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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지방선거를 한 달여 앞둔 4월 27일 부산의 한 교차로. 부산시장에 출마한 개혁신당 정이한 후보(38)가 출근길 유세를 위해 흰색 승용차 앞으로 다가갔다가 갑자기 주저앉았다. 승용차 운전석 문에선 갈색 액체가 흘러내렸다. 정 후보한테서 상황을 들은 개혁신당 측 설명은 이랬다. 운전자가 정 후보를 향해 “어린 놈의 XX가 무슨 시장이냐”며 아이스 커피가 담긴 컵을 던졌다는 것이다. 정 후보가 이를 피하려다 넘어지면서 머리를 다쳤다고 한다. 개혁신당은 “음료 테러”라고 규탄했다. ▷커피를 던진 운전자는 사건 당일 체포됐다. 정 후보와 같은 30대 남성이었다. 정 후보는 이 운전자를 면회한 뒤 언론사 카메라 앞에서 ‘선처 탄원서’라고 쓰인 서류를 경찰에 제출했다. 인터뷰에선 “이번 일로 제 또래들이 느끼는 삶의 무게를 이해하게 됐다”고 했다. 이후 그는 목 보호대를 두르고 유권자들을 만났다. ▷전재수 박형준 양강 구도였던 부산시장 선거에서 정 후보는 인지도가 낮은 정치 신인이었다. 국회의원 비서관과 국무총리비서실 사무관 정도 경력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며칠 뒤 정 후보는 지지율 저조로 TV 토론에 배제된 것에 반발해 단식 농성을 했다. 전 후보, 박 후보가 그를 위문하는 장면이 전파를 탔다. 결국 TV 토론에 나오게 된 그는 전 후보에게 거짓말탐지기를 내밀며 통일교 금품수수 의혹에 대한 입장을 밝혀 달라고 했다. ▷정 후보는 선거 직전 가족들과 유세차량에 올랐다. 병원장인 부친과 의대 교수인 부인, 생후 4개월 된 아들과 함께였다. 그는 “아이들이 꿈꿀 수 있는 부산을 만들겠다. 지금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지만 부산 시민이 저를 바위로 키워 달라”고 했다. 하지만 먼 미래 다짐이 무색하게도 정 후보는 선거 이튿날 돌연 정계 은퇴를 선언한 뒤 잠적했다. ▷정 후보가 정계를 떠난 그날 경찰은 그의 선거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커피를 던진 운전자와 짜고 자작극을 벌였는지를 가리겠다는 수사였다. 사건이 벌어지기 전 정 후보가 운전자와 통화했던 기록이 나왔고, 더구나 헬스 트레이너인 그 운전자는 정 후보와 알고 지내던 사이가 아닌지 경찰이 확인 중이다. 뇌진탕 진단을 해준 곳도 정 후보 부친이 운영하는 병원이었다. 정 후보 부친이 이사장으로 있는 고교 교사가 정 후보의 미국 대학 진학을 위해 학생부상 출석 일수 등을 허위 기재해 유죄 판결을 받은 사실도 드러났다. 의혹이 나날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부산시장 후보로 정당 공천을 받았는지 의아할 뿐이다. 당 대표가 사과하긴 했지만 검증 실패 책임을 면하긴 어려울 것이다. 테러 자작극이 사실이라면 젊은 정치에 기대를 걸었던 유권자에 대한 배신이고, 민주주의에 대한 테러가 아닐 수 없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경기에 나가는 게 싫어지고 뛰고 싶은 의지가 줄어든다. 부디 축구를 계속 하게 해달라.” 스페인 명문구단 레알 마드리드의 핵심 공격수이자 브라질 국가대표인 비니시우스 주니오르(26)는 2년 전 기자회견에서 인종차별을 멈춰 달라면서 눈물을 보였다. 18세 때부터 스페인 리그에서 뛰어 온 그는 인종차별의 오랜 희생양이었다. 경기 때마다 관중석에서 “원숭이” “멍청한 XXX” 같은 야유를 받았다. 이에 항의하는 의미로 레알 마드리드 선수 전원이 비니시우스의 등번호인 20번 유니폼을 맞춰 입고 그라운드에 오르기도 했다. ▷올 2월에는 비니시우스가 유럽 챔피언스리그 경기 도중 상대 선수로부터 모욕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그 선수가 유니폼 상의로 입을 가린 채 말을 한 게 포착돼 큰 논란이 됐다. 비니시우스는 “나를 원숭이라고 불렀다”고 주장했지만 상대 선수는 완강히 부인했다. 조사에 나선 주최 측은 입 모양을 알 수 없어 인종차별 발언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다. 킬리안 음바페, 리오넬 메시, 네이마르 같은 세계적 선수들은 “우리가 비니시우스”라고 지지 메시지를 내며 대책을 촉구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축구에 ‘비니시우스 룰’이 도입됐다. 상대 선수와 대립하는 상황에서 입을 가리면 혐오 발언을 한 것으로 간주해 즉시 퇴장시키기로 한 것이다. 국제축구연맹(FIFA) 잔니 인판티노 회장은 “숨길 게 없다면 말할 때 입을 가리지 않는다. 아주 간단한 문제”라고 했다. 입을 가리는 것 자체로 증거 인멸 행위라는 선언이었다. 이번 북중미 월드컵에서 1호 퇴장 사례가 나올지 관심이 높았는데 20일 파라과이 선수가 튀르키예 수비수와 설전을 벌이다 손으로 입을 가린 게 비디오 판독(VAR)으로 드러나 레드카드를 받았다. ▷같은 팀끼리는 입을 가리고 말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선수들은 경기 중 욕이나 농담을 주고받을 때 고화질 카메라에 입 모양이 읽혀서 논란 되는 걸 피하기 위해 종종 입을 가린다고 한다. 감독이 선수에게 긴급한 지시를 하면서 전술이 노출되지 않도록 입을 가리는 경우도 있다. 상대 선수의 평정심을 무너뜨리려 “그거밖에 못 하냐” 같은 말을 툭툭 던지는 ‘트래시 토크(trash talk)’도 흔히 오가는데 혐오 표현이 없고 입을 가리지 않았다면 허용된다. 하지만 상대와 충돌하는 상황에서 입을 가렸다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축구는 전 세계에서 고르게 사랑받는 대표적인 스포츠다. 유럽 빅리그에는 각국의 대표 선수들이 모여들고, 그에 따라 팬층도 전 세계로 넓어지고 있다. 그런 축구장이 인종차별로 얼룩지면 선수 개인의 인격권이 침해되는 건 물론, 그를 응원하는 팬들도 상처를 입고 고개를 돌릴 것이다. 그라운드에 혐오가 숨어들지 못하도록 단호히 선을 그어야 축구의 위상과 명예를 지킬 수 있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100세 시대라지만 늘어난 건 ‘수명’이지 ‘건강’이 아니다. 한국인의 기대 수명은 83.7세로 높아졌지만 건강하게 사는 기간은 72년에 머물러 있다. 평균적으로 72세 이후부턴 11년 이상 병치레를 하다 생을 마감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계속 늘어나는 기대 수명과 달리, 건강 수명은 제자리걸음이어서 둘의 격차가 벌어지는 추세다. 몸은 골골하는데 노후만 길어지는 장수는 마냥 축복으로만 보기 어렵다. ▷건강한 몸으로 오래 사는 게 화두가 되면서 최근 주목받는 용어가 ‘롱제비티(longevity)’다. 무작정 장수하기보단 건강하게 오래 사는 삶을 뜻한다. ‘저속노화’나 ‘항노화’와도 비슷한 말이다. 불로초를 찾거나 소년의 피를 마시는 등 미신에 가까운 고대 황제들의 회춘 요법과는 다르다. 운동과 식단, 수면처럼 의학적으로 검증되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건강 관리를 조기에 시작하면 황혼기에 활력 있는 삶을 연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령화가 전 세계적 현상이다 보니 ‘롱제비티’는 산업적으로도 급성장하고 있다. 비만치료제 열풍이 단적인 사례다. 노화를 부르는 대표적 만성 질환인 비만을 치료하는 게 글로벌 제약사들의 최대 승부처가 됐다. 일라이 릴리의 비만치료제 마운자로는 매출에서 부동의 1위였던 항암제를 제치고 올 1분기 세계 1위를 기록했다. 아마존, 구글, 오픈AI 같은 빅테크들도 개인별 생체 데이터를 분석해 질병을 예방하는 등 건강 수명을 늘리는 기술에 수조 원을 투자하고 있다. ▷최근 영국은 2009년생부터 담배 구입을 평생 금지하기로 했다. 미래 세대부턴 노후 건강의 최대 위협인 흡연을 원천 차단해 의료 재정 파탄을 막겠다는 전략이다. 독일이 설탕세 도입을 추진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이처럼 건강 수명은 각국 정부의 정책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다. 유병장수 하는 인구가 많아지면 의료비와 돌봄 부담이 커지는 건 물론 노동시장에서 이탈하는 연령도 낮아져 국가경쟁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 우리 정부 역시 2030년까지 건강 수명을 73.3세로 끌어올리겠다고 한다. 그러려면 노인 환자를 돌보는 것 못지않게 아프기 전에 건강을 지킬 수 있도록 하는 장기 대책이 나와야 한다. ▷9일부터 서울광장에서 열리고 있는 서울헬스쇼에선 노후 건강을 지키는 새로운 트렌드가 소개됐다. AI로 심장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할 수 있는 앱, 무릎이나 허리가 안 좋아도 등산 골프 러닝 같은 야외 활동이 가능하도록 도와주는 ‘입는 로봇’ 등이 주목받았다. 늙어서도 삶이 주는 기쁨을 온전히 누리려면 시대 변화에 맞게 나만의 관리법을 업데이트하는 ‘건강 지능(HQ)’도 필요하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몸에 투자하는 것만큼 수익률이 좋은 노후 대비도 드물다. 노년의 건강은 돈으로 살 수 없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1970∼80년대 국내에서도 인기리에 방영된 ‘우주소년 아톰’의 원작자는 일본에서 ‘만화의 신’으로 불린 데즈카 오사무(1928∼1989)다. 40년간 700여 편을 남겼고, 아톰 외에도 ‘불새’ ‘블랙잭’ 등 히트작이 즐비하다. 일본 애니메이션 시대를 연 선구자란 평가도 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으로 유명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도 어려서부터 그의 작품을 보면서 꿈을 키웠다고 한다. ▷거장인 데즈카도 어릴 적엔 또래들의 괴롭힘에 시달렸다. 왜소한 체구에 유난히 두꺼운 테의 안경을 쓴 그를 친구들은 “60m 안경”이라고 놀리곤 했다. 학교 교문에 들어서기 60m 밖에서부터 그의 안경이 보여서 붙게 된 별명이라고 한다. 그가 중고교에 다닌 1940년대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휩싸인 때였다. 교실도 군국주의로 물들었던 시기다. 데즈카는 귀퉁이에서 만화를 그리다 교사에게 한가한 짓을 한다며 얻어맞고, 군수공장에 끌려가 강제노동을 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의대에 진학했지만 미련 없이 만화가의 길을 택했다. ▷일본이 항복한 1945년 8월 15일은 데즈카에게 ‘해방’의 날이었다. 이듬해 18세의 나이로 데뷔작을 발표하면서 “만화의 세계에도 평화가 왔다”고 인사말에 썼다. ‘아톰’ 역시 일본을 패망시킨 원자폭탄에서 주인공 이름(Atom·원자)을 따왔다. 그가 그린 아톰은 자신의 힘을 약자를 돕는 데 쓰는 로봇 소년이다. 데즈카는 후배 만화가들에게 “만화를 그릴 때 인권만은 건드려선 안 된다. 특히 특정 민족이나 집단을 깔보진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만화의 아버지’로 추앙받았던 그지만 일본에서 사실상 금서 취급을 당한 작품이 있다. 재일조선인이 겪는 차별을 그린 1970년 발표작 ‘긴 동굴’이다. 2차 대전 때 땅굴 공사에 강제 동원돼 학대와 멸시를 당했던 조선인이 전쟁 후 일본에서 출신을 숨기고 출세하지만 결국 뿌리 깊은 차별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주간지에만 실린 뒤 자취를 감췄고, 여러 종의 데즈카 만화 전집에 한 번도 포함되지 못했다. 당시는 강제 징용 같은 과거사 관련 책이 나오면 일본 우익들이 출판사에 테러를 서슴지 않던 시절이었다. ▷반세기 넘게 빛을 보지 못했던 ‘긴 동굴’은 최근에야 다시 세상에 나왔다. 일본 호세이대 출판사가 2일 단행본으로 재출간했다. 어두운 역사를 외면하지 말자는 데즈카의 목소리도 되살아나게 됐다. 그는 ‘긴 동굴’을 내놓기 4년 전인 1966년 한 기고문에서 이렇게 썼다. “조선인들은 군국주의에 희생되고 민족 역사를 짓밟힌 채 강제로 일본에 오게 됐다. 편견과 경멸 속에 수십 년을 살아왔다. 일본인으로서 정말 부끄럽고 죄송하다. 우린 똑같은 일을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제대로 반성하고 있는가.”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미국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4년 미 정부는 무기 제조에 쓸 금속이 부족해지자 동전을 대신할 5센트짜리 지폐를 만들기로 했다. 그 지폐에 들어갈 인물로 남북전쟁의 영웅 윌리엄 클라크가 정해졌지만 이후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그와 성이 같았던 당시 재무부 화폐국장이 지폐에 자기 얼굴을 새겨서 ‘셀프 발행’을 한 것이다. “나라의 품위에 먹칠을 했다”는 비난이 거세게 일었고, 의회는 재발을 막겠다며 곧바로 입법에 나섰다. 미국 지폐엔 오직 사망한 인물의 얼굴만 넣을 수 있다고 법에 못을 박았다. ▷이후 160여 년간 지켜져 온 원칙이 최근 흔들리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올해 건국 250주년을 기념해 트럼프 얼굴이 들어간 250달러 지폐 발행을 추진하고 있다. 지폐 시안에는 트럼프가 대선 결과를 뒤집으려 한 혐의로 기소돼 교도소에 출석했을 때 정면을 노려보며 찍은 머그샷이 새겨져 있다. 45대, 47대 대통령인 트럼프를 뜻하는 4547 숫자도 보인다. 트럼프는 지폐 도안을 그린 영국인 화가와 연락하며 직접 의견을 냈다고 한다. ▷재무부 내 트럼프 측근 간부들이 이 작업을 주도하고 있지만 살아 있는 사람의 초상을 지폐에 넣는 건 현행법 위반이다. 지폐 종류도 1, 2, 5, 10, 20, 50, 100달러로 법에 정해져 있다. ‘트럼프 250달러’를 발행하려면 법부터 바꿔야 하는데 통과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런데도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은 “현직 대통령이 그려진 250달러를 발행하는 데 부적절한 점은 없다”며 믿기 힘든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이 와중에 바른말을 한 사람이 퍼트리샤 솔리메네 재무부 조폐인쇄국장이었다. 그는 법적 절차적 한계가 많다며 반대했다가 최근 경질됐다. 반대 이유에 대해선 “나 개인과 조직의 가치를 희생시킬 순 없었다”는 입장을 냈다. 공직자로서 당연한 처신이지만, 트럼프 정부에서 이런 직언을 했다간 무사하기 힘든가 보다. 트럼프의 수사 중단 요구에 불응한 연방수사국(FBI) 국장, 불법 이민 단속 당국에 납세자 정보 제공을 거부한 국세청장, 백신 음모론에 반대한 질병통제예방센터 국장이 이미 줄줄이 해임됐다. ▷미국 지폐에는 조지 워싱턴, 에이브러햄 링컨 등 굵직한 업적을 세운 전직 대통령들이 주로 새겨져 있다. 트럼프가 벌써부터 자기 얼굴을 넣으려고 하는 건 미 역사에 큰 획을 그은 대통령으로 남고 싶다는 욕망과 함께,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는 조바심이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왕정이 아닌 민주 국가에서 현직 지도자가 지폐에 자기 얼굴을 넣는 사례는 찾기 힘들다. 독재 국가인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북한의 김일성 정도가 있을 뿐이다. 자칫 이런 독재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 뿐이라고 직언할 수 있는 참모가 트럼프 정부에선 씨가 말라가고 있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비상계엄이 선포되던 날 밤,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에겐 중요한 선택을 고민할 109분의 시간이 있었다. 소방청장에게 언론사 단전·단수에 협조하라는 지시를 할지 말지가 그에게 던져진 숙제였다. 심사숙고 끝에 그런 지시를 해선 안 되겠다고 결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기어이 소방청장에게 전화를 걸고야 말았다. 그날 오후 9시 48분경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서 받은 언론사 단전·단수 지시를 109분 뒤인 오후 11시 37분 소방에 전달했다.이상민의 109분, 한덕수의 91분 그는 일개 연락관이 아닌 장관이었다. 그것도 계엄 선포나 해제를 건의할 수 있는 주무 장관이었다. 15년 법관 경력에 국민권익위원회 부위원장까지 지낸 그였다. 요건에 맞지 않는 불법 계엄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알았을 터였다. 윤 전 대통령의 위험천만한 지시를 따를지 말지 스스로 판단할 권한과 시간이 그의 손에 있었다. 그럼에도 결국 내란 세력과 한배를 타기로 선택한 것이다. 한덕수 전 국무총리에게도 계엄에 맞설 91분의 시간이 있었다. 한 전 총리는 그날 밤 윤 전 대통령에게 계엄 선포 계획을 듣고 ‘멘붕’에 빠졌다고 했다. 그 정도로 황당했다면 어떻게든 말렸을 법도 한데 그가 선택한 대응책은 국무회의를 열자는 것이었다. 국무위원들을 불러 반대 의견을 모아 보려 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하지만 당시 한 전 총리가 계엄에 명확히 반대했다고 증언한 국무위원은 한 명도 없다. “50년 공직 인생을 이렇게 끝내려 하느냐”는 최상목 전 부총리의 비난에도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계엄 계획을 알게 된 후 실제 선포되기까지 91분간 그런 애매모호한 태도로 일관했다. 더구나 자신의 건의로 열린 국무회의가 대통령의 일방적 계엄 통보로 끝났음에도 참석자 서명을 받아야 한다는 박성재 전 법무부 장관을 오히려 거들었다. 한 전 총리의 1, 2심 재판부 모두 당시 국무회의가 계엄에 합법적 외피를 씌우려는 행위에 불과했다고 판결한 이유다. 박 전 장관 역시 내란을 거부할 시간이 있었다는 점에서 앞의 두 사람과 다르지 않다. 그는 계엄이 선포되자 바로 법무부로 이동하며 차 안에서 간부들에게 전화 지시를 했다. 윤 전 대통령 호출을 받고 용산에 들어간 지 2시간이 훌쩍 지난 때였다. 계엄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할지 결정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서울고검장까지 지낸 법률가인 그가 불법 계엄임을 몰랐을 리는 없다. 하지만 그는 간부들에게 출국금지팀을 비상대기시키고, 구치소 수용 여력을 파악하도록 했다. 계엄 합동수사본부에 검사 파견을 검토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계엄령 위반으로 많은 정치인과 시민들이 잡혀 올 것에 대비한 후속 조치였다고 보는 게 상식적이다. 박 전 장관은 “(계엄 선포가) 엎질러진 물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지시를 내리던 시각은 국회의원들이 계엄 해제 표결을 위해 국회로 모이고 국민들도 거리로 나오던 때였다. ‘엎질러진’ 상황이 되지 않도록 막으려는 필사적 노력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박 전 장관은 계엄이 온전히 실현되도록 뒷받침하는 행태를 보였다. 다음 달 9일 선고되는 그의 1심 판결에서 이에 대한 심판이 내려질 것이다.엎질러진 물? 맞설 생각은 있었나 이들 세 국무위원이 당시 반대했더라도 계엄 선포는 막지 못했을 수 있다. 그렇더라도 대통령의 반(反)국가적 결정에 국무위원으로서 어떻게 대응할지는 그들 스스로 판단할 권한과 시간이 있었다. 박 전 장관은 최근 결심공판에서 6년 차 검사가 작심 발언과 함께 징역 20년을 구형하자 “내 인생을 깡그리 부정하는 후배 검사의 말에 참담함이 든다”고 했다. 하지만 오랜 공직 인생을 깡그리 부정한 건 그날 밤 절체절명의 순간에 국민이 아닌 권력의 편에 서기로 선택한 그들 자신일 것이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여사님 업체’라고 불렸던 21그램은 2022년 윤석열 전 대통령 용산 관저 공사를 맡기 전까진 영세 인테리어업체였다. 연 매출 20억∼30억 원에 가정집이나 사무실 리모델링을 주로 했다고 한다. 증축이나 구조 보강 같은 전문 공사는 면허도, 경험도 없었다. 그런 업체가 이미 정부의 관저 공사 의뢰를 받고 설계까지 마친 굴지의 종합건설사를 밀어내고 공사를 따냈다. 그 건설사 간부는 21그램 대표가 김건희 여사와의 친분을 강조하며 종합건설업 면허를 빌려달라고 했으나 거절하자 공사에서 배제됐다고 법정에서 밝힌 바 있다. ▷그렇게 시작된 관저 공사는 졸속을 거듭했다. 공사 면허가 없는 21그램은 급하게 하도급 업체를 섭외해 일을 맡겼다. 공사에 동원된 18곳 중 15곳이 무자격 업체였다. 대통령실은 이런 불법 도급을 방관했다. 작업이 끝난 뒤엔 준공검사도 안 하고 ‘완료’ 서류에 서명했다. 관저 공사를 담당한 김오진 당시 대통령실 관리비서관은 21그램을 누가 추천했는지에 대해 ‘윤핵관’으로 불린 윤한홍 의원으로부터 “김 여사가 고른 업체”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2차 종합특검에 진술했다. ▷21그램은 공사비로 41억 원을 요구했다. 대통령실이 관저 공사비로 편성해 놓은 14억 원의 3배에 달했다. 정상적인 공사라면 시작 전 계약서를 쓰고 정해진 예산에 맞게 공사가 진행돼야 하는데 관저 공사는 그와 반대였다. 하도급 업체들이 일단 공사를 해놓으면 나중에 그에 맞춰 도면을 그리고 주먹구구식으로 비용 명세를 작성했다고 한다. 21그램이 제시한 41억 원이 객관적 근거가 있는지, 투명하게 집행되는지는 애초에 따지지 않았다. ▷행정안전부가 애꿎게 그 유탄을 맞았다. 대통령실은 행안부를 압박해 모자란 공사비를 대도록 했다. “전용할 예산이 없다. 차라리 인사 조치를 해달라”는 담당 공무원들의 반발에도 결국 강행됐다. 공사비를 증액해야 한다면 대통령실이 정식 예산을 받아 처리하면 될 일이었다. 특검은 당시 대통령실이 관저 내 반려동물 수영장이나 다다미방 등 호화 시설을 설치한 게 드러날까 봐 행안부 예산을 끌어다 쓴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용산 이전 반대 여론을 의식해 일단 예산을 낮춰 잡았다가 야금야금 늘린 것이란 시각도 있다. ▷특혜와 탈법으로 얼룩진 관저 공사는 이후 윤석열 정부 실패의 예고편이었다. 1급 보안시설을 짓는 중대한 국가사업이 영부인 입김에 휘둘리고, 공직자들은 그에 끌려다니거나 출세를 위해 편승했다.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되던 날, 21그램 대표는 자신의 아내에게 “정권이 바뀌면 박살 날 수도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최근 특검이 관저 예산 불법 전용에 관여한 혐의로 김대기 전 대통령비서실장 등 고위 관계자들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한 걸 보면 틀리지 않은 예측이었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인분 45만 원, 소변 15만 원, 비방 유인물 50만 원.’ 돈 받고 앙갚음을 해주는 보복 대행 업체들이 요즘 내건다는 범죄 차림표다. 식당 메뉴판 꾸미듯 범죄별로 가격을 매겨 고객들을 찾아 나선다. 문자 폭탄은 건당 5000원, SNS 악플은 50건당 30만 원, 회사에 성인용품을 보내는 배송 테러는 ‘물건값+10만 원’이라는 식이다. 보이스피싱한 돈의 일부를 송금해 사기 의심 계좌로 만드는 수법으로 피해자의 계좌를 동결시키는 ‘통장 묶기’도 단골 메뉴인데, 3개월 묶기는 40만 원, 6개월은 80만 원이라고 한다.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고 싶다면 배달 음식을 시켜 먹듯 범죄를 주문하는 게 가능해진 세상이다. 보복 대행 업체들은 범행을 사주한 게 들통날 것을 걱정하는 의뢰인들에게 “100% 안전”을 강조한다. 범행 주문은 텔레그램으로 받고, 결제는 코인으로 하기 때문에 수사기관의 추적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특공대’라고 불리는 범죄 실행조는 외국인 불법 체류자를 쓰고, 수사에 대비한 대본까지 암기시킨다고 홍보하는 업체도 있다. 하지만 보안이 철저하다는 주장과 달리 업체들은 보복 피해자에게 의뢰인의 정보를 주면서 ‘역보복’을 부추겨 양쪽에서 수익을 낸다. ▷보복 대행 업체들은 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억울함을 풀어주겠다면서 사적 복수를 고민하는 이들을 유혹한다. 하지만 동시에 가해자 측이 피해자들의 입을 틀어막는 데도 자주 활용된다. 올 초 투자 리딩방에 참가했다가 수천만 원을 사기당한 피해자는 사기꾼 계좌에서 돈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은행에 요청했다가 이를 풀라는 협박과 함께 인분 테러를 당했다고 한다. 보이스피싱 조직이 보복 대행업을 겸업하며 피해자가 경찰 신고를 취하하도록 압박하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이 ‘청부 범죄’ 비즈니스는 기존 수사망을 교묘히 피해 가고 있다. 보복 대상자의 주소지와 연락처를 안정적으로 공급받기 위해 조직원을 배달 플랫폼이나 통신사 협력업체에 위장 취업시킬 정도로 조직적이다. 의뢰인과 지시자, 모집책, 실행자가 완전히 분리된 채 텔레그램과 코인을 매개로 활동하기 때문에 경찰이 말단의 실행자를 붙잡아도 지시자나 의뢰인까지 추적하기 쉽지 않다. ▷일본에선 어둠의 아르바이트라는 뜻의 ‘야미바이토’가 큰 사회 문제가 됐다. 보복 대행을 실행하는 고수익 알바가 대표적 사례다. 초창기엔 ‘헤어진 연인 뒤통수 한 대 치기’ 같은 소소한 보복이 많았지만 의뢰인과 지시자가 잡히지 않다 보니 범행이 점점 대담해져 요즘엔 강도 살인까지 벌어지고 있다. 보복 대행을 방치하면 이처럼 강력 범죄를 부를 수 있다. 우리도 지금의 오물 테러가 어떤 흉악 범죄로 진화할지 모른다. 보복 범죄의 생태계가 뿌리내리지 못하게 조기에 막아야 한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시한부 선고를 받은 말기 암 환자에겐 남은 날들 중 오늘이 몸 상태가 가장 좋은 날이다. 그런 ‘오늘’이 통증과 불안으로 가득하다면 얼마 남지 않은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이들이 통증을 덜 느끼며 차분히 삶을 정리할 수 있도록 심신을 보살펴주는 곳이 호스피스 병동이다. “죽으러 가는 곳 아니냐”는 오해도 있지만 ‘호스피스(hospice)’는 손님을 맞이한다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이다. 삶의 마지막 여행을 떠나는 손님을 환대하는 곳이란 뜻을 담고 있다. ▷서울대병원 호스피스 병동에는 말기 환자들이 가족에게 못다 한 말을 편지로 쓰도록 돕는 ‘내 마음의 인터뷰’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담당 의료진들은 환자들에게 허락된 시간이 너무 짧은 게 늘 안타깝다고 한다. 자기 삶을 돌아보고 가족들과 평온하게 작별하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병상이 부족해 임종이 임박한 환자들이 주로 오기 때문이다. 환자들은 호스피스에 온 지 짧게는 2∼3일, 길어야 몇 주를 넘기지 못하고 눈을 감는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짧은 안식조차 일부에게만 허락되는 게 요즘 실정이다. 국내 말기 환자 중 호스피스를 이용하는 비율은 4명 중 1명에 불과하다. 유럽 국가들이 인구 100만 명당 최소 50개 이상 병상을 확보하고 있는 데 비해 우리는 37개뿐이다. 병원 입장에선 적자 사업이다 보니 정부 지원이 절실하지만 관련 예산은 인력 한 명 충원하기에도 벅차다. 결국 대기표를 뽑고 기다리다 요양병원과 응급실을 전전하는 ‘임종 난민’들이 늘고 있다. ▷품위 있는 죽음은 몸과 마음이 편안할 때 가능하다. 통증이 다스려지고 죽음의 공포가 누그러져야 비로소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긴다.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의향서를 쓰는 이들이 급증했지만 실제 집행률이 낮은 건 존엄한 죽음을 위한 다른 선택지가 마땅치 않은 탓이 크다. 가족들이 무작정 치료를 중단하기엔 죄책감이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의사 조력 존엄사에 찬성하는 여론이 80%를 넘는 것도 고통 속에 연명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인식이 반영된 결과다. 호스피스같이 인간답게 눈감을 수 있는 대안이 다양하다면 무의미한 치료에 매달리거나 조력사를 고민하는 이들도 줄어들 것이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호스피스를 확대하겠다고 한다.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은 최근 본보 인터뷰에서 “호스피스를 요양병원에도 도입하고, 건강보험 재정으로 인력도 늘리겠다”고 밝혔다. 말기 환자들은 의사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한다고 한다. “지금도 이렇게 아픈데, 죽을 땐 얼마나 더 아플까요.” 임종을 앞둔 환자와 가족들의 짐을 덜어주는 건 정부가 책임져야 할 최우선 복지의 하나다.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지만 삶의 마지막 여행길의 풍경은 얼마든 바꿀 수 있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김건희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이 28일 2심에서 유죄 판결이 났다. 검찰이 김 여사를 무혐의 처분한 지 1년 반 만이다. 통상 피의자를 처벌해 달라고 하는 게 검찰이고, 정말 죄가 되는지 따지는 게 법원이다. 이 사건은 달랐다. 검찰에서 덮으려 한 사건이 재판에서 들춰졌다. 그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다. 특검이 검찰 수사를 뒤집어 지난해 김 여사를 기소했고, 석 달 전 1심의 무죄 판단을 2심이 뒤집었다.檢이 외면한 녹취가 주가조작 핵심 증거 2심 재판부가 주목한 증거는 김 여사가 증권사 직원의 사무실로 전화해 통화하면서 남긴 육성 녹취다. 김 여사는 20억 원이 든 자신의 증권 계좌를 주가조작 일당에게 맡기면서 “수익을 그쪽과 6 대 4로 나눠야 한다”고 했다. 아무런 손실 보장 약속도 없이 도이치모터스 주식 한 건에 투자하라고 20억 원을 몰아주고 수익이 나면 40%나 떼준다는 것이었다. 김 여사는 그 직원에게 “(지금 쓰는) 사무실 전화는 녹음되니 통화는 휴대전화로 하자”란 말도 했다. 재판부는 김 여사가 주가조작으로 큰돈을 벌 것으로 기대했을 가능성이 크고, 그런 거래의 흔적을 감추려 한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전화로 주식 거래를 할 때 고객과 증권사 직원의 통화는 모두 녹음된다. 주가조작 수사에선 기본적으로 살펴보는 자료다. 하지만 검찰은 4년 반이나 수사하면서 이 녹취 파일을 확보하지 못했다. 주가조작에 쓰인 김 여사의 3개 계좌 중 이 계좌에 대해서만 통화 기록이 누락됐다고 한다. 불기소 처분 이후 재수사에 나선 서울고검이 두 달도 안 돼 찾아낸 걸 보면 못 했다기보다 안 한 것에 가깝다. 고검의 뒷북 수사 역시 윤석열 전 대통령이 파면되고 특검 출범이 임박했던 지난해 4월에야 시작됐다. 김 여사는 2024년 5월 박성재 당시 법무부 장관에게 “내 수사가 어떻게 되고 있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도이치 사건 수사 지휘부가 이창수 전 서울중앙지검장 등 ‘찐윤’ 검사들로 모두 물갈이되던 때였다. 수사팀에서 김 여사의 예상 진술과 함께 증거 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한다는 취지의 내부 문건을 만든 것도 그즈음이라고 한다. 그 후 두 달 뒤, 김 여사를 소환 조사하라는 검찰총장의 지시도 어긴 채 검사들이 대통령경호처 부속건물로 찾아가 김 여사를 조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곤 앞서 작성했던 문건대로 김 여사를 불기소 처분했다.“봐주기 수사”란 비판이 끊이지 않았지만 올 1월 1심 판결은 달랐다. 김 여사의 주가조작 혐의에 대해 의심은 가지만 공범으로 가담하진 않았다며 무죄 판결했다. 이 판결로 검찰에선 도이치 사건 수사가 억울하게 매도당했다는 목소리도 일부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 2심 재판부는 1심의 오류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시세조종 세력과 김 여사 간에 갈등이 있었던 점에 대해서도 1심은 무죄 정황으로 봤지만 2심에선 주가조작 범행 특성상 공범들끼리 이익 배분을 두고 흔히 다툼이 벌어진다면서 유죄 판단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했다.상식과 법, 다르지 않다는 점 보여준 2심 이번 판결은 법의 관점이 일반 국민의 상식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보여 준다. 주가조작 유죄 판결로 검찰이 김 여사에 대해 ‘봐줄 결심’을 했었다는 점도 자연스레 드러났다. 재판부는 김 여사가 통일교로부터 받은 802만 원짜리 샤넬 백이 의례적 선물에 불과하다고 본 1심의 판단도 바로잡았다. 취임을 앞둔 대통령의 부인에게 아무 대가도 안 바라고 비싼 명품 백을 건네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며 묵시적 청탁이 이뤄진 것으로 보고 유죄로 뒤집었다. 1심에서 1년 8개월이던 형량은 4년으로 늘어났다. 김 여사는 이에 불복해 상고하겠다고 한다. 대법원은 어떻게 판단할지 지켜볼 일이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마라톤 풀코스를 2시간에 주파하려면 100m당 17초 속도로 달려야 한다. 보통의 성인 남성이 거의 전력 질주해야 하는 속도다. 이런 페이스로 단 한 번의 흐트러짐 없이 100m 달리기를 422회 반복해야 한다. 실제 경기에선 여러 변수가 있다. 바람, 날씨와 싸워야 하고 주변 선수들과 신경전도 치러야 한다. 그래서 2시간 내 완주는 인간 한계를 넘는 ‘마의 벽’이었다. ▷케냐 출신 사바스티안 사웨 선수(31)가 26일 영국 런던 마라톤에서 1시간59분30초의 기록으로 그 벽을 처음 깼다. ‘마라톤 황제’ 엘리우드 킵초게가 2018년 2시간 1분대를 기록했고, 5년 후 켈빈 킵툼이 2시간 35초로 바짝 다가섰는데 대기록은 사웨의 차지가 됐다. ▷‘서브 2(2시간 내 완주)’ 마라토너가 나올 수 있었던 건 선수들의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해 달리기의 ‘연비’를 높이는 기술이 발달한 게 한 요인으로 꼽힌다. 2시간 장벽이 곧 깨질 수 있다는 전망에 나이키 아디다스 등 스포츠 회사들은 초경량 탄소 섬유 개발 등 성능 경쟁에 나섰다. 사웨가 신었던 97g 러닝화는 200g 안팎이던 신발 무게를 절반으로 줄이고 탄성을 높였다고 한다. 또한 런던 마라톤은 적당한 온도에 코스도 평탄해 베를린·시카고 마라톤과 함께 선수들이 기록 경신을 기대하는 대회 중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장비나 경기 환경이 선수들의 정신력보다 중요할 순 없다. 누구와 함께 뛰느냐도 경기력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번 런던 마라톤에선 2등 선수도 1시간59분41초의 기록을 세웠다. 3위 선수 역시 종전 세계기록을 뛰어넘는 2시간28초였다. 한 대회에서 상위 3명이 모두 세계기록을 넘어선 건 처음 있는 일이다. 선의의 경쟁은 이처럼 위력적이다. 전반부보다 후반부에 더 빨리 달렸던 사웨는 준우승 선수에게 고맙다면서 “우리는 서로를 도왔다. 그가 아니었다면 2시간 내 완주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선수들은 내 옆의 선수들뿐 아니라 나보다 앞서 경기했던 선수와도 겨룬다. 선배 선수가 불가능해 보였던 기록을 깨서 먼저 길을 내면, 그 뒤의 선수들은 새 기록을 넘어서기 위해 달린다. 피겨스케이팅에서 4회전(쿼드러플) 점프는 한때 꿈의 기술이었지만 1988년 최초 성공 사례가 나온 뒤 정상급 선수들에겐 필수 기술이 됐다. 육상 100m 경기에서도 ‘10초 장벽’이 1968년 깨진 이후 기록 경신이 이어져 2009년 9초58(우사인 볼트)까지 단축됐다. 이제 사웨가 ‘서브2’ 시대를 열어젖힌 이상 예상을 뛰어넘는 마라톤 기록들이 줄지어 나올 것이다. 인간에게 한계란 없다는 사실을 선수들이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불거진 2016년 말 국회는 ‘숨은 우병우 찾기’로 떠들썩했다. 국회 국정조사특위가 우병우 전 민정수석에게 출석요구서를 전하려 자택을 찾았을 때 그는 가족과 함께 사라진 상태였다. 정당한 사유 없이 청문회에 불참하면 처벌하는 법이 있었지만 우 전 수석이 ‘송달 불능’ 상황을 만들어 처벌을 피한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우 전 수석을 국회 증인석에 앉히기까지 한 달 가까이 숨바꼭질이 이어졌다. 이 사달을 계기로 국회 출석요구서를 일부러 피하면 전달된 것으로 간주하는 ‘우병우 소환법’이 2018년 통과됐다. ▷이후 국회 출석 요구를 회피하는 사례는 줄었지만 증인으로 나와 선서를 거부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2024년 채 상병 사건 청문회에서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과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은 공수처 수사 중이란 이유로 선서를 거부했다. 형사소송법에 본인이나 친족이 형사소추나 공소 제기를 당할 염려가 있는 증언은 거부할 수 있게 돼 있고, 국회 증언·감정법에도 이런 경우 선서나 증언을 거부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다. 이완규 전 법제처장도 계엄 직후 안가 회동 관련 증인으로 국회에 나와 “수사 중”이라면서 선서를 거부했다. ▷쌍방울 대북송금 사건에서 진술 회유 의혹을 받고 있는 박상용 검사는 최근 국회 국정조사에서 증인 선서를 연이어 거부했다. 박 검사 역시 조작 기소 혐의로 서울고검의 수사를 받아 왔다. 그는 사유서에서 위법한 국정조사에 협조할 수 없어 선서는 거부하지만 위원들 질의에 성실히 증언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선서는 안 하되 할 말은 하겠다는 취지다. ▷증인 선서는 하는 순간 위증죄로 처벌받을 위험이 생긴다. 한덕수 전 총리도 국회와 헌법재판소에서 선서를 한 뒤 “계엄 문건을 받은 적이 없다”고 거짓 증언한 혐의로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증인 선서는 법정이나 국회에서 이뤄지는데, 법원에 비해 실체 규명 수단이 부족한 국회에서의 위증이 더 센 처벌을 받는다. 법정에선 증언을 거부하더라도 선서 자체를 거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최근 윤석열 전 대통령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김건희 여사나 부인 정경심 교수 재판에 출석했던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도 증인 선서 후 증언을 거부했다. ▷박 검사는 증인 선서는 하지 않고 국회 밖에서 적극 해명하는 전략을 펴고 있다. 여당이 공소 취소 명분을 쌓기 위해 만든 정치적 무대에 설 수는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하지만 현직 검사가 국회 절차를 거부한 채 언론과 유튜브를 확성기로 활용하는 게 공직자로서 적절한지에 대해선 논란이 있다. 증인 선서는 위증을 막기 위한 절차인 동시에, 증인에겐 발언의 신뢰도를 높이는 장치이기도 하다. 법적 책임은 피하면서 내 할 말은 하겠다는 태도로는 말에 무게가 실리기 어렵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서울에 사는 60대 이모 씨는 보건복지부의 ‘의료쇼핑 의심자’ 리스트에 올라 있다. 지난해 1∼10월 열 달간 받은 물리치료 횟수가 547회에 달한다. 월 55회꼴이다. 하루에 병원 6곳을 돌며 목, 허리, 어깨, 발목 치료를 받은 날도 있다. 이것도 한 해 전인 2024년(1159회)과 비교하면 절반으로 줄어든 것이다. 정부는 그해 하반기부터 진료비 본인부담률을 높였다. 매일 출근하듯 병원에 가는 ‘연간 365회 이상’ 이용자에 대해 366회 차 방문부터는 진료비의 90%를 내도록 한 것이다. 그 전엔 횟수 제한 없이 진료비의 20∼30%만 내면 됐다. ▷본인 부담이 커지자 병원 가는 횟수를 줄인 건 이 씨뿐만이 아니다. 연 365회 초과 이용자는 2024년 2285명이던 게 지난해 102명(9월 누적 인원)으로 뚝 떨어졌다. 내 돈 내고는 안 받을 치료를 거의 공짜로 누리는 도덕적 해이가 그만큼 심각했던 것이다. 실손보험이 이런 풍조를 부추겼다. 병원 가는 데 금전적 부담이 없다 보니 건강보험 재정에서 나가는 급여 진료와 실손보험에서 메워주는 비급여 진료가 함께 늘어 왔다. ▷‘연 365회’ 기준선은 없는 것보단 낫지만 큰 효과를 내진 못하고 있다. 그보다 살짝 아래인 1년에 300회 넘게 외래 진료를 받은 환자는 2024년 8400여 명에 달했다. ‘200회 초과’는 6만 명, ‘150회 초과’는 20만 명이 넘는다. 이들의 진료비를 대느라 건보 재정이 줄줄 새고 있다. 결국 정부는 내년 1월부터 기준을 한층 강화하기로 했다. 앞으론 1년에 300번 넘게 병원에 가면 301번째부턴 진료비 90%를 본인이 내야 한다. ▷의료 쇼핑객들이 건보 재정을 축내면 피해자가 생긴다. 정작 써야 할 곳에 돈을 쓰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령화로 ‘간병 파산’ ‘간병 살인’ 같은 비극이 늘고 있는데 이런 가족들의 고통을 덜어줄 간병비 급여화는 계속 밀리게 된다. 중증 희귀질환 치료나 필수 의료 확충에 쓸 재정 여력도 부족해진다. 더구나 청년 인구 감소로 이들이 짊어질 보험료 부담은 커지고 있다. 지금처럼 일부가 혜택을 독식하면 건강보험제도에 대한 젊은 세대의 불신이 깊어질 수 있다. ▷이참에 기준을 더 강화해 진료 횟수가 연 200회나 100회만 넘어도 본인이 병원비를 부담하게 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소수가 건보 재정을 갉아먹으며 다수의 성실 납부자들에게 박탈감을 주는 상황을 바로잡자는 것이다. 다만 신장병, 당뇨 등 만성질환자들은 병원에 자주 가야만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들의 치료받을 권리가 침해되지 않도록 적정선을 찾을 필요는 있다. 건강보험은 여러 세대가 십시일반으로 채워온 공동의 저수지다. 몰래 물줄기를 빼내거나 물을 오염시키는 얌체 환자들을 골라내야 ‘저수지’가 제 기능을 할 수 있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지난달 대전 안전공업에서 불이 난 건 점심시간 때였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휴게실 등에서 쪽잠을 자며 쉬고 있던 직원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폭발음과 함께 불이 번지면서 익숙한 일상의 공간은 절규로 가득 찼다. 2, 3층의 직원들은 유독 가스와 고열을 견디지 못하고 에어매트가 깔리기도 전에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온몸에 재를 뒤집어쓴 채 바닥에 쓰러진 이들도 많았다. 직원 364명 중 사망자가 14명, 부상자가 60명에 달한다. 나머지 직원들 역시 그날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생존자들이다. ▷불구덩이에서 살아남은 직원들은 여러 감정에 시달리고 있다. 친한 동료가 숨지거나 다친 모습을 목격한 충격,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 계속 일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이 교차한다고 한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로 이어질 가능성이 큰 징후들이다. 정부는 산업재해를 겪은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트라우마 치료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지만 대전 화재 생존자들 중 심리 치료를 받은 사람은 많지 않다. 상담받은 직원이 18%에 불과하다. ▷트라우마 치료를 위해선 다신 그런 위험을 겪지 않을 것이란 안정감이 필수라고 한다. 그런데 일터에서 끔찍한 사고를 겪은 노동자들은 다시 그 현장으로 돌아가야 하는 사람들이다. 아비규환의 기억이 되살아날 수밖에 없다. 지난해 태안화력발전소에서 하청업체 직원이 기계에 끼여 사망한 사건에선 동료들이 숨진 피해자의 시신을 그대로 목격했다. 그런 작업장에서 다시 기계를 돌려야 하는 노동자들은 이번엔 나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떨치기 어렵다. 이들에 대한 심리 치료가 더없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공장이 통째로 불탄 대전 화재는 거의 전 직원이 트라우마를 안게 된 사건이다. 하지만 직원들은 나약한 사람으로 보일까 봐 상담을 망설이는 사례가 많다고 한다. 아직 우리 사회엔 심리적 불안을 개인의 약점으로 낙인찍는 왜곡된 인식이 남아 있다. 정신과 치료를 받는 게 알려지면 인사상 불이익을 받을 수 있고, 이곳 직장을 잃을 경우 다른 일자리를 찾기 쉽지 않다는 것도 부담이라고 한다. 대전 화재 생존자들을 여전히 움츠리게 만든 요인들이다. ▷트라우마 치료는 사고 발생 후 7일에서 4주가 골든타임이다. 보통 이 시기는 사고 조사와 책임자 규명에 관심이 쏠려 생존자 마음 건강은 뒷전으로 밀리기 일쑤다. 이번 화재 사고처럼 감당하기 힘든 일을 겪은 사람은 다시 떠올리는 게 고통스러워 회피하는 것이 정상 반응이라고 한다. 동료들끼리 심리 상담 경험을 공유하며 권하는 문화도 미처 형성되지 않았다. 경영진이 주도적으로 상담을 통한 극복을 독려하지도 않은 듯하다. 산재 사고 후엔 마음 치료를 받는 것이 당연한 절차이자 권리라고 여긴다면 이들이 상담실로 향하는 발길이 한결 가벼워질 것이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부산 돌려차기 사건은 검경 수사의 뼈아픈 실패 사례다. 부실 수사로 피해자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줘 최근 국가배상 판결까지 났다. 검경이 놓친 건 범인의 성폭행 혐의였다. 범인은 자신의 온 체중을 실은 돌려차기로 피해자를 쓰러뜨린 뒤 그를 들쳐 업고 CCTV 사각지대로 가 7분간 머물렀다. 그 직후 피해자는 바지 지퍼가 열린 채로 발견됐다. 범인은 도주하면서 휴대전화로 ‘강간 폭행’ ‘강간 치상’을 검색했다. 경찰도 성폭행 가능성을 배제하진 않았다. 하지만 범인이 극구 부인하자 증거를 찾아보지도 않고 ‘묻지 마 범행’으로 결론지었다. 검찰 역시 성폭력 관련 수사를 보완하라고 요구하지도, 직접 하지도 않았다. 그러곤 형량이 높은 강간 살인미수 대신 살인미수로만 기소했다.성폭행 수사 부실… 법정 와서야 드러나 검경이 비워둔 빈칸은 결국 판사가 채워야 했다. 성폭행 혐의를 조사해 달라는 피해자의 반복된 요청을 2심 재판부가 받아들였다. 재판장은 피해자의 청바지와 속옷 등 의복 일체를 전면 재감정하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청바지 여러 곳에서 범인의 DNA가 검출됐다. 당초 경찰이 했던 감정은 범인이 만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일부 부위만 대상으로 이뤄져 나오지 않았던 증거였다. 용의자 특정에 집중하느라 성폭행을 밝히는 데는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피해자 청바지가 몸이 보일 정도로 내려가 있었다”는 최초 목격자 진술, “동생 속옷이 한쪽 다리에만 걸쳐 있었다”는 피해자 언니의 진술도 2심에 와서야 나왔다. 재판부는 성폭행 시도 사실을 인정해 범인에게 1심보다 8년 무거운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다만 성폭행 여부에 대해선 사건 후 1년이 지나서야 재감정이 이뤄져 증거가 충분치 않다고 판단했다. 범인은 동료 재소자들에게 피해자 주소를 읊어대며 “출소하면 살해하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하는데 초동수사 실패가 그의 출소를 앞당겨준 셈이 됐다. 물론 수사는 쉽지 않은 작업이다. 한정된 시간과 인력을 어디에 집중할지 매 순간 선택해야 한다. 확증 편향, 종결 욕구 같은 인지적 함정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선의를 갖고 최선을 다해도 수사는 실패할 수 있다. 사회적 공분이 큰 사건일수록 압박도 커 함정에 더 취약하다. 그래서 보완수사가 중요하다. 유동적, 잠정적일 수밖에 없는 1차 수사를 보완하지 못하면 추가 증거 수집 기회를 날리고 범인이 다른 사람일 가능성도 닫아버려 피해자와 피의자 모두에게 인권 침해다. 지금의 검찰개혁 논의에선 검사에게 보완수사권을 줄지 여부가 쟁점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보완수사를 가장 제대로 할 수 있는 제도를 갖추는 것이다. 검사가 보완수사를 할 수 있는 현 제도에서도 돌려차기 사건처럼 스크리닝에 실패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그렇다고 검사에게 보완수사 요구만 할 수 있게 하면 수사 통제는 더 허술해질 가능성이 높다. 경찰이 보내온 수사 기록은 1차 수사팀의 결론을 뒷받침하는 내용 위주로 편집된 정보일 수밖에 없다. 검찰이 이를 검증하고 다른 가설을 확인할 수단이 없다면 오류를 잡아내기가 쉽지 않다. 돌려차기 사건만 보더라도 검찰이 보완수사권을 적절히 활용해 최초 목격자와 피해자 언니의 진술을 확보했다면 그런 부실 기소가 이뤄지진 않았을 것이다.보완수사 ‘누가’보다 ‘제대로’가 중요 국가가 사적 보복을 용인하지 않고 형벌권을 독점하는 건 책임지고 실체를 규명해 합당한 처벌을 하겠다는 국민과의 약속을 전제로 한 것이다. 부실 수사는 이 계약을 정면으로 위반한 위법 행위다. 검찰권 남용을 막는 개혁은 필요하지만 수사의 완결성은 어떤 이유로도 후퇴해선 안 되는 원칙이다. 보완수사가 부실해 판사가 법정에서 ‘수사’하고, 피해자에게 국가배상까지 하는 상황이 재발하지 않도록 막는 것도 놓쳐선 안 될 개혁 과제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 기술자’ 이근안 씨를 만났던 피해자들은 이 씨의 손이 솥뚜껑처럼 컸다고 기억한다. 그런 손으로 팔을 확 잡아당겨 관절을 뽑았다가 다시 쭉 밀어서 집어넣었다고 한다. 이 씨의 주특기였던 이른바 ‘관절 뽑기’다. ‘날개 꺾기’ ‘통닭구이’도 그가 개발한 고문 기법이었다. 간첩으로 몰렸던 납북어부 김성학 씨는 “이 씨가 상대의 신체 반응을 봐가며 고문 강도를 세밀하게 조절해 고통을 극대화시켰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 거짓 자백을 받아냈던 이 씨는 훗날 “심문도 하나의 예술”이라는 궤변까지 늘어놨다. ▷전국으로 ‘출장 고문’을 다니며 특진을 거듭했던 이 씨는 1987년 민주화 이후 잠적했다. 11년간 숨어 살았던 그는 1999년 검찰에 돌연 자수했다. 함께 고문을 했던 동료 형사들이 비교적 가벼운 형량을 받은 걸 보고 심경의 변화를 느꼈다고 했다. 고문죄 공소시효도 대부분 지난 상태였다. 이 씨는 납북어부 사건으로만 기소돼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이 씨에게 고문을 당했던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2005년 복역 중이던 이 씨를 찾아갔다. 당시 김 전 장관이 “어디 개인의 잘못입니까. 시대가 만든 죄악이지”라면서 용서를 해줬다는 게 이 씨의 주장이다. 김 전 장관은 그날 만남에 대해 “나의 용서가 진실인지 반문하곤 한다”고 회고록에 썼다. “고문당했던 기억이 떠오를 게 분명해 면회 가던 날 오전까지 망설였다. 해마다 고문을 받은 시즌이 되면 몸서리치게 몸살을 앓곤 했다.” 머리로는 용서했지만 몸에 새겨진 상처를 지우진 못했던 것 같다. ▷이 씨는 2012년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고백’이란 책을 내며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기자와 만난 이 씨는 “피해자들에게 사과한다”고 했다. 정확히 무엇에 대해 사과하느냐고 묻자 “쥐어박으면 안 되는데 그게 내 잘못”이라고 했다. 김 전 장관은 “온몸이 발가벗겨진 채 전기 고문을 당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에 다가왔다”고 했고, 이 씨에게 고문을 받은 뒤 옥사한 피해자도 있다. 이런데도 이 씨는 자신의 행위를 ‘쥐어박는다’는 정도로 표현했다. ▷이 씨는 25일 서울의 한 요양병원에서 사망했다. 그는 88세까지 살았다. 고문 후유증으로 고통받았던 김 전 장관은 파킨슨병을 앓다가 64세에 눈을 감았다. 이 씨의 고문에 못 이겨 허위 자백을 한 뒤 옥살이를 했던 피해자들은 30, 40년 뒤에야 누명을 벗었지만 당사자가 이미 세상을 뜬 경우도 적지 않다. 이 씨는 출소 후 사망하기까지 20년 동안 피해자와 가족들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한 적이 없다. 피해자가 힘들게 내민 용서의 손길에도 제대로 된 반성과 사과 한마디 없이 떠난 그에겐 고문 기술자란 낙인이 역사의 형벌처럼 남게 됐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2024년 5월은 검찰이 김건희 여사 사건으로 격변에 휩싸인 한 달이었다. 5월 2일 이원석 당시 검찰총장이 디올백 의혹 전담수사팀 구성을 지시하며 수사 의지를 드러낸 게 발단이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4일과 12일 박성재 당시 법무부 장관과 각각 75분, 42분간 통화하며 긴박하게 움직였고, 13일 검찰 고위직 인사가 단행됐다. 이 전 총장은 패싱한 채 이뤄진 그 인사로 ‘찐윤’ 이창수 서울중앙지검장이 기용되고 김 여사 수사팀 지휘부가 몽땅 물갈이됐다. 김 여사가 박 전 장관에게 “내 수사 어떻게 돼 가고 있느냐”고 물은 게 그로부터 이틀 뒤다. ▷그 5월 말 김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을 수사한 서울중앙지검 반부패2부에서 작성했던 문건이 최근 논란이 되고 있다. 민중기 특검은 이 문건이 검찰의 봐주기 수사를 뒷받침하는 단서라고 보고 2차 종합특검에 넘겼다. ‘불기소처분서’라는 폴더에서 발견된 한글파일에 김 여사의 예상 진술과 함께 증거 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한다는 취지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문건이 마지막으로 수정된 게 그해 5월 24일로 이 전 지검장 부임 9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것만으로 검찰이 김 여사에 대해 ‘봐줄 결심’을 했다고 볼 수는 없다. 기소와 불기소로 나눠 수사 상황을 정리한 문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는 김 여사 조사조차 이뤄지지 않아 기소 여부를 검토할 단계가 아니었다. 김 여사 대면조사는 두 달 뒤에야 이뤄졌는데 벌써부터 ‘불기소’ 표현이 수사팀 문건에 등장한 것이다. 김 여사 조사 역시 “검찰청사로 불러 조사하라”는 총장 지시까지 어기고 수사팀이 대통령경호처 부속 건물로 찾아가 ‘황제 조사’ 논란을 빚었다. ▷이창수 전 지검장이 수사 검사에게 “유사 사건의 무죄 판례를 참고하라”는 메시지를 보냈다는 보도도 나왔다. 보도에 따르면 이 지시는 수사팀이 김 여사 기소 여부를 저울질하던 9월에 이뤄졌다. 사실상의 무혐의 처분 가이드라인일 수 있다고 특검이 의심하는 이유다. 이 전 지검장은 “판례 검토는 사건 처분 전 거쳐야 하는 절차”라고 해명했다고 한다. 그 말이 맞을 수도 있지만 지검장이 지휘 계통인 차장검사와 부장검사를 건너뛰고 일선 검사에게 직접 지시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서울중앙지검은 2024년 10월 김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혐의에 대해 불기소 처분했다. 공교롭게도 5개월 전 작성했던 문건과 같은 결론이다. 특검이 확보한 문건 중에는 수사팀의 수사보고서도 있는데 수사 결과 발표 후에도 수정된 흔적이 있다고 한다. 보고서 작성 날짜를 최초 작성일로 바꿀지 검사들끼리 대화한 내역이 발견됐다는 보도도 있다. 수사 과정이 정상적이고 떳떳했다면 이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밝혀내야 할 의혹이 아직 많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정보력은 지난달 28일 이란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 암살 때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하메네이 경호원들의 차량 번호와 출퇴근 경로를 꿰고 있던 모사드는 수도 테헤란의 교통 카메라를 해킹해 이들이 비밀 관저로 향한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또 외부에서 경호원들에게 위험 징후를 알리지 못하도록 주변 기지국을 교란시켜 전화를 걸어도 ‘통화 중’ 신호가 뜨게 했다. 결국 관저 지하 벙커에 모인 하메네이와 주요 수뇌부는 이날 오전 9시 45분 일거에 제거됐다. ▷모사드의 정보력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마음도 움직였다. “이란을 침공하면 며칠 내에 반대 세력을 규합해 정권을 붕괴시킬 수 있다”는 모사드의 보고가 트럼프의 공습 결정에 영향을 줬다는 미 언론의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트럼프는 지난달 28일 이란 공격 직후 이란 국민들에게 “우리가 작전을 끝내면 정부를 장악하라. 이란 정부는 여러분의 것이 될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는 반정부 시위로 이란 정권이 흔들리는 지금이 핵을 폐기시킬 적기로 본 것 같다. ▷하지만 수뇌부가 사라지면 정권이 무너질 것이란 정보는 오판으로 드러나고 있다. 전쟁 한 달이 다 되도록 이란 정권은 건재한 상태다. 핵심 세력인 혁명수비대는 무력 집단인 동시에 석유 등 국가 기간산업까지 장악하고 있다. 이런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백업 시스템을 촘촘히 갖춰 수뇌부가 제거되면 곧바로 후계자가 채워지는 구조다. 하메네이보다 더 강경한 차남이 뒤를 잇게 된 가운데 반대 진영은 구심점 없이 무력한 상태다. 국민들 역시 “변화를 원하지만 전쟁을 원했던 건 아니다”라면서 봉기의 동력도 낮아졌다. ▷정보기관의 오판은 적을 과소평가하고 스스로는 과대평가할 때 종종 벌어진다. 모사드 역시 그런 오류에 빠져 2023년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을 막지 못했다. 당시 모사드는 하마스가 가자지구 국경 일대에서 공격 예행연습을 하는 징후를 포착하고도 이스라엘군 수뇌부를 교란하려는 수작인 것으로 폄하했다. 또 아이언돔 같은 최첨단 방공망을 과신해 하마스가 픽업트럭과 패러글라이딩으로 뚫고 들어올 줄은 예상치 못했다. ▷이번 이란 전쟁에선 모사드가 미국을 끌어들이기 위해 ‘의도된 오판’을 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모사드를 제외한 이스라엘의 다른 정보기관들은 체제 붕괴가 어려울 것이라고 평가했지만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모사드의 정보를 앞세워 트럼프를 설득했다고 한다. 네타냐후는 며칠 전 “이란 국민들이 정권을 무너뜨릴지 확실히 말할 순 없다. 무너지진 않아도 약해지긴 할 것”이라며 한발 빼는 태도를 보였다. “이스라엘이 왜곡된 정보로 전쟁을 유도했다”면서 사임한 미국 대테러 수장의 말대로 가장 큰 오판을 한 건 모사드의 정보를 덥석 문 트럼프일 수 있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김건희 여사는 2022년 6월 나토(NATO) 순방 때 착용했던 반클리프아펠 목걸이의 출처에 대해 계속 말을 바꿔왔다. 순방 직후 논란을 빚자 “지인에게 빌린 것”이라더니 지난해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이후엔 “2010년경 모친 선물용으로 모조품을 구입한 것”이라고 했다. 특검이 김 여사 오빠의 처가에서 목걸이를 찾아냈을 땐 “오빠에게 선물한 모조품”이라고 또 말을 뒤집었다. 그 와중에 해당 모델이 2015년 처음 출시됐다는 제조사 측 설명도 나왔다. ▷김 여사의 주장대로라면 원본이 나오기 전에 만든 짝퉁을 모친에게 선물했고, 12년 뒤 영부인 신분으로 빌려서 착용했으며, 이를 다시 오빠에게 ‘선물’했다는 말이 된다. 서희건설 이봉관 회장이 “내가 목걸이를 줬다”고 자수하면서 김 여사의 해명은 더 들어볼 것도 없는 수준이 됐다. 이후에도 수수 혐의를 줄곧 부인하던 김 여사는 17일 매관매직 혐의 사건 첫 공판에서 반클리프 목걸이를 받았다고 결국 인정했다. 김 여사 오빠의 처가에서 나온 모조품은 심어놓은 조작 증거란 사실까지 자백한 셈이 된다. ▷김 여사는 이 회장에게서 받은 반클리프 목걸이에 대가성은 없었다고 부인하고 있다. 6000만 원대 목걸이가 윤 전 대통령 당선 축하 선물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이 회장은 당선 직후인 2022년 3월 김 여사에게 목걸이를 줬다. 그 후 석 달 뒤 이 회장의 맏사위인 박성근 전 검사가 한덕수 당시 국무총리 비서실장에 임명됐다. 이 회장은 김 여사에게 사위의 관직을 부탁했다고 한다. 김 여사가 목걸이를 받고 얼마 뒤 “목걸이가 아주 예쁘다. 도와드릴 게 없느냐”고 하자 이 회장이 인사 청탁을 했다는 게 특검의 수사 결과다. ▷김 여사는 통일교 금품 수수 사건 재판에서도 샤넬 백 2개를 받았다고 뒤늦게 시인한 적이 있다. 이때도 받은 건 맞지만 대가성은 없었다고 했다. 이런 ‘일부 시인’ 전략은 실제 효과를 발휘했다. 재판부가 샤넬 백 중 1개를 대가성 없는 단순 선물로 판단해 유죄 리스트에서 빼준 것이다. 가방이 전달됐던 바로 그 시점에 청탁이 이뤄진 건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통일교 사건 1심 판결은 ‘매관매직 재판’에 임하는 김 여사에게 힌트가 됐을 수 있다. 서희건설로부터 받은 반클리프 목걸이는 우겨봐야 소용이 없다는 판단 아래 받은 사실을 인정하되, 목걸이를 받던 그 자리에서 청탁이 있었던 건 아니니 대가성을 부인해 무죄를 받겠다는 전략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번에도 통일교 1심 판결 때와 같은 결과가 나올지는 미지수다. 한 전 총리는 비서실장 인사에 대해 “윤 전 대통령이 우리 박 전 검사님을 딱”이라며 ‘윤심(尹心) 인사’였다는 걸 밝힌 바 있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자궁암 3기 판정을 받던 때 나이가 38세. 그전까진 크게 배신당한 적 없는 삶이었다. 연세대 경영학과와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졸업 후 JP모건을 거쳐 글로벌 빅테크 메타에서 커리어의 정점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메타에서 실적 꼴찌 부서를 맡아 1년 만에 1등으로 끌어올렸고, 임원 승진이 눈앞에 보였다. 당시 일하던 싱가포르 본부에서 미국 본사가 있는 실리콘밸리로 옮길까도 계획하던 때였다. 바쁜 와중에 주 3회 필라테스, 건강식도 꾸준히 챙겼다. 그런 그에게 3기 암이라니. 죽음은 노크하고 들어오지 않았다. 갑자기 벽을 부수고 들어와 멱살을 틀어잡았다.》최지은 메타 아시아태평양본부 전무(42)는 2022년 2월 ‘생존율 50%’란 말과 함께 암 진단을 받았다. 그 후 6개월간 독한 항암 치료를 견뎠건만 암은 오히려 폐까지 번져 있었다. 자궁암 4기, 9개월 시한부 선고가 내려졌다. 다행히 그는 살아남아 말기 암 4년 차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최 씨는 죽음에 가까워지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이 많다고 증언한다. 생사의 경계에서 목격한 것들을 ‘그렇게 나는 다시 삶을 선택했다’란 책으로 냈다. 현재 싱가포르에 살고 있는 최 씨를 11일 화상 인터뷰로 만났다.―삶의 전성기로 가던 때에 암이 찾아왔다.“세상에 사기당했다는 분노, ‘뭐 하러 열심히 살았나’ 하는 허무함이 정말 컸다. 매사에 최선을 다하면 보답이 온다는 게 세상 이치라고 믿고 노력하며 살아왔는데 나를 지탱해 온 세계관이 산산조각 나버렸다. 내가 잘못한 게 뭐라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쥐 잡듯이 원인을 찾으려 했다. 직장에서 내게 스트레스를 줬던 누군가 때문에 암에 걸렸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항암 치료는 어떤 마음으로 견뎠나.“치료를 잘 받아서 내가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겠다는 회귀 본능이 강했다. 조금도 뒤처지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별별 노력을 다했다. 6시간 동안 독한 주사를 맞는 와중에도 10개 넘는 국내외 신문을 구독해 읽었고, 업계 소식도 계속 업데이트했다. 한국의 젊은 암 환자들과 얘기해 보면 다들 비슷하다. 치료받는 동안에도 자신을 몰아붙인다.”―6개월간 독한 항암치료를 견뎌냈지만 결국 시한부 9개월 선고를 받았다.“삶의 의욕을 완전히 잃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커튼 걷을 힘도, 이 닦을 힘도 없었다. 어차피 죽을 텐데 이가 몇 개 썩는 게 대수인가. 밥 먹어서 뭐 하나, 씻어서 뭐 하나 이런 생각뿐이었다. 그런 무기력한 마음으론 1분 1초가 너무 고통스럽다. 암은 저를 한 번 죽이지만 이런 고통이 저를 수천 번 죽이는 것 같았다.”극한의 절망에서도 선택지는 있었다최 씨는 지인들로부터 암 환자들 투병 수기 등 100권이 넘는 책 선물을 받았다. 그중 가장 큰 위로를 받은 게 ‘죽음의 수용소에서’란 책이었다. 아우슈비츠 생존자이자 정신의학자인 빅터 프랭클이 나치 수용소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기록한 책이다. 극한의 절망에서도 어떤 태도로 대응할지는 나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게 책의 핵심 내용이다.―책의 어떤 점에 위로를 받았나.“종일 우울해하며 침대에 누워만 있는 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조차 제 선택이란 걸 알게 됐다. 통화 한 번 하자는 친구, 바람 쐬러 가자는 가족들을 다 거부하고 가만히 죽음을 기다리는 선택을 나도 모르게 했던 거다. 책을 읽고 나서 선택지가 항상 있을 거란 생각을 하게 됐다. 사소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을 하나씩 해나갔다.”―그럼에도 ‘현타’가 올 때도 있었을 거 같다.“물론 그렇다. 싱가포르 병원의 제 주치의는 막연한 희망을 품게 만드는 의사가 아니었다. 절대 상황을 포장해서 좋게 말하지 않는다. 다만 안 좋은 소식을 전할 땐 쓰고 있는 마스크를 내리고 말했다. 그 순간만큼은 마스크 뒤에 숨지 않고 인간 대 인간으로 대하는 것에 따뜻함을 느꼈다. 주치의는 결말이 정해져 있다고 하더라도 결말로 가기까진 다양한 이야기와 서사들이 있다고 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라도 암과 죽음 사이에 여러 선택지가 있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말이었다.”―암 환자에게 힘이 되는 말이란 어떤 걸까.“다 잘될 거야” “암과 잘 싸워보자” 같은 말들은 고맙지만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저 역시 항암 치료란 걸 받기 전까진 열심히 ‘투병’을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6시간 동안 앉아서 몸에 독이 들어가는 걸 바라보면서 암은 싸우고 자시고 할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제가 가장 크게 위로를 받은 건 ‘버텨보자’는 말이었다. ‘어렵겠지만 우리 버텨보자. 끝까지 네 옆에 있을게’라고 했던 친구의 말이 큰 힘이 됐다.”최 씨는 항암 치료로 체중이 10kg이나 늘었고, 얼굴은 여드름투성이에 조기 폐경까지 왔다. 차마 거울을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오히려 암 말기가 되자 자신을 마주할 용기가 생겼다고 했다. 미래를 빼앗기고 나서야 현재를 살게 되는 아이러니였다.―3기보다 4기 치료가 더 즐겁다고 책에 썼다.“3기 때만 해도 빨리 나아서 살도 빼고 예전 모습이 돌아오면 거울을 다시 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4기가 되면서 그때로 돌아갈 여지가 없어지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거울 보는 것도 ‘지금 아니면 언제?’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폐 부위 수술을 하면서 옆구리에 큰 흉터가 생겼는데 그 흉터도 비로소 만질 수 있게 됐다. 병원 갈 때도 예전엔 추리닝만 입다가 좋아하는 옷과 모자를 여러 벌 사놓고 매번 바꿔 입었다. 그런 뒤부턴 병원 가는 게 기다려지기까지 했다. ‘어차피 죽을 텐데 뭐 하러 하나’가 아니고 ‘어차피 죽을 테니 마음대로 해보자’라고 생각하니 삶의 주도권을 조금씩 되찾게 됐다.”―삶의 우선순위도 달라지게 되나.“죽음에 가까이 갈수록 우리가 중시하는 정답, 경쟁, 결과 같은 것들은 아무 힘이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얼마나 빨리 승진했고, 돈을 얼마나 벌었는지는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대신 시행착오로 헤매던 순간, 사람들이랑 티격태격하고 ‘으쌰으쌰’ 하던 과정들이 생각난다. 내 인생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만한 ‘톱 10’의 순간들을 필름처럼 떠올린 적이 있다. 남편하고 여행 갔다가 기차를 놓쳐서 함께 벙쪘던 장면, 회사에서 사고 수습하느라 팀원들하고 밤새우고 배달 음식 시켜 먹으면서 떠들던 장면 같은 것들이다. 그 10개의 공통점이 있다면 현재에 온전히 머물렀던 순간들이다.”―현재를 살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실천이 참 어렵다.“사회에서 가르쳐주지 않지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게 현재를 살 수 있는 능력인 거 같다. 특히나 성취 지향적인 한국에선 극소수만, 그것도 엄청난 일을 겪지 않고선 갖기 어려운 초능력이다. 미국 투자회사나 빅테크에서 일하면서 성공한 사람들을 자주 봐왔다. 그런 사람일수록 현재를 살지 못하는 것 같고, 불행한 모습도 많이 본다.”모두가 만류했던 복직… 원래의 나를 찾고 싶었다1년간 치료를 받아온 최 씨는 2022년 말, 폐에 전이됐던 암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생사의 고비에서 삶 쪽으로 무게 추가 일단 기운 것이다. 물론 항암 치료는 계속해야 하고 3개월마다 암 검사를 받은 뒤 의사를 만나 다음 3개월이 허락되는지 통보받는 삶이긴 하다. 그렇게 주어진 ‘인생 2회차’에 그는 메타로의 복직을 선택했다.―주변에서 많이들 복직을 만류했을 텐데….“거의 모두가 반대했다. ‘그 몸으로 미친 거 아니냐’, ‘세계여행이라도 가지 그러냐’는 의견이 많았다. 게다가 회사에 구조조정도 있었고 제가 일했던 부서까지 없어진 상태였다. 복직하지 말라는 신의 계시인가도 싶었다. 하지만 생존만을 목표로 1년을 살다 보니 내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다시 찾고 싶었다.”―삶에서 일이란 어떤 의미인가.“일을 하면서 키웠던 근육이 암 치료에 큰 힘이 됐다. 일하면서 배운 게 딱 하나 있다면 불확실성 속에서 의사결정을 하는 방법이다. 암이야말로 그것만큼 불안정한 게 없다.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 오더라도 최선의 의사결정을 할 것이란 자신감을 일에서 배웠다고 생각하니 다시 일해보고 싶었다. 또 휴직하는 동안 큰 힘이 돼준 게 회사 동료들이어서 다시 돌아온 모습을 보여주고도 싶었다.”―일을 대하는 마음이 예전과 다른가.“예전엔 평가, 승진, 연봉 이런 것들이 중요했다면 이젠 아무 의미가 없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재미있고, 의미가 있는지가 중요하다. 그게 아니라면 내일 당장 그만둬도 상관없다. 또 이력서에 넣을 만한 커리어보다 내 부고에 쓸 만한 커리어를 쌓으려고 한다. 동료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지를 생각한다. 예전 팀원 중에 대중 앞에서 말하는 걸 힘들어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제가 기회를 주고 북돋아 줬더니 나중에 큰 무대에서도 잘하게 됐다. 그 친구가 ‘제 인생의 전환점을 함께해 줘 고맙다’고 했는데 그런 교감이 죽기 전에 생각나는 소중한 기억이다.”3개월마다 새로 얻는 삶… 하루하루가 생생하다최 씨는 복직 1년 반 만에 전무로 승진했다.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일하다 보니 성과가 자연스레 따라왔다고 한다. 예전엔 한 달이, 1년이 훌쩍 흘러갔지만 지금은 기억할 만한 하루를 만들자는 마음으로 지낸다. 하루하루가 생생하고 삶의 감각이 훨씬 풍요로워졌다고 한다. 그렇게 3개월 단위로 연장되는 삶을 3년 넘게 살고 있다.―의사를 만나러 가는 날은 기분이 어떤가.“여전히 불안하고 무섭다. 전날에는 잠도 잘 못 잔다. 하지만 3개월을 공포 속에 허비하면 너무 허망할 것 같아서 불안감과도 친하게 지내려 한다. 의사를 만나기 전날엔 지난 3개월을 복기해본다. 후회 없이 살았다는 생각이 들면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게 조금은 쉬워진다. 3개월마다 삶을 정리하고, 새로운 3개월을 부여받는 삶…. 저주받은 삶인 것 같지만 좋은 것도 많다. 가끔 아쉬운 3개월을 보냈다면 ‘이번 생은 망했으니 다음 생엔 재밌게 살아보자’라며 게임처럼 생각하기도 한다.”―결국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뭘까.“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인 것 같다. 사람과의 교감만큼 기억될 만한 순간이 있을까. 가족이든, 친구든,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든 함께하고 있는 시간을 온전히 즐기려고 한다. 아마 다음 달에 의사를 만나러 갈 땐 인터뷰로 했던 오늘 대화가 생각날 것 같다. ‘맞아, 그때 그런 얘기를 나눴지’ 하면서. 제 이야기로 누군가가 용기를 얻는다면 저에게도 큰 의미가 있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