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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배우 고(故) 신성일은 생의 마지막 시간을 전남 화순의 한 요양병원에서 보냈다. 지난해 10월 중순 인터뷰를 위해 찾았는데, 마치 경치 좋은 곳에 있는 깔끔한 콘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 여기서 그는 매주 한 번 ‘신성일 영화제’를 열고 자신이 출연한 작품들을 지인들과 함께 감상했다. 경북 영천에 ‘성일가’란 이름의 한옥을 짓고 만년의 거처로 삼았던 은막의 대스타. 그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보름여 후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죽음을 앞둔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생애 말기로 접어든 어르신이나 환자가 자기가 살던 집에서 임종을 맞는 것이 사치일 수도 있는 시대가 오고 있다.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 중 절반 이상은 요양시설을 찾는다. 지난해 사망한 65세 이상 노인 중 요양원, 요양병원 등 요양시설 이용자는 13만여 명에 이른다. 이들은 1인당 평균 707일(약 1년 11개월)을 시설에서 보낸 것으로 나타났다. 아무리 좋은 요양시설이라 해도 내 집만큼 편하겠는가. 의료기관에서 말년을 보내는 기간이 길수록 행복한 임종과는 거리가 멀기 마련이다. 국립암센터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 60.2%는 집에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하기를 원하지만, 2017년 국내 사망자 중 14.4%만 집에서 숨졌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병원 임종을 맞고 있는 셈이다. ▷1991년에는 가정 사망이 75%였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부모님도 상태가 위중해지면 집으로 모셔와 평소 거처하던 방에서 삶의 끝자락을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이 한 세대 만에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이유는 복합적이다. 쇠약한 부모님이나 환자를 가정에서 직접 돌보는 데는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다. 가정 간호와 임종을 돕는 사회적 시스템이 많이 부족한 상황에서 가족이 환자의 통증 관리나 심리적 문제에 의연하게 대처하기란 쉽지 않다. 누군가 생업을 포기하거나 개인 간병인을 둬야 할 경우라면 경제적 어려움까지 가중된다. ▷살던 곳에서 여생을 마치고 싶은 것은 대부분 노인들의 간절한 바람이다. 부모 된 마음으로 자녀에게 부담 주기 싫어 마지못해 요양시설에 들어가는 경우도 많다. 자식들 역시 어쩔 수 없으니 낯선 곳에서 부모님과 마지막 작별을 하는 것을 받아들일 뿐이다. 병원 사망이 일상화된 상황에서 임종은 삶의 한 단계가 아니라 의료 문제로 변질됐다. 대개의 한국인이 의료기관에서 생을 마감하는 사회. 어떻게 하면 죽음이 성큼 다가왔을 때 편안한 환경에서 소중한 사람들과 작별할 수 있을지에 대한 화두를 우리 모두에게 던지고 있다.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 백범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매일 어두워지면 집 뒤에 있는 쓰레기통을 뒤졌다. 쓰레기통 안에는 근처 채소상이 버린 배춧잎이 많았는데 그중 먹을 만한 걸 골라 씻고 소금에 절였다. 곽 여사는 이걸 끓여 죽과 찬거리를 만들어 아들과 임정 요인들의 뒷바라지를 했다. 임정 요인들은 동전 한 닢으로 시장에서 국수 찌꺼기를 받아와 먹기도 했는데 그나마도 거르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체격이 컸던 백범은 평소에는 식사량이 무척 많았다고 한다. 백범일지에 서대문형무소 투옥 시절의 고통을 적었는데 첫째는 악형, 두 번째는 배고픔, 회유와 우대가 그 다음이었다고 했다. 임정 시절에는 오후 늦게 이 집 저 집 동포들의 집을 다니며 한 술씩 얻어먹는 일이 많았는데, 임정이 재정적으로 극도로 궁핍한 데다 조금이라도 돈이 생기면 폭탄이나 무기를 장만하는 데 먼저 썼기 때문이다. 이런 백범이 자주 먹었던 음식이 쭝쯔(粽子)였다. ▷쭝쯔는 찹쌀이나 쌀가루를 대나무 잎이나 갈잎으로 싸 실로 묶은 뒤 쪄먹는 중국 음식이다. 지역에 따라 안에 돼지고기와 팥앙금, 대추를 넣기도 하는데 중국에서는 단옷날 쭝쯔를 먹는 풍습이 있다. 전국시대 초나라의 재상이자 시인인 굴원이 간신들의 참소를 받아 이날 자결한 것을 기리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단옷날 외에 평소에도 우리의 김밥처럼 시간이 없을 때나 여행 중 휴게소 등에서 빨리 먹기 위해 애용한다. 늘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야 했던 백범에게는 간단하면서도 지니고 다니기 좋은 쭝쯔는 최적의 ‘독립요리’인 셈이다. ▷임정의 충칭 시절(1940∼1945년)에는 ‘납작 두부볶음’도 자주 식탁에 올랐다. 식사 등 임정 안살림을 맡았던 오건해 선생은 중국어를 하지 못해 재료를 사러 시장에 나가는 게 너무 눈에 띄고 위험한 일이어서 직접 콩을 재배해 두부를 간장에 조린 이 음식을 만들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그제 독립유공자 및 유족을 초청해 함께한 오찬에도 쭝쯔와 오건해 선생이 만들었다는 ‘훙사오러우(紅燒肉·간장으로 조린 돼지고기)’가 등장했다. ▷올해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최근 종로구 익선동에는 ‘독닙료리집’이라는 음식점이 한 달간 문을 열었다가 닫았다. 독립운동가들이 먹던 음식 10가지를 제공했는데 한 달간 6000여 명이 다녀가는 성황을 이뤘다. 맛집이나 별미로 생각하고 찾아온 젊은이들은 음식에 담긴 사연을 듣고 숙연해했다고 한다. 대수롭지 않게 보였던 음식들에 깃들어 있는, 우리의 오늘을 있게 해준 고귀한 헌신과 희생의 역사에 고개가 숙여진다.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1960년대 예일대 심리학과 교수인 스탠리 밀그램은 학생이 문제를 틀릴 때마다 교사가 전기충격을 가하는 실험을 했다. 전기충격기는 가짜였고 학생도 실제론 배우였지만 교사 역할에 참여한 일반인들은 이를 몰랐다. 연구자의 지시에 따라 교사가 버튼을 누를 때마다 학생 역할을 맡은 배우는 비명을 질렀다. 밀그램은 학생이 죽을 수도 있는 최대치(450V)까지 누를 참가자는 0.1% 정도에 불과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실제는 65%가 눌렀다. 이들은 ‘모든 책임은 연구자가 진다. 당신은 책임지지 않는다’는 말에 무감각하게 따랐다. ▷최근 미국 국무부 외교관으로 일하던 척 박(박영철·35)이 워싱턴포스트에 트럼프 행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올리고 사임했다. 뉴욕 출신의 한인 2세인 그는 “공짜 주택이나 퇴직연금 같은 직업적인 특전 때문에 한때는 너무나 분명했던 이상에서 멀어지고 양심을 속였다”고 토로했다. 멕시코 영사관 행사에서 미국의 우정과 개방성에 대해 말하는 그 시간에 미국에선 수천 명의 불법체류 청년들이 쫓겨나고 있고, 미국에서는 흑인에 대한 경찰의 과잉 대응이 논란이 될 때 리스본 대사관에서 흑인 역사 주간을 열어 축하해야 하는 모순적인 상황을 견딜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지난 3년간 이런 행태에 반발하는 어떤 반(反)트럼프 움직임도 내부에서 보지 못했다”며 이런 미국을 ‘자기만족적 국가(Complacent State)’라고 지칭했다. ▷뉴욕타임스는 인권 탄압 비판을 받아온 불법 이주자 부모와 아이의 격리 수용이 최근 다시 벌어지고 있다면서 이런 ‘비열한 행위’는 이를 돕는 공무원들 때문에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물론 모든 공무원이 그런 건 아니다. 돈 맥갠 백악관 법률고문은 로버트 뮬러 특검을 해임하라는 트럼프 지시에 반발하다 지난해 사임했다. 4월에는 키어스천 닐슨 국토안보장관이 미-멕시코 국경지대 통관항 및 검문소 폐쇄에 반대했지만 트럼프는 받아들이지 않고 해임으로 답했다. 이런 일부 고위직의 저항에 이어 실무자급에서 처음으로 척 박이 나선 것이다. ▷조직의 일원으로서 일상의 지시를 수행했지만, 결과가 양심에 배치되는 일이 될 때 많은 이들이 고민을 한다. 하지만 대개는 지시를 이행하는 것일 뿐이라며 자기 합리화를 한다. 밀그램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아무리 정의로운 시민들이라 해도, 옳지 않은 권위의 지배를 받는다면 그들 또한 야만성과 비인간적인 태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미국이 과연 과거처럼 자유 공정 관용의 가치를 바로 세울 수 있을까.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임금 및 단체협상을 놓고 벌이는 파업은 우리에게는 흔한 모습이다. 올해도 여름휴가가 끝나는 이달 중순부터 현대·기아자동차, 한국GM 등 완성차 노동조합은 물론이고 현대중공업, 인천제철 등 조선·제철 분야에서 줄줄이 파업을 예고하고 있다. 파업은 노조의 가장 큰 무기지만, 과연 얼마만큼 실익이 있는 걸까. 이정묵 SK이노베이션 노조위원장(57)은 “이제는 노조도 조합운동과 노동운동을 구별해야 한다”고 말했다. SK이노베이션 노조는 올 3월 30분 만에 임금협약을, 지난달 29일에는 교섭 3주 만에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초면에 실례인데 혹시 어용 노조 아닌가. “하하하, 어용인지 아닌지를 내가 말해야 소용없고…. 개인적으로는 어용이니 강성이니 하는 이분법적 흑백논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노조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1997년에 해고됐는데 해고되는 어용도 있을까?” (왜 해고된 건가?) “당시 노조 운영을 위원장이 거의 독단적으로 했다. 지금은 노사가 잠정 합의를 하면 대의원 대회에 보고하고 찬반투표를 통해 결정하지만, 당시에는 위원장이 직인을 찍으면 끝이었다. 조합원의 공감대가 형성되기 전인데도 일단 결정했으니 따르라는 식이다. 그래서 노조 바로 세우기 운동을 했는데 회사가 울산에서 서울로 근무지 이동 발령을 냈다.” ―노조 바로 세우기는 회사로서는 좋은 일인데 왜 서울로 발령을 낸 건가. “노조 집행부 불신임 운동을 했는데 주동자인 나를 솎아내야 조직이 와해되니까…. 기존 노조는 물론이고 당시에는 회사도 나를 불편해했던 것 같다. 부당 전직이라고 생각해 울산으로 출근투쟁을 했는데 무단결근으로 해고됐다.” 그는 입사 전에는 노동운동을 하지 않았다. ―위원장은 어떻게 당선된 건가. 기존 노조나 사측에서는 달갑지 않았을 텐데…. “법적 투쟁을 거쳐 2001년 복직한 뒤 2008년 출마해 당선됐다. 그런데 그 6, 7년 사이에 분위기가 좀 바뀌었다. 강성 투쟁이 이익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거다.” (노사 대립이 심했나?) “무조건 대립과 충돌을 통해 얻으려 했으니까…. 처음에는 좀 먹혔는데 몇 년 하다 보니 회사도 내성이 생겨 잘 안 통했다. 그러다 보니 충돌이 더 자주 일어났고 결국 중재위원회까지 가서 직권 중재를 받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고도 결과는 조금씩 양보한 것보다 못했고…. 머리띠 매고 목소리만 크다고 장땡이 아니라는 걸 안 거다.” ―중재위는 조정이 결렬되면 정당한 파업권을 얻기 위해 가는 곳 아닌가. SK이노베이션은 필수공익사업장이라 당시에는 파업권도 없었는데 왜 간 건가. “내친김이니까 기 싸움으로 간 거지…. 다른 회사는 중재위 조정이 안 되면 파업을 할 수 있지만 우리는 그게 안 되니까 직권 중재를 받으면 그걸로 끝이다. 중재를 받으면 조금 더 얻을 거라는 기대도 있었고….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2008년 이전까지 필수공익사업장은 파업권이 없는 대신 국가가 직권중재를 통해 분규를 해결했다. 2008년 직권중재 제도가 폐지되고 파업권이 보장됐으나 대신 필수인력을 남겨두도록 했다. ―2017년부터 임금 인상을 물가 인상만큼만 하고 있는데 이유가 뭔가. “2008년 위원장을 할 때도 얘기했는데 그때는 깊게 논의하지 못했다. 2016년 출마하면서 공약으로 제시했는데… 고도성장기에는 몇십 %씩 임금이 올랐지만 성장이 정체되면서 임금인상률도 낮아지고 있다. 한계치에 온 건데… 더 이상 싸워서 임금을 계속 올릴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또 좋을 땐 올리고 안 좋을 땐 동결하는 식보다 적지만 꾸준히 오르는 임금 안정성이 더 중요하다고 봤다. 그래야 생활계획을 안정적으로 세울 수 있으니까. 그래서 우리 회사에 맞는 적정 임금인상률이 얼마인지 고민했고 지난 10년간 싸워서 얻어 낸 결과를 분석했더니 연평균 2.02% 인상이었다.” ―10년간 투쟁했는데 고작 2.02% 인상이었다는 건가. “더 허망한 건 같은 10년간 연평균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2.34%였다는 점이다. 2015년에는 적자 때문에 임금이 동결됐다. 2016년에는 3∼4% 인상을 요구하며 그렇게 싸웠지만 결국 중재위에서 1.5%로 결정됐다. 처음부터 물가상승률만큼만 인상안을 제시했다면 노조 내부에서 난리가 났겠지만 사실은 싸우지도 않고 더 많이 받을 수 있었던 거다.” (다른 수치가 높은 경제지표를 제시했으면 좀 더 많이 받을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수치가 높은 경제지표는 많다. 하지만 서로 간의 차이가 클수록 협상이 안 되지 않나.” ※SK이노베이션의 임금인상률은 2017년 1%, 2018년 1.9%, 2019년 1.5% 등 전년도 소비자물가 상승률만큼만 올랐다. ―회사가 흔쾌히 받아들였나. “회사로서는 적자가 나도 올려줘야 하는 부담이 생긴다. 실적이 안 좋으면 기업이 가장 먼저 요구하는 게 임금 동결 아닌가. 적자 때는 중재위에 가도 노조가 이길 가능성이 별로 없다. 대부분 동결된다. 하지만 취지에 공감해 합의를 했다.” ―회사가 3년 연속 3조 원대의 영업이익을 냈다. 합의는 했지만 그래도 회사 실적이 좋은데 임금 인상이 너무 적은 것 아니냐는 불만은 없나. “물가와 임금을 연동하는 데 반대했던 사람들 중에는 불만인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대다수 조합원은 해마다 75∼90% 이상 찬성으로 임금인상률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실적이 좋아졌다고 더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없다. 실적이 좋으면 성과급으로 받으면 된다. 회사도 그걸 인정했고 그래서 원래 1월에만 나오던 성과급을 2017년 단협에서 7월에도 주는 걸로 바꿔 지금 두 번 받았다. 기본임금은 안정적으로 가고 실적에는 성과로 배려하는 것, 이게 맞는 방향 아닌가.” ―최근 단협을 3주 만에 체결했다. 단협은 종류가 많아 수개월에서 1년 이상 걸리는 곳도 많은데 별다른 쟁점이 없었나. “정년 연장(60→62세)과 통상임금이 가장 컸는데 둘 다 나중에 얘기하기로 했다. 정년 연장은 개별 회사가 먼저 치고 나가기가 부담스럽고, 통상임금은 소송 중이라 지금 합의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노조가 이 둘을 양보하는 대신에 회사가 다른 부분을 받아줘 빨리 끝났다.” (어떤 걸 얻었나.) “가장 큰 게… 우리 회사는 만 60세 되는 해 태어난 달에 정년퇴직을 한다. 그런데 매년 1월 받는 성과급은 그 전해에 12개월 만근을 해야만 받았다. 그걸 정년퇴직한 달까지 일한 성과급을 받을 수 있도록 바꿨다.” ―조합원들이 기부금을 걷어 협력사 직원들에게 보너스를 준다던데…. “어느 회사나 원청과 하청 직원 간에 보이지 않는 갈등이 있다. 우리가 작은 정성이라도 보여줌으로써 조금이나마 갈등을 줄이고 싶었다. 큰 금액은 아니지만 협력업체 직원들을 우리의 동료로 생각하고 있다는 마음의 표시다. 또 우리만 잘 먹고 잘살면 되는 시대도 지났다. 그래서 조합원들에게 우리도 좋은 일 좀 하자, 그리고 자긍심을 느끼자며 제안했다. 자발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이 매달 기본급의 1%를 내고 있다. 옛날에는 노동자를 속된 용어로 폄훼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다 고등교육을 받고 전문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다. 노동자도, 노조도 생각을 바꿔야 하고 사회적 역할을 해야 한다.” ―자발적이라고는 하지만 올해 임금인상이 1.5%였는데 1%를 기부한다는 건가. “이해가 안 갈 거다. 그런데도 조합원 대다수가 찬성했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기부를 하면 기업의 가치가 좋아지고, 회사도 노조에 더 마음을 열 거라고 생각했다. 취지가 좋다 보니 회사도 동참해서 조합원들이 낸 금액만큼을 매칭 방식으로 보태고 있다. 절반은 불우이웃 등 소외계층을 돕고, 절반은 협력업체 직원들에게 매년 1월 보너스로 전달한다. 올해도 60여 개사 4200여 명에게 총 23억6000만 원을 지급했다. 1인당 50만 원 정도다.” ―노동운동과 노조운동이 다르다고 했는데…. “누군가는 나를 보고 ‘저게 무슨 노동운동이야’라고 할 수 있지만…, 조합운동과 노동운동은 좀 다르다고 생각한다. 조합운동은 회사 안에서 조합원들의 권익을 향상시키고, 억압과 탄압을 막아주는 거다. 최대한 협상을 하다가 끝내 안 됐을 때는 노동운동으로 전환해서 싸울 수 있겠지만 시작부터 너희는 적이야 하는 식으로 싸우기만 하면 되나. 우리가 그러면 사측도 우리를 그렇게 볼 텐데 그럼 보따리가 안 풀린다. 그 구별을 하자는 거다.” ―노동 운동가들 사이에서는 강하게 투쟁하지 않으면 어용으로 매도되는 분위기가 있지 않나. “그래서 주변에 이런 얘기를 자주 하는데… 시대 변화에 맞는 노동운동을 개발하는 게 결코 어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그런 노력보다 수십 년간 해오던 대로 협상이 잘 안 되면 머리띠 매고, 그래도 안 되면 관성적으로 파업했다. 사실 가장 편한 방식인데…. 투쟁도 대중이 인정해줘야 하는데 그런 방식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명분과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방식을 개발하고 스스로 달라져야 한다.”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히스패닉이 내가 사랑하는 텍사스주 정부와 지방정부를 장악할 것이다.’ 3일 미국 텍사스주 엘패소의 한 대형 쇼핑몰에서 총기 난사로 20명을 숨지게 한 백인 남성 패트릭 크루시어스(21)는 범행 전 이런 내용의 선언문을 올렸다. 히스패닉 때문에 텍사스가 민주당 텃밭이 될 것이며, 자신의 공격은 ‘히스패닉의 텍사스 침공에 대한 대응’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대대적 교체(The Great Replacement)’를 언급했다. ▷‘대대적 교체’는 2011년 프랑스의 작가 르노 카뮈(73)가 쓴 책(Le Grand Remplacement)에서 나왔다. 기존 토착 인구가 이주민에 의해 교체되면서 발생하는 인종 소멸 공포를 담았는데, 21세기 서구의 반(反)이민·분리주의 정서에 불을 붙인 것은 물론 유럽의 극우정치인들에게 사상적 기반을 제시했다. 3월 1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이슬람사원 테러 사건의 범인도 범행 전 같은 제목의 선언문을 올렸다. 그는 ‘출생률 탓’이라고 강조하며 “몇백만 명이 국경을 넘어와 백인을 대체한다”고 했다. 2017년 8월 미국 버지니아 샬러츠빌에서 유혈 참사를 일으킨 백인우월주의자들은 “너희는 우리를 대체할 수 없다(You will not replace us)”고 외쳤다. ▷크루시어스의 트위터에는 멕시코 국경 장벽 건설 등 트럼프의 정책을 칭송하는 글이 많았다고 한다. 트럼프는 그의 테러를 비난했지만, 최근 실제 언행은 달랐다. 트럼프는 유색인종 출신 민주당 여성 초선의원 4명에게 “원래의 나라로 돌아가라”고 했고, 흑인 인권운동가인 알 샤프턴 목사에 대해 “사기꾼이고 백인과 경찰을 싫어한다”고 공격했다. ‘도널드 트럼프라는 위험한 사례’의 대표 저자인 밴디 리 예일대 의과대학원 교수는 트럼프 취임 후 미국에서 증오범죄와 학교폭력이 늘고, 백인우월주의자들의 테러는 두 배가량 증가했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대통령이 이렇게 해도 된다고 했다”며 폭력을 가한다는 것이다. ▷하버드대 의대 교수를 지낸 제임스 길리건 등 정신의학 전문가들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스트롱맨들의 출현과 반이민·백인우월주의자들의 테러가 느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한다. 세계화가 고도화되면서 불평등이 심화되는데, 이런 불만을 저급한 지도자는 사회적 약자나 이방인 등 외부로 돌리고, 불만계층이 이를 폭력이나 테러의 이유로 삼는 악순환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도자들은 이런 지지층을 결집시켜 정치 생명을 연장한다. ‘진정한’ 대대적 교체가 필요하다.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세계보건기구(WHO)의 게임중독 질병 코드 등재를 국내에 적용하기 위한 민관협의체가 23일 국무조정실 주도로 출범했다. 업계에서는 2025년경부터 WHO 조치가 실제 국내 산업현장에 적용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동안의 규제도 만만치 않았는데 게임업계로서는 엄청난 강적을 만난 셈이다. 국내 온라인 게임 1세대 개발자인 송재경 엑스엘게임즈 대표는 “게임에 마약처럼 중독이라는 표현을 쓰는 건 안 맞는다고 본다”며 “업계가 명작이라 불릴 만한 좋은 게임을 계속 만들다 보면 나쁜 인식도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오늘날 국내 온라인 게임 산업이 있게 한 바람의 나라(넥슨·1996년)와 리니지(엔씨소프트·1998년)의 개발자다. 》 ―게임중독이 정확한 표현인가? 정립된 용어는 아닌 것 같은데…. “WHO가 쓴 용어는 Gaming Disorder(장애)다. 이를 우리는 게임중독이라고 많이 부르는데 정립된 용어는 아니다. 직역하면 ‘게임이용장애’이고, 업계에서는 ‘과몰입’이라고 부른다. 게임을 하다가 중단하는 게 잘 조절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이걸 ‘게임중독’이라고 부르니까 마치 게임 자체가 술이나 마약같이 엄청나게 해롭고, 한번 빠지면 절대로 헤어날 수 없는 듯한 인식을 준다. 안 그래도 인식이 안 좋았는데, 더 안 좋게 됐다.” (그렇다고 재미없는 게임을 만들 수는 없지 않나.) “개발자로서는 일종의 자기모순적인 상황인데…. 중독자처럼 게임에 빠지는 사람이 있는 건 부정할 수 없다. 단지 그들은 게임 때문에 그렇게 된 게 아니라 다른 원인이 있고, 게임은 그 도피처가 된 거라고 생각한다.” ※국무조정실은 게임중독은 오해의 소지가 있어 게임이용장애로 쓰고 있다고 밝혔다. ―게임이 없더라도 다른 것에 빠졌을 것이라는 건가. “한때 게임에 빠져 공부나 일에 지장을 받아본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조금만 지나면 잊어버리고 일상에 복귀한다. 그걸 알코올이나 마약에 붙이는 중독이라는 표현을 쓰는 게 적당한지 모르겠다. 소수의 사람들 때문에 게임 자체를 매도하는 건 아니라고 본다.” ―국내에 실제 적용되면 어려운 상황이 많이 발생할 것 같은데…. “지금 당장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없고…, 업계에서 ‘게임은 문화다’라는 캠페인을 하고는 있다. 게임이 영화 같은 문화로 대접받을 수 있도록 우리도 수준을 올리자는 것이다. 무시당하지 않게…. 그러기 위해서는 명작 영화나 소설처럼 어릴 때 경험한 게임 때문에 가치관이 바뀌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감동을 주는 게임이 많이 나와야 한다. 아직은 그런 게임들이 많이 부족하다.” (‘달빛조각사’란 게임을 만들고 있는데 그 정도의 역작인가?) “하하하. 아직은 그렇지 않다. 인터뷰를 조금 망설인 것도 말과 만든 게임이 일치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들어서였다. 단지 명작을 만들고 싶은 과정에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줬으면 한다.” ―차세대 정보기술(IT) 유망 분야로 게임을 손꼽지 않은 정부가 없는데 규제는 많이 풀렸나. “게임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온라인 게임 월 결제한도 제한이 16년이나 유지되다가 지난달에야 폐지됐다. 온라인 PC게임의 1인당 월 결제한도를 50만 원으로 제한한 것이다.” (게임산업 육성이 언제부터 나왔는데 16년 동안이나 그런 규제가 있었단 말인가.) “더 우스운 게 그동안 PC만 규제하고 모바일은 안 했다. 모바일 게임에서는 금액과 관계없이 얼마든지 게임 아이템을 살 수 있었다.” ―형평성이 안 맞는데 왜 그런 건가. “규제할 방법이 없으니까…. 모바일 게임에 결제한도 규제를 하려면 애플이나 구글에 요청해야 하는데 법적인 규제 근거도 미약하고, 다국적 회사들이 받아들일 리도 없기 때문이다.” ※온라인 게임 결제한도 제한은 온라인 게임의 사행성 논란이 일면서 2003년 업계 자율 규제로 시작됐다. 표면적으로는 자율규제였으나 사실상 정부 압력에 의한 것이었다. 자율규제라 법적 효력은 없지만 결제한도가 없는 게임을 만들 경우 게임물관리위원회가 등급을 허가하지 않는 식으로 규제했다. ―요즘은 같은 게임을 PC와 모바일 등 양쪽에서 다 즐길 수 있는 것도 많지 않나. “그래서 국내 게임회사들이 조심해야 했던 게… 양쪽을 합쳐 50만 원을 넘으면 안 되도록 시스템을 만들어야 했다. 지키지 않았다가 걸려서 한 달 영업정지 처분을 받은 곳도 있다. 영업정지란 게임 이용 중지다. 큰 회사라면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지만 작은 회사는 문을 닫을 수도 있을 정도의 처벌이다.” ※2015년 8월 NHN블랙픽의 온라인-모바일 연동 게임인 ‘야구 9단’에서 결제 초과가 발생했고, 당시 성남시는 영업정지 한 달을 내렸다. ―외국도 그런 월 판매액 한정 제도가 있나. “내가 아는 선에서는 없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특히 학부모일수록 게임에 대한 생각이 아주 부정적이다. 아무것도 남는 것 없이, 인생에 도움도 안 되고, 시간만 낭비하는 것으로 본다.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당연히 1순위로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됐고…. 그러니 ‘무슨 게임하는 데 50만 원씩 써’라고 생각하고, 제한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거다. 사실 기타 연주가 취미인 사람이 악보를 사고,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 운동복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게임하는 건 한심하게 보는 거지. 우리 아내도 내색은 안 하지만 내가 게임하고 있으면 좀 한심하게 보는 것 같기는 하던데…. 하하하. 당장 빠르게 개선될 인식은 아니고, 어려서 게임을 하면서 자란 세대가 기성세대가 되면 점차 변하지 않을까 한다.” ―다른 나라의 게임 규제에는 어떤 게 있나. “중국을 제외하면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중국에는 3시간 컷오프 제도가 있다. 한 가지 게임을 연속으로 3시간 이상 하면 얻은 점수를 절반으로 깎는 것이다. 근데 겉으로는 청소년 보호라고 했지만 사실은 게임 중 채팅 등을 통한 정보 유통을 차단하기 위해서가 더 큰 목적이라고 들었다.” ※중국은 2007년부터 시행한 3시간 컷오프 제도를 통해 18세 이하 청소년이 같은 게임을 연속으로 3시간 이상 하면 얻은 게임 점수의 절반을 차감하고, 5시간 이상이면 모든 점수가 사라지도록 하고 있다. ―국내 온라인 게임의 수익 모델이 아이템 판매 방식이다 보니 사행성 문제가 생기고 게임에 대한 인식도 안 좋아지는 것 아닌가. “스타크래프트 같은 패키지 방식 게임은 한번 게임 CD를 사면 더 이상 돈을 지불할 필요가 없다. 지금도 북미와 유럽은 이런 방식으로 게임을 만들고, 시장도 이쪽이 훨씬 크다. 반면 우리와 중국에서는 P2W(pay to win·온라인에서 게임을 무료로 제공하고 대신 필요한 아이템을 사도록 유도하는 게임) 방식이 더 인기다. 매출도 이쪽이 훨씬 크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솔직히 게임 아이템에 왜 돈을 쓰나 하는 생각이 있다.) “우습긴 한데 나도 좀 그렇다. 하하하. 좀 옛날 사람인 데다 어렵게 자라서….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게임에 필요한 아이템을 사는 문화에 별 저항감이 없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투자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이템을 안 사면 아예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게 만든 게임들이 돈은 더 잘 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달빛조각사도 그렇고 돈을 안 써도 할 만하게 만들려고 한다. 그 대신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돈을 주고 게임 아이템을 사는 행위가 당신이 만든 리니지에서 시작됐는데…. “1998년 리니지를 출시한 뒤 얼마 후 아이템을 사고판다는 말을 들었다. 아이템 판다고 속여 돈을 받고 잠적하는 신종 사기가 등장했다는 뉴스가 나오고….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만든 나조차 ‘진짜? 미친 것 아니야?’라고 생각했다. 말이 검이고 망토지, 사실 데이터베이스상의 01010101의 조합일 뿐인데 왜 이걸 돈을 주고 사는지 이해가 안 갔다. 당시 리니지는 월 2만7900원을 내고 이용하는 정액제로 아이템을 파는 게임이 아니었다. 그때는 아이템을 판다는 개념조차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유저들이 지금 전 세계 온라인 게임의 비즈니스 모델을 개척해준 셈인데…. 수요가 있으니 공급자가 생기고, 거래를 안전하게 중개해주는 아이템베이란 회사도 생겼다. 게임은 무료로 즐기되 필요에 따라 아이템을 사야 하는 부분 유료화 모델은 전 세계적으로 한국이 처음 개발한 거다.” ―좀 다른 얘긴데 직원들이 별로 대표를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전에 한 신입사원이 자기소개 중에 ‘주인의식을 갖고 열심히 일하겠습니다’라고 해서 ‘주인은 난데 왜 당신이 주인의식을 갖느냐. 그저 임무에 충실하고 일찍 집에 가서 쉬라’고 했다.” (뭔가 굉장히 신선한데?) “직원에게 주인의식을 가지라는 건 좀 허위적인 것 같다. 내 귀에는 꼭 ‘월급은 더 줄 수 없지만 일은 많이 해 주세요’란 의미로 들리기도 하고…. 물리적으로 실력도 체력도 부족한데 정신력으로 버티면 된다고 강요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인가? 좀 자유롭다.”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문재인 대통령이 최근 ‘2020년까지 최저임금 1만 원 달성’ 공약을 지킬 수 없게 됐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주 52시간제 등 현 정부의 경제정책은 사회적으로 어려운 계층을 위한 것이 많다. 그런데 정작 고통을 호소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 그들이다. 대통령은 ‘사람중심경제(J노믹스)’를 표방했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문 대통령의 대선 캠프에서 J노믹스를 설계했던 김광두 서강대 경제학부 석좌교수(전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는 “현 정부가 원설계에서 많이 바꾼 데다 실행 과정에서도 우리가 처한 시장경제질서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고 말했다. 》―경제 질서에 대한 어떤 인식이 부족했다는 건가. “문재인 정부는 공정하고 특권 없는, 정의로운 사회를 내세웠다. 그리고 이런 가치에 부합하지 못한 과거의 잘못을 적폐라는 이름으로 없애려고 했다. 지향하는 바는 동의한다. 문제는 방법론이 미숙했다.” (방법론이라니?) “시장경제에서는 경쟁에 지면 물건이 안 팔리고, 안 팔리면 일자리를 만들기 어렵다. 상품 경쟁력은 기업 경쟁력에서 나오고, 기업이 경쟁력을 가지려면 그 국가에 있는 게 도움이 돼야 한다. 지금 우리 상황은 기업이 머무르기에 좋은 환경인가? 정부정책이 그런 질서와 맞지 않았다. 양극화를 막고 저소득층의 생활을 위해 최저임금을 올릴 수는 있다. 그 자체는 좋은데, 임금은 결국 (자영업자와 영세 기업을 포함한) 기업이 주기 때문에 주는 쪽의 생산성과 경쟁력이 어떤 영향을 받을지 고민했어야 했다. 그게 미숙했다.” ―그건 너무나 상식적인 고려 아닌가. 청와대가 몰랐을 리가 있나. “몰랐다기보다는… (얽히고설킨) 경제생태계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못한 상태에서 서투른 정책을 썼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 부작용이 경제 성적표의 하락으로 나타나고 있고….” (소득주도성장을 주도한 장하성 전 대통령정책실장과 친분이 두터운데 그가 시장경제질서를 모를 수가 있나.) “장 전 실장이 시장경제질서에 대한 생각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원래 기업 내 분배 쪽에 관심이 더 많다 보니… 분배에서 노동자가 너무 적게 가져가는 걸 고쳐주는 게 정의라고 생각한 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인식이 조금 정확하지 못했던 게 우리나라는 영세 기업이 엄청 많다. 그들의 소화 능력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다. 부작용에 대한 보완도 일자리안정자금 등으로 도와주면 된다는 식으로 단순하게 생각한 것 같고…. 의사가 약을 쓸 때 부작용을 고려하지 않고 쓰면 되나. 정책도 마찬가지다. 세련된 정책이란 정책의 속도와 강도를 대상자가 어느 정도 수용할 수 있을지 알고 하는 것이다. 선한 의지는 인정하지만, 세련됨이 부족해 결과가 이렇게 됐다.” ―너무 호되게 겪어서인지 최저임금 차등 적용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일본은 지방자치단체가 최저임금을 결정한다. 앞서도 말했지만 음식점이든 주유소든 지역과 업종마다 임금을 주는 쪽의 상황이 다른데 어떻게 똑같이 주나. 지금 같은 동일한 최저임금 적용은 개선돼야 한다고 본다.” ―현 김상조 정책실장과도 지난 대선 캠프에서 함께 일했는데…. “김 실장이 이미지는 재벌 공격수로 돼 있지만, 그건 좀 공정을 강조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거고… 아주 유연한 스타일이다. 재벌에 무슨 원한이 있거나 고집만 부리는 사람은 아니다. 공정거래위원장 때는 진보 쪽에서 욕을 먹기도 했다. 변했다고…. 물론 경영계에서는 강경파로 보기도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매우 유연하기 때문에 상당한 노력을 할 거라 본다.” ―문 대통령은 ‘사람중심경제’를 표방했는데 왜 서민층이 더 힘들어진 건가. “지난 대선 캠프에서 내가 그걸 주도했는데… 원래 내가 설계한 J노믹스는 사람에게 투자하자는 것이었다. 사람의 능력을 올려주면 근로자는 소득이, 기업은 경쟁력이 올라간다. 기업 경쟁력이 오르면 일자리가 늘어난다. 이렇게 가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름이 ‘사람중심경제’다. 그런데 나중에 그냥 임금 보조해주고 올려주는 걸로 바뀌었다. 임금을 올려주더라도 교육, 직업훈련 등 사람에 대한 투자가 병행됐어야 하는데…. 물론 스스로 나아지려는 의지나 능력이 없는 사람도 있다. 그 부분은 복지로 해결해야 하는 거고…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미래를 준비하기 때문에 투자를 하면 충분히 한 단계 올라간다. 그게 빠졌다.” ―우리는 사람에 대한 투자는 고사하고 학교도 죽이고 있지 않나. “거참, 거꾸로 가고 있으니… 세계질서를 모른다고밖에 볼 수 없다. 지금대로라면 더 공부하고 싶고, 재주 있는 학생들은 해외로 나간다. 강사들 보호하자고 대학강사법 만들어 정작 강사들 죽인 것과 비슷하다. 시장을 모르는 거지. 외국 학생들이 한국에 와서 공부하게 만들어도 모자랄 판에 왜 우리 학생들이 나가게 만드나. 행정부가 경쟁력이 없는 것도 큰일이다.” ―어떤 경쟁력을 말하나. “미래에 우리에게 어떤 리스크가 올지 각각에 대한 종합 대응 시나리오가 있어야 한다. 국가위험도평가(NRK·national risk assessments)라고 하는데, 예를 들면 중동전쟁으로 기름값이 대폭 오르면 우리 경제는 어떻게 되느냐 같은 거다.” (그런 것도 없을 리가 있나. 대체 수입처 확보 방법은 있지 않나.) “수입처 확보 같은 건 있지만, 내가 말하는 건 산업과 경제 전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평가 및 대응 시나리오다. 만약 국가적으로 어떤 에너지에 대한 리스크가 있다고 판단되면 장기적인 리스크 완화 정책과 함께 공급 국가나 회사와의 관계 설정, 투자 등을 미리 대비하게 된다. 우리는 그런 게 없으니까 뭐 하나 터지면 그때 가서 우왕좌왕 아니냐. 비상대책회의 만들고… 터진 뒤에 비상대책회의 만들면 뭐가 되겠나. 그게 우리 행정부의 능력이다. 정권이 바뀌어도 지금 행정부 능력으로는 안 된다.” ―실례지만 당신은 경제 현실과 방향도 잘 알고, 박근혜 문재인 정부 초기에는 나름의 힘도 있었는데 왜 직접 각료로 참여해 뜻을 펼 생각을 안 했나. “직접 할 생각이 없었다기보다… (정부 같은) 조직은 조직 나름의 구조가 있는데 우리 같은 교수들은 그런 적응 능력이 좀 부족하다고 본다.” (그럼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은 왜 맡은 건가.) “대통령이 처음에는 다른 생각도 수용하겠다고 했으니까…. 그래서 대선 캠프에도 들어간 거고…. 문 대통령이 미국의 국가경제위원회(NEC) 같은 기구를 만들어 역할을 해달라고 했다. NEC는 미국의 중요한 경제정책의 이견을 조정하는 곳이다. 그래서 문 대통령이 의장이고, 내가 부의장으로 대행하는 기구를 만들었고, 그때는 우리 같은 사람들의 생각이 반영될 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실제 운용을 해보니 쉽지 않았다. 회의를 매일, 수시로 할 수도 없었고….” (NEC는 다른가?) “NEC는 백악관 안에 사무실이 있다. 결국 내가 재임 중에 두 번 하고 지금까지 안 열리는 걸로 안다.” ※그는 지난해 12월 말 자문회의 부의장을 그만뒀다. ―지금의 혼란이 새로운 길을 가는 데 따른 변화의 고통일 수도 있지 않나. “지금보다 나아지려면 뭔가 변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개혁은, 개혁을 하려는 사람과 다른 가치를 가진 쪽이 어느 정도는 동의해줘야 성공할 수 있다. 그들이 저항만 하면 성공할 수 없다. 잘해 보려고 하지 않는 정부가 어디 있겠나. 문재인 정부도 잘해 보려고 노력은 했는데…, 안타깝게도 지금 나타나는 건, 과거 어느 때보다 정치는 대립적이고, 사회는 분열돼 있고, 경제는 성적표가 좋지 않다.” ―지금의 변화에 대한 욕구는 과거 보수정부가 자초한 면이 있지 않나. “지금 사회정의, 공정 등에 대한 요구가 강하게 나오는 건 지난 10년간 보수 정부들이 그걸 악화시켰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강자들의 특권 남용, 갑질 때문에 화가 나 있는데 최순실 딸의 부정 입학, 대한항공 2세들의 갑질 같은 게 부채질을 한 거지. 보수가 스스로 개혁했어야 했는데 안 하다 보니 결국 시장질서에 대한 신뢰까지 떨어뜨렸다. 그 결과 새로운 질서가 필요하다는 요구가 대두됐고…. 하지만 그렇더라도 개혁이나 적폐 청산은 미래지향적으로 해야 한다.” ―미래지향적인 적폐청산은 어떻게 하는 건가. “지금 정부는 적폐가 발생하는 원인과 인프라를 바꾸기보다 사람을 혼내 주고 있다. 사람을 혼내면 일시적으로 조심하는 효과는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똑같은 잘못이 나온다. 정부 산하 숱한 단체에 정치권 인사와 은퇴 공무원들이 낙하산으로 간다. 그리고 하는 일이 자신과 단체를 위한 로비다. 그게 특권이고 공정성 훼손이 아니면 뭔가. 특권을 행사할 수 있는 인프라를 최대한 줄여주는 게 진정한 적폐 청산 아닌가.” (선거에서 신세졌는데 안 갚을 수도 없지 않나.) “다른 방식으로 보상을 해줘야지…. 그렇게 공정성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로비가 필요한 조직에 신세진 사람을 보내면 또 다른 불공정이 나올 수밖에 없지 않나. 더러운 물을 안 갈고 사람만 바꾸면 똑같은 행태가 계속 나타날 수밖에 없다. 사람을 혼내 주는 방식은 당사자가 강하게 반발하니 쉽지 않지만, 제도를 중심으로 하면 반발도 상대적으로 적을 거다. 적폐청산을 하더라도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한 적폐청산을 하자는 거다.”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2016년 5월 당시 21세이던 A 씨는 남편 B 씨와 결혼했다. 자신을 끔찍이 아껴주는 모습에 반했기 때문이다. B 씨의 누나가 “동생이 전에 교제하던 여성을 폭행해 만신창이가 됐다”며 만류했지만 굽히지 않았다. 얼마 안 지나 남편은 상습적으로 A 씨를 폭행했고, 보다 못한 지인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했다. 하지만 A 씨가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해 남편은 어떤 격리조치도 받지 않았다. 어느 날 6시간의 매질을 견디다 못한 A 씨는 이혼 소송을 내고 집을 나왔지만 이혼숙려기간 중 주소를 알아낸 남편에 의해 살해됐다. ▷첫 신고 당시 남편 B 씨가 처벌받지 않은 것은 폭행이 반의사불벌죄이기 때문이다. 반의사불벌죄는 수사·기소는 할 수 있지만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으면 처벌할 수 없는 범죄다. 일본 헌법 가안에서 영향을 받아 1953년 도입됐는데, 정작 일본은 도입하지 않았다. 미국도 가해자가 반의사불벌죄를 악용해 피해자를 협박하거나 회유하는 부작용이 많자 강제 기소정책을 도입해 가해자 처벌을 강화했다. 우리도 국회에 반의사불벌죄 폐지를 담은 가정폭력처벌법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1년 넘게 계류 중이다. ▷가정폭력은 범죄의 심각성에 비해 처벌에 어려움이 많다. 지난해 4월 서울북부지법에서는 50대 어머니가 흉기로 자신을 찌른 아들을 감싸다 위증죄로 벌금 300만 원을 받았다. 처음과 달리 법정에서 흉기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진술을 바꿨는데, 흉기 사용은 특수폭행으로 반의사불벌죄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을 찌른 아들을 감싸주려는 마음에 위증을 한 것이다. ▷한 베트남 여성이 남편에게 갈비뼈와 손가락이 부러질 정도로 무참히 폭행당하는 동영상이 공개되면서 반의사불벌죄 폐지 주장이 거세지고 있다. 결혼이주여성의 경우 남편의 생활비가 없으면 당장 생계가 막막해지는 데다 체류권이 남편에게 종속돼 있어 참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 여성도 신고하라는 지인의 말에 “애 아빠인데…”라며 망설였고 결국 지인이 신고했다고 한다. ▷가족에게 맞았다는 고통과 함께 가족이라 용서해야 하는 고통까지 감수해야 하는 게 가정폭력이다. 심하게 맞고도 경찰의 진단서 제출 요구를 거부하는 부모나 아내도 많다. 상해진단서를 제출하면 반의사불벌죄에 해당하지 않는 폭행치상이 되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식을, 아내가 남편을 감옥에 보내는 것은 쉬운 결심은 아닐 것이다. 남편을 감옥에 넣은 독한 사람이라는 삐딱한 시선도 주변에 있을 수 있고, 생계도 무거운 고민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가정폭력의 추방을 위해선 엄정한 처벌이 필요하다. 그래야 가정도 산다.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2016년 12월, 주광야오 중국 재정부 부부장은 베이징에서 열린 ‘2016∼2017 중국경제연회’에서 ‘중미 경제무역 관계의 건강한 발전 촉진’이란 주제의 연설을 했다. 당시는 대중(對中) 강경 노선을 예고한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의 취임을 앞두고 양국이 무역 난타전을 벌이던 시기. 주 부부장은 “양국 간 무역전쟁으로 양패구상(兩敗俱傷·양쪽이 다 패하고 상처를 입음)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트럼프 당선인의 외손녀인 아라벨라 쿠슈너(당시 4세)의 동영상을 소개했다. ▷중국어를 배우던 아라벨라는 같은 해 초 가족파티에서 빨간 치파오를 입고 당시(唐詩) 를 암송하며 재롱을 떨었는데 이방카가 인스타그램에 올린 이 영상이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화제가 됐다. 동영상은 14초에 불과했지만 중국 주요 동영상 사이트를 통해 폭발적으로 확산됐다. 주 부부장은 미국의 대중 무역 강경노선이 지속되면 미국도 3년 내 경기침체에 빠지고 500만 개의 일자리가 줄 것이라면서, 양국이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임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로 아라벨라의 동영상을 소개한 것이다. ▷중국 신화통신이 한국에 대한 일본 정부의 반도체 소재 품목 수출 규제에 대해 “양패구상의 우려가 있다”고 논평했다. 양패구상은 사냥개가 토끼를 쫓다 둘 다 지쳐 죽었다는 견토지쟁(犬토之爭)에서 유래한 고사성어.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이 일본에도 자기 발등을 찍는 자충수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에칭가스(고순도 불화수소)를 제조하는 일본 회사 스텔라케미화는 연간 120억 엔가량을 한국에 수출했지만 올해는 전망이 불투명해졌고, 주가도 하락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소재 공급이 끊겨 삼성전자의 생산에 지장이 생기면 반도체를 이용하는 모든 기기의 생산이 정체돼 혼란이 전 세계로 퍼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일본을 포함해 전 세계 정보기술(IT) 기업들이 한국 공급업체들에 메모리반도체 수출 물량이 충분한지를 문의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일본 내에서조차 중국만 어부지리(漁夫之利)를 얻을 것이란 소리가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도 “유일한 승자는 중국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수준 낮은 지도자는 멀리 보기보다는 당장의 정치적 유불리로 결정을 내린다. 그 뒷감당은 국민이 떠안아야 한다. 한일 간에는 쉽게 풀기 힘든 과거사가 있지만, 협력해야만 하는 현실도 있다. 경제·안보적으로 한국이 타격을 받으면 그 여파는 일본에도 고스란히 전가된다. 양패구상을 우리식으로 말하면 ‘너 죽고, 나 죽자’다. 그걸 막아야 하는 정치가 그걸 만들고 있다.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지난달 23일 오후, 기자를 맞아주는 그의 손에는 흙 묻은 호미가 들려 있었다. 일요일이지만 아침부터 밭을 고르고 있었다고 한다. 집 앞에 펼쳐진 2800여 평(약 9260m²)의 땅에는 직접 심은 깨 콩 블루베리 등 온갖 작물이 빼곡히 자라고 있었다. 이동필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64)은 “실제 농사를 지으며 살아보니 우리 농촌 현실이 장관일 때 보던 것보다 훨씬 절박했다”며 “뭐라도 도와야겠다는 생각에 경북도 5급 시간제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2016년 9월 장관 퇴임 바로 다음 날 고향인 경북 의성군 단촌면으로 내려왔다. 》 ―직접 농사를 지으며 본 농촌 현실이 장관 때 생각했던 것과 괴리가 크던가. “저 집 한번 봐라. 빈집이다. 그 앞집도 폐가고…. 노인들만 사는 동네는 요양원 비슷하고…. 한국농촌경제연구원장, 농식품부 장관 등을 하며 30여 년간 농업 농촌에 대해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을 갖고 연구하고 정책을 해왔는데, 결과적으로 이런 농촌 현실을 보며 자괴감이랄까, 책임감이 들었다. 장관에서 물러났다고 여기서 콩이나 심고 있어도 되나…. 아직 힘이 남아 있을 때 쓰러져가는 우리 농촌을 살리기 위해 뭐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지난해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마침 경북도에서 시간제 공무원을 뽑는다고 해 지원했다.”※그는 올 1월부터 도 농업정책과 소속 농촌살리기 정책자문관(5급)으로 일하고 있다. 2년 계약직으로 주 3일 근무하고, 출근하지 않는 날은 농사를 짓는다.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너무 세세한 일까지 잔소리를 하면 후배 공무원들이 힘드니까…. 큰 틀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지방자치단체는 한정된 예산, 인력, 조직을 정말 효율적으로 써야 하는데 아쉬운 부분이 많다. 사람이나 경제는 물과 같다. 한곳을 깊고 크게 파면 그리로 모인다. 사람을 강하게 끌어들일 중심지를 만들고, 주변에 배후지를 만들어야 하는데 대부분 여기 조금, 저기 조금 이런 식으로 산발적으로 만들다 보니 시너지 효과를 못 내는 게 많다.” (예를 들면 어떤 식인가?) “의성 금성면에 군립인 조문국(召文國)박물관(사업비 180억 원)이 있다. 조문국은 삼한시대 이 지역에 있었다는 작은 나라다. 단촌면에는 최치원문학관이 있는데 여기도 약 200억 원이 들었다. 이렇게 작게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니 흡인력이 약해 제대로 작동을 안 하는 거다. 이런 점을 조언해 주려고 한다.” ※조문국박물관과 최치원문학관은 차로 약 40분이나 떨어져 있다. ―농촌 소멸 현상이 어제오늘 얘기가 아닌데…. “쉬운 일은 아니지만 국가 전체를 아우르는 종합계획이 있어야 하는데 다 따로 움직이다 보니 효과가 반감되는 경우가 많다. 지방이 소멸된다고 난리인데 수도권에 또 신도시를 만들면 소멸을 가속시키지 않겠나. 지방도 일하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 예산을 표 되는 곳에만 쓰는 것도 문제고…. 시골에는 청년들이 갈 곳이 없다.” (갈 곳이 없다니?) “40, 50대면 청년인데 면에 열댓 명 정도 있다. 철도 부지 옆에 비닐하우스가 있는데 거기가 그들 회관이다. 그래 놓고 너희가 농촌의 미래라고 하면 되나.”※단촌면 인구는 약 2300명이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이런저런 시설들이 많던데…. “요 앞에 있는 단촌초등학교가 모교인데, 학생 수는 30명 정도 된다. 올 2월 졸업생이 한 명이었는데 각종 상과 장학금 10여 개를 혼자 들락날락거리며 다 받더라. 올해는 신입생도 없다. 그런 학교에 2층짜리 체육관을 지어줬다. 농촌 중심지 활성화 사업이란 게 있는데 그 일환으로 면사무소 앞에 2층 건물을 지었다. 근데 용도가 헬스장이다. 나중에는 다 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농촌이 이렇게 어려운데 투자의 우선순위가 체육관이나 헬스장일까. 안타깝더라. 이 논설위원도 전직 장관이 사무관 됐다는 얘기보다 지방 소멸 문제에 더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 ―거창하지는 않아도 농촌 현실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정책이 있나. “당장 획기적으로 농촌 인구를 늘리기는 쉽지 않다. 그 대신 귀농·귀촌을 좀 더 쉽게 할 수 있게 해주면 좋지 않을까. 예를 들어 귀촌을 위해 도시에 있는 집을 팔 경우 양도세를 대폭 감면해주는 식으로…. 세 부담 때문에 집을 못 팔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나. 1가구 2주택 보유세도 시골에 장만한 집은 제외해 준다든지…. 주민들도 외지인들에게 배타적으로 대하지 말고 먼저 함께 잘 살아보자고 손을 내밀어야 한다. 애써 귀농·귀촌한 사람들은 지역에 아는 사람이 없지 않나. 특히 경상도는 아주 보수적이라 외지에서 온 사람에게 별로 살갑게 대하지 않는다. 지역 사회가 관용이 있어야 사람이 모이고, 발전은 그렇게 모이는 과정에서 생긴다. 사람이 불편한데 누가 들어오겠나.” ―농업이 일자리를 창출하고 고소득이 보장되는 직업이 된다면 농촌 현실 개선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잘 안되는 이유가 뭔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규제가 많은 것도 이유 중 하나다. 술 분야만 해도 무슨 규제가 그렇게 복잡하고 많던지…. 복분자로 막걸리를 만드는 데 거의 10년 걸렸다.” (복분자로 술을 만들면 안 되나?) “1998년 국무총리실 파견 기간에 주류 쪽 규제 해소를 맡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술 시장은 온통 규제 덩어리다. 당시 복분자는 한약재로 분류돼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식품원료로 못 쓰도록 했다. 약이기 때문에 많이 먹으면 위험하다는 것이다. 어이가 없어 도대체 얼마를 먹어야 위험한지 과학적 기준을 보여 달라 했더니 별 기준도 없었다.” ―그래서 규제가 금방 풀렸나. “식약처와 싸워서 일단 복분자를 식품원료로 쓸 수 있게 한 게 첫 단추였다. 다음은 국세청과 싸워야 했다. 복분자로 술을 만들려면 국세청에 주류 제조와 판매 허가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국세청이 술에 대해 뭘 안다고 관여하나?) “이 사람들은 술은 알코올이라 해롭기 때문에 제조와 판매를 국가가 엄격히 통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 이면에 과세가 있고…. 술 자체를 못 만들게 하지는 않지만 시설규제를 통해 사실상 못 만들게 한다. ‘발효조 크기는 어느 정도 이상이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전통주는 대부분 시골의 조그만 업체에서 만드는데 이런 대형 시설을 어떻게 설치하나. 택배나 온라인 판매도 못 하게 했다.” (배달 판매도 못하게 했다고?) “우편으로 팔면 청소년들이 사서 마셔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란다. 대형 주류업체도 아닌 영세업체가 전국에 매장을 세울 수도 없지 않나. 하지 말라는 얘기지. 한 3년 싸웠더니 1회 주문에 5병만 허가해 주겠다고 하더라. 또 몇 년을 싸워 20병으로 늘렸다. 복분자 막걸리가 식약처부터 시작해서 우편 판매 허용까지 10년 정도 걸렸다. 내가 복분자 막걸리 전도사라고 불리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술 분야에서 가장 개선돼야 하는 게 뭔가. “우리가 가장 많이 마시는 희석식 소주를 만드는 주정(酒精)을 대한주정판매라는 회사가 독점으로 판다. 참이슬, 처음처럼 등은 이곳에서 주정을 사와 주류회사가 가공해 파는 것이다. 민간 회사인데 나라에서 술의 탈세 방지와 투명화를 관리해야 한다는 이유로 독점으로 만들어줬다. 그리고 그 회사를 국세청 퇴직 관료들이 휘어잡고 있다. 독점 판매 구조가 깨진다면 좀 더 다양한 제품이 나올 수 있을 거다.”※현 대한주정판매 이순구 사장은 서울 성동세무서장 출신이다. 국세청 출신들이 퇴직 후 한국주류산업협회, 진로발효 등 주정회사, 삼화왕관 등 병마개 회사 등 술 관련 회사의 대표이사, 임원 등 주요 보직으로 가는 것은 만연한 현상이다. ―현 64대 이개호 장관까지 역대 농림부 장관 중 재임 기간 1년 이하가 38명이나 된다. 제대로 된 농정을 펴는 것 자체가 어렵지 않나. “나는 박근혜 정부 시작부터 3년 반을 했는데… 오래하다 보니 오동필이라고 부르더라. 5년 할 거라고. 박근혜 순장조라고도 하고…. 농정은 긴 호흡으로 살펴야 하는데 장관의 재임 기간이 지나치게 짧은 게 문제긴 하다.” (박 전 대통령과 인연이라도 있었나.) “특별한 인연은 없는데… 내가 왜 장관이 됐는지는 나도 모른다. 최순실이 추천한 건 확실히 아닌 것 같고. 하하하.”※61대 장관인 그는 건국 이래 최장수 농림부 장관이다. 9대 윤건중 장관은 한 달 반, 45대 김양배 장관은 석 달 만에 바뀌었다. ―박 전 대통령이 농업과 관련해 뭘 당부하던가. “임명 때도 그렇고, 해마다 연초에 청와대에서 떡국을 먹는데… 6차 산업 잘 해달라고 했다.” (6차 산업?) “농업 분야는 그동안 생산, 증산에만 집중했다. 그런데 생산이 늘다 보니 오히려 가격이 떨어지는 등 복잡한 문제가 많이 발생했다. 농업의 부가가치를 높여 소비를 창출하고, 일자리도 만들자는 거다.” (너무 당연한 거 아닌가?)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생각이 약했다. 오로지 생산만 이야기했지….” ―거처하는 별채에 사원재(思源齋)라는 현판을 달았는데…. “음수사원(飮水思源·물을 마실 때 샘의 근원을 늘 생각하라는 뜻)에서 따온 건데, 사람이 근본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붙였다. 우리가 살면서 신세를 지지만 또 금방 잊지 않나. 필요가 없으면 다른 데 가서 또 줄을 서고…. 도리를 잊지 말자는 뜻이다.” (누굴 잊지 말자는 건가. 박 전 대통령을 말하나.) “다 포함해서….”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러시아 오렌부르크주에 있는 ‘블랙 돌핀’ 교도소는 죽어서도 나올 수 없는 곳이다. 연쇄 살인범 등 종신형을 받은 흉악범이 수감되는데 죽은 뒤에는 교도소 내 공동묘지에 묻힌다. 음식은 빵과 수프가 전부고, 이동할 때도 90도로 허리를 굽혀 걷게 해 평생 하늘을 보기 어렵다고 한다. 중국 헤이룽장성의 한 교도소에선 수년 전 사기 혐의로 수감된 한국인 사업가가 1년 만에 사망했는데 사인은 영양실조였다. ▷21년간 해외 도피 생활을 하다 파나마 공항에서 붙잡힌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의 4남 정한근 씨가 22일 국내로 압송됐다. 스페인어를 써가며 한국인임을 부인하던 정 씨가 마음을 바꾼 것은 “파나마는 교도소 관리가 불안하다”는 우리 대사관 직원의 말 때문이었다고 한다. 위조여권으로 입국할 경우 해당국 법으로 처벌되기 때문이다. ▷파나마를 비롯한 중남미 교도소는 재소자들이 목숨을 걸고 수형생활을 한다. 파나마 교도소에서는 분기당 30여 명이 살인 에이즈 등으로 사망한다. 브라질 카란디루 교도소에서는 40여 년간 1500여 명이 살해됐는데 마약과 총, 수류탄까지 자유롭게 유입되고 동성 강간으로 에이즈도 만연해 있다. 워낙 악명이 높아 미드 프리즌 브레이크 시즌 3의 무대가 된 파나마 교도소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온두라스 코마야과 교도소에서는 2012년 재소자의 방화로 358명이 사망했다. ▷국내 교도소·구치소는 중남미 교도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생활 여건이다. 곳곳에 폐쇄회로(CC)TV를 설치하고 교도관이 24시간 순찰을 돌며 재소자 간의 폭행을 막는다. 새로 지은 수용시설에는 각 층마다 샤워실이 있다. 아프다고만 하면 언제든 의무실에 갈 수 있고 당뇨병 같은 지병이 있는 수용자에게는 교도관이 매일 시간 맞춰 약을 챙겨준다. 국가인권위원회에 수백 통의 진정서를 보내고, 구치소를 상대로 엄청난 양의 정보공개 청구를 하는 재소자도 많다. 수감시설 주변에는 무료한 재소자들을 위해 만화책을 빌려주는 책방도 있다. ▷미결수들이 수용되는 구치소는 무죄 추정의 원칙 때문에 노역도 없고, 하루 종일 TV나 책만 보고 지낼 수 있다. 하지만 재소자들은 교도소보다 구치소 생활을 더 견디기 힘들어한다. 툭하면 불러내는 검찰, 늘어지기 일쑤인 공판 일정 등으로 몸보다 마음이 더 힘들기 때문이란다. 정 씨가 정말 파나마 교도소가 두려워 한국행을 택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언제 잡힐지 모르는 21년간의 도피가 마음이 편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더 고통스러운 감옥 밖 생활을 이제는 끝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유럽중앙은행은 최고액권인 500유로(약 68만5000원)권 발행을 올 초부터 중단했다. 탈세 돈세탁 등에 악용되는 일이 많은 데다 실생활에서는 별로 쓰이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 2010년 영국 강력조직범죄연구소는 영국에서 500유로권의 90%가 범죄 조직으로 흘러들어간다고 분석했다. ▷우리도 2009년 6월 23일 5만 원권 첫 발행 당시 지하경제가 더 커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컸다. 한 온라인 쇼핑몰의 5만 원권 발행 전 개인금고 판매량은 월평균 30대 정도였는데, 발행 5년 후인 2014년에는 월평균 1500대로 늘었다. 발행 10년간 5만 원권의 누적 환수율도 50%에 그친다. 두 장 중 한 장은 어딘가 숨어 있다는 얘기다. 2011년 4월에는 전북 김제의 한 마늘밭에서 110억 원어치 5만 원권 돈 뭉치가 발견되기도 했다. ▷5만 원권은 첫 발행 당일에만 1조3000억 원이 인출됐고, 백화점업계가 화장품 의류 등 5만 원짜리 상품만 따로 모은 ‘5만 원 마케팅’을 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화폐금융박물관에 전시할 일련번호 1∼100번을 제외한 2만 번까지를 인터넷 경매로 팔 정도였다. 그 인기는 여전해 지난달 기준으로 5만 원권은 국내 시중 유통 금액의 84.6%(98조3000억 원), 장수로는 36.9%(19억7000만 장)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지폐다. ▷현재 쓰이는 지폐 중 가장 먼저 발행된 건 5000원권(1972년)이다. 1만 원권은 1973년, 1000원권은 1975년 발행됐다. 5000원권과 1만 원권은 1972년 함께 발행하려 했으나 당초 1만 원권에 도안된 석굴암과 불국사를 지금의 세종대왕으로 변경하면서 한 해 늦어졌다. 1970년 라면 1봉지가 20원이던 시절에 1000원권보다 5000원권이 왜 먼저 나왔는지는 미스터리다. 한국은행 발권국은 “기록이 없어 잘 모른다”고 했다. ▷웬만한 직장인 월급이 3만∼4만 원이던 1970년대, 당시 최고액권이던 1만 원짜리 한 장의 가치는 어마어마했다. 연인과 영화 보고, 밥 먹고, 차를 마시고도 많이 남았다. 하지만 5만 원권이 나오면서 씀씀이 심리도 크게 바뀌었다. 특히 5만 원권은 경조사비를 올리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5만 원권 사용처는 경조금, 헌금, 세뱃돈 또는 용돈 등 개인 간 거래가 50.7%로 가장 많았다. 최근엔 10만 원권을 발행하자는 주장이 솔솔 나오고 있지만 선진국은 고액권을 없애는 추세다, 신용카드, 전자결제 등으로 인해 지하경제를 제외하곤 고액권의 역할이 점점 사라지는 추세를 감안해야 하지 않을까.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1시간만 지나도 포털 사이트에 줄줄이 올라오는 각종 성범죄 뉴스들. 최근에는 한 남성이 귀가하는 여성을 뒤따라 집에 침입하려다 실패하는 장면이 담긴 폐쇄회로(CC)TV 영상(일명 신림동 강간 미수 사건)이 공개되면서 여성들의 불안감이 극에 달했다. 통계상의 성범죄는 빙산의 일각이라는데, 그 빙산은 얼마나 크고 심각한 걸까. 여성범죄 전문이자 ‘미친놈들에게 당하지 않고 살아남는 법’의 저자인 울산지방경찰청 소속 이회림(필명·39·여) 형사는 “신림동 사건 같은 일은 아주 흔하게 벌어진다”고 말했다. 6세 때 동네 화장실에서 낯선 남성에게 성추행을 당한 그녀는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경찰이 됐다. 이후 일선 경찰서에서 성범죄 수사 전담 요원 등 여성범죄를 전담해 왔다. 》 ―신림동 사건 CCTV 영상은 충격 그 자체였는데 흔한 일이라니…. “암수범죄(暗數犯罪)나 피해자가 사건화를 거부하는 것까지 포함하면 성범죄 통계는 빙산의 일각이다. 신림동 사건도 신고하지 않았다면 사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게 된다.” (성폭행은 친고죄가 아닌데, 경찰이 알면서도 수사를 못 한다니?) “법적으로는 할 수 있지만 피해 여성이 울며불며 하지 말아 달라는데 무시하기는 어렵다. 가족들이 받을 충격 때문에 그러기도 하고…. 그런 경우가 너무 많다.” 암수범죄는 범죄가 발생했으나 경찰이 모르거나, 알아도 용의자의 신원 파악 등이 안 돼 통계에 집계되지 않는 범죄다. 2017년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강간 강제추행 등 성범죄는 모두 2만4100건이며 이 중 강간은 5223건이다. 이보다 훨씬 많은 범죄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 빙산이 도대체 얼마나 큰 건가. “통계를 낼 수 없으니…. 클럽에서 만난 여성들을 건드린 남자가 잡혔는데 피해자가 40여 명이나 됐다. 어떻게 알았냐면, 휴대전화에 어떤 식으로 했는지 적어 놨더라. 누구는 강간, 누구는 키스 이런 식으로…. 그중 신고한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대부분 잊고 싶으니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 성병까지 옮았는데 신고를 안 한 경우도 있다. 이해가 안 가겠지만… 사실이다.” ―그 정도로 신고를 꺼리나. “원룸에서 함께 살던 두 여대생이 집에 침입한 한 남성에게 차례로 강간당한 사건이 있었다. 신고는 안 됐는데 다른 곳에서 잡힌 범인의 여죄를 추궁하다 알게 됐다. 피해자들에게 확인하니까 ‘맞다’고 하더라. 경찰서에 와서 진술해 달라고 했더니 ‘잊고 살고 싶다’며 안 나왔다. 이 때문에 두 여대생 사건은 죄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게 현실이다.” ―신고가 적으면 실제 저지른 범죄만큼 처벌을 할 수가 없지 않나. “앞서 말한 40여 명을 건드린 범인은 5년을 살았다.” (40여 명에 고작 5년?) “한 명만 신고해 법정에서 진술했으니까…. 수사보고서에는 40여 명이 다 적혀 있지만 다른 피해자들이 나서지 않으니 판사도 어쩔 수 없었을 거다. 40여 명이 모두 신고했으면 5년만 나올 수가 있겠나. 법정에서 그놈 표정을 봤는데 엄청 반성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라. 가증스럽게…. 그놈이 출소 후 문자를 보냈다. 잘 지내냐고….” (연락처를 저장한 것도 아닐 텐데 그놈인지 어떻게 알았나) “밑에 자기 이름을 적었으니까….” ―좀 소름이 돋는데… 그런 경우가 잦은가. “어두운 쪽 사람들을 많이 접하다 보니 이상한 문자나 전화는 자주 온다. ‘여보세요’ 하면 말없이 가만히 있다가 툭 끊는데…. 누군지는 모른다. 사건 관련자들일 수도 있고…. 그래서 연말쯤 이름과 전화번호를 바꿀 생각이다. 받아 놓은 이름이 있다.” ―책까지 썼는데 얼굴을 공개하지 않고 필명으로 활동하는 이유가 그 때문인가. “워낙 다양하고 이상한 범죄자들을 많이 보니까…. 성범죄를 다루는 여경이라는 점에 자극돼 범행 대상으로 삼을 범죄자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불상사에서 가족들을 보호하고도 싶고, 얼굴이 알려지면 범인 검거에 지장도 있고. 죄송한데 양해해 줬으면 한다.” ―많은 여성들이 성폭행을 당할 때 제대로 저항을 못 한다고 하던데…. “‘긴장성 부동화’인데, 극도의 공포로 몸이 굳는 현상이다. 피해자 중 상당수가 저항하기보다 ‘빨리 끝났으면…’ 하는 생각이 더 든다고 하더라. 그래서 몸이 저항할 수 있도록 훈련을 해야 한다. 경찰이 되면서 유도의 손목 빼기 기술을 배웠는데 순간 울컥했다. 이것만 알았어도 그렇게 맞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에….” (맞다니?) “대학생 때 남자친구가 엄청 때려서 경찰에 두 번이나 신고했다. 나쁜 놈….” ―필사적으로 저항하라고 했는데, 그러다 더 큰 피해를 입는 것 아닌가. “가해자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가만히 있는 여성을 자기 손에 놓고 마음대로 하는 게 굉장히 짜릿하다는 것이다. 물론 납치돼 결박됐거나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는 차분하게 기회를 노릴 필요가 있다. 그런 경우가 아닌 일반적인 장소에서는 깨물기라도 하면서 저항해야 도망치거나 살 수 있다. 가만히 있으면 죽는다고 생각해야 한다.” ―태권도나 합기도를 배운다고 여성이 성폭행범을 제압할 수 있나. “잠깐 배운다고 그게 되겠나. 무술을 숙달해서 이기라는 게 아니라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일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잡혀온 가해자들이 ‘못된 애들은 건드리고 싶은 마음이 없어진다’는 말을 자주 한다.” (못된 애들이라니?) “손을 대려는데 저항하고 거부하는 여성들을 그렇게 표현한다. 얼마 전 한 지인이 겪은 일인데, 버스정류장에서 취한 남성이 옆에 앉아 슬쩍 만지려고 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더니 ‘아이, 씨’ 이러면서 일어나 멀쩡하게 갔다는 것이다. 무술이나 운동을 하면 왜 이걸 하는지 계속 생각하게 된다. 그 생각이 위험한 순간이 왔을 때 몸이 굳어지는 속에서도 저항해야 한다는 생각을 낳게 하는 것이다. ―홍익대 누드모델 몰래카메라 사건의 경우 성대결 양상까지 벌어졌다. “피해자가 남자라 경찰이 빨리 잡아줬고, 가해자가 여성이라 구속됐다는 건데…. 그 사건은 용의자가 교수와 학생들, 모델 당사자로 제한된, 아주 빨리 잡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늦게 잡으면 오히려 그게 더 문제인데….” ―수사하는 입장에서 애로점이 뭔가. “경찰 입장에서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순찰 경찰관에게 거의 어벤저스를 기대한다. 스웨덴 여행 중 친구가 카페에서 가방을 도난당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경찰이 아무리 빨라도 1시간 뒤에나 온다는 것이다.” (카페 주인이 그러던가?) “아니, 112에서. 스웨덴도 우리처럼 112다. 바로 신고 접수도 안 되고 연결에 연결을 해 간신히 통화가 됐는데 바빠서 그런 범죄는 빨라야 1시간 뒤에 도착한다더라. CCTV를 빨리 확인하고 싶으면 가까운 경찰서로 직접 가라며…. 나도 혼자 살아서 국내에서 신고를 많이 하는 편인데, 우리처럼 잘하는 곳은 드물다.” ―신림동 사건에서는 경찰의 안이한 대응이 문제가 되지 않았나(출동한 경찰은 피해자가 사는 건물 6층은 확인하지 않고 철수했다). “피해자도 만나고 좀 더 철저히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변명의 여지는 없지만 신고 시간이 오전 6시 반쯤이던데… 그 시간이 밤을 새우고 퇴근을 두어 시간 남긴, 제일 피곤한 시간이다. 그러다 보니 신고자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도 아니라 좀 방심한 게 아닌가 싶다. 안타까운 건 그런 사건이 숱하게 벌어지는데도 시스템은 변한 게 없다는 점이다.” ―변한 게 없다니…. “프로파일링(범죄유형분석법)이라고도 하지만… 그런 거창한 말도 필요 없이 신림동은 대학생들이 많고 집들이 밀집한 지역 특성이 분명한 곳이다. 성범죄도 신림동 사건처럼 남자가 여성을 뒤따라가다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지역 특성에 맞는 범죄 예방 모델이 적용됐어야 하는데 그런 게 전혀 없다. 나도 혼자 살아봤지만 밤에 철커덕 철커덕 하면서 문손잡이 흔드는 소리를 들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2007년 이전에 만든 전자키(디지털 도어록)는 건전지 두 개로 전기충격을 주면 잠금이 풀린다. 내가 직접 봤다. 얼마나 놀랐는지. 혼자 사는 여성들은 꼭 확인해 바꿔야 한다.” ―피해자 주변 사람들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게 있나. “가족이나 지인, 경찰 등 관계자들은 ‘왜 기억 못 하냐’ ‘시간 장소를 특정해야 하는데…’ 이런 말을 절대로 하면 안 된다. 진술이 정확해야 범인을 잡을 수 있으니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지만, 피해 여성들은 대부분 그 순간 얼어붙기 때문에 100% 정확하게 기억할 수가 없다. 그런 말이 피해자를 더 위축시켜 진술을 흔들리게 한다. 진술이 흔들리면 수사가 제대로 되기 어렵다. 피해 현장에 같이 있던 사람들도 ‘잘 생각해 봐. 이거 아니었어?’ 이런 말을 해선 안 된다. 피해자들은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기 때문에 빨리 잊고만 싶어 한다. 여기에 자기 진술도 확신이 없고, 수사 절차도 복잡하고 그러다 보면 중간에 포기한다. 진술 도중 ‘너무 힘들다. 신고 안 한 걸로 해 달라’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완벽한 대통령은 있을 수 없다. 그러기에 애정 어린 쓴소리가 필요하지만, 같은 편은 무조건 감싸고 반대편은 나쁘게만 보는 게 우리 정치현실이다. 정적(政敵)이라도 공정하게 대하고, 같은 편이지만 엄격하게 대할 수 있다면 지금보다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 지난달 29일 ‘문재인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멘토’라고 불리는 송기인 신부(81)를 찾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2005년 사목(司牧) 일선에서 은퇴한 그는 경남 밀양시 삼랑진의 꽃향기가 좋은 시골마을에 살고 있다. 그는 부산 민주화운동의 대부로 두 사람과 함께 민주화운동을 했고, 노 전 대통령에게는 세례를 줬다. 》 ―문 대통령의 멘토라고 불리는데 당선되고 어떤 당부를 하셨습니까. “멘토는 무슨…, 그냥 친구고 동지지요. 당선 직후에 전화가 왔는데 그냥 끊었습니다.” (당선자 전화를 끊었다고요?) “문 대통령 번호를 내가 알잖아요. 번호가 뜨기에 받지 않고 그냥 끊었지요. 다시 걸진 않더군요.” (덕담이라도 해주시죠.) “그런 말 안 해도 이해할 만하니까…. 나한테 전화할 시간이 어디 있어요. 얼마나 바쁠 텐데. 일할 시간을 확보해주는 게 가장 위해주는 거죠. 나중에 봤을 때 ‘알았습니다’라고 하더군요. 그때 왜 끊었는지 안다고…. 나중에 돈 모으지 말라, 친인척 관리 잘해라, 개혁은 끝까지 해야 한다고 당부했습니다. 그리고 생각이 다른 사람도 국가에 도움이 된다면 받아들이라고 했지요. 선거 때 찍지 않은 사람들을 모두 끌어안으려면 스스로 열려 있어야 한다고….” ―문 대통령은 열려 있다고 보십니까. 최근 들어 직접 발언하는 일이 많은데…. “얼굴이 당선 전보다 많이 어두워졌더라고요. 청와대 일이 많이 고된가 봐요. 답답해서 그럴 수도 있고…. 기다려 봐도 제대로 안되고, 시간은 자꾸 가고…. 간접적으로 그런 건의는 한 적이 있습니다. 대통령이 한 달에 한 번이나 정기적으로 국민에게 직접 말하는 자리를 만들었으면 한다고….” (지난달 9일 KBS 대담을 하지 않았습니까?) “언론이 묻고 답하거나 장관이나 청와대 수석을 통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직접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걸 말하는 건데…. 옛날에 미국 대통령 중에 그런 걸 한 사람이 있어요.”※그가 말한 것은 미국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노변정담(爐邊情談·따뜻한 난롯가에서 허물없이 나누는 이야기)이다. 대공황으로 은행 파산 위기가 닥치자 루스벨트는 대규모 인출 사태를 막기 위해 은행 휴업을 선포했다. 그리고 라디오를 통한 첫 노변정담에서 자신을 믿고 은행에 돈을 맡겨달라고 호소했다. 이 호소가 먹혀서 미국 전체 은행의 75%가 영업을 재개할 수 있었다. 루스벨트는 재임 중 30회에 걸쳐 노변정담을 했다. ―적폐 청산과 열린 정치가 다소 상충되는 면이 있지 않습니까. “잘못을 덮어 놓고 그냥 지나가면 사회가 발전할까요? 단지 제가 아쉬워하는 건 왜 좀 넓히지 못할까 하는 거예요.” (넓히다니요?) “저쪽 사람 생각이라도 좋은 건 채택해야 하는데 딱 금을 그어 놓고…. 예컨대 이명박 전 대통령 쪽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있었던 사람이라고 하면… 그런 사람은 일절 안 쓰는 것 같아요. 이 정권이…. 거기도 좋은 사람이 없을 수가 없잖아요. 개방해서 그런 사람들을 찾아서 써야지요. 이건 (기사에) 쓰지 마이소. 마∼ 답답한 얘기 또 한다고 그럴 거예요. 하지만 그런 게 제 마음속에서 참 아쉬워요.” ―문 대통령을 최근에 만나신 게 언제입니까. “노 전 대통령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아주 특별한 일이 없으면 청와대는 가지 않아요. 작년 8월 초 대통령이 경남 진해 해군기지 안에 있는 휴양시설로 휴가를 왔는데 초대하기에… 그냥 하루 저녁만 먹고 왔지요. 문 대통령이 ‘하실 말씀이 많지요’라고 했는데 ‘없다’고 했어요.” (대통령이 듣고 싶은 말이 있었던 것 아닙니까?) “글쎄요, 이미 언론에 다 나오고 대통령 자신도 알고 있을 텐데 내가 또 말해봐야 뻔한 얘기를 또 하는 것 아니겠어요? 휴가 온 건데 좀 쉬는 게 낫지 않나 싶었지요.”※당시는 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 드루킹 사건으로 인한 노회찬 전 국회의원의 자살 등 굵직한 이슈가 연이어 터질 때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최저임금 인상 문제로 사회적 갈등이 많았습니다. “없는 사람들에게 최저임금 만 원 주자는 데 반대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현실이 안 되니까…. 줄 수 있게 정부가 만들었어야지요, 먼저…. 난 그게 참 아쉬워요. 자영업자나 중소영세기업들이 만 원을 줄 수 있는 수준으로 올려놓고, 그 다음에 올렸으면 어땠을까. 1, 2년 좀 늦어지더라도…. 그런 아쉬움이 있어요.” (대통령 만났을 때 조언을 좀 해주시지요.) “그 애긴 아까 했고…. 노 전 대통령이 가장 이루고 싶었던 세상이 공평한 사회인데 문 대통령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단지 집집마다 전부 만 원씩 받는 게 공평사회가 아니지요. 어떤 사람은 더 받고, 어떤 사람은 덜 받아도 공평하게 느끼는 게 중요한 거거든요. 그걸 이루기가… 참 어려운 일인가 봐요.” ―현 정부 들어 차관급 이상 고위공직자가 11명이나 낙마했습니다.(마침 인터뷰 전날인 28일 대통령인사수석, 법제처장 등에 대한 인사가 있었고 회전문 인사라는 비판이 일었다.) “전에 다른 데에도 ‘인사가 그렇게밖에 안 되나’ 그렇게 말한 것 같은데…. 사실 문 대통령만의 문제는 아니죠. 과거 노 전 대통령 때 사람을 추천한 적이 있는데 ‘이런저런 문제 때문에 안 된다’고 그러더군요. 결함이 없는 사람이 없는 거죠. 문 대통령한테 누굴 추천해본 적은 아직 없습니다.” ―그런 공직자의 결함이 문재인 정부만의 문제가 아니라면 왜 야당이었을 때는 그렇게 공격했던 겁니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정말 꿈같은 생각인데…. 예컨대 보수 쪽이지만 정말 좋은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을 쓴다면, 그 사람이 진보 정부를 도와주는 것 아닙니까. 보수 정부도 마찬가지겠지요. 자기 사람을 만들어 쓸 생각을 해야 할 건데…. 저쪽 편이어서 안 되고, 이래서 안 되고 그러면….” (우리 정치는 진영 논리가 너무 강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는 말이지요. 진영이 달라도 좋은 능력을 가진 사람을 데려오면, 그 다음부터 자기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게 넓어지는 거고. 쉽지는 않겠지만….” ―현 정부가 많이 지적 받는 것 중 하나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이 경찰관을 폭행하는 등 불법·폭력집회를 계속하는데도 너무 미온적으로 대응한다는 것입니다. “불법·폭력집회는 확실하게 대응해야지요. 제가 좀 노조 편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하하하.” (뜻밖입니다.) “며칠 전에 포항에서 노조 쪽 사람들을 만나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현대 같은 대기업 노동자들은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봉급 수준을 생각하면 귀족이잖아요. 그에 걸맞게 노동의 질을 높이려는 노력은 얼마나 했고, 실제로 향상되고 있는지 생각해보라고…. 노동자들도 자신이 하는 일의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몇 시간 더 일하니까 얼마 더 다오’ 이런 생각으로는 사회가 발전할 수 없지요.” (민노총은 스스로 촛불정부의 공신이라고 합니다만…) “(불법·폭력집회가) 무슨 촛불정신입니까?”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 재판이 다 끝난 뒤에는 어떻게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십니까. “3년 후면 대통령 또 바뀌잖아요. 그 다음 대통령은 자신의 임기 중에 한 일이 아니니까 좀 부담을 덜 가지고 해결할 수 있지 않겠어요.” (형량이 나오는 대로 다 옥살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정치권에는 두 전직 대통령 문제를 내년 총선과 연계한 시나리오가 난무하고 있는데요. “난 그런 건 잘 모르겠고…. 거, 저 놀고 있는 국회 좀 없애면 안 되겠어요? 하하하. 저렇게 놀면서 세비는 다 받아 가잖아요? 너무 돈이 아까워….” (민주당 사람들에게 따끔하게 얘기를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민주당 사람들 난 잘 몰라요. 노 전 대통령 추도식도 난 당일은 안 가요. 그 전에 다녀오지.” (문 대통령의 측근으로 알려진 양정철 민주연구원장은 아십니까.) “전혀 모르고…. 본 적도 없고, 어디 사람인지도 몰라요.” ―꼭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물어보시고 (대답은 할 테니) 쓰지 말아 달라고 하면 안 쓰면 되겠지요, 하하하.” (지금 적폐청산에 노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복수는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음… 문 대통령이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을 겁니다.” (대통령은 몰라도 그 아래 사람들에게서는 보이는 것 같습니다.) “거기까지는 저도 자신이 없고….” 그는 한참 동안 멈춘 뒤 말을 이었다. “지금 소위 대통령 측근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갖고 일을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2017년 11월 주네팔 한국대사관 홈페이지 ‘안전여행·생활정보’ 코너에 이례적인 공지가 떴다. 인도에서 대리모 출산이 불법화되면서 일부 한국인이 인도에서 대리모를 구해 배아를 착상시킨 뒤 네팔에서 출산해 네팔 당국이 주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사관 측은 네팔은 대리모 출산을 인신매매와 같은 수위로 처벌하고, 아이는 바로 보육원으로 보낸다고 경고했다. 지난 14년간 이 코너에 오른 공지는 100건에 불과하고, 대부분 지진 고산병주의 등 여행 관련이어서 ‘대리모 주의’ 공지는 더욱 ‘쇼킹’했다. ▷대리모 출산 문제가 국내에서도 불거졌다. 10여 년 전 한 재력가 부부의 아이를 낳은 대리모 A 씨가 출산 사실을 폭로하겠다며 돈을 요구하다 공갈, 협박 등의 혐의로 구속된 것이다. 대학생 시절 대리모 알선 인터넷 카페를 통해 부부를 만난 A 씨는 8000만 원을 받고 출산했지만 이후 돈이 필요할 때마다 협박했다고 한다. 국내에서 대리모 출산은 불법이다. 하지만 A 씨처럼 체외 수정된 부부의 배아를 자신의 자궁에 착상시켜 낳은 경우는 명확한 법 규정이 없어 브로커만 처벌받았다. ▷독일 스페인 등은 대리모가 불법이지만 영국은 비상업적으로 허용하고, 미국은 주마다 다르다. 동성 결혼을 한 엘턴 존은 대리모를 통해 아들 둘을 얻었다. 영국의 캐럴 홀록이란 여성은 불임 부부들을 돕고 싶다며 대리모로 13명을 낳았다. 대리모가 허용돼도 최소 10만 달러(약 1억2000만 원)에 달하는 출산비용이 부담인 선진국 부부 중에는 아프리카나 동유럽, 동남아시아 여성을 통해 낳기도 하는데 이를 ‘구글 베이비’라고 부른다. 구글이 본사만 미국에 두고 일은 하청으로 개도국에서 하듯, 아기도 이런 식으로 낳는 것을 빗댄 것이다. 2010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 동명의 고발 영화가 출품됐을 정도니 전 세계적으로 이미 심심찮게 벌어지는 현상인 듯하다. ▷인간의 욕망과 급격히 발달하는 기술을 윤리와 제도가 발맞춰 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2014년 태국 여성을 통해 쌍둥이를 낳은 호주인 부부는 한 아이가 다운증후군에 걸리자 정상 아이만 데리고 출국해 전 세계적인 공분을 일으켰다. 한 미국-이탈리아 레즈비언 부부는 기증받은 정자로 올 초 해외에서 각각 아이를 한 명씩 낳았는데 미국 정부가 미국 여성이 낳은 아이에게만 시민권을 줘 현재 소송 중이다. 불임이 많아지는 데다 동성 결혼까지 늘면 대리모 출산도 더 늘어날 수 있다. 아기의 몸은 가볍지만 생명은 절대 가볍지 않다. 너무도 무거운 문제가, 우리 앞에 성큼 다가왔다.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최근 에베레스트 정상 모습을 찍은 사진 한 장이 화제가 됐다. 좌우 수천 m가 넘는 낭떠러지 외길을 등반객 수백 명이 빽빽이 줄을 지어 오르는 모습에 “합성사진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다. 하지만 이 사진은 네팔 산악인 니르말 푸르자가 네팔 쪽 코스에서 정상에 오르기 위해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는 등반객의 모습을 찍은 진짜였다. 전문 산악인들도 평생의 숙원으로 여겼던 에베레스트 등정이 이제는 해마다, 특히 5월이면 일명 ‘데스 존(death zone)’이라 부르는 정상 부근 병목 지점에서 ‘교통체증’을 앓을 정도의 대중적 코스가 됐다. ▷1977년 9월 15일 산악인 고상돈이 처음으로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뒤 “여기는 정상,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다”고 한 무선 메시지에 온 국민이 환호했던 감동을 생각하면 참으로 격세지감이다. 요즘은 상업 등반업체들이 일반인도 돈만 내면 ‘어떻게 해서든지’ 정상에 오르게 해준다고 한다. 업체와 고용한 셰르파 수에 따라 다르지만 약 3만5000∼5만 달러를 내면 산소통 식량 등 짐을 다 날라주고, 크레바스에 사다리까지 놔주기 때문에 등반객은 배낭만 메면 된다. 정상까지 이르는 300여 m 외길에는 아예 로프가 설치돼 잡고 오를 수도 있다. ▷에베레스트 정상은 날씨가 좋은 날이 매우 적다. 산악인 엄홍길 대장에 따르면 과거에는 정상의 기상 예측을 감으로 하는 경우가 많아 등반 실패가 많았기 때문에 아무나, 쉽게 도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산 곳곳은 물론이고 정상에도 와이파이 공유기가 설치돼 있어 좋은 날씨가 예측되면 다같이 등반에 나선다는 것이다. ▷올해 에베레스트에서는 10명이 강풍이나 추위, 추락 등이 아닌 이 교통체증으로 사망했다. 병목 지점은 한 사람이 간신히 걸을 폭밖에 안 돼 중간에 누군가 쓰러지거나 주저앉기라도 하면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다. 보통 6시간 정도를 버틸 수 있게 산소통 2개를 준비하는데, 병목 지점에서 오래 기다리다 보면 고산병과 함께 산소 결핍으로 인한 호흡 곤란을 겪는다고 한다. ▷에베레스트 같은 고산 등반을 하려면 최소한 하프코스 마라톤을 완주하거나, 한겨울에 최소 24시간 이상 산행할 수 있을 정도의 체력이 필요하다. 네팔 정부도 초보자 고령자 장애인 등에 대한 등반 제한을 검토했지만 관광수입 감소 우려로 흐지부지됐다. 마라톤도 출전 자격과 인원수를 제한하는데 해발 8000m급 고지를 오르는 데 아무 제한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말 교통경찰이라도 배치해야 하는 것 아닌가 모르겠다.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2015년 7월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당시 노동당 제 1비서)은 김종태전기기관차연합기업소를 방문해 “한평생 인민행 열차를 타고 험한 현지지도의 길을 이어간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제1비서 생각이 갈마(번갈아)든다. 좋은 철도에 편히 모셨다면 이다지도 가슴이 아프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직접 밀어 줄 테니, 그 열차에 오르던 위대한 수령님들을 모시는 심정으로 최단기간에 지하전동차를 개발하라고 지시했다. ▷석 달 후인 2015년 10월, 자체 개발한 새 전동차를 보기 위해 다시 찾은 김정은이 갑자기 간부들에게 “오플라(opla)가 뭔지 아나?”고 물었다. 오플라는 넉 달 전인 같은 해 6월 미국 디자이너 파테메흐 바테니가 공개한 1인용 ‘스탠딩 체어’ 이름이다. 선 채로 엉덩이만 살짝 걸치는데다, 앉는 부위가 실리콘이라 미끄러지지 않아 허리에 부담이 적다고 한다. 높이도 3단계(23, 27, 31인치)로 조절할 수 있다. 답변을 하지 못해 땀을 뻘뻘 흘리는 간부들 앞에서 김정은은 오플라가 건강에 좋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듬해 1월 1일, 평양에서 이 신형 지하전동차가 운행을 시작했다. 전에 없던 노약자석과 임산부석을 만들고, 자칭 인민 친화적으로 손잡이와 의자를 분홍색으로 칠했지만 당시 북한이 공개한 홍보영상과 지난해 일본 교토통신이 공개한 평양 지하철 영상에 오플라 의자는 없었다. 김정은이 당시 시찰에서 “전동차가 미남자처럼 잘생겼다”며 전체적으로는 만족한 걸 보면 크게 문제 삼지는 않았던 것 같다. ▷바테니의 오플라는 당시 한국에도 거의 소개되지 않은 디자인이었다. 허리 디스크 등을 예방하는 기능성은 있지만 1인용이라 많은 사람을 대량 수송해야하는 대중교통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간부들이 알았더라도 이미 완성돼 김정은이 시운전 행사까지 참여한 전동차 내부를 다시 뜯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김정은이 최신 트렌드인 ‘오플라’를 어떻게 알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영국 BBC의 자동차 오락프로그램인 ‘탑 기어’를 즐겨봤고, 수 천만 원짜리 고급술과 명품 시계, 요트 등에 대한 지식도 상당하다니 그런 트렌드를 접하다 알았을 지도 모른다. ▷철도 사정이 열악한 북한에서는 평양~함경북도 청진(약 700㎞)까지 공식열차 시간표 기준으로 27시간 43분이 걸린다. 의식주도 최빈국 수준이다. 김정은 스스로 “흰 쌀밥에 고깃국은 위대한 수령님과 장군님의 평생 염원”이라고 한 게 불과 두 달여 전이다. 나라는 식량 원조를 받아야 할 처지고 교통 인프라는 세계 최하 수준으로 낙후됐는데, 최고지도자는 최신형 의자 스타일을 꿰면서 이를 강조하니 뭔가 어색하다.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이런 중차대한 시점에 노사 간 대립은 함께 죽는 길이다. 윈윈(win-win) 방법을 찾아야 한다.” 최근 울산에서 열린 미래차 시대 관련 토론회에서 발표자로 나선 현대자동차 노조의 한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미래차 시대가 어떻기에 강성인 현대차 노조 간부까지 ‘상생’을 말하는 걸까. 이계안 대통령직속 일자리위원회 미래차 대응 태스크포스(TF)팀 위원장은 “미래차 시대가 우리 사회를 어떻게 바꿔놓을지, 축복일지 재앙일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다. 현대맨 출신인 그는 현대석유화학 상무, 현대건설 부사장, 현대자동차 사장 등을 역임했고, 17대 국회의원(당시 열린우리당)을 지냈다.》 ―문재인 대통령이 미래차를 시스템반도체, 바이오헬스와 함께 3대 신성장 기둥이라고 했는데, 미래차란 정확하게 어떤 것을 말하는 건가. “하하하. 아직은 잘 모른다. 세계적으로도 ‘이것이 미래차다’라는 정의는 아직 없다. TF에 참여하면서 어느 정도 정부가 가진 그림은 있을 것 같아 보여 달라고 했는데 이런저런 개념은 있는데 딱히 ‘이거다’라는 건 없다고 하더라. 자율주행과 전기화, 차량 공유경제 등을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많이 부족하다. 첨단 자동차 시대로만 생각하면 안 된다. 미래차와 함께 격변할 인류의 산업지도와 삶 전체를 포괄해 생각해야 한다.” (설명이 너무 어려운 것 같다.) “숱한 발명품 중에서 여성 해방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세탁기라고 한다. 가사노동에서 해방시켜 줬으니까. 자율주행시대가 오면 사람은 그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까? 차량 공유경제는 자동차 소비를 크게 줄일지도 모른다. 그 이후 산업과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 이런 광대한 변화까지 포괄해야 하다 보니 정의 내리기가 쉽지 않다.” ―정부가 그런 중장기 고민을 위해 TF를 만들었다는 건가? 보기 드물게 기특한데…. “지난해 말 핫이슈였던 광주형 일자리 문제를 대통령일자리수석이 담당했다. 나도 관여하고 있었고…. 또 경제수석실은 수소연료전지차를 담당했는데 둘 다 결국 현대·기아자동차가 상대였다. 그래서 내가 대학 동기동창인 이목희 일자리위원회 부위원장(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이걸 통합하면 더 포괄적인 접근을 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포괄적인 접근이라니?) “광주형 일자리를 단순히 값싼 노동자를 고용해 차를 만드는 걸로 보지 말고, 다가올 미래차 시대에 노사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선도적인 모델로 만들자는 것이다. 수소차는 자동차 연료를 바꾸는 것을 넘어 인류의 에너지 공급원이 바뀌는 데까지 확산될 수 있다. 각각의 문제를 개별적으로 다루지 말고 이런 더 큰 목적과 방향을 갖고 통합해 접근하자는 취지였다.” ―일자리위원회 아래 있는 이유가 자동차 산업 근로자의 구조조정에 대비하기 위해서인 것처럼도 보이는데…. “별도의 총괄 컨트롤타워를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일자리위원회 아래에 있으니까 마치 미래차로 인한 일자리만 다루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대통령이 위원장인 이 위원회를 잘 활용하면 더 효율적으로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부처 간 의견 조정, 자료 요구 등도 대통령 이름으로 하면 훨씬 수월할 테니까.” ―전기차, 자율주행차 이야기는 많이 나왔는데 왜 지금 미래차가 중요해진 건가. “유럽연합(EU)이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지난해 말 2030년까지 신차(승용차 기준)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2021년 대비 37.5% 감축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2021년까지 EU에서 파는 모든 신차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km당 95g을 넘으면 안 된다. 그 5년 후는 81g, 또 5년 후는 67g 이하로 낮춰야 한다. 가솔린은 말할 것도 없고, 디젤차로는 도저히 이 기준을 맞출 수 없다. 그래서 아예 전기차, 수소연료전지차로 전환할 수밖에 없게 된 거다. 그리고 이 전환이 다시 더 큰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고….”※독일 폭스바겐은 2026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내연기관차 개발을 하지 않고, 2040년부터는 내연기관차를 팔지 않겠다고 했다. 다임러와 BMW도 2025년까지 전기차 25종을 출시하겠다고 예고했다. ―더 큰 변화란 에너지 생산 기반의 전환을 말하는 건가. “그렇다. 궁극적으로 환경오염을 막기 위해 화석연료를 쓰지 말자는 것이다. 그런데 전기는 클린에너지지만 전기 생산과정에서 화력발전은 미세먼지를 발생시킨다. 현 정부는 탈원전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수력발전은 비중이 작고 댐을 만들면 또 환경 파괴가 생긴다. 액화천연가스(LNG)는 너무 비싸고…, 결국 미래차 시대는 에너지 기반을 태양광, 풍력 등 신재생 에너지로 바꾸는 계기가 될 수밖에 없다.” ―신재생 에너지는 안정적 공급이 어렵고, 우리는 국토가 좁아 태양광에 불리하지 않나. “물론 우리나라는 신재생 에너지를 생산하는 데 불리하다. 하지만 국내에서 직접 생산하는 것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우리 윗세대는 철도, 기술도 없었지만 포스코(포항제철)를 만들었다. 내가 1988년 현대석유화학에서 공장 만들 때 책임자였는데, 그때 화공과 출신들이 미쳤다고 했다. 원료도 기술도 없는데 어떻게 만드느냐고…. 지금 우리가 가장 많이 수출하는 것 중 하나가 석유화학 제품이다.” ―전기를 사온다는 건가. “얼마 전 남호주 정부 사람을 만났는데 한국이 전기를 사가면 어떻겠냐고 묻더라. 호주는 광활한 땅을 이용해 태양광 전기를 엄청나게 생산한다. 포항제철과 석유화학처럼 전기도 못 할 게 뭔가. 일본은 내년 도쿄 올림픽을 수소에너지 사회로 전환하는 계기로 삼기 위해 예산과 인프라를 늘리고 있다. 우리는 석유 석탄 우라늄 등 에너지 원료의 97%를 수입하는데 그걸 전기로 바꾸면 안 될 게 뭔가.” ※일본은 올해 수소에너지 사회 구축을 위한 예산을 지난해보다 33% 늘렸다. 2030년까지 수소 가격을 3분의 1로 낮춰 내수시장을 형성하고, 다시 전 세계로 수출한다는 전략이다. ―정부가 미래차를 위해 각종 지원을 하면 결국 현대·기아차가 가장 큰 수혜자가 되는 것 아닌가. 더욱이 당신은 현대차 사장 출신인데…. “정부가 그런 지원을 하면 현대·기아차가 가장 크니 결과적으로는 가장 큰 이득을 보긴 할 거다. 하지만 이게 전체 국가를 위한 투자이지 개별 회사에 특혜를 주자는 게 아니지 않나. 경부고속도로를 만들어주면 현대차가 특혜를 본다는 식인데…. 개별 회사가 그 엄청난 에너지 인프라를 깔고, 전기를 수입할 수는 없지 않나. 일본이나 미국은 자동차 회사가 많으니까 각자 전기차든, 하이브리드차든, 수소차든 맡아서 한다. 그런데 우리는 현대·기아차 혼자 다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정부에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데 정치권이나 정부에서는 미래차가 신성장 동력이라고 하면서도 ‘현대차 돈만 벌어주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혹자는 현대차를 위해 국가 예산을 쓴다고도 한다. 더욱이 정치권이든 현대차 사람들이든 두려워하는 게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적용한 직권남용죄 때문에 나중에 세상이 바뀌면 자신들도 그렇게 될까 봐 몸을 사린다.” (실제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나?) “실제로 있다.” ―당신이 위원장이 된 이유가 뭔가? 현대차 사장 출신이어서인가. “형식적으로는 TF 위원들이 투표 같은 걸 했지만…. 내가 위원들에게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이 20년 주기로 큰 위기를 맞고 살아난 과정을 이야기했다. 1979년 2차 오일쇼크로 국내 자동차 산업이 구조조정 위기를 맞았을 때, 현대가 반대로 30만 대 생산공장을 지어 성공한 것, 1998∼99년 외환위기 직후 현대도 정리해고를 해야 할 정도의 상황이었지만 역으로 기아차를 인수한 것 등이다. 기아차 인수할 때 내가 현대차 기획조정실장(사장)으로 책임자였고 인수 뒤에는 현대차 사장을 했다. 다시 20년이 지난 2019년 지금도 그때 같은 위기이자 기회인 때가 왔다고 말했는데 위원들이 그럼 그 경험을 살려 당신이 해보라고 하더라. 어떻게 하다 보니 현대에서 오일뱅크 인수에도 관여했고, 현대중공업에서 석유화학 공장 만드는 것도 하다 보니 좀 이것저것 에너지에 대해 알게 된 것도 있고….” ―미래에 전기차, 자율주행차 시대가 올 거라는 건 오래전부터 예상됐던 일 아닌가? 왜 미리 준비하지 못하고 이제 와서 늦었다고 그러는 건가. “사실 늦었다고는 하지만 늦었는지 아닌지 알 수는 없다. 우리가 세계 자동차 시장을 선도하는 위치가 아니고, 기존 시장에 뛰어드는 입장이라 뭘 먼저 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고…. 우리가 게을러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그렇다.” ―미래차 시대가 축복일지 재앙일지 알 수 없다고 했는데…. “전기차, 자율주행차 등 새 기술로 인한 일자리는 물론 생긴다. 좋은 부분도 있다. 하지만 전기차는 내연기관차보다 부품이 40% 정도 적다. 여기에 차량 공유경제가 접목되면 차를 안 사는 사람이 많아질 테니 생산량도 줄게 된다. 일자리가 준다는 뜻이다. 부품업체, 하청업체, 카센터, 주차장 등 차와 관련된 분야는 물론이고 건축설계나 관련 제도 등 파생적으로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른다. 축복일지 비극일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피해 갈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정부는 카풀 문제도 제대로 해결 못 하는데…) “그렇게 되면 그것도 재앙이고….”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빙속 여제’ 이상화(30)의 허벅지에는 얼굴처럼 선글라스를 끼울 수 있다. 허벅지 둘레가 약 60cm에 달해 웬만한 마른 여성의 허리둘레 정도 되기 때문이다. 이는 피나는 훈련의 결과물이다. 보통 여자 선수들은 스쾃을 120∼140kg 정도로 하는데 이상화는 170kg가량으로 했다. 폭발적인 스타트 훈련은 초등학교 동창이자 같은 스피드스케이팅 선수인 모태범과 함께 했다고 한다. ▷이상화는 애초에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만 운동을 하고 그만둘 뻔했다. 부모님으로서는 같은 운동을 하던 오빠(이상준)까지 둘을 지원하기 힘들었던 것. 하지만 계속 스케이트를 타고 싶다는 동생을 위해 상준 씨는 대신 운동을 포기하며 어머니께 “상화 뒷바라지 잘해 주세요”라고 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집 지하실에 작업공간을 차려 봉제 일을 하며 딸의 운동을 지원했고, 새벽마다 도시락을 들고 연습장을 찾았다. 밴쿠버, 소치 겨울올림픽 500m 2연패, 평창 겨울올림픽 500m 은메달, 그리고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는 2013년 월드컵 2차전에서 세운 500m 세계신기록(36초36)…. ‘살아 있는 전설’ 이상화의 기록은 이처럼 피나는 노력과 가족들의 헌신적인 배려로 만들어졌다. ▷이상화가 16일 은퇴식을 갖고 선수생활을 마무리했다. 화려한 영광 뒤엔 일반인은 상상도 하기 힘든 중압감이 있었다. 경기도 하기 전에 모두 금메달로 정해 버려 밤새 잠도 못 자고 벌벌 떨어야 했고, ‘반짝 금메달’이란 말을 듣기 싫어 올림픽이 끝나자마자 다음 올림픽까지 내리 4년간 훈련만 해야 했다. 특히 지난해 평창 올림픽을 앞두고는 극심한 부진에 빠졌었다. 고질적인 무릎·종아리 부상에 시달렸고 하지정맥류 수술을 받기도 했다. “마음은 나가는데 발끝이 떨어지지 않는다”며 가족에게 울고불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화는 절치부심했다. 초반 100m 추진력을 높이기 위해 10년 이상 써 온 금색 날을 높이가 낮은 파란색 날로 교체했다. 평창에서 은메달을 딴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하루 7차례 울리게 맞춰 놓은 알람을 꺼버린 것이었다. 기상, 오전·오후 훈련 등 하루를 철저히 설계했던 이상화는 은퇴식에서 눈시울이 붉어졌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 2000년 전국동계체전에서 남자 선수나 여자 중학교 선수들을 능가하는 대회신기록을 세우며 초등부 500m, 1000m를 석권한 뒤 근 20년간 한국 빙속의 신화를 써오면서 어린 소녀, 젊은 아가씨가 감내해야 했던 중압감과 의지, 투혼이 느껴져 국민들도 마음이 찡했고, 고마웠다.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우리는 인간의 변화 가능성에 대해 얼마나 믿음을 갖고 있을까. 범죄에 대한 처벌은 어느 선까지가 타당한 것일까. 피해자를 대신해 속이 후련할 정도로 처벌하는 게 맞을까. 아니면, 사람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 교화에 무게를 둬야 하는 걸까. 혹시나 답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지난달 22, 23일 경기 수원구치소에서 교도관 체험을 했다. 그곳은 ‘밖’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요즘 콩값 비싸서… ‘콩밥’ 못줘요” 구치소는 재판 중인 사람들이 형이 확정될 때까지 수감되는 곳이다. 하지만 수용 문제 때문에 구치소에도 기결수가 있고, 교도소에도 미결수가 있다. 지상 8, 9층짜리 2개 동으로 구성된 수원구치소에는 1700여 명이 수감돼 있다. 대부분 수원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는 미결수들인데, 내란 선동 등의 혐의가 확정된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57)이 6년째 수감 중이고, 최근에는 마약 투약 혐의로 남양유업 창업주 외손녀 황하나 씨(31)가 들어왔다. 교도관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마침 TV에 황 씨와 함께 마약 투약 혐의를 받고 있는 가수 겸 배우 박유천 씨(33)가 나왔다. “저분도 곧 여기 오나요?” “경기남부지방경찰청에서 수사하니까… 아마도….”(박 씨는 3일 합류했다.) 경기 의왕시에 있는 서울구치소는 ‘범털’, 수원구치소는 ‘개털’이 주로 수감된다는 속설이 있는데 어느 정도는 맞지만 특별한 이유는 없다. 서울구치소에는 서울중앙지방법원 사건 피의자들이 수감되는데 서울지법에서 재벌, 정치인 등 중요 인물 사건을 많이 다루기 때문이다. 서울구치소에는 현재 박근혜 전 대통령이 수감돼 있고 노태우 전 대통령,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 김경수 경남도지사 등도 이곳 동문들이다. 수감자들이 먹는 식사 그대로 저녁을 먹었는데 ‘콩밥’이 아닌 ‘찐밥’과 돈육제육볶음, 상추쌈이 나왔다. “저, 콩밥은 안 줍니까?” “요즘 콩이 비싸서… 못 줘요.”(올 1분기 콩값은 전년 같은 기간 대비 21.4% 올랐다.) 수감자들은 자기 방에서 배식을 받아먹는다. 기상은 오전 6시 반이고, 오후 9시 반 이후는 취침. 미결수는 작업이 없기 때문에 방 안에서 TV나 책을 보며 자유롭게(?) 지낼 수 있다. 가수 정준영이 경찰서 유치장에서 만화책을 보며 지낸다는 뉴스가 있었는데, 모든 미결수에게는 무죄 추정의 원칙이 적용되기 때문에 19금 등의 문제만 없으면 만화책도 반입이 가능하다. 단, 공간이 좁아 1인당 약 30권 정도만 허용된다고 한다. 구치소에도 도서관이 있어 책을 빌려주는데 소설보다 ‘분배의 실패가 만든 한국의 불평등’ ‘한국의 소수자 운동과 인권정책’ ‘이중섭 평전’ 등 수준 있는 책이 더 많았다. ―수감자들이 이런 책을 본다고요? 전시용 아닙니까? “심심하니까요. 어려운 책 많이 봐요. 그래도 가장 많이 보는 책은 국어사전과 옥편이죠.” (왜요?) “법률 용어가 어렵잖아요. 재판 준비하느라….” ‘장첸’같은 미결수 7, 8명이 등뒤에 엄중 계호 수용동 순찰 시간. 일명 ‘징벌방’인데 수감 중 물의를 일으킨 사람들만 따로 모은 곳이다. ‘감방’에서 또 무슨 사고를 칠까 싶지만 워낙 다양한 인간들이 모이다 보니 별의별 일이 다 생긴다고 한다. 과거에는 요구르트 구입이 가능했는데 재소자들이 요구르트에 빵을 넣어 발효해 술을 만들어 마신 뒤로는 금지됐다. 알갱이가 600개라 콘택 600이다, 아니다를 놓고 싸워 징벌방에 들어온 경우도 있다. 내기를 걸고 셌는데 600개가 안 되자 진 쪽이 분해서 때렸다고 한다. 자살 기도는 물론이고 스스로 못이나 바늘을 삼키는 자해도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지나가는 교도관에게 침을 뱉거나, 수감자들끼리 싸우는 경우도 많다. 이런 사람들을 징벌 차원에서 혼자 또는 2인으로 수감하는 곳이다. 여기서는 면회는 물론 TV 시청도 금지된다. ‘감방’ 속의 ‘감방’인 셈인데, 다른 수감자들과 부대끼지 않아 선호하는 사람도 일부 있지만, 대부분은 견디기 힘들어한다고 한다. 잠시 들어가 본 징벌방 벽에는 ‘×같다 징벌방, 다신 안 온다’ ‘3월 28일 징벌방 출소일. 부러워하지 마라 시간 금방 간다’는 등의 낙서가 가득 적혀 있었다. 나가 봐야 다시 원래 있던 감방으로 돌아가는 것뿐인데도 이렇게 나가기를 염원하다니…. 일반 수용자는 낮 동안은 면회, 재판 출석, 의료실 이용, 상담 등으로 이동이 많다.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영화 ‘범죄도시’의 장첸 같이 생긴 미결수 7, 8명이 안에 있었다. 왠지 뒤에서 누군가 머리를 내리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살인마 오원춘도 이곳을 거쳐 갔다고 한다. 재소자 관리는 마약범이 가장 어렵다고 한다. 이들은 ‘남한테 피해 준 것도 아니고 내 몸에 한 건데 뭐가 잘못이냐’며 죄를 지었다는 생각을 잘 안 한다는 것. 또 구치소에서는 약을 할 수가 없어 정신상태도 다소 불안하다고 한다. 황 씨는 어찌 지내고 있는지…. 여성 수감자들은 3, 4층에 있는데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징벌방을 담당하는 류주형 교위는 “폭력범들은 초등학교 5학년 남학생처럼 으스대는 자기 과시욕이 많고, 절도범들은 의외로 대범하다”며 “‘욱’ 해서 저지르는 범죄 유형일수록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도 잘한다”고 말했다. 수감되면 대부분 마음이 굉장히 좁아진다고 한다. 식사 시간에 고기 한 점 더 먹었다고 주먹다짐도 일어난다는 것. ‘설마’ 했는데 실제로 다음 날 기상 시간 직전에 ‘마약방’(마약 사범만 있는 방)에서 싸움이 일어났다. 10분 더 남았는데 깨워서란다. 불안감도 특징인데 형이 확정되지 않은 탓도 있고, 밖에 있는 애인이나 아내가 변심할까 봐 걱정하는 것도 이유라고 한다. 그래서 거의 매일 편지를 쓰는 사람이 많은데, 겉봉에 무지개색으로 만화를 그리고, 우표로 꽃을 만들어 붙인 것도 있었다. 자신이 이만큼 신경 쓰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무심코 보고 있는데 등기로 신청한 편지 겉봉에 쓰인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만약 아무도 받지 않는다면, 대문 옆 ○○○에 놓아주세요.’ 의료실 이용도 잦은데, 교도관 말로는 수감자들은 자기 몸을 끔찍이 챙기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작은 뾰루지지만 “혹시 잘못되는 것 아니냐”며 의료실 진찰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진찰을 받으려면 방에서 나올 수 있어 이것도 이유라고 한다. 국가마저 처벌로만 다룬다면… 상상하기 힘든 끔찍한 강력·흉악범죄가 빈번해지면서 이들에 대한 처벌과 사전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교화와 인권을 위해 수용시설을 개선해야 한다고 하면 “범죄자가 죗값을 받아야지 무슨 처우개선이냐”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야간 순찰을 마치고 잠시 쉬는 시간. 매일같이 범죄자를 보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일지 궁금해 동행한 이희관 교위에게 물었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강한 처벌과 열악한 처우로 죗값을 치르게 한다는 게 결국 복수를 의미하는 것 아닌가요.” ―피해자가 있는데…. 처벌에 복수의 개념도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죽을 때까지 가둬 놓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나올 사람들인데…. 가혹한 처벌만 받고 달라진 게 없다면…. 그래서 우리가 얻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요.” 온갖 범죄자를 보다 보니 그도 인간성에 회의를 느낀 적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눈물로 참회했던 사람이 출소 뒤 가족보다 더 옥바라지를 도운 지인을 돈 때문에 살해해 다시 들어오는 걸 본 적도 있다고 했다. “강력·흉악범일수록 어릴 적부터 가족과 주변에서 버려지고 학대받은 경우가 많아요. 이런 사람들은 마음속에 늘 분노가 잠재돼 있고 언젠가 터져 나오지요. 가정 학교 사회에서 충분히 사랑받지 못해서 그런 건데, 가장 마지막 보루인 국가마저 처벌로만 다룬다면….” 철문을 나섰다. 담장 하나 차이인데 공기가 완전히 다르게 느껴진다. 매일 출퇴근하는 교도관들도 똑같은 기분을 느낀다고 한다. 현재 전국 교정시설에 수용된 기·미결수는 약 5만 명. 사람이 얼마나 바뀔 수 있을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포기해선 안 되는 것은, ‘사람은 바뀔 수 있고, 우리는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 믿음은 배신당할 때가 더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수많은 전쟁과 범죄를 겪으면서도 거꾸로 가지 않은 것은 바로 이 마음 때문이 아닐까. 많은 비용이 들어감에도 그들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은, 교화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이 믿음을 잃지 않기 위해서가 아닐는지.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