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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는 아기 돼지 루퍼스는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 우주에 가는 것이 꿈이다. 책가방에 도시락, 담요를 챙겨 우주센터로 찾아간다. 함장인 루나는 곤란해한다. “돼지는 우주에 갈 수 없어.” 루퍼스는 포기하지 않는다. 우주복까지 챙겨 입고 다시 우주선으로 간다. 루나는 또 고개를 가로젓는다. 루퍼스는 고심 끝에 “나는 책을 사랑해요”라고 쓴 현수막을 들고 우주선을 찾아간다. 마침 우주로 가 책을 읽어주기로 했던 과학자가 독감으로 불참하게 되자 고민하던 루나는 눈을 번쩍 뜬다.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는 꼬마 돼지가 마침내 꿈을 이루는 이야기.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한국 문화계를 뒤흔드는 미투 고백 속에서 계속 눈에 띄는 단어가 있다. ‘선생님’이다. 이윤택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에게 당한 성폭력을 털어놓으며 피해자들은 한결같이 상대를 향해 ‘선생님’이란 존칭을 붙였다. “선생님께선 전혀 변함이 없으셨다”거나 “선생님은 네가 뭔데 판단하느냐고 분노하셨다”라는 식으로 회고한다. 폭로된 내용은 선생님이란 단어와는 어떤 식으로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 위기에 몰린 이 전 감독이 기자회견 리허설까지 하며 은폐를 모의한 새로운 사실이 폭로될 때도 ‘선생님’이라는 단어는 어김없이 등장했다. “도저히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일들이었습니다. 선생님은… 괴물이었습니다.” 거장에서 괴물이 된 그 순간까지도, 어찌 됐든 그는 ‘선생님’이었다. 역설적으로 이 시점에 계속 등장하는 ‘선생님’이란 단어는 폐쇄된 문화계 내부에 그간 얼마나 많은 부조리가 있어왔을지를 짐작하게 해주는 단서가 된다. 여전히 ‘선생님’이라 불리는 그에게 맞서기 위해 피해자들은 얼마나 큰 용기를 내야 했을까. 문화계에서 쓰는 ‘선생님’이란 호칭은 조금 특수하다. 감독이나 연출가 같은 객관적 직함과는 달리 한국식 친밀감과 존경, 호의나 유대감까지 내포한다. 이 때문에 ‘선생님’은 거장을 예의 바르면서도 친근감 있게 대하는 마법의 호칭이기도 하다. 출판문학 담당 기자로 일하게 되면서 가장 먼저 배웠던 것도 이 호칭이었다. 문단에서는 정작 ‘작가님’이라는 말은 거의 쓰지 않는다. ‘선생님’이란 말이 입에 친근하게 붙어 있을수록 인사이더(insider)다. 같은 맥락에서 많은 사람들의 ‘선생님’일수록 거장이다. 노벨 문학상 후보에서 성추행 가해자가 돼 버린 고은 시인 역시 모두에게 ‘선생님’으로 불리던 이들 중 하나였다. 미투 운동의 진원지는 미국 할리우드다.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에 의해 수십 년간 상습적으로 이뤄진 성폭력이 유명 여배우들의 증언으로 폭로되며 본격화됐다. 하지만 앤젤리나 졸리, 우마 서먼 같은 유명 배우조차 오랫동안 침묵해야 했을 만큼 그들의 권위는 막강했다. 주로 힘없고 백 없는 신인들이나 편집자들을 대상으로 저질러졌던 한국의 미투 사건이 공론화되기 어려웠던 이유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여기에 한국은 호칭까지 공범이 됐다. 피해자들은 ‘선생님’ 앞에서 무력했을 뿐 아니라 ‘같은 선생님’을 모시는 동료들 사이에서도 무력했다. 뻔히 보이지만 투명인간이 됐고 묵인과 방조가 이뤄졌다. 우리 문화계의 성폭력이 단지 거장 몇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내부의 권력구조와 깊숙이 연관돼 있는 이유다. 이토록 ‘일그러진 선생님들’은 어떤 비호 속에서 괴물처럼 커지고 있었던 것일까. 미투 폭로 후 주요 연극단체는 이 전 감독을 바로 제명시켰다. 고 시인과 관련된 전시공간이나 문학관 건립을 추진하던 지자체들도 흔적을 지우기 위해 고심 중이다. 피해자만 다시 상처받고 흐지부지됐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제대로 된 후속처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의 혼란이 문화계 판을 새로 짜는 자성과 혁신의 출발이 되려면 저 질문에 대한 답 역시 함께 찾아봐야 할 것이다. 박선희 문화부 기자 teller@donga.com}
가까운 곳에서 작은 행복을 찾는 소확행 트렌드가 확산되며 인기를 끄는 것 중 하나가 ‘작은 서점’이다. 동네 서점 지도 앱을 제작하는 퍼니플랜에 따르면 현재 전국 독립 서점은 277개에 이른다. 지난해 새로 문을 연 곳만 31개다. 동네 서점들은 대량으로 책을 다루지 않는 대신 관심사를 좁혀 분명한 취향과 공통점을 가진 컬렉션으로 독자들을 만난다. 여행 책만 파는 ‘사이에’나 고양이 서적만 모은 ‘슈뢰딩거’, 시집만 파는 ‘위트앤시니컬’ 등이 대표적이다. 독자별로 맞춤형 책을 추천해 주고 감상 평을 나누는 형태의 서점도 인기다. 서울 성북구 성북동의 ‘부쿠’는 공동대표 4인이 돌아가면서 상담을 통해 취향에 꼭 맞고 필요한 책을 선별해 주기도 한다. ‘책의 해’인 올해 모쪼록 책을 통해 행복을 재발견하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한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제게 정말 좋은 원두가 많은데 한 잔 드릴까요?” 서울 강남구 자택에서 13일 만난 김혜남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59)의 작업실 한편에는 10여 가지 원두가 산지별로 진열돼 있었다. 김 씨는 “볼리비아 게이샤가 좋겠다”고 했다. ‘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 ‘오늘 내가 사는 게 재미있는 이유’ 등을 쓴 베스트셀러 작가인 그는 파킨슨병 투병 중 인간관계를 다룬 일곱 번째 책 ‘당신과 나 사이’(메이븐·사진)를 냈다. 1시간 글을 쓰면 2시간 동안 꼼짝 없이 누워 있어야 하는 상태로 3년간 쓴 책이다. 마흔 즈음 병을 앓아 벌써 17년째. 한 시간 반 간격으로 약을 먹어야만 움직일 수 있는데, 그것조차 뜻대로 되지 않는다. 원두를 꺼내고 생수통을 드는 게 모두 도전이다. 그래도 “전문가가 해야 맛이 난다”며 한사코 직접 커피를 내렸다. 그는 “아픈 뒤 커피를 즐기게 됐는데 뭐든 끝까지 하는 성격 탓에 커피도 그렇게 공부했다”고 했다. 그의 추천대로 벌꿀 같은 향긋한 신맛이 산뜻하게 감겼다. 그가 책을 쓴 건 병으로 인한 고통 때문이었다. 국립정신건강센터의 ‘잘나가는 전문의’였던 그는 아프기 전까지 “내가 잘나서 주변에 사람이 많다”고 생각했다. 낯을 가리는 편이라 차갑다는 오해도 받았다. 하지만 병을 앓은 후 손 하나 꼼짝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인간은 혼자임을 깨달았다. 고통을 이기는 유일한 힘이 사람들의 온기, 관심이었단 것도. 그는 “뒤늦게 깨달은 소중한 관계를 지키는 방법에 대해 말하려다 보니 ‘거리 두기’가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물리적으로 가족, 연인은 사랑과 보호가 이뤄지는 0∼46cm를 유지하는 게 좋다. 친구와는 친밀함과 격식이 공존하는 46cm∼1.2m, 공적인 관계는 1.2∼3.6m가 이상적이라고 했다. 부모에게 받은 상처를 극복하는 건 부모를 한 인간으로 인정하고 거리를 두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직장동료도 친구나 가족이 아니라 ‘동료’일 뿐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부부싸움을 하면 남편은 ‘당신 책처럼만 하라’고 한다. 왜 책과 실제가 다르냐고. 하지만 인간관계를 잘 맺어서가 아니라 이렇게 하고 싶기 때문에 쓴 것”이라며 웃었다. 병원장의 괴롭힘 등 직접 겪은 사례들이 설득력을 더한다. 그는 벌써 다음 책을 준비 중이다. 고통에 대한 이야기다. 지난해 병이 악화돼 6차례 입원했는데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을 정도로 끔찍했다”고 했다. 타인과 절대 나눌 수 없는 것이 고통임을 절감했다는 것.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커피를 내려줄 때처럼 떨리는 손으로, 하지만 최선을 다해 기자가 가져간 새 책에 서명했다. 그는 “이제 누구도 판단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럴 자격도,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이런 노력에는 상대에 대한 존중과 편안한 거리감이 포함돼 있을 것이다. 편안하고 따뜻했던 그와의 시간을 떠올리자,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그룹 빅뱅의 지드래곤(30·사진)이 27일 현역 입대한다. 14일 소속사인 YG엔터테인먼트는 “지드래곤이 최근 입영통지서를 받고 현역 입대한다”며 “신병교육대 위치는 공개하지 않고 조용히 입소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2006년 빅뱅으로 데뷔한 지드래곤은 ‘뱅뱅뱅’ ‘거짓말’ 등으로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최근 박사과정 진학을 사유로 병역을 연기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움직이는 도서관이라고요? 올림픽 기간 내내 여기 있는 건가요?” 평창 겨울올림픽이 열리는 강원 강릉역 맞은편에 13일 정차된 ‘책 읽는 버스’. 호기심에 기웃거리다 버스 안으로 올라온 방문객들은 내부를 보고 탄성을 냈다. 버스 안에는 문학, 여행서부터 인문, 과학 등 분야를 망라한 최신 서적이 깨끗이 진열된 책장과 올림픽 홍보 영상이 나오는 50인치 대형 스크린, 마음껏 책을 읽고 쉴 수 있는 널찍한 의자와 여유 공간까지 갖추고 있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사단법인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대표 김수연 목사)이 운영하는 책 읽는 버스가 평창 올림픽을 맞아 8∼25일 강릉에 정차한 것. 강릉역에서 올림픽 관련 물품을 관리하는 자원봉사자 전수련(20), 은태현(23), 장철운 씨(24)는 잠시 짬을 내 쉬러 나왔다가 책버스를 발견하고 연신 환호성을 질렀다. 고성에 있는 숙소에서 강릉까지 오가며 자원봉사 중인 이들은 일이 끝난 뒤 여가시간에 할 일이 마땅치 않았다며 반겼다. 전 씨는 “올림픽 중에도 책과 함께할 수 있는 장소가 있어 뜻깊다. ‘언어의 온도’를 꼭 읽어보고 싶었는데 진짜 잘됐다”며 열심히 책장을 넘겼다. 책버스에 오른 방문객의 눈길을 가장 먼저 끄는 인기 아이템은 단연 문학 자판기였다. 긴 글, 짧은 글 중 하나를 선택해 버튼을 누르면 추천하는 문학 작품 내용의 일부분이 출력돼 나온다. 윤동주 김영랑의 시부터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한 구절 등 각양각색이다. 어떤 글귀가 나올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재미는 덤이다. 책버스 인근 행사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최힘찬 씨(24)는 문학자판기에서 3장을 연이어 뽑아갔다. 최 씨는 “일하는 중엔 책을 읽기가 어려운데 문학자판기는 한 장에 좋은 글이 정리돼 있어 틈틈이 보기에 안성맞춤”이라며 “명작의 글귀를 여러 장 챙겨가니 마음이 든든하다”고 말했다. 입소문이 나서 오후 내내 최 씨의 동료 아르바이트생들이 이곳에 들렀다 가기도 했다. 강릉을 찾은 관광객에게 책버스는 또 하나의 인상 깊은 추억이 되고 있었다. 서울에서 놀러온 정희윤 씨(20) 일행은 올림픽이 열리는 곳에 도착했다는 흥분이 가시기도 전에 책버스를 발견하고 더 들떴다. 김민우 씨(20)는 “처음엔 ‘책 읽는 버스’라고 해서 헌혈하고 나면 책을 선물로 주는 건가 했다”며 웃었다. 김 씨는 “문학을 좋아하는데 이런 공간이 있다니 정말 반갑다”며 문학자판기에서 글귀를 뽑아 친구들에게 하나씩 나눠 줬다. 미국 일본 중국 등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도 호기심을 보이며 책버스를 찾았다. 영어 동화책 코너가 따로 있어 가족 단위의 외국인들도 잠시 쉬어갈 수 있다. 이들을 위해 역대 겨울올림픽을 개최했던 12개국 작가들이 쓴 그림책을 모은 작은 특별전과 한국 문화, 역사를 소개하는 다국어 도서전도 마련했다. 책버스는 하루 평균 100여 명이 꾸준히 찾고 있다. 설 연휴에도 정상 운영한다. 패럴림픽 기간(3월 9~18일)에도 운영될 예정이다. 강릉=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소확행’을 추구하는 흐름은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힙(hip)한 라이프스타일로 주목받으며 인테리어에서부터 먹을거리, 출판, 패션까지 휩쓸어버린 덴마크발(發) ‘휘게(Hygge) 현상’이 대표적이다. 마이크 비킹이 쓴 ‘휘게 라이프, 편안하게 함께 따뜻하게’(2016년)는 촛불, 시나몬 번에 따뜻한 양모 담요를 두른 채 집에서 소박하지만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는 삶을 세계적 유행으로 만들었다. 휘게의 핵심 가치는 편안함이다. 행복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사소하게 즐기는 아늑함에 있음을 환기시켰다는 점에서 소확행과 닮았다. 이 트렌드는 소비문화 곳곳에 영향을 미쳤다. 2016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휘게 열풍 덕에 시나몬 가격이 20%나 올랐다”고 보도했다. 스웨덴 ‘라곰(lagom)’ 스타일도 최근 떠오른다. 패션잡지 ‘보그’는 지난해 “이제 휘게는 잊어라. 라곰 시대가 온다”라고 내다봤다. 라곰이란 지나치게 많지도 적지도 않은 상태를 일컫는다. 주로 겸양, 공평함 등을 뜻하는 단어로 화려함보다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것을 추구한다. 스웨덴의 전통적 커피 브레이크인 ‘피카(fika)’는 대표적 라곰 스타일. 잠시 일을 멈추고 차와 쿠키를 즐기는 자신만의 시간에서 꽉 찬 행복감을 느낀다. 미국판 소확행도 인기다. 뉴욕 브루클린에서 화제인 ‘100m 마이크로 산책(micro walks)’은 1년 내내 불과 100m 반경을 걸으며 세밀하게 주변을 관찰하며 소소한 행복을 찾는다. 한국도 지난해부터 ‘탕진잼’(소소한 물건을 사는 재미), ‘시발비용’(스트레스를 받아 지출한 비용) 등 작은 것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는 문화를 지칭하는 현상이 유행했다. 전문가들은 불확실한 미래에 지친 젊은층이 눈앞의 쾌락, 즉각적 충족감에 치중하며 이런 유행을 이끌었다고 분석했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트렌드 코리아 2018’에서 “저성장 속 깊어지는 상대적 박탈감과 해체되는 소속감, 과도한 경쟁 등 암울한 사회적 현실 속에서 느끼는 공허함을 극복하기 위한 현상”이라며 “이 같은 소비 트렌드는 계속 부상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영차영차! 야자수 꼭대기로 기어오르고 있는 너는 누구니?” 플랩을 넘겨서 동식물을 맞히는 방식은 유아 그림책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이 책은 조금 색다르다. 접혀 있는 플랩을 하나씩 들춰내 숨겨져 있던 동물의 모습을 찾아내는 방식은 같지만, 반전이 숨어 있다. 동물의 몸 일부를 보고 당연히 코끼리일 것이라 생각하고 넘겨보면 뜻밖에도 사슴이 나타난다. 나뭇가지에 길게 똬리를 틀고 있어 당연히 뱀이겠지 하고 넘겨보면 치타가 긴 꼬리를 감고 있는 식이다. 아이와 부모가 동물을 함께 추측해본 뒤 예상을 뛰어넘는 동물들을 발견해 가는 즐거움을 준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용서의 가치는 계속해서 의심받아왔다.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강권되는 용서에 문제를 제기하는 예술작품도 드물지 않다. 누가 누구를, 왜, 어떻게 용서해야 하며 그것은 무슨 실제로 소용이 있을 것인가. 용서란 섣부른 도피나 그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맹목적 집착 아닌가. 용서에 대한 이런 광범위한 반감의 시선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래서 이 책에 더 눈길이 간다. 상상하기조차 싫은 인생의 비극을 실제로 경험한 이들의 실화를 담았다.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이던 어느 날 삶을 완전히 뒤바꿔 놓는 비극이 찾아온다. 마트 계산대에서 일하다, 혹은 여느 때처럼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열다가 아들이, 엄마가, 딸이, 살해됐다는 걸 알게 된다. 믿기지 않는다. 모든 게 비현실적이다. 사건 이후의 모든 것은 예전과 다르다. 피해자 가족들은 극심한 혼란과 고통 속에 빠진다.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지만 상처는 극복되지 않는다. 분노, 절망, 불안, 자기학대가 되풀이된다. 이들의 이야기가 놀라운 건 여기서 그들이 내린 완전히 다른 선택 때문이다. 그들은 일반적이지 않은 결단을 내린다. 용서다. 완벽히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용서의 길을 택한다. 사연과 용서의 형태는 다르지만 모두 묵직한 울림을 준다. 런던에 살고 있던 아이도우 부부의 셋째 아들 데이비드는 자택 근처 공원에서 살해된다. 아들을 죽인 범인은 비슷한 또래의 소년이다. 몇 년을 고민하다 아들을 죽인 소년을 만나러 간다. 소년은 교도소 안에서 용서해 달라며 펑펑 운다. 어떤 사이였고, 왜 죽였는지 알고 싶었던 부인은 그때야 소년이 아들을 아무 이유 없이 죽였단 걸 알게 된다. 그냥 거기 칼이 있었다고. 그녀가 무너지듯 울며 내뱉는 질문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나는 데이비드 때문이 아니라 너 때문에 울고 있단다. 네 인생에 무슨 짓을 한 거니?” 캐시는 발레 무용수이자, 미인대회에서 우승하기도 한 사랑스러운 딸이 일하러 간 타지에서 잔혹하게 살해된 후 삶의 이정표를 잃어버린다. 하지만 선고 공판 즈음 가해자의 어머니를 법정에서 만난 뒤 살해당한 아이의 어머니로 사는 것보다 더 가혹한 삶이 있을 수 있음을 깨닫는다. 살인자인 아들을 둔 어머니는 온몸을 떨면서 자신에게 걸어온다. 캐시는 알 수 없는 깊은 연민을 느낀다. 물론 아직 딸을 죽인 살해범은 만나지도, 용서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곳을 향해 나아간다. 그녀는 “우리가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많지만 그 의문들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영국의 한 저널리스트가 시작한 비영리자선단체 ‘용서 프로젝트’에서 자신의 경험을 공유한 이들은 책 몇 권으로 풀어놔도 성이 차지 않을 것 같은 끔찍한 아픔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시도를 정확하고 간결하게 회고한다. 내전 중 반군에게 성폭행당하고 눈앞에서 아들이 살해당하는 걸 지켜봐야 했던 시에라리온의 세타 조는 가해자가 용서를 구하며 내미는 손을 어렵게 잡은 뒤 이렇게 말한다. “그의 손을 잡았을 때 나는 흐느끼고 있었다. 절망감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이 끔찍한 과거의 고통을 내려놓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저자는 “용서가 모든 문제를 관통하는 마법의 총알이나 만병통치약은 아니지만, 상처에서 탄력적으로 회복할 수 있는 하나의 방식임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한다. 여전히, 누구도 쉽게 답을 내리거나 강요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무너진 삶을 되살리고 회복시킬 놀라운 잠재력이 어쩌면 우리 안에 있을 수 있음을 이 책은 더없이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음악을 즐긴다는 건 사람이 누릴 수 있는 큰 호사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음악을 듣고 거기에 반응하며, 그것을 사랑하기까지 하는 것일까. 이 만만치 않은 질문에 작곡을 전공한 음악가인 동시에 물리학을 전공한 과학자인 저자가 답한다. 일단, 당신의 음악 취향은 어떤가.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부류의 음악을 결정하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음악은 주의 깊게 듣지 않는 경향이 있다.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새로운 종류의 음악을 즐길 가능성은 나이가 들수록 낮아진다. 특히 쿨한 음악과 그렇지 않은 음악의 구분에 민감한 10대들은 음악에 행동까지 좌지우지된다. 2006년 시드니 시의회는 배리 매닐로의 히트곡 음반을 틀어 10대들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장소에서 그들을 흩어지게 하는 방법을 발견해 내기도 했다. 이른바 ‘매닐로 방법’이란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이렇게 음악에 민감하다. 실제로 쇼핑몰에서 어떤 음악을 틀어놓느냐가 사람들의 쇼핑에 영향을 미친다. 팝보다 클래식 음악을 틀었을 때 사람들이 세 배나 더 비싼 와인을 샀다는 연구도 있다. 클래식 음악이 스스로 더 부유하고 세련되게 여기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런 방식으로 음악과 관련한 인문사회 과학적 분석과 연구를 망라해 가며 우리 삶에 음악이 미치는 심오한 영향력을 드러내 보여준다. 음악이 실제로 유대감을 만들고 그리움과 기쁨의 감정을 느끼게 해주며 질병까지도 이기게 하는 힘을 가진 존재임을. 저자는 말한다. “그러니 어찌 음악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이 책 한 권이면 어디서 음악 이야기가 나올 때 몇 마디 거들 수 있을지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저자의 유머러스한 필치도 흡인력이 있다.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순수문학 시장이 침체되면서 색다른 주제의 장르문학 공모전이 속속 생기고 있다. 기존 문학상들과 달리 소재의 다양성을 넓히고 독자들의 취향을 저격하며 차별화를 꾀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스릴러 공포 판타지 공상과학(SF) 등 마니아층이 탄탄히 형성된 분야를 중심으로 활기를 띠고 있다. 장르문학전문 출판사인 황금가지는 ‘ZA 문학 공모전’을 운영 중이다. 올해로 6회째다. ZA는 좀비(Zombie)와 아포칼립스(Apocalypse·묵시)의 약자로 ‘좀비로 인한 세상의 종말’을 소재로 한 작품을 공모한다. 좀비장르만을 대상으로 하는 희귀한 문학상이지만 마니아층의 지지를 받고 있다. 김준혁 황금가지 주간은 “한국에서 B급 문화로 취급돼온 좀비물이 최근 대중적 인기를 얻으면서 수요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기획했다”며 “단편, 장편을 공모하는데 계속 수상작이 안 나오던 장편에서 올해 처음 당선작이 나오며 완성도가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응모작은 매년 150∼170여 편이다. 이 출판사는 얼마 전부터 음식 테마 장르소설 공모전을 표방한 ‘테이스티 문학 공모전’도 진행하고 있다. 방송, 영화 등 대중문화를 점령하며 강력한 파급효과를 내는 먹방콘텐츠를 문학과 결합시켰다. 매회 주제를 정해주는데 1회는 고기, 2회는 면으로 공모했다. ‘해피버스데이 3D 미역국’ ‘스파게티의 이름으로, 라멘’ 등 제목부터 개성이 넘치는 수상작을 묶어서 단행본으로도 출간했다. 문학동네의 장르소설 전문 임프린트(독자 브랜드)인 엘릭시르도 지난해 처음으로 추리·미스터리물을 대상으로 한 장·단편소설과 비평 공모전을 만들었다. 출판사에서 운영 중인 격월간 잡지에 수록할 장르문학 작가와 작품을 발굴하자는 취지로 제정한 상이다. 공모 작품은 모두 추리물로 제한했다. 출판사들이 이색 공모전을 운영하는 것은 마니아층을 통해 평균 2, 3쇄 이상의 판로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데다 장편으로의 개작이나 영화·연극 판권 계약으로 이어져 부가수익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출판업계 관계자는 “장르문학은 성격상 원소스 멀티유스로 이용될 수 있어 공모전을 통해 작가군이 많이 양성된다면 성장 잠재력이 크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웹소설을 기반으로 한 장르문학 공모전도 인기를 끌고 있다. 추리와 미스터리 및 기타 장르가 혼합된 카카오페이지와 CJ E&M의 ‘추미스’ 공모전, 독자들이 바로 투표해 수상작을 결정하는 ‘톡소다 BL(Boy‘s Love·남성끼리의 사랑을 다룬 장르) 소설 공모전’ 등이 있다. 웹소설은 최근 10, 20대 젊은층을 중심으로 연간 2000억 원대까지 시장 규모가 성장하고 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죽음을 다룬 책들이 재조명되고 있다. 이른바 ‘웰다잉(Well-Dying)법’이라고 불리는 연명의료 결정제도가 4일부터 시행되면서 죽음을 선택할 권리와 아름다운 마침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연명의료 결정법은 회생 가능성이 없는 질병을 앓는 말기 환자가 치료를 중단할 수 있게 해 무의미한 연명의료에 매달리지 않게 하는 제도다. 생명을 인위적으로 단축시키는 존엄사나 안락사와는 다르지만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존엄사 전도사’로 불리는 허대석 서울대 의대 교수가 최근 쓴 ‘우리의 죽음이 삶이 되려면’(글항아리)은 임종을 주제로 환자, 보호자, 의료진이 겪게 될 일을 고민하고 해법을 모색한 책이다. 환자의 가치관과 자기결정권을 존중해 병의 진행 상태를 본인이 알고 연명의료 여부를 결정할 수 있도록 해야 죽음의 질을 높일 수 있다고 강조한다. 출판사가 일주일 만에 2쇄를 찍고 증쇄를 준비해야 할 정도로 독자들의 반응이 뜨겁다. 유명 드라마 ‘오싱’의 각본가인 하시다 스가코가 쓴 ‘나답게 살다 나답게 죽고 싶다’(21세기북스)도 연명의료 결정법 시행을 계기로 다음 주에 출간된다. 올해 92세를 맞은 저자가 인간답게 죽을 권리와 안락사 법제화에 대한 소견을 담담히 밝힌 책이다. 이현정 21세기북스 편집자는 “조용히 고통스럽지 않게 세상과 작별하기 위해 소극적 존엄사를 넘어 안락사까지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쳐 일본에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며 “존엄사법 시행으로 국내에서도 관심이 높을 것 같아 책을 내게 됐다”고 말했다. ‘죽음의 5단계’ 등 죽음학을 연구하고 호스피스 운동을 이끈 미국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쓴 ‘죽음과 죽어감’(청미)은 2008년 국내에 소개된 후 최근 기념판이 다시 나왔다. 어떻게 죽는지는 삶을 의미 있게 완성하기 위한 중요한 과제임을 알려주는 책으로, 웰다잉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지던 당시 출간됐다 최근 재조명받고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분투하는 의사들이 쓴 책도 인기를 끌고 있다. 남궁인 응급의학과 의사가 자신의 경험을 담은 ‘만약은 없다’(문학동네) ‘지독한 하루’(〃)와 김정욱 신경외과 의사가 수술대 위에서 겪은 일을 쓴 ‘병원의 사생활’(글항아리)이 대표적이다. 이 책들은 생사의 현장에서 인문학적 시선으로 삶을 폭넓게 성찰한 글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손민규 예스24 인문사회MD는 “의료 현장의 이야기는 간접적으로나마 죽음을 체험하고 의미를 짚어볼 기회를 주기 때문에 죽음을 마주할 기회가 별로 없는 젊은 독자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이곳은 우리 마을에 처음 생긴 도서관이에요. 어른들이 보는 책은 이쪽 서가에, 우리 친구들이 보는 책은 여기 있어요. 각자 한 권씩 골라서 읽어볼까요?” 강원 평창군 방림면사무소 계촌출장소 2층에 2일 새로 문을 연 ‘방림계촌작은도서관’. 계촌초등학교 병설유치원생 10여 명은 손지혜 교사(38)와 함께 책 2500여 권이 꽂힌 원목책장과 대형 책상, 스툴 등이 갖춰진 도서관 내부를 신기한 듯 둘러봤다. 특히 유아용 책상과 놀이 공간, 푹신한 빈백소파를 갖춘 어린이실에 들어서자 신이 났다. 노규민 군(7)은 “관심이 많은 물고기 책도 있다. 다 읽고 가고 싶다”고 소리쳤다. 창밖으로 눈이 뽀얗게 내려앉은 계촌리 야산과 너른 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새 도서관에 들어서며 탄성을 지른 건 아이들뿐만이 아니었다. 222m²(약 67평) 규모로 널찍한 이곳은 원래 마을 주민들을 위한 복지 차원에서 결혼식장으로 쓰였다. 하지만 인구가 줄어들고 젊은이들이 도시로 빠져나가면서 점점 본래 기능을 잃었다. 주국창 씨(58)는 “최근 3년간은 결혼식이 한 번도 열리지 않아서 이 넓은 공간이 방치돼 있었다”며 “볼 때마다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그랬던 이곳을 사단법인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대표 김수연 목사)이 KB국민은행의 후원을 받아 도서관으로 탈바꿈시켰다. 황옥근 씨(79)는 “이렇게 잘 지어주니 고맙고 좋다는 말밖에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열람 공간, 어린이실뿐 아니라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 행사를 열 수 있는 프로그램실도 마련됐다. 계촌은 평창 산골의 작은 마을이지만 주민들의 문화에 대한 관심은 매우 높다. 매년 첼리스트 정명화 등 정상급 클래식 연주자들과 함께 음악축제를 열고 있고 초등학교 전교생이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한다. 하지만 독서 환경은 열악했다. 공공도서관이나 서점이 전무해 책을 보려면 30분가량 차를 타고 평창군 도서관까지 가야 했다. 손 교사는 “농사짓는 가정이 많다 보니 아이들이 원한다고 해서 도서관까지 쉽게 갈 수 있는 여건도 못 됐다”며 “어르신들에게도 좋은 일이지만 아이들이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공부하며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환경에서 자랄 수 있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도서관을 둘러본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다시 찾아 대출할 책들을 고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날 열린 개관식에는 심재국 평창군수, 유인환 평창군의회 의장, 양재영 KB국민은행 강원경기남지역영업그룹 대표 등이 참석했다. 가수 서수남 씨의 축하공연으로 개관식 분위기는 한층 화기애애해졌다. 심 군수는 “평창 겨울올림픽을 일주일 앞두고 평창에서 가장 작은 마을 계촌의 열정으로 작은도서관이 문을 열게 돼 기쁘다. 이 여세를 몰아 올림픽까지 자랑스럽게 잘 치러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평창=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추리소설의 고전인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부터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에 이르기까지 범죄소설은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 뜨거운 사랑을 받아온 문학 장르다. 하드보일드 추리물의 대표작가 레이먼드 챈들러의 문체는 국내 많은 작가들의 워너비로 꼽히기도 한다. 하지만 누구도 이런 작품들을 진지한 비평과 연구 대상으로 고려하지 않았다. 장르소설의 위상이 낮은 한국에서는 특히 그랬다. 영문학과 교수이자 25년간 범죄소설을 연구해 온 저자는 지금까지 범죄소설을 바라보던 이런 시선에 의문을 제기한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소설은 본질적으로 범죄소설이다. 최초의 인간들은 죄 때문에 낙원에서 추방됐고 그들의 자녀는 형제를 살해했다. 태초부터 범죄가 영미소설의 원천을 형성한 셈이다. 그런데도 범죄소설은 항상 평가절하돼 왔다. 콜린스의 추리소설은 빅토리아 시대 다른 영국 소설의 진부함을 뛰어넘는 탁월함과 근대성을 갖추고 있음에도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이 미스터리를 밝히기 위해 저자는 19, 20세기 범죄소설의 계보를 추적해 나간다. 시작은 뉴게이트 소설이다. 뉴게이트 소설은 1830년경 유럽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범죄소설이다. 피지배계층이 당대 법률·경제 제도의 피해자라는 급진주의 관점을 담은 추리물로, 범죄자를 낭만적이며 영웅적 인물로 그려내 노동계급이 특히 열광했다. 당시 영국 사회에서는 노동계급의 선거권 획득을 위한 차티스트 운동이 격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체제 위협에 대한 공포심이 커지는 중에 등장한 뉴게이트 소설은 곧바로 경계와 탄압의 대상이 됐다. 추리소설이 경멸의 대상으로 낙인찍힌 것은 바로 여기서 기인한다고 저자는 암시한다. 국가가 개입해 뉴게이트 소설의 확산을 막는 등 탄압이 이뤄지는 와중에 문학사적으로는 체제와의 절충을 시도하는 반(反)뉴게이트 소설들이 등장했다. 범죄자가 아니라 탐정의 관점에서 사건을 분석하고, 독자를 범죄자에게서 격리시키는 추리소설이다. 저자는 새커리의 ‘캐서린’,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가 그런 사례라고 주장한다. 이후 셜록 홈즈나 미스 마플 시리즈 등으로 이어진 추리소설은 체제와의 타협을 통해 안착한다. 사건 해결의 열쇠를 쥔 탐정으로 백인 귀족 남성이나 가부장적 관점을 가진 무성적 노처녀를 내세움으로써 젠더, 인종, 규범과 관련된 지배계층의 이상을 대변하며 살아남은 것.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은 다시 한 번 변화를 꾀한다. 레이먼드 챈들러나 대실 해밋은 허무하고 비합리적 세상에서 노동계급의 좌절과 분노를 대변한다. 팜 파탈은 자본가의 욕망을 대변하는 존재로 소설 속에서 항상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저자는 이렇게 추리소설이 시대에 따라 지배가치에 저항하면서 분투해 왔음을 강조하며 “범죄소설이 이제는 온당한 문학적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저자의 의도와 달리 대부분의 추리물이 충실한 장르 문법으로 체제와 타협해 온 궤적이 더 뚜렷하게 보이는 건 아쉽다. 책의 마지막 문장에는 공감한다. ‘범죄소설은 어쨌든 문학의 주요 장르로 남을 것이고 오래도록 그럴 것이다.’ 이것만큼 재밌는 게 없으니까 말이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아이를 제시간에 맞춰 재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하루를 마무리하며 잠자리에 들 수 있을까. 이 그림책은 아이가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체크무늬 잠옷을 입은 토닥이에게 하나씩 털어놓는 것으로 시작된다. 아침 먹고, 유치원에 가고, 친구들과 놀고, 야외활동도 한다. 사소하지만 소중한 일상을 곱씹는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오늘이 마무리되고, 내일 있을 즐거운 일들을 기대하며 꿈나라로 떠난다. 부모와 아이가 서로의 하루를 공유하고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도록 간결한 글에 밝고 따뜻한 터치의 그림이 더해졌다. ‘밤기차를 타고’ ‘이불을 덮기 전에’까지 총 3권의 시리즈로 구성됐다.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철이 일찍 들어 웃자라는 아이들이 있다. 예의 바르고 조숙하다고 어른들에게 칭찬받기도 하지만 이 동화작가의 눈에 그 모습은 어딘지 계속 마음이 쓰였던 모양이다. 맏언니로 동생들 어리광을 받아주고 청소에 저녁까지 엄마 노릇, ‘살림 밑천 노릇’을 했던 그의 어린 시절이 겹쳤기 때문이다. 베스트셀러 ‘마당을 나온 암탉’을 쓴 동화작가 황선미 씨(55)가 낸 신작 ‘할머니와 수상한 그림자’(스콜라)는 이렇게 주변 환경 때문에 일찍부터 어른스럽게 자란 한 소년에 관한 이야기다. 조부모 아래서 자라는 아이는 평범한 또래들이 부모에게서 받는 것을 누리지 못하지만 의연함으로 견뎌 내려 애쓴다. 작가는 소년의 주변에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고 의지할 만한 여러 관계가 이미 촘촘히 엮여 있음을 조금씩 드러내 준다. 서울 마포구 KT&G 상상마당에서 지난달 26일 만난 황 작가는 “사회가 빠르게 변하며 가족의 형태도 많이 달라지고 있고 그 관계에서 생기는 결핍, 문제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인 것 같다”며 “현재 관계를 맺고 있는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지에 대해 생각해봤으면 좋겠다는 취지에서 썼다”고 말했다. 이 책은 가정, 학교, 또래집단 등 어린이들이 맺는 관계의 문제를 고찰한 5편의 연작 시리즈 중 한 편이다. 친구 관계를 다룬 ‘건방진 장루이와 68일’ 이후 두 번째 책이다. 앞으로 세 권의 책이 더 나올 예정이다. 그는 스스로에 대해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아이들과 공감대가 형성되는 신기한 교접 지점이 많다”고 말했다. 작가는 동화가 아이들만 읽는 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실제로 아이들이 맺는 관계의 대부분은 조부모, 부모, 교사, 지역공동체의 연장자인 어른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작가처럼 어린 시절의 우리가 투영된 이야기이기도 하고, 자기만의 골방에 웅크린 주변 아이들의 손을 잡아주는 역할을 해야 할 수도 있다. 결국 동화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인 셈이다. “심지어 아이들에게 좋은 친구는 나중에 사귀어도 되니 지금은 공부하라고 말하는 어른들이 있잖아요. 하지만 지금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고 감사함을 느끼며 자라는 게 정말 잘 크는 것 아닐까요.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모두 생각해봤으면 해요.” 작가는 지난해 가을부터 이달 중순까지 작가 레지던스 프로그램으로 스웨덴에서 겨울을 보냈다. ‘마당을 나온 암탉’ ‘푸른 개 장발’ 등이 번역 출간돼 스웨덴의 거의 모든 서점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의 책은 어린이 책이 아니라 소설 코너에 소개돼 있었다. 폭넓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는 외국처럼 동화의 저변이 넓어질 필요가 있다는 바람을 밝혔다. 하지만 한국은 출판 시장의 전반적인 침체로, 동화 시장 역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결혼 및 출산 연령이 높아지면서 지난해 한국의 신생아 수는 40만6200명으로 전년보다 7.3% 줄었다. 저출산은 도서시장에도 충격을 주고 있다. 지난해 예스24에서는 청소년 분야 도서 판매가 14% 감소했다. 황 작가는 “국내에서 동화는 독자층이 한정돼 있는 데다 저출산, 입시 위주 교육, 스마트 기기 증가로 시장이 갈수록 위축되고 있어 안타깝다”며 “다양한 연령대에서 동화를 읽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정책이 마련돼 좋은 작가가 많이 배출되고 다시 독자도 늘어나는 선순환이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반려동물을 다룬 책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인구가 1000만 명 규모로 확대되면서 독자층도 넓어진 것으로 분석된다. 농협경제연구소는 2015년 우리나라 반려동물 시장규모는 1조8000억 원에 이르고, 2020년에는 6조 원 규모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가구도 지난해 전체 가구의 28.1%(약 593만 가구)에 달했다. 콘텐츠 기근에 시달리던 출판계는 급격히 커지는 반려동물 시장에 주목하고 있다. 기존의 반려동물 책은 취미·실용서나 에세이·사진집이 대다수였지만 최근에는 반려동물과 인간의 유대감을 분석하거나 반려동물의 행동 습성과 생물학적 특성을 연구한 책이 많다. 인문과학분야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고양이와 인간이 공존하게 된 과정을 인문학적 관점에서 분석한 ‘거실의 사자’(마티), 고양이의 뇌와 마음을 과학적 관점에서 분석한 ‘캣센스’(글항아리)가 대표적이다. 고양이를 주제로 한 자기계발서를 표방한 ‘고양이처럼 행-복’(문학동네)처럼 고양이에게서 배울 수 있는 특유의 습관이나 태도를 엮은 책도 증가했다. 판매량도 상승세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지난해 반려동물 관련 도서 판매량은 3만7246권으로 전년보다 약 33% 증가했다. 고양이와 관련된 책이 늘어나는 이유는 강아지에 비해 고양이는 손이 덜 가고 작은 공간에서도 키울 수 있어 도시 생활자, 특히 1인 가구에 적합한 점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젊은층에서는 귀여운 고양이 사진을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리는 게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확산되고 있다. 마티의 정희경 대표는 “SNS를 중심으로 고양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점이 고양이 책 출간을 결정할 때 중요한 고려 사항이 됐다”고 말했다. ‘거실의 사자’는 지난달 23일 출간된 지 이틀 만에 트위터에서 6만 뷰를 넘어 화제가 되고 있다. 온라인 쇼핑몰에서도 고양이 관련 상품들의 신장세가 가파르다. G마켓의 지난해 고양이 관련 용품 매출은 3년 전보다 71%나 늘었다. 강아지 관련 상품은 같은 기간 매출이 35% 증가하는 데 그쳤다. 김도훈 예스24 문학담당 MD는 “취미 인문 문학 등 전 분야에서 반려동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시장이 커지고 있는 만큼 관련된 책의 종류는 더욱 다양해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소설가인 이문열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이사장(70·사진)이 중도 사퇴한다. 이 씨는 30일 본보와의 통화에서 이날 열린 재단 이사회에서 사퇴 의사를 표명하고 이사장직에서 물러난다고 밝혔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기관인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은 창작 환경 개선을 위해 2012년에 설립됐다. 이사장 임기는 3년이다. 박근혜 정부 시절이던 2016년 2월 임명된 이 씨는 임기가 1년가량 남았다. 이 씨는 “재단이 블랙리스트에 오른 예술인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지만 블랙리스트 사태로 (나를 임명한 문체부) 관련자들에 대한 사법처리가 진행되고 있어 예술인을 지원하는 기관의 이사장직을 유지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예술인복지재단은 연간 240억 원의 예산을 집행한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태어날 때부터 모든 걸 함께해 온 이불 ‘분홍이’. 재아는 분홍이가 없으면 안 된다. 심심할 때도 무서울 때도 외로울 때도 가장 좋은 친구가 되는 건 언제나 분홍이. 그러다 보니 꼬질꼬질 낡아 더러워졌다. 엄마가 재아를 설득해 분홍이를 겨우 빨아 널어 두었는데, 그만 바람에 날려가 아기 고양이들 차지가 돼 버렸다. 재아는 무척 속상했지만 아기 고양이를 위해 분홍이를 양보하기로 한다. 이제는 더 이상 아기가 아니니까 말이다. 재아처럼 만 4세까지 주로 드러나는 아이들의 집착행동은 양육자로부터 독립해 가며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친근한 이야기를 통해 아이들의 마음을 공감해 준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미국과 중국의 전쟁은 예정된 수순이다.’ 이 책은 이처럼 당혹스럽고 도발적인 결론에서 시작된다. 물론 현재의 우리는 “중국이 깨어나는 순간 온 세상이 뒤흔들릴 것”이라 했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경고대로, 중국의 부상이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에 막대한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현장을 똑똑히 목도하고 있다. 하지만 다들 생각할 것이다. 뭐, 그렇다고 설마 전쟁이? 하버드 벨퍼 국제문제연구소장을 지낸 국방 정책 분석 전문가인 저자는 얼핏 허무맹랑해 보이는 미중의 전쟁 가능성이 우리 생각보다 훨씬 높은 상황임을 주장한다. 근거는 고대 그리스의 역사학자 투키디데스가 최초로 설명했던 ‘투키디데스의 함정’에서부터 출발한다. 패권교체기 강국의 충돌 위험성을 뜻하는 이 말은 투키디데스가 기원전 5세기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핵심 원인이 ‘아테네의 부상과 그에 따른 스파르타의 두려움’에 있다고 한 분석에서 유래됐다. 새로 부상하는 세력이 지배 세력을 대체할 정도로 위협적일 경우 그로 인한 구조적 압박이 무력충돌로 이어지기 쉽다는 것이다. 실제로 역사를 살펴보면 이런 상황에서 대개 전쟁이 발발했다. 저자는 세계사 속에서 신흥강국의 부상이 기존 패권국의 입지를 무너뜨렸던 16개의 사례를 찾아냈다. 그중 제1·2차 세계대전, 중일전쟁, 나폴레옹 전쟁 등 12번이 모두 전쟁으로 끝났다. 20세기 중반 아시아로 손을 뻗치기 시작한 미국의 규제와 이를 부당하게 여긴 일본의 야심은 무역마찰을 빚다 진주만 공습으로 이어졌다. 세계1차대전 역시 표면적으로는 사라예보 사건과 이로 인한 유럽 각국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며 발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9세기 세계의 중심이었던 영국과 막강한 해군력 증진으로 급부상하던 독일의 긴장관계가 전쟁 15∼20년 전부터 형성되고 있었다. 신흥세력은 제도가 빨리 바뀌지 않는 것이 지배세력의 훼방이라 간주하고, 지배세력은 신흥세력이 도를 넘는 급한 조정을 요구한다고 생각한다. 힘의 이동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런 과도기적 마찰은 충돌을 부르게 된다. 그렇다면 현재 미중의 상황은 어떤가. 중국은 7년마다 경제규모를 두 배 이상 키우며 제조업, 시장 규모에서 미국을 능가하는 거인이 됐다. 옛 제국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 강력한 반부패정책을 펴고 민족주의 고취, 구조조정, 관료 개편을 통해 무력을 재건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위험요인은 한 가지 더 있다. 저자는 “만약 할리우드에서 중국이 미국에 맞서다가 전쟁까지 발발되는 영화를 만든다면, 시진핑과 도널드 트럼프보다 더 적절한 두 주인공은 찾기 힘들 것”이라고 말한다. 민족주의적 야심, 독특한 리더십, 벅찬 국내 과제 천명 등 ‘불길한 유사성’을 가진 이들은 실제로 지난해 미중 정상회담에서 무역 불균형과 북핵 위기를 두고 타협점을 찾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전쟁이 필연적인 건 아니다. 패권 교체기에 전쟁을 모면했던 사례도 네 번 있었다. 15세기 에스파냐는 교황의 중재로 포르투갈의 자리를 대체했고, 20세기 초 영국은 미국의 무리한 요구에도 자국 이익을 최대한 지키면서도 적대감을 가라앉히는 외교술로 전쟁을 피했다. 과연 미국과 중국의 대결은 전쟁으로 귀결된 열세 번 째 사례가 될까, 평화롭게 해결된 다섯 번째 사례가 될까.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양국이 투키디데스의 함정을 얼마나 정확히 인지하고 평화를 모색하는 노력을 기울이냐에 그 답이 달려 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