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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마치 못된 시누이처럼 행세하면서 방해를 하고 있다.” 현대자동차의 미국 시장 진출 ‘D데이’를 1년쯤 앞두고 준비 작업이 한창이던 1985년 1월, 당시 정세영 사장이 했던 말이다.현대차의 미국 진출은 한국 자동차 산업 70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두세 장면을 꼽으라고 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한 장면이다. 당시 미국은 전 세계 자동차 판매량의 절반을 차지하는 초거대 시장이었던 데다, 전 세계 모든 메이저들이 자존심을 내걸고 총력전을 벌인 격전장이었다. 현대차에는 글로벌 브랜드로 도약하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다.하지만 미국 시장의 벽은 높았다. 무엇보다 소형차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 업체들의 ‘텃세’가 보통 아니었다. 일본 업체들은 이미 현지 생산 기지까지 구축하고 미국 시장에 연간 300만∼350만 대를 판매하던 시절이다. 일본은 브랜드-품질-마케팅 모든 면에서 현대차를 압도하는 상황이었지만, ‘잠재적 경쟁자의 싹을 미리 밟아 버리겠다’고 작정이라도 한 듯 집요한 방해 공작을 펼쳤다.그럼에도 현대차는 특유의 뚝심으로 미국 시장을 끈질기게 파고들어,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 왔다. 지난해에는 현대차와 기아를 합해 171만 대를 팔아 연간으로 사상 최대 판매실적을 올렸고, 미국 진출 39년째를 맞은 올해는 ‘누적 3000만 대 판매 달성’을 예약해 둔 상태다.이처럼 ‘기념비적 순간’을 앞두고 있지만, 동시에 현대차는 미국 시장에서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기도 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트럼프 관세’ 때문이다. 트럼프 관세는 존재 자체가 본질적으로 미국이나 일본 업체들에 비해 한국 업체들에 불리한 구조다.지난해 미국 시장 판매량 순위는 GM, 도요타, 포드, 현대차·기아, 혼다의 순이다. 그런데 5개사의 현지 생산 비율을 보면 현대차·기아만 45%로 절반에 못 미치고, 나머지는 최소 55%에서 최고 99%에 이른다. 미국 업체는 논외로 치고, 설령 한국과 일본에 동일한 관세율이 적용되더라도 관세율의 절대 수준 자체가 높으면 미국 밖 생산비율이 높은 현대차·기아가 불리한 구조인 것이다.설상가상으로 한국은 미국과의 관세 협상에서도 일본의 뒤를 쫓아가는 처지다. 현재 25%인 관세율을 일본 수준인 15%까지 낮추지 못하면 한국의 자동차는 일본 자동차에 비해 결정적인 열세에 몰릴 수밖에 없다. 가격에서 밀리면 브랜드와 품질로 압도해야 하는데,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미일 간의 관세 협상 합의 내용만 보더라도 일본이 미국 자동차 시장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진심’인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일본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쌀 시장을 내준 데서 그치지 않고, 5500억 달러(약 750조 원)에 이르는 대미 투자 보따리까지 풀었다. 아니, 풀었다기보다는 갖다 바쳤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일본은 ‘내 지시에 따라’ 미국에 5500억 달러를 투자할 것이며, 미국은 수익의 90%를 가져갈 것이다”는 것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SNS에 올린 내용이다.(미일 간에 구체적인 합의 내용을 둘러싼 설왕설래가 있지만, 막무가내 떼쓰기로 일본이 트럼프 대통령을 당해낼 리 만무하다.)일본이 이런 굴욕적인 조건까지 감수하면서 합의를 한 것은 일본의 국익에 있어서 미국 자동차 시장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일본에 있어서 미국은 최대 수출시장, 자동차는 최대 수출 품목이다.이런 사정은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일본은 전체 수출의 19.9%를 미국에 의존하고, 한국이 18.7%를 미국에 의존한다. 전체 수출 품목으로는 반도체가 1위지만, 미국 시장만 보면 자동차가 압도적인 1위 수출 품목이다. 더구나 한국은 무역의존도가 높아 수출에 변고가 생기면 전체 경제가 심하게 흔들리는 구조다. 지난해 기준으로 일본의 무역의존도는 35.6%였는데 한국은 그 두 배가 훨씬 넘는 90.9%에 이른다.트럼프 대통령이 내건 관세 협상 ‘데드라인’까지는 4일이 남았다. 우리 경제구조를 고려하면, 미국 시장을 잃은 한국 자동차 산업은 생각할 수 없고, 자동차 없는 수출은 존립할 수 없으며, 수출이 무너진 한국 경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미국 자동차 시장을 잃은 한국 경제는 바퀴 하나가 빠진 자동차와 크게 다를 바 없다.대미 협상팀은 ‘일본보다 1%포인트라도 불리한 관세를 받아 들고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연한 각오를 갖고 협상에 임해야 한다. 39년간 일본 업체들과의 피 터지는 경쟁 끝에 어렵게 개척한 미국 자동차 시장이 이번 협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오점을 남겨서는 절대 안 된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2003년은 SK그룹 역사상 최대 위기의 한 해였다. 영국계 헤지펀드 소버린이 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 있는 SK㈜의 지분을 대량으로 사들여 1대 주주가 된 뒤 최태원 회장 등 경영진 교체를 선언하고 나선 것. 소버린이 우호 지분을 포함해 확보한 의결권은 30%대 중반으로 SK 측의 25.13%를 월등히 웃돌았다. 풍전등화 같은 상황에서 SK가 꺼내 든 방패는 ‘자사주 매각’이었다. 원래 자사주에는 의결권이 없지만 다른 곳에 팔면 의결권이 살아난다는 점을 활용한 것. 국내 은행 등이 백기사로 나서 SK㈜ 자사주 10.41%를 사주면서 소버린의 ‘경영권 탈취극’은 실패로 막을 내렸다. 그렇다고 해서 소버린의 전적인 패배는 아니었다. 소버린은 2년여 만에 시세차익 등으로 9000억 원가량을 챙긴 뒤 ‘먹튀’ 했다. 미국 일본 등 대부분의 선진국은 차등의결권이나 포이즌 필 같은 경영권 방어수단을 다양하게 인정한다. 하지만 한국은 예나 지금이나 일절 허용하지 않는다. 만약 자사주 매각조차 불가능했다면 SK그룹이 지금 소버린 지배 아래 있지 말란 법이 없다. 헤지펀드의 속성상 하이닉스 인수처럼 위험한 결정은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고, SK그룹은 지금 우리가 보는 SK와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자사주는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놓고 벌어진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과 삼성그룹 간의 공방에서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두 진영 간 의결권 확보전이 치열한 가운데 삼성물산이 KCC에 자사주 5.76%를 매각한 ‘한 수’가 기세를 갈랐다. 엘리엇은 이를 법정으로 들고 갔지만 법원은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3일 상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로 기업들의 충격이 크다. 투자고 뭐고 소송 걱정에 밤을 새워야 할 참이다. 그러나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내친김에 자사주를 경영권 방어에 쓸 수 없게 ‘소각’을 의무화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민주당의 코스피5000특별위원회 소속 김남근 의원은 자사주를 취득 1년 이내에 소각하도록 하는 법안까지 다른 의원 24명과 함께 발의한 상태다. 자사주 매각을 빼고는 경영권 방어 수단이 전무한 상황에서 투기자본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자사주 비중을 높여온 기업들로서는 벌거벗겨진 채 맹수 앞에 내던져지는 느낌일 것이다. 더구나 ‘더 독한 상법’을 향한 여당의 질주는 ‘자사주 소각 의무화’가 전부가 아니다. 집중투표제 의무화와 감사위원 분리 선출 확대는 더 속도를 내고 있다. 개정 상법에 더 독한 상법 개정안이 더해질 때의 결과를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2006년 행동주의 투자자 칼 아이칸의 KT&G 공격과 2018년 엘리엇의 현대자동차 공격을 돌이켜 보면 된다. 칼 아이칸은 당시 KT&G 정관상 집중투표제가 가능(대다수 국내 기업은 정관을 통해 집중투표제를 배제함)하다는 점을 활용해 이사회에 자기 몫의 이사를 진출시켰다. 이를 발판으로 KT&G에 알짜 자산 매각 등을 요구했고, 매입 시점으로부터 1년 2개월 뒤 주가가 원하는 만큼 오르자 약 1500억 원의 차익을 챙겨 ‘먹튀’ 했다. 엘리엇의 현대차 공격은 실패로 끝났지만, 단기 수익에 눈먼 헤지펀드가 ‘먹잇감’ 기업을 상대로 얼마나 무리하고 황당한 요구를 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엘리엇은 현대차 연간 순이익의 3.5배에 이르는 5조8000억 원을 배당으로 요구하는가 하면, 경쟁사 최고경영자(CEO)를 이사 및 감사위원 후보로 추천하기까지 했다. 지금 여당이 하려는 입법이 완성되면, 외국 투기자본은 이사회나 감사위원회에 자기 세력을 마음대로 심어 아무 때나 경영 기밀과 장부를 들여다보고 무리한 배당 요구를 ‘주주 환원’이라는 이름으로 시도 때도 없이 들이밀 것이다. 그러다 수틀리면 이 핑계 저 핑계로 소송을 걸어올 것이다. 기우가 아니다. 이미 소버린이, 엘리엇이, 칼 아이칸이 행동으로 보여줬던 일들이다. 그나마 이런 ‘맹수’들을 옭아맸던 족쇄를 치워버리겠다는 것이 지금 여당이다. 우리 기업들이 투기자본에 시달려 긴 안목의 투자와 경영을 못 하게 되면 한국 경제의 추락은 시간문제다. 무섭게 성장하는 중국 기업들에 밀려 한국 기업들이 설 자리는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소액주주 보호를 위해 제도 개선은 필요하다. 하지만 입법 우선순위를 가리고, 경영권 불안을 막을 보완입법도 해야 한다. 눈앞의 주가 상승에만 취해 ‘더 독한 상법 개정’을 강행하는 것은 한 끼 고기반찬을 위해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더불어민주당이 국회 상임위원장 단독 선출을 강행하고, 40개 중점 추진 법안 처리에 본격적으로 나설 태세다. 40개 법안 중에는 기업들이 지속적으로 우려를 표명해 온 ‘상법 개정안’과 ‘노란봉투법’이 포함돼 있다. 먼저, 상법 개정안은 현행법에 있는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뿐 아니라 주주로까지 확대하는 내용이다. 개정안이 시행되면 해외 투기자본의 소송 공세와 배임죄 확대 적용 가능성 때문에 인수합병(M&A) 등 장기적 전략 경영에 심각한 차질이 빚어질 것으로 기업들은 걱정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민주당의 이번 개정안과 같은 형태의 명문 조항을 상법(회사법)에 둔 나라는 세계적으로 전무하다. 개정론자들이 드는 거의 유일한 전거(典據)가 미국 ‘델라웨어주 회사법’인데, 사정을 알고 보면 이런 블랙코미디가 없다. 델라웨어는 ‘기업 파라다이스’로 유명한 곳이다. 오죽했으면 사람보다 기업이 많다. 잘나가는 대기업들과 유망한 벤처회사들이 앞다퉈 ‘기업하기 좋은’ 델라웨어를 찾아오다 보니 2023년 기준으로 기업 수가, 인구(103만 명)의 곱절인 207만 개에 이른다. 그 배경 중 하나가 ‘친기업의 끝판왕’이라고 해도 좋을 회사법이다. 델라웨어 회사법이 경영 활동을 얼마나 자유롭게 보장하는지는 한국의 상법과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첫째, 한국 상법은 감사나 감사위원을 선출할 때 대주주 의결권을 3%로 제한하지만, 델라웨어 회사법에는 대주주의 의결권을 제한하는 조항이 없다. 둘째, ‘포이즌 필’과 ‘황금주’ 등 한국에서는 금지된 경영권 방어 수단도 델라웨어 회사법은 자유롭게 보장한다. 셋째, 이사회 구성과 관련해서 한국은 미주알고주알 다양한 규제를 두고 있다. 이사 수는 3명 이상이어야 하고, 특히 자산 규모가 2조 원 이상이면 이사의 3분의 2는 사외이사로 두어야 한다. 사외이사가 될 수 없는 결격 사유는 21가지나 된다. 델라웨어에서는 대부분 기업 자율에 맡겨져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이사가 경영 판단과 관련한 책임을 면제받으려면 주주 전원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델라웨어에서는 정관에 규정을 둬서 포괄적으로 면제를 받을 수 있다. 다만 델라웨어 회사법 102조 (b)항 (7)호에 다음과 같은 예외조항이 있다. 이사나 임원이 ‘회사나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를 위반한 경우의 면책을 정관에 규정하더라도 이사나 임원의 손해배상 책임을 제한하거나 배제할 수는 없다는 조항이 그것이다. 한국의 상법 개정론자들이 전거로 삼는 것이 바로 이 조항이다. 델라웨어 회사법의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가 상징적 선언인지 실효적 조항인지, 이 조항을 대륙법 체계에 속하는 한국에 이식하는 게 맞는지 안 맞는지 등에 대한 숱은 논란은 일단 ‘패스’하자. 델라웨어 회사법이 천명하고 있는 본질인 ‘자유로운 경영 활동’에는 철저히 눈을 감고, 한 귀퉁이에 있는 애매한 조항을 빌려다 우리 상법에 큼지막하게 못질한 뒤, 알토란 같은 우리 기업을 해외 투기자본의 ‘소송 제물’로 던져주는 것이 옳은 일인가. 소액주주에 대한 지배주주의 횡포는 굳이 무리해서 ‘기본법’인 상법을 흔들지 않고서도, 자본시장법 등을 개정해 방지하면 될 일이다. ‘노란봉투법’도 기업들의 투자 의지에 찬물을 끼얹는 반기업적 법안이라는 점에서 상법 개정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가뜩이나 과격한 노조 활동 때문에 기업들이 앞다퉈 한국을 떠나는 판인데 노란봉투법으로 ‘파업 천국’을 만들면 한국에 남아날 기업이 있을지 의문이다. 또한 노란봉투법에는 ‘직접 계약 관계가 없더라도 실질적 지배력이 있으면 사용자로 본다’는 조항도 있는데, 노사협상 현장에 일대 혼란을 몰고 올 가능성이 크다. 일례로 현대차의 경우 1차 협력업체만 700여 개, 2∼3차 협력업체까지 합하면 5000여 개에 달하는데, 하청노조들이 너도나도 “현대차 사장 나와!”라고 덤비면 1년 내내 협상 테이블에 끌려다녀야 할 판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최근 시정연설에서 “경제성장률이 4분기 연속 0%에 머물고 있다”며 시급한 추경 처리를 호소했다. 하지만 이번 추경이 높일 수 있는 성장률은 기껏해야 0.2%포인트다. ‘재정주도 성장’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게 이런 정도다. 여차하면 ‘잠자는 물가’를 건드릴 위험도 있다. 이 대통령이 여러 차례 강조했듯이 “경제의 핵심은 기업”이고 “기업 성장이 곧 경제 성장”이다. 상법 개정과 노란봉투법 시행으로 기업의 손발을 묶어놓고 경제 회복을 바라는 것은 모순이고 몽상이다. 반(反)기업 포퓰리즘의 유혹에서 벗어나는 것이 ‘이재명 실용주의’가 성공하기 위해 통과해야 할 첫 관문이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국민의힘에 대한 정당 지지율이 급전직하로 추락하고 있다. 한국갤럽이 10∼12일 실시한 정기 조사에서 나타난 국민의힘 지지율은 21%였다. 12·3 계엄 직후의 24%보다도 낮다. 더불어민주당과의 격차는 5년 내 최대치로 벌어졌다. 전통적인 국민의힘 지지층인 60대 이상 연령층에서마저 민주당에 크게 밀렸다. 부산·울산·경남에서도 열세로 돌아섰다. 이렇게 가다가는 ‘영남 자민련’조차 ‘자조(自嘲)적 표현’이 아닌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 될 판이다. 국민의힘 지지율 폭망은 대선 패배 이후 국민의힘이 보여주고 있는 행태에 대한 국민적 분노와 실망감을 빼놓고는 설명하기 힘들다. 이번 6·3 대선이 윤석열 정부의 실정과 계엄에 대한 심판이었다는 사실에는 누구도 이의를 달기 어려울 것이다. 일례로 동아시아연구원이 이번 대선 직후 실시한 인식 조사에 따르면 ‘국민의힘이 잘못을 반성하고 윤 전 대통령의 탄핵을 적극 받아들였어야 했다’는 의견이 68.2%나 됐다. 그런데 국민의힘의 지금 모습은 어떤가. 김용태 비상대책위원장이 8일 발표한 ‘5대 개혁 과제’를 둘러싼 국민의힘의 행태를 보면, 개혁을 해나갈 능력은 둘째치고 그럴 의사가 있는지조차 의문이 들게 한다. 김 위원장의 5대 개혁안은 대통령 탄핵 반대 당론 무효화, 대선 후보 교체 진상 규명, 당심·민심 반영 절차 구축, 지방선거 100% 상향식 공천, 9월 초까지 전당대회 개최 등 5가지다. 이 중 뒤의 2가지는 계파 간의 이해가 엇갈리는 당 내부 문제로 볼 소지가 있는 만큼 논외로 치자. 하지만 앞의 3가지는 국민의힘이 계엄 이후 대선 직전까지 보여준 구태를 청산하겠다는 각오를, 국민에게 내보인다는 차원에서도 반드시 실행에 옮겨야 할 최소한의 개혁 조치다. 이제 와서 대통령 탄핵 반대 당론을 무효화한다고 해서 감동을 받을 국민도 없겠지만, 그조차 하지 않겠다는 것은 ‘계엄과 단절하라’는 국민적 요구와 척(隻)을 지고 가겠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국민의힘은 김 위원장이 내놓은 개혁안은 1주일이 지나도록 논의 테이블에조차 올리지 않고 있다. 지난 11일 김 위원장이 당 쇄신을 논의하기 위해 소집한 의원총회를 권성동 원내대표(12일 퇴임)가 개최 40분 전 문자로 취소해 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있었다. 이런 식으로 당 쇄신의 발목을 잡는 친윤 그룹에도 일견 그럴싸한 논리는 있다.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권 원내대표가 퇴임 기자회견에서 언급한 ‘가업(家業)승계론’이다. 이런 내용이다. “가업을 이어받을 때 자산과 부채는 함께 승계됩니다. 정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제1야당이라는 자산(資産)이 있으면서 동시에 윤석열 정부의 실패와 탄핵이라는 부채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산과 부채 중 하나만 취사선택할 수 없습니다.” 공당(公黨)의 개혁 문제에 ‘가업승계’를 끌어다 붙인 발상은 “원래 선거라는 건 패밀리 비즈니스(가업)”라는 윤 전 대통령의 정신세계를 빼다 박았다. 알다시피 윤 전 대통령의 ‘패밀리비즈니스론’은 ‘명태균 게이트’와 ‘건진 게이트’를 싹 틔운 기름진 토양이 됐다. ‘가업승계론’이 국민의힘에 얼마나 큰 해독을 끼칠지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권 전 원내대표의 말마따나 ‘윤석열 정부의 실패와 탄핵’이 부정적 유산이라는 점에서 ‘부채’인 것은 맞다. 하지만 자산과 함께 반드시 승계해야 할 부채가 아니다. 그냥 장부에서 지워버려도 뭐라 할 채권자가 없는 ‘가공(架空) 부채’, 아니 반드시 청산해야 할 ‘악성 부채’일 뿐이다. 상속을 거부해도 박수를 받으면 받았지, 빚 독촉을 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권 전 원내대표가 자산(資産) 목록에 ‘제1야당’을 올린 것도 황당하다. ‘당이야 여당이 되건 야당이 되건, 나는 당권만 쥐면 된다. 텃밭에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만 되면 된다’는 사고가 지배하는 국민의힘의 분위기가 무의식을 파고든 것이 아닐까 싶다. 거대양당제가 뿌리내린 대통령제 국가에서 최대 보수정당의 승계 자산은 ‘준비된 수권정당’이어야지 단 한 순간도 ‘제1야당’이어선 안 된다. 정치든 비즈니스든 단절 없는 쇄신이나 파괴 없는 혁신은 있을 수 없다. 국민의힘이 계엄과의 단절, 윤석열 정권이 남긴 부정적 유산의 청산을 미적대선 정권 재창출이 가능한 수권정당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번 대선 결과는 너무나도 명백하게 보여준다. 국민의힘이 쇄신에 따르는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107석 제1야당’에 만족해선, ‘지지율 21%’도 과분한 사치일 뿐이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6·3 대선’ 공식 선거운동이 오늘 종료된다. 임기를 2년여 남긴 대통령의 파면으로, 준비 없이 갑작스레 치러지는 선거라는 점에서, 차분한 공약 경쟁보다는 자극적인 네거티브 공방으로 흐를 것이라는 점은 어느 정도 예견됐던 일이다. 하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면서 치러진 2017년 ‘5·9 대선’에 비교해도, 이번 대선은 네거티브전 양상이 유독 두드러졌다. 정책과 공약의 제시는 처음부터 뒷전이었고 시종 거친 비방전이 이어졌다.특히 지난주 선거판을 달군 개혁신당 이준석 대선 후보와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발언은 원색적인 ‘언어 폭력’ 그 자체였다. 반성인지 변명인지 알 수 없는 사과는 더 어이없었다. 이 후보는 “심심한 사과를 하겠다”면서도 “그대로 옮겨서 전한 것이기에 다른 방법은 없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하지만 카메라 앵글 밖에서 했어도 문제 됐을 막말을 어린아이들까지 지켜보는 황금시간대에 지상파를 통해서 했다는 것은 어떤 이유를 갖다 대도 정당화하기 힘든 일이다.유 전 이사장의 경우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의 배우자인 설난영 여사에 대한 자신의 말이 “거칠었던 것은 인정한다”면서도 “여성·노동 비하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진보 진영에서조차 “여성을 일반화해 비하하고 노동자를 멸시한 엘리트주의 발언”(권영국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 “노무현 대통령을 고졸 출신 대통령이라고 조롱했던 그들과 다를 게 무엇이냐”(한국노총) 등의 지적이 나오는 마당이다.막말과 비하, 비방으로 얼룩진 선거전이 부를 부작용은 크게 세 가지다. 우선 대선 후 가장 시급한 정치·사회적 과제인 ‘국민 통합’을 저해하는 결정적인 장애물이 될 것이다. 또한 한국 민주주의의 복원 과정을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상황에서, 저급한 선거전이 한국의 이미지에 끼치게 될 악영향도 그냥 간과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선거전 막판까지 가뜩이나 부실한 ‘정책 경쟁’과 ‘공약 검증’을 집어삼키는 ‘블랙홀’이 돼버렸다는 점이다.지금 한국 경제는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와 양상은 다르지만, 그 심각성 면에서 결코 못하지 않은 중증(重症) 위기 국면으로 빠져들고 있다. 외환위기가 ‘빚으로 쌓아 올린 거품’이 꺼지면서 일시적으로 발생한 ‘유동성 위기’였다면, 지금은 성장엔진 자체가 꺼져가는 구조적이고 만성적인 위기라고 할 수 있다.최근 한국은행은 우리 경제의 올해 성장률 전망을 1.5%에서 0.8%로 대폭 낮췄는데, 이는 국제통화기금(IMF)이 4월 발표한 올해 세계 경제 성장률 전망치의 3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수치다. 앞서 1분기 우리 경제의 성장률(―0.2%)은 주요 19개국 가운데 꼴찌였다. 과거 ‘경제 모범생’ 한국의 흔적은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주요 선진국들이 2∼7년 만에 뛰어넘은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의 벽’에 11년째 갇혀 있는 가운데, 성장률은 무섭게 추락하고 있다.더 암울한 것은 잠재성장률의 하락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최근 발표에 따르면 우리 경제의 잠재성장률(기본 시나리오)은 2025∼2030년 1.5%에서 2031∼2040년 0.7%, 2041∼2050년 0.1%로 곤두박질칠 전망이다. 비관적 시나리오로는 2040년대 후반부터 ‘마이너스 성장 시대’로 진입한다. 즉, 앞으로는 고물가를 각오하고 돈을 풀어 경기를 부양하지 않는 한 1%대 성장 또는 0%대 성장 또는 마이너스 성장 중 하나를 오락가락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다.이런 현실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와 국민의힘 김 후보가 공통적으로 내건 ‘잠재성장률 3% 달성’ 공약은 사실상 ‘기적을 행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물론 도전적인 목표 자체를 나무랄 수는 없다. 문제는 도전적인 목표를 얼마나 구체적인 정책으로 뒷받침하느냐 하는 것이다.정상적인 선거전이라면 그 내용이 공약집 등을 통해 유권자들에게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갖고 전달됐어야 한다. 또한 그 내용은 후보들 간의 토론을 통해 철저하게 검증이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김 후보는 2차 TV토론이 끝난 뒤, 이 후보는 3차례 TV토론이 모두 끝난 뒤에야 공약집을 내놨다. 그러니 제대로 된 정책 토론이 이뤄지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이제 본투표까지는 하루가 남았다. ‘내란 심판’도 중요하고, ‘후보나 가족의 리스크’에 대한 검증도 중요하다. 그건 그것대로 투표장까지 안고 가자. 다만 2일 하루만이라도 한국 경제의 추락에 제동을 걸 후보가 누구인지를 차분히 따져 보는, ‘온전히 미래를 위한 시간’이 됐으면 싶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대통령의 심기를 살피며 두 명의 당 대표를 강제로 끌어내렸고 (중략) 그런 움직임을 추종했거나 말리지 못한 정치, 즉 권력에 줄 서는 정치가 결국 계엄과 같은 처참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국민의힘 윤희숙 여의도연구원장이 지난달 24일 정강·정책 방송 연설에서 윤석열 대통령 집권 중 보여준 자당의 행태를 반성하면서 했던 말이다. 윤 원장은 “얼마 전 파면당하고 사저로 돌아간 대통령은 ‘이기고 돌아왔다’고 말했다. 무엇을 이겼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당에 남겨진 것은 깊은 좌절과 국민의 외면뿐”이라고 했다. 지도부 ‘묵인’하에 당 공식 싱크탱크 책임자가 방송에 대고 한 말이니 많은 당원들이 공감하는 바일 것이다. 국민의힘에 ‘깊은 좌절과 국민의 외면’만 안긴 윤 전 대통령이 17일 탈당했다. 김용태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등의 압박에도 수일간 버티기로 일관하던 윤 전 대통령이 탈당을 결정한 데는 최근 여론조사 결과들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주 15일 나온 엠브레인퍼블릭 등 4개 사의 전국지표조사(NBS)와 16일 발표된 한국갤럽의 조사에서 김문수 후보에 대한 지지율은 각각 27%와 29%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에게 모두 20%포인트 넘게 뒤진 것으로 나타났다. 윤 전 대통령은 최근까지도, 탄핵 국면 당시 자신의 지지율이 40∼50%에 달했기 때문에 자신이 당적을 유지하는 것이 김 후보의 대선 승리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주변에 내비쳤다고 한다. 이중삼중 ‘확증편향’의 벽으로 둘러싸인 윤 전 대통령의 이런 ‘자아도취적 착각’도, 거듭 확인되는 충격적인 수치 앞에서는 결국 ‘현타(현실자각 타임)’가 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배경이 무엇이건 이제 중요한 것은 윤 전 대통령의 탈당이 김 후보의 불리한 판세 극복, 특히 중도 확장에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하지만 아무리 이리저리 둘러봐도 큰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대선까지 겨우 17일이 남은, 너무 늦은 시점에 탈당이 이뤄졌다는 점도 하나의 이유일 수 있겠으나 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윤 전 대통령은 17일 오전 페이스북에 탈당 선언문을 올리면서 그간의 비민주적 당 운영이나 불법 계엄 등에 대한 반성이나 사과는 일절 하지 않았다. 오히려 “국민의 힘을 떠나는 것은 대선 승리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 “이번 선거가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기회” 운운하며 자신의 탈당이 구국(救國)과 구당(救黨)의 ‘용단’이라도 되는 것처럼 포장했다. 이래서야 12·3 비상계엄에 대해 비판적 여론이 강한 중도층에 무슨 ‘감흥’을 줄 수 있겠는가. 하물며 위헌·위법한 계엄으로 헌법재판소에서 파면을 당한 윤 전 대통령에게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 수호를 말할 자격이나 염치가 있는가. 헌재가 윤 전 대통령의 파면 사유로 든 ‘자유민주주의-법치주의 파괴 사례’만 한번 간단히 꼽아보자. 헌법과 계엄법에 명시된 비상계엄의 실체적 요건 및 절차적 요건 위반, 국군의 정치적 중립성 침해, 헌법에 따른 국군 통수 의무 위반, 국민의 정치적 기본권-단체행동권-직업의 자유 침해, 영장주의 위반, 선관위 독립성 침해, 사법권의 독립 침해…. 어느 것 하나 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더구나 윤 전 대통령은 지금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형사재판을 받고 있는 중이다. 얼마 전에는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관의 부관이었던 20대 대위까지 법정에 나와 전화로 윤 전 대통령이 이 전 사령관에게 ‘총 쏴서라도 들어가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밝히는 등, 윤 전 대통령의 주장을 뒤엎는 현장 군인들의 증언이 이어지는 중이다. “법치” 운운하기는 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윤 전 대통령은 이번 탈당 선언문에 앞서 11일에도 김 후보 지지를 호소하는 메시지를 낸 적이 있는데, 지난주 NBS 조사에는 그 메시지가 김 후보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물은 항목이 있다. 결과는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는 응답(53%)이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는 응답(13%)을 압도했다. 중도층에서는 60% 대 7%로 격차가 더 컸다. 윤 전 대통령은 이번에 탈당 선언을 하면서 “백의종군(白衣從軍)”도 언급했다. 행여라도 탈당한 상태에서 김 후보의 당선을 돕기 위해 적극적인 역할을 하겠다는 뜻이라면, NBS 조사 결과에 나타난 민의를 곱씹어 보기 바란다.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훼손한 과오를 반성하고 사과하기 전까지는 어떤 말과 행동도 ‘역효과’만 날 것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알아야 한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진짜 개싸움이 시작됐다. 개싸움을 할 때는 룰 따지는 거 아니다.” 더불어민주당의 한 의원이 3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이재명 대선 후보에 대한 대법원의 ‘유죄 취지’ 파기환송 판결 이후 민주당의 반발이 도를 넘는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헌정 사상 단 한 번의 시도조차 없었던 대법원장 탄핵 카드까지 꺼내 들었다. 3일 민주당 초선 의원 모임인 ‘더민초’가 먼저 “조희대 대법원장 탄핵소추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운을 뗐고, 4일에는 당차원에서 의원총회를 열어 탄핵 여부에 대해 논의했다. 민주당이 실제로 실행에 들어가면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32번째 탄핵소추안 발의’가 된다. 민주당이 최종 결정은 일단 유보했지만, 이 후보 재판과 아무 관계도 없는 최상목 전 경제부총리에 대한 탄핵소추안 표결을 강행했던 민주당이고 보면 단순히 ‘엄포용’으로만 보기도 어렵다. 한국 경제가 벼랑 끝에 내몰릴 수도 있는 한미 관세 협상이 한참 진행되는 긴박한 상황에 ‘통상 사령탑’을 내쫓는 게 상식적인 사고방식으로 예측이나 할 수 있던 일인가. 탄핵뿐만이 아니다. 김민석 최고위원이 4일 언급한 특검과 국정조사 등도 현실화하지 말란 법이 없다. 과반 의석을 무기로 한 ‘입법 공세’는 더 광범위하고 파상적이다. 대법원 판결이 나온 다음 날부터 이 후보의 ‘사법 리스크’를 차단하려는 ‘방탄성 법안’ 발의가 줄을 잇고 있다. 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형사 재판을 받지 않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시작으로, 아예 대법원 구성을 놓고 ‘새판 짜기’를 하겠다는 취지의 법안도 복수(複數)로 등장했다. 현재 14명(대법원장 포함)인 대법관을 30명으로 증원하는 내용의 법원조직법 개정안도 그중 하나인데, 대선에서 이기면 현 대법관들의 임기가 끝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대법원 구성을 일거에 유리하게 바꿔 놓겠다는 의도가 비친다. 판사·검사에 대해 ‘법 왜곡죄’를 신설하는 내용의 형법 개정안도 발의됐다. 대법원 판결을 헌법소원으로 다퉈볼 수 있도록 하는 헌법재판소법 개정안 발의 예고도 나왔다. 현재 3심제인 재판제도를 사실상 4심제로 바꿔 놓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지금도 고질적인 지연이 문제로 꼽히는 재판이 더 길어지고 그에 따라 소송 비용도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 대표 한 사람의 사법 리스크를 해소하기 위해 전 국민에게 부담이 될 법안을 불쑥 꺼내는 것이 과연 맞는 일인가. 해당 법안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거센 논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들이지만, 더 본질적인 문제는 따로 있다. 민주당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의 부원장을 지낸 한 인사는 2일 유튜브에 출연해 “삼권분립이라는 것이 이제 막을 내려야 될 시대가 아닌가”라고 말을 했는데, 민주당이 들고나온 압박 및 입법 조치의 절반만 실행돼도 ‘삼권분립’은 저절로 막을 내리게 될 것이다.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나타난 89.77%의 기록적 득표율이 보여주듯 민주당 내부는 ‘이재명 일극(一極) 체제’가 빈틈없이 완성된 상태다. 이런 민주당은 국회에서 170석에 이르는 압도적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다. 이번 대선에서 이 대표가 이긴다면 입법권력과 행정권력이 ‘물리적’ 수준을 넘어 ‘화학적’ 결합을 하게 된다. 이것만으로도 과도한 권력 집중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인데, 민주당이 사법부까지 손안에 틀어쥐게 되면 ‘무소불위 절대권력의 탄생’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물론 대법원의 판결이라고 해서 성역은 아니다. 합리적인 범위 안에서라면 얼마든지 비판이 가능하다. 하지만 자신에 불리한 판결을 했다고 해서 민주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작동 원리인 ‘삼권분립’의 틀마저 흔들려 해선 안 된다. 그런 행태는 누구보다 주권자인 국민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도둑으로부터 집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고 해도, 번견(番犬)이 아닌 맹수를, 그것도 우리를 부수고 목줄마저 끊어버리고 뛰쳐나오려는 맹수를 집안에 들여놓는 집주인은 없을 것이다. 지금 이 후보의 대선 가도에 ‘가장’ 큰 변수가 있다면 그것은 대법원의 판결로 인한 ‘사법 리스크’나, 이 후보의 잦은 말 바꾸기로 인한 ‘신뢰 리스크’가 아니다. 절제할 줄 모르는 권력의 ‘폭주 리스크’를 국민, 특히 중도층의 뇌리에 각인시키는 일일 것이다. 이 후보와 민주당에 지금 필요한 것은 스스로 멈추는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용산 대통령실 시대가 머지않아 막을 내릴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대선 유력 후보들 다수가 용산행을 꺼리고 있기 때문이다. 18일 열린 더불어민주당의 대선 경선 첫 TV 토론에서는 대통령실 재(再)이전 문제가 핵심 이슈 중 하나였다. 이재명 후보는 “용산 대통령실을 잠시 사용하다가 청와대를 보수해 집무실로 사용하겠다”고 밝혔다. 김경수 김동연 후보는 용산에 아예 가지 않겠다고 했다. 국민의힘에서는 홍준표 안철수 후보가 청와대 복귀, 유정복 이철우 후보가 각각 세종과 충남 이전을 주장하고 있다. 다른 후보들은 유보적 태도다. 최소한 “용산을 고수하겠다”는 후보는 아직 없다. 세종 이전 시 먼저 정리해야 할 개헌 논란과 후보 지지율 판세 등을 감안하면 청와대 복귀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셈이다. 이렇게 되면 용산 집무실과 관저를 개축하고 이전하느라고 쓴 혈세는 아무 의미 없이 허비돼 버린 매몰비용이 되는 셈이다. 비단 돈만의 문제가 아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대통령실 이전을 인수위원회의 1호 사업으로 선정해 밀어붙였다. 집권 5년 청사진을 설계해야 할 중요한 시기에 무리한 계획을 강행하느라 소중한 시간과 국정 동력을 허비했다. 국가적으로 보면 ‘수백억 원이네, 1조 원이네’ 하는 이전 비용보다 이쪽이 더 큰 손실일 수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이 ‘저지른 일’이니, 차기 대통령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용산을 떠나면 되는 것일까. 한국에서 ‘불행한 대통령’의 역사가 끝없이 반복되는 것은 후임자들이 전임자들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윤 전 대통령만 하더라도, 앞서 탄핵을 당한 박근혜 전 대통령의 ‘불통’과 ‘비선정치’를 반면교사로 삼았더라면 김용현과 같은 소수 측근과 모의해 ‘자폭성 계엄’을 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윤 전 대통령의 실패를 자기 일처럼 곱씹어 보지 않으면, 차기 대통령도 비슷한 전철을 밟지 말란 법이 없다. 윤 전 대통령의 ‘탈(脫)청와대’가 실패한 원인은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다. 목적과 수단이 뒤바뀐 데 있다. 윤 전 대통령이 대통령실 이전을 추진하면서 내세운 명분은 국민과의 소통, 언론과의 소통이었다. 하지만 ‘공간’에만 사로잡혀 ‘소통’이라는 대통령실 이전의 목적은 온데간데없어졌다. 용산 이전의 전(全) 과정이 ‘불통’ 그 자체였다. 대통령실 이전의 상징 중 하나였던 출근길 문답은 6개월여 만에 없는 일이 됐고, 그 자리에는 기자들의 눈을 가리기 위한 가림막이 설치됐다. 정식 기자회견은 건너뛰고 그 공백을 자신의 입맛에 맞는 특정 언론사만 불러서 하는 녹화 대담이나 인터뷰로 채웠다. “이른바 파우치, 외국 회사 그 뭐 쪼만한 백”과 같은 아부성 발언이 질문을 대신한 결과 ‘여사 리스크’는 걷잡을 수 없게 커졌고 그것은 다시 총선 참패→야당과의 대치 심화→무모한 비상계엄을 거쳐 대통령직 파면에 이르는 일파만파의 후폭풍을 낳았다. 해외의 사례지만,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전 멕시코 대통령의 경우는 윤 전 대통령과 좋은 대비를 보인다. 오브라도르 전 대통령은 임기 내내 거의 매일 오전 7시에 생중계 기자회견을 했다. 임기 중 1400번이 넘는 회견을 할 정도로 소통을 열심히 한 그의 지지율은 퇴임 무렵에도 70%에 가까웠다. 정권 재창출에도 성공했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매일 아침 정례 기자회견을 하는 전통은 후임자인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현 대통령도 이어받았다. 윤 전 대통령의 출근길 문답처럼 대통령이 하고 싶은 말 몇 마디 던지고 끝내는 방식이 아니다. 대통령이 관련 각료나 전문가들과 함께 사전에 준비한 자료를 충실히 설명한 뒤, 기자들이 궁금증이 풀릴 때까지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다. 그러다 보니 매일 하는 회견이 2시간 가까이 걸릴 때도 있다. 뛰어난 업무 능력에 이 같은 ‘소통의 힘’이 더해진 결과 셰인바움 대통령의 지지율은 85%를 찍을 정도로 고공행진을 하고 있다. 다시 우리 대선 이야기로 돌아오면, 민주당이든 국민의힘이든 ‘용산이냐 청와대냐 세종이냐’의 갑론을박은 있지만, 용산 이전과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을 안전장치인 ‘소통’을 강화하려는 강한 의지나 실효성 있는 공약은 보이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탈청와대’ 공약을 내걸었던 대선 후보는 윤 전 대통령뿐이 아니다. 김대중, 이회창, 문재인 후보도 같은 공약을 내걸었다. 그만큼 우리 헌정사에서 청와대는 뿌리 깊은 불통과 권위주의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고민과 해답 없이 그냥 청와대로 들어가는 것은 이쪽저쪽 방향만 다를 뿐 ‘용산 흑역사’를 되풀이하는 일이 될 것이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탄핵심판 변론에 출석하지 않았던 노무현·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과 달리 윤석열 전 대통령은 총 11차례 중 8차례의 변론에 나왔다. 단순히 출석만 한 것이 아니라 변호사에게 귓속말이나 메모를 건네며 변론을 진두지휘하다시피 했고, 중요한 대목에서는 본인이 직접 나서서 많은 말을 쏟아냈다. 여기에는 자신이 ‘검찰총장을 지낸 우리나라 최고의 법 전문가’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이 그 과정에서 보여준 모습은 ‘법 전문가’라기보다는 ‘법 기술자’에 가까웠다. 뻔해 보이는 거짓을 사실로 포장하거나, 궤변이나 억지를 막무가내로 늘어놓는 경우가 많았다. 윤 전 대통령은 이렇게 함으로써 헌재재판관들을 설득할 수 있을 것으로 봤겠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이번 헌재 결정문을 자세히 보면 윤 전 대통령이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쏟아낸 말들이 윤 대통령의 다른 핵심적인 주장과 논리를 무너뜨리는 주된 근거로 인용됐다는 사실을 여기저기서 확인할 수 있다. ‘법 기술자 윤석열’이 ‘대통령 윤석열’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예컨대 헌재는 ‘비상계엄 선포의 목적은 군사상 필요에 따르거나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계엄법 2조 2항에 12·3 비상계엄이 위배되는지 여부를 판단하면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피청구인(윤 전 대통령)은 줄곧 이번 계엄이 야당의 전횡과 국정 위기 상황을 국민에게 알리고 호소하기 위한 목적으로 선포된 ‘경고성 계엄’ 또는 ‘호소형 계엄’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주장만으로도 피청구인이 이번 계엄을 중대한 위기 상황에서 비롯된 군사상 필요에 따르거나 위기 상황으로 인하여 훼손된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선포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어 헌재는 ‘대국민 호소’라는 목적 자체도 진실성이 없다고 판단했는데, 그 주된 논거 중 하나가 “계엄 해제에 적어도 며칠 걸릴 것으로 예상했는데 예상보다 빨리 끝났다”고 한 윤 전 대통령의 발언이었다. 이뿐 아니다. ‘대통령의 국법상 행위는 문서로써 하며, 이 문서에는 국무총리와 관계 국무위원이 부서(副署)한다. 군사에 관한 것도 또한 같다’고 돼 있는 헌법 82조와 관련해서, 윤 전 대통령은 ‘보안상의 이유 때문에 이를 이행할 수 없었다’는 취지로 변명했다. 그러나 헌재는 “대통령실 대접견실에 국무회의 구성원 11명이 모여 있을 때 부속실장 강OO가 계엄선포문 10부를 복사하여 김용현에게 전달했다”고 한 윤 전 대통령의 발언을 들어 앞부분 윤 전 대통령의 ‘변명’은 수긍하기 어렵다고 결론지었다. 국회의원의 국회 출입 통제 논란과 관련해서도 비슷한 장면이 있다. 윤 전 대통령은 8차 변론에서 “종이를 놓고 (김용현) 장관이 경찰청장하고 서울청장에게 국회 외곽의 어느 쪽에 경찰 병력을 배치하는 게 좋겠다고 해서 그림을 그리는 것을 제가 봤습니다”라고 진술했다. 윤 전 대통령은 다른 의도로 이 말을 했지만, 헌재는 이를 “경찰로 하여금 국회의원의 출입을 통제하도록 한 사실이 없다”는 윤 전 대통령의 주장이 거짓이라고 판단하는 증거로 삼았다. 이번 탄핵정국을 돌이켜보면 심판 절차가 진행된 4개월간 탄핵 찬성 의견이 줄곧 반대를 압도했다. 한국갤럽 조사를 기준으로 두 답변의 격차가 가장 좁혀졌을 때가 57% 대 38%, 19%포인트 차이였다. 우리 국민들이 복잡한 법적 쟁점을 조목조목 가려가며 이런 판단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 이상 국가긴급권이 정치적 목적으로 남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국민에게 큰 충격을 던지고도, 반성은커녕 변명과 거짓으로 일관한 윤 전 대통령에 대한 불신이 이런 숫자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싶다. 이번 결정문에는 헌재가 ‘이런 국민 불신과 불안을 이심전심으로 읽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구절이 있다. “만약 피청구인이 대통령으로서의 권한을 다시금 행사하게 된다면, 국민으로서는 피청구인이 헌법상 권한을 행사할 때마다 헌법이 규정한 것과는 다른 숨은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닌지, (중략) 끊임없이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피청구인의 권한 행사에 대한 불신은 점차 쌓일 수밖에 없고, 이는 국정운영은 물론 사회 전체에 극심한 혼란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필자는 이 대목이 헌재가 대통령 파면을 결정하게 된 가장 중대한 사유라고 본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의 신임을 잃은 대통령’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국민의 신임을 잃은 민주국가의 대통령이란 ‘호수 위에 뜬 달그림자’일 뿐이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주식 투자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치고 ‘금양’을 모르는 이는 드물 것이다. 2023년 2차 전지 테마주 열풍을 주도했던 업체 중 하나다. 당시 ‘K배터리 예찬론’을 폈던 이 회사의 홍보이사는 개미 투자자들 사이에서 “밧데리 아저씨”란 애칭으로 불리며 ‘추앙’받았다. “전기차 혁명의 주역은 테슬라가 아니고, 중국 배터리 기업도 아닌 K배터리”라는 믿음이 전파되면서 이 회사 주가는 그해 7월 15만9100원까지 치솟았다. 그로부터 1년 8개월가량 지난 이달 21일 현재 주가는 9900원. ‘16분의 1토막’이 났다. 실적 부진에 더해 회계 감사 문제까지 겹쳐 상장폐지 위기를 맞고 있다. 안타깝지만, 불과 한두 해 전까지 “반도체 다음으로 한국을 먹여 살릴 산업”으로 주목받던 K배터리가 처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대기업들은 이보다는 사정이 훨씬 낫지만 고전 중이기는 마찬가지다. 중국 기업에 밀려서다. LG에너지솔루션, SK온, 삼성SDI의 ‘글로벌 전기차용 배터리 사용량 시장점유율’은 1위인 중국 CATL은 쳐다볼 수도 없고, 3사를 다 합해야 2위인 중국의 BYD와 겨우 어깨를 나란히 한다. 물론 여기에는 방대한 중국 내수시장의 존재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중국 이외 지역에서도 중국 업체에 밀리는 추세가 뚜렷하다. 일례로 유럽 시장에서 중국 기업의 시장점유율은 2021년 18.4%에서 지난해 49.7%로 급등했다. 반면, 한국 기업의 점유율은 같은 기간 70.9%에서 45.1%로 주저앉았다. 전기차 분야에서는 이미 중국이 한국을 까마득히 앞서가고 있다. 2023년 미국의 테슬라를 제치고 전 세계 전기차 판매 1위 타이틀을 거머쥔 BYD는 이달 18일 세계 자동차 업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발표를 했다. 5분 정도 충전하면 400km 이상을 주행할 수 있는 초고속 충전 시스템을 공개한 것이다. 이 기술이 안정적으로 상용화되면 내연기관 자동차의 기름 넣는 시간이나 전기차 충전 시간이 비슷해져, 전기차 보급의 최대 장벽 중 하나가 사라지게 된다. 최근 중국의 굴기가 무서운 이유는 더 이상 가격 경쟁력만이 ‘메이드 인 차이나’의 유일한 무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과거 ‘대륙의 실수’라고 불렸던 스마트폰 제조업체 샤오미의 변신은 인상적이다. 지난해 매출과 순이익을 각각 35%와 41% 늘리며 역대 최고 실적을 달성하더니, 최근 대당 가격이 227만 원에 이르는 ‘초고가 라인업’을 출시하며 프리미엄 시장에서 삼성전자 및 애플과 본격 승부를 예고했다. 샤오미는 스마트폰에서의 성공을 발판으로 1억 원이 넘는 고가 전기차 시장에도 뛰어든 상태다. 한국이 압도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다고 자부해 왔던 반도체나 가전(家電)도 안전지대가 아니다. 반도체는 공정이나 양산 부분에서는 앞서고 있지만, 기초연구와 설계 기술 분야에서 이미 중국이 한국을 추월했다는 것이 우리 전문가들의 평가다. 가전제품은 가성비나 품질 수준이 기대치를 월등히 뛰어넘어 ‘이제는 중국산이라는 게 유일한 단점’이라는 말이 나온다. 인공지능(AI)이나 양자컴퓨팅 같은 미래 첨단 분야에서는 한국이 중국에 명함도 못 내미는 처지다. 이런 추세라면 5∼10년 뒤 한국이 중국에 확실하게 우위를 갖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산업이 하나라도 남아 있을지 의문이다. 샤오미의 레이쥔(雷軍) 회장은 비즈니스의 성공 비결과 관련해 “태풍의 길목에 서면 돼지도 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과거 중국 기업들의 비상(飛上)에는 14억 인구에서 나온 저임(低賃) 경쟁력, 세계무역기구(WTO) 질서를 통한 자유무역의 확대 등 ‘태풍’이 크게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중국 기업들이 보여주는 놀라운 기술력과 제품 경쟁력은 트럼프 1기와 바이든 정부 8년간 미국의 집중 견제를 받으면서 쌓아 올린 것이다. 더 이상 바람에 몸을 실어야 하는 돼지가 아니라, 스스로 바람을 부리며 날 수 있는 ‘용’이 된 셈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최근 삼성 전 임원들에게 “삼성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생존의 문제에 직면했다”면서 ‘승부에 독한 삼성인’을 강조한 것은 이런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삼성이 아무리 사즉생(死則生)의 각오로 덤빈다고 해도, 국가의 명운이 걸린 ‘반도체특별법’ 하나 처리 못 하는 정치권과 정부를 그대로 두고서는, 민관이 총력전을 펴는 중국을 상대로 승리는커녕 생존조차 장담하기 어렵다. 더구나 국가적 에너지의 대부분을 ‘아스팔트’에 쏟아부으며 경쟁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중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윤석열 대통령이 8일 서울구치소에서 풀려나 관저로 돌아갔다. 법원의 구속 취소에 이은 검찰의 항고 포기로 이제부터는 불구속 상태에서 ‘내란 우두머리’ 혐의에 대한 재판을 받게 됐다. ‘무죄 추정 원칙’에 따라 피고인에게 충분한 방어권을 보장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다만 어떤 경우에든 법치의 근간에 해당하는, 공정성과 형평성을 해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 나오는 것처럼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 식의 뒤틀린 정의(正義)로는 ‘법치’가 유지될 수 없다. 계엄과 관련해서 지금까지 구속 기소된 피고인은 윤 대통령을 빼고 10명이다. 건강이 좋지 않은 조지호 경찰청장만 조건부로 보석을 허가받았고, 나머지는 모두 구치소에 수감된 상태다. 헌정 질서를 통째로 무너뜨릴 수도 있는, 내란죄의 위험성과 중대성에 비춰 볼 때 이들에 대한 ‘구속 재판’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윤 대통령이 풀려남으로써 ‘내란의 종사자’들은 구속 재판을 받고 그 ‘우두머리’ 혐의를 받는 피고인만 불구속 재판을 받는 불공정하고 차별적인 상황이 연출되게 됐다는 점이다. 공정성과 형평성의 문제는 비단 내란 피고인 그룹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이번에 법원이 윤 대통령에 대해 구속 취소 결정을 내리면서 처음으로 꼽은 사유는 ‘검찰의 구속기간 계산 잘못’이다. 구속 전 피의자 심문을 위해 수사 서류가 법원에 있었던 기간을 ‘구속기간’에서 뺄 때 날짜 단위가 아닌 실제 시간 단위로 계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자체가 잘못된 법 해석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더 논란이 될 수밖에 없는 대목은 이 결정이 지금까지의 관행을 180도 뒤집는 결정이라는 점이다. 즉, 기간 계산을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바꾸는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니지만, 하필 윤 대통령 사례에 이를 처음 적용하는 것은 ‘법불아귀(法不阿貴·법은 권력자나 신분이 귀한 자에게 아부하지 않는다)’의 정신에 심각한 의문부호를 찍는 일이다. 물론 법원이 일부러 특혜를 주기 위해 이런 결정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윤 대통령과 변호인들이 끝없이 공세를 펴 온 공수처의 수사권 행사 절차 및 과정과 관련해서 재판부가 설명자료를 통해 밝힌 내용을 보면 그 나름의 깊은 고민이 배어난다. 재판부는 “윤 대통령 측의 주장과 관련해 공수처법 등 관련 법령에 명확한 규정이 없고, 대법원의 해석이나 판단도 없는 상태”라면서 “이런 논란을 그대로 두고 재판을 진행할 경우 상급심에서 파기 사유나, 한참 시간이 지난 후 재심 사유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의 이런 우려에는 공감이 가는 대목이 적지 않다. 국회는 공수처법을 만들면서 시비와 분쟁이 생길 수 있는 여지를 여기저기에 남겼다. 공수처와 검찰은 수사 초기에는 주도권 경쟁과 공 다툼을 하느라, 기소 임박 단계에서는 우왕좌왕 시간을 끄느라 ‘절차적 시비’의 단초를 제공했다. 여기에 더해 검찰은 항고를 통해 상급 법원의 판단을 받아 볼 수 있는 권리마저 스스로 내팽개쳤다. 과거 기계적, 습관적으로 항소·항고를 하던 검찰의 기세가 유독 윤 대통령 앞에서만 고분고분해졌다. 책임 소재를 떠나, 하나 분명한 사실은 윤 대통령이 ‘내란 우두머리’라는 중대한 혐의를 받으면서도 5100만 우리 국민 중 어느 누구도 누리지 못한 ‘특별한 방어권’을 적용받게 됐다는 사실이다. 과거 어느 정치지도자보다 ‘법치’와 ‘공정’을 소리 높여 강조해 온 윤 대통령이 ‘법아귀(法阿貴)’의 주인공이 된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윤 대통령과 변호인단은 내란죄 수사뿐 아니라 헌재 탄핵 심판 과정에서도 끊임없는 방어권 논란을 제기해 왔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총 11차례의 변론 중 8차례 참석해서 발언했고, 마지막 변론에서는 무제한 최후진술까지 했다. ‘트럼프 태풍’이 코앞에 닥친 상황에서, 인용이든 기각이든, 리더십 공백을 하루속히 메워야 하는 시급성에 비춰 볼 때 변론을 무한정 허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방어권은 충분히 보장되고도 남았다고 할 수 있다. 윤 대통령은 더 이상 ‘절차’를 놓고 왈가왈부해선 안 된다. 이제는 ‘실체’를 말할 때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았던 계엄의 진짜 동기는 무엇인지, ‘500명 수거 및 처리’ 등에 대해서는 어디까지 알고 지시했는지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해명할 것은 해명해야 한다. 헌재든 형사재판에서든 어떤 결정이 나와도 수용하고 승복하겠다고 스스로 약속하고, 지지층에도 당부해야 한다. 그것이 5100만분의 1, 특별한 방어권을 누리고 있는 윤 대통령이 마땅히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인공지능(AI)용 반도체 제조업체인 엔비디아의 21일 현재 시가총액은 약 4736조 원이다. 올해 우리나라 총예산의 7배에 이르는 금액이다. 요즘 반도체 주식이 약세인데도 이 정도다. 엔비디아는 본사가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타클래라에 있는데, ‘발상지’도 멀지 않다. 자동차로 15∼20분 거리다. 치즈버거를 비롯해 토스트, 팬케이크 등을 파는 패밀리 레스토랑 데니스가 그곳이다. 10대 시절부터 데니스에서 접시닦이 알바를 한 경험이 있는 젠슨 황은 데니스 구석 자리에 죽치고 앉아 동료들과 함께 사업을 구상했고, 그 결과로 1993년 엔비디아가 탄생했다. 미국 전역에 1300여 개 점포를 가진 데니스는 한국으로 치면 롯데리아 같은 곳이다. 한국 젊은이들도 롯데리아에 앉아 ‘조 단위 시총’ 기업을 창업하는 꿈을 키울 수 있을까. 가벼운 상상만으로도 무리일 것 같다. 검찰과 경찰의 내란 혐의 수사로 백일하에 드러났듯이, 불명예 전역한 예비역 군인이 현역 정보사령관과 영관급 장교들을 불러 모아 놓고 선거관리위원회에 쳐들어가 서버를 탈취하고, 직원들을 감금·폭행할 모의를 한 장소가 롯데리아다. 한 공간에 이 두 행위가 공존하는 것을 상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당나라 군대’에서나 있을 법한 ‘롯데리아 모의’가 2024년 한국에서 벌어진 자체가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특별히 가슴이 쓰려 오는 대목이 하나 더 있다. ‘햄버거집에서 시총 3조 달러짜리 기업을 창업하는 나라’와 ‘햄버거집에서 내란 모의하는 나라’의 극명한 대비가 요즘 현실 세계에서 너무나 실감 나게 펼쳐지고 있다는 점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 한 달여간 행보를 보면, 2기 트럼피즘의 실체는 더 볼 필요도 없이 명확하다. 모든 문제를 미국 국익과 관련된 돈과 비즈니스로 환원시키는 ‘경제 지상주의’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내놓은 가자지구 해법에 230만 팔레스타인인들의 생존권이나 인권은 안중에 없다. 부동산 개발업자 출신답게 그의 눈에는 해안 휴양지로서의 개발 가능성이 우선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終戰)과 관련해서도 ‘약소국을 침탈하는 강대국의 횡포’나 ‘전통적인 우방인 유럽 국가들의 안보’ 따위는 트럼프 사전에 없다. 미국의 도움 없이는 전쟁 수행이 불가능한 우크라이나의 처지를 이용해 희토류와 같은 자원을 챙길 계산부터 하는 게, 트럼프 대통령이 이끄는 미국이다. 한국을 “머니 머신”이라고 부르는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를 어떻게 대할지 예상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노선이 옳고 그른지는 둘째 문제다. 힘의 논리가 우선하는 국제 정치의 세계다. 그러기에 대부분의 국가들이 트럼프 대통령 ‘코드 맞추기’나 ‘대응 태세 구축’에 들어간 상태다. 캐나다는 “미국의 51번째 주”라는 거듭된 조롱까지 꾹꾹 참아가며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에 맞춰 대대적인 펜타닐 단속에 나서고 있다. 일본 이시바 시게루 총리는 이달 초 일찌감치 트럼프 대통령을 찾아가 ‘1조 달러짜리 대미 투자’와 ‘방위비 증액’ 선물 보따리를 풀었다. 상호관세의 주요 표적 중 하나인 유럽 국가들의 정상도 잰걸음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각각 24일과 27일 트럼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는다. 중국은 빅테크 기업들을 대미(對美) 전선의 선봉에 세우고 ‘경제 대 경제’로 대응하는 카드를 빼 들었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17일 중국의 간판급 빅테크기업 CEO들을 부르면서, 그간 ‘괘씸죄’에 걸려 은둔 생활을 해온 마윈 알리바바 창업주를 함께 불렀는데 작년까지의 중국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그림이다. 더 주목해야 할 게 있다. 경제보다 이념을 앞세우고 ‘공동부유(共同富裕·분배중시론)’를 주창해 온 시 주석이 CEO들 앞에서 “선부(先富·성장우선론)”까지 공공연히 언급하고 나선 점이다. 예사롭지 않은 움직임이다. 트럼피즘과 함께 밀려오는 거대한 파고 앞에 오직 한국만이 속수무책이고 무사태평이다. 대통령 권한대행인 최상목 부총리는 여태껏 트럼프 대통령과 전화 한 통 못 하는 처지다. 여당은 ‘12·3 비상계엄’의 후폭풍에 휩싸여 국정을 주도할 의지와 능력을 상실한 상태다. 야당은 “먹사니즘”이다 “잘사니즘”이다 말만 요란했지, 입법으로 보여주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런 여야정이 마주 앉은 국정협의회이니 뾰족한 결과물이 나올 리 만무하다. 자동차·반도체 등 한국의 주력 수출품을 겨냥한 관세 폭탄의 시곗바늘만 무심하게 돌아가고 있다. 중요한 시기에 나라를 이런 궁지에 몰아넣은 ‘대한민국 1호 세일즈맨’의 책임이 크고도 무겁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지금 대한민국을 틀어쥐고 있는 거악은 정치권력조차 쥐락펴락하는 경제권력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재벌 체제 해체에 정치생명을 걸겠습니다.” “(지금은) 기업경쟁력이 곧 국가경쟁력인 시대, 일자리는 기업이 만들고, 기업의 성장 발전이 곧 국가경제의 발전입니다.” 앞은 2017년 1월 당시 성남시장이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자신의 지지자들이 모인 ‘손가락혁명단 출정식’에서 했던 말이다. 뒤는 지난달 23일 이 대표가 신년 기자회견에서 했던 말이다. 두 발언 사이에 놓인 8년이라는 시간적 간극을 감안하더라도 한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고 믿기 힘들 정도로 극과 극을 달리는 발언들이다. 어느 쪽이 진짜인지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대표의 ‘우클릭’이 올 들어 갑자기 시작된 것은 아니다. 지난해 7월 당 대표 연임 도전에 나서면서는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유일한 이데올로기여야 한다”며 ‘먹사니즘’을 선언한 바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강도가 세진 것만은 분명하다. ‘먹사니즘 선언’ 때만 해도 자신의 간판 정책인 ‘기본시리즈’에 집착과 미련을 보였지만, 이제는 이것마저도 버릴 수 있다고 한다. 이달 3일 ‘반도체 산업 주 52시간 근로 예외’와 관련한 토론을 이 대표가 직접 주재한 것도 이목을 끌 만한 장면이었다. 노동계의 반발이 예상되는데도 이 대표는 “특정 산업의 연구개발 분야 고소득 전문가들이 동의할 경우 예외로 몰아서 일하게 해주자는 게 왜 안 되냐고 하니 (나도) 할 말이 없더라”며 관련 법안의 국회 통과를 시사하는 듯한 발언까지 했다. 이런 이 대표의 행보에 ‘중도 확장’을 통한 집권이라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민주당의 이른바 집권플랜본부가 이 대표의 성장 담론을 구체화하는 작업에 발 벗고 나선 것도 한 방증일 것이다. 민주당 집권플랜본부가 6일 개최한 세미나에서 제시된 이 대표 집권 후 경제 청사진은 한마디로 ‘장밋빛’이다. 1%대인 경제성장률을 5년 내 3%대, 10년 내 4%대로 끌어올리고 삼성전자급 ‘헥토콘 기업’ 6개를 육성하겠다고 한다. 말대로 된다면 두 손 들어 환영할 일이다. 문제는 이를 담보할 만한 구체적인 정책이 있는지, 단순히 말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실천할 의지가 있는지 여부다. 다른 것은 제쳐두고 일단 간단한 예로 ‘헥토콘 기업 6개 육성’만 놓고 한번 생각해 보자. 헥토콘 기업이란 기업 가치가 1000억 달러 이상인 비상장 스타트업을 말한다. 미국의 리서치기관인 CB인사이츠에 따르면 작년 12월 17일 기준으로 이런 기업은 전 세계에 3개뿐이다. ‘숏폼 동영상 신드롬’에 불을 붙인 ‘틱톡’의 모회사 바이트댄스, 우주개발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스페이스X, 그리고 인공지능(AI) 분야에서 두말할 나위 없는 선두 주자로 입지를 굳힌 오픈AI다. 이런 기업을 3개도 아니고 6개씩이나 만들겠다고 한다. 그러자면 창의성으로 이런 기업을 능가하거나, 창의성이 달리면 최소한 부지런함으로라도 이런 기업들을 뛰어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헥토콘 기업 중 하나인 스페이스X의 경영자 일론 머스크의 경우 스스로는 주 120시간을 일하면서, 회사 핵심 인재들에게는 주 80∼100시간 노동을 요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AI시대의 총아로 등극한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나는 눈뜰 때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일한다. 1주일에 7일간 일한다. 일하지 않을 때는 일하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고 했다. 당연히 이런 CEO 밑에서 일하는 엔비디아의 핵심 인재들이 주 7일, 때로 밤 1∼2시까지 일하는 것은 전혀 낯선 풍경이 아니다. 이런 기업들과 경쟁하거나 협업하기 위해서 우리 기업계가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 바로 ‘주 52시간 근로 예외’다. 근로시간을 늘리자는 것이 아니다. 주 52시간 틀은 지키되, 반도체 등 일부 업종의 R&D 등 직군의 억대 이상 고연봉자에 한해 회사와 근로자가 합의하면 한꺼번에 몰아서 일할 수 있도록 해주자는 것이다. 앞서 주 52시간 관련 토론회의 발언을 보면 이 대표는 이런 취지를 누구보다 잘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토론회가 열린 지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민주당은 ‘주 52시간 예외’ 입법을 ‘백지’로 돌리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선택은 자유겠지만, 그 선택이 ‘이 대표의 변신에 얼마나 진정성이 있는지’ ‘이 대표가 앞세운 실용주의의 유효 기간은 얼마나 될지’ 등 많은 의문들에 대한 답이 될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지식 수준이 낮거나 인습에 젖은 사람을 가르쳐서 깨우침.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계몽의 정의다. 23일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4차 변론에서 윤 대통령 측 조대현 변호사는 “국민들은 비상계엄을 계몽령이라고 이해하고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폈다. 12·3 비상계엄이 ‘계몽령’이면, 윤 대통령은 시대를 앞서가는 선각자이고 국민은 무지와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우민(愚民)’이라는 말인가. 헌재 탄핵심판에서 윤 대통령 측 궤변이 도를 넘고 있다. ‘계몽령’처럼 국민을 바보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나올 수 없는 황당한 주장이 난무한다. 12·3 비상계엄의 불법성을 입증하는 핵심 증거인 계엄포고령을 둘러싼 강변도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일 것이다. 물론 그 중심엔 윤 대통령이 있다.‘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한다’는 계엄포고령 1항이 헌법과 계엄법 등에 비춰 위헌·위법하다는 데 대해서는 이견을 찾아보기 어렵다. 윤 대통령조차도 이 조항이 “상위법규에 위배된다”는 점은 자신의 입으로 인정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윤 대통령은 ‘포고령은 계엄의 형식을 갖추기 위한 것으로 집행할 의사가 없었고 집행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불법이 아니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펴고 있다. 윤 대통령은 그 연장선상에서 “일부 (국회의원이 국회에) 못 들어갔다고 이야기를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서울경찰청에서도 입구에서 다 들여 보냈다”는 억지까지 늘어놨다. 작년 12월 3일 밤 온 국민이 TV와 SNS를 통해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본 명백한 사실조차도 이렇게 막무가내로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윤 대통령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기 위해 헌재 탄핵심판 4차 변론에 출석한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진술조차도 윤 대통령의 주장과 배치된다. 다음이 반대신문에서 국회 측 변호사와 김 전 장관이 주고받은 문답이다. 변호사: “포고령이 집행 가능성도 없고 실효성도 없다, 이렇게 피청구인(윤 대통령)이 말씀하셨어요.” 김 전 장관: “대통령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주무장관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변호사: “그러면 효력이 있으니까….” 김 전 장관: “그렇습니다.” 변호사: “실제로 집행하려고 하셨어요?” 김 전 장관: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검찰의 수사 결과도 김 전 장관의 증언 쪽에 가깝다. 윤 대통령은 포고령 발령 무렵부터 국회의 계엄해제요구안 가결 전까지 조지호 경찰청장에게 여러 차례 전화해 “조 청장, 국회 들어가려는 국회의원들 다 체포해 잡아들여, 불법이야, 국회의원들 다 포고령 위반이야, 체포해”라고 지시까지 했다고 한다. 이뿐 아니다. 당초 포고령에는 ‘야간 통행금지 항목’이 있었는데 검토 과정에서 윤 대통령이 빼라고 해서 뺐다는 게 김 전 장관의 증언인데 실행하지도 않을 포고령이면 굳이 왜 빼라고 했다는 말인가, 명백한 불법 조항은 그대로 방치하면서. 윤 대통령은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공수처에 체포된 15일에 공개된 장문의 손편지에서 “우리나라 선거에서 부정선거의 증거는 너무나 많다”면서 “칼에 찔려 사망한 시신이 다수 발견됐는데, 살인범을 특정하지 못했다 하여 살인사건이 없었고 정상적인 자연사라고 우길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밑도 끝도 없는 음모론이나, 검찰 수사와 법원 판결에서 이미 근거가 없다고 결론 난 사실 외에는, 결정적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반면 불법 계엄을 뒷받침하는 진술과 증거는 넘칠 정도로 많다.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관은 “본회의장으로 가서 4명이 1명씩 둘러업고 나오라고 해”라는 지시를, 곽종근 특전사령관은 “빨리 국회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부수고라도 사람들을 끌어내라”는 지시를 각각 윤 대통령으로부터 받았다고 했다. 홍장원 국가정보원 1차장도 윤 대통령으로부터 “이 기회에 싹 다 잡아들이라”는 지시를 들었다고 했다. 불명예 퇴역한 전직 장성이 현직 정보사령관을 수하처럼 부리면서 “부정선거와 관련된 놈들을 다 잡아서 족치겠다”고 준비시킨 야구방망이도 물증으로 확보돼 있다. 실행 의도가 없었기 때문에 불법행위가 없었고 정상적인 계엄이라고 우기기에는 ‘시신’이 너무 많은 ‘사건 현장’인 것이다. 지금이 봉건사회에서 근대사회로 넘어가는 구한말도 아니고, 윤 대통령 측이 쏟아내는 허무맹랑한 궤변에 ‘계몽 당할’ 국민이 과연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국민의힘 지도부와 여권이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 집행을 반대하는 명분으로 마치 입이라도 맞춘 듯 ‘국격’을 내세우고 있다. 권영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10일 “관저에서 수갑 채워 끌고 가는 것은 국격을 엄청나게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같은 날 박종준 전 대통령경호처장도 “국격에 맞는 적정한 수사”를 언급했다. 앞서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국격을 거론하며 공수처의 체포영장 신청을 비판한 바 있다. ‘법원에서 발부된 체포영장을 집행하는 것이 국격을 훼손하는 일인지’ 묻기에 앞서 윤 대통령이 선포한 12·3 불법 계엄은 과연 우리 국격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부터 다시 한번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군사독재, 내란, 쿠데타, 정정 불안, 치안 부재, 절대빈곤…. 계엄이 연상시키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계엄’은 서구 선진국에선 사어(死語)가 된 지 이미 반세기가 넘었고, 동남아나 중남미에서도 이젠 그닥 흔한 일이 아니다. 최근 10년 이내에 계엄을 선포한 적이 있는 나라는 세계적으로 9개국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타국과의 전쟁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계엄을 선포한 나라와 한국을 빼면, 튀르키예(2016년) 필리핀(2017년) 미얀마(2021년) 에콰도르(2024년) 정도다. 민주주의 수준으로 보나, 경제 발전 성과로 보나 한국이 과연 이 나라들과 동렬(同列)에 설 나라인가. 영국 이코노미스트 부설 연구소인 EIU는 매년 세계 167개국의 민주주의 발전 수준을 평가하고 있는데 2023년 기준으로 한국은 22위, 필리핀은 53위, 에콰도르 85위, 튀르키예는 102위였고, 미얀마는 북한보다도 떨어지는 166위였다. 1인당 국민소득은 튀르키예가 한국의 3분의 1, 에콰도르가 6분의 1, 필리핀이 9분의 1, 미얀마가 30분의 1수준이다. 윤 대통령의 난데없는 계엄 선포로 한국은 미얀마와도 국격을 견주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윤 대통령의 계엄 선포 직후 미국의 포브스는 “투자자들이 현대 아시아의 계엄령 집행자를 생각할 때 인도네시아 미얀마 필리핀 태국 그리고 이제는 한국을 떠올리게 됐다”고 했는데, 이게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아니, 어쩌면 인도네시아와 태국은 ‘그게 언제 적 이야기인데 우리를 거기에 넣느냐’고 억울해 할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국격을 이렇게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고도, 윤 대통령은 계엄 후 한 달이 넘게 지나도록 제대로 된 사과조차 하지 않고 있다. 무장한 정예부대를 시켜 국회와 선관위 등 헌법기관을 유린하려 해놓고도 “경고성 계엄”이라는 억지를 부렸고, 이마저도 부족했던지 이제는 변호사들을 앞세워 “평화적 계엄”이라는 황당한 주장을 늘어놓고 있다. 이런 식이면 “계엄령 포고문에 적시된 ‘처단’은 ‘평화적 처단’을 의미한다”는 궤변이 등장할 일도 머지않은 것 같다. 윤 대통령의 국격 훼손은 12·3 계엄 그 자체에서 멈추지 않았다. 이달 3일 공수처와 경찰이 체포영장을 집행하기 위해 대통령 관저에 진입했다가 경호처와 대치하는 장면은 전 세계에 생중계됐다. 공권력과 공권력이 서로 충돌하는 모습에서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은 정정(政情) 불안 국가’라는 강한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당시 BBC는 ‘관저 공방전’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면서 “합법적 체포영장을 집행하려는 시도를 병력이 막고 있는 데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고 했는데 ‘한국은 기본적인 법치(法治)조차 이뤄지지 않는 나라’라는 부정적인 인식이 국제적으로 각인되지 않았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권 위원장 등의 주장처럼 ‘내란 우두머리’ 혐의가 있는 대통령이라도 ‘수갑을 채워 관저에서 끌어내는 것’은 국격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치자. 애당초 무모한 불법 계엄을 기도하지 않았더라면 체포를 놓고 논란이 벌어질 일도 없었겠지만, 이 또한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치자. 윤 대통령은 지금까지 공수처가 3번, 검찰 특수본이 2번 등 총 5차례나 자진 출석해서 진술할 기회를 줬지만 모두 거부했다. 이 중 한 번이라도 응했다면 ‘체포영장’이 등장할 일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윤 대통령이 ‘품격’을 잃지 않고 관저에서 걸어 나올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열려 있다. 윤 대통령의 시대착오적 계엄으로 가뜩이나 상처 입은 대한민국 국격이다. 그런데 이제 여권이 국격 훼손 장본인의 책임을 면탈해 주기 위한 방패막이로까지 국격을 이용하려 한다면 너무나 염치없는 일이다. 국격에 두 번 먹칠을 하는 일만큼은 제발 이쯤에서 그만두기 바란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아직도 못 들어갔어? 본회의장으로 들어가서 4명이 1명씩 들쳐 업고 나오라고 해.” “문짝을 도끼로 부수고서라도 안으로 들어가서 다 끄집어내라.” “뭐 하고 있냐, 문 부수고 들어가서 끌어내, 총을 쏴서라도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끌어내.” 12월 3일 ‘계엄의 밤’ 윤석열 대통령이 당시 수방사령관과 특전사령관을 채근하며 쏟아낸 말이라고 한다. 검찰이 27일 김용현 전 국방장관을 내란 중요임무 종사 등의 혐의로 기소하면서 밝힌 내용이다. 언젠가 이 장면이 연극 무대에 오르거나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주연배우의 손에 위스키 병이라도 하나 들려 있지 않고서는 현실감을 자아내기 어려운 대사들이다. 취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한 나라의 대통령이 이런 흉포한 언사를 쏟아낼 수 있겠는가. ‘나와바리 전쟁’ 중인 조폭 보스도 아니고. “질서 유지를 위해 소수의 병력을 잠시 투입한 것이 폭동이란 말입니까?” 윤 대통령이 12일 담화에서 했던 말이다. 검찰이 이번에 발표한 자료에는 선관위 직원 체포를 위해 준비한 야구방망이, 망치, 송곳 등의 실물 사진이 첨부돼 있다. 대체 야구방망이와 망치를 어떻게 쓰면 ‘질서 유지를 위한 도구’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소수의 병력”도 속이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이다. 윤 대통령은 담화에서 “300명 미만의 실무장하지 않은 병력”이라고 했다. 하지만 국회로 출동한 특전사와 수방사 정예 요원만 해도 678명, 국회를 에워싼 경찰력이 1768명, 여기에 선관위와 더불어민주당 당사 등으로 출동한 병력과 경찰을 모두 합하면 4749명에 달했던 것으로 수사 결과 확인됐다. “실무장하지 않은”도 불법 계엄의 실상을 축소하고 왜곡하려는 교묘한 ‘언어 장치’ 중 하나다. 지금까지 계엄군의 총에 실탄이 장전됐다는 증언은 없지만, 부대 단위로 1000∼4000여 발씩 모두 9000여 발의 실탄을 탄약통에 넣어 갔다는 사실은 이미 입증이 끝난 상태다. 이런 사실을 알면서 윤 대통령이 “총을 쏴서라도”라는 발언을 했다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자칫 유혈참극이라도 벌어졌다면 그 죄를 어떻게 씻으려 했나. 윤 대통령은 또 “국회를 해산시키거나 마비시키려는 의도 자체가 없었으며, 국회 관계자의 국회 출입을 막지 않도록 했다”고 주장해 왔다. ‘40년 지기’를 통해 ‘체포의 체’자도 꺼낸 적이 없다고도 했다. 하지만 포고령 발령 무렵부터 조지호 당시 경찰청장에게 “국회 들어가려는 국회의원들 다 체포해, 잡아들여”라며 여러 차례 독촉 전화를 했다는 것이 검찰 수사 결과다. 이뿐 아니다. 검찰은 윤 대통령이 “국회를 무력화시킨 후 별도의 비상 입법기구를 창설하려는 의도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민주주의 기본 질서를 무너뜨리고 언론의 자유 등 국민의 기본권을 무참하게 짓밟은 전두환의 ‘국가보위입법회의’가 44년 만에 되살아날 뻔했던 셈이다. 유신의 ‘폭압 장치’인 ‘비상대권’도 여러 차례 언급했다고 한다. “국회의 계엄 해제 의결이 있으면 바로 병력을 철수시킬 계획이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는 윤 대통령의 주장도 검찰 수사 결과에 따르면 명백한 허위다. 국회에서 계엄해제안이 가결된 이후에도 이진우 수방사령관에게 “해제됐다 하더라도 내가 2번, 3번 선포하면 되는 거니까 계속 진행해”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물론 수방사령관 특전사령관 경찰청장의 진술들은 앞으로 법정에서 사실관계를 다투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마치 사전에 입이라도 맞춘 듯이 ‘국회의 계엄 해제 결의를 물리력으로 저지하라는 지시를 윤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받았다’고 일제히 거짓 주장을 할 가능성이 얼마나 있을까. 윤 대통령의 거짓말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12일 담화만 해도 지금까지 언급한 것 외에 “체코 원전 수출 지원 예산 90% 삭감”, “딥페이크 범죄 대응 예산 대폭 삭감” 등 깨알 같은 거짓말로 촘촘히 채워져 있다. ‘명태균 게이트’와 관련해서는 녹취가 나올 때마다 윤 대통령의 거짓말이 양파 껍질처럼 벗겨지는 중이다. 잘 알려진 대로 ‘워터게이트’로 탄핵 직전 하야한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이, 탄핵으로 내몰렸던 결정적인 원인은 도청이 아닌 거짓말이었다. 거짓말로 국민의 신뢰를 잃어버린 정치지도자는 그 자체만으로 자격 상실이다. 오직 윤 대통령만이 이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이중삼중으로 쌓아 올린 ‘거짓말의 성(城)’ 안에서 윤 대통령이 얼마나 더 버티기를 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성벽의 두께가 상식과 양심의 두께에 반비례할 것이라는 사실 하나만큼은 분명해 보인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주식시장이나 카지노에서 흔히 쓰이는 말로 ‘초보자의 행운(beginner’s luck)’이란 게 있다. 우연한 행운이 몇 번 이어지다 보면 대개는 자신이 그 분야의 타고난 천재라는 착각과 자만에 빠지기 쉽다. 그러면 점점 무리한 ‘베팅’을 하게 되고 운이 다하는 순간 패가망신하게 되는데, 이를 경고하는 의미로 자주 인용되는 말이다. 파울루 코엘류의 소설 ‘연금술사’에도 이런 말이 나온다. “무언가를 찾아 나서는 도전은 언제나 초보자의 행운으로 시작되고 반드시 가혹한 시험으로 끝을 맺는 것이네.” 한국 정치에서 초보자의 행운을 이야기할 때 윤석열 대통령보다 더 적절한 사례는 과거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윤 대통령은 2021년 6월 29일 정치에 첫발을 디딘 지 넉 달 만에 제1야당인 국민의힘 대선 후보 자리를 꿰찼고 다시 그로부터 넉 달 뒤에는 대통령에 당선됐다. 초보자의 행운을 만난 많은 이들이 흔히 착각하듯이 윤 대통령은 이를 100% 자신의 실력으로 이룬 성취로 받아들였고, ‘정치든 뭐든 내가 최고’라는 자아도취는 이내 독선으로 이어졌다. 많은 검토와 협의, 공사 등의 준비 기간이 필요한데도 “단 하루도 청와대에 들어가지 않겠다”며 ‘취임 전 집무실 이전’을 당선 즉시 기정사실화하고 군사작전하듯 밀어붙였다. 약간의 시차는 있었지만 관저 이전도 비슷했다. 아니 한술 더 떠 ‘촉박한 일정’을 이유로 온갖 불법과 변칙이 행해졌다. 독선은 다시 불통으로 이어졌다. 윤 대통령이 엄청난 무리를 해가며 집무실을 이전한 명분은 도어스테핑(약식 기자회견), 즉 소통이었다. 하지만 도어스테핑은 특정 언론사와의 갈등을 이유로 취임 6개월 만에 중단됐다. 이후 공식 기자회견은 윤 대통령이 ‘편하게’ 생각하는 특정 언론사와의 인터뷰나 대담으로 대체됐다. 비판 여론이 높아지자 기자회견이 재개되기는 했지만, 국민의 궁금증을 풀어주고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상당 부분은 끊임없이 의혹과 리스크를 생산해 내는 김건희 여사를 일방적으로 옹호하고 두둔하는 내용이었다. 독선과 불통은 정책이고 정치고 예외가 없었다. ‘카르텔 척결’이라는 외마디성 구호를 앞세워 연구개발(R&D)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가 거센 후폭풍을 맞았고, 밑도 끝도 없이 ‘2000명’이라는 숫자를 앞세워 의료개혁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여 의료계의 거센 반발을 불렀다. 찬성 여론이 70%가 넘는 김 여사 특검 여론에 대해서는 시종 귀를 막았고, 해병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와 관련해서는 ‘런종섭 사태’로 의혹과 비판 여론에 불을 질렀다. 그러자 ‘연금술사’에서 말하는 ‘가혹한 시험’이 찾아왔다. 4·10 총선 참패와 거대 야당의 탄생이 그것이다. 국정과 인사에 대한 대대적 쇄신, 야당과의 협치, ‘여사 리스크 해소’만이 ‘가혹한 시험’을 돌파하는 해법이었지만, 윤 대통령은 그것을 선택하는 대신 한국 정치사의 어두운 지하에 45년간 잠들어 있던 ‘비상계엄과 내란의 망령’을 불러냈다. ‘야당 경고용’이라는 윤 대통령의 주장과는 딴판으로 주요 정치인을 체포한 뒤 특급 보안시설인 수도방위사령부의 B1 벙커 안에 이들을 구금하려 했다는 섬뜩한 증언도 있다. 까딱했으면 불법 구금으로 악명을 떨쳤던 ‘보안사 서빙고 분실’이 되살아날 수도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14일 국회에서 가결된 탄핵소추안은 처음부터 끝까지 윤 대통령의 자업자득이고, 50년 후퇴할 뻔한 한국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서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불법 계엄으로 인한 비용을 우리 국민이 고스란히 지게 된다는 점이다. 미국의 경제 전문 포브스는 최근 “투자자들이 현대 아시아의 계엄령 집행자를 생각할 때 인도네시아 미얀마 필리핀 태국, 이제는 한국을 떠올리게 됐다”면서 “결국 5100만 국민이 이기적인 정치적 도박의 대가를 할부로 지불하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는데, 현실은 이보다 훨씬 심각하다. ‘더 독해진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운 ‘트럼프 2기’가 출범도 하기 전에, 선장 없는 한국 경제에는 내수 부진과 환율 불안 등의 ‘삼각파도’가 줄줄이 밀려오고 있다. 비용은 할부가 아닌 일시불, 외상이 아닌 현찰로 치러야 할 참이다. 윤 대통령은 ‘내란 시도’가 실패한 뒤에도 구차한 변명과 남 탓, 금세 탄로 날 거짓말로 일관하고 있다. 2년 7개월이나마 국가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올랐던 정치인의 도리가 아니다. 떠나는 뒷모습만이라도, 다만 한순간이라도 ‘The buck stops here(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의 언행일치를 보여주기 바란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지난달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반환점을 전후해 정부·여당에서는 낯간지러운 자화자찬성 홍보 자료나 발언이 적지 않게 쏟아졌다. 압권은 국민의힘 김민전 최고위원이 한 라디오쇼에 나와서 한 발언이었다. “경제 분야에서는 90점 이상 점수를 받을 수 있을 정도의 업적을 냈다. 현 정부가 출범할 때만 해도 굉장히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지금 취업률이 70%에 육박하고 있다. … 세계적인 경제 평가기관들이 한국 경제를 슈퍼스타라고 할 정도로 실적이 굉장히 좋다.” ‘자화자찬 릴레이’로부터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지난주, 한국은행은 내년과 내후년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 성장전망치로 1.9%와 1.8%라는 충격적 수치를 내놨다. 지금까지 우리 경제성장률이 2%를 넘지 못한 것은 통계를 내기 시작한 1954년 이후 6번뿐이었다. 원조 물자를 빼면 경제라는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던 1956년, 오일쇼크와 함께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겪은 1980년, 동남아시아에서 시작된 외환위기에 전염돼 국가 전체가 부도 상태에 빠진 1998년,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주요 국가들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부실이 터진 글로벌 금융위기, 전대미문의 글로벌 팬데믹과 맞닥뜨린 2020년, 그리고 작년이다. 한은의 전망이 현실화할 경우, 우리 경제가 개발 궤도에 오른 이후 ‘블록버스터급’ 외부 충격 없이 내재적 요인으로 2% 미만 성장을 하는 것은 2023년에 더해 2025년과 2026년 이렇게 3차례가 된다. 모두 윤 대통령 임기 중이다. 물론 모든 것을 현 정부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다. 경제의 기초체력에 해당하는 잠재성장률의 추락이, 비단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2012년 3.8%를 기록한 이후 단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하락에 하락을 거듭해 왔다. 그렇다고 해서 윤석열 정부의 책임이 가벼운 것도 아니다. 지난해와 올해 한국 경제의 잠재성장률은 각각 2.025%와 2.004%로, 경제 규모가 한국보다 15배나 큰 미국에 2년 연속 역전당했다. 비유하자면 조그만 스포츠카가 짐을 잔뜩 싣는 대형 덤프트럭보다 최적 주행 속도가 낮게 설정돼서, 출고된 셈이다. 실제 성장률이 잠재성장률보다 낮은 1%대가 된다는 것은 가뜩이나 낮게 설정된 최적 주행 속도만큼도 달리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비정상적인 ‘저성장의 늪’에서 우리 경제가 허우적대지 않게 하려면, 조금 늦은 감이 있더라도 지금까지 경제 운용에 대한 철저한 반성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먼저 ‘착시’를 걷어내야 한다. 고용률이 대표적인 예다. 평생직장을 원하는 청년들은 취업이 어렵고, 노년층은 부실한 연금 때문에 허드렛일이라도 해서 생계를 이어가는 한국에서 저출생-고령화의 진행과 함께 고용률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단기 임시직만 잔뜩 늘어나는, 일자리 질의 저하의 슬픈 단면이다. 이걸 놓고 ‘역대 최대 고용률’이란 미몽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니다. 임기 초반 잠시 시늉만 내다 내팽개쳐버린 기업 규제 완화에도 시동을 걸어야 한다. 이 정부는 불합리한 경제 형벌 규정 186건의 ‘개선 추진’을 대표적 규제개혁 성과 중 하나로 꼽는데 “삼라만상이 처벌 대상”인 배임죄를 손보거나 폐지하지 않는 한 무의미한 ‘숫자 채우기’일 뿐이다. 명백한 고의성이 입증되지 않는 배임을 민사 분쟁의 대상이 아닌 형사 처벌 대상으로 삼는 선진국도 드물거니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까지 적용해 무기징역을 선고할 수 있게 한 나라는 전 세계에서 한국밖에 없다. 더불어민주당이 당론 강행을 추진하면서 기업 경영의 최대 불안 요인 중 하나가 된 상법 개정안에 대해서는 윤 대통령이 나서서 빨리 매듭을 지어야 한다. 최근 금융위원장 등이 나서서 상법 개정에 대한 반대의견을 밝히기는 했지만, 윤 대통령이 올해 초 직접 “상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한 ‘말빚’을 빨리 청산하지 않으면 ‘기업 할 의욕’을 꺾는 불확실성이 계속 남아있게 될 것이다. 현 정부는 2022년 말 ‘5년 후 10위 이내 경제대국’이란 청사진을 내건 바 있다. 하지만 그해 13위였던 한국의 경제 규모 순위는 1년 뒤인 지난해 14위로 한 계단 더 미끄러졌다. 한은이 예고한 ‘1%대 성장률’이 현실화하면 ‘10위 이내 진입’은 고사하고 14위에서도 영영 밀려나게 될 것이다. 이런 추세가 더 이어지면 한국 경제가 20위 밖으로 밀려나는 것도 비현실적인 시나리오는 아니다. ‘슈퍼스타의 추락이 윤석열 정부에서 시작됐다’는 흑역사가 시작되는 것을 막기 위해,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군 통수권자가 군 시설인 체력단련장에서 운동하는 것은 하등의 문제가 없다.” 윤석열 대통령의 골프를 둘러싼 논란이 커지자 14일 대통령실 관계자가 기자들에게 한 말이다. 얼핏 그럴듯해 보이지만 잘못된 논리다. 골프 인구가 600만 명이 넘는 나라에서 사인의 골프를 놓고 시시비비를 따질 일은 드물다. 그러나 우리 국민의 정서상 공인은 다르다. 누구와 하는지, 빈도가 얼마나 잦은지에 따라 큰 문제가 될 수가 있다. 설령 단 한 번을 하는 경우라도 삼가야 할 ‘때-장소-상황’이란 게 있다. 작년 7월 전국에 폭우가 내린 가운데 ‘주말 골프’를 해 물의를 빚은 홍준표 대구시장에 대해 국민의힘이 어떤 처분을 했는지 떠올려 보자. 당시 국민의힘 윤리위원회는 “국민의 윤리 감정과 정서에 반하는 행위”라며 홍 시장에게 ‘당원권 정지 10개월’의 중징계를 내렸다. “홍 시장은 당 대표와 대통령 후보를 지내는 등 국민의힘 정치지도자로서 더 엄격한 윤리규정을 지켜야 한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국민의힘 당원이고, 홍 시장보다 더 ‘지도적인 위치’에 있다. 따라서 윤 대통령의 골프가 적절했는지 논하는 것은 여당의 잣대로도 괜한 시비가 아니다. 대통령실이 확인을 거부하고 있는 가운데 지금까지 나온 야당의 주장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8월 24일부터 11월 9일까지 7차례 골프를 했다. 8월 24일의 경우는 한미연합 군사훈련으로 군 골프가 금지돼 있던 기간이고, 19명이나 사상자가 나온 부천호텔 화재에 대한 추모 기간이었다고 한다. 또 10월 12일은 북한이 쓰레기 풍선 도발을 감행해 군 장성과 장교들이 줄줄이 골프를 취소하던 때라고 한다. 이 시기에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진 대통령이 골프를 한 것이 사실이라면, 부적절한 처신이 아닐 수 없다. 거짓 해명 논란은 더 심각한 문제다. 윤 대통령의 골프와 관련한 의혹은 국회에서 야당 의원들의 질의를 통해 지난 9월부터 제기돼 왔다. 하지만 경호처장 출신의 김용현 국방장관은 “모른다”로 일관했고, 여당 의원이 나서서 “윤 대통령은 골프를 안 친다”며 ‘역공세’를 펴기도 했다. 이런 사정을 뻔히 알고 있었을 대통령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윤 대통령의 골프가 한 언론사의 취재망에 걸려들고 보도가 확실해진 시점이 돼서야 “윤 대통령이 트럼프 당선인과의 외교를 위해 최근 골프 연습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윤 대통령이 트럼프 당선 이전부터 골프를 해 온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윤 대통령의 골프가 문제가 될 것 같으니까, 트럼프 외교를 핑계로 댔다’는 의심을 대통령실이 자초한 셈이다. 미필적이라도 고의에서 나온 거짓말이라면 심각한 문제다. 대통령실이 선택적 침묵과 석연찮은 해명으로 문제를 키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명태균 게이트에서도 익히 본 패턴이다. 대통령실은 쏟아지는 보도에도 한 달 이상 침묵하고 있다가 결정적인 폭로들이 나오자 등 떠밀리듯 ‘(윤 대통령이) 두 번 만났고, 국민의힘 대선후보 경선 막바지 이후로는 통화 사실이 없다고 기억한다’는 해명을 내놨다. 하지만 만난 횟수도 최소 4차례였고, 취임식 전날 직접 통화까지 한 사실이 얼마 안 가 드러났다. 부적절한 골프 라운딩과 거짓 해명 논란은 용산이 감당해야 할 자업자득 ‘업보’라 치자. 어찌 됐든 국내에서 ‘지지고 볶으면’ 될 일이다. 가장 우려스러운 대목은, 외신까지 너도나도 보도하는 바람에 기정사실이 돼 버린 골프 외교가 자칫 국익에 부메랑이 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골프 외교는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트럼프 1기에 ‘완결판’을 보여준 아이템이다. 어설프게 해선 괜히 비교만 될 뿐이다. 아베 전 총리는 트럼프 당선에 앞서 골프 스윙에 관한 그의 개인적인 고민에 대해서까지 정보 수집을 했다고 한다. 아베 전 총리가 2016년 11월 트럼프 당선 9일 만에 ‘고탄도에 슬라이스 방지’ 기능을 어필하는 50만 엔짜리 금장 드라이버를 선물로 싸 들고 미국까지 직접 날아간 것도 이런 치밀한 사전 준비에서 나온 것이다. 이렇게까지 공을 들여 ‘끈끈한 브로맨스’를 연출해 보였는데도, 그의 골프 외교가 얼마나 실리를 챙겼는지에 대해서는 갑론을박이 있다. 익히 알려진 대로 트럼프 당선인은 아주 거칠고 노련한 협상가다. 외교적 무례까지 서슴지 않으면서 상대방의 ‘멘털’을 흔드는 것은 기본이다. 즉흥적이고 어설픈 ‘아베 따라 하기’로 그를 상대하겠다는 것은 맨몸으로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지금 용산이 보여주는 게 이런 모습 같아서 걱정이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높은 지지도가 물론 아니겠지만… 다른 나라의 경우에도… 서방 국가를 보더라도… 직전의 (일본) 기시다 총리도 뭐 계속 15%, 13% 내외였고… 유럽의 정상들도 20%를 넘기는 정상들이 많지 않습니다.”한국갤럽 조사에서 윤석열 대통령 국정수행에 대한 긍정 평가가 처음 10%대로 떨어진 1일 정진석 대통령비서실장이 국회운영위원회에서 한 말이다. 앞뒤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 더 배전의 노력을 기울이겠다” 등의 상투어가 따라붙기는 했지만, 낮은 지지율 때문에 퇴진한 기시다 후미오 총리 사례까지 끌어다 대며 ‘나보다 못한 애도 있어요’라고 강조한 것을 보면 어느 쪽이 진짜 하려는 이야기였는지는 쉬 짐작이 간다.‘뭐가 문제인데…’는 비단 정 실장 한 명만의 속내는 아닌 것 같다. 또 다른 대통령실 관계자는 “지난주의 20%와 사실 한 끗 차이 아닌가”라고 동아일보에 말했다고 한다. 이만저만한 ‘집단 정신승리’가 아니다.우선 “20%를 넘기는 유럽 정상이 많지 않다”는 정 실장의 말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미국의 모닝컨설트는 한국 미국 유럽 남미 등 세계 25개국 정상의 지지율을 매달 조사해서 발표하고 있는데, 가장 최신 버전에 해당하는 ‘9월 25일∼10월 1일 조사’에 따르면 유럽 정상 14명 중 20% 미만이 1명, 20%가 2명, 29%가 1명이었고 나머지 10명은 31∼59%였다. 오차를 감안해 20% 2명을 10%대 그룹에 넣더라도 20%를 넘는 정상이 11 대 3으로 훨씬 많다는 이야기다. 유럽을 쳐다보면서 ‘위안거리’를 찾을 일이 아니다. 참고로 이 조사에서 윤 대통령의 지지율은 16%, 25명 중 최하위였다.10%대 지지율이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알려면, 올해 6월 이탈리아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를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당시 미국의 정치전문매체인 폴리티코는 G7 정상회의에 맞춰 내보낸 기사에 ‘레임덕 6명과 조르자 멜로니’라는 제목을 달았다. 당시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만 지지율이 40%를 넘고 나머지는 그 미만이라고 해서 붙은 제목이다. 당시 모닝컨설트 기준으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30%대,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 리시 수낵 영국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등은 20%대, 기시다 일본 총리는 10%대 지지율이었다. ‘레임덕 잣대’로 40%는 너무 높은 허들이 아닐까. 이후 벌어진 일들을 보면 그렇지 않다.바이든 대통령은 선거 전 도중 연임 도전 포기를 선언했고, 수낵과 기시다 총리는 이미 퇴진했다. 각각 내년 9월과 10월 총선을 앞둔 숄츠 총리와 트뤼도 총리는 국정 주도권을 상실한 채 퇴임 압력을 받고 있고, 재선 임기가 2027년 5월까지인 마크롱 대통령은 ‘내년 봄 조기 퇴진론’이 나오는 중이다. 서방의 어느 잣대를 빌려오더라도 윤 대통령 10%대 지지율은 심각한 레임덕 수준인 셈이다.문제는 이대로 레임덕을 맞기에는 윤 대통령이 해놓은 일이 너무 없다는 점이다. 기회 있을 때마다 노동·교육·의료·연금 4대 개혁 및 저출생 극복을 강조해 왔지만, 손에 쥘 수 있는 구체적인 성과는 거의 없다. 남은 절반의 임기 중에라도 개혁 성과를 내려면 내부 결속과 국민의 안정적 지지 확보가 필수적인데, 여당은 ‘여사 리스크’를 둘러싼 갈등과 윤 대통령의 고집으로 이미 두 동강이 났고 중도층은 지지를 접은 지 오래다.그런데도 용산의 위기의식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김건희 여사를 둘러싼 의혹 규명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갈수록 높아지는데 특검은 고사하고, 특별감찰관 도입마저 싫다고 버티는 중이다. 대통령 부부의 진솔한 사과는 감감무소식이다. 대통령 참석이 관행인 국회 시정연설에도 총리를 대신 보낸다고 한다. 야당이 뭐라건 중도층 민심이 어떻건, 지금까지 해온 대로 핵심 지지층만 단단히 붙잡고 가면 된다는 생각으로 보인다. 하지만 오산(誤算)이다.이번 갤럽 조사를 보면 여당 지지층에서도 윤 대통령에 대한 긍정 평가와 부정 평가가 44 대 44로 갈렸고, 핵심 지지기반 중의 하나인 대구·경북의 긍정 평가는 전국 평균보다 오히려 1%포인트가 낮았다. 스포츠 경기를 떠올려 보면, 잘하는 상대편 선수보다 느슨한 플레이로 실수를 연발하는 우리 편 선수에게 더 많은 비난이 쏟아진다. 정치에서도 기대나 희망이 포기나 절망으로 변하는 순간 ‘못하는 우리 편이 가장 미운 법’이다. 이번 조사를 보면 이미 임계점을 넘었는지도 모른다. 한가한 정신승리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