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광영

신광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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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신광영 논설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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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분야

2024-05-05~2024-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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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신광영]“안 쓰는 도로 팝니다” 세수 급감한 지자체들의 고육책

    요즘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선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에게 보유세를 물리자는 얘기가 나온다. 반려동물 증가로 개 물림 사고나 동물 유기 등이 늘고 있는데 여기에 예산을 할애하기 어려울 정도로 곳간 사정이 급하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무자녀세 도입을 검토하는 곳도 있다고 한다. 지자체들이 저출산 지원책을 내놓긴 했지만 실탄은 없다 보니 이런 고육책까지 거론되는 듯하다. 친환경 차량 세제 혜택을 줄이고 전기차 주행세를 도입하자는 목소리 역시 커지고 있다. 지자체들이 줄어드는 세수를 어떻게든 만회해보려는 몸부림이다. ▷지난해 중앙정부의 역대급 세수 결손으로 지자체 곳간은 직격탄을 맞았다. 소요 예산보다 56조 원이나 덜 걷히다 보니 지방으로 가는 교부세·교부금이 23조 원가량 줄었다. 부동산 경기침체와 공시지가 하락으로 지자체 수입원인 취득세와 재산세 수입도 줄어들었다. 기업들 실적마저 부진해 이들이 내는 법인지방소득세도 감소했다. 쪼그라든 재정으로 살림을 꾸리자니 예산이 줄줄이 깎여나간다. 인천에선 도로에 금이 가고 아스팔트가 깨져도 보수공사를 못 하고 있고, 학생들 무상급식이 중단될 위기에 놓인 지자체도 있다. ▷지방경제 활성화를 위한 예산이 깎이는 게 특히 문제다. 기업 투자유치 보조금, 전문인력 인건비 지원, 대학생 인턴 지원, 골목상권 부활 사업 등이 축소되고 있다. 일자리가 생기고 돈이 돌아야 세수가 발생하는데 경제 활력을 키우는 사업이 위축되면 오히려 악순환에 빠져 재정 가뭄이 더 심각해질 수 있다. 지방채를 발행해 돈을 끌어오려는 지자체도 많지만 잘 팔리지도 않을뿐더러 5%에 달하는 고금리가 큰 부담이다. ▷전국 17개 광역자치단체 중 재정자립도가 가장 낮은 강원도는 안 쓰는 도로를 민간에 팔기로 했다. 행정 목적으로는 용도가 마땅치 않지만 민간의 수요가 있을 만한 도로를 골라내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강원도는 도내 미활용 도로를 매각하면 향후 10년간 1200억 원의 수입을 올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지자체가 이런 식으로 공공자산을 내다 팔면 당장은 보탬이 되겠지만 장기적으론 세수 기반을 잃게 될 수 있다. ▷감세 기조로 인해 중앙정부부터 세수 확보에 애를 먹는 마당에 지자체 교부세가 늘어나길 기대하기는 당분간 어려운 상황이다. 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지방정부들 사정이 녹록지 않지만 광역단위로 재산세를 걷은 뒤 고르게 배분해 지자체 간 격차를 줄이는 대안을 고려해볼 만하다. 서울은 시가 각 자치구 재산세의 50%를 걷어 25개 구에 나누는 재산세 공동과세를 시행 중인데 이를 전국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물론 이 역시 광역지자체가 쇠락한다면 단기 처방에 그칠 수 있어 지방 세수의 파이를 키워야 하는 숙제는 여전히 남는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 2024-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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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원석 총장, 2년 전 썼던 칼럼에 답이 있다[오늘과 내일/신광영]

    이원석 검찰총장은 제주지검장이던 2022년 4월 주요 일간지에 6차례 연달아 기고를 한 적이 있다. 현직 검사장이 신문 오피니언면에 직접, 그것도 여러 매체에 등장한 건 이례적이었다. 그의 칼럼은 당시 여당이 한창 밀어붙이던 ‘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검수완박)’ 입법에 반대하는 글이었는데 두 가지가 눈에 띄었다. 우선 검경을 수직적 관계로 보던 기존 인식을 벗어던졌다. 자신이 수사하거나 지휘했던 사건들을 생생히 소개하며 두 기관이 힘을 합치고 서로 검증해야만 범인을 단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두 번째는 검찰 과오에 대한 반성이었다. 정치적 사건에 공정성이 부족했다는 지적, 살아있는 권력에 굴종했다는 지적을 뼈아프게 받아들인다고 했다. 그러면서 검찰이 일을 못한다고 무력화시킬 게 아니라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더 엄히 꾸짖어 달라고 했다.검사장 때 ‘검수완박 반대’ 6건 기고 연쇄 언론 기고 한 달쯤 뒤 이 총장은 대검 차장에 올랐고, 몇 달 후 윤석열 정부의 첫 검찰총장이 됐다. 이젠 어느덧 2년 임기 중 4개월을 남겨두고 있다. 그가 칼럼에 썼던 대로 살아있는 권력에 굴하지 않고, 어떤 사건이든 공정하게 실체를 규명하는 데 수사권을 쓰겠다는 다짐을 얼마나 실현했는지 물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김건희 여사 명품백 수수 사건은 검찰 수장의 내공을 시험대에 올린 사건이다. 수사 대상이 현직 대통령의 부인이고, 정치적 논란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원칙대로 정면 돌파하는 수밖에 없지만 검찰 수사는 김 여사에 대한 검찰 고발이 이뤄진 지 5개월이 지나도록 잠잠했다. 이 총장의 신속·집중 수사 지시는 총선이 야당의 압승으로 끝난 뒤에야 나와 ‘특검 대비용’이란 비판을 자초했다. 그 후 10일 만에 이 총장의 뜻과 다르게 단행된 인사로 수사팀 지휘부가 물갈이되면서 제대로 수사가 될지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 ‘총장 패싱’ 인사가 있었다고 해도 검찰의 최종 책임자가 이 총장이란 사실엔 변함이 없다. 김 여사 수사를 견제하는 용산과 이를 ‘김 여사 특검’의 명분으로 삼으려는 야권의 이중 압박을 풀어내는 게 그의 과제다. 그러자면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으로부터 검찰의 중립을 지켜내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명품백’ 엄정 수사로 그때 다짐 지켜야 윤 대통령과 이 총장은 한때 검찰 수사권 수호를 위해 한배에 탔었다. 윤 대통령이 총장에 취임할 때 그를 검사장으로 승진시키며 대검 기획조정부장으로 발탁했다. ‘검수완박’을 저지하기 위한 검찰 대응을 총괄하는 핵심 참모였다. 이 총장이 검찰 대표로 언론에 기고했던 이유 중 하나도 이런 이력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 이 총장은 인사권으로 검찰을 흔드는 대통령을 상대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 야권이 벼르고 있는 ‘검수완박 시즌2’에 맞서고자 한다면 지금이야말로 검찰 수사권의 존재 이유를 입증해야만 한다. 그는 최근 검찰 내부망에 글을 올려 “형사사법 체계가 정쟁의 트로피로 전락해선 안 된다”고 정치권을 비판했는데,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검찰의 엄정한 수사야말로 형사사법 체계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이 총장이 2년 전 기고했던 자신의 칼럼들에서 답을 찾았으면 한다. 물증까지 나와 있는 명품백 사건조차 제대로 파헤치지 못하는 검찰이라면 그가 6번이나 칼럼을 쓰면서까지 그토록 지키려 했던 검찰이 과연 맞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임기가 4개월밖에 안 남았고, 곧 있을 후속 인사에서 수사팀마저 교체될 수도 있지만 이 총장은 흔들림 없이 수사 지휘에 매진해야 한다. ‘총장 패싱’ 인사 다음 날 이 총장은 기자들에게 “인사는 인사고, 수사는 수사”라고 말했는데 적어도 수사만큼은 책임지고 완수하는 게 그가 2년 전 칼럼에서 했던 다짐을 지키는 길이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 2024-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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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신광영] “젊은층 덜렁덜렁 전세계약”… 국토장관의 경솔한 발언

    부장검사도 사기를 당한다. 얼마 전 퇴임한 검찰 간부는 10여 년 전 서울의 한 검찰청 부장검사일 때 지인에게 속아 690만 원을 떼였다. 사기꾼들을 숱하게 감옥에 보냈던 그마저 사기를 피하지 못했다. 작정하고 덤벼드는 사기범 앞에선 학력이나 사회 경험도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조심하고 경계해도 한순간에 당할 수 있는 게 사기 범죄다. ▷전세사기 대책을 총괄하는 국토교통부 박상우 장관이 최근 기자들과 차담회를 했다. 보증금 8400만 원을 날린 대구의 30대 여성이 극단적 선택을 해 8번째 ‘전세사기 사망자’가 나온 지 10여 일쯤 되던 날이었다. 박 장관은 피해자 지원 관련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 전에는 전세를 얻는 젊은 분들이 덜렁덜렁 계약을 했던 부분이 있지 않았나 싶다. 이제는 꼼꼼하게 따지는 인식이 생기지 않았겠는가.”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이날 간담회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국토부가 원래 피해자 주거지원대책을 발표하려다 돌연 취소하고 차담회로 대체한 것이어서 장관이 실효성 있는 방안을 내놓을지 기대하던 참이었다. 박 장관은 이날 50분간 많은 얘기를 했지만 ‘덜렁덜렁 계약했다’는 한마디가 피해자들 가슴에 비수로 박혔다. 피해자도 잘못이 있다는 인식이 엿보이는 발언이기 때문이다. 논란이 일자 국토부는 “이전 전세계약 과정에 허점이 상당했다는 취지”라고 해명했지만 피해자들 마음을 돌리진 못했다. ▷요즘 전세사기는 세입자가 대비한다고 피할 수 있는 수준을 훌쩍 넘어섰다. 집주인과 부동산 중개업자가 처음부터 짜고 치밀한 각본에 따라 세입자를 속이는 경우가 많다. 계약을 하고 보니 가짜 주인이거나, 동일 매물 다중 계약, 계약 직후 임대인 변경 등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진다. 이러니 누구보다 악착같이 미래를 준비해 온 젊은이들도 속절없이 당했다. 한 간호사는 휴일 없이 맞교대 근무를 하며 7년간 모은 결혼자금 수천만 원을 잃었고, 조종사를 꿈꾸며 월급을 모아 온 30대 청년은 훈련비로 쓸 5800만 원을 전세보증금으로 날린 뒤 빚을 갚기 위해 비행기 대신 원양어선을 타고 있다고 한다. ▷전세사기는 개인의 부주의가 아닌 제도의 실패가 낳은 지능 범죄다. 주무 장관이라면 누구보다 철저히 이런 관점에서 대책을 세워야 한다. 박 장관은 그날 간담회 모두발언에서 “피해자들 고통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리다”고 했지만 이후 질의응답에서 나온 ‘덜렁덜렁’ 발언은 경솔했다. 올 1월 부산지법의 한 부장판사가 전세사기 사건 주범에게 징역 15년형을 선고한 뒤 방청석의 피해자들에게 건넸던 말이 떠오른다. “절대로 여러분을 자책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뭔가 부족해서 피해를 당한 게 아니란 점을 반드시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 2024-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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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생 각서밖에 안 써봤다는 분도 임종 앞두곤 편지에 진심 담아”[월요 초대석]

    《“여기 제 이름 보이시죠? 병원 와서 그동안 많이 참으신 거 알아요. 저한테는 눈치 보거나 참지 말고 편하게 말씀하세요. 저랑 얘기하다 신경질 나거나 피곤하면 손만 들어주시고요.” 사회복지사 고주미 씨는 서울대병원 완화의료·임상윤리센터에서 일하며 말기 암 환자들과 만날 때면 이런 인사를 건넨다. 임종이 얼마 남지 않은 호스피스 등록 환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이를 편지로 정리해 가족들에게 전하는 게 주미 씨의 일이다. ‘내 마음의 인터뷰’라는 프로그램을 2013년부터 시작해 11년간 257명의 말기 환자를 만났다. “저는 ‘환자분’이란 호칭 대신 ‘○○님’이라고 이름을 불러요. 환자라는 정체성 말고, 당신이 어떤 사람이고, 지금 마음이 어떤지를 물어요. 의사, 간호사들은 그분들에게 더 이상 해줄 얘기가 별로 없고, 가족들도 많이 지쳤거나 속내를 털어놓기 힘든 경우가 많거든요.” 주미 씨가 편지를 함께 써 보자고 하면 환자들 반응이 제각각이다. “저 이제 죽어요?” “이거 유서 쓰는 건가요?” “편지라곤 각서밖에 안 써봐서…” 등등. 하지만 편지를 쓰고 나면 “누구도 나한테 이런 걸 물어오지 않았다” “정리하느라 손이 얼마나 아팠어”라며 고마워하는 이들이 많다.》● 임종을 앞두고서야 깨닫는 것들주미 씨는 후두암 말기여서 말을 할 수 없는 40대 아버지를 만난 날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목과 상체 곳곳에 호스가 달려 있던 그는 주미 씨를 보고 고개만 간신히 끄덕였다.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그의 아들은 병실 밖을 서성였다. 평소 엄했던 아버지를 어려워한다고 했다. “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물음에 아버지는 눈을 반짝이며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쓸 수는 있다는 뜻인 듯했다. 주미 씨가 수첩을 내밀자 그는 겨우 알아볼 만하게 몇 글자를 적었다. ‘칭찬 그때그때 못 한 거 미안하다.’“그분한테 다음 질문으로 ‘지금 두려운 게 있느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수첩에 크게 ×자를 그리더니 밑줄을 두 줄이나 긋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편지 제목에 ‘나는 두렵지 않다’라고 써서 보여드렸는데 그 제목에 줄을 쓱 긋고 다시 쓰셨어요. ‘저는 지금 행복합니다’라고.” 아버지는 주미 씨와 만난 지 나흘 만에 숨을 거뒀다.말기 상태인데 수용을 거부하는 환자가 있다기에 만나러 갔다가 전 직장 동료를 마주한 적도 있다. 고속 승진을 거듭했던 그는 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50대인 그에겐 사춘기 아들 둘이 있었다. 주미 씨가 “애들에게 전할 성공 법칙 3개만 알려 달라”고 했더니 그는 5개를 줄줄이 읊었다. ‘남한테 뭐 물어볼 때 무턱대고 묻지 말고 너만의 대답을 갖고 물어볼 것. 가족끼리 스킨십을 자주 할 것! 그리고 여행 많이 가라. 특히 엄마 모시고 자주 가라.’주미 씨가 며칠 뒤 그를 다시 찾았을 땐 병세가 악화돼 의료진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는 침대에 누운 채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주미 씨, 미안. 오늘은 못 하겠어.” 그는 그날 숨을 거뒀다.죽음에 임박해서야 깨닫는 것들이 있는 것 같다고 주미 씨는 말했다. “여행 많이 해둘걸” “내가 나를 좀 위할걸” “바쁘게 사는 게 좋은 건 줄 알았는데…”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40대 초반의 아버지가 어린 아들에게 쓴 편지는 “한 편의 시 같았다”고 주미 씨는 말했다. 그는 국어교사였다. ‘아빠는 우리 아들이 변해가는 계절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여유와 낭만이 있는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다. 아빠가 조금만 힘내서 집 지붕에서 뚜두둑 뚜두둑 떨어지는 빗소리도 같이 듣고 싶네. 사랑한다는 말이 아까울 정도의 아들, 사랑한다.(7일 후 임종)’● 얼굴 보고는 속 얘기 못 터놓는 가족들한 달째 의식불명인 60대 남편에게 매일같이 말을 거는 부인이 있었다. 환자가 의식이 없을 땐 보호자와 편지를 쓰기도 한다. 그 역시 남편을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날 위해서라도 기운 내라고 했더니 당신이 그랬잖아. 악착같이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그 말이 섭섭하더라. 왜 내 생각은 안 하는 거야.(눈물) 그런데 얼마나 힘들면 그랬겠어. 지금 생각하니 미안하지만 여전히 섭섭해. 그래도 여보, 당신이 하늘나라에서 날 기다려줄 것 같아서 좋아. 날 꼭 기다려.’부인은 이 편지를 남편의 귓가에 읽어줬다. 그 후 4일 뒤 남편은 사망했다. 마치 부인이 괜찮아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하늘로 떠난 듯했다.대장암 말기인 한 70대 남성은 주미 씨에게 스스럼없이 마음을 열었다. “부인에게 편지 좀 쓸까요” 한 마디에 담담하게 독백을 했다.‘여기 온지 보름 만에 내가 하반신을 못 써. 하늘이 나를 부르나 본데 내일이라도 부르면 가지 뭐(눈물). 당신은 나 없이 많은 시간을… 힘들어서 어떻게 해. 겨울이면 춥고, 여름이면 더울 텐데. 그래도 당신을 사랑해주는 손주들이 있으니 걔내들 공책이라도 하나 사주는 재미로 사시구려. 우리 지금은 떨어질지언정… 만납시다, 다시.’부부라고 다 사이가 좋은 건 아니다. 임종 때까지 갈등을 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말기 암 80대 남편에게 받은 상처가 컸던 부인은 애증의 마음을 편지로 옮겼다.‘내가 병날 정도로 나한테 모질게 한 거, 한 번만이라도 왜 그랬는지, 안 미안한지 궁금하지만 이렇게 누워 있는데 무슨 말을 할까 싶기도 해. 다음 생에는 남 괴롭히지 말고 좋은 사람으로 태어나서 잘 살았으면 좋겠어.’꼼짝 못 하고 누워 주미 씨가 읽어주는 편지를 듣던 남편의 눈가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부인에게 전해 달라며 들릴 듯 말 듯 말했다. “너무 미안했다. 날 용서해라.”주미 씨는 말했다. “가족들끼리 얼굴 보고 못 하는 얘기가 많잖아요. 편지가 대화의 촉매제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편지를 쓰다 보면 ‘끝까지 나를 부탁한다’고 속마음을 표현하거나 ‘수목장으로 해 달라’는 현실적인 내용까지 전하게 돼요.”● 얼마 안 남은 삶을 즐겁게 산다는 건하루는 주미 씨가 유방암 말기인 50대 여성을 만나러 병실에 들어설 때였다. 주치의와 전공의 3, 4명이 환자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저 괜찮아요. 선생님들 정말 최선을 다하셨잖아요. 다들 고생 많으셨어요.” 몇몇 전공의들이 울음을 참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였다. 주미 씨는 환자의 대학생 외동딸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가 의연해서인지 애써 두려움을 억누르는 듯 보였다. 주미 씨는 딸과 먼저 편지를 썼다.‘엄마 늙을 때까지 내가 옆에 있을 줄 알고 여유 부린 건데, 이제 해줄 수 있는 나이인데…. 엄마가 울면 같이 울 텐데 엄마가 안 우니까 나도 못 울고 있어.(미소) 뭐든 엄마랑 같이 했었는데 어떻게 될까 그런 게 막막해.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해. 엄마의 영원한 베이비, ○○가.’(5일 후 임종)주미 씨가 만난 이들 중에는 20, 30대가 적지 않다. 젊어도 성찰이 깊고 자기표현을 잘하는 환자가 많다고 한다. 혈액암 말기 20대 여성이 쌍둥이 동생에게 쓴 편지다.‘쌍둥이 내 동생 보고 싶어요. 나랑 똑같이 생겼어요. 내가 더 예뻐요.(미소) 아프기 전에는 많이 싸웠죠. 아프고 나서는 얼마나 잘해주던지.(울음) ○○아, 내 통장 비밀번호는 통장서랍 안에 다 있다. 그리고 이 말 하면 너 울 거 같은데, 나는 네가 많이 웃었으면 좋겠다.(미소) ○○이∼ 귀여워!’자궁암으로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고 그보다 한 달 넘게 살아 있는 60대 여성도 있었다. 가족들은 감사해했지만 정작 그는 고통스러워했다. 극도의 통증 때문에 휠체어에 아슬아슬 걸터앉은 채로 주미 씨를 맞았다. “지루하고 우울하고 행복하지 않다”고 했다.‘오늘밤은 어떻게 지내려나, 내일은 또 어떠려나 생각뿐. 삶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태에서 즐겁게 산다는 건 뭘까. 그런 것에 대한 모델링이 없어서 더 힘들다.’주미 씨는 며칠 뒤 그를 다시 찾아 이 편지를 읽어줬다. 가만히 듣고 있던 그는 뭔가에 북받친 듯 흐느끼기 시작했다. “편지 내용이 불편해서 우는 건가 싶어 당황했는데 환자분이 제 손을 잡으며 말씀하셨어요. ‘이렇게 짧은 시간에 나보다 나를 더 잘 표현해줘 고맙다. 나도 모르는 대답이 내 안에 있었다’라고요. 저는 그분 말을 그대로 옮겼을 뿐인데 경청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던 것 같아요.”● 장지 가는 버스에서 발견한 엄마 편지말기 환자들은 생명이 언제 멎을지 모르는 불확실성을 특히 힘들어한다. 편지 쓰기는 이들이 불안을 내려놓고 ‘지금, 여기’에 집중하도록 돕는 작업이다. 주미 씨는 “환자들은 종일 누워 지내며 대소변도 못 가리는 경우가 많아 스스로를 쓸모없는 존재로 여기기 쉬운데 편지를 주고받으며 여전히 사랑받고 중요한 사람이란 걸 실감하게 된다”고 했다. 그렇게 자존감이 회복돼야 남은 삶을 주체적으로 계획할 수 있다.“호스피스 치료는 통증 관리 못지않게 정서적 지지가 중요해요. 요즘 겨울이면 버스 정류장에 ‘엉따(엉덩이가 따뜻해지는)’ 의자가 있는데 버스가 올 때까지 편하게 기다리면 좋잖아요. 호스피스 역시 환자가 생의 종점까지 중심을 잡도록 해주는 거죠. 다만 말기 환자 중 호스피스 혜택을 받는 분이 20%대이고, 인력도 부족해서 서울대병원마저 호스피스가 필요한 분들 중 실제 의뢰되는 비율이 3분의 1 정도인 걸로 내부에선 보고 있어요. 특히 시스템은 없고 개인의 노력에만 의존하는 게 문제입니다.”폐암으로 세상을 뜬 70대 여성의 딸이 주미 씨에게 반가운 연락을 해온 적이 있다. 그 환자는 주미 씨와 함께 쓴 편지를 딸에게 직접 건네려 했지만 미처 전하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그런데 딸이 장의버스를 타고 장지로 가던 길에 어머니 가방을 열었다가 고이 접어둔 분홍색 편지를 발견한 것이다. “따님이 버스 안에서 마이크를 들고 가족들에게 그 편지를 읽어줬대요. 엄마를 보내드리는 데 편지가 뜻밖의 도움이 됐다고 해요.”주미 씨는 이 일의 보람을 설명하며 한 30대 환자의 편지를 인용했다. “‘병원엔 화장실 말고는 거울이 없다. 나 자신을 바라볼 기회가 없다. 제3자의 시선으로 나에 대해 얘기하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대목이 있어요. 환자가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 게 제 일인 것 같아요.”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 2024-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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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신광영]‘뺨 맞아도 다시’ 마크롱의 각본 없는 소통

    시민들과 설전을 자주 벌이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2022년 재선 도전 유세를 위해 알자스 지역을 찾았을 때 일이다. “당신 때문에 살면서 처음으로 마린 르펜(당시 극우정당 대선 후보)에게 투표하려 한다.”(행인) “이유가 뭔가.”(마크롱) “당신만큼 형편없는 대통령을 본 적이 없다. 오만하고 거짓말쟁이다.”(행인) “많은 토론거리를 줘서 감사하다. 하지만 당신이 계속 당신 생각만 하면 우린 토론을 할 수 없다.”(마크롱) ▷마크롱 대통령이 시민들과 만나는 현장에선 계란이나 토마토가 심심치 않게 날아든다. 극우 청년에게 뺨을 맞는 봉변도 있었다. 이 청년은 마크롱과 악수를 하다 다른 손으로 그의 뺨을 후려쳤다. 대통령이 폭행을 당한 중대 사건이지만 마크롱은 잠시 휴식을 취한 뒤 “폭행 위협이 있더라도 계속 소통할 것”이라며 다시 시민들을 만났다. 이후 영부인과 산책 중 시위대를 만났을 땐 “고함치지 말고 냉정히 말해 달라”며 토론을 청하기도 했다. ▷마크롱의 소통 행보를 ‘쇼’라고 폄하하는 시각도 있다. 개혁 과제를 밀어붙이면서 반대 여론을 끌어안는 것처럼 보이려는 제스처라는 것이다. 마크롱이 추진해 온 정책들을 보면 그런 쇼라도 해야 할 만한 사안이 적지 않다. 집권 초기부터 고용과 해고를 수월하게 만들고, 친환경 에너지 정책의 일환으로 유류세 인상을 시도해 노조와 화물기사들의 저항을 불렀다. 정년을 연장하고 연금 수령 시점을 늦춘 연금개혁 역시 국민 70% 반대를 무릅쓰고 관철시켰다. 여론을 수습하지 못하면 정권이 흔들릴 만한 이슈들이다. ▷과거 정부가 미뤄 온 민감한 문제를 건드리니 지지율이 높을 리 없다. 연금개혁 직후 26%까지 곤두박질쳤다가 요즘은 30%대에 머물고 있다. 위축될 법도 한데 마크롱은 더 거침없는 대화로 돌파구를 찾고 있다. 연금개혁에 반대하며 프라이팬을 두드리는 시위대 틈에 파고들어가 “프라이팬으로는 프랑스를 전진시킬 수 없다”고 설득하고 ‘연금 반대 시민’ 500명을 초대해 200분간 스탠딩 토론을 벌였다. 최근에는 농업박람회에 방문했다가 농업용 경유 면세 폐지에 항의하는 농민들이 야유를 퍼붓자 농민 수십 명과 즉석 토론을 했다. ▷‘트랙터 시위(농업개혁 반대)’ ‘노란조끼 시위(노동개혁 반대)’ ‘프라이팬 시위(연금개혁 반대)’ 등으로 바람 잘 날이 없지만 대통령이 시위대와도 기꺼이 마주 앉는 게 프랑스의 민주주의다. 대통령이 불편해할 목소리는 경호원들 선에서 ‘입틀막’ 되는 한국과 다른 대목이다. 9일 대통령 기자회견이 열리긴 했지만 추가 질문 기회가 없어 토론을 못 하는 구조에선 소통을 기대하기 어렵다. 마크롱이 프랑스에서 20년 만에 나온 재선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데는 대화를 통한 정면 돌파 전략이 한몫을 했다. 성공한 정치인이 되려면 까다롭고 날 선 질문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 2024-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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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신광영]독일 의대생 20%는 구급대원 간호사 출신들

    독일에는 의대에 가는 세 가지 길이 있다. 첫째는 성적. 우리 수능시험과 비슷한 아비투어(Abitur) 점수 순으로 선발한다. 이렇게 뽑는 비율이 전체 정원의 20%다. 가장 비중이 큰 60%는 대학 자율에 맡긴다. 나머지 20%를 뽑는 방식이 독특하다. ‘대기기간 전형’이란 게 있다. 지원자 중 최장 7년 이내에서 오래 기다린 순으로 입학시킨다. 여기서 관건은 의료·보건 관련 경력이다. 응급구조대원이나 중환자실 간호사, 요양병원 간호조무사, 조산사 등 현장 경험이 풍부할수록 가산점이 높아 주로 의료 경력자들이 지원한다. 독일 의대생 5명 중 1명은 이 전형으로 들어온 구급대원 간호사 출신들이다. 독일에서도 의대 입시는 치열하다. 한정된 기회를 어떻게 배분할지를 두고 독일이 고심한 결론이 바로 이 전형이다. 의사가 되는 경로는 다양해야 하고, 성적 우수자가 아니어도 환자를 돌보려는 사명감과 열정이 강하다면 입학 자격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늦깎이 입학생들이 의대 공부를 못 따라갈 것이란 우려도 나왔지만 기우였다. 의사 국가고시에서 다수가 탈락하는데 대기전형 출신들의 합격률은 다른 경로 입학생들에게 뒤지지 않는다. 의대 공부를 감당할 수 있다면 의료 현장에서 자신의 적성을 검증하고 환자에 대한 이해심을 기른 학생들이 더 좋은 의사가 될 수 있다는 게 독일인들의 인식이다. 2년 전 독일에서 의대 증원이 추진될 때였다. 코로나 사태로 의료인력 부족을 실감한 뒤 1만여 명인 입학 정원을 50% 늘리기로 했다. 독일은 인구당 의사 수가 우리보다 2배 이상 많다. 거기서 더 늘린다니 의사들이 반발할 법도 한데 대부분 찬성했다. 의사 업무가 과중해 의료 서비스의 질이 떨어진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독일 의사들은 추가 공급될 의사들을 경쟁자가 아닌, 환자를 나눠 맡을 동료로 보는 것이다. 의사는 독일에서도 고소득 직종이다. 근로자 평균 임금 대비 의사 소득이 5.6배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3위다. 1위(6.8배)인 한국과 차이가 크지 않다. 독일 의사들이 의대 증원에 있어 한국 의사들과 생각이 다른 것은 의대생 시절 경험의 영향도 있어 보인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동기들, 특히 환자 곁에서 궂은일을 하며 의료의 굳은살이 박인 동료들과 함께 배우고 수련하는 것 자체가 살아 있는 소양교육이다. 전국의 ‘전교 1등’들이 모여 엘리트로서 집단 자의식을 쌓아가는 한국 의대생들과 다를 수밖에 없다. “국민들은 ‘전교 1등’ 의사를 원하지, 실력이 모자란 의사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의대 증원이 추진될 때면 일부 의사들은 이런 반대 논리를 편다. 성적으로 줄 세우는 의대 입시가 수십 년 지속돼 온 걸 고려하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좁은 의대 구멍을 통과해 힘들게 공부하고, 온갖 비인간적 처우를 감내하며 수련했는데 이제 와 문턱을 낮추겠다니 선뜻 동의하긴 어려울 것이다. 정부의 이번 의대 증원 정책의 한계 중 하나는 성적 위주의 천편일률적 입시를 그대로 두는 것이다. 3000명인 정원을 1500명 늘린다고 의사라는 직업을 대하는 의대생들의 태도가 달라지진 않는다. 증원이 현실화되면 의대 합격선이 2.9점 낮아질 거라고 학원가에서 전망하는데 선배들보다 2.9점 낮은 ‘차상위’ 수재들이 늘어난 정원을 채울 뿐이다. 필수의료를 강화하려면 수가체계 개선이 급선무지만 의대생들이 사회적 책임을 내면화하도록 입시제도도 바꿔야 한다. 의료 일선에서 수년간 환자들과 부대껴 본 경험을 성적 못지않게 높이 평가하는 쪽으로 의대 관문이 넓어진다면 좋은 시작이 될 것이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 2024-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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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신광영]4년 새 4배 급증한 노인 상대 ‘사이버 사기’

    사기 범죄의 악랄함은 상대의 가장 아픈 약점을 공략한다는 데 있다. 투자 사기를 당해 은퇴 자금을 날린 노인들의 사연에는 그들이 헤쳐 가려 했던 힘겨운 현실이 녹아 있다. “안 그래도 먹고살기 바쁜 자식들에게 손 벌리기 싫어서” “병원비 생활비 부담은 계속 커지는데 연금처럼 매달 배당금을 준다기에” “혼자 살아 외로웠는데 살갑게 대해 주는 게 고마워서”…. 사기범들은 노인들의 이런 마음을 피해자의 금고를 여는 열쇠로 이용했다. ▷고령자 상대 범죄 중 최근 급증하는 분야가 사이버 금융사기다. ‘주식리딩방(주식 종목 추천 채팅방)’으로 초대해 투자를 유도하거나, 비대면 방식으로 가상화폐나 다단계 투자를 하게 한 뒤 돈을 들고 잠적하는 경우가 많다. 경찰청 통계에 잡힌 사이버 사기 피해자 중 60대 이상의 비중은 2019년과 비교해 4년 새 4배로 급증했다. 지난해 개인파산자 중에서도 60대 이상이 47.5%로 가장 많았고, 이들이 주식 코인 등 투자 실패로 파산한 비율은 최근 3년 새 4.5배나 증가했다고 한다. ▷삶의 경륜을 쌓아온 노인들이지만 디지털 세계에선 약자다. 요즘 금융투자는 온라인에서 많이 이뤄지는데 고령일수록 디지털 기술에 대한 이해력과 금융지식이 부족하다. 젊은층보다 정보를 얻는 매체도 제한적이고, 치매 증상 등으로 판단이 흐려질 수도 있다. 여생은 길어지고 고물가 장기화로 어떻게든 자산소득을 올려야 하는 노인들로선 경제 활동의 중심을 온라인으로 옮기는 게 큰 도전이다. 여기에 퇴직금이나 상속 재산 등 쌓아둔 목돈은 많으니 사기꾼들에겐 손쉬운 먹잇감이 되는 것이다. ▷피해 노인들 중에는 대기업이나 금융사 임원 출신도 있다고 한다. 투자 기법이 급속히 변화하고 있어 과거 경험만으론 따라잡기 어려운 데다, 유명 금융전문가나 연예인들이 투자했다는 허위 광고에 속아 넘어간 사례가 적지 않다. 최근에는 한 주식리딩방 업체 직원들이 시골 노인들을 찾아가 주식거래 앱을 깔아주며 회원으로 가입시키고, 손실 위험이 큰 관리종목 주식을 사들이게 한 사건도 있었다. 일부 피해자들은 낯선 사람이 휴대전화를 조작하는 게 꺼림칙했지만 평소 연락이 뜸한 자식들이 귀찮아할까 봐 물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노인들이 평생 일군 재산을 투자 사기로 잃지 않도록 지켜주는 건 고령화 시대에 중요한 복지다. 노후 파산이 많아지면 가족이 무너지는 건 물론이고, 국가의 복지 부담도 가중될 수 있다. 고령층이 주요 타깃이었던 보이스피싱이 꾸준한 예방 교육과 제도 정비로 피해가 줄고 있듯 디지털 약자에게 특화된 금융 교육이 필요하다. 요즘 시중은행들이 운영하는 ‘노인 금융학교’에 수강생이 몰려 관광버스까지 대절한다고 하는데 민간에만 맡겨둘 일이 아니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 2024-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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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신광영]유튜브 보는 게 독서가 될 수 없는 이유

    요즘 골목책방은 ‘인스타 성지(인스타그램에 올릴 만한 사진촬영 명소)’가 된 곳이 많지만 책방 주인들의 표정이 밝지만은 않다. 손님들이 책은 안 사고 근사하게 진열된 책들을 배경으로 사진만 찍고 가는 경우가 많아서다. 책방의 감성적이고 지적인 분위기를 소비하는 데 그치는 것이다. 또 책 판매는 줄어드는 반면 인테리어 소품용 모형 책은 잘 팔린다고 한다. 책은 안 읽어도 책이 풍기는 지성미는 갖추고 싶다는 게 요즘 세태다. ▷한 해 동안 책을 단 한 권이라도 읽은 성인 비율(종합독서율)은 지난해 기준 43%다. 정부의 독서실태조사가 처음 시작된 1994년 이후 최저치다. 30년 전 이 비율은 86%였다. 조사 대상자들이 책을 안 읽는 이유는 주로 두 가지다. 일하느라 시간이 없고, 유튜브 등 책 이외에 다른 매체를 이용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10, 20대 사이에선 유튜브 같은 동영상을 시청하는 것도 독서의 일종이란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독서 인구는 줄지만 유튜브로 책을 소개하는 ‘북튜브’ 채널은 인기다. 가성비 높은 지식 소비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볼거리는 늘었는데 시간이 한정돼 있다면 한 권에 10시간 이상 걸리는 독서보다 10분∼1시간 이내로 핵심을 추려주는 영상에 사람들이 몰릴 법도 하다. 책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이슈와 정보를 정리해주는 지식 콘텐츠가 많아 유튜브로 세상을 배운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독서만큼 도움이 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유튜브를 볼 때와 독서를 할 때 우리 뇌는 다르게 반응한다. 영상은 완제품 형태로 눈을 거쳐 뇌리에 바로 맺힌다. 뇌가 일할 필요가 없다. 반면 책은 뇌를 바쁘게 만든다. 글은 설명과 묘사, 정보를 담은 원재료일 뿐이고 한 문장 한 문장이 머릿속 지식과 경험, 정서와 뒤섞이면서 활발한 시뮬레이션이 펼쳐진다. 책을 읽다 잠시 멈추게 되는 게 이런 작용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영상을 100명이 보면 거의 비슷하게 기억하지만 책 한 권을 100명이 읽으면 각기 다른 100개의 스토리가 생긴다. 스쳐 흘러가는 영상과 달리 책에서 읽은 건 깊이 각인되는 이유는 나만의 맥락이 담겨 저장되기 때문이다. ▷책 대신 유튜브 보는 습관이 들면 당장은 단순명료하게 가공된 지식을 얻는 듯한 느낌이 들지만 장기적으론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잃게 될 가능성이 높다. 자칫하면 궁금한 주제를 짧고 흥미롭게 만든 영상만 골라 보고, 그마저 메뚜기 뛰듯 띄엄띄엄 보거나 ‘세 줄 요약’에만 익숙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세상은 갈수록 복잡해지고 단순화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은데 영상 제작자가 주관적으로 편집한 지식에 길들여지면 흑백 논리에 잘 휘둘리고, 가짜 정보에 대한 분별력도 떨어지기 쉽다. 독서는 시간이 걸리지만 그 정도 노력을 들여야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우리에게 준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 2024-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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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요 초대석]“쇠몽둥이 심판… 尹 이제라도 ‘통 큰 리더’ 모습 제대로 보여야”

    《집권 여당 참패라는 선거사상 초유의 결과를 낸 이번 4·10총선은 충청의 영향이 컸다. 2년 전 대선과 지방선거 때의 승리와 달리 국민의힘은 충남·충북에서 역대급 패배를 했다. 윤석열 대통령 부친은 충남 공주가 고향이다. 국민의힘은 총선 직전 충청권 판세를 박빙으로 분석했었지만 대전·천안·아산·청주 등 도시권 16석 중 단 1석도 건지지 못했고, 그나마 농촌과 중소도시에서 12석 중 절반인 6석을 얻는 데 그쳤다. 24일 충남 홍성군 충남도청에서 국민의힘 3선 의원 출신인 김태흠 충남도지사를 만났다. 그는 여당의 충청 참패에 대해 “어느 정도 예상했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고향이라도…” 24만7077표로 승부가 갈린 지난 대선에서 충남과 충북은 각각 8만292표와 5만6068표 차로 윤 대통령이 승리한 지역이다. 지난 대선에서 윤 대통령에게 더 많은 표를 안겨줬던 대전 역시 더불어민주당으로 다시 돌아섰다. 김 지사에게 충청 민심 변화의 원인에 대해 먼저 물었다. “영남과 호남은 다 자기편들이 있습니다. 충청 지역 유권자들은 우리 민심이 곧 대한민국 민심이란 프라이드를 가진 분들입니다. 정치적 변곡점 때마다 정치적 명분을 쥔 쪽을 지지해 왔습니다. 이번 선거에선 정부·여당을 지지해줄 명분이 없다고 본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충청 민심의 수도권화’를 강조했다. “충청권 도시들은 급속한 산업화·도시화로 외지 주민의 유입이 급증하면서 멜팅폿(Melting pot·여러 문화가 하나로 동화되는 것)이 이뤄졌고, 표심도 수도권을 따라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영호남처럼 특정 정당에 대한 충성도가 높지 않은 지역이다 보니 정권심판론이 먹혔다고 생각해요.” ‘대통령의 고향’을 언급하자 그는 “(대통령 고향이라고) 무조건 편들어 주는 곳이 아닙니다”라고 했다. 그는 “충청이 윤 대통령의 고향이라고 하지만 이를 도민들에게 확실하게 각인시키지 못했고, 내각이나 요직에 충청인 발탁이 미흡해 피부에 와닿지 않은 탓도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이미 명분에서 다 진 상태인데 충청으로 와서 표를 달라고 한들 도민들이 무조건 찍어줄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명분에서 졌다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종섭 전 주호주 대사 문제만 해도 임명 자체로 말할 나위 없이 잘못된 선택이었습니다. 당시 제가 대통령실 이관섭 비서실장한테 전화해서 자진 사퇴시키는 게 좋겠다고 했습니다. 지금이라도 빨리 사퇴시켜야 한다는 뜻을 전달했습니다. 그런데 (사퇴까지) 8일이 걸렸습니다. 민심에 둔감했던 것이죠.” 그는 김건희 여사 문제의 처리 과정에 대해서도 아쉬움을 표했다. “윤 대통령의 국정 방향은 맞게 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국민들이 윤 대통령을 뽑을 때 기대했던 것들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실망한 것입니다. 국민들은 문재인 대통령 시절 검찰총장으로서 핍박을 받으면서 공정과 상식을 지키는 리더가 될 것이라고 봤습니다. 또 남자답고 화통하고 스케일이 큰 리더일 것이란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김 여사나 장모 문제에 대한 대응을 보면서 공정과 상식을 기대한 국민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했습니다.”● “힘 못 쓴 ‘국회 완전 이전’ 공약” 그가 진단한 충청의 민심은 ‘정권 심판론’이 크게 작용했던 총선 전체 흐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른 원인은 없었을까. ―총선 직전 나온 ‘국회의 세종시 완전 이전’ 공약을 발표했습니다. 어떻게 보셨습니까. “국회는 이미 본회의장 등 일부 기능을 제외하고 11개 상임위원회와 대부분의 기능을 세종시로 이전하기로 결정했어요. 이런 상황에서 완전 이전이란 국민의힘의 공약은 파급력이 약할 수밖에요. 또 선거를 목전에 두고 발표했는데 진정성이 의심받지 않았나 싶습니다.” 세종은 공무원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국민의힘은 지난 21대 총선에 이어 이번 선거에서도 세종에서 단 한 석도 얻지 못했다. 세종에서의 계속되는 국민의힘의 패배에 대해 김 지사는 ‘38.6세’라는 숫자를 제시했다. “세종시는 2002년 16대 대선 공약 이후 위헌 논란과 수정안 등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젊은 도시’입니다. 평균 연령이 2023년 말 기준 38.6세입니다. 국민의힘 입장에서는 늘 어려운 지역일 수밖에 없습니다.” 국회 세종의사당과 대통령 세종집무실 건립이 지금까지 속도를 내지 못한 상황에서, 정책의 구체성을 따져보는 젊은 유권자들에게 여당의 약속이 곧이곧대로 전달되기 힘들었다는 얘기였다.● “민심의 쇠몽둥이 맞은 여권” 김 지사는 총선 직후 페이스북에 자신이 느낀 충격에 대해 “국민은 집권 여당을 향해 회초리가 아닌 쇠몽둥이를 들었다”고 표현했다. ‘여권의 위기’를 강조한 것이다. “회초리라고 하면 과반 150석 중에 130∼140석 정도 받았을 때 회초리를 들었다고 하는 거 아니에요? 100석 갓 넘기는 의석을 받았다면 그건 쇠몽둥이 아니겠습니까.” ―뭐가 달랐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윤 대통령이 장모가 감옥에 갔을 때 가족으로서 유감 표명이라도 했어야 했습니다. 작은 문제들을 진솔하게 털고 가지 않아 더 큰 문제로 쌓인 면이 있다고 봅니다. 디올백 문제 때도 대통령이 ‘국민 눈높이에는 맞지 않았다’ ‘사과드린다’ 그렇게 인정하고 털고 갈 수 있는 사안이었습니다. 그런 게 잘 안 되다 보니 국민 마음속에 불만이 누적됐을 것입니다.” ―대통령의 불통을 지적하는 여론이 많습니다. “윤 대통령이 가지고 있는 오만과 불통에 대한 인식이 1이라면 국민의 생각은 9, 10인 것 같아 안타까운 부분이 있습니다. 국민에게 비치는 문제점 중 대부분은 국정 운영 때문이라기보다는 장모 또는 김건희 여사 관련 리스크에서 온 게 사실입니다. 국민이 윤 대통령에게 가진 부정적 이미지는 실제보다 과장돼 있습니다. 그런 부분들이 국정 운영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게 안타깝습니다.”● “첫째는 듣는 사람이 바뀌어야” 그렇지만 김 지사는 “지금도 여권이 우왕좌왕하고 있다”며 “이러면 국민이 원하는 결과를 내놓을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대통령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대통령이 인적 쇄신에 나섰습니다. 앞으로 달라질까요. “대통령에게 직언을 해야 한다는 주문이 많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에게 직언을 한다는 게 사실 쉽지 않습니다. 대통령을 설득하려면 상당한 지혜가 필요합니다. 대통령이 생각하는 방향이 있으면 그 자리에선 동의한다고 해도 하루 이틀 지나 좀 더 의견을 정리하고 보완 방향을 판단해서 바꿀 건 바꾸자고 말하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물론 첫째는 듣는 사람이 바뀌어야 합니다. 하지만 참모가 되면 대통령의 생각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대통령은 앞으로 어떻게 바뀌어야 하겠습니까. “윤 대통령이 화통하고 스케일이 큰 리더의 모습을 이제라도 제대로 보여줬으면 합니다. 시대마다 원하는 리더가 있습니다. 지금은 자기 소신이 있으면서 통 크게 포용하는 리더를 원하는 시대입니다.” ―내각의 인적 쇄신 작업은 잘되고 있다고 보십니까. “총선 후 인적 쇄신은 기초적인 부분입니다. 인선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집권 여당으로서 3년 남은 기간에, 그리고 이런 정치 구도 아래에서 어떤 방향으로 국정을 이끌 것인가, 어떤 목표를 가지고 갈 것인가 방향 설정을 먼저 해야 합니다. 지금 사람 구하는 데 우왕좌왕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총리 인선,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번에 이재명 대표 회담 때 야당에 ‘총리로 좋은 분을 추천해 달라’고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일부 장관직도 민주당이 추천해주면 그분 모시고 국정 같이 잘 해볼 테니 좋은 의견을 달라고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통 큰 윤 대통령의 리더십을 보여줬으면 합니다.” 3시간 가까이 이어진 인터뷰에서 그는 ‘반성’과 ‘미래’를 수차례 언급했다. “국민의 눈높이에 맞추지 못한 부분들에 대한 처절한 반성, 그리고 앞으로 3년을 어떻게 가겠다고 하는 미래에 대한 비전의 부재”가 ‘위기의 여권’을 진단하는 그의 핵심 키워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집권 2년이 됐으니까 이번 선거는 심판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며 “이제라도 받아들일 것은 겸허히 받아들이고, 여당이 보여줄 수 있는 미래를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국정 동력 상실은 국가와 국민에게 큰 손실입니다. 앞으로 더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홍성=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신광영 논설위원 leon@donga.com}

    • 2024-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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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년생부터 평생 담배 못 사” 英 초강력 금연법 논란[횡설수설/신광영]

    올해 15세인 2009년생부터는 평생 담배를 살 수 없도록 한 초강력 금연법이 최근 영국 하원에서 1차 표결을 통과했다. 리시 수낵 총리가 추진한 법인데 여당인 보수당 의원들은 대거 반대하거나 기권하고 야당인 노동당이 압도적으로 찬성했다. 노동당은 “보건정책의 획기적인 진전”이라고 평가한 반면 보수당에선 “개인 자유를 침해하는, 보수당답지 않은 정책”이란 비판이 거세다. 리즈 트러스 전 총리는 작심 발언을 했다. “국가가 시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간섭해선 안 된다. 경찰국가를 넘어 유모국가로 가자는 것인가.” ▷‘비흡연 세대법’이라고 불리는 이 법은 2009년생이 담배 구입 가능 연령(18세)이 되는 2027년부터 허용 연령을 한 살씩 올려 평생 못 사게 막자는 것이다. 흡연자를 처벌하는 건 아니고, 담배를 판 상인에게 벌금을 물리는 방식이다. 영국에서는 무상의료 시스템이 흡연으로 인한 질병을 치료하느라 과부하에 걸리면서 강력한 금연법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커져 왔다. 이런 목적으로 쓰이는 예산이 연간 28조 원에 달한다고 한다. 이 돈을 의사 채용과 병상 확충에 쓰면 다른 환자들이 의사를 기다리는 기간을 단축할 수 있어 금연법에 대한 서민들이 지지가 높다. ▷수낵 총리는 술 담배를 하지 않고 일주일에 하루는 금식할 정도로 자기관리에 철저한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단지 건강에 대한 소신 때문에 여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금연법을 밀어붙이는 건 아니다. 사회복지 축소와 부자 감세 등 반서민 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하다 영국 역사상 최단기(44일)로 물러난 전임자(트러스 전 총리)의 실책이 그의 결단에 한몫을 했다. 게다가 야당인 노동당(45%)에 대한 국민의 지지율이 보수당(26%)보다 크게 높다 보니 중도·서민층의 지지를 얻으려는 목적도 있어 보인다. ▷이번 금연법이 발효되려면 하원의 최종 표결에 이어 상원까지 통과해야 한다. 작은 정부와 자유방임주의를 표방해온 보수당의 반대가 만만찮아 시행을 장담하긴 이르다. 흡연을 통제하면 담배 암시장이 난립하고, 전자담배 수요만 자극할 것이란 우려도 많다. 뉴질랜드 진보의 아이콘인 저신다 아던 전 총리(노동당)도 같은 내용의 금연법을 추진했지만 지난해 보수당으로 정권이 넘어간 뒤 법이 폐기될 위기에 놓였다. ▷“(시가 애호가였던) 윈스턴 처칠 전 총리를 배출한 보수당이 담배를 금지하려 한다니 미친 짓이다.” 보리스 존슨 전 총리는 수낵 총리를 저격하며 처칠을 소환했다. 처칠은 “나는 시가를 피우지 않는 사람을 믿을 수 없다. 시가는 생각의 동반자이자 실패의 위로자”란 말을 남길 정도로 골초였다. 하지만 그는 오랜 흡연으로 인해 폐질환과 고혈압에 시달리다가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처칠의 경우는 금연법 도입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 2024-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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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신광영]‘국왕도, 며느리도 암’ 신비주의 포기한 英 왕실

    영국 윌리엄 왕세자의 부인 캐서린 왕세자빈(42)은 영국인들에게 왕실의 완벽함을 상징해온 인물이다. 캐서린은 6년 전 셋째인 루이 왕자를 낳은 날 출산 7시간 만에 빨간색 드레스에 하이힐 차림으로 병원을 나와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첫째 조지 왕자, 둘째 샬럿 공주가 태어난 날에도 캐서린은 말끔하게 단장한 모습으로 등장해 로열 베이비를 건강하게 출산한 세손빈으로서 대중의 기대에 부응했다. ▷하지만 그가 22일 소셜미디어에 올린 영상메시지는 영국은 물론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1월 복부 수술 후 검사에서 암이 발견돼 화학치료를 받고 있다.” 암의 종류나 단계를 밝히진 않았지만 암 진단 사실을 직접 공개한 것이다. 올 들어 공개 석상에서 자취를 감춘 캐서린을 둘러싸고 최근 가족사진 편집 논란이 확산되며 건강 위중설, 부부 불화설 등 온갖 루머가 돌던 와중에 나온 발표였다. ▷왕실 인사들의 건강 상태를 공개하는 건 오래전부터 왕실의 금기였다. 약한 군주로 비쳐 외세 침략의 빌미가 될 수 있고, 대내적으론 민심의 혼란을 부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왕실의 신비주의가 그런 명분으로 유지됐다. ‘군주제는 대낮의 햇빛을 받으면 마법이 사라진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1948년과 1950년 임신을 했을 때 왕실은 “여왕이 흥미로운 상태(interesting condition)에 있다”고만 했고, 여왕의 어머니가 1960년대 암을 앓았던 사실도 40년 뒤에야 전기 작가를 통해 알려졌다. ▷찰스 3세 영국 국왕이 지난달 암 투병 사실을 공개했을 때 역사학자들이 “다른 군주들은 엄두를 내지 못했던 일”이라고 평가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발표가 나온 데에는 국민들이 왕족의 일거수일투족에 현미경을 들이대고, 왕실의 치부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순식간에 확산되는 환경에서 암을 숨기는 게 불가능하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서거 이후 군주제 지지 여론이 약화되면서 “불평도 하지 않고, 설명도 하지 않는다”는 왕실의 오랜 방침을 고수하기도 어려워졌다. 캐서린 왕세자빈 역시 암 치료를 받는 병원의 직원들이 자신의 의료기록에 접근한 사실이 알려지자 결국 카메라 앞에서 서게 됐다는 분석이 많다. ▷왕실 신비주의가 통하기 어려운 요즘 왕족들은 사치와 안락함을 누리는 대가로 대중의 동경과 비난을 한 몸에 받는 공적인 존재가 됐다. SNS 시대에 왕관의 무게를 견딘다는 건 사생활의 자유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도 포함한다. 다만 산악자전거를 타고 럭비를 즐길 정도로 건강했던 캐서린 왕세자빈의 부쩍 수척해진 얼굴은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만들어진 이미지의 완벽한 왕실보다 국왕과 며느리가 줄줄이 암 치료를 받게 된 진솔한 모습의 왕실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 2024-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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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이든의 ‘자학 개그’ [횡설수설/신광영]

    16일 오후 10시 미국 워싱턴 그랜드하이엇호텔에서 열린 만찬 무대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올라섰다. 바이든은 시계를 힐끔 보며 말문을 열었다. “내 취침 시간보다 6시간이나 지났네요(Six hours past my bedtime).” 좌중에서 폭소가 터졌다. 82세인 그의 재선 도전에 고령 논란이 커지자 ‘자학 개그’로 받아친 것이었다. 바이든은 이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78)을 겨냥했다. “민주당과 공화당 대선 후보가 정해졌는데 한 명은 너무 늙은 데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다. 다른 한 명이 바로 나다.” ▷이날 행사는 미국 중견 언론인들이 대통령 등 권력자들을 초청해 격의 없이 소통하는 ‘그리드아이언(Gridiron)’ 만찬이다. 1885년 시작된 이후 역대 대통령 대부분이 초청됐다. 세계 초강대국 지도자인 미국 대통령도 이때만큼은 ‘최고 폭소 책임자(CFO·Chief Fun Officer)’로서 면모를 드러내는 게 중요하다. 잘만 하면 야당과 국민들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고 전세를 반전시킬 기회로 만들 수 있다. ▷“오늘밤, 사상 최초로 저의 출생 비디오를 공개합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2011년 이 만찬에서 중대 발표를 했다. 당시 트럼프 등 보수 인사들이 오바마 출생지 의혹을 제기하며 오바마는 아프리카 케냐에서 태어나 선거법상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던 때였다. 오바마의 엄중한 표정에 만찬장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곧 대형 화면에 영상이 재생됐다. 아프리카 평원에서 새끼 사자가 태어나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라이온 킹의 한 장면이었다. 배꼽을 잡는 참석자들 사이에서 트럼프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후 7년 뒤인 2018년 트럼프 역시 같은 무대에 섰다. 행사 며칠 전 사위인 재러드 쿠슈너 당시 백악관 선임고문이 족벌정치 논란 끝에 기밀 접근권을 박탈당했는데 트럼프는 이를 빗대 인사말을 했다. “늦게 와서 미안합니다. 사위가 보안 검사를 통과하지 못해 오래 걸렸네요.” 트럼프는 당시 참모들의 연이은 사퇴에 대해 “요즘 백악관을 떠나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다음은 누굴까. 멜라니아(영부인)일까”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마이크만 들고 서서 말로 관객을 웃기는 스탠드업 코미디는 미국에서 웬만한 가수 콘서트 못지않은 인기 공연이다. 이런 문화가 정치에도 투영돼 유머감각은 정치인의 자질 중 하나로 평가된다. 미 대선에서도 “내가 낙선하면 피바다가 될 것(트럼프)” “트럼프는 히틀러 앵무새(바이든)” 같은 험한 말들이 오가지만 가끔 등장하는 자학 개그는 격해진 긴장을 풀어주는 순기능이 있다. 상대의 정곡을 찌르고 유권자의 공감을 얻는 데도 촌철살인이 담긴 유머는 위력을 발휘한다. 우리 정치에도 다 같이 빵 터지는 순간들이 많아지면 막말과 혐오의 언어가 조금은 줄어들 것이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 2024-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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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신광영]테라 권도형 한국 온다니 “미국으로 보내라”는 피해자들

    유럽 발칸반도 소국인 몬테네그로 법원이 가상자산 테라·루나 폭락 사태 주범인 테라폼랩스 대표 권도형 씨를 미국으로 인도하라고 했다가 최근 항소심에서 이를 뒤집고 한국 송환을 결정했다. 국내 피해자만 20만 명이 넘어 다행스러운 소식 같지만 “차라리 미국으로 보내라”는 피해자가 적지 않다. 적은 돈이나마 보상받기 위해 어렵게 민사소송을 하느니 권 씨가 미국 감옥에 평생 갇혀 죗값이라도 치르게 하고 싶다는 것이다. ▷권 씨는 현지 법원에 한국에서 재판받게 해달라고 요구해 왔다. 그래야 빠져나갈 구멍이 많다고 본 것인데 틀린 계산이 아니다. 그를 자본시장법상 사기 거래로 처벌하려면 코인도 주식 같은 증권에 해당한다는 전제가 필요하지만 우리는 코인의 증권성에 대한 판단을 정립하지 못한 상태다. 다행히 유죄 판결이 난다고 해도 처벌에 한계가 있다. 우리는 여러 혐의가 유죄여도 가장 무거운 혐의에 대한 형량의 2분의 1까지만 가중할 수 있다. 현재까지 경제사범의 최대 형량은 40년이다. 반면 개별 혐의별 형량을 모두 합산하는 미국에선 100년형도 가능하다. 게다가 미국은 루나·테라 코인을 이미 증권으로 간주해 이익환수 소송을 진행 중이다. ▷글로벌 무대의 범죄자들에게 미국 사법체계는 재앙 그 자체다. 세계 최대 아동 성착취물 사이트를 운영한 손정우도 2020년 미국이 우리 법원에 범죄인 인도 요청을 해오자 미국행을 필사적으로 회피했다. 당시 손정우를 종신형까지 선고될 수 있는 미국으로 보내자는 여론이 들끓자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불법 계좌를 만들어 범죄수익을 은폐했다며 고소했다. 그로 인한 추가 수사와 재판이 이어지며 그의 미국 인도는 불발됐다. 손정우는 성착취 관련 혐의로는 1년 6개월을 선고받는 데 그쳤다. ▷권 씨가 한국으로 올 경우 그의 ‘법원 쇼핑’은 성공하는 셈이 된다. 그러니 그를 미국으로 보내 평생 감옥에 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법도 하다. 다만 피해자 중 일부라도 피해 보전을 받으려면 우리 사법체계로 그를 단죄해야 한다. 검찰은 지난해 서울 성동구 성수동 고급 주상복합을 포함해 권 씨의 국내 자산 2300억 원을 추징·보전해 놓은 상태다. 미국이 추산한 전 세계 테라 사기 피해액 52조 원에는 크게 못 미치지만 소액이나마 보상을 기대할 순 있다. ▷우리 손으로 테라 사건을 처리하다 보면 ‘제2의 권도형’을 막을 법과 제도를 정비할 계기를 만들 수도 있다. 루나·테라는 가치가 ‘0원’으로 완전히 증발하면서 피해가 명확해졌지만 일부 코인의 경우 사기성 투자 권유나 은밀한 시세 조종이 벌어지는데도 아직 피해가 구체화되지 않은 사례들이 있다. 권 씨를 수사하고 재판하면서 규제 공백을 뼈저리게 실감하고 가상자산 관련 제도를 촘촘히 보완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기회가 될 수 있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 2024-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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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신광영]“태아 성별과 낙태는 무관”… 이젠 여아 선호가 걱정?

    우리나라 산부인과 진료실에선 의사와 예비 부모들 사이에서 선문답 같은 알쏭달쏭한 대화가 흔히 오간다. 초음파 검사를 하다가 뜬금없이 아기 옷은 무슨 색깔이 좋을지, 어떤 장난감을 준비할지 등을 묻는 식이다. 서구에선 임신 4, 5개월쯤 의사가 태아 성별을 알려주고 부모는 이를 기념하는 성별 공개 파티를 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임신 32주까진 의료진이 태아 성별을 알릴 수 없게 한 법조항 때문에 부모들이 눈치껏 성별을 알아채야 한다. ▷이 법이 최근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정을 받았다. 37년 전 제정 당시 팽배했던 남아 선호 사상이 확연히 퇴조했고, 대부분의 낙태가 성별을 알지 못하는 임신 10주차 전에 이뤄진다는 게 주된 이유다. 다만 재판관 9명 중 3명은 성별 공개에 신중해야 한다는 소수의견을 냈다. ‘남아 선호가 아니더라도 부모가 원하는 성별로 자녀를 한 명만 낳으려 할 경우 성별에 따라 낙태가 이뤄질 개연성이 있다.’ 여아 선호로 인한 낙태 가능성 역시 우려된다는 취지다. ▷재판관들은 여아 선호를 보여주는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비중 있게 인용했다. 지난해 조사에서 응답자 중 59%는 ‘딸이 하나는 있어야 한다’고 답했는데 ‘아들이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응답은 절반 수준인 34%에 그쳤다. 딸이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답변은 모든 연령대에서 아들보다 더 높게 나왔다. ▷여아 선호 현상은 자녀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에 자식은 가계에 기여할 노동력이자 부모의 노후 대책 성격이 강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딸보단 아들이 유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녀 양육이 ‘고비용’ 그 자체인 요즘엔 그런 공식이 적용되기 어렵다. 여성의 경제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직장을 포기하고 육아만 할 경우 기회비용이 일단 크다. 대학 졸업 후에도 안정적인 직장을 못 잡고 부모에게 얹혀사는 자녀가 많다. 자녀의 경제력은 부모 세대를 넘어서기 어렵고, 노후 돌봄은 자녀가 아닌 국가의 몫으로 옮겨가고 있다. ▷요즘 부모들이 자식에게 기대하는 가치는 정서적 친밀감이다. 키울 때 애교가 많고, 노후엔 부모를 살뜰히 챙기는 건 아들보단 딸인 경우가 많다. 딸은 정서적인 면에서 평생 보험이란 말도 있다. 또 맞벌이 부부들 중에는 “육아에 할애할 시간과 자원이 부족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부모 말에 잘 따르고 빨리 철드는 딸을 선호하게 된다”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인구 전문가들은 남아를 선호했던 나라 중에 한국처럼 급격하게 여아 선호로 바뀐 사례를 찾기 힘들다고 한다. 최근 여아 선호 현상은 저성장, 청년실업, 열악한 육아 환경 등 우리의 고질적 문제와 연결돼 있어 ‘한국적 현상’으로도 볼 수 있다. 해결 기미가 잘 보이지 않는 문제들인 만큼 태아 성별 공개를 무작정 허용해선 안 된다는 헌재 재판관들의 소수의견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 2024-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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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신광영] “손잡고 떠납니다” 네덜란드 前 총리 부부의 동반 안락사

    “부부가 둘 다 많이 아팠고, 서로 혼자서는 떠날 수 없었다.” 드리스 판 아흐트 전 네덜란드 총리가 세운 연구재단은 최근 판 아흐트 전 총리 부부의 부고를 이렇게 전했다. 1950년대 대학 캠퍼스 커플로 만나 70년을 해로한 두 사람은 한날한시에 안락사로 생을 마감했다. 93세 동갑내기인 부부는 마지막 순간까지 손을 맞잡고 있었다고 한다. 판 아흐트 전 총리는 2019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회복하지 못했고 부인 역시 지병 끝에 동반 안락사를 선택했다. ▷세계 최초로 안락사를 합법화한 네덜란드에서 2022년 안락사를 택한 사람은 8700여 명이다. 이 중 동반 안락사는 58명(29쌍)으로 드문 편이다. 다만 2020년 26명, 2021년 32명으로 많아지는 추세다. 우리는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소극적 안락사만 허용하지만 해외에선 의사가 약물 투여 등으로 환자를 죽게 하는 적극적 안락사, 의사 도움을 받아 환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조력자살을 허용하는 곳이 적지 않다. ▷안락사가 생명의 존엄성을 훼손하는지를 두고 찬반이 팽팽하지만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인간의 기본권으로 인정하는 나라는 꾸준히 늘고 있다. 삶은 선물이지만 버리고 싶을 때 버리지 못한다면 짐이란 인식이 커지는 것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2015년 안락사를 허용하며 법 이름을 ‘생명종결 선택권법(End of Life Option Act)’이라고 지었다. 엄격한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도 2021년 안락사와 조력자살을 합법화했다. 타인이 목숨을 끊도록 도우면 최대 징역 10년형에 처하도록 했던 스페인의 전향적인 변화였다. ▷하지만 안락사 허용 국가에서도 환자가 자칫 안락사로 내몰리는 등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네덜란드에서 안락사 심사위원회가 열릴 때면 완화치료 등 대안이 없는지를 두고 격론이 벌어진다고 한다. 또 악용 가능성에 대비해 안락사 허용 결정까지 3중, 4중의 안전장치를 두는 나라가 대부분이다. 환자의 고통이 심각하고, 회복할 가망이 전혀 없으며, 의료적 대안이 없어야 하는 건 기본이다. 환자가 자발적으로 한 선택인지, 복수의 의사와 여러 번 면담하면서 결심이 일관되게 유지되는지도 확인하도록 한다. ▷우리나라는 죽음을 드러내놓고 얘기하기를 꺼려 왔지만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령화가 진행 중인 탓인지 인식 전환도 빠르다. 2021년 서울대병원 조사에서 국민 76%가 안락사 또는 의사 조력자살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5년 전 조사 때 찬성률(41%)보다 거의 두 배로 뛴 것이다. 조력자살이 합법인 스위스 국민의 찬성률(81%)과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 2022년 국회에서 존엄조력사법이 발의된 것도 이런 변화가 반영된 것이다. 죽음의 격에 대한 논의를 더 이상 미루기 힘든 때가 오고 있는 것 같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 2024-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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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신광영]의사 형사책임 면제, 기울어진 운동장 더 쏠릴 우려

    서울 이대목동병원 신생아 중환자실장이던 조수진 교수는 2017년 신생아 4명이 사망한 사건의 책임자로 지목돼 구속됐다. 사건 1년 전 소아과 분야 세계 3대 인명사전에 등재되는 영광을 누렸지만 의료사고로 한순간에 피고인이 됐다. 신생아들에게 오염된 영양제가 투여되는 과정에서 주의의무를 소홀히 한 혐의(업무상 과실치사)였다. 법원은 병원 측의 감염 관리 부실을 인정하면서도 의료진에게 형사책임을 묻긴 어렵다고 판결해 유족들이 크게 반발했다. 무죄로 결론 나긴 했지만 재판이 끝나기까진 5년이 걸렸다. 의료계는 이 사건으로 의대생들의 소아과 기피 현상이 더 심해졌다고 주장한다. ▷의료사고 형사책임 감경은 의사들의 숙원이다. 특히 소아과 산부인과 응급의학 등 필수 분야로 의사들이 오지 않는 건 열악한 근무 환경 외에도 소송 리스크가 주요 이유다. 정부가 최근 의료사고 시 의사에 대한 형사기소를 면제해주는 특례법을 추진하고 나선 것은 의사 증원에 따른 의료계 반발을 달래려는 목적이 있다. 이 법은 의사가 종합보험이나 공제조합에 가입해 의료사고 피해자에게 보상할 수 있다면 공소 제기를 할 수 없도록 한 게 핵심이다. ▷의료사고처리 특례법은 교통사고처리 특례법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운전자에게 자동차보험을 의무화하되 음주운전 등 중과실 외에는 인명 피해를 내더라도 형사처벌을 줄여주는 법이다. 의료행위는 운전과 비슷하게 사고 위험이 늘 있는데 실수로 낸 사고라면 피해자 배상에 집중하고 처벌은 최소화하자는 취지다. 하지만 두 법 사이엔 중대한 차이가 있다. 교통사고 특례법은 운전자에게 잘못이 있다고 전제하고 불가피한 사고였다면 운전자가 입증하도록 한 반면, 의료사고 특례법은 환자가 의사의 과실을 입증해야 한다. ▷현재 의료소송은 심각한 정보 비대칭에도 불구하고 환자가 의사 과실을 입증하도록 해 환자에게 크게 불리하다. 이런 상황에서 의사에게 형사 면책까지 주어지면 법의 저울은 의사 쪽으로 완전히 쏠릴 수 있다. 정부는 필수의료는 물론, 성형·미용 분야에도 특례법 적용을 논의하겠다는 입장인데 의료사고가 특히 많은 성형수술까지도 의사에게 ‘면책특권’이 주어지면 환자들은 무방비로 의사에게 생명을 맡겨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의료사고에 형사처벌이 능사는 아니다. 의사들이 사고 위험이 높은 환자들을 애초에 포기하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의사의 리스크를 줄여준다는 명목으로 환자 방어권을 외면해서도 안 된다. 영미법계에 있는 ‘사과법(apology law)’을 도입해 의료분쟁 자체를 줄이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의료사고 시 의사가 환자 측에 적극적으로 상황을 설명하고 사과해도 소송에서 불리한 증거로 활용되는 걸 막아주는 법인데 이 법 도입 이후 소송으로 가는 비율이 확 줄었다고 한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 2024-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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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태원 참사, 수사로 진상조사를 대체할 순 없다[수요논점/신광영]

    《금요일인 26일 저녁 서울 이태원 해밀톤호텔 옆 골목은 한산했다. “여기가 맞아?” “이렇게 좁았다고?” 골목 앞에서 두리번거리던 두 여성은 바닥에 ‘10·29 기억과 안전의 길’이라고 쓰인 동판을 발견하고는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군복 차림으로 혼자 온 20대 남성은 골목 한가운데를 몇 분간 서성였다. 사건이 나던 날 입대를 며칠 앞두고 송별회를 하러 이 골목을 지나갔다고 했다.그는 골목의 경사 구간에서 한참을 맴돌았다. 성인 4명이 나란히 설 수 있을 정도인 폭 3.2m에 길이 10m 남짓한 공간(10평)이었다. 그날 밤 이 10평 안에서만 300여 명이 겹겹이 짓눌렸다. 사망자 159명 중 대부분이 거기서 숨을 거뒀다. 시신들이 수습된 뒤 골목에는 주인 잃은 휴대전화 수십 대가 밤새 울렸다. 이태원 핼러윈 참사 이후 1년 3개월이 흘렀다. 우리는 얼마나 더 안전해졌을까. 그 많은 죽음을 왜 막지 못했는지 이제는 답을 발견한 것일까.》●현장 달라졌지만 땜질처방 우려 주말인 28일 오후 7시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U강남도시관제센터를 찾았다. 강남역 등 관내 인파 밀집지역을 비추는 폐쇄회로(CC)TV 화면이 10여 개 띄워져 있었다. 인파가 많이 모이는 120곳의 실시간 상황을 볼 수 있고 3.3㎡(1평)당 1명 이상이 감지되면 ‘주의’ 알람이 울리도록 설정돼 있다. 행정안전부가 이달부터 일부 지자체에 도입한 인파관리 시스템이다. 서울시도 이동통신 3사로부터 기지국 접속 정보를 제공받아 휴대전화 사용자 수를 추정해 인파 밀집 정도를 파악하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민상현 강남구 도시관제팀장은 “운영한 지 한 달쯤 됐는데 ‘주의’ 표시가 뜨는 상황은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고 했다. 경찰 112상황실에도 인파 밀집 신고에 적극 대응하라는 지침이 내려진 상태다. 서울경찰청 관계자는 “요즘은 사람이 몰린다는 신고가 들어오면 바로 출동해 요란할 정도로 조치한다. 적어도 이태원 같은 압사 사건이 재발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사건 당시 핼러윈처럼 주최자가 없는 행사의 경우 안전관리 주체가 모호하다는 지적이 일었는데 이를 반영해 지자체장이 책임지도록 하는 재난안전관리법이 지난해 12월 8일 국회를 통과하기도 했다. 이태원 사건 이후 현장에서는 조금씩 변화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부의 이 같은 대책들이 이태원 사건의 종합적인 원인 진단을 거쳐 도출한 방안인지에 대해선 아직 의문이 많다. 사건 발생 후 국회 국정조사가 진행됐고, 경찰 특별수사본부와 검찰 수사가 완료됐지만 참사 현장에서 제기된 핵심적 질문들에 대한 답은 명쾌히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족과 생존자들이 제기하는 이 질문들은 안전관리 부실 그 자체보다 안전관리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은 원인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태원에 핼러윈 인파가 심각하게 몰릴 것으로 예상돼 현장 통제가 필요하다는 사전 논의와 내부 보고가 여러 차례 있었는데도 왜 관할 지자체와 경찰·소방은 대비하지 않았는지, 참사 시작 4시간 전부터 압사당할 것 같다는 112 신고가 11건이나 들어왔고 최고 긴급 단계인 ‘코드0’으로 분류됐음에도 왜 조치가 없었는지는 구체적인 경위가 확인되지 않았다. 용산경찰서가 서울경찰청에 했던 기동대 지원 요청이 묵살된 과정, 용산서장이 참사 시작 40분 전 상황 보고를 받고도 도보 10분 거리인 사건 현장을 앞에 두고 왜 관용차에서 50분이나 허비했는지도 정확히 드러난 게 없다.●수사 목적 실체 규명의 한계 윤석열 대통령은 30일 이태원 사건의 진상을 밝힐 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하는 내용의 ‘이태원 참사 특별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검경 수사가 끝난 상황에서 추가 조사의 필요성이 없고 불필요한 정쟁을 야기할 것이란 이유에서였다. 이미 수사가 이뤄졌으니 그것으로 실체 규명이 충분히 됐다는 취지다. 하지만 대형 참사 처리에 있어 수사 중심의 접근은 한계가 뚜렷하다. 수사는 수사 대상이 될 만한 일부 개인의 행위가 형법에 위반되는지를 확인할 뿐 사건을 야기한 원천적 환경과 구조 등을 총체적으로 규명하진 않기 때문이다. 수사를 통한 사건의 재구성은 불법행위를 입증할 증거를 중심으로 관련 법리에 부합하는지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제한적이고 파편적일 수밖에 없다. ‘재발 방지’라는 일관된 관점을 유지하면서 참사의 시작과 끝을 촘촘히 밝히려면 정부나 정치권의 입김에서 독립된 전문가 중심의 진상조사가 필요하다. 이런 절차 없이 사건 원인을 피상적으로 진단해 내놓은 대책은 땜질처방에 그치기 쉽다. 이태원 사건 관련 후속 조치에 관여한 경찰 관계자는 “이태원 관련 의사결정자들이 만약 ‘세월호 같은 여객선이 침몰할 것 같다’는 보고를 받았다면 철저히 대비하고 조치했을 것이다. 압사라는 경험해 보지 못한 위험을 상정하지 못해 일을 그르친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이어 “단순히 인파 관리를 잘하라거나 특정 기관에 ‘앞으론 너희가 책임지라’는 식의 1차원적인 대응으로는 제2, 제3의 참사를 막기 어렵다. 이태원 때와는 다른 새로운 위험을 예민하게 인지하고 막을 수 있는 포괄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했다.●참사 후 진상조사 제도화한 선진국들 이태원 참사 희생자 159명 중 외국인 희생자는 26명에 달한다. 미국 영화사 파라마운트가 최근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통해 공개한 다큐멘터리 ‘크러시(Crush)’에는 외국인 희생자 유족들의 목소리가 생생히 담겨 있다. 이들은 한국 정부의 무책임한 사후 대응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 같은 선진국에서 이런 대참사가 벌어졌는데 국가 차원의 진상조사도 이뤄지지 않고 유족들에게 정확한 사건 경위를 설명하지 않는 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말이다. 대부분의 선진국은 대형 참사가 벌어지면 형사 처벌을 위한 수사와 별개로 전문가가 중심이 된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린다. 1989년 축구장에서 관람객 97명이 압사한 힐즈버러 사건을 겪은 영국은 대규모 인명사고 후에는 공적 조사위원회가 자동 구성되도록 제도화했다. 힐즈버러 사건 생존자이자 재난관리 전문가인 앤 에어 박사는 “진상조사는 공개 조사와 사인 규명, 범죄 수사 등 세 가지 축의 절차가 상호 보완하며 이뤄져야 사건 전체를 규명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호주도 대형 재난이 발생하면 진상 규명을 위한 왕립위원회가 곧바로 구성된다. 2009년 산불이 빅토리아 지역 600곳으로 번져 173명이 사망한 사건이 나자 2주 만에 조사위원회가 꾸려졌고 이후 1년 5개월에 걸쳐 조사가 이뤄졌다. 진상조사를 할지 말지를 두고 소모적 논란을 벌이기보다 지체 없이 조사에 착수해 충분한 기간 동안 다각도로 살핀다. 이태원 사건의 유사 사례로 거론되는 2001년 일본 효고현 아카시시 ‘불꽃축제’ 압사 사고 때도 관할 지자체는 위기관리, 방재, 구급의학 등 각 분야 민간 전문가로 구성된 조사위원회를 설치해 7개월간 조사를 벌였다. 조사는 사전 준비가 왜 부족했고, 위험이 예상되는데도 경찰과 지자체 간 협의가 왜 이뤄지지 않았는지 등에 집중됐다. 재발을 막을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대안은 진상조사를 통해 사건의 구조적 원인이 특정될 때 도출할 수 있다. 효고현 경찰이 만든 인파 경비 매뉴얼에는 “초등학생도 알 수 있게 쉬운 말을 쓰고, 문장을 45자 전후로 짧게 쓰며, 복문을 쓰지 말고 영어처럼 결론부터 말하라”는 등의 현장 밀착형 대응 요령이 담겼다. 일본항공(JAL) 여객기가 2일 하네다 공항 활주로에서 다른 항공기와 충돌했을 때 승무원들의 기민한 대처로 전원 생존한 것도 40년 전 대형 추락사건 이후 철저한 조사를 바탕으로 ‘피로 쓴 매뉴얼’을 만들고 훈련했기 때문이다. 영국의 긴급구조 시스템, 미국의 국가테러방지센터 등도 각각 힐즈버러 사건, 9·11테러 같은 대형 참사 후 구성된 진상조사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국가 대응 체계를 개선한 사례들이다.●사후 대응 선진 프로토콜 만들어야 이태원 참사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게 대형 인명사고에 공정하고 전문적으로 대처하는 선진적인 프로토콜을 만드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세월호 사건 이후 10년 가까이 이어져 온 진통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미룰 수 없는 과제다. 해외에서도 진상조사위원회 구성과 권한을 두고는 정치적 논쟁이 벌어지곤 한다. 특별법이 국회로 되돌아오면 여야가 조사위의 독립성과 공정성을 높이는 쪽으로 추가 협상을 해서라도 이태원 참사의 실체를 밝힐 기회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 2024-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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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신광영]“몇초만 기다렸다 건너세요” 빨간 숫자 보행 신호등

    횡단보도 녹색불이 켜질 때 몇 초가 남았는지 알려주는 신호등은 한 ‘딸바보’ 아빠의 교통사고에서 시작됐다. 1998년의 일이다. 아버지와 여섯 살 딸이 횡단보도에서 녹색등이 깜박이는 걸 보고 함께 뛰어 건너는데 갑자기 빨간불로 바뀌었다. 그 순간 승용차가 횡단보도로 달려들어 딸을 치었다. 중상을 입은 딸에게 전자부품 회사에 다니던 아버지는 약속했다. 보행 가능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숫자로 표시해 주는 신호등을 만들겠다고. 그 후 6년 뒤 경찰청은 그가 만든 신호등을 도입했다. 그의 딸이 다니던 초등학교 앞에 맨 먼저 설치됐다. ▷올 들어 서울 도심 횡단보도에는 빨간불의 잔여 시간이 표시되는 신호등이 등장했다. 녹색불 잔여 시간 표시가 건널 사람은 서두르고 아니면 다음 신호에 건너라는 메시지를 준다면 빨간불 시간 표시는 몇 초 뒤면 건널 수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보행자들을 다독인다. 빨간 숫자로 표시되는 잔여 시간은 99초부터 시작해 6초까지 줄어든다. 마지막 5초는 표시되지 않는다. 보행자들이 1, 2초를 남겨 두고 예측 출발을 하면 미처 횡단보도를 벗어나지 못한 차량에 치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시가 올해 350곳에 설치 예정인 이 신호등이 전국 최초로 시행된 곳은 경기 의정부시다. 도입 6개월 만인 지난해 초 효과 조사를 해보니 보행자 교통사고가 3분의 1로 줄었다. 시민들도 10명 중 9명이 환영했다. “무단횡단을 자제하게 된다” “아이들 인내심 교육에 유용하다”는 반응이 많았다. 민간에서도 이런 시도가 일찌감치 시작됐다. 티맵이나 카카오내비 같은 자동차 내비게이션 앱은 서울 일부 지역을 지날 때 전방 300m 앞에서부터 신호등의 색상과 잔여 시간을 표시해 준다. ▷횡단보도 빨간불이 얼마나 남았는지 카운트다운 해주는 기능은 성격 급한 한국인에게 특화된 서비스 같지만 꼭 그렇진 않다. 미국 독일 일본에도 최근 도입되고 있다. 사람들에게 갈수록 시간이 귀해지는 공통적 시대상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버스정류장이나 지하철역 전광판에는 분 단위로 특정된 도착 시간이 뜨고, TV나 유튜브 영상에 광고가 나올 때도 몇 초를 더 봐야 하는지가 화면에 표시된다. 잔여 시간 알림 기능이 여러 영역으로 확산되는 건 이용자들이 몇 분, 몇 초의 시간 동안 택할 수 있는 대안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횡단보도 앞에서 20∼30초짜리 쇼츠 영상을 보는 보행자라면 적색등 잔여 시간 표시 장치가 특히 유용할 수 있다. 녹색불로 바뀔 때까지 남은 시간을 알아야 보던 영상을 잠시 멈출지, 아니면 마저 다 볼지를 판단할 수 있다. 요즘엔 횡단보도 보행자 대기선에 LED등이 켜지는 바닥신호등이 설치되고 있는데 이 역시 스마트폰 보느라 교통신호에 둔감한 ‘스몸비(스마트폰 좀비)들’이 늘어나는 세태를 보여 준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 2024-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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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드라마 봤다고… 北 16세 소년에 12년 노동교화형 [횡설수설/신광영]

    북한의 한 야외경기장 무대에 16세 청소년 2명이 나란히 섰다. 이내 이들의 양손에 수갑이 채워졌다. 12년 노동교화형이 선고된 직후였다. 한국 드라마를 본 게 죄목이었다. 무대 뒤로 교복 차림의 학생 수백 명이 도열해 이 공개재판을 지켜봤다. 영국 BBC방송이 18일 탈북자 단체로부터 제공받아 보도한 영상 속 모습이다. 북한이 이념 교육용으로 2022년 제작한 이 영상에는 ‘썩은 꼭두각시 정권의 문화가 10대들에게 퍼졌다. 고작 16살인 이들은 스스로 미래를 망쳤다’는 내레이션이 흘렀다. ▷북한은 2020년 말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이란 무시무시한 법을 공포했다. 남한 영상물을 보거나 소지한 경우 5년 형이던 처벌을 15년 형으로 강화했다. 유포한 자는 사형이다. 미성년자도 예외가 아니다. “미드 보다 걸리면 뇌물을 주고 나올 수 있지만 한국 드라마 보다 걸리면 총살”이란 말이 탈북자들 사이에서 돌았다. ▷북한은 MZ세대가 K콘텐츠에 젖어드는 현 상황을 특히 경계한다. MZ세대가 기성 질서에 도전적인 건 북한이라고 다르지 않다. 이들은 ‘당이 있어 먹고 산다’는 부채의식으로부터 자유롭다. 장기간 기근 속에 성장해 김씨 백두혈통의 은덕이랄 것을 별로 누린 적이 없다. 생활용품은 상당수가 중국 암시장에서 온 것들이다. 거기에 섞여 들어온 남한 영상물을 보고 자라 선전선동이 쉽게 먹혀들지 않는다. 이들은 연인을 부를 때 ‘동지’ 대신 ‘오빠’ ‘자기’ ‘남친’ 같은 애칭도 곧잘 쓴다. 북한이 이런 남한 말투를 ‘핀셋 단속’ 하겠다고 나선 것도 오죽 불안하면 그럴까 싶다. ▷북한이 K콘텐츠에 늘 적대적이었던 건 아니다. 2018년 남측예술단이 평양 공연을 했을 때 걸그룹 레드벨벳은 환대를 받았다. 당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내가 레드벨벳을 보러 올지 관심들이 많았는데 원래 모레 오려다가 일정을 조정해서 오늘 왔다. 평양 시민들에게 이런 선물을 해줘 고맙다”고 했다. 하지만 이듬해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의 하노이 회담이 틀어지고 경제가 악화 일로에 들어서면서 북한은 문화 장벽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한국 드라마는 어려운 현실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약”이라고 탈북자들은 전한다. 큰 희망을 갖긴 어려워도 소소한 재미와 세상에 대한 호기심만은 포기할 수 없는 북한 젊은이들에게 K콘텐츠는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다. 이런 기본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 한 처벌을 아무리 세게 해도 효과는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날로 무자비해지는 북한의 내부 단속은 남한의 ‘문화 침공’이 그만큼 두렵다는 자백이나 다름없다. 미국의 한 싱크탱크는 북한이 미사일을 쏠 때마다 ‘오징어게임’이나 BTS 뮤직비디오가 담긴 USB를 평양으로 날려 보내자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당장 실현 가능성은 낮지만 북의 도발에 대한 응징 효과만은 확실해 보인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 2024-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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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신광영]“입 안 데고 한국 컵라면 먹게 해달라” 푸틴 정적의 청원

    러시아에서 가장 악명 높은 감옥은 북극권 시베리아에 있는 제3교도소(IK-3)다. 면회가 어려운 건 물론 편지도 주고받기 힘들 정도로 외진 곳이다. 영구 동토층에 있어 겨울이면 영하 20도 밑으로 내려간다. ‘북극의 늑대’라고 불리는 이 감옥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최대 정적인 알렉세이 나발니(47)가 지난해 말 이감됐다. 푸틴이 올 3월 대선을 앞두고 야권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나발니를 시베리아에 고립시킨 것이란 시각이 많다. ▷혹독한 옥중 투쟁 중인 나발니는 최근 제3교도소의 반인권 실태를 법원에 고발하며 한국의 컵라면 ‘도시락’을 언급했다. “판사님도 아십니까. 교도소 매점의 최고 인기 품목은 단연 도시락입니다. 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 7∼10분을 기다려야 아주 맛있게 익는데 식사 시간이 제한돼 뜨거운 채로 빨리 먹느라 혀를 데었습니다. 행복해야 할 시간이 지옥으로 변했습니다.” 교도소 측이 수감자가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을 아침에 10분, 저녁에 15분으로 제한하고 있어 이를 없애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시베리아 감옥에 갇힌 야권 지도자가 ‘도시락 먹을 자유’를 호소할 정도로 러시아에서 도시락의 인기는 대단하다. 컵라면의 현지 발음은 ‘다쉬락’이다. 우리나라에서 미원이 조미료의 대명사였듯, 러시아에선 도시락이 곧 컵라면이다. 컵라면 시장에서 도시락의 점유율은 62%에 달해 10년간 1위를 지키고 있다. 몇 년 전 초코파이가 러시아의 ‘국민 간식’으로 주목받은 데 이어 도시락이 ‘국민 라면’으로 자리 잡았다. 러시아는 해외 브랜드 중 샤넬, 아디다스, 펩시 등 유명 기업 220여 곳만 저명 상표로 등록해 줄 정도로 까다로운데 도시락은 그 틈을 비집고 저명 상표로도 인정받았다. ▷국토가 광활해 기차가 주요 교통수단인 러시아에선 휴대용 사각 용기에 수프를 담아 기차에 오르는 사람이 많다. 1994년 도시락이 러시아에 수출됐을 때 현지인들은 수프통과 비슷하게 생긴 직사각형 용기에 열광했다. 둥근 사발 모양 용기에 비해 가방에 넣기 편리하고 먹을 때 흔들림도 덜했다. 현지인 입맛에 맞게 국내에 없는 8가지 다양한 맛으로 출시한 전략도 주효했다. 2년 전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후로는 전시 비축용으로 도시락을 사재기하는 러시아인도 많아졌다. ▷러시아 대법원은 식사 시간 제한을 폐지해 달라는 나발니의 청구를 결국 기각했다. 나발니가 러시아인들에게 친근한 ‘도시락’을 언급한 것을 두고 감옥에서도 국민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려 한 것 아니냐는 해석도 있다. 사법부로선 푸틴의 눈엣가시인 나발니의 손을 들어주긴 어려웠을 것이다. 그가 입 델 걱정 없이 도시락을 즐기기 어렵게 돼 유감이지만 북극 교도소마저 녹이는 K푸드의 위력이 확인된 건 반가운 일이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 2024-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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