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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1만 권 독서법’이라는 책이 유행이라고 한다. 연간 700권 이상 읽는 저자의 다독 비결은 핵심적인 한 줄 찾기다. 모든 문장을 다 보지 말고 책 읽는 목적을 정한 뒤 필요한 내용만 뽑아내라는 거다. 이때 중요한 건 자신이 이미 쌓은 선(先)지식 혹은 가치관일 것이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고 타자의 경험이나 사상을 흡수하는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 이 책은 중국이 개혁개방 이후 30여 년 동안 유럽, 일본의 사상을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내재화한 지적 편력(遍歷)을 다루고 있다. 대부분의 지식 수용 과정이 그러하듯 때론 암울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외국 사상을 이용하거나, 타산지석으로 배우는 모습을 포착했다. 내가 이 책에서 흥미롭게 본 것은 일본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와 마루아먀 마사오의 사상을 중국인들이 읽어낸 방식이다. 중국과 일본은 둘 다 화려한 문명을 한때 꽃피웠지만, 결국 19세기 말 서양 제국주의에 의해 ‘강요된 근대화’를 겪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물론 근대화의 성패는 엇갈렸지만 말이다. 일본 근대사상의 대부 격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중국 문명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했다. 얼핏 민족감정과 맞물려 반감을 살 만도 했지만, 문화혁명 직후 빠른 근대화에 내몰린 당시 중국 지식인들은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다. 예컨대 후쿠자와의 탈아론(脫亞論)은 제국주의의 단초라는 비판도 있지만, 근대화를 달성하기 위한 강한 의욕으로 여겨졌다. 이는 문혁과 맞물려 자신들의 봉건 잔재를 일소하려는 중국 사상계의 의지가 투영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발전에 대한 갈망은 콤플렉스로 이어지기 쉬운 것 같다. 일본 현대정치사상사 연구 대가인 마루야마 마사오에 대한 독법(讀法)이 그런 사례다. 마루야마는 ‘일본 정치사상사 연구’에서 도쿠가와 시대 유학 사상에서 근대화의 맹아를 찾고 있다. 그러나 오규 소라이의 유학 사상에서 근대화의 단초를 찾는 마루야마의 시도는 논리적 비약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저자에 따르면 중국 역사학자들도 근대화가 완전히 외압에 의한 게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2001년 방중한 자크 데리다가 “중국엔 자고로 철학이 없었다”고 말하자 중국 학계가 발끈한 것도 비슷한 맥락 아니었을까.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내가 꿈속에 나비로 변한 것인가 나비가 꿈속에서 나로 변한 것인가.’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을 따뜻한 동화책 버전으로 접한다면 이런 느낌 아닐까. 이 책은 독자에 따라 다양한 해석과 이야기 전개가 가능한 열린 그림책이다. 아기 곰과 여자아이의 만남과 여정을 다룬 이 책은 곰 인형을 끌어안고 잠든 여자아이를 묘사하면서 끝난다. 이쯤 되면 이것이 진짜 아기 곰의 이야기인지 혹은 아이가 꿈을 꾼 건지 아니면 곰 인형이 상상한 이야기인지 헷갈릴 수도 있을 거다. 상상은 각자의 몫. 간결한 글과 따뜻한 색상의 그림이 주는 흡인력이 대단하다. 해질녘 붉은 하늘과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 등을 묘사한 풍부한 색감이 인상적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경북 경주시에서 미완성 왕릉으로 추정되는 유적이 발견됐다. 기존 학계에서 신문왕릉 혹은 소덕왕후릉으로 추측한 곳인데 발굴 결과 성덕왕의 둘째 아들인 효성왕(?∼742)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은 걸로 나타났다. 왕이 죽기 전 자신이 묻힐 무덤을 미리 조성하는 이른바 ‘수릉(壽陵)’이 신라에서 행해졌다는 해석도 나온다. 발굴기관인 성림문화재연구원은 “황복사지 삼층석탑으로부터 135m 떨어진 발굴 현장에서 왕릉에 들어가는 석재들과 건물 터, 담장, 도로, 명문기와 등이 확인됐다”고 9일 밝혔다. 석재 북동쪽 왕릉 터에 봉분과 내부석실이 조성되지 않은 걸 감안할 때 왕릉 조성이 갑자기 중단된 걸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삼국사기에는 재위 기간이 5년에 불과했던 효성왕이 죽기 직전 유언에 따라 화장됐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고고학)는 “수릉 제도에 따라 효성왕 생전에 왕릉이 조성되기 시작했으나 갑자기 화장돼 미완성으로 남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발끝까지 울리는 북소리에 절로 신명이 났다. 국립국악원 우면당 재개관을 앞두고 7일 기자간담회에서 벌인 창작악단의 관현악 산조합주는 국악계에 조용한 혁명을 예고한 것이었다. 마이크를 쓰지 않는 ‘자연음향’인데도 각 악기의 울림이 충분히 전달돼 장중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맨 뒷줄에 배치한 장구의 가벼운 열채치기 소리도 생생히 들렸다. 9개월간의 리모델링을 거쳐 15일 재개관하는 우면당은 지금껏 건립된 국악 전용 자연음향 공연장 가운데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풍류사랑방이나 돈화문국악당도 자연음향 공연장이지만 크기가 상대적으로 협소해 중규모 이상 합주는 힘들다. 자연음향 공연장은 마이크로 왜곡되지 않은 국악기 본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국악계의 숙원이었다. 총 231석 규모의 우면당 공연장을 오직 자연음으로 메우기 위해 다양한 음향장치가 동원됐다. 우선 무대 전면 아래에 공명통 10개를 설치해 상대적으로 볼륨이 작은 현악기의 울림을 키웠다. 또 무대 천장과 객석을 둘러싼 벽면에 음향반사판 24개를 둬 음이 골고루 퍼질 수 있도록 했다. 무대 뒷면에는 연주 규모에 따라 전후 이동이 가능한 음향반사판을 세웠다. 소음을 차단하기 위한 방음시설을 추가했고, 객석 경사도를 22도에서 16도로 낮춰 안정감을 기했다. 김해숙 국립국악원장은 “실내악 훈련을 많이 해야 관현악 실력이 탄탄해진다”며 “우면당이 국악계의 실내악 수준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밝혔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1일 충남 부여군 왕흥사 터. 백마강 너머로 백제 멸망의 비극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낙화암이 멀리 보였다. 백제 위덕왕은 자신이 지은 화려한 왕실 사찰을 드나들며 보았을 낙화암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이나 했을까. 도도히 흐르는 저 강을 사이에 두고 백제의 흥망성쇠가 오롯이 펼쳐진 셈이다. 올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사리를 봉안하는 기구)가 이곳에서 출토된 지 10주년을 맞는 해다. 당시 왕흥사 목탑 터에서 사리기를 건져 올린 김용민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장과 이규훈 문화재청 학예연구관, 안보연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를 현장에서 만났다.○ 우리나라 最古 사리장엄구, 모습을 드러내다 “뭔가 대칼(대나무 칼) 끝에 걸리는 게 있습니다!” 2007년 10월 10일 왕흥사 목탑 터 발굴 현장. 장마가 끝나고 심초석(心礎石·목탑을 지탱하는 중앙 기둥의 주춧돌) 귀퉁이를 조사하던 강환구 연구원이 이규훈을 다급하게 불렀다. 조심스레 개흙을 제거하자 지붕 모양의 뚜껑돌이 모습을 드러냈다. 목탑에 사리기를 종종 묻어놓지만 심초석에 구멍을 내고 뚜껑돌을 놓은 건 처음이었다. 장기간 작업으로 지쳐 있던 발굴팀의 눈빛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공간이 좁아 손끝이 야무진 허진아 연구원이 들어가 서서히 돌을 들어올렸다. 모두 숨죽인 가운데 뚜껑돌을 올리자마자 탄식이 흘러나왔다. 기대와 달리 내부는 진흙과 물만 들어차 있었다. 하지만 실망은 오래가지 않았다. 흙탕물 속을 대칼로 찔러 보니 걸리는 게 다시 느껴졌다. 30분간 물을 빼내고 진흙을 제거하자 은은한 푸른빛이 감도는 원통형 그릇이 나왔다. 1500년의 세월을 담고 있는 백제시대 청동 사리합이었다. 사리합 표면을 닦아내자 ‘정유(丁酉)년’으로 시작되는 한자 명문이 드러났다. 발굴팀의 심장은 다시 고동치기 시작했다. 1차 사료가 없는 삼국시대의 명문은 역사 해석의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보존과학실 직원들을 긴급 소집하고 명문 해석에 돌입했다. 이때 안보연은 촬영한 명문 이미지를 바탕으로 글씨를 컴퓨터그래픽(CG)으로 복원했다. 그는 “세상에서 제일 먼저 이 명문을 보는 호사를 누려 행복했다”고 말했다. ○ 아버지와 아들 모두 잃은 왕의 슬픔 ‘정유년(577년) 2월 15일, 백제왕 창(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 사리 두 개를 묻었는데 신묘한 조화로 세 개가 되었다.’ 청동사리합 명문은 지금껏 알지 못한 새로운 정보를 제공했다. 우선 왕흥사 창건 연대가 삼국사기에 기록된 600년(법왕 2년)보다 23년이나 앞선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정사(正史)인 삼국사기에 적힌 연대를 바로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김용민은 “고고학자로서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횡재를 누린 기분이었다”고 회고했다. 명문이 얘기하는 왕흥사의 조성 경위도 흥미롭다. 위덕왕은 신라와의 관산성 전투에서 아버지 성왕을 여읜 인물이다. 부친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으로 한때 승려로 출가하려고 했던 그가 이젠 아들마저 잃은 것이다. 죽은 아들을 기리기 위해 사찰을 세운 아버지의 슬픔이 사리기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백제왕의 가계에 대한 새로운 사실도 확인됐다. 597년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된 아좌태자 이외에 위덕왕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왕자가 별도로 존재했음이 사리기를 통해 증명됐다.○ 홈쇼핑 만능렌치의 비밀 청동사리합을 발견한 것 못지않게 이를 여는 것도 만만치 않은 난관이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로 보내 사리합 뚜껑을 열려고 1주일 동안 씨름했지만 청동 녹이 달라붙어 번번이 실패했다. 발굴팀은 내부를 찍은 X레이 사진만 언론에 공개하려 했지만, 유홍준 당시 문화재청장은 열어볼 것을 지시했다. 발굴단원들이 골머리를 앓던 상황이었는데 답은 전혀 뜻밖의 곳에서 나왔다. 홈쇼핑 광고를 본 전산 담당 직원이 이른바 ‘만능렌치’로 열어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 것. 철물점에서 구입한 7000원짜리 렌치로 아무 흠 없이 사리합 뚜껑을 열 수 있었다. 청동사리합 안에선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조그마한 금 사리병이 들어있는 은 사리병이 나왔다. 금 사리병 내부는 명문에 적힌 사리는 찾아볼 수 없었고 물만 가득 채워져 있었다. 발굴팀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성분 분석을 했지만 순수한 물로 조사됐다. 이규훈은 “사리공으로 물이 샜다면 청동사리합이나 은 사리병에도 물이 들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며 “사리기에 적힌 신묘함이 여기서도 드러났다”고 말했다.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부여=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김해숙 국립국악원장(사진)이 7일 기자간담회에서 문화계 블랙리스트와 관련된 문화체육관광부의 압력을 전격 시인했다. 블랙리스트에 포함된 박근형 연출가의 2015년 11월 국악 공연 취소 과정에 문체부가 개입한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김 원장은 이날 서울 서초구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국악원은 문체부 소속 기관으로 따라야 하는 게 있다”며 “(공연 취소가) 옳다고 할 수는 없지만 100% 우리 혼자 결백하게 있을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문체부 압력이 있었다”며 “예정된 공연이 제대로 열리지 못한 건 가슴 아프고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앞서 국악원은 2015년 11월 ‘금요공감’ 프로그램으로 퓨전국악 공연 형식의 ‘소월산천’을 기획했다. 이 공연에는 박근형 연출가와 앙상블시나위, 기타리스트 정재일 등이 참가할 예정이었지만, 국악원은 공연 2주 전 “연극을 빼고 앙상블시나위와 정재일의 공연만 진행하라”고 갑자기 요구했다. 이에 앙상블시나위 측이 이를 거부하면서 공연이 무산됐다. 이와 관련해 연극계에서는 박 연출가가 2013년 연극 ‘개구리’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풍자했다는 등의 이유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제작 지원에서 배제됐다는 의혹이 일기도 했다. 한편 영화인 1052명이 모인 ‘블랙리스트 대응 영화인 행동’(가칭)은 7일 서울 종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김세훈 영화진흥위원장과 서병수 부산시장의 즉각적인 사퇴를 주장했다. 이들은 김 위원장이 블랙리스트에 오른 영화인을 지원에서 배제하려고 영화 진흥 사업을 편법으로 운영했다고 주장했다. 또 서병수 시장은 영화 ‘다이빙벨’의 상영을 반대하는 등 부산국제영화제의 독립성을 훼손했다며 사퇴를 촉구했다. 영화감독조합 부위원장인 류승완 감독은 기자회견에서 “학교에서 몇 명 왕따시키는 것도 굉장히 큰 문제인데, 블랙리스트는 국가가 특정 영화인을 왕따시키는 것”이라며 “문제를 책임져야 할 사람은 제대로 처벌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회견에는 임시 공동대표인 고영재 한국독립영화협회 대표와 안영진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 대표 등 영화계 인사들이 참석했다. 김상운 sukim@donga.com·장선희 기자}

“업신(집안 재물을 지키는 수호신)을 조사할 땐 막걸리라도 사가지고 들어가야 해요.” 김명자 안동대 명예교수(72)는 민속신앙 연구에서 가장 어려웠던 일로 ‘업신’ 현장조사를 꼽았다. 부엌을 관장하는 조왕신이나 마당을 지키는 터주 등은 눈에 쉽게 띄는 데다 종부(宗婦)들이 얘기도 잘해주지만 업신만은 달랐다. 예부터 “업신이 나가면 집안이 망한다”고 해서 창고처럼 집안 보이지 않는 곳에 업신이 숨어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쌀을 담은 항아리나 짚으로 엮은 터줏가리를 업신으로 모시면서 외부엔 철저히 그 존재를 숨겼다. 처음 보는 낯선 사람에게 자기 집의 업신이 뭔지 순순히 설명해줄 리 만무했다. 그래서 김 명예교수는 민속학에서 강조하는 라포르(Rapport·조사 대상과 정서적 친밀함을 이루는 것)를 만들려고 무던히 애썼다. 그는 “집안 며느리와 인간적으로 친해지는 게 중요하다”며 “여성의 참여를 극도로 금기시하는 유교 제의 과정도 며느리들을 통해 가까스로 연구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김 명예교수의 노고(勞苦)는 국립민속박물관이 올해로 17년째 발간하고 있는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 집약됐다. 이 사전은 우리나라 세시풍속부터 통과의례, 민간신앙, 설화, 전통예술을 망라한 대작으로 현재 5권이 발간됐으며 2024년까지 3권이 추가로 나올 예정이다. 박물관 내 전문가는 물론이고 민속학과 인류학, 국문학, 역사학, 건축학 등 전공 학자 600여 명이 사전 편찬에 동원됐다. 주로 구전으로 전승되는 민속 속성상 연구자들이 전국의 마을을 일일이 방문 조사하다 보니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한다. 강경표 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경북 울진군 후포항으로 ‘동해안 별신굿’ 장면을 촬영하러 갔다가 4일 내내 굿판에 매이기도 했다. 자료사진만 필요해 1박 2일 일정으로 내려갔는데, 굿을 주관하던 무당이 돌연 “같이 굿판에 참여해 웃고 즐겨야 사진을 사용할 자격이 있다”며 끝까지 굿판에 남아있으라고 요구한 것. 결국 연구팀 전원이 휴가를 내고 4일 내내 굿을 구경했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은 옛것에만 얽매이지 않고 현대의 풍속을 적극 반영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예를 들어 크리스마스와 밸런타인데이는 서양에서 유래된 풍속이라 연구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었지만, 역사적 연원이 깊고 현대인들의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점을 감안해 사전 본문에 수록했다. 전통 성년의례나 효 사상에 기반을 둔 성년의 날, 어버이날도 본문에 들어갔다. 천진기 국립민속박물관장은 “전통은 변하기 마련이고 민속학의 범주도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어 사전에 이를 반영했다”고 말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샤넬을 파는 한옥은 더 멋스러웠다. 얼마 전 헌법재판소 근처 북촌과 삼청동 일대 한옥을 둘러보며 이곳이 ‘핫 플레이스’로 뜬 이유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순간 오래전 개량한옥이 불편하다며 양옥으로 이사한 시골 이모가 떠올랐다. 그땐 ‘한옥=불편=낡은 것’이라는 공식이 머릿속에 박혔던 것 같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그때의 편견이 부끄러워졌으며, 하마터면 묻힐 뻔한 위대한 인물을 조명한 저자에게 감사했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 서울 북촌과 익선동, 봉익동 등지에서 한옥단지를 대규모로 건설한 부동산개발사업가이자 민족운동가인 정세권의 일대기를 다뤘다. 도시계획을 전공한 학자답게 정세권의 부동산 개발이 서울 경관과 서민들에게 끼친 영향을 깊이 있게 분석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직후 경성(서울)은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한 남촌과 조선인들이 사는 북촌으로 양분돼 있었다. 그런데 1920년대부터 일본인들의 경성 유입이 급증하자 총독부는 각종 정부기관과 관사들을 종로 일대에 짓는 방식으로 일본인의 북촌 진출을 유도했다. 부와 권력을 틀어쥔 일본인들의 북촌 진입으로 인해 조선인들은 마치 재개발 철거민처럼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 이때 사업가 정세권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소득은 낮지만 머릿수가 많은 조선인들에게 적합한 주거공간으로 소규모 한옥들로 구성된 단지를 창안한 것. 그는 몰락한 왕족이나 양반들의 대규모 저택을 사들여 여러 필지로 나눈 뒤 소규모 개량한옥을 수십 채씩 지었다. 당시 한옥은 양옥에 비해 생산비용이 적게 들어 집값을 낮출 수 있었다. 그가 위대한 것은 이윤 창출에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19세기 중후반 미국 뉴욕의 부동산개발업자들도 이민 인구 증가를 맞아 소규모 주택을 지었지만 볕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열악한 주거환경을 양산했다. 그러나 정세권은 자신이 직접 새로운 한옥단지에 살면서 문제점을 개선할 정도로 정성을 기울였다. 심지어 목돈을 들이기 어려운 서민들을 위해 ‘민간 임대주택’을 도입하기도 했다. 정세권의 노력 덕에 북촌은 일본식 적산(敵産)가옥이 아닌 한옥마을로 보존될 수 있었다. 저자는 “한옥단지에는 많은 수의 조선인이 거주할 수 있었기에 일본인 거주지역을 북촌으로 확장하는 시도를 막을 수 있었다”고 썼다. 북촌을 찾는 관광객이라면 정세권의 이름 석 자를 기억해줬으면 좋겠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임진왜란 때 만들어진 ‘삼안총(三眼銃·보물 제884호)’은 독특한 모양의 무기다. 총구멍이 세 개나 있어 한 번에 세 발의 탄환을 발사할 수 있다. 조선이 중국 명나라 군대로부터 전수받은 기술을 토대로 새로 개발한 첨단 무기다. 임진왜란은 비단 조선의 정치, 경제뿐만 아니라 무기 기술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됐던 삼안총을 이젠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실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됐다. 중앙박물관은 상설전시실인 조선실과 대한제국실을 최근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박물관 측은 “조선과 대한제국의 주요 사건을 시기순으로 보여주면서 각 전시품이 지닌 역사적 맥락을 상세히 전달하는 데 주력했다”고 밝혔다. 시대별 현안을 소개하면서 조선인들이 이에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알리는 데 방점을 뒀다는 얘기다. 구체적으로는 고려 사회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한 조선 건국 과정과 16∼17세기 전란으로 피폐해진 서민 경제의 부담을 덜기 위한 대동법(大同法) 시행, 조선 후기 상품 화폐 경제 발달, 19세기 말 대한제국의 근대화 노력 등을 조명했다. 이와 관련해 높이가 2.7m에 이르는 대형 지도인 ‘동국대지도’와 여러 책으로 이뤄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도록 대형 진열장을 설치했다. 이수경 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이 지도들은 조선 후기 상품 경제 발달에 따른 유통망 확대와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수도 한양과 충청도를 잇는 남한강 수운을 따라 사람과 물자가 드나든 양상을 보여주는 인터랙티브 영상도 선보인다. 영상에는 상업 발달뿐만 아니라 남한강 주변 명승지 유람 문화, 한양으로 조세 운송, 지방통치 체제 등 다양한 역사적 사실을 담았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지난해 2월부터 연재하고 있는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시리즈 취재차 전국의 유적을 둘러보고 있다. 그때마다 현장에서 느끼는 가장 큰 고민은 이른바 ‘사진발’이다. 고고학자를 주인공으로 발굴 현장 사진을 찍는데 “여기가 유적 맞나” 싶을 정도로 황폐한 나대지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국가사적조차 전시관은커녕 유적을 복토한 뒤 방치해 잡초만 무성한 곳이 부지기수다. 그러다 보니 촬영에 앞서 유적임을 알리는 푯말이라도 찾으려고 풀숲을 헤치는 게 일상이 됐다. 중국만 해도 뉴허량 등 웬만한 대형 유적에는 ‘노출 유구 전시장’이나 자료실 등이 잘 갖춰져 있다. 발굴로 드러난 유적을 고스란히 보존해 유적의 전모를 손쉽게 파악할 수 있다. 재작년 찾은 중국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의 츠펑(赤峰) 시 얼다오징쯔(二道井子) 유적은 주거지와 골목, 담 등 마을 유적을 거대한 철골 구조물로 통째로 씌워 보존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유적을 촬영할 때마다 고민하지 않을 날이 오기를 바란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부리부리한 눈과 덥수룩한 턱수염, 커다란 코…. 경북 경주 원성왕릉(괘릉)을 지키고 있는 무인(武人)상은 얼핏 봐도 한민족의 얼굴이 아니다. 학계 일각에선 생김새는 물론이고 머리에 두른 띠, 허리에 매단 주머니 등을 근거로 괘릉 무인상이 서역(아라비아)인을 모델로 했다고 본다. 이는 ‘경주 계림로 보검’(보물 제635호)과 더불어 신라∼아라비아의 장거리 교역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여겨졌다. 그런데 괘릉 무인상의 기원이 서역인보다 금강역사(金剛力士·불교의 수호신)상 같은 불교 조각이며, 원성왕 사후 60여 년 뒤 경문왕에 의해 조성됐다는 주장이 최근 제기됐다. 임영애 경주대 교수는 최근 발표한 ‘신라왕릉의 석인(石人)상’ 논문에서 38기의 신라왕릉 중 석인상을 갖춘 괘릉과 성덕왕릉, 헌덕왕릉, 흥덕왕릉을 분석했다. 이 가운데 석인상과 석사자, 십이지상, 화표석 등을 두루 갖춘 괘릉에서 신라왕릉 중 처음으로 무인상이 등장한다. 이와 관련해 신라 하대 석학이던 최치원이 쓴 ‘숭복사 비명(碑銘)’이 주목된다. 경문왕이 곡사를 다른 곳으로 이전하면서 숭복사로 이름을 바꾼 경위를 적은 비석이다. 괘릉은 곡사가 옮겨간 뒤 빈자리에 들어섰다. 숭복사 비명에는 ‘선대(원성왕)를 계승해 절을 중수하고 위엄으로 능역을 ‘호위’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라는 문장이 있는데, 임 교수는 호위의 구체적인 의미를 석인상 설치로 봤다. 따라서 괘릉 무인상의 조성 시기는 원성왕이 죽은 직후가 아닌 경문왕 즉위 초인 9세기 중반 이후라는 것이다. 또 원성왕 사후 소성왕, 애장왕 집권기는 사회 혼란기여서 선대 왕릉을 꾸미기가 쉽지 않았을 거라는 정황도 있다. 그렇다면 괘릉 무인상의 모티브는 무엇인가. 임 교수는 9세기 전반 서역인들의 신라 입국이 힘들었기 때문에 이들을 모델로 석인상을 만들기는 쉽지 않았을 거라고 본다. 당시 세계 제국이던 당나라가 서역인들의 활동을 대대적으로 단속했으며, 신라의 국내 상황이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괘릉 무인상의 얼굴이 경주 서악동 고분 문비(門裨)석의 금강역사상과 비슷한 게 오히려 눈길을 끈다. 무인상에서 머리에 두른 띠나 허리에 찬 둥근 주머니와 같은 복식은 서역뿐만 아니라 당대 중국 복식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신라왕릉 십이지상이 입고 있는 갑옷이 사천왕상과 흡사하고 사자상도 불교 사자상을 닮는 등 불교 조각의 광범한 영향도 간과할 수 없다. 임 교수는 “무인상은 사찰 입구에서 수호 역할을 하는 불교의 금강역사상을 모델로 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국보급 문화재로 평가받는 금동관세음보살좌상이 ‘고향’인 충남 서산시 부석사로 돌아온다. 일본 쓰시마(對馬) 섬의 한 사찰에서 도난당해 한국에 반입된 지 5년 만이다. 그동안 ‘도난 문화재’의 반환을 요구해온 일본 정부는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600여 년 만의 귀환 대전지방법원 민사12부(부장판사 문보경)는 대한불교 조계종 부석사가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관세음보살좌상 인도 청구소송에서 26일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판결의 핵심 내용은 부석사가 관세음보살좌상의 원래 소유주라는 것. 법원은 또 항소 여부에 관계없이 정부가 보관 중인 불상을 즉각 부석사로 인도하라고 주문했다. 재판부는 “그동안 진행된 변론과 현재 문화재청이 보관 중인 불상의 현장 검증 등을 통해 불상이 부석사 소유라고 넉넉히 추정할 수 있다”며 “과거 증여나 매매 등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도난이나 약탈 등의 방법으로 일본으로 운반돼 봉안돼 있었다고 보는 것이 상당하다”고 판결했다. 이어 “역사·종교적 가치를 고려할 때 정부는 불상을 원고인 부석사에 인도할 의무가 있다”며 “정부는 훼손 가능성을 주장하지만 부석사는 충분히 보관할 능력이 있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부석사 원우 스님은 “현명하고 지혜로운 판단을 내려준 재판부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며 “이번 판결이 일본에 약탈당하거나 불법 유출된 문화재 7만여 점을 환수하는 시발점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부석사는 우선 불상을 예산군 수덕사로 옮겨 보관하기로 하고 조계종과 문화재청, 수덕사, 경찰 등과 구체적인 방법을 협의할 계획이다. 14세기 초반(1330년경)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진 관세음보살좌상은 높이 50.5cm, 무게 38.6kg이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갔고 1526년 창건된 일본 나가사키(長崎) 현 쓰시마 섬의 사찰 간논지(觀音寺)에 봉안돼 있었다. 1973년에는 일본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그러나 2012년 10월 한국인 절도범들이 불상을 훔쳐 국내로 반입했고 이듬해 1월 몰래 판매하려다 경찰에 붙잡혔다.○ 미묘한 시기에… 일본 정부 “유감” 간논지와 일본 정부는 관세음보살좌상의 반환을 계속 요구했다. 일본에서 도난당한 것이 분명하다는 이유였다. 한일 정부는 불상 반환을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자 부석사 측은 반환 중지 가처분 신청을 냈고 2013년 2월 법원은 이를 받아들였다. 부석사는 왜구의 약탈에 의해 일본으로 불법 반출됐다며 정부를 상대로 인도 소송을 냈다. 반면 간논지는 “교역을 통해 쓰시마 섬에 들어온 한국 불상이 많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상세한 불상 반입 과정을 입증하지 못했다. 일각에서는 위안부 소녀상 설치에 이어 내려진 이번 판결이 양국의 갈등 상황에 부정적 파장을 더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26일 정례 브리핑에서 “일본 정부는 아직 반환이 실현되지 않은 불상이 조기에 일본으로 반환되도록 외교 루트를 통해 다양한 레벨에서 한국 정부에 요구해왔다”며 “이런 중에 그런 판결이 나온 것을 매우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신속하게 불상이 일본으로 반환될 수 있도록 한국 정부에 적절한 대응을 요구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국내 문화재계는 환영과 우려가 엇갈린 분위기다. 전문가들은 대체로 이 불상이 왜구에 의해 약탈당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그러면서도 법원의 결정으로 일본 내 우리 문화재 환수와 교류에 지장이 초래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수장고에서 불상을 감정한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는 “문화재는 제자리를 찾아가야 하는 게 원칙”이라며 “비록 법적 분쟁이 있었지만 양 사찰이 불법(佛法)에 따라 환수에 합의했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최근 일본 국립규슈박물관을 방문한 한 학자는 “이번 판결로 한일 문화재 교류, 나아가 우리가 추진해온 일본 내 문화재 환수 운동에 어려움이 많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대전=지명훈 기자 mhjee@donga.com / 도쿄=장원재 특파원 / 김상운 기자}

‘영조대왕은 세자에게 “밥 먹었느냐” 하고 물으신 뒤 세자가 대답하면 그 자리에서 귀를 씻고 그 물을 화협옹주가 있는 집의 광창(廣窓·들어올릴 수 있는 넓은 창)으로 버리셨다. 그래서 세자는 누나인 화협옹주를 만나면 웃으며 “우리는 귀를 씻으시도록 채비해드리는 남매요”라고 말했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閑中錄)에는 영조와 사도세자, 화협옹주의 묘한 가족관계가 드러나 있다. 영조가 자신이 편애한 화순옹주나 화완옹주를 만나기 전엔 늘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반면, 사도세자를 대면할 땐 귀 씻은 물을 화협옹주 처소 쪽에 버릴 정도로 노골적으로 싫어했다는 거다. 심지어 영조는 화협옹주가 한집에 살지도 못하게 했으며, 사위인 영성위까지 싫어했다고 전한다. 사도세자는 그렇다 쳐도, 유독 딸을 아낀 영조가 화협옹주를 꺼린 이유는 무얼까.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 “화협옹주는 태어날 때 또 딸인 것을 영조대왕이 서운히 여겨 용모도 빼어나고 효성도 아름다웠으나 부왕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적어 놓았다. 화협옹주는 영조와 영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다섯째 딸이다. 그런데 한중록이 전하는 영조의 심경과 사뭇 거리가 있는 기록이 최근 화협옹주 묘에서 발견됐다. 고려문화재연구원이 경기 남양주시 삼패동 화협옹주 묘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영조가 쓴 지석(誌石·죽은 사람의 인적 사항 등을 기록한 판석)이 나온 것이다. 지석엔 앞뒷면과 옆면에 걸쳐 총 394개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임금이 직접 지은 글(御製和協翁主墓誌)’임을 밝히고 있다. 부왕이 옹주를 위해 지석을 남긴 사례는 극히 드물다고 한다. 지석 내용은 먼저 간 딸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이 절절하다. 영조는 화협옹주가 죽기 이틀 전인 1752년 11월 25일 병문안을 위해 직접 옹주의 집에 행차한 일을 상세히 적고 있다. ‘내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시종들에게 명해 음식을 마련해 기다리고 문후를 위해 시종들을 내게 보냈다. 오호라. 그때 어찌 이렇게 할 수 있었던가!’ 옹주는 중병에도 아버지를 모시려고 정성을 다했다. 그러나 어쩌면 마지막이 되었을 부녀의 상봉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갑자기 의식을 잃는 바람에 영조가 “내 이제 궐에 들어가련다”라고 세 번 반복해 말했는데도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영조는 당시를 떠올리면서 “눈물을 흘리며 궁으로 돌아왔다”고 썼다. ‘다음 날 의원이 전하는 말을 들으니 옹주가 그 뒤 정신을 차리고 시종에게 “어찌 나를 깨우지 않았느냐? 편히 환궁하시라고 아뢰었어야 했는데”라고 했다 한다. 이를 듣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흘러 얼굴을 적셨다. 나를 보러 오려 한다고 들었으나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됐다.’ 생전 딸에게 모질었던 아버지의 뒤늦은 후회가 더 애달팠을까. 영조는 지석 말미에 “한 줄 써내려 갈 때마다 열 줄기 눈물이 흘러내린다. 아아, 슬프고 슬프도다”라고 덧붙였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전통문화 수호 첨병인 전국 14개 국립박물관은 설을 맞아 다채로운 전통 체험행사를 선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은 28일 설 당일 오후 열린마당에서 ‘남사당놀이’ 특별공연을 개최한다. 이날 상설전시관은 닫지만 최근 관람객 10만 명을 돌파하며 큰 관심을 끌고 있는 ‘이집트 보물전’은 관람이 가능하다. 국립김해박물관은 27, 29, 30일 사흘 동안 전통놀이 체험을 비롯해 떡메치기, 재미로 보는 새해윷점, 특선 영화상영 등 다양한 문화행사를 벌인다. 27일 열리는 ‘엽전으로 떡 사먹기’ 행사는 ‘거제, 큰물을 건너다’ 특별전 관람 시 제공하는 엽전 2냥(선착순 250명)으로 떡을 사먹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29일에는 ‘한복 장신구 노리개 만들기’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어린이들이 색칠만 하면 노리개를 완성할 수 있도록 했다. 한복을 입고 행사에 참여하는 어린이들에게는 공기놀이 세트 등 선물을 무료로 제공한다. 이날 오후 야외광장에서는 풍물놀이 한마당이 펼쳐진다. 설 연휴 사흘 동안(27, 29, 30일) 상설전시실 입구에 대형 복주머니 사진관이 마련된다. 사진 찍는 멋을 더할 수 있도록 특별 제작된 너비 1m 이상 대형 복주머니와 대형 복조리, 키 등을 내부에 꾸며놓았다. 이와 함께 새해 연하장을 보낼 수 있는 부스도 들어선다. 손으로 꾹꾹 눌러 쓴 정성어린 연하장을 보낼 수 있도록 연하장과 펜 등을 준비했다. 국립전주박물관은 설 연휴가 시작되는 27일부터 다음 달 11일까지 ‘설∼대보름맞이 작은 문화축전’을 개최한다. 29일 오후 떡국을 함께 나눠 먹는 행사와 더불어 27∼30일 한복을 입은 관람객들에게 기념품을 제공한다. 다음 달 4일에는 ‘한지 염색 체험행사’에 이어 서예가 이명순 매당서예원장이 입춘첩과 가훈, 좌우명 등을 써주는 행사를 진행한다. 다음 달 11일 정월대보름에는 ‘복조리·연 만들기 체험’을 비롯해 떡메를 직접 쳐서 떡을 만들어보는 ‘인절미 만들기 체험’과 투호, 팽이, 쌩쌩이 등 민속놀이 기구를 만들어보는 행사가 열린다. 건강과 가정 평안, 개인 소망을 비는 ‘희망 부적’을 만들거나 소원문을 새끼줄에 끼워 넣고 태우는 ‘달집태우기’도 할 수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은 28일을 제외한 설 연휴 기간 민속놀이와 떡메치기, 떡국 만들어 먹기, 뻥튀기 등 옛 음식 체험행사를 연다. 풍물놀이와 매직쇼 등 흥미로운 공연도 마련했다. 국립춘천박물관은 민속놀이 및 사물놀이 체험, 가족영화 상영 등을 준비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27∼30일 나흘 내내 ‘2017 정유년 설맞이 한마당-새벽을 여는 닭’ 행사를 연다. 전라도 임실 필봉농악과 경기도 광명농악을 시작으로 액운을 쫓는 비나리와 지신밟기, 소원성취 축원, 판굿 등이 열린다. 야외전시장 오촌댁에서는 설 차례상을 차리고 세배를 하거나, 설빔을 입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행사가 진행된다. 어린이박물관에서는 닭 그림 판화를 찍어볼 수 있다. 새해맞이 토정비결과 윷점을 쳐보는 시간도 있다. 복을 기원하는 도구를 직접 만드는 체험 프로그램도 만나볼 수 있다. 새해 소원을 담은 연을 만들어 하늘에 날리거나 복조리와 색동천 복주머니 등을 만들어 볼 수 있다. 이와 함께 어린이박물관 놀이마당에서는 전통놀이인 쌍륙이나 고누, 투호, 윷놀이 등을 해볼 수 있다. 퀴즈를 통해 설 풍속을 이해할 수 있는 ‘설맞이 어린이 탐험대’ 프로그램도 눈여겨볼 만하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이달 18일 충남 공주시 석장리 유적. 나뭇가지로 엮은 막집 뒤로 수려한 능선과 강줄기가 뻗어 있다. 멀리 강가 공터에 ‘한국 구석기 첫 발굴지’가 적힌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그렇다. 이곳은 남한 최초 구석기 유적(1964년 발굴)으로 국사 교과서와 공무원시험에 단골로 등장하는 석장리 유적이다.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시리즈 기획취지에 따른다면 석장리 발굴을 주도한 파른 손보기 선생(1922∼2010)을 인터뷰해야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이미 고인이 됐다. 그 대신 파른의 제자로 1969년(당시 연세대 3년생)부터 5년 동안 발굴에 참여한 박희현 서울시립대 명예교수와 현장을 찾았다. 48년 전을 회상하던 그가 강가 나루터를 한동안 쳐다보았다. “지금이야 번듯한 박물관까지 들어섰지만 그땐 도로조차 없어서 발굴 장비랑 식자재를 매일 배로 실어 날랐어요.”○ 3만 년 전 구석기 집자리 발굴 1970년 4월 석장리 발굴현장 1지구 51번 구덩이. 삽으로 흙을 파내려 가던 연세대 박물관 발굴팀이 갑자기 긴장했다. 주변 흙과 색깔이 다른 토층이 발견된 것. 변색된 흙은 범상치 않은 동그란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전형적인 기둥자리 흔적이었다. 현장을 지키던 파른의 지휘 아래 박희현 등 조사원들이 달라붙어 주변을 파자 총 5개의 기둥자리가 드러났다. 불을 뗀 자리도 같이 나왔다. 남한에서 구석기시대 집자리(막집)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막집에 살던 구석기인들이 사용한 긁개와 밀개, 새기개 등도 한꺼번에 발견됐다. 북한에서는 이보다 1년 앞서 굴포리 유적에서 구석기 집자리가 발견됐다. 집자리는 수렵 이동생활을 영위한 구석기인들이 머문 공간이라는 점에서 단순히 석기만 발견되는 것보다 의미가 크다. 집자리 위치와 내부 유물의 출토 양상을 통해 구석기인들의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석장리 1호 집자리 안에서 발견된 오리나무 재질 ‘숯 조각(목탄·木炭)’이 특히 중요했다. 파른은 국내 고고학계에서 처음으로 목탄에 대한 방사성탄소연대측정을 실시했다. 한국원자력연구소 측정 결과, 후기구석기에 해당하는 ‘3만690년 전’ 유물로 나타났다. 이로써 1960년대 석장리가 구석기 유적이 맞느냐를 놓고 벌어진 논란은 일단락됐다. 앞서 석장리 유적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고고학 박사과정을 밟던 중인 1962∼1963년 이곳을 답사한 앨버트 모어 부부였다. 이들은 마침 홍수로 무너진 금강 주변토층에서 뗀석기를 여럿 발견할 수 있었다. 당시 연세대 방문교수였던 앨버트 모어는 1964년 봄 파른과 함께 석장리를 답사했다.○ 식민사관 극복한 ‘한국 고고학 선구자’ “일본인의 식민사관에 의한 선사(先史) 편년은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연세춘추 1964년 12월 7일자 기고문) 파른은 1964년 석장리 1차 발굴을 마친 직후 연세대 학보에 실은 기고문에서 식민사학 극복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일제강점기 대학교육을 받은 파른은 민족의식이 강한 역사학자였다. ‘한반도엔 구석기시대가 없다’는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 등 일본 학자들의 주장에 그는 동의할 수 없었다. 사실 이미 1934년 함북 종성군 동관진 유적에서 구석기 유물(흑요석 석기, 동물 뼈)이 발견돼 1941년 나오라 노부오(直良信夫)가 논문까지 발표했지만, 일본 학계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의 선사시대 역사 왜곡은 비단 1930, 40년대에만 그치지 않았다. 2000년 전모가 드러난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의 구석기 유물 조작사건이 대표적이다. 후지무라는 1981년 미야기(宮城) 현에서 4만 년 전 구석기 유물을 발굴했다고 발표했지만 거짓으로 밝혀졌다. 일본식 학술용어에서 벗어나 뗀석기 용어들을 한글화한 것도 파른의 공이다. “발굴 기간 내내 한시도 자리를 비우지 않고 조사에 몰두할 정도로 열정이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1974년 석장리 발굴에 참여한 한창균 연세대 교수가 기억하는 파른이다. 파른은 본래 조선사를 전공했지만 석장리와 인연을 맺고 나서 선사 고고학자로 거듭났다. 영어와 일본어, 프랑스어에 능통했던 파른은 초인적인 노력으로 해외 고고학 원서들을 섭렵했다. 목탄 수종(樹種) 분석과 꽃가루 분석, 토양 산도 측정, 방사성탄소연대측정 등 다양한 자연과학 분석을 국내 발굴 현장에 최초로 적용한 것도 그의 중요한 업적이다.●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공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경북 경주 월성과 황성동 제철유적, 신안 해저선 등 굵직한 고고 발굴 자료를 모은 전시들이 올해 국립박물관에서 잇달아 열린다. 이영훈 국립중앙박물관장은 23일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쇠, 철(鐵), 강(鋼)―철의 문화사’ 특별전을 비롯해 전국 14개 국립박물관의 올해 주요 전시 계획을 발표했다. 중앙박물관에서 올 9∼11월 열리는 ‘쇠 특별전’은 경주 황성동 제철유적 발굴품과 가야시대 쇠 갑옷 등을 통해 철기시대가 우리 문명에 끼친 광범위한 영향을 조명한다. 2014년 말부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발굴 중인 경주 월성 출토 유물은 올 6, 7월 국립경주박물관의 ‘경주 월성 발굴 성과’ 특별전에서 선보인다. 지난해 중앙박물관의 신안 해저선 특별전이 독특한 유물 전시 기법으로 화제를 모은 가운데 신안 해저선 유물을 따로 모은 상설전시실이 3월 말 국립광주박물관에 개설된다. 중앙박물관의 주요 해외 유물 특별전은 5∼8월 ‘아라비아의 길―사우디아라비아의 역사 문화’와 5∼8월 ‘프랑스 근현대 복식, 단추로 풀다’, 9∼11월 ‘왕이 사랑한 보물―독일 드레스덴 박물관 명품전’, 올 12월∼내년 4월 ‘프랑스 미술의 거장들, 푸생에서 마티스까지―예르미타시 박물관 명품전’이 계획돼 있다. 이 중 프랑스 근현대 복식전을 지난해 김영나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퇴진으로 이어진 ‘프랑스 장식미술전’과 관련짓는 시각에 대해 이 관장은 “전시 주체(프랑스 장식예술박물관)만 같을 뿐 지난해 무산된 프랑스 장식미술전과 무관하다”고 말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이 여자랑 결혼해야 할까요?” “제게 맞는 차를 추천해 주세요.” “멀리 이사 가야 할까요?” 명문대 교수가 이런 종류의 질문을 받고 신문 지면을 할애해 성실히 응답한다면 어떨까. 지면 낭비라는 비판 혹은 “참 별난 교수 다 보겠네”라는 반응에 맞닥뜨리기 십상일 거다. 하지만 그가 행동경제학을 전공한 저명 심리학자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이 책은 독자들의 온갖 고민을 행동경제학 관점에서 해답을 제시한 미국 월스트리트저널 칼럼을 엮은 것이다. 그가 사람들의 일상적 ‘결정 장애’에 관심을 기울인 건 행동경제학이 전제로 하고 있는 의사결정 과정에서의 ‘비합리성’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결혼 대상을 고르고 차를 선택하는 거나 국가 의사결정 과정 모두 합리적으로 이뤄지지 않기는 매한가지라는 것이다. 이성에 앞서 인간 본연의 각종 심리적 기호나 편견이 먼저 개입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효율성을 따지는 한 직장인의 질문과 저자의 재치 있는 답변이 눈길을 끈다. 그 직장인의 궁금증은 왜 동료들이 사무용 소프트웨어인 엑셀의 매크로 기능이 실행될 때 ‘그래프 만들기’ 등 작업 과정을 일일이 보여주는 걸 좋아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작업 과정을 생략하고 모래시계 아이콘만 띄우면 매크로 작업이 3배나 빨라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사람들이 마냥 기다리는 걸 시간낭비로 생각해 싫어한다는 점과 눈에 보이는 걸 더 잘 믿는 성향이 있음을 지적한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당신이 그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수시로 보여주라”고 위트 있는 조언을 덧붙였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국보 제102호 ‘홍법국사(弘法國師) 실상탑(實相塔)’의 상륜(相輪·탑 꼭대기 장식)이 사라진 지 반세기 만에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최근 발견됐다. 독특한 모양의 동그란 몸돌(탑신석)로 유명한 고려시대 걸작의 완전체를 오랜 세월이 지나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앞서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 현묘탑’(국보 제101호) 사자상도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발견된 바 있어 미등록 문화재들을 철저히 조사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지난해 수장고 내 미등록 석조물 조사 과정에서 세로로 반파(半破)된 홍법국사탑 상륜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박물관에 따르면 이 상륜은 1961∼1967년의 어느 시점에 탑에서 분리돼 별도로 보관된 것으로 조사됐다. 일제강점기에 세로로 쪼개져 고정에 어려움을 겪자 1960년대에 분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 홍법국사탑을 촬영한 여러 사진을 비교 조사하는 과정에서 확인됐다. 상륜이 별도 수납된 뒤 보관기록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50년 이상 잊힌 채 수장고에 방치됐던 걸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지광국사탑 사자상도 한동안 분실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일제강점기 촬영 사진과 비교하는 과정에서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본래 충북 충주 정토사 터에 세워진 홍법국사탑은 일제강점기 충주군청을 거쳐 1915년 경복궁 경내로 옮겨졌다. 조선총독부가 그해 9, 10월 경복궁에서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면서 탑을 이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홍법국사 탑은 한 세트인 탑비(塔碑·보물 제359호)와 함께 보존처리를 마친 뒤 지난해 6월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석조물정원에 다시 건립됐다. 지난해 재건립 당시에는 상륜이 포함되지 않아 옥개석까지만 복원 조립된 상태다. 수장고에 50년 넘게 잠들어 있던 상륜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게 된 건 다양한 과학조사 덕분이었다. 박물관은 상륜을 3차원(3D) 스캐너로 촬영한 뒤 여기서 얻어진 이미지를 1918년경 촬영된 홍법국사탑 사진 위에 올려놓고 형태와 각도, 크기 등을 정밀 비교했다. 그 결과 3D 이미지와 1918년 사진 속 상륜의 이미지가 정확히 일치했다. 이 밖에 전자현미경과 편광현미경, X선 회절분석, 미세자기 분석 등을 통해 탑과 상륜이 같은 암석성분(결정질 석회암)임을 최종 확인했다. 박물관은 이번 과학 분석을 토대로 반파된 상륜을 온전히 복원해 탑에 붙이는 방안을 추진할 예정이다. 다행히 상륜이 가로가 아닌 세로 방향으로 쪼개져 원형을 복원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박물관 관계자는 “문화재위원회의 현상변경 승인을 거쳐 연내 복원을 마칠 계획”이라고 말했다. :: 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 실상탑 ::신라 말∼고려 초에 활동한 고승(高僧) 홍법국사의 사리를 안치한 승탑으로 고려 현종 8년(1017년)에 세워졌다. 팔각형의 지대석 위에 공 모양의 몸돌을 얹은 독특한 외관을 자랑한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대구 월성동 구석기 유적에서 발견된 흑요석(사진) 산지(産地)가 ‘백두산’으로 조사됐다. 약 2만 년 전 후기 구석기시대 백두산에서 700km나 떨어진 대구까지 물품이 이동한 사실이 처음 밝혀진 것이다. 구석기인들의 이동 범위가 현대인들의 상상보다 훨씬 넓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국립대구박물관은 최근 발간한 ‘대구 월성동 유적 흑요석 원산지 및 쓴 자국 분석’ 학술서에서 월성동 출토 흑요석 100점에 대한 산지 분석 결과를 소개했다. 2006년 발굴된 월성동 유적에서는 후기 구석기와 청동기, 통일신라시대 유구 등이 한꺼번에 나왔다. 박물관은 김종찬 전 서울대 교수(물리학)에게 ‘레이저 플라스마 질량분석(LA-ICP-MS)’을 조사 의뢰한 결과, 100점 중 97점이 ‘백두산계열 1형’인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백두산에서 생성된 흑요석 유형은 총 3가지가 있는데, 국내 구석기 유적에서는 주로 1형과 2형이 발견된다. 국내 구석기 유적에서 흑요석이 발견된 곳은 약 30곳. 이 중 월성동 유적에서는 한반도 남부 지역에 가장 많은 흑요석이 출토됐다. 발견 직후 흑요석 조사가 이뤄졌지만 국가 귀속 문화재에 대해 파괴분석을 할 수 없어 산지 규명에 실패했다. 그러나 레이저를 이용해 약 50μm 지름의 미세한 손상만 가하는 첨단 분석 기법이 도입돼 산지 분석이 가능해졌다. 이와 관련해 월성동 흑요석들이 원석 형태가 아닌 반(半)가공 형태로 들어왔을 걸로 추정돼 주목된다. 원석이 갖고 있는 특유의 자연면(自然面)이 없고, 인위적으로 다듬은 흔적만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적 내 석기 제작지 4곳에서 흑요석 부스러기들도 발견됐다. 백두산 흑요석은 경기도 일대에서도 발견된 적이 있다. 이에 따라 흑요석 원석이 백두산에서 채취된 뒤 가공을 거쳐 한반도 중부지방을 통해 대구까지 흘러들어왔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후기 구석기시대 한반도 남·북부를 잇는 교역 네트워크가 존재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장용준 대구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구석기인들이 사냥감을 쫓아 이동한 것은 분명하지만 어떤 경로를 거쳐 어떤 물건을 유통시켰는지는 아직 미스터리”라며 “이번에 영남 지역에서 최초로 흑요석 산지가 백두산으로 규명된 것은 적지 않은 의미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책에는 김경진 프랑스 페르피냥대 교수가 흑요석을 갖고 직접 용도를 실험한 결과도 수록됐다. 이에 따르면 월성동 백두산 흑요석은 주로 동물 뼈 등을 다듬는 ‘새기개’나 사냥용 ‘찌르개’로 쓰였을 걸로 추정된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책, 그림 등 종이로 된 국가지정문화재 상당수가 보존 상태가 좋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연구보고 논문집인 ‘문화재’ 최근호에서 “2014∼2015년 서적, 회화 등 종이류 문화재 53건의 상태와 보관환경을 조사한 결과 이 중 30건(56.6%)은 보존처리가 필요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수량, 크기 등 기본적인 서지정보가 불명확한 것들도 13건(24.5%)인 것으로 조사됐다. 상태가 양호해 보존처리를 하지 않아도 되는 문화재는 18건(34.0%)에 불과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가지정문화재는 총 4482건으로 이 중 종이류는 20%(963건)가량 된다. 이번 보고서는 이들 중 무작위로 53건만 추려 조사한 것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조선 전기 문신 서거정이 쓴 목판본으로 조선시대 문학비평사 연구의 핵심 자료인 ‘동인시화’(보물 제1712호)는 심하게 닳아 있었다. 고려시대 성리학자 박상충이 진주목사로 부임한 이인민에게 1370년 선물한 ‘근사록’(보물 제262호)은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근사록은 희귀한 현존 고려본인 데다 조선 초기 성리학사 연구에서도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조선 전기 학자 권주의 종손가에 전해 내려오는 ‘권주 종가 고문서’(보물 제549호)는 갈색으로 변색이 일어났다. ‘권주 종가 문적’(보물 제1002호)은 보존처리 미숙으로 추가 손상 판정을 받았다. ‘광산김씨 예안파 종가 고문서’(보물 제1018호)는 명칭과 연대, 수량이 잘못 표기된 사실이 확인됐다. ‘류성룡 종가 문적’(보물 제160호)도 국가문화재 지정 당시 일부 문서가 누락된 사실이 드러났다. 연구소는 이번에 문제점이 드러난 문화재들을 대상으로 안료와 재질, 구조 등에 대한 정밀 조사에 착수할 예정이다. 이를 토대로 ‘문화유산 보존관리 데이터베이스(DB)’를 구축하는 방안을 검토할 계획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종이 문화재는 재질 특성상 온도나 습도, 물리적 힘 등에 취약하다”며 “보존 상태가 좋지 않은 문화재를 소장한 개인들에게 항온, 항습 기능이 갖춰진 곳에 기탁할 것을 권고했다”고 설명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