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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송평인 논설위원입니다.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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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04~2024-05-04
칼럼97%
문학/출판3%
  • [송평인 칼럼]대통령-대통령비서실장-(장관)-비서실 출신 차관

    프랑스의 어느 정치가가 각료직을 제안받고는 차관이 책임지는 조건이라면 맡겠다고 했단다. 그 정치가는 각료직을 맡지 못했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에서라면 문제없다. 이 정부는 장관에게 책임을 지우지 않는다. 책임질 일이 있으면 차관 실장 국장 과장에게 지운다. 김규현 국정원장이 인사 파동에도 불구하고 유임될 것이라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국정원이 문재인 정부의 잘못을 바로잡는 데 있어 그동안 큰 실수를 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다만 1급 인사는 부서장 책임이다. 지난해에는 이 정권에서 꽂아넣은 검사 출신 기획조정실장이 원장을 통하지 않고 직접 대통령에게 사직서를 내는 일이 있었고 최근에는 원장이 올린 1급 인사안에 윤 대통령이 결재까지 했다가 철회하는 소동이 빚어졌다. 그런데도 인사안을 사실상 주도했다는 원장 측근에게만 책임을 묻고 말 모양이다. 윤 대통령이 누구에게 무슨 얘기를 듣고 ‘킬러 문항’에 귀가 꽂혔는지 모르겠으나 자신이 지시한 킬러 문항 배제에 대한 대책이 없었다고 분노한 모양인데 정작 이주호 교육부 장관은 멀쩡하고 이번에는 차관도 멀쩡하고 다만 대학 입시 담당 국장이 경질되고 교육평가원장이 교체됐다. 위기를 모면한 이 장관은 대통령을 향해 ‘최고의 입시전문가’ 운운하며 이 정부에서 장관이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몸소 보여줬다. ‘킬러 문항’이란 게 문제가 있긴 하지만 교과 과정 밖도 아니고 교과 과정 내에서 여러 번 꼬아서 고난도로 낸 문항까지 다 ‘킬러 문항’으로 몰아 없앤다면 결국 물수능으로 갈 수밖에 없어 변별력을 확보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물수능으로 가기로 한다면 그것도 하나의 정책이긴 하지만 물수능 예고를 학기 초가 아니라 학기 중에 하면서 어떻게 최고의 입시전문가인지는 모르겠다. 윤 대통령은 취임 1년을 맞은 지난달 9일 국무회의에서 “공무원들이 새 국정 기조에 맞추지 않고 애매한 태도를 취한다면 과감히 인사 조치하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국정 기조를 따라오지 못하는 장관들을 자신이 과감히 인사 조치하겠다는 말을 에둘러 한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발언 직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아니라 2차관이 교체됐다. 내가 보기에는 탈원전 폐기 정책이 대체로 잘되고 있는 것 같은데 윤 대통령에게는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원전 정책은 산자부에 가장 중요한 정책 중 하나다. 그에 부응하지 못했다면 일단 장관이 책임지고 그다음에 담당 차관이 책임지든가 해야 하는데 순서가 뒤집혔다. 장관도 바뀐다는 얘기가 있으니 그건 두고 보자. 윤 대통령 집무실 책상에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선물받은 ‘the buck stops here(책임은 내가 진다)’라는 팻말이 놓여 있다. 좋은 말이다. 그러나 윤 대통령이 한 번이라도 이 말을 진지하게 생각해 봤다면 도대체 대통령은 어떻게 책임을 질 수 있는지 자문해 봤어야 한다. 실제로는 대통령이 책임질 방법이 없다. 의원내각제라면 불신임이 예상될 때 자진 사퇴하든가 조기 총선으로 국민에게 책임 소재를 물을 수 있지만 대통령제에선 그럴 수 없다. 미국 대통령은 그래도 중임제니까 다음 선거에서 패배하는 것으로 책임을 진다고 하지만 한국 대통령은 단임제여서 임기가 끝나면 그냥 끝이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형사상 중대한 범죄를 저질러 탄핵을 당하는 것 말고는 책임질 방법이 없다. 그러면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담당 장관이 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윤 정부에서는 대통령도 책임지지 않고 장관도 책임지지 않는 시스템이 정착되고 있다. 세상에 책임지지 않는 장관 자리만큼 좋은 자리가 어디 있겠나. 그러나 그런 장관은 자칫 핫바지가 될 수 있다는 점은 각오해야 한다. 교체된 산자부 2차관 자리에 대통령실 비서관이 갔다. 곧 대거 차관 인사가 있을 예정인데 대통령실 비서관들이 줄줄이 가는 모양이다. 이런 차관들이 장관의 말에 귀를 기울일 리가 없다. 오로지 대통령실에서 나오는 말에만 귀를 기울일 것이다. 대통령의 뜻에 따라 대통령실이 직접 차관을 상대하는 국정이 이뤄지고 국정의 지휘도는 대통령-대통령비서실장-(장관)-차관이 될 것이다. 어디서 많이 본 지휘도 같지 않나. 검찰의 지휘도다. 스스로 판단에 따라 일하고 그 일에 책임지는 장관 따위는 괄호쳐버려야 이런 지휘도가 성립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3-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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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엘리엇에 1400억 원 배상, 누굴 탓해야 하나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이 불법이었는지 여부는 재판 중에 있다. 검찰이 소집한 수사심의위원회는 불기소를 권유했지만 현재 금융감독원장인 이복현 당시 수사검사가 기소를 고집해 결국 기소가 됐다. 다만 정부가 합병 승인 과정에 압력을 행사해 삼성에 도움을 줬는지는 합병이 불법이었는지와는 상관없다. 미국계 사모펀드 엘리엇은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승인 과정에서 정부가 합병 투표 찬성 압력을 행사해 7억7000만 달러(약 1조300억 원)의 손해를 봤다며 정부를 상대로 2018년 7월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을 제기했다. 그제 결과가 나왔다. 정부는 엘리엇에 손해배상금 690억 원에 소송 비용과 지연이자 등을 포함해 1400억 원을 지불하게 됐다. ▷대법원은 박근혜 전 대통령 때 삼성이 동계스포츠영재센터에 약 16억 원을 후원한 사실에 대해 삼성과 같은 대기업에는 승계 작업이라는 현안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묵시적 청탁이 인정된다고 보고 제3자 뇌물죄를 인정했다. 삼성이 미르·K스포츠재단에 낸 출연금 204억 원에는 제3자 뇌물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출연금으로 삼성을 처벌하면 다른 대기업도 처벌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6억 원 후원은 처벌하지 않으면 합병 승인 과정에서 압력을 행사했다고 해서 처벌받은 안종범 전 경제수석비서관,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 홍완선 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의 유죄 선고와 모순이 빚어진다. ▷안 전 수석이 형을 살고 나와 ‘안종범의 수첩’이란 책을 썼다. 안 전 수석에게는 박 전 대통령의 지시 사항을 받아쓴 63권의 수첩이 있어서 수사에 큰 도움을 줬다. 그러나 정작 그 많은 수첩에 ‘삼성 합병’이란 말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검찰은 그에게 삼성 합병과 관련한 대통령의 지시를 진술하도록 별건 수사로 갖은 압력을 넣었으나 그는 세모를 네모로 만들 수 없다며 거부했다고 한다. 고육지책으로 묵시적 청탁이 인정됐다. 그러나 대기업에 현안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묵시적 청탁을 인정하는 건 청탁의 범위를 너무 넓힌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고 소송을 제기한 것이 엘리엇만이 아니다. 또 다른 미국계 사모펀드 메이슨 캐피털도 2억 달러(약 2700억 원)의 ISD를 제기해 놓은 상태다. 국내 소액주주들은 국내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지만 1심에서 패소했다. 그러나 엘리엇의 승소는 항소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정부가 배상해야 할 액수가 더 늘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정부가 벌이고 정부가 바로잡는다고 한 그 일로 인해 세금으로 엄청난 손해배상을 하게 됐다. 우릴 자책할 수밖에 없긴 한데 정확히 누굴 탓해야 하나.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3-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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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쉬운 돈’의 대가 안 치르고 넘어가려는 한국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부의장을 지낸 앨런 블라인더 프린스턴대 경제학 교수가 쓴 ‘미국의 통화·재정사(A Monetary and Fiscal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1961∼2021’이 지난해 나왔다. 이 책은 벤 버냉키와 그 후임인 재닛 옐런의 저금리 정책이 빚은 결과를 다루고 있는 데다 통화정책만이 아니라 재정정책까지 조망하고 있어 돈 풀기에 중독된 미국의 모습을 역사적 맥락에서 그려 볼 수 있게 해준다. 버냉키와 옐런은 밀턴 프리드먼의 저서 ‘대공황’에 입각해 통화정책을 폈지만 실은 자처하는 케인스주의자다. 다만 기존 케인스주의자들이 재정정책으로 돈을 퍼붓는 주의라면 이들은 ‘재정정책 받고 통화정책 더’로 곱절로 퍼붓는 주의라는 점이 차이다. 둘은 제로금리로도 모자라 양적완화(QE)까지 해가며 돈을 공급했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포워드 가이던스(forward guidance)라는 방식으로 장기간의 저금리를 예고함으로써 경제주체들이 과도한 리스크에도 손해 보지 않는 세상을 만들었다. 블라인더는 공급측 정책으로 불리는 감세정책도 케인스주의에 반한다고 보지 않는다. 레이건, 아들 부시, 트럼프 때의 감세 정책은 재정 악화를 동반했다는 점에서 케네디, 존슨, 닉슨, 포드, 카터, 오바마, 바이든 때의 경기부양 정책과 다를 바 없었다. 케네디부터 지금까지 건전한 재정정책을 편 대통령은 아버지 부시와 클린턴밖에 없다. 미국은 한편으로는 복지라는 형태의 경기부양으로, 또 한편으로는 감세라는 형태의 경기부양으로 국가부채를 아이젠하워 시대에서는 상상할 수 없도록 불려 왔다. 반복되는 ‘재정절벽’ 위기는 그 결과다. ‘닥터 둠’으로 불리는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명예교수의 ‘초거대위협(Megathreats)’도 지난해 나왔다. 그는 실패한 통화정책으로 인한 천문학적 부채를 미국을 위협하는 요소로 꼽는다. 미국은 지난 40년 동안 거품 붕괴로 인한 충격에 한결같이 더 쉽게 빌릴 수 있는 돈(easy money)을 창조하는 방식으로 대응해 왔으며 그 최종 귀결이 제로금리다. 1960, 70년대 케네디-존슨의 민주당 정부와 닉슨-포드의 공화당 정부가 앞다퉈 푼 돈은 1980년 전후 볼커가 21%까지 끌어올린 금리로 흡수할 수 있었으나 이후 그린스펀, 버냉키, 옐런이 통화정책으로 푼 돈은 정부 기업 가계에 심각한 부채를 쌓아 5%대 금리만으로도 은행들이 파산할 정도여서 파월에게는 그 이상의 금리 인상이 버거운 실정이다. 세계적 헤지펀드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의 설립자인 레이 달리오는 2021년 ‘변화하는 세계질서(The Changing World Order)’라는 책에서 이런 사태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돈을 찍어내는 목적은 부채 부담을 줄이는 것이다(the goal of printing money is to reduce debt burden).” 헤지펀드를 운영해 막대한 돈을 벌어 본 사람으로서 오늘날 왜 리스크를 감수하는 쪽이 무조건 돈을 버는지 비법을 고백한 셈이다. 이 책은 ‘국가 성쇠의 이유’라는 거창한 부제를 달고 있다. 기축통화국은 예외적인 차입력(borrowing power)과 지출력(spending power)을 바탕으로 너무 많이 빌리고 너무 많이 쓰는 경향이 있다. 중앙은행이 제로금리를 유지하고 부채 만기를 연장해주면 채무자는 상환 없이 공짜로 돈을 계속 쓸 수 있다. 이런 현상이 금융위기로부터 코로나 시대에 이르는 기간에 일어났고 역사의 다른 시기에도 기축통화국이 쇠퇴하던 때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한국은 기축통화국도 못 되면서 미국이 금리를 낮출 때는 질세라 따라가며 부채를 방조했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금융통화위원회는 정부로부터 독립해 있으나 연준으로부터는 독립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과연 그런가. 미국이 금리를 올릴 때는 한미 금리 차가 역대 최대로 벌어지는데도 인상을 서둘러 동결했다. 실은 내년 총선을 앞두고 ‘정치적 경제’에 매달린 정부로부터 독립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돈의 규율이 무너진 미국만큼도 ‘쉬운 돈’의 대가를 치르지 않으려 하니 부동산 등 자산 가격이 벌써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물가 상승은 자산 가격이 하락했기 때문에 감내할 만했다. 앞으로는 물가 상승이 지속되면서 자산 가격도 상승할 것이다. 진짜 고통스러운 인플레이션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3-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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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폭력 시위 진압을 적폐로 몬 대통령은 폭력 시위를 막을 수 있을까

    얼마 전 민노총 건설노조의 서울 도심 1박 2일 술판 노숙과 출퇴근길 행진이 큰 불편을 끼쳐 시민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지하철을 상습적으로 멈추는 시위 등 불법 시위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렇게 된 건 문재인 집권 때 서울중앙지검의 윤석열 지검장-윤대진 1차장-이진동 형사3부장 라인이 백남기 씨 사망 사건의 책임을 물어 경찰관들을 기소하면서부터다. 2015년 11월 서울 도심 시위 사상 가장 폭력적인 시위 중 하나가 벌어졌다. 시위대가 경찰이 세워놓은 차벽을 무너뜨리려는 과정에서 경찰 차량 52대가 부서지고 수백 명이 다쳤다. 백 씨는 경찰 차량을 넘어뜨리려고 밧줄을 걸어 당기다가 경찰 직사살수에 쓰러져 나중에 숨졌다. 박근혜 정부의 검찰은 경찰 대처에 불법이 있다고 보지 않았으나 문재인 정부의 검찰은 이례적인 재조사로 서울경찰청장을 비롯해 기동단장과 2명의 살수요원을 기소했다. 70세 고령으로 젊고 건장한 성인도 버텨내기 힘든 직사살수에 맞서 홀로 밧줄을 당긴 백 씨의 행동은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자초한 위험은 합법적이더라도 법적 보호의 의무가 없는데 심지어 불법적이었다. 그런데도 경찰관들이 업무상 과실치사로 기소돼 유죄 선고를 받았다. 검찰과 법원은 과잉 살수를 주장했으나 세상 물정도 현장도 모르는 탁상머리 주장이다. 선진국에서는 경찰이 불법 시위 진압 때 곤봉도 내리치고 최루탄도 쏘고 심지어는 총도 쏜다. 차벽을 무너뜨리겠다고 죽음을 무릅쓰고 달려드는데 경찰이 직사살수조차 못 하면 하나 마나 한 곡사살수나 계속하고 있으란 말인가. 난 2007∼2010년 유럽 특파원을 지냈다. 독일 베를린 훔볼트 대학 앞에서 폭력 옹호적인 극좌파의 시위를 본 적이 있는데 시위라기보다는 경찰이 앞뒤 좌우로 꽁꽁 묶어서 끌고 다니는 포로 행진 같았다. 프랑스 파리는 시위가 잦고 시위가 끝날 무렵에는 카쇠르(casseur)라고 하는 복면 쓴 폭력배들이 끼어들기 일쑤여서 경찰의 최루탄 해산 시도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영국 런던에서는 ‘가축우리 가두기(corralling)’라는 시위 진압 방식도 경험했다. 경찰이 차단선을 친 골목에 갇히면 밥도 물도 못 먹고 신원을 밝히고 항복하기 전까지는 나올 수 없다. 밀고 나오려 했다가는 가차 없는 곤봉 세례가 기다린다. 미국 사정까지는 현장감이 없지만 총에 맞아 죽은 시위대 뉴스가 간혹 들려온다. 경찰관들은 손해배상 소송에도 시달렸다. 공권력 행사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은 국가와 공무원 개인 양측을 상대로 진행된다. 소송에서 지면 국가가 먼저 배상하고 공무원에게 책임이 있는지 따져 구상권을 행사한다. 따라서 일단 국가가 나서서 소송에 전력 대응한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국가만 소송을 포기한 게 아니라 경찰관들에게도 소송을 포기하도록 압력을 넣는 희한한 일을 벌였다. 경찰관들은 소송에서 다퉈보지도 않고 유족의 청구를 인낙해야 했다. 질서야 무너지건 말건 시위를 막다가 대강 그만뒀으면 당하지 않았을 일이다. 임무 달성을 위해 최선을 다한 결과는 국가권력에 의한 조리돌림이었다. 이러니 어느 경찰관이 책임감을 갖고 폭력 집회를 막을 것인가. 윤 대통령은 최근 “문재인 정부가 불법 집회와 시위에 대해 경찰권 발동을 사실상 포기한 결과 확성기 소음, 도로 점거 등 국민께 불편을 끼치고 있다”고 말했다. 자신이 이 사태와 무관하다는 듯 말하는 건 듣기 거북하다. 얼마 전 건설노조 집회는 시민이 불편한 것으로 끝났지만 앞으로는 또 2015년 같은 폭력 시위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그때 경찰은 2015년처럼 막을 것인가. 뭐가 아쉬운 게 있어서 그렇게 하겠는가. 경찰이 백 씨 건으로 대통령에게 감정이 좋을 순 없겠지만 악감정 때문에 우려하는 게 아니다. 대통령이 검사 시절 문재인 적폐 수사의 선봉장이 돼 만든 선례가 객관적으로 그렇게 못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법원의 집단 이성이 실패하는 걸 한일 관계의 톱니바퀴에 쇠막대기를 걸어 멈춘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서 봤다. 경찰의 살수차 운영까지 일일이 시비를 걸고서도 폭력 시위를 막을 길이 검판사의 탁상에서는 보였던 것일까. 진짜 걱정해야 할 것은 ‘사물의 본성’을 무시한 법 적용의 과잉이고 그것이 대부분의 적폐 수사의 본질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3-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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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중 부모 90% 이과 희망… 문과 위기 어떻게 극복할까[횡설수설/송평인]

    종로학원이 최근 온라인에서 초등학생과 중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 1395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 열 중에 아홉이 자녀의 이과 진학을 희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의학계열 선호도가 공학계열과 순수 자연과학계열 선호도를 합친 것과 비슷한 수준이지만 아무튼 문과 선호도가 10% 안팎으로 낮아진 것은 틀림없다. 생성형 인공지능(AI) 시대의 개시와도 관련이 큰 듯하다. ▷문과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문사철(文史哲)의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문(文)은 글을 읽고 쓰는 걸 말한다. 대학의 외국어학과들이 문학이 아니라 외국어를 가르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AI가 높은 수준의 번역을 해낸다면 문학과는 글을 읽고 쓰는 문 자체를 가르치는 데 주력할 수 있다. 사회과학도 텍스트를 읽는 데 급급하지 말고 적극적인 글쓰기에 나서야 한다. AI가 회사 말단사원의 허드레 사무일을 대체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말단사원 때부터 창의성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이고 창의성은 글을 쓰는 훈련에서 비롯된다. ▷AI 시대에 인식론과 윤리학, 즉 철학에 대한 이해가 더 중요해졌다. AI는 종종 아무 대답이나 그럴싸하게 지어낸다. 물론 그럴싸하게 지어내는 것은 인간도 한다. 그러나 AI는 인간과 달리 그럴싸하게 지어낸다는 의식 없이 태연하게 그렇게 한다. 궁극적으로 AI는 윤리 의식이 없다. 윤리 의식을 갖고 기계를 통제하는 건 인간이다. 마블 영화에서 아이언맨의 적수인 무기 생산 업체 최고경영자(CEO) 저스틴 해머처럼 파괴적인 인간이 되지 않으려면 인문학도에게 과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과학도에게도 철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현재의 우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공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건 AI 시대 전에도 그렇고 후에도 그렇다. 게다가 역사 공부는 ‘역사란 무엇인가’를 쓴 E H 카가 말했듯이 어떤 목적을 떠나 그 자체로 흥미로운 시간 여행이다. AI가 인간을 노동에서 해방시켜 준다면 남는 시간은 공간적인 여행만이 아니라 시간적인 여행에도 많이 쓰일 수밖에 없다. ▷법학과 경영학은 본래 문사철에 속하지 않는, 직업을 갖기 위한 학문이다. 법학을 대학원 과정으로 올려보냈듯이 경영학도 대학원 과정으로 올려보낼 필요가 있다. 법대가 전문대학원이 된 뒤 우수한 문과생들을 흡수하는 곳이 경영대다. 경영대까지 전문대학원이 된다면 우수한 문과생들이 문사철로 대학 과정을 이수한 후 법학전문대학원이나 경영전문대학원으로 진학하게 함으로써 인문학적 식견을 갖춘 법률가나 경영가를 키우면서 문사철을 살리는 방법이 될 수 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3-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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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젊은 정치인들의 일그러진 초상

    한국 현대사를 기전체로 서술한다면 암군(暗君) 문재인 시대에 대해서는 본기(本紀)에 덧붙이는 열전(列傳)에 조국전(傳), 추미애전과 함께 김남국전을 꼭 넣어야 할 듯하다. 김남국이라는 사람이 2020년 2월 더불어민주당에 의해 21대 총선 전략공천 대상으로 선정됐다. 정치에 열정을 가진 30대 젊은 변호사라는 게 이유였다. 그는 들어가기만 하면 열에 아홉은 변호사시험에 합격시켜 주던 로스쿨 1기 출신이다. 그가 전략공천되자 ‘무급으로 주차 안내, 시설 설치 같은 일로 시작해 10년을 버틴 청년 당원이 수두룩한데’라며 청년 당원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는 광주 살레지오고교를 나와 중앙대를 졸업한 뒤 전남대 로스쿨을 다녀 세월호 피해 학교인 단원고가 있는 안산단원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으나 그곳에 공천돼 거저 의원이 됐다. 그래도 변호사랍시고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배치됐다. 2020년 추미애 당시 법무장관의 아들 군 복무 특혜 의혹이 제기됐을 때는 국민의힘 의원들의 질의를 방해하고 고성을 지르고 막말을 하며 막무가내로 굴었다. 지난해 한동훈 법무장관 후보자 청문회에서는 교수 이모(李某)를 친척 이모(姨母)로 착각한 질문을 던졌다. 그의 특이함은 단순히 무례하고 중요한 사실관계에 대해 쉽게 착오를 일으킨다는 점이 아니라 그러고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 데 있다. 그런 그가 2019년 조국 사태 때는 매일 밤 조국을 위해 기도한 뒤 잠자리에 든다고 하고 의원이 된 뒤 한 토론회에서는 조국이 이슈가 되자 토론장을 나가 버리기도 했다. 대개 성인 남성은 마음이 쓰여도 무심한 척하는데, 그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여성처럼 간절한 사람으로 비치길 바라는 상반된 캐릭터도 갖고 있다. 코인 거래는 24시간 이뤄진다. 등락이 주식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크다. 코인 거래에 매달리면 낮에 일하기 힘든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밤잠도 제대로 자기 어렵다. 그는 한 후보자 청문회 때 코인 거래를 했을 뿐만 아니라 전날 밤부터 당일 새벽까지도 코인 거래를 했다. 그에게는 코인 거래가 주업이고 청문회는 부업만도 못한 잡일이었던 모양이다. 잡일을 하다 당하는 ‘이모’ 망신 따위는 주업의 금전적 이익이나 손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코인을 많이 보유했다고 해서 죄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코인 보유가 공직자로서 신고해야 할 재산을 은닉하는 것이라면 다르다. 재산이 아니라 불법적인 자금이라서 은닉했다는 추정도 나온다. ‘돈 버는 게임(P2E)’을 합법화하는 법안을 발의한 것이 코인 업체의 로비와 관련돼 있다는 의혹도 있다. 이준석은 역시 암군인 박근혜 시대의 열전에 넣어야 할 사람이다. 박근혜는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 때인 2011년 서울과학고와 하버드대를 나온 26세의 그를 비대위원으로 택했다. 그가 실제 의미 있는 사회 활동을 해보기도 전이다. 학력만 보고 뽑은 것이다. 그래서 그가 사회적 성취력이 크게 떨어지는 걸 알지 못했다. 이준석의 결정적 단점은 모든 것을 게임처럼 배틀(battle)로 여기는 것이다. 토론도 배틀, 정치도 배틀이다. 뭐든 자기가 이겨야 한다고 여긴다. 그렇게 아득바득해서 서울과학고와 하버드대에 갔는지는 모르겠으나 토론과 정치는 그런 게 아니다. 특히 토론에서는 서로에게 배우는 학습 과정(learning process)이 작동해야 한다. 자신이 주장하는 바가 틀릴 수도 있고 상대편의 주장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앞으로 나아가는 토론이 된다. 정치도 꺾어야 할 세력을 제외한 나머지에 대해서는 연대를 통해 지지 기반을 넓혀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는 싸움닭으로 일관했다. 전략적 투표에 의해 ‘어쩌다 당 대표’가 돼서는 제 주제도 파악하지 못하고 방송에서 자기 당을 공격할 때 실패는 예정돼 있었다. 정치에서 세대론을 함부로 거론하지 말자. 미국에서는 81세의 바이든이 재선 도전 의지를 밝혔다. 고령화사회에서야말로 한국도 김대중처럼 70대 후반에 대통령을 하는 정치인이 나와야 할 것이다. 86세대 정치인이 다 변질돼 가는 것 같지만 아직 전도양양한 사람이 많이 남아 있다. 반면 2030 정치인이라고 무조건 희망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각각의 세대에는 장점과 한계가 있다. 세대의 한계를 뛰어넘어 다른 세대의 장점을 기꺼이 배우는 자세를 가질 때 좋은 정치인이 될 수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3-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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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테라’ 권도형 보석…법무부 호언대로 송환할 수 있을까[횡설수설/송평인]

    오늘날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는 국가연합으로 세르비아공화국과 몬테네그로공화국으로 구성돼 있다. 가상화폐 테라와 루나를 만든 권도형 테라폼랩스 대표가 체포된 포드고리차 공항은 몬테네그로에 있고 재판도 그곳에서 받고 있다. 테라와 루나의 가치는 지난해 5월 폭락했다. 권 씨는 폭락 한 달 전 한국을 떠나 싱가포르 아랍에미리트를 거쳐 세르비아 몬테네그로까지 갔다. 올 3월 24일 아랍에미리트로 다시 떠나려다 체포됐다. ▷테라와 루나는 미국에 본거지를 둔 가상화폐 거래소를 중심으로 거래됐기 때문에 미국이 사건 관할권을 주장할 수 있다. 권 씨는 국적이 한국이고 한국인 피해자가 많기 때문에 한국도 당연히 관할권이 있다. 미국과 한국이 앞다퉈 범죄인 인도 요청을 했다. 범죄인 인도 관련 심리는 권 씨가 체포된 다음 날부터 진행됐으나 그는 12일 보석으로 풀려났다. 조속한 송환에서 멀어지는 분위기다. ▷폭락 사태는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한 달에 발생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문재인 정부의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폐지한 서울남부지검 금융·증권범죄합동수사단을 재설치하고 이 사건을 1호로 배당했다. 지난해 7월 법무부 장관으로서는 드물게 미국 실무 출장을 떠나 권 씨 사건을 수사하는 뉴욕남부연방검찰청을 찾았다. 올 1월에는 권 씨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도피 사실을 파악하고 단성한 수사단장을 현지로 보냈다. 그가 세르비아 법무부를 찾았지만 몬테네그로 법무부를 찾은 것 같지는 않다. 권 씨는 두 달 뒤 몬테네그로에서 체포됐다. ▷권 씨가 폭락 직전 테라와 루나를 팔아치워 비트코인으로 바꾼 뒤 스위스 은행에 예치했다가 약 1억 달러(약 1300억 원)를 현금화했다는 사실을 미국증권거래위원회(SEC)가 밝혀내 미국 검찰이 우리나라보다 앞서 권 씨를 증권 사기 혐의로 기소했다. 반면 우리나라 검찰은 권 씨와는 테라폼랩스의 공동 창업자로 국내에 머물던 신현성 씨에 대해 두 차례나 구속영장을 청구했으나 기각당하고 지난달에야 두 사람을 불구속 기소했다. ▷ 법무부는 수사도 하나 진척시키지 못하면서 송환의 자신감만 내비쳤다. 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권 씨에 대한 송환이 지체되면서 몬테네그로가 사법절차가 제대로 작동하는 나라인지도 알 수 없게 됐다. 실은 권 씨를 국내로 송환해 재판에 넘긴다 해도 미국처럼 엄벌에 처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신 씨 영장이 거듭 기각된 데서 보듯 미국과 달리 가상화폐가 증권으로 인정되지 않아 증권 사기의 적용이 어렵고 적용돼도 형이 미국처럼 중하지 않다. 이제는 어느 나라로든 조속한 송환이 이뤄져 범죄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게 하는 것이 급해졌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3-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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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정기조 안 맞추고 애매한 태도 취하면 누구든 인사조치”[횡설수설/송평인]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1년을 맞은 9일 국무회의에서 “공무원들이 전 정권의 탈원전이나 이념적 환경정책에 매몰돼 새 국정 기조에 맞추지 않고 애매한 태도를 취한다면 과감히 인사조치하라”고 말했다. 액면으로는 국무회의에 참석한 장관들에게 부서에서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공무원들을 과감히 인사조치하라는 얘기였으나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일부 장관들을 향한 경고도 겸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원자력발전산업 육성과 한국전력공사 구조조정 책임을 맡은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4대강 보 책임을 맡은 한화진 환경부 장관 등이 경고 대상으로 지목됐다. ▷장관은 대통령을 보좌하지만 대통령실의 수석비서관들과는 달리 부서권을 갖고 대통령을 보좌한다. 부서권은 장관이 서명하지 않으면 대통령이라도 마음대로 할 수 없게 한 것으로 행정부 내에서 대통령의 전횡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장관의 헌법적 권한이다. ‘애매한 태도에는 인사조치로 대응’이라는 말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는 몰라도 국무회의에서는 부적절하다. ▷대통령은 장관 임면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장관이 갖는 부서권의 제한을 뛰어넘을 수 있다. 장관이 대통령의 국정 기조에 대해 애매한 태도로 일관한다면 조용히 바꾸면 될 일이다. 그렇지 않고 공개적으로 공무원 사회 전체를 겨냥한 것은 복지부동 분위기가 심각한 수준이라 다른 장관이 와서 국정 기조에 맞춰 확고히 일해도 비슷한 사태가 반복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어서일 것이다. ▷하지만 ‘애매한 태도에는 인사조치로 대응’은 장관이 아닌 그 아래 공무원들을 향한 말이라고 해도 적절하지 않다. 합리적 근거 없이 정책 결정을 할 경우 직권남용이나 직무유기로 사법처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문재인 정부에서 원전 월성 1호기의 조기 폐쇄를 위해 경제성 평가를 조작했다는 이유로 백운규 산업부 장관과 그 아래 국장 과장 서기관 등 4명이 기소돼 이미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거나 재판 중이다. 탈원전이 자의적으로 이뤄져 문제가 된 것과 마찬가지로 원전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조치도 규칙을 지켜 추진하지 않으면 문제가 될 수 있다. ▷윤 대통령이 검사 시절 지휘한 ‘국정농단’과 ‘적폐청산’ 수사를 겪으면서 공무원들은 직권남용이나 직무유기로 처벌되는 걸 두려워하게 됐다. 그전까지만 해도 공무원들이 직권남용이나 직무유기로 처벌된 사례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사법처리가 두려워 복지부동하지는 않았다. 공무원들로 하여금 위에서 지시한다고 무조건 따를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만든 것은 검찰 수사와 처벌이다. 그래서 ‘국정 기조에 맞추지 않고 애매한 태도를 취한다면 과감히 인사조치하라’는 대통령의 말이 더욱 씁쓸하게 들린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3-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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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휴대폰 압수당하면 집 통째로 하세월 내주는 셈”[횡설수설/송평인]

    압수와 수색은 흔히 붙여 쓰기는 하지만 다른 개념이다. 압수는 증거물이나 몰수가 예상되는 물건을 수사기관이 가져가는 것이다. 압수는 물건이 기준이 된다. 그러나 수색은 물건만이 아니라 신체도 대상이 되고 장소도 대상이 된다. 통상 압수와 수색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압수수색 영장이 발부된다. 압수수색이라고 하지만 수색이 압수에 앞서니 수색압수라고 해야 순서로는 맞다. 물건 신체 장소를 대상으로 수색을 해봐야 압수할 물건을 찾을 수 있다. ▷압수수색에서 회계장부는 통째로 가져가도 상관없지만 전자정보는 그렇지 않다. 회계장부는 기록매체와 기록된 정보가 분리되기 어렵지만 전자정보는 기록매체와 쉽게 분리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컴퓨터를 통째로 수사당국이 가져가는 건 통상 허용되지 않는다. 컴퓨터에 담긴 정보를 시간과 주제어를 특정해 검색이란 방식으로 수색한 뒤 관련이 있는 것만 출력해 압수해야 한다. 그러나 휴대전화는 스마트폰이 되면서 크기만 작을 뿐 사실상 컴퓨터나 다름없는데도 수사당국이 통째로 가져가는 것이 관행이다. 법원이 이에 제동을 걸고 나왔다. ▷법원행정처는 1일 전국 영장전담 판사들이 참석한 온라인 간담회를 열어 수사기관이 통화 기간이나 내용을 특정하지 않고 휴대전화 단말기 자체를 압수 대상으로 지정해 영장을 청구하는 데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한 판사는 “휴대전화를 압수당하는 건 집을 통째로 내주는 것과 같다”며 “집은 하루 동안 수색하면 끝나지만 휴대전화는 끝없이 집을 뒤지면서 수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압수수색 제도에서 휴대전화가 사각지대에 있다는 말이다. ▷대검찰청은 곧장 입장문을 내고 휴대전화 압수수색 범위를 사전에 설정하는 건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반박했다. 휴대전화 전체를 먼저 가져가 수색을 해봐야 범죄에 필요한 정보를 찾아내 압수할 수 있다는 말이다. 휴대전화는 개인에 관한 정보를 거의 다 모아놓은 디지털 집과 같은 것이니 이런 말이 일리가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컴퓨터는 시간과 주제어를 특정해서 수색하고 있다. 휴대전화는 다소 더 어렵겠지만 그렇다고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오늘날 휴대전화는 범죄증거의 확보에 중요한 물건이다. 휴대전화는 버리거나 태우거나 부수거나 바꾸거나 초기화하면 증거 인멸 시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단정하기 위해서는 검찰이 먼저 범죄 혐의와 관련한 내용만 보고 다른 건 곁눈질하지 않는다는 충분한 신뢰를 줘야 한다. 물리적 집 이상의 영혼의 집 같은 것이 압수수색을 당한다고 생각해보라. 검찰은 수사의 편의만 생각하지 말고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발전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3-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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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월대와 견마

    중국 자금성의 출입문인 천안문에는 월대가 없다. 천안문을 지나면 나오는 단문과 오문에도 없다.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푸이가 즉위식을 하는 태화전 입구, 즉 태화문에서야 월대가 나타난다. 필요하면 태화전 입구까지 당시로서는 가장 빠른 이동 수단인 말을 타고 달릴 수 있었다. 경복궁의 출입문인 광화문 앞에도 본래 월대가 없었다. 태화전에 해당하는 근정전의 입구, 즉 근정문에는 월대가 있었다. 세종 때 예조판서가 광화문 앞에도 월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청을 올렸다. 두 가지 이유였는데 하나는 신하들이 무엄하게 광화문 코앞까지 말을 타고 온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중국 사신이 들어오는 곳인데도 문 앞에 월대가 없어 누추하다는 것이다. 세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농사철이라 백성이 바쁘다는 이유였다. 그 후 월대를 만들었는지는 기록이 없다. 만들었다면 월대 복원에 앞선 발굴 공사에서 무슨 흔적이라도 나왔을 것이다. 나오지 않았다. 그 사실을 확인한 게 이번 발굴의 가장 큰 성과다. 광화문 앞에는 월대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른 시기부터 정궁으로 쓰인 창덕궁의 출입문인 돈화문 앞에는 월대가 만들어졌다. 월대에는 말에게는 장애물인 계단이 있다. 잘못하다간 말에서 떨어질 수 있어 임금조차도 말을 타고 통과하는 것이 위험한 일이 됐다. 월대는 그 시대 대부분의 말을 보유한 왕실이 말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박제가 등 북학파가 신랄한 비판을 쏟아낸 조선의 기이한 풍습이 견마(牽馬)다. 말을 그냥 타고 가면 될 것을 사람이 말을 끌게 한다. ‘말 타면 견마 잡히고 싶다’는 말이 있다. 군사용이 아니면 말을 점점 더 안 쓰게 돼 말 타는 기술을 잃어버리고 말도 빌려 타게 되자 견마꾼이 끄는 대로 느릿느릿 타는 게 양반들 사이에서는 플렉스(flex·과시)가 됐다. 박제가가 1778년(정조 2년) 청나라를 돌아보고 와서 쓴 ‘북학의’는 수레 얘기로 시작한다. 청나라에는 말수레가 많은 데 반해 조선에는 고조선 벽화에도 나오는 말수레가 다 사라졌다는 것이다. 농산물을 생산해도 빨리빨리 실어 나르지 못하니 상업이 발전하지 못하고, 상업이 발전하지 못하니 농업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개혁도 지지부진했다. 서양은 마차가 달리고 중국은 말이 끄는 수레로 북적일 때 조선은 소달구지나 돌아다니는 세상이었던 것이다. 중국 황제가 거하는 자금성의 출입문에는 없는 월대를 조선 왕이 거하는 궁궐의 출입문에는 둬야 한다는 발상이 세종 때 예조판서의 독자적 발상인지, 중국 측에서 요구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느 쪽이든 조선의 기동성을 떨어뜨렸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궁궐 출입문의 월대는 중국과 조공 관계에 있던 다른 국가에서도 보기 힘든 것으로 조선의 과잉 예(禮) 의식이 빚은 결과다. 광화문 월대는 흥선대원군이 버려진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1866년(고종 3년) 만들었다. 돈화문에도 월대가 있으니 광화문에도 월대를 만들었을 것이다. 역사가 깊다고도 할 수 없고, 특별한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고도 할 수 없는 데다 사대(事大)의 상징과도 같은 월대를 광화문 앞 사직로를 직선에서 곡선으로 만들어 시민들의 안전과 편의를 위협하면서까지 복원하려 한다. 복원되는 월대는 고종 때와 달리 도로로 둘러싸여 월대 좌우로 부채꼴 모양의 거대한 빈 공간이 생기기 때문에 주변 면적까지 합치면 고종 때의 약 3배다. 대한민국은 21세기 개명 천지에 조선에도 없었던 어마어마한 규모의 월대를 갖게 된다. 외국인이 ‘저것은 무슨 용도였냐’고 물으면 뭐라고 설명할 것인가. 문화재청처럼 ‘임금과 백성이 만나는 공간’이라고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할 것인가. 월대는 사대 말고는 존재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건조물이다. 발굴 공사에서 월대 계단이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경사면으로 개조된 흔적이 발견됐다. 고종과 순종이 자동차를 타기 시작하면서 이미 월대는 거추장스러워졌다. 월대는 건축학적 관점에서 봐도 ‘없는 게 차라리 나은(less is more)’ 것으로 조선이 일제에 강점당하지 않았더라도 근대화 과정에서 철거됐어야 할 것이다. ‘일제가 훼손했으니 닥치고 복원’이 어디 월대뿐이겠냐마는 대한민국의 중심 도로를 차지하면서까지 복원하는 광화문 월대는 가장 납득하기 힘든 것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3-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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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 세계 온라인 방문자 1위’ 버즈피드의 뉴스 부문 폐업[횡설수설/송평인]

    미국 온라인 매체 버즈피드(Buzzfeed)의 뉴스 사이트에는 20일 마지막 올려진 기사들이 남아 있다. ‘당신이 오늘 아침 읽을 필요가 있는 뉴스 모음’에는 넷플릭스 인기 드라마 ‘성난 사람들(BEEF)’에 출연 중인 한국계 미국 배우 데이비드 최가 ‘나는 성공한 성폭행범’이라고 말했다는 자극적인 뉴스 등이 떠 있다. ▷2006년 ‘∼하는 몇 가지 방법’ 식의 콘텐츠 재가공으로 출발한 버즈피드는 2011년부터 전통 언론사인 ‘폴리티코’ 출신 편집장을 영입하면서 뉴스 서비스도 시작해 사이트 방문자 기준으로 그 수가 뉴욕타임스(NYT)를 넘어서기도 했다. NYT는 2014년 가장 강력한 경쟁 상대로 버즈피드를 언급했다. 한때 전 세계 온라인 방문자 수 1위였던 버즈피드가 20일로 뉴스 부문을 폐지했다. ▷버즈피드는 시작이 엔터테인먼트 콘텐츠 매체로 그 사업은 계속 이어진다. 또 버즈피드가 2020년 인수한 인터넷 뉴스 매체 ‘허핑턴 포스트’를 통한 뉴스 제공은 계속된다. 그럼에도 한때 NYT 등 대다수 전통 언론사들이 인터넷 시대의 롤모델로 삼았던 버즈피드가 뉴스 부문을 접었다는 소식은 버즈피드 식의 뉴스 생산과 유통이 10여 년 만에 효력을 다했음을 의미한다. ▷버즈피드에는 대개 인터넷 뉴스 매체가 그렇듯이 제목에 끌려 클릭을 해보면 제목에 미치지 못하는 내용의 뉴스가 많다. 이런 ‘낚시성 제목’을 다는 이유는 뻔하다. 더 많은 조회 수를 통해 더 많은 광고를 유치하기 위함이다. 독자들은 처음에는 낚시를 당하지만 반복되면 결국 외면하고 만다. 버즈피드만이 아니라 복스(Vox), 인사이더(Insider), 바이스 월드 뉴스(VICE World News)도 위기에 처했다. 인터넷 뉴스의 한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다. ▷전통 언론사에는 한 분야에서 오랜 취재 경험을 가진 기자들과 공정성을 재정적 안정성과 함께 지속가능한 조건으로 여기는 경영진이 있다. 인터넷 뉴스 매체에도 몇몇 경험 많은 기자들이 옮겨가서 일할 수 있고 실제 그렇게 한다. 그러나 버즈피드의 실패가 보여주듯 그런 매체들은 단기적 수익을 극대화하는 경영 환경 속에서 태어났고 그런 환경을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계몽의 시대에 문을 연 것은 아카데미즘이지만 19∼20세기에 민주주의와 인권을 진전시킨 것은 저널리즘이다. 전통적 언론도 점점 더 온라인으로 뉴스를 전달하는 21세기에 저널리즘이 세상에 유익한 방식으로 계속 존재하느냐 마느냐는 독자들에게 달렸다. 어린 시절부터 인터넷에 노출된 젊은이들이 꼼수 뉴스와 편집으로부터 가치 있는 보도를 구별해 낼 수 있는 미디어 해독력을 갖도록 사회와 학교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3-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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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일본도 인정한다는 ‘강제징용 개인청구권’은 허구의 권리

    일본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으로 미국에 대해 손해배상청구권을 포기했다. 그러자 3년 뒤 일본인 원폭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1963년 도쿄 지방재판소는 소송을 기각하면서 다만 일본이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서 포기한 것은 외교보호권이며 배상청구권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다는 논리를 남겼다. 일본인도 강제노동 피해를 입은 역사적 경험이 있다. 패전 뒤 철수하지 못하고 소련 지역에 남아 있던 일본 장병 60만 명이 시베리아로 연행돼 가혹한 노동 착취를 당했다. 일본 정부는 1956년 일소 공동선언에서 강제노동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을 포기했다. 그러자 피해를 입은 일본인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일본 최고재판소는 1997년 개인청구권은 남아 있지만 외교보호권은 없다는 똑같은 논리로 소송을 기각했다. ‘외교보호권 없는 배상청구권’은 실효성이 없는 허구의 권리일 뿐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외교 관계를 해치지는 않는다. 일본 정부는 판결 취지를 좇아 사법 밖의 영역에서 해결책을 추구했다. 원폭 피해자와 시베리아 억류 포로에 대해 특별법을 만들어 보상한 것이다. 얼마 전 박정희 정권에서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 민충식 씨가 1991년 한 국제포럼에서 했다는 발언이 30년 만의 외교문서 공개로 밝혀져 뉴스가 됐다. 그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 당시 교섭 대표 간에도 동 협정은 정부 간 해결을 의미하며 개인의 권리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는 암묵적 인식의 일치가 있었다”고 말했다. 협정 당시 한국 측 이동원 외무장관이 상대한 일본 측 교섭대표는 시나 에쓰사부로 외상이다. 도쿄 지방재판소의 ‘외교보호권 없는 개인청구권’ 판결은 한일 청구권 협정 체결보다 2년 전에 내려졌기 때문에 시나 외상은 판결의 내용과 의미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시나 외상만이 아니라 고노 요헤이 외상 등 다른 일본 정부 관계자들도 한일 청구권 협정에도 불구하고 개인청구권이 남아 있다는 말을 해 왔다. 다만 그때마다 한국에서는 그들의 발언이 그 말이 나온 맥락에 대한 이해 없이 소개돼 오해를 빚었고 이번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개인청구권’이 남아 있다는 말을 할 때의 함의는 일본이 한국인 피해자 개인에게 추가로 갚아야 할 돈이 남아 있다는 뜻이 아니라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에 돈을 주고 ‘완전하고 최종적인 해결’을 했으니 한국인 피해자 개인의 권리를 인정해 배상하는 것은 한국 정부가 할 일이라는 뜻에 가깝다. 한일 청구권 협정의 배상액은 충분치 않았다. 또 배상은 주로 육체적 물질적 피해에 대한 것이었으며 정신적 피해에 대한 것은 없었다. 이런 이유로 협정 자체를 비판할 수는 있다. 당시 협정이 불평등했으니 협정을 새로 맺자고 주장하면 현실성이 떨어지긴 하지만 주장 자체로는 논리적이다. 그러나 ‘완전하고 최종적인 해결’을 명시한 협정을 그대로 놔두고 법원이 아무런 유보 없이 배상을 명해 버리면 대략 난감한 상황이 되고 만다. 한국만 국가 간 협정으로 일본에 대해 청구권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 앞에서 거론했지만 일본도 미국과 소련에 대해 그렇게 했다. 일본 법원은 국가 간 협정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유보 없이 배상을 명했다가는 미국과 소련으로부터 이상한 나라로 취급받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외교보호권 없는 개인청구권’이라는 논리 모순의 권리 개념을 만들어냈다. 일본은 패전국이어서 그랬다고 치자. 승전국인 중국도 일본에 대해 1972년 중일 공동성명으로 청구권을 포기했다. 중국은 한국과 달리 청구권을 포기한 대가로 받은 돈이 없기 때문에 중국의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직접 일본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서 화해나 조정 결정을 얻어내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 한국은 중국과 달리 돈을 받았다. 그 돈으로 피해자에게 배상하기도 했지만 부족했을 것이다. 다만 대법원이 일본 기업에 대한 청구를 기각하고 한국 정부에 부족분을 청구하도록 했으면 어땠을까. 그러면 개인청구권을 일본 법원의 허구적 권리와 달리 실제의 권리로 격상시켜 인권의 보루 역할을 다하면서도 불필요한 외교 갈등을 피할 수 있었다. 왜 대법관들이 이런 자연스러운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는지 돌아보면 안타까울 따름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3-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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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물한 살 미군 사병에 국가기밀 줄줄이 샜다[횡설수설/송평인]

    존 워커는 미군 역사상 최악의 스파이 중 하나로 꼽힌다. 그가 1966년 미국 핵잠수함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보고받는 노퍽 해군기지에서 통신병과 준위로 근무할 때의 일이다. 그는 암호생성기 KL-47의 암호코드를 복사한 뒤 워싱턴에 있는 소련대사관을 찾아갔다. 이듬해에는 더 최신인 KW-7의 암호코드까지 빼돌렸다. 다시 이듬해 북한의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이 일어났다. 소련은 워커가 전해준 암호코드를 확인하기 위해 국가보안위원회(KGB) 팀을 북한으로 보내 푸에블로호의 암호기를 뜯어봤다. ▷미 공군 매사추세츠주 방위군 정보단 소속 일병 잭 테세이라가 한국과도 관련된 미국 정부의 기밀문건 유출 사건으로 13일 체포됐다. 이날 연방수사국(FBI) 요원들은 자동 소총으로 무장하고 장갑차까지 동원해 매사추세츠주 노스다이턴에 있는 테세이라의 자택을 급습해 그를 체포했다. FBI는 테세이라가 기밀문건 사진을 찍어 올릴 때 사진 속 배경에 반복적으로 찍힌 그의 자택 모습을 통해 신원을 포착했다. ▷워커는 부업으로 술집을 하다가 망해 돈이 궁해서 정보를 소련에 팔았다. 스파이들은 대개 돈이 궁하거나 이념에 경도돼 정보를 판다. 테세이라는 정보를 어디에 판 게 아니다. 성향도 총기를 애호하는 등 극우에 가깝다. FBI가 더 수사해봐야 정확한 동기가 나오겠지만 일단은 그가 온라인 채팅방에서 ‘OG’라고 불리는 방장 역할을 하면서 “하루 중 일부를 정부 컴퓨터 네트워크에 보관된 기밀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보안시설에서 보낸다”며 과시용으로 올린 문건이 채팅방의 구성원을 통해 흘러 나간 것으로 보인다. ▷미국에서는 일병에 불과한 21세 젊은이가 어떻게 전쟁을 유발할 수도 있는 1급 기밀을 다룰 수 있었는지 한탄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대부분의 국가가 그렇지만 특정 계급 이하는 최고 등급 기밀에 대한 접근이 제한돼 있다. 미 국방부의 한 전직 직원은 CNN에서 “장군과 대령은 서류를 좋아한다. 돋보기를 끼고 더 자세히 보고 싶어 하기 때문에 프린트하게 한다”고 말했다. 프린트하는 과정에서 사병들에 의해 기밀문건이 샜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미국이 악의적이라고 해석될 수 있는 행동은 안 한 것 같다”고 말했다가 구설에 올랐다. 한국의 고위 당국자는 도청은 없었다고 부인하지만 순순히 믿기 어렵다. 첩보 활동은 동기에 따라 좋고 나쁜 게 아니라 들키는 것 자체가 나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악이다. 한국에서 생산된 포탄이 미국에 수출됐다가 우크라이나에 지원되는 사안으로 한국이 매우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미국에 엄중히 항의해야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3-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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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짓 지식’ ‘개인정보 침해’… AI 개발 잠시 멈춰야 하나[횡설수설/송평인]

    챗GPT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AI)의 문제로 가장 먼저 지적된 것은 사실인 듯 지어내는 글이다. 주로 업데이트된 정보를 학습하지 못했거나 체계적으로 왜곡된 정보를 학습할 때 일어난다. 그러나 꼭 그렇지 않더라도 엉뚱한 단어들의 조합을 던져주면 황당한 설명을 지어내는 일이 종종 있다. ‘생각하는 인간’은 최소한 자신이 뭘 알고 뭘 모르는지 안다. 모르는 걸 안다고 착각할 때도 있지만 대체로는 그렇다. 소크라테스는 이것이 참된 지식의 출발점이라고 했다. 챗GPT는 인간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갖고 있지만 이 최소한을 모른다. ▷챗GPT가 온갖 정보를 긁어모아 마구잡이로 학습하면서 법적으로 가장 크게 문제가 될 게 표절일 줄 알았는데 개인정보 침해가 먼저 문제로 떠올랐다. 이탈리아 데이터보호청은 챗GPT가 학습을 위해 개인정보를 대량 수집·저장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개인정보 침해가 발생하고 있다며 챗GPT가 개인정보 보호 기준을 충족할 때까지 접속을 차단하기로 했다. 이탈리아의 조치에 캐나다 영국 프랑스 아일랜드 등이 동조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컴퓨터가 인간보다 계산을 잘하게 된 지는 오래됐다. 체스나 바둑에서 보듯 경우의 수를 따져 예측하는 것도 인간보다 잘하게 됐다. 컴퓨터가 챗GPT를 통해 인간에게 도전장을 낸 분야는 작문이다. 다만 인간처럼 생각을 토대로 문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특정 단어 다음에 특정 단어가 나올 확률 분포를 따져서 문장을 만든다. ▷학교에서는 당장 봄 학기를 맞아 작문 지도가 불가능해졌다고 아우성이다. 챗GPT에 감상문이나 리포트를 쓰라고 지시했더니 AI가 작성했는지, 사람이 작성했는지 판별하기 어려운 글을 써내고 있다. 판별 자체가 어려우면 사용을 금지한다고 금지될 일이 아니다. 모든 과목이 실은 작문이다. 작문 지도를 할 수 없으면 사고력과 표현력을 키울 수 없고 창의적인 생각에 따른 창의적인 글도 쓸 수 없다. AI처럼 확률 분포에 따른 글만 쓸 수 있다. 그래서 AI의 글은 AI의 글임을 알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워터마크(디지털 표시)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미국 비영리단체 ‘삶의 미래 연구소(FLI)’는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애플 공동창업자 스티브 워즈니악 등 유명 인사들의 서명을 받아 생성형 AI의 추가 개발을 6개월간 중단하고 사회에 미칠 영향에 대해 정밀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빌 게이츠 같은 이는 “개발 중단은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며 “문제가 있는 부분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어느 쪽 견해가 타당하든 이제 찬사에만 취해 있지 말고 한계와 문제를 진지하게 따져볼 때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3-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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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이해찬과 조국의 기만적인 ‘강제징용’ 아는 체

    조국 씨가 문재인 정부에서 청와대 민정수석을 할 때 배상과 보상의 차이를 거론하며 대법원의 일본 강제징용 판결을 옹호한 적이 있다. 배상은 불법행위에서 발생한 손해를, 보상은 적법행위에서 발생한 손실을 복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법학개론 수준의 개념 구별로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을 이해할 수 없다. 청구권 협정은 한일병합의 불법성에 대한 결론을 먼저 내린 뒤 맺어야 하는 협정이지만 그래서는 해결이 요원하니 선결 문제는 덮어두고 일단 돈 문제의 해결을 모색한 것이다. 일본은 한일병합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아 보상이라 주장했고 한국은 한일병합의 불법성이 명확하기 때문에 배상이라 주장했다. 내막을 잘 모르면 일본은 보상이라고 주장했으므로 배상 문제는 남아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양국이 원한 것은 보상으로 부르든 배상으로 부르든 실질적인 금전 문제의 해결이었다. 한국은 청구권 협정 전후로는 배상임을 고집하다가 근래로 올수록 보상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조 씨처럼 보상과 배상의 구별을 엄밀히 할 경우 보상이란 용어의 사용은 한일병합은 합법이었다고 인정하는 자가당착에 빠질 수 있다. 따라서 청구권 협정에 관한 한 보상과 배상은 그 차이에 큰 의미를 부여할 게 못 된다. 노무현 정부에서 2005년 민관공동위원회를 만들어 청구권 협정에 무엇이 포함됐는지 검토했다. 그 결과 △위안부 등 일본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 △사할린 동포 △원폭 피해자 문제는 청구권 협정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결론 내렸다. 또 일본의 무상원조 3억 달러에 포함된 것으로 강제동원 피해보상 문제 해결 성격의 자금을 명시했다. 1961년 12월 15일 제6차 한일회담 예비회담에서 강제동원에 대한 피해보상으로 생존자 1인당 200달러, 사망자 1인당 1650달러, 부상자 1인당 2000달러를 기준으로 3억6400만 달러를 산정했다. 이를 포함해 8개 항목에 대한 보상금으로 모두 12억2000만 달러를 일본에 요구했다. 일본은 일일이 보상액을 증명하는 게 곤란하다는 이유로 한일 간의 경제협력 금액을 올리는 대신 청구권을 포기하도록 요구했다. 민관공동위의 민간 측 위원장은 양삼승 변호사가, 정부 측 위원장은 당시 이해찬 총리가 맡았다. 이 전 총리가 최근 다시 등장해 “민관공동위는 개인 청구권마저 소멸된 것으로 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민관공동위 백서를 보면 2005년 4월 27일 제2차 민관공동위 회의 당시 문재인 민정수석이 ‘국가 간 협정으로 개인 청구권을 어떤 법리로 소멸시킬 수 있는지 법리적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개인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는 결론이 아니라 문 수석이 검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는 내용이다. 결론이 어땠는지는 양 변호사가 한 언론 인터뷰에서 밝혔다. “회의에서 청구권 협정 당시 강제동원된 사람들의 사적 청구권까지 해결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문 수석의 주장은 하나의 의견으로 기록된 것이다. 박정희 정부는 1977년 강제징용 사망자에게 1인당 30만 원씩 모두 25억6560만 원을 지급했다. 노무현 정부는 민관공동위가 백서를 낸 이후 추가로 돈을 지급하면서 “1977년 시행한 보상으로 인해 정부의 보상 의무는 없어졌지만 보상이 불충분해 도의적 책임을 느끼고 위로금을 지급한다”고 발표했다. 이 전 총리는 위로금이기 때문에 대위 변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말장난이다. 위로금은 대위 변제가 완료됐다는 전제에서 지급된 것이다. 다시 말해 강제동원된 사람들의 사적 청구권까지 해결됐다는 전제에서 지급된 것이다. ‘제3자 변제’는 노무현 정부를 포함해 역대 정부의 해석과 다른 대법원 판결 때문에 나온 고육책이다. 대법원 판결의 이행을 강제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건을 국제사법재판소(ICJ)로 가져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대법원 판결을 등에 업고도 ICJ로 가져가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바로 그 자신이 과거 강제징용 피해자 변호인으로서 개인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고 주장해온 사람이기에 그것은 모순이었다. 결국 그쪽 문은 닫혔음이 드러났다. 이제 다른 대통령이 다른 쪽 문을 열게 해줘야 한다. 비판할 건 비판하되 닫힌 문쪽의 경로로 다시 돌아가는 비판이어서는 안 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3-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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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꺼번에 핀 봄꽃, 반갑지만은 않은 이유[횡설수설/송평인]

    서울에서 아직 꽃망울 못 터뜨린 목련도 적지 않은데 벌써 벚꽃이 폈다. 진달래는 아직 펴 있고 개나리는 여전히 무성해지고 있다. 봄꽃은 대개 매화 진달래 개나리 목련 벚꽃 순으로 핀다. 서울 벚꽃 개화의 기준인 종로구 서울기상관측소의 벚꽃은 25일 폈다. 친구가 전남 구례 화엄사를 찾아 멋진 홍매화 사진을 찍어 카톡으로 보내준 것은 19일이다. 매화에서 벚꽃까지 한 달에 나눠 피던 꽃들이 전국에서 일주일 사이에 다 피었다. ▷꽃피는 시기가 빨라지면서 지자체는 봄꽃 축제를 앞당기고 있다. 산수유는 매화와 더불어 봄철에 가장 먼저 피는 꽃 중 하나다. 경기 이천시는 백사 산수유 축제를 2006년까지 4월 7일에 시작했으나 2007년에는 3월 30일로 1주일 앞당겼다. 이천시는 올해 다시 축제를 3월 23일로 1주일 앞당겼다. 7년 사이에 2주일 앞당겼다는 사실에서 점점 더 빨라지는 기후변화의 속도를 실감할 수 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의 연구에 따르면 영국에서 40만 종 이상 꽃의 평균 개화 시기가 1753∼1986년에 비해 1987∼2019년에 30일 더 빨라졌다. 영국에서 이런 과학적인 결과를 내놓을 수 있는 것은 과학자 박물학자 정원사 등의 관찰기록을 모아놓은 ‘자연의 달력(Nature’s Calender)’이라는 데이터베이스가 있어서다. 우리도 훌륭한 기록문화를 가진 나라인 만큼 비슷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개화 시기의 정확한 변화 추이를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지구가 겨울에 예전보다 덜 식었다가 빨리 데워지기 때문에 봄꽃 피는 시기가 빨라질 뿐만 아니라 압착되고 있다. 다양하고 많은 꽃이 한꺼번에 피니 보기는 좋다. 진달래의 분홍은 은은하기는 하지만 잿빛 산야를 물들이기에는 역부족이고, 개나리의 노랑은 물감을 풀어놓은 듯하지만 너무 노랗기만 해서 귀해 보이지 않았는데, 목련의 송이송이 탐스럽고 벚나무의 팝콘 터지는 듯한 흰 꽃과 함께 피어 있어 한데 잘 어울린다. ▷아름다운 외관 너머에는 심각한 생태학적 미스매치(mismatch)가 발생하고 있다. 꽃이 너무 일찍 피었다가 져버리면 그 꽃에 의존해 살아가는 곤충의 활동 시기와 어긋나 곤충이 살 수 없고 그 곤충을 먹고 사는 새도 살 수 없다. 몇 년 전부터 꿀벌 폐사 현상이 양봉업자의 애를 태웠고 근래로 올수록 심해지고 있다. 무엇보다 꿀벌이나 새가 없으면 자연수분이 이뤄지지 않아 나무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생태계에 큰 혼란이 초래될 수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점점 더 아름다워지는 봄꽃을 구경하는 게 기쁘지만은 않은 이유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3-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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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계묘국치, 진짜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들

    2012년 대법원 1부는 일본 기업의 강제징용 배상 책임을 처음 인정했다. 당시 전원합의체에 회부되지 않고 소부(小部)에서 결정된 것은 1부에 속한 김능환(주심) 이인복 안대희 박병대 대법관이 모두 배상 책임 인정에 동의했음을 뜻한다. 당시 대법원 1부가 파기환송한 사건은 재상고돼 6년 만인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회부됐다. 김명수 대법원장을 포함해 13명이 참여해 이 중 김 대법원장과 김소영(주심) 조희대 박상옥 이기택 김재형 박정화 민유숙 김선수 이동원 노정희 대법관 등 11명이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그로써 판결이 확정됐다. 국가는 어찌 되건 말건 자신만 비난을 면하면 된다고 여긴 대법관 15명의 이름을 기억해 두라고 일일이 거론해봤다. 윤석열 대통령이 구상권 행사 없는 ‘제3자 변제’로 일본에 숙이고 들어가는 국치(國恥)를 자초한 책임은 윤 정부 외교 3인방이 아니라 바로 이들에게 있다. 2012년 대법원 1부 판결이 내려진 직후 이 문제에 정통한 이근관 서울대 교수 등 국제법 전문가들의 비판 논문이 쏟아졌다. 요지는 두 가지다. 첫째,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는 강제징용 피해자 개인의 청구권도 포함돼 있다는 게 일본 정부만이 아니라 한국 정부도 오랜 기간 일관되고 명확하게 견지해 온 견해라는 것이다. 둘째,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체결된 대부분의 유사한 협정이 국가와 개인의 청구권을 구별하지 않고 동시에 소멸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2018년 대법원은 6년 전과 똑같은 판결을 내렸다. 한일 청구권 협정에는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표현이 나온다. 박근혜 정부에서 위안부 합의가 따로 체결된 것은 1965년 당시에는 위안부가 현안으로 부상하지 않아 한일 간의 묵시적 합의에 의한 청구권 범위에 들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제징용은 그 범위에 들어 있었다. 강제징용 배상 청구권이라면 그것이 개인의 청구권이지, 국가의 청구권이겠는가. 그래서 노무현 정부에서 국가가 대신 배상을 받았으니 피해자에게 대위(代位) 변제한다는 구상이 나왔고 그대로 실행됐다. 대법관들은 개인 청구권을 인정하는 판결이 한일 간 협정을 파기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외교 갈등을 초래하리라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으나 정부가 알아서 하라고 던져버리고는 빌라도처럼 손을 씻었다. 그들이 지난 5년간 한일 관계의 악화를 지켜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오지(奧地) 국가에서나 나올 법한 판결을 했으니 일본 기업이 배상을 거부해도 문재인 정부 5년간 국제사법재판소(ICJ)로 가져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사법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고 판사 검사 변호사 교수로서도 높은 평가를 받아 대법관의 자리에까지 오른 똑똑한 사람들이 외교관계를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헝(hung)’ 상태로 만드는 판결을 내리는 바람에 결국 일본에 숙이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초래했다는 것이 부끄러워한다면 진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두 사람을 더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한 사람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고, 다른 한 사람은 윤 대통령이다. 외교에는 ‘한목소리 원칙(one voice principle)’이라는 게 있다. 사법부냐 행정부냐 입법부냐를 넘어 국가 전체가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원칙이다. 양 전 대법원장은 한일 정부 간의 외교적 해법이 마련되기까지 판결 확정을 가능한 한 연기시키려 했다. 그런 그를 박근혜 정부와의 재판 거래로 몰아 구속영장을 청구한 것은 다름 아닌 당시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이다. 양 전 대법원장에게는 여러 혐의가 적용됐지만, 그를 구속까지 몰아가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강제징용 재판을 질질 끌었다는 혐의다. 제3자 변제는 채권자도 채무자도 원하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사과할 사람은 사과할 생각이 없고 아무런 관련 없는 제3자가 대신 사과한다면 사과를 받아들일 수 있겠나. 분명 무리한 해법이다. 그렇다고 이 해법을 탓하기도 어려운 건 이미 두어진 무리수는 새로운 무리수를 두지 않는 한 바로잡을 방법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다만 윤 대통령은 이 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는 듯이 딴청 부리지 말고 문재인 정부 적폐수사의 장단에 맞춰 칼춤을 춘 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이해를 구해도 구해야 할 것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3-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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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행 파산 사태로 ‘민간 연준’ 다시 맡은 JP모건 [횡설수설/송평인]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 미국이 세계 최고의 자본주의 국가로 부상하던 시대의 세 부자가 존 록펠러, 앤드루 카네기, J. P. 모건이다.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을 지낸 앨런 그린스펀은 ‘미국 자본주의의 역사’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다. “록펠러는 전 세계 정유량의 90%를 통제했고, 카네기는 영국보다 많은 철강을 생산했으며, 모건은 미국을 두 번의 파산 위기에서 구했다.” ▷록펠러와 카네기는 자수성가했지만 모건은 그렇지 않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국제금융의 중심지인 런던에서 영국과 미국을 오가며 금융 거래를 한 사람으로 재력을 가졌다. 그 자신은 독일이 학계의 중심이던 때 괴팅겐대에서 수학을 공부할 정도로 지적이었다. 석유왕 록펠러나 철강왕 카네기가 한 분야에서 기업을 키웠다면 은행가 모건은 금융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기업을 합병하고 이사회를 통해 장악했다. 미국에 연준이 없던 1895년과 1907년에 모건이 ‘1인 연준’ 역할을 한 것은 은행의 파산과 연이은 기업의 파산을 막는 것이 누구보다 자신에게 절실했기 때문이다. ▷모건은 1912년 하원 위원회에 불려나왔다. 그와 동업자들의 금융조합이 112개 기업의 341개 이사직을 차지했다는 혐의 때문이었다. 그는 이듬해 사망했는데 이유가 하원 위원회에서 공개적인 비방을 당한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가 사망한 해 미국에서 연준법이 만들어졌다. 이 법에 따라 12개의 연준 은행이 만들어져 모건 같은 민간 은행가가 하던 역할을 맡게 됐다.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이 미국 최대 은행인 JP모건의 제이미 다이먼 회장을 전화로 찾아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여파로 돈이 빠져나가고 있는 퍼스트리퍼블릭은행 등 중소은행에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다이먼 회장은 요청을 수락한 뒤 뱅크오브아메리카, 웰스파고, 시티 등 다른 은행 CEO와 일일이 연락해 협조 지원을 끌어냈다. 1907년 모건이 월가의 은행가들을 모아 협조 지원을 끌어낸 일을 떠올리게 한다. ▷은행의 파산을 막는 데 세금이 쓰이는 것은 맞지 않다. 116년 전이나 지금이나 궁극적으로 은행만이 은행을 도울 수 있다. 물론 뱅크런을 막아 은행권 전체에 이익이 될 때의 얘기지만 은행의 민간 소유권이 확고하고 은행이 자율성을 갖는 나라에서는 그렇다. 우리나라는 지금까지의 경험에서 보면 정부가 은행장들을 한데 모아놓고 몇 마디 윽박지르는 것만으로 협조 지원 정도는 간단히 될 것 같은 나라다. JP모건의 되살아난 민간 연준 역할은 우리에게는 처음부터 없었던 은행의 한 중요한 측면을 생각해보게 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3-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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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촘스키 ‘챗GPT는 절대 인간을 따라잡을 수 없다’[횡설수설/송평인]

    ‘그 사과가 떨어진다’는 건 묘사(description)다. ‘그 사과를 놓으면 떨어질 것이다’는 건 예측(prediction)이다. 챗GPT를 포함한 인공지능(AI)은 묘사와 예측은 잘한다. 그러나 설명(explanation)은 그 이상을 요구한다. ‘모든 물체는 떨어진다’와 같이 통계로 수집 가능한 사례를 넘어 보편성을 주장하는 추정이라든가, ‘모든 물체는 중력의 힘 때문에 떨어진다’는 인과적 설명은 AI가 만들어낼 수 없다. ▷95세의 노장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가 8일 챗GPT 출시 100일을 맞아 뉴욕타임스 기고에서 AI가 지닌 지능의 한계를 지적했다. 그는 아이의 언어 습득 과정은 신비로우며 인간은 언어의 활용을 통해 동물과 구별되는 도약을 했다고 본다. 그럼 기계는? 그에 따르면 인간 지능의 운영체계(OS)는 적은 정보로도 그것을 놀라울 정도로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데 반해 AI의 OS는 수백 테라바이트의 데이터를 가지고 패턴과 통계에 따른 답변을 만들어낼 뿐이다. ▷인간의 추정이나 설명은 틀릴 수 있다. 그러나 틀릴 수 있다는 점이 사고(thinking)의 중요한 구성 부분이다. 사고는 그럴듯한 설명을 제공하고 그 설명의 잘못을 수정해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챗GPT는 지구가 평평하다는 주장을 수정해가면서 지구가 둥글다는 결론에 이르는 방식이 아니라 어느 주장이 더 많이 거론되고 있느냐는 개연성을 따져 결론에 이를 뿐이다. ▷촘스키는 과학철학자 칼 포퍼를 소환했다. 포퍼는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가장 그럴듯한 이론이 아니라 가장 그럴 것 같지 않은 이론’이라고 역설적으로 말한 바 있다. 사과의 낙하는 사과가 자연스러운 위치를 찾아가는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도 당시로는 그럴듯했다. 그러나 ‘왜 하필 지구가 자연스러운 위치냐’는 의문이 따랐다. 사과의 낙하는 질량이 시공(時空)을 휘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아인슈타인의 설명은 여전히 그럴듯해 보이지 않지만 사실이다. 지능은 그럴듯해 보이지 않지만 통찰력 있는 것을 생각하고 표현하는 능력이다. ▷인간 지능의 또 하나의 능력은 도덕적 사고다. 도덕적 사고는 인간 지능의 창의성을 제한해 해야 하는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을 구별한다. 그것은 창의성과 윤리적 원칙 간의 균형을 맞추는 능력이다. 챗GPT는 겉보기에는 세련된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도덕적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촘스키는 이를 해나 아렌트가 나치 홀로코스트 실무책임자인 아이히만을 가리켜 썼던 ‘악의 평범성’에 비유한다. 어쩐지 인간 지능이 아니라 인공지능에 적용한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 같은 느낌이 든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3-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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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 대통령들의 독서

    문재인 전 대통령이 경남 양산 평산마을에 책방을 연다고 한다. 반가운 소식이다. 다만 책 추천은 좀 신중히 했으면 한다. 그가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훌륭한 독서가가 아닌 듯해서 하는 말이다. 암살로 사망한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회고록이 얼마 전 일본에서 출간됐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에 대해 “호전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군사 행동에 소극적이었다”는 평가가 나온다고 한다. 트럼프가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낸 ‘불구가 된 미국’이란 책이 있다. 이 책을 읽어봤다면 트럼프가 돈이 아까워서라도 전쟁하지 못할 ‘위인’임을 누구라도 알 수 있다. 문 정부의 청와대는 2017년 미국이 당장이라도 북한을 폭격해 전쟁이 날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그해 10월쯤 청와대 어느 수석과 저녁을 했다. 내가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이 너무 유화 일변도라고 비판하자 술이 들어간 그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며 당장 한반도에 전쟁이 터질지도 모르는데 무슨 소리를 하느냐며 버럭 화를 냈다. 외교나 안보와는 관련 없는 수석인데도 그래서 놀랐다. 청와대 분위기가 그랬던 모양이다. 트럼프의 책에는 군사력은 실제 사용해서 상대방을 제압하는 것보다 군사력의 압도적 우세를 과시함으로써 상대방이 지레 겁먹게 하는 게 돈이 덜 든다는 대목이 곳곳에 나온다. 문 전 대통령이 이 책을 읽어봤다면 ‘6·25전쟁 이후 최대 위기’ 운운하며 스스로를 기망하면서 전 세계의 비웃음을 산 평화 쇼를 벌이진 않았을 것이다. 문 전 대통령이 책에 각별한 애정을 표시하지 않았다면 ‘트럼프의 책 좀 읽어볼 것이지’라는 주문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통령으로 꼭 읽어야 할 책은 읽지 않고 대통령으로서는 참으로 한가한 책들을 많이도 읽고 권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문 전 대통령과는 달리 거의 혼밥을 하지 않는 타입이다. 사람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니 책 읽을 시간도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책을 꼭 읽어야 하는 건 아니다. 사람을 만나서 더 많은 걸 배울 수 있다.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유학 갈 때 아버지로부터 책 읽지 말고 사람 만나 살아 있는 지식을 배우라는 가르침을 받고 유럽통합의 아버지가 된 장 모네 같은 위인도 있다. 그러나 그것도 이미 아는 게 많아 말귀를 알아먹을 때의 얘기다. 윤 대통령이 대선 때 거론한 책이 한 권 있으니 밀턴 프리드먼의 ‘선택할 자유’다. 하도 이 책을 자주 거론해서 읽은 게 이 책밖에 없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책은 인플레이션에 대한 통찰로 가득 차 있다. 프리드먼은 5% 정도의 물가 인상은 가볍게 여긴 케인스주의 경제학자들과 달리 1%의 인플레는 1%의 ‘입법 없는 과세’라며 그 폐해의 심각성을 경고했다. 물가를 잡을 때는 물가를 잡는 데 전념해야 하는데 윤 대통령은 물가를 잡는 것과 동시에 공공요금 현실화, 의무보험료 징수 확대 등 오만 것을 다 하겠다고 덤비다가 난방비 폭등으로 비로소 책 속의 인플레가 아닌 실제 인플레가 뭔지 알게 된 듯 이번에는 방향을 완전히 바꿔 공공요금은 물론이고 소주 등 사기업의 물가까지 통제하는 방향으로 돌아섰다. 프리드먼이 하지 말라고 경고한 바로 그것을 하고 있다. 미국과의 금리차로 인한 환율 문제도 있고 해서 정부로서는 한국은행의 금리 결정에 왈가불가하기 어려워졌다. 그러자 2선에서 은행을 다그쳐 예금금리를 낮추게 하더니 다시 대출금리까지 낮추도록 압박하고 있다. 이런 것이야말로 ‘인플레는 언제나 어디서나(always and everywhere) 통화적 현상’이며 통화량 조절이 인플레 대책의 핵심이라는 ‘선택할 자유’의 내용에 정면으로 어긋난 것이다. 대부분의 정부는 인플레에 필요한 대책을 잘 알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대책을 밀고 가는 정부의 의지다. 프리드먼은 낮은 경제성장과 평시보다 높은 실업기간을 거치지 않고 인플레가 종식된 사례는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다고 단언한다. 정부의 역할은 인내심을 갖고 대처하면서 그 부작용을 줄이는 것이다. 윤 정부에 부족한 것이 바로 그런 인내심이다. 윤 대통령이 얼마 전 스스로 강조한 괴테의 문구가 있지 않나. ‘서두르지 말고 그러나 쉬지 말고(ohne Hast, aber ohne Rast).’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3-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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