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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 끝을 달려가는 요즘 문화계의 가장 뜨거운 화제의 하나는 가수 나훈아(70)와 아이돌 ‘방탄소년단(BTS)’이다. 숱한 루머 속에 은둔했던 나훈아의 11년 만의 복귀 무대는 여전히 ‘핫’ 했다. “나 그동안 힘들었다. 이해해줄 거지? 오늘 밤 나한테 맡겨라. 내 노래 들으면 암도 낫는다”라는 식의 그의 발언은 과장이지만 공연은 명불허전이었다. 10일 서울 고척돔 공연을 끝으로 해외 순회공연 시리즈를 마무리한 BTS는 아메리칸 뮤직 어워즈 축하 무대에 이어 유명 토크쇼 출연,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인 핫 100 진입 등을 통해 미국 본토 시장에 본격적으로 상륙하며 싸이 이후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다. BTS의 트위터 팔로어는 ‘천만대군’으로 불리는 등 강력한 팬덤을 형성했지만 이는 또 다른 차원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전설과 현재의 대세가 ‘통(通)’할 수 있을까? 어느 쪽이든 “감히 우리 오빠와 ‘엮다니’”라는 말이 나올 일이다. 그래도 이런 주제로 나눈 임진모 송기철 미묘 등 음악평론가들과의 대화는 흥미로웠다. 나이와 경력, 활동 무대와 이미지 등에서 너무 달라 연결점이 없어 보이지만 몇 가지 공통점이 나왔다. “연령층은 다르지만 모두 여성층에서 강력한 팬덤을 갖고 있죠. 나훈아는 중장년 이상, BTS는 10대에서 그렇죠.”(임진모) “‘완벽주의.’ 나훈아는 그 연배에서는 드물게 자신의 노래를 작사, 작곡하는 싱어송라이터죠. 게다가 무대 연출은 물론이고 조명 각도까지 직접 챙길 정도로 철두철미합니다. 그의 완벽주의가 개인적 능력에서 나오는 반면 BTS는 기획사에 의해 시스템으로 뒷받침돼 있죠.”(송기철) “나훈아 팬덤의 키워드는 한국인, 그중에서도 경상도 사나이의 진정성입니다. BTS는 젊은 세대가 공감하는 노래의 메시지와 개인이 아니라 ‘우리는 원 팀’이라는 이미지가 호소력을 갖습니다.”(미묘) 무엇보다 세대를 뛰어넘어 이들을 통하게 만드는 것은 음악의 설득력이다. 나훈아의 음악은 트로트에 기반을 뒀지만 그 틀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변주했다. 좋지만 따라 부르기는 어려운 노래가 있는데 그의 곡들은 좋으면서도 따라 부르기 쉽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영영’ ‘잡초’ ‘무시로’는 많은 이들의 애창곡이 됐다. BTS가 큰 반향을 얻은 것은 팬덤과 글로벌 스탠더드에 도달한 음악과 퍼포먼스의 수준뿐 아니라 ‘플러스알파’가 있다는 점이다. 가요 시장의 다양성을 말살시킨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성장해 온 아이돌 음악의 진화가 그 배경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미국 팝을 따라하면서도 한국화에 성공했다는 평가다. 모방의 단계에서 진화해 독특한 장점이 만들어졌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BTS의 성공 요인으로 꼽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SNS상에서의 음악 소비 행태는 오프라인에 비해 훨씬 빨리 이뤄지기 때문에 음악의 설득력이 없으면 팬들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지 않는다. 더 엉뚱한 질문이다. 나훈아가 BTS처럼 시스템적인 뒷받침이 있었다면 글로벌 무대에서 성공했을까? 과거 야구팬들 사이에 최동원 선동열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면 통했을까를 따지며 갑론을박을 벌였던 것처럼 말이다. 트로트와 발라드 장르의 속성상 정서의 벽을 넘기 어렵다는 게 중론이었다. 그가 좀 더 이른 시기에 해외시장에 관심을 가졌다면 일본과 동남아 시장에서는 반응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희망 섞인 위로도 나왔다. ※‘감히, 우리 오빠를’이라는 얘기가 어느 쪽에서 더 많이 나올지 궁금하다. 이런 접근법 자체가 풍성해진 우리 문화 덕분 아닌가 싶다.김갑식 문화부장 dunanworld@donga.com}

#22일(현지 시간) 오후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의 머제스틱 극장에는 50m가 넘는 긴 줄이 늘어섰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을 기다리는 인파였다. 섭씨 2, 3도의 기온은 차가운 바람을 만나 한겨울을 연상시켰다. 하지만 뉴욕의 그 유명한 ‘유령’을 찾아온 이들의 표정은 즐거웠다. 공연 끝날 무렵에는 공연장 주변을 급하게 빠져나갈 손님을 태울 인력거들도 하나, 둘 자리를 잡았다. 묘한 데자뷔가 느껴졌다. 2001년 이 작품의 국내 초연을 앞두고 같은 극장에서 공연을 관람했다. 당시에도 이 작품은 브로드웨이 초연 이후 14년째 공연 중인 히트 상품이었다. 이미 말로는 전해 들었지만 300kg이 넘는 샹들리에가 객석을 향해 떨어질 때 터져 나오던 객석의 놀라움과 감탄의 비명조차 생생하다. 16년이 지난 뒤 처지는 달라졌다. 주변 건물의 문을 바람막이 삼아 “공연아, 어서 끝나라”고 주문을 외는, 딸을 기다리는 아빠가 됐다. 여전히 비싼 티켓 가격에 같이 볼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추억을 떠올리며 내심 보고 싶었지만 이미 몇 차례나 봤다며 사양했다. 모처럼 큰마음 먹고 여행 왔는데 ‘이것도 투자’거니 생각했다. 다만, 30대 중반의 아빠가 느꼈던 그 문화적 충격을 10대 후반의 딸도 체험할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공연과 관련한 대화는 짧았다. 아빠: 공연 어땠니? 샹들리에 떨어지는 장면은 놀랍지 않아? 딸: 볼만했어. 쉬는 시간, 조명이 켜진 상태에서 샹들리에를 다시 올려 좀 ‘깨더라’. 그런데 배도 고프고 추워.(뭐라, 그게 전부니. 뮤지컬의 매력이 이런 것인 줄 몰랐다, 다시 보고 싶다, 문화상품의 힘이 이렇게 대단한 줄 몰랐다, 이런 대답이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 나도 춥다, 추워) ##하루 전 뉴욕 맨해튼 남서쪽의 하이라인 파크를 찾았다. 이곳은 서울역 앞 고가에 조성된 ‘서울로 7017’의 모델이 된 곳이다. 2014년 마지막 구간이 완공된 이후 단숨에 뉴욕의 명소가 됐다. 낡은 철로의 흔적과 나무, 꽃 등이 어우러져 황량한 건물 사이로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아빠: 여기가 서울역 앞 고가 길의 원형이야. 낡은 철로 보이지. 대단하다. 이런 아이디어가 21세기 세상을 바꾸는 거지. 딸: 그래, 그렇구나. (뭐, 그게 다야. 침 튀기며 소개하면 서울역 앞도 한번 가자고 해야지) ###24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남쪽으로 1시간 남짓 거리에 있는 어바인시의 한 대형 쇼핑몰을 찾았다. 이날을 시작으로 미국 내에서 한 해 소비의 20% 안팎이 발생한다는 블랙프라이데이였다. 평소 쇼핑을 귀찮아하는 편이지만 함께 보고 싶은 현장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주차장의 빈 공간을 찾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쇼핑몰은 어깨가 쉽게 부딪칠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다. 계산할 때도 긴 줄서기가 필수였다. 아빠: 정말 사람 많다. 말 그대로 미국 자본주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네. 여기 바로 한국서 분위기 보겠다고 온 사람들도 있으니. 딸: 잠깐, 지금 바빠. 온라인에 여기보다 더 싼 물건 나왔거든. (정말? 손 참 빨리 움직이네. 할 말 없다) 나중 확인한 내용이지만 올해 온라인의 블랙프라이데이는 더 뜨거웠다. 온라인 판매는 전년에 비해 17.9% 증가해 사상 최고였고, 이 중 40%가 ‘손가락(모바일) 쇼핑’이었다. 집안이 화목하고 자녀 교육이 잘되려면 아버지의 침묵이 필수라는 말까지 도는 세상이다.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그런 분위기가 못마땅하지만 정작 대화의 기술은 한참 부족하다. 이른바 교과서 같은 말들이 대화를 막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딸들의 혼잣말을 못 듣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김갑식 문화부장 dunanworld@donga.com}

‘야생야사’, 야구에 죽고 사는 야구팬들은 요즘 사는 게 권태롭다. 호랑이와 곰이 만난 최초의 단군시리즈는 KIA 타이거즈가 판타스틱4를 앞세운 두산 베어스를 4승 1패로 꺾고 우승을 차지하며 막을 내렸다. 야구에 관한 대화라면 부자(父子) 관계에 있어야 하는 존칭과 화법의 예의까지 때로 무시하는 게 우리 집 분위기다. 이번 시리즈에서는 야구를 처음 접하면서부터 응원해온 ‘인생의 팀’이 맞붙어 희비가 제대로 엇갈렸다. 누가 시즌 뒤 계약과 트레이드 소식이 많은 이 시기를 뜨겁다며 스토브(stove) 리그라고 했는가. 이따금 빅뉴스로 휴대전화의 가족 대화방에 문자 불꽃이 튀지만 지루한 겨울잠일 뿐이다. 한 시즌에 한국은 144경기, 미국 메이저리그는 장장 162경기를 치른다. 광적인 팬들의 라이프사이클은 여기에 맞춰진다. ‘야구 금단현상’이 일어날 지경이다. 야구 탓일까. 8월 광주시립발레단 예술감독으로 부임한 최태지 전 국립발레단장과 최근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눴다. “광주 생활은 어떠세요?” “월세살이야. 광주 사람 되려니 그동안 바빴어.” “거기 야구 때문에 요즘 분위기 좋죠?” “야구가 왜?” “8년 만에 11번째 우승인데….” 이럴 수가, 대화가 헛돌았다. “인구 147만 명 도시에 100만 관중이 들었어요”라는 말에 “대단하다. 야구가 그렇게 인기야? 야구 알아야 광주 사람 되겠구나”라는 답이 돌아왔다. 국립발레단에도 그 전성기를 연 판타스틱4가 있었다. 최 단장을 리더로 발레리나 김주원 김지영과 발레리노 이원국 김용걸이다. 1997년 러시아에서 갓 돌아온 10대 발레리나들이 파격적으로 주역 무용수에 발탁됐다. 이원국은 남성 발레의 대표작 ‘스파르타쿠스’의 2001년 국내 초연에서 타이틀 롤을 맡아 ‘발레리노의 교과서’라는 명성을 얻었다. 김용걸은 국립발레단을 발판 삼아 파리국립오페라발레단에 동양인 최초로 입단했다. KIA 김기태 감독의 리더십 키워드가 형님 또는 동행이라면 최 예술감독의 그것은 엄마 혹은 긍정이다. “우리 애들이 최고야. 얼마나 잘하는데…”라는 한없는 긍정과 엄마의 포용력으로 ‘양 김’ 발레리나를 세계 정상 수준으로 성장시켰다. 국립발레단 재단법인화 이후 정부 관리와의 쉽지 않은 예산 싸움도 그의 몫이었고, 해설이 있는 발레나 지방 소도시를 찾는 발레 대중화의 시발점도 그였다. 특히 러시아의 세계적 안무가 유리 그리고로비치를 초빙해 스파르타쿠스를 초연한 것은 우리 발레사의 한 분수령이 됐다. 지나치게 모신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남성 발레의 가능성이 확인됐고, 외국 안무가와의 협업도 잦아지면서 우리 발레의 수준 자체가 높아졌다. 판타스틱4 중 김주원 성신여대 무용과 교수의 기대는 이랬다. “최태지란 이름이 주는 효과가 정말 커요. 국립의 주역이던 이은원이 규모가 떨어지는 워싱턴발레단에 간 것도 줄리 켄트 단장 때문이죠. 성신여대도 그렇고, 내년 광주 오디션에 참가하겠다는 재능 있는 학생이 많아요.” 방송 활동에 이어 최근 연극 무대에도 섰던 그는 18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데뷔 20주년을 기념하는 ‘토크&콘서트’를 갖는다. 그는 “40세가 된 발레리나의 춤도 보여주고 얘기도 나눌 생각”이라며 “(최태지) 단장님이 부르면 저희가 가야죠. 패밀리인데”라고 했다. 17년 전 김지영과 함께 한 인터뷰에서 그는 “결혼은 서른 넘어서”라고 했지만 이제는 “55세?”라고 한다. 다시 혼자서 호호호 웃는다. 여심(女心)도 발레도 미스터리다. 어쨌든 발레의 판타스틱4는 봄날 광주에서의 재회를 기다리고 있다. 야구에 이어 광주의 ‘춤바람’을 기대해 본다. 김갑식 문화부장 dunanworld@donga.com}

간판스타란 말이 있다. 사전적으로는 어떤 분야를 대표할 만한 최고 수준의 기량을 갖춘 사람을 가리킨다. 단어의 속사정을 들여다보니 간판(看板)과 스타(star)가 합쳐진 말이다. 영화관 간판이 풍미하던 시절 나온 말이 아닌가 싶다. 한국 영화를 대표해온 간판스타는 누구일까? 지금은 다르겠지만 시간을 거슬러 갈수록 영화배우 강수연(51), 임권택 감독(81), 김동호 위원장(80)의 이름을 피해 갈 수 없다. 강수연은 여배우의 대명사였고, 임 감독은 한국 영화의 운명을 짊어진 개척자였고, 김 위원장은 영화 행정의 달인이었다. 강수연은 1987년 임 감독의 ‘씨받이’로 베니스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가 됐다. 수상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는 국내에서 수상 소식을 전해 들었다고 했다. 임 감독의 ‘아제 아제 바라아제’에서 삭발 연기를 펼친 그는 1989년 모스크바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김 위원장의 최근 직함은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이었지만 그냥 ‘위원장’으로 불렸다. 1996년 제1회부터 2010년까지 집행위원장으로 부산을 영화 도시로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수십 명이 참석한 모임에서 작은 목소리로도 사람의 마음을 얻어내는 조용한 리더십의 전형이었다. 참석자와 일일이 ‘원샷’을 하곤 했는데 한 바퀴가 아니라 때로 두 바퀴도 마다하지 않는 두주불사(斗酒不辭)의 호인이었다. 그러던 그의 금주 선언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건강을 지켜 부산영화제와 영화계를 위해 기여하고 싶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임 감독은 2002년 영화 ‘취화선’으로 감독상을 수상해 높기만 했던 칸 국제영화제의 벽을 넘어섰다. 1962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데뷔한 이후 2010년 102번째 영화 ‘화장’까지 한국 영화의 산증인이다. 최근 경기 용인의 자택에서 그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103번째 영화, 해야 하지 않냐”는 말에 그는 우선 몸이 좋아져야 한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면서 지난달 21일 폐막한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한 걱정을 드러냈다. “한 번도 안 빠지고 갔어요. 요즘 몸도 불편해 어지간하면 안 갔으면 했는데…. 김 이사장과 수연 양이 꼭 참석해야 한다고 해서요.” 그는 갈등 끝에 이번 영화제를 끝으로 물러난 김 이사장과 강수연 집행위원장이 사퇴한 것을 특히 아쉬워했다. “두 사람 모두 책임질 일보다는 공이 훨씬 많은데…. 이제 누구를 영화제 간판으로 하겠어요?” 임 감독과 부인 채령 씨가 들려준 얘기는 영화 ‘시네마천국’ 중 토토의 추억처럼 흐뭇하고 아쉽고 아름다웠다. 2015년까지만 해도 설날 다음 날 그의 집에서 영화인들의 모임이 열렸다. 거의 40년간 지속됐다. 임 감독의 작품에서 조감독을 거친 김영빈 김홍준 김의석 김대승 감독은 ‘직계’로 불리고, 배우 박상민 신현준 김승우 등은 ‘장군의 아들’ 팀이다. 부산국제영화제는 부부싸움의 원인이기도 했다. “생전 백화점 근처에도 안 가는 양반이 외국 손님 선물 산 카드 명세서 보면 화가 안 날 수 없죠. 밥값이며 그런 비용이 1000만 원 넘기도 했어요.”(채 씨) “국제 영화계에서 수십 년 만난 사람이 적지 않아요. 그들이 오면 제가 호스트죠. 허허.”(임 감독) 영화제를 보는 시각은 다를 수 있지만 두 사람의 내몰린 듯한 사퇴는 씁쓸하다. 이들은 우물 안 개구리 신세였던 한국 영화를 이끌어온 헌신적인 국가대표였다. 그 국제적인 명성과 경험은 제대로 살려야 할 우리 영화계의 자산이다.김갑식 문화부장 dunanworld@donga.com}

소설 ‘토지’로 잘 알려진 박경리 선생(1926∼2008)의 흔적이 오롯이 배어 있는 강원 원주시 토지문화관. 28일 제7회 박경리문학상 시상식이 열린 문화관 주변은 시상식을 알리는 여러 깃발과 주변의 알록달록한 단풍이 어우러져 가을 냄새가 물씬 풍겼다. 일찍 도착한 손님들이 자연스럽게 발길을 옮기는 곳이 문화관 옆 텃밭(사진)이다. 튼실한 배추와 요즘 보기 힘든 장독 행렬 때문이다. 이 텃밭은 선생이 가장 아끼던 장소였다. 밀짚모자를 쓴 선생은 글을 쓰지 않을 때면 이곳에서 땀을 흘리며 고추며 배추를 돌봤다. 반가운 것은 선생의 딸로 토지문화재단을 맡고 있는 김영주 이사장의 건강한 모습이었다. 암 수술과 치료를 받은 뒤였지만 밝은 표정이었다. “무엇보다 건강 챙기라”는 원창묵 원주 시장을 포함한 지인들의 덕담이 이어졌다. 딸은 어머니를 닮는다고 하나? 김 이사장은 노년의 선생과 몹시 닮았다. 외모만 닮은 게 아니다. 넉넉하게 사람들을 보듬어온 그 품도 그대로다. 다음 달 초 김장을 담그고, 그 김치는 문화관에 머무는 후배 작가들과 지인들에게 돌아간다.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조금 뒤늦은 감이 있지만, 우리 집의 추석 밥상머리 화두는 고구마였다. 정치며 집안 살림살이며 건강, 교육 문제는 뒷전이었다. 요즘 인터넷에서 고구마는 불협화음으로 꼬이는 상황을, 반대로 사이다는 시원하게 풀릴 때를 의미한다고 한다. 인터넷 고구마가 아닌 실제 고구마가 화두가 된 것은 집 앞 공터에 있는 어머니의 텃밭 때문이었다. 채소와 고구마, 감자 등을 심는 그 밭은 노모의 소일거리이자 선물 주머니였다. 최근 급격하게 허리와 무릎이 나빠진 어머니는 내심 예닐곱 이랑 심은 고구마를 캘 적임자로 추석에 오는 아들 손자를 꼽은 모양이다. 하지만 역시 무릎이 좋지 않은 아들의 대꾸는 퉁명스러웠다. “오자마자 웬 고구마를 캐냐.” 고구마성 발언이 나오자 불편한 얘기가 오갔다. 결국 추석 당일 꼭두새벽부터 호미를 들고 나가는 것으로 상황은 수습됐지만 1시간 반 동안 두 이랑 캐는 데 그쳤다. 이곳저곳 늘어진 줄기를 걷고, 호미로 고구마에 상처 내지 않고 캐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 해 전보다 더 굽은 노모의 허리를 보며 “고구마 먹지도 않는다. 텃밭 일 그만두라”고 구시렁거렸지만 텃밭의 최대 수혜자는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가든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오경아 씨의 책 ‘정원생활자’ 중에는 ‘옥수수, 콩, 호박의 세 자매 이야기’란 대목이 나온다. “미국의 일부 주에서 발행하는 1달러 동전의 뒷면에는 미국 원주민 여인과 함께 옥수수, 호박, 덩굴성 콩, 이렇게 세 종류의 작물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세 종류의 작물은 미국에서는 흔히 ‘스리 시스터스’, 세 자매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식물들이지요. … 혼자가 아니라 셋이 함께 심겨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식물입니다.” 문외한의 눈에 세 자매의 사연은 무릎을 칠 수밖에 없는 자연의 과학이다. 키가 큰 옥수수는 콩과 호박의 지지대가 되면서 비바람을 막아주고, 콩은 공기 중 질소를 빨아들인 뒤 뿌리로 보내 옥수수와 호박에 비료를 제공하고, 호박은 큰 잎으로 땅을 덮어 건조함을 막거나 추울 때 보온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수분을 도와주는 벌이 등장하면 네 자매다. 이 동전이 2009년 당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첫 임기가 시작될 무렵 공존과 화합의 상징으로 발행된 것도 의미심장하다. 최근 시작된 문재인 정부의 첫 국정감사에서 파열음이 곳곳에서 들리고 있다. 적폐 청산 또는 과거사 청산을 둘러싼 갈등이 주요한 원인이다. 여당은 박근혜-이명박 보수정권 9년의 적폐 청산을 벼르고 있고,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은 문 정부를 ‘신(新)적폐’, 노무현 김대중 정부를 ‘원조 적폐’로 규정하며 되치기에 나섰다.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다는 양측의 대치로 국감장 곳곳에서 고성이 오가며 파행도 이어지고 있다. ‘고구마 파동’이 가까스로 수습되자 추석 아침상 분위기는 여느 집과 비슷한 분위기로 돌아갔다. 큰 걱정을 던 노모의 말이다. “문제가 있다고 해서 정부랑 대통령이랑 싹 바꾸었는데 왜 밤낮으로 싸우기만 하냐. 이제 그만 싸울 때도 되지 않았냐. 고구마 줄기처럼 계속 나오는 과거만 파서 어쩌겠다는 건지….” 적폐를 그대로 두자는 국민은 없다. 문제는 그 정도일 것이다. 적폐 청산이 당리당략을 위한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돼서는 안 된다. 정치권이 서로에게 할 말이 있는 상황에서 과거 캐기에만 몰두하면, 우리 정치와 사회는 과거사의 미로에 갇힐 수밖에 없다. 공존과 공생, 토론과 합의, 대의와 양보가 어우러지는 지혜의 정원이 필요하다. 문재인 대통령, 그 정원을 가꾸는 첫 번째 정원사가 되어야 한다.김갑식 문화부장 dunanworld@donga.com}

거의 20년 전인 1998년 ‘최고의 밥상’이란 프로그램이 있었다. 요리에 관심 있는 동호인들이 출연해 자신들이 만든 요리로 우열을 가리는 형식이었다. 지금은 ‘먹방’이 오락과 교양 프로그램의 대세로 자리 잡았지만 당시에는 획기적 시도였다. 이 프로와 ‘꼬마 요리사’(1994년) 등 요리 프로그램을 연출한 최영인 SBS PD는 최고의 밥상을 찾았을까. 자연스럽게 여러 고수(高手)의 맛을 접했지만, 그들에게서는 답을 얻지 못했다는 게 그의 말이다. 맛과 TV 시청률에 관한 그의 해석이 흥미롭다. “아는 맛, 예측 가능한 맛이 나와야 침샘이 고이고 시청률이 뛰어요. 잘 모르는 맛은 요리가 화려해 보여도 남의 맛이죠. 그래서 사람들이 추억이 있는 엄마의 손맛을 최고의 밥상으로 자주 꼽는 것 같아요.” 정서적인 측면을 빼면 조선시대 최고의 밥상은 수라상, 즉 ‘왕의 밥상’이다. 전국 각지에서 진상된 최상의 재료로 최고 수준의 요리사가 만들었으니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그 밥상이 지금도 최고일지는 미지수다. “‘가장 맛있다’는 기준이 무엇인가에 따라 달라지죠. 당시 좋은 재료라고 해도 지방에서 서울로 오기 때문에 절이거나 말려야 했으니까요. 왕의 밥상은 ‘육해공’ 재료를 골고루 살려 예법에 맞춰 올린 건강식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산지에서 가공하지 않고 즉석에서 먹는 요즘 사람들의 밥상이 최고 아닐까요?”(한복려 궁중음식연구원장) 왕의 밥상에서는 상징적 메시지를 담은 정치적 행위가 이뤄졌다는 게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그 밥상은 자신의 오감(五感)을 통해 한 해 수확을 가늠하고 백성의 밥상머리 속사정까지 미루어 짐작해야 하는 통찰의 기회였다. 그래서 역대 왕들은 기근이 심해 백성이 굶주릴 때는 물에 만 밥, 수요반(水요飯)만 먹기도 했다. 폭군 연산군은 사슴 꼬리나 바다거북 같은 진귀한 음식에 식탐을 보였다고 한다. 기록에는 왕의 밥상과 관련한 표현들이 나온다. 철선(撤膳)은 백성들이 오랜 가뭄과 홍수에 시달릴 때 고기반찬을 거두는 것을 가리킨다. 각선(却膳)은 민생과 신하들의 당파 싸움 등 여러 이유로 왕이 아예 수라를 들지 않는 것이다. 감선(減膳)은 왕이 근신하는 뜻으로 반찬의 가짓수나 식사 횟수를 줄이는 것이다. 그 기록을 보면 영조가 79회로 압도적으로 많고, 정조(29회) 중종(28회) 성종(21회)의 순이었다. 특히 영조는 식음을 전폐하는 ‘수라 스트라이크’로 조정을 곧잘 뒤흔들었다. 곧 한가위다. 정치권에서 추석의 밥상머리 민심은 전통적으로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신문과 방송 등 언론 매체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한 여론 형성이 요즘의 추세다. 그래도 추석은 여전히 부모와 형제는 물론 친척, 지인이 모처럼 어우러지는 집단적 소통의 장이다. 아무리 “정치 얘기하지 말라”는 불문율이 생겼다 해도 소주 한잔을 나누다 보면 정치 훈수가 빠질 수 없다. 올해 추석 밥상머리 이슈의 메인 메뉴는 북핵을 둘러싼 안보 문제와 갈수록 어려워지는 나라와 집안 살림살이, 협치는 실종된 채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정치권, 내년으로 다가온 지방선거 등으로 다양하게 차려져 있다. 각 정당이 추석 민심을 잡기 위해 5당 5색의 홍보물을 준비해 서울역과 버스 터미널 등에서 인사에 나섰다고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홍보가 아니라 경청이다. 이 시기는 정치권이 여의도의 우물을 벗어나 자신들의 상차림을 겸허하게 평가받고 점수를 매겨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자신만이 옳다는 독선이 아니라 열린 가슴이야말로 최고의 밥상을 만들 수 있는 최상의 재료다.김갑식 문화부장 dunanworld@donga.com}
“나는 쉬고 싶다.” 전북 김제 금산사의 템플 스테이를 알리는 첫 문구다. 유난히 긴 추석 연휴. 국내외에서 여행을 즐기는 이들도 있지만 도심을 벗어나 산사(山寺)로 향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실제 조계종 등 각 종단에서 운영하는 연휴 템플 스테이 경쟁률이 만만치 않다. 대부분 청정하고 고즈넉한 산사를 배경으로 명상과 다도, 트레킹은 물론이고 ‘절밥’도 맛볼 수 있다. 사찰 특성을 살린 프로그램도 늘고 있다. 전남 영암 도갑사의 나 홀로 템플 스테이, 전남 해남 미황사의 ‘달빛 포행’, 경북 경주 골굴사의 선무도 수행, 경기 양주 육지장사의 단식 체험…. 지인들 중에는 짜인 프로그램도 불편하게 여겨 작은 암자를 택해 며칠 머무르는 이들도 있다. 단, 주의할 점은 있다. 작은 암자의 경우 개를 키우는 경우가 많다. 경험상 개 있는 암자는 가급적 피하고, 피할 수 없으면 개와 친해지고, 그것도 안 되면 일찍 귀사(歸寺)해라. 어둠 속 개 소리, 사방 십리는 울리고, 마음은 부끄러움으로 물든다.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신성일의 이름과 떨어져 있는 엄앵란은 꽤 어색하다. 그래도 나훈아(70)와 엄앵란(81) 얘기를 쓰고 싶다. 한 주 전 이들을 잇는 작은 인연의 끈이 눈에 들어왔다. 영화 ‘맨발의 청춘’ 등으로 1960년대 대표적 흥행 감독이었던 김기덕 감독에 대한 오비추어리가 계기가 됐다. 엄앵란은 김 감독에 대해 얘기하다 “나훈아 콘서트 보는 게 마지막 소원”이라고 했다. 1년 이상 암 투병 중인 노배우의 말이라 그냥 지나치기 어려웠다. 다소 뜻밖이고, 궁금했다. 그런데 11월 시작되는 이 콘서트의 3만 석은 예매를 시작한 지 10분 만에 동이 났다. “역시 명불허전의 ‘트로트 황제’” “부모님께 꼭 보여 드리고 싶었는데 아쉽다” 등의 반응과 암표 가격이 100만 원대까지 치솟았다는 얘기도 나돈다. 최근 병원 치료를 막 끝낸 엄앵란과 전화 연결이 됐다. “정말 소원이세요?” “표를 구할 수 없어서…. 지금도 손녀가 사준 나훈아 신곡 듣고 있어요.” 둘은 한 시대를 풍미한 스타였고, 인연도 없지 않다. 엄앵란은 신성일, 나훈아는 김지미의 이름과 줄곧 나란히 있었다. 신성일-엄앵란의 결혼은 당시 큰 ‘사건’이었다. 1964년 11월 14일 서울 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결혼식에는 전국에서 5000여 명의 팬이 몰려 일대가 마비됐다는 기사가 보인다. 2010년 작고한 앙드레 김도 엄앵란이 입은 웨딩드레스로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다. 두 배우가 없으면 영화를 찍을 수 없다고 했으니, 그 화제성은 요즘의 송중기-송혜교, ‘송송 커플’ 이상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나훈아는 뛰어난 가창력과 엄청난 카리스마뿐 아니라 굴곡이 많았던 세 차례 결혼으로 무대 밖에서 더 뜨거운 이슈 메이커였다. 여러 루머 끝에 열린 2008년 기자회견이 그 논란의 정점이었고, 이후 세상과의 인연도 사실상 끊어졌다. 이들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1960, 70년대까진 쇼 공연장과 방송사에서 종종 마주쳤다는 게 엄앵란의 말이다. “먼저 스타가 되고 10여 년 나이 차가 있어 그런지 그 양반(신성일)과 나를 선생님이라고 깍듯하게 불렀어요. 단짝 현미랑 어울려 있으면 찾아와 재밌는 얘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요즘 같지 않아 가족처럼 지냈는데 차츰 뜸해진 거죠.” 알려진 얘기지만 그래도 직접 묻고 싶었다. “왜 그렇게 힘들게 가정을 지키셨나요?” “‘엄앵란은 속이 없나 봐’, 이런 말들 하잖아요. 근데 배우와 인간으로 자존심, 품격 같은 걸 지키고 싶었어요. 그 양반,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며 밖으로 다녀도 집과 아이만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양반, 이번에 치료 때문에 잠시 머물다 ‘내는 영천 시골 간다. 니도 잘 살아라’ 한마디 하고 훌쩍 갔어요.” 그래서일까. 팔순을 넘긴 배우의 가수 나훈아에 대한 평이 그냥 들리지 않는다. “남편도 모르는 여자의 마음을 어떻게 족집게처럼 잘 알고 위로하는지. 노래 듣고 있으면 꽉 막힌 가슴이 풀리고 어느새 눈물이 주르륵 흘러요. 진짜 가수죠.” 그의 드라마 출연은 어떨까? 실제 2개월 전 유명한 PD가 드라마를 찍자고 찾아왔는데 거절했다고 한다. “욕심이죠. 대사 못 외워 바쁜 젊은 애들 붙잡고 있으면 그게 무슨 짓이야, 민폐죠.” 스스로 속이 없다는 배우의 속은 그렇게 깊었다. 팔순의 배우가 ‘레디 고’를 기다리고, 70대 가수가 관객의 눈물을 빼는 그런 무대를 상상해 본다. 올드 스타의 건재는 그 자체로 감동이자 축복이다. 그들은 우리 문화의 연륜을 증언하는 얼굴이자 소중한 스토리텔러다.김갑식 문화부장 dunanworld@donga.com}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중 페이스북은 지나친 개방성 때문에 호불호가 갈린다. 그래도 시대가 시대인지라 가입했고, 낯선 친구들이 생겼다. 난데없는 친구 요청이 아직도 부담스럽지만 ‘좋아요’를 누를 수밖에 없는 ‘페친’들도 생겼다. 그들 중 대표적인 이가 디자이너인 S 대표다. 그의 글은 집과 회사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소소한 사연이 많은데 무엇보다 솔직한 한마디가 압권이다. “‘엽오’, 나 어때?” “저 사람이 바람났나.” “어, 오늘도 뚱뚱해.” 이런 식이다. 페친들이 그의 글에 열광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은근슬쩍 광고를 끼워 넣거나 남의 글을 옮기는 게 아니라 자신만의 생활의 감동을 전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남편 회사의 창립기념일에 보낸 ‘돈다발 케이크’(사진)와 사연이 화제였다. 여러 재료로 윗부분에 감쪽같이 5만 원권 모양을 흉내 낸 케이크다. 곧바로 “저는 오늘 좀 늦게 사발면으로 때운다”는 댓글과 5만 원권 지폐 뭉치로 사발면 뚜껑을 닫은 합성사진이 올라왔다. 이에 자극을 받아 SNS의 가족방에 돈다발 케이크 사진과 “하나 보내줄까요?”라는 글을 남겼다. 대답은 “있으면 집에 가져오고, 살 거면 됐고.” “….”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방송 서비스 중 TV 다시 보기라는 게 있다. 말 그대로 보고 싶은데 놓친 프로그램을 다시 볼 수 있는 서비스다. 간혹 무료도 있지만 대개 일정한 비용을 추가로 부담해야 한다. 요즘 지상파 방송에서 최대 화제의 다시 보기 서비스는 KBS와 MBC, 공영방송 사장을 둘러싼 갈등이다. 2008년에도 당시 정연주 KBS 사장을 둘러싼 논란이 있었다. 입장에 따라 이들 사안을 보는 관점이 다르고 세부적 내용도 차이가 있지만 큰 줄기는 다를 게 없다. 한마디로 이전 정권에 의해 임명된 방송사 사장의 거취 문제가 관건이다. 두 방송사 소속 기자와 PD 등이 제작을 거부하고 있는 가운데 전국언론노조 MBC본부와 KBS본부(새노조)는 공영방송 정상화와 경영진 사퇴를 주장하며 4일 동시 파업에 들어갔다. 여기에 여당인 더불어민주당도 현재의 사장과 이사진의 구조가 공영방송의 걸림돌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반면 KBS와 MBC 사측은 경영진 퇴진을 목적으로 하는 이번 파업을 정치적, 불법 파업으로 규정하고 강경 대응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자유한국당은 정권에 의한 공영방송 장악 시도라며 국회 보이콧까지 언급하고 있다. 방송의 생일인 ‘방송의 날’(3일) 행사가 열린 1일 다시 보기의 하이라이트가 연출됐다. 이날 MBC에 대해 특별근로감독을 벌이고 있는 고용노동부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서부지청의 출석 요구에 여러 차례 넘게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김장겸 MBC 사장에게 체포영장이 발부된 것이다. 방송사 사장이라고 해서 초법적 존재는 아니다. 그럼에도 생일날, 부당노동행위를 이유로 현직 지상파 방송사 사장에게 처음으로 체포영장이 발부된 것은 어색한 무리수다. 이런 급박함의 이면에는 문재인 대통령의 방송법 개정안과 관련한 발언이 도화선이 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방송통신위원회 업무보고에서 “만약 이 법이 통과된다면 어느 쪽으로도 비토(거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사장으로) 선임되지 않겠느냐”며 “소신 없는 사람이 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효성 방통위원장은 “우리 자체 안을 방통위에서 만드는 것을 검토해 보겠다”고 했다. 소신 없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문제의 법안은 2016년 야 3당 의원 162명이 숱한 논의 끝에 내놓은 법안이다. 그 핵심은 공영방송 지배 구조를 개선하는 것으로 ‘여야 공영방송 이사 추천 비율을 7 대 6으로 개편’ ‘사장 선임 시 이사회 3분의 2가 동의하는 특별다수제 도입’이었다. 체포영장 발부로 탈출 소동이 벌어진 올해 방송의 날 기념식에 대통령은 물론이고 정부와 여권의 주요 인사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불참했다. 언론 특히 공영방송과 권력의 관계는 ‘나무는 조용히 있고 싶어도 바람이 멎지 않는다’(수욕정이풍부지·樹欲靜而風不止)라는 표현처럼 오래된 숙제다. 2003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제40회 방송의 날 기념식에 참석해 권력과 언론의 관계에 대해 의미심장한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정치권력은 통제장치가 잘 발달돼 있으나, 언론은 잘돼 있지 않다. … 지난날 적절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민주주의 원리에 따라 서로 협력, 견제하는 관계로 잘 발전해야 한다. 방송사에 전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앞으로도 지키겠다.” 이후 십수 년 동안 대통령이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노 전 대통령의 언급대로 정작 정치권력에 대한 통제장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삼척동자도 알지만 공영방송은 정권의 전유물이 아니라 국민 모두의 것이다. 이 원칙은 경영진이든 노조든 예외가 될 수 없다. 공영방송의 변화 역시 납득할 수 있는 민주적 절차로 이행되어야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김갑식 문화부장 dunanworld@donga.com}
방송가에서 한때 잊혀진 연예인 순위가 화제였다. 요즘 다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탤런트 최민용이 지난해 MBC ‘일밤―복면가왕’에 출연해 “내가 잊혀진 연예인 2위였다”고 말한 것이 한 계기가 됐다. 그 순위에는 가수 박남정, 그룹 소방차, 진행자로 인기를 끈 ‘까만콩’ 이본, 배우 김진 등의 이름이 있었다. 1위는 가수 겸 배우 구본승이었다. 이들 중 몇 명은 방송 활동을 재개했다. 잊혀진 순위의 마력이 시청자들의 추억을 ‘소환’한 덕분인지도 모른다. 최근 오랜 인연이 있는 방송사의 한 고참 PD와 사석에서 만났다. 부상으로 활동을 중단한 개그맨 K의 근황에 말끝이 이어졌다. K와는 사석에서 같이 만난 일도 있어 가깝게 느꼈기 때문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적절한 응급 치료로 그는 회복 중이라는 후문이다. PD의 전언 중 안타까운 것은 “큰 부상을 당했는데 사흘만 뉴스가 됐어요. 그 뒤에 사라졌어요. 빨리 방송을 재개해야 한다”는 K의 다짐이었다. 연예인은 잊혀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직업이라는 게 실감 났다. “K, 그래도 건강이 최고입니다. 빨리 쾌유하세요.”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20일 올해 첫 1000만 영화가 나왔다. 영화 ‘택시운전사’의 성공 요인은 여럿일 것이다. 수준급의 완성도뿐 아니라 극장가 상황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 손님 중 한 사람인 나를 움직인 것은 극 중 김만섭(송강호)이 전화로 어린 딸에게 던지는 “아빠가 손님을 두고 왔어”라는 대사였다. 1980년 5월 광주를 기억하는 이들은 당시 어느 자리에 서 있었느냐에 관계없이 자유롭기 힘들다. 그것이 마음의 빚이든, 아니면 복합적인 감정이든 말이다. 하지만 영화로 광주를 마주하는 것은 좀 다르다. 영화와 드라마, 가요 등 문화상품은 자신의 목소리를 효과적으로 높이기 위해 음악과 스토리를 포함한 극적 장치를 활용한다. 그래서 역사적 사건을 모티브로 다룬 작품을 접할 때는 냉정하게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심리적 거리감’이라는 방어선을 두기 마련이다. 애써 지키던 그 방어선은 그 대사 한 방에 무너졌다. 그 선이 무너지자, 어느 순간 만섭이 됐다. 만섭은 그래도 정부가 하는 말에는 진실이 담겨 있기 마련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소시민의 전형이다. 게다가 빚을 갚으면서 딸을 홀로 키워야 하는 처지에 그 진실의 속사정까지 세세히 들여다볼 여유는 없다. 그럼에도 그가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예측하기 어려운 광주로 U턴한 것은 최소한 손님을 두고 와서는 안 된다는 책임감 때문이다. 한국고전번역원 관계자들과의 최근 모임에서도 이 작품은 단연 화제였다. 역사 속에서 만섭의 손님이 상징하는 것처럼 무한책임의 사례는 없을까. 한 참석자가 언급한 고려 문신이자 학자 이제현(1287∼1367)에 얽힌 스토리가 있다. 다양한 분야와 인물의 글을 수록한 ‘용재총화(용齋叢話)’에 전하는 내용이다. 오랫동안 원나라에 머문 충선왕은 귀국하면서 정인(情人)에게 이별의 정표로 연꽃 한 송이를 남겼다. 그리움을 견디지 못한 왕은 이제현에게 그녀를 살피도록 했다. 그가 가보니, 제대로 먹지 않아 말도 잘 못하는 여인은 억지로 붓을 들어 시 한 수를 써 줬다. 그러나 이제현은 그 여인이 젊은 사람들과 술을 마신다는데 찾을 수 없다고 거짓을 고했고, 왕은 땅에 침을 뱉었다. 다음 해 왕의 생일에 이제현은 술잔과 함께 죽을죄를 지었다며 시를 올린다. 이에 왕은 “그날 이 시를 봤다면 죽을힘을 다해 돌아갔을 것인데, 경이 나를 사랑해 다른 말을 했으니 참으로 충성스러운 일”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해피엔딩이다. 하지만 봉건시대 관료에게 그 거짓말은 목숨을 건, 무한책임을 느끼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우리 사회 곳곳에는 손님들을 두고 온 무책임의 사례가 적지 않다. 국민을 불안에 떨게 만든 살충제 계란 파동은 당국의 전형적인 무능과 무책임을 보여준다. 국회와 정부, 지자체 차원에서 진행된 다양한 명목의 해외 시찰은 매년 외유성이라는 도마에 오른다. 뜬금없는 인증샷 대신에 촘촘하게 사육 환경이 표시된 프랑스 계란을 꼼꼼히 봤더라면 어땠을까. 탈원전 정책을 추진 중인 대만에서의 최근 대정전(블랙아웃)도 강 건너 불구경이 될 수는 없다.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의 역할을 둘러싼 논란을 지켜보는 것도 불안하다. 무한책임을 지겠다는 각오가 있어도 해결이 쉽지 않은 현안들이기 때문이다. 자리보전이 아니라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는 소신이 필요하다. 영화의 잔상이 생생하다. 만섭의 택시번호판은 ‘서울3 구3151’. 실제 이런 번호판도 있을까, 그는 왜 나중에 연락하지 않았을까? 오늘도 사람들은 집과 직장, 또는 낯선 곳에서 자신이 운전하는 삶의 택시에 손님을 태운다. 혹 두고 온 손님 없는지, 다시 볼 일이다. 김갑식 문화부장 dunanworld@donga.com}
프랑스 석학 기 소르망과 노벨문학상 수상자 르 클레지오, 보그너 패션그룹 회장인 빌리 보그너, 가수 싸이와 중국 배우 탕웨이…. 최정화 한국이미지커뮤니케이션 이사장(62·한국외국어대 교수)이 2010년부터 주최한 문화포럼 등에 참여한 인물들이다. 평소 궁금했던 화려한 인맥의 비결에 대해 최근 물어본 적이 있다. “그분들을 어떻게 돈으로 움직이겠어요?” 그의 답은 이랬다. 첫째는 관심과 진심, 둘째는 끈기, 셋째는 니즈를 채워주는 것. 기업과 정부 기관 지원 등으로 마련한 빠듯한 예산으로 비행기 표와 호텔 숙박료를 빼면 강연료 지불 같은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는 게 그의 말이다. 한반도 정세에 관심이 많았던 기 소르망은 YS(김영삼 전 대통령) 정부에서 요직을 맡고 있던 김덕 성균관대 석좌교수와 연결한 것이 계기가 됐다. 뮌헨 겨울올림픽 유치위원장을 맡았던 보그너 회장은 당시 평창 유치를 위해 뛰던 ‘맞수’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과의 만남을 주선한 것이 인연이 됐다. 29일 열리는 문화소통의 밤 행사에도 장뱅상 플라세 전 프랑스 국가개혁장관을 비롯해 사진과 방송 분야의 유명인사들이 참여한다. 이 행사의 트로피 제작은 최홍규 쇳대박물관장이 맡았다. “어떡하든 쇳값은 내야죠.”(최 이사장)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휴가 중이던 문재인 대통령은 5일 페이스북을 통해 방송 강연을 책으로 펴낸 ‘명견만리’를 언급하면서 “사회 변화의 속도가 무서울 정도로 빠르고 겪어보지 않은 세상이 밀려오고 있는 지금, 명견만리(明見萬里)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라는 글과 함께 일독을 권했다. 인터넷서점 알라딘에 따르면 대통령의 권유 뒤 이 책의 주말 판매량은 한 주 전보다 25배나 늘었다. 교보문고에서도 같은 책의 하루 판매량이 이전 평균치의 10배를 넘었다. 문 대통령과 관련이 있는 아이템(상품), 이른바 ‘문템’이 새롭게 등장한 셈이다. 문템의 목록은 안경테부터 시작해 등산복과 구두, 넥타이, 심지어 ‘문라테(문재인+카페라테)’까지 다양하다. 언행을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빨간 야구모자도 대표적인 대통령 상품의 하나다. ‘다시 미국을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문구가 들어간 이 모자는 후보 시절부터 저소득층 백인 노동자에게 보내는 강력한 메시지의 상징이었다. 그는 연설이 끝나면 모자를 지지자들에게 던지며 유세장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렸다. 미국 연방선거관리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모자와 티셔츠 등을 판매한 수익금이 600만 달러(약 67억4400만 원) 규모로 후원금의 6%에 이른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경우 특별한 상품이 부각되고 있지는 않지만 5월 취임식 때 입은 기성복이 화제였다. 이 옷은 파리의 남성복 가게 ‘조나스 에 콩파니’에서 구입한 것으로 450유로(약 55만 원) 정도의 비교적 저렴한 가격이었다. 당연한 얘기이지만 이런 상품들의 인기는 대통령의 지지도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 자신 소유의 골프클럽에서 머물고 있는 트럼프는 휴가가 아니라 ‘일하는 중’이라고 해명해야 할 정도로 신뢰의 위기에 빠져 있다. 5월 대선에서 66%의 지지율을 기록했던 마크롱도 주요 여론조사에서 뚜렷한 하향세다. 문템의 인기는 이들과 달리 70%가 넘는 문 대통령의 국정수행에 대한 지지율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문템과 별개로 대통령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도 여러 곡절이 숨어 있다. 주요 현안에 관한 발언은 당연지사이고, 현 상황에 대한 비유는 여러 해석을 낳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뗏목론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청와대에서 열린 여야 4당 대표와의 회동에서 “선거 전 일은 다 잊고 새로 시작하자. (대선이라는) 큰 강을 건넜으니 뗏목은 이제 잊어버리자”고 했다. 불가(佛家)에서는 뗏목의 비유가 자주 등장한다. 사벌등안(捨筏登岸), 말 그대로 언덕을 오르려면 뗏목을 버려야 한다. 진리조차 집착하고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흥미롭게도 2003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에게 뗏목론을 앞세운 조언들이 적지 않았다. 호소력 있지만 지나치게 감성적인 현장 화법과 열광적인 팬클럽을 연상시키는 지지자 그룹 등이 버려야 할 뗏목으로 지목됐다. 십수 년이 지난 지금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이번엔 문 대통령 스스로 뗏목론을 언급한 것이다. 대통령의 의중에는 무엇이 뗏목이고, 어느 시점에 버려야 할지에 대한 생각도 들어있을 것이다. 이제 흘러간 영화가 된 ‘봄날은 간다’에서 상우(유지태)는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물었다. 하지만 ‘정치적 사랑’은 “당연히 변한다”는 게 정답이다. 변덕스러운 세상인심에 관계없이 문템의 유통기한이 정말 길어지기를 바란다. 김갑식 문화부장 dunanworld@donga.com}

불교 의식에 정통한 인묵 스님이 19일 대한불교조계종의 ‘어산어장(魚山魚丈)’에 임명됐다. 어산은 부처의 공덕을 찬양하는 노래로 범패(梵唄)로도 불리며, 어장은 이 분야의 최고수를 가리킨다. 어산어장은 임기가 정해지지 않은 일종의 명예직이다. 범패와 비교할 때 오히려 어산이라는 표현이 낯설다. 전문가에 따르면 범패의 시원은 인도일 가능성이 높지만 흥미로운 설도 있다. 중국 삼국시대 조조의 아들인 조식(192∼232)과 관련된 얘기다. 조식이 산둥성 서쪽의 어산에서 세상의 소리와 달리 마음을 감동케 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 소리와 연못의 물고기 모양을 본떠 ‘태자송’ 등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범패의 시원이라는 것이다. 불교 의식에 밝은 태고종 법현 스님의 말이다. “업보로 물고기 몸을 받은 제자의 사연이 전해지는 목어(木魚·사진), 목어가 변해 입과 꼬리 부분만 남은 목탁 등 불가에는 물고기에 얽힌 일화가 적지 않다. 물고기는 눈꺼풀이 없어 눈 뜨고 잠을 자는 것처럼 보인다. 수행자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도 있다.”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뉴스를 다루는 곳의 데스크라는 자리에 있다 보면 많은 이야기를 접한다. 뉴스는 많고 지면은 부족하다. 그래서 A는 지면, B는 인터넷, C는 알고만 있자는 식으로 교통 정리한다. 최근 접한 얘기 중 가장 관심이 가지만 아쉬웠던 게 가수 나훈아(70)의 컴백이다. 11년 논란과 칩거 끝의 복귀와 새 대표곡 ‘남자의 인생’…. 논란 끝에 열린 마지막 기자회견에서 그는 “마이크 잡기가 힘들다. 가수는 꿈을 파는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은 꿈을 잃어버렸다”며 활동 중단 의사를 밝혔다. 17일 공개되는 앨범 제목이 ‘드림 어게인(Dream Again)’이다. 소속사의 짧은 설명으로는 궁금증이 풀리지 않았다. 후배들을 재촉해도 새로운 것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 추측만 많아진다. “음, ‘남자의 인생’, 뭔가 의미심장한데.” “허허, 사진 보니 KFC 할아버지 느낌, 세월은 어쩔 수 없네.” 달리 네 발은 있지만 스스로 꼼짝 못 하는 데스크(Desk)일까. 오도 가도 못 하는 신세니, 잔소리는 많아지고, 궁금증만 늘어난다. 직업병이래도 어쩔 수 없다. 여전히 그의 꿈이 궁금하다.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지난달 27일 문화체육관광부가 ‘문화가 있는 날’을 폐지하지 않고 확대 운영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솔직히 예상 밖의 수(手)였다. 문화가 있는 날은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 각종 공연과 전시 등 문화 이벤트를 할인된 가격에 제공해 국민들의 문화 향유 기회를 늘리겠다는 취지로 시작됐다. 이 정책은 박근혜 정부의 4대 국정기조 중 하나인 문화융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여서 폐지가 점쳐졌다. 가짓수는 적지 않지만 제대로 된 볼거리는 부족하다는 비판도 적지 않아 실효성에 의문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문체부는 이 정책의 확대 운영 방침과 함께 “지난해 말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가 터지면서 문화융성과 관련된 문화가 있는 날을 두고 국민들의 부정적인 시선이 커 사업 존폐에 관한 고민이 많았다”며 “하지만 매년 실시하는 만족도 조사에서 사업을 확대 운영하라는 의견이 많아 운영 방식과 날짜를 개편하게 됐다”고 그 배경을 설명했다. 허를 찔렸지만, 그래도 반가운, 문화정책의 희망을 볼 수 있는 묘수(妙手)였다. 문체부는 문화융성과 관련한 부정적 인식에 따른 고민을 솔직히 털어놨고, 문제점이 있지만 국민들이 원하고 있어 제대로 해보겠다는 의지도 밝혔다. 바둑에는 정석(定石)이 있다. 고수(高手)들은 기력이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정석을 잊어야 새로운 수를 볼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정석은 오랜 세월에 걸쳐 고수들의 지혜가 농축된 최적의 수이자 길이다. ‘바둑의 신’으로까지 추앙받는 알파고의 신수(新手)가 정석에 균열을 일으키기는 했다. 그래도 정석은 정석이다. 정부의 정책에도 정석이 있다. 너무 잘 알지만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도 따라온다. 최근 사석에서 만난 한 고위 관료의 말은 이런 어려움을 여실히 보여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게 국민 다수의 이익이죠. 그러면 어떤 정책이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이 뻔합니다. 그런데 이해 당사자를 포함해 새 정부 출범에 기여한 이른바 ‘공신(功臣)’ 또는 세력이 등장하면 상황이 꼬입니다. 눈치를 보다 가야 할 길로 못 가는 거죠. 정말 공신이라면 자신의 것을 내려놓고, 자기 역할이 끝나면 주저 없이 물러나야죠.” 문재인 정부 출범 초기에 가장 인상적인 장면의 하나는 5월 공개된 청와대 산책 모습이다. 양복 상의를 벗은 대통령과 참모들이 커피를 테이크아웃해 자유로운 모습으로 거닐었다. 사람들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청와대가 이 정도로 열려 있다면 이전 정부의 구중궁궐 시비와 비선 실세의 국정 농단은 더 이상 안 볼 수 있다는 안도감 때문이다. 하지만 잇달아 터지는 장관 후보자들에 대한 도덕성 시비와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내로남불’식 합리화는 국민들을 다시 불안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 와중에 새 정부 출범에 한몫했으니 자기 몫을 달라는 이른바 ‘촛불 청구서’가 새 정부에 밀려들고 있다. 하지만 촛불혁명과 관련한 연구 결과는 청구서 주인의 주장과는 다르다. 전문 시위꾼이 아니라 평범한 시민이 초유의 탄핵과 새 정부 탄생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서강대에 소속된 정치학자 3인의 연구에 따르면 촛불집회 참가자 중 82.9%가 1, 2회 참석했고 3회 이상 참가자는 17.1%에 그쳤다. 또 ‘친구나 직장 동료, 가족과 함께 참가했다’고 답변한 이가 82%인 반면 ‘정당·단체·동호회 회원과 함께였다’는 답은 3%였다. 문체부의 고민이 담긴 결정은 쉬운 것이 아니었던 만큼 이번에는 제대로 된 문화가 있는 날을 만들기를 바란다. 네 것이냐, 내 것이냐가 중요하지 않다. 이분법에서 벗어나 국민 이익을 잣대로만 옥석을 가리는 게 국정의 시발점이 되어야 한다. 국정의 정석이 두어져야 할 때다. 김갑식 문화부장 dunanworld@donga.com}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이른바 ‘내로남불’의 시대다. 불행하게도 새 정부 출범 이후 최고의 유행어가 됐다. 정부의 인사논란을 포함한 정치 현안부터 막장드라마까지 안 쓰이는 구석이 없다. 올해의 유행어가 될 법하다는 우스개도 나온다. 사전적 정보를 제공하는 한 인터넷 사이트는 내로남불에 대해 “박희태 전 국회의장이 만들어낸 말로 알려졌지만 이문열의 단편 ‘구로 아리랑’에도 유사한 문장이 나온다. … 대변인 시절에 유행어로 밀어붙인 것은 박희태 본인이 맞다”라고 설명한다. 이 표현이 마치 사자성어(四字成語)처럼 회자되고 있는 것은 최근이지만, 그 단어에 담긴 정서의 시간적 뿌리는 가늠하기 어렵다. 조상들의 좀 더 고상한 표현은 없을까? 한국고전번역원의 도움을 받았다. 제 논에 물 대기라는 뜻의 아전인수(我田引水)가 비슷하지만 일반적이고 심심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이다. 조선시대 실학자 이덕무가 속담을 모아 놓은 ‘열상방언’ 등 옛 문헌에서 어렵사리 찾은 말은 ‘정저흑 부저갹(鼎底黑 釜底갹)’. “솥 밑 그을음이 가마 밑 보고 껄껄댄다”는 말로 자기 잘못은 모르고 남을 책망하는 데 밝다는 의미다. 심리학자들은 내로남불 현상에 대해 잘잘못을 떠나 지극히 인간적 본능이 발현된 것이라고 한다. 인간은 문제가 생겼을 때 자아 붕괴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방어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행동할 때는 관대하지만, 관찰할 때는 비판적 태도를 취하는 행위자-관찰자 편향이론도 있다. 개인뿐 아니라 동네와 지역, 사회 차원의 내로남불도 있다. 거칠게 말하면 편 가르기와 진영 논리도 내로남불의 또 다른 얼굴이다. 역대 정권의 내로남불 공방을 지켜보면 우리 사회가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검증과 인사청문회가 무서운 통과의례가 된 백주대낮의 현실에서도 이 공방은 되풀이되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공언한 위장전입·부동산투기·논문표절 등 공직 배제 5대 원칙은 부메랑이 돼 발등을 찍고 있다. 이 원칙의 기준대를 훌쩍 뛰어넘을 수 있는 인재가 그리 많지 않다. 부인하고 싶지만 이게 현실이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의 말이다. “내로남불이 인간적 행태라고 그대로 인정할 수는 없다. 5대 원칙에 접근하기조차 힘든 보통 사람들은 옥석을 가렸음에도 드러나는 인재들의 흠결에 허탈해하고 분노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높은 도덕적 기준을 충족시킬 능력이 되지 않는다면 적어도 진심을 담은 사과로 이해를 구해야 한다. 그 진심이 빠져 있는 게 상황을 악화시키는 이유다.” 지금 필요한 것은 100%는 아니더라도 대부분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는 새로운 잣대를 만드는 것이다. 집권당과 야당으로 공수가 바뀌었다고 같은 행태를 반복한다면 시간낭비다. 더욱 경계해야 할 것은 ‘나, 우리만 옳다’는 독선과 오만이다. 이 경우 자신만 로맨스라고 외치는 내로남불의 ‘결정판’이 나올 가능성이 커진다. 문재인 대통령은 최근 강경화 외교부 장관 임명에 대한 지지가 훨씬 높다며 “나는 국민의 뜻에 따를 테니, 야당도 국민의 판단을 존중해 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그러자 국민의 뜻과 응답률 5, 6%에 불과한 여론조사 결과가 반드시 일치하느냐며 동의하기 어렵다는 야당의 반발이 터져 나왔다. 혹자는 내로남불을 풀 수 있는 열쇠를 처지를 바꿔 생각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와 타인보다 자신에게 엄격했던 선비 정신의 회복에서 찾는다. 입에 쓰다고 맛조차 보지 않고, 쓴소리라고 귀를 닫아서는 안 된다. 그 이유를 국민의 뜻이라고 한다면 더욱 걱정스럽다. 김갑식 문화부장 dunanworld@donga.com}

“자월명(自月明)하라·스스로를 달빛 삼아라.” 최근 출간된 원철 스님의 산문집 ‘스스로를 달빛 삼다’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불교계의 대표적인 문장가로 꼽히는 스님은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연구실장을 맡고 있다. 10년 넘은 인연이지만 스타일상 전화로 수다를 떨 사이는 아니다. 그래서 “어찌 지내시나” 하고 궁금해할 때 불쑥 날아오는 ‘책 편지’가 반갑다. 절집 생활과 여행, 사람들 속에서 겪은 에피소드를 불교적으로 풀어낸 글들이 실려 있다. ‘문(Moon)’이 대세라는 요즘 분위기 때문일까. 특히 ‘달빛을 만나다’는 제목의 글이 눈에 밟힌다.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에 얽힌 내용이다. 만월(滿月)은 그냥 호떡처럼 둥근 보름달이 아니라 차별 없이 그 빛을 고루 나눠주는 ‘만월보살’이란다. 동쪽 봉우리 만월산(滿月山), 만월선원(滿月禪院), 지월당(指月堂)…. 몇 년 전 해인사 작은 거처에서 만났을 때 세상 부러울 게 없다던 스님의 말도 떠오른다. 시절 인연으로 서울살이 중인 스님의 자월명(自月明)은 자신은 물론이고 세상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리라.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