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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난당했던 조선불화 ‘송광사 오불도(五佛圖·사진)’가 8일 우리나라로 돌아온다. 문화재청과 조계종은 “미국 포틀랜드박물관에 소장된 오불도를 최근 넘겨받았으며 내일 오전 인천공항을 통해 들여온다”고 6일 밝혔다. 오불도는 서울 종로구 불교중앙박물관을 거쳐 원래 자리인 전남 순천시 송광사로 옮겨질 예정이다. 오불도는 가로 117cm, 세로 157cm 크기의 1725년 작품으로 오십삼불도 중 하나다. 송광사 불조전에 걸린 오십삼불도는 칠불도 1폭, 구불도 2폭, 십사불도 2폭, 오불도 2폭으로 구성됐다. 나머지 오불도 한 폭은 여전히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앞서 미국인 로버트 마티엘리 씨(86)가 1970년대 초반 서울 인사동 골동품상에서 오불도를 구입했고 2014년 포틀랜드박물관에 기증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영건(營建·건물을 짓는 것)의 공역이 시작된 지 이미 3년이 됐다. 지방에서 잡아 올린 석수(石手)들은 도망치는 습속이 갈수록 심하다. 샅샅이 찾아내 잡아와 막중한 대공역에 사단이 생기는 폐해가 미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1867년 7월) 1865∼1867년 경복궁 중건 당시 공사 현장에서 일어난 사건을 영건도감(營建都監·궁궐 공사를 관장한 임시관청) 관리들이 매일 기록한 ‘영건일감(營建日鑒)’ 중 일부다. 조선시대 궁궐은 유교 통치철학이 구현되는 상징물로 그 시대 최고 장인들이 동원됐다. 흥선대원군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원납전을 거두고 당백전을 발행하는 등 재정악화를 초래했다. 현장 석수들은 심한 노역과 임금 체불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가기 일쑤였다. 영건일감을 통해 경복궁 중건이 불러온 흉흉한 민심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국립고궁박물관(관장 김연수)은 ‘영건, 조선 궁궐을 짓다’ 특별전에서 영건일감 등 궁궐 건축 관련 유물 180여 점을 선보이고 있다. 궁궐 건축 전반을 속속들이 알 수 있는 ‘창덕궁영건도감의궤(昌德宮營建都監儀軌·보물 제1901-2호)’와 경희궁을 그린 ‘서궐도안(西闕圖案·보물 제1534호)’, 덕수궁 중건공사를 정리한 문서인 ‘장역기철(匠役記綴)’ 등을 전시했다. 이 밖에 경복궁 근정전의 도면과 사진, 축소 모형 등도 볼 수 있다. 내년 2월 19일까지. 02-3701-7643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6명이 숨진 2009년 1월 19일 용산 참사는 재개발에 따른 철거에서 비롯됐다. 우리나라에서 철거민 시위는 민주화 시위와 더불어 매우 격렬하게 진행됐으며, 철거 대책 개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사람에게 집은 인간다움을 형성하는 기본권 중 기본권이기 때문이다. 미국 하버드대 사회학과 교수인 저자는 강제 퇴거가 빈곤층에 미치는 영향을 매우 실증적으로 규명해 냈다. 복잡한 통계와 도표로 현상을 분석하는 보통의 강단 학자들과 달리 그는 밀워키 지역 빈민층 속으로 직접 들어가 1년 넘게 생활했다. 일종의 참여 관찰 기법을 통해 퇴거당한 가족의 실상과 심리를 디테일하게 포착했다. 저자에 따르면 미국 빈곤층 가정은 소득의 절반 이상을 주거비에 쓰고 있다. 이들 가정의 넷 중 하나는 주택 임차료와 공과금을 내는 데 소득의 70% 이상을 지출한다. 아이들에 대한 교육비나 여가 비용에는 돈을 쓸 여지가 거의 없는 셈이다. 특히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부동산 값 폭락의 여파로 강제 퇴거 조치를 당하는 가정이 크게 늘었다. 안타까운 건 갈수록 퇴거에 대한 공동체의 연대감이 희미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1930년대만 해도 퇴거 집행관에 맞서 수천 명의 이웃이 힘을 합쳐 폭력까지 행사하는 게 다반사였다. 그러나 이제는 퇴거 통보를 받은 당사자들마저 어깨를 늘어뜨린 채 조용히 거리로 나서고 있다. 빈곤의 책임이 오로지 개인에게만 전가되고 빈민층 스스로 위축된 심리를 갖게 된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대다수 빈곤층은 시혜만 바라는 빈대 같은 존재가 아니라 자신만의 꿈을 갖고 사회에 기여하기를 원하는 일원임을 강조하고 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광복을 맞은 우리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어떤 존재인가. 혹자 주장대로 국가의 3요소(국민, 주권, 영토)를 온전히 갖추지 못한, 그래서 대한민국 역사로 편입하기는 애매한 임시조직에 불과한가. 아니면 3·1운동을 위시한 수많은 유혈투쟁이 낳은 대한민국과 헌법 정신의 시원(始原)인가. 저자는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 분야의 권위자로 꼽힌다. 독립기념관 산하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을 지냈고, 독립유공자를 선정하는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임정의 역할과 위상을 내세워 건국절을 반대하는 입장이다. 건국절과 관련한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임정 연구서로는 일독을 권할만한 책이다. 편지와 공문서, 신문보도 등 풍부한 당대 사료를 통해 김구와 이승만, 안창호, 홍진, 박은식 등 임정 핵심 인사 10명의 행적을 입체적으로 그리고 있다. 뜨거운 감자랄 수 있는 이승만 평가도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중립적으로 기술했다. 이 중 안창호와 이승만의 미묘한 관계가 눈길을 끈다. 개신교 신앙과 미국 체류 경험을 공유한 도산과 우남은 초기에는 서로 도왔다. 그러나 이승만이 임정 대통령에 선임되고도 상하이로 오지 않고 미국에서 원거리 정치에 나서면서 관계가 틀어진다. 상하이에 있던 이승만 측 인사는 “도산이 미주의 독립운동 조직을 자신의 수중에 넣으려 한다”는 왜곡된 보고로 우남의 중국행을 만류했다. 그때부터 이승만은 안창호를 의심하게 된다. 그러나 안창호는 임정의 앞날을 먼저 생각했다. 미국에서 사조직을 만들고 재정까지 틀어쥐려고 한다는 이유로 이승만에 대한 탄핵 요구가 제기됐을 때 도산은 “임정의 분열상이 알려지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며 말렸다. 내부 분열을 극복하고 임정을 중심으로 좌우 통합을 이룬 백범의 업적도 비슷한 맥락이다. 임정의 통합 정신을 오늘날에도 되새겨 봐야 하는 이유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중국이나 몽골은 물론이고 멀리 이슬람권에서 건너온 외국인들이 고려에 성공적으로 정착했으며, 쌍화점 같은 고려가요에 이들의 자취가 남아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개방적인 고려의 다양성이 여러 지역에서 온 외국인들의 이주를 가능케 했다는 것이다. 김철웅 단국대 교양학부 교수는 단국대 동양학연구원이 최근 개최한 ‘한국사 속의 외래인, 이주와 삶’ 학술회의에서 ‘고려시대 외국인의 이주와 정착’ 논문을 발표했다. 김 교수는 그동안 역사학계가 잘 다루지 않은 고려 귀화 외국인들의 삶을 파헤쳤다. 논문에 따르면 10세기 고려 전기에만 여진족은 480회, 송나라 사람은 200회 이상 한반도를 왕래한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고려와 송나라는 200년에 걸쳐 총 90차례(고려→송 60차례, 송→고려 30차례)의 사신 교환이 있었는데, 송나라 상인이 고려에 입국한 횟수는 이보다 많은 130차례에 달했다. 양국의 공식 외교관계보다 사무역의 빈도가 훨씬 높았던 셈이다. 이에 따라 고려로 귀화한 송나라 상인들도 적지 않았다. 흥미로운 것은 외국인의 출신지나 신분에 따라 고려왕조의 처우와 태도가 달랐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문사(文士)나 의료인 등 송나라 지식인들에게 고려는 집과 여인을 제공하며 귀화를 적극 유도했다. 이들의 전문성과 기술을 국가 통치에 활용하려는 시도였다. 고려사에는 서필이라는 관료가 “귀화 한인(漢人)들에게 집을 잃은 신하들이 많다”며 광종에게 항의했다는 대목이 나올 정도다. 심지어 향수병 때문에 본국으로 돌아가려 하는 송나라 사람들의 귀국을 왕이 나서 막기도 했다. 고려에 주저앉은 중국인들은 고려인과 혼인해 가정을 이뤘는데 고려속요 ‘예성강곡’은 귀화한 송나라 상인과 관련이 깊은 작품이다. 반면 거란이나 여진족들에 대해서는 가급적 큰 집단을 이루지 못하게 하고, 내륙이 아닌 북쪽 변방에 우선 배치하는 규제 방식을 취했다. 태조 왕건이 후대 왕들에게 남긴 훈요십조에서 거란에 대한 경계를 강조한 것도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요나라에서 피신한 거란인이 계속 늘고 농업 생산력을 높여야 할 필요가 생기면서 거란족의 내륙 거주도 허용했다. 몽골인과 이슬람교도들의 고려 이주는 송나라와 달리 원나라의 고려 지배에 따른 강요로 시작됐다. 고려후기 제주도로 들어가 말을 키운 몽골인을 지칭한 달달목호(達達牧胡)가 대표적이다. 몽골은 삼별초 토벌을 내걸고 제주도를 직할령으로 삼은 뒤 총독(다루가치)을 파견했다. 이들은 군사 목적에서 몽골 말 160필을 제주도로 들여와 키웠다. 원나라의 제국 확장에 기여해 몽골인 다음의 지배계급으로 군림한 이슬람교도(색목인)들도 고려로 들어와 일부는 평양부윤이나 장군이 됐다. 고려가요 쌍화점 중 “쌍화점에 쌍화 사러 갔더니 회회(回回)아비가 내 손목을 잡더이다”라는 가사는 이슬람교도의 고려 정착을 보여준다는 게 김 교수의 주장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삼다도(三多島)인 제주도의 상징이자 끈질긴 생명력의 대명사인 ‘제주 해녀’(사진)가 인류무형문화유산이 됐다. 문화재청은 “30일(현지 시간)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에서 열린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보호협약 정부간위원회에서 ‘제주 해녀문화’가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고 밝혔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19건의 인류무형문화유산을 보유하게 됐다. 무형유산위원회는 제주 해녀문화가 지역의 독특한 문화 정체성을 상징하며, 자연 친화의 방법으로 지속 가능한 환경을 유지한 점, 어로 지식과 기술이 공동체를 통해 전승된 점을 높게 평가했다. 인류무형문화유산 심사기준은 △무형유산 정의를 충족 △문화 다양성과 인류 창의성에 대한 기여 △무형유산 보호를 위한 구체적 조치 △등재 과정에서 공동체의 광범위한 참여 △해당국의 무형유산으로 선(先)등재 등 다섯 가지다. 앞서 올 10월 무형유산위원회 산하 전문가 심사기구가 “제주 해녀문화는 무형유산 심사 기준을 모두 충족한다”며 등재 결정을 권고했다. 우리나라의 인류무형문화유산은 2001년 등재된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을 비롯해 ‘판소리’(2003년) ‘강릉단오제’(2005년) ‘남사당놀이, 강강술래, 영산재, 제주 칠머리당 영등굿, 처용무’(2009년) ‘가곡, 매사냥, 대목장’(2010년) ‘줄타기, 한산 모시짜기, 택견’(2011년) ‘아리랑’(2012년) ‘김장문화’(2013년) ‘농악’(2014년) ‘줄다리기’(2015년) 등이다. 문화재청은 이번 등재를 기념해 ‘제주해녀문화 특별전’을 국립무형유산원에서 5일부터 개최할 예정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1600년 전에 거대한 호수공원이라니….” 2010년 10월 초 충남 연기군 나성리(현 세종시 나성동) 발굴 현장. 밤새 내린 가을비로 유적이 물에 잠겼다는 보고를 듣고 부랴부랴 현장을 찾은 이홍종(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58)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백제시대 도시 유적 한가운데 U자형의 거대한 호수가 주변 언덕 위 집터와 더불어 장관을 이뤘다. 비가 내리기 전에는 한낱 구덩이로밖에 보이지 않던 유구였다. 1.5m 깊이의 호수는 최대 너비 70m, 길이 300m에 이르렀다. 도시 한가운데 자리 잡은 꼴이 마치 현재의 경기 고양시 일산호수공원을 연상시켰다. 출토 양상도 이 구덩이가 도심의 경관용 호수라는 판단을 굳히게 했다. 당초 그는 이곳을 강물 근처 단구(段丘)에 있는 저습지로 보고 목간 같은 쓰레기가 잔뜩 쌓였을 걸로 봤다. 그래서 발굴조사원들에게 “유기물질이 있을 수 있으니 주의하라”고 지시했는데 정작 구덩이 속에서는 토기 조각 몇 점만 나왔다. 이홍종은 “도시의 핵심 경관인 만큼 호수를 깨끗하게 관리한 것 같다”고 말했다. 24일 그와 함께 답사한 나성리 발굴 현장은 행정중심복합도시의 일부로 변한 지 오래였다. 상가건물들이 대거 들어선 가운데 도시유적 위로 아파트를 짓고 있었다. 지금껏 발굴된 백제 유일의 지방도시 유적은 그렇게 사라지고 있었다.○ 도로, 빙고(氷庫) 등 도시 기반시설 즐비 나성리 유적은 백제의 지방 거점도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로마의 경우 폼페이나 헤르쿨라네움 등 여러 지방 도시가 발굴됐지만 우리나라는 발굴로 전모가 드러난 고대 도시유적이 별로 없다. 고고학자들이 지방도시 유적에 관심을 갖는 것은 도성-거점도시-농경취락으로 이어지는 지배구조를 이해하고 수도 이외 지역 귀족, 서민들의 생활상을 규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나성리 유적이 흥미를 끄는 건 넓은 부지에 도로망을 먼저 설치한 뒤 건물을 지은 계획도시라는 점이다. 실제로 도로 유구 안에서 건물터가 깔려 있거나 중복된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나성리에서는 너비 2.5m(측구 제외)의 도로뿐만 아니라 귀족 저택, 토성, 고분, 중앙호수, 창고, 가마터, 빙고, 선착장 등 각종 도시 기반시설이 한꺼번에 발견됐다. 이 거대한 도시유적을 지은 주체가 백제 중앙정부인지 혹은 지방 유력층인지를 놓고 학계 의견은 엇갈린다. 박순발(충남대 교수)은 나성리가 풍납토성의 구조와 흡사한 점을 들어 백제 중앙정부가 건설을 주도한 걸로 본다. 예를 들어 고지형(古地形) 분석 결과 풍납토성과 나성리 모두 토성 주변 수로와 옛 물길을 끌어들여 해자(垓字)를 판 흔적이 발견됐다. 반면 이홍종은 “출토 유물이나 묘제가 백제 중앙과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어 중앙정부의 지원을 받은 지방 유력층이 주도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5세기 백제 중앙의 통치력이 영산강 유역까지 온전히 미치지 못했다는 임영진(전남대 교수)의 주장과 비슷한 맥락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백제 중앙정부에 점차 복속됐으나, 일정 기간 지방 수장들이 반(半)자치를 누렸다는 것이다.○ 첨단 ‘고지형 분석’으로 도시유적 찾아내 사실 나성리 도시유적의 존재는 발굴 5년 전인 2005년 9월 고지형 분석에서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났다. 고지형 분석이란 항공사진과 고지도 등을 통해 유적 조성 당시 옛 지형을 추정해 지하에 묻힌 유적 양상을 파악하는 기법이다. 연사된 항공사진들의 낱장을 비교하면 겹친 부분이 나오기 마련인데, 이를 3차원(3D)으로 재연하면 세부 지형의 높낮이를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오랜 침식, 퇴적으로 사라진 옛 물길(구하도·舊河道)이나 구릉의 위치를 알아내 주거지 유적의 존재 혹은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 이홍종은 고지형 분석을 통해 나성리뿐만 아니라 공주, 논산, 청주에도 백제 도시유적이 묻혀 있을 걸로 예상한다. 재밌는 건 고지형 분석을 통해 규명한 옛 물길을 따라 지진이나 싱크홀이 빈발한다는 사실이다. 아무래도 물길은 암반층이 상대적으로 얇아 지반이 약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 고베 지진 당시 사망자의 97%가 구하도와 습지에 몰려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학계는 5세기에 건립된 나성리 도시유적이 약 100년가량 존속한 뒤 사라진 것으로 보고 있다. 6세기 중반 이후 유물이나 유적이 나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 쇠락의 원인으로는 고구려 남진과 자연재해 등이 거론된다. 이홍종은 “인근 곡창지대인 대평리 유적에서 강물이 범람한 흔적이 발견됐다”며 “홍수로 도시의 식량 기반이 사라진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세종=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

서울 송파구 석촌동에서 최소 10기의 돌무지무덤(적석총)이 연접(連接)된 백제시대 고분군이 발견됐다. 한반도에서 발견된 적석총 가운데 가장 많은 고분이 연접된 형태다. 이와 함께 빈전(殯殿·시신을 입관한 뒤 매장하기 전까지 안치하는 곳)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제의시설도 발견됐다. 한성백제박물관은 “서울 석촌동 고분군을 발굴 조사한 결과 기존 1호분과 2호분 사이에서 10기 이상의 돌무지무덤이 연접된 유구를 확인했다”고 29일 밝혔다. 지표면에 구멍이 뚫리는 싱크홀 현상의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석렬과 유물이 우연히 발견됨에 따라 지난해 10월부터 발굴이 시작됐다. 이 적석총들은 모두 사각형 형태로 가장 규모가 큰 것은 한 변의 길이가 대략 13m 정도 된다. 전체 무덤군의 너비는 최대 40m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인근 석촌동 3호분은 한 변의 길이가 50m로 측정됐는데, 마찬가지로 여러 무덤이 모인 연접분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앞서 석촌동 1호분이 남분과 북분이 서로 연접된 양상이 파악된 바 있다. 발굴팀은 이 적석총들이 북쪽부터 시작해 동쪽, 서쪽, 남쪽 방향으로 확장된 것으로 보고 있다. 석촌동의 연접분은 마한의 흙무지무덤이나 중국 지안(集安)의 고구려 적석총에서도 보이는 구조다. 발굴된 적석총 내부는 지표를 파내고 점토를 다진 뒤 돌을 쌓은 구조다. 적석총 외곽에 딸린 제의시설에서는 금귀고리와 달개 장식, 토기, 철제 낫, 기와, 유리구슬, 동물 뼈 등 30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됐다. 고고학계 일각에서는 기와가 나온 점을 주목해 빈전이었을 가능성을 조심스레 제기하고 있다. 백제의 경우 왕이나 왕비가 죽으면 2년 3개월 동안 시신을 빈전에 모시고 상례를 치른 뒤 매장하는 풍습이 있었다. 지금까지 확인된 백제의 빈전은 충남 공주시 정지산 유적이 유일하다. 이곳은 천도 이후 조성된 것으로 한성백제시대 빈전도 따로 지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발굴단 관계자는 “대규모 적석총의 규모나 출토 유물을 감안할 때 이곳이 한성백제의 왕릉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집필하려거든 학회장직을 그만두라.” 국정 교과서의 선사·고대사 부분을 집필한 최성락 목포대 교수는 지난해 11월 집필 참여소식이 알려지자 고고학회 회원들의 거센 항의에 시달린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소장파 교수는 “국정 교과서 필자 프로필에 고고학회장 직책을 넣지 말라”라는 요구를 하기도 했다. 결국 최 교수는 학회장 임기를 마친 뒤 올 초부터 교과서 집필에 참여했다. 이처럼 국정 교과서 집필을 둘러싼 학계의 반발이 적지 않았다. 이 때문에 국정 교과서 집필은 철저히 비밀리에 진행됐다. 교육부나 국사편찬위원회(국편)에서 분야별 집필진 회의가 따로 열려 필자들도 전체 명단을 알지 못했다. 자신과 함께 일한 분과의 필진만 알 수 있었다. 또 다른 분과의 집필 초고는 국편에서만 열람이 가능했다. 교육부는 “공개 이후에도 언론과의 인터뷰를 자제하라”라는 지침을 필진에게 내린 것으로 확인됐다. 국정 역사교과서 집필진 중 한 명은 28일 현장 검토본 공개 직후 소감을 묻자 깊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는 “참여자가 적어 형편없는 교과서가 쓰일까 봐 주변 만류를 무릅쓰고 용기를 냈다”라며 “하지만 요즘 같은 시국에서는 박근혜 정부의 부역자가 된 것 같아 참담하다”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김상운 sukim@donga.com·조종엽 기자}

28일 공개된 국정 역사교과서 집필진은 현직 대학교수(13명)와 중고교 교사(7명) 등 총 31명으로 구성됐다. 교육부는 이날 필진을 공개하면서 “균형성과 전문성을 고려해 공모와 초빙을 통해 학계 전문가들로 구성했다”고 강조했다. 필진 구성의 핵심기준으로 특정 이념에 치우치지 않는 ‘중립성’과 전공별 권위자라는 ‘전문성’을 든 것이다. 그러나 학계는 일부 필진들이 뉴라이트 혹은 보수 성향의 인사라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현대사 집필을 맡은 나종남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와 김명섭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세계사 분야의 이주영 건국대 명예교수는 ‘건국사관’을 주장한 뉴라이트 계열의 현대사학회 회원들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한 낙성대 경제연구소 소장인 김낙년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현대경제사를 담당했다. 현대사를 집필한 유호열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는 지난달 최순실 게이트와 관련해 “(박근혜) 대통령님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라는 글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려 논란을 일으켰다. 또 학계를 떠난 지 10년 이상씩 된 원로 교수가 많다는 지적도 나왔다. 대표 집필진인 신형식 이화여대 명예교수, 박용운 고려대 명예교수 등은 모두 70대다. 일부 필진은 통사(通史)를 다뤄야 하는 역사교과서의 집필 성격과 맞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다. 한 고대사 전공 교수는 “고대사 집필자 4명 가운데 한 명은 해양교류사를 전공해 고대사 전체를 조망하는 필자로 보기는 힘들다”고 했다. 특히 근현대사의 경우 역사학자들의 집단 보이콧으로 사회과학자 위주로만 필진이 구성돼 역사적 맥락을 담는 데 한계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현대사 분야는 집필진 전원이 법학자(1명) 정치학자(2명) 경제학자(2명) 군사사학자(1명)로만 채워졌다. 근대사 분야도 이를 전공한 현직 교수는 3명 중 한 명뿐이다. 국정교과서 집필 총괄기관인 국사편찬위원회(국편) 출신이 필진에 9명이나 포함돼 ‘김정배 사단’ 얘기도 나온다. 전현직 국편 출신은 최성락 이재범 고혜령 손승철 이상태 한상도 이민원 유호열 정경희 씨 등 9명이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국제정치학에서 외치(外治)는 내치(內治)의 연장이라는 시각이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외교나 안보를 국내 정치의 돌파구로 활용하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멀리서 찾아볼 필요도 없다. 최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직격탄을 맞은 청와대는 외교, 안보만큼은 대통령이 직접 챙겨야 하는 사안임을 강조하고 나섰다. 그러면서 야당의 반대가 심한 한일 군사비밀정보보호협정(GSOMIA)을 밀어붙이고 있다. ‘식물 대통령’으로 전락하지 않으려는 절박한 몸부림에 안보를 끌어들인 것이다. 이 책은 안보와 사생활 보호의 충돌을 법적, 역사적 관점에서 조명하고 현실적인 대책을 모색하고 있다. 미국 법학자인 저자는 이 과정에서 국가안보를 정략적으로 이용한 미국 정부의 행태를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딱딱한 법률 용어가 아닌 다양한 기본권 침해 사례를 따라가다 보면 “민주주의 선진국이라는 미국도 이 모양인데 우리나라는…”이라는 생각에 닿게 된다. 요즘 탄핵정국을 맞아 새삼 되돌아보게 되는 미국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탄핵 사유 중 하나는 연방수사국(FBI) 등 정보기관을 자신의 정략적 목적에 활용했다는 죄목이었다. 개인의 사생활을 깡그리 짓밟은 FBI의 불법 사찰은 이미 1950년대 코인텔프로(COINTELPRO·Counter Intelligence Pro-gram)라는 방첩 프로그램에서 정점을 찍었다. FBI는 국가 안보라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각계 인사들의 뒤를 캐고 협박했다. 예컨대 흑인 민권 운동가 마틴 루서 킹을 도청해서 알아낸 외도 사실을 이용해 그에게 “자살하라”는 편지까지 보낼 정도였다. 이런 짓을 벌이고도 FBI 수장인 존 에드거 후버는 무려 48년 동안 국장직을 유지했다. 정치 사찰을 벌인 정보로 대통령과 의원들의 목줄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미국 정치의 ‘흑역사’를 통해 국가 안보가 사생활을 지킬 권리에 우선한다는 논리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2001년 9·11테러를 계기로 법원 허가 없이 국가안보국(NSA)이 전방위 감청을 벌이는 등 미국에서 안보의 비상대권(非常大權)화가 심화되고 있다. 이와 맞물려 사생활과 안보는 제로섬 게임이며, 비상시국에서는 사생활을 양보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에 대해 저자는 “양자택일의 오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반박한다. 사생활 보호라는 헌법적 가치의 테두리 안에서도 얼마든지 국가 안보를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사생활을 개인의 비밀 차원으로 격하하는 시도에 단호히 맞서야 한다는 게 저자의 시각이다. 사생활은 그저 일개인이 전유하는 권리가 아니라 모든 국민의 기본권이며 사회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가치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칸트 철학의 대명률과 비슷한 맥락이다. 봉건 잔재를 뛰어넘은 근대 자유주의는 성찰하는 개인이 탄생했기에 가능했다는 정치철학자 래리 시덴톱의 견해도 간과할 수 없다. 특히 책 제목인 ‘숨길 수 있는 권리’로서 사생활은 민주주의 발전과도 불가분의 관계다. 누군가 나를 감시하고 있다는 걸 아는 개인은 결국 ‘자기검열(self-censorship)’에 빠져 자유로운 의사를 표현하기 힘들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략적인 안보몰이에 휘둘리지 않고 사생활을 지키려는 노력은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데도 중요하다는 것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우리나라 고고학계를 대표하는 한국고고학회가 창립 41년 만에 처음으로 고조선을 주제로 한 한국고고학전국대회를 내년에 개최한다. 이 대회는 매년 11월 열리는 고고학계 최대의 학술행사. 낙랑에 비해 고조선 연구를 등한시한 일제 식민사학의 영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자성론과 더불어 재야 사학계와 고대사 논란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향후 한국 사학계의 고대사 연구 방향과 맞물려 적지 않은 파장이 예상된다.》 최근 한국고고학회가 작성한 ‘2017년도 한국고고학전국대회 기획안’에 따르면 ‘고고학으로 본 고조선과 고조선 문화’를 주제로 한 고고학전국대회가 내년 11월 3일 열린다. 장소는 국립중앙박물관이 검토되고 있다. 이남규 고고학회장(한신대 교수)은 “고고학회가 1976년 창립된 이후 고조선을 학술대회 주제로 다룬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밝혔다. 그동안 고고학계가 고조선 조명에 소극적이었던 건 남한에 고조선 유적이나 유물이 드문 현실도 한몫했다. 남북 분단으로 평양 일대 고조선 유적 연구에 한계가 있었고, 중국 랴오닝(遼寧·요령) 지역에 있는 고조선 유적도 중국 정부의 동북공정으로 인해 제약이 따랐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학계의 연구 태도가 근본 원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한반도 역사에서 타율성론을 강조한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고조선보다 낙랑의 역할을 부각한 게 광복 이후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얘기다. 정인성 영남대 교수는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은 한반도에서 고대국가 형성과 발달, 문명화의 계기를 한군현(漢郡縣·한사군) 설치에서 찾았다”며 “광복 이후에도 이런 설명이 고착화된 데 대해 학계 내부의 비판이 부족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내년 고고학전국대회에서는 광복 이후 고조선 연구 성과를 소개하면서 고조선 연구가 부실했던 원인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논문이 발표될 예정이다. 고조선 강역과 한군현을 둘러싼 재야 사학계의 거센 공세에 맞불을 놓는 연구 결과도 발표된다. 최근 동북아역사지도 폐기를 계기로 강단사학계에서는 위기의식이 팽배해진 상태다. 내년 고고학전국대회에서 ‘고고학으로 본 고조선 왕검성과 낙랑’을 주제로 한 논문 발표와 토론이 기획된 이유 중 하나다. 정 교수는 “평양 낙랑토성이 고조선 왕검성인지에 대해 검토할 때가 됐다”며 “왕검성이 요서지방에 있었다는 재야 사학자들의 주장도 진위를 검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최근 재야 사학계에 맞서 고고학계와 문헌사학계가 손을 잡고 ‘고고학·역사학 협의회’를 구성하기도 했다. 한국고고학회와 한국상고사학회, 한국고대사학회, 한국역사연구회로 구성된 이 협의회는 지난달 이화여대에서 ‘요서지역의 고고학과 고대사’를 주제로 학술회의를 열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망국(亡國)의 원인은 재정 적자가 아니다. 주자성리학의 문민(文民) 우위 원칙과 해상 방어에 대한 무지가 (망국에) 더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신복룡 건국대 석좌교수) “재정 적자는 조선시대 경제 변수의 10∼15%만 설명해 줄 뿐이다. 내 책이 망국론으로 읽히는 것은 굉장히 불쾌하다.”(조영준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최근 서울 종로구 아산정책연구원에서 열린 ‘조선 후기 왕실재정과 서울상업’(조영준 지음·소명출판) 서평 모임. 책을 쓴 소장학자와 원로학자는 학술토론 특유의 격식은 갖추되 치밀한 논리로 일합을 주고받았다. 이날 모임은 국제정치학, 사회학, 역사학 등 여러 전공과 연령대의 학자들이 참석해 다양한 지적 스펙트럼을 보여줬다. 망국론은 학계의 핵심 논점 중 하나여서 이들의 열의도 뜨거웠다. 조 교수는 18세기 후반에서 일제강점기 직전인 1907년까지 총 400책에 이르는 왕실 회계장부를 10년에 걸쳐 분석했다. 왕실이 조달기관인 궁방(宮房)을 통해 시전 상인들과 거래한 내역들을 일일이 조사한 것이다. 초서체 한자를 하나씩 풀어 써야 하는 방대한 작업이었다. 이헌미 서울대 국제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상상을 초월하는 시간과 노력을 들인 저자에게 경의를 표한다”고 했다. 연구 결과 조선은 이미 1874년부터 재정 적자가 계속 누적돼 심각한 채무불이행 상태에 빠졌다. 결국 왕실은 궁방 근로자들의 임금을 체불하고 시전상인들에게 납품대금을 지급하지 않는 방식으로 부담을 떠넘긴 것으로 나타났다. 조 교수는 “조선 왕실은 문제가 발생한 국가제도를 바꾸지 않고 궁방과 같은 비공식 조달기관을 계속 운영했다”고 지적했다. 토론에서는 이 책이 식민지근대화론으로 해석될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 선임연구원은 “수탈자로서 왕조의 이미지는 1908년 일본이 제실 재산을 정리하면서 시전상인들에게 미지급금을 일부 변제한 것과 대비된다”며 “자본주의 발달에 저해된 조선왕조와 이를 촉진한 합리적인 식민정부로 거칠게 정리될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조 교수는 “식민지근대화론을 지지하기 위해 조선 후기의 어두운 부분을 부각시켰다는 독자들의 비판이 일부 있었지만 나는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한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이와 관련해 그는 생활수준을 보여주는 지표로서 조선인들의 연도별 ‘평균 키’에 주목하고 있다고 했다. 조 교수는 “평균 신장이 16세기 후반부터 지속적으로 작아지다가 개항이 시작된 1880년대부터 반등한 것으로 조사된다”며 “한국의 근대화와 생활수준 향상은 식민지보다 개항의 효과가 가장 컸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수학을 배우는 아이들이 처음 익히는 것 중 하나가 구구단이다. 2000년 전 중국 한나라 때 유래된 구구단은 고대 한중일 목간에 공통으로 나타나고 있다. 구구단 목간은 단순한 산수가 아니라 숫자에 정신을 담은 동아시아의 사상체계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이기도 하다. 윤선태 동국대 교수는 최근 경북대에서 열린 ‘고대세계의 문자자료와 문자문화’ 학술회의에서 2011년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에서 출토된 백제시대 구구단 목간을 집중적으로 분석한 논문 ‘백제의 구구단 목간과 술수학’을 발표했다. 쌍북리는 사비백제 시대 부소산성을 둘러싸고 관청 거리가 있던 곳으로 국가 행정과 관련된 목간들이 출토되고 있다. 여기서 발견된 구구단 목간도 국가 예산을 담당한 관리들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윤 교수는 “쌍북리 구구단 목간은 단순히 외우기 위한 게 아니라 검산 과정에서 확신을 기하기 위해 고안한 공식표”라며 “백제에서 수학이 실용적 기술로 인식됐음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그에 따르면 이런 목적과 형태를 갖는 구구단 목간은 현재까지 쌍북리 목간이 유일하다. 쌍북리 목간의 실용성을 강조하는 핵심 근거는 모양이다. 가로 5.5cm, 세로 30.1cm 크기의 길쭉한 소나무에 103자의 묵서가 새겨진 목간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폭을 좁게 다듬었다. 목간을 한 손에 편하게 움켜쥘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또 2∼9단까지 각 단마다 가로선을 일일이 구획해 찾기 쉽도록 숫자들을 나열했다. 각 구구단에 적힌 결과도 틀린 게 없다. 반면 일본 니가타(新瀉) 시 대택곡내(大澤谷內) 유적에서 출토된 구구단 목간은 실용성보다 주술적 성격이 강하다는 점에서 대비를 이룬다. 재밌는 것은 목간 앞쪽의 계산에는 문제가 없으나, 뒤로 갈수록 ‘六九七十四’(6×9=74)나 ‘三九二十四’(3×9=24)처럼 오답이 쓰여 있다는 점이다. 이를 두고 한반도에서 구구단을 뒤늦게 도입한 고대 일본 지식인의 한계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윤 교수는 의도적으로 숫자를 잘못 적었다고 봤다. 예컨대 ‘七九四十七’이나 ‘六九七十四’에서 모두 5가 와야 할 자리를 일부러 7로 채웠다는 것이다. 둘 다 7 대신 5를 넣으면 정답이 된다. 그렇다면 이 목간을 적은 사람은 왜 5를 피해 다른 숫자로 썼을까. 이와 관련해 니가타 출토 목간의 글자 방향이 보통의 한자와 정반대인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진행되고 있음이 주목된다. 윤 교수는 “글자 방향을 반대로 바꾼 것은 주술 목간에서 많이 확인되는 것으로 목간을 읽는 사람이 인간이 아니라고 보는 경우에 사용되는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동양에서 5월 5일 단오절은 예로부터 ‘흉일(凶日)’의 의미가 강했다. 단오절을 맞아 재액을 없애기 위해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거나 팔에 오색실을 두르는 풍습이 있었다. 특히 5월은 흉월(凶月)이라고 하여 여러 금기사항을 두기도 했다. 니가타 목간에서 숫자 5를 회피한 것은 이런 숫자 관념에 근거한 행위로 보인다. 특히 7세기 후반∼8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목간이 하천 근처에서 나무로 만든 제기(祭器)와 함께 출토됐다는 점도 주목된다. 윤 교수는 “물가에서 행해진 제사에 사용된 목간으로 주술적 기원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최순실 게이트에서 국민이 분개하는 지점 중 하나는 ‘권력의 사유화’일 것이다. 공적인 국가 권력을 개인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걸 현대 민주사회는 용납할 수 없다. 공과 사를 구분하지 않는 행태를 봉건시대의 잔재라고 말하는 이유다. 사회적 책임을 지는 ‘나’와 원초적 욕망을 지닌 ‘나’를 구분하는 것도 결국 도덕적 양심을 갖고 스스로 성찰하는 개인이 있기에 가능하다. 영국 정치철학자가 쓴 이 책은 유럽 근대화의 핵심 요소인 ‘개인’이 정치, 사회, 사상사에서 어떻게 등장했는지 세밀하게 추적하고 있다. 죽은 수장을 위하여 수십 명을 순장한 고대 무덤이 시사하듯 사회에서 개인이 차지하는 가치와 비중은 꾸준히 변천했다. 도덕적 신념을 갖춘 개인이 나타나면서 진정한 근대화 곧 세속적 자유주의가 가능해졌다. 그렇다면 개인이 역사의 중심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이 르네상스를 요인으로 꼽지만, 저자는 오히려 기독교 가치관이 핵심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기독교를 봉건주의와 동일시하고 르네상스를 근대화의 출발점으로 삼는 일반론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견해다. 근대의 자유주의 사고를 규정하는 대원칙은 이른바 ‘평등한 자유’인데, 15세기 경건주의 기독교가 강조한 ‘모든 영혼은 신 앞에 평등하다’는 메시지가 이를 가능케 했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교회의 권위는 종국적으로 공의회로 대표되는 신자들에게 있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의 가치를 재발견해 인간의 개성을 추구한 것이지 개인의 발명을 낳은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저자는 “역사학적 개념으로서 르네상스는 대단히 부풀려져 있다”라고 썼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청동기가 강원 정선군 아우라지 유적에서 발견됐다. 이번에 발견된 청동기는 평북 신암리 유적에서 나온 청동기와 더불어 기원전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조기(早期) 청동기’ 시대의 유물로 추정된다. 기존에 한반도 중남부의 가장 오래된 청동기는 전남 여수와 전북 전주 등에서 발견된 비파형동검으로 기원전 10∼9세기 유물이다. 이번 발견으로 한반도 중남부에서 청동기를 처음 사용한 시기를 300년가량 올려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학계에서는 조기 청동기 유물이 매우 드물어 고고학계에서 조기 청동기 시대 대신 사용한 ‘무문토기(민무늬토기) 시대’란 용어가 폐기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강원문화재연구소는 “올 3월 착수한 2차 발굴조사에서 청동기와 신석기, 철기 시대 주거지와 고인돌 등 총 109기의 유구가 확인됐다”고 16일 밝혔다. 앞서 2006∼2007년 1차 발굴조사에서는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 주거지, 수혈, 분묘 등 46기의 유구가 조사됐다. 이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청동기 주거지 안에서 발견된 청동장신구다. 조기 청동기 시대의 대표 유물인 각목돌대문토기(새김덧띠무늬토기)와 함께 발견된 이 장신구는 주변에서 나온 목탄(木炭)의 방사성탄소연대를 측정한 결과 기원전 13∼11세기 것으로 추정됐다. 그동안 경북 경주, 전북 순창, 강원 춘천 중도 등에서 조기 청동기 시대 유적이 발견됐으나, 정작 청동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최종모 강원문화재연구소 연구실장은 “한반도 청동기 연구사를 뒤집을 수 있는 획기적인 발견”이라고 평가했다. 청동장신구 4점은 돌반지처럼 얇게 편 청동고리와 대롱옥을 빼닮은 것이다. 특히 대롱옥을 닮은 청동장신구는 한반도에서 처음 나온 형태로, 같은 시기의 것은 중국에서도 발견된 적이 없다. 평북 신암리 유적에서는 청동단추와 청동끌(동착)이 나왔다. 현장을 둘러본 이건무 전 문화재청장은 “중국에서 멀리 떨어진 정선에서 독특한 청동장신구가 발견된 것은 의미가 작지 않다”며 “전래품이 아니라 독자 제작된 장신구로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성인의 것으로 보이는 두개골 근처에서 발견된 천하석(天河石) 귀고리도 주목할 만하다. 학계에서는 천하석 장식을 목걸이 혹은 귀고리로 추정했는데, 이번에 시신의 귀밑에서 발견돼 귀고리로 사용한 사실이 확인됐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10일 경북 고령군 지산동 고분군. 마치 낙타 혹처럼 능선을 따라 거대한 봉분들이 주산(主山) 곳곳에 들어서 있었다. 수백 개의 고분이 빽빽이 들어선 이곳은 하나의 거대한 선산(先山)이나 다름없었다. 백제 왕릉이 모여 있는 공주 송산리나 부여 능산리 고분군의 규모를 모두 능가했다. 약 15분을 올라 정상에 가까운 44호분 초입에 이르자 탁 트인 평지가 펼쳐졌다. 지금으로부터 1600년 전 가야인들이 왕릉을 조성하기 위해 경사면을 깎아내고 땅을 고른 흔적이었다. 함께 답사에 나선 김세기 대구한의대 명예교수(66·고고학)는 “44호분 옆 공터에 베니어판으로 지은 가건물을 짓고 거기서 먹고 자면서 발굴을 했다”며 “1977년 겨울은 유독 추웠다”고 회고했다.○ 가야사 연구 암흑기 시절 가야는 백제와 신라 사이에 끼여 고난을 겪은 역사를 반영하듯 오랫동안 조명을 받지 못했다. 1970년대 초반 천마총 등 신라 적석목곽분과 백제 무령왕릉이 학계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 가야사 연구는 상대적으로 방치됐다. 여기에는 가야 고분 연구가 자칫 일본의 식민사학에 이용될 수 있다는 우려도 한몫했다. 앞서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오는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여러 가야 고분을 파헤쳤다. 이들은 일본계 유물이 가야 고분에 많이 남아있을 거라고 봤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서기의 가야 점령 기록은 광복 이후 우리 학계의 가야 고분 연구에 걸림돌이 됐다. 김세기가 계명대 학부생으로 참여한 1977∼1978년 고령 지산동 고분 발굴은 순장곽 같은 가야 특유의 고분 양식을 확인함으로써 일본 식민사학자들이 만든 왜곡과 편견을 깨뜨릴 수 있었다. 언론인이자 사학자였던 천관우(1925∼1991)가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 기록의 주체를 왜가 아닌 백제로 해석한 것도 가야사 연구에 돌파구를 마련했다.○ 한반도 최다(最多) 순장묘 발굴 1977년 11월 시작된 44호분과 45호분 발굴은 경북대와 계명대가 각각 맡았다. 윤용진 경북대 교수와 김종철 계명대 교수가 발굴단장으로, 주보돈 조교(현 경북대 교수)와 김세기 등이 현장조사원으로 참여했다. 그해 가장 눈길을 끈 발굴 성과는 단연 순장자의 묘실인 ‘순장(殉葬) 석곽’의 존재였다. 이것은 대가야 고유의 묘제로 44호분에서만 무려 32기의 순장 석곽이 발견됐다. 44호분의 주인과 함께 최소 32명이 한꺼번에 순장된 셈이다. 김세기는 “주인공이 묻힌 석실 등에도 4명이 추가로 묻힌 45호분의 사례를 감안하면 총 36명이 순장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단일 무덤에 30여 명이 순장된 것은 삼국시대를 통틀어 가장 많은 인원이다. 중국에서는 최대 200여 명이 묻힌 순장묘가 발견됐으며 일본은 순장풍습이 있었다고 사료에 전해지지만 아직 순장묘가 발굴되진 않았다. 순장곽이 여러 개인, 이른바 다곽(多槨)순장묘는 오직 고령 지산동에서만 나온다. 대가야의 영역이던 경남 합천과 함양, 전북 남원과 장수, 전남 순천 등에서는 단곽(單槨)순장묘만 발견된다. 이것은 고령이 대가야의 중심지로 지산동에 왕릉을 세운 사실을 보여준다. 김세기는 “지산동 발굴은 황남대총 등 신라 적석목곽분의 순장 풍습을 재확인한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첫 대가야 금동관 출토 1978년 9월 초순 지산동 32호분 발굴 현장. 도굴로 벽이 무너진 석실 안에서 김세기의 눈이 순간 번쩍였다. 발치 쪽 토기를 붓으로 살살 훑다가 아래에서 푸르스름한 게 언뜻 비쳤다. ‘혹 청동기인가….’ 김종철이 돋보기로 자세히 관찰해 보니 청동 녹 사이로 금박이 보였다. 대가야 무덤에서 발굴된 첫 금동관이었다. 먼저 토기를 실측하고 수습한 뒤 금동관을 조심스레 꺼냈다. 32호분 출토 금동관은 고대국가 단계로 나아가던 대가야의 위상을 보여준다.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된 금관(국보 제138호)과 32호분 금동관의 장식이 꽃이나 풀을 묘사한 이른바 ‘초화형(草花形) 입식’으로 서로 닮은 사실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김세기는 “학계에 이견이 있지만 고고학 자료와 더불어 479년 남제에 사신을 파견한 기록 등을 종합할 때 가야가 고대국가 단계까지 발전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고령=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

한성백제시대 ‘왕궁 저수시설’이 몽촌토성에서 처음 발견됐다. 한 변의 길이가 14m에 이르는 대형 목곽시설로 지금껏 발굴된 백제 저수시설 중 최대 규모다. 저수시설 주위에서는 격자 모양으로 구획된 도로도 발견됐다. 한성백제시대 왕경(王京)의 체계적인 도시계획을 보여주는 중요 유적으로 평가된다. 한성백제박물관은 “몽촌토성 북문 터 인근을 발굴 조사한 결과 삼국시대 포장도로 5기와 고랑 1기, 수혈유구 18기 등이 확인됐다”고 14일 밝혔다. 북문 터 바깥에서는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도로와 더불어 수레바퀴와 사람의 발자국 흔적도 나왔다. 이번 발굴에서 핵심은 백제시대 때 만들어진 1호 도로와 2호 도로 사이에 있는 대형 ‘목곽 저수시설’. 이 시설은 박순발 충남대 교수 등 자문위원들이 이날 현장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존재가 드러났다. 처음에는 성토대지인 것으로 파악됐지만 물에 지속적으로 잠긴 흔적을 보여주는 개흙층과 목곽의 일부로 보이는 나무틀이 함께 발견됐다. 현장을 둘러본 신희권 서울시립대 교수(고고학)는 “북문 근처에 연못과 같은 자연 습지가 있다면 통행에 불편이 따를 수밖에 없다”며 “도로를 통해 인위적으로 공간을 구획해 만든 저수시설로 보는 게 자연스럽다”고 설명했다. 삼국시대 저수시설은 금산 백령산성과 공주 공산성 등 주로 산지에서 발굴됐으며 평지, 그것도 왕궁 터에서 발견된 것은 극히 드물다. 발굴단은 목곽 저수시설이 식수용과 화재진압용 등 다양한 용도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목곽 주변은 방수를 위해 점토층으로 두른 정황이 엿보인다. 목곽 저수시설과 1, 2호 도로는 동시에 조성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박 교수는 “저수시설을 가운데 놓고 도로망을 격자로 구획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격자형 도로는 경주의 신라시대 방리(方里)제처럼 고대 왕성의 교통망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특징이다. 박 교수는 “이번에 발굴된 도로망을 따라가다 보면 한성백제시대 왕궁 터와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앞서 지난해 7월 폭이 약 20m에 이르는 대형 2차로 도로(1호 도로)가 나와 학계에서 주목을 받았다. 1호 도로는 북문과 연결되는 메인 도로다. 이번 발굴에서는 1호 도로의 노면이 하나 더 확인돼 본래 3차로 도로였던 것으로 파악됐다. 일각에서는 가운데 노면을 왕이 행차할 때 사용하는 어도(御道)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1호 도로는 백제시대 당시 도로가 추가로 개설된 중층(重層) 구조로 확인됐다. 백제시대 상층 도로 위에서는 고구려 토기가 발견돼 고구려의 5세기 한성 점령을 보여주는 물증으로 조사됐다. 1호 도로는 북문 바깥으로 이어져 몽촌토성(남성)과 더불어 한성백제시대 왕성으로 쓰였던 풍납토성(북성)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도로유적 발굴 현장에서는 ‘관(官)’ 글자가 새겨진 백제시대 토기(직구단경호·直口短頸壺)도 나왔다. 관자 명문은 왼쪽과 오른쪽이 바뀐 글씨(좌서·左書)체였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언론인으로 한국 고대사 연구에 큰 족적을 남긴 후석 천관우(1925∼1991·사진)를 조명한 학술대회가 열렸다. 그는 동아일보 편집국장 등을 지냈으며 언론 자유와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다. 기자로서 틈틈이 한국사를 연구해 ‘한국사의 재발견’ ‘고조선사·삼한사연구’ 등 명저를 남겼다. 문창로 국민대 교수는 11일 백산학회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후석 천관우의 한국 고대사 연구’ 논문에서 “가야사를 연결고리로 한 고대 한일 관계사 연구에 획기적인 신설(新說)을 제시했다”고 썼다. 신라나 백제에 비해 역사 기록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가야사를 복원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다. 천관우는 일본서기에서 임나일본부 관련 기록의 주체가 왜가 아닌 백제라는 의견을 제기하며 새로운 역사 해석을 시도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최순실 게이트와 연이은 트럼프 당선 쇼크를 목도하면서 민주주의의 함정을 얘기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대중조작에 휘둘리기 쉬운 대통령 선출 시스템의 폐단을 지적한 것이다. 트럼프의 경우 외국인 이민자에 대한 블루칼라 백인들의 반감을 적절히 파고들었다. 돈이 있고 배운 백인들도 인종차별 발언이 옳지 않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이른바 ‘샤이(shy·부끄러워하는) 트럼프’로 힘을 보탰다. 이 책은 트럼프 당선을 전혀 다루고 있지 않지만 그와 맞물려 되새겨볼 만한 메시지가 적지 않다. 프랑스의 저명 철학자인 저자가 책을 내놓은 계기는 2015년 11월 13일 이슬람국가(IS)의 파리 테러. 그는 130명이 사망한 대규모 살상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를 깊이 따져 본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서구 시각에서 볼 때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곪아온 자본주의의 전횡에서 비롯됐다는 주장이다. 이 과정에서 서구와 비서구를 야만과 문명의 대립으로 보는 서구 중산층의 교만도 한몫했다. 저자는 저소득 이민자들이 중심이 된 IS의 극단적인 폭력은 자본주의 소비와 생산에 참여하지 못하고 소외된 상황에서 시작됐다고 본다. 이들은 마치 없는 존재로 취급되고 허무주의에 내몰렸으며 끝내 좌절된 욕구를 폭력으로 발산했다. 특히 1980년대부터 사회주의 폐기로 견제 받지 않은 자본주의는 국가마저 약화시켰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 주범인 대형 투자은행들을 제재하지 못하고 정부가 나서 막대한 세금을 투입해 파산을 막은 이른바 대마불사(大馬不死)가 대표적인 예다. 자본주의 전횡은 국가의 최소한의 사회통합 조치도 훼방을 놓았다. 예컨대 프랑스 정부가 고용을 늘리기 위해 시행한 노동시간 감축 정책은 불과 5년 만에 폐기됐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저자는 중산층과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걸고 있다. 저소득 이민자들과 연대해 자본주의의 모순을 뛰어넘을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한다. 트럼프가 자신의 견해와 대척점에 있는 이 책을 읽는다면 어떻게 생각할지 자못 궁금하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