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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제작한 황제지보(皇帝之寶)를 미국에서 되찾았다. 문화재청은 21일 “미국 국토안보부 수사국(HSI)이 18일 황제지보를 비롯한 조선과 대한제국 인장 9점을 미국 소장자로부터 압수했다고 알려 왔다”고 밝혔다. HSI는 공식 몰수 절차가 끝나는 대로 이르면 내년 6월 한국으로 반환할 예정이다. 이번에 되찾은 인장에는 고종의 자주독립 의지가 담긴 황제지보 외에도 1907년 순종이 고종에게 태황제(太皇帝) 존호를 올리며 만든 수강태황제보(壽康太皇帝寶), 시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대한제국 황실 서적에 설명이 수록된 유서지보(諭書之寶·지방관리 임명장에 사용)와 준명지보(濬明之寶·왕세자 교육 담당 관리에게 내리는 교지에 사용)도 포함돼 있다. 헌종이 서화에 찍었던 향천심정서화지기(香泉審定書畵之記)와 조선 왕실 인장인 우천하사(友天下士), 쌍리(雙(리,이)), 춘화(春華), 연향(硯香)도 함께 되찾았다. 이 인장들은 6·25전쟁 당시 미군 해병대원이 덕수궁에서 훔쳐 갔던 것들로 최근까지 그 후손인 미국인 A 씨가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HSI는 A 씨가 한 문화재 관련 단체에 인장들을 내다팔려 한다는 첩보를 입수해 9월경 한국 정부에 제보했고, 조선 왕실과 대한제국 인장임을 확인한 정부가 수사를 요청하면서 압수가 성사됐다. 한미 양국은 2010년 수사 당국 간 상호 협력 양해각서를 체결해 불법 반출된 문화재를 환수하고 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이토록 서슬이 퍼런 책을 만나는 게 얼마 만인가. 표지부터 붉은 이 책은 참 손 안 가는 모양새를 지녔다. 무슨 1980년대 불온서적도 아니고…. 제목도 어찌나 자극적인지. 솔직히 심한 두통거리 하나 껴안게 생겼다 싶었다. 하지만 책장을 넘기며 생각이 달라졌다. 이 책이 얼마나 날카롭고 매서우며 짜릿한지를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살짝 투덜거리며 이 책을 맡았는데, 읽고 나서는 책의 향기 팀장한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간명하다. 세계 어디에서건 정부의 긴축은 죽음에 이르는 처방이라는 주장이다. 영국 옥스퍼드대 학자인 스터클러와 미국 스탠퍼드대 예방연구센터 교수인 바수는 공중보건 전문가들. 불황이 인류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연구해 봤더니, 경기가 좋고 나쁜 건 그다지 문제가 아니었단다. 핵심은 정부 재정을 탄탄하게 만든답시고 긴축정책을 펴며 사회보장 프로그램을 축소한 것이 국민의 건강을 해쳤다는 얘기다. 게다가 이런 방식은 경기 부양에도 전혀 도움이 되질 않았다고 지적한다. 실례를 들어 보자. 한국도 포함됐던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를 살펴보자. 당시 한국과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는 파산 직전에 내몰렸다. 하지만 선택은 엇갈렸다. 세 나라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긴급구제자금을 요청해 강력한 긴축정책을 펼친 반면, 말레이시아는 사회보장비용을 줄일 수 없다며 다른 길을 갔다. 결과는 알고 있는 대로다. 태국은 자살률이 60% 증가했으며, 유아 사망률이나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에이즈) 감염률도 수직 상승했다. IMF 요구대로 공중보건 지출을 해마다 9∼15%씩 줄여 나간 결과다. 한국은 빈곤율이 1997년 11%에서 이듬해 23%로 치솟았다. 인도네시아도 마찬가지다. 반면 보건 및 빈곤구제 지출을 늘린 말레이시아는 모든 건강 지표가 좋아졌으며, 경제 회복도 가장 빨리 이뤄 냈다. 다행히 한국은 극단적 긴축은 피하며 이후 회복세를 보였지만, 태국과 인도네시아는 지금도 위기를 벗어났다고 말하기 힘들다. IMF는 당시의 선택이 잘못됐음을 공식 사과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는 충분히 예측 가능했다는 사실이 더 충격적이다. 실제로 20세기 초반 미국이 대공황을 겪었을 당시, 정부의 뉴딜정책을 받아들여 돈을 풀었던 주와 그러지 않았던 주는 전혀 다른 결과물을 손에 쥐게 된다. 이제는 짐작 가능하겠지만, 긴축을 지지했던 주는 국민 건강이 극도로 악화됐다. 소련이 붕괴했을 때도 똑같은 일이 되풀이됐다. 제대로 된 사회안전망을 갖추지 않고 급속한 자본주의를 시도한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은 모두 장기 경제 침체와 함께 수많은 생명을 잃었다. 하지만 점진적인 개혁을 표방하고 기존 복지정책을 유지했던 벨라루스는 충격을 최소화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2008∼2009년 엇비슷하게 경제 위기에 직면한 아이슬란드와 그리스를 보라. 아이슬란드는 현재 회복 기미를 보이고 있으나, 그리스는 갈수록 상황이 나빠지고 있다. 차이는 긴축정책을 폈는가, 아닌가다. 저자들은 말한다. 긴축, 정확히는 사회보장비용 축소가 경제적으로 옳고 그른지는 논외로 하자. 하지만 사회구성원의 건강을 해치고 사망률을 증가시키는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국민 생명까지 담보로 하면서 그런 정책을 밀어붙여야 할 명분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지금 당장 모든 국가는 긴축정책을 백지부터 재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목소리는 현재 정부 정책이나 세계 경제를 좌우하는 판에서는 주류의 시각이 아니다. 그리스는 물론이고 세계 최고의 국민의료시스템을 갖췄던 영국조차 최근 긴축을 내세우며 비용 절감을 외치고 있다. 눈앞에 위기가 닥쳤으니 허리띠를 졸라매려는 건 어쩌면 본능적인 일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본능이 수많은 생명을 갉아먹고 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한국의 세계유산인 하회마을과 양동마을이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협약 선포 40주년을 맞아 선정한 ‘최고의 모범 유산(The Best Model Case)’에 뽑혔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는 7일 “프랑스 파리에 있는 유네스코 본부가 최근 세계유산의 핵심정신인 ‘지속가능한 발전’을 가장 잘 구현한 26개 사례 가운데 하나로 ‘한국의 역사마을-하회와 양동’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한국위원회는 유네스코가 뽑은 26개 모범 사례를 모은 안내서 ‘세계유산, 인류를 위한 혜택’ 한국어판을 이날 출간했다. 경북 안동시 하회마을과 경주시 양동마을은 14∼15세기에 조성된 한국의 대표적 씨족마을. 2010년 등재 당시에도 ‘문화전통 혹은 문명의 독보적 증거로 예술성이 담긴 축제나 행사가 잘 보존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리나 보코바 유네스코 사무총장은 “세계유산의 보존과 개발이라는 요구를 다 충족시키기 위해 어떻게 인간과 유산이 조화를 이루는지를 잘 보여준 사례”라고 극찬했다. 최고의 모범 유산 선정은 유네스코가 1972년 선포한 ‘세계 문화 및 자연유산 보호협약’이 지난해 40주년을 맞아 세계 160여 나라에 산재한 981점의 세계유산 전체를 대상으로 이뤄졌다. 특히 유네스코에 가입한 전체 회원국과 유네스코 산하 세계 전문가 집단의 학자 및 관계자들의 의견을 종합 반영한 결과라는 점에서 더욱 의의가 크다. 민동석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사무총장은 “하회와 양동은 지역 및 중앙정부와 주민의 협력 아래 무형적 가치까지 통합적으로 전승한 모범 사례로 인정받았다”며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이 떠오른다. 한 명씩 한 명씩 사라져가고 범인은 오리무중. 지금 숭례문이 딱 그런 처지다. 처음엔 단청이 벗겨지더니, 이제는 기둥 나무가 쪼개진다. 다음은 뭐가 문제일까. 헌데 자기 탓이라는 이는 아무도 없다. 이런 사태를 누군들 바랐을까. 2008년 화마로 무너진 국보 제1호는 올해 5월 우리 품으로 돌아왔다. 그간 많은 이들이 애썼다는 것을 무시할 마음은 없다. 하지만 숭례문은 5년 공사를 마친 뒤 겨우 5개월이 넘었건만, 최악의 문화재 복원 사례로 기록될 처지에 놓였다. 문화재청이 ‘숭례문 종합점검단’을 꾸려 원인을 규명하겠다니 일단 그 결과를 기다려보자. 다만 책임자들의 해명이 영 찜찜하다. “시간이 부족했다.” “예산이 제대로 집행되지 않았다.” “해당 기관이 일을 키웠다.” 그런데 그전엔 왜 이런 얘기를 한 번도 안 했을까. 중요무형문화재에다 무슨 장(匠)이라는 분들이 누구 눈치를 본 것은 아닐 테고…. 혹시 이미 이런 우려를 표했는데 우리가 놓쳤나? 5월 복원 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여러 언론과 진행한 인터뷰를 찾아 살펴봤다. “숭례문은 ‘국민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일으켜 세우는 일이었다. …나무는 한겨울에 매서운 칼바람을 맞으며 전국의 산을 누비고 다닌 끝에 찾아낸 것들이다.” “국민 모두 자기가 주인이라는 생각으로 문화유산을 내 것같이 아껴야 해요. 주인의식을 갖고 ‘잘못된 점’은 정부에 말할 수 있어야 하고요.” “화재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전통적인 기법과 재료를 사용하여 ‘원형에 가깝게’ 복원한 것이 이번 숭례문 복구의 가장 큰 의의다.” “전통 방식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다소 고생스러울 수 있으나 ‘역사적인’ 의미도 있고 미학적으로도 훨씬 아름다워요.” 이제 정부 얘기를 들어보자. 7일 논란이 들끓자 ‘문화재청의 입장’이 나왔다. “전통 재료의 개발과 보급, 전통 기법의 계승을 위해 법적 제도적 근거를 마련하겠다. …종합 학술조사 시행과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등 맞춤형 지원 육성책을 마련할 계획이다. 이러한 모든 과정은 ‘정확하고 투명하게’ 국민에게 공개하겠다.” 당연한 것 아닌가. 지금까지 안 했다는 게 더 놀랍다. 하나 더, 장인들의 주장과는 뭔가 어긋난다. 시간도 예산도 불충분해 일을 키웠다는데, 앞으로는 정확하고 투명하게 처리할 수 있을까. 숭례문 복원 때 시민들은 몇 대(代)에 걸쳐 키운 나무를 기증하고 해외 동포들은 성금을 모아 보냈다. 서로 발뺌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최근 숭례문 복원의 부실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국보 제24호 ‘석굴암’의 본존불에 25개 정도의 미세균열(사진)이 존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문화재청은 7일 “석굴암의 본존불과 좌대(座臺)에서 표면 박리나 변색을 포함한 미세균열이 지금까지 25개 정도 확인됐다”고 밝혔다. 석굴암 미세균열은 천장과 벽체, 기둥에도 24개 정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재청은 1996년부터 정기적으로 석굴암 안전점검을 실시해 석굴암 전체에서 지금까지 도합 50개의 미세균열을 발견했다. 이 가운데 약 50%가 본존불과 본존불을 받친 좌대에 집중돼 있다. 최병선 문화재청 건축문화재연구실장은 “석굴암 균열은 1996년 정기 점검을 시작하기 전부터 존재했던 것도 있어 어느 시기에 생긴 것인지 정확히 알기 힘들다”며 “아직은 전체 구조물에 시급한 문제가 발생했다고 보기는 어려워 조심스레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문화재청은 향후 조금이라도 균열이 심각해지면 곧바로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입장이다. 석굴암은 1997년 문화재관리국 시절에도 미세균열로 인해 문제가 생긴 것 아니냐는 지적이 일어 한 차례 구조안전진단을 실시한 바 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조선시대 유교 사회를 이처럼 탁월하게 보여주는 씨족마을이 있을까. 생산과 생활, 의식이 전통 그대로 유지되는 것도 놀라운데, 21세기에도 잘 이어지고 있는 매우 보기 드문 사례다.”(아마레스와르 갈라 덴마크 코펜하겐 국제종합박물관연구소 이사) 상찬도 이런 상찬이 있을까. 하지만 더 기쁜 것은 그의 말이 결코 립 서비스가 아니란 점이다. 유네스코는 전 세계 981개의 세계유산 가운데 3%도 안 되는 모범사례를 뽑으며 한국의 역사마을인 하회와 양동을 이렇게 표현했다. ‘살아있는 유산과 탁월한 보편적 가치의 보호’의 구현이라고. 갈라 이사는 실제로 하회와 양동 마을 평가보고서의 주 집필을 맡았던 전문가. 그는 “지역사회의 인식과 지식이 유산 보존은 물론이고 문화적 체험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보여줬다”는 부분을 강조했다. 두 마을 주민들이 외부의 무분별한 문화 유입을 막고 마을의 문화를 관리하고 지키는 역할을 잘 수행했다는 뜻이다. 그로 인해 인류는 한국의 세계유산으로부터 사회적 문화적 혜택을 얻었다는 감사의 표현이기도 하다. 특히 많은 해외 전문가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 매력은 유형유산과 무형유산이 통합적으로 잘 관리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1984년 중요민속문화재 제122호와 제189호로 지정된 두 마을은 양진당(보물 제306호)과 충효당(보물 제414호·이상 하회마을), 무첨당(보물 제411호)과 향단(보물 제412호), 관가정(보물 제442호·이상 양동마을) 같은 진귀한 유형유산을 다수 지녔다. 게다가 ‘하회별신굿탈놀이’를 비롯해 전통적 유교 문화와 관습도 잘 이어져 내려왔다. 유네스코가 평가서에 “옛 가옥의 공간적 배치가 잘 유지됐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 학문적, 철학적 전통이 지금까지도 그대로 살아있다”고 쓴 이유다. 유네스코가 또 하나 하회와 양동의 강점으로 주목한 포인트가 있다. 미래의 발전 가능성도 무궁무진하다는 점이다. 유네스코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기금을 유치하고 투자했으며, 지역사회는 주인의식을 갖고 마을 공동체로서 지역사회 발전을 활성화시켰다”고 평가했다. 특히 하회마을이 엄격하고 실질적인 ‘보존관리 종합계획’을 가동하고 있고, 양동마을도 하회마을의 경험을 바탕으로 관리계획을 수립했다는 걸 높이 샀다. 이번 모범 사례 선정에는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국가의 약진이 크게 눈에 띈다. 중국의 ‘카이핑(開平) 댜오러우(雕樓) 건축물과 마을’은 농촌 사회의 전통과 외국 문화를 통합했다는 점에, 일본의 ‘시레토코(知床)’는 흰죽지참수리 같은 세계적인 멸종위기종의 중요한 번식지가 인류의 어업과 조화를 이룬 점에 큰 점수를 받았다. 김귀배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문화커뮤니케이션팀장은 “한중일은 최근 유네스코에서 가장 주목받으며 영향력이 커지고 있는 나라”라면서 “이번 선정에서도 이런 점이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는 모범 사례 선정을 기념해 26개 사례를 모은 안내서 ‘세계유산, 인류를 위한 혜택’(사진) 3000부를 일반에 배포한다. 홈페이지(www.unesco.or.kr)에서 신청하면 포장 및 배송료(5000원)만 받고 보내준다. 물량을 다 소진할 경우에는 향후 전자책으로 제작해 공짜로 제공할 계획이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김장철에 배추 값이 오르면 ‘김치가 아니라 금치’라는 말이 나온다. 하지만 이미 조선시대부터 김치는 중국 황제에게 진상할 정도로 귀한 음식이었다고 한다. 이런 김치가 서민적 반찬이 된 것은 비싸고 귀한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대중적 열망의 산물이었다.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55)는 5일 서울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린 심포지엄 ‘김치, 김장문화의 인문학적 이해’에서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논문을 발표했다. 세계김치연구소 주관으로 열린 심포지엄에서 윤 평론가는 “조선 초기 최고급 중국산 배추를 수입해 만든 김치는 왕실이나 최고위층 양반만 맛볼 수 있는 요리였다”고 설명했다. 세종실록에는 중국 사신이 새우젓으로 담근 김치 두 항아리를 요청하는 대목이 나온다. 겨우 김치 두 단지가 황제 진상품 목록에 오를 정도로 진귀한 음식이었던 것이다. 당시 김치의 주 재료인 배추는 종자 한 되가 하인의 몇 달치 월급과 맞먹을 만큼 비쌌다. 왕실에서도 국가 제사에 쓰기 위해 배추밭을 따로 관리할 정도였다. 또 다른 재료인 젓갈도 비슷했다. 실학자 이덕무(1741∼1793)는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젓갈로 담근 김치처럼 호화로운 음식을 먹을 수 있느냐”고 질타했다. 18세기 전라도 지역에서 주로 먹었던 ‘젓갈 김치’는 전국적으로 유명했지만, 워낙 비싸고 수급이 어려워 내륙에서는 웬만한 집안이 아니면 김치 재료로 쓸 엄두도 못 냈다. 이리도 귀한 김치가 대중적으로 퍼져나갈 수 있었던 까닭은 뭘까. 역설적으로 그만큼 맛있었기 때문이었다. 입맛에 맞는 고급 요리를 찾는 이들이 상류층을 필두로 늘어났고, 농민들은 김치를 담가 팔면 수익이 커지니 앞다퉈 배추를 심었다. ‘수요-공급의 법칙’이 대량생산의 불씨를 댕겼고, 공급이 늘어나니 가격도 하락했다. 18세기 중반 김치에 고춧가루를 넣기 시작한 것도 향신료인 후추나 산초 가격이 워낙 비싸 대안으로 각광을 받은 것이다. 지역마다 김치 맛이 달랐던 것도 이런 경제적 요인이 작용했다. 어업이 활발한 삼남 지방은 젓갈 수급이 용이해 맵고 짠 김치를 담가 먹는 문화가 일찍이 자리 잡았다. 하지만 시장 자체가 영남의 8분의 1 수준이던 함경도는 비싼 젓갈을 구할 유통 경로가 부족해 싱겁고 담백한 김치를 주로 먹었다. 윤 평론가는 “단지 기후 탓에 김치 맛이 지역마다 다르다는 도식적인 구분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며 “당대 김치 재료의 가격과 유통 구조가 제조 방식에 영향을 줬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최근 국내에서는 ‘떠먹는 요구르트’가 꽤 화제였다. 건강에 좋다며 애들에게도 열심히 먹였던 이 제품들이 알고 보니 당이 가득했다는 얘기다. 콜라나 초코파이보다도 설탕이 많이 들어 있다는 자극적인 비교도 쏟아졌다. 그러데 알고 보면, 이 식품업체들이 그간 딱히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떠먹는 요구르트 겉면에 버젓이 ‘당 함유량’이 표시돼 있다. 그저 몸에 좋은 유산균이 풍부하다고, 먹어 보면 맛있다는 측면만 강조해서 광고한 죄밖에 없다. 각설탕이 네댓 개쯤 들어간 것은 별 일 아니라서 대놓고 외치진 않았나 보다. 왠지 속은 기분이 드는가. 하지만 ‘배신의 식탁’을 쓴 저자였다면 아마 이렇게 코웃음 쳤을 것이다. “뭐 그 정도 가지고…. 그건 빙산의 일각도 안 돼요. 당신이 먹고 있는 음식들에 대한 모든 진실을 안다면 까무러칠 겁니다.” 대놓고 책날개에 ‘스타 기자’라고 써 놓은 것은 어이없지만, 실제로 저자인 마이클 모스는 이쪽 계통에서 경력이 화려하다. 월스트리트저널과 애틀랜타저널컨스티튜션을 거쳐 뉴욕타임스에 재직 중인 그는 2010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현지에서도 올해 출간된 이 책은 기자의 직분을 잘 살려 미 식품업계를 샅샅이 뒤진 탐사보도의 전형으로 큰 관심을 모았다. 이 책은 크게 ‘설탕으로 배신하다’와 ‘지방으로 배신하다’ ‘소금으로 배신하다’ 3부로 돼 있다. 부제들이 너무 번역 투라 어색하긴 해도 의도하는 바는 자명하다. 설탕과 지방, 소금이 당신의 식탁을, 우리의 위장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저자에 따르면 식품업계는 이미 그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신나게 장사하느라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을 뿐. 책에 등장하는 1999년 4월 미국 미니애폴리스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보자. 미국은 물론이고 세계 식품시장을 쥐락펴락하는 기업의 수장 11명이 비밀 회동을 했다. 이 자리에서 한 업체 대표가 그들이 이 세 가지 재료를 얼마나 듬뿍 쓰고 있는지, 이로 인해 얼마나 많은 소비자들의 건강을 해치고 있는지 장시간에 걸쳐 설명했다. 모두가 힘을 합쳐 이를 개선하자는 뜻에서 한 말일 텐데, 반응은 한마디로 정리됐다. “소비자는 변덕쟁이다.” 이러쿵저러쿵해 봐야 수시로 관심과 기호가 바뀌니, 업체는 그에 맞춰 다양한 제품을 내놓아야 한다는 반박이었다. 한마디로 기업은 선택권을 줬으니 책임은 소비자가 져야 한다는 얘기다. 과연 그럴까. 먼저 설탕을 짚어 보자. 현대인들은 하루 평균 22스푼의 설탕을 먹고 있다. 딱히 먹은 기억도 없겠지만, 설탕은 그저 커피믹스나 청량음료에만 들어 있는 게 아니다. 떠먹는 요구르트에서 보았듯 거의 모든 가공식품에는 당이 들어간다. 특히 ‘정제 탄수화물’이 심각하다. 탄수화물로 표기되지만 체내에 들어가면 바로 설탕으로 바뀐다. 하지만 시리얼이나 콜라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 업체들은 수십 년간 누가 더 설탕을 많이 넣을까 경쟁해 왔다. 왜? 더 맛있으니까, 더 많이 팔리니까. 소금이야 말할 것도 없다. 진짜 무서운 건 지방이다. 설탕이나 소금은 시민단체나 학계로부터 건강을 해치는 주범으로 공격이라도 받는다. 지방은 ‘소리 없는 암살자’다. 나쁜 건 알겠는데 어떻게 먹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돼지고기 비계만 골라낸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감자 칩이 바삭한 이유, 식빵이 촉촉하게 살아 있고 통조림 요리에 윤기가 도는 까닭…. 다 지방이 들어가 있어서다. 더 놀라운 건 지방은 설탕이나 소금 맛을 순화시켜 더 많은 섭취를 유도하고, 마약보다 중독성이 강하다. 한 가지 더. 모두가 완벽한 음식이라 여기는 치즈(여기서는 가공 치즈를 일컫는다)도 무조건 믿지 말길. 다른 의미로 완벽한 지방 덩어리니까. 이 책은 무서운 책이다. 단순히 설탕 지방 소금 3형제의 위험성만 지적하는 게 아니라, 관련 업계가 이를 사용하는 데 도덕적으로 얼마나 무책임했는지 일러 주기 때문이다. 저자는 종종 식품업체를 담배업체와 비교하는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파급력 면에서 따지자면 더하면 더했지 못할 게 없다. 특히 아이들을 맛으로 길들이는 이들의 치밀한 전략은 경이로울 정도다. 다만 너무 역사를 두루 살피는 통시성까지 갖춘 탓에 살짝 산만한 느낌이 없지 않다. 독자를 박력 있게 끌고 가지 못한다고나 할까. 이 정도인가 하며 놀라다가도, 뻔한 잔소리를 듣는 듯 푹 퍼지는 기분이 든다. 책을 읽다가 오히려 콜라가 당긴 적도 있었다. 어쩌면 그들 말이 맞다. 소비자는 변덕쟁이다. 배신을 당했는데 어떻게 보복해야 할지 모르겠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고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실크로드(비단길)’는 단순히 고고학을 넘어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지는 동서 통상로입니다. 당대에는 한반도와 경주가 실크로드가 이어진 대륙의 종착점이었다면 21세기에는 반대로 문화를 파급시키는 구심점이 될 수 있어요.” 28일 경북 경주시의 한 호텔에서 만난 이디리스 압두르슬 중국 신장(新疆)문물고고연구소 명예소장(62)은 ‘실크로드에서 한반도의 역할’에 대해 한참이나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세계적 실크로드 고고학자가 한국에 초청받아 왔다고 해서 이럴 이유는 없을 텐데…. 하지만 그가 이야기하는 실크로드 고고학의 현재를 들어 보면 뻔한 ‘립 서비스’는 아니었다. 》“실크로드는 단순히 한 국가의 유적으로 치부될 수 없는 깊이를 지녔습니다. 세계를 이어주는 문화의 흐름이죠. 신장과 아테네, 경주, 나아가 일본의 고대문화에서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는 것도 실크로드가 존재했기 때문이죠. 최근 신장위구르자치구의 로프노르 호수 지역에서 발굴을 진행 중인 소하묘지(小河墓地)의 유적도 이런 점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970년부터 실크로드 발굴에 앞장서 온 압두르슬 소장은 투루판 아스타나 고분 발굴(1973∼74년)과 쿵췌허(孔雀河) 묘지 발굴(1979년), 자오허(交河) 고성 구석기 유물 조사(1995년)를 이끈 중국의 대표적 고고학자다. 특히 2002년부터 현재까지 진행하고 있는 소하묘지 프로젝트는 지금까지 알려진 실크로드의 최고(最古) 주거지 발굴로 세계적인 화제를 모았다. 압두르슬 소장에 따르면 최근 연구소는 소하묘지에서 3500∼4500년 전 소와 밀의 표본을 찾아 DNA를 분석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분석 결과, 당시의 소는 모두 황우로 중국이나 한국 소의 유전자 구성과 매우 유사했다. 서유럽에서 전파된 가축소가 이곳을 거쳐 동쪽으로 전파됐음을 알 수 있다. 밀도 마찬가지였다. 함께 자리했던 민병훈 국립중앙박물관 아시아부장은 “함께 출토된 인골의 DNA 분석도 진행 중인데, 유럽과 아시아인의 유전자 특성이 고루 드러나는 양상을 띠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덧붙였다. 이런 역사성을 지닌 실크로드에 압두르슬 소장이 유독 ‘현재진행형’을 강조한 이유는 뭘까. 그는 “실크로드의 발굴과 보존 역시 세계가 함께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실크로드 연구에는 수많은 정부기관과 학자들이 인력과 자금을 보태고 있다. 한국도 중앙박물관을 비롯한 많은 기관이 참여하고 있다. 압두르슬 소장이 28∼30일 경주에서 열리는 국제학술대회 ‘실크로드 위의 인문학, 어제와 오늘’에 참석한 것도 이 때문이다. “2011년 12월 동아일보와 MBC, 중앙박물관이 주최한 특별전 ‘실크로드와 둔황’의 성공을 보며 많은 감명을 받았어요. 한국인들의 실크로드에 대한 관심은 대단했습니다. 현재 한국은 보존처리기술 지원도 적극 지원하고 있어요. 신장위구르에서도 인기 높은 ‘한류의 중심’인 한국이 실크로드 연구에서도 중추가 될 수 있습니다.” 평생 사막유적 발굴에 매진해 왔던 압두르슬 소장은 최근의 기후변화와 도시화에 대해 큰 우려를 표했다. 사막유적은 건조한 기후 덕에 보존이 잘 되어 왔는데, 이상기후로 비가 자주 내리며 파괴될 위기에 놓인 곳이 많다. 도시화로 인한 사막화 속도가 빠른 것도 걱정거리다. 다만 그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비난보다는 대안 마련에 힘쓰고 싶다”며 “최근 중국 정부도 유물 보전에 관심이 커 적극적으로 지원에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경주=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울산에 있는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호) 주변에서 공룡 발자국 화석(사진)이 발견됐다. 이 화석이 보존가치가 높은 것으로 판단되면 정부에서 추진하던 반구대 주변 투명 차단막 카이네틱 댐 건설이 차질을 빚을 수도 있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9일 “반구대 암각화 주변 발굴조사에서 약 1억 년 전인 백악기 시대 초식동물의 것으로 추정되는 발자국 화석 25개를 찾았다”고 밝혔다. 반구대가 있는 대곡천 일대의 공룡 발자국 화석은 12곳에서 발견됐는데, 암각화 북동쪽으로 25∼30m 거리에서 발견된 이번 13번째 화석이 가장 가깝다. 앞서 대곡천에서 발견된 화석 가운데 2곳은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돼 보존 중이다. 한 전문가는 “아직 단언하긴 어렵지만 만약 문화재위원회 심의에서 보존하는 방향으로 결정될 경우 카이네틱 댐은 사실상 힘들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지난주 포털 사이트 검색어 순위에는 ‘동묘’가 상위권에 올라왔다. MBC ‘무한도전’에서 정형돈과 지드래곤이 이곳 구제시장을 찾아 누리꾼들이 새삼 관심을 갖게 된 것. 동묘는 서울 종로구에 있는 ‘동관왕묘(東關王廟)’의 줄임말이다. 중국 촉나라 장수 관우(關羽·?∼219)를 모신 묘로 보물 제142호인 국가지정문화재다. 동관왕묘는 17세기 유례가 드문 ‘한중 합작 예술의 전형’으로 조선과 명나라 왕(황)실의 국토수호 의지를 담은 정부 간 공공협력의 결과물이다. 장경희 한서대 문화재보존학과 교수는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술저널 ‘문화재’ 제46권에 게재한 논문 ‘동관왕묘의 조각상 연구’에서 동관왕묘의 유래와 가치를 자세히 소개했다. 중국인들이 관우를 신격화해 전국에 수많은 관왕묘를 세운 건 널리 알려진 사실. 왕보다 격상시킨 관제(帝)묘가 약 30만 개 산재해 있다. 국내에는 1598년 정유재란 때 조선에 파병된 명나라 장수들이 왜적 퇴치를 기원하며 건립하기 시작했다. 현재 경북 안동 전북 남원 등 10여 곳에 남아있다. 명군이 자체적으로 세운 관왕묘와 달리 동관왕묘는 양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컨소시엄을 구성해 추진한 국책사업이었다. 선조 32년(1599년) 조선 왕실이 ‘동관왕묘조성청’이라는 임시기구를 만들어 명 황제가 파견한 기술자를 포함해 총인원 2400명을 투입해 관왕묘를 건립했다. 묘는 1601년에, 내부 조각상들은 1602년에 완성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장 교수는 “처음에는 한양 서남북에도 관왕묘를 세웠으나 1908년 일제의 강압으로 순종황제가 이를 동관왕묘로 합쳤다”고 설명했다. 자신들을 물리치려는 의도가 담긴 문화유산을 축소·격하시키려던 일제의 의도였다. 일제의 치졸한 방해에도 동관왕묘의 역사적 가치는 퇴색하지 않았다. 당대 한중 장인들이 힘을 모아 빚어낸 예술성이 잘 구현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대표 조각상인 ‘금동제 관우신상’은 구리 4000여 근(약 2.4t)을 들여 만든 높이 2.5m의 거작이다. 금동제 관우신상은 초기에 명나라 단독으로 구리 3800근으로 만들려다 실패했다. 하지만 조선 동장(銅匠)이 기술력을 보탠 뒤 300근 정도를 더 투입해 주조에 성공했다. 조선에서 제작된 유일한 관우 금동상으로, 명대에 유행한 당송시대 의복 양식을 살필 수 있는 작품이다. 관우상 앞에 배치한 소조상인 관평(關平)과 주창(周倉) 왕보(王甫) 조루(趙累)는 실존했던 인물들로 역시 예술성이 높다. 동묘는 중국에 바탕을 둔 유물임에도 한반도의 고유한 색채를 살려 더욱 매력적이다. 관우를 호위하는 문인(관평·왕보)과 무인(주창·조루) 한 쌍씩을 세운 것도 동관왕묘만의 독특함이다. 중국 관제묘는 보통 문인 한 쌍만 놓는데, 문무 한 쌍씩을 배열하는 방식은 조선 왕릉의 석조상 배치와 같다. 관우 뒤편에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해와 달, 다섯 봉우리가 그려진 그림)가 있는 것도 조선 스타일이다. 2011년 ‘동관왕묘 소장유물 기초학술조사’에서 일월오봉도 뒤편에 숨겨져 있었던 것으로 밝혀진 대형 운룡도(雲龍圖) 역시 조선 중기 왕실 미술의 특색이 잘 드러난다. 동관왕묘 유물들은 중국의 대표적 관우 신전인 ‘제저우(解州) 관제묘’나 관우의 목이 묻혔다는 뤄양(洛陽)의 관림(關林)보다 시기가 앞선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크다. 1593년 조영한 제저우 관제묘는 청대에 중건됐다. 관림 역시 18∼19세기에 다시 만들어졌다. 장 교수는 “동관왕묘는 본산인 중국과 비교해도 시기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한 차원 높은 문화재”라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내일 당장 실직한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겠습니까?’ 얄궂다. 프롤로그에서 처음 마주하는 문장이 협박인가. 그런데 이 글귀가 마음에 안 드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실직. 피고용자라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실제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래, 더러워서 때려치운다. 이런 생각 한 번쯤 안 해본 직장인이 있을까. 더 서글픈 건 더러워도 다니려는데 회사가 밀어내는 경우도 생긴다. 결국 자의건 타의건 자기 사업을 꾸리는 이들이 늘어나는 세상이다. 그런 와중에 유명은행 프라이빗뱅킹(PB)센터에서 최우량고객(VVIP) 자산관리팀장을 지낸 저자가 돈 잘 버는 ‘장사꾼’의 노하우를 들려주겠다는데 귀가 쫑긋 서는 건 인체의 자연스러운 반응. 그리고 이 저자, 지난해 출간한 ‘한국의 슈퍼 리치’에서 초고액 자산가들을 밀착 인터뷰해 상당한 화제를 모았었다. 그래 나도 사장 한번 되어 보자. 이쯤 얘기하면 흔한 말로 ‘대박’ 난 이들의 성공담을 소개해 주려니 싶겠지만, 이 책은 살짝 결을 달리한다. 물론 천호식품이나 미스터피자 같은 큰 회사의 최고경영자(CEO)나 ‘준재벌’이라 불러도 무방할 대형 음식점 사장도 등장한다. 하지만 더 눈길을 끄는 것은 작은 점포지만 자기만의 철학을 갖고 성실히 꾸려 가는 업주들이다. 저자는 사업이나 수익의 규모와 상관없이 장사를 통해 삶의 기쁨을 찾고 차근차근 한 발짝씩 나아가는 이들을 조명하려 노력했다. ‘나라화방’의 신문균 사장을 보자. 이 가게는 그림이나 상장의 액자를 만들어 주는 곳이다. 딱 들어봐도 사양산업이다. 실제로 신 사장도 종업원으로 일하던 가게가 외환위기 때 부도 위기에 몰려 망하다시피 했던 경험이 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위기를 다르게 받아들였다. 오히려 다들 기피하는 업종이니 더 치고 나갈 기회가 생긴다고 봤다. 신 사장이 자신만의 무기로 삼은 전략은 한 번 오면 다시 찾는 단골 만들기였다. 장사에서 단골 확보야 당연한 목표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그는 매우 뻔한 ‘정도’를 택했다. 조그마한 액자 하나도 진심을 담아 만드는 것이었다. 어느 날 한 여성 고객이 입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딸아이 방에 그림을 걸어 주고 싶다고 찾아왔다. 몇 푼 안 되는 주문이었지만 사장은 방을 찍은 사진을 받아 놓고 자신의 딸을 위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들였다. 알고 보니 그 고객은 강남에서도 꽤나 발 넓은 이였고, 자신은 물론이고 수많은 단골과 인연을 맺어 주는 디딤돌이 됐다. 물론 삐딱하게 보자면, 성공했으니 다 미화되고 교훈이 되는 건 사실이다. 책에 등장하는 업주들도 대다수가 과거 한두 번 망해 본 경험을 갖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자영업자 가운데 85%는 살아남지 못하고 폐업한다는데, 성공엔 어쩌면 운이 더 작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몇몇은 안정적인 궤도에 올라섰다고 말하기엔 아직 현재진행형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 책은 현실감이 더 넘친다. 이룰 거 다 이룬 사업가의 회고가 아니라 오늘도 동시대에서 1분 1초를 치열하게 살고 있는 장사꾼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부지런해야 하고, 남들과 달라야 하고, 결단력을 갖고 냉철해져야 한다는 다소 식상한 교훈들은 잠시 잊자. 장사를 하고 싶은가. 자신의 사업을 갖고 싶은가. 그렇다면 이들처럼 철저하게 절박해지라. 살아남겠다는 절박함이 없는 한 이 치열한 세상은 버틸 수 없다. 이 책은 병아리 감별사 같은 책이다. 읽어 보니까 알겠다. 어떤 이가 장사를 해야 할지, 누구는 도시락을 싸 들고 다니면서 말려야 할지. “바로 진단이 나오는 청진기”라고나 할까. 책을 읽다 아드레날린이 불끈 솟는 이도 있겠지만, 웬만하면 무턱대고 까불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만든다. 장사는 정말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장사꾼의 꾼은 존칭의 의미로 읽어야 한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그러면 다음에는 뭐가 등재되는 거지?” 23일 ‘김치와 김장문화’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가 사실상 확정됐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 나온 국내 반응은 대략 비슷했다. ‘반갑다, 기쁘다. 그런데 차기 등재 유산은 뭐냐’부터 ‘이런저런 등재 유산이 많던데 헷갈린다’는 반응까지. 마침 문화재청이 최근 이 문제를 다룬 문화재위원회의 세계유산분과 회의록을 공개했다. 이를 통해 궁금증을 풀어본다.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유산은 크게 세계유산, 인류무형문화유산, 기록유산으로 나뉜다. 세계유산은 ‘세계유산협약이 규정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닌 유산’으로서 특성에 따라 △문화유산 △자연유산 △복합유산으로 세분한다. 또 김치와 김장문화가 속한 무형문화유산은 전통 관습이나 지식 같은 무형적인 것, 기록유산은 6월에 등재된 난중일기나 새마을운동 기록물과 같은 기록문화를 지칭한다. 현재 한국은 세계유산 10건, 무형문화유산은 김치가 오를 경우 16건, 기록유산은 11건이 등재돼 있다. 현재 차기 등재에 가장 근접해 있는 한국의 유산은 세계유산 중 문화유산 부문의 ‘남한산성’이다. 지난달 유네스코 유산위원회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이코모스)의 현지 실사까지 마쳤고, 내년 6월 카타르에서 개최되는 제38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결정된다. 지금까지는 등재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것으로 점쳐진다. 다음 유력 후보는 역시 문화유산인 ‘백제역사유적지구’다. 지난달 등재신청서 초안을 제출했으며, 검토 결과를 통보받아 내년 1월 수정 신청서를 낸다. 일정상 2015년 6월에 최종 결정될 예정이다. 이예나 문화재청 국제협력과 사무관은 “유적지구에 포함된 공산성이 훼손돼 문제가 됐으나 문화재위원회의 회의를 거쳐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특이하게 세계유산에는 잠정목록이라는 게 있다. 등재를 희망하는 회원국들이 작성한 유산목록이다. 공식 절차를 거쳐 이 목록에 올려놓아야 등재 신청이 가능하다. 백제역사유적지구도 원래 공주부여역사유적지구와 익산역사유적지구로 각각 잠정목록에 올라 있었는데, 회의를 거쳐 통합 신청하기로 했다. 한국의 세계유산 잠정목록에는 15개가 올라 있다. 잠정목록의 한국 유산 가운데 남한산성과 백제역사유적지구를 제외하면 가장 추진 속도가 빠른 것은 ‘서원’과 ‘한양도성’이다. 지난해 4월 ‘한국의 서원 세계유산 등재추진단’이 발족해 대표 서원 9개를 뽑았다. 이르면 내년에 신청서 초안을 제출할 계획이다. 한양도성은 내년 6월까지 등재신청서 작성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잠정목록 진입을 노리는 문화유산도 있다. ‘김해·함안 가야고분군’과 ‘한국의 전통 산사’다. 전통 산사에는 △선암사 △대흥사 △법주사 △마곡사 △통도사 △봉정사 △부석사가 ‘한국 산지 가람의 전형을 보여주는 사찰’로 꼽혔다. 김치와 김장문화 이후 무형문화유산 등재를 준비하고 있는 다음 타자는 ‘줄다리기’와 ‘풍물놀이’다. 내년 3월 신청서를 제출할 계획인 줄다리기는 필리핀 베트남 캄보디아와 공동 등재를 노리고 있다. 한국은 2010년 ‘매 사냥술’을 사우디아라비아 벨기에 스페인 모로코 체코와 공동 등재한 경험이 있다. 풍물놀이는 구체적 일정이 확정되지 않았다. 기록유산은 아직 뚜렷한 등재 추진 대상이 나오지 않은 상태다. 현재 대상을 공모하고 있으며, 다음 달 최종 결정한다. ‘조선통신사 기록물’과 ‘KBS 영상기록물 이산가족을 찾습니다’가 현재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김치(사진)와 김장문화’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가 사실상 확정됐다. 문화재청은 23일 “올해 1월 최종 등재신청서를 제출했던 ‘김치와 김장문화’가 이날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 산하 심사소위원회로부터 ‘등재 권고’ 판정을 받았다”고 밝혔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에 따르면 지금까지 등재가 권고된 문화유산이 본심사에서 탈락한 전례가 없어 김치와 김장문화도 이변이 없는 한 등재가 이뤄질 것으로 전망된다. 김치와 김장문화는 지난해 3월 신청서 초안을 제출한 이래 그해 8월 ‘우선 심사대상’으로 선정돼 등재에 청신호가 켜졌고 올해 12월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리는 제8차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의 최종 추인만 남겨둔 상태다. 등재 신청서 작성을 주도했던 박상미 한국외국어대 국제학부 교수는 “김치와 김장문화는 한국사회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재창조돼 왔고, 공동체가 지닌 정체성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유네스코 정신에 잘 부합한다”고 말했다. 김치와 김장문화가 올해 말 공식적으로 오르면 한국의 무형문화유산 등재는 모두 16건으로 늘어난다. 지금까지 등재된 인류무형문화유산은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 △판소리 △강릉단오제 △강강술래 △남사당놀이 △영산재 △제주 칠머리당 영등굿 △처용무 △가곡, 관현악 반주에 맞춰 부르는 서정적 노래 △대목장 △매 사냥술, 인간문화유산 △줄타기 △택견 △한산모시 짜기 △아리랑이다. 한편 일본 음식인 ‘와쇼쿠(和食)’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등재 권고를 받았다고 일본 매체들이 23일 보도했다. 정양환 기자·도쿄=박형준 특파원 ray@donga.com}

16세기 초반 일본으로 건너간 고려불화 ‘금선묘(金線描·금가루로 그린) 아미타삼존도(阿彌陀三尊圖·사진)’가 약 500년 만에 고국 땅을 밟는다. 동국대박물관(관장 정우택)은 21일 “공민왕 8년(1359년)에 제작된 고려불화로 확인된 금선묘 아미타삼존도를 국내에 초청해 24일부터 한 달간 특별전시실에서 공개한다”고 밝혔다. 이 고려불화는 후지(富士) 산 서쪽 야마나시(山梨) 현 고후(甲府) 시의 한 사찰에서 소장해온 보물로 1530년 전후 이곳에 모셔진 뒤 한 번도 외부로 나간 적이 없다. 아미타삼존도란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대세지보살과 관세음보살을 좌우에 배치한 불화를 말한다. 이번에 귀환하는 삼존도는 가로 85.6cm, 세로 164.9cm의 비단 족자에 군청색 칠을 하고 금가루(금니)로 그린 그림이다. 고려불화는 160여 점이 남아 있는데, 비단에 그린 금선묘화로는 유일하다. 박은경 동아대 교수는 “당초 고려불화의 특색을 간직한 조선 초기 불화로 여겨졌는데, 지난해 화기(畵記)가 발견됨으로써 국보급으로 격상됐다”고 평가했다. 뜻깊은 대목은 이 불화의 첫 일반 공개가 한국에서 이뤄지는 점이다. 이 불화는 일본 사찰에서도 1년에 한 차례, 그것도 특별 신도에 한해서만 친견이 허락됐다. 사찰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 이소가이 다이데쓰(磯具大徹·73) 주지 스님은 “최근 경색된 양국 관계를 민간 차원에서나마 풀어주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전시를 허락했다”고 말했다.고후=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부처는 어디에 있어도 부처입니다. 본존(법당의 중심 부처. 여기서는 아미타삼존도를 지칭)께서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따사로이 이어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17일 오후 3시 반경 일본 야마나시 현 고후 시의 S사찰. 정원에서 그토록 재잘거리던 까치들은 어느새 사라졌다. 주지 스님의 법문 암송이 끝나고 갑작스러운 적막이 법당을 휘감는 순간, 윙 하고 가림막이 올라갔다. 사진으로만 보던 ‘금선묘 아미타삼존도’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왠지 털끝이 쭈뼛 섰다. 18일 출발을 앞두고 이날 열린 법회는 사상 첫 ‘환송회’였다. 사찰 기록에 따르면 1530년 전후 고려 불화가 모셔진 뒤로 한 번도 절을 떠난 적이 없다. 그런 불화가 내일이면 한국으로 떠난다니 법당에는 수백 명이 몰려들었다. 한 할머니는 “수십 년 드나들었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본존을 뵈는 건 처음”이라며 들떠했다. 현지인도 이 삼존도를 보기 힘들었던 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1543∼1616)와의 인연 때문이다. 1582년 이 불화가 영험하다는 소문을 듣고 절을 찾은 도쿠가와는 대단한 법력을 느끼고 자신의 무운을 기원했다. 에도 막부를 세운 뒤에는 이 불화를 1년에 딱 이틀만 공개하도록 명했다. 사찰은 그 유지를 받들어 지금까지도 외부 공개를 극히 꺼려 왔다. 그런 불화가 해외로 간다니 법당 분위기는 밝지만은 않았다. 한 사찰 관계자는 “한국행을 반대하는 방문이나 전화가 끊이지 않았다”고 귀띔했다. 특히 올해 초 쓰시마 섬에서 도둑맞은 불상이 아직 반환되지 않은 게 걸림돌이 됐다. 하지만 이소가이 다이데쓰 주지는 “신뢰하지 않으면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고 연신 되뇌었다. “인연의 지엄함을 믿습니다. 정우택 교수(동국대)가 본존의 정확한 기원을 밝힌 것도 다 이유가 있을 겁니다. 전시도 (내가) 먼저 ‘가져가라’고 했어요. 한국과 일본은 오랜 역사를 나눈 사이입니다. 잠깐 사이가 나빠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예요.” 지난해 4월 600년 넘는 이 불화의 하단에서 희미하게 남아있던 화기(畵記)를 찾아낸 정우택 교수는 법회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정 교수는 “부처님 인도 아래 아버지가 준 마지막 선물”이라고 회상했다. 화기를 발견했을 때 정 교수는 부친이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았다. 자료를 챙겨 서울에 돌아온 뒤 닷새 만에 부친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뜻깊은 불화이니 이송 과정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이송 비용만 2500만 원이 넘었다. 일본통운의 문화재 전문 수송팀을 불러 겹겹으로 포장했다. 18일 오전 현장에서 지켜본 과정은 정성 그 자체였다. 중성지로 일일이 불화를 감싼 뒤 전용 자개함에 넣고, 이를 비단으로 싸서 특별 제작된 목곽에 넣었다. 또 이를 다시 포장하고 밀봉한 뒤 마지막으로 나무박스에 넣는 데 1시간 이상 걸렸다. 운송에는 온도와 습기 조절 기능을 갖춘 특급 무진동 차량이 배치됐다. 운송 과정에 문제가 생겼을 때 받는 보험금도 최저 10억 원이 넘는다. 금선묘 아미타삼존도는 23일 서울에 도착할 예정이다. 24일 개막하는 동국대박물관 개관 50주년 특별전 ‘선선선(禪善線)-빛으로 나투신(모습을 드러내신) 부처’에서 볼 수 있다. 이 밖에도 특별전에서는 국내 개인 소장 조선 불화인 ‘1644년 치성광여래강림도’ ‘16세기 아미타대보살도’ ‘1581년 아미타삼존도’도 일반에 처음 공개된다. 11월 22일까지. 무료. 일요일 휴무. 02-2260-3722고후=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중앙아프리카 대륙의 젖줄, 콩고 강에서는 어떤 문화가 번성했을까. 잠비아 초원에서 발원해 적도를 따라 대서양으로 흘러가는 콩고 강(4700여 km)은 아프리카에서 나일 강에 이어 두 번째로 길다. 원래는 수렵채집 문화권이었으나 약 3000년 전부터 농경민인 반투족에 속하는 부족들이 강을 따라 터전을 잡으며 고유한 문화를 형성했다. 22일부터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특별전 ‘콩고 강-중앙아프리카의 예술’은 콩고 강 유역의 역사가 깃든 유물 71점을 만날 수 있는 기회다. 특별전에서 소개하는 예술품들은 모두 프랑스 케브랑리박물관이 소장한 문화재.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아프리카로 간 유럽인들이 수집한 것들이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아프리카의 신비하고 이색적인 작품들이 큰 호응을 얻었다. 특히 파블로 피카소, 조르주 브라크의 큐비즘(입체파)이나 앙리 마티스, 모리스 드 블라맹크의 포비즘(야수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전시품들은 인간의 형상을 그대로 옮긴 듯한 조각상들이 많다. 양성혁 학예연구사는 “중앙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조상 숭배’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신앙이자 관습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콩고 강 부족들은 선조의 뼈를 유골함에 보관하고 주위에 조각상을 만들어 세워 이를 수호하는 역할을 맡겼다. 유물 ‘은킨시 은콘디(강한 힘을 지닌 조각상이라는 뜻)’나 ‘수호자상’ ‘선조상’이 모두 이에 속한다. 이에 비해 가면은 각종 의례와 연관이 깊다. 성인식이나 농경의례에서 다양한 신과 정령이 깃드는 매개체로 활용되거나 부족 내 위계질서를 대변하는 상징물로 이용됐다. 상아나 나무로 제작하는데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에너지가 풍긴다. 이들에게 가면을 쓰고 춤을 추는 행위는 부족 공동체의 통합을 구현하기 위한 엄숙한 의식이었다. 여성을 표현한 유물이 많은 것도 콩고 강 예술품의 특징이다. 적도 아래 지역에 모계사회가 많았던 역사적 배경이 한몫했다. 하지만 부계사회라 해도 공통적으로 여성을 ‘우주를 넘어오는 조상의 넋을 받아들이는 중재자’로 인식했기에 여성에게 상당한 권위를 부여했다고 한다. 2014년 1월 19일까지. 무료. 02-2077-9000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솔직히 별 책이 다 나온다 싶었다. 물론 고서는 배울 가치가 무궁무진하다. 옛 어른들이 어떤 책을 읽고 배웠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하지만 저자가 ‘섭치’(여러 가지 물건 가운데 변변하지 않고 너절한 것)라고 부르는 이 책들은 무게를 달아 팔아도 몇 만 원 못 받을 가치를 지녔단다. 귀하게 대접받는 책도 많은데 왜 하필 쓰레기 고서에 관심을 가져야 하나. 살짝 ‘덕후(오타쿠)’ 냄새가 난다.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선임연구원인 저자도 처음부터 이런 ‘폐품’에 관심을 가졌던 건 아닌 모양이다. 우연히 낡디낡은 고서 두 상자를 얻었는데 어떻게 처분할까 고민했다. 그런데 문득 이 고서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단다. 아, 진짜 최강 덕후셨나? 그런데 생뚱맞은 고서들에서 저자는 사람과 세월의 흔적을 발견한다. “서지적 가치가 높은 희귀한 책일수록 손댄 흔적이 별로 없이 깨끗하고, 흔해 빠진 판본일수록 손때가 많이 묻어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 확실한 것은 책을 아끼고 공부하려는 열정만은 대단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 세월이 흘러 책들이 낡았다는 것은 반대로 그 책이 당대에 그만큼 인기 있는 베스트셀러였다는 뜻이다. 생각해 보면 책에 등장하는 ‘대학’ ‘논어’ ‘통감절요’는 글을 아는 이라면 누구나 읽어야 했던 책이다. 학문을 익히고 과거에 응시하고 마음을 닦기 위해 속지가 닳도록 책장을 넘기고 또 넘겼다. 적절한 비유일지 모르나 현대로 치자면 ‘성문종합영어’나 ‘수학의 정석’만큼 팔리지 않았을까. 그럼 진짜 시대의 역사성이 밴 책은 바로 이 구린내 나는 책들이 아닐까. 요즘으로 치면 포켓북만 한 ‘백미고사(白眉故事)’도 같은 맥락이다. 해석하자면 고사성어의 백미를 모은 책인데, 학생들이 들고 다니며 손쉽게 인용할 고사를 찾아보는 용도다. 가난한 선비를 위한 방각본(민간에서 싸게 만든 책) ‘사서오경’이나 가정집마다 하나씩 구비했다는 의서 ‘의학입문’ 역시 쓰임새로 따지면 어느 책보다 가치가 컸다. 이런 상상도 가능하겠다. 집에 일기장이 있으면 잘 보관하시길. 수백 년이 흐르면 어떤 대작보다 비싸질 수 있으니. 하지만 시대를 바꾼 건 그 저렴한 몸값으로 세상에 지식을 퍼뜨린 섭치들의 힘이었다. “권력자의 발버둥보다 강력한 것이 대중의 요구입니다. 지식과 정보에 접근하려는 대중의 욕구는 권력자도 막지 못했습니다. … 소수의 전유물이었던 지식 정보가 대중에게 널리 보급되면서, 어떤 이들은 신분 상승을 꿈꾸고 어떤 이들은 변화를 갈망했습니다. 좀 더 많은 사람이 책을 읽을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덕택입니다.” ‘쓰레기…’는 고정관념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 책이다. 가벼이 지나칠 수 있는 사물이라도 따뜻한 애정을 갖고 살피면 보물이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준다. 다만 고서에 치중했으면 좋겠는데, 너무 곁다리 이야기가 잦은 건 아쉽다. 책의 웅성거림이 살짝 산만하게 느껴진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매화와 난초, 국화, 대나무를 일컫는 사군자(四君子) 회화와 공예를 전시하는 ‘군자(君子)의 덕, 자연에서 배우다’가 18일부터 전남 목포시 목포자연사박물관에서 열린다. 국립민속박물관과 목포자연사박물관이 공동 기획하는 이번 전시는 매란국죽(梅蘭菊竹) 순서에 따라 4부로 구성됐다. 1부 ‘고사한 기품과 운치, 매화’에서 눈여겨봐야 할 작품은 소치 허련(1808∼1893)의 ‘매화도’다. 호방한 매화의 기세가 추사체 글씨와 잘 어우러진 그림이다. 그의 넷째 아들인 미산 허형(1862∼1938)의 매화 병풍도 눈길을 끈다. 2부 ‘빼어난 자태와 그윽한 향기, 난초’에 전시된 ‘금새우난’ 실물 표본이 인상적이다. 한여름에만 황색 꽃을 피우는 여러해살이 난초로 전남 신안·완도군과 경북 울릉군, 제주에서만 자생하는 희귀종이다. 허형의 ‘괴석에 자라난 난초 그림’도 만날 수 있다. 3부 ‘가을서리를 이겨내는 의연함, 국화’에서는 ‘국화무늬 수석’(사진)이 가장 눈에 띈다. 자연석인데 마치 들국화 꽃송이가 돌 위에 뿌려진 듯한 모습이 경탄을 자아낸다. 그릇 안쪽에 국화와 넝쿨무늬가 새겨진 고려청자 ‘국화 당초무늬 사발’도 매력적이다. 4부 ‘푸르고 곧은 기상, 대나무’에서는 소치의 제자인 송수면(1847∼1916)이 대나무의 사계를 담은 ‘대나무 여섯 폭 화첩’이 볼만하다. 12월 15일까지. 무료. 061-274-3655정양환 기자 ray@donga.com}
한국은 물론 중국 일본 티베트 인도에서 쓰였던 다양한 옛 문양 판화를 만나볼 수 있는 전시가 열린다. 강원 원주시 치악산에 있는 명주사 고판화박물관(관장 한선학)은 12월 30일까지 특별전 ‘인쇄 문화의 꽃-아시아 문양판화의 세계’를 개최한다. 판화는 다양한 미술작품을 구현하는 수준 높은 예술이다. 하지만 판화로 찍어낸 문양에만 한정해 보면 판화야말로 실생활에 깊이 스며든 생활예술이다. 이번 특별전에 소개되는 판화 문양들도 대다수가 이불보나 책 표지를 만드는 데 이용됐다. 가장 눈길을 끄는 유물은 300여 년 전에 사용되던 조선의 ‘능화판(菱花板)’. 책의 표지에 무늬를 넣기 위해 만들어진 목판으로 단순하면서도 기하학적인 구성이 돋보인다. 당대 유명 판화 생산지인 중국 쑤저우(蘇州)의 타오화우(桃花塢)에서 제작한 문자도 판화도 만날 수 있다. 타오화우 판화는 한반도와 일본 판화 양식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033-761-7885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