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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동하던 것들이 일제히 멈춰 선 건 월요일이던 28일 낮 12시 반쯤이었다. 달리던 전철은 지하터널 한복판에 서버렸고, 덜컹하며 멈춘 엘리베이터에 사람들이 갇혔다. 착륙하던 비행기는 관제탑과 교신이 끊겨 공항 상공을 맴돌았다. 도로엔 신호등이 꺼져 교차로마다 차량들이 뒤엉켰다. 카드 결제 단말기가 고장 나 손님들은 현금을 찾아 헤맸고, 냉동 기능을 상실한 진열대 속 아이스크림은 속절없이 녹아내렸다. 휴대전화는 인터넷이 끊겨 무용지물이 됐다. 그마저 배터리가 닳아버리자 낯선 이들끼리 전화 한 통을 사정했다. ▷대규모 정전으로 혼돈에 빠진 스페인과 포르투갈 주요 도시들의 풍경이다. 전기가 꺼진 사회는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비행기가 안 떠 발이 묶인 관광객들은 호텔을 예약하려 해도 스마트폰이 먹통이라 머물 곳을 찾지 못했다. 이동 수단이 자가용뿐이어서 주유소는 기름을 채우려는 차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도로변에는 목적지를 적은 종이를 흔드는 히치하이커들이 길게 늘어섰다. ▷스페인에서 15GW의 전력 발전량이 갑자기 손실된 게 정전의 발단이다. 스페인 하루 발전량의 60%에 달하는 양이다. 스페인과 전력망을 공유하는 포르투갈도 덩달아 피해를 봤다. 전력 손실의 정확한 원인은 아직 조사 중이다. 스페인은 태양광과 풍력을 통한 전력 생산 비중이 50%가 넘는데 재생에너지 확대 속도에 맞게 전력망과 저장 시설이 갖춰지지 않은 게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일부 지역 전력망이 복구되곤 있지만 완전 복구까진 일주일 넘게 걸릴 것이라고 한다. ▷유럽 서남부의 이베리아반도를 멈춰 세운 이번 정전은 21세기의 국가도 단번에 19세기로 후퇴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전기가 없으면 병원 수술실과 중환자실이 문을 닫고, 수도 가스 등 기본 인프라가 무력화된다. 운송망이 끊기는 건 한 나라의 혈액순환이 멎는 것과 같다. 정유공장도 돌릴 수 없어 이 상태가 며칠 더 이어지면 연료가 바닥난 차들이 하나둘 길가에 버려지고, 텅 빈 거리만 남게 된다. 정부가 재난 정보를 알리려 해도 인터넷과 TV가 먹통이라 조그만 휴대용 라디오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사이 불안한 사람들 틈새로 괴소문이나 가짜 정보가 스며든다. ▷우리에겐 당연해 보이는 일상이 있다. 스위치만 누르면 켜지는 불, 언제든 열리는 인터넷, 시간표에 맞춰 도착하는 지하철, 카드를 긁으면 들려오는 결제 완료음…. 이 모든 것은 전기가 끊기는 순간 곧바로 사라진다. 스마트폰 없인 하루도 버티기 힘들 만큼 ‘연결 사회’가 된 지금은 전기에 더 깊이 의존하고 있다. 갈수록 활용도가 커지는 인공지능(AI)도 전기를 엄청나게 먹는다. 우리의 문명이 깨지기 쉬운 얇은 껍질 위에 아슬아슬 얹혀 있다는 걸 이번 스페인 대정전이 일깨워준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18일 퇴임한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은 전날 한 대학 강연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헌재가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을 결정하는 데 왜 그리 오래 걸렸는지를 엿볼 수 있는 얘기였다. “설득에는 시간이 걸린다.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시간의 차이가 있다. 급한 사람이 늦은 사람을 기다려야지, 늦은 사람이 급한 사람을 어떻게 기다리겠나.” 만장일치에 이르기까지 재판관들 사이에 치열한 토론과 인내의 기다림이 있었다는 것이다. 문 권한대행은 “통합을 호소해 보자는 게 탄핵 선고문의 전부였다. 그래서 오래 걸렸다”고 했다. ▷재판관들이 정확히 어디에서 의견 차가 있었는지 아직 확인된 건 없다. 헌재 안팎에서 야당의 잘못을 결정문에 어느 정도 수위로 넣을지를 두고 이견이 있었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는데 문 권한대행의 강연에도 그렇게 해석되는 대목이 있다. 그는 정치권의 관용과 절제를 강조하면서 “야당에 적용되는 권리는 여당에도 적용돼야 하고, 여당에 요구되는 절제는 야당에도 요구된다. 양쪽에 적용되는 원칙이 다르다면 어떻게 통합이 되겠느냐”고 했다. 윤 전 대통령과 야당 중 어느 한쪽에만 불리한 잣대를 들이대지 않으려 했다는 의미로 들린다. ▷헌재가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문에 야당의 잇단 탄핵안 발의 등 일방적 행태를 적시한 것은 그런 논의의 결과로 보인다. ‘국회는 소수의견을 존중하고 정부와의 관계에서 관용과 자제를 전제로 대화와 타협을 통해 결론을 도출하도록 노력했어야 한다’고 한 대목이다. 헌재가 윤 전 대통령의 헌법 위반을 조목조목 짚으면서도 야당 역시 정치적 해결 노력이 부족했다고 지적해 설득력을 높였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더디게 가더라도 충분한 논의를 거쳐야만 또 다른 분열의 씨앗을 막을 수 있다는 걸 헌재가 보여줬다. ▷문 권한대행이 퇴임사에서 대화와 경청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이와 일맥상통한다. 그는 헌재 결정에 대한 학술적 비판은 수용하지만 ‘대인논증(對人論證)’ 같은 비난은 지양하자고 했다. 대인논증이란 사람의 경력이나 사상 등을 문제 삼아 근거 없는 주장을 펴는 것을 말한다. 이런 행태는 재판관 개인에 대한 부당한 공격일 뿐 아니라 법관들 간의, 법원과 국민 간의 합리적인 대화를 가로막는다. ▷대부분 판사 출신인 헌재 재판관의 구성을 다양화하자는 그의 제안도 비슷한 취지다. 각기 다른 배경을 가진 재판관들이 폭넓게 대화하고 차이를 좁혀야만 판사들만의 집단사고에 덜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독일이나 일본에선 변호사나 학자, 행정부 공무원, 정치인이 헌재 재판관이 되는 사례가 흔하다. 첨예한 사회적 갈등을 조정해야 하는 헌재는 고도의 정치력이 요구되는 법원이다. 다양한 재판관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야 그들 사이에서도 관용과 절제가 발휘될 수 있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법관은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다. ‘판사는 판결 쓰는 사람’이란 말도 있다. 판사가 판결문만 안 쓰면 판사 할 만하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그만큼 쓰기 어렵단 얘기다. 누가 옳고 그른지 반드시 가려내야 하고, 그 이유를 낱낱이 밝혀야 하며, 탈고한다고 끝이 아니라 누군가의 인생을 좌우하는 효력이 그때부터 발효되는 게 판결문이다. 법관은 선고를 하고 나면 그 판결이 합당한지를 따지는 여론의 법정, 역사의 법정에 서게 된다. 판결문이 읽기 어렵고 딱딱한 것은 판사들이 느끼는 이런 중압감 탓도 크다. 그렇다고 외계어 같은 어휘와 번역 투의 장문들이 판결문에 난무하는 게 정당화되진 않는다. 판결문은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혼나야 할 사람이 왜 혼나는지 이해할 수 있고, 그 판례를 적용받을 국민들도 삶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 판결문이 어려우면 법관이 상식과 동떨어진 판단을 해도 난해한 문장들에 가려져 잘 드러나지 않는다. 미국 법률가들이 “법의 언어는 그 법에 따라야 하는 사람들 귀에 외국어로 들려선 안 된다”(법철학자 빌링스 러니드 핸드), “독자가 판결문의 문장을 다시 읽어야 한다면 실패한 판결문”(전 연방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같은 말들을 신조로 삼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쉽고 공감 가는 ‘법의 언어’ 보여준 헌재 잘 쓴 판결문이 꼭 유려한 문체의 명문을 뜻하는 건 아니다. 상식에 맞는 논리로 쉽고 명쾌하게 썼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최근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결정문을 두고 ‘고개가 끄덕여졌다’는 반응이 많은 것은 잘 쓴 판결문에 가깝다는 의미일 것이다. 특히 화제가 된 문장이 ‘국회가 비상계엄 해제 요구를 신속 결의할 수 있었던 건 시민들의 저항과 군경의 소극적 임무 수행 덕분’이란 대목이다. 그간 윤 전 대통령은 계엄이 몇 시간 만에 해제돼 아무 일도 없었고, 경고성·호소용 계엄이라고 주장해 왔는데 이에 대해 헌재가 계엄이 좌절됐을 뿐 윤 전 대통령 스스로 멈춘 게 아니라고 꼬집은 것이다. 헌재가 12·3 계엄의 수많은 장면 중 그날 밤 국회에서 군인들을 맨몸으로 막아선 시민들, 멈칫멈칫하며 몸싸움을 피하는 장병들에게 주목한 것은 헌법의 시선이 국민의 눈높이와 일치한다는 걸 보여준다. 온 국민이 실시간으로 지켜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팩트이면서 그 어떤 법 기술로도 희석시킬 수 없는 반(反)헌법의 증거가 바로 그 장면이다. 문형배 헌재소장이 그 대목을 낭독할 때 많은 국민이 감명을 받은 건 우리 사회가 지향해온 가치와 상식이 틀리지 않았음을 헌법의 언어로 확인받는 순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좋은 판결문은 복종 대신 승복 끌어내 재판관들은 윤 전 대통령의 헌법 위반 사실을 조목조목 따질 때도 눈과 귀에 쏙쏙 들어오는 보통 사람들의 언어를 썼다. ‘대통령은 법치와 준법의 상징적 존재’ ‘모두의 대통령으로서 자신을 지지하는 국민을 초월해 사회를 통합시켜야 할 책무’ 등의 대목에선 쉬운 말로 헌법의 가치를 일깨웠다. 또 ‘윤 전 대통령이 야당의 전횡을 어떻게든 타개해야만 한다는 막중한 책임을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며 일부 주장을 인정하면서도 ‘국회를 배제 대상으로 삼는 것은 민주정치의 전제를 허무는 것’이라고 지적해 헌법의 경계를 명확히 했다. 헌재 결정 이후 우려했던 불복 움직임이 벌어지지 않은 건 재판관 전원일치 판결과 함께, 결정문이 국민의 보편적 상식을 쉽고 명료한 문장으로 풀어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판결에 시비를 걸려면 난해하고 비상식적인 주장을 펼 수밖에 없는데 그걸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어렵다. 잘 쓴 판결문은 읽는 이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복종 대신 승복을 끌어내는 힘이 있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재난이나 전쟁이 벌어진 참사 현장은 훗날 관광지가 되기도 한다. 이른바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이다. 9·11테러 현장인 미국 뉴욕의 그라운드 제로,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유대인 수용소, 원자폭탄이 투하된 일본 히로시마의 평화박물관 등이 대표적이다. 국내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는 서대문형무소, 비무장지대(DMZ) 같은 곳들이 있다. 역사적 고난을 물리적 증거로 남기는 동시에, 그때의 비극을 이겨냈다는 걸 보여주는 장소들이다. ▷얼마 전까지 이어진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관련 집회에는 외국인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시위대를 신기한 듯 바라보며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이 적지 않았다. 해외 언론도 현장 생중계까지 하며 한국의 집회 문화를 조명했다. 참가자들이 K팝을 떼창하고 야광봉을 흔드는 모습에 K팝 콘서트를 연상시킨다는 보도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 외국인들에게 서울 종로와 여의도 등 집회 현장을 구경시켜 준다는 관광 가이드들까지 등장했다. 우리 민주주의에 재난과도 같았던 계엄 사태로 빚어진 시위가 현재 진행형의 다크 투어리즘 상품이 된 것이다. ▷공교롭게도 지난해 12월 비상계엄 선포 이후 한국에 오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부쩍 늘었다. 올 2월까지 석 달간 입국한 해외 여행객이 전년 대비 19% 증가했다. 계엄 충격으로 원화 가치가 떨어져 한국 여행이 저렴해지기도 했지만 탄핵 집회에 대한 호기심이 영향을 줬을 것이란 분석도 있다. 외국인들 사이에서 한국의 시위 현장이 안전하다는 소문이 SNS로 많이 퍼졌다고 한다. 외국인들이 택시 기사에게 사람이 많이 모이는 집회 장소로 가달라고 한다거나, 서울 도심 호텔에 투숙하는 외국인들이 ‘집회 뷰(view)’가 나오는 방을 선호한다는 말도 들린다. ▷하지만 계엄 사태로 인한 전례 없는 불안과 혼돈이 외국인들에게 자랑거리일 수는 없다. 탄핵 찬반으로 갈려 과격하게 목청을 높이는 국론 분열의 속살이 외국인들에게 고스란히 노출됐다. 법원이나 재판관들을 공격하자는 일부 시위대의 선동은 한국의 국격을 의심케 했다.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된 뒤 대부분의 시위대가 헌법재판소 결정에 승복해 자진 해산했으니 망정이지 자칫 외국인들에게 싸움 구경만 시켜주는 민주주의의 흑역사를 쓸 수도 있었다. ▷탄핵 집회가 자주 열린 서울 안국동과 광화문 일대는 우리 민주주의의 전시장 같은 곳이다. 북촌, 경복궁 등 유명 관광지들과 붙어 있어 외국인들의 시선이 늘 향해 있다. 이런 접근성 때문에 탄핵 집회가 관광객들의 관심을 끌긴 했지만 다행히 시위 참가자들이 평화롭게 일상으로 돌아가면서 더는 다크 투어리즘 상품으로 유지되기 어려워졌다.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탄핵 집회는 뜨겁고 요란했지만, 뒤끝은 없었던 쿨한 이벤트로 기억됐으면 한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폭정과 독재 연구의 대가인 미국 예일대 석학 3명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대학 정책에 반발해 이민 길에 오른다. 새로 둥지를 틀 곳은 트럼프가 ‘미국의 51번째 주’라고 무시하는 캐나다의 명문 토론토대다. 이런 선택을 한 티머시 스나이더는 ‘폭정’(2017년) ‘가짜 민주주의가 온다’(2019년) 등 저서로 국내에도 꽤 알려진 역사학자다. 그는 트럼프를 아돌프 히틀러에 빗대 민주주의의 중대한 위협이라고 경고해 왔다. 예일대 동료인 그의 부인, 유명 철학자 제이슨 스탠리도 함께 떠난다. 스탠리는 “독재로 기울지 않는 나라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싶다”고 했다. ▷이들이 ‘학문적 망명’을 결심한 건 미 유수의 대학들이 트럼프의 압박에 학문의 자유를 빼앗기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컬럼비아대가 교내 팔레스타인 지지 시위를 허용한 것을 문제 삼아 반(反)유대주의를 부추긴다며 4억 달러(약 5900억 원)의 연방 자금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했다. 결국 대학 측은 집회 중 마스크 금지, 시위 학생 징계 등 방안을 내놓으며 항복했다. 하버드대, 펜실베이니아대 등도 ‘DEI(다양성, 형평성, 포용성)’ 관련 정책을 없애지 않으면 연방 예산을 끊겠다는 트럼프의 겁박에 비상이 걸렸다. ▷미 연구자들의 엑소더스(대탈출) 조짐은 학계 전반으로 퍼지고 있다. 최근 네이처지의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75%가 ‘미국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다’고 답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예산 절감을 명분으로 연구비를 대폭 삭감한 충격이 크다고 한다. 많은 연구 프로젝트가 중단 위기에 처했고, 적대적 이민 정책까지 겹쳐 연구실을 지탱해온 해외 인재들을 데려오기도 깐깐해졌다. ▷미국의 과학기술은 제2차 세계대전 때 파시즘과 유대인 탄압이 심했던 독일 이탈리아 등에서 망명해온 학자들 덕에 획기적으로 도약했다. 노벨상 수상자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독일), 엔리코 페르미(이탈리아) 같은 과학자들이 미 기술 패권의 토대가 됐다. 요즘 실리콘밸리를 이끄는 건 인도계인 순다르 피차이(구글), 사티아 나델라(마이크로소프트), 대만계인 젠슨 황(엔비디아), 리사 쑤(AMD) 등 이민자 출신 CEO들이다. 또 풀브라이트 등 장학 프로그램으로 전 세계 인재들을 빨아들인 게 국제개발처(USAID)인데 트럼프는 ‘국제 봉사에 왜 돈을 쓰느냐’며 이 기구를 없애려 한다. ▷해외 대학들은 지금이 미국 인재들을 데려올 기회라고 보고 있다. 토론토대뿐 아니라 영국 케임브리지대,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 등이 이들에게 자유로운 연구를 보장하겠다며 손짓하고 있다. 중국도 미국이 뒤로 빠진 틈을 타 개도국 인재들에게 두둑한 장학금을 내걸었다. 트럼프가 일부 열성 지지층만 바라보며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를 외치는 사이 미국을 초강대국으로 만든 인재들은 하나둘 떠나고 있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미얀마 제2의 도시 만달레이는 28일 발생한 규모 7.7 강진의 최대 피해 지역이다. 인구가 120만 명인 이 대도시의 더없이 취약한 구조 인프라가 이번 지진으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무너진 건물 틈새로 “살려달라”는 비명이 곳곳에서 난무하지만 잔해를 치울 장비가 없어 맨손으로 구조한다고 한다. 도시에 몇 안 되는 병원들은 이미 부상자로 가득 차 흙바닥에서 담요를 깔고 치료받는 환자들이 많다. 병원이 무너지는 바람에 들것에 실려 나온 한 임신부는 거리에 누운 채 출산했다고 한다. 이 와중에 폭염까지 겹쳐 생존자들이 질병 확산을 막기 위해 시신을 불태우고 있다는 얘기마저 들린다. ▷미얀마의 이 같은 아비규환은 비단 지진 때문만은 아니다. 4년 전 군부 쿠데타와 그에 따른 오랜 내전으로 이미 나라가 만신창이가 된 상태다. 군부와 저항세력 간 무력 충돌로 의료·구호 시설은 파괴됐고, 교통·통신 등 기반시설도 마비됐다. 많은 의사와 간호사들은 군사 정권에서 일할 수 없다며 의료 현장을 떠났다. 게다가 저항군이 장악하고 있는 만달레이 주변 지역은 군부 정권이 각종 물자 지원도 끊은 상황이었다. 군부는 반군을 소탕한다며 이 지역을 계속 공습해 왔고 심지어 지진이 나던 날에도 폭격을 퍼부었다. ▷미얀마 군부 수장인 민 아웅 흘라잉 최고사령관은 2021년 총선 패배에 불복해 쿠데타를 일으켰다. 민주화의 상징인 아웅산 수지 국가고문을 감금하고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후 4년간 군부에 맞서다 목숨을 잃은 사람이 4400여 명에 달한다. 미얀마를 외부와 단절시키기 위해 방송과 인터넷을 차단해온 군부는 대지진이 나자 “모든 국가의 도움을 받겠다”며 국제사회에 처음 손을 벌렸다. 그만큼 상황이 처참하단 얘기다. 원자폭탄 334개에 맞먹는 강진으로 현재까지 공식 사망자만 1600여 명에 이른다. 사망자가 1만 명이 넘을 수 있다는 분석(미국 지질조사국)도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미얀마를 돕겠다”고 하지만 회의적인 시선이 많다. 미국의 해외 구호를 총괄하는 국제개발처(USAID) 폐지를 추진하면서 원조 사업을 대폭 축소한 장본인이 트럼프다. 그에 따른 인도주의적 지원 공백이 현실화되는 첫 사례가 미얀마 지진일 거란 우려가 높다. 국제사회 지원이 이뤄지더라도 군부가 통치 지역 외에는 원조품을 공급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현재 미얀마의 거의 절반은 민주 진영 임시정부의 관할하에 있다. ▷최악의 시기에 강타한 초강력 지진으로 구조대와 의료진이 절실한 만달레이에는 총을 든 군인들만 넘쳐난다고 한다. 총으로는 단 한 명도 살릴 수 없다. 힘겹게 구조 활동을 벌이는 시민들은 외신에 “여긴 아무 지원을 받지 못하는 죽음의 도시”라고 말한다. 재난은 정치가 불안한 나라를 더 가혹하게 뒤흔든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지난해 12월 4일 새벽 국회의 비상계엄 해제 의결 직후 윤석열 대통령이 찾은 곳은 용산 합동참모본부 지하에 있는 결심지원실이다. 그곳에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과 박안수 전 계엄사령관 등 군 간부들이 있었다.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 시 대통령은 지체 없이 해제한다’는 계엄법에 따른다면 윤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계엄 해제와 함께 군 철수를 지시했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 윤 대통령 발언을 접한 방첩사령부 간부가 공수처에 한 진술은 그와 거리가 멀다. “정말 무서울 정도로 소름 돋는 일이 있었다”고 했다. ▷그의 진술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김 전 장관에게 “국회의원부터 잡으라고 했는데”라며 소리를 질렀다. “인원이 너무 부족했다”는 김 전 장관의 말에는 “그건 핑계다. 국회에서 의결했어도 새벽에 비상계엄을 재선포하면 된다”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 그는 당시 상황을 지켜본 방첩사 요원이 단체대화방에 이 내용을 공유해줘 알게 됐다고 했다. 그 자리에 있었던 다른 합참 간부도 윤 대통령이 “그러게, 잡으라고 했잖아요” “다시 걸면 된다”고 말하는 것을 직접 들었다고 공수처에 진술했다. ▷윤 대통령의 결심지원실 발언은 그가 계엄 당시 군경 지휘관들에게 의원들을 끌어내란 지시를 왜 그리 반복했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윤 대통령은 곽종근 전 특수전사령관에게 “의결정족수가 채워지지 않은 것 같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인원을 끄집어내라”고 했다. 조지호 경찰청장에겐 6차례나 국회의원 체포를 닦달했는데 이 중 2번은 국회의 계엄해제안이 통과된 이후였다고 한다.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관에게도 “해제됐다 하더라도 내가 2번, 3번 계엄령 선포하면 되니까 계속 진행하라”고 했다. 의원들을 끌어내고 국회를 장악하기만 하면 어떻게든 계엄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이런 지시가 나왔을까. ▷윤 대통령은 결심지원실에 와서 몇 분 뒤 김 전 장관과 박 전 사령관만 남겨 얘기를 나눴다. 세 사람이 어떤 대화를 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김 전 장관은 이 회의 직후 곽 전 사령관에게 중앙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할 수 있는지 문의한 것으로 조사됐다. 또 계엄 설계에 관여한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과도 통화하며 대응 방안을 상의했다. 이때까지도 계엄을 포기한 게 아니었다는 의심을 살 만한 대목이다. ▷윤 대통령이 계엄 해제를 발표한 건 국회가 계엄 해제를 의결한 지 3시간 반이 지나서였다. 합참 결심지원실에서 벌어진 상황에 비춰 보면 “국회를 무력화할 의사가 없는 2시간짜리 경고성 계엄”이라는 윤 대통령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 3시간 반 동안의 행적을 철저히 규명해야 하는 이유다. 윤 대통령이 그날 밤 합참에서 ‘의원부터 잡아놓고, 다시 계엄을 선포하면 된다’고 말한 게 사실이라면 정말 “소름 돋는 일”이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세계 여러 언어권에서 절친한 관계를 뜻하는 단어는 어원이 ‘함께 먹는다’인 경우가 많다. 친구를 프랑스에선 ‘코팽(copain)’, 이탈리아에선 ‘콤파뇨(compagno)’라고 하는데 둘 다 ‘빵을 나눠 먹는다’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중국어로 동료나 짝을 뜻하는 ‘夥伴(훠반)’도 ‘같은 불로 밥을 지어먹는 관계’라는 고대어에서 왔다. 우리말로 가족과 같은 말인 ‘식구(食口)’ 역시 마찬가지다. 직역하면 먹는 입, 해석하자면 한솥밥 먹는 사람들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가 함께 식사하는 관계를 귀하게 여겨왔다는 의미일 것이다. ▷요즘은 ‘혼밥’ 하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 그게 최선이어서라기보단 효율과 편의를 우선시한 선택이다. 원치 않는 상대와 불편하게 같이 먹느니, 식사 약속 잡느라 신경 쓰느니 혼자가 편하다는 것이다. 스마트폰으로 취향에 맞는 콘텐츠를 보며 호젓하게 식사를 즐길 수도 있다. 1인용 간편식과 배달 음식도 다양해져 혼밥은 더욱 손쉬운 선택이 됐다. ▷최근 발표된 유엔 세계행복보고서는 ‘혼밥 해서 행복하십니까’란 질문을 정면으로 던진다. 매년 140여 개국을 조사하는데 올해는 각국의 혼밥 현상에 초점을 맞췄다. 특히 1인 가구 증가와 고령화 속도가 가장 빠른 한국에 주목했다. 한국은 저녁을 다른 사람과 함께 먹는 횟수가 일주일에 평균 1.6회에 불과해 일본(1.8회)과 함께 세계 최하위권이다. 점심, 저녁을 다 합쳐도 4.3회에 그쳤다. 중남미는 9회, 유럽은 8회가 넘어 우리의 두 배다. 공교롭게도 행복지수 상위 10위권은 핀란드를 필두로 한 유럽과 코스타리카, 멕시코 등 중남미 국가들이다. 우리는 58위다. 지인과 식사하는 빈도와 삶의 만족도는 연관관계가 깊다는 게 이 보고서의 분석이다. ▷한국의 혼밥족 중에는 아동, 청소년들도 많다. 얼마 전 아이들이 혼밥을 할수록 행복감이 낮아진다는 연구 논문도 나왔다. 특히 저녁 식사를 편의점, 분식집 등에서 혼자 때우는 경우가 많은데 하교 후 각자 학원이나 독서실로 직행해야 해 가족이나 친구들과 식사 시간을 맞추기가 어렵다고 한다. 게다가 학원 시간에 쫓기고, 과제·시험 부담 때문에 인스턴트 음식이나 자극적인 음식을 찾는 경향도 강했다. 가족과의 편안한 저녁 식사는 한국 아이들에겐 사치에 가깝다. ▷영국 옥스퍼드대 학생 식당에는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는 긴 나무 테이블이 주로 놓여 있다. 학생들이 함께 밥을 먹도록 안쪽부터 차곡차곡 채워 앉는 게 오랜 전통이다. 식당이야말로 학생들이 서로 연결되고 이해할 수 있는 최적의 무대라는 게 이 대학의 철학이라고 한다. 이렇게까진 안 하더라도 마음 맞는 사람과의 식사를 자주 즐길 수 있도록 여러 대안들이 나와야 우리가 좀 더 행복해질 것 같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요즘 미국의 마트에선 이른 아침부터 달걀 손님들이 수십 m씩 줄지어 선다. 이들이 개장과 동시에 달걀 코너로 몰려들어 직원들은 안전사고라도 날까 봐 바짝 긴장한다고 한다. 구매 가능 개수가 1인당 12개로 제한돼 있어 더 가져가는 손님이 없는지도 살펴야 한다. 정오쯤 달걀이 한 번 더 입고되는데 아침에 못 사고 돌아간 이들이 더 필사적으로 달려든다고 한다. ▷조금이라도 덜 비싼 달걀을 사기 위해 벌어지는 오픈런 현장이다. 미국의 계란값이 너무 오른 탓이다. 올 1월 기준 12개들이 달걀 평균가(4.95달러)가 전년 동월 대비 50% 넘게 폭등했다. 뉴욕 같은 대도시에선 12개짜리 한 판이 10달러(약 1만4500원)가 넘는다. ‘금값’이다 보니 계란 털이범들도 나오는데 식당 냉장고에 있던 달걀 수십 판이 사라지는 사건부터 화물 트레일러에 실린 계란 10만 개가 통째로 도난당한 일도 있었다. ▷미국에선 최근 2, 3년 새 조류독감으로 암탉들이 대규모 살처분됐다. 자연히 달걀 공급도 크게 줄었다. 조류독감 예방에는 백신 등 보다 근본적 대안이 필요하지만 닭고기 주요 수출국인 미국은 백신 개발에 소극적이다. 백신을 맞은 가금류 제품은 일부 국가에서 수입을 꺼리기 때문이다. 현재로선 살처분에 의존하다 보니 조류독감이 덮치면 계란값이 크게 출렁인다. ▷흔한 식재료여서 만만하게 보이지만 계란은 물가 상승의 도화선이 되는 품목 중 하나다. 아침마다 계란 후라이나 오믈렛 등으로 거의 매일 먹기 때문에 조금만 비싸져도 바로 체감되는 데다 빵, 파스타 등 계란이 들어가는 다른 식료품도 같이 오른다. ‘에그플레이션(eggflation)’이란 말이 그래서 나왔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전방위적 관세 전쟁으로 물가 상승 우려가 큰 상황에서 계란값 폭등은 정권을 시험에 들게 하는 악재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미국은 최근 낙농 강국인 덴마크에 계란을 수출해 달라고 SOS를 쳤다. 얼마 전까지 덴마크령인 그린란드를 팔지 않으면 무자비한 관세를 물리겠다고 으름장을 놨는데 이젠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덴마크는 자국 내 계란 수요를 맞추기에도 빠듯하다며 난색을 보이고 있다. 미국이 도움을 청한 나라에는 한국도 있다. 충남 아산시의 양계농장에서 며칠 전 33만 개를 수출했는데 한국산 계란이 미국에 수출된 첫 사례다. ▷작은 것이 복병이 되곤 한다. 초강대국인 미국도 조류독감으로 계란이 부족해지면 덴마크나 한국과의 무역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트럼프가 이번 사태를 계기로 상대국을 존중하는 외교와 통상의 중요성을 깨달으면 좋으련만 그는 “조 바이든 전 대통령이 닭들을 대거 살처분했던 게 문제”라며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하고 있어 미국의 계란 파동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을 듯하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11일 필리핀 마닐라 공항에선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홍콩 방문 후 귀국하던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필리핀 대통령(80)을 인터폴 형사들이 에워쌌다. 재임 시절 범죄자들을 무자비하게 처단했던 철권통치자 두테르테에게 형사들은 체포영장을 내밀었다. 국제형사재판소(ICC)가 반인도적 살상 범죄 혐의로 발부한 영장이었다. “내가 무슨 범죄를 저질렀다는 거야!” 그는 역정을 냈지만 형사들에게 붙들려 ICC 본부가 있는 네덜란드 헤이그로 압송됐다. ▷두테르테는 “범죄자 10만 명을 죽여 물고기 밥이 되도록 강에 버리겠다”는 공약으로 2016년 대통령에 당선됐다. 필리핀 제2의 도시인 다바오시 시장 시절 범죄 용의자 1700명을 즉결 처형하는 극단적 방법으로 범죄를 척결했던 그다. 취임 후 공약대로 대대적인 범죄와의 전쟁이 벌어졌다. 마약 등 강력범죄 혐의자에 대해선 체포에 저항하면 사살하도록 했다. 그 과정에서 무고한 죽음이 적지 않았다. 사법절차 없이 처형된 용의자가 정부 집계로만 6000여 명이다. ICC는 1만2000∼3만여 명에 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필리핀에선 두테르테의 초강력 리더십을 지지하는 여론이 높았지만 국제사회의 비판이 거셌다. 당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그에게 “범죄 소탕은 올바른 방법으로 하라”고 훈계하기도 했다. ICC가 2018년 인권 유린 수사에 착수한 게 큰 위협이었다. 두테르테는 ICC 회원국 탈퇴로 맞섰고, 2022년 후임으로 선출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도 수사를 막아줬다. ▷그렇게 수사를 피해 온 두테르테가 결국 체포된 건 마르코스가 방패를 거둬들인 결과다. 몇 달 전 “ICC가 두테르테를 체포할 경우 협조하겠다”고 입장을 바꾼 것이다. 2022년 대선 때만 해도 둘은 굳건한 동맹이었다. 필리핀의 오랜 독재자의 아들인 마르코스는 퇴임 때까지 인기가 많았던 두테르테의 딸 사라가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나서준 덕에 당선됐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사이가 틀어졌다. 마르코스는 사라에게 국방장관직을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친미 외교를 펴 아버지의 친중 노선을 계승하려는 사라와 건건이 부딪쳤다. 급기야 여당 주도로 사라가 탄핵될 위기에 놓이자 다음 대선에서 딸을 대통령으로 만들려 했던 두테르테는 마르코스와 정적 관계가 됐다. ▷ICC에 구금된 두테르테가 어떤 처벌을 받을진 아직 불분명하다. 과거 반인권 범죄로 기소된 아프리카 지도자들이 10년 넘게 실형을 산 전례가 있다. 필리핀에선 마르코스가 정적 제거를 위해 해외 사법기관을 끌어들였다는 비판도 있지만 그냥 놔두면 큰 위협이 될 두테르테를 위해 그가 구명에 나설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두테르테에게 초법적인 범죄와의 전쟁은 대통령에 오르게 해준 정치적 자산인 동시에 스스로를 나락으로 내몬 양날의 칼이었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한 의료 관련 공익법인 이사장은 지난해 백화점 상품권 수십억 원어치를 사들였다. 그러곤 상품권을 되팔아 현금으로 바꾼 뒤 자기 계좌로 입금했다. 기부받은 돈으로 ‘상품권 깡’을 한 것인데 거리낄 게 없었는지 상품권을 살 때 법인카드로 긁었다. 최근 국세청이 확보한 그의 법카 결제 내역에는 귀금속도 다수 있었다. 함께 적발된 다른 공익재단은 기부금으로 고가의 주상복합 아파트를 샀다. 임대 수익금으로 공익 활동을 했다면 문제가 없지만 재단은 고액 기부자의 가족들에게 이 아파트를 공짜로 내줬다. 기부자가 재단을 우회해 세금을 안 내고 아파트를 사실상 소유하고 이용할 수 있도록 도와준 셈이다. ▷공익법인은 공익 목적으로 출연한 재산에 대해 증여세 면제 등 각종 혜택을 받는다. 그 대신 기부금이나 출연금을 공적 용도로 써야 한다. 복지, 의료, 교육 등 분야에 더 많이 기부가 이뤄지도록 도입된 제도지만 공익으로 위장한 ‘사익법인’이 적지 않다. 지난해 한 공익재단 대표가 기부금으로 수억 원대 골프장 회원권을 사들여 사적으로 쓰다가 걸린 일이 있었다. 수백억 원대 토지를 출연받아 놓고 기부자가 쓸 개인 건물을 짓거나, 재단 자금으로 기부자 손녀 유학비를 대는 등 부당 거래가 이뤄진 사례도 있다. ▷일부 자산가들은 세금 회피나 재산 보호를 위해 공익법인을 이용하기도 한다. 공익법인에 출연한 재산은 상속세나 증여세를 물지 않고, 채권자에게 압류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재단 명의로 고가 아파트를 사서 자녀에게 제공하거나 재단 돈으로 가족에게 허위 급여를 지급하는 등 재산을 우회시키는 수단으로도 쓰인다. 게다가 공익을 중시한다는 이미지까지 얻을 수 있어 여러모로 남는 장사다. ▷이 때문에 외부 감시가 철저해야 하지만 국세청에 공시된 공익법인은 10곳 중 3곳꼴이다. 엉터리 공시도 많다. 국세청이 지도 감독을 강화하고 있다곤 해도 총 4만 곳에 달하는 공익법인을 꼼꼼히 살피긴 쉽지 않다. 출연자와 특수관계에 있는 사람이 이사장 등 임원진을 맡아 재단 운영을 주도하는 경우가 많아 내부 감시에도 한계가 있다. ▷연말연시가 되면 노점상이나 분식집을 해온 어르신이 평생 모은 돈을 장학재단 등 공익법인에 쾌척했다는 미담을 자주 접하게 된다. 얼굴도 모르는 이들을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준 기부자들에게 일부 공익재단의 부정 행태는 큰 상처를 안기는 배신 행위다. 공익법인이 신뢰받지 못하면 설립 목적에 맞게 묵묵히 공익 활동을 해온 다른 재단들까지 의심받게 된다. 또 사회 전반의 기부 의욕이 꺾이고, 어렵게 일궈온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려는 자산가들도 망설일 수 있다. 무엇보다 공익재단의 도움이 절실한 사람들에게 기회의 문이 더 좁아지는 게 가장 뼈아픈 결과일 것이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12·3 비상계엄 며칠 뒤 평소 알고 지내던 미국 일간지 서울 특파원이 연락을 해왔다. 8년 넘게 한국 정치와 북한을 취재해 온 그가 대뜸 물었다. “최근 한국 이슈 중에 내가 놓친 게 있어?”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선포가 너무 갑작스러워 자기가 모르는 중대 사유가 있는지 궁금하단 취지였다.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아 우물쭈물하는 사이 그는 “도대체 왜”를 반복하며 의아해했다. 계엄 사태 초기 외신들의 반응이 대체로 그랬다. 한국 같은 선진 민주주의 국가에서 계엄령이 내려졌다는 데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외신의 눈에 비친 비상계엄 3개월 윤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 탄핵심판이 한창이던 지난달 초 그는 다시 연락을 해왔다. 한국 언론을 아무리 봐도 계엄의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며 “내가 놓치고 있는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윤 대통령이 주장하는 ‘계몽령’이란 표현을 영어로 어떻게 옮겨야 하느냐고도 물었다. 나름대로 설명을 해줬지만 그는 전쟁 중인 국가에서나 하는 ‘계엄’이 ‘계몽’과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지 끝내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계엄의 충격이 잦아든 뒤부터 해외 언론은 보도의 초점을 실체 규명에 맞췄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정치적 도박”(BBC)임에도 윤 대통령에게 어떤 목적과 계획이 있었는지를 궁금해했다. 윤 대통령이 부정선거를 주장하면서도 뚜렷한 증거를 내놓지 못한다는 점이 특히 주목을 받았는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21년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1·6 의사당 폭동을 선동한 것과 윤 대통령을 비교하는 보도(뉴욕타임스 등)가 이어졌다. 윤 대통령이 반국가세력 척결을 주장한 것에 대해 ‘반국가세력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는 지적(교도통신)도 나왔다. 한동안 간헐적으로 나오던 외신 보도는 윤 대통령 체포를 두고 벌어진 극한 대치, 서울서부지법 난동, 양분된 탄핵 찬반 시위를 계기로 다시 불이 붙었다. 해외 방송사들은 코로나19 때 한국 현지를 연결해 선도적인 방역 모델을 소개하곤 했는데 이번엔 부끄러운 한국 정치의 실상이 전 세계로 생중계됐다. 외신들은 한국 민주주의의 회복력을 인정하면서도 정파 간 대립이 계엄 사태로 더 극단화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일본의 한 일간지 특파원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당시만 해도 질서 있게 새 정부가 들어섰는데 이번엔 진보 보수의 접점이 없고 갈등이 너무 과격해 과연 봉합이 될지 걱정”이라고 했다. 계엄 사태 석 달이 된 요즘 해외 언론의 관심은 ‘계엄 이후’로 옮겨가고 있다. 윤 대통령 탄핵 이후 대선이 치러지면 리더십의 공백은 채워지겠지만 깊이 팬 분열의 골이 메워질지에 대해선 의문을 표하고 있다. 지금처럼 여론이 양극단으로 갈리면 누가 대통령이 되든 정파적 색채가 강해질 가능성이 높고, 극단적으로 행동하는 지도자는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기 어려워 외교적 경제적 손실이 클 것이란 시각이 많다. 한 한국계 미국인 기자는 최근 통화에서 “그동안 숱한 고비를 헤쳐온 한국이 이젠 미래가 불확실한 나라가 된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권력 공백 채워져도 분열 메워질지 걱정 요즘 한국 주재 해외 특파원들 사이에선 “본사에 위험수당을 신청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온다고 한다. 계엄 선포로 군인들이 동원되고 법원에 난동이 벌어지는 나라에서 일해야 하는 상황을 두고 나오는 말이다. 외국 기자들은 12·3 계엄선포문에서 언론·출판이 제한된다는 내용을 보고 크게 놀랐다고 한다. 그런 불안감 때문인지 이번 칼럼을 위해 연락했던 외국 기자들 대부분이 이름과 언론사를 익명으로 써달라고 했다. 외신을 통해 국제사회에 퍼지는 ‘불안한 한국’의 이미지는 계엄 사태가 끝난 뒤에도 오래 남게 될 것이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나종호 예일대 정신과 교수(42)는 한국에서 의대를 나와 미국에서 전공의 수련을 한 의사다. 현재 예일대 산하 병원에서 환자들을 만나고 중독과 자살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미국의 정신 건강 관련 문화와 제도를 경험해 온 나 교수는 그만의 시선으로 한국을 관찰해 왔다. 그는 배우 김새론 씨가 과거 음주 운전 사건 이후 집요한 비난에 시달리다 최근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소셜미디어에 글을 올렸다. ‘실수하거나 낙오된 사람을 버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지나가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거대한 오징어 게임 같다’고 썼다. 죄는 엄히 처벌하되 사람에게 파괴적 수치심을 부여해 벼랑으로 내모는 일은 이제 멈춰야 한다고 했다. 1일 화상 인터뷰로 그를 만나 더 자세한 진단을 들어봤다.》―한국에선 연예인들 자살이 유독 많은 것 같다.“한국의 연예인 사회는 일종의 자살 유가족 집단이라고도 볼 수 있다. 제 지인이 한 아이돌 가수의 빈소에 갔더니 비슷한 또래 가수들이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바닥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자살자의 유가족은 자살 위험이 높은데, 좁은 연예인 사회에서 동료의 자살을 자주 봐왔기 때문에 더 취약할 수 있다.”―정신 건강 관리가 특히 중요한 직업인 것 같다.“미국 투어를 온 K팝 그룹으로부터 상담 요청을 받은 적이 있다. 대형 소속사의 유명 가수들이어서 정신 건강도 잘 관리받는 줄 알았는데 미국에 있는 저한테 도움을 청해 와 놀라웠다. 연습생 시절엔 혹독한 훈련을 받느라 상담받을 여력이 없었을 것이고, 유명해진 뒤엔 정신과 치료를 받는 게 알려질까 봐 미뤄 온 게 아닐까 싶다.”―연예인들은 인격적 비난에 취약한 편인가.“이들에게 여론의 공격은 정신적 상처는 물론 생계와도 직결된 문제다.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올 길이 막혀버린다. 김새론 배우도 카페 일을 하며 재기하려 했던 것 같은데 결국 좌절됐다. 잘못에 대해선 당연히 처벌받아야 하지만 일상으로 돌아올 퇴로가 완전히 차단당하면 누구라도 버티기 어렵다.”―이번 사건에서 오징어 게임이 떠오른 이유는.“오징어 게임 참가자들은 옆에서 많은 사람이 죽는 걸 보고도 금방 또 잊고 다음 게임으로 넘어간다. 연예인들 자살이 이어지는 현 상황도 비슷하다. 잠시 추모하는 듯하다 어느새 잊고 또 다른 연예인을 죽음으로 내모는 행태가 반복되고 있다. 누군가가 죽어야 굴러가는 오징어 게임 속에서 살고 있는 게 아닌데 현실은 그렇지 않아 안타깝다.”―연예계에서만 벌어지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동의한다. K팝 아이돌의 정신 건강 문제도 한국 사회 전반의 치열한 경쟁 문화에서 파생된 게 아닐까 싶다. 요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좋은 학원에 가기 위한 ‘7세 고시’까지 생겼다고 하는데 청소년들도 아이돌 연습생들 못지않은 경쟁 속에 살고 있지 않나.”‘가용 한도 120% 사회’ 한국 ―미국에서 보는 한국인들의 삶은 어떤가.“미국 병원 레지던트로 있을 때 병원 자체가 가용 한도의 80% 정도로 굴러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국은 가용 한도의 120% 이상을 요구하는 것 같다. 남들보다 앞서야 하고, 끝까지 밀어붙여야 한다는 압박을 늘 받았던 것 같다. 한국에선 감기에 걸리면 마음이 편해서 좋았다. 쉬어도 된다고 스스로 정당화가 되니까. 주변에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런 근성이 경제 성장의 에너지였지만 그 결과 번아웃과 우울증에 걸리는 사람이 많아지면 오히려 성장을 방해할 수 있다.”―‘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아직 많다.“노력의 가치는 소중하지만 맹신하면 부작용도 크다. 그런 인식이 지나치면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단정하게 된다. 그러면 낙오자를 버리고 가는 사회가 될 수 있다.”―낙오의 대가가 혹독해 ‘공정’에 예민한 것 같다.그래서 객관식 위주의 줄 세우기식 입시가 유지되는 것 같다. 결과 시비를 줄이려면 점수가 숫자로 나와야 하고, 그걸로 서열을 정하는 것이다. 이런 환경에선 나보다 우위에 있는 사람을 우러러보게 되고 아랫사람에겐 가혹해지기 쉽다. 당하는 사람도 내가 더 열심히 안 한 탓이라고 자책하게 된다.우울증 향한 편견 보여준 하늘이 사건나 교수는 지난달 하늘이 사건과 관련해 ‘우울증엔 죄가 없다’는 글을 올렸다. 가해 교사의 우울증은 범행과 무관하고, 교사가 폭력적인 전조 증상을 보였을 때 신속한 분리 조치를 하지 않은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교사의 우울증을 문제 삼는 건 살인범이 당뇨병을 앓았다는 이유로 당뇨 탓에 범행했다고 보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했다.―이 사건 대책에 교사들 정신 검사가 포함됐다.“부적격자를 솎아내려는 취지라면 교사들이 정신 질환을 더 숨기려 할 것이다. 서이초 사건 이후 교사들 자살이 이어졌는데 그런 대책은 교사들을 더 위험으로 내몰 소지가 있다. ‘교사들이 마음 놓고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해 달라’는 하늘이 아버지의 호소와도 역행하는 것이다.”―가해 교사의 우울증에 왜 관심이 쏠렸을까.“정신 질환에 대한 낙인을 보여주는 것 같다. 링컨 대통령은 심한 우울증을 앓았는데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이라는 걸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살인 사건처럼 안 좋은 일에는 우울증이 마치 원인인 것처럼 부각된다.”―미국에선 정신 질환에 대한 인식이 다른가.“미국 병원에는 정신과 응급실이 있다. 자살 생각이 강하게 들거나 심한 조현병 증상을 겪는 환자들이 새벽에도 응급실에 온다. 이런 상황은 중증 외상 환자 못지않은 긴급 상황이다. 환자 본인의 생명은 물론, 주변인들의 안전과도 직결된다.”―상처가 안 보이면 안 아프다고 여기기 쉬운데….“우울증 아내를 돌보던 남편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자살 생각을 억누르지 못하던 아내를 응급실에 데려갔다가 ‘멀쩡해 보이는데 왜 왔느냐’고 거부해 무릎 꿇고 빌었다고 한다. 한국의 응급실 사정이 열악한 건 안다. 그럼에도 한국은 우울증에 걸렸을 때 치료받는 비율이 11%로 매우 낮고(미국은 66%), 자살률이 20년 넘게 세계 1위인 걸 고려하면 정신과 응급실이 필요하다.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라고들 하는데 중증의 우울증은 뼈가 부러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가만 놔두면 낫지 않는다.”―미국 전공의들은 정신 상담을 받는다고 들었다.“병원에서 거의 무료로 해준다. 거기엔 자본주의적 계산도 있다. 전공의들의 정신 건강이 양호해야 비용을 아낀다고 보는 것이다. 사람이 우울하면 집중을 못 해 효율이 떨어지고 실수도 많아진다.”―정신 건강에 투자하는 게 돈을 버는 길인가.“정신 질환이 방치되면 노동력 손실, 생산성 감소, 복지 지출 증가로 이어진다. 몇 년 전 연구를 보면 우울증 환자가 5명 중 1명 정도만 치료받는다고 할 때 1만2000명이 초과 사망하고 GDP(국내총생산) 손실이 133조 원에 달한다고 예측됐다. 우리나라는 우울증 치료율이 10명 중 1명도 안 돼 손실이 더 클 것이다.”―한국은 우울감을 더 키우는 사회가 되고 있다.“한국인의 삶은 빠른 속도의 트레드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계속 뛰는 것과 비슷한데, 트레드밀에 오르는 나이가 갈수록 어려지는 것 같다. 그러면 삶의 연료가 금방 떨어지고 우울증이 찾아올 가능성이 높다. 초등학생 자살률이 최근 8년 새 5배 늘었다는 통계를 가볍게 보면 안 된다.”―한국의 자살률도 여전히 높은 상태다.한국처럼 자살률이 20년 넘게 1위인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다른 나라들은 자살율이 세계 최고로 나오면 다들 깜짝 놀라서 국가 주도로 자살률을 다 낮췄다. 북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그랬고 일본도 한때 우리만큼이나 자살률이 높았지만 지금은 우리의 2/3도 안 된다.만일 내가 그때 내 말을 들어줬더라면나 교수는 서울대 심리학과와 의학전문대학원을 거쳐 예일대 교수가 됐다. 화려해 보이는 경력이지만 그의 20, 30대는 불안감, 우울감이란 시한폭탄을 안고 조마조마해하며 버틴 시기였다. 그는 지난해 출간한 책 ‘만일 내가 그때 내 말을 들어줬더라면’에서 학생 시절 애써 숨겨 왔던 고통을 솔직하게 털어놨다.―당시 불안과 우울 증세가 어느 정도였나.“하루는 우연히 마주친 선배가 ‘얘 말하는데 입술 떨리는 것 봐. 괜찮니?’라고 물어왔다. 그 전부터 불안하면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곤 했는데 얼굴로도 표출된 것이다. 그때라도 치료받았어야 했는데 입술이 떨리지 않도록 지그시 깨무는 습관이 생겼다. 의전원 시절엔 의예과 마치고 온 대부분의 동기들보다 대여섯 살이 많아 발표 조장을 맡곤 했지만 마이크만 잡으면 너무 떨어서 제대로 발표를 못 했다. 병동 실습 땐 교수님 질문에 블랙홀에 빠지는 일도 많았다. 나잇값도 못 한다는 생각에 갈수록 위축됐고 동기들도 피하게 됐다. 우울감에 빠져드니 집중력이 떨어지고 무기력해져 공부도 자취방 침대에 누워서만 겨우 했다. 어떻게든 졸업은 하자는 생각에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는 시험 족보를 눈에 바르듯 계속 봤다.”―도움을 받아볼 생각은 안 했나.“동기들과 술자리 중 우울증을 앓다가 유급한 친구 얘기가 나온 적이 있다. 동기들이 ‘그 친구 멘털이 강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고 말하는 걸 듣고 나도 티 내면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동기들에게 민폐를 끼쳐 미안했는데 더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의대를 그만둘 생각은 안 했나.“부모님께 학교를 못 다닐 것 같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부모님은 ‘힘들면 언제든 그만둬도 된다. 어떤 선택을 해도 너를 지지한다’고 해주셨다. 만약에 ‘이제 곧 졸업인데 고지가 눈앞이니 조금만 참아보자’며 설득하려 하셨다면 더 깊은 우울로 빠져들어 그만두게 됐을 것 같다.”―책에서 약점을 고백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뉴욕을 걷다 보면 세계적 수영선수 마이클 펠프스가 나오는 광고판을 보게 된다. 펠프스 하면 올림픽 때 결승점에 맨 먼저 도착해 환호하는 장면이 익숙한데 그는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광고 속 그는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로 ‘심리 치료는 제 인생을 바꿨다. 당신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저는 펠프스가 20개 넘는 금메달을 딴 것보다 자신의 우울증을 알려 비슷한 고통을 겪는 이들을 도우려 한 게 더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누구보다 강할 것 같은 사람이 약점을 솔직히 내보이면 다른 사람들도 용기를 내서 도움을 청할 수 있을 것 같다.”―정신 건강 면에서 한국에 가장 필요한 건 뭘까.“관대함이다. 나의 취약점을 꺼내 보일 수 있고 그걸 포용해주는 사회가 되면 좋을 것 같다. 그러려면 나 자신에게 먼저 관대해져야 한다. 내 안에 화가 덜 쌓이면 타인에게 들이대는 잣대도 너그러워진다. 나를 아끼는 마음과 남을 감싸는 마음은 서로 연결돼 있다.”나종호 예일대 의대 정신과 교수△2009년 서울대 심리학과 졸업△2014년 서울대 의학전문대학원 졸업△2016년 미국 하버드대 보건대학원 졸업△2016~2017년 메이오 클리닉 정신과 레지던트△2017~2020년 뉴욕대 정신과 레지던트△2021년 예일대 중독정신과 전임의△저서 : ‘뉴역 정신과 의사의 사람 도서관’(2022년) ‘만일 내가 그때 내 말을 들어줬더라면’(2024년)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광주의 한 소방서가 한 달 전 빌라 화재로 뒤탈을 겪고 있다. 화재 직후만 해도 신속한 조치로 인명 피해를 최소화했다고 평가받았던 사건이다. 불이 난 시간은 오전 3시경이었다. 2층 주인집에서 시작된 불이 4층 빌라 전체로 번졌다. 소방관들이 한 집씩 문을 두드리며 주민들을 대피시키는데 여섯 집에서 응답이 없었다. 새벽이라 깊이 잠들어 있거나 연기에 의식을 잃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불길이 빠르게 퍼지고 있어 지체할 새가 없었다. 소방관들은 여섯 집의 현관문을 강제로 뜯고 들어갔다. ▷소방관들의 대응은 칭찬할 만했지만 현관문 수리비를 누가 부담할지를 놓고 문제가 생겼다. 통상 화재 진압 중 발생한 피해는 건물주가 든 화재보험으로 배상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 화재로 사망한 건물주는 보험에 들지 않았다. 소방서가 가입한 행정배상보험이란 것도 있는데 소방관의 과실로 손실이 생겼을 때만 적용된다. 이번처럼 적절한 조치로 인한 피해는 보험 처리가 안 된다. ▷소방 활동은 불가피하게 재산 피해를 수반한다. 소방관들이 아파트 베란다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유리창을 깨거나, 유리 파편이 떨어져 주차된 차량을 파손하기도 한다. 나무 위 벌집을 제거해 달라는 요청에 사다리를 타고 화염방사기를 쏘다가 나무에 불이 옮겨붙자 비싼 나무를 망쳐놨다며 배상을 요구받는 일도 있다. ▷소방관들의 민·형사 책임을 면제해주는 법이 몇 년 전 생기긴 했다. 하지만 피해가 불가피했음을 소방관이 입증해야 하고,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주민들 민원이 계속돼 십시일반 돈을 걷어 배상하는 일이 아직도 적지 않다. 일부 소방관들은 열쇠 전문가를 초빙해 문을 부수지 않고 개방하는 법을 배운다고 한다. 소방차 진입을 막는 불법 주정차 차량에 대해선 파손해도 면책되는 법이 도입되긴 했지만 이 역시 차주들 민원과 소송 부담으로 집행 사례가 거의 없다. ▷빌라 화재 현관문 수리비 500여만 원은 소방 예산을 대는 광주시가 물어줄 방침이라고 한다. “물에서 건져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란 것이냐”는 비판도 있지만 세입자들 역시 사정이 넉넉지 않고 화재 발생에 전혀 책임이 없는 이들이다. 소방관과 주민의 문제로 방치할 것이 아니라, 어느 쪽도 피해 보지 않도록 시스템을 촘촘히 만들어야 할 책임이 국가에 있다. ▷억울하게 책임을 지게 된 소방관들은 마치 근로자가 산업재해를 당하고도 보호받지 못할 때 겪는 심리와 유사한 감정을 느낀다고 한다. 이런 일들이 계속되면 소방관들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몇 초 차이로 생사가 엇갈리는 현장에서 소방관들이 문을 강제로 열어도 될지, 불법 주정차 차량을 밀고 가도 될지 망설인다면 그 피해는 결국 국민의 몫이다. 걱정 없이 화재 진압과 인명 구조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에서 더 많은 소방 영웅들이 나올 수 있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12·3 비상계엄 이후 내란죄로 기소된 사람은 윤석열 대통령을 포함해 11명이지만 이들의 공소장은 사실상 하나다. 공소장별로 피고인만 다를 뿐 목차와 내용이 거의 같다. 윤 대통령이 계엄 전후 어떤 지시를 했고, 군경이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상세히 재구성하는 데 분량의 대부분이 할애돼 있다. 문제는 딱 거기까지라는 점이다. 윤 대통령이 왜 계엄을 했는지, 계엄을 어떻게 준비했고, 성공하면 어디까지 가려고 했는지는 명확히 수사된 게 없다.드러난 것 구체화하는 데 그친 검경 수사내란죄를 입증하려면 헌법 기관을 무력화시킬 목적의 폭동이 있었다는 걸 잘 보여줘야 하는 건 맞다.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 주요 사령관 등 ‘머리’를 잡아넣은 마당에 무슨 수사가 더 필요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검찰의 공소장은 온 국민이 지켜본 현장들, 수면 위로 이미 드러나 수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을 구체화하는 데 그쳤다. 그 아래 감춰진 것들을 충분히 파헤치진 못했다.윤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 탄핵심판에서 나온 증언들은 그간의 수사로 메우지 못한 빈칸이 아직 많다는 걸 보여줬다. 김봉식 전 서울경찰청장은 윤 대통령이 계엄 직전 삼청동 안가로 불러 계엄 선포 이유로 개인 가정사를 언급했다고 밝혔다. 조태용 국가정보원장이 계엄 전날 김건희 여사로부터 문자를 받은 사실도 드러났다. 윤 대통령이 계엄을 감행한 진짜 동기가 따로 있을 수 있다는 정황이다. “야당의 폭거를 막으려 했다”는 건 윤 대통령이 명분으로 내건 일방적 주장일 뿐이다. 형사사건에서 범행 목적은 객관적 증거로 판단할 뿐 피고인 주장을 그대로 인정하진 않는다.정치인과 언론인 500명을 수거해 처리한다거나 계엄 명분을 위해 북한 도발을 유도한다는 내용이 담긴 노상원 수첩도 미궁 속에 있다. 누구 지시로 작성됐는지, 어디까지 실행하려 했는지 수사가 되지 않았다. 윤 대통령의 계엄 관련 지시를 담은 쪽지를 둘러싸고도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과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 조 원장의 진술이 서로 엇갈린다. 검경이 남은 의혹들을 수사하고는 있지만 윤 대통령 탄핵 이후 대선이 시작되고, 새 정부 출범으로 지도부가 바뀌면 수사는 흐지부지될 가능성도 있다.게다가 이번 사건은 공권력이 범행 주체이자 수사 주체이기도 한 특수성이 있다. 기관 수장들이 계엄과 얽혀 있어 엄정한 수사가 어려울 것이란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드러난 건 수사하지만 배후는 애써 들추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검찰이 김성훈 경호처 차장에 대한 경찰의 구속영장을 3차례나 반려한 것도 그런 의심을 받고 있다. 윤 대통령 체포를 앞장서 막았던 김 차장은 현 정권 인사들의 비화폰 통화 기록을 인멸하려 한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그가 구속돼 비화폰 서버가 경찰 손에 들어가면 대통령실과 검찰 수뇌부의 부적절한 통화가 드러날까 봐 수사를 방해한다는 비판이 그래서 나온다. 경찰 역시 계엄 직후 조지호 경찰청장, 이상민 전 장관 등과 통화를 해 연루 의혹을 받는 사람이 최근 서울경찰청장에 임명됐다. 그는 청장이 공석 상태인 경찰에서 사실상 1인자다.특검 없이 계엄의 빈칸들 어떻게 채우나내란 사건은 결국 특검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다. 이미 재판이 시작돼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건 검경 수사로 사건 전모가 거의 밝혀졌다는 전제에서만 타당한 얘기다. 역사에 길이 남을 이 사건의 빈칸을 그대로 둔 채 수사의 종지부를 찍을 수는 없다. 그동안 수사기관의 적법성을 문제 삼아 온 윤 대통령은 이제 법정에서 수사 내용의 빈틈을 파고들 것이다. 특검이 출범해도 검경 수사의 설거지만 하게 될 것이란 전망이 적지 않지만 설거지를 확실히 해놓지 않으면 다음 식탁을 차릴 수 없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군이 야간에 건물을 장악하려 할 때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조치가 단전이다. 상대의 대응 능력을 떨어뜨리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앞이 깜깜해지고 엘리베이터나 전자식 출입문이 작동을 멈추면 내부 인원들은 당장 이동이 어려워진다. 통신까지 먹통이 된 채로 어둠에 갇힌 사람들은 혼란과 두려움에 빠져 침착하고 조직적인 대응을 하기 힘들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직후인 지난해 12월 4일 새벽에도 계엄군에 의한 국회 단전이 이뤄졌다. 그날 밤 곽종근 전 특전사령관은 국회 현장을 지휘하던 김현태 707특임단장에게 전기 차단이 가능한지를 물으며 “150명이 넘으면 안 된다고 하는데 들어갈 수 없겠느냐”고 사정하듯 얘기했다고 한다. 국회가 계엄 해제를 의결하기 10분 전인 0시 50분경의 일이다. 의원들이 본회의장으로 속속 모여들어 의결 정족수 150명을 채워가던 때였다.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최근 공개한 국회 본관 폐쇄회로(CC)TV 영상을 보면 계엄군이 2층 창문을 깨고 본관에 진입한 게 0시 32분이다. 그 후 18분 뒤 곽 전 사령관의 단전 지시가 있었다. 군인들은 본회의장이 있는 2층을 배회하다 국회 직원들에게 가로막히자 지하 1층으로 내려갔다. 이때가 오전 1시 1분. 계엄 해제안이 통과되던 바로 그 시각이다. 그로부터 5분 뒤 군인들은 지하 1층 전력 차단기를 내렸다. 지하 1층 일부 구역이 5분 넘게 암흑에 잠겼다. ▷그날 계엄 해제 표결은 전자투표로 진행됐다. 전력이 끊기면 투표 시스템도 멈춘다. 만약 계엄군이 투표 완료 전 본회의장 전력을 통제하는 2층 분전함을 찾아냈다면 표결은 중단됐을 수 있다. 수기 투표로 전환하더라도 어둠 속에서 신속히 진행되긴 어려웠을 것이다. 지하 1층 단전이라고 해서 표결과 무관했던 건 아니다. 당시 의원들 상당수가 의원회관과 국회 본관을 연결하는 지하 1층을 통해 본회의장으로 왔다. 계엄군이 조금만 일찍 해당 연결 통로에 설치된 방화셔터를 내린 뒤 전력을 차단해 못 열게 했다면 의결 정족수를 못 채웠을 가능성이 있다. ▷“국회 기능을 마비시키려 했다면 단전 단수부터 했을 텐데 어느 것도 하지 않았다”던 윤 대통령 측은 단전 사실이 드러나자 “곽 전 사령관이 한 것”이라고 한다. 곽 전 사령관이 “(전기 차단은) 제가 지시한 것”이라고 헌법재판소에 증언한 건 맞다. 하지만 그는 부하에게 단전 지시를 하기 20분 전쯤 윤 대통령으로부터 “아직 의결 정족수가 안 채워진 것 같다. 빨리 문을 부수고 들어가 안에 있는 인원을 끄집어내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했다. 단전은 의원들을 끌어내란 대통령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취한 기본적인 조치에 해당하는 셈이다. 윤 대통령이 “내가 단전을 지시한 건 아니다”란 말로 책임을 떠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암 환자들을 만나는 종양내과 의사는 초면에 임종을 얘기해야 할 때가 적지 않은 직업이다. 주로 암 수술 후 재발했거나 암이 너무 늦게 발견된 환자들이 항암치료를 위해 종양내과로 찾아온다. 저승길에서 유턴해 온 이들도 있다. 서울대병원 암센터 종양내과 전문의 김범석 교수(48)는 “의사와 장의사 사이에 낀 저승사자로 살아가는 기분”이라고 한다. 김 교수의 환자들 중에는 완치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생명을 연장하고 증상과 통증을 완화하는 게 치료의 목적이다. 4일 서울대병원에서 만난 김 교수는 “암 환자들이 남은 삶을 편안히 살아가도록 시간을 버는 게 제 일”이라고 했다.》김 교수는 병동에서 환자들의 어린 자녀를 볼 때면 한결 더 마음이 쓰인다. 그 역시 16세 때 아버지를 폐암으로 잃었다. 당시 아버지는 지금 김 교수 나이인 40대 후반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려운 청소년기를 보낸 김 교수는 암을 증오하면서도 정복하고 싶었다. 그 마음이 그를 종양내과 의사의 길로 이끌었다. 의대에 가기엔 성적이 부족했던 그는 “의자 방석이 너덜너덜해지도록 공부했다”고 한다. 20년째 암과 싸워 오면서 암에 대한 김 교수의 시선도 달려졌다. 초기엔 암을 제압하겠다는 의욕이 높았지만 암을 알아갈수록 그 역시 하나의 생명체라는 생각에 가까워졌다. 증오와 공포의 대상이 아닌, 이해와 예방의 대상으로 암을 바라보게 됐다. 그는 암으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이자 암을 치료하고 연구하는 의사로 살아온 그간의 기록을 최근 ‘죽음은 직선이 아니다’란 책으로 펴냈다. ―암은 무엇인가.“우리 몸에 30조 개 세포가 끊임없이 복제되는데 그 과정에서 일부 세포의 DNA에 치명적인 돌연변이가 생겨 암세포로 변한다.” ―암세포는 왜 위협적인가.“정상 세포는 사멸하고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하는데 암세포는 사멸하지 않고 무한 증식한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채로 신호도 무시하고 질주하는 자동차에 빗댈 수 있다. 주변 세포들의 영양분을 마음대로 끌어다 쓰고 정상 세포들의 생태계를 교란한다. 그 결과 해당 신체 기관을 무력화시키고 다른 장기로도 퍼져나가 못 쓰게 만든다.” ―암은 악당인가.“시각을 조금 바꿔 보면 암은 필연적인 생명 현상이다. 인류가 생존하고 진화해 온 특징은 암의 생존법과 동일하다. 인간은 스스로 후손을 이어 왔고 척박한 환경에서도 어떻게든 적응해 왔다. 생존을 위해선 주변에서 자원을 빼앗기도 하고 영역을 넓혀가며 번영을 이뤄 왔다. 그 과정에서 피해를 끼치기도 한다. 그게 딱 암의 생존법이다. 태아 역시 엄마 배 속에서 암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남는다.” ―정말인가. 암은 절망이고 태아는 희망 아닌가.“모체의 면역계는 본래 태아를 외부자로 인식하지만, 태반에 면역 회피 물질이 있어 태아를 보호한다. 암세포 역시 면역 회피 물질을 내며 면역계를 교란시키고, 이를 통해 몸의 방어체계가 자신을 적군인지 아군인지 헷갈리게 만든다. 또한, 태아는 엄마의 영양 상태와 관계없이 영양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도록 다양한 호르몬을 분비한다. 덕분에 엄마의 영양 상태가 불규칙하더라도 태아는 문제없이 성장할 수 있다. 암세포도 주변 세포의 상태와 상관없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영양분을 확보하는 데 집중한다.” ―암이 안 생기게 돌연변이 자체를 막을 순 없나.“세포 복제 과정에 오류가 전혀 없다면 변이가 안 생겨 유전적 다양성이 사라진다. 그렇게 진화가 멈추면 환경 변화에 대응할 능력이 떨어져 멸종될 수 있다. 종이 존속하려면 어느 정도의 오류가 필요하다. 암이 생길 수 있는 몸이기에 생명체가 여기까지 진화한 것이다.” ―암은 우리의 적이 맞나.“그토록 없애버리고 싶은 암은 변형된 우리 자신이다. 암과의 싸움이 힘든 건 수만 년 진화를 통해 인간의 몸에 누적된 세포 증식 능력과 생존력을 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잘 대응하면 치료할 수 있는 암도 많다. 말기 환자라도 생명을 연장하고 증상을 줄이는 치료법이 계속 나오고 있다. 다만 항암치료가 발전하는 만큼 암 역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진화한다.” ―암은 피할 수 없는 것인가.“암은 인간이 오래 살게 되면서 나타난 부작용이다. 암은 어찌 보면 장수의 부산물이다. 수십 년 세포 분열이 반복되면 고장 가능성이 커질 수밖에 없다. 현재 평균 수명(82세) 정도 산다고 하면 30% 정도가 평생 한 번 이상 암 진단을 받게 된다. 수명이 90세로 연장되면 그 비율이 60%까지 높아질 수 있다.” ―그래도 암에 걸리면 절망스러울 것 같다.“많은 환자들이 ‘왜 나한테만 이런 불행이 생기느냐’고 한다. 하지만 암에 걸린 게 불운한 것이라기보다, 암에 안 걸리고 산 하루하루가 행운의 연속이라고 보는 게 맞을 거 같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30조 개의 세포가 복제되면서 매일 9600억 개의 오류가 생긴다. 이 중 치명적인 부위에 돌연변이가 생기면 암이 된다. 그럼에도 세포들이 수십 년간 조화롭게 유지되고 있다면 그 자체가 경이로운 일 아닌가. 우리는 단순히 살아있다고 표현하지만 암이 생기지 않는 하루하루가 기적이다. 건강은 당연한 게 아니다.” ―암은 어떻게 생기는 것인가.“암이 주로 생기는 부위는 위벽이나 장벽, 폐 속 같은 부위의 상피세포다. 술, 담배, 음식물 등 외부에서 들어온 물질과 직접 맞닿는 곳이다. 뇌가 우리 몸의 지도층이라면 상피세포는 발암물질에 노출된 고단한 삶을 사는 하층민이다. 뇌는 명령을 내릴 뿐 그로 인한 결과는 상피세포가 감당한다. 발암물질의 공격으로 세포들이 궁지에 몰리면 돌연변이를 통해 위기를 넘기려 한다. 그 과정에서 암세포가 생겨난다.” ―암은 세포가 살려고 발버둥을 친 결과인가.“그렇다. 암세포가 처음부터 암세포였던 건 아니다. 암을 용서할 순 없지만 공부하다 보면 암세포에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자기 몸을 잘 보살펴야 하는 것인가.“묵묵히 제 역할을 하는 세포들 덕분에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줘야 한다. 적어도 내 몸이 싫어하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암을 부르는 ‘못할 짓’이란 어떤 것들인가.“암 예방 10계명은 노화를 늦추는 10계명과 같다. 요즘 혈당 스파이크란 말을 흔히 쓰는데 고혈당 습관은 노화를 촉진하는 동시에 세포에 계속 충격을 주는 것이어서 돌연변이 확률도 높인다. 사람이 안 늙을 순 없지만 천천히 늙는 것은 가능하듯, 암을 100% 막을 순 없지만 발병 확률을 60∼70%가량 낮추고 암이 생기더라도 최대한 늦게 생기게 할 방법은 있다. 담배 안 피우기, 소량의 음주도 피하기, 균형 잡힌 식사를 하고 짜거나 탄 음식 안 먹기, 주 5회 이상 하루 30분 넘게 땀 날 정도로 운동하기 같은 것들이다.” ―이미 다 아는 것들 아닌가.“그래서 획기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뿐, 획기적인 방법임에는 틀림없다. 만약 제 아버지가 환자로 온다고 해도 저는 꼭 이 말을 해주고 싶다. ‘담배 끊으세요.’” ―우리는 왜 알고도 실천을 안 하는 걸까.“예방의 효과를 체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암에 안 걸린 게 예방 노력 덕분인지 원래 건강해서 그런 건지 구별이 어렵다. 사람들은 건강한 게 당연하다고 전제하고 있어 예방이 나를 지켜준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좋은 항암제가 나오면 환자도 좋고 의사도 좋고 제약사 주가도 오르기 때문에 모두가 반기는데, 정말 획기적인 예방법은 다들 익히 알고 있다며 잔소리로 여긴다.” ―예방 노력을 해도 암에 걸릴 수 있지 않나.“우리 인생이 그렇듯 암 발생에도 어느 정도는 우연과 불운이 작용한다. 하지만 예방법을 꾸준히 실천하면 암 발생 확률을 확실히 낮출 수 있고 암에 걸리더라도 체력이 좋아서 암 치료를 잘 견딜 수 있다. 체력이 안 좋거나 노쇠하면 아무리 암이 작고 초기여도 치료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긴다.” ―‘나는 암에 안 걸릴 것’이란 인식이 많은데….“가장 경계해야 할 인식이다. 암은 나에겐 벌어지지 않을 일이고, 암 환자는 나와 다른 사람이라며 선 긋기를 하면 예방에 소홀해지고 암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갖기 쉽다. 암을 남 일 취급했던 사람일수록 암에 걸리면 더 큰 충격을 받고 후회, 부정, 분노의 과정을 겪으며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가 많다. 암을 두려워만 하고 대비하지 않으면 늦게 발견할 확률이 높아지고, 그 결과 더 힘들게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그게 암에 대한 두려움을 더 키우는 악순환에 빠진다.”‘죽음은 직선이 아니다’란 김 교수의 책 제목은 그런 선 긋기를 경계하자는 취지를 담고 있다. 정상 세포가 언제든 암세포로 변화할 수 있듯 삶과 죽음은 이분법적 직선으로 나누어진 게 아니라 경계가 모호한 채로 연결되고 순환한다는 것이다. 암을 저편의 존재로 보지 말고 언제든 만날 수 있다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고 그는 강조한다. 김 교수의 환자들 중에는 여생이 얼마 안 남았는데도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불안해하느라 소중한 현재를 낭비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그런 환자들일수록 삶을 지레 포기하거나 무의미한 치료에 매달리기 쉽다. 임종 준비 기간이 미국은 보통 6개월인데 우리는 소모적인 치료에 집착하다 삶을 마무리할 시간을 채 한 달도 갖지 못하는 사례가 많다. 항암치료 전문의인 김 교수가 존엄한 죽음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그런 안타까움 때문이다.“이제 임종 준비를 하셔야 한다고 해도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환자들이 많다. 현실적인 한계도 있겠지만 살아오면서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게 뭔지, 나는 뭘 좋아하는 사람인지 들여다볼 기회가 없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런 환자들을 보며 저 역시 일상을 돌아보게 된다. 그렇게 삶과 죽음에 대해 배운 것들을 널리 공유하는 것이 저에게 부여된 소임인 것 같다. 암과의 싸움은 늘 버겁고 환자를 잃는 날들의 연속이지만 패배가 예정돼 있다고 해서 의미 없는 싸움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죽는다는 이유로 우리의 현재 삶이 의미 없진 않듯이.”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은 예비역 장군이던 4년 전 ‘어쩌다 당나라 군대라 불리게 됐나’란 칼럼을 언론에 기고한 적이 있다. 그 글에서 ‘정치권의 인사 개입과 자기편 줄 세우기로 인해 무능한 군대로 전락했다’며 군의 정치화를 비판했다. 칼럼을 본 전현직 장성들은 많이들 황당해했다고 한다. 김 전 장관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앞장서 코드에 맞추고, 후배들을 줄 세우는 식으로 승승장구했던 정치군인의 전형이란 평가가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칼럼 역시 그가 윤석열 대선 캠프에서 활동하며 쓴 것이었다.4년 전 칼럼 기고해 군의 정치화 비판 육사 38기 선두 주자였던 김 전 장관은 박근혜 문재인 정부에서 연거푸 대장 진급에 실패한 뒤 인사 불만을 자주 표출했다고 한다. 그러다 전역 5년 만에 윤석열 정부 첫 대통령경호처장으로 발탁되자 그간의 좌절에 복수라도 하듯 군의 정치화를 시도했다. 지난해 9월 국방부 장관이 되기 전부터 윤 대통령을 등에 업고 군 인사에 개입해 ‘국방상관’이란 별칭이 붙었고 군 내에 ‘충암파’ ‘용현파’란 말도 생겼다. 이런 김 전 장관의 면모를 잘 보여준 인물이 전 국군정보사령관 노상원 씨다. 노 씨는 6년 전 불명예 전역한 민간인이지만 김 전 장관의 비선 측근으로 활동하며 현직 장교들을 쥐락펴락했다. “네가 여단장 되도록 도와주겠다” “장관님이 너를 귀하게 여기신다”는 노 씨의 회유에 장교들이 넘어가 이번 계엄에 가담한 것은 노 씨 뒤에 인사권자인 김 전 장관이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정치군인 문제를 공개 지적하면서 실제론 정치군인을 키워온 김 전 장관의 앞뒤가 다른 행태는 지난해 9월 장관 인사청문회에서도 드러났다. 그는 계엄 시도를 우려하는 야당 의원들 질의에 “지금 상황에서 계엄을 한다고 하면 어떤 국민이 용납하겠나. 우리 군이 따르겠는가. 저라도 안 따를 것 같다”고 했다. 당시는 김 전 장관이 윤 대통령과 이미 여러 차례 계엄 논의를 해왔던 때인데 태연하게 시치미를 뗐다. 어쩌면 “군이 따르겠느냐”는 그 발언은 김 전 장관의 진심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기 소신에 반하더라도 인사권자가 원하는 것이면 출세를 위해 복종하는 게 정치군인의 습성이다. 당당하지 않게 승진한 사람은 인사권자에게 약점이 잡혀 지시를 거스르기 어렵고, 부당한 명령을 받아도 안 되는 이유를 버리고 어떻게든 결과를 내는 데 몰두하게 된다. 이런 충성은 국가를 향한 것도 상관을 향한 것도 아닌, 자기 안위를 위한 충성이다. 이런 사람들이 진급을 거듭해 군 상층부를 장악하면 각자 자리에서 소임을 다해야 할 군인들을 일개 수족으로 전락시킨다. 이번 계엄 사태도 이 같은 정치군인들의 생태계 속에서 벌어졌다. 김 전 장관이 지난해 6월 윤 대통령과 폭탄주 회동을 하며 “대통령님께 충성을 다하는 장군들”이라고 인사시켰던 이들이 계엄 작전을 실행한 핵심 사령관들이다.군인들 줄 세운 金, 그 폐해 스스로 입증 그중 한 명인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관은 최근 윤 대통령 탄핵 심판에 증인으로 나와 정치군인의 수준을 보여줬다. 윤 대통령에게 불리한 내용에 대해선 자신의 기존 진술을 뒤집거나 입을 닫았고, 계엄 직후 야당 의원 유튜브에 나와 불법적 지시에 응한 것에 사과까지 해놓고 이제 와 적법했던 계엄이라고 말을 바꿨다. 윤 대통령과 김 전 장관 지시에 맹목적으로 따르면서 그들과 한배를 탄 이상 그나마 그게 살길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이미 군에 대한 신뢰를 잃은 국민들은 이런 장군을 보면서 또 한번 실망할 것이다. 김 전 장관은 자신이 4년 전 칼럼에 썼던 대로 군의 정치화가 군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를 입증해 보이고 있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서울구치소에서 지내는 윤석열 대통령이 최근 첫 일반인 접견을 하며 발신한 메시지는 “대통령실이 국정의 중심”이라는 것이었다. 면회를 온 정진석 비서실장 등 대통령실 참모들에게 “의기소침하지 말라”며 그런 말을 했다고 한다. 윤 대통령은 국회 탄핵소추안이 통과된 지난해 12월 14일부터 직무 정지 상태다. 자연히 대통령 비서 조직도 기능이 달라진다. 권한이 중단된 대통령 대신에 국정의 새 중심인 대통령 권한대행을 지원하는 조직으로 바뀐다. 대통령실은 국정 최고 책임자를 보좌하는 국가기관이기 때문이다.▷국정의 중심이 대통령실이라는 윤 대통령 발언이 단순 격려인지, 어떤 복선이 깔린 건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윤 대통령이 공수처에 체포되지 않기 위해 경호처를 방패로 동원했듯, 대통령실도 대통령 자신을 위해 복무하는 조직으로 보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든다. 탄핵소추 이후 변화된 국정 질서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심리가 은연중 드러난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대통령실 참모들에게 최상목 권한대행을 잘 보좌하라는 당부를 하는 게 상식에 더 부합한다.▷일각에선 벌써 한 달을 넘긴 최 대행 체제를 견제하려는 의도가 담긴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용산 참모들은 최 대행이 헌법재판소 재판관 2명을 임명하자 항의성으로 일괄 사표를 내는 등 크고 작은 신경전을 벌여 왔다. 이주호 교육부 장관이 의대 증원 정책에 대해 사과하고 원점에서 재검토하겠다고 한 것에 대해서도 용산에선 불만이 많다고 한다. 이런 기류가 윤 대통령에게도 전달됐고, 윤 대통령이 이번에 작심하고 “대통령실이 국정의 중심” 운운했을 거란 얘기다.▷윤 대통령은 그동안 구속된 뒤에도 변호인 등을 통해 지지층을 향한 메시지를 내왔다. 설 연휴를 앞두고 “국민 여러분 생각이 많이 난다”고 했고 며칠 뒤엔 “이번 계엄이 왜 내란이냐, 어떻게 내란이 될 수 있느냐”고 했다. 이젠 하루 1회 30분씩 일반인 접견까지 허용됐으니 방문 인사들의 입을 빌린 옥중 정치를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7년 구속됐을 당시 유영하 변호사만 창구로 두고 말을 아끼며 현실 정치와 거리를 뒀는데, 이와는 많이 다를 것으로 전망된다.▷요즘 여권에선 윤 대통령 접견을 위해 줄지어 번호표를 뽑고 있다고 한다. 국민의힘 출신 시도지사들과 의원들은 물론 권성동 원내대표, 권영세 비상대책위원장도 면회를 갈 예정이다. 권 대표는 인간적 도리에 따른 개인적 차원의 방문이라고 하지만 여당 지도부까지 윤 대통령의 접견 정치에 이용될 가능성이 크다. 냉철하게 선을 그어야 할 사람들이 그러질 못하니 윤 대통령의 현실 인식이 다수 국민의 상식과 갈수록 멀어지는 것 같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시도 때도 없이 돌출 발언을 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한국의 비상계엄 사태에 대해선 한 달 넘게 침묵해 왔다. 윤석열 대통령이 탄핵될 가능성이 있고 누가 다음 대통령이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먼저 의중을 드러내기보단 한국과 협상하기 유리한 타이밍을 기다리는 것이란 해석이 많다. 4년 전 1·6 의사당 폭동을 선동한 혐의를 받아온 트럼프로선 섣불리 메시지를 냈다간 민주주의를 무시하는 지도자란 이미지가 더 강해질 수 있어 거리를 두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그랬던 트럼프가 은연중 자신의 생각을 내비친 사적 대화가 공개됐다. 마러라고 자택에서 장녀 이방카와 전화 통화를 하던 중 농담하듯 한국의 계엄 사태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다들 나더러 혼돈 그 자체(chaotic)라고 하지만 한국을 봐. 탄핵이 중단된다면 윤 대통령을 만나게 될 수도 있지.” 4년 전 대선 패배에 불복해 결과를 뒤집으려 했다는 혐의를 받는 트럼프는 민주당으로부터 ‘민주주의의 적’이란 비판을 받아 왔다. 그런 그가 “내가 아무리 심해도 한국만큼은 아니지 않으냐”는 취지로 말한 건 한국 정치에 대한 조롱으로 들린다. ▷트럼프는 지난 대선 때 한국을 현금인출기란 뜻의 ‘머니 머신’이라고 불렀다. 이번 계엄 사태를 거치며 ‘나보다 더 심한 혼돈의 나라’라는 표현이 추가됐다. 한국에 대해 내정이 불안하고 민주주의가 취약한 나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 취임하면 두툼한 청구서를 들이밀 참이었던 그에게 한국은 돈이 많은데 약점도 많아 다루기 쉬운 상대로 보일 가능성이 높다. ▷윤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는 시위대 사이에선 트럼프가 취임하면 윤 대통령을 도와줄 것이란 기대가 많다. 이들은 태극기와 성조기, ‘Stop The Steal(스톱 더 스틸·도둑질을 멈춰라)’이란 피켓을 들고 집회를 한다. ‘스톱 더 스틸’은 1·6 폭동 때 트럼프의 극렬 지지자들이 의사당에 난입할 때 들었던 깃발 문구다. 양쪽 다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헌법 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한 공통점이 있는 만큼 트럼프가 윤 대통령에게 유대감을 느낄 것으로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철저히 이익을 보고 움직이는 트럼프가 탄핵 위기에 놓인 윤 대통령에게 손 내미는 게 도움이 된다고 판단할지 의문이다. ▷19일 윤 대통령의 구속에 변호인단은 “법치가 죽고 법 양심이 사라졌다”면서 시일야방성대곡이란 표현을 썼다. 황성신문 주필 장지연이 1905년 굴욕적인 을사늑약을 강요한 일제를 규탄하며 ‘이날 목 놓아 크게 운다’는 뜻으로 쓴 말인데 이를 윤 대통령을 구속한 사법부를 규탄하는 데 동원한 것이다. 정작 목 놓아 울고 싶은 이들은 따로 있다. 트럼프 2기가 맹렬한 기세로 출범하는데 리더십이 실종된 정부를 바라만 봐야 하는 국민들일 것이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