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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첨단 과학문명의 시대에 웬 제국 타령인가. 여기 19세기 제국주의까지 더하면 ‘공자 왈 맹자 왈’ 취급받기 십상이다. 하지만 저자 이름을 보게 되면 책장을 다시 한 번 들추게 된다. 국내에도 마니아층이 형성된 일본의 저명 사상가이자 문학평론가인 가라타니 고진의 ‘제국의 구조’(도서출판 b) 한국어판이 발간됐다. 문학, 철학, 역사, 사회비평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역작을 내놓은 그가 전작 ‘세계사의 구조’에 이어 제국의 역사를 다뤘다. 가라타니에게 제국과 제국주의는 과거의 낡은 유산이 아닌 현재 진행형이다. 그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도 그 속성을 보면 제국주의의 한 부류라고 말한다. 지금 또다시 제국의 역사를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다. 고진은 제국과 제국주의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페르시아, 이집트, 로마, 원나라 등 역사 속 제국은 만민법(국제법)과 세계 종교를 통해 다민족사회를 안정적으로 통합한 역사적 경험을 공유한다. 영화 ‘글래디에이터’ 초반에 이민족 출신인 막시무스가 팍스로마나의 가치를 새기며 전장에 뛰어드는 장면을 연상하면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제국주의는 민족개념에 기반을 둔 국민국가가 단순히 확대된 상태에 불과하며, 다른 국가를 폭력적으로 지배하는 수준에 그친다. 그런데 여기서 가라타니의 주장이 차별화하는 것은 유럽 중심의 제국 해석을 거부한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독일 학자 해나 아렌트도 제국과 제국주의의 분리를 주장했지만 서양적 편견에 휩싸여 제국이 로마에서 비롯된 것으로 오해했다는 것이다. 페르시아나 이집트, 원나라 등이 일종의 미개한 전제국가로 폄하됐다는 얘기다. 하지만 역사기록을 고찰한 가라타니의 결론은 이들 동양 제국이 분명 ‘제국의 원리’를 공유하고 있었으며 그리스 로마문명도 동양 제국의 역사적 유산을 이어받았다는 것이다. 가라타니는 최근 신자유주의의 제국주의적 폐해를 극복하려면 역사 경험 속에서 제국의 원리를 깊이 곱씹어 볼 것을 주문한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문화재청은 국보 제285호 울산 반구대 암각화의 보존을 위해 설치하려고 한 ‘가변형 임시 물막이(카이네틱 댐)’ 사업을 중단하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문화재청은 “문화재위원회 건축분과에서 임시 물막이 안건을 심의한 결과 사업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라고 21일 밝혔다. 50년 넘게 암각화가 대곡천에 수시로 잠겨 훼손이 심각하다는 지적에 따라 2013년부터 임시 물막이 건설이 추진됐다. 임시 물막이는 해체가 가능한 너비 18m, 높이 16m의 옹벽으로 국무조정실과 문화재청, 울산시가 함께 사업을 진행했다. 이에 따라 설계용역을 맡은 포스코A&C가 지난해 말부터 올 5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검증 모형 실험을 실시했다. 물막이 투명막이 수압을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실험하는 과정에서 투명판 이음매에 누수가 발생해 안전성을 충족하지 못하는 것으로 최종 결론이 났다. 문화재청은 “울산시와 협의해 대곡천의 수위를 낮추거나 생태제방을 쌓는 방안 등을 원점에서 다시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곡천의 수위를 낮추자는 문화재청의 안은 울산시가 식수원이라는 이유로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또 암각화 앞쪽 80m 지점에 생태제방을 쌓자는 울산시의 대안도 경관 훼손 등의 이유로 2009년과 2011년 문화재위원회에서 부결됐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보물 제6호인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사진)’의 이수((리,이)首·용의 형체를 새긴 비석의 머릿돌)의 일부 조각이 발견된 지 16년 만에 원래 자리를 찾을 것으로 전망된다. 문화재청은 “2000년 여주 고달사지 발굴 과정에서 추가로 출토된 이수 조각 2점을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원종대사탑비에 접합 복원하기로 했다”고 19일 밝혔다. 앞서 국립중앙박물관은 2년 전 이수 조각 2점을 발굴 기관으로부터 인수했으며, 올 초 이를 조사하면서 훼손되기 이전의 위치를 파악했다. 고려시대인 975년 건립된 이 탑비는 높이 3.2m, 너비 1.6m로 당시 고승인 원종대사의 출생과 행적 등이 돌에 새겨져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 탑비가 쓰러지면서 비신(碑身·비문을 새긴 비석의 몸체)이 여덟 조각으로 깨져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돼 왔다. 비신을 제외한 이수와 귀부(龜趺·거북 모양으로 만든 비석의 받침돌)는 1963년 보물로 따로 지정돼 여주 고달사지에 설치됐다. 현재 비신 복제품이 2014년 만들어져 이수, 귀부와 결합된 상태다. 문화재청은 1963년 당시 국가문화재 지정에서 빠진 비신에 대해서도 보물 신청을 추진할 계획이다. 그러나 추가로 발견된 이수 조각과 달리 비신에 대해서는 접합 복원을 당분간 추진하지 않기로 했다. 이수, 귀부에 결합돼 있는 비신 복제품을 빼내는 과정에서 훼손될 우려가 있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먹고살기 빠듯하던 1960년대, 20여 년 뒤 올림픽 개최를 도시계획에 반영한 행정가가 있었다. 불도저 시장으로 불린 김현옥 서울시장(1926∼1997) 얘기다. “서울에도 올림픽을 개최할 장소를 마련해야 된다고 생각해서 송파와 잠실에 올림픽공원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19일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 내 ‘불도저 시장 김현옥’ 전시실. 벽면에 걸린 모니터에 최상철 전 도시계획종합계장의 녹취를 담은 동영상이 재생됐다. 그는 1966년 서울시의 도시기본계획 수립 당시를 회고하면서 올림픽공원의 탄생 비화(秘話)를 언급했다. 최 전 계장은 삼권분립에 따른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행정부는 용산구, 사법부는 서초구, 입법부는 영등포구에 두는 기초안도 이때 마련됐다고 증언했다. 김현옥은 취임 직후 ‘도시는 선(線)’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도시 곳곳을 연결하는 교통망 구축에 주력했다. 각종 고가도로를 비롯해 강변북로, 세운상가, 북악스카이웨이, 남산 1·2호 터널 등 근대화를 상징하는 도로와 건축물이 대거 들어섰다. 하지만 1970년 4월 8일 마포구 창전동 와우시민아파트 붕괴로 33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졌고, 속도전 같은 도시 개발에 대해 비판 여론이 일자 김현옥은 그해 시장직에서 물러났다. 이번 전시에서는 도시 근대화의 이면을 다룬 사진과 언론보도, 녹취 동영상 등을 주로 선보인다. 다음 달 21일까지. 02-724-0148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기자들마다 취재 방식이 다르지만 필자인 기자는 학자들의 인터뷰 장소로 그의 연구실을 선호한다. 인터뷰 전 그의 논문을 읽고 학문적 관심사를 파악하지만 그것만으로 취재원의 현재를 이룬 지적 배경을 알기는 힘들다. 그런데 연구실에선 서가에 꽂힌 책 표지들을 쓱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종교나 취미, 관심사 등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은 히틀러가 소장한 1만6000여 권의 장서 가운데 그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책 10권의 내용을 히틀러가 처한 역사적인 상황과 엮어 분석했다. 그동안 히틀러의 전기는 숱하게 나왔지만 이처럼 독창적인 접근 방식을 취한 연구서는 별로 없었다. 저자의 분석 방식은 매우 디테일하다. 각 문장이나 단어에 친 밑줄은 물론이고 책의 여백에 쓴 각종 문장부호와 메모를 자세히 살펴봤다. 히틀러가 책을 보면서 어느 부분에 주목했는지, 그것이 2차 세계대전 당시 정치·군사 전략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세밀하게 분석한다. 예를 들어 히틀러가 패전 직전 읽은 ‘프리드리히 대왕이라 불리는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2세의 역사’(토머스 칼라일 지음)는 그의 망상적인 전쟁 구상에 중요한 근거가 됐다. 18세기 후반 ‘7년 전쟁’에서 패망 직전까지 몰린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1762년 1월 적국인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여제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평소 프리드리히 대왕을 롤 모델로 삼은 히틀러는 이 책을 본 뒤 연합군 사이의 분열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으리라 보고 러시아와 강화조약을 추진했다. 마침 종전 직전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면서 히틀러의 환상은 더 커졌다. 프리드리히 대왕처럼 ‘2개의 전선(two front war·동시에 서로 다른 방향에서 복수의 적과 싸우는 것)’을 벌인 히틀러가 결국 그것으로 인해 패배했다는 점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읽은 책이 프리드리히 대왕의 전기라는 사실은 아이러니하게 다가온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무고한 백성들이 길에서 참혹하게 죽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 935년 10월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은 장남 마의태자(麻衣太子)와 일부 신하의 만류를 물리치고 고려에 항복을 결정했다. 국력이 쇠해 신라의 영토는 경상도 일부로 쪼그라들었고 사방은 고려와 후백제에 포위당한 뒤였다.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한 희생만 더할 뿐이라는 게 경순왕의 명분이었다. 그러나 태자는 신라 천년 역사를 스스로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곧 금강산으로 들어가 삼베옷을 입고 풀뿌리를 캐며 여생을 보냈다. 경순왕의 막내아들도 화엄사에 들어가 머리를 깎았다. 이로부터 한 달 뒤 경순왕은 문무백관과 백성들을 거느리고 고려 수도 개경으로 출발했다. 온갖 짐을 실은 수레 행렬이 장장 12km에 달했다. 신라 핵심 인력과 알짜배기 문물, 인프라가 고려로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그해 12월 신라 천년왕도(千年王都) 금성(金城)은 경주(慶州)로 영원히 바뀌었다. 국립경주박물관이 ‘고려시대의 경주’ 특별전을 최근 개최했다. 흔히 신라 왕도로서만 기억되는 경주의 역사적 변천을 고려시대에 초점을 맞춰 재조명한 전시다. 불국사 석가탑 중수기(국보 126호)를 비롯한 500여 점의 중요 유물들을 선보인다. 왕조 교체기 옛 왕조의 문물에 대한 파괴와 계승이 동시에 이뤄지기 마련이다. 나말여초 당시도 마찬가지였다. 신라 왕권의 상징인 경주 월성과 동궁은 석재와 기와가 재활용되는 등 사실상 폐허로 바뀌었다. 그러나 신라를 이어 불교국가를 표방한 고려는 신라 국가사찰이었던 황룡사를 계속 후원했다. 이번에 전시된 고려시대 황룡사의 기와와 청자 출토품이 이를 잘 보여준다. 원나라가 고려를 정벌하면서 굳이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경주까지 침입해 황룡사를 파괴한 건 이곳이 고려 때도 여전히 핵심 사찰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9월 4일까지. 054-740-7530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허 참, 임 선생이 미국서 ‘요상’한 걸 배워왔네.” 1975년 11월 경기 여주시 흔암리 발굴 현장. 이곳을 찾은 선배 교수들이 임효재 당시 서울대 고고학과 전임강사(75·서울대 명예교수)를 미덥지 않은 눈으로 바라봤다. 땅을 파기도 빠듯한 시간에 임효재가 이끄는 발굴팀은 화덕 자리(爐址·노지)의 흙을 여섯 포대나 퍼 담아 연구실에서 온종일 분석에 매달렸다. 교수들은 궁금했다. “도대체 뭘 찾아내려는 건가?” “불에 탄 쌀(탄화미·炭化米)을 찾고 있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낱알도 찾기 어려운데 땅속에서 그 미세한 걸? 음 알겠네….” 임효재는 1968년 스튜어트 스트루에버 미국 노스웨스턴대 교수가 창안한 부유법(water flotation technique)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흔암리 발굴 현장에 적용했다. 부유법은 탄화곡물이 있을 가능성이 높은 화덕 주변의 흙을 물에 붓고 위에 뜬 물질을 채로 걸러내 돋보기나 현미경으로 조사하는 방식이다. 탄화곡물은 불에 탄 상태라 미생물에 의해 부식되지 않고 오랫동안 땅속에 보존돼 있다. 유구에서 토기와 같은 인공(人工)의 유물을 찾아내는 게 발굴의 전부였던 당시 국내 고고학계에서 자연 유물을 찾는 것은 시도된 적이 없었다. 40여 년 만에 흔암리 유적을 다시 찾은 임효재는 “모두들 반신반의했지만 한반도 최고(最古)의 탄화미를 결국 찾아냈다”며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과도 맞바꿀 수 없는 내 인생 최고(最高)의 유물”이라고 회고했다.○ 일본 학계의 ‘한반도 전파설’을 깨뜨리다 “선생님, 아무래도 뭔가 나온 것 같습니다.” 1976년 4월 여주 흔암리 현장 연구실. 핀셋으로 부유물을 하나씩 헤집으며 한참 돋보기를 들여다보던 서울대 학부생 이남규(현 한국고고학회장·한신대 교수)가 임효재를 급하게 불렀다. 전형적인 타원형의 탄화미였다. 꼬박 6개월 동안 충혈된 눈으로 작업한 끝에 나온 값진 성과였다. 앞서 임효재는 1972∼1975년 미국 텍사스주립대 유학 시절 부유법을 배웠다. 임효재는 “1970년대 초반까지 우리 학계는 농경유적에서조차 곡물을 찾아내지 못할 정도로 ‘눈 뜬 장님’과 같은 처지였다”고 말했다. 발굴팀은 연대 측정을 위해 탄화미와 함께 출토된 목탄(木炭)을 한국원자력연구소와 일본 이화학연구소에 동시에 보냈다. 객관성을 높이기 위해 양국 연구소에서 교차검증을 실시한 것이다.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 결과는 놀라웠다. 두 연구소 모두 기원전 10세기로 나왔는데, 이에 따르면 흔암리 탄화미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것인 동시에 일본보다 600년 이상 앞선다. 흔암리 발굴 이전 최고(最古) 탄화미는 김해 패총에서 발견된 것으로 연대는 기원후 1세기였다. 학계는 흥분했다. 벼농사 기원에 대한 일본 학자들의 한반도 전파설이 깨졌기 때문이다. 1970년대까지 일본 학계는 후쿠오카(福岡) 현 이타즈케(板付) 유적에서 발견된 탄화미의 연대(기원전 3~4세기)가 김해 패총보다 빠르다는 이유로 벼농사가 중국 남부에서 일본 열도를 거쳐 한반도로 전파됐다는 주장을 펴고 있었다. 그러나 흔암리 탄화미 발견을 계기로 상황이 역전된 것이다. 이로써 세계 고고학 교과서의 내용도 바뀌었다. 임효재는 벼농사의 황해 횡단설을 제기했다. “중국 양쯔(揚子) 강에서 황해를 건너 한반도 중부지방으로 벼농사가 들어왔다고 봅니다. 이후 한강을 따라 퍼지면서 일본 열도까지 전해진 것이지요.”○ 아시아 문화교류사 열쇠를 찾아 학계는 벼농사의 기원이 고대 아시아의 정치, 사회, 문화를 결정한 핵심 요인이었다는 점에서 흔암리 발굴의 의미를 높게 평가한다. 벼농사가 아시아 대륙을 횡단해 전파됐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문화교류사 연구에서도 중요하다. 1978년 흔암리 발굴보고서는 “흔암리 탄화미는 기원전 7∼13세기 전후 한반도 문화에 영향을 미친 중국 룽산(龍山) 문화의 파급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흔암리 유적은 자연유물이 고고학 연구의 중요한 연구 분야로 떠오르는 계기가 됐다. 실제로 임효재의 제자인 이경아(미 오리건대 교수) 안승모(원광대 교수) 김민구(전남대 교수) 등이 식물고고학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노교수에게 흔암리 유적의 남은 학술적 과제를 물어봤다. “흔암리 유적에 담긴 당시 사회구조가 아직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습니다. 주거지별로 흙을 채취하면 곡물의 양이나 종류가 각기 다릅니다. 이들 사이에 사회계급이나 기능의 차이가 있었다는 얘기죠. 후학들의 추가 연구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여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여호와 혹은 예수를 뺀 성경을 상상할 수 있을까. 신약성경은 예수의 행적을 통해 그를 닮기 위한 기록이다. 마찬가지로 논어는 인(仁)을 이룬 군자(君子)가 되기 위한 공자의 지침서 아닌가. 그런데 논어에서 군자와 인의 단어를 일부러 뺀 해설서가 나왔다. 시도 자체가 발칙하다. 이 책은 논어 완독을 위해 새로운 접근 방식을 취한 입문서다. 저자는 정통 한학자가 아닌 미술잡지 기자 출신의 고전번역가. 그는 군자를 번역문에서 삭제한 변(辨)으로 “당신은 실생활에서 지난 1년 동안 군자라는 단어를 몇 번이나 사용했는지”를 되묻는다. 현대어 그것도 비속어까지 동원한 논어는 아마 이 책이 처음일 것 같다. 예를 들면 이렇다. “부모와 어른한테 잘하는 사람치고 윗사람에게 막나가는 사람은 드물죠. 윗사람에게 막나가지 않는 사람치고 어디 가서 깽판 치는 사람도 없어요. 제대로 배운 사람은 기본에 힘쓰는 법입니다.” 비록 단어와 문체를 많이 바꿨어도 논어를 통해 공자가 전하고자 했던 핵심 가치나 본질은 그대로 담아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실제로 “내면에 갖춰진 바른 가치로서 정치를 하는 것은 이를테면 북극성이 제자리에 있으면 다른 많은 별들이 알아서 빙 두르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번역은 지금 들어도 무릎을 치게 만든다. 정치권의 신뢰가 바닥에 떨어진 요즘, 권력(power)이 아닌 도덕적 권위(authority)로 세상을 다스리는 정치가 나왔으면 하는 소망을 품게 만드는 대목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얇은 금테두리에 달린 영락(瓔珞·구슬 장식물)하며 나뭇가지 모양의 장식까지…. 아프가니스탄의 틸리야 테페 유적에서 출토된 금관은 신라금관과 닮은꼴이다. 물론 세부 형태나 제작 기법은 다르지만 금관이 주는 전체적인 이미지는 통하는 구석이 있다. 400년이나 떨어진 시점과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신라와 문화적 친연성을 볼 수 있어 신기하기만 하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국립아프가니스탄박물관이 소장한 유물 231건을 국내에 처음 소개하는 특별전을 5일 개최했다. 동쪽으로는 중국, 서쪽으로는 유럽, 남쪽으로는 인도와 연결된 아프간은 예부터 동서 문명 교류의 요충지였다. 아프간의 다양한 문화 교류의 흔적이 이번 전시 곳곳에 배어 있다. 예를 들어 기원전 2000년경 청동기시대 유적인 테페 푸롤에서 발견된 기하학 무늬의 황금 잔은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인더스 문명의 영향을 보여준다. 기원전 4세기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원정으로 건립된 아이 하눔 유적에서 나온 유물들에는 그리스 문자가 적혀 있다. 또 이곳에선 페르시아 양식의 건물이 발굴돼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가 혼합된 헬레니즘 문화의 특징을 보여준다. 쿠샨 왕조의 여름 수도였던 베그람 유적도 소개한다. 베그람은 7세기 중국 스님 현장이 기록한 카피시국의 도읍이다. 서기 1세기로 추정되는 궁전 터에서 발견된 유리와 청동기, 석고, 칠기 유물을 선보인다. 아프가니스탄 특별전은 2006년 파리 기메박물관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11개국에서 순회 전시를 이어왔다. 아프가니스탄이 전란에 휩싸이면서 유물들이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계속 해외 전시를 하고 있다. 한국은 12번째 개최국으로 순회전은 올해 10주년을 맞았다. 전시는 9월 4일까지. 9월 27일부터 11월 27일까지 국립경주박물관에서도 열린다. 02-2077-9265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지난해 충남 부여군 세도면에서 발견된 기원전 2세기 토광묘(土壙墓·수직으로 구덩이를 파고 시체를 매장하는 무덤)가 불법 공사로 90%나 파괴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국보급 ‘간두령(竿頭鈴·청동방울)’을 비롯한 각종 유물들이 제 위치를 잃고 흩어져 출토된 것으로 조사됐다. 앞서 국가 사적인 경주 황룡사지(皇龍寺址)에서도 통일신라시대 유적이 굴착기에 잘려 나가는 등 중요 유적에 대한 파괴가 잇따르고 있다. 동아일보가 최근 입수한 ‘부여 세도면 청송리 35-42번지 긴급발굴조사 약보고서’에 따르면 태양광발전 시설 건설업체인 ㈜유엔알이 지난해 7월 3일 공사를 벌이면서 입회조사(문화재 조사 전문가의 참관 아래 굴착을 개시하는 것)를 거치지 않고 땅을 파다 기원전 2세기의 토광묘 1기를 파괴했다. 이 보고서는 지난해 9월 문화재청이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로부터 제출받은 것이다. 이 토광묘 일대는 반경 300m 안에서 고려, 조선시대 유물이 나온 적이 있어 2년 전 지표조사 때 입회조사가 필요하다는 판정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사업시행자는 입회관이 현장에 도착하기 전에 불법으로 땅을 팠다. 입회관이 도착했을 당시 이 무덤은 굴착기에 의해 훼손돼 길이 1.2m, 너비 0.6m, 높이 0.2m만 남아 있었다. 무덤 깊이가 최소 1.5m 이상으로 추정되는 점을 감안하면 불법 공사로 토광묘의 약 90%가 무너진 셈이다. 무덤에서는 간두령뿐 아니라 세형동검, 잔줄무늬거울(다뉴세문경·多紐細文鏡), 청동투겁창, 청동 꺾창(동과·銅戈), 청동도끼(동부·銅斧), 대롱옥(관옥·管玉), 돌화살촉 등 33점에 이르는 유물이 나왔다. 특히 학계는 청동기∼초기 철기시대 제사장이나 수장이 농경의례를 집전할 때 사용한 무구(巫具)인 간두령에 주목한다. 수량이 극히 드문 데다 삼한지역의 초기 철기문화를 파악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앞서 충남 논산과 덕산에서 출토된 간두령 4점은 모두 국보로 지정됐다. 그러나 무단 굴착으로 토광묘에서 4m나 떨어진 지점에서 간두령이 발견되는 등 대부분의 유물이 제 위치를 잃은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간두령은 통상 2개가 한 쌍으로 나오지만 이곳에서는 한 개만 찾을 수 있었다. 정인성 영남대 교수(고고학)는 “유물은 원래대로 유구와 함께 발견돼야 출토 정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며 “우리나라 고대사 해석에 중요한 단서가 될 자료들이 훼손돼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문화재청의 늦장 대응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보고서에 따르면 문화재청은 사건 발생 뒤 25일이나 지나 토광묘에 대한 현지조사를 실시했고, 다시 20여 일이 흐른 뒤 긴급 발굴조사에 착수했다. 현재는 원래대로 복토된 상태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고고학)는 “유적 파괴로 중요한 청동 유물이 여기저기 흩어진 상황에서 현장조사와 긴급 발굴조사에 오랜 시일이 걸린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입법 미비로 시굴없이 공사 개시… ‘유물 훼손’ 사전 못 막아 ▼잇단 유적 파괴 원인과 대책최근 경북 경주시 황룡사지(皇龍寺址)에 이어 충남 부여군 세도면 토광묘(土壙墓)도 불법 공사에 의해 파괴된 사실이 드러나면서 잇단 유적 파괴의 원인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전문가들은 매장문화재보호법 등 관련 법규의 허점과 문화재청의 안일한 관리감독, 발굴법인 부실화 같은 고질적인 문제가 불거진 결과라고 지적한다.○ 구멍 뚫린 문화재 보호 법제 지난해 7월 파괴된 이 토광묘는 태양광발전 시설 공사에 앞서 2014년 ‘문화재 지표조사’를 거쳤다. 매장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사업 면적이 3만 m² 이상이면 유물이나 유적이 지표에 노출돼 있는지를 파악하는 지표조사를 받아야 한다. 지표조사 결과에 따라 입회조사 혹은 시굴, 발굴조사 여부가 결정된다. 문제는 지표조사로는 유물, 유적의 존재를 명확히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다. 특히 입회조사는 굴착을 전제로 한 것이어서 일단 공사가 중단되는 시굴이나 발굴조사에 비해 문화재 보호 조치가 훨씬 미흡할 수밖에 없다. 이번 토광묘의 경우 입회관이 현장에 도착하기 전에 불법으로 땅을 파긴 했지만, 만약 시굴 결정이 났다면 사고를 막을 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조유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입회조사는 개발사업자의 편의를 위해 생긴 제도”라며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일본처럼 입회조사 없이 시굴조사를 의무화하는 방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표조사나 입회조사는 시굴과 발굴 등 모든 문화재 조사 비용을 사업 시행자가 부담해야 하는 현행 제도에서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조사에 들어가는 비용뿐만 아니라 사업이 지연되는 데 따른 금융비용 등도 무시할 수 없다. 이에 따라 학계 일각에서는 일본처럼 시굴조사를 의무화하되 국가 예산을 일부 투입하는 방안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문화재청의 안일한 관리감독 잇단 유적 파괴에는 문화재 보호 주무 관청인 문화재청의 허술한 관리감독에도 원인이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각 지방자치단체에 문화재 업무를 위임한 채 뒷짐만 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예컨대 황룡사지와 세도면 토광묘에서 불법을 저지른 사업시행자에 대해 문화재청은 직접 고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 대신 지자체에 고발 조치를 요청하는 공문만 보냈을 뿐이다. 문제는 황룡사지 내 역사문화관 건립 공사의 경우 경주시가 직접 추진한 사업이라는 점이다. 더구나 공사 과정에서 경주시가 시공업체를 압박해 준공을 서두른 정황까지 확인됐다. 결국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꼴’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실제로 문화재청은 올 4월 경주시 책임 공무원들에 대한 징계를 시에 요구했지만, 아직까지도 처벌은 이뤄지지 않았다.○ 넘치는 발굴법인 부실화 요즘 국내 유적 발굴은 대부분 발굴 전문 법인들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 그런데 최근 부동산 경기 악화로 발굴 수요가 줄고 있지만, 발굴법인 수는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발굴 전문 조사기관 수는 2009년 67개에서 지난해 160개로 2배 넘게 급증했다. 이에 따라 업체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이른바 ‘발굴 단가 후려치기’가 본격화되고 있는 형국이다. 실제로 2011∼2013년 표준품셈(정부가 고시하는 적정 발굴 비용) 대비 실제 발굴 비용은 공공시행 사업 79%, 민간시행 사업 58%로 조사됐다. 통상 발굴법인이 최소한의 이윤을 내려면 이 수치가 70∼80%는 돼야 한다. 민간 시행 사업의 경우 발굴법인이 밑지는 장사를 한 셈이다. 한 고고학계 관계자는 “발굴법인들이 손실을 내지 않기 위해 조사 인원이나 기간을 줄이면 발굴은 부실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거의 반세기 전 일본인의 여행기를 읽는다는 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매년 개정판이 나오는 여행 가이드북 따위에서 접하는 최신 정보야 애당초 기대할 수가 없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하물며 50년이랴…. 그런데 거대한 시간의 벽이 오히려 이 책의 매력 포인트다. 마치 타임머신을 탄 기분이랄까. 저자는 1907년 일본 홋카이도에서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 때 군에 징집된 경험이 있는 이른바 ‘메이지(明治)인’이다. 일본에서 메이지인은 산전수전 다 겪고 조국의 경제 기적을 이끈 역군으로 묘사된다. 초식남과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가 판치는 현대 일본의 나약한 이미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실제로 저자는 역사소설을 쓰기 위해 각국의 현장을 치열하게 답사하는 부지런한 작가다. 일본 최고 권위의 아쿠타가와 문학상을 받은 소설가이자 기자 출신인 저자가 쓴 글답게 이 책에서는 1960년대 유럽과 소비에트, 미국의 풍경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글로벌 자본주의가 세계를 휩쓸기 전 냉전시대의 사회 풍경과, 이런 세태와는 별도로 면면히 이어진 보통사람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그렸다. 예컨대 유럽 여러 도시에서 목격한 노인들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프랑스 파리의 공원에서 본 노인들은 한없이 쓸쓸했고, 독일 베를린 시내를 산책하는 노인들의 표정에서는 무료함이 읽힌다고 썼다. 세계 최고의 사회보장 혜택을 받는 스웨덴 노인들은 카페와 레스토랑에서 풍족한 소비생활을 즐기고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쓸쓸한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저자는 “일본은 노인 생활보장제도가 제대로 돼 있지 않아 불우한 셈이지만 외국의 노인들과 비교해 더 불행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고 했다. 1960년대 일본의 가족주의는 본격적인 해체를 맞기 직전이었을 것이다. 가족과 공동체에서 분리된 개인주의 사회에서 노인복지의 한계점을 갈파한 서술이다. 외국인 관광객이 ‘대독 전승 기념 퍼레이드’를 관람할 수 있는 장소가 사전에 지정됐던 1965년 소비에트 치하의 모스크바 풍경도 색다르다. 저자는 크렘린 궁전의 붉은 광장까지 3, 4곳의 검문소를 통과할 때마다 일일이 여권을 제시해야만 했다. 특히 실내수영장에서 이용자들이 몸에 비누칠을 하는지 감시하는 의사와 너무 오래 수영하는 사람들을 긴 막대로 제지하는 직원들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모스크바를 벗어난 지방은 사회주의 시스템의 블랙코미디와는 달랐다. 저자는 돈독한 신심을 지키며 아름다운 자연에서 생활하는 러시아 노인들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는다. 역사소설 ‘오로시야국 취몽담’을 쓰기 위해 18세기 일본인 선원들이 표류한 러시아 이르쿠츠크를 1968년 답사한 기록도 볼만하다. 일본 역사소설의 대가답게 200년 전 이르쿠츠크의 건물과 거리를 세밀하게 고증했다. 예를 들어 표류 직후 피폐해진 심정을 안고 이곳에 도착한 선원들이 처음 목격했을, 그리고 단 두 명의 선원이 본국으로 돌아가기 직전 보았을 첨탑을 묘사한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인 포로들도 거친 이 도시에서 저자는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을 것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제국의 위안부’를 비판한 책을 최근 발표한 재일교포 학자의 방한이 불허돼 논란이 일고 있다. 일본과 남북한 국적을 모두 거부한 ‘조선적’ 국적자라는 이유로 우리 외교부가 입국을 거부한 데 따른 것이다. 출판사 푸른역사에 따르면 신간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사진)의 저자 정영환 메이지가쿠인대 교수(36)가 1일 서울에서 기자회견과 출판기념 강연회를 열 예정이었으나, 입국이 불허돼 영상 기자회견으로 대체됐다. 조선적 재일동포는 무국적자로 취급돼 우리 정부로부터 임시 여행증명서를 따로 발급받아야 한다. 앞서 정 교수는 노무현 정부 때인 2005, 2006년에는 입국이 허가돼 방한했지만,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8년 이후 입국이 거부되자 소송을 제기했다. 이번 입국 불허에 대해 외교부 관계자는 “대법원이 2013년 정 교수에 대한 여행증명서 발급 거부 처분이 정당하다고 판결했다”고 말했다. 당시 재판부는 “거부 처분은 남북교류법 등에 따른 것으로 헌법상 평등 원칙에 어긋나지 않고 재량권 일탈이나 남용도 아니다”라고 판시한 바 있다. 그의 입국을 추진한 출판기념강연회실행위원회는 입국 거부를 항의하는 성명을 1일 기자회견 때 발표할 예정이다. 정 교수의 신간은 박유하 세종대 교수가 쓴 ‘제국의 위안부’의 학문적 문제점을 조목조목 비판한 학술서로 올 3월 일본에서 출판됐다. 한국어판은 1일 출간된다. 그는 책에서 박 교수가 위안부 피해자들을 일본군의 동지나 일제의 애국자로 둔갑시키기 위해 사료들을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또 박 교수가 언급한 일본의 전후 사과와 보상도 실상 허구에 불과함을 구체적으로 논증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고고학자들에게 저습지(低濕地) 유적은 ‘대박’으로 통한다. 마치 타임캡슐처럼 저습지에서는 수천 년 전 유물이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심지어 썩기 쉬운 나무나 풀, 씨앗 등 온갖 유기물도 그대로 남아 있다. 이런 보존은 유물이 포함된 연못이나 우물과 같은 습지 위에 흙이 뒤덮여 외부 공기를 완벽하게 차단해주기 때문에 가능하다. 27일 조현종 전 국립광주박물관장(60)과 둘러본 광주 신창동 유적은 한국 저습지 발굴을 태동시킨 역사적인 장소다. 1992년부터 20년 넘게 발굴이 이어지고 있는 이 유적에서는 기원전 1세기 원삼국시대 유물이 총 2000여 점이나 출토됐다. 당시 사람들이 먹고 버린 벼 껍질부터 현악기, 베틀, 문짝, 칠기(漆器), 목제 농기구, 비단 조각, 심지어 그들이 배설한 기생충 알까지 나왔다. 이쯤 되면 미시생활사 복원의 ‘종합선물세트’와 다름없다. 조 전 관장은 고속도로와 국도 1호선 사이의 발굴 현장에서 “고고학자로서 운이 참 좋았다”며 오래전 기억을 더듬었다. 》○ 국도 방향을 바꾼 역사적 발굴 1992년 5월 광주 신창동 국도 1호선 직선화 공사 현장. 도로 포장을 위한 건설 중장비로 부산한 현장에 조현종(당시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사)이 황급히 흙을 퍼 담았다. 그는 연구실에 돌아오자마자 서둘러 흙을 채질한 뒤 물을 부었다. 물에 뜨거나 가라앉은 물질을 확인하다 점토대토기(粘土帶土器) 조각과 볍씨들이 눈에 확 들어왔다. 점토대토기는 초기철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 양식. 오랫동안 품어온 의문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오래전부터 농경 유적을 찾고 싶었습니다. 그때까지 출토된 건 고작 불에 탄 쌀 몇 알이 전부였거든요. 영산강 유역 어딘가에 농경 유적이 있으리라는 짐작이 현실로 들어맞은 겁니다.” 그해 6월 공사는 전면 중단됐다. 국도 1호선은 유적을 피해 우회도로가 만들어졌다. 공사 중 발견된 유적으로 인해 국도 방향이 바뀐 것은 처음이었다. 당시 문화재위원이던 김원룡 서울대 교수와 한병삼 국립중앙박물관장, 김기웅 경희대 교수가 진가를 알아보고 당국에 유적 보호를 강력히 요청한 결과였다. 김원룡은 한발 더 나아갔다. 당시 지건길 국립광주박물관장에게 “발굴을 즉각 중단하고 먼저 저습지 발굴기술부터 배워 오라”고 했다. 그때 한국 고고학계는 저습지 발굴 경험이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조현종의 회고. “발굴 중이던 유적을 중간에 덮는 건 처음이었습니다. 하지만 흠 없이 잘해야겠다는 생각에 곧 수긍했습니다. 유적을 위해서도 저 개인을 위해서도 훌륭한 판단이었죠.” 조현종은 그해 12월 일본 나라문화재연구소로 떠나 저습지 발굴을 배운 뒤 1995년 5월 신창동 유적 발굴을 재개했다.○ 삼한 최고(最古)의 수레를 발견하다 “남한에서 가장 오래된 수레바퀴였군요!” 2000년 말 구라쿠 요시유키(工樂善通) 사야마이케(狹山池) 박물관장을 만난 조현종은 그가 그린 스케치 한 장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해 중국 쓰촨(四川) 성에서 출토된 수레바퀴 유물을 묘사한 그림은 3년 전 신창동에서 나온 목기(木器) 형태와 흡사했다. 발굴팀은 해당 유물에 대한 정밀조사에 들어갔다. 당초 의례용 기물로 알았던 유물은 바퀴살과 바퀴축, 고삐를 고정하는 가로걸이대(車衡·거형)로 각각 밝혀졌다. 앞서 평양 낙랑고분에서 기원전 2세기의 수레 유물이 발견됐을 뿐, 삼한지역에서 최초로 출토된 기원전 1세기 수레 유물이었다. 학계는 흥분했다. ‘마한 사람들은 소나 말을 탈 줄 모른다(不知乘牛馬)’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기록을 토대로 당시 첨단의 수레 제조기술을 익힌 고조선 유이민(流離民) 집단이 삼한으로 이주한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다. 한반도 고대사 해석의 큰 흐름을 바꿀 수 있는 대발견이었다. 저습지 특유의 지난한 발굴 작업 끝에 나온 값진 결과물이었다. 땅속에서 수천 년 묵은 유기물이 밖으로 나왔을 때 급작스러운 부식을 막으려면 약품 처리와 습기 유지 등 꼼꼼한 준비가 필수. 워낙 조심스럽게 발굴이 진행되다 보니 신창동 유적에서는 가로 25m, 세로 25m 넓이의 유구를 3m 깊이까지 파는 데 3년이나 걸렸다. 저습지가 아닌 일반 발굴 현장에선 같은 면적의 작업에 통상 2개월 정도가 걸린다. 최근 국립광주박물관장에서 정년퇴직한 그에게 남은 과제를 물었다. “신창동에서 야자수 열매를 꼭 닮은 나무 그릇이 나왔습니다. 나는 이게 삼한이 멀리 동남아시아와 교류한 흔적이라고 믿어요. 동북아시아에만 국한하지 않고 시야를 넓혀서 연구해 보고 싶습니다.” 광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한국 현대건축의 거장 고(故) 김수근(1931∼1986)을 조명하는 특별전이 열렸다. 국립청주박물관(관장 윤성용)은 그의 30주기를 맞아 ‘지금 다시 김수근―김수근과 박물관 건축’ 특별전을 선보이고 있다. 김수근이 설계한 타워호텔과 세운상가, 서울 자유센터, 청주박물관 등의 건축 모형과 드로잉, 사진, 영상 자료 등을 전시했다. 고인이 주도한 세운상가와 여의도 도시계획안은 6·25전쟁 이후 폐허가 된 서울 도심을 되살리는 데 기여했다. 또 그의 작품인 서울 경동교회, 마산 양덕성당 등은 도시의 새로운 종교 건축양식을 창조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서울 대학로의 마로니에공원에 미술관과 공연장이 어우러진 복합 문화시설을 설치한 것도 김수근의 아이디어였다. 그가 설계한 서울 종로구 ‘공간’ 사옥은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루며 공존하는 기념비적 작품이다. 특히 김수근은 고(故)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과의 인연을 계기로 경주, 부여, 청주, 진주 국립박물관 설계에 잇달아 참여했다. 그의 작품인 경주박물관 월지관은 빛과 벽돌의 오묘한 조합을 통해 무한한 공간을 연출했고 청주와 진주박물관은 자연 속 전통건축의 아름다움을 탁월하게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8월 21일까지. 043-229-6401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고 김수환 추기경의 생전 어록은 저작권 보호 대상이 될까. 법원은 추기경의 발언 내용을 그대로 옮긴 건 창작성이 없고,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명사의 가르침은 널리 전파될 필요가 있다며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평화방송 사진기자 출신인 전대식 씨(60)는 김 추기경의 선종 3주기인 2012년 12월 김 추기경의 생전 어록과 전 씨가 촬영한 사진을 엮은 에세이집 ‘그래도 사랑하라’를 펴냈다. 이 책은 적지 않은 판매수익을 올렸다. 그러자 평화방송은 이 책의 사진 110장이 전 씨 재직 중에 찍은 것이고, 김 추기경의 발언이 2004년 평화방송에서 펴낸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와 비슷해 저작권을 침해했다며 출판 금지, 전량 폐기, 6억3000만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서울남부지법 민사13부(부장판사 김도현)는 최근 평화방송의 청구를 대부분 기각하고 평화방송 명의로 공표된 사진 12장만 저작권 침해를 인정해 장당 10만 원씩 120만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평화방송의 저작물은 김 추기경의 구술을 그대로 받아 적어 창작성이 인정되지 않으므로 저작권 보호 대상으로 볼 수 없다”며 “존경받는 공적 종교인인 김 추기경의 말씀은 널리 전파돼 사랑과 나눔의 고귀한 정신을 강조한 그의 삶을 많은 사람과 나눌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고(故) 김수환 추기경의 생전 어록은 저작권 보호 대상이 될까. 법원은 추기경의 발언 내용을 그대로 옮긴 건 창작성이 없고,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명사의 가르침은 널리 전파될 필요가 있다며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평화방송 사진기자 출신인 전 모씨(60)는 김 추기경의 선종 3주기인 2012년 12월 김 추기경의 생전 어록과 전 씨가 촬영한 사진을 엮은 에세이집 ‘그래도 사랑하라’를 펴냈다. 그러자 평화방송은 이 책의 사진 110장이 전 씨 재직 중에 찍은 것이고, 김 추기경의 발언이 평화방송에서 펴낸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와 비슷해 저작권을 침해했다며 출판금지, 전량폐기, 6억 3000만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서울남부지법 민사13부(부장판사 김도현)는 최근 평화방송의 청구를 대부분 기각하고 평화방송 명의로 공표된 사진 10장만 저작권 침해를 인정해 장당 10만원 씩 120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평화방송의 저작물은 김 추기경의 구술을 그대로 받아 적어 창작성이 인정되지 않으므로 저작권 보호 대상으로 볼 수 없다”며 “존경받는 공적 종교인인 김 추기경의 말씀은 널리 전파돼 사랑과 나눔의 고귀한 정신을 강조한 그의 삶을 많은 사람과 나눌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지난해 초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의 ‘폼페이 특별전’. 쭈그려 앉아 손으로 코와 입을 막은 남자와 얼굴을 감싼 채 엎드린 여자, 집 안에 묶인 채 죽음을 맞은 개 등 다양한 캐스트(화산재 등 퇴적물이 쌓여 보존된 화석)를 한참 바라봤다. 누군가는 이미 체념한 듯했고, 다른 누구는 끝까지 살아남으려 발버둥을 치던 모습이 생생하다. 한순간 시간이 정지된 듯 서기 79년 8월 25일의 참사가 눈앞에 펼쳐졌다. 18세기부터 폼페이를 발굴한 서양인들이 지금껏 이곳에 열광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책은 최근의 다양한 고고학 연구 성과를 통해 폼페이에 대한 일반인들의 잘못된 상식을 깨뜨리는 지적 통쾌함을 선사한다. 이른바 ‘폼페이의 역설’(폼페이가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것 같지만 의외로 일반인들이 잘못 알거나 무지한 게 많다는 뜻)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일반인들의 뇌리에 폼페이는 화려한 로마시대의 축소판으로 각인돼 있다. 그러나 저명한 로마사 연구자인 저자는 폼페이가 로마를 대표할 만한 도시는 아니었다고 말한다. 인구도 최대 3만 명을 넘지 않는 소도시였고, 각종 도심 건물이나 조각들은 로마의 것을 본떴다. 역사적으로도 폼페이는 정통 로마인들이 아닌 기원전 6세기경 에트루리아인과 그리스인들이 세운 도시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런 정황이 오히려 학자들에게는 강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로마시대 역사가들이 제대로 주목하지 않아 기록이 전하지 않는 부분을 규명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일종의 보너스인 셈이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그려진 수많은 인명의 급작스러운 죽음도 폼페이의 역설 중 하나다. 캐스트에서 풍기는 이미지처럼 대다수 폼페이 주민들이 아무런 징후도 느끼지 못한 채 일상을 영위하다 변을 당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각종 자연과학과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폼페이 주민들 상당수는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기 전 지진 등을 통해 위험을 감지하고 피난을 떠났다. 장거리 여행이 여의치 않았던 만삭의 여인이나 서민들, 화산 폭발을 근거리에서 관찰하고 싶었던 귀족 등이 대폭발의 희생자가 됐다. 이민족에 한없이 관대했다는 팍스 로마나의 이미지도 폼페이에선 흔들린다. 기원전 2세기부터 로마의 동맹으로 제국에 서서히 편입되기 시작한 폼페이는 식민지가 된 직후에는 정치권력에서 차별을 겪게 된다. 로마의 식민도시가 되고 나서 초기 수십 년 동안 선출된 폼페이 권력자들의 명단을 조사한 결과, 로마계 성(姓)만 보일 뿐 폼페이 원주민들의 성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코셰르 가룸’(유대교 율법에 맞게 조리된 음식)이라고 표시된 대형 항아리와 인도인들이 섬긴 여신(락슈미) 조각상 등이 폼페이에서 출토된 건 로마인들의 개방성을 보여주는 증거임을 부인할 수 없다. 2000년 전 폼페이를 재현하기 위한 서구 고고학자들의 창의적인 연구를 정리한 부분도 눈길을 끈다. 예컨대 로마 식민지가 되기 이전 초기 폼페이의 역사를 규명하기 위해 개발한 ‘열쇠 구멍 고고학’이 그렇다. 화산재가 쌓인 로마시대 유적을 파괴하지 않기 위해 좁은 면적을 깊게 파 들어가는 독특한 발굴 조사 방식을 개발한 것. 이와 함께 수레가 디딤돌(도로 위 오물을 밟지 않기 위해 인도 사이에 만든 징검다리)이나 도로 경계석과 충돌한 흔적을 정밀 조사해 폼페이 각 도로 구간의 교통 흐름을 알아낸 연구도 눈길을 끈다. 이를 통해 고고학자들은 폼페이의 좁은 도로에서 수레가 원활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일방통행로가 존재했기 때문임을 알아낼 수 있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당신은 시진핑 주석에게 상을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지난해 10월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옛 목(木)활자를 자세히 관찰하던 천정훙(陳正宏) 중국 푸단대 교수가 이재정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을 보며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천 교수는 “당신의 추정대로 청나라 황실에서 만든 활자로 보인다. 중국 본토에서도 자취를 감춘 활자들이 이곳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고 했다. 그동안 추정만 했던 목활자의 출처가 확인된 순간이었다. 천 교수가 청나라 목활자라고 판단한 핵심 근거는 황제의 권위를 의식한 ‘피휘(避諱·황제 이름자의 일부 획을 생략하거나 다른 글자로 바꿔 쓰는 것)’. 조사 결과 이 목활자에는 강희제 이름(玄燁·현엽)의 玄자와 건륭제 이름(弘曆·홍력)의 弘자의 마지막 획이 생략돼 있었다. 앞서 이 연구관은 해당 목활자가 유달리 높은 데다 서체도 특이해 중국에서 수입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 연구관은 “정조가 금속활자인 정리자(整理字)를 새로 만들면서 참고용으로 청나라 목활자를 수입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1791년(정조 15년)과 1792년 중국에서 활자를 구입했다는 기록을 감안하면 정조의 총애를 받은 박제가가 연행사로 중국에 파견됐을 때 입수한 것으로 보인다. 정리자와 중국 목활자 등 조선의 활자를 둘러싼 흥미로운 역사는 국립중앙박물관이 ‘활자의 나라, 조선’이라는 테마 전시회로 21일부터 선보이고 있다. 박물관은 총 82만 자(금속활자 50만 자, 목활자 30만 자 등)에 달하는 조선 활자를 소장하고 있는데, 이는 세계 최대 규모다. 조선이 고려시대 금속활자를 발전적으로 계승한 덕이다. 이웃나라 중국은 13세기 위구르 목활자만 전하며, 일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집권 시기 임진왜란을 통해 조선 인쇄술을 배워 만든 금속활자 3만 자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번 테마전에서는 정리자와 실록자(實錄字), 한구자(韓構字) 등 17∼20세기 왕실과 사대부들이 사용한 금속활자, 목활자 5만여 점을 전시한다. 또 17세기에 만들어진 정리자 보관장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알아낸 조선의 독창적인 활자 분류법도 소개한다. 9월 11일까지. 02-2077-9461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정조의 왕릉에 부장됐던 명기(明器)와 조선 국왕의 시신을 안치한 재궁(梓宮)이 처음 공개된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조선왕릉, 왕실의 영혼을 담다’ 특별전을 21일 개최했다. 왕과 왕비가 묻힌 조선 왕릉은 위치 선정부터 건설, 장례까지 모든 절차가 국가 예법에 따라 엄수됐다. 조선의 건축과 조경, 예술이 총동원된 조선 왕릉은 높은 문화재 가치를 인정받아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이번 특별전을 통해 처음 공개된 ‘정조 구릉지 명기(正祖 舊陵地 明器)’는 정조(재위 1776∼1800년)가 승하 직후 묻혔던 능지에 부장된 백자와 칠기함, 청동기 그릇들이다. 앞서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11년 융릉과 건릉 사이 구릉에서 명기를 발굴했다. 정조의 왕릉은 1821년(순조 21년) 효의왕후(1753∼1821)와 합장되면서 건릉(健陵)으로 이장됐다. 재궁은 국장을 치를 때 왕의 시신을 안치하던 관이다. 재궁은 왕이 즉위할 때 제작돼 해마다 옻칠을 더해 윤기를 유지했다. 이번에 선보이는 재궁은 여분으로 만들어 창덕궁 의풍각에 보관한 것으로 2005년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관됐다. 특별전의 1부 ‘조선왕릉, 세우다’에서는 국장 기록을 담은 의궤(儀軌)와 왕릉 터의 입지 여건을 묘사한 산릉도(山陵圖), 왕릉 건설을 위해 임시로 설치된 관청인 산릉도감(山陵都監) 관련 유물 등이 전시된다. 2부 ‘조선왕릉, 정하다’에서는 왕릉을 구성하는 요소와 제도를 소개하며, 3부 ‘조선왕릉, 모시다’에서는 산릉제례(山陵祭禮)에서 사용됐던 제기(祭器)를 전시한다. 4부 ‘조선왕릉, 돌보다’에서는 각 왕릉의 관리 기록을 빼곡히 수록한 왕릉지(王陵誌)를 볼 수 있다. 8월 28일까지. 02-3701-7633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국가 사적 제6호인 경주 황룡사지(皇龍寺址) 내 불법 공사로 인해 8세기 통일신라시대 건물과 도로, 수로 유적이 한꺼번에 파괴된 것으로 20일 공식 확인됐다. 이곳에선 현재까지 신라시대 연꽃무늬 수막새와 토기, 석불(石佛) 등 총 19점의 유물이 발견됐다. 문화재청이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로부터 최근 제출받은 ‘경주 황룡사 역사문화관 건립공사 부지 내 유적 긴급수습 약보고서’에 따르면 경주시는 사적 내 황룡사 역사문화관 부대시설 공사를 하면서 굴착기로 총 285m에 달하는 구덩이를 팠다. 문화재위원회의 사전 허가를 받지 않은 불법 공사였다. 유적 훼손 사실은 4월 22일자 동아일보 보도로 처음 알려졌고 연구소는 4월 25일∼5월 11일 긴급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역사문화관 북쪽 구덩이에서 약 70m 길이의 동서 방향 도로가 발견됐다. 15∼26cm 두께의 도로 유적은 자갈, 흙 등으로 다져진 상태였다. 근처에서 8, 9세기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연꽃무늬 수막새와 사자무늬 회첨막새, 토기 조각 등도 출토됐다. 보고서는 “신라 왕경 방리(方里)제에 의해 황룡사 북쪽에서 동서 방향으로 진행되는 도로 유구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신라는 수도 경주와 주요 대도시(9주 5소경)에 걸쳐 원활한 교통을 위해 바둑판 모양으로 도시를 구획하는 방리제를 시행했다. 이번에 훼손된 유적은 왕경의 각 방리를 구분 짓는 핵심 도로망 중 하나였다. 도로 유적 인근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수로로 추정되는 석렬(石列)도 나왔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석렬 안에 개흙층이 확인돼 물이 흘렀던 사실을 알 수 있다”며 “도로 양옆의 배수구일 수도 있지만 별도의 수로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석렬 부근에서도 연꽃무늬 수막새 4점과 완형에 가까운 토수 기와 2점 등이 출토됐다. 역사문화관 서쪽에 굴착한 구덩이에서 발견된 4개의 적심석(積心石·기둥을 올리기 위해 초석과 함께 건물 밑바닥에 까는 돌) 역시 잘려 나간 상태였다. 이들 적심석은 너비 1.3∼1.7m, 두께 0.3∼0.6m 규모로 최대 3, 4겹의 돌들이 층을 이루고 있다. 적심석의 양상을 볼 때 중간 규모 이상의 기와집이 들어섰던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사찰 혹은 귀족 저택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인근에서 황룡사지와 분황사에서 출토된 것과 비슷한 7, 8세기 신라시대 인화문 토기 조각도 나왔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고고학)는 “동궁과 월지 등 신라 왕궁의 중심 건물이 주변에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곳에 왕경의 핵심 시설이 있었을 것”이라며 “불법 터파기 공사로 도로와 건물, 수로 유적이 중간에 잘리는 중대한 훼손이 발생했다”고 강조했다. 경주시 관계자는 20일 “시공업체의 불법 공사를 사전에 보고받지 못했지만 관리감독을 소홀히 한 책임을 느낀다”며 “시공업체를 형사 고발했고 훼손된 유적은 보호를 위해 복토했다”고 말했다. 한편 문화재청이 두 달 전 담당 공무원에 대한 징계를 요구하는 공문을 경주시에 보냈으나 아직 징계 조치는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