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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황석영과 개그맨 김미화가 25일 문화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원회에 피해조사를 신청했다. 이로서 이명박 정부 블랙리스트에 대한 진상조사위 조사가 본격화 될 전망이다. 황 작가는 이날 서울 종로구 진상조사위 사무실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명박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 직원으로부터 ‘정부 비판을 하면 개인적으로 큰 망신을 주거나 폭로를 할 수 있으니 자중하라’는 경고를 들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이후 내가 작사한 ‘임을 위한 행진곡’도 김일성의 지령을 받아 제작됐다는 식의 왜곡된 사실이 유포됐다”고 주장했다. 박근혜 정부 때에도 2014년 세월호 참사 문학인 시국선언에 참여한 뒤 이탈리아 로마대학 초청행사와 프랑스 파리도서전 등 해외 행사에서 자신이 배제됐다는 게 황 작가의 설명이다. 영화, 뮤지컬, 드라마, 애니메이션 제작 제의도 갑자기 취소됐다고 한다. 그는 “온라인에 왜곡된 사실을 배포하고 해외행사에 배제시킨 배후를 밝혀 달라”고 진상조사위에 요청했다. 김미화 씨도 이날 조사신청서를 제출하며 “방송사와 경제단체, 광고사, 정부 유관기관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노출되지 못하게 막고 활동을 못하도록 한 증거들이 많다”고 말했다. 앞서 진상조사위는 박근혜 정부 당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뿐만 아니라 최근 국정원 자료를 통해 확인된 이른바 ‘MB 블랙리스트’도 조사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진상조사위는 “배우 문성근 씨와 변영주, 김조광수 감독 등 영화인들이 곧 조사신청을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 예술인들이 결성한 ‘적폐청산과 문화민주주의를 위한 문화예술대책위원회’는 이명박 전 대통령과 유인촌 전 문화체육부 장관, 신재민 전 문체부 차관에 대해 진상조사위에 조사를 신청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유 전 장관은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내가 (장관으로) 있을 때 문화예술계를 겨냥한 리스트는 없었다”고 말한 바 있다.김상운 기자sukim@donga.com}
한강은 이미 선사시대부터 우리 민족의 젖줄이었음을 알려주는 전시가 시작됐다. 한성백제박물관에서 11월 26일까지 열리는 ‘한강과 마을의 흔적’ 특별전이다. 한국매장문화재협회와 문화재청이 공동으로 선보이는 이 전시에서는 한강 일대 신석기∼삼국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 240여 점이 소개된다. 전시는 한강 물줄기의 흐름과 시대를 연계하는 방식으로 구성됐다. 1부 ‘프롤로그: 오랜 삶의 터전, 한강’에선 한강의 자연 환경과 인문지리, 주요 발굴 현장 등을 소개한다. 2부 ‘북한강 고대마을’에서는 북한강 상류부터 남한강 합류 지점까지 산재하는 강원 화천군과 춘천 중도 유적을 조명한다. 3부 ‘남한강 고대마을’은 삼국시대 교통의 중심지이자 중요한 철 생산지로 전략적 가치가 높았던 충주 탑평리 마을 유적을 다룬다. 4부 ‘한강 본류의 고대마을’은 구석기∼후기 청동기시대를 망라한 경기 하남시 미사동 유적과 마한, 백제 주거지가 나온 경기 양평군 양수리 유적을 소개한다. 02-2152-5917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청와대 경내에 안치된 석불좌상(石佛坐像)과 흡사한 불상이 경주 남산에도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한국 고대 불교미술 전문가인 임영애 경주대 교수가 문화재청과 서울시에 제출한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4호(청와대 석불좌상) 조사의견서’에 따르면 경주 남산 약수계 석불좌상과 청와대 불상의 몸체, 대좌(臺座·불상을 올려놓는 받침대) 형태가 서로 흡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적으로 남산 불상의 크기가 약간 크지만 △왼팔과 왼 무릎 위에 새겨진 길쭉한 물방울 모양의 옷 주름 △상대(上臺·상단에 있는 대좌)에 있는 연꽃무늬 △중대(中臺·중간 대좌)의 신장상 등이 서로 닮은 것으로 조사됐다. 일제강점기 경주에서 서울로 옮겨진 청와대 불상은 최근 문화재계 일각과 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원래 자리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 불상은 1912년 경주에 시찰 온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의 눈에 띄어 서울 총독 관저로 이운됐다. 이후 경무대가 광복 이후 청와대로 바뀌면서 경내에 그대로 남게 됐다. 올 6월 “청와대 불상의 문화재적 가치를 검토하라”는 대통령 지시가 떨어진 직후 문화재청과 서울시가 국가문화재 지정을 추진하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청와대 불상은 높이 108cm로 사각형의 삼단 대좌를 갖춘 9세기 통일신라시대 석조불상이다. 이런 유형의 사각대좌는 통일신라 후기∼고려시대 초기까지 유행했다. 통일신라시대 사각형 삼단 대좌 불상은 청와대 불상을 비롯해 경주 남산에 있는 불상 3구(약수계 석불좌상, 용장계사지 약사불좌상, 양지암곡 석불좌상)가 있다. 청와대 불상은 보물급 이상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조사 과정에서 청와대 불상의 중대가 현재 국립춘천박물관에 소장된 사실도 밝혀졌다. 청와대 불상은 광배(光背·불상 머리 뒤쪽에 붙는 장식물)와 중대, 하대가 사라진 상태다. 기록에 따르면 1961년까지 청와대 불상의 중대가 경복궁에 있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해당 중대가 불상과 따로 관리되다 2002년 춘천박물관 개관 당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모든 유물에는 ‘제자리’가 있는가 보다. 19일 전남 목포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해양유물전시관의 ‘신안선과 그 보물들’ 특별전. 길이 34m의 거대한 선체 잔해(殘骸)와 한때 여기 실렸던 4500여 점의 유물들이 오버랩돼 관람객을 압도했다. 신안선 정면과 옆면으로 고급 목자재인 자단목(紫檀木)과 도자기 진열장이 배를 감싸듯 배치됐다. 각기 따로 떨어져 있을 땐 느낄 수 없던 옛 무역선의 생생함이 694년의 간격을 뛰어넘어 고스란히 전달됐다. 본래 배와 화물은 한 몸뚱어리니 당연한 조합이겠지만, 이런 장면이 가능하기까지 무려 41년이 걸렸다. 신안선과 유물들의 소장처가 각각 목포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와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나뉘어 있기 때문이다. 신안선은 원나라 무역선으로 1323년 6월(음력) 중국 경원(慶元·현재 저장성 닝보)에서 출항해 일본 하카타(博多·후쿠오카)로 향하던 도중 전남 신안군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1976년 한 어부가 바다에서 도자기를 발견한 일을 계기로 수중 발굴이 시작돼 1984년까지 9년에 걸쳐 총 2만4000여 점의 유물을 건져 올렸다. 신안선과 배에 실린 유물 4500여 점을 나란히 보여주는 건 전례 없는 시도다. 앞서 지난해 발굴 40주년을 맞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특별전은 유물 2만여 점을 풀어놓는 과감한 전시 기법으로 호평을 받았지만 선체 재현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번 전시는 비록 유물 수량은 중앙박물관 전시의 5분의 1에 불과하지만, 어디서도 대체할 수 없는 선체 원형을 함께 감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부족함을 채우고도 남는다. 출항 당시 신안선은 일본 귀족들이 사용할 중국 각지의 고급 도자기들과 값비싼 향신료, 약재, 자단목, 동전 등을 가득 실은 상태였다. 실제로 이번 전시에선 다양한 색상의 유약을 입힌 화려한 도자기들이 눈길을 잡아끈다. 이 중 하얀색 유약이 흘러내리는 느낌을 살린 백탁유(白濁釉) 도기는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 회화를 연상시킨다. 7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촌스러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세련된 감각의 수작이다. 신안선에는 아직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들이 있다. 항해 중간에 고려를 들렀는지, 침몰 직후 생존자들이 존재했는지가 그것이다. 이번에 전시된 고려청자와 청동숟가락 등은 고려인의 탑승 가능성과 고려 기항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여겨진다. 그러나 고려 유물의 수량이 워낙 적은 데다 일종의 화물표인 목간 내용이 주로 일본 사찰과 관련된 게 적지 않아 한반도를 경유하지 않았을 거라는 견해도 제기된다. 생존자 존재 여부와 관련해 연구소는 이번 전시에서 새로운 주장을 소개했다. 신안선 승객 일부가 침몰 직후 살아남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일본 승려인 다이치(大智·1290∼1366) 선사의 전기에 “1323년 중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 도중 흑풍을 만나 고려 연안에 표류해 고려 충숙왕을 알현했다. 왕의 도움으로 본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일본으로 향하던 다이치 선사가 표류한 1323년은 신안선이 침몰한 해이기도 하다. 고려사에도 “충숙왕 11년(1324년) 7월 19일 표류민 220여 명을 일본으로 귀국시켰다”는 내용이 있다. 문동수 연구소 전시홍보과장은 “신안선 발굴은 우리나라 수중 발굴의 효시”라며 “2023년 신안선 출항 700주년을 맞아 블록버스터급 전시를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번 전시는 올해 말까지 열린다. 061-270-2044목포=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일제강점기에 촬영한 문무왕릉(대왕암) 사진이 새로 발견됐다. 지금껏 확인된 일제강점기 문무왕릉 사진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조선총독부의 흑백사진 한 장이 유일했다. 경주학연구원은 “일본 건축학자 노세 우시조(1889∼1954)가 1920년대에 촬영한 유리건판 사진 700여 장 가운데 문무왕릉 사진 1장을 찾아냈다”고 19일 밝혔다. 1928년경 찍은 걸로 추정되는 이 사진은 경북 경주 감포 바닷가에서 수중왕릉을 향해 촬영한 것이다. 문화재 전문 사진작가인 오세윤 씨는 “전체 구도와 망원렌즈가 존재하지 않은 시대 상황을 감안할 때 단순히 해변을 찍은 게 아니라 문무왕릉을 의도적으로 담은 사진”이라고 말했다. 노세 우시조는 일본 교토대 건축학교실 조수로 일할 당시 1926년 스웨덴 왕세자 구스타프 아돌프의 경주 방문 수행단으로 한반도에 오게 됐다. 조선총독부가 스웨덴과의 외교 관계를 의식해 고고학자였던 왕세자의 서봉총(瑞鳳塚) 발굴을 주선한 데 따른 것이었다. 이후 그는 한국 문화유산의 매력에 푹 빠져 전국을 누비며 중요 문화재들을 촬영했다. 자비를 들여 경주 황복사(皇福寺) 터를 발굴해 건물기단으로 쓰인 십이지상(十二支像)을 찾아내기도 했다. 보물 제1429호로 지정된 경주 원원사 터 삼층석탑도 그의 손에 의해 복원됐다. 연구원에 따르면 노세 우시조는 1927∼31년 경주 일대를 집중적으로 답사했는데, 이번 사진은 1928년 문무왕릉 근처에 있는 감은사 터 조사 과정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도 대왕암이 문무왕릉일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조선인과 일본인 향토사학자들로 구성된 경주고적보존회는 1932년 작성한 유적조사 자료에서 조선시대 지리지인 동경잡기(東京雜記)를 인용하며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그리워하며 이견대를 지어 릉을 바라보았다. 이견대 아래 10보 바다 속에는 사각의 돌이 솟아있고 출입문은 네 문과 같아 ‘대왕암’이라고 부른다”고 썼다. 경주학연구원은 노세 우시조의 사진 87점을 선보이는 ‘90년 전 흑백사진에 담긴 우리 문화재’ 전시를 경주세계문화엑스포에서 최근 개최하며 만든 도록에 문무왕릉 사진을 실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문화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원회가 박근혜 정부 때 임명돼 지원배제에 연루된 기관장들의 사퇴를 촉구하고 나섰다. 조영선 변호사(진상조사소위 위원장)는 18일 서울 종로구 인디스페이스에서 “블랙리스트 작성과 실행, 관리에 책임이 있는 기관장이나 핵심부서 책임자들은 스스로 용퇴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 조 변호사는 블랙리스트 논란을 빚었으나 현재 진상조사위 조사대상에 포함돼 있지 않은 국립국악원 등에 대해서도 “조사에 착수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립국악원은 2015년 11월 퓨전국악 공연 형식의 ‘소월산천’을 기획했으나, 공연 2주 전 블랙리스트에 포함된 박근형 연출가의 연극공연을 갑자기 취소했다. 연극계는 박 연출가가 2013년 연극 ‘개구리’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풍자하면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제작 지원에서도 배제된 것으로 보고 있다. 진상조사위는 또 최근 드러난 이명박 정부 당시 국가정보원의 ‘좌파 연예인 대응 태스크포스(TF)’에 대해서도 조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조 변호사는 “개별사건의 발생시기와 해당 정책이 결정된 시기에 제한을 두지 않는 게 조사위 설립목적에 부합한다”고 덧붙였다. 박근혜 정부 블랙리스트 사건 조사를 목적으로 출범한 진상조사위의 조사범위가 사실상 확대된 셈이다. 한편 진상조사위는 △부산국제영화제 외압 △서울연극제 대관 배제 및 아르코대극장 폐쇄 △공연예술창작산실 심사번복 요구 및 공연포기 강요 △소외계층 문화순회사업 등 선정배제 △한국문학번역원 지원배제 △모태펀드 영화계정 부당개입 등 6건의 블랙리스트 사건을 조사 중이라고 발표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지난달 초 러시아 연해주의 한 시골마을 식당. 건장한 체구의 40대 러시아 남성이 20분 넘게 식당 주변을 배회했다. 사내의 눈빛은 무척 날카로웠다. 취재진 이외에 다른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그가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자신의 얼굴은 사진 찍지 말라는 말과 함께 보자기에서 은은한 녹색빛이 감도는 ‘청동투겁창’을 꺼냈다. 약 2300년 전 이 땅에 살았던 한민족의 흔적이다. 그러나 감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취재진의 촬영과 실측이 끝나자마자 남자는 서둘러 유물을 가방 안에 쑤셔 넣고 사라졌다. 자칭 ‘아마추어 고고학자’라는 그는 선사유적에서 금속탐지기로 청동투겁창을 찾아냈다고 했다. 정식 발굴을 거치지 않고 유물을 개인적으로 취득하는 건 대부분의 나라에서 불법이다. 북방 고고학자인 강인욱 경희대 교수에 따르면 최근 연해주에서 유물이 도굴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00년부터 18년째 러시아과학원과 연해주 일대의 발해, 옥저 유적을 공동 발굴하고 있다. 소중한 유물들이 도굴꾼의 손아귀에 들어가기 전에 발굴단이 먼저 발견해 내기를….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다음달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선거를 앞두고 14일 서울에서 종단 쇄신을 촉구하는 대중집회가 열렸다. ‘조계종 적폐청산과 종단개혁을 위한 범불교도대회 봉행위원회’는 서울 종로구 조계사 앞에서 범불교도대회를 이날 개최했다. 청화스님은 봉행사에서 “지난 8년 동안 불교에서 청정승가를 부정하는 은처자 문제와 폭력, 도박문제가 연이어 터졌다. 그 결과 지난 10년간 불자 300만 명이 줄었다”며 “그럼에도 자승 총무원장은 반성하지 않고 차기 원장 선출에 개입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원인스님(전국선원수좌회 선림위원)은 “이 자리에 전국선원수좌회의 수천 납자들을 대표해 나섰다”며 “이미 결의한 전국승려대회 개최가 꼭 실천으로 옮겨질 수 있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집회 참석자들은 결의문에서 ▲자승 총무원장의 선거개입 중단과 즉각 퇴진 ▲부당하게 징계 받은 승려들의 승적 복원 ▲총무원장 직선제 실시 등 10개안을 요구했다. 주최 측 추산 3000명이 참석한 범불교도대회에서 스님과 시민들은 ‘종헌 수호’ ‘청정 종단’ ‘자승 퇴진’이 적힌 손팻말을 흔들며 구호를 외쳤다. 오랜 단식으로 병원으로 옮겨진 전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도 대회에 참석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국내 밀수범이 도굴해 일본으로 반출시킨 조선시대 ‘분청사기 묘지(墓誌·죽은 사람의 행적을 새긴 것)’가 19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조선 전기 고위 관직을 지낸 이선제(1390∼1453)의 분청사기 묘지를 일본인 소장자로부터 기증받아 국립중앙박물관에 인도했다”고 12일 밝혔다. 이선제는 세종 때 사관으로 고려사를 개찬한 데 이어 집현전 부교리로 태종실록을 편찬했다. 이어 강원도관찰사와 호조참판, 예문관 제학 등 고위 관직을 두루 지냈다. 조선 전기 묘지 중 현재 보물로 지정된 것은 삼성미술관 리움 등에 소장된 4점에 불과하다. 이번에 환수된 묘지는 분청사기에 상감기법으로 지문을 새긴 위패(位牌) 모양이다. 몸체 밑 부분이 두 개의 판으로 나뉘고 굽다리가 연꽃잎 무늬로 장식되는 등 독특한 양식으로 제작돼 보물급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또 이미 보물로 지정된 묘지 4점보다 고인(故人)의 관직이 가장 높다. 총 248자를 새긴 명문에는 고인의 생애와 가족관계, 관직 등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지금껏 이선제의 생몰연도마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환수된 묘지를 통해 정확한 연도와 가족관계를 파악할 수 있게 됐다. 이 묘지는 광주 무덤에서 도굴된 뒤 1998년 6월 김포공항을 통해 불법으로 밀반출된 사실이 그해 검찰 수사에서 뒤늦게 드러났다. 앞서 같은 해 5월 부산 김해공항의 한 감정관이 묘지 반출을 막고 그린 모사도 한 장이 환수에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 재단 측이 일본인 소장자 도로키 다카시 씨를 만나 환수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불법으로 반출된 문화재임을 보여주는 증거로 쓰였기 때문이다. 모사도의 존재를 확인하고 환수를 이끈 강임산 재단 협력지원팀장은 “박물관에 무상기증을 흔쾌히 승낙한 소장자와 광산 이씨 문중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새 정부 출범 100일이 넘도록 문화예술 공공기관장 자리가 비어 있어 업무 공백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특히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와 문화계 블랙리스트로 직격탄을 맞은 일부 기관들은 직원들의 사기 저하까지 겹쳐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다. ○ 단체장 장기간 공석 왜? 31일 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문화예술위원회와 영화진흥위원회는 블랙리스트 집행기관이었다는 이유로 박명진 전 위원장과 김세훈 전 위원장이 5월 사퇴했다. 송성각 전 콘텐츠진흥원장은 최순실 국정 농단에 연루된 사실이 밝혀져 임기를 1년가량 남긴 지난해 10월 물러났다. 콘진원의 경우 10개월 넘게 원장 자리가 비어 있다. 임명이 지연되고 있는 것은 우선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쳐야 하는 각 부 장관들의 취임이 늦어지면서 기관장 인선이 후순위로 밀렸기 때문이다. 정부 당국자는 “청와대 인사추천위원회가 지난달부터 기관장 후보자들에 대한 인사 검증에 착수했지만 검증 능력에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현행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각 기관은 임원추천위원회를 구성해 공모를 거친 후보들을 대상으로 심사(서류 및 면접)를 벌여야 한다. 임원추천위가 3명가량의 기관장 후보를 선정하면 이 중 한 명을 소관 부처 장관이 임명 혹은 임명 제청하는 절차를 밟게 된다.○ 기관장 후보 누가 거론되나 문화예술계에 매년 약 2000억 원을 지원하는 문예위는 지난달 7일 위원장 후보 5명에 대한 최종면접까지 마쳤지만 아직 청와대 인사 검증이 진행 중이다. 문예위 안팎에선 빨라야 이달 중순에나 위원장 선임이 이뤄질 것으로 보고 있다. 유력한 후보로는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와 심재찬 전 대구문화재단 대표, 임정희 문화연대 공동대표 등이 거론된다. 이들은 모두 최종면접에 참여한 것으로 확인됐다. 황 명예교수는 불문학을 전공한 문학평론가로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심 전 대표는 문예위 초대 사무처장 출신으로 문화행정 분야에 경험이 많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콘진원과 영진위는 아직 임원추천위조차 구성되지 않았다. 콘진원 원장 후보로 김영준 전 다음기획 대표와 여명숙 게임물관리위원장이 물망에 오른다. 김 전 대표는 가수 윤도현, 개그맨 김제동의 소속사 대표로 문화예술 분야 현장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다. 여 위원장은 국정 농단 사태로 구속된 차은택 씨 후임으로 문화창조융합본부장에 취임했다가 사직을 강요받고 물러난 전력이 있다. 영진위 위원장 후보로는 김인수 전 시네마서비스 대표와 오석근 영화감독(전 부산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 유인택 동양예술극장 대표의 이름이 오르내린다. 김호섭 이사장이 31일 퇴임한 동북아역사재단의 새로운 수장으로는 노태돈 서울대 명예교수, 이장희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안병우 한신대 명예교수 등이 물망에 오르고 있다. 김용직 관장이 7월 사임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신임 관장 공모도 최근 시작됐다. 이기동 원장이 사의를 밝힌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으로는 안병욱 가톨릭대 명예교수 등이 거론된다. 안 교수는 더불어민주당 윤리심판원장, 민주통합당 공천심사위원장 등을 지냈다.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이름도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 들리고 있다.○ 수장 없는 단체 업무 차질 블랙리스트와 국정 농단 사태로 조직이 크게 흔들린 일부 단체들은 사령탑의 부재까지 겹쳐 무기력한 형국이다. 문예위 관계자는 “내년 초 창작지원 사업 공모에 앞서 할 일이 산더미지만 직원들의 사기가 많이 떨어져 있어 걱정스럽다”고 털어놓았다. 국립박물관문화재단은 김형태 전 사장이 여직원 성추행 의혹으로 물러난 데 이어 배기동 이사장마저 국립중앙박물관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사장과 이사장이 모두 공석인 초유의 사태를 맞았다. 박물관계 관계자는 “이사회 핵심 멤버인 사장과 이사장이 공석이다 보니 재단이 중요한 의사결정을 쉽사리 내리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김상운 sukim@donga.com·임희윤·조종엽 기자}

“지금 꼭 필요한 것이 지역문화를 활성화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번 조직 개편에서 지역문화정책국을 신설했습니다.”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21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업무보고 때 발언한 내용이다. 지역에 밀착된 생활문화가 중요하다는 문화계 인식이 정부 정책에 반영된 것이다. 한 문화계 인사는 “문화란 먼 곳에 있는 고매한 대상이 아니다. 주변의 생활 현장에서 능동적으로 즐길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점에서 다음 달 7∼10일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일대에서 열리는 ‘2017 전국생활문화축제’의 의미는 작지 않다. 문체부가 주최하고 생활문화진흥원(원장 나기주)이 주관하는 이 행사는 문화 동호인들을 대상으로 한 전국 단위의 축제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문화 활동과 동호회 활동을 장려하기 위해 2014년부터 매년 가을마다 열리고 있다. 올해 축제는 ‘두근두근, 내 안의 예술!’을 주제로 동호회 전시 및 체험, 생활문화 영상제, 청년 버스킹 등 다채로운 행사를 선보인다. 17개 전국 시도별 생활문화 단체와 동호회들이 참여한다. 남동훈 축제 예술감독은 “이번 생활문화축제의 콘셉트는 시민들이 스스로 무대의 주인공이 되어 축제를 이끌어가는 것”이라며 “시민들이 함께 즐기고 공감할 수 있는 한마당이 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이번 축제는 우리나라 문화예술 공간의 대표 격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일대에서 진행된다. 대학로 소극장과 이음문화센터, 소나무길 등 대학로 곳곳에 자리 잡은 문화공간에서 각종 축제 프로그램이 펼쳐진다. 다음 달 7∼10일 마로니에공원 주변에서 전시 및 체험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8일 오후 7시부터 공원 무대에서 전야제 행사로 전국 생활문화 동호회의 공연, 전시가 열린다. 대학로 연극인 밴드 공연을 비롯해 가수 조동희와 통기타 동호회의 합동 콘서트, 배우 정인기와 화가 이상선의 기타 듀오 ‘까치와 도깨비’ 등 축하 공연이 펼쳐진다. 9일 오후 2시 마로니에공원 무대에서 열리는 축제 개막식에선 연합 풍물패의 길놀이 공연과 청춘 취타대 공연, 대형 합창 컬래버레이션 공연 등이 열린다. 9∼10일 열리는 본 행사에서는 전국 125개 동호회의 공연과 기획전시, 체험 프로그램, 소셜 라이브 중계, 현장 인터뷰 등이 마련돼 있다. 나기주 생활문화진흥원장은 “시민들이 일상에서 틈틈이 갈고닦은 문화예술 기량을 마음껏 뽐내고 소통할 수 있는 축제가 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최근 수장이 바뀐 국립중앙박물관이 중장기 전시계획으로 가칭 ‘인류의 여명’ 전시를 추진한다. 고인류의 출현과 진화, 한반도 선사문화를 아우르는 대규모 전시로 중앙박물관 역사상 첫 시도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달 취임한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이달 18일 학회 참석차 방한한 앙리 드 룸리 프랑스 고인류학연구소 이사장과 만난 자리에서도 이 전시는 화제가 됐다. “전시 일정상 2, 3년 내 개최하기는 힘들지만 인류 진화 과정에서 문화 보편성과 한반도 선사문화 특성을 조화롭게 보여줄 수 있는 전시를 선보이고 싶다”는 게 배 관장의 말이다. 1985년부터 인연을 맺은 룸리 이사장과 배 관장은 양국을 대표하는 구석기 시대 고고학자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배 관장은 우리나라의 주요 구석기 유적인 경기 연천군 ‘전곡리 유적’을 20년 넘게 발굴했다. 룸리 이사장은 구석기 고고학계의 세계적 석학으로 프랑스 고인류연구소장과 국립자연사박물관장을 지냈다. 고인류 화석이 발견된 ‘아라고 동굴’과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주거지로 밝혀진 ‘테라 아마타’ 유적을 발굴했다. 룸리 이사장은 자리에 앉자마자 전곡리 유적에 대한 얘기부터 꺼냈다. 그는 “과거 일본 학자들은 한반도에 구석기 문화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봤다”며 “배 관장이 발굴한 전곡리 유적은 한반도에도 오래전부터 고인류가 거주한 사실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앞서 1978년 전곡리에서는 동아시아 최초로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발견됐다. 약 14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발생한 아슐리안 주먹도끼는 양쪽 면을 갈아 만든 타원형 모양의 석기다. 전곡리 유적 발견을 계기로 이 주먹도끼가 아프리카와 유럽에만 존재할 뿐 아시아에선 발견되지 않는다는 ‘모비우스 학설’이 무너지고 고고학 교과서를 다시 쓰게 됐다. 룸리 이사장은 “유럽이나 아프리카와 다른 한반도에서 독창적으로 발달한 선사문화를 전곡리에서 엿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배 관장은 조심스럽지만 신임 관장의 포부도 밝혔다. 내년 고려 건국 1100주년을 맞아 중앙박물관이 의욕적으로 기획 중인 ‘대(大)고려전’도 역점을 두고 있는 사업이다. 이 전시는 고려불화와 청자, 나전칠기, 금속활자 등 해외 각국에 산재한 1급 고려 유물들을 모아 역대 최대 규모로 개최될 예정이다. 그는 “대단히 중요한 시기의 전시이니만큼 (북한을 포함해) 가능한 한 많은 고려 유물을 확보할 것”이라며 “북한 조선역사박물관 등에 협조를 요청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영나 전 관장 경질을 둘러싼 박근혜 정부의 프랑스 장식미술전 개입 논란에 대한 견해도 피력했다. 배 관장은 “현 정부는 각 분야의 전문성과 자율성을 보장하는 정책을 펴고 있으니 그 부분(전시 개입)에 대해선 염려할 필요 없다”며 “문화기관으로서 무게 중심을 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혹시나 있을지 모를 권력기관의 전시 개입에 대해선 원칙적으로 대응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풀이된다. 룸리 이사장은 특히 ‘인류의 여명’ 전시에 대한 조언을 잊지 않았다. “배 관장이 개관을 주도한 전곡선사박물관은 스페인 아타푸에르카 박물관과 더불어 고인류의 진화 과정을 제대로 설명하고 있다. 중앙박물관 전시도 인류 진화에서 물질이나 인식론적 측면의 다양한 변화상을 충분히 보여주기 바란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최근 미국에서 환수한 덕종 어보가 일제강점기 모조품인 사실이 드러난 데 이어 ‘문정왕후 어보(상존호 금보·上尊號 金寶)’의 제작 시기를 둘러싼 논란도 불거지고 있다. 시민단체 문화재제자리찾기는 “올 7월 환수한 ‘문정왕후 상존호 금보’가 화재로 인해 1554년(명종 9년)에 다시 제작한 어보라는 문화재청 주장은 잘못됐다”며 “명종실록을 살펴보면 해당 어보는 1547년(명종 2년)에 만들어진 원품이 맞다”고 27일 주장했다. 중종의 계비이자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는 총 3개의 어보를 받았다. 1547년 1월에 만들어진 ‘상존호 금보’와 그해 9월 제작된 ‘가상존호(加上尊號) 금보’, 1565년에 만들어진 ‘상시호(上諡號) 금보’가 그것이다. 이 중 7월에 환수한 상존호 금보를 제외한 나머지 2점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이미 보관돼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1553년 화재로 문정왕후의 침전에 보관돼 있던 어보가 불에 타 이듬해 다시 만들었다는 기록이다. 고궁박물관은 “통상 어보는 왕이나 대비 생전에는 한꺼번에 침전에 보관하기 때문에 둘 다 불에 탔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라며 “명종실록의 해당 기록도 그렇게 해석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문화재제자리찾기 측은 “명종실록에는 문정왕후 상존호 금보가 탔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며 재제작품이 아닌 원품이 맞는다고 주장했다. 논쟁의 초점은 명종실록 16권 9년 6월 7일자 기록이다. “성렬인명대왕대비(聖烈仁明大王大妃)와 공의왕대비(恭懿王大妃)의 보(寶), 옥책(玉冊), 교명(敎命), 인(印)을 완성해 바쳤다. 전년 가을 경복궁 화재 때 보, 옥책, 교명, 인이 모두 타버려 다시 만들 것을 명했는데 이때 완성했다(聖烈仁明大王大妃 恭懿王大妃寶 玉冊 敎命 印成 進之. 前年秋景福宮災 寶及玉冊 敎命 印 皆火 故命改之 至是成)”는 내용이다. 여기서 성렬인명대왕대비는 1547년 9월 제작된 ‘가상존호 금보’에 새겨진 문정왕후의 존호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보다 앞서 만들어진 ‘상존호 금보’에 새긴 존호(성렬대왕대비·聖烈大王大妃)와 다르기 때문에 화재로 소실된 어보는 ‘가상존호 금보’이지 ‘상존호 금보’가 아니라는 게 문화재제자리찾기 측 주장이다. 이에 대해 고궁박물관 관계자는 “실록에 적힌 ‘모두 탔다(皆火)’는 표현에 주목해야 한다”며 “상존호 금보가 생략된 문장으로 이해하는 게 옳다”고 반박했다. 학계는 명종실록 기록이 보는 시각에 따라 두 해석 모두 가능하다는 견해다. 한국고전번역원 관계자는 “문맥상으로 두 어보가 모두 탔다고 볼 수 있지만 어보에 새겨진 존호를 구체적으로 적시한 걸 보면 ‘가상존호 금보’만 소실됐다고 해석할 여지도 있다”고 밝혔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지난달 터키 차탈회위크 신석기 유적을 답사할 때 국내 고고학자들은 좀 과장하면 소녀처럼 들뜬 분위기였다. 20여 년 전 대학 교재로 접한 이언 호더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를 만났기 때문이다. “직접 볼 줄 몰랐다”며 나란히 ‘셀카’를 찍는 교수도 있었다. 시와 소설의 상징처럼 유물의 맥락을 입체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호더의 이론은 유물 형식 분류에 치중한 세계 고고학계에 혁명을 일으켰다. 그가 한 시대를 풍미한 석학이 된 것은 무려 25년에 걸쳐 한 유적을 발굴 연구한 덕이 컸다. 그곳에서 자동차로 약 5시간 거리의 야즐르카야 히타이트 유적 발굴도 한 고고학자의 집념을 빼놓을 수 없다. 안드레아스 샤흐너 발굴단장은 12년간 조사한 끝에 거대한 종자보관소와 관개시설을 찾아냈다. 대제국 히타이트를 떠받친 사회 경제 시스템을 규명한 것이다. 고고학은 시간과의 집요한 싸움이 필요한 분야다. “순환보직 근무제 때문에 한 유적을 오래 발굴하기 힘들다”는 게 국내 주요 유적을 발굴하고 있는 국립문화재연구소 연구원들의 현실이자 하소연이다. 고고학의 ‘스타 탄생’에는 무엇보다 시간이 필요하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23일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주최의 토론회에서 신문 구독료가 소득공제 대상에 포함될 수 있도록 협의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도 장관은 이날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신문 구독료의 소득공제와 관련한 질문에 “도서와 음반 등에 대한 조치 이후 체육 경기 관람과 신문 구독료에 대한 요청이 들어왔다”며 “구독료를 소득공제에 포함시키자는 취지의 소득세법 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돼 있어 추이를 보고 있다. 관심을 갖고 기획재정부와 계속 협의하겠다”고 말했다. 앞서 한국신문협회와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한국기자협회는 공동으로 신문 구독료를 소득공제 대상에 포함시킬 것을 촉구하는 의견서를 국회와 기재부, 문체부에 전달한 바 있다. 현재 국회에는 신문 구독료에 대해 연간 30만 원까지 소득공제하는 내용의 소득세법 개정안(더불어민주당 윤관석 의원 대표 발의)이 상임위에 계류돼 있다. 도 장관은 또 “2022년까지 30개 도시를 문화도시로 육성해 지역문화를 활성화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문화도시 중장기 정책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며 “10월 정책 계획을 발표하고 문화도시 지정 사업 공모에 들어가겠다”고 밝혔다. 도 장관은 이어 블랙리스트와 관련한 철저한 조사와 책임자에 대한 조치, 예술인 고용보험 도입, 평창 겨울올림픽의 성공적 유치 등을 강조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1592년 7월 10일 경상도 웅천현 안골포(安骨浦·현 경남 창원시 진해구) 앞바다. 구키 요시타카가 이끄는 40여 척의 왜선이 정박한 가운데 이순신의 함대가 빠르게 다가왔다. 특유의 학익진(鶴翼陣) 전법을 펼친 채 급습한 조선 수군에 왜군은 적잖이 당황했다. 수심이 얕아 대형 선박을 진입시키기 어려웠던 조선 수군이 몇 차례 유인을 시도했지만, 이틀 전 한산대첩에서 패한 왜군은 쉽사리 싸움에 응하지 않았다. 전투가 잠시 소강상태에 빠질 무렵 이순신은 ‘첨단병기’의 사용을 명령했다. 사정거리가 2.4km에 이르는 ‘대형 로켓화살(대장군전·大將軍箭)’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길이 2m, 무게 15kg의 대장군전이 날아와 배에 구멍을 내자 왜군도 더 이상 포구에만 머물 수 없게 됐다. 예상대로 왜선들이 반격해 오자, 이순신은 히든카드로 감춰 놓은 이억기 함대를 불러냈다. 하루 종일 진행된 이날 전투에서 왜군은 250여 명의 전사자를 낸 채 야음을 틈타 도주했다. 21일 국립진주박물관 ‘정유재란 1597’ 특별전에서 본 대장군전은 안골포 해전의 영광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182cm 길이의 원통형 나무 몸체는 화살촉이 사라진 자리 주변으로 X자로 갈라진 균열을 남겼다. 왜선에 꽂힌 순간의 강한 충격이 만든 흔적이리라…. 대장군전에는 쇠로 만든 3개의 날개가 돌아가며 붙어 있어 마치 로켓 혹은 어뢰를 연상시켰다. 425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몸체와 날개를 잇는 쇠고리와 못까지 형태가 온전히 남아있어 놀라웠다. 특히 표면에 새겨진 ‘가리포상김등조(加里浦上金等造)’ 글자가 눈길을 끈다. “김씨 등 여러 명의 장인이 가리포에서 만들어 진상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박물관에 따르면 가리포는 현재의 전남 완도로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 병영과 무기제조창이 있었다. 천자총통(天字銃筒) 화포에 화약과 함께 장전해 발사한 대장군전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적선을 공격한 핵심 무기였다. 그런데 천자총통과 달리 대장군전은 현재 국내에 전하는 유물이 하나도 없다. 이번에 전시된 대장군전은 왜군 장수 구키 요시타카가 안골포 해전 당시 수습한 것으로 그의 후손들이 400년 넘게 보관한 것이다. 실제로 일본 쪽 임진왜란 기록인 고려선전기(高麗船戰記)에 “조선 수군이 발사한 단단한 나무 봉이 고성(古城)의 창고에 보관돼 있다”는 기록이 있다. 임진왜란 연구자인 김일환 순천향대 연구교수는 “이번 전시품은 안골포 해전에서 이억기가 이끈 전라우수영의 수군이 발사한 대장군전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대장군전은 1966년 10월 일본 가라쓰성 천수각 박물관 개관 때 잠시 공개된 뒤 수장고로 들어가 오랫동안 기억에서 잊혀졌다. 그러다 올 2월 이효종 진주박물관 학예연구사가 일본 출장을 갔을 때 우연히 대장군전의 존재를 알게 됐다. 가라쓰시는 한일 우호 차원에서 박물관의 대여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다. 정유재란 발발 420주년을 기념한 이번 특별전에서는 ‘징비록’(국보 제132호)을 비롯한 150여 점의 관련 문화재도 함께 선보인다. 이 중 1598년 정유재란 때 흥양(현 전남 고흥군)현감이던 최희량이 이순신에게 보낸 전황 보고서(임란첩보서목·壬亂捷報書目)도 눈여겨볼 만하다. 실록에 나오지 않는 세세한 전황이 나오는 데다 이순신의 친필 사인도 살펴볼 수 있다. 10월 22일까지. 055-742-5952진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2년 전 미국에서 환수한 덕종 어보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모조품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문화재청은 2015년 환수 직후 외형상 문제점을 인식하고 지난해 10월 성분분석을 실시해 그해 말 모조품임을 최종 확인하고도 8개월 넘게 이를 감췄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앞서 환수 직후 문화재청은 덕종 어보가 성종이 죽은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1471년 제작한 원본이라고 밝힌 바 있다. 김연수 국립고궁박물관장은 18일 ‘다시 찾은 조선 왕실의 어보’ 특별전 간담회에서 “일제강점기인 1924년에 덕종과 예종 어보 5과를 도난당한 사실을 당시 동아일보 기사를 보고 알게 됐다”며 “성분분석 결과 덕종 어보 등 4점의 구리 함량이 70%를 넘어 15세기에 제작된 다른 어보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15세기 조선시대에 제작된 어보들은 모두 금 함량이 최소 60% 이상이다. 1924년 어보 도난 사건은 그해 4월 12일 동아일보 보도로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종묘전(宗廟殿) 내(內)에 의외사변(意外事變)…덕예(德睿) 양조(兩朝)의 어보를 분실’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이조 오백년 역대 왕들의 사위(祠位)를 봉안한 종묘에 도적이 들었다”며 “책임자가 되는 예식과장 이항구가 살펴보니 과연 덕종과 예종 신위 앞에 놓여 있던 어보가 사라졌다”고 썼다. 이항구는 을사오적 이완용의 둘째 아들로, 이왕직에서 어보 관리를 책임지는 예식과장으로 근무했다. 이후 종로경찰서가 수사를 맡았지만 범인과 어보를 찾아내는 데 실패했다. 이에 이왕직은 조선미술품제작소에 제작을 의뢰해 어보 모조품 5과를 종묘에 안치했다. 고궁박물관은 이미 2015년 3월 환수 직후 덕종 어보의 외양이 이상하다는 점을 파악한 것으로 확인됐다. 문화재청의 한 관계자도 “어보를 묶은 매듭 끈이 너무 얇고 긴 데다 거북등이 다른 것에 비해 훨씬 볼록하고 거북의 배 아래에 구멍까지 뚫려 있어 15세기 당시 어보와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문화재청이 성분분석에 착수한 시점은 이보다 한참 뒤인 지난해 10월이었고 지난해 말 성분분석 결과를 최종 확인하고도 이를 즉각 공개하지 않았다. 문화재청은 “올 2월 문화재위원회에 관련 사실을 보고한 뒤 홈페이지에서 관련 정보를 수정했다”고 해명하지만 유물 정보 몇 자를 살짝 수정하는 데 그쳤다. 한편 문화재청은 “순종 지시로 이왕직이 제작해 종묘에 정식으로 봉안했기 때문에 모조품이 아닌 ‘재(再)제작품’이 맞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일제에 국권이 침탈된 상황에서 이 어보를 만든 주체가 사실상 총독부이고 금 함량도 떨어지는 조악함을 감안할 때 조선왕조 때 만들어진 재제작품과는 격이 다른 ‘모조품’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온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첨단 그래픽 기술로 불교문화재를 소개하는 전시가 최근 열렸다. 국립광주박물관은 10월 22일까지 ‘마음이 곧 부처(卽心是佛)’ 특별전을 연다. 전남 곡성 태안사에 소장된 보물 제956호 ‘청동 대바라’ 등 신라 하대 불교의 한 축을 이룬 호남지역 불교문화재 300여 점을 선보인다. ‘신라국무주가지산보림사사적’(미 하버드대 옌칭도서관 소장)은 국내에 처음 공개되는 희귀 불서(佛書)다. 국내에 전하는 사적기가 대부분 조선 후기인 점과 비교할 때 이 책은 작성 시기가 1457∼1464년으로 이른 편이며 보존 상태도 양호하다. 국보 제42호 ‘송광사 목조삼존불감’과 국보 제117호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을 홀로그램과 미디어 파사드 기술로 재연한 코너가 눈길을 끈다. 높이 2.8m의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의 경우 실물과 똑같은 크기로 생생한 질감을 느낄 수 있다. 전시 1부 ‘구산선문이 열리다’에선 당나라에 다녀온 신라 승려들과 이들을 후원한 장보고의 선단(船團), 구산선문 개창 과정을 소개한다. 보물 제1871호 ‘염거화상탑지’를 감상할 수 있다. 2부 ‘호남지역, 구산선문의 중심에 서다’에서는 남원 실상사와 장흥 보림사, 곡성 태안사에 있는 불교 문화재를 선보인다. 이 중 태안사에 소장된 ‘청동 대바라’는 지름이 90cm를 넘는다. 3부 ‘선맥이 이어지다’에선 선종의 맥을 이은 스님들의 활동을 보여주는 ‘고봉국사 불감’ 등을 전시했다. 4부 ‘선과 차는 하나’에선 선종과 차 문화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유물을 선보인다. 062-570-7032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기원전 4∼3세기 고조선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투겁창(銅모·동모)이 러시아 연해주의 옥저 유적에서 처음 발견됐다. 옥저가 모피 등을 매개로 요동지역의 고조선과 원거리 교역을 한 사실을 보여주는 유물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2일(현지 시간) 동아일보와 강인욱 경희대 교수(북방 고고학), 국립문화재연구소로 구성된 취재팀은 연해주 아누치노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투겁창 1점을 현지에서 확인했다. 해당 유물은 한 러시아 주민에 의해 기원전 4∼1세기 크로우놉카(옥저) 문화층에서 발견됐다. 길이 21cm, 폭 3.9cm의 청동투겁창은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해 날 끝이 여전히 날카로웠다. 특히 숫돌로 등날을 갈아 움푹 파인 흔적이 투겁창 표면에 남아 있었다. 등날을 간 흔적이 많지 않은 걸 감안할 때 몇 번만 사용한 뒤 무덤에 매장한 것으로 보인다. 강 교수는 “자루를 투겁창에 고정하기 위해 등날에 구멍을 뚫었는데 이는 중국 지린(吉林) 지역 청동기에서 흔히 발견되는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강 교수는 투겁창의 형태가 위아래로 가늘게 떨어지고 한반도 출토품보다 대형인 점 등이 후기 고조선의 세형동검 양식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새로 발견된 유물은 요동 지역의 후기 고조선 문화가 지린성 중부를 거쳐 연해주로 유입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고 말했다. 고조선 청동투겁창의 역사적 맥락과 관련해 강 교수는 고조선이 압록강 일대와 중원을 잇는 모피무역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동물 뼈와 고대 화폐 명도전의 출토지역을 감안할 때 고조선은 압록강 중상류 일대에서 모피를 생산해 중원에 판매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 발견된 유물은 고조선의 원거리 모피무역 루트에 옥저도 포함됐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옥저가 자리 잡은 연해주는 예부터 모피와 약초 산지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연해주 콕샤롭카 유적에서 발견된 대형 건물터도 발해가 토착민들로부터 모피나 약초를 얻기 위해 세운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이와 관련해 지난해 연해주 니콜라옙카 성터에서 발견된 기원전 4∼3세기 부여계 안테나식(촉각식) 동검(銅劍)이 주목된다. 당시 이 동검은 비슷한 시기에 통용된 중국 위나라 화폐 ‘칠원일근’과 함께 발견됐다. 강 교수는 “고조선 청동투겁창과 부여 동검은 중원과 요동지역, 연해주로 이어지는 고대 모피무역 과정에서 옥저로 넘어온 유물로 추정된다”며 “옥저가 고립된 부족국가라기보다 멀리 고조선, 부여와 교류한 개방 사회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했다. 한편 연해주 미하일롭카 지역에서도 니콜라옙카 출토품과 비슷한 안테나식 동검이 출토된 것으로 확인됐다. 해당 동검 근처에서는 중국 화폐인 반량전(半兩錢)과 오수전(五銖錢)도 발견됐다. 강 교수는 “연해주는 이미 기원전부터 옥저로 대표되는 한민족 고대사의 한 축을 이뤘다”며 “이후 발해가 연해주로 진출한 건 우연이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아누치노=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연해주에 들어선 최초의 고대 국가는 발해(渤海)였다.” 2012년 10월 블라디미르 쿠릴로프 러시아 극동연방대 부총장이 산운 장도빈 선생 기념비 제막식 때 남긴 연설이다. 사실 연해주는 이미 신석기 시대부터 한반도의 역사 강역이었다. 광복절을 맞아 연해주 땅에 남겨진 대제국 발해의 영광과 옥저의 청동기문화를 현장 취재해 2회로 나눠 싣는다.》 1일(현지 시간)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약 400km를 달리자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너른 평원이 나타났다. 궁벽한 시골마을 콕샤롭카다. 가슴 높이까지 자란 풀밭을 헤치고 들어가자 농작물은커녕 꽃 한 송이 피지 않은 황무지가 나왔다. 사람이 살 수 있었을까…. 하지만 잡초를 걷어내자 문명의 흔적이 거기 있었다. 김동훈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와 니콜라이 클류예프 러시아과학원 극동연구소 선사고고실장이 ‘ㄴ’자로 꺾인 석렬을 가리켰다. 한민족 온돌의 초기 형태로 발해 시대 ‘쪽구들’의 일부인 부뚜막 유구다. 부뚜막과 연결된 고래는 건물 벽을 따라 죽 이어졌다. 15m 길이의 고래를 따라가 보니 건물 밖으로 거대한 굴뚝 기둥 자리가 보였다. 2006∼2013년 콕샤롭카 성(城) 유적을 조사한 한-러 공동 발굴단은 이곳에서 한 변이 약 10m에 이르는 대형 건물터 7개를 발견했다. 강인욱 경희대 교수(북방 고고학)는 “북방 오지를 개척하며 대제국을 일군 발해의 정체성을 생생히 보여주는 유적”이라고 말했다. 당초 러시아 학계는 콕샤롭카 유적을 발해가 아닌 말갈의 것으로 봤다. 알렉산드르 이블리예프 등 주요 연구자들은 발해 영역을 한카 호수 남쪽까지로 좁게 해석했다. 콕샤롭카를 발해 유적으로 보면 최대 아무르강 유역까지 발해 영역을 확장해 볼 여지가 생긴다. 우리 학계는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반면 발해 유적을 자국 영토 안에 둔 러시아나 중국은 고구려보다 말갈의 역할을 더 부각한다. 그러나 러시아 학계의 시각은 콕샤롭카 발굴로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한국 국립문화재연구소와 러시아과학원 극동연구소 공동 발굴단이 2008년 9월 이곳에서 쪽구들의 전모를 밝혀낸 게 결정적이었다. 쪽구들은 발해가 고구려로부터 이어받은 주거문화로 말갈 유적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김동훈 학예연구사는 “고래가 꺾이는 형태나 집 밖으로 굴뚝을 내는 구조 등이 중국에 있는 발해 상경성(上京城) 유적과 꼭 닮았다”고 말했다. 2014년 콕샤롭카 성벽 단면에서 서고성(西古城)과 크라스키노 등 발해 유적에서만 나오는 ‘주사위형 토제품’이 출토된 것도 중요하다. 2012년까지 국립문화재연구소 발굴단을 이끈 홍형우 강릉원주대 교수는 “콕샤롭카 유적은 발해 영역은 물론이고 말갈과 관계를 밝힐 수 있는 핵심 열쇠”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쪽구들을 갖춘 대형 건물터는 콕샤롭카 발굴단에 미스터리를 안겼다. 수도 상경성에 버금가는 건물들을 먼 변방에 지은 이유는 무엇이며, 고대의 다른 대형 건물들과 달리 기와가 발견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궁금증을 풀 실마리는 인근 제사 유구에서 나왔다. 돌로 사각형 모양의 제단을 쌓은 유구에서 흥미롭게도 ‘위구르계 토기’가 발견됐다. 발해 성터에 중앙아시아 유목민이 묻힌 무덤이라니…. 8∼9세기 발해와 위구르제국의 교역 과정에서 연해주까지 위구르인들이 건너온 사실을 보여준다. 이곳이 발해의 무역 거점이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학계 일각에서는 콕샤롭카 일대 토착민들로부터 모피나 약초를 얻기 위해 발해의 위세를 과시할 수 있는 대형 건물을 지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모피 교역은 주로 겨울에 이뤄지므로 사계절 내내 거주할 필요는 없지만 쪽구들 같은 난방시설은 필요했을 것이다. 강인욱 교수는 “발해는 강성한 당나라에 밀려 고구려에 비해 척박한 땅에서 나라를 시작했지만 거친 북방을 개척해 한계를 극복하고 대제국을 세웠다”고 강조했다.콕샤롭카=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