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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청동기 유적 위에 테마파크를 만들겠다고 해서 문화재 훼손 논란을 일으킨 강원 춘천시 중도 ‘레고랜드’ 사업자 측이 호텔과 전망타워 기초공사를 위해 유구(遺構)가 있을 확률이 있는 땅속 깊이 콘크리트 말뚝을 박겠다고 나섰다. 4년 전 사업자 측이 스스로 제안한 시공법을 무시한 것이다. 18일 문화재위원회 매장문화재분과위원회에 따르면 강원도와 강원중도개발공사, 레고랜드 코리아는 레고랜드 터에 들어설 두 건물의 기초 시공법을 바꾸겠다고 지난달 및 이달 17일 두 차례 신청했다. ‘(건물 터가) 연약 지반의 장기 침하 가능성이 높아 파일(pile) 기초 시공을 제안한다’는 것. 지반이 약해 건물 하중을 버티기 어렵기에 파일을 박아 보완하겠다는 얘기다. 문화재위 매장분과위는 두 차례 신청 모두 가부 결정을 보류했다. 매장분과위원장인 이청규 영남대 교수는 17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말뚝을 얼마나 깊고 넓게 박는 것인지, 기존 유구층과의 관계는 어떤지(훼손의 소지는 없는지) 관련 자료 보완을 요구했지만 사업자 측은 두 번째 신청할 때도 이를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았다”고 보류 사유를 밝혔다. 건물 규모나 환경에 따라 다르지만 길이가 보통 10m 이상인 기초용 말뚝은 수십 m 깊이로 박는다. 이렇게 시공된 수십 개 말뚝이 유구층(유구가 있는 지층)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는 어쩌면 당연하다. 사업자는 두 건물이 들어설 터 아래에는 유구가 없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입증되지 않았다. 말뚝 하단이 닿을 것으로 예상되는 깊이까지 발굴 조사한 적도 없다. 이 위원장은 “중도는 거의 청동기시대 지층까지 발굴했지만 그 아래층에 신석기시대 유구가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말뚝이 깊이 내려가는 건 문제”라고 지적했다. 유구가 있는지 없는지 파보려면 현재 보존 중인 청동기 유구층을 훼손할 수밖에 없어 문화재 보존 문제가 따른다. 호텔은 6층, 전망타워는 59.8m 높이로 지을 예정이다. 당초 사업자 측은 2016년 4월 땅을 깊이 파지 않고 벌집 모양 구조물을 바닥에 까는 ‘허니셀 기초’ 방식으로 시공하겠다고 문화재위에 보고했다. 4년이 지나 ‘전문가 검토 결과’ 지반이 약하다며 말뚝을 박겠다고 돌변한 셈이다. 지반이 그동안 갑자기 약해진 것일까, 아니면 4년 전 허니셀은 고층 건물에는 잘 쓰이지 않는 시공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업자 측이 건축허가를 받으려고 얼버무린 것일까. 문화재위는 시공 방식 변경을 요청하게 된 경위도 해명하라고 요구했다. 문화재위는 국민을 대신해 문화재를 보호하는 마지막 보루다. 사업자 측은 지난달 공법 변경을 처음 신청할 때 기초적인 건물 배치 자료도 제출하지 않았다고 한다. 문화재위, 아니 국민을 대하는 자세를 짐작할 만하다. 방대한 문화재 유존(遺存) 지역에 대규모 건설공사가 허가되는 ‘기적’을 봤으니 ‘말뚝 정도야…’ 한 것은 아니었을까. 조종엽 문화부 기자 jjj@donga.com}

“민족정신과 더불어 동아일보와 100년을 함께 살았네요.” ‘현역 100세 교육자’인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17일 오전 젊은 시절 7년간(1947∼1954) 교사와 교감으로 재직했던 서울 종로구 중앙중·고교 내 중앙학교 역사관에서 이렇게 말했다. 동아일보와 김 교수는 1920년 4월 함께 태어난 동갑내기다. 그에게 동아일보는 다니던 학교(평양 숭실중)가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로 폐교 위기에 놓였다는 소식을 알려줬고, 참배를 피해 한때 자퇴한 그가 평양부립도서관에서 홀로 공부할 때 벗이 됐던 신문이었다. 김 교수는 연세대 철학과 교수로 있으며 급격한 성장 속에 메말라 가는 정신적 가치를 담은 책 50여 권을 썼고, 퇴임 뒤에도 강연을 통해 사회교육에 앞장서 왔다. 김 교수는 1960년 7월 7일 첫 기고 이후 현재도 본보에 칼럼을 게재하고 있다. 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아 소중한 인연을 맺은 이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동감_백년 인연’의 일환으로 김 교수에 대한 감사 행사를 이날 열었다. 김재호 동아일보 사장은 함께 역사관을 둘러본 후 오찬을 같이하며 김 교수의 본보 칼럼과 인터뷰, 사진 등을 모은 책자 ‘백년의 동반자’와 창간 100주년 기념 오브제 ‘동아백년 파랑새’ 등을 증정했다. 중앙중·고교 역사관에서 ‘자랑스러운 중앙인’ 소개를 둘러보면서 김 교수는 “내 제자구먼” 하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김 교수는 저서 ‘백 년을 살아보니’에서 “(중앙중·고교 재직 시절이) 평생에서 가장 학생들과 사랑을 나눈 기간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날 김 교수와 만난 중앙고 3학년 이시현 군은 “중앙학교의 큰 스승을 뵙게 돼 영광”이라고 했다. 본보 100주년 캠페인 ‘꿈이 뭐예요?’와 관련해 김 교수의 꿈을 물었다. 김 교수의 평생 꿈은 ‘해방된 한민족이 보란 듯이 민족국가를 세우고 세계에서도 모범적이고 풍요롭게 사는 것’이었다. “해방된 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교육에 일생을 바치자고 결심했지요. 저에게 용기와 교훈을 준 스승이 도산 안창호와 인촌 김성수 선생이었습니다. 이제는 속으로 ‘선생님, 못 보시고 돌아가셨는데 바라시던 대로 요즘 우리나라 잘삽니다’라고 합니다. 나 죽고 난 50년 뒤에 내 제자들이 ‘더 좋은 나라가 됐다’고 했으면 좋겠습니다.” 김 교수는 오늘날 대한민국을 만든 원동력은 민족의식과 교육 열망이었다고 했다. “한국이라는 큰 나무의 뿌리는 암만 봐도 3·1운동 같아요. 어머니가 갓난 나를 업고 교회에 갔는데, 만세운동으로 남편을 잃은 아내들이 울지 않더라는 거예요. 민족의식과 ‘배워서 힘을 길러야 한다’는 의식이 3·1운동에서 싹터 그 힘으로 독립해 나라를 세울 수 있었고, 전쟁의 참화를 겪고 나서도 오늘날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거지요.” 김 교수는 이날도 ‘100세 청년’이었다. “나는 늙었다는 생각을 안 합니다. 항상 미래를 계획합니다. 여러분, 지난날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앞으로 얼마든지 갈 길이 있어요. 멀리, 높이 갈 사람은 짐을 많이 가져가면 안 돼요. 필요 없는 욕심은 버려야 합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6·25전쟁에 대한 반공주의적 연구는 전쟁을 냉전 대결 구도에서만 인식하면서 전쟁 이면의 복합성을 간과한 한계가 있다.” 김명섭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57)는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17일 열리는 학술회의 ‘6·25전쟁 한강선 전투와 전쟁 70주년 성찰’의 발표 자료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이번 학술회의는 한국정치외교사학회와 한국전쟁학회(이상 회장 조성훈 군사편찬연구소장)가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공동 개최한다. 김 교수는 ‘6·25전쟁사 70년의 역사정치학: 승전을 위한 선전을 넘어서’에서 공산주의에 반대하던 북한군 출신 전쟁포로라는 뜻으로 쓰이는 ‘반공 포로’보다 ‘송환 불원 포로’라는 용어가 더 적합하다고 했다. 반공 사상보다는 단순히 고향이 남쪽이어서 북쪽으로의 송환을 원하지 않은 포로도 있었다는 것. 중립국을 선택한 포로들은 공산주의와 반공주의를 거부한 ‘제3의 이데올로기’를 선택했다는 생각 역시 소설 ‘광장’ 등의 영향으로 생긴 통념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나중에 미국 등 에 밀입국할 것을 염두에 두고 중립국을 선택했다는 증언이 있는 것을 볼 때 평화롭고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떠났다는 것이다. 1950년 12월 4일 부서진 대동강 다리를 아슬아슬하게 타고 남하하는 피란민을 촬영해 퓰리처상을 받은 사진 ‘Flight of Refugees Across Wrecked Bridge in Korea’ 역시 남쪽 체제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게 아니라고 봤다. 김 교수는 16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이 사진은 선전용으로 활용됐지만 피란민 가운데는 원폭 투하와 폭격에 대한 공포로 안전한 곳을 찾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한국이 정전협정의 당사자가 아니라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밝혔다. 북한 측은 이 같은 주장의 연장선에서 ‘한국군은 미군의 괴뢰일 뿐’이라고 선전하면서 군사정전위에서 우리 군 소장이 유엔군사령부 수석대표를 맡자 위원회를 거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전협정 서명은 원래 국가 정상이 아니라 군 사령관이 하는 것이고, 마크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이 국군과 다른 참전국 군 사령관을 대표해서 서명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6·25전쟁 연구는 전통주의와 수정주의, 후기수정주의 등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김 교수는 이것이 미국학계의 냉전사 연구를 분류할 때 적합한 방법이라고 보면서 공산주의, 반공주의, 반(反)반공주의로 나눠 볼 것을 제안했다. 그는 “반공주의적 6·25전쟁 연구는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의 의미가 있었지만 도그마가 되면서 계승, 발전되지 못했고 공산주의적 시각이 주도권을 잡는 경향이 나타났다”면서 “반(反)반공주의 역시 공산주의적 선전은 비판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승전과 체제 선전을 위해 가려진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학술대회에서는 이 밖에 6·25전쟁 당시 한강선방어작전, 김포반도전투, 제2차 서울 수복 전투의 의미를 재조명한 발표 등이 있을 예정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이곳은 공청도(公淸道·현 충청도) 비인(庇仁·현 서천군) 땅입니다.”(조선 관리) “비로소 귀국의 이름을 듣고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걱정을 놓았습니다.”(표류한 일본 무사) 예기치 않은 운명은 역사에 뜻밖의 흔적을 남긴다. 1819년 일본 규슈(九州) 남단 사쓰마(薩摩)번(현 가고시마·鹿兒島현)의 중급 무사 야스다 요시카타(安田義方)가 탄 배가 표류하다가 조선 비인현의 한 섬에 도착했다. 야스다는 일본으로 돌아가기까지 6개월 동안 조선에서 있었던 일과 대화(필담)를 기록한 ‘조선표류일기’를 남겼다. 19세기 초 조선의 모습을 담은 이 책이 최근 국내 출간(이근우 부경대 사학과 교수, 김윤미 부경대 연구교수 번역·소명출판)됐다. 책에서는 야스다가 그린 다양한 그림 37장이 먼저 눈에 띈다. 조선의 다양한 인물과 물건을 예리하게 관찰해 그렸다. 비인현감의 행렬뿐 아니라 조선의 배(船), 각종 관(冠), 쌀가마니, 도끼, 초가집, 칼, 창, 돗자리, 교자, 담뱃대, 일산(日傘) 등이 그대로 담겼다. 그림에는 ‘조선도(朝鮮刀): 길이가 7, 8척 정도였다. 칼자루부터 칼집 끝까지 금으로 수를 놓았다’는 식으로 설명을 달았다. 일본으로 귀환하기까지 거친 여러 포구도 배가 다니는 해로와 함께 사실적으로 그렸다. 역자는 “문인화의 전통이 강한 조선의 양반이었다면 산수화 한 폭에 담았을 대상을 정밀하게 묘사한 점이 이 책의 특징”이라고 했다. 야스다의 기록은 편견이 없고 집요할 정도였다. 밥상을 받아도 음식의 종류와 수량을 적었으며 “나는 (술) 6잔을 마셨고, 히다카(동료 이름)는 7잔을 마셨다”고 썼다. 역자는 “야스다의 눈에 비친 조선의 관인은 의젓하고 당당하며, 보통 사람도 생업에 충실한 모습”이라고 밝혔다. 당시 조선과 일본은 우호적인 관계를 200년 넘게 지속하고 있었다. 조선 관리들은 야스다 일행을 경계하면서도 환대했다. 법에 따라 일행의 상륙을 가능한 한 막고, 지명과 거리에 대한 물음에는 제대로 답하지 않았지만 필담과 시, 술, 음식을 나누며 교분을 쌓았다. 이들의 귀환에 앞서 명주와 베, 지필묵, 청심환 등 선물과 식량을 여러 차례 보내주기도 했다. 일본으로 향하기 위해 부산에 도착한 야스다는 임진왜란을 떠올렸다. “선대 주군(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께서 사천(泗川)에서 고전하다가 대승을 거둔 날이 실로 이백 년 전의 오늘이었다. 우리들은 표류하여 부산포에 이르렀으나 옛날의 전장이 또한 이곳에서 가까이 있다고 한다. 이에 우러러보고 고개 숙여 생각하니 감개가 비장하여 칼과 창을 어루만져 보고, 눈물을 뿌리며 시를 지었다.” 야스다가 표착 직후 다가오는 배에 탄 이들이 조선 사람이라는 걸 금세 알아봤던 것도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잡혀간 조선 도공(陶工)의 후손들을 일본에서 봤기 때문이었다. 그는 “(조선인들이) 나에시로가와(苗代川) 마을에 살았다. 지금도 여전히 복식과 수염, 두발을 바꾸지 않고 있다”고 썼다. 야스다의 표류는 시공간적으로 묘하다. 그가 표착한 비인현은 그보다 400년 전인 1419년 왜구의 습격을 받아 조선의 대마도 정벌을 촉발한 곳이기도 하다. 야스다의 표류보다 3년 앞선 1816년에는 조선 서해안을 탐사하던 영국 배가 정박했다가 성경으로 추정되는 책을 조선 관리들에게 건네고 떠났다. 사쓰마번은 약 50년 뒤 메이지유신을 주도하며 일본을 탈아입구(脫亞入歐·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으로 들어감)의 길로 이끌었고, 일본 제국 해군의 주축이 됐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칭기즈칸의 손자 바투(1207∼1256)는 유럽 원정군을 이끌고 동유럽을 휩쓴 뒤 1243년 흑해와 카스피해 일대의 초원에 킵차크 칸국(汗國·한국)을 세웠다. 이즈음부터 1480년까지, 몽골이 러시아 대부분을 지배한 시기를 러시아인은 ‘타타르의 멍에’라고 부른다. 타타르는 몽골과는 다른 유목민 부족으로 몽골 제국에 편입됐는데, 서방 세계에서는 몽골이 타타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멍에’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지배는 상당히 가혹했다. 정복 과정에서 약탈과 학살, 파괴가 자행됐고 이후에도 징세와 징병을 통한 착취가 벌어졌다. 그러나 지배와 피지배 관계는 일면적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킵차크 칸국을 연구한 미국 역사학자의 이 책은 ‘멍에’를 가리키는 사료 이면에 은폐된 교류와 몽골족이 러시아에 미친 복합적인 영향을 좇는다. 저자에 따르면 원나라 황실이 어느 정도 한족의 문화에 물들어 갔던 것과 달리 킵차크 칸국에서 몽골인은 생활 방식을 그대로 유지했다. 이 나라는 몽골족의 힘의 근원이 되는 초원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형식적으로는 몽골 울루스(ulus·영토, 국가, 백성, 영지를 뜻하는 몽골어)에 포함되지 않는 여러 러시아 공국(公國)을 오랫동안 지배했다. 저자는 당시 러시아가 몽골인이 육성한 국제 상업의 혜택을 입었다고 봤다. 또 몽골의 보호 아래 러시아 정교회는 물질적 측면에서 거대하게 성장했다. 킵차크 칸국은 러시아를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같은 동유럽의 적으로부터 방어했다. 훗날 모스크바 공국이 몽골의 군사 재정 관료 모델을 활용하기도 했다. 킵차크 칸국의 멸망과 함께 여러 러시아 공국을 통합한 모스크바 공국의 ‘차르’는 기독교 제국의 황제이면서 ‘킵차크 칸의 정통 후계자’라는 지위를 가졌다. 그러나 동시대 사료에서 모스크바 공국이 킵차크 칸국을 계승했다는 개념은 잘 확인되지 않는다. 이는 러시아인이 몽골과의 관계에서 긍정적인 부분은 최대한 기록에 남기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중세 기독교도와 무슬림 사이에 생겨난 우호적 사건들이 종교적인 이유에서 감춰졌던 것과 마찬가지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른바 ‘침묵의 이데올로기’다. 부제는 ‘중세 러시아를 강타한 몽골의 충격’.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옛 신라와 가야, 백제 지역에서 출토된 말 갑옷 18점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전시가 열린다. 국립경주박물관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12일부터 8월 23일까지 경북 경주시 경주박물관에서 특별전 ‘말, 갑옷을 입다’를 공동 개최한다. 먼저 눈에 띄는 건 2009년 경주 쪽샘지구에서 완전한 형태로 출토된 말 갑옷이다. 보존 처리에만 10년 걸렸다. 실물과 이를 복제해 말 모형에 입힌 재현품(사진)이 함께 전시된다. 1992년 경남 함안군 마갑총에서 역시 완전한 모습으로 나온 가야시대 말 갑옷도 말 투구와 좌우측 말 갑옷이 최초로 함께 전시된다. 이 유물은 최근 보물로 지정됐다. 1934년 경주시 황남동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확인된 말 갑옷과 경주시 계림로 1호 고분에서 1973년 출토된 말 갑옷이 발굴 이후 처음 공개된다. 백제 지역인 공주 공산성에서 출토된 한국 최초의 옻칠한 가죽 말 갑옷과 말 투구도 볼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난 고대 중장기병(철기병) 모습이 영상으로 소개되며, 도기기마인물형각배(국보) 등 관련 유물 140여 점도 전시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을 막기 위해 경주박물관 홈페이지에서 사전 예약을 받지만 하루 300명까지는 현장에서도 신청을 받는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비무장지대(DMZ)에 있는 경기 파주시 대성동 마을에서 구석기시대 뗀석기가 발견됐다. 문화재청은 국립문화재연구소를 중심으로 구성된 비무장지대 실태조사단이 5월 26∼29일 진행한 첫 실태조사에서 구석기시대 뗀석기 2점을 수습했다고 9일 밝혔다. 석기는 마을 남쪽 구릉 일대에서 확인됐으며, 그중 찌르개(사진·위 끝이 날카로우며 아래로 내려올수록 폭이 넓어지는 모양의 도구)는 마름모꼴로, 큰 몸돌에서 떼어낸 돌조각을 이용해 만든 것이다. 양쪽 가장자리 날 부분은 잔손질해 대칭을 이뤘다. 나머지 한 점은 찍개(자갈돌이나 모난 돌의 가장자리를 떼 날을 세운 석기) 종류의 깨진 조각으로 보인다. 문화재청은 “석기가 수습된 지역은 구릉 정상부로, 규암 석재가 다수 확인되고 있어 유물의 추가 수습과 유적 확인을 위해 추가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구석기시대 뗀석기 유물은 2004년 개성공업지구 문화유적 남북공동조사 당시에도 1점이 발견된 적이 있다. 이 밖에도 고려시대의 수막새, 상감청자 조각, 용머리 장식 조각을 비롯해 통일신라∼조선시대의 유물이 확인됐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흉년과 역병으로 숨진 자의 수가 너무 많아 모두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만고에 드문 해였다.” 경상도 고성의 처사(處士·초야에 묻혀 살던 선비) 구상덕(1706∼1761)은 1733년의 봄을 이렇게 기록했다. 질병의 원인조차 제대로 모르던 시절, 향촌의 공동체는 역병에 어떻게 대응하고 살아남았을까. 김호 경인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53)는 계간지 역사비평 2020년 여름호에 ‘시골 양반 역병 분투기―18세기 구상덕의 승총명록을 중심으로’를 게재했다. ‘승총명록(勝聰明錄)’은 구상덕이 1725년부터 죽을 때까지 37년 동안 쓴 일기다. 이 발표문에 따르면 구상덕이 살았던 18세기 조선은 기근과 역병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1730년부터 이어진 역병과 재난으로 1733년 봄에는 들판에 나물을 뜯을 사람조차 없었다고 한다. 두창과 온역, 이질, 한질 같은 전염병이 1740년, 1748년, 1753년 등에 되풀이해 창궐했다. 구상덕도 아내와 딸, 친구와 친척을 연이어 역병으로 잃었다. 예나 지금이나 전염병 대응의 시작은 ‘사회적 거리 두기’였다. 구상덕은 자신의 마을에서 역병이 완전히 끝나지 않자 읍내 향교의 공사가 마무리되고 열린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집안에 역병이 돌자 향교에서 벌인 시회(詩會)에 불참했고, 집에서도 안채 등 정해진 곳을 떠나지 않고 스스로를 격리했다. 인적 드문 산중의 절이나 이웃집으로 몇 주씩 떠나 있기도 했다. 역병이 미치지 않은 동네의 누이 집으로 부모님을 모셨다. 구상덕은 친구가 역병에 걸려 죽게 되자 그의 아들을 거둔 뒤 데리고 암자로 피신했다. 김 교수는 “역병에 걸렸을지도 모를 사람에게 몸을 피할 공간을 제공하는 건 서로의 선의를 바탕으로 이뤄진 상호부조였다”고 설명했다. 구상덕은 역병을 막고자 점술가나 승려를 불러 독경을 요청했다. 1730년 아내가 괴질에 걸리자 소고기를 먹였다. 역병에 고기를 고아 먹는 치병(治病) 풍속이 있었던 것. 1757년 여름에는 역병이 돌자 닭 한 마리 값이 원래 5, 6전에서 몇 배나 올랐다고 일기에 썼다. 조정과 지방관은 처방전을 보급하고 피막(避幕)을 설치해 환자들을 격리했지만 대부분 인적 드문 들판에 세워져 환자들은 굶거나 얼어 죽는 일이 다반사였다. 피막은 병자들보다는 아직 병이 옮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장치였다. 구상덕이 가족의 안위만 살핀 것은 아니었다.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노파에게 죽을 먹였으며, 역병과 기근으로 버려진 아이를 노비 삼아 거두기도 했다. 또 백성의 고통을 사또에게 전하기 위해 각종 문서 작성을 도왔다. 김 교수는 “역병의 피해가 가혹한 상황에서 도덕적 삶을 유지하고 스스로 공동체를 지키려는 자발적인 ‘사(士·선비) 의식’이 역병의 시대를 헤쳐나간 열쇠였다”고 말했다. 오늘날 한국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대응에서 나타난 ‘시민들의 자발적 협조’ 역시 공동체의 안녕을 함께 도모하려는 선비의 의식과 닮아 있다고 김 교수는 분석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흉년과 역병으로 숨진 자의 수가 너무 많아 모두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만고에 드문 해였다.” 경상도 고성의 처사(處士·초야에 묻혀 살던 선비) 구상덕(1706~1761)은 1733년의 봄을 이렇게 기록했다. 질병의 원인조차 제대로 모르던 시절, 향촌의 공동체는 역병에 어떻게 대응하고 살아남았을까. 김호 경인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는 계간지 역사비평 2020년 여름호에 ‘시골 양반 역병 분투기-18세기 구상덕의 승총명록을 중심으로’를 게재했다. ‘승총명록(勝聰明錄)’은 구상덕이 1725년부터 죽을 때까지 37년 동안 쓴 일기다.이 발표문에 따르면 구상덕이 살았던 18세기 조선은 기근과 역병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1730년부터 이어진 역병과 재난으로 1733년 봄에는 들판에 나물을 뜯을 사람조차 없었다고 한다. 두창과 온역, 이질, 한질 같은 전염병이 1740년, 1748년, 1753년에 되풀이해 창궐했다. 구상덕도 아내와 딸, 친구와 친척을 연이어 역병으로 잃었다. 예나 지금이나 전염병 대응의 시작은 ‘사회적 거리두기’였다. 구상덕은 자신의 마을에서 역병이 완전히 끝나지 않자 읍내 향교의 공사가 마무리되고 열린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집안에 역병이 돌자 향교에서 벌인 시회(詩會)에 불참했고, 집에서도 안채 등 정해진 곳을 떠나지 않고 스스로를 격리했다. 인적 드문 산중의 절이나 이웃집으로 몇 주씩 떠나있기도 했다. 역병이 미치지 않은 동네의 누이 집으로 부모님을 모셨다. 구상덕은 친구가 역병에 걸려 죽자 그의 아들을 거뒀고, 다시 역병이 발발하자 암자에 머물렀다. 김 교수는 “역병에 걸렸을지도 모를 사람에게 몸을 피할 공간을 제공하는 건 서로의 선의를 바탕으로 이뤄진 상호부조였다”고 설명했다.구상덕은 역병을 막고자 점술가나 승려를 불러 독경을 요청했다. 1730년 아내가 괴질에 걸리자 소고기를 먹였다. 역병에 고기를 고아 먹는 치병(治病) 풍속이 있었던 것. 1757년 여름에는 역병이 돌자 닭 한 마리 값이 원래 5, 6전에서 몇 배나 올랐다고 일기에 썼다. 정부는 처방전을 보급하고 피막(避幕)을 설치해 환자들을 격리했지만 대부분 인적 드문 들판에 세워져 환자들은 굶거나 얼어 죽는 일이 다반사였다. 피막은 병자들보다는 아직 병이 옮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장치였다. 구상덕이 가족의 안위만 살핀 것은 아니었다.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노파에게 죽을 먹였으며, 역병과 기근으로 버려진 아이를 노비 삼아 거두기도 했다. 또 백성의 고통을 사또에게 전하기 위해 각종 문서 작성을 도왔다. 김 교수는 “역병의 피해가 가혹한 상황에서 도덕적 삶을 유지하고 스스로 공동체를 지키려는 자발적인 ‘사(士·선비) 의식’이 역병의 시대를 헤쳐나간 열쇠였다”고 말했다. 오늘날 한국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대응에서 나타난 ‘시민들의 자발적 협조’ 역시 공동체의 안녕을 함께 도모하려는 선비의 의식과 닮아 있다고 김 교수는 분석했다.조종엽기자 jjj@donga.com}

“만약 조선이 발흥하고 일본이 쇠퇴해 일본이 조선에 합병되고, 궁성(에도성)이 폐허가 되며 그를 대신해 그 위치에 큰 서양풍의 일본총독부 건물을 짓게 되고, 저 푸른색 물이 흐르는 해자를 넘어 높고 흰색 벽으로 솟는 에도성이 파괴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일본인 민예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사진)가 1922년 일제의 광화문 철거 방침에 반대하며 동아일보에 게재한 기고문 가운데 일제의 사전검열로 실리지 못한 내용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사장 최응천)은 야나기가 광화문 철거에 반대하며 1922년 7월 작성한 육필 원고를 일본 도쿄 니혼민게이칸(日本民藝館·일본민예관)에서 최근 발견했다고 7일 본보에 밝혔다. ‘장차 잃게 된 조선의 한 건축을 위하여’라는 제목의 이 원고는 1922년 8월 24∼28일 동아일보 1면에 5회에 걸쳐 실리면서 광화문 철거 반대 여론을 불러일으키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육필 원고에는 일제의 사전검열 탓에 신문에는 실리지 못하고 같은 해 일본 잡지 ‘가이조(改造)’ 9월호에만 실렸던 200자 원고지 2장 분량의 내용도 포함돼 있다.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장을 지낸 이상해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광화문의 아름다움을 추도사 하듯 애절하게 묘사하며 철거를 반대한 야나기의 글은 당시 한국인의 심금을 울렸다”며 “일제가 광화문을 헐어 조선의 상징을 말살하려는 데서 한발 물러섰고, 광화문은 비록 제자리는 아니지만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져 명맥을 유지하게 됐다”고 말했다. “너(광화문)를 자세히 아는 사람은 발언의 자유를 가지지 못했으며 또는 너를 산출한 민족 사이에서도 불행히 발언의 권리를 가지지 못하였다. … 그러나 침묵 가운데 너를 파묻어 버리는 것은 나로는 차마 견디기 어려운 비참한 일이다.” 야나기의 원고는 식민지 문화재의 운명과 나라를 빼앗긴 이들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는 절창(絶唱)이다. 야나기는 일본이 조선에 합병되고 에도성(江戶城)이 헐린다면 “반드시 일본의 모든 사람들은 이 무모한 일에 대해 분노를 느낄 것”이라며 “그런데 이와 똑같은 일이 지금 경성에서, 강요받는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고발했다. 야나기에게 광화문은 ‘차라리 한 채의 소슬한 종교’와도 같았다. 그는 “나는 마치 너(광화문)를 낳은 민족이 저 견고한 화강석 위에 끌을 깊이 파서 기념할 영원의 조각을 새긴 것과 같이 너의 이름과 자태와 영(靈)을 결코 스러지지 아니할 싶은 힘으로 잘 새기겠다”고 썼다. 총독부 건물의 신축은 “아무 창조의 미를 가지지 못한 양풍(洋風)의 건축이 돌연히 이 신성한 지경을 침범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조선총독부는 1920년대 경복궁 흥례문 구역을 헐고 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앞을 가리는 광화문을 철거하고자 했고, 결국 1926년 경복궁 동쪽의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다. 이상해 교수는 “의궤(儀軌)도 없는 광화문이 사라졌다면 원형 복원은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2014, 2015년 니혼민게이칸 소장 한국 문화재를 조사했고 이후 도쿄예술대의 관련 연구를 지원했다. 이번 조사에 참여한 스기야마 다카시(杉山享司) 니혼민게이칸 학예부장은 “니혼민게이칸 학예사들도 (야나기 육필) 원고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검열된 부분을 파악하고 의미를 고찰해서 확인한 것은 처음”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재단은 최근 동아일보에 당시 자료(야나기의 원고)가 존재하는지 물어왔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일제의 광화문 철거를 반대한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의 동아일보 기고 ‘장차 잃게 된 조선의 한 건축을 위하여’를 오늘날 맞춤법으로 고쳤다. ‘이조(李朝)’와 같은 당시 용어는 그대로 살렸다. 이 기고는 1922년 8월 24~28일 동아일보 1면에 (1)~(5)회로 연재됐다. (※) 표시된 문단은 당시 동아일보 기고에는 일제의 사전 검열 탓에 실리지 못했으나, 일본의 잡지 ‘가이조(改造)’ 1922년 9월호에는 실렸던 부분이다.장차 잃게 된 조선의 한 건축을 위하여야나기 무네요시 (1) 이 한 편을 공개할 시기가 성숙한 것처럼 나는 생각한다. 장차 행하려는 동양 고건축의 무익한 파괴에 대하여 나는 가슴을 짜내는 듯한 아픈 생각을 느낀다. 조선의 수부(首府)인 경성에 경복궁을 찾아보지 못한 여러 사람들은 왕궁의 정문인 저 장대한 광화문이 장차 파괴될 일에 대하여 알지 못하겠기로 신경에 아무 느낌과 생각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모든 독자가 동양을 사랑하고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의 소유자인 것을 믿고 싶다. 가령 조선이라는 것이 직접의 주의(注意)를 여러 많은 사람에게 주지 못한다 할지라도 점차 인멸(湮滅·자취가 없어짐)하여 가는 동양의 고(古) 예술을 위하여 이 한 편을 정성껏 읽어주기를 바란다. 이 한 편은 잃어버려서는 안 될 한 예술이 잃어버리게 되는 운명에 대한 애석의 문자(文字)이다. 그리고 그 예술의 작자(作者)인 민족이 목전에 그 예술의 파괴를 당하고 있는 사실에 대하여 나의 동정하고자 하는 애달픈 감정의 피력이다.※그러나 아직도 이 제목을 생생하게 상상할 수 없다면 부디 다음과 같이 상상하길 바란다. 만약 조선이 발흥하고 일본이 쇠퇴해 일본이 조선에 합병되고, 궁성(에도성, 일본 황거·皇居를 이름)이 폐허가 되며 그를 대신해 그 위치에 큰 서양풍의 일본총독부 건물을 짓게 되고, 저 푸른색 물이 흐르는 해자를 넘어 높고 흰색 벽으로 솟는 에도성이 파괴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아니면, 정으로 치는 소리를 듣는 날이 다가오고 있다고 강하게 상상해보라. 나는 그 에도(오늘날 도쿄)를 상징하는 일본 고유 건축의 죽음에 대해 애도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은 쓸데없는 것이라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사실 미적으로 이보다 뛰어난 것을 오늘날 사람들은 만들 수 없지 않겠는가. (아, 나는 망해가는 나라의 고통에 대해 여기서 새롭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반드시 일본의 모든 사람들은 이 무모한 일에 대해 분노를 느낄 것이다. 그런데 이와 똑 같은 일이 지금 경성에서, 강요받는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번역: 일본 도쿄 예술대 연구진)광화문이여! 광화문이여! 너의 생명이 조석(朝夕)에 절박(切迫)하였다. 네가 이 세상에 잇다는 기억이 냉랭한 망각 가운데 장사(葬事)되어 버리려 한다. 아! 어찌하면 좋을까? 나의 생각은 혼란해 어찌할 줄을 알지 못하겠다. 혹독한 끌과 무정한 철퇴가 너의 몸을 조금씩 파괴하기 시작할 날이 멀지 않았다. 이것을 생각하고 가슴을 쓰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그러나 너를 구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불행히 너를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너를 불쌍히 여겨 주지 않는 사람뿐이다. 아직 이 세상은 모순의 시대이다. 문 앞에 서서 너를 쳐다볼 때 누가 그 위력(威力)의 미를 부인할 자 있으랴? 그러나 이제 너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하려는 자는 반역의 죄를 받을 것이다. 너를 자세히 아는 사람은 발언의 자유를 가지지 못하였으며 또는 너를 산출한 민족 사이에서도 불행히 발언의 권리를 가지지 못하였다. 그러하여 그 곳에 있는 여러 사람은 어둡고 쓰린 무정한 세월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너를 사랑하는 것은 사실이며 이후 세월이 지나갈수록 너를 애모하는 마음이 점점 깊어갈 것도 나의 확신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러한 추모의 애(愛)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없는 세상이다. 아니 이러한 애(愛)를 죽이라고 강제하는 세상이다. 아!! 생각할수록 괴로운 아픔이 가슴을 누른다. 그러나 어찌할 수도 없는 것은 사실이니 이야말로 답답하고 아프지 아니한가? 아무나 말하기를 주저하리라. 그러나 침묵 가운데 너를 파묻어 버리는 것은 나로는 차마 견디기 어려운 비참한 일이다. 이 까닭에 나는 말할 수 없는 여러 사람을 대신하여 네가 죽는 이 때에 한 번 너의 존재를 이 세상에 의식케 하려고 나는 이 한 편을 쓰는 것이다. 그러나 네가 있는 장소에서 1000마일 이상이나 떠나 있는 내가 홀로 침묵을 깨치고 소리를 친다 할지라도 어둠의 힘과 강한 형세로부터 너를 구원하기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내가 시비를 논단(論斷)하는 이 말을 결코 무의미한 말이라고 생각지 말아주기를 바란다. 이를 쓰는 것이 나에게 대하여는 한 가지 큰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너의 운명을 다시 회복하도록 보증하여 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에 대한 존경과 정애(情愛)가 이 세상에 없다고는 생각하지 말아라! 너의 미(美)와 역(力)과 운명을 이해하는 사람은 실로 적지 아니할 것이다. 만약 그 수가 적다고 할지라도 너는 그 적은 사람의 정애라도 받아 주겠지? 어쨌든 너의 죽음을 생각하고 눈물 흘리는 사람이 있음을 생각하여다오? 나는 이 현세에서 장차 떨어지려는 너의 운명을 회복하여 줄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영(靈)의 세계에서는 너를 불멸의 자(者)로 만들지 아니하고는 마지 아니하겠다. 실제 너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해낼 수 있는 자유는 나에게 없으나 이 문자 가운데서 너를 불멸케 하는 자유는 나에게 있다. 아? 나는 이에서 너의 이름과 자태와 영(靈)을 결코 스러지지 아니할 싶은 힘으로 잘 □각(刻)하겠다. 마치 너를 산출(産出)한 민족이 저 견고한 화강석 위에 끝을 깊이 파서 기념할 영원의 조각을 새긴 것과 같이. (2) 광화문이여 너의 존재는 얼마 아니 하여 없어지리라. 그러나 없어져서는 안 될 너의 존재를 위하여 나는 이 글을 쓴다. 그리하고 나는 농후하고 선명한 먹으로써 이 글쓰기를 게을리 아니한다. 지상에 있는 시선에서는 너의 자태가 없어진다고 할지라도 내가 쓰는 이 문자는 지상의 어느 곳을 물론하고 널리 전파되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너를 근저(根抵) 깊게 기념하기 위하여 이 적은 추도문을 공중(公衆) 앞에 보내는 것이다. 아!! 광화문이여 사랑하는 벗이여? 뜻 아닌 죽음의 운명을 당하고 얼마나 무참히 생각하는가? 나는 네가 맛보지 않을 수 없는 괴로움과 쓰림을 생각하고 작지 아니한 동정을 보내고자 하노라. 아! 불쌍한 너의 영(靈)이여! 만약 네가 갈 곳이 없으면 나 있는 곳으로 와 주며 네가 죽은 후에는 이 문자 중에 길이 살아다오. 누구든지 이 문자를 읽고 너를 생각해 줄 이가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의 존재가 한 번 다시 여러 독자의 따듯한 의식 가운데에서 애모(愛慕)의 기억을 일으킬 날이 기어이 올 것이다. 그러나 여러 많은 사람은 너에게 대하여 침묵을 지키고 말하지 말라는 무서운 제재를 받고 있다. 그 까닭에 나는 그런 사람을 대신하여 발언의 자유를 지금 택하려고 한다. 아! 광화문이여 광화문이여 웅대하도다 너의 자태. 지금부터 50여 년 전 옛적에 너의 왕국 중에 가장 굳센 힘을 가진 섭정(攝政) 대원군이 그의 주저치 않는 강한 의지에 의하여 왕궁을 잘 지키라는 의미로 남면(南面)한 훌륭한 장소에 굳은 기초를 정한 것이다. 이곳으로부터 조선이 존재한다는 거룩한 사명을 다하고 있는 여러 많은 건축이 전면좌우에 연락(連絡)하여 있으며 광대한 도성의 대로를 직선으로 하야 한성을 지키는 숭례문과 서로 호응하야 있으며 그리하고 북에는 백악(白岳)의 장식(裝飾)이 잇고 남에는 남산의 요위(繞圍)가 있어서 이 황문은 과연 위엄 있는 위치를 태연히 점령했다. 이러하여 3개의 관문을 중앙에 두르고 거대하고 견고한 화강석으로 높이 축조했으며 그 위에 전통을 잘 지키는 중층(重層)의 건물을 용립(聳立·우뚝 솟음)케 했다. 여러 가지로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문은 좌우로 균등(均等)의 고탑(高塔)을 연(延)했으며 그 위에는 각루(角樓)가 아름다운 자세를 보전하고 있다. 앙현(仰見)하는 자로 누가 그 자약(自若)의 미에 대하야 놀라지 않을 자가 있으랴? 이것은 과연 일국의 최대한 왕궁을 지킴에 적당한 정문의 자세이다. 독자여! 이것은 이조 말기의 작품이라고 업신여기지 말라! 그리하고 완려하고 우아하고 정치한 미를 얻어 볼 수가 없다고 냉랭한 생각을 가지지 말라! 도리어 이조 말기에서라도 이러한 위대한 작품을 낸 것을 감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단순하고 단엄(端嚴)한 그 자태에는 의지(意志)의 미가 표현돼 있지 않은가? 불교의 고려조는 먼 과거로 흘러가고 지금은 유교의 이조 말이 아닌가? 지(地)의 교훈에서 양육된 사람은 대지에 누울 견고하고 안전한 미를 가지지 아니하면 안 된다. 광화문에 대하여는 이조의 미의 권화(權化)를 목전(目前)에 느낄 것이다. 보아라! 광화문이 어떻게 단순하게 태연히 땅에 서 잇는 것을. 문을 지나는 자마다 모두 그 권위에 놀랄 것이다. 실로 한 왕조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건설한 적호(適好)의 기념비이다. 여러 많은 사람은 이미 저 문전 광장에 무수히 쌓아 놓은 거대한 재료가 화염에 싸여 경복궁 재건의 기도가 수포에 돌아가게 됐던 것을 기억하리라. 비상한 노고와 막대한 비용이 덧없는 일편(一片)의 회신(灰燼·재)으로 돌아가 일반 인민이 뜻하지 않았던 재화(災禍)에 그만 의지가 약해진 때에 그러한 변사(變事)를 일고(一顧)도 아니하고 곧 그 실행을 최촉(催促)한 대원군의 의지의 강한 것을 생각할 것이다. 실로 금일의 저 광화문은 그 불요부절(不撓不折)의 정신의 대담한 피력(披瀝)이다. 그는 그가 죽은 지 겨우 20여 년 후에 그의 의지로 지어 놓은 이 견고한 문이 이처럼 빨리 와괴(瓦壞·기와가 깨지듯 부서짐)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나도 예술적 의식이 있는 우리 동포들에게 대하여 이러한 무참한 파괴가 백주에 감행되리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다행히 이것이 오문(誤聞·잘못된 소문)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시간은 지체 없이 달려와서 파괴되려는 그 무서운 광경이 내 눈 앞에 떠오른다. 그러면 이 검은 형세를 제지할 힘은 어디를 가든지 어찌 못할 것인가? 아! 동포여 동양의 순수한 건축을 경애하라! 이에 필적할 만한 건물을 우리는 세우지 못한 것이 아니냐? 오늘날 생활에 소용이 없다고 할지라도 마음대로 버려서는 인되겠다. 예술은 공리의 관계를 초월한 자(者)이다. (3) 미(美)가 있는 자(者)는 길이 보존하여라. 더구나 순 동양식의 예술은 우리의 영예를 위하야 깊이 사랑하라! 여러 가지 사정에 있어서 그러한 예술을 수호하는 것은 조선에 대한 추모요 예술에 대한 이해인 것을 깊이 각오(覺悟)하라! 저 광화문은 비록 근대의 작품이라고 할지라도 동양에서는 그렇게 많지 않은 훌륭한 건축이다. 조선에서 다섯 개의 우수한 문을 택한다고 하면 저 광화문은 반드시 그 가운데 하나인 작품이다. 작품의 양이 많지 못하고 역시 그 수가 매우 적은 조선에서는 더구나 중요한 건축의 하나가 아닌가? 저 광화문이 주도(主都)의 미(美)를 장식하고 있는 한 요소인 것은 누구나 모두 부인할 자가 없을 것이다. 그 주문(主門)이 없어진 때에 경복궁에 무슨 힘이 있으며 경복궁을 잃어버린 때에 한성(漢城)에 무슨 면목이 있으랴? 저 왕궁보다 더욱 정확한 형식과 더욱 위대한 규모를 가진 건축은 조선 안에서는 어디를 가든지 찾아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이조 건축의 대표이며 모범이며 정신이로다. 정치는 예술에 대하여 어디까지든지 염치없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예술을 침해하는 힘을 삼갈지어다. 도리어 예술을 옹호하는 것이 위대한 정치가의 할 일이 아니냐. 우방을 위하여 예술을 위하여 역사를 위하여 도시를 위하여 더구나 그 중에 민족을 위하여 저 경복궁을 구원하라! 그것이 우리의 우의(友誼) 상 정당한 행위가 아닌가? 특히 조선이라는 것을 생각게 하는 제(諸) 관아를 좌우에 이끌고 용립(聳立)한 북한산을 배경으로 하야 멀리서 대황로(大皇路)를 밟으며 광화문을 바라보는 광경은 참말 잊어버릴 수 없는 위대한 인상을 주는 것이 아니냐? 자연과의 배치를 깊이 고찰하여 잘 계획한 그 건축에는 이중(二重)의 미가 있도다. 자연은 건축을 지키고 건축은 자연을 장식하지 않았는가? 사람은 함부로 그 사이에 있는 유기적 관계를 깨뜨려서는 안 된다. 그러나 어찌 하랴? 지금은 천연과 인공과의 좋은 조화가 이해(理解) 없는 자로 인하여 파괴되리라는 것을. 이것이 만약 꿈에 불과하다면 다행하겠다. 그러나 그것이 무서운 현실인 것을 어찌 하랴? 마음을 고요히 하여 10여년 옛적을 생각하여 보라! 위대한 광경에 마음이 끌리어 문 앞에 가까이 나갈 때 사람은 알지 못하게 그 장엄한 미에 마음을 빼앗길 것이다. 이리하여 중문으로 들어가 금천교를 건너가면 앞에는 장대한 근정전이 용립하고 뒤에는 강녕전과 경회루의 기와가 물결치는 모양으로 서로 중첩하여 있다. 다시 금원(禁苑)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혹은 녹색으로 혹은 적색으로 몸을 장식한 10여 개의 건물이 혹은 그 아래 연화(蓮花)를 피우고 혹은 그 위에 송지(松枝)를 뒤덮어 각각 보기 좋은 장소를 택하여 있다. 동에는 건춘문 서에는 영추문 북에는 신무문 그리하고 남면의 정문을 이름하여 사람들은 광화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정연한 조직(組織) 있는 광경은 다시 두 번 이 세상에서 보지 못할 것이다. 이조의 대표적 건축인 강녕전과 교태전은 이미 다른 곳으로 이전이 되고 변형이 되어 지금은 다만 온돌에서 나오는 연기만이 작은 산 옆에서 고요히 떠오르고 있을 뿐이다. 중요한 최대의 건축인 근정전을 문 앞에서 우러러 볼 날은 두 번 우리에게 오지 아니할 것이다. 곧 얼마 아니하여 그러한 동양의 건축과 아무 관계 없는 방대한 양풍(洋風)의 건축이 곧 장차 완성될 총독부의 건축이 지금 그 준성(竣成)을 급히 하고 있지 아니한가? 아! 이미 전날에는 자연의 배경을 고찰하고 건축과 건축의 관계를 숙려하여 모든 점에 균등의 미를 포함케 하여 순 동양의 예술을 보류(保留)하려고 한 노력이 지금에 이르러는 전연(全然)히 파괴가 되고 방기가 되고 무시가 되었으며 이에 대신하여 아무 창조의 미를 가지지 못한 양풍의 건축이 돌연히 이 신성한 지경을 침범한 것이다. 이리하여 광화문에 연속된 흥례문은 이미 자취도 없어졌으며 저 금천교와 또 그 아래로 보이던 석조의 괴물(怪物)은 무참히 파괴를 당하여 지금은 다만 그 석편(石片) 등이 풀 속에 흩어져 있을 뿐이다. 저 위대한 경회루는 이후에도 잔존하겠지만 그것은 다만 유연(遊宴)의 용(用)으로만 공급될 것이다. 이리하여 남는 광화문은 그 위치에 서고 있을만한 의의를 참혹히 잃어버릴 것이다. 이전 날에는 그 문이 없어서는 안 될 위치에 존재했으나 지금은 도리어 있어서는 안 될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것은 그 건물을 사용하는 자가 변한 까닭이 아니고 무엇이랴? 누구든지 저 양풍의 건축이 광화문의 존재를 무시하고 설계된 것인 것은 부인할 자가 없을 것이다. (4) 현대의 동양, 주마등과 같이 모든 것이 격변하여 가는 현대 조선에서는 저 광화문이야말로 참말 귀중한 유작품(遺作品)이 아닌가? 이 까닭에 그 파괴가 무익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지를 숨길 수 없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실현되려는 파괴에 대하여 아!! 우리는 무슨 말을 하랴? 저 광화문이 파괴를 당하고 그 대신에 무엇이 건설되겠는가? 우리는 위대한 자를 무익한 노력으로써 파괴하고 그 대신에 왜소한 문을 세우게 되는 날을 어쩔 수 없이 기다리게 되었다. 아!! 그러면 여러 사람은 눈물을 흘릴까? 그만 미쳐 버릴까? 어떠한 기예로라도 저 광화문보다 더 장엄하고 더 거대하고 더 아름다운 문을 세우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광화문과 장차 세울 문을 마음에 그리고 어느 문이 우월할까를 선택하여 보라! 그 선택함에는 일순간의 시간이라도 요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 없는 파괴가 기탄(忌憚) 없이 감행됨에야 무슨 말을 하면 좋을 것인가? 여러 사람은 결코 스러지지 아니 할 하나의 기억이 스러지라고 강제하는 날이 시시각각으로 가까워 옴을 알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스러지지 아니할 기억이 이 문자(文字)로써 여러 사람의 가슴에 인(印) 박힐 수가 있을는지? 어찌하여 저 광화문이 파괴를 당한다는 생각을 우리에게 줬는가? 아! 어찌하여 그 파괴되는 문을 구원할 수 없으리만치 그처럼 비참한 경우에 빠진 자기가 되었는가? 우리에게 그것을 변해(辯解·변명)할만한 변해다운 변해가 있을까? 우리가 이러한 파괴를 마음대로 하는 것은 우리의 우의(友誼) 상 정당한 일일까? 또는 이 건축에 대한 정당한 이해일까? 우리는 그 파괴를 시인할 만한 적극적 이유를 어디를 가든지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아! 우리는 공연히 대답할 수 없는 대답을 바라서는 아니 된다. 그러나 파괴하는 그 사람은 대답하려고도 아니하고 파괴를 마음대로 행하고 있다. 아! 시간은 주저 없이 광화문의 사형(死刑)을 우리에게 고하고 있도다. 문은 재흥(再興)된 후로부터 겨우 50여 년의 성상(星霜)을 지났을 뿐이다. 그것이 어떻게 조성되었으며 누가 지었으며 또는 어떻게 완성되었는가는 지금도 오히려 새로운 추억이 아니냐? 그리하고 오히려 그러한 사실을 목격한 사람이 지금도 남아 있는 이 때에 이러한 파괴를 감행하여 그러한 기억을 추가케 하는 것은 그들에게 대하야 너무도 무정하고 무참한 행위가 아닌가? 나는 이러한 사정을 생각하고 파괴를 피하여 이전을 계획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면 이 자비스러운 처치로써 어떠한 운명을 광화문이 받을까? 다행히 죽음은 이로 인하여 면한다 할지라도 문이 가지고 있던 의의는 그만 반(半) 넘게 죽어 버리는 것이다. 광화문은 경복궁의 문이요, 딴 곳의 문이 아니다. 저 위치와 저 배경과 저 좌우의 벽을 제하고는 광화문에 얼만한 가치와 생명이 있을까를 생각하여 보라! 형체는 남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다만 추상적의 생명 없는 형체가 아니냐. 특히 자연과 건축과의 관계와 조화를 생각한 고인(古人)의 주의를 무시하고 그것이 얼만한 의의를 가지게 될 것인가? 아!! 그러면 다시 저를 ‘사(死)’에서 구원할 수는 없을까? 저의 존재와 가치를 시인하고 보호하려는 사람은 없는가? 저는 아직 젊도다. 육체는 완연히 건강하고 정신은 의연히 견고하지 아니한가! 때 아닌 죽음을 저에게 최촉(催促)하는 죄는 그 책임을 누가 지려는가! 아?! 광화문이여 너는 얼마나 적막히 생각하는가? 너의 많은 여러 벗들은 이미 너보다 먼저 죽어 바렷다. 도성의 서방(西方)을 장식하고 있던 돈의문(서대·西大)과 소의문(서소·西小)의 양 문은 벌써 시민의 눈에서 자취를 잃어버린 지가 오래다. 선년(先年)에 내가 혜화문(동소·東小)을 방문하였을 때 그 문은 보호자가 없는 까닭에 그 가련한 모양은 풍우(風雨)에 쓰러져 버릴 듯이 보였다. 너의 존귀한 형제인 숭례문(남대·南大)은 성벽에서 고립이 되었으며 또는 보잘 것 없는 철책으로 겨우 몸을 보전하고 있다. 사랑하여 주는 주인이 없는 너는 얼마나 그 짧은 운명을 애달피 생각하는가? 죽지 아니할 네가 죽지 않으면 안 될 이 세상을 얼마나 부자연하게 저주하고 원망하는가?(5) 아!! 문 앞에 안치된 2개의 큰 석사(石獅)여. 너는 오랫동안 잘 왕궁의 정문을 수호하였다. 추운 때나 더운 때나 어느 때를 물론하고 그 자태를 변치 않코 너에게 가까이 오는 자의 마음에 마다 위대한 권위로써 임하였다. 그리하고 문에 상당한 위엄과 확실로써 궁전에 더할 수 없는 미를 첨부하였다. 너는 지금도 묵묵히 전면을 바라보고 있으나 장차 네 주인의 신상에 내릴 운명을 위하여 너는 걱정하지 아니하는가? 아! 너는 자세히 알지 못하리라. 그러나 너의 주인은 이미 임종의 상(床) 위에 누워 있는 것이다. 그리하고 너도 영원히 동(動)하지 않겠다는 그 장소로부터 장차 동하게 될 날이 가까워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아!! 그러면 너는 장차 어디로 가게 되려는가?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아니 너를 가져가는 그 사람까지도 그 날이 오지 않으면 그 곳을 알지 못하리라고 생각한다. 용서해 다오? 나는 죄 있는 여러 사람을 대신하여 사죄하려고 한다. 나는 그 까닭에 지금 사죄의 붓을 든 것이다. 혹은 더운 여름철이나 또는 하늘 위에 눈송이 날릴 때나 그러하고 석모(夕暮)의 반월(半月)이 청백(靑白)의 빗을 누상(樓上)에 던질 때나 그 어느 때를 물론하고 나는 몇 번이나 여러 가지 생각을 마음에 그리고 그 문을 쳐다봤는지 알지 못한다. 지금도 그 거대한 모양이 아른아른 내 눈 앞에 떠오른다. 그런데 저 광화문이 이 세상에서 없어진다고 어떻게 생각할 수가 있을까? 그러나 그것은 괴로운 현실임에야 어찌 하랴? 누구든지 그 문을 파괴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말할 자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떠한 사정으로 인하여 너를 이러한 비참한 파탄의 도정까지 인도하게 되었는가? 나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에 말한 그 말을 생각한다. ‘여러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지 알지 못 한다’ 하는 이 말을. 만약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안다고 하면 안 될 일을 하고 있는 그 우열(愚劣·어리석고 못남)한 죄를 지지 아니할 것이다. 광화문이여 장수할 너의 운명이 단명에 마치고 마는 것을 너는 얼마나 괴로이 생각하고 얼마나 적막히 생각하는가? 나는 네가 아직 건전(健全)하여 있는 그 동안에 다시 바다를 건너 너를 찾아가려 한다. 너는 나를 고대하여 다오! 그러나 나는 그 전에 시간을 이용하여 이 한 편을 쓰는 것이다. 너를 산출(産出)한 너의 친한 민족들은 지금 말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 까닭에 그러한 사람을 대신하여 너를 애석히 생각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너의 생전에 말하여 두고 싶다. 그 까닭에 나는 이 말을 기록하여 공중(公衆) 앞에 보내는 것이다. 이로써 너의 존재가 다시 한 번 의식 깊게 여러 사람에게 반성을 준다고 하면 나는 얼마나 기뻐하랴? 그리하고 내가 기록하는 이 문자로써 그 의식을 영원히 계속케 한다 하면 너도 얼마나 기뻐할 것이냐? 그러면 이것이 나의 기쁨이 아니고 무엇이랴?(1922. 7. 4. 도쿄에서)조종엽기자 jjj@donga.com}

1890년 중국 남부에서 페스트가 발생했다. 이 페스트는 윈난성에서 홍콩으로, 인도 뭄바이로 퍼져나갔으며, 1907년경까지 모든 대륙으로 확산했다. 이전의 유행이 주로 유라시아와 북아프리카에 국한됐던 것과는 달랐다. 그 배경에는 긴밀하게 연결된 세계 경제, 항해기술의 발전과 상품 수송시간의 단축 등이 있었다. 이후 오늘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유행으로 생긴 일들과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각국 정부는 페스트 발병지에서 출항한 선박을 항구에서 격리했고, 사람들의 입국을 막았다. 포르투갈 정부는 아예 해상무역을 중단시켰다. 1897년 베네치아 국제위생회의에서는 어느 선에서 상품 수입을 금지하고 출항을 규제할지를 둘러싼 국제적 합의가 이뤄지기도 했다. 의학사를 연구하는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가 풍부한 사례를 통해 전염병과 세계 무역, 방역의 관계를 조명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걸그룹 트와이스의 신곡 ‘모어 앤드 모어(MORE & MORE)’ 뮤직비디오 장면에 등장하는 세트가 해외 설치미술가의 작품과 매우 흡사해 원작자가 표절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트와이스는 1일 미니 9집 ‘모어 앤드 모어’를 발표했고 동명 타이틀곡의 뮤직비디오에는 호수 위에 설치된 알록달록한 아치 모양 구조물 앞에서 멤버들이 군무를 추면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 구조물은 미국에서 활동하는 설치미술가인 데이비스 매카티의 작품 ‘펄스 포털’(Pulse Portal)과 매우 닮았다. 이 작가는 2018년경부터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미국 볼티모어와 라스베이거스, 시애틀 등 도시에서 열린 전시회와 축제 현장에 이 작품을 설치한 사진을 올렸다. 작가는 최근 SNS에 “트와이스가 내 조형물을 표절해 뮤직비디오를 만들었다. 이는 예술에 대한 노골적인 저작권 침해”라고 글을 올린 것으로 전해졌다. 트와이스 소속사 JYP엔터테인먼트는 3일 공식 입장을 통해 “‘모어 앤드 모어’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세트가 기존 특정 작품과 유사하다는 사실을 오늘 오전에 알았다”고 밝혔다. 이어 “뮤직비디오 제작사에 원작자와 대화를 통해 문제가 원만히 해결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며 “앞으로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검증 시스템을 보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봉오동전투 100주년을 맞아 관련 전시가 잇달아 열린다. 이북5도위원회(위원장 이명우)는 봉오동전투 승전 1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 사진기획전 ‘대한독립! 그날을 위한 봉오동전투’를 4∼16일 서울 종로구 이북5도청에서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당시 전장(戰場)의 오늘날 사진과 작전상황도 등을 통해 전투의 의미와 홍범도 장군의 생애를 조명한다. 전투의 시발점인 두만강 변 강양동 초소 원경, 전투가 벌어진 삼둔자 봉오동 전경 등이 전시된다. 봉오동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이 북간도 한인 3700여 명을 학살한 간도참변 역시 관련 사진을 통해 고발한다. 간도참변을 저지른 나남19사단과 예하 보병 제75연대의 병영 및 훈련 모습, 독립군 학살 장면 사진 등이 공개될 예정이다. 전시에서는 항일운동 기지였던 북간도 명동촌의 건설과 민족교육 장면 사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1920년 ‘대한민력’ 복제본 등도 볼 수 있다. 전시 자료는 명동촌을 개척한 규암 김약연 선생(1868∼1942)의 증손자 김재홍 함북도지사가 수집했다. 독립기념관도 ‘홍범도 일지 필사본’을 비롯해 독립군이 남긴 수기와 회고를 선보이는 특별전시를 4일부터 10월 25일까지 충남 천안시 독립기념관 특별기획전시실에서 연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물품의 가격 액수는 결코 소액이 아닙니다. 가령 소액이라 하더라도 해당 물품은 아군의 정신이고 또한 우리 민족의 심혈입니다.” 독립운동 단체 대한국민회 회장 대리 서상용(1873∼1961)이 1920년 중국군이 압수한 독립군의 군수품을 돌려받기 위해 작성한 문서 중 일부다. 압수품은 재봉기계와 총기용 기름, 군복, 약품 등이었다. 서상용은 이 글에서 “절대 타국 군인이나 민족에 위탁할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4일로 봉오동 전투가 시작된 지 100주년을 맞는다. 독립군이 대승을 거둔 건 1920년 6월 7일이지만 전투의 시작은 사흘 전인 6월 4일 홍범도(1868∼1943) 최진동(1882∼1945) 부대의 함북 종성군 일본군 헌병 초소 습격이다.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전개에 관해서는 연구가 적지 않지만 막상 승리의 바탕이 된 독립군의 무기와 보급 연구는 아직 부족한 편이다. 박환 수원대 교수는 최근 발간한 ‘독립군과 무기’(선인)에서 독립군 무장 현황에 대해 자세히 들여다봤다. 책에 따르면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무장투쟁 노선으로 전환한 뒤 1920년 말까지 무장에 심혈을 기울였다.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북로독군부만 해도 당시 소총 900여 정과 폭탄 100여 개, 권총 약 200정, 기관총 2문 등을 갖추고 있었다. 탄환도 총 1정에 150발씩 있었다. 이 같은 무장은 간도 동포들의 피와 땀에서 비롯됐다. 1920년 7월 서상용의 보고를 보면 당시 장총 한 정은 탄환 100발 등을 포함해 35원이었다. 이는 그 시절 간도 노동자 한 명의 한 해 노임(30∼45원)과 맞먹는다. 한인들은 금비녀부터 요강까지 독립군을 위해 군자금으로 내놨다. 청산리 전투 당시 사용한 무기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철수하던 체코군단으로부터 구입한 것이라는 건 널리 알려져 있다. 책에 따르면 당시 체코의 골동품 시장에는 무기대금으로 받은 한국인의 금반지, 비단 보자기 등이 흘러나왔고, 놋요강도 끼어 있었다고 한다. 북간도의 철혈광복단은 용정에서 일경을 습격해 15만 원을 빼앗아 군자금으로 쓰기도 했다. 한인들은 전투요원은 아니더라도 무기 운반대원으로 나섰다. 독립군의 무기는 중국과 러시아 국경지대 한인들이 육로와 해로로 반입했다. 어깨에 직접 메고 나르거나, 밀송선 수레 말 우마차를 동원했다. 대한군정서에 관한 일본 측 보고는 1920년 무기 운반대원이 “노령 방면에서 약 1500명의 운반대를 모집함으로써 불일간 병기와 함께 도착하게 됐다”고 적었다. 북로군정서 분대장이었던 이우석 역시 200여 명의 운반대원이 장총과 탄환 ‘200짐’을 운반했다고 생전 구술했다. 전투요원의 생활도 열악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대한국민회의 군사 훈련에 대한 일본 측 보고는 “식사는 가장 조악한 조밥에 부식물로는 한인이 먹는 야생초, 파를 넣은 된장국뿐”이라고 했다. 어렵게 확보한 독립군의 무기는 러시아를 중심으로 독일 벨기에 미국 프랑스 영국 제품이었고,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노획한 것도 있었다. 박 교수는 “독립군은 동포들의 자발적 희생으로 만든 상당한 수준의 무장을 갖고 있어 승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경북 경주시 남산 약수곡 석조여래좌상절터에서 통일신라시대 석불좌상에서 떨어져 나온 것으로 보이는 불상의 머리(불두·佛頭)가 발굴됐다. 문화재청은 “경주시가 일제강점기 석조여래좌상의 원위치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좌상의 머리로 추정되는 불두를 발견했다”고 3일 밝혔다. 조사 당시 석조여래좌상은 원래 자리에서 옮겨져 있었고, 그 옆에 불상 대좌(불상을 놓는 대)의 중대석과 상대석이 불안정한 상태로 노출돼 있었다고 한다. 하대석도 원래 위치에서 움직여 큰 바위 아래에 놓여 있었다. 이 바위 옆(서쪽)에서 머리는 땅속을 향하고 얼굴은 서쪽을 바라보는 상태로 발견됐으며 얼굴 오른쪽과 귀 일부에서 금박이 관찰됐다고 문화재청은 밝혔다. 머리가 유실됐던 석조여래좌상은 통일신라 후기 작품으로, 경주 석굴암 본존불상처럼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왼 손바닥은 펴서 위로 향하게 단전에 올리고 오른손은 펴서 무릎 아래 땅을 가리키는 모습의 인상)을 하고 있다. 통일신라 석불좌상의 대좌는 상당수가 팔각형인 데 비해 이 불상의 대좌는 네모다. 경주 이거사지 출토품으로 알려진 청와대 대통령 관저 뒤편 녹지원의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보물)과 형식이 같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걸그룹 트와이스의 신곡 ‘모어 앤드 모어’(MORE & MORE) 뮤직비디오 장면에 등장하는 세트가 해외 설치 미술가의 작품과 매우 흡사해 원작자가 표절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트와이스는 1일 미니 9집 ‘모어 앤드 모어’를 발표했고, 동명 타이틀곡의 뮤직비디오에는 호수 위에 설치된 알록달록한 아치 모양 구조물 앞에서 멤버들이 군무를 추면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 구조물은 미국에서 활동하는 설치미술가인 데이비스 맥카티(Davis McCarty)의 작품 ‘펄스 포털’(Pulse Portal)과 매우 닮아 있다. 이 작가는 2018년경부터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미국 볼티모어와 라스베이거스, 시애틀 등 도시에서 열린 전시회와 축제 현장에 이 작품을 설치한 사진을 올렸다. 작가는 최근 SNS에 “트와이스가 내 조형물을 표절해 뮤직비디오를 만들었다. 이는 예술에 대한 노골적인 저작권 침해”라고 글을 올린 것으로 전해졌다. 트와이스 소속사 JYP엔터테인먼트는 3일 공식 입장을 통해 “‘모어 앤드 모어’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세트가 기존 특정 작품과 유사하다는 사실을 오늘 오전 알았다”고 밝혔다. 이어 “뮤직비디오 제작사에 원작자와 대화를 통해 문제가 원만히 해결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며 “앞으로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검증 시스템을 보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조종엽기자 jjj@donga.com}

문화재청은 정면 9칸으로, 국내 사찰 누각으로는 가장 큰 전북 고창 선운사 만세루(萬歲樓)를 보물로 지정했다고 1일 밝혔다. 1620년 지은 만세루는 화재로 소실돼 1752년 다시 지었다. 정면 9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현존하는 사찰 누각은 대체로 정면 3칸이고, 5칸이나 7칸 규모도 있지만 9칸 규모는 흔치 않다. 처음에는 중층이었지만 재건하며 단층으로 지었다고 한다. 특히 가운데 칸 높은 기둥에 있는 마룻보(대들보 위에 설치되는 마지막 보)는 한쪽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 나무를 그대로 사용해 활기 넘치는 인상을 준다. 문화재청은 “만세루는 조선 후기 불교 사원의 누각 건물이 시대 흐름과 기능에 맞춰 구조를 적절하게 변용한 사례이며, 자재를 구하기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만들어낸 독창적인 건축물”이라고 설명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이제 ‘86세대’가 민주화의 ‘성직’을 내려놓게 하자.” 진보 성향의 계간지 ‘문화/과학’이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임명 사태 등을 계기로 ‘86세대’를 비판적으로 다룬 특집을 올 여름호(102호)에 냈다. 김현준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은 특집에 기고한 ‘86세대 지식인의 계급투쟁: 대리 정치와 표상의 독점’에서 최근 ‘조국 수호’에 나선 이 세대 일부 지식인을 비판적으로 분석했다. 김 연구원은 “‘조국 사태’로 드러난 건 민주 진영을 공격하기 위한 반민주 진영의 음모 따위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이었다”며 “그럼에도 일부 86세대 지식인은 불평등과 공정성의 문제가 촉발한 조국 비판을 ‘반민주’로 매도했다”고 지적했다. ‘86세대’의 엘리트들은 사실상 지배계급 내 편입을 시도하는 ‘상승 지향’ 세대라는 것이 김 연구원의 견해다. 그는 글에서 “이 세대가 스스로를 ‘민주화의 상징’ ‘도덕의 대변자’로 여기면서 민중을 대리한다는 자기 기만에 빠진 것은 아닌가”라고 물었다. 강정석 지식순환협동조합 대안대학 사무국장은 ‘계급 유지 전략으로서의 교육의 문제: 불평등의 구조화와 86세대’에서 “조 전 장관과 가족을 둘러싼 입시 비리 의혹은 한국 교육이 불평등을 고착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며 “소위 ‘86세대’는 자신들이 얻은 경제적 사회적 자원을 자녀 세대에 안정적으로 세습하는 방법으로 공정치 않은 교육제도를 활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성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86세대를 동질적 집단으로 규정하는 데 문제가 있다고 보고 권력과 부, 정보를 배타적으로 소유한 ‘파워 엘리트 86세대’에 비판의 초점을 맞췄다. 김 교수는 기고문 ‘파워 엘리트 86세대의 시민 되기와 촛불민심의 유예’에서 “파워 엘리트 86세대는 IMF 외환위기로 인한 정리해고를 비켜갔고 노동유연화 정책의 집행자로 참여했을 뿐 아니라 부동산으로 부를 축적하는 등 시류에 부합해 한국 사회의 상층으로 진입했다”며 “그럼에도 삶의 궤적을 ‘민주주의’로 정당화하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또 “청년 세대의 좌절은 촛불 민심을 근거로 헤게모니를 잡은 86세대가 스스로 청산 대상이 됐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비판했다. 이 밖에도 이번 특집에서는 ‘86세대의 문화 권력과 그 양가성에 대하여’(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대학 고용구조의 양극화와 86세대’(박치현 성균관대 강사), ‘86세대와 여성’(박혜경 인하대 사회복지학과 초빙교수)의 글이 실렸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6세기 북미의 화산 폭발이 고구려에 기근을 일으키고 국제정세를 바꿨을까? 기후가 우리 역사에 미친 영향을 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열렸다. 한국역사연구회와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은 학술회의 ‘인류세와 생태환경사: 한국 기후사의 모색’을 5월 30일 서울 중구 대우재단빌딩에서 개최했다. 한국사에서 환경의 영향에 관한 연구는 고대로 올라갈수록 자료 부족 등으로 인해 별 진척이 없었다. 학술회의 발표문 “한국사에서 ‘536년 화산’의 이해와 적용”(서민수 건국대 사학과 박사 수료)은 6세기 이상기후가 만든 재앙을 다룬 영국의 저자 데이비드 키스 등 해외 연구를 소개한 뒤 한국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추적했다. 발표문에 따르면 536년경 유럽과 중동 일대에서 햇빛이 약해졌다는 기록이 있고, 북반구 각지의 나무 나이테는 이 시기 기온 하강을 보여준다. 계절풍의 약화로 건조한 날씨가 지속됐다. 중국에는 이 시기 여름철에 눈과 서리가 내렸다는 기록이 있고, 541년 신라에는 3월(음력)에 눈이 한 척(尺)이나 왔다. 중국 북조와 고구려에서 서리와 가뭄, 기근, 혹한, 병충해가 일었다. 한랭 건조한 기후는 550년경까지 이어졌고, 농업생산량은 감소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536년 기근으로 인한 진휼(賑恤·곤궁한 백성을 구제함)과 왕의 순무(巡撫·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백성을 위로함)가 기록돼 있다. 536, 549, 550년에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참상이 벌어졌다고 한다. 이상기후는 535, 536년경 북반구에서 화산이 대규모로 분화했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우세하다. ‘범인’은 북미나 아이슬란드, 일본 등지의 화산 가운데 하나일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발표문은 “‘536년 화산 분화’는 중국과 한반도 일대에 갑작스러운 기후의 한랭건조화를 초래했고 만성적 기근이 광범위한 인구 이동을 유발했을 뿐 아니라 북방 유목민의 이합집산을 가속화했다”며 한반도 주변 국제정세 재편을 촉발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날 학술회의에서 김미성 KAIST 인문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은 조선 현종, 숙종 시기 이상기후로 발생한 대규모 유민(流民)이 서울에 몰려 조선 후기 상업 발전에 영향을 줬을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다. 이 밖에도 ‘1939년 조선 대가뭄의 양상과 그 여파’(고태우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동해 명태 회유로의 이동과 남북한 냉전’(조수룡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이 발표됐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