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엽

조종엽 차장

동아일보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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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조종엽 차장입니다.

jjj@donga.com

취재분야

2025-11-24~2025-12-24
문학/출판30%
역사21%
정치일반10%
문화 일반10%
사회일반10%
칼럼7%
검찰-법원판결3%
인사일반3%
산업3%
만화3%
  • 벽지 뒤에 숨기고, 경매로 세탁… 문화재 범죄 ‘007영화’ 뺨친다

    ‘물컹.’ 왜 ‘바스락’도 아니고 물컹인가. 지난해 봄 한상진 문화재청 사범단속반장(40)은 압수수색하던 집에서 침대 밑에 손을 넣었다가 예상치 못한 감촉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수색을 시작한 지 2시간이 지난 시점. 막노동하러 나가 들어오지 않았다던 문화재 은닉범이 침대 아래 높이 30cm도 안 되는 공간에서 욕설을 내뱉으며 기어 나왔다. 범인을 추궁한 결과 그의 아내가 운영하는 식당의 벽과 벽지 틈에서 국내 현존하는 서양식 세계지도 가운데 가장 앞선 보물 ‘만국전도(萬國全圖)’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문중에서 보관해 오다 1994년경 도난당한 물건이다. 앞서 전국을 돌며 탐문하던 단속반에 지난해 초 만국전도가 매물로 나왔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단속반은 매매업자 두어 명을 추적한 끝에 만국전도를 가지고 있다는 범인이 누군지 확인했다. 문제는 ‘범인이 순순히 이 지도를 내놓을 것인가’였다. 최근 동아일보 기자와 만난 한 반장은 “문화재 도난 사건은 도난품을 반드시 회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다른 사건과 비교가 안 된다. 이 때문에 절도, 은닉 혐의자들과의 기 싸움도 심하다”고 말했다. 범인도 처음에는 “내가 가진 건 보물이 아니라 다른 지도”라고 주장했다. 단속반은 “무슨 헛소리냐. 얼른 가져오라”고 했지만 범인은 “(지도를) 태워 버리겠다”고 협박했다. 단속반이 설득과 회유를 거듭했지만 범인은 끝내 지도를 내놓지 않았다. 결국 법원으로부터 영장을 받아 찾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 압수수색에 나섰던 것. 침대 밑에서 나타난 범인은 뒤늦게 “한 반장님, 지금이라도 내놓으면 좀 봐줍니까”라고 물었다. 이미 범인의 차량 트렁크와 방에서 지도와 함께 도난당한 문중의 고서적 100여 권을 찾아낸 상황이었다. 도난당했던 조선 중기 문신 권도(1575∼1644)의 ‘동계문집’ 목판이 최근 회수된 일을 계기로 문화재 절도 범죄와 추적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1809년 간행된 이 목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유교 책판’들과 비슷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조사 결과 2016년 종중 장판각(藏板閣·인쇄용 책판을 보관하는 전각)에서 목판을 훔친 범인은 이 종중 사람으로 매매업자에게 1000만 원에 팔아넘겼다. 범행 동기는 ‘생활고’였다. 한 반장에 따르면 동계문집 절도범은 순진한 경우에 속한다. 문화재 사범은 대략 자금책(유통책)과 절도책, 판매책이 팀으로 움직인다. 자금책이 의뢰해 절도책이 유물을 훔쳐 오면 판매책을 거쳐 또 다른 매매업자나 수집가의 손으로 넘긴다.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다. 대표적인 사례가 해저 문화재 도굴범이다. 자금책이 선박과 진흙을 빼는 장비를 임대하고 절도책의 숙박비 유류비 일당(日當) 등을 댄다. 현장에서는 선장과 잠수부, 조수가 일한다. 근래에는 아예 인근 양식장을 빌린다. 도굴한 도자기를 망에 담아 양식장 바닷물 속에 숨겨 놨다가 ‘고객’이 찾아오면 판매책이 늘어뜨린 끈을 감아올려 도자기를 보여준다. 도굴꾼들끼리도 속고 속인다. “어마어마한 보물이 잠들어 있으니 자금을 대면 건져 주겠다”며 자금책의 돈만 챙기고는 자취를 감추는 사기꾼도 있다. 2015년 충남 태안군 당암포구 앞바다에서 고려와 조선시대 도자기를 건져낸 일당은 자신의 몫이 적은 것에 불만을 품은 잠수부의 제보가 계기가 돼 붙잡을 수 있었다. 최근 문화재 범죄는 지능화, 음성화되고 있다. 이를테면 장물인 게 뻔한 불화(佛畵)를 화기(畵記)를 훼손한 채 경매에 내놔 마치 정상적인 물건인 양 세탁한다는 얘기다. 해외 밀반출 시도도 꾸준하다고 한다. 석물 같은 경우 수사망이 좁혀지는 데 압박을 느낀 절도·은닉범이 인적이 드문 도로가에 버려 놓고 공중전화로 위치를 통보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지정문화재는 ‘장물인 줄 모르고 샀다’고 해명해도 소용이 없다. 이른바 ‘선의 취득 배제’다. 비지정문화재는 도난신고가 됐는지, 공소시효가 지나지 않았는지를 확인해 형사처벌 여부를 따진다. 그와 무관하게 원소유자가 반환소송을 낼 수도 있다. 한 반장은 “선의의 구매자라면 최소한 사려는 물건이 장물은 아닌지 지역 박물관이나 문화재청 등에 확인해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집안에서 물려받은 문화재를 지키고자 한다면 “적어도 사진과 수량 기록을 남기고 가치가 있는 물건은 국공립 박물관에 기탁하는 게 좋다”고 덧붙였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0-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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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속고 속이는 ‘보물 찾기’…문화재 단속반의 절도범 추적기

    ‘물컹.’ 왜 ‘바스락’도 아니고 물컹인가. 지난해 봄 한상진 문화재청 사범단속반장(40)은 압수수색하던 집에서 침대 밑에 손을 넣었다가 예상치 못한 감촉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수색을 시작한 지 2시간이 지난 시점. 막노동하러 나가 들어오지 않았다던 문화재 은닉범이 침대 아래 높이 30㎝도 안 되는 공간에서 욕설을 내뱉으며 기어 나왔다. 범인을 추궁한 결과 그의 아내가 운영하는 식당의 벽과 벽지 틈에서 국내 현존하는 서양식 세계지도 가운데 가장 앞선 보물 ‘만국전도(萬國全圖)’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문중에서 보관해 오다 1994년경 도난당한 물건이다. 앞서 전국을 돌며 탐문하던 단속반에 지난해 초 만국전도가 매물로 나왔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단속반은 매매업자 두어 명을 추적한 끝에 만국전도를 가지고 있다는 범인이 누군지 확인했다. 문제는 ‘범인이 순순히 이 지도를 내놓을 것인가’였다. 최근 동아일보 기자와 만난 한 반장은 “문화재 도난 사건은 도난품을 반드시 회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다른 사건과 비교가 안 된다. 이 때문에 절도, 은닉 혐의자들과의 기 싸움도 심하다”고 말했다. 범인도 처음에는 “내가 가진 건 보물이 아니라 다른 지도”라고 주장했다. 단속반은 “무슨 헛소리냐. 얼른 가져오라”고 했지만 범인은 “(지도를) 태워 버리겠다”고 협박했다. 단속반이 설득과 회유를 거듭했지만 범인은 끝내 지도를 내놓지 않았다. 결국 법원으로부터 영장을 받아 찾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 압수수색에 나섰던 것. 침대 밑에서 나타난 범인은 뒤늦게 “한 반장님, 지금이라도 내놓으면 좀 봐줍니까”라고 물었다. 이미 범인의 차량 트렁크와 방에서 지도와 함께 도난당한 문중의 고서적 100여 권을 찾아낸 상황이었다. 도난당했던 조선 중기 문신 권도(1575~1644)의 ‘동계문집’ 목판이 최근 회수된 일을 계기로 문화재 절도 범죄와 추적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1809년 간행된 이 목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유교 책판’들과 비슷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조사 결과 2016년 종중 장판각에서 목판을 훔친 범인은 이 종중 사람으로 매매업자에게 1000만 원에 팔아넘겼다. 범행 동기는 ‘생활고’였다. 한 반장에 따르면 동계문집 절도범은 순진한 경우에 속한다. 문화재 사범은 대략 자금책(유통책)과 절도책, 판매책이 팀으로 움직인다. 자금책이 의뢰해 절도책이 유물을 훔쳐 오면 판매책을 거쳐 또 다른 매매업자나 수집가의 손으로 넘긴다.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다. 대표적인 사례가 해저 문화재 도굴범이다. 자금책이 선박과 진흙을 빼는 장비를 임대하고 절도책의 숙박비 유류비 일당(日當) 등을 댄다. 현장에서는 선장과 잠수부, 조수가 일한다. 근래에는 아예 인근 양식장을 빌린다. 도굴한 도자기를 망에 담아 양식장 바닷물 속에 숨겨 놨다가 ‘고객’이 찾아오면 판매책이 늘어뜨린 끈을 감아올려 도자기를 보여준다. 도굴꾼들끼리도 속고 속인다. “어마어마한 보물이 잠들어 있으니 자금을 대면 건져 주겠다”며 자금책의 돈만 챙기고는 자취를 감추는 사기꾼도 있다. 2015년 충남 태안군 당암포구 앞바다에서 고려와 조선시대 도자기를 건져낸 일당은 자신의 몫이 적은 것에 불만을 품은 잠수부의 제보가 계기가 돼 붙잡을 수 있었다. 최근 문화재 범죄는 지능화, 음성화되고 있다. 이를테면 장물인 게 뻔한 불화(佛畵)를 화기(畵記)를 훼손한 채 경매에 내놔 마치 정상적인 물건인 양 세탁한다는 얘기다. 해외 밀반출 시도도 꾸준하다고 한다. 석물 같은 경우 수사망이 좁혀지는 데 압박을 느낀 절도·은닉범이 인적이 드문 도로가에 버려 놓고 공중전화로 위치를 통보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지정문화재는 ‘장물인 줄 모르고 샀다’고 해명해도 소용이 없다. 이른바 ‘선의 취득 배제’다. 비지정문화재는 도난신고가 됐는지, 공소시효가 지나지 않았는지를 확인해 형사처벌 여부를 따진다. 그와 무관하게 원소유자가 반환소송을 낼 수도 있다. 한 반장은 “선의의 구매자라면 최소한 사려는 물건이 장물은 아닌지 지역 박물관이나 문화재청 등에 확인해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집안에서 물려받은 문화재를 지키고자 한다면 “최소한 사진과 수량 기록을 남기고 가치가 있는 물건은 국공립 박물관에 기탁하라”고 덧붙였다. 조종엽기자 jjj@donga.com}

    • 2020-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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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선사시대 사람들 생각, 지금과 얼마나 다를까

    터키 차탈회위크 신석기 유적의 무덤은 새알처럼 둥근 모양이다. 유골은 마치 엄마 배 속의 아기처럼 허리를 접고 팔과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있다. 망자가 다시 태어나리라는 재생의 소망을 담았을 것이다. 고구려의 해뚫음무늬 금동관 장식에서 용 두 마리와 봉황이 둘러싼 원은 해다. 그 안에는 태양 속에서 산다는 세 발 까마귀가 힘 있게 버티고 서 있다. 하늘신의 아들이 세운 나라에 산다는 고구려인의 자부심을 보여 준다. 각종 유물과 유적 등을 소재로 한반도와 주변에서 살던 고대인들의 생각과 사상으로 안내하는 책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와 암각화를 깊이 연구한 울산대 교수가 가족과 대화하는 형식을 빌려 비교적 쉽게 썼다. 저자는 사람이 세상을 보고 우주를 이해하는 방식이 선사시대와 과연 얼마나 크게 다를지 묻는다. 부제는 ‘동굴벽화에서 고대종교까지’.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0-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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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춘향의 항변은 국가권력의 폭력에 맞선 民의 실천”

    “유부(有夫) 겁탈하는 것은 죄 아니고 무엇이오. … 팔자 좋은 춘향 몸이 팔도 방백 수령 중에 제일 명관 만났구나. 팔도 방백 수령님네 치민(治民)하러 내려왔제, 악형하러 내려왔소.”(춘향전 ‘완판 84장본’에서) 춘향이 수청을 강요하는 신관 사또에게 대거리하며 맞서는 ‘춘향전’ 대목이다. 당대의 백성은 이 대목에서 얼마나 통쾌했을까. 춘향전은 조선 후기의 신분 질서를 부정하면서 근대적 이념과 논리를 제시했다는 해석이 자리 잡고 있다. 정반대의 해석도 있다. 하층민에게까지 열녀가 되기를 요구하는 춘향전은 지배계층의 통치 논리를 강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 중후기 정치사회를 연구하는 오수창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62)가 최근 ‘춘향전, 역사학자의 토론과 해석’(그물)을 출간하며 새로운 해석을 내놨다. 7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연구실에서 만난 오 교수는 “지금까지의 상반된 두 가지 해석은 각각 속류 민중주의와 허무주의에 빠진 것”이라고 말했다. “얼마나 지켜졌느냐는 별도로 하고 조선시대 수령이 기생(관기)을 포함한 읍비(邑婢·지방관아의 노비)와 동침하는 건 엄연한 불법이었습니다. 춘향이 표방한 정렬(貞烈)은 체제가 기생에게 허락한 범위 안에 있었고 춘향은 사또에게 법을 지키라고 요구한 것뿐이지요.” 오 교수는 “그런 면에서 춘향이 질적으로 새로운 논리를 제시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럼 춘향은 그저 지배체제의 이념에 순응한 것일까. 오 교수는 “사회 최하층의 나이 어린 기생이 관아 마당에서 지방의 최고 권력자와 정면으로 대결한 것 자체가 조선후기 국가권력의 불법과 폭력에 맞선 민(民)의 실천을 상징한다”고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한문본에서 매우 부드러웠던 대결 장면은 한글 이본(異本)들에서 점점 격렬하게 그려진다. 사또도 단순한 탐관오리가 아니라 체제의 대표자 성격이 뚜렷해진다. 춘향의 행동에 대한 기존의 상반된 해석 두 가지는 500년을 지속한 조선이라는 나라와 체제의 세련됨, 뒤집어 말하면 교활함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오 교수는 “민본주의를 표방한 조선의 지배층은 전근대사회임에도 특권을 상당히 억제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는 움직임을 효과적으로 억압했다”고 말했다. 이런 맥락에서 봐야 통치 이념의 보편성을 끌어다 자신의 가치를 천명한 춘향의 저항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 당대 민중이 춘향전을 열렬히 지지한 것도 처절하고도 찬란한 저항의 모습에 반해서였다는 얘기다. “계몽주의가 등장하고 그에 따라 근대가 만들어졌다는 식으로 새로운 이념과 사상이 세상을 바꾼다는 통념이 있지만 역사를 보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춘향전이 보여주듯 민(民)의 저항과 실천은 새로운 이념에 앞서 나타납니다. 낡은 질서가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는 없으니까요. 오늘날 ‘법과 상식을 지키라’는 운동이 비록 논리적으로는 새로울 게 없다고 해도 이미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 있다고 봅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0-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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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작자 곽신애, 정지우 아내이자 곽경택 동생

    “영화에 대해 주저하지 않고 의견을 말씀해 주신 한국 관객들에게 감사하다. 덕분에 안주하지 않고, 감독과 창작자들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9일(현지 시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마지막으로 마이크를 잡은 이미경 CJ그룹 부회장(62)이 말했다. 남동생인 이재현 CJ 회장(60)에게도 “불가능한 꿈일지라도 우리가 꿈을 꿀 수 있도록 해줘서 고맙다”고 밝혔다. 이 부회장은 ‘기생충’ 책임프로듀서(CP)로 기생충의 해외 진출과 수상 캠페인을 전폭 지원했다. 영화계 오피니언 리더들을 대상으로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는 데 힘썼다. 이 부회장은 아카데미 회원이기도 하다. 이 부회장은 영화 ‘마더’(2009년)의 제작투자를 맡으면서 봉준호 감독과 인연을 맺었다. CJ는 봉 감독의 ‘살인의 추억’과 ‘마더’, ‘설국열차’ 등의 투자, 배급을 맡았다. ‘기생충’의 아카데미 수상은 이 부회장의 꿈이 이뤄진 것이기도 하다. 이 부회장은 이날 “봉 감독의 모든 것을 좋아한다. 미소, 머리 스타일, 그가 말하고 걷는 방식, 특히 그가 연출하는 방식을 좋아한다. 가장 좋아하는 건 그의 유머 감각이다”라고 말했다. 곽신애 바른손이엔에이 대표(52)는 아카데미 92년 사상 처음으로 작품상을 받은 아시아 여성 제작자가 됐다. 그는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지금 이 순간 굉장히 의미 있고 상징적인, 그리고 시의적절한 역사가 쓰인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곽 대표는 키를 쥐고 제작한 영화가 단 한 편뿐인 자칭 ‘초짜’ 제작자다. 봉 감독과의 협업은 이번이 처음이다. 2015년 봉 감독이 ‘기생충’ 트리트먼트(시놉시스보다 좀 더 구체화된 개요)를 보내 오면서부터다. 당시 ‘작품에 폐가 될까 봐 너무 두렵지만 설레기도 합니다’라고 봉 감독에게 문자를 보냈는데 ‘뭘 또 두렵기까지씩이나’라는 답변이 왔다고 한다. 곽 대표는 봉 감독에 대해 “상대방이 최선의 작업을 할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을 주는 감독”이라고 했다. 대표적인 ‘영화인 가족’이기도 하다. 곽 대표의 오빠는 ‘친구’의 곽경택 감독이고, 영화잡지 ‘월간 키노’ 기자 시절 만난 남편은 영화 ‘해피엔드’의 정지우 감독이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0-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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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봉준호 영화 균형잡는 ‘호호브러더스’의 한축… ‘페르소나’ 그 이상의 배우 송강호

    “뭘 해도 다 받아줄 것 같은 예술가.”(배우 송강호가 봉준호 감독에게) “영화 전체의 흐름을 규정해버리는 선배님.”(봉 감독이 송강호에게) 영화 ‘살인의 추억’(2003년)을 시작으로 ‘괴물’(2006년)과 ‘설국열차’(2013년)를 거쳐 ‘기생충’까지 봉 감독의 필모그래피 가운데서도 가장 빛나는 작품들의 포스터 전면에는 예외 없이 배우 송강호의 얼굴이 있다. 송강호는 봉 감독이라는 선장이 모는 배의 균형추다. 뚜렷한 메시지를 제시하는 선장이 얼핏 작위적일 수 있는 설정을 흔들어대도 영화가 가라앉지 않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는 얘기다. 형사와 한강 둔치의 매점 주인, 열차를 멈추려는 보안기술자와 백수라는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하면서도 특유의 존재감으로 관객이 긴장을 풀지 않게 만들었다. ‘살인의 추억’에서 “밥은 먹고 다니냐”는 명대사가 그의 애드리브란 것도 널리 알려진 사실. 그래서 ‘봉 감독의 페르소나’라는 표현이 송강호에게는 다소 부족한 감이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봉 감독은 지난해 5월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소감으로 “위대한 배우가 없었다면 한 장면도 찍지 못할 영화였다”며 그에게 영광을 돌렸다. ‘기생충’의 아카데미 석권은 송강호와 봉 감독의 작고 아름다운 첫 만남이 맺은 세계적인 결실이다. 무명 시절 송강호가 단역 오디션에서 떨어진 뒤 당시 조감독이던 봉 감독이 “언젠가 꼭 함께하자”는 메시지를 전했던 것. ‘반칙왕’(2000년)과 ‘공동경비구역 JSA’(2000년) 등으로 인기 배우 반열에 오른 송강호는 장편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2000년)의 흥행에 실패한 봉 감독의 캐스팅을 선뜻 받아들였다. 그렇게 ‘살인의 추억’이 탄생했다. 송강호는 지난해 제72회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서 ‘엑설런스 어워드’를 받았다. 아시아 배우 가운데 첫 수상이었다. 지난해 12월에는 미국 LA비평가협회상 남우조연상도 받았다. 이번 아카데미에서는 연기상 후보에 이름을 올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호호 브러더스’라는 이름에 걸맞게 송강호는 봉 감독과 함께 ‘오스카 캠페인’ 여정에서 ‘기생충’을 알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0-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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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뱃사람 교섭했으니 물품과 사람을 보내주소서”

    “선생님 앞. … 일전에 송금하신 200원은 영수하여 가지고 경영하는 일은 그래도 진행이 되어 가오며 … 이쪽에서는 뱃사람을 교섭하여 놓았사오니 곧 물품과 사람을 보내주시길 바라오며, 일자가 오래 걸리지 않도록 곧 회답하여 주시옵소서. … 5월 28일. 최흥식 상서(上書).” 1932년 청년 최흥식(1909∼1932)은 중국 다롄에서 상하이의 곽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마치 상인이 투자자에게 중간보고를 한 듯하지만 백범 김구 전집에 수록된 편지다. 수신자인 곽윤은 백범 김구의 가명이다. 최흥식은 김구가 일본 수뇌를 암살하고자 비밀리에 조직한 한인애국단에 1931년 가입했고, 일제의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를 처단하기 위해 다롄에 잠복해 있다가 김구에게 이 편지를 보냈다. 보내달라는 ‘물품’은 거사용 폭탄, ‘사람’은 거사를 함께할 사람, ‘뱃사람’은 현지 조력자를 가리키는 암호였다. 거사 준비가 어느 정도 진행됐음을 보고하는 동시에 조속히 실행하자고 신호를 보냈던 것이다. 문화재청은 이 편지를 비롯한 ‘한인애국단원 편지 및 봉투’ 7점 등 모두 5건의 항일유산을 문화재로 최근 등록했다. 등록된 한인애국단원 편지 가운데는 김영구가 곽윤(김구)에게 보낸 것도 있다. “선생님 … 입학참고서와 옥편은 구하였으나 … 입학은 … 자신을 하옵기에 … 대략 학비는….” 필적과 정황으로 보아 발신자 김영구는 한인애국단원 유상근(1910∼1945)으로 추정된다. 거사 실행을 ‘입학’으로, 거사용 폭탄과 권총 등을 ‘입학참고서’와 ‘옥편’으로, 거사 비용을 ‘학비’로 바꿔 쓴 것이다. 이와 함께 한인애국단 유상근, 이덕주(1909∼1935), 유진식(1912∼1966)의 ‘한인애국단원 이력서 및 봉투’ 6점도 문화재로 등록됐다. 문화재청은 “해당 유물은 대일 의열 투쟁 거사의 최일선에 나섰다가 체포된 청년 독립투사의 신상을 새롭게 밝혀줄 원본들”이라며 “한인애국단 활동은 비밀스럽게 전개됐기에 편지와 이력서는 매우 드물고 귀중한 자료”라고 설명했다. 독립운동가 이교재(1887∼1933)가 임시정부를 방문하고 국내에 들여온 문서인 ‘대한민국임시정부 이교재 위임장 및 상해 격발(檄發·격문, 선언)’도 문화재로 등록됐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0-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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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회 한국학 저술상 수상작에 ‘김용섭 저작집 1~9’

    한국학중앙연구원(원장 안병욱)은 제1회 한국학 저술상 수상작으로 김용섭 연세대 명예교수(89·사진)의 ‘김용섭 저작집 1∼9’를 최근 선정했다. 김 교수는 조선 후기 농업사를 연구해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론을 제시한 학자로 평가된다.   수상작인 저작집은 ‘조선후기농업사연구’와 ‘한국근대농업사연구’, ‘한국중세농업사연구’ 등으로 이뤄져 있다. 상금은 3000만 원이고, 1000만 원 상당의 수상작이 전국 도서관에 배포된다. 시상식은 12일 오후 4시 경기 성남시 연구원 소강당에서 재단법인 산기 관계자들과 이만열 심사위원장(숙명여대 명예교수)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릴 예정이다. 한국학 저술상은 우수한 한국학 도서를 발굴해 학문 발전과 출판을 장려하고자 재단법인 산기의 후원을 받아 제정됐다. 재단법인 산기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있는 국내 최고(最古) 서점 ‘통문관’의 창업주인 산기(山氣) 이겸노 선생의 뜻을 이어 설립한 비영리법인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0-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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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타인에 절대적인 환대를 탐구하다

    2017∼2019년 월간 ‘현대문학’에 연재했던 에세이 모음집이다. 전북대 영문과 교수인 저자는 성서와 불경, 소설, 시, 철학을 오가며 환대의 윤리를 탐구한다. ‘수대나태자경’에서 석가모니의 전생인 수대나태자는 일종의 ‘보시 성애자’다. 당대의 전략 병기인 최강의 코끼리를 적국에 스스럼없이 내 줘 산으로 쫓겨 가더니, 급기야 가족을 종으로 내 달라는 사제의 말을 따른다. 사실 사제는 태자를 시험하려는 제석천의 현신. 가족은 다시 모이고, 태자의 조건 없는 보시는 적국의 왕도 변화시킨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아는’ 이 비린내 나는 저잣거리의 어수룩한 호구들에게도 천사가 ‘짠’ 하고 나타날까. 저자는 “완전하고 무조건적인 환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역설적으로 그 이상을 향해 나아갈 때 삶이 더 윤리적인 것이 된다”고 말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0-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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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도출병은 명백한 집단학살” 간도출병사 번역 김연옥 교수

    “일제의 간도 출병은 명백한 계획적 제노사이드(집단학살)입니다.” ‘간도출병사’를 번역 출간한 김연옥 육군사관학교 교수(42·사진)는 동아일보와의 전화 통화에서 “간도출병사를 읽으면 일본 군부가 외무성과 ‘투 트랙’으로 움직이면서 출병 계획을 입안한 것이 드러난다”면서 “간도학살 역시 군부가 단독 행동으로 현지에서 벌인 게 아니라 일본 정부 차원에서 결정하고 자행한 학살”이라고 말했다. 간도출병사는 1920년 청산리전투와 거의 같은 시기에 작성돼 당시의 실시간 전황(戰況)을 전해주는 1급 자료다. ‘간도출병사’에 기록된 비밀작전 지령을 보면 일본군이 애초부터 한국인 마을을 초토화하려 했다는 걸 시사하는 명령이 드러나 있다. 이들의 토벌 목표는 이른바 ‘불령선인’뿐 아니라 ‘가담하는 세력’ ‘반대되는 자’까지 포함해 뿌리를 뽑는 것이었다. 일례로 자료에 담긴 ‘군 참모본부 작전명령 57호’는 “1. 조선군사령관은 …혼춘 및 간도지방에서 불령선인 및 마적과 그에 가담하는 세력을 초토할 것”이라고 명시했다. 육군성 송달 ‘육밀(陸密)’ 제218호도 “불령선인의 무리들을 단순히 일상적으로 존재하는 불령단으로 보지 말 것. …반대되는 자에 대해서는 철저히 타격을 가해 제국이 받게 될 수도 있는 화근을 근절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명령했다. 일본군은 민간인을 학살했으면서도 독립군에 큰 타격을 가하는 데 실패했다. 간도출병사는 “여러 요인에 의해 그들에게 섬멸적 타격을 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인정하고 있다. 김 교수는 “독립군이 일본군 대부대를 어떻게 잘 피하면서 신출귀몰 했는지를 드러내는 점 역시 읽는 묘미”라고 말했다. 간도출병사가 청산리전투 당시 일본군 사망자를 11명으로 기록한 것에 대해서는 “일제 측이 사상자 자료를 누락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간도출병사’는 실제 적지 않은 피해가 생긴 봉오동전투의 일본군 사상자 역시 ‘약간 명’으로 쓰기도 했다. 김 교수는 “일본군은 ‘출병’ 당시 국경을 넘어 군사작전을 벌이는 불법성을 희석하고 민간인 학살의 만행을 가리기 위해 일종의 방패막이로 형식적으로나마 중국 측의 ‘양해’를 얻었다”면서 “일본군이 중국과의 공동 토벌이라는 협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애쓴 협상 과정이 간도출병사에 분명히 드러난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0-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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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교사도 살해 위협… “간도참변 본보 취재기자도 피살前 협박 가능성”

    간도참변(간도대학살) 당시 일본군은 외부의 현장 조사를 막기 위해 기독교장로회 선교사에게도 “현장에 가면 죽여 버리겠다”는 식으로 협박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간도출병사’에 남아있는 기록에 따르면 1920년 10월 31일 장암동 참변을 조사한 푸트(W R Foote) 선교사는 다른 현장을 조사하러 가기 위해 그해 11월 2일 간도 용정촌에서 병참사령관 쓰쓰이(筒井) 소좌와 만났다. 일본군이 장악한 도로의 통행증을 요청했지만 답변은 이랬다. “병졸이 귀하에게 하는 행위에 대해 나는 책임질 수 없다. 귀하는 …사살 당할 위해에 접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없다.…우리 병졸 중에는 인민의 불량(不良) 계급에 속하는 자도 일부 있으므로…즉, 만에 하나 귀하가 사살 당할 경우에는 많은 문제가 야기되며….” 국제 여론 때문에 일본군이 중요시하는 서양인 선교사에게도 이렇게 대응했으니 조선인 기자에게는 어땠을지 짐작할 수 있다. 동아일보 창간기자이자 논설기자로 간도참변을 취재하러 떠났다가 현지에서 피살된 장덕준 선생(1892∼1920·건국훈장 독립장·사진)은 더 센 협박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독립신문은 그의 최후에 관해 “밤중이 되어 …일본군은 말(馬)까지 가지고 다시 와서 가자고 강요하여 하는 수 없이 따라간 것인데 그 후로는 종적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일본군은 장덕준을 미워하고 기피하여 그날 밤 밖으로 유인하여 암살한 것이 틀림없다”고 보도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0-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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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년 간도에 내려진 비밀지령 “조선인 저항세력을 초토화하라”

    “날이 밝을 무렵 무장한 일본 보병의 일대(一隊)가 기독교 마을을 빈틈없이 포위하고 골짜기 안쪽 방향에 있는 볏단을 쌓아놓은 곳에 방화하고 촌민 일동에게 집 밖으로 나오라고 명령했다. … 눈을 마주칠 때마다 사살했고, 반사(半死)인 채로 쓰러져 활활 타오르는 건초 더미에 덮여 금세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불타 버렸다. 그사이 어머니도, 아내도, 자녀들도 마을 내 성년 남자 모두가 강제 처형을 당하는 것을 목격했다.” 푸트(W R Foote) 선교사와 함께 간도참변 현장을 목격한 용정촌 제창병원장 S H 마틴 선교사가 1920년 10월 31일 장암동 학살 사건을 조사하고 쓴 ‘장암동 도살 사건’이다. 김연옥 육군사관학교 교수가 최근 번역해 펴낸 ‘간도출병사’에 부록으로 실렸다. 마틴은 “가옥은 전부 불타버리고 일대가 연기로 뒤덮여 당시(當市·용정촌을 가리킴)에서도 그 불길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며 “나는 불탄 가옥 19채, 무덤 및 시체 36구를 목격했다”고 썼다.○일본군, 학살 뒤 천장절 축하 마틴 선교사에 따르면 일본군은 곡지(谷地)와 본가도(本街道) 사이 촌락 중 기독교도가 있는 집을 전부 불태워 버린 뒤 천장절(당시 다이쇼 일왕의 생일인 10월 31일) 축하연에 갔다. 용정촌으로 돌아온 그는 만취한 일본 병사와 마주쳤다. 시가지에는 일장기가 펄럭였다. 마틴 선교사는 이 같은 학살은 “중국 지린(吉林)성 남부의 간도 모든 지역에 적용된다”며 “촌락은 매일 조직적으로 소각됐고 청년들은 사살됐다”고 적었다. 두 선교사의 조사 내용은 그동안 부분적으로 알려졌지만 당시 일본군이 입수해 일본어로 번역한 전문이 그대로 소개된 건 간도출병사가 처음이다. 제창병원 간호부의 엠마 엠 페르소프 주임도 ‘성서(聖書) 행상인 이근식 및 동촌(同村) 조선인 4명 참살(慘殺)’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10월 29일 이른 아침, 일본 병사 약 40명이 용정촌에서 불과 5리 떨어진 마을에 도착해 성서 행상인 이근식이 이웃집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을 때 위 사람을 포박했다.” 이근식은 머리가 거의 잘린 채 땅 속에서 발견됐다. 일제 조선군사령부가 기밀문서인 간도출병사에 부록으로 선교사들의 증언을 남긴 의도는 이어지는 ‘변박(辨駁)자료’에서 알 수 있다. 학살을 무조건 부인하는 변박자료는 “기독교 신도들의 집 혹은 교회라고 칭해지는 것을 불태우긴 했으나, 우리 군의 토벌 행동은 국가의 자위(自衛)상 조선의 치안을 소란시키는 불령자를 응징하는 데 있고…” 등으로 일관한다.○생존자에게 반성과 청원 강요 “교회 겸 학교 및 가옥 수채가 소각되고 30명 살해됨. 그중 23명은 사살되고 나머지 7명은 각자 집에서 타 죽음.” 푸트 선교사가 일본 도쿄의 신학 박사 올만에게 보낸 편지에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이 패한 뒤 청산리에서 벌어진 학살을 기록했다. 그러나 변박자료는 “패잔병(독립군)이 저항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소각한 것 등으로 고의로 조선민을 괴롭게 하려고 소각한 사실은 없다”고 변명했다. 교회와 학교가 불타고 80명이 사살됐다는 ‘운통자’ 마을 학살에 관해서는 “지점이 명료하지 않다. 이러한 사실은 없었다”고만 적었다. 변박자료에서는 학살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주민들에게 오히려 사죄하고 일본군의 주둔을 청원하도록 강요한 일도 드러난다. “장암동 주민 십여 명은 연이어 서명하여 귀순의 뜻을 표하고, 기존의 마을사람 일동이 이 마음가짐을 가지지 못했음을 사죄했다. … 죽은 자는 그들이 이전에 저지른 잘못에 대한 응징이므로 불가피한 것이었고 … 우리 군대의 토벌 행위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함과 동시에….” 변박자료는 주민들이 이 같은 청원서를 냈다고 주장했다.○ 간도 독립군 6000명 이상 간도출병사는 일본군 시각에서 작성한 일종의 전쟁백서다. 당시 작전 개요, 의도, 전황 등을 알 수 있다. 동시에 독립운동사 연구에서도 기존 자료와 비교, 검토할 수 있는 새로운 사실을 다수 보여준다. 부록 ‘간도지방 불령선인단체 개황도’에는 일제가 밀정을 통해 파악한 간도지방 독립운동 세력이 병력과 함께 나열돼 있다. 특히 홍범도 장군이 이끌던 ‘대한독립군(도독부)’ 근거지 바로 옆에 ‘무관학교’가 표시된 점이 눈길을 끈다. 김연옥 교수는 “대한독립군이 운영하던 무관학교로 추정할 수 있다”며 “대한독립군이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한 것은 기존에는 몰랐던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동안은 정확히 몰랐던 북로군정서 무관학교 위치도 지도에 표시됐다. 다른 부록인 ‘불령선인 토벌계획 요도’는 1920년 8월 하순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작전 지도다. 역시 밀정 등에게서 파악한 독립군의 병력과 총기 등 무장 규모가 작전구역별로 상세하게 적혀 있다. 일본군이 파악한 독립군 병력은 모두 6000명 이상이다. 김 교수는 “두 지도를 종합하면 당시 서간도에 있던 독립군이 무장투쟁을 이어가기 위해 북간도로 많이 이동했다는 점을 추론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개황도 속 독립운동 단체 설명 (1920년 5월 말 시점) ::[1] 군정서(軍政署): 대종교(大倧敎)의 교도들을 주체로 하고, 가장 급진적이고 과격한 사상을 가졌으며, 군비(軍備)도 비교적 완비됨. 병력 600명, 소총 800정, 탄약 총 한 자루당 200발, 기관총 2정, 권총 폭탄 약간.[2] 독립군(도독부·都督府): 구(舊) 폭도파에 속하며 무력으로 한국의 독립을 기도하는 단체로 세력 범위가 가장 넓음. 병력 약 1000명, 소총 1000정, 탄약 총 한 자루당 50∼100발, 기관총 권총 탄약 약간.[3] 광복단(光復團): 이씨조선(李朝)의 부흥을 목적으로 하며, 공자회 계통과 구학파 계통에 속함. 병력 200명, 소총 150정, 탄약 총 한 자루당 50발.[4] 신민단(新民團): 성리교(聖理敎) 교도들을 주체로 함.[5] 의민단(義民團): 천주교 교도들을 주체로 한 것으로 창설된 지 얼마 되지 않음.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0-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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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도대학살’ 전모 보고서 100년만에 국내 첫 공개

    “연료를 사체 위에 둘 때 어떤 부상자가 일어서려고 시도했으나 곧바로 총검으로 찔러 화염 속에서 타 죽게 했다고 합니다.” 이는 캐나다 기독교장로회 푸트 선교사가 1920년 10월 30일 중국 지린(吉林)성 용정(龍井)촌 인근의 한국인 마을 장암동에서 벌어진 일본군의 학살 현장을 조사해 기록한 것이다. 일본군이 저지른 간도참변(경신참변)에 대한 캐나다 선교단의 보고서 등이 100년 만에 국내에서 처음 공개됐다. 김연옥 육군사관학교 교수가 최근 번역 출간한 ‘간도출병사(間島出兵史)’를 통해서다. 김 교수는 “간도출병사는 조선군사령부가 1920년 ‘간도 작전’의 전모를 담아 1926년 일본 육군성에 보낸 비밀문서”라며 “그동안 일부만 알려졌던 선교사들의 생생한 증언을 담고 있어 독립운동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0-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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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카뮈의 발길을 따라 이방인처럼 여행하다

    “그 젊음은 죽음을 껴안으면서 다시 찾아지는 젊음이다. … 그리하여 이제 나는 문명의 참다운 단 하나의 진보는 … 스스로 뚜렷이 의식하는 죽음을 창조하는 것임을 분명히 느끼게 된다.” 알베르 카뮈(1913∼1960)는 1937년경 산문 ‘제밀라의 바람’에 이렇게 썼다. 제밀라는 알제리 북쪽에 있는 고대 로마 유적. 카뮈는 이 폐허를 보며 필멸의 운명을 직시한 고대인들의 순수한 정신을 떠올렸다. 저자는 이곳을 찾아 카뮈의 글을 곱씹었다. 그리고 인간이 존재의 하찮음을 명징하게 의식하면서, 순간마다 힘을 다해 열정을 바치는 데 위대함이 있다는 뜻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여러 차례 손꼽히는 문학상을 받은 소설가이자 카뮈의 ‘이방인’을 손수 번역했던 저자가 카뮈의 발길이 닿았던 곳을 여행하며 독자를 카뮈의 삶과 작품으로 이끈다. 부제 ‘지중해의 태양 아래서 만난 영원한 이방인’.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0-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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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 경제보복은 한국 길들이기… 독도 무력 도발 대비해야”

    “(한일 관계가 극단으로 치달으면) 일본이 취할 수 있는 다음 행보가 독도 도발입니다. 일본이 독도 근처에서 무력 도발하면 육군 중심인 우리가 제대로 대응할 수 있을 거 같습니까?” 과거사와 현실 문제로 악화된 한일 관계가 여전하다. 최근 일본이 방위전략 홍보 영상에서 독도를 자국 영토로 표기한 사실이 확인되기도 했다. 10만 부가 팔린 ‘일본이야기’를 냈던 김현구 고려대 명예교수(76·역사교육)가 ‘일본 다루기: 달라진 한국’(이상미디어)을 최근 출간했다. 28일 서울 송파구 자택에서 만난 김 교수는 “일본의 경제보복은 한마디로 한국 길들이기”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일본이 강제징용 판결을 핑계로 주요 품목의 대한(對韓) 수출을 규제한 건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형성된 한미일 연대를 미중 패권 다툼에 따라 반중연대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묵인하에 한국을 압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일본은 필요할 때 덫을 치고 기다린다”면서 “한국인은 일본을 모르면서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외환위기 때 일본이 한국에서 자금을 회수한 걸 두고 화창할 때 우산을 빌려줬다가 비 올 때 가져갔다고 하지요. 그런 일을 겪고도 소재·부품 문제에 대비를 못 했던 거지요.” 그러나 일본이 조만간 추가 경제보복에 나설 가능성은 낮다고 봤다. 일본의 수출규제와 한국의 불매운동으로 지난해 일본의 대한 수출이 전년 대비 10% 이상 감소했다는 통계가 최근 나오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실리를 중시하는 일본이 명분을 위해 싸우는 모양새가 국내적으로 썩 유리하지 않습니다. 올해 외국인 관광객을 4000만 명으로 늘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을 5만 달러로 끌어올리는 동력으로 삼겠다던 아베 신조 총리의 구상이 우리의 일본 관광 불매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의 유행으로 타격을 입을 겁니다.” 그는 길게 봤을 때 통일을 앞두고 있는 한국이 중국을 적대하기 어렵다고 봤다. “김정은 정권은 근대화를 추진해도, 안 해도 몰락하게 돼 있어요. 통일은 대비의 문제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한데 우리 역사에서 중국에 맞선 세력이 한반도의 주인이 된 예가 없어요.” 중국은 지금도 경제적으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나라지만 향후 점점 한반도의 운명에 ‘상수’로 작용할 것이라는 의견이다. 김 교수는 “나쁘게 말하면 미국은 멀리 있는 깡패, 중국은 가까이 있는 깡패”라며 “한반도는 중국과 통일과 분열이라는 역사의 궤적을 같이했고, 이를 거슬렀을 때 반드시 침략을 받았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저술로 논박한 학자로 꼽힌다. 그는 ‘임나’ 관련 사료에 해설을 단 자료집을 만들 계획이라고 했다. “내가 공부해온 곳까지는 후학들이 헤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번 ‘일본 다루기’도 일본사를 공부한 학자의 책임감으로 내놓은 것이고요.”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0-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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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름 타고 내려오는 아미타불의 ‘금빛 자태’

    아미타불이 관음보살 대세지보살과 함께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온다. 주위에는 비파와 장구, 법라(法螺·소라 껍데기로 만들어 불교 의식에 쓰는 악기) 등 여러 악기가 춤추듯 날아다닌다. 비단에 금물로 그린 조선시대 아미타삼존도(사진)다.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이 불교회화실을 최근 개편하고 처음으로 공개한 작품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청정한 이상향, 정토(淨土)’를 주제로 회화와 경전, 사경(寫經·손으로 베낀 경전) 등 유물 23점을 불교회화실에서 새로 소개하고 있다. 조선 전기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금동 소재 불감(佛龕·불상을 모셔 두는 방이나 집)에는 부처가 머무는 세계가 담겼다. 부처와 두 보살을 중심으로 상서로운 기운을 내뿜는 나무와 누각, 새가 앉아 있는 연못 전경이 금빛 찬란하다. 아귀도(餓鬼道·불교에서 인색하고 탐욕스러운 사람이 죽은 뒤 가게 된다는 곳)에 떨어진 영혼이 극락에 가기를 기원할 때 쓰인 의식용 불화 ‘감로를 베풀어 아귀를 구함’도 전시에 나온다. 배고픔과 목마름에 시달리는 아귀, 영혼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불보살이 함께 등장한다. 이 밖에 극락으로 안내하는 아미타불과 인로왕(引路王)보살을 그린 그림, 왕실 기도처에 봉안된 지장삼존도, 가족의 명복을 바라며 발원한 화엄경 사경 등도 볼 수 있다. 전시는 7월 12일까지 열린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0-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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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계 9주기… ‘다시 읽는’ 박완서

    “나는 내 작중인물에게 내가 그들을 창조하면서 지워준 운명대로 살게 할 수밖에 없었다.” 박완서 작가(1931∼2011)가 1977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장편소설 ‘휘청거리는 오후’의 후기에 적은 글이다. 최근 발간된 ‘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작가정신)에 발췌돼 다시 실렸다. 문학으로 시대의 아픔을 보듬었던 박완서 작가의 9주기(22일)를 맞아 그의 소설들이 새롭게 독자를 만나고 있다. ‘프롤로그…’는 박 작가가 소설 산문 동화의 서문과 발문에 쓴 ‘작가의 말’ 67편을 연대순으로 담았다. 오디오북도 출시된다. 문학동네는 지상파 아나운서들이 낭독한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전 7권)을 4월까지 네이버 오디오클립을 통해 차례로 출시한다. 중단편집도 새 단장을 했다. 문학과지성사는 ‘문지작가선’의 하나로 박 작가의 중단편선 ‘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를 최근 펴냈다. 작가의 초기작 ‘도둑맞은 가난’(1975년)부터 골육상잔의 아픔을 담은 ‘빨갱이 바이러스’(2009년)까지 10편을 볼 수 있다. 문학동네도 중단편선 ‘대범한 밥상’을 표지갈이(리커버)해 인터넷서점 알라딘에서 출시했다. 4월 전국 동네서점이 선정하는 ‘동네서점 베스트 컬렉션’ 시리즈에도 그의 특별판이 나올 예정이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0-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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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위그림은 문자없던 시대 인류사를 풀어주는 열쇠입니다”

    지난해 7월 장석호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59)은 중국 칭하이(靑海)성 더링하(德令哈)현 소재지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네댓 시간쯤 달려 한 마을에 도착했다. 목적지는 지도에도 없는 곳. 바위그림 유적의 위치를 안다는 사람을 수소문해 차를 타고 몽골족의 여름 방목지를 찾아간 뒤 다시 계곡을 따라 수km를 걸어 들어갔다. 도중에 말, 산양, 사슴이 신화적인 모습으로 변형된 그림 등 수십 개가 그려진 바위가 풀꽃과 함께 눈에 들어왔다. “기대도 안 한 발견이었어요. 기원전 그림부터 100년이 안 넘는 것까지 섞여 있는 겁니다. 요즘도 이곳 사람들이 제사를 지낼 때 은밀하게 바위에 그림을 그리거든요.” 장 연구위원은 2018년 11월부터 1년 동안 중국 베이징대에 파견돼 중국 전역의 바위그림을 조사했다. 남쪽 윈난성부터 북쪽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까지 12개 성에 있는 바위그림 유적지 30곳을 찾아다녔다. 10일 서울 서대문구 동북아재단 연구실에서 만난 장 연구위원은 조사 때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바위 중앙에 소용돌이치는 태극이 그려져 있었다. “‘스바스티카(svastika·좌우가 뒤집힌 卍 문양)’의 변형이지요. 순환과 불멸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몽골의 산양 그림은 둥글어지다가 해의 모습을 닮습니다. 산양이 하늘이 내려준 빛의 상징인 거예요. 그게 다시 태극으로 변형되기도 합니다. 태극은 원류가 중원이 아니라 북방이에요.” 날이 저물어서야 도착한 원래 목적지는 몽골어로 회이토우타라(懷斗他拉)였다. 해발 3000m가 넘는 곳에 있는 분지다. “동물들의 놀이터더군요.” 북방민족의 바위그림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류사에서 문자 시대는 불과 5000여 년. 장 연구위원은 문자가 없던 시기 사람들이 남긴 이미지를 통해 선사시대 인류사를 추적한다. 그가 저장(浙江)성의 시탕(西塘)에서 촬영한 바위그림 사진을 보여줬다. 높이가 10m가량 되는 바위에 세로로 점선이 파여 있었다. 처음에는 장 연구위원도 그저 돌을 쪼개려던 흔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뱀 모양 끝의 여성 성기 같은 기호, 꽃이나 윷판 같은 무늬, 집, 별 모양을 비롯한 다양한 형상이 점선과 결합돼 있었다. “점선은 아래와 위를 연결하는 사다리로 보여요. 은하수나 천체가 있는 천상과 지상을 연결하는 무지개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스칸디나비아, 러시아 북서쪽에 자리한 카렐리야공화국, 러시아 예니세이강 유역,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몽골 등 자신이 답사한 유라시아 대륙 곳곳을 열거하다가 “어디에서도 이처럼 독창적인 바위그림은 못 봤다”며 “엄청난 희열이 몰려왔다”고 말했다. 이번 조사에서 그는 광둥(廣東)성을 비롯한 중국 남방의 그림은 배와 물고기, 패턴화된 선각무늬가 특이한 양식을 이루며 중원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비롯해 여러 성과를 냈다고 했다. “울산 천전리 암각화도 원래 서석(書石)이라고 했지요. 바위그림은 문자가 없던 시절의 글자였습니다. 현실과 비현실계를 잇는 메신저 역할을 했던 바위그림이 지금은 과거와 우리를 이어주고 있는 겁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0-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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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대서지학회 오영식 회장 “우리 문헌 모은 학술지, 하버드대 사서도 찾아읽어”

    “이번 호는 한 1400쪽 될 것 같은데?”(오영식 근대서지학회장·65) “형님, 1300쪽이 넘는 걸 그냥 제본하면 책이 터져요. 이번에는 양장본으로 내자고요.”(박성모 소명출판 대표·57) “아니, 무슨 학회지를 양장본으로 내?”(오 회장) 최근 창립 만 10년을 맞은 근대서지학회의 반년간 학술지 ‘근대서지’ 20호(2019년 하반기)를 소명출판에서 만들며 오 회장과 발행인 박 대표가 나눈 대화다. 결국 원고 하나가 다음 호로 미뤄져 양장본으로 발행할 필요가 없어졌지만 박 대표는 “제작비는 신경 쓰지 말라”고 고집을 부렸다고 한다. ‘근대서지’는 우리 근대 문헌을 소개하면서 수집가와 연구자의 가교 역할을 하는 내실 있는 학술지로 손꼽힌다. 통권 17호에선 1929년 발행된 잡지 ‘중성(衆聲)’ 1권 3호의 유려한 표지 디자인이 시인 이상(본명 김해경)의 작품이라는 것을 새로 밝힌 글을 실었다. 일본의 판화연구자부터 미국 하버드대 옌칭연구소의 사서까지 이 학술지를 빼놓지 않고 모은다. 4일 열린 20호 발간 기념회에는 회원과 연구자 등 70여 명이 몰렸다. 근대 문헌 수집가이기도 한 서지학자 오 회장을 9일 서울 송파구 개인 사무실에서 만났다. 사무실은 7단으로 책이 꽉 들어찬 서가가 줄지어 늘어섰다. 132m²(40평)쯤 되는 공간이 비좁았다. 이 사무실에 있는 책만 해도 2만 권이 넘는다. 귀중본 등 따로 보관한 것까지 모두 3만 권 정도 소장하고 있다. 대학 시절부터 헌책방을 드나들었고, 서울 보성고 국어교사로 일하며(2017년 퇴임) 월급을 쪼개 40년 동안 모은 책들이다. 오 회장이 서울 불암산 아래 살 때 소장 자료 목록을 정리해 사비로 내기 시작한 게 12호까지 이어진 ‘불암통신’이다. 최초의 순문학 동인지 ‘신청년 3호’나 이육사의 시 3편을 새로 발견한 소식은 일간지 문화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그러다 오 회장 주도로 근대서지학회를 창립한 게 2009년. 초대 회장은 인류학자인 전경수 서울대 명예교수가 맡았다. “누군가 근대 문헌의 원본을 안 보거나 잘못 인용했다고 가정해 보죠. 그 뒤 연구자들이 그걸 계속 재인용하면 끝내 원본을 제대로 본 사람이 없게 되지요. 사실 예전에는 국내 학문 풍토에서 이런 측면이 아예 없었다고 하기 어려워요. 뿌리인 서지학적 기초가 탄탄해야 인문학도 바로 섭니다.”(오 회장) 자료 정리가 학문 분야별로 오래전 진행된 일본에 비해 한국은 서지학의 중요성이 더욱 크다고 오 회장은 강조했다. 분단과 6·25전쟁을 거치며 수많은 문헌이 멸실됐고, 납북·월북 인사의 학문 연구가 오래 금기시된 탓이다. ‘숨은 자료의 공개와 공유’를 모토로 한 ‘근대서지’가 연구자들에게 단비가 되는 까닭이다. 최근에는 근대가요나 만화, 야구 등 체육사 연구자들도 이 학술지가 소개하는 자료에 주목하고 있다. 10년 동안 학회는 오 회장이 지은 ‘해방기 간행도서 총목록―1945∼1950’을 필두로 ‘책 잡지 신문자료의 수호자’(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를 비롯해 총서 12권을 출간했다. 오 회장은 “근대문화유산인 출판물의 평가나 목록조사 사업 등에 서지 전문가가 반드시 함께 참여해야 오류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퀴퀴한 옛 책 냄새를 사랑하는 까닭을 묻자 오 회장은 “헌책 수집 문화가 정착한 일본에서는 책 수집가를 은빛처럼 빛나는 흰 종이를 찾아다니는 ‘은어(銀魚)족’으로 부른다고 들었다”며 “인쇄본도 원본의 아우라가 있다”고 말했다. “(신소설의 효시인) ‘혈의 루’ 초판은 (확인된 게) 어디에도 없고, (최초의 근대 여성소설가로 꼽히는) 김명순(1896∼1951)의 창작집 ‘애인의 선물’은 지금까지는 저만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삼국시대 역사책도 아닌데 말이지요. 한데, 제 것도 뒤에 낙장이 있어요. 완전한 책을 소장하신 분이 어서 나타나야 학자들도 완전한 소설을 연구할 수 있을 텐데 말이에요.”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0-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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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족-한족간 융화가 中 왕조 승패 갈랐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뮬란’(1998)은 배경이 흉노와 한족의 전쟁이지만 2009년 중국 영화 ‘뮬란: 전사의 귀환’은 북위(北魏)와 유연(柔然)의 전쟁으로 바뀌었다. 중국 중세사 연구자인 박한제 서울대 명예교수(74)가 중국 영웅문학작품 ‘목란시(木蘭詩)’의 시대배경을 고증해 발표한 논문 내용이 중국중앙(CC)TV에서 방영된 결과다. 박 교수가 주창한 ‘호한(胡漢)체제’는 후한 말 이후 중국 서북방 유목민족(호족)이 중원으로 진입해 농경민족인 한족과 대립하면서도 공통된 정치, 문화체제를 형성한 과정을 가리킨다. 중국과 대만, 일본의 주요 학술지가 이 개념을 논평했고 학자들이 인용했다. 한국 학자가 창안해 해외 학계까지 유통시킨 유일한 역사용어로 꼽힌다. 최근 ‘중국중세 호한체제의 정치적 전개’와 ‘중국중세 호한체제의 사회적 전개’(이상 일조각)를 출간한 박 교수를 16일 서울 관악구 개인 연구실에서 만났다. “당나라 수도 장안에는 여러 나라 사람들이 오늘날 미국으로 이민하는 것처럼 몰려들었습니다. 당나라는 이들을 번인(蕃人)이라 부르며 구성원으로 받아들였기에 세계제국이 될 수 있었지요. 그 바탕에 호한 복합사회가 있습니다.” 박 교수는 ‘삼국지’ 직후의 시대를 다룬다. 위, 촉, 오의 동원이나 토벌 대상이던 서방, 북방 유목민족들은 진(晉)이 약화되자 중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5호 16국 시대 13개 나라와 선비족이 세운 북위(386∼534)를 필두로 한 북조(北朝)가 호족왕조다. 호족 군주들은 정치, 사회적으로 한족도 동의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해야 했다. 호한의 융화는 왕조의 성패를 갈랐다. “북조의 북주는 최약체였어요. 그러나 호한 통합의 기치 아래 형성된 ‘관롱집단(關(농,롱)集團·관중·關中과 농서·(농,롱)西 출신 중심의 지배층)’이 성공하면서 북제를 무너뜨렸고 뒤를 이은 수나라가 남조까지 평정할 수 있었습니다.” 북주는 호족만 있던 군대에 한족을 끌어들인 부병제(府兵制)로 군사력을 키웠다. 북위가 한족에 익숙한 균전(均田) 명칭과 유목민이 피정복민에 적용하던 생산방식을 결합해 균전제를 시행한 것도 호한체제의 하나다. 이런 문화는 당나라로 이어져 당 태종은 황제뿐 아니라 호족들의 수장을 일컫는 가한(可汗)으로 칭했다. 호한체제는 현재의 중국과 다민족으로 구성된 중국인의 형성에도 기여했다고 박 교수는 본다. 그러나 중국에서 민족 간 갈등과 충돌은 이어지고 있다. 박 교수는 자신의 연구가 현대 중국에 관한 것은 아니라고 전제한 뒤 “중국 당국이 분리주의를 철저하게 억누르고, 각 자치구의 한족 인구는 크게 증가해 가까운 미래에 중국의 분열은 상상하기 어렵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0-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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