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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心)속 깊은(深) 것에 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살면서 ‘도대체 이건 왜 이러지?’ ‘왜 마음이 마음대로 안 될까?’ 하고 생겨난 궁금증을 e메일(best@donga.com)로 알려 주세요. 함께 고민해 보겠습니다.“자신을 사랑하세요.”지난해 개봉한 스릴러 영화 ‘서브스턴스’에서 주인공 엘리자베스(데미 무어 분)가 자신이 진행하는 TV 에어로빅 쇼를 끝마칠 때 하는 말이다. 그는 한 때 아카데미상을 받을 정도로 잘 나갔지만, 50세가 되자 늙고 예쁘지 않다는 이유로 TV쇼에서 해고된다. 그는 시청자들에게 했던 말과는 달리 나이 들어가는 자기 몸을 누구보다 혐오하게 된다. 그러다 신비한 주사를 맞으면 7일간 젊고 매력적인 제2의 몸으로 살게 해주는 정체 모를 약물에까지 손을 댔다가 파멸한다. 노화, 비만, 못생김과 싸우며 자기혐오에 시달려온 엘리자베스는 결코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인물이다.이 외에도 영화 ‘미녀는 괴로워’, 애니메이션 ‘기기괴괴 성형수’, 웹툰 ‘외모지상주의’, 드라마 ‘마스크걸’ ‘여신강림’ ‘내 아이디는 강남미인’ 등 예쁘고 날씬해야 행복할 수 있다는 외모지상주의를 다룬 콘텐츠는 수없이 많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주는 결말도 있긴 하지만, 외모를 평가 대상으로 삼는 냉혹한 시선은 어느 콘텐츠나 똑같이 나타난다.일상에서도 ‘얼평(얼굴 평가)’ ‘몸평(몸매 평가)’은 늘 일어난다. 날카로운 외모 지적은 타인은 물론 우리 자신을 향할 때도 많다. ‘난 못생겼어’ ‘살을 더 빼야 해’ ‘늙어서 초라해’라며 성형과 다이어트에 무한한 관심을 갖는다. 국제 미용성형외과학회(ISAPS)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성형수술·시술 시행 건수는 미국, 브라질에 이어 세계 3위(2015년 기준)였다. 그만큼 외모 강박증이 우리 사회에 만연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거울 속 내 얼굴이 자꾸 마음에 안 들고, 타고난 체형이 원망스럽게 느껴질 땐 어떻게 해야 할까.● “난 못생겼어” “살 더 빼야” 집착한다면사실 외모 콤플렉스는 누구나 조금씩 안고 산다. 탈모, 곱슬머리, 여드름, 주근깨, 작은 키, 사각턱, 작은 눈, 굵은 종아리, 검은 피부 등 그 종류는 각자의 생김새만큼이나 다양하다. 풀메이크업 전엔 잠깐의 외출도 꺼리거나, 몸매가 드러나지 않게 펑퍼짐한 옷으로 가리고 다니는 것도 외모 콤플렉스 영향이 크다. 외출 전 2~3시간씩 몸단장을 하거나, 그날 자기 얼굴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약속을 취소해 버리는 사람도 있다. 외모에 관심 많은 10, 20대 때엔 더 그렇다. 지난해 경제 미디어 ‘어피티’가 2030세대 1283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39.2%가 ‘성형수술이나 시술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10명 중 4명이 외모 콤플렉스를 개선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병원을 찾은 셈이다. 또 응답자의 대부분(98.1%)은 ‘잘생기거나 예쁜 외모가 사회에서 혜택을 받는다’고 여겼다. 반대로 생각하면 외모가 뛰어나지 못하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그런데 단순히 외모에 자신감이 부족한 수준을 넘어 일상생활을 못 할 정도로 외모 강박증이 심하다면 신체이형장애(body dysmorphic disorder)일 수도 있다. 강박 장애의 일종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소해 보이는 작은 결점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증상이 대표적이다. 강박적으로 거울을 보고, 과하게 치장하거나, 외모에 대한 집착으로 일상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도 해당한다.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빈번하게 나타난다.신체이형장애 환자의 일부는 뇌신경에 결함이 생겨 실제로 특정 신체 부위가 왜곡돼 보이는 경우도 있다. 이런 사례가 아니라면 외모 때문에 놀림 받거나, 불이익을 당해 마음의 상처를 겪은 경우가 더 흔하다.◆ 외모에 자신감 없는 사람의 생각사람들이 내 외모가 별로라고 생각할까 봐 걱정된다내가 없을 때 다른 사람들이 내 외모를 흉볼까 봐 걱정된다외모가 신경 쓰여 다른 사람에게 말 걸 때 긴장된다외모 때문에 좋은 기회를 놓칠까 봐 불안하다다른 사람들이 내 외모의 결점을 눈치챌까 봐 불편하다거울을 볼 때 기분 좋은 느낌을 받은 적이 별로 없다옷을 입을 때마다 몸매가 어떻게 보일까 상당히 신경 쓰인다자료: 사회적 외모 불안 척도, 사회적 체형 불안 척도내 외모에 대한 불안감이 클 경우에는 타인을 두려워하는 사회불안장애를 겪기도 한다. 이를 사회적 외모 불안(social appearance anxiety)이라고 하는데, 뚜렷한 근거 없이 다른 사람이 내 외모를 부정적으로 평가할 것이라는 비합리적 사고에 사로잡히는 것이 대표 증상이다. 누군가가 나를 보고 웃음 짓는 것을 보면 ‘내가 뚱뚱해서 비웃은 것’이라고 기정사실화 하는 식의 인지 왜곡이 나타난다. 다른 사람이 나를 뚱뚱하다고 바라본다고 생각하니 당연히 자신감이 떨어지고 스스로 매력 없는 사람이라고 취급하게 된다. 그래서 거식증, 폭식증과 같은 섭식 장애와 우울증 등을 함께 겪는 경우도 많다. 여기에 높은 외모 기준을 들이대는 완벽주의 성향까지 더해지면 더욱 위험하다.● 남들 보기엔 멀쩡해도 “난 마음에 안들어”할리우드 배우 메건 폭스는 2023년 한 잡지사 인터뷰에서 신체이형장애가 있다고 고백했다. 그는 “내 몸을 사랑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며 “어린 시절부터 몸에 집착하며 외모에 항상 비판적이었다”고 말했다. 2007년 영화 ‘트랜스포머’에서 잘록한 허리를 드러내며 관능적인 모습으로 등장해 스타덤에 오른 바로 그가 말이다.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진짜 문제가 객관적 외모가 아닌 주관적 외모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연예인만 그런 게 아니라 일반인도 똑같다. 글로벌 브랜드 ‘도브’가 2013년 선보인 ‘리얼 뷰티’ 광고 캠페인은 자기 외모를 얼마나 평가 절하하고 왜곡해 인지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도브는 FBI에서 범인의 몽타주를 그리는 법의학자를 초청해 실험에 참여한 여성들의 얼굴을 각 두 장씩 그려달라고 요청했다. 실물은 커튼으로 가린 채 첫 번째 그림은 여성이 자기 모습을 묘사한 내용을 듣고 그렸다. 두 번째 그림은 다른 사람이 해당 여성의 얼굴을 묘사한 내용을 듣고 완성했다.두 그림을 비교한 결과는 놀라웠다. 다른 사람의 묘사를 듣고 그린 것보다 자기가 묘사한 얼굴을 그린 그림이 실제보다 훨씬 못생겨 보였다. 여성들이 자기 얼굴을 설명할 때 튀어나온 광대, 다크 써클 등 외모 콤플렉스를 과장되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남이 묘사해 준 얼굴은 이보다 훨씬 보기 좋았고 실제와 더욱 닮아있었다. 참가자 중 일부는 두 그림을 보며 눈물을 쏟기도 했다. 주관적으로 인식하는 자기 외모에 대한 왜곡이 심하다는 걸 보여준 광고였다.성형수술이 외모 강박, 외모 불안의 온전한 탈출구가 되긴 어렵다. 수술이 객관적으로 잘 되더라도, 주관적 외모를 바라보는 눈이 변화하지 않으면 소용없다. 남들 눈엔 수술 결과가 객관적으로 괜찮아 보여도 정작 본인은 만족하지 못해 같은 부위를 여러 번 손댔다가 오히려 처음보다 상황이 악화하는 경우가 많다. 다행히 수술 결과에 만족하더라도 이번엔 다른 부위가 눈에 띄어 또 다른 성형수술을 계획할 가능성도 크다.‘심리학, 외모를 부탁해’의 저자인 이정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진짜 문제는 외모가 아니라 성취와 대인관계 문제 등으로 낮아진 자존감에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저서에서 “이런 경우 성형수술은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점을 찾지 않고 외모에만 모든 불만족을 전이시키며 문제를 축소하려는 도피처가 될 뿐”이라고 강조했다.● SNS ‘얼짱’ ‘몸짱’ 보면 기분 나빠져주관적 외모 자존감이 낮아지는 원인은 다양하다. 가족이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 미 예일대 심리학과 연구진에 따르면, 거식증이나 폭식증 등 섭식 장애가 있는 여고생 77명의 가정환경을 추적해 보니 그 어머니도 어린 나이부터 오랫동안 다이어트를 해 온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또한 섭식 장애를 앓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이들은 딸에 대해 ‘체중을 더 감량해야 한다’ ‘외모가 매력적이지 않다’고 평가했다. 이런 환경에서 “살 빼” “그만 먹어”라는 잔소리를 들으며 컸다면, 외모 강박에 평생 시달릴 수 있다. 일부 연구에 따르면, 섭식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 사회불안장애의 평생 유병률이 적게는 20%에서 많게는 70%까지 높게 나타난다. 그만큼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며 불안감에 시달리게 된다는 의미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연예인, 인플루언서와 외모를 비교하는 영향도 상당하다. 러네이 엥겔른 미 노스웨스턴대 심리학과 교수 연구에 따르면, 특히 인스타그램이 해로운 것으로 나타났다. 10, 20대 여성 308명을 대상으로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앱의 사용 방식을 관찰했더니, 인스타그램을 사용한 여성들이 페이스북을 사용한 여성들보다 게시물에 등장한 인물의 얼굴과 몸을 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이들은 앱 사용 후에 자기 몸에 대한 만족도가 감소했고, 기분도 안 좋아졌다고 답했다. 연구진은 “인스타그램이 글보다 사진이나 영상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외모 비교에 특히 해롭다”고 분석했다.● 외모 자존감, 어떻게 회복할까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대 임상 심리과학학과, 미 채플힐 노스캐롤라이나대 심리·신경과학과 등 공동 연구진은 외모 강박을 개선하기 위해 고안된 프로그램을 검증한 전 세계 43개 연구를 분석해 어떤 방법이 실제 효과가 있었는지 살펴봤다. 혼자 쉽게 시도해 볼 만한 내용을 추려 소개한다.우선 외모에 대해 불평하는 일명 ‘바디 토크’를 줄여야 한다. 여성들끼리는 친밀감을 쌓는 차원에서 서로 “나 살찐 것 같아” “주름이 늘었어” 같은 대화를 하는 경우가 많다. 일부 연구에서는 여성 10명 중 9명이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바디 토크를 한다는 결과도 있다. 그런데 얼굴, 체중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하면 할수록 자신도 모르게 외모 자존감에 타격을 받는다. 단순히 자기 몸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몸을 평가 대상으로 바라보고, 죄책감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어제 또 라면 먹었어”처럼 살찌는 음식에 대해 무심코 뱉은 일상 대화도 마찬가지다. 외모에 관심이 덜하고 ‘얼평’ ‘몸평’하지 않는 친구와 어울리는 것도 방법이다.몸의 시각적 측면 대신 기능적 측면에 집중해 내 몸을 다시 바라보는 글쓰기를 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내 팔은 가늘다/굵다’ ‘내 몸은 날씬하다/뚱뚱하다’를 떠나 ‘나는 내 팔로 ( )을 할 수 있어 좋다’ ‘나는 내 몸으로 ( )을 할 때 강인함을 느낀다’와 같이 무엇이 보이는지가 아닌,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외모와 관련해 자동으로 떠오르는 비합리적 사고의 흐름을 기록해 보는 방법도 도움 된다. 안 좋은 생각으로 흐르게 만든 특정 사건이 발생하면(예: SNS에 예쁘고 잘 생긴 일반인이 올린 게시물을 여러 개 봤다), 이에 따라 어떤 감정이 느껴졌는지(예: 부럽고 질투 난다), 어떤 생각을 하게 됐는지(예: 내 외모는 평균 이하인 것 같다), 생각에 대한 근거(예: 나는 이들만큼 예쁘고 잘생기지 못하다)를 먼저 쓴다.그런 뒤 이를 반박할 근거(예: 보정을 거친 사진일 수 있다, 이들이 평균 외모를 대변하는 건 아니다)와 대안적 사고(예: 보여주기용 SNS 사진과 이들의 실제 모습은 다를 수 있다)를 차례로 작성해 보는 것이다. 그런 다음 느껴지는 감정 변화(예: 질투심이 누그러들었다)를 관찰해보자. 만약 이런 시도를 통해서도 이같은 생각을 끊어내기 힘들다면, 앞서 실험에서 나타난 것처럼 인스타그램 등 비현실적 인물들과 자꾸 외모를 비교하게 만드는 SNS를 아예 하지 않는 것도 방법이다.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자신을 사랑하세요.” 지난해 개봉한 스릴러 영화 ‘서브스턴스’에서 주인공 엘리자베스(데미 무어 분)가 자신이 진행하는 TV 에어로빅 쇼를 끝마칠 때 하는 말이다. 그는 한 때 아카데미상을 받을 정도로 잘 나갔지만, 50세가 되자 늙고 예쁘지 않다는 이유로 TV쇼에서 해고된다. 그는 시청자들에게 했던 말과는 달리 나이 들어가는 자기 몸을 누구보다 혐오하게 된다. 그러다 신비한 주사를 맞으면 7일간 젊고 매력적인 제2의 몸으로 살게 해주는 정체 모를 약물에까지 손을 댔다가 파멸한다. 노화, 비만, 못생김과 싸우며 자기혐오에 시달려온 엘리자베스는 결코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이 외에도 영화 ‘미녀는 괴로워’, 애니메이션 ‘기기괴괴 성형수’, 웹툰 ‘외모지상주의’, 드라마 ‘마스크걸’ ‘여신강림’ ‘내 아이디는 강남미인’ 등 예쁘고 날씬해야 행복할 수 있다는 외모지상주의를 다룬 콘텐츠는 수없이 많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주는 결말도 있긴 하지만, 외모를 평가 대상으로 삼는 냉혹한 시선은 어느 콘텐츠나 똑같이 나타난다. 일상에서도 ‘얼평(얼굴 평가)’ ‘몸평(몸매 평가)’은 늘 일어난다. 날카로운 외모 지적은 타인은 물론 우리 자신을 향할 때도 많다. ‘난 못생겼어’ ‘살을 더 빼야 해’ ‘늙어서 초라해’라며 성형과 다이어트에 무한한 관심을 갖는다. 국제 미용성형외과학회(ISAPS)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성형수술·시술 시행 건수는 미국, 브라질에 이어 세계 3위(2015년 기준)였다. 그만큼 외모 강박증이 우리 사회에 만연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거울 속 내 얼굴이 자꾸 마음에 안 들고, 타고난 체형이 원망스럽게 느껴질 땐 어떻게 해야 할까. ● 특정 부위에 집착… “난 별로야” 사실 외모 콤플렉스는 누구나 조금씩 안고 산다. 외모에 관심 많은 10, 20대 때엔 더 그렇다. 그런데 단순히 외모에 자신감이 부족한 수준을 넘어 일상생활을 못 할 정도로 외모 강박증이 심하다면 신체이형장애(body dysmorphic disorder)일 수도 있다. 강박장애의 일종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소해 보이는 작은 결점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증상이 대표적이다. 강박적으로 거울을 보고, 과하게 치장하거나, 외모에 대한 집착으로 일상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도 해당한다.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빈번하게 나타난다. 신체이형장애 환자의 일부는 뇌신경에 결함이 생겨 실제로 특정 신체 부위가 왜곡돼 보이는 경우도 있다. 이런 사례가 아니라면 외모 때문에 놀림 받거나, 불이익을 당해 마음의 상처를 겪은 경우가 더 흔하다. 타인이 내 외모를 흉볼 것 같은 불안감이 클 경우에는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사회불안장애의 차원으로 보기도 한다. 이를 사회적 외모 불안(social appearance anxiety)이라고 하는데, 뚜렷한 근거 없이 다른 사람이 내 외모를 부정적으로 평가할 것이라는 비합리적 사고에 사로잡히는 것이 대표 증상이다. 누군가가 나를 보고 웃음 짓는 것을 보면 ‘내가 뚱뚱해서 비웃은 것’이라고 기정사실화 하는 식의 인지 왜곡이 나타난다. 거식증, 폭식증과 같은 섭식 장애와 우울증 등을 함께 겪는 경우도 많다. 여기에 높은 외모 기준을 들이대는 완벽주의 성향까지 더해지면 더욱 위험하다. ● 몸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문제 할리우드 배우 메건 폭스는 2023년 한 잡지사 인터뷰에서 신체이형장애가 있다고 고백했다. 그는 “내 몸을 사랑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며 “어린 시절부터 몸에 집착하며 외모에 항상 비판적이었다”고 말했다. 2007년 영화 ‘트랜스포머’에서 잘록한 허리를 드러내며 관능적인 모습으로 등장해 스타덤에 오른 바로 그가 말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진짜 문제가 객관적 외모가 아닌 주관적 외모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연예인만 그런 게 아니라 일반인도 똑같다. 글로벌 브랜드 ‘도브’가 2013년 선보인 ‘리얼 뷰티’ 광고 캠페인은 자기 외모를 얼마나 평가 절하하고 왜곡해 인지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도브는 FBI에서 범인의 몽타주를 그리는 법의학자를 초청해 실험에 참여한 여성들의 얼굴을 각 두 장씩 그려달라고 요청했다. 실물은 커튼으로 가린 채 첫 번째 그림은 여성이 자기 모습을 묘사한 내용을 듣고 그렸고, 두 번째 그림은 다른 사람이 해당 여성의 얼굴을 묘사한 내용을 듣고 그렸다. 두 그림을 비교한 결과는 놀라웠다. 다른 사람의 묘사를 듣고 그린 것보다 자기가 묘사한 얼굴을 그린 그림이 실제보다 훨씬 못생겨 보였다. 여성들이 자기 얼굴을 설명할 때 튀어나온 광대, 다크 써클 등 외모 콤플렉스를 과장되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남이 묘사해 준 얼굴은 이보다 훨씬 보기 좋았고 실제와 더욱 닮아있었다. 참가자 중 일부는 두 그림을 보며 눈물을 쏟기도 했다. 주관적으로 인식하는 자기 외모에 대한 왜곡이 심하다는 걸 보여준 광고였다. 성형수술이 외모 강박, 외모 불안의 온전한 탈출구가 되긴 어렵다. 수술이 객관적으로 잘 되더라도, 주관적 외모를 바라보는 눈이 변화하지 않으면 소용없다. ‘심리학, 외모를 부탁해’의 저자인 이정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진짜 문제는 외모가 아니라 성취와 대인관계 문제 등으로 낮아진 자존감에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저서에서 “이런 경우 성형수술은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점을 찾지 않고 외모에만 모든 불만족을 전이시키며 문제를 축소하려는 도피처가 될 뿐”이라고 강조했다. ● 가족부터 SNS까지… 외모 강박 부추기는 환경들 주관적 외모 자존감이 낮아지는 원인은 다양하다. 가족이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 미 예일대 심리학과 연구진에 따르면, 거식증이나 폭식증 등 섭식 장애가 있는 여고생 77명의 가정환경을 추적해 보니 그 어머니도 어린 나이부터 오랫동안 다이어트를 해 온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또한 섭식 장애를 앓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딸에 대해 ‘체중을 더 감량해야 한다’ ‘외모가 매력적이지 않다’고 평가했다. 이런 환경에서 “살 빼” “그만 먹어”라는 잔소리를 들으며 컸다면, 외모 강박에 평생 시달릴 수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연예인, 인플루언서와 외모를 비교하는 영향도 상당하다. 러네이 엥겔른 미 노스웨스턴대 심리학과 교수 연구에 따르면, 특히 인스타그램이 해로운 것으로 나타났다. 10, 20대 여성 308명을 대상으로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앱의 사용 방식을 관찰했더니, 인스타그램을 사용한 여성들이 페이스북을 사용한 여성들보다 게시물에 등장한 인물의 얼굴과 몸을 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이들은 앱 사용 후에 자기 몸에 대한 만족도가 감소했고, 기분도 안 좋아졌다고 답했다. 연구진은 “인스타그램이 글보다 사진이나 영상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외모 비교에 특히 해롭다”고 분석했다.● 외모 자존감, 어떻게 높일 수 있을까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대 임상 심리과학학과, 미 채플힐 노스캐롤라이나대 심리·신경과학과 등 공동 연구진은 외모 강박을 개선하기 위해 고안된 프로그램을 검증한 전 세계 43개 연구를 분석해 어떤 방법이 실제 효과가 있었는지 살펴봤다. 혼자 쉽게 시도해 볼 만한 내용을 추려 소개한다. 우선 외모에 대해 불평하는 일명 ‘바디 토크’를 줄여야 한다. 여성들끼리는 친밀감을 쌓는 차원에서 서로 “나 살찐 것 같아” “주름이 늘었어” 같은 대화를 하는 경우가 많다. 일부 연구에서는 여성 10명 중 9명이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바디 토크를 한다는 결과도 있다. 그런데 얼굴, 체중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하면 할수록 자신도 모르게 외모 자존감에 타격을 받는다. 단순히 자기 몸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몸을 평가 대상으로 바라보고, 죄책감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어제 또 라면 먹었어”처럼 살찌는 음식에 대해 무심코 뱉은 일상 대화도 마찬가지다. 외모에 관심이 덜하고 ‘얼평’ ‘몸평’하지 않는 친구와 어울리는 것도 방법이다. 몸의 시각적 측면 대신 기능적 측면에 집중해 내 몸을 다시 바라보는 글쓰기를 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내 팔은 가늘다/굵다’ ‘내 몸은 날씬하다/뚱뚱하다’를 떠나 ‘나는 내 팔로 ( )을 할 수 있어 좋다’ ‘나는 내 몸으로 ( )을 할 때 강인함을 느낀다’와 같이 무엇이 보이는지가 아닌,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외모와 관련해 자동으로 떠오르는 비합리적 사고의 흐름을 기록해 보는 방법도 도움 된다. 안 좋은 생각으로 흐르게 만든 특정 사건이 발생하면(예: SNS에 예쁘고 잘생긴 일반인이 올린 게시물을 여러 개 봤다), 이로 인한 감정(예: 부럽고 질투 난다), 생각(예: 내 외모는 평균 이하인 것 같다), 생각에 대한 근거(예: 나는 이들만큼 예쁘고 잘생기지 못하다)를 먼저 쓴다. 그런 뒤 이를 반박할 근거(예: 보정을 거친 사진일 수 있다, 이들이 평균 외모를 대변하는 건 아니다)와 대안적 사고(예: 보여주기용 SNS 사진과 이들의 실제 모습은 다를 수 있다)를 차례로 작성해 보는 것이다. 그런 다음 느껴지는 감정 변화(예: 질투심이 누그러들었다)를 관찰해보자. 만약 이런 시도를 통해서도 비슷한 생각을 끊어내기 힘들다면 아예 SNS를 하지 않는 것도 방법이다.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마음(心)속 깊은(深) 것에 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살면서 ‘도대체 이건 왜 이러지?’ ‘왜 마음이 마음대로 안 될까?’ 하고 생겨난 궁금증을 e메일()로 알려 주세요. 함께 고민해 보겠습니다.“내전 각오” “묵사발” “목숨 걸자”4일 헌법재판소 탄핵 선고를 앞두고 우리 사회에서 쏟아져 나온 말들이다. 물론 강성 지지층을 선동하는 소수의 정치인과 극단적 유튜버의 목소리에 불과하지만, 폭력까지 불사하겠다는 발언 수위로 인해 이를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은 불안하기만 했다. 지난해 12월 비상계엄 선포부터 헌재의 대통령 파면 결정에 이르기까지 지난 4개월간 한국 사회는 혼란스러웠다. 헌재 선고 직전 한 여론조사에서 ‘내 생각과 다르면 (선고 결과를) 수용하지 않겠다’는 응답이 44%에 달할 정도로 사회적 불신과 진영 갈등이 심했다. 탄핵 선고 당일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할 만큼 좌우 강성 지지층의 분노와 흥분이 커지기도 했다.사회가 혼란스러울수록 극단적 정치 성향 지지층이 늘어나는 현상은 정치적 양극화로만 설명하기 어렵다. 사회, 문화적으로 복잡하고 다양한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가운데 개인 심리 차원에서 불확실성과 모호함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경향도 영향을 미친다. 혼란한 상황을 빠르게 정리해 안정감을 얻고 싶어 하는 심리가 정치 영역에서 발휘될 때 자칫 극단적이고 단순한 사고로 빠지기 쉬워서다. 극단에 쏠리게 되면 음모론에 빠지기 쉽거나, 선동적인 정치인이 인기를 끄는 등 부작용도 함께 나타난다.● 빠른 결론 원하는 ‘종결 욕구’심리학에서는 불확실성을 피해 확실한 결정을 빠르게 얻고자 하는 심리적 특성을 종결 욕구(need for closure)라고 한다. 여러 선택지 앞에서 힘들게 고민하다 결정을 내린 뒤에 후련함을 느꼈다면 종결 욕구가 해소된 것이다. 종결 욕구 수준은 자라온 환경과 성격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종결 욕구가 큰 사람은 한시라도 빨리 결정을 내려야 마음이 편해지는 반면, 종결 욕구가 그다지 크지 않은 사람은 결말을 열어 두고 천천히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종결 욕구 수준이 높고 낮은 특정 성향이 더 좋다고는 할 수 없다. 종결 욕구가 큰 사람은 질서와 계획을 중시하고, 변하지 않는 확고한 생각을 바탕으로 가족이나 신념, 국가에 헌신적인 경향이 있다. 반면 불확실성을 피하려다 다양한 의견을 무시하는 것은 단점으로 꼽힌다. 이와 반대로 종결 욕구가 적은 사람은 자유롭고 유연한 사고가 가능하다. 그러나 지나칠 땐 결정을 미루거나 우유부단하다는 단점도 있다.◆종결 욕구 수준이 높은 사람의 특징·불확실한 상황을 싫어한다 ·여러 가지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싫어한다·확실하고 체계적인 생활방식을 즐긴다·결정을 내리면 안심이 된다·집단 내 다수가 추구하는 가치에 어떤 사람이 반대하면 짜증 난다·문제에 직면하면 빨리 해결하고 싶어 한다◆종결 욕구 수준이 낮은 사람의 특징·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채 새로운 상황의 불확실성을 즐긴다·가능하면 다양한 의견을 고려한다·날마다 규칙적인 일과가 싫다·막판에 계획이 바뀌면 재미있다고 느낀다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과의 교류가 더 즐겁다·갈등 상황을 보면 양쪽 모두 옳은 견해일 수 있다고 믿는다자료: 종결 욕구 척도어떤 상황에 놓이는지에 따라 종결 욕구 수준은 조금씩 변화한다. 종결 욕구라는 개념을 처음 제시한 아리에 크루글란스키 미국 메릴랜드대 칼리지파크 심리학과 석좌교수에 따르면, 불확실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누구나 일시적으로 종결 욕구가 커진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시간에 쫓기거나, 피곤하거나, 시끄러운 상황에서 평소보다 빨리 결정을 내려 상황을 끝내버리고 싶어 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처럼 혼란스럽고 심리적으로 불편한 상황에서는 평소보다 직관적이고 빠른 결정을 내리기 쉽다. 하물며 피로와 소음도 종결 욕구를 자극하는데, 요즘같이 정치, 경제, 사회, 외교 등 국가 전반이 혼란스러운 한국 사회의 상황에서는 더욱 그럴 수 있다.● 폐쇄적 사고 강해…똘똘 뭉쳐 조직에 충성이때 좀 더 나은 선택을 통해 미래의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서는 각자 나름의 주관적 확신이 필요하다. 나만의 확고한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면 결정이 쉽고 빨라질 뿐 아니라 모호함이 사라지면서 심리적 안정감도 느낄 수 있어서다. 그래서 종결 욕구가 커지면 열린 사고보다는 편협하고 폐쇄적인 사고를 하기 쉽다. 다양한 가능성을 고려하기보다 직관적이고 빠른 결정을 선호하는 경향이 많아져서다. 다양한 의견을 취합하기보다는 획일적인 집단 사고를 추구하게 된다. 여러 정보를 검토하려면 인지적 과부하로 스트레스가 생기고, 이는 또 다른 혼란을 추가하는 격이기 때문이다.빠른 결정, 확고한 결말, 심리적 안정을 위해 조직 내에서는 ‘우리끼린 잘 맞아야 한다’는 의식이 강해진다. 내가 속한 조직에 순응할수록 충성심은 올라간다. 다른 집단은 배척하고, 조직 내에서도 의견을 달리하는 소수를 무시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이러한 특성이 합쳐지면 정치적 강성 지지층이 똘똘 뭉치는 원동력이 된다. 우리와 남의 경계가 더욱 뚜렷해지면서 협력보단 대립, 갈등, 혐오가 조장되기 쉽다. 결과적으로 보수는 더 보수 성향으로, 진보는 더 진보 성향으로 극단화된다. 정치적 강성 지지층은 종결 욕구가 누구보다 높은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근거 없는 음모론에 더 솔깃강성 지지층이 많이 시청하는 유튜브 채널 등에서 음모론이나 유언비어가 판치는 것도 높은 종결 욕구 수준과 관련 있다. 음모론은 실체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사안에 이른바 ‘명쾌한’ 답을 제공해 극단적인 결론을 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폴란드 바르샤바대 연구진은 성인 245명을 대상으로 개인의 종결 욕구 수준에 따라 음모론을 얼마나 믿는지 살펴봤다. 연구 당시 폴란드는 시리아 난민 수용 문제로 유럽연합(EU)과 갈등을 겪고 있었다.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폴란드 국민 78%가 난민을 받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연구진은 실험 참가자를 두 그룹으로 나눠 첫 번째 그룹에는 ‘EU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폴란드에 난민을 입국시켜 폴란드 사회를 어지럽힌 후 정치적 장악력을 넓히려는 속셈이 있다’는 취지의 음모론적 시각을 강조하는 기사를 보여 줬다. 두 번째 그룹에는 난민 수용과 관련해 지금까지의 사실관계를 객관적으로 정리한 기사를 보여 줬다.그런 다음 이들에게 난민 문제와 관련해 ‘EU의 진짜 목적이 따로 있다’ ‘EU가 폴란드 문화를 파괴하려고 한다’ ‘EU가 폴란드 경제를 파탄 내려 한다’ 같은 음모론적 주장에 얼마나 동의하는지 물었다.음모론적 시각이 담긴 기사를 읽은 첫 번째 그룹에서 종결 욕구가 큰 사람일수록 음모론에 강력하게 동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객관적 기사를 읽은 두 번째 그룹에서도 종결 욕구가 큰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음모론에 더 동조하는 경향을 보였다. 두 그룹 모두 종결 욕구가 작은 사람은 음모론을 덜 믿었다. 연구진은 “불확실성을 싫어하는 사람은 모호한 현실을 조금이라도 명확하게 해석하기 위해 근거 없는 음모론마저도 단서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극단 정치인 선동에 잘 휘둘려이때 극단적 성향 정치 지도자에게 끌리는 현상도 나타난다.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는 민주적 의사 결정 스타일을 나타내는 리더보다는 대화와 타협을 배제하고 지지층이 원하는 화끈한 결정을 내리는 독단적인 리더에게 안정감을 느낄 수 있어서다.이 현상은 좌우 정치 성향과 무관하다. 이탈리아 로마 사피엔차대 연구진은 2022년 상반기 성인 1754명을 대상으로 국가 안팎의 불확실성이 강성 지도자를 선호하는 심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분석했다. 당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 종식 직전이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막 침공한 때였다. 연구진은 실험 참가자들이 코로나19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얼마나 혼란을 느끼는지와 함께 이들의 종결 욕구 수준, 강력한 사회 규범을 원하는 정도, 강성 지도자를 지지하는 수준을 조사했다.그 결과 코로나19와 전쟁으로 큰 불안을 느끼는 사람일수록 종결 욕구 수준이 높았고 이는 강력한 사회 규범과 강한 리더에 대한 선호로 이어졌다. 강력한 사회 규범과 강한 리더를 원하는 정도는 우파 성향 참가자들에서 더 두드러졌지만, 좌파 성향 참가자들에서도 이에 못지않은 유사한 경향성이 발견됐다. 위기에 처하면 사람들은 각자 성향에 맞는 강력한 정치적 지도자를 원하게 된다고 해석할 수 있다.문제는 강성 정치 지도자가 유권자에게 일부러 실제보다 과장된 불안감을 심어 주고 자기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몰고 가는 전략을 쓸 수도 있다는 점이다. 연구진은 반(反)이민 정책을 고수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지지하는 유권자를 사례로 들었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미국에 거주하는 불법 이민자 비율을 실제보다 12~13%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 연구진은 “불법 이민자 수를 과대평가한 사람들은 이민자를 위협으로 인식해 강력한 정책을 펼치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투표하려는 경향이 강했다”고 분석했다. 이어 “정치 지도자들이 위협적이고 과장된 언사로 대중을 불안하게 만드는 선동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는 전략을 쓸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정치인 혐오 발언, 정서적 양극화 부추겨혐오 발언을 일삼는 정치인은 더욱 경계해야 한다. 감정적으로 평온한 상태에서는 여러 정보와 의견을 수렴할 준비가 돼 있어 대화와 타협을 할 수 있지만, 적대감이 일어난 상태에서는 극단적이고 폐쇄적인 사고가 더 촉진된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커진 종결 욕구로 인한 영향과 혐오 발언 효과가 합쳐지면 정서적 양극화가 더욱 심해질 수 있다.미국인 6535명을 대상으로 관련 실험을 진행한 김진우 국민대 미디어·광고학부 교수 연구에 따르면, 감정 상태에 따라 사람들이 정책 관련 정보를 받아들이는 양상이 달라졌다. 감정적으로 평온한 상태에서 공화당과 민주당 지지자들은 의료정책에 대해 평소 자기의 정치적 신념과 어긋나는 정보를 접하더라도, 사실관계가 타당하다고 판단되면 이를 수용해 온건한 방향으로 의견을 바꾸려는 경향이 관찰됐다.그런데 ‘트럼프 행정부는 무책임하고 비열하다’ ‘민주당원은 멍청하다’ 같은 적대감을 일으키는 메시지와 함께 의료정책 정보를 접했을 땐, 평소 자신의 신념과 반대되는 내용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상대 진영에 대한 혐오와 적대를 느낀 순간 타협의 여지가 사라진 것이다. 김 교수는 “적대적이고 논쟁적인 맥락에서 전달된 정보에 더욱 편견을 갖게 돼 있다”며 “정치 지도자들이 건설적인 정치 환경을 조성하지 못하거나, 의도적으로 적대감을 일으킬 때 지지층 간 갈등은 더 깊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지난해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부터 이달 4일 헌법재판소 대통령 파면 선고에 이르기까지 지난 4개월간 한국 사회는 혼란스러웠다. 헌재 선고 직전 한 여론조사에서 ‘내 생각과 다르면 (선고 결과를) 수용하지 않겠다’는 응답이 44%에 달할 정도로 사회적 불신과 진영 갈등이 심했다. 헌재 선고 당일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할 만큼 좌우 강성 지지층의 분노와 흥분이 커지기도 했다. 사회가 혼란스러울수록 극단적 정치 성향 지지층이 늘어나는 현상은 정치적 양극화로만 설명하기 어렵다. 사회, 문화적으로 복잡하고 다양한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가운데 개인 심리 차원에서 불확실성과 모호함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경향도 영향을 미친다. 혼란한 상황을 빠르게 정리해 안정감을 얻고 싶어 하는 심리가 정치 영역에서 발휘될 때 극단적이고 단순한 사고로 빠지기 쉬워서다. 극단에 쏠리게 되면 음모론에 빠지기 쉽거나, 선동적인 정치인이 인기를 끄는 등 부작용도 함께 나타난다.● “확실한 정답 원해” 극단 정치 성향으로 심리학에서는 불확실성을 피해 확실한 결정을 빠르게 얻고자 하는 심리적 특성을 종결 욕구(need for closure)라고 한다. 여러 선택지 앞에서 힘들게 고민하다 결정을 내린 뒤에 후련함을 느꼈다면 종결 욕구가 해소된 것이다. 종결 욕구 수준은 자라온 환경과 성격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종결 욕구가 큰 사람은 한시라도 빨리 결정을 내려야 마음이 편해지는 반면, 종결 욕구가 그다지 크지 않은 사람은 결말을 열어 두고 천천히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종결 욕구라는 개념을 처음 제시한 아리에 크루글란스키 미국 메릴랜드대 칼리지파크 심리학과 석좌교수에 따르면, 불확실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누구나 일시적으로 종결 욕구가 커진다. 정치, 경제, 사회, 외교적으로 혼란스러운 요즘 한국 사회가 이에 해당할 수 있다. 종결 욕구가 커지면 열린 사고보다는 편협하고 폐쇄적인 사고를 하기 쉽다. 다양한 가능성을 고려하기보다 직관적이고 빠른 결정을 선호하는 경향이 많아져서다. 다양한 의견을 취합하기보다는 획일적인 집단 사고를 추구하게 된다. 여러 정보를 검토하려면 인지적 과부하로 스트레스가 생기고, 이는 또 다른 혼란을 추가하는 격이기 때문이다. 빠른 결정, 확고한 결말, 심리적 안정을 위해 조직 내에서는 ‘우리끼린 잘 맞아야 한다’는 의식이 강해진다. 내가 속한 조직에 순응할수록 충성심은 올라간다. 다른 집단은 배척하고, 조직 내에서도 의견을 달리하는 소수를 무시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이러한 특성이 합쳐지면 정치적 강성 지지층이 똘똘 뭉치는 원동력이 된다. 우리와 남의 경계가 더욱 뚜렷해지면서 협력보단 대립, 갈등, 혐오가 조장되기 쉽다. 결과적으로 보수는 더 보수 성향으로, 진보는 더 진보 성향으로 극단화된다. 정치적 강성 지지층은 종결 욕구가 누구보다 높은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강성 지지층이 음모론에 더 잘 빠진다 강성 지지층이 많이 시청하는 유튜브 채널 등에서 음모론이나 유언비어가 판치는 것도 높은 종결 욕구 수준과 관련 있다. 음모론은 실체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사안에 이른바 ‘명쾌한’ 답을 제공해 극단적인 결론을 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폴란드 바르샤바대 연구진은 성인 245명을 대상으로 개인의 종결 욕구 수준에 따라 음모론을 얼마나 믿는지 살펴봤다. 연구 당시 폴란드는 시리아 난민 수용 문제로 유럽연합(EU)과 갈등을 겪고 있었다.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폴란드 국민 78%가 난민을 받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연구진은 실험 참가자를 두 그룹으로 나눠 첫 번째 그룹에는 ‘EU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폴란드에 난민을 입국시켜 폴란드 사회를 어지럽힌 후 정치적 장악력을 넓히려는 속셈이 있다’는 취지의 음모론적 시각을 강조하는 기사를 보여 줬다. 두 번째 그룹에는 난민 수용과 관련해 지금까지의 사실관계를 객관적으로 정리한 기사를 보여 줬다. 그런 다음 이들에게 난민 문제와 관련해 ‘EU의 진짜 목적이 따로 있다’ ‘EU가 폴란드 문화를 파괴하려고 한다’ ‘EU가 폴란드 경제를 파탄 내려 한다’ 같은 음모론적 주장에 얼마나 동의하는지 물었다. 음모론적 시각이 담긴 기사를 읽은 첫 번째 그룹에서 종결 욕구가 큰 사람일수록 음모론에 강력하게 동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객관적 기사를 읽은 두 번째 그룹에서도 종결 욕구가 큰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음모론에 더 동조하는 경향을 보였다. 두 그룹 모두 종결 욕구가 작은 사람은 음모론을 덜 믿었다. 연구진은 “불확실성을 싫어하는 사람은 모호한 현실을 조금이라도 명확하게 해석하기 위해 근거 없는 음모론마저도 단서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 극단적 지도자에게 쏠리는 눈 이때 극단적 성향 정치 지도자에게 끌리는 현상도 나타난다.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는 민주적 의사 결정 스타일을 나타내는 리더보다는 대화와 타협을 배제하고 지지층이 원하는 화끈한 결정을 내리는 독단적인 리더에게 안정감을 느낄 수 있어서다. 이 현상은 좌우 정치 성향과 무관하다. 이탈리아 로마 사피엔차대 연구진은 2022년 상반기 성인 1754명을 대상으로 국가 안팎의 불확실성이 강성 지도자를 선호하는 심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분석했다. 당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 종식 직전이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막 침공한 때였다. 연구진은 실험 참가자들이 코로나19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얼마나 혼란을 느끼는지와 함께 이들의 종결 욕구 수준, 강력한 사회 규범을 원하는 정도, 강성 지도자를 지지하는 수준을 조사했다. 그 결과 코로나19와 전쟁으로 큰 불안을 느끼는 사람일수록 종결 욕구 수준이 높았고 이는 강력한 사회 규범과 강한 리더에 대한 선호로 이어졌다. 강력한 사회 규범과 강한 리더를 원하는 정도는 우파 성향 참가자들에서 더 두드러졌지만, 좌파 성향 참가자들에서도 이에 못지않은 유사한 경향성이 발견됐다. 위기에 처하면 사람들은 각자 성향에 맞는 강력한 정치적 지도자를 원하게 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문제는 강성 정치 지도자가 유권자에게 일부러 실제보다 과장된 불안감을 심어 주고 자기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몰고 가는 전략을 쓸 수도 있다는 점이다. 연구진은 반(反)이민 정책을 고수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지지하는 유권자를 사례로 들었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미국에 거주하는 불법 이민자 비율을 실제보다 12∼13%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 연구진은 “불법 이민자 수를 과대평가한 사람들은 이민자를 위협으로 인식해 강력한 정책을 펼치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투표하려는 경향이 강했다”고 분석했다. 이어 “정치 지도자들이 위협적이고 과장된 언사로 대중을 불안하게 만드는 선동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는 전략을 쓸 수 있다”고 경고했다.● ‘혐오 조장’ 정치인이 위험한 이유 혐오 발언을 일삼는 정치인은 더욱 경계해야 한다. 감정적으로 평온한 상태에서는 여러 정보와 의견을 수렴할 준비가 돼 있어 대화와 타협을 할 수 있지만, 적대감이 일어난 상태에서는 극단적이고 폐쇄적인 사고가 더 촉진된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커진 종결 욕구로 인한 영향과 혐오 발언 효과가 합쳐지면 정서적 양극화가 더욱 심해질 수 있다. 미국인 6535명을 대상으로 관련 실험을 진행한 김진우 국민대 미디어·광고학부 교수 연구에 따르면, 감정 상태에 따라 사람들이 정책 관련 정보를 받아들이는 양상이 달라졌다. 감정적으로 평온한 상태에서 공화당과 민주당 지지자들은 의료정책에 대해 평소 자기의 정치적 신념과 어긋나는 정보를 접하더라도, 사실관계가 타당하다고 판단되면 이를 수용해 온건한 방향으로 의견을 바꾸려는 경향이 관찰됐다. 그런데 ‘트럼프 행정부는 무책임하고 비열하다’ ‘민주당원은 멍청하다’ 같은 적대감을 일으키는 메시지와 함께 의료정책 정보를 접했을 땐, 평소 자신의 신념과 반대되는 내용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상대 진영에 대한 혐오와 적대를 느낀 순간 타협의 여지가 사라진 것이다. 김 교수는 “적대적이고 논쟁적인 맥락에서 전달된 정보에 더욱 편견을 갖게 돼 있다”며 “정치 지도자들이 건설적인 정치 환경을 조성하지 못하거나, 의도적으로 적대감을 일으킬 때 지지층 간 갈등은 더 깊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교육부는 37개 지역별 국립대학들이 글로벌 수준의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국립대학 육성 사업을 2023년부터 본격화했다. 지역 경쟁력 약화, 지역 인재 유출 등을 해소하고, 국립대학의 교육 혁신과 연구 환경 개선이 목적이다. 이에 따라 각 대학도 지역 균형 발전과 국가 인재 양성을 위한 다양한 변신을 꾀하고 있다. 특히 인기 학과 쏠림 현상을 방지하고, 원활한 진로 탐색을 돕기 위한 전공 자율선택제 확산이 눈에 띈다. 국립부경대는 자유전공학부를 신설하고 ‘자유전공 길라잡이센터’를 열었다. 자유전공학부를 포함해 단과 대학별 자유전공학부, 글로벌자유전공학부에 입학한 학생은 올해 915명이다. 전체 정원의 약 30%에 달하는 비율이다. 이들을 위한 자유전공 길라잡이센터에서는 직업 탐색과 함께 연계된 전공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를 위해 국립부경대는 자유전공학부별 학부장 8명, 전공별 전공 길라잡이 지도교수 78명을 임명했다. 학사 지도 전담 학사 길라잡이 교수 5명도 신규 채용했다. 또 자유전공학부 학생들의 자유로운 교류 활동을 위한 ‘자유전공학부 오픈 라운지’도 마련했다. 기존 학생들이 이용하던 ‘과방’ 역할을 겸함으로써 자유전공학부 학생들의 소속감이 저하되는 것을 예방하고자 한다. 국립부경대 관계자는 “자유전공학부는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미래를 설계하고 다양한 융복합 역량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며 “학생들의 만족도를 조사해 소속감을 높이고, 인기 학과 운영을 위한 교내 공간 마련, 수업 커리큘럼 확보 등으로 전공 자율선택제에 계속 적극 대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경북대도 2025학년도 대학입시에서 전체 모집인원의 25.4%(961명)를 무전공으로 선발했다. 특히 단과대인 첨단기술융합대학은 정원 100%를 무전공으로 뽑았다. 또 전공 자율선택제 강화와 함께 기초학문을 교양 필수로 편성해 균형 잡힌 융복합 교육과정을 제공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를 위해 경북대는 2006년부터 기초학문 연구 재정 확충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꾸준히 이어왔다. 최근에는 ‘기초보호학문진흥위원회’를 구성하여 기초보호학문의 장기적 육성과 지원 체계를 마련했다. 이 외에도 융복합 전공의 활성화를 위해 ‘마이크로모듈제’를 도입해 전공 간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융복합 전공을 선택하면, 전공 필수 이수학점이 줄어들기 때문에 다른 전공의 수업을 자유롭게 들을 수 있게 된다. 앞으로 기초학문 활성화를 위해 교양과목 교육 과정에도 ‘마이크로 모듈제’를 확대 적용할 계획이다. 부산대는 전공 자율선택제를 확대하기 위해 첨단융합학부를 신설하고 맞춤형 ‘학생 코디네이터 제도’를 도입했다. 올해 처음 받은 자율전공 신입생은 총 159명이다. 무전공 입학생들의 전공 선택을 돕기 위한 ‘학생 코디네이터’ 제도도 시작했다. 이를 위해 부산대는 올 2월 진로 전문 코디네이터 3명을 신규 채용하고, 진로지도 챗봇 개설, 멘토링 프로그램 등 첨단융합학부 특성에 대응하는 시스템을 구축할 예정이다. 1학기에 진행되는 멘토링 프로그램은 ‘선배와 함께하는 멘토링 프로그램’, ‘어서 와, 느그들 학부 대학 처음이지?’라는 주제로 진행된다. 첨단융합학부에 입학한 한 학생은 “첨단 에너지, 반도체 등에 관심이 많아 첨단융합학부에 지원하게 됐다”며 “1년 동안 많은 것을 경험하고 ‘학생 코디네이터’의 도움을 받아 진로를 구체화하고 싶다”고 말했다.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마음(心)속 깊은(深) 것에 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살면서 ‘도대체 이건 왜 이러지?’ ‘왜 마음이 마음대로 안 될까?’ 하고 생겨난 궁금증을 e메일(best@donga.com)로 알려 주세요. 함께 고민해 보겠습니다.“하버드대 입학 과정에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 나는 하버드대생들과 함께 학교에 다닐 만큼 똑똑하지 않다.”(미국 배우 나탈리 포트먼)“나는 과대 포장된 가수다. 사기를 제대로 쳤다고 생각했다. 열과 성을 다한 것에 비해 돌아오는 대가가 다른 사람에 비해 후하다.”(가수 아이유)나탈리 포트먼은 2015년 하버드대 졸업식 축사에서 불안했던 자신의 대학 생활을 고백했다. 그는 영화 ‘스타워즈 에피소드 1-보이지 않는 위험’(1999)에 출연 직후 하버드대 심리학과에 입학했지만 대학 생활 내내 자신이 이 대학에 다닐 자격이 없다고 느꼈다. 공부에 압도당해 침대 밖으로 나오는 것조차 힘들었고 교수들과 면담하다 울기도 했다. 가수 아이유는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혐오하다 결국 폭식증을 앓았던 과거를 고백한 적이 있다. 과분한 인기에 비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고 남을 잘 속이는 재주가 있을 뿐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성공한 스타의 화려함에 감춰진 어두운 이면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들에게는 엄청난 노력을 쏟아붓고도 스스로를 인정하지 못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찬사를 받아도 정작 자괴감에 빠져 ‘난 원래 못났다’ ‘남들이 속고 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로 꼽히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도 “평생 해 온 연구이긴 하지만 과분한 주목을 받으니 마음이 너무 불편해서 마치 사기꾼이 된 것 같다”고 했다.이런 현상이 큰 업적을 이룬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열심히 노력해서 성취하고도 ‘다른 사람에 비하면 난 아무것도 아니다’라며 스스로를 평가절하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때 나타나는 자기 비하는 겸손과는 엄연히 다르다. 하찮은 자신의 밑천이 드러날까 과하게 두려워하며 의심하고 자책하다 불안과 우울함에 시달린다면,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완화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 스스로 ‘한심하다’ 생각하는 실력자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느껴 봤을지 모른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경력에 비해 실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들킬지 모른다는 느낌 말이다. 충분히 능력 있고 성취도 이뤘지만, 실제 자신의 못난 모습이 들통날까 봐 두려워하는 것을 가면 증후군(imposter syndrome)이라고 한다. 능력 있는 척하는 가면을 쓰고 사람들을 속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정식 진단명이 아니기에 ‘가면 현상’이라고 칭하는 학자들도 있다. 국내 조사는 없지만, 미국에서는 약 70%가 살면서 한 번쯤 가면 증후군을 겪어 봤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가면 증후군 증상을 겪는 사람들은 자신이 무능하다고 믿지만 사실은 고(高)성과자일 가능성이 크다. 1978년 가면 증후군 개념을 처음 소개한 미 조지아주립대 심리학과 폴린 클랜스, 수잰 아임스 교수는 이 같은 사람들의 특징을 △자기 능력 부정(자기 의심) △다른 사람의 칭찬 무시 △실패에 대한 과도한 걱정 △최고가 되고 싶은 욕구 등으로 정의했다. 탁월한 능력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정작 성공해도 자신의 실력을 믿지 못한다. 실패했을 때 느끼는 강한 굴욕감과 수치심을 피하려고 과로하다 번아웃을 겪거나 우울증에 빠지기 쉽다.◆가면 증후군을 겪는 사람들 생각·내 능력으로 성공한 게 아니라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훨씬 똑똑한 것 같다·이번에 좋은 성과를 냈더라도 다음에는 잘하지 못할 것 같다·가까운 사람들이 내가 무능하다는 것을 알게 될까 두렵다·주변에서 날 믿어줄지라도 프로젝트나 시험에 성공하지 못할까 두렵다.·누군가 인정하는 말을 해줘도 잘 받아들이지 못하겠다·새로운 일을 맡으면 실패할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자료: 가면 현상 단축형 척도(CIPS-10)● 자기 불신 사고 회로 무한 반복처음 연구가 시작된 미국, 유럽에서는 가면 증후군이 주로 사회적 차별을 겪는 성공한 여성에게 주로 나타난다고 봤다. 하지만 미 캘리포니아주립대 연구진이 2023년까지 발표된 가면증후군 관련 전 세계 연구 108건을 분석한 결과, 성별에 따른 차이는 상당히 작았다. 특히 아시아 문화에서는 이런 경향이 더욱 두드러졌다. 성별 문제라기보다 겸손을 미덕으로 여기는 문화에서 가면 증후군 증상이 더욱 폭넓게 나타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가면 증후군을 겪는 사람들은 ‘자기 불신→집착적 노력(과로)→성공해도 실력이 아닌 운으로 돌림→자기 불신’이라는 사고 회로를 무한 반복한다. 자기 불신 때문에 과제가 닥치면 잘 해내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으로 괴로워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대부분 집착적으로 노력하거나 일부는 아예 게으름을 피우며 벼락치기를 택한다. 실패하더라도 ‘미뤄서 못 했지, 무능한 게 아니다’라는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다. 두 유형 모두 우려했던 것보다 괜찮은 결과를 얻더라도 ‘운이 좋았다’거나 ‘역시 다음엔 더 노력해야겠다’며 자신을 다그치고, 다시 자기 불신의 악순환에 갇힌다.그래서 이들은 면접에 합격하거나 어려운 학위를 따고도 ‘아무나 받아줬겠지’ ‘내가 했으니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누가 도와줬으니 사실상 남이 다 해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여기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실력 있는 사람으로 보더라도 내가 생각하는 모습과 격차가 크다.● 어린 시절 가정 환경-불행한 완벽주의 성향에 영향가면 증후군은 환경과 타고난 성격의 영향을 모두 받는다. 특히 어린 시절에 성취를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칭찬에 인색한 부모 밑에서 자란 경우 더 겪기 쉽다. 이런 아이들은 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나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굳혀 간다.지나치게 경쟁적이고 업무 관련 지적이 많은 조직에서 일하는 직장인에게도 나타날 수 있다. 완벽함이 기본이고, 모른다거나 도와 달라고 하면 무능하다고 여기는 분위기라면 더욱 그렇다. 자신만의 기준이 엄격한 프리랜서나 창의력이 계속 필요한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완벽주의 성향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완벽주의자에게는 성실함을 바탕으로 목표를 이뤄 가는 좋은 측면도 있다. 그러나 가면 증후군은 부적응적이고 불행한 완벽주의 성향과 훨씬 가깝다.독일 괴테대 심리학과 연구진은 성인 274명을 대상으로 완벽주의의 여러 속성과 가면 증후군 증상과의 관계를 살펴봤다. 그 결과 ‘학업 또는 직장에서 실패하면 인생 전체가 실패한 것’이라거나 ‘나는 항상 남들보다 뒤처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완벽주의자일수록 가면 증후군 점수도 높게 나타났다. 또, 원래 완벽하고 싶은 욕구가 별로 없었지만, 부모나 타인의 강요로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사회 부과 완벽주의’ 성향이 높을수록 가면 증후군 증상도 강했다. 대표적으로 불행한 완벽주의 성향으로 꼽힌다.실패했을 때를 대비해 처음부터 사람들 기대치를 낮추려고 더 심하게 자기 실력을 비하하기도 한다. 미 웨이크포레스트대 심리학과 연구진은 대학생 95명에게 앞으로 치를 학교 시험에서 몇 등 정도 할 것 같은지 솔직히 답해 보라고 했다. 이어 등수 예측치를 다른 학생들과 공유하겠다고 했더니, 유독 가면 증후군 점수가 높은 학생들은 원래 예측한 것보다 등수를 훨씬 낮췄다. 연구진은 “주변 기대치를 낮춰서 실패해도 무마할 수 있도록 행동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엄살 피우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생각보다 실력 없다’는 소리를 피하기 위한 나름의 생존 전략인 것이다.● “전문가라면 응당 모든 걸 알아야”이들은 자신에게만 유독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기 때문에 자기 능력에 대한 비합리적인 신념을 확고하게 갖고 있다. 가면 증후군 증상을 보이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가면 증후군 협회’를 세운 미국이 밸러니 영 박사는 현실에서 만난 여러 가면 증후군 증상을 겪는 사람들을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눴다. ‘전문가 유형’은 특정 분야의 전문가라면 응당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내가 똑똑하다면, 모든 걸 이해하고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감히 전문가라고 칭하려면 학위, 자격증, 경험 등이 차고 넘쳐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남들보다 몇 배의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 그러면서도 모르는 게 여전히 많다고 생각해 자신감이 떨어진다.‘개인주의자 유형’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 해내는 것만이 진짜 유능한 것이라고 여긴다. 남에게 도움을 받으면 내 능력이 아니고, 무능한 것이라고 인식한다. 함부로 도움을 요청했다가 무능하다고 찍힐까 봐 두려워하기도 한다. 다 끝내고 나서도 ‘내가 이렇게 간신히 해낸 걸 알면 사람들이 날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여긴다.또 ‘천재 유형’은 배우기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 앞에 서면 ‘내가 유능했더라면 이미 잘하고도 남았을 텐데, 역시 난 무능하다’고 생각한다. 피나는 노력을 해서 성취를 이루면, 오히려 타고나지 못한 재능이 없어서 그렇다고 여긴다. ● ‘나는 정말 무능할까’ 묻는 메타인지 필요‘나는 무능하다’ ‘다른 사람보다 열등하다’는 자기 파괴적인 생각을 멈추려면 자기 비하로 시작해 자기 비하로 끝나는 사고 회로를 끊어야 한다.미 노스텍사스대 연구진은 가면 증후군 증상 완화를 위해 개발한 교육 프로그램을 교수, 기업 임원 등 이런 증상이 있는 65명을 대상으로 3개월간 진행했다. 모든 과정이 끝난 후 어떤 방법이 효과적이라고 느꼈는지 알아보기 위해 이들을 심층 인터뷰했다.그 결과 이들이 느낀 가면 증후군 해소의 첫걸음은 나에게 가면 증후군 증상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아는 것이었다. 평생 ‘나는 남보다 못났다’는 근거 없는 자괴감에 시달려 온 이들에게는 이런 증상을 명명하는 용어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됐다. 자기가 정말 무능해서가 아니라 환경이나 성격의 영향으로 자기 비하적 사고에 갇혀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한 참가자는 “스스로에게 ‘헛소리 그만해!’라고 외칠 수 있는 권한이 생긴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내가 느끼는 한심함, 무능함을 뒷받침할 만한 객관적 증거가 있는지 자문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됐다. 예를 들어 ‘내가 똑똑했으면 이 일은 진작에 끝냈어야 해’ ‘나는 아는 게 하나도 없어’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면 정말 그런지 따져 보는 것이다. 누가 봐도 엄청나게 일이 많은 상황에서 ‘진작에 끝냈어야 한다’거나 일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전부 다 알아야 한다’는 가정은 누구에게나 가혹할 수 있다. 현실을 왜곡하거나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따져 볼 필요가 있다.이 모든 과정은 내 생각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메타인지와 연결된다. 가면 증후군과 메타인지를 연구하는 리사 손 미 컬럼비아대 버나드칼리지 심리학과 교수는 “메타인지란 실수나 부족한 부분뿐 아니라, 내 성공도 인정하는 능력”이라고 강조한다. 메타인지를 활용해 자신을 평가절하만 하는 생각을 모니터링하는 게 중요하다는 의미다. 불안감 때문에 쓸데없이 노력하는 시간도 줄일 수 있다. 손 교수는 “많은 사람이 ‘난 잘 못해’ ‘그저 운이 좋았어’ 같은 생각들을 메타인지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는 ‘겸손해야 한다’는 하나의 이미지일 뿐, 내 생각에 오류가 없는지 판단하는 과정이 진짜 메타인지라는 걸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또 참가자들은 비슷한 증상을 겪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더니 이전보다 훨씬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으로 고통스러워 한다는 것을 보면서 잘못된 생각 패턴을 고칠 수 있었다.이를 통해 ‘다른 사람 빼고 나만 못났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자, 주변에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게 됐다. 남에게 질문한다는 것은 무지와 무능을 고백하는 거라고 여겨 혼자 끙끙거리던 사람들이 주변과 소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스스로에게 더 친절해졌고, 더 이상 강하게 몰아붙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다만 도움을 청할 때 유의할 점이 하나 있다. 또 다른 연구 결과에서는 같은 상황에서 같이 경쟁하고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오히려 더 비교하게 돼 불안감을 느끼는 역효과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도움이 필요할 땐 바로 옆 동료보단 나와 다른 환경에 놓여 있는 사람에게 요청하는 게 더 효과적이다.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하버드대 입학 과정에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 나는 하버드대생들과 함께 학교에 다닐 만큼 똑똑하지 않다.”(미국 배우 나탈리 포트먼) “나는 과대 포장된 가수다. 사기를 제대로 쳤다고 생각했다. 열과 성을 다한 것에 비해 돌아오는 대가가 다른 사람에 비해 후하다.”(가수 아이유) 나탈리 포트먼은 2015년 하버드대 졸업식 축사에서 불안했던 자신의 대학 생활을 고백했다. 그는 영화 ‘스타워즈 에피소드 1-보이지 않는 위험’(1999)에 출연 직후 하버드대 심리학과에 입학했지만 대학 생활 내내 자신이 이 대학에 다닐 자격이 없다고 느꼈다. 공부에 압도당해 침대 밖으로 나오는 것조차 힘들었고 교수들과 면담하다 울기도 했다. 가수 아이유는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혐오하다 결국 폭식증을 앓았던 과거를 고백한 적이 있다. 과분한 인기에 비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고 남을 잘 속이는 재주가 있을 뿐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성공한 스타의 화려함에 감춰진 어두운 이면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들에게는 엄청난 노력을 쏟아붓고도 스스로를 인정하지 못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찬사를 받아도 정작 자괴감에 빠져 ‘난 원래 못났다’ ‘남들이 속고 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로 꼽히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도 “평생 해 온 연구이긴 하지만 과분한 주목을 받으니 마음이 너무 불편해서 마치 사기꾼이 된 것 같다”고 했다. 이런 현상이 큰 업적을 이룬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열심히 노력해서 성취하고도 ‘다른 사람에 비하면 난 아무것도 아니다’라며 스스로를 평가절하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때 나타나는 자기 비하는 겸손과는 엄연히 다르다. 하찮은 자신의 밑천이 드러날까 과하게 두려워하며 의심하고 자책하다 불안과 우울함에 시달린다면,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완화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 ‘난 한심해’라는 고(高)성과자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느껴 봤을지 모른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경력에 비해 실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들킬지 모른다는 느낌 말이다. 충분히 능력 있고 성취도 이뤘지만, 실제 자신의 못난 모습이 들통날까 봐 두려워하는 것을 가면 증후군(imposter syndrome)이라고 한다. 능력 있는 척하는 가면을 쓰고 사람들을 속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정식 진단명이 아니기에 ‘가면 현상’이라고 칭하는 학자들도 있다. 국내 조사는 없지만, 미국에서는 약 70%가 살면서 한 번쯤 가면 증후군을 겪어 봤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가면 증후군 증상을 겪는 사람들은 자신이 무능하다고 믿지만 사실은 고(高)성과자일 가능성이 크다. 1978년 가면 증후군 개념을 처음 소개한 미 조지아주립대 심리학과 폴린 클랜스, 수잰 아임스 교수는 이 같은 사람들의 특징을 △자기 능력 부정(자기 의심) △다른 사람의 칭찬 무시 △실패에 대한 과도한 걱정 △최고가 되고 싶은 욕구 등으로 정의했다. 탁월한 능력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정작 성공해도 자신의 실력을 믿지 못한다. 실패했을 때 느끼는 강한 굴욕감과 수치심을 피하려고 과로하다 번아웃을 겪거나 우울증에 빠지기 쉽다. 처음 연구가 시작된 미국, 유럽에서는 가면 증후군이 주로 사회적 차별을 겪는 성공한 여성에게 주로 나타난다고 봤다. 하지만 미 캘리포니아주립대 연구진이 2023년까지 발표된 가면 증후군 관련 전 세계 연구 108건을 분석한 결과, 성별에 따른 차이는 상당히 작았다. 특히 아시아 문화에서는 이런 경향이 더욱 두드러졌다. 성별 문제라기보다 겸손을 미덕으로 여기는 문화에서 가면 증후군 증상이 더욱 폭넓게 나타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가면 증후군을 겪는 사람들은 ‘자기 불신→집착적 노력(과로)→성공해도 실력이 아닌 운으로 돌림→자기 불신’이라는 사고 회로를 무한 반복한다. 자기 불신 때문에 과제가 닥치면 잘 해내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으로 괴로워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대부분 집착적으로 노력하거나 일부는 아예 게으름을 피우며 벼락치기를 택한다. 실패하더라도 ‘미뤄서 못 했지, 무능한 게 아니다’라는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다. 두 유형 모두 우려했던 것보다 괜찮은 결과를 얻더라도 ‘운이 좋았다’거나 ‘역시 다음엔 더 노력해야겠다’며 자신을 다그치고, 다시 자기 불신의 악순환에 갇힌다.● 경쟁적 환경과 완벽주의도 영향 가면 증후군은 환경과 타고난 성격의 영향을 모두 받는다. 특히 어린 시절에 성취를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칭찬에 인색한 부모 밑에서 자란 경우 더 겪기 쉽다. 이런 아이들은 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나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굳혀 간다. 지나치게 경쟁적이고 업무 관련 지적이 많은 조직에서 일하는 직장인에게도 나타날 수 있다. 완벽함이 기본이고, 모른다거나 도와 달라고 하면 무능하다고 여기는 분위기라면 더욱 그렇다. 자신만의 기준이 엄격한 프리랜서나 창의력이 계속 필요한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완벽주의 성향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완벽주의자에게는 성실함을 바탕으로 목표를 이뤄가는 좋은 측면도 있다. 그러나 가면 증후군은 부적응적이고 불행한 완벽주의 성향과 훨씬 가깝다. 독일 괴테대 심리학과 연구진은 성인 274명을 대상으로 완벽주의의 여러 속성과 가면 증후군 증상과의 관계를 살펴봤다. 그 결과 ‘학업 또는 직장에서 실패하면 인생 전체가 실패한 것’이라거나 ‘나는 항상 남들보다 뒤처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완벽주의자일수록 가면 증후군 점수도 높게 나타났다. 또, 원래 완벽하고 싶은 욕구가 별로 없었지만 부모나 타인의 강요로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사회 부과 완벽주의’ 성향이 높을수록 가면 증후군 증상도 강했다. 대표적으로 불행한 완벽주의 성향으로 꼽힌다.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 처음부터 사람들 기대치를 낮추려고 더 심하게 자기 실력을 비하하기도 한다. 미 웨이크포레스트대 심리학과 연구진은 대학생 95명에게 앞으로 치를 학교 시험에서 몇 등 정도 할 것 같은지 솔직히 답해 보라고 했다. 이어 등수 예측치를 다른 학생들과 공유하겠다고 했더니, 유독 가면 증후군 점수가 높은 학생들은 원래 예측한 것보다 등수를 훨씬 낮췄다. 연구진은 “주변 기대치를 낮춰서 실패해도 무마할 수 있도록 행동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엄살 피우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생각보다 실력 없다’는 소리를 피하기 위한 나름의 생존 전략인 것이다.● ‘나는 정말 무능할까’ 묻는 메타인지 필요 ‘나는 무능하다’ ‘다른 사람보다 열등하다’는 자기 파괴적인 생각을 멈추려면 자기 비하로 시작해 자기 비하로 끝나는 사고 회로를 끊어야 한다. 미 노스텍사스대 연구진은 가면 증후군 증상 완화를 위해 개발한 교육 프로그램을 교수, 기업 임원 등 이런 증상이 있는 65명을 대상으로 3개월간 진행했다. 모든 과정이 끝난 후 어떤 방법이 효과적이라고 느꼈는지 알아보기 위해 이들을 심층 인터뷰했다. 그 결과 이들이 느낀 가면 증후군 해소의 첫걸음은 나에게 가면 증후군 증상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아는 것이었다. 평생 ‘나는 남보다 못났다’는 근거 없는 자괴감에 시달려 온 이들에게는 이런 증상을 명명하는 용어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됐다. 자기가 정말 무능해서가 아니라 환경이나 성격의 영향으로 자기 비하적 사고에 갇혀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한 참가자는 “스스로에게 ‘헛소리 그만해!’라고 외칠 수 있는 권한이 생긴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내가 느끼는 한심함, 무능함을 뒷받침할 만한 객관적 증거가 있는지 자문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됐다. 예를 들어 ‘내가 똑똑했으면 이 일은 진작에 끝냈어야 해’ ‘나는 아는 게 하나도 없어’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면 정말 그런지 따져보는 것이다. 누가 봐도 엄청나게 일이 많은 상황에서 ‘진작에 끝냈어야 한다’거나 일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전부 다 알아야 한다’는 가정은 누구에게나 가혹할 수 있다. 현실을 왜곡하거나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 모든 과정은 내 생각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메타인지와 연결된다. 가면 증후군과 메타인지를 연구하는 리사 손 미 컬럼비아대 버나드칼리지 심리학과 교수는 “메타인지란 실수나 부족한 부분뿐 아니라, 내 성공도 인정하는 능력”이라고 강조한다. 메타인지를 활용해 자신을 평가절하만 하는 생각을 모니터링하는 게 중요하다는 의미다. 불안감 때문에 쓸데없이 노력하는 시간도 줄일 수 있다. 손 교수는 “많은 사람이 ‘난 잘 못해’ ‘그저 운이 좋았어’ 같은 생각들을 메타인지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는 ‘겸손해야 한다’는 하나의 이미지일 뿐, 내 생각에 오류가 없는지 판단하는 과정이 진짜 메타인지라는 걸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마음(心)속 깊은(深) 것에 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살면서 ‘도대체 이건 왜 이러지?’ ‘왜 마음이 마음대로 안 될까?’ 하고 생겨난 궁금증을 e메일()로 알려 주세요. 함께 고민해 보겠습니다.윤민지 씨(가명·29)는 친구들 사이에서 ‘태평양 오지랖’으로 통한다. 남 이야기를 자기 일처럼 들어주고 도와주는 ‘공감 왕’이라서다.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회사 동기의 전화를 끊기 어려워 밤새 들어주다 다음 날 지각한 적도 있다. 다른 사람 일 도와주느라 정작 자기 일을 끝내지 못해 야근하는 날도 종종 있었다. 아무리 바쁘고 피곤해도 누군가 도와 달라고 하면 거절하기 어렵다. 윤 씨는 “가족들은 ‘그러다 네가 골병든다’고 타박하지만, 차라리 내가 피곤한 게 마음 편하다”고 말한다.공감 능력이 부족해도 문제지만, 과하게 넘쳐흐르면 오히려 ‘공감 피로’ 또는 ‘공감 스트레스’를 겪을 수 있다. 말 그대로 남에게 공감해 주다 지친 상태를 말한다. 공감 피로라는 말은 원래 환자를 돌보면서 정서적 소진을 겪는 간호사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처음 사용됐다. 남들보다 ‘공감의 촉’이 예민한 사람이라면 직업과 관계없이 누구나 공감 피로를 겪을 수 있다. 1일자 기사 에서 연습을 통해 부족한 공감 능력을 키우는 방법을 알아봤다면, 이번에는 직장이나 가정에서 공감이 흘러넘쳐 피곤해지는 이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아보자.● ‘공감 능력자’, 좋기만 할까?다른 사람의 감정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한다면, 공감적 과(過)각성 상태에 있는 건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태도 덕분에 주변에서 ‘착하다’는 말은 많이 들을지 몰라도, 정작 본인은 쉽게 방전될 수 있다.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의대 임상 조교수이자 작가인 주디스 올로프 박사는 공감 능력이 지나치게 뛰어나 다른 사람과 자신 사이의 감정적 경계가 흐린 사람을 ‘초민감자(empath)’라고 지칭했다. ‘공감 능력자’라고도 바꿔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다른 사람 기분을 잘 알아채고 △남의 고통을 해결해 주고 싶어 하며 △다른 사람 감정을 내 감정인 양 느끼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느라 자신은 소홀히 하는 특징을 가졌다. 감정 전이(轉移)에 민감해 여러 사람이 같이 있을 때 스트레스 받는 분위기가 형성되면 남들보다 더 큰 영향을 받아 쉽게 지친다. 감각적으로도 민감한 경우가 많아 소음 등 주변 환경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이런 사람들은 공감 피로를 느끼기 쉽다. 공감할 때 필요한 인지적, 감정적 에너지를 과하게 사용하다가 금세 바닥이 날 수 있어서다. 게다가 상대에게 감정을 이입하기 위해서는 내 감정과 생각을 억압하게 되는데, 이때 몸은 이 과정을 스트레스로 인식한다. 결과적으로 스트레스로 인한 염증 반응까지 나타난다.● 공감 잘하는 부모, 몸에 염증 더 많다그 대상이 모든 걸 다 줘도 아깝지 않은 자녀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에리카 만자크 미 노스웨스턴대 심리학과 교수 연구팀에 따르면 공감적인 부모는 그렇지 않은 부모보다 염증 수치가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부모와 그들의 청소년(13~16세) 자녀를 247명씩 모집해 이들의 공감 능력, 염증 수치, 스트레스, 우울 지수, 인생의 목적, 자존감 등을 검사한 결과다. 자녀에게 잘 공감하는 부모는 자녀 상태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수시로 억압하기 때문에 몸은 스트레스를 겪는다.같은 연구진의 또 다른 연구에서는 우울증을 앓는 자녀를 둔 공감적인 부모는 1년 뒤 몸에서 더 많은 염증 성분이 발견됐다. 우울하고 힘든 자녀 마음에 공감했을 뿐인데 그 대가가 따른 것이다. 부모와는 반대로 공감적인 부모 밑에서 자란 청소년은 감정 조절을 잘할 뿐만 아니라, 몸의 염증 수치도 낮았다. 부모가 감정에 잘 공감해주기에 정서적 스트레스가 감소하는 덕분이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공감적인 부모는 주관적으로 인식하는 자존감, 인생의 목적의식 등은 남들보다 높게 나타났다. 연구진은 “자녀의 필요를 잘 채워 주는 좋은 부모라는 느낌이 부모에게 심리적 만족감을 줄지라도, 몸에는 무리가 따를 수 있다”고 분석했다.● 공감 피로 쌓이면 타인에게 무관심해져공감 피로가 누적되면 무관심으로 이어진다. 감정적 소진이 심해지면서 더 이상의 소진을 막기 위해 무관심 전략을 택하는 것이다. TV에서 안타까운 사정이 있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기부하라는 광고가 반복적으로 나올 때 나도 모르게 채널을 돌려버린 적이 있다면, 그 순간 공감 피로가 누적돼 회피 전략을 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이재신, 이민영 중앙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대학생 212명을 네 그룹으로 나눴다. 첫 번째 그룹에는 울거나 화내는 인물 사진을 보여주며 이들의 감정에 최대한 공감해 보라는 미션을 줬다. 나머지 세 그룹에는 대조 효과를 알아보기 위해 웃는 인물에 공감하기(두 번째 그룹) 울거나 화내는 인물의 성별과 나이 관찰하기(두 번째 그룹) 웃는 인물의 나이와 성별 관찰하기(네 번째 그룹) 미션을 각각 부여했다. 첫 번째 그룹만 부정적인 감정에 공감하느라 애쓰면서 공감 피로도가 높아지게 만들기 위한 장치였다.그런 다음 각 그룹에 ‘식량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소액이라도 기부해 주세요’라는 문구가 담긴 아프리카 기아 구제 포스터를 보여 주며 기부 의사를 물었다. 결과를 살펴보니 다른 사람의 부정적인 감정에 공감해 보라고 했던 첫 번째 그룹에서 기부 의사가 유독 낮게 나타났다. 다른 사람이 느끼는 힘든 감정에 애써 공감하려고 노력하면서 공감 피로도가 높아지자, 남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진 탓이다. 이재신 교수는 “공감 피로도가 높아질수록 무감각해지고 냉담해지는 경향성이 나타났다”며 “감정적 피로가 누적되면 남에게 도움의 손길을 더 이상 내밀지 않게 된다”고 설명했다.이런 현상은 안 좋은 소식이 범람하는 뉴스를 볼 때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각종 사건·사고로 가족과 삶의 터전을 잃은 안타까운 사연을 접할 때면 뉴스를 보다가도 어느 순간 ‘지찬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스탠리 코언 런던정경대학(LSE)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저서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에서 이와 같은 공감 피로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사회 전체가 너무 언짢고 위협적이고 비정상적이어서 우리는 완전히 소화할 수 없거나 공개적으로 인정하기 힘든 정보를 제공받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여기서 안타까움, 죄책감 같은 것을 느끼지 않기 위해 모른척하고 도망치게 된다. 나를 방어하기 위한 행동인 것이다.● 의사들은 환자에게 왜 무덤덤할까평소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남을 돕는 직업에 매력을 느껴 의료진, 심리치료사, 사회복지사, 교사, 성직자, 자원봉사자, 비영리단체 종사자 등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이런 직업을 가졌을 때 만나게 되는 환자나 고객의 부정적 감정에 지나치게 물들지 않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공감 피로로 인한 만성 스트레스는 번아웃으로도 이어지기 때문이다.아르헨티나 파발로로대 연구진이 의사 7584명을 연구한 결과 공감 피로를 느끼는 의사들은 주관적 고통 수준이 높고, 정서적으로 무감각하며 삭막한 상태에 이르는 경향이 발견됐다. 이들은 정서적으로 피로를 더 많이 느꼈고, 일에서 성취감을 느끼지도 못했다. 성폭력 상담원을 대상으로 한 국내 연구 결과에서도 피해자를 상담하면서 느끼는 공감 피로로 인해 정서적 탈진과 무감각함을 호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그래서 올로프 박사(UCLA)는 ‘순교자가 되려고 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타인의 기분에 지나친 책임감을 느끼며 자책하지 말라는 것이다. 순교자가 되지 않으려면 상대의 고통을 전부 내 것으로 끌어안지 말고 거리를 둬야 한다.경험 많은 의사들은 고통스러워하는 환자를 볼 때 일부러 공감 스위치를 끄는 훈련이 돼 있다. 대만 국립 양밍대 의대 연구진은 바늘로 몸을 찌르는 사진을 볼 때 의사와 일반인의 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뇌전도(EEG) 검사를 통해 살펴봤다. 그 결과 일반인은 사진을 보면서 자기가 바늘에 찔릴 때처럼 고통을 느끼는 뇌 부위가 반응했다.의사들에게서 이런 반응은 나타나지 않았다. 공감 못하는 의사가 과연 바람직한지 의문이 들 수도 있겠지만, 의사들이 주사기나 메스를 들 때마다 마치 내가 찔리는 것 같은 고통을 경험한다면 그 또한 문제일 것이다. 대신 의사들은 자기 조절이나, 주의와 집중이 필요할 때 활성화되는 뇌 영역이 반응했다. 연구진은 “의사들은 공감을 의도적으로 줄여 환자의 고통을 그대로 느끼는 대신 이들을 어떻게 치료할지 인지적으로 생각하는 훈련이 돼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내 욕구 먼저 생각하기공감 능력이 과하면 대인관계에서도 피로해지기 쉽다. 특히 나르시시스트는 자기중심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상대방의 공감 능력을 악용한다(지난 기사 참고: ). 공감 능력이 과한 사람은 자신의 욕구와 감정을 희생하면서 상대방을 만족시켜주고자 노력하기 때문이다.이런 성향이 극단적으로 나타나 나르시시스트의 희생양이 되기 쉬운 사람을 에코이스트(echoist)라고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헤라에게 저주를 받아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남의 말만 메아리처럼 따라하게 된 에코라는 인물에서 따왔다. 나르시시스트가 다른 사람의 욕구를 무시하며 산다면, 에코이스트는 자기 욕구를 무시하며 산다. 자신감이 부족해 자기 주장을 펼치지 못하고 남들에게 휘둘리는 것도 특징이다.공감 능력이 뛰어난 것을 넘어 지나치게 다른 사람들 감정을 살피고 신경 쓴다면, 스스로를 너무 부족하게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신종호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는 “자신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내가 약한 존재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타인의 상태를 더 살피고 이에 큰 영향을 받는다”며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다른 사람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도록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특히 자녀 일에 과잉 공감하며 일희일비하기 쉬운 부모라면 혼자만의 시간이 더욱 필요하다. 잠시 방문을 닫고 혼자 5분 휴식을 취하는 것부터 낮잠, 여행 등 뭐든 좋다. 일정한 거리를 둠으로써 무감각과 냉담함, 번아웃을 물리칠 수 있다. 이 교수는 “공감이라는 것이 절대적으로 좋다고만 볼 수는 없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과하거나 편향될 때 나타나는 공감의 양면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윤민지 씨(가명·29)는 친구들 사이에서 ‘태평양 오지랖’으로 통한다. 남 이야기를 자기 일처럼 들어주고 도와주는 ‘공감 왕’이라서다.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회사 동기의 전화를 끊기 어려워 밤새 들어주다 다음 날 지각한 적도 있다. 다른 사람 일 도와주느라 정작 자기 일을 끝내지 못해 야근하는 날도 종종 있었다. 아무리 바쁘고 피곤해도 누군가 도와 달라고 하면 거절하기 어렵다. 윤 씨는 “가족들은 ‘그러다 네가 골병든다’고 타박하지만, 차라리 내가 피곤한 게 마음 편하다”고 말한다. 공감 능력이 부족해도 문제지만, 과하게 넘쳐흐르면 오히려 ‘공감 피로’ 또는 ‘공감 스트레스’를 겪을 수 있다. 말 그대로 남에게 공감해 주다 지친 상태를 말한다. 공감 피로라는 말은 원래 환자를 돌보면서 정서적 소진을 겪는 간호사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처음 사용됐다. 남들보다 ‘공감의 촉’이 예민한 사람이라면 직업과 관계없이 누구나 공감 피로를 겪을 수 있다. 1일자 기사 ‘공감 능력 제로 탈출법’에서 연습을 통해 부족한 공감 능력을 키우는 방법을 알아봤다면, 이번에는 직장이나 가정에서 공감이 흘러넘쳐 피곤해지는 이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아보자.● ‘공감 잘하는 부모 몸에 염증 더 많아’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의대 임상 조교수이자 작가인 주디스 올로프 박사는 공감 능력이 지나치게 뛰어나 다른 사람과 자신 사이의 감정적 경계가 흐린 사람을 ‘초민감자(empath)’라고 지칭했다. ‘공감 능력자’라고도 바꿔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다른 사람 기분을 잘 알아채고 △남의 고통을 해결해 주고 싶어 하며 △다른 사람 감정을 내 감정인 양 느끼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느라 자신은 소홀히 하는 특징을 가졌다. 감정 전이(轉移)에 민감해 여러 사람이 같이 있을 때 스트레스 받는 분위기가 형성되면 남들보다 더 큰 영향을 받아 쉽게 지친다. 이런 사람들은 공감 피로를 느끼기 쉽다. 공감할 때 필요한 인지적, 감정적 에너지를 과하게 사용하다가 금세 바닥이 날 수 있어서다. 게다가 상대에게 감정을 이입하기 위해서는 내 감정과 생각을 억압하게 되는데, 이때 몸은 이 과정을 스트레스로 인식한다. 결과적으로 스트레스로 인한 염증 반응까지 나타난다. 그 대상이 모든 걸 다 줘도 아깝지 않은 자녀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에리카 만자크 미 노스웨스턴대 심리학과 교수 연구팀에 따르면 공감적인 부모는 그렇지 않은 부모보다 염증 수치가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부모와 그들의 청소년(13∼16세) 자녀를 247명씩 모집해 이들의 공감 능력, 염증 수치, 스트레스, 우울 지수, 인생의 목적, 자존감 등을 검사한 결과다. 자녀에게 잘 공감하는 부모는 자녀 상태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수시로 억압하기 때문에 몸은 스트레스를 겪는다. 같은 연구진의 또 다른 연구에서는 우울증을 앓는 자녀를 둔 공감적인 부모는 1년 뒤 몸에서 더 많은 염증 성분이 발견됐다. 우울하고 힘든 자녀 마음에 공감했을 뿐인데 그 대가가 따른 것이다. 그런데 공감적인 부모는 주관적으로 인식하는 자존감, 인생의 목적의식 등은 남들보다 높게 나타났다. 연구진은 “자녀의 필요를 잘 채워 주는 좋은 부모라는 느낌이 부모에게 심리적 만족감을 줄지라도, 몸에는 무리가 따를 수 있다”고 분석했다.● 공감 피로가 낳은 냉담함 공감 피로가 누적되면 무관심으로 이어진다. 감정적 소진이 심해지면서 더 이상의 소진을 막기 위해 무관심 전략을 택하는 것이다. TV에서 안타까운 사정에 처해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기부하라는 광고가 반복적으로 나올 때 나도 모르게 채널을 돌려 버린 적이 있다면, 그 순간 공감 피로가 누적돼 회피 전략을 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재신, 이민영 중앙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대학생 212명을 네 그룹으로 나눴다. 첫 번째 그룹에는 울거나 화내는 인물 사진을 보여주며 이들의 감정에 최대한 공감해 보라는 미션을 줬다. 나머지 세 그룹에는 대조 효과를 알아보기 위해 웃는 인물에 공감하기(두 번째 그룹) 울거나 화내는 인물의 성별과 나이 관찰하기(두 번째 그룹) 웃는 인물의 나이와 성별 관찰하기(네 번째 그룹) 미션을 각각 부여했다. 첫 번째 그룹만 부정적인 감정에 공감하느라 애쓰면서 공감 피로도가 높아지게 만들기 위한 장치였다. 그런 다음 각 그룹에 ‘식량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소액이라도 기부해 주세요’라는 문구가 담긴 아프리카 기아 구제 포스터를 보여 주며 기부 의사를 물었다. 결과를 살펴보니 다른 사람의 부정적인 감정에 공감해 보라고 했던 첫 번째 그룹에서 기부 의사가 유독 낮게 나타났다. 다른 사람이 느끼는 힘든 감정에 애써 공감하려고 노력하면서 공감 피로도가 높아지자, 남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진 탓이다. 이재신 교수는 “공감 피로도가 높아질수록 무감각해지고 냉담해지는 경향성이 나타났다”며 “감정적 피로가 누적되면 남에게 도움의 손길을 더 이상 내밀지 않게 된다”고 설명했다.● 의사들은 환자에게 왜 무덤덤할까 평소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남을 돕는 직업에 매력을 느껴 의료진, 심리치료사, 사회복지사, 교사, 성직자, 자원봉사자, 비영리단체 종사자 등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이런 직업을 가졌을 때 만나게 되는 환자나 고객의 부정적 감정에 지나치게 물들지 않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공감 피로로 인한 만성 스트레스는 번아웃으로도 이어지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 파발로로대 연구진이 의사 7584명을 연구한 결과 공감 피로를 느끼는 의사들은 주관적 고통 수준이 높고, 정서적으로 무감각하며 삭막한 상태에 이르는 경향이 발견됐다. 이들은 정서적으로 피로를 더 많이 느꼈고, 일에서 성취감을 느끼지도 못했다. 성폭력 상담원을 대상으로 한 국내 연구 결과에서도 피해자를 상담하면서 느끼는 공감 피로로 인해 정서적 탈진과 무감각함을 호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올로프 박사(UCLA)는 ‘순교자가 되려고 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타인의 기분에 지나친 책임감을 느끼며 자책하지 말라는 것이다. 순교자가 되지 않으려면 상대의 고통을 전부 내 것으로 끌어안지 말고 거리를 둬야 한다. 경험 많은 의사들은 고통스러워하는 환자를 볼 때 일부러 공감 스위치를 끄는 훈련이 돼 있다. 대만 국립 양밍대 의대 연구진은 바늘로 몸을 찌르는 사진을 볼 때 의사와 일반인의 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뇌전도(EEG) 검사를 통해 살펴봤다. 그 결과 일반인은 사진을 보면서 자기가 바늘에 찔릴 때처럼 고통을 느끼는 뇌 부위가 반응했다. 의사들에게서 이런 반응은 나타나지 않았다. 공감 못하는 의사가 과연 바람직한지 의문이 들 수도 있겠지만, 의사들이 주사기나 메스를 들 때마다 마치 자신이 찔리는 것 같은 고통을 경험한다면 그 또한 문제일 것이다. 대신 의사들은 자기 조절이나, 주의와 집중이 필요할 때 활성화되는 뇌 영역이 반응했다. 연구진은 “의사들은 공감을 의도적으로 줄여 환자의 고통을 그대로 느끼는 대신 이들을 어떻게 치료할지 인지적으로 생각하는 훈련이 돼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나보다 남이 우선이라고? 공감 능력이 과하면 대인관계에서도 피로해지기 쉽다. 특히 나르시시스트는 자기중심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상대방의 공감 능력을 악용한다. 공감 능력이 과한 사람은 자신의 욕구와 감정을 희생하면서 상대방을 만족시켜 주고자 노력하기 때문이다. 이런 성향이 극단적으로 나타나 나르시시스트의 희생양이 되기 쉬운 사람을 에코이스트(echoist)라고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헤라에게 저주를 받아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남의 말만 메아리처럼 따라하게 된 에코라는 인물에서 따왔다. 나르시시스트가 다른 사람의 욕구를 무시하며 산다면, 에코이스트는 자기 욕구를 무시하며 산다. 자신감이 부족해 자기 주장을 펼치지 못하고 남들에게 휘둘리는 것도 특징이다. 공감 능력이 뛰어난 것을 넘어 지나치게 다른 사람들 감정을 살피고 신경 쓴다면, 스스로를 너무 부족하게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신종호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는 “자신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내가 약한 존재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타인의 상태를 더 살피고 이에 큰 영향을 받는다”며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도록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특히 자녀 일에 과잉 공감하며 일희일비하기 쉬운 부모라면 혼자만의 시간이 더욱 필요하다. 잠시 방문을 닫고 혼자 5분 휴식을 취하는 것부터 낮잠, 여행 등 뭐든 좋다. 일정한 거리를 둠으로써 무감각과 냉담함, 번아웃을 물리칠 수 있다. 이 교수는 “공감이라는 것이 절대적으로 좋다고만 볼 수는 없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과하거나 편향될 때 나타나는 공감의 양면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마음(心)속 깊은(深) 것에 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살면서 ‘도대체 이건 왜 이러지?’ ‘왜 마음이 마음대로 안 될까?’ 하고 생겨난 궁금증을 로 알려 주세요. 함께 고민해 보겠습니다.“남의 돈 벌기가 쉬운 줄 알았니? 어딜 가나 다 똑같아.” (퇴사를 고민하는 동료에게)“육아가 얼마나 힘든데, 그냥 안 낳는 것도 방법이야.” (난임으로 걱정하는 친구에게)“요즘 갑상샘암은 암도 아니래.” (암 진단을 받은 지인에게)아무리 위로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해도 상대방 입장에 제대로 서 보지 않은 채 섣불리 나오는 말은 오히려 상처를 줄 수도 있다. 진정한 공감을 하려면 구체적 상황에 대한 인지적 이해뿐 아니라, 정서적 감정이입과 이에 따른 배려 행동까지 이어져야 한다. 이런 과정 없이 오지랖 넓게 참견하고, 내 잣대로 판단하는 것을 두고 스스로 공감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악의가 있어야만 상처를 주는 것은 아니듯, 의도하지 않은 ‘무례함’도 상처를 준다.주위에서 ‘공감 능력 떨어진다’고 핀잔을 줘도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태어날 때부터 ‘공감 능력 제로(0)’로 태어났기 때문일까. 다른 사람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능력은 어느 정도 타고 나는 것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노력하면 얼마든지 기를 수 있다. 미술이나 음악적 재능을 갖고 태어났더라도 후천적 연습과 노력에 따라 실력이 결정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공감의 기술’을 어떻게 연마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 머리가 나쁘면 공감도 못한다?공감 능력은 정서 지능지수(EQ)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정서 지능은 정서를 처리하고 조절하는 능력으로, 자신과 타인의 정서를 똑똑하게 잘 다루는 정도를 나타낸다. 정서 지능과 대비되는 인지적 지능지수(IQ)가 높아야 공감 능력이 좋다는 오해도 있지만, 지적 능력이 공감 능력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즉, IQ보다 EQ가 높아야 공감 능력이 뛰어나다.정서 지능은 살면서 여러모로 중요하다. 캐럴린 매캔 호주 시드니대 심리학과 교수 연구진이 전 세계 4만2529명을 대상으로 한 정서 지능 관련 연구 158건을 분석한 결과 정서 지능이 높은 사람들은 정서 지능이 낮은 사람들보다 학업 성적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연구진은 “실패 극복, 환경 적응을 비롯해 다른 사람들과 건강한 관계 맺기에 더 능숙해 전반적으로 삶에서 여러 도전에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공감 능력이 부족한 사람 특징·다른 사람 감정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모른다·다른 사람이 진짜 감정을 숨기고 있는지 아닌지 구분하지 못한다·상대방이 말하고자 하는 정확한 의도를 이해하기 어려워한다·자신이 말할 때 누가 관심을 보이는지, 혹은 싫증을 느끼는지 구분하지 못한다·영화 등장인물이 겪고 있는 기분을 생생하게 느끼기 어렵다·토론할 때 다른 사람 관점을 고려하지 않는다·자신과 다른 생각인 사람의 생각을 인정하지 못한다자료: 공감 지수 검사, 공감 평가 척도한때는 EQ와 공감 능력도 IQ 비슷하게 유전적 영향이 커서 변하기 어렵다고 봤지만, 최근 공감 능력은 연습이 필요한 기술에 가깝다는 주장이 주목받고 있다. 신종호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는 “과거보다 아동, 성인 모두 타인과 같이 놀고 싸우고 양보하는 상호작용을 맺는 사회적 만남이 줄어들면서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경험 자체가 줄었다”며 “이때 상호작용 경험을 늘리려는 개인 의지에 따라 부족한 공감 능력을 개선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노력에 달린 문제이기에 공감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연마할 수 있고, 반대로 너무 과해 괴로운 사람은 적당히 조절할 수 있는 것이다.● 변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변한다공감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노력해 봤자’라는 회의적인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 ‘노력해서 남들에게 더 많이 공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더 크다. 미국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연구진은 실험 참가자 112명을 두 그룹으로 나누고 첫 번째 그룹에는 ‘공감 능력은 개발될 수 있다’는 내용을, 두 번째 그룹에는 ‘공감 능력은 변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전문가 인터뷰를 각각 보여 줬다. 한쪽으로 치우친 전문가 의견을 믿게 하려는 목적이었다.그다음 이들에게 동성 결혼 합법화 같은 민감한 현안에 대해 반대 진영과 토론할 때 상대를 얼마큼 이해할 수 있을지 물었다. 그러자 ‘공감 능력은 가변적’이라는 글을 읽은 이들은 상대를 최대한 이해해 보겠다고 했지만, ‘공감 능력은 불변한다’는 글을 읽은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의 주장이 맞다고 더욱 확신했다. 연구진은 “중요한 것은 태생적으로 공감 능력을 타고났는가가 아니라, 변화하고 발전하려는 의지가 얼마나 있느냐에 달렸다”고 분석했다.● ‘다른 사람 신발 신어 보기’북미 원주민 샤이엔족(族)에는 ‘네 이웃의 신발을 신고 두 달 동안 걸어 보기 전에는 그를 판단하지 말라’는 격언이 전해 내려온다. 걸을 때 신발이 헐떡이는지, 꽉 조여서 뒤꿈치가 까지는지, 바닥에 뾰족한 돌이 잘 박히는지 등 신발을 신어보기 전에는 상대방의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듯, 속내를 이해하려면 철저히 그의 입장이 되어보라는 의미다.공감 능력을 키우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은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 보는 것’이다.애덤 골린스키 미국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실험에 참가한 학생 37명을 세 그룹으로 나누고, 신문 가판대 근처 의자에 앉아 있는 노인 남성의 사진을 보여주며 이 노인의 일과를 상상해 글로 써보라고 했다. 첫 번째 그룹에는 노인이라는 존재에 대한 선입견을 최대한 배제하라고 요청했고 두 번째 그룹에는 내가 사진 속 노인이라고 생각해 보라고 했다. 세 번째 그룹에는 아무 요청도 하지 않았다.연구진은 실험에 앞서 다른 학생들을 대상으로 일반적으로 노인 남성에게 갖는 부정적 선입견을 알아봤다. 분석 결과 외롭고, 의존적이고, 꼰대 같고(전통을 따지고), 고집스럽고, 건망증이 심하다는 다섯 가지 특징이 추려졌다. 연구진은 실험 대상인 세 그룹에서 이 다섯 가지 묘사가 각각 얼마나 나타나는지 살펴봤다.가장 많은 선입견이 드러난 그룹은 아무 요청 사항이 없던 세 번째 그룹이었다. 선입견을 배제하라고 요청한 첫 번째 그룹에서는 다섯 가지 묘사가 세 번째 그룹보다 훨씬 적게 나타났다. 그런데 내가 노인이라고 상상하며 글을 쓴 그룹은 부정적 묘사가 거의 없었을 뿐 아니라, 세 그룹 가운데 노인의 하루를 가장 긍정적이고 밝게 묘사했다.연구진은 “의식적으로 선입견을 억제하는 방법보다 상대방에게 감정을 이입하는 것이 상대를 긍정적이고 공감하듯 이해하는 데 더 큰 도움을 준다”고 분석했다. 이후 젊은 흑인 남성 사진을 가지고 진행한 실험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타났다.이 연장선에서 연기 수업이 공감 능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도 속속 나오고 있다. 연기야말로 상대방 신발을 신어 보는 가장 확실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메소드 연기로 화제를 모은 배우들의 인터뷰를 들어보면, 배역을 깊게 이해하기 위해 카메라가 없는 일상에서도 노숙자, 장애인 등의 삶을 몸소 체험했다는 얘기들이 심심치 않게 들린다. 심지어 이런 효과는 자폐 아동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도 나타났다. 블라이드 코빗 미 밴더빌트대 정신의학 및 심리학과 교수 연구팀은 공감 능력이 부족한 8~14세 자폐 스펙트럼 장애 아동에게 역할극 수업을 10회 진행한 뒤 2개월 동안 추적 관찰했다. 그 결과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는 능력을 포함해 사회적 소통 능력이 전반적으로 좋아졌다.● 글로 배우는 공감의 효과공감 능력 발달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입을 모아 강조하는 또 다른 비법은 놀랍게도 미술, 음악, 문학 같은 예술에 있다. 작가의 의도를 상상하거나 주인공에게 몰입하는 경험이 간접적으로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보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2000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이자, 예술과 뇌과학의 연관성을 연구하는 에릭 캔들 컬럼비아대 의대 명예교수는 저서 ‘통찰의 시대’에서 “예술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창의적인 과정, 즉 예술가가 작품을 만들어 낸 인지적, 감정적, 공감적 과정을 뇌에서 재현하고자 하는 억누를 수 없는 충동에서 비롯된다”고 했다.영어 단어 ‘empathy(공감하다)’는 예술 작품에 감정을 이입해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의미의 독일어 ‘Einfühlung(감정이입)’에서 왔다. 그렇다고 여기서 말하는 예술이 반드시 미술관이나 클래식 음악회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TV 드라마, 영화관, 극장, 콘서트장을 비롯해 스마트폰으로 접하는 사진 한 장, 노래 한 곡에서도 예술을 느낄 수 있다. 미국 TV 드라마 ‘왕좌의 게임’을 사랑하는 시청자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등장인물에 빠져드는 몰입도가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문학 또한 다른 사람 입장이 돼 보는 간접적 경험을 제공한다. 주인공의 서사가 있다면 만화책도 가능하다. ‘공감은 지능이다’를 쓴 자밀 자키 미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교수는 이를 타인과의 ‘가벼운 접촉’이라고 봤다. 다른 사람의 삶을 간접적으로 맛보면서 그의 입장이 돼 보고, 현실에서 그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배려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미 로체스터대 심리학과 연구진이 전 세계에서 실시된 관련 연구 14건을 분석한 결과, 주인공이 등장하는 문학작품을 읽으면 논픽션 장르 글을 읽거나 독서하지 않은 사람에 비해 정서적, 인지적 공감 능력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예술적 경험을 통한 공감으로 편견을 해소할 수도 있다. 편견 대상이 주인공인 문학작품을 읽고 나면, 이들에게 감정이입 하는 경험을 통해 좋지 않은 인상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여러 연구에서 무슬림, 이민자, 동성애자가 주인공인 문학작품을 읽고 난 뒤에 그동안 갖고 있던 편견이 상당 부분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신 교수는 “우리 사회에 공감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늘어난 이유는 학생은 독서하지 않고, 성인은 문학작품보다 자기계발서를 더 많이 읽는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며 “여러 직·간접적 접촉 경험을 늘리는 것이 공감 능력을 키우는 데 중요하다”고 말했다.‘공감 제로’ 성향과는 정반대로 ‘공감 과잉’으로 다른 사람 감정에 휘둘리며 늘 피곤하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기분에 쉽게 전염되고, 여기에 맞춰주느라 사회생활에 문제가 되는 이들이 공감의 적당량을 채우며 살 방법은 없는지 다음주 기사에서 알아보겠습니다.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남의 돈 벌기가 쉬운 줄 알았니? 어딜 가나 다 똑같아.” (퇴사를 고민하는 동료에게) “육아가 얼마나 힘든데, 그냥 안 낳는 것도 방법이야.” (난임으로 걱정하는 친구에게) “요즘 갑상샘암은 암도 아니래.” (암 진단을 받은 지인에게) 아무리 위로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해도 상대방 입장에 제대로 서 보지 않은 채 섣불리 나오는 말은 오히려 상처를 줄 수도 있다. 진정한 공감을 하려면 구체적 상황에 대한 인지적 이해뿐 아니라, 정서적 감정이입과 이에 따른 배려 행동까지 이어져야 한다. 이런 과정 없이 오지랖 넓게 참견하고, 내 잣대로 판단하는 것을 두고 스스로 공감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악의가 있어야만 상처를 주는 것은 아니듯, 의도하지 않은 ‘무례함’도 상처를 준다. 주위에서 ‘공감 능력 떨어진다’고 핀잔을 줘도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태어날 때부터 ‘공감 능력 제로(0)’로 태어났기 때문일까. 반대로 ‘공감 과잉’으로 다른 사람 감정에 휘둘리며 늘 피곤하게 사는 사람도 있다. 공감이 메마르거나, 과하게 흘러넘쳐 사회생활에 문제가 되는 이들에게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공감의 ‘골디락스’로 갈 방법은 없는지 상, 하편에 걸쳐 알아보자.● 머리가 나쁘면 공감도 못한다? 공감 능력은 정서 지능지수(EQ)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정서 지능은 정서를 처리하고 조절하는 능력으로, 자신과 타인의 정서를 똑똑하게 잘 다루는 정도를 나타낸다. 정서 지능과 대비되는 인지적 지능지수(IQ)가 높아야 공감 능력이 좋다는 오해도 있지만, 지적 능력이 공감 능력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즉, IQ보다 EQ가 높아야 공감 능력이 뛰어나다. 한때는 EQ와 공감 능력도 IQ 비슷하게 유전적 영향이 커서 변하기 어렵다고 봤지만, 최근 공감 능력은 연습이 필요한 기술에 가깝다는 주장이 주목받고 있다. 신종호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는 “과거보다 아동, 성인 모두 타인과 같이 놀고 싸우고 양보하는 상호작용을 맺는 사회적 만남이 줄어들면서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경험 자체가 줄었다”며 “이때 상호작용 경험을 늘리려는 개인 의지에 따라 부족한 공감 능력을 개선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공감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우선 ‘노력해 봤자’라는 회의적인 생각을 버려야 한다. 이보다는 ‘노력해서 남들에게 더 많이 공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더 크다. 미국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연구진은 실험 참가자 112명을 두 그룹으로 나누고 첫 번째 그룹에는 ‘공감 능력은 개발될 수 있다’는 내용을, 두 번째 그룹에는 ‘공감 능력은 변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전문가 인터뷰를 각각 보여 줬다. 한쪽으로 치우친 전문가 의견을 믿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그 다음 이들에게 동성 결혼 합법화 같은 민감한 현안에 대해 반대 진영과 토론할 때 상대를 얼마큼 이해할 수 있을지 물었다. 그러자 ‘공감 능력은 가변적’이라는 글을 읽은 이들은 상대를 최대한 이해해 보겠다고 했지만, ‘공감 능력은 불변한다’는 글을 읽은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의 주장이 맞다고 더욱 확신했다. 연구진은 “중요한 것은 태생적으로 공감 능력을 타고났는가가 아니라, 변화하고 발전하려는 의지가 얼마나 있느냐에 달렸다”고 분석했다.● ‘다른 사람 신발 신어 보기’ 북미 원주민 샤이엔족(族)에는 ‘네 이웃의 신발을 신고 두 달 동안 걸어 보기 전에는 그를 판단하지 말라’는 격언이 전해 내려온다. 철저히 상대방 입장이 돼 보기 전에는 그를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다. 공감 능력을 키우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은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 보는 것’이다. 애덤 골린스키 미국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실험에 참가한 학생 37명을 세 그룹으로 나누고, 신문 가판대 근처 의자에 앉아 있는 노인 남성의 사진을 보여주며 이 노인의 일과를 상상해 글로 써보라고 했다. 첫 번째 그룹에는 노인이라는 존재에 대한 선입견을 최대한 배제하라고 요청했고 두 번째 그룹에는 내가 사진 속 노인이라고 생각해 보라고 했다. 세 번째 그룹에는 아무 요청도 하지 않았다. 연구진은 실험에 앞서 다른 학생들을 대상으로 일반적으로 노인 남성에게 갖는 부정적 선입견을 알아봤다. 분석 결과 외롭고, 의존적이고, 꼰대 같고(전통을 따지고), 고집스럽고, 건망증이 심하다는 다섯 가지 특징이 추려졌다. 연구진은 실험 대상인 세 그룹에서 이 다섯 가지 묘사가 각각 얼마나 나타나는지 살펴봤다. 가장 많은 선입견이 드러난 그룹은 아무 요청 사항이 없던 세 번째 그룹이었다. 선입견을 배제하라고 요청한 첫 번째 그룹에서는 다섯 가지 묘사가 세 번째 그룹보다 훨씬 적게 나타났다. 그런데 내가 노인이라고 상상하며 글을 쓴 그룹은 부정적 묘사가 거의 없었을 뿐 아니라, 세 그룹 가운데 노인의 하루를 가장 긍정적이고 밝게 묘사했다. 연구진은 “의식적으로 선입견을 억제하는 방법보다 상대방에게 감정을 이입하는 것이 상대를 긍정적이고 공감하듯 이해하는 데 더 큰 도움을 준다”고 분석했다. 이후 젊은 흑인 남성 사진을 가지고 진행한 실험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타났다. 이 연장선에서 연기 수업이 공감 능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도 속속 나오고 있다. 연기야말로 상대방 신발을 신어 보는 가장 확실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블라이드 코빗 미 밴더빌트대 정신의학 및 심리학과 교수 팀 연구에서도 이 같은 효과가 나타났다. 코빗 교수 팀은 공감 능력이 부족한 8∼14세 자폐 스펙트럼 장애 아동에게 역할극 수업을 10회 진행한 뒤 2개월 동안 추적 관찰했다. 그 결과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는 능력을 포함해 사회적 소통 능력이 전반적으로 좋아졌다.● 글로 배우는 공감의 효과 공감 능력 발달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입을 모아 강조하는 또 다른 비법은 놀랍게도 미술, 음악, 문학 같은 예술에 있다. 작가 의도를 상상하거나, 주인공에게 몰입하는 경험을 많이 할수록 간접적으로 다른 사람 신발을 신어 보는 경험이 늘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2000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이자, 예술과 뇌과학의 연관성을 연구하는 에릭 캔들 컬럼비아대 의대 명예교수는 저서 ‘통찰의 시대’에서 “예술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창의적인 과정, 즉 예술가가 작품을 만들어 낸 인지적, 감정적, 공감적 과정을 뇌에서 재현하고자 하는 억누를 수 없는 충동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영어 단어 ‘empathy(공감하다)’는 예술 작품에 감정을 이입해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의미의 독일어 ‘Einfhlung(감정이입)’에서 왔다. 그렇다고 여기서 말하는 예술이 반드시 미술관이나 클래식 음악회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TV 드라마, 영화관, 극장, 콘서트장을 비롯해 스마트폰으로 접하는 사진 한 장, 노래 한 곡에서도 예술을 느낄 수 있다. 미국 TV 드라마 ‘왕좌의 게임’을 사랑하는 시청자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등장인물에 빠져드는 몰입도가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문학 또한 다른 사람 입장이 돼 보는 간접적 경험을 제공한다. 주인공의 서사가 있다면 만화책도 가능하다. ‘공감은 지능이다’를 쓴 자밀 자키 미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교수는 이를 타인과의 ‘가벼운 접촉’이라고 봤다. 다른 사람의 삶을 간접적으로 맛보면서 그의 입장이 돼 보고, 현실에서 그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배려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미 로체스터대 심리학과 연구진이 전 세계에서 실시된 관련 연구 14건을 분석한 결과, 주인공이 등장하는 문학작품을 읽으면 논픽션 장르 글을 읽거나 독서하지 않은 사람에 비해 정서적, 인지적 공감 능력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예술적 경험을 통한 공감으로 편견을 해소할 수도 있다. 편견 대상이 주인공인 문학작품을 읽고 나면, 이들에게 감정이입하는 경험을 통해 좋지 않은 인상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여러 연구에서 무슬림, 이민자, 동성애자가 주인공인 문학작품을 읽고 난 뒤에 그동안 갖고 있던 편견이 상당 부분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신 교수는 “우리 사회에 공감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늘어난 이유는 학생은 독서하지 않고, 성인은 문학작품보다 자기계발서를 더 많이 읽는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며 “여러 직·간접적 접촉 경험을 늘리는 것이 공감 능력을 키우는 데 중요하다”고 말했다.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삼성금융네트웍스와 KB국민은행은 ‘모니모 KB 매일이자 통장’ 출시를 앞두고 다음 달 6일까지 사전 예약 이벤트를 진행한다. 200만 원까지 최대 연 4% 이자를 제공하는 ‘모니모 KB 매일이자 통장’은 두 회사가 합작해 4월 선보일 예정이다. 통장을 개설하면 하루 단위로 이자를 받을 수 있고 자유로운 입출금과 무료 송금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삼성금융네트웍스 금융 통합 앱 ‘모니모’ 이벤트 페이지에서 ‘통장 사전 예약 응모하기’를 클릭하면 이벤트에 참여할 수 있다. 1회만 응모하면 이벤트 종료일까지 매일 자동으로 응모할 수 있다. 매일 2만 명씩 20만 명을 추첨해 선불 충전금 ‘모니머니’를 최대 12만 원 제공한다. 이벤트 당첨 고객은 통장 사전 개설 기간에 통장을 만들면 혜택을 더 받을 수 있다. 당첨 결과는 이벤트 기간 매일 오전 10시부터 모니모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삼성금융네트웍스 관계자는 “삼성금융네트웍스와 KB국민은행이 협업한 ‘모니모 KB 매일이자 통장’을 기다린 고객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사전 예약 이벤트를 준비했다”며 “고객에게 유용한 혜택과 서비스로 보답할 것”이라고 밝혔다.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마음(心)속 깊은(深) 것에 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살면서 ‘도대체 이건 왜 이러지?’ ‘왜 마음이 마음대로 안 될까?’ 하고 생겨난 궁금증을 로 알려 주세요. 함께 고민해 보겠습니다.몇 년 전 초등학생들이 돌과 흉기 등으로 길고양이를 잔혹하게 학대한 사진을 찍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 올린 일이 있었다. 해외에서도 10대들이 살아 있는 거북이, 햄스터 등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려서 죽인 뒤 SNS에 자랑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들의 범행 동기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심심해서’다.일부 철없는 아이들만의 일탈은 아닐 것이다. 성인 중에도 심심하다는 이유로 아동이나 동물을 학대했다는 뉴스를 종종 찾아볼 수 있다. 협박, 욕설, 유언비어로 온라인을 도배하는 악성 댓글 작성자를 잡고 보니 ‘심심해서’ ‘장난으로’ 그랬다는 경우도 많다.지루하고 따분한 ‘노잼(재미 없음)’ 상태에선 공격성이 나타나기 쉽다. 심심할 때는 뇌가 외부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남을 괴롭히면서 느끼는 쾌감이 평소보다 더 크게 느껴질 수 있어서다. 그래서 지루함과 가학성(sadism)은 매우 가까운 친구다. 심심하다는 이유로 말썽을 일으키고 주변 사람을 못살게 구는 심리를 알아보자.● 무료하고 심심해… 악플 달고, 후임 괴롭혀가학적인 성격 정도는 개인의 기질이나 환경같이 다양한 요인의 영향을 받는다. 그런데 지루한 상황에 처하면 평소보다 유독 못되게 행동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다. 특히 같은 상황에서도 지루함을 남들보다 더 자주, 강렬하게 느끼는 사람일수록 그렇다.◆ 지루함을 잘 느끼는 사람들 특징·뭘 해야 할지 몰라 막막할 때가 많다·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을 때가 많다·흥미를 느낄 만한 일이나 볼거리를 찾기 어려워한다·일상을 즐겁게 지내기 어렵다·해야 할 일이 반복적이며 단조롭다고 느낄 때가 많다·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자극이 필요하다·무슨 일을 하든 제대로 된 동기부여를 받지 못한다·흥미진진하고 다소 위험한 행동을 하지 않으면 지루함을 느낀다단축형 지루함 성향 척도(SBPS)슈테판 프파타이허 덴마크 오르후스대 심리학 및 행동과학과 교수와 에린 웨스트게이트 미국 플로리다대 심리학과 교수 등으로 이뤄진 공동 연구팀은 총 7617명을 대상으로 9개 실험을 통해 지루함과 가학성의 관계를 연구했다. 그 가운데 몇 가지 연구를 소개한다.첫 번째 연구에서는 1780명을 대상으로 지루함을 느끼는 성향, 가학성, 성격 등을 검사해 상관관계를 살펴봤다. 가학성 검사 문항에는 ‘나는 사람들을 다치게 하는 것을 즐긴다’ ‘사람들이 고통받는 것을 보는 게 즐겁다’ ‘선혈이 낭자한 비디오 게임을 좋아한다’ 등이 포함됐다.그 결과 평소 지루함을 잘 느끼는 사람들이 가학성도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재미있는 점은 이들이 원래 남을 괴롭히는 걸 좋아하는 사이코패스나 나르시시스트는 아니라는 것. 사이코패스나 나르시시스트 성향이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분석 과정에서 이를 통제한 뒤 결과를 도출했을 때도 지루함을 자주 느끼는 사람에게서 더 높은 가학성이 나타났다. 평소 특별히 못된 사람이 아니더라도 지루할 때 가학성이 높아질 수 있다는 얘기다.후속 연구에서는 만성적인 지루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실제 어떤 방식으로 남을 괴롭히는지 각각 살펴봤다. 자주 지루해 하는 사람들은 온라인에서 악플러로 활동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장난으로 지인들에게 혐오스러운 웹사이트 주소를 보내는 악취미도 있었다. 군 복무 중 후임을 괴롭힌 경험이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현역 군인거나 군인이었던 적이 있는 미국인 289명을 조사한 결과 군 복무 중 지루함을 많이 느낀 사람일수록 동료 병사들에게 언어적, 신체적 가학 행위를 많이 저지른 것으로 나타났다.심심하다는 이유로 자녀에게 언어나 물리적인 폭력을 휘두르는 부모도 있다. 미국 캐나다 영국의 미성년 자녀가 있는 300명을 연구한 결과 지루함을 잘 느끼는 성향의 부모는 아이에게 비아냥거리거나, 아이를 때리는 경향이 더 두드러졌다.학교 폭력도 마찬가지다. 세르비아에서 만 10~18세 학생 1038명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수업을 비롯한 학교생활을 지루하게 여기는 학생일수록 친구들을 괴롭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학교에서 즐겁게 지내기 어렵다’ ‘학교가 지루하다’고 답한 이들은 ‘학교에서 친구를 밀거나 주먹으로 때렸다’ ‘놀리거나 괴롭혔다’고 답하는 경향을 보였다. ● 재미 삼아 벌레 죽이기?연구진은 심심하다는 이유로 살아 있는 생명체를 죽일 수 있는지도 알아보고 싶었다. 앞서 초등학생이나 10대 청소년이 고양이, 거북이, 햄스터를 “장난으로 죽였다”고 말한 것처럼 지루하고 따분한 순간에 실제로 생명을 해칠 만큼 잔혹해질 수 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실험에 참가한 독일 성인 129명을 두 그룹으로 나눴다. 첫 번째 그룹에게는 혼자 앉는 칸막이 부스에서 폭포수가 떨어지는 지루한 영상을 20분 동안 보여줬다. 두 번째 그룹은 알프스와 관련한 다큐멘터리를 봤다. 첫 번째 그룹이 본 폭포수 영상에 비해 꽤 볼 만한 내용이었다.영상을 보는 동안 이들 옆에 살아 있는 벌레(구더기)와 분쇄기를 같이 놔뒀다. 원한다면 영상을 보면서 벌레를 분쇄기에 넣어도 된다고 알려 줬다. 벌레에게는 최대한 인격적인 느낌이 들도록 ‘토토’ ‘키키’ 같은 이름을 붙였다. 참가자의 잔혹성을 시험해 보려는 의도였다. 참가자들에게는 벌레를 넣고 분쇄기를 작동시키면 벌레가 갈려서 죽을 거라고 안내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소리만 나고 작동하지는 않았다.영상이 아무리 지루하다고 해도 살아서 꿈틀거릴 뿐 아니라 이름까지 있는 벌레를 갈아 죽이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실제로 참가자 129명 가운데 116명은 벌레에 손을 대지 않았다. 13명만 벌레를 분쇄기에 넣었다.이 13명은 모두 가학 성향이 높게 나타난 사람들이었다. 이 중 12명은 폭포수 영상을 본 사람들이었다. 가학 성향이 높을수록, 영상을 보며 지루함을 많이 느꼈다고 답한 사람일수록 벌레를 많이 죽였다. 이들은 벌레를 분쇄기에 넣을 수 있어 ‘기뻤다’ ‘흥미로웠다’ ‘만족스러웠다’고 답했다. 연구진은 “지루한 환경은 가학성이 나타나도록 돕는 매개가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지루하다고 스스로에게 전기 충격 주기도때로는 지루함으로 인한 공격성이 자신을 향하기도 한다. 지루한 것보다는 아픈 게 낫다고 여길 때도 있다.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대 심리학과 연구진은 성인 30명을 대상으로 앞서 영상 보여 주기 실험과 비슷한 연구를 진행했다. 이번에는 영상을 보는 동안 자신의 팔 안쪽에 붙인 전기 충격 장치를 작동시키는 버튼을 줬다. 처음에는 85초짜리 영상이 60분간 반복되는 영상을 보여줬고, 그다음에는 60분짜리 흥미로운 다큐멘터리를 보여 줬다.영상이 모두 끝나고 확인해 보니, 지루한 영상을 보는 사이 참가자의 90% 이상이 평균 22.4회 전기 충격 버튼을 눌렀다. 지루함을 이겨 보려고 스스로 따가운 고통을 택한 것이다. 반면 흥미로운 다큐멘터리를 볼 때는 참가자 30% 정도만이 평균 2.4회 전기 충격 버튼을 눌렀다.● 지루함은 무조건 나쁜 감정일까?그렇다고 지루함이 꼭 나쁜 결과만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창의성이 발휘되도록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휴식을 취하거나, 집중할 필요 없는 반복적인 일을 할 때 뇌의 12개 부위가 연결된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가 활성화되는데, 이때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등 창의성이 발휘될 가능성이 커진다.‘해리포터’ 시리즈 작가 J. K. 롤링은 1990년, 자꾸만 연착하는 런던 행 열차 안에서 동그란 안경을 낀 깡마른 소년 이미지를 떠올렸다고 한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당시 펜도 없었고, 기차에서 남들에게 펜을 빌리기도 너무 부끄러워서 내내 혼자 생각하며 해리포터 소설을 구상했다”고 밝혔다. 지루함이 창작 활동에 긍정적 영향을 준 것이다.천재 작가에게나 해당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일반인에게도 이런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 영국 센트럴랭커셔대 심리학과 연구팀 연구 결과, 실험 참가자들에게 전화번호부 읽기 또는 필사하기처럼 의미 없고 반복적인 일을 시켜 지루함을 유발한 다음 창의력을 테스트하는 문제를 냈더니 평균 수준보다 더 높은 점수를 받았다.지루함을 연구해 온 안드레아스 엘피도루 미 루이빌대 철학과 교수는 “지루함이 삶에 도움이 될지, 해가 될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렸다”고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지루한 감정은 현재 상황이 만족스럽지 못할 때 울리는 일종의 알람 같은 것이다. 현재 자신의 흥미, 관심사, 목표, 행복감 등과 관련해 불만족스러운 상태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이때 남을 괴롭히는 일 같은 자극적인 흥밋거리를 찾을 것인지, 생산적인 일을 선택해 삶의 의미를 찾을 것인지는 나 자신에게 달려있다. 예를 들어 지루한 순간에 스마트폰을 들어 악성 댓글을 쓸 것인지, 오랜만에 친구에게 연락해 안부를 물을 것인지는 전적으로 내 선택이라는 것이다. 좀이 쑤시는 순간에 사람이나 동물을 괴롭힐 게 아니라 밖에 나가서 운동이나 산책을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순간순간이 지루하다는 이유로 충동적인 행동을 하기 전에 어떤 행동이 지금 나에게 가장 도움이 될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 보면 어떨까.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양자컴퓨팅 기술은 인공지능(AI)과 융합될 때 그 진가가 발휘될 겁니다.” 양자컴퓨팅 기술 스타트업 ‘엑스닷츠’를 이끄는 이우도 대표는 양자컴퓨팅 기술의 잠재력에 관해 설명하며 이같이 말했다. 엑스닷츠는 물리학을 전공한 이 대표가 동료 연구원 2명과 함께 2022년 시작한 회사다. 양자컴퓨팅 알고리즘 기반의 사물인터넷(IoT) 기술, 에지 컴퓨팅 기술을 접목해 여러 산업 분야의 난제를 해결할 수 있는 솔루션을 개발하고 있는 기술 스타트업이다. 양자컴퓨팅 기술은 기존 컴퓨팅 방식의 성능 한계를 초월하는 초격차 기술로 인식되고 있지만 아직 장밋빛 미래를 예견하기엔 이르다는 것이 이 대표의 설명이다. 이 대표는 “양자컴퓨팅 이론은 이미 1980년대에 정립됐는데, 관련 기술과 하드웨어 등의 발전으로 이제 그 이론을 현실화하는 단계”라며 “과학의 영역에서 공학 기술의 영역으로 접어드는 단계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양자컴퓨팅 기술이 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특정 환경이나 분야가 국한돼 있다는 어려움도 있다. 이 대표는 “특정 환경이나 문제에서 양자컴퓨팅 기술이 탁월한 성능으로 작동하지만, 또 다른 환경에서는 스마트폰 성능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기도 한다”며 “양자컴퓨팅 기술이 최적 성능을 발휘할 환경이나 분야, 문제 등을 찾아 그에 적합한 솔루션을 개발하는 것이 엑스닷츠의 핵심 역량”이라고 설명했다. 엑스닷츠가 집중하는 양자컴퓨팅 적용 환경은 전력 관리 분야다. 양자컴퓨팅 기술과 알고리즘을 적용해 전력 에너지 관리를 최적화함으로써 탄소 배출량은 줄이고, 기업이나 국가 전체의 전력 운영 비용은 획기적으로 낮추기 위해 솔루션 개발에 매진하고 있다. 에너지 고갈 현상과 탄소 배출로 인한 환경 오염 등이 전 세계의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면서 전력 최적화는 앞으로도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인식에서다. 한 기업이 소비하는 전체 전력 현황을 데이터화하고 이를 양자컴퓨팅 알고리즘으로 최적화하면, 기존 설치된 전력 설비에는 큰 변화를 주지 않고도 효율을 유지하면서 전력 소비와 비용은 크게 절감할 수 있다. 이 대표는 “양자컴퓨팅 전력 최적화 기술을 적용하면 약 30%의 전력량 감소를 기대할 수 있다”며 “전력 비용이 절감되지 않으면 엑스닷츠는 수익을 받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현재 엑스닷츠의 전력 최적화 솔루션은 국내 유수의 대기업, 대학 등과 활발한 시장 검증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2026년까지 시장 검증을 마친 후 본격적인 상품화에 나선다. 이 대표는 “2028년쯤 양자컴퓨팅 기술이 전력 분야를 포함해 여러 분야에 본격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할 것”이라고 했다. 이어 “양자 기술 선진국에 비해 아직 제도적 지원이나 국가적 양성이 부족한 터라 물리학 분야의 우수 인력을 수급하기 쉽지 않다”며 “관련 인력을 포함해 세일즈, 마케팅, 물류·운항·운전·경로 최적화 분야에서 일할 새로운 인력을 모집할 예정”이라고 했다.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마음(心)속 깊은(深) 것에 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살면서 ‘도대체 이건 왜 이러지?’ ‘왜 마음이 마음대로 안 될까?’ 하고 생겨난 궁금증들을 로 알려주세요. 함께 고민해 보겠습니다.직장인 유진수 씨(37)는 아직도 ‘사돌이’를 잊지 못한다. 사돌이는 유 씨가 다섯살 때 가지고 놀던 사자 인형의 이름이다. 사돌이는 잘 때나 밥 먹을 때 늘 유 씨 옆에 있었다. 하도 오랫동안 가지고 놀아서 솜이 다 죽고 꼬질꼬질해 못생긴 인형이었다. 그러다 어느날 부모님이 낡아서 볼품 없어진 사돌이를 유 씨 몰래 갖다 버렸다. 당시 부모님은 새 사자 인형을 여러개 사다주며 낙담한 유 씨를 달래봤지만, 세상에 사돌이를 대신할 사자 인형은 없었다.‘다 큰 어른이 웬 인형?’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어렸을 때 가지고 놀던 애착 인형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는 것은 물론이고, 귀엽고 보들보들한 인형을 사모으는 어른이 적지 않다.실제로 인스타그램이나 틱톡에서 부드러운 천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plush’를 검색하면 봉제 인형 관련 게시물 수백만 개가 나온다. 대부분 성인들이 수집하고 있는 인형들이다. 영유아용 애착 인형으로 알려진 영국 인형 브랜드 ‘젤리캣’은 어른들에게 더 인기가 많다. 미국 시장조사업체 서카나는 지난해 기준 전 세계 봉제 인형 시장 규모를 약 120억 달러(약 17조2300억 원)로 추정하며, 2030년까지 연평균 8%씩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성인이 인형에 열광하는 이유를 단지 키덜트(kid·어린이 + adult·어른, 어린이 감성을 소비하는 어른) 문화로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장난감 중에 봉제 인형만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부드러운 촉감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다. 부드럽고 포근한 촉감이 주는 심리적 위로 효과에 대해 알아보자.● 어린시절엔 인형 벗삼아 독립 연습어렸을 때 특정 인형이나 이불에 유난히 집착하던 경험이 있다면 잘 알 것이다. 꼬질꼬질해진 인형이나 이불을 세탁하는 날은 마르기도 전에 달라고 떼쓰는 통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낡아서 보기 싫다는 이유로 부모가 몰래 인형이나 이불을 버린 적이 있다면 큰 상실감을 느꼈을 것이다.그렇다고 인형이나 이불에 집착하는 모든 아이가 애정 결핍은 아니다. 영국 소아과 의사이자 저명한 정신분석학자인 도널드 위니콧은 1951년 발표한 연구에서 아이들이 잠들 때나 분리 불안을 느끼는 상황에서 인형, 담요같이 부드러운 애착 대상을 통해 스트레스를 낮추고 안정감을 찾으면서 독립을 연습한다고 설명했다. 아이가 커가면서 엄마에 대한 절대적인 의존성을 낮춰가는 발달 시기에 과도기적으로 나타나는 일시적 현상으로 본 것이다.30년간 아동과 부모의 애착 관계에서 애착 이불(인형)의 역할을 연구해 온 리처드 패스먼 미국 밀워키 위스콘신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도 부모와 안정적인 애착 관계가 형성됐더라도 아이가 인형이나 이불에 집착할 수 있다고 봤다. 다만 부모와의 애착 관계가 불안정한 아이일수록 애착 물건이 주는 안정 효과가 더 강력한 것은 맞다.● 포근한 품 찾는 것은 생존 본능인간의 이런 특성은 성인이 되어서도 마음이 힘들 때 포근한 대상을 찾도록 진화해 왔다. 여러 신경생물학, 지각(知覺)심리학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는 기분이 안 좋을 땐 뇌에서 촉각 자극을 추구하고, 기분이 좋으면 시각 자극을 선호하도록 환경에 적응했다.이는 생존 본능과 관련이 있다. 아기나 새끼 동물은 생존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불안 같은 부정적 감정을 느낀다. 이때 따뜻하고 부드러운 보호자 품에 안기면 평소보다 더 큰 안정감과 만족감을 느낀다.미국 심리학자 해리 헬로우가 1958년 발표한 ‘사랑의 본질’이라는 고전적 심리학 연구에서도 이는 잘 드러난다. 어미와 헤어져 분리 불안을 겪는 새끼 원숭이가 철사로 만든 어미 모형과 천으로 만든 어미 모형 중 어느것을 더 선호하는지 살펴봤더니, 천으로 만든 모형에서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심지어 철사 모형에는 젖병이 달려 있어 먹이를 먹을 수 있었음에도 불안한 새끼 원숭이는 먹이보다 정서적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을 더 좋아했다. 실험 시작 전에는 새끼 원숭이가 당연히 먹이를 주는 철사 모형에 더 애착을 느낄 거라고 생각했지만, 완전히 반대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후 실험에서는 천으로 만든 어미 모형에서 철사 못 같은 뾰족한 물체가 튀어나오는 다소 잔인한 장치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때도 마찬가지로 새끼 원숭이는 피를 흘리면서도 천 모형 어미를 떠나지 못했다. 접촉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졌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이런 특성은 성인이 되어서도 그대로 남아 있다. 불안과 슬픔을 느끼거나 우울한 상태에서 부드러운 촉각을 경험하면 마음이 안정되고 기분이 좋아지게 되는 것이다. 반면 아무 위협도 없고 기분이 좋은 상황에서는 포근한 촉각이 주는 위로 효과가 떨어진다. 오히려 이때 우리 뇌는 환경을 탐험하며 활력을 주는 시각적 자극을 찾는 것을 더 선호한다.위협이 있을 땐 촉감에 민감해져 안정을 추구하고, 위협이 사라지면 시각 자극에 더 예민해져 주변을 탐험하고 싶어지는 일종의 균형 시스템으로 발전한 셈이다.● 촉각의 위로…어른을 위한 인형 개발촉각이나 신체 접촉 관련 연구 상당수는 아동 발달에 관심을 뒀다. 사회가 점차 각박해지고 개인의 외로움, 우울증, 자살, 고령화 같은 현대 사회 문제가 불거지면서 연구자들은 어떻게 하면 성인도 촉각을 활용해 심리적 안정 효과를 얻을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특히 세계 각국에서는 불안과 우울감을 해소하고 안정감을 주는 특수 인형 개발에 힘쓰고 있다. 영국 브리스틀대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 공동 연구팀은 특수 제작된 숨 쉬는 쿠션을 개발해 성능을 검증했다. 처음부터 숨 쉬는 쿠션을 개발한 것은 아니었다. 심장 박동이 느껴지는 쿠션, 자고 있는 고양이처럼 ‘푸르르르’하며 진동을 내는 쿠션, ‘푸르르르’ 떨림과 숨 쉬는 움직임이 같이 나타나는 쿠션, 무지개 조명이 나오는 쿠션 등도 후보군이었다. 사전 실험을 진행해 보니 이 가운데 사람들에게 가장 반응이 좋은 게 숨 쉬는 쿠션이었다. 이어진 실험에서는 실험참가자 129명에게 불안과 스트레스를 조장하기 위해 수학 시험을 보겠다고 공지했다. 시험은 필기도구로 종이에 푸는 게 아니라, 남들 앞에서 화면에 뜬 문제를 보고 정해진 시간 내에 구두로 설명하는 압박 방식으로 이뤄졌다.실험참가자를 세 그룹으로 나누고 시험을 치르기 전에 어떻게 하면 불안을 낮출 수 있는지 알아봤다. 첫 번째 그룹은 쿠션을 꼭 껴안고 있으라고 했다. 이 쿠션은 부드러운 재질의 하늘색 천으로 만들었고, 안에 동력 장치를 넣어 마치 쿠션이 숨 쉬는 것 같은 움직임이 느껴지도록 했다. 두 번째 그룹은 명상 전문가가 녹음한 명상법을 따라했다. 세 번째 그룹은 혼자 편안하게 휴식을 취했다. 수학 시험을 보기 전후로 심리 검사를 통해 각각 불안 수준을 측정했다.심리 검사 점수를 분석해 보니, 쿠션을 껴안고 있던 사람들은 전문가 지도에 따라 명상을 한 사람만큼이나 시험 전 불안이 감소했다. 실제로 사람들은 쿠션 덕에 ‘진정됐다’ ‘편안했다’ ‘위안을 얻었다’ 같은 반응을 보였다. 연구진은 “긴장한 참가자들이 쿠션 움직임에 따라 호흡 속도가 느려지고, 부드러운 촉감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얻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사람과 소통하며 촉각 자극하면 더 큰 안정감부드럽고 폭신한 인형은 혼자 사는 노인의 우울감이나 외로움을 더는 효과도 있다. 일본 연구진은 스마트폰으로 통화할 때 상대방 음성에 맞춰 진동하는 인형 ‘허그비’를 개발했다. 60대 여성 18명 가운데 절반은 허그비를 껴안고 통화하도록 했고, 나머지 절반은 스피커폰으로 각각 15분씩 통화했다. 대화 상대는 연구진이 고용한 남자 대학생들이었다.통화 전후 노인들의 혈액과 타액을 채취해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수치를 살펴본 결과 허그비를 안고 있던 사람들은 다른 그룹보다 코르티솔 수치가 훨씬 더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일반 스피커 기능으로 통화한 노인들도 코르티솔 수치가 일부 감소했다. 사람과 상호 작용하며 즐거운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를 낮추는 효과가 있어서다. 이에 더해 연구진은 허그비가 부드러운 촉각에만 반응하는 인간 신경섬유인 C 섬유를 자극해 불안과 스트레스를 느끼는 뇌 편도체의 활성화 정도를 낮춘 것으로 분석했다.덴마크 오르후스대에서도 60대 이상 남녀 참가자 29명을 대상으로 같은 실험을 해 봤더니, 허그비를 안고 통화한 사람들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스트레스와 불안 지수가 훨씬 더 낮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허그비를 마치 어린 아이나 강아지, 펭귄같은 동물에 빗대어 설명하면서 사물이 아닌 인격체처럼 묘사하기도 했다. 다만 남성 노인들은 남자가 인형을 안고 있다는 것 자체를 다소 어색해 하기도 했다.● 포근한 잠옷·소파로 포근한 환경 만들면 도움촉각의 위로가 반드시 인형 같은 천 소재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댄 킹 싱가포르대 경영대학원 교수와 크리스 제니제프스키 미 플로리다대 경영대학원 교수가 시행한 연구에 따르면 로션을 바를 때의 부드러운 느낌도 기분이 별로인 소비자 정서를 환기하는 힘이 있었다. 로션의 부드러움 덕에 기분이 좋아진 소비자들은 로션을 사는 데 돈을 더 많이 지불할 의사가 있다고 했다. 폭신한 인형을 종류별로 사 모으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그런데 연구진이 의도적으로 같은 로션에 물을 타서 로션을 바를 때 부드러운 느낌을 상쇄시키자, 소비자들은 이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로션을 사겠다는 의사를 철회했다.이런 특성에 주목해 더 나은 기분을 느낄 수 있도록 휴식 공간을 꾸밀 수도 있다. 환경에서 느끼는 감각과 지각이 감정에 미치는 효과를 분석한 책 ‘조이풀’을 쓴 디자이너 잉그리드 페텔 리는 “어릴 적 애착 인형처럼 의미가 있는 물건이 아니더라도 어른 역시 힘들 때 위안을 얻을 수 있는 폭신하고 부드러운 질감의 소품을 통해 얼마든지 휴식 공간을 꾸밀 수 있다”고 강조했다.힘든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와 무심코 만진 부드러운 소파, 쿠션, 무릎 담요 등이 건네는 위로가 생각보다 클 수 있다. 잠자리에 촉감 좋은 베개 또는 이불을 두거나 포근한 소재 잠옷을 입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반대로 이런 소품들은 회의실이나 작업공간, 교실처럼 지적 탐구 능력이 필요한 곳에서는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 활력이 필요한 공간에는 안정감을 주는 부드러운 질감보다 화려한 패턴이나 색상을 활용해 시각을 자극하는 것이 좋다.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인스타그램이나 틱톡 등에서 부드러운 천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plush’를 검색하면 봉제 인형 관련 게시물 수백만 개가 나온다. 각종 동물부터 눈 코 입 달린 사물 인형까지 다양하다. 귀여울 뿐 아니라 촉감도 보들보들해 보여 만져 보고 싶게 생겼다. 인기 많은 브랜드 한정판 제품은 중고 사이트에서 100만 원 넘는 가격에 팔린다. 영유아용 애착 인형으로 알려진 영국 인형 브랜드 ‘젤리캣’은 어른들에게 더 인기가 많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인형 게시물을 올리는 것도 대부분 성인이다. 신상품을 종류별로 수집하는 애호가도 많다. 미국 시장조사업체 서카나는 지난해 기준 전 세계 봉제 인형 시장 규모를 약 120억 달러(약 17조2300억 원)로 추정하며, 2030년까지 연평균 8%씩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다 큰 성인이 인형에 열광하는 이유를 단지 키덜트(kid·어린이+adult·어른, 어린이 감성을 소비하는 어른) 문화로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장난감 중에 봉제 인형만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부드러운 촉감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다. 부드럽고 포근한 촉감이 주는 심리적 위로 효과에 대해 알아보자.● 마음이 힘들 땐 보드라운 것을 찾도록 진화했다 어렸을 때 특정 인형이나 이불에 유난히 집착하던 경험이 있다면 잘 알 것이다. 꼬질꼬질해진 인형이나 이불을 세탁하는 날은 마르기도 전에 달라고 떼쓰는 통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낡아서 보기 싫다는 이유로 부모가 몰래 인형이나 이불을 버린 적이 있다면 큰 상실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인형이나 이불에 집착하는 모든 아이가 애정 결핍은 아니다. 영국 소아과 의사이자 저명한 정신분석학자인 도널드 위니콧은 1951년 발표한 연구에서 아이들이 잠들 때나 분리 불안을 느끼는 상황에서 인형, 담요같이 부드러운 애착 대상을 통해 스트레스를 낮추고 안정감을 찾으면서 독립을 연습한다고 설명했다. 30년간 아동과 부모의 애착 관계에서 애착 이불(인형)의 역할을 연구해 온 리처드 패스먼 미국 밀워키 위스콘신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도 부모와 안정적인 애착 관계가 형성됐더라도 아이가 인형이나 이불에 집착할 수 있다고 봤다. 다만 부모와의 애착 관계가 불안정한 아이일수록 애착 물건이 주는 안정 효과가 더 강력한 것은 맞다. 인간의 이런 특성은 성인이 되어서도 마음이 힘들 때 포근한 대상을 찾도록 진화해 왔다. 여러 신경생물학, 지각(知覺)심리학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는 기분이 안 좋을 땐 뇌에서 촉각 자극을 추구하고, 기분이 좋으면 시각 자극을 선호하도록 환경에 적응했다. 이는 생존 본능과 관련 있다. 아기나 새끼 동물은 생존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불안 같은 부정적 감정을 느낀다. 이때 따뜻하고 부드러운 보호자 품에 안기면 평소보다 더 큰 안정감과 만족감을 느낀다. 미국 심리학자 해리 할로가 1958년 발표한 ‘사랑의 본질’이라는 고전적 심리학 연구에서도 이는 잘 드러난다. 어미와 헤어져 분리 불안을 겪는 새끼 원숭이가 철사로 만든 어미 모형과 천으로 만든 어미 모형 중 어느것을 더 선호하는지 살펴봤더니, 천으로 만든 모형에서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심지어 철사 모형에는 젖병이 달려 있어 먹이를 먹을 수 있었음에도 불안한 새끼 원숭이는 먹이보다 정서적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을 더 좋아했다. 이런 특성은 성인이 되어서도 그대로 남아 있다. 불안과 슬픔을 느끼거나 우울한 상태에서 부드러운 촉각을 경험하면 마음이 안정되고 기분이 좋아지게 되는 것이다. 반면 아무 위협도 없고 기분이 좋은 상황에서는 포근한 촉각이 주는 위로 효과가 떨어진다. 오히려 이때 우리 뇌는 환경을 탐험하며 활력을 주는 시각적 자극을 찾는 것을 더 선호한다. 위협이 있을 땐 촉감에 민감해져 안정을 추구하고, 위협이 사라지면 시각 자극에 더 예민해져 주변을 탐험하고 싶어지는 일종의 균형 시스템으로 발전한 셈이다.● 어른을 위한 ‘마음 안정 인형’ 촉각이나 신체 접촉 관련 연구 상당수는 아동 발달에 관심을 뒀다. 사회가 점차 각박해지고 개인의 외로움, 우울증, 자살, 고령화 같은 현대 사회 문제가 불거지면서 연구자들은 어떻게 하면 성인도 촉각을 활용해 심리적 안정 효과를 얻을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특히 세계 각국에서는 불안과 우울감을 해소하고 안정감을 주는 특수 인형 개발에 힘쓰고 있다. 영국 브리스틀대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 공동 연구팀은 특수 제작된 숨 쉬는 쿠션을 개발해 성능을 검증했다. 실험을 위해 모집한 성인 129명에게 불안과 스트레스를 조장하기 위해 수학 시험을 보겠다고 공지했다. 시험은 필기도구로 종이에 푸는 게 아니라, 남들 앞에서 화면에 뜬 문제를 보고 정해진 시간 내에 구두로 설명하는 압박 방식으로 이뤄졌다. 실험 참가자를 세 그룹으로 나누고 시험을 치르기 전에 어떻게 하면 불안을 낮출 수 있는지 알아봤다. 첫 번째 그룹은 쿠션을 꼭 껴안고 있으라고 했다. 이 쿠션은 부드러운 재질의 하늘색 천으로 만들었고, 안에 동력 장치를 넣어 마치 쿠션이 숨 쉬는 것 같은 움직임이 느껴지도록 했다. 두 번째 그룹은 명상 전문가가 녹음한 명상법을 따라 했다. 세 번째 그룹은 혼자 편안하게 휴식을 취했다. 수학 시험을 보기 전후로 심리 검사를 통해 각각 불안 수준을 측정했다. 심리 검사 점수를 분석해 보니, 쿠션을 껴안고 있던 사람들은 전문가 지도에 따라 명상을 한 사람만큼이나 시험 전 불안이 감소했다. 실제로 사람들은 쿠션 덕에 ‘진정됐다’ ‘편안했다’ ‘위안을 얻었다’ 같은 반응을 보였다. 연구진은 “긴장한 참가자들이 쿠션 움직임에 따라 호흡 속도가 느려지고, 부드러운 촉감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얻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부드럽고 폭신한 인형은 혼자 사는 노인의 우울감이나 외로움을 더는 효과도 있다. 일본 연구진은 스마트폰으로 통화할 때 상대방 음성에 맞춰 진동하는 인형 ‘허그비’를 개발했다. 60대 여성 18명 가운데 절반은 허그비를 껴안고 통화하도록 했고, 나머지 절반은 스피커폰으로 각각 15분씩 통화했다. 대화 상대는 연구진이 고용한 남자 대학생들이었다.통화 전후 노인들의 혈액과 타액을 채취해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수치를 살펴본 결과 허그비를 안고 있던 사람들은 다른 그룹보다 코르티솔 수치가 훨씬 더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허그비가 부드러운 촉각에만 반응하는 인간 신경섬유인 C 섬유를 자극해 불안과 스트레스를 느끼는 뇌 편도체의 활성화 정도를 낮춘 것으로 분석했다. 덴마크 오르후스대에서도 60대 이상 남녀 참가자 29명을 대상으로 같은 실험을 해 봤더니, 허그비를 안고 통화한 사람들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스트레스와 불안 지수가 훨씬 더 낮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안정이 필요한 곳엔 화려함 대신 포근함을 촉각의 위로가 반드시 인형 같은 천 소재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댄 킹 싱가포르대 경영대학원 교수와 크리스 야니셰프스키 미 플로리다대 경영대학원 교수가 시행한 연구에 따르면 로션을 바를 때의 부드러운 느낌도 기분이 별로인 소비자 정서를 환기하는 힘이 있었다. 로션의 부드러움 덕에 기분이 좋아진 소비자들은 로션을 사는 데 돈을 더 많이 지불할 의사가 있다고 했다. 폭신한 인형을 종류별로 사 모으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이런 특성에 주목해 더 나은 기분을 느낄 수 있도록 휴식 공간을 꾸밀 수도 있다. 환경에서 느끼는 감각과 지각이 감정에 미치는 효과를 분석한 책 ‘조이풀’을 쓴 디자이너 잉그리드 페텔 리는 “어릴 적 애착 인형처럼 의미가 있는 물건이 아니더라도 어른 역시 힘들 때 위안을 얻을 수 있는 폭신하고 부드러운 질감의 소품을 통해 얼마든지 휴식 공간을 꾸밀 수 있다”고 강조했다. 힘든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와 무심코 만진 부드러운 소파, 쿠션, 무릎 담요 등이 건네는 위로가 생각보다 클 수 있다. 잠자리에 촉감 좋은 베개 또는 이불을 두거나 포근한 소재 잠옷을 입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반대로 이런 소품들은 회의실이나 작업공간, 교실처럼 지적 탐구 능력이 필요한 곳에서는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 활력이 필요한 공간에는 안정감을 주는 부드러운 질감보다 화려한 패턴이나 색상을 활용해 시각을 자극하는 것이 좋다.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마음(心)속 깊은(深) 것에 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살면서 ‘도대체 이건 왜 이러지?’ ‘왜 마음이 마음대로 안 될까?’ 하고 생겨난 궁금증들을 메일(best@donga.com)로 알려주세요. 함께 고민해 보겠습니다.20대 직장인 이주아(가명) 씨는 처음엔 입사 동기 A가 좋았다. 먼저 다가오는 A의 성격 덕에 급속도로 친해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 싸한 느낌이 들었다. A는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는 신나서 하다가도 주제가 이 씨 이야기로 바뀌면 관심이 뚝 떨어졌다. 회사에서 이 씨가 상사에게 칭찬을 받으면 A는 질투하며 심술을 부렸다. 심지어 이 씨가 낸 업무 아이디어를 자기 생각인 것처럼 회사 안에서 말하고 다녔다. 이 씨가 싫은 티를 내자 A는 다른 동료들에게 자신이 피해자인 것처럼 행세했다. 이 씨는 다른 입사 동기에게 억울함을 호소해 봤다. 하지만 “A 성격 좋은 것 같던데 왜?”라는 반응이 돌아와 놀라울 뿐이었다.매력적으로 다가와서는 자기 위주의 관계를 형성한다. 그 관계에서 자신이 돋보이지 못하면 질투에 불타올라 상대를 깎아내린다. 어느새 주변 사람들까지 포섭해 상대를 자기 멋대로 통제하려 든다. 우리 주변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나르시시스트의 모습이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다른 사람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는 나르시시스트에게 영문 모르고 당하기 쉽다.나르시시즘은 사이코패스, 마키아벨리즘(남을 착취하는 성향)과 함께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어두운 성격의 3요소(dark triad)’로 꼽힌다. 나르시시스트라고 해서 전부 ‘왕자병’ ‘공주병’ 성향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평범한 모습으로 교묘하게 괴롭히는 경우가 더 많다. 이들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알아보자.● 나르시시스트는 모두 성격 장애?자기애성 성격 특성은 ‘있다’ ‘없다’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는 게 아니다. 자기애가 매우 부족한 수준부터 병적인 정도까지 나타나는 스펙트럼상에서 이해해야 한다.병적 수준의 나르시시스트는 자기애성 성격 장애에 속한다.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DSM-5)에 따르면 진단 기준은 △근거 없는 자만심(오만불손) △특권층과만 어울려야 한다는 착각 △무한한 권력, 성공, 지능, 외모에 대한 환상 △무조건적 존경심 요구 △특권 의식 △타인 착취 △공감 능력 결여 등이다. 학계 일부에서는 악성 나르시시스트는 사이코패스와 같다고 보기도 한다. 자기애성 성격 장애는 일반 인구의 1% 수준으로 나타난다.병적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자기애 양상을 다양하게 드러내며 사람을 교묘하게 괴롭히는 나르시시스트가 더 많다. 이는 여러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과대형 나르시시스트(외현적·外現的 나르시시스트)가 가장 전형적이다. 거만하고 특별 대우를 바라며, 권력 지향적이고 외적 아름다움에 집착한다. 트로피처럼 자신을 빛나게 해주는 그럴듯한 배우자, 연인, 자녀를 원한다. 리더십이 있는 것처럼 보여 기업 임원 등에 많다.취약한 나르시시스트(내현적·內現的 나르시시스트)는 내향적이고 소심해서 눈치채기 어렵다. 이들은 늘 불안하고 과민하며 고집 세다. 주목받기는 싫어하지만 특별 대우를 바라는 건 똑같다. 소극적 성격 탓에 현실에서 눈에 띄게 성공하지는 못하는데, 이때 남 탓을 하며 짜증을 부린다. 은밀하게 악성 댓글을 다는 사람 중에 많다.봉사와 헌신을 통해 자기를 드러내려는 공동체적 나르시시스트(관계적 나르시시스트) 유형도 있다. 이들은 사회나 조직에 이바지하는 게 진짜 목적이 아니라, 헌신하는 자신의 멋진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길 바란다.◆과시형 나르시시스트의 속마음·여러 사람에게 주목받는 것을 좋아한다.·권력 의지가 강하다.·나는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몸매(체격)를 과시하기 좋아한다.·다른 사람보다 더 유능하다고 느낀다.·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타고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다른 사람을 설득해 뭐든지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자료: 자기애성 성격 검사·NPI◆취약한 나르시시스트의 속마음·겁이 많고 소심하다.·다른 사람 눈치를 많이 살핀다.·비판받을 때 쉽게 굴욕감을 느낀다.·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하고 잘 대해 주길 바란다.·사람들이 왜 내 장점을 더 알아주지 않는지 의문이다.·기회만 된다면 죄책감 없이 다른 사람들을 이용할 수 있다.·다른 사람이 자기 문제로 내 시간을 요구하거나 공감해 주길 바라면 괴롭고 귀찮다.자료: 내현적 자기애 척도·CNS● 나르시시스트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길러진다나르시시스트는 양육 환경에 의해 생겨나는 경우가 많다. 부모의 전폭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는 유아기에는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 느끼며 살아간다. 대부분 성장하면서 겪는 크고 작은 실패와 좌절을 통해 ‘나는 공주(왕자)가 아니라 보통 존재’라는 것을 저절로 경험한다.부모의 과잉보호 등으로 인해 성숙에 필요한 좌절 경험을 못 하고 성장하면 성인이 돼도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생각에 머물러 있다. 혹은 정반대로, 어렸을 때 감당할 수 없는 좌절을 겪으면 비참한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 완벽한 모습으로 칭송받는 자신을 상상하며 자기애를 키울 수도 있다.극단적으로는 어린 시절 부모의 학대나 부재 등도 영향을 미친다. 나쁜 양육의 결과로 다시는 누구에게 의존하기 싫은 마음이 무의식적으로 싹튼다. 그러기 위해서 자신이 모든 걸 완벽하게 갖춘 인간이라고 점점 믿게 된다.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불안에 떠는 하찮은 존재라는 느낌을 더 이상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동시에 주변 사람들은 무능하고 모자란 존재라고 평가절하하며 자기를 더 돋보이는 존재로 인식한다.어린 시절 특출난 재능을 보이거나, 탄생 자체가 가족 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아이도 나르시시스트가 되기 쉽다. 어렸을 때부터 특별 대우를 받으며 자란 아이는 주변 칭찬에 굉장히 민감해진다. 그런데 칭찬받지 못할 때 생기는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부모가 좋아하는 이상적인 자기 모습을 상상하며 과장된 자기상(像)을 키워 나간다. 이런 상상이 고착하면 과도한 자기애가 생길 수 있다.나르시시스트 부모를 둔 자녀도 자기애성 성격으로 자라기 쉽다. 이렇게 자란 사람은 ‘너는 완벽하다’며 오냐오냐해서 자녀를 길러 나르시시스트로 키우기도 한다. 학교 교사에게 자녀를 특별 대우하라고 요구하며 “왕의 DNA를 가진 아이”라고 주장한 학부모 사례도 이런 선상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자녀를 마치 자신을 빛나게 해줄 트로피 같은 도구로 여겨서 ‘성공해야만 내 자식’이라는 자세로 상처를 주는 나르시시스트 부모도 있다. 이들은 자녀가 성공해야만 사랑을 주고 실패하면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사소한 일에도 “무시 당했다”며 바르르나르시시스트의 깊은 내면 세계는 사실 빈약할 뿐 아니라 열등감으로 차 있다. 누가 자신을 무시하는지 항상 날이 서 있다.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면 복수에도 능하다. 자기애와 분노, 공격성과 관련한 연구 437건을 분석해 보니 성별이나 국적, 나이와 관계없이 나르시시즘 성향이 강한 사람은 신체적, 언어적 폭력 성향이 두드러진 것은 물론이고 사이버 공간에서도 공격성을 보였다.특히 취약한 나르시시스트는 복수의 화신이다. 즐라탄 크리잔 미국 아이오와주립대 심리학과 교수 연구팀은 실험 참가자 208명에 대해 나르시시즘 검사를 한 뒤 높은 점수를 받은 사람들을 과대형 또는 취약한 나르시시스트 유형으로 나눴다.이어서 참가자들에게 미각 관련 실험이라고 속인 다음 평소에 어떤 맛을 좋아하는지 조사했다. 이후 역한 맛의 야채즙 또는 일반 차(茶) 중 하나를 무작위로 주면서 “당신과 짝꿍인 참가자가 당신 취향을 고려해 선택한 음료”라고 설명했다. 야채즙은 상대방의 사소한 행동도 자기를 무시했다고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나르시시스트를 도발하기 위한 장치였다. 야채즙을 받은 나르시시스트들은 ‘(짝꿍에게) 분명히 좋아하는 맛을 알려줬는데도 짝꿍이 (나를) 무시해서 이상한 음료를 줬다’고 여길 가능성이 컸다. 예측은 맞아 떨어졌다.이어진 실험에서는 반대로 짝꿍에게 줄 음식 소스로 보통 맛과 엄청 매운맛 중에 선택할 기회를 참가자에게 줬다. 참가자 대다수가 보통 맛 소스를 주겠다고 했지만, 야채즙을 마신 취약한 나르시시스트 유형 참가자 대다수는 엄청 매운맛을 선택했다. 심지어 이들은 짝꿍이 아니라 제삼자에게 줄 소스를 선택하라고 했을 때도 엄청 매운맛으로 결정했다. 사소한 한 번의 ‘도발’로 인해 여러 사람에게 공격성이 뻗친 것이다. 작은 도발에도 바르르 떨며 주변 사람들을 괴롭힐 준비가 되어 있는 나르시시스트 특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팀보단 내가 우선…팀워크 방해물조직에 속한 나르시시스트는 혼자 주목받는 걸 원하기 때문에 팀워크에 해롭다. 나서는 걸 좋아해 초반에는 리더감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팀의 성과보다는 자기가 돋보여야 하는 욕심이 앞선다.에밀리 그리할바 미 버팔로대 경영대학원 교수를 비롯한 공동 연구팀은 스포츠 경기에서 나르시시스트 선수의 활약이 팀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알아봤다. 2013~2014년 미국 프로농구(NBA) 2460경기를 분석했다. 당시 선수 391명이 각자 트위터(현 X) 계정에 올린 사진, 글 4731건을 분석해 자기애 점수를 매겼다. 예를 들어 “거울을 보면서 무슨 생각하냐고? 위대함(What do you think when you look in the mirror? Greatness)” 같은 글을 쓰거나, 자신의 근육질을 과시하는 노출 사진을 올린 선수에게 자기애 점수를 높게 줬다. 그리고 이들의 경기당 어시스트 수와 승패를 살펴봤다. 어려워서 확률이 낮은 슛을 넣어 성공을 혼자 만끽할 것인지, 동료에게 패스해 팀 전체의 득점 기회를 높일 것인지 보기 위해서다.그 결과 자기애 점수가 높은 선수는 어시스트 수가 상대적으로 적었고 팀 성적도 저조했다. 평균 자기애 점수가 높은 팀일수록 전체 어시스트 수가 적었고 팀 성적도 안 좋았다. 자기가 돋보이는 게 중요한 나르시시스트가 많을수록 팀 성과가 저조했다.이런 팀은 함께 뛴 경기 경험이 쌓여도 선수들이 서로 협력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경기에서 합을 맞춘 시간이 늘어날수록 경기력은 늘어나기 마련인데, 자기애 점수가 높은 선수들이 많은 팀은 시즌 막바지로 가도 팀워크가 개선되지 못했다. 반면 자기애 평균 점수가 낮은 팀들은 상대적으로 서너 경기 더 이긴 것으로 나타났다. ● ‘손절’만이 답? 이들과 어떻게 살아야 할까일명 ‘회색 돌’ 기법이란 것이 있다. 20년 이상 자기애 관련 연구를 한 키스 캠벨 미 조지아대 심리학과 교수는 회색 돌 기법에 대해 “특별한 방법은 없고, 그저 당신 일을 하면 된다”고 설명한다. 나르시시스트는 만만한 대상으로 하여금 화, 슬픔, 죄책감, 미안함 같은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게 해 자기 마음대로 쥐락펴락하려고 한다. 이에 말려들지 않으려면 최대한 감정 동요를 보이지 않아야 한다. 반응도 없이 튀지 않으면서 배경에 스며드는 회색 돌처럼 말이다. 필요한 말만 하고 거리를 두다 보면 가지고 놀기에 재미없는 사람이라 느껴 나르시시스트가 알아서 떠나간다.하지만 한집에 사는 사이라면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때 필요한 건 나르시시스트가 자신의 감정을 자극하는 말을 할 때 ‘이건 내 문제가 아니라 저 사람 문제’라는 관점을 갖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 전문 유튜브 채널 ‘토킹닥터스’를 운영하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원은수 원장은 “상대가 나를 공격하며 흔들어대도 그 말에 곧이곧대로 상처받을 필요가 없다”며 “저 사람이 나를 협박해서 통제하고 싶어 하거나 화풀이하고 싶어 한다는 것같이 상대에게 원인이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나르시시스트마다 자기애 특성이 드러나는 방식과 수준이 천차만별이므로 ‘손절’ 내지는 무작정 사랑으로 포용하기 같은 절대적 대응 방법이 없다는 점도 알아야 한다. 원 원장은 “심각하게 폭력적이고 반(反)사회성을 드러내는 이들이 있는 반면, 본인이 먼저 변화하려고 노력하는 경우도 있다”며 “중요한 점은 스스로 인지해서 바뀌려고 노력하느냐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더해 주변 사람들과의 대인관계 문제가 자꾸 불거지고, 나 때문에 상처받았다는 말을 누군가 한 적이 있다면 혹시 내가 나르시시스트는 아닌지 돌아볼 필요도 있다.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20대 직장인 이주아(가명) 씨는 처음엔 입사 동기 A가 좋았다. 먼저 다가오는 A의 성격 덕에 급속도로 친해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 싸한 느낌이 들었다. A는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는 신나서 하다가도 주제가 이 씨 이야기로 바뀌면 관심이 뚝 떨어졌다. 회사에서 이 씨가 상사에게 칭찬을 받으면 A는 질투하며 심술을 부렸다. 심지어 이 씨가 낸 업무 아이디어를 자기 생각인 것처럼 회사 안에서 말하고 다녔다. 이 씨가 싫은 티를 내자 A는 다른 동료들에게 자신이 피해자인 것처럼 행세했다. 이 씨는 다른 입사 동기에게 억울함을 호소해 봤다. 하지만 “A 성격 좋은 것 같던데 왜?”라는 반응이 돌아와 놀라울 뿐이었다. 매력적으로 다가와서는 자기 위주의 관계를 형성한다. 그 관계에서 자신이 돋보이지 못하면 질투에 불타올라 상대를 깎아내린다. 어느새 주변 사람들까지 포섭해 상대를 자기 멋대로 통제하려 든다. 우리 주변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나르시시스트의 모습이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다른 사람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는 나르시시스트에게 영문 모르고 당하기 쉽다. 나르시시즘은 사이코패스, 마키아벨리즘(남을 착취하는 성향)과 함께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어두운 성격의 3요소(dark triad)’로 꼽힌다. 나르시시스트라고 해서 전부 ‘왕자병’ ‘공주병’ 성향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평범한 모습으로 교묘하게 괴롭히는 경우가 더 많다. 이들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알아보자.● 나르시시스트는 모두 성격 장애? 자기애성 성격 특성은 ‘있다’ ‘없다’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는 게 아니다. 자기애가 매우 부족한 수준부터 병적인 정도까지 나타나는 스펙트럼상에서 이해해야 한다. 병적 수준의 나르시시스트는 자기애성 성격 장애에 속한다.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DSM-5)에 따르면 진단 기준은 △근거 없는 자만심(오만불손) △특권층과만 어울려야 한다는 착각 △무한한 권력, 성공, 지능, 외모에 대한 환상 △무조건적 존경심 요구 △특권 의식 △타인 착취 △공감 능력 결여 등이다. 학계 일부에서는 악성 나르시시스트는 사이코패스와 같다고 보기도 한다. 자기애성 성격 장애는 일반 인구의 1% 수준으로 나타난다. 병적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자기애 양상을 다양하게 드러내며 사람을 교묘하게 괴롭히는 나르시시스트가 더 많다. 이는 여러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과대형 나르시시스트(외현적·外現的 나르시시스트)가 가장 전형적이다. 거만하고 특별 대우를 바라며, 권력 지향적이고 외적 아름다움에 집착한다. 트로피처럼 자신을 빛나게 해주는 그럴듯한 배우자, 연인, 자녀를 원한다. 리더십이 있는 것처럼 보여 기업 임원 등에 많다. 취약한 나르시시스트(내현적·內現的 나르시시스트)는 내향적이고 소심해서 눈치채기 어렵다. 이들은 늘 불안하고 과민하며 고집 세다. 주목받기는 싫어하지만 특별 대우를 바라는 건 똑같다. 소극적 성격 탓에 현실에서 눈에 띄게 성공하지는 못하는데, 이때 남 탓을 하며 짜증을 부린다. 은밀하게 악성 댓글을 다는 사람 중에 많다. 봉사와 헌신을 통해 자기를 드러내려는 공동체적 나르시시스트(관계적 나르시시스트) 유형도 있다. 이들은 사회나 조직에 이바지하는 게 진짜 목적이 아니라, 헌신하는 자신의 멋진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길 바란다.● ‘나르시시스트는 길러진다’ 나르시시스트는 양육 환경에 의해 생겨나는 경우가 많다. 부모의 전폭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는 유아기에는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 느끼며 살아간다. 대부분 성장하면서 겪는 크고 작은 실패와 좌절을 통해 ‘나는 공주(왕자)가 아니라 보통 존재’라는 것을 저절로 경험한다. 부모의 과잉보호 등으로 인해 성숙에 필요한 좌절 경험을 못 하고 성장하면 성인이 돼도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생각에 머물러 있다. 혹은 정반대로, 어렸을 때 감당할 수 없는 좌절을 겪으면 비참한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 완벽한 모습으로 칭송받는 자신을 상상하며 자기애를 키울 수도 있다. 어린 시절 특출난 재능을 보이거나, 탄생 자체가 가족 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아이도 나르시시스트가 되기 쉽다. 어렸을 때부터 특별 대우를 받으며 자란 아이는 주변 칭찬에 굉장히 민감해진다. 그런데 칭찬받지 못할 때 생기는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부모가 좋아하는 이상적인 자기 모습을 상상하며 과장된 자기상(像)을 키워 나간다. 이런 상상이 고착하면 과도한 자기애가 생길 수 있다. 나르시시스트 부모를 둔 자녀도 자기애성 성격으로 자라기 쉽다. 이렇게 자란 사람은 ‘너는 완벽하다’며 오냐오냐해서 자녀를 길러 나르시시스트로 키우기도 한다. 학교 교사에게 자녀를 특별 대우하라고 요구하며 “왕의 DNA를 가진 아이”라고 주장한 학부모 사례도 이런 선상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사소한 일에도 “날 무시하네” 나르시시스트의 깊은 내면 세계는 사실 빈약할 뿐 아니라 열등감으로 차 있다. 누가 자신을 무시하는지 항상 날이 서 있다.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면 복수에도 능하다. 자기애와 분노, 공격성과 관련한 연구 437건을 분석해 보니 성별이나 국적, 나이와 관계없이 나르시시즘 성향이 강한 사람은 신체적, 언어적 폭력 성향이 두드러진 것은 물론이고 사이버 공간에서도 공격성을 보였다. 특히 취약한 나르시시스트는 복수의 화신이다. 즐라탄 크리잔 미국 아이오와주립대 심리학과 교수 연구팀은 실험 참가자 208명에 대해 나르시시즘 검사를 한 뒤 높은 점수를 받은 사람들을 과대형 또는 취약한 나르시시스트 유형으로 나눴다. 이어서 참가자들에게 미각 관련 실험이라고 속인 다음 평소에 어떤 맛을 좋아하는지 조사했다. 이후 역한 맛의 야채즙 또는 일반 차(茶) 중 하나를 무작위로 주면서 “당신과 짝꿍인 참가자가 당신 취향을 고려해 선택한 음료”라고 설명했다. 야채즙은 상대방의 사소한 행동도 자기를 무시했다고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나르시시스트를 도발하기 위한 장치였다. 야채즙을 받은 나르시시스트들은 ‘(짝꿍에게) 분명히 좋아하는 맛을 알려줬는데도 짝꿍이 (나를) 무시해서 이상한 음료를 줬다’고 여길 가능성이 컸다. 예측은 맞아떨어졌다. 이어진 실험에서는 반대로 짝꿍에게 줄 음식 소스로 보통 맛과 엄청 매운맛 중에 선택할 기회를 참가자에게 줬다. 참가자 대다수가 보통 맛 소스를 주겠다고 했지만, 야채즙을 마신 취약한 나르시시스트 유형 참가자 대다수는 엄청 매운맛을 선택했다. 심지어 이들은 짝꿍이 아니라 제삼자에게 줄 소스를 선택하라고 했을 때도 엄청 매운맛으로 결정했다. 사소한 한 번의 ‘도발’로 인해 여러 사람에게 공격성이 뻗친 것이다. 작은 도발에도 바르르 떨며 주변 사람들을 괴롭힐 준비가 되어 있는 나르시시스트 특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조직 내부 나르시시스트는 팀워크를 갉아먹는 주범이다. 에밀리 그리할바 미 버펄로대 경영대학원 교수를 비롯한 공동 연구팀에 따르면 2013∼2014시즌 미국프로농구(NBA) 2460경기를 분석한 결과 나르시시즘 점수가 높은 선수가 많은 팀일수록 다른 팀원에게 득점 기회를 제공하는 어시스트 횟수가 적었고 팀 성적도 좋지 않았다. 자기가 돋보이는 게 중요하다 보니 팀을 먼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자기애 점수가 낮은 팀들은 이 팀들에 비해 평균 서너 경기를 더 이긴 것으로 분석됐다.● ‘손절’이 답? 이들과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일명 ‘회색 돌’ 기법이란 것이 있다. 20년 이상 자기애 관련 연구를 한 키스 캠벨 미 조지아대 심리학과 교수는 회색 돌 기법에 대해 “특별한 방법은 없고, 그저 당신 일을 하면 된다”고 설명한다. 나르시시스트는 만만한 대상으로 하여금 화, 슬픔, 죄책감, 미안함 같은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게 해 자기 마음대로 쥐락펴락하려고 한다. 이에 말려들지 않으려면 최대한 감정 동요를 보이지 않아야 한다. 반응도 없이 튀지 않으면서 배경에 스며드는 회색 돌처럼 말이다. 필요한 말만 하고 거리를 두다 보면 가지고 놀기에 재미없는 사람이라 느껴 나르시시스트가 알아서 떠나간다. 하지만 한집에 사는 사이라면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때 필요한 건 나르시시스트가 자신의 감정을 자극하는 말을 할 때 ‘이건 내 문제가 아니라 저 사람 문제’라는 관점을 갖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 전문 유튜브 채널 ‘토킹닥터스’를 운영하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원은수 원장은 “상대가 나를 공격하며 흔들어대도 그 말에 곧이곧대로 상처받을 필요가 없다”며 “저 사람이 나를 협박해서 통제하고 싶어 하거나 화풀이하고 싶어 한다는 것같이 상대에게 원인이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나르시시스트마다 자기애 특성이 드러나는 방식과 수준이 천차만별이므로 ‘손절’ 내지는 무작정 사랑으로 포용하기 같은 절대적 대응 방법이 없다는 점도 알아야 한다. 원 원장은 “심각하게 폭력적이고 반(反)사회성을 드러내는 이들이 있는 반면, 본인이 먼저 변화하려고 노력하는 경우도 있다”며 “중요한 점은 스스로 인지해서 바뀌려고 노력하느냐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더해 주변 사람들과의 대인관계 문제가 자꾸 불거지고, 나 때문에 상처받았다는 말을 누군가 한 적이 있다면 혹시 내가 나르시시스트는 아닌지 돌아볼 필요도 있다.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마음(心)속 깊은(深) 것에 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살면서 ‘도대체 이건 왜 이러지?’ ‘왜 마음이 마음대로 안 될까?’ 하고 생겨난 궁금증들을 메일(best@donga.com)로 알려주세요. 함께 고민해 보겠습니다.“그렇게 생각하는 바보가 어딨어?”내 생각엔 아무리 타당하더라도 살다 보면 분명 ‘그렇게 생각하는 바보’와 만날 때가 있다. 심지어 매우 자주, 곳곳에서 맞닥뜨린다. 가족 친구 동료 같은 가까운 사이부터 온라인 기사 댓글로 싸우는 상대 진영 지지자까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논리로 무장한 상대 주장에 대화를 포기하거나, 이상한 사람 취급하며 돌아선 적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그런데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다. 정말 내 생각은 다 옳고, 상대는 다 틀렸을까. “길을 막고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물어봐!”라고 큰소리쳤을 때, 정말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내 생각을 지지해 줄 것인가. 내 생각이 정답이자 기준이라고 여기는 것부터가 큰 착각일 수 있다.다른 사람들도 다 나처럼 생각할 것이라고 여기는 인지 오류를 허위 합의 효과(false-consensus effect)라고 부른다. 합의 착각 효과 또는 거짓 합의 효과라고도 한다. 내 생각을 지지하는 사람이 절대 다수고, 반대 의견은 비정상이라고 평가절하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부싸움 같은 일상적 순간부터 요즘같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상황 등 다양하게 나타난다. ‘내 말이 맞다’고 바득바득 우기는 누군가 얼굴이 떠올랐다면 도대체 왜 이러는 건지 한번 살펴보자.● 나와 생각 다르면? ‘이상한 사람’ 낙인허위 합의 효과라는 말이 낯설어 보이지만 학계에 알려진 지는 꽤 오래됐다. 리 로스 미국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교수의 1977년 연구로 거슬러 올라간다. 연구진은 실험에 참여할 학생 104명을 모집해 이들에게 커다란 광고판을 들고 30분 동안 학교 구석구석을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은지 물었다. 광고판에는 ‘조스(샌드위치 가게 이름)에서 식사하세요’ 같은 홍보 글귀가 쓰여 있었다.104명 가운데 광고판을 들고 학교를 돌아다닐 수 있다고 한 사람은 52%, 싫다고 한 이는 48%였다. 대략 반반이었다. 아마도 절반은 이 일이 재미있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나머지 절반은 창피해서 거절했을 것이다.그런 뒤 학생들에게 다른 학생들은 어떻게 결정했을 것 같은지 물었다. 광고판을 들고 돌아다니겠다고 한 학생들은 61% 정도가 제안을 수락했을 거라고 예상했다. 제안을 거부한 학생들은 70%가 제안을 거부했을 거라고 봤다. 모든 학생이 스스로가 다수 의견 쪽에 속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재미있는 사실은 광고판을 들고 다니겠다고 한 학생과 거부한 학생이 각각 어떤 성격일지 예상해 보라는 후속 질문에서 드러났다. 학생들은 자기와 반대 의견을 낸 사람들을 괴팍하고 비협조적이며 냉소적이고 공격적인 성격으로 봤다. 본인과 같이 평범하고 정상적인 학생이라면 자신과 같은 결정을 내릴 거라고 여겼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비정상적인 성격일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우리 편은 다수, 상대 편은 소수?정치 종교같이 주요 신념과 관련된 주제일수록 이런 경향이 강해진다. 다른 주제보다 내 가치관을 방어하고 정당화하려는 동기가 강해서다. 나와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널리 퍼져있다고 생각하면 사회적 안정감이 생길 뿐 아니라 ‘내가 대세를 형성하고 있다’는 느낌 덕에 자존감도 높아진다.정당 지지자 간 허위 합의 효과에 관한 연구는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2016년 당시 쟁점이던 테러방지법 찬반 의견을 알아본 연구가 있다. 20~50대 유권자 3000명을 대상으로 해당 법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은 결과 ‘매우 반대’(26.3%), ‘약간 반대’(17.2%), ‘잘 모르겠다’(6.9%), ‘약간 찬성’(27.1%), ‘매우 찬성’(22.5)으로 나타났다. ‘잘 모르겠다’는 응답을 제외하면 반대 43.5%, 찬성 49.6%로 양쪽이 비슷했다.추가로 이들에게 ‘일반적으로 한국 사람 몇 % 정도가 테러방지법을 찬성한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러자 해당 법안을 ‘매우 반대’하는 이들은 28.6%가, ‘약간 반대’하는 이들은 36.9%만 찬성할 거라고 예상했다. 전체 찬성 의견(49.6%)보다 훨씬 낮은 수치다. 반대로 ‘매우 찬성’하는 이들은 65%가, ‘약간 찬성’하는 이들은 50.6%가 찬성할 거라고 예상했다.특히 매우 반대하거나, 매우 찬성하는 사람들에게서 허위 합의 효과가 더 강력하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신념이 강할수록 남들도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 믿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해서다.● 상대 의견에 귀 닫을 수록 착각 심해져이런 경향성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연구진이 미국 성인 유권자 1684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연구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총기 규제, 사형제 등에 대한 찬반 의견을 조사했더니, 각 정책을 강력히 찬성 또는 반대하는 사람들은 자신과 같은 입장의 사람들의 비율이 실제 비율보다 훨씬 더 많을 거라고 예측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지인들과 해당 이슈에 대해 토론하거나, 온라인에서 찬반토론을 하면서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 실제로 부딪히는 경험을 하고난 뒤에는 이런 과다 추정이 완화됐다. 반대자들과 토론하고 나서야 비로소 현실을 자각하고, 자기 생각이 틀렸을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그런데 문제는 자신만의 신념이 강한 사람들은 반대 의견을 듣기 싫어한다는 점이다. 위 연구에서는 연구진의 요구로 어쩔 수 없이 찬반 토론에 참여하긴 했지만…, 현실에서는 반대 의견에 귀를 닫아버리는 경우가 많다. 위협적이고 불쾌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결국 똑같은 생각을 가진 우리 편끼리만 어울리면서 ‘우리가 정답’이라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이때 불리한 정보는 무시하고 유리한 정보만 골라서 받아들이는 확증편향도 이를 부추긴다.● “하느님도 내편” 정말일까?이 같은 경향은 심지어 신의 뜻을 유추할 때도 나타난다. 각자가 믿는 신의 뜻을 해석할 때 내가 그렇게 생각하니 신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여긴다. 남들도 다 나에게 동조할 거라는 자기중심적 사고가 신의 영역까지 확대되는 셈이다.니컬러스 에플리 미 시카고대 부스 경영대학원 교수 연구팀은 종교가 있는 922명에게 낙태, 동성 결혼 합법화에 대한 찬반을 물었다. 그리고 각자가 믿는 종교의 신은 찬반 중 어느 쪽일지, 일반 국민은 찬반 중 어느 쪽이 많을지 예측해 보라고 했다.그 결과 종교가 있는 사람들은 해당 법안에 찬성하면 찬성하는 대로, 반대하면 반대하는 대로 신도 자기 생각과 똑같을 거라고 여겼다. 이런 경향성은 나와 의견이 같은 일반 국민 비율을 예측한 것보다 더 강하게 나타났다. 반면, 종교를 믿지 않는 77명에게도 같은 질문을 해봤더니, 자기 생각과 신의 생각이 같을 거라고 보는 경향성은 상당히 낮게 나타났다.내 의견을 말할 때와 신의 뜻을 추측할 때 뇌의 같은 부위가 활성화된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에플리 교수 연구진은 종교가 있는 17명에게 안락사 합법화 같은 논쟁적 주제에 대해 자신, 각자가 믿는 신, 일반인 의견은 각각 어떨지 차례로 생각하고 답하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뇌 활동을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으로 관찰했다.그 결과 뇌 내측 전전두피질 등 내 의견을 답할 때 활성화된 부위와 신의 뜻에 대해 생각할 때 활성화된 부위가 똑같았다. 내 의견과 다른 사람 의견을 답할 때 활성화된 뇌 부위도 일부 겹치기는 했지만 신의 뜻을 생각할 때 더 높은 일치율을 보였다. 연구진은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신의 뜻을 추론하는 과정과 자기 신념을 생성하는 과정의 뇌 활동이 상당히 유사했다”며 “신의 뜻을 추론할 때 자기중심적인 생각으로 편향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분석했다.● ‘토끼굴’ 가두는 알고리즘이 위험하다이렇게 오류를 범하기 쉬운 우리의 습성은 내 취향을 반영하는 디지털 알고리즘과 만나면 더 강력해진다. 편향된 정보만 보며 고정관념이 더 강화될 수 있어서다. 또 나와 관심사가 비슷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팔로어들 의견을 대세론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특정 취향 맞춤형 정보만 보는 ‘필터 버블’, 알고리즘에 의해 편향된 SNS 게시물에 더욱 빠져드는 ‘토끼굴 효과’ 등도 이를 잘 나타낸다.알고리즘은 소수 의견도 보편적 주장인 것으로 속게 만든다. 극소수가 제기한 음모론에 빠지기도 쉽다. SNS 팔로어들이 나와 똑같이 생각하는 ‘우리 편’으로만 이뤄져 있다면 상승효과가 난다. SNS 같은 미디어에서 나타나는 허위 합의 효과를 연구하는 나은영 서강대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SNS가 없던 시절에도 사람은 원래 자기 의견에 찬성하는 사람이 더 많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여기에 SNS 효과까지 더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개인의 생각 차이를 존중하기보다 집단 내 동질성을 강조하는 한국의 문화적 특징도 일부 영향을 미친다. 같은 집단 내에서 비슷한 의견을 가지고 단합하려는 경향이 있기에 서로 의견이 다를 때 다양성의 가치는 소홀히 하기 때문이다.이를 조금이라도 완화하려면 ‘내 생각이 정답은 아니다’라는 자세가 필요하다. 나 교수는 “일단 ‘나도 틀릴 수 있다’는 생각으로 태도를 유연하게 바꿔야 한다”며 “우리 모두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듣기 거북하더라도 반대 의견을 들어 보려는 자세를 취하는 것도 크게 도움이 된다. 나 교수는 “구미에 맞지 않는 정보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며 “비슷한 의견을 가진 사람만 만나기보다 반대되는 사람도 골고루 만나고, 미디어를 이용할 때도 양쪽을 대변하는 미디어를 고루 이용하는 게 좋다”고 했다.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그렇게 생각하는 바보가 어딨어?” 내 생각엔 아무리 타당하더라도 살다 보면 분명 ‘그렇게 생각하는 바보’와 만날 때가 있다. 심지어 매우 자주, 곳곳에서 맞닥뜨린다. 가족 친구 동료 같은 가까운 사이부터 온라인 기사 댓글로 싸우는 상대 진영 지지자까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논리로 무장한 상대 주장에 대화를 포기하거나, 이상한 사람 취급하며 돌아선 적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다. 정말 내 생각은 다 옳고, 상대는 다 틀렸을까. “길을 막고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물어봐!”라고 큰소리쳤을 때, 정말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내 생각을 지지해 줄 것인가. 내 생각이 정답이자 기준이라고 여기는 것부터가 큰 착각일 수 있다. 다른 사람들도 다 나처럼 생각할 것이라고 여기는 인지 오류를 허위 합의 효과(false-consensus effect)라고 부른다. 합의 착각 효과 또는 거짓 합의 효과라고도 한다. 내 생각을 지지하는 사람이 절대 다수고, 반대 의견은 비정상이라고 평가절하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부싸움 같은 일상적 순간부터 요즘같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상황 등 다양하게 나타난다. ‘내 말이 맞다’고 바득바득 우기는 누군가 얼굴이 떠올랐다면 도대체 왜 이러는 건지 한번 살펴보자. ● 나와 생각 다르면? “이상한 사람” 허위 합의 효과라는 말이 낯설어 보이지만 학계에 알려진 지는 꽤 오래됐다. 리 로스 미국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교수의 1977년 연구로 거슬러 올라간다. 연구진은 실험에 참여할 학생 104명을 모집해 이들에게 커다란 광고판을 들고 30분 동안 학교 구석구석을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은지 물었다. 광고판에는 ‘조스(샌드위치 가게 이름)에서 식사하세요’ 같은 홍보 글귀가 쓰여 있었다. 104명 가운데 광고판을 들고 학교를 돌아다닐 수 있다고 한 사람은 52%, 싫다고 한 이는 48%였다. 대략 반반이었다. 아마도 절반은 이 일이 재미있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나머지 절반은 창피해서 거절했을 것이다. 그런 뒤 학생들에게 다른 학생들은 어떻게 결정했을 것 같은지 물었다. 광고판을 들고 돌아다니겠다고 한 학생들은 61% 정도가 제안을 수락했을 거라고 예상했다. 제안을 거부한 학생들은 70%가 제안을 거부했을 거라고 봤다. 모든 학생이 스스로가 다수 의견 쪽에 속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광고판을 들고 다니겠다고 한 학생과 거부한 학생이 각각 어떤 성격일지 예상해 보라는 후속 질문에서 드러났다. 학생들은 자기와 반대 의견을 낸 사람들을 괴팍하고 비협조적이며 냉소적이고 공격적인 성격으로 봤다. 내 의견과 다른 사람은 수가 더 적을 뿐 아니라 성격도 비정상적이라고 바라본 것이다.● 반대 의견 들으면 불쾌… 끼리끼리 어울려 정치 종교같이 주요 신념과 관련된 주제일수록 이런 경향이 강해진다. 다른 주제보다 내 가치관을 방어하고 정당화하려는 동기가 강해서다. 나와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널리 퍼져 있다고 생각하면 사회적 안정감이 생길 뿐 아니라 ‘내가 대세를 형성하고 있다’는 느낌 덕에 자존감도 높아진다. 정당 지지자 간 허위 합의 효과에 관한 연구는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2016년 당시 쟁점이던 테러방지법 찬반 의견을 알아본 연구가 있다. 20∼50대 유권자 3000명을 대상으로 해당 법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은 결과 ‘매우 반대’(26.3%), ‘약간 반대’(17.2%), ‘잘 모르겠다’(6.9%), ‘약간 찬성’(27.1%), ‘매우 찬성’(22.5)으로 나타났다. ‘잘 모르겠다’는 응답을 제외하면 반대 43.5%, 찬성 49.6%로 양쪽이 비슷했다. 추가로 이들에게 ‘일반적으로 한국 사람 몇 % 정도가 테러방지법을 찬성한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러자 해당 법안을 ‘매우 반대’하는 이들은 28.6%가, ‘약간 반대’하는 이들은 36.9%만 찬성할 거라고 예상했다. 전체 찬성 의견(49.6%)보다 훨씬 낮은 수치다. 반대로 ‘매우 찬성’하는 이들은 65%가, ‘약간 찬성’하는 이들은 50.6%가 찬성할 거라고 예상했다. 특히 매우 반대하거나, 매우 찬성하는 사람들에게서 허위 합의 효과가 더 강력하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신념이 강할수록 남들도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 믿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해서다. 자신만의 신념이 강한 사람들은 반대 의견을 듣기 싫어한다. 위협적이고 불쾌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결국 똑같은 생각을 가진 우리 편끼리만 어울리면서 ‘우리가 정답’이라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이때 불리한 정보는 무시하고 유리한 정보만 골라서 받아들이는 확증편향도 이를 부추긴다.● “오, 하느님도 내 생각과 같을걸?” 이 같은 경향은 심지어 신의 뜻을 유추할 때도 나타난다. 각자가 믿는 신의 뜻을 해석할 때 내가 그렇게 생각하니 신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여긴다. 남들도 다 나에게 동조할 거라는 자기중심적 사고가 신의 영역까지 확대되는 셈이다. 니컬러스 에플리 미 시카고대 부스 경영대학원 교수 연구팀은 종교가 있는 922명에게 낙태, 동성 결혼 합법화에 대한 찬반을 물었다. 그리고 각자가 믿는 종교의 신은 찬반 중 어느 쪽일지, 일반 국민은 찬반 중 어느 쪽이 많을지 예측해 보라고 했다. 그 결과 종교가 있는 사람들은 해당 법안에 찬성하면 찬성하는 대로, 반대하면 반대하는 대로 신도 자기 생각과 똑같을 거라고 여겼다. 이런 경향성은 나와 의견이 같은 일반 국민 비율을 예측한 것보다 더 강하게 나타났다. 반면, 종교를 믿지 않는 77명에게도 같은 질문을 해봤더니, 자기 생각과 신의 생각이 같을 거라고 보는 경향성은 상당히 낮게 나타났다. 내 의견을 말할 때와 신의 뜻을 추측할 때 뇌의 같은 부위가 활성화된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에플리 교수 연구진은 종교가 있는 17명에게 안락사 합법화 같은 논쟁적 주제에 대해 자신, 각자가 믿는 신, 일반인 의견은 각각 어떨지 차례로 생각하고 답하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뇌 활동을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으로 관찰했다. 그 결과 뇌 내측 전전두피질 등 내 의견을 답할 때 활성화된 부위와 신의 뜻에 대해 생각할 때 활성화된 부위가 똑같았다. 내 의견과 다른 사람 의견을 답할 때 활성화된 뇌 부위도 일부 겹치기는 했지만 신의 뜻을 생각할 때 더 높은 일치율을 보였다. 연구진은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신의 뜻을 추론하는 과정과 자기 신념을 생성하는 과정의 뇌 활동이 상당히 유사했다”며 “신의 뜻을 추론할 때 자기중심적인 생각으로 편향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분석했다. ● 자기중심성 부추기는 알고리즘 이렇게 오류를 범하기 쉬운 우리 습성은 내 취향을 반영하는 디지털 알고리즘과 만나면 더 강력해진다. 편향된 정보만 보며 고정관념이 더 강화될 수 있어서다. 또 나와 관심사가 비슷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팔로어들 의견을 대세론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특정 취향 맞춤형 정보만 보는 ‘필터 버블’, 알고리즘에 의해 편향된 SNS 게시물에 더욱 빠져드는 ‘토끼굴 효과’ 등도 이를 잘 나타낸다. 알고리즘은 소수 의견도 보편적 주장인 것으로 속게 만든다. 극소수가 제기한 음모론에 빠지기도 쉽다. SNS 팔로어들이 나와 똑같이 생각하는 ‘우리 편’으로만 이뤄져 있다면 상승효과가 난다. SNS 같은 미디어에서 나타나는 허위 합의 효과를 연구하는 나은영 서강대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SNS가 없던 시절에도 사람은 원래 자기 의견에 찬성하는 사람이 더 많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여기에 SNS 효과까지 더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를 조금이라도 완화하려면 ‘내 생각이 정답은 아니다’라는 자세가 필요하다. 나 교수는 “일단 ‘나도 틀릴 수 있다’는 생각으로 태도를 유연하게 바꿔야 한다”며 “우리 모두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듣기 거북하더라도 반대 의견을 들어 보려는 자세를 취하는 것도 크게 도움이 된다. 나 교수는 “구미에 맞지 않는 정보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며 “비슷한 의견을 가진 사람만 만나기보다 반대되는 사람도 골고루 만나고, 미디어를 이용할 때도 양쪽을 대변하는 미디어를 고루 이용하는 게 좋다”고 했다.최고야 기자 bes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