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동

유재동 부장

동아일보 산업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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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rrett@donga.com

취재분야

2025-06-16~2025-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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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7%
인공지능3%
  • [오늘과 내일/유재동]‘임기 내 5000’, 너무 집착하면 기업 골병든다

    3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상법 개정안은 이재명 대통령의 증시 공약 달성을 위한 중요한 퍼즐 중 하나다. 더불어민주당은 최근 “상법을 개정하면 코스피가 5,000까지 높아질 수 있다”는 자체 전망을 계속 쏟아내고 있다. 이번에 상법 개정을 주도한 당내 조직의 이름도 ‘코스피5000특별위원회’다. 상법 개정으로 기업들이 주주 이익을 더욱 챙기게 되면 자연스레 투자 자금이 국내 금융시장으로 유입되고 이것이 주가 상승으로 이어진다는 계산이다. 그 계산이 아직까진 틀리지 않아 보인다. 이 대통령도 이날 기자회견에서 “(지난 한 달간) 좀 괜찮다 싶은 점은 눈에 띄는 주식시장”이라며 기대와 자신감을 내비쳤다.산업 경쟁력 강화가 가장 근본 과제 이 대통령과 여권은 주가 상승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을 소액주주의 이익 보호, 그리고 부동산 투자 자금의 증시 유입이라 보고 있다. 기업이 주주 환원을 늘리고 지배구조를 투명하게 하면 개미와 외국인 투자가가 이른바 ‘국장’으로 돌아오고 증시 저평가가 해소될 것이라는 기대에서다. 실제로 최근 코스피가 거침없는 상승세를 보이며 3,000을 돌파한 것은 새 정부의 이런 정책에 대한 기대감이 반영된 측면이 크다. 부동산에 과하게 쏠려 있는 투자의 물줄기를 국가 경제와 기업 성장의 기반이 되는 주식시장으로 돌리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부동산 과잉 투자가 온갖 사회 병폐를 일으키는 것과 달리 증시 활성화는 내수 진작과 기업의 자금 조달이라는 경제 선순환으로 이어진다. 주주 배당을 높여 투자 수익률을 높이고 주식시장에 새로운 자금을 유입하면 주가가 오를 가능성이 크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이런 식의 정책은 역대 정권에서도 추진한 전례가 많았다. 윤석열 정부의 증시 밸류업 대책, 박근혜 정부의 배당소득증대세제가 비슷한 정책이었고, 논란이 있지만 우리나라가 주식 투자 수익에 세금(금융투자소득세)을 걷지 않는 것도 증시 활성화를 위한 방안 중 하나다. 그러나 지난 모든 증시 부양책이 그랬듯이 이런 종류의 법·제도 변경은 실행이 손쉬운 만큼 효과는 제한적이고 단기적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대책이 잘못 남용될 경우 투자 여력을 줄여 자칫 기업가치를 훼손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주가의 향방을 가르는 가장 근본 요인은 무엇보다 해당 기업이 얼마나 수익 창출력이 있느냐다. 새 정부 들어 갑자기 증시가 오르니까 어디선가 큰 희망의 불빛이라도 생긴 것 같지만, 주력산업이 위기에 빠지고 내수 침체와 중국의 급부상에 산업 기반이 흔들리는 우리 경제의 본질은 한 달 사이에 전혀 변한 게 없다. 지금까지는 새 정부 출범에 대한 기대감, 그리고 그동안 주가가 너무 떨어져서 생긴 기저효과 덕에 3,000을 넘었지만 앞으로도 구조 개혁이나 실질적인 경쟁력 개선 없이 지금 같은 상승세가 이어질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지금까지 속성과외나 잔기술을 동원해 실적을 올렸다면 앞으로는 진짜 실력을 쌓아야 할 때다. 무리한 주주이익 강요는 부메랑 될 것 시장 투명성을 높이고 주주 이익을 보호하는 큰 방향은 옳지만 과도한 규제로 기업들의 손발을 묶으면 이는 우리 경제에 자해 행위가 될 수 있다. 당장 주가를 높이기 위해 자사주 소각과 배당을 지나치게 강요하다 보면 기업의 투자 여력이 줄어 향후 기업가치에도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번 상법 개정도 증시를 잠시 상승시키는 요인은 될 수 있지만, 경제계의 우려대로 기업 경영과 투자를 제약하는 쪽으로 작용할 경우 오히려 시장의 악재로 돌변할 가능성이 크다. 주가 5,000에 집착해 무리수를 두며 시장 거품을 키우기보다는, 과감한 구조 개혁과 산업 경쟁력 강화라는 정공법을 펼쳐야 할 때다. 유재동 산업1부장 jarrett@donga.com}

    • 2025-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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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유재동]‘제조업 주권론’의 시대

    ‘철의 도시’가 요즘 차갑게 식었다. 경북 포항의 ‘포스코 1선재공장’에선 반년이 넘도록 기계음이 들리지 않는다. 45년간 철강 제품을 생산하던 이 공장은 작년 11월 깊은 불황의 여파로 문을 닫았다. 공장 폐쇄를 아쉬워하며 직원들이 찍은 단체사진엔 그 표정에 착잡함이 짙게 묻어났다. 회사는 해체된 설비들이 널브러져 있는 이곳을 앞으로 어떻게 정리 또는 활용할지 못 정한 상태다. 그만큼 업(業)의 미래가 캄캄하다는 얘기다. 한때 ‘민족의 불꽃’, ‘산업의 쌀’이라는 대접을 받아 온 철강산업이 호된 된서리를 맞고 있다.中에 휘청이는 한국의 뿌리 산업 철강은 경기침체와 중국의 무차별 저가 공세로 시장이 잠식당한 대표적 업종이다. 석유화학, 배터리 등 다른 뿌리산업들도 비슷한 처지다. 그뿐이 아니다. 전기차, 가전, 반도체 등 중국과 경쟁 관계에 있는 모든 산업이 존재론적 위기에 봉착했다. 얼마 전 만난 대기업 CEO는 “우린 벌써 주4.5일제 얘기가 나오는데 중국은 일머리 있고 주72시간씩 일할 각오가 돼 있는 대졸자가 한 해 1200만 명이나 쏟아진다”, “중국 연간 연구개발(R&D) 투자액(800조 원)이 우리 정부 전체 예산보다도 많다”며 한숨을 쉬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달 공장 시찰에서 “우린 과거에 성냥, 비누, 양철을 수입에 의존했지만 지금은 세계 제조업 1위 대국이 됐다”고 뻐기듯이 말했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폭탄에 맞서 글로벌 ‘제조업 전쟁’의 포문을 연 것이다. 요즘 국내 산업계에는 “중국이 손대는 산업은 그냥 접어야 한다”는 자조가 팽배하다. 비용이나 물량으로는 상대가 안 되고, 기술력도 별 차이가 없으니 겨뤄봐야 승산이 없다는 것이다. 누울 자리 보고 발을 뻗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합리적인 경영 판단일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공급망이 안정되고 국가 간 분업이 원활하던 20, 30년 전과 상황이 다르다. 뭐든 손 놓고 멍하게 있다가는 순식간에 자기 안방을 내주고 글로벌 무대에서 무참히 짓밟히기 십상이다. 공장 문을 닫는 것은 단지 제품 생산을 중단하는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간 어렵게 이뤄온 기술 개발과 인력 양성의 맥이 끊기고, 전후방 산업 생태계도 연쇄 타격을 입는다는 뜻이다. 제조업을 포기한 대가가 얼마나 쓰라린지는 미국이 보여주고 있다. 근현대 글로벌 산업의 헤게모니는 영국에서 미국을 거쳐 1980년대 일본, 2000년대 중국으로 이동했다. 40년 전에 제조업 주권을 넘겨준 미국은 이제야 뒤늦게 조선, 섬유, 철강 등 전통산업 재건을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다. 그러나 이를 받쳐줄 생산 인프라가 사라진 지 오래고, 수십 년 전 공장에서 일했던 근로자들은 너무 나이가 들어 일터를 떠났다. 특히 지나치게 올라버린 인건비가 발목을 단단히 잡는다. 미국 본토에서 아이폰을 생산하겠다는 트럼프의 야심 찬 구상을 월가는 “허구적인 얘기”라고 일축한다. 한 대에 500만 원이 넘는 스마트폰을 누가 사겠냐는 것이다.AI 시대일수록 제조업 기반 지켜내야 많은 국가가 제조업을 지키려고 분투하는 것은 반드시 양질의 일자리를 확보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동안 쌓아올린 제조업 기반이 더 발전된 산업으로 나아가는 발판이 될 수 있어서다. 한국이 1960년대 가발, 섬유로 시작해 중공업, 자동차, 반도체 등 고부가 첨단 업종으로 주력 산업을 계속 진화시킬 수 있었던 것도 기존 분야에서 신산업의 싹을 지속 발굴한 덕분이다. 요즘 테크업계에선 소버린 인공지능(AI)이 화두다. AI 기술이 우리 산업에 만개하기 위해서는 그 토대가 되는 뿌리산업부터가 흔들림 없이 중심을 잡아줘야 한다. 새 정부도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라는 각오로 선대가 피땀 흘려 이룬 산업 포트폴리오를 지켜내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유재동 산업1부장 jarrett@donga.com}

    • 2025-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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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I기술은 전체 산업구도 바꾸는것… 곳곳에 잘 스며들게 해야”

    《 이재명 정부는 성장 잠재력 저하, 혁신 기업의 부재 등 한국 경제의 고질병을 치유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를 위한 방편으로 인공지능(AI)에 대한 과감한 투자를 약속한 바 있다. 이정동 서울대 공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AI 기술 자체를 발전시키는 것보다 AI를 각 산업 분야에서 잘 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우선”이라며 “한국의 풍부한 산업 기반에 AI를 접목하면 우리에게도 기회가 있다”고 말했다. 》“인공지능(AI) 기술 고도화보다 중요한 것은 AI를 각 산업에 잘 스며들게 하는 것입니다.”이정동 서울대 공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최근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교수는“정책의 방점을 ‘AI의 발전’이 아니라 ‘AI의 활용’에 찍어야 한다”며 “한국의 넓은 산업 포트폴리오에 AI를 접목하고 기초과학에 투자하면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다”고 강조했다.이 교수는 서울대 공과대학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고 서울대 공학전문대학원에서 기술경영경제정책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 ‘축적의 시간’과 ‘최초의 질문’ 등 저서를 통해 한국 산업 혁신의 방향성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문재인 정부에서 청와대 경제과학특별보좌관을 지내기도 했다.―새 정부가 펴야 하는 산업 및 과학기술 정책의 방향성은 무엇인가“‘창조적 파괴’가 정책의 근간이 돼야 한다. 새로운 아이디어, 새로운 시도, 새로운 기업이 생겨나고 낡고 효율성이 떨어지는 산업이 ‘새살’로 바뀌는 역동적인 환경을 산업 생태계에 조성해야 한다. 새로운 산업이 성장하는 과정은 인내의 시간이다. 내가 지금 씨를 뿌려서 후임자, 또 그 후임자 대에서 성과를 낸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장기 정책과 단기 정책을 정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당장 우리 경제를 어떻게 안정시킬 것인가를 고민하는 건 단기 정책이고, 성장 잠재력을 어떻게 키울 것이냐를 고민하는 것이 장기 정책이다. 예를 들면 통상 이슈에서 ‘당장 협상을 잘해서 관세를 얼마나 깎느냐’의 문제는 단기 이슈다. ‘어떻게 하면 근본적으로 산업 경쟁력을 강화해 협상 테이블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겠느냐’는 장기 이슈다. 단기 이슈와 장기 이슈가 한 테이블에 올라가면 국정 최고책임자는 단기 이슈에 먼저 손이 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소나기부터 피하고 보자’는 생각이 산업을 망친다. 꼬리가 머리를 흔들면 안 된다.”―단임제 정부라면 눈앞의 일부터 챙기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리더의 마인드’가 필요하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돌 하나 더 놓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정책을 펴야 한다. 일본은 ‘잃어버린 30년’ 동안 크고 작은 부양책을 20번 넘게 썼다. 그동안 일본의 산업 근간이 망가졌다. 비록 (대통령 임기가) 5년밖에 안 되더라도 50년 앞을 내다보고 돌을 놓겠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윤석열 정부의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의 여파는 어떠한가.“비유하자면 누군가 ‘한국의 성장 잠재력을 잘라라. 아킬레스건을 몇 가지 알려 줄테니 정확하게 수술해라’라고 지령을 내린 것처럼 정밀타격을 줬다. 예산삭감 이후 재계약이 안 된 ‘포닥(박사 후 연구원)’ 숫자가 집계조차 되지 않는다. 정부 출연 연구소에서도 이들을 받아주지 못하는 상황이다. 지금 와서 예산을 복구해도 무용지물이다. 공장은 반년 정도 스위치를 껐다가 켜도 다시 바로 가동할 수 있지만 연구는 다르다. 완전 ‘생짜’로 다시 해야 된다.”―중국의 산업, 과학·기술의 발전이 가파르다.“중국은 장기 성장 정책을 세우고 전폭적인 지원을 해왔다. 전략 산업을 확실하게 지정하고 충분한 인센티브를 부여해 자원이 몰리도록 해준 것이다. 그 결과 중국은 이제 블랙홀처럼 주변국의 산업 생태계를 빨아들이고 있다.”―오랜 기간 동안 한국에서 이렇다할 혁신기업이 배출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한국 기업들 중엔 ‘스케일업(Scale up)’하는 기업이 전혀 없다. 작은 성과에서 시작해 비용을 투자하고 성공과 실패의 과정을 거쳐 성과를 점점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이 스케일업이다. 9999번 실패하더라도 1번 성공하면 결실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한국에선 실패를 감당하려 하지 않는다. 실패는 곧 책임소재와 비용의 문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대기업일수록 더 심하다. 같은 이유로 정부의 연구개발 사업의 성공률은 비정상적으로 높다. 도전성이 있는 연구가 아니라 성공이 보장된 연구만 하기 때문이다.”―한국의 기업가 정신이 퇴보하고 있다고 보나.“주가는 미래 성장 잠재력의 합계다. 지금 돈을 못 벌더라도 도전적으로 시도를 하고 있을 때 주가가 올라간다. 근데 우리 기업들을 보면 장부 가격과 주가 차이가 크지 않다. 시장이 잠재력을 크게 보지 않는다는 의미다. IMF의 영향일지도 모르겠지만 점점 기업의 의사결정이 단기화되고 수익 중심으로 변하고 있다. 기업가의 시대에서 최고재무책임자(CFO)의 시대로 넘어가면서 한국 산업이 전반적으로 보수화됐다.”―벤처캐피털(VC)과 금융회사들도 제 역할을 못하고 있나.“최근 통계를 살펴보면 VC 투자는 초기 벤처가 아니라 거의 성공한, 또는 성장이 보장된 벤처에만 투자하고 있다. 그건 벤처가 아니다. 벤처 투자는 될지 안 될지 모르는 기업이라도 가능성을 보고 투자해 결실을 얻는 것이다. 금융권도 마찬가지다. 사업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갖고 있는 아이디어의 가능성을 가지고 돈을 빌리는 게 아니라 자기 아파트를 맡기고 돈을 빌려야 하는 현실이다. 은행의 존재 이유가 없다.”―혁신기업을 만들어내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대체 불가능한 것을 찾아나서야 한다. 우리가 1번부터 20번까지 하고 있는데, 글로벌 기업들은 1번부터 100번까지 하고 있다 가정해 보자. 이 상황에서 글로벌 주도권을 잡으려면 101번, 102번이 뭔지를 찾아야 한다. 하지만 다들 21∼100번 중에서 찾고 있다.101, 102번이 무엇일지는 우리도 모르고 글로벌 기업도 모른다. 이럴 때일수록 기초과학에 투자해 예상치 못한 발전의 씨앗들을 키워야 한다. 우리가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가 없다 해도 그렇게 허접한 나라가 아니다. 특허 개수로는 세계 4, 5위권, 논문은 10위 권이다. 결정적으로 한국은 앞선 세대의 피와 땀으로 만든 넓은 산업 포트폴리오를 갖고 있다. 포트폴리오가 넓다는 건 우리가 각기 다른 종류의 기술을 가지고 있고 또 앞으로 새 기술이 생길 가능성도 많다는 의미다. 이럴 때일수록 기초과학이라는 씨앗들을 심을 필요가 있다.”―산업 혁신을 위해 정부나 정치권은 무엇을 해야 하나“혁신과 관련해서는 정부보다 국회가 더 많은 역할을 해야 한다. 민주주의 절차에서 합의를 이루라고 만든 공간이 국회인데 막상 국회에서는 그런 논의가 진행되지 않고 있다. 혁신이 생기려면 창조적 파괴가 계속 일어나야 한다. 규제완화 등을 통해 창조의 길을 터주는 것은 물론, 파괴되어 밀려나는 분야의 사람들이 새로운 길을 찾도록 해주는 것도 중요하다. 단기적으로는 밀려나는 사람들의 생활에 문제가 없도록 보살피는 한편 장기적으로는 재교육을 통해 일선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돕는 게 필요하다. 이 매커니즘 역시 국회가 앞장서서 만들어야 한다.” ―한국은 해외 인재를 데려오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턱을 더 낮춰야 한다. 지금 서울대에서 공부하고 있는 말레이시아, 인도 등 국가 출신 학생들만 해도 정말 똑똑하다. 근데 한국에서 취직을 못 한다.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 글로벌 인재 허브를 자임할 정도로 생각을 바꿔서 문호를 개방해야 한다.”―이공계 학생들의 의대 집중 현상은 어떻게 해소해야 하나.“이공계의 성공 사례를 더 많이 보여주고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 그러려면 새 대통령부터 더욱 과학자를 존중하고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AI 기술 발전을 위해 필요한 정부 정책은 무엇인가.“AI의 속성은 과거 철도, 전기 등과 같다. 기술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 기술이 각 산업에 침투해 산업의 구조 자체를 바꾼다는 게 핵심이다. AI 시대에 선진국이 되려면 AI 기술 자체를 고도화하는 것보다 AI가 각 산업 분야에 빨리 스며들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정책의 방점을 ‘AI의 발전’이 아니라 ‘AI의 활용’에 찍어야 한다. ‘AI 기술을 최고로 만들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정책은 잘못됐다는 의미다. AI 기술이 극도로 고도화돼도 일선 산업 생태계가 AI를 필요로 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AI 전문가에게 바이오를 가르치는 게 빠르겠나, 아니면 바이오 전문가가 AI를 배우는 게 빠르겠나. AI 자체의 발전을 주장하기에 앞서서 우리가 구축해 놓은 넓은 산업의 포트폴리오 안에서 AI를 어떻게 잘 활용하느냐를 고민하는 게 우선이다. 그러면 그 어떤 나라보다 새로운 걸 만들어낼 수 있는 잠재력이 높은 나라가 한국이라고 생각한다.”―새 정부에게 바라는 모습은.“매번 정부가 기업들을 불러다 회의를 한다. 만약 워싱턴에서 실리콘밸리의 기업들을 불러 모으면 오나? 정부는 정부의 역할을 찾아야 한다. 기초 과학 발전과 같이 나중에 기업이 가져다 쓸 씨앗을 심는 것, 차마 기업이 신경쓰지 못하는 영역을 먼저 나서 열심히 해주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다.”유재동 산업1부장 jarrett@donga.com박종민 기자 blick@donga.com}

    • 2025-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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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I기술은 전체 산업구도 바꾸는것… 곳곳에 잘 스며들게 해야”

    “인공지능(AI) 기술 고도화보다 중요한 것은 AI를 각 산업에 잘 스며들게 하는 것입니다.” 이정동 서울대 공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최근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교수는 “정책의 방점을 ‘AI의 발전’이 아니라 ‘AI의 활용’에 찍어야 한다”며 “한국의 넓은 산업 포트폴리오에 AI를 접목하고 기초과학에 투자하면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서울대 공대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고 서울대 공학전문대학원에서 기술경영경제정책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 ‘축적의 시간’과 ‘최초의 질문’ 등 저서를 통해 한국 산업 혁신의 방향성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문재인 정부에서 대통령 경제과학특별보좌관을 지내기도 했다. ―새 정부가 펴야 하는 산업 및 과학기술 정책의 방향성은 무엇인가. “‘창조적 파괴’가 정책의 근간이 돼야 한다. 새로운 아이디어, 기업이 생겨나고 낡고 효율성이 떨어지는 산업이 ‘새살’로 바뀌는 역동적인 환경을 산업 생태계에 조성해야 한다. 새 산업이 성장하는 과정은 인내의 시간이다. 내가 지금 씨를 뿌려서 후임자, 또 그 후임자 대에서 성과를 낸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하지만 ‘소나기부터 피하고 보자’는 생각을 하면 산업을 망친다.” ―단임제 정부라면 눈앞의 일부터 챙기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리더의 마인드’가 필요하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돌 하나 더 놓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정책을 펴야 한다. 일본은 ‘잃어버린 30년’ 동안 크고 작은 부양책을 20번 넘게 썼다. 그동안 일본의 산업 근간이 망가졌다. 비록 (대통령 임기가) 5년밖에 안 되더라도 50년 앞을 내다보고 돌을 놓겠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윤석열 정부의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의 여파는 어떠한가. “비유하자면 누군가 ‘한국의 성장 잠재력을 잘라라. 아킬레스건을 알려줄 테니 정확하게 수술해라’라고 지령을 내린 것처럼 정밀 타격을 줬다. 예산 삭감 이후 재계약이 안 된 ‘포닥(박사 후 연구원)’ 수가 집계조차 되지 않는다. 지금 와서 예산을 복구해도 무용지물이다. 공장은 반년 정도 스위치를 껐다가 켜도 다시 바로 가동할 수 있지만 연구는 다르다. 완전 ‘생짜’로 다시 해야 된다.” ―중국의 산업 기술 발전이 가파르다. “중국은 장기 성장 정책을 세우고 전폭적인 지원을 해왔다. 전략 산업을 확실하게 지정하고 충분한 인센티브를 부여했다. 그 결과 중국은 이제 블랙홀처럼 주변국의 산업 생태계를 빨아들이고 있다.” ―오랫동안 한국에서 혁신기업이 배출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 기업들 중엔 ‘스케일업(Scale up)’하는 기업이 없다. 작은 성과에서 시작해 비용을 투자하고 성공과 실패의 과정을 거쳐 성과를 점점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이 스케일업이다. 9999번 실패하더라도 1번 성공하면 결실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실패를 감당하려 하지 않는다. 실패는 곧 책임 소재와 비용의 문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대기업일수록 더 심하다.” ―한국의 기업가 정신이 퇴보하고 있다고 보나. “외환위기 영향일지 모르겠지만 점점 기업의 의사결정이 단기화되고 수익 중심으로 변하고 있다. 기업가의 시대에서 최고재무책임자(CFO)의 시대로 넘어가면서 한국 산업이 전반적으로 보수화됐다.” ―벤처캐피털(VC)과 금융회사들도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나. “최근 통계를 살펴보면 VC 투자는 초기 벤처가 아니라 거의 성공한, 또는 성장이 보장된 벤처에만 투자하고 있다. 그건 벤처가 아니다.” ―혁신기업을 만들어 내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대체 불가능한 것을 찾아 나서야 한다. 우리가 1번부터 20번까지 하고 있는데, 글로벌 기업들은 1번부터 100번까지 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상황에서 글로벌 주도권을 잡으려면 101번, 102번이 뭔지를 찾아야 한다. 하지만 다들 21∼100번 중에서 찾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기초과학에 투자해 예상치 못한 발전의 씨앗들을 키워야 한다. 한국은 앞선 세대의 피와 땀으로 만든 넓은 산업 포트폴리오를 갖고 있다. 포트폴리오가 넓다는 건 앞으로 새 기술이 생길 가능성도 많다는 의미다.” ―산업 혁신을 위해 정부나 정치권은 무엇을 해야 하나. “혁신과 관련해서는 정부보다 국회가 더 많은 역할을 해야 한다. 민주주의 절차에서 합의를 이루라고 만든 공간이 국회인데 막상 그런 논의가 진행되지 않고 있다. 혁신이 생기려면 창조적 파괴가 계속 일어나야 한다. 규제 완화 등을 통해 창조의 길을 터주는 것은 물론이고 그로 인해 밀려나는 사람들이 새 길을 찾도록 해주는 것도 중요하다.” ―AI 발전을 위해 필요한 정책은 무엇인가. “AI의 속성은 과거 철도, 전기 등과 같다. 기술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 기술이 각 산업에 침투해 산업의 구도 전체를 바꾼다는 게 핵심이다. AI 시대에 선진국이 되려면 AI 기술 자체를 고도화하는 것보다 AI가 각 산업 분야에 빨리 스며들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우리가 구축해 놓은 넓은 산업의 포트폴리오 안에서 AI를 어떻게 잘 활용하느냐를 고민하는 게 우선이다. 그러면 그 어떤 나라보다 새로운 걸 만들어낼 수 있는 잠재력이 높은 나라가 한국이라고 생각한다.” ―새 정부에 바라는 모습은…. “매번 정부가 기업들을 불러다 회의를 한다. 만약 워싱턴에서 실리콘밸리의 기업들을 불러 모으면 그들이 오나? 정부는 정부의 역할을 찾아야 한다. 기초과학 발전과 같이 나중에 기업이 가져다 쓸 씨앗을 심는 것, 차마 기업이 신경 쓰지 못하는 영역을 먼저 나서서 열심히 해주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다.”유재동 산업1부장 jarrett@donga.com박종민 기자 blick@donga.com}

    • 2025-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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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유재동]침몰하는 한국號 구할 유일한 치트키

    요즘 테크업계에서는 ‘에이전틱 인공지능(AI)’이 최대 화두다. 에이전트(Agent·대리인)의 사전적 의미는 ‘다른 사람을 대신해 일을 수행하는 자’다. 지금까지 생성형 AI는 세밀하고 구체적인 작업 지시를 내려야 텍스트나 이미지 같은 결과물을 생산했지만, 에이전틱 AI는 실제 사람을 대신해 스스로 상황을 분석하고 출장 일정 수립이나 결제·예약 같은 여러 단계의 업무를 한 번에 수행한다. 기존 AI가 시키는 것만 하는 소극적 두뇌라면 이제 여기에 눈·귀·손·발이 붙어 자율성과 실행력이 가미된 셈이다. 요즘 AI 기술은 인지→생성→추론형 등으로 숨 가쁘게 진화하면서 해당 업계에 몸담은 사람들조차 그 변화상을 따라가기 벅찰 지경이다. 며칠 전 만난 한 AI 전문가는 “챗GPT 등장 이후 지금까지 3년보다 최근 3개월 사이에 더 눈부신 발전이 있었다”고 했다.전 세계 생산성 혁명 일으키는 AI 기술 AI를 어떻게 실무에 활용할 수 있느냐는 이제 모든 기업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문제가 됐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인간과 AI 에이전트가 함께 일하는 ‘하이브리드팀’이 기업 조직문화의 대세로 자리 잡게 될 것이라면서, 궁극에는 AI가 모든 실무를 담당하고 인간은 방향 제시와 최종 검수 정도만 하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리 먼 얘기도 아니다. 앞으로 2∼5년 안에 대부분의 조직이 이런 쪽으로 방향 전환을 시작할 것으로 예측된다고 한다. 이미 많은 국내외 기업들은 AI를 현업에 충분히 활용하며 비용 절감과 생산성 향상 효과를 보고 있다. 반복적 일상 업무를 넘어 시장 분석, 리스크 관리, 경영 전략 수립 같은 핵심 업무도 맡기는 수준이다. 물론 일각에선 마약·무기 제조 등 범죄에 악용하는 행위를 막기 위해 AI 산업을 강력히 규제해야 된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또 AI가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고 디지털 빈부 격차를 확대할 수 있으며, 환각 등 오작동이 사회 혼란을 낳을 것이라는 우려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이런 이유를 내세워 AI 활용과 투자에 강한 족쇄를 채우기에는 우리가 잃는 기회비용이 너무나 많다. AI가 고도화될수록 기업은 적은 비용을 투입하고도 많은 수확을 하는 ‘생산성 혁명’을 경험할 수 있다. AI는 월급을 올려 달라 하지도 않고, 갑자기 파업이나 퇴사도 하지 않는다. 주 52시간제를 지킬 필요도 없다.저성장 韓경제 반등 위한 마지막 해법 지금 한국경제는 거의 수직으로 가라앉는 중이다. 인구 감소와 산업 경쟁력 상실, 높아진 무역 장벽과 중국의 저가 공세, 정부·정치권의 혁신기업 씨말리기 등 어느 하나 고질적이거나 구조적이지 않은 문제가 없다. 구조적 문제라는 것은 단지 경기가 반짝 좋아진다고 해서, 또는 정권이 바뀐다고 해서 금세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요즘 만나는 산업계 리더들은 앞으로 10∼20년 후 한국의 모습이 두렵다는 말을 많이 한다. 미래가 두려운 나라엔 출산 기피와 소비 침체, 극한 갈등 같은 사회 불안 요인이 쌓여갈 수밖에 없다. 해법이 쉽게 보이지 않는 상황이지만 어디선가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역사적으로 세계 경제의 전환점은 흔히 ‘O차 산업혁명’이라 불리는 파괴적 혁신에서 비롯됐다. 많은 전문가들은 외환위기 때 IT 혁명에 올라타며 위기를 극복했듯이 이번에도 AI의 물결을 주도하며 저성장의 난국을 타개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최근 한국은행과 국제통화기금은 우리 경제가 AI를 충분히 활용해 시너지를 낸다면 생산성을 최대 3%, 국내총생산(GDP)은 13% 높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우리에게 강점이 있는 제조업 곳곳에 AI를 스며들게 해서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이고 신규 비즈니스 모델을 창출할 수 있느냐에 앞으로 대한민국호(號)의 생사가 달려 있다.유재동 산업1부장 jarrett@donga.com}

    • 2025-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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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유재동]명품 자동차 회사는 어쩌다 식품기업이 됐나

    폭스바겐이 소시지를 만들어 판다는 것은 자동차 마니아들 사이에선 이미 유명한 얘기다. 1970년대 공장 근로자들의 급식용으로 생산한 물량을 시중에도 판매하기 시작한 게 벌써 50년이 넘었다. 소시지에 대한 회사의 애정과 자부심은 본업인 자동차에 필적한다. 소시지는 포장지에 ‘폭스바겐의 오리지널 부품’이라고 적혀 있고 실제 자동차 부품처럼 고유 시리얼 번호도 부여받았다. 폭스바겐은 이와 곁들일 케첩도 함께 만들어 파는데, 무슨 자동차 첨단기술이라도 되는 양 이들 식품의 레시피를 극비에 부치고 있다. 소시지는 인기가 좋아 작년 한 해만 855만 개가 팔렸다. 폭스바겐그룹의 전체 자동차 판매량(약 900만 대)을 곧 추월할 기세다. 물론 단가 차이가 엄청나기 때문에 두 제품을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하긴 무리가 있다. 하지만 독일 언론들은 이를 자국 자동차 산업의 위기 신호라고 여긴다. 지난해 폭스바겐의 영업이익과 차량 판매량은 각각 15%, 3.5% 줄었다. 주업인 자동차 사업이 부진하자, 부업인 식품업과 방산업 등에서 돌파구를 모색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폭스바겐의 실적 악화는 지역 경제로 전염되고 있다. 계열사 아우디 공장이 있는 남부 잉골슈타트는 시(市)에서 가장 많은 세금을 내는 모회사의 사세가 기울면서 빚더미에 빠졌다. 주민들은 한때 부유했던 도시를 이제 자조적으로 ‘독일의 디트로이트’라고 부른다.장기침체의 수렁에 빠진 독일 경제 폭스바겐의 문제는 수렁에 빠진 독일 경제의 상징적인 단면이다. 독일은 최근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이라는 충격적인 성적을 냈다. ‘유럽 경제의 기관차’로 불리던 나라가 이렇게 큰 어려움에 빠진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리스크 분산’에 실패했다는 점이다. 제조업이 강한 독일의 최대 교역국은 오랫동안 중국이었다. 중국이 고성장하고 독일 제품을 많이 사들였을 때는 문제가 없었지만, 이젠 고객에서 경쟁자로 변모하면서 중국 의존도가 높은 독일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에너지 공급은 러시아에 지나치게 기댄 게 화근이 됐다. 독일은 천연가스의 절반 이상을 러시아에서 수입해 왔는데 전쟁 등으로 공급이 끊기면서 에너지 가격이 폭등하고 생산 비용이 치솟는 위기를 겪고 있다.산업구조나 시장환경 한국도 판박이 시대 변화에는 발 빠르게 대응하지 못했다. 독일은 기존에 강점이 있던 전통 제조업에만 안주하다가 배터리와 반도체 같은 첨단산업 분야에서 최근 10여 년간 미국과 중국에 철저히 밀렸다. 기술혁신과 산업구조 재편에 소극적인 경향은 최대 경쟁력이었던 자동차 분야에서 가장 큰 생채기를 냈다. 독일은 그동안 세계를 호령했던 내연기관 차량에만 치중한 나머지 글로벌 시장의 새로운 흐름이 된 전기차와 자율주행차 개발에서 뒤처졌다. 최근 막강한 기술력으로 무장한 신생 빅테크 기업들이 세계 시장을 휘젓고 있지만, 독일에서는 이에 대항할 만한 기업을 딱히 떠올리기 힘들다. 뿌리 깊은 관료주의와 숨 막히는 규제 환경, 복잡한 행정 절차 역시 독일의 발목을 잡는 요인이다. 지금까지 열거한 독일의 문제는 주어만 한국으로 바꿔도 무방할 만큼 두 나라가 처한 상황이 너무나 유사하다. 높은 수출 의존도와 낮은 에너지 자립도, 제조업 편중, 혁신의 부족, 규제 장벽, 제로에 수렴하는 성장률까지 한국은 독일보다 사정이 나은 구석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독일이 탄탄한 펀더멘털을 앞세워 글로벌 금융위기 때 유럽 경제를 떠받치는 구세주로 칭송받던 게 불과 10여 년 전이다. 우리도 세상 흐름에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그저 멍하게 있다가는 순식간에 ‘경제 열등생’의 처지로 전락할지 모르는 일이다. 유재동 산업1부장 jarrett@donga.com}

    • 2025-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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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유재동]이 대환장 관세쇼의 결말

    현기증 나게 쏟아지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무차별 관세 폭탄은 이제 각국이 미국과의 협상에 돌입하는 쪽으로 국면이 전환되고 있다. 하지만 협상의 향방을 예견할 수 없고 향후 불확실성만 증폭되며 시장 충격이 장기화될 우려가 여전하다. 처음에는 그저 엄포인 줄 알았던 고관세 협박도 많은 분야에서 기어코 현실이 됐다. 모두를 파국으로 몰고 갈 ‘경제 핵전쟁’이 눈앞에서 발발하고 있다.모두를 파국으로 몰고 갈 경제 핵전쟁트럼프의 전략은 얼핏 보면 진짜 미치광이처럼 단순해 보이지만 나름대로 꼼꼼한 계획이 있다. 그는 우선 상대가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강력한 ‘선빵’을 날린다. 그리고 반응을 봐가면서 다음 작전을 구사한다. 만일 상대가 원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일부를 희생양 삼아 2차, 3차 공격을 감행하고, 이 과정을 마치 리얼리티쇼를 하듯 자랑스럽게 기자회견이나 SNS를 통해 공개한다. 아무리 황당한 정책도 진짜 실행할 수 있다는 본보기를 보여줘 상대의 공포감을 유발하는 것이다. 그의 또 다른 중요한 전략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최종 목표, 즉 본심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이런 모호성과 예측불가능성 때문에 사람들은 이 대환장 관세쇼의 결말을 쉽게 예단하기 힘들다. 트럼프는 고율의 관세 부과와 부과 연기, 추가 관세 같은 중요한 결정을 매일 손바닥 뒤집듯 한다. 관세율 산정 방식도 주먹구구다. 논리적 근거는 빈약하고 인용하는 통계도 사실과 다른 부분이 많다. 상대가 상식에 입각해 행동하지 않으니 무슨 패를 갖고 있는지, 나중에 어떻게 입장을 바꿀지 도통 예측할 수가 없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은 흔히 바보 같은 상대를 비꼴 때 하는 말인데, 세상에서 가장 힘센 자가 그렇게 나오면 이는 비웃음의 대상이 아닌 공포 그 자체일 뿐이다.앞으로 가능성은 크게 세 가지다. 우선 미국의 선공에 중국 등 각국의 강력 보복으로 글로벌 무역전쟁이 확대되면 모두가 공멸하는 최악의 결과가 나올 수 있다. 100년 전 세계 경제를 쑥대밭으로 만든 대공황식 파국이다. 두 번째로는 관세 전쟁의 부메랑이 미국 경제를 덮치며 트럼프가 민심에 밀려 먼저 백기를 드는 시나리오가 있다. 그러나 가장 가능성이 큰 것은 그 중간 어디쯤일 것이다. 트럼프의 위협과 각국의 협상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동안 미국이 화력을 대중(對中) 전선에 집중하면서 트럼프 1기 때와 비슷한 양상이 전개될 수 있다. 중국의 부상을 꺾으려는 미국과 그 자리를 넘보려는 중국. 두 나라가 적당히 타협하느냐, 정면충돌하느냐는 트럼프 두 번째 임기 4년 내내 글로벌 경제의 가장 큰 리스크로 작용할 것이다.트럼프의 과녁이 중국을 향한다 해도 우리는 한숨을 돌릴 수 있는 처지가 못 된다. 트럼프가 또 마음을 바꾸면서 화살을 우리 쪽으로 겨냥할 가능성이 언제든 열려 있다. 그러나 이처럼 상대 전략을 예측하기 힘든 상황에서 조급한 마음에 우리 패를 먼저 내보이며 조아리면 자칫 덤터기를 쓸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트럼프가 지금은 세 보일지 몰라도, 관세 부작용으로 여론 압박이 커지면 아무리 그라고 해도 버틸 방도가 없다. 시간은 오히려 우리 편일 수 있으니 신중해야 한다.결국 버틸 수 있는 경쟁력 있어야 승리우리는 협상도 협상이지만 스스로를 더 강하게 만드는 데 집중할 필요가 있다. 미중의 강 대 강 대치는 글로벌 공급망과 기술 생태계의 단절을 심화시켜 중국 경제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는 한국 경제에 치명상을 입히게 된다. 어느 한쪽의 선택을 강요받지 않으려면 산업 경쟁력을 부단히 쌓아 올려 핵심 분야의 초격차 우위를 확보해야 한다. 이 전쟁은 어차피 장기전이고, 그 승리는 결국 버티는 자의 차지가 될 것이다.유재동 산업1부장 jarrett@donga.com}

    • 2025-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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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요 초대석]“예상보다 센 트럼프 관세… 中-동남아 의존도 높은 韓 복합 타격”

    《“우리가 맞는 관세도 문제지만, 중국과 베트남에 대한 고관세가 큰일입니다. 우리 기업이 여러 경로에서 충격을 받을 전망입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시절 금융당국을 이끌었던 전광우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초대 금융위원장·76)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가 예상보다 상당히 강하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다만 이번 관세는 조정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우리 전략 산업을 활용해 협상을 잘해야 한다”면서 “미국과 관세 협상을 잘하기 위해선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신뢰를 받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 이사장은 최근 국내 상황에 대해서는 “정치 안정성이 흔들리면 아무리 밸류업 정책을 한다 해도 소용이 없다”며 “외국 투자자들은 코리아 디스카운트 최대 요인으로 정치 불안을 꼽는다”고 지적했다. 전 이사장은 미국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미시간주립대 교수, 세계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 등을 지낸 ‘글로벌 경제통’이다. 특히 주요국 경제 석학 및 금융계 인사들과 교분이 깊어 해외에서 한국경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객관적인 시각으로 진단해 왔다. 다음은 일문일답.》―트럼프 관세 폭탄 강도가 상당하다. “그렇다. 예상보다 강력하다. 일단 직접적인 충격으로는 우리 최대 수출 시장인 대미 수출이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간접적인 충격도 크다. 중국에 대한 관세가 기존 20%를 합해 54%다. 트럼프가 대선 후보 시절 중국에 60%까지 관세를 매기겠다는 말을 했는데 벌써 그 수준에 근접했다. 안 그래도 내수가 둔화된 중국 경제가 더 위축되면 한국의 대중 수출 여력이 더 떨어질 수 있다. 또 중국이 자국에서 안 팔리는 상품을 한국 등에 저가로 밀어내는 행위가 더 거세질 수 있다. 게다가 베트남에 대한 관세율도 매우 높은데 이로 인해 국내 대기업들의 생산 기지가 상당히 큰 피해를 볼 수 있다.” ―정부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지금까지는 국정 공백기였기 때문에 트럼프 행정부와 직접 소통할 기회가 없었지만 이젠 민관정이 한 팀으로 나서야 한다. 트럼프는 딜(협상)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이번 관세도 조정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그만큼 우리의 전략 산업을 활용해 협상을 잘해야 한다. 조선업이 좋은 사례다. 미국은 전체적으로 산업 구조가 첨단 기술 쪽으로 옮겨가면서 조선업 같은 전통 제조업이 밀리고 있다. 미국-중국 중심의 수출 시장을 다변화해서 피해를 최소화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지금은 정부보다 기업이 먼저 움직이는 상황이다. “미국과 이런 협상을 잘하기 위해선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신뢰받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아무리 우리가 산업 경쟁력이 있다고 해도 안정된 정치 리더십 없이는 어렵다고 본다. 일본을 봐라. 일본은 미국이 아시아에서 가장 신뢰하는 나라다 보니 우방국들의 군함 건조 분야에서도 앞서가고 있다. 우리 산업이 해외에서 국제 경쟁력을 갖고 장점을 살려 나가려면 정부가 뒤에서 잘 받쳐주고 믿음을 줘야 한다. 또 현대차가 얼마, 삼성이 얼마, 이런 식으로 기업들이 개별적으로 미국에 투자 발표를 하기보다는 정부가 이들을 모아 패키지로 투자 보따리를 꾸려 트럼프 행정부와 협상하는 게 더 효과적이다.” ―트럼프발 관세 폭풍이 1930년대 대공황 때와 비슷하다는 평가도 있다. “비슷한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 우선 미국 우선주의 기조, 관세를 무기로 삼았다는 것이 비슷하다. 다른 점이 더 중요하다. 대공황 때는 미국 경제가 불황에 빠졌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 관세라는 충격적 수단을 동원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나 홀로 호황’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미국 경제가 좋은 상황이라는 게 다르다.” ―그러면 미국은 왜 관세 카드를 들고나온 걸까. “트럼프는 관세로 글로벌 지정학적 구도를 재편하려는 본심을 갖고 있다. 이번 관세는 궁극적으로 중국을 견제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1970년대 닉슨 대통령―키신저 국무장관 시절 미국이 중국과 대화를 시작한 진짜 속내는 중국을 자유시장 진영으로 끌어들여 당시 최대 적성국인 소련을 견제하려는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1등은 항상 2등만 신경을 쓴다. 이번에 트럼프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자꾸 러시아 편을 드는 것도 러시아를 통해 강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을 견제하려는 목적이다. 미국 입장에서 중국이 러시아, 북한, 이란 등과 밀착하는 것은 자신이 의도하는 세계 구도와는 맞지 않는다. 이처럼 미국이 중국을 옥죄면 옥죌수록 중국 경제가 위축되면서 한국이 이중으로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이젠 글로벌 경제가 자유무역으로 돌아갈 수 없는 건가. “1930년대 대공황은 보호무역주의가 촉발했지만 이후에는 자유무역 기조가 역사의 큰 흐름을 차지했다. 자유무역이 각국의 공동 번영에 기여하고, 보호무역이 결국 모두에게 피해를 입힌다는 것은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동의하는 바다. 지금 트럼프의 보호주의도 오래 못 갈 가능성이 있다. 미국에서 중간선거를 승리한 대통령은 흔치 않다. 트럼프가 의회의 전폭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기간이 2년밖에 안 남았을 수도 있다. 한 번의 선거 결과가 역사의 흐름을 바꾸지 못한다. 다만 우리 기업은 자유무역이든 보호무역이든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본연의 힘을 길러야 한다.”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 선고 이후 경제 상황을 어떻게 보나. “그동안 헌재 결정이 미뤄져서 리더십 공백이 길어지며 정치 사회적 불안이 커진 게 우리 경제에 안 좋았던 부분이었다. 그러나 이제 헌재 결정으로 ‘한 스텝’은 밟은 것이다. 아직 새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시간이 걸리겠지만 계엄 사태로 빚어졌던 전례 없는 혼란 상황이 이제 해결 국면으로 진입하는 것 아닌가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든다.” ―그래도 위기 상황은 계속되고 있다. “우리가 전례 없이 도전적인 상황인 이유는 국내 여건이 이렇게 어려운 와중에 트럼프발 관세 폭풍이 몰아쳐서 내우외환이 생겼다는 것이다. JP모건 등 일부 투자은행은 이제 우리 성장률을 0%대로 보고 있다. 심지어 역성장 가능성까지도 나오고 있다. 국민과 정치권이 단합해서 극복해야 한다. 과거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조기 극복을 할 수 있었던 건, 적어도 극복 과정에서 국민들이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번 정치 혼란이 경제에 미친 피해는 어느 정도인가. “정치적 혼란, 리더십 공백이라는 것이 외부 환경이 급변할 때는 더더욱 심각한 문제가 된다. 트럼프 2기가 들어섰지만 우리는 계엄 사태로 인해 즉각적이고 선제적인 대응을 할 수 없었다. 또 노동-교육 개혁 등 전반적인 개혁 과제의 성과가 미진했다. 증시도 바닥권을 헤맸다. 배당이나 지배구조도 중요하지만 기업 가치나 주가 결정에 가장 즉각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정치 환경이다. 정치 체제 안정성이 흔들리면 아무리 밸류업을 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 외국 투자자들은 코리아 디스카운트 최대 요인으로 정치 불안을 꼽는다.” ―경제가 다시 안정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정치권과 국민 모두가 헌재 판단을 우선 겸허하게 수용해야 된다. 그리고 우리가 좀 더 성숙한 민주주의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해외에서는 정치 불안이 나타나고 핵심 산업의 경쟁력도 흔들리는 지금 한국이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고 보고 있다. 내가 평소 교류하는 해외 인사들은 한국의 상황을 매우 진지하게 걱정한다. 국민들의 갈라진 마음을 하나로 만들 수 있는 리더십도 필요하다.” ―앞으로 가장 걱정되는 부분은 무엇인가. “만일 대통령 파면 이후에도 국론 분열이 심화된다면 국가 신용등급 하락 같은 상황도 올 수 있다. 국가신인도 평가에는 국가부채나 단기외채, 외환보유액 같은 지표도 중요하지만, 큰 틀에서 그 나라의 리더십이 바로 서 있는지, 책임감 있는 정치인이 많이 포진해 있는지 같은 주관적 요인 역시 매우 중요하다. 해외 투자기관과 오랜 접촉을 통해 느껴온 바다.” ―윤석열 정부의 지난 3년을 어떻게 평가하나. “정책 목표는 나름 잘 설정했지만 제대로 실천한 게 없어서 문제였다. 노동 의료 교육 등 구조 개혁으로 잠재성장률을 높이겠다는 건 맞는 방향이지만, 실제로는 반도체 주 52시간 근무제 예외 같은 것도 관철시키지 못했다. 경제의 기초체력이 계속 떨어지고 있는데 이런 과도기적 대행 체제 상황에선 추세가 반전되긴 어려울 것이다. 다만 외교적으로 보면 일본과 관계 개선에 나선 것은 대단히 용기 있고 평가받을 만한 일이었다. 다음에 어떤 정부가 들어서든지 간에 과거를 딛고 미래를 내다본다는 생각에서 동북아 안보의 버팀목인 일본과의 선린우호 관계를 잘 유지해야 된다.” ―그래도 막판에 연금 개혁에선 진전이 있었다. “이번 모수 개혁은 비록 일부 계층에서 반대하긴 하지만 상당히 의미 있는 성과다. 이번 합의로 국민연금의 운용 규모가 커지게 되면 그만큼 각종 부문에 투자할 수 있는 여력도 커질 수 있다. 이는 금융시장에도 상당히 긍정적인 요소다.” ―우리 경제가 이번 탄핵 사태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나. “과거에도 어려운 시기를 많이 겪었지만 우리 경제는 항상 회복력이 강했다. 그 회복력을 이번에 다시 보여주고 선진국으로 거듭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이번 탄핵 사태가 이제 국가 경제를 턴어라운드시키고 국민이 단결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전광우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76)△서울대 경제학과△미국 인디애나대 경영학 박사△미국 미시간주립대 경영학과 교수△세계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우리금융지주 부회장△초대 금융위원장△국민연금공단 이사장△연세대 경제대학원 석좌교수유재동 산업1부장 jarrett@donga.com}

    • 2025-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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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유재동]明식당엔 기적의 레시피가 있다

    그동안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관한 칼럼을 여러 건 썼다. 가장 유력한 대권 주자의 기업관(觀)은 국가적으로 중차대한 문제라서, 마치 직업병처럼 그의 발언에 일일이 귀 기울인 결과다. 그동안 관찰해 온 이 대표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고 이리저리 애를 쓰는 배트맨이나 카멜레온 같았다. 평소엔 “그럼 그렇지” 하다가도 어느 날은 “진짜 달라졌나” 하는 호기심을 주면서 사람들을 계속 헷갈리게 한다. 이 대표의 그런 변화무쌍한 모습 자체에 그의 본질이 담겨 있다고 본다.통제와 개입으로 혁신기업 만든다는 발상 계엄과 탄핵 때문에 요즘 갑자기 헌법 공부하는 사람이 많아지듯, 필자는 이 대표 덕분에 시장경제의 기본 원리를 새삼 다시 곱씹어 보고 있다. 그가 던진 말에는 전통 주류 경제·경영학으로는 설명하기 어렵고 생소한 구석이 많기 때문이다. 상법 개정이나 반도체법에 대한 고집은 강성 지지층에 등 돌리지 못하는 그의 처지를 반영한 것이라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얼마 전 ‘K엔비디아 발언’은 이 대표가 기업을 평소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는지 너무 날것 그대로를 보여준 느낌이라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위장과 표변의 대명사인 그가 자신도 모르게 허연 맨살을 드러내고 말았다. 이 대표는 엔비디아 같은 기업을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답은 제시하지 않았다. 단지 그런 기업이 생기면 그 과실을 국민과 나누겠다고 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한마디만으로도 이 대표가 구상하는 ‘혁신기업의 레시피’를 대략 가늠해 볼 수 있다. 국민이 공동으로 투자해 대표기업을 육성하고 그로 인해 발생할 이익을 나눈다는 발상에는 기업가 정신의 모태인 자율 경영과 성과 보상의 원칙이 살아 숨 쉴 공간이 없다. 그보다는 통제와 개입, 이익 환수처럼 혁신의 씨앗을 말려 죽이는 독소만이 담겨 있을 뿐이다. 엔비디아 같은 기업은 기업가의 창의와 야수 같은 열정, 우수한 인재, 활발한 벤처 생태계 등 모든 조건이 한데 어우러져야 겨우 하나 생길까 말까 한다. 이 대표가 들고 있는 재료로 혁신기업을 빚어내겠다는 것은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기적의 요리법’에 가깝다. 이 대표는 요즘 대기업 총수나 금융계, 경제 단체, 글로벌 석학 등으로 만남의 외연을 넓히고 있다. 또 기회 될 때마다 “기업이 잘돼야 나라가 잘된다” “민주당은 원래 경제 중심 정당” 같은 말을 쏟아내고, 이는 ‘친기업 행보’ ‘중도층 잡기’라는 제목이 달려 언론에 소개된다. 그러나 이 대표 본인이 바라는 ‘우클릭’은 딱 거기까지다. 실제로는 반도체 연구개발직만이라도 ‘주 52시간 근무 예외’를 적용해 글로벌 경쟁의 족쇄를 풀어주는 데 반대하고, 모든 기업들이 우려하는 상법 개정을 강행해 기업가의 선제적 투자를 가로막고 있다. 애초에 기득권과 이익단체 눈치를 보며 미래 산업을 짓밟는 규제를 잔뜩 양산한 것도 전 정부의 여당인 민주당이었다.코리아 디스카운트 되레 악화시킬 우려 이 대표는 좌우를 오가는 오락가락 발언 와중에 종종 호언장담도 서슴지 않는다. 그는 최근 “민주당이 집권하면 아무것도 안 해도 코스피가 3,000은 넘을 것”이라고 했다. 이 대표의 바람대로 엔비디아 같은 기업이 도깨비 방망이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져 국민들이 투자 수익도 챙기고 세금에서 해방되는 만화 같은 세상이 오면 코스피는 3,000이 아니라 그 이상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여준 그의 본모습이 집권 후 현실이 된다면 우리는 오히려 지금보다 더 심각한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경험해야 할지 모른다. 야당 대표가 이런저런 정책 이슈를 선제적으로 제시하고 공론화시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그 방향을 손질하고 또 일관성도 조금 갖췄으면 한다. 유재동 산업1부장 jarrett@donga.com}

    • 2025-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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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유재동]관세폭탄이나 딥시크보다 더 두려운 것

    최고 권력자가 등장하는 행사는 그 나라의 지향점을 말해 준다. 그 집단이 중국 같은 권위주의 체제 국가라면 더욱 그렇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며칠 전 소집한 좌담회에는 딥시크 창업자 량원펑과 알리바바의 마윈, 화웨이의 런정페이, 비야디 회장 왕촨푸 등이 모였다. 이들의 공통점은 죄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등 첨단 정보기술(IT) 기업 총수라는 점. 값싸고도 품질 좋은 상품과 서비스로 서방의 공포심을 자극하면서, 미국과 기술패권 경쟁의 선봉에 선 인물들이었다. 갈수록 독해지는 미국의 대중 압박과 고립 작전을 견뎌내고 14억 인구를 먹여 살려야 한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으로 읽혔다.최강대국도 미래 생존 위해 분투하는데 국가 차원의 ‘생존 본능’이 감지되는 모멘트는 최근 미국서도 나왔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전쟁 참화에 시달리는 우크라이나를 쥐어짜서 안보 보장을 대가로 희토류의 50%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중국이 전 세계 희토류 공급망을 독차지하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우방국의 약점을 들춰내 자원 확보를 노리는 약탈적인 행보에 나선 것이다. 트럼프는 환경 보존이라는 인류 공통의 희망을 배신하고 자국 에너지 공급 안정화를 위해 화석연료 개발도 맹추진 중이다. 트럼프와 시진핑이 흠결 많은 권력자란 건 누구나 안다. 자국이나 정권의 이익을 위해 국제사회 규범을 수시로 무시하고, 지도자의 품격을 지키기는커녕 이웃 나라를 상대로 조폭 같은 협박이나 인권유린을 일삼는다는 평가도 받는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이들이 현존하는 위협에 맞서 국가 미래를 먼저 생각하는 마인드를 갖췄다는 점이다. 트럼프는 지난달 취임식 때 일론 머스크와 제프 베이조스, 마크 저커버그 같은 첨단 산업의 거물들을 연단 제일 앞자리에 세웠다. 건국 100주년인 2049년 미국을 능가하는 경제대국이 돼보겠다는 중국에 “감히 꿈도 꾸지 말라”는 메시지를 던진 셈이다. 시진핑은 이에 맞서 수만 명의 디지털 전사를 집중 양성해 중국 중심의 AI 생태계를 완성하겠다는 야욕을 드러내고 있다. 자국 이익을 최우선으로 수호하겠다는 두 권력자의 다짐은 이제 글로벌 사회가 과거처럼 상호 공조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홀로 각자도생해야 살아남는 시대라는 점을 간파한 결과다.우리는 무기력증 언제 벗어던질 건가 이처럼 세계 최강대국들조차 자기 먹고사는 문제를 챙기기 바쁜 와중에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돌아볼 수밖에 없다. 성장률은 경제 규모가 몇 배는 더 큰 미국에 추월당한 지 오래고, 정치권이 혁신기업의 싹을 말려 죽이는 동안 투자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한국을 탈출하고 있다. 복지부동에 빠져 맹탕 정책만 양산하는 탄핵 정부 공무원들, 기업가정신을 잃고 현상 유지에 급급한 창업 3∼4세대 대기업들…. 한국의 가장 큰 문제는 트럼프의 관세폭탄이나 딥시크의 공습이 아니라 이런 무기력함을 어느샌가 정상으로 여기고 위기 극복의 의욕마저 꺾여버린 모습이 아닌가 싶다. 트럼프와 시진핑의 지독한 생존 의지는 안타깝게도 요즘 많은 한국인들이 부러워하는 지도자의 면모이기도 하다. 미국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은 전기 충격에도 속수무책인 경험을 반복한 개들은 나중에 피할 방법이 생겨도 탈출 의지를 상실한다는 실험 결과를 통해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그동안 ‘넛크래커에 끼인 호두’, ‘냄비 속의 개구리’처럼 한국 경제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표현이 많았는데, 여기에 ‘셀리그먼의 강아지’가 추가될 수도 있을 것 같아 걱정이다. 모두가 살기 위해 앞만 보고 내달리는 전쟁터에서 우리는 언제까지 계속 이렇게 엉거주춤 헤매고만 있을 건가. 답은 이미 나와 있는데 절박함이 아직도 모자란 건지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다.유재동 산업1부장 jarrett@donga.com}

    • 2025-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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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유재동]‘실용 표방’ 李, 노동개혁 화두도 던져보라

    얼마 전 만난 한 장관급 인사가 “요즘 젊은이들은 편한 것만 하려고 든다.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데 처음부터 좋은 직장만 찾으려 하니 나라 미래가 걱정”이라고 말했을 때, 이는 공직자로서 매우 위험한 인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적인 자리의 푸념이라 넘기기엔, 관료들의 이런 사고가 정부의 국정 철학에 알게 모르게 스며들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혹여나 이번 명절 때 취업준비생 조카에게 비슷한 훈수를 뒀다면 괜한 꼰대 짓을 한 것은 아닌지 반성해 봐야 한다. 우리 사회가 청년들로 하여금 성에 안 차는 직장이라도 빨리 잡느니 차라리 장기 취준생으로 남도록 부추기고 있어서다.경직된 고용 시장이 경제 생산성 저해 평균 연봉이 9000만 원에 이르는 현대제철 노조가 최근 총파업을 예고했다. 이 회사는 중국의 저가 공세로 영업익이 60% 급감하며 실적 한파를 겪고 있지만 노조는 아랑곳하지 않고 역대 최대 성과급을 요구하고 있다. 연봉 1억2000만 원 선인 KB국민은행은 노조가 성과급을 300% 올려 달라며 파업 목전까지 갔다가 250% 인상으로 겨우 봉합했다. 대기업과 금융사 노조의 이런 모습은 연례행사처럼 되풀이된다. 강력한 투쟁력과 파업권을 무기로 실적 악화나 이자 장사 논란에도 매년 엄청난 임금 인상을 관철시켜 왔다. 그 결과 국내 대기업의 대졸 초임은 우리보다 경제 규모가 몇 배가 큰 일본보다도 60%나 높은 수준이다. 한국 사회에서 대기업 정규직이라는 노동 계급은 철옹성과 같다. 전체 근로자의 10%에 불과한 이들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구직자들이 온 힘을 다하지만 쉽게 넘볼 수 없다. 작년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직장을 옮긴 전체 중소기업 근로자의 12%만이 대기업에 입성했다. 평균 연봉이 1억 원에 육박하는 현대차 생산직은 재작년 10년 만에 공채에 나섰는데 수만 명의 지원자가 폭주해 서버가 다운됐다. 대기업 취업 문이 바늘구멍인 이유는 일단 한 번 뽑고 나면 해고가 어렵고 갈수록 연봉이 자동적으로 올라가는 고비용 구조라 기업들이 채용에 소극적이기 때문이다. 대-중소기업 격차와 노동 시장의 이중구조가 이처럼 견고한 상황에서 청년들이 별 볼 일 없는 직장에서 커리어를 시작하느니, 장기 백수로 남더라도 대기업의 문을 계속 두드려 보는 것은 ‘합리적인 선택’일 수밖에 없다. 정규직 과보호와 낡은 호봉제를 깨는 노동 개혁은 우리 경제의 여러 고질적인 문제를 동시에 개선시키는 ‘만능 키’다. 우선 인건비 부담이 줄어들며 기업들이 청년 채용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갈수록 잠재성장률이 떨어지는 한국은 그간 질 좋은 일자리를 찾지 못해 쉬고 있던 인력을 활용해 경제 역동성을 높일 수 있다. 비정규직→정규직, 중소기업→대기업의 ‘일자리 사다리’를 복원하면 중소기업 구인난을 완화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소수에게만 허락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과도한 입시 경쟁이나 저출산 문제 해결에도 도움이 된다. 국제통화기금(IMF)도 정규직 근로자에 대한 과보호를 풀면 우리 경제 생산성이 5% 증가할 것이라고 추정했다.진정성 있다면 국가 위한 결단 내려야 요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실용과 성장, 안보 같은 키워드를 내세워 중도층 표심 잡기에 나서고 있다. 희대의 정권 자멸에도 자기 지지율이 박스권에 갇히자 어떻게든 외연을 확장해 조만간 벌어질 수 있는 조기 대선에서 대세론을 굳히려는 포석이다. 하지만 이 대표 특유의 캐릭터 탓에 아직은 그 진정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쯤에서 자신의 주된 지지 세력인 귀족 노조와 결별하고 국민 전체를 위한 개혁에 나서자는 파격을 보여주면 어떨까. 보여주기식 말보다는 구체적인 행동, 사사로운 이득보다 국가 전체를 위한 결단을 보여주는 정치에 우리는 목말라 있다. 유재동 산업1부장 jarrett@donga.com}

    • 2025-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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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유재동]미국 국뽕 티셔츠의 성공이 의미하는 것

    요즘 미국 소매업체 월마트에서 불티나게 팔리는 티셔츠가 있다. 작년 독립기념일(7월 4일)에 출시된 이 옷은 가슴팍에 ‘AMERICAN MADE’(미국산)라는 글자가 박혀 있고 아랫단엔 작은 성조기 문양이 들어가 있다. 얼핏 보면 애국심에 호소하는 여느 ‘국뽕’ 상품과 다를 게 없는데 특이한 점이 두 가지 있다. 우선 가격이 12.98달러(약 1만9000원)로 매우 착하다. 또 방적 염색 봉제 등 모든 생산 과정이 실제 본토에서 이뤄졌다. 면화의 원산지도 물론 미국이다.자국 공급망 재건으로 제조업 부흥 시도 티셔츠는 ‘아메리칸 자이언트’라는 업체의 제품이다. 베이어드 윈스럽 대표는 어린 시절의 향수를 떠올리며 이 회사를 창업(2011년)했다고 한다. 그가 유년기를 보낸 1970년대만 해도 미국의 의류 산업은 제법 경쟁력이 높았고 거리엔 품질 좋은 국산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 흔했다. 하지만 이후 세계화가 진행되고 인건비가 싼 중국 등 해외로 생산기지가 옮겨가며 순식간에 수입 의류가 미국 시장을 점령했다. 윈스럽은 타임머신을 되돌려 아직도 미국이 질 좋고 저렴한 옷을 생산할 수 있다는 걸 입증하고자 했다. 이 회사는 미국 남부 농장들과 파트너십을 맺어 원재료를 저렴한 가격에 조달하고 공장 자동화로 생산 비용도 줄였다. 결정적으로 월마트와 대규모 공급 계약으로 안정적인 판로를 확보한 게 13달러 티셔츠가 가능할 수 있었던 비결이 됐다. 물론 이런 제품의 성공 사례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여전히 미국에서 팔리는 옷의 95% 이상은 해외에서 생산된 수입품이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아메리칸 자이언트의 ‘작은 실험’에 미국은 적지 않게 고무돼 있다. 외국에 의존하지 않고 순전히 자국 내 공급망으로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줬고, 그로 인해 산업 기반을 지키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표본까지 제시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트럼프 2기 행정부가 공약대로 수입품 관세를 대거 인상할 경우 ‘메이드 인 아메리카’의 경쟁력은 더욱 배가될 수 있다. 기업들은 굳이 애국심에 호소하지 않고도 외국산 못지않은 가성비의 제품을 소비자에게 내세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국 내에서 모든 생산 과정을 진행하려는 기업들의 행보는 차기 행정부의 정책 기조와도 100% 부합한다. 관세뿐 아니라 앞으로 또 어떤 인센티브가 제2의 아메리칸 자이언트를 탄생시킬지 모를 일이다.미중發 통상 악재, 한국엔 산업 전체 위기 제조업 부흥에 대한 미국의 기대감은 역으로 한국에는 상당한 도전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미국이 드높은 관세 장벽에 더해 이전보다 더 촘촘한 공급망으로 철벽을 치면 우리 기업이 거대한 북미 시장을 비집고 들어갈 틈은 갈수록 좁아지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은 최대 시장인 중국 수출의 둔화로 고전하고 있지만, 지난해 미국을 상대로는 사상 최대 흑자를 내며 무역 전선에서 선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급변하고 있다. 트럼프는 보호무역과 리쇼어링(해외 진출 기업의 본국 회귀) 정책만으로도 모자라서, 자국 내 생산이 어려운 핵심 산업은 한국 같은 동맹국을 쥐어짜서 미국 땅에 공장을 지으라고 압박할 태세다. 미국에 안보를 의존하는 우리로서는 이런 요구를 대놓고 무시할 수 없는 처지다. 그는 취임도 하기 전에 이웃나라에 영토를 내놓으라는 협박마저 불사하는 인물이다. 우리 기업은 이런 미국발 악재에 더해 중국의 저가 상품 밀어내기로 양쪽에서 협공을 당하고 있다. 중국산의 쓰나미에 내수 시장이 잠식되고 미국 등 해외 시장의 판로마저 막힌다면 단순한 통상 위기를 넘어 자칫 산업 기반의 붕괴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까지 올 수도 있다. 이처럼 대외 환경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데 이를 버텨내야 하는 나라 꼴은 여전히 엉망진창이다. 기업들로서는 그 어느 해보다 불안한 한 해의 시작이다.유재동 산업1부장 jarrett@donga.com}

    • 2025-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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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가 만난 사람]“트럼프 제재, 中 기술자립 의지 높일 것… 글로벌 반도체 경쟁 더 격화”

    《“트럼프의 강한 압박이 단기적으로는 중국의 발전을 지연시키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중국의 자립화 의지와 기술 개발 투자를 더 높일 것입니다. 결국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경쟁환경은 더욱 치열해지겠죠.”1일 취임한 윤의준 한국공학한림원 회장(65)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대중 제재가 이어지는 동안 한국 반도체 산업은 전열을 정비해야 한다”며 “우리가 국가적 차원에서 반도체 산업에 지원을 안 하면 자칫 산업공동화 현상이 올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윤 회장은 화합물 반도체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다. 화합물 반도체는 두 가지 이상 원소로 만들어진 반도체로 기존 실리콘 반도체보다 전력 효율과 특성이 좋아 요즘 첨단 분야에서 수요가 늘고 있다. 그는 차세대 디스플레이로 주목받는 마이크로-발광다이오드(LED) 분야의 원천 특허도 다수 갖고 있다. 서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전자재료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서울대 교수, 연구처장 및 산학협력단장, 한국에너지공대 초대 총장 등을 지냈다.1995년 설립된 한국공학한림원은 공학 분야에서 기술 발전에 공을 세운 공학기술인들이 모인 단체다. 공학 분야 석학 및 관련 기업 최고경영자(CEO) 등 661명(정회원은 288명)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공학기술 분야에서 정부에 정책 제언을 하는 ‘싱크탱크’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다음은 윤 회장과의 일문일답.》―중국과 일본 등에 비해 한국의 산업 경쟁력을 어떻게 진단하고 있나. “첨단산업 분야에서 한국의 수출경쟁력이 중국에 이미 뒤처지고 있다. 2024년 1∼8월 첨단산업의 무역특화지수를 보면 한국은 25.6, 중국은 27.8로 중국이 앞서고 있다. 특히 10년 전인 2014년과 비교했을 때 한국의 지수는 4.3포인트 하락한 반면, 중국은 16포인트 상승했다. 물론 한국이 아직 앞서는 분야도 많다. 조선업에서 한국은 세계 선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전기전자 산업에서는 한국, 일본, 대만이 치열한 경쟁 구도를 보이고 있다. 한국의 산업 경쟁력은 전반적으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중국의 빠른 추격과 일본, 대만의 기술력에 대응해 지속적인 혁신과 구조조정이 필요한 시점이다.” ―우리나라 산업 경쟁력이 예전 같지 않은 원인은 무엇인가. “결국 ‘혁신의 부족’이다. 과거엔 정부 주도의 강력한 산업정책으로 많은 성과를 냈지만, 현재는 생산성과 경쟁력이 함께 약화되고 있다. 주력 산업이었던 제조업의 경쟁력 약화, 대-중소기업 간 불균형 심화로 인한 비즈니스 생태계 저하, 혁신의 부재, 그리고 기업가 정신 약화로 인한 인재 부족 등…. 우리나라의 혁신 네트워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신호다.” ―그렇다면 기업가 정신과 혁신이 부족해진 이유는 뭔가. “주요 대기업들을 보면 예전처럼 ‘죽기살기’로 신기술을 개발하는 것 같지가 않다. 세계 최고가 되고자 하는 분위기라든가, 추진력, 결기, 이런 게 없어 보인다. 주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중엔 주 52시간 근무제 같은 규제 문제도 있을 것이다. 한창 연구개발에 매진해야 하는데 근무시간 채웠다고 컴퓨터 끄고 집에 가야 하는 상황이 현실에 안 맞는 것이다. 또 반도체 산업을 예로 들면 과거 한국의 반도체가 세계로 쭉쭉 뻗어 나가는 시대엔 공대에서 제일 잘 하는 학생들이 전자공학과를 가고 최고 인재들이 기업에 모였는데 지금은 학생들이 ‘그쪽에 비전이 있을까’ 하며 주저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정부나 정치권의 반도체 산업 지원은 부족한 게 많다. “아직도 ‘잘나가는 대기업을 왜 세금으로 지원해야 하느냐’, ‘왜 수도권에 지원을 몰아주느냐’는 심리가 이들에게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반도체는 특정 기업이나 산업의 영역으로 보면 안 된다. 인공지능을 비롯해 미래 산업의 가장 기초가 되는 산업인 만큼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해야 한다. 미국과 중국은 국가적으로 엄청난 지원을 하고 있는데, 우리만 ‘민간이 알아서 하라’고 하면 승산이 없을 것이다. 자칫 그러다가 국내 산업 공동화가 올 수도 있다. 다 미국으로 빠져나가지 않겠나.”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대중 제재가 한국 반도체 산업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트럼프의 강한 압박이 단기적으로는 중국의 발전을 지연시키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중국의 자립화 의지를 더욱 높이게 될 것이다. 미국의 제재가 중국의 기술적 발전을 포기하게 하지는 못할 것 같다. 결국 중국은 미국의 제재를 견디기 위해 자체 반도체 기술 개발에 더 많은 자원을 투자할 것이고 이로 인해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경쟁환경은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미국의 대중 제재가 우리에게 반사이익이 될 수도 있지 않나. “물론 대중 제재로 중국의 추격이 단기적으로 주춤할 수 있다. 그 사이에 한국 반도체 산업은 전열을 정비해야 한다. 반도체특별법의 조속한 통과로 반도체 업계에 보조금, 세제 혜택, 인프라 구축을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우리 스스로가 기술적 우위를 유지해야 한다.” ―그런데 반도체특별법은 계속 국회에서 공전하고 있다. “반도체특별법은 반도체 산업만을 위한 법이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 산업의 경쟁력 유지를 위한 법이다. 반도체를 생산하는 대기업은 물론 소재, 부품, 장비와 관련된 수많은 중소중견기업의 성장을 지원하는 법이다. 반도체 없는 한국은 상상하기 어렵다.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은 자동차, 조선, 정보통신 등 타 산업의 경쟁력 확보의 근간이다. 반도체 산업을 지키자는 데 여야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중국의 기술력은 우리를 바짝 추격해 와 있고, 미국 일본 등 선발국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원천기술을 사업화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법안이 국회에서 멈춰져 있는 것은 국가적으로 위험한 일이다. 지금 정치권은 산업계의 목소리를 믿어야 할 시기다.” ―우리나라에 ‘제2의 엔비디아’가 안 나오는 이유는 뭔가. “아직 창업 생태계가 안 갖춰져 있다. 초기 스타트업에 투자할 수 있는 벤처캐피털(VC)이 부족하다. 우리나라 VC는 실리콘밸리 VC에 비해 아직 진짜 ‘모험 자본’이라 할 만한 투자를 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시리즈 A∼C’(투자 유치 단계)까지 기업이 수익을 내지 않아도 다 기다려주며 기업의 성장을 도와준다.” ―저출산으로 학생 수가 줄고 의대 선호 경향까지 있어서 반도체 인력을 양성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 “학생들에게 반도체 산업의 국가적 중요성을 홍보하면서 애국심에 호소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본다. 인력 부족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우리의 반도체 산업을 계속 성장시켜야 한다. 성장을 통해 늘어난 기업의 이윤이 근로자에게 돌아가고, 일자리가 늘어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반도체 산업의 직업안정성과 보수가 높아지면 반도체 선호 경향, 이공계 선호 경향이 다시 나타날 것이다. 아울러 반도체 관련 스타트업들이 더욱 발전해야 한다. 우리나라가 갖고 있는 반도체 인프라를 이용해서 반도체 관련 창업으로 세계 시장을 공략하는 젊고 패기 있는 기업인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특히 인공지능(AI)의 발전은 새로운 기회의 창이 열리는 시점이며 인공지능용 반도체의 수요는 급격히 늘어날 것이다. 지금도 전 세계에는 엔비디아, TSMC 아성에 도전하는 기업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엔비디아의 독점을 깨기 위한 새로운 수많은 도전자 중에 한국 스타트업이 많이 나와야 한다.” ―산업계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대학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나. “기존 대학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곳이었지만, 이제는 인터넷에 전 세계 유명 교수의 강의가 다 공개돼 있고, 인공지능에 물어보면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있는 세상이 됐다. 따라서 앞으로의 우리 교육은 학생들에게 세상에 없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창의적 역량을 길러줘야 한다. 질문을 할 줄 아는 학생, 무엇이 문제인지 파악하고 그에 맞는 해법을 남보다 먼저 찾을 수 있는 학생을 길러내야 한다. 이를 위해선 학부생 교육이 단순 지식 전달 위주의 강의에서 프로젝트 기반 학습 방법으로 바뀌어야 한다. 적극적으로 기업, 연구실 인턴십을 하도록 해서 대학에서 배우는 학문이 문제 해결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체득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학은 창업 혁신의 거점 역할을 해야 한다. 대학의 우수한 인적·물적 인프라를 활용해 스타트업과 중소벤처 성장 생태계의 중심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한국의 AI 경쟁력은 어떠한가. “어느 정도 경쟁력이 있고 상당한 잠재력도 있다고 본다. AI 등 미래 산업 분야에서 한국의 위치는 전 세계적으로 중상위권에 속해 있다. 영국의 데이터 분석업체 토터스 미디어에 따르면 한국은 글로벌 AI 국가 역량에서 6위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거대언어모델(LLM)을 갖고 있는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다. 그러나 한국이 AI 분야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몇 가지 중요한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AI 산업 발전을 위한 인프라 투자, 인력 양성, 국제협력 등에 국가의 지원이 필요하다. 법제도와 규제 개선도 필요하다. 또 인재 유출 문제를 해결하고 해외 인재를 유치하기 위한 전략도 필요하다. 지속적인 투자 확대 또한 필수적이다. 대한민국이 갖고 있는 제조업에 AI를 도입하여 제조업 경쟁력을 높이는 것도 필요하다.” ―공학한림원의 역할을 어떻게 변화시킬 생각인가. “올해로 한국공학한림원이 창립 30주년을 맞이한다. 일단 회원제도를 업그레이드하려고 한다. 현재는 대기업과 주요 대학의 석학들이 주로 회원으로 돼 있는데 그 문호를 넓히려 한다. 우리나라가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유니콘 기업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그런 기업과 기업인들이 공학한림원에 참여해 함께 우리나라 발전을 위해서 의견을 나눠야 한다. 이를 위해 보다 젊고 역동적인 유니콘 창업가, 중소중견 기업인, 여성 공학인들을 새로 맞이하려 한다.”윤의준 회장(65)△1983년 서울대 금속공학 학사△1985년 서울대 대학원 금속공학 석사△1990년 MIT 전자재료 박사△1985∼2020년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2011∼2013년 서울대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 원장△2013∼2017년 산업통상자원부 R&D전략기획단 주력산업MD△2019∼2021년 서울대 연구처장 겸 산학협력단장△2020∼2023년 한국에너지공대 초대 총장유재동 산업1부장 jarrett@donga.com}

    • 2025-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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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유재동]尹이 한때 꿈꿨던 정부

    오래전에 이 정부 인수위에 참여했던 고위 공직자에게 들은 얘기다. 대선 직후 새 정부도 ‘문민정부’, ‘참여정부’처럼 별칭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와서 실제 몇 가지 아이디어가 논의됐다고 한다. 그때 윤석열 대통령의 의중이 담겼다며 내부에서 공유되는 것 중에 ‘상식(常識)의 정부’가 있었다. 다소 기이했던 건, 그 앞에 ‘미치지 않은’이라는 수식어도 함께 달려 있었다는 것이다.상식과 합리, 예측가능성의 상실 별칭을 다는 건 어찌됐건 없던 일로 결론이 났다. 너무 즉흥적이고 지나가는 농담 같은 말이어서 별로 진지하게 검토됐을 것 같지도 않다. 다만 분명한 건 인수위 내에서 이런 표현을 생각해낼 사람은 실제 윤 대통령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그는 후보 시절 “이번 대선은 상식의 윤석열과 비상식의 이재명 간 싸움”이라는 이분법적 프레임으로 상대를 거세게 몰아붙였다. 탈원전, 소주성, 조국 사태 등 전 정권의 국정 실패와 몰염치를 답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특유의 거친 언어로 구현하지 않았을까 싶다. 정부가 상식적이고 정상적(미치지 않음)이어야 한다는 건 물론 지극히 옳고 당연한 얘기다. 그럼에도 역대 정부에선 정권이 국민 기대와 달리 상식 밖의 일을 도모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런 일들은 집권세력이 특정 이념에 경도돼 민생 현장을 외면하거나 권력자의 오판을 참모들이 쉽게 견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주로 발생했다. 또 이는 필연적으로 정권 지지율 하락과 경제를 스스로 위험에 빠뜨리는 자해 행위로 이어졌다. 상식의 가치를 그렇게도 강조했던 윤 대통령의 최근 헛발질은 ‘미친 정권’의 극적인 사례이자 너무 황당한 자기모순이라 아직까지도 사실로 믿어지지 않는다. 기업인이나 투자자를 만나 보면 이들은 의외로 정부에 그다지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이들의 요구 사항은 돈이 저절로 쏟아지는 요술방망이를 안겨 달라거나 역사에 길이 남을 노벨상급 경제 정책을 펴 달라는 게 아니다. 그저 규제·행정 당국으로서 최소한의 상식과 합리를 갖추고, 의사 결정에 필요한 예측 가능성을 보장해 달라는 것뿐이다. 뒤집어 말하면 극단적인 정책 변화나 정치적 혼란에 따른 불확실성, 세계 어디에도 없는 엉뚱한 규제 같은 것은 경제에 가장 치명적인 요인들이다. 만일 윤 대통령의 처음 바람대로 이 정부가 기본 상식에만 입각해 돌아갔어도 우리 경제는 그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그럭저럭 버틸 여력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끔찍한 자폭 행위 몇 번에 우리는 이미 최소한의 자격조차 미달한 정부를 갖게 됐다. 어이없는 계엄의 대가는 투자자들이 금융시장을 떠나가고 내수 경기가 나락에 떨어지며 국가 경제가 위험에 처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간 공들여 쌓아온 국격과 대외신인도가 한 방에 허물어질 위기다.결국 경제를 극한 위험에 빠뜨려 윤 대통령이 꿈꿨던 이상적인 정부가 실패로 돌아간 가장 근본 원인은 정부의 발목을 잡는 거대 야당도, 지지율을 바닥에 내리꽂은 여사 문제도 아니라고 본다. 그보다는 자기주장만 상식으로 여기고 이에 반대하는 의견들은 비상식으로 매도한 것, 그리고 설득과 인내, 타협이라는 국정 운영의 기본을 망각한 비민주적 태도가 문제의 본질이었다. 여러 증언을 종합해보면 윤 대통령은 대체로 경청보다는 독선, 토론보다는 윽박지름으로 행정부를 이끌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합리적인 의견 개진이 불가능한 경직된 관료 조직, 잦은 정책 실패와 이해할 수 없는 인사로 귀결됐다. 45년 만의 계엄이라는 희대의 자책골은 어느 한겨울 밤의 정신 나감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차곡차곡 빌드업된 결과물일 수 있다.유재동 경제부장 jarrett@donga.com}

    • 2024-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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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유재동]식물 정부의 피해는 오롯이 국민의 몫

    공교롭게도 지난 두 번의 정부 부처 출입을 모두 정권 말기에 했다. 2007년과 2012년, 대통령 국정 지지율이 지금처럼 20∼30%를 맴돌았을 때다. 당시 관료들의 사무실에는 회색 철제 캐비닛이 유독 눈에 많이 띄었다. 그때 만난 국·과장들은 “내가 가진 정책 아이디어는 모두 저 안에 쌓아 놨다”는 말을 종종 했다. 어차피 정권의 힘이 빠진 지금은 추진해 봐야 빛을 볼 수 없으니, 새 정부가 출범하면 그때 들이밀기 위해 아껴 놓고 있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당대 최고의 엘리트 관료들이 모인다는 기획재정부는 딱히 이렇다 할 정책을 내놓지 않았고 휴가자가 많은 사무실은 빈자리가 많아 개점휴업을 방불케 했다. 임기 3년 차에 벌써 심각한 복지부동 돌이켜 보면 그때의 경제 상황은 공무원들이 바닥에 배를 깔고 시간만 보내거나 선거판을 기웃거릴 정도로 한가한 시절은 절대 아니었다. 노무현 정부 마지막 해인 2007년은 글로벌 금융위기의 전주곡인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지며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에 거대한 외풍이 몰아쳤다. 2012년은 우리 경제의 생산성이 잠재성장률에도 못 미치는 최악의 경기침체 국면에 돌입했던 시기다. 낮은 정권 지지율이나 국회 상황을 핑계로 관료들이 일손을 놓기는커녕 비상등을 켜고 밤낮없이 일해도 부족했을 때였다. 당시 공무원들이 아예 기본적인 일조차 안 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임기 말 분위기에 휩쓸려 규제 완화나 경제 구조개혁 같은 주요 현안에 소극적으로 임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공직사회 복지부동의 폐해를 감안하면 고작 3년 차에 접어든 현 정부에서 벌써부터 정권 말 풍경이 관찰되는 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극심한 여소야대로 인해 “어차피 뭘 해도 안 된다”는 무기력증, 핵심 국정과제를 주도적으로 처리하다가 다음 정부 때 책임 추궁을 당할 수 있다는 공포감이 정권의 이례적인 ‘조기 식물화’를 부추기고 있다. 간부들의 자신감 결여는 조직 전체로 전염되며 능력 있는 MZ 사무관의 공직 이탈로 이어진다. 낮은 급여를 참고 조국에 기여한다는 사명감으로 버티라는 조언은 공무원 사회에서 꼰대 발언의 상징이 된 지 오래다. 물론 이런 요인들이 관료들에게 일이 손에 안 잡히는 원인은 될 수 있어도 그 자체로 복지부동의 면죄부가 될 순 없다. “국회 권력이 너무 커졌다”, “요즘 젊은 공무원들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은 10, 20년 전에도 나왔던 얘기들이다.정책 주도권 되찾고 실용적 성과 보여줘야 공무원들이 캐비닛을 꽁꽁 걸어 잠그고 잠수 타는 것의 피해는 오롯이 국민의 몫이다. 공직자의 기강 해이는 각종 비리와 안전사고로 이어져 국민의 소중한 인명·재산 손실을 일으킨다. 글로벌 경쟁에 일분일초가 아쉬운 기업들은 집권 초 약속했던 규제 개혁이 2년 반 넘게 공전하면서 정부에 대한 기대감을 접었다. 레임덕의 가장 현실적인 정의는 미래 권력의 눈치를 살피면서 정작 지금 해야 할 일은 소홀히 하는 것이다. 공무원들 마음이 콩밭에 가 있고, 중요한 의사결정을 다음 정부로 넘기는 현상이 앞으로 2년 이상 더 지속된다고 상상해 보라. 당장 미국에서 일론 머스크를 모셔와 공직 개혁의 칼춤을 추게 해도 모자랄 판이다. 이른 동면에 들어간 관료사회를 깨우려면 정권이 최소한의 지지율을 다시 회복하는 게 필수다. 그런 반전이 자화자찬식 민생토론회와 정책 홍보, 또는 대통령의 분노를 듬뿍 담은 기강 잡기로 과연 가능할까. 그보다는 국민적 합의가 어느 정도 이뤄진 민생 아이템을 발굴해 야권과 조금씩이라도 합의를 해나가는 식으로 실용적인 성과를 계속 쌓아가는 게 이 정부의 유일한 살길이라 본다. 정부가 불리한 정치 구도에서도 정책 주도권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그런 변화를 국민도 충분히 체감하기 전까지는 관료들이 자기 방 캐비닛 문을 자발적으로 여는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유재동 경제부장 jarrett@donga.com}

    • 2024-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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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유재동]文의 뻥튀기, 尹의 마사지

    이명박 정부 마지막 해인 2012년 9월, 기획재정부는 ‘원천징수 합리화’라는 낯선 대책을 내놨다. 간이세액표 개정을 통해 매월 떼어가는 근로소득세액을 줄여 가계 수입을 늘려주겠다는 내용이었다. “나랏빚을 내지 않고도 경기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처음엔 ‘묘수’라는 호평이 부처 내에서 나왔다. 하지만 이 대책은 곧 조삼모사 논란에 휩싸인다. 세금을 적게 내는 만큼 연말정산 때 적게 돌려받는다는 점에서 결국 납세자의 부담은 같았기 때문이다. 당시 정부는 “없는 살림에 마른 수건 쥐어짜 마련한 정책”이라며 둘러댔지만 사실 여기엔 차마 대놓고 밝히지 못한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었다. 대선을 불과 석 달 앞두고 경기를 어떻게든 끌어올려 보자는 것이었다.보수 정권마다 반복되는 재정 꼼수 이런 꼼수는 다음 정권에서 급기야 큰 사달로 번졌다. 경제민주화를 기치로 화려한 복지 공약을 내세운 박근혜 정부는 그 재원 마련을 위해 집권 첫해부터 세법 개정에 나섰다. 근소세 공제 방식을 소득공제에서 세액공제로 전환한 것인데, “고소득자 부담을 늘렸다”는 정부 설명과 달리 중산층과 봉급생활자가 내야 하는 세금이 대거 늘었다. 여론 반발에 직면한 정부는 “세율을 올리지 않았으니 증세가 아니다”, “거위가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깃털만 살짝 뽑았다”는 식의 말장난으로 오히려 월급쟁이의 분노만 키웠다. 복지 확대를 위해 증세가 필요하다거나 나랏빚을 더 내야 한다고 국민을 설득하는 정공법 대신, ‘거위 털 뽑듯’ 슬그머니 직장인 유리지갑을 털 궁리만 한 것이다. 정부가 얕은수로 국민의 눈을 속이는 일은 놀랍게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최근 기재부는 30조 원의 세수 결손을 메우기 위해 외국환평형기금과 주택기금 등 각종 기금을 동원한다고 발표했다. 당초 정부는 올해 예산을 편성하면서 병사 월급과 기초연금 인상, 신공항 건설 같은 선심성 대책을 대거 포함시켰다. 하지만 세수가 원하는 만큼 걷히지 않자 외환시장 안정과 서민 주거복지에 써야 할 비상금을 탈탈 털고, 한국은행에선 150조 원이 넘는 차입금까지 끌어다 쓰는 무리수를 감행했다. 그러고도 “국채 발행을 피했으니 건전재정 기조를 지켜냈다”, “나랏빚 펑펑 내던 전임 정부와는 다르다”고 스스로를 홍보한다.前정부 고용 부풀리기와 다를 게 뭔가 그러나 이런 자평과는 반대로 정부의 ‘재정 마사지’는 현 정부가 그토록 차별화를 시도했던 지난 정부의 데자뷔를 보는 느낌이 든다. 문재인 정부가 막대한 예산을 동원해 공공 일자리를 쏟아낸 결과 고용률이 올라가는 등 이른바 ‘겉모습’은 개선됐지만, 실제로는 저임금 비정규직만 잔뜩 늘어나면서 고용의 질은 추락했다. 돌려막기와 마이너스통장으로 겨우 파산을 면하고는 “나라살림을 튼튼히 지켰다”고 정신승리하는 것과, 예산 축내며 질 낮은 ‘세금 알바’를 양산해 놓고 자칭 ‘일자리 정부’라 치켜세우는 것. 그 둘을 지켜보며 국민들이 느낄 민망함의 차이가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는 최저임금 과속 인상과 일자리 증가라는 서로 상충되는 목표를 달성하려다 결국 통계 분식(粉飾)까지 감행했다. 그런 견지에서 보면 우파 정부에서 유독 이런 ‘재정 꼼수’가 되풀이되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건전 재정과 감세 기조가 집권 세력에 일종의 도그마(독단적 신념)가 된 상태에서 선심성 지출은 지출대로 하려다 보니 관료들이 이런 막다른 선택에 내몰리고 마는 것이다. 건전 재정이라는 큰 방향은 옳지만 이는 국가 경제를 운용하는 하나의 원칙쯤으로 여겨야지 그 자체가 절대 허물어선 안 되는 성역이 돼선 곤란하다. 누구보다 대통령부터 그 고집을 내려놔야 한다. 유재동 경제부장 jarrett@donga.com}

    • 2024-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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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유재동]증시 부양이 밸류업이라는 착각

    “밸류업한다고 증시 오르겠어요? 기업이 돈을 잘 벌어야 뭐라도 되지.” 듣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얼마 전 금융당국 고위 관료가 털어놓은 얘기는 아무리 사석(私席)이었지만 너무 솔직했다. 자사주 매입, 배당 확대 같은 대책들은 곁가지일 뿐이고 결국엔 주가와 비례적 함수 관계에 있는 기업 실적이 받쳐주지 않으면 밸류업이고 뭐고 공염불이라는 그의 주장은 물론 일리가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증시 밸류업의 주무부처 관료가 이렇게 대놓고 존재론적 ‘자기 부정’을 하다니…. 증시 문제를 바라보는 대통령, 넓게 말해 여야 정치권과 관료·전문가 그룹 간 인식차가 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세금 깎아주는 등 단기 성과에만 집착 고질적인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한다며 정부가 증시 밸류업 정책을 추진한 지도 1년이 다 돼 간다. 올해 초 일본을 벤치마킹한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발표한 데 이어 최근에는 야심 차게 ‘코리아 밸류업 지수’까지 내놨다.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한국거래소를 두 번이나 찾으며 각별한 관심을 보였고 대주주 주식양도세 완화, 증권거래세 인하 같은 세제 지원책도 줄줄이 나왔다. 하지만 성적표는 아직 초라하다. 올 들어 미국 일본 등 주요국 지수가 20% 안팎 고공행진을 하는 동안 코스피는 상승은커녕 되레 뒷걸음질 쳤다. 자사 주가의 밸류업 계획을 공시한 기업도 상장사 중 1%가 채 안 된다. 기업의 주주 친화적 경영을 유도해 시장 평가를 높이겠다는 밸류업의 큰 방향은 옳다. 기업들이 지금보다는 배당을 늘리고 소액주주의 목소리를 수용하는 한편 오너 일가의 이익만 챙기는 일부 기업들의 행태에 변화를 주는 것도 필요하다. 문제는 밸류업의 본질인 ‘기업가치 제고’보다 ‘증시 부양’이라는 단기 성과에 집착한 나머지 앞뒤를 가리지 않은 대책을 남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게 금융투자소득세다. 금융상품 투자수익에 일정 비율로 과세한다는 이 제도는 여야 합의로 마련돼 내년부터 시행 예정이지만 정부여당이 개인투자자 표심을 우려해 느닷없이 폐지를 추진하고 있다. 금투세를 굳이 없앤다면 적어도 ‘패키지 딜’로 추진돼 왔던 거래세 인하라도 되돌려 재정 누수를 막아야 하는데 거래세는 또 원래대로 낮추겠다고 한다. 평소 건전재정을 중시한다던 정권이 맞나 싶다.기업 환경과 경제 활력 개선이 핵심 정부가 아예 ‘공포 마케팅’을 조장하기도 한다. 주가 하락이 예상되는 주식을 빌려 팔아 수익을 내는 공매도는 모든 선진국에 보편화된 투자 기법이고 시장의 과도한 거품을 빼는 순기능도 있다. 하지만 정부는 ‘공매도는 주가 폭락의 주범→공매도 금지는 밸류업’이라는 일부 투자자 단체의 단선적 주장에 확성기를 대주기 바쁘다. 국제 표준을 한참 벗어난 규제의 결과는 해외 투자자들이 이탈하고 증시의 선진지수 편입이 번번이 좌절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밸류업의 사다리를 스스로 걷어찬 것이다. 대통령과 여권은 어떻게든 시장에 거품을 주입해 지수를 끌어올리는 게 밸류업의 본질이라고 믿는 듯하다. 마치 우리 증시의 실패가 공매도와 금투세 때문이고 이를 없애지 않으면 주가가 당장이라도 폭망할 것처럼 여론을 호도한다. 그러나 진정한 밸류업은 주주 환원 확대, 기업 지배구조 개선과 함께 경제 활력을 높이고 혁신기업이 양산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라는, 그 뻔한 진리를 굳이 또 강조해야 하나 싶다. 최근 어느 해외 연기금 관계자가 우리 증시를 놓고 “저평가라는 말도 부끄럽다”고 혹평했는데, 다른 건 몰라도 ‘저평가’라는 말이 너무 후하다는 점은 동의할 수밖에 없다. 지금 현실을 보면 우리 증시는 저평가된 게 아니라 딱 수준에 맞는 적당한 평가를 받는 것 같다.유재동 경제부장 jarrett@donga.com}

    • 2024-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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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유재동]‘이지 머니’ 시대는 다시 오지 않는다

    주요국의 금리 피벗이 본격화됐다. 2022년 3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가파른 긴축에 시동을 걸며 각국의 돈줄 조이기가 시작된 지 2년 6개월 만이다. 금리를 내릴 여지조차 없는 일본을 제외하면 긴축 완화 결정은 이제 선진국 중 사실상 한국만 남았다. 고금리·고물가·고환율의 3고(高) 위기에 시달려 온 우리는 이 시기를 누구보다 기다려 왔다. 중력을 거스르는 힘겨운 오르막 경사가 이제 조금이나마 평탄해질 기미를 보이고 있다.과거와 달리 물가 불안요인 상존금리 인하는 기본적으로 경제 성장에 플러스 요인이다. 시장에서 자금 조달이 쉬워지기 때문에 기업 투자가 늘고 주식 부동산 등 자산가치가 오른다. 또 사업이 잠시 어려워진다 해도 급전을 빌려 버티는 게 용이해진다. 풍부한 유동성의 파도에만 올라타면 ‘마치 무빙워크 위를 걷는 것처럼’(오크트리캐피털 하워드 막스 회장의 표현) 적은 힘을 들이고도 쉽게 돈 벌 기회가 열려 있다. 세계 경제는 저금리 환경에서 생산성이 높아지고 물가도 안정적이었던 골디락스 시대를 경험한 바 있다. 정보기술(IT) 혁명이 미국의 ‘신경제’로 이어진 1990년대, 중국의 고도 성장에 전 세계가 수혜를 입었던 2000년대 초중반이 그랬다.통화정책의 변화에 따라 경기 흐름이 바뀐다는 것은 경제학에서 기본 중 기본이 되는 원리다. 하지만 앞으로는 과거와 같은 제로금리나 양적완화의 사례를 경제원론 교재에 다시 추가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최근 각국이 ‘이지 머니’(easy money·손쉽게 돈을 빌려 투자하는 것)의 폐해를 너무나 뼈저리게 경험했기 때문이다. 코로나 사태 이후 연준은 금리를 너무 오랫동안 낮게 유지했다가 정권이 흔들릴 수준의 인플레이션을 겪었다. 더 멀게는 2008년 금융위기 역시 장기간 이어진 초저금리가 집값 거품의 모래성을 쌓아 올린 게 직접적인 도화선이 됐다.물가도 과거와 달리 불안 요소가 상존한다. 미국의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되든 미중 갈등은 더욱 커질 조짐이다. 이는 전 세계를 하나로 이어왔던 공급망이 더 잘게 분절되고 값싼 중국산은 글로벌 시장에서 배제된다는 것을 뜻한다. 저가 상품과 인력의 이동이 자유롭지 못한 고비용 구조가 세계 경제에 상수(常數)로 고착화됐다. 여기에 기후변화에 따른 식량 가격 폭등, 지정·지경학적 긴장에 의한 에너지 위기도 자주 반복되고 있다. JP모건의 제이미 다이먼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물가 불안 요인들을 열거하면서 고물가에 경기침체가 겹치는 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경고했다. 이런 우려들을 감안하면 각국의 긴축 완화에는 상당한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 연준은 2022년 초부터 제로 수준의 금리를 5%포인트 넘게 올리는 데 불과 1년 반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반대의 과정은 훨씬 천천히 이뤄질 공산이 크다. 어쩌면 제로금리는커녕 연 2∼3% 이하의 상대적 저금리 시대도 앞으로 수년간 찾아오지 않을 수 있다.각국 금리 낮추는 데 한계 분명특히 한국은 가계부채라는 혹을 달고 있어 고민이 더 크다. 미국과 유럽을 따라 금리를 함부로 내렸다간 자칫 ‘경제 시한폭탄’이 폭발해 버릴 수 있다. 바닥을 뚫고 지하실로 내려간 경기를 생각하면 한국은행은 금리를 내려도 이미 한참 전에 내렸어야 하지만 가계빚과 집값 우려가 발목을 단단히 잡으면서 통화정책이 길을 잃은 모양새다. 금리를 빠르게 내리기 어렵다는 것은 서민들의 이자 부담이 앞으로도 계속된다는 것, 그리고 내수 경기 회복이 한동안 쉽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언제나 그랬듯이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은 결코 녹록지 않다.유재동 경제부장 jarrett@donga.com}

    • 2024-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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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유재동]먹사니즘의 본질은 막쓰니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평소 자신이 포퓰리스트라는 비난에 전혀 굴하지 않는다. 그냥 쿨하게 인정하고 때로는 이를 역이용하기도 한다. 그는 언론 등에 “포퓰리즘으로 비난받은 정책을 내가 많이 성공시켰다. 앞으로도 포퓰리즘을 하겠다”고 했다. 포퓰리즘을 대놓고 하겠다는 자에게 포퓰리스트라는 비판은 아무런 타격감이 없다. 임기응변과 권모술수의 달인다운 면모다. 포퓰리즘이란 말이 본인도 듣기는 거북했는지 이 대표는 이번엔 먹사니즘이란 대안을 들고나왔다.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 즉 민생을 최우선에 두겠다는데 그 대의(大義)에 누가 반기를 들까 싶다. 문제는 그 아름다운 단어를 한 꺼풀 벗겨냈을 때 드러나는 진짜 속살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를 위험에 빠뜨렸던 포퓰리즘 정책들은 죄다 ‘민생’, ‘실용’ 같은 그럴듯한 말들로 포장돼 있었다. 이재명의 새 정치 구호도 그리 다를 게 없어 보인다.철학도 원칙도 없는 ‘나랏돈 퍼주기’ 이 대표가 외치는 민생회복지원금은 먹사니즘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내는 사례다. 그의 주장대로 전 국민에게 25만 원씩 나눠주기 위해선 생때같은 나랏돈 13조 원이 필요하다. 국민 개개인이 받는 돈은 그야말로 ‘용돈’ 수준이지만 이를 위해 들어가는 재정은 천문학적이고 오히려 고물가를 더 부추기는 부작용까지 우려된다. 이 대표가 ‘1호 민생법안’으로 밀어붙인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남아도는 쌀을 정부가 의무적으로 사들이자는 것인데 쌀 과잉생산을 유발할 수 있는 데다 매입·보관 비용도 매년 1조 원이 들어간다. 대선 공약이었던 ‘탈모약 건보 적용’과 ‘병사 월급 200만 원’, 또 그의 브랜드로 자리 잡은 ‘기본 시리즈’도 모두 국가 재정에 심각한 충격을 주는 내용이다. 굳이 나랏돈을 펑펑 써야 한다면 곳간을 어떻게 채워 넣을지에 대한 구상이라도 내놔야 하는데 그조차도 없다. 차라리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대기업-고소득자에게 세금을 더 걷겠다고나 하면 정책의 타당성 여하를 떠나 앞뒤 논리라도 맞을 텐데, 여태 ‘부자 감세’ 프레임을 씌어 반대해 온 종합부동산세 완화를 느닷없이 추진하겠다고 한다. 기존 입장이 어떻든지 간에 납세자의 표만 얻을 수 있다면 나라살림 축내는 건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취지로 읽힌다. 지금까지 지켜본 이재명의 먹사니즘은 무슨 철학이나 원칙이 있는 국정이념이라기보다는, 뭐든 나눠주거나 깎아주면서 민생을 챙기는 정치인으로 자신을 각인시키고, 무리한 지출에 국고가 바닥나는 현실은 외면하는 무책임한 정치쇼에 가깝다.민생 가장한 또 다른 포퓰리즘일 뿐 진짜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 그리고 요즘 이 대표가 유독 강조하는 ‘성장’의 해법을 찾으려면 지금처럼 재정 퍼주기 같은 원시적인 처방에 기대선 안 된다. 그보다는 투자와 혁신 등 민간 부문의 창의성이 빛을 발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경쟁에서 뒤처지는 취약 계층에 기회의 사다리를 제공하는 것이 우선이다. 특히 국가 지도자급 반열에 오르는 걸 목표로 한다면 정치적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나라의 시스템을 바로잡는 일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 가령 연금·노동개혁과 전기요금 현실화 같은 문제는 비록 유권자의 인기를 얻진 못하더라도 국가 장래를 위해 꼭 필요한 과제들이다. 지금 서민경제 현장은 현금 뿌리기로는 해결 못 하는 일들만 산더미다. 당장 노동시장에선 이렇다 할 직업도, 구직의사도 없이 그냥 쉬는 청년이 사상 최대라고 한다. 먹사니즘을 표방한다는 이 대표는 이들의 지갑에 25만 원씩 꽂아준다는 것 외에 청년 ‘일자리 절벽’의 근본 해법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있나. 민생이라는 말의 무게를 그가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게 아닌지 걱정이다. 유재동 경제부장 jarrett@donga.com}

    • 2024-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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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스피 사상최대 폭락… 亞증시 ‘최악의 날’

    미국의 경기 침체 등을 우려한 투자자들의 ‘역대급 투매’로 한국과 일본, 대만 증시가 모두 사상 최대 폭으로 하락하는 등 아시아 증시가 일제히 초토화됐다. 기업들의 연쇄 부도나 감염병 확산 같은 대형 악재 없이 막연한 공포심리로 인해 증시가 이 정도로 대폭락하는 것은 전례가 드문 일이다. 그만큼 한국 금융시장이 대외 환경 변화에 매우 취약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으로도 분석된다. 5일 국내 증시에서 코스피는 전 거래일보다 234.64포인트(8.77%) 하락한 2,441.55에 거래를 마쳤다. 하락 폭 기준으로는 역대 최대다. 코스닥도 88.05포인트(11.3%) 하락한 691.28에 마감했다. 이날 코스피와 코스닥은 하락 폭이 커지면서 오후에 거래가 20분간 일시 중단되는 ‘서킷브레이커’가 발동됐다. 국내 증시에서 서킷브레이커가 발동된 것은 2020년 3월 19일 이후 4년 4개월여 만이다. 코스피는 거래 재개 이후에 지수가 더 떨어지면서 한때 289.23포인트(10.81%) 내린 2,386.96까지 하락하기도 했다. 두 시장에는 매도 사이드카 역시 발동됐다. 일본 증시는 더 크게 내렸다. 이날 닛케이평균주가는 4,451.28엔(12.4%) 내린 31,458.42로 마감했다. 이날 낙폭은 3,836엔이 떨어졌던 1987년 10월 20일 ‘블랙 먼데이’보다 커 역대 최대였다. 대만 증시 역시 1807.21포인트(8.35%) 빠진 19,830.88로 거래를 마쳤다. 1967년 지수 산출 이후 최악의 폭락장이다. 한국 시간 5일 밤 개장한 이날 뉴욕 증시는 나스닥지수가 6%, S&P500지수가 4% 급락한 채 거래를 시작했다. 유럽 증시도 장중 2%를 넘는 하락세를 보였다. 글로벌 증시 폭락의 직접적인 이유는 미국의 경기 침체 우려다. 여기에 인공지능(AI) 거품론이 불거지는 등 그동안 증시를 이끌었던 빅테크 기업 실적에 대한 의문이 확산된 것도 증시 하락의 기폭제가 됐다. 일본의 경우는 기준금리 인상으로 엔화 가치가 다시 급등하면서 수출 기업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그동안 엔화를 저금리에 차입해 세계 각지에 투자(엔 캐리 트레이드)했던 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갈 것이라는 전망이 나와 시장 불안을 가중시켰다. 여러 악재가 중첩된 복합 위기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증시 전문가들은 이런 요인들이 이날 대폭락장을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글로벌 금융위기나 9·11테러, 팬데믹처럼 뚜렷한 이유 없이 시장이 급전직하하는 것은 막연한 공포심리가 투자자들 사이에 빠르게 전염되면서 비이성적인 투매가 반복된 결과라는 것이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주가 급락을 설명할 단서가 뚜렷하지 않다”며 “미국은 지금까지 증시가 과하게 오른 데 따른 반작용일 수 있지만 한국은 별로 오른 것도 없는 증시가 더 떨어지니 허무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유재동 경제부장 jarrett@donga.com}

    • 2024-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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