않을까 내심 걱정도 했다”라며 “그런데 끝까지 인내하고 이겨내는 모습을 보였다. 그게 바로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라고 했다.이 대회 16번홀(파3)에선 선수들이 자신이 고른 배경 음악을 틀고 입장하는 이색 이벤트가 진행됐다. 롯데 유니폼을 입은 김재호는 프로야구 롯데의 응원곡 ‘영광의 순간’을 선택했다. 김재호는 우승 세리머니 때도 롯데 유니폼을 입었다. 유니폼 뒷면에는 아버지 김용희 이름과 등번호 99번이 새겨져 있었다. 김재호는 인터뷰에서 “모두 아버지 덕분”이라며 눈물을 쏟았다.김재호가 골프채를 잡은 건 김용희 감독이 1994년 미국 텍사스로 야구 연수를 떠난 게 계기였다. 김 감독은 “쉬는 날 가끔 골프장을 가곤 했는데 방학 때 미국에 온 재호가 골프 카트 모는 재미에 골프장에 왔다가 재미를 들였다”고 했다. 그는 또 “운동이 얼마나 힘든 건지 알기에 시키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세 달만 보겠다’던 재호가 정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하는 걸 보고 시키게 됐다”고 말했다. 전형적인 경상도 부자(父子)인 둘은 김재호의 우승 후에도 서로에게 크게 감정을 드러내진 않았다. 아버지 김 감독은 “수고했다”라고 짧게 한 마디를 건넸다. 김재호 역시 “축하한다, 잘했다 같은 얘기는 말은 서로 잘 하지 않는다”며 웃었다. 중년들에게 희망을 준 김재호의 우승은 김용희 감독에게도 적지 않은 자극이 됐다. 롯데는 올해도 7위에 그치며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1992년 마지막 우승 후 33년간 우승하지 못했다. 김 감독은 “내 역할은 1군 선수단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전력을 2군에서 만들어 내는 것”이라며 “롯데는 내 모든 인생이 들어있는 팀이다. 잘되도록 최선을 다하는 게 당연하다”고 했다. 김 감독은 “현재 롯데가 부진하고 팬들게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해 최송하다”며 “하지만 하나하나 약점을 고쳐가면 언제든 좋아질 수 있는 팀이다. 하루하루 새로운 걸 채워나갈 것”이라고 말했다.김 감독이 평생 마음에 새기고 사는 사자성어는 ‘종신지우(終身之憂)’다. 무언가를 이루려면 몸이 다할 때까지 근심이 없을 수 없다는 뜻이다. 김 감독은 “내게 야구는 평생의 근심 덩어리다.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야구를 할지, 더 좋은 야구 시스템을 만들지가 고민”이라며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근심이 없을 수 없다. 롯데 유니폼을 입고 있는 요즘은 자나깨나 어떻게 롯데를 좋을 팀으로 만들까 고민한다”고 말했다. 다시 한번 유니폼을 입고 우승의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 건강 관리에 신경을 많이 쓴다. 한때 애연가였던 그는 2001년 12월 금연을 선언한 뒤 한 번도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다. 두주불사일 정도로 술도 좋아했지만 6년 전부터 아예 끊어버렸다. 요즘엔 안 좋은 음식을 멀리하고, 먹는 양도 최대한 줄이려 한다. 김 감독은 “롯데가 우승하는 날 축배를 들 생각이다. 딱 세 잔을 마실 것”이라며 웃었다. 롯데가 우승하면 통산 세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이 된다.이헌재 기자 uni@donga.com}

지난달 한국프로골프(KPGA)투어 렉서스 마스터즈 16번홀(파3)에선 선수들이 자신이 고른 배경 음악을 틀고 입장하는 이색 이벤트가 진행됐다. 김재호(43)는 프로야구 롯데의 응원곡 ‘영광의 순간’을 선택했다. 그는 이날 노래 제목처럼 인생 최고의 순간을 맞이했다. 210번째 대회 출전 만에 생애 첫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역대 최고령 첫 우승 기록을 쓴 김재호는 “모두 아버지 덕분”이라며 눈물을 쏟았다. 김재호는 우승 세리머니 때도 롯데 유니폼을 입었다. 유니폼 뒷면에는 아버지의 이름과 등번호 99번이 새겨져 있었다. ‘미스터 롯데’라는 별명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김용희 롯데 퓨처스(2군) 감독(70)이 그의 아버지다. 김 감독은 실업야구 시절 최고의 거포 중 한 명이었다. 프로야구가 출범한 1982년 롯데 유니폼을 입은 뒤에도 팀을 대표하는 스타였다. 그해 초대 올스타전 최우수선수(MVP)를 차지했고, 2년 후인 1984년 다시 한번 올스타전 MVP에 뽑혔다. 슈퍼스타였지만 후덕한 인품으로 더 유명했다. 말 많고, 탈 많은 야구계에서 물의 한번 일으키지 않고 모범적인 선수 생활을 했다. 은퇴 후엔 롯데, 삼성, SK에서 지휘봉을 맡길 정도로 신망이 높았다. 70세가 된 지금도 여전히 롯데 2군 감독을 지내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다만 그는 우승에 목말라 있다. 유일한 한국시리즈 우승 트로피는 고 최동원이 혼자 4승을 거둔 1984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어 올렸다. 그가 가장 아쉬워하는 건 롯데 사령탑 첫해였던 1995년이다. 두산과 치른 한국시리즈에서 5차전까지 3승 2패로 앞서다 내리 두 번을 져 준우승에 그쳤다. 아들 김재호도 비슷했다. 실력은 분명 우승권인데 마지막 날만 되면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인내한 끝에 43세에 첫 우승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아들의 전화를 받은 김 감독은 “수고했다”라고 짧은 축하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마음으로 가장 기뻐한 것도 김 감독이었다. 그는 “실패가 이어지면서 아들이 포기하지 않을까 걱정도 했다. 오랜 인내 끝에 우승을 한 만큼 앞으로도 성실하게 좋은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 역시 다시 한번 유니폼을 입고 우승의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 건강 관리에 신경을 많이 쓴다. 한때 애연가였던 그는 2001년 12월 금연을 선언한 뒤 한 번도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다. 두주불사일 정도로 술도 좋아했지만 6년 전부터 아예 끊어버렸다. 요즘엔 안 좋은 음식을 멀리하고, 먹는 양도 최대한 줄이려 한다. 롯데는 올해도 7위에 그치며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1992년 마지막 우승 후 33년간 우승하지 못했다. 김 감독은 “내 역할은 1군 선수단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전력을 2군에서 만들어 내는 것”이라며 “롯데는 내 모든 인생이 들어있는 팀이다. 잘되도록 최선을 다하는 게 당연하다”고 했다. 그토록 기다렸던 아들의 우승에도 축배를 들지 않았던 김 감독은 “롯데가 우승하는 날 딱 세 잔만 마실 것”이라며 웃었다. 롯데가 우승하면 통산 세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이 된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