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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K옥션이 개최하는 ‘전재국 미술품 컬렉션’은 지난해부터 이어진 전두환 전 대통령 추징금 환수 마지막 경매다. 하지만 미술계는 그 역사적 상징성과 별개로 이번 경매에 관심이 크다. ‘꽃의 화가’ 김홍주 목원대 명예교수(69)의 작품이 대거 25점이나 나왔기 때문이다. 김 교수의 작품은 신라호텔 로비에 걸린 꽃 그림(실제 제목은 모두 ‘무제’) 외엔 난도가 무척 높다. 특히 인물화 풍경화가 다수인 초·중기 작은 “이래서 화가들이 사랑한 화가구나”라며 머리를 긁적이게 만들었다. 대단한 듯한데 선뜻 좋단 소리는 나오질 않는다. 하지만 왠지 모를 낯선 독특함은 여운이 길었다. 한 관계자는 “전 씨가 김 교수의 시대별 작품을 이만큼 모은 걸 보면 미술관 설립을 꿈꿨다는 소문이 사실인 것 같다”고 말했다. 딴 건 어려워 그냥 넘겨도 꽃 그림 4점을 동시에 보는 황홀경은 놓치기 아깝다. 작품당 최소 추정가가 3000만 원이니 입맛만 다실 뿐이지만. 11일까지 서울 강남구 신사동 K옥션 전시장. 02-3479-8888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제가 한번 먹어보겠습니다.” 지난해 유행어라면 뭐가 있을까. 다양한 의견이 나오겠지만, 채널A 프로그램 ‘먹거리 X파일’을 진행하는 이영돈 PD의 한마디도 꽤나 회자됐다. 아울러 방송이 선정한 ‘착한 식당’은 방송 때마다 포털사이트 검색어에 오르곤 했다. 개인적으로 착한 떡집에 혹해 전화를 걸었다가 몇 개월 뒤까지 주문이 찼다는 답에 절망했던 적도 있다. 어쩌면 이는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먹거리에 관심이 큰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일 뿐이다. TV 채널마다 근사한 맛집과 음식을 다루는 정보물을 틀지 않는 데가 없다. 심지어 요리 대결 서바이벌에 ‘먹방’이란 신조어도 자연스러워졌다. 허나 아이러니하게도 이토록 열망이 큰 풍조와는 어울리지 않게 직접 요리에 들이는 노력은 갈수록 적어지고 있다. 책에 따르면 미국 가정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시간은 1960년대보다 절반 이상 줄어서 하루 평균 27분밖에 되질 않는다. 한국도 별반 다르지 않다. 주위를 둘러봐도 즉석식품이나 배달요리에 대한 의존도는 갈수록 커지는 추세다.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교수인 저자는 줄기차게 음식문화를 다룬 책을 써온 인물. 특히 2008년 동아일보 올해의 책 10에 선정되기도 했던 ‘잡식동물의 딜레마’(다른세상)는 큰 화제를 모았다. 잡식성인 인간은 오랫동안 시행착오를 겪으며 안전한 식탁을 마련했다고 믿었으나, 그 뒤에 가려진 ‘음식사슬’의 구조적 폐해를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그런 저자가 이번엔 직접 요리에 뛰어들었다. 현대사회가 지닌 ‘요리의 역설(cooking paradox)’ 기저에 깔린 실체를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요리 자체에선 멀어지면서 착한 음식에 대한 갈구는 커져가는 현실 속에서, 몸으로 요리를 겪어가며 그 본질을 탐구하려는 욕심이었다. 책에선 인류의 요리법을 4가지 요소로 구분한다. 고기나 생선을 굽는 ‘불’과 무언가를 담아 끓이거나 조리는 ‘물’, 서양인의 주식인 빵을 만드는 데 핵심인 ‘공기’, 그리고 저자가 차가운 불이라고 부르는 발효를 다룬 ‘흙’이다. 고대 서양에서 만물을 구성하는 4원소라고 믿었던 요소를 요리에 접목한 것이다. 저자는 1년 넘게 공들인 취재와 체험을 사회문화사에 비춰가며 쫄깃쫄깃하게 버무려놓는다. 예를 들어, 불은 인류가 가장 먼저 발견한 요리법이자 인간을 동물과 구분 짓는 결정적 계기였다. 날것을 먹느라 소비하는 생체에너지와 시간을 줄여 문명의 발전에 투입할 여력을 얻었다. 또한 야외에서 함께 고기를 굽는 문화는 인류가 신께 제물을 바친 뒤 이를 나눠먹는 종교적 의례가 기원이다. 동물을 구워 그 영혼(연기)은 하늘에 바치고, 신이 허락한 잔해를 먹는다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 불은 인간이 신과 자연 가운데 위치하도록(맘껏 동물을 잡아먹을 수 있도록) 철학적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면죄부가 됐다. 저자는 더 나아가 통돼지 바비큐 전문가를 찾아 직접 요리 현장을 겪어본다. 바비큐는 미국에서 남부 흑인문화의 역사가 고스란히 배어 있는 전통 요리로 대접받는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우리가 먹는 고기는 대부분 잔인한 대량사육의 결과물이며, 숯이나 소스는 더이상 복합화학성분이 빠지지 않는다. 물론 최근 이에 대한 대안으로 ‘옛 방식’을 찾는 이가 늘고 있지만, 이는 비용과 시간이 갑절 이상 든다. 잡식동물의 딜레마는 여전히 우리를 옭아매고 있다. 다소 냉소적으로 흘렀지만, 사실 이 책은 그 절망의 한계를 뛰어넘는 희망을 요리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특히 흙, 발효는 저자가 가장 깊이 끌린 요리법이다. 여러 난관이 있지만 인간은 직접 요리하는 ‘문화적 창조’를 통해 오감을 깨우고 자연이나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을 배운다고 자신했다. “(요리를 다루는 사람들은) 자신이 자연과 생생한 대화를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일들은 발효에 참여한 살아있는 생물들과의 작업이다. … 우리가 성공을 거두려면 그러한 관계를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 특히 저자는 발효음식의 세계적 대표주자 ‘김치’에서 큰 감명을 받는다. 김치를 알려고 한국까지 찾아오는데, 이연희라는 분에게 김장을 배우며 요리가 지닌 본질을 깨닫는다. 이 씨는 “맥도널드 햄버거도 입맛은 있다. 하지만 한국인에겐 손맛이 더 중요하다”고 일러준다. 손맛이 뭔지 몰라 당황하던 저자는 자신의 체험을 되짚어가며 그 깊은 의미를 알아차린다. 음식에 들어가는 정성과 생각, 개성이 한데 버무려진 맛. 요리는 인간을 북돋우는 치료제였던 것이다. 거대산업과 현대문명에 휩쓸려 자신을 잃어버렸다고 고민하는 이들이여. 얼른 주방에 들어가 요리하라. 인간은 호모 ‘요리’쿠스였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높다란 뿔 하나가 창공에 꽂혀 있어/남쪽 땅 진압하는 그 기세 당당하네/두힐(전라 나주 지역 백제시대 지명)로 봉했던 곳 청해 안이 거기더냐.’(다산 정약용·1762∼1836의 시 ‘월출산 정상에 올라서·登月出山絶頂’에서) 전남 영암군에 있는 월출산은 예부터 영험한 기세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조선 지리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선 ‘작은 금강산’이라 불렀으며 정약용은 물론이고 기대승(1527∼1572) 이유원(1814∼1888) 등 여러 문인이 글을 남겼다. 특히 다산과 친분이 깊던 초의선사(1786∼1866)는 1812년 그린 ‘백운동도(白雲洞圖)’에서 월출산의 뾰족한 봉우리 생김새를 잘 표현했다. 문화재청은 최근 월출산처럼 충청 전라에서 역사적 향취가 담긴 장소를 모은 종합보고서 ‘고서화 고문헌 등에 나타난 명승자원 발굴조사’를 발표했다. 국가지정문화재인 명승은 그간 경관적 요소를 중시했으나 앞으론 옛 글과 그림의 흔적을 좇아 ‘인문학적인 스토리텔링’도 발굴해 선정 기준으로 삼겠다는 의도다. 이번 조사에서 월출산과 함께 뽑힌 우선지정대상 가운데 전북 부안군 봉래곡 직소폭포도 눈에 띈다. 구한말 우국지사 송병선(1836∼1905)은 직소폭포를 “설악산 구룡폭포나 개성 박연폭포와 비교해도 손색없다”고 극찬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이 소장한 표암 강세황(1713∼1791)의 ‘우금암도(禹金巖圖)’에는 보이는 대로 담은 폭포 물결이 춤을 춘다. 이 밖에 △대전 동구 남간정사(南澗精舍) △충북 영동군 황간 한천팔경(寒泉八景) △전남 구례군 오산 사성암(四聖庵) 인근도 우선지정대상 명승 자원으로 선정됐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지금까지 국내 하나밖에 없는 것으로 알려진 조선시대 왕의 나들이용 접이식 의자인 ‘용교의(龍交椅)’가 경매에 나왔다. 고미술품 경매사인 ㈜마이아트옥션은 26일 “다음 달 열릴 제12회 경매에 조선 왕이 야외에서 사용하던 용교의가 출품된다”고 밝혔다. 높이 108cm의 이 나무의자는 피나무 소재에 금색이 가미된 붉은색 주칠(朱漆)을 칠하고 금장식을 입힌 왕의 전용 의자. 왕세자는 흑칠(黑漆) 가구를 썼다. 등받이에는 네 발가락 용 한 쌍이 여의주를 감싼 문양판이 있으며, 바닥은 호피로 만들어졌다. 의자 다리는 X자로 교차를 이뤄 접을 수 있다. 조선 왕실 의자가 경매에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용교의는 그동안 국내에선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용교의 하나만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사한 유물도 조선 현종이 1669년 문신 이경석(1595∼1671)에게 하사한 궤(의자)밖에 없다. 김정민 마이아트옥션 경매사는 “출처는 밝힐 수 없으나 조선 왕실 후손 쪽과 관련 있다”며 “최저가 5억 원부터 경매가 이뤄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설명했다. 이번 경매에는 역시 궁궐에서 사용하던 10폭 병풍그림 ‘요지연도(瑤池宴圖·360×149cm)’도 출품됐다. 도교 여신인 서왕모가 사는 곤륜산의 요지에서 열린 연회 모습을 담은 것으로 왕실의 번영과 장수를 기원하는 뜻을 지녔다. 지난해 6억6000만 원에 낙찰된 10폭 병풍그림 ‘해상군선도(海上群仙圖)’는 이 연회 장면의 일부를 그린 것이다. 현재 요지연도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92호로 지정된 8폭 병풍을 비롯해 15점 정도가 전해진다. 경매 가격은 6억 원으로 추정된다. 이 밖에 현재 심사정(1707∼1769)이 그린 ‘수하선인도(樹下仙人圖)’와 위창 오세창(1864∼1953)이 보관함에 ‘단원 김홍도 필적’이라고 쓴 ‘추성부도(秋聲賦圖·보물 1393호인 리움 소장 ‘추성부도’와 다른 작품)’도 나왔다. 다음 달 6∼12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5길 공아트스페이스에서 전시되며, 13일 오후 5시 같은 장소에서 경매가 이뤄진다. 02-735-9938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현대식 복식부기’인 19세기 ‘개성 복식부기 장부’가 등록문화재가 됐다. 문화재청은 26일 “근대기 개성 지역에서 활동했던 박재도(朴在燾) 상인 집안의 회계 장부 14책과 다수의 관련 문서를 등록문화재 제587호로 지정했다”고 밝혔다. 이 장부는 25년(1887∼1912년) 동안 거래한 내용 약 30만 건이 기재돼 있는 데다 현대적 회계 방식과 거의 일치하는 복식부기로 작성돼 있다. 후손인 박영진 씨가 소장한 이 문화재는 지난해 전성호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의 연구 결과를 본보가 단독 보도하며 알려졌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아무리 제주라 해도 칼바람이 불었을 지난달, 강요배 작가(62)는 목탄 하나 손에 쥐고 삼성혈로 나섰다. 옷깃 여며가며 돌하르방 하나 쓱쓱. 담배 한 대 피우고 또 하나 뚝딱. 대정골 보성골 관덕정까지 넘나들며 한나절 만에 돌하르방 12점을 그렸다. “수십 년 마주쳤어도 직접 그려보니 그 기(氣)가 다릅디다. 소묘는 그런 날것의 싱싱함이 살아있죠.” 서울 종로구 학고재갤러리 본관에서 열린 개인전 ‘강요배 소묘 1985∼2014’엔 실제로 그런 활어회 같은 작품이 즐비하다. 모두 53점이 소개됐는데 “전시할 거라곤 생각도 못했던” 스케치인지라 다소 투박한 것도 있다. 하지만 1980년대부터 민중화가로 명성을 얻은 작가의 내밀한 속내를 들여다보는 기분이 들어 꽤나 감칠맛이 났다. 특히 ‘해금강’ ‘만폭동’을 비롯해 1998년 방북 때 그렸다는 작품들은 빠듯한 일정이었다는데도 상당히 인상적이다. 2000년에 그렸다는 인물 소묘들은 당시 북한 주민을 만났던 기억을 되살려 작업한 것. 전체적으로 풍경이나 정물 작품들도 뛰어나지만, 돌하르방이나 인물 소묘에서 불거지는 ‘무심(無心)하되 다심(多心)한’ 표정들이 발길을 잡는다. 3월 30일까지. 02-720-1524정양환 기자 ray@donga.com}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소장 임지현)는 제1회 ‘국경을 넘는 어린이·청소년 역사책’ 수상작으로 어린이 부문 대상 ‘우리 역사에 뿌리내린 외국인들’(해와나무)과 장려상 ‘제술관을 따라 하루하루 펼쳐보는 조선통신사 여행길’(그린북), 청소년 부문 장려상 ‘십대를 위한 동아시아사 교과서’(뜨인돌)를 선정했다. 초국적 역사 이해에 기여하고, 다문화사회에 걸맞은 공존의 윤리를 구현한 책에 주어지는 이 상의 시상식은 28일 오후 2시 서울 왕십리로 한양대 백남학술정보관 6층 대회의실에서 열린다. ■국립고궁박물관(관장 이귀영)은 조선의 왕실문화를 배울 수 있는 교육프로그램을 이달부터 운영한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교과서 속 왕실유물’과 성인들이 궁중 수라상을 체험하는 ‘수라간 최고상궁’을 비롯한 38가지 프로그램이 1년 내내 운영된다.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www.gogung.g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02-3701-7500}

“어머니의 하서(下書)를 봉독하오니 훈계하신 말씀, 전신에 소름이 끼치고 뼈끝까지 아르르해지며 이놈의 눈에도 때 아닌 낙숫물이 뚝뚝 (흐릅니다.) … 저는 우로(雨露)와 강산과 부모를 버리고라도 이 길을 떠나간다는 결심이었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말씀대로 지금 귀성한다면 이 불초 봉길이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1930년 10월 중국 칭다오에서 보낸 편지에서) 아들은 조국산천 어머니의 근심에 온몸이 덜덜 떨렸다. 허나 “장구한 시일을 두고 과거사도 묵상했고 미래사도 암료(暗料·깊이 헤아리다)한” 결심을 어찌 바꾸겠는가. 이역만리 객지에서 피눈물을 쏟으면서도 스스로 택한 애국의 길을 의연히 걸어갔다. 1932년 4월 29일 일제 원흉들에게 폭탄을 던져 한민족 기개를 만방에 떨친 의사 매헌 윤봉길. 그에게 1931년 상하이로 가기 전 칭다오에서 1년은 그냥 흘려보낸 세월이 아니었다. 자신의 의지를 다시금 다지고, 거리낌 없이 독립운동에 나서려는 인고의 시간이었다. 이번에 처음 정확한 이름이 밝혀진 일본인 나카하라 겐지로(中原兼次郞)가 운영하는 세탁소에 매헌이 취직한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녔다. 1930년 3월 처음 집을 나섰을 땐 곧장 만주로 가 독립단에 뛰어들려 했으나, 망명길에 만난 김태식(金泰植)의 설득으로 이곳에서 일단 정보를 모으기로 했다. 한시준 교수는 “일단 중국은 물론이고 국외 체류 자체가 생경한 윤 의사가 생전 처음 직장에 취직해 현지 분위기를 익히려는 의도가 강했다”고 설명했다. 돈을 모아야 할 이유도 있었다. 마음을 무겁게 했던 빚을 탕감해야 했다. 훗날 백범 김구 선생(1876∼1949)에게 전한 자필 이력서를 보면, 세탁소 월급을 모아 ‘월진회(月進會)’ 자금 50원을 갚았다는 대목이 나온다. 윤 의사는 고향인 충남 예산에서 농촌 계몽 운동 조직인 월진회 활동을 벌였는데, 망명 당시 이 회비를 무단으로 가져왔던 것. 독립운동이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음에도 어떻게든 매조지 하는 의사의 맑은 성정을 엿볼 수 있다. 당시 칭다오에서 윤 의사는 가족에게 편지 2통을 보냈다. 1930년 어머니에게 편지를 쓴 뒤 이듬해 상하이로 떠나기 직전 맏아들 종(淙)에게 서신을 부쳤다. 의사는 “종아! 너는 아비가 없음이 아니다. 너의 아비가 이상의 열매를 따기 위해 잠시적 역행이지 하년(何年) 세월로 영구적 전전이 아니다”며 “후일에 따뜻한 악수와 따뜻한 키스로 만나자”고 다독였다. 김상기 충남대 국사학과 교수가 쓴 ‘자유의 불꽃을 목숨으로 피운 윤봉길’(역사공간)엔 의사의 인정어린 면모도 드러난다. 칭다오에서 알고 지낸 한일진(韓一眞)이란 친구가 미국행을 결심하자 수중에 있던 돈을 털어 여비로 건넸다. 넉넉지 못한 형편이었으나 전혀 머뭇거리지 않았다. 뒷날 한일진은 미국에서 의거 소식을 듣고 “평생의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고 싶다”며 의사의 고향집에 돈을 보냈다고 한다. 뭣보다 나카하라 세탁소의 실존이 확인되며 그간 미스터리였던 ‘어떻게 일제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훙커우 공원에 들어갔는가’의 해답을 찾는 일도 큰 진전을 이뤘다. 그간 윤 의사의 행사장 입장을 놓고 △중국 경비 회유 △비밀출구 잠입 △일본인 위장 △강행 돌파 등 여러 설이 분분했다. 하지만 이규창 선생은 회고록 ‘운명의 여진’에서 “(의사는) 세탁소 노부부를 부축하고 일본 국기를 들고 입장해 축하대 앞자리에 앉았다”며 “일본인 세탁소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거사하기가 쉬웠던 것”이라고 전했다. 김광만 PD는 그간 연구가 미진했던 윤 의사의 칭다오 흔적을 찾으려 중국과 일본을 수차례 오갔다. 오랜 추적 끝에 지난해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에서 윤 의사가 이력서에서 언급한 나카하라 세탁소를 칭다오 업체명이 실린 1931년 ‘중국상공지도집성’에서 마침내 찾았다. 이를 기반으로 역시 처음 발굴한, 같은 해 찍은 일본 지도 ‘대일본직업별명세도’에서 위치를 확인했다. 김 PD는 “칭다오 현지에 갔더니 이미 다른 건축물이 들어섰지만 당시 도로가 그대로 남아 정확한 지점 확인이 가능했다”며 “우리 역사의 잔향이 밴 장소인 만큼 중국 정부와 협의해 표지석을 세우는 사업을 추진하면 좋겠다”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매헌 윤봉길(梅軒 尹奉吉·1908∼1932·사진) 의사가 중국 상하이 의거 직전 1년여간 머물렀던 칭다오(靑島)의 거주지가 처음으로 확인됐다. 칭다오는 윤 의사가 국외로 망명해 처음 정착했던 곳으로, 그간 명확하지 않았던 중국에서의 행보를 밝힐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근대사 다큐멘터리 제작사 ‘더채널’의 김광만 PD(59)는 23일 “새로 발굴된 사료를 바탕으로 윤 의사가 1930, 31년 살았던 칭다오의 ‘나카하라(中原) 세탁소’의 정확한 위치를 찾았다”고 밝혔다. 김 PD는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에서 윤 의사가 생활한 거주지 상호와 장소가 표시된 1931년판 ‘중국상공지도집성’을 찾아낸 뒤 칭다오를 방문해 실측 확인했다. 세탁소 자리엔 현재 은행이 들어서 있으며 칭다오 동북쪽 구시가지에서 랴오닝(遼寧)로와 린지(臨濟)로가 만나는 지점의 큰길가에 있다. 칭다오는 윤 의사가 독립운동에 뛰어들 결심을 굳히고 중국으로 가 처음 정착한 곳이다. 독립운동사 전문가인 한시준 단국대 역사학과 교수는 “칭다오는 윤 의사가 주변 신상을 정리하고 웅지를 펼칠 미래를 준비한 곳”이라며 “한민족 독립운동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퍼즐 조각 하나를 드디어 찾은 셈”이라고 평가했다. 이번 조사 결과는 그간 윤 의사 의거에서 가장 큰 의문으로 남아있던 ‘도시락폭탄 투척 장소’인 훙커우(虹口)공원 진입 과정을 추정할 근거를 제공한다. 칭다오 생활의 실체가 확인됨에 따라 윤 의사가 일본인 세탁소 주인의 환심을 얻어 함께 행사장에 들어갔다는 애국지사 이규창(李圭昌·1913∼2005)의 주장에 힘이 실리게 됐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먼 옛날도 아니다. 우리 선조들은 별자리를 보고 길흉화복을 점쳤다. 그저 민간에서 유행하는 풍습도 아니었다. 조선 말기까지도 버젓이 관상감(觀象監)이란 관청이 존속했다. 주 업무야 천문 관측과 책력 작성 같은 과학적 분야였으나, 이를 바탕으로 풍수를 살피고 점괘를 내놓는 일도 맡았다. 그런 선인들에게 이따금 나타나는 혜성은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 한국천문연구원 선임연구원인 저자는 이공계 과학자면서도 역사와 한문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사료를 활용해 당대의 우주 현상을 과학적으로 풀이하는 ‘역사 천문학’에 오랫동안 매료됐다. 2005년 전작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별자리’를 통해 개밥바라기나 좀생이별을 비롯한 우리 별 이야기를 풀어내더니, 이번엔 혜성에 초점을 맞췄다. 한국사에서 혜성과 관련된 첫 기록은 사마천의 ‘사기’에 등장한다. 안타깝게도 한나라가 옛 조선을 침범했을 때였다. “조선을 공격할 때 혜성이 나타났다. … 점괘가 ‘남수(南戍·남쪽을 지키는 별자리)는 월문(越門)이고, 북수(北戍)는 호문(胡門)이다’라고 했다. 조선은 바다 건너 있으니 넘는(越) 형세이고, 북방에 있으니 호(胡·오랑캐)의 지역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혜성은 워낙 이질적인지라 불길하게 읽히는 경우가 많았다. 신라 진평왕 때 나타난 혜성은 왜구 침략을 알리는 전조라 했고, 조선 순조 11년(1811년) 홍경래가 이끈 반란군은 혜성 출현에 반역의 정당성을 부여했다. 남이 장군(1441∼1468)도 혜성을 언급했다가 역모 혐의를 뒤집어썼다. 저자는 이 같은 한국사와 함께 당시 서양 과학사도 솜씨 좋게 버무려 역사와 과학을 넘나드는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를 풀어낸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지도가 ‘욕망한다’라…. 개인적으로 어떤 책이건 국내에 번역되며 제목이 바뀌는 게 싫다. 작가 나름의 고충이 있었을 진의 파악이 힘들기 때문이다. 이 책도 원제는 ‘12개 지도의 세계사’다. 하지만 이 책만큼은 지도에 인간의 욕망이 투영됐다는 논지를 부각시켰다는 면에서 가점을 주련다. 여전히 ‘제목 바꿔달기’엔 동의 못 하겠지만. 어쨌든 이 책은 영국 퀸메리대 교수인 저자가 역사적인 세계지도 12개를 콕 집어 분석했다. 이를 통해 당대의 세계관(혹은 우주관)과 시대상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간 지도를 다룬 책이 꽤 나왔던지라, 솔직히 이 책도 처음엔 시큰둥했다. 하지만 고리타분한 표현이긴 하지만 “읽다 보면 끝없이 빠져들게 된다”(파이낸셜타임스)는 평가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뭣보다 지도마다 맞춤하게 부여한 주제의식이 꽤나 맛깔스럽다. 12세기 시칠리아의 지도가 기독교와 이슬람, 유대교를 아우른 문명적 융합 아래 태어났다는 2장 ‘교류’. 1662년 네덜란드 지도 ‘대 아틀라스’를 통해 부의 축적에 끝없이 목말라했던 시기를 반영한 8장 ‘돈’. 어느 챕터 하나 처지지 않고 재밌다. 아, 21세기 최신 지도 구글 어스를 다룬 마지막 장 ‘정보’도 빼놓으면 아쉽다. 그러나 팔은 안으로 굽는 법. 역시 1402년에 제작됐다는 조선의 세계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혼일강리도)’를 다룬 4장 ‘제국’이 가장 흥미로웠다. 해외학자가 이만큼이나 한국사에 해박한 것에 일단 놀랐다. 또한 그 지도에 당시 중국이란 강국과 상대하며 취할 건 취하고 버릴 건 버려가며 독자적 노선을 걸은 조선의 웅지가 배었다는 사실에 또 한번 놀랐다. 참고로 혼일강리도는 아시아에서 최초로 유럽이 등장하는 현존 최고의 지도이기도 하단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런던 패딩턴 역에서 발견한 한 낙서를 소개한다. “멀리 떨어진 곳도 다른 곳에서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다.” 세상에 완벽한 지도란 없다. 그만큼 상대적이고 다양한 가치관이 지도에 담겨 있다. 지도는 단지 길을 찾는 도구가 아니라 세상과 소통하는 열쇠였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석가모니의 어머니인 마야부인(摩耶夫人)으로 추정되는 청동상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출토됐다.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배병선)는 20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충남 부여군에 있는 왕흥사(王興寺) 터에서 지난해 발굴조사를 벌인 결과 소형 청동 인물상을 찾았다”고 밝혔다. 6세기 백제시대 사찰인 왕흥사 터는 2007년에 위덕왕(威德王·554∼598)이 577년 죽은 왕자를 위해 봉안했다는 명문이 있는 사리기(舍利器)가 나와 큰 화제를 모았다. 출토된 인물상은 높이 6cm의 소형 유물이나, 지금까지 국내에선 발견된 적이 없는 자세와 복식이 눈길을 끈다. 오른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발밑까지 내려오는 주름치마를 입었는데, 마야부인일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고 있다. 배 소장은 “마야부인 상이 맞을 경우 네팔과 파키스탄, 일본엔 부조상이나 불상이 여럿 전해지나 한반도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된 문화재”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청동상을 마야부인으로 보기는 다소 무리라는 견해도 있다. 마야부인은 룸비니 동산에서 무우수(無憂樹) 가지를 붙잡고 오른쪽 겨드랑이에서 석가를 낳았다고 전해진다. 때문에 해외 마야부인 상은 나뭇가지를 붙잡았거나 애기(부처)가 함께 등장한다. 이번에 나온 청동상은 자세는 엇비슷하지만 나무와 부처는 찾지 못했다. 다만 이 청동상은 두상이 몸체에 비해 큰 데다 옷차림을 표현한 기법으로 미뤄볼 때 삼국시대 한반도에서 만들어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강순형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출토된 지층의 깊이를 감안하면 왕흥사 창건 시절 제작된 인물상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그 착취와 압정에 가담한 측의 인간이 과연 그리워하거나, 옛날 그대로 기뻐하거나… (해도 용인되는 것인가).”(가지야마 도시유키·梶山季之의 소설 ‘잘 있거라, 경성’ 중에서) 그들에게 이 산천은 고향이었다. 나고 자랐고 뛰어놀았던 땅. 하지만 한순간 영문도 모른 채 쫓기듯 떠나야 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뒤 깨달았다. 우리는 한국인에게 몹쓸 존재였구나. 어린애였노라 변명한들 그 죄의식은 씻기질 않았다. 일본 문단에는 ‘식민자(植民者) 2세’라 불리는 작가들이 있다. 일제강점기 한반도에서 태어나 주로 10대에 패망을 맞고 귀환해, 1950년대 이후 등단한 이들을 일컫는다. 그들은 어린 시절 추억과 이후 알게 된 실상 속에서 겪은 모순과 갈등을 작품에 녹여냈다. 신승모 동국대 교수는 최근 학술지 ‘일본학’에 게재한 논문 ‘식민자 2세의 문학과 조선’에서 이들의 작품을 조명했다. 경남 진주 태생의 소설가 고바야시 마사루(小林勝·1927∼1971)의 ‘눈 없는 머리’(1967년)는 식민자 2세의 어린 시절이 투영된 작품이다. 주인공 소년 사와키는 ‘언제나 상냥한’ 조선인 이경인을 따랐다. 하지만 이경인은 독립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이를 걱정해 면회를 간 사와키는 이전 모습은 사라지고 ‘괴물’처럼 변한 이경인을 발견한다. 사와키는 “아이로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서운 것에 부닥친” 느낌을 토로한다. 함경남도 출생인 고토 메이세이(後藤明生·1932∼1999)의 소설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1972년)’는 좀더 직접적이다. 주인공은 독백처럼 “전쟁이 끝났을 때 소년시절은 끝났다”고 되뇐다. 철없던 유년의 추억조차 원죄로 떠올려야 하는 운명을 되새김질한다. “저는 ‘태어난 고향’을 잃어버린 셈입니다. 요컨대 저희들은 고향에서 추방돼서, ‘조국 일본’으로 귀환해온 셈입니다. … 식민지로서 그곳을 지배하던 일본인 자손의 한 사람인 제가 그곳에서 추방된 것에 이의는 없습니다. 따라서 저는 추방됐다고는 생각해도 결코 그곳을 빼앗겼다, 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1967년 신상옥 감독이 영화화한 소설 ‘이조잔영’의 원작자 가지야마 도시유키(1930∼1975)도 빼놓을 수 없다. 이조잔영은 1919년 3·1운동 때 일어난 ‘제암리 학살사건’을 모티브로 삼았다. 가지야마는 1961년 ‘사상계’를 이끌던 장준하 선생(1918∼1975)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본이 귀국을 식민지로 삼던 시대의 죄를 도려내서 일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신 교수는 식민자 2세 작가들의 공통점으로 ‘역사에 대한 부채의식’을 꼽았다. 이미 성인으로 한반도에 살았던 기성 작가들은 거리낌 없이 그 시절을 그립다 말하는데, 이들은 그마저도 조심스러워했다. 고바야시는 생전 마지막 에세이 ‘그립다고 해서는 안 된다’에서 안일하게 고향을 추억하는 자신을 책망한다. 신 교수는 “그들이 식민지 체험을 소재 삼아 작가적 입지 확립에 ‘이용’한 사실은 비판할 대목이나 작품에서 드러나는 진정성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평가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1950년대부터 한국 문화재에 빠져 평생 세계를 돌며 고미술품을 모아 왔습니다. 그 가운데 한국에서 불법 반출된 작품이 있다면 언제든 돌려줄 용의가 있습니다.” 18일 오전 서울 중구 신세계갤러리에서 만난 로버트 무어 씨(84)는 시종일관 여유가 넘쳤다. 다음 달 19일 크리스티 뉴욕에서 개최하는 ‘십장생-로버트 무어 컬렉션’ 경매를 앞두고 작품 소개차 방한한 그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 고미술 수집가이자 거래상. 하지만 지난해 소장하던 현종 어보와 그가 로스앤젤레스카운티박물관(LACMA)에 넘긴 문정왕후 어보를 미 국토안보부 수사국(HSI)이 밀반출품으로 압수하며 논란의 중심에 섰다. 그는 “정식 거래 절차를 밟아 구입했을 뿐 이전 해외 반출 과정은 몰랐다”며 “현종 어보도 (압수가 아니라) 자의로 협조해 내놓은 것”이라고 해명했다. “고대 로마시대부터 전쟁을 겪으며 문화재가 밀반출되는 건 일상적인 일이었습니다. 한국도 그런 아픔을 겪으며 해외에 수많은 고미술품이 산재해 있어요. 이를 돌려받으려면 명백하게 불법 유출을 증명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한국인들이 국외 소재 문화재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무어 씨는 1955년 주한미군으로 1년간 머물며 한국 문화재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귀국 후 1957년 고려시대 청동 수저를 15달러에 구입하며 본격적으로 수집에 나섰다. 한때 1000점이 넘는 한국 고미술품을 모았다. 이미 1986년과 2006년 두 차례 경매에 도합 350여 점을 출품했고, 이번에 19세기 민속품 위주로 135점을 내놓았다. 무어 씨는 “중국 일본과 달리 한국 문화재는 자연스럽고 인간미가 넘쳐 정이 간다”고 말했다. “2000년 LACMA와 한국 문화재 200여 점을 거래했던 게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사명감을 갖고 세상 곳곳에 흩어졌던 작품들을 찾아내 박물관이나 전문가들이 제대로 보전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한국 고미술품을 모을 당시엔 주목도가 떨어졌는데, 요즘은 세계적 관심을 모으고 있어 무척 기쁩니다.” 신세계갤러리의 크리스티 경매 출품작 전시는 19일까지 이틀만 열릴 예정. 일정이 빠듯했으나 “꼭 한국에 먼저 소개하고 싶다”는 그의 소망이 강해 성사됐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어보와 관련한 HSI의 조사가 아직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팝아트 계열 작품을 보다 보면 애매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창의적 발상에 놀라다가도, 어디까지가 예술의 범주인지 궁금해진다. 영국 작가 줄리언 오피(56) 역시 그런 의미에서 여러 문제의식을 던지지만, 일단 ‘산뜻해서’ 보기 좋다는 점만은 부정하기 힘들다. 서울 종로구 국제갤러리에서 2009년 이후 두 번째로 국내에서 열리는 오피의 개인전은 작품 수는 21점뿐이지만 상당히 매력적이다. 발광다이오드(LED) 패널에 애니메이션으로 움직임을 구현하거나 비닐 소재를 이용해 만화 같은 이미지를 표출한 작품이 주를 이루는데, 모두 사람을 주제로 삼았다. 마치 대도시를 배경으로 찍은 흑백 혹은 컬러 영화를 보는 기분이 든다. 역시 가장 이목이 집중되는 작품은 서울을 배경으로 한 ‘사당동에서 빗속을 걷는 사람들’과 ‘신사동에서 걷는 사람들’ 1∼3. 지한파로 통하는 오피가 한국 사진가가 찍은 사진 3000여 점을 선별해 작품화했는데, 도시의 화려함과 익명성이 함께 녹아들어 있다. 오피는 “서울 사람들은 옷을 너무 잘 입고 분위기도 밝아 놀라움을 준다”고 말했다. 무료. 3월 23일까지. 02-735-8449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일제강점기 공장에는) 경비가 많았어요. 서너 군데 초소를 만들어놓고 수용소 철망까지 해놓고. … 고되게 일시키고. 잘 먹지도 못해 고단하니깐. 밤중에 담 넘어서 도망가고 그랬어. 여공들은 감옥소야. 외출 안 해줘요. 아예 안 해줘요.”(90세 민석기 씨의 구술 중에서) 서울 영등포 일대는 일제강점기부터 유명한 공장지대였다. 전쟁 물자를 만드는 군수공장부터 면방직 철강 고무신 맥주 공장까지 다양한 산업 현장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수많은 조선 노동자들이 자신의 청춘과 눈물을 쏟아부었으나 이제는 이름도 기억되지 않는 잊혀진 역사로 남았다.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는 이러한 당대의 생활사를 복원하는 차원에서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까지 이 지역에서 일했던 이들의 구술을 모은 ‘영등포 공장지대의 25시’를 최근 펴냈다. 김현숙 전임연구원은 “공장에서 불철주야 고된 노동을 묵묵히 담당했던 노동자와 기술자의 피와 땀으로 오늘의 서울을 일궈냈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고 배경을 밝혔다. 당시 이 일대 공장의 조선인 수는 명확하진 않다. 시기별로 차이는 있으나 평균 1만 명 넘게 공장에서 일했던 것으로 보인다. 충남 홍성 출신인 김영환 씨(88)는 1941년 대일본방적회사에 취직했다. 말이 입사였지 마을 이장을 동원한 반강제적 모집이었다. 열다섯 어린 나이에 부모 허락도 필요 없었다. 덜컥 따라갔더니 15, 16명이 한방을 쓰는 기숙사에서 지내며 하루 12∼15시간을 일했다. 생활 여건은 상상을 초월했다. 배고파 서울에 왔는데 “애들 주먹만 한 보리빵”으로 저녁을 때울 때도 잦았다. 감자가루로 만든 풀을 얻어다 보일러실 수증기에 데워 먹기도 했다. 하루 종일 햇빛을 못 볼 때가 흔했고, 말썽이 없어야 한 달에 4시간 외출이 허락됐다. 김 씨는 “(1945년 8월 15일에) 경비가 없어 다들 그냥 밖으로 나와 흩어졌다. 영등포역에서 누군가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치기에 그제야 해방된 줄 알았다”고 회상했다. 앞서 민석기 씨는 1938년 당시 명문이던 경성공업학교에 입학했는데 학생 때부터 강제노역에 동원됐다. 방학이면 애국봉사란 미명 아래 조선 학생을 노동현장에 내몰았다. 당연히 일본 학생은 제외됐다. 그는 “김포비행장 닦을 땐 아예 인근 집에서 재우며 한 달씩 일을 시켰다”며 “일본 감독한테 삽으로 맞아 가며 소금만 찍은 주먹밥을 먹고 버텼다”고 말했다. 그에게 가장 안타까웠던 기억으로 남은 이들은 여공들이었다. 겨우 열일곱 안팎의 꽃다운 나이였지만 감옥 같은 기숙사 수용소에서 지냈다. 3년 넘게 바깥에 나가보질 못한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여공들이 식당 바깥에 내버린 쓰레기통 잔반을 주워 먹던 광경은 잊혀지질 않는다. 당시 열악한 여건 속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냈던 이들을 빗대어 ‘방직공장 사람이면(사람이 다가서면), 전봇대에 꽃이 핀다(피게 한다)’는 말도 유행했다. 영등포 공장에서 일하다 징용됐던 전을원 씨(90)는 당시 군수공장 용접기술공이던 친형의 고초를 잊지 못한다. 남들은 벌이가 낫다며 부러워했지만 일본 헌병대를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전 씨는 “뭔 의심만 생기면 한국 기술자를 끌고 가 사나흘씩 취조하는 일이 일상처럼 벌어졌다”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어쩌면 다른 뭔가를 볼 틈이 없는지도 모른다. 1820년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보다 윗대쯤 되는 선조는 영국인이었으나 남아프리카에 정착했다. 이후 케냐를 지배하고픈 영국 정부 시책에 혹해 중앙 동부아프리카로 떠난 그들은, 갖은 고생 끝에 농장을 운영하는 ‘하얀 부족’(흑인 원주민은 백인 이주민들을 이렇게 불렀다)으로 자리 잡았다. 거기서 태어나고 자라 자식과 손자를 키운 여인. 대자연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었다. 대프니 셸드릭, 그는 아프리카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1934년생으로 올해 팔순인 저자에게 어린 시절 케냐는 신나는 모험과 즐거움이 가득한 곳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급자족에 가까운 노동에 벌이가 시원찮아 시름이 깊었다. 허나 물정 모르는 아이가 가족 생계를 고민했겠나. 농작물을 초토화시키는 메뚜기 떼가 휩쓸고 지나가면 그 뒤에 남은 메뚜기볶음 먹을 일에 신이 났다. 행여 짐승이 맞으면 생명까지 앗아가는 우박이 내려도 얼른 모아다 아이스크림을 만들었다. 그에겐 가축도 초식동물도 심지어 맹수도 함께 뛰노는 친구였다. 그리도 애정이 넘쳤던 탓일까. 열다섯 살에 20대 빌 우들리란 나이로비국립공원 관리원과 첫사랑에 빠져 곧장 결혼을 선언했다. 물론 부모들이야 반길 리가 없었다. 어르고 달래도 듣지 않자 약혼부터 시켰으나, 19세가 되자마자 홀랑 식을 올려 버렸다. 그러고 이듬해 큰딸을 출산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동화라면 그랬겠지만 현실은 달랐다. 2, 3년도 안돼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성급했는지 깨달았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대프니의 심장이 딴 데서 콩닥대기 시작했다. 자신보다 스무 살 가까이 위인 이혼남 데이비드 셸드릭. 게다가 남편의 직장상사였다. 그런데도 빌이 출장 중일 때 그의 품에 안겨 춤이라도 추면 정신이 아득해지고…. 이거 뭐, 자유부인이야 뭐야. 운(?)이 좋았던 걸까. 마음이 떠난 건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합의이혼을 거쳐 잘 헤어졌다. 그리고 서양인답게 평생 좋은 친구로 지냈다. 대프니의 성이 셸드릭인 것에서 짐작했겠지만, 데이비드와 재혼했다. 이후 차보국립공원의 초대소장이 된 남편과 함께 그는 아프리카 동물보호에 온몸을 투신하기 시작한다. 솔직히 이 책은 살짝 당황스러웠다. 표지 소개 글을 봤을 땐 ‘침팬지의 어머니’ 동물학자 제인 구달의 또 다른 버전을 상상했는데, 정말 제목 그대로 사랑 이야기였다. 나이팅게일 위인전인 줄 알고 펼쳤는데 스칼릿 오하라(‘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여주인공)를 맞닥뜨린 기분이랄까. 그런데 어어 하다가 뒷장이 궁금해 손에서 책을 놓질 못한다. 신상에 초점을 맞춰 소개했으나 책 전체를 관통하는 저자의 또 다른 사랑, 자연과 동물이 가벼운 건 아니다. 어릴 때부터 야생동물과 친숙했던 그는 밀렵으로 고아가 된 동물(주로 코끼리)을 양육해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일에 주력했다. 특히 남편이 50대에 심근경색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이름을 딴 ‘데이비드 셸드릭 야생동물 트러스트’를 세워 평생 헌신한 공로는 엄청나다. 이를 인정받아 영국 왕실로부터 남성의 기사(knight)에 해당하는 데임(dame) 작위를 받았다. 광활한 아프리카에서 워낙 경험이 풍부했기 때문일까. 책은 뻔한 회고록을 뛰어넘어 웬만한 문학작품보다 흥미진진하다. 게다가 저자의 나이를 보면 알겠지만, 제2차 세계대전과 케냐 독립운동 같은 시대적 회오리도 상당해 대하역사소설을 읽은 감흥이 밀려든다. 케냐판 ‘토지’라 하면 너무 극찬이긴 한데…. 어쨌든 동물이나 아프리카, 역사 어느 방면에 관심 있는 독자라도 만족할 만하다. 역시 사랑 얘기는 세대와 국경을 초월한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오늘은 정월대보름. 지금이야 설날 한가위나 휴일이지만, 예전엔 어느 때 못지않은 큰 명절이었다. 달집태우기와 쥐불놀이, 부럼 깨물기나 더위팔기는 요즘도 익숙하다. 국립민속박물관에 따르면 조상들은 대보름엔 숫자 9와 연관돼야 길하다고 여겼다. 아홉 가지 나물을 먹고 마당도 아홉 번 쓸고, 심지어 밥도 아홉 차례 먹어야 건강하고 부지런히 산다고 믿었다. 선조들은 부럼 말고도 이날 꼭 챙겨먹는 음식이 있었다. 올해 밸런타인데이와 겹쳤다고 초콜릿은 아니다. 오곡밥에 원소병(圓小餠)과 진채식(陳菜食), 복쌈이 대표적이다. 서울호서직업전문학교의 전순주 호텔조리과 교수는 “이런 전통음식에는 오랜 세월 경험으로 축적된 조상들의 혜안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전 교수와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의 도움을 얻어 그 뜻을 되새겨봤다. 먼저 복쌈은 배춧잎이나 아주까리 잎, 김으로 밥을 싸 먹는 음식. 말 그대로 복을 싸서 먹는다는 의미다. 조선 순조 때 한양의 연중행사를 기록한 ‘열량세시기(洌陽歲時記)’에는 복쌈을 ‘박점(縛占)’이라 부르며 김에 싸먹되 많이 먹어야 좋다고 소개했다. 경기 일부 지역은 김으로 싼 복쌈을 볏섬이라 부르기도 했다. 충남에서도 복쌈을 먹을 때마다 볏섬도 함께 쌓인다는 구전이 전해진다. 생김새도 닮았거니와 풍년을 바라는 농경사회의 소망이 담긴 것이다. 원소병은 소를 넣은 찹쌀반죽 떡을 꿀물이나 오미자 물에 띄워 먹는 일종의 디저트. 이름의 유래는 여럿인데, 한자 그대로 둥글고 작은 떡(圓小餠)이란 설과 중국에서 대보름을 지칭하는 원소(元宵)에서 비롯됐다는 얘기가 있다. 위관 이용기(1870∼1933)가 1924년 펴낸 요리책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에는 삼국지연의에도 나오는 중국 원소(袁紹)가 좋아한 음식이라고 나온다. 이 요리를 대보름에 즐기게 된 배경에는 생김새가 닮은 달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음력에 바탕을 둔 세시풍속에서 보름달은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전 교수는 “소에는 견과류와 대추 유자청 계핏가루를 넣어 맛과 영양을 함께 추구했다”고 설명했다. 진채식은 일종의 나물무침인데 조선 학자 홍석모(1781∼1850)가 쓴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도 등장한다. “박나물 버섯 따위를 말린 것과 콩나물순 순무 무를 묵혀 먹는 것을 이른다. 먹으면 그해 여름에 더위를 타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대체로 지난해 가을 손질해 말려뒀던 나물을 재료로 쓰는데, 겨울철 채소 섭취가 쉽지 않던 시절을 견디는 훌륭한 수단이었다. 전 교수는 “겨울철엔 생체의 활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진채식은 비타민이나 무기질을 공급하는 생활의 지혜였다”고 평가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공청회(公聽會). 사전적으로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기관이 공개적으로 국민 의견을 듣는 자리다. 주로 민감한 정부 정책을 결정하고자 할 때 여론을 반영하려는 좋은 취지가 담겼다. 그런 뜻에서 12일 오후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문화재 수리체계 제도개선을 위한 공청회’는 시의적절했다. 최근 숭례문과 문화재 수리자격증 대여 논란 등 문화재 분야에서 관련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때 문화재청이 학계와 업계를 아우른 외부 의견에 귀를 기울이려는 자세는 반가운 일이다. 실제로 공청회장에는 200여 명이 몰려 열기가 뜨거웠다. 앉을 자리도 없어 상당수가 몇 시간을 선 채로 지켜봤다. 하지만 세 시간 넘게 이어진 이 자리를 공청회라 불러야 할지는 머뭇거려진다. 교수들의 주제 발표에 패널들이 마이크를 ‘한 번씩만’ 잡았더니 예정시간을 넘겨버렸다. 사안이 엄중하니 성심성의껏 논의하려는 심정은 이해가 간다. 그래도 온갖 장황한 부연 설명이 이어지는 건 자제했어야 옳다. 참다못한 한 참석자는 갑자기 “여기가 무슨 수업 받는 교실이냐”고 소리를 질렀다. 발언 방식엔 동의할 수 없지만 분통 터진 속내는 짐작할 만했다. 겨우 발언권이 넘어간 방청석도 어수선했다. 목소리만 높인 채 상대를 비난하며 자기 입장 전달에 급급했다. 이마저 서로 고성과 험한 말이 오고 가며 부산스러웠다. 결국 토론 좌장을 맡은 김동욱 문화재위원회 건축분과위원장은 “여건상 한계가 있으니 나머지 하고픈 말은 서면으로 직원들에게 제출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런 웃지 못할 분위기는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했다. 공청회 주제는 △문화재수리기술자 자격제도 △보수·정비사업 입찰제도 △수리품셈제도 세 가지였다. 김 위원장이 말했듯 ‘한 가지만으로도 며칠씩 밤을 새워 토론해도 모자랄’ 사안들이었다. 그걸 겨우 반나절 만에, 그것도 방청객 질의응답은 40분만 잡아놓고 ‘민의를 듣겠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발표자와 패널 구성도 아쉬웠다. 발표진과 패널은 모두 건축학과 교수 아니면 문화재수리 관련 협회 사람들이었다. 물론 이 분야 전문가들인 건 틀림없다. 하지만 다양한 의견을 듣는 게 목적인 자리가 한쪽 방향으로 흘러가는 모양새가 역력했다. 게다가 몇몇은 “평생 고생했는데 비난만 받는다”며 신세 한탄에 가까운 얘기를 늘어놓았다. 서로 다른 입장을 피력하면서도 발언자들은 하나같이 ‘문화재의 특수성과 전문성’을 강조했다. 당연한 말이다. 문화재는 매우 특수한 분야이고, 어느 영역보다 전문성이 중요시돼야 한다. 그런데 이날 공청회가 과연 전문적이고 특수했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이 망설여진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중국엔 시험 합격을 관장하는 별자리 신이 있다? ‘공부의 신’이라 하면 드라마나 만화를 떠올릴 사람이 많겠다. 하지만 중국이나 대만은 다르다. 요즘도 수험생 책상 앞에 얼핏 요괴처럼 보이는 그림을 붙여놓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 신(神)이 바로 도교에서 유래한 ‘수험의 신’ 괴성(魁星)이다. 배원정 월전미술문화재단 초빙연구원(33)은 최근 국립중앙박물관 학술지 ‘미술자료’ 제84호에 게재한 논문 ‘괴성 도상의 기원과 전개’를 통해 중국 문화에서 혁혁한 위상을 차지하는 괴성을 분석했다. 현재 국내에선 괴성이 다소 생소하지만, 조선회화에 그림 소재로 등장하곤 해 한국과도 인연이 얕지 않다. 으뜸 혹은 우두머리 별로 해석되는 괴성은 본래 북두칠성의 첫째 별로 딱히 학문과 관련이 없었다. 그러다 네 번째 별인 규성(奎星)과 혼동을 일으키게 됐다. 奎도 한나라 땐 으뜸이란 의미로 통용된 데다, 魁와 奎 두 글자의 중국어 발음이 ‘쿠이’로 같다. 도교에서 규성은 ‘문창제군(文昌帝君)’으로 신격화됐다. 이 신은 본디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관장하나, 이름에 글월 문(文)이 들어 있다 보니 학업 운도 다스린다는 믿음이 더해졌다. 흐르는 세월 속에 혼용되다 괴성이 문창제군, 즉 학문의 신이자 수험의 신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그러면서 괴성이 북두칠성의 첫 번째 별부터 네 번째 별을 아우른다는 풀이도 생겼다. 괴성이 ‘전국구 스타’가 된 건 명나라 때였다. 명태조 주원장(1328∼1398)이 “과거(科擧)를 거치지 않으면 관리가 될 수 없다”며 6세기 수나라 때 생긴 과거를 전면 확대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분을 따지지 않고 시험만 잘 보면 벼슬에 중용했다. 괴성의 인기도 함께 치솟았다. 명대의 문집 ‘엄산외집(儼山外集)’에는 “시험장 앞에서 점토로 만든 괴성 인형을 팔았다”고 나온다. 감독관이 미신에 기대지 말라고 타박해도 소용이 없었단다. 지방 고을마다 문창각(文昌閣)이나 괴성루(魁星樓)가 들어서 제사 지내는 이들로 성황을 이뤘다. 배 연구원은 “괴성신앙은 청대로 이어져 문창제군 탄생일(음력 2월 3일) 제사엔 황제가 보낸 대신이 참석했다”고 설명했다. 괴성의 도상(圖像)도 흥미롭다. 한 손에 붓을 든 이유는 짐작되나, 꼭 한 발을 꺾어 들었고 ‘됫박’이 등장한다. 이는 한자 괴(魁)를 형상화했기 때문이다. 괴 자에서 왼쪽 변인 ‘귀신 귀(鬼)’는 한쪽 다리를 구부린 모양새처럼 보인다. 됫박은 오른쪽의 ‘말 두(斗)’를 형상화한 것으로 됫박 모양의 북두칠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국내에서도 괴성의 자취가 남아 있다. 화가 조석진(1853∼1920)과 안중식(1861∼1919)이 함께 그린 ‘해상군선도’(한양대 박물관 소장)에서 왼편에 입맞춤하는 여인네처럼 한 다리를 구부린 괴성을 만날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김덕성(1729∼1797)의 ‘뇌공도(雷公圖·천둥의 신)’도 도상을 따져 보면 괴성도로 봐야 옳다. 배 연구원은 “중국처럼 폭발력은 없었으나 한반도에도 괴성신앙이 전파됐음을 증명하는 사료가 많다”고 말했다. 조선도 과거를 치렀는데 왜 확산되진 않았을까. 괴성이 유행한 명엔 ‘삼교합일(三敎合一)’ 풍조가 만연했다. 유교와 불교, 도교를 아우르며 서로 배척하지 않았다. 반면 조선은 유교이상사회 건설을 건국이념으로 삼은 국가다. 도교나 불교가 자연스레 공존했지만, 엄격한 유학자가 대놓고 도교 신을 모시는 건 아무래도 꺼림칙했을 가능성이 높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