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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순수한 흑백을 가려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소설은 이런 단편적인 사고에 대항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말을 따뜻한 것, 살아있는 것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양식과 상식이 필요합니다.” 신작 장편소설 ‘기사단장 죽이기’(1, 2권)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68·사진)는 역사 문제를 둘러싼 갈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기사단장…’에서 난징대학살, 일본과 나치 독일의 동맹을 다뤄 일본 극우 세력으로부터 적잖은 공격을 받았다. 하루키는 “사람들은 ‘흑이냐 백이냐’로 판단하고, 말을 돌멩이처럼 상대에게 던져댄다. 매우 슬프고 위험천만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언론 인터뷰를 하지 않기로 유명한 그는 ‘기사단장…’ 출판사인 문학동네와 최근 진행한 서면 인터뷰에서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밝혔다. 1979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데뷔한 하루키는 “처음에는 ‘소설 같은 건 앞으로 얼마든지 쓸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남은 인생에서 소설을 몇 편이나 더 쓸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든다”고 했다. 하지만 악기를 자유롭게 연주하는 것처럼 글쓰기가 변함없이 즐거운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란다. “1년 반 동안 ‘기사단장…’을 썼어요. 글이 써진다 싶으면 계속 쓰고 다 쓸 때까지 쉬지 않습니다. 따로 구상을 하는 건 방해가 돼요. 생각나는 대로 자연스럽게 쓰죠. 자유로움이 가장 중요해요.” ‘기사단장…’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생각한 바대로 행동하는 것, 자신을 믿는 것’에 대해 자주 곱씹어 본다. 하루키 스스로도 그럴까. “일상생활에서는 의견이나 신념이 꽤 확실한 편이에요. 그런데 근본적으로는 나 자신을 초월한 곳에 존재하는 흐름이나 힘에 순순히 몸을 맡기지 않으면 소설을 쓸 수 없다고 믿고 있어요.” ‘기사단장…’은 동일본 대지진도 다루며 치유를 향해 나아간다. 사회적으로 큰 트라우마를 남긴 재난이 벌어진 이후 문학의 역할에 대해 물었다. 그는 “목적을 가지되 목적을 능가하는 시도를 하고 모든 이가 공유할 수 있는 무언가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 독자들을 향해서는 “30여 년간 변함없이 제 작품을 열심히 읽어주셔서 늘 각별한 고마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한국 방문 계획에 대해 묻자 “언젠가 그럴 기회가 생기면 좋겠지만 솔직히 공적인 행사를 좋아하지 않아 초대를 받으면 사양하게 된다”고 에둘러 답했다.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인 춘원 이광수(1892∼1950)의 ‘무정(無情)’ 초판본(사진)이 공개됐다. 고려대 도서관은 국어교사 출신인 이 학교 졸업생 유모 씨(75)가 제자로부터 받아 소장하고 있던 무정 초판본을 기증했다고 17일 밝혔다. 1918년 1000권이 발행된 무정 초판본 가운데 지금까지 전해진 건 한국현대문학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한 권이 유일했다. 그러나 현대문학관 소장본은 표지 장정이 없어 1920년 나온 재판본을 통해 초판본의 겉모습을 추정해왔다. 무정은 1917년 1월 1일부터 6월 14일까지 매일신보에 126회 연재됐고, 이듬해 7월 20일 ‘신문관’ 출판사에서 출간됐다. 이번에 공개된 초판본은 표지와 책등, 판권지 등 상태가 온전해 1918년 출간 당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도서관 측은 “1910년대 출간된 소설은 화려한 그림의 통속적 표지가 많았는데 무정 초판본의 표지는 그림 없이 단정한 글씨로 작가와 제목, 발행사만 인쇄돼 이전 출판물과는 다른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판권지에 찍힌 스탬프를 통해 이 초판본은 전북 전주 대화정 남문통(현재 전주시 전동 지역)에 있는 ‘동문관’에서 판매된 것으로 확인됐다. 한편 유 씨는 한국 최초 문고본인 ‘청년문고’의 제1편인 ‘용비어천가’도 고려대 도서관에 기증했다. 도서관 측은 “1915년 ‘신문사’ 출판사가 펴낸 청년문고 제1편 ‘용비어천가’는 지금까지 출판 사실만 전해졌다. 실물이 발견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고려대 도서관은 ‘무정’과 ‘용비어천가’를 정밀점검한 뒤 9월 중순 이후 귀중본 열람실에 비치할 예정이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하는 ‘문학과지성 시인선’이 500호를 돌파했다. 1978년 시인선 1호인 황동규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가 나온 지 햇수로 40년 만이다. 지금까지 시인 211명의 개인 시집 492권과 시조시인 4명의 시선집 1권, 옌볜 교포 시선집 1권, 평론가들이 엮은 기념 시집 6권이 나왔다. 문지 시인선은 시집이 100권씩 추가될 때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앤솔로지 시집을 출간해 왔다. 500호는 전체 시인선 가운데 출간한 지 10년이 넘은 작품을 대상으로 모두 130편을 추려 묶었다. 65명의 시인마다 2편씩 대표작을 고른 것. 제목인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사진)는 황지우의 ‘게 눈 속의 연꽃’에 나온 구절에서 따왔다. 500호에는 황동규의 ‘조그만 사랑 노래’, 마종기의 ‘바람의 말’, 최승자의 ‘즐거운 일기’ 등이 실렸다. 작품 선정은 오생근, 조연정 문학평론가가 맡았다. 이광호 문학과지성사 공동대표(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 교수)는 “시인선은 실험적인 시를 폭넓게 포용하면서 서정시, 전통시도 함께 받아들였다. 시적 언어를 새롭게 발명하고 세상을 새로운 각도로 보여주는 작품을 싣고자 노력했다”고 말했다. 시인선 가운데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은 29만 권(82쇄) 넘게 찍었고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63쇄), 이성복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52쇄), 최승자의 ‘이 시대의 사랑’(46쇄)은 각각 15만 권 안팎을 찍었다. 우찬제 문학과지성사 공동대표(서강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시인선은 동시대의 감수성을 새롭게 열어가는 시인을 발굴하는 데 주력하며 한국 문학을 진화시키는 데 기여해 왔다”며 “시인선의 품격을 유지하고 사람다움의 깊이를 담아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숲속에 버려진 아기 루나. 마녀 잰은 루나를 구해 달래다 실수로 달빛을 먹인다. 잰은 어마어마한 마법의 힘을 갖게 된 루나를 키우기 시작한다. 시를 사랑하는 늪 괴물 글럭과 작은 용 피리언이 루나의 친구이자 가족이다. 얼핏 보면 마냥 아름다운 동화 같지만 삶과 죽음의 의미,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같은 묵직한 주제가 녹아 있다. 루나가 버려진 건 우연이 아니다. ‘보호령’이라는 도시를 지배하는 장로회가 해마다 숲속에 아기를 버려야 한 해를 무사히 보낼 수 있다고 주장하며 벌인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주입해 장로회의 말에 순종하게 만든 것. 아직 어려 마법의 힘을 주체하지 못해 글럭을 토끼로 만들고 내디딘 발자국마다 꽃이 피어나게 하는 루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잰은 결국 마법을 쓸 수 없게 루나의 능력을 일정 기간 봉인한다. 마침내 13세가 되어 마법의 봉인이 풀린 루나는, 기력이 다했지만 또다시 버려진 아기를 구하러 숲으로 가는 잰을 뒤쫓는다. 시냇물이 케이크가 되고, 이부자리가 백조로 변하는 등 마법이 피어나는 장면은 신비롭다. 생생한 인물들의 캐릭터는 생의 의미를 찬찬히 짚어보고, 인간의 탐욕을 돌아보게 만든다. 의문을 풀기 위해 모험에 나서는 루나, 죽음이 다가오며 마법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지만 마지막까지 할 일을 해 내는 잰, 대장로 자리를 물려받을 것이란 기대를 받고 자랐지만 얼굴에 큰 흉터를 입는 사고를 당한 후 목수 일을 하며 행복을 찾아가는 앤테인…. 다른 이의 슬픔으로 허기를 채우는 이그나시아 수녀 등은 다양한 인간 군상을 대변한다. 시간의 흐름에 순응하면서도 지나친 욕심을 버리고 자신이 진정 원하는 삶을 찾아가라고 속삭인다. 긴장감이 고조되며 마지막까지 궁금증을 자아내는 전개는 작품을 탄탄하게 떠받친다.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이 함께 읽어도 좋은 책이다. 읽는 이에 따라 각각 다른 재미와 의미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기에. 미국의 유명 아동문학상인 뉴베리상 2017년 수상작. 원제 ‘The girl who drank the moon’.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한강에 유람선을 타러 간 막동이와 친구들은 1741년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 겸재 정선의 그림에 담긴 한양과 한강 주변 풍경을 만난다. 송파나루에 내려 송파산대 놀이패와 마당극을 벌이고 압구정 정자 근처 독서당에서 책 읽는 관리들도 본다. 양화나루 건너 선유봉에서 신선 할아버지를 만나 구름을 타는 행운도 누린다. 조선시대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한 후 세운 삼전도비, 정조가 한양에서 수원 화성까지 행차할 때 임시로 놓은 배다리를 보며 우리 역사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맨 뒤에 ‘독서여가도’ ‘압구정’ ‘동작진’ 등 정선의 그림과 그에 대한 설명을 실었다. 그림과 역사, 지리를 익히게 해준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소설가들이 더 사랑한 소설가’로 불렸던 박상륭 작가(사진)가 타계했다. 향년 77세. 13일 문학계에 따르면 대장암으로 투병하던 고인은 1일 캐나다에서 별세한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다. 문인들은 철학적 깊이와 끝없이 이어지는 문장의 리듬감 때문에 고인의 소설에 열광했다. 1999년에는 현역 작가로는 이례적으로 ‘박상륭문학제’가 열릴 정도였다. 그러나 난해하고 복잡한 문장으로 인해 대중적으로 환영받지는 못했다. 서라벌예술대 문예창작과를 나온 고인은 김동리 선생(1913∼1995) 밑에서 이문구 소설가(1941∼2003)와 함께 문학을 배웠다. 1963년 사상계를 통해 ‘아겔다마’로 등단한 고인은 인간의 존재와 죽음, 타락과 구원에 대해 천착하며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간호사였던 아내를 따라 1969년 캐나다로 이주한 후 시체실 청소부로 일하며 죽음을 가까이에서 체험했다. 그러나 1975년 발표한 ‘죽음의 한 연구’는 한국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유리’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주인공이 40일 동안 온몸으로 치러내는 삶과 죽음의 드라마를 통해 인간의 고통과 환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후 그 후속편인 ‘칠조어론(七祖語論)’ 3편에 이어 ‘잡설품(雜說品)’으로 연작 시리즈를 마무리했다. 영화 ‘유리’와 연극 ‘뙤약볕’을 비롯해 춤, 미술 등 다양한 장르에서 그의 작품을 토대로 한 예술이 만들어졌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무라카미 하루키가 7년 만에 펴낸 장편소설 ‘기사단장 죽이기’(1, 2권·문학동네)가 12일 출간되면서 판매에 가속도가 붙고 있다. 교보문고에서는 예약판매를 포함해 12일 오후 6시까지 1, 2권을 합쳐 모두 1만1000권(5500세트)이 팔렸다. 서울 교보문고 광화문점에는 ‘기사단장…’의 별도 매대가 설치됐다. 13일부터는 하루키의 주요 작품과 책에서 언급한 음악 CD를 모은 별도 서가도 운영할 예정이다. ‘기사단장…’은 예약 판매량이 이전 작품의 3배가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터넷서점 알라딘에 따르면 ‘기사단장…’ 1권은 예약 판매로 4979권이 팔렸다. ‘1Q84’ 1권(2009년)의 3.7배,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2013년)의 3배나 됐다. 연령별로는 30대가 43.3%로 가장 높았고, 이어 40대(28.1%), 20대(19%) 순이었다. 최원호 알라딘 해외소설담당 MD는 “지금까지 나온 하루키의 작품 가운데 ‘기사단장…’의 예약 판매 부수가 가장 많다”며 “‘1Q84’의 주 구매층이 20대(27.6%)였던 것을 감안하면 독자들도 작가와 함께 세월을 지나며 점차 연령대가 높아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얼마 전 휴가 때 간 미국 옐로스톤 국립공원에서 바이슨(사진)을 만났다. 버펄로라고도 불리는 바이슨은 이 공원의 마스코트로 우뚝 솟은 두 뿔과 커다란 눈망울이 인상적이었다. 지금은 곳곳에서 느긋하게 풀을 뜯고 있지만 한때 바이슨은 멸종위기에 처했다고 한다. 아메리카 대륙에 건너온 백인들이 고기와 가죽을 확보하고 인디언의 식량을 차단하기 위해 바이슨을 무차별 살육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바이슨을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고, 이들은 미국을 대표하는 국립공원의 상징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아무르표범, 대왕판다 등 멸종위기 동물 50마리를 숨은그림찾기로 만나게 한 그림책 ‘사라지는 동물 친구들’(이자벨라 버넬 지음·김명남 옮김·그림책공작소)에 눈길이 갔다. 열대우림, 사막 등이 알록달록하게 펼쳐진 가운데 동물들이 꼭꼭 숨어 있다. 옐로스톤의 검은 곰, 엘크, 사슴은 털에 윤기가 흐르고 기운차 보였다. 지구는 다양한 생명이 공존하는 별이란 걸 웅변하는 듯했다.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12권 전체가 한 권의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품들이 서로 조금씩 연관을 맺고 그물망처럼 얽혀 있으니까요. 제 모든 것을 보여드리는 겁니다.” 올해 등단 50주년을 맞은 윤후명 소설가(71)가 12권짜리 ‘윤후명 소설전집’(은행나무)을 완간했다. 윤 작가는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11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 소설전집을 만드는 작업은 4년간 진행됐다. 소설 ‘강릉’, ‘둔황의 사랑’, ‘원숭이는 없다’, ‘협궤열차’와 시집 ‘명궁’, ‘홀로 등불을 상처 위에 켜다’ 등을 내며 소설과 시의 경계를 넘나든 윤 씨는 우리 언어의 아름다움을 깊이 있게 형상화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그는 서사 위주의 전통적 방식에서 벗어난 글쓰기로 주목받았다. “소설은 이야기가 중심이라고 강조하지만 저는 서사 구조보다는 이미지에 집중해 글을 썼어요. 기존 틀을 벗어나지 않고서는 발전하기 어렵다고 생각했거든요. 이 전집에는 제가 추구해온 이미지가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고향 강릉에 대한 애정도 숨기지 않았다. “소설을 처음 쓸 때 뭘 써야 할지 막막했는데, 아는 것을 쓰라는 말이 떠올랐어요. 제 고향인 강릉에서부터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지금까지 쓴 건 결국 고향 이야기, 제 이야기를 무수히 변주하고 다른 형태로 바꿔 놓은 것이란 걸 깨닫게 됐습니다.” 전집은 모두 1인칭으로 서술돼 있다. 나에 대한 탐구부터 시작하자는 의미에서 1인칭을 사용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윤 씨는 시인과 소설가, 두 가지 역할을 함께하는 것이 녹록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다른 나라와 달리 우리 문단만 소설과 시를 별개로 여깁니다. 제가 시도 쓰고 소설도 쓰니까 농담처럼 박쥐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어요.(웃음) 소재와 느낌에 따라 어떤 건 시로 좋은 게 있고 어떤 건 소설로 좋은 게 있는데 말이죠.” 요즘 독자들이 소설을 읽지 않는 데 대한 책임은 소설가들에게 있다고 반성하기도 했다. “세상은 너무나 빨리 변하는데 소설은 이를 따라가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소설은 지금까지 해 왔던 것과는 다르게, 그리고 앞서가는 형태로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가야 합니다.” 점점 커져가는 독자들과의 괴리를 좁히지 않으면 문학은 그들만의 세계에 갇히고 말 것이라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미래가 잘 보이지 않는 문학이란 걸 평생 붙들고 살아왔습니다. 돌아보니 기쁨, 즐거움, 괴로움 등으로는 쉽게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 드네요. 독자들과 같은 세계에 살고 있다는 걸 함께 느끼며 마음을 나누고 싶습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지극히 ‘하루키스러운’ 모든 것을 망라했다. 12일 국내 출간하는 무라카미 하루키(68)의 신작 ‘기사단장 죽이기’(1, 2권·문학동네·사진)는 책장을 펼치는 순간 읽는 이를 빨아들이는 이야기 전개와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몽환적 요소, 클래식 음악과 술, 문학의 향연에 이르기까지 ‘하루키 코드’가 집약된 작품이다. 무명 화가인 주인공은 친구 아버지(아마다 도모히코)가 쓰던 산속 아틀리에에 머물다 유명 화가인 도모히코가 그린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를 우연히 발견한다. 이후 꼬리에 꼬리를 무는 기묘한 사건과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들이 촘촘히 직조되며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도모히코가 오스트리아 빈에서 유학할 당시 학살을 벌이는 나치에 저항하고, 그의 피아니스트 동생은 강제 징집돼 난징대학살 현장에서 어쩔 수 없이 살상을 저지른 후 트라우마에 시달리다 자살하는 등 역사적인 사건도 소환했다. 방황하고 부서지면서도 부조리한 사회에 자기만의 방법으로 맞서는 인간의 의지를 담아낸 것. 일본 우익 세력이 난징대학살의 참상을 묘사한 것을 비판하자 인터뷰를 하지 않기로 유명한 하루키는 올해 4월 아사히신문 등과의 인터뷰에서 “역사는 국가의 집합적 기억이기 때문에 과거의 일로 잊어버리거나, 슬쩍 바꿔치거나 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책임을 짊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기사단장…’은 묵직한 울림을 자아내지는 않지만 확실한 재미를 선사한다는 측면에서는 합격점이다. 호기심을 점점 고조시키며 이야기의 숲으로 이끄는 저자의 솜씨는 여전하다. 아내에게 갑자기 이혼 통보를 받은 주인공이 그 충격으로 방황하며 여행을 떠나고, 아틀리에에서 LP로 멘델스존 푸치니 슈베르트의 음악을 듣고 시바스리갈을 마시는 등 하루키가 즐겨 사용했던 감각적 장치들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장석주 시인은 “미스터리, 예측 불가능의 카오스 상태 속에서 우연한 만남, 낯선 여자와의 섹스 같은 코드가 반복되는 등 이전 작품에 대한 오마주의 흔적이 산포되어 있다”고 분석했다. ‘1Q84’ 이후 7년 만에 선보인 장편소설인 ‘기사단장…’은 출간 전부터 국내 서점가를 강타했다. 6월 30일부터 예약판매를 시작한 지 일주일이 채 안 돼 예스24, 알라딘, 인터파크 등 주요 인터넷 서점에서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밀려드는 주문에 문학동네는 출간 전에만 30만 권(15만 세트)을 찍었다. 염현숙 문학동네 대표는 “예약판매 기간에 30만 권을 인쇄하는 건 문학동네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 책은 올해 2월 일본에서 출간될 당시 130만 권을 제작해 화제가 됐다. 세 권짜리인 ‘1Q84’는 국내에서 200여만 권(약 67만 세트)이 판매됐다. 본격적인 휴가철을 앞두고 소설에 대한 인기가 갈수록 뜨거워지는 가운데 ‘기사단장…’은 상당 기간 선두를 꿰찰 것으로 전망된다. 한편 ‘기사단장…’은 선인세를 둘러싸고도 화제다. 출판계에서는 선인세만 30억 원에 이른다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문학동네는 “그 정도는 아니다”라고 선을 그으며 “일본 에이전시로부터 문학 전문 출판사로서의 실적, 작품의 경향, ‘1Q84’ 판매 실적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결정을 내렸다는 설명을 들었다”고 밝혔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스페인에서 돈을 벌기 위해 밀항하다 붙잡혀 폐인이 된 연인을 데려오는 세네갈 여성 파투, 자기중심적인 남자 친구에게 얽매이길 거부하고 홀로 아이를 낳는 프랑스 여성 유진, 내전이 일어나자 의지할 곳 없는 친구를 데리고 버텨내는 라이베리아 여성 마리. 9개의 단편 소설과 1개의 에세이로 구성된 이 책에는 거친 파고에 맞서 단단하게 생의 끈을 부여잡는 여성들이 등장한다. ‘우연’ ‘타오르는 마음’ ‘아프리카인’ 등으로 유명한 저자는 200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후 3년간 집필한 작품을 모아 이 소설집을 펴냈다. 여성을 비롯해 또래보다 인지 능력이 떨어지지만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남성, 테러에 희생된 여인의 배 속 태아 등 소외된 존재들의 목소리에 주목했다. 저자는 이 책에 대해 “저항이라는 주제로 소설을 쓰고자 했다”고 말했다. 프랑스 니스와 나이지리아 등에서 자랐고, 중남미를 여행하며 다양한 문화를 접한 저자의 열린 태도는 글 속에 진하게 녹아 있다. 세네갈, 라이베리아, 가나 등 아프리카 여러 나라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져 이국적인 정취를 자아낸다. 내전과 식민 지배, 가난으로 신음하는 아프리카의 현실이 정교하게 묘사된 가운데 오래된 나무에 영혼이 깃들어 있고, 독수리, 하이에나가 사람을 지켜준다고 믿는 아프리카인의 세계관도 담겨 있다. 책장을 넘기는 속도는 중반을 향해 갈수록 가속도가 붙는다. ‘야마 나무’는 참혹한 살인과 겁탈이 난무하는 내전 속에서 펼쳐지는 여성 간의 끈끈한 연대를 밀도 있게 그렸다. ‘빛나는 작은 돌멩이’에 불과한 ‘피의 다이아몬드’로 인해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고발하고, 인명 구조를 할 때마저 피부색에 따라 차별하는 유엔군의 행태도 꼬집는다. ‘L.E.L. 마지막 날들’은 가나를 지배하는 영국인 총독과 아내 러티샤, 총독의 가나인 현지처 아두미사 간에 벌어지는 긴장이 속도감 있게 전개된다. 다만 총독에게 버림받은 아두미사의 저주가 러티샤를 향하는 대목은 유럽 남성 중심적 사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저자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 같다. 개연성이 충분히 있는 설정이지만 러티샤 역시 식민지에서 현지처를 두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 남성들의 이기적인 욕망의 희생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린 듯하지만 세상을 향해 보란 듯이 우뚝 서는 여성들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에는 온기가 스며 있다. 욕망을 채우는 데 급급한 남성에게 펀치를 날리고 홀로 당당하게 걸어가는 여성에게 응원을 보낸다. 생명을 품어내고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존재에 대한 경외감도 숨기지 않는다. ‘발 이야기’에서 임신한 유진이 진통을 느끼며 하는 생각에는 여성에 대한 저자의 시선이 명료하게 투영돼 있다. ‘바로 내가 나에게로 오는 중이다. 나는 다른 누구일 수 없고, 다른 곳에 있을 수도 없다.’ 원제는 ‘Histoire Du Pied Et Autres Fantaisies’.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영화스파이더맨: 홈 커밍(사진)감독 존 와츠. 출연 톰 홀랜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마이클 키턴, 젠데이어 콜먼. 5일 개봉. 12세 이상.완성형이 아니라서 더 매력적인 ‘고등학생’ 스파이더맨. ★★★★☆그 후감독 홍상수. 출연 권해효, 김민희, 김새벽, 조윤희. 6일 개봉. 청소년 관람불가.시간이 흐를수록 또렷해지고, 또 희미해지는 묘한 이야기. ★★★★재꽃감독 박석영. 출연 정하담, 장해금, 정은경. 6일 개봉. 12세 이상.박석영 감독 ‘꽃 3부작’의 따뜻한 마무리. ★★★■공연 뮤지컬 ‘시카고’ 내한공연(사진)1920년대 시카고를 배경으로 살인을 저지른 벨마, 록시는 변호사 빌리와 손잡고 언론을 이용해 무죄 선고를 받아내려 한다. 관능적인 춤과 블랙 유머가 정교하게 직조된 무대. 23일까지. 서울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 4만∼14만 원. 02-577-1987 ★★★☆연극 ‘킬 미 나우’지체장애가 있는 아들을 돌보느라 자기 삶을 포기한 제이크는 병마가 덮쳐오며 일상이 무너지자 극단적인 결심을 한다. 인간의 존엄, 고통, 사랑의 의미가 진하고 가슴 저리게 다가온다. 이석준 이승준 윤나무 신성민 등 출연. 16일까지. 서울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 2만∼5만 원. 02-766-6007 ★★★☆■클래식김선욱&드레스덴 필하모닉고풍스러운 음색이 특징인 드레스덴 필하모닉과 피아니스트 김선욱(사진)이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들려준다. 8일 오후 8시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5만∼20만 원. 02-3463-2185젊음의 열정과 고독한 노년의 조화.♥♥♥♥(두근지수 ♥ 5개 만점)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정기연주회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두 번째 시리즈로 호르니스트 김홍박의 협연으로 호른 협주곡도 무대에 오른다. 13일 오후 8시 서울 롯데콘서트홀. 1만∼3만 원. 032-625-8330흔치 않은 호른의 협연 무대.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정기연주회최수열 객원지휘자와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의 조합으로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들려준다. 14일 오후 8시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1만∼6만 원. 02-523-6258이상적 조합에 윤이상의 음악까지. ♥♥♥♥■콘서트 이승열한국을 대표하는 모던 록 싱어송라이터가 오랜만에 펼치는 무대. 7일 오후 8시, 8일 오후 5시 서울 현대카드 언더스테이지. 6만6000원. 02-3444-9989최근 낸 6집 ‘요새드림요새’ 수록곡들을 처음 라이브로 들을 수 있는 자리. ♥♥♥♥SM타운 라이브 월드투어 VI 인 서울SM엔터테인먼트 소속 가수들이 한자리에서 펼치는 릴레이 공연. 8일 오후 6시 서울월드컵경기장. 11만 원. 02-323-8500강타 보아 유노윤호 트랙스 선데이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샤이니 루나 엑소 이동우 제이민 헨리 레드벨벳 NCT127 NCT드림. ♥♥♥♥}

맑은 수채화 같다. 창작 뮤지컬 ‘리틀 잭’은 1960년대 영국을 배경으로 밴드 ‘리틀 잭’의 보컬인 잭이 세상을 떠난 첫사랑 줄리에 대한 기억을 잔잔하게 풀어간다. 극은 소극장에서 열리는 콘서트 형식으로 진행된다. 잭은 펑크를 낸 피아노 연주자를 대신해 온 줄리를 본 순간 곧바로 사랑에 빠져든다. 미국에 사는 줄리는 몸이 아파 요양하기 위해 영국에 온 것. 대기업 오너인 줄리 아버지의 강한 반대로 두 사람은 소식도 모른 채 헤어지지만 결국 다시 만나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추억을 쌓아간다. 줄거리는 옥경선 작가가 황순원의 ‘소나기’를 모티브로 만들었다. 충격적인 소재와 화려한 볼거리가 넘치는 작품들 속에서 ‘리틀 잭’은 기름기를 걷어내고 인공 감미료 없이 담백하게 맛을 낸 음식을 마주하는 기분을 느끼게 만든다. 잭과 줄리가 설레는 마음으로 가만가만 이어가는 대화는 처음 사랑을 시작한 이들이 나누는 이야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귀에 쏙 들어오는 참신한 대사는 없지만 그래서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작품을 은은하게 채색하는 건 음악이다. ‘마이 걸’을 포함한 주요 넘버는 아무 계산 없이 사랑했던 푸르른 시절을 떠올리게 만든다. 잭과 줄리가 함께 부르는 풋풋하고 보드라운 멜로디는 한동안 귓가에 맴돈다. 배우들의 편안한 연기는 관객을 작은 콘서트장으로 자연스럽게 이끈다. 여름날 소나기처럼 싱그러움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정민 김경수 유승현 김지철 등 출연. 8월 20일까지.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극단 연희단거리패의 산실이었지만 폐관됐던 가마골소극장(사진)이 7일 부산 기장군 일광면에 다시 문을 연다. 가마골소극장은 1986년 부산 광복동에 둥지를 틀었고 이후 중앙동, 광안리, 거제동으로 옮긴 후 2012년 문을 닫았다. 연희단거리패는 일광면에 120석 규모의 가마골소극장을 만들어 재개관하고, 이를 기념해 7일부터 23일까지 신파극 ‘홍도야 울지마라’를 공연한다. 연희단거리패의 젊은 단원이 주축이 된 극단 가마골이 상주극단으로 활동한다. 극단은 이윤택 조인곤 김하영 대표체제로 운영된다. 가마골소극장이 있는 6층 건물에는 목로주점 ‘양산박’, 1970년대 클래식 다방을 재건한 ‘카페 오아시스’와 북 카페 ‘책 굽는 가마’가 들어선다. 도서출판 도요와 연희단거리패 아카이브도 마련된다. 가마골소극장 대표를 지낸 고 이윤주 연출가를 추억하는 이윤주 기념관도 있다. 가마골소극장은 문학작품을 함께 감상하는 ‘수요 문학의 밤’, 인문학과 예술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가마골 시민문화강좌’, 북 콘서트 형식의 ‘맛있는 책읽기’ 등 각종 문화 프로그램도 운영할 예정이다. 한편 가마골소극장과 안데르센극장(부산 기장군)에서는 15일부터 8월 6일까지 제1회 기장세계아동청소년연극축제를 연다. 미국 독일 프랑스 멕시코 베트남 한국 등 6개국의 극단이 참여해 모두 11개 작품을 공연한다. 051-723-0568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1945년 광복 직후 만주. 조선인들은 가난과 전염병에 시달리며 조국으로 돌아갈 기차를 간절히 기다린다. 일본군 위안소를 탈출한 명숙은 지옥을 함께 건넌 일본인 여성 미즈코를 벙어리 동생으로 속여 조선으로 데려가려 한다.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5∼30일 공연되는 배삼식 극작가(47)의 신작 ‘1945’다. 김정민 이애린 김정은 박윤희 등이 출연한다. 지난달 30일 서울 용산구 국립극단에서 만난 그는 “1945년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여러 문제의 뿌리가 된 해이고, 만주는 조국에서 내몰린 이들이 2등 국민으로 살아야 했던 공간이다”고 말했다. 그는 “관념적인 상태로 머물러 있는 이 시공간에서 구체적인 욕망을 갖고 하루하루 살아갔던 이들의 삶을 생생하게 불러내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열하일기만보’ ‘하얀 앵두’ ‘3월의 눈’ ‘먼 데서 오는 여자’로 동아연극상, 대산문학상 등 굵직한 상을 휩쓴 배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도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는다. ‘1945’에서는 걸림돌이 되는 사람은 가차 없이 버리려는 이가 있고, 내 한 몸 가누기 힘든 상황에서도 타인을 보듬어 안고 가려는 이도 있다. 작가는 이들 한 명 한 명의 삶을 치열하게 묘사하지만 옳고 그름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개개인의 삶에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에요. 인간을 살아가게 만드는 동력인 욕망을 쉽게 긍정하거나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이런 시각은 분노와 혐오가 넘치고, 생각이 다른 이에게 즉각 옳고 그름의 칼날을 들이대는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이 위험하다고 느끼는 그의 우려와도 맞닿아 있다. ‘1945’는 시간과 공간적 배경은 물론이고 인물의 캐릭터도 눈에 띄는 점이 있다. 명숙은 운명에 정면으로 맞서는 당찬 여성으로 그렸다. 그동안 많은 작품에서 봐왔던 위안부 피해자와는 사뭇 결이 다르다. “명숙은 지옥에서도 버티며 삶에 대한 의지와 목적을 갖고 움직이는 인물이에요. 다른 이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요. 명숙을 통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인간의 존엄을 돌려드리고 싶었어요.” 극에서 명숙은 “산 사람은 뭐 영영 사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언제든 한 번 가는 건 마찬가지지. 결국엔 혼자 가야 하는 건데, 뭐”라고 읊조린다. 암 투병을 하다가 5월 세상을 떠난 아내 이연규 배우를 지켜보며 쓴 대목처럼 느껴졌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아내가 많이 아파 힘들어할 때 무서운 꿈을 꿨다며 깨어나서 한 말이었어요.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제 작품을 가장 먼저 읽은 후 부족한 점을 짚어내고 용기도 줬던 아내는 제일 믿었던 독자이고 평론가였어요.” 그는 스스로를 ‘기술자’라고 불렀다. “희곡을 쓴다는 건 무대라는 형식에 맞게 표현하는 기술을 가져오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제 글이 배우들의 육체를 통해 말이 되고 움직임이 되는 과정이 예전보다 부드러워진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히 기쁠 거예요. 어줍지 않고 성마르지 않은, 믿음직한 기술자가 되고 싶어요.”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한국은 빠른 시간에 뮤지컬 산업의 성장을 이뤄냈습니다. 하지만 실력 있는 스타 배우는 여전히 부족합니다. 소수 스타 배우들의 출연료가 높다 보니 충분한 제작비를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이에요.”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에서 팬텀 역으로 2700여 회나 출연한 배우 브래드 리틀이 한국 뮤지컬 시장에 대해 최근 지적한 말이다. ‘배우 기근’에 시달리는 뮤지컬 업계에서는 실력과 인지도를 함께 갖춘 배우 풀을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동아일보사는 한국 뮤지컬계를 이끌어갈 미래 스타를 발굴하고 뮤지컬 산업의 저변을 확대하기 위해 동아뮤지컬콩쿠르를 신설한다. 동아일보사가 수십 년간 개최하고 있는 동아음악콩쿠르, 동아무용콩쿠르, 동아국악콩쿠르, 서울국제음악콩쿠르는 국내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대회로 미래의 거장들을 발굴해 왔다. 뮤지컬콩쿠르는 국내 주요 뮤지컬 제작자들에게 신인 발굴 현장이 되는 한편 대학에서 관련 분야를 전공할 학생들에게는 무대를 미리 경험하는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참가자들은 오랜 현장 경험을 갖춘 뮤지컬 연출가와 제작사 대표, 음악감독, 배우 등으로 구성된 심사위원 앞에서 자신의 기량을 발휘함으로써 배우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할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뮤지컬콩쿠르는 중등부, 고등부, 대학(일반)부 등 3개 부문으로 나눠 실시한다. 참가자는 국내외 프로 뮤지컬 무대에 데뷔한 적이 없어야 한다. 8월 7∼11일과 17, 18일에 실시하는 예선에서는 뮤지컬 곡 가운데 한 곡을 자유롭게 선택해 3∼4분 내외로 부르면 된다. 8월 28∼30일 열리는 본선에서는 자신이 고른 뮤지컬 곡 전곡을 부른다. 예선곡과 본선곡은 중복되면 안 된다. 뮤지컬 관계자들은 뮤지컬콩쿠르가 처음 도입되는 데 반가움을 나타냈다. ‘영웅’, ‘명성황후’ 등을 연출한 윤호진 에이콤 대표는 “과거에 비해 뮤지컬 배우층이 넓어지긴 했지만 탄탄한 기량을 갖춘 배우들은 한정돼 있다”며 “동아뮤지컬콩쿠르가 능력 있는 신예들을 발굴하는 등용문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라흐마니노프’, ‘빈센트 반 고흐’ 등을 제작한 한승원 HJ컬쳐 대표는 “배우를 발굴할 새로운 기회가 생긴 것을 환영한다”며 “실력만 있으면 신인이라도 얼마든지 캐스팅할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 한 대표는 이어 “어떤 참가자들이 있는지 파악하고 관객들의 반응을 확인할 수 있도록 뮤지컬 제작자와 일반인도 본선 무대를 관람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동아뮤지컬콩쿠르가 궁극적으로 좋은 뮤지컬 콘텐츠를 만드는 데 기여하길 바라는 의견도 많다. 원종원 순천향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뮤지컬 평론가)는 “한국 뮤지컬 시장에서 배우는 투자자를 유치하고 관객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며 “콩쿠르 참가자 및 수상자들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질 수 있는 방안도 장기적으로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참가 신청은 28일까지 동아뮤지컬콩쿠르 홈페이지()에서 하면 된다. 02-361-1414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지킬 박사가 인간 내면의 선과 악을 분리해 내는 약을 만들지 못했다면 어떻게 했을까. 당장 내일이 연구 발표일인 데다 실패한 사실이 알려지면 지원금도 끊기는 상황이라면?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공연되고 있는 연극 ‘술과 눈물과 지킬 앤 하이드’는 소설과 뮤지컬로 큰 인기를 끈 ‘지킬 앤 하이드’를 기발하게 뒤집었다. 연극 ‘웃음의 대학’ ‘너와 함께라면’, 뮤지컬 ‘오케피’를 쓴 일본 유명 희극 작가 미타니 고키의 작품으로 그의 내공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신약 개발에 실패한 지킬 박사(윤서현 김진우)는 급한 마음에 하이드를 연기할 무명 배우 빅터(정민 장지우)를 고용한다. 조신한 숙녀처럼 보이지만 실은 야한 소설을 즐겨 읽고 이를 실천(?)해 보길 꿈꾸는 지킬 박사의 약혼녀 이브(박하나 스테파니)가 ‘나쁜 남자’ 연기를 하는 빅터에게 매료되면서 상황은 꼬여 간다. 비장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약을 마셔도 변화가 생기지 않는 데다 약혼녀마저 빅터에게 사로잡히자 풀이 죽은 지킬 박사는 허당 캐릭터의 매력을 발산한다. 얼떨결에 나쁜 남자가 돼 예상치 못한 수난을 당하면서도 울며 겨자 먹기로 하이드 연기를 이어가는 빅터는 짠하지만 웃음이 터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억누르고 있던 욕망을 앙큼하게 뿜어내는 이브, 상황을 해결하는 듯하면서도 이를 은근히 즐기며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지킬 박사의 조수 풀(박영수 장태성) 역시 극을 단단하게 떠받친다. 머리를 텅 비운 채 그저 유쾌해지고 싶은 이들에게 딱 맞는 작품이다. 8월 20일까지. 3만5000∼4만5000원. 1588-5212 ★★★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때론 사랑을, 때론 우정을 나누는가 하면 천적처럼 맹렬하게 싸운다. 결혼 외에 어지간한 건 함께한 50대 남녀가 목요일마다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주제는 역사, 비겁함, 죽음 등으로 거창하지만 매번 말다툼으로 번지고, 그동안 감춰 두었던 가슴속 이야기를 조금씩 풀어낸다. 27일 막을 여는 연극 ‘그와 그녀의 목요일’(극본·연출 황재헌)이다. 여주인공 연옥 역에 더블 캐스팅 된 배우 윤유선(48)과 진경(45)을 서울 종로구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최근 만났다. 두 사람은 드라마 ‘참 좋은 시절’(2014년)에 함께 출연한 후 가까워졌다. 두 사람이 연기하는 연옥은 은퇴한 국제 분쟁 전문 기자로, 센 것 같지만 실은 여리고 상처가 많다. 11년 만에 연극 무대에 서는 윤 씨는 “20대 때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에 출연한 후 연극의 매력을 알게 됐다”며 “드라마나 영화에서 해 보지 않은 역할을 찾고 있었는데, 연옥이 딱 그런 캐릭터다”라고 말했다. 연극배우로 출발한 진경은 TV와 영화에서 활약하다 4년 만에 다시 연극 무대로 돌아왔다. 진경은 분쟁 전문 기자가 쓴 책을 읽으며 배역을 분석했다. 어떤 캐릭터의 옷을 입은 게 아니라 자신이 느낀 그대로를 가감 없이 전하고 싶기 때문이다. 진경은 “어른도 사춘기를 겪고 질풍노도의 시기가 계속된다. 이런 갈등이 집약된 캐릭터가 연옥”이라고 설명했다. 두 사람은 연옥에게서 젊은 날 자신들의 모습을 순간순간 발견한다고 했다. “어릴 때는 별것 아닌 일에도 자존심을 굽히는 게 잘 안 되잖아요. 자존심을 내세우다 상처를 주고받는 젊은 세대가 이 작품을 보면 좋을 것 같아요.”(윤) “돌이켜 보면 20, 30대에는 세상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있었어요. 다만 연옥과 달리 나이가 들면서 세상과 다른 이들을 이해하는 부분이 많아진 것 같아요.”(진) 역사학자인 정민 역은 성기윤, 조한철이 맡았다. 기회가 된다면 어떤 남자와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지 궁금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 미세먼지 대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요. 맑은 공기를 찾아 떠나는 ‘공기 난민’까지 생겼잖아요.”(진) 똑 부러지게 말을 이어가는 진경을 보노라니 드라마, 영화의 캐릭터와 겹쳐졌다. 진경이 “이거, 연옥과 정민의 토론 주제로 넣을까요?”라고 묻자 윤유선은 “우주 얘기도 하잖아. 미세먼지도 추가하자”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고는 깔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은 색깔이 사뭇 달라 보이지만 공통점이 있다. 할 말을 꼭 한다는 것. 진경은 아니다 싶은 건 얘기해야 마음이 편하고, 윤유선 역시 납득이 안 되는 부분이 있으면 반드시 풀고 가야 하는 성격이다. 꾸준히 연기자의 길을 걸어온 이들은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악역에 도전해 보고 싶어요. 또 인수대비처럼 카리스마 있는 캐릭터로 변신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어요. 무엇보다 믿을 수 있는 배우라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노력할 거예요.”(윤) “제 그릇에 맞게 그때그때 할 수 있는 만큼 책임지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지금은 이 연극을 책임지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죠.”(진) 27일∼8월 20일. 서울 종로구 드림아트센터 2관 더블케이씨어터. 5만5000원. 1577-3363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아내가 대본을 읽어보고는 ‘이거 당신이네요. 당신 안에 갇혀 있는 걸 끄집어내기만 해도 될 것 같다’고 하더군요.”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24일 막을 올리는 연극 ‘대학살의 신’에서 미셸 역을 맡은 배우 송일국(46)은 꾸밈없이 소탈하게 말을 이어갔다. ‘대학살…’은 아이 싸움이 어른 싸움으로 번지는 과정을 통해 위선으로 가득 찬 인간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 맞아서 이가 부러진 아이의 아빠인 미셸은 공처가, 마마보이에 평화주의자인 척하는 남자다. 아내 베로니끄(이지하)는 아마추어 작가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만행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 “제 안에 미셸과 비슷한 부분이 있어요. (판사인) 아내에게 지적 열등감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에요. 마마보이는 아니지만 배우로서 어머니(김을동) 앞에서는 부족함을 너무나 많이 느껴요.” 후배들을 숱하게 지도한 어머니였지만 아들을 가르칠 때는 ‘대본이 마구 날아다니는’ 상황이 벌어지는 바람에 두 번 만에 그만뒀단다. 그에게 ‘대학살…’은 연극 ‘나는 너다’,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 이후 세 번째 무대다. 남경주, 최정원이 때린 아이의 부모 역을 맡았다. 송 씨는 배우 네 명 가운데 막내다. “선배들은 자기 대사는 물론 상대방 대사까지 다 외우고 소화해 큰 그림을 그리더라고요. 학부 2학년생이 대학원 박사 과정 수업 들어온 것 같다고 할까요. 제가 헤매면 짚어주고 챙겨주세요. 그럴 땐 막내라 행복해요.” 극 중 배우들은 처절하게 망가진다. 무게감 있는 연기를 많이 했던 그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데 대한 두려움은 없는지 궁금했다. “전혀요. 연극에서의 모습이 실제 저와 가까워요. 지금까지는 연극에서처럼 위선을 떤 거죠. 하하하.” 아빠 역할이다 보니 그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겪는다는 생각으로 연습하고 있단다. 삼둥이(대한, 민국, 만세)가 연극에서처럼 맞아서 이가 부러져 들어오면 어떨까. 그는 5초간 침묵한 뒤 입을 열었다. “중립자적 입장을 가져가려 하겠지만(극 중 그의 대사다)…. 아, 진짜 그러면 돌아버릴 것 같긴 해요!” 그가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삼둥이 사진은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삼둥이는 올해 다섯 살이다. 민국이에게 한 살 연상의 여자 친구가 생겼단다. “민국이에게 여자 친구를 보면 어떠냐고 물어보니 설렌다고 하더군요. 만세는 감성이 남다른 것 같아요. 엄마가 상가(喪家)에 간다고 하면 만세가 ‘엄마, 슬프겠어요’라고 해요. 이제 아이들과 대화가 제법 됩니다.” 그는 요즘 성악, 탭 댄스를 배우고 있다. 뮤지컬에 또 도전하기 위해서다. 드라마, 영화에서 하고 싶은 역할도 많다. 그는 특히 “눈물 펑펑 쏟아내는 슬픈 사랑 연기를 꼭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24일∼다음 달 23일. 4만∼6만 원. 02-577-1987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이는 제18회 서울 변방연극제가 26일부터 7월 8일까지 서울 종로구 30스튜디오, 혜화동1번지 등에서 열린다. 연극 연출가뿐 아니라 미술, 무용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들이 연출한 작품도 무대에 오른다. 개막일인 26일에는 ‘25시―극장전’이라는 제목으로 낮 12시부터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시민, 예술가 등 24명이 참여해 1인당 1시간씩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릴레이 퍼포먼스를 진행한다. 이후 마지막 1시간 동안 24명이 동시에 퍼포먼스를 벌인다. ‘혁명적 병원’(28, 29일·차재민 연출)은 실제 상담사와의 워크숍을 통해 치유에 대해 살펴본 후 정상과 비정상에 대해 퍼포먼스 형식으로 질문을 던진다. 35개국의 인권운동가들을 인터뷰한 책 ‘진실을 외쳐라: 세상을 바꾸어가는 인권운동가들’(케리 케네디 지음)을 각색해 쓴 희곡으로 만든 ‘권력에 맞서 진실을 외쳐라: 어둠 너머의 목소리’(28∼30일·하일호 연출)도 공연된다. 세월호 참사 가해자들의 언어를 담아낸 ‘킬링 타임’(27∼29일·구자혜 연출)과 한국에서 티베트, 베트남, 중국, 인도 음식점을 운영하는 현지인들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정체성과 소속감, 삶의 방식 등을 고찰한 ‘이방인의 만찬’(30일∼7월 2일·안정민 연출)도 만날 수 있다. 현대인의 몸을 주제로 다룬 두 작품인 ‘자유롭게 그러나 고독하게’(7월 3∼5일·강화정 연출)와 ‘슬픈 짐승: 답장’(7월 3∼5일·동이향 연출)은 하루에 두 작품을 다 볼 수 있게 연이어 공연한다. 일본인의 부조리한 일상을 여성의 시각으로 풀어낸 일본 작품 ‘케미코후모와’(29, 30일)도 한국에서 관객을 만난다. 다양한 세대의 시민 7명이 소설가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고 ‘민주주의와 나, 기억’이라는 주제로 워크숍(7월 7일)도 연다. 폐막일인 7월 8일에는 공간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극장 밖의 삶에 대해 고민해 보자는 의미로 공연 참가자들이 가두행진을 할 예정이다. 070-7918-7342,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