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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6일 발표된 로또 1224회의 1등 당첨자는 12명이었다. 그다음 주는 13명, 또 그다음 주는 10명이었다. 그런데 혹자에 따르면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논리다. 먼저 로또에서 가능한 숫자 조합은 약 814만 개다. 따라서 1등에 당첨될 확률은 ‘814만분의 1’이다. 2명이 동시에 1등에 당첨될 확률은 ‘814만분의 1’을 2번 곱하면 된다. 이런 식으로 계속 계산해 나가면 12명이 동시에 1등에 당첨될 확률도 나온다. 분모가 ‘8’ 뒤에 ‘0’이 82개나 붙는 수로, 전 우주에 존재하는 원자의 수보다 850배 많은 수다. 현생 우주에서는 통계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매주 로또 1등 당첨자가 10여 명씩 꼬박꼬박 나오는 이유가 뭘까. 간단하다. 이 계산법이 말도 안 되는 ‘엉터리’이기 때문이다. 정확한 계산법을 보자. ‘나’라는 ‘나무’만 생각하지 말고 수백만 명이 여러 줄(번호 조합)씩 로또를 사는 ‘숲’을 봐야 한다. 1224회의 경우 총 판매 금액은 1211억 원이었다. 1줄에 1000원이니, 줄 수로는 1억2110만 개다. 이는 로또에서 가능한 총 숫자 조합 814만 개의 14.8배나 되는 수다. 814만 개 모든 조합에 대해 그것을 찍은 사람이 평균적으로 15명 정도는 있다는 얘기다. 따라서 1등 당첨자가 십수 명 나오는 것은 지극히 정상인 것이다. 이제 ‘로또’를 기억하면서,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9일 기자회견에서 한 발언을 생각해 보자. 장 대표는 “인천 송도1·2동 관내 사전투표에서 국민의힘 유정복 후보와 민주당 박찬대 후보의 득표수가 완벽하게 일치했다”며 “이런 결과가 나올 확률은 로또 당첨보다 어려운 5억9000만분의 1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광주·전남 통합선거에서는 두 후보의 투표수가 똑같은 지역이 10곳(5쌍)이나 발견됐는데, 이는 확률적으로 5억9000만분의 1을 무려 여섯 번이나 곱해야 가능한 초자연적 현상”이라고 덧붙였다. 5억9000만분의 1에 대한 근거도 전혀 없거니와, 앞서 12명이 로또 1등에 당첨되는 것은 현 우주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계산법과 똑같은 엉터리 계산법이다. ‘쌍둥이 득표’ 현상에 대한 올바른 통계적 이해법은 필즈상 수상자인 허준이 교수의 부친이자 통계학 권위자인 허명회 고려대 통계학과 명예교수가 자신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설명한 바 있다. 인천의 행정동을 2개동씩 짝지을 수 있는 조합이 9316가지나 되고, 이 중 1%의 비율로 크기가 비슷하고 정치·사회적 성향이 유사할 수 있기 때문에 ‘쌍둥이 득표’가 나오는 것은 통계적으로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취지다. 또한 광주·전남의 경우 짝지을 수 있는 읍면동 조합이 인천보다 훨씬 많은 7만7028개에 이르기 때문에 ‘쌍둥이 득표’ 발생 확률이 인천보다 높다는 것이다. 다른 예를 보자. ‘쌍둥이 득표’는 국민의힘이 압승한 2022년 지선에서도 있었다. 시도지사 관내 사전투표만 놓고 봐도 충북(노영민-김영환)의 영동군 양산면과 보은군 내북면, 전남(김영록-이정현)의 화순군 동복면과 신안군 장산면에서 각각 두 당 후보의 득표수가 일치했다. 장 대표식 계산법으로 5억9000만분의 1을 두 번 곱한 ‘34경8100조분의 1’ 확률이다. “지구가 생겼다가 멸망할 때까지 단 한 번도 일어나기 힘든 우연한 사건”이 벌어진 셈인데, 2022년 지선도 부정선거 의혹이 있나. 사이비 통계학은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이 가장 애용하는 무기다. 혹세무민을 과학으로 포장할 수 있는 데다, 아무 말을 막 지어내도 그럴듯해서 대중이 쉽게 현혹되기 때문이다. ‘음모론의 대가’인 김어준 씨가 18대 대선 직후 들고 나왔던 ‘K값 음모론’이나 2020년 미국 대선에서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이 주장했던 ‘벤퍼드의 법칙 짝퉁판’이 모두 그런 경우다. 장 대표가 사이비 통계를 들고나왔다는 것은 부정선거론에 대한 탐닉이 중증(重症)에 이르렀다는 징표일 가능성이 크다. 9일 올림픽공원 경기장 집회에 참석해서 ‘부정선거 재선거’ 피켓을 든 것도 단순한 ‘우연’은 아닐 것이다. 국민의힘 소장파 의원들의 모임인 대안과미래는 11일 회견에서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의 공정을 지키고자 모인 시민들의 요구를 부정선거 음모론으로 오염시키는 것은 보수정당 대표로서 결코 해서는 안 될 행위”라고 지적했다. 100% 공감이 가는 말이다. 의원들은 또 이렇게 말했다. “장 대표가 스스로 보수라고 생각한다면 이제 그만 자리에서 물러나시라.” 더더욱 공감이 가는 말이다. 국민의힘이 통째로 부정선거 음모론의 진창으로 빨려 들어가는 일은 없어야 한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이 “대기업의 초과이익을 어떻게 사회적으로 재분배할 것인가를 두고 한국형 사회연대임금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긴급 토론을 열겠다”고 최근 밝혔다. 당초 일정을 1일로 못 박았으나 돌연 계획을 바꿔 “각계의 보다 다양한 의견 수렴을 위해 개최 일정을 다시 조율 중”이라고 한다. 김 장관이 말한 ‘사회연대임금’은 1950년대 스웨덴에서 처음 시행된 아이디어다. 근로자가 소속된 산업 또는 기업의 임금지불 능력이나 수익성과 무관하게 동일노동에 대해서는 동일임금을 지급하자는 취지였다. 쉽게 말하면 돈을 잘 버는 대기업 근로자들의 몫은 줄이고, 돈을 못 버는 영세기업 근로자의 몫을 늘려서 ‘임금 키 높이’를 맞추는 정책이었다. 사회연대임금은 산업적 측면에서 두 가지 효과를 냈다. 먼저 ‘좀비기업’ 퇴출 효과다. 생산성이 낮은 사양업종 분야의 기업들은 높은 임금을 감당하지 못해 줄줄이 문을 닫았다. 반면 생산성이 높은 대기업들은 근로자들의 임금으로 나갈 돈을 연구개발이나 설비투자로 돌려 막대한 ‘초과이익’을 거뒀다. 발렌베리 가문 산하의 에릭손, 사브, ABB 등이 초고속 성장을 한 배경 중 하나가 이것이다. 하지만 사회연대임금은 노동계층의 분화 및 노동운동의 과격화, 경기 침체가 겹치면서 1970년대 초반부터 1980년대 초반에 걸쳐 해체의 길을 걸었다. 이미 반세기 전에 사실상 ‘유효기한’이 끝난 모델이다. 그리고 사회연대임금 도입 당시 스웨덴과 지금의 한국은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먼저 한국의 노동인구가 7∼8배 이상 많다. 한국의 이해관계가 훨씬 복잡하다는 이야기다. 노조 조직률의 경우 당시 스웨덴은 70%대가 넘었지만 한국은 13%에 불과하다. 한국은 노조 대표성이 훨씬 떨어진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당시 스웨덴을 대표하던 스웨덴노동조합연맹(LO)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임금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대기업 근로자들이 임금 인상 요구를 자제해야 한다는 확실한 인식과 실천 의지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민노총이나 한국노총, 삼성그룹 초기업노동조합 삼성전자 지부가 자기 몫을 떼어 하청업체나 비정규직 근로자들에게 나눠주려고 할까. 오히려 기업에만 더 큰 짐을 안길 가능성이 크다. 노동운동가 출신인 김영훈 장관도 이런 점을 잘 알기에 사회연대임금에 굳이 ‘한국형’이라는 수식어를 붙였겠지만, 어떤 변형을 시도한다 한들 ‘상한 귤’로 ‘상한 탱자’ 이상을 만들기는 어렵다. 더구나 김 장관은 사회연대임금에 더해 초과이익 재분배까지 함께 거론하고 있다. 반도체 초과이익을 협력업체들까지 공유해서 상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진쎄미켐, 대덕전자, 리노공업… 모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핵심 협력업체들이다. 동진쎄미켐은 올해 1분기에만 3281억 원 매출에 666억 원 영업이익을 남겼다. 대덕전자는 3463억 원 매출에 영업이익 513억 원을 남겼다. 리노공업은 1분기 영업이익률 47%다. 김 장관이 오지랖 넓게 나서서 재분배를 위한 ‘바람잡이’ 역할을 하지 않아도 기술력이 있는 협력업체에는 ‘과실’이 알아서 돌아가는 것이 지금의 ‘반도체 경기’다. 한국 반도체 산업에 가장 시급한 숙제는 초과이익 배분이 아니다. 30%대에 불과한 소재-부품-장비의 국산화율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지금 정부가 할 일은 전 부처가 머리를 맞대고 국내 소부장 기업들을 육성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벌어들인 영업이익이 최대한 국내에서 순환하도록 하는 것이다. 김 장관은 “삼성전자의 성공은 노사의 헌신적인 노력에 국가와 지역사회의 지원이 더해진 결과”라는 점을 초과이익 재분배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한데 국가와 지역사회의 지원 없이 성장하는 기업이 하나라도 있던가. 그래서 기업은 돈을 벌어 법인세·법인지방소득세·재산세·자동차세·면허세·취득세를 내고 고용을 창출해 국가와 지역사회에 갚는 것이다. 지금 전 세계 빅테크와 반도체 업계는 ‘인공지능(AI) 혁명’ 길목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생존을 건 투자 경쟁을 벌이고 있다. 구글과 같은 기업은 단기금융상품을 포함해 170조 원이 넘는 현금성 자산을 갖고 있으면서도, 100년 만기 회사채까지 발행해 투자 자금을 조달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수백조 원대에 이르는 초대형 투자 계획을 발표한 상태다. AI 혁명은 이제 갓 막이 오른 단계다. 반도체 분야만 해도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자칫 과도한 분배 요구에 발목이 잡혀 투자에 실기하면 한순간에 영원한 낙오자가 될 수도 있다. 반도체가 흔들리면 성장도, 환율도, 재정도, 주가도 재앙에 가까운 상황을 맞게 되는 것이 지금 한국 경제의 객관적인 상황이다. 김 장관은 ‘위험한 불장난’을 멈춰야 한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장쩌민, 후진타오 등 중국 최고지도자들이 방한하면 꼭 삼성의 반도체 사업장을 방문합니다. 그러면 그분들은 저에게 반도체의 핵심기술인 디자인, 즉 회로선폭에 대해 묻습니다. 다른 나라 지도자들은 매출 등 일반적인 내용을 묻지만 중국 지도자들은 달라요. 반도체 기술의 핵심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이 2003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인터뷰는 이렇게 이어진다. “중국이 반도체에 관심을 가질수록 저는 더욱 초조해집니다.… 수십조 원을 투자해 여기까지 온 반도체산업이 중국에 발목을 잡히면 다시는 회복할 수가 없어요.” 잡과매철(砸鍋賣鐵). 1995년 당시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이 반도체 산업 육성을 강조하며 인용한 사자성어다. 가난한 집이 밥 짓는 솥을 내다팔아 장사 밑천을 장만할 정도로, 비장한 각오와 결연한 의지로 반도체를 키우라는 뜻이다. 실제로 장 주석 발언 직후부터 중국은 최초의 국가적 대규모 반도체 프로젝트인 ‘909 공정’을 시작하는 등 국가적 자원을 총동원해 반도체 굴기(崛起)’에 나섰고, 그 흐름은 후진타오 시대를 거쳐 시진핑 시대에도 이어졌으며, 시간이 갈수록 가속도가 붙고 있다.‘잡과매철’의 결의(決意)로부터 30여 년, 중국 반도체 산업은 눈이 부실 만큼 발전을 거듭해 왔다. 대표적인 것이 한국 메모리 산업의 양대 축 중 하나인 ‘낸드플래시 메모리’다. D램 중 하나인 HBM만 하더라도 한국과 중국 간에는 3년 정도의 기술 격차가 있지만, 낸드플래시는 그 격차가 1년 이내로 좁혀졌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일반적으로 낸드플래시는 얼마나 단을 높이 쌓느냐가 핵심경쟁력이다. 그런데 중국의 YMTC는 한국 기업(300단 안팎)에 거의 육박하는 270단까지 이미 쫓아왔고, 400단 이상으로 단수를 높이는 데 필요한 기술까지 개발해 놓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일각에서는 머지않아 한중 간의 기술 수준이 역전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메모리가 아닌 파운드리 분야에서도 중국의 존재감은 급속히 커지고 있다. 중국의 최대 파운드리 업체 SMIC도 지난해 4분기 기준 6%대의 시장 점유율을 확보해 2위인 삼성전자를 바짝 뒤쫓고 있다. 행여라도 미국의 규제가 중국의 반도체 굴기에 제동을 걸어줄 것으로 기대한다면, 완전한 오산(誤算)이다. 1806년 나폴레옹이 영국을 겨냥해 내린 ‘대륙봉쇄령’ 이래로 수많은 경제 제재가 있었지만, 그것이 성공한 역사는 거의 없다. 대륙봉쇄령만 하더라도 단기적으로는 영국 경제에 타격을 줬지만 길게 보면 기술혁신을 통해 난관을 돌파하는 쪽으로 경제 주체들을 이끌어, 진행 중이던 영국의 산업혁명과 신시장 개척을 가속화하는 촉매제가 됐다. 망가진 쪽은 영국이 아니라 프랑스였다. 중국에 대한 미국의 반도체 규제도 결국은 대륙봉쇄령과 비슷한 전철을 밟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미 그런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다. 미국의 규제가 시행되기 전만 해도 중국 빅테크들은 시장에 나와 있는 질 좋고 저렴한 외산 제품을 사다 쓰면 그만이었기 때문에 절박함이 덜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길이 막혔기 때문에 기술 자립과 제품 국산화에 사활을 걸고 있고, 중국 정부는 이를 강력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지난해 SMIC, CXMT, 캠브리콘 등 중국의 주요 반도체 업체들이 사상 최대 매출을 올린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중국을 최대 시장으로 두고 있는 한국 반도체산업으로서는 큰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와중에 선두주자인 삼성전자가 성과급 갈등과 파업으로 ‘자충수’를 둔다면, 중국 반도체 업체들로서는 한 번 더 날개를 다는 셈이다. 지금까지 삼성이 수많은 고난과 도전을 극복하고 초일류 기업으로 도약해 온 비결은 끊임없는 ‘위기의식’이다. 하지만 개인 성과급을 위해 회사에 최대 100조 원에 이르는 피해를 안길 수 있는 파업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삼성전자 노조를 보면 위기의식의 상실을 넘고, ‘안주(安住)’를 넘어 ‘오만’의 경계에 들어섰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오랜 기업 흥망사에서 변함 없는 철칙은 오만 앞에 무너지지 않는 1등은 없다는 것이다. GM이 그랬고, 노키아가 그랬으며, 인텔이 그랬다. 삼성전자 노조는 이제라도 “중국에 발목을 잡히면 다시는 회복할 수 없다”는 이건희 회장의 두려움과 경고를 깊이 되새겨야 한다. 턱밑에서 칼을 갈고 있는 중국 ‘추격자’들의 존재를 두 눈 똑바로 뜨고 봐야 한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루이지애나에 사는 야만인들은 과일이 먹고 싶으면, 밑동을 베어 나무를 쓰러뜨린 뒤 열매를 딴다.” 1748년 출간된 몽테스키외의 저서 ‘법의 정신’에 나오는 구절이다. 전제 정치가 얼마나 파괴적 결과를 낳는지를 경고하기 위해 든 비유다. 하지만 그보다는 현재 한국에서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을 놓고 벌어지는 쟁탈전에, 이 비유가 더 잘 들어맞을 것으로 보인다. 성과급에 눈이 멀어 한국 경제의 성장과 고용, 수출과 경상수지, 국가 재정과 경제 안보의 ‘버팀목’인 반도체 생산라인을 파업으로 멈춰 세우겠다는 것이, 오늘 한 끼를 위해 나무 밑동을 베는 ‘야만’과 무엇이 다른가. 현재 삼성전자 노조는 반도체 사업에서 나오는 영업이익의 15%를 성과급으로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연봉의 최대 50%’로 되어있는 개별 상한도 풀라고 한다. 내년 성과급으로 40조 원이 넘는 돈을 챙기겠다는 심산인 셈이다. 작년 삼성전자의 연구개발(R&D)비 37조7000억 원보다도 많은 금액이다. 회사 측이 “업계 최고 대우” 약속과 함께 특별보상안까지 제시했지만, 노조는 파업을 기어이 강행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삼성전자 노조가 총파업에 들어가면 반도체 가동 중단에 따른 손실액이 하루에만 1조 원, 파업 장기화 시 영업이익이 최대 10조 원 감소할 수 있다는 추산이 나온다. 직접적인 손실도 크지만 ‘파업 리스크’로 인한 신뢰 손실과 브랜드 가치 훼손은 훨씬 더 아프다. 회사야 어찌 되건 내 몫만 많이 챙기면 된다는 노조의 이기주의적 행태는 ‘길 가던 나그네’까지 “내 몫 내놓으라”고 덤비게 만드는 ‘촌극’까지 낳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의 한 의원은 “반도체 호황은 특정 산업만의 성취가 아니라 여러 차례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과정에서 농축수산물 시장 개방이라는 막대한 부담을 감내해 온 농어민들의 희생이 축적된 결과”라며 농어민 환원 확대를 주장했다. 또 국회의원 재선 도전에 나선 진보당 상임대표는 ‘이익균점법’까지 들고나왔다. 문제는 메모리 수요가 꺾이는 날이 언젠가는 온다는 점이다. ‘사이클’이라는 말이 왜 있겠는가.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해 ‘반도체 굴기’에 나서고 있는 중국의 존재도 위협적이다. 천문학적인 설비투자를 해야 하는 반도체산업은 한발만 삐끗해도 ‘천 길 낭떠러지’다. 과거 메모리 시장을 석권했던 일본의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다. 흔히 반도체 하면 떠오르는 게 ‘클린룸’인데, 이 클린룸을 처음으로 ‘발명’한 곳이 일본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주력으로 삼고 있는 메모리 반도체의 경우 한때는 ‘일본 기업들의 독무대’였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세계 ‘반도체 톱10’의 1위부터 6위까지가 일본 기업이었다. D램만 따지면 세계 시장의 70% 이상을 일본 기업들이 장악했다. 그러나 지금은 메모리 시장에서 일본 기업들은 흔적조차 없다. 일본이 메모리 시장에서 몰락한 데는 미일반도체협정 등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신규 설비와 R&D에 천문학적인 자금을 쏟아부어야 하는 ‘투자 치킨게임’에서 제대로 응전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도체 경기가 좋을 때는 수익으로 ‘잔치’를 벌이고, 경기가 나쁠 때는 비용 절감을 하느라 투자를 뒷전으로 돌리다 보니 경쟁력을 완전히 상실했다는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충격적인 실적 부진에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 최고경영진이 연이어 ‘반성문’을 내고, 삼성전자의 미래에 의문을 품은 외국인 주식투자가들이 33일 연속 순매도 행진을 벌였던 게 불과 1년 반 전이다. 운 좋게 ‘AI 투자 붐’에 올라타 기사회생했다고 해서, 샴페인을 터뜨리고 있을 때인가. 메모리와 함께 반도체의 두 축이 돼야 할 파운드리의 경쟁력은 또 어떤가. 2021년 말 34%포인트였던 TSMC와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점유율 격차는 작년 말 65%포인트까지 벌어졌다. 삼성전자의 점유율은 고작 7%다. 이대론 희미한 반전의 불씨마저 사그라질 판이다. 대만 반도체 산업의 아버지로 불리는 모리스 창 TSMC 회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MS 어디에도 노조가 없습니다. 그 회사들의 성공에는 노조가 없다는 점이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이테크 기업의 회장과 CEO들은 제 말에 절대적으로 동의할 겁니다.” ‘자기 발등 도끼로 내리찍는’ 삼성전자 노조의 파업을 보면서 창 회장과 전 세계 하이테크 기업의 CEO들이 삼성의 미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할지 무척이나 궁금해지는 날들이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2024년 2월 카타르에서 열린 아시안컵 4강전은 한국 축구 치욕의 날이었다. 역대 최강의 전력을 자랑한다는 한국팀은 FIFA 랭킹 64계단 아래인 ‘약체’ 요르단을 상대로 말할 수 없는 졸전(拙戰)을 펼친 끝에 0-2로 완패했다. 경기 내용도 문제였지만 축구팬들의 분노를 더욱 키운 것은 경기 종료 직후 경기장과 이후 기자회견장에서 보인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의 ‘환한 웃음’이었다. 90초가량의 인터뷰에서 “너무 죄송하다”는 말을 5번이나 반복했던 손흥민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태도였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 미국 워싱턴 연방의회 의사당 앞에서 ‘해맑은’ 웃음과 함께 김민수 최고위원과 찍은 ‘인생샷’을 접한 보수 지지자들의 심정도 클린스만의 밝은 웃음을 마주해야 했던 축구팬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6·3 지방선거가 두 달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서 많은 여론조사 수치가 국민의힘의 기록적 패배를 예고하고 있다. 한국갤럽과 NBS의 조사에서 국민의힘은 2.5배가 넘는 격차로 더불어민주당에 절대적인 열세를 보이고 있다. ‘텃밭 중의 텃밭’이라고 할 수 있는 대구에서조차 누구를 후보로 세워도 김부겸 민주당 후보에게 크게 뒤진다는 여론조사가 연이어 나오고 있다. 당내 곳곳에서 ‘이대로 가다가는 14 대 2가 아니라 15 대 1로 질지 모른다’는 심각한 위기감이 감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당무를 내팽개치고 정해진 일정을 사흘이나 앞당겨 미국으로 달려가서 한 일이 ‘친윤(親尹)’ 최고위원과의 ‘브로맨스 연출’이라니, 보수의 미래를 걱정하는 유권자들로서는 속이 뒤집히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장 대표의 이번 방미에서 기괴했던 것은 사진 소동뿐만이 아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이회창 서청원 최병렬 박근혜 홍준표 이준석 등 많은 보수 야당의 대표가 공식 방미를 했다. 하지만 사실상 ‘본격 선거 국면’에 돌입한 상황에서 간 적은 한 번도 없다. 방미 시점과 직후 예정된 선거(대선, 총선, 지선)가 가장 근접했던 게 2002년 1월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의 방미인데, 이마저도 6·13 지방선거를 5개월이나 앞둔 시점이었다. 면담 대상자도 딕 체니 부통령, 콜린 파월 국무장관 등 거물들이었다. 장 대표는 15일(현지 시간) 특파원 간담회에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및 국무부 관계자들과도 만났다면서 “보안상 문제로 말씀드리기 어렵다”며 면담자 이름조차 명확히 밝히지 않았는데, 이제껏 전례가 없는 일이다. 장 대표는 16일 귀국편 비행기 탑승 수속 도중 국무부 측 연락을 받고 황급히 발길을 돌렸다고 하는데 현재로선 누구를 만났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설령 J D 밴스 부통령이나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이라 한들, 약속도 잡지 않은 채 운에 맡기듯 선거 국면에 열흘간 한국을 비우면서 미국으로 달려가는 것이 맞나. 조 그루터스 공화당 전국위원회 의장과 공화당 소속 대럴 아이사 하원의원도 마찬가지다. 그루터스 의장은 미국 내 부정선거론과 관련이 있는 인물이고, 아이사 의원은 쿠팡의 개인정보 유출 사건과 관련해 한국 정부의 대응을 비판했던 인물이다. 이들과의 만남이 지방선거에 무슨 도움이 되나. 이러니 당 안팎에서 ‘미국에 왜 갔는지 모르겠다’는 비판이 나오는 게 당연한 일이다. 장 대표는 미국으로 출발한 뒤 뒤늦게 올린 페이스북 메시지에서 “저는 어제 세계의 자유를 지키는 최전선 워싱턴으로 출발했다”고 했다. 클린스만이 대표팀 감독으로서의 책무를 내팽개치고 툭하면 외국으로 나가면서 했던 말이 “국가대표팀 감독이라면 국제적으로 활동하면서 국제 축구 트렌드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가 요르단전 참패였다. 궁색하기는 전자나 후자나 마찬가지다. 사실 저조한 당 지지율과 그간의 행적 때문에 이번 선거전에서 장 대표를 위한 공간이 많지 않았던 게 현실이지만, 이번 방미로 ‘전쟁 중 탈영한 최고사령관’ ‘상중에 가요방에 간 상주(喪主)’라는 당내 비판까지 마주하게 되면서 그가 설 자리는 훨씬 더 좁아졌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18일 후보 확정 직후 한 방송 인터뷰에서 장 대표의 방미에 대해 “후보들에게 짐이 되는 것”이라고 했고, 19일 동아일보 인터뷰에서는 “시간이 흐르면서 장동혁 지도부가 이제 시야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서울 외에 부산, 대구·경북도 지방선대위 구성을 추진 중이다. 사람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장 대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요르단전 패전 이후 클린스만의 모습에 자신을 투영해 보면 의외로 쉽게 자신의 처지, 그리고 이제부터 가야 할 길이 보일지 모른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트럼프를 이해하려면 로마의 폭군들을 봐야 한다’, ‘현대판 네로…’, ‘트럼프: 추악한 콤모두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로마의 폭군에 빗댔던 영미권 매체의 칼럼 제목들이다. 트럼프 1기부터 최근까지 이런 글이 끊이지 않는다. 물론 일각에서는 너무 나간 비유라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이란 전쟁을 보면서 칼리굴라의 ‘바다 전쟁’이 떠오르는 것만은 어쩔 도리가 없다. 수에토니우스의 ‘황제전’ 등에 따르면 칼리굴라는 브리타니아(영국) 원정을 명분으로 대군을 이끌고 갈리아(프랑스) 해안까지 진군했다. 그런데 칼리굴라는 도버 해협을 건너는 대신, 텅 빈 바다를 향해 전투태세를 취하게 했다가 갑자기 병사들에게 조개를 줍게 했다. 그리고 자신이 바다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승리했음을 일방적으로 선언한 뒤 전리품인 조개껍데기를 들고 로마로 ‘개선’했다고 한다. 정상적인 사고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기괴한 행태다. 그러나 황당함에 있어서는 트럼프의 이란 전쟁도 이에 못지않은 것 같다. 적과 아군을 가릴 것 없이 수많은 인명 피해를 부르는 전쟁은 무엇보다 명분과 대의가 중요하다. 또한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고 단기간에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전략-전술적 목표가 분명해야 한다. 하지만 이란 전쟁의 경우는 명분도, 목표도 분명치 않다. 개전 초기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전쟁의 목표로 이란 핵 위협 제거와 정권 교체를 들고나왔다. 이어 지난달 중순에는 목표를 군사적 무력화로 슬쩍 바꾸더니 최근에는 다시 석유 통제라는 이권 챙기기로 무게 중심을 옮기고 있다. 종전 시점을 놓고도 수시로 말이 바뀐다. 지난달 20일 “군사작전의 점진적 축소 방안을 고려한다”고 해놓고, 하루 뒤인 21일 “지금부터 48시간 내에 호르무즈 해협을 완전히 개방하라”며 최후통첩을 했다. 그러다가 시한 만료 직전인 23일에는 돌연 공격을 5일간 보류하라고 지시했고 이후 다시 기간을 10일 추가 연장했다. 이러다 보니 ‘사람은 바뀌어도 말은 안 바뀌는 이란, 사람은 그대로인데 말만 바뀌는 미국’이라는 풍자가 SNS 등에서 회자된다. 문제는 우리가 이 기괴한 전쟁의 최대 피해국 중 하나라는 것이다.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에 따른 공급망 쇼크는 유류와 LNG 등 에너지에만 그치지 않는다. 한국은 반도체 제조에서 빼놓을 수 없는 헬륨, 자동차·가전의 핵심인 알루미늄, 식량 생산에 필수적인 요소(尿素)의 상당 부분을 중동에 의존하고 있다. 나프타 공급 부족은 소비재 산업 전반에 걸쳐 심각한 파장을 부를 가능성이 크다. 한국으로선 이란 전쟁의 1차적인 쇼크에서 벗어나는 것이 시급한 과제지만, ‘이란 전쟁의 늪’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위기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지금과 같은 ‘초(超)연결사회’에서 온 나라가 위태로울 정도의 ‘공급망 위기’를 겪지 않기 위해 가장 주의를 기울여야 할 대목은 ‘단일실패지점(Single point of failure)’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단일실패지점이란 한 부분의 마비가 시스템 전체의 마비로 이어질 수 있는, 그 지점을 뜻한다. 우리에겐 이번 전쟁으로 존재가 확연히 드러난 호르무즈 해협이 대표적 예일 것이다. 심각한 점은 우리에게 단일실패지점이 호르무즈 해협 하나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수출입 물동량의 99%를 해상 운송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에는 인도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말라카 해협, 미중 해상 패권 경쟁의 최전선인 대만 해협과 남중국해도 잠재적 단일실패지점들이다. 또한 단일실패지점은 비단 지리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은 전기차와 스마트폰 첨단가전의 필수 소재인 희토류의 80%를 중국에 의존하고 있는데, 이 또한 미중 간 패권 경쟁의 전개 양상에 따라서는 우리에게 치명적인 급소가 될 수 있는 단일실패지점이다. 칼리굴라의 바다 전쟁은 황당하고 기괴했지만, 큰 피해를 낳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란 전쟁은 많은 인명 피해를 낳은 데다 세계 경제를 대혼돈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그런데도 트럼프 대통령은 이런 재앙적 결과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호르무즈 해협은 석유가 필요한 나라들이 알아서 관리하라는 식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는 아직 1020일이 남아 있다. 당분간 언제 어디에서 ‘제2, 제3의 호르무즈 봉쇄’가 펼쳐진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번 전쟁의 종전 여부와 상관없이, 곳곳에 도사린 단일실패지점을 해소하는 것은 우리 경제의 존망을 다투는 화급한 과제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진보 진영의 장외 스피커로 통하는 유시민 작가가 18일 한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쏟아낸 발언들이 더불어민주당 지지층에 큰 파장을 낳고 있다. 특히 그가 들고나온 한 장의 벤 다이어그램이 진보 진영의 담론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며, ‘수박 논쟁 시즌2’를 예고하고 있다. 유시민 작가가 내놓은 벤 다이어그램은 일견 단순해 보인다. A는 가치지향형 그룹, B는 이익지향형 그룹, C는 가치-이익을 둘 다 중시하는, A와 B의 교집합 그룹이다. 하지만 이 단순한 도식 안에는 무서운 정치적 ‘암수’가 도사리고 있다.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지난 9개월여간 진보 진영 내부의 주도권 경쟁은 ‘급격한 검찰개혁’과 ‘실용과 민생 등 안정적인 국정 운영’ 중 어느 것에 우선순위를 두느냐에 따라 ‘친청(친정청래) 대 친명(친이재명)’ ‘올드 이재명 대 뉴 이재명’의 구도를 형성해 왔다. 정청래 민주당 대표가 김어준-유시민의 지원 사격을 등에 업고 강행하려 했던 조국혁신당과의 합당 문제 같은 것들이 이런 구도를 확연히 드러낸 대표적인 충돌 지점들이었다. 하지만 유시민의 벤 다이어그램에 발을 딛는 순간 이런 구도는 흔적도 없이 해체된다. 우선 ‘순혈주의’가 두 집단을 가르는 새로운 구분선이 된다. 유시민 작가의 정의(定義)에 따르면, 가치를 중시하는 A그룹은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전 대통령부터 이재명 대통령까지 이어지는 진보 진영의 코어 지지층이다. 이른바 ‘적통’으로 자리매김된다. 이에 비해 B그룹은 출세나 선거 출마를 위해 대통령 주변에 새롭게 모여든 사람들로 그려진다. ‘뉴 이재명’ 그룹은 진보 진영 내에서 제대로 된 ‘족보’가 없는 뜨내기 기회주의자들로 비하되는 셈이다. 여기에 도덕적 우월주의 잣대가 하나 더 추가된다. 유 작가의 분류법에 따르면 A그룹은 자기 행동을 결정할 때 가치(올바름)에 기반을 두는 사람들이고, B그룹은 이익에 중점을 두는 사람들이다. A그룹은 이재명 대통령이 잘못돼도 떠나지 않을 충심의 아이콘이고, B그룹은 “겨울이 오면 제일 먼저 떠나고 돌 던질” 배신의 아이콘으로 그려진다. 마치 유교에서 말하는 군자와 소인배의 대비를 보는 듯하다. 여기에서 조금만 시야를 넓히면 유 작가가 ABC 벤 다이어그램을 통해 짜놓은 판은 조선 후기 예송(禮訟)논쟁과 놀랄 정도로 닮은 점이 많다. 그가 말하는 ‘가치’에 ‘검찰개혁’ 대신 ‘예’를 놓고, 정청래-유시민-김어준의 자리에 ‘서인(西人)-노론(老論)’을, ‘뉴 이재명’ 또는 ‘친명’ 그룹의 자리에 ‘남인(南人)’이나 ‘서인-소론(少論)’을 놓으면 된다. 노론의 영수로 예학의 대가였던 우암 송시열은 ‘주자학’과 ‘예’에 대한 독점적 해석권으로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했고, ‘산림(山林)’에 앉아서도 천하를 호령했다. “주자의 책은 한 글자도 고칠 수 없다”며 주자학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고, 반대파들을 ‘사문난적(유학을 어지럽히는 도적이라는 뜻)’으로 몰아 제거했다. 물론 송시열도 종국에는 당쟁의 희생자가 됐고, 그가 추구한 것이 유교적 이상정치였다는 점도 간과해선 안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결과적으로는 모두가 예송논쟁의 피해자가 된 셈이다. 검찰개혁에 대한 유시민의 교조주의적 강경론도 주자학이나 예학에 대한 송시열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수사-기소 분리’라는 원칙에 단 하나도 예외가 있어선 안 된다. 부작용이 생기면 어떡하느냐고? “나중에 보완하면 돼요”라는 것이 유 작가가 올해 2월 초 김어준의 유튜브에 출연해서 내놓은 답이다. 급진적인 변화로 인해 나타나게 될 형사사법의 혼선이나, 그 과정에서 국민들이 입게 될 피해는 아예 관심 밖으로 보인다. 유시민의 벤 다이어그램 어디에도 정치와 무관한 국민이나 민생이 설 자리는 잘 보이지 않는다. 예송논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의 지배계층이 예송논쟁에 빠져 있던 17세기 후반은 민생이 최악의 도탄에 빠져 있던 시기다. 가뭄, 홍수, 전염병과 같은 재난이 끊이지 않았고 전례 없는 대기근이 팔도를 휩쓸었다. 그런데도 사대부들은 백성의 고통을 전혀 돌보지 않고,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얼마 동안 입느냐를 놓고 서로 죽고 죽이는 권력 다툼에만 몰두했다. 이재명 정부는 이를 ‘반면교사’로 삼을 필요가 있다. 유시민의 벤 다이어그램과 강경 지지층의 공세에 발목을 잡혀 검찰개혁이 국민의 편익과 눈높이에서 멀어지거나, 국정 기조가 실용과 통합 대신 배제의 문법으로 끌려 들어가선 안 된다. 미국-이란 전쟁으로 ‘고유가-고환율-저성장’의 벼랑 끝에 선 민생이 정치투쟁의 뒷전으로 밀리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할 것이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만약 윤석열 대통령이 계엄을 하지 않고 정치를 계속했더라도 주가는 5,000∼6,000을 찍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가 7일 부산 구포시장을 방문해서 한 말이다. 더불어민주당에서는 당장 “그건 마치 ‘학창 시절 안 놀았으면 수능 만점을 받았을 것’이라는 주장” 등의 반박이 쏟아져 나왔다. “박정희 대통령이 없었더라도 한국은 고도성장을 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놓고 과거 벌어졌던 보수-진보 간의 논쟁을 연상시킨다. 보수-진보 간의 공수만 바뀌었을 뿐이다. 한 전 대표의 앞뒤 발언을 자세히 보면, 그가 말하고자 했던 요점은 세 가지로 보인다. 첫째 최근의 주가 상승은 현 정부의 정책 덕분이 아니라 반도체 슈퍼 사이클 덕분이라는 것, 둘째 기록적으로 높은 주가지수에도 서민과 시장 상인의 삶은 나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보수 재건’을 통해 서민들의 삶과 체감 경기를 개선하겠다는 것이다. 일단 주가 상승 원인의 경우 수치상 한 전 대표의 주장에 아주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재명 대통령 취임 당일 2,770.84였던 코스피 지수는 올해 2월 25일 상승률 119%를 기록하며 6,000을 처음 돌파했다. 이 기간 동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주가는 각각 252%와 368%씩 올랐다. 코스피 전체 상승분의 절반 이상을 두 기업의 주가가 견인했다. ‘인공지능(AI) 혁명’으로 인한 폭발적인 반도체 수요를 빼놓고 지금의 높은 주가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엄연한 실체로서 오랫동안 우리 주식시장을 억눌러 왔던 현실에서, 반도체 슈퍼 사이클만으로 ‘코스피 6,000’을 모두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높은 주가에도 서민경제가 어렵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한국은행은 올해 경제성장률을 전망하면서 “부문 간 회복 격차가 커 체감경기와는 괴리가 클 것”이라고 했다. 자영업 경기의 ‘바로미터’로 꼽히는 음식업 사업자 수는 21개월 연속 감소세다. 지난해 4분기 적자 가구의 비중은 25%로 매해 4분기 기준 2019년 이후 6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그러나 ‘윤 전 대통령이 계엄을 하지 않고 정치를 계속했더라도 주가가 5,000∼6,000을 찍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한 전 대표의 의견에는 동의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다. 주가에 영향을 주는 것은 비단 기업 실적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경영 성적이 아무리 좋아도 성장률이나 물가와 같은 거시경제지표나 집권 세력의 국정 운영 능력, 그 나라의 비전, 정치적 안정성 등이 받쳐 주지 않으면 주가가 오르는 데는 한계가 있다. 과연 윤 전 대통령은, 불법 계엄만 빼놓으면, 한국이 나아갈 국가적 비전을 제시하고 안정적인 국정 운영 능력을 보였던가. 아니다. 취임 전부터 청와대 이전을 무리하게 강행한 것을 시작으로, 근로시간 개혁, 연구개발(R&D) 예산 삭감, 의대 증원 등을 충분한 검토와 소통 없이 밀어붙이는 바람에 하는 일마다 브레이크가 걸렸다. 국가적 규모의 대형 이벤트나 국책 사업도 제대로 된 게 드물다. 2030년 엑스포 유치를 호언했지만 투표 결과 2차 투표에는 가보지도 못한 채 1차 투표에서 119표 대 29표라는 참패를 당했다. “삼성전자 시가총액 5개의 가치가 있다”며 대대적으로 홍보를 한 ‘대왕고래 프로젝트’는 윤 전 대통령의 발표 8개월 만에 “전혀 경제성이 없다”는 판정이 나왔다. 윤 전 대통령은 국정 실패의 원인으로 야당의 발목 잡기를 지목해 왔다. 물론 그런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다른 누구도 아닌 윤 전 대통령 스스로 만든 것이었다. 각종 여론조사와 보선 등에서 준엄한 민심의 경고가 있었지만 윤 전 대통령은 독선적인 국정 운영을 고집해 2024년 총선에서 민주당에 압도적인 과반 의석을 안겨 줬다. ‘윤 전 대통령이 계속 정치를 했으면 주가가 6,000 갈 수 있었을지’를 따지는 것은 객관적인 검증이 불가능한 ‘가정(假定)’의 영역이다. 한 전 대표가 그렇게 믿는 것은 자유다. 다만 꼭 짚어 넘어가야 할 점은 한 전 대표가 ‘보수 재건’을 말하면서 이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이다. ‘보수 재건’은 윤석열 정부의 실패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성찰 위에서 논해야만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윤석열 정부의 실정(失政)을 지켜본 국민을 납득시킬 수 없다. ‘윤 전 대통령도 계엄만 안 했으면 주가도 올리고 서민경제도 살렸을 것’이라는 식의 논리라면 한 전 대표가 비판해 온 ‘윤 어게인’과 뭐가 얼마나 다른지 묻고 싶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윤석열 전 대통령과의 ‘절연’ 대신 ‘동행’을 선택했다. ‘절윤(絶尹)’을 요구하는 당 안팎의 목소리에 대해서는 ‘오히려 너희들이 절연 대상’이라고 되받아쳐, 보수의 미래를 걱정하는 모두를 아연케 했다. 6·3 지방선거가 불과 100일 남은 시점에서다. 장 대표가 그간 감질나게 언급해 온 ‘나만의 타임 스케줄과 계획’이 마침내 전모를 드러낸 형국이다. 올 초 기자회견 때만 해도 “과거 일들은 사법부의 공정한 판단과 역사의 평가에 맡겨두고 계엄과 탄핵의 강을 건너 미래로 나아가겠다”고 했던 장 대표다. 비록 반쪽짜리 사과였지만 “비상계엄은 상황에 맞지 않는 잘못된 수단이었다”고도 했었다. 그런데 다시 태도를 바꿔 “1심 판결은 12·3이 내란이라는 충분한 근거와 설명을 내놓지 못했다” “무죄 추정의 원칙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적용되어야 한다”며 윤 전 대통령을 비호하고 나선 것이다. 당 전체를 미래는 고사하고 더 깊은 ‘내란의 늪’ 속으로 끌고 들어가겠다는 선언인 셈이다. 당 안팎에서 “이제 선거는 해보나 마나”라는 비명이 터져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런데 장 대표는 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여러 가지 분석과 해설이 나온다. 첫째, 장 대표가 강성우파 유튜버들의 ‘가스라이팅’에 포획돼 합리적인 판단 능력을 상실했을 가능성이다. 장 대표는 유튜버 고성국 씨 등이 “걸림돌을 제거하라” “배신자를 축출하라”며 반당권파에 대한 제명을 요구하자, 주저 없이 한동훈 전 대표 등에 대한 제명으로 응답했다. 유튜버 전한길 씨가 이달 9일 “윤(尹) 어게인 세력과 같이 갈 수 없다는 것이 장 대표의 공식 입장인지 3일 안에 답하라”고 압박하자, 바로 다음 날 한 언론 인터뷰에서 “절연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분열의 시작”이라고 ‘순응’했다. 한국의 적통 보수정당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지 기가 찰 노릇이지만, 최근 벌어지는 여러 일을 보면 ‘가스라이팅 가설’에 적잖이 수긍이 간다. 둘째, 나름으로는 선거 전략일 가능성이다. 지방선거는 투표율이 낮기 때문에 충성도가 높은 보수든 진보든 ‘집토끼’를 많이 불러내는 쪽이 선거에 이긴다고 보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지지율 격차가 크지 않을 때나 통하는 이야기다. 한국갤럽의 최근 조사를 기준으로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은 44% 대 22%, 정확히 2배 차이다. 이처럼 큰 격차를 지지층 외연 확대 없이 강성 지지층만 투표장으로 불러내 극복할 수 있겠나. 4 대 2로 지고 있는 축구 경기를 ‘텐 백(10-back) 전원 수비 전술’로 뒤집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황당한 생각이다. 장 대표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런 생각을 진지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셋째, 장 대표가 6·3 지선의 승패 따위에는 아예 관심이 없을 가능성이다. 승산이 높지 않은 선거에 승부를 걸기보다는, 선거에 지더라도 당권만 지키면 된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선거 승부처인 중도층이 싫어하는 언행만 골라 하는 장 대표이고 보면 가장 설득력 있는 가설인 셈이다. 장 대표 체제 출범 후 국민의힘 당원이 75만 명에서 110만 명으로 늘었다고 하니, 장 대표가 단꿈을 꿀 만도 하다. 하지만 이런 ‘계산’이 과연 현실에서 통할지는 의문이다. 2000년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7번의 총선과 6번의 지선이 있었다. 매번 선거 양상도 다르고 결과도 달랐지만, 공통점이 한 가지 있다. 선거에 패배한 당의 리더는 자의든 타의든 대표직을 내놨다는 것이다. 보수 정당 사례만 봐도 2010년 지선의 정몽준, 2016년 총선의 김무성, 2018년 지선의 홍준표, 2020년 총선의 황교안, 2024년 총선의 한동훈이 모두 그랬다. 일단 사퇴 후 전당대회를 통한 대표 복귀? 물론 꿈꿀 수는 있다. 그러나 막상 선거 결과가 나왔을 때, 당권 장악이라는 사리사욕을 위해 지선을 통째로 제물로 바친 리더를 다수 당원이 다시 선택할까. 설령 받아들인다 해도 그런 리더를 앞세운 정당이 과연 얼마나 존속할 수 있을까. 그래도 장 대표가 ‘사퇴 후 대표 복귀’ 꿈을 못 버리겠다면, 황교안 전 미래통합당 대표가 걸었던 전철을 되새겨 보기 바란다. 황 전 대표는 사퇴 후 2년 반 만에 당권에 도전했지만, 결과는 4위 낙선이었다. 지금은 중앙 정치 무대에서 아무 의미 없는 존재가 됐다. 장 대표는 작년 11월 “우리가 황교안이다”라고 외친 적이 있는데, 그 외침은 자신의 정치적 미래에 대한 ‘무의식적 예언’이 아니었을까. 장 대표의 ‘윤 어게인 폭주’를 보면서 지울 수 없는 느낌이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쿠팡은 자랑스러운 한국 기업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설립돼 성장했고, 사업의 99% 이상을 한국 내에서 운영합니다.” 2019년 7월 일본이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에 나섰을 때의 일이다. 당시 한국 소비자들 사이에서는 대대적인 일제 불매운동이 벌어졌고, 그 타깃에는 쿠팡도 포함돼 있었다. 일본의 소프트뱅크로부터 거액 투자를 받았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때 쿠팡이 들고나온 것이 앞서 언급한 ‘쿠팡=한국 기업론’이었다. 2021년 3월 미국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할 때까지만 해도 쿠팡은 ‘한국 기업’임을 애써 강조했다. 창업자인 김범석 쿠팡Inc 의장은 상장 당일 언론 인터뷰에서 쿠팡의 성공을 “한강의 기적의 일부”라고까지 했다. 그러나 개인정보 유출 사태 이후 김 의장의 언행은 180도 달라졌다. 김 의장 지갑으로 들어가는 돈 90%가 한국 소비자들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은 철저히 외면한 채, 완전한 ‘외국 기업인’ 행세다. 한국 국회의 출석 요구를 묵살하면서 그가 내세운 명분도 “글로벌 기업 CEO”라는 것이었다. 한국 소비자들에 대한 태도도 무책임하기 그지없다. 쿠팡 사태가 시작된 지 80일이 넘었지만, 3400만 피해자 앞에 얼굴 한 번 내밀지 않고 있다. 사과인지 변명인지 헷갈리는 서면 사과문 한 장 내놓은 것이 전부다. 이런 와중에 한국을 향한 미국 정·관계의 압박은 날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지난달에는 J D 밴스 부통령이 김민석 국무총리에게 “쿠팡 등 ‘미국 기술 기업’들에 불이익을 주는 조치를 하지 말라”고 했다는 외신 보도가 나왔다. 이달 5일에는 미국 하원 짐 조던 법사위원장과 스콧 피츠제럴드 의원이 쿠팡에 대한 한국 정부의 ‘표적 공격’에 대해 직접 조사하겠다며 청문회 개최를 예고하고 나섰다. 조던 위원장의 정책·전략 담당 수석을 지낸 타일러 그림이 현재 쿠팡의 로비스트로 등록돼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배경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무엇이 김범석을 이렇게 오만하게 만든 것일까. 첫째, 한국 정치가 만들어준 ‘기울어진 운동장’ 덕에 확보한 압도적 시장지배력이다. 상장 직전인 2020년만 해도 쿠팡의 연 매출액은 대형마트 3사의 절반 수준이었다. 하지만 불과 4년 만에 쿠팡의 매출은 대형마트 3사의 전체 매출을 추월했다. 심야·휴일 영업을 규제하는 유통산업발전법에 대형마트들이 발이 묶여 있는 동안 쿠팡이 사실상 ‘노 마크’로 시장을 싹쓸이 해온 결과다. 몸집이 커질 대로 커진 ‘공룡’ 쿠팡에 있어서 한국 정부는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니다. 둘째, 자국 기업에는 가혹하고 외국 기업에는 관대한 한국의 ‘자학적 규제’ 때문이다. 한국에서 자산 5조 원을 넘는 기업의 오너는 공정거래법상 ‘총수’로 지정돼 다양한 규제를 받는다. 하지만 2021년 쿠팡의 자산이 5조 원을 돌파했을 때, 공정거래위원회는 김 의장이 미국 시민권자라는 이유를 들어 그를 ‘총수’로 지정하지 않았다. ‘외국인’이라는 방패 뒤에 숨으면 ‘규제 칼날’이 닿지 않는다는 것을 공정위가 친절하게 알려준 셈이다. 끝으로 쿠팡이 그동안 워싱턴 정가에 뿌려놓은 돈에 대한 믿음일 것이다. 쿠팡은 2021년 뉴욕 증시 상장 이후 미국 정·관계 로비에만 150억 원이 넘는 돈을 뿌렸다. 그 약발은 우리가 익히 보다시피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는 중이다. 이런 점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미국 정부와 정치권을 앞세운 그의 고압적 대응 방식이 바뀔 가능성은 극히 희박해 보인다. 문제는 이제부터 우리 정부의 대응이다. 관세 문제가 가시처럼 목에 걸려 있는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오버’를 하게 되면 국익에 치명적인 해(害)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고 김범석의 노림수대로 따라주는 것은 국가의 위신이나 자존심상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정부와 정치권이 쓸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대응 방안은 시대착오적이거나 자학적인 규제로 한국 기업들이 받아 왔던 역차별을 일소하는 것이다. 쿠팡을 통제 불능의 ‘괴물’로 키운 대형마트 규제는 한시라도 빨리 폐지해야 한다. 당정이 8일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에 뜻을 모았다고 하니, 최소한 우리 기업들이 ‘미국 기업’ 쿠팡과 동등한 위치에서 경쟁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글로벌 경쟁 시대에 맞지 않는 대기업 집단 규제 등도 원점에서 다시 손볼 때가 됐다. 미국 정·관계가 쿠팡과 관련해서 한국 정부에 쏟아내는 불만의 핵심은 ‘미국 기업’을 차별대우 했다는 것이다. 한국 기업들의 손발을 꽁꽁 묶어 ‘미국 기업’ 좋은 일 해주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는, 기가 찰 일이 또 생겨선 안 된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칼 쓰는 종족하고 활 쓰는 종족하고 싸워서 칼 쓰는 종족이 이겼다고 해도 모두가 칼만 쓸 수는 없잖아요. 필요하면 활도 쓰고, 칼도 쓰고, 창도 쓰고 하는 거죠.” 21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이혜훈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에 대한 지명을 철회할 것인지 질문을 받고 한 말이다. 웬만하면 ‘탕평 인사’를 관철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재명 대통령은 25일 결국 이 후보자에 대한 지명을 철회했다. 당초 일요일까지는 여론을 지켜본다는 분위기가 강했지만, 싸늘한 민심에 하루라도 빨리 ‘손절’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국민 눈높이를 감안하면 지명 철회는 너무나 당연한 결정이 아닐 수 없다. 이 후보자는 국회의원 시절이던 2019년 ‘조국 사태’ 당시 조국 법무부 장관 지명 및 임명 강행은 부적절하다는 의견을 여러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피력했다. 이때 이 후보자가 내세운 기준은 두 가지다. 첫째는 ‘상식과 국민 정서’, 둘째가 ‘사익보다 공익을 우선하는 태도’였다. 하지만 이 후보는 정작 자신에 대한 청문회에서는 자신이 제시했던 원칙에 정면으로 위배하는 태도로 일관했다. 제기된 의혹의 핵심이 ‘철저하게 공익을 외면하고 사익을 우선해 온 가족들의 삶’이었는데도, 그것을 구차한 변명과 강변으로 시종 정당화하려고 했다. 먼저 가장 큰 쟁점이었던 원펜타스 부정 청약 의혹의 경우 이 후보자의 배우자가 청약 당시 장남을 부양가족에 올린 것이 당첨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런데 당시 장남은 세종시에서 전셋집까지 얻어 직장 생활을 했고, 용산에는 신혼집까지 얻어두고 있었다. 이런 경우라면 장남은 세종이나 용산에 주민등록을 두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도 이 후보자는 “장남이 당시 결혼식은 올렸지만 사실상 파경 상태여서…”, “식사나 세탁을 해결하는 데 익숙하지 않아서…”와 같은 상식 밖의 해명을 했다. 이 후보자 장남의 ‘할아버지 훈장 찬스’도 어처구니가 없다. 이 후보자는 청문회에서 장남이 2010학년도 연세대 수시 입시에서 사회기여자 전형에 ‘국위선양자 자격’으로 응시해서 경제학과에 입학했다고 밝혔다. 시아버지가 내무장관을 지낸 공로로 청조근정훈장을 받아서 이 전형의 자격을 얻었다는 것인데, 내무장관 업무와 국위 선양이 대체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더구나 우리 헌법 11조는 ‘훈장 등의 영전은 이를 받은 자에게만 효력이 있고, 어떠한 특권도 이에 따르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당시 학교 측이 갖고 있었던 자체 기준에 따른 것이어서 자신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는 태도로 얼버무릴 일이 아니다. 지명 철회는 이 후보자의 ‘자업자득’인 것이다. 그러나 지명 철회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다. 이재명 정부의 허술한 인사 검증 시스템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이 대통령은 앞서 기자회견에서 이 후보자의 의혹과 관련해서, “그쪽 진영에서 공천을 무려 5번을 받아서 3번씩이나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아무런 문제가 제기되지 않았던 분이잖아요”라고 했다. 이 후보자의 무성한 의혹의 책임을 ‘정치적 배신’ 프레임에 사로잡혀 협치를 외면하는 야당 탓으로 돌린 셈이다. 하지만 부동산 문제와 위장 전출입, 자녀 입시 문제는 인사청문회의 단골 메뉴였다. 조금만 진지하게 검증을 했더라면 부정 청약과 ‘할아버지 훈장 찬스’ 의혹은 충분히 걸러낼 수 있었던 사안들이다. 어떻게 세종시에서 번듯한 직장의 정규직으로 근무하면서 결혼식까지 올린 성인이 전세 사는 부모의 피부양자로 올라 있는 것을 그냥 보아 넘긴다는 말인가. 장남 입학의 경우, 이 후보자는 처음에 ‘다자녀 전형’이라고 했는데 학교에 전화 한 통만 했어도 그해에는 이런 전형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연후에 신문 기사만 검색했어도 그해 YS 손자가 ‘국위선양자’ 자격으로 연세대에 입학해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제대로 된 인사 검증 시스템이라면 이 후보자가 혹여라도 이런 논란을 피하려고 일부러 ‘다자녀 전형’이라고 쓴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따져 묻는 작업까지 했어야 했다. 이재명 정부의 인사 검증 시스템은 작년 7월 강선우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가 낙마했을 때도 거센 부실 논란에 휩싸인 적이 있다. 인사청문회 제도 도입 이후 ‘처음으로 현역 의원 불패 신화’가 깨지면서 큰 후폭풍이 일었던 사안이다. 그런데도 인사 검증 시스템은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다. 탕평 인사는 중요하다. 그러나 인사청문회도 통과하지 못할 정도로 도덕성과 자질이 떨어지는 후보자에게까지 박수를 보낼 만큼 국민의 눈높이가 녹록하지는 않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19세기 중후반 미국의 서부는 건맨과 무법자들의 세상이었다. ‘법’보다 ‘주먹(Lynch Law)’이 가깝던 이 시절을 대표하는 상징물 중 하나로 ‘콜트 싱글 액션 아미’란 게 있다. 서부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리볼버형 권총이다. 이 권총에는 공식 상표명보다 더 유명한 별칭이 있다. ‘피스메이커(Peacemaker)’다. 제조사 콜트가 만든 ‘마케팅 용어’인데, 야만과 폭력을 상징하는 물건에 ‘피스메이커’라니…. 이런 반어(反語)와 역설이 또 있을까. 어쩌면 ‘피스메이커’로 불리기를 좋아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최근 행보를 보면서도 비슷한 착란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트럼프 대통령은 새해 벽두나 다름없는 지난 3일 특수부대를 투입해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마치 자기 집 다락에 있는 물건 꺼내오듯, 데리고 나왔다. 우리가 알던 국제법 상식으로는 상상할 수 없던 일이다. 트럼프 대통령 스스로도 국제법이 안중에 없다는 사실을 공언했다. 8일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내겐 국제법이 필요 없다”고 했다. ‘국제적 사안에서 대통령의 권한을 제한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는 “하나 있다. 나 자신의 도덕성”이라고 했다. 베네수엘라 다음은 그린란드다. 트럼프 대통령은 9일 백악관에서 열린 한 회의에서 그린란드 확보 문제를 놓고 “난 합의를 타결하고 싶고 그게 쉬운 방식이지만, 우리가 쉬운 방식으로 하지 않으면 힘든 방식으로 하겠다”고 했다. 그린란드를 자치령으로 두고 있는 덴마크의 처지에서는 ‘피스메이커’의 총구가 관자놀이에 와서 닿은 느낌일 것이다. 사정이 딱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덴마크를 동정하고 있을 처지는 아니다. 공공연히 말로 옮겼느냐, 옮기지 않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내겐 국제법이 필요 없다’는 태도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전혀 다를 게 없다. ‘무법자 건맨’들의 시대에 총 한 자루 없는 ‘약자의 정의’만큼 무망하고 무의미한 것은 없다. 중국과 러시아를 등에 업고 핵보유국 행세를 하려는 북한을 상대하면서 G2 갈등의 틈바구니에서 ‘생존곡예’를 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새로운 국제 질서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정확히 이해하고 그에 맞는 대비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자면 얼어붙은 빙하의 땅 그린란드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부터 정확히 알아야 한다. 미국이 무리를 해서라도 그린란드를 손에 넣으려는 것은 미-중-러 간 북극해 패권 다툼이 가장 큰 원인이다. 북극해는 불과 4, 5년 전까지만 해도 일체의 정치적 갈등과 군사적 긴장이 배제된 곳으로 만들자는 국제적 합의(일명 ‘북극예외주의’)가 통용되던 ‘평화의 바다’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미국의 위협과 압박에 직면한 덴마크의 국방정보국은 지난해 12월 내놓은 정보보고서에서 이렇게 진단하고 있다.“북극에서 러시아 중국 미국 등 강대국 간의 경쟁이 점점 더 가열되고 있다. 북극의 전략적 중요성이 커지고 있으며, 미국의 안보 및 전략적 초점이 북극으로 쏠림에 따라 이러한 흐름이 더 가속화할 것이다.”“러시아는 10년 넘게 북극의 군사 인프라를 꾸준히 확장하고 현대화해 왔다.”“중국의 장기적 목표는 빙하 아래 미사일 발사용 잠수함을 배치해 러시아 및 미국과 동일한 핵 보복 능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북극해의 이런 지정학을 염두에 둔다면 그린란드가 미국에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전략적 요충지인 것은 맞다. 북극해와 이를 둘러싼 나라들의 해안선이 맞닿는 전체 길이를 100이라고 치면, 러시아가 53.2%를 점하는 반면 미국(알래스카)은 3.8%에 불과하다. 미국으로선 영토의 대부분이 북극권에 들어 있는 그린란드가 탐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점을 감안해도 덴마크는 미국의 85년 동맹이다. 동맹을 상대로 노골적인 협박에 가까운 “힘든 방식” 운운하는 것이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더구나 미국은 그린란드에 미군기지 사용권을 이미 안전하게 확보하고 있다. 그럼에도 “심리적으로 필요해서” 굳이 소유를 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정도면 ‘거래적 동맹’은 ‘돈로주의’의 선한 쪽 얼굴에 속할 수도 있다. 한국으로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한미 동맹을 굳건히 하기 위한 노력을 조금도 소홀히 해선 안 되겠지만, ‘돈로주의’가 어떤 얼굴을 하고 다가온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준비는 해둘 필요가 있다. 또한 북극해의 전략적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는 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우선순위에서 한반도와 북핵이 밀려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대비책도 시급히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29일 0시 청와대에 대통령을 상징하는 봉황기가 다시 걸렸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단 하루도 들어가지 않겠다”며 취임과 함께 용산으로 대통령 집무실을 옮긴 지 3년 7개월 만이다.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 윤 전 대통령이 2개월에 불과한 짧은 기간에 무리하게 대통령실 이전을 강행하면서 내세웠던 논리다. 우리 정치의 오랜 폐단으로 지적돼 온 ‘제왕적 대통령제’를 탈피하기 위해서는 ‘권위주의와 불통’의 공간인 청와대를 반드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윤 전 대통령은 용산 대통령실을 미국 백악관처럼 개방적인 공간으로 만들어 최고의 지성들과 공부하고 도시락을 시켜 먹으며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회의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이 실제 보여준 모습은 너무도 딴판이었다. ‘최고의 지성’이 앉아야 할 자리에는 ‘충성파 군인’들이 앉았고, ‘도시락’이 있어야 할 식탁에는 ‘폭탄주 세트’가 놓였다. ‘용산의 밤’은 지성의 언어 대신 “총으로 쏴죽이겠다”처럼 원초적인 분노의 배설로 채워졌다. ‘용산의 낮’은 낮대로 1시간 중 59분을 윤 전 대통령 혼자 떠드는 일방통행 회의가 ‘뉴노멀’이 되면서 ‘의대 2000명 증원’과 ‘R&D 예산 삭감’과 같은 정책 참사가 줄을 이었다. 이처럼 용산 이전으로 인한 긍정적 효과는 전무(全無)하다시피 했던 반면 부정적 효과와 소모비용은 막대했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용산 이전에는 국방부 이사, 경호부대 이전, 외교부 공관 리모델링 등으로 832억 원의 예산이 투입됐다. 이 과정을 다시 거꾸로 되돌리는 데는 추가로 500억 원의 예산이 필요하다고 한다. 500억 원은 청와대 복귀와 국방부-합참 원상 복귀에만 드는 돈으로, 앞으로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일각에서는 이전 비용이 1조 원을 넘을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지만, 용산 이전으로 인한 정치·사회적 후폭풍과 나비효과까지 고려한다면 이마저도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따름이다. 조은석 내란 특검은 15일 최종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대통령이 군 지휘부와 함께 군 기지 내에 위치하게 되었고, 대통령과 경호처장 지척에 국방부 장관과 합참의장 공관 등 주요 군 지휘부의 공관이 위치함에 따라 대통령과 군이 밀착되는 여건이 조성되었다”고 했다. 즉, ‘용산 이전’이 윤 전 대통령이 ‘망상적 계엄’으로 발을 내딛는 데 있어서 ‘나비의 날갯짓’이 됐다는 이야기다. 윤석열 정권의 최대 리스크였던 김건희 비리의 상당 부분도 졸속 이전과 관련성이 크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한남동 관저에 입주하기 전까지 약 반년 동안을 아크로비스타 사저에서 머물렀는데, 최재영 목사의 디올백, 로봇개 사업자의 바쉐론 콘스탄틴 시계, 통일교의 샤넬백 등이 이 시기에 아크로비스타 지하 코바나컨텐츠 사무실에서 건네진 것들이다. 또한 같은 시기 진행된 한남동 관저 공사도 유례없는 특혜와 불법으로 얼룩졌다. 대통령 관저라는 특급 보안시설 공사를 종합건설 면허도 없는 영세 인테리어업체가 수주한 것은, 김 여사와 이 업체 대표 간 얽히고설킨 인연을 빼놓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시대착오적 계엄과 대통령 가족의 비리 연루 등으로 인한 국격 추락과 사회적 갈등 비용은 추산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이다. 우리의 근세사에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는 수치스러운 사건이 있었다. 1895년 일본의 외교관 군인 낭인 자객들이 경복궁에 난입해 명성황후를 시해하자, 그 이듬해 신변에 불안을 느낀 고종이 몰래 궁을 떠나 ‘아관’, 즉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던 사건이다. ‘파천’은 원래 임금이 난리를 피해 머무는 장소를 옮기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대통령실 용산 이전의 경우 윤 전 대통령이 적극적 의지로 벌인 일이기는 하지만, 그 무모함과 조급증으로 인해 빚어진 혼란상과 부작용의 연쇄효과는 ‘파천’에 견주고도 남을 것이다. 그 3년 7개월을 잃어버린 세월로 치부하기에는 우리가 치른 국가적 비용이 너무나 크다. 그 실패를 두고두고 반면교사로 삼아 경계하는 것만이 그 손실을 조금이라도 만회하는 길일 것이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사실(史實)’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무속 논란을 포함해 용산 이전의 진정한 동기와 장소 선정 과정, 공사업체 선정 경위와 특혜, 이에 대한 봐주기 감사 논란 등 아직 속 시원히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너무 많다. 이런 의혹들을 끝까지 규명해 ‘사초(史草)’로 남기는 것이 ‘용산파천’ 같은 흑역사를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게 하는 첫걸음이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을 떠올려 보자. 4수생 기우(최우식 분)가 과외 알바 면접을 위해 집을 나선다. 자신을 대학생으로 속이기 위해 위조된 재학증명서를 손에 든 기우가 아버지 기택(송강호 분)에게 말한다. “아버지, 전 이게 위조나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 내년에 이 대학 꼭 갈 거거든요.” 기택이 감탄한다. “오∼,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기택-기우 부자보다 더 ‘계획’에 진심인 사람이 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다. “나만의 타임 스케줄과 ‘계획’을 갖고 가고 있다. 제가 생각했던 거에서 크게 이탈하지 않고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12월 6일) “즉흥적인 게 아니라 사전에 ‘계획’해서 한 발언이다.”(11월 13일) “이번 계엄에도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3월 1일) 먼저 12월 6일 발언은 장 대표가 ‘멸콩TV’라는 한 유튜브 채널에 나와서 한 말이다. 12·3 비상계엄 1년을 맞아 ‘윤 어게인’ 세력과 단절을 선언하고 대국민 사과를 하라는 요구와 주문이 여기저기서 쏟아졌지만 장 대표는 철저히 외면했다. 그냥 외면한 정도가 아니라, “12·3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고 강변하기까지 했다. ‘내가 윤석열’이라는 외침이나 다름없었다. 이에 대한 비판이 커지자, 그 응답으로 나온 것이 멸콩TV 인터뷰다. 두 번째, 11월 13일의 ‘계획’ 발언은 국민의힘 의원총회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지난달 12일 특검이 황교안 전 총리를 체포하자 “우리가 황교안이다. 뭉쳐서 싸우자”고 외쳤다. 대표적인 부정 선거론자인 황 전 총리와 국민의힘을 동일시하는 것을 놓고는 당내에서까지 심각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그러자 ‘계획’ 발언이 나왔다. 세 번째, “하나님의 계획”은 장 대표가 한 우파 기독교단체 주최 집회에 참석해서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기각’을 주장하면서 한 말이다. 장 대표의 주장대로 계엄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면, 윤 전 대통령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에게 윤 전 대통령은 불법 계엄을 실행한 ‘내란 수괴’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을 이행하기 위한 ‘도구’였던 셈이다. 요컨대, 12·3 계엄은 대한민국을 새롭게 고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고, ‘윤 어게인’ 세력과 부정선거론자들까지를 포함해 우파를 하나로 결속시킨 다음, 중도 확장을 통해 내년 지방선거 승리를 향해 나아가겠다는 것이 장 대표의 계획인 셈이다. 장 대표의 ‘계획’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11일 공개된 전국지표조사(NBS)에 따르면 우리나라 중도층의 63%는 ‘12·3 계엄이 내란에 해당한다’고 했다. ‘아니다’라는 응답은 23%에 그쳤다. 계엄과 탄핵 이후 ‘국민의힘 대응이 적절했다’고 본 중도층은 고작 10%였다. 중도층의 86%는 ‘부적절했다’고 평가했다. 이런 지경이니 국민의힘에 대한 중도층의 호감도는 바닥을 길 수밖에 없다. 한국갤럽이 12일 발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국민의힘에 ‘호감이 간다’고 한 중도층은 21%에 불과하다. 더불어민주당(46%)에는 절반도 못 미치고, 조국혁신당(27%)보다 낮은 수치다. 이런 중도층을, ‘내가 윤석열’을 부르짖던 입으로 어떻게 설득하겠다는 건가. 부모가 돌아온 탕아를 맞듯, 자신이 아무 때나 “중도 확장”을 외치면 중도층이 두 팔 벌려 환영할 것이라고 장 대표는 생각하나. 이만저만한 착각이 아닐 수 없다. 주류 보수정당이 극우의 등에 올라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도박’인지는 프랑스와 브라질의 사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프랑스 공화당은 샤를 드골 대통령에게 뿌리를 둔 정통 보수정당으로 드골 외에도 조르주 퐁피두, 자크 시라크, 니콜라 사르코지와 같은 거물 정치인들을 배출했다. 하지만 중도 확장에는 눈을 감고 극우세력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다 거리 두기에 실패한 결과 이 당은 존립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2022년 대선에서는 이 당의 후보가 선거비용보전 기준(5%)에도 못 미치는 ‘초라한’ 득표율을 기록했을 정도다. 브라질의 사회민주당은 좌파 노동자당에 맞서 우파를 대변하는 최대 보수정당이었지만, 지금은 독자적으로는 대통령 후보조차 낼 수 없는 군소정당으로 전락한 상태다. 극우 선동가와 아스팔트 우파에 당 주도권을 내준 결과였다. 계엄 1년이 넘도록 아직도 계엄 옹호와 윤 어게인의 늪에서 헤매고 있는 장 대표의 ‘계획’은, 국민의힘을 프랑스 공화당이나 브라질 사회민주당 꼴로 만들겠다는 ‘보수 자폭 계획’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더 늦기 전에 ‘브레이크’를 걸지 않으면 안 된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젊은 분들이 하도 해외 투자를 많이 해서 ‘왜 이렇게 많이 하냐’고 물어봤더니… 답이 ‘쿨하잖아요’ 이렇게 딱 나오더라고요.”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달 27일 기자간담회에서 최근 환율이 1500원 가까이 고공행진을 하는 원인은 “한미 금리 차도, 외국인투자가도 아닌 해외 주식 투자”라면서 덧붙인 말이다. 이 총재의 이날 ‘쿨 투자’ 발언은 지난달 26일 구윤철 경제부총리가 환율 브리핑에서 한 ‘세금 발언’으로 불이 붙은 서학개미들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는 결과가 됐다. 서학개미들은, 이 총재가 과거 자녀들의 해외 유학비로 20억 원을 썼고 장용성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이 41억 원이 넘는 미국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는 ‘지난 뉴스’까지 소환하며 이 총재의 발언을 성토했다. 구 부총리는 브리핑에서 서학개미에 대한 과세 강화 여부를 묻는 질문에 “현재로선 검토하고 있지 않지만, 상황이 된다면 검토할 수 있다”고 답했다. 현재 국내 주식의 경우는 양도소득세가 전혀 없지만, 해외 주식은 연간 양도차익 250만 원을 초과하는 수익에 대해서는 22%를 세금으로 내야 한다. 일종의 ‘징벌세’인 셈인데, 이를 더 강화할 가능성을 거론한 것이다. 고환율, 즉 ‘원저(低)’는 통상 수출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호재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런데 이 총재와 구 부총리의 발언을 보면, 지금의 ‘원저’는 수출 경쟁력 제고라는 긍정 효과보다 물가 상승 등 부정 효과가 큰 ‘나쁜 원저’라는 것이 정부와 외환 당국의 인식인 것 같다. 아직 단정하기에는 이르지만, 어느 정도 공감이 간다. 서학개미들의 해외주식 투자가 환율에 대한 압박 요인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서학개미들을 외환시장 교란 ‘주범’처럼 몰고 가고, ‘징벌세 강화’까지 거론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NH투자증권이 지난해 7월 해외주식 투자자 63만9685명의 계좌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1인당 평균 투자 원금은 793만 원이었다. 한국의 외환시장은 하루에만 100조 원이 넘게 거래되는 거대한 시장이다. 800만 원도 안 되는 원금을 투자한 서학개미들에게 외환시장 불안의 책임을 덮어씌우려는 것은, 정부와 외환 당국의 무능을 스스로 자인하는 꼴밖에 안 된다. 책임 전가를 위한 희생양이 ‘굳이’ 필요하다면, 장 금통위원처럼 수억, 수십억 원을 투자한 ‘서학고래들’이어야지 “젊은 분들”이 돼선 안 된다. 장기적으로 보면 해외 투자 증가가 국가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만 끼치는 것도 아니다. 한국보다 먼저 고도성장을 경험한 일본을 보자. 지난해 일본이 상품을 수출해 남긴 무역수지는 4조480억 엔(약 38조 원) 적자였지만, 전체적인 경상수지는 30조3771억 엔(약 286조 원)의 기록적 흑자였다. 기업이 해외 자회사로부터 받은 배당을 포함해 배당과 이자로만 41조7114억 엔(약 393조 원) 흑자를 낸 덕분이었다. 해외 투자가 늘어나는 것은 ‘수출대국’을 넘어 ‘투자대국’으로 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인 것이다. 물론 지나친 해외 투자가 국내 자본시장 위축과 환율 불안을 부르는 것은 맞다. 이 총재의 지적처럼 해외 주식에 2배, 3배 ‘레버리지 투자’를 하다가는 ‘쪽박’을 차기 십상이다. 이에 대한 대책은 필요하다. 또한 환율 불안이 국가 경제를 골병들게 하는 ‘나쁜 원저’로 진행할 가능성도 서둘러 차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럴수록 애먼 서학개미 때리기 같은 ‘쇼잉’이 아니라, 제대로 된 정책 대응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적극 재정’이 아닌 물가 관리에 거시경제 정책의 최우선 순위를 둬야 한다. 미국과의 관세 협상 결과로 떠안게 된 대미 투자 부담, 적립금 규모가 1322조 원에 이르는 국민연금의 해외 투자 확대 필요성을 감안하면 당분간 ‘환율 고공비행’은 불가피하다. 물가를 자극할 가능성이 큰 소비쿠폰 배포 등 선심성 재정 풀기는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 여행수지 등 만성적인 경상수지 적자 요인에 대한 개선도 발 벗고 나서야 한다. K팝, K드라마, K의료, K푸드 등 K컬처가 전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가운데 ‘원저’로 인해 외국인들의 구매력이 커지는 현 상황은 관광산업을 ‘달러박스’로 키울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서학개미들이 미국 빅테크 주식 투자에 열을 올리는 가장 큰 이유는 이들 기업이 혁신과 성장, 호(好)실적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국내 주식시장을 키우려면 한국에서도 테슬라나 엔비디아 같은 기업이 싹을 내릴 수 있는 토양을 조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밸류 업”을 수백만 번 외친들, 법인세 인상과 노동 규제 강화 같은 반기업 정책을 쏟아내는 한 서학개미의 ‘국장 탈출’ 행렬은 꼬리에 다시 꼬리를 물 뿐이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대장동 개발 비리에 대한 1심 판결문은 740쪽에 이른다. 복잡한 법률적 쟁점도 많다. 피고인 5명에 대해 적용된 죄목이 10가지가 넘고 일부는 유죄, 일부는 무죄 선고가 내려졌다. 그러다 보니 ‘항소 포기가 옳다느니, 잘못됐다느니’ 상반된 주장이 중구난방으로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지엽적인 법리 논란’은 일단 접어두고 재판부가 인정한 사실 관계에 주목을 하면, 대장동 사건의 본질은 아주 단순하고 명확하다. 김만배 남욱 정영학 등이 유동규 등 성남시 수뇌부를 구워삶아 사전 짬짜미로 사업자 지위를 확보한 뒤, 수익배분 구조를 일방적으로 자신들에게 유리한 구조로 설계해 천문학적인 개발이익을 독식하다시피 한 전대미문의 부패 범죄라는 사실이다. 먼저 수익률부터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검찰이 특정한 대장동 일당의 범죄 수익은 김만배 6111억 원, 남욱 1010억 원, 정영학 646억 원 등 모두 7800억 원에 이른다. 이에 비해 이들이 투자한 자기자본은 고작 3억5000만 원. 무려 2000배가 넘는 수익을 올린 셈이다. 만약 이들이 개발사업에 기여한 것이 있다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대장동 일당의 실질적인 사업 기여는 거의 ‘제로’에 가깝다. 누구보다 대장동 일당이 이 사실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김만배가 남욱을 앉혀 놓고 “야, 이게 4000억짜리 도둑질이야. 형(김만배 본인) 아니면 니네 이 사업 못 했어”라고 큰소리를 쳤겠는가.(2014년 11월 무렵의 대화) 아니 ‘도둑질’이라는 표현 정도로는, 이들이 한 범죄 행각을 설명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판결문에 드러난 사업자 공모 및 선정 과정을 보면 이른바 ‘바리케이드 치기’와 ‘스펙 박기’ 등 그 바닥의 불법과 편법이 총동원됐다. ‘바리케이드 치기’는 다른 사업자가 아예 들어올 수 없게 노골적으로 벽을 치는 것을 의미하는데, 대장동 일당은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될 수 있는 건설사는 사업 신청도 할 수 없도록 규정에 못을 박아버렸다. 그리고 다시 ‘스펙 박기’를 통해 대장동 일당의 ‘스펙’에 맞춰 구체적인 사업자 선정 조건과 심사 기준을 ‘맞춤형’으로 적어 넣었다. 대장동 일당이 수험생인 동시에 출제와 채점까지 ‘1인 3역’을 한 것이다. 수익배분 방식도 자신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방식으로 만들어 넣었다. 이처럼 대장동 일당들이 번 돈은 악질적인 범죄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이 명백한데도, 수천억이 고스란히 이들의 주머니로 들어갈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당장 대장동 일당 중 한 명인 남욱이 검찰의 항소 포기 결정이 내려지기 무섭게 검찰에 재산 동결 해제를 요청하고 나섰다. 검찰이 범죄 수익 일부로 보고 묶어 놓은 부동산 등 약 514억 원 재산 중 일부를 돌려 달라는 것인데,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없다. 각각 1250억 원과 250억 원의 재산을 동결 당한 김만배와 정영학도 언제 “내 돈 내 놓으라”고 덤벼들지 모른다. ‘도둑’만 탓할 일도 아니다. 항소 포기로 이들에게 ‘몽둥이’를 쥐여준 검찰 수뇌부는 더 문제다. 정성호 법무부 장관과 여권은 “검찰이 항소를 포기했더라도 민사소송을 통해 부당이득을 돌려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통상 오랜 시일이 걸리기 마련인 민사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대장동 일당들이 마음대로 재산을 처분해 버리면 어디서 범죄 수익을 환수한다는 말인가. 더구나 “형사 재판 무죄가 나왔는데, 민사 재판을 통해 부당이득을 환수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란 것은 많은 법조인들이 지적하는 바다. 1심 재판부도 판결문에서 “공사가 대장동 관련 형사 소송 결과가 모두 나온 뒤 민사소송 절차를 통해 피해를 회복하는 것은 심히 곤란하다”며 “뒤늦게나마 피해 회복 과정에 국가가 개입하여 범죄 피해 재산을 추징한 다음 이를 다시 피해자에게 환부하는 조치를 취하여 신속한 피해 회복을 도모할 필요성이 크다”고까지 밝히고 있다. 정 장관은 앞서 10일 출근길 브리핑에서 ‘외압설’을 부인하면서도 “성공한 수사, 성공한 재판”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항소를 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고도 했다. 이제 검찰이 묶어 놓은 돈마저 대장동 일당이 찾아가겠다고 나선 이상, 정 장관은 다시 한번 국민 앞에 설명할 필요가 있다. 남욱의 재산 동결 해제 요청은 항소 포기 단계에서 예상했던 것인지, 아니면 이럴 줄 모르고 항소 포기에 문제가 없다고 했던 것인지, 특히 민사소송의 최종 결과가 나오기에 앞서 대장동 일당이 범죄 수익을 처분하는 것을 막을 방법은 무엇인지….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엔비디아의 주가는 1999년 1월 상장 이후 지금까지 5800배가량 올랐다. 엔비디아 설립자인 젠슨 황 CEO가 거부(巨富)가 됐음은 당연지사. 블룸버그 세계 억만장자 순위에 따르면 그의 재산은 252조 원이다. 하지만 세계 최고 부자는 아니다. 1위는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671조 원), 2위는 래리 엘리슨 오러클 회장(462조 원)이다. 둘 다 AI 업계의 ‘큰손’이다. 2023년 말 미국 팰로앨토의 한 초밥집에서 이들 억만장자 3명이 식사를 한 적이 있는데, 후일 엘리슨은 이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일론과 나는 애걸하고 있었다. 한 시간 동안 초밥을 먹으며 애걸했다.” 엔비디아의 GPU(AI 칩)를 더 팔아달라는 ‘애걸’이었다. ‘사는 쪽이 갑(甲), 파는 쪽이 을(乙)’이라는 비즈니스 세계의 영원한 불문율조차 적용되지 않는 존재. 이것이 현재 엔비디아와 젠슨 황의 위상이다. 경주 APEC이 1일 폐막했다. 21개국 정상급과 1700명의 글로벌 기업인들이 모였지만, 최고의 ‘신 스틸러’를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젠슨 황일 것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 회장과 같은 거물들과 함께 시끌벅적한 치킨집에서 치맥 회동을 하는 모습은 ‘역대 최고의 몸값을 가진 배우’ 3명이 펼쳐내는 ‘거리의 서민 먹방’이었다. 닭 뼈를 능숙하게 발라낸 뒤 기름 묻은 손가락을 쪽쪽 빠는 젠슨 황의 모습은 ‘저래서 부자 되는구나’, ‘어쩌면 치킨 먹는 국룰을 저렇게 완벽하게…’ 하는 탄성을 자아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고선 다음 날 고성능 GPU를 26만 장씩이나 공급하겠다는 엄청난 선물 보따리까지 풀어놨다. 영원한 ‘5000만의 깐부’로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현재 우리나라가 갖고 있는 고성능 GPU는 민관을 통틀어 4만 장 수준이다. 26만 장이 다 들어오면 한국은 GPU 보유 일약 세계 3위가 된다. 동시에 젠슨 황은 “한국이 AI 분야 리더가 될 가능성은 무한대”라며 우리의 잠재력을 극대치로 인정하고, 자신감까지 한껏 고취시켰다. 그가 한국을 떠난 지 몇 시간 뒤에는 엔비디아의 공식 유튜브 계정에 ‘대한민국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나라’로 시작해서 ‘기적이 계속되는 바로 이곳 한국에서’로 마무리되는 헌정 영상이 올라왔다. 감동적인 ‘엔딩’이다. 젠슨 황의 헌사에 취하다 보면, 우리나라가 ‘AI 3대 강국’ 초입에 금방이라도 들어설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만은 않다. 고성능 GPU만 하더라도 미국이 현재 갖고 있는 것은 2000만 장이 넘는다. 26만 장 확보는, 황무지를 개간할 삽과 곡괭이를 장만한 정도다. 또한 GPU는 건축에 비유하면 단순한 ‘벽돌’일 뿐이다. AI를 개발하고 활용하기 위해서는 ‘건물’에 해당하는 데이터센터가 필요하다. 하지만 시간이 생명인 데이터센터 건립은 이중삼중의 까다로운 규제에 사사건건 발목이 잡힌다. 그리고 데이터센터를 가동하려면 엄청난 양의 전기가 필요하다. 전기가 없는 초고층 빌딩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재앙’이다. 미국의 빅테크들이 이미 가동을 중단한 원전까지 사들여 독점 공급 계약을 맺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국회 심의까지 거쳐 확정한 원전 건설 계획을 놓고, 주무장관이 ‘백지화 검토’를 운운하는 실정이다. 안정성이 떨어지는 신재생 에너지로 AI 산업의 전력 수요를 메운다는 것은 허황된 꿈과 같은 이야기다. AI 혁명에 하드웨어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하지만 한국은 AI 인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나라다. 현재 AI 기업의 82%가 인력 부족을 호소하고 있고, 2027년까지 1만2800명의 신규 인력이 부족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그나마 있는 인력도 줄줄이 해외로 새어 나가는 중이다. 한국은 세계 5위 ‘AI 인재 유출국’이다. 그런데도 이를 해결해 보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국회가 특별법을 통해 추진한다는 AI 관련 산업 규제 완화 및 지원 방안도 차일피일이다. 젠슨 황이 게임용 그래픽 카드 제조회사였던 엔비디아를 시가 총액 5조 달러(약 7154조 원)의 초우량 기업으로 키워낸 가장 큰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우리 회사는 앞으로 30일 후 파산합니다.” 젠슨 황이 직원들에게 입버릇처럼 강조했던 엔비디아의 모토에 답이 있다. ‘절박함’이다. 젠슨 황의 전기에도 이런 말이 나온다. ‘승리의 어머니는 영감(靈感)이 아니라 절박함이었다.’ 한국이 ‘AI 3대 강국’이 되려면 AI 분야에서 가장 성공한 기업인 엔비디아에서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앞으로 30일 후 한국 AI 산업은 망합니다.” 대통령도, 정부도, 여당도, 야당도, 기업도 이런 절박함이 없으면 젠슨 황이 고성능 GPU를 100만 장, 200만 장 가져다 안긴들 ‘AI 3대 강국’은 공허한 메아리로 떠돌게 될 뿐이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서민재상.’ 17일 별세한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일본 총리에게 항상 따라붙는 수식어다. ‘국회에서 돌을 던지면 세습 의원이 맞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금수저’ 의원들의 천국인 일본 정계에서, 무라야마 전 총리는 완전한 이방인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보기 드문 ‘흙수저’ 출신이었다. 소년 시절에는 종업원이 3명뿐인 작은 ‘동네 공장’에서 선반공으로 일하며 야간 상업학교를 다녔다. 70세의 나이로 총리가 됐을 때도 변변한 재산이라곤 지은 지 80년이 넘어 곧 무너질 것 같은 낡은 집 한 채가 전부였다. 총리 재임 시절에는 민박집으로 휴가를 가겠다고 해 보좌관들이 여기저기 수소문했지만, 하나같이 “총리가 민박을? 장난하지 마세요”라며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설날의 푸른 하늘을 보고 결심했다.” 한마디를 남기고 취임 1년 반 만에 표표히 총리직을 던지고 떠나버린 ‘선인(仙人)’의 풍모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그간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에게 그의 이름이 익숙한 것은 ‘무라야마 담화’를 통해서다. “(일본은)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 특히 아시아 여러 나라의 많은 분들에게 큰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 … 다시 한 번 통절(痛切)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밝힙니다.” 일본의 현직 총리가 처음으로 공식 담화를 통해 내놓은 반성과 사죄였다. 후임 총리 중 어느 누구에게서도 이렇게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사과는 없었다. 일본사회당 소속이었던 그는 ‘여당=자민당, 제1야당=일본사회당’이 공식처럼 통용되던 ‘55년 체제’가 깨지고 자민당과 사회당 간의 연립정권이 성립하면서 어느 날 갑자기 등 떠밀리듯 총리 자리에 올랐다. 의석수에서 자민당에 밀리고 사회당 안에서도 비주류였으며, 흔한 각료 경험 한번 없었던 그는 ‘실세 총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가 총리로 재임하던 시기는 일본의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을 자학(自虐)이라고 주장하며 과거사를 미화하고 덧칠하려는 ‘역사수정주의’ 광풍이 휘몰아치던 시절이다. 무라야마 담화는 ‘일본이 아시아의 일원이 되려면 철저한 반성과 진심 어린 사죄가 필요하다’는 그의 확고한 신념과 ‘꼭 관철시키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가 없었다면, 결코 나올 수 없었던 일종의 ‘정치적 기적’이었다. 취임 직후부터 시작된 무라야마 전 총리의 ‘반성과 사죄 행보’에 대한 자민당 강경파와 다른 우파 정당 의원들의 비판과 반발은 거세고도 끈질겼다. 1994년 10월 중의원 본회의 대정부 질의도 상징적인 장면 중 하나다. 당시 2년 차 초선인 33세의 한 여성 의원이 무라야마 총리를 향해 일문일답식으로 집요하게 질문을 퍼붓는다. “지금 총리가 50년 전 정권의 결정을 잘못이라고 결정할 권리가 있습니까.” “잘못이라는 근거가 뭡니까.” “충분한 국민적인 협의도 없이 총리가 멋대로 일본을 대표해서 사과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여성 의원은 이후로도 무라야마 담화에 대한 공격을 자신의 ‘정치적 트레이드마크’ 중 하나로 삼았다. 3선 의원이던 2002년에는 “구체성이 결여돼 있다. 정밀히 조사해서 수정해야 한다”고 날을 세웠고, 자민당 정무조사회장(한국의 정책위의장에 해당)이던 2013년에는 “침략이라는 문구를 넣은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비난했다. 이 여성 의원이 바로 이달 초 자민당 신임 총재로 선출된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우익 성향의 제2야당인 일본유신회와 자민당 간의 연립정부 구성 협상이 거의 성사 단계라고 한다. 무라야마 전 총리의 별세 시점을 전후해 다카이치의 ‘총리 등극’이 급물살을 타는 것은 역사의 단순한 우연인가, 아니면 불길한 복선(伏線)인가. 다카이치는 2019년 자민당 총재 선거 출마 당시 ‘자녀 세대와 손자 세대까지 사죄를 시켜서는 안 된다’는 아베 담화의 한 구절을 콕 집어 거론하며 “나는 계승한다”고 했다. 무라야마 전 총리가 떠난 빈자리가 앞으로 점점 더 크게 느껴질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은 괜한 걱정일까. 무라야마 담화는 공자의 ‘장막여신(杖莫如信)’을 인용해 이렇게 끝맺는다. ‘기대고 의지할 지팡이로 삼기에 신의(信義)만 한 것은 없다.’ 퇴임 후에도 “담화의 정신을 잃지 말라”며 우경화하는 일본 정치를 향해 죽비를 날리던 무라야마 전 총리는, 우리에게 ‘신의를 보여주고 실천한 일본의 지도자’로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무라야마 전 총리의 명복을 진심으로 기원한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김건희 특검이 국민의힘 데이터베이스 관리 업체를 압수수색해 통일교 신도로 추정되는 당원 11만 명의 명단을 확보했다. 통일교 압수수색 과정에서 확보한 교인 120만 명 명단과 국민의힘 당원 500만 명의 명부를 대조해 11만 명을 뽑아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더불어민주당은 “국민의힘이 통일교와 연루되었다는 것이 밝혀지면 국민의힘은 열 번, 백 번 정당 해산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며 공세에 나섰다. 홍준표 전 대구시장도 “통일교 11만, 신천지 10만, 전광훈 세력까지 합치면 그 당은 유사종교 집단 교주들에게 지배당한 정당이나 다름없다”고 가세했다. 국민의힘과 통일교 간의 유착 의혹과 관련해서 특검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2023년 전당대회와 2024년 총선이다. 특히 ‘당원 투표 100% 룰’로 치러진 2023년 전당대회 경선을 깊이 들여다보고 있다. 당시 경선에서는 책임당원만 투표권이 있었기 때문에 전체 통일교인 당원 중 몇 명이 책임당원이었는지, 그들 중 몇 명이 실제 투표를 했는지 등이 의혹을 둘러싼 핵심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은 당원 명부 압수수색에 대해 “특검이 특정 종교와 국민의힘을 연결해 악의적인 프레임으로 몰고 가고 있다”며 “비열한 정치 의도”라고 반발한다. 당원 중 통일교인이 11만 명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도 통계학까지 거론해 가며 “정상적인 숫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나라 국민 10명 중 1명꼴로 국민의힘 당원이기 때문에, 전체 통일교인 120만 명의 10%가량이 국민의힘 당원 명부에 들어 있을 개연성은 “통계학적으로 아주 높다”는 것이다. 만약 통일교인들이 100% 자발적인 의사로 당원 가입을 했고 가입 시점도 자연스럽게 분산돼 있다면, 통계학을 앞세운 국민의힘의 주장에 설득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당원 가입 과정에 ‘조직적인 힘’과 ‘거래’가 개입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실제로 많은 부분이 특검 수사로 드러난 바다. 특검은 국민의힘 전당대회 넉 달 전 김건희 여사가 건진법사 전성배 씨를 통해 당시 윤영호 통일교 세계본부장에게 ‘통일교인을 당원에 가입시켜 권성동 의원의 당선을 돕도록 요청’해, 윤 전 본부장이 움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윤 전 본부장과 전 씨 간에 “전당대회에 어느 정도 필요한가” “3개월 이상 당비 납부한 권리당원 1만 명 이상을 동원해 달라”와 같은 구체적 문자메시지가 오간 사실도 확인했다. 이 무렵 통일교가 전국 5개 지구를 통해 각 교회 예배시간 이후 신도들에게 국민의힘 당원 가입서를 나눠주고, 가입 현황을 할당량으로 정리해 윗선에 보고했다는 진술도 확보된 상태다. 다만 통일교가 처음에는 권 의원을 밀었지만, 권 의원이 불출마를 선언함에 따라 지원 대상을 김기현 의원으로 바꿨다고 특검은 본다. ‘거래’ 흔적도 짙다. 지난달 18일 구속 기소된 윤 전 본부장의 공소장에는, 그가 2022년 3월 윤석열 전 대통령 당선 직후 당시 당선인 사무실로 찾아가 아프리카 및 캄보디아 공적개발원조(ODA) 관련 프로젝트 등 교단의 다양한 현안을 윤 전 대통령에게 청탁한 일이 구체적으로 기재돼 있다. 청탁을 받은 윤 전 대통령이 ‘그와 같은 사항을 논의해 재임 기간에 이룰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로 답했다는 내용도 공소장에 담겨 있다. 이 만남이 있은 지 1주일 뒤 외교부에서 아프리카 ODA를 2배 늘리는 목표가 담긴 국정과제 이행 계획서가 작성됐고, 이후 캄보디아 사업 관련 ODA 예산도 지속적으로 증액됐다. 이처럼 ‘조직적인 힘’과 ‘거래’의 개입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와 정황들이 줄줄이 나온 이상, 국민의힘이 말하는 ‘통계적 개연성’은 정교유착 의혹을 떨쳐 내는 데 충분한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조직적 결속력을 가진 특정 집단이 마음만 먹으면 당 대표 선출과 같은 중대사안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당내 민주주의의 구조적 취약성’의 존재를 부인하기 어려워졌다. “만일 책임당원 40만 명이 투표했는데 그중 25%인 10만 명 정도가 특정 후보를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면 결과는 보나 마나”라는 지적이 국민의힘 내부에서도 나오는 실정이다. 이례적으로 투표율이 높았다는 2023년 전당대회에서도 투표에 참여한 책임당원은 46만 명 정도였다. 특검의 수사 결과를 기다릴 것도 없다. 특정 집단이 머릿수를 앞세워 당을 자신들의 편협한 사고나 이해에 가둬놓을 수 있는 ‘사이비 당원 민주주의’ 시스템을 당장 뜯어고쳐야 한다. 대선 패배 후 100일이 넘도록 갈피조차 못 잡고 있는 쇄신 논의도 여기에서 시작해야 한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법안.’ 미국 독립기념일인 7월 4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한 법안의 별칭이다. 하지만 ‘아름다운’이라는 수식어와는 달리 ‘미등록 이민자’들에게는 대재앙을 예고하는 법안이었다. 이 법안의 핵심 내용 중 하나는 미등록 이민자 단속·추방 및 국경 장벽 보강을 위해 1500억 달러(약 208조 원)의 예산을 투입한다는 것이었다. 1500억 달러는 세계 3대 군사 강국인 영국의 연간 국방예산보다 2배나 많은 금액이다. 이를 무기로 이민세관단속국(ICE)은 인력을 대폭 충원한 뒤 이민자 사회를 공포와 불안으로 몰아넣는 대대적인 단속을 벌이는 중이다. 단속 방식도 거칠어서 인권 침해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심지어 학교 앞에서 잠복을 하고 있다가 자녀들을 등교시키기 위해 오는 부모를 덮치거나, 영주권 심리를 위해 법원에 출석하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가 체포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미등록 이민자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명분은 ‘안전’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앞장서서 “우리나라에 테러리스트, 살인자, 강간범, 폭력 범죄자, 갱단 조직원들이 있다”, “이란 암살 조직보다 1400만 명의 불법 이민자가 더 두렵고 걱정스럽다” 등 미등록 이민자와 중범죄자를 동일시하는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이민자들에 대한 증오와 적대감을 키워 자신의 지지층을 결속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전혀 사실이 아니다. 20년 넘게 이민과 범죄의 관련성을 연구한 범죄학자 그레이엄 오지와 카리스 쿠브린에 따르면, 이민자 비율이 높은 지역일수록 범죄 발생률이 낮으며, 살인과 같은 폭력 강력범죄는 그런 경향이 더욱 두드러진다. 트럼프 행정부는 미등록 이민자 추방과 함께 합법 이민을 억제하는 정책도 병행하고 있는데, 이 같은 정책은 미국 경제에 장기적으로 큰 상처를 남길 것이라는 데 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순수 미국인 노동자의 고령화와 은퇴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이민 노동자의 고용 시장 유입이 감소하면 연 2% 수준인 미국 경제의 잠재성장률이 1.5%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구체적인 분석도 나온다. 이민이 미국 경제의 혁신을 이끄는 엔진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는, 굳이 복잡한 통계를 인용할 필요도 없다. 미국에서 혁신의 상징으로 통하는 7대 빅테크(일명 ‘M7’) 최고경영자(CEO) 중 4명은 이민자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은 대만, 알파벳(구글)의 순다르 피차이와 마이크로소프트의 사티아 나델라는 인도,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이다. 이런 점만 보더라도 트럼프 행정부의 난폭하고 패쇄적인 이민정책이 두고두고 미국 경제에 큰 후유증을 남길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특히 이번 미국 이민 당국의 현대자동차-LG에너지솔루션 합작법인의 조지아주 배터리 공장에 대한 급습은 ‘제 발등 찍기’의 결정판이 될 수밖에 없다. 현대차그룹이 조지아주 한 곳에서만 창출하는 직간접 일자리는 연간 4만 개가 넘는다. 또한 한국 기업들은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 1500억 달러의 대미 추가 투자를 약속한 터다. 그런데도 이민 당국은 헬기와 장갑차까지 동원해 중범죄자를 단속하듯이 했고, 공장 가동을 앞두고 막바지 작업을 위해 한국에서 파견된 근로자 300명을 무더기로 체포해서 구금시설에 강제 수용하기까지 했다. 이들은 ‘테러리스트, 살인자, 강간범, 폭력 범죄자, 갱단 조직원’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미국 이민 당국은 비자 자격을 문제 삼지만, 공장 건설에 필수적인 인력을 본국에서 보낼 수 있는 길은 사실상 막아놓고 투자를 하라는 것은 우리 기업들을 ‘불법 리스크’로 몰아넣는 것이 아니고 뭔가. 더구나 특정 사업장을 덮쳐서 토끼몰이 식 단속을 하는 것은 전임 조 바이든 정부 때는 전혀 볼 수 없던 방식이다. 제조업 환경에 적합하지 않은 조지아주가 우리 기업들의 투자처로 주목을 받은 큰 이유 중의 하나가 관대하고 유연한 이민자 정책이었는데, 우리 기업들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여유를 주지 않고 단일 사업장 기준으로 사상 최대 규모의 단속 작전을 벌인 점도 납득하기 어렵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앞으로 어떤 기업이 미국에 흔쾌히 투자를 하려고 하겠는가. 트럼프 행정부가 지금의 이민정책을 바꾸지 않는 한 ‘제조업 부활’은 고사하고, 이미 미국에 진출한 기업들마저 발길을 돌리게 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이번 사태가 미국 제조업의 쇠락을 가속화시키는 결과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