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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국민이 염원하던 금메달을 한국이 낳은 장한 아들 양정모 선수가 제21회 올림픽 ‘몬트리오올’ 대회 레슬링자유형종목 페더급에서 드디어 쟁취하였다. … 사상 처음으로 애국가가 장엄하게 세계만방에 울려퍼지는 가운데 자랑스러운 태극기가 몬트리오올 하늘에 휘날리자 모두는 제어할 수 없는 감격에 복바쳐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렸다.” 1976년 8월 2일자 동아일보 1면 톱 ‘양정모 선수, 건국 후 첫 금메달’이라는 제목의 기사다. 꽤 감상적이지만 당시에는 이 표현이 자연스러웠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첫 금메달의 감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태정태세문단세…’, 이런 식으로 외운 조선 왕의 계보처럼 ‘첫 금메달=1976년 몬트리올, 레슬링 양정모’는 머릿속에 콕 박혀 있다. ‘첫’이라는 단어의 카리스마는 강력하다. 처음이 없다면, 그 처음은 숙제가 되고 결국 벽이 된다. 영화계에서 ‘첫 올림픽 금메달’은 단연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이다. 3대 영화제라고 해도 칸은 베니스, 베를린과 ‘클래스’가 다르다. 출품 자격이 제한되는 아카데미에서는 외국어영화상이 금메달일 것이다. 29일 폐막된 제70회 칸 영화제를 다룬 뉴스들은 비교적 젊은 스웨덴 감독 루벤 외스틀룬드(43)의 황금종려상 수상과 홍상수 감독의 ‘그 후’, 봉준호 감독의 ‘옥자’ 등 한국 영화의 수상 실패를 알렸다. 우리 영화계에서 칸 영화제가 산악인의 에베레스트 등정처럼 도전해야 하는 벽이 된 것은 오래된 일이다. 그 비장한 순간, 운 좋게 현장에 있었다. 2000년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이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처음 진출했다. 이 작품은 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첫 진출이라는 성과를 남겼다. 당시 이미 60대 중반이던 그는 칸에서 건강을 이유로 한동안 끊었던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다. “이거 참, 칸 영화제가 뭐라고!”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40여 년 전 양정모 선수가 금메달을 놓고 몽골 오이도프와 맞선 것처럼 임 감독도 ‘국가대표’의 심경으로 영화제에 임했던 것이다. 거장에게도 첫 도전은 긴장과 고독, 그 자체였다. 그로부터 2년 뒤 임 감독은 ‘취화선’으로 칸 영화제 감독상을 받으면서 국가대표의 멍에를 벗었고, 이후 박찬욱 홍상수 감독이 새 국가대표로 나섰다. 영화계에 따르면 국제영화제와 감독은 묘한 ‘궁합’이 있다.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칸은 임권택 박찬욱 홍상수, 베니스는 김기덕 감독, 이런 식의 조합이다. 영화제는 자신이 조명한 감독의 작품들을 지켜보며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금메달을 겨냥한 국가 주도의 엘리트 체육을 둘러싼 논란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영화를 포함한 문화는 스포츠와도 달라 이른바 ‘금메달 프로젝트’를 만들어도 성과를 장담하기 어렵다. 하지만 한국 영화는 자산도 적지 않다. 세계적으로 드물게 자국 영화의 시장 점유율이 50% 안팎으로 높은 수준이고 한류라는 강점도 있다. 칸과 아카데미의 벽을 넘어서는 첫걸음은 다양성의 확대다. 독점적인 위치의 배급망과 투자 능력이 있는 몇몇 제작·배급사의 눈에 들어야만 영화가 제작될 수 있는 환경으로는 어렵다. 그 영화가 그 영화라는 얘기가 나오는 것은 그들의 셈법에 맞추기 때문이다. 영화제가 원하는 작품과는 거리가 멀다. 영화 한두 편 연출한 뒤 개점휴업 상태인 감독도 많다. “영화 한 편 망하면 몇 년간 백수가 될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게 공공연한 얘기다. 이래서는 안 된다. 임권택 감독의 103번째 작품부터 젊은 감독의 신작까지 다양한 장르와 예산의 작품이 나와야 한국 영화의 ‘그 후’가 열린다. 김갑식 문화부장 dunanworld@donga.com}

한두 해 전 일이다. 지금은 대학생이 된 아들이 갑자기 “아재” “아재”를 연발했다. 귀에 거슬리지만 참다 결국 물었다. “네가 홍길동이냐. 왜 아빠를 자꾸 아재라고 해.” “어, 그게 그래도 친근하다는 건데….” “….” 조금 더 지나 ‘개저씨’와 아재의 차이를 알게 됐다. 어느덧 인터넷에는 구식 유머를 가리키는 아재 개그가 넘쳐난다. 이 분야의 고수로 알려진 한 선배는 가정 평화의 비결이 뭐냐고 묻자 소 세 마리를 키우라고 했다. “맞소, 옳소, 좋소.” 한 라디오 방송에서는 사내 커뮤니케이션에 좋다며 아예 ‘부장님 개그’라는 코너까지 운영한다. 호칭과 유머 감각뿐일까. 기호와 그림으로 만들어진 이모티콘은 신세계다. 부적절한 이모티콘 사용으로 스타일 ‘구긴’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변명을 조금 보태자면 아재들은 유머가 부족한 세상을 살아왔다. 아재의 아재는 더 그렇다. 새 정부 출범 이후 달라지고 있다는 청와대와 국회…. 하지만 아재의 눈으로 봐도 갈 길이 멀다. 더 많은 웃음과 유머가 넘치길 바란다.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장미 대선으로 불리는 짧은 선거 기간, 심지어 인수위원회조차 꾸릴 수 없다고 한다. 역대 어느 정권보다 촌각을 다퉈야 하는 바쁜 대통령이 될 듯하다. 지난달 차기 정부의 문화정책을 다루는 세미나와 포럼이 잇달아 열렸다. 박근혜 정권에서 논란이 됐던 블랙리스트 방지와 예술인 복지 확대 등을 빼면 대선 주자들의 문화정책은 알맹이가 없다는 게 대체적인 반응이다. 역대 정부와 비교해도 새 정부의 문화정책은 ‘제로’에 가깝다. 김대중 정부는 처음으로 문화예산 1%를 넘겼고, 박근혜 정부는 최순실 국정 농단이라는 비극으로 끝났지만 문화융성을 국정 기조의 하나로 내세웠다. 문화정책 부재(不在)의 원인은 무엇보다 최순실-차은택 등 비선 실세의 국정 농단 때문이다. 겉으로는 한류 지원과 문화산업에 대한 육성, ‘문화가 있는 날’을 통한 문화 향유의 확대가 명분이었다. 하지만 속사정은 국민 세금과 기업의 준조세로 만들어진 재원에 대한 비선 실세의 ‘곶감 빼먹기’였다. 문화융성이라는 허울이 초유의 대통령 탄핵의 단서를 제공한 탓에 이 단어는 새 정부의 ‘금기어’가 됐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는 말이 있다. 아니, 실체를 드러낸 국정 농단을 보면 빈대가 아니라 도둑이 들었다. 하지만 도둑이 미워도 문화라는 집을 태우거나 폐가로 만들 수 없다는 것도 명백하다. 문화산업이 4차 산업혁명을 이끄는 핵심 키워드의 하나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동남아는 물론이고 미국과 유럽에서도 가수 싸이와 그룹 ‘빅뱅’ ‘방탄소년단’,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통해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어느새 한류는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언어’가 됐다. 그 언어가 글로벌 경쟁을 벌이고 있는 기업들의 든든한 배경이다. 새 정부 문화정책의 ‘첫 수(手)’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최근 만난 몇몇 문화인의 훈수를 옮겨본다. “역대 정권의 실패에서 배워야 한다. 박근혜 정부처럼 마음에 안 든다고, 밉다고 블랙리스트 만들어 차별대우하지 말아야 한다. 기호 2번(홍준표 후보)의 막말이 귀에 거슬리지만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문화계 코드 인사가 큰 문제였다는 주장도 사실이다.”(A 씨) “문화정책, 차라리 없는 게 낫다. 그냥 ‘내비 두면’ 좋겠다. 문화인들의 ‘디그니티(dignity·위엄, 품위, 존엄성, 자존감)’를 지켜주기 바란다. 이른바 적폐청산이라는 잣대를 문화계에 들이대면 우리 문화, 문화산업은 다시 10년 뒤로 후퇴할 수밖에 없다.”(B 씨) 박근혜 정부의 문화정책을 ‘복기’할 때 이들의 말은 타산지석이다. 비선 실세가 문화계를 국정 농단의 놀이터로 삼은 것은 그만큼 문화 분야가 탈이 덜 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문화산업을 육성하겠다는 주장에 토를 달 수 없었고, 선거 뒤 논공행상의 전리품을 나눠줘도 정치 경제 등 다른 분야에 비해 잡음이 적었다. 권력과 문화의 관계에 대한 원칙적인 조언도 있다. “권력과 문화의 불협화음은 당연하다. 권력의 나팔수가 된 문화의 역겨움은 과거 숱하게 지켜봤다. 연극에서 날 선 대사로 힘센 자를 비판하고, 노래로 비꼬는 게 문화의 매력 아닌가?”(C 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대중문화계 스타들의 불화는 오래된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아카데미와 그래미 시상식에서 대통령을 비판했다고 해서 불이익을 받았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돌이켜보면, 돈으로 감투로 문화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고 보고, 바꾸려고 한 게 박근혜 정부의 오만이자 비극의 씨앗이었다. 김갑식 문화부장 dunanworld@donga.com}

영화보다 스마트폰이 더 재미있다는 자녀들과 2시간 가깝게 영화를 보기는 쉽지 않다. 같은 시간대에 TV 앞에 옹기종기 있기도 어렵고 좋아하는 장르와 배우 등을 따지다 보면 언제나 ‘영화 이산가족’이다. 최근 TV에서 방영되는 영화를 한 사람도 졸지 않고 끝까지 ‘시청 완주’하는 이변을 경험했다. 오드리 헵번(사진), 그레고리 펙 주연의 ‘로마의 휴일’(1953년)이다. 채널을 돌리다가 헵번의 단발머리에 끌려 잠시 멈췄는데, 곧 영화 속으로 쏙 빠져들었다. 공주가 기타로 경호원 머리를 내리치는 장면이나 마지막 기자회견 신은 그런대로 기억이 났다. 하지만 오래된 기억의 갈피마다 공백이 많았다. 흥미로운 것은 대학생 아이가 영화에 대해 ‘엄지 척’을 했다는 것이다. 60년이 지난 올드 스토리가 세월과 세대차를 뛰어넘은 것은 지금 봐도 사랑스럽고 매력적인 헵번의 캐릭터 때문인 듯하다. 투병 중에도 아이들을 위해 노력했던 헵번 말년의 모습은 아직도 사람들 마음에 생생하다. “헵번, 너무 매력적이지 않니? 저 배우 너도 아니?” “알아요. 성형수술도 안 했을 텐데….” 부자의 대화를 지켜보던 안방마님은 웃기만 했다.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형식이 내용을 지배하는 경우가 많은데, 19일 밤 진행된 ‘대통령 후보자 TV 토론’이 그러하다. 이 TV 토론에서는 ‘토론 시간 총량제’라는 새로운 룰(규칙)을 정해 후보자가 자신에게 할당된 9분을 상대후보자들에게 자유롭게 질문하거나 답변하는데 쓰도록 했다. 그 결과 지지율 1위를 기록 중인 문재인 후보에게 질문이 집중되고, 정책별로 후보자간 토론연대가 형성되는 모습도 연출돼 토론이 이전보다 흥미롭게 진행됐다. TV 토론을 할 때 가장 중요한 룰은 후보자간 공정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후보자간 질문의 횟수와 답변 시간 등을 엄격하게 적용해 특정 후보자에게 불리하게 진행되지 않도록 토론 룰을 정한다. 토론 룰이 엄격하다보니 정책의 중요성에 관계없이 다양한 주제들이 질문되고 답변으로 이어져 중요한 정책에 대한 후보자들의 생각을 검증하기 힘들었다. 후보자들 역시 제한된 답변시간을 이용해 즉답을 회피하거나 두루뭉술하게 답변해 TV토론의 흥미를 떨어뜨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어제 진행된 TV토론에서는 후보자들이 자유롭게 질문시간을 쓸 수 있어 한 가지 이슈에 대해 집중 질문을 할 수 있었고, 질문의 주도권을 잡은 후보자가 토론을 이끌어나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안보’ 분야 첫 번째 질문자로 나선 유승민 후보는 ‘사드배치’와 ‘북한 핵개발 대응’ 등에 대해 문재인 안철수 후보에게 질문을 집중해 ‘국가안보 프레임’을 부각시키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후보자간 설전도 토론의 긴장감을 높이는데 일조했다. ‘국민연금’ ‘복지정책’ 등에 대해 구체적인 재원 조달방안을 대라는 질문과 답변 공방이 이어지자 홍준표 후보는 “대통령 후보자 토론이 아니라 기재부 국장들 간 토론 같다”고 폄하하기도 했다. ‘대북송금’ 문제로 후보자 간 공방이 이어지자 심상정 후보는 “언제까지 대북송금 문제를 물고 늘어질꺼냐”라고 호통치기도 했다. 이 모두 이전 TV 토론에서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TV토론에 기대하는 내용과 후보자들의 품격은 시청자들마다 다를 것이다. 정책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토론하길 원하는 시청자들도 있겠지만, 자신이 특별히 관심 없는 내용을 수치까지 들면서 설명하는 토론회를 지루하다고 느끼는 시청자도 있을 것이다. 때문에 TV 토론을 통해 지지후보를 바꾸기는 쉽지 않다. 많은 시청자들은 TV 토론을 시청하면서 자기가 지지하는 후보자의 생각을 확인하거나 적어도 관심 있게 지켜보는 후보들에게 설득당하길 기대하면서 자신의 성향에 따라 TV 토론의 내용을 인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TV 토론의 영향력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미디어 기술이 발달하면서 TV 토론의 영향력은 더욱 커지고 있다. TV 토론을 통해 시청자들이 설득 당해서라기보다는 다양한 미디어의 원천 콘텐츠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TV 토론은 신문과 인터넷 등 다른 미디어에 의해 그 내용이 편집돼 많은 유권자들에게 요약·전달되고, 지지자들이나 반대자들 역시 후보들의 모습과 말을 편집하거나 자신의 의견을 달아 SNS를 통해 전달한다. 그래서 후보자들의 TV토론은 1회 방송으로 그치지 않고 생명력을 지속하면서 후보자들을 홍보한다. 이제 후보자들은 TV 토론이 어떻게 생명력을 지속하면서 활용될지 고심하면서 토론에 임해야 한다. 구체적인 내용이 없는 애매한 답변은 1회성 TV 방송으로 사라지지만, 구체적인 사실을 담은 정책내용들은 공감하는 이들에 의해 생명력을 갖게 된다. TV 토론에서 정책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야하는 이유다.김갑식기자 dunanworld@donga.com}

봄철 대화의 편한 ‘메뉴’는 무얼까? 아무래도 날씨와 꽃, 조금 더 편한 사이라면 옷 아닐까 싶다. 중년 남성들의 고민 중 하나는 ‘사이즈’다. 운동도 하고 덜 먹으려고 노력해도 체중과 허리 치수는 언제나 완만한 상승곡선이다. 이때부터 허리띠 구멍을 더 뚫거나 상의를 바깥으로 꺼내는 ‘응급처방’을 내리지만 큰 효과는 없다. 얼마 전 사이즈 때문에 고민하던 누군가와 함께 이태원에 갔다. 큰 옷이 많다는 귀동냥에 끌려서다. ‘그래, 큰 옷 사서 길면 가위로 싹둑 자르면 되지’라는 심정이었다. 과연 이태원은 빅 사이즈의 천국이었다. 여기저기 ‘빅 사이즈’ ‘큰 옷 전문’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동행은 디자인과 색깔은 보지도 않고 “XL나 110 사이즈 있느냐”고 물어야 하는 설움은 안녕이라며 반기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막상 사이즈를 말하니 점원이 난감한 표정이다. “너무 작으셔요.” “몸을 조금 더 키워 오셔야 하는데….” 그래, 우리 사이즈는 기성복 매장과 이태원 큰 옷의 사각지대였다. 어디로 가야 하나?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전남 곡성군 오곡면 섬진강로 압록역(鴨綠驛). 이름에 얽힌 유래가 있다. 이 지역은 900년 전 섬진강과 보성강의 푸른 물이 합류하는 곳이라 합록(合綠)으로 불렸다. 400여 년 전 마을이 생기면서 오릿과 철새들이 날아들어 합(合) 대신 오리 압자(鴨)가 됐다. 이 간이역은 2008년 승객이 줄어 폐역이 됐다. 출입이 어렵지만 밖에서 한때 볼거리였던 ‘김영애 소나무’도 볼 수 있다. 1995년 직장인들의 귀가를 재촉한다고 해서 ‘귀가시계’로 불렸던 드라마 ‘모래시계’가 촬영됐던 곳이다. 극 중 태수(아역 김정현) 어머니로 출연한 김영애는 빨치산 남편의 뼈를 지리산 자락에 뿌린 뒤 생을 마감한다. 철길과 소나무, 그리고 허공에 휘날리던 스카프. 20년이 훨씬 지났지만 아직도 그 장면이 생생하다. 지난 9일 전해진 그의 죽음은 잊고 있었던 다른 장면들도 불러냈다. 이 드라마는 5·18민주화운동과 삼청교육대 등을 소재로 다룬 방송사의 야심작이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배우들과 김종학 PD, 송지나 작가가 참석한 간담회도 열렸다.흥미로웠던 것은 등장하는 장면이 많지 않았음에도 최민수 박상원 고현정 등 주연들 못지않게 태수 어머니에게 여러 질문이 나왔다는 점이다. 어린 태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과 허공에 날리던 스카프의 애처로움에 매료된 기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의 답변을 100% 그대로 옮길 수는 없지만 이런 말들로 기억된다. “제가 나오는 분량은 적고 주인공들도 있는데 과분하게 잘 봐주신 것 같다” “스카프 신이 강렬한 것은 연기보다는 작가와 PD 덕분인 것 같다.” 하지만 그때 40대 중반의 그는 주인공 이상으로 아름다웠고 빛났고 겸손했다. 안타깝게도 고인이 된 김 PD와는 ‘모래시계’를 계기로 가끔 전화 통화를 하거나 사석에서 소주 한잔을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됐다. 이 작품에 얽힌 화제는 시간이 흘러도 빠질 수 없는 진짜 ‘양념’이었다. “초반 분위기를 잡을 수 있을까 걱정됐지. 그 역할을 해준 배우가 김영애 씨야. 눈빛만으로 연기할 줄 아는 몇 안 되는 연기자 중 한 명이야. 서득원 (촬영)감독이 찍은 스카프 장면을 보는데 울컥했어. 드라마가 정말 되겠다 싶었어.” 그 뒤 팬의 한 사람으로 배우 김영애의 길을 지켜봤다. 그 사이 여러 모습들이 지나갔다. 드라마 ‘황진이’의 행수기생, 영화 ‘변호인’의 국밥집 주인과 ‘판도라’의 노모, 유작이 된 드라마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의 자식 못 이기는 엄마…. 암으로 투병 중인 그가 외출증을 끊어 촬영에 임했고, 정신이 맑아야 한다며 진통제 없이 버텼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병상에서 진행된 한 인터뷰에서 나온 그의 말이다. “평범하게 태어나서 공부도 별로 많이 못 했는데… 모범적으로 살지도 못 했고… 단지 운이 좋아서 배우가 됐고, 과분하게 사랑받았어요.” “배우가 그리 잘났나? 아니에요. 좋은 배우, 좋은 역할은 모두가 같이 만드는 거예요.” 그의 말들은 독백이자 세상을 향한 유언처럼 들린다. 팬의 한 사람으로 지켜본, 66년에 걸친 김영애의 모래시계는 이렇게 끝났다. 모래시계는 인생을 닮았다. 사르르, 언젠가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대통령 선거 D―20. 미래를 좌우할 대한민국의 모래시계가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대선 주자들은 시대라는 블록버스터의 주연 배우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에게 그리움을 남기고 떠난 한 배우의 겸손한 삶은 소중한 교훈이다. ‘운이 좋아 정치인 됐고 과분하게 사랑받고 있다’고. ‘좋은 정치는 모두 같이 만드는 것’이라고. 부끄럽지 않을 ‘유언’을 남기시라! 김갑식 문화부장 dunanworld@donga.com}

“…전하께서는 조금이라도 심기가 불편하시면 말을 가리지 않고 하시는 경우가 많아 신은 항상 개탄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앞으로 말씀하실 때에는 온화하고 평온하게 하시기 바랍니다.”(검토관 조상명) “…종친을 제재한다는 것은 종친이 권세가 있을 때 하는 말이다. …내 마음이 이미 상해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화가 난 것이지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는가?”(영조) “…신하로서 감히 들을 수 없는 하교를 내리셨으니 이는 성상의 함양(涵養·능력이나 품성을 쌓거나 갖춤) 공부가 부족해서 그런 것입니다.”(김동필) 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 9년 11월 7일의 기록이다. 절대권력자인 왕과 경연청에 속한 하급 관리의 대화다. 영조의 입장에서 슬그머니 감추고도 싶을 듯한 내용이다. 그러나 조선은 왕의 일거수일투족이 곧바로 드러나는 ‘기록의 국가’였다. 1997년 조선왕조실록이 세계기록유산으로 처음 등재된 데 이어 2001년 ‘승정원일기’, 2011년 ‘일성록’이 차례로 등재됐다. 한 국가의 역사 기록이 3종이나 등재된 것은 드문 사례다. 서울대 국사학과 한영우 명예교수는 “근대 이전 우리만큼 통치 자료를 철저히 남긴 나라는 없다. 가히 독보적이다”라고 평한 바 있다. 한국고전번역원이 최근 정부 지원을 받아 인공지능(AI)으로 승정원일기 번역에 나서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 번역에는 인공신경망번역(NMT·Neural Machine Translation) 기술이 적용된다. 지난해 이세돌 9단과의 대국으로 화제를 모았던 구글 딥마인드의 ‘알파고’처럼 스스로 학습해 번역 수준을 향상시키는 딥러닝 방식이다. AI를 이용해 작업하면 향후 45년 걸릴 것으로 예상되던 번역 기간을 27년 정도 단축할 수 있다는 게 번역원 전망이다. 기록은 당대의 언어로 번역돼 그 뜻이 후세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빛을 발한다. 하지만 현실은 기록의 방대함과 전문 인력의 부족 등으로 아쉬운 상황에 머물러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완역에 이어 재번역에 들어갔지만, 승정원일기와 일성록의 번역률은 각각 20%와 38% 수준에 그치고 있다. 승정원일기와 일성록이 고전 번역 분야의 도전이자 숙원 사업으로 꼽히는 이유다. 특히 승정원일기는 지금의 대통령비서실 격인 승정원에서 그날그날의 말과 글, 동정을 기록한 것으로 최고 권력자의 곁에서 지켜본 움직임을 엿볼 수 있다. 정7품 주서(注書)가 하루 종일 임금을 수행하면서 국정 전반에 관한 왕의 명령과 보고, 신하와의 대화 등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조선 초기부터 작성됐으나 임진왜란, 이괄의 난 및 여러 화재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인조부터 순종 때까지의 기록이다. 비록 일부가 사라졌지만 남은 기록의 글자 수는 무려 2억4300여만 자에 달한다. 중국이 자랑하는 ‘25사(史)’가 중국 전 왕조의 역사를 기록한 것인데도 총 4000만 자 정도에 불과하다. 승정원일기는 방대함뿐 아니라 생생함에서 그 가치를 더한다. 이른바 조선시대판 ‘녹취’였다. 임금과 신하가 경연에서 학문을 토론하거나 내의원에서 임금을 진료하면서 주고받는 문진(問診), 국정 현안에 대한 임금과 신하의 대화 등이 마치 영화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전해진다. 6일 특검의 수사 결과가 발표됐지만 대통령의 세월호 7시간 행적은 여전히 안갯속이다. 기록이라는 측면에서만 본다면 대한민국은 조선왕조보다 더 후진적일지도 모른다.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하다고 배웠지만 어쩔 수 없이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우리 조상들이 지닌 ‘기록의 DNA’만 제대로 살렸다면 어땠을까?” ‘왕의 공부가 부족하다는 기개를 가진 관리들이 있었다면?’김갑식 문화부장 dunanworld@donga.com}

서울 용산구 삼각지에 한 식당이 있다. 전복 요리를 중심으로 제철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1월 방어와 꼬막, 2월 새조개, 이런 식으로 메뉴가 나오다 경매에서 참치라도 들여오면 참치 파티가 열린다. 아쉽게도 세 팀 정도 들어오면 손님을 사양할 정도로 공간이 좁다. 그래도 방법은 있다. 주인장은 지인이나 단골의 양해를 얻어 옆 식당으로 보낸다. 좀 기다리면 옮긴 식당으로 음식이 배달된다. 단, 술은 이동한 식당의 것을 이용하는 조건이다. ‘식당 품앗이’다. 심지어 주인장과 오랜 인연이 있는 손님들은 육질이 좋은 고기 등 식재료를 가져와 야외에서 굽는다. 이들은 주변 식당 손님뿐 아니라 행인들이 관심을 보이면 고기 몇 점을 권한다. 특정 식당을 찾는 이유는 다양하다. 맛과 서비스, 가격, 공간의 편안함…. 하지만 내가 굳이 삼각지를 찾는 이유는 정(情)에 끌려서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한 장면 같은 골목 풍경이 그립기 때문이다.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트럼프, 내게 좋은 생각이 있는데 서로 일을 바꾸면 어떻겠나. 당신은 시청률에서 대단한 전문가이니 TV를 맡고, 나는 당신의 일(대통령)을 하면 된다. 그럼, 사람들이 다시 편안하게 잠잘 수 있을 거다.” 배우 출신으로 미국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내며 한때 대권(大權)까지 꿈꾼 아널드 슈워제네거의 말이다. 이에 앞서 반(反)이민 정책으로 세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국가조찬기도회에서 자신이 공동 제작했던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맥을 못 추고 있는 것에 대해 “슈워제네거를 후임으로 썼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재앙이라는 표현도 사용했다. 트럼프와 별들의 갈등은 이제 뉴스도 아니다. 배우 메릴 스트립은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할리우드에서 외국인과 이방인을 모두 축출한다면 아마도 예술이 아닌 풋볼이나 격투기를 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물론 ‘가장 과대평가된 여배우’라는 트럼프의 반격이 이어졌다. 스트립은 1979년 ‘디어 헌터’를 시작으로 올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플로렌스’까지 20차례 노미네이트됐다. 이 중 ‘소피의 선택’ ‘철의 여인’이 주연상,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가 조연상 트로피를 그에게 안겨줬다. 트럼프의 말처럼 과대평가인지는 모르겠다. 이런 장면들을 지켜보면 심사가 좀 복잡해진다. 흥미롭다는 느낌을 넘어 놀랍고 부럽다. 그 놀라움은 세계 최고의 권력을 쥔 미 대통령과 화려한 ‘말의 전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싫어도 그렇지, 세계를 전전긍긍하게 만드는 트럼프와 ‘맞짱’ 뜨는 것 자체가 낯설다. 부러움은 그들이 주고받는 말의 품위와 유머에서 나온다. 유머와 가시가 적당하게 버무려진 말들은 곱씹는 재미까지 느끼게 한다. 당신과 내 일을 바꾸자니. 미국에서 권력과 스타의 관계가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지난해 개봉된 영화 ‘트럼보’의 장면들이 떠오른다. 영화는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까지 최고조에 이르렀던 매카시즘을 다뤘다. 1급 시나리오 작가였던 돌턴 트럼보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싸웠고 결국 블랙리스트에 올라 할리우드에서 내쫓긴다. 그는 11개의 가명으로 시나리오를 써야 했고, 그중 한 작품이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로마의 휴일’이다. 씁쓸한 얘기지만 꽤 오랜 시간이 흐른 2017년 대한민국에서는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가 대통령 탄핵의 한 사유로 거론되고 있다. 여기서 생기는 궁금증이 있다. 왜 대통령과 정권 실세들은 블랙리스트를 만들었을까. 우선 경제적 숫자로만 표현이 쉽지 않은 문화의 정서적 파급력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모델로 한 영화 ‘변호인’의 관람객 수는 1137만 명을 넘었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다른 의혹을 제기한 다큐멘터리 ‘다이빙벨’은 권력에 대한 역린(逆鱗)이 됐다. 문화 융성에 대한 열정과 비전, 업적을 문화인들이 훼손하고 있다는 게 청와대의 판단이었을 것이다. 또 하나, 권력의 힘만 있다면 문화적 흐름이나 판을 바꿀 수 있다는 오판이다. 실제 콕 찍어 블랙리스트는 아니더라도 역대 정권은 문화·예술계를 향해 자신의 입맛에 맞추라며 돈과 인사라는 무기를 휘둘렀다. 참여정부의 코드 인사와 이명박 정부의 문화계 진보 인사 솎아내기가 그랬다. 대통령은 과거에 가능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두 팔 걷고, 더욱 치밀하거나 졸렬하게 블랙리스트에 매달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치가 생물(生物)이라면 문화는 흐르는 물이다. 문화의 본성은 자유로움이다. 권력의 입장에서 때로 못마땅하고 억울해도 참아야 문화의 꽃은 핀다. 곧 다가올 그래미상과 아카데미 시상식, 별(★)들의 말말말이 기다려진다.김갑식 문화부장 dunanworld@donga.com}

최근 음원 사이트에 가입돼 있는 걸 알았다. 평생 노래 7곡으로 버텨 왔기에 뜻밖의 사실이었다. “아빠가 몇 년 전부터 요금 내주고 있는데 왜 이용을 안 했어”라는 딸의 말이 있기 전까지 몰랐다. 돈만 내는 ‘곰’이었다. 요즘 차량용 블루투스로 사이트의 최신 곡을 듣다 보니 곰의 귀동냥은 가히 혁명적으로 바뀌었다. 드라마 ‘도깨비’ OST를 비롯해 빅뱅의 ‘에라 모르겠다’, 볼빨간사춘기의 ‘나만 안 되는 연애’, 에일리의 ‘첫눈처럼 너에게 가겠다’…. ‘18번’으로 만들고 싶은 노래까지 생겼다. ‘…비겁하다 욕하지 마 더러운 뒷골목을 헤매고 다녀도…촛불처럼 짧은 사랑…내 생에 봄날은 간다….’ 어느 날 함께 차에 탄 대학생 아들이 신나게 노래를 뽑았다. 캔의 ‘내 생에 봄날은’이다. 곰 역시 들은 기억이 있어 노래는 합창이 됐다. 속으로는 ‘지가 언제 뒷골목을 헤매. 뭐, 내 생에 봄날은 간다고∼’ 구시렁거리면서. 한 지붕 밑에 살면서도 대화가 어렵다. 때로 음악은 그 벽을 한순간에 무너뜨린다.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정치 지도자는 더 싫다. 유력하다는 대선 후보들은 그만큼 더 싫다. 최순실의 국정 농단과 관련한 뉴스가 수시로 나온다. 하루가 멀다 하고 대권(大權) 후보들의 지지율이 발표된다. 이런 정치의 계절에 정치가 싫다는 말이 가당한 말인가. 그럼에도 요즘 마주치는 적지 않은 이들이 의외로 최 씨의 국정 농단이나 “누가 지지율 1위래” 하는 말에 손사래를 친다. 술맛 떨어지게 왜 그러냐고, 쯧쯧쯧. 이 사람 역시 손사래 치는 부류에 가깝다. 국정 농단, 촛불, 대선에 이어 특정 후보의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단계를 밟다 서로 불쾌해진 경험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괜찮은 사람으로 기억되려면 고개를 끄덕거리며 술 한 잔 더 마시는 게 낫다. 동아일보는 6일자에 기획 시리즈 과 관련한 기사를 보도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전국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51.9%는 ‘경제위기가 다시 닥쳐도 금 모으기와 같은 위기 극복 운동에 동참할 의향이 없다’고 답했다. 모를 일이다. 국가와 민족의 위기에 헌신적으로 응답해온 우리 국민의 정서를 감안하면 충격적이다.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다리가 끊어진 것에 대한 좌절감이 큰 원인일 수 있다. 5포, 7포를 넘어 N포까지 가는 젊은 분노도 빠질 수 없다. 응답자들의 답변을 조금 더 보자. 그러면 국민의 ‘변심(變心)’이 신뢰의 부재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청와대를 포함한 정부를 신뢰할 수 있다는 답이 2.7%에 그친 것은 그렇다고 치자. 국정 농단을 추상같은 기개로 세워야 할 법원 검찰 등 사법부 수치가 6.1%였다. 심지어 청문회를 통해 증인들을 추궁하고 있는 국회를 신뢰할 수 있는 기관으로 꼽은 응답도 3.3%에 불과했다. 같은 대통령제를 하면서도 미국과 우리 현실은 왜 이렇게 달라야 하나.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퇴임을 앞두고 부러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제 최고 권력자에서 시민으로 돌아가는 아름다운 뒷모습에 박수를 치고 싶다. 내 집에는 정치가 싫다면서도 뉴스를 틀어 놓고 사는 아내가 있다. 어느 날 대화다. “(드라마) ‘도깨비’ 보자. ‘기승전’으로 시작해 최순실로 끝나는 뉴스가 지겹다면서 왜 집에 오면 꼭 뉴스를 봐? ○○○는 이래서 싫고, △△△는 저래서 얼굴도 보기 싫다며….” “뉴스 보면 화가 나지. 유력하다는 정치인 얼굴 나오면 더 싫고. 그래도 봐.” 말이 되나? 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얘기에 귀를 닫을 수는 없고, 이런 대화가 불가피할 때 싫다는 감정은 감추면 된다는 설명이다. 촛불은 새로운 정치의 현장이고, 광장은 그 촛불로 매주 뜨겁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 지성인 김병익 문학과지성사 고문은 기고에서 ‘대통령이 무너뜨린 국격(國格), 국민이 쌓아올렸다’는 동아일보 기사 제목이야말로 최근 본 가장 아름다운 말이라고 표현했다. 맞다. 하지만 촛불의 어둠 속에는 정치, 특히 정치 지도자의 일그러진 모습에 배신당한 많은 이들도 있다. 촛불이 상징하는 새 정치는 국민들이 느끼는 그 끝없는 배신감과 상처를 치유하는 것에서 먼저 시작되어야 할지 모른다. 논어에 있다는 한 일화가 정치가 싫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중국의 춘추(春秋)시대에 공자(孔子)가 여러 나라를 순방하던 중 초(楚)나라의 섭공이 다스리는 지역에 도착했다. 그가 공자에게 자신의 지역을 어떻게 하면 잘 다스릴 수 있는지를 묻자 공자는 ‘근자열 원자래(近者悅 遠者來)’라고 답했다. “(정치는) 가까이 있는 사람은 기쁘게 하고 멀리 있는 사람은 찾아오게 하는 것입니다.”김갑식 문화부장 dunanworld@donga.com}

“프랑스 공연을 마치고 왔는데 가장 크게 느낀 게 뭔가요?” “‘좋은 관객’을 보고 왔다는 겁니다.” 지난달 김승업 충무아트센터 사장과 안호상 국립극장장과의 점심 모임이 있었다. 마침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립창극단 ‘변강쇠 점 찍고 옹녀’ 공연 뒤 첫 대면이라 자연스럽게 화제가 그쪽으로 옮아갔다. 안 극장장의 대답은 의외였다. 20년을 훌쩍 넘긴 ‘기자 짬밥’으로 예측한 답변은 공연 성과였다. 아니면 프랑스 공연장의 시설이나 요즘 파리 공연계 분위기 정도였다. 공연 장소인 테아트르 드 라빌은 현대 무용의 거장 피나 바우슈나 머스 커닝햄의 정기공연이나 화제작들이 오르는 곳이다. 관객의 호불호가 분명해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공연 도중 퇴장하는 관객들이 적지 않은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들이 의자에서 불쑥 일어나면서 생기는 소리는 공연자들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는다고 한다. 좋은 관객에 대한 안 극장장의 설명은 이렇다. “창극은 대부분 처음 본 공연일 텐데도 관객 1000여 명이 금세 웃으며 작품에 빠졌다. 공연장 측에서 우리 작품을 선택한 이유와 배경을 잘 이해하고 있는 관객들이었다.” 동석한 김 사장은 공연장과 관객의 관계를 동반자라고 정의했다. “공연장도 음식점처럼 자주 찾는 ‘단골손님’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벗’이 될 수 있는 관객들이 좋은 관객이죠.” 그는 몇 년 전 김해문화의전당 사장 재직 시절 뮤지컬 ‘미스 사이공’ 때 만난 그 벗들을 잊지 못했다. 부산에서 가깝지 않은 거리임에도 공연장을 찾은 일행은 이곳에서 작은 모임을 진행하면서 “큰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줘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2주 전 국립극장에서 열린 ‘음악이 있는 생큐 파티’도 좋은 관객을 만날 수 있는 행사였다. 국립극장 패키지 티켓을 구입한 관객 50명을 상대로 공연장 로비에서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국립창극단과 국립무용단 등 상주 단체의 예술감독과 주역들이 참석해 관객들과 격의 없는 대화도 나눴다. 주요 공연의 장단점과 주역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너무 잘 알고 있어 기쁘면서도 부담이 느껴져 ‘무서웠다’는 게 안 극장장의 말이다. 요즘 베스트셀러 순위에선 ‘채식주의자’(한강)와 ‘종의 기원’(정유정)이 나란히 1, 2위를 차지하고 있다. 독자들이 한동안 국내 소설을 외면했다는 점에서 고무적인 일이다. ‘종의 기원’ 출간 뒤 얼마 되지 않아 한강 작가의 맨부커상 수상이 발표됐다. 정 작가가 3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 묻히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지만 이 책을 출간한 은행나무 측 설명은 다르다. 맨부커상의 화제성에 밀려 순위는 내려왔지만 절대 판매량이 크게 늘었다는 것이다. 두 작품이 ‘쌍끌이’로 출판 시장을 이끌면서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긍정의 도미노’ 현상이다. 작품과 관객, 또는 독자와의 관계에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식의 딜레마에 빠질 때가 있다. 좋은 작품이 있어야 좋은 관객들이 생기는 것인지, 아니면 작품이 좀 모자라도 인내하고 격려하는 좋은 관객이 있어야 좋은 작품이 탄생하는지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반대의 경우 꽤 명확하다. 작품 탓, 관객(독자) 탓으로는 문화와 그 사회의 수준을 높일 수 없다는 점이다. 과거 한국 영화는 한동안 볼 게 없다는 비난에 시달렸고, 최근까지 한국 소설도 그랬다. 좋은 관객이든 나쁜 관객이든 관객은 있어야 한다. 그 계기가 무엇이든 한번 찾아온 손님을 단골손님, 나아가 벗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김갑식 문화부장 dunanworld@donga.com}

“최대한 빨리 제 방에 숨어서 글을 쓰고 싶다.”(소설가 한강 씨·46) “연습하러 가야죠.”(발레리노 김기민 씨·24) 소설 ‘채식주의자’로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세계 3대 문학상의 하나로 꼽히는 맨부커상의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한 한강 씨와 무용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 최고 남성 무용수상을 거머쥔 김기민 씨의 말이다. 최근 세계에 ‘신(新)한류’의 도래를 알렸던 이들의 소감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그것이 글쓰기든 춤이든 자신들이 ‘연습벌레’임을 드러낸 것이다. 김 씨의 경우 동아일보 기자와 연결된 시점이 새벽이었다. 시상식이 열렸던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5시간 걸려 집이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간 그에게 “힘들 테니 좀 쉬라”고 했더니 돌아온 대답이란다. 큰일을 한 만큼 좀 쉬어도 될 터이지만 한 씨의 대답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의 인터뷰 곳곳에는 “어서 제자리로 돌아가 읽고 쓰는 생활을 다시 하고 싶다”는 평상의 삶에 대한 언급이 많았다. 이번 쾌거는 시쳇말로 사회성이 다소 떨어지는 듯한 두 예술인의 승리다.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배려와 책임감도 눈에 띈다. 한 씨는 “조용히 묵묵하게 자신의 글을 쓰시는 분들의 훌륭한 작품도 읽어주시면 좋겠다”, 김 씨는 “안내자 없이 길을 가면 힘들잖아요. 세계 발레계에서 뒤에 따라올 후배들에게 길을 안내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이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한류(韓流)=대중문화’라는 공식을 깼다는 점이다. 그것도 세계정상에 오르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아온 장르에서 얻은 성취다. 이들이 속한 문학과 발레계는 한류와 거리가 멀다. 한류 하면 케이팝과 영화, 드라마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10대들에게 장래 희망을 물어보면 연예인이 선두를 다투는 것은 오래된 일이다. 시인과 소설가 등 문인, 또는 발레와 전통무용 등 무용인이 상위에 오른 것을 본 적이 없다. 언어로 표현되는 문학은 그동안 우리에게 적지 않은 상실감을 준 장르였다. 매년 10월 노벨문학상 수상자 발표 때마다 고은 시인의 자택 주변에 있다 빈손으로 돌아오는 게 언론의 연례행사였다. 우리 언어와 문화를 잘 아는 좋은 번역자가 그 숙원을 풀 수 있는 열쇠의 하나였다. 앞으로도 문인들의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적어도 해법의 실마리를 찾았다는 점에서 희망적이다. 발레, 그중에서도 발레리노의 세계는 어떤가? “범아, 발레 한번 해 보자.” 전성기 시절 ‘발레리노의 교과서’로 불린 이원국 씨에게 그의 어머니가 던진 말이다. 범은 어릴 때 그의 이름이다. 춤은 학창 시절 집안에서 내놓은 문제아를 보다 못한 어머니의 마지막 제안이었다. 춤이라도 춰서 대학에 가라는 의미였다. 요즘은 분위기가 바뀌었다지만 아직도 “남자가 무슨 춤이냐”는 분위기가 적지 않다. 이런 풍토에서 한국 발레는 기적을 이뤄냈다. 2006년 김주원 성신여대 교수의 같은 상 최고 여성 무용수상 수상에 이어 꼭 10년 만이다. 어쩌면 우리를 더 깜짝 놀라게 한 두 예술인의 수상은 한류를 다시 바라보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문화 융성을 4대 정책 기조의 하나로 내세운 정부는 그동안 한류를 대중스타를 앞세운 돈벌이와 벤처, 일자리 창출 수단으로만 여겨온 것은 아닌지? 한류의 비즈니스화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전부는 아니다. 몸이 그렇듯 기초가 약하거나 균형을 잃은 문화 편식은 문화를 망칠 수 있다. 더디고 힘들어도 예술의 원천인 문학, 나아가 공연계에 꾸준히 투자해야 지속 가능한 한류의 꽃을 피울 수 있다. 김갑식 문화부장 dunanworld@donga.com}

금녀(禁女)의 영역인 가톨릭교회에서 여성 성직자가 나올 수 있을까?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이 가톨릭교회의 여성 부제(副祭) 허용을 검토하고 싶다는 언급이 화제가 되고 있다. 교황은 이달 12일 수도원 대표들과의 만남에서 여성에게도 부제직을 줄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할 위원회를 창설하겠다고 밝혔다. 가톨릭교회에서 성직자는 사제(司祭), 통상 신부를 의미한다. 수녀들은 수사와 함께 수도자로 분류된다. 사제들은 일정 기간의 부제 기간을 거쳐 사제품을 받게 된다. 교황은 그동안 보수 세력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자와 낙태 여성, 이혼 경력자 등에 대해서도 관용적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여성 부제의 탄생은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게 교계의 전망이다. 2년 전 가톨릭의 동성 결혼 인정 여부가 국제적 이슈가 됐을 때 나눈 신부들과의 대화가 떠오른다. “여성 사제가 인정되면 그것은 더 이상 가톨릭이 아니라 개신교라고 봐야 한다.” 한마디로 ‘불가(不可)’였다. 수천 년 신과 그 대리자인 남성 사제를 통해 신앙과 조직의 근간을 유지해 온 가톨릭교회로서는 불가능한 결정이라는 것이다. 세상은 바뀌고 있지만 종교는 요지부동이라는 비판이 나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성공회 등 일부 개신교단에서는 여성 성직자의 활동이 왕성하지만 많은 교단은 아직 여성의 목사 안수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반면 국내 불교계의 대표적 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의 여성 성직자(비구니) 비율은 놀랍다. 전체 1만3000여 명의 출가자 중 비구니 비율이 절반에 가깝다. 출가에 관해서는 성(性)에 관계없이 문이 열려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이 수치를 종단 내 양성평등의 실현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조계종 헌법인 종헌에 따르면 비구니의 경우 말사(末寺·본사 주지가 임면권을 행사하는 사찰) 주지와 국회 격인 중앙종회에서 비구니 몫으로 할당된 81석 중 10석을 빼면 종단의 선출직을 맡을 수 없다. 2년 전에는 사법부 격인 호계원 위원의 자격을 ‘비구(남성 스님)로 하지 말고 승려로 하자’는 취지의 개정안이 제출됐지만 부결됐다. 최근 조계종의 대중공사에서도 논란이 됐지만 비구니들은 종단 행정의 최고 책임자인 총무원장 선출 과정에서는 더욱 소외돼 있다. 현행 간선제에 따르면 중앙종회 의원을 포함한 320여 명이 투표에 참여할 수 있다. 어림잡아 전체 스님의 절반인 6500명 비구니의 ‘표심’은 종회 의원에 뽑힌 불과 10표로 반영된다. 자연스럽게 비구니들의 불만은 많지만 종단 주류의 분위기는 미적지근하다. ‘비구니는 출가해 100년이 지나도 방금 출가한 비구를 공경해야 한다’ 등 비구니 팔경법(八敬法)을 내세우거나 ‘여성은 깨달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비구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팔경법은 엄격한 신분 사회인 인도의 카스트 제도 아래서 여성 보호와 출가 공동체 유지를 위해 권장된 규율일 따름이다. 수천 년이 지나 이를 불평등의 근거로 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1962년 이른바 조계종의 통합 종단이 출범한 뒤 50여 년이 흘렀다. 종단은 지금보다 훨씬 강화된 비구 중심으로 운영돼 왔다. 그 사이 종권(宗權)을 둘러싼 폭력 사태와 금권 선거, 계율을 어긴 범계(犯戒)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종교에서 여성 신자의 비율이 압도적이지만 성직자의 남녀평등은 어렵고 힘든 숙제로 남아 있다. 성(性)을 이유로 한 차별은 세상의 순리에 맞지 않다. 평등의 종교로 알려진 불교, 그중에서도 조계종의 새바람을 기다린다.김갑식 문화부장 dunanworld@donga.com}

온통 선거에 세상의 이목이 집중됐던 13일. 선거와 관련한 속보가 쉴 새 없이 전해지던 때에 개인적으로 특별한 ‘시간여행’을 경험했다. 다음 날 문화면 ‘요즘! 어떻게?’란 기획에 실릴 임권택 감독(82)의 인터뷰 기사를 손보면서다. 후배 영화담당 기자의 꼼꼼한 취재에 데스크로서는 별로 할 일이 없던 차에 “임 감독님 만나 뵌 느낌이 어떤지” 물었더니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임 감독 버전’으로 말을 옮기면 대강 이렇다. “김 기자(필자)랑 같이 일해요? 십수 년 전인데 프랑스 칸영화제도 같이 갔고 잘 알죠. 그 양반이 늙은 내가 문자메시지를 배워 스태프에게 보낸다는 기사를 덜컥 내보내 한참 화제가 됐죠. 허허.” 짐작대로라면 길지 않은 이 말에 1분쯤은 족히 걸렸을 것이다. 아, 어 하며 말도 몇 번 끊겼을 것이다. 문자메시지,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만 15년 전인 2001년 사연이다. 당시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던 그와 문자메시지는 잘 어울리지 않았다. 이미 60대의 거장이었던 그의 스타일은 시나리오보다는 매일 현장에서 느끼는 감에 의해 촬영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시나리오는 삭히고 삭히는 과정을 거쳐 머리와 마음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영화담당 기자 시절이던 2000년으로 거슬러간다. 배우 조승우의 영화 데뷔작인 ‘춘향뎐’ 때였다. 임 감독은 이 작품으로 우리 영화로는 최초로 칸영화제 공식 경쟁 부문에 진출했다. 지금이야 해외 영화제 수상이 드문 일도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영화계의 오랜 염원이었다. 현지에서 진행되는 인터뷰와 시사회, 그리고 해외 언론 반응까지 가까이서 지켜봤다. ‘국가대표’라는 책임감이 임 감독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2001년 영화 ‘취화선’과 관련한 인터뷰 때의 일이다. 그는 끊은 지 10년이 넘었다는 담배를 수시로 물었다. 그러면서 ‘그놈의 노장, 그놈의 칸 소리!’라며 손사래를 쳤다. 결국 이듬해 그는 이 작품으로 감독상을 받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사연들은 점점 추억이 됐다. 심지어 문자메시지 기사는 다시 찾아보고서야 무릎을 쳤다. 하지만 더 선명해지는 기억도 있다. 임 감독은 어눌한 말로 알려졌지만 심중을 정확히 전달한다는 점에서는 달변가였다. 그가 곧잘 언급하는 세계일화(世界一花·세계는 한 송이 꽃)는 영화 외길을 걸어온 그의 세계를 단박에 보여준다. 여기에 누구를 보더라도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과 예측불허의 유머가 있다. 인터뷰 당시 불가피한 사정 때문에 조금 늦는 결례를 범하게 됐고, 한여름이라 아이스크림을 사 갔다. “이거 캐스팅을 위한 로비 아냐? 어쨌든 시간 비워 둬요. 하하.” 출연료는 없지만 알맞은 배역이 있다는 유쾌한 농담이었다. 14일 오전 모처럼 임 감독과 통화를 하며 103번째 작품에 대해 묻자 그는 “제가 인기 감독이 아니잖아요? 몸도 그렇고. 감당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죠”라고만 했다. 세상의 이른바 원로(元老)와 지도자, 중진들이 앞다퉈 국민을 위한다면서도 자신의 사심을 말해온 게 요즘 세태다. 특히 원로라는 이름을 쓰는 단체는 많아졌지만 정작 그 무게는 떨어졌다. 원로는 자연 연령뿐 아니라 누군가가 증거로서 남긴 삶, 겸손과 포용의 품격이 더해져야 비로소 완성된다. 총선 다음 날 승자와 패자가 있고, 기쁨과 좌절이 넘치고, 산적한 과제와 그 해법에 대한 고민 등이 떠오르는 아침이다. 그런데 오리무중이다. 임 감독이 사회를 다룬 영화를 다룬다면 주인공은 누구일까. 그 마지막 캐스팅이 궁금하다. 김갑식 문화부장 dunanworld@donga.com}

19세기 일본에서 막부가 지배하던 시기 바둑은 그냥 바둑이 아니었다. 영주들의 직접적인 무력 충돌이 줄어들면서 바둑은 이들의 힘을 과시하는 또 다른 전쟁터가 됐다. 영주의 후원을 받는 바둑 명가(名家)들은 자신들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사활을 걸었다. 1835년 7월 명인기소(名人碁所·막부 시대의 바둑관직)를 놓고 혼인보(本因坊) 가문의 조와와 스승을 대신해 출전한 아카보시 인테쓰가 대국을 한다. 나흘간의 격렬한 대국이 벌어졌다. 아카보시는 결국 상대의 묘수에 견디지 못하고 246수 만에 돌을 던졌다. 대국 직후 그는 피를 토하고 두 달 후에 눈을 감은 것으로 알려졌다. 바로 바둑사의 전설로 남아 있는 토혈국(吐血局)이다. 최근 이세돌 9단과 구글의 인공지능(AI) 프로그램 알파고가 펼친 세기의 대국이 오래전 인상 깊게 들었던 과거의 기억을 살려냈다. “바둑이 뭐라고 죽음까지”라며 궁금증과 놀라움을 동시에 느꼈던 기억이 생생하다. 꼭 30년 전인 1986년 조치훈 9단의 일화도 있다. 당시 전성기를 맞은 조 9단은 일본 최대 기전인 기성전 타이틀전을 10여 일 앞두고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했다. 두 다리와 왼손 골절, 머리 찰과상 등 전치 6개월의 중상이었다. 담당 의사는 대국을 포기하라고 만류했다. 하지만 조 9단은 “바둑을 둘 수 있는 오른손과 머리만 멀쩡한 건 하늘이 나에게 바둑을 두라는 뜻”이라며 대국을 강행했다. 그는 다리와 왼쪽 손목에 깁스를 하고 대국장에 들어서 전대미문의 휠체어 대국이 이뤄졌다. 결국 승리는 도전자 고바야시 고이치 9단의 차지가 됐지만 조 9단은 이른바 ‘목숨을 걸고 둔다’는 승부사의 상징이 됐다. 이 9단은 세기의 대국에서 1승 4패로 알파고에게 패했다. 완패에 가깝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에게 열광했다. 알파고가 슈퍼컴퓨터 수준이 아니라 기술적으로 1000여 명의 ‘훈수꾼’을 삽시간에 동원할 수 있는 괴물임이 드러나서일까? 궁지에 몰린 인류의 대표에 대한 호모사피엔스 차원의 안타까움일까? 인공지능이 초래할 미래사회에 대한 불안과 공포 때문일까? 이런 원인들이 모두 작용했다는 게 개인적 생각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것은 대국 현장에서 보여준 이 9단의 모습 자체였다. 진심(眞心)과 투혼, 명분의 3박자가 어우러졌다. 패배 뒤 그의 소감을 옮겨 보자. “사실, 충격적이다. … 진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너무 놀랐다.”(1국) “완패였다. 초반부터 한 번도 앞선 적이 없다. 이제부터는 한 판이라도 이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2국) “3국에서 중압감을 이기기에는 제 능력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4국 승리 뒤 그는 명분을 취했다. 백이 승부에서는 유리하지만 흑으로도 이겨 멋지게 유종의 미(美)를 거두겠다는 것이다. 그는 대국마다 초읽기에 몰리면서도 혼신의 힘을 다해 알파고와는 다른 인간계 바둑의 매력까지 보여줬다. 바둑 용어는 알게 모르게 세상사에 비유돼 왔다. 포석(布石)과 행마(行馬)부터 미생(未生) 완생(完生), 국면(局面)과 대마불사(大馬不死), 수순(手順)과 복기(復棋)….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다. 하지만 최근 공천 과정에서 드러난 정치의 수준은 여야 가릴 것 없이 국민의 눈높이에서 한참 밑돌고 있다. 사람들은 지금까지의 공천 과정만 복기해도 벌써 돌을 던졌어야 하는 패자(敗者)들이 부지기수라고 한다. 욕심을 감춘 꼼수와 누군가의 뜻만 받드는 외길 수, 자신의 잘못을 남 탓으로만 돌리는 후안무치한 수만 난무한다. 바둑이나 인생이나 모두가 승자일 수는 없다. 하지만 이세돌처럼 진다면 그는 승자다.김갑식 문화부장 dunanworld@donga.com}

이세돌 9단이 거푸 컴퓨터에게 무릎을 꿇었다. 이 9단은 10일 서울 광화문 포시즌즈호텔에서 열린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 2국에서 211수만에 불계패를 당했다. 이로서 종합전적 2패가 됐다. 이날 승리로 알파고는 사실상 세계 최고수의 반열에 올랐다. 이 9단이 1국에선 상대를 잘 모르는 상태여서 적응이 덜 된 탓에 패했다고 할 수 있지만 오늘 바둑까지 지면서 실력에서 이 9단에 버금간다고 볼 수 있다는 해석이다. 이날 대국은 초반부터 신중하게 출발했다. 어제 대국에서 초반에 실패를 맛본 이 9단이 두터움을 중시하는 수법으로 나온 것. 이 9단은 두텁게 두다가 알파고가 실수를 할 때 응징하겠다는 뜻이었다. 이 9단의 의도대로 알파고가 좌하귀에서 싸움을 걸어갔다가 실패하면서 백이 우세해졌다. 그러나 이후 이 9단은 평소 기풍과는 달리 지나치게 안전한 행마로 일관하다가 알파고가 승부수에 휘말려 역전패당했다. 이현욱 8단은 “1국과 달리 이세돌 9단이 본인의 실력을 충분히 발휘했는데도 졌다”며 “이젠 알파고가 최소한 인간 프로기사 정상급과 같은 실력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유창혁 9단은 “이 9단이 중반 흑(알파고) 중앙의 엷은 곳을 추궁해서 더 많은 우세를 확보했어야 했다”며 “알파고가 1국에서 끝내기 실수가 있었는데 오늘은 완벽하게 이 9단을 따라 잡아 역전시켰다”고 말했다. 3국은 하루 쉬고 12일 토요일 오후 1시 같은 장소에서 열린다. ○17보(178~195)끝내기가 진행되고 있지만 흑 집은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 좀 흑이 엷다고 생각한 곳에서 흑 집이 계속 붙고 있는 것. 이젠 어렵다는 것이 프로기사들의 진단이다. 미세한 것도 아니다. 점점 차이가 벌어졌다는 뜻이다. ○16보(155~177)이세돌 9단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고 있다. 턱을 괴는 빈도 수도 높아졌다. 손도 미세하게 떨린다. 알파고가 정확한 끝내기로 중앙 집을 키우고 있다. 흑 165까지 예상 밖의 중앙 집이 생겨났다. 이현욱 8단은 “이젠 흑이 좋아보인다”고 말했다. 그런데 또 알파고의 뜻밖의 수가 등장한다. 백 166 때 흑 167로 중앙 백 넉점을 잡은 것이 예상을 빗나간 것. 11집 끝내기. 대신 우상에서 끝내기를 한 것은 12집에 선수 넉 집 끝내기를 한 것. 그런데 이게 선후수가 바뀌기 때문에 흑이 173으로 둔 것이 커서 흑에게 손해가 없다는 진단이 나온다. 유창혁 9단은 “알파고의 끝내기가 무섭다”며 “이길 수 있다면 약간의 손해는 감수하는 1국 때의 모습이 또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이젠 이현욱 8단은 흑 177 시점에서 “흑이 이겼다”고 선언했다. 이 단계에선 끝내기의 변화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15보(143~154)바둑이 점차 혼돈에 빠지고 있다. 백 우세 설도 어느덧 많이 사그라들었다. 중앙이 많이 어지러워진 탓이다. 이세돌 9단은 백 144의 시점에서 제한시간 2시간을 다 쓰고 1분도 남지 않았다. 이젠 1분 초읽기 3회에 의존해서 둬야 한다. 초읽기를 잘 모르시는 분을 위해 설명하면 1분 초읽기 3회라는 것은 1분을 세 번 준다는 것이다. 1분 안에 두면 3번의 1분이 계속 남아있다. 그러나 1분을 초과하면 1분 하나가 없어지고, 또 1분을 초과하면 1분 하나가 없어서 마지막 1분만 남게 된다. 이때는 1분 안에 무조건 두지 않으면 시간패를 당한다. 흑 145의 시점에서 초읽기에 들어갔다. 이세돌 9단은 이젠 시간이 없다. 중앙 백의 엷음을 빨리 봉합하고 우상 쪽으로 달려가고 싶은데 알파고가 놔주지 않는다. 바둑이 점점 꼬이고 있다는 게 유창혁 9단의 진단이다. 흑 153에서 이 9단은 마지막 초읽기에 몰렸다. 좋은 응수가 보이지 않아 이 9단이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어제 한판은 상대를 잘 몰라서 졌다고 할 수 있지만 오늘은 그럴 수없다. 철저히 맞춤형 전략을 들고 나왔는데도 졌다면 더 큰 충격일 수 있다. 어려운 장면에서 백이 손을 빼고 154로 큰 곳부터 차지하고 본다.○ 14보(130~142)이세돌 9단이 중앙 백 일부를 이어가라는 알파고의 주문(129)을 뿌리쳤다. 백 130으로 아까부터 미해결 지역으로 남아있던 우상 귀에 손을 댄 것. 이 9단이 손을 까딱이며 계속 계가를 하더니 중앙보단 우상 쪽이 크다는 결론을 내린 것. 그렇다면 129는 실수였을까. 국후 검토에서 밝혀지겠지만 이런 계산은 이 9단도 정확한 편이다. 유창혁 9단은 “집으로는 우상이 당연히 큰데 두터움으로 치면 중앙이 크다”며 “이 9단은 중반 이후 계속 쌓아온 두터움을 집으로 바꾸는 과정이라 생각한 것 같다”고 말했다. 프로기사들의 해설은 백이 좋다는 쪽이지만 한켠에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어제 하도 알파고의 예상을 뛰어넘는 실력에 당한 탓인지 조심스럽다. 이세돌 9단은 한 수를 둘 때마다 계속 계가를 반복하고 있다. 이상한 일이다. 알파고는 좀처럼 뒤쳐지는 법이 없다. 기분상으로는 많이 따돌렸다 싶은데 돌아보면 바로 뒤에서 씩 웃고 있다. 사람을 질리게 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이다. 중앙에서 또 한번 격변이 일고 있다. 백 140으로 먼저 선수활용하고자 했는데 흑이 바꿔치기를 하자면서 141로 끊고 나왔다. 기분 나쁜 수다. 그러자 이세돌 9단도 아예 손을 빼버리고 백 142로 우하 쪽 큰 끝내기를 둔다. 서로 의도를 거스르고 있는 상황. 점점 승부가 미궁 속으로 빠지고 있다.○ 13보(121~129)이세돌 9단이 백 126까지 하변을 도려내면서 실리에는 확실한 우세를 차지했다. 오늘 하루 종일 참던 이세돌 9단이 마지막으로 폭발한 것. 타개의 명수인 이세돌 9단이 과연 중앙 백 대마의 생사를 걸고 도발한 것인데 그 결과가 주목된다. 집균형은 완전히 무너졌다. 이제 알파고는 중앙 백 대마 공격에 온 힘을 다 쏟아야 한다. 온 힘은 컴퓨터에 맞지 않고 온갖 계산을 쏟아부어야 한다. 그런데 알파고는 잡을 수 없다고 본 것일까. 중앙 공격 대신에 우하 중앙 흑을 단속한다. 이현욱 8단은 “알파고가 너무 여유롭다”고 지적한다. 즉, 한가한 곳에 뒀다는 얘기. 그렇다면 이세돌 9단의 승부수가 성공했다는 뜻일까. 이현욱 8단은 “지금은 반면 3,4집 정도 차이처럼 보인다”며 “사람 같으면 거의 끝났다고 할텐데 끝내기에 강한 알파고가 어떤 수를 들고 나올지 몰라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현욱 8단은 “이 바둑을 역전당한다면 사람 입장에선 답이 없게 된다”고 말했다. 결국 백이 정상적으로 마무리하면 승리가 눈에 보인다는 것이다. 흑 129도 좀 까다로운지 이 9단이 남은 시간을 물쓰듯 쓰고 있다. 이 9단은 이제 8분여 남았다.○ 12보(108~120)이세돌의 인내가 과연 결실을 맺을까. 오늘 어찌보면 비굴할 정도로 참아왔던 이세돌 9단이 점점 승리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중앙에서 공방이 벌어지고 있지만 국면의 초점은 우상귀. 누가 먼저 손을 대느냐가 관건이다. 물론 손을 대는 쪽이 유리하다. 지금 흐름으로 보면 이세돌 9단이 먼저 착수할 가능성이 크다. 백 112가 선수의 곳. 그런데 흑이 이곳을 받고 있어서는 당연히 우상귀는 백의 차지가 된다. 불리할 수 있다고 본 알사범(알파고)는 계속 강수를 날린다. 흑 113도 그럴 듯하다. 물론 당장 성립한다고는 볼 수 없지만 이렇게 받기 까다롭게 둬 놔야 변수가 생긴다는 것이다. 유창혁 9단도 “날카롭다”는 감탄을 여러차례 하고 있다. 119을 두기 전에 알사범의 장고가 길어지고 있다. 드디어 둔 119. 그러나 여기서 흑이 뭔가 해내기는 어려워보인다. 이세돌 9단, 참고 참던 그가 여기서 참지 않고 화를 낸다. 하변에 선착한 것. 중앙은 살아 있다는 뜻일까. 아니면 그냥 중앙을 받고 있다간 질 수도 있다는 뜻일까. 살 떨리는 승부처를 맞이했다.○ 11보(101~107) 흑 101이 또 한 번 의의의 수. 그런 수를 어떻게 생각해내는지가 궁금한 상황이다. 이런 수는 수읽기로 두는 수가 아니다. 30분 씩 장고를 해도 찾기 힘든데 고작 1분도 안걸려 둘 수 있다는 게 놀랍다는 것이다. 일단 상상을 초월한 수여서 일단 나쁘게 보인다. 하지만 유창혁 9단은 “전혀 일리가 없는 수는 아니다”라며 “묘한 수인 건 분명한데 막상 응수하려고 하면 까다롭다”고 말했다. 여기서 알파고는 또 흑 103이라는 놀라운 수를 선보인다. 이미 프로기사들이 좋지 않다고 결론 내린 수. 이세돌 9단도 이미 수읽기를 마쳤는지 바로 104로 끊어간다. 여기서 이 9단이 또 한번 득을 본다면 승부는 거의 결정될 것 같다. 마지막 승부처로 보인다. 어쨌든 백이 기분 좋은 싸움이다. 여기서 백 106은 인내의 수. 오늘 이세돌 9단 정말 많이 참는다. 확실히 이겼다고 할 정도는 아닌데 우세를 더 확보하기 위한 수보다는 현재의 우세를 지키는 수를 두고 있다. 흑 107이 날카롭다. 유창혁 9단은 “몇 번의 실수가 있었지만 지금은 일류프로처럼 두고 있다”며 “107과 같은 수는 이세돌 9단이 평소 즐겨두는 수”라고 말했다. ○ 10보(91~100)흑이 91로 칼을 뽑았다. 알파고의 공격이 시작된 것. 부분 수읽기가 강하다고 알려진 알파고의 실력을 제대로 가늠해볼 시점이다. 유창혁 9단은 “감각적 대목에는 약간 문제가 있는 듯 하지만 부분 수읽기는 역시 강하다”고 진단한다. 처음부터 감각 이상으로 잘못된 길로 접어들지 않는 한 실수가 없다는 것이다. 상변 흑 97 때가 어려운데 이세돌 9단은 상변 백 한 점을 살리지 않고 백 98로 중앙으로 달아나며 타협을 택한다. 아직 자신이 유리하다고 보는 것. 이어 백 100으로 두텁게 두며 중앙을 정리한다. 이세돌 9단이 돌부처 이창호 9단처럼 두는 장면이다.○ 9보(80~90)이세돌 9단이 드디어 상변을 뛰어들었다. 백 80. 이 돌이 어떻게 살아가는지가 중반의 골격을 결정지을 듯 하다. 그런데 흑 81이 아마 이 9단의 머리 속에 없던 수. 유창혁 9단은 인공지능이 이런 수를 둔다는 것이 놀랍다고 감탄한다. 그냥 백을 몰아가면 불리할 것으로 보이니까 멀리서 포위하며 크게 공격하겠다는 뜻이다. 일류급 프로만이 가질 수 있는 안목이라는 것이다. 어려운 장면이 계속 되고 있다. 이세돌 9단은 평소 타개에선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기사다. 이 바둑에서 상변 타개 역시 평소같으면 자신있게 둘텐데 지금은 조심에 조심을 거듭하고 있다. 그만큼 알파고의 부분 수읽기가 뛰어난 것을 의식하고 있다. 지금 백 집은 50집, 흑 집도 50여집 남짓이어서 여전히 덤을 낼 수 없는 상황. 그래서 흑(알파고)도 상변 백 말 공격을 통해 성과를 내지 않으면 안된다. 백 90까지 좌변에서 알파고(흑)가 선수를 한 뒤 이젠 백을 공격할 태세다.○ 8보(69~79)이세돌 9단은 형세가 확실히 유리하다고 보고 있다. 중앙 공격은 도외시하고 실리를 챙기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는 적어도 오늘은 기세의 승부사가 아니다. 해설자들 역시 호의적 평가를 주지는 않고 있다. 아무리 유리하다 해도 공격할 건 공격해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 알사범(알파고의 별명)을 의식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세돌이 여러번 공격을 참자 알사범의 흑 73이 참 좋은 수가 됐다. 백 74로 급소를 찔러간 수가 여전히 아프지만 흑 73이 오기 전보단 아픔이 덜하다는 평가다. 지금은 상변 흑 집을 얼마나 지울 수 있느냐가 승부의 관건이다. 형세가 이세돌 9단에게 나쁘진 않은데 좋은 기회를 놓친 것이 어딘지 기분 좋지 않다는 유창혁 9단의 설명이다. 지금은 상변 흑 진으로 쳐들어가 가야할 시점. 백은 78, 흑 79를 교환하고 생각에 골몰하고 있다.○ 7보(61~68)백이 유리해진 것은 분명하다. 좌하귀에서 실패한 알사범(알파고의 별명)은 흑 61로 응수를 묻는다. 이세돌 9단이 반발하면 싸움이 커지는데 이 9단은 백 62로 다시 한번 꾹 참는다.확실히 어제의 학습 효과가 있다. 참고 기다리다가 알파고의 실수가 나오면 응징한다는 것이다. 오늘은 일단 좌하귀에서 그런 효과를 봤다. 흑 63에도 백이 중앙 흑을 공격하면 기분이 좋을 텐데도 백 64로 또 참는다.기세하면 이세돌인데 오늘은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며 유창혁 9단은 웃는다.흑이 65로 젖히자 또 받는다. 유창혁 9단은 “여기는 전혀 받고 싶지 않은 곳인데…”라며 말끝을 흐릴 정도다. 과거 이창호 9단이형세가 유리할 때 두는 모습처럼 두고 있다. 이세돌 9단은 원래 이창호 9단과 전혀 기풍이 반대인데 오늘만큼은 이창호 기풍처럼 두고 있다.알사범은 이곳 저곳을 선수(?) 처리한 뒤 흑 67로 상변을 지킨다. 중앙이 굉장히 엷지만 상변을 빼앗기면 희망이 없다고 보고 이곳 먼저 지킨 것. 확실히 알사범이 전체를 보는 시야는 좋다. 그럼 이제 이세돌 9단의 장기인 공격이 발휘될 때인데, 지금까지 두는 스타일을 보면 과연 공격을 가겠느냐는 지적이다.집을 세보면 상변 흑 집이 40집이 나면 계가. 역시 이 9단은 공격을 하지 않고 백 68로 정말 두터운 자리를 두어간다. 아, 이세돌의 옛 모습은 사라지고알파고를 이기기 위한 전략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이 9단이 이기면 이 수들은 다 두터운 수가 되고 지면 발 느린 수가 된다.○ 6보(49~60)좌하귀 싸움에서 이세돌 9단은 확신을 가진 듯 거의 노타임으로 일관하고 있다. 흑 51에 대해서도 백 52로 단수치는 수를 두는 손길이 힘차다. 유창혁 9단도 “이세돌 9단이 좋은 흐름을 탔다”며 “이 변화에서 백이 유리해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러나 유 9단은 “알파고가 실수했다 해도 방심해선 안된다”며 “어제도 알파고의 실수로 유리해진 뒤 마음이 풀어져 실착이 잦았다”고 말했다. 어쨌든 좌하 변화는 알파고의 무리수를 이 9단이 적절히 응징하고 있다. 이현욱 8단도 “흑이 어떤 변화로 가도 백이 유리하다”고 설명했다. 알파고의 종잡을 수 없는 실력에 해설은 하는 유창혁 9단, 이현욱 8단도 대략 난감한 표정. 이세돌 9단은 이곳의 변화를 이미 예상하고 있다. 알파고가 둘 때마다 계속 시간을 들이지 않고 즉시 응수하고 있다. 60수까지 좌하 변화가 일단락됐는데 반면 승부, 즉 흑이 덤 7집반을 낼 수 없는 상태라고 한다. 프로끼리의 대국에서 이 정도 차이가 나면 승부가 벌써 끝났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인데 어제 알사범(알파고의 별명)이 보여준 괴력을 감안할 때 아직 속단은 이르다는 것이다. ○ 5보(38~48)이세돌 9단이 15분 정도의 장고 끝에 백 38로 밀어올렸다. 흑이 어깨 짚은 수(37)의 밑으로 받을 것이라는 예상이 우세했지만 위로 민 것이 전투적 자세라는 평. 이때 알사범(알파고의 별명)이 드디어 도전장을 내밀었다. 흑 41은 보통 백 42와 교환돼 악수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시각으론 당연히 둘 수 없는 수. 그런데 알사범은 흑 43으로 좌하 흑 두 점을 이어 전투를 원하고 있다. 이런 대목은 인간의 수법에는 없는 방법이니까 스스로 학습한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현욱 8단은 인간 생각이라고 전제하면서 “지금부터 파생되는 몇 가지 변화들을 살피면 흑이 유리한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세돌 9단도 이제 맞받아치지 않을 수 없다. 더 이상 물러서는 건 자존심 상 허락하지 않는다. 국면은 점차 복잡한 장면으로 흘러가고 있다. 백 46에 알사범은 흑 47을 노타임으로 둔다. 이를 본 이 9단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건 안되는 수인데 왜 이렇게 두지”하는 표정이다. 그러더니 바로 백 48로 나가 끊는다. ○ 4보(32~37) 오늘 바둑은 어제와는 정반대다. 이세돌 9단이 어제는 초반부터 오버페이스 하듯 전투적인 수를 많이 뒀는데 오늘은 두텁고 침착한 수를 두고 있다는 것. 그러나 유창혁 9단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하변에서 흑이 이상한 수를 뒀는데 그를 제대로 응징하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백이 불리하다고 보긴 힘들다고 덧붙였다. 조금 더 좋아질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세돌 9단이 잠시 자리를 비울 때 알사범(알파고의 별명)의 신수가 또 나왔다. 흑 37. 이런 형태에서 어깨 짚는 것은 처음 본다는 설명이다. 좌변 백 집을 굳혀줘서 두기 싫은 수인데 알사범은 어제에 이어 이런 수에 대한 결단이 빠르다. 부분적으로 본다면손해인데 전체적으론 나쁘지 않을 수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어제 알사범이 이기자 알사범의 수를 이해하려는 분위기가 강하다. 유창혁 9단은 “어제 대국 중에 좀 이상하다고 봤던 수들이 나중에 찬찬히 검토하니 나름 의미가 있었다”며 “그런 게 알파고의 능력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현욱 사범도 “인간 바둑계에선 이해하기 힘든 수들이 오늘도 자주 나온다”고 말했다. 흑 37의 의외의 수에 이 9단이 장고를 하고 있다. 오늘 바둑에서 이 9단은 초반부터 시간을 많이 쓰고 있다. 알파고보다 15분 가까이 많이 사용했다. 어제 초반에 빨리 두다가 일격을 맞은 게 역시 의식이 되는 것 같다. 이 9단의 장고가 10분을 넘어서고 있다. 보통 이세돌 9단은 발빠르게 두고 상대가 공격해 오면 맞받아치는 스타일인데 오늘은 두터움으로 일관하고 있다. ○ 3보(21~31)알파고는 세팅이 돼 있는지 한 수를 1분 안팎에 둔다. 어려운 장면이나 쉬운 장면이나 마찬가지. 어제도 똑같았고 알파고가 제한시간을 5분 남긴 채 끝났다. 좌하귀 정석이 진행되고 있는데 이세돌 9단은 두터움을 중시하는 정석을 택했다. 어제 초반 전투에서 알파고의 강력함을 깨달았기 때문에 오늘은 신중한 선택을 하고 있다. 이현욱 사범은 “어제 알사범이 보여준 장점은 탁월한 균형감각으로 부분 전투에서 손해보더라도 결국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알사범은 프로기사들이 알파고에 붙여준 별명. 흑 29가 호수. 유창혁 9단은 이세돌 9단이 여기를 먼저 차지하는 방법을 연구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좌하 정석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얘기다. 두텁긴 한데 흑 29가 오니까 빛이 바랜 느낌이라는 것. 백 30으로 좌변을 지키고 흑도 31로 좌상을 지켜 포석이 거의 일단락되고 있다. 어제 초반 전투와 달리 오늘은 너무 차분하다. ○ 2보 (10~20)알파고의 흑 13이 처음 보는 수. 보통 흑 11, 백 12를 교환한 뒤에는 하변을 벌리는 것이 보통이다. 만약 13으로 가려면 흑 11, 백 12를 교환하지 않는 것이 상식적이다. 하지만 알파고는 인간의 상식을 넘어서고 있다. 흑 15도 의외의 수. 이렇게 들여다보는 수는 프로바둑에선 맛을 없앤다고 해서 악수로 평가받는다. 유창혁 9단은 “흑 13, 15를 보면 알파고가 약한 것 아니냐는 느낌이 드는데 어제 대국도 그렇지만 이런 수들로 인해 약하다고 방심해선 안된다”고 설명했다. 백으로선 16로 잇는 것은 당연. 알파고 흑 17의 좌하 정석도 옛 버전이다. 사이버오로 해설을 하는 이현욱 8단은 “프로기사들은 알파고를 알사범으로 부른다”며 “알 사범이 오늘도 이긴다면 기존에 프로기사들이 알고 잇는 이론을 전부 다시 써야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알파고는 오늘도 예측하기 힘든 수들을 계속 두고 있다. 최근 바둑계 경향으로 보면 어딘지 어설픈 수들인데 이 9단은 손이 빨리 나오고 있지 않다. 어제 빨리 두다가 당한 경험이 있어서 일 것이라는 유창혁 9단의 분석. ○ 1보(1~10)대국은 오후 1시 정각에 시작됐다. 이세돌 9단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짙은 감색 양복에 하늘색 와이셔츠를 입었다. 이 9단이 평소 즐겨입는 옷이다. 알파고는 첫수를 우상귀 화점에 뒀다. 알파고는 지난해 10월 판후이 2단 대결 5번을 비롯해 어제 1국까지 첫수는 무조건 화점에 뒀다. 이는 소목 등 다른 곳보단 가장 변화가 적기 때문. 초반이 약한 알파고로선 화점을 최적의 선택으로 판단한 것이다.이 9단은 좌하귀 화점에 뒀고 이어 알파고는 좌상 소목, 이 9단도 우하 소목으로 뒀다. 혹시 이 9단이 흉내바둑을 염두에 두고 있는 건 아닌지 싶을 정도로 똑같은 모양이다. 해설을 맡은 유창혁 9단은 “어제 이세돌 9단이 평소보다 많이 흔들렸다”며 “컴퓨터라는 걸 염두에 두지 않고 자신의 바둑을 두는 게 좋다”고 말했다. 유 9단은 “그동안 알파고 같은 컴퓨터 프로그램은 초반 약하고 수읽기가 강하다는 평가였는데 어제는 오히려 초반이 강하고 사활에서 살짝 실수하는 모습이어서 예측과는 많이 달랐다”며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백 10까지 진행된 포석은 90년대 초반 유행했던 포석. 알파고의 포석이 옛날 모양이 많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백을 잡은 이세돌 9단은 일단 흑이 하자는 대로 받아주고 있다. 백 10을 둘 때 해설장에 이세돌 9단의 부인 김현진 씨(33)과 딸 혜림 양(10)이 등장해 카메라 세례를 받았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사실, 충격적이다. 구글 알파고에게 진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패배해서) 너무 놀랐다. 바둑 면에서 이야기하면 초반의 실패가 끝까지 이어졌다.” 9일 이세돌 9단은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포시즌스 호텔에서 구글 알파고와의 바둑 대국 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시종일관 떨리는 목소리로 “알파고의 실력에 놀랐다”고 소감을 전했다. 이 9단은 대국 종료 후 40분 뒤 굳은 얼굴을 한 채 간담회장에 들어선 뒤 착잡한 얼굴로 기자들의 질문에 답했다. 그는 “알파고가 초반에 경기를 힘들게 가져가지 않을까 생각했다”면서도 “알파고가 게임을 풀어가는 능력과 사람으로 치면 도저히 둘 수 없는 수로 승부수를 던진 점에 대해 놀랐다”고 했다. 그는 알파고와의 도전을 받아들인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는 외신 기자의 질문에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오늘 즐겁게 바둑을 뒀다”고 말했다. 이 9단은 알파고와의 대국 중간 평소 대국에서 볼 수 없었던 당황한 표정들을 보였다. 그의 스승인 권갑용 8단은 대국 중 긴장한 듯 웃거나 굳은 표정을 짓는 이 9단을 보면서 “세돌의 저런 표정은 처음”이라고 할 정도였다. 이 9단은 다만 첫날 대국에서 패배했지만 남은 네 번의 대국에 대해서는 자신감을 보였다. 그는 “(알파고의 대국 패턴을 알게 된) 이제야 비로소 승률은 5대 5”라며 “오늘 포석에서 실패했기 때문에 졌지만 그런 점을 보완한다면 승산이 있지 않을까 한다”고 말했다. 또 “판후이 2단과 비교했을 때 (나는) 세계 대회 우승도 했고 실전 경험 자체가 달라 1국을 졌다고 해서 크게 흔들리는 일은 없다”고 덧붙였다. 판후이 2단은 지난해 10월 알파고에게 5대 0으로 패배한 중국의 프로 바둑기사다. 자신에게 알파고가 어떤 존재냐는 질문이 나오자 이 9단은 턱에 손을 괴고는 “정말 놀라움을 선사한 알파고지만 지금 어떤 존재인지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다”고 답했다. 이 9단과는 달리 검은색 티셔츠를 맞춰 입은 구글 알파고 팀원들은 승리에 대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데미스 하사비스 구글 딥마인드 최고경영자(CEO)도 마찬가지였다. 하사비스는 승부가 결정된 직후 자신의 트위터에 “우리가 달에 도착했다”며 “우리 팀(알파고팀)이 매우 자랑스럽다”는 글을 남겼다. 그는 “오늘은 역사적인 순간이며 알파고의 경기 결과를 기쁘게 생각 한다”며 “이세돌 9단의 전투적이고 창의적인 스타일 때문에 오늘 게임이 흥미진진하고 긴장감이 넘쳤다. 그에게 거대한 존경심을 표한다”고 말했다. 알파고 개발 책임자 데이비드 실버 박사는 “오늘 대국에서 알파고는 모든 순간순간마다 자신이 보유한 한계치까지 가야만 했다”며 “오늘 이룬 업적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며 이 9단에게 깊은 존경심을 느낀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에 대해 이 9단도 “제게 바둑적인 존경심을 표하셨는데 저도 알파고를 만든 두 분(하사비스, 실버)께 깊은 존경심을 전하고 싶다”고 화답했다.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지난달 29일 막을 내린 제88회 아카데미는 ‘역대급’으로 탈도 말도 많았던 시상식이었다. 시상식 이전부터 주요 부문에 단 한 명의 흑인 후보자도 없어 ‘오스카는 너무 하얗다(Oscar So White)’는 비판이 불거졌다. 논란 속에 치러진 시상식의 하이라이트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로 도전 20년 만에 오스카를 거머쥔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의 수상이었다. 영화음악의 전설로 불리는 엔니오 모리코네의 한참 늦은 수상도 빠질 수 없다. 6번째 도전 끝에 영화 ‘헤이트풀8’로 오스카를 받은 88세 노장은 “아카데미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에게 감사한다”는 소감을 밝혔다. 외신에 따르면 모리코네는 ‘타란티노의 계략’에 빠졌다. 당초 그는 이 작품의 음악을 맡지 않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이를 눈치 챈 타란티노가 모리코네의 부인에게 시나리오를 전달했고, 부인이 남편을 설득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아카데미의 또 다른 볼거리는 무대에 오른 스타들의 말 말 말이다. “레버넌트를 촬영한 2015년은 지구온난화가 가장 심했던 해다. 인류 모두에게 커다란 위협이기 때문에 함께 나서야 한다.” 스태프에 대한 감사에 이은 디캐프리오의 말은 배우를 넘어 인간의 품격을 보여줬다. 이런 공감은 2010년 아이티 대지진 때 현지에 살다시피 했던 배우 숀 펜처럼 그가 평소 환경문제에서 보여준 삶의 궤적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아카데미 스피치의 촌철살인(寸鐵殺人)은 어쩔 수 없이 인종차별에 맞춰졌다. “피부색이라는 것이 머리카락 길이만큼이나 의미 없길 바란다.”(감독상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보이콧해야 한다고? 내가 실업자라 그만둘 수가 없다.”(흑인 사회자 크리스 록) 오스카가 보기엔 황금빛이지만, 그 속살이 흰색이라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동아일보 영화팀이 2000∼2015년 16년간의 남녀 주연상, 조연상, 감독상, 작품상 등 주요 7개 부문을 최근 조사한 결과 흑인에게 돌아간 상은 11개에 불과했다. 그나마 1929∼1999년의 총 4개와 비교하면 나아진 것이다. 아카데미의 본질이 할리우드 영화 산업을 위한 이벤트 중의 이벤트라는 걸 감안하면 놀라운 결과가 아니다. 이번 시상식에서 흑인 MC와 일부 유색인종에 대한 배려는 ‘눈치 없이’ 단 한 명의 흑인 후보도 내지 못한 아카데미 스스로의 반성문 아닐까. 그럼에도 한때 영화를 담당했던 입장에서는 아카데미가 부럽다. 이런저런 사정을 다 알면서도 기사를 써야 하는 아카데미의 상품성이 얄밉지만 부럽다. 그 상품성에는 상을 준 아카데미는 물론이고 정부에 대한 비판, 지구 차원의 이슈에 대한 발언, 치부마저 고백하는 스타들의 솔직함과 유머까지 포함돼 있다. 반면 대종상을 비롯해 국내에서 치러지는 각종 시상식을 지켜보면 화려한 쇼와 영상 등 볼거리가 적지 않음에도 허전함을 지울 수 없다. 축제의 백미는 당연히 수상자의 육성이다. 하지만 국내 스타들의 소감은 주체할 수 없는 눈물에 이어 스태프는 물론이고 머리를 만져준 헤어 디자이너까지 언급하며 “고맙다”고 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지금 오장육부가 배 속에서 온통 즐겁게 떠들고 있네요. 아마 제가 수상한 것이 기쁜가 봅니다.” 말더듬이 국왕을 연기한 ‘킹스 스피치’로 2011년 남우주연상을 받은 콜린 퍼스의 말이다. 말더듬이에서 달변가로의 변신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그래도 이제는 눈물과 고맙다로 채워진 소감보다는 다른 것을 기대한다. 무슨 말이든 못 하랴, 상 받은 날에.김갑식 문화부장 dunanwor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