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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으로 미국에 대해 손해배상청구권을 포기했다. 그러자 3년 뒤 일본인 원폭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1963년 도쿄 지방재판소는 소송을 기각하면서 다만 일본이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서 포기한 것은 외교보호권이며 배상청구권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다는 논리를 남겼다. 일본인도 강제노동 피해를 입은 역사적 경험이 있다. 패전 뒤 철수하지 못하고 소련 지역에 남아 있던 일본 장병 60만 명이 시베리아로 연행돼 가혹한 노동 착취를 당했다. 일본 정부는 1956년 일소 공동선언에서 강제노동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을 포기했다. 그러자 피해를 입은 일본인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일본 최고재판소는 1997년 개인청구권은 남아 있지만 외교보호권은 없다는 똑같은 논리로 소송을 기각했다. ‘외교보호권 없는 배상청구권’은 실효성이 없는 허구의 권리일 뿐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외교 관계를 해치지는 않는다. 일본 정부는 판결 취지를 좇아 사법 밖의 영역에서 해결책을 추구했다. 원폭 피해자와 시베리아 억류 포로에 대해 특별법을 만들어 보상한 것이다. 얼마 전 박정희 정권에서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 민충식 씨가 1991년 한 국제포럼에서 했다는 발언이 30년 만의 외교문서 공개로 밝혀져 뉴스가 됐다. 그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 당시 교섭 대표 간에도 동 협정은 정부 간 해결을 의미하며 개인의 권리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는 암묵적 인식의 일치가 있었다”고 말했다. 협정 당시 한국 측 이동원 외무장관이 상대한 일본 측 교섭대표는 시나 에쓰사부로 외상이다. 도쿄 지방재판소의 ‘외교보호권 없는 개인청구권’ 판결은 한일 청구권 협정 체결보다 2년 전에 내려졌기 때문에 시나 외상은 판결의 내용과 의미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시나 외상만이 아니라 고노 요헤이 외상 등 다른 일본 정부 관계자들도 한일 청구권 협정에도 불구하고 개인청구권이 남아 있다는 말을 해 왔다. 다만 그때마다 한국에서는 그들의 발언이 그 말이 나온 맥락에 대한 이해 없이 소개돼 오해를 빚었고 이번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개인청구권’이 남아 있다는 말을 할 때의 함의는 일본이 한국인 피해자 개인에게 추가로 갚아야 할 돈이 남아 있다는 뜻이 아니라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에 돈을 주고 ‘완전하고 최종적인 해결’을 했으니 한국인 피해자 개인의 권리를 인정해 배상하는 것은 한국 정부가 할 일이라는 뜻에 가깝다. 한일 청구권 협정의 배상액은 충분치 않았다. 또 배상은 주로 육체적 물질적 피해에 대한 것이었으며 정신적 피해에 대한 것은 없었다. 이런 이유로 협정 자체를 비판할 수는 있다. 당시 협정이 불평등했으니 협정을 새로 맺자고 주장하면 현실성이 떨어지긴 하지만 주장 자체로는 논리적이다. 그러나 ‘완전하고 최종적인 해결’을 명시한 협정을 그대로 놔두고 법원이 아무런 유보 없이 배상을 명해 버리면 대략 난감한 상황이 되고 만다. 한국만 국가 간 협정으로 일본에 대해 청구권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 앞에서 거론했지만 일본도 미국과 소련에 대해 그렇게 했다. 일본 법원은 국가 간 협정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유보 없이 배상을 명했다가는 미국과 소련으로부터 이상한 나라로 취급받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외교보호권 없는 개인청구권’이라는 논리 모순의 권리 개념을 만들어냈다. 일본은 패전국이어서 그랬다고 치자. 승전국인 중국도 일본에 대해 1972년 중일 공동성명으로 청구권을 포기했다. 중국은 한국과 달리 청구권을 포기한 대가로 받은 돈이 없기 때문에 중국의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직접 일본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서 화해나 조정 결정을 얻어내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 한국은 중국과 달리 돈을 받았다. 그 돈으로 피해자에게 배상하기도 했지만 부족했을 것이다. 다만 대법원이 일본 기업에 대한 청구를 기각하고 한국 정부에 부족분을 청구하도록 했으면 어땠을까. 그러면 개인청구권을 일본 법원의 허구적 권리와 달리 실제의 권리로 격상시켜 인권의 보루 역할을 다하면서도 불필요한 외교 갈등을 피할 수 있었다. 왜 대법관들이 이런 자연스러운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는지 돌아보면 안타까울 따름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존 워커는 미군 역사상 최악의 스파이 중 하나로 꼽힌다. 그가 1966년 미국 핵잠수함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보고받는 노퍽 해군기지에서 통신병과 준위로 근무할 때의 일이다. 그는 암호생성기 KL-47의 암호코드를 복사한 뒤 워싱턴에 있는 소련대사관을 찾아갔다. 이듬해에는 더 최신인 KW-7의 암호코드까지 빼돌렸다. 다시 이듬해 북한의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이 일어났다. 소련은 워커가 전해준 암호코드를 확인하기 위해 국가보안위원회(KGB) 팀을 북한으로 보내 푸에블로호의 암호기를 뜯어봤다. ▷미 공군 매사추세츠주 방위군 정보단 소속 일병 잭 테세이라가 한국과도 관련된 미국 정부의 기밀문건 유출 사건으로 13일 체포됐다. 이날 연방수사국(FBI) 요원들은 자동 소총으로 무장하고 장갑차까지 동원해 매사추세츠주 노스다이턴에 있는 테세이라의 자택을 급습해 그를 체포했다. FBI는 테세이라가 기밀문건 사진을 찍어 올릴 때 사진 속 배경에 반복적으로 찍힌 그의 자택 모습을 통해 신원을 포착했다. ▷워커는 부업으로 술집을 하다가 망해 돈이 궁해서 정보를 소련에 팔았다. 스파이들은 대개 돈이 궁하거나 이념에 경도돼 정보를 판다. 테세이라는 정보를 어디에 판 게 아니다. 성향도 총기를 애호하는 등 극우에 가깝다. FBI가 더 수사해봐야 정확한 동기가 나오겠지만 일단은 그가 온라인 채팅방에서 ‘OG’라고 불리는 방장 역할을 하면서 “하루 중 일부를 정부 컴퓨터 네트워크에 보관된 기밀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보안시설에서 보낸다”며 과시용으로 올린 문건이 채팅방의 구성원을 통해 흘러 나간 것으로 보인다. ▷미국에서는 일병에 불과한 21세 젊은이가 어떻게 전쟁을 유발할 수도 있는 1급 기밀을 다룰 수 있었는지 한탄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대부분의 국가가 그렇지만 특정 계급 이하는 최고 등급 기밀에 대한 접근이 제한돼 있다. 미 국방부의 한 전직 직원은 CNN에서 “장군과 대령은 서류를 좋아한다. 돋보기를 끼고 더 자세히 보고 싶어 하기 때문에 프린트하게 한다”고 말했다. 프린트하는 과정에서 사병들에 의해 기밀문건이 샜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미국이 악의적이라고 해석될 수 있는 행동은 안 한 것 같다”고 말했다가 구설에 올랐다. 한국의 고위 당국자는 도청은 없었다고 부인하지만 순순히 믿기 어렵다. 첩보 활동은 동기에 따라 좋고 나쁜 게 아니라 들키는 것 자체가 나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악이다. 한국에서 생산된 포탄이 미국에 수출됐다가 우크라이나에 지원되는 사안으로 한국이 매우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미국에 엄중히 항의해야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챗GPT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AI)의 문제로 가장 먼저 지적된 것은 사실인 듯 지어내는 글이다. 주로 업데이트된 정보를 학습하지 못했거나 체계적으로 왜곡된 정보를 학습할 때 일어난다. 그러나 꼭 그렇지 않더라도 엉뚱한 단어들의 조합을 던져주면 황당한 설명을 지어내는 일이 종종 있다. ‘생각하는 인간’은 최소한 자신이 뭘 알고 뭘 모르는지 안다. 모르는 걸 안다고 착각할 때도 있지만 대체로는 그렇다. 소크라테스는 이것이 참된 지식의 출발점이라고 했다. 챗GPT는 인간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갖고 있지만 이 최소한을 모른다. ▷챗GPT가 온갖 정보를 긁어모아 마구잡이로 학습하면서 법적으로 가장 크게 문제가 될 게 표절일 줄 알았는데 개인정보 침해가 먼저 문제로 떠올랐다. 이탈리아 데이터보호청은 챗GPT가 학습을 위해 개인정보를 대량 수집·저장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개인정보 침해가 발생하고 있다며 챗GPT가 개인정보 보호 기준을 충족할 때까지 접속을 차단하기로 했다. 이탈리아의 조치에 캐나다 영국 프랑스 아일랜드 등이 동조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컴퓨터가 인간보다 계산을 잘하게 된 지는 오래됐다. 체스나 바둑에서 보듯 경우의 수를 따져 예측하는 것도 인간보다 잘하게 됐다. 컴퓨터가 챗GPT를 통해 인간에게 도전장을 낸 분야는 작문이다. 다만 인간처럼 생각을 토대로 문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특정 단어 다음에 특정 단어가 나올 확률 분포를 따져서 문장을 만든다. ▷학교에서는 당장 봄 학기를 맞아 작문 지도가 불가능해졌다고 아우성이다. 챗GPT에 감상문이나 리포트를 쓰라고 지시했더니 AI가 작성했는지, 사람이 작성했는지 판별하기 어려운 글을 써내고 있다. 판별 자체가 어려우면 사용을 금지한다고 금지될 일이 아니다. 모든 과목이 실은 작문이다. 작문 지도를 할 수 없으면 사고력과 표현력을 키울 수 없고 창의적인 생각에 따른 창의적인 글도 쓸 수 없다. AI처럼 확률 분포에 따른 글만 쓸 수 있다. 그래서 AI의 글은 AI의 글임을 알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워터마크(디지털 표시)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미국 비영리단체 ‘삶의 미래 연구소(FLI)’는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애플 공동창업자 스티브 워즈니악 등 유명 인사들의 서명을 받아 생성형 AI의 추가 개발을 6개월간 중단하고 사회에 미칠 영향에 대해 정밀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빌 게이츠 같은 이는 “개발 중단은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며 “문제가 있는 부분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어느 쪽 견해가 타당하든 이제 찬사에만 취해 있지 말고 한계와 문제를 진지하게 따져볼 때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조국 씨가 문재인 정부에서 청와대 민정수석을 할 때 배상과 보상의 차이를 거론하며 대법원의 일본 강제징용 판결을 옹호한 적이 있다. 배상은 불법행위에서 발생한 손해를, 보상은 적법행위에서 발생한 손실을 복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법학개론 수준의 개념 구별로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을 이해할 수 없다. 청구권 협정은 한일병합의 불법성에 대한 결론을 먼저 내린 뒤 맺어야 하는 협정이지만 그래서는 해결이 요원하니 선결 문제는 덮어두고 일단 돈 문제의 해결을 모색한 것이다. 일본은 한일병합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아 보상이라 주장했고 한국은 한일병합의 불법성이 명확하기 때문에 배상이라 주장했다. 내막을 잘 모르면 일본은 보상이라고 주장했으므로 배상 문제는 남아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양국이 원한 것은 보상으로 부르든 배상으로 부르든 실질적인 금전 문제의 해결이었다. 한국은 청구권 협정 전후로는 배상임을 고집하다가 근래로 올수록 보상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조 씨처럼 보상과 배상의 구별을 엄밀히 할 경우 보상이란 용어의 사용은 한일병합은 합법이었다고 인정하는 자가당착에 빠질 수 있다. 따라서 청구권 협정에 관한 한 보상과 배상은 그 차이에 큰 의미를 부여할 게 못 된다. 노무현 정부에서 2005년 민관공동위원회를 만들어 청구권 협정에 무엇이 포함됐는지 검토했다. 그 결과 △위안부 등 일본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 △사할린 동포 △원폭 피해자 문제는 청구권 협정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결론 내렸다. 또 일본의 무상원조 3억 달러에 포함된 것으로 강제동원 피해보상 문제 해결 성격의 자금을 명시했다. 1961년 12월 15일 제6차 한일회담 예비회담에서 강제동원에 대한 피해보상으로 생존자 1인당 200달러, 사망자 1인당 1650달러, 부상자 1인당 2000달러를 기준으로 3억6400만 달러를 산정했다. 이를 포함해 8개 항목에 대한 보상금으로 모두 12억2000만 달러를 일본에 요구했다. 일본은 일일이 보상액을 증명하는 게 곤란하다는 이유로 한일 간의 경제협력 금액을 올리는 대신 청구권을 포기하도록 요구했다. 민관공동위의 민간 측 위원장은 양삼승 변호사가, 정부 측 위원장은 당시 이해찬 총리가 맡았다. 이 전 총리가 최근 다시 등장해 “민관공동위는 개인 청구권마저 소멸된 것으로 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민관공동위 백서를 보면 2005년 4월 27일 제2차 민관공동위 회의 당시 문재인 민정수석이 ‘국가 간 협정으로 개인 청구권을 어떤 법리로 소멸시킬 수 있는지 법리적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개인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는 결론이 아니라 문 수석이 검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는 내용이다. 결론이 어땠는지는 양 변호사가 한 언론 인터뷰에서 밝혔다. “회의에서 청구권 협정 당시 강제동원된 사람들의 사적 청구권까지 해결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문 수석의 주장은 하나의 의견으로 기록된 것이다. 박정희 정부는 1977년 강제징용 사망자에게 1인당 30만 원씩 모두 25억6560만 원을 지급했다. 노무현 정부는 민관공동위가 백서를 낸 이후 추가로 돈을 지급하면서 “1977년 시행한 보상으로 인해 정부의 보상 의무는 없어졌지만 보상이 불충분해 도의적 책임을 느끼고 위로금을 지급한다”고 발표했다. 이 전 총리는 위로금이기 때문에 대위 변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말장난이다. 위로금은 대위 변제가 완료됐다는 전제에서 지급된 것이다. 다시 말해 강제동원된 사람들의 사적 청구권까지 해결됐다는 전제에서 지급된 것이다. ‘제3자 변제’는 노무현 정부를 포함해 역대 정부의 해석과 다른 대법원 판결 때문에 나온 고육책이다. 대법원 판결의 이행을 강제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건을 국제사법재판소(ICJ)로 가져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대법원 판결을 등에 업고도 ICJ로 가져가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바로 그 자신이 과거 강제징용 피해자 변호인으로서 개인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고 주장해온 사람이기에 그것은 모순이었다. 결국 그쪽 문은 닫혔음이 드러났다. 이제 다른 대통령이 다른 쪽 문을 열게 해줘야 한다. 비판할 건 비판하되 닫힌 문쪽의 경로로 다시 돌아가는 비판이어서는 안 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서울에서 아직 꽃망울 못 터뜨린 목련도 적지 않은데 벌써 벚꽃이 폈다. 진달래는 아직 펴 있고 개나리는 여전히 무성해지고 있다. 봄꽃은 대개 매화 진달래 개나리 목련 벚꽃 순으로 핀다. 서울 벚꽃 개화의 기준인 종로구 서울기상관측소의 벚꽃은 25일 폈다. 친구가 전남 구례 화엄사를 찾아 멋진 홍매화 사진을 찍어 카톡으로 보내준 것은 19일이다. 매화에서 벚꽃까지 한 달에 나눠 피던 꽃들이 전국에서 일주일 사이에 다 피었다. ▷꽃피는 시기가 빨라지면서 지자체는 봄꽃 축제를 앞당기고 있다. 산수유는 매화와 더불어 봄철에 가장 먼저 피는 꽃 중 하나다. 경기 이천시는 백사 산수유 축제를 2006년까지 4월 7일에 시작했으나 2007년에는 3월 30일로 1주일 앞당겼다. 이천시는 올해 다시 축제를 3월 23일로 1주일 앞당겼다. 7년 사이에 2주일 앞당겼다는 사실에서 점점 더 빨라지는 기후변화의 속도를 실감할 수 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의 연구에 따르면 영국에서 40만 종 이상 꽃의 평균 개화 시기가 1753∼1986년에 비해 1987∼2019년에 30일 더 빨라졌다. 영국에서 이런 과학적인 결과를 내놓을 수 있는 것은 과학자 박물학자 정원사 등의 관찰기록을 모아놓은 ‘자연의 달력(Nature’s Calender)’이라는 데이터베이스가 있어서다. 우리도 훌륭한 기록문화를 가진 나라인 만큼 비슷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개화 시기의 정확한 변화 추이를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지구가 겨울에 예전보다 덜 식었다가 빨리 데워지기 때문에 봄꽃 피는 시기가 빨라질 뿐만 아니라 압착되고 있다. 다양하고 많은 꽃이 한꺼번에 피니 보기는 좋다. 진달래의 분홍은 은은하기는 하지만 잿빛 산야를 물들이기에는 역부족이고, 개나리의 노랑은 물감을 풀어놓은 듯하지만 너무 노랗기만 해서 귀해 보이지 않았는데, 목련의 송이송이 탐스럽고 벚나무의 팝콘 터지는 듯한 흰 꽃과 함께 피어 있어 한데 잘 어울린다. ▷아름다운 외관 너머에는 심각한 생태학적 미스매치(mismatch)가 발생하고 있다. 꽃이 너무 일찍 피었다가 져버리면 그 꽃에 의존해 살아가는 곤충의 활동 시기와 어긋나 곤충이 살 수 없고 그 곤충을 먹고 사는 새도 살 수 없다. 몇 년 전부터 꿀벌 폐사 현상이 양봉업자의 애를 태웠고 근래로 올수록 심해지고 있다. 무엇보다 꿀벌이나 새가 없으면 자연수분이 이뤄지지 않아 나무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생태계에 큰 혼란이 초래될 수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점점 더 아름다워지는 봄꽃을 구경하는 게 기쁘지만은 않은 이유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2012년 대법원 1부는 일본 기업의 강제징용 배상 책임을 처음 인정했다. 당시 전원합의체에 회부되지 않고 소부(小部)에서 결정된 것은 1부에 속한 김능환(주심) 이인복 안대희 박병대 대법관이 모두 배상 책임 인정에 동의했음을 뜻한다. 당시 대법원 1부가 파기환송한 사건은 재상고돼 6년 만인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회부됐다. 김명수 대법원장을 포함해 13명이 참여해 이 중 김 대법원장과 김소영(주심) 조희대 박상옥 이기택 김재형 박정화 민유숙 김선수 이동원 노정희 대법관 등 11명이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그로써 판결이 확정됐다. 국가는 어찌 되건 말건 자신만 비난을 면하면 된다고 여긴 대법관 15명의 이름을 기억해 두라고 일일이 거론해봤다. 윤석열 대통령이 구상권 행사 없는 ‘제3자 변제’로 일본에 숙이고 들어가는 국치(國恥)를 자초한 책임은 윤 정부 외교 3인방이 아니라 바로 이들에게 있다. 2012년 대법원 1부 판결이 내려진 직후 이 문제에 정통한 이근관 서울대 교수 등 국제법 전문가들의 비판 논문이 쏟아졌다. 요지는 두 가지다. 첫째,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는 강제징용 피해자 개인의 청구권도 포함돼 있다는 게 일본 정부만이 아니라 한국 정부도 오랜 기간 일관되고 명확하게 견지해 온 견해라는 것이다. 둘째,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체결된 대부분의 유사한 협정이 국가와 개인의 청구권을 구별하지 않고 동시에 소멸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2018년 대법원은 6년 전과 똑같은 판결을 내렸다. 한일 청구권 협정에는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표현이 나온다. 박근혜 정부에서 위안부 합의가 따로 체결된 것은 1965년 당시에는 위안부가 현안으로 부상하지 않아 한일 간의 묵시적 합의에 의한 청구권 범위에 들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제징용은 그 범위에 들어 있었다. 강제징용 배상 청구권이라면 그것이 개인의 청구권이지, 국가의 청구권이겠는가. 그래서 노무현 정부에서 국가가 대신 배상을 받았으니 피해자에게 대위(代位) 변제한다는 구상이 나왔고 그대로 실행됐다. 대법관들은 개인 청구권을 인정하는 판결이 한일 간 협정을 파기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외교 갈등을 초래하리라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으나 정부가 알아서 하라고 던져버리고는 빌라도처럼 손을 씻었다. 그들이 지난 5년간 한일 관계의 악화를 지켜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오지(奧地) 국가에서나 나올 법한 판결을 했으니 일본 기업이 배상을 거부해도 문재인 정부 5년간 국제사법재판소(ICJ)로 가져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사법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고 판사 검사 변호사 교수로서도 높은 평가를 받아 대법관의 자리에까지 오른 똑똑한 사람들이 외교관계를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헝(hung)’ 상태로 만드는 판결을 내리는 바람에 결국 일본에 숙이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초래했다는 것이 부끄러워한다면 진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두 사람을 더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한 사람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고, 다른 한 사람은 윤 대통령이다. 외교에는 ‘한목소리 원칙(one voice principle)’이라는 게 있다. 사법부냐 행정부냐 입법부냐를 넘어 국가 전체가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원칙이다. 양 전 대법원장은 한일 정부 간의 외교적 해법이 마련되기까지 판결 확정을 가능한 한 연기시키려 했다. 그런 그를 박근혜 정부와의 재판 거래로 몰아 구속영장을 청구한 것은 다름 아닌 당시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이다. 양 전 대법원장에게는 여러 혐의가 적용됐지만, 그를 구속까지 몰아가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강제징용 재판을 질질 끌었다는 혐의다. 제3자 변제는 채권자도 채무자도 원하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사과할 사람은 사과할 생각이 없고 아무런 관련 없는 제3자가 대신 사과한다면 사과를 받아들일 수 있겠나. 분명 무리한 해법이다. 그렇다고 이 해법을 탓하기도 어려운 건 이미 두어진 무리수는 새로운 무리수를 두지 않는 한 바로잡을 방법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다만 윤 대통령은 이 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는 듯이 딴청 부리지 말고 문재인 정부 적폐수사의 장단에 맞춰 칼춤을 춘 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이해를 구해도 구해야 할 것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 미국이 세계 최고의 자본주의 국가로 부상하던 시대의 세 부자가 존 록펠러, 앤드루 카네기, J. P. 모건이다.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을 지낸 앨런 그린스펀은 ‘미국 자본주의의 역사’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다. “록펠러는 전 세계 정유량의 90%를 통제했고, 카네기는 영국보다 많은 철강을 생산했으며, 모건은 미국을 두 번의 파산 위기에서 구했다.” ▷록펠러와 카네기는 자수성가했지만 모건은 그렇지 않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국제금융의 중심지인 런던에서 영국과 미국을 오가며 금융 거래를 한 사람으로 재력을 가졌다. 그 자신은 독일이 학계의 중심이던 때 괴팅겐대에서 수학을 공부할 정도로 지적이었다. 석유왕 록펠러나 철강왕 카네기가 한 분야에서 기업을 키웠다면 은행가 모건은 금융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기업을 합병하고 이사회를 통해 장악했다. 미국에 연준이 없던 1895년과 1907년에 모건이 ‘1인 연준’ 역할을 한 것은 은행의 파산과 연이은 기업의 파산을 막는 것이 누구보다 자신에게 절실했기 때문이다. ▷모건은 1912년 하원 위원회에 불려나왔다. 그와 동업자들의 금융조합이 112개 기업의 341개 이사직을 차지했다는 혐의 때문이었다. 그는 이듬해 사망했는데 이유가 하원 위원회에서 공개적인 비방을 당한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가 사망한 해 미국에서 연준법이 만들어졌다. 이 법에 따라 12개의 연준 은행이 만들어져 모건 같은 민간 은행가가 하던 역할을 맡게 됐다.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이 미국 최대 은행인 JP모건의 제이미 다이먼 회장을 전화로 찾아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여파로 돈이 빠져나가고 있는 퍼스트리퍼블릭은행 등 중소은행에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다이먼 회장은 요청을 수락한 뒤 뱅크오브아메리카, 웰스파고, 시티 등 다른 은행 CEO와 일일이 연락해 협조 지원을 끌어냈다. 1907년 모건이 월가의 은행가들을 모아 협조 지원을 끌어낸 일을 떠올리게 한다. ▷은행의 파산을 막는 데 세금이 쓰이는 것은 맞지 않다. 116년 전이나 지금이나 궁극적으로 은행만이 은행을 도울 수 있다. 물론 뱅크런을 막아 은행권 전체에 이익이 될 때의 얘기지만 은행의 민간 소유권이 확고하고 은행이 자율성을 갖는 나라에서는 그렇다. 우리나라는 지금까지의 경험에서 보면 정부가 은행장들을 한데 모아놓고 몇 마디 윽박지르는 것만으로 협조 지원 정도는 간단히 될 것 같은 나라다. JP모건의 되살아난 민간 연준 역할은 우리에게는 처음부터 없었던 은행의 한 중요한 측면을 생각해보게 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그 사과가 떨어진다’는 건 묘사(description)다. ‘그 사과를 놓으면 떨어질 것이다’는 건 예측(prediction)이다. 챗GPT를 포함한 인공지능(AI)은 묘사와 예측은 잘한다. 그러나 설명(explanation)은 그 이상을 요구한다. ‘모든 물체는 떨어진다’와 같이 통계로 수집 가능한 사례를 넘어 보편성을 주장하는 추정이라든가, ‘모든 물체는 중력의 힘 때문에 떨어진다’는 인과적 설명은 AI가 만들어낼 수 없다. ▷95세의 노장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가 8일 챗GPT 출시 100일을 맞아 뉴욕타임스 기고에서 AI가 지닌 지능의 한계를 지적했다. 그는 아이의 언어 습득 과정은 신비로우며 인간은 언어의 활용을 통해 동물과 구별되는 도약을 했다고 본다. 그럼 기계는? 그에 따르면 인간 지능의 운영체계(OS)는 적은 정보로도 그것을 놀라울 정도로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데 반해 AI의 OS는 수백 테라바이트의 데이터를 가지고 패턴과 통계에 따른 답변을 만들어낼 뿐이다. ▷인간의 추정이나 설명은 틀릴 수 있다. 그러나 틀릴 수 있다는 점이 사고(thinking)의 중요한 구성 부분이다. 사고는 그럴듯한 설명을 제공하고 그 설명의 잘못을 수정해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챗GPT는 지구가 평평하다는 주장을 수정해가면서 지구가 둥글다는 결론에 이르는 방식이 아니라 어느 주장이 더 많이 거론되고 있느냐는 개연성을 따져 결론에 이를 뿐이다. ▷촘스키는 과학철학자 칼 포퍼를 소환했다. 포퍼는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가장 그럴듯한 이론이 아니라 가장 그럴 것 같지 않은 이론’이라고 역설적으로 말한 바 있다. 사과의 낙하는 사과가 자연스러운 위치를 찾아가는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도 당시로는 그럴듯했다. 그러나 ‘왜 하필 지구가 자연스러운 위치냐’는 의문이 따랐다. 사과의 낙하는 질량이 시공(時空)을 휘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아인슈타인의 설명은 여전히 그럴듯해 보이지 않지만 사실이다. 지능은 그럴듯해 보이지 않지만 통찰력 있는 것을 생각하고 표현하는 능력이다. ▷인간 지능의 또 하나의 능력은 도덕적 사고다. 도덕적 사고는 인간 지능의 창의성을 제한해 해야 하는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을 구별한다. 그것은 창의성과 윤리적 원칙 간의 균형을 맞추는 능력이다. 챗GPT는 겉보기에는 세련된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도덕적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촘스키는 이를 해나 아렌트가 나치 홀로코스트 실무책임자인 아이히만을 가리켜 썼던 ‘악의 평범성’에 비유한다. 어쩐지 인간 지능이 아니라 인공지능에 적용한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 같은 느낌이 든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문재인 전 대통령이 경남 양산 평산마을에 책방을 연다고 한다. 반가운 소식이다. 다만 책 추천은 좀 신중히 했으면 한다. 그가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훌륭한 독서가가 아닌 듯해서 하는 말이다. 암살로 사망한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회고록이 얼마 전 일본에서 출간됐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에 대해 “호전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군사 행동에 소극적이었다”는 평가가 나온다고 한다. 트럼프가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낸 ‘불구가 된 미국’이란 책이 있다. 이 책을 읽어봤다면 트럼프가 돈이 아까워서라도 전쟁하지 못할 ‘위인’임을 누구라도 알 수 있다. 문 정부의 청와대는 2017년 미국이 당장이라도 북한을 폭격해 전쟁이 날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그해 10월쯤 청와대 어느 수석과 저녁을 했다. 내가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이 너무 유화 일변도라고 비판하자 술이 들어간 그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며 당장 한반도에 전쟁이 터질지도 모르는데 무슨 소리를 하느냐며 버럭 화를 냈다. 외교나 안보와는 관련 없는 수석인데도 그래서 놀랐다. 청와대 분위기가 그랬던 모양이다. 트럼프의 책에는 군사력은 실제 사용해서 상대방을 제압하는 것보다 군사력의 압도적 우세를 과시함으로써 상대방이 지레 겁먹게 하는 게 돈이 덜 든다는 대목이 곳곳에 나온다. 문 전 대통령이 이 책을 읽어봤다면 ‘6·25전쟁 이후 최대 위기’ 운운하며 스스로를 기망하면서 전 세계의 비웃음을 산 평화 쇼를 벌이진 않았을 것이다. 문 전 대통령이 책에 각별한 애정을 표시하지 않았다면 ‘트럼프의 책 좀 읽어볼 것이지’라는 주문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통령으로 꼭 읽어야 할 책은 읽지 않고 대통령으로서는 참으로 한가한 책들을 많이도 읽고 권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문 전 대통령과는 달리 거의 혼밥을 하지 않는 타입이다. 사람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니 책 읽을 시간도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책을 꼭 읽어야 하는 건 아니다. 사람을 만나서 더 많은 걸 배울 수 있다.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유학 갈 때 아버지로부터 책 읽지 말고 사람 만나 살아 있는 지식을 배우라는 가르침을 받고 유럽통합의 아버지가 된 장 모네 같은 위인도 있다. 그러나 그것도 이미 아는 게 많아 말귀를 알아먹을 때의 얘기다. 윤 대통령이 대선 때 거론한 책이 한 권 있으니 밀턴 프리드먼의 ‘선택할 자유’다. 하도 이 책을 자주 거론해서 읽은 게 이 책밖에 없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책은 인플레이션에 대한 통찰로 가득 차 있다. 프리드먼은 5% 정도의 물가 인상은 가볍게 여긴 케인스주의 경제학자들과 달리 1%의 인플레는 1%의 ‘입법 없는 과세’라며 그 폐해의 심각성을 경고했다. 물가를 잡을 때는 물가를 잡는 데 전념해야 하는데 윤 대통령은 물가를 잡는 것과 동시에 공공요금 현실화, 의무보험료 징수 확대 등 오만 것을 다 하겠다고 덤비다가 난방비 폭등으로 비로소 책 속의 인플레가 아닌 실제 인플레가 뭔지 알게 된 듯 이번에는 방향을 완전히 바꿔 공공요금은 물론이고 소주 등 사기업의 물가까지 통제하는 방향으로 돌아섰다. 프리드먼이 하지 말라고 경고한 바로 그것을 하고 있다. 미국과의 금리차로 인한 환율 문제도 있고 해서 정부로서는 한국은행의 금리 결정에 왈가불가하기 어려워졌다. 그러자 2선에서 은행을 다그쳐 예금금리를 낮추게 하더니 다시 대출금리까지 낮추도록 압박하고 있다. 이런 것이야말로 ‘인플레는 언제나 어디서나(always and everywhere) 통화적 현상’이며 통화량 조절이 인플레 대책의 핵심이라는 ‘선택할 자유’의 내용에 정면으로 어긋난 것이다. 대부분의 정부는 인플레에 필요한 대책을 잘 알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대책을 밀고 가는 정부의 의지다. 프리드먼은 낮은 경제성장과 평시보다 높은 실업기간을 거치지 않고 인플레가 종식된 사례는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다고 단언한다. 정부의 역할은 인내심을 갖고 대처하면서 그 부작용을 줄이는 것이다. 윤 정부에 부족한 것이 바로 그런 인내심이다. 윤 대통령이 얼마 전 스스로 강조한 괴테의 문구가 있지 않나. ‘서두르지 말고 그러나 쉬지 말고(ohne Hast, aber ohne Rast).’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국회의 탄핵 소추로 직무정지된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판사 출신이지만 검사 인맥으로 보수 정부에 들어왔다. 대검 중앙수사부장 출신인 안대희 대법관 밑에서 재판연구관을 한 인연으로 박근혜 정부에서 국민권익위 부위원장을 지냈고 윤석열 대통령의 충암고 후배라는 인연으로 장관이 됐다. 이 장관은 취임하자마자 경찰제도개선자문위원회를 만들어 경찰국 신설을 추진했다. 위원장인 황정근 변호사와 함께 경찰국 신설에 총대를 멘 검사 출신 정승윤 부산대 로스쿨 교수는 국민권익위 부위원장으로 임명됐다. 지금은 경찰제도발전위원회가 자문위를 대체해 경찰대 폐지 등을 추진하고 있다. 그 위원장도 검사 출신인 박인환 전 건국대 법대 교수다. ▷윤 대통령은 어제 경찰 국가수사본부장에 정순신 변호사를 임명했다. 경찰 수사의 최고위 자리에 검사 출신을 임명한 것이다. 정 변호사는 윤 대통령이 대검 중수 2과장을 할 때 대검 부대변인을 지냈고 윤 대통령이 서울중앙지검장을 할 때 인권감독관으로 같이 근무했다. 문재인 정부 때 검경 수사권 조정 과정에서 경찰 수사지휘권을 포기하는 대신 직접 수사권을 계속 갖겠다고 한 것은 당시 검찰총장이던 윤 대통령이다. 그러나 이제 국수본부장에 측근 검사 출신을 임명함으로써 수사지휘권을 넘어선 깨알 같은 수사 지시가 가능해진 셈이다. ▷윤 정부는 경찰국을 신설해 경찰 인사권과 징계권을 확보하더니 국가수사본부장에 검사 출신을 임명함으로써 경찰 장악의 마침표를 찍었다. 법무부 장관도 검찰총장도 대통령의 측근, 복귀할 가능성이 높은 행안부 장관도 국수본부장도 대통령의 측근이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의 관할 범위가 남아 있긴 하지만 공수처가 무기력한 수사력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대통령 자신은 법으로 정해진 특별감찰관을 아예 임명할 생각도 않고 있으니 대한민국의 모든 수사는 대통령 측근들이 장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사는 그 위력을 잘 알면 알수록 더 두려운 것일까. 검찰의 경찰 수사지휘권은 법적으로 사라졌다. 더불어민주당 정권의 ‘검수완박’법으로 줄어든 검찰 직접 수사 영역을 대통령령을 통해 확대하긴 했으나 그런 확대에는 한계가 있다. 물론 검찰이 영장청구권을 독점하는 한 영장 청구가 필요한 정도의 중요 수사를 경찰이 검찰 눈을 피해 하기는 어렵다. 그렇다 하더라도 검찰이 직접 수사하지도 못하고 지휘하지도 못하는 큰 공백이 생긴 것은 오랫동안 검찰을 통해 모든 수사를 장악했던 정권에는 공포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보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경찰을 장악하려고 하는 정권의 노력이 이해되지 않는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은행은 공공재인가. 공공성을 엄밀히 적용하면 경제 행위는 가족 단위를 벗어나는 순간 다 공공성을 지닌다. 그래서 공공성을 지닌다고 다 공공재라고 하지 않는다. 그 공급이 시장 메커니즘에 의존하지 않는 것을 특별히 공공재라고 한다. 군대 경찰 사법 등의 서비스는 국가에 의해 제공되니 공공재다. 우리나라는 전기와 가스마저도 공기업이 제공하지만 은행은 공기업조차도 아니다. 은행은 오래되고 강력한 사적(私的) 기원을 갖고 있다. 사채업이 은행의 원형이다. 자본주의의 발상지인 영국에서 은행이 민간 소유인 것은 물론이고 중앙은행인 잉글랜드은행마저 민간 소유다. 미국도 연방정부가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을 임명하긴 하지만 Fed를 구성하는 12개 연방준비은행은 민간 소유다. 우리나라 한국은행만 무자본 특수법인으로 별종인데 민간 소유가 아니어서 독립성이 부족하다. 은행이 과점 체제라는 말은 과연 그런지도 의문이고 언급한 취지가 현실적이지도 않다. 외환위기 이후 은행의 경쟁력을 위해 대형화가 필요하다면서 합병을 유도해 과거보다 더한 과점 상태를 만든 것은 정부다. 우리나라는 NH농협은행을 포함해 전국적 대형 은행이 5개다. 우리나라와 규모가 비슷한 영국 프랑스 독일도 전국적 대형 은행은 그 정도뿐이다. 그래도 일단 과점이라고 해두자. 대형 은행은 설립 자본이 커 과점을 깨려면 산업자본의 금융계 진입이 필요한데 이를 막고 있는 것도 정부다. ‘은행 돈잔치’에 과점을 들먹이는 건 현 구조 내에서 바로잡아야 할 행태의 문제를 구조의 문제로 치환하고 언제 가능할지도 모르는 구조의 변화를 추구하는 격이다. 지난해 은행이 예대마진으로 떼돈을 번 건 과점 탓이라기보다는 정부 탓이다. 대출금리는 대개 변동금리이기 때문에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올리면 은행은 대출금리를 즉각 올린다. 반면 예금금리는 정기예금의 경우 1년 단위로 금리가 조정되는 고정금리다. 대출금리는 빠르게 올라가는 데 비해 예금금리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금리인상기에는 예대마진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정부는 지난해 7월부터 은행에 예대마진을 공시토록 의무화했다. 대출금리를 올렸으나 예금금리를 올리지 않아 큰 예대마진을 취하는 은행을 압박하기 위함이다. 그런 차에 레고랜드 파동으로 회사채가 소화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은행이 부실대출이 발생할 것에 대비해 예금금리를 높여 수신을 늘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돈이 은행으로만 몰려 제2금융권이 감당할 수도 없는 예금이자를 제시하며 수신 경쟁에 나섰다. 정부는 다시 은행에 예금금리를 낮추라고 압박했다. 그 뒤 회사채 사태가 가라앉으면서 은행은 예금금리를 다시 높일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되고 다시 예대마진이 벌어졌다. 그러지 않아도 벌어지던 예대마진을 더 벌어지게 한 것은 오락가락한 정부다. 정부는 이제 낮춰진 예금금리에 맞춰 대출금리를 내리도록 압박하고 있다. 기준금리가 오르면 예금금리도 대출금리도 다 올라야 정상이다. 그런데 어쩌다 낮춰진 예금금리에 맞춰 예대마진을 핑계로 대출금리를 낮추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시중에 유통되는 통화량이 줄지 않고 중앙은행이 기껏 기준금리를 올린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검사 출신이다. 1960년대 자본주의를 혐오해 은행가들을 납치하고 살해하던 극좌파들이나 쓸 법한 ‘은행의 약탈적 행위’ 같은 표현이 검사 출신의 입에서 나와 놀랐다. 검사 출신이 와서 금감원 퇴직자들이 각종 금융회사 임원이나 감사로 가는 전관예우 관행이나 뿌리뽑나 했더니 과거에는 개입하면서도 멋쩍어하던 대형 은행장 인사를 아예 노골적으로 하는 신(新)관치까지 선보이고 있다. 한국이 세계 7대 경제대국임에도 해외에서 큰 프로젝트를 할 때 자국 은행이 없어 외국은행 좋은 일만 시키고 있다. 고작 담보대출이나 하며 ‘땅 짚고 헤엄치기’식으로 수익을 올린 은행의 돈잔치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번 돈이 있으면 은행 경쟁력을 개선하는 데 써야 한다. 그러나 금감원장이 과격한 말로 은행을 금리인상의 고통을 끼치는 장본인처럼 몰아가서는 대출금리를 낮추라는 빗발치는 요구로 물가 잡기가 실패할 수 있다. 금감원장은 금융적으로 무엇이 더 중요한지 구별하고 그 비중에 맞게 시비를 가려도 가려야 할 것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의원내각제에서는 정부와 여당이 일체가 된다. 정부 내각은 여당의 일부다. 여당의 실세들이 장관이 된다. 다만 여기서의 일체는 실은 구조적으로 불안한 일체다. 주요 정책을 둘러싸고 총리와 장관들 사이에 이견이 발생했으나 그것이 해소되지 않으면 장관들은 사퇴로 항의를 표시한다. 여러 장관의 동시 사퇴는 때에 따라서는 내각을 붕괴시키고 총리의 교체를 가져온다.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 당정은 총리를 중심으로 빈틈없이 단합할 것이 요구된다. 대통령제에서는 정부와 여당 사이에 칸막이가 있다. 대통령은 여당에 의지하지 않고 정부를 구성한다. 여당의 실세 몇몇이 정부의 정책에 반대한다고 해서 정부의 존립이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당정의 빈틈없는 단합은 요구되지 않는다. 다만 정부의 성공이 선거의 승패와 긴밀히 연결되기 때문에 정부와 여당은 협조할 강한 동기가 부여돼 있다. 대통령이 대통령제에 고유한 당정의 독립성을 훼손하고 정당 민주주의를 후퇴시킨다는 비난을 받더라도 리스크를 감수하고 당무에 개입하겠다고 하면 막을 방법은 없다. 윤석열 대통령은 당무 개입을 하지 않겠다고 한 약속을 식언(食言)으로 만들면서 대통령실을 내세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특정 당 대표 후보를 비토했다. 3김 이후로 청와대 시절에도 본 적 없는 대통령을 용산 시대에 보고 있다. 대통령실은 김기현 의원과 ‘윤핵관’이 윤심(尹心) 타령을 할 때는 잠자코 있다가 안철수 의원이 윤안(尹安)연대를 거론하자 윤심을 당 대표 선거에 이용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나왔다. 공정함은 고사하고 공정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명백한 불공정이다. 윤심 후보를 뽑기 위해 대놓고 당무에 개입하고 있으면서 당 대표 후보가 윤심에 기대려 한다고 해서 문제 삼는 건 논리적으로도 앞뒤가 안 맞는다. 그냥 까라니까 까는 수준이다. 대통령제가 당정 분리의 토대 위에 서 있다고 하지만 당 대표는 대통령과 화합해야 한다. 대통령실이 누군가를 ‘국정 운영의 적’이라고 부른다면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무시한 이준석 같은 이들이나 대상이 돼야지 대통령에 대한 존중을 계속 표시하는 이들까지 적으로 취급해서는 그렇지 않아도 극우화하는 옹색한 정권이 더 옹색해질 수밖에 없다. 대통령실은 윤안연대는 대통령과 당 대표 후보는 같은 격(格)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됐다고도 한다. 대통령제에서 대통령과 당 대표는 같은 격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상하(上下)관계도 아니다. 둘의 차이는 격이 아니라 서 있는 위치의 차이다. 윤 대통령은 국민의힘의 오너가 아니다. 그는 바지사장일 뿐이다. 바지사장이 과거의 3김들처럼 오너 행세하며 당에 존중 이상의 복종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대통령실은 당원들끼리 윤핵관이라는 표현을 쓰는 건 옳지 않다며 안 의원을 비난했다. 그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있는 걸 있는 대로 말하는 것일 뿐이다. 대선에서 윤석열에게 표를 던진 유권자 중에서는 윤핵관을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도 적지 않다. 윤핵관만 정권의 성공을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도 정권의 성공을 바라며 윤핵관을 비판하고 있다. 대선에서 윤석열을 찍고 싶지 않았지만 차마 이재명이 당선되는 꼴을 볼 수 없어서 윤석열을 찍은 유권자들이 없었으면 윤석열 정권은 태어날 수 없었다. 그 세력을 온전히 안철수가 대표하느냐 마느냐는 부차적인 문제다. 중요한 것은 대선 과정에서 보수세력과 중도세력의 연대를 파괴하려고 한 것이 이준석이었고 지금은 윤핵관이고 대통령실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소인배이고 그들의 의도는 실제로는 충정일지 몰라도 결과적으로는 간신배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안 의원이 국민의힘 대표를 잘할까. 여러 가지 이유로 의문이 든다. 그러나 이유는 다르지만 똑같은 의문이 김기현 의원에게도 들고 이미 사퇴한 권성동 의원과 나경원 전 의원에게도 든다. 다 그만그만한 인물들이다. 지금 국민의힘에 깃발을 높이 들고 ‘나를 따르라’고 할 수 있는 독보적 지도자는 없다. 결국 그만그만한 인물들의 연대로 당을 꾸려 가야 할 형편이다. 하지만 이런 형편은 발상을 달리해보면 친이(親李) 친박(親朴) 공천이 빚은 파동의 악몽에 시달렸던 보수 정당에는 공천 민주화를 통해 한걸음 전진할 수 있는 모처럼의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무속인 천공이 다시 세간의 관심이다. 지난해 1월 대선 과정에서 김건희 여사가 한 유튜브 매체와 주고받은 청와대 이전 관련 사담(私談)이 공개됐을 때 그가 등장했다. 대통령 관저가 육군참모총장 공관으로 정해졌다가 외교부 장관 공관으로 바뀌었는데 거기도 개입했다는 의혹이 지난해 12월 김종대 전 정의당 의원에 의해 제기됐다. 이번에는 그의 보좌관 출신으로 문재인 정부에서 국방부 대변인을 지낸 부승찬 씨가 ‘권력과 안보’라는 책을 내면서 같은 의혹을 제기했다. ▷지난해 4월 1일 미사일전략사령부 개편식에서의 일이라고 한다. 남영신 당시 육군총장에게서 “인수위 고위 관계자와 천공이 총장 공관을 둘러보고 갔다는 보고를 공관장 부사관에게 받았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반신반의해서 “천공이 눈에 띄는 모습인데 가능한 일이냐”고 반문하기까지 했으나 “부사관이 무슨 의도로 허위보고를 하겠느냐”는 답을 들었고, 며칠 후 전화해 “언론에 알려도 되느냐”고 물었을 땐 “현역인 부사관에 대해서만 비밀을 지켜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 ▷김 전 의원은 대통령실에 의해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고발돼 조사를 받고 있다. 부 씨가 왜 그때 실명의 전언이 등장하는 구체적 얘기를 하지 않고 책을 내기 하루 전에야 그 얘기를 하는 것일까. 대통령실은 이번에는 부 씨만이 아니라 보도한 기자들까지 고발했다. 중요한 건 전언보다는 물증인데 부 씨가 남 전 총장으로부터 얘기를 들은 문재인 정부 때 왜 물증까지 확보해 두지 않고 지금에 와서 전언으로만 주장하는 것일까. 여러 의문이 든다. ▷한 번 불거진 의혹이 해소되지 않은 채 다시 불거지면서 반복되는 건 소모적이다. 대선 때부터 이어진 ‘무속 정권’ 의혹이 국정의 발목을 잡지 않도록 이번에 확실히 정리해 두는 게 중요하다. 남 전 총장이 우선 부 씨의 주장을 확인해 줘야 한다. 총장까지 지낸 사람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뒤에 숨는 건 비겁하다. 남 전 총장이 자발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국회 국방위원회가 증인으로 소환해서라도 확인해야 한다. ▷대통령실은 수사까지 갈 것도 없다. 천공이 다녀갔다는 날의 공관이나 주변의 폐쇄회로(CC)TV 기록을 공개함으로써 간단히 사실 여부를 확인해줄 수 있다. 그래서 거짓임이 확인된다면 청담동 술자리류의 가짜 뉴스가 판치지 못하도록 하는 강력한 경고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수사를 핑계로 CCTV 기록 공개를 거부한다면 오히려 대통령이 의심을 살 수 있다. 가짜 뉴스를 발본색원하는 계기가 되든 대통령의 실상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계기가 되든 분명한 결과가 나와야지 흐지부지돼서는 안 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동의보감에 따르면 남자의 결혼 적령기는 16세, 여자는 14세이다. 조선시대만 해도 조혼(早婚)이 성행하고 대가족으로 모여 살았기 때문에 조혼한 부모가 낳은 아이를 기준으로 보면 인생 육십일 때 조부모뿐만 아니라 증조부모까지 함께 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80, 90세 이상 사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경우 고조부모하고도 같이 살았다는 얘기다. 그래서 넉넉잡아 기억에 남아 있을 수 있는 고조부모까지 제사를 지냈다. 그것이 4대 봉사(奉祀)다. ▷한국국학진흥원은 1일 ‘제례문화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라는 자료를 내고 조선시대에 4대 봉사가 원칙으로 명시된 적이 없다고 밝혔다. 1484년 성종 때 편찬된 법전인 경국대전에 따르면 “6품 이상의 관료는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3대까지 제사를 지내고, 7품 이하는 2대까지, 벼슬이 없는 평민은 부모 제사만을 지낸다”고만 명시돼 있다. 다만 이후로 ‘주자가례’를 신봉하는 주자학이 득세하면서 고조부모까지 제사를 지내는 4대 봉사가 양반집을 중심으로 확산됐다. ▷평민이 4대 봉사를 지키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올수록 신분 질서가 무너지고 결정적으로 구한말 갑오경장에 의해 양반과 평민의 구분이 없어지자 양반의 평민화가 이뤄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평민의 양반화가 이뤄져 모두가 4대 봉사를 원칙으로 삼게 됐다. 실제 지키건 안 지키건 그랬다는 말이다. 가난한 집에 시도때도 없이 돌아오는 제삿날을 간소화한 것은 뜻밖에도 일제였다. 일제는 가정의례준칙을 둬 2대 봉사를 강제했다. ▷유교의 본산인 성균관은 광복 후 4대 봉사의 원칙을 재확인했다. 물론 그것을 엄격히 따를 수 있는 일반 가정은 얼마 되지 않았다. 많은 가정이 조부모까지만 제사를 지내거나 나중에는 그것도 어려워 부모 제사만 지내게 됐다. 성균관도 결국은 타협해 명절이나 부모 제사 때 4대까지 한꺼번에 모시는 간략한 방안을 제시했다. 그런데 이번에 국학진흥원에서 4대 봉사의 원칙 자체를 부정하고 나온 것이다. ▷국학진흥원은 “조혼 습속이 사라진 오늘날 고조부모 제사상을 차리는 건 시대착오적”이라고 강조했다. 과거에는 조혼 때문에 3대나 4대가 함께 살았지만 지금은 고령화(高齡化)로 3대가 공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수명 100세 시대가 되면 4대가 공존하는 것도 드물지 않아질 것이다. 그때의 예법은 또 어떨 것인가. 제사란 살아 있을 때 생활을 같이 하거나 따로 살아도 왕래하면서 쌓인 친밀감을 토대로 한다. 봉사는 몇 대가 맞느냐를 따지기보다는 기억에 남아 있는 조상을 추모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민주주의는 다수(plurality)가 아니라 과반(majority)의 지배다. 대통령부터 과반 득표자여야 한다. 이를 위해 미국 같은 연방제 국가가 아닌 이상 프랑스처럼 결선 투표를 하는 수밖에 없다. 만약 딱 한 가지만 개헌을 한다면 의원내각제냐 대통령 중임제냐의 선택이 아니라 대통령 결선 투표 도입부터 해야 한다. 대통령 중임제도 그 위에서라면 더 쉽게 논의할 수 있다. 그 다음으로 필요한 개혁은 의회에서 과반 지배의 확립이다. 의회에서는 정당 의석수 과반과 정당 지지율 과반이 괴리될 수 있어 그것이 문제다. 미국과 영국같이 양당제의 전통이 긴 국가에서는 100% 소선거구제에 대한 의문이 별로 나오지 않는다. 의석수의 과반이 대체로 지지율의 과반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지 않다. 이 괴리를 없애는 가장 단순한 방법은 100% 비례대표제의 실시다. 지역구를 아예 없애고 정당 지지만 밝혀서 그 지지율대로 의석을 나눠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나라는 극히 드물다. 정치는 어느 정당이 하느냐 못지않게 어느 정당의 누가 하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독일은 양당제가 아닌 국가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두 가지 방식을 보여준다. 프랑스는 대선과 마찬가지로 총선에서도 결선 투표를 실시한다. 다만 1, 2위 후보만 결선에 나서는 것은 아니고 일정한 득표율을 넘는 모든 후보가 결선 투표에 나서는 완화된 방식을 취한다. 결선 투표를 통해 당선된 사람은 지역구에서는 과반 지배를 관철했는지 모르지만 그들이 다 모였을 때 국가 전체로는 어느 정당이 과반이 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엄격한 결선 투표의 필요성이 대선보다 덜하다. 다만 대체로는 완화된 결선 투표로도 의석수에 상응하게 지지율을 모아주는 효과가 있다. 독일은 100% 비례대표제에 현실적으로 가장 근접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실시한다. 지역구별 소선거구제로 당선자를 뽑는 투표와 함께 정당 지지를 표시하는 투표를 한 다음에 당선자 수가 지지율에 미치지 못하는 정당에는 지지율에 비례하는 의석수만큼 의석을 나눠주는 것이다. 이 제도는 어느 정당의 당선자 수가 지지율에 따른 의석수를 넘어서는 만큼 의원 수가 늘어날 수 있어야 가능하다. 의석수를 가변적으로 늘릴 수만 있다면 의석수와 지지율의 괴리를 줄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대선 결선 투표와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과반의 지배를 위해 정치의 양극화를 지양하고 협력을 모색하게 하는 제도다. 특히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대선 결선 투표와 달리 개헌 없이도 도입할 수 있다. 다만 지난 총선에서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실패한 것은 의석수를 늘릴 방법을 마련해 놓지 않고 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당선자 수가 지지율에 따른 의석수를 넘는 정당은 위성정당을 창당할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정치 개혁에 중대선거구제를 위한 자리는 없다. 일본이 선진국 중에서는 유일하게 중대선거구제를 실시해 오다가 소선거구제와 비례대표제의 조합으로 바꿨다. 우리가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전진하지는 못할망정 일본마저 버린 중대선거구제로 퇴행해서야 되겠는가.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당장 제대로 실시하기 어렵다면 일단 이전의 병립형 비례대표제로 돌아가야 한다. 병립형 비례대표제는 의석수와 지지율의 괴리를 좁히는 데 기여하는 바가 크지 못하지만 제3, 제4 정당에는 의미가 있다. 병립형 비례대표제로 돌아가되 총선 때마다 지역구 의석을 10석씩이라도 줄여서 비례대표 의석을 100석까지 늘려야 한다. 사라지는 지역구 후보들의 반발이 예상되기 때문에 이것도 쉽지는 않다. 하지만 한꺼번에 하지 않고 조금씩 하면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충분한 수의 비례대표 의석을 마련하는 것이 제대로 된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가기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다만 우리는 정당 공천에 대한 불신이 크다. 특히 비례대표 공천에 대한 불신이 크다.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는 권역별로 비례대표를 뽑되 지지 정당의 후보들 중 누구를 선호하는지 투표한다. 비례대표 당선의 우선순위를 유권자 투표로 정하면 중대선거구제와 비슷해진다. 발상을 전환해 비례대표를 중대선거구제식으로 뽑는다면 사라지는 지역구의 후보를 출마시켜 기회를 주는 것과 동시에 공천에 대한 불신도 어느 정도 불식시킬 수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선거에 나선 김영훈 후보와 안병희 후보는 선거 1주일을 앞두고 불법 설문조사를 했느니 마느니 고소고발전을 벌였다. 양측은 이미 2년 전 변협 회장 선거 투표 당시의 폭행 사건까지 끌어들여 고소와 맞고소를 주고받은 상황이었다. 변협의 선거 규칙은 까다롭다. 그렇게 꽁꽁 묶어놓아 돈이 안 드는 선거를 만든 측면이 있다. 다만 변호사가 고소고발의 전문가다 보니 까다로운 선거 규칙을 역이용해 상대 후보를 고소고발하는 사태가 빚어지기도 한다. ▷김 후보가 16일 3909표(38.5%)를 얻어 3774표(37.2%)를 얻은 안 후보를 누르고 내달부터 임기가 시작되는 신임 회장으로 뽑혔다. 1.3%포인트의 표 차는 선거가 치열했음을 보여준다. 선거의 가장 큰 쟁점은 사설 법률플랫폼 로톡이었다. 현 집행부 노선을 계승한 김 후보는 로톡에 비판적인 반면 안 후보는 로톡에 개방적이다. 다만 김 후보는 협회 차원의 법률플랫폼이라는 대안을 제시하고 나왔다. ▷변협은 법무법인 세종의 설립자인 신영무 변호사를 끝으로 명망가 위주의 회장 시대에 작별을 고했다. 2013년 임기를 시작한 위철환 회장부터는 지방변호사회에서 조직 기반을 다져온 회장들이 당선됐다. 2021년 임기를 시작한 현 이종엽 회장에 이르러서는 이미 지방변호사회를 숫자로 장악한 로스쿨 출신 변호사들이 변협에도 영향을 미쳐 당선을 좌우했다. 그러나 로톡을 둘러싼 찬반 논란은 로스쿨 출신 변호사들 간에도 분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대체로 업계에서 기반을 잡은 변호사는 로톡에 반대하고 기반을 잡지 못한 변호사는 찬성하는 쪽이다. ▷변협은 공익단체와 영리단체의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다. 그러나 로스쿨 출신 변호사들이 한 해 1700명씩 쏟아져 들어오면서 업계의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생계를 유지하기도 힘든 변호사가 점점 늘고 있음을 뜻한다. 변협 회장도 이들의 요구에 부응할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변협의 영리단체적 성격이 강화되고 있다. ▷변협은 인권이 위협받을 때는 인권의 수호자가 되고 헌법이 위협받을 때는 헌법의 수호자가 돼야 한다. 정당한 영리 추구가 인권과 헌법의 수호와 상치되는 건 아니지만 변협의 영리단체적 성격이 강화되고 변협 회장 선거가 회원의 영리만 앞세운 선거가 되면 인권과 헌법의 수호에 필요한 권위가 사라질 수 있다. 회장 선거가 치열한 것까지야 뭐라 하겠는가. 다만 한편으로는 경직된 선거 규칙을 완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상호 비방을 자제해 변협이 법 기술자들의 모임이 아니라 법 수호자들의 모임임을 보여줬으면 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여행 중 여인숙에 딸린 식당에서 식사하는 것이야 오래됐지만 집에 거주하면서 식당에 가서 식사하는 건 서양에서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지난해 개봉 영화 ‘딜리셔스: 프렌치 레스토랑의 시작’은 18세기 프랑스 귀족의 저택에서 일하던 요리사가 돼지가 먹는 감자로 디저트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귀족에 의해 부당한 멸시를 받고 쫓겨나는 일로 시작된다. 돈을 받고 음식을 판다는 생각을 못 해온 요리사가 프랑스 혁명기의 평민을 상대로 식당의 개념을 발견해 가는 과정이 흥미롭다. ▷이후 2가지 종류의 식당이 발전했다. 하나는 레스토랑이고 다른 하나는 캉틴(cantine)이다. 레스토랑은 음식을 제 가격을 받고 파는 곳인데 반해 캉틴은 무료로 주거나 제 가격보다 훨씬 싸게 판다는 차이가 있다. 캉틴은 수도원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19세기 중엽 이후 집산주의가 확산되면서 학교와 공장으로 번져갔다. 우리나라의 학생식당이나 구내식당은 학교나 기업의 보조를 받아 값싸게 먹을 수 있는 곳이라는 점에서 캉틴에 속한다. ▷학생식당과 구내식당이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더니 이번에는 고물가로 다시 어려움에 처했다. 서울대 기숙사 학생식당을 운영하는 생활협동조합은 봄 학기부터 아침 식사 중단을 검토하고 있다. 식자재 가격 상승에 전기료 인상까지 겹치면서 식대를 웬만큼 올려서는 운영이 어렵기 때문이다. 광주테크노파크 구내식당은 지난해 2월 문을 닫은 후 1년 동안 12차례 입찰을 시도했지만 유찰됐다. 입찰가를 낮출 대로 낮춰도 응하는 사람이 없다. ▷NHN 페이코가 ‘페이코 모바일 식권 서비스’를 이용하는 기업 직원의 지난해 3분기 결제데이터를 권역별로 분석한 결과 서울 종로구의 평균 밥값이 비교적 싼 편인데도 8500원이다. 백반 가격이 대개 그 정도다. 가장 비싼 삼성역 인근은 1만5000원이고, 강남역 인근은 1만2000원이다. 가장 싼 구로구가 7000원이다. 그나마 학생식당의 밥값은 평균 5000원 정도이고 구내식당의 밥값은 병원이 6000원 정도다. ▷5000원도 많은 학생들에겐 부담스러운 가격이다. 그래서 아침에 한해 ‘1000원 학식’을 제공하는 대학들이 꽤 있다. 학생이 1000원, 농식품부가 1000원, 나머지는 학교가 부담한다. 아침에 긴 줄을 선다고 한다. 그러나 중요한 건 점심이다. 수업시간에 맞춰 집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나오거나 바로 돌아가 뒤늦은 점심을 먹는 학생도 적지 않다. 그나마 5000원짜리 점심마저 그 가격으론 운영이 어려워 없어질 판이다. 학생도 학교도 학생식당도 어렵다. 정부가 더 많은 지원을 노력해야 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의원내각제 국가에서는 여야 모두 당의 리더가 있고 그들은 총리이거나 야당 지도자다. 대통령제 국가는 약간 다르다. 미국에는 중앙당이 없고 당 대표가 없다. 당의 리더는 여당의 경우 대통령이고 야당은 의회 원내(院內)대표다. 프랑스에는 중앙당이 있고 당 대표가 있다. 그러나 여당 대표는 대통령이다. 야당 대표는 대개 의회 원내대표를 겸한다. 우리나라는 프랑스처럼 중앙당이 있고 당 대표가 있지만 여당 대표는 대통령이 아니고 야당 대표는 국회 원내대표를 겸하지 않는다. 당 대표가 여당의 경우 대통령으로 국정을 이끌거나, 야당의 경우 원내에서 국정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지 않으면서 공천에만 몰두하는 나라는 의정 체제가 비교적 잘 알려진 나라 중에서는 우리나라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당에서 당 대표는 대통령과 원내대표 사이에 낀 과잉의 존재다. 당 대표가 자신이 과잉이라는 주제 파악도 못하고 대통령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여길 때 여당은 늘 위기를 맞았다. 더불어민주당보다는 국민의힘 쪽에서 그런 일이 많았다. 박근혜 정권에서 김무성이 그랬고 윤석열 정권에서 이준석이 그랬다. 유승민은 원내대표 때부터 그런 전력을 보여줬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 유승민의 태도가 당 대표라는 자리의 성격을 잘못 이해한 데서 온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윤핵관’의 당 대표 장악 시도가 정당화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당 대표는 본래 원외(院外)에서 중앙당을 대표하는 자리다. 원외의 당이 의미를 갖는 것은 당이 진성(眞性)당원을 중심으로 구성되고 그들이 내는 당비에 의해 당이 운영될 때다. 국민의힘 책임당원은 가짜 진성당원이다. 이들이 내는 당비는 고작 월 1000원이다. 당비는 다 모아도 정당 운영비의 1%밖에 기여하지 못한다. 정당 운영비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건 국가보조금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정당에서 가짜 진성당원 중심으로 대표를 뽑고 그 대표가 공천을 좌우하는 방식이 민주주의를 밑바닥에서부터 위협하고 있다. 국민의힘은 당 대표 선거를 앞두고 선거 룰을 개정해 이번 선거부터 적용하기로 했다. 그 자체가 반칙인 데다 개정된 룰은 일반 유권자의 의사를 30% 반영해온 데서 당원들의 의사를 100% 반영하는 쪽으로 퇴행했다. 반칙과 퇴행을 해서라도 당 대표 자리를 장악하겠다는 것이다. 대통령실이 출산율 제고를 위한 의견 표명일 뿐인 것을 트집 잡아 벌인 나경원에 대한 공격은 느닷없었다. 대통령의 참모들과 윤핵관은 대강 친윤(親尹)인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다. 확실한 자기들의 사람을 꽂아 위로부터의 일사불란한 공천권을 행사하겠다는 것이다. 한국 정치의 개혁은 누구를 당 대표로 뽑느냐에 달려 있지 않고 당 대표라는 자리를 없애는 데 달려 있다. 당 대표는 지역구를 좌우하는 중앙당, 플랫폼 정당을 거부하는 폐쇄적 당원, 위로부터의 공천 같은 시대착오적 개념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자리다. 물론 현실적으로 당장 당 대표를 없애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국민의힘의 전진은 이런 시대착오적 개념을 떨쳐낼 당 대표를 뽑을 수 있느냐에 달렸다. 민주당은 당 대표란 자리에 붙어 있는 시대착오적 개념에 또 하나의 시대착오적 개념을 더했다. 사법처리 방탄이다. 검찰의 수사가 여전히 변죽만 울릴 뿐 정곡을 찌르지 못한다고 여기지만 이재명도 드러난 혐의를 믿을 만하게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이재명을 민주당 당선이 확실한 지역구에 출마시켜 불체포특권이 있는 국회의원을 만들더니 그것으로도 모자라 당 대표로 만들고 국회를 끊임없이 열어 이중 삼중의 방벽을 치고 있다. 자신의 사법처리를 막는 데 바쁜 사람이 현 국정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야 할 야당 대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 우리나라 양대 정당은 한 번도 진성당원 중심의 정당이었던 적이 없지만 더 이상 진성당원 중심의 정당이 모범도 아니다. 오늘날의 정당은 원외에서는 당원만이 아닌 일반 유권자와 두루 소통하면서 원내에서 입법 활동을 통해 실력을 보여줘야 한다. 이것을 정당의 원내화라고 한다. 우리나라 정당이 원내화의 추세로부터 동떨어져 유독 후진적임을 보여주는 것이 독립된 당 대표라는 자리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경찰관은 휴무일 또는 근무시간 외에 2시간 이내로 복귀하기 어려운 지역으로 여행할 때는 소속 경찰기관 장에게 신고해야 한다는 조항이 경찰공무원 복무규정에 들어 있다. 윤희근 경찰청장이 이태원 참사 당일 밤 충북 제천에서 월악산 등반을 한 뒤 머물렀다는 캠핑장이 어딘지는 모른다. 다만 네이버 길찾기로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에서 가장 가까운 그 지역 캠핑장을 찍어 봐도 자동차로 평일 오후 1시 기준 2시간 20분이 걸리는 것으로 나온다. ▷이 규정이 경찰 내에 더 이상 상급자가 없는 경찰청장에게 적용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규정의 취지로 봐서 경찰청장은 쉴 때도 비상 상황에 대비해 2시간 이내 복귀 지역에 있으려 노력해야 한다. 윤 청장은 자신의 관할 범위는 전국이므로 자신이 근무 지역을 벗어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청장이 업무를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는 것이야 누가 뭐라 하겠는가. 등산한다고 먼 곳까지 갔으니 말이 나오는 것이다. ▷윤 청장은 캠핑장에서 지인들과 음주를 하다 참사 발생 시점으로부터 45분이 지난 밤 11시경 참사 사실도 모른 채 잠이 들었고 이후 경찰청 상황실의 전화를 2차례나 놓친 뒤 다음 날 0시 14분에야 참사 사실을 알았다. 그는 그제 국회 이태원 참사 진상조사에서 음주를 추궁하는 의원에게 “청장도 주말 저녁이면 음주할 수 있다”고 답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요점은 음주를 했느냐 안 했느냐가 아니라 어느 정도나 마셨냐는 것이다. ▷국가공무원 복무규칙에는 공무원은 근무시간이 아닌 때도 항상 소재 파악이 가능하도록 연락체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돼 있다. 이 규정은 경찰청 상황실이 청장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다는 정도로는 부족하고 연락을 받으면 응답 가능한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음주로 깊이 잠든 탓에 상식적으로 적절한 시간 범위 내에서 응답하지 못했다. 그 자체로 징계감인데도 그는 아직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지도 않았다. ▷미국 국립알코올남용중독연구소(NIAAA)에 따르면 미국 성인 남자를 기준으로 표준 음주 2잔 이내가 적절한 양이다. 표준 음주 1잔은 맥주로는 340cc로 캔 맥주 1개에 해당하고 양주로는 43cc로 21도 소주 1잔을 약간 넘는다. 2잔 초과는 과음이다. 과음 상태로라도 제때 응답을 했으면 모르겠으나 응답도 못 했으면서 음주할 권리 운운하는 걸 바라보는 국민의 마음은 답답하다. 참사 사실을 먼저 안 대통령이 경찰청장을 찾았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으나 경찰청장은 쉬든 자든 대통령의 전화에 늘 즉시 응답 가능한 상태로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군대에서는 하계훈련과 동계훈련을 기본으로 한다. 혹서기와 혹한기에 대비한 훈련이다. 병사 1년 차 때는 고참을 따라다니며 배운다. 병사 2년 차 때는 신참을 데리고 다니며 가르친다. 이것이 한 사이클인데 이 사이클을 도는 데는 2년이 걸린다. 신병 교육을 받고 실제 군복무에 투입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을 고려하면 26개월 정도가 필요하다. 육군을 기준으로 2002년까지는 의무 복무 기간이 26개월이었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3년 24개월로 줄었다. 다시 이명박 정부 때인 2012년 21개월로 단축되고 문재인 정부 때인 2020년 18개월, 즉 1년 6개월까지 내려왔다. 1년 6개월은 제대로 복무해도 한 사이클을 돌기에 부족하다. 문재인 정부 때 연대급 이상 기동 훈련이 중지되면서 그나마 그런 훈련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기동 훈련은 부대의 단위가 커질수록 의미가 있다. 대대급 기동 훈련 10번 하는 것보다는 연대급 기동 훈련 1번 하는 것이 낫고, 연대급 기동 훈련 10번 하는 것보다는 사단급 기동 훈련 1번 하는 것이 낫다. 나는 1980년대 군 복무를 하면서 육군 보병 대대 소속으로 근접항공지원(CAS) 요청 훈련을 받은 적이 있다. 근접 전투 상황에서 적이 있는 곳을 정찰하고 공군 조종사에게 폭격을 위한 좌표를 찍어 알려주는 훈련이다. 좌표를 잘못 찍어주거나 조종사가 잘못 알아들으면 적 쪽이 아니라 우리 쪽이 폭탄을 맞는다. 연락은 육군 내 통신망을 사용하지 않고 직접 공군 조종사와 하는 것이어서 상호 교신이 가능한 장비와 프로토콜에 대한 숙지가 필요하다. 그것도 연습을 해봐야 제대로 할 수 있다. 그 훈련을 통해 보병들끼리 움직이는 기동 훈련도 쉽지 않은데 제병(諸兵)협동훈련이나 육해공 합동훈련, 나아가 한미 연합훈련은 그 조율이 얼마나 복잡하고 연습은 또 얼마나 필요할지 대략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문 정부에서는 그런 훈련을 하지 않거나 지휘소 훈련(CPX)으로 대체했다. 훈련은 본래 CPX를 한 뒤 실제 병력이 참여하는 본훈련을 한다. 실제 해보면 CPX대로 되지 않는다. CPX만 한 것은 훈련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 군이 그제 북한군 드론에 철저히 농락당했다. KA-1 경공격기 한 대는 드론 대응을 위해 이륙하다 땅에 처박혔다. 전투기나 헬기가 드론을 탐지했으면 즉시 실사격을 해야 하는데 사람도 아닌 기계를 놓고 경고사격을 하고 경고방송을 했다. 사격 능력은 100여 발을 쏘고도 한 발도 맞히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드론 4대가 다른 1대를 위해 스스로의 위치를 노출하면서 교란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것도 빨리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정보 분석이 늦었다. 드론이 서울 상공까지 진입했다. 사린 가스라도 뿌렸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아찔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북한군 드론이 5시간 우리 영공을 휘젓고 다니는 동안 보고만 받았을 뿐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열지 않았다. 비상사태에 대한 감이 떨어진다. 군을 질책할 법도 한데 이번에는 5시간 동안 뻔히 보면서 뭘 했느냐고 하지는 않았다. 다만 엉뚱하게 드론 부대 창설을 앞당기겠다고 했다. 드론을 탐지하고 격추할 레이더와 대공포가 아니라 드론 부대 창설을 언급했다. 엉뚱함의 정도가 전날 북한군 드론 침공에 대한 대응에는 실패해 놓고 우리 군도 바로 드론을 북한 영공에 침투시켰다고 발표한 합참과 비슷하다. 군대를 오합지졸로 만든 장본인은 문 전 대통령이지만 그 탓을 해봐야 지금 소용이 없다. 윤 대통령은 문 정부에서 북한 드론에 대한 대응 훈련이 전무했다고 비판했다. 그럼 그는 취임 이후 군에 대응 훈련을 시켰는데도 이 모양이란 말인가. 이제는 모든 책임을 윤 대통령이 질 수밖에 없다. 이 정부는 내년에 F-35 추가 도입 예산을 확보했다고 자랑했지만 그런 것으로 안보가 보장되지 않는다. 훈련도 안 하면서 첨단 무기 도입만 그럭저럭 한 것이 문 정부다. 현실의 군대는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처럼 좋은 무기를 획득했다고 당연히 전투력이 좋아지는 게 아니다. 첨단 미사일을 쐈는데 거꾸로 날아가고 군용기를 띄웠는데 이륙하자마자 땅에 처박히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잃어버린 5년을 만회할 혹독한 훈련을 통해 군의 대비태세를 되찾는 것이 시급하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