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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의 여러 사료나 도상에 나오는 악마들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머리에 뿔이 달렸고, 몸에 반점이나 줄이 가로로 그어져 있다. 이 때문인지 12, 13세기에 줄무늬 옷은 비하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당시에 줄무늬 옷을 입는 이들은 집시나 죄수처럼 사회에서 배척받는 사람들이었다. 줄무늬 옷이 기본 아이템으로 여겨지는 현대사회에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당시엔 줄무늬 자체가 혼란을 야기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스위스 로잔대와 제네바대에서 초빙교수를 지내며 ‘중세 문장학의 대가’로 꼽히는 저자는 “중세인은 자연에서 줄무늬를 발견하는 게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기에 공포감과 혐오감을 느꼈다”고 설명한다. 무질서의 상징이던 줄무늬는 근대 유럽에서 새로운 지위를 얻는다. 가로 줄무늬가 아니라 세로 줄무늬가 등장하면서 신성로마제국을 중심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된다. 장 클루에(1486~1540)의 그림 ‘프랑수아 1세의 초상’에서 보듯, 군주들마저 세로 줄무늬 옷을 입고 초상화 모델로 설 정도였다. 세로 줄무늬가 귀족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상징물이 됐다. 하지만 여전히 일부계층의 상징이나 이국적인 이미지가 강했던 줄무늬는 미국으로 건너가 또 한번 변화를 맞는다. 직물이나 실내장식으로 퍼지던 줄무늬는 독립혁명이 시작된 1775년을 기점으로 정치적 아이콘으로 떠오른다. 당시 미국인은 영국에 맞서며 13개의 식민지를 뜻하는 빨간색과 하얀색으로 이뤄진 가로 줄무늬 깃발을 만든 것이다. 이때부터 줄무늬는 자유주의 독립사상에 대한 지지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등극했다. 전위적인 예술가들에겐 줄무늬가 도발적이면서도 불량스러운 이미지로 애용됐다. 괴짜였던 파블로 피카소(1881~1973)는 위아래로 줄무늬 옷을 입은 모습을 자주 드러냈다. 프랑스 설치미술가 다니엘 뷔렌(84)도 줄무늬를 주제로 50년 가까이 활동하고 있다. 줄무늬라는 하나의 소재를 따라 천변만화하는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줄을 긋는다는 하나의 행위가 어쩌면 가장 파격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스트라이프, 혐오와 매혹 사이 / 미셸 파스투로 지음·고봉만 옮김 / 238쪽·2만2000원·미술문화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1. 18일 서울 강동구 강동성심병원. 진료를 기다리던 어린이 환자들 사이로 일러스트화가인 구지민 작가(30)가 나타났다. 구 작가가 “중력 없는 방이 있다면 뭘 하고 놀까”라는 질문을 던지자, 아이들은 종이에 그림을 그리고 잘라 구 작가가 미리 준비한 그림에 붙이기 시작했다. 현직 작가와의 만남에 아이들은 아픈 것도 잊은 채 빠져들었다. #2. 2018년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미술관. 광장 앞에 낯선 전시물들이 채워지며 지나가던 시민들이 웅성거리며 모여들었다. 그린란드 피오르에서 옮겨온 어른 키보다 살짝 큰 빙산 조각 30개가 예술품으로 배치된 것. 온난화를 경고하기 위해 덴마크 설치미술가 올라퍼 엘리아슨(55)이 주도한 ‘아이스 워치’라는 야외 전시였다. 얼핏 닮은 점이 없어 보이는 두 프로젝트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예술가와 후원자를 연결해주는 ‘아트 펀드레이저’가 성사시켰다는 것. 국내에선 ‘문화예술후원매개전문가’라고도 부르는 아트 펀드레이저는 해외에선 이미 낯설지 않은 개념. 미국은 약 1만 명에 가까운 아트 펀드레이저가 활동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에선 최근 공연 기획을 중심으로 미술 전시나 예술프로젝트 등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2019년 유엔의 세계기후변화 회의를 앞두고 열린 ‘아이스 워치’는 미 블룸버그재단의 아트 펀드레이저가 기획을 주도했다. 재단이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널리 알리고 싶어 하자 적절한 예술가를 찾아 연결시켰다. 당시 현지에서도 “예술과 후원이 만난 모범 사례”라며 반향이 컸다고 한다. 구 작가의 미술치유 워크숍도 마찬가지다. 국내 미술계 아트 펀드레이저 스타트업인 ‘블루버드씨’가 기획했다. 김상미 블루버드씨 대표는 “병원을 찾은 아동을 위한 예술이란 콘셉트를 갖고 후원자인 병원과 미술가인 구 작가를 섭외했다”며 “예술은 감정 회복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만큼 다양한 기획을 선보일 예정”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리그 오브 레전드(LoL) 라이브: 디 오케스트라’도 일종의 아트 펀드레이저가 내놓은 결과물이다. 세종문화회관이 아트 펀드레이저 역할을 맡아 “젊은 남성들이 좋아할 만한 클래식 공연을 해보자”는 취지로, 젊은층이 좋아하는 게임인 ‘LoL’ 배경음악을 연주하는 콘서트를 기획했다. ‘LoL’ 제작사인 라이엇게임즈가 후원하고 KBS교향악단이 연주를 맡았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여성 관람객 위주였던 기존 클래식 공연과 달리, 남성 관람객이 50% 이상이었다. 조휘영 세종문화회관 공연제작마케팅팀 PD는 “객석 점유율이 95%에 이를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특히 20대 예매가 63.9%를 차지해 기획 의도와 잘 맞아떨어졌다”고 했다. 아트 펀드레이저는 국내에선 초기 단계이지만 성장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기획재정부는 ‘미래 유망 14개 신 직업’ 가운데 하나로 꼽기도 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2020년부터 아트 펀드레이저 양성을 위한 ‘아트너스 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민세정 예술위원회 예술확산본부 차장은 “2020년엔 지원자가 50명이었지만 지난해 71명, 올해는 120명으로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 김성규 전 세종문화회관 사장은 “한국은 문화예술에 대한 모금이나 후원이 활발하지 않은 실정이라 아트 펀드레이저 같은 관련 전문가 양성이 시급하다”며 “문화예술에 대한 후원은 이를 즐기는 저변이 확대된다는 뜻이기에 문화계가 더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바람이 그린 ‘그림’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전업 화가 10년 차인 김수연 작가(36)는 최근 자신이 지속한 ‘바람 채집’이 벽에 가로막힌 기분이 들었다. 그는 “자연이 만든 의도하지 않은 미의 세계”를 찾기 위해 야외에서 붓을 줄에 매달아 바람에 흔들리는 대로 그림이 그려지게 했다. 나름대로 성과를 냈지만, 뭔가 본질적인 해답은 저 멀리 안개에 가려진 듯 답답했다고 한다. 최근 김 작가는 12일부터 열린 전시 ‘Dialogue(대화)’에서 진행한 ‘일대일 프라이빗 멘토링’에서 빛을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전시 기획자인 이대형 예술감독, 임근준 미술평론가와의 대화에서 “국내외 여러 문학에는 바람이 가진 상징이나 의미가 자주 등장한다. 이를 공부하며 자신의 답을 찾아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미술의 길은 어렵고 지난하다. 특히 청년 작가들은 혼란에 빠져 길을 잃거나 포기하는 경우가 잦다. 미술계에선 고민에 빠진 MZ세대 작가들이나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지역 작가들이 선배 화가나 현직 큐레이터 등과 상담하는 ‘일대일 매칭 프로그램’이 최근 늘어나고 있다. 이 예술감독도 “상업성과 예술성 사이에서 갈피를 잡기 힘든 작가들에겐 약간의 조언도 방향 설정에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지난해부터 시작된 국립현대미술관의 기획 사업인 ‘공립미술관 추천작가-전문가 매칭 지원’이다. 지역 공립미술관이 지역 작가들을 추천하면 분야별 전문가가 ‘맞춤형 멘토링’을 진행한다. 지난해는 5개 기관에서 추천한 15명의 작가가 대상이었고 올해는 7개 기관에서 추천한 12명에게 지원을 해주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이 공모로 선정한 작가들을 상대로 멘토링과 전시를 진행하는 ‘신진미술인 전시 지원 프로그램’도 비슷한 경우다. 미술관은 “최근 대상을 확대해 공모 선정 작가가 아니더라도 작업관이 확립되지 않은 젊은 작가에게 도움을 주려 하고 있다”고 밝혔다. 강원 양구에서 주로 활동하는 김형곤 작가(52)도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 프로그램을 통해 김주원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과 만난 뒤 “이런 기회가 더 늘어나야 한다”며 반색했다고 한다. 김 실장은 “지역 미술계는 작가가 대중과 소통할 기회나 창구가 많지 않아 고립되기 쉽다”며 “비평가를 비롯한 미술계 인사들과 만나 작업관을 확장해 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올해로 10년차에 접어든 김수연 작가(36)는 최근 자신의 작업 방향에 고민이 생겼다. 김 작가는 줄에 매달아 놓은 붓이 바람에 흔들리며 남긴 흔적을 바탕으로 작업해왔는데, “단순히 월별로 그 흔적을 채집하는 데에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의 고민은 이달 12일부터 서울 양천구 현대백화점 목동점에서 진행하는 단체전 ‘Dialogue’의 부속 프로그램인 ‘일대일 프라이빗 멘토링’에서 일견 해소됐다. 이는 전시 기획을 맡은 이대형 예술감독이 “상업성과 예술성 사이에서 방향을 찾기 어려워하는 작가들에게 뼈아픈 조언이 필요한 때”라며 시니어 큐레이터 2명과 함께 기획한 것이다. 김 작가는 “약 한 시간의 대화를 통해 ‘국내외 문학 속 바람이라는 소재의 의미를 작품에 반영해보라’는 조언을 받았고, 새 작업의 물꼬를 텄다”고 말했다. 큐레이터나 비평가와의 일대일 매칭 프로그램을 통해 작업 활로를 찾는 작가들이 늘고 있다. 이제껏 일대일 매칭 프로그램은 레지던시를 운영하는 재단이나 미술관에서 종종 진행되어 왔다. 2008년부터 서울시립미술관이 공모 선정 작가를 상대로 멘토링과 전시를 진행한 ‘신진미술인 전시지원 프로그램’ 등이 대표적이다. 최근에는 프로그램 대상이 확대되면서 작업관이 확립되지 않은 젊은 작가들이나 비평과 멀어진 지역 작가들에게 특히 도움이 된다는 평이다. 지난해부터 시작되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기획 사업인 ‘공립미술관 추천작가-전문가 매칭 지원’이 한 사례다. 지역 공립미술관이 지역 작가들을 추천하면 분야별 전문가가 붙어 맞춤형 멘토링을 진행한 후 자료집을 발간하는 식이다. 지난해에는 5개 기관 14명을, 올해는 7개 기관 12명을 진행했다. 지난해 강원 양구군에서 활동하고 있는 서양화가 김형곤(52)의 경우, 매칭 상대인 김주원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이 작가 작업실에 방문해 심층 토론을 진행했다. 김 실장은 “미술 신은 대중과 언어로 소통이 잦지 않고 창구가 많지 않아 작가가 고립되기 쉽다. 그동안 눈에 띄지 않던 작가들이 타 지역과 중앙에서 활동하는 비평가들을 만나며 작업관을 확장해 나가는 것은 중요하다”고 말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박수근(1914∼1965)이란 이름 앞에서 예술가로서의 삶의 태도를 다시 점검하게 됩니다. 박수근미술상 수상은 ‘질문하기를 멈추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강원 양구군 박수근미술관에서 25일 열린 제7회 박수근미술상 시상식 및 미술관 개관 20주년 기념 특별전 개막식에서 올해 박수근미술상을 받은 차기율 작가(61·인천대 조형예술학부 교수)가 말했다. “38세에 혼자가 돼 6남매를 키우신 어머니에게 감사드린다”며 잠시 울음을 삼킨 그는 “부족한 제게 또다시 전진할 기회를 줘 감사하다”고 했다. 박 화백의 예술혼을 기리는 뜻에서 제정된 박수근미술상은 동아일보와 양구군, 강원일보, 박수근미술관이 공동 주최한다. 이인범 박수근미술상 운영위원장은 “차 작가는 자연, 장소의 기억, 노마드 등을 기본 개념으로 집요하게 탐구하며 다양한 소재로 설치미술 작업을 해 왔다”고 말했다. 이어 “예술을 자신과 겸허하게 마주하는 방법으로 받아들여 온 작가로, 이는 박 화백이 치열하게 추구했던 길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박 화백의 장녀인 박인숙 박수근미술관 명예관장은 “선함과 진실함을 전해주는 아버지와 맥이 통하는 면이 많은 차 작가가 앞으로도 멋진 작품을 만들 것이라 믿는다”고 했다. 서흥원 양구군수는 “차 작가는 수십 년간 자연, 인간, 우주에 천착하며 작품세계를 구축해 왔다”고 말했다. 차 작가는 이날 박 화백의 작품 ‘아기 업은 소녀’(1963년)를 조각으로 만든 상패와 창작지원금 3000만 원을 받았다. 내년 5월 박수근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 박수근미술관 개관 20주년 기념 특별전 ‘박수근의 시간·미석(美石)의 공간’에서는 ‘철쭉’(1933년)과 ‘절구질하는 여인’(1952년)을 비롯해 판화, 탁본, 드로잉 등을 만날 수 있다. 내년 3월 26일까지 열린다. 양구=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자기 복제처럼 똑같은 그림을 그리는 것 같아 부담스러울 때도 있지만, 그래도 보리밭을 그리고 싶은 걸 어쩌겠어요.” ‘보리밭 화가’ 이숙자 화백(80)이 6년 만에 개인전으로 돌아왔다. 서울 종로구 선화랑에서 19일 열린 선화랑 45주년 기념전 ‘이숙자’에서 만난 그는 수줍은 미소로 작품을 소개했다. 40점을 출품한 이번 전시에는 2022년 작품도 3점 포함됐다. 역시 모두 보리밭이다. ‘분홍밭 장다리꽃이 있는 보리밭’과 ‘청보리―초록빛 안개’는 각각 1981년, 2012년에 그렸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 전면 개작했다. 이 화백은 “파기할까 고민도 했지만 내 자식이 부족하다고 버릴 순 없지 않으냐”며 “과거의 저와 현재의 제가 합작했다고 여겨 달라”고 했다. 천경자 화백(1924∼2015)의 제자인 그는 이번 전시에 1980년대부터 쌓아온 자신의 화업(畵業) 50년을 두루 조망할 작품을 많이 선보였다. 그 가운데 ‘이브의 보리밭 90-6’(1990년)은 빼놓을 수 없는 대표작. 보리밭에 맨몸으로 누운 여성을 그린 작품은 당시에도 적나라한 묘사로 파장을 일으켰는데, 32년이 지난 지금도 당당한 기세가 느껴진다. “발가벗은 여성의 몸도 사람 얼굴 보듯 낯익었으면 좋겠어요. 낮은 여성 인권에 대한 저항과 인습에 대한 반항이 의식 속에 있지 않았나 싶어요.” 이 화백은 최근 자화상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매일 맨몸으로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몸과 얼굴을 캔버스에 담는다고 한다. 그는 “이번에 처음 공개한 ‘푸른 모자를 쓴 작가의 초상’(2019년)은 날 너무 곱게 그린 것 같다”며 “‘볼 테면 보라지’라는 마음으로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고 했다. 다음 달 19일까지.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보리밭 화가’라고 하면 금세 떠오르는 작가가 있다. 50년 화업을 이어온 이숙자(80) 화백이다. 이 화백은 서울 종로구 선화랑에서 6년 만에 개인전을 열고 있다. 19일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자기 복제처럼 똑같은 그림을 그리는 것 같아 부담스러웠지만, 그럼에도 보리밭을 그리고 싶은 걸 어쩌냐”며 웃었다.출품작 40점 중 신작 3점도 모두 보리밭 그림이다. 이중 ‘분홍빛 장다리꽃이 있는 보리밭’(1981년)과 ‘청보리-초록빛 안개’(2012년)는 마음에 들지 않아 올해 개작한 작품이다. 그는 “파기할까 생각했지만 내 자식이 부족하다고 버릴 순 없다”며 “과거의 저와 현재의 제가 합작한 작품”이라고 했다. 천경자 화백(1924~2015)의 제자였던 그는 “무슨 그림을 그려도 천 선생님을 흉내 낸다고 했는데, 보리밭을 그리면서 그 소리가 들어가더라”라며 보리밭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이번 개인전에는 1980년대 작품부터 출품돼 이 화백의 작품 세계를 두루 조망할 수 있다. 그중 단연은 ‘이브의 보리밭’(1990년)이다. 보리밭에 맨몸으로 누워있는 여성과 세밀하게 표현된 음모는 당시 매우 큰 파장을 일으켰는데, 32년이 지난 지금도 여성의 당당한 기세가 느껴진다.“발가벗은 여성의 몸도 사람 얼굴 보듯 낯익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낮은 여성인권에 대한 저항, 인습에 대한 반항이 내 의식 속에 있지 않았나 싶어요.”최근 이 화백은 자신의 적나라한 자화상을 그리는 데에 몰두하고 있다. 맨몸으로 거울 앞에 서서 매일 자신의 몸과 얼굴을 캔버스에 담는다. 이번에 처음 발표한 ‘푸른 모자를 쓴 작가의 초상’(2019년)이 “너무 날 곱게 그린 것 같다”면서, “볼 테면 보라지”하는 마음으로.전시는 다음달 19일까지.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서양화가 서용선(71)은 약 2년 전부터 자신의 회화작업을 스스로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서울대 미대 교수였던 그는 본격적인 전업 작가로 활동한 2008년부터 각 작품의 도판과 전시이력, 비평 등을 한데 모았다. 올해 7월 출간된 ‘서용선 2008-2011’(연립서가·사진)이 그 결과물. 서 작가는 “‘전작도록’의 중간 단계로 보면 된다”며 “앞으로도 3, 4년 치씩 묶어 책으로 내놓을 예정”이라고 말했다. 전작도록이란 작가의 작품이력과 출품기록을 담은 자료로, 향후 미술품 감정의 기초로 활용돼 중요성이 크다. 일반적으로 작가가 활동을 중단한 뒤, 즉 세상을 떠났을 때 만든다. 하지만 최근 미술계에선 서 작가처럼 생존 작가들이 전작도록을 미리 준비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그간 사후 전작도록은 혼란이 빚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작품을 선정하는 데 연구학자마다 의견이 달라 제작에 차질을 빚는 일이 잦았다. 수록작의 진위를 놓고 논란이 생긴 사례도 있다. 서 작가도 “작품에 대한 기억은 1차적으로 작가가 제일 확실한 게 당연하지 않나”라며 “작가가 직접 참여하면 제작도 원활하고 내용도 훨씬 풍부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해외에선 생존 작가의 전작도록 작업이 상당히 보편화된 추세다. 독일의 거장 게르하르트 리히터(90)는 2011년 ‘1962∼1968년 도록’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6권을 내놓았다. 이인범 전 상명대 교수는 “생존 작가의 전작도록은 제작 과정에서 자기 작품에 대한 자가 비평이 가능하다는 장점을 지녔다”며 “작가가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뿌리를 굳건히 만드는 역할도 한다”고 말했다. 예술경영지원센터가 전작도록의 사전 단계라 할 수 있는 ‘원로작가 디지털 아카이빙 자료수집 연구지원’ 사업을 진행하는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2015년부터 이승택(90)과 박서보(91), 김순기(76), 김영원(75) 등 작가 30명을 대상으로 했다. 일반적으로 한 작가당 연구진 3∼6명을 투입해 1, 2년씩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심지언 예술경영지원센터 시각사업본부장은 “작가들이 생전에 연구자들과 작품에 대한 정보를 객관적으로 정리하면 향후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두 해 전, 서양화가 서용선(71)은 자신의 회화 작업을 총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서울대 미대 교직을 떠나 전업 작가가 된 2008년부터 시작했다. 올 7월 출간된 ‘서용선 2008-2011’(연립서가)은 그 결과물이다. 이 책에는 각 작품 도판과 전시 이력, 작품에 대한 비평 등이 포함됐다. 최근 동아일보와의 화상통화에서 서 작가는 “이 책은 전작도록(전체 작품 이력과 출품 기록을 담은 것으로, 미술품 감정의 기초 자료로 활용되는 책)의 중간단계 작업”이라고 말했다. 최근 국내 생존 작가들이 전작도록을 미리 준비하는 경우들이 늘고 있다. 보통 전작도록은 작가가 작품 활동을 중단했을 때, 즉 일반적으로 사후에 제작한다. 하지만 이럴 경우 전작도록에 수록할 작품에 대해 학자 간 이견이 생겨 작업이 중단되기도 하고, 수록작에 대한 진위에 대해 다른 의견이 나올 가능성이 많았다. 이 때문에 작가들이 생전부터 자신의 전작도록 작업에 힘써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다. 서 작가는 “작품 소유나 기증 이력들을 작가 개인이 추적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며 책에 대한 아쉬움을 표했지만, 국내에서 미미한 연도별 도록 제작에 돌입했다는 것으로도 의의는 크다. 그는 “작품에 대한 기억은 1차적으로 작가에게 있으니 작가의 참여가 중요하다. 이러한 중간 단계 노력이 있다면 사후 전작도록 제작이 원활함은 물론 내용도 풍부해질 것”이라며 “앞으로도 작품 3, 4년 치씩 묶어 꾸준히 책으로 내놓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예술경영지원센터도 전작도록의 사전 단계인 ‘원로작가 디지털 아카이빙 자료수집 연구지원’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한 작가의 현재까지 작품 활동을 정리해 온라인에 공개하는 식이다. 2015년부터 박서보(91), 김순기(76), 김영원(75) 등 30명을 대상으로, 한 작가 당 3~6명의 연구진이 1~2년간 진행한다. 심지언 예술경영지원센터 시각사업본부장은 “원로 작가 중 아카이브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높지 않으신 분들이 있다. 생전에 연구자들과 함께 객관적인 작품 정보를 정리해야 추후 연구, 유통 등에 원활하다”고 말했다. 해외에서는 이미 여러 생존 작가가 전작도록 작업에 뛰어들고 있다. 독일 대표화가인 게르하르트 리히터(90)는 2011년에 1962~1968년 도록을 시작으로 현재 6권까지 내놓았다. 이인범 전 상명대 교수는 “생존 작가가 전작도록을 만들게 되면, 그 과정에서 자기 작품에 대한 자가 비평이 가능해진다. 전작도록이 단지 진위 여부 기준이 되는 걸 넘어서서 작가에게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뿌리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설렁탕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현진건이 쓴 소설 ‘운수 좋은 날’(1924년)의 안타까운 결말은 오래도록 한국인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된 대목. 주인공 김 첨지는 퇴근길에 부인이 원하던 설렁탕을 사왔지만 부인은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그런데 부인은 왜 하필 ‘설렁탕’을 사달라고 한 걸까. 배탈이 난 환자가 먹기엔 좀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텐데. 소설 배경인 1920년대에 설렁탕은 대표적인 외식 메뉴였다. 당시 신문 기사들을 보면 1920년까지 경성 안팎에 설렁탕 가게는 25개뿐이었으나 1924년엔 100군데가 넘는다. 당시 설렁탕은 한 그릇에 13∼15전. 요즘 시세로 치면 3900∼4500원으로, 서민도 크게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었다. 게다가 소머리고기로 육수를 내 몸보신에 좋다는 인식도 강했다. 어쩌면 심성 고운 부인은 남편의 가벼운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 설렁탕을 고른 게 아닐까. 국문학 전공자로 성균관대 학부대학 대우교수인 저자는 근대소설 10편을 중심으로 일제강점기 유행했던 음식과 그를 둘러싼 문화를 다뤘다. 선정 작품은 염상섭의 ‘만세전’(1924년)과 이상의 ‘날개’(1936년), 심훈의 ‘상록수’(1936년) 등 우리에게 친숙한 소설들이다. 저자는 “먹는다는 행위는 사회 문화적 취향과 연결되며 제도에 지배되기도 한다”며 “안타까운 것은 한국에서 그 시기가 식민지라는 역사와 맞물려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광수의 ‘무정’(1917년)에선 좀 더 이채로운 음식이 등장한다. 주인공 영채는 극단적 선택을 하기로 맘먹고 탄 평양행 기차에서 일본 도쿄 유학생인 병욱을 만난다. 병욱은 상처가 깊던 영채에게 위로를 건네며 어떤 음식을 건넨다. 영채는 “구멍이 숭숭한 떡 두 조각 사이에 엷은 날고기가 끼인 것”을 맛본 뒤 “특별한 맛은 없으면서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운치 있는 맛이 있다”고 느낀다. 이 음식은 바로 샌드위치였다. 일본 회사 ‘오후나켄’이 1898년부터 일본 기차역에서 팔며 ‘서구 음식’으로 큰 인기를 끌었고, 이후 조선에도 들어왔다고 한다. ‘무정’에는 또 다른 음식도 등장한다. 영채와 정혼한 형식은 하숙집에서 끓인 된장찌개를 “지극히 졸렬한 음식”이라고 비난한다. 일제강점기 지식인들이 한국 전통 문화와 서구 문명을 어떻게 바라봤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당시 경성에서 크게 유행했던 ‘카페’의 분위기도 맛볼 수 있다.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1934년)에는 구보 씨가 즐겨 찾은 ‘낙랑파라’라는 카페가 나온다. 당대 문인들은 카페에 모여 피로하고 우울한 대화를 나누곤 했다. 여기선 커피도 팔았다. 채만식은 1939년 잡지 ‘조광’에 기고한 글에서 커피를 “힝기레 밍기레한 게 맹물 쇰직한 맛”이라고 표현했다. 저자는 문학과 역사를 무게감 있게 다뤘지만,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추억 여행을 떠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이상의 ‘날개’에 등장하는 두부장수나 심훈의 ‘상록수’에 나오는 카레를 마주하다 보면, 그 시대를 살진 않았는데도 왠지 ‘찡한’ 옛 앨범을 들추는 기분이랄까. 오늘 저녁엔 학창 시절 읽었던 그 소설들을 다시금 들춰 보고 싶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설렁탕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현진건이 쓴 소설 ‘운수 좋은 날’(1924년)의 안타까운 결말은 오래도록 한국인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된 대목. 주인공 김 첨지는 퇴근길에 부인이 원하던 설렁탕을 사왔지만 부인은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그런데 부인은 왜 하필 ‘설렁탕’을 사달라고 한 걸까. 배탈이 난 환자가 먹기엔 좀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텐데.소설 배경인 1920년대에 설렁탕은 대표적인 외식 메뉴였다. 당시 신문기사들을 보면 1920년까지 경성 안팎에 설렁탕 가게는 25개뿐이었으나 1924년엔 100군데가 넘는다. 당시 설렁탕은 한 그릇에 13~15전. 요즘 시세로 치면 3900~4500원으로, 서민도 크게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었다. 게다가 소머리고기로 육수를 내 몸보신에 좋다는 인식도 강했다. 어쩌면 심성 고운 부인은 남편의 가벼운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 설렁탕을 고른 게 아닐까. 국문학 전공자로 성균관대 학부대학 대우교수인 저자는 신간 ‘식민지의 식탁’에서 근대소설 10편을 중심으로 일제강점기 유행했던 음식과 그를 둘러싼 문화를 다뤘다. 선정 작품은 염상섭의 ‘만세전(1924년)과 이상의 ‘날개’(1936년), 심훈의 ‘상록수’(1936년) 등 우리에게 친숙한 소설들이다. 저자는 “먹는다는 행위는 사회 문화적 취향과 연결되며 제도에 지배되기도 한다”며 “안타까운 것은 한국에서 그 시기가 식민지라는 역사와 맞물려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이광수의 ‘무정’(1917년)에선 좀더 이채로운 음식이 등장한다. 주인공 영채는 극단적 선택을 하기로 맘먹고 탄 평양행 기차에서 일본 도쿄 유학생인 병욱을 만난다. 병욱은 상처가 깊던 영채에게 위로를 건네며 어떤 음식을 건넨다. 영채는 “구멍이 숭숭한 떡 두 조각 사이에 엷은 날고기가 끼인 것”을 맛본 뒤 “특별한 맛은 없으면서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운치 있는 맛이 있다”고 느낀다. 이 음식은 바로 샌드위치였다. 일본회사 ‘오후나켄’이 1898년부터 일본 기차역에서 팔며 ‘서구 음식’으로 큰 인기를 끌었고, 이후 조선에도 들어왔다고 한다. ‘무정’에는 또 다른 음식도 등장한다. 영채와 정혼한 형식은 하숙집에서 끓인 된장찌개를 “지극히 졸렬한 음식”이라고 비난한다. 일제강점기 지식인들이 한국 전통 문화와 서구 문명을 어떻게 바라봤는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당시 경성에서 크게 유행했던 ‘카페’의 분위기도 맛볼 수 있다.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1934년)에는 구보 씨가 즐겨 찾은 ‘낙랑파라’라는 카페가 나온다. 당대 문인들은 카페에 모여 피로하고 우울한 대화를 나누곤 했다. 여기선 커피도 팔았다. 채만식은 1939년 잡지 ‘조광’에 기고한 글에서 커피를 “힝기레 밍기레한 게 맹물 쇰직한 맛”이라고 표현했다.저자는 문학과 역사를 무게감 있게 다뤘지만,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추억 여행을 떠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이상의 ‘날개’에 등장하는 두부장수나 심훈의 ‘상록수’에 나오는 카레를 마주하다보면, 그 시대를 살진 않았는데도 왠지 ‘찡한’ 옛 앨범을 들추는 기분이랄까. 오늘 저녁엔 학창 시절 읽었던 그 소설들을 다시금 들춰보고 싶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처음부터 어떤 장르로 만들겠다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다양한 장르의 요소를 끌어와서 적절하게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7일 공개한 넷플릭스 드라마 ‘글리치’ 극본을 집필한 진한새 작가(36·사진)는 드라마에 대해 “주제를 먼저 정해놓고 시작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19일 만난 그는 “어릴 적에 UFO(미확인비행물체)를 본 적 있다는 아내와의 대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며 “한 장르를 의식하면 너무 얽매이는 것 같다”고 답했다. 드라마는 19일 현재 넷플릭스 국내 드라마 가운데 4위에 오르며 순항 중이다. ‘글리치’는 외계인으로 짐작되는 지효(전여빈)와 그를 추적하는 보라(나나)의 서사가 주된 줄거리이지만 스릴러 등 다양한 얘기들이 버무려져 있다. 특히 두 여주인공은 외계인을 추적하다 사이비 종교와 맞닥뜨리는 등 좌충우돌을 거듭한다. 진 작가는 “둘의 관계를 우정이나 사랑으로 규정하고 싶지 않다. 딱히 대체할 말이 없어 그냥 ‘지효와 보라의 관계’라 부르고 싶다”고 했다. 청소년 범죄를 그린 드라마 ‘인간수업’(2020년)에 이어 범죄물 성격이 강한 작품을 집필해온 그는 “차기작으로는 ‘하이틴 로맨스’를 구상하고 있다”고 했다.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미친 드라마’란 시청자 반응이 무척 마음에 들었어요. 이 작품에서 가장 시도해보고 싶은 게 속도감이었거든요.” 9일 종영한 tvN 드라마 ‘작은 아씨들’의 대본을 쓴 정서경 작가(47)가 말했다. 화상으로 17일 만난 그는 12부작인 드라마를 쓰며 “걷는 것도 뛰는 것도 아닌, ‘날아가는 것처럼’ 진행할 순 없을까”를 항상 염두에 뒀다고 한다. 그는 올해 개봉한 영화 ‘헤어질 결심’ 시나리오를 박찬욱 감독과 공동 집필해 빼어난 작품성으로 화제를 모았고, ‘작은 아씨들’도 최고시청률 11.1%를 기록하며 2연타를 쳤다. ‘작은 아씨들’은 가난하지만 우애 넘치는 세 자매 오인주(김고은) 오인경(남지현) 오인혜(박지후)가 비밀권력단체 ‘정란회’와 대립한다는 줄거리. 매회 예상을 뛰어넘는 사건과 갈등으로 화제를 모았다. 박진감은 넘치지만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정 작가는 “영화적 문법으로 쓴 작품이라 매회 2시간짜리 영화를 압축하다 보니 다소 부족하고 특이한 부분이 있었다”고 말했다. 작품마다 ‘능동적인 여성상’을 그리는 정 작가의 특징은 이번 작품에서도 잘 드러났다. 그가 시나리오를 쓴 영화 ‘친절한 금자씨’ ‘아가씨’ ‘헤어질 결심’에서도 여성 캐릭터는 전체 서사를 이끌어가는 핵심 역할을 한다. 정 작가는 “어린 시절 친구들이 자매처럼 많은 것을 가르쳐 줬다”며 “‘작은 아씨들’에서도 여성의 멋진 우정을 잘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캐릭터를 만들 때 저는 캐릭터의 결함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캐릭터들이 그런 부족한 부분에도 불구하고 사랑받길 원하는 거죠. 가끔씩 이 때문에 호불호가 갈리기도 합니다.” 드라마 방영 중 우여곡절도 있었다. 베트남 정부가 베트남전쟁에 대한 왜곡된 정보가 담겼다며 항의해 넷플릭스가 베트남에서의 방영을 중단했다. 정 작가는 이에 대해 “베트남전쟁에 대한 사실관계를 다루거나 정의하려는 의도가 아니었기에 현지 반응을 크게 예상하지 못했다”며 “이번 시청자 반응을 기억하면서 다음 작품 때 더 세심하게 쓰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나무를 태워 만든 목탄 벽화는 시간이 지나면 없어진다. 영원하지 않은 우리 삶과 같다. 현재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허윤희 작가(54)는 30여 년간 목탄으로 그림 작업을 해왔다. 그는 목탄을 긴 나무 막대기에 묶어 벽면에 그림을 그리고 지우는 퍼포먼스로 유명하다. 왜 사라지는 그림 작업을 이어 나갈까. 서울 마포구 갤러리 A.P.23에서 22일까지 열리는 개인전 ‘9 리터의 먼지와 오두막’을 보면 작가의 예술관이 명확히 이해된다. 전시는 작가의 작품 세계를 짚는 아카이브 자료를 기반으로 하며 회화, 드로잉 등 총 27점으로 구성됐다. 전시장 초입에는 그를 대표하는 목탄 회화와 벽화 영상이 있다. 5개 퍼포먼스를 묶은 영상을 따라 안쪽으로 가면 조금 다른 작업들이 눈에 띈다. ‘관(棺)집’(2001년)은 작가가 프랑스 남서부 시골에서 두 달 동안 자갈과 통나무로 만든 집을 담은 사진 작품이다. 집은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가는 관 크기 정도로 비좁다. 허 작가는 “삶을 하루 단위로 쪼개 생각하다 나온 작품”이라며 “저녁에는 관에 들어가 죽음을 맞이하고 아침에는 새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했다. ‘생태주의 미술가’로도 불리는 그는 “단지 자연을 좋아하는 작가”라며 웃었지만 그 지향점은 초기작부터 엿보인다. 출품작 중 가장 오래된 ‘윤희 그림’(1996년). 1995년 독일 유학 시절, 그는 헌책방에서 구한 책 ‘NOA NOA’(1901년)의 각 페이지에 외로움을 달래려 그림일기를 그렸다. 책 모퉁이에 ‘피처럼 붉은 해가 움직인다. 젊음과 힘을 품고서 작열한다. 하지만 영원하지 않음을 미리 안다. 달은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적었다. 이에 대해 그는 “자연은 우리에게 생성, 소멸, 순환을 가르쳐 준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기에 자연과 함께하는 삶이야말로 인간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30여 년 전, 예술가를 결심한 허윤희 작가(54)가 선택한 재료는 목탄이었다. 그는 목탄을 긴 나무 막대기에 묶어 벽면에 그림을 그리고 지우는 퍼포먼스를 진행해왔다. 시꺼멓기만 한 것, 어차피 지워 사라지는 것을 그는 왜 그릴까.“목탄은 나무를 태운 것으로 자연 그 자체다. 목탄 벽화는 시간이 지나면 없어진다. 영원하지 않는 우리 삶과 같다. 현재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최근 만난 허 작가의 이러한 설명은 ‘9 리터의 먼지와 오두막’ 展에서 좀 더 명확해진다. 서울 마포구 신생 갤러리인 A.P.23에서 22일까지 진행하는 이 전시는 허 작가의 작품세계를 되짚는 아카이브 자료 기반 전시다. 전시는 생태학적 관점으로 그의 회화, 드로잉 등 총 27점을 구성했다.전시장 초입은 역시 그를 대표하는 목탄 회화와 벽화 영상이 자리한다. 5개의 퍼포먼스를 묶은 영상을 따라 전시장 안쪽으로 나아가다 보면 조금은 다른 작업들이 눈에 띈다. 그중 국내 전시에서 처음 소개되는 ‘관(棺)집’(2001년)은 작가가 프랑스 남서부 시골에서 두 달 동안 자갈과 통나무를 사용해 집을 만들고 사진으로 남긴 것이다.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가는 크기다. 허 작가는 “삶을 하루 단위로 쪼개어 생각하면, 저녁에는 관에 들어가 죽음을 맞이하고 아침에는 새 생명을 얻는다”며 “좀 더 살아있는 것을 의식하며 살게 된다”고 했다.작가가 자연을 얼마나 섬세히 관찰하고 있었는지는 ‘돗토리의 기억’ 시리즈(2010년)에서도 드러난다. 이 작품은 작가가 일본에서 레지던시에 머문 시절 구한 쌀 봉투에 곡식을 넣고, 봉투 바깥쪽에 나뭇잎과 꽃 등을 그린 작품이다. 허 작가는 “쌀은 아시아인에게 기본적인 요소다. 그 쌀이 비닐봉지가 아닌 종이에 담겨있다. 그 아날로그적이고 전통적인 것들이 따뜻하게 느껴졌다”고 말했다.그는 “생태주의 미술가라 생각했기 보다는…. 단지 자연을 좋아하는 작가”라며 웃었지만 허 작가의 지향점은 초기작부터 엿보인다. 출품작 중 가장 구작인 ‘윤희 그림’(1996년)를 보면 알 수 있다. 1995년 자유를 꿈꾸며 독일 유학을 갔을 시절, 독일어도 모르던 작가는 헌책방에서 구한 책 ‘NOA NOA’(1901년) 위에 그림일기를 그렸다. 이 책의 모퉁이에 적힌 문구는 “자연은 우리에게 생성, 소멸, 순환을 가르쳐준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기에 자연적인 삶이 자연스럽고 인간적”이라는 지금 작가의 말과 맥을 함께 한다.“해가 움직인다. 피처럼 붉은 해가 움직인다. 젊음과 힘을 품고서 작열한다. 하지만 영원하지 않음을 미리 안다. 달은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박윤조 A.P.23 디렉터는 “한국 생태미술은 장기간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예술과 삶을 성찰해온 작가들이 있다는 특성이 있다. 허윤희의 작업은 자연의 재생력에 대한 희망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면에서 개관전으로 소개하기 적합했다”며 “앞으로도 A.P.23은 생태주의 중견 작가들을 많이 소개할 것”이라고 설명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매일 오후 4시 15분이면 여우가 온다. 미국 서부 로키산맥의 한 자락, 외딴 계곡을 따라 한참 올라가면 푸른 오두막이 있다. 생물학자인 저자가 대학 시간강사 계약이 끝난 뒤 지은 집. 그런데 어느 날부터 여우가 찾아왔다. 그것도 12일 내내. 하루는 마음먹고 가만히 앉아 봤다. 그러자 여우는 2m 정도 떨어진 채 가만히 눈을 맞춘다. ‘여우와 나’는 독특한 책이다. 과학서라기보단 2005년부터 2, 3년 동안 여우와의 인연을 그린 회고록에 가깝다. 미 옐로스톤국립공원을 비롯해 여러 국립공원에서 레인저 등으로 활동했던 저자는 당시 학계에서 그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책이 나온 뒤 ‘PEN 에드워드 윌슨 과학저술상’ ‘노틸러스 북어워드 금메달’을 휩쓸었다. 자꾸만 찾아오는 여우. 이 기이한 우정을 이어가려 저자는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1900∼1944)의 소설 ‘어린 왕자’를 읽어준다. “어린 왕자는 생텍스에게 양을 그려 달라고 부탁한단다. 생텍스가 부탁을 들어주는 이유는… 음, 그건 정 때문인 것 같아, 여우야.” 몇 마디 건넨 다음엔 15초의 침묵. 서로를 가만히 쳐다보는 시간은 여우와 저자만의 패턴이었다. ‘어린 왕자’에서 왕자와 여우가 서로를 길들여 간 것처럼, 저자와 여우도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어 간다. 믿기 힘든 일이지만, 그 시작은 기억도 불분명할 만큼 자연스럽게 벌어졌다. 저자는 여우와 관계를 맺은 ‘처음’을 떠올리려 애써봤지만 자꾸만 헷갈렸다. 4월이라고 썼다가 선을 긋고, 3월이라 고쳤다가 지우고…. “우리 사이에 ‘유레카’의 순간은 없었다.” 저자도 어이가 없었다. 그 역시 “과학적 방법이야말로 앎의 토대이며 야생 여우에겐 인격이 없다”고 배운 생물학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15일째 되던 날(여우의 시계로는 약 6개월) 저자는 여우를 떠나보내기로 마음먹었다. 항상 만나던 오후 4시 15분 그 자리에 나가지 않고 외출해 버렸다. 여우 생각이 나지 않을 만한 일거리를 만들어서. 하지만 자꾸만 신경 쓰이고 떠오르고. 결국 저자는 다시 여우와의 자리로 돌아갔다. 사실 여우를 만나기 전 그의 소원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 “너를 원한 적이 없다”던 아버지. 열여섯에 집에서 도망쳤다. 평생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 채 부유하듯 살아왔던 인생. “관계 맺는 일에 늘 젬병”이었던 저자에게 손을 내민 게 야생동물이었단 점은 아이러니하기까지 하다. 짐작했겠지만, 어느 순간 여우는 나타나지 않았다. 산불이 한 번 난 뒤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당연히 그리웠겠지만, 저자는 배운 게 있다. 이제 그는 사라지려고 애쓰는 짓을 관두기로 했다. 누군가를 곁에 두고 싶어 했던 “우리 여우”처럼. ‘여우와 나’는 정의하기 무척 어렵다. 머리보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과학책은 처음 봤다. 특히 시적인 묘사와 섬세한 문체는 교양과학서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다. 저자가 여우에게 읽어준 ‘어린 왕자’의 또 다른 버전이랄까. 읽는 내내 현실이라 믿기 힘든 동화 속 세상을 엿본 기분이 든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청명하지만 쌀쌀했던 11일 오전 경북 경주시 남산 솔숲자락. ‘한국 수묵화의 거장’ 박대성 화백(77·사진)의 작업실은 뭔가 정겨운 냄새가 진득했다. 책상과 책장을 가득 채운 고서와 한지, 붓. 바닥엔 물고기 한 마리가 그려진 한지가 놓여 있었다. 이날 작업실엔 반가운 손님도 찾아왔다. 박 화백을 “스승님”이라 부르는 이순자 씨(65)였다. 2007년 시민 대상으로 박 화백이 무료 그림수업을 한 ‘우리 그림 교실’ 1기 수강생. 그때부터 연을 이어온 이 씨는 “해외 일정으로 바쁘셔서 잠깐 오셨다기에 냉큼 찾아왔다”며 반가워했다. 실제 박 화백은 올해 눈코 뜰 새 없다. 3월 독일과 6월 카자흐스탄, 7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LACMA), 9월 하버드대와 다트머스대에서 연달아 개인전이 열렸다. LACMA 전시는 지난달 방탄소년단(BTS) 리더 RM이 관람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올려 화제가 됐다. 박 화백은 “10월 주이탈리아 한국문화원과 내년 미 뉴욕주립대, 메리워싱턴대에서도 전시가 잡혀 있다”고 했다. “22일에도 미국에 갑니다. 해외에서 주목받는 이유요? 전통 수묵화지만 현대미술과 통하는 게 있어서죠. 평생 탐구한 ‘보이지 않는 뿌리’에 관객들이 진정성을 느끼는 게 아닐까요.” 박 화백이 말한 ‘뿌리’란 무엇일까. 그는 문화의 정수가 글자에 담겨 있다고 믿는다. 어린 시절 제사 지방문과 병풍을 따라 그린 그는 중국, 대만에서 서예를 배웠고 상형문자의 원형을 찾아 히말라야도 다녀왔다. 박 화백은 “인류의 근간인 상형 속에 삼라만상이 들어있다. 그 자체가 최고급 디자인”이라고 했다. 국내외를 오가는 와중에도 박 화백은 큰 프로젝트 하나를 염두에 두고 있다. 가로 13m, 세로 5m 규모의 대작을 구상하고 있다. 화폭엔 백두산과 한라산, 금강산을 뼈대로 한반도 암각화와 벽화를 그려 넣으려 한다. “마지막 대작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경주솔거미술관 ‘몽유신라도원도’(11.5×5m)보다 클 거야. 제목은 정해뒀어요. ‘코리아 판타지’. 수묵화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도 많이 공감하는 작품이 됐으면 합니다. 이르면 올해 말쯤 완성될 거예요.” 박 화백은 “마지막 대작”이지만 동시에 “첫발”이라고도 했다. 앞으로의 그림은 세계를 염두에 두겠다는 뜻이다. 그는 “이젠 ‘나’의 것에서 ‘우리’의 것으로 나아갈 시점”이라며 “더 단순하게 시원하게,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폭발력 있는 작품을 그리겠다”고 했다. 원로 작가로서 새로운 시도가 두렵진 않을까. 박 화백은 “인생은 원래 고행이다. 타성에 젖지 않는 게 중요하다”며 껄껄 웃었다. 그는 6·25전쟁 때 부모가 세상을 떠났고, 그도 왼팔을 잃었다. 하지만 박 화백은 “팔을 잃은 건 화가로서 운이 좋았다”고 했다. “집에 틀어박혀 그림만 그렸지. 불운을 잘 다루면 어떤 운보다 더 큰 행운이 됩니다. 그 덕에 1984년 가나아트에서 1호 전속작가가 됐고, 고 이건희 전 삼성전자 회장의 월급화가로도 일할 수 있었죠. 예술가는 억척스러워야 해.” 박 화백은 청년에게도 “고비라고 느껴지면 붓을 잡아보라”고 권했다. 꼭 그림이 아니어도 괜찮다. 붓을 스승으로 삼으면 스스로 깨닫는 게 있다는 조언이다. “붓은 연필과 달리 마음대로 잘 써지지 않아요. 가고자 하는 길을 잘 따라 주지 않는다고 할까. 그래서 필법(筆法)이란 게 존재합니다. 각자 나름대로 얻는 게 있을 겁니다.”경주=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청명하고도 쌀쌀했던 11일 경북 경주시. 한국화 거장 박대성 화백(77)의 작업실은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박 화백을 “스승님”이라 부르는 이순자 씨(65)는 2007년 박 화백이 시민들을 상대로 무료 그림 수업을 진행하는 ‘우리 그림 교실’ 1기 수강생. 15년간 연을 이어온 이 씨는 “스승님께서 최근 해외 일정으로 바쁘셔서 한국에 오셨다길래 냉큼 찾아왔다”며 “그림에서 묻어나는 엄격한 정신력을 외국에서도 알아본 것 같다”고 기뻐했다.그의 말마따나 올해는 박 화백에게 가장 바쁜 해다. 4월 독일, 6월 카자흐스탄, 7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9월 미국 하버드대 한국학센터, 다트머스대 후드미술관, 10월 주이탈리아 한국문화원도 예정돼있다. 내년에도 미국 뉴욕주립대 스토니브룩, 메리워싱턴대에서 전시가 이어진다.22일 하버드대와 다트머스대 전시를 위해 또 한번 미국으로 나서는 그는 해외에서의 주목에 대해 “우리만 우리를 너무 모른다”고 했다. 국내에서 한국화를 도외시하는 데에 대한 섭섭함을 에둘러 표한 말이었다. 외국 관객들의 극찬은 한국화가 주는 낯섦 때문만은 아니다. 박 화백은 전통 수묵화를 현대미술로 재해석해왔다.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니다. 일평생 ‘보이지 않는 뿌리’를 찾았기 때문에 관객들이 그 진정성을 느낀 것이다.” 56년 화업을 이어온 화가의 자평이었다.그가 말한 뿌리는 글자다. 박 화백은 화가가 되기로 한 유년시절부터 그림 공부의 기초를 글씨에서 찾았다. 제사 지방문과 병풍을 따라 그리던 그는 이후 대만과 중국에서 서예를 공부했고 상형문자의 원형을 찾아 히말라야를 다녔다. “인류의 근간이 되는 상형 속에는 삼라만상이 다 들어있지. 그 자체가 최고급 디자인이야. 이걸 백번 활용해야지.” 박 화백은 여전히 매일 글씨 연습을 하고, 그 안에서 그림을 구상해낸다.최근 떠오른 심상도 있다. 박 화백은 현재 너비 13m, 높이 5m 대작을 준비 중이다. 경주솔거미술관에 전시된 그의 대작 ‘몽유신라도원도’(11.5×5m)보다 더 크다. 화폭에는 백두산, 한라산, 금강산이 뼈대를 잡고 고구려 벽화, 반구대 암각화, 유물 20여 점이 속속들이 그려질 예정이다. “나의 마지막 대작일 것”이라는 이 작품의 이름은 ‘코리아 환타지’. 그는 “나는 영어를 하는 사람이 아닌데 그렇게 짓고 싶었다. 수묵이지만 더 많은 국적의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르면 올해 말 완성될 예정이다.이 작품은 첫발에 불과하다. 그는 앞으로 “세계적인 그림을 그릴 것”이라고 했다. “신라의 형상을 모본 삼아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는 ‘나’의 것에서 ‘우리’의 것으로 더 나아가야지. 더 단순하고 시원하게. 어느 누가 봐도 ‘내 그림이다’ 할 수 있도록.” 한국적 오브제들을 없앤다는 말은 아니다. 그는 “열 번 손대어 그렸던 그림이라면 그 획수를 줄여 간명하면서도 폭발적인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했다.원로 거장 반열에 올랐음에도 새로운 시도는 그에게 즐거운 일이다. “인생은 원래 고행”이고 “타성에 젖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5살 때 한국전쟁으로 부모와 왼쪽 팔을 잃었다. 독학으로 미술에 입문했다. 21살 등단 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8번이나 상을 받았다. 1984년 가나아트 1호 전속작가가 됐고, 고 이건희 전 삼성전자 회장의 월급 화가로도 일했다. 그는 굴곡진 삶을 회고하며 “예술가는 운이 있어야 하고 억척스러워야 한다”고 했다. 그에게 가장 큰 운은 무엇이냐 묻자 ‘팔을 잃은 것’이라고 했다.“나는 팔을 잃었고, 병신 소리가 듣고 싶지 않아 집에 틀어박혀 그림만 그렸지. 불운을 잘 다루면 그 어떤 행운보다도 더 큰 운이 된다고.”박 화백은 “고비마다 붓을 잡아보라”고 권했다. 홀로 그림에 임했지만, 붓을 벗과 스승 삼아 일생을 보낸 화가의 덧말이었다.“붓은 연필과 다르게 내가 가고자 하는 길로 잘 따라와 주지 않을 때가 있어. 필법(筆法)이란 게 존재하는 이유지. 이 시대 우리들은 붓을 잡을 수 있어야 해.”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1975년, 프랑스 현대미술가 자크 빌레글레(1926∼2022)는 동네를 산책하다 한 전시 포스터를 발견한다. 그해 2, 3월 파리 컨템퍼러리 아트 내셔널센터에서 여는 ‘장 뒤뷔페: 카스틸라의 풍경―삼색의 지역’ 전시 포스터였다. 포스터 속 그림에 매료된 빌레글레는 장 뒤뷔페(1901∼1985)에게 편지를 쓴다. “이번 전시 포스터를 내 작업에 사용해도 될까요? 당신이 허락해주면 굉장히 영광일 것 같습니다.” 두 작가의 우정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서울 송파구 소마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뒤뷔페 그리고 빌레글레’는 25세 차에도 활발히 교류했던 두 사람을 함께 조명한다. 뒤뷔페의 초기 회화 24점을 포함해 콜라주, 설치작품 등 총 67점과 빌레글레의 데콜라주(떼어내고 찢어서 만든 작품으로 콜라주의 반대 의미) 35점이 나란히 전시됐다. 빌레글레 작품을 국내에서 소개하는 건 처음이다. 전시는 뒤뷔페의 우를루프 연작을 전면 배치했다. 빌레글레가 처음 포스터를 보고 편지를 쓴 전시가 우를루프 연작을 소개한 것으로, 둘의 인연에 우를루프가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우를루프는 새가 지저귀고, 늑대가 울부짖는다는 뜻을 조합해 뒤뷔페가 만든 말로, 정형화된 미술계를 꼬집는 의미를 담고 있다. 뒤뷔페가 낙서에서 모티브를 얻은 모든 작품을 우를루프라고 부른다. 콜라주 작품 ‘기억의 사슬 Ⅰ’(1964년)에서 볼 수 있는 삐뚤빼뚤한 곡선은 ‘등장인물’(1971년) 등을 통해 점차 사람의 형상을 띠었다. 우를루프 연작 중 포스터는 빌레글레의 작품에 직접적인 영향을 줬다. 출품작 ‘카르푸 몽마르트르-랑뷔토’(1975년)나 ‘모리스 캉탱 광장’(1975년)은 빌레글레가 뒤뷔페의 포스터를 캔버스에 붙이고 찢어 만든 작품이다. 빌레글레는 찢어진 벽보를 통해 당시 시대상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소마미술관은 “두 사람의 작품은 달라 보이지만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작업할 때 만들어내는 정신적인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고 했다. 내년 1월 31일까지. 성인 2만 원.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1975년, 프랑스 예술가 자크 빌레글레(1926~2022)는 동네를 산책하다 한 전시 포스터를 발견한다. 그해 2~3월 파리 컨템포러리 아트 내셔널센터에서 진행하는 ‘장 뒤뷔페: 카스틸라의 풍경-삼색의 지역’ 전시 포스터였다. 포스터 속 그림에 매료된 빌레글레는 장 뒤뷔페(1901~1985)에게 편지를 쓴다.“이번 우를루프 전시의 포스터를 내 작업에 사용해도 될까요? 당신이 허락해주면 굉장히 영광일 것 같습니다.”(1975년 3월 23일 편지의 일부 내용) 두 예술가의 우정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서울 송파구 소마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뒤뷔페 그리고 빌레글레’는 25살의 나이차에도 활발히 교류했던 두 사람을 함께 조명한다. 뒤뷔페의 초기 회화 24점을 포함한 총 67점, 빌레글레의 작품 35점이 나란히 전시됐다. 빌레글레 작품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소개된다. 전시는 뒤뷔페의 우를루프 연작을 전면 배치했다. 빌레글레와의 인연에 우를루프가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우를루프란 특별한 의미 없는 단어로, 정형화된 미술계를 꼬집는 뒤뷔페식 신조어다. 뒤뷔페가 전화하며 그린 낙서에서 모티브를 얻은 모든 작품을 통칭한다. 콜라주 작품 ‘기억의 사슬 Ⅰ’(1964년)에서 보이는 삐뚤빼뚤한 곡선은 ‘등장인물’(1971년) 등을 통해 점차 사람의 형상을 띠었다.우를루프 연작 중 포스터는 빌레글레의 작품에 직접적인 영향을 줬다. 출품작 ‘까르푸 몽마르뜨-렁뷔토’(1975년)나 ‘모리스 컹탕 광장’(1975년)은 뒤뷔페의 포스터를 캔버스에 붙이고 찢으며 만든 작품이다. 빌레글레는 찢어진 벽보를 통해 당시 시대상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이번 전시에는 그의 마지막 벽보 작업인 ‘캥페르 사람들의 작업-펜아르 수영장-르 카르티에’(2006년)도 출품됐다.소마미술관 측은 “두 사람의 작품 양상은 달라 보이지만, 완전한 자유에 근간하여 작업할 때 만들어내는 정신적인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내년 1월 31일까지. 성인 2만 원.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