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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재미있는 생각만 가지고 항상 신나고 싶습니다.” 26일 찾은 경기 안산 상록구에 있는 한 유치원 앞마당에는 원아들이 적은 글귀들이 삐뚤빼뚤 적혀 있었다. 이 유치원에선 최근 이른바 ‘햄버거병’(용혈성요독증후군·HUS) 의심 증상을 포함한 집단 식중독(장출혈성 대장균)이 발생했다. 평상시라면 아이들의 목소리로 시끄러워야 할 원아 167명 규모의 유치원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현관에는 안산시에서 19일 발부한 일시폐쇄명령서가 붙어 있었다. 해당 유치원에서 시작된 집단 식중독의 유증상자는 26일에도 6명이 추가돼 지금까지 49명으로 늘어났다. 전날까진 식중독 환자로 분류됐던 원아 1명이 갑작스레 햄버거병 증세를 보여 햄버거병 의심 환자는 15명으로 늘었다. 이로써 A유치원 식중독 사태에 따른 입원 환자는 모두 23명(원아 20명, 원아 가족 어린이 3명). 전날까지 투석을 받던 원아 5명 가운데 1명은 증세가 호전돼 투석 치료를 중단했다. 원아와 교직원, 식재료 납품업체 직원 등 295명을 대상으로 식중독 검사를 벌이고 있는 안산시는 “147명이 음성 판정을 받았으며 99명은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고 밝혔다. 상록구의 또 다른 유치원에서는 전날 원아 8명과 교사 1명에게 노로바이러스로 의심되는 식중독 증상이 나타났으나 추가 증상자가 발생하지 않았다. 집단 식중독의 피해가 커지면서 해당 유치원을 둘러싼 ‘늑장대응’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의심 증상을 발견한 보호자들이 등원 중지 등의 대처를 요구했지만, 유치원이 차일피일 미루며 사태를 키웠다는 주장이다. 구 관계자는 “보건소에 최초로 집단 식중독을 신고한 것도 사태를 미리 인지하고 있었던 유치원이 아닌 병원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고 했다. ‘안산 유치원 집단 식중독 사태로 인해 신장투석을 받고 있는 아이의 큰아버지’라는 한 누리꾼은 25일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조카가 배출했다는 혈뇨와 배꼽 옆에 관을 꽂고 투석 중인 조카의 사진도 함께 첨부했다. 이 누리꾼은 “부모가 아이에게 증상이 발현되자마자 유치원에 알리고 모든 원아의 등원 중지를 요청했는데 유치원은 수일 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아 사태를 악화시켰다”고 주장했다. 또 “역학조사에 꼭 필요한데다가 교육시설이라면 일정 기간 보관 의무가 있는 식재료를 폐기한 데 대해 50만 원의 과태료만 부과한 것은 말도 안 된다”고 호소했다. 상록구 보건소에 따르면 보건소는 16일 안산고대병원이 “한 유치원에서 여러 명의 원아가 같은 증상으로 입원했다”고 신고한 뒤 해당 유치원의 집단 식중독 사태를 알게 됐다. 보건소 관계자는 “해당 유치원이 직접 신고를 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해당 유치원은 보건소가 사태를 인지했다는 것을 안 뒤에야 16일 오후 보호자들에게 “몇몇 원아들이 장염 증상으로 진료를 받게 됐다”고 공지했다. 동아일보는 적절한 조치가 해당 유치원의 박모 원장과 여러 차례 통화를 시도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안산=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안산=김태성 기자 kts5710@donga.com}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비대면 온라인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저지른 대학생들이 또 다시 적발됐다. 심지어 한 대학에선 수백여 명이 집단 ‘커닝’을 저지르기도 했다. 여러 대학에서 부정행위가 잇따르자 학습권이 침해됐다며 최종 성적의 수용 여부를 자율적으로 택하는 ‘선택적 패스제’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움직임도 거세지고 있다.● 모바일메신저 이용해 부정행위 22일 오후 대학생 커뮤니티인 ‘에브리타임’의 중앙대 게시판엔 한 법학 과목 강의의 일부 수강생들이 기말고사 부정행위를 모의했다는 글이 올라와 혼란이 벌어졌다. 작성자는 “우연히 카카오톡 단체방에 초대됐는데 부정행위를 저지를 계획을 짜고 있었다”고 고발했다. 게시물에 따르면 해당 과목 수강생 A 씨와 B 씨는 이미 온라인 중간고사 때도 모바일메신저를 이용해 판례와 속기록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부정행위를 벌였다. 당시 적발되지 않은 채 좋은 성적까지 얻은 두 사람은 이달 중순 기말고사를 앞두고 다시 한번 커닝을 모의했다. 이번엔 또 다른 수강생 C 씨에게도 제안해 함께 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들은 부정행위를 논의하려고 C 씨를 채팅방에 초대한다는 게 게시물 작성자를 초대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두 사람이 동명이인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바뀐 걸 눈치를 못한 이들은 비밀을 털어놨고, 작성자는 이를 공개적으로 알렸다. A 씨 등은 게시판에 “답안이 아닌 판례를 공유하는 수준이어서 부정행위가 될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스스로 부끄럽고 후회스럽다”는 내용의 글을 올려 사실을 인정했다. 중앙대 관계자는 “단과대에서 사실관계를 파악해 대응방안과 재발방지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부정행위엔 무관용이 원칙”이라 말했다. 한국외대도 한 강의의 수강생 700여 명이 18일 기말고사에서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을 이용해 답안을 공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이들은 오픈채팅방이 익명 참여가 가능하고 방을 빠져나가면 흔적이 남지 않는 점을 이용했다. 해당 강의는 중간고사 때도 부정행위 논란이 일었다고 한다. 학교 측은 “해당 과목 기말고사를 다시 치르게 하고 표절 시스템을 통해 적발된 학생들은 낙제점을 줄 계획”이라 했다. ● 선택적 패스제 놓고 시끌 부정행위 논란이 커지자 ‘선택적 패스’ 제도와 등록금 반환 등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단체행동도 계속 늘고 있다. 선택적 패스를 채택하면 최종 성적을 확인한 학생이 해당 성적을 받을지, 대신 ‘패스(Pass·통과)’로 처리할지 선택할 수 있다. 패스를 결정한 과목은 학점 평점 계산에 포함되지 않고 이수로만 반영된다. 22일 연세대와 한양대, 이화여대에서 선택적 패스제 등을 요구하는 농성을 시작한 데 이어 23일 경희대에서도 관련 집회가 열렸다. 경희대 학생들은 ‘경희대학교 학생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 경희인 집중공동행동’을 꾸려 “코로나19로 변화된 수업환경 속에 등록금과 성적평가 기준을 기존과 동일하게 유지하는 건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한양대는 22일 “선택적 패스제를 도입하지 않겠다”고 밝히자 23일 학교 규탄 집회로 번졌다. 한양대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집회에 참여해 학생들의 힘을 보여주자”는 반응이 크게 늘었다. 이화여대 총학생회도 선택적 패스제 도입과 등록금 반환을 촉구하며 이틀째 농성을 이어갔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한성희 기자 chef@donga.com 신지환 기자 jhshin93@donga.com}

18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인근의 한 주차장 앞. 대여한 공유 전동킥보드에 발을 올리자마자 주변 보행자들이 갑자기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했다. 연습 삼아 아주 느린 속도로 주행했는데도 시민들은 서둘러 자리를 떴다. 심지어 불쾌한 표정으로 째려보는 이까지 있었다. 전동킥보드를 향한 냉랭한 반응은 요즘 도심을 지나다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대목이다. 여러 공유 전통킥보드 업체가 생겨나며 이제 전동킥보드는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된 지 오래. 하지만 그만큼 불쾌한 경험도 쌓여갔다. 조모 씨(54)는 “자전거보다 빠르게 달리는데 소리는 잘 안 들려 갑자기 나타나면 화들짝 놀랄 때가 많다”며 “최근엔 크고 작은 사고도 잦아 다투는 모습도 여러 번 봤다”고 했다. ‘킥라니.’ 요즘 인터넷에선 전동킥보드를 고라니와 합친 신조어 킥라니라 부른다. 지방도로에서 순식간에 차도로 뛰어드는 고라니처럼, 아찔한 사고를 불러일으키는 존재란 뜻이다. 최근 이런 문제점을 반영해 관련법 개정도 이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안전 확보를 위해선 갈 길이 멀다는 의견이 많다.● 전동킥보드 법 개정, 오히려 안전은 뒷전 전동킥보드는 인도를 휘젓는 게 가장 눈살이 찌푸려지지만, 차도에서 운전해도 위험천만한 상황은 자주 벌어진다. 원래 법적으로 전동킥보드는 자전거도로나 자전거 통행이 허용된 혼용보도가 없는 경우엔 차도에서 운전해야 한다. 하지만 차량 운전자들은 전동킥보드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이날 한 택시운전사는 차창까지 내리고 “왜 차도에서 타느냐”며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시민 김모 씨(40)도 “보행자 입장에선 차도로 가면 좋겠지만, 차도 위의 전동킥보드가 더 아슬아슬해 보이긴 한다”고 했다. 행정안전부와 경찰청은 이달 초 전동킥보드와 관련해 개정 법률을 공포했다. 도로교통법에 ‘개인형 이동장치(퍼스널 모빌리티·PM)’를 “최고속도 시속 25㎞ 미만, 총중량 30㎏ 미만인 원동기장치자전거”로 정의했다. PM의 통행방법도 기존 오토바이가 아닌 전기자전거에 준하는 수준으로 만들었다. 법률을 시행하는 12월 10일부터는 전동킥보드를 비롯한 PM의 자전거도로 통행이 가능해지며 13세 이상 운전자라면 운전면허 없이도 운전할 수 있다. 하지만 반응은 썩 좋지 않다. 개정 법률이 규제 완화에 초점을 맞춰 전동킥보드 등 PM으로 인한 사고 방지 대책이 부실하단 지적이다. 도로교통공단에 따르면 PM이 가해 차종으로 분류된 교통사고 건수는 2017년 117건에서 2018년 225건, 2019년 447건으로 증가했다. 2년 만에 약 4배로 늘어난 셈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안전 수칙은 오히려 후퇴한 측면도 있다. 헬멧 등 안전도구에 관한 규정이 그렇다. PM을 오토바이보다 자전거에 가까운 원동기로 취급해 헬멧 착용은 의무에서 권고 사항으로 완화됐다. 현행법은 자전거 운전자도 헬멧 착용을 권고하지만 오토바이와 달리 별도의 처벌 규정이 없다. 이성렬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수석연구원은 “PM과 자전거의 운행 특성의 차이점으로 인해 발생하는 부작용들을 잘 관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운전자 연령대가 만 13세 이상으로 대폭 낮아진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전동킥보드를 오토바이와 같은 기종으로 분류한 건 물론 과했다. 하지만 전기로 동력을 얻는 PM을 자전거와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단 의견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중학생이 헬멧도 쓰지 않은 채 차도 위를 달리는 모습만 상상해 봐도 답이 나오지 않느냐”며 고개를 저었다. ● 전동킥보드에 맞는 기본법과 도로 정비 시급 교통안전 전문가들은 “전동킥보드 등 PM에 맞춘 규정을 바탕으로 기본법을 새로이 정비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오토바이나 자전거 등 기존 원동기 규정에 전동킥보드를 끼워 맞출 게 아니라 PM의 특성을 적절히 반영한 새로운 법이 필요하단 뜻이다. 국토교통부도 현재 2021년 시행을 목표로 PM 기본법의 내용을 꾸리고 있다. 이제 착수한 단계라 아직 어떤 내용들이 법에 포함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통행방법 등 최소한의 안전 규정을 마련하고 현재 거의 관리 단속이 이뤄지지 않는 관련 산업의 진입장벽을 높이는 효과는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공유 전동킥보드는 주차와 관련한 규제조차 마련되지 않아 아무데나 널브러져있는 광경을 자주 마주한다. 최근 몇몇 지방자치단체들은 기존 자전거거치대에 전동킥보드도 주차하도록 정비하는 등 자체적인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PM기본법이 마련되면 보기도 안 좋고 보행도 불편한 이런 점까지 잘 챙겨야 한다”고 했다. 앞으로 전동킥보드가 자전거도로로 대거 유입될 상황도 대비해야 한다. 자전거도로망을 대폭 정비하는 게 급선무다. 국내 자전거도로는 원래도 교통선진국의 자전거 친화적인 도로와 비교하면 열악한 수준이다. 자전거도로가 없는 곳도 많을뿐더러, 중간에 끊겨서 하나로 연결된 ‘망’ 구성도 안돼 있다. 한 교통전문가는 “안 그래도 도심의 자전거도로는 사고취약지역이라 불리는데, 전동킥보드까지 늘어나면 현재 도로 사정으론 문제가 심각해질 것”이라 내다봤다. 국토부는 PM과 관련한 도로교통법 개정안이 활발히 논의되던 시기인 3월에 “차도·보도와 구분되는 ‘제3의 도로’ 설계 지침을 마련하겠다”는 내용의 계획을 발표했다. 자전거뿐만 아니라 전동킥보드를 비롯한 각종 PM들이 상용화되며 이들 원동기들이 통행할 도로 건설이 시급하다는 판단에서다. 국토부 관계자는 “PM으로 인한 교통사고가 급증하며 이를 방지하자는 차원에서 설계지침을 만들게 됐다”며 “상대적으로 바퀴가 작은 점 등 자전거와 구별되는 특성을 고려해 도로의 경사나 턱의 높이를 비롯한 세부 설계지침을 마련할 계획”이라 말했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마스크 착용을 요구하는 버스 기사를 폭행한 50대 남성이 구속됐다. 서울광진경찰서는 마스크 착용을 요구했다는 이유로 마을버스 기사를 폭행한 혐의(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운전자 폭행 등)로 50대 남성 A 씨를 20일 구속했다. 정부는 지난달 26일부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버스, 택시, 지하철 등 대중교통 승객이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으면 승차를 거부할 수 있게 했는데 이와 관련해 운전사를 폭행한 승객이 구속되기는 처음이다. 경찰 관계자는 “A 씨가 운전자의 정당한 요구에 불응한 데다 감염병과 관련해 버스 내 승객의 안전과도 직결된 범죄 행위로 사안이 중대하다고 법원이 판단해 구속영장을 발부했다”고 설명했다. A 씨는 18일 오후 2시 30분경 광진구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고 마을버스에 탔다. 버스 기사는 마스크 착용을 요구했으나 A 씨가 거부하자 하차를 요구했다. A 씨는 5분여 동안 기사와 실랑이를 벌이다 기사를 폭행했다. A 씨는 이를 말리던 승객 1명에게도 뺨을 때리고 침을 뱉는 등 폭력을 행사했다. 도주하려던 A 씨는 버스에서 내려 자신을 쫓아온 기사에게 붙잡히자 기사의 목덜미를 물어뜯는 등 또다시 폭행했다. 이 과정에서 기사는 피부이식 수술이 필요할 정도로 큰 부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A 씨는 현장에 있던 시민들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현행범으로 체포됐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어르신, 잠깐만요.” 13일 오후 2시경, 노인요양시설인 서울 영등포구의 한 데이케어센터 앞. 이곳에서 일하는 요양보호사가 황급히 센터 건물 밖으로 뛰어나왔다. 10분 전쯤 자신이 직접 마스크를 씌워줬던 70대 치매 노인이 마스크를 벗은 채로 센터를 나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양보호사는 “이곳에 오는 대부분의 어르신들은 치매를 앓고 있어 잠시라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며 “보호자들에게 가정돌봄을 권유하는 공지를 했는데도 전체 노인 30명 중 20명 이상이 계속 와 센터 문을 닫을 수가 없다”고 했다. 데이케어센터는 돌봄이 필요한 고령자를 대상으로 낮 시간에 운영하는 시설이다. 서울시가 시내 데이케어센터 등에 휴관을 권고했지만 영등포구의 센터처럼 문을 닫지 못하는 곳이 많다. 서울시는 12일 시내 데이케어센터 444곳과 노인요양원 212곳 등에 휴관을 권고했다. 도봉구에 있는 ‘성심데이케어센터’ 방문자가 하루 전인 11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데 따른 조치다. 14일 현재 성심데이케어센터 관련 확진자는 17명으로 늘었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주말인 13, 14일 서울시내 데이케어센터 10곳을 둘러본 결과 서울시의 휴관 권고에도 10곳 모두 운영 중이었다. 현장에서 만난 센터 직원들은 서울시의 휴관 권고에 대해 “현실을 모르고 내린 조치”라고 입을 모았다. 도봉구의 한 센터는 서울시가 휴관을 권고한 12일 이후로도 매일 25∼30명의 노인이 센터를 찾아와 정상 운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운영자 박모 씨는 “한여름에도 겨울이라 우기며 이불을 달라고 하고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어르신들을 집에서 모실 수 있는 보호자는 많지 않다”고 했다. 강서구의 한 센터 관계자는 “서울시가 가정돌봄이 불가능한 어르신들에 대해서만 긴급돌봄이나 방문요양 서비스를 운영하라고 했지만 이곳을 찾는 어르신 대부분은 치매환자이거나 홀몸노인이어서 가정돌봄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동대문구의 한 센터 관계자는 “직장생활을 하느라 어르신들을 하루 8시간씩 센터에 맡길 수밖에 없는 보호자들의 사정을 생각하면 문을 닫기는 어렵다”고 토로했다. ‘도저히 집에서 돌볼 형편이 안 된다’는 보호자들의 딱한 형편을 듣다 보면 센터 문을 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가정에서 돌보기가 힘든 노인들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서울과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코로나19 재확산 우려가 큰 상황이어서 휴관을 권고한 것”이라고 설명했다.전채은 chan2@donga.com·이소연 기자}

“어르신, 잠깐만요.” 13일 오후 2시경, 노인요양시설인 서울 영등포구의 한 데이케어센터 앞. 이곳에서 일하는 요양보호사가 황급히 센터 건물 밖으로 뛰어나왔다. 10분 전쯤 자신이 직접 마스크를 씌워줬던 70대 치매 노인이 마스크를 벗은 채로 센터를 나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양보호사는 “이곳에 오는 대부분의 어르신들은 치매를 앓고 있어 잠시라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며 “보호자들에게 가정돌봄을 권유하는 공지를 했는데도 전체 노인 30명 중 20명 이상이 계속 와 센터 문을 닫을 수가 없다”고 했다. 데이케어센터는 돌봄이 필요한 고령자를 대상으로 낮 시간에 운영하는 시설이다. 서울시가 시내 데이케어센터 등에 휴관을 권고했지만 영등포구의 센터처럼 문을 닫지 못하는 곳이 많다. 서울시는 12일 시내 데이케어센터 444곳과 노인요양원 212곳 등에 휴관을 권고했다. 도봉구에 있는 ‘성심데이케어센터’ 방문자가 하루 전인 11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데 따른 조치다. 14일 현재 성심데이케어센터 관련 확진자는 17명으로 늘었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주말인 13, 14일 서울시내 데이케어센터 10곳을 둘러본 결과 서울시의 휴관 권고에도 10곳 모두 운영 중이었다. 현장에서 만난 센터 직원들은 서울시의 휴관 권고에 대해 “현실을 모르고 내린 조치”라고 입을 모았다. 도봉구의 한 센터는 서울시가 휴관을 권고한 12일 이후로도 매일 25~30명의 노인이 센터를 찾아와 정상 운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운영자 박모 씨는 “한여름에도 겨울이라 우기며 이불을 달라고 하고, 대소변을 가리지 못 하는 어르신들을 집에서 모실 수 있는 보호자는 많지 않다”고 했다. 강서구의 한 센터 관계자는 “서울시가 가정 돌봄이 불가능한 어르신들에 대해서만 긴급돌봄이나 방문요양 서비스를 운영하라고 했지만, 이곳을 찾는 어르신 대부분은 치매환자이거나 독거노인이어서 가정 돌봄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동대문구의 한 센터 관계자는 “직장생활을 하느라 어르신들을 하루 8시간씩 센터에 맡길 수밖에 없는 보호자들의 사정을 생각하면 문을 닫기는 어렵다”고 토로했다. ‘도저히 집에서 돌볼 형편이 안 된다’는 보호자들의 딱한 형편을 듣다 보면 센터 문을 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가정에서 돌보기가 힘든 노인들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서울과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코로나19 재확산 우려가 큰 상황이어서 휴관을 권고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프라이팬으로 손을 지지는 등 지속적인 학대를 받아온 A 양(9)이 목에 쇠줄이 묶인 채 생활하다 위험을 무릅쓰고 4층 발코니로 탈출한 것으로 드러났다. 하루 한 끼만 주고 ‘물고문’까지 시키는 등의 추가 학대도 확인됐다. 하지만 의붓아버지(35)는 “학대는 아니다”라며 혐의를 부인하고 친모(27)는 조현병을 이유로 아직 경찰 조사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아동학대 가해자가 자신의 처지를 내세워 학대를 정당화하려는 건 다른 사례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동아일보가 2014년 9월 이후 아동학대 치사 사건 21건을 분석해 보니 42.9%가 질병이나 생활고, 그로 인한 심신미약을 이유로 무죄를 주장했다. 하지만 최근 법원은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추세다.○ 목에 쇠사슬 걸고 감금, 4층 베란다로 탈출경남지방경찰청에 따르면 A 양은 지난달 29일 오후 6시경 지붕과 맞닿은 4층 높이의 발코니 난간을 통해 옆집으로 넘어가 도망쳤다. 아무도 없는 옆집에서 음료수를 마신 뒤 맨발로 거리를 배회하다 극적으로 구조됐다. 경찰 관계자는 “당시 눈 부위의 멍, 손과 발의 화상을 비롯해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현재 병원 치료를 받으며 회복 중”이라고 말했다. A 양은 경찰 조사에서 수년간 두 사람에게 온갖 학대를 당했다고 진술했다. 밥은 하루 한 끼뿐이었고 청소 등 일을 시킬 때가 아니면 목이 쇠사슬로 묶인 채 다락방에 갇혀 지냈다고 한다. 이미 알려진 프라이팬이나 글루건은 물론이고 쇠줄과 자물쇠 등 온갖 도구로 학대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욕조에 강제로 머리를 담그는 ‘물고문’도 당했다. 경찰은 A 양의 집에서 프라이팬 등 학대에 사용한 증거 물품을 확보했다. 하지만 의붓아버지는 “A 양이 반항할 때 몇 대 때렸을 뿐”이라며 학대 혐의를 부인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어머니는 조현병을 호소하며 조사도 받지 않았다. 경찰은 10일 다른 자녀 3명도 아동보호전문기관에 임시로 맡겼다. 경찰 측은 “법원의 임시보호명령 결정을 받아 5세와 4세, 1세인 자녀를 전문기관에 맡겼다. 이 과정에서 부모가 자해 소동을 벌였으나 생명에 지장은 없다”고 전했다.○ 학대범 절반 가까이 ‘심신미약’ 주장동아일보가 2014년 9월 이후 아동학대 치사 사건 21건을 분석해 보니 절반에 가까운 9건(42.9%)의 피의자들이 질병과 생활고, 심신미약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21건은 모두 당시 아동학대 특례법이 시행된 뒤 이 법이 적용된 사건들이다. 지난해 6월 생활고로 다투다 2세 아들을 숨질 때까지 폭행한 부부는 “친모가 지적장애 2급 판정을 받았고 산후우울증도 앓고 있었다”고 항변했다. 2017년 5월 자신의 조카를 돌보다 학대해 숨지게 한 이도 “평소 우울증을 앓아 사물을 변별하거나 의사 결정할 능력이 미약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최근 법원은 이 같은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분위기다. 우울증이나 지적장애라 해도 어린이를 학대해선 안 된다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 재판장은 판결에서 “양육과 보호 책임을 부담하는 부모가 자녀에게 심각한 상해를 가하거나 유기를 해선 안 된다는 점은 이해하기 어려운 상식이나 행동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재판장도 “아무리 힘든 처지에 있어도, 그 어떤 이유에서든 아이를 잃은 부모는 절대 (해당 사건의) 피고인으로 불려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법원의 판결은 강화됐지만 통계로 드러나는 아동학대 건수는 계속 늘고 있다. 아동학대 특례법은 2013년 경북 칠곡군에서 한 계모가 8세 딸을 학대해 숨지게 한 뒤, 죽은 아이의 언니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다 들통 난 사건을 계기로 제정됐다. 하지만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아동학대 사건은 오히려 2014년 1만27건에서 2018년 2만4604건으로 2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과거엔 사회 인식 부족으로 학대 아동 파악이 부실했다는 걸 감안해도 가파른 증가세다. 학대로 인한 사망 아동 역시 2014년 14명에서 2018년 28명으로 증가했다. 2017년엔 38명이나 됐다. 전문가들은 “처벌 강화와 더불어 예방 조치가 병행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도미향 남서울대 아동복지학과 교수는 “학대당한 아이가 직접 신고할 수 있을 정도로 사회적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며 “모든 부모가 혼인신고나 출산신고 때 의무 아동권리교육을 받게 하는 등 인식 개선을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학대 재발과 대물림을 막기 위한 관리도 절실하다. 21건 가운데 3건은 피고인이 과거 가정폭력의 피해자였거나 아동학대로 처벌받은 뒤 또다시 학대를 저지른 경우였다. 아동보호전문기관을 운영하는 굿네이버스 관계자는 “학대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심리치료와 상담도 이뤄져야 한다”고 조언했다.전채은 chan2@donga.com·신지환 / 창녕=강성명 기자}

약 2년 동안 프라이팬으로 손을 지지는 등 학대를 받아온 A 양(9)은 목에 쇠줄이 묶인 채 생활하다 위험을 무릅쓰고 4층 발코니로 탈출한 것으로 드러났다. 하루 한 끼만 주고 ‘물고문’까지 시키는 등 추가 학대도 확인됐다. 하지만 의붓아버지(35)는 “학대는 아니다”며 혐의를 부인하고, 친모(27)는 조현병을 이유로 아직 경찰 조사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아동학대 가해자가 자신의 처지를 내세워 학대를 정당화하려는 건 다른 사례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동아일보가 2014년 9월 이후 아동학대 치사 21건을 분석해보니 약 42.9%가 질병이나 생활고, 그로 인한 심신미약을 이유로 무죄를 주장했다. 하지만 최근 법원은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추세다.● 목에 쇠사슬 걸고 감금, 4층 베란다로 탈출 경남지방경찰청에 따르면 A 양은 지난달 29일 오후 6시경 지붕과 맞닿은 4층 높이 발코니 난간을 통해 옆집으로 넘어가 도망쳤다. 아무도 없는 옆집에서 음료수를 마신 뒤 맨발로 거리를 배회하다 극적으로 구조됐다. 경찰 관계자는 “당시 눈 부위의 멍, 손과 발의 화상을 비롯해 온”이 상처투성이였다. 현재 병원 치료를 받으며 회복 중“이라 전했다. A 양은 경찰 조사에서 수년 간 두 사람에게 온갖 학대를 당했다고 진술했다. 밥은 하루 한 끼뿐이었고, 청소 등 일을 시킬 때가 아니면 목을 쇠사슬로 묶인 채 다락방에 갇혀 지냈다고 한다. 이미 알려진 프라이팬이나 글루건 뿐만 아니라 쇠줄과 자물쇠 등 온갖 도구로 학대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욕조에 강제로 머리를 담그는 ‘물고문’도 당했다. 경찰은 A 양의 집에서 프라이팬 등 학대에 사용한 증거 물품을 확보했다. 하지만 계부는 “A 양이 반항할 때 몇 대 때렸을 뿐”이라며 학대 혐의를 부인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어머니는 조현병을 호소하며 조사도 받지 않았다. 경찰은 10일 다른 자녀 3명도 아동보호전문기관에 임시로 맡겼다. 경찰 측은 “법원의 임시보호명령 결정을 받아 5살, 4살, 1살인 자녀를 전문기관에 맡겼다. 이 과정에서 부모가 자해소동을 벌였으나 생명에 지장은 없다”고 전했다.● 학대범 절반 가까이 ‘심신미약’ 주장 동아일보가 2014년 9월 이후 아동학대 치사 21건을 분석해보니, 절반에 가까운 9건(42.9%)의 피의자들이 질병과 생활고, 심신미약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21건은 모두 당시 아동학대 특례법이 시행된 뒤 이 법이 적용된 사건들이다. 지난해 6월 생활고로 다투다 2세 아들을 숨질 때까지 폭행한 부부는 “친모가 지적장애 2급 판정을 받았고 산후우울증도 앓고 있었다”고 항변했다. 2017년 5월 자신의 조카를 돌보다 학대해 숨지게 한 이도 “평소 우울증을 앓아 사물을 변별하거나 의사결정할 능력이 미약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최근 법원은 이 같은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추세다. 우울증이나 지적장애라 해도 어린 아이를 학대해선 안 된다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 재판장은 판결에서 “양육과 보호책임을 부담하는 부모가 자녀에게 심각한 상해를 가하거나 유기를 해선 안 된다는 점은 이해하기 어려운 상식이나 행동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재판장도 “아무리 힘든 처지에 있어도, 그 어떤 이유에서든 아이를 잃은 부모는 절대 (해당 사건의) 피고인으로 불려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법원의 판결은 강화됐지만 국내에선 아동학대가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아동학대 특례법은 2013년 경북 칠곡군에서 한 계모가 8세 딸을 학대해 숨지게 한 뒤, 죽은 아이의 언니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다 들통난 사건을 계기로 제정됐다. 하지만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아동학대사건은 오히려 2014년 1만27건에서 2018년 2만4604건으로 2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학대로 인한 사망 아동 역시 2014년 14명에서 2018년 28명으로 증가했다. 2017년엔 38명이나 됐다. 전문가들은 “처벌 강화와 더불어 예방 조치가 병행돼야 한다”고 했다. 도미향 남서울대 아동복지학과 교수는 “학대당한 아이가 직접 신고할 수 있을 정도로 사회적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며 “모든 부모가 혼인신고나 출산신고 때 의무 아동권리교육을 받게 하는 등 인식 개선을 위한 적극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학대 재발과 대물림을 막기 위한 관리도 절실하다. 21건 가운데 3건은 피고인이 과거 가정폭력의 피해자였거나 아동학대로 처벌받은 뒤 다시 또 학대를 저지른 경우였다. 아동보호전문기관을 운영하는 굿네이버스 관계자는 “학대 재발을 막기 위한 심리 치료와 상담도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창녕=강성명 기자 smkang@donga.com신지환 기자 jhshin93@donga.com}

약 2년 동안 프라이팬에 손을 지지는 등 온갖 학대를 받아온 A 양(9)이 이미 3세 때부터 친모 B 씨(27)에게도 학대를 당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해당 지방자치단체는 이런 기록이 남아있었는데도 A 양에 대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사실도 확인됐다. 동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B 씨는 2011년 대구에서 홀로 A 양을 출산한 뒤, 2014년 경남 창원으로 이사했다. 같은 해 기초생활수급자격을 신청했으며, 입양기관에 A 양의 가정위탁도 요청했다. 이때 B 씨가 밝힌 가정위탁 사유는 ‘학대 및 돌봄 곤란’이다. 친모가 스스로 아이를 학대했다고 공식적으로 밝힌 것이다. 이 요청이 받아들여진 뒤 A 양은 2015년부터 위탁가정에서 자랐다. B 씨는 당시 한 달에 한 번꼴로 위탁가정을 찾아가 A 양과 만났다고 한다. A 양이 언제부터 다시 B 씨와 살게 됐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2017년 계부인 C 씨(35)와 결혼해 거제시로 이사할 때, A 양도 함께 전입신고가 이뤄졌다. 그런데 기초생활수급자인 B 씨의 기록이 거제시로 이관될 당시 “A 양이 과거 학대 및 가정 위탁 이력이 있다”는 기록도 넘겨졌다. 시 관계자는 “신규 전입한 기초생활수급 가정 상담 때도 이런 내용을 확인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해당 시는 이후 A 양이 아동학대를 당할 가능성을 면밀히 살피지 않았다. A 양과 두 동생은 사회복지서비스지원시스템상 ‘학습 지원이 필요한 아동’으로만 분류됐다. 5차례에 걸쳐 가정방문도 이뤄졌지만 학대 정황은 보고가 이뤄진 적이 없다. 심지어 2018년 9월 가정방문 보고서에는 “A 양은 쾌활하고 밝았다”라고, 지난해 5월 보고서엔 “C 씨를 잘 따르고 동생을 잘 챙긴다”고 기록돼 있다. A 양이 “약 2년 전부터 학대를 당해왔다”고 진술한 것과 대치된다. 특히 같은 5월 보고서에는 A 양이 “동생을 잘 돌보지 않으면 아빠가 힘들다”고 말했다고 적혀 있다. 8세 여아가 이런 통상적이지 않은 말까지 했는데도 상황은 바뀌질 않았다. 거제시는 “학대가 워낙 오래된 기록인 데다 가정방문에서는 학대의 정황이 잘 포착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실제로 거제시는 올해 초 A 양 가정이 경남 창녕군으로 전입할 때 “복지 사각지대에 처할 수 있는 위기가구여서 보호가 필요하다”는 정보만 전달했다. 게다가 창녕군은 이 가족이 전입한 뒤 한 차례도 방문 지원에 나서지 않았다. 정부가 2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여파로 가정 방문 자제를 요청한 탓이다. 하지만 이 가족은 1월 15일 전입해 한 달 정도 학대를 알아챌 방문 기회가 있었다. 창녕군 관계자는 “계부가 면사무소에 자주 방문해 아동수당, 양육수당을 신청하고 넷째의 출생까지 신고해 별 문제가 없는 줄 알았다”고 해명했다. A 양은 결국 지난달 29일 집을 뛰쳐나와서야 스스로 학대 사실을 알렸다. 아동학대 사건이 잇따르자 경찰청은 “10일부터 한 달 동안 복지부, 교육부, 지자체로 구성된 합동점검팀이 위기아동 보호 실태를 집중 점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합동점검팀은 이 기간 경찰과 아동보호전문기관에서 위기아동으로 분류된 아이와 보호자를 직접 만나 면담하고 주변 이웃과 학교 측과도 상담해 안전 여부를 종합적으로 확인한다. 전채은 chan2@donga.com·한성희 기자}

프라이팬에 손을 지져 지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학대를 당해온 A 양(9)이 올 초 정부의 위기아동 경보망에 포착됐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탓에 방문조사를 받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게다가 A 양처럼 위기아동으로 분류되고도 방문이 미뤄진 아이들은 올 들어 1만7079명에 이른다. 코로나19로 인해 사회와 단절된 곳에서 도움도 청하지 못하고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암수(暗數) 학대’ 가능성이 커져 버렸다. 9일 경남 창녕군과 경찰 등에 따르면 A 양은 올 1월 정부 ‘e아동행복지원시스템’에 위기아동으로 등록됐다. 이 시스템은 영유아 건강검진이나 국가예방접종 미실시 기록 등 공적 정보 41종을 모아 위험도가 높다고 판단한 아이들을 방문조사 대상으로 선별한다. A 양은 친모 B 씨(27)의 조현병 병력 등 몇 가지 정보가 기준에 부합해 위기아동으로 분류됐다. 하지만 A 양에 대한 방문조사는 한 차례도 이뤄지지 못했다. 2월 코로나19가 본격 확산되자 보건복지부가 방역 조치의 하나로 전국 지방자치단체에 “e아동행복지원시스템에 따른 위기아동 방문조사를 중단하라”는 공문을 내려보냈기 때문이다. 복지 공무원의 발길이 끊어진 사이 A 양은 집에 갇혀 친모와 계부 C 씨(35)의 폭행에 시달렸다. 머리에서 피가 날 때까지 막대기로 맞았고 온몸이 멍투성이가 됐다. 3월 등교 개학마저 미뤄지는 바람에 A 양은 외출도 하지 못했다. 지난달 29일 스스로 집에서 탈출해 이웃 주민에게 발견되기 전까지 A 양이 당한 학대는 어떤 수사기관이나 아동보호전문기관에도 포착되지 않았다. 더 심각한 건 A 양처럼 당국의 관리 사각지대에서 학대에 시달리는 아이들이 얼마나 더 있을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는 점이다. 복지부는 올해 1차(1∼3월) 방문조사 대상 위기아동을 2만858명 선정해 각 지자체에 통보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확산되고 ‘사회적 거리 두기’ 수칙이 확대되기 전까지 방문조사가 완료된 아동은 3779명(18.1%)뿐이었다. 위기아동 방문조사는 이달 9일 현재까지도 재개되지 않고 있다. 2차(4∼6월) 방문조사 대상 아동은 선별조차 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경찰청에 접수된 아동학대 신고가 올 3, 4월 1647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699건)보다 줄어든 건 전혀 긍정적인 수치가 아니다. 한 전문가는 “공식 집계로는 마치 아이들이 더 안전해진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조사 자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고 했다. 수면 아래에선 더 끔찍한 학대가 자행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코로나19 방역 수칙을 철저히 지킨다는 전제하에 하루빨리 위기아동 방문 점검을 재개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위기아동 조사 작업은 아동의 태도나 표정, 집안 환경 등을 관찰하는 방식으로 이뤄져 실제 대면하지 않으면 사실상 무의미하다. 공혜정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 대표는 “아동 학대를 스스로 신고하는 아이들은 대부분 10대 후반 청소년이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린 아이들은 신고를 기다리기보다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경찰도 대책 마련에 나섰다. 동아일보가 확보한 경찰청 내부 자료에 따르면 경찰청은 △신고 접수 시 현장조사를 강화하고 △아동이 ‘학대가 아니다’라고 해도 조사를 중단하지 않으며 △기존에 사례 관리 중인 학대 위험 아동 2315명을 집중 모니터링하기로 했다.전채은 chan2@donga.com·한성희 기자}

3일 오후 서울 송파구에 있는 한 아파트단지. 4000여 가구 대단지인 이곳은 일명 ‘초품아(초등학교를 품은 아파트)’다. 하지만 준공년도가 오래되다보니 지하는커녕 지상 주차장도 부족한 실정. 초등학교 정문 앞마저 차량 5대가 일렬로 불법 주자하고 있을 정도였다. 이날 오후 내내 지켜본 현장은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었다. 꽉꽉 들어찬 차들 사이로 이더서 사람이 불쑥 나타날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좁은 통로로 차들도 겨우겨우 빠져나가는 모습도 이어졌다. 한 유치원생은 평행 주차한 자동차 사이에서 나오나 배달 오토바이랑 부딪힐 뻔도 했다. 주민 이모 씨(36)는 “실제로 몇 년 전에 한 어린이가 차에 치이는 사고도 발생한 적이 있다”며 “재건축 단지라 도로 보수도 안 돼 더 위험한 지경”이라고 말했다. 아파트 도로 사고는 도심에서 끊이지 않는 골칫거리다. 가장 안전하다고 여겨야 할 내 집 앞 도로가 오히려 안전사각지대가 되버렸다. 공동주택 내 도로는 해마다 전국에서 10만 건 이상 크고작은 사고가 발생하지만, 관련 법령 미비로 처벌이나 단속이 쉽지 않다. 법적으로 도로가 아닌 ‘도로 외 구역’이기 때문이다.● ‘자기 집 앞 비극’ 이젠 사라져야 아파트 단지 도로의 취약성은 꼭 오래된 아파트만의 문제가 아니다. 2일 교통안전공단 연구진과 함께 찾은 경기 고양시 한 아파트는 준공 15년 정도 된 ‘준 신축’이다. 지하주차장도 넉넉하고, ‘볼라드(차량진입제어 말뚝)’ 등 교통안전시설이 비교적 잘 갖춰져 있다. 하지만 단지 정원에 심은 회양목이 문제였다. 1m 이상 자라며 교차로 반대편에서 회전에서 들어오는 차량을 볼 수가 없었다. 이날도 서내 대가 그냥 들어오다 급정거를 했다. 한 주민은 “아파트 단지에 설치한 출입구 3곳이 입출구 표시가 명확하지 않아 역주행으로 들어오는 차량도 적지 않다”고 귀띔했다. 현행 주택건설기준 등에 관한 규정에 따르면 아파트 단지는 차량이 시속 20㎞ 이하로 주행하도록 설계된다. 하지만 도로교통법 상 사유지로 취급돼 이를 어겨도 경찰이 단속할 권한이 없다. 심지어 법적으로 운전자는 단지 내에서 보행자 보호 의무조차 없다. 아파트단지 도로가 본격적으로 논란이 된 건 2017년부터다. 대전에서 119구급대원인 엄마가 5살 딸과 장을 보고 집에 오다 아파트 횡단보도에서 승합차에 치였다. 딸은 목숨을 잃었고, 엄마는 중상을 입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지며 도로교통법 개정을 요구하는 청와대 청원이 20만 명을 넘어섰다. 당시 경찰청은 “도로 외 구역에서 보행자 보호 의무 신설과 위반 시 제재 수단을 마련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국회도 이러한 내용을 담은 도로교통법과 교통사고처리특례법 개정안 등이 발의됐다. 하지만 지난달 임기가 만료된 20대 국회에서 관련 법안이 통과되지 못하고 폐기 처분됐다. 관련 법안이 국회에서 잠자는 동안 비극은 계속됐다. 올해 4월 전북 정읍시에선 자동차를 몰던 어머니가 아파트 커브길을 돌다 자신의 8세 아들을 치어 숨지게 했다. 임채홍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캐나다는 난폭운전과 사망사고 등 일부 교통 규정을 사유지에도 적용한다. 미국의 대다수 주들은 주민 동의와 지자체 승인을 거쳐 아파트와 학교에 교통법규를 적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밝혔다.● 교통안전 친화적인 아파트 설계를 아파트 단지 도로와 같은 도로 외 구역은 정부 차원에서 수집하는 통계조차 없다. 국가가 관리하는 공로(公路)가 아니기 때문이다. 민간 보험업계에서 사고 내역 등을 분석해 간접적으로 추산할 뿐이다. 보험개발원이 2017년 발생한 교통사고를 분석한 결과 전체 약 400만 건 가운데 아파트 등에서 벌어진 사고가 16.4%(약 66만 건)를 차지했다. 전문가들은 아파트 단지를 경찰이 단속할 수 있게 만드는 것과 동시에 단지 시설을 교통안전 친화적으로 바꾸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서울 동작구에 있는 대방주공아파트는 2017년까지만 해도 매달 2, 3건의 교통사고가 발생했다. 입주민 어린이가 택배차량에 깔리는 일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아파트는 2017년 교통안전공단의 컨설팅을 받아 주요 건널목에 횡단보도와 과속방지턱 설치 등 시설 개량에 나섰다. 아파트 관리사무소 관계자는 “대략 사고 자체가 30% 이상 줄었다. 인명사고는 개선 뒤 1건도 없었다”고 했다. 아파트 단지 도로는 올해 말부터 조금씩 희망이 엿보인다. 11월부터 아파트에서 교통사고가 나면 지방자치단체에 의무 보고해야 한다. 단지의 교통안전시설 진단·개선 의무화 등이 담긴 교통안전법 개정안도 시행될 예정이다. 윤공현 교통안정공단 책임연구원은 “현재는 기존 단지의 교통시설 개선에 집중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아파트 설계단계부터 교통안전 친화적인 시설을 반영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국토부 관계자도 “공동주택을 짓기 전 지자체 심의 단계인 교통영향평가에서 교통안전시설을 반드시 검토하도록 도시교통정비촉진법 등 관련 법안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더불어민주당 윤미향 당선자는 2012년 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현 민주당) 비례대표로 출마하려던 이용수 할머니에게 “위안부 문제 해결은 국회에 가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이라며 만류했다는 의혹에 대해 “별로 중요하지 않게 받아들이고 말씀드렸던 것 같다”고 밝혔다. 윤 당선자는 29일 국회 소통관에서 열린 기자회견 후 가진 일문일답에서 “당시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지만 이 할머니가 일본대사관 앞 거리에서 전화를 했다. 할머니가 진짜로 국회의원 하고자 한다는 걸로 받아들이지 않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윤 당선자는 또 “이 할머니에게 내가 배신자가 돼있다. 30년간 활동했는데도 배신자로 느낄 만큼 신뢰를 드리지 못한 것은 지금이라도 사죄 말씀 드리고 싶다”고 했다. ‘조만간 할머니를 찾아갈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할머니가 만나주신다면요”라고 답했다. 윤 당선자는 입장 발표문에선 “피해자들에게 현금 지원을 목적으로 모금한 돈을 전달한 적이 없다”는 이 할머니의 주장에 대해 “이 할머니의 지적과 고견을 깊게 새기는 것과 별개로, 이 할머니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정의기억연대(정의연)의 기부금 유용 의혹을 처음 제기한 이 할머니는 대구의 한 커피숍에서 윤 당선자의 기자회견 직후 기자들과 만나 “기자회견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줄줄 써서 하는 게 그게 뭐냐”고 말했다. ‘윤 당선자가 사죄하겠다고 말했다’고 하자 이 할머니는 “내가 무슨 사과를 받느냐. 나는 없어요. 그런 거 없어요”라고 답했다. 이 할머니는 지인들에게 “두 번 다시 말하기 싫다. 추가 입장문도 내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대구=장영훈 jang@donga.com / 전채은 기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92)는 29일 국회에서 열린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당선자의 기자회견에 대해 사전부터 “(윤미향) 이름도 듣기 싫다”며 불쾌감을 표현한 것으로 전해졌다. 서혁수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시민모임)’ 대표는 이날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이 할머니께서는 기자회견을 보려고 하지도 않으셨다. 별도의 입장 발표도 없을 것”이라며 “오늘 윤 당선자가 기자회견을 한다는 사실은 알고 계신다”고 말했다. 서 대표는 “오늘 아침에도 이 할머니와 통화를 했는데 기자회견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도 않아 하셨다”며 이 같이 말했다. 현재 대구 자택에 머무르고 있는 이 할머니는 기자회견이 열린 오후 2시에 외출해서 다른 일정을 소화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이 할머니를 비롯한 측근들은 모두 기자회견에 대해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으며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대한변호사협회 일제피해자 인권특별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이 할머니를 오랜 기간 지원해 온 최봉태 변호사는 동아일보의 인터뷰 요청에 대해 “정쟁이 심해 인터뷰를 사양한다”고 밝혔다. 서 대표 역시 “이 할머니의 의견도 나오지 않은 상황이어서 시민모임 차원에서도 별도의 입장을 내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할머니의 수양딸 A 씨도 기자회견 전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어머니가 기자회견을 보실지 안 보실지 모른다”고 말했다. 이 할머니는 7일과 25일 두 차례에 걸친 기자회견 후 대구에서 생활하며 건강을 회복하고 있다. 2차 기자회견 이후 29일까지 윤 당선자 측과 별다른 접촉은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전채은기자 chan2@donga.com김소영기자 ksy@donga.com}

“아이고…, 여기는 무슨 미로 같네요.” 21일 오전 경기 파주시에 있는 지방도 제367호선. 이곳을 지나가던 50대 운전사는 연거푸 브레이크를 밟으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운전경력이 30년 가까이 됐지만 땀을 뻘뻘 흘릴 정도. 서둘러 속도를 늦춘 뒤 찬찬히 살펴보면 그때서야 풀숲에 가려졌거나 쓰러져 보이지 않던 ‘갈매기 표지’가 보였다. 급커브를 알리는 꺽쇠 형태의 표지다. 찾기 힘든 갈매기 표지만 문제가 아니었다. 꾸불꾸불한 길목마다 교통사고로 부서진 도로이탈방지시설이 계속해서 눈에 들어왔다. 몇몇 보수 흔적도 보였지만 그대로 방치된 곳도 적지 않았다. 심지어 아스팔트 포장이 무너져 도로 한복판에 구멍이 뻥뻥 뚫려 있기도 했다. 직장인 박모 씨(35)는 “인근에 마장호수 등이 있어 주말 가족 단위 나들이 차량이 많다. 오가는 차량 수에 비해 도로 정비가 너무 부실하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늙어가는’ 지방도로…사고율도 높아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국내 도로 상태를 보며 놀라는 이들이 많다. 해외 어디를 가도 이만큼 정비가 잘 된 도로를 만나기 힘들 정도다. 하지만 국도에 비해 전국의 지방도로는 그리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들다. 상대적으로 낡고 보수도 더뎌 교통사고가 발생할 확률이 높다. 도로의 종류는 크게 5종류로 나뉜다. 고속국도(고속도로)와 일반국도, 지방도, 특별·광역시도, 시·군도다. 국도 두 곳은 국토교통부에서 직접 관리하고, 나머지 지방도로는 시청 도청 등 각 지방자지단체 관할이다. 지자체들은 “재정이 열악하다보니 지방도로는 도로의 유지와 보수가 쉽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실제로 형편이 나은 대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도로일수록 상황은 나쁘다. 인구는 적은데, 관할 도로 면적은 크기 때문이다. 행정안전부의 이상열 지역균형발전과 주무관은 “도심에서 떨어진 군 단위 지역이 오히려 인구대비 도로 면적이 넓다. 하지만 예산이 부족해 노후화된 도로를 정비하지 못하는 실정”이라 말했다. 한 지자체 관계자는 “솔직히 도로정비 등 교통안전사업은 눈에 잘 띄지 않다보니 우선순위에서 밀리기 일쑤”라고 귀띔했다. 지방도로의 부실이 만든 결과는 예상보다 심각하다. 도로교통공사에 따르면 전체 도로 11만714㎞ 가운데 지자체가 관리하는 지방도로는 9만1964㎞. 한데 2018년 전체 교통사고 21만7148 건 가운데 지방도로에서 발생한 사고가 19만4728건이다. 거의 90% 가까이 된다. 65세 이상 고령자의 사고율도 높다. 2018년 노인 사고 3만8647건 가운데 약 89%인 3만4506건이 지방도로에서 벌어졌다. 지난해 2월 충남 금산군에서는 지방도로를 걸어가던 70대 여성이 차에 치여 목숨을 잃기도 했다. 충돌·추돌 등이 아닌 차량 단독 사고도 지방도로에서 잦다. 안전시설이 부족해 사망사고로 이어질 확률도 높다. 지난해 2월 경기 평택시 고덕면에선 굽은 지방도로에서 중앙분리대를 들이받은 차량이 가드레일이 관통해 운전자가 목숨을 잃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가드레일 시작과 끝 지점에 차량과 충돌하면 충격을 완화하는 이른바 ‘단부시설’이 있었다면 안타까운 희생이 없었을 수도 있다”고 했다. ● 정부와 지자체 모두 적극적으로 나서야 중앙정부도 이런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다. 여러 해에 걸쳐 지방도로 개선사업을 진행해왔다. 행안부는 2004년부터 해마다 위험한 지방도로 수십 곳을 선정해 유지·보수 작업에 국비를 보조한다. 특히 이 사업은 심하게 굽은 커브길 폭을 넓혀 곡률을 줄이고, 폭이 좁은 양방향 도로를 넓혀 차량이 안전하고 원활하게 지나다닐 수 있도록 정비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위험구간으로 선정됐던 지방도로는 정비 뒤 교통사고 발생이 평균 70% 정도 감소했다. 진영 행안부 장관은 3월 “올해도 지방도로 정비에 예산 366억 원을 투입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정부가 민간기관과 손을 잡고 개선에 나서기도 한다. 국토교통부는 손해보험협회 등과 함께 2017년부터 해마다 교통사고 잦은 지방도로를 파악해 개선안을 제시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 보험회사가 보유한 사고 정보를 활용해 대상을 선별하고 현장조사를 바탕으로 구조적 문제점을 짚어낸다. 국도와 지방도로 구분 없이 30~40곳 정도 선정하는데, 뽑고 보면 이중 대다수가 지방도로다. 손해보험협회 관계자는 “전문가들이 제시한 대안은 국도는 국토관리청으로, 지방도로는 도로관리청으로 전달한다”고 말했다. 대안이 나왔다고 문제가 곧장 해결되는 건 아니다. 강제성이 없다보니 별다른 피드백이 없는 지자체가 많다고 한다. 이윤형 한국교통안전공단 부교수는 “지자체도 교통안전사업의 중요성을 좀더 인식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박창규 기자 kyu@donga.com 서형석 기자 skytree08@donga.com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김동혁 기자 hack@donga.com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전북 전주에 있는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에서 2세 어린아이가 불법 유턴하던 차량에 치여 목숨을 잃었다. 스쿨존에서 운전자의 안전 의무를 강화한 이른바 ‘민식이법’(도로교통법과 특정범죄가중처벌법 개정안)을 3월 25일 시행한 뒤 처음 벌어진 스쿨존 사망 사고다. 전북 전주덕진경찰서 등에 따르면 21일 낮 12시 15분경 덕진구 반월동에 있는 스쿨존에서 A 군(2)이 B 씨(53)가 몰던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에 치였다. B 씨는 왕복 4차로 도로에서 불법 유턴을 하다 사고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A 군은 출동한 119구조대가 인근 병원으로 옮겼지만 끝내 숨을 거뒀다. 사고 당시 현장에는 A 군의 엄마가 함께 있었으며 B 씨는 사고 당시 술을 마시진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관계자는 “운전자가 사고 당시 과속을 했는지 등 정확한 사고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며 “조사 결과를 토대로 구속영장 신청 및 민식이법 적용 여부를 종합적으로 검토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민식이법 시행 이틀째였던 3월 27일 경기 포천에서 벌어진 교통사고가 ‘민식이법 적용 1호 사건’이었던 것도 21일 공개됐다. 경기북부지방경찰청에 따르면 당일 포천시 추산초등학교 앞 스쿨존에서 한 여성(46)이 과속으로 김모 군(11)을 치어 다치게 한 혐의로 불구속 입건됐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조사한 결과 이 여성이 몰았던 차량은 스쿨존에서 시속 39km에 이르렀다. 사고 지점은 편도 1차로 도로로 횡단보도 구간은 아니었다. 김 군은 이 사고로 팔이 부러져 전치 6주 진단을 받았다. 경찰은 제한속도 30km인 스쿨존에서 과속을 한 데다 어린이 보행자에 대한 보호 의무를 다하지 않은 점 등을 들어 운전자를 기소 의견으로 6일 검찰에 넘겼다. 운전자는 경찰 조사에서 과속과 운전 부주의를 모두 인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여성은 “스쿨존이라 조심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실수로 시속 30km를 넘은 것 같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전국에서 경찰이 입건한 민식이법 적용 1호 사건으로 확인됐다. 이후 부산 연제경찰서는 같은 혐의로 입건된 피의자를 이보다 먼저 검찰에 넘겨 검찰 송치 시점을 기준으로는 두 번째다. 전채은 chan2@donga.com / 전주=박영민 기자}

정의기억연대(정의연) 전신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조성한 서울 중구 남산 ‘기억의 터’ 기림비의 위안부 피해자 명단에서 고 심미자 할머니는 물론이고 2005년 별세한 박복순 할머니 이름도 빠진 것으로 확인됐다. 박 할머니도 일본 아시아여성기금으로부터 민간기금을 받은 뒤 정대협과 줄곧 불편한 관계였다. 동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기억의 터에 있는 조형물 ‘대지의 눈’에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 247명의 이름이 가나다순으로 새겨져 있다. 정의연은 “2016년 조성 당시 한국 정부에 공식 등록된 피해자에 미등록 피해자를 합해 산정한 인원”이라고 설명했다. 이 기준대로라면 1993년 정부에 위안부 피해자로 공식 등록됐으며, 1992∼2004년 일본 최고재판소 재판에도 42차례 참석했던 박 할머니는 명단에 포함됐어야 한다. 박 할머니는 생전에 심 할머니가 꾸린 세계평화무궁화회에 소속돼 있었다. 무궁화회는 여러 차례 정대협 활동에 대한 비난을 내놓았다. 박 할머니는 1997년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6명과 함께 일본 아시아여성기금에서 민간기금을 받은 걸 두고 정대협과 부딪쳤다. 윤정옥 당시 정대협 대표는 “그 기금을 받으면 공창이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박 할머니는 “일본 국민이 반성하며 모은 위로금을 받으면 왜 안 되냐”고 반발했다. 양순임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회장은 20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박 할머니는 내성적인 성격이라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으셨다. 그런데도 정대협만은 ‘나쁜 놈들’이라며 비판하곤 했다”고 전했다. 양 회장은 “정대협이 다른 위안부 할머니들을 쥐고 휘두른 측면이 있다”며 “박 할머니는 흔들리지 않았고 아시아여성기금을 받은 것도 후회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양 회장은 2005년 박 할머니의 장례를 주도했다. 정의연 관계자는 “당시 정대협에서 활동하지 않아 상황을 잘 모른다. 확인이 어렵다”고 답했다. 김태성 kts5710@donga.com·전채은 기자}

정의기억연대(정의연) 전신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조성한 서울 중구 남산 ‘기억의 터’ 기림비의 위안부 피해자 명단에서 고 심미자 할머니는 물론 2005년 별세한 고 박복순 할머니 이름도 빠진 것으로 확인됐다. 박 할머니도 일본 아시아여성기금으로부터 민간기금을 받은 뒤 정대협과 줄곧 불편한 관계였다. 동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기억의 터에 있는 조형물 ‘대지의 눈’에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 247명이 가나다순으로 새겨져있다. 정의연은 “2016년 조성 당시 한국정부에 공식 등록된 피해자에 미등록 피해자를 합해 산정한 인원”이라 설명했다. 이 기준대로라면 1993년 정부에 위안부 피해자로 공식 등록됐으며, 1992~2004년 일본 최고재판소 재판에도 42차례 참석했던 박 할머니는 명단에 포함됐어야 한다. 박 할머니는 생전에 심 할머니가 꾸린 세계평화무궁화회에 소속돼 있었다. 무궁화회는 여러 차례 정대협 활동에 대한 비난을 내놓았다. 박 할머니는 1997년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6명과 함께 일본 아시아여성기금에게서 민간기금을 받은 걸 두고 정대협과 부딪혔다. 윤정옥 당시 정대협 대표는 “그 기금을 받으면 공창이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박 할머니는 “일본 국민이 반성하며 모은 위로금을 받으면 왜 안 되냐”고 반발했다. 양순임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회장은 20일 동아일보와 통화에서 “박 할머니는 내성적인 성격이라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으셨다. 그런데도 정대협만은 ‘나쁜 놈들’이라며 비판하곤 했다”고 전했다. 양 회장은 “정대협이 다른 위안부 할머니들을 쥐고 휘두른 측면이 있다”며 “박 할머니는 흔들리지 않았고 아시아여성기금을 받은 것도 후회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양 회장은 2005년 박 할머니의 장례를 주도했다. 정의연 관계자는 “당시 정대협에서 활동하지 않아 상황을 잘 모른다. 확인이 어렵다”고 답했다. 김태성기자 kts5710@donga.com전채은기자 chan2@donga.com}

15일 오후 서울 금천구 독산로 시흥초등학교. 여느 초등학교처럼 이 초교 주위로 ‘스쿨존’으로 표시돼있다. 시속 30㎞ 이상 속도를 내면 안 되고, 주정차도 함부로 할 수 없단 뜻이다. 하지만 현실은 너무나 달랐다. 왕복 2차로쯤 되는 너비의 길이 주차된 차들로 가득 차 있었다. 도로 곳곳 스쿨존 표시가 무색할 정도였다. 이렇다보니 주차 차량 사이에서 사람이 튀어나오면 대처하기가 쉽질 않았다. 실제로 한 승용차는 서행 중이었지만, 갑자기 아이와 엄마가 모습을 드러내자 ‘끼익’하고 급정거했다. 동행한 이성렬 삼성교통안전연구소 수석연구원은 “3월 ‘민식이법’이 본격 시행됐지만 이렇게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다. 각 학교 상황에 따라 ‘맞춤 처방’이 필요한 이유”라고 했다.● 스쿨존, 감속이 능사가 아니다 이 연구원의 진단은 현장을 나가보면 확연히 느껴진다. 함께 돌아본 서울 초등학교들은 모두 지리적 조건에 따라 위험요소가 달랐다. 아무래도 새로 생긴 학교들은 안전 환경이 나쁘지 않지만, 민식이법만으로는 사고 발생을 막기 어려워 보이는 곳도 적지 않았다. 2014년부터 5년 동안 국내 스쿨존 보행자 사고 건수는 2014년 452건에서 2018년 377건으로 조금씩 줄어왔다. 특히 길을 건너다 벌어지는 사고는 많이 줄었다. 하지만 시흥초처럼 인도·차도 구분이 없거나 애매모호한 지역은 같은 기간 큰 변화가 없었다. 특히 보도와 차도를 분리하는 ‘보차 분리’가 되지 않으면, 이동 차량에 대한 경계 없이 갑자기 뛰어드는 어린이들이 특히 위험하다. 이 연구원은 “도로 주변에 보도를 설치하고 가능하면 안전 펜스도 설치하는 게 스쿨존의 정석”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도로 폭이 좁은 시흥초는 인근 다세대주택의 주차 차량이 많아 별도 보도를 설치할 공간이 협소했다. 시흥초의 한 학교보안관은 “등·하교 시간에는 정문 밖 큰 길로 나와 교통안전지도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단순히 스쿨존 문제만도 아니었다. 시흥초 주변 도로는 구불구불하고 경사가 심해 보행자의 안전을 지키기 어려운 구조였다. 직접 200m 정도 걸어서 학교까지 가보니, 주차차량은 물론 지하주차장 입구도 여러 곳을 지나야 했다. 아침 출근길에 오른 차량과 등교하는 학생들 동선이 겹칠 수밖에 없었다. 서울 서대문구 홍연초등학교 인근도 비슷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홍연초 앞에는 주택가를 가로지는 약 200m의 일방통행로가 있다. 그런데 차량 한 대가 겨우 지나다닐 수 있을 만큼 폭이 좁다. 별도의 보도로 없어서 등교하는 아이들은 도로 가운데를 어떤 보호 장치도 없이 그냥 지나가야 한다. 자녀를 차에 태워 등교시키는 부모들도 이 도로를 많이 이용한다. 한 학부모는 “실은 학교로 연결되는 왕복 2차로 도로가 따로 있긴 하다. 하지만 이쪽 통행로가 훨씬 빨리 도착해 이쪽으로 많이 몰려 위험하다. 가끔 역주행하는 차량도 없지 않다”고 귀띔했다. 직접 차를 타고 학교 인근 돌아보니 위험성은 더 크게 느껴졌다. 길이 좁다보니 시야 확보도 쉽지 않았고, 보도와 차도의 구분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어디서 사람이 등장할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이 연구원은 이럴 경우 도로 재질에 변화를 주는 것도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그는 “도로가 좁아 보도 설치 공간이 부족할 경우엔 울퉁불퉁한 재질로 도로를 포장해 운전자가 승차감이 다르게 느낀다”며 “자연스레 스쿨존을 인식하면 경각심을 높일 수 있다”고 했다. 끼게 ● 아이들 통학 환경 복합적으로 고민해야 서울 중랑구에 있는 면일초등학교는 앞 두 학교와는 또 사정이 달랐다. 학교를 둘러싼 스쿨존에 등하굣길 학생들이 이용할 수 있는 보도가 마련돼 있었다. 정문으로 이어지는 도로에는 아무리 폭이 좁아도 횡단보도가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면일초은 학교 뒤편 도로가 안전에 취약했다. 어린이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도로 가장자리에서 노상주차장이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와 한쪽 면이 맞닿아 있는 체육문화센터에 딸린 주차장이었다. 현행법은 학교와 유치원, 어린이집 주 출입구와 연결된 도로의 노상주차장만 불법으로 규정한다. 면일초 뒤편 도로의 노상주차장은 엄밀히 말해 합법이다. 하지만 합법 불법과 상관없이 이런 노상주차장은 아이들의 안전을 저해한다. 인근에 있는 한 가게 주인은 “원래 이쪽으로 아이들이 많이 등교하는데, 차들의 이동 동선과 맞물려 위험해 보인다”고 했다. 때문에 최근 정부 정책은 스쿨존 내에는 노상주차장을 만들지 않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서울지방경찰청은 지난달 27일 “스쿨존에 부적합하다고 판단되는 노상주차장 48개소를 상반기애 완전히 폐지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박창규 기자 kyu@donga.com}

최근 전동킥보드를 비롯한 개인형 이동수단(PM) 이용자가 급증하고 있는 가운데 도로교통공단이 이들 교통수단의 안전수칙을 안내한 카드뉴스를 제작했다. 18일 도로교통공단이 공개한 카드뉴스에는 개인형 이동수단을 이용하기 위한 자격과 운행 가능 도로 등 전반적인 이용 수칙이 소개됐다. 개인형 이동수단은 도로교통법상 차로 구분돼 원동기장치자전거 운전면허 혹은 2종보통 자동차면허 이상의 면허가 있는 사람만 이용할 수 있다. 오토바이 등 이륜차와 마찬가지로 차로로 주행해야 한다. 안전모를 착용하지 않을 경우 범칙금 2만원이 부과된다. 음주운전은 자동차 운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처벌 대상이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그래, 그동안 어떤 곡들을 쳐 왔니?” 이런 게 운명인 걸까. 2010년 3월. 장형준 서울대 피아노과 교수(58)가 첫 질문을 던지자 식당은 갑자기 칠흑처럼 어두워졌다. 갑작스러운 정전에 당황한 장 교수. 그런데 그 앞에 앉은 아이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자연스레 젓가락질을 이어갔다. 사랑하는 제자인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 김상헌 씨(29)와의 첫 만남이었다. “실은 되게 두근거렸어요. 교수 생활 16년 만에 시각장애인 학생을 가르치는 건 처음이었거든요. ‘어떤 난관도 함께 이겨내야지’ 하고 혼자 들떴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뭔가가 머리를 쾅 때렸어요. 그동안 이 아이는 어떤 ‘삶의 터널’을 지나왔는지 몰랐던 거죠. 때로는 어둡고 힘겨웠을 시간들을 겪어왔고, 또 앞으로도 그럴 텐데.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13일 장 교수가 자신의 연구실에서 제자와의 인연을 들려주기 시작하자 김 씨는 배시시 미소를 머금었다. 10년 전 시각장애인 최초로 서울대 피아노과에 입학한 그에게도 장 교수는 선명하고 뚜렷한 존재였다. 이후에도 아직 시각장애인 입학생은 없다. 김 씨는 “교수님은 제 마음을 한눈에 알아보시고 어루만져 주셨다”고 했다. “신입생 때 강의를 듣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이리저리 치이다 보면 정작 레슨 시간엔 실력 발휘가 안 되더라고요. 하지만 교수님은 제가 풀죽었단 걸 아시곤 조용히 챙겨주셨습니다. 고전할 때도 모른 척 넘어가주셨고, 학생들에게 부탁해서 어디서도 외롭거나 다치지 않게 배려하셨어요. 교수님 덕분에 학교에서 ‘인싸’로 지낼 수 있었죠.” 하지만 장 교수는 모든 공을 제자에게 돌렸다. “상헌이는 처음부터 완성형이었다”며 손을 내저었다. “처음부터 기교는 거의 마스터한 상태였어요. 악보를 외워서 연주하니 기억력도 어마어마했죠. 오히려 제가 이 친구를 만난 게 ‘행운’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음악적 교감은 언제나 서로를 충만하게 했다. 장 교수는 레슨실에서 김 씨를 마주할 때마다 “항상 뭔가 더 기대하게 만들었다”고 기억했다. 공식적인 사제 인연은 학부 4년, 석사과정 2년으로 끝났지만 두 사람은 구애받지 않았다. 김 씨는 지금도 연주회를 앞두고 벽에 부딪힐 때면 장 교수를 찾아간다. 김 씨는 “졸업생이 자꾸 찾아와 귀찮게 하는데도 항상 반갑게 맞아주신다”고 했다. “예전엔 상헌이를 좀 혹독하게 가르쳤죠. 하루는 수업이 끝난 뒤 완전히 지쳐서 뻗어 있더라고요. 별로 미안하진 않습니다, 하하. 상헌이의 연주가 이젠 많이 성숙해졌어요. 특히 슈만과 바흐 곡들을 칠 땐 평가자가 아닌 감상자 위치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듣게 됩니다. 올해 7, 12월로 예정된 앙상블과 독주회 땐 조용히 찾아가 객석에서 그의 음악을 즐길 겁니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