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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시회가 끝나면 눈물이 날 것 같습니다.” 최근 한 미술 전시회에서 관람객에게 작품 설명을 하던 큐레이터가 여담이라며 말문을 꺼냈다. “곡선을 중시했던 작가의 가치관에 맞춰 작품들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도록 전시 공간을 구성했어요. 쉽지 않은 작업이었죠. 해외에서 온 고령의 설치 담당자가 불편한 몸을 이끌고 전시관 1, 2층을 오르내리며 열정적으로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탄했답니다. 느낀 바도 많았고요.” 큐레이터의 목소리에는 그가 전시회를 준비하며 겪었을 고민과 함께 애정이 담겨 있었다. 전시회가 끝난 후 그 미술관 앞을 지나게 됐다. 철거된 나무판들이 쌓여 있었다. 그 큐레이터는 마지막 관람객이 떠난 후 얼마나 울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끝난 후에야 거기에 쏟았던 노력과 감정을 또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인간관계든 일이든 그 무엇이든 말이다. 특히 공연은 매일 막을 내리고, 오직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휘발성을 지닌 장르이기에 ‘끝’의 의미를 늘 생각하게 만든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막공’(마지막 공연)을 본 적이 있다. 막이 내린 후 배우들이 한마디씩 소감을 얘기했다. 여주인공 알돈자 역을 맡았던 배우는 감사 인사를 한 후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여인숙에서 일하며 몸을 파는 알돈자는 거친 노새꾼들에게 잔혹하게 짓밟히지만 끝내 일어서는 캐릭터다. “너무 힘들어서 중간에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공연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을지 두려워하며 떨 때, 다들 할 수 있다고 다독여 줬습니다. 막공을 해냈다는 게 믿기지 않고 고마울 뿐입니다.” 눈물범벅이 된 채 말을 이어가는 모습을 보니 그의 마음고생, 몸 고생이 얼마나 컸을까 싶어 코끝이 찡해졌다. 배우들은 배역에 몰입하다 보면 실제 삶도 그와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다. 감당하기 힘든 삶을 살아가는 역할을 맡아 이 악물고 버텨낸 그에게 더 세게, 더 오래 박수를 보냈다. 뮤지컬계에서 스타 연출가로 불리는 왕용범 씨는 완벽주의자로 유명하다. 큰 성공을 거둔 창작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을 만들 때는 배경이 된 스위스를 다녀왔고, 생명과학 윤리를 다룬 논문을 비롯해 찾아본 자료만 2000쪽이 훌쩍 넘는다. 그는 “공연은 끝나고 나면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작업 후 에너지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죄스럽다”고 말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붓는단다. 정호승 시인의 ‘침묵 속에서’란 시를 읽다 보니 이들이 떠올랐다. ‘이별의 시간이 찾아올 때까지는/사랑의 깊이를 모른다는 님의 말씀을/이제야 침묵 속에서 알아차립니다.’(시집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중) 끝이란 건 나도 몰랐던 나의 모습과 감정을 깨닫게 만든다. 하얀 종이를 갖다대야 투명한 용기에 담긴 액체의 색깔을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돌아설 때 고마움과 환희, 뿌듯함을 느끼는 순간이 쌓여 갈수록 스스로에게 잘살았다고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손효림 문화부 기자 aryssong@donga.com}
이윤택 연출가가 이끄는 극단 연희단거리패가 운영하던 게릴라극장(서울 종로구 혜화로)이 다음달 문을 닫는다. 2004년 동숭동에 문을 연 이 공연장은 2006년 5월 현재 위치로 옮긴 뒤 ‘하녀들’ ‘수업’ ‘갈매기’ 등 고전을 비롯해 실험적인 작품 160여 편을 무대에 올렸다. 연희단거리패 뿐 아니라 다른 극단의 작품도 공연했다. 완성도 높고 참신한 작품이 꾸준히 공연되면서 게릴라극장은 ‘오프 대학로의 중심’ ‘소극장 연극의 메카’로 불렸다. 하지만 경영난에 시달려 결국 극장을 매각하게 됐다. 앞으로 극장은 다른 용도로 전환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게릴라극장은 폐관 공연으로 연극 ‘황혼’을 30일부터 다음달 16일까지 올린다. 알프스의 관광객을 상대로 산짐승의 울음소리를 흉내내주며 살아가는 70대 시각장애인에게 50대 매춘부가 찾아오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오스트리아 작가 페터 투리니의 작품으로 시각장애인 노인 역에 명계남, 매춘부 역에 김소희가 출연한다. 게릴라극장 예술감독인 채윤일 씨가 연출을 맡았다. 지난해 11월 게릴라극장에서 국내 초연된 작품이다. 연희단거리패는 지난해 종로구 창경궁로에 개관한 소극장 ‘30스튜디오’에서 공연을 올리며 작업을 이어갈 예정이다. 75석 규모의 30스튜디오가 있는 건물에는 카페와 함께 공동생활을 하는 연희단거리패 단원들의 숙소도 있다. 극단 측은 “10년 넘게 매일 불을 밝히던 게릴라극장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만, 이곳을 거쳐 간 연극인들과 관객들의 열정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며 “게릴라극장을 사랑해주셨던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밝혔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대선을 한 달여 앞둔 31일, 치열한 권력 다툼을 그린 연극 ‘왕위 주장자들’의 막이 오른다. 13세기 노르웨이를 배경으로 헨리크 입센이 쓴 작품으로 국내 초연이다. 연출을 맡은 김광보 서울시극단장(53)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17일 만났다. 그는 2014년 11월, 세월호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입센의 ‘사회의 기둥들’을 연출하기도 했다. “둘 다 우연의 일치예요. ‘사회…’는 공연을 2013년에 결정했고, ‘왕위…’는 2015년 서울시극단장을 맡은 후 계획했어요. 올해 대선이 있다는 걸 1%도 고려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연말과는 시간차가 나잖아요. 봄에 대선을 할 줄 그 누가 알았겠습니까.” 왕위를 확신하는 호콘왕과 6년간 섭정하며 왕국이 자신의 것이라 믿는 스쿨레 백작은 맹렬하게 충돌한다. 니콜라스 주교는 스쿨레 백작의 욕망과 의심을 부추기며 갈등을 고조시킨다. 눈이 충혈된 채 수척한 얼굴을 한 김 단장은 “매일 KO되고 있다”로 토로했다. “‘억척 어멈과 그 자식들’을 할 때 브레히트의 통찰력에 함몰돼 정말 어려웠는데 이번에도 그런 느낌이에요. 입센을 담아내기엔 제 그릇이 부족하다는 걸 절감하고 있어요.” ‘줄리어스 시저’, ‘그게 아닌데’로 동아연극상 연출상을 받는 등 주요 연극상을 휩쓸어온 스타 연출가는 고뇌하고 있었다. 그는 “스타 연출가란 말은 지나가는 바람에 불과하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권력에 대한 인간의 집착과 심리를 깊숙한 부분까지 끄집어내는 게 만만치 않아요. 절망과 환란의 시대에 권력자들은 희망을 제시하는데, 그게 모든 이가 바라는 진정한 희망인지 의구심을 제기하고 싶고요.” 집에 가면 곧바로 쓰러져 자느라 유일한 취미인 영화도 못 보고 있다고 한다. 한 달 전, ‘왕위…’의 배경이 되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 ‘라스트 킹’을 본 게 마지막이란다. 그는 대선 주자들이 이 작품을 꼭 보기를 희망했다. “극중 상황을 대선 주자들도 실제 겪게 되지 않을까요. 왕권을 쟁취할 자격이 있는지, 권력을 가졌을 때 어떤 방식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될 겁니다.” 그는 쉬지 않고 한 해 7, 8개의 작품을 올리는 일 중독자로 유명하다. 서울시극단장이 된 후에는 작품 수가 연간 3, 4개로 줄었다. “공공성과 재정 자립도 등 책임질 게 많아요. 작품별로 에너지가 2, 3배는 더 소모되는 것 같아요. 몸무게가 4kg 정도 빠졌어요.” 그가 부임한 후 서울시극단 작품에 대한 주목도가 높아지고 관객들의 호응도 커졌다. ‘침체된 서울시극단에 숨결을 불어넣고 싶다’는 소망을 실현시킨 셈이다. 하지만 그는 연출가로서 진화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김광보표 연극’이라는 게 고인 물처럼 느껴질 수 있잖아요. 어떻게 변화할지 고민하고 있어요. 러시아의 유명 연출가인 레프 도딘을 보면 그 통찰력에 감탄하게 돼요. 제 ‘욕망’은 ‘김광보가 한 단계 진일보했다’는 말을 듣는 겁니다.” 유성주 김주헌 유연수 이창직 강신구 등 출연, 31일∼4월 23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2만∼5만 원. 02-399-1794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주요 작품▽ 줄리어스 시저▽ 나는 형제다▽ 여우인간 ▽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 그게 아닌데 ▽ 프로즌▽ 사회의 기둥들▽ 스테디 레인 ‘동토유케’}

두산아트센터가 ‘갈등’을 주제로 2017년 두산인문극장을 운영한다. 두산인문극장은 2013년 ‘빅 히스토리: 빅뱅에서 빅 데이터까지’를 시작으로 2014년 ‘불신시대’, 2015년 ‘예외’, 2016년 ‘모험’을 주제로 관객을 만났다. 연강홀에서는 25, 26일 안은미 씨가 안무와 연출을 맡은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오후 5시·1만 원)를 공연한다. ‘단발머리’, ‘백만송이 장미’, ‘낭만에 대하여’ 등에 맞춰 막춤을 추는 할머니들을 통해 과거의 시간과 공간을 기억하는 몸짓과 삶의 에너지를 선보인다. 탈북 여성 조목란이 브로커에게 정착금과 임대아파트 보증금을 사기 당한 후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려는 이야기를 그린 연극 ‘목란언니’(28일∼4월 22일·스페이스111·3만 원)도 공연한다. 분단된 남북처럼 갈라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작품이다. 2012년 동아연극상 희곡상(김은성)을 받았다. 연극 ‘죽음과 소녀’(5월 2∼14일·스페이스111·3만 원)는 칠레 독재 정권을 모티브로 만든 작품이다.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는 빠울리나가 자신을 고문한 의사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감금하면서 인권위원회 활동을 하는 변호사 남편과 벌이는 충돌을 담았다. 연극 ‘생각은 자유’(5월 23일∼6월 17일·스페이스111·3만 원)는 세계시민과 이주민, 난민의 시각으로 한국과 독일 베를린을 바라보며 예술과 사회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알리바이 연대기’로 2013년 동아연극상 작품상과 희곡상을 받은 김재엽 연출가의 신작이다. 그가 베를린에서 1년간 생활하며 쓴 일기와 창작노트, 현지 인터뷰 등을 활용해 만들었다. 두산갤러리에서 진행하는 전시 ‘또 하나의 기둥’(4월 12일∼5월 27일)은 공간의 안과 밖에서 개인으로, 혹은 대중으로 대립하고 연결되기도 하는 우리의 모습을 담았다. 연강홀에서는 영화 ‘무산일기’, ‘대답해줘’ 등을 상영한다. 갈등을 주제로 한 강연(27일∼6월 5일)도 월요일마다 10회 진행한다. 전시, 강연, 영화는 무료다. 02-708-5001, 5050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얼굴을 하얗게 분칠한 광대들이 공연장 앞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거나 손을 흔들며 관객을 반긴다. 막이 오르기 전부터 공연은 이미 시작된 셈이다. 연극 ‘변두리 극장’은 공연장에 들어서기 전부터 공연 내내 기존의 질서를 뒤엎는다. 독일의 유명 희극배우이자 극작가, 영화 제작자인 카를 발렌틴(1882∼1948)의 작품으로, 민중이 처한 부조리한 상황을 익살스럽게 비틀며 현실을 풍자했다. 막이 오르면 요즘 보기 어려운 언어유희, 몸개그가 낯설면서도 신선하게 펼쳐진다. 악보대로 연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지휘자 광대(이승헌)와 악보에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제대로 연주할 수 없다는 단원 광대들은 도돌이표 같은 실랑이를 계속한다. 부부 광대는 ‘백 투 더 퓨처 투’처럼 상대방의 얼굴에 침을 더 많이 튀게 만드는 말을 찾아내며 악착같이 싸운다. 주문한 책을 다 만들었다고 전화한 제본소 직원에게 담당자가 아니라며 회사 직원들이 전화를 계속 다른 사람에게로 넘기는 장면은 관료주의의 폐해를 꼬집는다. 에피소드별로 이야기가 어디로 튈지 예상할 수가 없다. 배우들은 바이올린 피아노 트럼펫 드럼 등을 직접 연주하고, 뛰고 구르며 온몸으로 에너지를 뿜어낸다. 몸 훈련이 잘된 연희단거리패 배우들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다. 용수철처럼 온몸을 자유자재로 구부리고 펴며 극장을 휘젓는 이승헌은 광대 그 자체다. 메마른 이 시대에, 머리를 비우고 광대들과 한바탕 어울리다 보면 다소 촌스러우면서도 정겨웠던 어느 한때로 돌아간 듯하다. 윤정섭 김아라나 신명은 박현승 등 출연. 26일까지 서울 종로구 게릴라극장. 3만 원. 02-763-1268. ★★★☆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과거의 나를 불러내 숨결을 다시 불어넣은 것 같아요. 초심을 많이 찾게 됐어요.” 서울 종로구 대학로 학전블루 소극장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밑바닥에서’에 대해 말하는 왕용범 연출가(43)의 눈은 설렘으로 반짝였다. ‘프랑켄슈타인’ ‘잭 더 리퍼’ ‘삼총사’ 등 대극장 뮤지컬을 꾸준히 선보이며 뚜렷한 색깔을 구축한 그는 소극장으로 돌아와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최근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작품에만 집중할 수 있는 자유로움이 간절했는데 마음의 고향인 대학로에 와서 위안을 받고 있다”며 미소 지었다. 막심 고리키의 동명 희곡을 바탕으로 그가 다시 만든 이 작품은 2005년 초연돼 호평을 받았다. 배경은 여인숙에서 선술집으로 바뀌었다. 백작을 대신해 감옥에 갔다 출소한 페페르, 병든 동생을 돌보며 술집을 운영하는 타냐, 알코올 중독자인 전직 배우 등의 앞에 새 종업원 나타샤가 등장하면서 이들의 마음에 희망이 꿈틀댄다. 하지만 이내 더 거센 소용돌이가 몰아친다. 2007년 공연 후 10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오른 ‘밑바닥에서’는 처절함과 슬픔, 처연한 웃음이 밀도 높은 연기와 어우러진 옹골찬 작품이다. “대학(서울예대 연극과) 시절 연극으로 만들면서 완전히 사로잡힌 작품이에요. 극한 상황에서도 인생의 답을 찾아가려 몸부림치는 모습이 낭만적으로 느껴졌죠.” 어려웠던 가정사와도 겹쳐졌단다. 외환위기로 아버지의 사업이 기울면서 그는 닥치는 대로 일했다. “전단 돌리기, 무대 조명 아르바이트, 우편물 접기 등 안 해본 게 없어요. 하지만 부모님은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셨고, 연극을 하고 싶어 했던 동생은 ‘돈은 내가 벌 테니 형은 연극 해’라며 길을 비켜줬어요. 너무 고맙고 지금도 가슴에 사무쳐요.” 그래서 아무리 힘들어도 인생은 살 만하다는 생각을 갖게 됐단다. 그 마음을 고스란히 이 작품에 쏟아냈다. “가난의 밑바닥보다는 인간 내면의 밑바닥을 더 비추려 했어요. 배우들의 에너지는 물론 숨소리까지 고스란히 전하고 싶어 200석이 채 안 되는 학전블루를 택했어요.” 과거 이 작품을 하며 아내가 된 배우 서지영을 만났기에 더 각별하단다. 그는 앞으로 10년간의 일정이 꽉 짜여 있다. 8월 충무아트센터 대극장에서는 창작뮤지컬 ‘벤허’를 초연한다. “한 작품을 만드는 데 3년 정도 걸려요. 배경이 되는 나라를 다녀오고, 해당 시대에 대한 역사, 문화, 생활상 등 관련 책을 모조리 찾아봐요.” 요즘은 로마와 기독교의 역사, 여러 나라의 독립운동, 이스라엘 관련 책 등을 보고 있다. “작업하고 나서 조금이라도 에너지가 남아 있으면 죄스러워요. 끝나고 나면 돌이킬 수 없는 게 공연이니까요. 고정된 시선을 깬 작품이 좋은 반응을 얻을 때면 신선한 자극을 받아요. 아, 그런데 아무리 애써도 절대 알 수 없는 게 딱 두 가지더라고요. 여자와 관객 마음요.(웃음) 저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며 작품을 만들려고 해요.” 최우혁 김지유 서지영 이승현 등 출연. 5월 21일까지. 6만 원. 02-1544-1555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깊고 그윽한 수묵화 같다. 효(孝)가 아닌 죽음의 관점에서 심청을 새롭게 해석한 연극 ‘심청’이다.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공연 중인 ‘심청’은 사전 정보 없이 관람하더라도, 죽음을 관념이 아니라 실재적으로 고민한 노작가의 연륜이 담긴 작품임을 직감할 수 있다. 이강백 극작가(70)는 삶과 죽음을 마디마디 곱씹은 후 이를 묵직하게 투영했다. 맹수 같은 파도를 달래기 위해 출항할 때마다 처녀들을 제물로 바쳐온 선주(송흥진)는 겉보리 스무 가마에 팔려온 간난(정새별)을 지극정성으로 모시지만, 간난은 왜 죽어야 하느냐며 제물 되기를 거부한다. 깊은 병이 들어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 선주는 온 힘을 다해 죽음을 거부하는 간난을 보며 마음이 흔들린다. 간난이 자기 이름 석 자를 배워 써보고 기뻐하며 생의 마지막 순간을 환희로 채워가는 동안 선주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짓눌린다. “내가 내게 다가오는 것”이라는 선주의 대사는 죽음의 핵심을 꿰뚫는다. 누구의 아들, 누구의 아버지, 선주 등 그 무엇도 아닌 자기 스스로와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 죽음이기에. 극은 우울하지 않다. 당돌하고 솔직한 간난과 선주 자리를 물려받기 위해 간난을 설득할 묘안을 짜내는 세 아들(이길, 신안진, 윤대홍)은 웃음을 자아낸다. 죽음이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살아 있는 이들은 또 이렇게 산다. 이수인 연출가는 여백을 둔 공간 구성과 서정적인 연주, 마임(이두성)의 정갈한 동작으로 메시지를 단아하게 증폭시킨다. 놓치지 말아야 할 공연 목록에 넣고 싶은 작품이다. ★★★★(★5개 만점). 19일까지, 3만 원. 02-742-7563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7시간. 연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1, 2부(각 3시간 30분)를 합친 공연 시간이다. 압도적인 스케일과 정동환 김태훈 지현준 등 쟁쟁한 배우들의 출연으로 화제가 됐다. 뚜껑을 열어본 결과는 합격점이다. 각색도 함께한 나진환 연출가(극단 피악 대표)는 친부 살해를 소재로 인간의 탐욕과 죄의식 등을 다각도로 비추며 인간 존재와 신의 의미를 깊이 고찰한 원작의 핵심을 정연하게 추려내 안정감 있게 연출했다. 배우들의 명품 연기는 무대를 한껏 달군다. 도스토옙스키가 작품을 설명하는 극중극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도스토옙스키와 대심문관, 식객 등 1인 다역을 맡은 정동환은 시선을 사로잡는다. 1부의 하이라이트인 ‘대심문관’에서 인간의 자유 의지와 본성, 신의 의도 등에 대한 의문과 주장을 그리스도에게 쏟아낼 때는 집중력 높은 연기로 깊은 내공을 확인시켜 줬다. 2부에서 탐욕과 파괴 본능을 상징하는 식객으로 분해 인간의 어두운 내면을 환기시키고 조롱해, 보는 이마저 마음의 소용돌이를 일으키게 만든다. 김태훈은 방탕하지만 솔직하고 진실함을 지닌 장남 드미트리를 격정적으로 그리며 1, 2부를 꽉 채운다. 이성만을 신뢰하며 마음의 벽을 단단히 치지만 욕망과 죄의식이 터져 나오며 정신분열을 일으키는 차남 이반 역을 온몸으로 처절하게 연기하는 지현준은 2부에서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낸다. 스메르쟈코프 역의 이기돈도 주목해야 한다. 그는 악마적 본성을 드러내며 이반에게 죄의식을 교묘히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소름 끼치게 소화했다. 긴 호흡의 대사를 통해 주제를 찬찬히 음미하고 싶다면 1부를, 역동적이고 드라마틱한 무대를 원한다면 2부를 추천한다. 19일까지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3만∼6만 원. 02-765-1776 ★★★☆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정동극장이 외국인 단체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상설 전통공연에서 벗어나 국내 관객들의 눈길을 끌 만한 다양한 장르가 융합된 전통 기반 창작공연을 선보인다. 손상원 정동극장장은 지난달 28일 서울 중구 정동극장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외국인이 언제든 정동극장에 오면 한국 전통 공연을 볼 수 있게 하고, 국내 관객도 전통 문화를 쉽고 친근하게 느낄 수 있도록 다양한 공연을 기획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한국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 가운데 절반 이상이 개별 관광객이기 때문에 한국 문화를 즐기는 방법이나 콘텐츠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를 위해 여러 형태의 전통 공연을 만드는 ‘창작ing’ 사업을 신설했다. 판소리 ‘적벽가’를 현대적으로 해석해 뮤지컬, 춤과 결합한 ‘적벽’(26일까지)이 이 사업을 통해 탄생했다. 지난해 ‘적벽무’란 제목으로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에서 대학생 뮤지컬 부문 우수상 등을 받은 작품을 다듬고 규모를 키웠다. ‘적벽’은 고수 1명과 소리꾼 1명이 펼치는 판소리의 기존 형식에서 벗어나 판소리 합창과 군무를 통해 웅장함을 강조했다. 11, 12월에도 창작 신작들을 선보일 예정이다. 기존 상설 공연의 일환으로, 한국 무용을 기반으로 만든 ‘련, 다시 피는 꽃’은 다음 달 6일부터 10월 29일까지 무대에 오른다. 극장 마당에 있는 카페와 레스토랑은 리모델링해 젊은 예술가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창작 공간인 ‘정동마루’로 바꾼다. ‘정동마루’ 개관을 기념해 ‘춘향가’ ‘심청가’ 등을 새롭게 해석한 작품들을 다음 달 공연한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서울 종로구 대학로 학전블루소극장 앞에는 가수 김광석(1964∼1996)이 기타를 치는 모습의 노래비가 있다. 그가 1995년 이 소극장에서 콘서트 1000회를 맞이한 것을 기념해 김광석추모사업회에서 세웠다. 얼마 전 노래비 앞에 놓인 소주 한 병을 봤다. 그와 소주 한 잔 기울이고 싶은 마음을 담아 누군가가 놓아둔 것이리라. ‘영원한 가객’이 부른 노래는 뮤지컬 ‘그날들’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 여름, 동물원’ 등으로 만들어졌다. 최근 막을 내린 ‘그날들’은 미스터리한 사건에 절도 있는 군무가 어우러진 작품이다. 다음 달 대구에서 무대에 오르는 ‘바람이…’는 그의 목소리를 빼닮은 배우가 통기타와 하모니카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른다. 시간이 되돌아간 듯 아련함이 밀려든다. 깊이 있는 음악으로 호평받은 ‘그 여름…’은 연말에 다시 공연될 예정이다. 푸르른 젊음 그대로 멈춘 그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다. 노래비 옆 나뭇가지는 앙상했지만 그는 추워 보이지 않았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발가벗은 세 살짜리 남자아이가 젓가락으로 냄비를 두드리고 옹알거리며 온 동네를 돌아다녔다. 사람들은 깔깔깔 웃고 난리가 났다. 운명이었을까. 아이는 넌버벌 퍼포먼스 ‘난타’에 20년간 출연하며 냄비, 도마, 프라이팬 등을 두드리고 있다. 올해로 20주년을 맞은 난타의 탄생부터 지금까지 무대를 지키고 있는 배우 김문수(52)다. 그는 8년간 헤드 셰프 역을 맡은 후 12년째 매니저 역을 하고 있다. 서울 중구 명동난타극장에서 지난달 28일 그를 만났다. 그는 “송승환 PMC프러덕션 회장과 작품을 만들 때부터 오래갈 것이라 예감했다. 그만큼 힘과 매력이 있는 작품이다”며 빙그레 웃었다. 그가 한 행사장에서 망가진 냉장고와 청소기, 양동이 등을 두드리며 공연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송 회장이 찾아오면서 인연이 시작됐다. 당시 송 회장은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던 중이었다. 김덕수 사물놀이패 단원 등도 합류해 연구한 끝에 1997년 10월 탄생한 ‘옥동자’ 난타는 55개국에서 공연됐다. 현재 서울 명동, 충정로, 홍대와 제주를 비롯해 중국 광저우, 태국 방콕까지 6곳의 전용극장에서 상설 공연 중이다. 20주년을 맞아 전용공연장(659석)과 객실 204개를 갖춘 ‘호텔난타제주’(지하 2층, 지상 5층)가 한라산 인근에 17일 문을 연다. 가히 ‘난타 왕국’이라 부를 만하다. 배우 류승룡, 김원해 등이 난타 출신이다. 그는 20년간 단 한 번도 공연을 펑크 낸 적이 없다. “연극을 할 때 선배들에게서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무대에 서야 한다’고 배웠어요. 그 신념을 지키는 건 제 자신을 지키는 일이기도 해요. 난타 배우 중 최고령이지만 수영, 걷기를 꾸준히 해서 체력은 짱짱하답니다. 하하.” 이런 그에게 송 회장은 20주년 기념행사 때 순금 칼이 도마에 세로로 박힌 기념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관객들이 웃으면 뜨거운 기운이 막 솟구쳐요. 막이 내릴 때면 매번 울컥해요.” 일주일에 많게는 14회가량 무대에 오른 적도 있지만 요즘은 4, 5회 공연한다. 사건도 많았다. 칼을 자유자재로 휘두르고 두드리는 고난도 기술을 구사하다 손이 베여 세 번이나 수술을 받았고, 칼날 조각이 오른쪽 눈썹에 튀어 꿰매기도 했다. “수프 통을 엎어 무대 전체에 수프가 좍 쏟아진 적도 있었어요. 헤드 셰프 역을 할 때였는데, 공연의 일부인 것처럼 셰프 역 배우들에게 화를 내며 닦으라고 지시해 같이 바닥을 닦은 후 공연했죠.” 영국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벨기에로 유럽 투어를 처음 나갔을 때 하루 공연하고 이동하는 일정이 이어져 군대보다 더 힘들었단다. 하지만 잊지 못할 벅찬 감격을 맛봤다. “네덜란드에서 50대 현지 여성이 엔딩 때 머플러를 손에 쥐고 마구 흔드는 모습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어요. 온몸에 소름이 돋더라고요.” 그는 첫 공연 때 썼던 상모(농악대가 쓰는 모자)를 수선해 지금도 쓰고 있다. 상모를 볼 때마다 20년간의 기억이 떠오른다. 무대에 설 때마다 늘 새롭단다. 싱글인 그는 “난타는 내 인생의 동반자”라며 눈을 찡긋거렸다.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동아연극상의 새 심사위원이 위촉됐다. 동아일보는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사옥에서 3일 심사위원 위촉장 전달식을 열었다. 심사위원은 윤광진 용인대 연극학과 교수(63), 허순자 서울예술대 연극과 교수(63), 박근형 한국예술종합학교 연출과 교수(54·극단 골목길 연출가), 최용훈 청운대 뮤지컬학과 교수(54·극단 작은신화 대표), 이경미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학과 겸임교수(54), 김태훈 세종대 영화예술학과 교수(51), 임일진 인천대 공연예술학과 교수(49) 등 7명으로 구성됐다. 심사위원장은 윤 교수가 맡았다. 윤 심사위원장은 “연극계가 갈수록 다양하고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하고 있다. 동아연극상의 권위에 걸맞게 우리나라 연극이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을 모색하며 신선하고 역동적인 에너지와 변화 등을 놓치지 않고 수용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심사위원에 대해서는 3년 임기제를 도입했으며 연임 가능하다. 간사제도도 신설해 황승경 국제예술기획 대표(41)가 간사를 맡았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이혜영의, 이혜영에 의한, 이혜영을 위한’ 작품이었다.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메디아’는 이 씨의 존재감이 압도적이다. 그는 사랑을 위해 조국까지 버렸지만 남편 이아손(하동준)이 크레온 왕(박완규)의 딸과 결혼하기로 하자 광기 어린 분노에 휩싸인 메디아를 연기하며 특유의 센 에너지를 뜨겁게 분출한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암사자 같다. 고통, 절망으로 점철된 상황에서도 이아손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여린 내면을 드러내는가 하면 고혹적인 자태로 유혹한다. 그럼에도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침착하려 애쓰며 처참한 복수를 계획한 후 하나씩 차례로 실행할 때는 지독할 정도로 차갑다. 두 아들을 죽이기 전 고뇌하는 모정을 절절하게 토해내는 등 극한의 감정들을 자유자재로 뿜어내며 원숙한 연기력을 입증해 보였다. 메디아의 감정을 대변하거나 때로 동정하고 비난하는 코러스는 극의 메시지를 압축적으로 표현한다. 메디아와 두 아들에게 더 좋은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공주와 결혼하는 것이라며 오히려 역정을 내는 이아손의 행동은 “인간이 가장 사랑하는 건 자기 자신”이라는 말로 설명된다. 하지만 극은 메디아가 두 아들을 죽이며 정점을 향해 치닫는 순간 힘없이 무너지며 서둘러 끝을 맺는다. 치를 떠는 이아손을 향해 메디아가 죽기 전 외친 한마디 “속상해?”는 극을 떠받치기에는 너무 가볍다. 남명렬(아이게우스 역) 등 관록 있는 남자 배우들의 비중이 작아 이 씨에게 지나치게 기댄 구성도 아쉽다. 4월 2일까지, 2만∼5만 원, 1644-2003. ★★★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진도 씻김굿, 동해안 별신굿, 제주도 무혼굿이 녹아든 연극을 무대에서 만날 수 있다. 연희단거리패는 굿을 소재로 만든 연극인 ‘씻금’ ‘오구’ ‘초혼’을 차례로 공연하는 ‘굿과 연극’ 기획전을 서울 종로구 창경궁로 30스튜디오에서 3월 1일부터 시작한다. 대본 구성과 연출은 모두 이윤택 연출가가 맡았다. ‘씻금’(3월 1∼12일)은 ‘씻김’의 진도 사투리다. 주인공 순례의 죽음을 시작으로 그의 가족사가 펼쳐지며 진도 앞바다에 빠져 죽은 여러 넋이 등장한다. 일제강점기, 광복 이후 소용돌이, 외환위기를 거쳐 세월호 사건까지 한국 근현대사와 개인사가 연결된다. 삶과 죽음, 개인과 역사가 제의를 통해 만나고 화해한다. 육자배기, 흥그레 타령, 진도 아리랑 등 남도소리 미학을 맛볼 수 있다. 진도 씻김굿의 마지막 당골(남도 지역 세습무)인 고 채정례 선생이 음악 부분을 직접 지도했고 김미숙이 출연한다. ‘오구’(3월 16일∼4월 2일)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재산 싸움을 벌이는 자식들의 이야기를 주축으로 죽음의 두려움과 슬픔을 해학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풍어를 기원하는 동해안 별신굿(정식 명칭은 동해안 풍어제)이 등장한다. 강부자가 팔순 노모로 출연하기도 했다. 1989년 초연 당시 20대의 나이에 노모를 연기했던 남미정이 이번 무대에 선다. 제주도민들이 근현대에 겪은 수난을 그린 ‘초혼’(4월 20일∼5월 7일)에는 바다에 빠져 죽은 사람의 넋을 건져내 위로하고 저승으로 보내는 제주도 무혼굿이 나온다. 3대에 걸쳐 벌어진 한 집안의 수난사를 통해 일제에 대한 해녀들의 저항 운동, 제주도4·3사건 등의 역사가 펼쳐진다. 원한을 품은 이들이 한을 풀고 용서하는 과정을 그렸다. 김소희 김미숙 윤정섭 등이 극을 이끈다. 이 연출가는 “최순실의 국정 농단 사태로 우리 문화 예술의 원형인 굿이 혹세무민의 수단으로 오해받는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시리즈를 기획했다”며 “굿이 얼마나 다양한 스타일로 동시대의 현실을 반영하는지 널리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각 3만 원. 02-766-9831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우아, 정말 좋으시겠어요!” 꽤 오래전, 해외 봉사 취재에서 만난 약사와 통성명을 하다 무심코 튀어나온 말이었다. 전문 분야가 확실한 데다 자기 소유의 약국을 갖고 있으니 매우 탄탄한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한 말이었다. 그러고는 30분 넘게 ‘약사의 애환’에 대해 들어야 했다. 그는 혼자 약국을 운영하느라 화장실을 제때 가기 힘들고 점심도 10분 만에 후다닥 먹기 일쑤라고 했다. 다른 약국과 박카스 가격을 비교하며 “여기는 왜 다른 데보다 비싸게 받느냐”고 항의하는 손님이 적지 않아 애를 먹는다고 했다. 자신을 의료인이 아니라 단순히 약을 ‘건네주는’ 사람으로 취급할 때면 자괴감을 느끼게 된다고 토로했다. 그의 말을 들으며 세상에 애환 없는 직업은 없다는 사실을 또 한번 실감하게 됐다.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부모가 자기의 일을 자녀에게 권한다면 그건 좋은 직업이라고. 직접 그 일을 해 본 후 자녀에게도 같은 길을 걸으라고 말할 정도로 자신 있다면 얼마나 장점이 많은 걸까. 그 기준이 세속적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말이다. 연극배우는 고되고 힘든 대표적인 직업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연극을 하다 방송, 영화계로 진출해 스타가 된 이들이 인터뷰나 토크쇼 등에서 돈에 쪼들렸던 연극배우 시절을 회상하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마음이 찡해질 때가 종종 있다. 최근 연극배우들을 만나면서 일의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 영화 ‘부산행’, 드라마 ‘공항 가는 길’ 등에도 출연한 유명 연극배우 예수정 씨는 “대개 삶을 찬찬히 들여다볼 시간이 없는데, 나는 한 작품 한 작품 할 때마다 인생에 대해 공부하게 된다. 연극이 나를 학습시키고 삶을 풍부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연희단거리패 대표인 배우 김소희 씨는 “연극 덕분에 고여 있지 않고 늘 깨어 있게 된다”고 했다. 김 씨는 “연극은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에게도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게 가능하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몸만 건강하면 계속 연기할 수 있기 때문에 배우는 말년이 좋은 직업이다”라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조씨 고아, 복수의 씨앗’에 출연한 이형훈 씨도 매번 작품을 할 때마다 새로운 이야기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자극을 많이 받는다고 했다. 그래서 채우고 다듬어야 할 부분을 찾아내고 이를 완성하기 위해 애쓰게 된단다. 이들이 ‘좋은 직업’으로 꼽은 기준은 성장이었다. 이 일을 계속하면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보다 좀 더 나아질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이 엿보였다. 돈, 명예, 안정성, 성취감…. 좋은 직업을 꼽는 기준은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많은 것을 얻을수록 좋겠지만, 그중에서도 ‘성장’은 정신을 살찌우는 요소다. 연극배우들은 물질적으로는 넉넉하지 않지만 정신이 윤택해지는 일을 하고 있음을 확인시켜 줬다. 이들이 차곡차곡 쌓아올린 정신적 풍요로움은 객석으로도 고스란히 전해질 것이다. 손효림 문화부 기자 aryssong@donga.com}

“어머, 케빈 코스트너다! 진짜 멋있었는데….” “엊그제 같은데, 세월 정말 빠르다.” 22일 뮤지컬 ‘보디가드’가 공연 중인 서울 강남구 LG아트센터의 객석 2층 로비에서 50대 여성 두 명이 연신 감탄사를 터뜨렸다. 1992년 개봉한 영화 ‘보디가드’의 포스터와 그해 신문 기사들이 전시돼 있었기 때문이다. 한쪽에서는 다방커피와 꿀생강차를 무료로 주는 일일찻집이 열리고 있었다. ‘보디가드’ 제작사인 CJ E&M의 박종환 공연홍보팀장은 “50대 이상 관객을 위해 한 달에 한 번 행사를 마련했는데 호응이 뜨겁다”고 말했다. 5060 관객을 확보하기 위해 공연계가 안간힘을 쓰고 있다. 20, 30대만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들 세대를 적극 공략하고 나선 것이다. 이날 ‘보디가드’를 보러 온 50대 이상 관객들은 다방커피, 생강차를 마시고 옛 신문을 보며 향수에 젖었다. 고교 동창 8명과 함께 온 송재철 씨(65)는 “오랜만에 생강차를 마시니 몸도 마음도 따뜻해진다”고 말했다. 성당 지인 6명과 온 사공애 씨(57)는 “애들 키우느라 눈 돌릴 틈 없이 살았던 때가 떠오른다”며 미소 지었다. 팝의 거장 닐 세다카의 ‘One way ticket’ ‘You mean everything to me’ 등 추억의 노래를 엮어 만든 뮤지컬 ‘오!캐롤’(서울 디큐브아트센터)은 LP판으로 가득 찬 레코드 가게를 배경으로 주인공인 남경주가 등장하는 영상 광고를 내보내며 향수를 자극한다. 이달 초 1차 공연을 마친 후 28일부터 2차 공연을 시작하는 이 작품은 동창회, 계모임을 하는 관객을 겨냥해 전화로 예매하면 5∼19명은 30%를, 20명 이상은 40%를 각각 할인해 준다. 1차 공연 때는 한정식 프랜차이즈 식당에 공연 안내문을 붙이고 추첨을 통해 관람권을 증정했다. 지난달 막을 내린 뮤지컬 ‘그 여름, 동물원’은 북한산, 관악산, 청계산 등의 입구 18곳에 ‘고 김광석과 그룹 동물원의 실화’라는 안내 문구를 쓴 현수막을 달았다. 홍보 담당자는 “50대 이상에서는 오프라인 마케팅과 입소문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과태료를 낼 각오를 하고 이분들이 자주 다니는 등산로를 공략했다”고 말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 관계자는 “2014년에 비해 관객이 3배로 늘었고 객석 대부분을 중장년층이 채웠다”며 “올해 말 공연도 확정됐다”고 설명했다. 예술경영지원센터와 신한카드에 따르면 최근 1년간의 공연 관람객을 분석한 결과 상위 5%의 ‘큰손’은 30대 초반 여성(8.1%)에 이어 50대 남성(8%)이 뒤를 이었다. 이어 40대 초반 여성(7.8%)과 50대 여성(7.5%) 순이었다. 김현진 예술경영지원센터 정보분석팀장은 “5060세대는 시간은 물론이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문화생활을 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공연을 관람하는 숫자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며 “1회 결제 금액도 젊은층보다 많기 때문에 5060세대를 겨냥한 마케팅은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어머, 케빈 코스트너다! 진짜 멋있었는데….” “엊그제 같은데, 세월 정말 빠르다.” 22일 뮤지컬 ‘보디가드’가 공연 중인 서울 강남구 LG아트센터의 객석 2층 로비에서 50대 여성 두 명이 연신 감탄사를 터뜨렸다. 1992년 개봉한 영화 ‘보디가드’의 포스터와 그 해 신문기사들이 전시돼 있었기 때문이다. 한쪽에서는 다방커피와 꿀생강차를 무료로 주는 일일찻집이 열리고 있었다. ‘보디가드’ 제작사인 CJ E&M의 박종환 공연홍보팀장은 “50대 이상 관객을 위해 한 달에 한 번 행사를 마련했는데 호응이 뜨겁다”고 말했다. 5060 관객을 확보하기 위해 공연계가 안간힘을 쓰고 있다. 20, 30대만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들 세대를 적극 공략하고 나선 것이다. 이 날 ‘보디가드’를 보러온 50대 이상 관객들은 다방커피, 생강차를 마시고 옛 신문을 보며 향수에 젖었다. 고교 동창 8명과 함께 온 송재철 씨(65)는 “오랜만에 생강차를 마시니 몸도 마음도 따뜻해진다”고 말했다. 성당 지인 6명과 온 사공애 씨(57)는 “애들 키우느라 눈 돌릴 틈 없이 살았던 때가 떠오른다”며 미소 지었다. 팝의 거장 닐 세다카의 ‘One way ticket’, ‘You mean everything to me’ 등 추억의 노래를 엮어 만든 뮤지컬 ‘오!캐롤’(서울 디큐브아트센터)은 LP판으로 가득 찬 레코드 가게를 배경으로 주인공인 남경주가 등장하는 영상 광고를 내보내며 향수를 자극한다. 이달 초 1차 공연을 마친 후 28일부터 2차 공연을 시작하는 이 작품은 동창회, 계모임을 하는 관객을 겨냥해 전화로 예매하면 5~19명은 30%를, 20명 이상은 40%를 각각 할인해준다. 1차 공연 때는 한정식 프랜차이즈 식당에 공연 안내문을 붙이고 추첨을 통해 관람권을 증정했다. 지난달 막을 내린 뮤지컬 ‘그 여름, 동물원’은 북한산, 관악산, 청계산 등의 입구 18곳에 ‘고 김광석과 그룹 동물원의 실화’라는 안내 문구를 쓴 현수막을 달았다. 홍보담당자는 “50대 이상에서는 오프라인 마케팅과 입소문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과태료를 낼 각오를 하고 이분들이 자주 다니는 등산로를 공략했다”고 말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 관계자는 “2014년에 비해 관객이 3배로 늘었고 객석 대부분을 중장년층이 채웠다”며 “올해 연말 공연도 확정됐다”고 설명했다. 예술경영센터와 신한카드에 따르면 최근 1년간의 공연 관람객을 분석한 결과 상위 5%의 ‘큰 손’은 30대 초반 여성(8.1%)에 이어 50대 남성(8%)이 뒤를 이었다. 이어 40대 초반 여성(7.8%)과 50대 여성(7.5%) 순이었다. 김현진 예술경영지원센터 정보분석팀장은 “5060세대는 시간은 물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문화생활을 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공연을 관람하는 숫자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며 “1회 결제금액도 젊은층보다 많기 때문에 5060세대를 겨냥한 마케팅은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삶의 출구가 막힌 이들에게 희망은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까. 현재 공연 중인 연극 ‘밑바닥에서’는 막심 고리키 원작으로 하루하루 연명하기도 벅찬 부랑자들에게 어느 날 다가온 희망과 그에 따른 지독한 파장을 격정적이면서도 처연하게 그렸다. 시궁창을 떠올리게 만드는 싸구려 여인숙에는 바닥까지 내려간 인생들이 모여 있다. 한때 지식인이었던 사기꾼, 도둑, 아픈 아내를 둔 일거리 없는 수리공, 몰락한 귀족…. 어느 날 이들 앞에 노인 루카가 나타난다. 루카는 상처와 소망을 숨기고 살아가던 사람들 한 명 한 명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조금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라고 다독인다. 미심쩍은 눈길로 바라보던 사람들은 차츰 그의 말을 마음에 새기며 꿈꾸던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기 시작한다. 그즈음 루카는 사라진다. 이후 전보다 더한 지옥이 펼쳐진다. 꿈을 향해 나아가려던 사람들은 그곳에 공기처럼 존재하던 탐욕과 이기심 앞에 처참하게 짓밟힌다. 아귀다툼을 벌이고, 악다구니하며 울부짖는 이들은 묻는다. 비빌 언덕은 고사하고 마음 편히 기댈 어깨 하나 없는 이들에게 던져진 루카의 말은 빛이었을까, 치명적인 독(毒)이었을까. 배우들은 농익은 연기로 바닥 인생을 실감나게 그리며 관객을 수시로 들었다 놓는다. 희망의 역설과 존재의 이유를 곱씹어 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정상훈 강성진 김아영 김수로 등 출연. 3월 12일까지, 서울 종로구 드림아트센터 2관 더블케이씨어터, 3만5000∼4만 원, 02-2088-0923. ★★★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박명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이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태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박 위원장과 문예위 임직원들은 23일 사과문을 내고 “부당한 간섭을 막아냈어야 하지만 독립성을 확보하지 못한 기관으로서 힘이 없었고 용기가 부족했다”며 “문예진흥기금 사업 추진 과정에서 발생한 지원 배제 사태로 상처 받은 예술가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밝혔다. 문예위는 특검 수사에 임했고 감사원 감사도 진행 중이라 사과가 늦어졌다며 책임져야 할 일에 대해서는 책임지겠다고 덧붙였다. 문예위는 “사태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심사위원 선정방식을 개선하고 옴부즈맨 제도를 신설했다”며 “복원해야 할 사업들을 다시 세우고 예산 확충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문화예술계의 의견을 수렴해 자율성을 확립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매년 2000억 원 가량의 문예진흥기금을 집행하는 문예위는 블랙리스트에 오른 문화예술인들을 지원 대상에서 배제하는 역할을 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나무 계단과 단상, 사다리로 이뤄진 간결한 무대는 손필드 저택, 로우드 자선학교, 숲길 등으로 끝없이 변화한다. 사각 프레임과 등불을 손에 든 배우들은 활짝 열린 창문과 어스름한 저택을 순식간에 표현해낸다. 제인 에어가 외숙모에게 학대받고, 자선학교를 다니며 손필드 저택에서 로체스터와 사랑에 빠지는 그 모든 과정이 광활한 공간에서 펼쳐지는 듯하다. 19일 서울 중구 장충단로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영상 화면으로 만난 영국 국립극장(NT)의 ‘제인 에어’는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와 상상력을 한껏 자극하는 연출이 결합해 한 편의 대서사시를 눈부시게 그려 냈다. 영국 국립극장에서 화제가 된 연극을 촬영해 각국 공연장이나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NT Live 프로그램이었다. 영화 ‘미스터 홈즈’, ‘패딩턴’에 출연한 매들린 워럴은 제인 에어 역을 맡아 탄탄한 연기의 진수를 보여준다. 갓 태어난 아기의 울음소리를 내는 것을 시작으로 자존심 강한 소녀, 인내와 따뜻한 마음으로 아이를 가르치는 가정교사, 신분의 차이에도 주눅 들지 않고 사랑을 표현하는 당찬 여성을 매력적으로 그려 낸다. 여러 역할을 매끄럽게 소화하는 배우들의 다채로운 연기는 보는 즐거움을 더한다. 중간중간 등장해 제인의 심정과 상황을 노래하는 배우의 청아한 음색은 가슴 깊은 곳을 파고든다. 무대 위에 자리 잡은 피아노, 드럼, 베이스의 재즈 연주는 극의 흐름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몰입도를 높인다. 인터미션을 제외하고 3시간 10분에 이르는 공연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버린다. 마법 같은 시간이었다. 아주 오래전 읽었던 ‘제인 에어’를 다시 펼쳐보고 싶어졌다. 24, 25일 1만5000원. 02-2280-4114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